{{{#!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100%><tablebordercolor=#143d69><tablebgcolor=#143d69> |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 관련 문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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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1956 · 1957 · 1958 · 1982 · 1983 · 1986 · 1987 · 1988 · 1990 · 1991 · 1992 · 2004 · 2008 | |
리그 우승 (23회) | 1954 · 1956 · 1957 · 1958 · 1963 · 1982 · 1983 · 1985 · 1986 · 1987 · 1988 · 1990 · 1991 · 1992 · 1993 1994 · 1997 · 1998 · 2002 · 2004 · 2008 · 2018 · 2019 | |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1회) | 1982전기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8 · 2010 · 2011 · 2012 · 2013 · 2017 · 2018 · 2019 · 2022 | |
시즌 문서 | 2013-2021 · 2022 · 2023 · 2024월별문서 | |
현역 선수 경력 | 쿠리야마 타쿠미/선수 경력 · 겐다 소스케/선수 경력 · 이마이 타츠야/선수 경력 · 나카무라 다케야/선수 경력 타이라 카이마/선수 경력 | |
경기장 | 1군 베루나 돔 · 2군 CAR3219 필드 · 지방 홈구장 사이타마현영 오미야공원 야구장 · 조모 신문 시키시마 구장 | |
과거 헤이와다이 야구장 | ||
홈 중계 채널 | 후지 테레비 2 | |
주요 인물 | 구단주 고토 타카시 · 단장 공석 · 감독 니시구치 후미야 · 선수회장 토노사키 슈타 · 주장 겐다 소스케 | |
구단 상세 정보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10.19(야구) | |
틀 문서 | ||
세이부 그룹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영구 결번 역대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미스터 레오 |
1. 개요
역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에 재적했던 선수들을 이 항목에서 정리한다. 현역 선수단은 사이타마 세이부 라이온즈/선수단 항목 참고.2. 영구결번
- 24. 이나오 가즈히사: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 님. 이나오가 은퇴한 때부터 1972년까지 24번을 달고 감독직을 지냈다. 그런데 구단이 다이헤이요로 매각된 1973년에 이나오 자신은 81번으로 번호를 바꾸고 24번을 후배 선수들에게 물려주기로 결정하며 준영구결번으로 남겼다. 이후 라이온즈 24번의 계보는 고가 마사아키(古賀正明)-아키야마 코지-히라노 겐(平野謙)-마쓰나가 히로노리(松永浩典)로 이어지다, 결국 2012년에 이나오 탄생 75주년을 맞아 동년 5월에 구단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3. 준영구결번
- 3. 오시타 히로시: 1960년 은퇴 후 오시타의 커리어를 기리기 위해 당시 니시테츠 라이온즈의 구단사장이었던 니시 마다지로(西亦次郎)가 '당분간 오시타의 3번을 결번으로 처리하겠다'라고 해 영구결번으로 지정했으나, 1968년 오시타가 토에이 플라이어즈에 감독으로 내정되면서 슬그머니 영구결번을 해제했다. 이에 대해 오시타의 동의가 있었는지는 불명이라고. 어쨌든 세이부가 구단을 인수하고 나서는 라이온즈의 3번은 기요하라 가즈히로의 상징처럼 되어버렸다. 이후 이 번호를 받은 선수로는 나카지마 히로유키, 아사무라 히데토가 있었고 2020년부터는 야마카와 호타카가 달다가 2023시즌후 FA로 소프트뱅크로 이적하게 되어 2024시즌 현재 결번상태이다.
