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2-18 03:29:03

제16대 대통령 선거

2002년 대선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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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투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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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6월 15일 제3차 개헌으로 부통령직 폐지
** 2014년 7월 24일 헌법재판소가 국민투표법 제14조 제1항 내용 중 일부에 대해 헌법 불합치 결정을 내렸으나 이후 법률 개정이 이뤄지지 않아 2016년 1월 1일자로 효력을 상실하여 시행 불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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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파일:external/www.kyeongin.com/130207.jpg
후보자들의 선거 벽보
{{{#!wiki style="margin: -7px -12px" 1997년 12월 18일
15대 대선
2002년 12월 19일
16대 대선
2007년 12월 19일
17대 대선
}}}
투표율 70.83% ▼ 9.82%p
선거 결과
후보 [[한나라당|
한나라당
]]
이회창
[[새천년민주당|
새천년민주당
]]
노무현
득표율
46.58% 48.91%
득표수 11,443,297 12,014,277
대통령 당선인
파일:노무현_대통령.jpg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1. 개요2. 배경3. 과정
3.1. 새천년민주당경선
3.1.1. 결과
3.2. 한나라당의 경선3.3. 본선 진행 상황3.4. 노무현-정몽준 단일화3.5. 폭풍전야, 갑작스러운 단일화 파기3.6. 개표 진행 상황
4. 투표율5. 출구조사6. 개표 결과
6.1. 지역별 개표 결과6.2. 격전지역6.3. 노무현 후보의 부재자투표 초압승
7. 한나라당의 대선 불복과 재검표8. 평가
8.1. 인터넷이 처음 등장한 선거8.2. 신문, 전화의 영항력8.3. 대기업이 선거자금에 관여한 마지막 선거
9. 병풍 논란10. 특이사항11. 둘러보기

[clearfix]

1. 개요

파일:SSI_20170508172323_V.jpg
기뻐하는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 내외
파일:02노무현당선_경향신문.png
대통령 당선 확정을 알리는 경향신문 기사
대한민국 제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식 영상
새로운 대한민국!
국민 후보 노무현
노무현 대통령 당선인대선 슬로건
제16대 대한민국 대통령을 선출하기 위해 2002년 12월 19일에 치러진 선거.

48.91%를 득표한 기호 2번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가 46.58%를 득표한 기호 1번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를 득표율 2.33%p, 표차 570,980표 격차로 제치고 당선되었다.

2. 배경

제15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처음으로 여당이 된 새정치국민회의는 전국 정당을 목표로 2000년 1월 20일 새천년민주당으로 확대 창당했다. 그러나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한나라당에게 석패하였고, 이후 재보궐선거 패배가 잇따라 벌어지며 대선 승리와 정권 재연장도 불확실한 상황이 된다. 당내에서는 이인제가 큰 인기를 얻고 있었지만 이인제의 지지율이 이회창을 이기기 충분치 못한 수치였다.

야당이 된 한나라당의 경우 제16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을 상대로 승리를 거두며 원내 1정당으로서의 입지를 다져나갔고, 이후로도 재보궐선거에서 잇따라 승리하며 지지층들의 만족감을 채워나갔다. 당시 한나라당의 총재였던 이회창은 유력 대권 주자로 떠올랐다. 사실 한나라당의 경우 이회창 외에는 거의 대항마가 없을 정도였는데, 대쪽 판사의 이미지와 이미 대선에 한 번 도전했던 경력이 한몫을 하면서 사실상 이회창의 차기 대통령 당선이 기정사실화될 정도였다. 대선 여론 주자에서 40%가 넘는 지지율을 보이며 다른 후보들을 압도했다.

파일:external/legacy.www.hani.co.kr/021003000120001227340-21.jpg
16대 대선 만 2년 전의 2000년 연말 한겨레21 커버스토리 기사. 출처.

그런 와중에 사실 당내에서도 당외에서도 확실한 지지층이 없던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선 2년 전만 해도 거의 없었다. 허나 경선지지율이 2%에 불과했던 노무현은 노사모 열풍을 일으키며 인터넷 네티즌들에게 호평받았고 이 기세를 타 대선 본선에서 당시 최다 득표 수를 경신하고 당선되는 기적을 보이게 된다.

3. 과정

3.1. 새천년민주당경선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svg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제16대 대통령 후보 경선
{{{#!wiki style="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6px -1px -11px;"
<rowcolor=#00AA7B>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새천년민주당 김중권 사퇴
2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당선
3 새천년민주당 정동영 낙선
{{{#FFFFFF 4}}} 새천년민주당 김근태 사퇴
{{{#FFFFFF 5}}} 새천년민주당 이인제
{{{#FFFFFF 6}}} 새천년민주당 한화갑
{{{#FFFFFF 7}}} 새천년민주당 유종근
}}}}}}}}}}}}


새천년민주당은 지금까지 당원들만이 참여했던 대통령 선거 후보 경선을 최초로 국민 참여 경선 형식으로 바꾸었다. 당원:일반 국민의 비율을 50:50으로 하여 2002년 3~4월 동안 각 광역자치단체를 순회하여 선거를 하는 방식이었다. 이는 이른바 각본 없는 16부작 정치 드라마라는 평가를 받으며 세간의 주목을 끈다.[1]

후보자
  • 이인제: 김영삼에 의해 발탁돼 문민정부 초대 노동부 장관과 민선 1기 경기도지사로 재임하다 신한국당 대선후보 경선에 출마해 패배한 뒤, 탈당하고 국민신당을 창당해 제15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했다. 낙선한 뒤 국민신당과 새정치국민회의의 통합으로 국민의 정부에 합류했다.[2] 16대 총선에서는 새천년민주당 중앙선거대책위원장으로 활약하며 제1당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수도권과 충청권, 강원권 승리로 제5대 국회의원 선거 이후 민주당계 정당 최다 의석을 확보하며 민주당의 전국 정당화를 이끌었다. "피닉제"라는 개그 요소로 전락한 훗날과는 위상이 전혀 달랐으며, 이인제 대세론을 이끄는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그러나 한편으로 본선에서 겨룰 강력한 상대인 한나라당 이회창에게 여론조사 지지율이 계속 밀리던 상태였기 때문에 정권 연장을 희망하는 새천년민주당 지지층 입장에서는 '이 사람으로 정권 연장을 할 수 있을까?' 라는 일말의 불안감도 있었다.
  • 정동영: MBC 뉴스데스크 앵커 출신으로 김대중에 의해 정치권에 발을 들였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았으며 당시 당내의 소장파였다.
  • 김중권: 민주정의당 국회의원 출신으로 문민정부 출범 이후 정계 은퇴했다가 김대중의 회유로 새정치국민회의에 입당한 뒤 국민의 정부 시절 대통령 비서실장과 새천년민주당 대표를 맡았다. 당시 노무현과 함께 영남권(경북) 후보로 분류되었다.
  • 김근태: 노무현과 함께 거의 동등하게 여겨지던 개혁후보였으나 홀로 (다른 후보 대부분이 받은) 정치자금 수수를 양심선언하며 사퇴해버렸다. 김근태는 그 역풍을 맞게 되었지만 이것이 젊은 진보 지지층 사이에 정치개혁에 대한 공감대를 불러일으키면서 反권노갑, 反이인제 정서가 점점 차오르기 시작했다.
  • 한화갑: 호남 출신으로 당시 김대중의 가신 그룹으로 분류되었다.[3] 김근태·노무현과 연대 가능성이 있었으나 실제적으로 이뤄지진 않았다.
  • 노무현: 김영삼에 의해 발탁된 영남 출신 정치인이었으나 3당 합당 이후 김영삼의 곁을 떠났고 1991년부터 김대중민주당에서 활동했다. 영남후보론이인제 정체성 문제를 들고 이인제 후보를 맹추격했다.
  • 유종근: 김대중의 보좌관 출신으로 민선 1·2기 전라북도지사를 재임했다.

한편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노무현은 "이인제의 대선 출마를 막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대권 경선에 나섰다."라고 밝힌 바 있다. 이인제에 대해서 "재주는 있어 보이는데 성실해 보이지도 않고 철학이 있어 보이지도 않는다.", "나는 88년부터 89년까지 이인제 씨와 함께 국회 노동위를 같이 했다. 그때 이인제 씨는 불성실의 극치였다.", "다른 후보가 우리 민주당의 대권 후보가 되는 것은 상관없지만, 이인제가 대권 후보로 선출되는 것만큼은 반드시 막아야 한다." 등의 말로 비판을 하기도 했다.

경선 시작 시점에서 가장 유력한 후보는 이인제였으나, 김근태가 자신이 정권 실세였던 권노갑 상임고문에게 불법 정치자금을 받았다는 사실을 고백하면서 권노갑의 지원을 받던 이인제의 조직이 위축되어버린다. 이후 경선 시작 얼마 전쯤부터 여론조사에서 다른 후보들이 이인제의 턱밑까지 추격했고, 제주 경선 직전에는 이미 3자(이인제, 노무현, 한화갑)에서 2강(이인제, 노무현) 구도로 경선 분위기가 상당히 바뀌었다. '이인제 대세론' 주춤, 2강 구도 뚜렷 이 기사에서 소개된 여론조사들은 대체로 이인제가 큰 격차로 1위를 하고 노무현, 한화갑, 정동영 3인이 각각 서로 득표차가 크지 않은 2·3·4위를 하는 것으로 나왔는데, 실제 경선 결과에선 한화갑 후보가 이인제 후보를 3표 차이로 제치고 1위를 했다.

첫 경선 지역인 제주도에서는 한화갑이 175표로 1위를 얻는다. 근소한 차이로 이인제가 172표로 2위를 했고, 노무현과 정동영이 각각 3, 4위를 기록한다. 분명 한화갑은 여론조사에서는 1위를 할 것으로 예측되지 않았는데, 제주도가 전남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한화갑의 지역구와 가깝다는 영향을 크게 받은 것이다.

두 번째 지역 울산광역시에서는 노무현이 1위를 하며 선전을 했고 누적 득표에서도 이인제, 한화갑을 제치고 1위로 올라선다. 정치적 기반이 영남이었던 노무현이 영남 지역인 울산에서 승리해야 다음 경선 지역이었던 광주에 가서 영남 출신 후보라는 강점을 어필할 수 있었기 때문에 노무현은 여기에 신경을 많이 썼다. 같은 영남권 후보였던 김중권 역시 2위로 선전했다. 이 경선이 끝난 직후 김근태, 유종근 후보가 사퇴한다.

세 번째 지역 광주광역시 경선이 최대 분수령이었다. 광주는 당시 새천년민주당 소속이었던 김대중 대통령의 정치적 고향[4]이고 옛날부터 민주당에게 텃밭이었던 지역이기에 광주 경선에서의 승리는 그 상징성이 매우 컸다. 경선 전의 분위기는 광주가 홈그라운드였던 한화갑과 대세론 이인제가 1위를 두고 다툴 것으로 예상됐었고, 누적 득표에서도 이들이 앞서갈 거란 예상이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여기서 결정적 변수가 발생했다. 지금까지의 여론조사에서는 민주당의 어떤 후보가 나오더라도 상대 진영 후보였던 이회창을 이길 수 없는 것으로 나왔는데, 광주 경선 직전의 여론조사에서 노무현 vs 이회창 양자 구도에서 노무현이 이회창을 앞서는 결과가 나온 것이다.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따르면 이 여론조사 결과를 보도한 언론은 문화일보였는데, 광주에는 문화일보가 들어오지 않아서 노사모는 광주까지 내려와서 신문을 직접 시민들에게 나눠줬다고 한다. 사실은 SBS-문화일보 공동 여론조사였고 결과가 광주방송을 통해 8시 뉴스에서 보도가 되어 알고있는 사람들도 꽤 있었다.

