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00:37:22

베티 데이비스

베티 데이비스의 주요 수훈 및 수상 이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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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8379242-641F-4E16-9EC4-4DDE7A61F63B.png 스미스소니언 선정 미국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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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미국 정부가 운영하는 국립 교육재단 스미스소니언 재단의 잡지, 스미스소니언 매거진이 “미국사 가장 중요한 100인의 인물”을 선정했다. 미국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인물들을 뽑았기 때문에 미국인이 아닌 사람들도 많고 부정적인 인물들도 있다.
<colbgcolor=#000047><colcolor=#FFC224> 개척자들 <colbgcolor=#FFF,#000> 크리스토퍼 콜럼버스 | 헨리 허드슨 | 아메리고 베스푸치 | 존 스미스 | 조반니 다 베라차노 | 존 뮤어 | 메리웨더 루이스 | 사카자위아 | 키트 카슨 | 존 웨슬리 파월 | 닐 암스트롱
혁명가 & 저항가들 마틴 루터 킹 | 로버트 E. 리 | 토머스 페인 | 존 브라운 | 프레드릭 더글러스 | 수전 B. 앤서니 | W. E. B. 듀보이스 | 테쿰세 | 타탕카 이요탕카 | 엘리자베스 케이디 스탠턴 | 말콤 엑스
대통령들 조지 워싱턴 | 토머스 제퍼슨 | 율리시스 S. 그랜트 | 우드로 윌슨 | 에이브러햄 링컨 | 제임스 매디슨 | 앤드루 잭슨 | 시어도어 루스벨트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로널드 레이건 | 조지 W. 부시
첫 여성들 포카혼타스 | 엘리너 루스벨트 | 힐러리 클린턴 | 마사 워싱턴 | 오프라 윈프리 | 헬렌 켈러 | 소저너 트루스 | 제인 애덤스 | 이디스 워튼 | 베티 데이비스 | 세라 페일린
범법자들 베네딕트 아놀드 | 제시 제임스 | 존 윌크스 부스 | 알 카포네 | 빌리 더 키드 | 윌리엄 M. 트위드 | 찰스 맨슨 | 와일드 빌 히콕 | 리 하비 오즈월드 | 러키 루치아노 | 존 딜린저
예술가들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 | 앤디 워홀 | 프레데릭 로 옴스테드 | 제임스 애벗 맥닐 휘슬러 | 잭슨 폴록 | 존 제임스 오듀본 | 조지아 오키프 | 토머스 에이킨스 | 토머스 내스트 | 앨프리드 스티글리츠 | 앤설 애덤스
종교인들 조셉 스미스 | 윌리엄 펜 | 브리검 영 | 로저 윌리엄스 | 앤 허치슨 | 조너선 에드워즈 | 라파예트 로널드 허버드 | 엘런 화이트 | 코튼 매더 | 매리 베이커 에디 | 빌리 그레이엄
팝 아이콘들 마크 트웨인 | 엘비스 프레슬리 | 마돈나 | 밥 딜런 | 마이클 잭슨 | 찰리 채플린 | 지미 헨드릭스 | 마릴린 먼로 | 프랭크 시나트라 | 루이 암스트롱 | 메리 픽포드
제국-건설자들 앤드루 카네기 | 헨리 포드 | 존 D. 록펠러 | J. P. 모건 | 월트 디즈니 | 토머스 에디슨 | 윌리엄 랜돌프 허스트 | 하워드 휴즈 | 빌 게이츠 | 코닐리어스 밴더빌트 | 스티브 잡스
운동선수들 베이브 루스 | 무하마드 알리 | 재키 로빈슨 | 제임스 네이스미스 | 아널드 슈워제네거 | 타이 콥 | 마이클 조던 | 헐크 호건 | 짐 도프 | 세크리테리엇 | 빌리 진 킹
출처 }}}}}}}}}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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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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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9년 미국 영화 연구소(AFI)가 선정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남, 여배우 순위이다.
1위2위3위4위5위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케리 그랜트
베티 데이비스
제임스 스튜어트
오드리 헵번
말론 브란도
잉그리드 버그만
프레드 아스테어
그레타 가르보
6위7위8위9위10위
헨리 폰다
마릴린 먼로
클라크 게이블
엘리자베스 테일러
제임스 캐그니
주디 갈런드
스펜서 트레이시
마를레네 디트리히
찰리 채플린
조안 크로포드
11위12위13위14위15위
게리 쿠퍼
바버라 스탠윅
그레고리 펙
클로데트 콜베르
존 웨인
그레이스 켈리
로런스 올리비에
진저 로저스
진 켈리
메이 웨스트
16위17위18위19위20위
오슨 웰스
비비안 리
커크 더글러스
릴리안 기시
제임스 딘
셜리 템플
버트 랭카스터
리타 헤이워드
막스 형제
로렌 바콜
21위22위23위24위25위
버스터 키튼
소피아 로렌
시드니 푸아티에
진 할로우
로버트 미첨
캐롤 롬바드
에드워드 G. 로빈슨
메리 픽포드
윌리엄 홀든
에바 가드너
같이 보기: 영화, 사랑 영화, 뮤지컬 영화, 영감을 주는 영화, 배우, 영화 음악, 명대사 }}}}}}}}}}}}

AFI 평생 공로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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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0 -10px -5px; min-height:calc(1.5em + 5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5px -1px -11px"
1973년 1974년 1975년 1976년 1977년
존 포드 제임스 캐그니 오슨 웰스 윌리엄 와일러 베티 데이비스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헨리 폰다 앨프리드 히치콕 제임스 스튜어트 프레드 아스테어 프랭크 카프라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존 휴스턴 릴리안 기시 진 켈리 빌리 와일더 바버라 스탠윅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잭 레먼 그레고리 펙 데이비드 린 커크 더글러스 시드니 푸아티에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엘리자베스 테일러 잭 니콜슨 스티븐 스필버그 클린트 이스트우드 마틴 스코세이지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로버트 와이즈 더스틴 호프먼 해리슨 포드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톰 행크스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로버트 드 니로 메릴 스트립 조지 루카스 숀 코너리 알 파치노
2008년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워렌 비티 마이클 더글러스 마이크 니콜스 모건 프리먼 셜리 맥클레인
2013년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멜 브룩스 제인 폰다 스티브 마틴 존 윌리엄스 다이앤 키튼
2018년 2019년 2022년[1] 2023년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줄리 앤드류스 니콜 키드먼
[1] 2020년 시상 예정이었으나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확산으로 인해 시상식 개최가 2년 연기되었다. }}}}}}}}}}}}

