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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시리즈 우승 ★★★ | 1962 · 2006 · 2016 | ||
리그 우승 (7회) | 1962 · 1981 · 2006 · 2007 · 2009 · 2012 · 2016 | ||
퍼시픽리그 전·후기 우승 (2회) | 1981후기 · 1982후기 | ||
클라이맥스 시리즈 | 2007 · 2008 · 2009 · 2011 · 2012 · 2014 · 2015 · 2016 · 2018 · 2024 | ||
시즌별 요약 | 2023 · 2024 | ||
현역 선수 경력 | 키요미야 코타로/선수 경력 | ||
경기장 | 1군 에스콘 필드 홋카이도 2군 카마가야 파이터즈 스타디움 과거 고라쿠엔 구장 · 메이지진구 야구장 · 도쿄 돔 · 삿포로 돔 | ||
지방 구장 스타루힌 구장(아사히카와) · 오비히로노모리 야구장(오비히로) · 쿠시로 시민구장(쿠시로) 오션 스타디움(하코다테) | |||
홈 중계 채널 | |||
주요 인물 | 구단주 이카와 노부히사 · 단장 키다 마사오 · 감독 신조 츠요시 · 선수회장 마츠모토 고 · 주장 공석 | ||
구단 상세 정보 | 역사 · 선수단 및 등번호 · 역대 선수 · 응원가 · 유니폼 | ||
틀 문서 | |||
코칭스태프 | 투수 | 포수 | 내야수 | 외야수 | 육성 선수 | 역대 감독 | 영구 결번 | 1라운드 지명 선수 | 역대 개막전 선발 투수 |
1. 개요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의 역대 선수들에 대해 서술한 문서. 현역 선수단은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선수단 항목 참고.2. 영구결번
홋카이도 닛폰햄 파이터즈 영구결번 |
No. 100 |
오코소 요시노리 |
특이하게도 첫 번째 영구결번이 구단 오너. 이 사람은 파이터즈의 現 모기업인 닛폰햄의 창업자이자 닛폰햄 시대의 첫 오너다. 2009년 일본 야구전당에 입성했는데 이것을 기념해 영구결번으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 오사와 케이지 감독의 번호였던 86번은 오사와의 퇴임 이후 등번호를 선택한 선수나 코치가 없어 사실상 영구결번 상태이다.
다만 이 이상의 영구결번은 없을 듯. 구단 측에서 선수들의 영구결번에 대해선 거의 영구적으로 제정하지 않을 방침이라고 한다.
3. 출신 선수들
3.1. 투수
- 도바시 마사유키 (1955 - 1967) : 통산 162승으로 플라이어즈-파이터즈 프랜차이즈 최다승 투수이다. 은퇴 후 2번(1973년, 1992년)에 걸쳐 팀의 감독을 역임했지만 모두 성적 부진으로 단년 임기에 그쳤고 1984~1986년 야쿠르트 스왈로즈 감독을 맡았지만 그곳에서도 5-6-6위로 이렇다 할 성과는 내지 못했다. 플라이어즈 시대 최후의 감독이자 플라이어즈, 파이터즈 시대에 모두 감독을 맡아본 유일한 인물. 2012년 9월 근위축성측색경화증(루게릭병) 진단을 받고 투병했지만 이듬해인 2013년 8월에 숨을 거뒀다. 향년 77세.
- 야나 노부오 (1956 - 1958) : 시합도중 가슴부상을 입는 바람에 일찍 프로생활을 마감했다. 하지만 팬들 사이에서 인기가 높아 지금까지도 플라이어즈 & 파이터즈의 OB 멤버로 인정받는다. 그 후 배우로 전향하였고, 야구팀의 후원사였던 토에이에서 특촬물 배우로 주로 활동하였다. 제일 유명한 작품은 첫번째 슈퍼전대 비밀전대 고레인저의 최종보스 흑십자총통.
- 오자키 유키오 (1962 - 1973) : 마쓰자카 다이스케 이전 '괴동'이라 불린 젊은 강속구 투수였으나 혹사로 인한 어깨 부상으로 일찍 기량이 쇠해 선수생활을 접어야 했던 비운의 투수.
- 다카하시 나오키 (1968 - 1980)
- 주동식 (1972 - 1982) : 팀 선배 장훈의 주선으로 한국프로야구에서 뛰었다.
그러나 지금은 팀의 흑역사로 남겼다... - 미야모토 요시노부 (1975 - 1981) 한국계 일본인으로 국내에서도 프런트 및 1군과 2군 코치를 순회하였다. 2024년 현재 근황으로 일본에 귀국
- 다카하시 카즈미 (1976 - 1983)
- 마시바 시게쿠니 (1978 - 1988) : 원래는 1970년 다이요 훼일즈에서 데뷔한 선수였으나 별다른 활약은 못하고[1] 1978년 닛폰햄으로 이적했다. 이후 1981년 무려 15승 0패로 10할 승률(!!)을 기록하여 그 해 최고승률 타이틀을 획득.[2] 닛폰햄의 주전 투수로 활약하다가 1989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해 이듬해 은퇴했다. 통산성적은 81승 83패 2세이브.
- 키다 이사무 (1980 - 1985) : 데뷔 첫 해인 1980년에 무려 22승 8패 4세이브, 방어율 2.25, 225탈삼진으로 다승왕, 최우수 방어율 타이틀과 최다탈삼진 기록을 꿰차는 노모 히데오의 원조급 대활약을 보여주며 사상 최초로 동시에 퍼시픽리그 신인왕과 MVP를 수상했다. 하지만 데뷔 시즌에 너무 무리를 한 탓인지 그 이후로는 기대에 못 미치는 부진한 성적을 기록했고, 결국 닛폰햄을 떠나 요코하마 타이요 훼일즈, 주니치 드래곤즈 등을 전전했지만 끝내 부활하지 못하며 1990년을 끝으로 60승 71패라는, 데뷔 시즌의 대활약에 따른 기대와는 너무나 못 미치는 성적으로 현역 생활을 마감했다.
- 에나츠 유타카 (1981 - 1983) : 1981년 팀을 퍼시픽리그 우승으로 이끌며 MVP를 수상한 '우승 청부사'.
