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8:00:49

이승만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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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8년 제4대 국회의원 선거 · 진보당 사건 · 농업협동조합 발족
1959년 제28보병사단 사단장 살인사건 · 조봉암 사형
1960년 제4대 대통령 선거 (3.15 부정선거) · 4.19 혁명 · 2.28 학생민주의거 · 고려대학교 4.18 학생 시위 · 김주열 최루탄 사건 · 장면 부통령 사퇴 · 이승만 대통령 하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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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color=#fff><colbgcolor=#254170> 제1공화국
이승만 정부
李承晩 政府 | Syngman Rhee Government
1948년 7월 24일 ~ 1960년 4월 27일
<rowcolor=#fff> 출범 이전 이후
대한민국 임시정부 허정 권한대행 체제
남조선과도정부 허정 내각
대통령 이승만 ,/ 제1-3대,
부통령 이시영 ,/ 초대 (~1951.5.14.),
장면 ,/ 권한대행 국무총리 (1951.5.14.~1951.5.16.),
김성수 ,/ 제2대 (1951.5.17.~1952.6.28.),
장택상 ,/ 권한대행 국무총리 (1952.6.28.),
함태영 ,/ 제3대 (1952.8.15.~1956.8.14.),
장면 ,/ 제4대 (1956.8.15.~1960.4.23.),
허정 ,/ 권한대행 수석국무위원 (1960.4.23..~)[외무],
국무총리[2] 이범석 ,/ 초대 (1948.7.31.~1950.4.20.)[국방],
신성모 ,/ 서리 (1950.4.21.~1950.11.22.)[국방],
장면 ,/ 제2대 (1950.11.23.~1952.4.23.),
허정 ,/ 서리 (1951.11.6.~1952.4.9.)[사회][6],
이윤영 ,/ 서리 (1952.4.24.~1952.5.5.),
장택상 ,/ 제3대 (1952.5.6.~1952.10.5.),
이갑성 ,/ 직무대행 (1952.10.5.~1952.10.9.),
백두진 ,/ 서리 (1952.10.9.~1953.4.23.)[재무],
백두진 ,/ 제4대 (1953.4.24.~1954.6.17.)[재무],
변영태 ,/ 제5대 (1954.6.27.~1954.11.28.)[외무],
백한성 ,/ 임시 서리 (1954.11.18.~1954.11.29.)[10],
수석국무위원[11] 변영태 ,(1954.11.30.~1955.7.28.)[외무],
김형근 , / 수석국무위원 대리 (1955.7.29.~1956.5.19.)[내무],
김현철 ,(1956.5.19.~1956.5.26.)[재무],
이익흥 ,(1956.5.27.~1956.12.31.)[내무],
조정환 ,(1956.12.31.~1959.12.21.)[외무],
최인규 ,/ 수석국무위원 대리 (1959.12.22.~1960.3.23.)[내무],
홍진기 ,(1960.3.24.~1960.4.24.)[내무],
허정 ,(1960.4.25.~)[외무],
여당
[[대한독립촉성국민회|
대한독립촉성국민회
]] ,(~1951.12.17.),


[[자유당(1951년)|
파일:자유당_투명.png
]] ,(1951.12.17.~),
연립여당
[[한국민주당|
한국민주당
]] ,(~1949.2.10.),


,(1949.2.10.~1949.11.12.),

[[대한국민당(1949년)|
대한국민당
]] ,(1949.11.12.~1951.12.17.),
파일:이승만 취임 선서.jpg
▲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이승만 취임 선서

1. 개요2. 정책3. 영향
3.1. 긍정적 영향3.2. 부정적 영향
4. 의의와 한계

[clearfix]

1. 개요

제1-3대 대한민국 대통령 이승만이 이끌었던 정부로, 제1대 대통령 선거, 제2대 대통령 선거, 제3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승만이 승리하면서 1948년 8월 15일 정식 출범하여 1960년 4월 27일까지 존속하였다.

4.19 혁명으로 인해 이승만이 하야하면서 허정 권한대행 체제로 전환되었다.