파일:Kennedy Center honors.jpg
케네디 센터 공로상 수상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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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20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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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 1978년 <colbgcolor=#fff,#1f2023>매리언 앤더슨, 프레드 아스테어, 조지 발란신, 아르투르 루빈스타인, 리처드 로저스
1979년 에런 코플런드, 엘라 피츠제럴드, 헨리 폰다, 마사 그레이엄, 테네시 윌리엄스
1980년 레너드 번스타인, 제임스 캐그니, 애그니스 데밀, 린 폰탠, 리언타인 프라이스
1981년 카운트 베이시, 케리 그랜트, 제롬 로빈스, 헬렌 헤이스, 루돌프 세르킨
1982년 조지 애벗, 릴리안 기시, 베니 굿맨, 진 켈리, 유진 오르만디
1983년 캐서린 던햄, 엘리아 카잔, 프랭크 시나트라, 제임스 스튜어트, 버질 톰슨
1984년 레나 혼, 대니 케이, 잔카를로 메노티, 아서 밀러, 아이작 스턴
1985년 머스 커닝햄, 밥 호프, 아이린 던, 앨런 제이 러너, 프레더릭 로, 베벌리 실즈
1986년 루실 볼, 레이 찰스, 제시카 텐디, 험 크로닌, 예후디 메뉴힌, 앤서니 튜더
1987년 페리 코모, 새미 데이비스 주니어, 베티 데이비스, 네이선 밀스타인, 알윈 니콜라이
1988년 앨빈 에일리, 조지 번즈, 마이어나 로이, 알렉산더 슈나이더, 로저 L. 스티븐스
1989년 해리 벨라폰테, 클로데트 콜베르, 알렉산드라 다닐로바, 메리 마틴, 윌리엄 슈만
1990년 디지 길레스피, 캐서린 헵번, 라이즈 스티븐스, 줄리 스턴, 빌리 와일더
1991년 베티 콤덴, 로이 에이커프, 아돌프 그린, 헤럴드 니콜라스, 로버트 쇼, 그레고리 펙
1992년 라이어널 햄프턴, 폴 뉴먼, 조앤 우드워드, 진저 로저스, 므스티슬라프 로스트로포비치, 폴 타일러
1993년 자니 카슨, 아서 미첼, 게오르그 솔티, 스티븐 손드하임, 매리언 윌리엄스
1994년 커크 더글러스, 아레사 프랭클린, 모튼 굴드, 해럴드 프린스, 피트 시거
1995년 자크 당부아즈, 메릴린 혼, 비비 킹, 시드니 푸아티에, 닐 사이먼
1996년 에드워드 올비, 베니 카터, 조니 캐쉬, 잭 레먼, 마리아 톨치프
1997년 로렌 바콜, 밥 딜런, 찰턴 헤스턴, 제시 노먼, 에드워드 빌렐라
1998년 빌 코스비, 프레드 엡, 존 칸더, 윌리 넬슨, 앙드레 프레빈, 셜리 템플
1999년 빅터 보르게, 숀 코너리, 주디스 재스민, 제이슨 로바즈, 스티비 원더
2000년 미하일 바리시니코프, 척 베리, 플라시도 도밍고, 클린트 이스트우드, 안젤라 랜스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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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세기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000000>2001년<colbgcolor=#fff,#1f2023>줄리 앤드류스, 밴 클라이번, 퀸시 존스, 잭 니콜슨, 루치아노 파바로티
2002년 제임스 얼 존스, 제임스 리바인, 치타 리베라, 폴 사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2003년 제임스 브라운, 캐럴 버넷, 마이크 니콜스, 로레타 린, 이작 펄만
2004년 워렌 비티, 오시 데이비스 & 루비 리, 엘튼 존, 조앤 서덜랜드, 존 윌리엄스
2005년 토니 베넷, 수잔 파렐, 줄리 해리스, 로버트 레드포드, 티나 터너
2006년 주빈 메타, 돌리 파튼, 스모키 로빈슨, 스티븐 스필버그, 앤드루 로이드 웨버
2007년 레온 플라이셔, 스티브 마틴, 다이애나 로스, 마틴 스코세이지, 브라이언 윌슨
2008년 모건 프리먼, 조지 존스,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트와일라 사프, 더 후
2009년 멜 브룩스, 데이브 브루벡, 그레이스 범브리, 로버트 드 니로, 브루스 스프링스틴
2010년 멀 해거드, 제리 허먼, 빌 존스, 폴 매카트니, 오프라 윈프리
2011년 바바라 쿡, 닐 다이아몬드, 요요마, 소니 롤린스, 메릴 스트립
2012년 버디 가이, 더스틴 호프먼, 레드 제플린, 나탈리아 마라코바
2013년 마티나 아로요, 허비 행콕, 빌리 조엘, 셜리 맥클레인, 카를로스 산타나
2014년 알 그린, 톰 행크스, 퍼트리샤 맥브라이드, 스팅, 릴리 톰린
2015년 캐롤 킹, 조지 루카스, 리타 모레노, 오자와 세이지, 시실리 타이슨
2016년 마르타 아르헤리치, 이글스, 알 파치노, 마비스 스태플스, 제임스 테일러
2017년 카르멘 드 라발라데, 노만 레어, 글로리아 에스테판, LL 쿨 J, 라이오넬 리치
2018년 셰어, 필립 글래스, 레바 매킨타이어, 웨인 쇼터, 해밀턴 팀 (린 마누엘 미란다, 토마스 카일, 알렉스 라카뫄르, 앤디 블렝큰불러)
2019년 어스, 윈드 앤 파이어, 세서미 스트리트, 샐리 필드, 린다 론스태드, 마이클 틸슨 토머스
2020년 데비 엘렌, 조안 바에즈, 가스 브룩스, 미도리, 딕 반 다이크
2021년 저스티노 디아즈, 베리 골디, 론 마이클스, 베트 미들러, 조니 미첼
2022년 조지 클루니, 에이미 그랜트, 글래디스 나이트, 타니아 레온, U2 (보노, 디 에지, 애덤 클레이튼, 래리 뮬렌 주니어)
2023년 퀸 라티파, 르네 플레밍, 빌리 크리스탈, 디안 워윅, 배리 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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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oldenglobe_cecildemil.png
골든글로브 세실 B. 드밀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52년 1953년 1954년 1955년 1956년
세실 B. 드밀 월트 디즈니 대릴 F. 재넉 진 허숄트 잭 L. 워너
1957년 1958년 1959년 1960년 1961년
머빈 르로이 버디 아들러 모리스 슈발리에 빙 크로스비 프레드 아스테어
1962년 1963년 1964년 1965년 1966년
주디 갈랜드 밥 호프 조셉 E. 레빈 제임스 스튜어트 존 웨인
1967년 1968년 1969년 1970년 1971년
찰턴 헤스턴 커크 더글러스 그레고리 펙 조안 크로포드 프랭크 시나트라
1972년 1973년 1974년 1975년 1977년
앨프리드 히치콕 새뮤얼 골드윈 베티 데이비스 핼 B. 월리스 월터 미리쉬
1978년 1979년 1980년 1981년 1982년
레드 스켈튼 루실 볼 헨리 폰다 진 켈리 시드니 푸아티에
1983년 1984년 1985년 1986년 1987년
로런스 올리비에 폴 뉴먼 엘리자베스 테일러 바버라 스탠윅 안소니 퀸
1988년 1989년 1990년 1991년 1992년
클린트 이스트우드 도리스 데이 오드리 헵번 잭 레먼 로버트 미첨
1993년 1994년 1995년 1996년 1997년
로렌 바콜 로버트 레드포드 소피아 로렌 숀 코너리 더스틴 호프먼
1998년 1999년 2000년 2001년 2002년
셜리 맥클레인 잭 니콜슨 바브라 스트라이샌드 알 파치노 해리슨 포드
2003년 2004년 2005년 2006년 2007년
진 해크먼 마이클 더글러스 로빈 윌리엄스 안소니 홉킨스 워렌 비티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스티븐 스필버그 마틴 스코세이지 로버트 드 니로 모건 프리먼 조디 포스터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우디 앨런 조지 클루니 덴젤 워싱턴 메릴 스트립 오프라 윈프리
2019년 2020년 2021년 2023년
제프 브리지스 톰 행크스 제인 폰다 에디 머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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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ezar-trophy.png
세자르 공로상 수상자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1976년 1977년 1978년
잉그리드 버그만 다이애나 로스 앙리 랑글루아 자크 타티 로버트 도프만
1978년 1979년 1980년
르네 고시니 마르셀 카르네 샤를 바넬 월트 디즈니 피에르 브롱베르제
1980년 1981년 1982년
루이스 드 푸네스 커크 더글러스 마르셀 파뇰 알랭 레네 조르주 댄시거즈
1982년 1983년 1984년
알렉산드르 노우츠킨 장 네니 안제이 바이다 Raimu 르네 클레망
1984년 1985년
조르주 드 보르가르 에드위지 푸이에르 크리스티앙 자크 다니엘 다리외 크리스틴 구즈레날
1985년 1986년
알렝 프와레 모리스 자르 베티 데이비스 장 들라누아 René Ferracci
1986년 1987년 1988년 1989년
클로드 란츠만 장뤽 고다르 세르지 실버만 베르나르 블리에 폴 그리모
1990년 1991년 1992년
제라르 필리프 장 피에르 오몽 소피아 로렌 미셸 모르강 실베스터 스탤론
1993년 1994년 1995년
장 마레 마르첼로 마스트로야니 제라드 우리 장 카르메 잔느 모로
1995년 1997년 1997년
그레고리 펙 스티븐 스필버그 로렌 바콜 앙리 베르누이 샤를 아즈나부르
1997년 1998년 1999년
앤디 맥도웰 마이클 더글러스 클린트 이스트우드 장뤽 고다르 페드로 알모도바르
1999년 2000년
조니 뎁 장 로슈포르 조지안 발라스코 조르주 크라벤느 장피에르 레오
2000년 2001년 2002년
마틴 스코세이지 데리 코울 샬럿 램플링 아녜스 바르다 아누크 에메
2002년 2003년
제러미 아이언스 찰리 리치 베르나데트 라퐁 스파이크 리 메릴 스트립
2004년 2005년 2006년
미셸린 프레슬 자크 뒤트롱 윌 스미스 휴 그랜트 피에르 리차르
2007년 2008년
마를렌 조베르 주드 로 잔느 모로 로베르토 베니니 로미 슈나이더
2009년 2010년 2011년 2012년 2013년
더스틴 호프먼 해리슨 포드 쿠엔틴 타란티노 케이트 윈슬렛 케빈 코스트너
2014년 2015년 2016년 2017년 2018년
스칼렛 요한슨 숀 펜 마이클 더글러스 조지 클루니 페넬로페 크루스
2019년 2020년 2021년 2022년 2023년
로버트 레드포드 없음*
2024년 2025년 2026년 2027년 2028년
크리스토퍼 놀란
* 내정자(브래드 피트)의 수상 거부로 당해의 수상자를 공석 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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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대 칸 영화제
파일:칸 영화제 로고.svg
여우주연상
제3회
(1950년)
제4회
(1951년)
제5회
(1952년)
이사 미란다
(말라파가의 성벽)
베티 데이비스
(이브의 모든 것)
리 그랜트
(형사 이야기)

