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9 17:01:39

조선인민유격대

조선인민유격대
朝鮮人民遊擊隊
Korean People's Guerrilla
파일:남조선로동당 당기.svg
성립 1946년
해체 1955년
활동지역
[[대한민국|]][[틀:국기|]][[틀:국기|]][1]
기원 미군정기의 피난민[2]
목적 게릴라전을 통한 대한민국 전복
이념 공산주의
사회주의
반제국주의
좌파 민족주의
참전 6.25 전쟁

1. 개요2. 역사3. 몰락원인
3.1. 환경3.2. 민심 확보의 실패3.3. 보급3.4. 전염병3.5. 대한민국 국군의 토벌3.6. 경찰의 토벌3.7. 미군의 토벌 지원3.8. 남로당의 몰락3.9. 지휘부의 무능3.10. 간부와 비전투요원이 다수인 구조
4. 이모저모
4.1. 여성대원4.2. 이성관계4.3. 처벌4.4. 항미소년돌격대4.5. 현지주민 협조자 포섭 방식
5. 관련 매체
5.1. 빨치산 문학(수기, 실록)5.2. 빨치산 문학(소설)5.3. 토벌대 문학5.4. 빨치산이 비중있게 나오는 작품5.5. 빨치산 노래(사실)5.6. 빨치산 노래(추모)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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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에 실존했던 좌익 성향 무장 테러 조직. 통칭 빨치산. 그러나 정식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이다. 이 문서는 박헌영계 빨치산을 다루지만 별도로 김원봉이 지휘하는 인민공화당 빨치산이 있었다.

1946년부터 1955년까지 약 9년간[3] 태백산맥, 소백산맥, 지리산 일대에서 국가전복을 위해 게릴라전을 펼쳤다. 이 때문에 군경과 민간인이 학살과 약탈 피해를 입었다.

1946년 대구 10.1 사건으로 공산당 활동이 비합법화된 이후, 남로당 계열이 야산대(野山隊)라는 이름으로 초보적인 게릴라전을 벌였고, 여수·순천 10.19 사건과 그에 호응한 각 반란사건의 잔당들이 지리산으로 도피했을 때 일제강점기경성콤그룹에서 무장투쟁을 준비한 경험이 있는[4] 이현상이 이들을 규합하여 본격적으로 무장세력화한다. 이 이외에도 전국 각지의 지명수배된 사회주의자들이 산발적인 무장투쟁을 벌이고 있었으나 대부분은 도피성에 가까웠다.

각 세력은 행정구역 도 단위로 활동하였는데 경남도당, 경북도당, 전남도당, 전북도당 등 상당수의 세력이 태백산맥과 거기에에서 뻗어나온 각 산들에 터를 잡고 활동하였기 때문에 태백산맥, 그 중에서도 소백산맥지리산은 빨치산의 대명사격이 되었다.[5]

한편 북한은 남로당 출신의 리승엽을 주축으로 이들을 지원하고 규합하여 후방 교란세력을 만들기 위해 계속 100~1000 단위의 무장공비집단을 만들어 남파하나 대부분 주전선에서 걸려 궤멸되었고 이현상의 세력만이 성공적으로 남하하여 활동하였다. 이들은 리승엽의 명으로 조선인민군 유격대 남부군으로 개칭하였으며 이현상을 필두로 삼아 각지에서 활동하는 빨치산 세력을 규합하여 한때 낮에는 대한민국, 밤에는 인민공화국 소리를 들을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하였다. 그러나 물적·인적 보급이 완전히 차단되었고 군경의 지속적인 토벌로 점점 세가 위축되었다.

또한 북한에서 김일성과 남로당의 권력다툼 끝에, 남로당을 이끄는 박헌영과 리승엽이 숙청되자 남한의 빨치산을 지휘하는 남로당 세력들은 그야말로 멘붕. 이에 빠르게 지도부가 김일성 절대지지파로 교체되는데 이에 따라 박헌영의 오른팔인 이현상마저 모든 직위를 박탈당하고 초라하게 빨치산의 뒤를 쫒아다니다가 토벌대에 의해 사살된다.

빨치산 자체는 국내 군경들이 실시한 1차 대공세로 인해 그 위세를 잃었으며 2차 대공세 때 완전히 작살나버려 이후에는 더 이상 조직적인 부대가 남아 있지 않게 된다. 이후 망실공비란 이름으로 경찰서 형사들의 추적을 받게 된다.

대부분의 생포된 유격대원들은 거제도 포로수용소에서 일정심사를 거쳐 민간인 학살 등에만 연루되지 않았다면 대개 재판을 받고 얼마 안 가서 방면되었으나 고립된 빨치산들은 그 사실을 알 리 없었다. 물론 한국군 등 진압군측에선 무의미한 피해를 줄여 보기 위해 이런 사실들을 빨치산들에게 선전해서 투항을 권유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립되었던 유격대원들은 이를 사실로 받아들이는 경우가 거의 없었다. 당시 증언에 의하면 10대에 불과한 빨치산들이 포로로 잡히고도 곧 인민공화국이 너희 괴뢰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발악하는 경우도 많았고 국군에 의해 점거된 빨치산 근거지에서 빨치산들이 '허약한 국방군 따위'가 감히 자기네 근거지에 도달했으리라곤 상상도 못하고 인민군이 여기까지 왔다고 환영하는 황당한 일도 있었다고 한다.

생포된 유격대원을 이렇게 취급한 이유는 다음과 같다. 당시 대한민국 정부는 이들의 교전권을 인정하지 않고, 적의 비정규군이 아니라 '납치되거나 오도되어 가담한 선량한 양민' 또는 일반 범죄자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이는 몇가지 이유가 있다. 우선 유격대의 경우 정규군과는 달리 교전권을 인정하기에는 굉장히 미묘한 형태이다. 게다가 후방 치안을 확보하기 위해 추가적인 유격대원의 증가를 막아야 했는데, 만약 빨치산들을 교전권 당사자로 인정하면 오히려 빨치산이 더욱 증가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었다.

물론 진압군측에서 화가 나서, 또는 운반하기 힘든 중상자를 그 자리에서 바로 사살해버리는 것이야 막지는 못했겠지만, 일단 산 아래로만 내려오면 목숨은 보장받았다. 김영옥 대령의 회고록에서도 잡은 포로 중 크게 다친 한 사람을 계속 끌고 다닐 수 없어서 죽여버린 적이 있다고 하며, 그 자신도 조금 후회하기도 했다고 한다. 만약 이들을 한국 정부가 교전권이 있는 존재로 인정해버렸다면 오히려 북한과의 포로 교환시 북한으로 송환당했을 수도 있다. 물론 이들은 상당수가 그러기를 바랐지만. 다만 한국 출신으로 입산한 이들 뿐 아니라 낙오해서 산으로 들어간 정규 조선인민군 출신자들도 모조리 포로가 아닌 범죄자로 간주해 버린 데 대해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을 수 있다.

결국 대한민국 토벌대에 의해 지리산 본부를 제외한 나머지 유격대 지지구는 모두 사라지고 말았다. 그렇다고 지리산 본부도 안정된 곳은 아니었다. 고립 상태가 되어 상황이 최악이긴 마찬가지였다.

당시 토벌대와는 서로 잔인하게 죽고 죽이며 피비린내나는 전투를 벌였다. 당시 토벌대장인 차일혁 경무관의 수기를 보면 상부에서 빨치산의 목을 잘라 전과 보고를 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고, 빨치산이 경찰서를 공격하여 경찰서장 목을 잘라 효수하는 참상이 벌어지기도 했다.

2.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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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몰락원인

3.1. 환경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은 대체로 험준한 산과 깊은 계곡이 있는 것이 특징이라지만 늦가을부터 초봄까지는 나뭇잎이 떨어져 토벌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은신처를 마련하기가 쉽지 않았다. 게다가 지리산과 같이 높은 산은 계절이 가을만 되어도 어두워지면 냉기가 나올 정도로 추운 날씨가 된다. 겨울이면 말할 것도 없고 이러한 추운 환경에 보급이 제대로 이루지지 않으니 유격대원들이 활동을 제대로 할 수 있을리가 없었다. 특히 대한민국 국군은 10월부터 겨울 기간까지를 최적의 토벌기로 삼았다. 그 이유는 추운 날씨도 이들의 토벌에 한몫을 하지만 눈이 쌓이게 되면 결국엔 유격대원들의 발자국이 남아 추적하기가 더욱 쉬웠기 때문이다. 빨치산 유격대원은 이러한 이유로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고 곧 땔감을 구하지도 못해 얼어죽는 사태까지 발생한다. 이 때문에 토벌대의 1차·2차 대공세도 매해 겨울에 집중되었다.

3.2. 민심 확보의 실패

상술됐듯 파르티잔의 존속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무기나 군량이 아닌 파르티잔 활동을 벌이는 지역에 사는 주민의 지지와 지원이다. 그래야 지역민으로부터 정보를 얻고 은신처를 제공받으며 식량이나 인적 자원도 얻는다.[6]외부 군사적 지원이 없는 파르티잔에게 민중의 지지가 없다면 전투가 거듭되면서 결국 물적, 인적자원이 고갈되어 소멸하게 되는 것은 당연한데, 조선인민유격대는 지역주민의 민심 확보에서 처음부터 끝까지 실패했다. 이 실패는 주요 활동무대가 태백산맥인 이상 당연한 일이었는데, 이 지역 주민들에게 아무리 계급투쟁을 설파해봤자 먼나라 이야기일 뿐이었다. 그 일대 주민 대부분이 빈농에 화전민이 태반인데다가 그들에게 있어서 삶을 곤궁하게 만드는 적은 지주나 미 제국주의자가 아니라 태백산맥의 척박한 자연환경이었다.

따라서 그 일대 주민 대부분은 파르티잔의 이념이나 목적에 공감하기 힘든 처지였다. 빨치산들은 민가만 만나면 빨치산 활동의 정당성을 알리고 젊은 남자가 있으면 입대를 권유했지만 효과가 지극히 미미했으며 군경의 강력한 압박이 시작되자 지역 주민을 대하는 태도도 강압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힘내라며 식량을 제공해주는 주민들도 있었지만, 이후 수도 없이 나타나서 식량 달라고 하니 아무리 우호적인 주민이라도 미칠 노릇이었으니 당연히 이후로는 거절하려 했고 이는 식량 약탈로 이어진다. 여기에 젊은 장정을 억지로 납치하다시피 빨치산에 넣어버리기 시작했고[7] 군경의 추적을 피해 도주할 때 지역주민을 만나면 목격자를 남기지 않으려 살인도 서슴치 않아 말기에는 완전히 민심이 빨치산에게 등을 돌리고 말았다. 빨치산 활동 중기에는 포상금이 걸려 있어도 주민들이 빨치산을 소 닭보듯 하고 신고도 안 하며 무시했던 걸 생각하면 극도로 민심을 잃었다.[8]

전북도당의 경우 특히 이런 경향이 심해서, 포로로 잡은 군경을 살해하는 것은 기본이고, 군경의 처자식과 형제, 그리고 군경을 도와준 주민까지 죽였을 정도였다. 특히 군경을 도와준 주민을 잡으면 인민재판이라는 명목으로 여러 사람 앞에서 칼로 난자해 참살하는 식이었다. 되도록 총성을 내지 않으려고 칼을 사용하는데다 임신한 부녀자나 노인도 가리지 않고 죽였기 때문에 더욱 잔혹했다. 주민들의 민심과 지지를 통해서 세력을 확장하는 전쟁의 반란군이나 게릴라 집단들이 이런 짓을 저질러놓고도 민심을 얻으려고 하면 당연히 실패할 수 밖에 없다.[9]

오영수의 단편소설 '머루'는 빨치산의 만행으로 일가족이 몰살당하고 소와 가산을 약탈당해 풍비박산난 참상을 그리고 있다.

이현상을 위시한 수뇌부도 바보가 아니라서 토벌작전이 시작되기 전부터 지역 특성상 민심확보가 어렵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활동방침을 북에서 다시 진공해올 때까지만 버티다가 아군이 오면 호응하자는 취지로 전환했는데 당연히 그 시점에서 북한은 이미 재진공은 커녕 빨치산 자체를 버리고 있었다.

3.3. 보급

유격대를 창설한 1949년부터 전쟁 초/중반까지는 인민군의 보급과 자신을 지지한 주민들에게 받은 식량으로 넉넉히 버틸 수 있었으나 인천상륙작전으로 한반도 중부지방이 대한민국 국군에게 탈환되면서 보급로가 끊기게 되었다. 그래도 주민들의 도움으로 버틸 수는 있었으나 대한민국 국군의 전남지방 탈환 및 지리산 진입과 더불어 주민들의 보급 거절로 구하기가 점점 어려워지자 그들의 식량과 보급품을 약탈하기 시작했다. 이 약탈하는 과정에서 주민들의 증오를 샀고 그 주민들이 경찰 및 국군에 적극적으로 신고하여 주민들의 지지를 확보한 군경의 토벌로 큰 피해를 입게 된다.

무기는 항상 부족했다. 구빨치라 불리던 활동 초기에는 그런대로 가진 게 많았지만, 북한군이 낙동강까지 밀고 내려와 남한 거의 전역이 북한 수중에 있던 3개월 동안 구빨치 시절 가지고 있던 무기들을 북한의 경찰서인 내무서에 싹 반납했다. 그런데 후퇴가 시작되자 내무서부터 총기를 싸들고 후퇴해버렸고 이후에야 도당에 상황이 전파되어 대혼란에 빠진다. 그 이후 빨치산이 가진 무기는 인민군 낙오병을 설득하여 빼돌린 무기를 제외하면 내무서에 반납하지 않은 권총 밖에 없었다. 결국 맨손으로 시작하여 모든 것을 경찰과의 전투에서 노획품으로 해결했는데, 이러면 수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으니 무기가 있는 사람보다 무기가 없는 비전투원이 항상 더 많았을 정도다. 탄약은 하나하나 아껴야 했지만 군경이 주둔하고 떠난 자리를 뒤지면 상당수의 탄약을 주워서 충원할 수 있었다. 또는 후방부 병기과에서 한번 사용한 탄약을 재생해서 사용하였는 말도 있는데, 소설 <남부군>의 이태는 탄약 구조상 불가능하다고 부정하였다. 그러나 이영식 저 수기 [빨치산]에서는 탄피, 잼피나무 껍질 말려 태운 것과 불발탄에서 빼온 뇌관, 화약을 사용해 한발한발 재생탄을 만드는 과정이 적혀 있다. 추락한 세이버 제트기의 기관포 탄약도 몇발이나마 사용했다고. 하지만 이러나 저러나 물량이 모자란 것은 매한가지고 가끔씩 만들다 폭발할 때도 있었으며 야매 재생탄이다보니 위력과 명중률은 전혀 기대할 수 없었다고 적혀 있다.

남부군의 경우 북강원도 세포군에서 출발할 때 총원 700명중 절반이 몽둥이와 수류탄 몇 개만 지녀 실질적으로 비무장인 상태였는데 남진하면서 전원 미군복장에 M1 소총으로 무장하였다. 그러고도 남아돌아 중간중간 비장했고, 인근 도당의 비무장 부대들에게 나눠줄 정도였다는 것. 이에 인근 도당에서는 전리품을 챙길 목적의 부대를 만들어 남부군에 일시적으로 연합작전을 벌렸다. 재미있는 것은 맨손으로 시작한 전투경찰대의 경우 초기에는 상당수의 무장을 빨치산과의 전투 때 노획품으로 해결하였다. 그 바람에 소련제 무기까지 보유하였다.

3.4. 전염병

1951년 봄부터 조선인민유격대는 장티푸스의 일종인 '재귀열병'이라는 돌림병으로 인해 전투력이 급격히 약화되었다. '재귀열병과의 투쟁은 조국을 위한 투쟁'이라는 구호가 나왔을만큼 유격대에게는 큰 시련이었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도 나오는 등 빨치산 문학마다 반드시 다루는 엄청난 타격이었다. 그러나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는 당시에 전염병의 명칭을 몰랐다가 책의 출판 이후에야 전남 빨치산 의사에게서 병명을 들었다고 나온다.

51년 2월경 전남도당에서 유행하기 시작하여 산을 타고 점점 북상해 4월에는 전북, 5월에는 충북 도당과 충북 속리산의 남부군까지 전염되어 갔다. 이태는 이 전염병으로 아마 1천명 정도의 희생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였다. 전북 도당의 경우 도당과 5개 병단이 있는 북부 지역에만 4백명중 3백명이 걸렸다고 하니 상당한 타격이었을 듯. 남부군은 몇백명 밖에 안되는 총 병력중 60명 또는 100여명이 죽었다고 한다. 전남 도당이 가장 타격이 컸는데, 여기서만 1천명의 사망자가 나왔다는 글도 있다.

<빨치산의 딸>에 따르면 신기하게 구빨치는 이 병에 안결렸다고 하는데, 최소한 빨치산 문학의 실제 주인공인 구빨치 이옥자, 정운창, 황의지는 안걸렸지만, 신빨치 이태, 최태환은 이 병에 걸렸다. 그러나 낙동강 서쪽 지역의 안재성의 <신불산>과 동쪽 지역의 <실록 남도부>, <북위38도선>에는 이 병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경상도 지역에는 발병 자체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빨치산의 딸>에서는 인과관계가 전혀 다르게 나온다. 51년 1월 하순 남부군이 월악산을 지날 때 시작되었고 전남도당에는 그 이후 별도로 미군이 비행기를 동원해 세균을 뿌렸다고 한다. 전남 지역에서부터 전염병이 점점 북쪽으로 번진 것이 아니라, 미군의 세균전이기 때문에 동시 다발적으로 발생했다는 주장. 다만 특이하게 구빨치 대원들은 거의 걸리지 않았다고 한다.

일단 여러 목격자에 의해 증언된 분명한 사실은 쌍발 군용기가 저공비행하면서 투항을 권고하는 삐라와 정체불명의 백색 분무액을 살포하고 지나갔는데 2, 3일 뒤에 빨치산 대원들에게 재귀열병 증세가 나타났다는 것. 그 상황만큼은 사실이다. 미군의 세균전 설만 갖고도 전향자의 책인지 비전향자 또는 종북주의자의 책인지 확실히 구분할 수 있다는 주장도 있지만, 일단은 의심할 만한 정황과 복수의 목격자가 있기 때문에 완전한 억지 주장은 아니다. 그래서 2001년에 국제민간조사단이 진상조사에 착수하기도 했는데 앞서 말한 군용기의 목격담 이외의 별다른 증거는 찾지 못했다.

그런데 알아둬야 할 것은 아무리 세균전이 오래된 전술이라고는 해도 그 당시 미군이 아군인 국군(즉 빨치산 토벌대)에 피해를 주지 않고 빨치산만 감염시키도록 깔끔하게 병원체를 살포하고 통제할만큼 뛰어난 기술력을 가졌다고 보기는 힘들다는 점이다. 21세기 시점에서도 아군에게 예방접종 등 별다른 방역조치를 전혀 하지 않고 적군에게만 피해를 주는 세균전을 벌인다는 것은 불가능한데 하물며 1951년 시점에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국군 토벌대도 작전 중 산속에서 장기간 숙영하는 일이 잦았는데, 만약 진짜 미군이 병원체를 살포했다면 이들도 같은 증세가 나타났거나, 미군이 국군 토벌대에게 별도의 방역조치나 의료지원을 했어야 했겠지만, 둘 중 어느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또한 항공기에 장착하는 열상 감지기조차 없었던 시절인데 빨치산 부대의 위치를 제대로 탐지한 것도 아니고, 단순히 숨어 있을 거 같은 지역이라서 병원체를 살포했을 가능성도 극히 적다. 다시 강조하지만 생물학 무기라는 게 21세기 현대전에서도 깔끔하게 통제할 수 있는 무기가 아닌데 당연히 1950년대 기술로는 어림 반푼어치도 없다.

따라서 민간인과 빨치산이 목격한 군용기의 수상한 액체 살포와 빨치산 대원의 집단발병은 단순히 우연이거나, 증언한 빨치산 생존자가 집단발병시기를 착각했을 가능성이 높다. 군용기에서 분무한 액체의 정체에 대한 의문은 남지만, 단순히 기체결함 혹은 어떤 상황에 의해 고의로 연료나 기타 액체를 배출시켰거나 그냥 착각일 가능성도 충분히 존재한다.
<태백산맥>, <빨치산의 딸>, <전남 유격투쟁사>에서는 세균전설을 암시 혹은 주장하고, <남부군>,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는 단순 돌림병설로 추정한다. 최태환의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는 환경이 너무 더럽다 보니 걸린 병으로 추정하고 있다.

3.5. 대한민국 국군의 토벌

국군은 유격대 활동을 토벌하기 위해 노력해왔지만 6.25 전쟁으로 제대로 시행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1953년 휴전 협정 체결과 함께 정전체제가 굳어지면서 공산주의와 공생할 수 없었던 대한민국 정부는 후방을 교란하는 불안요소인 조선인민유격대 섬멸을 지상과제로 삼아 적극적인 토벌 작전을 펼쳤다. 6.25 전쟁 초기에는 미 해병대를 투입하여 헬기로 입체적인 기동 작전도 벌였고, 6.25 전쟁 후기에는 육군 장성들 중에서 최고로 여겨졌던 백선엽 장군을 보내 백(白) 야전사령부를 만들어 토벌하였다. 군이 본격적으로 투입된 상황에서 고립된 좁은 지역에 갇힌데다 지역 주민의 지지까지 잃은 유격대의 궤멸은 필연적이었다.

3.6. 경찰의 토벌

국군의 경우 육군 11사단, 8사단등 다양한 부대가 순환식으로 공비 토벌을 했지만, 경찰은 그 특성상 한 지역에 고정적으로 주둔하고, 보통 출신 지역에서 채용되어 그 지역 인근에 거주와 근무를 하는 경우가 많아 지세가 밝고 정보가 많았다. 하지만 경찰가족이라는 이유로 친지들이 학살당하는 일이 많아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부역자 가족 학살 등 양민학살이 많이 발생하였다. 또한 육군에 비해 무장이 많이 부족하였다.

