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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마흔 선언

20세기 제국주의 열강의 서아시아 분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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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1916년 1917년 1920년
후세인-맥마흔 서한 사이크스-피코 밀약 밸푸어 선언 세브르 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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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1. 명칭 문제
2. 배경
2.1. 아랍 민족주의의 고조와 제1차 세계 대전2.2. 다마스쿠스 의정서(1915. 5. 23.)2.3. 드 분센 위원회(1915. 4.~6.)와 영국 치하 이집트 카이로의 동향
3. 교환 서신(1915. 7.~1916. 3.)의 내용
3.1. 1915년 7월 14일 후세인(→ 맥마흔)(1차)3.2. 1915년 8월 30일 맥마흔 → 후세인(2차)3.3. 1915년 9월 9일 후세인 → 맥마흔(3차)3.4.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 → 후세인(4차)3.5. 1915년 11월 5일 후세인 → 맥마흔(5차)3.6. 1915년 12월 16일 맥마흔 → 후세인(6차)3.7. 1916년 1월 1일 후세인 → 맥마흔(7차)3.8. 1916년 1월 30일 맥마흔 → 후세인(8차)3.9. 1916년 2월 18일 후세인 → 맥마흔(9차)3.10. 1916년 3월 10일 맥마흔 → 후세인(10차)
4. 서신과 관련된 직접적 참고 자료
4.1. 1915년 7월 14일 압둘라가 로날드 스토어스에게 전한 서신4.2. 1915년 10월 19일·20일 맥마흔-에드워드 그레이 간 교환된 전보4.3. 1915년 10월 26일 에드워드 그레이에 대한 맥마흔의 전보4.4. 1916년 1월 1일 후세인 빈 알리의 전령이 전달한 '구두 전언'
5. 교환 서신에 대한 당대 영국의 반응6.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의 해석 문제
6.1. 영국 측의 해석6.2. 아랍 측의 해석
6.2.1. 영국 측의 해석과 반하는 영국 측 자료
6.3. 기타 쟁점 및 문제점
7. '아랍 통일 국가' 건국의 좌절
7.1. 사이크스-피코 밀약(1916. 5.)7.2. 아랍 반란헤자즈 왕국의 건국(1916. 6.), 영국 치하 이집트군의 북상(1917. 1.~1918. 12.)7.3. 밸푸어 선언(1917. 11.)7.4. 호가스 메시지(1918. 1.)와 바셋 서신(1918. 2.)7.5. 7대인에 대한 선언(1918. 6.)7.6. 헤자즈 왕국기 하기 사건(1918. 10. 8.)과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1918. 11. 7.)7.7. 파이살-바이츠만 협정(1919. 1.)과 파리 강화 회의7.8. 제1차 전 시리아 의회(1919. 6.~7.)7.9. 킹-크레인 조사위원단과 보고서(1919. 6.~8.)7.10. 제1차 헤자즈-네지드 전쟁(1918. 7.~1919. 7.)7.11. 영국군의 철수와 시리아 아랍 왕국의 건국(1920. 3.)7.12. 산레모 협정(1920. 4.)과 시리아 아랍 왕국의 멸망(1920. 7.)7.13. 트란스요르단 토후국(1921. 4.)과 이라크 왕국의 성립(1921. 8.)7.14. 제2차 헤자즈-네지드 전쟁과 헤자즈 왕국의 멸망(1925. 12.)
8. 결과9. 관련 문서


McMahon–Hussein / Hussein-McMahon Correspondence

1. 개요

파일:샤리프 후세인 이슬람 칼리파.jpg 파일:ArthurHenryMcMahon.jpg
아서 헨리 맥마흔

제1차 세계 대전이 진행되던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에 걸쳐, 메카의 샤리프를 맡고 있던 후세인 빈 알리이집트 주재 영국 고등판무관 아서 헨리 맥마흔(Arthur Henry McMahon, 1862 ~ 1949)[1]이 각각 5차례에 걸쳐 상대에게 전달한 총 10편의 서신을 가리키는 말.[2]

아랍 민족이 오스만 제국에 반대하여 삼국협상 측에 서서 전쟁에 참여하는 조건으로, 영국이 아랍의 통일된 독립 칼리프제 국가의 건국을 지원한다는 내용으로 아랍 반란의 직접적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거의 동일한 시기인 1915년 11월부터 1916년 3월에 걸쳐 영국은 동맹 국가인 프랑스와 협상하여, 최종적으로 1916년 5월 서신의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맺었으며, 결과적으로 전후 아랍의 정세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는 거의 일치하는 것이 없이 사이크스-피코 밀약에 가까운 형태로 재편되었다. 이는 아랍 국가들의 반서방 감정에 핵심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한편 10편의 서신 중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에서 제외하기를 요구한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 및 1915년 11월 5일 후세인의 답신 등에서 나타나는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에 대한 해석 문제가 팔레스타인 지역, 그리고 이를 포함하는 대(大)시리아[3]의 전후 처리를 놓고 큰 논란이 되었으며, 밸푸어 선언으로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a national home)'을 건설할 것임을 공표하면서 이에 대한 분란은 더욱 가중되었다. 결과적으로 이는 영국의 해석에 따라 팔레스타인을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에서 배제하도록 처리되어 현대 이스라엘의 건국 및 그로 인한 중동 지역의 오랜 분쟁의 원흉으로 지목되어 왔고,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전체 내용에 비해 비교적 지엽적인 문제였던 이 문제가 오히려 더 유명해졌으며, 오늘날까지도 중동 지역 정세를 논하며 빼놓을 수 없는 자료로서 인용되고 있다.

1.1. 명칭 문제

한국에서는 세계사 교과에서부터 '맥마흔 선언'이라는 호칭을 썼기 때문에 흔히 '맥마흔 선언'으로 알려져 있고, 일각에서 이를 '(후세인-)맥마흔 각서'로 수정하는 정도이지만, 실제로 관련 내용은 후세인 빈 알리와 헨리 맥마흔이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교환한 10편의 서신에서 논의되었으며, 그 내용이 일시에 '선언'된 적이 없다. 따라서 이를 선언으로 지칭하는 것은 잘못되었으며, 영문 위키백과 등에서 이를 지칭하는 표현은 맥마흔-후세인 교환 서신(McMahon-Hussein Correspondence)이다. 다만 양자 가운데 서신을 먼저 전달한 것이 후세인 빈 알리이므로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표현과 같이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으로 바꾸어 쓰는 쪽도 무리가 없다. 또한 '서신을 교환하는 행위'를 뜻하는 'Correspondence' 자체에 대해서 단어의 형태로 명확히 합의된 번역이 없으므로 이에 대한 패러프레이징은 가능할 것이며, 실제로 현재 이를 번역하는 표현 또한 '맥마흔-후세인 서한/후세인-맥마흔 서한(사례 1, 사례 2, 사례 3)', '맥마흔-후세인 서신 교환', '후세인-맥마흔 왕복 서신' 등이 혼재되어 있다. 또한 1건씩의 개별 서신에 대해서는 물론 '후세인 서신(서한)', '맥마흔 서신(서한)' 등의 표현이 쓰일 수 있으며, 특히 1915년 10월 24일 쓰여 가장 큰 논쟁점이 된 맥마흔의 서한을 '맥마흔 서신(서한)'이라고 칭하는 경향이 있다.

이 명칭을 알고 보면 '맥마흔 선언'이라는 표현은 다른 의미에서도 잘못된 인상을 준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바로 '후세인'(빈 알리)으로 대표되는 아랍 측의 입장이 전달되지 않았다는 인상을 주는 것이다. 물론 오스만 통치 아래의 국가를 갖지 못한 토후와 세계 최강대국 영국이라는 비대칭적인 입장의 교환이라는 점은 명확히 인지되어야 하지만, 실제로는 후세인 빈 알리 측에서도 이후 역사에 큰 영향을 미치는 대(大)시리아 해안 지역의 통치권 문제와 관련된 사안을 포함하여 아랍 지역의 독립 방식에 대해 많은 의견을 개진했다. 결국 영국이 당장 가장 큰 문제였던 '통일된 아랍 민족 국가'의 건설부터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서 협의의 내용이 크게 퇴색된 것은 사실이지만, '맥마흔 선언'이라는 표현은 이후 역사에서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해 아랍 측의 피해자로서의 입장을 강조한 나머지 아랍 측의 주체적 입장을 부정하기까지 하는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더욱이 이것을 '선언'으로 지칭하는 것은 아랍 측에도 불리하다. '선언'은 한 국가의 일방적인 입장에 의해 발표될 수 있는 것으로서 이후 현실적 상황에 의해 선언의 내용이 실행되지 않을 변명거리를 충분히 마련하여 주는 명칭인 반면, 아랍 측의 주장은 서신의 교환을 통해 양 측의 의견이 서로에게 전달되었음에도 그 내용이 지켜지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술하겠지만 이 양 측의 서신 교환을 통해 양 측이 이 내용을 협정(agreement)에 준하여 인식하고 있었다고 하여, 후세인-맥마흔 서신 협상이라는 표현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

끝으로, 이 '맥마흔 선언'이라는 표현이 유독 한국에서 널리 퍼진 데에는 후술하듯 세계사 교과에서부터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이 충돌하여 이스라엘-팔레스타인 분쟁이 발생했다는 왜곡되고 단순화된 관점이 크게 작용했다고 의심해 볼 여지가 있다. 그러나 오히려 이로 인해 세계사를 열심히 배웠다는 학생들조차도 제1차 세계대전 전후 아랍의 독립을 주도한 후세인 빈 알리의 이름을 들어보지조차 못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것을 생각하면, 되레 탈식민주의 관점에서도 당시의 시대상을 이해하는 데 뒤틀린 시야를 제공하는 잘못된 이름임을 알 수 있다.

2. 배경

2.1. 아랍 민족주의의 고조와 제1차 세계 대전

그 기원에 대해서는 의견이 합일되지 않지만, 18세기 말 프랑스 혁명의 결과 민족주의는 19세기 유럽에서 역사의 방향을 이끄는 하나의 중요한 사상으로 자리 잡았다. 그 결과 독일 제국이탈리아 왕국과 같은 유럽 역내 주요 국가들이 형성되는 데 민족주의의 영향이 지대하게 작용했으며, 이러한 사상은 19세기 초반 라틴아메리카의 독립 운동에 영향을 미치는 것을 시작으로 비유럽권에도 전파되기 시작하여 19세기 말에는 세계 무대에 첫 발을 올린 국가들에서도 어렵지 않게 그 영향력을 찾아볼 수 있는 것이 되었다.

그렇지만 이러한 민족주의의 영향력은 다민족·다종족·다문화를 아울러 통치하던 전통적인 제국에서는 국가의 구심력을 해체하는 척력으로서 강하게 작용하기도 했으며, 그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오스만 제국에서의 형태였다. 오스만 제국은 아나톨리아 반도를 가장 중심적인 기반으로 하면서도 발칸 반도에 수도를 두고 그 인근 권역을 지배 하에 두는 동시에, 이슬람교의 최대 성지인 메카메디나아라비아 반도홍해 연안 지방, 지중해 동부 연안의 레반트 지역, 이라크 등의 지역을 관할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1908년 혁명으로 이듬해 압뒬하미트 2세를 퇴위시킨 청년 튀르크당의 튀르크 민족주의는 제국 내 튀르크인들에게는 단결의 계기를 마련하여 오늘날 튀르키예의 기초가 되었지만, 반대로 비튀르크인들에게는 배제와 소외를 불러일으키는 악영향을 미치기도 했다.