- 타나카 유키오 (1982 - 1989) : 아래의 내야수 타나카 유키오와는 이름 한자까지 똑같다지만 일단은 동명이인. 1981년 드래프트 1위로 데뷔했지만 통산성적은 25승 36패 13세이브, 방어율 4.23으로 기대엔 못 미쳤다. 하지만 1985년 6월 23일 고라쿠엔 구장에서 열린 대 킨테츠 버팔로즈 전에서 노히트 노런을 달성하는 대활약을 펼친 적도 있는데, 이 노히트 노런이 본인 인생의 유일한 완봉승이자 최초의 인조잔디 구장에서 달성한[3] 노히트 노런이었다. 은퇴 후엔 2001~2003년까지 닛폰햄에서 투수코치를 역임했고 그 외에도 스카우트를 맡기도 했다.
- 시바타 야스미츠 (1984 - 1994)
- 니시자키 유키히로 (1987 - 1997) : 80년대 말, 잘 생긴 외모로 퍼시픽 리그 구장에 관중을 불러온 '트렌디 에이스'. 인기나 실력에서 라이벌이었던 긴테쓰의 좌완 아와노 히데유키와의 치열한 신인왕 경쟁 끝에 아와노에게 신인왕을 넘겨준 것으로도 회자된다. 하지만 1997년 시즌에 성적부진에 시달리다 시즌 종료 후 세이부 라이온즈로 토사구팽 당하시피[4] 트레이드되었고, 세이부에서 4년간 구원투수로 시즌 20세이브도 기록해 보는 등 그럭저럭 뛴 후 은퇴했다.
- 시바쿠사 히로시 (1988 - 2005)
- 타케다 카즈히로 (1988 - 1995) : 세이브왕을 차지하기도 하고(1991, 18세이브) 선발 10승도 거두는 등 여러 보직을 오가며 활약했던 투수. 1998년에는 다이에에서 13승을 거두어 다승왕을 차지해 다승왕과 세이브왕을 모두 수상한 경험이 있는 몇 안되는 투수가 되었다. 1999년에는 주니치 드래곤즈에서 뛰며 선동열, 이종범, 이상훈과 함께 리그 우승을 맛보기도 했다.
- 이와모토 츠토무 (1991 - 2005) : 한국계 일본인 투수로 닛폰햄의 도쿄 말기 시절 눈물나는 선발진의 에이스로 잠시 활약했던 적이 있다. 다만 성적보다도 쇼맨쉽과 예능감으로 더 빛을 봐 은퇴 이후 오랫동안 야구 해설자로 파이터즈 관련 매체에서 활동하고 있다.
역시 모리모토 히초리의 선배답다 - 시마자키 타케시 (1992 - 1998)
- 이마제키 마사루 (1993 - 2000)
- 킵 그로스 (1994 - 1998) : 1995년 16승, 96년 17승을 거두며 2년 연속으로 다승왕을 차지한 투수. 퍼시픽 리그 외국인 투수로서는 최초로 다승왕을 차지한 선수이다. 닛폰햄에서의 5시즌 동안 2번이나 230이닝을 넘긴 엄청난 이닝 이터였지만, 팀이 만년 약체이던 닛폰햄이라 95년에는 다패왕(13패)도 가져갔고 구속이나 구위가 빼어나다기보다는 체인지업과 완급조절로 땅볼 유도를 하는 기교파 투수라 삼진이 적고 피안타가 많은 등 외국인 투수로서는 다소 이례적인 유형으로 성공을 거둔 선수였다.
- 가네무라 사토루 (1995 - 2007) 한국계 일본인이며, 그 유명한 훌리오 술레타에게 죽빵 맞은 선수로 각인 되어 있다. 거기다가 트레이 힐만 감독에게 항명하다 까인 적이 있도 있다.
- 시모야나기 츠요시 (1996 - 2002)[5]
- 타테야마 요시노리 (1999 - 2010)
- 쇼다 이츠키 (2000 - 2006) : 1999년 드래프트 1위의 좌완투수로, 그 해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키류제일고등학교의 에이스로 3경기 완봉을 거두는 활약으로 군마 현 학교 최초의 고시엔 우승을 이끌고 화려하게 프로에 입성했다. 2002년 첫 풀타임 선발 시즌에 9승 11패 3.45의 호성적을 거두며 퍼시픽리그 신인왕을 차지한다. 하지만 다음해부터 어깨부상으로 인해 5점대 ERA에 15패로 다패왕을 차지하면서 커리어가 꼬이기 시작했고, 2007년 한신으로 트레이드된 뒤 2008년 방출되었다. 그 이후로 대만프로야구 싱농 불스('09-'10)-마이너리그 스캠 초청계약-베이스볼 챌린지 리그 니가타 알비렉스 BC('11)-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즈('12-'13)-대만 라미고 몽키스('14)-시코쿠 아일랜드 리그 플러스 에히메 만다린 파이레츠('14~)를 거치는 등 대만리그 2번, 독립리그 2번, 일본프로야구 복귀 1번이라는 대단한 역마살의 저니맨 커리어를 보냈다. 2019년 현재까지도 독립리그에서 현역으로 뛰는 중.
- 에지리 신타로 (2002 - 2010)[6]
- 타케다 히사시 (2003 - 2017) : 170cm의 작은 체구와 최고구속 145km/h 정도의 느린 구속으로도 오랜 기간 닛폰햄의 필승조로 활약하며 홀드왕 1회(2006), 세이브왕 3회(2009, 2011, 2012)를 달성한 프랜차이즈 투수. 다만 마무리투수 말년에는 떨어진 구위로 인해 2점대 ERA인 주제에 그에 맞먹는 WHIP를 기록하면서도 어찌저찌 세이브를 챙기는 작가 기질이 극대화되었고 결국 마스이 히로토시에 마무리 자리를 넘겨준 뒤 재기하지 못했다. 프로 은퇴 뒤에는 프로 진출 전 뛰었던 일본의 사회인야구 팀 일본통운에서 뛰는 중.
- 마이클 나카무라 (2005 - 2008) : 오스트레일리아인과 일본인 혼혈 투수로 두 나라의 이중국적을 가지고 있다. 2000년 시드니 올림픽 호주 국가대표로도 선발된 적이 있다. 2004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뛰었지만 제대로 정착하지 못한 뒤 일본프로야구에 드래프트로 지명되었다. 2006년 퍼시픽리그 최다 세이브를 거두며 닛폰햄의 홋카이도 연고이전 후 첫 일본시리즈 제패의 주역이 되었다. 2008년 시즌 종료 후 난다긴다 하는 구원투수는 죄다 영입하던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으나 그곳에서는 먹튀화했다.
