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0-26 23:22:38

법통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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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봉 왕정복고 시대의 프랑스 왕국 국장

1. 개요2. 역사
2.1. 부르봉 왕정복고기2.2. 7월 왕정기2.3. 분파2.4. 이후
3. 사상
3.1. 사회, 경제 정책3.2. 외교 정책
4. 여담5. 같이 보기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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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Légitimisme / Légitimism

1830년 프랑스 7월 혁명으로 무너진 부르봉 왕조의 왕위 계승권을 주장하는 왕당파의 일종. 보나파르트주의, 오를레앙주의와 함께 19세기 프랑스 우익의 3대 정파이다. 이를 추종하는 세력은 법통파(Legitimistes) 또는 정통왕당파라고 한다.

2. 역사

2.1. 부르봉 왕정복고기

초왕당파
Ultraroyalistes
<colbgcolor=#a9a9a9> 활동 시기 <colbgcolor=#ffffff,#1f2023>1815년 ~ 1830년
주요 정치인 샤를 10세
프랑수아 르네 드 샤토브리앙
이념 군주주의
전통적 보수주의
반동주의
가톨릭 교권주의
스펙트럼 우익[1] ~ 극우
법통파의 시작은 부르봉 왕정복고 시절 반동주의 극우 정당이였던 초왕당파(Ultraroyalistes, 1815 ~ 1830)였다. 1815년 왕정복고 직후 치러진 선거에서 전체 400석 중 350석을 차지하며 압승을 거두고 공화주의자들에 대한 복수를 부르짖었으나[2] 이들을 크게 부담스러워한 루이 18세에 의해 바로 의회가 해산되었고 루이 18세 치세에는 정치권력의 주류가 되지 못했으나 샤를 10세가 반동적인 정치를 펴자 그를 지지했다.

이들은 부르봉 왕정 몰락 이후 샤를 10세의 손자인 샹보르 백작을 왕좌의 후보로 지지하고 부르봉 가문의 자매 가문인 오를레앙가에 반대한다. 법통주의는 대귀족과 성직자들의 지지를 받았다.

7월 혁명으로 7월 왕정이 들어서고 집권 세력은 정통 부르봉 왕가(샤를 10세)에서 오를레앙주의(루이필리프)로 교체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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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7월 왕정기

1831년 치러진 선거에서 전체 460석 중 104석을 얻는 등 여전히 만만치 않은 존재감을 드러냈다. 1832년 5월 샹보르 백작의 모후인 베리 공작부인이 정통 부르봉 왕가의 복구를 위해 반란을 시도했으나 빠르게 진압되었으며 이후에 루이 19세20분 군림과 앙리 5세로의 계승 이후 일어난 일련의 정치적 파동이후 법통주의자들은 정치적으로 소외되었고 의석도 10분의 1 수준으로 크게 줄었다.

이들은 부르봉가를 지지한다는 점과 선거인단을 줄인다는 데 있어서 우익적인 성향을 보였으나 시간이 갈수록 루이 16세를 살해하는데 일조한 오를레앙에 대항하여 시대정신에 타협할 필요를 느껴 언론의 자유, 노동자들의 권리 등과 같은 유화책에 대해 관심을 보였다.

