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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야 |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영화 심볼.jpg 영화 | ||
입성날짜 | 1960년 2월 8일 | ||
위치 | 6773 Hollywood Blvd.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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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8caa9c><colcolor=#ffffff> 비비안 리 Vivien Leigh | |
본명 | 비비언 메리 하틀리 Vivian Mary Hartly |
출생 | 1913년 11월 5일 |
인도 제국 웨스트벵골 다질링[2] | |
사망 | 1967년 7월 8일 (향년 53세) |
잉글랜드 런던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
직업 | 배우 |
학력 | 왕립연극학교 |
신체 | 160cm |
배우자 | 허버트 리 홀먼 (1932년~1940년, 이혼) 로런스 얼리비에이 (1940년~1960년, 이혼) |
파트너 | 존 "잭" 메리베일 (1960년~1967년, 비비언 리 사망) |
자녀 | 딸 수잰 리 홀먼 (1933년-2015년) |
활동 | 1935년 - 1967년 |
종교 | 가톨릭 |
서명 | |
링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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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영원한 스칼렛 오하라 ― 로스앤젤레스 타임스, Harry Trimborn 1967년 7월 9일. |
영국의 배우. 아카데미상을 받은 최초의 영국인 여배우이며[3] BAFTA에 여우주연상 분야가 신설됐을 때 이를 첫 수상한 배우이기도 하다. 베니스 국제 국제영화제 여우주연상도 수상했고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성 배우 16위[4]에 선정되었다.
잉그리드 버그먼, 바버라 스탠윅, 에바 가드너와 함께 1940년대에 활동한 배우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1939)의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하여 미모와 출중한 연기력을 모두 인정받았다. 다만 본인은 연극 무대에서 인정받길 언제나 바랐다. 한편으론 양극성장애로 인해 사생활에 문제가 많아 주디 갈런드와 더불어 개인적 삶이 불행했던 배우로 꼽힌다.
2. 생애 및 활동
2.1. 어린시절
1913년 11월 5일, 영국 식민지였던 인도 벵골 다즐링에서 외동딸로 태어났다.외할아버지는 인도에 오래 전에 정착한 아르메니아 가톨릭 계통 집안 출신으로 파르시 혼혈이었고, 외할머니 역시 인도에서 나고 자란 아일랜드인이었다.
아버지는 Pigott, Chapman & Co.(피것 챕먼 사)에 근무하던 스코틀랜드 출신 외환중개인이었는데, 이 회사는 오늘날에도 운영되고 있다. 제1차 세계 대전이 터졌을 땐 뱅갈로르에서 인도 제국군 기병 연대 장교로 근무했다. 외가가 부잣집이어서 아주 어려서부터 승마를 배웠다.
1931년부터 부모님의 적극 지지 하에 런던 왕립연극학교에서 연기를 배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얼마 안 있어 13살 연상의 상급법원 변호사 허버트 리 홀먼(Herbert Leigh Holman)과 사랑에 빠져 연애하면서부터는 연기에 흥미를 잃었다. 1932년 12월 결혼을 하면서 비비언 리 홀먼(Vivian Leigh Holman)이 되었고 학교도 그만 뒀다. 그러나 몇 주 뒤 무대와 달리 단조로운 일상에 질려 1933년 봄 아이를 임신한 상태로 복학했다. 그리고 출산 후 아이를 유모에게 맡기고 본격적인 활동에 들어갔다. 남편은 배우라는 직업 자체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지만 리가 활동을 못하게 방해하진 않았다.
1935년, 친구들의 제안으로 영화에 단역으로 출연하게 되고 곧 고용한 에이전트의 제안으로 활동명에서 홀먼을 뺀다. 평범한 이름인 Vivian의 a를 e로 바꿔 좀 더 있어보이게 만들자고 제안한 것도 바로 이 에이전트였다. 그렇게 비비언 리 홀먼(Vivian Leigh Holman)에서 비비언 리(Vivien Leigh)가 되었다. 친한 지인들 사이에선 비브(Viv)라는 애칭으로 불렸다.
2.2. 연극 무대 데뷔
같은 해, 리는 "The Masque of Virtue(정절의 가면극)"[6]에서 앙리에트(Henriette) 역으로 첫 무대 연기를 선보이며 엄청난 찬사를 받는다. 1760년대 프랑스 파리에서 사창가 여성이 순진한 처녀로 위장한 채 한 후작과 결혼함으로써 그의 명예를 떨어뜨려 파멸 시킨다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이는 연기에 대한 막대한 부담감으로 작용해 양날의 검이 된다. 리는 나중에 "이때 나를 위대한 여배우라고 찬양했던 평론가를" 평생 "용서한 적이 없다"고까지 표현했다. 리의 정신병력은 이미 이때부터 시작되고 있었다.6살 연상의 로런스 얼리비에이는 이 훌륭한 데뷔 무대를 본 사람 중의 하나였다. 그해 가을, 리는 동료 배우를 졸라 아내 질 에스먼드와 호텔에서 식사를 하고 있던 얼리비에이에게 다가가 자기 소개를 했다. 리는 이 만남 직후 친구에게 "저 남자랑 결혼할 거야"라고 말하기도 했다.[7]제작자 앨릭잔더 코더[8]에게 발탁된 리가 투입된 <영광의 결전(Fire Over England)>(1937)[9]에 함께 나오면서 본격적인 불륜이 시작된다. 둘은 올드 빅 극장(Old Vic Theatre)이 제작한 연극 "햄릿"에도 같이 나왔는데, 리는 오필리어 역이었다. 둘 다 바로 이혼하려 했으나 배우자들이 모두 반대해 동거부터 시작했다.
