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0 21:20:35

조조/업적과 능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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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정치 - 환령의 문제점을 청산하다3. 군사
3.1. 상대한 세력3.2. 위무주손자3.3. 용인술3.4. 힘의 집중과 분산3.5. 북방 민족 정벌3.6. 수로의 군사적 운용3.7. 친정 중시3.8. 친족 중시3.9. 초기의 과감함과 말년의 안일함
4. 제도
4.1. 둔전제4.2. 호조법4.3. 구현령4.4. 원호법
5. 인재 등용6. 신체
6.1. 무예6.2. 건강6.3. 외양
7. 예술가의 면모
7.1. 요리7.2. 패션7.3. 음악7.4. 문학7.5. 서예7.6. 종교
7.6.1. 유교7.6.2. 도교
8. 유사한 인물들

1. 개요

조조의 업적과 능력을 정리한 문서.

2. 정치 - 환령[1]의 문제점을 청산하다

조조가 암군들과 환관들의 집정, 황건적의 난과 동탁의 집권 그리고 이각, 곽사의 집권 이후로 쇠약했던 정권을 20여 년 동안 안정시켰던 건 큰 공헌이다. 동탁은 환관과 기득권층을 거의 박살내놓았고[2], 그렇게 박살나 텅 비어버린 관료층을 조조가 채워준 것이다. 조조는 어쨌든 동한 말기 막장이었던 사태를 수습하고, 환령 이래 동한의 암덩어리였던 환관외척 집단 일소를 완성하여 광무제가 육성해놓았던 사인층의 염원을 실현한 바 있었다. 재야 여론을 주도하던 사인 식자층은 정치 감각과 뛰어난 통치 능력을 보여준 조조에게 크게 이끌릴 수밖에 없었다. 더군다나 조조 역시도 한말의 문제점에 대해 진저리를 치고 있었으니 유학자들과 뜻이 맞았고, 그들을 받아들여 탄탄한 위나라 정부를 꾸리게 된다.

그러나 유학자들이 잘못 생각했던 것은, 조조에게 지식인들이란 어디까지나 수단에 불과했다는 점이었다. 황제를 허수아비로 만든 것만 봐도 그렇고, 공융이나 예형 같은 당대의 저명한 유학자들을 탄압해 죽이기도 했다. 특히 공융은 불효자라고 낙인찍어 죽여버린 건 말의 앞뒤가 안 맞는 사례였다. 불효자이거나 인성이 안 좋은 자라도 능력만 있으면 대접하겠다고 해놓고는 저랬으니 그냥 자기 자제력이 상당 부분 떨어졌을 뿐이었다. 그런 조조가 세운 나라가 바로 위나라였고, 서진은 위나라를 상당 부분 이어받은 나라였다.[3][4] 서진이 통일할 때까지 한 자리 해먹은 유학자라면 이미 나라가 지식인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알고 적응한 경우였고, 적응하지 못하고 떨어져나간 사람들은 그대로 중앙정부와는 인연을 끊어버린다. 이들은 백성과 고락을 함께 하며 현실을 개혁한다는 은자 정신을 가진 것도 아니라서, 그저 현실에서 도피한다는 식으로 아예 깊은 산속에 틀어박히게 된다.

3. 군사

파일:external/www.ssk-group.net/sousou.jpg
관도에 있는 조조의 기마상

조조의 능력을 비판할 때 항상 거론되는 것은 바로 통일 왕조 건설에 실패했다는 점이다.[5][6] 후한 말 이후의 시대를 묶어 흔히 위진남북조 시대라고 하는데, 당연한 것이겠지만 나라는 중국사에서 통일 왕조로 취급되지 않으며, 다만 진의 전신인 만큼 삼국을 대표해 쓰는 것일 뿐이었다. 중국 역사 전체로 눈을 돌려보면 남북조시대 북조 국가들이나 오대십국시대의 5대 왕조들이 차지한 영역이 위와 비슷함을 알 수 있다. 굳이 말하면 남북조 시대에서 조위를 넘어서는 성세를 확실하게 자랑한 국가는 전진과 북주 외엔 없고, 오대십국 시대의 5대 국가들이야 다들 조위를 넘어서는 국세를 자랑하지만 5대 국가들은 말 그대로 중앙 왕조들이기에 사실 조위의 성취가 그렇게까지 깎아내릴 만한 것은 못 된다.

중국사를 통틀어 군사적 능력이 최고로 꼽히는 군주들은 서초패왕, 한고제, 광무제, 송무제, 당태종, 송태조, 원세조, 홍무제, 영락제, 강희제 등 당대에 자신의 군사적 능력으로 통일 왕조를 건설했거나 건설하기 직전까지 갔던 군주다. 이들은 당대에 거의 자력으로 전 국토를 통일하거나 실질적으로 완벽한 통일 왕조를 건설했기 때문에 최고의 평가를 받지만, 조조는 이들과 비슷한 통일 군주가 아니라는 결점 때문에 이들 보다 평가가 다소 깎이는 편이다.

단, 군사적 능력만 보면 조조가 후한 말기와 위진남북조시대의 군주들을 통틀어 최고 수준의 지휘관이었음은 결코 부정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의 편견과 달리 조조는 하북을 완전히 제패한 50대 초반까지는 거의 항상 자신보다 세력이 큰 적과 싸웠다. 비록 패배한 경우도 여러 차례 있었지만 그런 상황에서도 결국 반전의 계기를 잡아내어 전투는 졌지만 전쟁은 이겨낸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가 통일 군주로 등극하지 못한 결정적인 원인인 적벽대전한중 공방전도 패전 후 대처는 성공적이어서 손권의 북진을 적절히 차단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3.1. 상대한 세력

거병 초기부터 왕위에 오른 말년까지 중원을 누비며 싸운 인물인지라 상대한 적들 역시 많다.
  • 동탁: 거병 초창기에 대적한 적이고[7] 동탁이 장안으로 도주하자 혼자 추격했다가 서영 상대로 복병에 무너지면서 더는 충돌이 없었지만 동탁 사후 정권을 잡은 이각곽사로부터 달아난 헌제를 협천자하는 과정에서 이각과 곽사를 몰아냈다.
  • 도겸: 원술과 연계하여 조조를 공격했으나 조조는 원소와 함께 이를 연주에서 격퇴했다. 참고로 이때만 하더라도 조조는 신생군벌에 불과했고 도겸은 서주에 터를 잡은 지 오래된 까닭에 세력에서 도겸이 우위였다!!! 또한 알려진 것과 달리 도겸은 절대 백면서생이 아니었으며 후한 말 많은 반란 진압에서 활약했던 인물이다.[8] 절대 만만한 호구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의 예상을 뒤엎고 연전연승하며 도겸을 밀어붙인[9] 조조의 용병술이 뛰어났다. 이후 도겸의 부하가 조숭을 죽이는 사건이 벌어지며[10] 조조는 서주를 유린하나 여포에게 근거지인 연주를 공격당하자 퇴각. 도겸이 사망하며 공손찬 측의 지원군으로 와 있던 유비가 서주목을 승계한다. 이후 서주는 유비, 여포, 조조 등 여러 군벌들의 지배를 거쳐가다 최종적으로는 조조의 손에 떨어진다.[11]서주대학살 때문에 약체로 보이지만, 저 도겸의 세력이 나중에 유비와 여포로 이어지며 조조에게 어느 정도 위협이 되었고 결국 8년이 지난 후에야 서주는 간신히 조조의 세력권에 귀순된다. 말 그대로 도겸의 세력+유비/여포의 세력이 얼마나 조조 입장에서는 골치아팠는지 보여주고 있다.
  • 원술: 원소와 연합하던 시절 조조의 숙적이었다. 초기엔 원소와 자웅을 겨룰 만큼 큰 세력을 가졌다. 원술은 남양에서 북쪽의 공손찬과 연합하며 원소를 견제했고, 원소의 지원을 받던 조조를 공격했으나 역으로 털려 양주까지 밀려난다. 양주에서 재기에 성공하지만 참칭을 계기로 재차 여포와 연합한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이 크게 약해지며 공중 분해된다. 난세 초반만 하더라도 조조를 따위로 만들어 버릴 만큼 압도적인 세력을 자랑했지만 조조에게 연달아 발리면서 중원의 패권을 내어 주었고 결국은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다. 여포와의 동맹 관계라도 잘 관리했으면 그래도 최소한 조조를 견제하는 것은 가능했겠지만 대신 1850여 년이 지난 현재까지도 조롱당할 거리를 남겨주고 갔다.
  • 여포: 멘탈리티의 문제가 있지만 여포 본인의 군재/무예는 원소의 용병으로 싸우면서도 정평이 크게 나 있었다. 조조가 연주에서 자리잡을 때 처음에는 장막의 사주를 받아 치열하게 싸웠다. 사실 이때가 조조에게 있어서 최대의 위기나 다름없다. 동탁 토벌에 집안 재산을 거의 다 써버리고 몇 년 동안 황건적들과 싸우다가 겨우 연주에 자리를 잡은 건데 그걸 홀라당 여포에게 털린 것이다.[12] 심지어 여포는 조조를 잡아 죽일 수도 있었다. 이후 여포를 쫓아내고 연주의 기반을 완전히 굳혔는데, 여포가 유비를 배신하고 서주를 차지하자 공격을 시도해 죽였다. 이때 여포는 조조의 교묘한 이간계 때문에 이미 싸우기도 전에 패배한 것이나 다름없을 만큼 고립된 상태였고 결국 전쟁이 시작하자마자 가지고 있던 힘도 제대로 못 써보고 망했다. 의외로 조조가 여포에게 이긴 것을 평생의 자랑거리 중 하나로 삼았을만큼, 단순무식해서 은근 조소를 받는 여포가 조조에게 있어서는 중간보스 느낌의 거대한 벽이었다.
  • 장수: 관동에서 지지고 볶던 조조가 사예 방면으로의 진출을 꾀하며 마주쳤다. 상대적으로 약소한 세력에도 불구하고 유표의 지원과 가후의 활약이 더해져 수차례 조조에게 뼈아픈 패배를 안겨주며 선전했다. 그러나 체급차는 극복할 수 없었는지 결국 조조에게 항복한다. 조조는 장수에게 아들과 조카, 그리고 호위대장을 잃었다.
  • 원소: 서로의 숙적이었던 원술과 공손찬이 패망하자 자연스럽게 대립하는 입장이 된다. 원소의 세력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어서 한때 조조 본인조차 원소에게 투항할 마음이 생겼을 정도라고 한다. 원소가 먼저 공세를 취했으나 조조가 이를 관도에서 가까스로 막아냈다.[13] 그런데 이 전투 직후 원소의 건강이 악화일로를 걸은 끝에 그대로 사망해버리는 대사건이 터졌고, 원가는 후계자 다툼으로 세력이 분열되어[14] 그 틈을 노린 조조에게 멸망당했다.[15] 이후 조조의 세력은 분열된 원가를 7년에 걸쳐 멸망시키고 북중국 전역을 장악해 명실상부한 최강자가 된다. 원소를 이기는 것이 게임으로 치면 1주차 정엔딩이라면 이후 본격적인 천하통일을 노리는 건 2주차 진엔딩을 도전하는 플레이라 볼 수 있다.
  • 고간: 원소의 외조카. 원가분열 이후 병주에서 독립하였으며, 원담이나 원상의 편을 들지 않고 조조에게 항복했다. 그런데 그 직후 은밀하게 반란을 계획하고 호관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 계획이 매우 치밀하여 사례의 3군이 고간의 편을 들었다. 게다가 고간의 군사적 능력도 뛰어나 조조군이 처음에 고전했으나, 순욱이 두기를 보내 고간의 난에 가담한 사람들 중 갈팡질팡하는 이들을 회유해 고간 군 내부에 반대 파벌을 만듦으로써 고간의 난은 실패한다. 조조가 애먹은 상대 중 하나.
  • 유표: 원래 원소, 조조와 함께 원술에 대항하고 있었으나 원술이 패망하자 적이 되었다. 장수와 유비를 방패삼아 장수, 유비를 내세워 끊임없이 조조를 위협해왔고 조조와 대리전을 벌였으나 장수가 조조에게 투항한 후에는 별다른 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결국 유표 사후 그의 세력은 조조에게 흡수됐다가 유비, 손권의 반격으로 북형주만 차지하게 된다. 보유하고 있는 병력만 10만에 가까워 실력을 놓고 보면 원소, 조조 다음가는 제3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방 호족들을 제대로 장악하지 못했고[16] 본인 스스로도 문약했던 까닭에[17] 결국 형주를 조조에게 내어주고 만다.
  • 마초: 관서의 군웅들 중 한 명으로, 장안 이서 지역을 완전히 자기 아래로 복속시키려는 조조와 충돌하게 된다.[18] 결국 장기전의 유리함을 살린 조조가 승리하여[19] 마초를 비롯한 관중 군웅들의 세력을 뿌리뽑았다.[20] 마초는 조조가 맞상대 할 당시 강대한 관서 군벌 연합의 수장이었고 맹장 곽원을 격파하고 후일의 일이지만 하후연을 물리치는 전과를 올렸으며 조조의 전략을 간파하고 그를 궁지에 몰아넣기도 했다. 결국 제압하긴 했지만 조조도 만단위의 손실을 입었다. 하지만 어쨌거나 이긴 것은 조조였다. 폭발적인 저돌력을 자랑한 마초를 상대로 조조의 꼼꼼한 판짜기가 거둔 승리였다.
  • 장로: 익주 진출의 교두보로 한중의 토착 세력인 장로를 공격해 복속시켰다.
  • 장막장초 형제: 서주 대학살 직후 장막이 여포와 손잡고 반란을 일으켜 조조는 아주 가까스로 여포를 격퇴했으며, 여기에 호응한 장막의 동생인 광릉태수 장초는 원소가 보내준 주령과 연합해 옹구에서 장초를 제거하였다.[21][22]
  • 손권: 자신의 천하통일 야망을 저지시킨 장본인 중 한 명인 애송이. 형주를 너무나도 쉽게 점령하자 그 기세를 몰아 손권을 위협한 건 좋았으나 너무 싸움을 서두른 나머지 애송이 군주가 앞세운 주유유비의 활약에 대패하며 물러났다. 적벽은 변명의 여지가 없이 결국 손오의 명장 주유에게 수전에서 대파, 육전에서 유비에게 대파되는 등 조조 본인의 대패다.[23] 하지만 애당초 북쪽 출신 중에서 수전에 능했던 이들은 하북 출신 관우 이후 서진 시대 두예왕준이 나올 때까지 아무도 안 나왔다. 이후 서로 몇 차례 대치하며 적당히 강화를 맺기도 한다.
  • 유비: 기반과 세력 격차, 상대 전적에서 늘 조조에게 밀렸지만 끝까지 조조에 맞서길 포기하지 않으며 대항해 결국 조조의 천하통일을 저지시키며, 둘의 마지막 격돌인 한중 공방전에서도 조조를 패퇴시켰다. 한중 공방전 승리 후 유비가 한중왕을 칭하자 정말 한 고조가 항우를 무찌른 게 재현되는 거 아니냐며 천하가 들썩였을 정도다. 실제로 얼마 뒤 관우가 번성을 침공하자 이전과는 다르게 위나라에서 대대적인 반란이 각지에서 발생했으며[24], 이후에도 제갈량이나 강유 등이 북벌을 할 때 호응하는 세력이 꽤 있었다. 하지만 유비도 조조가 이간책을 써서 손권을 이용해 관우를 치게 만드니[25] 결국 두 나라는 서로 싸우느라 엄청난 손해를 보았고 결국 유비는 천하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죽어 서로의 천하통일을 마지막까지 막은 격이 되었다.

3.2. 위무주손자

손자병법》에 주석을 단 것으로 유명하다. 현대인들이 읽고 있는 손자병법은 기본적으로 모두 조조가 주석을 단 《위무주손자》이다.[26] 그가 손자병법에 한 일은 내용을 고치는 것보다는 당시까지 있었던 일화들과 보충 설명들을 달아놓은 것이다. 그리 길지 않은 문장만으로도 격조를 높였고,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달아놓은 주석은 손무라는 걸출한 병법가의 기본 틀과 함께 손자병법을 병법서 이상의 책으로 끌어 올려 주었다.