● 행정경찰
내무부 치안국 산하 도경비국장의 지휘를 받아 각종 경찰부대를 지휘하였다. 빨치산이 자주 출몰하는 지역에서는 경찰들도 치안유지 및 행정업무를 보며 스스로 싸워야 했다. 군·면마다 지서가 설치되어 있고 이를 통해 각종 경찰 부대를 지휘하였다. 도청소재지 등 안전한 지역 경찰은 그야말로 행정경찰이었지만, 빨치산 치하에 있던 지역 경찰서는 전쟁터 그 자체였다.

사찰과 또는 사찰계에서 지역 빨치산들의 인적사항을 가장 잘 파악하고 있기 때문에 군대나 전투경찰대의 토벌 때 해당 지역 경찰이 항상 함께 한다.

● 전투경찰대
행정경찰과는 달리 순전히 빨치산 토벌만을 위해 조직되어서 행정 기능 등을 하지 않는다. 도경비국(현 지방경찰청)에 소속되어 한 지역이 평정되면 다른 지역으로 가서 싸우곤 했다.

말이 경찰이지 그냥 민간인들을 자체적으로 훈련시킨 부대이다. 교과서에도 실린 적 있는 ‘지리산 호랑이’ 제18대대장 차일혁 경무관의 예를 들자면, 그 자신은 팔로군 항일유격대 출신으로 인공시절 수십명 규모의 지역 반공유격대를 이끈 적이 있다. 이 경험을 인정했다며 경감으로 특채되어 제18전투경찰대대장이 된다. 그리고 알아서 경력을 모으고 무장시키고 훈련해서 어떻게든 빨치산만 토벌하라고 한다(...). 이에 약간의 경찰간부학교를 갓 졸업한 경위를 행정참모로 삼고 유격대 출신 간부나 군에서 추천받은 장교를 경위로 임명하여 중대장, 유격대 경험자나 일본군 출신을 경사로 대충 임명한다. 왜 대충이냐면 내무부 임명장이나 뭐 비스무레한 것도 없다. 심지어 경사는 인기투표 비슷하게 임명했다고도 나온다. 병력은 북한이 후퇴하고 자생적으로 조직된 치안유지대를 중심으로, 지원한 전시연합대학 학생이나, 갈 곳 없는 피난민, 가족이 인공시절 죽은 유가족들로 병력을 채웠다. 위험한 고비인 창설기를 넘기자, 경력 보충 때는 전방 군대 가기 싫어 병역의무를 전경으로 해결하려는 사람들이 많아 지원자들로 쉽게 충원하였다.

무기는 유격대 시절 보유하고 있던 무기를 바탕으로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장비들, 식량은 빨치산과의 전투에서 노획한 것과 마을 주민들에게 강제로 공출받는 식으로 지원받았다. 즉 경력, 무기, 식량 등이 하나도 없이 경찰에서 대대장 한명만 임명해주고 이후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했다.

특히 장비의 경우 행정경찰보다도 떨어졌으며, M1은 거의 없고 대부분 일제 강점기 38식, 99식 소총이었다. 기관총과 박격포 등 중화기는 빨치산에게 노획(...)하여 사용했기 때문에 82mm 박격포 등 아예 소련제였다. 전반적으로 무장이 워낙 후져 빨치산은 총성으로 국군(M1)인지 경찰(99식)인지 구분하였다.

51년 후반 남한내 행정력이 어느정도 안정되고 나서야 정식 계급장도 나오고, 간부들의 경우 일선 경찰서와 인사교류도 있었다. 결국에는 행정경찰이 되었으니 경찰 내 각종 부대중 가장 대우가 좋았다. 행정경찰에서 할당제로 차출되었고, 징계 삼아 전투경찰로 전보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한다는 자료가 있는데 이 시기를 말하는게 아닌가 싶다.

행정경찰이라고 후방에서 편하게 노는 것은 절대 아니어서 수시로 토벌 작전에 나갔으며 단지 구역이 시군 관할 내였을 정도이며, 전투경찰은 한곳을 평정하면 빨치산의 밀도가 가장 높은 곳을 찾아 이동하는 부대였다. 이들 행정경찰들은 작전 나갔다가 아군이 한명이라도 희생당했는데 아무런 전과를 못 올리면, 경찰서 유치장 근무 아니면 전투경찰로 발령난다고 한다. 전투경찰=죽음이었기 때문에 경찰들은 전과를 올리기 위해 열심히 싸울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래도 목숨이 왔다갔다 하는 전선으로 갈까봐 군대가기 싫어 전경에 갔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래도 지옥 저래도 지옥이지만, 조금이라도 생존확률이 높은 곳을 찾는 인간의 본성을 보는 것 같아 씁쓸하다. 해군 수병이나 공군 지상병들이 생존에는 훨씬 유리했지만, 당시엔 사람들이 무식해서(...) 해공군이란 게 있는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많았던지라, 가까이 있는 경찰이 더 선호된 탓도 있고,[10] 현재와 달리 전의경과 같은 병 전환복무 제도가 없어 전원 순경 이상 직원 신분이었으므로 제복 공무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얻을 수 있는 길이기도 했다는 점 역시 무시할 수 없었다.

빨치산 1차 대토벌작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1952년 해산하였고, 1953년 서남지구 전투경찰대로 재창설되어 2차 대토벌작전을 수행하였다. 이후 같은해 7월 1일자로 해체된다. 주요간부진은 행정경찰이 되었다. 다만 행정업무나 정치질에 서툴고 전투에만 능숙한 무골 계열 간부들은 이로 인해 도리어 입지가 좁아지고 결국에는 축출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경찰청 의무경찰의 조상격이나 직접 이어지지 않는다.[11]

● 의용경찰대(의경)
지역별로 자위를 위해 만들어진 조직. 경찰이 아니라 그냥 [의병]으로 보면 된다. 보통 지서 산하에 지역 주민들로 만들어진 방어 조직. 빨치산은 경찰을 포로로 잡으면 이승만의 주구인 '검은개'라며 죽였지만(군인은 '얼룩개' 혹은 '노란개)), 의경은 억지로 끌려왔다고 해서 풀어주었다고 한다. 의무경찰하고는 사돈의 팔촌 관계로 약자만 같은 정도.

의경과 향방은 식사만 제공되고 무보수였다. 기본적으로 무명베로 학생복 같이 지은 옷에 검거나 푸른 물을 들인 옷을 입었으며 경찰복이 지급되었다는 기록도 보인다. 무장은 99식 소총은 양반이고, 인민군/빨치산에서 노획한 무기도 들고 다녔다. 무기가 부족해서 인근 야산의 나무를 베어오거나, 1인당 1일 3홉 받는 쌀을 모아서 인근 군부대에서 총과 실탄을 암거래를 통해 사오는 등, 듣기만 해도 눈물나는 조직이었다.

가입하면 가장 큰 혜택이 징병을 연기 내지 보류해준다는 것이다. 또한 군경이 양민 학살하기 직전 항상 하는 대사인 "여기 군인이나 경찰, 공무원 가족이 있으면 한쪽으로 빠져 있어라!"에 해당되기 때문에, 살기 위해 의경 등에 가입하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필요한 경비는 '시국대책위원회'라는 이름으로 구성된 지방 유지와 면장/이장이 제공하였다. 면장/이장의 경우 필요한 쌀 등의 양식을 마을에서 각출하는 것이 일이었다. 의경과 향방 역시 같은 마을 사람이니 자기 쌀로 자기가 먹는 격.

향방이나 의경에 들어가기 나이가 어중간한 사람들이 들어가는 자경단으로 '민보단'이 있었다. 마을별로 조를 짜서 자기 마을을 지키거나 경찰 지서의 방책 경계를 맡았다. 낮에는 민보단이 경계를 책임지고 밤에는 군경과 임무를 교대하는 식이었다.

51년 5월 1일자로 청방, 향방과 함께 해산되었다고 하는데 이후에도 의경과 향방이 활동했다는 기술이 종종 보인다.

● 향토방위대(향방)
그냥 대한민국판 리얼 의병. 군 단위 지역에서는 의경과 향방이 양대 전투력이었다. 도 경무국 소속의 전경이나 군부대는 남부군이나 도당 직속부대 같은 메이저급 빨치산을 상대하고, 의경과 향방은 군당이나 면당 빨치산을 상대하는 식.

당시는 산에 빨치산이 득실거릴 때라 지방에서는 경찰과 육군이 함께 주둔하면서 치안을 담당하고 있었다. 그런데 매우 병력이 부족했기 때문에 경찰은 의경을 조직하고 군인은 향방을 조직하였다. 즉 향방은 군인계열 조직이다.

빨치산 문학에서는 전경과 함께 가장 많이 언급된다.

청년방위대(청방)
해방이후 난립한 청년 우익단체를 통합한게 대한청년단이며 여기에 이승만에게 절대 충성함을 모토로 만든 준군사단체가 청년방위대이다. 북한군과 빨치산에게 가족을 잃은 청년들이 많아 분위기가 살벌하였다. 1950년 12월 국민방위군 설치로 인해 공식적으로 해체된다.

하지만 암암리에 활동 했는지 이후에도 빨치산 문학에 계속 등장하다. 하지만 징병 적령기인 젊은 청년들인지라 인적 자원은 군에 입대하고, 조직 자체는 점점 경찰서 산하 부대로 들어가다가 한국군 최대의 흑역사인 국민방위군 사건으로 51년 5월 1일 국민방위군이 해체되며 같은날 함께 해산된다.

서북청년단(서청) 역시 활발히 활동하였는데, 이쪽은 메이저 단체이며 북한에 대한 강한 적개심으로 군이나 경찰로 들어가는 일이 많고, 정치적 이유로 이승만 정부에 등용되어 막상 서북 출신은 급속히 줄어들었다. 각 군 지부에 1명 정도만 서북 출신이고 나머지는 죄다 동네 청년들이었을 정도. 면 단위 파견소는 100% 동네 청년. 이쯤되면 간판만 서청이었다. 결국 서북출신 인력 수급 문제로 빨치산 토벌시기 쯤에는 서청보다는 청방이 대세가 된다.

청방은 각 군은 물론 면 단위로 지부가 있었으며 초법적인 기관이라 이쪽에서 공산당 관련자를 찾는다며 소환장을 보내면 안나올 도리가 없었다. 경찰의 소환장 받고 가면 고문은 받아도 언젠가는 돌아오는데, 청방에 끌려가면 불문곡직하고 그대로 맞아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수시로 빨치산 가족들을 두들겨 팬 후 산으로 보내 각자 가족을 데려오라고 하는 등 온갖 악행은 청방이 도맡아서 하다시피했다. 제주 4.3 사건에서 제주도민이 군경이 학살했다고 증언했지만 알고보면 서청이 한 것처럼, 빨치산 주변 지역 마을민에게 토벌대가 한 악행은 알고보면 청방이 한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군대가기도 싫어하고, 토벌에 참여하는 것도 싫어하고, 조직을 해체하라고 하니 난리피는 동네 깡패 조직으로 그려져 있는데 실제로도 그러했다. 차일혁 경무관의 수기에도 가장 다루기 힘든 조직으로 묘사되어 있다.

● 사찰유격대(보아라 부대)
빨치산 자수자나 포로를 편입하여 만든 부대. 시군 경찰서 소속으로 ‘희망부대’, ‘승리부대’, ‘강철부대’ 등 이름이 있었는데 ‘보아라부대’가 가장 유명하여 다른 사찰유격대도 같은 이름으로 통칭되었다. 일선 경찰서 별로 사찰유격대가 조직되어 있었다. 전투경찰대는 부대안에 빨치산 투항자를 섞기도 하고 따로 조직하기도 했으며, 군부대에서는 인민군 정규군 포로로 비슷한 부대를 만들어 활용하였다.

주로 51년말~52년초의 군경의 제1차대토벌작전이 끝나고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이전에도 지호대라는 이름으로 활동하기는 했지만 미미한 정도라 대부분 기록에는 언급이 없다.

막상 본격적으로 활동하니 그 효과가 너무 충격적이라 빨치산 문학에서는 반드시 치를 떨며 다룬다.[12] 그 바람에 빨치산은 의경을 포로로 잡으면 그냥 풀어주고, 군인의 경우 일단 입산하라고 설득을 했던데 비해, 원한에 사무친 경찰과 사찰유격대는 포로로 잡으면 바로 처형했다.

1차 대토벌 작전이 끝나고 빨치산 투항자와 포로가 대폭 늘어난 덕분에, 다수의 전향자로 각 경찰서마다 사찰유격대를 구성하게 되었다. 소설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의 주인공 황의지도 1차 대토벌 작전이 끝나는 시기에 포로로 잡혔다가 사찰 유격대 부대장이 되는데, 그 뿐만이 아니라 상당수가 공산이념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었다. 황의지만 해도 친일 경찰의 고문에 시달리다가 할 수 없이 입산했던 것인데, 새로운 경찰서장이 모든 것은 자기가 책임지겠다며 따뜻하게 품어주자 쉽게 전향한다.

이들은 그동안 산생활 경험을 바탕으로 야간에 빨치산 거점 깊숙이 침투하였다. 빨치산 출신자들이 배신자라며 학을 떼는 존재.[13]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한 것이 바로 이들 사찰유격대. 당시 총경이던 차일혁 경무관의 전투경찰제2연대 사찰유격대인지, 육군 제5보병사단 56연대 수색대(인민군 육군 포로 출신 전향자로 구성된 부대)인지 당시 논란이 엄청났다. 그러나 어느쪽이든 사찰유격대 계열이 당시 대한민국을 떠들썩하게 한 대전과를 거두었다.

이현상 사살로 인해 내무부 장관, 김장홍 치안국장, 김종원 사령관은 태극무공훈장을 받고, 김억순 작전 과장은 금성충무무공훈장, 차일혁 총경은 금성화랑무공훈장을 받았다. 그에 반해 정작 이현상의 목을 딴 사찰유격대장 김용식은 은성화랑무공훈장 밖에 못 받았다. 해당 사찰유격대는 김용식 경사를 제외한 35명 전원 빨치산 출신으로 되어 있었는데 엄청난 대공을 세우고도 그에 합당한 대우를 받지 못했다.

토벌 작전이 끝나자 곧바로 해체되었고 민간인으로 돌아간다. 이후 대우가 영 좋지 않은데, 평상시에도 사찰계의 감시를 받았고 무슨 일만 있으면 경찰서로 불려가 취조받았다. 5.16 군사정변 후 용공분자로 몰려 탄압받았고, 12.12 군사반란 이후 삼청교육대에 끌려가서 갖은 고초를 겪었다. 이들은 북한과 비전향장기수 입장에서는 극악무도한 배신자들이기 때문에, 어떤 경우에도 그들 틈에 섞여서 다시 좌익 활동을 할 수 없는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정권의 논리에 따라 지속적으로 탄압받는다.

간단히 정리하자면 경찰은 내무부 치안국-도경비국-시군경찰서-읍면지서 순으로 조직되어 있다. 도경 산하의 무장 조직이 전투 경찰대이고, 경찰서 이하의 조직이 향방과 의경이었다. 사찰유격대는 전경, 일선경찰서, 군이 다함께 애용하였다. 청방은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그외 '철도경찰대'도 존재하여 가끔 언급된다.

3.7. 미군의 토벌 지원

미군은 조선인민유격대 섬멸을 위해 남한에 최신 무기와 탄약을 지원했다. 이는 미국의 공산권 봉쇄 정책과 맞물리는 것으로, 미 육군 제8군사령관 제임스 밴 플리트 장군이 조선인민유격대 토벌에 미 육군 병력을 투입하고 직접 작전을 지휘했다는 점에서도 그 적극성을 유추할 수 있다.

한때 미 해병대가 후방에서 토벌작전에 동원되기도 했다. 공격적인 해병대가 왜 이런 일에 투입되는 거야? 하고 투덜대기는 했지만 실력은 확실했다.

3.8. 남로당의 몰락

사실 남로당과 북로당은 6.25 전쟁 이전 이미 합작을 완료해 조선로동당으로 합쳤다. 하지만 조선로동당 내부에서 남로당 계열은 철저히 소외되고 있었다. 그 이유는 북한의 모든 군권은 북로당 계열이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남로당은 군사력 부족을 뼈저리게 여기고 구빨치를 키우는데 역량을 기울였다.

그러나 6.25 전쟁이던 1951년 9월 이후 유격대와 조선로동당 간의 원활한 통신은 두절되었다. 중앙당에서 내려오는 지령은 통신수단 미비로 늦어지기 일쑤였고, 인편을 통해 내려오던 중 이미 효력이 다하고 나서 전달되거나 회답을 소지하고 북상하던 연락원이 체포되는 일도 있었다. 이 때문에 업무 연락에 곤란을 겪던 중 1953년 3월부터 박헌영·리승엽을 중심으로 한 남로당 계열이 대대적인 숙청 작업을 통해 제거되면서 결정적인 타격을 입게 된다.

당의 지시를 충실히 따르는 빨치산 역시 당의 지시를 실현하기 위해서 간부들은 충성선언문을 도당위원장에게 제출하고 사상교육을 강화한다. 하지만 이것은 빨치산의 일방적인 구애일 뿐이였다. 북한에서는 남한에서 활동하고 있는 빨치산 역시 남로당 계열로 보고 있었다. 이 때문에 휴전 후 이들이 북한으로 들아와 남로당의 세력이 강화되는 것을 경계하였다.

여기에 남로당 박헌영·리승엽의 직계인 이현상을 제거하기로 한 것이다. 이현상이 위원장이 있는 제5지구당은 해체되어 다시 도당시절로 돌아갔고, 이현상의 부대인 남부군은 공중 분해 되었으며, 이현상은 모든 직위가 박탈되고 평당원으로 격하된 후 보름후 군경에게 사살되었다.

이 당시 전북도당에서 남부군으로 전속되었다가 체포된 한 빨치산이 쓴 수기가 1980년대 말 크게 히트하였으며 영화화되기도 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남부군'이다.

여담으로 말이 49년 남로당과 북로당의 합당이지 실제로는 알게 모르게 차별을 받았다. 또한 남로당이 비합법화하면서 지하세력화되었고 이후 당증이 없었다. 6.25 이후 남한이 인공치하가 되었지만 이미 남로당 조직이 붕괴되어 있어 지하당원들은 정식 당원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극히 까다로운 재심사만 있을 뿐 새 입당은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인공시절 도당 위원장은 박영발, 방준표처럼 북한으로 월북하여 신분이 확실한 남로당계였고, 부위원장들은 죄다 북한에서 내려온 북로당계였다.

3.9. 지휘부의 무능

빨치산이라고 하여, 유격 투쟁에 특화된 특수부대로 상하가 도배된 것이 아니며, 무능하거나 경험이 부족한 경우도 있다.

빨치산은 남파공작원처럼 게릴라전을 훈련받은 특수부대가 아니라, 6.25 당시 북한이 남한 지역을 통치하기 위해 조직했던 행정 조직이 명령에 의해 그대로 입산한 것이다. 즉, 대부분 전투 경험이 전무하다. 여기에 정말 한줌 밖에 안되는 야산대 시절의 구빨치들과 인민군 낙오병들이 간부급을 맡아서 유격전을 지휘하게 된다. 문제는 이들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각 도당의 사령부인데, 관련 항목에 나와 있듯이 이들은 그냥 남한을 통치하기 위해 북한의 로동당에서 보낸 낙하산들이지 무슨 게릴라전에 특화된 지휘관들이 아니다. 전남도당 위원장 박영발이나, 전북도당 위원장 방준표의 경우 둘다 경상도 쪽에서 지하활동 하다가 월북한 후 모스크바 유학까지 다녀온 공산 엘리트이지 군사학에 대해서는 문외한이다. 만약 대한민국 정부에서 북한 후방을 휘저을 백골병단장을 유격전의 전문가인 채명신 장군 대신, 북한의 각 도지사로 임명했던 서청 간부에게 맡겼다면 어떤 파멸적인 결과가 나왔을까? 이는 빨치산만의 문제가 아니라 공산진영 특유의 군사/행정 등을 당이 지도한다는 이념을 충실히 반영했기 때문인데(...) 뭐 의도는 좋았다.

기존에 목숨 걸고 싸워오던 구빨치들을 제끼고 이 낙하산들이 지휘를 맡았는데, 이들의 전투 방식은 소수의 게릴라가 유격전을 펼치는 것이 아니라, 정규군이 싸우듯이 거점 확보에 주력하였다.[14] 예를 들어 경찰지서나, 주요 목진지에 설치된 토치카를 정면 공격하여 격파하는 방식의 전투를 자주 하였다. 초기에는 빨치산이 나타났다고 하면 경찰들이 총기를 다 던져 주고 도망갔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제대로 방어전투를 하기 시작하자 빨치산은 엄청난 피해를 입는다. 그러면서 자꾸 해방구를 만드는데 집착하여 일정 면적을 확보하고 그 주위에 방어선을 펼치는 정규전을 벌여 나갔다. 어디에 있는지 뻔히 보이는 빨치산은 독안에 든 쥐에 불과하다. 그 때문에 군경의 공격으로 빨치산은 엄청난 피해를 입게 된다.

