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생애
1.1. 어린 시절
1612년(광해군 4년), 선조의 5남 정원군의 장남인 능양군(훗날 인조)과, 청성현부인(淸城縣夫人) 한씨(훗날 인열왕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청성현부인 한씨는 비록 전주 이씨는 아니었지만, 부모님 양쪽으로 효령대군의 핏줄을 받았고, 남편인 능양군과는 태종을 공통조상으로 두었다. 즉 소현세자와 그의 동생들은 양쪽 부모로부터 전주 이씨 왕족의 피를 받은 로열 패밀리였던 셈이다. 능양군은 본디 지금의 경희궁 터인 아버지 정원군의 집에서 살다가 16세에 한살 위인 한씨와 혼인한 후, 경행방 향교동 사저로 분가해, 2년 뒤 장남 소현세자를 낳았다. 소현세자의 본명 '이왕(李𣳫)'은 공문서등에 사용되었던 이름이고, 실제 그가 사저에서 12세까지 살 때, 어떤 아명으로 불리었는지는 기록이 없다.소현세자가 어렸을 때, 할아버지 정원군은 이복형인 광해군과 원수지간이었다. 소현세자가 6살 되던 해인 1617년(광해군 9년), 그의 할아버지 정원군은 당시 왕 광해군에게 집을 강제로 빼앗겼다. 정원군의 집터에 왕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술사에 말에 광해군이 집을 빼앗고 그 자리에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두해 전에, 아끼던 막내아들 능창군(소현세자에겐 막내삼촌)을 이복형 광해군 손에 참혹하게 잃었던 정원군은 집까지 뺏긴 뒤 울화병이 생겨 술만 처마시다가 결국 소현세자가 8살 되던 1619년(광해군 11년), 세상을 떴다. 이후 소현세자의 아버지 능양군은 제 아버지와 동생의 복수를 하겠다 천명했으며 실제로 4년 후, 반정에 성공해 인조로 즉위하게 되었다. 소현세자는 비록 할아버지와 함께 살며 그의 설움을 직접 체험하진 않았겠지만, 반정 모의를 하는 아버지를 두고, 밑으로는 일곱살 넘게 터울지는 동생들[1]을 둔 맏아들로서, 반정이 성공할 때까지 상당한 심리적 압박을 받았을 것이다.
12살이 되던 해인 1623년(광해군 15년), 아버지 능양군은 반정에 성공했다. 아버지가 인조로 즉위함으로서, 소현세자도 하루 아침에 원자가 되었다. 처음엔 창경궁에 머물렀지만, 1624년(인조 2년) 이괄의 난으로 창경궁이 타 버리자, 아버지 인조는 할아버지의 옛집이기도 했던 경덕궁(지금의 경희궁)으로 이어했으며, 원자였던 소현세자는 경덕궁 동궁의 첫 주인이 되었다. 광해군은 소현세자 할아버지 집을 빼앗아갔다가, 그 자리에 엄청 좋은 새 집만 지어준 셈이었다.
그로부터 1년 후인 1625년(인조 3년) 1월 21일, 원자는 경덕궁 융정전(지금의 경희궁)에서 왕세자로 정식 책봉되었다.[2] 그리고 14살에 결혼할 뻔하다가 파토가 난다. 최종 간택에서 소현세자보다 한 살 어린 13살 윤의립의 딸이 간택되었다. 하지만 윤의립의 친척이 한 해 전에 있었던 이괄의 난에 연루되었다고 대신들이 극구 반대한 것이었다. 하지만 사실상 인조의 지지세력이고 반정공신들이기도 한 서인들이, 남인인 윤의립의 딸을 탐탁잖아 했던 것이 원인으로 보인다.
아무튼 소현세자와의 혼인이 확정되었다가 파혼당한 윤씨 소녀는 낙담해서 자결했다 하는데, 진위는 불분명하다. 자결한 소녀 이야기는, 2년 후, 소현세자가 한살 연상의 강빈과 혼인했을 때, 두 사람 사이에서 1636년(인조 14년), 첫 아들 원손이 태어나기 전까지 9년간 아이가 안 태어난 이유로 일부 창작물에서 상상되어지기도 했다. 소현세자가 자신 때문에 죽은 윤의립의 딸에 대한 죄책감 때문에, 강빈을 오랫동안 냉대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승정원일기와 동궁일기가 번역되며 소현세자와 강빈은 조선왕조실록에 남은 첫 아들 이석철이 태어나기 전에도, 두 딸을 두는 무난한 어린 부부의 모습이 밝혀졌다. 그 중 첫 딸은 결혼한 지 1년 만인 1628년(인조 6년) 12월[3] 태어났다. 따라서 실제 기록만으론 소현세자가 초기에 강빈을 냉대했다는 흔적은 찾을 수 없으며, 설령 소현세자가 정말로 창작자들의 상상처럼 윤의립의 딸에게 죄의식을 느꼈다 한들, 길어야 2달 만에 강빈에게 마음을 열었던 것이다.
아무튼 왕세자가 되고, 혼인하려다 파혼한 뒤, 2년이 지난 후, 정묘호란이 발발했다. 이괄의 난으로 북도 방어력이 극히 약화된 상황에서 능한산성(凌漢山城)[4]까지 후금군에게 빼앗기자 인조는 분조에 대해 논하기 시작했고 사헌부에서는 도성을 버리지 말고 근왕군을 이끌어 막자고 주장했으나 인조 자신은 "논한 것들이 실질성이 없다(所論, 太半失實矣)"고 답하고는 자신은 강도(江都)로 향하고 세자는 분조[5]를 이끌고 전주로 내려가게 했다. 인조실록에 따르면, 비가 오던 날 소현세자가 말을 타고 오는 길을 볏짚으로 깐 적이 있는데 소현세자가 볏짚은 군사를 일으킬 때 말에게 먹여야하는데 헤프게 쓰지말라고 명령한 것과 전쟁 중이니 세금을 함부로 걷지 말고, 쇠고기나 우유 등을 진공하지 말라고 한 것을 보면 당시 열 여섯살에 불과했음에도 소현세자는 분조를 훌륭하게 이끈 것으로 기록된다. 실제로 전주 분조를 철수하는 날, 호남 백성들이 송축했다는 기록까지 남아있었을 정도.
전란이 끝난 1627년(인조 5년) 말 강석기의 차녀와 가례를 올리게 된다. 이 시기의 기록물로 <소현동궁일기(昭顯東宮日記)>와 <소현분조일기(昭顯分朝日記)>가 있는데 당시 조선의 군 체계와 왕세자 교육을 담당하는 시강원(侍講院)이 사용한 교재 및 교육 체계 등을 알 수 있는 매우 귀중한 자료로, 시강원 스승들의 눈으로 본 소현세자의 공적 영역의 생활상에 대해 알 수 있다.[6]
정묘호란이 끝난 직후 시강원은 세자 교육을 위해 소현세자에게 엄청난 양의 공부를 시켰는데 1628년(인조 6년)에 있었던 조강례(朝講禮)[7]에서 소현세자가 강학한 책을 30번 읽는다고 하자 좌빈객[8]이었던 김상용이 "100번을 읽어야 그 뜻을 통달한다"고 답했고 1629년 조강례에서는 소현세자가 새로 배운 건 30번, 예전에 배운 건 20번 정도 읽는다고 하자 우부빈객 장유가 "읽는 양을 2배로 늘리라"고 했다. 같은 해 회강례(會講禮)[9]에서는 김류가 민간의 선비들은 하루에 읽는 횟수가 기본 100회이고 70회 밑으로 내려가지 않으니 그러니 "새로 배운 것은 60번, 전에 배운 것은 40번 읽으라"고 진언했는데 하루에 100번씩 읽는게 당시 세자의 기본 학습이었던 셈이었다.
소현세자는, 다음날 내일은 주강과 석강을 하겠다, 혹은 주강만 하겠다는 식으로 표면적으론 다음날 자기 공부 스케줄을 정할 수 있었다. 당일에 취소할 수도 있었고, 공식 행사가 있으면, 스승들이 먼저 취소시키기도 했다. 각종 행사 뿐 아니라 심지어 죄인들이 형벌을 받는 날도 휴일이어서, 수업을 통째로 쉬는 날은 은근히 많았다. 하지만 앞서 서술되었듯, 한번 나갔던 수업 진도는 그만큼 되풀이 암기하며 복습을 해야 했던 데다, 별다른 이유없이 수업을 빼먹는 일은 눈치 보여서라도 어려웠던 거로 보인다.
1.2.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가다
1636년(인조 14년) 병자호란에서 조선이 오랑캐라고 그렇게 천대하고 멸시하던 여진족의 나라 청나라에게 치욕적으로 패배하면서 동생인 봉림대군과 함께 볼모로 청나라의 심양(묵던)(Mukden, 현재의 랴오닝성 선양시)으로 끌려갔다. 소현세자가 포로로서 심양으로 이동할 때 시강원 인원만 300명 정도가 동행했고 정축하성(삼전도의 굴욕) 이후 인조는 세자가 북으로 억지로 끌려간 탓에 시강원과 동궁의 호위를 맡은 세자익위사(世子翊衛司)를 대폭 줄였다.[10]청나라로 간 소현세자는 고관[11]들과 접촉하면서 친분을 쌓으며 인맥을 쌓아나갔고 그를 통해 얻은 고급 정보를 몰래 인조에게 알려줘서 대비하게 하기도 했다.[12] 인질로 있으며 좌절하지 않고 아내 강빈의 권유로 심양 근처에 농장을 만들고 끌려온 조선인들을 노예 시장에서 돈을 주고 구출해내서 농장에서 일하게 하는 등의 성과를 보였다. 여기서 얻은 곡물로 장사를 하니 세자의 거처가 마치 시장과도 같이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상당한 재물을 얻어 청나라 관료들과의 교류와 심양관 운영에 쓰였다.
청나라 측에서는 툭하면 세자에게 외교적 현안, 특히 명나라와의 밀교 등에 대한 것을 따져 묻고는 했는데 그 때마다 세자는 마치 외교 훈련이라도 받은 듯이 능숙하게 답변하곤 했다고 한다. 유명한 일화로 청 장수 용골대가 세자를 윽박지르자 "나는 타국에 있지만 일국의 세자인데 어찌 이리 협박하는가? 죽고 사는 건 하늘에 달렸으니 이런 식으로 협박하지 말라."라고 조용히 반론한 적이 있다. 세자인 데다 포로 입장에서 저렇게 점잖게 반박한거지, 쉽게 말하면 "내가 한 나라의 왕자인데 고작 네까짓 장교한테 그 따위 소리를 들을 위치가 아니다. 꼬우면 죽여라" 하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13] 횡의 사건[14] 때는 도르곤 등을 찾아 평안감사, 선사포첨사, 의주부윤, 예조참판 등 청나라에 끌려 온 수많은 조선인들이 목이 붙은 채로 무사히 귀국할 수 있게 최선을 다 했다.
1.3. 아버지 인조와의 갈등
하지만 이러한 소현세자의 행보는 점점 아버지 인조의 견제를 사게 되었다.인조는 청나라의 침입을 막지 못하는 실책을 저질렀다. 한 나라의 군주라는 사람이 오랑캐에게 굴복해 무릎을 꿇고 머리를 조아리는 망신을 당해 권위가 바닥을 쳤고, 수십만명의 조선 백성들이 포로로 끌려가는 것도 막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인조는 청에 대한 반감을 끈덕지게 고수하며, 현실성 없는 복수라도 그것을 기치로 내걸었다. 박씨전 에 반영되었듯 당시 대부분의 조선 사람들이 청나라에 대한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다. 이렇게 적개심으로 대동단결한 민심에 편승하는 것이, 패전이라는 엄청난 실책을 저지른 인조 자신의, 조선 내에서의 권위를 부지하는 안전한 길이었다. 실제로도 청나라가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을 인질로 삼고 있음을 끊임없이 인조에게 상기시키며 [15] 인조를 협박해 오는 마당에, 이런 상황에서 인조가 청에 대해 증오심 외에 다른 감정을 품기는 힘들었을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 역시 환경만 보면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반청 감정을 품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사실 청나라로부터 받은 목숨에 대한 위협이나 굴욕적인 대우는 조선 구중궁궐에 남은 인조보다, 청나라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직접 받은 게 심하면 심했지 덜하진 않았다. 조선에서 끌려온 자신의 신하들(삼학사)이 코 앞에서 참수되는 것도 보았으니까. 인조와 소현세자의 결정적 차이는 이를 계기로 소현세자는 좀 더 상황을 냉정하게, 객관적으로 볼 줄 알게 되었단 것이다. 소현세자는 굴욕감에 이만 갈거나, 자포자기하거나, 장렬히 시들어버리는 대신, 당시 한창 국운이 상승중이고 영웅이 많던 건강한 청나라를 인정하는 데서 출발했다. 청나라를 오랑캐라고 혐오하고 멸시하는 기존의 조선식 사고에서 벗어났기에, 청나라와 조선 양쪽의 팽팽한 갈등을 조율하면서도, 조선인들을 보호하고 실익을 추구하는 훌륭한 외교활동을 수행하는 게 가능했다. 오죽하면 항복한 명나라 문인 범문정이 "조선 왕을 끌어내고 세자를 세웠으면 나았을 것"이라는 말을 했을까.
인조와 소현세자 부자의 불화는 선대의 선조와 광해군 부자의 관계와 유사하면서도 다른 점이 있다. 둘다 자신의 중대한 실정으로 권위에 위협을 느끼고, 그 결과 잘나가는 자신의 아들이자 후계자를 정적으로 간주해 억압하려 한 공통점이 있다. 다만 선조의 경우엔 문제가 더 심각했을 수 있다. 선조에게, 권위에 대한 위협은 현실적이었다. 재야 사림이나 조정 중신들은 공공연하게 선위를 요구했다. 이 때 선위를 주장한 이들이 차기 왕으로 지목한게 세자 광해군이었고, 임진왜란 이후 집권 여당 역시 광해군 충성파가 다수 포함된 강경파 북인이었다. 이런 상황에 폐위될 위기감을 느낀 선조는 왕 노릇을 계속하기 위해[16] 분조를 이끄는 임무를 훌륭히 수행한 아들 광해군을 적으로 간주하게 되었고. 어린 영창대군과 탁소북(濁小北)을 부풀려 키워, 광해군을 몰아내고 견제하려 하다가, 결국 자신의 사후 아홉살밖에 안된 어린 영창대군이 이복형 광해군 손에 의해 증살당하는 결과를 야기한다. 아무튼 선조가 받은 위협은 꽤 실질적이고 결정적이었다. 그를 공격한 것은 내부의 정치 권력이었고, 이는 달리 말하자면 선조의 내적 지지기반이 상대적으로 취약한 상태라는 의미였다. 또 선조를 폐위시키고자 하는 이들은 단순 공갈이 아니라 진심이었다. 다시말해 선조는 먼저 광해군을 공격하고 견제하지 않으면 실제로 자신이 공격당할 것을 합리적으로 예측할 수 있는 상황이었다.반면 인조의 상황은 좀 달랐다. 비록 청나라로부터 왕권 교체 위협을 받을지언정, 인조의 조선 내에서의 지지기반은 탄탄했다. 또한 당시 청나라가 인조를 협박한다 해도, 말 뿐이었지, 실제로 청나라의 행보를 보면, 소현세자를 내세워 인조를 몰아내고 조선의 왕권을 무리해서 교체할 의도까지는 없었다. 청나라의 일차적 목표는 어디까지나 명을 몰아내고 중원의 주인이 되는 것이었다. 소현세자를 왕으로 내세우겠다 협박하는 것은, 그 과정에서 여전히 자신들에 대한 반감을 숨기지 않는 인조가 행여 뒤에서 뒤통수를 치지 않을까 견제하기 위한 임시방편이었다. 청나라는, 국내에서의 지지기반을 잃지 않은 인조를 굳이 건드려, 조선인들의 격한 반발을 불러오는 에너지 낭비를 하고 싶지 않은 상황이었다. 청나라가 원하는 조선에 대한 간섭 수준은 명나라가 조선에게 가지고 있던 지위를 대체하는 것이었지, 특별히 그 이상의 간섭을 원하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인조에겐 그런 바깥 상황이나 흐름을 정확히 읽을 능력도 의지도 없었다. 인조는 청나라가 아들을 앞세워 자신을 몰아내려 한다는 두려움에 떨었다. 덤으로, 중전이 될 야망을 품은 소용 조씨가 소현세자에 대해 끊임없이 험담을 하는 과정에서, 소현세자를 정적으로 간주하는 인조의 환상은 점점 더 커지게 되었다. 물론, 만약 청나라가 인조를 끌어내리고 소현세자를 즉위시키려 했다면 청나라의 힘으로 즉위해 청나라에서 집권 정당성을 얻는, 한마디로 청나라 앞잡이 조선 왕이 탄생하는 셈이었다. 이를 고려말 원 간섭기에 투영해 청나라에 대한 종속이 심해질 것이라 예측하며, 그렇게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견제를 정당화했을 수 있다.[17] 하지만 정말로 청나라가 조선에 대해 원간섭기식 통치를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를 제거한다고 막을 수 있을 수준이 아니었고, 봉림대군으로도 얼마든지 대체 가능했다. 하지만 불행히도 인조에겐 그런 것을 판단할 능력도 없었다. 그저 소현세자와 그 자식들만 없으면 자신이 안전할 거라고 믿었다.
