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3 21:56:44

경종(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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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제20대 국왕
경종 | 景宗
파일:의릉2.jpg
의릉 능침
출생 1688년 11월 20일
(음력 숙종 14년 10월 28일)
한성부 창경궁 취선당[1]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즉위 1720년 7월 17일 (31세)
(음력 숙종 46년 6월 13일)
한성부 경덕궁 숭정문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새문안로 45)
사망 1724년 10월 11일 (향년 35세)
(음력 경종 4년 8월 25일)
한성부 창경궁 환취정
(現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경궁로 185)
능묘 의릉(懿陵)
재위기간 조선 왕세자
1690년 7월 21일 ~ 1720년 7월 17일
(음력 숙종 16년 6월 16일 ~ 숙종 46년 6월 13일)
조선 왕세자 | 조선 국왕 대리청정
1717년 9월 5일 ~ 1720년 7월 17일
(음력 숙종 43년 8월 1일 ~ 숙종 46년 6월 13일)
조선 제20대 국왕
1720년 7월 17일 ~ 1724년 10월 11일
(음력 경종 즉위년 6월 13일 ~ 경종 4년 8월 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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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bf1400><colcolor=#ffd400> 본관 전주 이씨
운(昀)[2]
부모 부왕 숙종
생모 희빈 장씨
양모 인현왕후, 인원왕후
형제자매 3남 중 장남
배우자 단의왕후 (1696년 혼인 / 1718년 사망)
선의왕후 (1718년 혼인)
후궁 없음
자녀 없음
종교 유교 (성리학)
휘서(輝瑞)
전호 경소전(敬昭殿)
묘호 경종(景宗)
시호 조선: 덕문익무순인선효대왕(德文翼武純仁宣孝大王)
: 각공(恪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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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ttachment/1263947987_126346468128495.jpg
경종 어필
1. 개요2. 생애
2.1. 숙종의 금지옥엽2.2. 대리청정기2.3. 재위 기간2.4. 불임 의혹2.5. 이복동생 연잉군과의 관계2.6. 사망2.7. 독살설2.8. 의릉
3. 조상4. 여담5. 대중매체
5.1. 영화5.2. 드라마5.3. 소설5.4. 뮤지컬5.5. 기타
6. 관련 문서7.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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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조선의 제20대 국왕. 숙종과 희빈 장씨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자 조선의 마지막 적장자 출신 왕.[3]

기나긴 치세를 자랑하는 숙종영조 사이에서 4년을 재위하였으며 37살의 나이에 병으로 승하하였다. 아버지인 숙종의 재위 기간 46년과 이복동생인 영조의 52년을 합하면 한 세기에 가까운 98년이며 조선 왕조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기간이다. 아버지이복동생의 재위 기간과 비교하여 경종의 재위 기간은 4년에 불과하다. 재위 기간이 짧아서 이렇다 할 큼지막한 업적도 남기지 못하였고 자연히 조선 역사에서의 비중은 미미하다. 그러나 98년에 달하는 아버지와 이복동생의 치세를 설명하려면 경종의 치세는 빼놓을 수 없는 역사의 페이지로 평가받는다.

2. 생애

2.1. 숙종의 금지옥엽

후궁 소생의 서자이나 숙종이 27세라는 늦은 나이[4]에 본 아들이었던 까닭에, 태어난 지 100일도 안 되어 원자 책봉을 받았고[5] 3살때에는 왕세자에 책봉되었다. 손이 귀한 왕실에서 태어난 금지옥엽 왕자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당시 숙종의 지극한 총애를 받아 권세가 대단했던 희빈 장씨가 낳은 아들이였고, 훗날의 이복동생들인 연잉군, 연령군이 태어나기 한참 전이었기 때문에 아버지 숙종의 사랑을 독차지했다.

어머니 희빈 장씨를 배경으로 하는 남인들이 든든하게 버티고 있었고, 인현왕후가 폐출된 후 희빈이 중전의 자리에 오르면서 본인 또한 한때 서자에서 적장자로 신분이 격상되는 등 유년기에는 탄탄대로의 세자 시절을 보냈다. 하지만 숙종은 일당 전제화를 방지하고 왕권 강화를 목적으로 무수한 환국(換局)을 일으키며 신하들을 핍박했고, 그 과정에서 생모가 후궁으로 다시 강등되고 인현왕후가 복위되면서 그도 다시 인현왕후의 법적 아들이 된다. 어찌 보면 어머니의 원수지만 그래도 인현왕후를 자기 어머니 모시듯 극진히 모셨다고 한다.

14세가 되던 해에는 생모인 희빈 장씨가 중전인 인현왕후저주했다는 숙빈 최씨의 고변이 있었다. 이때 희빈 장씨는 자결하라는 명을 받았다.[6] 이때 세자였던 경종은 대신들에게 찾아가 어머니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간청했지만 "이게 다 세자 저하를 위한 것"이라 둘러대면서 세자의 요청을 일절 무시했다. 이후 1716년(병신년)의 병신처분으로 2년 전 죽은 윤증이 추탈[7]되면서 상황은 최악으로 몰렸다. 이런 상황에서는 경종도 마음 고생이 심했을 가능성이 높고 경종의 병세로 이어졌을 가능성이 가장 크다.

2.2. 대리청정기

숙종 말년에는 부왕이 지병으로 몸져 눕자 대리청정을 맡게 된다. 이는 노론이이명이 숙종과 독대(정유독대)한 후에 청한 것으로서[8] 주도자에서 보듯 경종의 실수를 유발한 후 세자를 연잉군으로 교체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그런데 그 노림수를 알고 있었는지 경종은 극히 행동을 조심하여 "아뢴대로 하라", "따르지 않겠다", "유의하겠다" 등의 말만 하며 트집을 잡히지 않기 위해 노력했고 하도 답답했는지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계 신하들이 틀에박힌 대답만 하지 말고 가끔은 모르면 물어보고 의견도 내어보시라고 간했는데 그에 대한 경종의 답변마저 "유의하겠다" 였다. 단, 유일하게 경종이 목소리를 내어 신하들의 요구를 거부하는 부분이 있었는데 처벌 요구였다. 집권 세력이 노론이었기 때문. 괜히 처벌 요구를 따랐다가 친소론 인사를 잡아죽이면 자기 지지 세력만 깎아먹는 꼴이다. 역으로 노론에 대한 처벌 또한 뒷감당이 쉽지 않았던지라 소론때와 비슷하게 행동했다.

그러나 딱 1번 큰소리를 내며 노발대발한 적은 있다. 승지 유숭이 지각[9]하자 "당장 여기서 물러나라. 사관들도 물러가라! 신하가 되어서 너희들이 이렇게 날 기다리게 할 수 있느냐? 여섯 승지들을 모조리 나문[10]해라!"하며 폭발을 한 것. 이렇게까지 경종이 강하게 나올지 몰랐었는지 대신들도 당황해서 어쩔 줄을 몰라 했고 공포에 질린 승지 및 사관들은 벌벌 떨며 세자 앞에서 물러나야 했다. 신하들이 "왜 화가 나셨는지 알려달라"고 해도 세자는 "물러나라고 하지 않았냐"며 분노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화를 푼 세자는 행동이 지나쳤음을 인정하며 승지들에게 다시 입시[11]를 하라고 했다.[12] 아마도 그동안 억누른 감정이 작은 일을 계기로 터져나온 것으로 보인다. 물론 며칠 뒤에 신하들이 이 일을 지적할 때의 대답은 "유의하겠다"가 전부였다. 이에 대해 숙종은 비망기를 통해 지나친 행동이었다고 질책하였는데 세자를 두둔하는 소론 신하들이 오히려 "주상께서 지나친 행동임. 비망기로 질책할 정도는 아닙니다"라고 말로 그를 보호해 유야무야 넘어가게 되었다. 노론 쪽에서도 사간 이봉익이 상소를 올려 숙종이 승정원에 내린 비망기가 지나쳤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당시 숙종은 중병을 앓고 있는데다 대리청정을 하고 있는 세자의 권위를 깎아서는 안 된다는 인식에서 비롯한 것 같다. 숙종은 "내가 세자의 아버지인데 부자간의 정리로 그런 말도 못하냐?"라고 투덜거렸으나 병세가 위중하여 화도 못 내고 드러누워 버렸다.

