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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량공 필리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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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0701a0><colcolor=#ffffff> 부르고뉴의 공작
필리프 3세
Philippe III de Bourgogne
파일:Philip_the_good.jpg
출생 1396년 7월 31일
부르고뉴 공국 디종
사망 1467년 6월 15일 (향년 70세)
부르고뉴령 네덜란드 플란데런 백국 브뤼허
재위 부르고뉴 공국의 공작
1419년 9월 10일 ~ 1467년 6월 15일
배우자 발루아의 미셸[1] (1409년 결혼 / 1422년 사망)
아르투아의 본[2] (1424년 결혼 / 1425년 사망)
포르투갈의 이자벨[3] (1430년 결혼)
자녀 앙투안, 조제, 샤를[4], 코르넬리(사생아), 앙투안(사생아), 마리(사생아), 다비드(사생아), 안(사생아), 라파엘(사생아), 보두앵(사생아), 필리프(사생아)
아버지 부르고뉴 공작 장 1세
어머니 바이에른의 마르가레테
형제 마리, 마르그리트, 카트린, 이자벨, 안, 아녜스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부르고뉴 공작
2.2.1. 잉글랜드와의 동맹2.2.2. 잉글랜드와의 마찰과 저지대 국가에 대한 영향력 확대2.2.3.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2.2.4. 프랑스와 손을 잡다2.2.5. 부르고뉴국의 확장2.2.6. 궁정 생활과 예술 후원
2.3. 말년
3. 가족4. 매체에서의 등장5.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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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프랑스 왕국 발루아 왕조의 분가인 부르고뉴 발루아 공가의 공작으로, 필리프 3세라고도 한다. 백년전쟁잉글랜드 왕국과 프랑스 양쪽을 오가며 이득을 챙겨, 아라스 조약을 통해 프랑스 왕국의 봉신인 부르고뉴 공국을 사실상의 독립국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부유한 플란데런 지역을 외교와 군사로 정복해 부르고뉴 공국을 주국 프랑스에 크게 꿇리지 않을 강국으로 성장시켰다.

2. 생애

2.1. 초년기

1396년 7월 31일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인 디종에서 부르고뉴 공작 호담공 필리프의 아들이자 느베르 백작인 용맹공 장과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질란트, 홀란트 백작인 알브레히트 1세의 딸 마르가레테의 외아들로 태어났다. 누이로 마르그리트[5], 마리[6], 카트린[7], 이자벨[8], 안[9], 아녜스[10]가 있었다.

필리프는 처음에는 디종 인근의 루브르 성에서 살다가 파리의 프랑스 궁정에 거주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만 그가 대부분의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은 플란데런 백국겐트에 있는 프린센호프 궁전이었다. 그는 이곳에서 플란데런 출신 가정교사들의 교육을 받았고, 자연스레 이곳의 관습과 언어에 익숙해졌다. 또한 아버지의 고문인 장 드 투아시에게 프랑스어를 교육받았다.[11] 1403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딸이자 사촌인 발루아의 미셸과 약혼했다. 그들의 결혼은 그들이 각각 13세와 14세였던 1409년에 이뤄졌다.

1410년 샤롤레 백작이 되었으며, 1411년 아버지로부터 플란데런 백국과 아르투아 백국의 정부를 물려받았다. 1415년 아쟁쿠르 전투가 벌어지기 직전, 당시 19살이었던 필리프는 삼촌인 브라반트 공작 앙투안, 레텔 백작 필리프와 함께 전장에 나가고 싶어했지만 아버지의 허락을 받지 못했다. 아쟁쿠르 전투는 프랑스군의 완패로 끝났고, 두 삼촌은 전사했다.

2.2. 부르고뉴 공작

2.2.1. 잉글랜드와의 동맹

1419년 9월 10일, 아버지 용맹공 장이 도팽 샤를을 받든 아르마냑파와 화해하고 잉글랜드의 침략에 공동으로 대적하기 위해 몽뜨흐 다리에서 회견을 가졌다가 아르마냑파 기사들에게 피살당했다. 이후 부르고뉴 공작으로 추대된 필리프는 도팽 샤를이 아버지를 해치는 데 책임이 있다고 믿고 그에 대한 충성 맹세를 포기하고 잉글랜드 국왕 헨리 5세와 협상을 가졌다. 하지만 본래 신중한 성격이었던 그는 헨리 5세에게 가급적 많은 것을 양보하지 않고 동맹을 이끌어내기를 희망했다. 그해 10월, 잉글랜드군이 묄랑 다리를 점령하면서, 파리 시는 심각한 식량 부족에 시달렸다. 파리의 부르고뉴파 주둔군은 필리프에게 파리 시민들이 잉글랜드군에 항복할 수 있다고 경고하며 헨리 5세와 조속히 합의해 달라고 요청했다. 필리프는 그래도 헨리 5세의 요구를 다 들어주려 하지 않았지만, 헨리 5세가 자기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전쟁을 계속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내자 결국 그의 요구를 전부 받아들이기로 했다.

1420년 5월 21일, 정신병에 시달리던 프랑스 국왕 샤를 6세는 필리프와 이자보 왕비의 거듭된 압박에 버티지 못하고 트루아 조약을 체결했다. 이에 따르면, 헨리 5세는 샤를 6세의 딸 카트린 드 발루아와 결혼하며, 샤를 6세가 사망한 뒤 헨리 5세가 프랑스 왕위를 이어받고, 헨리 5세와 카트린 드 발루아 사이의 아들이 그 뒤를 잇는다. 반면 도팽 샤를의 계승권은 박탈되었다. 이후 헨리 5세는 프랑스 왕위 계승자의 권한으로 필리프가 미셸과의 결혼에서 받은 지참금, 즉 솜, 페론, 루아, 몽디디에의 소유를 확인했다. 1420년 7월 1일 몽뜨흐를 공략한 필리프는 아버지의 유해를 발굴한 뒤 디종의 샴몰 샤르트뢰즈 성당에 할아버지 호담공 필리프의 관과 나란히 안장했다. 이후 필리프는 파리 법정에서 열린 궐석 재판을 통해 도팽 샤를을 비롯한 아버지를 살해한 자들에게 유죄를 선고했다.