역대 베니스 영화제
파일:베니스 국제 영화제 로고.svg
볼피 컵 - 여우주연상
제4회
(1936년)
제5회
(1937년)
제6회
(1938년)
아나벨라
(Veille d'armes)
베티 데이비스
(Marked Woman, Kid Galahad)
노마 시어러
(마리 앙투아네트)

역대 아카데미 시상식
파일:oscar_logo.svg
여우주연상
제7회
(1934년)
제8회
(1935년)
제9회
(1936년)
클로뎃 콜베어
(어느 날 밤에 생긴 일)
베티 데이비스
(데인저러스)
루이제 라이너
(위대한 지그펠드)
제10회
(1937년)
제11회
(1938년)
제12회
(1939년)
루이제 라이너
(대지)
베티 데이비스
(제저벨)
비비언 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wiki style="margin:-10px -10px"<tablewidth=90%><tablebordercolor=#fff,#1f2023> 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svg파일: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로고 화이트.svg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 입성자
Hollywood Walk of Fame Stars
}}}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26px"
{{{#ffffff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colbgcolor=#d4a1a1><colcolor=#FFD700> 이름 베티 데이비스
BETTE DAVIS
분야 영화 / 텔레비전
입성날짜 1960년 2월 8일
위치 영화: 6225 / 텔레비전: 6335 Hollywood Blvd.
}}}}}}}}}}}} ||

}}} ||
<colbgcolor=#4e5f28><colcolor=#fee8e1> 베티 데이비스
Bette Davis
본명 Ruth Elizabeth Davis
루스 일리저버스 데이비스
출생 1908년 4월 5일
미국 매사추세츠주 로우얼
사망 1989년 10월 6일 (향년 81세)
프랑스 뇌이쉬르센
국적
[[미국|]][[틀:국기|]][[틀:국기|]]
활동 1929년 – 1989년
신체 160cm
배우자 하먼 아스커 넬슨(1932년–1938년 이혼)
아서 판즈워스(1940년–1943년 사별)
윌리엄 그랜트 쉐리(1945년–1950년 이혼)
게리 메럴(1950년–1960년 이혼)
자녀 딸 바버러 데이비스 쉐리(1947년생)[1]
딸 마고 메럴[2](1951년생)[A]
아들 마이클 메럴(1952년생)[A]
서명 파일:베티데이비스서명.jpg
1. 개요2. 외모 특징3. 생애 및 활동
3.1. 조안 크로포드와의 불화3.2. 개인사
4. 여담5. 주요 출연 작품6. 어록

[clearfix]

1. 개요

파일:Davis, Bette_11.jpg
미국의 배우.

고전 할리우드 황금기에 활동한 배우 중 한 명으로, 5년 연속(1939–43년)으로 아카데미 주연상 후보에 오른 최초의 배우일 만큼[5] 연기력을 인정받았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배우 2위에 선정되었다.# 장르를 불문하고 영화에 등장한 점이 후대에도 높게 평가되고 있다.

거침없고 직설적인 성격으로, 남성 위주였던 당시 할리우드의 여성으로서는 드물게 캐서린 헵번과 함께 본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해 인권이 취약하던 시절 소수자들에게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주었다.[6] 1980년대에는 젊은 시절의 악역 이미지와 더불어 말년에 자주하던 과장된 연기와 TV 인터뷰에서의 디바 같은 태도가 일종의 밈이 되었는데, 이 덕분에 주디 갈런드와 함께 게이 아이콘으로도 유명했다.

2. 외모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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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티 데이비스 아이즈

경력 초기에는 "당시 여배우의 기준에 부합하지 못하는 얼굴 때문에 줄줄이 퇴짜를 받았다."[7] 영화 속 의상들 역시 데이비스의 몸매를 드러내는 게 아니라 오히려 잘 감추고 보정하는 걸 목적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오늘날 스타일 측면에서 남긴 게 아무 것도 없다. 이 모두를 영화를 볼 땐 아무도 눈치 채지 못한다. 데이비스가 전부 연기력 하나만으로 감쪽같이 숨겼기 때문이다. 흔히 말하는 아름다움을 연기하는 배우의 시초다.[8]

큰 눈으로 유명한데 처음 배우가 된 후 첫 소속사인 유니버설 스튜디오즈에서 배역을 못맡아 거의 짤릴 뻔 했으나 촬영감독이 그 큰 눈이 카메라에 잘 받을거라며 한 영화에 추천했고 그 영화로 데뷔를 한 일화가 있다. 눈이 워낙 유명해져서 대중문화에 끼친 영향도 상당하다. 1981년도에 빌보드 핫 100 9주 1위와 빌보드 연말 차트 1위를 기록한 킴 칸스의 "Bette Davis Eyes"라는 노래도 있다.[9] 마돈나의 싱글인 "Vogue"의 가사에 등장하기도 한다.