2. 정책

1. 민주주의를 전적으로 믿어야 될 것입니다. 우리 국민 중에 혹은 독재제도가 아니면 이 어려운 시기에 나갈 길이 없는 줄로 생각하며 또 혹은 공산분자의 파괴적 운동에 중대한 문제를 해결할만한 지혜와 능력이 없다는 관찰로 독재권이 아니면 다른 방식이 없다고 생각하는 이도 있으니 이것은 우리가 다 큰 유감으로 생각하는 것입니다. 목하의 사소한 장해로 인해서 영구한 복리를 줄 민주주의의 대정방침을 모호하게 만드는 것은 우리가 결코 허락하지 않을 것입니다. 독재주의가 자유와 진흥을 가져오지 못하는 것은 역사에 증명된 것입니다. 민주제도가 어렵기도하고 또한 더디기도 한 것이지만 의로운 것이 종말에는 이기는 이치를 우리는 믿어야 할 것입니다. 민주제도는 세계 우방들이 다 믿는 바로 우리 친구들이 이 전제정치와 싸웠고 또 싸우는 중입니다. 세계의 안목이 우리를 드러다 보며 역사의 거울이 우리에게 비치어 보이는 이때에 우리가 민주주의를 채용하기로 하고 30년 전부터 결정해서 실행하여온 것[20]을 또 간단없이 실천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제도로 성립된 정부만이 인민의 자유를 보장하는 정부입니다.
1. 민권과 개인자유를 보호할 것입니다. 민주 정체의 요소는 개인의 근본적 자유를 보호하는 것입니다. 국민이나 정부는 항상 주의해서 개인의 언론과 집회와 종교와 사상의 자유를 극력 보호해야 될 것입니다. 우리가 40여 년 동안을 왜적의 손에 모든 학대를 받어서 다만 말과 행동 뿐 아니라 생각까지도 자유로 하지 못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우리민족이 절대로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는 개인 자유활동과 자유판단권을 위해서 쉬지 않고 싸워온 것입니다. 우리를 압박하는 사람들은 유래로 저의 나라의 전제정치를 고집하였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를 주장하는 마음이 더욱 굳어저서 속으로 민주제도를 배워 우리끼리 진행하는 사회나 정치상 모든 일에는 서양민주국에서 행하는 방식을 모범하여 자래로 우리의 공화적 사상과 수난을 은근히 발전하여 왔으므로 우리의 민주주의는 실로 뿌리가 깊이 박혔던 것입니다. 공화주의가 30년 동안에 뿌리를 깊이 박고 지금 결실이 되는 것이므로 굳게 서 있을 것을 믿습니다.
1. 자유의 뜻을 바로 알고 존중하며 한도 내에서 행해야 할 것입니다. 어떤 나라에던지 자유를 사랑하는 지식게급의 진보적 사상을 가진 청년들이 정부에서 게단을 밟어 진행하는 일을 비평하는 폐단이 종종 있는 터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언론과 행실을 듣고 보는 이들이 과도히 책망해서 위험분자라 혹은 파괴자라고 판단하기 쉬웁니다. 그러나 사상의 자유는 민주국가의 기본적 요소이므로 자유권리를 행사하여 남과 대치되는 의사를 발표하는 사람들을 포용해야 할 것입니다. 만일 그렇지 못해서 이런 사람들을 탄압한다면 이것은 남의 사상을 존중히 하며 남의 이론을 참고하는 원측에 위반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시비와 선악이 항상 싸우는 이 세상에 우리는 의로운 자가 불의를 항상 이기는 법을 확실히 믿어서 흔들리지 말어야 될 것입니다.
1. 서로 이해하며 협의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관건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가 새 국가를 건설하는 이때에 정부가 안으로 공고하며 밖으로 위신이 있게 하기에 제일 필요한 것은 이 정부를 국민이 자기들을 위해서 자기를 손으로 세운 자기들의 정부임을 깊이 각오해야 될 것입니다. 이 정부의 법적 조직은 외국군사가 방해하는 지역 외에는 전국에서 공동히 거행한 총선거로 된 것이니 이 정부는 국회에서 충분히 토의하고 제정한 헌법으로써 모든 권리를 확보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부터는 우리 일반 국민은 누구나 다 일체로 투표할 권리와 참정할 권리를 가진 것입니다. 일반 국민은 누구를 물론하고 이 정부에서 분포되는 법령을 다 복종할 것이며 충성스러히 바뜰어야만 될 것입니다. 국민은 민권의 자유를 보호할 담보를 가졌으나 이 정부를 불복한다든지 번복하려는 권리는 허락한 일이 없으니 어떤 불충분자가 있다면 공산분자 여부를 물론하고 혹은 개인으로나 또 당으로나 정부를 전복하려는 사실이 증명되는 때에는 결코 용서가 없을 것이니 극히 주의해야 할 것입니다. 민주주의가 인민의 자유권리와 참정권을 다 허락하되 불량분자들이 민권자유라는 구실을 이용해서 정부를 전복하려는 것을 허락하는 나라는 없는 것이니 누구나 다 이것을 밝히 알어 조심해야 될 것입니다.
1. 정부에서 가장 전력하는 바는 도시에서나 농촌에서나 근로하며 고생하는 동포들의 생활정도를 개량하기에 있는 것입니다. 기왕에는 정부나 사회에 가장 귀중히 여기는 것은 양반들의 생활을 위했던 것입니다. 지금부터는 이 사상을 다 버리고 새 주의로 모든 사람의 균일한 기회와 권리를 주장하며 개인의 신분을 존중히 하며 노동을 우대하여 법률 앞에는 다 동등으로 보호할 것입니다. 이것이 곳 이 정부의 결심이므로 전에는 자기들의 형편을 개량할 수 없던 농민과 노동자들에게 특별히 주의하려 하는 것입니다. 또 이 정부의 결심하는 바는 국제통상과 공업발전을 우리나라의 필요에 따라 발전을 실시하여 우리 농장과 공장소출을 외국에 수출하고 우리가 우리에게 없는 물건은 수입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즉 공장과 상업과 노동은 서로 떠날 수 없이 함께 병행불패(竝行不敗)해야만 될 것입니다. 경영주들은 노동자를 이용만 하지 못할 것이오 노동자는 자본가를 해롭게 못할 것입니다. 공산당의 주의는 게급과 게급 사이에 충돌을 붙이며 단체와 단체 간에 분쟁을 붙여서 서로 미워하며 모해를 일삼는 것이나 우리의 가장 주장하는 바는 게급전쟁을 피하고 전민족의 활동을 도모함이니 우리의 활동과 단합성은 우리 앞에 달린 국기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상고시대부터 태극이 천지만물에 융합되는 이치를 표명한 것이므로 이 이치를 실행하기에 가장 노력할 것입니다.
1. 우리가 가장 필요를 느끼는 것은 경제적 원조입니다. 과연 기왕에는 외국의 원조를 받는 것이 받는 나라에 위험스러운 것을 각오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언제던지 무조건하고 청구하는 것은 불가한 줄로 아는 바입니다. 지금와서는 이 세계대세가 변해서 각 나라 사이에 대소강약을 물론하고 서로 의지해야 살게되는 것과 전쟁과 평화에 화복안위를 가치당하는 이치를 다 깨닫게 되므로 어떤 적은 나라의 자유와 건전이 모든 큰 나라에 동일하게 관심 되는 것입니다. 연합국과 모든 민족들이 개별적으로나 단체적으로 기왕에 밝히 표명하였고 앞으로도 계속해서 발표할 것은 이 세계의 대부분이 민주적 자유를 누리게 하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방들이 우리에게 많은 도음을 주는 것이오. 또 계속해서 도움을 준 것인데 결코 사욕이나 제국주의적 요망이 없고 오직 세계평화와 친선을 증진할 목적으로 되는 것이니 다른 의심이 조곰도 없을 것입니다.
대한민국 30년 8월 15일 대통령 이승만[21]
제헌헌법에 따르면, 자유경제를 원칙으로 삼고 있으나, 사회정의와 균등경제 정신에 입각하여 농지를 농민에게 분배하고 영리를 목적으로 하는 사기업이 노동자에게 이익 균점권을 보장하도록 하였으며 자연력, 공공성을 가지는 기업은 국영 또는 공영으로 두며 긴급상황에 한해 사영기업을 국유 또는 공유로 이전할 수 있도록 명시되었다. 또한 정부조직법을 통해 국무총리 직속에 예산 편성 사무를 담당하는 기획처를 신설하고 국무회의에 제출하는 종합적 계획안을 세우도록 하였다.[22]