물론 클라우제비츠앙투안 앙리 조미니마냥 전술 이론에 밝은 사람이 명장 취급을 다 받지는 않는다. 이론 연구는 지휘관보다 참모 계열의 장교들이 더 적성에 맞고, 현대는 물론 전근대에도 참모와 지휘관의 재능을 동시에 갖춘 사람은 흔치 않았기에 그런 인식이 더 강하다. 그러나 조조의 경우 자신의 병법을 실전에서 잘 응용하였으며[27] 그 경험을 토대로 조조가 주석을 달 수 있었던 것이다. 군사 이론과 실전 경험의 불합치가 불러오는 재앙은 마속만 봐도 알 수 있듯이 그 교정은 중요한 일이다. 또한 기존의 군사 교리를 실전에서 검증하는 것은 현대의 군사학교들에서는 교리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작업이다.

조조의 군사지휘 행적이 손자병법에서 주로 제시하는 총력전의 정석과는 거리가 멀고, 단기적인 성과에 급급하고 전술적 기만책에 과하게 의존하는 경향이 있어서 조조가 주석까지 달아놓고도 사실은 손자병법의 핵심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고 보는 의견도 있다. 손자병법은 국가의 정상적인 잠재력을 전부 사용할 수 있는 상황을 상정하고 대전략을 제시한 것인데, 조조는 거병 초반에는 작은 기반을 가진 군벌이었고 말년까지도 체제 내에 헌제 및 한 체제에 충성하는 근왕파들이 여럿 있었어서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정권이었다. 빨리 군사적 성과를 내고 돌아가야 그 성과를 기반으로 자기가 권신으로 황제 위에 군림할 명분을 얻을 수 있기에 단기적 성과에 집착할 수 밖에 없었다. 군주가 직접 군대를 지휘하거나 혹은 군주에게 신뢰받는 장군이 군대를 지휘할 때를 전제로 쓴 손자병법의 이론을 전부 조조에게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

여담으로 주석을 달면서 "보통 공성할 때 공격 측이 수비 측보다 병력이 10배는 많아야 한다지만 그건 군대의 질이 서로 비등한 상태일 때의 이야기일 뿐, 양쪽의 질이 차이나면 2배만 많아도 충분히 함락시킬 수 있다. 내가 그런 식으로 여포를 사로잡았다." 등등 자화자찬이 섞인 이야기도 많다. 물론 그게 사실이기는 하므로 설득력이 없다는 것은 아니다.

3.3. 용인술

조조의 용병술 중 단연 최고의 능력은 군사적 용인술이었다. 군재가 아무리 뛰어나도 그걸 지원해 줄 부장이 없으면 그 군재는 사실 있으나 마나다. 심지어는 혼자 다 해치운 것 같은 명장 한신의 경우에도 조참/관영과 같이 뛰어난 장수들이 같이 있었다.

조조의 곁에는 인격적인 면모와 다양한 개성의 장수들을 통합할 수 있는 지도력을 지니고 있었던 하후돈이 있었고, 두 말하면 입 아픈 용장/맹장인 조인이 있었으며, 신속한 기동전이 주특기였던 하후연, 그리고 그 외에 조조가 그 실력을 알아보고 스카웃 해 적재적소에 배치한 오자양장들을 포함해 수많은 명장들을 모두 아우르며 적재적소에 배치해서 세력을 잘 유지하면서 확장했다. 특히나 북방 민족의 위협[28]전예조창을 파견해 박살내버리고 북방을 안정시키는 점에 있어서는 용인술이 돋보였다 볼 수도 있는 면모가 있다. 항장 서황/장합/장료/장패 등을 과거의 악연을 깨끗하게 잊고 중용했으며 하급군관~병졸 출신이었던 우금의 재능을 단박에 알아먹고 이외에 이전, 조홍 등 다른 장수들도 잘 써먹은 것을 보면 인재의 장단점을 알아보고 활용하는 재능은 단연 최고였다고 할 수 있다.

3.4. 힘의 집중과 분산

그리고 조조의 경우 군의 힘의 집중과 분산을 매우 잘 해낸다. 심지어는 패퇴하는 과정에서도, 연주가 털린 상황에서 성 3개를 가지고서 그 성 3곳의 여력을 집중해 초현/산동반도를 토벌하여 세력을 꾸리고 결국 이 세력을 통해서 여포를 연주에서 완전히 몰아내는 데 성공하고 심지어는 적벽에서 패퇴했음에도 군의 분산을 통해 완전히 흔들릴 뻔한 세력을 조인을 남군에 남겨 형북을 유지하고, 각지에 장수들을 배치하여 대비케 한다. 형주 공방전에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지만 관우를 상대하기 위해 서주의 장패, 회남의 하후돈, 장료, 각주의 자사들 병력까지 모두 끌어들여 관우를 상대했다.

3.5. 북방 민족 정벌

조조는 북방 원정으로 원가에 붙은 오환족을 박살내 그 세를 크게 꺾고, 흉노족을 복속시켜 후환을 제거하였다. 조조의 북방정벌이 삼국지연의에서 비중 문제로 원소의 토벌에 부수된 피라미 사냥쯤으로 치부되지만 사가들은 조조의 오환토벌이 후한 말 북방 민족들의 세를 크게 꺾은 업적이라며, 만약 조조의 오환토벌이 없었더라면 오호십육국시대가 1세기 더 빨리 도래했을 것이다라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그는 건안 20년(216년)에는 남흉노를 5부로 나누어 선우를 유명무실하게 만들고 5부 흉노로 분할 통치하면서 흉노를 사실상 중국에 복속시키고 노예화하였고 흉노는 한인들에게 사회적, 경제적으로 멸시받는 존재가 되었다. 이런 북방 이민족들의 대규모 중국 이주는 후일 오호십육국시대의 단초를 제공하기도 하지만, 이런 이민족들을 통제하는 문제는 이완기에 들어선 대제국이 어느 제국이든 겪는 문제였기에 관리에 실패한 서진 정권에게 문제가 있는 것이지, 조조와 조위에게 책임을 돌릴 순 없다.

다만 북방 민족들을 막을 요충지였던 하북 지역의 역량을 약화시킨 실책은 부정할 수 없기는 하다. 조조는 이민족들을 철저하게 때려잡았지만, 동시에 원소를 따른 하북 세력과 백성 대다수를 몰락시키거나 억누르는데 힘을 쏟았다. 게다가 이어진 반란과 내전으로 하북 지역의 역량은 계속 약화되었다. 조조가 이후 하북의 업성을 자신의 세력의 수도로 두었지만 조비 시대에 다시 낙양으로 돌아감으로써 이런 행보는 무색해졌다. 물론 조조 본인의 시대에는 조조가 일군 막강한 군사력이 건재했으며 바로 그 이민족들을 아주 철저하게 깨부수었기에 조조 생전, 삼국 시대, 그리고 이후 서진 초기까지는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따라서 오호십육국시대의 책임을 조조에게 떠 넘기는 것은 좀 지나친 부분이 있다.

3.6. 수로의 군사적 운용

후한 말에 들어 전장의 장소가 황하, 회수, 장강 등 큰 하천과 호수까지 전장이 되면서 물을 이용하는 사례도 증가하였다. 아마 그중에서 대중적으로 가장 잘 알려진 것은 여포를 토벌했던 하비 전투일 것인데, 이때 조조는 기수, 사수의 물을 끌어와 하비를 수몰시키는 방법을 사용했다. 그러나 물을 전쟁에서 이용하던 사례는 이런 식의 것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마 조조는 수계(水系)를 이용한 병력과 물자의 이동에 대한 중요성을 잘 알았고 이를 가장 잘 사용한 인물이었던 것 같다. 가령 204년에 있던 원상과의 전투에서 조조는 기수의 수리시설인 백구(白溝)를 이용해 군량을 운반했고, 206년에 있던 오환 정벌에서는 주변의 강과 수계를 개척하여 각각 평로거(平虜渠)와 천주거(泉州渠)라는 수로를 만들기도 했다. 조조가 북방에서 전쟁을 진행하면서 시행한 수로 개척은 해하(海河) 수계 형성에 영향을 주기도 했다. 조조의 수로 개척은 해하 수계 중에서도 여러 물줄기가 합쳐지는 지점인 천진 일대에 영향을 줬다.

3.7. 친정 중시

조조의 군사 전략에서 특이점은 두가지를 들어 볼 수 있는데, 하나는 개인 친정(親征) 중시이며 다른 하나는 친족 중시다.

조조는 다른 지역을 침공할 때 자신이 직접 진두지휘(陣頭指揮)하는 모습이 많이 보였다. 하북 정벌, 오환 정벌, 형주 정벌, 강동 정벌, 한중 정벌이 모두 조조의 친정 아래에서 이루어졌는데, 이는 유비가 관우장비 등의 자신의 부하로 하여금 다른 지역을 점령하게 하고 관우가 독자적으로 형주 북쪽 지역을 침공한 것과 비교된다. 하지만 조조 자신이 노년에 접어들면서 신체 정신적 역량이 떨어지게 되었는지 친정의 결과도 악화되는데, 형주 정벌을 마지막으로 적벽대전한중 공방전이라는 두 결점을 남기면서 영토 확장이 좌절된다.

이는 조조가 한 황실을 등에 업은 '협천자'라는 정치적 입장을 택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만일 한 지역을 정복하는 거대한 정벌 계획을 조조 이외의 인물이 나서서 수행하고, 그 인물이 성공을 이룩하게 된다면 조조의 정치적 입지는 크게 약화된다. 조조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하여 군권을 손에서 놓을 수 없었으며, 언제나 전쟁에 나서야 하고, 이기지 못하면 정치적 입지가 손상되었다. 이는 조조 스스로도 군권만은 절대 놓을 수 없다고 천명한 것에서 드러난다. 후한과 공존하는 막부의 우두머리라는 입장상, '조조의 대안'이 될 만한 장수가 나타나면 그는 후한 조정을 등에 업고 또 다른 '협천자'를 수행할 수 있었으므로 이러한 상황이 되는 것을 철저하게 막아야 했다.

사실 이는 통일 왕조 군주에게서도 자주 나타나는 모습이다. 당태종, 송태조, 홍무제, 영락제, 숭덕제 등등 병법에 자신있는 군주들(개국한지 얼마 안 됐을 때는 더더욱)은 본인이 직접 사령관이 되어 출정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조조뿐만 아니라 유비, 손씨 가문에서도 종종 등장하는 모습이다. 엄밀하게 따지면 조조는 중국사 통일 군주들과 달리 자신에 반대하는 군웅인 유비와 손권을 끝내 제압하지 못하여 천하를 석권하지 못했다는 차이만 있을 뿐이다.

3.8. 친족 중시

조조는 군사 분야에서는 조씨, 하후씨 친족을 매우 중시했다. 항장이나 이성의 숙장들을 대우하기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친족 장수들을 우위에 놓고 그들로 하여금 항장들을 감독하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 역시 친족을 전혀 데리고 있지 않았으면서 관우, 장비 같은 장수들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그들을 높이 대우한 유비와의 차이점. 그러나 이 역시 많은 왕조에서 드러나는 특징이라 조조만의 특징으로 보긴 어렵다.

문제는 조씨, 하후씨 일족에는 그 지위에 걸맞은 군사적 능력을 가진 인물들[29]도 많았지만, 다소 부족한 인물도 있었다는 점이다. 아무리 봐도 정사에서 그 지위에 걸맞은 수준의 '군공'은 찾기 어려운 조홍하후돈[30]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비교적 명장으로 꼽히는 하후연 역시 한중 공방전에서 패배하여 사망한 직후 조조 자신이 하후연의 사령관으로서의 역량 부족을 한탄한 기록이 남아 있다.[31]

이런 문제점이 조조의 군사 행동에서 문제를 일으키기는 했지만, 이 역시 어쩔 수 없는 선택에 가깝기는 하다. 조조는 상당히 자주 내부 반란에 시달렸는데 서주 공방전 와중에는 여포를 앞세운 진궁, 장막이 일으킨 본거지 연주에서의 반란으로 거의 죽을 뻔 했고, 협천자 이후에는 후한 황제와의 마찰로 인해 여러 차례의 반란에 지속적으로 시달렸다. 동승 등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후한 내에서의 반 조조 반란은 조조가 죽을 때까지 완전히 없어지지 않았다. 이런 상황에서 조조가 정권을 유지하려면, 군권을 꽉 잡기 위하여 친족을 중용하는 정실 인사를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3.9. 초기의 과감함과 말년의 안일함

조조는 일견 무리하게 보일 정도로 굉장히 과감하고 공세지향적인 경우가 많았으며, 후일 조조의 주력부대 중 하나가 되는 청주병들을 거둘 때나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에서는 이러한 과감한 공격이 성공을 거두었다. 관도대전에서 보여준 조조군 전체의 행보를 보면 틈이 보이면 그쪽으로 과감히 기동해 군세를 패퇴시켜 물러나게 하는 기동을 보여주고 있다. 관도대전의 승패를 가른 오소 전투 역시 기동전이다. 이후 조조와 유사한 기동전술을 보인 사례는 사마의강유 정도다. 하지만 이 때문에 위기를 자주 겪기도 했는데 동탁을 추적하다가 서영에게 대패를 당해서 겨우 목숨을 건진 것이 그 사례다. 역시 과감하게 나섰던 적벽대전에서는 보급 문제, 질병 문제가 겹치면서 무너지게 된다. 기동전 자체는 양날의 검이라서 먹히면 좋은데 안 먹히면 망한다.[32] 그 사례가 조조 특유의 기동이 전혀 안 먹히다 시피한 한중 공방전과 적벽에서 막히고 오림에서 패퇴하는 적벽대전이다.

그러나 원소를 쓰러뜨린 이후부터는 과감함보다 오만함과 안이함이 눈에 띄게 되며, 스스로가 오만해지면서 대실패를 거두게 된 경우도 많았다. 원가의 잔당을 토벌할 때만 해도 원담과 원상의 사이를 가르는 이간계를 쓰면서 틈을 기다리며 싸웠던 조조였지만 이후에는 조금 달라진다. 적벽대전에서는 손권에게 허세를 부리기도 했으며, 패배 이후 형주를 떠날 때에도 병사를 충분히 남겨놓지 않고 떠나면서도 유비가 오면 어쩌냐는 유파의 말에 그럼 내가 친히 육군[33]을 몰고 와서 막겠다는 말을 했지만 실상은 조인에게 형주를 맡긴 채 방치했고, 연합군에게 형주의 대부분을 내어주고 말았다. 오와의 지속적인 싸움에서도 그다지 재미를 보지 못했다. 관서 군벌과의 싸움에서는 마초와 한수 사이의 이간계를 다시 펼쳤고 한중까지 정벌했지만, 그 과정에서 만 단위 손실을 입어야 했으며, 한중 정벌 이후에는 다시 다소 안이한 판단과 움직임을 보여주다가 유비에게 한중을 내어주고 관우의 번성 공방전 때는 관우 하나 막는다고 회남 전선을 통째로 비워 대놓고 손권에게 틈을 노출시키는 등, 말년의 행보는 잦은 실패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오만하고 안이한 모습을 자주 보여주었다.

이에 대해서는 조조에게 가장 강력하고 위협적이었던 원가의 세력을 완전히 말살하고, 상당히 강력했던 유표의 잔당마저 흡수한 뒤라서, 남아있는 손권과 유비의 세력은 별거 아니라고 보았기 때문에 정신적으로 해이해졌다는 분석이 많다.[34][35] 사실 조조는 일생동안 분발하기도 했지만 행운도 많이 따라왔기에 인생 말년쯤 되면 이상한 착각에 빠져서 해이해졌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36][37] 조조 입장에서는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면 그야말로 아찔한 장면도 많았기 때문에 궤도에 올라서고는 과감하게 움직이는 데 두려움이 생겼을 수도 있다.[38] 특히 전성기의 조조와 말년의 조조를 비교하면 도저히 같은 사람인가 의심스러울 정도로 급격한 변화를 보여주는 게 특징.[39][40] 하도 블러핑만 많이 사용하니 적 책사들이 대놓고 허허실실[41]을 쓸거라고 예상하고 있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평가도 있는게, 조조의 최중신 중 하나라고 할 수 있는 곽가가 원가 소탕 중에 사망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그동안 조조의 성공을 이끌어 왔던 책사진이 하나 둘 퇴장하면서 조조 본인의 한계가 노출되기 시작했다고도 볼 수 있다. 확실히 초중반의 조조와 적벽 이후의 조조는 크게 달라졌는데 적벽 전에는 순욱부터 시작해 희지재를 비롯하여 순유, 정욱, 곽가 등의 인력 다단계를 활용해 인력 풀을 충분하게 모아왔다면 적벽 이후에는 본인의 늙음과 동시에 참모진영이 소모되어 고착화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이후 활용되는 S급 참모라면 사마의 정도가 고작인데 적벽 이후에 제대로 된 인재 발굴에 실패한 경우라고 할 수도 있다.