연극 "햄릿"에 나온 리와 얼리비에이 |
코더는 리를 렉스 해리슨이 주연한 <찻잔 속의 폭풍(Storm in a Teacup)>(1937)에 출연시킨 데 이어 리를 MGM에 대여함으로써 로버트 테일러와 <옥스퍼드의 영웅(A Yank at Oxford)>(1938)을 찍도록 주선했다. <옥스퍼드의 영웅>은 영국에서 큰 인기를 모았지만, 리는 이 영화를 찍을 때 양극성장애 증상 중 하나인 잦은 감정기복을 공공연하게 노출해 영화판에서 함께 작업하기 어려운 배우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거리 공연을 하는 찰스 로튼이 가출한 소매치기인 리가 생존하도록 도와주지만 리가 부자 작곡가 렉스 해리슨을 만나 갑자기 대성하면서 연을 끊자 알코올 의존증이 된다는 헐거운 줄거리의 <거리의 악사(Saint Martin's Lane)>(1938) 같은 영화도 있었다.
2.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영광의 결전>(1937)과 <옥스퍼드의 영웅>(1938)을 봤을 때부터 이미 리를 염두에 두었던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요청으로 리의 미국 에이전시는 1938년 2월에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 후보 명단에 리의 이름을 올려놓고 있었다. 이 두 영화 속에서 리가 묘사한 인물들의 모습은 스칼렛 오하라와 유사한 측면이 있었다. 리의 미국 활동을 돌봐주던 이 에이전시의 대표가 또 마침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의 형제인 마이런 셀즈닉(Myron Selznick)이었기 때문에 리의 활동 전반에 대해 총괄 계약을 맺고 있던 앨릭잔더 코더와 데이비드 O. 셀즈닉 사이에서 다리 역할을 성실하게 잘해주었다. 덕분에 코더와 셀즈닉이 1938년 여름에 가진 중간 협상들이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다. 그래도 원래는 폴렛 가더드가 거의 낙점 상태였으나 찰리 채플린과의 법적 결혼 여부가 불분명하다는 스캔들이 있었고, 12월에 미국에서 가진 스크린 테스트에서 데이비드 O. 셀즈닉이 리에게 강한 확신을 느낀 덕에 막판에 리가 최종 선발되었다.이때 마이런 셀즈닉이 데이비드 O. 셀즈닉에게 리의 실물을 처음 소개하며 "데이비드, 여기 네 스칼렛 오하라가 있다"고 했다는 말이 있는데, 떠도는 풍문에 가깝다. 리가 소설이 나오자마자 자신이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할테니 두고 보라고 예언했다는 소리도 있는데, 1937년 <21 Days>를 찍을 때 원작 소설을 읽고 다른 배우들에게 스칼렛 오하라를 연기하고 싶다고 한 말과 배역 발표 직전에 자신에게 호의적인 분위기를 감지하고 한 평론가에게 자신이 뽑힐 것 같다고 한 말이 합쳐져 잘못 퍼진 것이다. 원래 원작의 팬이었던 리는 촬영 내내 소설책을 늘 곁에 두었고, 이는 원작에 부합하는 정밀한 인물 묘사로 이어졌다. 무명의 영국 배우가 전형적인 "남부 상류층 여성"[10]을 연기하게 됐다는 사실이 퍼지자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지만, 리는 보란듯이 첫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거머쥐며 연인 얼리비에이보다 더 큰 유명세를 가진 스타가 되었다.
한편 얼리비에이는 리와 떨어진 상태로 몇 주 동안 미국에서 <폭풍의 언덕>을 촬영하며 리가 보고 싶어 매우 외로워하는 중이었는데,[11] 리가 미국에 와준 덕분에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촬영 과정에서 조증 증세가 심하게 나타나 리는 영화가 망할까봐 크게 걱정했는데, 얼리비에이는 리가 자기 혐오에 빠지지 않도록 꾸준히 격려했다. 리는 클라크 게이블과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를 포함한 대부분의 배우들과 친하게 지냈지만, 모순되게도 애쉴리 역의 레슬리 하워드와는 앙숙이었다고 한다.[12]
2.4. 얼리비에이와의 결혼생활
리는 1931년작의 개작 <애수(Waterloo Bridge)>(1940)에서 상류층 군인 역의 로버트 테일러와 사랑에 빠지는 발레리나 역을 맡았다. 진부하지만 효과적인 사건들이 이어진 끝에 리는 창녀로 전락했다가 전사한 줄로만 알았던 테일러와 재회한다. 리는 영화출연작 중 가장 좋아했다던 이 역할을 시작으로 신경쇠약을 앓는 인물들을 많이 연기하게 되는데, 리의 연기 속 삶이 실제 병력과 공명하게 된 점이 묘하다.<애수>(1940) |
1940년 8월 31일 드디어 리와 얼리비에이는 각자의 배우자와 이혼하고 로스앤젤레스 산타바바라에서 결혼한다. 리와 얼리비에이 둘 다 각자의 자녀 양육권을 얻지 못했지만, 리의 전남편은 리가 사망하기 전까지 항상 좋은 친구로 남았다. 신부 들러리는 바로 캐서린 헵번이었다.