남부군 지휘관 이현상 역시 군사에는 문외한이었으나, 남부권 인원들은 여수·순천 10.19 사건이 진압된 후 입산한 국방경비대 14연대의 잔당이 대부분으로서, 수년을 계속하여 싸우다 보니 경험치가 쌓여 한국전쟁 이후 유격전에서는 상당한 능력을 발휘하였고, 특히 도당 빨치산들과 달리 자신들의 관할 구역이 없다 보니 자유로운 전투가 가능하였다. 그러나 남부군 역시 도당들에 비해 뛰어났을 뿐이지 전문 유격부대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면모를 보였다. <남부군>에서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전쟁에서 이기는 비결은 ‘이길 만한 전쟁만 하는 것’이라고 하였는데, 남부군은 ‘이기지 못할 전투만 골라서 한 셈이었다.”라며 비판하였다. 그러면서 지금처럼 기관총을 거치한 경찰의 토치카를 백주 대낮에 정면 공격하는 대신 모든 빨찌산이 열명, 스무명씩 수백개의 소조로 나뉘어 그 독특한 게릴라전을 펼쳤으면 어땠을까? 하는 구상을 해본다.[15]

<남부군> 이태의 또다른 지적 역시 참고할만하여 여기에 옮긴다. “이상한 일이지만 당시 빨치산들은 전통적으로 패잔 일본군의 전술 사상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었다. 적의 전력을 까닭없이 낮춰 보며 자기편의 정신력 우위, 야습과 돌격전에 대한 근거 없는 우세를 믿는 일본 군대의 미신적 전통이 그대로 살아 있었음이 분명했다... 정신력의 만능을 믿고 야습이나 돌격전이 자신들만의 전매특허처럼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런 허세나 미신적 전술사상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빨치산들은 마침내 깨닫게 된 것이다.” 전북 54사단장 황의지도 이러한 전투방식에 대해 비판적이었다. 특히 회문산 투구바위 고지전은 국군이 비행기를 동원해 폭격을 하는데도 무모하게 고지를 지키려고 해 엄청난 손실을 입는다. 북한 로동당 정치위원회 역시 빨치산의 과오를 깨닫고 52년 중반 111호 결정을 통해 “각 유격대가 대부대로 집결하여 참호를 파고 수일간에 걸친 진지전을 전개하는 경향이 있다.”라고 비판한다.

그러나 <이현상 평전>에서는 이러한 정규전을 옹호한다. "전쟁이 터진 후에는 거의 모든 산간 마을이 소각되어 큰 마을로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데 마을마다 수백 명씩 군경이 주둔하고 있어 소규모 부대로는 보급투쟁조차 불가능했다. 다수 병력이 경찰서를 포위해 나오지 못하도록 눌러놓고 있는 동안 일부 대원들이... 곧바로 이웃 마을의 대규모 군경이 지원을 나오기 때문에 이를 막기 위해서라도 유격대는 숫자가 많아야 했다." 그렇기 때문에 대규모 작전이 대원들을 보호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이며, "유격전이라 해서 열 명 이하 부대가 전기나 통신을 마비시키는 일만 해야 한다는 생각이야말로 현실을 모르는 교조적인 지적일 수 있었다."라고 <남부군>의 이태를 역공한다. 하지만 간부로서 전투에 참여해 본 이태나 전북도당의 고위 군사간부였던 황의지보다 저자가 직업인 안재성의 주장을 더 신뢰할 수 있을까? 군경의 제 2차 대토벌당시 남부군이 뒤늦게 내렸던 결정은 소부대로 편제한 다음 지리산을 탈출해 야산에서 숨죽이고 있는 것이었다. 이태의 증언에 따르면, 자신이 소속된 문춘편대는 이 야산으로 피신한 기간 동안에는 병력손실이 전무했다. 수백명이 몰려다니면 포착되기도 쉽고 대병력의 추적을 받기 마련이다.

자신들의 관할 구역에 대한 집착이 심했는데, 각 도당/군당은 가능하면 자신의 관할 구역 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심지어 면당도 해당 면에서 전멸할 때까지 임지를 지켰다고 한다. 군경에 쫒겨 정말 위험할 때도 인접한 도로 넘어가지 않고 어떻게든 자신의 구역 안에서만 좌충우돌하였다.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를 보면 중반부에는 빨치산들이 도 경계선에 걸쳐 있어 경찰이 쫒아 오면 살짝 넘어간다고 나온다. 전북 치안국 소속인 차일혁의 제18 전투경찰대대가 마음먹고 전남까지 쫒아가서 전과를 올렸다가, 전남쪽의 엄중한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정말 일시적으로 넘어가는 것은 드물게 있었던 것 같지만, 아지트를 도 경계선을 너머로 옮기는 경우는 빨치산이 괴멸하는 그날까지 없었다. 그러나 후반으로 가면 차일혁도 빨치산도 경찰처럼 도 경계선을 넘어가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그에 맞추어 작전을 짠다.

각 도당 빨치산이 지리산 일대에서 활동했다고 하지만, 전북 도당은 관내인 남원군에 있는 지리산이라는 매우 한정된 구역 안에서 이리 뛰고 저리 뛰고 했을 뿐이었다. 경남 도당은 관내인 지리산 천왕봉 동쪽 중산리골에서 대원사골 일대를 맴돌았고, 전남 도당 역시 지리산을 이용할 경우 관내인 구례, 광양에서만 활동하였다. 이러한 면에서 보자면 지역당이 아닌 남부군이 유리하여 자유로운 유격전이 가능하였다. 이는 죽어도 자신의 책임구역을 벗어나면 안된다는 인식 때문이었다. 실제로 인천상륙작전 이후 자신의 임지를 벗어나 북으로 도망친 경기 도당 위원장 박광빈, 강원 도당 위원장 조진성은 별오리 대회에서 출당조치되었다.

당시 북한군에는 팔로군 출신의 부대가 3개 사단에 달하였다. 이들은 모두 오랜 항일전쟁과 국공 내전을 거친 유격전의 전문가들인데, 이들이 지휘관으로 투입되었다면 대한민국 정부 입장에서는 훨씬 무서운 적이 되었을 것이다.

사실 오히려 토벌대장인 차일혁은 팔로군쪽에서 중국 공산당과 함께 유격전을 하던 사람이였고, 채명신은 백골병단을 지휘하며 유격전을 한 경험이 있어서 유격전에 있어서 토벌대가 더 능숙했던 점도 있다. 물론 어디까지나 지휘부의 이야기이고 정식 경찰들도 조준도 할줄 몰랐다는 이야기가 많다. 물론 정규 경찰들은 그래도 시간이 지나면서 실력이 크게 향상되기는 했다.

3.10. 간부와 비전투요원이 다수인 구조

6.25 전쟁 이후 남한이 북한 출신 월남자로 부대를 훈련시켜 북파공작원으로 보낸 것에 반해, 빨치산은 처음부터 남한에 조직된 공산 행정조직과 그를 추종하는 좌익 세력이 입산한 것으로, 빨치산 수기조차도 피난민과 비슷하다고 격하시켜 보기까지 한다. 반면 오히려 반란 세력이라기보단 탄압을 피해 산에 숨은 것이라는 식으로 서술하기도 한다. 사실 이승만이 (어떤 계열이든)반대 세력에 대해 상당한 탄압을 한 것은 사실이며, 이로 인해 입산한 사람도 많았으며, 공산주의 계열에서도 처음부터 입산한 것이 아닌 남로당이 불법화되어 입산한 것이기 때문에 틀린 말도 아니긴 하다. 다만 이는 극초반에만 해당하며, 여순사건 이후로는 투쟁의 정당성을 떠나서 단순히 탄압을 피해 숨어들어간것과는 차이가 있다.

이 때문에 노약자와 여성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투쟁인민'이라고 하여 도당 산하에 후방부대로 편성하고, 젊은 남녀만 추려서 유격대로 만드는 것이 일반적. 연로한 노인과 아이들로 구성된 '투쟁인민'은 곡성군 백아산에만 천명이 넘을 정도로 있어, 유격대원들이 보급 투쟁을 통해 먹여 살려야 했다. 그 때문에 전체 재산세력(빨치산)의 숫자는 몇만명에 달해도 실질적으로 싸울 수 있는 젊은 사람의 숫자는 훨씬 적었다. 유격대원보다 숫자가 많다는 비전투 인력들은 50년말~51년초처럼 빨치산의 세력이 상당했을 때야 한번도 군경이 토벌하러 온 적 없는 안전한 산속에서, 유격대의 후방부대 역할을 하고 있었으나, 남한의 행정력이 확대되면서 깊은 산속까지 토벌하러 오자 오히려 유격대가 먹여주고 피난시켜줘야할 혹 같은 존재가 되었다. 그 때문에 전남북 도당의 경우 51년의 1차 국군 대토벌 작전이 다가오자 미리 지리산으로 피난시켜보내 유격대와 별도 행동을 하게 하였는데, 결과적으로는 1차 대토벌 작전으로 이러한 비전투 병력은 거의 괴멸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피난민 뿐만이 아니라 전투부대인 유격대 안에서도 환자와 여성 등이 다수 있었다(부역자 가족 등). 소설 <태백산맥>에서도 6.25 전쟁중 이런 사례가 많았음을 서술한 내용이 있다. 물론 처음부터 이 지경은 아니었다. 하지만 전투 때마다 여성들을 잘 내세우지 않아 젊은 남성들 위주로 싸우다 보니 결과적으로는 환자들과 여성 전투원의 비중이 점점 높아지게 된 것이다. 그리고 후반으로 갈수록 젊은 남성이 부족하니 평소라면 후방부대에 편입되어야 할 환자와 여성들마저 최전방에서 싸우게 되는 악순환이 이어지게 되었다.

‘당사업’과 ‘군사’라는 이원적인 지도부도 문제이다. 다른 항목에서 언급했듯이 빨치산은 당사업을 주관하는 도당위원회와 군사를 담당하는 유격대(혹은 총사령부)라는 2원 조직으로 이루어져 있다. 물론 도당이 군사부장을 통하여 유격대를 통제하고 있고, 전남 도당을 제외하면 도당 위원장이 유격대장을 겸하고 있지만 결국에는 최고지휘부가 2개가 있고, 간부들도 2배가 되어버렸다.

남부군의 경우에야 관할구역이 없어서 도당 위원회나 여성/노약자 등 피난민들로 구성된 비전투 병력이 없는 순수한 유격 조직이었기 때문에 위와 같은 병크는 없었다. 그러나 전투부대의 비대한 지휘부는 도당이나 남부군이나 마찬가지였다. 소설 <남부군>에서도 작가 이태가 소속되어 있던 전북 도당 4중대의 경우, 모든 부대가 병단으로 전환 하는 과정에서, 중대를 병단으로 바꾸어 칭하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상부기관인 병단 사령부를 만들고 예하에는 단지 1개 중대인 4중대만 배치되어 있었다. 이때문에 병단 사령부와 중대 지휘부라는 옥상옥적인 지휘구조로 간부의 비대화를 불러왔다. 그렇지 않아도 지휘라인이 중대장과 문화중대장, 병단장과 병단 문화부장이라는 군사/정치의 2원적인 조직으로 비대화 되어 있는데 옥상옥이라는 이중고를 겪고 있는 것이다. 참고로 독수리 병단은 고작 70명이다.[16]

남부군의 경우 겨우 170명인 승리사단에 사단장과 정치위원이 있고 사단 군사부/정치부 소속 간부(참모와 지도원)들이 9명에 달하며 여기에 간부 대우를 받는 작가, 시인, 화가, 기자 등이 있다(부사관 격인 특무장은 빼고 말이다). 한국군으로 치자면 1개 중대에는 중대장과 부중대장만 있으면 되는데 인사, 작전, 정보, 군수 참모를 전부 보유하고 이와 별도 라인인 정치위원과 그아래 다수의 정치장교를 배속시켜 놓은 꼴.

여기가 끝이 아니라 산하 3개 연대와 사단정찰대에 연대장과 연대 정치지도원들이 있다. 꼴랑 40명 밖에 안되는 연대인 주제에 다시 아래 대대장들이 있다(대체 어떻게 쪼갰는지 그 아래 소대장과 분대장도 있다). 이러다보니 전투원 보다 간부가 더 많을 지경. 여기에 승리사단 위에 남부군 사령부가 있다. 다 합쳐 300명 밖에 안되는 남부군에 사령부가 대체 몇개야...

그래도 사단 군사부의 경우 구빨치 출신들로 유격전에 능통했는데(남부군의 경우 14연대 반란군 출신), 주로 남로당계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에 반해 정치부 소속의 지도원들은 6.25 이후 인민군과 행정기관을 따라 내려온 북로당 출신들이었는데 전투에 참가하지도 않고 밥이나 축내는 밥벌레들이었다. 주로 하는 일은 대원들에게 노래를 가르쳐 주거나 교양강좌, 그림극을 진행하는 정도였다. 후반부에 가서야 정치부원들의 보초선 순찰, 대열 수습, 일부 전투의 지휘 등 군사적 과업이 늘어났다.

이러한 비대한 간부들을 먹여살리기 위해 전투부대원들이 죽어났다. 전남 도당 위원장 박영발의 경우 하루를 자도 막사가 지어지고 내부에 휘장이 둘러지는 ‘산중귀족’이었고, 남부군 이현상 역시 군경에 추격당하여 후퇴하는 그 위급한 와중에도 꼬박꼬박 막사가 지어지고 부하들이 반찬까지 해다 바쳤다. 또한 병력들은 숙영하게 되면 자신의 “부대 일은 젖혀 두고 사단 본부의 막사를 세워야 하고 땔나무 준비를 해 바쳐야 했다.”(소설 <남부군> 인용)

소설 <남부군>에서는 이러한 상황에서 “(1차 대토벌작전 직후) 이즈음 남부군에서는 ‘간부 보존사업’이라는 말을 자주 썼다... 사실상 정치부나 참모부 기타 본부요원의 피해율은 전투대에 비해 엄청나게 적었다. 또한 여성대원의 소모율이 상대적으로 적기 때문에 전체적으로 그 비중이 커졌다.(506쪽)”라고 하면서 간부의 비율만 점점 높아지는 것을 비판한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에서 정지아 <빨치산의 딸>에서는 “남부군의 전투간부들은 최전선에 나와 직접 현장지도를 하는 것이 거의 상례화돼 있었다. 그래서 간부 소모율이 일반부대에 비해 훨씬 높았고, 이 겨울 공세가 끝나고 난 후에는 간부보존 운동이 벌어질 정도였다.(2권 323쪽)”라고 나와 있어 어안이 벙벙(...).

결국 다수의 간부, 여성, 환자만 득실대는 극히 기형적인 전투 조직이 만들어지게 된다.

4. 이모저모

공산주의 사상이라는게 남녀노소 상하관계가 평등한 것이 원칙이다. 초반에는 남녀가 악수하고, 여성들이 사회참여하는게 신선해서 많은 좌익 동조자들이 생겨났다.

그러나 군사적 경험을 살린다며 일본군 출신자들을 대거 지휘관으로 쓰다 보니, 희한하게 상하관계가 엄격해졌다. 사소한 부분부터 똥군기가 발휘되었고 심지어 먹는데도 양의 차별이 있었다.

웃긴 것은 남부군에서는 이런 똥군기와 가혹행위, 기합, 폭행이 더욱 심했는데, 여순사건 당시의 국방경비대 14연대를 모체로 했기 때문이다. 국방경비대 14연대는 국방경비대대 4연대 1대대를 모체로 했고, 전남에서 창설된 경찰예비대 4연대는 동시기 창설된 다른 부대처럼 일본/만주군 경력자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4.1. 여성대원

여자 빨치산들은 처음에는 조경순처럼 사랑하는 남자를 따라 입산하거나, 정순덕처럼 먼저 입산한 남편을 찾기 위해 산으로 들어가기도 하였다. 대체로 입산 이유가 단순하고, 이념적으로 무장되었다기보다 인간적인 성정을 바탕으로 깔고 있었다. 그러나 산 속 생활에서 그녀들은 모진 시련과 고통을 경험하게 되면서 '악독한 투사'로 돌변하게 되는 두 얼굴을 보여준다.
-최화수의 <지리산 반세기> 93쪽
공산권에서 남녀평등과 여성의 권리를 강조했던 건 사실이지만, 이게 원칙적으로 그랬을 뿐 중국이나 한반도로 넘어와선 변질되어 막상 고위급으로 가면 여성 간부는 매우 드물었고 현실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성차별이 존재했다.[17] [18] 빨치산 역시 마찬가지였으며, 일할 때만 남녀평등이라며 전부 동원하지만 권력은 나누지 않았다.

도당에 비해 여성 참여가 활발했던 남부군의 경우, 여자 빨치산중 고위직은 간부부장 조복애, 구빨치 시절부터 활동하였으며 소설 <남부군>에서 이태와 함께 환자 생활했던 여걸 ‘김희숙’이라고 나오는 ‘양봉순’ 정도에 그친다.[19]

조복애는 여대까지 나온 당대에는 엄청난 고학력자이다. 조복애는 이후 일본에 탈출했다가 다시 지하조직의 임무를 띠고 잡입했다가 체포되어 장기형을 받고 복역중이라는 설(외팔이 부대장 최태환)과 전후 56년경 평양의 거리에서 그녀를 본 적이 있다는 증언(박갑동)이 있다.

양봉순은 구례군 간전면 출신으로 50년 1월에 문경에서 고장난 미군 탱크에 올라 수류탄을 까넣을 정도로 용감했다. 소설 <남부군>에서도 부대가 토치카에 의해 돈좌되자 양봉순이 뛰어들어 수류탄을 까넣었다고 하는 일화가 나와 있다. '특공'이 주특기 인듯. 전남도당 구빨치 출신으로 남부군에서 승리사단 대대장까지 올랐으며 당원신분에 영웅칭호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연대가 40명, 사단이 150여명인 상황에서 대대는 과연 몇명? 실상은 전선호 연대안에 2개 구분대가 있었는데 양봉순은 그중 하나의 구분대장이었다. 북한에서는 대대이하의 전투부대 단위를 구분대라고 하기 때문에 일부책에서 구분대장인 그녀를 그냥 대대장이라고 번역한 것 같다.

그녀와 동격인 정치지도원 임성일을 포함하여 12명이라는 미니 부대이다. 전남도당 시절 이태가 이끌던 14명 소대 보다 적은 병력이다. 그래도 22세의 어린 여자임에도 불구하고 자신보다 나이 많은 부대원을 지휘하다니 여걸인 건 사실이다. 이태가 소대장일 당시는 중대급에만 있는 문화부중대장(정치위원)이 있었다. 즉 중대장부터 장교라고 볼 수 있었고 이태는 하사관 격이었다. 그에 비해 양봉순의 구분대는 정치지도원까지 있는 엄연한 단위부대이다.

특히 주목할 점은 육체적 능력이 필요한 군사부 중에서는 가장 고위직이라는 것이다. 육체 능력이 덜 필요한 정치부에는 간부부장 조복애가 가장 높았지만, 그녀 말고도 꽤 있었다.[20]

"국군은 여자 지휘관이 있냐? 간호장교가 전부가 아니냐?" 하는 반론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국군의 경우 여성은 전투대원이 아니었지만, 빨치산의 경우 여성 대원이 상당수였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즉 상당수가 전투대원이었지만 그에 걸맞는 대우가 이뤄지지 않았다.[21] 양봉순의 경우 대원이 12명으로 분대장. 이 정도가 군사지휘관으로 올라갈 수 있는 한계였다.

<빨치산의 딸>의 저자 정지아의 엄마인 이옥남이 남부군의 정치지도원이라고 하는데, 같은 정치부 소속이기는 하지만 간부부장인 조복애와는 달리 특별한 직책이 없었다. 아마 6.25 이전 2병단 시절부터 함께 하던 구빨치라고 해서 대우해주는 듯. 정치부의 서열로 따지자면 정치위원(여운철과 차일평) → 군단단위 정치부간부(No1. 조직부장, No2. 간부부장, No3 선전선동부장 등) → 사단 정치위원 (승리사단 이봉갑) → 사단 정치지도원 (민운지도원 등) → 정치지도원 대우 예술인(기자 이태, 화가 양수아, 성악가 최순희 등) → 구빨치 = 문화공작대(여성 다수. 최말단대원) 순으로 이어지니, 간부의 말석 정도 된다. 비교를 위해 첨언하자면 예술인은 간부 대우인데 실상은 간부와 말단 대원 중간이었다. <남부군>에 따르면 이태는 문춘의 명령으로 실종된 남부군 인원들을 찾으러 들어갈 때 구빨치 두 명과 함께 동행했는데, 문춘이 세 명 중 누가 대장이 될지 정해주지 않아서 문제가 생겼다는 식으로 서술한다. 즉, 민운지도원 등 정식 지도원이 아닌 지도원 대우 정치부간부나 구빨치나 비슷한 계급이라는 것이다.

소설 <태백산맥>을 보면 인천상륙작전 이후 좌익세력이 대거 입산하여 빨치산화될 때, 구빨치의 가족이거나 부역자인 여성들이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입산한다. 주인공 염상진이 아이들을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본인만 입산하라고 설득하지만 맡길 곳이 없다고 막무가내로 밀고 올라온다. 그 바람에 전부 잉여화된다. 결국 빨치산 대원들이 비전투요원인 여성과 아이들까지 먹여 살리기 위해 보급투쟁을 해야 했기 때문에 부담만 가중되었다. 피난민에 가까운 부녀자와 노약자들은 대부분 첫해 겨울의 혹독함을 이기지 못하고 그냥 하산해 버렸고, 51년 겨울의 1차 대토벌 작전으로 완전히 박멸된다.

그 유명한 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콩의 경우는 여성이 4~5명당 1명씩 배치되어 빨래, 식사 등 잔심부름을 담당하였다고 하는데, 빨치산의 경우는 너무 힘들어서인지 그마저도 없었다.

비교적 병력이 넉넉했던 초기에는 간병부, 취사, 전투원의 식사추진 또는 전투가 개시되면 경계나 전투원들이 휴대하고 있던 배낭 등 전투에 불필요한 물건을 보관, 운반하는 역할을 담당했다. 사태가 긴급할 때는 전투에 가담하는 등 보조부대 정도의 역할이었다.