이런 인조의 두려움을 부채질하기라도 하듯, 그런 상황에서 소현세자는 볼모생활이 길어질수록 아버지의 통제나 틀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행동하는 모습을 보이게 되었다. 만주에서 볼모생활을 하며 조선의 구중궁궐에서는 접할 수 없었던 새로운 힘과 문화, 새로운 철학들을 접하게 된 소현세자 입장에서는 오히려 변할 수 없는 아버지가 내심 좋게 말해 안타깝고, 나쁘게 말해 답답하게 느껴졌을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왕이 되었을 때 실제로 계몽군주의 행보를 보일지 아닐지를 떠나 적어도 명백한 가능성을 보여줬다. 반면 이것이 과장되었다고 하는 수정주의적인 시각도 있다. 소현세자는 조선을 떠나기 전과 딱히 변한 게 없고, 딱히 뭔가 새로운 사상이나 비전을 대놓고 보여준 적도 없으며, 아담 샬을 통해 기독교와 서구 문물을 접했다는 것도 아담 샬의 거짓말이며, 심지어 소현세자는 청나라를 등에 업고 조선을 몰아낼 심지어 '병약'하기까지 한 꼭두각시였기 때문에 조선의 자주권을 지키기 위해서라도 현명하고 냉철한 인조는 부득이하게 아들을 제거할 수 밖에 없었다고 보는 것이다. 하지만 이런 수정주의적 시각은 <조선왕조실록> 같은 기본 사료에 명시된 소현세자의 개성이나 장단점에 대한 평가와도 한참 어긋난다.
앞서 말했다시피, 정말로 청나라가 왕족을 내세우는 원 간섭기식 경영을 하려 했다면, 인조가 소현세자 하나만 숙청한다고 해결될 일은 아니었다. 또한 소현세자가 청나라의 꼭두각시나 앞잡이가 될 거라는 예측은 그저 인조 시점에서 본 변명이자 허상에 불과했다. 솔직히 그 정도로 소현세자가 청나라 입장에서 다루기 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애초에 청나라 입장에서야 소현세자를 볼모로 잡아가는 목적이, 청나라 황실의 권위도 높일겸, 조선 왕실의 권위는 찍어누르며 인조도 자유자재로 부릴 겸, 정치적 입지를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었을 것이었다. 하지만 정작 소현세자는 청나라 황실 내에서도 주눅 들거나 겁먹어 지내며 시키는대로 청나라를 떠받드는 대신, 잡혀간 조선 백성과 그들의 안위를 챙기며, 청나라 황실의 볼모라는 입지를 도리어 활용해, 조선인 포로들을 사비를 털어 사들여 후일에 조선으로 데려갈 방법을 구비했다. 또한 도르곤이나 용골대같은 청나라 황실 밑의 장군들이나 군인들에게 꿇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청나라 황실의 볼모로서 왔으니 나는 청나라 황제의 손님'이라는 입장으로 그들에게도 대등하거나 우대를 받는 외교적으로 굉장히 현명한 태세를 잘 보여주었다.
소현세자가 청나라에 적개심을 가지고 있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하지만 소현세자는 그걸 드러내지 않을 정도의 현실 감각은 있었다. 덤으로 참으로 든든한 아버지, 즉, 조선을 방어할 힘도 없으면서 가진 거라곤 오랑캐에 대한 혐오심에,[18] 현지 돌아가는 사정도 모르면서, 동궁에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생각을 일절 드러내지 못하게 억압하는 아버지, 나중에는 자신을 정적으로 간주하는 과대망상에 빠진,[19] 아버지이기보단 짐덩어리에 가까운 아버지를 등에 업고도, 청나라의 압박과 등쌀에 어떨 땐 숙이고, 어떨땐 대항하며, 국본(왕세자)으로서 조선의 자존심과 품위를 유지하고 자국민을 힘 닿는 한 보호해냈다. 소현세자가 이런 어려운 업무를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것 자체가 과장이고, 유난히 허약 체질이라, 귀국하자마자 학질로 갑자기 돌연사했다는 시각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소현세자 병약자 설은, 승정원일기나 심양일기, 동궁일기 등에 나온 소현세자에 대한 방대한 기록 중, 진료 기록만 물량공세해 맥락을 창조하는 과정에서 나온 확증 편향에 가깝기 때문이다.
덧붙이자면, 물론 소현세자가 사가들 앞에서 지금까지와 다른 조선을 만들겠다고 천명한 바는 없다. 하지만 세자가 아버지를 비판하고 다른 노선을 타겠다고 사가들 앞에서 떠들어대는 것이야말로, 성리학적 질서 하에선 멍청하고 미친 짓이다. 아들로서 하지 말아야 할 불효이고, 국본(왕세자)으로서 절대 말아야 할 반역 행위일 것이다. 게다가, 실록에 나온 사가의 소현세자의 인성 총평을 보면, 소현세자는 영리하지만 내향적인 타입이었다.[20] 또한 <동궁일기>를 보면, 강압적인 시강원 스승들과는 동궁 시절부터 코드가 안 맞았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심양일기>나 <동궁일기>처럼 시강원 스승들이나 사관 앞에서 소현세자가 내뱉은 말만으로 소현세자의 내면을 읽긴 어려우며, 대신 그의 행동이나 무의식적 말을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다.소현세자는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가던 초기만 해도, 아랫사람들을 신경쓰고 배려하는 천성은 가졌을망정, 전형적인 성리학적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었다. 서얼 등 신분 차별을 당연시 여기고, 심양에 도착한 후에도 학문 경연을 멈추지 않았다. 하지만 볼모생활 후반, 소현세자는 변화를 보이게 되었다. 경연을 그만두었고, 새로운 문물에 관심을 가지고, 조선에선 천대받는 무인이나 노비들과 더 잘 터놓고 지낸다. 거기에 흥미롭게도 김자점이 훗날 강빈을 죽일 이유를 가져다붙이기 위해, 강빈이 소현세자의 암묵적 동의 하에 사관 보고서를 슬쩍 고쳐쓰는 일을 했다고 까는 내용이 실록에 언급되어 있다. 이는 당시 소현세자 혹은 세자빈이, 인조 입맛에 안 맞는 돌출언행을 보이고 뒷수습 했다는 정황일 수도 있다. 물론 김자점의 말이 사실일지 여부는 미지수지만. 아무튼 봉림대군이 훗날 소현세자를 까면서 '자기 주장이 없이 아내에게 끌려다녔다'고 표현하는 부분이 있는데, 성리학적 남존여비 철학을 따르자면, 남성만이 판단하고 책임질 권리가 있고 여성은 판단하지 않고 남성의 결정에 순종하는 것이 미덕이다.[21] 그런 질서 속에서 봉림대군에게 저런 식의 까일 구실을 제공했다면, 세자빈은 자기 생각이 분명한 편이고, 소현세자는 '바깥일에 간섭하지 말아야 할 아녀자에 불과한' 세자빈의 생각을 귀담아듣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던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는 심지어 성리학적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천주교에 호감을 드러냈던 것으로 보인다.[22] 아담 샬의 회고록에 나온 소현세자의 개인 서신은 말 그대로 쐐기를 박는다. 후술하겠지만, 선교사 아담 샬의 회고록에 오류나 과장된 측면이 있음은 사실이다. 심지어 아담 샬은 소현세자를 조선의 왕세자가 아닌 왕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하지만 최소한 소현세자가 조선을 떠나기 이전과 비교해 변화하거나, 변화하려는 마음가짐이 없었다면, 아담 샬 역시 소현세자의 눈에 헛소리 하는 양이 정도로 보였을 것이며, 아담 샬이 소현세자가 기독교에 호감을 보였다는 기록을 남길 수 있을 리 없다. 이러한 소현세자의 변화는 소현세자가 사망 직후 쓰여진 <조선왕조실록> 소현세자 졸기에도 대놓고 기록되어 있다. 당시 사관들은 이런 소현세자의 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안타까워 하며 '까는 논조로' 썼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더더욱 허구이기 어렵다.
소현세자는 점차 변하고 있었지만, 대리청정 때와 마찬가지로 소현세자가 아버지인 국왕이 시키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 했다. 또 이런 사고방식을 벗어날 길이 없었던 인조에게는, 소현세자가 가지기 시작한 이런, 어쩌면 조선의 미래를 다른 방향으로 흐르게 만들 수 있었을지 모를 변화의 씨앗, 즉, 이런 독립적 행보 자체가 부담이었을 것으로 보이며 또한, 드러난 기록에 따르면, 인조가 소현세자를 미워하게 된 원인 중 하나는, 바로 사비를 털어 청으로 끌려간 조선인 노예들을 구출해 낸 것이었다. 소현세자가 애민사상에 입각해 한 행동을, 인조는 자신에게 대항할 사병을 모으는 행위 정도로 상상했다.[23]
이렇게 소현세자는 자기 할 일 열심히 하고, 더 나아가 기존의 조선질서에 대해 비판적인 행보를 남기는 과정에서, 인조의 아들에 대한 두려움은 차곡차곡 적립되었고, 이는 소현세자가 2차례 임시 귀국을 했을 때 적나라하게 드러나게 되었다.
삼전도의 굴욕 이후 3년 만에 소현세자는 1차 귀국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에 보낸 조선 사신이 "세자가 3년이나 청에 있었으니 고국 구경이나 시켜달라"며 독단적으로 요구한 것이었다. 청나라는 원손과 인평대군을 볼모로 보내는 것을 조건으로 승낙한다. 비록 원손은 잠시 부모 얼굴만 보고 고국으로 돌아왔고, 인평대군 역시 고국으로 돌아왔지만, 독단으로 진행된 이 일로 원손까지 청나라의 손아귀에 집어넣을 뻔했다고 판단한 인조는 격분해 사신을 유배보냈으며 환영 행사도 치르지 않았다. 2차 임시 귀국 때는 의심이 더욱 심해져 있었는데 "세자가 여기 오래 있었으니 또 1번 보내주겠다."며 일시 귀국시킨 것을 영구 귀국으로 잘못 이해하고 '중한 것은 버리고 작은 것은 취하니 이 어찌된 영문인가? 저들이 갑자기 호의를 보이니 내 알 수가 없구나. 조그만 일에도 의심이 생긴다. 1번 화살에 상처입은 매란 으레 이런 것이다'라면서 노골적으로 의심을 드러냈다. 이러한 의심은 세자빈 민회빈 강씨의 친정 아버지이고 인조의 사돈이며 소현세자의 장인인 강석기가 화병으로 피를 토하며 죽은 이듬해, 김자점을 비롯한 삼정승이 세자빈이 "아버지 묘를 찾아 곡을 하게 해달라"는 요구를 강경하게 거절하는 것으로 표면화된다. 나중에 강빈의 사사(賜死)에 한몫을 했던 김자점조차 크게 당황해서 "빈궁(민회빈 강씨)이 부친상을 당해서 가보라고 청나라에서 보내줬는데 못 보게 하면 청나라 사람들이 의심을 하지 않겠습니까?"라고 다시금 청했으나 무시했고[24] 세자가 청나라로 갈 동안 찾아보지도 않았다.
설상가상으로 심기원의 역모까지 터지는데 인조반정의 1등 반정공신 심기원이 회은군[25]으로 바꾸고 이것저것 꾸미다 발각된 사건이다. 심기원이 끝까지 억울함을 호소했다는 사실은 별개로 치더라도, 심기원을 고변한 황익은 심기원이 원래 인조를 상왕(上王)으로 모시고 심양에서 나온 소현세자에게 양위시키는 방안도 강구하였으나, 막상 귀국한 세자를 보니, 그가 응하지 않을 것 같아 시도하지 않았다는 진술까지 덧붙였다. 솔직히 황익의 고변은 소현세자가 아버지를 몰아낼 의도가 없음을 보여주면 보여줬지, 반대의 경우는 아닌 듯하다. 그럼에도 단지 역모 고변 사건에서 소현세자 이름이 지나가듯 잠깐 언급되었다는 이유만으로도, 인조는 소현세자에 대한 편집증적 두려움을 더더욱 키우게 되었다.
1.4. 귀국과 죽음
1644년(인조 22년), 명나라의 수도 북경에 이자성이 이끄는 반란군이 들이닥치면서 명나라는 276년만에 멸망한다. 그러나 이자성의 반란군은 오삼계와 손잡은 청나라에 의해 모조리 쓸려나가고, 청나라는 북경에 무혈입성으로 입관하여 중원을 제패한다.1645년(인조 23년), 청나라의 실권자인 섭정왕 도르곤[26]은 소현세자 형제의 영구 귀국을 섭정왕의 자격으로 허락했다[27]. 이에 소현세자는 아내 강빈 및 세 명의 아들들과 함께 고국 조선으로 약 9년만에 영구 귀국했다.
인조가 돌아온 소현세자 내외의 환영 행사를 대대적으로 하지 않았다는 것을 근거로 이때부터 이미 인조가 소현세자 일가를 제거해버릴 마음을 품었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있는데, 후술하겠지만 이때 소현세자는 환후가 중해 귀국도 지체될 정도로 중환자여서 행사고 뭐고 기뻐할 새가 없었다. 만일 부친 인조가 정말로 흑심을 품고 세자 일가를 죽이려 했다면 오히려 크게 잔치를 대대적으로 벌여서 강제로라도 참석시키는 쪽이 더 빨랐다.
이미 오기 전부터 심했던 지병이 악화된 소현세자는 귀국한지 3달도 못 되어 1645년(인조 23년), 학질로 돌연 세상을 떠났다. 오랫동안 편집된 조선왕조실록의 기록만 알려져 독살설이 널리 퍼졌으나, 승정원 일기, 심양일기를 토대로 한 연구 결과는 지병 악화로 인한 돌연사 가능성도 제기한다. 다만 전근대 기록의 한계로 사망 원인은 여전히 명확히 판명되지 않았다.
믿기지 않겠지만, 승정원 일기의 기록에 따르면 세간의 인식과 다르게 소현세자가 사망하자 인조는 도리어 아들의 죽음을 크게 슬퍼해서 소현세자가 사망한 4월 26일부터 5월 2일까지 미음조차 먹지 않았다고 한다.[28] 참조.
인조의 이후 행적을 보면 결국엔 남의 자식인 며느리와 그 며느리의 피가 섞인 손자들은 배척해도 아들들만은 오롯이 아꼈다.
1.5. 소현세자의 가족들에 대한 인조의 숙청
소현세자가 죽은 뒤 인조는 원손 석철이 아닌 차남 봉림대군을 후계자로 세웠다. 이는 종법 질서에 맞지 않는 일이라서 신하들의 반발에 부딪혔다. 당시 원손은 10살이었고,[29] 어릴 때부터 계속해서 군왕 교육을 받아왔다. 그러나 인조는 소현세자가 죽은지 얼마 되지 않아 봉림대군의 세자 책봉을 밀어붙이며, 봉림대군이 장성했기 때문에 자신이 사망했거나 하는 유사시에 나라의 안정을 꾀할 수 있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설득하기보단[30] 대신 왕의 권위로 신하들의 반발을 찍어 눌렀다.소현세자 사후 인조 23년 5월 20일, 송준길이 지평의 벼슬을 사양하면서 상소하여 김상헌을 시켜 원손을 교육하게 하고 의원 이형익을 처형할 것을 청하였으나, 인조는 한마디 비답도 내리지 않고 그를 체직해버렸다. 5월 6일과 5월 27일에는 안시현(安時賢)이 상소를 올려 세손을 책봉할 것을 청했으나, 5월 6일 상소에 대해서는 "이 같은 소인의 행태는 내가 차마 똑바로 볼 수 없다."라고 크게 성을 내면서 물리쳤고, 5월 27일의 상소도 읽씹을 해버렸다. 윤 6월 2일, 인조는 기습적으로 신하들을 소집하여 자신이 늙고 병들어 미약한 원손이 성장할 수 있는 것을 볼 수 없겠다고 선포하면서 대군들 중 한 사람으로 새로 세자를 세우겠다고 선포버린다. 놀란 김류가 신하들에게 물어서 처리하라고 발을 빼자 좌의정 겸 약방도제조 홍서봉이 "옛 역사를 상고해 보건대, 태자(太子)가 없으면 태손(太孫)으로 이었으니, 이것이 곧 바꿀 수 없는 떳떳한 법입니다. 상도를 어기고 권도를 행하는 것은 국가의 복이 아닌 듯합니다."라고 반대했고, 심열도 "홍서봉의 말이 신의 뜻과 정히 부합됩니다. 전하께서 비록 사소한 병환이 있으시기는 하나 아직 춘추가 한창 때이시고, 원손이 비록 미약하기는 하나 이미 10세에 이르렀습니다. 예로부터 어린 임금이 왕위를 이은 경우가 어디 한량이 있었습니까. 종통은 매우 중대한 것이니, 가벼이 의논할 수 없을 듯합니다."라고 동조했다. 이경여 역시 홍서봉과 심열에게 동조하면서 "대체로 떳떳한 법을 지키면 비록 어려운 시기를 당하더라도 오히려 나라를 보전할 수 있지만 만일 갑자기 권도를 쓰면 인심이 복종하지 않아서 흔히 환난을 일으키게 됩니다. 지금 온 나라가 원손에게 기대를 건 지 이미 오래인데, 만일 이 말을 듣는다면 중외의 인심이 반드시 모두 소란해질 것이니, 매우 두렵습니다."라고 하였다.