- 6. 나카니시 후토시: 1970년에 은퇴 당시 나카니시에 견줄만한 선수가 등장하면 그 선수에게 물려주겠다고 하여 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하지만 위의 이나오 카즈히사와 비슷한 이유로 해제가 됐고, 당시 감독이었던 이나오가 추천한 기쿠카와 소지로(菊川昭二郎)가 이 번호를 사용했다. 세이부로 바뀌고 나서 그나마 이 등번호를 달만한 자격이 있던 플레이를 했던 선수는 90년대 초반 유격수로서 황금시대를 떠받친 타나베 노리오. 2017년부터는 사회인야구 출신의 신인 유격수 겐다 소스케가 이 번호를 달고 플레이하는 중이며, 빈틈없는 수비주루와 정교한 타격을 보여주며 2017년 신인왕을 수상해 이 등번호의 전망을 밝게 하는 중.
- 27. 이토 쓰토무: 은퇴 후 이토 스스로가 인정한 후배 포수에게 넘겨주기로 하여 준영구결번으로 지정했다. 이후 2006년 호소카와 토오루(細川亨)가 사용했으나 2010 시즌 종료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로 FA 이적하면서 결번 상태였다가, 2012년부터 스미타니 긴지로가 사용하고 있다가 2018 시즌 후 FA 이적한 후로는 그의 보상선수로 요미우리에서 넘어온 우츠미 테츠야가 달고 있었고 2022 시즌을 끝으로 현역 은퇴를 하고 전업 코치로 전향하면서 97번으로 변경, 2023년 현재는 공석이다가 2024년 6년만에 돌아온 스미타니 긴지로가 다시 이 등번호를 시용하게 되었다.
4. 출신 선수들[1]
4.1. 투수
- 이나오 가즈히사 (1956 - 1969)
- 이케나가 마사아키 (1965 - 1970.5)
검은 안개 사건에 연루되어 1970년 영구제명 당했다가 2005년 복권되었다. 이나오 카즈히사의 뒤를 이을 차세대 에이스로 각광받았지만 불상사로 인해 불과 24세의 나이에 그라운드를 떠나야 했다. 나가야스 마사유키(1968 - 1969)
검은 안개 사건의 주동자로 영구제명 되었다.- 히가시오 오사무 (1969 - 1988)
니시테츠 시절부터 다이헤이요 클럽, 크라운라이터, 세이부 시대까지 살아남은 유이한 프랜차이즈 선수. - 카토 하지메 (1972 - 1975)
- 나가이 다모쓰 (1974 - 1986)
- 하마우라 도루 (1974 - 1980)
- 사오토메 유타카 (1976 - 1981)
- 구라모치 아키라 (1977 - 1978)
- 모리 시게카즈 (1979 - 1988)
- 마쓰누마 히로히사 (1979 - 1990)
- 마쓰누마 마사유키 (1979 - 1989)
- 후루사와 캔지 (1979 - 1982)
- 고바야시 세이지 (1981 -1983)
- 스기모토 타다시 (1981 - 1984)
- 쿠도 키미야스 (1982 - 1994, 2010)
- 에나츠 유타카 (1984)
- 와타나베 히사노부 (1984 - 1997)
- 곽태원[2] (1985 - 1997)
- 이시이 타케히로 (1989 - 1997)
- 카토리 요시타카 (1990 - 1997)
- 시오자키 테트야 (1990 - 2004)
- 토요타 키요시 (1993 - 2005)
- 하시모토 다케히로 (1994 - 2002)
- 이시이 타카시 (1994 - 2007)
- 니시구치 후미야 (1995 - 2015)
일본판 Mr. Almost. 노히트 노런 달성 기회를 총 3번 놓쳤는데, 그 중 한 경기는 9회 3아웃까지 퍼펙트 피칭을 하고도 타선이 점수를 뽑지 못해 10회까지 넘어가서 안타를 맞았기에 노히터와 함께 퍼펙트 게임도 깨진 경우였다.(...) 게다가 그 세 경기 모두 세이부 홈경기였다는 것이 두 배로 슬픈 우연. 아무튼 오랜 기간 세이부의 프랜차이즈 에이스로 활약했고, 사와무라상도 한 번 타고 통산 182승을 거둔 훌륭한 선발 투수였다. 현재 세이부 코칭스텝으로 활동중이다. - 모리 신지 (1997 - 2005)
