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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사고 仁川 仁峴洞 火災 事故 Incheon Inhyeon-dong a pub Fire Accident | ||
발생일 | 1999년 10월 30일 토요일 오후 6시 55분 | |
발생 위치 | 인천광역시 중구 인현동 27-41 (현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83번길 10) | |
유형 | 화재(실화) | |
원인 | 지하 노래방 아르바이트생의 담뱃불로 인한 실화 | |
인명피해 | 사망 | 56명 |
구조 | 78명 | |
재산 피해 | 불명 | |
영향 | 인천 도심의 이동[1] 동인천 상권의 쇠퇴[2] |
[clearfix]
1. 개요
1999년 10월 30일 토요일 오후, 즉 저녁쯤인 6시 55분에 인천광역시 중구 우현로83번길 10(인현동 27-43)에 있던 무허가 불법 주점 '라이브2'에서 일어난 대형 화재 사고.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가 일어난 후 4개월도 안 된 시점에서 일어난 또다른 대형사고이자 사망 56명, 부상 78명의 대참사로, 정부 수립 이래 3번째로 피해가 큰 대형 화재 사고였다.[3]해당 주점은 인천시내 번화가 한가운데에서 불법 무허가 영업 및 미성년자 주류 판매를 버젓이 자행하던 곳이었다. 정상적이라면 곧장 영업 정지 처분을 받고 폐쇄되어야 도리이나, 해당 점포 주인[4]이 지역 공무원과 경찰을 뇌물을 찔러가며 회유하여 영업을 묵인해 주고 있던 상태였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주점은 인천 지역 일대의 중고등학교 앞에서 버젓이 전단을 돌려 가며 점포 홍보를 하고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불법 주류 판매를 하고 있었으나, 미성년자 주류 판매 신고가 들어와도 해당 점포와 유착하던 경찰들은 제대로 현장에 출동하지도 않은 채 신고를 묵살했다고 한다. 이러한 주점 사장의 비리와 탈법, 지역 공권력의 부패와 묵인, 방조로 인해 당시 인천 번화가 한복판에서 '학생들한테도 술을 막 파는 집'으로 소문이 빠르게 퍼지며 인천 일대의 학생들이 교복을 입고도 버젓이 드나드는 명소가 되었고, 이는 결국 참사 당시 대부분의 희생자들이 중고등학생이 되는 결과를 낳았다.
인천 최대의 유흥가였던 동인천역 인근의 구도심 상권은 이 사고로 인해[5] 단순히 상권 위축 수준을 넘어 도심 지위가 구월동과 관교동으로 완전히 넘어가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이 타격은 경인선으로 나란히 연결된 제물포역을 거쳐 주안역[6]과 동암역의 상권에도 상당한 악영향을 끼쳐 결국에는 세 지역 상권이 같이 망하다시피 하는 결과를 낳았다. 다른 도시들의 원도심과 다르게 인천 원도심에 해당하는 중구와 동구가 현재 무척 피폐하고 발달이 덜 되고 낙후된[7][8]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사고 상황
문제의 인현동 '라이브2호프'는 3층짜리 상가 건물로, 지하 1층은 노래방, 지상 1층은 고깃집, 2층은 호프집, 3층은 당구장이었다. 당시 지하 노래방은 내부 수리 공사 중이었는데, 이 곳에서부터 불이 나 위로 점점 올라오기 시작했다. 화재의 원인은 노래방에서 일하던 10대 남자 아르바이트생들의 담배.[9] 불은 빨리 진압되었으나, 화염과 유독가스가 지상 입구에서 지하 노래방을 잇는 벽의 소재를 타고 3층까지 올라간 것이 문제였다. 화염과 가스가 출입구를 가득 채웠으니 위층에서는 출입구를 통해 내려오는 건 불가능해진 상태였다.다행히 1층은 지상과도 곧바로 연결돼 있고 현관도 발화 지점의 반대 방향에 있었는데다 직원들과 손님들이 화재를 금방 알아채고 일찌감치 빠르게 다 대피해 인명피해가 전혀 없었고, 3층 NBA 당구장에 있던 사람들도 창문을 깨고 뛰어내리면서 부상자가 속출했을지언정 사망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모든 사망자들은 2층 호프집에 집중되었다.[10]
당시 호프집에는 마침 학교 축제가 끝난 뒤 뒤풀이를 하던 인천 지역 고등학생들이 꽉꽉 들어차 있었다. 사망자의 대부분도 이들이었다.[11] 이 때는 10월 말이라 인천 지역 고등학교들의 축제가 몰려 있던 시즌이었는데, 축제가 끝난 직후라 모두 학생임을 드러내는 교복을 입고 있었다. 이 때문에 사고 이후 미성년자들이 술집에 대놓고 버젓이 막 출입한 것에 대해서 계속 질타가 나왔다.
특히 사고가 난 동인천 권역에는 여러 학교들 주변에 유흥가라는 불건전한 업소가 너무 많았던 것도 문제였다. 당시 뉴스 동영상을 보면 알겠지만, "마땅히 놀 곳이 없다"[12]며 한탄하는 해당 지역 모 학생의 인터뷰도 있었다.
