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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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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독립운동가 김경천.png
본명 김광서(金光瑞)
별칭 조선의 나폴레옹, 김응천(金應天), 김현충(金顯忠), 백마 탄 김장군, 김일성, 김장군(金將軍)
출생 1888년 6월 5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해안사 승평리
(現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
사망 1942년 1월 2일 (향년 54세)
소비에트 연방 시베리아 수용소
본관 시흥 김씨[1]
부모 아버지 김정우(金鼎禹), 어머니 윤옥연
자녀 2남 3녀
서훈 건국훈장 대통령장 추서
링크 국가보훈처, 네이버 캐스트

1. 개요2. 생애
2.1. 초년기2.2. 만주에서의 독립운동2.3.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2.4. 이후의 행적
3. 기타4.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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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파일:김경천 장군.png
낙엽이 지기 전에 무기를 준비하여 압록강을 건너고 싶다.
국방TV-조선의 나폴레옹 김경천 KBS역사스페셜신흥무관학교 100주년 특집
2부 만주벌 이름 없는 독립 전사들[2]

대한민국독립유공자.

2. 생애

2.1. 초년기

파일:attachment/김경천/Kinkouzui2.png
김경천의 아버지 김정우
1888년 6월 5일 함경도 북청도호부 해안사 승평리(현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승평리)에서 부친 김정우(金鼎禹)와 모친 윤옥연(尹玉蓮)의 5남 1녀 중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김정우는 1895년 일본에 관비 유학생으로 유학, 경응의숙 보통과, 동경 신전구(神田區) 순천구합사학교(順天求合社學校) 공업예비과, 동경고등공업학교 기계학과를 졸업한 후 동경포병공창에서 총탄제조 견습을 마치고 귀국해 대한제국 육군군기창장으로 일했던 일본 유학파 출신 조선 육군 최고위층 인사였다.

김경천은 8살 때 서울 사직동으로 이주했고 15살에 경성학당을 졸업했다. 1909년 경기도 고양군 용강면에 거주하는 부호 유계준(柳桂俊)의 딸 유정화(호적명: 유정(柳貞))와 결혼했다. 김경천이 일본으로 유학가기 1주일 전에 혼인 잔치가 벌어졌는데, 이때 김경천은 부인에게 피아노를 사주고 배우게 했다고 한다. 이후 김경천은 부인을 일본으로 불렀고, 두 딸 지리(知利)와 지혜(智慧)를 낳았다.

김경천은 17살에 일본육군사관학교 부설 고등학교에 입학했다(이때 한국인이 그 학교에 입학하려면 일본천황한테 허락을 받아야만 했다.). 19살에 육군사관학교 본과에 입학하고 22살에 육군사관학교 전과정을 마쳤다. 졸업 성적은 언어상 불리하여 1등을 못했지만 종합적인 성적은 여태까지의 졸업생들을 포함하여 최우등이었다.#

재학중이던 1910년 경술국치가 일어나자, 그는 졸업 후 일본군 장교 임관을 거부하려 했으나 독립전쟁을 위해 일본군에서 정보를 빼와야 한다는 생각에 마음을 고처먹고 임관했다. 이에 대해 일본육군사관학교 45기인 이형석(李炯錫)은 후에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홍사익의 말을 들으면 그는 한참 혈기 왕성한 때에 유학을 갔다가 조국이 강압적 합방을 당하고 보니 그 젊은이들의 비분강개야말로 불가형언으로 안절부절이었다는 것을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요꼬하마인가 어딘가 시골 어떤 요정에서 대소통곡한 끝에 어떤 사람은 곧 전원이 퇴학하고 돌아가자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이중교 앞에 가서 전원이 자결하여 이 분하고 억울한 마음을 풀어보자고 하였는데, 결국은 지청천의 주장에 따라 우리가 이왕 군사훈련을 받으러 온 것이니 배울 것은 끝까지 배운 다음 장차 중좌가 되는 날 일제히 군복을 벗어 던지고 조국 광복을 위하여 총궐기하자는 맹세로서 결론을 짓게 되었다는 것이다.
이형석, <지청천>, '한국 근대인물백인선', 신동아 1970. 1월호 부록, p.243

육사를 졸업한 김경천은 도쿄 제1사단 기병 제1연대에서 근무했다. 그는 1916년 12월 동경 제1사단에서 근무하던 한국인 장교들이 조직한 친목단체 전의회(全誼會)를에 가담하여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전의회는 표면상 친목단체였지만 실제로는 국제정세와 조선의 상황 등에 관하여 논의하며 자신들의 향배에 대해 숙고하는 자리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휴가를 얻어 조선으로 귀국한 그는 독립운동을 위한 준비작업에 착수했다. 동지를 물색했으며, 부친으로부터 물려받은 토지를 팔아 자금을 준비했다.