- 오카지마 히데키 (2006) 보스턴에서 뛰던 그 선수가 맞다. 이 후 일본 국내로 돌아와서는 소속팀이 아닌 호크스/DeNA에서 뛰다 성적이 대폭 하락하자 은퇴를 선언
- 타케다 마사루 (2006 - 2016) : 느린 공에도 불구하고 전성기에는 정교한 제구력으로 에이스 다르빗슈를 보좌하는 2-3선발로 활약한 좌완투수. 이름(勝)과는 달리 꽤나 승리운이 따르지 않았던 것으로도 팬들 사이에서 유명했다. 극도의 투고타저에 시달렸던 2011년에는 164이닝 2.46 ERA의 준수한 성적으로 11승 12패의 디시전을 거두며 다패왕을 차지한 것은 물론 5경기 연속 완봉패라는 진기록을 세우기도 했을 정도. 이대호의 일본 무대 첫 홈런을 허용한 투수이기도 하다. 은퇴 후 독립리그 팀인 "이시카와 밀리언스타즈" 감독으로 있다가 2022년 이후 1군 투수코치로 친정팀에 복귀.
- 야기 토모야 (2006 - 2012) : 2006년 대졸 신인으로 12승 8패 2.48의 뛰어난 성적을 거두며 신인왕을 수상하고 다르빗슈 유에 이은 2선발 역할을 맡아 일본시리즈 우승에 공헌한 좌완투수. 하지만 신인왕 시즌 이후 잦은 부상에 시달리며 들쭉날쭉한 모습을 보이다 2012년 오프시즌에 이토이 요시오와 함께 오릭스 버팔로즈로 트레이드되었다. 그 이후에도 별달리 좋은 모습은 보이지 못하고 2017년 주니치에서 은퇴.
- 라이언 글린 (2007 - 2009) : 삼성 라이온즈에서 뛰었던 그 라이언. 일본에서는 4시즌간 괜찮은 선발투수로 활약했다. 특이사항으로 단 4시즌을 뛰었는데도 20보크를 기록해 일본프로야구 통산 보크 순위 3위에 올라있다.(...)
- 타다노 카즈히토 (2008 - 2014) : 초저속 이퓨스와 한여름 밤의 음몽 출연으로 악명 높았던(...) 투수. 위의 사건으로 일본프로야구에서 드래프트되지 못하고 클리블랜드 인디언스에서 뛰며 프로생활을 시작했으나 어찌저찌 일본으로 돌아와 뛰게 되었다. 닛폰햄에서 방출된 뒤 독립리그에서 플레잉 코치로 뛰다 2018 시즌부터 전력분석원으로 닛폰햄에 복귀. 2022년 부터는 2군 투수코치로 보직이 전환됐다.
- 마스이 히로토시 (2010 - 2017) 도쿄 대첩(야구)때 역전을 허용한 그 선수 맞다.
- 저스틴 토마스 (2013)
- 기사누키 히로시 (2013 - 2015) 거인에서 신인상을 수상하고 기대를 받는 몸이였으나 이후 실력이 정체되어 닛폰햄으로 트레이드 되었다.한때는 가네코 치히로와 더불어 오릭스의 희망 이라고 불렸었다. 후배 가네코도 2019년 닛폰햄 으로 이적
- 나카무라 마사루 (2010 - 2019) : 고교시절 사이타마의 다르빗슈[7]라는 별명을 얻으며 이름을 알리고 2009 드래프트 1라운드에 지명되며 선발로 쏠쏠한 역할을 하다가 2014년 8승을 올리며 앞으로 중요한 선발투수가 되는 듯 했으나 2014년은 그냥 뽀록이고 2015년 이후 이도저도 아닌 애매한 성적을 남기며 2019년[8] 은퇴를 선언했다…가 2020-2021 윈터시즌 호주 프로야구 리그에 참여하며 복귀했고 2021년에는 멕시칸리그 신생팀에 용병 선수로 진출하였다. 이후 2021년 멕시칸리그에서 다승왕을 차지하며 나름대로 재기한 후 2022년 시즌을 앞두고 오릭스 버팔로즈에 육성선수로 입단하였다.
- 아리하라 코헤이 (2015-2020): 2015년 퍼시픽리그 신인왕이며, 2019년에는 15승으로 퍼시픽리그 다승왕에 올랐다. 2020년에는 개막전 선발투수로 낙점됐다. 2020 시즌 후 포스팅을 통해 MLB 진출을 선언했고 2020년 12월 27일 텍사스 레인저스와 공식적으로 계약을 맺었다.
- 미야다이 고헤이 (2018-2020) : 도쿄대 법학과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으로 주목받았던 선수. 원래 소속리그에서도 당연하듯이 바닥을 깔아주는 도쿄대 야구부이지만 그래도 이 선수가 도쿄대의 에이스로 뛰는 동안에 간간이 승리를 거두면서 주목을 받았고 닛폰햄 구단이 키요미야 코타로 지명으로 화제몰이를 했던 2017년 드래프트에서 7순위 로또픽으로 지명했다.[9] 운동엘리트들이 득실거리는 프로의 세계에서 그래도 머리는 좋을테니까 그 좋은 머리로 타고난 재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받았으나 결국 재능의 한계를 극복하지 못하고 방출되었다. 닛폰햄 재적 3시즌 동안 1군 등판은 신인이었던 2018년 딱 한경기가 있었다. 8월 24일 소프트뱅크 전이었는데 도쿄대 출신 투수의 1군경기 선발등판은 무려 51년만의 기록이라고 한다. 그 경기에서 4⅔이닝 2실점으로 그럭저럭 괜찮은 결과를 내면서 1군에 더 오래 있을 줄 알았더니 그 경기에서 고관절 부상을 당하면서 1군에서 말소되었고 그 이후로 2020년까지 단 한번의 1군 승격도 없었다. 방출 이후 그대로 프로커리어를 접고 다나카 에이스케(전 치바 롯데 마린즈)처럼 제2의 인생을 시작하나 했더니 야쿠르트에서 줍줍하면서 프로선수로서 생명을 연장했다.
- 우라노 히로시 (2014-2020) : 2020시즌 종료후 은퇴.