사고 당일 SBS 8 뉴스에선 한수진 앵커가 말미에 속보 형식으로 먼저 보도했고, 이후 KBS 뉴스 9와 MBC 뉴스데스크에서도 다루게 됐다.
2.1. 비상구가 없었나?
만약 '즉시 사용 가능한' 비상구가 있었다면 이 정도로 심각한 규모의 사망자가 나오지는 않았을 것이다. 사실 불 자체는 30분 만에 진압되었고[13] 모두 비상구로 탈출하는 것만 남은 상태였는데 있던 비상구를 베니어 합판으로 막아 버렸다. 또 호프집이 2층이었던 만큼 창문에서 뛰어내린다면 어딘가가 부러질지언정 죽지는 않았겠지만 내부 수리를 하면서 창문을 개폐식이 아닌 통유리로 바꿔 버렸던 데다 간판으로 쓰려고 모두 판자를 붙여 놓은 상태였다 보니 그 방법을 택하는 것 역시 어려웠다.[14] 보다 못한 건물주 측에서 이를 지적했지만 묵살하였다고 한다.거기다가 호프집 매니저[15]의 정신 나간 조치로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화재로 고등학생들이 빠져나가려고 하자 호프집 종업원들이 대왕코너 화재사고처럼 "돈 내고 나가라."며 유일한 출입구를 막은 것이다. 출입구에서 종업원들과 학생들 간의 실랑이가 벌어지는 사이 불길은 치솟아 결국 출입구로 대피할 수 없게 되었고[16] 결국 유독가스에 노출된 학생들은 대부분 순식간에 질식사하였다.[17][18]
당시 화재가 발생하자 비상구등이 켜져 학생들은 유독가스에 질식되어 죽기 일보 직전인 상황에서 필사적으로 비상구등이 켜진 쪽으로 향했으나 알고 보니 그 비상구등은 가짜였고 비상탈출구인 줄 알았던 곳은 화장실이었다. 따라서 화재 구조 당시 화장실과 그 앞에 시신들이 쌓여 있었다고 한다.
2.2. 내부 구조 문제
당시 호프집 내부는 탁자와 의자가 꽉꽉 들어차 있었고 50여 평 정도 규모의 공간에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앉아 있었으며 사람이 돌아다닐 만한 통로는 겨우 한 사람이 빠져나갈 만한 아주 좁은 수준이었다.[19] 게다가 유일한 창문은 석고보드로 막아 놓아 창문으로 탈출할 수 없었으며 비상구표식은 화장실 문 쪽에 붙여 놓았다. 계단 역시 폭 1~2m 정도의 아주 좁은 계단이라 겁에 질려 우왕좌왕하는 사람들 때문에 완전히 정체 상태였으며 불이 나자 계단이 굴뚝 역할을 해 연기를 위층으로 올려보냈다.내부 구조물들 역시 주로 인화성 물질로 만들어져 있던 탓에 불이 붙으면서 치명적인 유독가스를 뿜어냈다. 사고 후 경찰의 부검 결과 밝혀진 사망자 대부분의 사인도 유독가스로 인한 질식사였다.[20] 일부 사람들은 환풍구를 통해 탈출하려는 시도를 하기도 했는데 그로 인해 시신들이 층을 이룰 정도로 꽉꽉 메워져 있었다고 한다.[21]
게다가 처음 화재가 시작된 지하 노래방 천장에 설치된 비상 소화 장치인 스프링클러도 수리한다는 명목으로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스프링클러만 제대로 달려 있었어도 초기 진화가 가능했을 것이다.
이 업소는 1999년 3월에 안전 기준 미달로 적발되어 중구청으로부터 영업장 폐쇄 명령을 받은 상태였으나 화재 당시 업소 주인[22]이 인수하여 무허가 영업을 하고 있었다. 뇌물로 공무원들을 매수했기에 가능한[23] 불법 영업이었고 사고 이후 뇌물을 받은 공무원들 역시 구속되었다. 사장의 집에서 임대료 없이 전세를 살고 있던 사람도 있었는데 그 또한 직위가 경위인 경찰이었으며 전경을 동원해서 참사가 발생했던 술집의 보수를 돕기까지 했다.