2.3. 분파

이 분파들은 1840년대 초 탄생해 오를레앙 왕조 후기 동안 부르봉 왕정복고의 방법론을 놓고 이견을 보였다. 그러다가 1843년 샹보르 백작 앙리(앙리 5세)가 프랑스에 복귀해 정계 입문을 선언하자 통합된다.
  • 온건 절대주의: 블라카스 공작 루이 드 블라카스[3]가 이끈 노선으로, 앙시앵 레짐절대군주제에 우호적이었고 의회를 불신해 직접적, 무력적 행위를 통한 왕정복고를 선호했으나 절대주의 계파 내에선 온건파로 분류되었다.
  • 농본주의전통주의: 마찬가지로 의회에 적대적이었고 의회정치에 참여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주로 농민이나 지주들의 지지를 받았으며, 봉기와 혁명을 통한 왕정복고를 추구했다.
  • 의회자유주의: 의회에 우호적이었으며, 가장 온건한 계파였다. 왕정복고 역시 의회 체제 내에서 합법적으로 권력을 취득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진보 오를레앙주의자들과 동맹을 맺고자 했다.
  • 의회보수주의: 의회 참가에 찬성했으며, 보수주의적 계파들 중 그나마 가장 온건한 편이었다. 무장 봉기나 혁명, 혹은 쿠데타보다 합법적인 정권 탈취를 선호했으며, 보수 오를레앙주의자들과 타협에 우호적이었다.
  • 갈리아주의: 강경한 민족주의 성향을 띄었으며, 동시에 가톨릭 교권주의 성향도 강하게 띄었다, 의회 참가에 반대했지만 동시에 무장 혁명과 같은 폭력적 수단도 반대했다. 정권 탈취 방법으로는 전 국민에 의한 민주적인 국민투표를 통한 왕정복고를 선호했다.
그러나 이 당시 대다수 법통주의자들은 현실을 인정에 의회 참가를 선호했으며,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의회를 통한 합법적 정권 탈취를 목표로 했다. 오를레앙주의자들과의 동맹 문제 역시 당시까지는 반대가 우세했고 앙리 5세의 반-오를레앙 성향 덕분에 한동안 이루어지지 못했으나, 1871년 프랑스 제2제국이 무너진 후 오를레앙주의자들과 연대해 군주제 복고를 노렸다 실패하고 만다.

법통주의자들이 끝내 부르봉 왕정복고에 실패한 이유는, 근본적으로 가톨릭 정체성에 지나치게 집착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가톨릭주의는 시골 농부들에게는 잘 먹혔지만 도시민에게는 그저 법통주의자를 시대착오적인 수구 집단으로 보이게 할 뿐이었다.

2.4. 이후

오를레앙가 출신의 왕 루이필리프2월 혁명으로 폐위당하고 프랑스 제2공화국이 들어서자, 법통주의는 부르봉 가 지지자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것을 목표로 다시 수면에 떠올랐다. 하지만 곧이어 대통령을 선출하는데 그치자는 민주 법통주의자들과 보수 법통주의자들로 나뉘어 루이 나폴레옹에게 밀리고 말았고, 방데[4] 등 법통주의의 세가 강한 지역에서도 루이 나폴레옹에 몰표를 던졌다. 이후 법통주의자들은 질서당과 합쳐서 활동하는 방식으로 권세를 얻었으며, 연립정부의 구성원이 되어 1850년에는 중등교육을 가톨릭 교회에 접근할수있도록 하는 교육법안을 통과시키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으나, 루이 나폴레옹이 쿠데타 과정에 법통주의 주요 인사들을 전부 체포하였으며 스스로 황제가 되면서 법통주의자들은 정치에 밀려났다.

1870년 나폴레옹 3세의 프랑스 제2제국프로이센-프랑스 전쟁으로 패망하고 프랑스 제3공화국이 세워진 후 왕당파들은 엘리트 계층에 대한 루이 나폴레옹의 지지기반을 흡수했고, 의회의 과반을 점하는데 성공한다. 이들은 부르봉가 출신의 샹보르 백작과 오를레앙가 출신의 인물이 교대로 왕좌를 취하는 것으로 왕정을 부활시키는 것을 꾀한다. 하지만 오를레앙가를 증오한 샹보르 백작의 비타협적인 태도로 이 계획은 무산되어 주류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되고, 이후 샹보르 백작의 죽음으로 법통주의자들의 정치적 생명에 종지부를 찍었다. 이후 비시 프랑스 시절 필리프 페탱 행정부에 합류하여 권세를 노렸으나 패전 이후는 완전하게 비주류로 전락해 프랑스 정계에서 퇴출되었다.

3. 사상

3.1. 사회, 경제 정책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전통적 보수주의
, 가족주의
, 협동조합주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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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통주의 사상의 가장 기본이 되는 요소는 바로 '가족'이다. 여러 전통적인 가족주의자들이나 가족 가치의 옹호자들이 그렇듯 법통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사회의 기본 요소는 바로 가족이었으며, 사회는 이 '가족'들이 모인 거대한 가족이자 유기체였다. 따라서 가족을 결성하는 결혼은 신성시되었으며,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이 '가족'을 수호하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를 위해 가부장적인 권위와 지도를 통한 질서가 필요해지며, 결과적으로 법통주의는 가부장적 보수주의 성향을 띄게 되었다. 또 이러한 개인과 개인이 결합해 형성된 '가족'의 가치를 사회적으로 적용하기 위해 법통주의자들은 보수적 협동조합주의(conservative coporatism) 성향을 띄는 경우가 많았다. 역설적으로 이는 19세기 정치환경에서 푸리에주의와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와도 유사했으며, 따라서 법통주의자들 내에선 이 극좌파들과 연대하자는 주장도 있었다. 이들은 자본주의가 개인을 이기적으로 만들어 가족 가치를 해체시킨다고 보았으며, 따라서 광범위한 협동조합의 결성을 통해 개인과 집단의 이익을 방어하고 개인을 고립시키는 것을 방지할 수 있다고 보았다.