유비가 나이 40대 후반부터 50대 후반까지 적벽을 넘어 형주, 촉, 한중을 얻고 오십에 새장가를 가며 새로 얻은 인재들을 데리고 중장년의 노련함을 보여주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부분. 유비에 비해 조조쪽은 확실히 작은 전투에 강하고 젊을 때 영민함이 빛을 발한 케이스라고 할 수 있다.

촉 방면으로는 장로를 쳐서 땅을 얻은 것은 좋았고, 이후 과감하게 촉으로 움직였어야 한다고 말은 되고 있다. 파촉으로 들어가자는 이 전략이 계속 회자되는 중요한 이유는 성공하면 동오가 홀로 버티기 어려우니 사실상의 통일이라는 점에 있다. 그에 더해서 조조의 유리한 점은 일단 원거리 정벌을 근거리까지 나온 김, 정벌에 성공해서 기세가 좋은 반면 유비 측은 찌르면 어지러워질 수 있다는 점, 더해서 세력 차이가 있고 유비측은 아직 혼란스러우니 조조는 안 되면 그냥 돌아가면 그만이라는 점에 있다. 확실히 젊었을 때의 과감한 조조라면 반드시 시도해 봤을 법한 전략으로 보이는 것은 맞다.

헌데 조조의 일생 가운데 이 파촉 정벌과 비슷한 대목은 유성 원정이다. 내친 김에 그리고 결정타를 위해 오환 원정까지 나가는 것인데 이 때 신하들의 반대는 장성 북쪽까지 나가는 것이 위험부담이 크고 비용이 많이 들 수 있으며, 위신이 떨어지고 유비와 유표의 후환이 두려운 것에 있었다. 여기서 조조의 마음을 움직인 곽가의 진언은 이민족과 원상이 연합할 경우의 곤란함, 그리고 유표와 유비의 미묘한 관계 때문에 공격받지 않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조조는 차근차근 준비해 운하를 판 보급로를 마련하고 또 잊혀진 옛길을 통한 기습으로 빠르게 전역을 종결하는 효과적인 전투로 마무리했다.

유엽이 제안한 파촉진격이 조조 측에서는 안 되도 그만, 찔러서 잘 되면 대박이라는 대체적으로 조조 측의 세력우위에 기댄 낙관적인 전망에 기반하고 있고 나름대로 합당하긴 하다. 하지만 바로 그 전 해에 복황후의 반란 시도가 있었고 손권을 쳤지만 소득이 없이 돌아왔다. 일이 꼬이면 쉽게 나올 수 있는지도 모르는 땅에 들어가고 싶겠는가?

원소의 잔당 처리로 북쪽에서 오래 싸울 때에는 아무리 인물평이라 해도 큰 근거는 없고 용기를 주기 위한 일방적인 폄하에 가까운 손책이 죽어줘서 망한다는 대운이 진짜로 따라와 줬고, 유성 전투 때 가장 큰 위험부담이었던 유비와 유표의 문제는 곽가가 진언했던 유비와 유표의 미묘한 알력 같은 근거가 있긴 했다. 하지만 손권은 이미 적벽대전 시점부터 격렬한 반항이 있었고 4차례나 적극적으로 조조와 싸웠다. 더해서 형주의 관우도 위협적이다. 그리고 이 진격이 이뤄질 경우 가장 큰 이득인 파촉이 무너지면 동오가 홀로 보전할 수 없으니 게임 끝이라는 점은 손권의 격렬한 저항이 필연적으로 따라올 것이라는 점을 시사한다.

조조도 방어하는 상대에게 항상 이긴 것이 아니다. 손권에게 3번이나 틀어막혔는데 기분도 나빴겠지만 강을 막고 뻐기는 상대에게 쉽게 답이 보였을 것인가? 오히려 관도대전 원소의 심정으로 답답하기만 했을 것이며 스스로가 손권의 위신을 세워주는 격이었음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촉으로 가면 유비를 흔들 수 있다지만 사실 그야말로 운빨로 함 해보자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유비는 지형에 의지해서 막을 것이고 장비를 써서 덤빌 것인데, 한중에서도 애먹다가 하후돈의 길 잃어버리기 운빨까지 상당히 따라서 이긴 조조다. 흔들릴 거라고 즉흥적으로 유비를 치는 것을 쉽게 내킬 것이라 보는 것도 이상하다. 유비가 막아내면 위신을 더해주는 것을 손권 상대로 직접 경험하던 와중이다.[42]

각주에도 반란이 얘기되지만 복황후의 반란 시도를 막은 것이 바로 작년이다. 서쪽 험한 땅에 직접 들어가면 반란 시도가 다시 없으리란 법이 없다. 그리고 조조는 원소의 잔당을 처리한 이후 1년 이상 직접 원정을 한 적도 없다. 지킬 게 많아졌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특히 원소의 잔당을 처리할 때 고간의 반란이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조조의 허리를 끊을 수도 있었다는 점에서 상당한 위협적이었다. 이 때는 어떻게 순욱이 미리 순연을 업성에 파견해뒀고 두기를 따로이 보내는 등 잘 처리해줬지만 순욱도 순유도 없는 마당에 어떻게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그리고 파촉은 정리하면 좋지만 안 해도 그만인 땅이고, 원소의 잔당은 반드시 처리해야 하는 문제였다.

반란이나 손권 같은 리스크를 관리하기 위해 자신은 돌아가고 대리의 장수를 내세워서 파촉을 친다? 조조가 그 전까지 유비를 많이 격파하긴 했으나 유비 상대로는 친정을 많이 했고 대리인을 보냈을 때는 오히려 유비가 조조군을 격파했던 적이 많았다.[43] 유엽이 말은 그렇게 해도 조조가 직접 유비를 치러 파촉까지 들어가기에는 상당히 부담스러웠을 것이다. 그리고 대리인 인선도 즉흥으로 짜기에는 애매했을 것이다.

만족함을 알라는 조조답지 않은 뜬금없는 말로 유엽의 입안을 거절한 조조였다. 그게 물론 한중을 먹었으니 다 먹었다 만족했다는 뜻일 수도 있지만 기타 이런저런 위험부담 또한 조조의 심중에 없었을 리가 없다. 그리고 조조의 생애를 살펴 보면 거의 30년 동안 싸워댔는데 솔직히 지긋지긋했을 것이다. 우리야 쉽게 과감하지 않았다 하지만 조조 인생 말년부터 보자면 50대 중반이 넘은 고대인이 기력이 있어봐야 얼마나 있겠는가. 전쟁터 지휘관이 스트레스 많이 받는 것은 당연지사인데 조조는 그 여파로 극심한 편두통까지 앓았다. 조조가 또라이 같은 악행도 많이 하긴 했지만 다 늙고 승상이나 위왕까지 올라서도 옹양주, 한중, 강남까지 가서 싸우고 싶겠는가?[44]

그리고 전쟁터는 험한 일이 생기는 곳이다. 패자가 되기 전의 위기는 물론[45] 조조가 패자가 된 이후인 마초와의 싸움에서도 허저가 없었으면 사실상 조조는 죽은 목숨이었다. 정비가 소와 말을 풀지 않았어도 목숨이 어떻게 됐을지 모른다. 천하를 다 평정해놓고 옹양주 정리하러 갔다가 다 망할 뻔한 것이다. 조조 개인적으로도 50대 중반의 고대인이 이런 경험을 해서 담이 남아나겠는가? 하후연을 지원하지 않은 것에 대한 얘기도, 하후연이 죽은 때가 218년 9월인데 조조가 죽은 시기가 220년 1월이다. 물론 한중에서의 패전과 번성공방전 때 놀란 것도 조조의 수명을 당긴 요인이겠지만 이미 조조는 장수나 장군이라기보다는 목숨이 간당간당하던 노인 시기였던 것이다. 조조가 본거지를 벗어나 멀리까지 간 것만 해도 상당한 분전이었을 수 있다.

번성공방전 때 놀라 크게 과장된 태도를 취한 것? 조조는 이 과장된 태도를 취하고 6개월 이내에 죽는다. 간웅이라는 명성과 조조의 이미지 때문에 간과하기 쉽지만 다 죽기 직전의 노인이 놀랐다고 보면 이상할 게 없다.

어떻게 보자면 마초를 평정한 이후부터는 그의 나이나 건강 상태까지 고려해도 조조가 굳이 움직일 일은 없었다. 유수구 원정 같은 건 굳이 나갈 일도 아니었다.[46] 과감함으로 따지면 죽기 직전까지도 조조는 주변 상황에 비해 지나치게 과감했다고도 볼 수 있다. 단, 건강이 안 좋은 노인치고 매우 과감했던 거지 젊을 때에 비해서는 아니고 또 그래서 애매해서 큰 쓸모는 없는 과감함이었던 것도 맞는 듯하다.

솔직히 말해서 삼국정립의 형세 이후 조조를 제외하면 위, 진 쪽에서 우두머리가 친정한 일도 별로 없다. 그리고 친정 결과가 좋았던 일도 없다.[47] 조비의 친정은 쓸모가 없었고, 사마사의 친정은 사마사가 해야만 했을지도 모르나 결과적으로 전장의 스트레스를 받은 사마사가 죽어버렸다. 조예가 친정하겠다고 할 때도 신하들이 쓸데없다고 말렸다. 조조 역시 아무리 친정으로 권위를 올리고 싶다 하더라도 마초 정벌 이후에는 내정이나 다지면서 후임 사령관 육성이나 하는 쪽이 더 좋았을 수 있다.

4. 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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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성 허창시 '위무제광장'에 세워진 조조의 석상

장쭤야오의 《조조평전》을 보면 군벌들 간의 어지러운 싸움을 종식시키고 오환과 선비를 정복하여 통치체제를 안정시켰으며 호족들에 의한 토지 독점을 견제하고 부역을 덜어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는 한편, 농지세와 호구세를 병합한 호조제를 도입하여 현대 중국정부 수립 전까지 각 왕조가 실시한 조세제도의 근간이 되었고 수리사업을 활성화하고 소금과 철의 전매를 관영화하여 생산력 증대 및 국고의 충실을 기하였으며 사회질서를 바로 세우고 올바른 행정 기풍을 진작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조조의 호조제는 조위가 한나라 말기에 붕괴된 화페경제의 재건에 실패함을 보여주는 사례다. 기존 화폐체제를 살리지 못하니 이를 화폐가 아닌 현물을 바치는 것으로 대신한 것이고 그마저 각 인구수를 정확하게 계측하기 어려워 단순하게 한 집 단위로 묶어서 세금을 매겼다. 이는 당시 조조의 정책이 장기적이지 않고 그의 행정력이 그리 뛰어나지 못했음을 알수 있는 대목으로 당장에는 효과가 있었을지 모르나 조조 사후에는 큰 효과를 보지 못한 전란의 시기이기에 효과를 본 것이지 장기적인 정책은 아니었다.

게다가 조조가 행한 둔전제 역시 우선 민둔제는 당시 각종 유민과 사로잡은 민간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가둬놓고 강압적으로 시행 하였고 그들의 처우는 호적에도 포함시키지 않고 일반 양민보다 못한 처우를 받았다. 더욱이 수취율마저 어마어마하게 높았다. 둔전제 또한 조조가 살아 있을 당시엔 자신의 권위로 이를 억눌렀지만 이를 제도화 하여 폐단을 막을 수단 역시 마련해두지 않은 당장의 눈앞의 고난만을 해결하기 위해서 시행하여 조조 사후엔 귀족들이 둔전을 사유화하는 문제가 불거지기도 하였다.

그러니 호족들에 의한 토지독점을 견제하고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다는 것은 너무 조조의 입장에서 유리하게 해석하는 게 아닌가보여진다. 다만 원호법의 시행으로 군인의 복지를 챙긴점은 그 당시에는 정말 대단한 것이다. 소금과 철의 전매 역시 촉한의 유비와 제갈량 역시 시행하였으며 제갈량은 철과 소금의 생산량과 질을 향상시켜 항구적 이득이 되어 후대에까지 칭송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을 감안할 필요가 있다. 또 오나라에서는 해염의 생산이 성행하고 철, 구리가 난다는 기록이 있다. 한마디로 조조만의 업적은 아니다.

따라서 조조의 내정 정치의 방향을 간단하게 표현하면, 법가 사상가인 신불해상앙에 비견된 평가처럼 사회 전체를 '극도로 긴장되고 일사불란한 계엄령 상태'로 두었고, 위촉오 삼국의 군주들 중 가장 효율적으로 내정 제도를 굴렸지만[48], 제도를 시행하며 나올 수 있는 폐단은 본인의 임기응변으로 대응했고, 제도의 폐단을 막는 제도화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 이 점에서 보면 상앙 같은 이들보다도 못하다. 적어도 상앙의 개혁의 결과물은 진효공부터 진이 멸망할 때까지 시행되었으며 심지어 상앙의 개혁으로 진나라는 전국칠웅 최강국이 되어 끝내 천하통일을 이루게 되었으며 이미 상앙이 활동하던 진효공 시절에만 해도 진나라는 좀 꺾이긴 했지만 나름 전성기를 구가하던 위나라를 캐관광을 보낼 정도로 강성했다. 이에 비해 조조는 어쩄든 자신의 정책으로 하북을 먹고 다지는데는 성공했지만 그렇다고 유비나 손권의 세력에 비해 압도적인 우위를 차지하지 못했으며 본인 생전에는 적벽대전에서 지고 본인 사후에는 제갈량의 북벌로 인한 끊임없는 공격을 받고 심지어 본인 사후 20여 년 후인 흥세 전투에서도 촉나라에게 대패하는 등 신통치 못했다. 결국 하북을 먹고 다지는 데만큼은 본인의 정책이 실효가 있었겠지만 천하를 도모하는 데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그런 조조의 정치는 효율적이었지만 미야자키 이치사다의 표현을 빌리자면 몹시도 위태로운 것이었고, 조조는 그 위태로움의 경계선을 상시 걸어가며 순전히 자신의 능력으로 이를 때웠다. 그러나 조조 본인이 사망하고, 군대건 세금 문제건 인재 선발이건 모든 부분에서 규모가 커지게 되면서 군주 개개인만의 능력이나 임기응변만으로는 한계가 있던 위나라 말기 ~ 서진 정권 하에서는 조조의 유산이라고 볼 수 있는 정책들의 폐단이 쌓이고 제대로 해결되지 못했다.[49] 어쨌거나 조조 본인의 생전엔 효율적인 면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었기에 후대에서 제대로 시정하지 못한 책임까지 조조에게 묻는 것은 무리다.

또한 조조는 전략적 이유로 백성을 강제 이주시키는 행위를 자주 했고, 이로 인해 민초 사이에서는 불평불만이 있었다.[50] 먹고 살게는 해주지만 그렇다고 마음과 몸이 편하게는 못 해주기 때문에 민담 등에서 이미 악역이 된 듯하다. 국경 지대에 있는 농민들 강제 이주는 예사였으며, 민둔제의 경우는 징발된 농민으로 하여금 황무지를 개간시키는 것이다. 백성의 딸이나 심지어 유부녀까지 빼앗아서 병사들의 아내로 던져주었다.[51] 물론 조조가 납득이 가는 이유나 효율성 없이 백성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강요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동탁이나 이각, 곽사처럼 권력을 즐길 줄만 알지 제대로 쓸 줄 모르는 폭군과는 다른 평가를 받지만, 결국 후대에는 여러가지 의미에서 악명을 떨치게 된다.