3. 수사 및 처벌
해당 업소 주인은 당시 노래방, 호프집, PC방, 콜라텍 등 운영하던 가게만 8곳이었고, 사고 당시 발화점이었던 지하노래방도 이 양반이 운영하던 곳이었다. 업소 주인은 인근 학교 교문 앞에서 전단지를 배포하고 자신의 가게를 이용하면 자신이 운영하는 다른 가게(이를테면 PC방) 이용권을 지급하는 등 노골적으로 청소년들을 타겟으로 영업을 했던 것으로 밝혀졌다. 이로 인해 청소년에게 술을 판다는 신고가 많이 접수되었으나, 당시 업소 주인에게 뇌물 등을 상납받은 경찰이 제대로 단속하지 않아 계속 영업이 가능했고, 심지어 업소 주인이 운영하던 업소 8곳 모두 무허가 업소였는데, 이 또한 관할 구청 공무원들에게 뇌물을 주고 공무원들이 눈감아 주었기에 가능했다.당시 같은 건물 지하층 노래방은 인테리어 공사를 하고 있었는데, 사고 당일은 페인트 작업을 했던 날이었다. 그날 작업을 마친 인부들이 저녁이 되자 뒷정리 후 퇴근하려 했는데, 주인이 인건비를 아껴볼 요량으로 그냥 두고 가라고 하였고, 뒷정리는 노래방 알바생들에게 지시하였는데, 알바생들은 바닥 등에 떨어진 페인트 자국들을 지우기 위해 인부들이 두고 간 시너를 뿌려가며 청소하고 있었는데, 이후 지하실의 특성상 환기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담배불로 인해 발화된 것으로 밝혀졌다. 이 사고로 건물 지하 노래방 사망 1명, 1층 식당 사망 0명, 부상 0명[24], 2층 호프집 사망 56명, 부상 62명, 3층 당구장 사망 0명, 부상 17명[25]의 인명피해가 집계되었다.
사고 수습 후 피해 학생들의 유가족들에게는 정부로부터 보상금이 지급되었다고 하며[26] 이후 이루어진 재판에서 업소 주인과 매니저는 법원으로부터 업무상 과실치사 혐의로 각각 징역 5년과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노래방 인테리어 시공업자[27], 업소 주인으로부터 상납을 받고 결탁했던 비리 공무원들과 경찰들은 아무도 실형을 선고받지 않았다.
4. 기타
사고 후 인천시 측은 '청소년 보호육성 종합계획'을 내놓은 바 있었고,# 2004년 사고 지점 인근에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이 생기면서 위령비가 건립되었다.[28] 참고로 2022년 최신 로드뷰에는 위령비 앞에 쓰레기가 쌓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2000년 1월 30일 도원실내체육관에서 합동장례식이 치러지고#[29] 시신은 인천시립화장장(현 인천시립승화원)에서 화장되어 인천 앞바다에 유골이 뿌려졌다.
1990년대까지 인천의 중심지로 잘 나갔던[30] 인현동은 이 사건으로 인해 도심으로서의 상징성을 관교동·구월동에 넘겨줬고 상권도 몰락했다.[31][32]
만악의 근원인 호프집 사장 정성갑은 사고 직후 도주했다가 며칠 후에 자수했는데도 불구하고 변호사 타령이나 하거나 뇌물 같은 건 주지 않았다는 등 당당한 태도를 유지해 사방팔방에서 어그로를 끌었다. 5년간 교도소에서 복역한 후 CCM 가수로 변신하면서 교도소 등을 돌며 찬양 사역을 하고 있다는 기사(댓글 달린 기사)가 2007년에 보도되면서 피해자들과 대중들을 다시 분노케 했다. 후술된 2014년 기사에 따르면 그래도 몇 년간은 공연 때마다 자신의 과오를 반성하는 발언을 해 왔긴 한 듯. 물론 이와 별개로 분노의 반응은 당연하며 이 정도로 면죄부를 받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CCM 가수가 된 주인과 화재 현장에서 돈 내고 나가라고 입구를 막았다가 혼자 도망친 자는 별개의 인물이니 혼동하거나 왜곡하지는 말 것. 뭐 이놈이나 그놈이나 그게 그거지만. 2013년까지는 꾸준히 활동한 모양이나 이후 행적은 불분명하다. #
호프집 주인(당시 34살)은 인근에서 '청년 재벌'이라고 불릴 정도로 그 동네에서 사업을 엄청 크게 하던 사람이었는데, 사고가 난 호프집 이외에도 그 호프집 길 건너 맞은편에 있는 노래방, PC방, 콜라텍 등 여러 개의 사업장을 운영하고 있었다. 이 사람네 업장만 돌아도 유흥이 완벽하게 해결된다는 얘기가 있었다. 하지만 이 사고로 인해 나머지 사업도 같이 몰락했다. 이게 인과응보인 게 사고가 난 호프집에는 '내부 수리 중'이라는 팻말을 걸어 놓고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하고 있었다. 이렇게 미성년자에게 술을 판매하고 있어서 그동안 청소년보호법 위반 등의 혐의로 10번 이상 입건되었으나 입건만 되고 처벌은 받지 않았는데 이 때문에 이 사람이 혹시 조직폭력배 내지는 경찰의 비호를 받고 있는 게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들이 생겼다.[33] 참사 5주기 때인 2004년 <서울신문> 기사에선 여전히 잠적 상태이며, 이들은 2002년 1월 인천 중구청 측이 제기한 구상금 청구소송에서 20억원을 배상하라고 판결받았으나 뚜렷한 재산이 없어서 배상을 못한 정황이 나왔다.
