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리 그랜트의 주요 수상 및 헌액 이력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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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fff8ed><colcolor=#000> 케리 그랜트 Cary Grant | |
본명 | 아치볼드 알렉산더 리치 Archibald Alexander Leach |
출생 | 1904년 1월 18일 |
잉글랜드 브리스틀 호필드 | |
사망 | 1986년 11월 29일 (향년 82세) |
미국 아이오와주 데븐포트 | |
국적 | [[영국| ]][[틀:국기| ]][[틀:국기| ]]| [[미국| ]][[틀:국기| ]][[틀:국기| ]] |
신장 | 187cm |
데뷔 | 1931년 <디스 이즈 더 나이트> |
활동기간 | 1932년 – 1966년 |
직업 | 배우 |
부모 | 아버지 일라이어스 제임스 리치(1873 ~ 1935) 어머니 엘시 머리어 리치(1877 ~ 1973) |
배우자 | 버지니어 체럴 (1934 결혼 – 1935 이혼) 바버러 허튼 (1942 결혼 – 1945 이혼) 벳시 드레이크 (1949 결혼 – 1962 이혼) 다이언 캐넌 (1965 결혼 – 1968 이혼) 바버러 해리스 (1981 결혼 – 1986 사별) |
자녀 | 딸 제니퍼 그랜트(1966년생) |
링크 | / 팬페이지 'carygrant.net'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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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모든 사람이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어 합니다. 심지어 나조차도 캐리 그랜트가 되고 싶다니까요![1]
- 캐리 그랜트
- 캐리 그랜트
영국 태생의 미국 배우.
2. 인기 및 위상
자신이 직접 지은 예명으로 사회 밑바닥에서 올라온 자수성가형 배우다. 제임스 스튜어트, 클라크 게이블 등과 함께 30년대 후반부터 50년대 까지 할리우드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 187cm의 큰 키에 구릿빛 피부, 잘생긴 외모를 지녀, 당대 최고의 미남 배우로 통한다. AFI 선정 가장 위대한 남배우 2위로 선정되었을 만큼 큰 인기와 영화사에 인상적인 업적을 남겼다.당대엔 상류층과 배우들 사이에서 미국식 영어와 영국식 영어를 섞은 미드 애틀랜틱이란 억양이 우아하게 들린다며 각광받고 있었는데, 캐서린 헵번, 타이론 파워 등은 인위적으로 이 말투를 배워 연마했지만, 원래 영국인인 그랜트는 16살 때부터 미국에서 살았던 덕에 우연찮게 이에 가까운 언어 습관을 자연적으로 구사했다. 이는 그랜트의 여유롭고 점잖은 태도와 함께 신사 이미지에 일조했다.[2]
3. 생애 및 활동
어머니 | 아버지 |
본명은 아치볼드 앨릭잔더 리치로, 1904년 1월 18일 영국 브리스틀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일라이어스 제임스 리치[3]는 의류 공장에서 압착기를 담당하는 노동자였고 집안은 가난에 시달렸다. 재봉사인 어머니 엘시 머리어 리치[4]는 춤, 노래, 피아노를 가르쳐주고 극장에 자주 데려가 영화를 접하게 해준 사람이었지만, 원체 몸이 약했던 형 존이 아기 때 죽은 뒤로 이를 자책하며 우울증을 앓고 있었고 아치볼드 리치가 9살이 됐을 때 인근 정신병원에 영구 수용되었다. 이때 아버지는 어머니가 피서객이 많이 찾던 해안가 마을인 웨스턴슈퍼메어(Weston-super-Mare)로 혼자 놀러나갔다고 했다가, 곧 죽었다고 속였다. 아치볼드 리치는 1935년 31살이 되어서야 아버지의 사망 직전 고백을 통해 어머니가 살아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돼 재회했다. 이는 평생 트라우마로 남았다.
늘 불륜을 저지르며 가정을 등한시하던 알코올 의존증의 아버지는 아치볼드 리치가 10살 때 아치볼드를 정신병동의 아내 밑으로 서류상 넘겨놓고 재혼을 하면서 아치볼드를 아예 버려버렸다. 이때 조금이라도 도와준 친척이나 주변 어른은 단 한 명도 존재하지 않는다.[5] 네 번째 아내 다이언 캐넌은 어린 아치볼드 리치가 이 시기에 겪은 일들은 자신이 들어본 부랑아 사연 중 가장 끔찍한 사례라고 말한 적이 있다.
하는 수 없이 비셥 로드 초등학교[6]에 다닐 때부터 지역 극장 히퍼드러움(Hippodrome)에서 잡역부로 일하면서 스스로 돈을 벌어야 했다. 그렇게 본의 아니게 학교 수업을 늘 빼먹다가 1918년 14살에 고의로 말썽을 일으켜 장학금까지 받고 입학했던 페어필드 중등학교[7]에서 퇴학을 당한 뒤 유랑 희극 극단인 봅 펜더 공연단[8]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곳에서 촌극, 곡예 등을 하며 다양한 공연 실력을 다졌다. 심지어 대말(竹馬)[9]도 탔다.