1421년 6~8월, 필리프는 헨리 5세의 도팽 샤를을 향한 공세에 참여했다. 그해 8월 29일, 필리프는 아르마냑군이 피카르디 서부에서 행군 중이라는 소식을 듣고 1,000명의 기병대를 이끌고 요격에 나섰다. 1,000명 가량의 아르마냑군은 르 크루투아 인근에서 다른 부대와 합류하려 했지만 솜강이 불어나는 바람에 건너지 못하고 있다가 부르고뉴군에 따라잡혔다. 이후의 전투에서 아르마냑군 절반이 전사하고 대다수 생존자는 생포되었지만, 부르고뉴군 역시 큰 피해를 입었기에 더 이상 헨리 5세를 돕지 못하고 철수했다. 그 후 헨리 5세는 1421년 9월부터 1422년 5월까지 모 공방전을 수행하면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데다 이질에 걸려서 더 이상 공세를 벌이지 못하고 프랑스로 귀환하다가 8월 31일 벵센에서 사망했다.

헨리 5세는 생전에 갓난 아들 헨리 6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베드퍼드 공작이자 동생인 랭커스터의 존이 잉글랜드 섭정, 부르고뉴 공작 필리프가 프랑스의 섭정이 되기를 바란다는 유언장을 작성했다. 그러나 필리프는 섭정이 되기를 거부했다. 이 때문에 랭커스터의 존이 프랑스의 섭정을 받았고, 헨리 5세의 또다른 동생인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잉글랜드의 수호자가 되었다. 랭커스터의 존은 필리프가 적극적으로 협조해줘야 프랑스 통치가 원활해진다고 판단하고, 1423년, 필리프의 누이인 안과 결혼함으로써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관계를 돈독히 다지려 했다. 또한 존은 1423년 12월 17일 필리프와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와 함께 아미앵에서 상호 지원을 약속하는 협약을 맺음으로써, 도팽 샤를을 받드는 '프랑스의 반역자'들을 토벌하는 데 서로 힘을 보태기로 했다.

2.2.2. 잉글랜드와의 마찰과 저지대 국가에 대한 영향력 확대

하바이에른 공작이자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작 빌헬름 4세[12]에게는 외동딸 자클린이 있었다. 자클린은 1415년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의 넷째 아들인 투렌 공작 장과 결혼했고, 1415년 12월 15일 장의 형이자 프랑스 왕위 계승권자인 도팽 루이가 갑작스럽게 사망한 뒤 장이 도팽이 되면서 장차 프랑스 왕비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1417년 4월 4일 남편 장이 돌연사하면서 16세에 미망인이 되었고, 2달 후인 5월 31일에 아버지 빌헬름 2세 마저 사망했다. 이후 에노와 홀란트, 질랜드의 여백작이 되었지만, 삼촌이자 새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이 세 지역마저 회수하려 들면서 문제가 발생했다. 이에 삼촌의 야심을 막을 사람을 남편으로 삼기로 하고, 브라반트 공작 장 4세와 1418년 3월에 결혼했다.

요한 3세는 이 기회에 저지대 국가에 대한 신성 로마 제국의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의 지원을 받으며 에노로 쳐들어갔고, 자클린은 이에 대응해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을 받아 항전했다. 그러나 많은 빚을 지고 있어서 군대를 제대로 운영할 수 없는데다 심약한 성격이었던 브라반트 공작 장 4세는 요한 3세의 침공에 제대로 대응하지 않다가 1419년 5월 성 마르틴스딕 조약을 체결해 요한 3세에게 12년간 홀란트와 질랜드에 대한 전적인 양육권을 넘기고 그 대가로 금전적 보상을 받은 뒤 전쟁에서 이탈했다. 결국 남편의 지원을 받지 못한 자클린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홀란트에서 그녀를 지지하는 마지막 도시였던 레이던 시마저 1421년 초 요한 3세에게 함락당하자 잉글랜드로 망명했다.

자클린은 자신에게 제대로 된 도움 한 번 주지 않는 남편 장 4세를 원망했고, 잉글랜드의 도움을 받고 빼앗긴 영토를 되찾으려 했다. 그녀는 교황청에 남편이 자신을 무자비하게 학대했으며 성적 결합도 이뤄지지 않았으니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달라는 요청서를 발송한 뒤 새 남편감을 물색했다. 마침 존의 권세를 질시해 이에 버금갈 세력을 갖추길 희망했던 험프리는 그녀와 결혼하고 저지대 국가에 진출함으로써 세력을 키우기로 마음먹었다. 험프리와 자클린은 1423년 2월에서 3월 7일 사이에 에식스주 해들리 마을에서 비밀 결혼을 맺었다. 1423년 10월 20일, 헨리 6세는 험프리의 요구에 따라 자클린과 그녀의 후손들이 잉글랜드로 대우받을 수 있도록 허용하는 특권을 내렸으며, 글로스터 공작부인으로 인정했다.

이 일련의 상황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던 필리프는 부르고뉴 공국의 영향력 아래에 있는 저지대 국가에 잉글랜드가 진출하기를 바라지 않아 두 사람의 결혼을 무효로 처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로 인해 험프리, 자클린 부부와 필리프간의 관계가 악화되었다. 그럼에도 험프리는 계획을 밀어붙이기로 하고, 1424년 가을에 자클린과 함께 군대를 이끌고 칼레에 상륙한 뒤 11월 말에 몽스에 입성한 후 12월 5일에 몽스에서 에노 백작으로 취임했다. 1425년 1월 3일, 그는 공식 문서에 아래와 같이 서명했다.
"험프리, 신의 은총으로 왕의 아들이자 형제이자 삼촌인 글로스터 공작, 에노 백작, 홀란트, 질랜드, 펨브로크, 프리슬란트의 영주이자 잉글랜드의 시종장."

1425년 1월 6일, 바이에른 공작 요한 3세가 중독이 의심되는 증세를 보이며 사망했다. 요한 3세는 자식이 없었고, 죽기 1년 전에 필리프를 저지대 국가 내 영지들의 상속인으로 지명했다. 필리프는 요한 3세가 죽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재빠르게 군대를 보내 두 백작령을 장악하고는, 자클린과 험프리의 결혼은 교회의 허가를 받지 않았기에 간통이며,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자클린의 진정한 남편이니 이 영지들의 주권자라고 선포했다. 이후 험프리와 필리프간의 날이 선 편지가 오갔고, 급기야 양자는 결투를 벌이기로 했다. 하지만 베드퍼드 공작 존이 중재하면서 결투는 취소되었다.