2.2. 만주에서의 독립운동

김경천이 본격적으로 만주로 망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도쿄에서 벌어진 2.8 독립 선언이었다. 그는 1923년 7월 2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19년에 전무후무한 세계적 회의가 열리고 각 소약민족에게도 권리를 준다함에 우리 동경 유학생이 독립운동의 첫소리를 발하였소. 이때 나는 동경에서 사관학교를 마치고 일본육군 기병 제1연대 시관으로 있을 때이라. 꿈속같이 기쁜 중에도 불보듯 하는 마음을 참을 수 없었소. 그리하여 병으로 수유를 얻어가지고 2월 20일에 경성에 도착하니 도처에 공기가 이상스러웠소.

김경천은 병을 칭하여 휴가를 얻어내는 뒤 경성으로 간 뒤 육사 3년 후배인 지청천, 이응준과 만났다. 세 사람은 사직동에 있는 김경천의 집에 모여 나라의 일에 통분을 나눴고, 앞으로 어찌할 지를 숙고했다. 그 결과 그들은 국외로 탈출하여 독립운동을 전개하기로 결의했다.

김경천은 만주로 망명하기로 결심한 뒤 일제 경찰의 감시를 피하기 위해 표면적으로는 당구를 치고 밤에는 술집을 드나들었다. 그는 장안의 유명한 기생의 집에 드나들기도 했고, 중국 요리집에서 당구와 술로 날을 보내기도 했다. 특히 서울에 와있던 몇 달 동안 의친왕의 애인과 염문을 뿌려 장안의 화제가 되기도 했다. 그렇게 일제의 감시에서 벗어난 그는 1919년 6월 초 평양에 있던 이응준에게 연락했지만 연락이 닿지 않자 1919년 6월 6일 지청천과 함께 만주로의 망명을 단행했다.[3] 그는 훗날 동아일보 기자에게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3월 3일에 독립선언이 터지니 이때 우리군의 몇 사람은 장래 조선 민족이 독립운동을 하자면 아령과 남북만주를 중심삼지 아니하면 아니되리라하고 동지 지청천과 함께 협의하고 국경을 남으려는데 당시 경계가 심할 때이라. 잘못하다가 잡힐 염려가 있으므로 6월 6일에 우리 두 사람은 군복을 벗고 보통 양복을 갈아입은 후 자동차를 타고 수원을 갔었소. 그리하야 수원에서 차를 타고 그대로 남대문으로 오니 해가 지고 어둡디다. 그대로 신의주까지 와서 자는 데 밤중에 경찰의 조사가 있으므로 그 밤을 자지 못하고 처음에는 일인이라고 대답한 후 정거장에 가서 차를 타고 국경을 넘었습니다.

김경천과 지청천 등 일본군 현역 장교의 망명은 일본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본군은 두 사람의 체포에 혈안이 되었으며, 현상금 5만엔을 내걸었다. 한편 김경천은 신의주 맞은 편 안동현에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대한독립청년단에 가입해 활동했다.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운동비 조달을 위해 노력했으며, 파리 강화 회의에 파견된 김규식 등 동지들을 후원하고자 노력했다.

또한 1919년 8월에는 안병찬 외 28명 중 한 사람으로서 '중화민국 관상보 학계제군에게 고함'이란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했다. 그들은 이 성명에서 일본이 조선과 마찬가지로 중국에 대해서도 침략을 전개할 것이며, 만일 국제연맹에서 한국문제에 대해 만족할 만한 해결책을 얻지 못하면 곧 독립전쟁을 선포하여 최후의 한 사람까지 혈전을 전개할 것임을 천명했다.

그러나 김경천의 대한독립단에서의 활동은 그해 8월 총재 안병찬이 체포되면서 대한독립단이 약화되자 크게 위축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보다 효율적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서간도 유하현에 있는 신흥무관학교를 찾아가 교관으로서 활동했다. 그는 이 학교에서 지청천, 신팔균과 함께 교관을 맡아 독립군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세 사람은 조국을 위해 투쟁할 것을 맹세하고 그 맹세의 뜻으로 다같이 천자(天字)가 붙은 별호를 가지게 되었는데, 동천(東天) 신팔균, 경천(擎天) 김광서(金光瑞). 청천(靑天) 지석규(池錫奎)라 했는데, 사람들은 이들을 남만 삼천(南滿 三天)이라고 불렀다.