반면 참사 당시의 건물주는 건물주로서의 도의적인 책임을 지고 매번 학생교육문화회관 앞 위령비에 가서 피해자들의 넋을 위로해 주고 있다. 건물주 본인도 화재 당시 3층 당구장에서 뛰어내려 전치 3개월의 부상을 입었으며 친구의 조카도 이 참사로 희생되었다고 한다.
이 사고의 피해자 중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곽은희 씨는 이후 2000년에 방송된 그것이 알고싶다-화상 그 후 편에 등장하여 화제가 된 적이 있다. 한동안 공부를 위해서 안면 성형수술도 하지 않은 채 학업에 전념하여 일리노이 주립대학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귀국한 것으로 알려졌다. 이 방송에서 곽은희 씨는 얼굴을 드러내고 생활하면서 화상 환자들은 전염병을 가진 사람이 아니니 노골적으로 피하지만 말아 달라고 호소했다.[34]
2007년 2월 20일에 공개된 당시 신인 가수 SAT의 '이게 나예요'[35] 뮤직비디오는 이 사건을 소재로 만들어졌으며 호프집 장면 이후에 나온 내용은 모두 실제 있었던 일이었다고 한다. 업타운이 동년 12월에 발표한 노래 'UPT Paradoxxx'에 이 사건을 비판하는 내용이 등장하였으며 김금희의 소설 '경애의 마음'은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하였다.
이 사건이 1981년 인천직할시(현 광역시)가 승격된 이래 인천 지역의 최악의 인명사고이기도 한다. 2위는 9명이 숨지고 6명이 다친 세일전자 화재이며 번외로 2002년에 있었던 북성동 여인숙 화재 및 매몰 사고와 2015년 강화도에 있었던 캠핑장 화재 사고도 있는데 당시 사망자는 각각 6명, 5명으로 기록되었다.
사고 당시엔 미성년자 주제에 감히 대놓고 호프집에 갔다는 이유로 학생들에 대해 예의가 없다느니, 자업자득이라느니 등의 여론도 많았다.[36] 이에 인천시내 15개 고등학교의 학생 대표들이 이러한 여론 및 교육계, 기성세대에게 항의하는 성명서를 만들고 토론회 등을 열려고 했으나 인천광역시교육청은 이를 저지했다.
미성년자의 음주 및 주점 출입은 21세기에도 시선이 곱지 않지만 이 당시 기성세대들이 오히려 청소년들이 건전하게 즐길 수 있을 만한 문화시설을 세우는 데 관심이 있었다면 이렇게까진 되지 않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인천in 기사)
당시의 사회 분위기상 예의 바르게 행동하고 공부에만 집중하는 것이 학생의 본분이라고 여겨졌고 그 이외의 오락실이나 PC방 등의 유흥은 거의 용납받지 못했으며 2020년대에 비하면 시선이 상당히 곱지 않았다.[37] 만약 이 당시에 청소년을 음주, 흡연, 성폭력 등의 위험에 노출되지 않을 만큼 건전한 여가시설들을 여럿 세워 주거나 기성세대들이 적극적으로 건전한 청소년 행사들을 유치시키고 진행했다면 이렇게까지 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편 사고가 발생한 상가 건물은 인천 중구청에 구상권 청구 명목으로 가압류된 상태였다가 건물주 측이 1억원을 들여 소방시설 및 비상구 보강 등 수리를 거쳐 2000년에 영업을 재개했다. 파란 건물이 당시 사고가 났던 건물이며 그 건물 2층이 당시 사고가 났던 호프집 자리다. 사고 당시 손님들이 주먹으로 유리창을 깨고 탈출했던 3층 NBA 당구장은 사고 이후에도 한동안 같은 이름으로 여전히 건물주가 직영하며 계속 영업하다가 2013년 4월 폐업하였다. 2층은 위 2004년 <서울신문> 기사를 토대로 하면 2002년 7월 건물주의 아들이 노래방을 새로 차렸고, 청소년들이 많이 드나들던 곳이라 청소년룸도 같이 차렸으나 몇년 후 폐업했다. 1층에 있던 고깃집은 사고 몇달 후에 다시 차렸으나 얼마 후 분식집이 들어서다 2002년 돈까스집, 2014년 캠핑고기집, 2015년 연어요리집, 2017년 술집, 2023년 라운지펍 등으로 가게가 몇 번 바뀌었다. 지하 1층 쪽은 2004년 극단 '놀이와축제'가 소극장 '씨알'을 열었으나# 이마저도 2013년 문을 닫았다.(전후 내용들은 2000년 인천일보 기사, 2014년 경향신문 기사, 2015년 인하프레스 기사, 네이버 거리뷰 참조)
2000년에 인천시 측이 해당 상가 건물을 청소년 문화공간으로 조성할 것을 요청하면서 건물주 측도 당시 시가 14~15억을 쳐 준다면 이를 넘길 뜻이 있다고 했으며 이조차 어려울 경우 가연/난연재를 쓰지 않는 업자들에게 넘기겠다고 밝혔다. 단, 청소년 문화공간 조성은 상권 침체를 우려하는 주변 상인들의 반발 등으로 사실상 백지화 상태.