- 요시카와 미츠오 (2007-2016, 2019-2020) : 오랫동안 포텐이 터지지 않던 애증의 좌완 파이어볼러였지만[10] 2012년 1점대 ERA에 14승을 기록하며 다르빗슈의 메이저 진출 공백을 무색하게 하는 활약으로 에이스로 등극, 2012년 퍼시픽리그 MVP까지 차지했다. 하지만 이후로는 팔꿈치 부상으로 인해 폼이 하락해 평범한 선발 요원 정도의 성적만 냈고 2016년 시즌 종료 후 외야수 이시카와 신고와 묶여 요미우리의 애증의 거포 유망주이던 오타 타이시, 왼손 계투 쿠몬 카츠히코와의 2:2 트레이드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한다. 그러나 요미우리에서는 중간계투로 강등되는 등 좋지 못한 성적만 내다 2019년 다시 닛폰햄의 우완투수 카기야 료헤이, 좌완투수 후지오카 타카히로와의 트레이드를 통해 포수 유망주 우사미 신고와 묶여 친정 닛폰햄으로
반품복귀. 그러나 2020년 11월 20일 현금트레이드로 세이부 라이온즈 로 재이적.이적 후에도 불쇼 중[11] - 닉 마르티네스 (2018-2020) : 2020 도쿄 올림픽에서 한국 국가대표팀이 미국전에서 상대한 그 투수 맞다. 첫해인 2018시즌 무난한 성적으로 재계약에 성공. 그 다음해를 말아먹었으나 가까스로 재계약을 성공했지만 2020시즌도 말아먹은 바람에 방출. 맷 무어의 미국복귀와 벤덴헐크의 퇴단으로 외인선발이 필요한 소프트뱅크가 낚아챘고 2021시즌 드디어 부활에 성공하면서 에이스로 군림했다. 그리고 그 해에 망해가는 친정팀 상대로 털면서 제대로 복수까지 한건 덤. 시즌 종료후 메이저리그행[12].
- 후지오카 타카히로 (2019 - 2020) 상술했던 요시카와 미츠오와 트레이드되어 요미우리로 갔다. 근데 후지오카도 롯데에서 오카 히로미와 트레이드된게 함정(...). 그리고 이쪽도 좌완 1라운더 출신이다.
- 사이토 유키 (2011-2021) : "손수건 왕자". 고교시절 다나카 마사히로와 함께 고교야구 최고의 투수로 이름을 알렸으나 프로로 직행하지 않고 대학에 진학[13]. 대학에서도 명성에 걸맞은 활약으로 1라운드에 지명됐다. 하지만 고교시절과 대학시절 어마어마한 혹사[14]로 프로에서 제몫을 다하지 못한 채 결국 2021시즌 종료후 은퇴. 여담으로 애니메이션 다이아몬드 에이스 1기의 최종보스 캐릭터인 나루미야 메이 및 학교가 모티브인 이니시로 실업 고등학교이다. 야구선수로서 1차 지명값을 못하긴 했지만 고교 시절 전국구급 인기덕에 선수 시절 반 이상을 2군에서 보냈음에도 유니폼이나 2군 경기 티켓등으로 마케팅 차원에선 그럭저럭 도움이 돼서 롱런이 가능했고 은퇴식도 1군 선수 안부러운 수준으로 크게 진행했다.
3.2. 포수
- 오오미야 타츠오 (1977 - 1987) : 팀의 2번째 퍼시픽리그 우승 당시 주전 포수. 1987년 오시마 야스노리와의 맞트레이드로 주니치 드래곤즈로 이적했다가 1992년 세이부 라이온즈에서 은퇴했다. 현재는 야구해설가로 활동 중인데, 스승인 오사와 케이지를 벤치마킹해 유카타를 입고 선수들의 조그만 실수에도 가차없이 쓴소리를 시전하는 해설로 인기를 끌고 있다.
- 타무라 후지오 (1978 - 1995) : 80년대 중반~90년대 중반 팀의 주전포수로써 활약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통산 1123안타 110홈런을 기록하며 포수로썬 나름 준수한 타격 성적을 기록했다. 말년엔 롯데, 다이에에서 선수생활을 보냈으며 은퇴 후 현재까지 여러 팀에서 코치를 맡고 있다.
- 타카하시 신지 (1997 - 2011) : 2004년 삿포로 돔 이전 첫 해 26홈런을 치는 등 준수한 장타력을 보여줬던 공격형 포수로 2000년대 닛폰햄의 주전 포수로 활약했다. 다만 동시기에 죠지마 켄지가 존재한 탓에 포수 시절엔 내내 무관에 그쳤고, 1루수로 전향한 2009년[15]에야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수상했다. 후에 오릭스 버팔로즈로 이적했다가 은퇴.
- 노구치 토시히로 (1998 - 2002) : 도쿄돔 말기의 주전 포수. 야쿠르트에서 후루타 아츠야에 밀린 잉여 자원으로 분류되어 닛폰햄으로 트레이드된 선수였다. 2000년에는 3할에 근접한 타율에 다리도 그리 빠르지 않은 포수 주제에 11개의 3루타를 치는 변태스탯을 찍으며 '빅뱅 타선'의 지뢰밭 하위타선을 이끌기도 했지만 이후에는 눈에 띄는 성적을 거두지 못했고, 사네마츠 카즈나리 등 젊은 포수를 육성하고자 했던 구단 방침에 따라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되었고 이후 야노 아키히로의 백업으로 6년간 한신에서 뛴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즈로 이적했다가 2010년 은퇴했다.
- 나카지마 사토시 (2004 - 2015) : 1987년에 데뷔한 최후의 한큐 브레이브스 출신 현역 선수. 29년 연속 1군 경기 출전이라는 대기록을 가진 선수로 오릭스의 마지막 일본시리즈 우승과 닛폰햄의 연고이전 후 첫 일본시리즈 우승을 모두 경험했다. 2007년부터 은퇴하는 2015년까지 선수와 1군 배터리코치를 겸임했는데, 이는 2군 구장인 카마가야 파이터즈 스타디움이 1군 구장인 삿포로 돔에서 멀리 떨어져있는 팀 특성상 비상시 포수를 충원하기 어렵기 때문에 배터리코치가 본업인 나카지마를 비상시의 포수로 활용할 수 있도록 응급조치처럼 이루어졌던 인사였다. 닛폰햄으로 이적했을 때 이미 전성기가 한참 지나 백업포수 정도로 쓸려고 영입된 것이었고 코치 겸임 이후에는 정말 비상시가 아니면 출장조차 하지 않았지만 아무튼 제한된 쓰임새로나마 선수생활을 이어간 특이한 케이스였다.