김경천은 서울 집에 많은 군사서적을 소장하고 있었다. 그는 이 책들을 신흥무관학교로 가져오기 위해 성명이 알려지지 않은 한 여인을 파견했다. 그러나 이 여인은 김경천의 집을 감시하던 일제 경찰에게 체포되어 고문 끝에 사망했다고 한다.[4] 이때 장길상(張吉相)이 배천택(裵天澤)을 시켜 5만원을 군자금으로 보내왔다. 이에 김경천, 지청천, 신팔균 세 사람은 이 돈을 공동관리 하면서 계획을 추진했다.

이들은 1920년 3월 1일을 기하여 국경지대의 요충지 어느 한 곳을 점령해서 국내에 3.1 운동을 다시 일으킬 기폭제를 만들기로 했다. 이에 따라 신팔균은 남만주로 가서 한인사회의 지원을 얻기로 했고, 지청천은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연락하기로 했으며, 김경천은 연해주로 가서 무기 구입 루트를 개척하기로 했다. 김경천은 우선 중간 기착지로 독립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던 북간도를 택했다. 단신으로 북간도로 간 그는 그곳에서 동지들을 규합하고자 했지만 그곳의 지방 파벌간의 갈등으로 정착하지 못해 연해주로 재차 이동했다.

2.3. 연해주에서의 독립운동

1919년 말 연해주로 이동한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면서 독립운동의 기회를 모색했다. 당시 시베리아 일대는 1919녀 말부터 1920년초까지 러시아 내전으로 인한 혼란에 휩싸여 있었다. 우수리스크에서는 백위파 수비대 사병들이 1920년 1월 26일 반란을 일으켰고, 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1월 31일 대규모 봉기가 일어나 볼셰비키의 수중으로 넘어갔다. 이에 시베리아에 출병했던 미국, 영국, 프랑스는 시베리아에서 그들의 군대를 대피시키기로 했다. 하지만 일본군은 그곳에 계속 주둔해 연해주를 장차 손에 넣을 야욕을 보였다.

그러던 1920년 3월, 러시아 혁명부대와 한인 부대가 아무르강 하구 북쪽에 위치한 니콜라옙스크의 일본군과 민간인을 학살하는 사건이 벌어졌다.(니콜라옙스크 사건) 일본군은 이를 명분으로 삼아 1920년 4월 한인들이 다수 거주하는 연해주를 공격해 한인들을 다수 학살했다.(연해주 4월 참변) 특히 김경천이 있던 블라디보스토크의 신한촌에 대하여 무자비한 학살이 단행되었다. 이에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산림지대인 수청 일대로 피신했다.

하지만 수청 일대도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1920년 4월 6일 일본군이 습격해오면서 이곳 역시 일본군과 백위파 군대의 지배하에 들어갔으며, 일본군은 이곳에 헌병대를 설치하는 한편 친일조직인 거류민회를 조직하여 한인들을 통제했다. 여기에 일본의 조정을 받는 중국계 마적들이 수시로 출몰하여 한인들을 괴롭혔다. 이에 김경천은 의용군을 모집해 마적 소탕에 적극 나섰다. 1922년 1월 23일자 동아일보 기사 '경천 김장군'은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김경천은) 노령 해삼에 입하여 1년간을 체제하였으나 역시 여의치 못한 중 일본이 출병하여 일본군이 과격파와 반과격파의 군기를 모두 몰수하고 조선인을 포착할 때에 다행히 도망하여 노령 연해주 삼림지대인 조선인의 통칭 수청이라는 산중에 잠적하여 있었는데, 그때에 중국인 마적은 러인의 무기를 일병이 전부 압수하였음을 아는 고로 무인지에 들어온 듯하여 농촌에 절대 다수를 점한 조선인의 피해가 막대하였나이다.

그러나 우리 농민은 마적을 방어할 방량이 전무하여 가산을 포기하고 안전지대로 이전하려다가 처자는 아사하고 부모는 동사하여 반광반사(半狂半死)한 촌민이 수청에서 해삼에 탈주하여 가옥에 거주할 여유가 없는 고로 정거장 화차 중에서 생활하면서 시중에서 걸식하는 조선사람이 부지기수이었나이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 군대는 조선인의 독립단과 공산당을 박멸키 위하여 마적 괴수를 니꼴니스크시에 불러다놓고 각별 우대하여 가면서 마적에게 무기를 공급하여 조선인 촌락을 습격케 하여 다대한 손해를 주도록 한 것은 공연한 비밀이라 노령에 있는 조선 사람은 누구든지 알지 못하는 사람은 없나이다.