이승만 행정부는 조봉암, 이순탁 등 중도계열 인사를 농림부, 기획부에 중용하여 농지개혁과 산업계획을 추진하였다. 이에 농림부는 지주의 전업을 보장하여 소유한 자본이 중소기업에 투자되기로 유도함으로써[23] 농촌 집중으로 인한 토지 영세성의 문제를 해결하려 하였고 기획부는 산업부흥 5개년계획과 이를 뒷받침하는 물동 5개년계획을 마련하였다.[24]

3. 영향

3.1. 긍정적 영향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나아가야 할 근대화, 산업화, 민주화를 통한 민주적 자본주의 산업강국의 건설을 위해 초석을 놓았고 이를 위한 포석을 놓았다는 의의가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외교면에서 대체로 옳은 방향으로 기초를 잡은 점이 있다.

또한 수십년간 국내를 떠나있었던 탓에 내치나 조직 운영에는 좀 미숙했지만[25], 무시할 수 없는 외교 감각을 지녔던 이승만이 외교를 잘한 측면이 많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다. 확실하게 작전권을 넘겨버려서 미국 혹은 UN군이 발을 빼는 건 원천봉쇄하다시피 했으며,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시에도 미국과 의회의 생리를 너무나 잘 아는 입장에서 반공포로 석방 사건 같은 벼랑끝 전술로 아이젠하워 정부의 당면 목표였던 휴전을 훼방놓는 입장을 불사하며 체결을 성공하였다. 이걸로 모자라 아예 미군을 서울과 근교에 잡아두어, 북한이 남침한다면 미본토에서 위원회 통과다 의회 승인, 비준이다 하기도 전에 미군과 교전하지 않을 수 없어 자동으로 미군을 참전하게 하는 장치까지 마련하기까지 하였다. 이걸 자주 입장에서 비판하는 견해가 있을 수 있는 데 문제는 이승만은 청년시절에 대한제국이 미국으로부터 전략적 가치를 인정받지 못하고 일본 식민지가 되는 과정을 자기 눈으로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것이다.[26] 무슨 수를 써서도 이번에는 미국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아야 한다는 생각이 강했고, 결국 이를 성공시켰다. 또한 주한미군이 남한에 있듯이 중국군이 북한에 남겠다는 주장도 개소리 말라면서 철회시킨 것도 이승만의 주장이었다.