하지만 김자점은 반대하지 않고 여러 신하들의 의견을 묻자고 하였고, 인조는 김류에게 영의정인 당신이 결단하라고 그를 압박하였다. 김류가 "신이 비록 수상의 자리에 있기는 하나 어찌 감히 혼자 결단할 수 있겠습니까. 만일 종사의 존망이 이 일에서 결판난다는 것을 분명히 안다면 뭇 신하들 가운데 진실로 감히 다르게 의논할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의 일이 존망에 관계된다고 반드시 볼 수 없는데도 비상한 도리를 행하려고 하시니, 이것이 바로 신들이 감히 함부로 의논하지 못하는 까닭입니다."라고 발을 빼려 하자 인조는 태종조 때는 신하들이 양녕대군을 폐하라고 청했는데 니들은 뭐하냐면서 압박하였다. 그리고 덕종이 죽은 후 월산대군이 아니라 예종이 승계한 전례, 예종이 죽은 후 제안대군이 아니라 잘산군이 승계한 전례를 들면서 나이가 찬 임금이 있어야 종사를 보전할 수 있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그럼에도 우찬성 이덕형과 이시백은 홍서봉의 의견에 동조하면서 계속 반대했고, 이경석과 이식, 김육, 정태화, 이목, 여이징도 모두 반대했다. 이에 성이 난 인조는 "이 일은 반드시 대신이 결단해야겠다. 경들은 이렇게 평범한 말만 하고 있으니, 어느날 갑자기 내가 죽기라도 한다면 경들은 어떻게 할 생각인가."라고 버럭 화를 내어서 좌중이 갑분싸 분위기에 빠졌다.
이쯤되자 김자점이 적극적으로 영합하면서 분위기를 조성하고 나섰고 분위기를 읽은 김류도 슬금슬금 동조하여 "만일 상의 뜻이 이미 정해졌다면 신이 어찌 감히 그 사이에서 가부를 논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다만 "지금은 원손이 어려서 아직 덕망을 잃은 것이 드러나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오늘의 하교가 있으므로, 인심이 놀라 의혹하고 뭇 신하들의 의논이 귀일되지 않은 것입니다."이라고 좀 유보적인 태도를 보였는데, 인조가 원손의 사부인 김육을 지목해서 원손이 현명한지 불초한지를 말해보라고 하였다. 아마도 김육에게 알아서 원손 좀 욕해보라는 의도였겠지만 김육은 꿋꿋하게 "원손이 아직 어려서 덕망을 잃은 것이 없습니다."라고 답하였다. 그러자 인조는 원손이 띨띨해서 안된다고 욕을 하기 시작했고, 예조판서 이식이 "진강(進講)할 때에 원손의 재기(才氣)가 드러난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라고 반박했다. 이경석도 "신도 강서(講書)의 반열에 나가 참여하고 있으나, 어린 소년에게 어찌 장래의 성취를 미리 점칠 수 있겠습니까."라고 두둔했다. 그러나 답정너 인조는 "한갓 그 현명함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나이를 가지고 또한 말한 것이다."[31]라고 선포하더니 이덕형 등이 계속 반대함에도 불구하고 김류와 김자점을 시켜 분위기를 조성한 다음, 남은 아들 둘이 모두 용렬하지만 그중에서 장자를 삼겠다는 논리로 봉림대군을 세자로 선포하였다. 6월 4일, 봉림대군은 세자 책봉을 사양하는 소를 올리며, 짐짓 원손에게 왕위를 물려주어야 한다고 청했으나, 인조는 "상소를 살펴보고 너의 간절한 마음을 잘 알았다. 너는 총명하고 효성스럽고 우애 있으며 국량이 좁은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특별히 ‘맏형이 죽으면 그 다음 아우가 계통을 잇는다.[兄亡弟及]’는 예를 썼으니, 너는 사양하지 말고 더욱 효제(孝悌)의 도리를 닦아 형의 자식을 마치 너의 자식처럼 보살피거라."라고 하면서 이를 물리친다. 이후 봉림대군을 세자로 한다고 했지 기존의 원손을 어떻게 한다는 말이 없어 조정에서는 경선군을 계속 원손으로 불렀는데 인조는 한동안은 이를 방관하다가 저주 사건이 터진 8월에 비망기를 내려 ""원손의 칭호를 지금까지 그대로 쓰는 것은 매우 해괴한 일이니, 각사의 해당 관리들을 추고하여 치죄하라."라고 원손의 운명을 관짝에 넣어버린다. 이후 원손은 제손(諸孫)으로 부르게 하였다.
이렇게 효종과 현종의 승계 라인을 자기 독단으로 결정지은 인조는, 그 다음엔 며느리 강빈을 역적으로 몰아 죽여버림으로서, 소현세자 적자들의 정통성을 없애는 그의 기준에선 깔끔하고도 효율적인 방식을 택했고, 봉림대군 세자 책봉 후 본격적으로 숙청의 칼날을 빼 들었다. 다만 인조는 이와중에도 명분과 형식을 꽤나 중시하는 양반이라, 사실상 윗사람에게 찍힌거 외엔 전혀 잘못한 게 없는 강빈을 죽어 마땅한 악녀로 만들기 위한 작업을 시작했는데, 총애하던 후궁 소용 조씨를 저주했다는 죄목으로 원손 이석철의 유모를 포함한 궁인 두 사람을 고문하다 죽였다. 또한, 여전히 사용되던 원손의 이름도 모든 공문서에서 삭제했다. 이때 강빈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임신 중이었는데,[32] 궁인들이 죽어나간다는 말을 듣자 도저히 참을 수 없었는지 인조가 머무는 창경궁 양화당 앞으로 달려나가 '제발 헤아려 달라'고 애원했다. 하지만 인조는 불쾌해하기만 했으며, 같은 달 강빈의 남자 형제들, 문성(文星)·문명(文明)·문두(文斗)·문벽(文璧)을 각각 제주(濟州)·진도(珍島)·흡곡(歙谷)·평해(平海)로 귀양보냈다.[33]
다만 이는 전초전에 불과했다. 이듬해인 1646년(인조 24년) 1월 자신의 수라에 올라온 전복에 독을 탔다는 누명을 씌워 강빈의 궁녀들을 무고했다. 그냥 무고한 정도가 아니라 세자빈의 지시로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탔다는 말을 실토할 때까지 고문했다. 하지만 이 과정도 인조 마음대로 순순히 풀리지는 않은 게, 세자빈을 모시던 십수명의 궁인들은 고문을 당하다 잔혹하게 죽는 한이 있어도, 강빈을 배반하는 허위 실토는 하지 않았다.[34] 이 무렵, 강빈은 소현세자의 유복자를 유산하고 멘탈이 나가있던 상태였다. 설사 멘탈이 정상이었다고 해도 불가능한데 이 때 강빈은 인조의 명령으로 유폐되어 있었다. 어거지를 써서 강빈이 궁인을 시켜 독살시도를 할 수 있었지 않나 싶어도 진짜 왕에 대한 암살 미수사건이면 의금부나 형조를 시켜 수사를 하도록 지시하는데 인조는 내시들을 동원했고 또한 어찌되었던 왕이 먹을 음식에 독이 들었다면 그걸 중간에서 걸러내지 못한 왕의 궁녀들의 잘못임에도 정작 그들은 쏙 빼놓고 고문하지 않았다.
실록에 보면, 인조가 강빈을 죽이기 약 1달 전인 1646년 2월, 김자점과 함께 강빈을 비하하는 내용이 있다. "청나라에서 올 때 비단과 금을 잔뜩 실어왔으니, 그것으로 마음만 먹으면 뭔 짓인들 못하겠느냐고" 인조가 말 한다. 그러자 김자점은 "세자가 사냥을 나가거나 하면 사관 보고서를 멋대로 고쳐썼다는데 아녀자가 되어서 바깥일에 이렇게까지 개입할 수 있느냐."는 식으로 맞장구쳤으며, 긴 대화 끝에 "강빈과 소현세자의 아들 셋도 그대로 뒀단 화근에 된다"고 언급한다.
결국 강빈은 '성정이 포악해 국왕이 총애하는 후궁을 저주한 것도 모자라 임금의 수라에 독을 타려 했다'는 죄목으로 폐서인 되었다. 폐서인이 된 강빈은 궁에 들어올 때 탔던 꽃가마 대신 검은 휘장이 둘러쳐진 가마를 타고 사가로 쫓겨났으며 바로 그날 사약을 받았다.[35] 유배를 갔던 강빈의 남자 형제들도 강빈이 사사된 후 곤장을 맞다 죽었으며 심지어 강빈의 친정어머니까지 누명을 쓰고 사형당했다.
강빈이 죽은 후에도 인조는 계속해서 며느리에게 누명을 씌웠다. 세자가 된 봉림대군이 들어올 창경궁 저승전에 강빈이 흉물을 묻어 봉림대군을 저주했다고 단정했는데, 문제는 당시 강빈이 그 저승전에 거주 중이라는 것이었다. 때문에 사관조차 자기가 자기 거처에 흉물을 묻으면 그 저주가 어디로 가겠냐고, 인조의 주장이 어이없다는 의견을 남겼다.[36] 하지만 그러거나말거나, 인조는 저승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며, 묻혀있는 흉물들을 많이 찾아올수록 포상하게 했다.
이런 상황에서 인조의 당초 계획대로 소현세자와 강빈의 세 아들들(경선군, 경완군, 경안군)도 죄인의 아들이 되었으며, 장남 이석철은 열살, 차남 이석린은 여섯살, 삼남 이석견은 두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제주도로 유배형에 처해졌다. 당시 제주도엔 장독이라는 돌림병이 창궐하고 있었는데 장남 석철과 차남 석린은 이 병에 걸려, 각각 열세살과 아홉살에 연이어 병사한다. 유배될 당시 만 두돌이었던 막내 석견만 혼자 살아남았으며 효종 사후 간신히 '경안군'으로 봉군되고 왕족 신분을 다시 회복했지만, 경안군 역시 오랜 유배생활로 인해 겪은 고초와 스트레스 때문에 병상생활을 하다가 22세의 나이로 요절하였다. 그나마 경안군은 혼인을 해서 죽기 전 당시 세살이었던 장남과 한살이었던 차남을 낳아둔 덕분에, 소현세자의 혈손들은 절멸하지 않고 오히려 갈수록 효종의 혈손들보다 번창하게 되었다. 나중에 가면 효종의 가계는 부계가 완전히 단절되었음에도 소현세자의 가계는 조선 멸망 이후에도 끝까지 살아남아 현재에도 많은 후손들이 살아가고 있다.
소현세자가 죽고 강빈이 숙청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청나라의 용골대는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데려가서 키우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이것이 청나라의 공식적 요청이며, 친청파 조선 왕을 육성하려는 의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소현세자 가계를 통해 조선 왕가를 견제하려는 의도로 해석하는 시각도 있다. 하지만 이 요청이 청나라의 공식 요청이 아닌 용골대의 개인적인 요청이며, 소현세자가 적대적인 입장에도 불구하고, 그간 서로를 존경하고 호감을 느꼈기 때문에, 안타까운 마음과 동정심에 아이들을 데려가고 싶다는 소회를 밝혔다는 시각도 있다.[37] 용골대의 의도가 어찌되었건, 인조는 셋 중 둘은 이미 죽었다는 거짓말로 변명해 둘러댔다. 인조의 거짓말은 곧 진실이 되어, 석철과 석린은 유배지에서 돌림병에 걸려 죽었다.
효종 역시 아버지 인조의 태도와 크게 다르지 않아 형수인 강빈을 '역강'「逆姜」(반역자 강씨라는 뜻)으로 비하했다. 또한 조금이라도 강빈을 비호하거나 그녀의 억울함을 주장하는 신하들은 심하다싶을 정도로 잡아 고문해 죽이는 등, 매우 철저하게 강빈을 모독하고 배척했다. 또한 자신의 정통성을 수호하기 위해서였는지 죽기 직전까지[오류] 형 소현세자의 아들과 딸들을 왕족으로 신원회복 시켜주지 않았다.
이래저래 소현세자는 심지어 대한제국 때에도 추존왕으로 추존되지는 못하였다.
1.6. 소현세자의 묘
소현세자의 묘는 경기도 고양시의 서삼릉 내에 있는데, 그 묘를 소경원(昭慶園)이라고 한다. 본래는 소현묘(昭顯墓)라 불리었으니, 고종때 세자'묘(墓)'를 '원(園)'으로 격상하는 조치로 소경원으로 바뀌었다. 정자각은 한국 전쟁 때 불타 초석만 남아 있다.이 묘는 비공개라 들어가 볼 수 없다. 그 이유는 소경원 구역이 농협 사유재산 부지이기 때문. 단 아예 볼 수 없는 것은 아니고 서삼릉에 가면 매월 마지막 주 토요일 오전 10시에 해설사의 인솔 하에 비공개 능역을 들어갈 수 있는데, 소경원을 답사하고 싶으면 이때 시간 맞춰서 서삼릉을 방문하면 된다. 또 근처의 군 부대에서 정훈교육 기간에 맞추어 단체 방문한다. 비공개 능역 답사 때 인종과 인성왕후의 능인 '효릉(孝陵)'과 폐비 윤씨의 묘인 '회묘(懷墓)'도 돌아볼 수 있다.
1.7. 소현세자 죽음의 원인에 대한 고찰
승정원일기가 전산화되기 이전 실록에 의존해야 했을 때 이덕일이 제시한 수많은 독살설 중에 실록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고 생각되었고, 인조의 행동 때문에 연구자들도 한때 독살을 비롯한 타살 가능성에 동의했던 몇 안 되는 인물 중 하나가 소현세자다. 실록에만 의존하던 시절, 타살 근거는 다음과 같았다.청나라에서 돌아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소현세자는 시름시름 앓기 시작했다. 내의원에서는 세자의 병이 학질(말라리아)이라고 했다. 침을 놓는 시술이 시작됐지만, 소현세자는 불과 사흘 만에 창경궁 환경전에서 그만 숨을 거두고 말았다. 그러나 세자의 죽음은 의문투성이였다. 일단 '학질(말라리아)'이라는 병이 의심스러웠다. 모기를 통해 감염되는 말라리아는 여름에 걸리는 전염병인데, 세자는 늦겨울 2월에 돌아왔기 때문이다. 병증이 학질이 맞다 하더라도 약 처방이 아닌 침을 놓는 시술을 시행한 것도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소현세자는 이렇다 할 치료조차 받지 못하고 청국에서 돌아온 지 두 달만에 숨을 거뒀다. 그래서 소현세자가 독살당했다는 건 한때 학계 정설로까지 굳어지는 듯했다.
하지만 방대한 승정원일기가 전산화되고, 세자의 질병을 상세히 기록한 심양일기와, 시강원 스승들이 작성한 소현세자의 학창생활, 즉, 2만 페이지에 달하는 소현동궁일기의 국역과 출간이 이뤄진 시점에 당시 정세를 단편적으로나마 훨씬 디테일하게 엿볼 수 있게 되어, 의학적 관점에서의 연구도 더해졌다. 이후, 위의 추론된 근거만으론 독살을 단언할 수 없게 되었고, 대신 다른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평소 지병이 있던 소현세자가 17세기 한의학으로 해결하지 못하는 지병의 급성 악화로 사망했고, 당시 인조는 그런 상황을 철저히 이용했다는 것이다. 다만, 소현세자의 돌연사를 유발한 그 지병이 무엇이었는지 규명하는 것 역시 17세기 의학 기록의 한계로 결국 추론의 영역에 머물게 되었고, 워낙 인조, 혹은 귀인조씨가 소현세자를 숙청하고도 남을 맥락과 앞뒤 정황이 있다 보니, 독살, 혹은 타살설 역시 정황상, 그리고 대중적으로는 설득력을 잃진 않은 상태다.