숙빈 최씨의 소생인 연잉군, 명빈 박씨의 소생인 연령군 등이 있었고 자신도 정궁의 소생이 아니라서[13] 언제든지 갈릴 수 있었기 때문에 신중하게 행동한 듯하다. 정궁인 인현왕후의 폐서인과 복위, 어머니의 사사를 보면서 부왕(숙종)은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인물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실제로 숙종은 세자 교체를 내심 고려했는데 당시 청나라 강희제가 태자를 교체했고[14] 연약하고 강하지 못한 경종을 못 미더워하는 점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간간히 보인다. 노론에서는 이런 왕의 의도를 알고 연잉군을 밀어주려 안간힘을 썼고 숙종의 의중을 어떻게든 활용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세자(경종)를 지지하던 소론 측 인사들이 격렬하게 반발했고 숙종은 끙끙 앓으며 누워있는데다 책잡히지 않고 대리청정을 이어나가고 있는 세자를 아무런 이유 없이 내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기 때문에 그냥 음모를 꾸미는 정도에서 끝이 났다. 특별히 공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두드러진 실책을 한 적도 없었으니 당연히 세자를 교체할 뚜렷한 명분이 없었다. 당시의 정황을 보면 숙종이 "내가 아파서 왕 노릇을 못해먹겠는데 세자에게 대리청정 좀 시키는게 어떠냐?"라고 하자 영의정 김창집을 비롯한 노론 대신들이 즉각 찬동하면서 세자의 능력을 칭찬했는데 그동안 반(反) 세자임이 분명했던 노론이 이러는 것이 너무 냄새가 나서 소론의 대신인 영부사 윤지완이 지부상소[15]를 하는 등 한동안 분위기가 험악했다.

어찌어찌 세자 자리를 유지하고 있던 경종은 1720년 아버지 숙종이 끝내 승하하면서 간신히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었다. 숙종이 조금만 더 건강했거나 오래 살았으면 왕위에 못 올랐을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지만 조선 시대 시스템상 국왕이 마음대로 세자를 팽개칠 수 있는 것이 아니라서[16] 무기력하고 병약하다고는 해도 실수가 없고 다른 이들을 따위로 돌릴 정도의 정통성을 가지고 있었던 경종을 내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조선의 폐세자 중에서 공식적으로 아버지인 왕에 의해 폐세자된 건 양녕대군사도세자 두 사람뿐이며, 나머지 3명은[17] 아버지의 의지와 별개로 를 당해서 폐세자된 것이다. 양녕대군은 세자의 자질이 없는 광인임을 대놓고 보여줬으며 사도세자 또한 영조에게 워낙 괴롭힘을 당해서라고 해도 온전한 정신 상태가 아니었다. 이렇게 결격 사유가 명백한 세자들을 폐세자할 때도 태종과 영조도 여러 신하들의 강한 반대를 꺾으며 밀어붙이느라 권위와 정치력을 많이 소진했었다. 건강이 안 좋고 정치적 기반이 약하다고 인격과 능력에는 큰 문제가 없는 세자를 폐하는 건 왕에게도 굉장히 힘든 일이다. 무엇보다도 재위 기간은 물론이요 조선 왕들 중에서 살만큼 살고 재위할 만큼 재위했다. 경종은 조선의 역대 왕세자 중 세자 재위 기간이 두 번째로 긴 기록(30년)을 가지고 있다. (왕세자 + 황태자 재위 기간이 가장 긴(32년) 왕세자는 순종이다.) 오랜 시간 세자로 재위해온 동안 쌓인 권위 또한 무시할 수 없는 수준이기에 더더욱 폐세자론을 함부로 꺼내기 힘든 것이다.

2.3. 재위 기간

즉위 후 노론의 우려와는 달리 피의 복수가 벌어지지는 않았다. 하지만 즉위했다고 해도 다수파인 노론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경종 본인도 하루가 멀다하고 "콜록콜록"하며 자리보전하고 눕기 일쑤였으니 치적을 세울만한 환경은 전혀 못 되었다. 사실 노론은 이 당시 왕만 자기 편이 아니지 의정부, 비변사, 육조, 승정원, 삼사, 오군영, 의금부, 포도청 등이 전부 노론 차지이며 지방의 관찰사수령들, 지방의 병마절도사수군절도사도 다 노론 차지였고 병권, 군권도 다 노론이 차지했으며 성균관, 사학의 유생들 대다수가 노론이고 심지어 궁내의 내시궁녀노론과 줄이 이어져 있어서 궁궐 안 상황도 생방송으로 일일이 체크할 수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여소야대도 모자라서 그냥 야당 같지도 않은 초거대 야당이 야당이란 이름의 거죽만 쓰고 실권을 장악한 판으로, 이 모든 상황을 일거에 뒤집어 엎을 수 있는 단 하나의 자리만을 제외하고는 모든 것이 노론의 손에 있었다고 보아도 좋다.[18]

이런 상황에서 노론연잉군왕세제 책봉을 관철시켰고[19] 심지어 대리청정까지 주장했다. 대리청정최석항조태구의 순차적인 결사적인 반대로 경종이 명을 거두어 결국 이뤄지지 않았으나, 김일경이 이를 근거로 노론숙청을 주장하는 상소를 올리고 이것이 받아들여지면서 피바람이 분다. 여태까지 신하들에게 이리저리 휘둘리기만 했던 경종은 이 시점부터 갑자기 돌변하는데...