전투가 가능한 젊은 여성대원들은 각 부대별로 흩어져 전투요원으로 소모되기도 했고, 정치부에 속한 문화공작대라는 이름으로 선전선동을 담당하기는 했는데 결국에는 잉여짓이다. 소설 <남부군>에서도 여성 전투대원들은 간호부나 문화공작대로 빠지는 모습이 나온다. 그에 반해 가장 위험하며 최고 정예 대원만 가능한 정찰대나 연락원은 남성만 가능했다. 결국 전투가 지속될수록 남성 대원들이 죽어나가고 여성 대원들의 비중이 점점 높아졌다. 후기로 가면서 젊은 남성 대원이 아무리 부족해도 여성 대원을 정찰대, 선요원, 호위대 같은 정예요원으로 이용했던 사례는 없었다.

M1 카빈이 파워가 너무 약해 여성대원만 들게 하고 남성은 M1 개런드를 들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남부군>의 이태도 부상 때문에 몸이 안좋아 평소에는 카빈 들고 다니다가 막상 전투가 벌어지니 카빈 버리고 전사자의 개런드 찾아 다녔다고 한다. 영원히 고통받는 카빈 그런데 무겁다고 개런드를 안쓰고 성능 떨어지는 카빈밖에 못쓴다는 여성 대원에게 얼마나 전투력을 기대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전리품이 워낙 많아 M1으로 무장한다는 선택지가 있던 남부군도 이 모양인데, 도당의 경우는 한 술 더 떠서 남성 대원들도 얄짤없이 성능도 떨어지는 주제에 오히려 더욱 무거운 38식 또는 99식, 즉 일제의 아리사카뿐이었고 그나마도 부족하여 남성 대원들은 몽둥이(...)를 들고 다녔고 여성 대원들은 그냥 맨손이었다.

<남부군>에서는 빨치산들이 너무 힘들어 생리가 끊겼다고 나오는데, <빨치산의 딸>에서 이옥남은 생리대가 꼭 필요하기 때문에 천을 잘라서 그냥 물에 씻어서 사용했다고 나온다. 정순덕 역시 산에 있는 동안에도 한번도 생리가 끊긴 적이 없었다고 하며, 그걸 자랑스럽게 여겼다. <남부군>의 저자인 이태가 일부 사례를 보고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를 범했을 가능성이 높다.

4.2. 이성관계

빨치산 세계에서 이성관계는 엄한 금기였다. 지방부대에 따라서는 남녀대원간에 연애관계가 인지되면 두 사람을 공개처형하기도 했다. 그렇게까지는 않더라도 이성 간에 서로 좋아하는 낌새가 있으면 한쪽을 먼 부대로 전속시켜 다시는 만날 수 없게 떼어놓는 것이 불문율이었다. 비단 그래서만이 아니라 그 사회에서는 이성관계는 상상외로 담백했다...[22] 하지만 예외는 있었다.
- 이태 <천왕봉> 9페이지

각종 기록을 보면 일반 대원 사이에 단순한 연애의 감정은 있었지만, 특별히 성적으로 문란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위의 이태의 글에서 나온 예외의 대상은 남부군의 별명인 나팔부대. 그 나팔을 부는 나팔수 한일수와 여자 평대원인 문정숙의 로맨스였다. 그들은 이현상에게 둘의 관계를 보고 후 남부군내에 유일한 커플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간부는 달랐다. 임신한 빨치산이 투항했다던지,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빨치산 이야기가 종종 나오는데 주로 안전한 후방에 앉아 있는 사령부 고관의 산중처이다. <남부군>에서 이태도 간호원 박인자(영화 남부군에서는 최진실 분)와의 로맨스, <북위38도선>에서는 성일기가 19세의 여대원 김상선과의 이야기가 나온다. 그러나 각각 정치부와 지휘부라는 안전한 후방에 있을 때 이야기이다.

최고위급 간부인 도당위원장쯤 되면 한명씩 산중처를 다 끼고 있었다. 특히 각 도당위원장 최후의 순간을 보면 죽는 현장에 항상 산중처와 같이 있다.

우선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은 50년 낙동강 전선에서 합류하여 3년간 사령부 의무요원으로 있던 하수복과 53년 초부터 관계를 맺었다. 이현상은 자기 관리에 대단히 엄격한 것으로 빨치산 경험자는 물론 토벌대에게도 인정받은 사람인데, 어떻게 자신의 딸과 같은 나이인 하수복을 산중처로 삼았다는 것이 상당히 의아스럽다. 어떻게 보면 위의 전인수랑 비슷한 경우인데, 이현상은 남부군 전성기일 때는 여성 대원과 염문을 퍼트리는 일이 없었지만, 빨치산이 괴멸 직전인 53년 초 불과 수십명의 대원만 이끌고 도망다닐 때 관계 형성이 되었다.

54년 1월 31일 덕유산에서 국군의 포위 속에 죽은 전북도당위원장 방준표의 경우, 그 역시 신단숙이라는 산중처를 끼고 있다가 함께 죽었다. 그녀는 전북 부안 출신의 간호병으로 가냘픈 몸매의 놀랄 만한 미인이며, 그 미모 때문에 방준표에게 발탁되어 시중 들고 있었다고 한다. 50년 입산할 때 겨우 18세쯤의 어린 소녀였고, 당시 방준표는 그보다 25세 연상이었다.

남도부의 경우 해방후 천석꾼 집안의 아내와 결혼을 하여 두 딸과 아들을 둔 상태였으나, 그 역시 빨치산 활동중 상당한 미모의 산중처를 끼고 있었다. 그녀는 51년 12월경 남도부의 아이를 출산했는데, 이때 산파 역할을 한 간병부가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이었다. 이때 태어난 딸은 하천형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하지만 이는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이에 대한 증거는 정순덕의 증언이 유일하다. 경남서부의 빨치산은 주로 지리산에서 활동했고, 남도부 부대는 경남 동부인 울산 신불산에서 활동해 두 부대간의 교류가 거의 없었다. 남도부는 월북이래 계속 북에서 활동하고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강원도, 경북을 거쳐 바로 신불산으로 들어갔는데 언제 지리산까지 와서 관계를 가졌다는 건지 알 수 없다. 만약 여성이 울산즈음에 있었다면 신불산주위에서 해산을 하게 하지 왜 지리산까지 만삭의 여인을 보내 해산을 하게 했을까?

경남도당내 최대 무력부대이자, 사실상 마지막던 '이영회 부대'장 이영회의 경우, 이현상의 허가 아래 이옥순이라는 여성과 연애하였다. 53년 빨치산이 전멸 직전에 빠지자 이영회는 이옥순을 귀순시켰고, 그녀는 비행기를 타고 다니며 빨치산에게 자수를 권유하는 선무방송을 하였다.

그에 반해 <빨치산의 딸> 1권에서는 50년초 전남도당 빨치산이 완전히 전멸위기까지 몰리자 도당 위원장 전인수는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자신의 소굴에서 엽색 행각을 벌이며 태업하다가 부하들에게 처형당한다. 사실 전인수는 경성제대를 나온 지식인으로 대단히 교조주의적인 인물이었다. 유격대원끼리 연애를 금지한다는 원칙에 따라 연애했다는 이유로 부하들을 처형한 일이 있던 사람이었다.

같은책 2권에서도 작가 정지아의 엄마 이옥남이 전남도당 시절 갓난아기를 데리고 빨치산 활동중 토벌대에게 쫒기던 장면이 나온다. 다른 빨치산이 아기가 소리를 낼까봐 입을 막았다가 돌려주는데, 숨이 막혀 죽어 있었고 이옥남은 오열한다. <남부군>에서는 주인공 이태가 남부군 시절 빨치산 엄마가 직접 아기의 입을 막아 토벌대를 피해 숨어있다가 죽게 만들어 흐느끼는 장면을 목격한다.

4.3. 처벌

<남부군>에 의하면 전북도당에서 산중에서 오발하면 총살이라고 한다. 그에 반해 남부군에서는 작전시 오발하면 총살이지만 단순 이동중에 오발하면 다음 작전에서는 꼭 공로를 세워 죄값을 치뤄야 하는 식으로 경우에 따라 합리적으로 운용했다고 한다.

<태백산맥>에서는 전남도당을 다루고 있는데, 빨치산에는 "주의, 견책, 경고, 엄중경고, 출당" 등 5단계 처벌이 있다고 한다. 1, 2단계는 단순한 훈계이며 3, 4단계는 누적되면 출당을 전제로 한 '경고'라고 한다. 그 어떠한 경우에도 당원 신분으로 처벌하지 않기 때문에, 출당 처분을 통해 당적 박탈한 후 처벌로 되어있다. 그럼으로 5단계인 출당조치는 처벌하겠다는 뜻이라고 한다. 조연인 남로당 출신 강동기 중대장이 북한에서 온 한상근 문화부중대장과 싸워 각각 경고와 엄중경고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 이미 합당이 되었는데 남로가 어디있고 북로가 어디있냐는 질타와 함께.

그러나 당원이라면 기본적으로 북한출신을 뜻한다. 합당 후에는 남한출신의 입당은 없었기 때문에 이 정도의 합리적(?)인 징계심사의 기회가 남한출신에게도 주어질지는 기대하기 힘들었다. <남부군>에서도 이태는 북한출신 당원과 다툼이 있으면, 남한출신의 비당원인 자신만 깨진다고 자조한다.

4.4. 항미소년돌격대

<태백산맥> 10권에 등장하는 존재인데, 빨치산 막바지 시기에 전남도당에서 이들을 용캐 살아남았다고 발견한다. 당시 빨치산은 인민을 위한 투쟁이라는 모토에 맞쳐서 농민들을 위해 농번기에 소를 잡으면 사형이라는 규정이 있었는데 거지중에서도 상거지꼴인 항미소년돌격대를 발견하고 몰래 소를 잡아 이들을 잘 먹였다가 들통난다. 그래도 전후사정이 참작되어 가벼운 처벌로 끝나는 훈훈한 미담이 적혀 있다.

다른 작품에서도 한줄정도 등장하는 이들은 이태의 <여순병란>과 <천왕봉>의 '소년돌격대 전말기'편에서 중복해서 실리며 구체적으로 나온다. 전남 도당 소속으로 휴전 직후인 53년 8월 8일 편성한 '88부대'가 이들의 정식명칭이다. 편성시 총원 36명에 부대장 이봉삼(14연대 반란군 사병. 24세), 참모장 박채수로 이둘을 제외하면 15세 전후의 소년.소녀들로 2개 대대로 구성되어 있었다. 아마도 50년 9.28 수복으로 좌익동조자들이 대거 입산하였는데 이때 어린이들도 부모를 따라 들어갔다. 이때는 너무 어려 유격대원으로 편성되지 못하였지만 53년경이 되어 조금 크기도 했고, 빨치산 자체가 전멸 직전이라 이런 꼬꼬마들 까지 부대편성이 되어 전선 투입이 된 것이 아닌가 싶다(9.28 수복 이후 아버지를 찾아 개별적으로 입산한 경우도 있고). 이러한 어린 소년들은 그전까지는 지휘관들의 소년 연락병이라는 형태로 종종 언급되었다.

대표적인 예로 여순 사건인 48년에 경찰인 오빠 내외가 억울하게 청년단에게 죽어 복수하겠다고 입산한 13세 소녀 최달순은 이때야 너무 어려서 활약 못했지만 54년경에는 이 소년돌격대의 마지막 대장이 된다. 19세로 최연장자이기도 하고.

4.5. 현지주민 협조자 포섭 방식

빨치산들이 산에서 생활하기 위해서는 신발, 성냥, 옷감 같은 생활필수품, 의약품, 종이등 각종 용품이 필요했다. 또한 군경측의 정보등이 필요했다. 이러한 것을 얻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협조자로 만들 필요성이 있었다.

정순덕의 경우 2~3명이 움직이는 고립무원의 상황속에서 생활필수품과 정보습득을 위해 계속하여 협조자를 포섭을 시도하다가 안되면 일가족 전체를 학살하기도 하고, 결국 포섭 시도중 제보에 의해 체포되었다. 즉 빨치산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협조자란 필수불가결한 존재.

이러한 협조자들은 주로 군당/면당에서 만들었다. 그렇기 때문에 도당 직속으로 생활하다가 관할지역이 없는 남부군으로 전속된 <남부군> 작가 이태의 경우 이러한 협조자 이야기가 안나온다. 그러나 지방 빨치산의 경우 협조자 이야기가 자주 나오는 편.

군당/면당의 경우에도 당 사업과 유격대가 분리되어 있었다. 당 사업을 하는 활동가들은 주로 조직과 선전 업무를 맞았다. 이들은 유격 활동을 보장해주기 위해 현지 주민들을 정보원으로 조직하는 사업을 하였다.

안재성의 <신불산>에 의하면 처음에는 야간에 유달리 어려워 보이는 집을 골라 접근 한다. 젊은이라면 살살 꼬시며 입산하자고 하고, 노약자들만 있는 경우 좌익 사상 교육을 일장 연설하다가 돌아간다. 그러면서 신고를 하면 우리도 불리하지만, 당신도 불리하니 절대 신고 하지 말라고 다짐을 준다.

이런식으로 하룻밤에 두어군데의 가난한 집을 찾아다니며 교양 선전을 한후, 다음날 군경이 마을로 드나들면 꽝이고, 조용하면 일단 협조할 의사가 있는 것으로 간주한다. 최화수의 <지리산 반세기>를 보면 신고하면 나중에 빨치산에 의해 처형 당하고, 이태의 <천왕봉>에 의하면 신고할 경우 청년단이나 경찰에게 요시찰 대상자로 몰려 어떤 협조를 했냐며 몽둥이 찜질 당한다. 부녀자의 경우 여관으로 끌려가 청년단에게 강간 당하며 뭘 잘못 했는지 불라고 하는 것은 덤.[23] 조정래의 <태백산맥>에도 이런 경우가 여러번 나오는데 마을 주민 입장에서는 빨치산이 이미 집까지 들어온 이상 신고하든 안하든 이미 요단강에 한발 적신 셈이다.

만약 마을 주민이 신고 안할 경우 며칠후 다시 방문하여 교양선전 후, 넉넉히 돈을 주며 쌀, 의약품, 종이, 연필등 산에서 구하기 힘든 것을 구해달라고 한다. 신고할 우려가 있기 때문에 언제 가져오라는 말은 하지 않고 사다 놓으라고만 한다.

마을 주민이 겁이나서 장에 못갈 경우 반동으로 몰려 인민재판행이고, 이판사판이라는 심정으로 물건들을 사놓는 경우는 주변산에서 동태를 감시하다가 안전이 확인되면 내려가 받아 온다. 협조 대상으로 지목한 집들은 매우 가난한 집으로, 식량을 나눠주기도 하고, 구입하고 남은 돈은 쓰라고 하면 빨치산에게 협조자+뭔가 얻어 먹은 셈이 되는 것이다.

한 두 번 거래에 성공하게 되면, 이후 사둔 물건은 집으로 찾아가는 대신 마을 근처 산의 비밀 장소에 두게 한다. 단 한번만 거래해도 군경에게 잡히면 총살형이기 때문에 이때부터는 신고하는 일이 없다. 그러면서 점점 협조자가 되어 묻지도 않아도 근처 어디에 군인들이 새로 왔다면서 정보를 제공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빨치산 당 활동가들은 이들에게 사회주의 원리와 정국의 정세를 알려주며 협조자를 세포조직원으로 성장시키게 된다.

경찰과 청년단도 고수들이라, 식량은 전부 경찰 지서에 갖다 놓고, 하루 분량씩 타먹게 했으며 하다못해 성냥의 경우도, 다 쓴 성냥개비를 가져와야 그 만큼 새 성냥을 사게 해주는등 마을 주민에 대한 통제가 철저했다. 특히 산간마을에서 조금이라도 외곽에 있는 가난한 집은 요시찰 대상자로서 마을의 자경단을 통해 감시하였다.

5. 관련 매체

5.1. 빨치산 문학(수기, 실록)

미제 간섭자들의 침공으로... 그렇게 해서 유격 투쟁이 전개되었다... 각 전구 중심으로 해방구를 창설하고, 항일유격전의 전통을 이어받은 전략 전술로써 전설 같은 전과들을 올리면서 당 중앙의 결정을 실행했다. 그것은 참으로 위대한 투쟁들이었고 높이 자랑할 만한 전과들이었다.
- 전남 유격투쟁사 서문

빨치산 문학에는 ‘노동문학’, ‘민족문학’, ‘민중문학’, ‘분단극복문학’, ‘통일문학’등 다양한 호칭이 있다는 특징이 있다. 또한 범주가 넓은 편이라는 특징도 있는데, 빨치산 출신 비()전향자와 그 추종자들이 쓴 책 외에도, 전향한 빨치산이 쓴 책들도 전부 이쪽으로 분류한다.

남부군의 빨치산 시인 김영은 1990년 한겨레와의 인터뷰에서 "빨치산에 대한 기존 글들을 보면 극좌로만 보는 반공일변도의 글들과, <태백산맥> 등과 같이 관념적으로 빨치산을 미화/영웅주의적 견지에서 보는 것, 그리고 <남부군>이나 자신의 글과 같이 사실적 기록에 충실한 것"이라며 3등분으로 분류하였다. 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24]

각 빨치산 문학을 보면 빨치산의 흐름은 이해할 수 있으나, 세부적인 인물, 날짜, 지명 등이 틀린 부분이 여러군데 발견된다. 워낙 패쇄적인 조직이고 상호 연락수단이 없어서 빨치산 시절 스스로 자신들이 몇 명인지도 모를 정도로. 소설 <남부군>도 출판 후, 외팔이 부대장 최태환,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 등 여러 빨치산들이 사실 오류를 알려와 날짜, 지명 등을 수정하는 개정판을 냈다. 빨치산 문학류를 보면 여러 작품들이 같은 사건을 다루는 부분이 있는데, 대조해 보면 날짜나, 이름 혹은 직위들이 항상 조금씩 틀리게 나와 있다.

거의 모든 빨치산 문학과 토벌대 수기는 빨치산 활동이 가장 활발한 호남 지역에 치우쳤다. 충남북도, 경남북도의 빨치산 활동을 다룬 작품이 없는 것이 아쉽다. 도당은 아니지만 관할구역이 없던 남부군과 남도부 부대를 다룬 작품은 몇 개 있다.

분류하자면 전북 도당 소속은 <남부군>, <젊은 혁명가의 초상>, <장군의 후예>이며 전남 도당 소속은 <빨치산의 딸>, <전남 유격투쟁사>이다. 어째 전북 도당 소속은 죄다 전향한 사람들의 책이고, 전남 도당 소속은 비전향자들이다. 그 종류가 많아 나무위키 항목에서는 소설과 비소설 분야로 분리해 놓는다. 그런데 소설분야도 어째 책마다, 한치의 틀림도 없는 진실이라고 쓰여 있다.

여기에 <실록 정순덕>을 포함하면 전남북과 경남 낙동강 서쪽, 남부군을 관할로 하는 제5지구당 소속자의 책이며,
경북, 경남 낙동강 동쪽, 남도부 부대를 관할로 하는 제4지구당 소속자를 배경으로 하는 책은 <남도부>, <북위38도선>, <신불산>이 있다.

애석하게도 충남북 도당이 소속된 제3지구당 관련 책은 현재까지 존재하지 않는다. 이때문에 본 문서에도 제3지구당 이야기가 가장 적다.[25]

여순사건의 잔당들이 이현상의 지도로 지리산에서 빨치산 행각을 펼칠 때 17세의 정순덕도 함께 있었다. 그녀는 무려 13년이나 지리산에서 빨치산으로 활동하다가 64년 경찰에게 체포되어 오랫동안 비전향 장기수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71년 자수한 남파간첩 김남식이 정순덕을 북한에서 큰 인물로 생각하며 63년 ‘지리산 여장군’이라는 영화도 제작했다는 거짓부렁을 펼쳤다.[26] 그래도 김남식 때문에 여러 작가들이 그녀의 존재에 대해 관심을 일으키게 되었는데 그중 작가 김성동이 쓴 87년 실천문학에 발표한 <역사를 찾아서>가 이른바 빨치산 문학 제 1탄이 되었다.[27]


남부군
1988년 두레, 이태 저, 전2권

빨치산 종군 기자였던 이태가 쓴 초 베스트셀러 수기. 남부군은 워낙 유명하여 안성기 주연의 영화로 만들어졌을 정도. 물론 우익세력들이야 빨치산 찬양 소설이라고 까대지만, “김일성이 나쁘지 박헌영씨가 나쁘냐? 김일성주의가 나쁘지 공산주의가 나쁘냐?”라는 책 저변에 깔린 김일성까 정신 때문에 나름대로 객관성을 담보하고 있다. 대신 박헌영-남로당-이현상-빨치산으로 이어지는 남로당계에게는 한없는 온정주의를 보여주기 때문에 어느 정도 걸러들어야 한다. 책 내용이 남한에도 버림받고, 북한에도 버림받은 공중에 붕 뜬 존재인 빨치산에 대해 다루고 있는데, 거창한 이념이나 사상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빨치산에 대해 정말 리얼하게 써 놓았다. 다만 전향자가 쓰다보니 비전향자들 입장에선 열받을만한 내용. 한홍구 교수는 <전남 유격투쟁사>의 추천사에서 “남부군은 빨치산을 비인간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지만, 그 인간은 극히 나약하고, 감상주의적이며, 빨치산 활동이 잘못되었다고 반성하는 전향자들이 중심이 된 인간이었다. (이 때문에) 살아남은 빨치산 비전향자들은 분노했다.”라고 언급하고 있다.[28]

이때문인지 종북 세력들은 전향자의 반동작품이라고, 극우 세력들은 빨갱이 작품이라고 비난한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이 책은 절대 빨치산 찬양 책도 아니고, 중립적인 책도 아니다. 무능한 빨치산 지도부[29]와 자신들을 버린 북한을 비판하는 책일 뿐이다.