1920년 이 극단이 2년 짜리 미국 순회 공연을 하게 됐을 때도 같이 갔다.[10] 필요했던 서류들에 아버지 서명을 위조했다는 얘기가 있다. 순회 공연이 끝나고 나서도 뉴욕에 남아 연기자를 지망하기로 했지만, 캐스팅은 늘 불발됐다. "파커랑 랜드랑 리치"(Parker, Rand, and Leach)란 이름의 삼인조 보드빌 공연팀을 꾸리는가 하면 주말마다 코니 아일랜드에서 대말 공연을 하며 생계를 꾸려나갔다. 아치볼드 리치가 이 팀에서 나가면서 1921년에 새로 들어온 멤버가 바로 제임스 캐그니였다. 캐그니가 들어온 뒤로는 이 팀의 이름은 "파커랑 랜드랑 캐그니"(Parker, Rand, and Cagney)가 된다.
1923년부터는 뮤지컬 "Golden Dawn" 등에서 작은 역할을 맡을 수 있었다. 1928년 영화사 카메라 테스트 기회를 얻었지만 실패했다.
"Golden Dawn" (1927-8) |
1931년 연극 "Nikki"의 공연에서 할리우드 스타 페이 레이의 상대역을 하며 운이 텄다. 이 공연에서 할리우드 관계자들의 주목을 받았고, 공연이 막을 내린 뒤 LA로 거처를 옮겼다. 파라마운트 픽처스와 5년 계약을 맺었다. 주급은 450 달러였다. 본명인 영국 이름 아치볼드 리치 대신 게리 쿠퍼처럼 미국적으로 들리는 이름이 필요하다는 파라마운트의 요구에 예명을 지었다. '캐리(Cary)'는 자신을 영화계에 데뷔할 수 있게 해준 연극 "Nikki"에서 연기했던 인물의 이름인 캐리 락우드(Cary Lockwood)에서 따온 것이었고, '그랜트(Grant)'는 회사에서 지정해서 제시한 성 가운데서 골랐다.
이렇게 '캐리 그랜트'가 된 아치볼드 리치는 1932년 데뷔작 <디스 이즈 더 나이트>부터 호평 받았지만 <마담 버터플라이>(1932), <금발의 비너스>(1932)에 이르기까지 흥행작은 없었다. <Sinners in the Sun>(1932)을 찍던 중 촬영장에서 랜덜프 스캇[11]을 만나 동거인이 되었고 그 뒤 12년 간 같이 살았다.
<마담 버터플라이> (1932) |
스타 메이 웨스트의 눈에 들어 웨스트와 함께 하게 된 첫 메이저 영화 주연작 <다이아몬드 릴>은 메가히트작으로, 파산 위기였던 파라마운트 픽처스를 구원해주었다. 그 다음에 또 같이 출연한 <나는 천사가 아니다>(1933)는 아예 메이 웨스트가 대본까지 직접 쓴 작품이었다.
<나는 천사가 아니다> (1933) |
<Thirty Day Princess> (1934) |
<Thirty Day Princess>(1934) 등의 작품을 거쳐, 그랜트는 1935년 어느새 주급 3,500달러의 대우를 받게 됐음에도 파라마운트와 갈라서게 된다. 이유는 MGM으로 자신을 대여해 <바운티호의 반란>(1935)에 출연하게 도와달라는 요구를 파라마운트에서 거절했기 때문이었다. 그랜트의 예상대로 해당 영화는 아카데미 시상식을 휩쓸었다. 그렇다고 다른 영화사를 찾지도 않았고, 에이전트를 통한 영화 건당 계약이라는 당시로서는 큰 모험을 하게 되었다.
제작사와 다년 짜리 계약에 묶여있어야 살아남을 수 있는 시절이었고, 이전 시도자들은 모두 실패했던 길이었다.[12] 그랜트도 초반엔 꼭 그렇게 될 것만 같았다. 캐서린 헵번이 나온 RKO의 <실비어 스칼럿>(1935) 주역을 따냈지만 영화는 흥행을 망쳤다. 진 할로우와 나온 <Suzy>(1936) 등 그 뒤에 바로 이어진 다섯 작품들도 작품성이 변변찮았고 흥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1937년 MGM의 <타퍼>의 성공으로 기사회생하면서부터 그랜트는 곧 남들과 달리 독립적이고 자유로운 개체로 살아남을 수 있는 그만의 경쟁력을 증명했다. 이후 10여년간 그랜트는 스타로서의 명성을 눈부시게 쌓아나간다. 그랜트는 영화 수익의 10%를 받는 계약을 협상한 최초의 할리우드 배우이기도 하다.
