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 | 와브 수트 우세르카프(Wab sut Userkaf) |
뜻 | 우세르카프의 신성한 지역 |
높이 | 49m |
경사 | 53°07'4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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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는 기원전 2490년경 제5왕조 창시자인 파라오 우세르카프를 위해 건설되었다. 이 피라미드는 조세르의 계단식 피라미드 북동쪽에 위치해 있다. 또한 이 피라미드는 석회암으로 지어졌으며 내부는 여러 종류의 석재로 채워졌으나, 현재는 무너져 현지에서는 돌무더기라는 뜻의 엘-하람 엘-마하르비시(El-Haram el-Maharbish)로 불리고 있다.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는 19세기 서구 고고학자들에 의해 왕실의 피라미드인 것으로 밝혀졌다.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는 장례 신전, 제단 및 예배당, 숭배 피라미드, 왕비 네페르헤테페스의 피라미드와 그녀의 장례 신전을 포함하는 대규모 묘역의 일부이다. 우세르카프의 장례 사원과 숭배 피라미드는 현재 완전히 붕괴된 상태이며, 왕비의 피라미드 또한 지속적인 도굴로 인해 묘실이 노출된 상태로 남아있다.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는 이전 4왕조의 피라미드와 그 규모, 건축 양식, 위치에서 큰 차이를 보이며, 이는 왕권 이념의 변화와 연관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2. 발견
우세르카프 피라미드의 입구는 1831년 이탈리아의 이집트학자 오라치오 마루키에 의해 발견되었으나, 실제 내부 탐사는 1839년 존 셰이 페링에 의해 이루어졌다. 페링은 누구의 피라미드인지는 정확히 알지 못했고, 이를 5왕조 말기 파라오 제드카레 이세시에 속한다고 보았다. 페링의 내부 탐사 이후 피라미드는 오랫동안 방치되었으며, 1842년 카를 리하르트 렙시우스에 의해 공식 피라미드 목록에 기록되었으나 추가 조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피라미드는 1927년 세실 맬러비 퍼스와 장-필리프 로르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으며, 1928년 거대한 붉은색 화강암으로 된 우세르카프의 두상이 발견되어 피라미드의 소유자를 확인할 수 있었다. 이후 발굴은 로르에 의해 1948년 재개되어 1955년까지 진행되었고, 북쪽과 서쪽에서의 추가적인 연구는 1976년 아흐메드 엘-쿨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최근의 연구로는 2000년 오드란 라브루스에 의해 진행된 조사 등이 있다.
3. 피라미드 외부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 외부 묘역은 기존 4왕조 피라미드 단지와 유사한 구조로, 피라미드와 상부 사원, 나일강 근처에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하안 사원이 있었다. 단 차이점은 이전의 묘역들과는 다르게 건물들이 남북 축으로 배치되었으며, 주요 사원은 피라미드 남쪽에 위치하고 피라미드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또한, 피라미드 동쪽에는 소규모 예배당이 있는데, 이는 이전에는 장제전의 성소에 위치하던 배치와 다르다.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 묘역의 남쪽에는 왕비 네페르헤테페스의 소규모 피라미드 묘역이 있다.우세르카프의 장제전은 시간이 흐르며 광범위하게 채석되었고, 사이스 시대[1]에 거대한 수직 갱도 형식의 무덤이 새로 만들어져 완전히 손상되었다. 현대의 복원에 따르면 장제전은 이전의 장제전과 유사한 구조를 가졌으나 상세적인 구조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사원의 중앙에는 흑색 현무암 바닥의 열린 안뜰이 있었으며, 이곳에서 우세르카프의 거대한 두상이 발견되었다. 안뜰 남동쪽과 남서쪽의 문은 소규모의 다주식 형태의 방으로 이어졌고, 그 뒤로 내부 성소가 있었다. 오늘날에는 현무암 바닥재와 외부 입구를 둘러싼 화강암 벽돌만이 남아 있다.
피라미드 동쪽에 소규모 봉헌실이 위치하며, 현재는 거의 남아 있지 않다. 중앙에 두 개의 기둥이 있는 방과 석영 재질의 문이 있었으며, 내부는 흑색 현무암 바닥재와 석회암, 화강암 벽으로 구성되었다.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 묘역 남서쪽에는 소규모의 카 피라미드가 있다. 높이는 15m, 밑변 길이는 21m이며, 기울기는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와 같다. 이 피라미드는 위치가 다소 특이한데, 묘역 자체가 남-북으로 지어진 것과 관련된 것으로 보인다.
