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원제는〈경부텰도노래(京釜鐵道歌)〉로,[1] 1908년에 최남선이[2] 일본의 철도창가를 멜로디와 가사를 모티브로 하여 만든 곡이다. 실질적으로 녹음된 기록은 현재 한국과 외국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힘들고, 대신 가사와 악보만 전해지고 있다. 의왕시에 있는 철도박물관에 원본이 전시되어 있다.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박물관에서 노래를 들을 수 있다. 위 영상은 인천에 있는 한국근대문학박물관의 한 전시실에서 찍은 것이다.
총 67절로, 스코틀랜드 민요 'Comin' Thro' The Rye'[3] 곡조에 맞춰서 부르면 된다. 그러나 음수율을 7.5조[4]에 맞추어 만들었기 때문에 일본 철도창가 원곡 곡조에 맞춰 불러도 딱 맞게 떨어진다.
자매버전(?)으로 경인철도가, 호남철도가, 경원철도가, 경의철도가, 마산행진곡, 경주행진곡이 있다.
2. 가사
경부텰도노래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 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친소 다같이 익혀 지내니 /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관왕묘[5]와 연화봉[6] 둘러보는 중 / 어느 덧에 용산역 다다랐도다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 집 / 이천여 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7]
서관(西關)가는 경의선 예서 갈려서 / 일산 수색 지나서 내려간다오
옆에 보는 푸른 물 용산나루니 / 경상 강원 웃물배 뫼는 곳일세
독서당(讀書堂)[8]의 폐(廢)한 터 조상하면서 / 강에 빗긴 쇠다리 건너나오니
노량진역 지나서 게서부터는 / 한성(漢城) 지경(地境) 다하고 과천땅이다[9]
호호양양 흐르는 한강물소리 / 아직까지 귀속에 쳐져있거늘
어느 틈에 영등포 이르러서는 / 인천차와 부산차 서로 갈리네[10]
예서부터 인천이 오십여 리니 / 오류 소사 부평역 지나간다네
이 마음에 틈을 타 다시 갈 차로 / 이번에는 직로로 부산가려네
관악산의 개인[11] 경 우러러보고 / 영랑성[12]의 묵은 터 바라보면서
잠시동안 시흥역 거쳐 가지고 / 날개 있어 나는 듯 안양이르러[13]
실과 같은 안양내 옆에 끼고서 / 다다르니 수원역 여기로구나
이전에는 유수도(留守道) 지금 관찰부(觀察府) / 경기도의 관찰사 있는 곳이라
경개 이름 다 좋고 서호(西湖) 항미정(杭眉亭) / 그 옆에는 농학교(農學校) 농사시험장[14]
마음으로 화령전(華寧殿) 첨배(瞻拜)한 후에 / 대성인의 큰 효성 감읍(感泣)하도다
달 바라는 나각(螺閣)은 어찌되었나 / 물 구경 터 화홍문 변이 없는지
운담(雲淡) 풍경 때맞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 양어(養魚) 상연(賞蓮) 겸하는 만석거(萬石渠)[15]로다
광교산을 옆하고 떠나나가서 / 잠시간에 병점역 이르렀도다
북(北)에 뵈는 솔밭은 융릉 뫼신 데 / 이름높은 대황교(大皇橋)[16] 거기 있다오
이 다음에 정차장 오산역이니 / 온갖 곡식 모이는 큰 장거리오
그 다음에 정차장 진위역[17]이니 / 물새사냥 하기에 좋은 터이라
서정리를 지나서 평택이르니 / 들은 늦고 산낮아 들만 넓도다
묘한 경개 좋은 토산(土産) 비록 없으나 / 쌀 소출은 다른데 당하리로다
게서 떠나 성환역 다다라서는 / 해가 벌써 아침때 훨씬 겨웠네
십오 년 전[18] 일청전 생각해보니 / 여기 오매 옛일이 더욱 새로워
일본사람 저희들 지저귀면서 / 그 때 일이 쾌하다 서로 일컬어
얼굴마다 기쁜 빛 가득하여서 / 일본남자 대화혼(大和魂) 자랑하는데
그 중에도 한 노파 눈물 씻으며 / 그 때통에 외아들 잃어 버리고
늙은 신세 표령(飄零)[19]해 이 꼴이라고 / 떨어지는 눈물을 금치 못하니
말말마다 한이오 설움이어서 / 외국사람 나까지 감동되거늘
쓸데없는 남의 공 자랑하기에 / 저의 동포 참상을 위로도 없네
척수루의 빈 터는 볼 수 있으나 / 월봉산의 싸움터 자취 없도다
안성천의 다리를 얼른 건너서 / 순식간에 직산역[20] 와서 닿았네
백제국의 첫 도읍 위례성 터는 / 성암산[21]에 있으니 예서 삼십리
천오동[22]에 놓았던 구리 기둥은 / 돌 주초[23]만 두개가 남았다더라
이편저편 보는 중 모르는 틈에 / 어느 덧에 천안역 다다랐도다