청년 튀르크당의 집권 이전부터, 오스만 제국의 아래에서 아랍 민족주의(아랍 내셔널리즘)는 점차 고개를 들기 시작하고 있었다. 메흐메드 알리가 점차 이집트를 독립적인 국가로 꾸려나갈 때, 그 시작은 아랍 민족주의에 정확히 대응시키기는 어려운 것이었으나, 튀르크인의 지배에서 벗어난 아랍인들의 독자적 문단이 형성되면서 반튀르크적인 문건이 이집트로부터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러한 문건들은 레반트로 넘어가 읽히기 시작하였다. 아랍 민족주의의 또 다른 한 형태는 네지드 왕국의 건립으로 표출되었는데, 비록 와하브파 종교 운동과 뒤섞여 근대적 민족주의의 형태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기는 하나, 이후 네지드 왕국 계통의 세력이 아라비아 반도의 통일을 추구하여 적지 않은 성과를 도출해 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이를 가볍게 여길 수는 없다. 네지드 왕국은 1891년 한 차례 멸망하였으나, 1903년부터 1907년에 걸쳐 압둘아지즈 이븐 사우드하일을 중심으로 하는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으로부터 리야드를 탈환하여 리야드 토후국을 건립한 이후 1913년에는 페르시아 만으로 나아가는 경로인 알 아흐사(하사)까지 획득하여 네지드-하사 토후국으로 재편되면서, 아라비아 반도의 정세에서 무시할 수 없는 세력으로 떠올랐다.

반면 메카와 메디나 등이 속한 헤자즈는 아랍 민족주의의 중심이 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아랍 민족주의의 주변부였다. 오스만 제국에서는 헤자즈 지역의 자치권을 회수하고 이 지역을 직할 통치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기도 했지만, 토착 세력의 반발로 그 흐름이 순조롭지는 못했다. 그런데 다마스쿠스에서부터 철도가 연장되어 1908년에는 메디나까지 헤자즈 철도가 연결되면서, 오스만 제국의 행정력이 헤자즈 지역으로 더 직접적으로 침투해 나갔다. 후세인 빈 알리가 이 지역에서 집권한 것은 이 무렵이었으나, 그는 본래 청년 튀르크당 연합진보위원회의 반대에 맞서 압뒬하미트 2세가 직접 메카의 아미르로 임명한 인물로 중앙 권력의 입김에서 무관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따라서 1911년[4] 아랍인 봉기를 이끌어 달라며 접근한 오스만 제국 의회의 아랍 의원들이 1913년에는 후세인을 튀르크인들의 꼭두각시로 간주할 정도로, 그는 본래 민족주의 운동에 적극적이지 않았다. 그러나 청년 튀르크당이 끝내 압뒬하미트 2세를 폐위시키고 튀르크어 교육을 강화하는 등 비주류 민족에 대한 압박을 강화하면서 메카와 제다로까지 철도를 연결하고자 그를 압박해 오자, 그는 마침내 제국 정부와 강하게 대립했다.

이러한 흐름 속에서 메카의 샤리프였던 후세인 빈 알리와 그의 하심 일가 또한,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아랍인들의 독자적인 국가를 세우기를 꾀하기에 이르렀다. 그에게는 장남 알리 빈 후세인이 있었고, 차남으로 오스만 제국 의회의 메카 대표를 맡고 있던 압둘라와 3남으로 제다 대표를 맡고 있던 파이살이 있었다. 1914년 2월, 후세인의 2남 압둘라는 영국의 이집트 총독 허버트 키치너와 동방 장관(Oriental Secretary)인 로날드 스토어스(Ronald Storrs)에게 접근하여, 후세인 빈 알리의 해임 위기 속에서 후세인 가가 오스만 제국에 대항할 경우 영국이 이를 도울 수 있는지를 물어왔다. 그러나 이때 영국의 답은 당시 적대 관계가 아니었던 오스만 제국의 내정 문제에 개입할 수 없다고 하여 그 제안을 거절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얼마지 않아 세계의 정세가 완전히 뒤바뀌었다. 1914년 8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한 이후 오스만 제국은 이를 관망하고 있었으나, 전쟁 개전 직전 영국이 전쟁을 이유로 오스만 제국에 발주하기로 했던 애진코트 호를 떼먹으면서 반영 여론이 고조되었고, 그 와중에 독일의 함선 2척이 영국과 프랑스를 피해 마르마라 해를 통과하는 것에 대해 삼국협상 측을 자극하는 것을 피하고자 오스만 제국은 함선의 국적을 자국의 것으로 세탁하여 주었으나, 독일인들이 여전히 항행하던 이 두 척의 함선이 흑해를 가로질러 10월 29일 러시아 제국을 공격하는(...)[5] 사건이 연이어 일어나면서 결국 1914년 11월 1일, 오스만 제국은 반강제로 제1차 세계대전에 독일 제국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편에 서서 참전하게 된다. 이에 따라 이전부터 그리스, 이집트, 키프로스, 크레타 등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빼먹어가던 영국의 이권이 이 시점에서 다시금, 그리고 결과적으로는 최종적으로 오스만 제국과 충돌하게 되었으며, 후세인 가 또한 새로운 계기를 얻게 된다.

2.2. 다마스쿠스 의정서(1915. 5. 23.)

오스만 제국과 협상국 사이에 전운이 감돌게 된 1914년 10월, 전쟁부 장관(The Secretary of State for War)이 된 키치너는 압둘라에게 접근해 아랍인들의 의사가 여전한지를 문의했다. 이에 대해 후세인 가에서는 영국이 후세인 가를 지원해 준다면 후세인 가는 오스만 제국을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답해 왔으며, 키치너는 영국을 지지한다면 아랍인들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지, 지원할 것이며, 후세인 가가 메카와 메디나에서 칼리프직을 맡게 될 것이라는 서신을 보냈다. 다른 한편으로 오스만 제국은 개전 이후 11월 11일 후세인에게 지원군을 요청해 왔으며, 후세인이 이를 거부하자 1915년 1월 그를 체포할 계획을 세웠다.[6] 후세인 가에는 이제 선택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다.

1915년 1월, 후세인은 메카에서 아랍 민족주의 비밀단체 알-파타트(Al-Fatat)[7]와 알 아흐드(Al'Ahd)[8]의 대표단을 만났다. 후세인은 이들을 일단 돌려보냈지만, 비밀스럽게 진행되던 후세인 암살 계획이 노출된 데 대해[9] 정부에 협상을 요청하며 대리인으로 보낸 후세인의 3남 파이살이스탄불로 향하던 도중인 1915년 3월 말부터 약 1달 간 다마스쿠스를 중심으로 한 시리아에 머물면서 두 단체의 지도자를 다시 만났다. 이를 통해 키치너의 제안과 후세인의 의사가 전달되었다.

이후 파이살은 이스탄불에서 오스만 제국의 질책을 들은 뒤 돌아오는 길인 5월 다시 다마스쿠스에 들렀는데, 이 사이 상황은 또 다시 달라져 있었다. 시리아 총독 아흐메드 제말 파샤(Ahmed Djemal Pasha)가 비밀단체들을 적발하여 그들의 조직을 분쇄해 버렸고, 현지에 두 단체의 단원들은 10명이 되지 않는 인원밖에 남지 않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비밀단체들은 더 절박하게 후세인 측이 움직여 줄 것을 주문했으며, 후세인 측에 더 의존적인 상태가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파이살과 두 단체의 단원들에 의해 오스만 제국에 대한 봉기 계획이 구체화되었다. 이를 통해 아랍의 독립된 국가 결성이 결의되었고, 이들은 후세인을 '아랍인들의 왕(King of the Arabs)'으로 모시기로 하였으며, 1915년 5월 23일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에 대한 계획안을 포함한 문서를 작성해 이를 영국에 전달하기로 하였다. 이를 다마스쿠스 의정서(Damascus Protocol)라고 하며, 여기서 계획한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은 다음과 같다.
  • 북쪽 : 북위 37도선, 구체적으로는 메르신-아다나-비레직-우르파-마르딘-미디아트-자지라트 이븐 우마르[10]-아메디를 거쳐 페르시아와의 국경선을 경계로 함
  • 동쪽 : 페르시아와의 국경선부터 아래로 페르시아 만까지
  • 남쪽 : 인도양. 단 아덴을 제외
  • 서쪽 : 홍해지중해로부터 메르신까지
파일:DamascusProtocol.jpg
다마스쿠스 의정서(Damascus Protocol)에서
아랍 독립 추진 세력이 계획한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11]

이는 물론 아랍 독립 추진 세력이 결의한 것이므로 영국의 의중이 아직 반영되지 않았음을 구태여 언급할 필요가 있겠지만, 이러한 다마스쿠스 의정서의 영토관은 이후 진행되는 후세인-맥마흔 서신 교환에서의 영토 인식에서 가장 기초적인 밑그림이 된다.

2.3. 드 분센 위원회(1915. 4.~6.)와 영국 치하 이집트 카이로의 동향

한편 협상국은 협상국대로 오스만 제국의 영역을 분할하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1915년 3월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이스탄불과 다르다넬스 해협 인근의 영토를 병합할 의사를 밝혀왔고, 이에 프랑스와 영국도 자기 몫을 챙기기로 합의했는데, 프랑스는 대(大)시리아 지역에서의 권리를 요구했다. 프랑스는 1838년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연 영국에 뒤질세라 1843년 마찬가지로 예루살렘에 영사관을 열었고, 마찬가지로 '성지'에 대한 관할권을 주장하는 러시아 제국에 맞서 크림 전쟁에도 개입했다. 또한 1840년대부터 레바논 지역에서 계속되던 드루즈교도와 기독교의 충돌이 1860년 극단에 다다라 기독교도 학살이 발생하자, 나폴레옹 3세는 대(大)시리아 지역의 기독교도를 보호하는 것을 인도주의의 일환이라고 주장하며 호시탐탐 이 일대에 개입할 기회를 노렸다. 그 결과 오스만 제국은 외세의 눈치를 살피며 1861년 베이루트를 제외한 해안의 소(小)레바논 일대를 일반적인 산자크에 비해 자치적 성격을 상당히 인정한 무타사리프령(Mutasarrifate)으로 설정해 상위 행정 구역인 베이루트 빌라예트(Beirut Vilayet)[12]로부터 분리시켜야 했다. 프랑스는 이어 1894년에는 베이루트에 기술자를 보내어 근대식 항만을 설치한 바 있었고, 1907년 알레포와 다마스쿠스, 베이루트를 연결하는 철도를 부설하기도 했기 때문에, 1912년 발칸 전쟁으로 오스만 제국이 동요하면서 시리아에서 분리독립주의가 고양되자 이 지역에 대해 개입할 의사를 드러내기도 한 바 있었다.

영국은 이에 대해 프랑스를 자극하기를 피하려 하면서도, 대(大)시리아 지역에서 프랑스의 이권이 어느 이상으로 확대되기를 원하지는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에서는 아랍 독립을 지지한다는 명분으로 이 지역에서 이권을 차지하기 위해 허버트 헨리 애스퀴스가 1915년 4월 8일 설립하여 모리스 드 분센(Maurice De Bunsen)이 영수를 맡은 이른바 드 분센 위원회(De Bunsen Committee)가 개설되었으며, 이 위원회에는 전쟁부 장관인 키치너의 대리로 훗날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기초하는 마크 사이크스(Mark Sykes)도 끼어 있었다.

최종적으로, 6월 30일 보고서를 제출한 이 위원회에서 영국은 아랍 지역을 병합하는 데 대해서는 강한 의욕이 없었고 오히려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분권화된 상태로 영국의 이권만이 지켜지기를 원했지만, 유사시에는 유전 지대이면서 페르시아 만을 장악하는 통로가 될 이라크와 이집트로부터 이라크로 나아가는 군사 경로가 될 팔레스타인을 세력권으로 삼거나 병합하는 경우까지도 논의했다. 특히 팔레스타인에 대해서는 세력권을 설정하거나 병합해야 할 경우 예루살렘을 비롯한 성지에 대해 프랑스, 러시아와 이슬람교계의 이해 관계를 고려해야 할 필요가 있음을 제시하여, 이후 영국이 보이는 태도의 청사진이 마련되었다.