경종 2년(1722) 목호룡노론이 경종을 살해하고 이이명[20]을 옹립하려 한다고 고변하는 사태가 발생하여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이 신임사화[21] 로 소론 쪽의 모함을 받아 사약을 먹고 죽는 사건이 일어난다. 이에 노론은 변명하였고 경종은 분노하여 "결탁(締結)이니 교통(交通)이니 하는 따위의 말은 자못 심히 무엄하다. 다시 번거롭게 하지 말라."라고 일갈을 날려버렸다.[22] 이후 대리청정 논란으로 유배되어 있던 노론 4대신(이이명, 김창집, 조태채, 이건명)이 유배지에서 사사되고 노론 측 인사들이 대거 숙청된 뒤 소론 강경파들이 집권하게 된다. 한편으로는 그동안 노론이 경종이 임금인데도 불구하고 임금 취급도 안하고 대놓고 무시하고 선넘는 행동을 씨게하며 자업자득이라고 볼 수 있다. 당시 임금이 경종이라서 망정이었지 다른 왕이었으면 이미 노론 세력은 신임사화가 일어나기도 전에 제거되었을 지도 모른다. 그 만큼 노론은 선을 넘고 말도 안되는 행위를 벌였었다.
이후 경종이 한번 더 제대로 분노를 폭발시킨 적이 있다. 노론이 초토화되자 소론 측에서는 얼씨구나 하고 노론 씨 말리기에 더불어 연잉군의 왕세제 추탈에도 앞장 섰는데 그 와중에 너무 경종이 소극적이라는 식의 주장이 나왔다. 그 말에 경종은 분노하여 일갈하자 소론은 잘못을 뉘우치며 경종의 화를 가라앉혔고 노론에 대한 공격 수위를 낮추기 시작했다. 바로 그 상황에서 소론 강경파 준소 김일경 등과 소론 온건파 완소 오명항 등의 분당이 일어났다. 이렇듯 경종은 즉위 초반에는 신하들의 요구에 여기저기 휘둘려 다니기만 하고 왕권도 땅에 떨어진 상태였으나, 신임사화와 그 이후부터는 주변에서 끊임없이 이간질하고 실제로 개인적으로 앙심을 품을 수 있음에도 왕실의 리더로서 충실하고 책임감 있는 왕다운 자질을 보여주며, 자신 다음의 정통성을 갖춘 이복동생인 연잉군을 지켜줘서 아들이 없었음에도 왕위 계승이 차질없이 이루어질 수 있게 했다. 어머니 관련 스캔들, 자신의 좋지 못한 건강, 경쟁자라고 볼 수도 있었던 동생, 갈라져 있던 의 분위기 등 여러 난제가 산적해 있었지만 숙종영조 사이에서 자신의 역할은 충실히 다했다고 볼 수 있다. 보다시피 아버지 숙종 및 할머니 명성왕후의 다혈질 성격을 동시에 물려받았다. 그 정도가 숙종명성왕후에 비할 바는 아니라 할지라도, 할아버지인 현종도 온화한 이미지와는 사뭇 다른 반전이 있었다. 또한, 그 유명한 어머니 장희빈도 온화한 것과는 전혀 거리가 먼 성격이었다. 거기다 왕비 복위 후 경종을 양자로 입적하여 아동기를 함께 보낸 적모 인현왕후도 인식과 다르게 마냥 온화한 사람이 아니었다.[23]

이렇게 노론소론의 격렬한 정쟁에 치이다가 결국 1724년(경종 4년) 37세의 이른 나이로 승하했다. 세자 시절 대리청정을 할 때부터 노론 대신들을 찍어누르고 조선의 마지막 전국 일제 양전사업인 경자양전(庚子量田)을 강행해서 완성시켰던 기록 등이 있는 걸 보면 뒷배경만 안정적이었으면 국정을 잘 이끌어 나갔을지도 모른다는 설도 있다.
삼남(三南)의 전지(田地)를 개량(改量)하는 역사(役事)를 마쳤다. 조세(租稅)의 부과에 해당되는 총수(總數)는 경상도가 26만 2천 결(結)이고, 전라도가 24만 5천 5백 결이며, 충청도가 16만 3백 결이었다. 결부(結負)는 예전에 비하여 자못 불어났으나, 온갖 간사한 폐단이 나와 허위가 서로 뒤섞였으니, 민폐(民弊)는 도리어 심하였다.
경종실록 2권, 경종 즉위년 10월 6일 기해 1번째기사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전답(田畓)을 개량(改量)하였다. 경상도의 전세(田稅)는 총 26만 2천 결(結)이고, 전라도는 24만 5천 5백 결이고, 충청도는 16만 3백 결이다.
신이 삼가 살펴보건대 정전법(井田法)이 폐지된 이후로 부민(富民)이 겸병(兼幷)하는 폐단이 있어 온 지가 대개 이미 오래 되었습니다. 이때 삼남의 전답을 개량하여 전세(田稅)를 정하였으니, 어찌 거룩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러나 조정에서는 다만 균전(均田)의 명칭만 사모하고 균전의 실상은 구하지 아니하여 관찰사(觀察使)·군수(郡守)·현령(縣令)은 적임자를 얻지 못해서 간악한 좌수(座首)·별감(別監)과 교활한 아전들로 하여금 중간에서 농간을 부리게 하였습니다. 세도 있는 집안의 전답은 하등(下等)에 배치하고, 곤궁한 백성의 전답은 상등(上等)에 배치해서 허위(虛僞)로 서로 속이고, 간교한 폐단이 백방으로 발생하여 결부(結負)의 수량은 옛날에 비해서 약간 증가되었는데도 백성들의 원망은 도리어 심함이 있었습니다. 세상에서 말하기를, ‘삼남에서 인심을 잃은 것은 전지의 개량에서 연유되었다.’고 하는데, 이는 참으로 맞는 말입니다.
경종수정실록 1권, 경종 즉위년 10월 6일 기해 1번째기사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밝혀 놓은 남구만의 《약천집(藥泉集)》이 발간되었고 관상감의 허원이 청나라에서 들여온 서양의 것을 모방한 소화기[24]가 만들어지기도 했다.[25] 그러나 비용 문제로 각 군문에 수총기(水銃器)를 두라는 목표는 실현되지 못했다. 구조도 복잡하거니와 당시 수총기(水銃器)는 대형 물탱크가 없어서 화재 진압용 방화수를 계속 퍼날라야 했는데, 그 체계가 미비했다.[26] 또한 경종 대에 벽걸이형 태엽시계 문신종(問辰鍾)을 들여왔는데[27] 경종(景宗)이 경종(警鐘)을 울렸다! 태엽시계를 수입하면서 조선의 시간 체제는 12간지에서 따온 12시간제에서 서구식 24시간제로 바뀌기 시작했다.[28] 서구식 24시간제가 제도화된 것은 정조 말년에 가서였지만 《경종실록(景宗實錄)》이나 《승정원일기(承政院日記)》에서는 태엽 시계를 기반으로 한 24시간제 시간 단위가 경종 대에 조금씩 기록되기 시작했다.

2.4. 불임 의혹

경종은 슬하에 자식(후사)을 두지 못했고, 이미 연잉군을 '왕세제(王世弟)'로 지명해뒀기 때문에, 연잉군그 뒤를 이었다. 이에 잘 알려진 경종의 불임설이 있다.

경종은 젊어서부터 병약했다. 기본적으로 비만이었다는 것은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고 생애 내내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신경병증을 앓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머니가 당쟁에 휘말려 죄인으로 자결하여 죽는 모습을 어린 나이에 직접 목격한 상황에서, 제2의 연산군처럼 되어 피바람이 몰아칠까 봐 두려워한 노론 신하들이 틈만 나면 갈궈대니, 거기서 받은 정신적 스트레스가 상당했을 것이다.

노론 강경파의 영수 민진원의 단암만록(端岩晩錄)을 인용하자면, "세자는 때때로 벽을 향하고 앉아서 조그마한 소리로 중얼거려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것처럼 했다. 또 한밤중에 계단과 뜰 사이를 방황하기도 했고 정신도 안정되지 못했으며 지각도 불분명했다. 숙종(喪)에도 한 번도 곡소리를 내지 않았으며 까닭 없이 웃기까지 했다." 노론의 기록이란 특성상 의도적이고 악의적인 표현일 가능성이 있으나, 경종이 느낀 스트레스가 대단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불임설도 여기에 나왔다.

경종이 불임인 것에 대해서는 여러 설이 있다. 가장 유명한 야사희빈 장씨사약을 받아 죽기 전에 세자(경종)를 보고 싶다고 애원했고, 이에 마음이 약해진 숙종이 세자를 데려오도록 했다. 하지만 희빈 장씨는 돌연 악독한 말을 퍼부으며 세자의 성기를 매우 꽉 붙잡고 당기는 만행[29]을 저질렀고, 그 때문에 경종이 기절했으며, 이로 인해 자식을 둘 수 없는 성불구자가 됐고 병약해졌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이는 어디까지나 야사에서 나오는 이야기이고 조선 왕조 실록에 쓰여진 정사가 아니다.[30] 그리고 실제로 있었던 일이라면, 희빈 장씨를 깎아내리고 윤지술이 어머니를 사사한 업적에 대해 경종이 불쾌하게 여기지 않았을 것이다.[31] 게다가 이윽고 집권한 서인세력들이 희빈 장씨를 폄훼하고 싶어서 안달난 상황에서 이 일화가 사실이라면 실록으로 남기지 않을 이유가 없다.