3.3. 내야수
- 오오스기 카츠오 (1965 - 1974) : 양대리그 최초로 각 리그에서 1000안타를 기록한 강타자. 야쿠르트 스왈로즈로 이적한 후 1978년 야쿠르트의 첫 센트럴리그+일본시리즈 우승을 이끌었고 일본시리즈에서 시리즈 타점 신기록을 찍으며 맹활약한 공으로 MVP를 수상했다.
- 돈 짐머 (1966) - 그 페드로 마르티네즈가 2003 아메리칸 리그 챔피언십 시리즈중 패대기 한 뉴욕 양키스 시절 지도자로 계셨던 그 영감님이 맞다. 선수시절 막바지 일본에서 잠시 뛰다가 은퇴.
- 카시와바라 준이치 (1978 - 1985) : 난카이 호크스의 주전 1루수였지만 노무라 카츠야가 난카이 구단 경영진과의 갈등으로 해임된 것에 반발해 닛폰햄으로 이적했다. 닛폰햄에서도 중심타자로 활약하며 1981년 일본시리즈 진출의 주역이 된다.
- 후루야 히데오 (1978 - 1990)
- 타카시로 노부히로 (1979 - 1988)
- 토니 솔라이타 (1980 - 1983) : 아메리칸 사모아 출신으로 1981년 홈런왕-타점왕. 닛폰햄에서 4년 연속 30홈런을 치며 중심타자로 활약했다. 은퇴 후엔 공무원으로 전직했으나, 1990년 토지매매 관련 문제로 생긴 트러블에 휘말려 상대 주민에게 총살 당하는 불운한 최후를 맞이하고 말았다.
- 시라이 카즈유키 (1984 - 1995) : 준족의 2루수로 활약하며 최고출루율 타이틀도 한 차례 얻었던 선수.
- 히로세 테츠로 (1986 - 1998) : 드래프트 1위로 데뷔했지만 데뷔 후 7년 동안이나 백업 이하로 머물렀다가 30대 초반의 나이(32세)였던 1993년에야 비로소 주전 유격수 자리를 차지했던 대기만성형 선수. 이후 4년간 주전 유격수, 3루수로 활약하며 골든글러브와 베스트나인을 2차례 수상하는 쏠쏠한 활약을 펼쳤으나 얼마 안가 1997년 카타오카 아츠시 등의 대두로 주전 자리를 잃고 이듬해에 은퇴했다. 대머리+안경이라는 임팩트있는 인상에 1루 슬라이딩 등의 허슬 플레이와 재미있는 언행으로 예능계에서도 나름 활약했다.
- 타나카 유키오 (1986 - 2007) : 입단 당시 이름 한자까지 똑같은 동명의 선수가 있어 '코유키'(작은 유키)라는 별명으로 불렸으나, 또다른 애칭은 '미스터 파이터즈'. 90년대 닛폰햄을 대표했던 프랜차이즈 스타. 골드글러브 5회와 타점왕 1회, 6번의 20+홈런 시즌을 기록한 공수겸장의 유격수였다.[16] 파이터즈의 원 클럽 플레이어로서는 유일하게 2000안타를 달성해 명구회에 가입한 인물.
- 오오시마 야스노리 (1988 - 1994) : 주니치 드래곤즈의 중심타자였으나 닛폰햄으로 트레이드된 뒤에도 꾸준한 활약을 펼쳤다. 도쿄돔 시대의 말기(2000~2002)에 감독을 맡으며 '빅뱅 타선' 이라 불린 강타선을 구축했지만, 성적 부진으로 3년만에 해임되었다. 이후 NHK의 해설 겸 평론가를 하다가 2017년에 개인 블로그를 통해 2016년 10월에 대장암 말기 판정을 받았음을 고백했고 이후 투병생활에 들어갔지만 2021년 6월 30일에 숨을 거뒀다.[17] 숨을 거두기 몇 주 전까지 메이저리그 해설을 했었다. 여담으로 통산 2204안타 382홈런 1204타점이란 뛰어난 스탯에 1983년에 센트럴리그 홈런왕까지 수상한 경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단 1번도 베스트나인, 골든글러브를 수상해 본적이 없다는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물론 요미우리의 두 레전드랑 포지션이 겹친 탓에 타이틀 자체를 하나도 못 딴 타이요 훼일즈의 마츠바라 마코토보단... - 카타오카 아츠시 (1992 - 2001) : 뛰어난 선구안으로 4할 출루율 3회, 100볼넷을 2회 기록한 90년대 중후반의 붙박이 3번 타자-3루수. 하지만 FA로 입성한 고향 팀 한신 타이거스에서는 2003년 우승에 공헌한 걸 빼면(근데 그 해는 규정타석 미달...) 선수 시절에는 FA먹튀, 코치로서는 타격 막장화의 주범으로 어마어마하게 까이는 인물이 되었다.
- 오치아이 히로미츠 (1997 - 1998) : 같은 1루수였던 기요하라 카즈히로를 요미우리가 영입한 것에 반발해 스스로 방출을 요청한 후 닛폰햄으로 이적했다. 그러나 전해의 부상으로 인해 20홈런 이상을 기대할 수 있었던 장타력이 급격하게 폭망하면서 결국 과거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부진 끝에 계약기간 만료 2년 만에 선수생활 은퇴하고 말았다.
- 오가사와라 미치히로 (1997 - 2006) : 명실상부 2000년대 파이터즈를 대표하는 강타자. 2006년 퍼시픽리그 MVP[18]
- 카네코 마코토 (1994 - 2014) : 타격은 극히 평범했지만, 처음으로 2루수 주전을 차지한 1995년부터 2012년까지 닛폰햄 센터 내야의 주전 한 자리를 계속해서 지켜낸 수비형 내야수. 골든글러브를 두 포지션에 걸쳐 3번 수상했다.(2루수 : 1998~99, 유격수 : 2009) 일본의 세이버메트리션 사이에서는 코사카 마코토 등과 함께 일본프로야구 사상 최고의 수비력을 자랑하는 내야수로까지 평가받을 정도의 수비 장인.