4.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는 조세르의 피라미드 북동쪽에 위치하며, 원래 높이는 약 49m, 밑변 길이는 73m, 경사는 53°였다. 피라미드의 핵심 구조는 수평으로 배치된 작은 석회암 벽돌로 구성되어, 4왕조 시기 피라미드보다 작업 난이도가 대폭 하락했다.[2] 그러나 외장재가 도굴당하면서 핵심 구조가 드러났고, 시간이 지나며 더 심하게 파손되다. 이 같은 현상으로 인해 현재의 폐허 상태가 되었다. 피라미드는 계단식 피라미드로 만들어졌으며, 외장재는 투라(Tura) 지역에서 채굴한 석회암으로 만들어졌다.피라미드 내부에 별도의 방이 없으며, 지하 구조는 피라미드 건설 전에 파 놓은 깊은 도랑에 건설되었다. 지하 구조의 입구는 피라미드 북쪽 바닥에서 시작되며, 남쪽으로 18.5m 길이의 경사진 통로가 이어져 있다. 통로의 일부는 붉은 화강암으로 마감되었으며, 이후 두 개의 화강암 포트컬리스[3]이 위치하고 있다. 통로 끝에는 창고, 묘실과 붙어있는 곁방, 그리고 매장실이 위치하고 있으며, 매장실에서는 검은 현무암 관의 파편이 발견되었다.
5. 네페르헤테페스의 피라미드
우세르카프는 자신의 가족을 가까운 곳에 매장하는 전통에 따라 왕비 네페르헤테페스를 위해 자신의 피라미드 남쪽 10m 떨어진 곳에 소규모 피라미드를 지었다. 이 피라미드는 현재 완전히 무너져 작은 잔해만이 남아 있다.왕비의 피라미드는 1928년 C. M. 퍼스에 의해 처음 발견되었으며, 1929년에 네페르헤테페스 왕비의 것으로 추정되었다. 이후 1943년 페르센(Persen)의 무덤에서 왕비의 이름과 지위를 명시한 석재가 발견되었고, 1979년 오드란 라브루스에 의해 추가적인 증거가 발견되면서 이 피라미드는 네페르헤테페스의 것으로 확정되었다.
왕비의 피라미드는 원래 높이 16.8m, 기울기 52°, 밑변 길이 26.25m였으며,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와 같은 건축 기법으로 지어졌다. 피라미드의 외장석이 도굴당했기 때문에 현재는 내부 구조가 노출된 상태이다. 내부 구조는 북쪽 입구에서 시작되는 하강 통로와 T자형 방으로 구성되며, 이는 다른 왕비 피라미드 전체와 동일한 동서 축 구조를 가지고 있다.
왕비 피라미드 묘역은 별도의 장제전을 포함하고 있으며, 이는 피라미드 동쪽에 위치해 있다. 장제전은 남동쪽에 입구가 있었으며, 동서로 뻗은 열린 안뜰로 이어졌다. 장제전은 대략적인 구조가 어느정도 밝혀졌으며[4], 개방형 행각과 예배당, 석상이 있었던 방 등을 포함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6. 이후
우세르카프의 피라미드는 이후 람세스 2세의 네 번째 아들 카엠와세트(Khaemweset)의 지시로 복원 작업이 진행되었다. 이는 카엠와세트와 제물을 운반하는 자들이 새겨진 석재에 의해 확인된다. 이후 제26왕조 시대에는 우세르카프의 신전이 묘지로 사용되었으며, 대형 수직 갱도 형식의 무덤이 만들어져 현대적인 복원도 어렵게 되었다. 이는 사이스 시기에는 이미 우세르카프의 신전이 폐허 상태였음을 의미한다.[1] 사이스를 수도로 삼았던 시기. 제26왕조 프삼티크 1세 시기부터 제31왕조 다리우스 3세 시기까지이다.[2] 4왕조 시기 피라미드는 모두 거대한 벽돌로 건설되어 작업 난이도가 높았다. 단, 내구도 하나는 엄청났기 때문에 현재도 남아있는 것이다.[3] 길을 차단하기 위해 만드는 문. 흔히 중세시대 시기 성에서 볼 수 있는 창살문도 포트컬리스의 일종이다.[4] 단, 자세한 구조는 보존 상태가 매우 나빠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