2023년 거리뷰 최신 시점 기준으로 1층엔 요리주점이 있고, 2층은 현재는 공실(空室)이며 3층은 신학대학이 있다. 주변을 보면 노래방도 PC방도 다 있고 유흥가로서의 기능은 계속하는 것으로 보이나 성인도박장이 제법 들어선 풍경을 보았을 때 상권이 좀 더 어두운 방향으로 침체되었음을 시사하는 풍경이기도 하다.
2019년은 참사 20주기가 되는 해[38]였지만 유가족들은 10월 30일 인천 중구청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연안부두에서 팔미도를 가는 유람선에 탑승해서 추모 의식을 치러야 했다는 안타까운 소식이 전해졌다. 당초 유족들은 30인승 배를 지원해 줄 것을 요구했지만 중구청은 자체 행정선이 없어 인천시에 지원을 요청했는데 30인승 이상 행정선은 어로 단속 때문에 지원이 불가해 11인승 배만 줄 수 있다고 해서 벌어진 일이었다고 한다. #
2019년 11월 참사 20주기를 맞아 오마이뉴스에서 특별기획 기사들을 냈다.
- ① "사고 나면 언제나 힘없는 사람들이 희생양" 젊은이 57명 앗아간 참사... 학교는 죽은 아이들을 퇴학시키려 했다
- ② 이재원 유족회장 "인현동 화재 참사로 기억해야" 질식사한 내 아들... 국가는 20년을 침묵했다
- ③ 눈물의 배삯 12,000원 "아무리 그래도 이건 아니야" 그 부모들은 왜, '뽕짝 춤판' 옆에서 오열했나
- ④ 고 이지혜양 어머니 "알바생이라며 보상에서 제외" 아르바이트 첫 날 죽은 열여덟 내 딸... 나라가 두번 죽였다
2020년 넷플릭스 드라마 보건교사 안은영에 이 사건을 모티브로 한 설정이 있다. 은영이 학생일 때 일어난 사건으로 대사로만 언급되지만 화재 당시 처참한 모습으로 죽은 선배들이 은영의 눈에 보였다고 한다.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로 아들[39]을 잃은 전 여자 하키 국가대표 김순덕[40]은 안 그래도 정부의 무책임한 태도에 환멸을 느끼고 있었는데 이 사건까지 터지자 '이 나라는 달라질 게 없다. 어린아이 하나 지키지 못하는 이딴 나라에서 내 자식을 키우지 않겠다.'며 훈장을 반납하고 뉴질랜드로 이민을 가 버렸다. 15년 후 청해진해운 세월호 침몰 사고가 터지자 '여전하다. 우리 때와 달라진 게 없다.'는 씁쓸한 비난을 하기도 했다. 시간이 그렇게 많이 흘렀는데도 망가진 외양간을 전혀 고칠 생각도 안 하고 거기서 계속 소를 키우고 있으니 소가 다치거나 병들어 버린 셈이다.
2022년 4월 7일, SBS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이 사건을 다뤘다. 방송에서 나온 생존자 및 유족들은 호프집을 둘러싼 좋지 못한 인식 때문에 사건명에서 호프집이란 단어를 떼 달라는 부탁을 했다. '어떻게 학생이 호프집에서 술을 마시냐', '죽어도 싸다' 등의 폭언까지 무차별적으로 들었다고 한다.[41] 심지어 유가족들이 책임자의 처벌과 재발방지 대책 마련을 촉구하는 시위를 하자 자식을 팔아 돈 벌려고 한다며 비난하는 몰상식한 이들도 있었다고 한다.
상술된 씨랜드를 다룬 12월 9일 자 방송에서도 짤막하게 언급된 바 있다. 학생이 술을 마신 것이 떳떳하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그것이 죽을 죄는 결코 아니다. 위에서도 언급되다시피 그 당시엔 청소년들이 모여서 건전하게 놀 수 있는 곳이 없었다. 무엇보다 해당 참사는 업소 주인의 탈법과 이를 관리해야 할 공권력의 부패가 결합된 것이 주 원인이니만큼 피해자에게만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반드시 사라져야 할 것이다.
5. 유사 사례
아래 사건들은 유흥주점 화재로 청소년들이 사망한 참사들이다.- 대구 향촌동 디스코텍 화재사고 (1983. 04. 19.) - 25명 사망, 67명 부상.
6. 관련 자료
- 인천미래기억채집: 1999 인현동 화재참사 기억(영상물) - 홍례문문화연구소. 2023.
