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5-12-23 23:51:00

김대중/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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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식습관3. 방송 출연4. 그의 이름을 딴 시설이나 단체5. 종교6. 기타

1. 개요

김대중에 대한 여담을 정리한 문서.

2. 식습관

  • 고향 음식인 홍어를 무척 좋아했다고 한다. 제14대 대통령 선거에서 패배하고 1993년 영국으로 떠났을 때는 동교동계흑산도 홍어를 영국으로 공수하는 정성까지 들였다고 한다. 김대중이 홍어를 좋아했던 것과 관련해 일화가 하나 있다. 야당 총재 시절 당직자가 김대중의 심부름으로 목포시의 수산물 시장에서 홍어를 샀는데, 그 당직자가 계산을 한 다음 혼잣말로 "선생님께서 이거 보시면 참 실하다고 좋아하시겠네"라고 말하자 돈을 세던 주인이 깜짝 놀라 혹시 김대중 총재를 이야기한 거냐고 되물었다. 이에 당직자가 맞다고 얘기하자 주인이 황급히 가게 안으로 들어가더니 더 큰 홍어를 가져왔다고.[1] 위에서 언급된 천상현 셰프의 회고에 따르면 홍어삼합은 좋아하지 않았고 삭히지 않은 활홍어회를 즐겼다고 한다.
  • 바닷가에서 자라서 어류 요리는 웬만한 미식가 수준으로 잘 알고 있었는데, 상술되었듯 제일 좋아하는 해산물이었던 홍어는 맛만 보고도 신선도를 맞추는 수준이었다고 한다.[2] 또 입맛도 까다로운 편이어서 홍어가 영 신선하지 않다거나 해서 본인의 입에 안 맞으면 관련 담당자들에게 오늘 홍어는 별로였다고 꼭 짚고 넘어가곤 했다고 전해진다. #
  • 이 밖에도 설렁탕을 먹을 때는 깍두기 국물을 넣어서 한 그릇을 말끔히 비우곤 했고[3], 청와대에 들어갔을 때는 종종 야식으로 라면을 즐겨 찾았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의 건강을 염려한 이희호 여사가 김대중에게 잔소리를 해 야식 메뉴를 견과류로 바꿨다는 후문이 전해진다. #
  • 중국 요리도 좋아했는데, 방우영 조선일보 회장이 자신의 사직동 자택으로 초대했을 때도 특별히 중국 음식을 대접했다고 한 걸 보면 정말 좋아한 것 같다. 이유는 종류가 다양하고 맛과 양도 만족스러워서라고 할 만큼 대식가적인 면모도 있었다. 그런데 김정기 전 경호원의 말로는 정작 식사량이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오히려 군것질을 매우 좋아해서 음식을 조금씩 자주 먹는 성향의 사람이었다고 한다. 박지원도 김대중이 도로변에 있는 옥수수를 팔고 있으면 자주 먹었고 그 외에도 과일이나 간식들을 차 안에서 자주 먹었다고 밝혔다.
  • 이러한 식사에 대한 의견은 김대중의 최측근이었던 박지원의 경우 조금 다르게 소회하였는데, 김대중을 대식가라고 단도직입적으로 묘사하였다. 일례로 빠르게 식사를 마치고 대화를 나누길 원했던 김영삼과의 영수회담 당시 식사에 대한 기호가 달랐는지, 면전에서는 칼국수로 식사를 때운 후 만남이 끝난 다음에는 추가로 식사를 하고 가야겠다며 복국 등의 같은 거한 식사를 정신 없이 먹을 정도로 대식가의 면모가 있었다고 한다.[4] 청와대 중식 셰프로 대통령을 모셨던 천상현 셰프 역시 김대중이 재임 기간에 거의 유도선수 정도로 많이 먹어서 청와대 요리사들이 모두 놀랄 정도였다고 술회했다. 하지만 역시 대통령 재임 말기에는 식사량이 줄어드는 게 느껴졌다고 한다.[5]
  • 김정기의 증언에 따르면 아이스크림빵빠레를 엄청나게 좋아했다고 한다. 오죽하면 건강 문제 때문에 이희호가 빵빠레를 못 먹게 하려고 청와대 인사들에게 남편의 빵빠레 금지령을 내렸는데, 당연히 김대중은 몰래 잘만 먹었다고 한다. 가끔씩은 이희호 앞에서 "나 오늘 빵빠레 먹었다~!"라면서 놀리기도 했다고 한다.
  • 스트레스를 받는 날은 아이스크림 메뉴가 비비빅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스트레스가 풀릴 때까지 비비빅을 2~3개까지 우적우적 씹어먹었다고 한다. 을 좋아해서 비비빅 말고 붕어빵도 좋아했다고 한다.
  • 장옥추 전 비서의 음식 일화에 따르면, 식사량이 그렇게 많지는 않았으며 김대중이 1995년에 프라이드치킨을 처음 접했을 때 치킨을 처음 맛보고선 점심과 저녁에도 치킨을 찾았다고 한다. 그리고는 이렇게 맛있는 음식이 있다며 치킨을 비서진들에게도 하나씩 권했다고 한다. 치킨을 나눠주면서 꺼내던 말이 "아까운 건데, 정말 맛있다"라며 치킨을 찬양했다고 한다.[6] 퇴임 이후에는 배달 음식을 자주 시켜먹었다고 했는데, 어김없이 치킨은 물론이고 족발도 자주 시켰다고 한다. 라면도 좋아해서 남편이 라면을 먹는 것을 싫어하여 이희호가 외출하는 날이면 오늘은 라면 먹는 날이라고 몰래 라면을 끓여먹었다고 한다. 청와대 입성 이후 주치의가 건강 문제로 라면을 먹지 말라고 한 이후로 라면을 끊었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대통령 시절에도 라면을 좋아했다는 말이 있는 걸 보면 계속 즐겨 먹은 듯하다.
  • 위의 일화들을 보면 알겠지만, 74세라는 고령의 나이에 대통령직을 맡으면서 설탕과 팥앙금, 밀가루 등의 분식을 굉장히 즐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원래 건강이 그렇게 좋지 않았고[7], 오랜 정치 생활을 하면서 스트레스로 담배와 단 음식을 달고 살았는데 훗날 담배는 끊었어도 단 음식은 끊지 못했다.
  • 손성실, 문문술 청와대 조리사들의 말에 따르면 된장도 좋아했다고 한다. 청와대 시절 밥상에는 항상 생야채와 된장을 함께 올렸다고 한다. 홍어회도 된장만 있으면 한 접시를 전부 비웠다고 한다. 청와대 주방장들은 김대중의 찌개로 된장찌개를 꼽았다.
  • 김대중 내란음모 조작 사건으로 수감되었을 때도 밥 대신 과자, 빵 등 군것질을 하기도 했다. 후원금이 넉넉했을 것이니 사먹는 것은 문제가 없었을 듯하다. 그런데 좁은 감방 안에서 달콤한 고칼로리 식품이나 많이 먹기만 하니 정치 참여 불이행 서약으로 석방되어 미국으로 출국할 때는 살이 엄청나게 쪄버렸다. 이를 두고 부인 이희호와 동교동계 당원들은 "(세간에서는) 감옥 갔다오면 고생해서 야위어 보이는 게 정상이라 여길 텐데, 이렇게 살이 쪘으니 호의호식한 줄 알겠다."라고 놀리곤 했다고.[8]