<타퍼> (1937) |
속사포같이 내뱉는 말솜씨와 신사다운 목소리, 빼어난 외모, 매력적인 옷차림 때문에 곧바로 스타가 되었고, 이러한 특징으로 인해 젊은 시절에는 스크루볼 코미디에서 크게 두각을 보였다. 이 시기의 그랜트는 주로 뻔뻔해도 미워할 수 없는 바람둥이로 묘사되는데, 본격적인 시작은 아이린 던과 나온 <이혼 소동>(1937)이다. 부부가 각자 상대방이 바람을 폈다고 의심하며 이혼한 뒤 서로의 재혼을 방해하려고 애쓰는 내용이었다. 이 영화를 통해 그랜트는 감독 리오 맥캐리를 만났는데, 맥캐리의 세련된 패션, 행동거지, 말투를 면밀히 관찰해 모범으로 삼으면서 특유의 스타일을 완성했다.
캐서린 헵번과 배리 피츠제럴드 그리고 니서(Nissa)라는 이름의 표범이 나오는 <베이비 길들이기>(1938), 제멋대로인 상속녀 캐서린 헵번의 첫 번째 남편으로 나와 현 약혼자는 물론 새롭게 등장한 기자 제임스 스튜어트와 헵번의 마음을 얻기 위해 경쟁하는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 능력있는 기자인 여주인공의 신문편집자 전 남편으로 나와 아웅다웅하는 <연인 프라이데이>(1940) 등도 대표적이다. 하워드 혹스, 조지 큐코어 등 내로라하는 거장들이 이러한 이미지를 부각시킬 수 있는 역할로 그랜트를 기용했다.
한편 40년대부터 앨프리드 히치콕은 <의혹>(1941)을 시작으로 그랜트의 내면에 숨어 있는 어둡고 속을 알기 힘든 모습에 초점을 맞췄다. 제2차 세계 대전을 배경으로 나치를 때려잡으려는 정부 요원 그랜트를 돕기 위해 잉그리드 버그먼이 잠입하는 내용의 <오명>(1946)은 그 중 걸작으로 손꼽힌다. 그 외에 <나는 결백하다>(1955),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1959)가 있다.
<나는 결백하다> (1955) |
007 시리즈 원작자 이언 플레밍은 로맨틱 코미디와 앨프리드 히치콕 감독의 서스펜스물 모두에 능한 그랜트가 1대 007이 되어주길 바랬지만 그랜트는 시리즈 1편 <살인번호>가 제작된 1961년 이미 57살[13]이어서 이 제안을 거절했다. 그랜트는 나이를 고려해 한 편만 계약하고 싶어했고, 제작사는 시리즈로 계약하고 싶어해서 서로 뜻이 맞지 않았다. 대신 이 취향의 영향으로 제임스 본드는 그랜트 이미지처럼 키 180 중반 이상의 미남 배우를 쓰는 게 한동안 원칙이었다.
60년대에 들어서도 도리스 데이와 <댓 터치 오브 밍크>(1962) 같은 로맨틱 코미디물을 찍기도 했으며, 1966년 <뛰지 말고 걸어라>로 은퇴할 때까지 슬럼프 없이 정상의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상복은 없어서 <페니 세러네이드>(1941)와 <논 벗 더 론리 하트>(1944)로 아카데미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지만 무관에 그쳤다. 그랜트는 자신의 연기가 외모 때문에 지나치게 저평가 받는다며 언론에 직접적으로 불만을 토로했고, 경력 내내 이를 고통스러워했다.
<페니 세러네이드> (1941) |
1966년 딸이 태어난 후 딸의 양육에 집중하기 위해 은퇴에 들어갔다. 이후 그랜트를 다시 영화계로 불러내기 위한 다양한 시도들이 있었지만 전부 거절 당했다.
1986년 뇌졸중으로 인한 사망 후 유언에 따라 장례식이 생략되었다. 유해의 행방에 대해선 명확히 공개된 적이 없다. 화장 후 캘리포니아주의 한 언덕에서 재를 흩뿌렸다는 추측이 있을 뿐이다.