다른 한편, 1914년 12월 이집트의 카이로 대표부는 단독으로 '영국 정부의 공식 선언'의 이름으로 '아라비아와 팔레스타인, 시리아, 메소포타미아의 토착민'에게 아랍인들이 오스만 제국을 몰아내 독립을 쟁취하면 영국 및 협상국이 이들을 식민화하지 않고 독립을 인정할 것이며, 칼리프를 칭할 것을 권유했다. 그러나 이러한 선언은 영국 외무부의 승인을 얻지 못한 것으로, 단독으로 저지른 행동으로서 이후 영국 정부에 의해 고려되지는 않았다.

한편 알 아흐드 소속으로서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투항해 카이로에 머물던 무함마드 파루키(Muhammad Sharif al-Faruqi)는 맥마흔의 자문 역할을 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랍 민족주의 세력이 영국으로부터 독립의 보장을 받지 못하면 독일 편에 설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의 주장은 그러나 과장이 심했던 것으로, 우선 정보력이 뛰어나 일찍이 파이살 등의 동향을 파악하고 자신을 알 아흐드의 대리인이라고 주장하면서 영국을 속여넘기는 데는 성공했지만 이는 사실이 아니었다. 그가 아랍인들이 봉기할 규모에 대해서 상당히 과장하면서도, 후술하는 사이크스의 방문 때에는 시리아 방면에 영국이 개입해야만 봉기가 성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한 것 또한 따져보면 모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내세운 이런 긴박한 위기 의식은 맥마흔과 사이크스에게 실제 사실에 가까운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이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의 협상이 진행되고 영국이 시리아 방면에 군사적으로 개입하는 데 한 동력이 된다.

또한 후세인과 맥마흔의 서신 교환이 시작된 이후, 드 분센 위원회에 참여했던 마크 사이크스는 1915년 11월에 이집트를 방문하여 맥마흔이 교환하던 서신의 내용을 자문하고 영국 정부로 돌아가 12월 16일 최종적으로 보고서를 전쟁 위원회(War Committee)에 제출했다. 이 기회를 틈타 카이로군 정보부에서 근무하던 길버트 클레이튼(Gilbert Clayton)은 사이크스를 설득했고, 사이크스는 영국 중앙 정부에 이슬람 문제를 전담할 부서의 창설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시의 인도 총독(Viceroy) 찰스 하딩(Charles Hardinge) 등의 반대로, 결국 이는 1916년 1월 영국 본국이 아닌 카이로 정보국 내에 아랍국(Arab Bureau)을 두는 선에서 정리되며, 그곳의 수장으로 임명된 것이 이후 언급되는 데이비드 조지 호가스(David George Hogarth)였다.

3. 교환 서신(1915. 7.~1916. 3.)의 내용

1915년 7월 14일, 후세인이 맥마흔에게 첫 번째 서신을 전달하는 것으로 두 사람의 서신 교환이 시작되었다. 이 무렵 영국은 갈리폴리 전투에서의 졸전으로 전황을 타개하지 못하고 있었고 오히려 이집트 방면 영국군이 남하하는 오스만 제국 세력을 방어하는 입장에 서 있었으므로, 영국에게도 이는 절호의 기회였다. 두 사람은 1915년 7월부터 1916년 3월까지 각각 5차례에 걸쳐 서신을 보냈으므로 총 합쳐 10편의 서신이 서로를 오갔고, 이는 1916년 6월부터 개시된 아랍 반란(대아랍 봉기)의 기초가 되었다.

각각의 서신에 담긴 내용은 대략 다음과 같다.
① 1915년 7월 14일 후세인(→ 맥마흔)(1차) : 아랍 독립 국가가 다마스쿠스 의정서에 기초한 영토를 갖고, 이슬람교에 의한 아랍 칼리프국으로서 건국하는 것을 지지할 것을 요청하며, 그 대가로 영국에 대해 아랍 국가에서의 경제 사업의 우선권을 가질 것을 보장하는 것 등을 반란의 조건으로 제시함
② 1915년 8월 30일 맥마흔 → 후세인(2차) : 아랍 인종에 의한 아랍 칼리프국을 건립할 경우 영국이 지지할 것임을 밝히지만, 영토에 대한 문제는 전쟁 도중인 지금 논하는 것이 시기상조일 것이라고 판단함과 일부 아랍인들은 오스만 제국의 치하에 놓여 있음을 이유로 들어 확답을 회피함
③ 1915년 9월 9일 후세인 → 맥마흔(3차) : 영토 경계를 확정하는 것은 주민들이 스스로의 권리를 누리고 미래를 결정하는 데 핵심적인 요소라고 주장하면서, 설정된 영토는 순수한 아랍인들의 영역으로서 이론의 여지가 없음을 강조하며 영토 문제에 대한 확답을 요구함. 오스만 제국의 아래에서 봉사하는 아랍인들이나 메카·메디나 등지의 행보는 이슬람 율법에 따르기 위해 불가피한 것이므로 그에 대한 책임은 오스만 제국의 반영 세력에게 한정되어야 하며,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기를 계획하는 아랍인들의 뜻은 영국이 협상에서 보장하는 바에 달려 있다고 주장함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 → 후세인(4차) : 영토 문제에 대해, 메르신과 알렉산트레타[13] 두 구역과 다마스쿠스·홈스·하마·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있는 시리아 일부는 순수한 아랍 지역이 아니므로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고,[14] 바스라바그다드 빌라예트[15]에 대해 영국의 '특별한 행정 조치'가 필요할 것임을 인정하기를 요구함
1915년 11월 5일 후세인 → 맥마흔(5차) : 메르신과 아다나 빌라예트(윌라야)에 대해서는 영국의 주장을 수용하여 영유권 주장을 포기하지만, 알레포와 베이루트 두 빌라예트들 및 그 서쪽 해안가에 대해 순수한 아랍 지역이 아니라고 주장하는 것은 수용할 수 없음. 이라크 빌라예트는 아랍 문명의 핵심적이고 전통적인 중심지이지만, 금전적 보상을 조건으로 잠시 동안 영국 행정 아래에 둘 수 있음을 인정함. 그 밖에 협상국이 독일 및 오스만 제국과 강화할 가능성에 대해 우려를 표함
1915년 12월 16일 맥마흔 → 후세인(6차) : 메르신과 아다나 구역에 대해 합의가 이루어진 데 감사의 뜻을 표시하지만,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빌라예트에는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권이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문제는 신중히 다루어져야 하며 이후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다시 논의할 것을 요청함. 바그다드 빌라예트에 대해서도 추후의 논의가 필요하다고 언급하고, 아랍인들의 행동이 늦어지는 것은 감수할 수 있지만 아랍인들의 행동을 촉진시키고 오스만 제국에 대한 협조를 억제시키는 활동은 지속되어야 한다고 보며, 영국은 독일 및 오스만 제국과 강화할 의사가 없음을 분명히 함. 신실한 협의에 대한 대가로 2만 파운드를 지불함
1916년 1월 1일 후세인 → 맥마흔(7차) : 영국의 신의에 감사를 표하며, 바그다드 빌라예트의 문제에 대해서는 영국의 의사를 존중하기로 하고 보상금도 영국의 뜻에 맡기기로 함. 그러나 북부 지역과 그 해안가에 대해서는 11월 5일 서신에서 언급한 내용을 고수할 것을 밝힘. 베이루트와 그 해안가를 프랑스뿐만 아니라 그 어떤 세력에게도 양도하는 안은 주민들에게 동의를 얻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영국에게도 큰 부담을 지울 것이라고 주장함. 아랍인들이 직접 행동에 나설 때에는 그 행동에 충분한 가속이 붙을 것임을 주장하며, 1914년 무렵 로날드 스토어스와 논의했던 뜻은 변함이 없음을 밝힘
1916년 1월 30일 맥마흔 → 후세인(8차) : 북부 지역에 대해,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을 해칠 수 있는 어떤 일도 피하려는 아랍 측의 의사를 알고 있다고 하면서, 영국과 프랑스의 동맹이 굳건하며 이 대의에 아랍인들이 동참하게 되었음을 기쁘게 생각함을 밝히고, 아랍인들의 움직임을 촉진하려는 막후 활동에 대한 재량권을 후세인에게 맡기기로 함
⑨ 1916년 2월 18일 후세인 → 맥마흔(9차) : 대부분 아랍인으로 구성된 10만 명 이상의 병력이 시리아로 보내진 아들 중 한 명(파이살)의 아래 모일 것이며, 첫 활동을 준비하기 위해 메디나에 장남(알리 빈 후세인)을 보내기로 했음을 밝히고, 군자금 등으로 쓸 목적으로 5만 파운드의 자금을 전달하기를 요구함. 또한 향후 봉기에 필요한 물품으로 포트 수단에 쌀 2만 가마니·밀 1만 5000가마니 등의 식량, 소총 5000정 등의 군수물자 등을 구비해 놓기를 요구함
⑩ 1916년 3월 10일 맥마흔 → 후세인(10차) : 영국 정부가 후세인의 활동을 인정하고 후원하기로 하였으며 약속된 자금을 전달함을 알리면서, 첩보와 경제 활동의 단속 등의 전황을 파악하고 봉기를 준비하는 데 필요한 정보 및 사전 활동을 요청하고 전쟁의 승전을 기원함

내용을 살펴보면, 후세인은 '아랍 이슬람 칼리프국(Arab Caliphate of Islam)'의 기치 아래 아랍 독립 운동을 진행할 것이라고 하면서 다마스쿠스 의정서로 정리된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 계획을 영국이 공인하여 주기를 요청하는 반면, 맥마흔은 그에 대한 확답을 회피하면서 예외가 될 지역을 설정하여 주기를 요청하였다. 이 중 현재의 튀르키예 남부인 메르신·아다나 지역에 대한 문제와 이라크에 대한 문제는 아랍 측에서 영국의 의사를 존중해 양보할 것임이 비교적 빠르게 협의되었으나, 현재까지도 가장 큰 쟁점이 되고 있는 다마스쿠스·홈스·하마·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있는 시리아 일부알레포와 베이루트 빌라예트 및 그 서쪽 해안가에 대해서는 끝내 합의했다고 볼 상황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8번째 편지에서 프랑스와의 동맹이 중요하며 전쟁이 다가오고 있음을 강조하여 대화의 물길을 돌린 맥마흔의 의사대로 9·10번째 편지에서는 두 사람이 구체적인 반란 계획을 논의하는 데로 화두를 돌렸다.

결국 후세인 빈 알리는 일부 지역에 대한 영토 문제가 확정되지 않은 채, 유보의 단서를 남긴 상황에서 반오스만 반란에 나서게 되었다. 애초에 1915년 초에 오스만 제국에서 그를 제거하려 하는 계획이 이미 노출된 상황이었고, 이것이 지연된 것은 단순히 전쟁 중에 그 문제를 차순위로 미뤄두어야 했던 오스만 제국의 시급한 상황 때문이었을 뿐, 시간이 늦어지는데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날 다른 카드가 없다면 결과는 뻔히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 상황에서 오스만 제국에서 병력의 지원을 요구한 데 대해 후세인 빈 알리는 이 건을 일단 헤자즈 일대를 방어하는 데 여력을 집중하겠다는 식으로 어영부영 덮어두었지만, 날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스만 제국이 그에게 병력과 물자를 제공하라고 재차 압박해 오는 상황이 반복될 것임은 명약관화였다.