뜻밖의 여론조사 결과와 당시 노사모[5]들의 열성적인 지지 운동에 힘입어 결국 모두의 예상을 깨고 노무현이 1위, 이인제 2위, 한화갑 3위로 기록되며 누적 득표 1위 유지에 성공하게 되는 이변을 연출한다. 광주 경선의 대이변은 노무현 바람, 이른바 노풍(盧風)이 일어나게 되는 계기가 된다.

광주광역시 민주당 경선 발표 동영상. 노무현의 지지 세력과 기성 민주당의 문화적인 괴리감을 볼 수 있는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무현이 1위라는 대이변을 일으킨 것은 그만큼 노무현에 대한 광주 지역의 기대가 컸기 때문이기도. 실제 여론조사에서 이회창을 이길 가능성이 큰 것은 물론, 5공 청문회 때 5.18 민주화운동의 진상을 규명하기 위해 고군분투하고 지역주의 타파를 위해서 노력해온 행보를 광주시민들이 높게 평가했고 대권후보로 받아들인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물론 네 번째, 다섯 번째 지역이던 대전·충남에서는 예상대로 충청권을 홈그라운드로 품은 이인제가 노무현에 비해 4~5배 많은 득표율(67%, 73.3%)로 1위를 거둠에 따라 누적득표에서도 1위로 노무현을 제치고 크게 앞서나간다. 이로 인해 광주 경선에서 불이 붙었던 노풍이 잠시 주춤하고 이인제 대세론이 다시 탄력을 받게 된다.

그러나 한편 홈그라운드였던 광주에서 기대 이하의 성적을 받았던 한화갑은 대전 경선 직후 사퇴한다. 리틀 DJ라는 별명을 가진 인물로, 김대중의 비서 출신으로 옆에서만 무려 40년을 같이 지내왔던 인물이다. 김대중과 더불어서 호남의 가장 큰 맹주였던 인물인데, 아무래도 호남의 심장 광주에서의 예상치 못한 패배가 본인에게 큰 충격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여섯 번째 지역 강원도는 대전/충남에서 다시 힘을 받은 이인제 대세론과 위기를 맞은 노풍이 맞붙는 두 번째 분수령이었다. 노무현 입장에서는 충청에 이어 강원 지역까지 이인제에게 질 경우, 호남, 영남 제외 '다른 지역에서의 확장성 부족'이라는 약점을 드러내게 되는 것이어서 승리가 절실한 상황이었다.

경선 직전에 노무현은 빨갱이라는 삐라가 살포되었는데, 노무현을 견제하기 위해서 이인제 측이 벌인 일이었다. 이에 노사모들은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면서 삐라를 떼어내는 작업을 하기도 했다. 이는 영화 노무현입니다에 나오는 내용이다. 이 시기 이인제는 노무현에 대한 공격 수단으로 색깔론을 사용했었다.

결과적으로 630:623, 단 7표 차이로 노무현이 1위를 차지한다. 누적 득표 1위는 여전히 이인제였으나 노무현이 따라붙는 형국이었기 때문에 주춤하던 노풍이 다시 불붙게 되었으며, 강원 경선 직후 노무현과 같은 영남권 후보인 김중권이 사퇴를 선언한다. 이인제 입장에서는 노무현과 같은 영남권 후보인 김중권이 레이스를 계속 해줘야 향후 영남 지역 경선에서 영남표가 분산이 될 텐데 김중권 사퇴로 인해 노무현이 영남표를 독식할 수 있게 된 것이기에 김중권의 사퇴가 결코 달갑지 않은 상황이었다. 김중권의 사퇴 직후 이인제 측은 경남 유세를 취소한 후 칩거에 들어갔는데, "노무현을 밀어주기 위한 플랜이 있는 것 아니냐?"라며 음모론을 제기하면서 탈당 뉘앙스를 간접적으로 내비친다.# 다만 이후 후보 본인은 탈당 의사를 묻는 질문에 경선 완주 의사를 밝혔다.

그리고 영남후보론을 기반으로 한 노무현이 선전을 하면서 노풍이 계속 탄력 받는 구도가 유지되었는데, 일곱 번째 지역인 경상남도에서 약 4배 차이로 이인제를 크게 앞서며 1위를 기록했고, 정동영의 홈그라운드였던 여덟 번째 지역 전라북도에서도 정동영을 꺾으며 1위를 차지한다. 또한 아홉 번째 지역 대구광역시에서 노무현은 이인제를 두 배 이상 앞서며 1위를 차지하면서 마침내 기존의 누적 득표 1위였던 이인제를 제치고 1위를 탈환하게 된다.

그리고 이번 경선의 하이라이트, 대망의 열 번째 지역 인천광역시 경선. 여기서 이인제 측은 충청도 출신들이 많이 사는 지역적 특성을 바탕으로 재역전을 노리며 노풍 차단에 나선다. 이 시기는 노무현을 향한 색깔론 공세가 절정을 이루던 시기였는데, 대표적으로 언론 국유화 논란과 장인 좌익 활동 논란이 있었다. 경선 토론 당시 이인제는 노무현에게 '급진과격파'라고 공격하기도 한다. 같은 당 내 후보에게 색깔론으로 공격하는 막장스러운 모습이었다.[6] 아이러니한 사실은 정치적으로 적대관계나 다름없던 김종필 전 총리[7]마저 직접 이인제가 노무현의 장인의 좌익 이력으로 색깔론을 이슈화하자 "그런 것으로 비방하는 것은 옳지 않다."라면서 이인제를 비판했다는 것이다. 애초에 '장인이 빨갱이'란 식으로 까면 김종필 본인도 예외가 아니다.

게다가 상대 진영 후보였던 이회창을 비롯한 조선일보, 동아일보가 노무현에 대한 색깔론 공세에 앞장선다. 이회창 입장에서 영남이 정치적 기반인 노무현보다[8] 본인과 정치적 기반이 같은 이인제가 본선에 올라오는 것이 본인에게 유리할 것으로 봤기에 노무현을 공격함으로써 이인제를 도와주려는 측면이 강했다.

노무현은 이런 논란들에 대해 정면 돌파를 택했고, 인천 경선에서 그 유명한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라는 명연설을 선보인다. 정면 돌파가 효과를 발휘했는지 노무현은 이인제를 누르고 1위를 차지하며 누적 득표 1위를 유지한다.
{{{#!folding 인천 지역 경선의 노무현 연설 후반부 [ 펼치기 · 접기 ]
앞으로 인천은 동북아시아의 물류 중심 기지가 될 것입니다. 비즈니스 중심 기지가 될 것입니다.
저는 이것을 미리 내다보고, 해양수산부 장관때부터 인천의 항만 계획을 전부 다시 뜯어고쳤습니다.
저는 이미 출발하고 있습니다.
제가 대통령이 되면, 어제 발표됐던 우리 정부의 동북아 물류 비즈니스 중심 계획을 확실하게 추진해 나가겠습니다.

음모론, 색깔론, 그리고 근거 없는 모략, 이제 중단해주십시오.
한나라당조선일보가 합창해서, 입을 맞추어서 저를 헐뜯는 것을 방어하기도 참 힘이 듭니다.

제 장인좌익활동을 하다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나, 해방되는 해실명을 하셔서 앞을 보지 못했기 때문에 무슨 일을 얼마나 했는지는 모르겠습니다.
제가 결혼하기 훨씬 전에 돌아가셨는데, 저는 이 사실을 알고 제 아내와 결혼했습니다.
그리고, 아이들 잘 키우고, 지금까지 서로 사랑하면서 잘 살고 있습니다.
뭐가 잘못됐습니까? 이런 아내를 제가 버려야 합니까?
그렇게 하면 대통령 자격이 있고, 이 아내를 그대로 사랑하면 대통령 자격이 없다는 것입니까?
여러분, 이 자리에서 여러분들께서 심판해 주십시오.
여러분이, 여러분이 그런 아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대통령 자격이 없다고 판단하신다면 저 대통령 후보 그만두겠습니다.
여러분이 하라고 하면 열심히 하겠습니다![9]

언론 국유화, 과거에도 생각해본 일 없고, 앞으로도 그럴 생각 없습니다.
어느 언론사를 대통령이 폐간할 수 없습니다. 그런 생각 해본 일이 없습니다.
대통령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할 수 없는 일이 있습니다.
국유화, 폐간, 어떤 대통령도 할 수 없는 일인데 감히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한다는 것입니까?
이치에 닿지 않는 말을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모략해선 안됩니다.
조선일보와 동아일보가 제게 언론사 소유지분 제한의 견해를 포기하라고 압력을 가해왔지만,
저는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굽히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모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저는 언론을 권력으로서 어떻게 흔들 생각도 없지만, 그러나, 언론에게 고개를 숙이고 비굴하게 굴복하는 정치인은 되지 않겠습니다.
끝까지 맞서 싸울 것입니다. 도와주십시오! 제게 힘을 주십시오!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민주당 경선에서 손을 떼십시오!}}}
그리고 열한 번째 지역인 경상북도에서 노무현은 이인제에게 두 배 차이로 1위를 차지했으나, 열두 번째 지역 충청북도에서 충청권 기반의 이인제가 노무현에게 두 배 차이의 승리를 거두면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하는 듯 했다. 하지만 열세 번째 지역 전라남도에서 노무현이 약 3배 차이로 1위를 차지하면서 승부에 쐐기를 박아버리자 이인제는 결국 사퇴하게 된다. 사실상 새천년민주당 경선의 승부가 결정된 순간이었다.

남은 두 후보 노무현, 정동영은 열넷·열다섯·열여섯 번째 지역인 부산광역시, 경기도, 서울특별시까지 모두 완주했다. 특히 정동영은 경기도에서 깜짝 1위를 하는 선전을 하기도 했다. 사실 이때의 1위는 이미 후보 결정된 김에 완주해 주는 후보한테 한번 1등 시켜주자는 분위기 덕분이기도 했었다. 사실상 패전이 확정된 상황에서도 완주하는 모습이 '원칙을 지킨다'는 모습이 호감을 불러왔고, 비방과 네거티브를 지양하고 정제된 톤으로 비전과 정견을 발표하는 모습도 높은 점수를 받았다. 가능성이 없다고 해서 1명 빼고 모두 다 사퇴해서 경선이 중간에 끝나버리면 흥행에도 악영향이고 모양새도 나빠지는데 1명이라도 남아서 끝까지 경선을 완료하는 모습에 박수를 보내준 사람이 많았다. 이때 얻은 호감이 후일 열린우리당 의장과 17대 대선에서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로 확정되는데 주춧돌이 되지만 시간이 흘러 자신이 대권후보가 되기 위해서 노무현과 거리가 멀어졌고 혼탁한 경선을 보여주었다.

물론 이전 경선에서 크게 벌어진 표차를 메우기에는 역부족이었고, 부산/서울 경선에서 노무현이 크게 앞섰기에 새천년민주당 경선은 노무현의 승리로 끝난다.