- 데니 토모리 (1997–2002)[3]
- 호시노 토모키 (1999 - 2012)
- 오누마 코지 (2001 - 2010)
- 쉬밍치예 (2001 - 2011)
- 호아시 카즈유키 (2001 - 2011)
- 장즈자 (2002 - 2006)
- 오노데라 치카라 (2003 - 2011)
- 와쿠이 히데아키 (2005 - 2013)
- 알렉스 그라만 (2006 - 2011)
- 키시 타카유키 (2007 - 2016)
- 이시이 카즈히사 (2008 - 2013)
- 오카모토 신야 (2008 - 2009)
- 노가미 료마 (2009 - 2018)
- 오이시 타츠야 (2011 - 2019)[4]
- 마키타 카즈히사 (2011 - 2017)
- 토가메 켄 (2012 - 2022)
- 데니스 사파테 (2013)
- 마이클 보우덴 (2014)
- 궈쥔린 (2015 - 2019)
- 앤디 밴 헤켄 (2016)
- 타와타 신사부로 (2016 - 2021)
- 알렉시스 칸델라리오(2017)[5]
- 스테판 파이프 (2017)
- 파비오 카스티요 (2018 - 2019)
- 타카기 하야토 (2018 - 2019)
- 오가와 류야 (2018 - 2021) : 주니치에서 현금 트레이드로 데려온 좌완 불펜 투수.
- 에노키다 다이키 (2018 - 2021)
- 리드 개럿 (2020 - 2021) : 평균구속 155km/h의 강속구 불펜용병. 2020년 8월 8일 최고구속인 시속 162키로미터를 기록하였다.[6]
- 잭 닐 (2019 - 2021) : 2019 시즌에 11승 1패[7]라는, 그 궈타이위안에 필적하는 성적을 거둔 우완 에이스. 그러나 2020 시즌부터는 영 불안하더니 21 시즌 이후 방출.
- 요시카와 미쓰오 (2021) : 한때 니혼햄의 좌완 에이스였던 선수였으나 요미우리, 니혼햄을 거쳐 세이부로 현금 트레이드 영입 후 폭망... 하고 1년 만에 방출.
- 우츠미 테츠야 (2019 - 2022)
- 션 놀린 (2020)
- 쿠몬 카츠히코 (2021 - 2023)
- 버치 스미스 (2022)
- 디트릭 엔스 (2022 - 2023)
- 헤수스 티노코 (2023)
- 브룩스 크리스키 (2023)
4.2. 포수
- 와다 히로미 (1955 - 1972)
선수생활 전부를 니시테츠에서만 활동했던 레전드 포수. 니시테츠가 구단 운영에서 손을 뗀 1972년을 끝으로 은퇴했다. 은퇴 후에는 라이온즈에 남아 산호세 독립리그로 유학을 가는 선수들을 인솔하는 역할을 맡기도 했다. 2009년에 72세의 나이로 췌장암으로 별세. 여담으로, 당시 세이부 소속이었던 오쿠보 히로모토에게 "데이브 오쿠보" 라는 별명을 붙여준 사람이기도 하다. 덧붙여 자기 자신은 "행크 와다" 라는 별명을 붙였다. - 와카나 요시하루 (1972 - 1978)
- 오쿠미야 타네오 (1978 - 1980)
- 타부치 코이치 (1979 - 1984)
세이부에서는 주로 1루수, 지명타자를 보았다. - 노무라 카츠야 (1979 - 1980)
오랫동안 지내왔던 난카이 호크스에서 내쫓겨나다시피 하며 떠난 뒤 롯데 오리온즈를 잠깐 거쳐 여기서 선수생활을 마감했다. - 이토 쓰토무 (1982 - 2003)