이처럼 오스만 제국의 압박을 받아 직간접적으로 오스만 제국에 협조하는 일이 늘어난다면, 영국과의 협상도 갈수록 의도대로 이루어지지 않을 가능성이 컸다. 일의 빠른 진척을 위해 많은 것을 눈 감았던 맥마흔의 서신에서조차, 꾸준히 강조된 것은 지금 당장 거사에 나서지는 못하더라도 오스만 제국에 협조하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요구였다. 게다가 영국 측의 첩보에는 후세인이 단순히 그들의 독립을 위해 영국을 이용하는 것일 뿐 자기 이익을 위해 영국 그리고 독일 및 오스만 제국 사이에서 양다리를 걸치는 것이라는 의심을 담은 보고가, 심지어 그가 반란을 일으킨 이후에도 여러 차례 올라갔으며, 현대에는 아예 그것이 그의 진의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는 해석까지 나오곤 했다. 결국 시간이 뒤로 미루어지면 미루어질수록 그는 영국과의 사이에서나 오스만 제국과의 사이에서나 협상에서 불리한 지위에 몰릴 수밖에 없었으므로, 그는 지나치게 협상을 오래 끌 수 없었다. 그 결과 끝내 해당 지역에 대한 양 측의 주장이 완전히 합의되지 못한 채, 후세인 가는 우선 아랍 반란을 위해 나서게 된다.

이하 제시하는 서신 원문을 제공하는 곳은 다음과 같다.

[ 원문 제공처 펼치기 · 접기 ]
* 서신 영문판 제공처 1
: 조지 안토니우스(George Antonius)(1938), 《아랍의 각성(The Arab Awakening)》, 414~427쪽. 1915년 7월 14일~1916년 1월 30일 동안의 서신 8편이 수록되어 있다. 조지 안토니우스는 아랍 언론에서 후세인 빈 알리 본인이 제공한 사진 등을 출처로 한 발췌본을 모아 원본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고 하며, 이로 인해 원문이 영문이었을 서신의 내용 또한 이하 영국 정부에서 정리한 원본을 기초로 하는 여러 판본들과도 그 문형을 상당히 달리 한다. 다만 이 덕분에 조지 안토니우스의 재구성본은 오히려 다른 영문본에서 문장 구조가 꼬이거나 중의적인 해석이 나올 수 있는 부분에 대해 대조해 볼 수 있는 단서가 된다.
* 서신 영문판 제공처 2(클릭 시 다운로드)
: 영국 인도국 문서(IOR/L/PS/18/B222), 카타르 국립도서관 전자도서관 제공. 10편 전편 수록. 8~14번·17~18번·22번 총 10건이 교환 서신에 해당한다. 연도가 명기되어 있지 않으나 1939년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에서 수정한 '이전의 독법(Former reading)'을 확인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이전의 것으로 보이며, 오자·표기 및 철자법· 대소문자 표기· 단수·복수 표기·구두점·줄바꿈 등 문장을 읽어나갈 때 본질적으로 큰 의미 차이가 없는 부분에서 다른 점이 보일 뿐 기본적으로 교정 이전 '이전의 독법'을 따른 문서라는 것을 제외하면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과 큰 차이가 없다. 또한 1918년 11월의 CAB 24/68/86과 1930년 7월의 CAB 24/214 C.P. 271의 서신 발췌본과도 대체로 내용이 일치하나 두 문서에서 영국 인도국 문서와도 약간 다른 표기가 군데군데 보이는데, 문제를 최대한 단순화시켜 생각하는 것이지만 이를 계통적으로 따지면 영국 인도국 문서는 1930년 7월부터 1939년 영국-아랍 위원회에서 언급된 '이전의 독법' 사이에 위치한 것으로 두어 그 연대를 대략 추측할 수 있다.
* 서신 영문판 제공처 3(이미지), (PDF)
: 위키미디어 공용 제공, 10편 전편 수록. 약칭 'Cmd.5957'. 1939년 영국-아랍 위원회에서 기존에 영국 내부에서 유통되던 번역을 교정해 아랍인들에게도 공개한 판본으로, 현재 가장 널리 유통되는 형태이다. 다만 그 날짜에는 일부 오류가 포함되어 있다.
* 유대 가상 도서관(Jewish Virtual Library)
: 10편 전편 수록. 1939년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과 내용이 사실상 차이가 없으나 오자 등이 포함되어 있어 정밀성이 떨어지는 편. 대신 온라인 홈페이지에 이미지가 아닌 텍스트 형태로 공개되어 있어 접근성이 좋기 때문에 인터넷에 이 형태로도 많이 퍼져 있다.
* 서신 아랍어판 제공처
: 아랍어 위키문헌, 10편 전편 수록. 그러나 1915년 9월 9일의 서신 내용 가운데 곡물 운송에 대한 후반부 내용이 없고, 그 자리에 1916년 1월 1일 서신의 후반부 내용이 잘못 삽입되어 있는 오류가 있다. 이 1월 1일 서신의 후반부는 제 자리에 수록된 쪽과 잘못 수록된 쪽의 문형이 완전히 달라 둘 이상의 판본을 출처로 하여 뒤섞인 것으로 보인다. 또한 아랍어 발췌본을 확인해 교환 서신의 원문을 재구성한 조지 안토니우스가 주석으로 단, '특별한 행정 조치(special administrative arrangement)'에 대응되는 표현 'tadābir idariya khāssa(تدابير إدارية خاصة)'가 'tadabir idariya makhsoosa(تدابير إدارية مخصوصة)'로 쓰여 있어 실제 원문이 아닌 영문판의 중역일 가능성이 높으며, 이 때문인지 날짜는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의 오류를 답습하였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영문본에서 대체로 생략된 인삿말과 미사여구 등은 이곳에 가장 상세하다. 1915년 9월 9일 서신의 후반부와 정확한 원문의 서지가 확인되는 출처가 있다면 되도록 교체 바람.
* 기타 일부 발췌본이 수록된 사례 :
* 영국 국립 문서보관소 CAB 24/68/86
: 1918년 11월, 아래에서 언급하는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의 발표 이후 영국 정치정보부(Political Intelligence Department)에서 작성한 문서로 '국왕 후세인에 대한 영국의 약속에 대한 보고(Memorandm on British Commitments to King Husein)'라는 제목이 붙어 있다.
* 영국 국립 문서보관소 CAB 24/214
: 1930년 7월 25일 작성된 '내각(Cabinet, CAB)' 문서(C. P. 271)로 '팔레스타인 : 맥마흔 교환 서신(Palestine : McMahon Correspondence)'이라는 제목이 붙어 있고, 그 '부록(Annexure)'으로 '맥마흔-후세인 교환 서신의 (발췌) 요약(Summary (with Extracts) of McMahon-Husein Correspondence)'이 붙어 있다(우상단 쪽수 기준 173~176쪽).
* 1937년 필 위원회 보고서
: 약칭 'Cmd.5479'. 1936년부터 시작된 팔레스타인 대봉기를 맞이한 영국 측에서 아랍인 거주 지역과 유대인 거주 지역을 분리하여 민족 갈등을 해결하려는 안을 논의한 위원회의 보고서로, 상단 쪽수 기준 17~19쪽에 1915년 7월 14일·9월 9일·10월 24일의 서신이 발췌되어 실렸다.
* 그 밖에 비공식적인 영문 발췌본은 조셉 메리 네이글 제프리스(Joseph Mary Nagle Jeffries)에 의해 1923년 1월 《데일리 메일》에 게재되었다고 하며, 그 밖에 아랍어 발췌본들은 후세인 본인을 포함한 이들에 의해 아랍 언론에 여러 차례 게재되어 조지 안토니우스에 따르면 발췌본을 모으는 작업을 통해 원본을 거의 재구성할 수 있었다고 한다.

  • 이하 서신 원문에서 'GA주a-b'는 조지 안토니우스(1938), 《아랍의 각성》의 a쪽에 붙은 원주 b번을, 'AAC주c'는 1939년 아랍-영국 위원회 교정본에 붙은 원주 c번을 가리킨다.
  • 영국 인도국 문서철에 실린 원문은 '이전의 독법'이 고쳐진 것을 제외하면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과 큰 차이가 없는 한편, 주석이 거의 쓰이지 않았다. 때문에 별도로 원문을 싣지 않되 a번째 서신의 본문에서 보이는 영국 인도국 문서본만의 유의미한 차이는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에 'IOa본-b', 주석은 'IOa주-b'와 같이 표기해 기록한다.
  • 이슬람력 날짜의 그레고리력 환산안에 대해서는 원문 문건들에 대부분 정리되어 있어 가능한 한 이를 따르되, 1915년 12월 중순에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보낸 6번째 서신과 1916년 1월 하순에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보낸 8번째 서신의 날짜에는 익히 알려진 판본의 환산안에 다소의 문제가 있어 각주로 별도로 설명하였다. 이 이슬람력 날짜에 대한 각주는 '이슬람력의 a월 b일'에서 따 'ISLa-b'와 같이 번호를 붙이되, 원문에서 곧바로 이견이 없는 날짜를 서술하거나 다른 각주에 의해 설명되는 경우는 별도의 각주를 생략하였다.

3.1. 1915년 7월 14일 후세인(→ 맥마흔)(1차)

{{{#!folding [ 영문(《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Mecca, Ramadan 2, 1333.
[July 14, 1915.]

Complimentary titles.
Whereas the entire Arab nation without exception is determined to assert its right to live, gain its freedom and administer its own affairs in name and in fact;
And whereas the Arabs believe it to be in Great Britain’s interest to lend them assistance and support in the fulfilment of their steadfast and legitimate aims to the exclusion of all other aims;
And whereas it is similarly to the advantage of the Arabs, in view of their geographical position and their economic interests, and in view of the well-known attitude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GA주414-1] to prefer British assistance to any other;
For these reasons, the Arab nation has decided to approach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with a request for the approval, through one of their representatives if they think fit, of the following basic provisions which, as time presses, have not been made to include matters of relatively smaller importance, since such matters can wait until the time comes for their consideration: –
1. Great Britain recognises the independence of the Arab countries which are bounded: on the north, by the line Mersin-Adana to parallel 37˚ N. and thence along the line Birejik-Urfa-Mardin-Midiat-Jazirat (ibn ‘Umar)-Amadia to the Persian frontier; on the east, by the Persian frontier down to the Persian Gulf; on the south, by the Indian Ocean (with the exclusion of Aden whose status will remain as at present); on the west, by the Red Sea and the Mediterranean Sea back to Mersin.
2. Great Britain will agree to the proclamation of an Arab Caliphate for Islam.
3. The Sharifian Arab Government undertakes, other things being equal, to grant Great Britain preference in all economic enterprises in the Arab countries.
4. With a view to ensuring the stability of Arab independence and the efficacy of the promised preference in economic enterprises, the two contracting parties undertake, in the event of any foreign state attacking either of them, to come to each other’s assistance with all the resources of their military and naval forces; it being understood that peace will be concluded only when both parties concur.
In the event of one of the two parties embarking upon a war of offence, the other party will adopt an attitude of neutrality, but, if invited to join, will agree to confer with the other party as to the conditions of joint action.
5. Great Britain agrees to the abolition of Capitulations[GA주415-1] in the Arab countries, and undertakes to assist the Sharifian Government in summoning an international congress to decree their abolition.
6. Clauses 3 and 4 of the present Agreement are to remain in force for a period of fifteen years. Should either party desire an extension, due notice of one year before the expiry of that period will have to be given.
Therefore, since the entire Arab nation is (God be praised!) united in its resolve to pursue its noble aim to the end, at whatever cost, it requests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to return an answer, whether negatively or in the affirmative, within thirty days of the receipt of this message, in default of which it reserves its right to complete freedom of action, just as we will consider ourselves absolved from the letter and the spirit of the declaration which we made earlier through ‘Ali Efendi.[GA주415-2]
Compliments.}}}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To His Honour:
July 14, 1915.[AAC주1]