비단 북한과의 관계뿐만 아니라 주변국과의 관계를 생각해보아도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후 현재까지 대한민국이란 나라가 실력을 기르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계속해주고 있는 것도 사실.참조

그밖에도 농지개혁법 등을 제정하고 개정한 것에 커다란 치적이 있는데, 농지개혁이 만약 개정이 안 되었다면 한국 전쟁때 수 많은 농민들이 북한의 토지배분 선전에 넘어가 북한편으로 붙었을 가능성이 매우 크다는 학계의 주장이 있다. 때문에 농지개혁법은 매우 커다란 의의를 지니고 있는데, 농지개혁법은 농림부 장관 조봉암이 다 했지 이승만은 한 거 없다는 주장도 있지만 조봉암을 자리에 앉힌 것이 이승만이니 그의 치적에 역시나 포함된다. 다만, 제대로 법제화가 되기 전에 이미 농촌 수준에서 밀어붙였던 것은 상당한 의의. 일각에선 당시 미국에게 엄청난 원조를 받아 전후 복구와 그 이후의 경제성장을 했다는 재평가가 일고 있기도 한다.[27]

이승만 정부의 최대의 의의는 대한민국이 미국과 동맹한 서방 자본주의 진영에 속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엄청난 대가를 치렀지만, 포석 면에서 올바른 방향이었고, 이 구도하에서 이루어진 국력 향상의 혜택을 후손들이 보고 있다. 산업화근대화에 뒤쳐져, 식민지로 전락하기까지 했던 대한민국에게 한미동맹과 주한미군은 북한 뿐만 아니라 , , 로부터도 체제를 안정시켜 주는 인큐베이터 역할을 하였으며, 경제적으로도 군사비 부담을 대폭 경감하여 결과가 증명하듯이 세계 유수의 산업강국으로 국력을 키울 수 있었다.

다만 친미 외교노선에 대해서 단순히 친미적이었다고만 규정하기엔 무리가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승만 정부 시절의 친미 노선은 35년이 넘는 제국주의 세력의 식민통치에서 막 벗어나고, 이후 3년 동안의 전쟁으로 전 국토가 초토화된 그야말로 최악의 특수한 조건에서 비롯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이승만 대통령 본인도 '한국의 생존을 위해 미국을 끌어들이려 했던' 점에서 친미일 수 있어도, '미국의 뜻에 맹목적으로 따르는' 의미에서의 친미는 결코 아니었다. 오히려 이승만은 자신의 전생애를 통틀어 미국과 마찰을 빚어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국 전쟁 당시에도 이전의 여러 남침 징후를 무시하고, 애치슨 선언에다 한국군에 대한 지원에 미적지근했던 미국에 대해 분노를 폭발시키며 미국 대사에게 빨리 미군 참전 안시키면 남한에 있는 미국 민간인들 다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하는 깡을 부리기도 하였다[28] 반공포로 석방 사건만 해도 미국을 제대로 물먹인 사건이라서 미국에서 길길이 날뛰었고 처칠도 열받아서 저런 인간이 통치하는 땅 지켜줄 필요없으니 영국군을 철수시키자는 주장까지 했다. 미국 정부도 멋대로 구는 이승만을 몰아내는 쿠데타까지 획책했었다. 종이 위의 구상에서 그쳤지만.

독립운동 시기부터 꾸준하게 반공사상을 주창해왔고, 이로 인해 미 군정과 갈등을 빚기도 했다. 북한은 정부 명칭만 가지지 않았지, 해방 이후 소련의 주둔 아래에 1946년 3월 민주개혁을 주창하며 중앙집권화를 강화했고, 1946년 11월 도, 시, 군인민위원회 선거를 실시했다. 그 결과 1947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구성했다. 이런 위협 속에서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의 협상이 지지부진하게 되자 한반도의 공산화를 우려하며 남한 단독정부 수립을 주장하여 관철시켰다. 남한 단독 선거를 통해 이승만은 정치 분야에서 자유민주주의 원칙에 입각한 대한민국을 건국[29]하였다. 물론 권력에 대한 욕심으로 전제적인 권위주의적 통치를 했고, 3.15 부정선거와 같은 오점을 남기기도 했지만, 기본적으로 이승만은 미국 정치제도에 대한 동경이 있었기에, 자유민주주의를 바탕으로 한 대통령 중심제 정부를 확립했다. 이승만은 대한민국을 동아시아에서 유일하게 미국식 대통령제를 모방한 나라로 만들었다.