온양온천 여기서 삼십리이니 / 목욕하러 가는 이 많이 나리네[24]
인력차와 교자가 준비해있어 / 가고 옴에 조금도 어려움 없고
청결하게 꾸며논 여관있으나 / 이는 대개 일본인 영업이라니
이런 일은 아무리 적다하여도 / 동포생업 쇠함을 가히 알리라
그네들이 얼마나 잘하였으면 / 이것 하나 보전치 못하게되오
백제 때에 이 지명 탕정(湯井)[25]이라니 / 그 때부터 안 것이 분명하도다
수천년간 전하던 이러한 것을 / 남을 주고 객(客)되니 아프지 않소
소정리와 전의역 차례로 지나 / 갈거리(葛居里)[26][27]를 거쳐서 조치원오니
낙영산(落影山)의 그림자 멀리 바라고 / 화양서원 옛일을 생각하도다[28]
내판역을 지나서 미호천건너[29]/ 몇십분이 안되어 부강역[30]이니
충청일도 윤내는 금강가이라 / 쌀 소금의 장터로 유명한데오
사십리를 격조(隔阻)한 공주 고을은 / 충청남도 관찰사 있는 곳이니[31]
내포(內浦) 일판 너른 뜰 끼고 앉아서 / 이 근처의 상업상 중심점이오
계룡산(鷄龍山)의 높은 봉(峰) 하늘에 닿으니 / 아(我) 태조(太祖) 집 지으신 고적(古蹟) 있으며[32]
금강루의 좋은 경(景) 물에 비치니 / 옛 선비의 지은 글 많이 전하네
마미(馬尾)[33] 신탄(新灘) 지나서[34] 대전 이르니 / 목포(木浦)가는 곧은 길 예가 시초라[35]
오십오 자(五十五尺) 돌미륵(彌勒)[36] 은진(恩津)에 있어 / 지나가는 행인의 눈을 놀래오
증약지나[37] 옥천역 다다라서는 / 해가 벌써 공중에 당도하였네
마니산성 남은 터 바라보는중 / 그 동안에 이원역 이르렀도다[38]
속리사(俗離寺)[39]가 여기서 삼십리라니 / 한번 가서 티끌 마음 씻을 것이오
운연(韻連) 죽던 양산(陽山)[40]이 육십 리(六十里)라니 / 쾌남아(快男兒)의 매운 혼 조상하리라
고당포를 바라며 심천이르니[41] / 크지 않은 폭포[42]나 눈에 띠우고
그 다음에 영동역 다다라서는 / 경부사이 절반을 온 셈이라[43]
이십사번(二十四番) 화신풍(花信風)[44] 불어올 때에 / 때 좋다고 꽃피는 금성산인데
정든 손을 나누기 어렵다하여 / 꽃다운 혼 스러진 낙화대(落花臺)로다[45]
미륵[46] 황간 두역을 바삐 지나서 / 추풍령의 이마에 올라타도다[47]
경부선 중 최고지(最高地) 이 고개인데[48] / 예서부터 남(南)편을 영남이라오
얼마 안가 김천역[49] 다다라보니 / 이전부터 유명한 큰 장거리라[50]
사통하고 팔달한 좋은 덴 고로 / 이 근처에 짝 없이 굉장하다네
그 다음의 정차장 금오산이니[51] / 이름 있는 도선굴 있는 곳이라
산 아래 지었던 길재 사당은 / 지낸 세월 오래라 저리되었네
금오산성(金烏山城) 너른 곳 지금 어떠뇨 / 세 연못과 한 시내 그저 있는지
무릉도원 깊은데 역사(役事) 피하듯 / 이전부터 그 근처 피란(避亂) 곳이라
약수역[52]을 지나면 왜관역이니 / 낙동강의 배편이 예가 한이요
삼백년전 당하던 임진왜란에 / 일본군사 수천명 머무던 데라
왜관 지나 신동에[53] 신동 지나면 / 영남천지 제일 큰 대구군이라[54]
경상북도 모든 골 작고 큰 일을 / 총할(總轄)하는 관찰사(觀察使) 여기 있으니[55]
부하(府下) 인구 도 총합 사만오천에 / 이천이백 일본인 산다하더라
산 이름은 연귀(連龜)이나[56] 거북 못 보고 / 집 이름은 영귀(詠歸)나[57][58] 관원 있도다.
연년마다 춘추로 열리는 장(場)은 / 우리나라 셋째의 큰 교역이니[59]
대소 없이 안 나는 물건이없고 / 원근없이 안 오는 사람이었네
누구누구 가르쳐 팔공산인지 / 일곱 고을 너른 터 타고 있으되
수도동의 폭포는 눈이 부시고 / 동화사의 쇠북은 귀가 맑도다
달성산의 그윽한 운취 끼고서 / 경산군을 지나서 청도이르니
청덕루의 불던 피리 소리가 없고 / 소이서국(小伊西國)[60] 끼친 예(禮) 그림자도 없네
성현터널[61][62] 빠져서 유천 다다라[63] / 용각산을 등지고 밀양이르니
장신동의 기와집 즐비한 것은 / 시골촌에 희한한 경광이러라
밀양군은 영남의 두서넛째니 / 예전에서 도호부 두었던 데라
상업상에 조그만 중심이되어 / 상고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네
객관(客館) 동편(東便) 영남루(嶺南樓) 좋은 경개는 / 노는 사람 지팡이 절로 멈추고
만어산에 나는 돌 쇠북과 같이 / 두드리면 쟁쟁히 소리난다네
그 다음에 있는 역 삼랑진이니 / 마산포로 갈리는 분기점[64]
예서부터 마산이 백 리 동안에 / 여섯 군데 정차장[65] 지나간다네
원동역을 지나서 물금에 오니 / 작원관(鵲院關)을 찾으며 낙동강 끼고
머지 않은 임경대 눈앞에 있어 / 천하재자(天下才子) 고운(孤雲)을 생각하도다
통도사가 여기서 육십 리인데 / 석가여래 이마뼈 묻어있어서