WHEREAS the whole of the Arab nation without any exception have decided in these last years to live, and to accomplish their freedom, and grasp the reins of their administration both in theory and practice; and whereas they have found and felt that it is to the interest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to support them and aid them to the attainment of their firm and lawful intentions (which are based upon the maintenance of the honour and dignity of their life) without any ulterior motives whatsoever unconnected with this object;
And whereas it is to their (the Arabs’) interest also to prefer the assistance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in consideration of their geographical position and economic interests, and also of the attitude of the above-mentioned Government, which is known to both nations and therefore need not be emphasised;
For these reasons the Arab nation see fit to limit themselves, as time is short, to asking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if it should think fit, for the approval, through her deputy or representative of the following fundamental propositions, leaving out all things considered secondary in comparison with these, so that it may prepare all means necessary for attaining this noble purpose, until such time as it finds occasion for making the actual negotiations: –
Firstly. – England to acknowledge the independence of the Arab countries, bounded on the north by Mersina and Adana up to the 37° of latitude, on which degree fall Birijik, Urfa, Mardin, Midiat, Jezirat (Ibn ‘Umar),[AAC주2] Amadia, up to the border of Persia; on the east by the borders of Persia up to the Gulf of Basra; on the south by the Indian Ocean, with the exception of the position of Aden to remain as it is; on the west by the Red Sea, the Mediterranean Sea up to Mersina. England to approve of the proclamation of an Arab Khalifate of Islam.
Secondly. – The Arab Government of the Sherif to acknowledge that England shall have the preference in all economic enterprises in the Arab countries whenever conditions of enterprises are otherwise equal.
Thirdly. – For the security of this Arab independence and the certainty of such preference of economic enterprises, both high contracting parties to offer mutual assistance, to the best ability of their military and naval forces, to face any foreign Power which may attack either party. Peace not to be decided without agreement of both parties.
Fourthly. – If one of the parties enters upon an aggressive conflict, the other party to assume a neutral attitude, and in case of such party wishing the other to join forces, both to meet and discuss the conditions.
Fifthly. – England to acknowledge the abolition of foreign privileges in the Arab countries, and to assist the Government of the Sherif in an International Convention for confirming such abolition.
Sixthly. – Articles 3 and 4 of this treaty to remain in vigour for fifteen years, and, if either wishes it to be renewed, one year’s notice before lapse of treaty to be given.
Consequently, and as the whole of the Arab nation have (praise be to God) agreed and united for the attainment, at all costs and finally, of this noble object, they beg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to answer them positively or negatively in a period of thirty days after receiving this intimation; and if this period should lapse before they receive an answer, they reserve to themselves complete freedom of action. Moreover, we (the Sherif’s family) will consider ourselves free in word and deed from the bonds of our previous declaration which we made through Ali Effendi.[IO1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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المذكرة: لما كان العرب بأجمعهم دون استثناء – قد قرروا في الأعوام الأخيرة أن يعيشوا وأن يفوزوا بحريتهم المطلقة، وأن يتسلموا مقاليد الحكم نظريا وعمليا بأيديهم . ولما كان هؤلاء قد شعروا وتأكدوا أنه من مصلحة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أن تساعدهم وتعاونهم للوصول إلى أمانيهم المشروعة، وهي الأماني المؤسسة على بقاء شرفهم، وكرامتهم وحياتهم...
ولما كان من مصلحة العرب أن يفضلوا مساعدة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عن أية حكومة أخرى بالنظر لمركزها الجغرافي، ومصالحهم الاقتصادية وموقفهم من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أنه بالنظر لهذه الأسباب كلها يرى الشعب العربي أنه من المناسب أن يسأل الحكومة البريطانية إذا كانت ترى من المناسب أن تصادق بواسطة مندوبيها أو ممثليها على الاقتراحات الأساسية الآتية:
أولاً : أن تعترف إنجلترا باستقلال البلاد العربية من مرسين ـ اذنه، حتى الخليج الفارسي شمالاً ومن بلاد فارس حتى خليج البصرة شرقا، ومن المحيط الهندي للجزيرة جنوباً يستثنى من ذلك عدن التي تبقى كما هي ـ ومن البحر الأحمر والبحر المتوسط حتى سينا[22] غربا.
على أن توافق إنجلترا أيضاً على إعلان خليفة عربي على المسلمين.
ثانياً : تعترف حكومة الشريف العربية بأفضلية إنجلترا في كل مشروع اقتصادي في البلاد العربية، إذا كانت شروط تلك المشاريع متساوية.
ثالثا: تتعاون الحكومتان الإنجليزية والعربية في مجابهة كل قوة تهاجم أحد الفريقين وذلك حفظا لاستقلال البلاد العربية. وتأمينا لأفضلية إنجلترا الاقتصادية فيها.. على أن يكون هذا التعاون في كل شيء في القوة العسكرية، والبحرية، والجوية …
رابعا: إذا تعدى أحد الفريقين على بلد ما ونشب بينه وبينها عراك وقتال، فعلى الفريق الآخر أن يلزم الحياد. على أن هذا الفريق المعتدى إذا رغب في اشتراك الفريق الآخر معه ففي وسع الفريقين أن يجتمعا معا وأن يتفقا على الشروط.
خامسا: مدة الاتفاق في المادتين الثالثة والرابعة من هذه المعاهدة خمس عشرة سنة. وإذا شاء أحد الفريقين تجديدها عليه أن يطلع الفريق الآخر على رغبته قبل انتهاء مدة الاتفاقية بعام(*) .
هذا ولما كان الشعب العربي بأجمعه قد اتفق "والحمد لله" على بلوغ الغاية وتحقيق الفكرة مهما كلفه الأمر فهو يرجو الحكومة البريطانية أن تجيبه سلبا أو إيجابا في خلال ثلاثين يوما من وصول هذا الاقتراح. وإذا انقضت هذه المدة ولم يتلق من الحكومة جواباً فإنه يحفظ لنفسه حرية العمل كما يشاء.
وفوق هذا فإننا نحن عائلة الشريف نعتبر أنفسنا ـ إذ لم يصل الجواب ـ أحرارا في القول والعمل من كل التصريحات، والوعود السابقة التي قدمناها بواسطة علي أفند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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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한국어 번역(《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1333년 라마단 2
[1915년 7월 14일]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전체 아랍 민족(Arab nation)은 예외 없이 생존권을 주장하고 그들의 자유를 획득하며 명목상으로나 실질적으로나 스스로의 사무에 대한 행정을 도맡기로 결의하였소.
또한 아랍인들은 다른 모든 목적을 배제하고 그들의 변함없고 적법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조력과 지원을 베푸는 데 대영제국이 관심을 두고 있음을 믿고 있소.
나아가 그들의 지리적 위치와 경제적 이권이라는 관점에서, 또 대영제국 정부의 잘 알려진 태도라는 관점에서[GA주414-1] 다른 어느 국가보다 영국의 조력을 선호하는 것이 아랍인들에게 이익이 될 듯하오.
이러한 이유들로, 아랍 민족(nation)은 그들의 대표자(representative) 중 한 명을 통해 대영제국과 접촉하여 아래의 기초적 조목들에 대해 그것들이 적합하다고 여겨진다면 찬성을 요청하기로 결정했소. 시간의 압박이 있으므로, 그러한 조목들은 상대적으로 덜 중요한 문제들을 포함하지 않았고, 그러한 문제들은 그것들을 숙고할 때가 올 때까지 미루어둘 수 있을 것이오.
1. 대영제국은 북쪽으로 북위 37도의 평행선을 따르는 메르신-아다나, 그리고 그 선을 따르는 그 다음의 비레직-우르파-마르딘-미디아트-자지라트(이븐 우마르)-아메디로부터 페르시아의 변경까지, 동쪽으로 페르시아의 변경부터 아래로 페르시아 만까지, 남쪽으로 (아덴의 지위를 현재와 같이 두는 것을 제외하고) 인도양까지, 서쪽으로 홍해와 지중해로부터 메르신으로 돌아오는 기선을 따라 아랍 지역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오.
2. 대영제국은 아랍 이슬람 칼리프국의 선포를 승인해야 하오.
3. 샤리프의 아랍 정부는 다른 조건이 동일하다면 아랍 지역들 안의 모든 경제 사업에서 대영제국에게 우선권을 부여하기를 약조하오.
4. 아랍 독립의 안정성과 약속된 경제 사업에서의 우선권의 효과를 보증하려는 관점에서, 계약하는 두 이해 관계자는 어떤 외국이 어느 한 쪽을 공격하는 사건이 벌어질 때 모든 가능한 육군력과 해군력을 동원해 다른 한 쪽에게 조력을 제공하기로 약조하는 것이오. 평화 조약(peace)은 쌍방의 이해 관계자가 동의할 때에만 결의될 수 있소.
두 이해 관계자 중 한 쪽이 공세 전쟁에 착수할 때, 다른 이해 관계자는 중립적 태도를 보여야 하오. 다만 참전을 요청 받은 경우, 합동 행동의 조건에 대해서 다른 한 쪽의 이해 관계자와 협의하는 데 동의해야 하오.
5. 대영제국은 아랍 지역들 안에서 특혜 조약(Capitulations)[GA주415-1]을 폐지하는 데 동의하고, 샤리프의 정부가 그것들을 폐지하기 위해 국제 회의를 소집할 때 조력하는 데 약조하는 것이오.
6. 이 협약의 3항과 4항은 15년의 기간 동안 유효하오. 어느 한 쪽의 이해 당사자가 연장을 원할 경우, 이 기간이 만료되기 1년 전에 고지되어야 하오.
그러므로, 전체 아랍 민족이 (신께 찬미를!)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끝까지 그들의 고귀한 목적을 추구하고자 결심하는 데 단결함에 따라, 그들은 대영제국 정부에게 부정적이든 찬성하든 이 전언을 받고 30일 이내에 답변하여 주기를 요구하오. 그렇지 않을 경우, 우리 스스로가 이 서신과 우리가 일찍이 알리 에펜디(‘Ali Efendi)[GA주415-2]를 통해 창출해 낸 선언의 정신에 대한 책임에서 벗어나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과 같이, 그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권리를 지닌 채로 있을 것이오.
(미사여구)}}}