- 이이야마 유지 (1998 - 2017) : 통산 OPS 4할대에 선수생활 전부를 대수비/대주자요원으로만 보낸 선수지만, 내야 어느 포지션에서도 빈틈없는 수비능력으로 가늘고 길게 현역생활을 유지했던 선수. 은퇴 후에서도 코치로 팀에 남았다.
그리고 코로나 두 번 확진됐다 운 한번 드럽게 없네 - 다나카 켄스케 (2000 - 2012, 2015 - 2019) : 2019년 기준 포수 츠루오카 신야와 함께 닛폰햄의 2006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경험한 유이한 현역 NPB 선수[19]. 2013~14년을 각각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와 텍사스 레인저스 산하 마이너에서 보낸 걸 빼면[20] 현역 생활을 닛폰햄에서만 보낸 대표적인 프랜차이즈 스타 2루수다. 2019년 시즌 종료 후 은퇴.
- 코야노 에이이치 (2003 - 2014) : 2010년 타점왕. 2014시즌 종료후 FA로 오릭스로 갔다. 그이후 거기서 쭉 뛰다 은퇴. 현재는 오릭스 2군 타격 코치로서 살고 있다.
- 페르난도 세귀뇰 (2004 - 2007) : 2004년 홈런왕. 오레스테스 데스트라데 이후 최고의 거포 스위치 히터로 꼽히는 외국인 선수. 홈런왕 1회(2004), 퍼시픽리그 지명타자 베스트나인에 2회(2004, 2006) 선정되었다. 특이사항으로 훌리오 줄레타와 함께 일본프로야구에서 단 두명 뿐인 13개 구단(현 NPB 12개구단+킨테츠) 상대 홈런을 기록한 선수 중 하나이다.
- 니오카 토모히로 (2009 - 2013) :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프랜차이즈 유격수였으나 불륜 스캔들과 후배를 괴롭히는 악행등의 모습 등이 폭로되어 문책성으로 트레이드되었다. 이적 이후 쓰레기 같은 성적을 보여주며 간간히 선수생활을 하다 은퇴. 니오카 처럼 비슷하게 후배를 괴롭혀서 사고 친 이후 타팀으로 트레이드 된 선수는 외야수 항목에 있는 나카타 쇼가 있다.
- 미첼 아브레이유 (2013 - 2014) : 2013년 홈런왕. 쿠바 프로야구 리그의 홈런타자였으나 2004년 메이저 진출을 노리고 코스타리카로 망명했다. 하지만 메이저 승격 없이 마이너와 멕시칸 리그를 전전하다 연봉 2000만엔에 닛폰햄에 영입된 것이 대박. 2013년 파리그 유일의 30홈런대인 31홈런을 치며 홈런왕에 등극하는 활약으로 뛰어난 가성비를 보여주었다. 하지만 다음 해에는 허리 부상으로 신음하다 조용히 방출.
- 브랜든 레어드 (2015 - 2018) 닛폰햄의 2016년 일본 시리즈 우승 MVP 였던 강타자였지만, 지금은 지바 롯데에서 활약 중이다. 덤으로 형인 제럴드는 2022년 롯데 자이언츠 배터리코치를 하고 있다.
3.4. 외야수
- 오시타 히로시 (1946 - 1951): 플라이어즈 초창기를 대표하는 강타자였지만, 어머니의 필로폰 중독 치료비에 쓰느라 가불받은 급여가 너무 많아진 것이 화근이 되어 구단과 불화를 겪다 1952년 시즌 개막 뒤 얼마 지나지 않아 니시테츠 라이온즈로 트레이드된다.
- 후카미 야스히로 (1952 - 1953): 위의 오시타의 트레이드 상대. 플라이어즈에서는 짧은 기간만 뛰었지만, 이적 첫 해인 1952년 25홈런(니시테츠에서 2홈런, 토에이에서 23홈런)을 치며 홈런왕이 되었다. 덕분에 후카미는 일본프로야구 사상 유일한 2구단 소속 홈런왕이라는 진기록을 가지게 되었다.
- 부스지마 쇼이치(1954~1971)
- 장훈 (1959 - 1975): 재일교포 이자 명실상부 팀내 최고 아니 일본야구사 최고의 레전드이다. 팀내가 아니더라도 일본프로야구 역사상 손꼽는 대기록을 보유한 통산 타율 1위의 레전드다. 한미일 야구 3국 중 유이하게 통산 3할과 3천안타 500 홈런 300 도루 클럽을 가입한 선수이다[21]. 자세한 내용은 장훈의 문서를 읽어보자
- 백인천 (1962 - 1974) 그 롯데 자이언츠 감독으로 유명한 백골퍼가 맞다
- 시마다 마코토 (1977 - 1990) - 파이터즈 프랜차이즈 사상 최다 도루(통산 352도루, 그중 마지막 해 호크스에서 기록한 1도루를 빼고 모두 파이터즈에서 기록) 기록자이자 일본프로야구 도루계의 콩라인. 1979년 55도루를 한 것으로 시작해 1984년까지 40도루+ 2회(1981, 84)를 포함 단 한번도 30도루 이하를 기록한 적이 없고 3할 타율도 3회 기록하는 등 공수주에서 꾸준한 모습을 보인 리드오프였다. 하지만 도루왕 타이틀은 후쿠모토 유타카와 오이시 다이지로에 밀려 단 한 차례도 차지하지 못했다. 덕분에 구단 사상 첫 도루왕은 시마다가 현역에서 은퇴한 지 20년이 넘게 지난 뒤에야 아래의 양다이강이 차지하게 된다. 1991년 후쿠오카 다이에 호크스로 이적한 뒤 그해를 끝으로 은퇴했다.
- 토미 크루즈 (1980 - 1985)
- 김실 (1986 - 1993) : 닛폰햄에서 방출된 뒤 삼성 라이온즈, 쌍방울 레이더스, OB-두산 베어스에서 뛴 재일교포 좌투좌타 외야수.
- 맷 윈터스 (1990 - 1994)
- 제리 브룩스 (1997 - 1998)
- 나이젤 윌슨 (1997 - 2001) : 홈런왕 2회(97, 98), 타점왕 1회(98)를 차지하며 지명타자 베스트나인에 2회 선정(98, 2000)된 캐나다 출신 흑인 좌타자. 천식 환자로 흡입기를 항시 가지고 다녔음에도 뛰어난 파워를 보였다.