4. 주요 출연 작품
- This Is the Night, 1932
- Sinners in the Sun, 1932
- 우리는 즐겁게 지옥에 간다(Merrily We Go to Hell), 1932
- Singapore Sue, 1932
- 악마와 심해(Devil and the Deep), 1932
- 금발의 비너스(Blonde Venus), 1932
- Hot Saturday, 1932
- 마담 버터플라이(Madame Butterfly), 1932
- 다이아몬드 릴(She Done Him Wrong), 1933
- The Woman Accused, 1933
- The Eagle and the Hawk, 1933
- 나는 천사가 아니다(I'm No Angel), 1933
-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1933
- Thirty Day Princess, 1934
- Wings in the Dark, 1935
- 실비어 스칼럿(Sylvia Scarlett), 1935
- Big Brown Eyes, 1936
- Suzy, 1936
- The Amazing Quest of Ernest Bliss, 1936
- Wedding Present, 1936
- 타퍼(Topper), 1937
- 이혼 소동(The Awful Truth), 1937
- 베이비 길들이기(Bringing Up Baby), 1938[14]
- 휴일(Holiday), 1938
- 강가딘, 1939
- 연인 프라이데이(His Girl Friday), 1940
- My Favourite Wife, 1940
- 필라델피아 스토리(The Philadelphia Story), 1940
- 페니 세러네이드(Penny Serenade), 1941
- 의혹(Suspicion), 1941
- Mr. Luck, 1943
- None But The Lonely Heart, 1944
- Arsenic And Old Lace, 1944
- 오명(Notorious), 1946
- 독신남(The Bachelor and the Bobby-Soxer), 1947
- The Bishop's Wife, 1947
- Every Girl Should Be Married, 1948
- Mr. Blandings Builds His Dream House, 1948[15]
- 나는 전쟁 신부(I Was a Male War Bride), 1949
- 위기(Crisis), 1950
- Dream Wife, 1953
- 나는 결백하다(To Catch a Thief), 1955
- 잊지 못할 사랑(An Affair to Remember), 1957
- 키스 뎀 포 미(Kiss Them for Me), 1957
- 무분별(Indiscreet), 1958
- 북북서로 진로를 돌려라, 1959
- 페티코트 작전(Operation Petticoat), 1959
- 남의 것이 더 좋아(The Grass Is Greener), 1960
- That Touch of Mink, 1962
- 샤레이드(Charade), 1963
- Father Goose, 1964
- 뛰지 말고 걸어라(Walk Don't Run), 1966
5. 사생활
5.1. 결혼과 이혼
5번 결혼하고 4번 이혼했다.- 버지니어 체럴(Virginia Cherrill)
찰리 채플린의 <시티 라이트(City Lights)>(1931)에 나온 무성영화 스타 버지니어 체럴과 파티에서 만나 1934년에 결혼했지만 일 년도 못 돼 헤어지고 1935년에 이혼했다. 이혼이 거의 결정됐을 때 그랜트가 자살 시도를 했다는 얘기가 있다. 1934년 12월 LA 법정에서 체럴은 이혼 사유가 그랜트가 "과음을 하고, 목을 조르고 때렸고,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그랜트는 훗날 1930년대에 이혼을 하려면 그 정도 사유는 지어내야했다며 부인했다. 또한 체럴이 위자료로 매주 1,000 달러를 요구하는 등 법정공방이 상당히 치열했는데, 그럼에도 둘은 평생 친구로 남았다.
- 바버러 허튼(Barbara Hutton)
1942년에 결혼한 두 번째 아내는 당시 세상에서 가장 부유한 여성 중 하나였던 상속녀 바버러 허튼이었다. 언론은 이 둘을 "캐시(돈)과 캐리(Cash and Cary)"라고 불렀는데, 이는 "현찰 구매"란 뜻이기도 하다. 허튼의 두 전 남편들이 오로지 돈만 보고 결혼했기 때문에 언론은 그랜트도 그랬을 거라 짐작했지만, 그랜트는 허튼에게서 한 푼도 받지 않았다. 그럼에도 둘은 3년 뒤 이혼했다. 허튼의 말을 종합해보면 그랜트가 허튼의 친구들과 마찰을 많이 일으킨 게 가장 큰 원인으로 짐작된다. 그랜트는 허튼의 화려한 사교 생활을 쓸데없는 낭비라고 싫어했다. 서로 호감은 여전히 깊어서 평생 절친으로 지냈다.
- 벳시 드레이크(Betsy Drake)
1948년 영국 연극 공연에서 벳시 드레이크를 보고 마음에 뒀던 그랜트는 퀸 메리호에서 우연히 드레이크를 마주친다. 드레이크는 그 길로 같이 LA로 향해 미국에서 영화를 찍게 됐다. 둘은 1948년 <Every Girl Should Be Married>에 같이 출연했고 드레이크는 RKO와 계약을 이어나간다. 둘은 1949년 성탄절에 결혼한 뒤로 결혼 생활에 집중하기 위해 작품을 좀 쉬기로 했고, 그랜트는 그 후로 5년 동안 5편의 작품에만 출연했다.
그러나 이 결혼도 그랜트가 1957년 소피아 로렌과 만나면서 위기에 빠진다. 로렌 역시 곧 남편이 될 유부남 카를로 폰티와 사귀고 있을 때였다.[16] 이때 드레이크는 그랜트의 촬영장이 있던 스페인에 그랜트를 보러 왔다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승선했던 배에 사고가 났다. 다행히 구조되긴 했지만 이 소식을 듣고도 이미 마음이 뜬 그랜트는 아내를 살피러 가지 않고 그대로 스페인에 머물렀다. 심지어는 드레이크가 그랜트와 함께 출연하기 위해 직접 대본을 쓴 <달빛 아래서(Houseboat)>의 여주인공 역도 로렌에게 줘버렸다. 로렌은 이 작품으로 미국에서 인기를 얻게 된다.