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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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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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0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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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9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99년 10월 30일56 인천 인현동 호프집 화재 참사 1999년 6월 30일23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 1998년 10월 29일27 부산 범창콜드프라자 화재 1998년 7월 31일~8월 1일103 1997년 9월 3일 65 21 베트남항공 815편 추락 사고 1997년 8월 6일 228 대한항공 801편 추락 사고 1996년 7월 26일20 철원 군부대 산사태 1996년 4월 4일21 양평 버스 추락 사고 1995년 8월 21일37 경기여자기술학원 화재 1995년 6월 29일502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1995년 4월 28일101 1994년 10월 24일29 충주 제5호 화재사고 1994년 10월 21일32 성수대교 붕괴 사고 1993년 10월 10일292 서해훼리호 침몰 사고 1993년 7월 26일68 아시아나항공 733편 추락 사고 1993년 6월 10일20 연천 예비군 훈련장 폭발 사고 1993년 4월 19일34 논산 정신병원 화재 1993년 3월 28일78 1993년 1월 7일28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 1992년 10월 22일28 대양하니호 침몰 사고 1991년 11월 3일22 인제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11월 4일21 소양호 버스 추락 사고 1990년 9월 1일25 영동고속도로 섬강교 버스추락사고
- [ 198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89년 9월 17일24 전북 모래재 버스 추락 사고 1989년 7월 27일79 대한항공 803편 추락 사고 1988년 3월 25일22 안양 봉제공장 화재 1987년 11월 29일115 대한항공 858편 폭파 사건 1987년 8월 29일32 오대양 집단자살 사건 1987년 6월 16일29 극동호 유람선 화재 사건 1986년 7월 30일21 고창 거룻배 전복 사고 1985년 1월 11일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1984년 3월 24일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38 부산 대아호텔 화재 사건 1983년 10월 9일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 197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79년 10월 27일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1974년 11월 3일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1972년 8월 1일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 196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69년 9월 17일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1968년 10월 30일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41 서문시장 화재 1966년 1월 18일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140 연호 침몰 사건 1962년 9월 7일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62 부산 국제고무공장 화재 1960년 1월 26일31 서울역 압사 사고
- [ 195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59년 7월 17일67 부산 공설운동장 압사 사고 1957년 2월 22일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66 태신호 화재 1955년 3월 2일42 부산역 열차 화재 1953년 11월 27일29 부산역전 대화재 1953년 1월 31일56 오산 건널목 추돌 사고 1953년 1월 25일66 행운환 침몰 사고 1953년 1월 9일330 창경호 침몰 사고 1952년 11월 16일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30+ 제13호 침몰 사고 1950년 6월 30일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 1940년대 ]
- ||<tablewidth=100%><tablebgcolor=#fff,#1f2023><width=33%>발생일