형편이 이러함으로 조선 청년은 의용군을 조직하여 마적을 토벌하였으나 매양 불리한 때가 많이 있었나이다. 이때에 김장군은 각촌에 격문을 전달하여 의용군을 모집하여 급속히 주야로 연습을 하여 마적 토벌을 시작하였으나 처음에는 의용군에 불리하였나이다.

김경천은 1923년 7월 29일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1920년 3월에 저 유명한 니항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삼월 초사일에 각 처에 헤어져 있는 조선 군대와 적군이 연합하여 니항에 있는 일본군대와 백군에게 총공격을 개시하였소. 이때 군세는 적군의 연합군은 2천여 명이오, 우리 조선 군사가 700여 명인데 소학령에는 수천명의 백군과 일본군 800명이 주둔하였었소. 전후 2시간 콩볶듯 싸우는데 이 싸움에 일본군이 2백여 명이 죽고 적군 속에서는 '홍가리' 군사가 많이 죽었으며, 우리 군사는 겨우 6, 7인 전사자가 있을 뿐이었소. 이 싸움에 우리 조선군이 용맹스럽게 싸운 것은 세계 각국 군사의 경탄하는 대상이 되었었소.

그러나 그후 백군이 일본군을 뒤에 업고 쳐들어 옴으로 우리 군사는 몇 배나 되는 일본군과 싸우는 것은 무모이라. 그곳에서 수청 지방으로 퇴각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때 수청 지방에는 마적 고산의 패가 횡행하여 인민이 살 수 없었소. 이때에 우리 군사와 마적 사이에 충돌이 있엇는데, 우리는 탄환이 부족함으로 일시 퇴각하였더니 마적이 들어와서 조선 사람의 집 4, 50호를 일시에 불을 놓아 밤이 새도록 화광이 충전하고 연기가 산간에 가득한데, 이것이 우리 인간의 생지옥인가 하는 생각이 있었소.

나는 이 광경을 보고 아무래도 마적을 토벌하지 아니하면 아니되겠다 결심하고 이때에 이를 토벌하기 위해 지원병을 뽑는데 재일학교 교사 다니는 사람이 많이 지원하였었소. 이때에 마적 400여 명들은 일본 사람이 파놓은 요새 속으로 들어가 있는 것을 변안간 공격을 시작하여 일제 사격하니 필경 놈들이 지탱하지 못하고 산산이 헤어지는데 필경 거의 다 죽고 300여 명 중에 겨우 60명 쯤 살아가고 몰살을 하였소. 그리고 그해 겨울에는 여러가지 일로 아무 일도 하지 못하였소.

김경천은 처음에는 수청 일대의 창해청년단에서 총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마적 소탕에 전력을 기울였다. 당시 창해청년단은 수청을 3개구로 나누어 각구에 지부를 설치했으며, 단장은 김규면, 참모장은 정재관, 사령장은 김경천이 맡았다. 그리고 수청을 3개구로 나누어 각구에 지부를 설치했으며, 총 병력은 상비대가 102명, 예비대가 945명이었다. 마트베이 김은 저서 <일제하 시베리아의 한인사회주의자들>에서 김경천의 활약을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그는 1920년 봄부터 노령 지역의 한국인 청년들을 규합하여 그 지휘하에 60명이 넘는 조선인 빨치산 부대가 모양을 갖추었다. 부대는 수청구역의 중국인 반혁명도당과 싸웠다. 자신들의 수적 우세를 이용하여 적은 김경천 부대가 방어하는 다우지미 마을로 밀고 들어왔다. 조선인 빨치산 부대는 강습을 견디다 못해 퇴각했다. 중국인 반혁명 도당은 약탈을 하고 농가를 불태운 후 자신의 근거지인 수청 광산으로 철수했다. 그 당시 수청군에 근거를 둔 김경천, 한창걸, A.P 사바츠키의 발치산 부대는 수청군당 지하조직의 소집에 따라 중국인 반혁명 도당과 투쟁했다. 주변의 농민들도 빨치산을 도왔다. 전반적인 세력으로 인해 도당들은 포위 섬멸되었다.