또, 의외일지 모르지만 법통주의자들은 투표권 확대, 심지어 성인 모든 남성 보통선거를 추구했다. 이는 당대 대다수의 국민이 농민인 상황에서 이들은 여전히 왕정복고를 지지했기 때문이다. 또 지방자치제에 우호적이라 기초지방자치선거를 치른 후 선출된 선출직 공무원들이 다시 투표를 통해 전국적 선출직 공무원을 뽑는, 민주집중제와 유사한 상향식 선거를 선호했다. 또 갈리아주의 계열의 민족주의적 법통주의자들은 보나파르트주의자가 국민투표를 통해 권력을 얻는 것에 영감을 받아 국민투표를 사용해 국민과의 민주적 절차를 통해 왕정복고를 이루어야 한다고 보았다.

1840년대 이후 법통주의자들은 자유나 평등과 같은 근대적 개념을 받아들였지만, 대의민주주의는 여전히 거부했다. 다수의 법통주의자가 의회에 참가하기는 했지만 정부가 의회에 대해 정치적으로 책임을 진다는 현대 민주주의의 개념을 거부했다. 그들은 주권이 왕에게 있으며 왕이 국가 그 자체를 대표한다는 전통적인 군주제 이론을 따랐으며, 앙리 5세는 한술 더떠 의회나 국민투표를 비롯한 근대적 정치이론 일체를 싫어했다.

앞에서 서술한대로, 법통주의자들은 지방분권에 우호적이었고, 어떤 의미에서는 연방주의에 가까웠다. 다만 이 연방주의의 개념은 가족 가치에 기반한 공동체주의적, 유기체론적 개념이었고, 현대적인 의미의 정치적 분권화는 아니었다. 법통주의자들에게 있어서 지역사회는 역시 '가족' 가치의 확장이었으며, 가족이 모여 지역사회를 이루로 이 분산된 지역사회들이 모여 중앙 행정 및 사회를 구성한다고 보았다. 다만 앙리 5세는 이 지방분권화 주장에 대해 매우 온건한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법통주의자들은 경제적으로 경제적 자유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일체를 매우 혐오했다. 그들은 농본주의에 기반한 전통적 경제를 선호했으며 산업화 자체에 부정적이지는 않았지만[5], 자본주의적 산업화가 농촌 경제를 파괴하고 공동체주의적 가치를 쇠퇴시키며 인간을 고립시킨다고 보았다. 다만 정부의 경제 개입에도 부정적이었으며, 기업의 자유라는 개념은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어쨋든 이들은 전통적인 농업 경제를 선호해, 농업이 산업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보았으며 농업의 산업화를 추구했다.

한편 법통주의자들은 뜻밖에도 가톨릭적 이유에서 노동조합 같은 조합 결사체를 지지했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이 노동자들과 각 직종들의 종사자들에게 주어지던 길드와 법인 등과 같은 사회적 안전장치를 무너뜨리고 부르주아들이 신민들을 착취하게 만들었다고 비판했으며, 협동조합 형태의 노조 결성에도 우호적이었다. 다만 파업에 대해서는 사회의 안정을 해치고 자유기업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아 반대하거나 소극적이었고, 애초에 전통적 보수주의 특성상 사회적 계급 구분에도 긍정적이었다.