그리고, 2002년 4월 27일. 서울 경선 직후 노무현 후보가 공식적으로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로 확정되었다. 이 영상은 후보 수락 연설을 하던 자리에서 노래를 부르는 모습이다. 노래 제목은 김지하 시인이 작사한 김광석타는 목마름으로. 참고로 2002년의 새천년민주당 대선후보 확정은 대선으로부터 7개월 하고도 20여 일 앞선 시기로서 역대 대선의 주요 정당 대선 후보 선출 시점 중 가장 빠른 것이기도 하다.

새천년민주당 후보 경선에서 노무현에 밀려 후보가 되지 못한 이인제는 결국 탈당했다.

3.1.1. 결과

새천년민주당 제16대 대통령 후보자 선출
지역 1. 김중권 2. 노무현 3. 정동영 4. 김근태 5. 이인제 6. 한화갑 7. 유종근 합계
제주 55 (8.2%) 125 (18.6%) 110 (16.4%) 16 (2.4%) 172 (25.6%) 175 (26.1%) 18 (2.7%) 671
울산 281 (27.8%) 298 (29.4%) 65 (6.4%) 10 (1.0%) 222 (21.9%) 116 (11.5%) 20 (2.0%) 1012
합산 336 (20.0%) 423 (25.1%) 175 (10.4%) 26 (1.5%) 394 (23.4%) 291 (17.3%) 38 (2.3%) 1683
광주 148 (9.4%) 595 (37.9%) 54 (3.4%) 사퇴 491 (31.3%) 280 (17.9%) 사퇴 1568
합산 484 (15.2%) 1018 (31.9%) 229 (7.2%) 885 (27.8%) 571 (17.9%) 3187
대전 81 (6.1%) 219 (16.5%) 54 (4.1%) 894 (67.5%) 77 (5.8%) 1325
합산 565 (12.5%) 1237 (27.4%) 283 (6.3%) 1779 (39.4%) 648 (14.4%) 4512
충남 196 (10.1%) 277 (14.2%) 39 (2.0%) 1432 (73.7%) 사퇴 1944
합산 761 (13.1%) 1514 (26.1%) 322 (5.5%) 3211 (55.3%) 5808
강원 159 (10.7%) 630 (42.5%) 71 (4.8%) 623 (42.0%) 1483
합산 920 (12.6%) 2144 (29.4%) 393 (5.4%) 3834 (52.6%) 7291
경남 사퇴 1713 (72.2%) 191 (8.1%) 468 (19.7%) 2372
합산 3857 (44.1%) 584 (6.7%) 4302 (49.2%) 8743
전북 756 (34.3%) 738 (33.5%) 710 (32.2%) 2204
합산 4613 (42.1%) 1322 (12.1%) 5012 (45.8%) 10947
대구 1137 (62.3%) 181 (9.9%) 506 (27.7%) 1824
합산 5750 (45.0%) 1503 (11.8%) 5518 (43.2%) 12771
인천 1022 (51.9%) 131 (6.7%) 816 (41.4%) 1969
합산 6772 (45.9%) 1634 (11.1%) 6334 (43.0%) 14740
경북 1246 (59.4%) 183 (8.7%) 668 (31.9%) 2097
합산 8018 (47.6%) 1817 (10.8%) 7002 (41.6%) 16837
충북 387 (32.1%) 83 (6.9%) 734 (61.0%) 1204
합산 8405 (46.6%) 1900 (10.5%) 7736 (42.9%) 18041
전남 1297 (62.0%) 340 (16.3%) 454 (21.7%) 2091
합산 9702 (48.2%) 2240 (11.1%) 8190 (40.7%) 20132
부산 1328 (62.5%) 796 (37.5%) 사퇴 2124
합산 11030 (78.4%) 3036 (21.6%) 14066
경기 1191 (45.5%) 1426 (54.5%) 2617
합산 <colbgcolor=#ffcc00> 12221 (73.3%) 4462 (26.7%) 16683
서울 3924 (63.0%) 2305 (37.0%) 6229
합산 16145 (70.5%) 6767 (29.5%) 22912

3.2. 한나라당의 경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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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00A8,#0095DA>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한나라당 이부영 낙선
2 한나라당 이상희
3 한나라당 이회창 당선
4 한나라당 최병렬 낙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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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나라당에서도 새천년민주당과 같은 국민 참여 경선제도를 도입했다.

후보
한나라당 경선은 비교적 싱겁게 이회창 후보의 압승으로 끝난다. 전남-광주-전북에서 이부영에게 더블스코어로 이긴 것을 제외하면 모든 지역에서 최소 트리플 스코어로 1위를 차지했다. 이미 대선에 한번 도전해봤던 경험, 당 대표를 맡은 이후 당 개혁을 주도했던 경력, 그리고 "대쪽 판사, 대쪽 국무총리"의 이미지와 인지도가 워낙 굳건했기 때문에 이미 대선 후보로 사실상 내정되었던 분위기였고 다른 후보들이 도전하기에는 너무나 벅찼다.

사실, 이회창의 경쟁자가 될만한 대권 후보들도 정말로 본인들이 이회창을 제치고 대권 후보가 될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는 거의 하지 않았던 상황이었다. 그래서 그냥 전국적으로 이름이나 알리는 것이 목적이었고, 반쯤 구색맞추기 식으로 출마를 했다는 설이 지배적이다.
한편 1998년 재보궐선거로 정계에 입문한 박근혜 전 의원은 2월 28일 한나라당을 탈당하여 4월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고 독자행보 혹은 이인제-정몽준-김종필 등과의 연대를 모색했으나 # 결국 출마를 포기했다. 박근혜 전 의원은 한국미래연합이 2002년 6월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한나라당에 복당했다. #2002년 어록

3.3. 본선 진행 상황

파일:지지율 추이.jpg[10]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6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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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한나라당 이회창
2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당선
3 하나로국민연합 이한동
4 민주노동당 권영길
5 사회당 김영규
6 국태민안호국당 김길수
7 무소속 장세동 사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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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당에서 후보가 결정된 이후로 한동안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압도할 것으로 보였었지만 얼마 안 가 YS시계 사건, 김홍업 사건으로 지지율이 상당 부분 떨어져서 지지율 차이가 좁혀졌는데 5월 24일 조선일보 여론조사에서는 노무현 42.6, 이회창 37.4%까지 좁혀졌으며 같은 날 다른 여론조사에서는 노 후보 42.7%, 이 후보 42.2%까지 좁혀졌고, 6월 1일 여론조사에서는 MBC·한국갤럽 조사에서도 노 후보 39.1%, 이 후보 38.6%로 지지도로 격차는 0.5%포인트까지 좁혀졌다.#

설상가상으로 선거일이 2002년 월드컵 한국 대 포르투갈전 하루 앞인 6월 13일에 치러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투표율이 낮게 나오면서 야당이었던 한나라당이 압승하여[11] 노무현 후보에게 타격을 주었고, 지방선거 이후로 지지율이 역전되어 한 동안 이회창이 다시 앞서는 형국이 되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영남에서 광역단체장 한 석 이상 확보하지 못하면 당에 재신임을 묻는다고 했었다. 결과적으로는 영남에서 새천년민주당은 한 석도 얻지 못했지만 재신임을 받고 그대로 대선을 진행하였다. 재밌는 것은 이 재신임을 조선일보가 이미 몇 달 전 예언했다는 것.# 훗날 문재인20대 총선 호남 지역에서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의 대결을 놓고 비슷한 약속을 한 적이 있고, 민주당이 패하긴 했지만 대선에 출마해서 승리하였다.

한편, 정몽준 후보가 2002 월드컵 유치의 공로를 인정받아 대선 주자로 떠오르면서 대선 구도는 이회창 후보가 가장 앞서나가는 형태가 되었고 노무현 후보는 3위로 쳐졌다. 그리고 8.8 재보선에서도 새천년민주당이 패배하면서 이회창이 승기를 굳히는가 싶었지만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의 병역기피 논란이 또 불거졌다. 이미 15대 대선에서 한 번 등장했던 문제였지만 징병 국가인 대한민국의 특성상 그 여파를 무시할 수 없었다. 선거 이후 '아들 둘 중 하나만 군대에 갔어도 대통령은 이회창이었을 것이다.'라는 우스갯소리가 돌았다. 그래서 대선 이후 한나라당의 최병렬 의원은 인터뷰에서 "병풍으로 인해서 부재자 투표, 즉 현역 병사들의 표심이 노무현 후보로 쏠렸다"라고 인터뷰를 하기도 했다.#

의혹을 제기한 김대업[12] 씨의 과거 이력과 수사관 자격 사칭[13] 혐의를 가지고 방어를 시도했지만 이회창 후보의 청렴한 이미지는 이미 돌이킬 수 없이 오염되었다.[14] 게다가 인터넷을 기반으로 한 노사모[15] 등의 영향력이 새롭게 떠오르면서 다시 지지율이 오르기 시작했다.

3.4.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파일:상세 내용 아이콘.svg   자세한 내용은 노무현-정몽준 단일화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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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로써 대선은 1강(이회창) 2중(노무현-정몽준) 구도가 되었지만 여론조사에서 정몽준-노무현 양자 단일화 시에는 이회창을 꺾는다는 결과가 나오면서 단일화 여론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에 당시 민주당 주류의 김민석이 단일화를 성사시키고 당으로 돌아오겠다며 정몽준 캠프를 지원하러 갔고 당내 상당수의 세력은 후단협을 결성하면서 여권의 분열을 초래하고 단일화를 압박하기에 이른다.

사실 겉으로 보기에는 1강 2중으로 정몽준과 노무현이 팽팽한 것처럼 표현되었으나 정몽준 후보의 지지율이 대세 상승 중이었기 때문에 후단협 세력은 사실상 당내 후보를 비토하는 정몽준 지지세력이나 다름없었고 노무현의 당내 입지가 매우 위태로워졌다. 또한 단일화 여론조사에서도 지속적으로 정몽준이 노무현에 근소우위를 보임에 따라 상황은 여러모로 정몽준에게 유리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당내의 차가운 외면이 대중들에게는 절차적으로 정당하게 선출된 공식 대선후보를 부당하게 압박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노무현의 세력이 결집하고[16] 지지율도 반등하게 된다. 단일화 협상이 진통 끝에 포장마차에서 정몽준과 노무현이 소주 러브샷을 나누는 상징적인 제스쳐 이후에 3개 기관에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에 따라 단일화를 합의하는 것으로 마무리 되었고 공식 후보등록일에 임박하여 후보 단일화를 위한 여론조사가 진행이 된다. 단일화 여론조사 중 일정 수준의 이회창 지지율이 나오지 않은 것은 한나라당 지지자의 역선택이라고 판단하여 배제하기로 한 사항까지 합의가 되었고, 진행된 여론조사에서 노무현이 정몽준을 앞서는 것으로 결론이 나면서 노무현이 단일후보가 된다. 결국 정몽준 측은 고심 끝에 결과를 승복하기로 하였으며 노무현의 서울 유세현장에 동행한다.