3. 방송 출연

1997년 제15대 대통령 선거 도전과정 중, DJ에게 의미가 있었던 문화계 사건 두 가지가 있었다.

첫째, 당시 인기가도를 달리는 MBC의 예능 프로그램 일요일 일요일 밤에에 출연한 것. '이경규가 간다' 코너에서 이경규예고도 없이 DJ의 자택(동교동 자택이 아닌 일산 자택)을 기습 방문했다. 김대중의 회고에 따르면 아침 운동을 하러 집 대문을 열었더니 이경규와 제작진들이 있었다고.무릎팍도사에서 김영희와 이경규가 밝힌 후기 김대중은 그동안 자신에게 심어졌던 이미지를 180도 바꾸는 데 성공한다. 당시만 해도 기성 정치인들의 예능 프로그램 출연은 대단히 생소한 편이었고, 특히 DJ는 언론에 줄곧 과격한 사상가, 마키아벨리의 이미지로 비춰졌었다. 이 프로그램에서 그는 특유의 유머 감각을 발휘하여 프로그램이 끝날 때까지 옆에서 김영희의 웃는 모습이 그치지 않을 정도로 이경규를 들었다 놨다 했다.[9] 몰래카메라를 의심하는 부분이 백미. 이로 인해 김대중은 앞서 말한 강한 이미지를 희석하고 인간적이고 유머 있는 이미지를 만들 수 있었다. DJ는 이게 고마웠는지 나중에 <이경규에서 스필버그까지>라는 책을 쓰기도 했다. DJ의 재택근무 비서였던 장성민의 증언에 따르면, 김영희가 사고를 친 것을, 이경규가 일산의 DJ 자택까지 동행해 방송이 나갈 수 있도록 도운 것이라고 한다. 방송이 나간 후 박지원 대변인이(훗날 청와대 비서실장)이 “DJ의 정치인생 40년 가운데 웃는 모습이 TV로 나간 것은 처음”이라며 고마워했다는 후문이다.

둘째, KBS에서 절찬리에 방영되는 사극 용의 눈물에서 "이방원"이 탄 말에 DJ라는 인장이 지워지지 않은 채 방영되는 방송 사고가 일어났다. 사실, 진짜 방송사고가 맞았지만[10], 언론들이 한 마디씩 하는 바람에.. → 파장이 갈수록 커졌다. 배추머리 김병조 같은 거물도 말 한 마디(망한나라당)에 방송인 생활이 끝나는 등 '오독고'가 아직 과한 시대였던터라, 언론에서 주목할수록 드라마 관계자의 속이 바싹 타들었다고 한다.

한편 1997년에는 체험 삶의 현장에 출연해서 직접 일한 적도 있었다. 일의 종류는 남대문시장에서의 옷 판매.

임기 첫해인 1998년, 한국관광공사의 대한민국 홍보영상에 직접 출연하기도 하였다.
"한국이 변하고 있습니다. 오셔서 새로운 한국을 만나십시오."

4. 그의 이름을 딴 시설이나 단체

  • 행사
    • 김대중마라톤대회

5. 종교

위의 프로필에서 봤듯이 생전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세례명토마스 모어. 원래는 특별한 종교를 두지 않았고, 김대중의 부모 역시 그 시대 여타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유교(성리학)를 신봉했기에 김대중도 그 영향을 따랐으나,[11] 정치 신인이던 1957년, 은사이자 독실한 가톨릭 정치인이었던 장면 세례자 요한과의 인연으로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게 되었고, 가톨릭 신자가 되었다. 당시 장면의 세력이었던 민주당 신파 정치인들은 보스 장면의 영향을 받아 가톨릭 신자가 되는 경우가 많았는데 김대중도 이 중 1명이었다.