독살설을 비롯해 실증적 가능성이 크게 낮아진 타살의 경우를 배제하면 아무래도 상술했던 병사의 가능성이 높다. 서울대 법의학자, 부검의로 활동중인 유성호 교수는 한 방송에서 제1형 당뇨성 케톤산증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제1형 당뇨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으로 급격한 스트레스나 감염 등의 사유로 발현되며 주로 30대 초반에 발견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소현세자가 청으로 잡혀간 20대 후반에서도 표본이 많고 오히려 의료 접근성이 높아진 현대의학에서 20대 후반에 진단을 받는 경우가 많아졌기 때문에 연령 측면에서도 충족하며 청으로 잡혀간 후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았을 것임은 당연지사이므로 조건에 부합한다. 소현세자의 병상일지를 보면 청에서 지낼 당시에 비뇨계 질환과 갈증 등을 호소했고 귀국 후 식후혼곤증과 기침, 천식 등의 기관지질환이 수 차례 기록돼있다. 거기다 당시 학질이라고 기록했던 말라리아의 주요 증상인 발열 또한 자가면역질환의 주요 증상이다. 전후 상황을 고려했을 때 제1형 당뇨를 앓고 있던 소현세자가 극심한 스트레스로 병세가 악화되었고 3개월에 걸친 귀국길에서의 여독 및 당시 인조의 편집증으로 인한 압박 등 심신이 한계치에 임박하자 합병증으로 케톤산증이 나타나 사망에 이르렀다는 유추가 가능하다. 당시 의학으로는 진단할 수 없는 내용이고, 제1형 당뇨의 치료는 현대의학에서도 오로지 인슐린 투여 뿐이기에 만약 이러한 내용이 사실이라면 병세가 외부로 드러나기 시작했을 시점에 소현세자의 죽음은 확정적이었던 셈이다. 다만, 유성호 교수가 말했듯 이는 어디까지나 제한적인 근거와 현대의학에 기반한 추론에 불과하다. 같은 방송에서는 쇼그렌 증후군을 의심하는 소견도 소개되었다.[39]
1.7.1. 소현세자 독살설의 허점
일단 상술된 이전 독살 논리의 허점은 다음과 같다.첫째 전통 의학에서 학질은 모기에 물린 말라리아만을 의미하지 않았고. 고열과 주기적인 발작이 동반되는 병증을 통틀어 학질로 칭했다.[40] 따라서 2월의 겨울 날씨라 해도 소현세자가 넓은 의미의 학질 증상을 보일 수 있었다.[41]
두번째로, 소현세자가 고국으로 영구 귀국 후 병세가 악화되었을 때 '이렇다 할 제대로 된 진료도 받지 못했다'는 말은 매우 위험한 오해의 소지가 있다. 귀국한 소현세자가 아플 때마다 내의원에서는 매번 여러 명의 어의를 파견했으며, 사망직전 급격히 사경을 헤맬 때는, 인조가 어의들의 의견을 수용해 침의(鍼醫) 2명만 자신옆에 남기고 모든 어의를 동궁에 보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 '이렇다 할 제대로 된 진료도 받지 못했다'는 표현은 실록 기록을 근거로 한 것으로, 소현세자가 귀국길에 아팠다가, 어의들의 처방으로 회복되었던 일을 생략한 것이다. 소현세자는 이후 약 한달 반 정도 건강한 모습을 보였다. 문제는 이후 갑자기 쓰러져 여러 어의들의 다양한 처방에도 불구하고 그저 악화 일변도만 걷다 3~5일 만에 사망했다는 점이다. 이렇게 '사망 순간 효과적인 치료를 받지 못했다 =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못했다'라는 말로 표현한 것이면 모르되, 무려 국본인 소현세자가 사경을 헤매며 어의도 없이 방치되었다 이해하면 그것은 왕실 시스템에 대한 몰이해에서 나온 사실 왜곡이다.
세번째로, 전통 한의학은 학질 치료에 침술도 주된 치료로 활용하였다.[42] 전통 한의학에선 학질을 외감병, 몸 내부가 아닌 밖에서 사기가 침투해 발병한다고 보았고, 밖에서부터 들어온 병은 빼내는 걸 기본으로 하기에 침을 써서 안에 머물고 있는 사기를 빼내는 개념으로 침술 치료를 시행했다. 또한 승정원일기의 소현세자 치료기록을 면밀히 살펴보면 이형익이 시술한 번침은 메인이 아니었고, 이형익은 소현세자를 진료한 유일한 어의도 아니었다. 조선에 돌아와 처음 증세를 보일 때, 기존 약 처방을 써봤는데 차도가 없어서, 이형익이 응급조치로 침을 놓았고, 그때 침술이 효과를 내서 병세가 호전되었다. 이후 한동안 소현세자는 병세가 사라져 건강한 모습을 유지했다. 그러다 느닷없이 병이 재발하고 순식간에 심각한 단계에 이르렀다. 이때 기존에 신임을 얻었던 이형익이 침을 놓았는데, 이때 소현세자가 사망에 이른 것이다.
1.7.2. 새로 연구된 소현세자 질병에 대한 상세한 기록
승정원 일기, 심양일기 등 새로 연구된 방대한 사료에서 발견한 소현세자에 대한 기록 중 질병 관련 내용들만 발췌해 모아보면 구체적으로 다음과 같다.1. 소현세자는 10대 동궁 시절부터, 극심한 스트레스를 받으면, 위장 계통에 탈이 나는 체질이었다. 1625년(인조 3년) 6월 경엔 머리는 좋아 배운걸 잘 기억하나, 그것만 믿고 집중하지 않아 기본자세가 틀려먹었단 꾸사리를 연달아 먹더니, 오밤중에 느닷없이 토하고 난리가 났다. 어의들도 난리가 났고 시강원 스승들도 당황해 병문안을 들락거렸지만, 세자는 매우 창피해 했다.
2. 스트레스성 속병 증세가 어의가 원정 파견될 정도의 중증으로 처음 기록된 건 1637년(인조 15년), 삼전도 항복 이후 볼모로 청나라로 끌려간 직후다. 심리적 고통과 달라진 환경에 기인한 것으로 추정된다. 이때는 소현세자 뿐 아니라 세자빈도 함께 스트레스성 속병을 얻어, 심양에 도착하자마자 나란히 몸져 앓아누웠고, 세자빈의 증세가 더 심했다고 기록되었다. 다만, 그 상황에서도 세자빈은 경숙군주로 추증된 셋째 딸을 출산했다.
3. 심양에 머물며 청과 조선을 중재하던 시절, 소현세자는 확실히 동궁에 있던 시절에 비하면 병치레를 자주 했다. 1637년(인조 15년)엔 산증이라 불리는 비뇨기 계통, 소화기 계통 속병으로 해석되는 지병이 생긴거로 추정되며, 그 외에도 감기, 안질, 말을 타다 생긴 부상 등으로 부쩍 어의들의 진료 기록이 잦아졌다. 또, 증세가 심각해지면 조선에서 처방전, 어의, 약재를 파견받곤 했다. 8년의 볼모생활 중 어의가 파견된 건 총 세차례로, 청나라에 도착한 이듬해인 1638년(인조 16년) 5월, 3년 후인 1640년(인조 18년) 10월 16일. 그리고 그로부터 4년 후인 1644년(인조 22년) 3월이다.[43] 게다가 1644년에는 특히 소현세자의 몸을 망가뜨릴 일이 있었는데, 바로 장거리 행군이었다. 인조의 병환이 심해지자 소현세자는 병문안을 위해 청 측에 간절히 부탁해서 임시 귀국을 허락받아 한양에 다녀왔다가 곧바로 산해관 전투에 가야 했다. 이 때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산해관, 북경으로 이어지는 수천 킬로미터에 달하는 강행군을 강요해야 했다.심양일기에 따르면 행군길에 제대로 된 숙소도 만들지 못해서 신하들은 말 그대로 땅바닥에 그냥 누워서 자야 했고, 세자 본인은 겨우 청군에게 임시 천막을 빌려서 쉴 수 있었다. 이러니 몸 상태가 어땠을지는 두 말할 필요가 없다.
4. 소현세자 건강에 다시 이상이 생긴건, 북경에서, 귀국을 허락받고 영구 귀국길에 오른 1644년(인조 22년) 11월 18일 이다. 본래는 1645년(인조 23년) 1월 6일 심양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이로 인해 예정보다 3일 늦은 1월 9일 심양에 도착했다. 이후 소현세자는 보름 정도 심양에서 요양, 치료하며 병세가 호전되길 기다렸고, 1월 말에 심양을 떠나게 되었다. 이후 2월 18일 한양에 도착했지만, 증세가 호전되지 않아, 20일부터 어의들이 파견되어 침과 약을 처방했고, 3월 14일 이후 엔 거의 완치되었다.
4_1. 승정원일기를 토대로 당시 어의들이 소현세자를 치료한 진료 기록을 그대로 옮겨보면 다음과 같다.
처음 소현세자를 진료하고 치료한 이들은 최득룡, 유후성, 박군이란 다른 어의들이었다. 2월 20일부터 24일까지 이들이 처방한 이모영수탕(二母寧嗽湯) 5첩을 복용했으나 딱히 차도가 없었다.[44] 이후 약간의 약재를 가감해 다시 이모영수탕 5첩을 복용했지만 역시 차도가 없었다. 이로 인해 2월 26일 진료부터 이형익이 새로 투입되었고, 3월 5일에는 세자의 요청으로 박태원이 추가로 참여했다. 어의들은 탕재를 바꿔 소시호탕(小柴胡湯)을 새로 처방했고 이에 3월 5일 진찰에서 세자는 증상이 크게 호전되는 모습을 보였고, 3월 6일부터 탕재 복용과 이형익의 시침이 병행되었다. 세자는 더욱 호전되었다. 어의들은 이형익이 3차례 시침하였는데 경과가 좋으니 2차례 더 시침하겠다는 의견을 내었다. 이렇게 3월 14일까지 세자는 5차례에 걸쳐 침을 맞았고 미열을 제외한 다른 증상이 완화되어 3월 14일부터는 침을 맞지 않았다.
5. 이후 한달간 세자는 완치는 아니었지만 건강이 많이 회복되었다. 4월 15일 인조는 세자의 기력을 돋우기 위해 타락죽을 하루걸러 하루씩 동궁에 올리게 했다.[45] 그리고 처음 주치의였던 박군은 4월 16일 세자에게 거의 다 나았다는 진단을 내렸다.[46]
6. 소현세자의 건강에 마지막으로, 그리고 본격적으로 이상이 생긴 건, 더는 침을 맞지 않게 된 지 약 한달 반이 지난 4월 21일부터였던 것으로 보인다. 처음 이틀간은 증세가 경미해 모두가 대수롭지 않게 여겼으나, 24일부터 갑자기 위중증으로 치달았다. 이후 이뤄진 모든 처방은 효험이 없었고, 그로부터 3일 후, 세자는 사망했다.
이때의 처방 과정을 또 소상히 옮기면 다음과 같다. 처음엔 오한과 한전(寒戰)[47] 증세를 보였다. 다만 그날 증세는 두어 시간 후에 없어졌고 다음날에는 아무런 증상도 나타나지 않아, 세자 본인이나 약방에서는 이 증세를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23일 오전에 다시 동일한 증세가 나타났다. 이번에는 그 증세가 한나절이나 지속되었다. 이에 약방에서는 23일에 어의 박군 등을 시켜 세자를 진찰하게 했는데, 박군은 학질(瘧疾) 증세로 진단했다. 처음엔 박군 혼자에게만 진찰과 치료를 맡겼는데, 세자에게 차도가 없자 다시 최득룡을 추가 투입하고, 탕약만으로는 금방 효과를볼 수가 없다며, 24일 새벽부터, 지난번에도 투입되어 효과가 있었던 이형익의 침을 맞도록 요청했다.[48]
25일에 이형익까지 투입되었다. 이형익의 번침(燔針)을 맞은 소현 세자는 어의 박군이 처방한 시호지모탕(柴胡知母湯)을 들었다. 그러나 증세는 여전히 호전되지 않았다. 26일 오전에 어의 최득룡이 처방한 시호탕(柴胡湯)을 들었으나 탕약을 복용한후 더욱 위중해졌다. 이때 인조는 어의들의 의견을 받아들여 세자를 진료할때 침의(鍼醫) 2명만 자신옆에 남기고 모든 어의를 동궁에 보내라는 지시를 하달했다.[49] 세자의 증세가 심상찮자, 어의들은 다시 이형익의 번침을 처방했다. 하지만 이 침을 맞은 직후인 4월 26일 정오. 소현세자는 결국 사망했다.
그것이 알고싶다 유튜브 내 프로그램인 사인의 추억 ep2에서 법의학자 유성호 교수가 소현세자의 증상을 분석했을 때 제1형 당뇨의 가능성이 있다고 추론했다. 인슐린이 전혀 분비되지 않는 제1형 당뇨의 합병증인 당뇨병성 케톤산증으로 사망했을 가능성이 있다는 것.[50] 소현세자의 사망직전 증상이 쇼그렌증후군의 증상과도 일치하나 주요 발병대상이 40대 여성인 점에서 제외. 독살의 근거로 제시되는 시신이 검고 일곱 구멍에서 피가 흐른다는 실록의 기록은 소현세자 사후 2개월 후(음력 6월27일 한여름)의 기사인데다, 기사에 기록된 "소현세자의 피부가 검어지고 이목구비에서 피가 터져나오는 현상"은 부패한 시신의 특징이라 부검을 하는 법의학자들은 꽤 자주 보는 현상이라고 한다. 뱀의 혈액독에 당하면 유사한 시체가 될 수 있지만 이목구비에서 피가 나오지는 않는다고...
1.7.3. 반론: 소현세자 질병 사망설의 한계와 위험성
승정원 일기, 심양일기, 동궁일기 등이 번역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초부터였다. 왕조 실록과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방대한 분량의 자료들을 변역하는 과정에서 학자들은,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기존에 정설로 굳어진 것들이 뭐라도 하나 뒤집히는 성과를 기대하고도 남았을 것이다.그런 과정에서 소현세자의 병증에 대한 일련의 기록들이 엄청난 반전으로 다가온 것이 분명하다. 당대 사가들이 중요하다 여겨지는 것들만 발췌해서 실은 조선왕조 실록만 보면, 소현세자는 건강한 30대 초중반의 젊은이가 느닷없이 앓아누워, 3일만에 사망했고, 시신은 급격히 시커멓게 변했으며, 그 과정에서, 소용 조씨의 사람인 이형익이 하필 어의로 참여했기에, 그의 마수가 개입되었다는 그림을 그리게 한다.
하지만 보다 자세하고 방대한 사료들은 다른 이야기를 제시한다. 3일간 본격적으로 이상 증세를 보이기 이전부터도 소현세자가, 귀국하는 과정에서 이미 건강에 문제가 생겼던 점, 그리고 이를 회복해가던 중 불과 1달 반 후 갑작스럽게 쓰러져 돌이킬 수 없게 되었단 맥락이다. 당시 소현세자는 17세기 의학으로 고칠 수 없는 심각하고 중대한 질병을 앓고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는 호전된 것처럼 보여도 사실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골병이 들어 있었다가 그것이 마지막 순간 터져 나왔다고도 볼 수 있다. 이는 17세기 뿐 아니라 현대에도 장기간 입원와 퇴원치료를 반복하는 중환자나 고령자가 사망직전 이따금 보이는 패턴이기도 하다. 유가족 입장에서 보면 멀쩡하게 나아가던 환자가 갑작스럽게 사망하니, 어처구니가 없고, 주치의나 병원이 사람을 죽였다며 소송이라도 걸고픈 기분이라도 들 것이다.
또 심양일기와 승정원일기를 통해, 소현세자가 훗날 시한폭탄이 되는 지병을 볼모생활 중 얻었을 거라는 추정도 가능하다. 이 두 기록은 소현세자가 청에 볼모로 끌려온 후 확실히, 이런저런 크고 작은 질환과 부상으로 어의들의 처방을 받은 기록이 예전에 비해 증가함을 보여준다. 심양일기는 시스템이 무너진 상황에서 작성된 것이기 때문에, 동궁일기에 비해 진료기록이 누락되었을 가능성이 있음에도 그러하다. 또한, 산증이나 손마비 증세 같은 질병들에 대해,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겨 치료를 안하려 했거나 몇개월간 차도가 없어 재차 처방했다는 기록들이 눈에 띈다. 이는 예전 동궁에 있었을 때 어의들이 세자가 조금만 아파도 난리 부르스를 치는 패턴과는 확연히 다르다. 때문에 소현세자가 볼모 생활 내내, 여건상 불편함을 참고 무시하다, 나중에 급성 위중증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는 어떤 신체적 이상을 장기적으로 방치했을 가능성도 있다.
다만 소현세자 질병 사망설에도 한계는 있다. 일단 상술된 글에 매우 적극적으로 활용된 논문[51]들은 일단, 병사설로 결론 내리되, 병이 나아가던 소현세자를 갑작스럽게 죽음으로 몰 정도의 지병이 무엇이었는지는 답을 내리지 못한다. 물론 이는 17세기 병증에 관한 기록 자체의 모호성이 가진 한계이기도 하다. 단지, 현대에 존재하는 병 기준으로 여러 가지의 질환이 중증으로 겹쳐야 나올 수 있는 증상이 아닐까, 라고 추론하는 정도이다. 경희대 한의과대학원 출신 한의사들이 모여 저술한 <조선왕조 건강실록>에서는 종친부인이 목격했다는 출혈과 피부병변의 원인이 만성 간기능 저하라는 예측을 내놓기도 했다. 한의사 방성혜의 경우, 소현세자가 앓던 질병이 폐렴, 혹은 혈관염이었다고 예측한다. 셋은 각각 다른 질병이며, 모두 가설이다.
이런 상황에서, 질병 사망을 '진실'이라 단정짓기 위해, 실록과 당대 맥락을 토대로 한 기존의 타살설은 공부도 안하는 이들의 감상적 헛소리라고 단정짓는 논조 역시 그다지 객관적으로 진실에 다가가는 방법론은 아닌 것으로 보이며, 더 나아가 타살설을 확신하는 것 못지않게, 위험한 확증 편향을 낳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소현세자 병사설이 낳은 위험한 확증 편향은 다음과 같다.