}}} ||1960년 드레이크와 그랜트는 당시 심리 치료의 하나로서 실험 처방되고 있었던 LSD를 복용하기 시작했다.[17] 그러나 드레이크는 그랜트의 불륜을 극복하지 못했고 둘은 이혼했다. 드레이크는 그랜트가 양성애자인 기미를 긴 결혼생활 내내 전혀 느끼지 못했고 부부생활이 매우 활발했다고 했다.
- 다이언 캐넌(Dyan Cannon)
그랜트는 1961년 CBS TV 시리즈 "The Aquanauts"에 특별출연한 다이언 캐넌을 보고 반해 사귀게 된다. 캐넌은 그랜트와의 만남을 크게 주저했지만 막상 사귀고 난 뒤엔 늘 결혼하고 싶어했다. 반면 그랜트는 이혼 할 때마다 유독 크게 불행을 느끼는 편이었기 때문에 결혼은 이제 그만하고 싶었다. 그러나 캐넌이 임신을 하면서 1965년 7월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되었다. 그랜트는 딸이 탄생함과 동시에 육아에 집중하고자 은퇴에 들어갔다.
캐넌과는 결국 1968년 이혼했다. 나중에 캐넌은 정신적 학대와 강압적 태도가 문제였다고 말했다. LSD까지 전도했다고 한다. 그러나 한편으론 좋은 면도 많은 사람이었다고 덧붙이기도 했다. 캐넌 역시 그랜트가 양성애자일 가능성은 없다는 입장이다.
- 바버러 해리스(Barbara Harris)
다섯 번째 아내 바버러 해리스와는 1976년 런던에서 만났다. 47세 연하로, 로열 랭커스터 호텔 홍보담당자였다. 해리스는 그랜트와 동거하기 위해 1979년 LA로 이사를 왔고, 1981년 결혼식을 올리고 86년 그랜트가 뇌졸중으로 사망할 때까지 함께 했다.
- 그 외
1937년 배우 필리스 브룩스[18]와 사귀기 시작해 약혼까지 했으나 39년 말에 헤어졌다. 이후 브룩스는 45년에 존 F. 케네디의 하버드 대학교 시절 룸메이트였으며 매사추세츠 하원 의원을 오래 역임한 정치인 토버트 먹다널드[19]와 결혼해 백년해로했다.
5.2. 성 지향성 문제
양성애자 혹은 동성애자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오랜 떡밥은 12년간 동거한 랜덜프 스캇과의 관계다. 다만 증인은 "내가 두 사람 집에 놀러간 적이 있는데 그냥 딱 봐도 사랑하는 사이 같더라"고 모호하게 말했을 뿐인 게이 디자이너 미스터 블랙웰[20] 같은 사람들 정도다. 블랙웰은 자신이 그랜트, 스캇, 타이론 파워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주장해 이 세 사람의 게이설에 불을 지핀 장본인인데, 블랙웰이란 예명을 하워드 휴즈가 지어줬다는 등 다양한 허풍을 떠벌린 전적이 있어 말에 무게가 없는 인물이다. 반면 그랜트의 전 아내들은 스캇과 그랜트가 성적인 관계는 절대 아니었다고 방어해주었다. 더불어 최근 들어 스캇이 확고한 이성애자였다고 결론 내린 스캇 전기작가들도 있어서 그랜트와 연인 사이였다는 의심은 많이 줄어든 추세다.
참고로 둘이 같이 나온 사진들은 거의 다 그랜트가 독신남성들끼리 이렇게 재미나게 산다고 보여주려고 일부러 찍은 사진이다.
랜덜프 스캇은 평생 두 번 결혼했는데, 첫 번째 아내는 재벌 듀폰 가문 사람으로, 실화 바탕의 영화 <폭스캐처> 중심인물인 존 듀폰(John du Pont)이 조카였다. 둘 사이에 아이는 없다. 두 번째 아내는 21살 연하의 배우였는데, 아이 둘을 입양해 죽을 때까지 같이 살았다.
그래서 현재는 게이임을 숨기지 않고 활동했던 유명 의상 디자이너 오리 켈리(Orry-Kelly)와 9년 동안 붙었다 떨어졌다 하며 동거했던 전적이 더 크게 부상해, 대중매체와[21] 언론에서 호명되고 있다. 스캇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증거나 증인은 없다. 스캇과 달리 같이 찍힌 사진 한 장조차 남아있지 않다. 그래도 성인 남성 둘이 다년간 동거를 했다는 사실 자체가 매우 의심스럽다는 추론이다. 그랜트는 켈리와의 깊은 친분을 숨긴 적이 없고, 켈리가 사망했을 때도 본인이 관을 운구했다.
말런 브랜도, 하워드 휴즈와 관계가 있었다는, 확인되지 않은 주장도 있다.