참고로 세례를 서울대교구 약현성당에서 받았는데, 당시 세례를 주었던 신부가 "교회를 위해 순교할 마음으로 정치하며 살아가시오!"라며 토머스 모어를 세례명으로 정해주었다고 한다.[12] 김대중 본인은 처음 세례명을 전해들은 순간 "하필 목 잘린 사람 이름을 지어주시나...?'' 싶어 깜짝 놀랐다고 한다.[13] 이후 김대중은 세례명대로 파란만장한 정치 여정을 걷게 되었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김수환 스테파노 추기경, 정의구현사제단 등 민주화운동에 동참했던 가톨릭 인사들과 교류하며 지냈고, 미국 망명을 떠난 이후에도 미국 성당에 꾸준히 출석했다. 1997년 대통령 당선 이후에는 김수환 추기경이 직접 명동성당에서 축하미사를 봉헌했다. 당시 대선에서 함게 경쟁했던 이회창 전 한나라당 총재도 함께 참석했는데, 이 두 사람이 함께 미사에 나온 건 봉두완 전 의원의 주선과 김수환 추기경의 요청 때문이었다고 한다. 청와대에 있는 와중에도 신부가 꾸준히 방문하여 미사를 집전했고, 퇴임한 이후에는 자택 근처 서교동 성당에 다니며 신앙 생활을 이어갔다. 그러다보니 2009년 사망 당시 장례 방식도 거의 가톨릭식으로 치러졌다. 이외에도 가톨릭계에서 직접 각 성당에 빈소를 마련했고, 정진석 니콜라오 추기경의 집전으로 명동성당에서 장례 미사를 치러주기도 했었다.[14] 참고로 김대중은 임종 직전 자신이 다니던 서교동성당 신부로부터 병자성사를 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원불교와도 인연이 깊은데, 제13대 대통령 선거 후보 시절인 1987년 11월 24일에 익산시에 위치한 원불교 중앙총부를 내방하여 당시 종법사인 대산 김대거로부터 '중산(中山)'이라는 호를 받기도 했다. 그 외에도 1994년 3월 17일에는 원광대학교에서 한국 대학 첫 명예 정치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또한 총무처에 지시해 원불교 교정원장을 15대 대통령 취임식 단상으로 올려 의전해줬다. 즉, 원불교가 정부 행사에서 4대 종교로 참여할 수 있도록 큰 협력을 해준 셈이다. 대통령 취임 후 2001년 8월에는 부산원음방송, 9월에 서울원음방송[15]을 개국하도록 협력해줬다. #1 #2

참고로, 영부인 이희호 여사의 종교는 개신교(감리회)이다. 혼인성사를 받을 당시 특별히 관면을 본 듯 하다. 하지만 두 사람은 살아생전 같은 그리스도인으로서 서로의 신앙을 존중하며 살아왔고, 김대중은 이희호의 교회 행사나 기도회 등을 같이 다녔다. 또한 매년 열린 김대중의 도쿄 납치 사건 생환 기념 미사 때도 두 부부는 늘 함께 참석해서 기도했다. 김대중과 김홍일, 김홍업은 가톨릭, 이희호와 김홍걸은 창천교회에 다녔다. 에큐메니컬 운동의 가장 모범적인 가족의 예.[16]

이러한 김대중의 영향으로 민주당계 정당 정치인들은 가톨릭 신자가 상당히 많다. 박지원, 정동영 등이 동교동계 합류 이후 김대중을 따라 가톨릭에 입교한 대표적인 경우다. 또한 가톨릭이 1970-80년대 민주화운동을 지원했기 때문에 이에 영향을 받아 세례를 받은 민주/진보 정치인들이 많다.

반면 보수정당에는 개신교 신자가 많은데, 이는 민주당 구파의 수장이었던 조병옥과 그를 계승한 김영삼의 영향을 받은 것이다. 현재 한국 최대 보수정당인 국민의힘에는 김영삼 손을 잡고 정계에 진출한 정치인이 매우 흔하다. 한편 보수정당에는 불교 신자도 흔한데, 이는 보수정당이 불교색이 강한 영남을 기반으로 두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보수정당에도 이회창, 오세훈, 이준석 등 가톨릭 신자가 존재한다.