한편 이 해 11월엔 비극이 하나 있었다. 리는 전남편에게 맡겨놓고 거의 찾지 않았던 딸을 간만에 보려고 딸이 있던 캐나다에 찾아갔는데 "스칼렛"이 왔다며 캐나다 언론이 몰려드는 바람에 일대에 소란이 벌어졌고 딸은 납치 협박까지 받고 말았다. 결국 다른 학생들의 안전에 대한 우려로 딸은 수녀원 직영 학교에서 쫓겨나 강제로 일반 학교 전학을 가야했다. 딸은 그 뒤로도 전남편과 외할머니 밑에서 자랐다.
결혼 직후 개봉한 <레이디 해밀턴(That Hamilton Woman)>(1941)은 엠마 해밀턴 전기영화로 얼리비에이가 연인 호레이쇼 넬슨으로 나왔다. 이 영화 막바지에서 해밀턴 부인은 사랑하는 넬슨도 전성기의 화려함도 잃은 채 알코올 의존증 폐인이 되는데, 그 모습을 연기한 리 본인의 말년을 연상케 한다.[13]
이후 리는 "안티고네"(1949) 등 얼리비에이가 연출하거나 출연하는 연극에 함께 나왔고 영화는 띄엄띄엄 <안나 카레니나>(1948) 등 6편만을 찍었다. 일차적으로는 연극을 영화보다 더 우월하다고 생각한 리의 선호도 때문이었다. 이는 리만 갖고 있던 유별난 사고방식이 아니라 당시 영국 배우들 사이에 깔려 있던 지배적인 분위기였으며 오늘날에도 영국엔 이런 기조가 어느 정도 남아있다.
<안나 카레니나>(1948) |
그러나 리는 한편으로는 얼리비에이와 함께 영화에 출연하려고 엄청난 노력을 했다. 허나 한쪽이 발탁되면 다른 한쪽은 실패하는 식으로 계속해서 동시 출연이 결렬됐다. 얼리비에이는 히스클리프 역을 맡은 <폭풍의 언덕>(1939)에서 상대역 캐시를 리에게 주려고 노력했으나 제작사에서 끝끝내 거부했다. 리는 이저벨러 역이라도 하길 원했지만, 리가 원하는 수준의 출연료를 줄 수 없다고 해 결국 무산되었다. 앨프리드 히치콕의 <레베카>(1940)에서 겨우 부부 동반으로 주역이 되나 했더니 뽑힌 건 얼리비에이 뿐이었다. 제작자 데이비드 O. 셀즈닉, 히치콕, 그리고 조언을 요청 받은 감독 조지 큐코어까지도 해당 역할에 리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셀즈닉은 또한 둘의 스캔들 때문에 이혼이 완료될 때까지는 둘이 함께 작업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다. 덕분에 리를 제치고 선택된 조안 폰테인에게 얼리비에이는 매우 차갑게 대했고, 거기다 "촬영 스태프가 죄다 영국인들인지라 미국인인 나를 왕따시켰다"고 폰테인이 후에 털어놓았다. 또한 셀즈닉에게 분노한 리와 얼리비에이는 두 번 다시는 셀즈닉이 제작하는 영화에 출연하지 않았다.
게다가 "로미오와 줄리엣"(1940) 공연 때처럼 무대 연기를 망치기도 하면서 양극성장애가 심해졌다. 얼리비에이 때문에 리가 연기를 망쳤다는 평이나 얼리비에이가 리 때문에 연기를 망쳤다는 소리가 번갈아 나왔다. 완벽주의자였던 리는 나쁜 평에만 집착하는 습관이 있어 얼리비에이의 위로조차도 거부했다. 때로는 실제 이상의 혹평이 쏟아지기도 해서 얼리비에이는 "(평론가들은) 리의 미모 때문에 판단을 그르쳐 계속해서 리의 연기를 합당하게 대우해주지 않는 행위를 중단해야한다"고 말하기도 했다. 둘은 연극 "로미오와 줄리엣"에 거액을 투자했었는데 연기평 뿐만이 아니라 흥행에서도 참패해 큰 손해를 보았다.
설상가상으로 리는 평소 건강 상태가 안 좋았던 탓에 부부의 2세를 계속 유산하게 되고, 그 과정에서 양극성장애는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어 결국 발작 증세까지 일으킨다. 특히 클로드 레인스의 상대역으로 나온 영화 <시저와 클레오파트라>(1945) 촬영 중에 넘어지면서 아이를 유산했을 때 크게 낙심했다. 게다가 이 영화는 흥행에도 불구하고 적자를 봤다.
리는 한 번 발작을 시작하면 갖은 욕설을 내지르고 물건을 던지며 이를 말리는 얼리비에이를 폭행하는 등 과격한 행동을 하다가 마지막에는 바닥에 쓰러져 울다 기절했다. 깨어난 뒤에는 무슨 일이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지 못했고, 나중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게 된 후엔 매우 부끄러워 했다. 이런 증세가 심해지면서 리는 대부분의 연극 순회공연에서 중도 하차/복귀를 반복했다. 얼리비에이가 그 무엇보다도 참을 수 없었던 건 리가 다른 사람들 앞에선 최대한 멀쩡한 척 잘 참다가 "가장 그래선 안 되는 대상인" 자신 앞에서만 "그 악마"를 풀어놓는다는 점이었다.
1944년엔 북아프리카에 주둔 중이던 군 위문을 위해 순회공연을 다녔다. 직후 몇 주 동안 고열과 기침에 시달리다가 왼쪽 폐가 폐결핵에 걸려있다는 진단을 받았다. 리는 하루에 담배를 4갑 이상 피울 정도로 지독한 골초였다.