3.5. 폭풍전야, 갑작스러운 단일화 파기


하지만 선거 전날인 2002년 12월 18일 명동 유세가 발단이 되어 정몽준은 노무현 지지철회 및 단일화 파기를 발표한다. 당시에는 정몽준 측이 지지철회 사유를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아 논란이 되었다. 가장 유력한 설은 정몽준 측이 내각 구성에 일정한 지분을 요구했는데 노 캠프 측에서 확답이 없어 불만이 쌓이던 중 선거운동 마지막날 명동 유세에서 서갑원의 제안으로 추미애, 정동영 등이 유세차량 단상에 올랐고 노무현이 이들을 차기, 차차기 대권주자로 소개한데다가 정몽준을 향해 재벌개혁에 동참할 뜻이 있냐고 물으면서 정몽준 측의 심사가 완전히 뒤틀려버렸다는 것이다.

정몽준 측에서는 유세차량 내에서 양자만이 유세하기로 한 단일화 합의사항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런데 민주당 측이 선거운동 마지막 날이기에 안일하게 생각해서 일을 벌였고 정몽준은 유세 후 이어진 회식에서 측근들과 대화를 나누며 결심을 굳히고 쾌속으로 지지철회를 발표하게 된다. 대선 당일 조선일보 조간은 鄭夢準, 노무현을 버렸다로 신문 1면을 새까맣게 내보냈다.# 후일 자신의 자서전인 '운명이다'에서 노무현은 자신의 속도 까맣게 타들어갔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노사모가 거리의 조선일보를 줍고 있다는 사실을 미쳐 알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비록, 선거 전날 정몽준이 노무현 후보에 대한 지지를 철회했지만 결과적으로 노무현이 대통령에 당선된다. 오전에는 한나라당 지지층이 우세했으나 오후의 인터넷 및 핸드폰 문자 투표독려에 따라 젊은 층의 물량공세로 전세를 뒤집었다는 이야기는 당시 선거관련자에게 전설로 회자되기도 한다. 영국의 언론 가디언은 이 점에 주목, 당선 소식의 제목을 "World's first internet president logs on"(세계 최초의 인터넷 대통령이 로그인했다.)으로 뽑았다. 노 대통령은 당시 출구조사에서 승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축하를 받은 직후 "확정되면 깨워주게"하고는 한숨 푹 잤다는 패기를 보였다.

사실 대선 하루 전 정몽준의 노무현 지지 철회가 어떤 영향을 불러왔는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다. 우선 민주당 지지자들의 결집과 무당파층의 표를 불러와서 노무현 후보가 승리한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는 의견이 있다. 왜냐하면 지지 철회 소식을 들은 노무현 후보가 정몽준의 집앞으로 찾아가 문전박대와도 같은 상황을 당하는 장면이 대선 전날 방송 전파를 탔기 때문이다. 당시 이 장면에 울컥해하거나 안쓰러워서 무당파층도 노무현 찍으러 투표장에 갔단 사람들도 있었다.[17]

이 한 번의 판단미스로 인해 정몽준은 배신자로 찍혀버리고, 자신의 정치적 이미지는 와장창 박살난다. '왜 배신했는가'에 대해서도 종로 유세에서 노무현 후보가 정동영 의원을 밀어주는 듯한 발언과 모양새에 불편함을 느끼고 삐쳐서라고 밝혀서 소인배 이미지까지 추가해버렸다. 그리고 훗날의 버스비 70원 발언으로 서민의 아픔을 알리 없는 상속재벌로 인식이 박혀버리며 이미지를 완전히 날아가버렸다.

지지 철회가 노무현 후보 쪽에 악영향을 주기는 했지만 판세를 뒤집을 정도는 아니었다는 의견도 있다. 실제로 선거막판(공표금지기간)[18] 여론조사를 보면 이 기간 내내 노무현 후보가 이 후보를 적게는 5%, 많게는 10% 가까이 앞서고 있었고, 당내에서는 과반 득표로 당선되리라는 예상도 나왔지만, 실제 선거결과는 2.3% 차이에 불과했다. 즉 정몽준을 지지했던 중도 표가 지지 철회로 이회창으로 옮겨가 표차가 줄긴 했지만 그것이 대세를 바꿀 정도는 되지는 못했다.[19]

이회창 본인은 회고록에서 두 이야기를 모두 받아들여 자신의 패배요인으로 단일화 파기 시간이 너무 늦었고 한나라당 진영이 단일화 파기로 승리를 확신해 안이해졌으며 단일화 파기로 노무현에 대한 동정론이 일었다고 말했다.

이 선거에서 지역구도는 대체로 완화된 대신에 세대구도가 강화되었다.[20] 또한 이 선거에서는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가 약 100만표(3.9%)를 득표하면서 3위에 오르는 성과를 거두었는데, 이는 조봉암 이후 대한민국의 진보정당의 대선 후보가 얻은 가장 높은 득표수였다.[21] 당시 3자 구도로 이루어진 대선후보 TV토론에서 권영길 후보는 그 유명한 "살림살이는 좀 나아지셨습니까?"라는 유행어를 남기면서 인상적인 활약을 펼친 것이다. 이러한 대선에서의 성과를 바탕으로 민주노동당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13.2%의 정당득표율로 총 10석을 획득하면서 오랜 원내진출의 숙원을 이루게 된다.

3.6. 개표 진행 상황

노무현 후보 대통령 당선 뉴스
개표 과정이 하나의 드라마라고 불릴 정도로 뜨거웠다. 투표 종료 직후에 발표된 방송 3사 출구조사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오차범위 내에서(KBS-미디어리서치 노무현 49.1% 이회창 46.8%, MBC-코리아 리서치 노무현 48.4%, 이회창 46.9% SBS-TN소프레스 노무현 48.2% 이회창 46.7%) 앞선 걸로 나왔다. KBS 출구조사에 따르면, 오전까지는 이회창 후보가 1 ~ 2%p 차이로 근소하게 우세했지만, 오후 1시 이후부터는 전세가 역전되어 노무현 후보가 계속 1 ~ 2%p 차이로 근소하게 우세를 점했다.

하지만, 보수세가 강한 부산광역시 동래구를 시작으로 개표가 시작되자,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후보를 여유있게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개표 30%가 될 때까지 한나라당 측은 환호, 민주당 측은 긴장의 연속이었다. 예측과 달리 한나라당의 이회창 후보가 50%를 넘는 우세를 계속 보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울특별시, 인천광역시, 경기도수도권 지역의 개표가 시작[22]된 개표 32% 쯤에 점점 상황의 반전이 일어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개표 34.5% 쯤에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앞섰다.

그리고 그 이후 투표함 하나를 깔 때마다 1위가 뒤바뀌는 숨막히는 접전이 펼쳐졌고. 그리고 수도권 지역의 개표가 더 빨라진 개표 40%부터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앞서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표차는 10만표 안팎으로 크지 않았는데, 새천년민주당에서는 빨리 표차가 더 벌어지기를 바라고 한나라당에서는 빨리 재역전이 이루어지길 바라며 피말리는 접전을 벌이고 있었다. 그러던 중 21시 35분, 개표가 57% 진행된 시점에서 두 후보 간 표차가 18만 표를 넘어서자 노무현 후보의 당선 유력이 선언되었다.

노무현 후보가 강세를 보였던 수도권 지역 개표율이 중반에 이르렀을 때인 22시에 전국 개표율 68% 시점에서 두 후보 간 표차가 250,000표에 이르자 노무현 후보의 당선 확실이 선언되었다. 그리고 수도권을 뺀 나머지 지역의 개표가 마무리가 되기 시작한 개표 70%부터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여유있게 따돌리고 앞서나가면서 당선되었다.[23] 실제로, 노무현 후보와 이회창 후보의 표차가 수도권에서만 720,000표였다. 최종 개표 결과 노무현 후보가 득표율 2.33%차, 득표수 570,980표차로 이회창 후보를 꺾고 16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4. 투표율

성별 투표율
남성 71.3% 여성 70.3%
종합 연령별
20대 전반 57.9% 20대 후반 55.2%
30대 전반 64.3% 30대 후반 70.8%
40대 76.3% 50대 83.7%
60대 이상 78.7%
남성 연령별
20대 전반 63.1% 20대 후반 51.9%
30대 전반 61.5% 30대 후반 69.6%
40대 76.5% 50대 84.7%
60대 이상 85.6%
여성 연령별
20대 전반 52.3% 20대 후반 58.6%
30대 전반 67.1% 30대 후반 72.0%
40대 76.2% 50대 82.7%
60대 이상 73.9%
성별 지역별 연령대를 종합해서 보면 광주광역시 50대 남성이 89.0%로 가장 투표율이 높고, 충청남도 20대 전반 여성이 34.7%로 가장 투표율이 낮게 나타났다.

5. 출구조사

MBC-코리아리서치 출구조사 결과 (단위: %)
출구조사 발표 영상
연령별 한나라당
이회창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전체 46.9% 48.4%
연령별 (단위: %)
20대 34.9% 59.0%
30대 34.2% 59.3%
40대 47.9% 48.1%
50대 57.9% 40.1%
60대 이상 63.5% 34.9%
성별 (단위: %)
남성 45.9% 49.2%
여성 48.4% 48.3%
SBS-TNS 출구조사 결과 (단위: %)
출구조사 발표 영상
한나라당
이회창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46.7% 48.2%
KBS-미디어리서치 출구조사 결과 (단위: %)
연령별 한나라당
이회창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전체 46.8% 49.1%
20대 31.7% 62.1%
30대 33.9% 59.3%
40대 47.4% 48.7%
50대 이상 59.8% 39.8%
KBS-미디어리서치 출구조사 시간대별 득표율 추이 (단위: %)
시간대별 6~9시 9~11시 11~13시 13시~15시 15시~16시 16~17시
한나라당
이회창
49.3% 49.4% 48.7% 47.6% 47.1% 46.8%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47.5% 47.4% 47.7% 48.6% 48.9% 49.1%
한국갤럽 투표자 전화조사 결과 (단위: %)
연령별 한나라당
이회창
새천년민주당
노무현
20대 28.5% 60.6%
30대 33.5% 60.5%
40대 43.9% 46.6%
50대 이상 63.0% 28.4%
이 때는 대한민국이 고령사회가 되기 이전이였고[24] 1980년대 중반 이후에 출생한 저출산 세대들이 유권자가 되기 이전이기 때문에 당시엔 20대30대 유권자가 절반에 가까웠다.[25] 이 선거 이후, 지역구도가 옅어지고 세대구도가 짙어지는 현상이 지속적으로 나타나게 된다. 한편 이 선거에서 생애 처음으로 대선 투표권을 행사하거나 사회 초년생인 1970년대생들이 노무현 후보에게 (출구조사 기준) 약 60% 가량의 몰표를 행사했다. 이들 세대는 2020년대가 된 현재도 더불어민주당 핵심 지지층으로 남아있다. 반면에 노무현 후보가 접전 우세였던 40대와 이회창 후보가 우위였던 50대 이상은 더 보수화 되면서 보수 정당 핵심 지지 세대층으로 남아 제18대 대통령 선거에서 박근혜를 당선시켰고,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윤석열을 당선시켰다.

