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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 구형왕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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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 전 구형왕릉
山淸 傳 仇衡王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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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재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
분류 유적건조물/절터
면적 45\,000㎡
지정연도 1971년 02월 09일
제작시기 가야
위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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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상세
2.1. 왕릉부정론
3. 외부 링크4. 사적 제214호

1. 개요

傳 仇衡王陵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인 제10대 구형왕왕릉으로 전해지는 무덤. 전해지는 무덤이므로 전() 자가 앞에 붙어서 전구형왕릉이다.

2. 상세

앞에 보이는 비석과 석물은 비교적 최근에 중건(?)한 것이다. 옛날부터 있던 건 무덤의 본체.

현재 구형왕의 능으로 전하는 무덤은 경상남도 산청군 금서면 화계리 산16에 위치해 있으며 진입로의 도로명은 구형왕릉로로 지정되어 있다. 1971년 2월 9일부로 사적 제214호으로 지정되었다. 일반 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에 위치했는데 높이 7.15m인 기단식 석단이 있다. 총 7층으로 구성되고 무덤 정상은 타원형이다.

구형왕릉이라 전하는 돌무더기에 대해서도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설 2가지가 있다. 석탑이라고 보는 설이 있는 안동시의성군 지방에 모습이 흡사한 석탑들이 산재했기 때문. 반면 왕릉이라고 보는 이유는 《동국여지승람》의 산음현 산천조에 씐 기록 때문이다.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릉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이 있고 세간에는 왕릉이라 전한다.
ㅡ《동국여지승람》권 31, 산음현(山陰縣) 산천조(山川條)

그리고 조선시대 문인이었던 홍의영(洪儀泳,1750∼1815)의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다음과 같은 글이 남아있다.
무덤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는데,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王山寺記)》에 구형왕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왕산사기를 발견한 기록도 있다.
약 200년 전 산청군 유생 민경원이 산에 올라 기우재를 지내고 내려오다가 비가 내려 왕산사에서 비를 피하던 도중 왕산사 법당 들보 위에 있는 목궤를 발견하였는데 왕산사에서 구형왕릉의 내력을 적은 산사기(山寺記)를 발견하고, 구형왕과 왕비의 옷과 칼, 그리고 영정까지 찾아냈다. 이에 정조 17년(1793)에 덕양전을 짓고 이후 봄 가을로 추모제를 지낸다.
ㅡ《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
하지만 정확한 기록이 없는 만큼 아직도 왕릉인지 석탑인지에 대해 불분명하다. 대부분의 기록이 금관국이 멸망한지 천년이 넘어가는 조선시대 기록인데다 ~라 카더라라는 기록들이라 신뢰도가 낮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곳의 정식 명칭도 "구형왕릉으로 전해진다." 라는 명칭인 전구형왕릉(傳仇衡王陵)이다.

《산청현유지》라는 책에는 정조 22년(1798년)에 처음으로 왕릉이 나타났다고 기록되었는데, 《왕산심릉기(王山尋陵記)》에 있는 '왕릉이 처음 나타났다.'는 기록을 필자가 잘못 이해하고 기입했기 때문이다.

이후 신라대학교 박물관에서 조사[1]했더니 중앙 석실에서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2.1. 왕릉부정론

냉정하게 바라보았을 시에 이 석조구조물이 구형왕릉일 확률은 극히 낮은 편이라는 주장이 있다. 부산외국어대학교 권덕영 교수가 "대구사학 86집"에 투고한 논문에도 "구형왕릉은 <만들어진 역사>의 전형이다. 불탑임이 명백한 이 석축구조물이 처음으로 문자화해서 나타난 것은 조선초기 지리지 《동국여지승람》이다. 여기서 이 지역의 전승임을 전제로 '왕릉이라 한다'고 기록했다."라고 밝힌 것이 대표적. 불탑으로 세워졌다가 신라 왕릉으로 알려지고, 이후 다시 구형왕릉으로 변해 갔다고 주장한다.