1947년 얼리비에이가 기사 작위를 서훈한 뒤 레이디 얼리비에이(Lady Olivier)가 되었고, 이혼한 후에도 영국 특유의 관습에 따라 최소한 영국 내에선 계속 그렇게 불렸다. 이때부터 귀족들과의 사교 생활이 시작돼 다양한 교류가 있었다.
1940년대 후반 리와 얼리비에이는 올드 빅의 재건을 위한 자금을 모으기 위해 손튼 와일더[14] 희곡 원작의 "위기일발"(1945)[15] 등 순회공연을 많이 다녔는데 1948년의 호주 순회공연 6개월 동안 리는 불면증으로도 고생하였고 종종 연기를 대역에게 넘기기도 했으며, 부부싸움도 잦았다. 크라이스트처치 공연에서 한 번은 리가 신발을 못 찾겠다는 이유로 무대에 오르길 거부하자 얼리비에이가 리의 뺨을 때리기까지 했다. 리도 똑같이 얼리비에이의 뺨을 때려 응수했다. 얼리비에이는 훗날 "호주에서 비비언을 잃어버렸다"고 회고했다. 정확하겐 리가 이때 얼리비에이를 잃어버린 것이다.
이즈음 리는 "얼리비에이를 아직 사랑하긴 하지만 이젠 거의 남매 같다"고 말하고 다녔다.[16] 결국 리는 호주인 배우 피터 핀치와 바람을 피우기까지 한다.
얼리비에이는 호주에서 핀치의 재능을 발견하고 자신의 극단에 들어와 영국에서 일할 것을 권했고, 자연히 핀치는 얼리비에이-리 부부와 가깝게 지냈는데, 그러다 보니 리와 핀치가 눈이 맞은 것이었다. 불륜의 시작은 이미 호주에서부터였고, 얼리비에이가 불륜에 대해 알게 된 건 런던에서였다. 얼리비에이는 핀치의 스승이자 고용주이기도 했으니 배신감은 이중으로 컸을 터. 그래도 얼리비에이는 핀치를 해고하지 않았다. 심지어 리와 핀치는 함께 호주로 떠나기 위해 런던 히스로 공항까지 갔는데, 비행기가 연착하는 사이 따라잡은 얼리비에이가 리를 설득해서 다시 런던 집으로 데려왔다.[17]
얼리비에이는 리가 갑자기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한 것이나 동시에 여러 사람들과 바람피우기 시작한 것이 이 문서에서 계속해서 언급되고 있으며 흔히 조울증이라고 불리는 양극성장애의 징후라는 걸 전혀 알지 못했다. 그럴수밖에 없는 게 당시는 "bipolar disorder"라는 말조차 존재하지 않던 시대였다. 리는 전기 충격 요법까지 받으며 상태를 완화시키기 위해 노력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양극성장애에서 유발된 성적 충동을 억제하기 힘들었기에 자연히 육체적 외도의 연속으로 이어졌다.
2.5.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1947년 MGM 수장 루이 B. 메이어의 딸이며 데이비드 O. 셀즈닉의 아내였던 아이린 메이어 셀즈닉[18]은 브로드웨이에서 테너시 윌리엄스의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 초연을 올리며 연극 제작자로 데뷔했다. 브로드웨이 공연이 극찬을 받은 뒤 웨스트엔드판을 새로 준비하던 아이린 메이어 셀즈닉과 테너시 윌리엄스는 1949년 올드 빅의 "추문 패거리"[19]와 "안티고네"에서 리의 연기를 인상 깊게 보고 리를 그해 웨스트엔드 공연의 블랜치 두부아(Blanche DuBois) 역으로 발탁했다. 얼리비에이가 연출을 맡게 된 이 영국판 공연은 총 326회가 올라갔으며 상업적 성공을 거뒀지만 케니스 타이넌[20] 등 일부 유명 영국 평론가들은 리의 연기를 비난해 리에게 고통을 주었다.브로드웨이판을 연출했으며 영화판까지 감독하게 된 일리어 커잰 역시 리가 연기한 웨스트엔드판 블랜치 두부아를 좋아하지 않은 사람들 중 하나였다. 커잰은 평소 리의 연기력이 전반적으로 좋지 않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따라서 영화판이 기획됐을 때 커잰은 리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고, 브로드웨이에서 블랜치 두부아 역으로 같이 일했던 제시카 탠디[21]와 또 함께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탠디는 인지도 부족을 이유로 영화제작자에 의해 제외되었다. 연극계에선 이미 존경받고 있었으나 영화계에선 완전히 초짜였던 공동 주연 말런 브랜도를 대신해서 내세울 수 있는 이름값 있는 스타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커잰은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를 2순위로 원했으나 배우 본인에게 거절 당했으며, 베티 데이비스 또한 출연을 원치 않으면서 리에게 배역이 돌아가게 되었다. 한편 얼리비에이는 가까이에서 리의 상태를 살피기 위해 이 시기에 미국에서 윌리엄 와일러의 <캐리(Carrie)>(1952)를 찍기로 결정했다.