창해청년단 단장 김규면은 '김규면 비망록'에서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1920년 하반기부터 1921년 상반기까지는 연해주에서 고려인 빨치산부대가 일본군의 침입과 마적 부대의 활동을 방지하는 전투에서 번번히 승리하였다. 촌락을 불지르고 약탈하던 코산파 마적 700여 명은 수청 지방 우지미, 허포수동, 석탄광에서 창해소년단 부대의 토벌에 소탕되었다. 허포수동 농촌에 출병하였던 일본군대는 마적부대가 패주하는 바람에 다른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김경천은 이렇듯 1920년경 수청 일대에서 마적을 토벌하는 데 성공했고, 이로 인해 세간으로부터 '김장군(金將軍)'으로 널리 알려졌다. 이후 그는 수청 일대를 중심으로 군정을 단행했다. 당시 수청에 살고 있던 조선인 뿐만 아니라 중국인과 러시아인 모두 김경천의 관할 구역을 벗어나 타 지역으로 이동하고자 할 때에는 김경천의 증명서를 소지해야 했다. 그리고 재러동포들의 안정된 삶의 기반을 마련하기 위해 민정도 단행하였는데, 총책임은 정재관이 담당했다. 정재관은 민정책임자로서 매년 매호마다 10원씩 걷어서 군자금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러시아식 교육을 전폐하고 민족교육을 실시했으며, 둔전병 제도도 실시했다.

1921년 봄 연해주 수청군 인접지역인 올가군에서 300여 명에 달하는 통합 빨치산 부대가 조직되었고, 김경천은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수청의 아누치노 구역에 있는 백군 까벨부대와 전투를 전개했으며, 까르뚜크 마을에서의 전투에도 참전했다. 1921년 초에는 대한독립혈성단이 다른 군소 단체들을 규합하여 결성한 수청고려의병대에 초빙되어 군대의 총책임자로 활동했다. 당시 수청고려의병대에서 활동했던 박청림은 김경천의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적었다.
김경천이 우리의 새 지휘관으로 임명됐다. 그는 서울서 태어났다. 빈천하게 된 한 양반가문 출신이다. 1910년 한일합방 후 일본에 건너가 돈벌이를 하다가 일본 사관학교를 최우등으로 졸업, 그후 일본군 장교로 근무한 사람이다. 3.1 운동이 실패한 후 김경천은 동조자 지청천, 유동천, 기타 젊은 장교들을 데리고 만주로 탈출했다. 거기에서 동조자 2명은 현지 유격대에 입대했고 자기는 두만강을 건너 수찬강 하구에 와 동포들의 협력을 받아 다우지마촌에 오게 되었다. 현지에서 그는 유격대 훈련관으로 활약하기 시작했다. 채영이 이르끄쯔크로 떠난 후, 그는 이철남의 소개로 우리의 새 부대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때까가 1921년 초였다.
박청림, <혈성단부대의 전투행로>. '재소한인의 항일투쟁과 수난사', 국학자료원, 1997. P.48~49.

김경천은 뜨레치푸진에서 사관 속성과를 만들어 군사훈련을 시켰으며, 추위가 너무 심해 훈련이 불가능할 때는 병사 집합실에서 군사학을 가르쳤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김경천과 혈성단의 지도자인 강국모(姜國模) 사이에 주도권 싸움이 벌어졌고, 이르쿠츠크에서 파견나온 손풍익이 단총에 맞아 희생되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김경천은 이러한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수청 일대의 마적 퇴치에 노력했다. 그 결과, 그는 1921년 여름 러시아 적군 사령관의 도움으로 의복을 지원받고 수청 일대에서 횡행하는 마적을 소탕하는 데 성공했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연해주에 있는 적군과 연합을 추진했다. 부대장 이철남이 아누치노로 가서 연해주 무력혁명위원회 위원장 윌스키와 부위원장 룹쪼브를 만나 무장부대 연합회담을 전개한 끝에 상호간에 연합할 것을 합의했다. 박청림의 회고에 따르면, 김경천은 이 회담의 결과에 대해 부하들에게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고 한다.
이국 땅에서 우리의 철천지 원수 일본군을 공격하고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달성하는 것이 우리들의 목적입니다. 일본군은 조선을 강점한 것처럼 러시아의 광활한 극동 지역을 점유할 목적으로 이곳에 온 것입니다. 때문에 우리들은 러시아 형제들과 합세하여 10만명의 사무라이 대군을 격멸해야 합니다. 합심이 승리의 담보일 것입니다.