또한 경종이 불임이 되어 자식을 못 낳으면 당연히 세자 자리에서도 밀려날 가능성이 높아진다. 이 당시에는 후사(後嗣)를 이을 수 없는 사람이 왕위에 오를 수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후사를 이을수 없으면 세자에서 밀려나고, 세자에서 밀려나면 곧 왕이 될 수 없는 것이며 더 나아가 끝내 죽음으로도 이어질 수 있는데, 그렇게 되면 남인 복귀, 명예 회복은 꿈조차도 꿀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이 사실을 장희빈이 당연히 모를 리가 없다. 특히나 생모가 의도해서 성불구를 만들었다는 것 자체가, 아이를 낳아본 적 없는 이들이 믿거나 만들어낸 말일 가능성이 농후하다. 사실 장희빈의 경우 (최소한 스스로 생각하기엔)억울하게 사약을 받았는데, 이를 복수해 줄 이는 세자인 경종 말고는 없었다. 그렇다면 경종이 내내 안녕해서 왕위를 물려받기를 원하는 것이 상식이다. 애초에 경종을 세자 자리에 앉히려고 노력한 게 장희빈이며, 더군다나 사약 먹을 때는 금부도사를 비롯해서 죽는 모습을 지켜보는 사람들이 수두룩 있었다. 이들 앞에서 그런 짓을 저질렀다면 금부도사가 보고하지 않을 리 없고, 보고하면 즉시 기록으로 남는데, 정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즉 야사는 야사일 뿐이라는 것이다.

실제로 경종이 완전한 성 불구였다고 단정하기는 힘들다. 학자들은 대체로 과도한 스트레스로 인한 생식 능력 저하 정도로 추측하고 있다. 굳이 장희빈과 연관을 짓자면, 위에서 언급했듯이 경종이 생모의 죽음 자체에 충격을 받아 쇠약해진 정도. 결혼을 2번이나 했음에도 끝내 자손을 두지 못했고, 계비인 선의왕후와 함께 양자를 들이려고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하지만 단순한 생식 능력 저하였다면 왕비의 불임을 의심하고 후궁을 한 명이라도 들이려는 노력이 있었을 것이나 경종은 단 하나의 후궁도 들이지 않았고,양자를 고려하는 등의 아예 자식을 낳을 기대 자체를 하지 않았음을 볼 때 성 불구가 절대 아니라고 부정할 수도 없다.

하지만 왕실의 대전제, 대원칙인 효종 - 현종 - 숙종 '삼종의 혈맥'(三宗之血脈)을 고려하면 해당자는 연잉군의 아들(효장세자) 뿐이었다. 그러나 즉위 당시 효장세자의 나이는 겨우 생후 16개월이었다. 그게 아니라면 의외로 간단한 해법이 있는데 소현세자의 증손자 밀풍군이었다. 이인좌의 난에서 그들이 괜히 밀풍군을 옹립한 것이 아니다.[32]

세자 / 세제 책봉은 청나라의 승인을 받아야 되는 일이었는데 청나라에서 "아니 왕(경종)이 아직 젊은데 왜 동생을 왕세제로 책봉하나?"라 의문을 제기하자 당시 책봉 요청을 위해 갔던 노론의 이건명, 윤양래 등이 "왕이 발기가 불능[33]이라 자손을 둘 수 없다"고 보고했다.[34] 결국 청나라의 기록[35]에도 남게 됐는데 그 때문에 경종이 성 불구였다는 설이 퍼진 모양이다. 훗날 노론연잉군은 이것을 두고 단순히 마비를 말한다고 항변하지만 청 실록에는 분명히 氣甚痿弱、嗣續絕(기운이 심히 위약하여 사속(자녀)이 끊긴다)라고 말했는데 그냥 거짓말이다.

경종의 개인사와 관련해서도 장자를 낳기 어려운 정황도 존재한다. 기본적으로 희빈 장씨와 그 외척들의 몰락으로 궁궐 내부에서 본인을 지지해줄 친족세력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황에서, 숙종의 세번째 부인(계비)인 인원왕후소론에서 노론쪽으로 붙으며 변절하면서 자신의 정치적 비호세력도 안 남게 되었고 툭하면 노론대리청정을 강권(講勸)하며 경종을 끝까지 괴롭혔다. 그리고 경종의 첫번째 부인인 단의왕후 심씨(端懿王后)는 일반 조선 여성이 15세에 관례를 올린 데 반해 인현왕후(仁顯王后)의 승하로 삼년상을 같이 치르면서 18세에 관례를 올리게 되고[36] 관례를 올린지 4개월 정도 지나서 본인의 아버지이자 경종의 장인인 '심호'[37]가 사망한다. 이후 경종이 보위에 오르기 2년전인 1718년 단의왕후는 갑자기 혼절하더니 31세의 나이에 요절한다.[38]

이후 후세를 걱정한 대신들의 강제에 노론 영수 김창집의 애제자 어유구의 여식, 선의왕후 어씨(宣懿王后)를 두번째 부인(계비)으로 맞아들이게 되는데 이 때 경종 31세, 어씨 14세로 나이차가 17살이나 나는 어린 신부였다. 선의왕후 어씨가 관례를 올린 바로 다음 해에 아버지 숙종이 사망하고 경종이 즉위하였는데 그 즉위 다음 해부터 연잉군을 지지하는 노론측 대신들은 '애 낳지 말고 동생후계자로 삼으라'고 몰아붙였다. 이후 어씨는 시동생인 영조와 사이가 정말 나빠져서 영조가 즉위할 때도 홀대 받으며 1730년 26살 어린 나이에 사망한다. 사망 당시 정황도 석연찮은데, 영조의 장자 효장세자의 요절이 독살이고 그 배후가 어씨임이 드러나 자살을 강요당해 죽었다는 설이 있다.

2.5. 이복동생 연잉군과의 관계

노론소론의 기나긴 정쟁 속에서 이복동생 연잉군이 왕권을 위협하는 인물이었으나, 형제 간에 우애는 형님 동생하며 각별했다고 한다. 소론 준론들의 공격으로부터 연잉군을 필사적으로 보호했고, 동생이 찾아오면 환대하고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등 평소에도 좋은 관계를 유지했다. 야사로 전해지는 이야기로는, 경종이 병색이 완연해져 자리 보전을 하고 있을 때 연잉군이 병문안을 들었다. 그러자 아픈 와중에도 경종이 "창문을 열어라, 세제가 덥겠구나"라고 말했다고 할 정도.

박시백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박상검이 일으킨 역모 사건 이후 경종이 속으로는 연잉군을 매우 불신했으나, 왕세제에 대한 의혹들을 차단하고 보호함으로써 좋든 싫든 연잉군이 자신의 하나뿐인 후계자임을 인정했다고 주장한다.[39] 사실 객관적으로 보면 당시 조선 왕실에서 법적으로 문제 없는 계승자는 연잉군 뿐이었다. 소현세자의 후계인 밀풍군은 촌수가 너무 먼 데다 자칫 잘못하면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된 역린을 크게 건드릴 수도 있었다.[40] 그의 시각에 따르면 연잉군은 이후 "황형"이라며 경종의 우애를 강조했으나 이것은 정치적인 쇼맨십이었을 뿐이며, 진정한 대계(大繼)를 생각한 경종이 더욱 우애를 표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간단하게 말하면, 애증. 하기야 경종 자신도 아버지의 환국으로 인해 자신의 생모와 외삼촌(장희재)이 죽음을 당한, 아버지 숙종의 의심과 변덕에 시달린 골육상쟁의 직접적인 피해자이다. 비록 이복동생인 영조가 마음에 안 들었어도, 사적으로는 이복동생을 처단하는 골육상쟁을 벌여서 조정에 피바람과 분란을 일으키는 게 싫었을 것이다.