물론 이것이 그리 신기한 일이기만 한 것은 아니다. 유럽 역사를 예로 설명하자면 회사-노조간의 분쟁(특히 파업 등 격화된 분쟁)에서 공권력이 개입하는 것을 '노조 탄압'으로 보는 경향이 강한 현대(=자본주의 고도화 이후)의 관점과는 전혀 다르게 19세기 중후반~심하면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오히려 급진주의적 노동조합측이 공권력의 개입을 적극적으로 요구하고, 회사 측에서는 이에 질색하는 반응을 보이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그리고 이는 법통주의자들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 즉 가족과 그 확장이라는 개념에서 이해하면 아주 간단한 일이다. 당시 유럽의 보수주의자들에게 (특히 법통주의를 비롯한 전통적 보수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은 이일수록) '회사'란 '마을'과 마찬가지로 '가족' 가치의 확장으로 탄생하는 것이었고, 따라서 사장이란 그 대가족의 가장과 같은 것이었다. 그러니까 파업 등 노사분규를 일으키는 노동자들을 괘씸하게 여기는 것과는 별개로, "밉든 곱든 회사는 가족이나 다름없는 것인데, (대)가족 내의 문제에 공권력을 개입시킨다는 것이 대체 무슨 개소리냐? 집안일로 식구끼리 서로 소송을 걸어댄다는 것과 뭐가 다르냐?"며 극혐하고 치를 떠는 반응을 보였던 것. 반면 급진주의적 노동조합측은 이런 전통적 관념을 거부하고 사장과 노동자는 단지 서로 노동계약을 맺고 있을 뿐 독립적인 입장이어야 한다고 여겼기에 "독립적인 관계에서 이해관계와 입장차로 분쟁이 발생했다면 공권력의 개입을 통해 조정하는 것이 좋은 해결책 아니냐?" 는 입장을 보였던 것이다.[6]

이 점에서 19세기 유럽의 정치지형은 기본적으로 보혁 양극 구도가 아니라 삼각 구도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다. 왕당파를 비롯한 전통주의, 복고주의자들이 한 축, 그리고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자들이 또 한 축, 마지막으로 노동자들을 중심으로 한 사회주의자들이 마지막 한 축이다. 물론 법통주의의 전성기는 사회주의가 본격적으로 세력화한 시기보다는 조금 앞 시대라고 봐야 하겠지만, 프랑스 대혁명 당시에도 부르주아상퀼로트는 별개의 입장을 가지고 있었으니 삼극의 맹아는 그 때에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이 구도가 조금 더 명확해진 이후, 사회주의(또는 그 맹아가 되는) 정치세력은 대체로 반 왕정, 공화주의를 지향한다는 점에서는 부르주아를 중심으로 한 자유주의/공화주의자들과 입장을 같이했지만 경제적 문제에서는 자본주의에 반대한다는 점에서 오히려 전통주의/복고주의에 가까운 입장을 보이기도 했던 것. 특히 아직 산업과 자본주의의 발전히 고도화되지 않았던 당시에 사회주의의 대안으로 제시된 의견들은 주로 공동체주의적 경제구조를 지향하는 것이었고, 이는 복고/전통주의자들의 관점과 생각보다 많이 다르지 않았다. 전통주의자들 사이에서만 극좌파와 연대하자는 주장이 있던 것이 아니라 1848년 혁명 직전 갓 태동하기 시작한 초기 독일 사회주의자들 중에도 '자본주의에 맞서기 위한 전통주의자(왕당파)와 사회주의자의 연합'을 주장하던 이들도 있을 정도.[7] 그러니까 법통주의자를 비롯한 당시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이 흔히 좌파적 결사체라고 여겨지는 노동조합과 같은 조합 결사체들을 지지한 것은 전혀 이상한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은 자신들이 지지하는 전통적 가치에 의해 그 조합 결사체들을 운영하는 것이 가능하다고 여겼던 것 뿐이고, 생각해보니까 애초에 코포라티즘(협동조합주의) 자체가 사회주의, 아나키즘 등 좌파 이념의 전유물이 아니라 보수적 협동조합주의도 있고 파시즘의 원동력 역시 코포라티즘이다. (다만 자본주의 코포라티즘만 없다.) 단지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왕당파 등의 복고주의 및 파시즘등은 모두 정치적으로 도태되고 노동조합을 중시하는 정치사상으로써 살아남은 것이 주로 좌파쪽 이념이었을 뿐이다.

어쨌건 이러한 사상은 초기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기독교 사회주의자들은 기업에 대한 국가의 적극적인 개입에 우호적인 방향으로 법통주의의 사상을 온건화시켰지만, 법통주의자들은 지역 사회의 지방자치단체 차원에서의 기업에 대한 개입이나 제재라면 몰라도 국가 차원에서의 적극적인 개입에는 부정적이었다.