6.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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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본문 내용은 '야설(夜雪)' 이란 제목의 한시. 눈길에서 비뚤게 걷지 말라고 유명한 시로, 서산대사의 '답설(踏雪)'로 알려진 작품이라 글귀 오른쪽에도 적혀 있으나 후일 밝혀진 바로는 조선 후기 문신 이양연(李亮淵)의 작품이다.[18]
  • 서예에 상당히 능하여 경매에서 꽤 비싸게 팔리기도 한다. 최고작은 4100만 원의 “행동하는 양심으로 민주회복조국통일”이다. #
  • 죽을 고비만 다섯 차례[19] 겪어본 흔치 않은 이력의 정치인이다. 군사독재 시절에는 친정부 성향의 언론들로부터 온갖 마타도어에 시달렸으며, 시국사건에 얽혀 징역을 살았다. 이런 DJ 옆에서 같이 정치 생활을 했던 측근들도 고통 분담(?)에 동참, 연혁이 오랜 측근일수록 감옥에 다녀오지 않은 사람이 드물며[20], 김옥두, 한화갑 같은 경우는 김영삼의 측근 김동영과 더불어 고문까지 받은 대표적인 측근 정치인으로 꼽히고 있다. 정치인으로서 가장 영광스러운 자리인 대통령직까지 수행했지만, 그 도달 과정은 한창 능력을 발휘할 40대 ~ 50대 시기에 정권 차원에서 가한 박해를 감내하는 가시밭길이었던 것이다. 그나마 김대중의 역량과 사람보는 안목을 높이 평가한 노태우가 집권한 1988년(60대 중반)부터 상황이 조금씩 풀리기 시작한다.
  • 역대 대통령 중 가장 고생을 많이 했다. 전술한 바와 같이 죽을 고비도 많이 넘겼고 온갖 박해를 당하고 심지어 전두환에 의해 대한민국에서 쫓겨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렇게 역경이란 역경이 모두 닥쳐와도 다 견뎌내고 기어이 대통령의 자리에 올랐으니, 이 점을 빗대어 겨울을 버티고 피어난다는 인동초(忍冬草)별명이 되었다. 민주화 투쟁에서의 수많은 시련, 대선에서의 수많은 고배를 겪으면서도 꺾이지 않았고 기어이 대권을 쟁취한 그에게 붙여진 가장 대표적인 별명이다.
  • 일베 등 극우 커뮤니티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고등학생이었던 일제강점기 시절 자신을 가르쳤던 고등학교 교사에게 찾아가 "센세. 와따시데쓰. 아노 다이쥬데쓰요.(선생님 접니다, 그 다이쥬[21][22]입니다)"라고 했다는 증언이 있는데 실제로 1998년 10월, 김대중 전 대통령이 일본을 방문했을 때 자신의 고등학교 일본인 은사인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郎)를 만난[23][24] 적이 있다.
  • 김대중, 노무현의 연설을 모두 담당했던 강원국의 말로는, 김대중은 생각의 과녁이 너무 멀어 맞히기가 어려웠고, 노무현은 과녁은 가까우나 막 움직여서 맞히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비슷한 비유로 유시민은 김대중은 높은 산이라 우러러보기에는 좋으나 오르기에는 힘들고, 노무현은 낮은 언덕이라 함께 오르기에 좋다는 말을 한 적이 있다. 이 두 표현은 김대중과 노무현의 미세한 차이를 잘 보여준다.
  • DJ가 신문을 10여개씩 챙겨보면서 뉴스, 정보를 갈구했던 탓에 그의 측근들은 늘 머릿속에 뭔가 소식을 하나씩 지니고 있었다고 한다. MBC 아나운서 출신인 정동영 의원 같은 경우는 한 발 더 나아가, 막 정계에 입문한 초년병 시절이었는데도, 박지원과 함께[25] 아침 6시에 김대중 전 총재에게 일일 브리핑을 하는 생활을 6개월 동안 한 적이 있다. 이 생활이 고됐는지 정 전 의원은 자신의 후임자가 정해지자 속으로 만세를 불렀다는 소회를 밝힌 적도 있다.
  • DJ는 자신이 신임하는 측근들에 대해서는 사소한 부분까지 일일이 챙겨주는 것으로 잘 알려졌다. 한 번은 박지원 비서실장이 야당 대변인이던 시절 아침 회의 때부터 술냄새를 풍겨 다른 참석자들이 눈살을 찌푸리면 "대변인이 밤새 을 한 모양이군요. 기자들과 술을 마시는 게 대변인의 가장 중요한 일이지요."하며[26] 이런저런 사람들을 분위기를 풀어주곤 했다.
  • 평소 반 걸음만 앞서가는 글쓰기를 강조했다. "아무리 하고 싶은 말이 있더라도 너무 앞서가지 마라. 따라오지 않으면 잠시 멈춰서서 들어라. 이해해줄 때까지 설득하라. 그래서 의견을 맞추라"고 강조한다.
  • 그 밖엔 "손을 놓지 마라. 2 ~ 3걸음 앞으로 나서면 마주 잡은 손이 떨어질 것이고, 따라올 수가 없다. 늘 그들 안으로 들어가 읽는 사람이 무엇을 원하는지, 그들의 생각이 무엇인지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란히 가서도 안 된다. 발전이 없다."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상고를 졸업하고 일본 대학 진학을 계획했지만, 재정 문제로 장학 제도가 매우 잘 갖춰진 만주 건국대학으로 방향을 바꾸어 입학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2차 세계대전의 여파로 징병될 가능성이 높아지자, 진학을 포기했다. 건국대학에 진학해도 병역 혜택이 주어지는 것은 아니었으며, 만주 건국대는 오히려 평소에도 학업과 무술 연마, 군사 훈련을 병행했던 터라, 재학생들의 징병 가능성이 매우 높았다. 2차 대전 말기 무렵, 미국만주에 주둔한 일본 관동군을 견제하기 위해 소련군을 끌어들였으며, 이때까지 만주에서 철수하지 못하고 남아서 부역한 일본인, 한국인 생존자는 대부분 소련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 때문에 대학 진학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 평생 한이 남았다고 밝힌 바가 있다.[27] 대선 공보에는 경희대학교 대학원 수료로 표기되어 있는데, 경희대 대학원에서 비학위 과정 1개를 수료하고 1개의 석사 정식 학위 과정을 수료하였다. 다만 아쉽게도 논문은 통과하였지만 학위는 받지 못해서 수료 처리가 되었다.[28] 이후 노벨평화상을 수상한 2000년에 경희대학교 평화의 전당에서 열린 "경희가족의 날" 행사에서 축하패를 건네기도 했다.