4.1. 둔전제

조조의 정치 능력의 진수는 임기응변과 현실성, 유연성, 그리고 빠르고 과감한 결단력에 있다. 동시에 일반 민중들의 피해에는 무심한 안타까운 면이 있다.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둔전법(屯田法)으로서 전한 시절부터 이미 존재해왔던 법을 모개 등이 새로 정비한 것이다. 종전의 둔전은 변방 등에 신 경작지를 개척하는 것이었으며 주로 병사들의 군량 자급자족을 위해 제한적으로 이루어지곤 했다. 반면에 조조는 민둔(民屯)이란 것을 두어 수도인 허도 근처에 배치해 전란으로 황폐해진 땅의 생산량을 단기간에 비약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동시에 둔전의 확대 과정에서 강제이주와 엄벌 같은 강압적인 방식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란이 발생하거나 도주하는 경우도 일어났다. 또한 둔전민은 일반 농민에 비해 천대받았다.

시기에 따라 변동이 있지만, 세율은 수확의 50%, 관의 소를 빌릴 경우에는 60%라는 가혹한 것이었다. 기반은 마련해주는 대신 먹고 사는 정도만 보장해주는 제도였기에 유랑민이라면 모를까, 전란에서 비껴나있는 민중들에게는 오히려 더 손해인 제도였다. 일부 학자들은 부패만 없으면 이게 더 낫다는 주장을 하지만, 한나라의 기존 세제 쪽이 오히려 부패가 없으면 당연히 백성들의 부담이 훨씬 덜하다. 오히려 둔전제가 부패할 시 백성들에게 피해가 덜가는 거지 단순하게 따져서 부패로 수확의 30% 정도를 추가로 빼앗기더라도 둔전제보다는 기존 세제가 백성들 손에 남는 것이 더 많다. 게다가 둔전제가 특별히 부패를 저지르기 어려운 장치가 되어있는 것도 아니다. 조조 대에는 이런 것을 임기응변으로 회피했으나 위나라 말기 조방 대에 접어들어서는 조상 일파가 사유화하면서 각종 부정부패로 이외의 수탈이 늘어나기에 이른다. 결국 둔전제는 위나라 마지막 황제 조환대에 폐지된다. 이 여파는 진대에도 남아서 이때에 이르면 부세가 이미 농민 소득의 절반가량이라는 언급이 나온다. 토지에서 거둔 농산물의 25%만이 자신의 것이 된다는 이야기이다. 한나라 시절에 부세가 1/15였음을 감안하면 얼마나 혹독한 것인지 알 수 있다.

둔전제는 단기적으로 조조의 세력을 급성장시키는 데 큰 역할을 한 것은 확실하다. 조조는 임기응변으로 자신의 세력을 확고히 하고 그에 따른 이득을 최대한 뽑아냈다. 그러나 이 제도가 위나라의 전체적으로 봤을 때 우위를 지탱했는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조조의 전략적 우위가 확고해진 것은 하북을 평정한 이후이며, 그 이전에는 원소에게 압도적으로 밀리는 물량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관도대전 당시에는 심각한 물자 부족을 겪었다는 기록도 확고히 존재한다. 또한 단지 기록에 자세히 남지 않았을 뿐, 원소를 비롯한 많은 군웅들도 둔전제 못지 않은 내정 정책을 펼쳐서 경제력 향상을 꾀했다는 것은 기록이 많이 남은 유비와 손권의 예로 쉽게 유추할 수 있다.

과거에는 둔전제가 경제적 체질을 강화했다는 식의 과대평가가 있었으나 이는 논란이 있다. 둔전제 항목을 봐도 알겠지만, 둔전은 결국 40년 만에 폐지되고 만다. 심지어 조조 생전에도 이미 백성들이 둔전에서 일하는 것을 거부하는 등 반발이 극심했다. 그렇지만 북위/수/당의 균전제, 조용조는 둔전제의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는 있다. 균전제는 기본적으로 나라의 모든 땅을 공유지(公有地)로 삼고 백성에게 고르게 경작지를 나누어주고 세금을 받아들이는 법이다. 북위는 왕조 명칭에서 보듯 조위를 계승한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균전제 시행 전후에 (조위의) 둔전제에 관한 언급이 자주 발견되는 것을 보면 균전제의 선구로 둔전제를 이해할 수 있는 소지도 내재되어 있다.[52]

물론 조조의 둔전, 민둔은 기본적으로 조조가 유언에서 본인의 시대를 전시체제라고 인정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임시변통의 소지가 강한건 사실이다. 서진만 봐도 등장으로 조위의 둔전제가 264년 폐지되면서 경작은 조위식의 토지없는 강제 노동이 아니라 일반 민중이 담당하게 되었으며, 그 수입으로 군비의 대부분을 감당했다. 즉, 서진은 조위의 방식을 버리고 국가에서 양민들에게 토지를 분배해주고 토지세를 징수하는 국가 수전제도를 운영하였는데 이는 5세기 북위에서 나타나는 균전제와 같은 방식인 것이다. 이런 제대는 송나라 때부터 더 이상 시행되지 않고, 이른바 전제불립(田制不立)이라고 하여 국가에서 토지의 소유권에 대해서는 방임하면서 기존에 토지세에 더해서 매매의 과정에서도 세금을 징수하는 방향으로 정책을 선회하였다.

또, 당 말기에는 양세법이라는 초대형 세제 개혁이 있었다. 고려의 토지 제도 확립에 영향을 주었다는 것도 지나친 과대 평가다. 고려에서 운영한 둔전은 전형적인 군사 둔전으로, 이는 조조 이전 시대부터 있어왔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둔전제의 영향력은 오호십육국 시대 일부에만 영향을 끼치는 정도로 끝난다. 즉, 조조의 둔전제는 전란기에나 먹힐 만한 임시방편적인 제도였을 뿐이다. 문제는 후대에 황제들이 임시방편으로 쓰던 방식을 그대로 써먹으려 했던 게 가장 큰 문제였다.

4.2. 호조법

전조(田租)는 1무(畝-이랑)에 4승(升)을 거두고, 호(戶)당 비단 2필, 면 2근(斤)만을 내게 하며 달리 제멋대로 거두지 말라. 군국(郡國)의 태수와 상들은 이를 분명히 검찰(檢察)하고, 강민(强民)들이 숨기는 것이 없게 하고, 약민(弱民)들이 부(賦)를 겸하는 일이 없도록 하라.
위서 수전조령

한대에는 인두세(人頭稅)를 기반으로 수취체계를 운영하였다. 그러나 후한 말에 호족들의 토지겸병 증대와 전란으로 말미암아 유랑하는 농민들이 크게 늘어나면서 인두세에 기초한 수취체계가 붕괴되었다. 따라서 조조는 200년 전후로 호조법을 시행한다. 그전까지 중국은 개별 단위로 인두세를 부과해 한 명마다 세금을 적용했으나, 조조는 개별 수취에서 호(戶) 단위의 가족 집단 하나로 치환해 세금을 부과해서 과세 부담을 줄였다. 전쟁을 치르며 내지(內地)의 양곡으로 외지(外地)의 군사와 국민을 부양하는 데는 조조가 전쟁으로 피폐해진 중원에 수리 사업을 대대적으로 재정비한 공헌도 컸다.

호 단위로 부과하는 전통도 이때부터 생겨난 것이다. 다만 이건 족징이나 인징 등이 가미되어서 좋다고 볼 수만은 없지만 어쨌든 이러한 제도의 시행은 분명히 유의미한 것이었으나, 제도의 관리 측면까지 세세하게 법령화되어 있지는 못했다. 제도 자체를 관리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조조 개인의 역량에 의존했다고 볼 수 있으며, 호족 문제와 더불어서 보았을 때 엄청난 세제 개혁으로 간주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어쨌거나 조조가 후대의 조용조 체제 성립의 첫 삽을 뜬 인물임에는 분명하다. 실제로 이후 위와 진에서는 토지면적에 따라 일정량의 곡물을 거두고, 호의 품급(品級 : 호등(戶等))에 따라 직물(織物)을 수취하였는데, 전자를 조(租), 후자를 조(調)라고 불렀다.#

4.3. 구현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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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른바 유재시거, 구현령을 내려서 능력 위주의 인재 등용을 시행한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불인불효'해도 능력만 있으면 뽑겠다는, 도덕성과 상관없이 능력만 있다면, '덕행과는 상관없이 능력으로 인재를 뽑겠다.'라는 선언은 당시로써는 상당히 파격적이었다. 한 시절에는 관직을 뽑는 절차를 "효렴(孝廉)"이라고 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인물의 덕행을 기준으로 하여 사람을 선발했었기 때문이다. 뭐, 사실 그 덕행이란 게 결국, 사대 호족 내에서 친목/인맥빨로 나눠 먹기라는 것은 유명한 이야기지만. 조조를 높이 평가하는 입장에서는 구현령을 '유교 도덕을 뛰어넘은 능력 위주의 선발'이라고까지 하는 등의 칭찬을 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실 공직자를 등용할 때 장래를 생각한다면 능력과 도덕성을 별개로 판단할 수 없다. 공직자가 능력은 있는데 도덕적이지 않다면 부정부패의 위험성이 있으므로 해로울 수 있다. 그리고 유재시거가 애초에 거기서 말하고 싶은 것이 진짜 도덕성과 능력인지도 의문이다. 인재의 명성과 도덕성이라는 건 기존의 관리들이나 지방 호족들에게 얼마나 알려졌고 어떤 평가를 받고 있는가라고도 할 수 있다.[53] 조조가 유재시거를 주장한 것은 이제부터 관료 등용을 추천에 의존하는 관례를 따르지 않고 조조 자기 의중대로 하려는 시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물론 결국 구현령은 실제로는 이루어진 정책이라고는 볼 수 없으므로 이 의도가 성공했다고 볼 순 없다. 또한 구현령은 실질보다는 그 의의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이는 어떤 시대에나 그렇듯이 큰 의미가 없는 일이었다. 삼국시대에도 재능보다 덕이 부족한 인재가 더 널렸고, 바보가 아닌 이상은 '유력가의 추천'을 받는 인재가 발탁되는 것이 당연했으며, 조조마저도 그러한 시스템의 한계에서 벗어난 적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 이렇게 불인불효도 상관없다면서 구현령 내려놓고 공융을 불효죄로 죽인 게 조조다.

그리고 조조의 용인술에서 항상 나오는 말이 구현령을 내세워 '실력에 따라 인재를 중용하다'인데. 말 자체도 모호하거니와 삼국시대에서 실력에 따른 인재 등용을 안 한 군주는 사실상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유비가 그러했고 원소가 그러했으며 손책이 그러했고 손권도 초반 한정 그러했다. 동시대 군주인 유비와 손권이 인재 등용에 있어서 조조 이상의 파격적인 인선을 보인 사례는 분명히 있었다. 과연 조조의 인재등용 방식이 타 세력과 뚜렷한 차별점을 줄 수 있을 정도로 특별한가? 애초에 난세이니만큼 '인성'보다는 '능력'이 더 중시되는 것은 당연하다.

먼저 유비의 경우, 한중왕 즉위 당시 최요충지 한중 태수를 자신의 최측근이자 이미 전중국에서 그 능력을 인정받던 만인지적 장비를 제끼고 일반 부곡 출신의, 당시엔 상대적으로 무명에 가까웠던 위연을 중용해 맡겼다. 또 자신에게 전혀 충성하지 않았던 유파를 끝까지 붙잡아 그 능력만은 요긴하게 활용했다. 당장 친인척 없이 밑바닥 인생을 살았었던 서서가 유비에게 중용된 것만 봐도 그렇고, 그 덕분에 제갈량을 얻을 수 있었는데다가 유비 자체도 밑바닥에서부터 관우, 장비, 간옹 정도만 데리고 기업을 시작했다. 또 손권 같은 경우는 어려서부터 전장을 전전하느라 학식을 쌓지 못해 상소를 올릴 때 글조차 쓰지 못하고 말로 대신해야 했던 무지렁이 무부에 불과했던 여몽이 배움이 부족할 뿐 머리 자체는 엄청나게 좋다는 것을 간파하여 직접 호학을 권하며 지용겸장으로 성장시켜 활약할 수 있게 해주었으며, 능력을 제외하고는 생양아치에 불과한 반장을 도덕성을 묻지 않고 중용해 그 능력만큼은 잘 활용했다.

또한 조조의 호적수였던 원소흑산적과 이민족인 오환족까지 포섭해 자기 세력으로 만들었다.

결국 위의 현실 정치에서 구현령은 실질이 수반되지 않은 선언에 불과하였다. 어차피 관리 선발 기준은 한 시대와 크게 다를 것이 없었으며, 후대의 과거 제도나 시험 선발 같은 체제 정비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여러 차례 선포되었음에도 구현령이 현실 정치에 미친 영향력은 적은 편이다. 사실 조조 휘하에서 활약한 인물들을 보면 어디 유명한 가문의 누구라는 경우가 꽤 많으며 인물을 추천하여 등용한 인물이 지인을 추천하여 등용시키는 비제도적 등용 체계였다.

그나마 조조 생전에는 창업 군주만 가질 수 있는 강력한 전권과 실질을 추구할 수밖에 없는 난세의 현실 때문에 비교적 낮은 신분 출신의 인재나, 예법에 크게 얽매이지 않은 인재들이 적지 않아 광폭한 인재풀을 구성했다. 그러나 이들이 '공신'의 지위를 얻으면서 점차 인재풀이 고착화 되는 과정이 나타난다. 정작 이것을 파악하고 막아야 할 조조 본인은 노화의 영향인지 젊은 시절만큼 적극적으로 인재를 관리하지 않았다. 이렇듯 조조가 만든 시스템에도 허점이 보이는 것은 마찬가지이다. 조위 말에 호족세력이 발호한 것은 종친을 배제하는 대신 호족들로 땜빵한 조비와 조예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조비가 황제를 칭할 때 호족들의 지지가 필수적이었던 게 우연은 아니다. 그것보단 조비가 호족에게 기댈 수밖에 없도록 조장한 조조의 책임도 있다고 보는 것이 맞는다.

결국 조조 사후의 조비 시대에 이미 기존의 호족 집단에서 공신 계층을 이루면서 성장한 문벌 귀족들이 고위 벼슬을 독점하다시피 하게 되었다. 위나라의 성립 이후에는 더욱 더 명문가 출신이 고위직을 독점하게 되고, 예외적인 사례는 등애 정도만 남게 된다. 이런 풍조는 위진남북조시대 중국 정치계를 대표하는 귀족 계급이 형성되는 흐름으로 이어지게 된다.

이렇게 지나치게 강력해진 귀족 계급 때문에 오히려 상대적으로 '문벌'이라는 측면에서는 그 계통부터 청류와는 거리가 멀어 미묘한 측면이 있었던 조씨의 세력은 흔들리게 된다. 조예 이후의 조상 정권에서는 조씨, 하후씨와 인척들이 모여서 정권을 형성하고 귀족들과 대항하게 되지만, 결국 귀족들의 지지를 받은 사마씨에게 무너지게 된다. 아이러니하게도 사마소를 따라 위를 뒤집어엎은 자들은 순욱, 종요, 신비, 화흠, 왕랑, 가규 등의 후손이었다.[54]

그리고 조조 본인부터가 '부모에게 잘 하는데 어떻게 임금에게는 못하겠는가?'라면서 인재를 등용한 사례도 있다. 그리고 사실 유교에서 인이나 효를 강조하는 것도 이런 맥락이다. 일단 자기 부모한테 잘 하고 착하게 살아야 충성도 한다는 것이다.[55] 물론 조조가 살던 시대는 이런 효도에 관한 관점을 자기 이득을 위해 이용하는 비정한 위선자들이 속출하긴 한다. 그러나 조위가 무너지는 것도 결국 불인불효불충한 무리들에 의했다는 것도 생각해 볼만한 이야기다. 그리고 이렇게 능력으로만 인재를 뽑겠다는 것을 공표했다는 사실만으로 큰 상징성과 연관성을 느껴볼 만한 시대는 최소한 21세기 중국까지도 아직 도래하지 않았다.

4.4. 원호법

조조는 관도대전 그리고 적벽대전과 큰 싸움이 끝났을 때마다 영을 내려 싸움에서 죽은 장병들에게 자손이 없으면 친척으로 하여금 대를 잇게 하였다. 또한 조조는 그 가족에게 농사지을 땅을 나누어 주고 밭갈이 소를 주었다. 나아가 각 고을에는 학교와 선생을 두어서 죽은 장병들의 자식들을 교육시켰고 장병들을 위해 묘당을 지어 제사가 이어지게 도왔다. 이렇듯 조조는 살림이 궁핍한 이들을 위로하고 구제할 것을 명하는 체계적인 원호법을 사실상 처음으로 실시하였다.