소현세자가 겉으로 보기에 한동안 멀쩡하다, 급격한 사망에 이를 정도의 심각한 지병으로 사망했다는 설을 하나의 가설이 아닌 '진실'이라는 도그마를 세우기 위해선, 소현세자가 일상생활 영위가 힘겨울 수준의 병약자였다고 단정지어야 논리적으로 매끄럽다. 기왕이면 그 병을 앓은 기간이 길고 오래될수록 논리엔 설득력이 생긴다. 그러다 보니 소현세자 병사설을 진실로 밀어붙이는 주장엔 소현세자 = 병약자 이미지가 포함된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 소현세자 졸기는 소현세자의 국본으로서의 자질과 장단점을 적나라하게 써 놓긴 하지만 '병약했다'는 묘사는 1도 없다. 오히려 볼모생활 후기로 갈수록 청나라인들처럼 승마를 좋아하고, 무인이나 노비들과 어울렸다는 묘사가 눈에 띈다. 또 소현세자 사후 3개월이 지나 온통 칭송 일색으로 쓰여진 쓰여진 지문(誌文 :추모글)에선, 소현세자가 병사하거나, 혹은 의원들이 약을 잘못 썼을 거라고 나름 수습하나, 최소한 겉보기엔 태연했으며, 병색이 있거나 골골거렸단 흔적은 찾아볼 수 없음을 언급한다. 즉, 볼모생활 내내 소현세자는 정상적이고, 조선에 있을 때보다 활동적인 생활을 영위하고 있었다. 물론 건강하다고 병이 안걸리는건 절대 아니지만, 그러기에는 지병을 달고있음에도 더욱 활동적으로 생활한 청나라시절이 설명이 되지 않는다.
그리고 병사설 자체와 별개로, 확증편향을 뒷받침하기 위한 소현세자 병약자 이미지의 근거는, 심양일기나 승정원일기에서, 당대 어의들이 소현세자 진료기록만 발췌해 쭉 연결하고 강조한 논문들이다. 논문들 자체는 소현세자의 병증을 심도있게 파고들고, 현대적 관점에서 명확히 규명해, 독살인지 병사인지 밝히겠다는 시도로서 매우 훌륭하다.
하지만 이 논문들 역시 아쉽게도 소현세자 타살 의혹을 제거할 만큼 실체를 규명해 내진 못했으며, 무엇보다 이 논문들만 읽고 소현세자가 허약체질 병약자였다고 단정해 확증편향된 논지를 갈겨대는 건 그냥 사실 왜곡에 가깝다. 왜냐하면 이 1차 사료들이 날씨 기록과 서연을 했는지 여부 다음으로 부지런히 기록하는 게 세자가 약간의 병증이라도 호소하면 어의들이 달라붙어 질병을 처방한 진료기록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수년간 쌓인 병원 기록만 한꺼번에, 그것도 디테일한 기록을 생짜 그대로 가져와 쭉 붙여서 나열해 놓으면 어떤 멀쩡한 사람도 병약체질 환자로 보이는 게 하는 게 가능 하며, 소현세자를 볼모생활 내내 병을 달고 살았던 골병환자로 왜곡하는 건 일도 아니다.[52] 또, 이 과정에서 나름 천수를 누렸던 왕이나 세자들의 병증 기록들과 동일선상에서 충분히 비교되었는지는 의문이다.
예컨데 심양일기를 보면, 볼모로 있을 때 건강이 나빠졌던 건 강빈이나 봉림대군도 마찬가지다. 특히 강빈의 경우, 볼모생활 초, 조선에서 파견된 어의가 필요할 정도로 아픈 적이 있는데, 이후 세번째 딸을 무사히 출산했다. 또, 조선왕조실톡에서 나온 이미지와 달리, 소현세자 뿐 아니라 봉림대군도 병 때문에 청나라 군대를 못 따라간 기록들이 있으며, 형제간에 이런 일은 번갈아가며 있는 편이었다. 참고로 효종이 10년 후 사망한 건 지병 악화가 아닌 과다출혈로 인한 의료사고였다. 또 동궁일기에는 당시 한창 멀쩡히 활동중이었던 인조의 병에 관한 기록도 보이는데, 그것들도 소현세자 진료기록만큼 집중해서 모아보면 인조 역시 언제 쓰러져 급사해도 이상하지 않은 중증 환자처럼 보인다.
이런 상황에서 소현세자 병약자설을 확증편향하다보면, 모순이 생긴다. 귀국 후 갑작스럽게 병사할 만큼, 중대한 병을 달고 살던 소현세자는, 이 때문에 8년이라는 볼모생활동안 어의들이 한번도 아니고 두번도 아닌 무려 세차례나 오가게 하며, 외교활동, 전쟁 최전선 참전과 더불어, 아내 강빈과의 사이에서 무려 자식을 다섯이나 추가로 더 만들게 된 것이다. [53]
엄연히 실제했던 인조의 소현세자에 대한 견제와 냉대를 마치 없었던 일인양 왜곡하거나, 인조의 본심에 대해 근거도 없이 선의로 해석하려 애쓰는 무리수를 둔다. 더 나아가, 심지어 소현세자 사후 강빈과 자식들에 대한 숙청, 전근대 사회에서도 '이건 부당하고 비인간적이다'고 여겨져 꾸준히 상소와 탄원이 올랐던 대대적인 숙청 역시 '조선을 지키기 위한 현군의 선택'이라는 논조로 정당화하려 하는 일관되게 섬뜩한 가치전도를 보인다. 하지만 병사설 확증편향 논리대로 정말로 인조가 단지 급작스럽게 장자를 잃고 차남 효종의 정통성을 세워주기 위해 '괴롭지만 본인의 선택이 아니라 어쩔 수 없이' 강빈에게 억지 누명을 씌워 죽이고, 손자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밖에 없던 게 전근대 사회의 숙명이라면, 마찬가지로 아버지였던 세자가 일찍 죽는 바람에 삼촌이 먼저 재위에 올랐던 성종은 무사했다.
이제 와서 조선왕조실록만 토대로 소현세자의 죽음을 독살로 확정하는 것은 분명히 무리가 있으며, 특히 그것을 이형익이 마지막 순간에 놓았던 침 때문이라고 단정하는 것 역시 무리가 있다. 승정원 일기같은 새로운 사료들은 충분히 반전이 될 만한 새로운 가설을 제공했다.
결론적으로, 소현세자의 죽음은 원인이 규명되지 않은 돌연사라고 정리하는 것이 현재로선 차라리 객관적으로 보인다. 혹은 일단 병사로 보이지만 의혹이 남는다. 정도가 가장 적합할 것이다.
귀국과정에서 병을 얻었던 소현세자는 이후 여러 어의들의 노력으로 건강을 회복하던 중, 약 한달 반 후 갑작스럽게 사경을 헤매다 삼일만에 손쓸 틈도 없이 사망했으며, 이후 시신은 염을 하기도 전부터 빠르게 참혹한 모습으로 변해갔다. 우연히 시신을 본 종친 부인이 마치 약물에 중독된 사람같았다, 고 언급할 만큼. 여기까지가 논란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소현세자가 사망한 이유는, 지금도 명확히 알 수 없다. 학술적으로는 병사설이 안전하게 지지될 수밖에 없는 게, 동궁일기와 승정원일기에 기록된 귀국 후 급증한 병증 기록들 때문이다. 다만, 매우 아쉽게도 그 병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한 연구는 지금까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았거나 한계에 부딪친 거로 보인다. 심지어 소현세자 을유동궁일기 직역자는, 일단은 다른 연구가들처럼 소현세자 병사 가능성에 무게를 두면서도, 앞서 승정원일기를 중심으로 본 결론과 달리, 이형익이 의심받을만 했다는 개인적 의견을 덧붙였다. [54]
여담이지만, 조선왕조실록을 근거로 소현세자가 독살되었다는 가설이 대중화 되기 전인 8-90년대에는 소현세자가 인조에게 청나라에서 선물로 받은 벼루를 자랑하자 분노한 인조가 소현세자의 머리에 벼루를 던졌고, 이에 맞은 소현세자가 상처가 덧나서 죽어버렸다는 식의 야사가 제법 퍼져있었다.[55] 야사의 전체적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봉림대군은 조선으로 귀환하면서 잡힌 포로들의 송환을 정식 요구했는데 소현세자는 벼루와 붓을 요구했고 이 사실을 알고 분노한 인조가 벼루를 세자에게 던지니 그 자리에서 맞아 죽었다'라는 식의 내용. 하지만 정작 소현세자가 아버지에게 미움을 받았던 원인 중 하나는, 인조의 허락도 없이 청나라 볼모 생활 중 조선인 포로들을 구출한 탓이다. 아무튼 위의 야사가 소현세자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것은, 병자호란 이후 반청기조가 팽배한 상황에서, 외교적 타협과 실용주의로 조선의 안전을 도모했던 소현세자의 행보가 당대 백성들에게 '오랑캐에게 아부한다'는 식의 흑백논리로 비난받게 된 정서를 반영하는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서양의 최신 과학기술에 대한 이해가 전혀 없던 조선인들에게는 소현세자가 가져온 천주교 성물이나 서양제 과학기기가 '쓸데없는 기물'로 오해받아 '벼루'로 왜곡되어 전해졌을 가능성이 높다. 이형익의 시침 직후 소현세자가 사망했음에도, 단지 그것만으로 이형익이 처벌을 안 받은 것은, 승정원 일기에 나오는 소현 세자의 진료 기록만 살펴보면 딱히 수상한 일은 아니라고 판단된다. 세자의 마지막 순간에는 여러 의원들이 개입했고, 이형익은 그 전엔 침술을 통해 소현세자의 증세를 완화시킨 적 있었다. 이 때문에 세자의 정적인 소용 조씨와 연결고리가 있음에도, 신임을 얻어 그 다음에도 투입이 되었던 것이다. 다만 상술했듯 을유동궁일기의 기록을 보면, 소현세자의 병세가 승정원 일기와 미묘하게 다르기 때문에, 이형익의 결백을 확신하기 좀 어려워 지긴 한다.
그럼에도, 조선 시대엔 의원에 대한 기대치 자체가 낮았다. 특별한 자격이 필요한 것도 아니고, 따로 공부해야하는 과목이 있는 것도 아니고 동네 글방 선생도 지인이나 자신에게 지병이 생기면 의서 몇권 읽고 의원 노릇 할 수 있었다. 그 정도로 의원이 되기 쉬운 만큼 의원에게 많이 바라지도 않았다. 고칠 수 없는 병이 많다는 걸 잘 알았고, 치료 받은 환자가 사망해도 어쩔 수 없다고 납득하고 넘어가는 일이 많았다.[56] 조선시대 의원 중에 가장 유명한 허준의 위인전들이나 창작물들이 허준의 생애에 서스펜스를 더해주기 위해 임금을 살리지 못한 것을 생사기로에 선 절체절명의 위기로 묘사하거나 선조 사후 관직에서 물러난 것을 부당한 탄압으로 묘사하기 위해 오바를 한 이미지가 실제로 그랬던 것처럼 널리 퍼져있으나, 실제로 허준은 선조 사후 책임을 지고 잠시 관직에서 물러났다 복직하였으며, 이처럼 지존인 임금의 승하에 관여되어 있어도 잠시 관직을 떠나는 명목상의 처벌이 전부였으며 그마저나 일반적이지 않았다. 대부분의 어의들은 형식적인 사직조차 없이 관직생활을 이어갔다. 정말 시술이 문제시되어 처벌을 받은 어의는 조선 역사 통틀어 효종대 어의 신가귀 딱 한 명뿐이다. 그 신가귀조차 명백히 본인의 과실로 왕을 과다출혈으로 사망케 했음에도 참형이 아닌 교수형을 당했다. 이런 맥락이 있었기 때문에, 이형익은 뒷날 인조가 승하했을때도 무탈했다.
1.7.4. 서인이 소현세자를 죽였다?
한편 조선 폭망의 원인이 노론이었다는 노론 음모론이 소현세자의 비극과 결합하면서 소현세자를 싫어한 서인과 인조가 합작해서 독살했다는 음모론도 나돌았다. 하지만 독살설, 타살설이 설득력이 있는가 없는가를 떠나서 그 배후가 서인이라는 주장은 진실과 매우 매우 거리가 멀다.물론 소현세자의 독살범으로 강하게 의심받고, 이후 민회빈 강씨를 죽음으로 몰아넣은 김자점이 공교롭게도 서인이긴 하다. 하지만 김자점은 당시 서인의 주류를 크게 벗어난 일탈행동을 한 것이었다. 서인의 영수가 속한 주류는 청서파였는데, 김자점은 서인 내에서도 소수파인 공서파에 속했고, 심지어 그 공서파 내에서도 소현세자를 지지하는 이들이 더 많았으며, 김자점은 서인에서 보면 외톨이, 아웃사이더에 가까웠다.[57] 당장에 인조 시기 조정을 장악한건 서인이었는데 조정대신들은 김자점, 김류를 제외하면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데 반대했고 김류 역시도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는건 찬성했지만 민회빈 강씨 처분에 관해서는 왕과 입장을 달리했다가 미움을 샀다.
노론 음모론과 정반대로, 오히려 서인은 소현세자의 강력한 지지층이었다. 소현세자빈의 아버지 강석기부터, 서인들과의 탄탄한 혼맥 구조로 인해 딸인 강빈이 세자빈으로 당첨당한 사례다. 또한 소현세자 상례 때 기년복(1년) 대신 참최복(3년)을 입어야 한다 주장하며, 소현세자-원손 후계구도를 강력히 주장한 것이 사람이 서인의 대표격인 송준길이었다.
다만 서인이 소현세자를 옹호한 이유는, 소현세자 본인의 개인 성향이나 정치적 성향과 무관히, 단지 소현세자가 장자라는 이유에서였다. 이는 서인의 학풍 때문이었다. 서인은 왕과 사대부가 같다는 이기일원론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고, 따라서 소현세자와 그 자식들이 가장 정통성이 크다고 생각했다. 때문에 이후 인조가 각종 무리수를 두면서까지 소현세자의 가족들을 숙청하고 봉림대군을 세자로 삼자 강하게 반발했고, 이후에도 계속해서 강빈 사건의 재조사를 주장했다.[58]
이런 소현세자에 대한 서인들의 옹호는 심지어 소현세자가 사망한지 십수년이 흐른 후에도 이어졌다. 서인들은, 소현세자 막내 아들 경안군과 그가 요절하며 남긴 아들 임창군 임성군 형제로 간신히 이어진 소현세자의 혈손들이 효종, 현종, 숙종 라인으로 이어지는 현 왕가보다 정통성이 있다는 생각을 은연중 비치며, 예송논쟁의 단초를 제공했다. 예송논쟁이 식민사관에서 말하는 것과 같은 하등 쓸모없는 상복 배틀이 아닌 이유도 거기에 있다.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 입는 기간을 통해 효종을 장남으로 인정하느냐, 차남으로 보느냐는, 효종의 정통성 문제이기도 했고, 소현세자의 죽음 후 일어난 그의 혈손들에 대한 숙청을 떠올리는 매우 민감한 이슈였던 것이다.
또한, 이런 서인들의 옹호가 실제로 소현세자 혈손들의 삶을 더 나아지게 하는데 하등 보템이 되진 않았다. 도리어 현 왕실의 소현세자 혈손들에 대한 견제심만 키워 유배 뺑이 돌리게 하는데만 일조했다.
1.7.5. 소현세자의 상례에 관한 실증적 고찰
소현세자 사망후, 인조가 세자빈과 원손을 정적으로 취급해 숙청했다는 큰 맥락은 부인하기 어렵다. 다만, 인조가 소현세자의 상례까지 경우없이 약소하게 치렀다고 보는 시선은 논란의 소지가 있다. 인조의 의도가 무엇이었건, 결과적으로 인조가 치른 소현세자의 상례가 왜란이후 간소화된 조선후기 세자 상례의 선례가 되었기 때문이다.인조 시기가 조선 제도사에서 이전과 이후를 가르는 분기점으로 꼽히는데 국가 의례측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왜란으로 전대 문헌이 대거 소설된 사정과 예학의 발전, 산림의 대두속에 의례 절차들을 새로이 논의하고 만들어 나가야했다. 1645년(인조 23년)에 행해진 소현세자의 상례는 1457년(세조 3년)에 행한 의경세자의 상례와 1563년(명종 18년)에 행한 순회세자의 상례에 이은, 조선 역사상 세번째로 행해진 세자 상례이자 임진왜란 이후 첫번째 행해진 세자 상례 중 하나였다.
인조는 소현세자를 왕위 계승권에서 완전 지워버리기 위해, 그의 권위를 상기시킬 수 있는 행보들을 적극적으로 차단했다.[59] 다만 그와 별개로 상례 절차는 격식의 틀 내에서 '검약'을 내세워 최대한 단출히 치렀다고 해석된다. 소현세자는 폐세자 되거나, 죄를 지어 죽은 것이 아니었고, 엄연히 국본(왕세자)으로서 사망했다. 이런 소현세자의 장례를 뚜렷한 명분도 없는 상태에서 격하시켜 치른다는 것은, 왕조 시대에 다른 사람도 아닌 왕인 인조 본인의 권위를 실추시킬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소현세자가 아플때 적극적으로 치료케하고 용태를 보고받았던 대목이나 세자 사후 격한 반응을 보면 인조는 남의 자식인 며느리나, 그 며느리 피가 섞인 손자들과 별개로 자기 맏이는 확실히 아꼈다.
소현세자 상례의 절차와 성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조선 시대 전체 세자들의 상례 절차에 대한 명확한 이해와 비교가 먼저 이루어져야 한다. 이 같은 과정을 거치면 소현세자 상례는 조선시대 세자 상례가 정형화되는 과정을 보여주는 의미있는 사례다.
소현세자는 1645년(인조 23년) 4월 26일 오시 정각 창경궁 환경당에서 사망했다. 우선 초혼(招魂)하는 복(復)[60]가 진행되었고 뒤이어 왕과 왕비, 백관은 옷을 갈아입고 거애(擧哀, 왕이나 왕후가 승하한 뒤 비로소 슬픔을 표하는 절차)하였다. 그리고 종묘와 숙녕전(肅寧殿, 사망한 인조 비 인열왕후(仁烈王后)의 신주를 모신 혼전(魂殿))에 세자의 상을 고했으며, 임시기구인 장례 도감이 설치되었다. 또한 급히 강화사고로 사관을 파견하여 실록에 나오는 세자상 관련 내용을 등사(騰寫, 베껴오다)해오도록 하였다.