1921년 8월, 수청의병대는 러시아 참모부의 지령에 따라 도비허로 이동했다. 그리고 김경천은 9월에 러시아 유격대 셉첸코 부대의 제안에 따라 의병대 일부를 올가항에 보냈으며, 나머지 대원들은 자신이 직접 이끌고 아누치노로 이동했다. 1921년 10월, 김경천 부대는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수청에 주둔한 백군을 공격해 수청 신영동에서 전투를 벌였으나 패하여 일본군과 백군의 추격을 받았다. 이에 김경천은 기병을 데리고 이만 지방으로 이동했다. 김경천은 훗날 동아일보 기자에게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증언했다.
이때 우리는 적군과 행동을 같이 하였으므로 백군이 조선군이라고 만나기만 하면 죽일 때이오. 이때 연해주에 적군이 전멸함에 다시 쫓기에 돌아가는데 강냉이죽을 먹어가며 겨울에 박착을 하고 '이만' 강가로 이백리를 행군하여 갔소. 그래서 필경 어떤 산에 가서 얼음과 눈으로 요새를 만들고 지키고 있으니 만일 이때 일본군이나 백군이 들이치면 배산일전하려 하였소.

이만에 도착한 그는 한국의용군에 가담하여 김규면, 정재관과 재회했다. 이후 그는 이만의 서방 약 20리 지점에 근거지를 두고 단원 천 명을 이끌었다. 이들은 각자 소총과 탄약 350발을 가지고 있었다. 1922년 정월, 백군이 이만을 침공하면서 전투가 벌어졌다. 김경천은 이에 대해 동아일보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이듬해 정월 백군이 이만 땅으로 나가는 것을 보고 적군이 모두 나오나보다하고 다시 행군을 하여 나오다가 하바로프스크에서 홍백전쟁이 있었는데, 그 전쟁 중에 나는 백군의 중간연락을 끊기 위하여 이만에 있는 백군 총공격을 시작하니 그때는 정월 어떤 날이라. 제1차로 백군이 수백명 죽고 대략 여섯시간 동안 격렬히 싸우는데 백군은 대포를 걸고 내리다질러서 탄환이 우박 쏟아지듯 하였소.(중략)

이때 적군의 사령관이 백군에게 항복하여 그리 빼가서 붙었음으로 적군의 일부를 내가 지휘하야 싸우게 되었는데, 이때 나는 악에 받친 사람이었소. 탄환이 비 쏟아지듯 하는 속에 말을 타고 서서 지휘하는데 백군이 대포를 놓다가 번-한 불빛에 나를 보고 "꺼레이츠"란 소리를 지르고 달아나는 자가 있었소. 이리하여 이만은 완전히 점령하였으니 이때는 적군의 힘이 약할 때이라. 약 200여 명의 우리 군사로 백군 700여 명이 지키는 곳을 점령하기는 하였으나 배후에는 일본 군사가 있는 터이라. 오래 지킬 수 없어 다시 퇴각하였소.

당시 이 전투에 참가했던 최호림은 이만 부근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22년 1월 5일, 우리는 하루 종일 행군하여 그날 저녁 늦어서야 루끼야놉까에 와 그곳에서 숙소를 정했다. 이튿날 이른 새벽 우리 유격대는 이만시 근교에 당도하여 께드롭까강을 도하해 도시에 바싹 접근했다. 그러나 기습 공격은 불가능했다. 그들은 밀정을 통해 우리 유격대의 이만 쪽으로의 이동에 대한 정보를 받고 방어시설을 튼튼히 갖추어 놓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던 까닭에 다른 전술을 적용해야만 했다.

그러던 차 꼬와료브 중장이 그만 전사했다. 우리는 그 즉시로 200명의 기마대를 두어 양쪽 측면에서 공격을 가하기 시작했다. 적군이 노출된 평지에 나타나자 김경천 부대가 기관총 교차사격을 시작했다. 아군 기마병들의 장검이 햇빛에 번쩍이었다. 적군의 기세가 수그러지기 시작하자, 우리 보병과 기마병들이 도시로 돌진하여 우체국, 전신국, 철도역을 점유했다. 이만시 수비대를 격멸하고 숱한 군수품, 무기를 노획했다. 이 전투에서 우리 유격대원 12명이 전사하고 13명이 부상했다.
최호림, ‘원동변강 고려인 생활역사 초록’(遠東邊疆 高麗人 生活歷史 抄錄)