요약하자면 구한말, 가쓰라-태프트 밀약을 통해 단순히 국제법이나 이상주의적인 시각으로는 국가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닫고 온갖 정치적 공작을 통해서 미국을 잡아두어 대한민국을 지키려고 했고 이를 이루어냈다는 것이다. 하지만 외교로 미국을 잡아두고 안으로는 발췌개헌, 사사오입 개헌, 3.15 부정선거 등 내치는 최악이었다.

또하나 대표적인 예로는 중국 인민지원군의 개입으로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병력이 부족해지자 미군은 구 일본군의 한국전쟁 개입을 구상했는데, 이승만은 일본군이 한반도에 진주하면 일본군은 공산군과 싸우기 전에 먼저 한국군부터 싸워야 할 것이라고 반대했고 뒤이어 중공군의 공세가 좌절되자 결국 무산되었다. 물론 해양순찰이나 기뢰제거에 이승만과 대한민국 정부 몰래 일본군 출신을 투입시킨 사실은 있지만 이 때도 일본군으로 한국 영토에 상륙시키거나 한 것이 아니라 그냥 일본군 출신이고, 미군에 소속된 특별부대의 형태였다.

3.2. 부정적 영향

일단 외교적인 측면에서는 높게 평가할 수 있고, 경제적으로도 사실상 아무 기반도 갖춘 게 없었음을 감안하면 그럭저럭 선방은 했다고 할 수 있다.[30] 그러나 정치 및 사회적으로는 결코 긍정적인 시각으로는 평가할 수 없는 점이 너무나 많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 이승만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학계, 지식인[31]이 이승만 정부의 외교, 국방상의 치적을 앞세워 이승만 정부 시대에 나타났던 국내의 정치, 사회적인 여러 오점들에 대해 일종의 면죄부를 요구하기도 하지만, 과를 공으로 미화하거나 덮을 순 없는 법이며 반대로 과를 내세워 공을 폄하하거나 무시할 수도 없는 법이다. 업적은 업적이고, 과오는 과오다.

물론 정부 수립 두 달 정도 뒤에 여순사건이 터졌고, 2년도 안 되어 6.25 전쟁이 터진 점에서 실드칠 소지가 있기는 하다. 사실 미국한반도를 거진 포기하다시피 하다가 북한이 남침하자 국제공산주의의 세력 확대 시도로 판단하고 개입한 데서 보듯이 전쟁 자체에 대해서는 이승만 정부의 책임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으니까... 그렇지만 문제는 전쟁 난 다음. 한국전쟁에서 북한이 남침하자 국민들에게 국군들이 선전하고 있다는 방송을 틀고 열심히 도망한 뒤 한강철교를 폭파했고 부산광역시에 임시 수도를 두었으며, 그 곳에서도 독재 연장을 위한 권력투쟁이나 하였고 군간부와 행정을 치밀하고 체계적으로 통솔하지 못하여 국민방위군 사건이라거나 보도연맹 학살사건 같은 끔찍한 사건들도 터뜨렸다. 또한 애초에 반대세력을 빨갱이로 몰아 제거하는 작업을 통해 세운 국가여서 민중합의에 의한 지지가 취약했던 탓에 체제 강화를 위한 기타 여러가지 뻘짓거리들이 자행되었다.

우선 여순사건 직후 국가보안법이 제정[32]되었으며, 물론 이건 그렇다 쳐도 발췌 개헌(부산정치파동)안[33]이 통과되어 직선제를 통한 장기 집권이 실행되었고,[34] 초대 대통령에 한하여 중임제한을 없앤 그 유명한 사사오입 개헌안도 이때 통과되었다.[35] 또한 강력한 라이벌로 떠오른 조봉암에게 간첩 혐의를 씌워 처형하는 사법살인도 이때 처음 시행되었다.[36] 또한 당시 여적필화사건으로 논란을 일으킨 비판적인 신문인 경향신문[37]에게는 무기한 발행정지 처분을 내렸다. 한마디로 국내 관리는 삽질의 연속이었던 셈. 이 외에도 장면 부통령 저격사건 같은 일도 있었다. 또 각종 우상화 작업도 병행되었다.

또 자신이 익숙하지 않다며 자신의 마음대로 한글 간소화 안을 밀어붙이더니 한글학회에서 이를 거부하자 일제마냥 한글학회의 활동을 방해하고 탄압했다. 자세한 것은 관련 문서 참고.