1425년 3월 말, 험프리는 잉글랜드로 돌아와서 추밀원에 브라반트 공작과의 전쟁에 대한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잉글랜드 당국은 자신들과 동맹을 맺고 있는 부르고뉴 공국과 갈라서기 싫었기에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험프리가 그렇게 자리를 비운 사이, 부르고뉴 공국의 지원을 받은 브라반트군이 공세를 개시해 5월 중순에 몽스를 포위했다. 몽스 주민들은 처음에는 강경히 맞섰지만 결국 6월 13일 항복했다. 험프리의 지지자 일부는 처형되었고, 자클린은 헨트에 감금되어 부르고뉴군의 감시를 받았다. 하지만 자클린은 9월 2일 새벽에 남장을 하고 탈출해 홀란트의 주요 도시인 하우다에 도착했다. 이에 부르고뉴 공작의 지지 세력인 '대구파'의 반대 세력인 홀란트의 지주 귀족들이 도시로 모여들어 자클린에게 충성을 맹세했다. 이 소식을 접한 필리프는 대구파 도시들에서 대규모 민병대를 소집해 자클린을 체포하게 했다. 그러나 대구파 민병대는 자클린의 군대의 매복에 걸려 학살당하고 부대 깃발을 전부 빼앗겼고, 자클린파 민병대가 역습에 나서 대구파 도시들을 향한 습격 작전을 벌였다.

1426년 1월, 필리프가 파견한 부르고뉴군이 로테르담 인근 해안에 상륙했다. 자클린은 험프리가 보낸 소규모 잉글랜드 병사들과 함께 항전했지만 끝내 패배를 면치 못했다. 하지만 부르고뉴군이 로테르담에서 더 진군하지 않는 사이 군대를 신속하게 재건한 자클린은 6월에 대구파의 주요 도시인 하를럼을 포위했다. 플란데런에 주둔한 부르고뉴군이 하를럼을 구하기 위해 파견되었지만, 매복에 걸려 괴멸되었다. 이에 필리프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현장으로 달려가 하를럼을 구원했고, 자클린 파벌은 점차 수세에 몰렸다.

1427년 4월 17일, 브라반트 공작 장 4세가 갑작스럽게 병사했다. 이리하여 부르고뉴 공작은 에노, 홀란트, 질란트에 영향력을 행사하기 위한 모든 명분을 상실했다. 그러나 부르고뉴의 법률가들은 험프리와의 재혼이 합법적인 결혼이 아닌 간통임을 자클린이 공개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한 통치자의 자격이 없다고 주장하면서, 그녀의 가장 가까운 친척인 필리프가 영주권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여기에 법적인 근거는 거의 없었지만 부르고뉴의 막강한 권력에 심한 압박감을 느낀 에노 백령의 삼부회는 결국 부르고뉴 공작을 영주로 인정했다.

이 무렵, 잉글랜드에 있던 험프리는 아내를 돕기 위해 병력을 보내주지 않고 직접 현장으로 가지도 않았다. 이에 자클린은 필리프에게 협상하자고 요청했다. 필리프는 그녀의 남편인 험프리가 자신의 숙적이자 장차 공국에 위협이 될 인물이라고 지적하며, 그와 이혼하면 영지를 돌려주겠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자클린은 잉글랜드의 지원을 여전히 기대해 이 제안을 거부했고, 필리프는 직접 군대를 이끌고 홀란트를 다시 침공했다. 자클린은 이에 맞서 처절하게 항전하면서, 남편에게 연이어 서신을 보내 구원을 간청했다.

1428년 3월 3일, 험프리는 잉글랜드 의회에 홀란트로 군대를 파견해 자클린을 구해야 한다는 안건을 제출했지만 일언지하에 거부당했다. 이에 험프리는 가망이 없다고 판단하고 자클린과의 모든 관계를 끊기로 마음먹었다. 사실 그는 1425년 잉글랜드로 돌아간 뒤 스터브러의 기사 레지날드 코브햄의 딸인 엘레노어 코브햄을 정부로 삼고 있었다. 그는 자클린과의 결혼을 없던 일로 해버린 뒤 엘레노어 코브햄과 결혼했다. 이에 런던 시의 여성 대표단이 의회에 출석해 자클린을 버리고 다른 여자와 결혼한 험프리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무시당했다. 험프리에게 버림받은 자클린은 결국 모든 영지의 행정권을 필리프에게 양도하며 앞으로 그의 허락 없이 결혼할 경우 영주권을 몰수당한다는 내용의 델프트 조약에 서명했다.

1432년, 자클린은 홀란트와 질란트의 슈타트홀더이자 자신을 감시하는 임무를 맡았던 브랑크 반 보르셀렌과 사랑에 빠졌다. 그녀는 1432년 7월 필리프의 승인 없이 결혼했다. 필리프는 이 소식을 전해듣자 브랑크를 루펠몽드 성에 가두고 사형을 선고했지만, 형벌을 시행하지는 않고 계속 가뒀다. 그러면서 자클린에게 델프트 조약을 위반한 책임을 지고 모든 권한을 자신에게 넘기고 복종한다면 브랑크를 풀어주겠다고 권했다. 자클린은 이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1433년 4월 12일 헤이그 조약이 체결되었다. 자클린과 그녀의 남편은 오스트레반트 백작과 백작부인의 칭호만 유지했으며, 그곳의 연간 수입을 받았다. 그 외에 자클린이 가진 모든 영지는 공식적으로 부르고뉴 공국의 소유가 되었다. 이리하여 필리프는 에노, 홀란트, 질란트 백국을 확고하게 확보했고, 저지대 국가에 대한 절대적인 지배력을 갖췄다.

2.2.3. 잉글랜드와 프랑스 사이에서

1424년 8월 17일,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군이 베르뇌유 전투에서 랭커스터의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에게 궤멸되었다. 이에 도팽 샤를은 11월 30일 마콩에서 부르고뉴 및 브르타뉴 측 대표와 협상해, 두 세력이 잉글랜드와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잡기를 희망했다. 당시 랭커스터의 험프리와 저지대 국가를 놓고 심한 갈등을 벌였던 필리프는 잉글랜드와 동맹을 이어가는 것에 회의를 품고 있었기에 협상에 응했다. 그는 도팽 샤를이 1419년 당시 어려서 아르마냑파 인사들에게 휘둘렸을 뿐, 아버지 용맹공 장 살해에 관여하지 않았을 거라 믿는다며, 아르마냑파를 궁정에서 축출한다면 그를 지원할 의향이 있다고 제안했다. 하지만 도팽 샤를은 자신의 주요 지지 세력인 아르마냑파와 척지는 건 정치적 자살이라는 걸 잘 알았기에 이를 들어줄 수 없었다. 결국 협상은 실패했고, 도팽 샤를은 그 대신 브르타뉴 공작의 형제인 아르튀르 드 리슈몽을 프랑스 무관장으로 선임하는 조건으로 브르타뉴 공국과 동맹을 맺었다.