소현세자의 상례는 임진왜란 이후 처음 발생한 세자상으로서, 왕실에서 참고할 만한 기록들이 대거 소실된 상태였다. 가장 기본이 되는 왕실 예법서 <국조오례의>는 왕과 왕비의 의례집으로, 세자 상례에 대한 규정은 빠져있기 때문에 참고대상이 될 수 없었다. 그래서 <세조실록>과 <명종실록>에 기록된 의경세자와 순회세자의 사례를 참고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전쟁으로 강화 실록들도 흩어지고 일부 소실되어 모든 기록을 검토하진 못했다. 이에 완전한 실록을 상고하기 위해 5월 4일에 사관을 무주사고로 파견하였다. 5월 18일 무주에서 실록이 올라오면서 실록을 근거로 구체적인 절차를 결정하였다. 그러나 온전한 실록 기록 확보가 늦어지면서 이미 진행된 절차와 실록과의 차이가 또 다른 논점을 낳게 되었고 이는 새로운 규정이 마련되는 과정으로 진행된다.
먼저 한여름에 상례를 치러야 하는데 실록기록 기다리고 있을 수는 없었다. 결국 상례는 우선 진행되고 의례를 수행하는데 꼭 필요한 세부사항들은 새로 논의하여 결정해야했다. 인조와 관료들은 상례를 치르면서 왕실의 의례를 전면 재정비해 후세의 전범(典範, 의례규범 편찬서)을 만드는 시대적 요구까지 받들게 된 셈이었다.
세자가 왕보다 낮으니 왕례(王禮)보단 강쇄(降殺, 등급을 깎아 낮추다.)하고 사대부례보다는 높아야 한다는 원칙은 알았지만 세부기준이 전해지지 않으니 낮추고 높이는 정도에 대해선 저마다 의견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일단 입관 절차는 <국조오례의>에서 왕은 5일째 입관하도록 규정한 것에 의거 세자니까 강쇄하여 3일만에 입관하도록 했다.
성복(成服, 시신을 입관한 다음날 상복을 갖춰 입는 절차로, 왕세자, 대군 이하의 왕자, 왕비, 왕세자빈, 내외명부, 종친과 백관 등 모두가 최복이라 불리는 삼베 상복을 입는다.)은 왕은 6일째에 시행하지만 세자이니 4일째에 시행되었다.
그리고 성빈(成殯, 빈소를 차리는 절차)때 왕은 찬궁(欑宮)이라하여 안에 사신도를 그려 붙인 나무 집을 만들어 그안에 관을 보관하는 가매장 절차를 거치나 세자의 예에서는 생략하기로 했다. 이상의 방식은 강쇄의 원칙에 따라 예조가 제안한 것으로 인조는 이를 허가했다.[61]
이리하여 4월 27일 시신에 상복을 입히는 습(襲)과 옷과 천으로 시신을 감싸는 소렴(小殮) 절차가, 4월 28일 수의로 시신을 감싸묶고 입관하는 대렴(大斂) 절차가 끝나고 창경궁 숭문당에 빈소가 차려졌다. 그리고 이날 앞서 언급된 강화사고 실록기록이 확인된다.
3일째 입관하고 4일째 성복하는 절차는 의경세자상(喪)과 동일하여 문제될 것이 없었다. 그러나 상복과 찬실(欑室, 세자 사후 관을 모시는 절차)에선 차이가 있었다. 예조는 수정할 것을 제안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62]
찬실은 성빈할 때 세자와 세자빈의 관(梓室)을 모셔두는 곳으로 왕의 찬궁을 낮추어 부른 명칭이다. 찬실을 설치하지 않은 것은 소현세자상이 간략하게 치러졌다는 근거로 제시되는데 한여름인 소현세자상에는 굳이 찬실을 만들지 않아도 되었고[63] 참고할 전례가 부족한 상황에서 왕의 찬궁에서 강쇄한 찬실의 제도를 급히 마련하는 것이 어려웠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세자 상례외에 이전 국상(國喪)에 대한 기록들(각종 등록류)들도 풍부하게 활용되었다. 5월 1일 소현세자 생존시를 형상화하여 백관이 참알례(參謁禮 원래는 중하급 관원이 상급관청을 찾아 인사하는 의식을 말한다. 여기선 백관이 세자를 찾아 인사하는 형식으로 진행)를 행했는데 이건 인열왕후 상례 기록을 근거로 한 것이다.
5월 4일에는 강화 실록 기록에는 빠져있어 알 수 없던 세자 발인시 의물(儀物 의장기물)을 대행왕 상례때 기록을 참고하여 여기서 강쇄하는 방식으로 마련했다.
시책(諡冊 조선시대 국왕과 왕비가 죽은 뒤 시호(諡號)를 올릴 때 사용된 역사서)과 옥책(玉冊 시호나 존호를 올리는 문서)은 의경세자의 상례에 사용되었다는 기록은 있었으나 재료가 명시되어 있지 않았다. 왕의 시책과 애책은 옥을 사용하지만, 세자는 생전 책봉할 때도 죽책을 사용하기 때문에 사망 후의 시책과 애책도 대나무로 만들도록 정해졌다.[64]
시인(諡印 국장에서 사용된 시호를 새긴 도장)은 옥으로 제작해 금으로 제작하는 왕의 시보(諡寶 시호를 새긴 도장)와 차등을 두고 발인에 사용되는 함궤(函樻), 배안(排案 책봉 따위의 의식이 있을 때 책문(册文) 등을 올려 놓는 탁자), 상탁(제상(祭床)과 향탁(香卓))은 검은 옻(黑漆)을 칠하기로 하였는데 이는 임금 상례에 사용될 물건엔 왜주칠을 하는 것에서 차등을 둔 것이다. 소현세자 상에서 정해진 이상의 규정들은 영조대 편찬된 궁중의례서 <국조상례보편>의 세자 상례 절차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5월 16일 세자의 시호가 소현세자로 정해졌다. 묘호(墓號)와 궁호(宮號), 수묘관(왕실의 능과 묘소를 관리하는 관리)은 정하지 못한채 무주사고의 실록 기록이 도착하길 기다렸다. 5월 18일 무주실록 기록이 올라오면서 구체적인 절차가 결정되었다. 의경세자의 상례에 따라 세자의 발인 때에 승지가 호위하여 가도록 하고, 우제(虞祭 장례(葬禮)를 마치고 돌아와서 지내는 제(祭))는 오우제(五虞祭 장사 후 5번 지낸다는 의미다. 왕과 왕비는 칠우제, 사대부는 삼우제)로 정해졌다.
묘호와 궁호의 문제는 의경세자와 순회세자의 사례가 달랐는데, 의경세자는 묘(墓 무덤)는 의묘(懿墓), 묘(廟 사당)는 효정묘(孝靖廟)로 따로 명명했지만 순회세자는 순화묘(順懷墓), 순회묘(順懷廟)로 동일했다. 이 문제는 실록의 전례에 따라 대상(大祥 죽은 지 2년이 되는 달의 기일(忌日)에 지내는 제사)을 지낸후에 정하기로 하여 보류된다.
이상의 절차가 진행되는 동안 관상감제조 김육(金堉)과 예조참의 이덕수(李德洙)는 술관(術官 음양·복서·점술 등의 지식을 가지고 길흉을 점 치는 관리)들을 인솔하여 5월 5일부터 건원릉(태조 릉) 광릉(세조와 정희왕후릉), 희릉(장경왕후릉), 효릉(인종과 인성왕후릉) 등을 면밀히 살펴 장지를 정하는 작업을 수행했다.
그리하여 5월 15일 효릉(孝陵) 우동(右洞) 을좌신향(乙坐辛向)의 언덕이 장지로 정해졌다. 절차는 순회세자의 전례를 받들어 간소하게 진행해 민간의 부담을 덜어줘야 한다는 주장이 장지가 정해지기 전부터 강조되었다.[65]
인조는 직접 순회세자묘를 방문해 살폈고 왕릉보다 격을 낮추어 문석(文石 능앞에 세우는 문관형상 석상)과 호랑이, 양, 말 석상을 한쌍씩 배치하고 사대석(莎臺石 봉분 둘레에 세우는 돌)과 홍문(紅門 능(陵), 원(園), 묘(廟) 정면에 세우는 붉은 칠을 한 문) 설치하지 않으며 묘를 수호하는 군졸의 수는 순회세자의 전례와 동일한 30인으로 결정되었다.
너무 간략하다는 비판이 제기되기도 했지만, 인조는 검약을 숭상하는 뜻을 밝히며 그대로 진행시켰다. 이걸 인조가 세자를 박대했다는 근거로 많이들 활용되는데 이러한 제도는 기본적으로 순회세자묘라는 전례를 따른 것으로 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종묘에서 달마다 초하룻날과 보름날에 간략하게 지내는 삭망제(朔望祭)도 거를 정도로 물자 아끼는데 열심이었던 인조대 궁중 의례에서 곧잘 보이는 양상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또한 병풍석을 설치하지 않는 조치는 효장세자 상례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난다.
정묘호란 직후에 치러진 강빈의 가례도 예물을 축소했고 인열왕후 상례도 똑같이 검약하게 진행했다. 조선 왕릉은 담백한 억새봉분으로 유명한 태조의 건원릉 이후로 점차 대형, 화려해지는 양상을 보이는데 인열왕후를 위한 장릉(長陵)을 조성할때 건원릉을 참고해서 석물을 간소화하고, 혈(穴)도 얉게 파서 공사부담을 줄이게끔 조치했다.
소현세자가 임진왜란으로 이전 기록이 대거 소실된 상태에서 조선후기 세자 상례의 기본이 되었다면 인열왕후 상례는 조선 후기 왕비 상례의 기본이 되었고 이 둘을 나란히 놓고 보면 공통점이 상당히 보인다.
일부 연구자는 소현세자 묘를 조성하며 격회(隔灰 관을 묻을 때, 먼저 관의 바깥 주위에 석회를 메우는 절차)를 하지 않았으니 인조가 장례를 대충 치른 증거라고 주장하는데 소현세자묘는 엄연한 회곽묘다. 당연히 석회를 둘렀움이 의궤에서 확인된다. 다만 탄격(炭隔)을 생략하긴 했다.
조선 시대식 회곽묘는 일단 무덤이 들어가는 구덩이 광중(壙中)을 파서 목관을 안치한 다음 삼물(三物), 석회, 황토, 세사(細沙 입자 고운 잔모래)를 섞는데 탄격(炭隔)은 삼물과 광중 벽 사이에 숯가루를 추가하는 것이다. 숯, 석회, 황토, 세사의 사물(四物)로 묘를 조성하는 것인데 국조오례의가 제시하는 회곽묘 조성법이다.
고운 숯가루를 그득 쌓아야해서 자원 소모와 공역이 심해서 사대부들 회곽묘 조성에선 생략되는 경우가 많았다. 특히 임진왜란 이후에 조성된 사대부가 회곽묘 발굴에서 탄격의 흔적이 나타난 사례는 현재까지 없다. 심한 물자부족을 초래했던 임진왜란을 기점으로 무덤 조성방식이 변화한 것으로 18세기에 이후론 삼물의 구성 비율에서 구하기 힘든 석회 비율을 조정하는 등 묘가 간소화되는 경향이 더욱 강해진다. 그러니까 그냥 물자와 공역을 절약하자는 취지였다.
6월 15일로 발인 날짜가 정해졌고 6월 9일 시책과 시인을 빈궁에 내렸다.
6월 10일에는 명정(銘旌 국상(國喪)을 지낼 때 상여 앞에서 길을 인도하고 하관이 끝난 뒤 관 위에 씌워서 묻는 깃발)을 고쳐 썼다.
6월 11일 발인과 반우(返虞 장사 치른 뒤에 신주를 모시고 돌아와 궁궐에 있는 혼전에 모시는 의식)을 위한 습의(習儀 사전연습)가 진행되었다.
6월 14일 사시에 계빈(啓殯 발인할 준비로 출구(出柩)하려고 빈소(殯所)를 엶) 절차가 진행되고 신시에 조전(祖奠 길의 안전을 담당하는 도신(道神)에게 능지까지 안전하게 무사히 갈 수 있도록 기원하는 제사)을 행했다.
6월 15일 4경 5점에 견전제(遣奠禮 발인(發靷)할 때 문 앞에서 지내는 제사)를 올리고 5경 1점에 발인했다. 명정전 동쪽 뜰을 거쳐 명정문과 홍화문의 왼쪽 협문을 나간 행렬은 19일 축정(丑正 오전 2시)에 천전례(遷奠禮, 발인하기 위하여 영구를 옮길 때 지내는 제사)를 지내고 진정(辰正 오전 8시) 1각에 매장을 시작했다. 사시(巳時)에 입주전(立主奠 신주를 만들어 사당에 모셔 놓고 올리는 의식)을 치른 다음 반우(返虞 장사 치른 뒤에 신주를 모시고 돌아오는 절차)하여 인경궁 중휘당 혼전에 도착했다.
이날 신시에 초우제, 20일 재우제, 22일 삼우제, 24일 사우제, 25일 오우제를 지내고, 27일에 졸곡제(卒哭祭 우제 이후 지내는 제사. 졸곡은 곡을 그친다는 뜻으로 이때부턴 아침과 저녁으로만 하게 되어 있다.)를 지냈다. 수묘관과 혼궁관원을 중심으로 1646년 4월 26일 연제(練祭 사망 첫 기일에 지내는 제사), 이듬해 상제(祥祭 두번째 기일에 지내는 제사)가, 이후 담제(禫祭 3년의 상기를 마친 뒤 상복을 벗고 평상으로 돌아감을 고하는 제사)가 치러졌다.
담제를 마치면 사당을 지어 세자의 신주를 봉안해는 절차가 기다리는데, 소현세자의 경우 별도의 사당을 짓지 않고 순회묘(順懷廟)에 순회세자의 신주와 함께 봉안되도록 했다. 이는 순회세자 때와 다른 조치로, 소현세자상이 간소하게 치러졌다는 중요한 근거로 쓰였다. 하지만 순회세자 입묘시에는 의경세자가 추숭된지라 나란히 봉안할 세자의 사당이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을 놓치고 있다.
왕실의 손이 극히 귀해지는 조선 후기에 효장세자(영조), 문효세자(정조), 효명세자(순조)의 사례가 연달아 나와서 대수롭지 않게 생각할 수 있는데 세자가 병사하는 사례가 그리 많지 않다. 조선 전기에는 폐세자가 된 의안대군, 양녕대군, 이황, 이지를 제외하고 왕이 되지 못하고 병사한 세자는 소현세자 이전 2백 수십년간 의경세자와 순회세자 단 2명 뿐이었고 순회세자가 사망했을 때 성종의 아버지인 의경세자는 이미 덕종으로 추숭받아 왕으로 종묘에 신주가 봉안 되어 다른 세자 사당이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세자 신주를 봉안하는 전례도 없어, 소현세자 신주를 순회묘에 함께 봉안토록 한 조치가 반드시 전례에 어긋난다고 말하긴 어렵다.
영조대 효장세자 입묘시에도 소현세자의 전례를 따라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게 예법에 어긋나는 일이라면 신하들이 자식 잃은 슬픔에 잠긴 영조 앞에서 이런 주장을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영조도 이를 여러 의견중 하나로 담담히 받았지 예법에 어긋나거나, 잘못된 주장이라고 하진 않았다.[66]
묘호와 궁호도 순회세자의 경우에 따라 소현묘(昭顯墓), 소현묘(昭顯廟)로 정했고 이후 치러진 왕세자, 세자빈 상례 단의왕후, 효장세자, 의소세손도 이러한 방식을 따랐다.[67]
상복 문제의 경우, 소현세자의 상복은 왕과 왕비가 입는 장자복과 신하들이 입는 세자복으로 구분된다.
4월 27일 예조는 왕과 왕비가 입을 상복을 기년복(아내 상 혹은 아버지 생존시에 어머니 상을 당하여 1년 상을 치를 때 입는 상복)으로 간주하고, 구체적인 형식과 절차는 인열왕후의 상례 기록을 따를 것을 제안하였다.
상복은 참최(斬衰), 자최(齊衰), 대공(大功), 소공(小功), 시마(緦麻)의 오복제도로 나뉘는데 인열왕후 상례 복제에 의하면, 자최복을 12일간 입었다가 벗고 공제복(公除服)이라 하여 백목면(白木綿)으로 된 단령(團領)과 생마(生麻)로 짠 띠(布帶), 백피화(白皮靴)를 착용하는데, 이전 12일과 합쳐서 총 30일 만에 복을 완전히 마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머니 상과 큰아들 상에 구분을 둬야지 똑같이 할 수 있냐는 반론이 제기되어 실록의 기록을 기다리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4월 28일 보고된 실록의 의경세자 상례에서 세조의 상복은 기년복으로 30일간 백의와 추포대를 하는 단상임이 확인되었다.