이렇게 하여 12년간 집권했고, 여기에 최종적으로 대한민국 부통령으로 이기붕을 확고하게 당선시켜 계승을 명확히 하기 위해[38] 3.15 부정선거라는 뻘짓을 하였으나, 그래도 대안이 없다고 참던 국민들이 민주주의 최후의 근간인 선거를 무력화하는 시도까지는 결코 용서하진 않았다. 도리어 쌓여가던 불만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멸망을 자초하여 언론탄압에 반발한 언론사들의 공격이 이어졌고, 군부가 등을 돌린 상태에서 무엇보다 민주주의 교육을 받고 각성한 학생들이 중심이 된 시민혁명 4.19 혁명이 일어나 이승만이 대통령 자리에서 하야하였고 체제는 종식되었다. 그리하여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대한민국 초대 정권으로 국제적으로 벼랑 끝에 몰려 있었던 대한민국을 뛰어난 외교적 성과로 보전하는데에는 성공하였으나, 대한민국 역대 정권 중 가장 큰 사건사고를 내내 터뜨렸으며, 이에 분노한 국민들이 들고 일어나 붕괴되어 역설적이게도 대한민국 민주화에 기여한 정권이 되었다.[39]

물론 당시 사실상 국제적 미아 상황[40]이었던 대한민국에서 권력이 멀쩡히 유지되긴 상당히 어려웠다. 일단 당선되었다면 나라를 위해 잘 일하면서도 정권 유지를 해야 하며, 정권 유지가 중대 과제인 것이[41] 정치다. 장관을 임명할 때도 자신에게 충성하지 않는 사람은 능력 좋다고 가져다 놓을 수가 없는 게 현실이다.[42] 이승만의 전략은 여러모로 대한민국에 대대로 이익을 주고 있으나, 그를 행해야 했던 이승만 정부의 구성물이 매우매우 좋지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어거지로 정권을 유지하려 한 게 문제였다. 농담 아니고 이승만 정부의 내치 능력은 정말 처참하기 짝이 없었다. 채택한 전략은 매우 우수했으나 정작 그를 실행해야 했던 정권이 이승만 등 일부를 제외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어중이 떠중이 다 모인 오합지졸이었다. 즉 그나마 외교를 잘 했기 때문에, 신의 한 수가 된 한미동맹조차 없었으면 한국은 그야말로 현재의 북한이 부럽지 않은 수준의 막장 국가가 됐을 가능성이 높았다.[43]

요약해서 보면 대한민국이라는 집의 주인으로서 일단 안 무너지게는 해 놨지만, 더 튼튼하게 할 생각은 안 하는 바람에 결국은 쫓겨났다고 볼 수 있겠다.

4. 의의와 한계

대한민국의 기반은 이승만 정부가 다져놓은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현재 대한민국의 정치세력들은 제1공화국 하의 이승만 정부를 긍정적으로 평가하지는 않는다. 실제로 박정희를 비롯한 5.16 군사정변 주동자들은 소위 '혁명재판'을 통해 이승만 정부 실세 상당수를 처벌했다.[44][45] 하다못해 현재 존재하는 모든 정당 중에서 이승만의 자유당을 계승한다고 자처하는 정당은 없으며 간혹 당명에 자유가 들어가면 약칭이 자유당이 아닌 것으로 정할 정도다.[46]

더불어 역대 정권 중 가장 많은 대한민국 국적의 사망자가 발생한 공화국이기도 했다.[47] 6.25 전쟁 당시 북한의 조선인민군에 의한 학살도 잊어서는 안 되겠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 기타 양민학살, 국민방위군 사건 같은 건들은 이승만의 책임으로 봐도 무방하다. 이외에도 제주 4.3 사건 같이 극좌 세력과 이승만 정부 모두에게 책임이 있는 사례도 들 수 있고 제주도의 사례에서 나타나듯이 식량난 문제도 후대 정권에 비해서 심각했다.[48]

2차 대전 전후의 여느 아시아나 아프리카의 신생독립 후진국처럼 독립운동가 지도자들이 집권한 후 독재화되면서 몰락한 정치실패와 같은 과정을 거쳤다고 볼 수 있다.[49]