- 셔먼 오반도 (1999 - 2002, 2004 - 2005)
- 모리모토 히초리 (1999 - 2010) 한국계 일본인 이자 한신의 카네모토 히로시마의 타카히로 료타 아라이 형제와 함께 국내에서 인기가 많았던 선수 이후 FA가 되어 하필 통인구가 바뀐 그해 요코하마와 이후 세이부로 이적을 해서 먹튀가 되어 결국 반등도 하지 못하고 은퇴를 했다.
- 신조 츠요시 (2004 - 2006) : 훌륭한
그리고 똘끼넘치는일본에서는 팬 서비스 만큼은 이 사람을 이길자가 없다. 그리고 팀내의 무드 메이커 등으로 활약하며 파이터즈의 인기팀 도약과 홋카이도 정착에 공헌한 1등공신. - 이나바 아츠노리 (2005 - 2014) : 야쿠르트 스왈로즈에서 FA 이적한 우익수로 2006~2009년 4년 연속 베스트나인과 골든글러브를 차지하며 2000년대 말 팀 리더격으로 활약한 선수이다. 2017 ~ 2021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 감독. 지금은 구단의 단장으로 일을 하는 중
- 터멀 슬레지 (2008 - 2009, 2012) : 한국인 어머니와 흑인 아버지를 둔 미국 출신의 혼혈 외야수. 04-05년, 약체팀 몬트리올 엑스포스의 마지막 시즌의 주전 외야수였고 연고지 이전의 결과 만들어진 워싱턴 내셔널즈의 원년 시즌을 함께한 좌타자였다. 닛폰햄에서 첫 해 16홈런, 2년차에 27홈런을 치고 09-10년에는 요코하마 베이스타즈의 주전 좌익수로 2년 연속 20+홈런을 쳤다. 다만 흑역사로 마이너리거 시절인 2003년 도핑에 적발되며, 야수로서는 최초로 강화된 메이저리그 도핑 규정에 따라 징계를 받은 선수라는 기록도 가지고 있다.
- 이토이 요시오 (2004 - 2012) 신죠/모리모토를 이은 팬 서비스를 잘하는 선수 비록 원 클럽 맨이 못 되었지만 타 팀으로 이적 후에도 자기 밥 값을 하는 선수 2022년에 은퇴하였다. 특이하게도 닛폰햄을 빼면 칸사이 지역 팀에서만 10년을 뛰고 은퇴한 셈이다.
- 양다이강 (2007 - 2016) : 등록명은 일본식 음독과 대만식 음독이 괴상하게 뒤섞인 "요 다이칸"[22]. 2013 WBC 대만 야구 국가대표팀에 발탁되었고 2012~2014년 외야수 골드글러브를 수상한 "호타준족"의 중견수. 닛폰햄 구단 사상 최초의 도루왕(2013)이기도 하다. 일본으로 야구 유학을 가서 후쿠오카 제1고교를 나와, 일본인과 같은 방식으로 고교생 드래프트로 입단했다. 2016 시즌이 끝나고 FA를 선언,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했다.
그리고 요미우리 라는 돈지랄팀 걸맞은 완벽한 먹튀가 되었다 - 나카타 쇼 (2008 - 2021) 팀의 프랜차이즈 겸 차세대 중심타자 였었고 그대로 닛폰햄에서 활약했었으면 영구결번 까지도 노릴만한 선수였는데 니오카 처럼 후배 괴롭히면서[23] 결국 요미우리로 트레이드 되었다.
요미우리 반대 버전 이라고 생각하면 된다. - 스기야 켄시 (2009 - 2022) 드래프트 6위로 입단한 스위치 히터이자 외내야 모두 소화가능했던 유틸리티맨. 오프시즌의 삼관왕(オフの三冠王)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예능감으로는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에 필적하는 존재감을 뽐내는 선수[24]. 위의 나카타 쇼와의 콤비, 세이부 돔 아나운서인 스즈키 아즈사(鈴木あずさ)의 디스 등의 일화는 상당히 유명하고, 야나기타 유키가 "쟨 야구 그만둬도 일은 잔뜩 있겠다"라고 쑥덕거리기도 했을 정도의 예능감을 가지고 있다. 다만 예능감에 비해 실력은 냉정하게 백업 수준으로[25] 기복이 심해서 커리어 중 한번도 규정타석을 채운적이 없었다. 특기할만한 기록은 레이와 연호가 들어선 뒤 나온 첫 양타석 홈런 기록[26]. 결국 2021년 빅 보스에 의해 오프 시즌 예능참여를 금지당했고 스기야는 이를 받아들였지만 2022 시즌의 성적은 작년과 별반 다를 것 없어 결국 2022년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다. 하위지명이었지만 14년간 원클럽맨으로 남은 선수에 대한 경의 표현인지, 구단에서는 스기야의 은퇴시합을 일본 야구 국가대표팀과의 시범경기로 잡았다. 덕분에 은퇴 세레모니는 어지간한 선수보다 더 호화롭게 받았다. 은퇴 이후로는 유튜브 채널을 개설했다.
- 오오타 타이시 (2017 - 2021) : 요미우리의 실패한 1픽의 사례[27]로 만년유망주에 그치는 듯 싶었으나 2017년 닛폰햄으로 트레이드된 이후 드디어 포텐을 터트려 팀의 강한 2번타자로 자리잡았다. 수비역시 준수해 2020년 골든 글러브까지 얻었으나 2021시즌 제대로 망하면서[28]논텐더로 풀렸다. 그후 요코하마로 이적.