경종과 연잉군의 정치적 대립이 극에 달했을 때는 경종이 연잉군에게 직접 폭언을 한 적이 있다. 신축환국 직후 정치적 위협을 느낀 연잉군이 '환관과 궁녀 중 나를 해치려 하는 자가 있다'며 조사해 처벌해 줄 것을 요구하자, 경종은 이를 거부했다. 연잉군이 거듭 요구하자 경종은 '차마 듣지 못할 하교'를 내렸다고 실록은 적고 있다(경종 실록 1년 12월 22일 기사). 임금이 직접 욕을 했을 경우 실록에서는 이런 식으로 적절히 필터링을 하는 편이다. 연잉군의 의도는 내관 및 궁녀 집단에 있는 자신의 반대 세력을 탄압함으로서 세제(世弟)로서의 위치를 강화하고자 한 것인데, 이를 간파한 경종은 지나친 부탁에 분노한 나머지 연잉군에게 입에 담기 힘든 폭언을 한 것이다.

하지만 이후 연잉군이 '주상께서 내 부탁을 들어주지 않으시니 차라리 세제 자리를 내놓겠다!'는 폭탄 선언을 거듭했고, 당황한 조정 대신들이 수사를 속개했다. 이 때 노론은 물론이고 소론조차 왕세제(영조)를 편들었다. 반대 세력이긴 해도 어쨌든 확고한 왕위 후계자인 세제 대신 일개 환관 및 궁녀들을 편들 수는 없었기 때문. 조사 결과 실제로 연잉군을 해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내시 박상검과 문유도, 궁녀 석렬과 필정을 잡아들여서 자백을 받아낸 후 사형을 집행했다.[41] 이로 인해서 연잉군의 위치는 제법 견고해졌다. 그러다가 목호룡의 고변으로 신임사화가 터지자 연잉군은 졸지에 역적 수괴로 몰릴 판국이 되었고, 거적을 펼치고 그위에 엎드려 '나같은 죄인이 어찌 왕세제가 됩니까?'라고 울며불며 고할 정도였다. 하지만 경종은 노론이 세운 세제임에도 불구하고 연잉군의 사직을 윤허하지 않았다. 왕에게 독을 먹인 김씨 성의 궁인을 찾아야 한다는 상소에도 김씨가 한둘이 아니라 못 찾겠다고 거부하여 옥사의 확대를 막았다.

특히 영조 재위 초반기 영조가 내세운 탕평책의 중심 인물들은 바로 경종을 지지했던 소론 온건파 인사들이 대부분인데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박문수. 결과적으로 이것은 노론의 지지를 받은 세제 영조가 소론 정권 아래서 무사히 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되었고 나아가 영조의 탕평책에 힘을 실어준 셈이니 영조 입장에서 경종은 분명한 생명의 은인이자 자신의 정책에 힘이 된 신하들까지 내려 준 '어진 황형'이다. 영조는 평생에 걸쳐 경종에 대해 자주 회상하고 그리워하는 말을 자주 했다. 심지어는 경종이 죽은지 약 46년이나 지난 뒤인 77세 때 손자 정조와 함께 존현각에 올라서는 "이 건물이 우리 황형께서 세자 시절 공부하시던 곳이다. 오늘 할아비와 손주가 함께 앉으니 황형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지는구나"라고 소회를 밝히기도 했다. 사실 영조는 이런 행동을 상당히 자주 하는 임금이기도 했다. 걸핏하면 부왕 숙종을 그리면서 울고, 생모인 숙빈 최씨를 그리면서 또 울고 가뜩이나 눈물을 필살기로 장전한 임금이었는데 잔정도 참으로 많았던 듯 하다.

오죽하면 정조 16년에는 윤구종이 혜릉 앞에서 "이 무덤에서도 말에서 내려야 하나?"라는 발언을 한 적이 있다는 혐의로 붙잡아 국문하니 “의릉(경종의 무덤)에 신하 노릇을 하지 않으려 했다”하였다. 그러자 정조가 "아니 선왕의 효성과 우애는 모두가 알아주는데 어찌 이럴 수 있냐?"라고 한 적이 있다. 조정 대신들도 '이게 무슨 흉악한 발언이며, 천지간의 사람으로서 어찌 이처럼 극악한 말을 할 수 있는가'라며 경악하였고 이에 동조했다. 즉, 윤구종의 행동이 오히려 영조를 모욕한 행위라고 지적할 정도로 후대 사람들은 영조의 우애를 인정했다는 뜻이 된다.[42] 당연히 윤구종은 역적 수준으로 국문을 받았고, 이를 이기지 못했는지 처벌받기도 전에 형장의 고문으로 사망했다.[43] 그런데 이 윤구종 사건은 원래 정언 유성한이 정조에게 "너님 공부도 안 하는 데다 여악이 난잡하게 논다는데 그래서야 되겠음?"이라는 불온한 상소[44]를 올려서 신하들이 죄를 줄 것을 청하며 뒷배경을 조사하다가 밝혀진 것이다. 채제공을 비롯한 남인들은 유성한이 과거 사도세자를 핍박하는 발언을 한 것과 유성한과 윤구종이 같은 패거리임을 거론하며 "경종대왕께 충성을 다 하지 않는 역적 놈들이 사도세자를 핍박했는데 이런 자들이 경종과 영조, 사도세자에게는 충성했겠음?"을 주장하며 사도세자 신원 문제를 들고 나오기 시작했다. 이후 같은 해에 영남 유생들이 올라와 사도세자의 추승을 청하는 상소를 올리니 이것이 바로 영남 만인소. 경종의 죽음부터 사도세자의 죽음까지 복잡하게 얽힌 큰 사건이 된 것.

이후 영조는 경종을 모셨던 친소론 상궁과 내관들로 하여금 사도세자를 모시게 하여 사도세자의 권위를 높여주려 했는데, 이로 인해 나중에 사도세자가 소론이 아니냐는 논란이 있다.

2.6. 사망

세자 시절부터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상황에 놓여있었다고 실록에도 기록되어 있고 자세한 정황은 위에 서술된 바와 같다. 그래서 즉위 후에도 몸이 좋지 않았고, 결국 상술한 것처럼 1724년 즉위 4년만에 사망하였다.

소아비만과 다한증, 다뇨증 등을 앓고 있었고 설사병과 오뉴월 염천에도 오한을 느꼈다고 하는 것으로 보아 당뇨병 및 고혈압, 신장합병증을 앓았을 가능성도 다분히 있다.[45] 문종의 경우 부왕인 세종의 삼년상을 치르며 건강이 나빠져 죽었다는 정황으로 보이는 기록이 여럿 있지만, 경종은 원래부터 병약하여 줄초상이란 견해는 잘 보이지 않는 편이다.