5. 인재 등용

인재 욕심이 대단해서 자신과 악연이 있었던 인물이라도 과감하게 기용하는 면이 있었다.
  • 진림: 진림은 조조의 3대 조상까지 싸잡아 욕하는 글을 썼는데도 살아남아 순조롭게 출세한다. 일단 시위를 떠나면 화살은 날아갈 수밖에 없다며 대답하자, 조조는 자신을 위한 화살이 되라며 설득하고 진림은 그 뒤부터 조조의 문관이 된다.[56]
  • 위충: 장막이 연주를 침공하자 위충은 도망가버려서 그를 신뢰하고 있던 조조는 분노한다. 그러나 위충을 다시 사로잡았을 때 너의 재능을 아낄 뿐이라며 다시 기용했다.
  • 장수: 장수에 의해 친족들이 죽었음에도 등용했다.단 장수의 경우엔 그를 비롯해 친족들의 말로가 좋진 못했다. 그래도 일단 이 부분은 명확하게 밝혀진 바가 없어 추측만 가능할 뿐이고, 적어도 합류 당시엔 깔끔하게 맞아줬다. 그러나 조조가 살아있는 시절에 발생한 문제다. 자세한 내용은 장수(삼국지) 참고.
  • 가후: 가후 때문에 친족들이 죽었음에도 등용했다. 가후는 이후 조조가 후사 문제를 문의할 만큼 총애받는 책사가 된다. 다만 가후의 처세술이 좋다는 것을 감안해야 한다. 원한이 있으면 보복하는 조비가 장수에게는 보복했지만 가후에게는 보복하지 않고 오히려 중용했다. 조비도 매료시켰으니 조조를 매료시키는 것은 별거 아니다.
  • 유웅명: 마초에게서 조조에게 도망왔다. 그러나 다시 조조를 버리고 장로에게 도망갔다. 장로가 격파되자 유웅명은 조조에게 항복하는데 조조는 그를 용서하고 관직에 복직시켰다.
  • 필심: 필심은 연주 시절 조조에게 등용되었다. 장막, 여포가 연주에서 모반을 일으켰을 때 필심의 가족을 인질로 잡자 조조는 필심을 장막에게 보내준다. 필심은 돌아오지 않았다. 조조가 장막, 여포를 격파하고 다시 필심을 사로잡았는데, 조조가 "부모에게 효도하는 사람이 어찌 자기 임금에게 충성하지 않겠는가? 그는 바로 내가 찾고 있는 그런 사람이다"라며 필심을 다시 등용했다.
  • 유비: 여포에게 서주에서 쫒겨난 후 조조에게 갔을 때 조조가 자신과 동등한 군벌로 대응하며 좌장군 벼슬까지 줬지만 유비는 조조 밑에 있을 생각이 없었고 조조의 유비 끌어들이기는 결국 실패했다.[57]

반면 자기 휘하에서 오래 일하더라도 비위에 거슬리는 인물들에게 냉혹한 일면이 있었다.
  • 양수: 연의에서는 그 유명한 계륵 에피소드 이후 처형시킨다. 정사에서는 몇 달 뒤에 죽이지만. 어쨌든 양수가 재능은 있었지만 조조에게 밉보여서 죽은 건 동일하다.[58]
  • 공융: 유재시거 내세우면서 불효자라고 죽였다.
  • 최염: 최염이 감옥에서도 의연한 태도를 보이자 '이런 건방진 놈을 봤나?' 하고 자결시켰다. 심지어 최염은 조조와는 사사롭게는 사돈관계였다.
  • 최씨: 최염의 조카딸. 문제는 조조의 아들인 조식의 아내, 즉 며느리인데도 죽였다(!).
  • 예형: 예형은 명성 때문에 죽이기 껄끄럽자 유표에게 보냈다. 물론 유표도 죽이기 껄끄러워 황조에게 보냈고 단순한 황조에게 막말을 해 황조가 단칼에 죽였다.
  • 허유: 자신과 친분이 있었고, 관도대전에서 큰 공을 세웠던 허유도 죽였다. 단 허유같은 경우엔 본인의 잘못도 크다.
  • 누규
  • 주불의
  • 순욱: 조조가 구석을 받는 것을 순욱이 반대하자, 그와 거리를 두게 되었다. 연의에서는 순욱을 전장으로 끌고 가서 여러 구실을 붙여 죽이려 했는데 순욱이 이를 알고 병을 핑계로 집에 있자 이제 그대에게 내릴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의미로 빈 도시락통을 보냈다. 이에 순욱은 그 뜻을 깨닫고 독약을 먹고 자살했다. 정사에서는 순욱이 조조의 뜻에 반대한 것에 근심하다 병을 얻고 죽었다..고는 하나 순욱순유가후전 뒷부분의 배송지 주석에는 찬합 이야기가 실려 있다.
  • 모개: 최염의 동료였던 모개 또한 밀고로 인해 체포되었으나 다른 동료들의 변호로 관직을 빼앗기고 쫓겨났다. 이후 모개는 병을 얻어 죽게 된다.
  • 화타: 비록 자신의 눈에 거슬리는 행위를 많이 했다는 것을 감안해야 하지만 순욱이 말려는데도 죽였다.
  • □희: 조만전에 따르면 조조는 총애하는 희(姬, 첩)가 있어 조조가 낮잠 자는 것을 늘 수종했는데, 조조가 베개를 베고 누우며 조금 이따가 자신을 깨우라고 말했다. 희(姬)는 조조가 편안히 잠든 것을 보고 깨우지 않았는데, 조조가 스스로 잠이 깬 뒤 그녀를 몽둥이로 때려 죽였다.
  • 변양
  • 환엽
  • 원충

조조의 장점으로 언급되는 소위 '능력주의'나 관대한 모습은 오직 정치적으로 쓸모가 있는 사람들에게만 적용된다는 안타까운 한계점이 있다. 조조는 기본적인 그릇은 매우 컸지만, 이용 가치가 없는 사람들은 미물처럼 취급하는 구석이 있었다. 물론 이용 가치가 없다는 말은 능력이 떨어진다는 말이 절대 아니다. 당장 조조에게 밉보여 버림받거나 살해당한 인물들 가운데는 능력은 물론 인품마저 훌륭한 인물들도 적지 않았고 순욱처럼 자신의 공업에 큰 공로를 한 자들도 상당수 있었다. 이런 조조에 대해 장야신[59]인재를 구할 때 충성스럽거나 효도하지 않아도 된다더니 왜 불효죄로 사람을 죽였나 하는 내용의 말을 했다. 더불어 조조가 살아 돌아온다해도 이 질문을 하지 못할 것이라고 얘기했다. 조조가 질문하는 사람을 죽여버릴까봐 두려우니까. 위진정통론 시각으로 편찬된 정사 삼국지의 저자 진수조차 최염이 조조에게 살해당한 것은 매우 억울한 일이라고 비판했다.

순욱의 간언을 듣고 헌제를 맞이한 조조였고, 원소는 헌제의 정통성을 거부하는 입장이었지만, 관도대전 직전까지 조조는 관료들의 충성을 얻지 못했다. 오히려 원소와 뒷거래에 나서는 사람들이 속출했다.
태조는 성격이 엄했으므로, 연속(掾屬)들은 공무에 관한 일로 왕왕 곤장을 맞기도 했다. 하기는 항상 독약을 가지고 다니며 죽어도 치욕은 받지않을 것을 맹서하였기 때문에 시종 벌을 받지 않았다.
위서 하기전

여기서 연속이란 말단 관료, 소속된 관료를 뜻한다. 말단 관료를 처벌한 일은 대수롭지 않을수도 있지만 위나라에서는 조조가 구현령을 발표한 이후로 속관도 조조에게 직접 상소를 올릴 수 있는 권한이 있었고 하기, 최림, 최염 등 명문 호족들도 처음에는 속관으로 시작했다. 연속이 비록 직급은 낮지만 명문 일족의 귀족들도 임명되는데, 조조는 그들을 모두 몽둥이로 다스렸던 것이다. 위나라의 군신관계의 분위기가 대단히 억압적이었음을 보여주는 일화다.

위풍은 조조가 죽기 1년 전에 반역을 도모했는데 이 반역 사건은 기존의 그것과는 다른 굉장한 특징이 하나 있다. 바로 위나라 고관의 자제들이 위풍과 함께 반역에 참가했다는 것이다. 왕찬, 장수, 송충, 유이의 자식들이 위풍과 뜻을 같이 했으며 결국 적발되어 어떤 집안은 대가 끊기고 어떤 집안은 친척이 대를 잇는다. 즉, 조조가 왕이 되고도, 죽기 1년 전까지도 위나라를 엎으려는 시도가 귀족 자제들 사이에 있었을 정도로 조조와 신하들의 연결 고리는 튼튼하지 않았다는 말이다.[60]

6. 신체

6.1. 무예

개인적 무예와 용력도 상당했던 모양이다. 맨손으로 큰 개를 때려잡았다는 기록도 있고, 조조가 직접 칼을 썼다는 기록도 몇 개 존재한다. 보통 삼국지에서 무력으로 유명한 군주라고 하면, 압도적으로 여포와 손책, 손견 정도가 나오고, 그 다음으로는 공손찬이나 유총을 꼽으며 손권이나 조조한테서 의외의 무예 기록들이 나오곤 한다.

조조 역시 만만치 않은 무예를 자랑했다. 물론 완력이나 싸움 실력이 없어도 큰 문제가 없는 현대와 다르게 당시에는 시대상이 시대상이다 보니 어느 정도의 무예와 완력은 기본 소양인 건 감안해야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기록이 꽤나 비범하다.
태조가 일찍이 중상시 장양의 집에 몰래 들어갔다가 장양에게 발각되었다. 그러자 뜰에서 수극을 휘두르다 담을 넘어 달아났다. 무재가 남들보다 뛰어나니 능히 (그를) 해칠 수 없었다.
이동잡어

대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젊은 시절 조조가 십상시 중 하나로 유명한 장양의 집에 들어갔다가 걸리는 상황이 터진다. 정사에서는 그 이유가 나오지 않지만 조조의 빽이 환관계의 전설이라고 칭해지는 조등이라[61] 얌전히 잡혔어도 별 일은 없었겠고 아마 그래서 더 함부로 못 건드렸을 가능성도 크지만, 직접적으로 무재가 남달라서 그랬다는 언급도 있다.
군사들이 모반하여 밤중에 태조의 장막을 불태우자 태조가 손수 검으로 수십 명을 죽였고 나머지가 모두 패하여 흩어지자 진영 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모반하지 않은 자는 500여 명이었다.
위서

반동탁연합 때, 조조는 답답하게 진격을 멈춘 다른 제후들을 놔두고 진격했다가 하필이면 동탁군 최고의 명장 중 하나인 서영에게 걸려 패배를 당한다. 병력이 상당히 증발한터라 조조는 양주자사 진온의 도움으로 서주의 단양병[62] 병력 4,000명을 모으는데, 돌아오는 길에 반란이 터졌다. 이 기록은 그때의 일로, 밤중에 그 혼란스러운 와중에도 조조가 몸소 수십 명을 베어가며 위기에서 탈출했다고 한다. 물론 진영에 조홍 같은 쟁쟁한 이들도 함께 있었기에 조조의 '용맹'만으로 이긴건 아니겠지만 그래도 대단한 건 변함없다.
재력(才力)이 남보다 뛰어나 손수 활을 쏘아 나는 새를 맞추고 맹수를 사냥했으니 일찍이 남피에서 꿩을 사냥해 하루에 63마리를 잡은 적도 있다.
위서

조조는 궁술 실력도 뛰어났다. 삼국 제일의 명궁 이런 수준은 아니지만, 하루에 꿩 63마리 사냥이면 대단한것이다. 물론 사냥 관련 기록에서는 맨 손으로 맹수를 쳐내는 손권이 있어서 빛이 바래는 감이 있다.

위에서 나오듯 전장에서 살다시피 하면서도 크게 아팠던 적이 없고,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나 죽음의 위기에서도 기어이 살아 돌아왔으니 말은 잘 탔을 거고 무예가 수준급이었던 건 분명하다.

6.2. 건강

평생 전장을 돌아다니며 격무 중에 크게 아프거나 잔병치레한 기록이 없다. 후술할 조조닭의 일화에서 볼 수 있듯이 몸에 좋은 음식을 골라 챙겨먹으며 건강 관리를 철저히 한 모양이다.

평생동안 지병인 편두통에 고생하기도 하는 등 마냥 건강하기만 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63][64] 조조의 꼼꼼하고 사려깊은 성격과 그가 관리해야 했던 넓은 영지와 복잡한 시대상 등을 보면, 골치가 안아플 수 없었다. 그 시대 평균 수명이 지금보다 훨씬 짧고 의학 수준도 매우 떨어졌다는 사실을 감안하면 60대 중후반까지 살았던 조조는 고대인으로서 상당히 장수했다고 볼 수 있다. 무엇보다 편두통은 의학이 어마어마하게 발전한 현대에서도 어떻게 해볼 수 없는 불치병이다.

혹은 실제로 의학적 지병이 있었을 수도 있는데, 후한서에 나오는 조조의 병은 '두풍(頭風)'이었다. 이는 현대의 삼차신경통을 포괄하는 개념이다. 이전부터 계속 앓아왔고 차도가 있었다면 치료 불가능이 아닐 수도 있다. 삼국지 미디어 매체들이 조조를 냉혹한 초인으로 많이 표현하지만 실제로 조조는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을 것이다. 따라서 치료가 가능하더라도 조조 본인의 성향과 지위를 감안하면 재발이나 악화가 되어 치료한들 무의미해지게 된다. 그렇다고 은퇴하여 요양에만 전념할 상황도 아니었다. 밑에 가족 관계에 나와있지만 한 자식들부터 60대에 얻은 늦둥이까지 포함해 수많은 자식들이 있었던 걸 보면[65] 건강 관리에 굉장히 신경을 썼던 모양이다.

그런데 당시 위나라의 고위급 장수들이나 재상들은 60대~70대는 물론이고 80대, 심지어 90세 이상까지 산 것으로 추측되는 인물들도 꽤 발견되는 터라 당대 기준으로 충분히 살만큼 산 조조조차 단명한 것처럼 보일 지경이다.

6.3. 외양

정사에서는 이상하게도 조조의 외모에 대해 기록하지 않았고, 야사에서는 조조가 작고 왜소했다는 식의 기록이 있기 때문에 조조의 풍채가 훌륭하지는 않았을 것이라고 짐작할 수 있다. 보통 창업 군주를 묘사할 때 외양을 실제보다 높게 기술해주는 편인데, 조조의 경우 그런 묘사가 없다. 주원장 수준으로 추남은 아닐 지라도 패업군주에 걸맞지 않은 볼품없는 외모의 소유자일 가능성이 높다.

조조의 외모에 대한 기록이 있는 야사가 두 개 있는데 세설신어에서는 '형루(形陋)', 위씨춘추에서는 '자모단소(姿貌短小)'[66]라는 한자를 사용해서 조조의 외모를 묘사한다. 태평어람에 인용된 『위씨춘추』에는 무왕(조조)은 체구는 왜소하지만 의기양양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조조가 어린 시절에 원소, 원술 등의 친구들과 어울려 놀 때 상당한 놀림거리를 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단순 환관의 자식이라는 출신 뿐 아니라 키가 작고 볼품없이 생긴 외모도 적지 않게 작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세설신어에는 조조가 자신의 용모가 흉노의 사신을 제압할 위엄이 없다고 생각해 신하로 위장하고 최염을 왕좌에 세워서 왕 노릇을 하게 한 후 흉노의 사신을 접대하게 했는데, 그 사신에게 나중에 위왕의 풍채가 어떠냐고 묻자, 그 사신이 "위왕은 대단히 위엄이 있었지만 단지 그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칼을 들고 시립하고 있던 사람이야말로 진짜 영웅이었다."라고 했다. 그래서 조조가 그 사신을 위험하다고 여겨 사람을 시켜 살해했다고 한다. 물론 그냥 뜬 소문이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으나, 흉노 같은 경우 다른 대등한 외국이 아닌 일개 야만 부족이었고, 그 당대에 오늘날 유엔 같은 국제질서가 있던 것도 아니었기에 그냥 꾸며낸 얘기라고 치부하는 것 또한 지나친 태도다. 이런 얘기가 있는데 믿거나 말거나 쯤으로 흥미롭게 볼 순 있을 듯하다.