리를 제외한 영화판의 배역들은 액터스 스튜디오 출신의 브로드웨이판 출연진이 거의 그대로 넘어온 상태였다. 따라서 제시카 탠디가 낙마한 것에 대한 배우들의 반발이 따랐다. 뿐만 아니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때와 마찬가지로 영국인이 남부 여성을 연기하는 걸 "가짜 미국인 흉내"라고 비판하는 업계인들이 있었다. 브랜도만이 리의 "상처 입은 나비"처럼 연약하면서 아름다운 면모가 인물에 완벽하게 부합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브랜도 역시 리가 고지식하고 영국인 특유의 젠체하는 태도가 있다고 생각해 처음엔 싫어했다.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1951) |
이에 따라 촬영 초반 리는 출연진 전원 및 감독과 심한 갈등을 겪었다. 그러나 브랜도는 의외로 리가 저속한 농담을 아무렇지도 않게 같이 즐기는 등 자신과 비슷하게 털털한 면모도 있음을 발견하며 친해졌고, 커잰은 곧 연기를 위해서라면 그 무엇도 불사하는 리의 투지를 크게 존경하게 된다. 작가 테너시 윌리엄스는 리가 자신이 글에서 의도했던 모든 것을 상상 이상으로 충족시켰다며 감탄했다. 메소드 연기[22] 배우들이 대부분인 이 영화에서 기존의 연극 연기를 하는 배우는 리 뿐인데, 배역 자체가 과거의 영광에 사로잡혀 과잉 행동을 하는 인물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리의 연기 양식은 역에 잘 부합했다고 할 수 있다. 영화계의 평단 역시 리의 연기를 극찬해, 리는 생애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타냈고, 작품상만 있던 BAFTA에 막 신설되었던 여우주연상 항목 최초 수상자가 된다.[23] 이 해에 리는 윌리엄 셰익스피어의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와 조지 버너드 쇼의 "시저와 클레오파트라"를 동시에 공연하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
2.6. 정신병 악화와 이혼
그러나 "그저 그런 배우"라는 표현까지 쓰며 또 리를 깎아내린 케니스 타이넌을 비롯, 영국 연극 평론가들은 공연 두 개를 동시에 해내는 건 역시 무리였다며 리의 연기를 신랄하게 까내렸고, 블랜치 두부아 역에 오래 과몰입한 것까지 겹쳐 양극성장애가 극심히 악화되고 만다. 안 그래도 이 영화 전에 연극에서도 블랜치 두부아 역을 맡았으니 영화 촬영 기간까지 합치면 무려 1년 이상을 정신이상자 역에만 빠져있던 것이다. 리 본인도 후에 블랜치 두부아 역이 자신을 "미치게 만들었다"고 인정했다.리의 상태를 염려한 사람들은 당장 어떻게든 리를 할리우드에서 멀리 떨어뜨려놓는 게 상책이란 판단 하에 리를 실론 섬에서 촬영 예정이었던 영화 <거상의 길(Elephant Walk)>(1954)에 밀어넣었다. 남자상대역은 리가 헤어졌다 다시 만나길 반복하던 불륜 상대인 피터 핀치였다.
그러나 촬영 현장에서 리의 망상장애는 절정에 달했고, 핀치를 래리[24]라 부르며 졸졸 뒤를 쫓아다니기 시작했다. 결국 얼리비에이가 소환됐지만, 얼리비에이는 리와 핀치가 붙어있는 모습을 보고 리를 포기하고 핀치에게 리를 맡기고 돌아나왔다. 촬영은 취소되었다. 제작사 파라마운트 픽처스는 리를 대신할 여배우로 MGM에서 엘리자베스 테일러를 빌려왔다. 이즈음 리의 발작을 돌봐준 친구 데이비드 니븐과 스튜어트 그레인저는 훗날 매우 참혹한 경험이었다고 회상했다.
리와 핀치는 남프랑스로 사랑의 도피를 했다. 1955년 스트랫포드의 "십이야" 공연에선 아예 둘이 손을 잡고 돌아다녔다. 그러나 리는 계속 환각에 시달리면서 헛소리를 중얼거렸고, 야밤에 알몸으로 정원을 돌아다니다가 발견되기도 했으며, 아무하고나 되는 대로 자고 다니기 시작했다. 리는 할리우드에서 벌어지는 각종 환락 파티에 참석해 연하의 신인 배우들을 제공 받았다. 이런 파티에 참석하던 여배우들 중에 리 정도의 이름값을 가진 사람이 없어 같은 시기에 활동한 많은 업계인들의 회고록에서 예시로서 이름이 계속 언급된다. 결국 핀치는 리를 감당할 수 없었고 관계는 소멸되었다.
이 시기에도 리는 얼리비에이와 셰익스피어 연극에 계속 함께 나왔는데, 삐걱거리던 실제 관계가 무대 위 상성으로도 이어져 전반적으로 평이 좋지 않았다. 이즈음에 리는 흥행에 실패한 영화 <더 딥 블루 씨(The Deep Blue Sea)>(1955)에서 삶에 좌절해 자살하려는 아내 역으로 나왔다. 1956년 노엘 카워드가 쓴 "South Sea Bubble(남해의 포말)"[25]을 공연하던 중에 리는 임신 사실을 알고 하차하기로 결정했는데, 하필 마지막으로 정해뒀던 공연날 유산을 하고 만다. 이는 또 몇 달간의 긴 우울증으로 이어졌다. 리는 이어 "타이터스 앤드로니커스"를 공연하면서 얼리비에이와 동료 배우들에게 화풀이를 해대곤 했다.
1956년의 얼리비에이와 리 |
리와 얼리비에이는 결국 1958년에 별거에 들어간다. 얼리비에이는 배우 조안 플로라이트와 만났고, 리는 배우 잭 메리베일[26]과 동거를 시작했다. 메리베일은 얼리비에이에게 폐결핵 환자인 리를 자신이 잘 돌보겠다고 약조했다.