3. 생애 및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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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매사추세츠주에서 태어났다. 1915년 부모님의 이혼 후 어머니 밑에서 자라다가 기숙형 사립학교 쿠싱 아카데미를 졸업하고 1926년 배우를 지망하여 대학교 연극과에 입학했다. 1929년 연극 "Broken Dishes(깨진 접시)"로 브로드웨이에 정식 데뷔하였다.

1930년 할리우드로 이동했지만 마중 나왔던 유니버설 스튜디오즈의 담당자가 너무 평범하다고 깔 정도로 이후의 명성에 비하면 초라한 첫해였다. 1932년 유니버설과의 재계약 실패 후 뉴욕으로 돌아가려다 데이비스를 눈여겨 본 워너 브라더스사와 5년간 계약을 맺고 계약 이후 작은 배역을 전전하였다.

그러다가 RKO 라디오 픽쳐스의 1934년작 <인간의 굴레에서>에 출연하게 된다. 당시 악역은 인물에 배우가 먹히는 경우가 많아 배우들이 맡기를 꺼렸으나 데이비스는 가능성을 발견하고 도전하였다. 철저히 망가져서 전혀 매력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나오는 여주인공 또한 기존엔 존재하지 않던 개념이었다. 영화는 엄청난 성공을 거두며 데이비스를 일약 스타덤에 올렸다. 데이비스는 개인 분장실용 트레일러를 받은 최초의 여배우가 되었고 전문분장사를 시켜 특유의 큰눈을 돋보이게 하는 눈화장에 매일 공을 들이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수상이 유력시 되고 있었으나, 막상 후보 지명조차 받지도 못했고, 이로 인해 엄청난 논란이 일어났다. 당시 아카데미 협회는 자그마한 친목 사교 모임 정도였으나 이 스캔들로 일정한 자격을 갖춘 대규모 전문가들이 투표에 참여하는 방식으로 확대 개편되었다. 결국 1936년 <데인저러스>로 첫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데이비스는 워너의 기존 간판 케이 프랜시스를 누르고 "워너 사의 가장 큰 수입원이 되어 소녀가장 소리까지 듣게 됐지만"[10] 워너 사는 데이비스에게 대놓고 "우린 사실 네가 찍는 영화들도, 너도 그리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즉 돈만 아니었다면 너랑 함께 할 일은 없었다는 소리를 당사자 면전에서 해버린 것이다. 워너 사는 배은망덕하게도 여신같은 외모가 아닌 데이비스와 그에 맞춰 점잖지 않은 내용들로 이뤄진 영화들이 자사를 대표하는 이미지가 됐다는 사실을 창피하게 여겼다. 당시 워너 사에 큰 소속감을 느끼고 있던 데이비스는 매우 상처 받았다.

워너 사의 데이비스에 대한 실질적 대우 역시 형편없었다. 부당함을 느낀 데이비스는 워너 사를 상대로 소송을 제기하였다. 주위의 지지를 못 받았고 패소로 끝났지만, 7년 뒤 올리비아 더 해빌런드의 계약 무효 소송 승소의 근거가 되었다. 이때 "더 해빌런드 법"이 만들어졌는데, 이 법은 스튜디오 체계가 붕괴되는 데 일조하였다.

사람들은 이제 데이비스가 워너 사에서 쫓겨날 거라고 생각했지만 뜻밖에도 잭 워너는 곧 데이비스가 실은 옳은 소리를 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잭 워너는 데이비스의 기지를 높게 평가해 최고의 대우를 보장해주었고, 데이비스가 그간 요구했던대로 대본의 질을 높이기 위해 힘쓰게 되었다.
1938년, <제저벨>
1938년 <제저벨>로 윌리엄 와일러와 처음 작업을 함께 하면서 와일러의 초기 페르소나로 활동하였다. 데이비스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 오하라 역에서 탈락하고, 소속사인 워너 사에게서 일종의 보상으로 받은게 제저벨 역이다. 워너 브라더스가 영화 배급권을 자기들이 갖는 대신, 워너 사 소속인 데이비스, 에롤 플린, 올리비아 더 해빌런드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역들로 빌려주겠다는 제안을 했으나, 셀즈닉은 스칼렛 오하라 역은 신인이거나 얼굴이 덜 알려진 배우이길 원해서 데이비스는 애초에 제외되었다.[11] 우여곡절 끝에 작업하게 된 <제저벨>을 기점으로 전성기가 시작되었다. 두 번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1939년부터 1943년까지 5년 연속으로 후보에 올라가는 등 연기력이 활짝 꽃 핀 시기다.

하지만 이와 함께 경력이 슬슬 하락세에 접어들기 시작했다. 우선 1941년 여성으로선 최초이자 최연소로 아카데미 협회의 의장직에 오르지만 협회와의 불화로 사퇴하게 된다. 1940년작 <편지>까지 함께 성공적으로 작업한 윌리엄 와일러와도 불화로 인해 1941년작 <작은 여우들>을 끝으로 같이 작업을 하지 않게 되었다. 또한 10여년간의 흥행 연타도 1946년작 <디셉션>의 실패로 끝이 났다. 거기에다가 출산까지 겪으며 활동이 정체되었다.

하지만 1950년작 <이브의 모든 것>에서 영화사에 길이 남을 연기를 펼치며 화려하게 재기하는 데 성공한다.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유력시 되었으나, <이브의 모든 것>에서 이브를 연기한 앤 백스터와 <선셋 대로>의 글로리아 스완슨이 함께 후보에 오르면서 삼파전이 펼쳐지면서 표가 갈려 제3의 주자였던 주디 할러데이가 <귀여운 빌리>로 여우주연상을 받았다. 할러데이 역시 명연기를 했다. 경쟁자들이 워낙에 대단했을뿐.

이후 다시 침체기를 겪다가 평소 앙숙지간이었던 조운 크로퍼드의 제안으로 1962년작 <제인의 말로>에 출연하면서 재기하는데 성공한다. <제인의 말로>에서 두 주연 배우의 사이가 매우 안 좋다는 점이 서로를 증오하는[12] 두 자매 연기와 영화 홍보에 큰 도움이 되었다. 이 영화가 워낙 기대작이었고 제작 당시 둘 다 경력이 내리막길이었기 때문에 둘은 싸움을 자제하려고 했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고 결국 전설적인 일화들이 남았다. 영화는 대성공했고 데이비스는 다음해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이 확실시 되었으나 정작 수상자는 <기적은 사랑과 함께>에서 헬런 켈러를 가르치는 앤 설러번 선생 역을 맡았던 앤 밴크로프트였다. <제인의 말로>의 성공 때문에 1960년대엔 미친 노파 역으로 주로 활동했다.

1964년, <제인의 말로>의 성공을 재현하고 싶었던 워너 사는 심리스릴러 <허쉬 허쉬 스윗 샬롯>을 만들게 된다. 원작 소설가, 이야기 골자, 감독, 두 주역까지 전부 전작 그대로였다. 그러나 데이비스와 크로퍼드의 사이는 워너 사의 생각보다 훨씬 안 좋았고 크로퍼드는 올리비아 더 해빌런드로 교체되었다.

데이비스는 이후에도 꾸준히 활동했다.

1983년 유방절제술을 받았고 결국 1989년 암으로 프랑스에서 사망했다. 사망 당시 100만 달러 가량의 유산을 남겼다.