명예로운 그대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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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5년 7월 14일[AAC주1]}}}
아랍 민족(nation) 모두는 예외 없이 근년에 그들의 자유 속에 살아가며 그것을 성취하고 이론적으로나 실천적으로나 그들의 행정의 고삐를 쥐기로 결의한 바 있소. 또한 그들은 대영제국의 정부가 어떤 식으로든 이 목적과 연결되지 않는 이면의 동기를 숨기지 않고, 그들의 (생명의 명예로움과 존엄성을 유지하려는 데 기반을 둔) 확고하고 정당한 목적들을 지원하고 도우려는 데 관심을 갖고 있음을 알고 느껴 왔소.
나아가 그들은 그들의 지리적 위치와 경제적 이권을 고려하여서 대영제국의 조력을 선호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두 민족(nation) 사이에 잘 알려져 있어 굳이 더 강조될 필요조차 없는, 앞서 말한 (대영제국) 정부의 태도에 대해서도 그러하오.
이러한 이유들로 아랍 민족은 다음의 기초적인 제안들이 적절하다고 생각될 수 있다면, 시일의 촉박함을 고려할 때, 대리인(deputy)이나 대표자(representative)를 통해 대영제국의 정부에게 찬성할지의 여부를 묻는 것이 적합할 것이라고 생각할 따름이오. 실질적인 협상을 위한 기회를 잡을 시간이 올 때까지, 이는 이 고귀한 목적을 성취하는 데 모든 수단을 구비하여 줄 수 있을 것이고, 이에 비하면 그 밖의 모든 것들은 차순위로 고려하여 미루어둘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첫째로, 영국은 북쪽으로 메르신와 아다나로 경계 지어지며 비레직, 우르파, 마르딘, 미디아트, 자지라트(이븐 우마르),[AAC주2] 아메디에 걸치는 북위 37도선을 따라 페르시아와의 국경으로 이어지는 선까지, 동쪽으로 페르시아와의 국경으로부터 바스라 만까지, 남쪽으로 아덴의 지위를 현재와 같이 두는 것을 제외하고 인도양까지, 서쪽으로 홍해와 지중해로부터 메르신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아랍 지역들의 독립을 인정하는 것이오. 영국은 아랍 이슬람 칼리프국의 선포를 승인해야 하오.
둘째로, 샤리프의 아랍 정부는 사업의 조건이 다른 것 없이 동등하다면 언제나 아랍 지역들 내에서 영국을 모든 경제적 사업에서 최우선 대상으로 인정할 것을 인정할 것이오.
셋째로, 아랍 독립을 보장하고 경제 사업의 최우선적 지위를 확실히 하기 위해, 계약하는 쌍방의 이해 관계자는 어느 쪽을 공격하려는 외국 세력(Power)에 맞서는 데 최대한의 육군력과 해군력으로서 서로에게 조력을 제공해야 하오. 평화 조약(Peace)은 쌍방의 이해 관계자의 협의 없이 결의되어서는 안 되오.
넷째로, 이해 관계자 중 어느 한 쪽이 공세적인 충돌 상태에 진입할 때 다른 한 쪽의 이해 관계자는 중립적 태도를 지킬 것이며, 어느 한 쪽이 다른 쪽의 군세에 합류하려 하면 양자가 그 조건에 대해 만나 논의해야 하오.
다섯째로, 영국은 아랍 지역들에서의 외국인으로서의 특권[28]을 폐지함을 인정하고, 국제 회의에서 샤리프의 정부가 그것들을 폐지하려는 의사를 보이는 데 조력해야 하오.
여섯째로, 이 조약의 3조와 4조는 15년 동안 유효할 것이고, 어느 한 쪽이 갱신되기를 원한다면 조약의 만료 시효로부터 1년 전에 이를 고지해야 하오.
결론을 말하자면, 아랍 민족 모두는 (신께 찬송드리며) 어떠한 대가라도 치를 것을 각오하고 최종적으로 이 고귀한 목적을 달성하려는 데 동의하고 단결하였소. 그들은 대영제국의 정부에게 이 의사를 전달하고 30일의 기한 내에 이를 긍정적으로 보는지, 아니면 부정적으로 보는지 답해 주기를 간청하오. 만일 답을 받기 전에 시한이 지난다면, 그들은 완전히 자유롭게 행동할 것이오. 나아가 우리(샤리프 일가)는 알리 에펜디(Ali Effendi)[IO1본-1]를 통해 갖추어진 우리의 상기한 선언에 구애받지 않고 자유롭게 말하고 행위할 것이오.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번역)

이 서신의 작성 일자에 대해서는 아래 '1915년 7월 14일 압둘라가 로날드 스토어스에게 전한 서신' 단락을 참고. 또한 압둘라의 서신에서 수령자는 1914년 2월 압둘라와 서신을 교환했던 로날드 스토어스로 가정되어 있었기 때문에, 엄밀히 말해 이 서신은 맥마흔에게 보내진 것은 아니다. 다만 맥마흔이 이와 관련된 사무를 인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서신에서 전달한 내용이 이후 맥마흔과 후세인이 논의를 진행하는 데 가장 큰 전제가 되므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 10편 가운데 이 서신을 별도로 분리하여 보지는 않는다.

3.2. 1915년 8월 30일 맥마흔 → 후세인(2차)

{{{#!folding [ 영문(《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Cairo, August 30, 1915.

Complimentary titles.
We have the honour to tender the gratitude due to you for the sentiments of sincere friendship for England which you display, and it pleases us, moreover, to learn that Your Lordship and your people are at one in believing that Arab interests are in harmony with British interests, and vice-versa.
In earnest of this, we hereby confirm to you the declaration of Lord Kitchener as communicated to you through ‘Ali Efendi, in which was manifested our desire for the independence of the Arab countries and their inhabitants, and our readiness to approve an Arab caliphate upon its proclamation.
We now declare once more that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would welcome the reversion of the caliphate to a true Arab born of the blessed stock of the Prophet. As for the question of frontiers and boundaries, negotiations would appear to be premature and a waste of time on details at this stage, with the War in progress and the Turks in effective occupation of the greater part of those regions. All the more so as a party of Arabs inhabiting those very regions have, to our amazement and sorrow, overlooked and neglected this valuable and incomparable opportunity; and, instead of coming to our aid, have lent their assistance to the Germans and the Turks; to that new despoiler, the German, and to that tyrannical oppressor, the Turk.
Nevertheless, we are fully prepared to despatch to Your Lordship whatever quantities of grain and other charitable gifts may be owed by Egypt to the Holy Land of Arabia and the noble Arabs. These will be forwarded, on a sign from Your Lordship, to whatever locality you may indicate.
We have made the necessary arrangements for facilitating the journeys of your messenger to us.
Compliments.}}}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To his Highness the Sherif Hussein.
August 30, 1915.

(After compliments and salutations.)
WE have the honour to thank you for your frank expressions of the sincerity of your feeling towards England. We rejoice, moreover, that your Highness and your people are of one opinion– that Arab interests are English interests and English Arab. To this intent we confirm to you the terms of Lord Kitchener’s message, which reached you by the hand of Ali Effendi, and in which was stated clearly our desire for the independence of Arabia and its inhabitants, together with our approval of the Arab Khalifate when it should be proclaimed. We declare once more that His Majesty’s Government would welcome the resumption of the Khalifate by an Arab of true race. With regard to the questions of limits and boundaries,[AAC주3] it would appear to be premature to consume our time in discussing such details in the heat of war, and while, in many portions of them, the Turk is up to now in effective occupation; especially as we have learned, with surprise and regret, that some of the Arabs in those very parts, far from assisting us, are neglecting this their supreme opportunity and are lending their arms to the German and the Turk, to the new despoiler and the old oppressor.
Nevertheless, we are ready to send your Highness for the Holy Cities and the noble Arabs the charitable offerings of Egypt so soon as your Highness shall inform us how and where they should be delivered. We are, moreover, arranging for this your messenger to be admitted and helped on any journey he may make to ourselves.
Friendly reassurances. Salutations!
(Signed) A. H. McMAHON.

[IO2본-1]}}}

{{{#!folding [ 아랍어판(아랍어 위키문헌 제공) 펼치기 · 접기 ]
من السير هنري مكماهون إلى الشريف حسين 30 أغسطس 1915 إلى السيد الحسين النسيب سلالة الأشراف وتاج الفخار وفرع الشجرة المحمدية والدوحة القرشية الأحمدية صاحب المقام الرفيع والمكانة السامية السيد ابن السيد والشريف بن الشريف السيد الجليل المبجل دولتلو الشريف حسين سيد الجميع أمير مكة المكرمة قبلة العالمين ومحط رجال المؤمنين الطائعين عمت بركته الناس أجمعين .
بعد رفع رسوم وافر التحيات العاطرة والتسليمات القلبية الخالصة من كل شائبة نعرض أن لنا الشرف بتقديم واجب الشكر لإظهاركم عاطفة الإخلاص وشرف الشعور والاحساسات نحو الإنجليز. وقد يسرنا علاوة على ذلك أن نعلم أن سيادتكم ورجالكم على رأي واحد وأن مصالح العرب هي نفس مصالح الإنجليز والعكس بالعكس . ولهذه النسبة فنحن نؤكد لكم أقوال فخامة اللورد كتشنر التي وصلت إلى سيادتكم عن يد علي أفندي وهي التي كان موضحا بها رغبتنا في استقلال بلاد العرب وسكانها مع استصوابنا للخلافة العربية عند إعلانها.
وإنا نصرح هنا مرة أخرى أن جلالة ملك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يرحب باسترداد الخلافة إلى يد عربي صميم من فروع تلك الدوحة النبوية المباركة.
وأما من خصوص مسألة الحدود والتخوم فالمفاوضة فيها تظهر أنها سابقة لأوانها، وتصرف الأوقات سدى في مثل هذه التفاصيل في حالة أن الحرب دائرة رحاها ولأن الأتراك أيضا لا يزالون محتلين لأغلب تلك الجهات احتلالا فعليا وعلى الأخص ما علمناه وهو مما يدهش ويحزن أن فريقا من العرب القاطنين في تلك الجهات نفسها قد غفل وأهمل هذه الفرصة الثمينة التي ليس أعظم منها، وبدل أقدام ذلك الفريق على مساعدتنا نزاه قد مد يد المساعدة إلى الألمان، نعم مد يد المساعدة لذلك السلاب النهاب الجديد وهو الألمان والظالم العسوف وهو الأتراك.
مع ذلك فأنا على كمال الاستعداد لأن نرسل إلى ساحة دولة السيد الجليل وللبلاد العربية المقدسة والعرب الكرام من الحبوب والصدقات المقررة من البلاد المصرية وستصل بمجرد إشارة من سيادتكم وفي المكان الذي تعينونه . وقد عملنا الترتيبات اللازمة لمساعدة رسولكم في جميع سفراته إلينا ونحن على الدوام معكم قلبا وقالبا مستنشقين رائحة مودتكم الزكية ومستوثقين بعرى محبتكم الخاصة سائلين الله سبحانه وتعالى دوام حسن العلائق بيننا.
وفي الختام أرفع إلى تلك السدة العليا كامل تحياتي وسلامي وفائق احترامي.
تحريرا في 19 شوال 1333
الموافق 30 أغسطس 1915
المخلص
السير أرثر مكماهون
نائب جلالة المل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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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한국어 번역(《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1915년 8월 30일, 카이로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우리는 당신께서 영국에 대한 진실된 우의의 감정을 보여주신 데 대해 감사를 표합니다. 더욱이 합하(Your Lordship)와 당신의 민족(people)이 아랍의 이익이 영국의 이익과 조화를 이루며 그 반대 또한 마찬가지라고 한 뜻으로 믿고 있음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이에 대해 진실된 마음을 담아, 우리는 여기서 당신과 알리 에펜디를 통해 소통하며 아랍 지역들과 그곳 주민들의 독립에 대한 우리의 희망, 또 아랍 칼리프국이 선포되었을 때 우리가 찬성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공표한 키치너 경의 선언을 당신께 확언하여 드립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 번 예언자의 축복받은 혈통에서 태어난 진실된 아랍이 칼리프국을 되찾는 것을 대영제국이 환영함을 선언합니다. 변경과 국경의 문제에 대해서는, 전쟁이 진행 중이고 튀르크인들이 그 대다수 지역들을 실효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단계에서는 상세히 협상하기에 지나치게 이른 것이며 시간의 낭비일 것입니다. 더욱이 바로 그 지역들에 거주하는 아랍인들 중의 한 분파는, 놀랍고 슬프게도, 이 가치 있고 비할 데 없는 기회를 간과하고 무시하고 있으며, 우리의 도움을 받으려 하기보다 새로운 약탈자인 독일인과 오랜 압제자인 튀르키인들에게 조력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합하께 아마도 이집트로부터 아라비아의 성스러운 땅과 고귀한 아랍인들에게 원하는 만큼의 곡물과 다른 희사할 선물들을 보내드리기 위해 온전히 준비되어 있습니다. 합하께서 신호를 보내주신다면 이 물건들은 당신께서 지시하시는 대로 어느 장소로든 보내질 것입니다.
당신의 전령(messenger)이 우리를 향해 오는 여정이 성사되도록 필수적인 조치를 취해 두었습니다.
(미사여구)}}}