우리나라 모든 절 으뜸이 되니 / 천 이백 칠십년 전 이룩한 바라
물금역을 지나면 그 다음에는[66] / 해육운수 연하는 구포역이라
낙동강의 어귀에 바로 있어서 / 상업 번성하기로 유명한 데라
수십분을 지난 후 다시 떠나서 / 한참 가니[67] 부산진 거기로구나
우리나라 수군이 있을 때에는 / 초선두어 요해처(要害處) 방비하더니
해외 도적 엿봄이 끊이었는지 / 남의 힘을 빌어서 방비하는지
해방함 한 척 없이 버려 두었고 / 있는 것은 외국기 날린 배로다
수백년전 예부터 일인(日人) 살던 곳 / 풍신수길 군사가 들어올 때에
부산으로 파견한 소서행장의 / 혈전하던 옛 전장 여기 있더라
범어사 대찰이 예서 오십리 / 신라 흥덕왕시에 왜관 십만을
의상이란 승장이 물리치므로 / 그 정성을 갚으려 세움이라네
삼십리를 떨어진 동래 온정은 / 신라부터 전하는 옛 우물이라
수 있으면 도상의 피곤한 것을 / 한 번 가서 씻어서 뉘기리로다
영가대(永嘉臺)[68]의 달구경 겨를 못하나 / 충장단의 경배야 어찌 잊으리
초량역을[69] 지나선 부산항이니 / 이 철도의 마지막 역이라 하네
부산항은 인천의 다음 연 데니[70] / 한일 사이 무역이 주장이 되고
항구 안이 너르고 물이 깊어서 / 아무리 큰 배라도 족히 닿네
수입 수출 통액이 일천여만 원 / 입항 출항 선박이 일백여만 톤
행정 사무 처리는 부윤[71]이 하고 / 화물 출입 감독은 해관이 하네
일본사람 거류민 이만 인이니 / 얼른 보면 일본과 다름이 없고
조그마한 종선도 일인(日人)이부려 / 우리나라 사람은 얼른 못하네
한성 남산 신령이 없기전부터 / 윤산[72] 신령 없은 지 벌써 오래니
오늘날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 강개함도 도리어 어리석도다
검숭하게 보이는 저기 절영도 / 부산항의 목쟁이 쥐고 있으니
아무데로 보아도 요해지이라 / 이충무의 사당을 거기 모셨네
인천까지 여기서 가는 동안이 / 육십시간 걸려야 닿는다는데
일본 마관[73]까지는 불과 일시에 / 지체없이 이름을 얻는다하네
슬프도다 동래는 동남 제일현 / 부산항은 아국 중 둘째 큰 항구[74]
우리나라 땅같이 아니 보이게 / 저렇 듯한 심한 양 분통하도다
우리들도 어느 때 새 기운 나서 / 곳곳마다 잃은 것 찾아 들이여
우리 장사 우리가 주장해보고 / 내 나라 땅 내 것과 같이 보일가
오늘 오는 천 리에 눈에 띄는 것 / 터진 언덕 붉은산 우리같은 집
어느 때나 내 살림 넉넉하여서 / 보기 좋게 집 짓고 잘살아보며
식전부터 밤까지 타고온 기차 / 내 것같이 앉아도 실상 남의 것
어느 때나 우리 힘 굳세게 되어 / 내 팔뚝을 가지고 굴려볼거나
이런 생각 저생각 하려고 보면 / 한이없이 뒤대에 연적나오니
천리길을 하루에 다다른 것만 / 기이하게 생각되 그만둡시다
우렁차게 토하는 기적소리에 / 남대문을 등지고 떠나나가서
빨리 부는 바람의 형세같으니 / 날개 가진 새라도 못 따르겠네
늙은이와 젊은이 섞여 앉았고 / 우리 내외 외국인 같이 탔으나
내외친소 다같이 익혀 지내니 / 조그마한 딴 세상 절로 이뤘네
관왕묘[5]와 연화봉[6] 둘러보는 중 / 어느 덧에 용산역 다다랐도다
새로 이룬 저자는 모두 일본 집 / 이천여 명 일인이 여기 산다네[7]
서관(西關)가는 경의선 예서 갈려서 / 일산 수색 지나서 내려간다오
옆에 보는 푸른 물 용산나루니 / 경상 강원 웃물배 뫼는 곳일세
독서당(讀書堂)[8]의 폐(廢)한 터 조상하면서 / 강에 빗긴 쇠다리 건너나오니
노량진역 지나서 게서부터는 / 한성(漢城) 지경(地境) 다하고 과천땅이다[9]
호호양양 흐르는 한강물소리 / 아직까지 귀속에 쳐져있거늘
어느 틈에 영등포 이르러서는 / 인천차와 부산차 서로 갈리네[10]
예서부터 인천이 오십여 리니 / 오류 소사 부평역 지나간다네
이 마음에 틈을 타 다시 갈 차로 / 이번에는 직로로 부산가려네
관악산의 개인[11] 경 우러러보고 / 영랑성[12]의 묵은 터 바라보면서
잠시동안 시흥역 거쳐 가지고 / 날개 있어 나는 듯 안양이르러[13]
실과 같은 안양내 옆에 끼고서 / 다다르니 수원역 여기로구나
이전에는 유수도(留守道) 지금 관찰부(觀察府) / 경기도의 관찰사 있는 곳이라
경개 이름 다 좋고 서호(西湖) 항미정(杭眉亭) / 그 옆에는 농학교(農學校) 농사시험장[14]
마음으로 화령전(華寧殿) 첨배(瞻拜)한 후에 / 대성인의 큰 효성 감읍(感泣)하도다
달 바라는 나각(螺閣)은 어찌되었나 / 물 구경 터 화홍문 변이 없는지
운담(雲淡) 풍경 때맞춰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 / 양어(養魚) 상연(賞蓮) 겸하는 만석거(萬石渠)[15]로다
광교산을 옆하고 떠나나가서 / 잠시간에 병점역 이르렀도다