  • 평생 정치만 해왔다고 알고 있는 사람이 많지만, 소싯적에는 선박 회사와 신문사를 경영한 사람이었다. 덕분에 처음부터 전업 정치인으로 나선 동지 YS(김영삼)보다 경제 현안 파악 측면에서 우위에 설 수 있었고, 여기에 DJ 본인이 꾸준한 공부[29]로 시대 조류를 면밀히 파악하고 대응하고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이기도 했다.[30] 그리고 전쟁 후 모든 게 부족하던 시절에 신문사를 운영했기에, 사장(김대중)이 직접 기사를 작성해 올리는 경우도 많았던 덕분에, 상대방 말을 받아적는 습관이 몸에 배었다고 한다. 김영삼이 선친 김홍조 옹의 장례식장에서 "받아적는 것 하면 김대중 아이가?"라며 옛일을 회상했을 만큼, 젊은 시절 국회의원 김대중의 상징적인 모습이었다는 후문이다.
  • 기네스북에 이름을 올린 사람이기도 하다. 초선 의원 시절 법안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서 표결 직전 의사 진행 방해 발언 필리버스터로 원고 한 장도 없이 무려 5시간 19분 동안 연설했는데, 이는 '세계 최장 시간 국회 연설'로 기록되었다. 반대로 의회 연설 쪽에서는 미국의 상원의원 스트롬 서먼드가 24시간 18분 동안이나 연설을 해 최장 시간을 기록했다. 그러나 서먼드는 처음부터 끝까지 관련 내용에 대해서만 연설한 것이 아니라, 할머니의 비스킷 레시피 같은 쓸데없는 말로 온갖 꼼수를 총동원해 시간을 끈 것이었다.
    사실 아예 원고 한 장도 없이 일장연설한 김대중이 특별한 케이스지, 일반적인 필리버스터의 형태는 이렇다. 사전에 치밀하게 준비된 원고뿐만이 아니라 연설자가 지금까지 머릿속에 담은 모든 지식을 총동원하기 때문에 별의별 내용이 다 나오게 되며, 어떻게든 관련 현안과 연계할 만한 내용을 고르는 것 또한 연설자의 역량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 2013년 미국 버락 오바마의 의료보험 개혁에 맞서고자 21시간 동안 연설한 테드 크루즈 의원의 경우 쓸 만한 소재가 떨어지자, 동화책 내용부터 영화 스타워즈의 잡다한 대사까지 끄집어내기도 했다. 사실 한국의 필리버스터와는 다르게, 미국에서는 현안과 별 관련이 없더라도 성경책을 읽든 전화번호부 번호를 읊어대든 상관이 없어서 가능했던 이야기다. 한국의 필리버스터에서는 관련없는 내용을 1분 동안 언급하거나 아예 연설을 멈추면 자동으로 다음 주자에게 넘겨야 하고, 화장실같은 개인 용무 해결도 일일이 의장의 허가를 받아야 하는 등 제약이 많다. 후일 2016년 테러방지법 반대 필리버스터에서 초반 2시간의 인트로를 원고도 없이 풀어낸 정청래에게 사람들이 기겁한 것도 이 때문.
    후에 더불어민주당이 테러방지법 처리를 최대한 늦춰보려고 필리버스터 카드를 꺼내들었을 때 (기네스북에 등재된 건 아니지만) 김광진은수미정청래이종걸 순으로 이 최장 기록을 갱신했다.
  • 히로히토 덴노가 사망했을 때 일본 대사관에 설치된 분향소에서 조문을 한 적이 있어 경향신문에서 이 사건을 취재하여 당시에 논란이 된 바 있었다.[33]
  • 2001년 3월, 김대중 전 대통령 방미 당시 갓 취임한 조지 W. 부시미국 대통령과의 정상회담에서 매우 어색한 분위기를 보이며 부시 전 대통령과 대북 관계에 대해 심한 의견 충돌을 보이기도 하였다.[35] 부시 전 대통령은 미국과 합의한 내용을 북한이 지키고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 나는 김대중 대통령의 구상을 지지하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갖고 있다, 나는 북한의 지도자에 대해 의구심을 가지고 있다라고 하였고, 이에 김대중 전 대통령은 미국이 북한하고 협상하는 문제는 미국이 결정할 문제로써 우리는 지금 당장 해야 한다든가 그런 의견을 표시한 바 없다, 부시 대통령께서는 북한에 대해서 생각을 솔직하게 저한테 말씀해 주셨는데, 그 점은 참고하겠다라고 답하며 서로간의 격한 입장 차만 표명한 채 둘의 어색한 만남은 마무리되었다.[36][37]
  • 정계 은퇴 번복[38]을 통해 항간에서는 대통령병에 걸린 환자라는 비난까지도 있었다. 이건 서슬 시퍼런 군사 독재 정권에서 살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한 측면도 있지만 군사독재가 끝난 1992년에서도 대선에서 패배하여 정계 은퇴를 약속했으나 또 번복했다.
  • 잠시 정치를 하지 않고 있던 시절에 배우 오정해결혼식에 주례를 담당하기도 했다.
  • 2009년 5월 23일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 영결식 때 추도사를 직접 써서 읽기로 했지만 당시 정권인 반대 진영이었던 이명박 정부가 난색을 표했기 때문에 무산되었다. 김영삼, 전두환 등의 다른 전직 대통령이 참석하는데 김대중 한 사람만 추도사를 읽으면 형평성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 표면상의 이유였다. 김대중이 읽으려던 추도사는 한 달 가까이 지나서야 공개되었다. 관련 기사
  • 공인된 장소에서는 표준어를 사용했지만, 사석에서는 서남 방언을 고집했다고 한다. 측근들이 자제하라고 당부했지만 끝끝내 고집을 피웠다고 한다. 스스로를 호남의 자랑이라고 생각했으며, 매체에서 서남 방언을 하는 캐릭터가 부정적인 역을 자주 맡는 것에 분노를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예:모래시계#)
  • 뉴욕 한인회장이자 성공한 사업가였던 박지원 전 의원은 1983년 미국 워싱턴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만난 이후 인생이 변하게 되었다. 박지원 전 의원은 김대중 전 대통령에게 큰 감명을 받고는 무릎을 꿇고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선생님. 제가 잘못 살아왔습니다. 저의 삶이 부끄럽습니다. 민주화를 위해서 벽돌 하나라도 놓는 그런 생각으로 살겠습니다." 이후 박지원은 국민의 정부가 출범한 뒤 청와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고 다선 국회의원, 민주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을 거쳐 국민의당 원내대표, 비대위원장, 당대표 등 굵직한 정치 경력을 추가해 왔다.
  • 시대적인 배경으로 인해, 그 시절을 산 어르신들이 그렇듯 일본어에 능숙했다. 대통령 재직 시절 일본인사와 공식 통역관의 통역을 거쳐 이야기 했는데, 대담이 끝난 후 그 통역관에게 오역한 부분을 지적했다는 후문이 있다. 영어는 감옥에서 영문법 책을 읽으며 독학해, 미국 방송사 ABC의 나이트라인[40]
  • 젝키 팬덤 이야기와 관련해서 나무위키에 조작질 해놓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도 그렇다. 아래와 같이 써놨다.