1425년, 브르타뉴 공작이 도팽 샤를과 손잡은 것을 알게 된 랭커스터의 존이 분노해 브르타뉴 침공을 준비했다. 이를 감지한 브르타뉴 공작 장 5세 드 브르타뉴는 그 해 7월 말에 필리프에게 사절을 보내 잉글랜드인들이 랭커스터의 존의 지시에 따라 그를 암살하려는 암살을 꾸미고 있다고 주장하면서 정교하게 위조된 문서들을 증거로 제시했다. 고문들은 제시된 증거들이 위조문서임을 간파하고 작성자를 찾아내서 고문해 자백을 받아냈고, 필리프는 브르타뉴 공국이 잉글랜드군의 공세로 무너지는 걸 방관했다. 이후 필리프는 잉글랜드군의 군사 작전에 협조하면서도 도팽 샤를과의 협상을 지속하는 이중적인 행보를 이어가면서 최대한의 이득을 뽑아내고자 노력했다.

1429년 2월, 오를레앙 공방전을 치르던 오를레앙 수비군 지휘관 장 드 뒤누아는 적 진영에 저명한 시민 대표단을 보내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 넘기고, 잉글랜드인과 부르고뉴인들이 루아르 강 남쪽으로 이동할 수 있게 하겠다고 제안했다. 여기에 도시의 세금 중 절반을 잉글랜드에 바치고, 나머지 절반은 오를레앙 공작의 몸값으로 보내겠다고 덧붙였다. 필리프는 이 제안에 혹해 파리로 달려가서 베드퍼드 공작 존에게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권고했다. 그러나 오를레앙이 곧 함락될 거라 확신했던 베드퍼드 공작은 오를레앙을 부르고뉴에게 넘기기 싫었기에 거부했다. 이에 실망한 필리프는 오를레앙 공방전에 참여한 부르고뉴군에 철수를 명령했고, 부르고뉴군은 1429년 4월 17일에 전장을 떠났다. 이로 인해 오를레앙 포위군은 약화되었고, 이후에 등장한 잔 다르크가 독려한 프랑스군의 맹렬한 반격으로 인해 패퇴했다.

1429년 6월 29일 ~ 7월 16일, 잔 다르크가 인솔하는 프랑스군이 도팽 샤를의 프랑스 국왕 대관식을 치르기 위해 부르고뉴파가 장악하고 있던 랭스로 진격했다. 당시 부르고뉴파와 잉글랜드군은 이권다툼을 벌이느라 사이가 매우 소원해졌고, 개별적으로 작전을 세우고 서로 협력하지도 않았다. 게다가 일전에 잉글랜드군이 파테 전투에서 막대한 손해를 입었기 때문에, 잉글랜드군이 부르고뉴를 도울 의지가 있을 리 없었다. 결국 부르고뉴 측이 단독으로 아르마냑파를 막아야 했지만, 민심이 그쪽으로 완전히 쏠려서 많은 도시가 곧바로 항복하고 병사들도 전의를 상실했으니 승산이 없었다. 결국 필리프는 민심을 등에 업고 압도적인 기세로 밀어붙이는 잔 다르크의 프랑스군을 저지할 엄두를 내지 못하고 방관했고, 도팽 샤를은 7월 16일 랭스에 입성한 뒤 7월 17일 프랑스 국왕 샤를 7세로서 대관식을 거행했다. 잔 다르크는 대관식 당일에 필리프에게 서신을 보내 진정한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경의를 표하고 평화를 이루자고 호소했지만, 필리프는 묵살했다.

샤를 7세 정부는 랭스 대관식 이후 두 패로 나뉘었다. 잔 다르크, 장 2세 달랑송, 질 드 레 등은 가까운 시일 내에 파리를 공략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적이 거듭된 패배로 상실한 전력을 회복할 시간을 주지 말고 공략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반면 대관식 때 샤를 7세의 머리에 기름을 부었던 르노 드 샤르트르 주교, 조르주 1세 드라트레무아유 등은 목표를 충분히 달성한 이상 부르고뉴파와 협상하여 우리 쪽으로 끌어들일 때까지 전쟁을 미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파리의 방비가 매우 막강하니 섣불리 공격했다가 큰 피해를 볼 것이므로 부르고뉴파를 회유하는 데 중점을 두기를 희망했다.

두 정파의 대립이 가중되고 있을 때, 필리프의 측근인 다비 드 브리모가 이끄는 부르고뉴 대표단이 찾아와 15일간의 휴전을 제안하면서, 파리를 샤를 7세에게 넘길 의향이 있다고 밝혔다. 이에 샤를 7세는 파리 진군을 미루기로 하고 루아르 강 주변의 도시들을 가능한 한 많이 복속시키는 데 중점을 두기로 했다. 1429년 8월,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와 아라스 주교 등이 이끄는 부르고뉴 사절단이 샤를 7세를 방문했다. 부르고뉴 측이 잉글랜드와의 관계를 끊고 파리를 넘겨주겠다는 약속을 지키길 희망했지만, 사절단은 이에 대해서는 별다른 언급을 하지 않고 크리스마스까지 센강 북쪽의 아르플뢰르 등지에서의 적대행위를 중단하자고 제안했다. 샤를은 이에 불만족했지만, 부르고뉴 측이 적대행위를 해서는 안 되는 지역에 파리를 넣지 않은 것을 보고 파리를 내줄 의향이 있다고 보고, 그들의 제안을 받아들이기로 했다. 이리하여 콩피에뉴에서 양측의 서명과 날인으로 합의가 이뤄졌고, 샤를은 크리스마스까지 4개월 동안 파리 북쪽의 도시들을 공격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하지만 잔 다르크는 이에 만족하지 않았고, 1429년 8월 26일 ~ 9월 13일 장 2세 달랑송, 질 드 레, 장 드 브로세 등 자신을 추종하는 장성들과 함께 1차 파리 공방전을 감행했다. 그러나 부르고뉴파 인사인 장 빌리에 드 릴라당과 메닐 영주 시몽 모히어가 이끄는 파리 민병대 4,200명의 결사적인 항전으로 고전하다가 샤를 7세의 강력한 철수 명령이 내려지자 결국 파리 공략을 포기하고 물러났다. 이후 샤를 7세는 부르고뉴파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자신과 손을 잡게 하기 위해 외교에 전념했다. 그러면서 군사 작전을 루아르 강변의 미수복 도시들에 국한시켰다. 또한 자신이 대관식을 거행했을 때 충성을 맹세한 파리 북쪽의 도시들에는 일체의 관심을 주지 않았다.