3.1. 조안 크로포드와의 불화

조안 크로포드와는 지독한 앙숙으로 유명했다. 공식적으로는 불화가 없다고 부정했으나 비공식적으론 암투가 치열하게 벌어졌다.

시작은 크로포드에 대한 데이비스의 질투였다. 데이비스가 힘들게 오디션을 보면서 배역을 따는 무명 배우의 삶을 살고 있을 때 크로포드는 이미 전성기에 돌입해 있었는데, 데이비스는 무용수 출신 크로포드보다 연기 학교에서 공부한 자신이 더 뛰어난 배우라고 생각해 크로포드를 질시했다. 데이비스는 사석에서 "크로포드 양은 스타지만, 나는 배우야"라고 자주 말하고 다닌 것으로도 유명하다.

이후 악연이 여러 번 겹치면서 데이비스는 크로포드에게 더 깊은 앙심을 품게 되었다.

1933년 워너 사는 <Ex-Lady>로 데이비스의 이름을 처음으로 영화 제목 위로 올리면서 홍보를 야심차게 준비했는데, 하필 워너 사가 언론사에 홍보 자료를 뿌린 날 크로포드가 당시 최고의 스타였던 첫 번째 남편 더글러스 페어뱅크스 주니어와의 이혼을 발표했다. 크로포드의 이혼이 온갖 신문의 1면을 장식하게 되면서 데이비스의 신작 소식은 구석진 자리의 단신으로 옮겨졌고 결국 <Ex-Lady>는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과를 받고 말았다.

1935년 데이비스는 <데인저러스>를 찍으면서 상대 배우인 프랜쵸우 토운에게 크게 반한다. 그러나 토운은 이미 크로포드와 사귀던 중이었고 둘은 <데인저러스> 촬영 도중에 약혼까지 했다. 데이비스는 당시 토운이 크로포드에게 깊이 빠져있었고 촬영 중 점심시간마다 크로포드와 만났다고 시인했음에도, 크로포드가 자신에게서 토운을 뺏어갔다는 생각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말년에도 바로 이 점 때문에 크로포드를 용서할 수가 없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자연히 크로포드 역시 데이비스에게 악감정을 갖게 되었다. 1936년, 데이비스는 수상에 대한 기대가 전혀 없이 아카데미 시상식에 참석했는데, 미국 배우 조합(SAG)의 결성에 같이 항의하자며 잭 워너가 억지로 데려간 자리였다. 당연히 SAG를 지지하던 데이비스는 워너에게 시위하는 뜻에서 거의 꾸미지 않은 채로 갔다. 로저 무어에 따르면 데이비스가 시상대에 오르기 전 크로포드가 "옷이 참 예쁘네!"라고 비꼬며 창피를 줬다는 목격담이 할리우드에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13]

그래도 먼저 화해의 손길을 내민 건 크로포드였는데, 1943년 MGM에서 워너 사로 이적한 뒤 크로포드는 개인 분장실을 데이비스 옆방에 배정해달라고 요청한 뒤 꽃과 선물을 잔뜩 보냈다. 그러나 데이비스는 이를 전부 돌려보냈다.

데이비스가 이를 두고 "레즈비언의 (성적) 접근"이라고 뒷담화를 했다는 얘기가 있는데, 이는 그저 비아냥거리려고 한 말만은 아니었다. 당시 할리우드에는 크로포드가 양성애자라는 소문이 기정 사실처럼 번져있었기 때문이다.[14] 실제로 크로포드가 반농담식이긴 하지만 데이비스에 대한 성적 호기심이 담긴 발언을 했다는 주변인들의 증언도 있다.

이후 데이비스가 거절한 영화들에 크로포드가 나와서 줄줄이 고평가를 받자 데이비스가 이를 질투하고 화를 내면서 사이가 더 틀어지게 되었다. 크로포드는 <밀드러드 피어스>(1945)로는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받았고, <Possessed>(1947)로는 후보에 올랐다.

1952년 크로포드와 사이가 틀어진 부부 작가 캐서린 앨버트와 대일 윤슨[15]은 크로포드를 기초로 하여 대본을 쓴다. 데이비스는 기꺼이 주연을 맡았고 보란듯이 인터뷰마다 최고의 대본이라고 극찬하고 다녔다. 이 영화 <스타>에서 여주인공은 명성에 집착하는 한물 간 스타로 묘사된다.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데이비스를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려주었다.

앨버트 부부는 이렇게 크로포드를 모욕해놓고도, 황당하게도 자신들의 딸이며 크로포드의 대녀였던 신인 스타 조운 에번스[16]가 겨우 17살에 자동차 판매사원과 결혼을 하겠다고 하자 크로포드에게 딸의 고집을 꺾어달라고 부탁했는데, 크로포드는 복수를 위해 반대로 아예 자신의 집에 판사와 언론을 부른 뒤 조운 에번스의 결혼식을 열어주었고, 일이 다 끝난 뒤에 앨버트 부부에게 후통보했다. 다행히 조운 에번스는 남편과 백년해로했고 크로포드에 대해 늘 감사하게 생각했다.

<제인의 말로>(1962)를 같이 찍자고 제안한 사람은 크로포드였다. 자신이 반드시 제인을 맡아야 한다는 데이비스의 주장도 받아들였다. 데이비스는 수락 전에 감독 라버트 얼드리치가 크로포드와 잠자리를 갖고 있진 않은지 확인하기도 했다. 영화를 찍으며 얼드리치가 크로포드를 더 편애하면 안 된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다가 촬영장에서 일이 터졌다. 당시 크로포드는 네 번째 남편 앨프러드 스틸[17]펩시 CEO였던 덕분에 펩시의 이사로 있었는데, 데이비스는 오로지 크로포드를 엿먹이기 위해 크로포드의 분장실에 코카콜라 자판기를 설치했다.

이에 크로포드는 데이비스의 제인 역이 자신의 블랜치 역을 때리는 장면에서 데이비스가 자신을 진짜로 때릴지도 모른다는 걱정에 대역을 부탁하기도 했다. 대역을 쓰지 못한 근접촬영 부분에서 실제로 데이비스가 크로포드를 심하게 때리는 걸 확인할 수 있다는 얘기가 있다. 열받은 크로포드는 데이비스가 바닥에 쓰러진 자신을 끌고가는 씬을 촬영할 때 주머니에 돌을 넣어놓았고 일부러 연기를 망쳐 같은 장면을 반복해서 찍게 해 데이비스를 기진맥진하게 만들었다.

이후 둘은 싸움을 자제했지만 영화 촬영이 끝나자마자 인터뷰에서 서로를 깎아내리기 바빴다. 홍보 행사에 크로포드가 불참한 게 가장 널리 알려진 사례다. 훗날 크로포드는 내부 시사회가 끝난 뒤 데이비스에게 의견을 물었을 때 데이비스가 "나의 훌륭한 연기가 잘 담긴 영화다"라고만 하고 자신의 연기에 대해서는 일언반구도 하지 않아서 속으로 매우 실망한게 불참한 이유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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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 데이비스만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에 오르자 크로포드는 함께 후보에 오른 앤 밴크로프트, 제럴딘 페이지, 캐서린 헵번, 리 레믹에게 만약 시상식에 못 가게 된다면 자신이 대리 수상을 해주겠다고 연락을 돌린다. 불참한 밴크로포트가 수상자로 발표되자 크로포드는 시상식 무대로 올라왔고 데이비스가 보는 앞에서 대리이긴 하나 아주 보란듯이 수상을 했으며, 그레고리 펙 등 다른 수상자들과 함께 활짝 웃으며 기념사진까지 찍었다.