2012년 두산 베어스 수석코치로 지낸 그 이토 맞다. 라이온즈 프렌차이즈 사상 최고의 포수하면 떠오르는 인물. 선수시절 수많은 리그우승은 물론 일본시리즈 재패에도 큰 기여를했으며 2012년 두산 베어스에서 코치로 재임하기도 했다. 당시 최재훈을 발굴해냈으며 한국에선 이토센세라고 불렸다. 2013년 지바롯데로 떠나 2019년에 주니치 수석코치가 되며 2021년 현재까지 주니치 코치로서 생활하고 있다. - 오쿠보 히로모토 (1985 - 1992)
- 나카지마 사토시 (1998 - 2002)
- 호소카와 토오루 (2002 - 2010)
멘도사 라인의 수비형 포수. 그러나 의외로 거포 스타일이라서 전성기 때는 15홈런 정도 쳤다. 물론 홈런만 치지 컨택 선구안 모두 쓰레기라 전형적인 공갈포였었다. FA로 세이부를 떠난 후에도 여러 팀을 거쳐오면서 2019년에도 뛰는 중. 물론 지금은 한국나이로 40세라 장타툴마저 사라졌다. - 스미타니 긴지로 (2006-2018, 2024~)
일본의 제프 매티스. 철벽수비를 자랑하지만 타율은 진짜 NPB에서도 역대급 멘도사 타격이다. 3000타석을 넘게 나왔는데 통산 타/출/장이 2/2/2에 OPS가 5할대 중반으로, 그 정도 타석을 소화한 선수로서는 일본 야구 사상 손꼽힐 정도의 암울한 타격을 보여주었으며 세이부 시절로만 한정하면 그 기간 찍은 OPS와 홈런 수(.3455타석 OPS .532, 31홈런)가 투수 가네다 마사이치의 그것(2054타석 OPS .525 38홈런)에 비견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런 점에서는 선배인 호소카와 토오루와 비슷하지만 그보다도 훨씬 암울한 공격력. 호소카와가 FA를 선언하고 소뱅으로 이적한 이후 8년째 주전포수 하고 있는 데 8년 동안 100안타를 친 해가 없고 타율도 2할 1푼만 찍어줘도 고마운 수준이다. 거기다가 장타력도 풀 시즌 뛰어서 홈런 5개 칠까말까한 수준에 3할을 넘긴 해가 거의 없으며, 볼삼비는 에르네스토 메히아보다 안 좋으니[8]... 하지만 수비력만큼은 NPB 최강이라서 주전 자리를 굳건히 유지해온데다 국가대표까지 승선했다. 사실 이런 모습은 2005년 드래프트에서 지명받을 때의 평가와는 전혀 딴판인데 드래프트 때는 수비와 투수리드는 뛰어나지만 공격이 안 되는 호소카와 때문에 고교 통산 48홈런의 공격형 포수의 소질을 보고서 스미타니를 지명한 거였다.고교 3년동안 친 홈런의 갯수가 프로에서 13년동안 친 홈런의 갯수보다 많다.그러나 정작 현실은 상기한대로 흘러갔고, 2018년 시즌부터는 그래도 포수 수비가 가능한 정도로까지 성장한 공격형 포수 유망주 모리 토모야에게 완전히 주전자리를 뺏기고 백업으로 밀려났으며 오프시즌에 바로 FA를 통해 요미우리로 이적했다. 냉정하게 크보나 대만야구 와도 수비형 포수할거 같다...고 생각했는데 요미우리에 이적하자 무슨 보약을 먹었는지 58경기에서 2할 6푼의 타율에 6홈런, OPS .723을 기록하며 갑자기 쓸만한 타격을 보여주었다가 2021시즌 라쿠텐으로 현금트레이드 되었다가 23시즌 전력외통보를 받고 6년만에 세이부로 복귀했다. - 모리 토모야 (2014~2022)
4.3. 내야수
- 나카니시 후토시 (1952 - 1969)
- 토요다 야스미츠 (1953 - 1962)
- 오기 아키라 (1954 - 1967)
- 모토이 미츠오 (1967 - 1978)
- 이하라 하루키 (1971 - 1975, 1978 - 1980)
- 마유미 아키노부 (1973 - 1978)
최후의 후쿠오카 연고지 시절 라이온즈 선수. - 스즈키 하루히코 (1974 - 1984)
- 야마자키 히로유키 (1979 - 1984)
- 스티브 온티베로스 (1980 - 1985)