6. 개표 결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기호 이름 득표수 순위
정당 득표율 비고
<colcolor=#fff> 1 이회창(李會昌) 11,443,297 2위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46.58% 낙선
2 노무현(盧武鉉)
12,014,277
1위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48.91% 당선
3 이한동(李漢東) 74,027 4위


파일:하나로국민연합 흰색 글씨.svg
0.30% 낙선
4 권영길(權永吉) 957,148 3위


[[민주노동당|
파일:민주노동당 흰색 로고타입.svg
]]
3.89% 낙선
5 김영규(金榮圭) 22,063 6위


파일:사회당 1998년 글자.svg
0.08% 낙선
6 김길수(金吉水) 51,104 5위


[[국태민안호국당|
파일:호국당_투명.png
]]
0.20% 낙선
7 장세동(張世東) 사퇴


[[무소속(정치)|
무소속
]]
선거인 수 34,991,529 투표율
70.83%
투표 수 24,784,963
무효표 수 223,047

6.1. 지역별 개표 결과

대한민국 제16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개표 결과
파일:제16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투표 결과 2.png
<colbgcolor=#eeeeee,#26282c> 정당
파일:한나라당 흰색 로고타입(1997~2004).svg


[[새천년민주당|
파일:새천년민주당 흰색 로고타입.svg
]]
후보 이회창 노무현
전국 11,443,297
(46.58%)
12,014,277
(48.91%)
서울특별시 2,447,376
(44.95%)
2,792,957
(51.30%)
부산광역시 1,314,274
(66.74%)
587,946
(29.85%)
대구광역시 1,002,164
(77.75%)
240,745
(18.67%)
인천광역시 547,205
(44.56%)
611,766
(49.82%)
광주광역시 26,869
(3.57%)
715,182
(95.17%)
대전광역시 266,760
(39.82%)
369,046
(55.09%)
울산광역시 267,737
(52.87%)
178,584
(35.27%)
경기도 2,120,191
(44.18%)
2,430,193
(50.65%)
강원도 400,405
(52.48%)
316,722
(41.51%)
충청북도 311,044
(42.89%)
365,623
(50.41%)
충청남도 375,110
(41.22%)
474,531
(52.15%)
전라북도 65,334
(6.19%)
966,053
(91.58%)
전라남도 53,074
(4.62%)
1,070,506
(93.38%)
경상북도 1,056,446
(73.46%)
311,358
(21.65%)
경상남도 1,083,564
(67.52%)
434,642
(27.08%)
제주도 105,744
(39.93%)
148,423
(56.05%)
파일:제16대 대통령 선거 지역별 투표 결과 1.png
대체적으로는 수도권, 충청권에서의 승리로 영호남의 인구 차이로 인한 보수 정당 후보의 우위를 꺾었다는 점에서 제15대 대통령 선거의 결과와 거의 유사했다.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김대중 후보가 DJP연합을 통해 충청표를 얻었다면 제16대 대통령 선거에서 노무현 후보는 수도 이전 공약을 통해 충청표를 얻을 수 있었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영남권과 강원도에서 승리했다.

서울특별시 25개 자치구 가운데 노무현 후보는 23개 자치구에서 승리했지만 반면 이회창 후보는 부동산 정책이 가장 예민하고 부유층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 서초구, 강남구에서만 승리했다.[26] 반대로 용산구(0.07%, 88표차), 송파구(0.29%, 1,005표차)에서는 각각 0.5%차 미만의 초접전 끝에 노무현 후보가 두 곳을 획득하면서 서울특별시에서 5% 이상 격차로 승리할 수 있었다.[27]

제15대 대통령 선거와 차이점이 있었다면 바로 부울경 지역의 결과다. 노무현의 고향인데다가 지역 감정을 타파하기 위해 계속 낙선하면서도 부산광역시에 출마했던 노력의 영향으로 이전에는 10% 대의 득표율에 그쳤던 부울경에서 30% 정도의 득표율을 얻는데 성공했다. 또한 그간 30%도 넘기기 힘들던 강원도에서 40%를 넘기면서 이회창의 기반을 상당히 뺏어왔다.[28]

6.2. 격전지역

역전에 역전을 거듭한 드라마틱한 선거답게 초박빙 접전 지역이 매우 많았다. 불과 수십 표 차로 순위가 갈린 곳이 3개나 될 정도다. 격전지역 중 서울특별시 용산구, 인천광역시 동구와 남구, 강원도 평창군 정도를 제외하면 경기도, 강원도의 최전방 지역에서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앞섰고[29], 그리고 충청권에서도 가장 보수적인 펀에 속하는 농촌지역에서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 앞서면서 격전 지역이 되었다. 최전방 지역의 경우 2002년 당시 북한과의 화해 분위기로 민주당계 정당에 대한 거부감이 완화되면서 노무현 후보가 근소한 표차로나마 승리할 수 있었으며 충청권의 경우 수도 이전 공약의 영향으로 노무현 후보가 압승했는데 전통적인 보수강세 지역에서도 접전 끝에 신승했다는 분석이다. 전국 시, 군, 구 단위에서 1, 2위 후보 간 표 차가 1,000표 차 미만인 곳을 열거하면 다음과 같이 15곳이다.

6.3. 노무현 후보의 부재자투표 초압승

군인과 대학생, 선관위 공무원들이 주로 투표한 부재자투표에서 노무현 후보는 64.1%를 득표하여 30.6%를 득표한 이회창 후보에게 더블스코어의 초압승을 거두었다. 부재자 투표결과만 보면 TK를 제외한 전국에서 승리했고 기초자치단체 결과로 보면 이회창 후보 부친의 고향인 충남 예산과 경남 일부 지역[32]을 제외하면 TK 지역이 아닌 기초자치단체 부재자투표에서 전승했다. 경북 기초자치단체에서도 포항시남구, 영덕, 영양, 울진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부재자투표에서 승리했다.[33]

7. 한나라당의 대선 불복과 재검표

선거 직후 한 온라인 게시판에 국정원에서 17년 동안 근무한 중견 간부라고 자신을 밝힌 이가 개표 조작이 가능하다는 내용의 양심선언을 빙자한 대국민 사기극을 벌였다. 이는 사칭이었고, 실제로는 특수학교 교사로 밝혀졌으며 나중에 실형을 선고 받았다. 노무현의 표로 분리된 표 사이로 이회창의 표가 들어갔다는 것, 전자 개표기의 오작동, 개표 부정의 가능성 등의 내용이었다.

그후 이회창 후보의 팬클럽인 창사랑과 당원 200여명은 캠프 해단식을 점거하는 등의 항의시위 및 항의전화를 지속하였고, 한나라당이 이에 동조하여 결국 서청원 전 한나라당 대표는 12월 24일 의원·지구당위원장 연석회의를 통해 '전자 개표 조작설'의 검증 작업을 하기로 결정, 당선무효소송을 내었다. 이에 2003년 1월 27일 전국 244개 개표소 가운데 40%인 80여 곳에서 대법원 관리 아래 헌정 사상 초유의 대규모 재검표(11,049,311표)가 이루어졌다. 이 재검표에는 5,000만원의 비용과 8,000명의 인원이 동원되었다. 재검표 결과, 이회창 후보의 표는 88표 늘었고, 노무현 후보의 표는 816표가 줄었다.

결과적으로 격차인 286,000표에 훨씬 미달하는 0.00008%의 차이로 선거 당락에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재검표 결과가 이렇게 나오면서 한나라당은 소를 취하했지만 톡톡히 망신을 사며 대국민 사과를 해야 했고, 서청원 대표도 대선 패배에 대한 책임을 지고 당대표직을 사퇴했다.

하지만 부정선거 선동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 내내 사라지지 않았고, 16대 대선이 부정 선거였다는 내용의 흑색선전이 주요 일간지 전면 광고로 잊을만하면 한번씩 등장하고는 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10년 뒤인 18대 대선에서는 이렇게 선거 불복으로 피해를 본 새천년민주당의 후신인 민주통합당의 일부 지지 세력들[34]이 선거 직후 부정 선거 의혹을 내세우며 수(手)개표를 주장했다는 것이다. 더 플랜 참고. 다만 문재인 후보나 당 자체(후신인 민주당(2013년) 포함)는 결과에 승복했다. 한편 한나라당의 후신인 새누리당은 2013년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에 대해 야당 측에서 언급만 하면 바로 득달같이 대선불복이냐며 NLL 대화록 논란을 꺼내버렸다.

그러나 NLL 대화록 논란은 결국 무혐의로 끝나고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 문재인이 당선된 뒤 윤석열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 주도로 재수사가 이뤄져 당시 인사들이 모두 형사 처벌되었다는것이 아이러니다. 그리고 당시 이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을 수사했던 윤석열서울중앙지방검찰청 검사장검찰총장에 올랐고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당선되어 대통령까지 올랐다.

2016년에 있던 20대 총선에서는 더불어민주당 지지자들이 트위터에서 부정선거 음모론을 제기하기도 했는데, 전술한 일들에 비하면 음모론자들의 활동이 극히 미미했던지라 아무런 주목도 받지 못했다. 이후 역사를 반복하듯 18년 뒤인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의 후신 미래통합당의 낙선인[35]들이 부정개표 의혹을 제기하고 있다. 특히 선거 당시 당대표였던 황교안 등 당 지도부가 여기에 부화뇌동하면서 보수 진영이 몰락의 틈으로 빠지는데 일조했다.

결국 김종인 전 비대위원장을 거쳐 2021년 이준석 전 대표 체제가 새롭게 출범한 이후에야 제대로 결과에 승복했다. 이때 이준석 전 대표는 아예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부정선거 음모론에 토론까지 나서며 진화에 나섰다.[36] 결국 부정선거 음모론으로부터 거리를 두는데 성공한 이후에야 보수 진영은 다시 전국 단위 선거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8. 평가

21세기에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였던만큼 그 상징성과 의미도 남달랐다. 정확한 평가는 구 시대의 정치문화와 새로운 정치문화가 함께 등장한 선거였다고 봐야 할 것이다. 선거 과정에서 인터넷의 등장, 희망저금통, 삼김의 영향력에서 어느 정도 벗어난 후보 등 선진화된 정치풍토를 보여주긴 했지만 대기업으로부터 수수받은 불법 대선정치 자금과 여전히 삼김의 계파가 쥐고 있던 주류권 등 구 시대적인 면을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는 모습도 보였다.

8.1. 인터넷이 처음 등장한 선거

인터넷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이전 정권인 국민의 정부에서 국민PC 사업으로 컴퓨터 보급을 가속화시켰고, 케이블 인터넷ADSL 상용화로 초고속 인터넷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리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가지게 되었다. 개인 홈페이지 및 인터넷 커뮤니티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노사모는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든 뒤 그곳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20~30대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넓혀나갔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통한 투표 독려는 IT기기에 익숙한 젊은 층, 즉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이대의 유권자들이 결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노무현이 당선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당시 이회창 후보 측에서도 뒤늦게 인터넷 마켓팅을 시도했으나, 노사모에 비해 지나치게 어설펐고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켰다.[37][38]

천리안, 나우누리, 하이텔PC통신의 경우 이전 선거보다 영향력이 많이 쇠퇴했지만 그래도 포털로 어느 정도 영향력을 발휘했다. 특히 나우누리의 경우 노무현 지지 성향 네티즌들이 결집하여 인터넷상의 선거 여론을 이끌었을 정도였다.[39][40]

8.2. 신문, 전화의 영항력

인터넷의 등장에도 기존의 신문, 전화 등 통적인 선거 방식의 영향력은 여전했다. 당시만 해도 지금의 스마트폰 시대처럼 정보가 실시간으로 퍼지지 않다보니, 대선판의 급박한 소식이나 상황변화는 모두 신문 호외를 통해서 뿌려졌다. 새천년민주당 경선 당시 이인제 측에서 들고 나온 노무현 장인의 좌익 경력에 대한 보도 역시 호외로 뿌려졌는데, 경선 새벽 노사모 회원들이 이걸 직접 다 줍고 다녔다는 인터뷰가 있었다. 또한 위에도 언급되었지만 투표 당일 조선일보가 '정몽준, 노무현 버렸다!' 라는 자극적인 제목의 호외를 길거리에 막 뿌리기도 했다. 이 호외 역시 노사모 회원들이 동이 트기 전에 전부 다 주웠다고 한다. 이 외에도 대선 판에 대한 여러 정보들이 신문을 통해 뿌려졌고, 대선 후보들의 광고 역시 신문에 실렸다.