[외무] 외무부장관 겸임.[2] 사사오입 개헌과 함께 국무총리직은 폐지되었다.[국방] 국방부장관 겸임.[국방] [사회] 사회부장관 겸임.[6] 장면 총리의 미국 체류 기간 동안 임시로 임명.[재무] [재무] 재무부장관 겸임.[외무] [10] 변영태 총리의 해외 체류 기간 동안 임시로 임명.[11] 사사오입 개헌으로 폐지된 국무총리직을 대신하여 국무회의를 조정 및 총괄하는 신설 직책이었다. 외무 → 내무 → 재무부장관 순으로 우선 임명되었다.[외무] [내무] 내무부장관 겸임.[재무] [내무] [외무] [내무] [내무] [외무] [20] 1919년 3.1운동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것을 뜻한다. 실제로 이승만은 이를 기념하는 의도에서 1919년을 건국 1년으로 하는 대한민국 연호를 사용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대한민국 연호 참조.[21] 金珖燮 편, 『이대통령훈화록』, 중앙문화협회, 1950.[22] 정진아, 정권의 자립경제론, 그 지향과 현실.[23] 강진국, 1949, 농지개혁법 해설, 문화출판사[24] 기획처 물동계획국, 1949, 조선식산은행조사부.[25] 하지만 내치도 마냥 못했다고 할 수만은 없는 게, 조봉암을 농림부장관으로 임명해 농지개혁법을 제정해서 농민들이 한국 전쟁 당시 북한의 선전에 휩쓸리지 않을 수 있었던 것 등 업적도 있었기 때문이다.[26] 국제법을 믿었던 대한제국이 한미수호조약에 의거해 미국에 일본의 침략을 저지해달라고 요청하는 일행의 통역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그 때 이미 미국은 가쓰라-태프트 밀약으로 한국을 일본에 넘기고 자기들은 필리핀의 영유권을 인정받은 상태였다. 이런 쓰라린 경험에다 이후 실제 수십년의 경험으로 이승만은 겉으로 하는 미국의 립서비스에 관계없이 미국으로부터 필요성을 인정받지 못하면 또다시 버림받을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강해진다.[27] 삼성제일모직, 제일제당을 설립한 것도 이승만 정부 시기의 일인데, 이들 두 회사는 6.25 전쟁 직후의 낙후된 한국 경제에서 그나마 수입대체 효과를 통한 산업자립의 기반을 마련한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28] 6.25 전쟁 이전 이승만이 제의한 한미상호방위조약 요구는 미국에 의해 거절당하였다. 또한 미국은 근본적으로 애치슨 선언에서 드러나듯이 필리핀 일본 얄류산 열도를 잇는 선을 방어선으로 설정하고, 남한의 군비는 국경 경비대 수준으로 둘려고 하였다. 장개석 정권을 포기하고, 주한미군을 철수시킨데서도 나타나듯이 적어도 1950년 전의 미국은 아시아한반도에서 육전도 불사한다기보다는 일본이나 대만, 필리핀 같은 섬에 거점을 두면서 해공군으로 미국에 대한 위협을 막으려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이승만은 주한미군 철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진해에 미해군 기지를 유치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만다.#[29] 참고로 뉴라이트가 건국절 논란을 들고 오기 전에는 정부 수립과 건국을 따로 구분하지 않은 채 혼용하는 분위기였다.[30] 이승만 체제 하에서 대한민국문맹률 및 기본 상식에 대한 결여 비율은 엄청나게 줄어들었고, 그 인력을 박정희가 나중에 경제를 발전시킬 때 공장 노동력으로 잘 써먹었다는 걸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공장 노동자를 우습게 보는 사람들이 많은데, 기본 판단 및 학습능력과 언어 구사 능력은 갖고 있어야 한다.[31] 주로 뉴라이트 성향으로, 이들의 기원이 데탕트 이후 변절한 주사파였음을 감안하면 숭배의 대상을 김일성에서 이승만으로 틀은 것이기도 하다.[32] 당시 초대 대법원장이었던 김병로는 국가보안법에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었지만, 이승만 전 대통령의 권한이 워낙 막강했으니 더는 뭐라고 하지도 못하고...[33] 말이 개헌이고 정치파동이지 내용을 보면 친위 쿠데타다. 거기다 이 짓을 한 시기는 전황이 교착되어 사실상 고지전 위주로 변했다고는 하지만 한국전쟁 중이었다.[34] 당시 대한민국 부통령이었던 김성수는 '민주주의를 유린한 행동'이라며 강력히 반발하였고, 부통령이 사퇴하는 사태가 벌어지기도 했다.[35] 다만 이승만은 고령이어서 혜택을 단 한 번밖에 누리지 못하긴 했다. 재미있는 점은 역대 대한민국 대통령미국 대통령 모두 최대한 해먹은 게 많아봐야 4회가 마지막이라는 것이다. 한국은 이승만 3회, 박정희 4회(3선은 유신 임기로 바꿔서 재직). 그 외에는 전부 단임. 