4. 구단 출신 메이저리거
- 오카지마 히데키 (보스턴 레드삭스 → 일본 복귀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 다르빗슈 유 (2012 ~ 2017 텍사스 레인저스 → 2017 LA 다저스 → 2018 ~ 2020시카고 컵스 → 2021년 ~ 샌디에이고 파드리스)
- 다테야마 요시노리 (텍사스 레인저스 → 뉴욕 양키스 → 한신 타이거스)
- 다나카 겐스케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 → 텍사스 레인저스 → 닛폰햄 복귀 후 은퇴)
- 오타니 쇼헤이 (2018 ~ 2023 LA 에인절스 → 2024 LA 다저스)
- 크리스 마틴 (텍사스 레인저스)
- 아리하라 코헤이 (텍사스 레인저스 → 복귀 후 후쿠오카 소프트뱅크 호크스)
[1] 그나마 1975년에는 3완봉승을 포함한 개막 6연승을 기록했으나 그 이후 7연패하며 여름에 2군으로 올라갔고 2군(이스턴 리그)에서 최우수 방어율(0.69)을 획득했다.[2] 이 해 마시바의 10할 승률은전후 최초의 10할 승률로, 2013년의 다나카 마사히로 이전까지 양대리그제 시행 이후 유일한 10할 승률이었다. 당연히 NPB 최고기록.[3] 원래 고라쿠엔 구장은 천연잔디를 사용했으나 1976년부터 인조잔디로 바꿔 폐장 때까지 계속 인조잔디를 유지해 왔다. 참고로 이 날 노히트 노런은 고라쿠엔 구장 최후의 노히트 노런이기도 했다.[4] 그 해 시즌에 FA권을 취득했는데, 성적 부진 탓에 본인이 FA선언을 고사했다. 그러나 구단 측에서 "FA선언을 하지 않겠다면 트레이드 요원 대상에 넣겠다"라는 사실상의 전력외통보를 선언하면서 결국 세이부로 트레이드되었다.[5] 한신 타이거스로 트레이드 된다.[6] 2011년 요코하마를 거쳐 소프트뱅크 호크스에서 뛴 후 은퇴했다.[7] 외모만 봐도 다르빗슈를 닮았다.[8] 2018년에 1군 기록이 없이 2019년 2년만에 복귀전을 치렀는데, 이날 불륜왕에게 만루홈런을 맞고 조기강판. 결국 이 경기가 일본 마지막 경기가 되었다. 참고로 상대팀 롯데의 선발 사사키 치하야 역시 이날 2년 만의 복귀전을 치렀는데 이쪽은 QS+을 찍고 승리투수행(…). 참고로 사사키도 1라운더다.[9] 다만 대학 시절 성적은 도쿄대가 아녀도 지명이 가능했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준수했다. 도쿄대 화제몰이로 뽑힌 건 아니다. 4학년 시즌을 엄청나게 조져서 7순위로 떨어진 거지 3학년 때 페이스는 오히려 지명은 당연하고 상위 라운드도 가능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도쿄대 야구부는 당연히 선수들의 수비도 바닥이라서 땅볼 타구가 안타가 되는 일이 더 많은데 미야다이의 성적은 도쿄대가 아니라 다른 야구 명문대학 소속이어도 프로 지명을 노릴 만큼 좋았다.[10] 고졸 1라운더 유망주였다. 기대치가 어마어마했으나 기대치만큼 해준 해는 딱 한 해.[11] 결국 이적 1년만에 세이부에서 방출당했다. 이후 은퇴한 듯.[12] 김하성의 동료가 되었다.[13] 일본은 한국과 달리 대학에 직행 하는 선수들이 꽤 많다. 일본은 고졸 출신보단 대졸이나 사회인 출신을 많이 선호해서 구단 OB인 다르빗슈 유처럼 정말 잘하는 선수가 아닌 이상 좋은 대접을 받기 어렵다.[14] 지금이야 혹사에 대한 인식이 나빠졌지만 당시엔 미화되어 나쁜 인식이 없어 라이벌인 다나카도 고교시절 미친듯이 굴려졌다. 사이토는 대학야구에서 이걸 한번 더 경험했으니...[15] 2009년 일본시리즈 당시 타석에서 표정이 썩어있던 마지막 타자가 바로 이 타카하시 신지 였다.[16] BECK의 타나카 유키오의 이름은 이 선수에서 따왔다고 한다.[17] 부모님 두 분 모두 암으로 세상을 떠났고 형은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는 점에서 가족력이 의심된다.[18] 이듬해 곧바로 요미우리 자이언츠로 이적하여 센트럴리그 MVP가 되었다. 즉, 양대리그 타자 최초의 MVP. 투수 최초는 에나츠 유타카이다.[19] 같은 팀의 포수 츠루오카 신야가 주로 백업이었던 것과 달리 다나카는 이때 힐만 감독의 총애를 받으며 주전 2루수로 출장했다. 메이저리그까지 합쳐도 06년 일본시리즈 우승 경험 선수는 다르빗슈 유가 더해지는 것 외에는 없다. 엄밀히 따지면 이토이 요시오도 2006년 닛폰햄 소속이기는 했지만 그 해에 투수에서 외야수로 전향하느라 일본시리즈를 포함한 1군 경기에는 전혀 출장하지 않았다.[20] 메이저리그에서도 잠깐 뛰었다. 정말 메이저리거였다는 것만 증명할 수 있을 정도로 잠깐 뛰어서 그렇지.15경기 나왔다. 황재균보다도 메이저리그 생활이 짧다[21] MLB에 윌리 메이스 단 한명만이 보유 중[22] 성인 요는 일본식 음독이고 이름의 다이칸은 본인 이름의 중국어식 발음인 다이강을 일본화한 독음이다. 참고로 프로 입단하고 나서 개명을 했는데 개명하기 전 드래프트에 지명될 당시의 이름은 일본식 중국음독으로 양 촌소(楊 仲壽, 한국어 표기법으로 옮기면 양 종셔우)라고 표기 했었다. 형인 양야오쉰도 일본에서 뛰었었다.[23] 이구치 카즈토모라는 후배 투수를 단순히 괴롭힌 수준이 아니라 아예 줘패서 뇌진탕까지 오게됐다.[24] 어느 정도냐면 일본 인터넷 상의 반응은 "야구 잘하는 연예인(野球の上手い芸人)" 취급이다.[25] 만약 좋은 성적을 남겼다면 인터넷 상에서 떠도는 야구 잘하는 연예인 취급이 나오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닛폰햄 팬들은 예능에서 활약하던 선수 시절 스기야를 보고 "시합에서 좀 쳐라(シアイデウテヤ)"라 하기도 했다.[26] 2019년 5월 23일에 도호쿠 라쿠텐 골든이글스와의 홈경기에서 기록.[27] 이승엽이 요미우리 시절 먹튀로 군림화 할때 이승엽과 타카하시 요시노부 그리고 오가사와라 미치히로를 밀어낼 수 있다는 그 신인이 바로 이 오타 였다.[28] 고질적으로 선구안이 나빠 타율 2할 중후반을 쳐도 OPS는 단 한번도 9를 넘긴적이 없다. 이런 막장 선구안에 타격까지 망하니 성적이 나빠질수 밖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