오프라인에서의 선거 캠페인 도구도 전화 역시 이용되었다. 특히 정몽준이 노무현에 대한 지지를 철회한 다음 날 투표 당일, 노사모 회원들은 집전화와 휴대전화를 미친듯이 돌려 투표 독려 전화/문자를 보냈고, 이것이 젊은 층의 투표 참여를 독려하여 결국 노무현이 당선되는 결과를 낳았다. 그 날 하루 통화만 2000만통이 걸렸는데, KT 창립 이래 최대 통화수였다고 한다. #[41]

8.3. 대기업이 선거자금에 관여한 마지막 선거

16대 대선은 한국의 재벌 및 대기업이 선거자금에 관여한 마지막 선거였다. 이전부터 대기업의 불법 정치자금은 암암리에 문제가 되어왔지만, 이것이 크게 공론화된 것이 바로 16대 대선이었다. 소위 차떼기 사건이라 불리는 논란이 바로 이것으로, 차떼기 사건 이후 대기업이 정치자금을 주는 것이 법적으로 완전 금지되었으니 이 사건이 한국 정치의 풍토를 바꾼 것이다.

불법 대선자금 문제는 대선 당시에는 큰 이슈가 되지 못하다가, 대선 이듬 해인 2003년 하반기부터 수사가 시작되었다. 대검찰청 중앙수사부에서 약 7개월에 걸쳐 수사한 결과 한나라당SK그룹, LG그룹, 삼성그룹 등 대기업들로부터 약 823억의 불법 정치자금을 수수한 사실이 인정되었다. 특히 이 과정에서 소위 차떼기라고 하는, 현대 마이티 2.5톤 차량에 현금을 꽉꽉 채워서 트럭째로 정치자금을 운반하는 희대의 방법을 사용해 더욱 화제와 조롱거리가 되었다.[42] 과거 금융실명제 시행 이전에는 은행을 통해 차명계좌를 만들어 정치자금을 건내받았으나, 금융실명제 실행 이후 은행 계좌를 통해 정치자금 수수는 제약이 걸리자 이런 방식을 택한 것이다. 결국 선거 캠프의 총책들이 구속 수감되고, 한나라당은 여의도 당사를 팔고 한동안 천막당사에서 생활해야 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과 새천년민주당 캠프도 불법 대선자금 문제에서 자유롭지 않았다. 2004년 3월 수사를 통해 공식적으로 밝혀진 불법 대선자금 규모는 114억으로, 한나라당에 비하면 훨씬 못 미치지만 그래도 엄연히 불법 대선자금을 수수한만큼 안희정 등 캠프 관계자들은 형사처벌을 받았다. 당시 노무현은 기자회견에서 "한나라당 캠프가 수수한 불법 대선자금 총액보다 1/10 이상이 넘어가면 재신임을 묻겠다" 라고 공언했지만, 결론적으로 1/10이 넘고 말았다. 다만 한나라당 입장에서는 남을 나무랄 상황이 아니었기 때문에, 노무현 캠프의 대선자금 수수는 선거 캠프 관계자들이 형사처벌을 받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불법대선자금 문제가 크게 공론화되자, 공직선거법 개정으로 대기업이 공식 후원금을 포함한 정당의 선거자금에 일절 후원할 수 없도록 바뀌었다. 또한 선거자금의 운반책 역할로 지구당이 원인으로 지목되자, 결국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앞두고 지구당 제도가 폐지되었다. 현재는 당원협의회를 두어 지구당을 대체하고 있지만, 지구당과 달리 사무실은 둘 수 없다.

차떼기 사건 이후 이러한 대기업의 불법정치자금 운반을 방지하기 위한 여러 법령이 제정된 결과, 제17대 대통령 선거부터는 불법정치자금에 관한 이슈는 거의 사라졌다.

9. 병풍 논란

지난 대선과 마찬가지로 이회창 후보의 두 아들 군 면제 의혹 문제가 도마에 올랐다. 이회창 측에선 체중 미달로 정당하게 면제받은 것이라 주장했는데, 이때 김대업이라는 전직 부사관이 튀어나와 체중이 조작된 허위 진단서를 받아 병역 면제가 됐을 수 있다고 주장하며 사건이 확대되었다. 수사 결과, 검찰 측은 대선 두 달 전 진단서 조작 의혹이 사실무근이라고 결론지었다.

그러나 체중 고의 감량을 통한 면제 의혹은 여전히 남아 이회창 후보에게 찝찝한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몇몇 이회창 지지자들은 그 뒤로도 오랫동안 김대업 때문에 이회창이 대선에서 패배했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나라당은 대선 후 정식으로 재판을 청구하였고, 2005년 5월 대법원은 김대업과 오마이뉴스 대표 오연호 등이 지급해야 할 배상액을 확정함으로써 이 사건은 사실무근으로 밝혀졌다. 2002가합40574 참조. 자세한 내용은 병풍 사건에서 볼 수 있다.