1923년 3월, 김경천은 러시아 적군과 연합하여 약골리가를 공격했다. 이에 백군은 우수리스크 쪽으로 퇴각했다. 이어 백군이 한반도 쪽으로 퇴각할 것 같아 보이자, 김경천은 이들을 추격하기 위해 일본군의 경계선을 뚫고 추풍 지역으로 돌격했다. 김경천은 동아일보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추풍 지역의 돌격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것은 범의 허리를 밟고 지나가는 듯한 장쾌한 모험이었소. 불빛에 뻔히 비치는 일본 보초병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흰말을 포장으로 덮어서 데리고 강을 건너는데 강에 배가 없어서 어찌할 수 없었소. 마침 19세 먹은 소년 기병 1인이 자원하고 강 위에 가로질린 철사에 매어 달리어 십여간이나 되는 강을 건너가서 배를 가지고 와서 전 군대를 건너게 하니, 이때 발각만 되면 몰살이라. 더욱 소년을 구사일생의 경우에 보내고 매우 염러되었었소. 건너간 후 그날 밤으로 취풍, 우리 독립군이 있는 곳에 도착하였소.

1922년 7월, 김경천은 연해주의 혁명군사위원회로부터 뽀시에트 군사구역 조선 빨치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이후 일본군이 시베리아에서 철수하게 되자, 독립운동단체들은 앞으로의 대책을 수립하기 위해 하나로 통합하여 지휘체계를 재정비하기로 했다. 이리하여 김경천이 활동하고 있던 부대인 수청의병대도 1922년 8월경 한족공산당과 병합하여 대한혁명단이라고 개칭하고 니콜리스크 서방 7리 지점에 본부를 두었다. 김경천은 이 대한혁명단의 사령관으로 활동했다.

김경천은 아편 수출을 통해 단비를 마련했으며, 장정의 교육을 위해 러시아 육군 사관 5명을 초빙해서 한 달에 50원씩 급여를 주며 교편을 맡게 했다. 또한 무관학교를 설립해 300명의 생도를 수용했다. 생도는 14세부터 18세까지의 나이대였고, 대한혁명단의 자제로부터 선발했으며, 교육기간은 2년이었다.

1922년 9월, 김경천은 적군의 몇몇 부대와 더불어 휘하 부대를 이끌고 노콜스크-우수리스크에서 뽀시에트를 거쳐 두만강 하구에 이르는 전투 원정에 참가했다. 뽀시에트로 이동하던 중, 상부 시지미촌에서 백군 패잔병들과 대면하면서 전투가 개시되었다. 김경천은 기마 공격을 감행했고, 적군을 격파하는 데 성공했다. 그런데 전투 후 김경천이 부하 몇명을 데리고 전장을 시찰하던 중, 부상당한 채 방치되어 있던 백군 장교가 그를 향해 쐈다. 탄환은 김경천이 탄 군마를 맞췄고, 김경천은 낙마했다. 부하들이 급히 그를 구조했지만, 김경천은 왼쪽 다리가 골절되는 부상을 입었다.

이후 수청 계곡의 다우지미로 이송되어 치료를 받은 그는 1922년 10월 고려혁명군이 조직되어 총재에 이중집(李仲執)이 선임되었을 때 고려혁명군 동부사령관을 맡았다. 그러나 1922년 12월 말 소련 정부가 한인무장부대에게 무장 해제를 요구하면서, 고려혁명군은 설립된 지 2달만에 해산되었다.

한편, 김경천은 연해주에서 백군과 일본군을 상대로 투쟁할 때 '김일성'이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이 때문에 김일성 가짜설의 근거로 인용되기도 했다. 그의 활약상과 위상이 당대 어느정도였는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5]

2.4. 이후의 행적

러시아 내전 종결 후 한인 무장단체들이 모조리 해산당한 것에 실의에 빠져 있던 김경천은 1923년 2월 상하이로 가서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했다. 그러나 개조파와 창조파 간의 알력다툼이 극심한 것에 깊은 실망을 느낀 그는 그해 4월 블라디보스토크로 돌아가서 구로지코 부근에 무관학교를 설립하려 했으며, 사관생도의 교재용으로 일본 육사의 교과서를 번역한 것을 사용하려 했다. 그러나 자금을 모으지 못해 이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또한 그는 1924년 3월 한족군인구락부를 조직하여 본부를 블라디보스토크에 두고 지부를 니콜스크에 두었다. 그러나 러시아 당국의 대한인정책과 연해주 출신 2세들과의 갈등으로, 한족군인구락부는 점점 쇠퇴했다. 1926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윤해(尹海), 김규식 등과 함께 민족당 주비회를 조직했으나 역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로 인해 실의의 나날을 보내던 김경천은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극동고려사범대학에서 군사학과 일본어를 가르쳤으며, 한소국경지대에서 국경경비대 고급장교로서 일하기도 했다.