제목은 남부군이지만 작가의 소속이 원래 전북도당이었다가 이후 남부군으로 변경됨에 따라 내용도 이에 따른다. 작가는 전북 도당에서는 소대장(독수리병단 시절)→문화부 중대장(27부대 시절)으로 준간부 급정도는 되었지만 남부군에서는 그냥 평대원 신세. 당원이 아니어서 이에 따른 서러움을 톡톡히 당한다.[30]

출간될 당시 참고할만한 다른 빨치산 책이 전무하고, 인터넷도 없던 시절이라 기본적인 사실관계가 틀린 구절이 너무 많다. 이때문에 이후에 나오는 모든 빨치산 문학은 이 책을 인용하면서도 비판하고 있다. 전남 도당과 남부군에서의 체험말고는 전부 틀려있다고 봐도 무방하다.

작가의 체험 자체가 매우 짧아 야산대 시절은 아예 겪어 보지 못하고, 인천상륙작전 직후인 50년 9월 28일 이후 입산하여 52년 3월 19일, 그러니까 군경의 1차 대토벌 작전이 끝난지 4일후 체포되었다. 이후 지구당 개편이나, 남로당 숙청, 군경의 2차 대토벌 작전 등의 굵직굵직한 빅 이벤트는 겪어 보지 못했다. 책에는 자신이 체포될 때 "남부군의 역사도 그 3월을 마지막으로 끝나버렸다."라고 적어놓았지만 이후에도 빨치산과 남부군은 2년 가량은 활발히 활동한다. 그러니 이 책만 읽고 빨치산을 전부 이해하기에는 매우 부족하다. 이때문인지 후속작으로 자신이 빨치산이 되기 전과 체포 후를 다루는 실록소설 <여순병란>을 펴냈다.

재미 하나는 확실한데 이거 읽고 재미지다고 다른 빨치산 문학 읽으면 대실망할 것이니 주의 할 것.


● 실록:정순덕
1989년 대제학, 정충제[31] 저, 전3권

정순덕이 출소하자 한동안 함께 생활한 작가가 그녀의 구술을 바탕으로 지은 책. 단순히 빨치산 문학이라고 비하하기 좀 그러한게, 작가의 후기에도 나오지만 정순덕이 워낙 거짓말을 잘하고 불리한 부분에서는 침묵을 지켜서 책을 쓰기 힘들었다고 나온다. 또한 탈고 직전에 정순덕이 빨치산이 양민학살한 ‘인민재판’ 부분을 빼달라고 애걸복걸하였는데 안 빼주어 빨치산 출신자들 사이에서 정순덕의 입장이 매우 난처해졌다고 한다. 이 때문에 출판직후 작가와 사이가 틀어졌다고 한다. 이런 우여곡절로 인해 비교적 객관성이 지켜져 남부군과 함께 평가가 높은 편이다.

위에서 언급했던 <역사를 찾아서>이라는 이름으로 글을 쓴 김성동은, (내가 먼저 정순덕 장군님 일대기를 쓸려고 했는데) 이 책은 "말도 안되는 반공문예물"이고 정 장군(...)이 인세 얼마를 받기로 해서 기막한 이야기를 죄 털어 놓았는데 준다던 돈을 한푼도 안줬다고 비판한다.

다만 시인 고은이 기고한 서문에서 “정순덕 선생의 결연한 삶을 통해 우리는 실로 많은 것을 배우는 바 있다... 그녀가 이룩해 낸 지난날의 역사체험을 조국통일의 질적 변화에 반영시키고 싶은 것이다... 나는 진지하게 권유한다. 이 책을 읽으라고! 한번 읽지 말고 세 번 읽으라고!”라는 용비어천가를 끄적여 놓으셔서 눈살이 찌푸려진다. 작가의 후기와는 대비되는 서문. 팀킬? 마지막 빨치산으로 일컬어지는 정순덕은 아무것도 모르던 시골 처자에서 남편 찾으러 입산했다 빨치산이 된 기구하고 안타까운 이력이 있지만 어린이와 출산 중인 산모까지 죽인 극악무도한 행각을 펼쳤다.

간단히 쓰자면 정순덕은 경남 산청군에서 부역자 출신 남편을 따라 입산하여 남부군을 거쳐 경남 이영회 부대에 있다가 53년말 부대가 괴멸된 후 망실 공비로 떠돌아 다니게 되었다. 63년 11월 12일 생포되어 수감생활을 하다가 전향서를 쓰고 85년에 석방되었으며, 이후 꽃동네에 있다가 2004년 병사했다. 마지막 빨치산이며 그것도 여자라는 이유로 상당히 화제가 되었으나, 빨치산 활동면에서는 유명한 간부급 같은건 아니고 그냥 평대원.


● 젊은 혁명가의 초상
1989년 공동체, 최태환 저

최태환은 길림성 화룡현의 조선족 출신으로, 47년 6월 9일 팔로군 군정학교를 졸업하면서 북한으로 전속되었다. 북한에서 인민군 역사기록부장 및 보안성 민청위원장 및 제 6사단 정치보위부 책임장교로 중좌까지 올랐다.[32] <젊은 혁명가의 초상>에서도 황의지의 땅크병단 소속 외팔이 문남호, 이상윤과 만나는 장면이 나온다. 오른팔을 삼각건으로 감은 상태의 최태환에 비하면 한팔을 절단한 문남호는 진짜 외팔이. 게다가 참모에 머물렀던 최태환에 비하면 문남호는 부대장까지 했다. 결국 외팔이 부대장의 전설은 여러 외팔이들의 활동이 조합되어 생긴 이미지이다. 그러나 차일혁 총경의 자사전에 나온 외팔이는 최태환을 뜻하는 게 맞다.

이후 낙동강 전선에서 한쪽 팔에 부상을 입고 후퇴하다가 낙오되어 전북도당에 합류 후 '외팔이 부대장'으로 빨치산 활동을 하였다. 초기에는 전북 임실군당에서 활동하다가 이후 도당 보위 병단 → 번개병단 →기포병단 등을 떠돈다. 정규군 낙오자는 북상하고 빨치산은 이를 최대한 보장해줘야 한다는 최고사령부의 명령 때문에 위치가 애매하여 가는 곳마다 직위가 없는 객장 신분이었다. 도당 보위병단에서는 정치위원, 번개병단에서는 정취위원겸 참모장을 지냈다. 번개병단 시절 말없이 월북하려다가 병단장 장성구에게 걸려서 처형당할 뻔 했는데, 도당위원 정치위원인 오원식이 자신들은 최태환을 치료해줄 의무만 있기 때문에 처벌할 수 없다고 해서 그냥 넘어간적도 있을 정도. 이러한 이유로 기포병단시절에서는 무슨 직위에 있었다는 서술이 없다. 사단제 개편후 45사단 민운과장으로 있다가 도당위원장회의 참석하기 위해 지리산으로 이동중 제1차대토벌 작전의 토벌대에게 체포되어 군사재판에서 징역 10년형을 받는다.

여담으로 빨치산문학 주인공중 이태보다 입산 기간이 짧은 유일한 경우이다. 입산 기간은 50년 11월초 ~ 51년 12월 초.

칠보 발전소를 두고 전북 치안국 18전투경찰대대장으로 있었던 차일혁 총경과 대리인을 내세워 회담을 하기도 하였다. 이후 차일혁이 공주경찰서장 재직시절, 공주형무소에 정훈교육 하러 온 그를 보게 된다. 자신이 그 외팔이 대장이라고 나서지는 않았다고.

<빨치산의 진실>에서는 이 책의 서문에 "두개로 쪼개진 조국을 하나로 화합하기 위하여 몸부림쳤던 이 나라 젊은 혁명가들의 이야기"라고 썼다며 비난한다. 그러나 책 내용을 보면 자신의 출신인 팔로군의 엄정한 군기와 이상에 대한 찬양은 있지만, 딱히 북한과 빨치산에 대해는 호의적이지 않다. 오히려 팔로군에 비하면 군기가 해이한 인민군과 빨치산에 대한 비난이 은근히 들어가 있다. 또한 대원들이 죽을 때 마다 대체 어떤 가치를 위해 죽는 것인지 회의한다. 책 마무리가 좀 갑작스러운데 토벌대에 체포되면서 아무런 후기도 없이 끝나버린다.

저자 최태환은 제2공화국이 들어서면서 대전교도소에서 수감되던중 대사면령에 의해 8년 9개월만에 석방되었다. 오른팔 부상으로 사람을 죽이지 않았다는 주장이 참작되었기 때문이다. 이후 술집운영도 하고, 자서전도 집필하며 삼성화재에서 일하다가 48년만인 1990년에야 고향에 돌아갈 수 있었다. 마을에서는 그가 죽은줄로만 알고 6미터 높이의 '혁명열사비'를 세워놓았다고.

황의지, 성일기, 구연철의 자전소설에 비해 자신을 띄워주는 정도가 약한 편이다.


● 이현상(남부군 비극의 사령관)
1990년 학원사, 이태 저

남부군 작가 이태의 소설. 이현상은 알려진 대로 군경이 죽인 것이 아니라 투항한 빨치산 출신으로 구성된 사찰유격대에 의해 죽었다는 것부터 시작하여 전반적으로 이현상에 대하여 재조명하였는데 위의 책과 달리 철저히 외면당했다. 별 재미없으니 빨치산에 대해 학구적으로 연구하는 사람이 아니면 읽기 힘들다.

다만 이현상을 사살한 것이 경찰도 군인도 아니고 북한에서 암살한 것일 수 있다는 이태의 추측이 여러군데 자주 인용된다.[33]

이현상 자체가 박헌영이 남한에 자신의 군사력을 만들기 위해 파견한, 박헌영의 왼팔이자 남로당의 주요인물이고, 이 때문에 북한의 지령을 받는 남한 출신 김일성 절대 지지파 빨치산에 의해 모든 지위를 박탈당하고 버림받았다.

안재성의 <이현상 평전>에 의하면 "반공의 잣대를 의식한 때문인지 지나치게 북한을 비난하는 입장에서 해석... 틀린 부분이 너무 많아 신뢰할 만한 책이 되지 못했다."라고 한다.


● 빨치산의 딸
1990년 실천문학사, 정지아 저, 전3권

중앙대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한 당시 26세의 정지아가 쓴 빨치산 문학. 자신이 빨치산의 성지인 지리산 자락에서 빨치산의 딸로 태어나(지리산+백아산=지아) '조국해방투쟁으로 복원하려는 장정에 섰다.'고 언급한다. 다만 정치적 평가와 사학적 평가는 분명 다른 것이다. 빨치산의 딸은 이념의 영역에서 빨치산들의 사상에 대해 충실히 다뤘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기본 마인드가 “물론 힘들기야 하죠. 그러나 조국이 미제에 짓밟혀 신음하고 있는데 젊은 우리가 조국을 위해 투쟁하지 않으면 누가 우리 조국을 지키겠어요(2권 277쪽)”이다. 그리고 미군은 “월급을 받고 돈 때문에 남의 나라 전쟁터에 팔려온 미군들이 자기 죽음의 의미를 알았을 리 없다.(2권 237쪽)”라며 폄하한다.

덕분에 출판하자마자 책은 압수당하고, 출판사 대표는 실형, 정지아는 집행유예를 선고받았다. 책은 10년간 판매금지되었다.

정지아의 아버지는 전남 도당 조직부부장 정운창이고 어머니는 남부군 정치지도원 이옥남이다.[34]

정지아는 ‘소설의 형식을 띠기는 했지만 모든 것은 철저하게 사실적인 증언에 의거했다.’고 주장하나 알아서 걸러 읽을 것. 1권과 2권 초반까지는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2권 대부분은 어머니의 이야기다. 서로 소속이 달라 이야기는 겹치지 않는다.

1권에서 주인공은 정운창(빨치산명 유혁운) 전남도당 곡성군당에서 활동하다가 백운산특수지구 선전선동과를 거쳐 곡성군당 위원장을 지냈고, 이후 전남도당 조직부장을 맡았다고 나온다.[35]

재미있는 부분으로는 1949년 9월 1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립 1주년 기념투쟁에서 백운산특수지구당 유격대장 박종하의 지휘로 60명의 빨치산이 국군 15연대를 야간에 기습공격, 700명의 포로와 1천정의 소총 등 엄청난 전리품을 얻어 남한 유격투쟁사에 영원히 남을 최고의 전과를 얻었다는 부분이 백미이다. 이때의 포로는 전리품만 운송해주고 석방되었는데, “박종하를 추격하다가 패배한 5사단이 분풀이로 포로 700명을 전원 총살하여 시체라며 트럭에 싣고 돌아다녔다는 후문이 있었다”라는 삼국지식 기술이 있다.[36][37]

이후 유혁운은 전남도당에서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지하 조직을 만들기 위해 위장 자수를 한다. 조직부장이면 도당위원장과 부위원장 다음가는 No.3 급의 최고위직인데 이정도 고관을 위장 자수 시켰다는게 좀 수상하기는 하다. 이후 광주 형무소에서 전향까지 한다. 이때도 핑계는 이미 전향한 자들 사이로 들어가 조직 지도하기 위해 위장 전향했다고(...).

2권의 주인공은 정지아의 엄마 이옥남(빨치산명 이옥자)으로, 그녀는 49년경 전남도당 구례군당에서 남부군으로 소속을 변경하는데, 6.25 당시 낙동강 전투에서 유격전, 춘천으로 북상, 지리산으로 재남파 등 남부군의 중요한 행적이 나온다. 소설 <남부군>에서는 작가 이태가 전북 도당에서 남부군으로 51년에야 소속 변경했기 때문에 이전의 중요한 사건들이 몽땅 빠져 있기 때문에 이를 보완해줄 만 하다. 이태가 남부군에 합류한 시점부터는 양쪽의 에피소드가 거의 비슷하게 진행된다.

판매금지가 풀리면서 2005년 2권으로 편집한 복간판이 나왔다. 작가 정지아는 소설 출판 6년 뒤인 1996년 조선일보(!)를 통해서 정식 등단했다. 2022년, 아버지 사망을 계기로 자전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발표했다.


남도부(전설적 남한유격대 총사령관 하준수 일대기)
1993년 월간 말, 노가원 저, 전2권

경남 함양군 출신으로 자생적인 빨치산 활동을 하다가 월북하여 인민군 소장, 중장 계급을 받고 거듭 남파된 빨치산 남도부을 주인공으로 하였다. 제목에 나온 '남한 유격대 총사령관'이란 표현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빨치산을 총칭하는 명칭은 '조선인민유격대'이고 총사령관은 오직 김일성뿐이다. 다만 월북하는 남한인들을 재조직하여 남파시킬 책임을 갖고 있는 사람은 사법상 이승엽이며, 그는 권한도 없으면서 남한 6개도 빨치산을 지도하는 사령관 자리를 이현상에게 주었다. 그에 비해 남도부는 김일성에게 권한을 부여받았다고 한다. 그때문에 이현상과 남도부 중 누가 진짜 빨치산 총사령관이냐는 논란이 있을 수 있다. 참고삼아 말하자면 이현상이 한때 지휘하던 6개도 빨치산은 대략 1~2만명. 여기의 지휘라인에 벗어나 있는 남도부는 300명이다. 반면에 채명신 장군은 그의 자서전을 통해 백골병단 시절 빨치산 총사령관이면서 인민군 중장이었던 길원팔을 잡았다고 나온다. 빨치산 총사령관 3명 시대

정리하자면 빨치산이든 북한군이든 총사령관은 김일성이다. 여기에 대남 비서로 이승엽을 두고 당 중앙 연락부를 통해 빨치산을 지휘한다. 그 산하로 제3지대 부지대장 대리겸 유격지도부장이 남도부, 4지대장 이현상, 5지대장이 길원팔이다. 즉 이현상과 길원팔은 동격이며 남도부는 한급 떨어진다. 참고로 제3지대장은 경북도당 위원장 출신인 박종근이며, 남도부의 신불산 부대에는 박종근이 파견한 부지대장이 함께 있는데, 딱히 남도부가 그 부지대장의 상관이라고 보기도 어렵다. 이러한 이유로 남도부가 인민군 중장이었는지도 의심스럽다. 한국전쟁당시 인민군 중장은 총참모장, 전선사령관 정도였는데 300여명의 유격부대장이 인민군 중장이었다는 것은 어색하다. 길원팔은 자신의 임지에 가보지도 못하고 북한에 있을때 채명신에게 잡혀 죽는다.

이와는 별개로 빨치산 문학 제목이 상업적인 목적을 위해 과장된 면이 있다. 별 관련도 없는데 "남부군 그 2부가 펼쳐진다."라고 광고하거나, 동급의 지휘관이 여러명 있는데도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라고 책 타이틀에 박는 등 자극적인 제목이 많다. 이런 면에서 "전설적 남한유격대 총사령관"이라는 부제는 좀 과장되었다.

남도부가 등장하여 1985년에 대박을 친 이병주의 대하소설 <지리산>의 영향을 받지 않았나 싶다. 남도부의 부하 및 친척등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썼기 때문에 남도부의 삶에 대해 잘 나와 있다. 그러나 6.25 발발과 남파 후 행적에 대해서는 너무 틀린 것이 많다. 대표적인 것이 오진우가 아니라 남도부가 766부대장이라는 것, 강정구 부대와 원래 한 부대라는 것, 남도부가 길원팔 대신 사실상 5지대장이었다는 것, 3지대장 박종근 사망시기 남도부가 박종근의 사망으로 3지대장으로 추대되었다는 것, 남도부가 인민군 중장이라는 것, 남한내 빨치산의 거의 괴멸된 막판에도 3차 월북했다 김일성의 지령을 받고 재남파되었다는 것, 김달삼이 살아서 월북했다가 남도부보다 조금 먼저 남파되었다는 것, 예하에 9개 소지구당 편제였다는 것 등인데 전부 사실이 아닐 가능성이 높다. 아예 남도부 체포과정은 동양라디오(DBS) 극화의 내용으로 대체했는데, 그야말로 소설이고 실제와는 너무 다르다. 6.25와 남파 후 부분은 차라리 읽지 말고 아래의 <북위38도선>을 추천한다.


● 여순병란
1994년 청산, 이태 저, 상하 2권

여순사건을 조명한 실록 소설. 그동안 군경측의 여순사건 책은 있었지만, 좌익 혹은 전향한 자의 책은 최초이다. 이태가 전남도당에서 남부군으로 소속 변경했을 때만 해도, 14연대 반란 사건의 주역은 다 죽었지만 주요 하사관들이 남부군 사단장/연대장으로 있었고, 14연대 반란을 측면 지원한 이현상, 박종하등도 살아 있어 이들의 입을 통해 반란을 조명 할 수 있었다. 군경측 자료에는 없는 매우 귀한 1차사료들이다.

상권은 여순사건의 발발까지에 초점을 맞추었고, 하권은 그의 작품인 <남부군>에서 부족한 부분, 즉 여순사건 이후부터 이태가 합류할 때까지인 약 3년을 다루고 있다. 사실 그의 작품인 <남부군>은 이름만 남부군이지, 48년말에서 53년말까지 5년에 걸친 남부군의 활동중에서 이태가 합류했던 1년도 안되는 기간만 다루고 있다. 그 바람에 남부군의 역사를 보자면 많이 부족한 작품인데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을 참고하여 부족한 부분을 집필하였다. 그래서 두 책의 내용이 아주 많이 겹친다.

51년말~52년초의 군경의 1차 대토벌 작전때 이태는 체포되고, <빨치산의 딸>에서도 정지아의 엄마 이옥남이 이미 군경에 귀순한 상황이라 이후 자료가 부족한 편이나 <여순병란>에서는 이후 남부군의 활동도 충실히 다룬다. 그야말로 소설 <남부군>의 완전판이라고 할만하다.

다만 도서관에서는 매우 희귀한 책이니 할 수 없이 최근에도 재판을 찍어낸 <빨치산의 딸> 2권을 읽어야 한다.
책 말미에는 2편의 단편이 실려 있는데 작가의 다른 책인 <천왕봉>에 중복 게재되어 있다. 대체 왜...


● 북위 38도선
2006년 교학사, 정원석 저, 전2권

남도부 부대 참모장 성일기의 증언을 바탕으로 한 실록 소설. 성일기의 50년지기 친구인 의사 정원석이 의뢰하여 집필하였다.

시기적으로 실록 <남도부>보다 훨씬 이후의 작품이고 남도부와 마지막을 함께한 인물이라, 새로운 자료도 많고 많은 부분에서 오류를 바로잡아 놓았다.

성일기의 빨치산명은 '차진철'이며 회령 제3군관학교에서 교육 받고 분대장 자격으로 남파되어 활동하다가 남도부 부대에 합류한다. 이후 300명에 달하는 남도부 부대가 9명으로 줄어들자 저절로 지위가 올라가 참모장(...)이 된다. 이후 53년말 특무대에게 체포된 후 회유 끝에 남도부의 소재를 신고하여 특무대가 그를 체포, 이 공로로 무사 석방된다.

월북했던 그의 여동생인 성혜림은 나중에 김정일과의 관계에서 김정남을 낳아 잠시 매스컴을 타기도 하였다.

북한이나 공산진영에 대한 찬양은 단 한줄도 없고, 반대로 <남부군>식의 비판적 서술도 없이 매우 담담하게 집필되어 있다. 다만 작가의 성향 탓인지 등장인물의 족보와 출신학교를 필요 이상으로 과도하게 써놓았다. 심지어 스토리상 전혀 관련 없는 성일기가 어렸을 때 집에 자주 놀러왔던 아버지 친구들의 족보와 출신학교를 열거해놓기도 했다.


● 이현상 평전
2007년 실천문학사, 안재성

이현상의 일대기를 담았다. 하지만 1/3 지점부터 여순사건이 발생하여 이후 내내 이현상이 빨치산에 몸을 담았기 때문에 빨치산 문학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소설 형식이며, 중간에 출처를 밝히는 레퍼런스가 아예 없어 평전이라는 말이 무색하다.

작가는 노동소설가인 안재성인데 이 책은 "노동 소설"로 봐달라고 한다. 아마도 이현상이 빨치산 활동하기 전 까지 일제강점기에 한 노동운동 경력을 서술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안재성은 이후 <박헌영 평전>, <한국노동운동사>를 쓰기도 했다.