북(北)에 뵈는 솔밭은 융릉 뫼신 데 / 이름높은 대황교(大皇橋)[16] 거기 있다오
이 다음에 정차장 오산역이니 / 온갖 곡식 모이는 큰 장거리오
그 다음에 정차장 진위역[17]이니 / 물새사냥 하기에 좋은 터이라
서정리를 지나서 평택이르니 / 들은 늦고 산낮아 들만 넓도다
묘한 경개 좋은 토산(土産) 비록 없으나 / 쌀 소출은 다른데 당하리로다
게서 떠나 성환역 다다라서는 / 해가 벌써 아침때 훨씬 겨웠네
십오 년 전[18] 일청전 생각해보니 / 여기 오매 옛일이 더욱 새로워
일본사람 저희들 지저귀면서 / 그 때 일이 쾌하다 서로 일컬어
얼굴마다 기쁜 빛 가득하여서 / 일본남자 대화혼(大和魂) 자랑하는데
그 중에도 한 노파 눈물 씻으며 / 그 때통에 외아들 잃어 버리고
늙은 신세 표령(飄零)[19]해 이 꼴이라고 / 떨어지는 눈물을 금치 못하니
말말마다 한이오 설움이어서 / 외국사람 나까지 감동되거늘
쓸데없는 남의 공 자랑하기에 / 저의 동포 참상을 위로도 없네
척수루의 빈 터는 볼 수 있으나 / 월봉산의 싸움터 자취 없도다
안성천의 다리를 얼른 건너서 / 순식간에 직산역[20] 와서 닿았네
백제국의 첫 도읍 위례성 터는 / 성암산[21]에 있으니 예서 삼십리
천오동[22]에 놓았던 구리 기둥은 / 돌 주초[23]만 두개가 남았다더라
이편저편 보는 중 모르는 틈에 / 어느 덧에 천안역 다다랐도다
온양온천 여기서 삼십리이니 / 목욕하러 가는 이 많이 나리네[24]
인력차와 교자가 준비해있어 / 가고 옴에 조금도 어려움 없고
청결하게 꾸며논 여관있으나 / 이는 대개 일본인 영업이라니
이런 일은 아무리 적다하여도 / 동포생업 쇠함을 가히 알리라
그네들이 얼마나 잘하였으면 / 이것 하나 보전치 못하게되오
백제 때에 이 지명 탕정(湯井)[25]이라니 / 그 때부터 안 것이 분명하도다
수천년간 전하던 이러한 것을 / 남을 주고 객(客)되니 아프지 않소
소정리와 전의역 차례로 지나 / 갈거리(葛居里)[26][27]를 거쳐서 조치원오니
낙영산(落影山)의 그림자 멀리 바라고 / 화양서원 옛일을 생각하도다[28]
내판역을 지나서 미호천건너[29]/ 몇십분이 안되어 부강역[30]이니
충청일도 윤내는 금강가이라 / 쌀 소금의 장터로 유명한데오
사십리를 격조(隔阻)한 공주 고을은 / 충청남도 관찰사 있는 곳이니[31]
내포(內浦) 일판 너른 뜰 끼고 앉아서 / 이 근처의 상업상 중심점이오
계룡산(鷄龍山)의 높은 봉(峰) 하늘에 닿으니 / 아(我) 태조(太祖) 집 지으신 고적(古蹟) 있으며[32]
금강루의 좋은 경(景) 물에 비치니 / 옛 선비의 지은 글 많이 전하네
마미(馬尾)[33] 신탄(新灘) 지나서[34] 대전 이르니 / 목포(木浦)가는 곧은 길 예가 시초라[35]
오십오 자(五十五尺) 돌미륵(彌勒)[36] 은진(恩津)에 있어 / 지나가는 행인의 눈을 놀래오
증약지나[37] 옥천역 다다라서는 / 해가 벌써 공중에 당도하였네
마니산성 남은 터 바라보는중 / 그 동안에 이원역 이르렀도다[38]
속리사(俗離寺)[39]가 여기서 삼십리라니 / 한번 가서 티끌 마음 씻을 것이오
운연(韻連) 죽던 양산(陽山)[40]이 육십 리(六十里)라니 / 쾌남아(快男兒)의 매운 혼 조상하리라
고당포를 바라며 심천이르니[41] / 크지 않은 폭포[42]나 눈에 띠우고
그 다음에 영동역 다다라서는 / 경부사이 절반을 온 셈이라[43]
이십사번(二十四番) 화신풍(花信風)[44] 불어올 때에 / 때 좋다고 꽃피는 금성산인데
정든 손을 나누기 어렵다하여 / 꽃다운 혼 스러진 낙화대(落花臺)로다[45]
미륵[46] 황간 두역을 바삐 지나서 / 추풍령의 이마에 올라타도다[47]
경부선 중 최고지(最高地) 이 고개인데[48] / 예서부터 남(南)편을 영남이라오
얼마 안가 김천역[49] 다다라보니 / 이전부터 유명한 큰 장거리라[50]
사통하고 팔달한 좋은 덴 고로 / 이 근처에 짝 없이 굉장하다네
그 다음의 정차장 금오산이니[51] / 이름 있는 도선굴 있는 곳이라
산 아래 지었던 길재 사당은 / 지낸 세월 오래라 저리되었네
금오산성(金烏山城) 너른 곳 지금 어떠뇨 / 세 연못과 한 시내 그저 있는지
무릉도원 깊은데 역사(役事) 피하듯 / 이전부터 그 근처 피란(避亂) 곳이라
약수역[52]을 지나면 왜관역이니 / 낙동강의 배편이 예가 한이요
삼백년전 당하던 임진왜란에 / 일본군사 수천명 머무던 데라
왜관 지나 신동에[53] 신동 지나면 / 영남천지 제일 큰 대구군이라[54]
경상북도 모든 골 작고 큰 일을 / 총할(總轄)하는 관찰사(觀察使) 여기 있으니[55]
부하(府下) 인구 도 총합 사만오천에 / 이천이백 일본인 산다하더라
산 이름은 연귀(連龜)이나[56] 거북 못 보고 / 집 이름은 영귀(詠歸)나[57][58] 관원 있도다.