    대통령이었던 시절 손녀가 청와대에서 뮤지컬 '알리바바와 도적들'을 공연하러 왔던 젝스키스의 매니저에게 맞은 적이 있다. 정작 본인은 못 봤다고 한다.[41] 사실 당시 젝스키스의 소속사는 문제가 많은 기획사로 지금은 망해가는 중이다.

    사실관계를 보면 청와대에 공연하러 왔을 때 일도 아니고, 젝키 영화 개봉 때 극장에서 팬들이 저지선을 무너뜨려 제지하는 도중 매니저한테 맞았다고 한다. 매니저 본인이 밝힌 이야기다. 기사

    그리고 때린 것이 분명 잘못된 행동이지만, 당시 젝키 팬덤의 행동이 막장인 측면이 컸다. 젝키 멤버의 불알을 잡고 자기 것인 마냥 안 놓은 일도 있고, 달리는 차 뒤에 매달려서 대형사고가 날 뻔한 적도 있고, 한 멤버는 팬들이 계속 쫓아와 울면서 경찰서로 들어가 도와달라 한 적도 있다.[42] 팬들은 막장으로 굴고 그걸 매니저는 때려서 막고 미개했던 시절이다. "문제가 많은 기획사"라고 하는 얘기도 사실관계를 보면 허위 루머가 태반이다. 애초에 망조가 들었다는 것도 소위 말하는 젝키 악성 팬덤이 그리도 싫어하는 창업주 이호연이 사망한 후의 일이고. 자세한 사항은 해당 문서로.
  • 역대 대통령 중에 가장 최고령인 나이로 대통령에 취임했다. 취임 당시 나이는 만 74세 1개월. 다만 재임 시점 기준으로 최고령이었던 대통령은 1960년 4월 하야 당시 만 85세였던 이승만 전 대통령이다.[43]
  • 인권을 중시하던 대통령이다보니 국민의 정부 때부터 한국에서는 사형이 한 번도 집행되지 않았으며 더불어 사형수를 감형해주기도 했다. 김대중의 목표는 모든 사형수의 감형이었지만 사법당국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고 밝힌 바 있다. 그리고 참여정부에서도 이 기조를 이어 몇몇 사형수를 감형했다. 정권이 바뀐 이후 사형수의 감형 사례는 없지만 사형은 여전히 집행하지 않고 있다. 연합뉴스 따라서 2017년 5월 25일 기준으로 한국은 사형제는 존재하나 실시하지 않는 '사실상 사형 폐지국'으로 분류되어 오고 있다.
  • 2017년 10월, 대한민국 검찰청이명박 정부 시절 국정원 심리전단 직원과 보수 단체 관계자가 서로 주고받은 이메일을 입수했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세상을 떠난 뒤에 작성된 이 이메일에는 불법 대북송금 사건을 빌미로 노르웨이 노벨위원회에 김 전 대통령을 폄훼하며 고인의 노벨평화상 수상을 취소해달라는 청원을 넣을 계획이 담겼다고 한다. YTN 보도 게다가 노벨평화상 수상 취소를 위한 사전 공작으로 반독재 인권상이기도 한 라프토상의 수상 취소도 획책했다.경향 보도 이 사실이 알려지자 김 전 대통령의 유지를 잇는 민주당국민의당 호남계의 반응은 당연히... 민주당은 "이명박이야말로 정치 보복의 화신이다"라며 비난을 퍼부었고, 박지원 의원은 본인 페이스북에 "천하의 못된 짓은 다 모아 자행한 이명박과 이명박 정부 주동자, 그리고 가담자는 철저히 발본색원해서 처벌해야 한다. 이명박을 당장 구속 수사해야 한다"고 격정적으로 주장했다. # 사실 김영삼 정부 때도 김영삼의 노벨평화상을 위해 김대중의 노벨평화상 수상 반대 공작을 벌인 적이 있다. #
  •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되는 대통령이다. 수많은 선거에서 지고, 정계은퇴 선언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결국에는 대통령이 되어서 그런지, 선거 후에 가장 많이 언급이 된다. 이는 보수, 진보정당 가릴 것 없다. 최근에는 장제원황교안을 평가하면서# 언급하기도 했다.
  • 정치인 홍준표가 DJ의 식사자리에 초대받았으나 결국 거절하고 YS에게 갔다는 건 유명한 일화.[45] 참고로 13대 대선 당시 홍준표 본인은 경상도(창녕군), 부인 이순삼 여사는 전라도(부안군 줄포면) 출신인지라 정치적 논쟁이 잦았고, 합의 끝에 '한주의통일한국당'이라는 군소정당의 교주 출신 후보 신정일에 투표하기로[46] 결정했지만 이순삼 여사는 남편 몰래 김대중에 투표를 했다. 이를 나중에 알게 된 홍준표는 부인과 또 싸우고 무척 서운해했다고 한다.
  • 한때 개인 차량으로 1999년식 현대 에쿠스[47]를 보유했었는데, 처음에는 큰 아들 김홍업의 명의로 운행했으나, 퇴임 이후부터 서거하기 전까지 개인 차량으로 보유해왔다고 한다. 서거 후인 2009년 말 6,000만원이라는 엄청난 금액에 중고매물로 올라와 화제가 된 적도 있었다.# 이와 별개로 15대 대선 후보 시절에는 현대자동차가 제공한 현대 다이너스티 방탄 리무진을 타고 다녔고,[48] 의전용으로 에쿠스 리무진[49]도 보유한 바 있다.
  • 1997년 대선 당시에는 미국 팝의 황제 마이클 잭슨을 대한민국에 초청하기도 했는데 당시 로비스트였던 최규선 씨가 주선한 것으로 알려졌다.[50] 잭슨은 당시 김대중 대통령을 만나고 취임식에도 참석했다.[51]
  • 2022년 기준 유일하게 정권 재창출에 성공한 민주당계 정당 출신 대통령이다.
  • 서예, 작문, 영화 등 예술에 조예가 깊었던 것과 별개로, 노래는 못 부르는 음치였다.
  •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엄청나게 좋은 몸을 타고났다. 술, 담배를 다 즐긴 데다가 대식가에 추가적으로 대통령 당선 전에도 각종 성인병을 달고 다녔고, 위에 언급된 수감생활과 각종 고문 후유증에 1920년대에 태어났음에도 거의 구순까지 살았으며 심지어 사망 원인의 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 자살 이후 정신적으로 큰 충격을 받은 것이다.
  • 김대중의 보이지 않는 측근으로 손아랫동서인 김소환씨가 있다. 이른 바 중대한 정치적 결단을 내렸던 '목동구상'의 목동이 이 김소환의 목동 아파트였다. 이곳은 김대중과 동교동계 정치인들의 안가처럼 쓰이기도 했다. 김소환은 물심양면으로 김대중을 도왔으나 대통령이 되는 것을 보지 못하고 1993년 지병으로 사망했다.