이후 데이비스는 모든 인터뷰에서 크로포드가 자기가 상을 못 받게 하기 위해 로비를 했다고 말하며 분노했다. 물론 크로포드는 부인했지만 둘의 사이는 겉잡을 수 없을 지경이 되었다.

<제인의 말로>의 성공을 재현하기 위해 기획된 <허쉬 허쉬 스윗 샬롯>(1964)에서 또 일이 터졌다. 크로포드보다 촬영장에 먼저 도착한 데이비스가 모든 스태프들을 자기 편으로 끌어들여서[18] 크로포드를 왕따시키기로 결정한 것이다. 사실 이건 크로포드 잘못도 있다. 크로포드는 영화 현장에서 전권을 휘두르는 폭군같은 행동으로 당시 악명이 높았고 결국에는 스태프들조차도 등을 돌리게 되었다.

정신적으로 피폐해진 크로포드가 열흘만에 병가를 내자[19] 제작사는 크로포드의 병원에 찾아가 데이비스 때문에 꾀병을 부리는건 아닌지 뒷조사까지 했다. 얼드리치는 크로포드를 카메라 앞에 세우기 위해 사설탐정까지 고용해 크로포드의 근황을 살폈지만 다른 배우로 교체하지 않으면 영화 제작 자체를 취소하겠다는 워너 사의 협박에 몇 여배우들에게서 거절을 당한 뒤 올리비아 드 하빌랜드의 승낙을 얻어냈다. 제작사가 관여했다고는 하지만 당시 촬영장에서 데이비스의 영향력을 생각하면 누가 그 뒤에 있었는지 대충 예상이 갈 것이다. 크로포드는 자신이 강판된 사실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알았다고 한다.

1977년 크로포드가 사망한 뒤론 데이비스도 차차 누그러졌다. 크로포드의 연기력만큼은 존경한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고 1978년 크로포드의 입양딸이 그 유명한 "Mommie Dearest"라는 회고록으로 크로포드를 비난했을 땐 배은망덕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사랑하는 훌륭한 내 딸 B.D.가 나에 대해 그런 고약한 책을 낸다면" "내게 얼마나 상처가 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실제로 그런 일을 당한) 크로포드가 매우 안타까울 뿐이다"라고도 덧붙였다. 말이 씨가 됐는지 1985년 데이비스의 딸 B.D. 하이먼도 "My Mother's Keeper"라는 책을 내며 데이비스는 "학대하고 군림하는 사악한 어머니"였으며 "역겨운 알코올 의존증 환자"라고 폭로했다. 그러나 크로포드의 경우만큼 대중에게 널리 받아들여지진 않았고, 데이비스는 1987년 회고록 "This 'n That"을 펴내며 반박했으며, 데이비스의 입양아들 마이클 메럴도 사실이 아니라고 맞서며 B.D. 하이먼과 연을 끊었다.

둘의 사이는 이후에도 회자되어서 2017년 수전 서랜던제시카 랭이 출연한 미니 시리즈 퓨드로 제작되었다.

3.2. 개인사

  • 첫 번째 남편 하먼 넬슨은 고등학교에서 만나 사귀기 시작했다.
  • 하먼 넬슨과의 결혼생활 중 윌리엄 와일러 연출작 <제저벨>(1938)에 나오며 와일러와 깊이 사랑에 빠졌다. 와일러는 넬슨과 이혼하고 자신과 결혼해달라고 청했지만 데이비스는 이를 망설였다. 결국 와일러는 24시간 안에 결혼에 대한 답을 주지 않으면 다른 여자랑 결혼하겠다고 데이비스에게 최후통첩을 내린다. 그러나 하필 그날따라 집안에 처박혀있던 데이비스는 이 전보를 받지 못했고 와일러는 전보를 보낸지 24시간이 지나도 답이 없자 데이비스를 포기하면서 당시 알게 된지 겨우 3주 밖에 안 됐던 두 번째 아내와 결혼해 사망시까지 함께 했다.
  • 1938년 Tailwaggers Society(테일웨거스 소사이어티) 자선행사에서 하워드 휴즈를 만나 말리부에 집 한 채를 대여해 밀회를 갖기 시작했다. 데이비스는 여전히 첫 번째 남편 하먼 넬슨과 결혼생활 중이었고, 휴즈는 캐서린 헵번과 그대로 동거하면서 진저 라저스까지 만나고 있었다. 당시 데이비스는 휴즈와의 관계를 언론에 간접 시인하기도 하고 간접 부인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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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8년 테일웨거스 소사이어티 자선행사에서
  • 하루는 부부 침실에서 휴즈와 성관계를 갖던 중 침실에 미리 도청 장치를 설치해놨던 남편 하먼 넬슨이 쳐들어왔다는 얘기가 있다. 화가 난 넬슨이 입막음 댓가로 휴즈에겐 70,000 달러를, 데이비스에겐 10,000 달러를 요구했으며 결국 휴즈가 이 돈을 전부 지불했다고 한다.[20]
  • 결국 데이비스는 그해 넬슨과 이혼했다. 하워드 휴즈는 진저 라저스의 1940년 이혼 때는 본인이 직접 과정에 적극 개입하고 약혼 반지와 신혼집 예정 부지까지 선물하며 결혼을 약속했지만, 데이비스의 이혼엔 그 어떤 도움도 주지 않았고 끝까지 청혼하지 않았다. 데이비스는 이혼 비용을 워너 사에서 빌려야했다. 그렇게 휴즈와의 관계도 끝이 났다.
  • 두 번째 남편 아서 판즈워스는 항공장비 회사 대표였는데, 갑자기 인도에서 쓰러지면서 바닥에 머리를 부딪혔고 뇌출혈로 인한 뇌손상으로 35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 네 번째 남편 게리 메럴과의 결혼생활 중에 입양한 딸 마고 메럴은 3살 때 정신박약아로 판정되었다. 이후 특수학교와 시설을 거쳤다.
  • 게리 메럴과 이혼할 때 유명 사립탐정 프레드 오태쉬[21]를 고용해 메럴의 뒤를 밟게 해 불륜 증거를 잡았다.