삼국지연의에서는 조조가 첫 등장 할 때 '신장 7척[67], 가느다란 눈, 긴 구레나룻(身長七尺,細眼長髯)'라는 외모 묘사가 나오는데 이는 연의의 창작이라서 역사상의 조조의 외모와는 관련 없다.

한국에서는 고우영 삼국지의 영향을 받아서(+마른 사람은 교활하다는 이미지)조조는 대체로 깡마르고 광대뼈가 튀어나왔으며 째진 눈에 이방수염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일본도 대체로 비슷하지만 좀 더 미형에 카리스마있게 그려지는 편이고 반면 중국 매체에 나오는 조조는 덩치도 있고 수염도 풍성한 풍채 좋은 호걸로 묘사된다.

7. 예술가의 면모

조조는 당대 문학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는 5언의 악부시(樂府詩)에 새로운 풍조를 불러일으키고 문학으로서의 완성도를 높인 일류 시인이었다. 그의 시대에 처음으로 개인의 문학, 개성의 문학이 탄생했다. 박물지에 따르면 환담, 채옹은 음악에 능하고 빙익(馮翊)의 산자도(山子道), 왕구진(王九眞), 곽개(郭凱) 등이 바둑을 잘 뒀는데 조조가 이들과 동등하게 능했다고 한다.

조조는 창업 군주에 준하는 치적[68]을 쌓았다. 조조만큼 예술가로서 높은 경지에 도달한 동시에 정치와 행정, 전쟁 같은 군주로서의 능력까지 뛰어난 인물은 거의 없긴 하다. 음악에 조예가 깊고 문장에도 재주가 있던 당현종도 조조의 예술적 경지에는 미치지 못하고[69], 천재적인 예술가였으나 결국 나라를 망친 송휘종, 정무를 완전히 팽개친 천계제는 나쁜 사례다. 중국사의 역대 군주들 가운데 조조만큼 군주로서의 능력과 예술가의 자질을 높은 수준으로 겸비한 인물을 굳이 찾아 본다면 선덕제 정도밖에 없는데, 이상하게 선덕제는 명군으로나 예술가로나 모두 존재감이 높지 못하다.

두 번의 서주 대학살이라든가[70] 관도 대전 전 후 7~8만에 달하는 원소군 포로를 모조리 죽이거나 생매장하는 등 상식적으로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잔혹한 기행을 이 예술가적 기질과 연결시키는 사람이 많다. 중국계 일본인인 역사 문학가 진순신은 저작 <소설 제갈공명>에서 이러한 조조의 부정적인 의미의 예술가적 감수성을 예리하게 드러내는 장면을 묘사한다. 작중에서 조조의 서주 대학살로 인해 부모를 잃고 남은 가솔들과 함께 피난길을 떠나는 제갈량은 숙부 제갈현에게 "왜 조조는 죄없는 백성을 죽이는 겁니까?"라고 묻는다. 그러자 제갈현은 "조조가 시인이라서 그렇다"라고 답한다.[71] 적벽대전 이후 말년으로 접어들수록 이전의 과감하고 냉철한 모습과는 달리 왠지 뭔가 나사 풀린 모습을 자주 노출하게 되는데, 이 문제 역시 조조의 예술가적 감수성이 노쇠화와 맞물려 안 좋은 방향으로 발휘된 경우로 보는 시각도 많다. [72]

말년의 조조는 적벽대전 이후 유비의 침공에 대비해 군대를 남겨놓으라는 유파의 요청을 가볍게 즈려밟고 남형주를 버리다시피 뒤로 한채 즉각 철수해 결과적으로 유비의 웅비를 뒷받침할 기반을 마련해 준다. 또한 한중을 점령하고 나서는 한중은 익주의 목구멍이나 다름 없으니 지금 이 기세를 몰아 그대로 쇄도하면 능히 유비를 깨부술 수 있다는 유엽사마의의 합리적인 의견을 무시하고, 곧바로 철군해서 결과적으로 익주를 점령한지 얼마 안 된 불안정한 시기에 익양 대치 등으로 위기에 직면해 있던 유비의 숨통을 터줬다. 그리고 한중 공방전 때는 한중을 구원하기 위해 목적지를 목전에 둔 장안까지 멀쩡히 잘 친정나왔다가 어째서인지 그대로 장안에 눌러앉아 하후연과 장합 등이 유비군에게 당하고 있는 것을 반 년 이상 수수방관하다 총사령관 하후연이 전사하는 최악의 상황에 몰리고 나서야 뒤늦게 부랴부랴 구원에 돌입했고, 결국 한중을 빼앗김으로써 결과적으로 한중왕 즉위라는 유비의 최전성기를 열어준다. 마지막으로 번성 공방전 에서는 관우의 북진에 필요 이상으로 과민 반응하며 멘붕에 빠져 갈피를 못잡고 하북으로 천도를 하네마네 우왕좌왕하다가 사마의와 장제의 진언을 듣고 비로소 정신을 바로잡고 올바른 대응을 펼칠 수 있었다. 사실 이 부분도 좀 어폐가 있는 게, 아무리 사마의와 장제의 말을 듣고 손권과 이면적 합의가 있었다지만 관우 하나 잡겠다고 손권과 합의가 이루어지자 마자 멀리 합비의 장료와 양주 26군의 사령관 하후돈까지 형주로 오라고 동원하고 온회전에도 나오듯이 조서를 내려 회남 방면을 지키기 위해 회남에 주둔하고 있던 여러 주의 군사들까지 각기 소집하며 회남전선을 텅 비우면서 그야말로 박박 긁어모아 형주로 보내고 이 지역을 무방비로 노출시키는 건 역시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손권이 그렇게까지 믿을 만한 사람인가 하면 당연히 아니고 말이다. 아무리 우금이 이끄는 정예 7군이 수몰돼 전멸[73]했고 또 관우의 기세가 대단히 강성해 내부에서 반란까지 들끓었다곤 하나 관우의 군세는 조위의 전력에 도저히 비할 바가 아니다.

사실 말년에 뭔가 이전과 많이 다른 어설픈 인물로 급변모했다는 인상을 주는 건 난세의 간웅으로서 조조와 인물상이 상당 부분 겹치는, 한때의 절친이자 호적수였던 원소에게서도 보여지는 일면이다. 원소 역시 평생을 과감하고 냉철한 간웅으로 철두철미 일관하다 말년 관도대전 무렵부터 뭔가 급격히 성급하고 허술한 모습을 노출하더니 관도 대전에서 참패하고 얼마 안 가 급사하면서 원가의 패망을 불러왔다.

히지만 이런 것을 조조가 예술가적 기질을 통해 자신의 감정을 잘 표현해서 좋았고 원소가 아니라는 식으로 볼 수도 있지만, 갖다붙이기식 해석밖에 되지 않는다. 예술가적인 면모가 있어서 좋았다면 꾸준히 좋은 판단을 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고 원소보다는 좋은데 그게 예술가적 기질 때문이라는 것은 말이 안 된다. 일단 한 명은 급사했는데 예술로 스트레스를 풀지 않아서였고 한 명은 더 오래 살았는데 잘 놀아서 그랬다는 게 이상한 얘기니까.[74]

예술가 기질과 군주 노릇은 상극인가? 중국사 최고의 명군이라는 강희제 같은 경우도 연주하고 잘 놀았다는 얘기가 전하고, 한국사 최고의 명군이라는 세종대왕도 음악에 능했다. 그리고 한고제도 직접 음악 연주하면서 대풍가를 부르고 춤추고 놀았고, 그의 숙적인 항우도 해하가를 불렀다. 그 외에도 시를 남긴 황제나 명장들은 엄청 많다. 여러 사상가들도 정치에 있어서 예술과 정치의 관계를 논하고 있다.

그렇다면 최고의 예술가가 되고 또 동시에 최고의 군주가 되는 것은 어려운가? 그야 당연하다. 왜냐면 뭐가 됐건 간에 두 가지에서 상당한 경지에 오르는 것은 어렵다. 물리적이고 시간적인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보통 하나의 일을 잘하는 것도 쉽지 않다. 두 가지 일을 잘 한다면 머리도 좋고, 두 가지 일에 재능도 있는데, 운도 좋아서 재능이 있는 두 가지에 다 접촉할 수도 있었고 그 두 가지를 다 깊게 시도해 볼 만한 시간적 재정적인 여유가 있는 것이다.

예술가 기질과 군주 역할을 굳이 상극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대중들에게 흔한 미친 예술가 이미지를 뒤집어씌운다면 가능할 것이다. 송휘종이나 조조나 그런 부분이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그게 무엇이건 간에 취미 등에 너무 열중하면 사업은 망하기 마련이다. 예술이 아니라 다른 헛짓거리를 해서 망한 군주들도 많다. 예술을 해서 망한 군주들은 인격에 영향을 미치는 예술만의 어떤 독특한 특성 때문에 망했다고 할 수도 있으나, 그러면 예술 말고 다른 취미에 빠졌거나 다른 이상한 행각을 벌이다 망한 군주들도 다 그 취미나 행각의 어떤 고유한 특성이 필요하게 된다. 그것도 이상하다.

예술에 심취했던 군주들은 예술을 했으니까 그나마 예술가 개인으로서의 업적이라도 남은 것이고, 하나에 시간을 쏟고 성취를 얻은 만큼 다른 것은 잘 못하는 게 사람이라면 보통 그렇게 된다. 사람 목을 마구 자르는 폭정을 저질러서 망한 군주들은 예술가로서의 업적 같은 것도 없다.

단지 일반적으로 볼 때 이와 같은 정치가나 사업가나 경영가와 같은 류의 사람들은 취미도 대체적으로는 남성적인 경우가 많았다. 과거 인물들은 사냥에 심취한 경우가 많았고 그게 아니더라도 격구 등의 스포츠 취미는 자주 볼 수 있다. 또한 이들은 이런 취미를 통해서 어느 정도 실용적인 목표도 달성했다. 현대의 사업가들이 골프는 거의 무조건 하는 것이나 종교를 통해서도 인맥 도모를 하는 것과 같다. 보통 이런 사람들은 취미에 큰 의의를 두지 않고 기왕 친목 도모를 하는 김에 스트레스도 풀거나 건강관리도 할 겸해서 본업과 같이 가는 하나의 줄기로 삼는 것을 생각해 본다면 조조의 이런 면모는 독특하다.

7.1. 요리

중국 요리 중에는 조조닭이라는 음식이 있다. 하비에서 주둔하던 조조가 너무 바쁘다 보니 몸져누웠는데, 이를 치료하기 위해 요리사들은 의원의 말대로 조조가 먹는 닭에 한방 재료들을 넣었고 이를 먹은 조조는 서서히 기운을 차렸고 후에도 이런 음식을 자주 먹게 돼서 조조닭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즉, 삼계탕 같은 음식과 비슷한 것. 이런 일화가 있었을 만큼 조조도 꽤 바쁘게 살았다는 걸 알 수 있다.

귀한 식재료였던 전복 요리를 즐기는 것을 넘어 환장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75], 정확히는 전복을 말린 '건화'를 즐겨먹었다고 한다. 물론, 건화는 조조가 개발한 것은 아니다. 사실, 먹은 것만으로 나열하기 시작하면 대륙의 기상 중국인답게 한국인 관점으로는 온갖 해괴한 것들이 다 나오기 시작할 것이다.

문화인답게 술도 좋아했는지 술의 레시피를 천자에게 상주했는데, 이것이 구온춘주. 후일까지 황실에 진상하는 명품이 됐다.

7.2. 패션

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쓰던 갈관(葛冠)이라는 모자 대신에 백갑이라는 모자를 만들어 위진 시대에 백갑이 널리 퍼졌다고 한다. 미화할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찾아내 마구 부풀리는 창업 군주임에도 인물이 준수했다는 기록은 없으나, 붉은 옷으로 유명하다.

7.3. 음악

박물지에 따르면 한말에 금석(金石) 음악이 실전되었으나, 한중에서 두기(杜夔)라는 인물을 얻어, 헌현종경(軒懸鐘磬)을 설치하고 음악 연주법을 다시 보급했다.

7.4. 문학

조조는 문학에 매우 뛰어났고, 그의 문학적 재능은 자식들에게도 이어졌다. 흔히 조조, 조비, 조식 세 사람을 통틀어 삼조(三曹)라 부른다. 이 중 조식은 이백이 출현하기 전까지 중국 문학의 일인자로 손에 꼽혔다. 다르게 말하면 삼조의 위치는 후대에 나타날 위대한 문학가의 수준에 미치지 못해서 그렇지 엄연히 중국 문학에 길이 남을만한 문학가였단 뜻이다.

조조 이전의 시들은 유가적 취향이 강하여 현실을 도외시하였으며 부(賦)라는 형태의 매우 긴 문학이라 접근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이에 반하여 조조는 수도에 문인을 모으고 '건안 문학'이라 불리는 새로운 사조를 주도한다. 건안 문학의 특징은 이전의 문학과 달리 현실을 강하게 반영하였으며 화자의 개인적 감상을 적극 표현하기 시작했다는 점 등이 있다. 조조 자신도 오언시[76] 등의 간결한 시를 많이 지었다. 대표적으로 보출하문행, 단가행, 호리행 관창해 귀수수 구수수 거북이는 장수한다지만 고한행 추호행 해로행 나의 술에게 극동서문행 등이 있다. 조조 시 중에선 군중, 민중, 일반병사의 고달픔을 노래한 시가 꽤 많은데, 순수문학파이기는 했지만 조조의 인물상을 생각해봤을 때 정치적인 의도, 즉 프로파간다의 성격이 어느 정도 포함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매너리즘을 타파하고 개성을 부여한 건안 문학의 풍토는 이후의 중국 문학사에서 아주 중요하게 다루어지고 있다. 물론 그 필두에 서 있던 사람이 조조였다는 것은 말할 필요도 없고. 중국 문학에 완전히 새로운 기풍을 불어넣은 공이 자자하기 때문에 중국에서는 문학적인 요소만 가진 시인으로만 조조를 평가해도 위인이라 평가한다.

마오쩌둥이 조조의 시가를 좋아했다고 알려져있다. 마오쩌둥이 조씨 삼부자의 시 중 가장 으뜸으로 치는 것이 조조의 작품으로 조조의 시에서 영웅호걸의 풍모가 느껴진다고 한다. 패기가 넘치면서도 깊은 사색과 문학적 감수성이 들어있는 해로행 같은 작품을 보면 그 평가가 정확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2019년에 개봉한 중국 영화 유랑지구의 주제가에도 조조의 시가 차용되었다.

현대중국의 교육과정에서는 중학교에서 관창해, 고등학교에서 단가행을 배운다.

7.5. 서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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곤설의 탁본

서예에도 재능이 있는 편으로 글씨가 예술적으로도 평가받았던 모양이다.

장화박물지에 따르면 한나라 때 안평(安平)의 최원(崔瑗), 최원의 아들 최식(崔寔), 홍농의 장지(張芝), 장지의 동생 장창(張昶)이 모두 초서를 잘 썼는데 조조가 이들에 버금갔다고 한다.

실제로 아직 존재하는 유일한 글씨가 있는데 석문잔도의 곤설(袞雪)이 그것이다. 소용돌이치며 튀는 물방울이 마치 눈과 같다 하여 쓴 것으로 서체가 호방할 뿐 아니라 재치가 들어간 글씨로 평가받는다. 곤(袞)자는 본래 흐를 곤(滾)으로 써야 하지만 이에 대해 누가 물으니 바로 옆에 물이 흐르니 삼수변을 붙일 필요가 없다고 대답했다고 한다.[77] 더불어 곤(滾)과 곤(袞)은 통가자[78]로, 살짝 다른 글씨를 사용해 재치를 더하고 설(雪)자와의 균형을 맞추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현재는 댐 건설로 본래 글씨가 있던 곳은 물에 잠겼고 글은 그 이전에 떼어내 박물관에 보관하고 있으며 석문잔도에는 복사본이 존재한다. 어떤 의미로 보면 삼수변이 사라진 셈이다.