1430년 1월 10일, 필리프는 황금 양모 기사단을 창설했다. 그 후 자신을 따르길 거부하고 샤를을 받드는 파리 북쪽의 도시들을 공략하기 위한 군사 작전을 세웠다. 이 사실을 알게 된 샤를 7세 궁정은 방돔 백작 샤를에게 이들 도시에 사절을 보내 부르고뉴 공작에게 복종하라는 뜻을 전하게 했다. 다른 도시들은 이에 순종했지만, 콩피에뉴 시만은 끝까지 저항할 뜻을 포명하고 기욤 드 플라비를 수비대 지휘관으로 세웠다. 1430년 4월 4일,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가 지휘하는 부르고뉴군이 콩피에뉴를 공략하기 위해 출진했고, 4월 15일 콩피에뉴에 도착한 뒤 콩피에뉴 공방전을 시작했다.

콩피에뉴 시는 샤를에게 구원을 호소했지만, 이런 일로 부르고뉴파와의 협상이 깨지길 원하지 않은 샤를은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잔 다르크는 프랑스 기사 플로랑 달리에, 이탈리아 용병대장 바르톨로메오 바로타를 비롯한 인사들을 설득해 300~400명의 자원병들을 구성한 뒤 콩피에뉴로 출진했다. 5월 14일 콩피에뉴에 도착한 잔은 5월 23일 콩피에뉴에서 출격한 수비대와 동행하여 도시 북동쪽의 마르니에 있는 부르고뉴 전초기지를 공격했다. 초기에는 적군을 압도하고 기지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지만, 리니 백작이 파견한 증원군 6천 명이 반격해오자 상황이 불리해졌다.

잔은 끝까지 항전하자고 호소했지만, 사령관들은 이를 묵살하고 후퇴를 명령했다. 이때 적의 추격을 막기 위한 후위대가 편성되었고, 잔은 깃대를 든 채 말을 타고 후위대와 함께 하기로 했다. 이후 잔과 후위대가 콩피에뉴 성으로 들어오려 했을 때, 돌연 성문과 연결된 다리가 들어올려지면서 고립되었다. 잔은 끝까지 항전했으나 한 병사가 쏜 화살에 맞은 뒤 옷을 잡혀 낙마당하면서 생포되었고, 후위대는 그대로 항복했다. 그 후 콩피에뉴는 6개월간 항전을 이어가다가 11월 초 샤를 7세가 파견한 구원군이 인근에 이르자 부르고뉴군이 공성을 중단하고 철수하면서 해방되었다.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는 생포된 잔 다르크를 엄중히 감시하면서도 잘 대해주는 한편, 프랑스 국왕 샤를 7세에게 몸값을 지불하고 잔을 데려가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샤를 7세는 아무런 응답도 하지 않았고, 그 사이에 필리프는 베드퍼드 공작과 협의한 끝에 잔 다르크를 잉글랜드에 넘기기로 했다. 결국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는 필리프의 압력을 받고 1430년 11월 10,000 파운드를 수령한 뒤 잉글랜드군에 넘겼다. 그 후 잔은 피에르 코숑이 주관하는 이단 재판에 회부된 뒤 1431년 5월 30일 유죄 판결을 받고 루앙에서 화형에 처해졌다.

한편, 오랑주 공국의 공작인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부르고뉴 공국과 사보이아 공국의 지원을 토대로 도피네 전역을 석권하기 위한 대규모 공세를 개시하려 했다. 사실 필리프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로부터 부르고뉴의 대리권을 부여받은 것을 근거로 자신과 갈등을 벌이기도 했고, 샤를 7세 편을 들었던 적도 있었던 그를 그리 신뢰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그를 잘만 이용하면 샤를 7세에게 유의미한 타격을 입힐 수 있을 거라 여기고 지원했다. 한편, 사보이아 공작 아메데오 8세는 그를 통해 프랑스를 충분히 약화시킨 뒤 영토를 확장하고 싶었기에 역시 상당한 장병과 군자금을 제공했다.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상당수의 부르고뉴군이 합세한 4,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공세에 착수했지만, 1430년 6월 11일 안통 전투에서 라울 6세 드 고쿠르 등이 이끄는 1,600명의 프랑스군에게 참패했다. 이후 라울 6세는 오랑주군이 빼앗았던 모든 성채를 탈환한 뒤, 오랑주로 진군해 6월 말부터 포위했고, 오랑주 시는 7월 3일에 항복했다. 뒤이어 오랑주 공국의 다른 지역도 잇따라 항복했다. 이후 루이 2세 드 샬롱아를레는 부르고뉴 공국에서 찬밥 취급받다가 1432년 샤를 7세에게 충성을 맹세하는 대가로 영지를 돌려받았다.

1432년 5월 ~ 8월 20일, 부르고뉴군 사령관 장 빌리에 드 릴라당, 장 2세 드 뤽상부르리니는 베드퍼드 공작 존이 이끄는 잉글랜드군과 함께 라니쉬르마른 공방전을 치렀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공략에 실패했다. 이것이 부르고뉴군이 잉글랜드군에 협조한 마지막 전투였다. 이후 일드프랑스의 시골 지역 다수가 프랑스군에 넘어갔고, 파리로 향하는 식량 운송은 더욱 방해받았다. 파리에서는 굶주림이 일상이 되었고, 전염병 마저 돌았다. 이에 파리 시민들은 점차 잉글랜드와 부르고뉴의 지배에 반감을 품었고, 그중 많은 이가 샤를 7세에게 파리를 넘기기 위한 음모를 꾸몄다. 베드퍼드 공작은 음모를 적발하는 대로 관련자들을 처형하는 등 강경책을 동원해 어떻게든 민심을 다잡으려 애썼지만, 전세가 갈수록 프랑스 쪽으로 기우는 걸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여기에 베드퍼드 공작의 아내이자 필리프의 누이인 안이 사망하면서, 부르고뉴와 맺었던 결혼 동맹이 끊어졌다. 필리프는 이제 잉글랜드에 더 이상 기댈 이유는 없다고 판단하고, 샤를 7세와의 협상을 본격적으로 벌였다.