1960년 발레 공연을 찾은 메리베일과 리 |
리는 이 소란 속에서도 일부 공연을 훌륭하게 치러, 성폭행을 당한 뒤 남편과 지인들의 외면 속에 자살한 로마 시대 루크레티아 전설을 소재로 한 "Duel of Angels(천사들의 결투)"(1958)[27]와 벨 에포크 시대를 배경으로 파리의 고급 창부인 주인공 루루(Lulu)를 둘러싼 소동을 다룬 "Look After Lulu!(루루를 부탁해!)"(1959)[28] 같은 성공을 맛봤다.
"Duel of Angels" |
1960년 리는 얼리비에이에게 자살 협박까지 했지만 결국 그해 두 사람은 이혼에 들어갔다.
2.7. 말년
얼리비에이와 리는 이혼한 후에도 서로를 그리워하며 서신을 교환했지만, 이미 각자 다른 사람과 사는 관계로 예전으로는 돌아가지 못했다.1961년 개봉한 <로마의 애수(The Roman Spring of Mrs. Stone)>는 테너시 윌리엄스의 소설이 원작으로, 리는 공동주연 워런 베이티가 연기한 제비족에게 넘어가는 중년 여배우 역이었다. 이 제비족에게 버림 받고 자포자기하는 결말[29]은 지금 기준으로도 꽤 충격적이다. 리의 영화출연작 초반과 후반기가 모두 그러했듯이 이 영화도 범작 이하로 평가 받았지만, 그래도 리는 1963년 두 귀족들이 러시아 혁명을 피해 프랑스 파리로 도망가 하인으로 일하게 된다는 가벼운 코미디 "Tovarich(동지)"로 미국 뮤지컬 무대 데뷔를 하면서 토니상을 거머쥔다.
리의 영화 활동은 스탠리 크레이머가 감독한 1965년작 <바보들의 배(Ship of Fools)>에 출연한 것이 마지막이다. 리는 이 영화를 찍으면서도 망상장애를 버텨내는 과정에서 동료 배우들과 무수히 다퉜다. 여기서 리는 다시 한 번 몰락한 남부 사교계 명사를 연기한다. 젊음도 미모도 꿈도 모두 잃고, 홀로 남겨진 자신의 주름진 얼굴을 바라보며 스스로를 조롱하는 장면은 마치 당시의 리 자신을 연기하는 듯 보여 가슴이 아플 정도다. 리의 연기는 좋은 평가를 받았다.
말년에 리가 영화 출연을 하지 못하고 잊혀져 간 것을 슬퍼했다는 설이 한국에 널리 알려져 있는데, 사실과 조금 다르다. 리는 영화로도 성공하고 싶어하긴 했지만 연극배우로서 성공하는 것을 더 큰 업적으로 여겼고, 죽기 전해에도 전세계 공연계의 중심인 브로드웨이 무대에 서고 있었기 때문에 공연계에선 잊혀질래야 잊혀질 수가 없었다. 말년에 우울증이 심해진 건 건강 악화로 인해 본업인 연극 무대에 자주 설 수 없어서이다.
리는 이혼 후에도 침실 머리맡에 얼리비에이의 사진을 항상 비치해 두었고,[30] 레이디 얼리비에이로 불리는 걸 선호했으며[31], "메리베일과 (평온하게) 오래 사느니 얼리비에이와 짧게 살고 싶다"고 주변 친구에게 고백했다는 증언 등을 종합해보면 리는 평생 얼리비에이를 진심으로 사랑했던 것으로 보인다. 얼리비에이 역시 리와 마찬가지로 사랑하는 마음은 여전했던 것 같다. 얼리비에이는 죽기 몇 주 전 한밤중에 눈물이 차오른 채로 리가 출연한 영화를 돌려 보는 모습이 목격된 적이 있다. 얼리비에이는 친구에게 "이게 내가 사랑한 사람이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2.8. 사망
1967년 7월 8일 리는 에드워드 올비[32]의 "A Delicate Balance(미묘한 균형)"[33] 런던 초연을 준비하던 중에 폐결핵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메리베일의 연락을 받고 리의 집에 도착한 얼리비에이는 리의 시체가 눕혀진 침대 곁에 서서 "둘 사이에 벌어졌던 그 모든 죄악에 대해 신의 용서를 간구했다"고 한다.리의 사망 소식이 알려지자 웨스트엔드 극장들은 한 시간 동안 차양 조명을 소등하며 리를 기렸다.
가톨릭 장례식은 런던 카더간[34]의 세인트 메리 성당[35]에서 진행되었다. 메리베일이 런던의 세인트 마튼 인 더 필즈[36] 성공회 교회에서 연 추도식에는 리의 전 배우자들인 홀먼과 얼리비에이가 함께 했다. 리의 유해는 화장돼 이스트 서식스 티커리지 밀[37]에 자리한 리의 여름 피서용 별장 호수에 뿌려졌다.
외동딸 수잰 리 홀먼[38]은 작가, 배우로 활동하다 2015년 향년 81세로 사망했다. 딸이 낳았던 세 명의 손자가 리의 핏줄을 잇고 있다.
3. 여담
- 리의 정신병을 악화시킨 건 리의 무대 연기를 도가 지나치게 비하하던 영국의 연극 평론가들이었다. 리의 연기 양식을 싫어하던 일부 영국 평론가들과 리의 갈등은 상당히 가시적이었으며, 로런스 얼리비에이도 리를 보호하기 위해 몇 번 공개적으로 항의 발언을 한 적이 있다. 영화 평론가들이나 미국의 연극 평론가들과는 같은 문제를 겪지 않았다.
- 허리가 19인치인 것으로 알려졌으나 이는 코르셋을 조인 상태에서 쟀을 때 얘기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촬영할 당시 허리 치수는 23인치였다.