2.7. 독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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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의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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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조상

본인 부모 조부모 증조부모
경종
(景宗)
<colbgcolor=#fff3e4,#331c00> 숙종
(肅宗)
<colbgcolor=#ffffe4,#323300> 현종
(顯宗)
효종
(孝宗)
인선왕후
(仁宣王后)
명성왕후
(明聖王后)
청풍부원군 김우명
(淸風府院君 金佑明)
덕은부부인 은진 송씨
(德恩府夫人 恩津 宋氏)
왕비 장씨
(王妃 張氏)
옥산부대빈 장씨
(玉山府大嬪 張氏)
옥산부원군 장형
(玉山府院君 張炯)
증 우의정 장응인
(贈 右議政 張應仁)
증 정경부인 남포 박씨
(贈 貞敬夫人 藍浦 朴氏)
파산부부인 파평 윤씨
(坡山府夫人 坡平 尹氏)
증 판서 윤성립
(贈 判書 尹誠立)
증 정부인 밀양변씨
贈 貞夫人 密陽 卞氏)

4. 여담

  • 대중이 여기는 경종의 모습은 '병약하다'는 이미지가 강해서 마른 체형에 파리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제로는 비만 체형이었다. 뚱뚱하고 후덕한 외모가 대중적인 병약한 이미지와 거리가 멀기 때문에 일어나는 오해.[46] <승정원일기>의 기록이 이를 뒷받침하는데 숙종 39년 기사에는 경종의 모습을 "비만태조(肥滿太早·아주 일찍부터 살이 찌다.)"라고 했고 재위 2년 기사에는 "성체비만(成體肥滿·다 커서도 살이 쪘다.)"으로 묘사돼 있다. 비만한만큼 더위를 많이 느끼고 다한증을 자주 앓았다. 이런 일화 등을 보건대 근대 시기 잘 먹어서 후덕한 것과는 거리가 아주 먼 상황이었으며 현대인들이 여기는 비만인의 이미지에 100% 부합하는 모습을 보이므로 추정한 경종의 몸무게는 70kg 이상 정도로 추측할 수 있다. 성인병이 의심되는 묘사도 있는데 경종 2년 6월 24일, 삼수의 옥 문제를 논의하다가 신하들 앞에서 오줌을 싼 것. 물론 바지에 지린 것은 아니고 요강을 쓴 것이지만 중요한 자리에서도 잠깐 오줌을 참지 못할 정도로 배뇨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사헌부 지평인 이거원(李巨源)이 "군신 간에도 예의가 있는데 말도 안 하고 소피를 누다니 예의에 어긋납니다." 라고 왕을 비판했다. 다한증 및 소변을 못 참을 정도로 자주 보는 것은 전형적인 당뇨 증상이고 운동부족 비만인 경우 당뇨를 앓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특히나 경종처럼 어려서부터 소아비만인 경우라면 더더욱. 정작 어머니인 희빈 장씨는 실록에 기록될 정도로 상당한 미인이었던 것과 대조적이다.
  • 경종의 두 아내들은 팔자가 기구한 편이었는데 첫 아내 단의왕후 심씨는 세자빈 시절에 일찍 요절했으며 <조선왕조실록>에 보면 말을 횡설수설 하는 증상이 있어 정신병이 있었다고 한다. 경종의 자식이 없는 이유는 단의왕후의 탓도 있는데 그녀의 집안은 나중에 이인좌의 난에 참가하는 바람에 몰락했다. 2번째 아내 선의왕후 어씨는 일찍부터 당시 연잉군이었던 영조를 경계했는데 14세에 경종과 혼인했으며 불과 2년 뒤 숙종이 사망했고 뒤이어 경종이 사망했으므로 여러모로 아이를 가지기 힘든 상황이기는 했다. 선의왕후 어씨와 그의 친족들은 다른 왕족양자로 들여 경종의 뒤를 잇게 하려는 계획까지 세웠다고 한다. 이 탓에 영조와 사이가 나빠서 영조가 즉위한 뒤에 둘이 서로를 무시하는 일이 잦아 난감한 일이 여럿 있었다고 하며 이인좌의 난을 뒤에서 부추겼다는 말조차 있을 정도이다. 그래서 그런지 효장세자를 그녀가 독살했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효장세자는 일개 궁인에 의해 독살당했다고 추정한다고 하나 일개 궁녀가 국본(國本)인 왕세자를 독살한다는건 불가능하다. 당시 친국에서도 궁녀가 김 상궁이 사주했다고 납초하였고 <조선왕조실록>에도 김 상궁은 동조(東朝)를 섬기던 상궁이라고 기록되어 있었다는 점, 영조가 이를 서둘러 차단했다는 점은 의미심장하다. 그 후 어씨는 갑자기 죽는데 사실상 자살을 강요당한 정황이 있다.
  • 휘는 '운(昀)'으로 '햇빛'이라는 뜻이다. 훈음은 '윤'이라서 경종의 휘를 '윤'으로 쓰는 경우가 많은데 1690년에 작성된 경종의 작명 단자에는 음이 '운(云)'이라 적혀있다. 왕실에서 공식적으로 경종의 휘를 '운'으로 발음한다고 밝힌 이상 한자의 원음이 '윤'이라도 '운'으로 읽는 것이 맞다. 남송의 황제인 이종도 즉위 후 이 한자로 개명했는데, 이때에는 '윤' 으로 발음한다.
  • 병약하고 조용한 대중적인 이미지 때문에 묻히는 사실이지만 부왕인 숙종과 동생 영조 못지 않게 꽤나 다혈질에 욕도 좀 구사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재위 초반은 노론 신하들에게 눌려 지냈고 후반부도 여전히 무기력하고 병에 시달렸기 때문에 경종, 영조에 비해 기록이 그리 많지는 않다.

5. 대중매체

조선사에서 효종-현종-숙종[47]-경종-영조 초[48]까지의 라인은 다른 국가의 침공이나 엄청난 이벤트 없이 정치사, 그것도 당쟁 위주로 흘러간지라 그 사이에서도 가장 짧은 재위 기간을 가진 경종은 대중매체에 등장하는 일이 드물다. 등장하더라도 장희빈 관련 매체에 아역으로 나오거나 영조의 회상으로만 등장하는 경우가 잦다.

5.1. 영화

  • 2015년 개봉한 영화 <사도>에서는 영조와 사도세자종묘를 참배하는 장면에서 언급되는데 영조사도세자에게 "이 어른은 나의 형님이신 경종대왕이시다. 사람들은 내가 이 어른을 독살했다고들 한다"며 영조의 정통성 콤플렉스를 나타내는 장면에는 빠지지 않고 등장한다. 중반부에는 고문당하던 죄인이 영조에게 "경종대왕을 독살한 당신이 어찌 왕이란 말이오" 라며 절규하는 장면도 나온다. 이에 대한 영조의 대답도 흥미로운데 "25년 동안 지겹지도 않냐"며 한숨을 쉬다가 그 죄인의 입을 찢어버린다. 실제 있었던 영조의 친국을 그대로 영상화한 것인데 다만 영조가 즉석에서 죄인의 입을 찢어버리는 건 영화적 과장이다.
  • 상의원에서는 은근히 반찬으로 영조에게 쪼잔하게 구는 모습을 보여준다.

5.2. 드라마

  • 1988년 MBC 드라마 《조선왕조 500년 - 인현왕후》에서는 김성환(청소년)과 여민구(아역)가 연기했다. 세자 시절로만 나오는데 임금으로서의 모습은 나오지 않는다.
  • 2002년 KBS 드라마 《장희빈》에서는 배우 곽정욱[49](아역)과 이승형(성인)이 연기했다. 주로 왕세자로서 등장하며 장희빈과 장희재는 세자의 생모와 외숙임을 내세워 부심을 부리거나 행패를 부린다. 신사무옥 때 생모를 구명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하는 모습도 그렸으며 94화에서는 장희빈의 부름으로 인현왕후의 빈소에서 취선당으로 불려왔다가 다시 빈전으로 데리고 오라는 숙종의 명을 장희빈이 거부하며 세자를 뺏기지 않기 위해 세자를 붙잡고 늘어지다가 바짓가랑이를 잡아당기자 세자가 쓰러지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은 장희빈이 경종의 하초를 못 쓰게 했다는 야사를 반영했으며 세자가 쓰러지자 장희빈이 당황하는 장면도 넣었다. 세자가 인현왕후의 빈소로 돌아간 후 앓아눕자 장희빈은 "날 죽이려거든 세자부터 죽이라"고 발악하다가 강제로 사약을 마시고 죽는걸로 처리했으며 세자는 그 소식에 취선당으로 달려가지만 막 사약을 마시고 죽은 생모를 끌어안고 통곡한다. 연잉군과의 사이는 그렇게 나쁘지 않게 나오며[50] 세월이 흘러 드라마의 마지막 장면에서는 즉위식 때 생모의 환상을 보는 장면에서 등장한다.
  • 2019년 SBS 드라마 《해치》에서는 배우 한승현[52]이 연기했다. 경종이 비만이었던 재현을 따라 통통한 배우를 섭외했다.