빨치산 부분은 이미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과 이태의 <이현상(남부군 비극의 사령관)>에서 나온 내용이다. 특히 6.25 이후 하산했을 때부터 이태가 남부군으로 배속되었을 때까지의 부분은 <빨치산의 딸> 2권을 그대로 옮기다시피 했다는 평가가 있다.

국군과 빨치산에 대한 편향적인 서술이 존재한다. 예를 들어 "국군은 촌락에 주둔하게 되면 가축을 잡아 술상을 차라게 하고 동네 여자들을 강간하는 일이 재미처럼 행해졌다... 술판이 벌어지면 당연히 일본군 군가를 부르는 게 순서처럼 되어 있었다. 부역자를 가진다며 주민들을 모아놓고 폭행하다가 수틀리면 즉석에서 사살하는 일도 여전했다."라는 부분이 나오는데 과장이 되기는 했지만 한국측 책에서도 언급된다. <어느 졸병이 겪은 한국전쟁>에서도 일개 소대장급 장교도 이동중에 여자 없이는 못자서 마을 여자들을 조달하였다고 하고, 빨치산 토벌대장인 차일혁 총경의 일대기에도, 국군측 토벌대장의 토색질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심지어 위와 같은 문장에 나오는 "좌익에게 가족을 잃은 경찰 간부가 노인과 아이들뿐인 산골 마을 주민 오십여명을 산으로 몰아넣고 포격지원을 요청해 몰살시킨 사건도 있었다."의 출처가 바로 차일혁 총경의 일대기이다.

그러나 빨치산에 대한 편향적인 서술은 문제가 심하다. 왜 이태의 <남부군>이 명작 소리를 듣냐면 그는 기본적으로 이현상과 빨치산을 추종하는 입장이지만, 비판할 거리가 나오면 가혹하리만큼 북한과 빨치산의 오류에 대해 비판하기 때문이다.

다만 여순 사건부터 시작된 좌파세력의 학살을 "학살"이라 표현하는 것이나 이현상이 '이건 봉기가 아니라 반란이다'고 서술한 내용들이 존재해서 좌파세력의 학살을 은폐하진 않았지만, 이태의 책과 다르게 북한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가 부족한 편이다.

작가는 친북사상이 있다기 보단 노동운동가로서 이현상에게 흥미를 느낀 것으로 추측된다. 실제 작가는 이현상이 속한 일제강점기 노동운동 세력을 다룬 <경성 트로이카>란 책을 먼저 썼다.

여러 책에 나온 이현상의 행적을 집대성했다는데 의미가 있다.


● 전남 유격투쟁사
2008년 선인, 정관호 저

소설 <남도 빨치산>(전 6권)을 쓴 정관호 작품. 아주 체계적으로 전남 도당의 빨치산 투쟁에 대해 정리해 놓은 사실상의 학술서적이다. 체계적으로 빨치산 활동을 정리한 것은 높이 평가해줄만 하지만 작가의 전작 소설 때문인지 객관성에 의문을 제기하는 시선도 상당하다. 특히 작가의 출신이 북로당 계열이다 보니 북쪽의 각종 지시에 무비판적이며, 가장 충격적이었던 남로당과 박헌영 숙청에 대해서도 간부들의 심적 동요 외에는 별일 없었다며 어물쩡 넘어가버린다.

전향자의 이름과 이후 활동을 삭제한 것도 아쉽다. “극히 소수이지만, 현재의 처지 또는 후손들의 형편을 고려해 스스로 이름을 싣기를 꺼리리라고 짐작되는...”이라는데(...).

역사학자 한홍구는 경상남북도, 전라북도, 충청남도 지역의 유격투쟁사가 정리된 책도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갖고 있다는데, 정관호 같이 시간 남아도는 빨치산 생존자가 또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다만 전북 도당은 소설 <남부군>,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에서 이미 다루어진 바가 있다.


● 신불산 - 빨치산 구연철 생애사
2011년 산지니, 안재성

<이현상 평전>의 작가 안재성이 빨치산 출신 구연철의 회고담을 일종의 자서전식으로 집필하였다.

구연철은 1920년 일제강점기 경상남도 양산시에서 태어나, 39년 부모를 따라서 지옥섬이라고 불리던 하시마 섬에서 학창시절을 보냈다. 해방 후 조국으로 돌아왔다가 동국대학교를 다니며 좌익사상에 눈을 뜨게 되었다. 남로당원도 아니고 전단지 돌린 것 외에는 별 활동을 하지 않았지만 서북청년단에게 끌려가 죽기직전까지 고문당하다가 풀려난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졌지만 전선이 좀처럼 고향까지 내려오지 않자, 가만히 있으면 다른 좌익들처럼 정부에 의해 살해될 것이니 차라리 빨치산들을 만나자는 생각에 경남 도당 동부지구당이 있는 신불산으로 입산하여 빨치산이 된다.

그 직후에는 남도부가 이끌고 온 동해남부유격대도 만나게 되고, 조선로동당에 가입도 하게 된다. 첫 배치는 양산군당이었고 이후 본부로 소환되어 당학교를 수료하고 군당으로 돌아갔다가 울산군당 조직부로 이동된다. 여기서 조직원→조직부장→위원장으로 승진하다가 울산, 경주, 양산을 관할로 하는 제3소지구당 조직부장이 그의 최종 직위가 된다(소지구당 결성시기에는 위원장 포함 조직원 12명). 53년말 군경의 제2차대토벌 작전으로 소지구당에 혼자 남게 되어 본부인 제4지구당으로 돌아가 합류하게 된다. 이후 책 내용이 갑자기 중간과정을 건너뛰고 53년 4월 이른바 ‘남로당 부산시당 재건사건’ 공작차 부산으로 잠입했다가 체포되어 무기형을 언도받는 시점으로 이동한다. 이후 감형되어 20년을 비전향장기수로 살다가 나와(정확한 전향여부는 안나온다) 부산 달맞이 고개에서 오리농장을 하며 살다가 2005년 안재성을 통해 자서전을 출판했다는 것이다.

실록 <남도부>, <북위38도선>이 경남에서 낙동강 동쪽에서 활동하던 남도부 부대의 행적을 각각 최고지휘관과 말단 병사의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는데 반해, <신불산>은 낙동강 동쪽에 있던 경남도당 동부지구당의 당원 입장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앞의 책들은 유격대장인 남도부가 최고지휘관이지만, 당원인 구연철은 지구당 부위원장(책에서는 위원장) 이영섭을 더 중시하고 있다. 구연철이 지구당 사령부에 있지 않고, 산하 군당에 있어 사령부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지만, 어쩌다 사령부를 방문했을 때 있던 ‘조용식 위원장 사칭 사건’ 같은 경우에는 다른 책들에 나오지 않던 지구당의 속사정에 대해서 기록해 놓았다.
구연철의 성향이 워낙 친북적이기는 하지만 경남 동부의 빨치산에 대해 이해하기 좋은 자료이다.


● 장군의 후예(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
2013년 도서출판 작가, 박찬두 저, 전3권

상당히 특이한 구성의 책인데 ‘장수 황씨’ 종친회장인 황의지가 조선의 명재상 황희 정승, 임진왜란 때의 명장 황진의 이야기는 잘 알려 있지만 구한말 절명시를 쓰고 자살한 매천 황현의 이야기는 잘 안 알려져 있다며 황현에 대한 글을 쓰고 싶다며 작가인 박찬두를 찾아왔다가 만들어진 책.

1권은 황희, 황진, 황현의 일대기를 다룬 것이니 패스.[38]

2권에는 그 후손인 황의지가 일제에 징병되어 중국에 갔다가 종전 후 소련군 포로로 시베리아에 끌려갔다가 돌아오는 내용이 2/3이다.[39] 주인공은 고향으로 가기 위해 38선을 넘자마자 북에서 온 빨갱이라며 엄청난 구타와 고문에 시달리고, 고향에 돌아와 보니 자신을 일본군에 강제입대시킨 친일파들이 그대로 군청과 경찰에 남아있는 것을 보고 충격받아 입산하여 빨치산이 된다.[40] 이때부터 본격 빨치산 문학의 시작. 이후 징병된 경력을 높이 평가받아서 간부급으로 활동하다가 6.25 이후 전북 도당에서 벼락 병단장이 된다.

3권에서는 빨치산 조직 개편으로 45사단(700명?) 사단장이 된다. 당시 전북도당은 전북북부의 45사단과 전북남부의 46사단, 그리고 지리산에 위치한 방준표의 직속부대로 나뉘어져 있었기 때문에 45사단 사단장직위는 그가 이전에 역임했던 벼락병단 병단장 직위보다 더 높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의 사단은 국군의 1차 대토벌 작전으로 작살난다. 남은 80여명을 인솔해 지리산으로 들어가니, 방준표 도당위원장은 그가 작전지역을 이탈해 도망해왔다며 호되게 꾸짖고, 호위병으로 쓴다며 남은 80명을 전부 데려가버려 이후 낙동강 오리알꼴이 된다.

병력을 뺏기고 남은 것은 20여명의 환자들뿐이어서 보급투쟁하기에도 벅찰 지경이 된다. 결국 사단장이 친히 보급투쟁하러 민가로 나왔다가 경찰에게 체포된다. 경찰, HID, 군부대, 포로수용소에서 상다리 휘어지는 잔치상 대접과 무자비한 몽둥이 찜질을 번갈아 가면서 받다가 남원 경찰서장의 잘못되면 자신이 책임지겠다는 따뜻한 말에 감화되어, 이후 검사에게 기소유예를 받고 사찰유격대에 소속된다.

이 책의 2권 2/3까지는 황의지는 공산주의의 '공'자도 꺼내지 않는다. 오히려 그는 철저한 민족주의자였다. 또한 해방 초반까지는 극우파로 분류된 김구를 추종하던 그를 좌익으로 만든 것은 경찰들의 고문이었다. 그러나 황의지를 다시 대한민국의 품으로 돌려놓은 것은 남원 경찰서장 이규형의 따뜻한 말과 행동이었다. 이 소설은 우리가 한 인간을 어떻게 대접하나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을 잘 보여준다.


● 빨치산
이영식(본명 육철식)저

1948년 월북한 뒤 강동정치학원과 제3군관학교를 거쳐 인민군 장교(중위)로서 6.25에 투입된 저자[41]의 이야기이다. 이태의 남부군과 더불어 본인이 직접 겪은 이야기를 풀어낸 수필이나 남한 출신인 이태와 비록 월북했지만 북한에서 엘리트 장교 코스를 밟고 내려온 저자의 빨치산 내에서의 대접은 제법 다르다.[42] 훈련기관이 훈련기관이다보니 상당히 거물급 인사들을 많이 만나는데, 월북하자마자 리승엽[43], 박헌영[44], 심지어 군사훈련중에는 자신이 참가하는 연극을 관람하러 온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을 먼발치로나마 직접 보기도 했다. 추후 제3군관학교에서 통신장교 훈련을 받고 있을때는 당시 교장이던 오진우에게 직접 특진을 받은적도 있는 상당한 엘리트.

6.25 발발 이후에는 인민군 총참모부 정찰부 소속으로 28일 서울을 거쳐 낙동강까지 내려갔으나 고착된 전선과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으로 군산으로 향한다. 그러다가 9.28 후퇴때 운장산으로 들어갔다가 도로 월북하지 못하고 전남유격사령부가 위치한 백아산을 거쳐 지리산과 백운산을 전전하다 1952년 2월 포로가 된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신문기자를 했던 이태와는 달리 저자가 중학교 중퇴 학력의 군인이라 그런지 문학적 묘사는 많이 부족한 편이다. 전체적 수필의 내용은 감상적인 모습보다는 자신이 어디에 가서 무얼 했는지 묘사하는 것이 중점이 되고 있고, 순수하게 오로지 조국을 잘 살게 만들고 싶다는 마음으로 월북한 것이라 북한의 체제와 빨치산 활동에 대한 비판은 별로 찾아볼 수 없다. 뜬금없이 산중연애(...)를 하는것도 덤. 다만 그렇다고 아주 눈을 감고 산 것은 아니기에 잊을만 하면 나오는 추위와 배고픔, 피로에 대한 묘사와 생존을 위한 몸부림은 더하면 더했지 덜하진 않는다. 다만 전투병과임에도 불구하고 통신장교라는 특성상 실제 전투를 한 적은 별로 없고[45] 전투시 누군가를 죽였다는 묘사는 전혀 나오지 않는다.

앞서 말했듯이 인민군 출신이라 북한에서든 남한에서든 대접이 상당히 좋은데, 북한에서 훈련받을 때에는 상당히 좋은 수준의 보급을 받으며 생활했고,[46] 전쟁발발 이후에는 자신의 분대를 이끌고 농가의 돼지를 징발해 잡아먹어도 아무도 막지 않고, 입산 이후에는 가는 길의 모든 빨치산 지휘관들이 최우선으로 대접해주는 모습이 나온다.

6.25가 터지기 전의 남한 상황을 설명해주는데 상당히 혼란스럽다. 월북과정도 상세히 묘사가 됐는데 첩보소설 뺨치는 수준으로 비밀스럽게 진행된다. 당시 이렇게 자원을 쓰면서까지 인력을 확보한 북한의 국력을 간접적으로나마 알 수 있는 부분.

저자 이영식은 후에 포로수용소에서 사형 판결을 받지만 석방된 뒤 남한 육군본부 작전 교육국에서 국문관[47]을 지내다 전역, 시를 쓰며 살다가 노환으로 사망했다. 1988년에는 <남부군>의 저자 이태와 빨치산 관련 토론과 강연을 하기도 했다.

5.2. 빨치산 문학(소설)

보통 <지리산>과 <태백산맥>도 빨치산 문학으로 분류된다. <빨치산의 기원>에서도 태백산맥은 물론 <남부군>까지 빨치산 문학이며 빨치산을 찬양한다고 까고 있고, 아예 '빨치산 문학 연구 : 『남부군』, 『지리산』, 『태백산맥』을 중심으로'라는 논문도 있을 정도로 대표적인 빨치산 문학으로 분류된다. 남부군의 경우도 엄밀히 말하자면 실화소설이다. 하지만 일련의 사실을 소설형식으로 집필한 것이고, 지리산과 태백산맥은 사실에 영감을 얻어 창작한 픽션이다. 지리산의 경우 이태남도부 등의 인물을 가명으로 하여 재창작하였고, 태백산맥은 인물부터 순수 창작이다.

여담으로 남부군은 모든 빨치산 문학의 범람의 신호탄이기도 했지만, 지리산과 태백산맥의 탄생에도 중요한 역할... 아니 표절의 소스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태가 출판사에 제출한 원고를 이병주가 보고 이를 인용하겠다며 빌려가 소설 지리산을 썼고, 이는 자료를 수집하던 조정래에게도 흘러 들어가서 태백산맥의 바탕이 되었다. 지리산의 경우 표절 시비가 일어날 정도로 연관성이 짙지만, 태백산맥은 배경이 전라북도와 전라남도로 서로 다르기 때문에 딱히 연관성은 없다. 다만 빨치산의 행동강령 등을 설명하는 일부 문단에서 상호 유사성을 보인다.


● 지리산
초판 1985년 기린원, 이병주 저, 전 7권
재판 2006년 한길사

유신체제 하에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둘러싼 지식인의 고뇌를 다루던 소설가 이병주의 작품. 중반부까지는 남로당을 다루고, 후반부로 가야 빨치산 이야기가 나온다. 이때 이현상에 버금가는 유명 빨치산인 남도부(본명 하준수)'를 모델로 한 하준규, 그리고 모델 미상의 박태영(소설상 정순덕을 이끌며 최후의 빨치산으로 나옴), 이태의 사촌이라는 이규를 주인공으로 한다. 문학적 측면에서 태백산맥과 비견되는 대하소설이다.

출판 시기는 <남부군>보다 더 빠르다. 소설 <남부군>의 이태가 비중있는 조역으로 나오는데, 이태의 수기를 표절하였다고 서로간에 다툼이 있었다. 심지어 <남부군>의 출판사에 원고 제출 당시 남부군의 원제가 <지리산맥 눈나리다>였다.

등장인물들이 태백산맥(조정래) 못지 않은 지독한 사투리로 대화하여 읽는 것이 매우 난해하다. 극중 구성도 매우 늘어지는 편. 고전이라는 느낌이 물씬 든다.

<실록 정순덕>의 작가 정충제는 " '실록'이란 말이 무색할 만큼 허무맹랑했다... <지리산>은 작가 개인이 체험했던 혹은 지엽적으로 알고 있는 몇 안되는 논픽션을 가지고 허구에 의한 스토리로 시종일관하고 있다."라고 비평하였다. 또한 <지리산> 서문에서 작중인물들이 실재했다고 한 것 부터 분명한 거짓이라고 비판하였다. 정리하자면 소설 <지리산>은 정충제의 비평처럼 어디까지나 몇가지 논픽션 사실(<남부군>의 원고등) 만을 갖고 새롭게 창작한 소설이다. 하지만, 정충제 자신도 허무맹랑한 문현동 금 루머를 창작한 인간이니 가려서 들어야 한다.

1989년에는 KBS1을 통해 드라마화된 바 있는데, 주연은 박진성, 전광렬 등이다.


태백산맥(조정래)
초판 1986년 한길, 조정래 저, 전 10권
최신판 2013년 해냄 출판

더 이상 말이 필요 없는 한국문학의 최고봉...이지만 항목에도 나오듯이 남로당 미화가 하늘을 찌른다. 여순사건의 반란 부대인 국방경비대 14연대중 여수에 남아있던 2개 중대가 진압군을 피해 벌교로 후퇴하여 학살극을 벌였는데 책은 이 부분부터 시작된다. 계속하여 재판을 찍어내어 구하기 쉽다.

다른 책들은 거의 전부 도당을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이 책만은 벌교가 속해 있는 보성 군당을 중심으로 다루고 있다. 벌교가 주인공이라 해방후 벌교의 좌우익 갈등이 중심이지만 9~10권 정도로 가면 중심 인물들이 입산하고 전남 도당으로 넘어가 거의 전남 도당 빨치산 위주로 다룬다. 작가는 많은 사람들이 작중 등장인물의 실제 모델이 누구냐고 묻지만 딱히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실제로도 읽어보면 대응할만한 현실의 인물들이 없어 정말 완벽한 창작인 것 같다.

빨치산 문학이 범람하기 전이라 자료도 부족했을 때인데, 빨치산 사이의 은어나 역사등에 대해 정말 신기할 정도로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다. 작가의 취재가 돋보이는 부분. 다시 말하자면 실제 역사안에 창작인물들이 활동하는 소설이다.[48]

참고로 태백산맥은 안나온다(...). 태백산맥 쪽에서 활동한 것은 위의 책의 주인공 남도부이다. 오히려 이 책은 벌교를 중심으로 다루다가 벌교 출신 빨치산들이 활동하는 지리산을 다룬다.


● 녹슬은 해방구
1990년 백산서당, 권운상(1955~1996)[49] 저, 전9권

이 작품은 작가가 "3년간 투옥중 비전향 장기복역수와 접촉하여 들은 생생한 증언을 채록하여 집필한 것으로 털끝 만큼도 허구가 없는 실록"이라고 한다. 아마도 81년 12월부터 82년 사이에 비전향 장기수들이 복역하는 광주교도소 특별사동에 들어와 그들과 접촉한 것으로 추정된다. 일단 작가의 작중 아바타인 수용번호 1877번 박선생은 교도관에게 대들어 특별사동으로 간 것으로 되어 있다.

책은 박선생이 특별사동에서 비전향 장기수들과 생활을 하며 대화하는 장면과 그들이 과거를 회상하는 극중 극의 두 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다. 1•2•3권은 1942년 국내 항일유격대의 형성 부터 8.15 광복까지, 4•5권은 광복 이후 이들이 모여 조직을 결성하는 장면, 6•7•8권은 46년 10월 대구 항쟁부터 제주 4.3 사건과 지리산의 빨치산 활동을, 9권은 그 이후 60~80년대 초까지를 다루고 있다.

책 자체가 워낙 오래되어서 문체가 읽기 어려운 것은 이해하겠는데, 등장인물들이 죄다 듣보잡이라 다른 책을 통해 교차검증이 안된다. 빨치산 책들도 다양한 인용자료를 통해 나름의 진실성을 담보하는데 이 책은 그딴 거 없다. 그냥 비전향 장기수에게 들었다는 것이 유일한 소스이다. 다만 작가가 교도관들에게 두들겨 맞은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작중 아바타인 박선생이 극중극에서 현실로 돌아오는 부분에는 문장마다 교도관 욕이 빠지지 않는다. 예를 들면 "(교도소장) 그 자는 툭 불거진 배를 툭툭 치고는 똥테모자를 쓴 간부간수들을 몰고서 어미닭이 새끼병아리 거느리듯이 지나갔다."와 같은 문장이다.

제목의 뜻은 빨치산 당시의 해방구는 잠시 대한민국 정부로 인해 녹슬었을 뿐이니, 혁명가들이 살아 숨쉬는 이상 언젠가 그 녹을 닦아 내어 진정한 해방구를 완성한다는 것이다.

여담으로 이 책의 광고가 “남부군과 태백산맥을 덮으시면서 왠지 허전하지 않으셨습니까? 이제 제 2부가 펼쳐진다”이다(···).

이 책은 검찰 판례상 이적표현물로 지정되어 있다.


● 천왕봉
1992년 두레, 이태(이우태) (1922~1997) 저

표지에 "남부군의 저자가 내놓는 또하나의 빨치산 문학. 빨치산들의 숭고한 사랑이야기"라고 되어 있다. 역사적 사실을 증언과 체험 등을 통해 소설 형식으로 쓴 단편 모음집이다. 소설 남부군에서 나오는 몇몇 에피소드를 자세히 적어 놓았다고 보면 된다.