백의는 인열왕후 상례때 언급된 백목면으로 만든 단령으로, 베(布)로 만드는 자최복과는 아예 다르다. 추포대는 위에 언급된 거친 생마로 짠 띠다. 세자가 왕보다 먼저 사망하거나 세종대 소헌왕후처럼 왕비가 왕보다 먼저 사망한 경우 왕은 자최복을 입지 않고 백의와 추포대만으로 30일을 마쳤다. 이게 조선전기 왕실의 기년복제였던 건데 예조는 의경세자상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인조는 “예에 근거가 있으니, 이전대로 마련하여 행하라”고 명하였고 인렬왕후상의 방식으로 복제가 결정되었다.
인열왕후상은 30일만에 복을 마친다는 점에서는 의경세자상과 동일하지만 일단 자최상복을 12일간 입었다가 공제복으로 변복하는 절차를 거쳐 백의와 추포대로 바꾼다는 점에서 중요한 차이가 있다.
인열왕후의 상례는 선조대 의인왕후 상례를 참고한 것으로, 임진왜란 이후 참고할 자료가 불에 소실되고 부족한 상황에서 국가 전례가 사대부 예학의 영향을 받은 결과이다.
당시 선조는 예학적 지식을 갖춘 신료들의 의견에 따라 먼저 자최상복을 입었는데 나중에 조선 전기 실록을 확인해서 백의와 추포대만 입었음이 확인되었다. 그러나 입었던 상복을 갑자기 바꿀 수는 없으니 이일역월제(以日易月制 군주는 국가의 많은 일을 처리해야 하므로 사대부들처럼 상(喪)에 임하여 달수를 다 채울 수 없기에, 편의적으로 달수를 날수로 환산하여 상을 치렀다. 곧 삼년상인 경우는 27개월을 27일로 바꾸어 지내고 기년상인 경우는 12개월을 12일로 바꾸어 지냈다.)를 적용해 12일차에 공제복으로 변복하는 절차가 추가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왕실의 기년복은 자최상복을 입다가 공제복으로 바꾸어 30일만에 마치는 단상으로 확립되었다.
인조는 4월 29일부터 자최상복을 입고, 만 12일만인 5월 12일에 공제복으로 백색목면단령, 생마포대, 백피화를 착용했다. 공제 이후 기존의 자최상복은 전례에 따라 상의원 내시의 책임 하에 후원에 묻었다. 그리고 18일을 더 지낸 후 30일 만인 5월 29일에 복을 마쳤다.
그런데 30일 만에 복을 마치는 단상제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은 바로 인조였다. 5월 3일에 인조는 자신이 자최기년복인데, 왜 30일 만에 복을 벗는지 질의했다. 예조는 실록을 근거로 <가례>의 기년복에 30일 휴가를 주는 제도에 맞추어 30일에 상복을 마치도록 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그러자 인조는 30일에 복을 마치는 단상제를 쓰지 말 것을 명령했다. 예조가 무리하게 고쳐서는 안된다고 반대했다. 인조는 다시 아내의 복과 장자의 복은 다르고 장자의 복이 더 중요하기 때문에 30일에 상복을 마치는 제도를 쓰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에서 대신들에게 이 문제를 논의하게 했다.[68]
5월 7일 예조는 선왕조때부터의 전례를 함부로 바꿀수 없음을 다시 한번 주장했고 이를 인조가 받아들여 인열왕후상과 같이 12일에 공제하고 30일에 마치는 것으로 결정되었다.
하지만 그렇게 논의가 조용히 끝나지 않았다. 전기 기록 소실이 심하고, 실록은 상세하지 않으니 왕보다 차등을 둔다는 원칙 아래 신하들마다 자의적인 기준으로 논쟁이 이어졌다.
5월 20일에 송준길은 <의례儀禮>에 따라 장자에게 참최삼년복을 입어야한다는 원칙을 주장했지만, 이건 당시로선 전례가 없는 굉장히 급진적인 주장이라서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5월 27일에는 부제학 이목, 교리 유홍, 부수찬 김홍욱이 차자를 올려서 3년짜리 참최복을 행하지 않고 1년짜리 기년으로 낮춘 것도 문제인데, 기년을 채우지도 않고 30일만에 복을 벗는 것은 더욱 심하다고 주장하였다. 일단 이미 12일이 지나 공제복으로 갈아입었으니, 공제복으로 기년을 채울 것을 제안했다.
인조는 예조에 명하여 이 문제를 대신들에게 의논하게 하였다. 영의정 김류와 좌의정 홍서봉은 순회세자 상례에 의경세자의 전례를 그대로 따랐고, 당시 퇴계 이황도 제왕가의 상제에 대해서는 논하지 않았음을 강조하였다. 결국 조종의 성문법을 준수해야 할 것을 주장했고 인조는 이 견해를 받아들였다.
이러한 논의를 거쳐 소현세자를 위한 기년복은 공제가 적용된 30일 단상제의 형태로 진행되었다. 왕조례는 매우 보수적인 속성을 보이는데, 수많은 논쟁을 거쳐도 결국은 조종전례를 따른다는 명분으로 기존의 관행대로 진행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럼에도 이목, 유홍, 김홍욱이 제안한 공제복으로 기년(1년)을 마치는 방식은 이후 단상제가 폐지되는 단의왕후 상례를 시작으로 효장세자와 문효세자의 상례에 적용되었다. 소현세자 상복 논쟁은 왕실의 단상제 폐지로 나아가는 논의 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또한 송준길이 의례를 근거로 참최삼년복을 주장하는 것은 조선 예학의 변화 발전 양상을 대변한다.
당시 세자를 위한 상복은 자최기년이 전례에 합당하였고, 뒷날의 영조도 효장세자 사후 기년복을 입었다. 이는 <경국대전>에서 장자와 중자를 구분하지 않고 “아들을 위한 상복은 기년”이라 규정한데 기반한 것으로 조선 전기부터 세자의 상복은 계속 기년이었다. 송준길이 주장한 참최삼년복은 고례를 중시하던 산림학자들의 원칙론이었을 뿐 조선의 세자에게는 한 번도 시행된 적이 없는 복제였다.
왕의 장자복과 더불어 백관의 세자복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다. 4월 26일에 홍문관은 명나라의 태자 상례 조항을 모방하여 절목을 만들어 올렸는데, 여기에서 백관의 복제는 12일간 자최기년복을 입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예조는 "명의 상례는 날짜로서 달수와 바꾸었으므로 초상이 막 난 때로부터 12일에 이르기까지가 곧 우리나라로 말하면 기년복이 되는 것"이라고 해석하였다.
그런데 4월 28일 보고된 세조대 의경세자 상례 절목에 의하면, 백관의 상복은 자최삼월복[69]이고 여기에 식가(式暇)를 적용하여 7일간 백의, 오사모, 흑각대를 착용했다 벗는 간략한 절차로 치러졌음이 확인된다. 당혹스러워진 인조와 신료들은 자최상복으로 3개월을 채우는 방향으로 정리하려 했다.
삼사는 백관의 세자복은 기년이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인조는 전례를 따르기로 결정한다. 그러자 다음에는 신하들은 3개월 내내 자최복을 입냐는 물음이 제기되었다. 자최삼월복은 이일역월하면 한달을 하루로 쳐서 3일만에 갈아입어야 하지만 의경세자 상례때 백관이 7일만에 상복 벗은 전례와 절충해 7일만에 자최상복 벗고 백의, 오사모, 흑각대를 착용하는걸로 정했다. 서연관과 세자를 호위하는 익위사 관원은 차이를 둬서 12일만에 변복케 하고 자최상복은 벗기만 하고 3개월간 그대로 두며 장례때도 자최상복을 입고 참여하게 했다.
역시나 송준길은 의경세자때의 전례는 억측으로 만든 근거없는 사례이며 왕은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받아들여지지 못했고 부제학 이목은 왕은 기년복으로 채우고 백관도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조종의 전례를 따라야하며 왕의 장자복과 신하의 세자복이 똑같을 수 있냐는 반박에 막혔다.
이때의 논의들은 조선 사대부들의 예학이 점점 정교해짐을 보여줌과 동시에 예송논쟁의 예고편이다.
17세기 소현세자상의 자최삼월복은 국조오례의에도 근거가 적혀 있지 않은 15세기 의경세자상의 백의 7일복보다는 예학적인 진전을 보여주는 변화이며 여기서 더 논의를 거쳐서 18세기 효장세자상에는 백관의 자최기년복으로 이어진다.
소현세자상에서 시행된 상례 절차는 등록과 의궤로 후대에 전해져 세자 상례의 새로운 기준으로서, 숙종대 단의왕후, 영조대 효장세자 등 세자와 세자빈의 상례에 적극 활용됨은 물론 영조대 편찬된 <국조상례보편>에도 상당수 반영되었다. 물론 변경되는 사례들도 다수 있지만, 소현세자 상례는 임진왜란 이후 세자 상례의 기본틀을 구축했다는 점에서는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추후 변화의 과정에 대한 연구가 필요한 것이지 소현세자 상례가 이후의 의식과 다르다고 해서 약소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역사의 시간성을 간과하는 주장이다.
덧붙여 '능'은 왕과 왕비, '원'은 세자, 세자빈의 무덤이고 '묘'는 기타 나머지 무덤을 뜻한다. 즉 세자인데 원이 아니라 묘라는 것은 세자 취급 안 해준다는 소리다라는 주장이 널리 퍼져있는데 조선 시대 왕실 상례를 살펴보는 대신 기계적으로 암기만 해서 생긴 낭설이다. 조선 시대 세자묘들은 처음에는 묘(墓)였다가 후손이 즉위하면서 추숭되거나 왕실 권위를 높이기 위해 격상시켜 능원(陵園)으로 바뀌었다.
의경세자의 무덤은 '덕종'으로 추숭되어 경릉(敬陵)은 개칭되기 전까진 그냥 의묘(懿墓)였다. 인조대 기준으로 조선에 유일한 세자묘였던 순회세자의 무덤도 '순회묘(順懷墓)'로 명명되었다가 1870년(고종 7년) 12월 10일에 순창원(順昌園)으로 개칭했다. 소현묘란 명칭 자체가 의경세자의 추숭으로 조성 당시 유일한 세자묘였던 순회묘의 전례를 본받아 정해진 명칭이다.
효장세자의 무덤도 효장묘(孝章墓)였다 정조 즉위 직후 '진종'으로 추증되면서 영릉(永陵)으로 바뀌었다. 사도세자의 융릉(隆陵)도 영조대는 수은묘(垂恩墓)로 명명되었고, 사도세자의 첫아들 의소세손의 무덤은 의소묘(懿昭墓)였다가 1870년(고종 7년)에 의령원(懿寧園)으로 격상되었고, 정조의 아들 문효세자의 무덤도 원래는 효창묘(孝昌墓)였는데 1879년(고종 16년)에 '효창원(孝昌園)'으로 격상되었다.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의 무덤은 조성되었을 때는 연경묘(延慶墓)라고 부르다 헌종이 즉위하여 '익종(翼宗)'으로 추존하면서 수릉(綏陵)이 되었다.
고종 이전에 세자묘를 원이라고 부른 사례는 정조가 사도세자의 무덤을 수은묘에서 영우원(永祐園) 다시 현륭원(顯隆園)으로 개칭한 사례가 유일했는데 아버지를 어떻게든 왕으로 추숭하고 싶었지만 자기 충신들조차 설득할 명분조차 없었던 정조가 궁여지책으로 개칭한 명칭이다. 사도세자만의 특수한 사례로 단순한 병사(病死)였다면 원으로 불릴 일 없었다.
우리가 조선시대 것이라고 알고 있는 수많은 요소들은 알고보면 오랜 변천을 거쳐 조선 후기에나 굳어진 것들이 많다. 왕실 관혼상제와 능원도 마찬가지다.
참고로 강빈의 오라비 강문명은 세자의 발인 날짜가 외조카인 원손에게 불길한 날이라는 지관의 말을 듣고, 날짜를 바꿔달라 요청했으나 인조가 듣지 않고, 나중에 이 일로 트집잡혀 유배가고 숙청된 사실을 상례를 대충 치른 근거랍시고 가져오기도 하는데 이건 그냥 후계자를 효종으로 정했기 때문에(=강씨와 소현세자의 아들들을 쳐내기로 했기에) 생긴 일이지 상례를 대충 치러서가 아니다.
소현세자가 죽은 이상 인조의 권위를 흔들 순 없었고 남은 건 효종을 위해 처리해야 하는 그의 가계였는데 처리해야 할 강씨 가문의 견해를 수긍해서 그들의 발언권과 입지를 유지시켜 줘야 할 이유가 없다. 왕실 상례 같은 중요한 행사에서 그 터를 정하는 일에 관여하는 것은 정치적 입지를 되새기는 것이지 단순한 추모나 권유의 의미가 아니다.
그리고 풍수는 기본적으로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 팔때 물이라도 나오지 않는 이상 참고 이상의 의미는 없다. 겨우 풍수사 말 안 들었다고 상례를 대충 치른 증거라고 민다면 맏아들 죽을 흉지라는 풍수사 최양선 말을 듣고도 소헌왕후와 자신의 묘를 헌릉 옆 땅으로 정한 세종도 문종과 아내를 아끼지 않아서 아내 상례를 대충 치른 거란 말인가? 원래 파주 운천리에 있던 인조의 장릉은 뱀과 전갈이 출몰하는 흉지라서 영조 때 파주 탄현면 갈현리로 이장했는데 그럼 이것도 효종이 효심이 없어서 대충 상례를 지낸 결과란 말인가?