2.2.4. 프랑스와 손을 잡다

1435년 8월 5일, 프랑스와 잉글랜드, 부르고뉴 간의 평화 협상이 아라스에서 개최되었다. 잉글랜드 협상가들은 잉글랜드와 프랑스 국왕 헨리 6세와 샤를 7세의 딸을 결혼시키고 영구 휴전을 맺자고 제안했다. 그 정도로 전쟁을 끝낼 생각이 없었던 샤를은 잉글랜드인들에게 자신을 진정한 프랑스 국왕으로 인정하고 프랑스 왕위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라고 요구했지만 거부당했다. 이로 인해 협상은 중단되었고, 샤를 7세는 부르고뉴 쪽으로 관심을 돌렸다.

필리프는 아버지 용맹공 장이 살해된 사건의 배후자로 의심되는 샤를 7세를 개인적으로 혐오했지만, 잉글랜드 측이 노르망디, 일드프랑스 등 점령지에서 빗발치는 반란에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고, 국왕 헨리 6세는 너무 어리고 섭정을 맡은 베드퍼드 공작은 중병에 걸려 제 역할을 못하는 상황이니, 그들과의 동맹을 이어가봐야 좋을 게 없다고 여기고 협상에 진지하게 임했다. 그 결과 1435년 9월 21일, 프랑스와 부르고뉴는 아라스 협약을 체결했다. 조약의 내용은 아래와 같다.
1. 필리프는 샤를 7세를 프랑스의 국왕으로 인정한다. 그 대신, 프랑스 국왕에게 경의를 바칠 의무를 면제받는다.
2. 샤를 7세는 필리프의 아버지 용맹공 장의 살인자를 처벌한다.
3. 부르고뉴 공국은 잉글랜드와의 동맹을 끊고 프랑스에게 군대를 지원한다.
4. 프랑스는 부르고뉴가 오세르와 볼로뉴 지방, 솜과 페론 강변 도시, 퐁티외, 저지대 국가 등 주변 지역을 공략하는 것을 용인한다.
5. 부르고뉴 공국은 톤네르 백국을 프랑스에 반환한다.

이렇게 프랑스와 손잡은 필리프는 샤를 7세가 2차 파리 공방전을 단행했을 때 지원병을 보내줬다. 이에 격분한 잉글랜드 당국은 부르고뉴 공작의 신민인 플란데런, 네덜란드, 피카르디 상인들의 재산을 약탈했으며, 잉글랜드군 2,000명을 저지대 지역으로 파견해 불로네에서 플란데런 군인 1,500명을 격파했다. 필리프는 이에 대응해 잉글랜드에 전쟁을 선포한 뒤 칼레를 향한 공세를 준비했다. 1436년 6월, 필리프 장 2세 드 크로이 등이 이끄는 부르고뉴군과 호른의 장이 이끄는 플란데런 민병대 연합군 30,000명이 칼레로 진격했다. 이들은 오예플라주, 상카트, 발링헴 등 소규모 잉글랜드 요새를 공략한 뒤 7월 9일 2차 칼레 공방전을 벌였다.

그러나 모르탱 백작 에드먼드 보퍼트가 이끄는 수비대가 압도적인 수로 몰아붙이는 적을 상대로 분전했고 식량도 잘 갖춰졌기에, 칼레 공략이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호른의 장이 돌을 잔뜩 실은 배 5~6척을 칼레 항구 앞바다에 침몰시켜서 칼레의 해상 봉쇄를 완수하려 했으나 이 역시 실패했다. 그러던 7월 29일 글로스터 공작 랭커스터의 험프리가 이끄는 구원군 10,000명이 칼레로 접근했다. 이에 필리프는 칼레와 기옌에서 전면 철수하기로 했다. 이후 양자간의 전쟁은 수년간 더 이어지다가 1439년 그라블린 평화 협약이 체결되면서 종식되었다. 이후 필리프는 노르망디가스코뉴를 향한 재정복 전쟁을 단행하는 프랑스를 더이상 돕지 않고 부르고뉴국의 영역 확장에 힘을 기울였다.

2.2.5. 부르고뉴국의 확장

필리프가 부르고뉴 공작에 선임되었을 무렵, 그는 부르고뉴 공국, 플란데런 백국, 아르투아 백국, 부르고뉴 백국 등지를 물려받았다. 이후 랭커스터의 험프리와 손잡은 에노 여백작 자클린과 1424년부터 1428년까지 전쟁을 치른 끝에 그녀를 굴복시키고 에노, 홀란트, 질란트를 손아귀에 넣었다. 1429년 나뮈르 백작 장 3세가 사망한 뒤 나뮈르 백국 역시 손아귀에 넣었다. 1430년 10월 4일 필리프 드 생폴이 자녀를 두지 못한 채 사망하면서 브라반트 공작가가 단절되자 브라반트 공국을 물려받았으며, 여기에 로티에르 림부르크를 추가로 확보했다.

1431년 7월 부르고뉴파의 지원을 받은 앙투안 드 보데몽이 로렌으로 쳐들어갔다. 앙주와 로렌 공작 앙주의 르네는 이에 맞섰지만 볼뉴빌(Bulgneville) 전투에서 참패하고 생포된 뒤 프랑스콩테의 돌(Dole) 성채에 감금되었다. 이에 르네의 아내 이자벨은 남편을 구하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 필리프와 앙투안을 상대로 분전했다. 1432년 2월 16일, 필리프는 르네가 갇힌 성채를 찾아와서 5월 1일에 석방시켜주겠지만 그 대신 르네의 아들 장과 루이를 인질로 넘기고 거액의 배상금을 지불하라고 요구했다. 르네는 이를 받아들이고 가석방되었다.