연년마다 춘추로 열리는 장(場)은 / 우리나라 셋째의 큰 교역이니[59]
대소 없이 안 나는 물건이없고 / 원근없이 안 오는 사람이었네
누구누구 가르쳐 팔공산인지 / 일곱 고을 너른 터 타고 있으되
수도동의 폭포는 눈이 부시고 / 동화사의 쇠북은 귀가 맑도다
달성산의 그윽한 운취 끼고서 / 경산군을 지나서 청도이르니
청덕루의 불던 피리 소리가 없고 / 소이서국(小伊西國)[60] 끼친 예(禮) 그림자도 없네
성현터널[61][62] 빠져서 유천 다다라[63] / 용각산을 등지고 밀양이르니
장신동의 기와집 즐비한 것은 / 시골촌에 희한한 경광이러라
밀양군은 영남의 두서넛째니 / 예전에서 도호부 두었던 데라
상업상에 조그만 중심이되어 / 상고들의 내왕이 끊이지 않네
객관(客館) 동편(東便) 영남루(嶺南樓) 좋은 경개는 / 노는 사람 지팡이 절로 멈추고
만어산에 나는 돌 쇠북과 같이 / 두드리면 쟁쟁히 소리난다네
그 다음에 있는 역 삼랑진이니 / 마산포로 갈리는 분기점[64]
예서부터 마산이 백 리 동안에 / 여섯 군데 정차장[65] 지나간다네
원동역을 지나서 물금에 오니 / 작원관(鵲院關)을 찾으며 낙동강 끼고
머지 않은 임경대 눈앞에 있어 / 천하재자(天下才子) 고운(孤雲)을 생각하도다
통도사가 여기서 육십 리인데 / 석가여래 이마뼈 묻어있어서
우리나라 모든 절 으뜸이 되니 / 천 이백 칠십년 전 이룩한 바라
물금역을 지나면 그 다음에는[66] / 해육운수 연하는 구포역이라
낙동강의 어귀에 바로 있어서 / 상업 번성하기로 유명한 데라
수십분을 지난 후 다시 떠나서 / 한참 가니[67] 부산진 거기로구나
우리나라 수군이 있을 때에는 / 초선두어 요해처(要害處) 방비하더니
해외 도적 엿봄이 끊이었는지 / 남의 힘을 빌어서 방비하는지
해방함 한 척 없이 버려 두었고 / 있는 것은 외국기 날린 배로다
수백년전 예부터 일인(日人) 살던 곳 / 풍신수길 군사가 들어올 때에
부산으로 파견한 소서행장의 / 혈전하던 옛 전장 여기 있더라
범어사 대찰이 예서 오십리 / 신라 흥덕왕시에 왜관 십만을
의상이란 승장이 물리치므로 / 그 정성을 갚으려 세움이라네
삼십리를 떨어진 동래 온정은 / 신라부터 전하는 옛 우물이라
수 있으면 도상의 피곤한 것을 / 한 번 가서 씻어서 뉘기리로다
영가대(永嘉臺)[68]의 달구경 겨를 못하나 / 충장단의 경배야 어찌 잊으리
초량역을[69] 지나선 부산항이니 / 이 철도의 마지막 역이라 하네
부산항은 인천의 다음 연 데니[70] / 한일 사이 무역이 주장이 되고
항구 안이 너르고 물이 깊어서 / 아무리 큰 배라도 족히 닿네
수입 수출 통액이 일천여만 원 / 입항 출항 선박이 일백여만 톤
행정 사무 처리는 부윤[71]이 하고 / 화물 출입 감독은 해관이 하네
일본사람 거류민 이만 인이니 / 얼른 보면 일본과 다름이 없고
조그마한 종선도 일인(日人)이부려 / 우리나라 사람은 얼른 못하네
한성 남산 신령이 없기전부터 / 윤산[72] 신령 없은 지 벌써 오래니
오늘날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 강개함도 도리어 어리석도다
검숭하게 보이는 저기 절영도 / 부산항의 목쟁이 쥐고 있으니
아무데로 보아도 요해지이라 / 이충무의 사당을 거기 모셨네
인천까지 여기서 가는 동안이 / 육십시간 걸려야 닿는다는데
일본 마관[73]까지는 불과 일시에 / 지체없이 이름을 얻는다하네
슬프도다 동래는 동남 제일현 / 부산항은 아국 중 둘째 큰 항구[74]
우리나라 땅같이 아니 보이게 / 저렇 듯한 심한 양 분통하도다
우리들도 어느 때 새 기운 나서 / 곳곳마다 잃은 것 찾아 들이여
우리 장사 우리가 주장해보고 / 내 나라 땅 내 것과 같이 보일가
오늘 오는 천 리에 눈에 띄는 것 / 터진 언덕 붉은산 우리같은 집
어느 때나 내 살림 넉넉하여서 / 보기 좋게 집 짓고 잘살아보며
식전부터 밤까지 타고온 기차 / 내 것같이 앉아도 실상 남의 것
어느 때나 우리 힘 굳세게 되어 / 내 팔뚝을 가지고 굴려볼거나
이런 생각 저생각 하려고 보면 / 한이없이 뒤대에 연적나오니
천리길을 하루에 다다른 것만 / 기이하게 생각되 그만둡시다
내용은 경부선으로 채워졌지만, 애석하게도 경술국치 전 노래이므로, 부국강병 내용이 많이 들어가있는 것이 일본 철도창가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
개통 당시 경부선을 어림할 수 있다. 대전 대신 공주가 비중있게 등장하거나, 증약역, 미륵역, 초량역 등 지금은 폐지된 역이 대거 나온다거나, 금오산역을 지나는 노선[75]이 나오는 등 개통 초기 시대상을 많이 반영하고 있다.