4. 여담

  • 제2차 세계 대전 참전 군인들을 지원하기 위해 존 가필드와 함께 술이 금지된[22] 군인 전용 무료 오락 공간인 할리우드 캔틴[23]을 열고 전두지휘했다. 무수한 할리우드 스타들[24]이 이 공간에 들려 공연을 하고 연합군들과 함께 춤을 추고 음식 봉사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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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당시 미국 사회에 만연해 있던 흑백 분리 정책에 저항하던 인종차별 반대론자였다.
  • 험프리 보가트, 캐서린 헵번, 헨리 폰다 등과 함께 당시 할리우드의 대표적인 민주당원이었다. 현대 할리우드는 민주당원이 압도적으로 많지만, 정치 지형이 현대 미국과 다른 30~40년대에는 오히려 공화당원이 더 많았다. 특히 할리우드는 '자유'를 추구하는 집단이기 때문에, 전쟁 이후 냉전 분위기가 대두된 40~50년대까지만 해도 반공 보수파가 우세할 수밖에 없었고, 심지어 매카시즘이 맹위를 떨치던 50년대에는 할리우드 블랙리스트 사건까지 있었다. 그 이후인 60년대부터는 진보적 가치가 대두되며 리버럴 세력이 압도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 1930-40년대에 아카데미상을 2번이나 받았지만, 상운이 없는 배우로 분류된다. 전술했듯 1950년 <이브의 모든 것>과 1962년 <제인의 말로>에서 최고의 연기를 보여줬음에도 둘 다 상을 타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카데미가 나이 든 배우를 홀대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을 생각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 말년에 대선배 릴리언 기쉬와 함께 1987년작 <8월의 고래>를 찍으면서 툭하면 기쉬보다 돈 많이 달라고 하거나 기쉬에게 귀 먹었냐고 비아냥거려서 기쉬가 무척 언짢아했다고 한다. 그래도 한편으로는 기쉬는 병마를 앓고 있던 데이비스를 가엾게 여겼다고 한다. 데이비스는 사망하기 2년 전으로 한창 암투병할 시기였다.
  • 후배였던 카렌 블랙[25] 역시 좋아하지 않았다. 공포 영화 <마리안의 욕망>(1976)을 찍으면서 블랙의 연기에 존중이 결여되어 있다고 생각해 불화가 있었다고 한다.
  • 스크루볼 로맨틱 코미디 <The Bride Came C.O.D.>(1941)에서 제임스 캐그니와 짝을 이뤘다. 개봉 당시 묻혀버린 마이클 커티즈 연출의 <Jimmy the Gent>(1934) 이후로 두 사람이 또 뭉쳤던 이유는 다시 함께 일하고 싶어서였다고 알려졌었다. 그러나 캐그니는 말년 인터뷰에서 실은 데이비스가 자신을 마피아와 연루된 사람이라고 믿으며 함께 홍보사진을 찍는 것조차 거부하는 등 함께 일하는 게 쉽지 않았다고 말하며 인간적으론 좋아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러나 데이비스가 직업적으로는 해야할 몫을 해내는 훌륭한 배우라고 생각했다.
  • 캐서린 헵번과도 묘한 경쟁 구도였다.[26] 그 대표적인 예로 햅번은 메릴 스트립을 계산적이고 기계적인 연기를 한다고 깠으나, 데이비스는 스트립의 데뷔 초, 그녀의 진가를 알아보고는 자신의 진정한 후계자라며 스트립에게 친필 편지까지 보내기도 하였다. 이때 인연으로 데이비스 사후 다큐에 스트립이 출연하기도 하였다.
  • 디즈니도널드 덕 만화영화 <The Autograph Hound>(1939)에서 당대 다른 탑스타들과 함께 과장되게 묘사되었다. <제저벨>(1938) 속 의상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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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교적 노안인 편이었다. 동시기에 동갑인 제임스 스튜어트와 비슷한 나이로 보이는데, 스튜어트는 당시 할리우드에서 노안이라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특히 <이브의 모든 것>에 나오는 앤 백스터가 무지무지한 동안이기에, 더욱 노안인게 부각된다.[27]

5. 주요 출연 작품

<rowcolor=#fee8e1> 연도 작품 배역 비고
1932 The Man Who Played God 그레이스 블레어 대럴 F. 재넉 제작
So Big 댈러스 오매러 양 조지 브렌트 출연
The Rich Are Always with Us 상속녀 말브로 조지 브렌트 출연
The Dark Horse 케이 러슬
Three on a Match 속기사 루스 웨스캇 머빈 러로이 연출
험프리 보가트 출연
20,000 Years in Sing Sing 페이 윌슨 마이클 커티즈 연출
스펜서 트레이시 출연
1933 The Working Man 제니 하틀런드/제인 그레이 미 의회도서관 영구 보존
Ex-Lady 헬런 바우어 1933년 바버라 스탠윅 주연작 개작
Bureau of Missing Persons 노머 라버츠 루이스 스톤 출연
1934 The Big Shakedown 노머 넬슨
Fashions of 1934 린 메이슨 윌리엄 파월 출연
Jimmy the Gent 조운 마튼 제임스 캐그니 출연
인간의 굴레에서
(Of Human Bondage)
밀드러드 라저스 레슬리 하워드 출연
Housewife 퍼트리셔 버클리 조지 브렌트 출연
1935 데인저러스
(Dangerous)
배우 조이스 히스 제 8회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프랜쵸우 토운 출연
Bordertown 머리 로어크 폴 뮤니 출연
Special Agent 줄리 가드너 조지 브렌트 출연
The Girl from 10th Avenue 미리엄 브레이디
Front Page Woman 기자 엘런 가필드 조지 브렌트 출연
1936 화석의 숲
(The Petrified Forest)
게이브리엘 메이플 레슬리 하워드, 험프리 보가트 출연
The Golden Arrow 데이지 애플비 조지 브렌트 출연
1937 Kid Galahad 루이즈 "플러프" 필립스 제 5회 베니스 국제 영화제 볼피컵
Marked Woman 술집 여성 메리 드와이트 스트로버 볼피컵[28]
It's Love I'm After 조이스 아든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 레슬리 하워드 출연
That Certain Woman 메리 다널 (헤인즈) 헨리 폰다, 도널드 크리스프 출연
1938 제저벨
(Jezebel)
줄리 마스던 제 11회 미국 아카데미 여우주연상
헨리 폰다, 조지 브렌트 출연
The Sisters 루이즈 엘리엇 에롤 플린 출연
1939 사랑의 승리
(Dark Victory)
상속녀 주디스 "주디" 트러헌 험프리 보가트, 로널드 레이건, 조지 브렌트 출연
후아레스
(Juarez)
벨기에의 샤를로트 폴 뮤니 출연
The Old Maid 샬럿 러블 이디스 워튼 원작, 조지 브렌트 출연
엘리자베스의 스캔들
(The Private Lives of Elizabeth and Essex)
엘리자베스 1세 에롤 플린, 더 해빌런드 출연
1940 속세와 천국
(All This, and Heaven Too)
앙리에트 들루지-데포르트 샤를 부아예 출연
편지
(The Letter)
레슬리 크러즈비 윌리엄 와일러 연출
W. 서머싯 몸 원작
1941 작은 여우들
(The Little Foxes)
리지너 기든즈 윌리엄 와일러 연출
릴리언 헬먼 원작
대단한 거짓말
(The Great Lie)
매기 패터슨 밴 앨런 메리 애스터, 조지 브렌트 출연
The Bride Came C.O.D. 조운 윈필드 제임스 캐그니 출연
1942 가라 항해자여
(Now, Voyager)
샬럿 베일 폴 헨리드, 클로드 레인스 출연
In This Our Life 스탠리 팀버레이크 킹스밀 존 휴스턴, 라울 월시[29] 연출.
더 해빌런드, 조지 브렌트 출연
만찬에 온 사나이
(The Man Who Came to Dinner)
매기 커틀러 모스 하트, 조지 S. 카우프먼 원작
1943 라인의 감시
(Watch on the Rhine)
새러 믈러 대실 해밋 대본
릴리언 헬먼 원작
Old Acquaintance 작가 캐서린 "킷" 말로우 빈선트 셔먼 연출
기그 영, 앤 리베어 출연
Thank Your Lucky Stars 본인
1944 미스터 스케핑튼
(Mr. Skeffington)
프랜시스 비어트리스 "패니" 트렐리스 스케핑튼 클로드 레인스 출연
할리우드 캔틴
(Hollywood Canteen)
본인
1945 푸른 옥수수
(The Corn Is Green)
릴리 크리스터벌 마패트 양
1946 도둑맞은 인생
(A Stolen Life)
케이트 보스워스/퍼트리셔 보스워스 글렌 포드 출연
디셉션
(Deception)
크리스틴 래드클리프
1948 June Bride 린더 길먼 로버트 몽고메리, 데비 레널즈 출연
1949 Beyond the Forest 로저 몰린 킹 비더 연출
조셉 코튼 출연
1950 이브의 모든 것
(All About Eve)
마고 채닝 제 4회 칸 영화제 여우주연상 외 1 건
1951 Payment on Demand 조이스 램지
1952 낯선 사람으로부터의 전화
(Phone Call from a Stranger)
머리 호우크 셸리 윈터스 출연
1953 스타
(The Star)
마거릿 엘리엇 스털링 헤이든, 내털리 우드 출연
1955 여왕과 로올리경
(The Virgin Queen)
엘리자베스 1세 두 번째 엘리자베스 1세 연기
1956 The Catered Affair 애그니스 헐리 어니스트 보그나인, 데비 레널즈 출연
1959 The Scapegoat 드 게 백작 부인 알렉 기네스 출연
1961 포켓에 가득찬 행복
(Pocketful of Miracles)
애플 애니 프랭크 캐프러 연출
글렌 포드 출연
1962 제인의 말로
(What Ever Happened To Baby Jane?)
베이비 제인 허드슨 조운 크로퍼드 출연
1963 La noia 디노의 엄마 이탈리아 영화
1964 데드 링거
(Dead Ringer)
마거릿 들로커/이디스 필립스 칼 몰든, 피터 로퍼드 출연
허쉬 허쉬 스윗 샬롯
(Hush...Hush, Sweet Charlotte)
샬럿 할리스 더 해빌런드, 조셉 코튼 출연
Where Love Has Gone 제럴드 헤이든 부인 수전 헤이워드 출연
1965 The Nanny 유모
1968 The Anniversary 태거트 부인
1971 노인 강도
(Bunny O'Hare)
버니 오헤어 어니스트 보그나인 출연
1972 핵잠수함 스타피쉬
(Madame Sin)
신 부인 로버트 웨그너 출연
1973 Scream, Pretty Peggy 엘리엇 부인 TV 영화
1976 마리안의 욕망
(Burnt Offerings)
일리저버스 숙모 캐런 블랙, 올리버 리드 출연
1978 나일 살인 사건
(Death on the Nile)
머리 밴 스카일러 피터 유스티노프, 데이비드 니븐 출연
마녀의 산 2
(Return from Witch Mountain)
리서 웨지 크리스토퍼 리 출연
The Dark Secret of Harvest Home 더 위도우 포춘 TV 미니시리즈
1980 숲속의 눈동자
(The Watcher in the Woods)
에일우드 부인 캐럴 베이커 출연
1985 겨울 살인사건
(Murder with Mirrors)
캐리 루이즈 세러콜드 TV 영화
헬런 헤이즈제인 마플
1986 As Summers Die 해나 러프튼 TV 영화
제이미 리 커티스 출연
1987 8월의 고래
(The Whales of August)
리비 스트롱 릴리언 기쉬, 앤 소던 출연
1989 사악한 입맞춤
(Wicked Stepmother)
머랜더 피어포인트