샤리프 후세인 전하께
{{{#!wiki style="text-align: right;"
1915년 8월 30일}}}
(미사여구와 인사 이후에)
우리는 당신께서 영국에 대한 진실한 감정을 뚜렷이 드러내 주신 데 감사를 표합니다. 나아가 우리는 전하와 전하의 민족(people)이 하나의 의견, 다시 말해 아랍의 이익이 영국의 이익이며 영국 또한 아랍에 대해 그러하다는 것에 동의하였음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그러한 차원에서 우리는 알리 에펜디를 통해 당신의 손에 전달된, 아라비아와 그곳 주민들이 독립하는 것을 우리가 희망함을 분명히 말하였던 키치너 경의 전언에서 언급한 바와, 아랍 칼리프국이 선포되었을 때 우리가 이를 승인할 것이라는 점을 확언하여 드립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대영제국의 정부가 참된 인종으로서의 아랍의 칼리프국이 다시 서게 됨을 환영함을 선언합니다. 경계와 국경(limits and boundaries)[AAC주3]의 문제에 대해서는, 튀르크인들이 현재 그 대부분을 실효지배하고 있는데다가, 전쟁의 한가운데서 그것을 상세히 논하는 데 우리의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너무 이른 것 같습니다. 놀랍고 또 슬픈 일이지만, 특히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바로 그들의 일부분을 이루는 어떤 아랍인들은, 우리를 지원하기는커녕 절호의 기회를 저버리고 새로운 약탈자인 독일인과 오랜 압제자인 튀르크인들을 돕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전하께서 그러한 공여(offering)들이 어떻게, 또 어디로 전해져야 하는지 알려주신 대로, 이집트에서 성스러운 도시들(Holy Cities)과 고귀한 아랍인들을 위해 전하께 희사품의 공여를 베풀 수 있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나아가 우리는 당신의 전령이 공인받고 우리를 향해 오는 여정 동안에 도움을 받을 수 있도록 준비하고 있습니다.
친의를 담아 장담하여 드립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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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헨리 맥마흔의 서명)}}}
[IO2본-1]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3.3. 1915년 9월 9일 후세인 → 맥마흔(3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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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cca, Shawwal 29, 1333.
[September 9, 1915.]

Complimentary titles.
We received your note of the 19th Shawwal, [August 30,] with gratification, and have given it the fullest consideration, notwithstanding the obscurity and the signs of lukewarmth and hesitancy we descried in it in regard to our essential clause. We find it necessary to affirm to Your Excellency our sentiments of amity with Great Britain and our readiness to ensure her a favoured place in all circumstances and in every manner, for in that way can the true interests of our co-religionists best be served.
Your Excellency will suffer me to say, in explanation of what I mean by lukewarmth and hesitancy, that your statements in regard to the question of frontiers and boundaries – namely that to discuss them at this stage were unprofitable and could only result in a waste of time since those regions are still occupied by their sovereign government, and so forth – reflect what I might almost describe as reluctance or something akin to reluctance, on your part.
The fact is that the proposed frontiers and boundaries represent not the suggestions of one individual whose claim might well await the conclusion of the War, but the demands of our people who believe that those frontiers form the minimum necessary to the establishment of the new order for which they are striving. This they are determined to obtain; and they have decided to discuss the matter, in the first resort, with that Power in whom they place their greatest confidence and reliance, and whom they regard as the pivot of justice, namely Great Britain.
In this, they are moved by considerations of the reciprocity of interests, the requirements of territorial organisation, and the wishes of the populations concerned; and also by their desire to see the foundations of their future life settled beforehand, so as to avoid finding themselves, when their new life is being established and organised, in opposition to or conflict with Great Britain or one of her allies – which God forbid! It should be noted that, in drawing up their proposed delimitation, they have not outstepped the bounds of the regions inhabited by their race.
For our aim, O respected Minister, is to ensure that the conditions which are essential to our future shall be secured on a foundation of reality, and not on highly-decorated phrases and titles. As for the caliphate, God have mercy on its soul and comfort the Moslems for their loss!
I am confident that Your Excellency will realise beyond all doubt that I have had nothing to do with the proposing of those boundaries, which include only populations of our race, and that they were proposed by our people who regard them as being, to put it briefly, vitally and economically essential – as indeed they are.
In conclusion, we believe in all sincerity that your loyalty will prevail, whether you are satisfied with us or displeased; and that you will not wish to seize upon the fact that some of our people are still with the utmost zeal furthering Ottoman designs, as stated in your letter under reference, as an excuse for treating our aspirations with such lukewarmth and hesitancy. I think Your Excellency is above denying that our demands are fundamental, nay, that they are the very substance and essence of our existence, be it from the material, the spiritual or the moral point of view. Up to this very moment, I have been endeavouring, in person and with all my powers, to enforce the prescriptions of our Sacred Law in my country and in all that concerns me in relation to the rest of the empire, until God issue His decree.
For these reasons, and the better to set your mind at ease, I may state that the people of all those countries, including those of whom you say that they are zealously furthering German and Ottoman designs, are awaiting the result of the present negotiations, which depend solely upon whether you reject or admit the proposed frontiers, and upon whether or not you will help us to secure their spiritual and other rights against evil and danger. Please communicate to us the decision of the British Government on this point, for our guidance as to what suits their policy, and as to what steps it behoves us to take. For the rest, it is God Who decrees the past and the future, He ordains all things, exalted be His Name!
With regard to our request for the despatch of the people’s bounty, with the customary purses from the Ministry of Auqaf and all that it is usual to send with the Pilgrimage convoy, I had in view that their despatch would be a means of substantiating the terms of your proclamations to the world, and more particularly the Moslem world, in which you stated that your hostility was solely directed against the usurpers of the caliphate and, hence, of the rights of all Moslems. To say nothing of the fact that the said bounty comes from specific endowments which have nothing to do with politics. If you decide to send them, let the bounty due on account of the past two years be consigned in a special steamer to Jedda as usual in the name of the people, and let the skipper or the special officer who is usually charged year by year with the duty of delivery communicate with the authorities at Jedda on arrival at the port, and ask for the competent official who is to take delivery of the grain against the proper receipt to be signed by the receiving officer. It should be noted that only the signature of that officer may be accepted, and the skipper or special officer should be instructed that if any obstruction is attempted, he should threaten to return with his cargo to the port of departure. The consignment is to be formally received by the committee known as the ‘Committee for dealing with the People’s Bounty’.
If you should wish to reply to this note, let the reply be sent by the bearer.
Compliments.}}}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September 9, 1915.