미국은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4회나 했다. 단, 그는 헌법에 그게 명문화되지 않고 단지 암묵적으로 2기까지만 한 것을 이용한 것이라 불법은 아니었지만, 이승만은 명백히 불법으로 했다.[36] 진보당 사건을 지칭한다. 이 사건은 인혁당 사건과 더불어 정략적 차원에서 사법살인을 한 극히 일부인 사건이다.[37] 당시 경향신문은 천주교계 신문이었다.[38] 왜 명확히냐면 당시 자유당 대통령 후보는 이승만, 부통령 후보는 이기붕, 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조병옥, 부통령 후보는 장면이었는데, 정작 이때 조병옥은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 그래서 대통령 자리는 '너무나' 자연스럽게 이승만 것이 될 수 있던 것. 하지만 진짜 문제는 이승만은 당시 80살 넘은 초고령의 노인이었고, 이기붕은 장면에게 이미 저번 선거에서 패한 전적이 있었는데, 당시 헌법으로는 미국처럼 대통령이 죽으면 부통령이 권력을 이어받게 되어 있었다. 그래서 자유당에서는 권력을 유지하려면 어떻게든 이기붕을 닥치고 당선시키고 봐야 했다.[39] 대한민국 헌법의 전문엔 '불의에 항거한 4·19민주이념을 계승'한단 문장이 있으며, 이 문장이 유지되는 한, 이승만 정권은 정의롭지 못하며 민주주의가 아닌 정권이었음을 명시하고 있는 셈이다. 참고로 제3공화국 시절부터 이 문장이 들어가 있었다.[40] 간단히 말해 전 세계가 버린 나라이자 언젠가 멸망해도 전혀 이상하지 않은 나라. 반공포로 석방도 지정학적 특성상 버려질 가능성이 높은 나라를 어떻게든 북한+중국+소련으로부터 지키기 위한 나름의 시도였다. 초기 주한미군에 대한 통제가 거의 없었던 것도 이런 점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한국이지 미국이 아니었다.[41] 이 정권 유지가 나라를 위해 일하는 것보다 우선되게 되면 국가 막장 테크가 시작된다.[42] 비슷한 경우가 중일전쟁 때 미국에서는 장제스에게 능력이 좋았던 바이충시를 중용하라고 계속 권유했으나, 바이충시는 반장전쟁 때 장제스하고 대립한 사람이었기에 장제스가 계속 그 권유를 씹었던 적이 있다. 그리고 그렇게 대립했던 사람들은 국공내전 당시 하나 둘 장제스의 예상대로 배신했다. 근데 바이충시는 반장전쟁 이후로는 장제스한테 반기를 든 적도 없는디? 물론 자신을 따르려 하지 않는 사람을 끝내 따르게 만들고 이런 사람들이 능력이 좋은 부류도 많긴 하지만, 리스크는 상당히 큰 일이다.[43] 물론 미국이 한미동맹을 체결한 뒤에도 보장해 준 것이라곤 오직 한국의 안전 뿐 내부가 어떻게 돌아가는가는 신경도 쓰지 않았지만, 실은 가장 중요한 게 바로 그 안전 보장이다. 안전 보장을 못 받아서 제대로 성장하기도 전에 망한 나라나 북한의 김씨왕조처럼 쓸데없는 대미 전쟁 준비와 적화통일을 한답시고 GDP의 30%를 군비에 몰아놓어 민생을 등한시하다가 망한 체제가 역사엔 숱하게 많다.[44] 심지어 박정희 정부 때도 4.19 혁명을 4.19 의거로 낮춰 부를지언정 그 뜻은 계승한다고 주장했다. 물론 박정희가 혁명재판을 실시한 데에는 5.16 군사정변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것을 기본적으로 내포함과 동시에, 사실상 군사독재정권에 방해되는 자들을 처리하기 위한 의도도 다분히 숨어있었다.[45] 다만 처벌받았던 이승만 정부 실세들과 자유당 인사들은 최인규, 곽영주, 이정재를 제외하면 나중에 모두 사면 또는 복권되었다.[46] 대표적으로 현재 집권여당인 국민의힘의 전신 자유한국당의 경우 정식 약칭은 자유당이 아니라 한국당이었다.[47] 아예 반공권 독재자 중에서도 수하르토를 제외하면 가장 많은 인명을 학살한 인물이다.[48] 물론 식량난 문제는 정부의 책임만은 아니다. 그 박정희 정부 시절에서도 쌀이 부족해서 혼분식도 장려하고 통일미도 개발하고 별 짓을 다 했다가 겨우겨우 식량난을 해결할 수 있었다. 그런데 정부 수립 초반과 한국 전쟁 등의 험한 풍파를 겪으며 박정희 정부보다 내적으로나 외적으로나 더 혼란스러웠다는 이승만 정부 시절은 말할 것도 없다.[49] 다만 외교적으로는 제1세계 서방 자본주의 열강과 밀접한 동맹을 맺으며 국가의 안전을 보장받으며 국력을 축적할 수 있게 했고 경제적으로는 다른 신생독립 후진국들이 기득권 세력의 반발에 부딪쳐 농지개혁과 같은 경제구조적인 개혁에 성과를 크게 거두지 못하면서 후진국 신세에 벗어나지 못했다는 점을 비교하면서 외교적으로는 긍정적으로 평가해야한다. 여러가지 실책이나 권력에 눈이 멀어 저지른 악행도 있지만 장기집권하면서 독선적으로 변한 것에서 정치실패가 발생했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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