10. 특이사항

  • 인터넷이 선거 결과에 큰 영향을 준 첫 번째 사례이기도 하다. 이전 정권인 국민의 정부에서 국민PC 사업으로 컴퓨터 보급을 가속화시켰고, 케이블 인터넷ADSL 상용화로 초고속 인터넷이 전국 방방곡곡에 깔리면서 세계에서 가장 앞선 수준의 인터넷 인프라를 가지게 되었다. 개인 홈페이지인터넷 커뮤니티 열풍이 불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노무현 후보를 지지했던 노사모는 인터넷에 홈페이지를 만든 뒤 그곳을 기반으로 활동하면서 20~30대를 중심으로 지지층을 넓혀나갔고, 인터넷 커뮤니티와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통한 투표 독려는 IT기기에 익숙한 젊은 층, 즉 노무현을 지지하는 사람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나이대의 유권자들이 결집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은 결국 노무현이 당선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그리고 2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들이 대한민국의 각종 IT기기 사이트[43]의 주요 사용층으로 이들 사이트들은 지속적으로 강력한 친민주당 성향을 띄고 있다. 당시 이회창 후보 측에서도 뒤늦게 인터넷 이미지 메이킹을 시도했으나, 노사모에 비해 지나치게 어설펐고, 오히려 역효과만 일으켰다.[44]
  • 광고전에서도 마찬가지였다. 노무현은 그 유명한 상록수기타로 연주하는 광고로 큰 주목을 받았다. 반면 이회창의 경우 버스 기사 광고로 대표되는 네거티브 광고#[45]와, 정권을 잃은 것을 "흙바닥에서 굴렀다"식으로 표현하는 광고 등 효율적이지 못한 선거전략으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회창 캠프는 5년 전 선거에 이어 이번에도 홍보전에 실패한 셈이다. # 관훈클럽 기사
  • 심지어 이 선거는 대통령 선거를 네 번이나 더 치른 후인 현재에도 인터넷 상에서 계속 회자되고 있다. 노무현이 정치인 합성의 대표 주자(?)로 자리매김하면서 당시의 자료가 아직까지 발굴되거나 언급되고 있으며, 상대 후보인 이회창 또한 한국 인터넷 최대의 미스터리로 남은 흙오이 사건을 탄생시켰기 때문이다.
  • 3당 합당 이후 보수화된 부울경에서 노무현은 민주당 간판으로 30% 내외의 득표율을 기록하는 선전을 했다. 직전 대선 때와 비교하면 울산 15% → 35%[49], 부산 15% → 30%, 경남 11% → 27%로 2배 이상 증가하였는데 전국적인 표차를 감안하면 부울경에서의 선전이 당락에 꽤 영향을 미친 셈. 당시 부울경에서 민주당 간판으로는 선거비용 보전선인 15% 얻는 것조차 매우 힘들었다. 그런데 다른 선거도 아니고 대통령 선거에서 경남 출신 노무현이 민주당 간판을 달고 나오면서 (비록 젊은 층이 대부분이긴 했지만) 지지세를 확보하는데 성공한 것.[50] 그리고 또 다른 민주당 약세 지역인 강원도에서는 무려 40%의 득표율로 선전하면서 지역감정 타파에 어느 정도 공헌한 것으로 평가된다.[51] 참고로 이 때부터 17대 대선을 제외하곤 부울경대경권의 득표양상이 달라지기 시작했다.[52] 대한민국 국회의원 선거에서나 대한민국 대통령 선거에서나 대한민국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나 동일하게 말이다. 이런 점에서 보면 노무현은 한국 정치사에서 유의미한 상당수 득표의 향방을 결정한 정치인이다.
    • 특히 지역감정이 극심했던 제7대 대통령 선거 이후 치른 직선제 선거에서 영남권이 지지하는 보수정당 vs 호남권이 지지하는 민주당계 정당의 구도 속에서 충청권과 수도권에서 민주당계 정당이 승리를 차지해도 격차가 크지 않았기에, 인구가 많은 영남권의 몰표로 보수정당이 민주당계 정당에 우위를 점했었다. 심지어 김대중이 신승했던 제15대 대통령 선거조차도 이인제의 영남권 표 잠식과 DJP연합 중 한 개라도 없었다면 당선자는 이회창이였다. 하지만 노무현의 당선 이후에 TK와 PK의 연결 고리가 서서히 약해지면서 민주당계 정당도 마냥 불리한 승부를 안해도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 최전방 지역인 인천광역시 옹진군&강화군, 강원도 철원군&양구군에서 각각 38%, 40%, 48%, 47%를 득표해 민주당계 후보가 받은 최고의 득표율을 기록했다. 게다가 철원군과 양구군에서는 노무현 후보가 이회창 후보를 이겼다. 그 뿐 아니라 경기도의 최전방이던 연천군포천시에서도 노무현 후보가 이겼다. 반면 이회창 후보는 최전방에서 옹진군, 강화군, 파주시, 고성군 등 4개 지역에서 승리하는데 그쳤다. 이는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북한과의 화해 분위기로 인해 전방 지역 장노년층 및 젊은 군인들의 민주당에 대한 거부감이 약화되었기 때문으로 분석할 수 있다. 15년 뒤 제19대 대통령 선거의 경우 문재인 후보가 철원군, 화천군, 양구군, 인제군에서 근소한 표차로 승리하긴 했으나 연천군포천시에서는 홍준표 후보에게 밀렸다. 접전이었던 16대와는 달리 문재인 후보가 전국 결과에서 큰 득표율 차로 압승한 선거였다는 점을 생각할 때 아쉽다면 아쉬운 결과였다. 2000년대 초반의 남북 화해 분위기가 노무현 후보의 최전방 지역에서의 선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 3당 합당 이후 영남권의 일부 지역에서 민주당계 후보가 보수 후보를 처음으로 이긴 선거이기도 했다, 참고로 그 지역이 울산광역시 동구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 42,803표를 받아 32,595표를 받은 이회창 후보를 무려 만 표 이상 앞섰다.[53] 공교롭게도 부울경에서 민주당계 후보가 당선되기 시작하는 시점이 노무현 전 대통령이 당선된 이후라는 걸 생각하면 의미있는 기록이다.
  • 노무현 전 대통령제13대 대통령 선거부터 제17대 대통령 선거까지의 기록 중 역대 최다 득표 수를 기록하였음에도, 득표율 48.91%라는 수치[54]만으로 보수 세력에게 반쪽짜리 대통령이라는 디스를 받았다. 과반, 즉 50%를 넘지 못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하지만 정작 제6공화국 이래 역대 대선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모두가 과반을 넘기지 못했다는 것을 생각해보면 합리적이지 못한, 헐뜯기식 비난이었다[55]. 이들은 이후 17대 대선에서 48.67% 득표율로 당선된 이명박 전 대통령에 대해서는 반대로 "국민 과반수가 선택한 대통령"이라는 찬양으로 일관하여 빈축을 샀다[56]. 정작 이명박은 노무현보다 득표율도 0.24% 적었고 득표 수도 52만 표나 적었다. 이 선거에서 낙선한 이회창보다 고작 5만 표 정도 더 받았을 뿐이다. 또 17대 대선은 투표율도 겨우 63.03%로 매우 저조했기에 실제 유권자 대비 득표율로 따진다면 이명박은 30.5%, 노무현은 34.3%를 기록한 셈이 된다.
  • 대선마다 진복기, 허경영 등 황당함으로 주목받는 군소후보가 하나씩 등장하기 마련인데, 해당 선거에선 김길수가 해당 타이틀의 주인공으로 등극하게 되었다. 대선 포스터 중 승려복을 입은 눈에 띄는 후보로 정장을 입지 않고 승려복을 입어 무언가 있어보이는 비범함, 정교분리의 원칙은 쌈싸먹은 듯한 캐치프레이즈 등등으로 주목받는 데에는 성공해 이른바 '엽기 선거포스터'의 대명사로 짤방화되었고, 언론에서 특이한 선거포스터를 언급할 때도 빠지지 않는 사진이 되었다.
  • 이 대선을 마지막으로 기표소 천막에서 궁서체가 사라졌다.
  • 전자개표기가 도입된 최초의 대선이다. 이 때문에 역대 대선 사상 최초로 선거 당일에 당선 여부가 확정됐다. 그 이전 대선의 경우, 13대 노태우 전 대통령은 다음날(1987년 12월 17일) 오후 3시, 14대 김영삼 전 대통령은 다음날(1992년 12월 19일) 아침 8시 5분, 15대 김대중 전 대통령은 다음날(1997년 12월 19일) 새벽 4시 12분에 당선 확정 소식이 나왔으나, 16대 대선에서는 자정도 되기 전인 오후 11시 26분에 노무현 후보의 당선 확정이라는 소식이 떴다. 당시 역대 가장 빠른 당선 확정 소식이었다. 이후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이 기록이 경신된다.[63] 개표는 다음 날 새벽 3시 20분 종료.
  • 현재까지는 양당 후보들 중 나이가 더 적은 후보가 당선된 마지막 선거이다.[67][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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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민주화대한민국 제6공화국이 들어선 이후 13~15대까지 세 번의 대선이 이미 치러졌지만, 이때까지는 흔히 말하는 총재 정치의 시대였기에 주요 정당의 대선 후보 경선이 그다지 드라마틱할 수가 없었다. 삼김씨와 같이 한 당의 수장이자 대표이며 구심점인 정치인이 총재 자리에 있으면 그 총재가 대선 후보로 나서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겨졌기에 당 내 경선이란 그저 의례적인 요식 행위 정도로 여겨지고 있었던 것이다. 달리 말하면 어떤 정당에서 대선 후보로 누가 나올지 누구나 다 뻔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16대 대선 새천년민주당 경선의 경우 누가 대선 후보가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벌어지는 진짜 대결이었기에 그런 모습을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는 그만큼 흥미진진할 수밖에 없었다.[2] 15대 대선 당시 이회창의 낙선에 가장 큰 원인이었다. 경선 불복으로 탈당해 독자 출마하면서 무려 500만 표나 분산시켰다. 어찌 보면 김대중, 노무현의 대통령 당선에 가장 큰 공로를 세운 인물이다.[3] 다만 동교동계의 핵심이자 김대중의 심복으로 활동했던 권노갑은 이인제를 지원하고 있었다. 사실 권노갑과 한화갑은 동교동계에서 함께 생활한 것은 맞지만 개인적 관계는 멀었다.[4] 전두환의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의 원인이 되었던 5.18 민주화운동의 근거지였으며, 6.10 민주 항쟁, 6.29 선언 이후 치러진 13대 대선에서 94.41%, 14대 대선에서 95.84%, 15대 대선에서 97.28%를 김대중 후보가 득표했다.[5]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낙선한 뒤 재보궐로 당선된 노무현이 2000년 16대 총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14대 총선1회 지선 때처럼 또 낙선했는데, 이를 계기로 결성된 지지 단체다.[6] 이런 전적 탓에 [age(2002-04-06)]년이 지난 지금도 친노-친문 성향 네티즌들은 이인제를 거진 태극기 부대 취급한다. 그리고 이인제는 2017년 실제로 박근혜 탄핵 반대 태극기집회에 참석하였다.[7] 기본적으로 김종필이 박정희 정권 출신 인사이기도 하고, 김종필이 총재로 있던 자민련이 김대중 정부와 DJP연합을 결성했다가 내각제·햇볕정책 의견차, 그리고 결정적으로 임동원통일부장관 해임 파동으로 2001년 갈라선 바가 있다.[8] 노무현도 이 점을 이용해 광주 경선에서 "영남 출신인 나를 뽑아주면 영남에서 표를 갈라먹어 이회창의 몰표를 막아 이회창 대세론을 허물 수 있다."라며 지지를 호소했다.[9] 이 직후 박수세례가 터진다. 그 이후 잠시 이인제의 처참한 표정이 나온다.[10] 출처[11] 그것도 16곳 중 11곳을 가져가는 초 압승이였다. 그리고 기초단체장,광역의원도 한나라당이 60% 이상을 싹쓸어갔다. (당시 기초의원은 정당공천제가 아니었다.)[12] 김대업 이외에도 설훈한나라당 이회창 후보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을 제기했다. 나중에 김대업과 설훈은 무고죄로 처벌을 받았다.[13] 이후 MBC '이제는 말할 수 있다.'에서 밝히기를 김대업씨는 본인은 더 이상 이런 병역 비리가 사회 지도층 전반에 판치는 상황을 두고 볼 수 없어서 검찰 수사팀에 최대한 협조하였고 그 과정에서 수사관들과 같이 병역비리에 연루된 의사들을 압박했는데 갑자기 담당 검사가 태도를 바꾸면서 자신이 팽당했다고 주장했다.[14] 감사원장으로 재직하던 당시 전직 대통령들에 대한 서면조사 및 전직 국방부 장관, 해군참모총장, 공군참모총장, 청와대 외교안보 수석 등을 검찰 고발하는 등 활발히 활동하면서 별명이 '대쪽'이었다.[15] 15대 총선에서 서울 종로구에서 낙선한 뒤 재보궐로 당선 된 노무현 당시 의원이 2000년 16대 총선 지역구도 타파를 위해 부산에서 출마했다가 14대 총선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 때처럼 또 낙선했는데, 이를 계기로 결성된 지지 단체다.[16] 이때 박범계가 김민석의 탈당에 충격을 먹고 판사직을 그만두고 노무현캠프의 법률특보로 합류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17] 이때 진보 정당의 권영길 후보는 다소 손해를 봤다는 의견이 있다.[18] 당시에는 선거 24일 전부터 여론조사 공포가 금지되었다.[19] 유시민 역시 데이터 분석을 하면서 지지 철회가 어마어마한 악영향을 주긴 했지만 지지층의 막판 결집으로 역전을 막았다고 평가했다.