[1] 이 시기에도 발음은 이미 '경부철도노래' 였는데, 단지 표기 관습이 남아 있어서 이렇게 표기한 것이다. ㅣ 계열 모음 앞의 ㄷ이 ㅈ으로 변하는 구개음화는 17세기에 일어났지만, 한자음 표기에 한해 구개음화 이전의 발음대로 표기하는 표기 관행은 1920년대까지 유지되었다.[2] 아직은 친일반민족행위자가 되기 전이었다.[3] 경부철도가 이외에 이 곡조에 가사를 붙인 한국어 노래로는 '밀밭에서', '들놀이' 등이, 일본어 노래로는 '고향의 하늘'(故郷の空)이 있다.[4] 7모라, 5모라를 일정한 규칙에 따라 배열하는 일본 시가 특유의 운율 형식으로, 와카나 렌가, 하이쿠 등의 일본 고전 시가에서 비롯되었다. 철도창가를 비롯해 태평양 전쟁 이전 시기에 쓰여진 일본의 가곡들은 대체로 이 형식을 따라 7모라, 5모라를 계속 되풀이하는 가사로 쓰여진 경우가 많다.[5] 서울 동관왕묘가 아니라 당시 숭례문 근처에 있던 남관왕묘를 말한다. 1979년에 동작구 사당동으로 이전했다.[6] 용산구 청파동의 다른 이름.[7] 용산구 동부이촌동 일대는 지금도 일본인 거주자 비중이 높은 동네다.[8] 현재의 청암자이아파트 인근 '독서당 터' 비석이 있는 자리로 보인다.[9] 당시 노량진 일대는 경기도 과천군 소속이었다. 서울의 일부가 된 건 1936년부터.[10] 구로역은 1969년에 개업했다. 그래서 당시 경인선과 경부선의 분기점은 영등포역이었다.[11] 현대 표준어로는 '갠'이 맞으나 7.5조 음수율에 맞추기 위해 원문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12] 안양에 있는 삼성산의 산성(山城).[13] 다음역인 군포역은 군포장역으로서 1905년에 개업했으나 빠져 있다. 그 다음역인 의왕역은 1944년 개업했다.[14] 당시에는 권업모범장(勸業模範場)으로 불렸다. 1906년 통감부가 설치했고, 농학교는 수원고등농림학교로 개편되었다가 해방 후에는 수원고농은 서울대학교 농과대학으로 승격되고 농촌진흥청도 입주했다. 현재는 서울농대는 관악캠퍼스로, 농진청은 전북혁신도시로 이전하여 수원시 측은 부지를 개발하는 것을 추진 중이다.[15] 지금 수원시 장안구 송죽동에 있는 만석공원이다. 정조 19년(1795년)에 축조되면서 화성 밖의 평야가 곡창지대로 변모하였다. 현재는 매립으로 인해 크기가 과거의 1/3에 불과하다. 인근에 수원종합운동장이 위치해 있다.[16] 대황교동 인근. 이름이 제후국에 걸맞지 않다는 중국 측의 태클이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와 관련된 설화도 있다.[17] 2006년에 개업한 역이 아닌 폐지된 그때의 진위역이다.[18] 제1차 중일전쟁은 1894년에 발발했다. 성환전투는 동년 7월 29일이다.[19] 신세가 딱하게 되어 안착 못하고 이리저리 떠돌아다니는 것.[20] 그러나 직산역은 이 노래가 나온 지 20년도 더 지난 1934년에 개업했다.[21] 당시에는 몽촌토성과 풍납토성이 발굴되지 않던 때라서 위례성을 천안 인근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었다. 이에 관한 내용은 해당 문서 참조. 한편 '성거산' 위례성의 한자를 잘못 읽은 오기로 보인다.[22] 천흥사지로 보인다. 興을 奧로 잘못 읽은 것[23] 천흥사 당간지주[24] 장항선은 1922년에 개업했기 때문에 이때에는 천안역에서 내려서 다른 교통수단을 이용해야 했다.[25] 탕정은 온양의 옛 이름, 현 아산시 동부에 위치한 행정구역으로, 여기서 따온 탕정역은 장항선에 지어졌다.[26] 지금은 세종특별자치시에 해당하는 전동면 심중리. 1995년에 충청남도 연기군 전동면으로 편입되었기 때문에, 그 전에는 충북 청주 영역이었다. 괴산군의, 그것도 경북 상주와 접경지인 화양계곡이 나왔는데 정작 관찰사가 언급되지 않은 이유는 관찰사가 충주에 있었기 때문이다. 1908년에 도청은 청주로 옮겨간다. 그리고 부강 일대에서 충남 관찰사 이야기가 나온 것이 의아할 수 있는데, 이 노래가 만들어졌을 때, 부강은 문의군에 속해있었고, 문의군은 1896년부터 1914년까지 충남이었다! 1914년에 충북 청주와 통합되었고, 계속 충청북도 구 청원군 영역에 있다가, 2012년에 세종시를 신설하면서 문의군 영역 중 부강면만 세종시로 편입되었다.이미 경부선 부설 때부터 경계를 넘나든다는 티가 난다.[27] 전동역을 칭하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으나, 1923년에 개업했기 때문에 당시엔 없었다. 다만 현 전동역이 있는 노장리 또한 과거에는 갈거리로 불렸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실존했다면 현 전동역과 비슷한 위치에 있었을 가능성은 있다. 심중리와 노장리는 바로 이웃한 마을이기도 하다.[28] 낙영산과 화양서원은 괴산군 청천면에 속한 지역으로 이 일원을 흔히 화양구곡(華陽九曲)이라고 부른다. 본디 청주군 소속으로 송시열이 배향된 사액서원인 화양서원이 있었다. 여기에 있던 것이 바로 그 유명한 만동묘. 흥선대원군이 집권 전에 방문했을 때 말에서 안 내렸다라는 이유로 만동묘지기한테 봉변당했다 훗날 서원 철폐를 단행했다는 야사가 있다. 