이것도 개미허리다
- 파란색 눈의 소유자다.
- 얼리비에이와 한 번에 길게는 20장이 넘는 편지를 주고 받았다.
- T. S. 엘리엇, 마릴린 먼로, 윈스턴 처칠, 엘리자베스 2세와 서신을 교환했다. 특히 처칠이 비비안 리의 팬이라 레이디 해밀턴(That Hamilton Woman) 영화를 수차례 돌려보고 그림도 선물해주었다고 한다.
- 상술했지만 연극과 영화를 통틀어서 새드 엔딩으로 끝나는, 불행한 캐릭터를 유독 많이 연기했다. 이는 리의 정신건강을 악화시킨 원인 중 하나였다.
- 인도에서 잠깐 살았던 만큼, 사석에서 인도식 영어 표현을 조금 섞어쓰기도 했다.
- 이름을 따서 만든 속옷 회사가 있다. 코미디언 주병진이 설립한 속옷회사 제임스 딘과 같은 경우이다. 다만 제임스 딘이 남녀 속옷을 모두 담당한 반면, 비비안은 여성 속옷만 전문적으로 다뤘다.
- 브랜도에 따르면 리는 "뒤태가 뛰어난"[39] 여성이었지만 1994년 출간된 브랜도의 자서전 "어머니가 가르쳐주신 노래(Songs My Mother Taught Me)"에 따르면 리와 잠자리는 갖지 않았다고 한다. 왜냐면 이때도 리는 "주변의 거의 모든 남자와 잠자리를 갖고 있었"는데 브랜도 본인이 "매우 좋아하는" "얼리비에이가 이를 못본 척하며" 고통스러워하는 걸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일리어 커잰 감독이 영화 촬영 중 리로부터 브랜도가 리 본인과 얼리비에이 둘을 동시에 번갈아가며 상대 중[40]이라고 말하는 걸 들었다더라 하는 풍문이 있다. 즉 커잰이 직접 한 말이 아니며 출처는 존재하지 않는다.
- <마릴린 먼로와 함께한 일주일>(2011)에서 영국 배우 줄리어 어몬드[41]에 의해 묘사되었다. 사진은 먼로가 1956년 영국 런던을 방문했을 때의 모습이다.
- 휴고우 비커스[42]의 "Vivien Leigh: A Biography(비비언 리 전기)"를 바탕으로 얼리비에이와의 관계를 집중적으로 다룬 전기 영화가 제작된다고 발표된 적이 있으나 흐지부지 되었다.
- 1958년에 에드워드 머로, 케니스 타이넌, 새뮤얼 골드윈과 인터뷰한 영상이 있다.
에드워드 머로가 리를 소개하면서 “안녕하세요 할머니”라고 지칭하자 웃으면서 받아주는가 하면, 영화 산업에 대해 토론할 때 본인의 경력 최고 작품 중 하나인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이름을 순간 기억 못해서 “뭐시기와 함께 사라지다(Gone with the something)"(...)라고 말하는 걸 볼 수 있다.
토론 내용은 “배우가 자신의 출신과 다른 나라의 인물을 연기하는 게 타당한가?”인데,[43] 그런 건 타당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케니스 타이넌에게 “내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서 남부 상류층 여성 역이었고,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에서도 배우들 중 유일한 영국인이었다.” 면서 “영국 배우보고 헨리크 입센이나 체호프 연극에 도전하지 말라는 것과 똑같다”고 지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내가 해봐서 아는데의 실제판
[1] 1953년 시상식부터 연기부문 시상.[2] 現 인도 서벵골주 다르질링[3]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로 2번 받았다.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2회 이상 수상한 여배우는 10여 명에 불과하다. 대표적으로 캐서린 헵번,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잉그리드 버그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메릴 스트립, 조디 포스터, 힐러리 스웽크, 프랜시스 맥도먼드 (2018년 기준) 등이 있다.[4] #[5] Maureen O'Sullivan. 1932년부터 타잔 시리즈를 찍은 게 유명하고 로런스 얼리비에이가 다시 역으로 나오는 1940년판 <오만과 편견>에서 제인 역을 맡기도 했다.[6] 카를 슈테른하임의 희곡 Die Marquise von Arcis(아르치스 후작부인)을 각색했다.[7] 친구가 '너희 둘 다 결혼한 몸이지 않냐' 하니 그건 알지만 저 남자랑 결혼할 것이라 다시 말했다고 한다.[8] Alexander Korda. 헝가리어 이름은 코르다 샨도르. 비비안 리는 코더에게 정서적, 금전적으로 많은 도움을 받아 나중에 감사를 표하기도 했다.[9] "무적함대"로도 유통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영국을 선전하려는 의도가 있던 이 프로파간다 영화에서 리는 순진한(ingenue) 처녀이자 엘리자베스 1세의 질투를 받는 시녀이다. 본인의 젊음 때문도 있지만 그녀의 잘생긴 애인 마이클이 엘리자베스 눈에 들었기 때문. 나중에 두 사람은 무사히 결혼한다.[10] Southern belle. 남북 전쟁 전에 흑인 노예들을 부리던 백인 농장주 계층의 사교계 여성을 뜻한다.[11] 영국과 미국 사이를 배로 이동하던 시대다. 