1983, 84년 연속으로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차지하고 81~85년 4년 연속 규정타석 3할 타율을 기록한 정교한 중장거리 타자였다. - 이시게 히로미치 (1981 - 1994)
- 토마시노 세이지 (1983 - 1997)
- 세이케 마사카즈 (1983 - 1990)
2014 ~ 2015년 SK 와이번스의 코칭스태프로 일했고 2015년에는 SK의 2군 감독을 맡았다. - 츠지 하츠히코 (1984 - 1995)
- 타나베 노리오 (1985 - 1999)
- 키요하라 카즈히로 (1986 - 1996)
- 스즈키 켄 (1988 - 2002)
-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1989 - 1992, 1995)
- 나라하라 히로시 (1991 - 1997)
- 쿠로다 사토시 (1993 - 2001)
- 마쓰이 가즈오 (1994 - 2003, 2018) - 1998년 퍼시픽리그 MVP.
- 다카기 히로유키 (1995 - 2008)
- 도밍고 마르티네스 (1997 - 1998)
- 토니 페르난데스(야구) (2000)
- 나카지마 히로유키 (2001 - 2012)
- 알렉스 카브레라 (2001 - 2007)
일본진출 2년차에 오 사다하루. 터피 로즈와 타이기록이자 당시 단일시즌 최다 홈런이었던 55홈런을 때려낸 것을 포함해 세이부에서만 273홈런을 쏘아올린 베네수엘라 출신의 우타거포 1루수로 라이온즈 사상 최강의 외국인 선수, 일본프로야구 역대 최고의 외국인 타자 중 하나로 꼽힌다. 비공식 기록으로 추정치 180m 비거리의 홈런을 때려낸 적도 있는 괴력과 우람한 체격이 트레이드마크였던 선수. 다만 2007년 미첼 리포트에 이름이 거론되고, 2014년에는 멕시코 윈터리그에서 뛰던 도중 도핑이 적발되어 리그에서 영구제명된 적도 있는[9] 일본프로야구의 펠릭스 호세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일단 일본에서 뛰던 시절에 약물검사에 걸린적은 없다지만... - 호세 페르난데스 (2004 - 2005, 2010 - 2011)
- 카타오카 야스유키 (2005 - 2013)
2007년부터 2010년까지 4년 연속 도루왕을 차지하고 통산 320도루를 기록한 발빠른 2루수였다. 2013년 시즌 종료 후 요미우리로 FA 이적했고 그곳에서 은퇴. 현재는 요미우리의 내야수비주루 코치를 맡는 중. - 에토 아키라 (2006 - 2009)
- 아사무라 히데토 (2009 - 2018)
- 에스테반 헤르만 (2012 - 2013)
NPB의 외국인 타자로는 드문 유형인 쌕쌕이 유틸리티 내야수. 한자릿수 홈런에도 불구하고 세이부에 있던 2년 연속으로 40도루를 기록하고 2013년에는 .413의 출루율로 최고출루율 타이틀을 차지할 정도로 출루능력도 있었던 리드오프맨으로 활약했다. - 코디 랜섬 (2014)
선수로서의 활약은 별볼일 없었지만, 이 선수를 위해 응원단이 미국 흑인 가스펠인 Joshua Fit the Battle of Jericho를 갖고 만들었던 응원가가 엄청난 중독성을 자랑해서 그 응원가 하나만으로 지금까지도 간간히 거론되곤 한다. 인도 볼리우드 영화의 마쌀라 군무 씬에 합성. 위화감이 없다. 2017년 올스타전 경기 후 퍼시픽리그 팬들이 부르는 영상. - 에르네스트 메히아 (2014 - 2021)
- 사토 류세이 (2018 - 2021, 2023~)
- 야마다 하루카 (2015~2022)
- 야마카와 호타카 (2014~2023)
- 쟌센 위티 (2022)
- 데이비드 맥키넌 (2023)
세이부에서 무려 8년째 뛰고 있었던 사실상의 프랜차이즈 스타. 그러나 2021년 부진을 면치 못하고 자진 퇴단했다.