5.3. 소설

  • 이강백이 지은 희곡 《진땀 흘리기》는 노론들에게 "빨리 연잉군(영조)에게 양위하라"는 괴롭힘을 당하는 경종의 심리적 고통을 다루고 있다.
  • 네이버웹소설승은궁녀스캔들》에서는 숙종 44년을 배경으로 세자 시절의 경종과 생과방 나인을 주인공으로 하는 로맨스 소설이다. 경종 외에 연잉군, 내시 박상검, 선의왕후 어씨, 숙종 등이 대거 등장하고 망가지는 팩션 소설. 독살당했다는 역사 기록과 달리 독살당한 척하고 궁을 나와 순심과 함께 행복하게 살아간다.

5.4. 뮤지컬

  • 뮤지컬 <경종수정실록>은 경종과 연잉군(영조) 사이의 갈등 및 정치 대립에 관한 이야기를 다룬 뮤지컬이다. 홍수찬이라는 가상 인물이 경종의 친구이자 스승, 사관으로 등장한다.

5.5. 기타

  •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15권에 등장한다. 작가가 외형에 대한 묘사를 발견하지 못하고 지나쳐 처음엔 지나치게 비쩍 말라 광대뼈가 툭 불거진 모습이였다. 개정판에서 조금 수정되었지만 여전히 비만형은 아니다.
  • 조선왕조실톡에서 등장한다. 비만이었다는 묘사를 잘 반영해 살이쪘지만 병약한 모습 그대로 그려냈다.