항해 과정의 험난함은 비행기에 비할 바가 못 됐고 한 번 떨어지면 만나는 게 쉽지 않아 연인과 떨어져있는 고통이 더 크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12] 다만 훗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촬영에 대한 뒷이야기를 회고할 때 "클라크 게이블의 입냄새 때문에 키스신 찍을 때 기절할 뻔했다"(...)고 말한 적이 있다. 그런데 리 본인도 담배 4갑씩 태우는 골초지만 관리안하는 상대 남자배우와 다르게 관리잘해서 뒷말이 없었다[13] 그 외에도 엄청난 미인에 교양 있고, 아이 하나가 있는 상태에서 역시 유부남에 명예가 드높은 남자와 사랑에 빠지는데 불륜이라 힘들어한 것 역시 공통점이다.[14] Thornton Wilder. 1897 - 1975.[15] The Skin of Our Teeth. 20세기 초 뉴저지. 캐나다에서 얼음벽이 남하하면서 빙하기가 닥쳐 미 북동부 인류가 절멸위기에 빠진다. 노골적인 성경 은유를 통해 인류와 문명의 가치를 되묻는다.[16] 얼리비에이의 자서전 "어느 배우의 고백(Confessions of an Actor)"에 따르면 리는 이 말을 얼리비에이 본인에게도 했다고 한다. 얼리비에이는 사형 선고를 받은 기분이었다고..[17] 이 사건을 모티브로 리의 친구 테런스 래티건(Terence Rattigan. 1911 - 1977)이 대본을 집필하여 영화까지 나온다. 1963년 엘리자베스 테일러와 리처드 버튼이 주연을 맡아 <예기치 못한 일>이란 제목 하에 개봉돼 미국에서 엄청나게 흥행했다.[18] Irene Mayer Selznick. 브로드웨이판이 성공하고 얼마 안 있어 셀즈닉과 이혼에 들어가 영화판이 개봉했을 땐 이혼이 이미 완료된 상태였다.[19] The School for Scandal. 1777년에 초연된 아일랜드 출신 극작가 리처드 브린즐리 셰리던(Richard Brinsley Sheridan)의 희곡. 짝사랑하는 여인이 자신의 형제와 연인이 되자 지인인 귀족 부인과 공모해 형제가 후원자의 아내와 불륜 중이라고 추문을 퍼트리는 위선적인 남자의 얘기다.[20] Kenneth Tynan. 리의 연기마다 늘 정도 이상의 악평을 퍼부어 리의 정신병 악화에 일조했다.[21] Jessica Tandy. 1909 - 1994. 훗날 영화 <드라이빙 미스 데이지>(1989)로 '최고령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자' 기네스 기록을 갖게 된다.[22] 콘스탄틴 스타니슬랍스키는 '메소드 연기'의 전신이 되는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Система Станиславского / Stanislavski's System)'이란 연기법을 만들었다. '메소드 연기'란 용어 자체가 리 스트라스버그가 만든 미국식 영어다. 이 두 연기론은 서로 다르다고 스타니슬랍스키 본인부터 이미 생전에 인정했었다.[23] 남우주연상 부분은 랠프 리처드슨과 브랜도가 수상했다.[24] Larry는 로런스 얼리비에이의 애칭. 참고로 얼리비에이는 리를 'vivling' 등으로 불렀다.[25] 남해회사 거품 사태와 무관한 얘기다. 태평양에 위치한 가상의 영국령 섬 살로모(Samolo)에서 독립을 지지하는 총독을 돕기 위해 반대 세력 우두머리의 아들을 유혹하는 여성 역이었다. 앞선 1951년 미국 공연에선 클로뎃 콜베어가 주연했다.[26] John "Jack" Merivale.[27] 장 지로두(Jean Giraudoux)의 Pour Lucrèce(루크레티아를 위하여)를 크리스터퍼 프라이(Christopher Fry)가 각색했다.[28] 1908년. 남자친구가 군 복무로 2주간 떨어져 지내게 되면서 루루가 바람필까봐 자기 친구에게 루루를 봐달라고 부탁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루루는 곧 다른 나라 왕자와 밀회를 가지려하고, 친구는 대부에게서 돈을 받아내기 위해 루루와 가짜 결혼식을 올리려한다. 희극답게 남자친구가 루루, 친구, 왕자에게 심각하지 않은 수준의 복수를 몇 차례 감행한 뒤 루루와 화해하게 된다.[29] 스포일러 호시탐탐 자신의 육체를 탐내던 노숙자 청년에게 집 열쇠를 던져주며 집으로 들어오게 해 몸을 허락한다.[30] 메리베일은 이런 리를 이해해주었다.[31] 얼리비에이와 결혼한 지 얼마 안 돼 카이로에서 'Miss'라 호칭하자 자신이 올리비에와 결혼한 걸 모르냐며 짜증을 냈다는 일화가 있다. 처음 얼리비에이의 공연을 보고 반했을 때부터 리는 언제나 남편의 능력을 존경했다.[32] Edward Albee. 1928 - 2016.[33] 1966년 브로드웨이 초연엔 제시커 탠디, 흄 크로우넌이 나왔다. 1967년 퓰리처상을 받았다. 50대 후반에 접어든 여주인공은 자신이 미쳐가는 걸 두려워하고 남편의 불륜을 의심한다.[34] Cadogan.[35] St. Mary's Church.[36] St Martin-in-the-Fields. 투르의 마르티노(Martin of Tours)를 가리킨다.[37] Tickerage Mill.[38] Suzanne Leigh Holman.[39] 정확히는 엉덩이를 뜻하는 것이다.[40] "On many a night he rose from Larry's bed and joined me in mine."[41] Julia Ormond. 1965-.[42] Hugo Vickers. 1951. 영국의 전기작가.[43] 예시로 중국인 배우가 일본인 캐릭터를 연기하는 것이나 그 반대의 경우를 말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