4.4. 외야수
- 오시타 히로시 (1952 - 1959)
- 타케노우치 마사시 (1968 - 1978)
- 칼 볼스 (1969 - 1971)
- 오타 타쿠지 (1969 - 1986)
히가시오 오사무와 마찬가지로 니시테츠 시절부터 다이헤이요 클럽, 크라운라이터, 세이부 시대까지 살아남은 유이한 프랜차이즈 선수 - 도이 마사히로 (1975 - 1981)
- 백인천 (1975 - 1976)
- 송재박 (1975 - 1982)
- 홍문종 (1976 - 1980)
- 타치바나 요시이에 (1977 - 1991)
- 코노 준키(홍순기) (1980 - 1984)
- 아키야마 코지 (1981 - 1993)
- 아베 오사무 (1981 - 1996)
- 카나모리 에이지 (1982 - 1988)
- 하뉴다 타다카츠 (1983 - 1997)
- 타오 야스시 (1985 - 1986)
- 조지 부코비치 (1986 - 1987)
- 요시타케 하루키 (1987 - 1996)
- 타일러 반 바클레오 (1988 - 1990)
일본 첫 시즌에 700만엔이라는 엄청 낮은 연봉에도 불구 38홈런에 OPS 1.024라는 대박 가성비 활약을 펼치며 아키야마-키요하라를 잇는 'AKB' 클린업 트리오를 이루었다. 이후엔 첫 시즌만큼의 활약은 못 하고 히로시마 도요 카프로 트레이드된 뒤 그곳에서 일본 생활을 마감. 은퇴 후엔 오랫동안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의 코치를 맡고 있는 중이다. - 히라노 켄 (1988 - 1993)
츠지와 함께 전성기 테이블 세터를 보던 스위치 히터 외야수. 주니치의 주전 중견수였으나 젊은 히코노 토시카츠 등에 밀려 트레이드로 세이부에 왔다. 정교한 타격과 뛰어난 수비력, 빈틈없는 작전 수행과 주루능력을 보여주며 아주 쏠쏠히 써먹었다. 은퇴 후KIA 타이거즈에서 타격코치를 지내기도 했다. - 카키우치 테츠야 (1989 - 2002)
- 사사키 마코토 (1994 - 1998)
아키야마 코지와의 '세기의 트레이드'로 세이부에 입단한, 난카이 말기~다이에 초창기 호크스를 대표하는 호타준족의 프랜차이즈 외야수였다. - 오제키 타츠야 (1995 - 2005)
- 카와다 유스케 (1996 - 2002)
- 시미즈 마사지 (1996 - 2002)
- 오오토모 스스무 (1996 - 2004)
- 와다 카즈히로 (1997 - 2007)
사회인야구를 거쳐 포수로 입단했으나 특히 수비에서 더딘 성장세를 보이며 이토 츠토무 등의 기라성같은 선수들을 밀어내지 못하고 20대 후반까지도 자리를 잡지 못했던 선수였다. 하지만 외야수로 포지션을 전향한 뒤 타격 재능이 대폭발, 정교함과 파워를 겸비하며 3할-30홈런을 꾸준히 찍는 퍼시픽리그 대표 우타 슬러거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다. 2007년 오프시즌에 주니치 드래곤즈로 FA 이적한 뒤에도 페이스를 이어갔으며 특히 2010년에는 38세의 나이로 타율 .339 37홈런 93타점 OPS 1.061(리그 최고)의 호성적을 찍고 리그 우승의 일등공신이 되어 센트럴리그 MVP[10]가 되고 최종적으로는 2050안타, 319홈런을 때려내며 명구회에도 가입한다, 만 30세에 처음 규정타석을 넘기고 통산 안타의 90퍼센트 이상을 30대 이후에 때려냈을 정도의 대기만성형 선수. - 아카다 쇼고 (1999 - 2009)
- 사토 토모아키 (2001 - 2012)