<colcolor=#000>사망 사건명 1949년 10월 5일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1946년 10월 22일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549~,000+우키시마호 사건
[1] 일명 동인천 지역인 인천광역시 중구 동인천동 일대에서 남동구 구월동과 부평구 부평동 일대로 옮겨갔다.[2] 1997년 외환 위기로 쇠퇴의 조짐을 보이던 동인천 상권은 이 사건이 결정타가 되어 완전히 망했고, 인천축현초등학교 등 동인천 지역의 여러 학교들이 연수구, 부평구 일대로 이전하며 젊은 사람들 또한 줄어들었다. 2010년대 후반 수인선 전철의 완전 부활과 동인천 일부 지역의 재개발이 논의되고 실제로 몇 군데 진행되며 그나마 나아졌다지만 전성기 시절에 비하면 백분의 일도 안 되는 수준이다.[3] 1위는 대구 지하철 참사, 2위는 대연각 화재사건이다. 대구 지하철 참사가 이동수단 사고로 따로 분류될 경우 대연각호텔 화재는 건축물 화재 관련 인재 1위가 된다.[4] 호프집 이외에도 다양한 업소를 인근에 소유, 운영하며 청년재벌로 불렸다고 한다.[5] 유일한 이유는 아니다. 또 다른 유력한 이유는 인천 지하철 1호선의 개통.[6] 사실 주안 쪽은 그 전에도 내리막의 조짐은 있었지만, 사고 이후 나머지 두 곳과 달리 급격하게 추락했던 것은 아니다. 동인천 상권을 찾던 사람들이 사고 후 몇 년간 일시적으로 주안에 몰리기도 했는데, 인프라와 포텐이 그 일시 수요에 미치지 못해 다시 몇 년간 내리막을 타서 한순간에 몰락했던 것이다. 다만 주안역 상권은 인근 구축 아파트들의 재개발과 자체적인 상권이 부실했던 서구와 연결되는 인천 도시철도 2호선의 개통과 재개발의 영향으로 점차 재도약 하고 있으며, 현재에도 동인천역과 동암역 상권보다는 상황이 상대적으로 나은 편이다.[7] 다만 중구는 본토 한정이다. 영종도는 인천국제공항과 공항신도시 개발의 영향을 받은 지역인 만큼 섬 지역만 따로 영종구로 분구하자는 의견까지 거론될 정도로 상황이 완전히 달라졌다. 지금은 그나마 여러 오래된 건물들이 재건축되면서 많이 나아진 상황. 반면 인접한 동구가 피해가 가장 심각했는데, 사고 이전인 1994년에 발표된 '동구통계연보'에는 인구가 10만명대를 유지하고 있었으나, 사고 이후 몰락이 가속화되어 지금은 절반인 6만 명밖에 남지 않았다. 웬만한 인구 적은 시군구들도 이렇게까지 인구가 훅 떨어지진 않는다. 다시 말하지만, 고령화와 저출산 현상이 일상인 지방 시골도 아니고 대도시 자치구의 현주소가 이렇다. 이후 2026년 중구 원도심과 동구는 영종구 분구와 함께 제물포구로 통합 개편될 예정이디.[8] 비단 중구와 동구 뿐만 아니라 원래 인천은 서부는 발달이 덜 되고 중노년층의 인구가 많은 반면 동부는 발달이 많이 되고 젊은층의 인구가 많다. 다만 서부 중에서도 서구는 현재는 많이 발전한 것은 인구도 많이 늘어서 2026년 7월 1일 부로 검단 쪽이 검단구로 분리될 예정이고, 연수구는 아예 인천판 강남이라고 불릴 정도로 인천 최고 부촌이다.[9] 초기에는 불장난으로 인해 노래방 바닥에 있던 시너통에 불이 붙은 것이라고 경찰이 발표했으나, 나중에 재조사 결과 노래방 아르바이트생들이 청소를 하던 도중 담배를 피우기 위해 켠 라이터가 원인이었음이 공식적으로 밝혀졌다. 과정을 간단히 요약하자면, 시너와 석유 중 어느 것이 더 잘 타는지 어처구니없는 실험을 해 보기로 한 것으로, 시너를 바닥에 뿌리고 라이터로 불을 당기자 불길이 무서운 기세로 6호실과 12호실 양쪽으로 번져나가면서 순식간에 큰 불로 확대돼버렸다. 참고로 이 알바생 2명의 정체는 각각 14살 임모군과 17살 김모군으로, 개중에 김모군은 현장에서 불에 타 즉사하였고, 생존한 나머지 한 명 임모군은 체포되었다. KBS. 이 소년들 역시 가출 청소년들로써 푼돈을 받고 허드렛일을 하면서 방황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10] 다만 전술했듯 지하 1층 노래방 사망자도 1명 있었다.[11] 총 34개 학교에서 사망자가 나왔다. 희생자 중에는 중학생들도 있었다.[12] 실제로 199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인천광역시의 번화가는 동인천역과 그 인근 지역이었으며, 구월동과 부평역으로 대표되는 신시가지는 아직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전의 정말 별볼일 없는 동네들이었다. 그렇다고 대도시의 중심지라고 해서 청소년들이 놀 수 있는 공간이 있었냐 하면 그렇지도 않다. 명동과 신촌도 마찬가지였으며, 대학가 인근은 출입 불가가 이상한 상황에 가까웠다고 볼 수 있다. 2020년대로 치면 바, 클럽 포지션이라고 할 수 있는 나이트조차도 떳떳하게 들어갈 수 있었다. 나이트 죽돌이/죽순이라는 단어도 그냥 생긴 게 아니다.[13] 만일 조금만 늦었다면 질식사한 학생들의 시신이 전부 타서 신원 확인이 더 어려웠을 것이다.[14] 바로 위층인 3층 당구장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창문에서 뛰어내려 대피했지만 사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15] 후술된 CCM 가수가 된 실제 주인이 아니라 호프를 운영하던 바지사장이다. 즉 별개의 인물.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는 지배인이라고 지칭했다.[16] 매니저는 그 뒤 주방으로 달려가 환풍기를 뜯어내 탈출구를 만들었지만 이를 학생들에게 알리지 않고 자기 혼자만 탈출해 살아남았다.