7.6. 종교

7.6.1. 유교

주로 일본의 삼국지 창작물을 통해 만들어진[79] '조조=법가 정치가'라는 이미지와 한국 사회에 퍼진 유교에 대한 반감이 맞몰려서 한국에서는 유교를 배척한 '실리주의적 지도자'라는 이미지가 다소 퍼져 있는데, 이는 사실과 거리가 멀다.[80] 유교는 중국 문명의 근간이기 때문에 간단히 부정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유교와 법가를 병용하는 것은 한나라 이후 중국 정치의 기본이었고, 조조 자신도 지식인인 이상 유교의 주요 경전은 모두 암기하고 있었을 수밖에 없다. 조조는 공식 석상에서 유교 경전을 자유자재로 인용하고 있으며, 자기 마음에 드는 사람들을 공자의 어록을 빌려 칭찬하는 경우도 자주 보여줬다. 멀리 갈 것 없이 당장에 조조가 중용한 순욱을 필두로 하는 순씨 일족 뿐만 아니라 조조 밑에서 일한 내로라하는 호족, 관료들이 다름 아닌 유교 지식과 소양을 갖추었던 사람들이다.

조조는 유교를 배척하기는커녕 오히려 유교 사상을 능수능란하게 사용한 정치가이다. 공융을 죽일 때는 불효했다는 죄목도 포함해서 죽이기도 했다. 물론 이건 유교를 따른 게 아니라 이용한 것이니, 조조의 평가가 더 더러워진 일화 중의 하나다.[81]

7.6.2. 도교

조조는 도가에 상당히 심취해 방술(方術), 즉, 도교의 영향을 받은 연단법이나 방중술을 좋아하여 그런 사람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82] 박물지에 따르면 조조는 양성법(養性法)을 좋아하고 방약(方藥)을 알아 방술지사(方術之士)들을 초빙하게 했다. 또한 1척에 이르는 들의 을 먹었고, 또 적게 먹고 짐주(鴆酒)를 많이 마셨다. 또 조조가 끌어모은 방사의 이름이 16명이나 기록되어 있는데, 그중에는 좌자, 화타의 이름도 끼어 있다. 조식의 글에도 천하의 방사들을 위왕이 모두 불러 모았다는 언급이 있었다.

이 영향 때문인지 조식은 도교를 옹호하는 "변도론"을 저술하였으며, 조조의 양자인 하안은 연단술을 활용하여 오석산을 만들었다. 조조의 취향은 후로 육조 시대로 이어지는 노장 문화에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다고 볼 수 있다.

8. 유사한 인물들

종종 조조를 동양의 카이사르라고 평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 둘의 차이점과 공통점을 알아보자.

단순한 인상 비평으로는 공통점도 많겠지만 달리 조조는 카이사르에 비해 전체적으로 밀리는 편이다. 북중국만 평정한 조조와는 달리 카이사르는 갈리아와 로마 전역을 통합했었다. 그리고 조조는 당대에서부터 민중과 지식인들 대부분에게 비판 받았지만, 카이사르는 민중에서의 인기가 많았고 따르는 중간계급도 많았다. 또한 조조는 이전의 이미지와 달리 제도 개혁에는 생각보다 무심해서 남북조시대의 귀족화에 한몫해 비판을 받지만, 카이사르는 로마 개혁에 적극적이었고 평가는 갈릴지언정 로마의 도약에 큰 기틀을 잡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무엇보다 세계사에 남긴 영향은 카이사르가 더 크다는 것이다.[83]

그러나 실제로도 둘은 비슷한 면모들도 많다. 두 명 모두 군사, 정치, 행정, 예술, 학문 등 다방면의 분야에서 뛰어난 천재였고, 놀기 좋아하는 플레이보이라는 점도 닮았다. 둘 다 끝내 황제의 자리에는 오르지 않았거나 못했지만 원하면 황제에 자리에 오를 수 있을 만큼의 토대를 다져놓았고, 실제로 이들 바로 다음의 후계자들은 모두 황제가 되었다. 또한 군사적, 정치적 업적을 세운 영웅이 문학적 재능도 보인 경우는 매우 드문 일인데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와 같은 걸출한 저서를 남겼고, 조조도 당대의 유수 시인으로 손꼽히며 손자병법의 주석 작업, 악부의 진흥 등에 큰 업적을 보였다. 게다가 처음에는 우호관계였으며 오히려 이 둘보다도 커리어나 세력상 앞서가는 입장이었지만, 이후에는 적대관계로 변했다가 결국에는 이 둘에게 역전당하고서 패배로 끝을 맺었고 연배까지 비슷한 라이벌[84]이 있다는 것까지 닮았다.