조선 초기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이전엔 구형왕릉이라는 기록이나 전승이 없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증보문헌비고》에 와서 민간전승을 인용하면서 '신라왕릉'이라고 했고, 1798년에 구형왕릉이라는 것을 증명한다는 사중기(寺中記)[2]인 《왕산사기(王山寺記)》가 등장했으며, 1864년 김정호가 편찬한 《대동지지》에 와서는 "왕산사는 가야 구형왕의 수정궁터이며 그 옆의 무덤은 구형왕릉"이라고 나온다.

위에 언급된 신라대학교 박물관 조사에서도 왕릉과 같은 고분일 가능성은 아주 적다고 밝혔다. 2007년에 조사한 경남문화재연구원에서 가야 수정궁터라고 기록된 왕산사터를 발굴했지만, 조선 중기 형식의 물품들만 발견되었다. 구형왕릉,加耶(가야)역사 입증할 유물 출토 안돼

그리고 구형왕릉의 내역이 기록되었다는 《왕산사기》가 정말로 존재했던 기록인지 여부도 불투명하지만, 실존했다 한들 조선 효종대에 호란으로 인해 폐허가된 왕산사를 중수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왕산사기는 아무리 빨라도 효종의 재건 당시 지어졌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때문에 기록의 사실성 여부가 불투명하다고 판단하는 것이다.

전 국립일제강제동원역사관 학예부장인 주영민의 연구에 의하면, 전 구형왕릉은 무덤으로 보기 희박하다고 한다. 전 구형왕릉은 본래 본래 용왕(龍王)과 관련된 민간신앙의 성소였으나 조선 후기에 구형왕릉으로 변형되었고 용왕을 모신 사당 수창궁이 구형왕의 궁터로 변하게 된 것이라고 파악했다.[출처]

3. 외부 링크

4. 사적 제214호

가야 10대 임금인 구형왕의 무덤으로 전해지고 있는 돌무덤으로, 구형왕은 구해(仇亥) 또는 양왕(讓王)이라 하는데 김유신의 증조부이다. 521년 가야의 왕이 되어 532년 신라 법흥왕에게 영토를 넘겨줄 때까지 11년간 왕으로 있었다.

이 무덤을 둘러싸고 종래에는 석탑이라는 설과 왕릉이라는 2가지 설이 있었다. 이것을 탑으로 보는 이유는 이와 비슷한 것이 안동과 의성지방에 분포하고 있는데 근거를 두고있다. 왕릉이라는 근거는 『동국여지승람』, 『산음현 산천조』에 ‘현의 40리 산중에 돌로 쌓은 구룡이 있는데 4면에 모두 층급이 있고 세속에는 왕릉이라 전한다’라는 기록이 있다. 이 무덤에 왕명을 붙인 기록은 조선시대 문인인 홍의영의 『왕산심릉기』에 처음 보이는데 무덤의 서쪽에 왕산사라는 절이 있어 절에 전해오는 『왕산사기』에 구형왕릉이라 기록되었다고 하였다.

일반무덤과는 달리 경사진 언덕의 중간에 총높이 7.15m의 기단식 석단을 이루고 있다. 앞에서 보면 7단이고 뒷면은 비탈진 경사를 그대로 이용하여 만들었기 때문에 평지의 피라미드식 층단을 만든 것과는 차이가 있다. 무덤의 정상은 타원형을 이루고 있다. 돌무덤의 중앙에는 ‘가락국양왕릉’이라고 쓰인 비석이 있고 그 앞에 석물들이 있는데 이것은 최근에 세운 시설물이다.

조선 정조 17년(1793)에는 왕산사에서 전해오던 나무상자에서 발견된 구형왕과 왕비의 초상화, 옷, 활 등을 보존하기 위해 ‘덕양전’이라는 전각을 짓고, 오늘날까지 봄과 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

※(전구형왕릉 → 산청 전 구형왕릉)으로 명칭변경 되었습니다.(2011.07.28 고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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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발굴조사는 아니었다.[2] 절에 내려오는 기록[출처] 주영민, 2016, 傳仇衡王陵 연구, 영남고고학 7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