[17] 본 사고보다 먼저 일어났던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 사고도 건물주의 안전 수칙 규정 위배 등 공통적인 문제점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씨랜드 사고의 경우 최초 목격자인 태권도 관장 부부와 캠프를 온 초등학교, 유치원 교사들과 씨랜드 강사들의 재빠른 대처로 수련원 건물 302호실에 있었던 소망유치원 아이들을 포함한 50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이 살아남았다.[18] 단, 소망유치원 교사들은 제외. 이들은 화재 사고 시발점이었던 수련원 301호실에서 불이 발생했을 당시 아이들은 내버려둔 채 밖에서 고기를 구워먹고 술을 마시며 회식을 했다. 때문에 다른 아이들과는 달리 301호실의 아이들은 전부 살아남지 못했다.[19] 정확한 구조는 한동안 알려지지 않았으나 2022년 방송된 꼬리에 꼬리를 무는 그날 이야기에서 미니어처로 재현했다. 더불어 당시 술을 마실 수 있었던 연령대의 사람들에게 물어보면 지역에 상관없이 비슷비슷한 구조의 호프집들이 많았음을 알 수 있다.[20] 저렴하게 인테리어하기 위해 디자인된 인테리어 제품으로 장식하고 빈틈을 우레탄폼으로 메운 뒤 페인트 등으로 마감하는 게 거의 전부였으며 우레탄폼조차도 그냥 싼 제품을 사용했다.[21] 주방의 환풍구로 탈출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학생들에게 돈 내고 가라고 했던 매니저였다고 한다.[22] 화재가 시작된 지하의 노래방도 이 사람이 소유하고 있었다.[23] 언론에 따르면 비밀 수첩에 1998년 말부터 1999년 1월 중순까지 인천중부경찰서, 파출소 등에 얼마씩을 지출했다는 내용이 구체적으로 기록되어 있었음이 밝혀졌다.[24] 상술했듯 미리 화재를 감지하고 즉시 전부 빠르게 대피했던데다 길과 바로 연결된 층이었던 덕분에 빠른 대피가 가능해서 인명피해가 전무했다.[25] 가장 높은 3층에서 뛰어내릴 당시 충격으로 부상을 입었으나, 하늘이 도왔는지 다행히 사망자는 전혀 없었다. 원래 당구장에 있던 사람들은 당구를 치던 2명과 주인 이렇게 3명 정도였고, 나머지는 계단을 통해 2층에서 올라온 학생들이었다. #[26] 그러나 사고 당시 호프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변을 당한 여학생의 유가족들은 당시 여학생이 종업원이었다는 이유로 보상금을 단 한 푼도 지급받지 못했다고 한다.[27] 다만 이들은 주인이 뒷정리를 손수 하겠다고 해서 그냥 귀가한 데다 불장난을 저지를 거라곤 예상도 하지 못한 걸 감안해야 한다.[28] 대한서림 건물 바로 뒤 사거리에서 중구보건소 방향으로 가다 보면 건립취지문, 추모조각상+추모시가 있다. 원래 인천학생교육문화회관 터는 인천축현초등학교가 있던 자리로, 해당 학교는 2001년 연수구 옥련동으로 이전했다.[29] 사망자들 중 10명의 영결식은 7개 소속 학교에서 자체적으로 거행되었다.[30] 희생자 중 인천 구도심권이 아닌 부평, 계산 지역 학교에 재학 중이던 학생들도 있었을 정도였다. 즉, 먼 동네에서도 놀러오는 학생들이 어느 정도 있을 만큼 인기 있는 지역이었다는 것.[31] 그런 까닭인지 현재는 인천의 원도심은 관교·구월동으로 여겨지고 있으며 다른 도시의 원도심과 비교해도 도심 공동화가 매우 심하게 발생하고 있고 이제 인천시민들마저 이 지역은 구도심이라고 부르고 있다. 여기에 구월동 상권으로 접근이 가능한 인천 도시철도 1호선이 화재 참사 24일 전에 개통된 것과 이 사고가 함께 맞물리며 동인천 상권은 빠르게 몰락했다.[32] 단, 이 사고 전부터 주안 상권은 있어 왔고 사고 이후에도 유지되었기에 이때 완전히 인천광역시청 부근(관교 및 구월)으로 넘어갔다고 하기는 좀 과한 감이 있다. 그 지역에서 놀던 사람들이 동인천과 주안으로 나뉘던 시절에서 이 사고로 인해 주안으로 몰린 시기도 잠시 있었으며, 이미 내리막을 걷던 주안이 이후 10년간 더 내리막을 타면서 넘어간 것이다. 사실 한 방에 넘어가기엔 동인천과 관교동은 너무 멀고 중간 자리의 주안의 몰락이라는 한 단계가 더 필요했다.[33] 경위 직급의 한 경찰은 아예 사장의 집에 전세를 살았다. 말이 전세이지 전세금도 내지 않았으며 같이 살자고 해서 살았다는 인터뷰를 했고 전경들을 동원해 참사가 벌어진 곳의 보수를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34] 이지선 교수와 비슷한 케이스다. 나이대도 비슷하고, 화재로 전신에 중화상을 입은 점, 그런 상처를 극복하고 미국에 유학을 가서 졸업해가지고 온 점 등이 공통적이라고 할 수 있다.[35] 정일우와 우리가 출연한 뮤직비디오이며 유튜브에 남아 있는 유일한 뮤직비디오. 정식 뮤비는 아니지만 심의 문제인지는 모르겠으나 유족들의 방영 금지 요청이 있었다는 말이 나돌기도 했다. 내용은 미성년자 음주에 화재로 사망한 실화에 여주인공이 마지막으로 자살한다는 충격적인 것.[36] 당시만 해도 학생인권이나 학생들이 건전하게 즐길 수 있는 문화시설이 21세기만큼 발달하지 못했다.[37] 2010년대 이후 오락실은 성인 오락실을 제외하면 인형뽑기, 코인 노래방과 같이 개방적인 공간으로 진화했다.[38] 공교롭게도 그 해에 버닝썬 게이트가 터졌고 유착 관계 등 여러 모로 비슷한 부분이 있어 지역 언론에서는 '세기말 버닝썬'이라고 했을 정도이다.[39] 1993년생[40] 1988 서울 올림픽 하키 여자부 은메달리스트[41] 사실 "호프집"을 빼야 하는 게 아니라 2차 가해를 하는 어른들의 태도가 주요 문제인데 이런 행위는 씨랜드 청소년수련원 화재사고 피해자를 비하하는 것이나 다름없다. 호프집이라는 단어를 빼도 호프집에서 일어난 것이지 건전한 장소에서 일어난 것이 아니니 의미가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