현재까지의 증거상으론 그랜트는 양성애자 의혹이 남았을뿐 게이는 아니라고 할 수 있다. 그랜트와의 관계가 발각됐던 여배우나 사교계 인사 수가 상당히 많은데, 한 상류층 부인은 하필 그랜트와 밀회 중에 교통사고가 나는 바람에 언론을 탔다. 놀랍게도 여자들을 꼬실 때 게이라는 소문이 도는 걸 심리적으로 역이용 했다는 증언, 게이 소문을 재밌어했다는 증언들도 있다.
어쨌든 공공연하게 번진 소문이라 마를레네 디트리히는 그랜트를 '호모'에 준하는 남자 동성애자 비하 용어인 팬지라고 뒤에서 조롱한 적이 있다. 1980년 코미디언 체비 체이스는 "그랜트는 호모에요. 참 대단한 계집애죠!"라고 모욕했다가, 그랜트에게 고소를 당한 뒤 자신의 발언을 취소했다.
6. 여담
- 딸 제니퍼 그랜트도 배우로 데뷔했는데 드라마 "베벌리힐스 아이들(Beverly Hills, 90210)"(1993-4)과 "무비 스타스(Movie Stars)"(1999-2000) 등 텔레비전을 중심으로 활동한다. <바빌론>(2022)에도 잠깐 출연했다.
- 딸이 쓴 회고록 Good Stuff: A Reminiscence of My Father, Cary Grant이 있다. 그랜트가 경력까지 포기해가며 양육한 딸인만큼 다정하게 보살핌 받았던 순간들과 유쾌한 일화들을 자세하게 기록했다. 딸은 인터뷰에서 캐리 그랜트가 본인이 어려서 겪은 일을 딸인 자신은 절대로 겪지 않게 하려고 총력을 기울였으며, 캐리 그랜트가 주양육자를 자처한 덕분에 어머니 다이언 캐넌이 계속 배우 생활을 해나갈 수 있었다고 말했다.
- <Behave Yourself!>(1951)는 원래 그랜트를 위해 만들어진 기획이었다. 그랜트가 여의치 않자 팔리 그레인저에게 넘어갔다.
- 굉장한 구두쇠였다. 그랜트가 게이라는 의심을 받은 이유 중 하나도 생활비를 아끼려고 동료 배우 랜덜프 스캇과 동거했기 때문이다. 두 번째 아내 바버라 허튼과의 이혼 사유도 세계에서 제일 부유한 여성 중 하나였던 허튼의 평소 씀씀이를 그랜트가 늘 못마땅하게 여겼기 때문이었다.
- 다른 사람들에게도 인색하게 굴었다는 소문이 있다. 사인해줄 때 돈을 받았다는 소리도 있고, 직원들이 몰래 훔쳐먹지 못하게 냉장고에 있는 우윳병에 금을 그어가며 마셨다는 등 전해지는 에피소드가 다양하다. 집에 손님들이 찾아오면 집에 머무는 동안 소요된 비용을 계산해 청구했다는 얘기까지 있다. 그랜트가 활동할 당시부터 떠도는 풍문이었고 취재가 된 사항이 아니다. 이 소문들이 사실이라면 아버지에게 유기 당해 고아처럼 자라 초등학생 때부터 생계를 스스로 꾸려 나가야 했던 불우하고 가난했던 성장과정 탓일 거란 추측들이 있다.
- <필라델피아 스토리>(1940)와 <아세닉 앤 올드 레이스>(1944) 출연료를 전쟁자금으로 기부했다. 팬덤에서 인색했단 소문에 대한 반박 자료로 제시하곤 한다.
- 어려서 사고를 당했을 때 치과대 재학생에게 앞니 하나를 통째로 뽑히면서 앞니 하나를 영구 삭제 당했다. 잘 보면 앞니가 하나 밖에 없다. 치아 틈이 자연스레 메워져 있어서 눈치 채기 어렵다.
- 2001년 고향 브리스톨에 실물 크기의 동상이 세워졌다.
- 그랜트는 전처 벳시 드레이크의 영향으로 최면 요법을 공부하게 되었고, <오명>을 촬영하던 당시, 압박이 심했던 버그만에게 최면 치료를 시술해서 영화촬영을 순조롭게 끝낼 수 있었다.
- 하워드 휴즈와 친구여서 1937년 휴즈의 부탁을 받고 캐서린 헵번에게 휴즈를 소개 시켜 커플을 성사시켰다. 이런 인연과는 별개로 여러 번 함께 공연했지만, 케리 그랜트는 캐서린 헵번과 서로 그다지 좋아하지는 않았다. "난 원래 키 크고 깡마르고 성격 드센 여잔 싫어하지만 캐서린 헵번은 예외였다."란 말은 남겼지만, 케리 그랜트가 꼽은 최고의 여배우는 그레이스 켈리였다.# 캐서린 헵번 역시 케리 그랜트에 대해 "He is personality functioning."(그의 성격이 잘 먹힌다.)란 짧고 시큰둥한 평가만 남겼다.