제목인 천왕봉은 물론 지리산 꼭대기의 그 봉우리이다. 김민호라는 가상의 빨치산이 포로 수용소를 탈출,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이 되어 1986년까지 혼자만의 고독한 투쟁을 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그 외에 남부군에게 '나팔부대'라는 별명을 하사하게된 나팔수 한대수의 사랑 이야기(잔돌평전), 소설 <남부군>에서 잠깐 스쳐 나왔던 남편인 경찰을 죽였는데 따라와서 '조그마한 후배지 역할'을 한 그의 아내와 어린아이의 이야기(회문산 순녀기)등 다양한 단편소설이 실려 있다.

사실 <천왕봉>은 이태가 독수리병단 소대장 시절 기술 서기를 했던 문학 애호가이자 시인지망생 김웅(작중 김영)과 소설 <빨치산의 딸> 작가 정지아가 의기 투합하여 함께 출판하려고 했던 프로젝트 소설이었다. 그러나 정지아가 투옥되어 연락이 갑자기 끊기게 되자 할 수 없이 준비했던 글을 혼자 출판한 것이다.

더 설명하자면 소설 <남부군>을 본 김웅이 이런 책을 쓸 사람은 남부군 생존자중에서 이우태(이태) 형님 밖에 없다고 생각되어 전화번호부를 뒤져 연락하게 되고, 이후 빨치산 문학 붐을 타고 출판된 <빨치산의 딸>을 본 이태가 2권의 주인공 이옥자가 남부군 시절 이옥남이라는 것을 알고 역시 전화번호부를 뒤져 그녀와 연락하게 된다. 이때 이옥남을 통해 글재주가 있는 그녀의 딸 정지아와 공동 작품집을 내려고 한 것이다. 사실 <천왕봉>은 김웅을 모티브로 쓰게 된 소설이다. 다만 김웅은 소설과 달리 포로 수용소에서 탈출하지 못했고 15년의 수감 생활을 하다가 전향후 출소하지만 사찰계 형사의 보호관찰 때문에 아무 일도 못 하고 비참하게 산다. 그런데 <남부군>에 나오는 김영이 바로 그임이 알려져 나름 유명해져 보호관찰도 풀리고 언론의 인터뷰도 하며 <빨치산 철창수첩>등 다수의 작품을 내게 된다.


●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
1997년 살림, 이태 저

이태가 그동안 쓴 2편의 소설과 2편의 회상록을 묶어서 작가의 서문만 쓰면 되는 상태에서 97년 3월 6일에 사망하자, 그를 기리며 3월 20일에 인쇄하여 출판한 유고집이다.
제목은 단편소설집 <천왕봉>에서 언급되는 김웅이 쓰려고 했던 소설의 제목이다. 하지만 그가 15년간의 수감생활중 얻은 각종 병으로 앓다가 1남1녀를 남기고 1995년 죽자, 이태가 김웅의 일대기를 각색하여 중편소설을 쓰고 제목을 김웅이 쓰려 했지만 못 쓴 소설의 제목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라고 붙였다.

순수한 문학소년인 김웅이 해방후 좌익이라며 사람들을 함부로 죽이는 데 부조리를 느끼고, 연세대학교 재학시절 교내 우익 단체 '학도호국단'에게 시달리다가 6.25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느껴 동기 몇명과 함께 입산하게 된다. 2년간의 빨치산 활동후 국군에게 체포 후 전향은 배신이라고 느껴 장기간 버티다가 어머니 때문에 전향후 15년만에 출소한다. 결혼도 하게 되고 문학 재능을 살려 취직하여 그동안 고생하신 어머니를 모시며 살아나가려 한 찰나에 3개월마다 찾아오는 사찰계 형사 때문에 계속 직장에서 해고당하고 고통받다가 <남부군>을 통해 유명해져서 왕성한 창작 활동을 한다. 전형적인 빨치산의 입산 경로와 수형소에서의 고통, 출소후의 고통이 잘 그려져 있다.

그 외 <전쟁사의 언덕>은 이태의 일본군 징병 시절을 각색한 소설이고, <무심천 세심기>는 이태의 일제시절 중학교 회상기이다. 이보다는 가장 마지막에 있는 <지리산이여 안녕>이 가치가 있다. 소설 <남부군>은 이태가 전투경찰 205연대에게 체포되면서 끝나는데, <지리산이여 안녕>은 체포에서 시작하여 포로 경험담을 쓰고 있다. <남부군>에서 에피소드로 짧게 언급한 박기서가 준 돈으로 호송 경찰이랑 엿바꿔 먹은 이야기, 전경에게 휘발유 한컵 얻어먹고 뱃속에 기생충을 싹 퇴치한 이야기 등이 나와 있다. 결국 이태는 전투경찰 최고위 간부인 동문 2명을 만나 얼렁뚱땅 도민증을 발급받아 그냥 집으로 가게 된다. 위에 김웅의 경우 15년의 수감생활을 했고, 어떤 순박한 농민 출신 대원은 총살당했다고 <시인은 어디로 갔는가>에 자세히 적어 놓았는데, 자신의 경우와 대비되어 일종의 부채 의식을 강하게 느낀 것 같다.


● 남도 빨치산
2008년 매직하우스, 정관호 저, 전6권

전남도당 빨치산을 다룬 소설. 작가는 함경도 북청 출신으로 교원으로 있던 중, 한국전쟁 때 전라남도 지역 교원으로 파견되어 남하했다가 후퇴중 낙오되었다. 이후 전남 강진군당을 거쳐 전남 도당에서 <전남로동신문> 주필을 하며 빨치산 생활을 하다가 1954년 4월 8일 백운산에서 검거되었다.

기본적으로 소설이라 그다지 참고할만한 자료는 없다. 내용 자체는 빨치산 찬양 일색이다. 주인공이 따로 없고 전남도당 그 자체가 주인공이라 <태백산맥> 식으로 수많은 등장인물이 나오는데 그것도 극중 가명이 많아 매우 혼란스럽다.


● 붉은달
2012년 도서출판 생각나눔, 김창휘 저

작가는 강원도 홍천군 토박이로, 홍천군 의원까지 지내다가 뒤늦게 등단하였는데, 단지 개인적인 관심으로 관련 작품들을 섭렵하여 해당소설을 썼다고 한다.

주인공은 남로당 출신으로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하고 월남하여, 전남도당 번개병단 2중대 문화부중대장으로 있다가 남부군으로 전속되었다가 2차 대토벌 작전때 군경에게 체포된다. 대략 소설 남부군의 작가이자 주인공인 이태의 행적을 따라가며, 막판에 이현상이 북한의 지령을 받은 암살조에게 사살되는 것을 목격하는데, 이것 역시 어디까지나 이태가 자신의 추리라며 소설 <이현상(남부군 비극의 사령관)>에 언급한 것을 모티브로 하였다.

소설 남부군은 출판 당시 시대상황상 할 수 없이 소설 형식을 빌린 논픽션(Non-fiction)이라면, 소설 태백산맥은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작가적 상상력을 덧붙여 새로운 사실을 재창조한 팩션(Faction)이다. 그에 반해 붉은달은 그냥 소설 남부군의 팬픽(Fan fiction) 느낌이 강하다.

●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북한군이 되어 남하한 주인공 최대치가 빨치산이 되었다가 토벌대(전투경찰)의 총에 맞고 지리산에서 죽는다. 드라마 전체중에서는 최후반 부분에 해당하지만 여명의 눈동자 세대라면 이 작품을 통해 빨치산을 처음 접한 이가 대부분일 듯.

5.3. 토벌대 문학

빨치산 문학과 비교하자면 우파진영에서 쓴 책들인데, 따로 명칭이 없어 편의상 토벌대 문학이라 명명하였다. 소설이라기 보다는 주로 수기, 학술서들이다.

● 빨치산 토벌대장 차일혁의 수기
1990년 후아이엠, 차길진 저

빨치산 토벌당시 서남지구전투사령부 전투경찰 2연대장이였던 ‘지리산 호랑이’ 차일혁 총경의 진중수기를 바탕으로, 그의 아들 차길진이 집필하였다. 2011년에 개정증보판이 나와 구하기도 쉽다. 책의 서두 부분에 “젊은 혁명가의 초상”의 저자이자 ‘외팔이 부대장’ 최태환이 추모글을 써놓았다. 차일혁은 중국에서 팔로군계열 항일유격대에 속해서 일본군/만주군과 싸운 사람이다.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와서 군사영어학교에 입교하여 군인이 될 기회가 있었으나 "좌파들과 일본육군사관학교 출신들이 득세"한다는 소리를 듣고 포기하였다. 이후 한국전쟁이 터졌을 때 유격대를 만들어 마을에서 외롭게 싸우다가 인천상륙작전이후 남한이 수복되었지만 빨치산이 득세하자 이를 토벌하기 위한 18전투경찰대대장으로 임명된다. 말그대로 임명만 되고 부하, 장비, 식량 아무것도 없어서 스스로 병사를 모집하고, 장비와 식량을 빨치산과 싸워서 노획물로 충당하는 고군분투기이다. 소속이 전북 치안국이었기 때문에 전북도당(외팔이 최태환, 남부군 이태,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 황의지)을 상대로 싸운다. 이 때 그의 기록이 특기할만한데 전북 도당은 포로를 전부 죽였으며, 도저히 못 믿겠지만 도당 위원장 방준표는 시체에서 간을 날로 꺼내 먹었다고 쓰여 있다. 그에 반해 포로를 죽이지 않았으며, 시체에 배를 가른 흔적이 없는 것을 보고 전북 도당이 아닌 다른 부대(남부군)라 판단하였다고 한다.

재미있는 것은 차일혁은 빨치산이 위급하면 다른 도 경계선을 넘어가 버려 추적할 수 없다고 나오는데(후반부에는 그게 아닌 것 같다고 인정한다) 소설 <남부군>에서는 도당, 군당 심지어 면당까지 자신들의 행정구역을 절대 안 넘어가고 그 경계선 안에서 맴돌다가 죽어갔다고 나온다. 또한 차일혁은 빨치산들은 시신을 메고 가기 때문에 실제 전과는 눈앞의 시체보다 많은 것이라는 기술을 자주 써 놓았지만, 소설 <남부군>에서는 “빨치산은 자기 편 시체는 반드시 떠메고 간다”는건 그냥 ‘전설’일 뿐이라고 일축한다. 토벌대와 빨치산의 오해와 시각차를 잘 알 수 있어 양쪽을 비교하면서 읽으면 재미있다.

또한 상층부와 군경의 타락상에 대한 비판이 잘 나와 있다. 경찰 위에 군림하려고만 하는 군 토벌대, 마을 주민들을 닥달하며 떼떼 권총 내놓으라는 헌병 상사,[50] 의무경찰대를 몽둥이로 두둘겨 패며 여자 데려오라는 국군 중대장 등. 빨치산 문학에 지도부를 비판하는 ‘소설 남부군’이 있다면, 토벌대 문학에서는 지도부, 군경의 무능과 타락을 비판하는 차일혁의 수기가 있다.


● 빨치산의 진실
1992년 도서출판 다나, 이기봉 저

중반까지는 주로 역사와 이론이며, 후반부에는 빨치산의 기원인 14연대 사건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여순사건을 직접 경험한 첩보공작 계통 출신이다. 성향이 상당히 오른쪽으로 치우쳐 있어 걸러 들을 필요는 있다. 대표적으로 여순사건 때는 상당히 과장된 빨치산의 군경가족 학살을 써놓았고, 훨씬 대규모로 자행되었던 군경의 민간인 학살은 한 줄도 안나온다. 게다가 여순사건의 발생과정은 소설체로 써났는데, 내용도 사실이기 보다는 소설에 가깝다.

그래도 빨치산 출신자 외에는 거의 관심이 없는 주제를 다룬 학술서라는데 의미가 있다. 빨치산 문학에 대한 정의도 이책에 따랐다. 빨치산의 극초기인 1948년 여순사건까지만 다루고 있어 아쉽다.


● 실록 지리산
1992년 고려원, 백선엽 저

우리가 아는 그 백선엽 맞다. 백선엽 자신이 백(白)야전사령부 사령관으로 있으면서 경험했던 빨치산 토벌기이다. 빨치산을 다루는 자료에서 많이 인용되는데 책 자체는 구하기 힘들다. 남부군에 대응되는 내용으로 국군의 입장에서 서술하지만 빨치산에 대한 적대감이 거의 없이 담담하게 적었다. 자신의 경험과 국군측 자료뿐 아니라 빨치산 출신들을 찾아가면서 인터뷰했고, 자신이 몰랐던 국군의 가혹행위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며 이에 대한 사과문을 싣기도 했다.

마지막은 황의지를 직접 찾아가 인터뷰한 내용을 실었다. 그가 누군지를 자세히 서술하면서 진짜 원수는 일본놈들과 그 밑에서 붙어먹던 친일 주구들이다. 아직도 그 영향력을 잃지 않고 있는 친일 주구들을 척결해야만 이 민족의 한이 풀릴 것이라는 자신에게도 해당되는 말을 담담히 적은 것은 높게 평가할 부분이다.


정리해보자면 1) 만주군 에 자원입대하여 간도특설대 소속으로 팔로군 항일유격대를 토벌하다가, 해방 후 군인이 되어 빨치산을 토벌한 백선엽, 2) 중국에서 공산당 팔로군계 항일유격대에서 일본군과 싸우다가, 해방후 전투경찰이 되어 빨치산을 토벌한 차일혁, 3) 일본군에 징병되어 만주로 끌려갔다가, 해방 후 친일파 경찰의 시달림 끝에 빨치산이 되어 포로로 잡혀 경찰 사찰유격대원이 된 황의지, 4) 일본군에 징병되어 일본으로 끌려갔다가, 해방후 얼떨결에 빨치산이 된 이태 네 사람의 엇갈린 운명이 우리 현대사의 비극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백선엽은 그냥 출세하고 싶었을 뿐이지 뼛속부터 친일파도 아니었고, 황의지나 이태 역시 처음에는 공산주의와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백선엽은 자서전에서 자신은 독립군을 토벌한 적이 없으며 그냥 공산주의 비적때만 토벌하였다고 하였지만, 토벌 대상이었던 차일혁은 공산 비적이 아니라 엄연한 항일 독립군이었다. 네 명 모두 시대적 형편과 처해진 상황에 따라 행동했을 뿐이었다.

5.4. 빨치산이 비중있게 나오는 작품

● 지리산 반세기
1997년 해성, 최화수 저

소설가 최화수가 “해방 이후 지금까지 반세기 동안 지리산을 무대로 펼쳐진 역사적인 사건들과 주민들의 애환을 낱낱히 밝히면서 우리 민족 현대사의 한 단면을 고찰한다.”라며 출판하였다. 지리산에 관심이 매우 많아 그가 지은 책중에서 ‘지리산’이 들어가는 책만 4종류.

책 내용의 2/3는 지리산 빨치산 이야기인데, 이 책의 주제에 맞게 빨치산에게 학살당하고 그보다 몇 배 큰 규모로 토벌대(특히 육군 11사단)에게 학살당한 주민들 이야기가 상당한 분량을 차지한다. ‘거창 양민 학살사건은 혹시 빙산의 일각 아냐?’ 하는 의심마저 든다. 여러 빨치산 문학들이 참고자료로 나오며 특이하게 지리산에 인접한 경남 함양군 마천면의 <마천 향토지>가 많이 인용된다. 예를들어 이태의 <남부군>에서 남부군이 경찰이 지은 초소와 나무 방벽을 넘을려고 애를 쓰는 장면이 나오는데, 경찰이 아니라 마천 주민 특공대가 지었다는 것.

이어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의 최후와 지리산의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 이야기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나머지 책 내용의 1/3은 지리산이 벌목되고 유원지로 개발되는 과정을 다룬다.

여타 빨치산 문학과 토벌대 문학에서는 밤낮을 가리지 않고 죽기살기로 싸우는 전투를 다루고 있지만, 이 책은 그 과정에서 집에 숨어 전투가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는 주민들을 다루고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있다. 결국 죽어나는건 민간인 뿐이라는 평범한 진리와 함께. 빨치산은 밤에 와서 주민들을 학살하거나 산으로 끌고가고, 토벌대는 낮에 와서 ‘’‘작전 구역에 있는 모든 민간인을 적으로 간주하고 학살’‘’하였다(단, 남부군은 신사적이였다는 기술도 해놓았다).


● 빨치산의 아내, 무명옷 입은 선생님 "이여자, 이숙의"
2007년 삼인출판사, 이숙의 저

경북도당 위원장 박종근의 아내 이숙의의 자전적 소설. 남편이 입산한 이후 홀로 딸을 키우고 교직에서 헌신하는 내용이다.

1부는 원래 이숙의가 출판하려고 했던 자서전이다. 박종근의 얘기는 거의 나오지 않는다. 신혼 생활 6개월 후 박종근이 월북했으며 이후 소식은 전혀 모른다고 한다. 시아버지이자 박종근의 아버지 박영교는 대동청년단 간부를 지낸 우익 거물로 이후 의성군의 3대, 4대 국회의원까지 지냈다. 그러나 성격이 워낙 더러워 완전히 인연을 끊고 지냈다고 한다.

특기할만한 점은 52년 3월에 박종근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고 신문에도 나왔으며 이 때문에 경찰에 끌려갔다고 한다.[51]

2부는 이숙의가 교직 시절 가장 기억나는 제자 5명과 있었던 5가지 에피소드를 신문 기고를 위해 집필한 글이다. 그러나 기고 직전에 이숙의가 사망하여 딸인 박소은이 자사전에 신문 기고하려던 글을 합치고 뒤에 자신의 글을 가필하여 책을 출판하게 된다. 이숙의는 대구 10.1 사건을 "황홀했다. 10월 항쟁! 늦게야 의성은 무혈로 모든 공공 기관의 권력 행사를 인민위원회에 스스로 인계했다."라고 하며 독일에 사는 딸 박소은은 남한을 "국적 불명의 문화로 치장된 모순의 땅. 그 요란한 간판 뒤에는 수많은 희생을 치르면서 자유와 민주를 지키려 한 보석처럼 빛나는 소수의 사람들이 살고 있다." 라고 하며 북한에 가니 "동심에 남아있던 고향 땅처럼 가난하지만 순수한 모습을 그대로 지키고 있다."라고 하는 좌익 성향의 인물들이다.

이숙의와 박소은은 혁명열사 가족이라는 신분으로 북한에 몇 번 초대되는데 이 때 혁명열사릉에 있는 박종근의 가묘를 방문한다. 묘지에 새겨진 박종근의 사망 날짜는 52년 2월 17일이다.


* (만화)
2004년, 박건웅

빨치산 출신 비전향 장기수를 주인공으로 한 만화로, 빨치산 활동 당시의 모습이 중요한 내용으로 등장한다. 빨치산이 좋게 나오긴[52]하는데, 결국 다들 사살되거나 겨울 추위 속에 다 얼어죽는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국군이 좀 악랄하게 나오긴 하지만, 개념잡힌 사람도 나오고 포로 빨치산을 재미로 죽이는 부하를 가차없이 쏴죽이는 한국군 장교(네놈이 사람이냐?라고 하면서 쏴죽인다)도 나온다.

5.5. 빨치산 노래(사실)

개별 문서가 있는 노래로는 인민항쟁가, 적기가, 태백산맥에 눈내린다, 메데가, 인터내셔널가[53], 부용산[54] 정도가 있다.

이외에도 각 도당이나 부대마다 노래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자료가 부족하여 모두 서술하기는 어렵다.

● 전남빨치산의 노래


우리들은 이 강산 조국 지키는
인민의 귀염받는 아들딸이다
추움도 더움도 두려움 없이
원쑤를 용서치 않는
전남 빨치산

총에 맞고 쓰러지나
칼에 맞고 쓰러지나
정의와 평화 위해서 싸우는 우리
미제 반동 놈들아 오라면 오라
하늘 땅 우리 나라 피로 지키리

미제 반동 놈들아 오라면 오라
하늘 땅 우리 나라 피로 지키리
전남 빨치산
전남도당에서 국방경비대가 쓰던 노래를 개사했다고 전해진다. 2절은 51년 춘계공세로 많은 사상자가 발생한 것을 계기로 공격적인 가사가 되었다고 한다.

● 제주도 유격대가


한라산 깊은골짝 우리의 진지
돌각담 울타리는 우리의 성채

아 제주 빨치산은
아 조국의 자유를 지킨다


그 외에도 별도 문서가 없는 빨치산이 불렀던 노래들도 여기서 서술한다.


● 빨치산 추도가[55]


가슴 쥐고 나무 밑에 쓰러진다 혁명군아
혁명정신 따르려다 혁명전사 되었구나
만리천정 우주고혼 정처없이 떠돌다가
혁명정부 이루거든 다시살길 바라노라

공중나는 까마귀야 시체보고 울지마라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몸은 비록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있다
아아 아아아아아 아아 아아아아

● 철창의 봄(불란서의 봄, 파리코뮌의 노래)


동남풍이 불어서 포도꽃 피고
향기로운 바람은 철창을 산다
아아 불란서에 봄이 왔건만
잘 있거라 이 봄아 나는 가련다
진달래꽃 무르녹은 언덕 밑에서
순이야 잘 있더냐 고향의 마을
아아 가신님의 부름 소리에
조선이여 불러보며 울기도 했다
아네모네 꽃이 피면 가슴은 뛰고
붉은기 높이 들고 고함지를 때
아아 불란서에 봄이 왔고나
잘 있거라 이 봄아 나는 가련다

● 산지천


산지천 따라 비 내리면 남수각 아래 눈물 이네
남수각 아래 눈 내리면 산지 앞바당 눈물 이네
어디 있나요 당신 어디 있나요 당신은

당신의 몸은 타내리고 당신의 혼은 타오르고
산지천 따라 이별하듯 갈라진 나라 우리나라
어디 있나요 당신 어디 있나요 당신은

현해탄보다 더 깊은 물 임진강보다 더 깊은 물
제주바당에 물 막은 섬 당신이 없는 한라산은
어디 있나요 당신 어디 있나요 당신은

당신과 함께 노래하던 햇볕도 없이 스러져간
한라산 자락 백성들은 그 이름 언제 불리려나
어디 있나요 당신 어디 있나요 당신은

아직도 완전하지 못한 불안한 나라 우리나라
완전한 자주 통일독립 그날은 언제 오려는지
어디 있나요 당신 어디 있나요 당신은

● 이덕구


머리에 쓴 것은 도리구찌로구나
손에다 권총을 쥐고서 싸움을 나가네
누구냐 그의 이름 무섭다고
박박 얽은 그 얼굴 이 이 이덕구

덕구 이덕구

박박 얽은 그 얼굴 덕구 덕구 이덕구
장래대장 꼬심인감 덕구 덕구 이덕구
손에 권총을 들고 싸움에 나가는구나
좁쌀같은 곰보 자국 억구 덕구 이덕구
덕구 덕구 이덕구 덕구 덕구 이덕구

5.6. 빨치산 노래(추모)

빨치산 투쟁 당시 실제 빨치산들이 부르던 노래 뿐만 아니라 이후 이들을 기리는 노래도 많이 만들어졌다. 좌익 투쟁에 가치를 두거나 이승만 독재 정권에 대항한 것에 의미를 두어 빨치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는 경우도 많다.