1434년 4월 24일, 르네는 바젤 대성당에서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명목상 로렌 공국의 주권자인 지기스문트로부터 로렌 공작으로서의 지위를 인정받았다. 로렌을 자기 것으로 삼을 기회를 노리고 있었던 필리프는 이 소식을 듣고 분노해 르네의 가석방을 취소하고 소환령을 내렸다. 르네는 강력한 권세를 누리는 부르고뉴 공작의 명령을 어길 수 없어서 돌 성채로 돌아가 2년간 장남 장과 함께 재감금되었다.[13]

1434년 11월 앙주 공작이자 칼라브리아의 공작으로서 장차 나폴리 여왕 조반나 2세의 뒤를 이어 나폴리 국왕이 될 예정이었던 루이 3세가 사망했다. 르네는 옥중에서 형의 지위를 상속받았으며, 곧 조반나 2세로부터 후계자로 지명되었다. 1435년 2월 조반나 2세가 사망하면서 나폴리 국왕 직위를 상속받았지만, 필리프가 석방을 완강히 거부하는 바람에 돌 성채에 여전히 갇혀지냈다. 그러다가 1437년 2월 7일 여러 영지를 필리프에게 넘겨주고 배상금 납부를 지속하며, 자신의 아들 장과 필리프의 조카인 부르봉의 마리를 결혼시키겠다고 약속한 뒤에야 풀려났다.

1435년, 필리프는 자신을 "서부 대공작"이라고 선포했다. 이에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지기스문트는 신성 로마 제국의 서쪽 변경이 부르고뉴국의 급격한 확장으로 인해 위태로워지고 있고, 신성 로마 제국의 명목상 영역이었던 저지대 국가가 부르고뉴국에 넘어간 것에도 반감을 품고 있었기에, 필리프에게 이 이상의 확장을 꾀하면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위협하고 프랑스 왕실에도 부르고뉴국과 화평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그러나 1435년 9월 21일 아라스 협약이 체결되면서 프랑스와 부르고뉴국이 동맹을 맺어버렸고, 제후들 역시 부르고뉴국을 압박하라는 황제의 명령에 순종하지 않으면서, 지기스문트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1437년 5월 22일 브뤼헤에서 반란이 일어났을 때 하마터면 목숨을 잃을 뻔했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했고, 1438년 반격을 가해 브뤼헤를 정복한 뒤 매년 5월 22일에 브뤼헤인들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피살당한 브뤼헤 총독 장 빌리에 드 릴라당에게 사죄하는 의미로 속죄의 미사를 치르도록 명령했다. 또한 분쟁지역에 대한 부르고뉴 공작으로서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르시니를 포위 공격한 끝에 굴복시켰다. 1443년 숙모인 엘리자베트 드 괴를리츠 여공작이 자식을 두지 못한 채 사망한 뒤 룩셈부르크 공국을 손에 넣었다. 1452년 겐트 주민들이 봉기를 일으켰지만 1453년 그라베에서 진압되었다.

2.2.6. 궁정 생활과 예술 후원

필리프의 궁정은 유럽에서 가장 호화로운 곳으로 명망이 높았다. 그는 고정된 수도가 없었고, 여러 궁전을 자유자재로 돌아다녔다. 주요 궁전은 브뤼셀, 브뤼헤, 릴에 있었다. 그는 성대한 잔치와 축제를 매년 개최했으며, 그의 기사단은 토너먼트에 참가하기 위해 그의 영토 전역을 자주 여행했다. 그는 1444년부터 1446년까지 부르고뉴 주요 수입에 2%에 해당하는 금액을 이탈리아의 비단과 금 옷감 공급엄체인 recette génerale에 지불했다. 또한 공작 컬렉션에 600권의 사본을 넣는 등 도서 수집에도 열을 올렸다. 유럽 전역의 엘리트들은 부르고뉴국, 그 중에서도 플란데런에서 생산되는 고급 제품들을 애용했고, 그 덕분에 부르고뉴국은 호황을 맞이했다. 그가 호화로운 삶을 살 수 있었던 건 바로 이 때문이었다.

필리프는 예술을 열성적으로 후원했다. 그는 많은 태피스트리, 조각, 보석 및 기타 예술 작품을 의뢰했는데, 이 중에는 에댕 성에 있는 기계식 자동 장치 및 분수도 있었다. 또한 그의 치세에 부르고뉴 예배당이 부르고뉴 작곡가와 가수를 양성하는 기관으로서 기능을 수행해 유럽의 음악 중심지가 되었다. 부르고뉴국 궁정에서 활약한 대표적인 음악가로 프랑스 작곡가 질 드 빈스, 기욤 뒤 페이 잉글랜드 작곡가 로버트 모튼를 들 수 있다.

또한 미술가들을 후원하기도 헀는데, 그로부터 후원을 받은 유명한 화가 얀 반 에이크는 잔 다르크가 죽은 뒤인 1437년, 선량공의 부하이자 부르고뉴 공국 대법관 및 재상인 롤랭이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에게 기도를 올리는 그림인 <대법관 롤랭과 성모 마리아>를 그렸다. 롤랭은 선량공의 병원 건립 등 자선사업과 선행에 큰 영향을 끼친 한편 잔 다르크를 팔아넘기도록 조장하고 그 몸값의 일부를 챙겼다는 소문이 있었는데,[14] X선으로 반 에이크의 그림을 촬영한 결과 기도하는 손이 처음에는 돈주머니를 쥐고 있는 모습으로 그린 것으로 밝혀졌다.참고 기사

이에 대해 반 에이크가 잔 다르크를 팔아서 돈을 차지한 롤랭을 위선적인 인간이라고 여겼으며, 그런 롤랭을 측근으로 둔 필리프를 비판했다는 의견이 제시되기도 했지만, 학자들은 신빙성이 떨어지는 이야기로 간주한다. 필리프는 반 에이크 자녀들의 대부가 되어줬으며, 자신의 세번째 아내가 될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의 딸 이사벨라의 초상화를 그려오라고 시키기도 할 정도로 굳게 신임했다. 반 에이크가 그런 필리프를 그림을 통해 비판했다는 것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또한 반 에이크가 잔 다르크를 알고 있었다거나 우호적이었다는 기록이 없다. 돈주머니는 다른 종교화에도 자주 나타나는 모티브이며[15], 그 뜻은 탐욕이 아니라 신께 바치는 헌금을 의미하는 도상이다.