1936년, 김경천은 이오시프 스탈린대숙청에 휘말리고 말았다. 그는 그해 9월 29일 원동지방 국경수비대 군법회의에서 소령 형법 제58조 12조에 의거하여 징역 3년형을 선고받았다. 이후 2년 6개월간 형기를 살던 그는 1939년 2월 4일 카르라가에서 석방되었고, 1939년 봄 가족을 찾아 카자흐공화국 카라간다주 텔만스크 구역으로 찾아왔다. 그리고 그곳에 있는 코민테른 집단농장에서 채소작업원으로서 한 달간 일했다.

그러나 1939년 4월 인민의 적이라는 혐의를 뒤집어 쓰고 한인들에 의해 다시 체포되었고, 그해 12월 17일 간첩죄로 유죄판결을 받아 교정강제노동수용소 8년 금고형을 선고받고 카라간다에 있는 교정강제노동수용소에서 복역했다. 이때 그는 자신의 부인 유정화에게 편지를 보내, 자신은 잘못이 없으며 다만 독일과의 전쟁 발발 가능성 때문에 실수가 있어 체포된 것일 뿐이니 걱정하지 말라고 전했다.

1941년 독소전쟁 발발 후, 김경천은 시베리아로 이감되었고 편지 왕래도 허용되지 않았다. 이후 1942년 1월 2일 코미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유배된 그는 이르항겔스코에주 금고지에 소재한 시베리아 형무소에서 심장질환으로 사망했다고 전해진다.[6] 하지만 이것은 유족의 증언일 뿐, 그가 언제, 어디서, 어떻게 사망했는지는 공식기록에서 확인할 수 없다.

1956년과 1959년에 소련 군사재판소에서 재심되어 무죄를 선고받았다. 1998년에는 한국정부로부터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받았다.

그가 기록한 회고록과 일기형식으로 생애를 기록한 글로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이 있다.

3. 기타

  • KBS 역사스페셜 2012년 12월 06일자 '백마 탄 김장군, 김경천! 시베리아의 전설이 되다'에서 그의 삶을 재조명한 바 있다.
  • 어린이동아는 2015년 8월 19일자에서 영화 암살의 등장인물 '속사포'가 김경천과 많이 닮았다고 했다.(뛰어난 총 실력, 사관학교에서 실력을 갖춘 군인 등[7])
  • 자신의 일기인 경천아일록에서 안중근에 대해 "이토 히로부미를 총살한 이는 안응칠씨라 한다. 아 위대하다. 우리에게도 사람이 있구나!"라고 평가했다.
  • 2015년 9월 25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풍림스페이스본 2단지아파트 106동 정문 옆에 표지석을 설치했다. 김경천이 서울에 거주하던 시절의 집터로 추정되는 곳이다.[8]

4. 저서

  • 경천아일록(擎天兒日錄), 부록: 오가세기(吾家世紀)


[1] 경천아 일록에서 김경천은 본인의 본관을 김해 김씨라 밝히고 있다. 1916년 10월 10일에 자신의 본관을 시흥(始興) 김씨로 정정하였다. 일부에서는 김경천이 본관을 시흥으로 정정한 것이 독립 의지를 표현하기 위한 것이라는 주장을 하나, 한국의 독립과 김경천의 본관은 상관관계가 없고 본관의 정정은 오류가 없는 경우에는 이루지지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2] 40:05 김경천이 직접 작성한 독립운동 당시 일기가 나온다.[3] 이응준 문서에서 보듯이 이응준은 개인적인 사유로 일이 꼬여 취조를 받았었고 풀려나는 대신 망명을 포기했어야 했다. 그 후 계속 일본군에 남았고 나중에는 결국 친일행위를 저질러 친일인명사전에 등재되었다.[4] 김 이브게니 작, <김경천에 대한 회고>[5] 후일 김일성 가짜설과 관련된 증언에서 1940년대 중후반 기준으로 '김일성은 약 50대에 일본육군사관학교를 나왔다'라고 알려져 있었는데, 이 설 속의 김일성은 김경천과 나이도 일본육사출신이란 것도 동일한 것을 알수 있다.[6] 김 이브게니 작, <김경천에 대한 회고>[7] 마침 속사포는 혈서로 위에 나온 김경천의 수기를 썼다.[8] 본적지가 서울특별시 종로구 사직동 166번지인데, 현재 이 번지는 사라진 상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