[1] 자료에 따라선 먼저 흑산도산이 아닌 수입산을 내놓았고, 김대중의 이름을 언급하자 그제서야 흑산도산이 아님을 고백했다는 이야기와 덧붙여 추가로 돈도 받지 않고 흑산도산으로 바꿔줬다는 이야기도 있다.[2] 대통령 임기 시절에는 가끔씩 고향의 해산물을 공수해 왔다.[3] 특히 설렁탕은 김대중을 회고하는 많은 측근들이 빼놓지 않는 음식인데, 전국 유세를 다닐 때 많은 인원을 몰고 다녔기 때문에 설렁탕은 앉으면 바로 나오고 빨리 먹고 갈 수 있는 음식이라서 매일 먹었다고 한다. 그래서 박선숙에 따르면 하루는 전 국회의원이자 당시 동아일보 기자였던 윤영찬이 김대중을 따라다닐 때 "박선숙 부대변인이 설렁탕을 너무 많이 먹어서 다른 거 먹고 싶다고 합니다."라고 자기를 팔아서 그날 불고기를 먹었다고 했다. 실제로 김대중은 윤영찬을 매우 아꼈다고.[4] 2022년 9월 10일 KBS 방영 다큐멘터리 '한식연대기 1부 - 정치의 맛'에서 나온 인터뷰 영상이다.[5] 2023년 5월 23일 KBS 같이갑시다 방영분.[6] 물론 김대중이 1924년생이니 원래 치킨을 접할 수 없었던 나이라고 치더라도, 보통 사람이 나이가 들수록 소화기관의 소화력 저하 등의 이유로 기름진 음식은 피하게 마련임을 생각하면 나름 놀랄 노릇이다. 참고로 김대중은 1995년 당시에도 상당한 고령인 71세였다.[7] 군사정권 시절 고문을 당한 적이 있으니 그럴 수밖에 없다.[8] 사실 그 시절 재소자에게 주는 식사는 쌀과 콩 등 잡곡을 섞어 오늘날 봉구스밥버거 같이 생긴 동그란 틀에 찍어주었는데(그래서 재소자들은 이를 가다(形)밥이라 불렀다), 다섯 가지 종류로 나뉘어 교도소 내 작업을 나가는 재소자에게는 가장 큰 사이즈를, 그렇지 못하는 정치범이나 흉악범은 가장 작은 사이즈를 주었다. 김대중은 예의주시해야 하는 정치범인데다 전두환에게 찍혀있었으니 다른 재소자들과 달리 가장 작은 사이즈를 받을 수밖에 없었고, 대식가였던 김대중은 배고픔을 채우기 위해 군것질을 할 수밖에 없었다.[9] 김영희 PD는 나중에 20대 대선더불어민주당 이재명 후보의 선거 운동을 도와주기도 했다. 하지만 이때는 10년 전 나는 가수다를 기획했을 때와 전혀 달라지지 않은 구시대적 감각으로 홍보를 했고, 홍보 포인트를 잡는 것도 서툴러져, 지지자들에게도 좋은 평가를 듣지 못했다는 차이점이 있다.[10] 호주 말 목장주를 취재한 기자가 이를 확인.[11] 알려진 사실이지만 김대중은 어린 시절 서당을 다녔었다.[12] 공교롭게도 약현성당한국 가톨릭 순교자들이 순교한 순교터 위에 세워진 성당이다.[13] 토머스 모어는 헨리 8세의 이혼 문제에 대해 반대 입장을 표현하다 참수형을 당했다.[14] 다만, 장례 미사에서 김대중의 시신은 국장을 위해 국회에 안치되어 있었기 때문에 관 없이 미사를 진행했다.[15] 이 당시에는 원음방송 본사가 익산에 있었다.[16] 다만 감리회가 한국 개신교의 주류 교단 중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한 편이라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 비주류 교단을 포함하면 대한성공회가 가톨릭과의 관계가 가장 원만하다고 볼 수 있다.[17] 보통 개명을 하게 되면 글자 자체가 바뀌지만 한자만 바꾸고 한글로는 똑같이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대표적인 예가 백범 김구와 최초의 정상회담을 한 김정일인데 김구는 거북 구()자를 아홉 구()자로 바꿨고, 김정일은 한 일() 자를 아버지와 같은 날 일()자로 바꿨다. 나경원도 마찬가지다.[18] 전두환의 장남 전재국과 정도경 부부에게 준 것인데, 결혼 축하 선물이란 추측과 달리 이들은 1980년대 초에 결혼했고 이 글씨는 1992년의 것이다. 귀국하여 시공사 사장이 된 이후에 준 글귀로 보인다.[19] 전쟁, 교통사고, 납치, 사형선고.[20] 심지어 김대중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박지원대북송금 사건으로 인해 감옥에 갔다왔다.[21] 김대중 전 대통령의 창씨개명한 이름은 '도요타 다이쥬'다.[22] 여담으로 해당 성씨는 오우치 씨와 더불어 백제 임성태자의 후손들이 사용하는 상씨로 알려져 있다.[23] 김대중(金大中(김대중))전 대통령은 8일 오후 숙소인 영빈관에서 목포상고 재학시절 은사였던 무쿠모토 이사부로(椋本伊三郎(양본이삼랑)·80)와 20여분 동안 만났다., 김 대통령 일본인 은사 모쿠모토 해후(MBC), [김대통령] 일본서 60년 전 은사와 해후(조선일보)[24] 무쿠모토는 8.15 광복 직후 귀국하여 외교관으로 변신, 에티오피아터키, 우루과이 대사를 역임하고 1983년 외교 일선에서 물러났다. 그리고 2002년 허혈성 심부전으로 인해 11월 28일 0시 34분 도쿄도 메구로구의 병원에서 향년 84세를 일기로 사망했다.[25] 정동영이 일산의 총재 자택으로 출근하면, 전날까지 이런저런 사람들과 을 마셨던 박지원이 차 안에서 운전사와 졸고 있는 모습을 종종 보았다고 한다.[26] 정가에서는 흔히 "기름칠한다"는 은어를 쓴다. 언론인들과 시간을 내어 소식을 주고받거나, 관계개선의 소통창고로 이용된다고 한다. 동아일보를 제외한 기존 보수언론들과 관계가 껄끄러웠던 DJ에게 매우 중요한 일이기도 했다. 하단에도 나와 있지만, 박지원은 원래 미국에서 사업을 하며 뉴욕 한인회장까지 맡을 만큼 확실하게 기반을 다졌던 사람이라, 그 사업가 경험을 활용하고자 한 인사로 추정.[27] 물론 김대중 세대에서는 무학이나 국졸도 아주 많았을 것이고 자녀뻘 되는 다음 세대에서도 중졸, 고졸이 많았기 때문에 그 당시에는 고등학교만 졸업해도 굉장한 고학력 인텔리이기는 했다. 아무래도 정치인들이 대체적으로 학력이 높고, 본인 역시 배움과 경험에 대한 갈망이 있어서 그렇게 여긴 것으로 보인다.[28] 이렇게 경희대학교와 인연이 닿아 자신의 아들 김홍일김홍업을 경희대에 진학시켰다. 게다가 이들의 아내, 즉 김대중의 두 며느리도 모두 경희대 출신이다. 