- G.G.사토 (2004 - 2011)
- 기무라 후미카즈 (2006 - 2021)
- 코리 스팬젠버그 (2020 - 2021)
- 브라이언 오그레이디 (2022)
이후 한화 이글스로 팀을 옮겼으나 이글스 최악의 용병타자로만 남기고 퇴출됐다. - 마크 페이튼 (2023)
5툴 플레이어 외야 노망주. 2019년에는 주전 우익수를 차지했으나 컨택의 부족으로 2할 초반을 겨우 기록했다. 원래는 투수 출신으로 4시즌 41경기 1승 4패 1홀드를 기록하며 어느정도 출장기록도 있었으나 결국 타자로 전향. 2021년 닛폰햄 파이터즈로 이적했다.
내외야 전 포지션을 소화 가능한 유틸리티 용병. 그러나 2020 시즌 가장 많은 삼진을 당한 타자이다. 21년에도 폭풍 삼진을 적립하면서 퇴출.
5.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마쓰이 가즈오 (재적 1994 - 2003, 2018. 뉴욕 메츠 → 콜로라도 로키스 → 휴스턴 애스트로스 → 일본 복귀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세이부 복귀)
- 마쓰자카 다이스케 (재적 1999 - 2006, 2020 - 2021, 보스턴 레드삭스 → 뉴욕 메츠 → 일본 복귀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주니치 드래곤즈 → 세이부 복귀)
- 나카지마 히로유키 (재적 2001 - 2012, 오클랜드 애슬레틱스 → 일본 복귀 후 오릭스 버팔로즈 → 요미우리 자이언츠)
- 마키타 가즈히사 (재적 2011 - 2017,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일본 복귀 후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
- 기쿠치 유세이 (재적 2010 - 2018, 시애틀 매리너스)
- 아키야마 쇼고 (재적 2011 - 2019, 신시내티 레즈 → 일본 복귀 후 히로시마 도요 카프)
[1] 괄호 안은 재적 연도[2] 한자: 郭泰源. 일본에서의 등록명은 가쿠 다이겐. 중국식 발음으로는 궈타이위안.나이 든 일본야구 전문가들은 곽태원이 더 익숙하다.[3] 등록명은 데니였으며, 일본식 이름은 유이 토모리이다.[4] 사이토 유키의 동기로, 6개 구단에 1지명을 받은 와세다대학의 영건이었지만 연이은 부상에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하고 은퇴.[5] 일본판 톰 션. 작년의 밴헤켄보다 더 허접한 모습을 보여주면서 시즌 말기인 9월에 방출당했다(...) 세이부에서는 똑같이 전력 외로 밀려난 다른 외국인 선수들을 10월 시즌 끝 까지 기다려줬는데 이 선수는 얼마나 빡쳤는지 중도에 방출.[6] [7] 외국인 선발 10승 이상은 2002년 이후 마지막이며, 비 대만인 출신으로는 라이온즈 사상 최초.[8] BB/K가 메히아는 .334인데 스미타니는 .212 (...) 참고로 볼넷을 절대로 못 얻어나간다고 개까이는 박종윤의 통산 BB/K가 .277이다...[9] 후에 본인이 결백을 주장하여 재조사 후 영구제명은 취소되었다.[10] 2016년 아라이 타카히로가 경신할 때까지 센트럴리그 최고령 MVP였다. 다만 아라이의 MVP 수상은 베테랑 예우가 꽤 많이 반영되어 논란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