여기서는 조선의 역사를 생각한다는 의미. 다만 조치원에서 이곳까지는 약 45km 거리이다.[29] 그러나 내판역은 노래가 지어진 후인 1922년에 개업했으며, 역명의 유래가 된 내판리는 조치원역에서 미호천을 건너야 나온다.[30] 노래가 지어진 지 1년 후인 1909년 개업으로 되어 있으나, 그 이전부터 영업기록이 있다.[31] 1896년에 충청남도가 설치되면서 도청이 공주로 들어왔다. 하지만 철도 연선에서 배제되고 그 사이 일개 리(里)단위 행정구역에 불과했던 대전이 대전역을 기반으로 크게 성장하자 1932년에 대전부로 도청이 이전했다. 지금 충남도청은 홍성군과 예산군 사이의 내포신도시로 이전했다.[32] 이성계는 계룡시 신도안면 일대 천도 계획을 갖고 공사착수도 했지만 결과는 무산되었다. 이 떡밥은 훗날 조선 후기 정감록으로 되살아난다.[33] 한자음역으로 우리말은 '말미'이다. 이 일대는 '말미' 혹은 '말목' 등으로 불렸는데 여기서 '말'은 크다<大>는 의미이다. 곧 '큰 고개' 또는 '큰 여울목'이라는 뜻. 여기서 말목은 한자로는 마포(馬浦)가 된다. 이 마포가 변하여 오늘의 매포(梅浦)가 된 것이다. 참고로 매포역은 1934년에 개업하였다. 매포역 남쪽에 있는 하천도 마미포천이다.[34] 회덕역은 20년 뒤인 1930년에 개업하였다.[35] 처음 작사가 이루어진 1908년에는 아직 개통 안된 시점이다. 곧 계획만 나오던 시점인 셈.[36] 국보 제323호 논산시 관촉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이다. 많은 사람들이 역사책에서 고려시대 대표 석조 불상으로 접해봤을 것이다. 머리 높이랑 몸통 높이가 비슷해 2등신(...)으로 놀림을 받기도 한다.[37] 증약역은 1910년 폐역되었다가 1956년 부활 후 1974년에 재폐역되었다. 세천역은 1922년에 개업하였다.[38] 다음 역인 지탄역은 1966년 개업했다.[39] 속리산 법주사(본문의 30리를 30마일로 간주하는 경우) 또는 그 법주사의 말사인 영국사(寧國寺)(본문의 30리를 12km로 간주하는 경우)로 비정. 영국사는 홍건적의 난 때 공민왕이 마니산성에 머물며 이곳에 와 기도하니 나라<國>가 안녕<寧>을 되찾았다고 해서 영국사라는 이름을 얻게 된 역사가 깊은 절이다.[40] 지금의 충청북도 영동군 양산면. 운연은 전투를 이끌던 장군인 김흠운(歆運)의 오기로 보인다. 『삼국사기』에 나오는 「양산가」의 유래에 따르면 신라는 조천성을 얻기 위해 655년(무열왕 2년)에 장수 김흠운(金歆運)을 출병시켰지만, 야밤에 백제의 기습으로 장렬히 전사했는데 사람들이 이를 슬퍼하여 「양산가」를 지어 그를 추모했다고 한다. 또한 김흠운이 전사한 시기에 생긴 것으로 보는 말을 매장한 영동가곡리고분이 있다.[41] 다음역인 각계역은 1964년 개업했다.[42] 영동군 심천면 옥계폭포이다. 세종 때 아악(雅樂)을 정비한 것으로 유명한 난계 박연(朴堧)이 자신의 고향이기도 한 이곳을 즐겨 찾았다고 전해진다. 인근에 국악박물관과 박연을 모신 사당인 난계사(蘭溪祠)가 있다.[43] 지금 경부선의 절반은 황간역에 더 가깝다. 지속적으로 개량을 하면서 노선길이가 바뀐 것이다.[44] 화신풍은 꽃이 핌을 알리는 바람, 즉 따뜻한 봄바람을 의미한다. 조상들은 이 화신풍이 24번의 '후(候)'마다 불어온다고 믿었다. '후(候)'란 소한부터 곡우까지 8개 절기를 각각 3등분한 것을 말하는데, 매 후마다 바람이 불면 매화부터 마지막 연화(楝花/멀구슬나무꽃)까지 24가지 꽃이 순서대로 핀다고 생각했다.[45] 여기서 꽃다운 혼은 신라 화랑인 관창을 의미한다. 금성산 낙화대는 관창(金官昌)이 황산벌 전투를 앞두고 아버지인 김품일과 머무르던 곳이다. 계백의 결사대에 막혀 신라군의 사기가 떨어진 시점에서 김품일은 자신의 아들을 적진으로 보내 싸우도록 했다. 계백도 관창의 목을 베면 신라군이 물밀듯이 싸우러 올 것을 알고 있었기에 몇 번이나 풀어주고 싸우고를 반복하지만, 자신을 목을 베라는 관창의 고집에 결국 패전을 각오하고 관창의 목을 베었다. 그렇게 관창의 죽음에 분노한 신라군의 역습을 받아 계백과 그의 결사대는 황산벌 전투에서 무너지고, 신라군은 사비성으로 진격한다.[46] 한글로는 '미륵', 한자로는 '미근'이라고 인쇄돼 있으나, 勒(륵)을 勤(근)으로 오기한 것. 그러나 이 노래가 지어진 지 30년 후인 1938년 개업하여 1992년에 폐역되었다. 물론 지명은 개역 이전부터 미륵이다.[47] 다음 역인 신암역은 1937년, 직지사역은 1925년 개업하였다.[48] 추풍령역은 경부선 소재 역 중 가장 해발고도가 높은 곳에 위치해 있다.[49] 경북선은 1924년부터 영업을 시작했다.[50] 지금은 김천시가 작은 도시지만 이 때는 평양·대구·강경에 버금가는 장터로 이름을 떨쳤다. 비록 구한말에 급성장했으나 대구에 이은 2등을 차지했을 정도로 번성했다. 감천 변의 황금동, 용두동, 감호동 일대가 그 때 시장 터이다.[51] 눈치가 빠른 사람은 알겠지만, 이 때는 경부선이 구미를 안 지나갔다. 이는 증기기관차가 산을 못넘어가면서 현재 노선과 같이 금오산을 빙 둘러가는 노선으로 이설된 것이다. 그 결과, 1916년에 구미역이 개업한다.