- 그랜트가 주선해서 잘 됐던 또 다른 커플로 로잘린드 러슬과 그 남편이 있다. 영화제작자 프레드릭 "프레디" 브리슨[22]은 <여자들>(1939)을 보고 러슬에게 반했고, 친구 그랜트가 1939년 <연인 프라이데이>(1940)를 찍을 때 상대역이 된 러슬을 소개시켜달라고 부탁했다. 그랜트는 러슬에게서 브리슨에 대한 흥미를 끌어내기 위해 몇 주 동안 촬영장에서 러슬에게 인삿말로 "프레디 브리슨이란 사람 만나본 적 있어?"란 소리를 끈질기게 해댔고, 두 사람의 첫 데이트에도 동행했다. 1941년 그랜트가 신랑 들러리를 맡은 가운데 결혼한 러슬 부부는 백년해로했다. 사진 속 제일 오른쪽은 그랜트의 두 번째 아내 바버라 허튼.
- 엘리자베스 테일러는 아역 스타 시절에 그랜트의 사인을 받은 적이 있다. 테일러는 이 당시의 경험에 대해 회상하며 "그랜트는 내가 나 자신을 재밌고 흥미로운 사람으로 느끼게 만들어줬다"고 했다.
- 캐리 피셔가 한참 LSD에 빠져있을 때 딸이 걱정된 데비 레이놀즈로부터 (경험자로서) 얘기 좀 해달라고 부탁 받은 적이 있다. 피셔는 자신이 "적정량"을 복용하고 있기 때문에 문제 상황이 아니라고 생각해 반발했다.[23] 피셔의 관점에선 그랜트도 의사의 지시 하에 의학적으로 복용했던 것이니 역시 문제될 게 없는 케이스였다. 이로 인해 피셔와 레이놀즈의 사이는 한층 더 나빠졌다.
- 1975년 MGM 이사진으로 합류했다.
- 그 시절 배우 중에서는 텔레비전 경력이 없는 배우다.
- "난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인 척 하다가 끝내 그 사람 자체가 되었다. 그 사람이 내가 되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혹은 어느 한 순간 나와 그가 마주쳤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 ITV에서 스트리밍 서비스 ITVX의 대표작으로 내세울 4부작 전기 드라마 Archie를 제작한다고 발표했다.# 그랜트의 본명인 아치볼드 리치(Archibald)에서 따온 제목이다. 그랜트 역을 맡은 제이슨 아이작스는 "세상에 케리 그랜트란 아이콘은 오직 하나 뿐이기에 스스로 그랜트가 되어보려는 멍청한 시도는 하지 않을 것"이라면서 "그래도 (내가 연기할) 아치 리치는 그랜트가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만든 캐릭터인 케리 그랜트와 아주 멀리 떨어져있는 존재는 아니"라고 말했다. 그랜트의 네 번째 아내 다이언 캐넌과 딸 제니퍼 그랜트가 총괄제작을 맡았다.
- 메소드 연기법에 반감을 가진 듯하며, 이와 관련해 "I have no rapport with the new idols of the screen, and that includes Marlon Brando and his style of Method acting. It certainly includes Montgomery Clift and that God-awful James Dean. Some producer should cast all three of them in the same movie and let them duke it out. When they've finished each other off, James Stewart, Spencer Tracy and I will return and start making real movies again like we used to."(나는 말론 브란도의 메소드 연기가 특별하다고 생각지 않습니다. 여기엔 몽고메리 클리프트와 형편없는 제임스 딘도 포함되고요. 영화 제작자들은 이 셋을 한 영화에 캐스팅해서 서로 죽이게 해야 합니다. 그들이 서로를 끝내면 제임스 스튜어트, 스펜서 트레이시와 나는 돌아와서 예전처럼 다시 진짜 영화를 만들기 시작할 것입니다.)#라는 말을 남겼다. 그러나 무언가를 느낀 듯 1966년 본인이 언급한 천재 메소드 배우 몽고메리 클리프트가 불과 45세에 생을 마감한 바로 그 해 Walk Don't Run(1966)를 끝으로 영화계에서 은퇴했다. 그 후 뉴 할리우드 시대의 물 만난 물고기처럼 메소드 연기는 할리우드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그 시작점엔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1967)가 있었다. 그 <우리에게 내일은 없다>의 주연배우 워렌 비티[24]는 먼 훗날 자신이 제작・각본・감독・주연을 모두 맡은 <천국의 사도>[25]에 케리 그랜트를 캐스팅하려고 무척 공을 들였지만 케리 그랜트는 끝내 거절했다. 해당 배역은 제임스 메이슨이 맡았다.