6. 어록

조안 크로포드와의 불화에서 볼 수 있듯 굉장히 터프한 성격이라 성격에 걸맞는 직설적인 어록을 많이 남겼다.
늙음은 계집들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
일을 더 잘 해내기 위해 불가능한 것에 도전하는 것, 이것이 나의 신조다.
섹스는 인간에 대한 신의 가장 큰 농담이다.
50살이 되었을 때, '여기에 우리가 반세기 동안 있었구나'라고 생각했다.
60살이 되는 건 조금 무서웠다.
70살이 될 때 내가 무얼 하고 있었냐고? 나는 검은 얼굴로 검은 가발을 쓰고 검은 옷을 입고 검은 화환을 문 앞에 걸었다.
성공은 새로운 목표를 낳을 뿐이다.

[1] 결혼 후 성을 하이먼으로 바꾸어 B.D. 하이먼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2] Margot "Margo" Mosher Merrill.[A] 입양.[A] [5] 이후 그리어 가슨이 타이 기록(1942–46년)을 냈다.[6] 달리 말하면 엄청난 디바여서 커리어 중반 이후로는 제작사, 제작자, 감독, 동료배우 할것 없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으면 직언을 퍼부어서 많이들 껄끄러워 했다.[7] 영화평론가 라버트 오즈본.[8] 현대 평론가들은 배우의 외모 기준이 까다롭지 않은 오늘날의 할리우드에 와선 데이비스의 얼굴이 그저 멋지게 보이게 됐으며, 이 때문에 오늘날의 관객들은 데이비스가 당시 왜 그렇게까지 외모를 비하 당했는지, 이를 오로지 연기로 극복했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체감하기 힘들 것이라고도 말하기도 했다.[9] 베티 본인은 이 곡을 정말 좋아했다고 한다. 자기를 다시 각인시킨 곡이라고 자필로 작곡자와 칸스에게 편지를 보냈을 정도. 손자도 자길 존경하게 만든 곡이라고 한다. 이후 그래미상 수상 당시 장미 화환을 보냈다고 한다.[10] 하워드 B. 고틀립(Howard B Gotlieb).[11] 워너 사에서 제안한 세 명 중에서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배역을 따낸건 멜라니 역의 더 해빌런드가 유일하다.[12] 정확히는 데이비스가 연기하는 베이비 제인 역이 크로퍼드의 역을 질투하며 일방적으로 증오한다.[13] 일이 벌어졌을 당시에 무어는 9살이었으나 업계에 들어온 후 이 일화를 전해듣고 자서전에 적어두었다.[14] 워너 사는 두 사람을 위해 여성재소자들을 소재로 한 <Caged>(1950)를 기획했는데, 데이비스가 "레즈비언 영화 같은 건 안 찍는다"며 거부해 다른 배우들로 교체되었다는 얘기가 있다.[15] Katherine Albert. Dale Eunson.[16] Joan Evans.[17] Alfred Steele. 1900 - 1959.[18] 데이비스는 영화의 제작에도 관여했기에 영향력이 컸다.[19] 처음엔 꾀병이었으나 나중에는 피로가 몰려와서 진짜로 몸이 아팠다고 한다.[20] 다만 이 일화를 주장한 찰스 하이앰 저술 서적의 신빙성에 대해 많은 사람들이 의구심을 표하고 있다.[21] Fred Otash. 많은 유명 누아르 소설과 영화 주인공들이 오태쉬에 기초하고 있다.[22] 그 대신 다양하게 제공된 논알콜 음료들 중에선 우유가 가장 잘 나갔다고 한다.[23] Hollywood Canteen.[24] 베티의 뜻에 동참한 할리우드 스타들 명단 보면 전부 기라성급이다. 당시 데이비스의 영향력을 알 수 있는 부분.[25] 아메리칸 뉴웨이브 시네마와 70년대 미국 공포 영화를 이끌었던 배우였다. 로버트 올트먼 영화에도 출연했다.[26] 당장 AFI 선정 가장 위대한 여배우 2위로 1위인 캐서린 헵번과 엎치락뒤치락한다.[27] 사실 이건 어쩔 수 없는 게 데이비스는 <이브의 모든 것>을 찍을 때 42세였다. 반면 이브 역을 맡은 백스터는 당시 27세였다. 백스터가 상당히 동안인 건 맞지만, 데이비스의 나이를 고려하면 <이브의 모든 것> 속 모습은 괜찮은 편이라 할 수 있다.[28] <Kid Galahad>와 함께 오름.[29] 휴스턴 부재 중 연출을 맡았으나 크레딧 미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