[1] 소현세자의 바로 아래 동생 봉림대군은 소현세자보다 7살 어리다.[2] 이렇게 보통 아버지가 세자를 거치지 않고 왕위에 오를 경우 자신의 장남을 바로 형식상 원자로 삼았다가 세자로 봉하는데, 소현세자는 이 과정을 거치지 않고 2년간 왕자의 신분이었다가 1625년(인조 3년), 왕세자로 정식 책봉되었단 말이 있는데, 무엇을 근거로 한 건지 모르겠다.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분명 원자를 세자로 책봉했다고, 그것도 과정이 훨씬 디테일하게 나와있다.[3] 1628년 12월 24일 산실청을 철거했다는 승정원일기 기록. 그리고 동궁일기에 12월 17일 출산했다는 기록이 있다. 동궁일기에는 '중전'이 출산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학자들은 빈궁의 오기로 결론내린 듯하다. 직후 시강원 스승들이 빈궁에게 안부를 묻는 장면이 있는데다, 인열왕후는 이듬해 7월 대군을 출산했기 때문에 달수가 안 맞기 때문이다. 양력으로는 1629년 1월10일에 출산.[4] 오늘날의 평안북도 곽산군 능한산에 위치해 있다.[5] 조정의 일부.[6] 다만 일기라는 말과 그 방대한 양만 가지고 현대적 기준의 일기장을 기대한다면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다. 이순신의 난중일기 같은 것과 달리, 소현세자가 직접 쓴 일기가 아니다. 조선왕조실록의 1차 사료인 승정원 일기와 마찬가지로, 사관들이 본인들이 기록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하는 날씨라거나 세자의 공적 행보, 언행에 관한 것들만 기록해 놓은 것이기 때문에, 소현세자의 실생활이나 성격을 명확히 파악할 순 없고 단편적인 단서만 제공한다. 예컨데 소현세자가 새신부인 민회빈 강씨와 어떻게 지냈는지 등에 대해서는 이 자료들만 가지고는 파악하기 어렵다.[7] 아침 예절 공부라는 설명이 있는데 그보단 아침 정식 강연이란 표현이 정확해 보인다. 소현세자가 받던 정규수업은 조강례, 주강, 석강, 세가지 타입이 있었는데, 이중 조강례와 주강은 같은 시간대인 진시(7:30~10:30)에 이루어졌지만, 조강례쪽이 대대적이고, 참석하는 학자들이 훨씬 많았다, 주강은 당직 스승들이 하는 약식 수업이었다. 석강의 경우엔 저녁수업이란 이미지와 달리 미시(13:30~15:30)에 이루어지는 에프터눈 수업이었다.[8] 빈객은 왕세자의 교육을 담당한 세자 시강원 소속의 관직이며 <인조실록>에도 '세자 빈객'이라는 이름으로 나온다. 각 관직은 좌우(左右)로 나뉘어졌는데 사(師) 정2품, 빈객(賓客)은 종2품이었다. 그 외에 종3품의 보덕(輔德), 정4품의 필선(弼善), 정5품 문학(文學), 정6품 사경(司經), 정7품 정자(正字), 정8품의 시직(侍直)으로 구성되었다.[9] 왕세자가 월 2회 사부들과 관료들 일부를 데리고 <경전>과 <사기> 등을 강론하는 모임이다. 그동안 배우는 학문을 시험해 보는 의미도 있기 때문에 논술 시험의 의미도 있다.[10] 인조실록 34권, 인조 15년 2월 15일 을유 1번째 기사[11] 특히 동갑이었던 아이신기오로 도르곤(예친왕)과 자주 접촉했다고 한다.[12] 이걸 보고 몽골어나 만주어에 능했다는 이야기가 인터넷에 떠돌고 JTBC 드라마 궁중잔혹사 꽃들의 전쟁과 tvN 드라마 <삼총사>에서는 소현세자가 능숙한 만주어로 말하는 모습이 등장하는데 적어도 처음엔 외국어를 전혀 못했다. 본인 스스로 황제의 말을 잘 못 알아들어 불편하다고 밝혔고 청나라가 몽골어를 가르치려고 보낸 역관들을 "아랫사람들부터 익숙하게 되면 배우겠다."면서 돌려보낸 기록이 있다.[13] 물론 청나라가 그걸 이유로 삼아 진짜로 소현세자를 죽여버렸다면 조선의 반청 감정이 삼전도의 굴욕 때보다 더욱 극에 달하여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조선을 제후국으로 두기가 병자호란 직후보다 힘들어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걸 계기로 청나라가 3번째 조선 침략을 감행할 경우 조선인들은 삼전도의 굴욕으로 인한 반청 감정에 소현세자의 원수를 갚으려는 복수심까지 더해지면서 정묘호란이나 병자호란 때와 달리 조국인 조선의 멸망을 각오하고 청나라에 맞서 싸울 가능성도 있었을텐데 만약 그런 전쟁이 청나라의 중원 입관 전에 일어났다면 청나라의 입장에서는 중원 정복에도 걸림돌로 작용했을 것이다.[14] 임경업, 최명길 등이 명나라를 위해 공포탄을 쏘고 화살촉을 제거한 화살을 쏘는 등 태업 행위를 하고 명나라 배에 식량을 제공하며 스님들을 시켜 명나라에 외교 문서들을 전달했다가 명나라 병부상서가 투항하면서 들킨 일이다.[15] 인조가 조금이라도 말을 안 듣는다 싶으면 청나라에서는 "조선 왕(인조)은 너의 세자를 잊었느냐? 너의 아들도 잊었느냐? 짐을 잊었는가? 짐은 네가 나한테 무릎꿇었던 것을 잊지 않고 있다."라는 협박장이 날아오고는 했다.[16] 선조의 선위를 주장하며 신하들이 들었던 예가 당현종과 당숙종의 사례인데 선대 황제와 현 황제의 권력 다툼이 벌여져 아버지 당현종이 실권을 모두 잃고 반유폐 생활을 해야 했다. 선조 이전까지 조선에 상왕이 5명 있었는데 세조는 상왕으로 달랑 하루만 있다가 병사했으므로 크게 의미없는 사례이고 태종 같은 경우에는 군사권과 외교권을 쥐고 실권을 휘두르고 마음 편히 살다 갔지만 나머지 태조, 정종, 단종은 모두 쿠데타인 1차 왕자의 난, 2차 왕자의 난, 계유정난 등으로 반강제로 물러났으며 이 중 단종은 비명에 갔다. 이런 사례들을 볼 때 선위하고 물러나라는 게 선조에게 어떤 의미로 받아들여졌을까?[17] 실제로 그런 기록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고 인조의 행동을 어떻게든 정당화하기 해보기 위해 나온 현대적인 해석이다.[18] 다만 인조는 그런 모습을 겉으로 보여준 적은 없다.[19] 물론 이런 모습은 선조도 보여주긴 했다.[20] 세자는 자질이 영민하고 총명하였으나 기국과 도량은 넓지 못했다(世子姿質英明, 而器量不弘) 인조 23년 4월 26일 왕세자의 졸기[21] 숙종의 첫번째 비 인경왕후에 대한 사후 추모 글을 보면, 인경왕후에 대한 애정을 담아 당대의 이상적인 여성으로 묘사하긴 하는데, 어린 시절부터 대인기피증 환자급으로 바깥 활동을 안 하고, 자신의 생각이나 감정을 1도 표현하지 않고,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럽고, 규칙을 1도 어기지 않는 여성으로 묘사해 놓는다.[22] 다만 주의해야 할 점은 이 때의 중국에 들어온 기독교는 철저히 유교에 어느 정도 영합적인 모습을 보였다는 것이다. 중국에 워낙 뿌리를 박고 있던게 유교였던 만큼 유교를 부정하고서는 전도가 안 되니까 선교사들은 유교와 기독교는 다르지 않다는 것을 어필하고 다녔다. 아담 샬은 명말청초에 황제들에게도 등용되기도 했으니 상류층을 중심으로 포교를 하고 다녔을텐데 그렇다면 확실히 기독교가 유교와 다르지 않다고 포교했을 것이고 그리고 상대가 소현세자니만큼 "천주교는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종교에요." 라고 하기엔 좀 그렇다. 아담 샬의 고향인 독일도 이 때는 범독일권의 지도자는 황제였던 만큼 아담 샬이 신분질서를 부정하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의문스럽고. 애초에 그런 사람이면 명나라-청나라에서 내려주는 자리 받아먹었을지도 의문이지만 말이다.[23] 정작 본인은 왕실 차원의 조선인 포로 송환 노력은 하지도 않았다. 하긴, 병자호란이 터진 직후 종묘와 사직 보전을 위해서라면 백성들은 어육(魚肉. 생선과 짐승의 고기를 아울러 이르는 말로, 짓밟고 으깨어 아주 결딴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름.)이 되어도 상관없다'는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을 수 있던 것이 당시 인조를 비롯한 조선의 집권 사대부들이었다. 아무래도 현대인들로서는 공감하기 힘든 가치관이다.[24] 인조실록 45권, 인조 22년 2월 9일[25] 월산대군의 현손이자 성종의 양현손.[26] 당시 청 홍타이지가 죽고 9~10살 밖에 되지 않는 그의 아들 순치제가 즉위하게 되면서 순치제는 어린아이라 숙부인 도르곤(예친왕)이 섭정왕으로 실권을 크게 쥐고 있었다.[27] 이 과정에서 소현세자는 귀국 선물로 용연벼루를 갖고 싶다고 청했는데, 용연벼루는 청나라 황실에도 하나밖에 없는 비싸고 귀한 물건이어서 처음에는 청측도 주저했지만 그래도 조선의 왕자가 갖고 싶다고 하니 너그럽게 건네주었고, 동생 봉림대군은 포로로 잡혀 있는 조선인들을 돌려달라고 청했다. 참고로 나중에 소현세자는 인조 앞에서 청의 모든 것들에 대해 얘기하며 청을 본받아야 한다며 긍정적으로 얘기했는데, 이미 청나라의 청자만 들어도 치를 떠는 인조는 소현세자의 면전 앞에 소현세자가 선물로 받은 벼루를 집어던져서 그 충격으로 소현세자가 며칠 후 숨졌다고 알려져 있었지만, 이건 말 그대로 야사로써 사실이 아니다.[28] 아들 소현세자가 죽기 한 달 전부터 인조 본인 역시 내내 아팠고, 위중한 증세도 있는 등 인조 역시 당시 건강이 좋지 못했다.[29] 당시 성년의 기준이 15세였음을 감안하면 인조가 5년만 더 살았어도 수렴청정이 불필요했다.[30] 덧붙이자면 청나라도 원손을 비롯한 소현세자의 아들들보다는 봉림대군의 계승에 찬성했다. 정확히 말하면 당시 실권자였던 섭정왕 도르곤(예친왕)의 의중이었는데 중국 본토에서 이런저런 국정이 산적한 가운데 나이 어린 왕이 즉위해서 평정한지 얼마 되지 않은 후방의 조선의 안정성이 떨어지는 일이 일어나는 것을 반기지 않았다.[31] 사실 이는 어느정도는 맞고 어느정도는 틀린데, 먼저 틀린 측면을 보면 인조 사망 당시 이석철은 13세로서 장성하지 못한 나이는 아니나 최소 2년, 길면 7년 정도의 수렴청정만 거치면 친정이 가능한 나이였고 숙종의 경우 아예 14살에 즉위하고도 수렴청정 없이 직접 정사를 돌보았다. 다만 맞는 측면에서 보면 이런 경우는 대외적 격변이 없는 안정기에 더 어울리는 말이라 아직 남명 정권이 남아있어서 청나라와 대결을 벌이고 있던 당시 판세에선 나이도 따져볼만은 한 형국이었다. 거기다가 인조도 소현세자 당시 이미 50대인지라 당시 평균 수명을 생각하면 몇년 내로 죽을 가능성은 얼마든지 있었다. 어수선한 주변 분위기에 자기는 언제 죽을지 모르는 상황이니 인조의 논리도 아주 일리가 없는건 아닌 셈.[32] 참고로 이 때문인지는 몰라도 이후에 소현세자의 유복자에 대한 소문이 백성들에게 널리 퍼져나갔고 그래서 숙종 시절에는 자신이 소현세자의 유복자임을 주장하여 왕족 지위를 얻으려는 사기꾼인 손처경이라는 자가 나타나기도 했다.[33] 인조실록 46권, 인조 23년(1645년, 을유) 8월 26일[34] 이 고문이 어찌나 지독했는지 열명 중 일곱명이 국문을 받다가 죽었다. 그런데도 다들 독살 혐의를 부인하다 죽었다.[35] 이 과정에서 인조는 며느리가 "원수를 갚아달라!"라는 유언을 남기고 죽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의 말 외에는 강빈이 이런 말을 했다는 증거가 전혀 없다. 자기를 역적으로 만들 촘촘한 판에 놓여 죽음을 앞둔 어미가 자식들까지 죽으라고 저런 말을 했을리는 당연히 없고, 인조의 날조라는 게 정설이다.[36] 인조실록 49권, 인조 26년 3월 25일 경신 3번째기사 http://sillok.history.go.kr/id/kpa_12603025_003[37] 그러나 이는 사실 말이 안 된다. 애초에 이석철은 장차 왕이 될 순번 1순위였고 따라서 이런 사람을 자기나라로 데려가 키우겠다는 말은 그 의도가 너무 명백하다. 이석철에게 갈 곳이 없는 것도 아니고 명백히 조선이라는 나라와 조선왕실이라는 소속집단이 있는데 단순힌 동정심 때문에 그런 말을 한다는 것은 조선을 무시하거나 숨겨진 의도가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적어도 용골대가 말실수나 멍청해서 그런 말을 한 것은 아니다. 용골대는 조선에서의 이미지와는 달리 실제로는 군사적으로도 행정적으로도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런 사람이 말실수나 멍청해서 이런 말을 한 것은 가능성이 없다.[오류] 소현세자의 아들인 경안군이 복권된 것은 효종이 죽기 2달 전인데 이 때에 효종이 병을 앓고 있던 건 사실이다. 허나 당시엔 죽을 수준은 아니었고[70] 2달 뒤 병세가 악화되긴 했지만 효종의 죽음은 어의였던 신가귀가 뜻하지 않게 일으킨 의료사고지 질환 때문은 아니었다. 효종의 승하 직전이라면 직전에 복권이 이루어지긴 했지만 효종이 자신의 죽음이 임박했음을 인지한 상태로 복권을 단행한 것은 아니라는 것. 효종은 재위기간 내내 소현세자의 자식들(조카들)에 대한 유화적인 모습을 보였는데 추정상 효종은 단계적으로 복권절차를 밟으려고 했던 것으로 보이고 실제로도 조선에서 복권은 한번에 이루어지는 경우는 드물었고 그렇다고 해도 정말 엄청난 시간이 지난 뒤에야 가능했다.[39] 다만 쇼그렌 증후군은 환자의 대부분이 여성, 특히 4~50대의 중년여성이라는 점에서 가능성이 조금 떨어진다고 보았다.[40] 전통 한의학에서 종기가 옹, 모낭염, 부스럼, 단독, 봉와직염을 모두 아우르는 광범위한 개념인 것처럼 고열과 주기적인 한열왕래(한열발작) 증상이 있으면 학질로 진단했고, 때문에 종류도 광범위했다. 전통 한의학에서 말하는 학질은 風瘧, 寒瘧, 熱瘧, 濕瘧, 痰瘧, 食瘧, 勞瘧, 鬼瘧, 疫瘧, 瘴瘧, 痎瘧 등으로 세분화하고 있으며 당시 세자를 진료한 의관들은 열학(熱瘧)과 노학(勞瘧), 귀학(鬼瘧)의 일종으로 진단한 것으로 보인다. 김종덕, 2007, 소현세자 병증과 치료에 대한 연구, 규장각 제31집, p.67[41] 중국과 한국의 전통의서들은 학질이 다발하는 계절로 하지에서 동지사이, 즉 한여름부터 가을을 지나 초겨울까지로 잡으며 나머지 계절에도 학질이 발병할 수 있다고 설명한다. 류정아, 박찬국, 1999, 학질의 증상과 기전에 대한 문헌적 고찰 - 청대(淸代)까지 중국 의서를 중심으로, 대한한의학원전학회지[42] 전통한의학 고전이자 기본의서인 <황제내경(黄帝内经)>의 <소문(素問)>을 보면 학질에 대한 설명과 치료를 적은 자학편(刺虐篇) 제1장부터 학질의 유형별로 시침 방법을 지시하고 있다.제36편 자학편 참조.[43] <승정원일기> 발췌[44] 오히려 가래가 끓어 오르고 위산이 역류하는 증상이 더해졌다.[45] <승정원일기> 1645년(인조 23년) 4월 15일[46] <승정원일기> 1645년(인조 23년) 4월 16일[47] 부들부들 떠는 발작 증세[48] <승정원일기> 1645년(인조 23년) 4월 24일[49] <승정원일기> 1645년(인조 23년) 4월 25일[50] 흔히 알고있는 제2형 당뇨와는 달리 제1형 당뇨는 자가면역질환이며, 췌도가 파괴되어 아예 인슐린이 전혀 분비되지 않는다. 현대 의학으로도 인슐린주사 외에는 치료방법이 없고, 혈당수치를 수시로 감시하지 않으면 위험하다. 발병 원인은 스트레스와 감염.[51] 『신명호 (2010). 『승정원일기』를 통해본 昭顯世子의 病症과 死因. 사학연구, (100), 109-137.[52] 심지어 앞서 언급했던 신명호의 논문의 경우, 소현세자가 자주 병들었다는 주장을 강화하는 과정에서 오류를 내기도 했다. 예컨데 1644년 초 조선에서 세번째로 파견된 어의가 소현세자가 아파서 파견되었다고 단정한 것이다. 하지만 이는 승정원일기와 심양일기를 크로스체크하지 않은 결과이고, 심양일기를 살펴보면, 이때 세자는 건강했다. 당시 파견된 어의는 강빈 을 위해 파견된 것이다.[53] 참고로 심양일기는, 현대적 기준에선 의외다 싶을 정도로 서술하는 주제가 제한적이다. 소현세자의 질병 관련 기록은 가벼운 눈병이나 멍이 든 기록까지 적지만, 자녀들 출생에 관해선 간략한 정도가 아니라 그냥 기록을 안 해버렸다.[54] 왜냐하면 승정원일기와 을유동궁일기의 기록에 온도차가 있어, 병세가 다르게 보이기 때문이다. 승정원일기만 보면, 소현세자는 이형익의 침을 맞고 쾌차 수준으로 회복되었다고 해석 가능하지만, 을유동궁일기에서 보면 침을 맞은 후 증세 일부가 반대로 악화되었다. 하필, 공교롭게도 이무렵, 을유동궁일기 기록 일부가 훼손되어 있다.[55] 전주이씨대동종약원에서는 소현세자파의 약사에서도 이 이야기를 소개하며. 이외에 백윤식이 소현세자로 연기한 KBS 드라마 대명(1981년)에서 이 야사를 가져다 사용했다.[56] 신동원, 2004, 호열자 조선을 습격하다. 역사비평사.[57] 심지어 공서파도 소현세자를 지지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최명길도 본래 소현세자 지지 세력이었고, 심기원도 본래 소현세자를 지지했었다.[58] 그리고 굳이 이기일원론이니 뭐니 하는 것 없이 종법질서라는 강력한 명분이 있었다. 종법질서상으로는 왕이 죽기 전 장자인 세자가 죽으면 차자가 잇는게 아니라 장자인 세자의 장자 즉 적장손이 세손으로서 후계자가 된다. 소현세자의 경우엔 이미 아들인 이석철이 원자로 책봉되어 있었고 정상적으로는 몇년 뒤 세손으로 책봉될 예정이었기에 학풍 관계없이 소현세자를 지지하는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물론 조선에선 이를 어기긴 했는데(세조 시기) 그래도 종법질서상으론 왕-적장자-적장손이 정론이다.[59] 태조는 신덕왕후가 연소한 세자를 남기고 죽자 국법을 위반하면서까지 신덕왕후의 정릉을 한양 도성 내, 그것도 광화문 바로 남쪽에 조성하고 원찰로 흥천사를 창건해 신덕왕후의 존재감과 권위를 유지하여 세자의 권위를 지키려 했다. 반면 인조는 봉림대군 쪽으로 후계구도를 잡으며 동시에 소현세자 혈손들을 몰아낼 작정이었던 만큼 그런 안배를 할 이유가 하등 없었다.[60] 지붕에 올라 망자가 입던 옷을 흔들며 돌아오라 세번 외치는 행위. 사극에서 임금 사후에 상위복(上位復))하고 외치는 절차가 이것이다.[61]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1645년) 4월 26일[62]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1645년) 4월 28일[63] 찬신을 만든 효장세자의 상은 음력 11월에 치러졌다. 영조도 추위를 찬실 설치의 근거로 들었다.[64]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1645년) 5월 7일[65]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1645년) 5월 3일[66] <승정원일기> 제 696책, 영조 5년(1729년) 11월 5일.[67] 정조대 문효세자 이후에는 그보다 앞선 의경세자의 전례에 따라 따로 묘호와 궁호를 마련하였다.[68] <인조실록> 권46, 인조 23년(1645년) 5월 3일[69] 3개월 동안 상복을 입는 복으로, 만 1년간 입는 재최부장기와 동일한 등급의 생포를 사용하되 삭장은 짚지 않았다.
[70] 이 때는 효종이 아니라 효종의 아들인 현종의 병세가 더 안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