[1] 그리고 1941년 법적으로 개명해서 진짜 캐리 그랜트가 되었다.[2] 그랜트는 게리 쿠퍼나 게이블이랑 달리, 유들유들한 이미지가 강했는데 조지 클루니가 이 계보를 이어받았다고 평가받는다.[3] Elias James Leach. 1872 - 1935.[4] Elsie Maria Leach. 1877 - 1973.[5] 전기 작가들이 계속해서 도움을 줬을만한 주변인들을 찾아보고 있지만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6] Bishop Road Primary School.[7] Fairfield Grammar School. 공부를 잘해야 들어갈 수 있었다.[8] Bob Pender Stage Troupe.[9] 이런 묘기다. 자료 사진 속 남자는 그랜트가 아니다.
[10] 때문에 한창 윗세대이자 같은 노동 계급 출신인 찰리 채플린과 유사하게 영화계 진출 커리어를 밟았기 때문에 캐리 그랜트도 영국 영화랑 별로 연관관계가 없다.[11] Randolph Scott. 감독 버드 베티커와 제작자 해리 조 브라운, 각본가 버트 케네디 조합의 래나운 서부극으로 유명한 배우다.[12] 대표적인 저항자로는 베티 데이비스와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가 있다. 더 해빌런드도 그랜트의 시도 8년 후인 1943년에야 소송을 시도했을 정도로 제작사 계약의 효력이 강력했던 시절이었다.[13] 우연하게 로저 무어가 역대 최고령으로 본드 역을 은퇴할 때 나이와 같다.[14] 배역처럼 작중 등장하는 표범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15] 낡은 집을 싼값에 사서 문이 문짝째로 떨어진다거나, 벽에 기대면 벽이 무너지는 등의 슬랩스틱 코미디물의 원조인 작품이다. 1986년 톰 행크스 주연에 〈머니 핏〉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16] 정리하면, 유부남 두 사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그리고 로렌은 이혼하지 않은 상태의 폰티와 결혼식을 올려 중혼이 돼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해외를 떠돌게 된다.[17] 당시에는 LSD나 기타 마약의 유해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며, 노년에 접어든 그랜트는 LSD를 훌륭한 치료제라고 주장했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바 있다.[18] Phyllis Brooks. 1915 - 1995.[19] Torbert Hart Macdonald. 1917 - 1976.[20] Mr. Blackwell. 사실 디자이너로서의 성과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며, 드레스 순위 매기기를 통해 여성 스타들의 외모를 재치있게 비하하며 유명해졌다.[21] 드라마 "레이 도노반" 5시즌 9화 등.[22] Frederick Brisson. 1912 - 1984.[23] 자신의 중독 정도면 일종의 joypop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24] 워렌 비티도 메소드 배우다.[25] 비평과 흥행에서 말 그대로 초대박을 친 워렌 비티 대표작 중 하나다.
[10] 때문에 한창 윗세대이자 같은 노동 계급 출신인 찰리 채플린과 유사하게 영화계 진출 커리어를 밟았기 때문에 캐리 그랜트도 영국 영화랑 별로 연관관계가 없다.[11] Randolph Scott. 감독 버드 베티커와 제작자 해리 조 브라운, 각본가 버트 케네디 조합의 래나운 서부극으로 유명한 배우다.[12] 대표적인 저항자로는 베티 데이비스와 올리비어 더 해빌런드가 있다. 더 해빌런드도 그랜트의 시도 8년 후인 1943년에야 소송을 시도했을 정도로 제작사 계약의 효력이 강력했던 시절이었다.[13] 우연하게 로저 무어가 역대 최고령으로 본드 역을 은퇴할 때 나이와 같다.[14] 배역처럼 작중 등장하는 표범을 무서워했다고 한다. 크라이테리온 콜렉션 블루레이로 출시되었다.[15] 낡은 집을 싼값에 사서 문이 문짝째로 떨어진다거나, 벽에 기대면 벽이 무너지는 등의 슬랩스틱 코미디물의 원조인 작품이다. 1986년 톰 행크스 주연에 〈머니 핏〉이란 제목으로 리메이크되었다.[16] 정리하면, 유부남 두 사람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친 것이다. 그리고 로렌은 이혼하지 않은 상태의 폰티와 결혼식을 올려 중혼이 돼 한동안 이탈리아에서 쫓겨나 해외를 떠돌게 된다.[17] 당시에는 LSD나 기타 마약의 유해성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으며, 노년에 접어든 그랜트는 LSD를 훌륭한 치료제라고 주장했던 자신의 과오를 인정한 바 있다.[18] Phyllis Brooks. 1915 - 1995.[19] Torbert Hart Macdonald. 1917 - 1976.[20] Mr. Blackwell. 사실 디자이너로서의 성과는 없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이며, 드레스 순위 매기기를 통해 여성 스타들의 외모를 재치있게 비하하며 유명해졌다.[21] 드라마 "레이 도노반" 5시즌 9화 등.[22] Frederick Brisson. 1912 - 1984.[23] 자신의 중독 정도면 일종의 joypop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24] 워렌 비티도 메소드 배우다.[25] 비평과 흥행에서 말 그대로 초대박을 친 워렌 비티 대표작 중 하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