● 지리산
박종화 곡, 가사

나는 저 산만 보면 피가 끓는다 눈 쌓인 저 산만 보면
지금도 흐를 그 붉은 피 내 가슴에 살아 솟는다
불덩이로 일어난 전사의 조국사랑이
골깊은 허리에도 울부짖는 가슴에도 덧없이 흐르는 산아
저 산맥도 벌판도 굽이굽이 흘러 가슴깊이 스미는 사랑
나는 저 산만 보면 소리 들린다 헐벗은 저 산만 보면
지금도 울리는 빨치산 소리 내 가슴에 살아 들린다

나는 저 길에 서면 분노가 인다 도청앞 금남로에 서면
지금도 짓밟는 군화발 소리 불타는 적개심 인다
불덩이로 일어난 전사의 조국 사랑이
치열했던 도청에도 비좁은 골목에도 덧없이 흐르는 길아
금남로도 광장도 굽이굽이 흘러 가슴 깊이 스미는 사랑
나는 저 길에 서면 분노가 인다 금남로 한벌판에 서면
지금도 울리는 칼빈총소리 내 가슴에 살아 들린다

● 빨치산의 밤
조국과 청춘


조국의 이름으로 오기위해
온갖 설움들고 능선넘었네
달빛받아 뿌연 겨울산에서
분노의 상처 어루만지며

하얗고 긴 눈이 내릴수록
조선의 산하 피로 물들고
역설의 이름들만 온 산하에
비명되어 새겨져 가네

밤마다 갈아온 총창을 들고서
나는 가리 내조국을 찾으러
나의 이밤도 멈출수 없다
역사의 힘찬 발걸음

모질고 모진 그 시련 넘어서
땀과 눈물이 아름다운 그곳
돌아서지 않으리 아득한 그 길에
이름도 없이 사라진대도

● 녹슬은 해방구
조국과 청춘

그해 철쭉은 겨울에 피었지 동지들 흘린 피로
앞서간 죽은 저편에 해방의 산마루로 피었지
그해 우린 춥지 않았어 동지들 체온으로
산천이 추위에 떨면 투쟁의 함성 더욱 뜨겁게산 넘어 가지 위로 초승달 뜨면
멀리 고향생각 밤을 지새고
수많은 동지들 죽어가던 밤
분노를 삼기며 울기도 했던 나의 청춘을 동지들이여
그대의 투쟁으로 다시 피워라
꿈에도 잊을 수 없는 조국해방의 약속을

● 지리산 반란의 고향(지리산 너 지리산이여)
안치환

눈보라 몰아치는 저 산하에
떨리는 비명소리는 누구의 원한이랴
죽음의 저 산
내 사랑아

피 끓는 정열을 묻고
못다부른 참 세상은 누구의 원한이랴
침묵의 저 산 지리산
일어서는 저 산 지리산
( 남겨진 상처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서)
(못다한 사랑을 목놓아 노래하라)
지리산
반란의 고향

푸르른 저 능선 저 깊은 골에
찢겨진 세월의 자욱
무엇을 주저하랴
부활의 저 산

솟구치는 대지의 거친 숨소리
눈부신 조국의 하늘
무엇을 주저하랴
투쟁의 저 산 지리산
다가오는 저 산 지리산
(남겨진 상처를 가슴에 보듬어 안고서)
(못다한 사랑을 목놓아 노래하라)
지리산
반란의 고향

6. 관련 문서



[1] 태백산맥, 소백산맥, 지리산 일대[2] 본격적으로 빨치산의 존재가 역사에 등장하는 것은 대구 10.1 사건 당시 피난민들에 의해 자생적으로 만들어진 이후이다. 스티코프 일기에 대구 10.1 사건 당시 빨치산의 존재가 나온다. 그러나 이 사건 이전부터 좌익에 대한 테러 및 정치탄압을 피해 빨치산이 된 사람들이 소수 존재했기에 정확히 언제부터 존재했다고 말하긴 힘들다.[3] 공식적인 빨치산 종식 선언은 1955년에 이루어졌으나, 미처 토벌되지 않은 소수의 개인들은 1963년까지 활동지(지리산 등)에서 숨어지냈다.[4] 사실 일제강점기에 이현상이 무장투쟁을 직접 했다는 사료는 전혀 없다. 이현상이 일한 인민전선부는 무장투쟁 담당 부서가 아니었으며 덕유산에 간 것도 요양 목적이었다. 다만 이현상도 이들과 같이 일했으니 대충 얼게가 어떻게 되는지는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크며 이를 기반으로 준비했을 수도 있다.[5] 그래서 조정래 작가가 쓴 빨치산 소재 소설 제목이 태백산맥인것이다.[6] 실제 비슷한 사례가 바로 구한말 의병이나 한국 독립군으로 실제로 이들은 각자가 활동한 지역의 지지와 지원을 얻어 존속할 수 있었다. 실제로 일본이 의병을 진압할 수 있던 건 남한 대토벌 작전으로 대표되는 지역민에게 공포를 심어 주어 의병 지원을 하지 못하게 만드는 작전을 수행하고 나서였고 만주 독립군 역시 일본군의 간도 참변으로 대표되는 지역 지지기반 제거 작전으로 인해 버티지 못하고 러시아로 떠났다가 자유시 참변을 겪고 중국 관내로 이동한다.[7] 당연히 도주하는 사람이 많았고 잡히면 탈영으로 간주해서 총살했다. 그나마 몇몇 빨치산은 불쌍해서 그냥 놓아주기도 했다고.[8] 아래에서도 서술되었듯이 분노한 지역 주민들이 국군 및 경찰 토벌대에 적극적으로 신고를 하고 그들의 거점을 알려주어 토벌을 수월하게 해버린 것 때문에 조선인민유격대의 타격은 엄청났다.[9] 나중의 일이나 한국전쟁 당시에 인민군의 만행에 그 북한을 지원했던 중국도 기겁할 정도였다. 이때의 중국군은 '민심은 승리의 지름길'이라는 등식과 공산당이 국민당에게 쫓겨 거지꼴로 도망다니면서도 결국 국공내전에서 이긴 이유 중 하나가 도망다니면서 쌓은 농민의 지지가 있었기 때문이여서 인민군에 비하면 나름 규율이 있었기에 이러한 빨치산이나 인민군의 만행에 기겁을 하는 것이 당연했다.[10] 사실 21세기에도 육군 대신 경비교도대의무소방대 등 다양한 경로가 있었지만 많은 사람들은 그런 게 있다는 존재조차 몰랐다. 뭐 21세기 초반에 싹다 병력자원 부족으로 폐지되긴 했다만 인터넷이 있는 시대에도 그랬으니 그 시절에는 평소에 쉽게 접할 수 있는 육군과 경찰에 몰릴 수밖에 없었다.[11] 전경의 설립 목적이 시위 진압이 아니라 이렇게 후방에서 무력을 사용한 치안유지를 위함이다. 이후 시위 진압 하려고 전경을 만들었나? 하는 논란과 징병대상자의 부족 문제에 전경은 결국 폐지되고, 정식 경찰 공무원이 시위 진압을 담당하게 된다.[12] 그런데 웃기게도 보통 같은 책에 빨치산에서는 배신자는 극소수라는 문장도 나온다. 예를 들자면 <빨치산의 딸>에서 “한두 사람이야 어땠건 대부분 남한 사회주의자들은 최후의 순간까지 적과 투쟁하면서 마지막 총 한방까지 적을 향해 겨누다가 전사하거나 자폭으로 자신의 생명을 거두었다.(2권 318P)”라고 나온다. 그럼 그 수많은 사찰유격대 조직은 어떻게 생겼을까? 모순이란 이럴 때 쓰는 말.[13] 게다가 이들은 산생활 경험과 함께 6.25 전쟁 이전부터 있었던 정식 경찰들, 혹은 다른 빨치산 토벌만을 목적으로 편성된 경찰들과는 경찰 상부에서 씻지 말고, 마치 같은 빨치산의 모습인 것처럼 자신들의 신분을 위장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게 무슨 소리냐면 빨치산은 산생활하면서 얻은 능력인 동물처럼 뛰어난 후각을 가지고 있어서 토벌대가 아무리 멀리 있어도 귀신같은 후각을 이용해 비누, 담배, 휴대식량 냄새 등 제대로 된 인간의 냄새를 맡은 즉시 도망쳐버린 뒤 기회를 봐서 토벌대를 공격하는 전법을 썼던 반면 토벌대는 근처의 빨치산이 도망친 후에 다시 매복하는지도 모르고 당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런데 사찰유격대는 겉보기로는 빨치산 그대로의 모습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빨치산의 후각이 무력화되어 그들에게 접근하기가 쉬웠고, 여기에 그들이 가진 산생활 경험과 전투력까지 더해지는 바람에 빨치산은 이들과 마주치는 족족 큰 손해를 입었으며, 특히 간부들의 피해가 극심했다.[14] 중국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는데 마오쩌둥이 세력을 잡기 전까지 소련 유학파들이 중국 공산당을 지휘하였는데 이들 역시 비슷하게 대도시를 공략하여 거점을 확보하려 들었으나 당연히 이들도 비슷한 결과를 맞이했다.[15] 이태의 구상에 가장 근접한 활동을 한 부대가 '남도부 부대'였다. 수십명 단위의 3개 소조로 파괴 활동만 하였지, 경찰서를 공격하거나 마을을 점령하는 연합작전은 하지 않았다.[16] 사단 개편 직전에야 1중대와 5중대가 추가된다.[17] 북한은 1960년대 이후 김일성이 사회주의 대가정론을 강조했고, 아버지 수령/어머니 당/자식 인민으로 설정된 주체사상에 근거한 가부장제를 재확인. 그래서 제도적인 성차별이 약화되는 추세인 한국과 달리 북한은 가부장제가 공고하며, 로동당의 관제 집단인 여맹(녀맹)만 여성단체로 활동할 수 있다.[18] 다만 이것은 북한이나 중화권의 이야기이며 소련의 경우 인민위원이 여성이 더 많았다. 분단된 독일도 서독보다 동독이 성문화가 자유롭고 남녀차별이 적었다고 한다.[19] <빨치산의 딸>에서 그녀의 본명이 나오자, 이태의 다음 작품인 <여순병란>에서는 그냥 본명 양봉순으로 나온다. 여담으로 출판 당시 사정 탓에 남부군에서 나오는 인명은 최고지휘관 급을 빼면 이태 본인을 포함한 대부분을 가명 처리했다. 심지어 책 출판시 그와 친했던 빨치산 출신들도 이태가 누구지? 하고 갸웃거렸을 정도.[20] 소설 <태백산맥>에서는 배경인 전남 도당에서 이지숙은 여맹위원장으로 여성 최고위직, 외서댁은 대대장으로 군사 지휘관중 여성 최고위직으로 나온다. 여맹의 경우는 당연히 여자가 지도자이고, 외서댁은 청년단장 염상구에게 강간당해 아이 낳고 산에 입산한 여인인데, 소설속이지만 여자는 거의 말단 소대장급 이상은 올라가지 못했다.[21] 그리고 포로로 잡히면... 정규군 포로 대우는 기대할 수도 없으며(어느 전쟁에서나 포로로 잡힌 여군의 경우겠지만), 생포된 여자 빨치산을 국부에 바셀린을 발라가며 윤간했다는 증언도 있다.[22] 이런 식으로 대원들의 연애를 엄격하게 금지했던 것은 19세기 중엽 중국 청나라에서 활동했던 태평천국도 마찬가지였다. 태평천국은 부부가 함께 들어와도 만나거나 성관계도 못하게 막을 만큼, 남녀 간의 연애를 엄격히 금지시켰다. 나중에는 약간 완화되기는 했으나, 미혼 남녀가 만나서 성관계를 가지다가 적발되면 모두 처형당했다. 출처: 어메이징 세계사/ 도현신 지음/ 서해문집/ 232~234쪽[23] 이런점 때문에 빨치산들이 한밤에 쳐들어와 마을주민들에게 강제로 쌀 등을 짊어지고 산까지 나르게 하면, 돌아가면 청년단들에게 끌려가 모진 고문을 당할 껄 생각하면 무서워 그냥 빨치산으로 남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 물론 빨치산의 부역하라는 지시를 거부하면 그 자리에서 반동으로 몰려 처형.[24] 이에 따라 본 문서의 빨치산 문학을 3등분할까 하였지만, 똑같이 빨치산 미화물이긴 하지만 <빨치산의 딸>처럼 사실 기록에 충실한 작품과 <녹슬은 해방구>같은 허무맹랑한 소설을 같은 범주에 넣기 어렵다고 판단되어 반공물/소설/비소설로 3등분한다.[25] 충남 도당 선전부장 노상겸 등 생존자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닌데.[26] 왜 거짓이냐면 유명한 빨치산 지도자도 아니고 듣보잡이었던 정순덕이 붙잡힌게 64년이라 그때서야 그녀의 이름이 알려질 수 있었다. 게다가 김일성의 지시로 영화가 제작은 됐는데 64년 정순덕이 체포되는 바람에 상영되지 못하고 영화 필름은 창고로 들어갔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도 본사람이 없다고... 거짓의 스멜[27] 김성동은 정순덕이 교도소에 있을때 면회해서 글을 쓰게 되었다. 그녀를 정 장군이라고 높이며, 관련된 농민문학 성격의 책을 쓸려고 했는데, 출소 후 음성 꽃동네로 입소하는 바람에 면회를 하지 못해서 미뤄지고 있었다. 정충제라는 놈이 친척을 사칭하고 면회하여 먼저 책을 내게 되었다고 비난한다. 참고로 이 정충제는 후에 문현동 금 사기사건을 벌인 자이기도 하다. <역사를 찾아서>는 정성녀라는 가명으로 나오며 내용 자체도 사실관계가 매우 틀리다. 즉 정순덕에게 모티브를 딴 소설에 지나지 않는다.[28] 한홍구 교수는 빨치산의 딸을 추천하였다... 고 하는데 정확한 워딩은 “(이태의) <남부군>은 빨치산을 비인간의 영역에서 인간의 영역으로 끌어들였지만, 그 인간은 극히 나약하고, 감상주의적이며, 빨치산 활동이 잘못되었다고 반성하는 전향자들이 중심(사학적 평가일 뿐, 이분법적인 호오를 따진 것이 아니다.)”이었고,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 당시 빨치산들의 생각을 비교적 충실히 담아냈으나 활동 전모를 밝힐 “체계적인 정사(正史)는 나오지 않았다”고 썼다.[29] 주로 북로당 계열의 지도부를 비판한다. 남로당 계열에게는 한없는 부드러운 시선.[30] 51년 10월에 가서야 81사단 정치위원 이봉갑의 보증으로, 로동당원이 된다. 이 직전에는 이봉갑의 연줄로 81사단 정치부 기자가 되어 간부대우를 받게 된다.[31] 문현동 금 사건 루머를 퍼뜨린 자이기도 하다.[32] 소설 <남부군>에서는 전북도당 최태환을 외팔이 부대장으로 묘사하는데, 소설 <남도 빨치산>에 나오는 외팔이 부대장은 전남도당 산하 14연대 반란군 출신으로 팔에 총상을 입은 남태준이다. 전남도당 의무과장은 진짜 외팔이이다. 당시 외팔이가 많았나보다.[33] 해당 항목에서도 나오지만 이현상을 사살한 것으로 공식 인정받은 것은 차일혁 총경의 사찰유격대이다. 그러나 차일혁의 자사전에서도 사찰유격대는 이미 “죽은 이현상의 목만 잘라 온 것이며, 5사단 수색대가 이현상을 사살하고 시체를 회수 안 했다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그럼 이현상은 누가 죽인 것일까?” 하는 의문을 표시하고 있다. 두 책은 같은 해에 나와 서로 참고했을 가능성은 낮다. 진실은 저 너머에.[34] 소설 <남부군>에서는 이옥남이 안나오지만, 이후 작품인 <천왕봉>에 의하면 자신이 전북 도당에서 남부군으로 소속 변경되었을 때 재귀열병을 앓은 직후라 상태가 안좋았는데, 그가 회복할 수 있게 도와준 사람이 이옥남이었다고 한다. <빨치산의 딸>을 통해 그녀가 살아 있다는 것을 알게 되어 기뻤다고 한다. 이태의 또다른 책인 <여순병란>에서는 이정순이라는 이름으로 몇줄 나온다.[35] 책 출판당시 기사를 보면 전남 도당 조직부부장 혹은 전남 도당 인민위원장이라고 나와있기도 하다. 실제 전남 인민위원장 김정수는 군경의 1차대토벌작전에서 사살되었다.[36] 2년 후 5사단 56연대 수색대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사살하는 대공을 세운다.[37] 이책을 참고하여 집필한 <이현상 평전>에서는 도저히 말이 안된다고 생각했는지 국군포로 36명이라고 나온다.[38] 작가도 마지막 빨치산 사단장이라는 것에 흥미를 갖고 황의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즉 황의지에 대한 책을 쓰기 위한 서비스 차원에서 ‘장수 황씨’에 관한 책 1권을 내줬다고 봐도 된다.[39] 이 부분은 시베리아로 끌려간 조선인 일본군 이야기인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와 상당히 비슷하다. 다만 그 책과 달리 황의지는 포로 생활시 소련에게 상당히 호감을 가졌다. 일본군은 조선인 병사들을 무자비하게 두들겨 팼는데, 오히려 소련군은 포로들에게 욕만 하지 폭행이 없었다. 여기에 능력에 따라 대우해주고 월급도 줬다.[40] 포로생활을 마치고 조국으로 돌아왔는데 경로상 지나친 북한에서는 환대해주었고, 특별히 남쪽으로 못가게 하거나 설득하는 것 없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길 안내까지 해주었다. 그에 비해 남한에서는...[41] 월북 당시 초급중학교 3학년 중퇴라고 나오는데 현재의 중학교 3학년에 해당한다. 따라서 당시엔 아직 10대.[42] 이는 이태의 남부군에서도 종종 언급되는 일로 빨치산 내부에서도 인민군 출신인 자들은 주로 요직을 차지하고 좋은 대접을 받았다. 반대로 이태같이 본디 남한에서 활동하다 빨치산이 된 경우에는 은근한 차별과 괄시를 받았다.[43] 남조선로동당의 중심인물이자 조선로동당 초대 정치위원[44] 당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이자 외무상[45] 주로 사령부 소속으로 북한과의 통신을 시도하거나 라디오 방송을 수신했다.[46] 매 끼니마다 고깃국이 나온다![47] 대북삐라를 제작하는 일을 맡았다.[48] 빨치산 부분은 남부군의 이태가 출판사에 보낸 원고를 사전에 자료 수집차 얻어 읽었기 때문이다. 그 바람에 남부군보다 먼저 나왔지만 남부군에 나오는 자료를 바탕으로 집필할 수 있었다.[49] 노동운동가 출신 작가. 고등학생 시절부터 유신 반대운동에 가담했다가 1976년 반 유신 학생시위를 주도하여 국민대학교 법학과를 제적당했다. 이후 노동운동에 몸담다가 1980년 통일사회당 노동국장으로 미스유니버스대회장 폭파미수 사건에 연루되어 2년 6개월을 옥살이한 바 있으며, 민통련 인권부장으로 활동했다. 1988년과 1992년 두 차례 총선에 출마, 낙선했다. 강남구 일대에서 학원업에 종사하던 중 충주로 낙향, 민족문학작가회의 활동 등 작가 활동에 전념하다 1996년 12월 26일 고문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났다. 2009년 미스유니버스대회장 폭파미수 사건이 재심되어 계엄법 위반에 대해 무죄를 선고받았다.[50] 싸우기는 무섭지만, 빨치산 간부의 상징인 권총을 얻어 실적을 올리고 싶어서였다.[51]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종근이 죽은 시점은 확실하지 않다. 대충 52년 초중반은 맞는데 지구당 개편 이전에 사망했다는 설과, 개편 직후 사망했다는 설로 갈린다.[52] ─하지만, 여기서도 민간인을 약탈하는 악랄한 빨치산도 나오는데 동지들을 아끼던 빨치산 대장에게 총살. 이 대장은 개념잡히고 부하들을 아끼는데 추위와 굶주림 속에서 하나둘 죽어가는 부하들을 보며 차라리 항복하라고 하고 자신은 마지막까지 따르던 1명과 같이 그냥 추위 속에 얼어죽는 길을 고른다.[53] 당시에는 일본 공산당 버전을 한국어로 번역한 북한 버전을 불렀기 때문에 지금 한국에서 부르는 인터내셔널가와는 다르다.[54] 빨치산 노래는 아니고 빨치산들이 자주 불렀을 뿐이다.[55] 항일투쟁 당시부터 널리 불려진 독립군 추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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