6. 관련 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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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생모 희빈 장씨의 처소[2] 원래 훈음은 '윤'이다.[3] 대한 제국으로 확대할 경우 순종이 마지막 적장자 출신 왕이다.[4] 당시에는 15세부터 성년이었고, 10대 후반~20대 초반에 혼인을 하여 자식을 보고, 40대 즈음에 손자를 보는 것이 일반적이었다.[5] 이 원자 책봉에도 말이 많았다. 인현왕후가 아직 젊은데다가 대왕대비인 장렬왕후가 승하한지 1년도 되지 않은 상중이었다.[6] 사약을 받았다고 많이 알려져 있지만 사약을 받았다는 기록은 야사인 인현왕후전과 수문록에만 등장하고 정사인 조선왕조실록에는 그녀가 주례의 규정에 따라 사사할 수 없음을 언급하고 자결하였음을 알 수 있는 기록들이 있다.[7] 追奪, 죽은 사람의 죄를 논하여 살았을 때의 벼슬 이름을 깎아 없앰. 대략 삭탈관직과 비슷하며, 현대로 치면 서훈 취소나 신분 박탈형이라고 보면 된다.[8] 다만 당시 독대의 내용이 직접적으로 알려지지 않았다. 달리 말하면 숙종이이명이 비밀리에 세자의 대리청정을 확실하게 합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의견을 주고 받으면서 암묵적으로 상호 동의를 내린 수준인지는 확실하지 않다.[9] 그냥 지각한 정도가 아니라 일부러 늦게 왔다. 입궐을 해서 출석 체크를 하고 노론쪽 인사랑 1시간이나 노닥거리다가 어전 회의에 들어온 것. 당연히 노론이 경종을 시험하려고 한거다.[10] 拿問, 죄인을 잡아다가 심문함.[11] 入侍, 대궐에 들어가서 임금을 알현해 만나뵙는 일.[12] 숙종실록 63권, 숙종 45년 6월 11일 임자 1번째 기사[13] 따지고 보면 후궁 소생으로 장희빈이 한때 중전까지 된 적은 있으나 경종을 낳을 당시 장희빈의 신분은 중전이 아니었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 1품 빈의 아들이었고 그의 입지를 위협할만한 적자가 탄생한 것도 아니거니와 생모인 장씨가 강등을 당할때 인현왕후쪽으로 입적이 됐기 때문에 정통성 면에서 당시 경종의 정통성에 맞설만한 인물은 없었다.[14] 새롭게 바뀐 태자가 바로 경종 년간에 즉위한 옹정제이다.[15] 持斧上疏, 도끼를 지참하고 하는 상소. 안 들어주려면 가져간 도끼로 자기 목을 치라는 의미가 있다.[16] 청나라도 원래 청나라는 적장자 계승의 전통이 없던 나라라서 가능한 이야기였다. 당장 청나라 강희제도 적장자가 아닌데 형을 제끼고 황제가 되었고 애초에 청나라는 강희제 이전에도 모두 적장자가 아닌데 형을 제끼고 황제로 즉위하고 그 뒤로도 적장자 황제가 매우 드물어 청나라 역사상 적장자 출신 황제는 도광제 단 1명밖에 없었으며 그마저도 도광제는 선제 가경제의 유일한 적자이자 가장 나이 많은 아들이었다. 청나라에서 장자 출신 황제는 도광제 - 함풍제 - 동치제 3대밖에 없었고 함풍제와 동치제는 적장자가 아니라 서장자였다.[17] 태조의 세자 이방석, 연산군의 세자 이고, 광해군의 세자 이지.[18]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19] 연잉군을 세제(世弟)로 삼을 것을 주청했을 때가 경종 1년(1721)이고 경종의 나이가 34세, 선의왕후 어씨가 17세였다.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경종이 설령 이 때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해도 아직 나이가 창창한 젊은 왕에게 득남을 위한 섭생(葉生, 아이를 잉태하는 것)을 권하는 것이 신하된 자의 도리인데 다짜고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자고 하는 것부터가 그만큼 노론이 당시 궁지에 몰려있었다는 의미로 해석하였다. 심지어 수렴청정이나 대리청정도 아니고 경종 자신이 친정하는 중이었음에도 굳이 왕께서 대비에게 가서 연잉군을 세제로 책봉하는 것에 대한 동의를 구할 것을 경종에게 강권(強勸)하기까지 했다.[20] 이이명이 부각된 것은 아들 이기지가 경종 살해에 참여한데다가 이이명전주 이씨세종서자밀성군의 8대손이었기 때문이다. 실질적 이유는 노론 4대신(김창집·이이명·이건명·조태채)의 필두였기 때문이다.[21] 삼수의 옥이라고 부르기도 한다.[22] 경종 1년 10월 19일[23] 다만 경종이 정말로 아버지와 친할머니의 성격을 고스란히 다 물려받았다고 하기도 애매한게 경종이 화낸 경우는 현대인들이든 당시 사람들 기준으로든 화나는게 당연한걸 넘어 합리적으로 보일 지경으로 막장이었다. 신임옥사 전간기에 노론이 본인을 임금취급도 안하던 상황조차 나중에 표출했으나 잠시 넘어간걸 생각하면 초인적인 인내심을 발휘하며 통치했던 친할아버지 현종의 성품을 많이 물려받았다고 해석할 여지도 충분하다.[24] 불 끄는 소화기가 맞으며 수총기(水銃器)(물대포)였다.[25] 관상감(觀象監)에서 서양국(西洋國)의 수총기(水銃器)를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그대로 따랐다. 본감(本監)의 관원(官員)인 허원(許遠)이 연중(燕中)에 들어 갔다가 가져온 것으로 화재(火災)를 구하는 것이었다. 이어 각 군문(軍門)에 영을 내려 만들어서 비치하도록 하였는데, 지부(地部)에서 경비가 바닥이 났다며 풍년이 들 때를 기다려 만들자고 청하니, 임금이 역시 허락하였다. (경종 3년 5월 25일)[26] 이것은 당시 유럽도 마찬가지였는데 제대로 된 소방펌프는 경종이 죽고도 6년 뒤인 1730년에야 영국에서 개발되었다.[27] 서양국(西洋國)의 문신종(問辰鍾)284)(註 284)(문신종(問辰鍾) : 앉혀 놓게 만든 시계의 일종.) 을 관상감(觀象監)에 내려 새로 만들게 하였다. 이것은 진하사(進賀使) 밀창군(密昌君) 이직(李樴)이 돌아올 때에 청(淸)나라 임금이 우리 나라에 보낸 것이다. 그 법(法)이 매우 정밀하고 교묘하여 밤이나 낮이나 비올 때나 흐릴 때나 쉽게 시각을 추측할 수 있는데, 관상감에서 모형을 따라 새로 만들 것을 계청(啓請)하니, 임금이 윤허하였다. (경종 3년 10월 9일)[28] 청나라강희제 대에 12시간제를 폐지하고 24시간제로 바꿨다. 일본네덜란드와의 통교 문제로 에도 막부 초기에 이미 24시간제를 도입한 것을 보면 한국중국의 시제 개혁이 늦었던 것이다.[29] 드라마 <조선왕조 오백년> - 인현왕후에서 이와 비슷한 내용으로 야사라는 내레이션과 함께 재현하는 장면이 나온다.#[30] 설민석이 이를 어쩌다 어른에서 얘기했다가 역사 전공자들에게 줄기차게 까이기도 했다. 단, 강의에서는 '야사'라는 사실을 덧붙였다.[31] 단순히 불쾌하게 여긴 정도가 아니라 어미와 자식간의 끊어질 수 없는 의(義)를 망령되게 훼손하려 했고 결국 윤지술은 신임사화 때 길일경 등 소론의 탄핵으로 사형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론 강경파의 말에 따라 동조한 노론 4대신을 신임사화로 전부 죽여버렸다. 윤지술은 숙종의 행장에 희빈 장씨를 사사한 행적이 애매하게 기록되어 있다며 이는 만고에 길이 남을 업적이니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말했다.[32] 하지만 밀풍군은 경종과 촌수가 8촌이나 된다. 왕실에 자손이 없기로서니 정말 그렇게 되는 경우는 가까운 친척이 아예 없을 경우인데 연잉군이 있는 마당에 밀풍군 영입은 명분없는 행동이다. 게다가 아무리 소현세자의 후손들이 복권되었다고 하지만 잘못하면 예송논쟁마냥 효종정통성 역린을 건드릴 수 있다.[33] 실록에는 위약(痿弱)이라고 기록되어 있다.[34] 이는 모욕을 넘어서 능멸에 가까운 발언이다. 발언의 수위를 생각하면 당장 주살(몸을 찢어 죽이는 일)당해도 할 말이 없는 수준. 주살 수준이 아니라 경종 정도의 배짱이면 아예 이건명 집안 자체를 싸그리 박살 내버릴 수도 있고. 경종이 이 사실을 몰랐을 리 없다. 훗날 이건명사약을 받아 죽고 경종은 급속도로 쇠약해져 2년 만에 죽는다.[35] 청실록 1강희 61년(1722년) 음력 2월 25일 기사(한문)[36] 조선에서는 관례 이전에는 잠자리를 가지지 않았다.[37] 단의왕후 심씨의 친정아버지.[38] 31세면 숙종의 정비 인경왕후보다는 10년 정도 오래산것이긴 했지만 문제는 인경왕후와 달리 한번도 임신한 적이 없었다. 게다가 단의왕후 본인은 그래도 세자 시절 정국에서는 어찌어찌 연잉군 및 노론과 사이가 나쁜 편은 아니었으나 선의왕후 어씨는 노론 집안 왕비임에도 정작 같은 노론들한테 뒤통수를 맞았기에 노론이 선의왕후까지 엮어서 경종을 괴롭히기 시작한 시점부터 연잉군과 사이가 좋을수가 없었다.[39] 이 근거로 경종을 독살하려 한 김씨 궁녀의 진실을 “김씨 성 가진 궁인이 한둘이냐”며 끝내 밝히지 않은 것을 들었다. 보통 왕을 독살하려 한 이는 끝까지 파헤쳐 잡는 게 보통이지만 수사 도중 자칫 동궁(연잉군)쪽에 불리한 진술이 나올까봐 차단한 것으로 추측된다. 이에 대한 나름대로의 근거를 대자면 실제로 삼수의 옥 당시 연잉군 측 인물들이 끌려나오기도 했다.[40] 당장 효종이 죽고 그의 적장자이자 유일한 아들인 현종이 즉위하였음에도 예송논쟁이 일어난 것을 생각해보자.[41] 다만 박상검의 경우 자복하지 않고 죽었고, 석렬과 필정은 자살했으며, 문유도만이 자복했다.[42] 사실 영조하고 생전에 사이가 나빴던 사람은 선의왕후였지 단의왕후는 요절해서 사이가 나쁠일이 없었다.[43] 성대중의 <청성잡기>에 따르면 윤구종을 사형시키려고 백정 몇 명을 꾀어 망나니 준비를 시켰는데 윤구종이 후유증으로 옥사하는 바람에 유야무야됐다. 졸지에 일감이 끊긴 백정들은 항의한답시고 사적으로 봉화를 피워 난동을 일으켰고 정조가 노해 그들 모두 처벌 후 귀양을 보냈다.[44] 정조는 조선왕조 내에서 손에 꼽히는 공부벌레 임금으로 유명했기에 사실관계조차 무시한 모욕이었다.[45] 신장 수치(BUN 및 크레아티닌, 특히 크레아티닌 수치)가 폭증하면 한여름에도 뼈가 시리는 오한이 엄습하며 특히 잦은아설사는 중증 당뇨의 합병증 중 하나이다. 다만 경종 본인이 세자 시절부터 정쟁에 휘말려 극도의 스트레스를 받고 있었으므로, 당뇨와는 별도로 과민성 대장 증후군을 앓고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46] 그래서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에서 허약한 모습으로 그려졌으나 개정판에서 허약하지 않은 모습으로 수정했다. 뚱뚱하게 수정할시 현종과 중복되기 때문일 듯. <조선왕조실톡>에서는 파오후인 모습으로 제대로 묘사했다.[47] 그나마 숙종의 경우 장희빈 쪽이 꽤 미디어화 되었다.[48] 말년에 벌인 일이 너무 어마무시하고 정조와도 연결되는지라 영조 후반은 꽤 나온다.[49] 1998년 MBC 드라마 <대왕의 길>에서는 훗날 영조가 되는 연잉군을 연기했다. 4년 만에 형제를 모두 연기한 것. 2002년 SBS 드라마 <야인시대>에서는 김두한 아역.[50] 즉위식 장면 직전에 연잉군의 활쏘기 연습을 돕기도 했다.[51] 청송 심씨로 이후 단의왕후로 추증했다.[52] 배우 양희경의 아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