당시의 CC였던 셈. #[29] 읽은 책만 2만 권에 달했다고 한다. DJ의 자택을 방문한 사람들이, 서재에 소장된 수많은 책 대부분이 하나하나 손때가 묻어있는 걸 보고 놀라곤 했다는 일화가 있다.[30] 박태준을 영입하는 데 공들인 주된 사유 중 하나가 "기업체를 운영해본 덕분에, 규모가 큰 실물 경제에 매우 밝은 인물이기 때문"이었다는 후문이다.[31] 두 사람 모두 가톨릭 신자이며, 아내와 사별한 아픔이 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32] 국민의 정부 초대 국정상황실장을 지낸 장성민이 밝힌 사실로는, 김대중 전 대통령은 넥타이를 매우 좋아했으며 기분이 좋으면 자신의 넥타이를 풀어 선물하는 버릇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때 바이든이 받은 녹색 넥타이는 본래 장성민이 2001년 1월에 생일선물로 준 것이었다고 한다.[33] 김대중 平民黨 총재가 9일 상오 駐韓일본대사관저의 히로히토日王의 분향소를 찾아 조문하고 있다[34] 전두환 정권 당시에도 천황은 사과 의지를 표명해왔다.[35]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36] 부시 대통령 '북한 믿을 수 없어'[37] 부시는 이때 좋지 않은 앙금이 남았는지 이후 공식 석상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을 'this man', 노무현 전 대통령을 'easy man'으로 부르는 외교적으로 큰 결례를 저질러 구설수에 올랐다. 하지만 이명박 전 대통령과는 보수 성향이라는 공통점 때문인지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고 한다.[38] 극우 커뮤니티에서 자주 고인드립으로 써먹는 그 유명한 멘트인 "정치 안 해요. 내가 안 해요. 이건 내 문제니까 내가 안 하는 거요. 누가 날 강제로 시키는 거요." 그러나 이 발언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복귀했다.[39] 여기서 말하는 '민간인'이란 장성급 장교출신이 아닌 사람을 의미한다. 한마디로 모병제 국가나 군 면제 등으로 인해 군 복무 경험이 아예 없는 사람 또는 병사, 부사관, 장성급 이하 장교 출신으로 의례적인 군 복무만 한 사람을 뜻한다.[40] 테드 카플이 진행하는 미국 ABC 나이트라인 봉두완 아나운서와[53] 함께 출연할 만큼 실력을 쌓았다. 외국어 어휘를 늘리는 데는 그 나라 문학 작품을 읽는 게 매우 도움된다는 외국어 공부 지론도 갖고 있었다고. 2차례의 외국 망명을 거치며 외국의 주요 인사들을 만났는데, 덕분에 DJ는 대통령 당선 전부터 풍부한 외교 경험을 쌓으며 일가견을 갖게 되었으며, 수십 년에 걸친 민주화 투쟁으로 쌓은 세계적인 지명도를 바탕으로 미국, 중국, 일본 등과 역대 최고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였다. 해외 순방을 그리 많이 다닌 것은 아니었지만, 한국 역대 대통령들 중에 김대중만큼 미국, 중국, 일본의 행정수반과 두루 원만한 관계를 가지면서도 주도적인 포지션을 가졌던 자는 없었을 정도로 능수능란한 외교를 했다. 하지만 시대적 한계 때문인지 영어 발음은 그다지 좋지 않고 영어에서 사투리 억양이 나온다. #[[https://youtu.be/h04HsM34Jh4|7분 20초경 부터][41] 젝스키스의 당시 매니저는 소녀팬들을 때리는 걸로 유명했다.[42] 전부 다 멤버 본인들이 증언한 내용들이다. 141218일자 해피투게더, 160423일자 무한도전, 160601일자 라디오스타 등 방송에 나온다.[43] 김대중의 퇴임시 나이는 만 79세 1개월.[44] 사실 김대중은 남북정상회담 훨씬 전인 1987년부터 빌리 브란트 서독 총리의 추천으로 14년째 노벨평화상 후보로 선정된 인물이었다. 남북정상회담 하나만으로 김대중이 노벨평화상을 받았다고 할 수는 없는 것. 그리고 동티모르 학살에서 동티모르를 지켜낸 것도 노벨평화상의 이유 중 하나였다. 과장 안 보태고 남북정상회담이 없었어도 노벨평화상을 받을 수밖에 없는 인물이었던 것.[45] 홍준표가 정계에 입문한 이유가 검사 시절 당시 본인과 가족들을 위협하던 자들로부터 가족을 지키기 위함이었는데, 당시 김대중이 이끌던 야당의 세력이 여당에 비하면 많이 약했기 때문에 들어가지 못했다고.[46] 사실상 사표로 버려버리기로 했다.[47] 1세대 초기형 VS450 트림.[48] 당시 정주영 전 현대그룹 명예회장의 지시로 방탄 기능을 탑재한 다이너스티 리무진 3대를 특수 제작해 각각 정주영 전 명예회장, 그리고 여야 대권 후보였던 김대중과 이회창에게 각각 제공했다고 한다. 대통령 당선 후 해당 차량은 김대중의 측근인 한화갑 전 의원이 타고 다니다가 아태평화재단에 기증됐다. 이후 한동안 근황이 알려지지 않다가 2013년 아태평화재단 측에서 해당 차량을 전시용으로 목포시에 기증하겠다는 의사를 밝혔으나 목포시에서 거절했고#, 폐차 위기에 놓였다가 2016년 간신히 영암군에 기증됐다.#[49] 2008년식 마지막 출고분으로 알려져 있으며, 서거 이후에는 박지원 전 의원이 물려받아 운행하였다가, 현재는 목포에 위치한 김대중 노벨평화상 기념관에 전시되어 있다.[50] 권노갑 회고록[51] 마이클 잭슨 김대중 대통령 취임식 참석 위해 방한[52] 다만 오바마의 경우 본인이 직접 나서서 재선에 성공한 것이었다. 미국은 4년 중임제라서 두 번 대통령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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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70년대의 대표적인 언론인으로 능변으로도 그 실력을 인정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