[20] 사실 세대구도 자체는 13대 대선14대 대선, 15대 대선때도 어느정도는 작용했지만, 13대 대선과 14대 대선때는 청년층의 표심이 反보수 성향이 강했을뿐. 표 자체는 김대중뿐만 아니라 타 야당후보에게도 골고루 나눠가졌던 탓에 노태우김영삼이 이를 충분히 극복할수있었고, 15대때도 김대중이 청년층들에게 많은 표를 얻었지만 압도적인 수준은 아니었다.[21] 이후 14년 뒤 19대 대선에서 심상정이 200만표를 득표하며 2002년의 권영길을 넘어선다.[22] 수도권 지역은 전통적으로 수도권 이외 지역보다 개표가 늦게 시작되고 늦게 끝난다.[23] 참고로 SBS당시 개표 62.4% 시점에서 노무현 후보의 당선 확실 발표와 동시에 자체적으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선언했다.[24] 대한민국이 고령사회로 진입한 시기는 2017년이다.[25] 이 당시 20대, 30대면 1960~1970년대생이 대다수였는데 이들은 소위 말하는 베이비붐 세대들이다. 20대 초반이었던 1979~1982년생들도 80만명대 출생자들이다. 20대가 800만명, 30대가 860만명 이었다. 오히려 50대 이상이 지금과는 다르게 인구가 적은 편이었다. 당시 50대가 450만명 정도였고, 60대 이상(70, 80, 90대 다 포함)이 560만명 정도였다.[26] 25개구 가운데 강남구에서만 40%를 넘지 못했다.[27] 지금까지도 용산구, 송파구에서 민주당 후보가 양자구도에서 승리한 유일한 사례로 남아있는데, 특히 송파구의 경우는 잠실1동과 잠실2동을 승리한 것이 결정적인 승인이었다.[28] 제6공화국 이래 대통령 선거에서 민주당이 강원도에서 40% 이상 득표율을 기록한 건 2002년, 2022년 2회에 불과하다.[29] 후술하다시피 철화양인에서 모두 노무현이 접전 끝에 승리했다.[30] 2022년 현재까지 대한민국의 주요 선거에서 손꼽히게 적은 표차다. 황종국(1표차), 문학진(3표차, 문세표), 허인회(11표차), 김중권(19표차) 등[69]과 함께 말이다. 하지만 그 이후 2018년 지방선거 이시종 도지사를 제외하면 단양은 민주당의 완벽한 사지(死地)이자 적지(敵地)가 되었다. 노무현 탄핵 역풍이 분 2004년 총선에서도 제천에서는 이겼지만 단양에서는 졌다. 문풍이 거세게 분 2018년 재보선에서도 제천에서는 이겼지만 단양에서는 졌다.[31] 원래 충청북도 단양군은 평소에 보수의 우세다. 민주당계가 충청북도 단양군에서 승리한 것은 제16대 대통령 선거가 이례적이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로 인해 자유한국당이 대참패했던 제19대 대통령 선거에서도 충청북도 단양군은 자유한국당 홍준표 후보가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당선인을 근소하게나마 이겼다.[32] 마산, 진주, 고성, 의령, 함안, 남해, 함양, 산청, 거창, 합천[33] 18대 대선 부재자투표에서는 문재인 52%, 박근혜 47%로 문재인 후보가 압승하지 못했다.[34] 김어준[35] 민경욱, 황교안 등.[36] 이준석 본인부터가 제21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일투표함에서는 이겼는데, 사전투표함에서 상대 후보였던 더불어민주당 김성환 후보에게 역전당하면서 패배했다. 그런 이준석조차 4.15 부정선거 음모론을 철저히 반박했었다.[37] 노무현 친화적인 당시 인터넷 상에선 오히려 흙오이 같은 밈이나 나돌았다.[38] 다만 이후 어느 정도 존속은 되었는지 정계복귀 이후 17대 대선에서 제법 역할을 하긴 했다.[39] 나우누리 VT에 노사모 클럽이 있었다.[40] 다만 이 과정에서 나우누리 유머게시판이 지나치게 정치화되어 나우누리의 쇠퇴를 불러오는 안 좋은 면도 있었다.[41] 이해찬 전 국무총리가 대선 이후 KT 사장과 오찬 중 알게 됐다고 밝혔다.[42] 한나라당 법률고문을 맡았던 서정우 변호사가 LG그룹이 보내준 150억이 실린 트럭을 휴게소에서 건내받아 그걸 몰고 한나라당 당사로 직접 상경했다.[43] 클리앙, 뽐뿌, 이토랜드, DVD프라임[44] 노무현 친화적인 당시 인터넷 상에선 오히려 흙오이 같은 밈이나 나돌았다.[45] 기승전결로 치면 광고의 기-승은 서정적으로 잘 구성되었으나, 상대 후보를 상징하는 난폭운전 기사가 사고를 내서 많은 사람들이 사상한 것을 암시하는 비명과 아이의 울음으로 치명적인 거부감을 선사했다. 극단적인 설정 때문에 (이회창을 상징하는) 미소를 짓는 버스기사가 마치 사고차량을 조롱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덤이다. 우회적인 네거티브를 의도한 광고가 유권자들을 겁박하는 광고로 전락한 셈이라, 방영 직후 중년 여성 지지자들이 한나라당 당사로 달려와 광고 책임자가 스파이라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고 한다. 참고로 배우 김영철이 후반 나레이션으로 등장하는데, 신중하고 안전한 선택을 권유하는 멘션이 비명과 울음 속에 묻혀버린 흑역사가 되었다(...)[46] 장교 출신이 아닌 일반병. 게다가 그 장교 출신들조차도 전임 대통령들은 모두 군사반란(정변)을 일으켰기에 제대로 된 군인 취급을 받기 어렵다. 참고로 노무현은 병장이 아닌 상등병으로 제대했는데, 그 이유는 베트남 전쟁 파병 다녀온 군인들이 전부 다 병장을 달고 와서 병장 정원이 다 돼서 그랬다고 한다. 당시엔 병장 정원이 있었다고 한다.[47] 이승만은 구한말, 김대중, 최규하, 윤보선은 일제강점기 때라서 군대에 가지 않았고, 박정희, 전두환노태우장교 출신이다. 김영삼은 현역병이 아니라 학도병 참전용사. 이명박, 윤석열병역면제로 군대를 가지 않았고, 박근혜여성이라 대상자가 아니다.[48] 2012년 제18대 대통령 선거 때까지는 노무현이 유일한 현역병 출신 대통령이었으나, 2017년 제19대 대통령 선거 결과 문재인당선되면서 유일은 아니게 되었으며 문재인은 병장으로 전역이다.[49] 현대중공업 회장으로서 울산에 정치적 기반이 확실한 정몽준과 단일화를 한 효과다.[50] 여담으로 노무현은 부산 유세 때 "사자는 새끼를 벼랑에서 떨어뜨린 후 살아돌아온 강한 새끼들만 키워준다. 부산에서 여러 번 떨어뜨린 노무현이 이제 대통령 후보로 살아돌아왔으니 부산에서 키워달라."는 명언으로 부산 민심을 자극하기도 했다. 물론 부산 민심은 이회창 후보에게 3분의 2에 달하는 표를 몰아주었고, 노무현 후보는 서부산 지역에서 상당히 선전했지만 단 한 곳에서도 이기지 못했다.[51] 강원도는 15대 대선을 제외하면 민주당 계열에 30%대의 지지율을 보여주었다. 민주당 계열이 40% 이상의 득표율을 받은 대선은 동-서간 지역 감정이 시작된 6대 대선 이후 최초다.[52] 왜냐하면 이 대선을 기점으로 민주당의 호남 색채가 옅어짐과 동시에 친노 성향이 강해지고, 게다가 부울경으로 이주한 전라도 출신 이주민, 노동자와 청년층의 증가로 인해,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세가 강해졌기 때문이다. 대경권은 구미시 정도를 제외하면 이주민이 적고, 현지인들의 보수 성향이 확고해서 당선권은 무리지만 시도의회 비례 한둘은 민주당이 잡기도 한다.[53] 단일화를 했던 정몽준의 표를 흡수했기에 가능했다. 더 구체적으로 따지자면 울산 동구 및 북구는 정치색 자체가 통상적인 영남권의 보수정당 우위구도와는 다르다고 볼 수 있다. 현대중공업을 비롯한 생산직 노동자의 비율이 높아 노동조합의 지지를 받는 진보정당의 세가 강하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현대중공업의 오너인 정몽준의 개인적 영향력도 막강한데 정몽준은 일단 보수정치인으로 분류되기는 하나 민자당-한나라당으로 이어지는 보수 주류 정당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정치인이기도 했던 것. 따라서 민주당계 정치인 중에서는 상대적으로 진보적인 성향으로 여겨졌던 노무현의 성향+정몽준과의 단일화 효과 덕분에 울산 일부 지역구에서 승리가 가능했던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54] 하지만 이것도 매우 대단한 성과인데, 헌정 사상(정확히 말하자면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되고 보혁대결구도가 나타난 6공 이후) 민주당계 정당 후보가 대선에서 얻은 최대 득표율이며 이 기록은 2022년 제20대 대통령 선거까지 깨지지 않았다. (그나마 제일 근접한 기록이 제18대 대통령 선거 문재인의 48.02%지만 선거에서는 졌고, 민주당계가 다시 승리한 제19대 대통령 선거는 역대 최대의 다자구도 선거였던 덕분에 역대 최대 표차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정작 당선인의 득표율은 41.08%에 머물렀다.) 단, 통념과는 달리 '민주진보진영' 단위로 보면 대선 과반득표사례가 없지 않다. 당장 16대 대선만 해도 민주당계 정당+진보 정당 후보의 합계득표율은 52.8%로 과반이고, 20대 대선에서도 50.2%로 과반이었기 때문이다.[55] 애초에 결선투표도 없는 단순다수제 선거에서 당선자에게 과반득표를 기대하는 것 자체가 전혀 합리적이라고 볼 수 없다. 2023년 현재 기준으로 볼 경우 대통령 직선제가 시행된 6공 이후 대선중에서 당선인이 과반득표에 성공한 사례는 딱 한번, 제18대 대통령 선거박근혜 뿐인데 이는 해당 대선이 3위 이하 후보들의 득표율 총합이 0.42%에 불과한 극단적인 양강구도 대선이었기에 벌어진 현상이다. 덕분에 박근혜도 대통령 직선제 이후 첫 과반 당선이라는 진기록을 세웠지만 문재인 역시 이전까지의 모든 대선에서 승리 가능한 득표로 낙선하는 다른 진기록을 남긴 것이다. 그 외의 대선에서는 대략 양강구도가 두드러지는 경우 40% 후반, 다자구도가 나타나는 경우 40% 초반대의 득표율로 당선자가 나온다고 보면 거의 맞아들어가며 심지어 18대 대선 다음으로 극단적인 양강구도가 나타났다는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확인된 바와 같이 약간이라도 존재감 있는 제3후보가 딱 한명이라도 있으면 당선인의 과반득표는 성립하기 힘든 것이다.[56] 대표적인 사례로, 노무현 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2002년 12월 20일자 중앙일보 기사의 제목은 <과반수에도 못 미치는 반쪽짜리 대통령> 이었지만 정확히 5년 뒤인 2007년 12월 20일 같은 중앙일보에서 이명박 후보의 당선을 알리는 기사의 제목은 <과반수에 육박한 진정 국민 모두의 대통령>이었다. 그리고 후술된 바와 같이 득표율 및 득표수 모두 노무현 당선인쪽이 명확히 앞서있었다. 결국 민주당계 정당의 지지자들이 소위 조중동등 보수언론에 격렬한 혐오감과 불신을 보이는 원인의 상당부분은 보수 언론 스스로 자초한 면이 큰 것이다.[57] 출구조사에서는 새누리당 이인제 후보가 이겼지만, 개표 결과 더불어민주당 김종민 후보에 역전당하면서 패배했다.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자유선진당 이인제 후보가 출구조사에서는 민주통합당 김종민 후보에 밀렸지만, 개표 결과 출구조사를 뒤집고 당선된 것과는 정반대의 일이다.[58] 다만 김중권은 18대 대선에서 문재인 후보를 지지하였다.[59] 이때 정세균과 큰 갈등을 겪었다.[60] 거기다가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한나라당 공성진 국회의원이 2011년 6월 9일,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인해 의원직을 잃는 일까지 생기면서(잔여 임기가 1년 미만이었던 관계로 재보궐선거는 실시되지 않았다.) 서울특별시 강남구 을에서의 한나라당-새누리당에 대한 민심은 하락할 수밖에 없었다.[61] 거기다가 새정치민주연합 정태호 후보와 동시에 출마하면서, 새누리당 오신환 후보가 어부지리로 당선되었다.[62] 바른정당과의 통합을 반대했다.[63] 17대 대선 당시 당선 확정 발표 시각은 역시 자정이 되기 전인 오후 10시 48분. 전자개표기의 활약도 있었지만 애초에 투표율이 70%를 넘지 못했기에 셀 수 있는 표의 숫자도 적어서 결과도 빨리 나왔다.[64] 사실 이 대선 당시에는 엄밀한 의미의 여당이 따로 없었는데, 왜나하면 김대중 전 대통령이 대선 몇 개월 전에 새천년민주당을 탈당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새천년민주당이 범여권, 한나라당이 범야권으로 취급받기는 했다.[65] 자유한국당황교안을 영입하는 것을 목표로 했으며, 결국 2019년 1월 15일, 황교안이 자유한국당에 입당했다.[66] 즉, 2위 후보는 다음 대선에서 당선되는 (재수) 징크스가 깨진 것이다. 초반에는 이회창의 지지율이 앞서서 이 징크스가 이어지나 했으나 노무현정몽준과의 단일화로 후반에 노무현의 지지율이 급격히 오르면서 당선되어 이 징크스가 깨졌다. 하지만 2012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한 문재인 전 대통령이 다음 대선인 2017년 대선에서 당선되었다.[67] 이 선거 이후로는 양당 후보들 중 나이가 더 많은 후보가 당선되었다. 17대 대선의 이명박정동영보다 12살 더 많고, 18대 대선의 박근혜문재인보다 1살 더 많으며, 19대 대선의 문재인홍준표와 동갑이긴 하나(호적상으로는 문재인이 1살 위), 문재인은 1월생, 홍준표는 11월생(호적상 1954년 12월생)이며, 20대 대선의 윤석열이재명보다 3살(호적상으로는 4살) 더 많다.[68] 참고로 전 대선김대중이회창보다 11살 더 많았으며, 13대 대선의 노태우와 14대 대선의 김영삼은 후임자보다 나이가 더 적다. 13대 대선 2위는 김영삼, 14대 대선 2위는 김대중이기 때문에 이렇게 설명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