2.3. 말년

1454년 2월 17일, 필리프는 릴에서 꿩 연회를 개최했다. 이때 그는 지난해 콘스탄티노폴리스를 공략한 오스만 제국에 맞서 새로운 십자군을 일으키겠다고 맹세했지만 실천에 옮기지 않았다. 1456년 9월, 도팽 루이가 아버지 샤를 7세를 피해 부르고뉴로 망명했다. 필리프는 도팽 루이가 브뤼셀에서 20km 떨어진 주나프의 작은 성에서 은신하게 해줬고, 연간 36,000 파운드의 연금을 받도록 했다. 도팽 루이는 1461년 7월 25일 샤를 7세가 사망할 때까지 주나프에 머물렀다. 1465년과 1467년 리에주에서 2차례 반란이 일어났지만 모두 진압했다. 반란 진압으로부터 몇 주 후인 1467년 6월 15일, 필리프는 71세의 나이로 브뤼헤에서 사망했다. 사후 부르고뉴 공국의 수도 디종의 샴몰 샤르트뢰즈 성당에 있던 아버지 용맹공 장의 관 옆에 안장되었다.

3. 가족

  • 발루아의 미셸(1395 ~ 1422): 프랑스 국왕 샤를 6세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딸.
    • 아녜스: 유아기에 사망.
  • 아르투아의 본(1396 ~ 1425): 외 백작 필리프 다르투아와 오베르뉴 여공작 마리[16]의 딸. 필리프와 결혼하기 전 느베르 백작 필리프 2세와 결혼했지만 사별했다.
  • 포르투갈의 이사벨라(1397 ~ 1471): 포르투갈 국왕 주앙 1세랭커스터의 필리파의 딸.
    • 앙투안(1430 ~ 1432): 요절.
    • 조제(1432): 요절.
    • 용담공 샤를(1433 ~ 1477): 부르고뉴 공작.

기록에 따르면, 필리프는 24명의 정부를 두었으며, 적어도 18명의 사생아를 두었다고 한다. 대표적인 사생아는 다음과 같다.
  • 코르닐 드 부르고뉴(1420 ~ 1452): 베베랑 영주. 1452년 6월 16일 겐트 반란군과 맞붙은 바젤 전투에서 전사했다.
  • 앙투안 드 부르고뉴(1421 ~ 1504): 라 로슈 백작, 베베랑 영주. 용담공 샤를의 핵심 측근으로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으며, 마리 드 부르고뉴막시밀리안 대공의 결혼을 주선했다. 부르고뉴-베베랑 가문 창립자이기도 하다.
  • 마리 드 부르고뉴(1426 ~ 1462): 샤르니 백작 피에르 드 보프레몽의 부인.
  • 다비드 드 부르고뉴(1427 ~ 1496): 위트레흐트 주교.
  • 안 드 부르고뉴(1435 ~ 1508): 마리 드 부르고뉴의 가정교사, 브리그담 영주 아드리안 반 보르셀렌과 초혼, 라벤슈타인 영주 아돌프 드 클레베와 재혼.
  • 라파엘 드 메르카텔리스(1437 ~ 1508): 겐트의 성 바본 수도원의 대 수도원장.
  • 보두앵 드 부르고뉴(1445 ~ 1508): 팔레 영주.
  • 필리프 드 부르고뉴(1464 ~ 1524): 위트레흐트 주교, 네덜란드 제독.
  • 장 드 부르고뉴(? ~ 1499): 브뤼헤 부장관.

4. 매체에서의 등장

게임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2: 결정판의 DLC '서쪽의 군주들'의 서쪽의 대공들 캠페인에서 등장. 4장부터 아버지 용맹공 장의 뒤를 이어 부르고뉴를 지휘하며 영웅 유닛으로 조종할 수 있다. 마지막 장에서 잔다르크를 붙잡고 이후 독대하여 그녀와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때 보여주는 모습은 현실의 냉혹한 정치인의 모습으로 도팽을 무조건 믿는 잔다르크를 그의 입장에서 광신도로 묘사하며 현실의 냉정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잉글랜드와 도팽에게 사자를 보내 둘 중 먼저 온 쪽에게 잔을 넘기기로 했고 이후 잉글랜드가 오자 잔을 넘기며 개인적인 감정은 없다고 말한다.

라이트 노벨 율리시스: 잔 다르크와 연금의 기사에선 TS되어 여성으로 등장한다. 해당 항목 참고. 이쪽은 잔이 주연급 인물이라 대립했던 입장이라 적으로 등장하지만 주인공을 좋아하기에 얀데레같은 모습도 보인다.

한국의 대체역사소설 용병대장과 성녀에서도 출현한다. 히로인이 잔 다르크이어서 아무래도 동시대의 인물인 만큼 출현이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 다만 이 세계관에서는 원 역사에서 잔을 넘긴 업보 때문인지 비참한 결말을 맺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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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샤를 6세이자보 드 바비에르의 딸.[2] 장 드 베리의 외손녀(4녀 마리의 딸).[3] 주앙 1세랭커스터의 필리파의 장녀.[4] 흔히 용담공 샤를이라고 잘 알려진 부르고뉴 공작 샤를 1세로 마리 드 부르고뉴의 아버지다.[5] 1393 ~ 1441, 1404년 루이 드 기옌과 초혼, 1423년 아르튀르 드 리슈몽과 재혼.[6] 1394 ~ 1463, 클레베 공작 아돌프 1세 드 클레베의 부인.[7] 1400 ~ 1414, 앙주 공작이자 프로방스 백작인 루이 3세의 부인.[8] 1403 ~ 1412, 팡티에브르 백작 올리비에 드 샤티용의 부인[9] 1404 ~ 1432, 베드퍼드 공작 랭커스터의 존의 부인[10] 1407 ~ 1476, 부르봉 공작 샤를 1세 드 부르봉의 부인.[11] 장 드 투아시는 1420년 필리프에 의해 부르고뉴 총리로 선임되었다.[12] 필리프의 외할아버지인 알브레히트 1세의 아들[13] 다만 차남 루이는 석방되었다.[14] 당대 연대기 작가 샤틀랭은 롤랭에 대해 "그는 마치 지상의 삶이 영원 할 것처럼 재산을 거두어들였다. 그리하여 그의 정신은 길을 잃었다. 그는 나이가 들면서 생애의 마지막이 눈앞에 닥쳐왔는데도 인생의 장벽이나 한계를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고 기술하기도 했다.[15] 하기아 소피아의 성화에서도 이런 표현이 사용되었다.[16] 장 드 베리의 4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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