일본에서는 오다 노부나가와 비견되는 일이 많고, 이미지상도 비슷하게 나온다. 소위 하고 강력한 카리스마 리더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주로 그렇게 비교하는 경우가 많다. 다만 정작 그 둘은 쿨한 성격은 커녕 다혈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1] 후한의 황제인 환제영제를 묶어서 부르는 말이다.[2] 물론 이것은 중앙정부를 무력화시키려고 하다보니 중앙권력에 깊숙하게 관여한 환관들도 함께 쓸어버린 것뿐이다. 국가개혁의 큰 뜻 같은 건 없었다. 애초에 무고한 인민을 수없이 살상하고 수도 일대를 초토화시키면서 대혼란을 초래한 것에 불과하다. 단, 동한의 큰 암덩어리였던 환관 및 환제영제 시대에 커진 족벌 계층을 완전히 싹 쓸어버려 조조 같은 훗날의 개혁자에게 큰 도움을 준 건 여하튼 사실이었다.[3] 삼국지연의의 독자들은 위-진 교체 장면에서 위나라가 드디어 업보 쌓아온 대가를 받는다고 느끼는 경우가 많고, 그래서 진나라는 위나라와 다를 것이라고 어렴풋이 생각하기 쉬운데 그것 자체는 일단 사실이었다. 서진이 보수적이었던 것은 사실이었어도 서진은 제2의 사마의가 나타나지 않게 면밀한 제도 개혁과 위나라의 각박한 전시 체제 완화에 노력을 기울였던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는 진실이다.[4] 훗날 등장하는 유유나 소도성은 그 때문에 사마의와는 꽤 다른 방식을 연구해서 실천해야 했고 실은 바로 그것이 전 황실을 몰살하는, 좋지 못한 풍습의 근본적인 원인이다. 유유가 각별히 잔인한 것만은 아니었다.[5] 허나 이는 시대의 운이 따라주지 않았다는 점이 한 몫 한다. 조조에게는 유비라는 세기의 호적수이자 시대를 초월한 숙적이 존재했고, 이 둘은 상대방의 대업을 서로 저지하고 실패시켜 기타 라이벌리와 달리 승패를 내지 못한 채 시대를 종결했다.[6] 다만 이렇기 때문에 이들의 대결과 일대기가 오늘날에서도 다른 라이벌리들보다 훨씬 더 많은 각광과 인기를 얻고 있는 것이다. 만약 조조가 유비를 제압하고 통일 왕조를 건설했다면 그 평가는 올라갔을지언정, 오늘날 만큼의 인기는 얻지 못했을 것이다.[7] 동탁 토벌 당시에 조조는 유비와 함께 패에서 군을 모아 동탁과 맞섰다. 이 때 유비의 역량을 파악할 수 있는 충분한 시간이 있었을 것이다. 논영회에서 유비가 굉장하다고 치켜세워주고 앞으로도 계속 의식하는 게 전해들은 썰이나 결과만으로 평가한 게 아니라 직접 보고 내린 결론이라는 의미.[8] 황건적의 난 같은 경우 도겸은 장패를 기도위로 삼아 반란을 토벌하였다.[9] 서주가 수성에 유리한 지역인데도 조조를 상대로 우위를 점하지 못한 도겸의 군사적 능력이 뛰어나지 못했던 탓이다.[10] 도겸이 고의로 장개를 사주했다는 설도 있다.[11] 진등이 오의 침공을 막아내는 과정에서 부하인 진교를 보내 조조에게 도움을 청하고 항복한다.[12] 순욱과 정욱의 공이 정말 큰데 이들이 성 몇개라도 지켜내지 못했다면 조조는 그냥 유랑하며 떠도는 세력이 될 뻔했다.[13] 조조군 승리의 일등공신은 곽도와 허유이다.[14] 심지어 원담이 원상의 부하인 봉기를 베어죽이고 곽도의 충동질에 넘어가 통째로 청주를 조조에게 들어 바쳤다.[15] 원담-고간-원상 순으로 망했다. 이 중 조조가 가장 애먹었던 상대는 고간.[16] 이는 애초에 유표가 형주에서 복종하지 않는 도적들을 소탕할 때 채씨와 괴씨를 포섭해 그들의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형주의 치읍 역시 무릉에서 양양으로 옮겨졌으며 채모와 괴월은 막강한 권력을 쥐게 되었다. 게다가 유표 밑에 있던 문관들인 한숭, 부손 등은 유표 생전에도 조조에게의 투항을 주장하던 친조조파였다. 그 상황에서도 본인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한 것으로 보아 파벌 분열을 막는 능력은 상당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유기를 확실한 후계자로 만들지 못하여 결국 나중에 형주가 조조 손아귀에 넘어간 것은 유기를 멀리한 유표에게도 책임이 있다.[17] 단, 정략과 통치술에서는 상당한 수준이었다고 평가해 줄만 하다. 연의에서는 제대로 묘사되지 않았지만 유표는 절대 형주를 쉽게 손에 넣은 인물이 아니었다.[18] 사실 고유가 이를 예상하여 조조가 종요를 시켜 장로를 치는 것을 반대했으나 조조는 고유를 무시하였고 결국 관서에서 마초와 한수가 반란을 일으킨다. 마초는 이로써 아버지와 동생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다.[19] 마초와 한수를 이간질하여 군의 중심을 무너뜨렸다.[20] 마초는 장로에게 투항했다가 훗날 유비에게로 간다.[21] 장막은 이후 원술에게 달아나다가 부하에게 살해된다.[22] 주령은 이후 조공이야말로 영웅이라면서 원소에게 돌아가지 않고 조조에게 항복하는데, 이것이 서주 대학살 직후인지라 주령의 인성에 악평하는 사람들이 있다.[23] 조조 본인은 적벽에서 패한 후에도 조인을 남겨 남형주 지배력을 유지하려 했지만 조인은 1년의 격전 끝에 주유에게 패배하였다. 조조가 돌아가버린 상황이라 조인이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인데도 1년이나 버틴 것이다. 괜히 조인이 위나라 최고의 명장이라 불리는 게 아니다.[24] 남양에서 후음이, 허도에서는 김의, 경기, 위황이 반란을 일으켰으며, 기주에서는 위풍이 반란을 꾀했다.[25] 조조는 동소의 말을 받아들여 양번의 포위를 풀 요량으로 관우에게 손권이 뒷치기할 것이라는 정보를 관우 측에 흘렸다. 관우는 설마설마하며 포위를 풀지 않았으나 미방의 배신으로 위쪽은 위군, 아래쪽은 오군에게 포위당하는 바람에 결국 죽고말았다.[26] 나라의 제가 석을 단 손자병법. 흔히 조조의 저서로 알려진 맹덕신서가 사실 이 위무주손자를 일컫는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27] 물론 서주대학살이나 적벽에서의 전략적 우위에도 불구한 대패 등등 조조는 군사적 실책도 많이 저질렀다.[28] 물론 북방 민족들 입장에서는 살아갈 터전을 구하기 위해서 왔다.[29] 대표적인 예가 조인과 조진. 이 둘 모두 연의에서는 잡장으로 폄하된 명장들이다.[30] 하후돈은 내정에 상당히 능했다.[31] 하후연의 전사는 조조에게도 어느 정도 책임이 있다는 것이 정설인데, 조조는 한중에서 유비를 막는 하후연이 위기에 처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하후연이 전사하기 최소 반년 전 장안에 도착한 뒤 하후연을 구할 움직임을 안 보이고 미적지근하게 있었다. 근데 하후연이 한중에서 보여준 행동들은 유비의 덫이었다. 이전까지 하후연은 반란 진압이나 마초 토벌에서 큰 공들을 세웠다.[32] 이런 고대의 전술을 현대에 부활시킨 독일군도 똑같은 문제를 겪고 무너졌다.[33] 육(六)군, 즉 천자가 이끄는 군대를 가리킨다.[34] 다만 손권은 몰라도 유비 세력을 별 거 아니라고 봤을 가능성은 희박하다. 조조는 원소와 대립하던 시기에도 유비부터 쳐야한다며 군을 직접 이끌고 서주로 쳐들어갔으며, 적벽대전 때도 '유비는 나의 맞수이나...'로 시작해서 유비에게 패배하긴 했어도 나보다 한수 늦다는 평을 남겼고 한중에서도 친정한 유비에게 패배하고서 '아 법정이네. 이거 법정이 짠 거지 유비는 이런 거 못 함' 하고 정신승리를 시도했다.[35] 손권 역시 자식을 낳으려면 손권 같은 발언을 했던 것으로 봐서 완전히 만만히 봤을 리는 없다. 그리고 유비나 손권을 어떻게 평가하느냐와는 별개로 조조 말년 조위의 영역은 사실 그 당시 전통적인 중화의 영역은 다 먹어치운 상태였기 때문에, 유비가 한실 혈통이자 유방도 촉에서 진군했다는 공통점 정도가 걸리는 것을 빼면 사실상의 통일이라고 선언해도 무방했다.[36] 여포와의 싸움에서는 황충의 발생으로 흉작이 들면서 여포 군의 군량이 떨어지며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고, 원소와의 싸움에서도 장수가 항복해 오며 형주 방면이 안정이 되는 행운이 따라주었다. 손책의 급사 이후 손오 세력의 혼란도 손책이 일찍 죽을 것이라는 곽가의 예언을 추앙하면서 대충 넘어가지만 사실 엄청 운빨이 좋았다. 게다가 관도, 창정에서 승리하긴 했지만 원소의 세력은 건재했는데, 원소 자신이 급사해 버리고 아들들끼리 싸운 것 역시 운의 영역. 유표의 경우 자연사한 것을 틈타 유종을 쉽게 낚는 등 여러모로 행운이 많았다. 물론 떠돌아다니는 행운을 적기에 낚아챈 것이야말로 조조의 비범한 능력이다. 하지만 잘 풀려서 다행이지 조금만 불운했어도 그냥 갈 수 있던 경우가 조조는 상당히 많았다. 다른 군벌과 조조의 주요 전투에서 원술, 서량 연합, 입촉 이전의 유비 정도를 그다지 운이 따르지 않았음에도 조조가 이겼었고, 18로 연합군, 적벽, 한중 등 별달리 운이 누구에게 기울었다고 보기 어려운 전투에서는 패배하기도 했다. 특히 다른 건 뭐 어쩔 수 없이 움직이는 와중에 과감하게 뛴 건데 18로 연합군 시절은 조조 스스로가 까불면서 나섰던 것인데 조금 더 운이 나빴으면 여기서 그냥 저승으로 갈 수 있었다. 또한 이긴 싸움에서도 사실 죽을 뻔한 위기도 있었다.[37] 특히 장수를 한 번 평정한 이후 추씨를 탐하다 저승문턱까지 왔다가 돌아온 것은 100프로 조조의 추태에서 비롯된 일인데, 만약 조앙이 자기의 목숨을 버리고 아버지에게 말을 바칠 정도로 효자가 아니었다면? 자기의 목숨을 아까워해서 자기 혼자 말을 타고 빠져나가도 누구도 그렇게까지 큰 비난은 못했을 것이며 여기저기 바쁘게 쏘다닌 조조가 직접 키운 일도 별로 없는 조앙의 인성은 조조의 교육과도 큰 연관이 없다. 거기에 조앙은 조조에게 미치지 못했다 조조처럼 세력을 통솔할 수가 없으니 그를 염두에 둔 순간적인 계산이다 같은 해석도 여기저기 있는데 조앙 입장에서 이 경우 일신보존을 위해 매우 쉬운 답은 조조가 죽은 후 세력의 대표자로서 그냥 유종처럼 냅다 세력을 원소에게 들어서 바친다가 있다. 그러면 조조가 싸우던 지역의 패권이 원술, 여포, 유비 심지어 손책이나 유표까지 끼어드는 난장판이 되더라도 조앙 개인은 아무 상관이 없고 사실 그렇게 나쁜 선택도 아니다. 진짜 조조는 여기서도 100% 운으로 살아나선 것이다.[38] 천하를 안정시킨 일면이 있다고는 하나 다른 일면으로는 학살과 악정 등을 저지른 것도 사실이기 때문에 늙은 나이에 계속 군사를 이끌고 친정하는 것은 두려웠을 수 있다. 조조에게 있어서 암살, 반란 등은 남의 얘기가 아니며 이룰 것을 다 이룬 늙은 나이에는 생각지도 않은 작은 일이 발단으로 훅 가버릴 수 있다.[39] 사실 위대한 명장들도 사람이고 당연히 시간이 지남에 따라 전투 스타일이 바뀌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나폴레옹도 청년기 이탈리아 전역에서 놀라운 기동전을 펼치나 후반기에는 대규모 물량을 이용하는 전투로 스타일이 바뀐다.[40] 다만 나폴레옹의 경우엔 나폴레옹 전쟁이 격화됨에 따라 나폴레옹 본인 특유의 기동전을 수행할 정예병력들이 많이 소모되어 신병들이 소화하기 쉬운 전술로 변화를 준 것이 가깝다. 특히 이베리아 반도 전쟁러시아 원정이 치명타였다.[41] 허를 찌르고 실을 꾀하는 계책.[42] 유성 원정이 성공으로 끝났지만 조조 본인조차 개운빨이라고 자평하면서 반대한 인물들에게 상을 내렸고, 이런 걸 상례로 삼아서는 안 된다고 했다. 자세하게 분석한다면 다를 수 있겠으나 운하를 파면서 보급로를 만들고 옛길을 통해서 이민족에게 급습을 가할 수 있었던 유성 원정보다 험한 촉땅에 들어가서 유비에게 도전하는 것의 성공 확률은 얼핏 보기에 꽤 낮아 보인다. 이민족과의 전투라 이야기로서는 삼국지 내에서 별 언급이 안 되지만 실제 역사의 비중으로 볼 때 많이 중요하게 평가되는 유성 원정은 조조 본인조차 끝나고 나서 개운빨이라고 자평했는데 평생의 맞수 유비를 상대로 훨씬 더 험한 땅에 깊게 들어가는 것은, 적벽에서 이미 1패를 경험한 조조 입장에서 많이 부담스러웠을 것이다.[43] 원소가 조조 후방으로 유비를 파견했을 때 조인이 유비를 격파한 거 말고는 조조의 부하들과의 싸움에서 유비가 모조리 이겼다.[44] 다 늙어서 평생 가 본 적도 없고 신경 쓰고 싶지도 않던 한중에서 강제등산해서 좋았겠는가? 강남에 3번이나 가서 전염병이나 돌보고 몇 개월 동안 막사에서 자고 하면서 신경 곤두세워서 군사들 관리나 하고 급보를 받고 밤중에 감녕에게 기습이나 받고 하던 게 좋았겠는가?[45] 원소 사후 잔당들을 정리할 때에 심배가 배치한 저격병들에게 화살을 맞은 것이라던가. 잔부상으로 추정되지만 심배에게 운이 조금만 더 따라줬으면 조조는 이때 끝나거나 당장은 버텨도 후유증과 고대 의학의 한계로 얼마 안 가 죽었을 수도 있다.[46] 젊었을 때나 중장년의 나이에 겪은 고난들이야 그렇다고 쳐도 50대 중반의 나이에 화살비 아래에서 마초에게 쫓겼던 것이나 유수구 원정 같은 것은 거의 100프로 수명에 안 좋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47] 조조조차도 원소의 잔당을 정리해 패자로 등극한 이후에도 적벽의 패전, 한중의 패전 등 큼지막한 친정 패전이 두 개나 있다. 또한 손권 상대로 한 원정은 번번이 큰 소득이 없었다. 마초, 장로를 상대로 친정에서 승리를 거두었다.[48] 사실 촉과 비교했을때 효율적이었는지는 상당히 의문이 남는다. 촉이 진짜로 국가를 풍요롭게 만들어서 동원력을 늘린 정석적인 케이스라면, 조조의 위는 최적화를 잘 해서 단기적으로 짜내는데는 뛰어났지만 항구적으로 유지할만한 체제는 아니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이 임시변통식 짜내기도 규모의 차이가 어마어마하다보니 촉과 오가 애를 먹은 것이긴 하다.[49] 이는 역대 위나라 황제들의 역량이 조조보다 딸리거나 일을 할 수 없어서 그렇다. 당장 조비만 해도 문제가 많았던데다가 단 몇년 만에 요절, 그 뒤를 이은 조예는 재위기간의 상당기간을 제갈량의 북벌을 저지하는 데 쏟아야 했고 그 이후에는 타락하고 몇년 뒤 사망, 또 그 이후의 조방, 조모, 조환은 꼭두각시였으니 논할 여지가 없다.[50] 예를 들어, 손권의 지배 지역인 강남은 인구가 적었기 때문에 손권은 주변에서 인구를 납치해오는데 열성이었다. 손권에게 인구를 늘려주기 싫었던 조조는 강남 인근의 백성들을 강제로 이주하려고 했는데, 이 조치에 반발한 백성들이 무려 10만호나 강남으로 도망가버렸다. 손권에게는 엄청난 이득이었는데 조조와는 달리 10만호나 온 것은 넝쿨째 들어온 호박이나 다름없었다. 손권이 장악한 오나라는 인구가 적어서 원주민을 사냥하는 등 별짓을 다 했는데 그렇게나 간절히 원하는 인구가 조조의 뻘짓때문에 넝쿨째 들어왔다.[51] 다만 이는 세병제 초기라 그랬다. 실제로 이후의 세병제는 이정도까지는 안 해도 되었다.[52] 출처는 강좌 중국사[53] (아마도) 연의 한정이긴 하지만 유비가 파촉 정벌에 성공했을 때 법정이 과거에 원한을 가진 인물들을 찾아다니며 복수한 적이 있었는데, 누군가가 이를 원망하여 제갈량에게 고발한 것도 모자라 처벌까지 해 달라고 넌지시 부탁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제갈량은 '주군(유비)께서 촉 땅을 먹은 지 얼마 되지 않았고, 거기서 법정의 공이 적다고 할 수도 없다. 게다가 법정이 그런 짓을 계속할 인물도 아니라고 본다.'라고 대답했고, 법정도 나중에 이 얘기를 전해 듣자 행동을 조심했다고 한다.[54] 이들은 각각 순욱의 아들 순의, 종요의 아들 종회, 신비의 아들 신창, 왕랑의 아들 왕숙과 손녀 왕원희, 가규의 아들 가충 등이다.[55] 연의에서 제갈량이 설전으로 설종(오)과 왕랑(위) 같은 문관들을 박살낼 때 썼던 논리도 이거다. "주군에게 항복을 권유하다니 어찌 자식이 부모에게 할 말이겠는가" 정도로 순서가 바뀌긴 했지만 핵심은 변하지 않았다.[56] 근데 이건 애초에 조조 성격상 패드립을 당해도 멘탈에 지장이 없었던 영향도 크다. 사실 이 시대에는 상대를 깎아내리기 위한 패드립이 흔했다.[57] 덤으로 비록 유비와 마찬가지로 끝내 자신의 사람으로 만들지는 못했지만 관우와 함께했던 일화 역시 유명하다. 적토마 선물이나 오관육참은 연의의 창작이긴 하나, 정사에서도 관우가 공을 세우자 한수정후라는 높은 직위를 내리는 등 이런저런 성의를 보였다. 그밖에도 관우가 자신의 주공이자 대형 유비의 행방을 알자마자 바로 유비를 찾아 조조 휘하를 떠났는데 이에 부하들이 관우를 추격할 것을 조조에게 진언하나 이에 조조가 자신의 주공을 위한 것임을 언급하며 관우를 쫓지 말라고 직접 명을 내린다.[58] 양수가 조식파의 주요 인물이라 후계자 문제로 거슬렸다고 한다.[59] 장야신의 저서중 하나가 "조조는 어떻게 영웅이 되었나"이니 조조를 호의적으로 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음에도 이렇게 비판한 것.[60] 이와 정 반대되는게 유비 세력. 조조와는 차원이 다른 위기를 겪으며 세력이 공중분해되었다 모였다를 반복했지만 유비 세력의 핵심 구성원들은 큰 변동이 없었다.[61] 이때는 이미 사망했지만 그럼에도 생전에 십상시의 아버지와도 같은 존재라 영향력이 어마어마했다.[62] 서주 단양군의 병사들로 용맹하고 잘 먹었으며 무장이 잘 되어 있었다. 유비가 도겸을 지원했을 때, 단양병 일부를 도겸이 유비의 군대로 편입시켰다는 기록이 있다.[63] 때문에 연의에서는 길평에게 독살당할 뻔했다.[64] 고우영 삼국지에서는 조조의 두뇌가 쉴새없이 가동되기 때문에 이따금씩 자신의 비상한 두뇌를 감당하지 못하고 두통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라고 해석했다.[65] 아들만 25명이라고 한다.[66] 용모가 짧고 작다는 의민데 한마디로 단신 숏다리라는 것이다. 여담으로 원소는 '자모위용' 즉, 용모가 카리스마있고 잘생겼다는 의미를 지녔다.[67] 전한 시대로 치면 161cm, 후한 시대로 치면 165.9cm에 해당된다.[68] 여러 개인적 실책과 정책적 실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조조와 조위의 치세에 후한 말 환령 대부터 발발한 대혼란상과 무질서를 어느 정도 바로잡고 중앙권력의 통치력을 회복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69] 당현종 이융기는 갈고羯鼓와 횡적橫笛를 무척 잘 연주하였고, <야반락夜半樂>, <소파진락小破陣樂>, <예상우의곡霓裳羽衣曲> 등의 곡을 짓기도 하는 등 음악가로서 출중했다. 예술분야를 음악으로만 한정짓는다면 이융기는 조조를 확실하게 능가할 것이다.[70] 이때 여포에게 뒤통수 맞고 그대로 죽었거나 메뚜기떼가 구원해 주지 않았다면 조조의 예술가적인 기질에 대한 찬미는 불가능했을 것이다.[71] 이는 작중 인물들의 대화를 빌려 상식적으론 도무지 이해하지 못할 조조의 잔혹한 폭거의 이면에 깔린 심리적 메커니즘을 설명하려는 시도임과 동시에 앞으로 전개될 제갈량의 행보를 추동하는 심리적 동인을 밝히려는 노력이다. 물론 제갈량이 진짜 서주 대학살로 인해 고향을 등지고 떠났는지는 확실치 않고 혈육을 잃은 건 더더욱 아니지만, 왜 뛰어난 재능을 갖춘 제갈량이 부귀 영화를 누릴 수 있는 출세길이 훤히 열린 조조에게로 출사하지 않고 그 당시에는 별 볼일 없는 존재였던 유비에게 임관해서 평생을 유비의 충신으로 초지일관했는지 납득이 가게끔 개연성을 부여한 훌륭한 문학적 묘사라 할 수 있다.[72] 사실 어떻게 보면 논영회부터 이미 싹수가 보였다고 말할 수 있다. 이후 나비효과를 생각하면...[73] 대부분 포로로 잡혔다.[74] 차라리 예술가적 기질로 흔히 해석되는 서주대학살 같은 것을 해서 여포한테 망할 뻔했는데 메뚜기떼가 나타나서 도와주는 걸 보니 천운이 따랐다 같은 게 말이 된다면 말이 된다.[75] 조식이 지은 구제선주표에 따르면 조식이 서주에서 있을 적에 조조에게 전복을 200개나 갖다바쳤던 일이 있었다고 한다. 일부에서는 이 이야기가 조조가 검소했다는 건 전형적인 서민 코스프레고 실제로는 이익은 다 챙기는 높으신 분이었을 거라는 의견과 당시에도 귀한 전복을 진상하려고 어민들이 수탈과 고생당했다는 증거로 여기기도 한다. 물론 검소한 거랑 식도락은 좀 별개라 검소하지만 음식 자체는 미식으로 즐기는 사람이 있으니 꼭 그렇게만은 볼 수 없다.[76] 五言詩, 한 행에 다섯 글자가 있는 한시. 대부분의 한시는 오언시 또는 칠언시다. 兮 등의 불필요한 추임새 등이 사라져 있다.[77] 관련 민담에 의하면 실수로 삼수변을 쓰지 않은 것을 임기응변으로 대답한 것이라고 한다.[78] 동일한 글자로 간주하는 글자. 파자에 많이 사용된다.[79] 특히 창천항로가 이런 묘사의 대표격이다.[80] 사실 극동 사람들은 나름대로 번성했으면서도, 가장 늦게 서구 문명에 아주 깨끗하게 완패했기 때문에 공통적으로 유교를 극혐하고, 비실리적이며 개혁대상이라고 보는데, 고대 사회 기준으로는 삼년상 같은 쓰레기 제도가 있는 등 아주 틀린 말은 아니지만 아주 맞는 말도 아니었다. 삼국지 시대만 해도 유학자들을 멀리한 인물들은 빠르게 패망했다. 대표적으로 원술, 공손찬 등이 있으며 조예 같은 인물도 제갈량이 죽은 후 도사 노릇에 심취하면서 위나라의 기둥뿌리를 뒤흔들기도 했다.[81] 물론 유교를 정치적 수단으로 사용한 것은 딱히 조조만 그랬던 게 아니다. 조조의 숙적이었던 원소부터가 그런 식으로 두각을 나타낸 인물이고, 조비조차도 오히려 유교를 진흥시키고 장려했다. 물론 이는 아버지 조조와 마찬가지로 위나라의 황권 강화를 위한 정치적 목적이 더 강했다. 정작 조비는 유교 질서를 장려한 것과는 정반대의 행적을 더 보여줬다.[82] 여강의 좌자, 초군의 화타, 감릉의 감시, 양성의 극검을 끝내 이르게 했다.[83] 다만 이는 조조의 잘못으로만 볼 수 없는 것이 로마의 내전과 중국의 내전은 그 기간과 규모가 크게 달랐다고 이전문단에서는 주장했고, 중국이 군사적으로는 크게 발달했으나 인구가 급감하고 전체적인 국력이 한나라 전성기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쇠략된 상태였다고 이야기하지만, 로마도 마찬가지였다. 로마도 카르타고를 완전히 말살한 이후부터, 카이사르의 내전기까지 100년 가까이 내전을 벌여왔다. 그중에서 로마연합이 해체되어 서로 싸울 정도로 이탈리아 내에서도 큰 문제로 자리잡았고, 노예들이 크게 반란을 일으킨 스파르타쿠스까지 엄청나게 혼란스러웠다. 이는 중국과 거의 100년 가까이 내전이 지속되었던 점이 동일하다. 따라서, 이런 동시적인 혼란 속에서도 결국 당대에도 후세에 외침을 당하도록 완료를 못한 조조와 이런 상황에서도 로마 제국의 크기를 키우고, 안정적으로 국가를 수립하며, 속주민과의 차이도 줄여나가도록 대계를 세운 카이사르는 압도적인 차이가 있다. 또한, 이 모든 차이를 만든 결정적인 차이는 조조한텐 유비, 원소 등이 있고, 원소는 잡았으나 끝내 유비는 못잡아서 크게 막혔으나, 카이사르는 원로원, 폼페이우스 등이 있었고, 원로원 폼페이우스를 제압하는데 성공하였다. 더욱이 조조와 카이사르의 가장 큰 차이는 후계자 선정이다. 조조는 조비라는 장자를 내세워서 조씨끼리의 내전은 벌어지지 않았으나 능력이 떨어져서 끝내 사마의 일가에게 빼앗긴 반면, 카이사르는 아우구스투스에게 모든것을 물려주어서 아우구스투스라는 존재에 의해 로마는 200년간 평화를 맞게되는 후계자 선정까지 뛰어났던 것이다. 단 아우구스투스 일가, 즉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에 혈통적으로 한정해서 보면 딱 100년 갔다. 으레 로마 제국의 성립은 기원전 27년이라고 하지만 이미 악티움 해전에서 이겨 로마 전체의 원탑이 된 기원전 31년부터 실질적으로는 황제였다고 볼 수 있는데, 네로가 기원후 69년에 시해당했기 때문에 31+69=딱 100년.[84] 폼페이우스/원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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