[52] 약목역의 목(木) 자가 수(水)자로 오기된 것으로 보인다. 약목역의 공식 개업은 이 노래가 지어진 지 10년 후인 1918년이나, 그 이전부터 영업 기록이 존재한다.[53] 신동역 또한 공식 개업은 1918년이나, 그 이전부터 영업기록이 존재한다. 다음역인 지천역은 1921년 개업.[54] 대구는 조선시대와 일제강점기에도 상당히 큰 도시였다. 1789년의 대구도호부 인구는 6만 1000명이었는데, 그 당시 경상도에서 4번째로 인구가 많은 군현이었고(1위는 인구 7만 2000명의 경주부) 인구 2만 8000명 정도의 중소도시였던 동래도호부의 2배가 넘었다. 동대구역은 대구역지하차도 건설과 대구 동부 지역의 개발 촉진을 위해 대구역의 여러 철도 시설들과 관문역 기능을 이전하여 1969년에 개업한다.그 결과 대구역은 한때 새마을호가 통과하는 역이 된다....[55] 2016년에 안동(경북도청이전신도시)으로 이전했으나 이 당시의 경북도청은 대구에 있었다.[56] 연귀산은 중구 봉산동 제일중학교 인근의 언덕을 말한다. 지금은 팔공산이 대구의 진산(鎭山)이지만 조선시대에는 연귀산이 대구의 진산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조상들은 이 언덕에 돌거북상을 묻음으로써 지맥을 통하게 하여 앞산의 강한 화기(火氣)로부터 대구를 지키고자 하였다고 전해진다. 거북상은 현재 제일중학교 화단에 놓여있다.[57] 영귀정(詠歸亭). 영귀는 '읊조리며<詠> 돌아온다<歸>'는 뜻으로 본디 공자의 제자인 증자의 말에서 따온 것으로 관직에서 벗어나 자연으로 돌아간다는 의미로 쓰인다. 곧 쉽게 말해 은퇴[58] 영귀정(詠歸亭)은 대구의 선비들이 시문(詩文)을 즐기던 곳으로 일제강점기에 매입되어 '도수원(刀水園)'이라는 요정로 조성되었다. 낮에는 유원지로 유료개방하여 대구 시민들이 조각배를 타고 둘러볼 수 있었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도수원 놀이터'라고도 불린다. 광복 뒤 호수는 매립되었다. 한때는 대구역 기관차고가 있었고 지금은 칠성시장 가구단지가 들어섰다.[59] 서문시장은 조선시대에 이미 서울 시전, 평양장과 더불어 3대 시장으로 꼽혔다. 지금도 전국구급 재래시장 중 하나.[60] 이서소국(伊西小國). 이서국은 과거 청도에 있던 변한 출신 고대 국가 가운데 하나로 신라 초기에 복속된다.[61] 오늘날 청도와인터널로 관광지가 되었다.[62] 삼성역은 1921년에 개업, 남성현역은 약 10년 뒤인 1919년에 개업.[63] 당시 상동역의 이름이 유천역이었다. 전 역인 신거역은 1967년에 개업했다.[64] 지금의 경전선인 마산선 개통은 1905년에 이루어졌다. 물론 삼랑진-마산 구간만 개통한 것. 러일전쟁으로 이 구간이 우선 건설되었다. 오늘날의 전 구간 개통은 1968년이다.[65] 낙동강역, 한림정역, 진영역, 덕산역, 창원역, 신마산역을 말한다. 철로가 계속 이설되면서 현재는 신마산역도 다른 데로 갔고, 덕산역이 빠진 대신, 진례역과 창원중앙역이 생기면서 일곱 군데 정차장을 지나간다.[66] 화명역은 한 세기가 지난 1999년에야 개업하였다.[67] 사상역은 1928년에 개업하였다.[68] 조선 후기 통신사들이 안전한 항해를 기원하며 해신(海神)에게 제사를 지내던 곳. 원래 철길 바로 옆에 있었으나 일본이 쌓은 부산진성으로 이전했다.[69] 1965년 부산진역과 통합되었다.[70] 이건 작가가 오류를 범한 것이다. 실제로는 부산항이 인천항, 원산항보다도 일찍 개항하여 한반도에서 가장 일찍 개항한 항구다.[71] 부윤은 조선시대부터 대한민국 정부 수립 극초기까지 아주 오랫동안 쓰였으며, 부(행정구역)의 수장을 일컫는다. 한국의 도(행정구역)에 상응하는 일본의 부와 달리 한국의 부는 시에 상응하는 행정구역이다. 부윤은 정부 수립 이듬해에 시장으로 바뀐다. 따라서 여기서 말하는 부윤은 동래부윤으로, 오늘날의부산광역시장에 상응한다.[72] 지금의 부산광역시 금정구 부곡동 동쪽에 있는, 해발고도 317m짜리 산으로, 윤산터널이 이 산을 통과한다.[73] 馬関. 옛날에는 시모노세키를 이렇게 썼다.[74] 이것도 작가의 오류다. 실제로는 당시에도 부산항이 인천항보다도 훨씬 큰 항구로서 한국에서 가장 큰 항구였고 이는 지금도 마찬가지다. 인천항은 한성, 중국과 가깝다는 이점은 있으나 뻘이 심하고 수심도 얕아서 발전하는 데에 한계가 있었던 반면 부산항은 뻘도 없고 수심도 깊으며 일본과도 가까워서 발전하기에 더 유리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에는 명나라, 청나라와의 외교통상이 더 중요해서 인천 연안이 부산 연안보다 무역이 활발했던 건 사실이나 강화도 조약으로 부산항이 인천항보다 먼저 개항하고 일본의 내정 간섭이 심해져 대일 교류가 많아진 후로는 부산항이 그 지리적 이점 덕분에 인천항을 역전하여 대한제국 이후로는 부산항이 인천항보다 더 커졌다.[75] 구배가 너무 심한 관계로 1916년에 금오산 우회 노선이 개통되어 폐지되었다. 이 때 대신역, 아포역, 구미역이 생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