3.2. 외교 정책

파일:관련 문서 아이콘.svg   관련 문서: 프랑스 내셔널리즘
, 국민보수주의
, 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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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통주의자들은 근대 프랑스 혁명의 산물이었던 민족주의(nationalism)를 수용했으며, 민족(nation)이라는 수사를 자주 사용해 대중들을 선동했다. 법통주의자들은 이런 민족주의적 감성에 근거해 영국에 대한 강한 반감을 드러냈으며, 7월 왕정을 영국에 종속된 정부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이 반영주의는 역사적 이유에서 근거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영국의 의회민주주의, 입헌군주제 체제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하다. 반영주의는 무려 20세기의 전통적 보수주의자들에게까지 살아남아, 1940년 성립된 비시 프랑스 정부도 반영 감정을 이용했을 정도였다.

법통주의자들은 가톨릭 교세가 강한 아일랜드와 폴란드의 독립을 지지했고 일민주의[8]를 주장했다. 다만 이탈리아 통일 전쟁으로 부르봉 왕조가 지배하던 이탈리아 왕정들이 차례로 무너지고 교황령마저 일시적으로 폐지되자 이런 사상은 거의 사라지게 되었으며 오히려 러시아 제국의 정교회 보수주의적 정책에 감명받아(?) 러시아를 옹호하는 쪽으로 변했다.

식민지화에 대한 입장은 다소 복잡해서, 가톨릭 포교와 노예제 폐지와 같은 종교적, 문명적 이유에 의한 식민지화에는 긍정적이었고 따라서 알제리 식민지화에도 찬성했지만, 시장의 확대라는 자본주의적 이유나 단순 정치적 위기 해결을 위한 의미없는 서아프리카 식민지화 같은 것에는 강경하게 반대했다. 다만 알제리 식민지화도 이슬람교도들이나 아랍 부족들의 저항을 부를 수 있다며 반대한 법통주의자들도 일부 있었다. 동시에 당연하게도 가톨릭적 입장에 기반해 노예제도에 매우 부정적이었으며, 노예제도가 유지되던 미국을 규탄하며 '앵글로색슨족의 도덕성' 운운하여 영국까지 은근슬쩍 같이 엮어서 비판하기도 했다.

4. 여담

종교적 의미의 정통주의(orthodoxie)와는 전혀 무관하다.

5. 같이 보기

6.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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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민주의는 근대(modern)에 탄생한 이념이다. 따라서 21세기 기준 서구 선진국에서 국민보수주의가 강경 우익인 경우가 많기는 하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근대적/현대적(modern) 보수주의이며, 고전적(classical) 보수주의에 속하지 않는다.
상징 | 역사 |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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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당대 기준[2] 부르짖기만 한 게 아니고 실제로 프랑스 남부를 중심으로 보나파르트 가문에 부역(?)한 이들이나 프랑스 혁명에 앞장선 이들을 색출해 살해하는 등의 대규모 백색테러를 벌였다.[3] 1870년대 융합주의 운동을 이끈 피에르 드 블라카스의 할아버지이다.[4] 방데는 옛 학살의 여파로 1880년대 즈음까지도 왕국의 백기를 계양했었다.[5] 물론 산업화 자체에 부정적인 이들도 소수 있기는 했다.[6] 이 당시의 풍조 중에는 회사 측이 노조의 요구를 들어주건, 노조가 요구 관철에 실패하건 쟁의가 종결될 때 사측이 쟁의에 참여한 노동자들에게 '사장 어르신께 드리는 반성문'을 쓰라고 요구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현대인의 관점에서 보기엔 저게 대체 무슨 의미인가 싶은 해괴한 풍습이지만, 이 시기의 사고방식에서 보면 사측(사장) 입장에서는 노조의 요구를 거절하는데 성공했으면 좋은거고, 들어주게 되었더라도 '자식들이 조르는 걸 도저히 거절하지 못했다' 비슷하게 나름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할 수 있지만 어쨌건 회사를 확장된 가족으로 보는 입장에서는 '가족 내에 분란을 일으킨 데 대해서는 반성문을 써라' 라고 요구함으로써 자신들의 세계관을 지탱하려고 했던 것이다.[7] 반면 이런 주장을 공상적 사회주의 중에서도 제일 골때리게 황당한 주장이라고 무지막지하게 까댄 사람도 있었는데 그 사람은 당연히 카를 마르크스다.[8] 한 나라에 한 민족만 있어야 한다는 사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