To His Excellency the Most Exalted, the Most Eminent–the British High Commissioner in Egypt; may God grant him Success.
WITH great cheerfulness and delight I received your letter dated the 19th Shawal, 1333 (the 30th August, 1915), and have given it great consideration and regard, in spite of the impression I received from it of ambiguity and its tone of coldness and hesitation with regard to our essential point.
It is necessary to make clear to your Excellency our sincerity towards the illustrious British Empire and our confession of preference for it in all cases and matters and under all forms and circumstances. The real interests of the followers of our religion necessitate this.
Nevertheless, your Excellency will pardon me and permit me to say clearly that the coolness and hesitation which you have displayed in the question of the limits and boundaries by saying that the discussion of these at present is of no use and is a loss of time, and that they are still in the hands of the Government which is ruling them, &c., might be taken to infer an estrangement or something of the sort.
As the limits and boundaries demanded are not those of one person whom we should satisfy and with whom we should discuss them after the war is over, but our peoples have seen that the life of their new proposal is bound at least by these limits and their word is united on this.[IO3본-1][AAC주4]
Their reason for this union and confidence is mutual interest, the necessity of regulating territorial divisions and the feelings of their inhabitants, so that they may know how to base their future and life, so not to meet her (England?) or any of her Allies in opposition to their resolution which would produce a contrary issue, which God forbid.[IO3본-2][AAC주5]
For the object is, honourable Minister, the truth which is established on a basis which guarantees the essential sources of life in future.[AAC주6]
I am confident that your Excellency will not doubt that it is not I personally who am demanding of these limits which include only our race, but that they are all proposals of the people, who, in short, believe that they are necessary for economic life.
Is this not right, your Excellency the Minister?
In a word, your high Excellency, we are firm in our sincerity and declaring our preference for loyalty towards you, whether you are satisfied with us, as has been said, or angry.
With reference to your remark in your letter above mentioned that some of our people are still doing their utmost in promoting the interests of Turkey, your goodness (lit. “perfectness”) would not permit you to make this an excuse for the tone of coldness and hesitation with regard to our demands, demands which I cannot admit that you, as a man of sound opinion, will deny to be necessary for our existence; nay, they are the essential essence of our life, material, and moral.
Up to the present moment I am myself with all my might carrying out in my country all things in conformity with the Islamic Law, all things which tend to benefit the rest of the Kingdom, and I shall continue to do so until it pleases God to order otherwise.
In order to reassure your Excellency I can declare that the whole country, together with those who you say are submitting themselves to Turco-German orders, are all waiting the result of these negotiations, which are dependent only on your refusal or acceptance of the question of the limits and on your declaration of safeguarding their religion first and then the rest of rights from any harm or danger.
Whatever the illustrious Government of Great Britain finds conformable to its policy on this subject, communicate it to us and specify to us the course we should follow.
In all cases it is only God’s will which shall be executed, and it is God who is the real factor in everything.
With regard to our demand for grain for the natives, and the moneys(“surras”) known to the Wakfs’ Ministry and all other articles sent here with pilgrims’ caravans, high Excellency, my intention in this matter is to confirm your proclamations to the whole world, and especially to the Moslem world, that your antagonism is confined only to the party which has usurped the rights of the Khalifate in which are included the rights of all Moslems.
Moreover the said grain is from the special Wakfs and has nothing to do with politics.
If you think it should be, let the grain of the two years be transported in a special steamer to Jedda in an official manner, in the name of all the natives as usual, and the captain of the steamer or the special “Mamur” detailed as usual every year to hand it over on his arrival at the port will send to the Governor of Jedda asking for the Mamur of the grain at Jedda or a responsible official to take over the grain and give the necessary receipt signed by the said Mamur, that is the Mamur of the grain himself. He should make it a condition that he would (? not) accept any receipt but that signed by this Mamur.
Let the captain of the steamer or the “Mamur” (detailed with the grain) be instructed that if he finds anything contrary to this arrangement he should warn them that he will return home with the cargo. Thereupon the Mamur and the special committee detailed with him, which is known as the committee of the grain for the natives, will take over the grain in the proper form.
Please accept my best regards and salutations.
If you choose to send a reply to this, please send it with the bearer.
29th Shawal,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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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ن الشريف حسين إلى السير مكماهون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مكة في 29 شوال سنة 1333 (9 سبتمبر سنة 1915)
لصاحب السعادة والرفعة نائب جلالة الملك بمصر، سلمه الله
بمزيد من السرور والغبطة تلقيت كتابكم المؤرخ في 19 شوال وطالعته بكل احترام واعتبار رغم شعوري بغموضه وبرودته وتردده فيما يتعلق بنقطتنا الأساسية أعني نقطة الحدود.
وأرى من الضروري أن أؤكد لسعادتكم إخلاصنا نحو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واعتقادنا بضرورة تفضيلها على الجميع في كل الشؤون وفي أي شكل، وفي أية ظروف ويجب أن أؤكد لكم أيضا أن مصالح اتباع ديانتنا كلها تتطلب الحدود التي ذكرتها لكم .
ويعذرني فخامة المندوب إذا قلت بصراحة أن "البرودة" و"التردد" الذين ضمنهما كتابه فيما يتعلق بالحدود وقوله أن البحث في هذه الشؤون إنما هو إضاعة للوقت، وإن تلك الأراضي لا تزال بيد الحكومة التي تحكمها.. ويعذرني فخامته إذا قلت أن هذا كله يدل على عدم الرضا، أو على النفور أو على شئ من هذا القبيل. فإن هذه الحدود المطلوبة ليست لرجل واحد نتمكن من إرضائه ومفاوضته بعد الحرب بل هي مطالب شعب يعتقد أن حياته في هذه الحدود وهو متفق بأجمعه على هذا الاعتقاد.
وهذا ما جعل الشعب يعتقد أنه من الضروري البحث في هذه النقطة قبل كل شئ مع الدولة التي يثقون بها كل الثقة ويعلقون عليها كل الآمال وهي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
وإذا أجمع هؤلاء على ذلك فإنما يجمعون عليه في سبيل الصالح المشترك، وهم يرون أنه من الضروري جداً أن يتم تنظيم الأراضي المجزأة ليعرفوا على أي أساس يؤسسون حياتهم كي لا تعارضهم إنجلترا أو إحدى حليفاتها في هذا الموضوع مما يؤدي إلى نتيجة معاكسة، الأمر الذي حرمه الله.
وفوق هذا فإن العرب لم يطلبوا ـ في تلك الحدود ـ مناطق يقطنها شعب أجنبي بل هي عبارة عن كلمات وألقاب يطلقونها عليها.
أما الخلافة فإن الله يرضى عنها، ويسر الناس بها.
وأنا على ثقة يا صاحب الفخامة أنكم لا تشكون قط بأني لست أنا شخصيا الذي يطلب تلك الحدود التي يقطنها عرب مثلنا، بل هي مقترحات شعب بأسره، يعتقد بأنها ضرورية لتأمين حياته الاقتصادية.
أو ليس هذا صحيحاً يا فخامة الوزير؟
وبالاختصار فإننا ثابتون في إخلاصنا نصرح بكل تأكيد بتفضيلنا لكم على الجميع أكنتم راضين عنا ـ كما قيل ـ أو غاضبين.
أما ما يتعلق في قولكم بأن قسماً من شعبنا لا يزال يبذل جهده في سبيل تأمين مصالح الأتراك، فلا أظن أن هذا يبرر البرودة والتردد الذين شعرت بهما في كتابكم فيما يتعلق بموضوع الحدود، الموضوع الذي لا أعتقد أن رجلاً مثلكم ثاقب الرأي ينكر أنه ضروري لحياتنا الأدبية والمادية.
وأنا حتى الساعة لا أزال أنفذ ما تأمر به الديانة الإسلامية في كل عمل أقوم به وأراه مفيدا وصالحا لبقية المملكة وأني سأستمر في هذا إلى أن يأمر الله في غير ذلك.
وأود هنا يا صاحب الفخامة أن أؤكد لكم بصراحة أن كل الشعب ـ ومن جملته هؤلاء الذين تقولون أنهم يعملون لصالح تركيا وألمانيا ـ ينتظر بفارغ الصبر نتائج هذه المفاوضات المتوقفة على موافقتكم أو رفضكم قضية الحدود وقضية المحافظة على ديانتهم وحمايتهم من كل أذى أو خطر.
وكل ما تجده الحكومة البريطانية موافقا لسياستها في هذا الموضوع فما عليها إلا أن تعلمنا به وأن تدلنا على الطريق التي يجب أن نسلكها.
[3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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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3년 샤왈 29일, 메카.
[1915년 9월 9일]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들)
샤왈 19일[ISL10-19]자 그대의 편지를 기쁨과 함께 받았고, 이를 온전히 숙고하며 읽었소. 그럼에도 우리의 본질적인 조목들에 대해 모호함과 더불어 미온적이고 망설이는 태도의 신호를 보임을 느꼈소이다. 우리는 각하께 대영제국에 대한 우리의 친선의 감정과 대영제국에 대해 어떤 상황이든, 또 어떤 경우든 호의적인 장을 보증할 준비가 되어 있음을 확언하여 둘 필요가 있음을 느꼈소. 그러해야지만 우리 동질적인 종교인들의 진실된 이해 관계가 최선의 상황에서 갖추어질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오.
내가 미온적이고 망설이는 태도라고 한 의미를 설명하자면, 변경과 국경의 문제에 대한 그대의 언급, 말하자면 지금의 단계에서 그것을 논의하기에는 부적절하며 그러한 지역들이 여전히 그곳의 주권 정부에 의해 지배되고 있으므로 이는 시간을 낭비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뿐이라는 등의 각하의 말씀이 내가 꺼림직함이나 그와 비슷한 어떤 말로 그려야 할 태도를 반영하고 있다고 슬프게도 말해야겠소.
진실은 제시한 변경과 국경이 전쟁의 종결을 기다릴 수 있는 한 개인에 의한 제의가 아니요, 그러한 변경이 그들이 그것을 위해 분투하는 새로운 질서의 수립에 필요한 최소 한도를 형성한다고 믿는 우리 민족의 요구라는 것이오. 이 점에서 그들은 최선의 대상으로서 그들이 가장 신뢰하고 의지할 수 있으며 그들이 정의의 구심점으로 여기는 열강(Power), 곧 대영제국과 함께 이를 성취하기로 결의하고 그 문제를 논의하기로 결정한 것이오.
이로 인해 그들은 이익의 호혜성에 대한 숙고, 영토의 조직에 대한 요구, 관련된 주민들의 소망에 의해, 또 그들의 새로운 삶이 수립되고 조직될 때 대영제국이나 그 동맹 국가 중 하나와 신께서 금하시는 것과 같이 반대 입장에 서거나 충돌하는 상황을 피하기 위해 사전에 자리 잡힌 미래의 삶의 기초를 마주하고자 하는 그들의 희망에 의해 움직이오. 그들이 제시한 구획안을 창출할 때 그들이 그들 자신의 인종이 거주하지 않는 지역들의 범주를 넘어서지 않았음은 특별히 언급되어야겠소.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아아, 존경하는 판무관(Minister)이시어, 화려하게 문식된 문구들과 명목들이 아닌 실제에 기초한 우리의 미래를 보증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보증하는 것이오. 칼리프국을 위하여, 신께서는 그들의 영혼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무슬림들이 앗긴 것에 대해 위안을 주실 것이오!
나는 각하께서 모든 의심을 넘어 내가 우리 인종의 주민들만이 포함된 이 국경을 제의하는 데 전혀 관여하지 않았고, 그것들은 우리 민족이 실제로 그러한 것과 같이 간결하고 중대하며 경제적으로 필수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것이기에 그들이 제의한 것임을 깨달으실 것임을 확신하오.
결론적으로, 우리는 그대가 우리에 대해 만족하든 그렇지 않다면 불만을 갖든 그대의 충실한 마음이 승리를 거둘 것이며, 그대의 편지에서 언급한 것과 같이 우리 민족의 일부가 여전히 오스만의 꿍꿍이(designs)를 펼치는 데 최선의 열의를 다하고 있다는 사실에 매달려 이를 우리의 열망을 그러한 미온적이고 망설이는 태도를 보이는 데 핑계로 삼기를 원치 않는다는 데 신실한 믿음을 갖고 있소. 각하께서는 우리의 요구가 기초적인 것이라는 것을, 아니, 바로 그것들이 물질적, 정신적, 또는 도덕적 관점에서 우리 존재의 요체이고 본질임을 부정하지 않으실 것이라고 생각하오. 바로 지금 이 순간까지 나는 신께서 명령을 내리시기 전까지 나의 지역(country) 안에서, 또 제국의 다른 지방과의 관계를 고려할 때 성스러운 율법에 따른 방책을 집행하는 데 몸소 나의 힘을 다하여 노력하여 왔소.
이러한 이유들로 인해, 또 그대를 안심시키기 위해 더 나을 것이라고 생각하여, 나는 그대가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꿍꿍이를 펼치는 데 열성적이라고 말하는 이들을 포함해 그러한 모든 지역의 사람들이 지금의 협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으며, 그대가 제안된 변경을 거부할지 받아들일지의 여부에, 또 그대가 그들이 정신적인, 또 그 밖의 권리들을 악과 위험에 맞서 지키려는 것을 도울지 말지의 여부에 오롯이 달려 있다고 말하겠소. 이 점에서 무엇이 그곳의 정책에 걸맞을지에 대해, 또 우리가 어떤 길로 나아갈지에 대해 길잡이가 될 수 있는 것이라면 대영제국의 결정을 우리에게 전달해 주시오. 그 밖의 것들에 대해서는, 과거와 미래에 대해 이끄시는 것은 신이실 것이오. 그 분께서는 모든 것을 정해 두셨으니, 높이 받들어질지어다, 그 분의 이름이여!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기 위해 보내달라고 요청한 건과, 와크프(Auqaf) 부에서 상례적인 돈꾸러미(purse)를 보낸 건, 또 순례객들이 호송해 와 전달된 것으로서 모두 늘상 있던 것들에 대해서는, 나는 그들이 보내진 일이 세계, 그 중에서도 특히 무슬림 세계에 대해 그대가 그대의 적대감은 칼리프국에 대한, 또 그렇기에 모든 무슬림들의 권리에 대한 강탈자만을 향한다고 한 선언을 입증할 수단이라고 보오. 구체적으로 기증을 받아서 온 앞서 말한 자선금이 정치와 무관함을 따로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오. 그대가 그러한 자선을 보내려 한다면, 지난 2년 몫의 자선 물품을 제다를 향해 가는 특별한 증기선에 실어 늘 그러했던 것과 같이 일반민(people)의 이름으로 보내주시오. 그리고 증기선의 선장이나 매년 늘 그랬듯 송달의 직무를 맡아 처리한 특별한 관료에게 이를 제다에서 항구에 도착하는 물건을 맡은 당국자에게 전달하도록 하고, 그가 곡물의 송달에 대한 권한을 지닌 관료에게 물어 수령한 관료에게 격을 갖춘(proper) 수령증에 서명을 받도록 하시오. 해당 관료의 서명만 받아야 함을 분명히 알리고, 선장이나 특별한 관료는 만일 이를 가로막으려 시도하는 어떤 일이 벌어지는 경우 그의 짐을 싣고 출발한 항구로 돌아갈 것이라고 압박하라고 지시하시오. 이렇게 수송된 물품은 '대민 자선 담당 위원회(Committee for dealing with the People’s Bounty)'로 알려진 위원회에 의해 공식적으로 수령될 것이오.
그대가 이 편지에 답을 보내려 한다면, 전령(bearer)을 통해 답을 보내 주시오.
(미사여구)}}}

{{{#!wiki style="text-align: right;"
1915년 9월 9일}}}
가장 고귀하고 탁월한, 이집트의 영국 고등판무관 각하께, 신께서 그를 성공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1333년 샤왈 19일[ISL10-19]자 그대의 편지를 큰 행복과 기쁨 속에 받았고, 깊이 숙고하고 배려하는 마음으로 읽었소. 그럼에도 우리의 본질적인 논점에 대해서는 불명확성과 차갑고 망설이는 어조가 담겨 있다는 인상을 받았소이다.
어떠한 경우이든 또 어떤 문제가 있더라도, 또 어떠한 형식과 상태 아래 놓이더라도 이름 높은 대영제국과 우리의 선호에 대한 고백에 대해 각하가 진실할 것임을 확실히 할 필요가 있소. 이는 우리 종교를 믿는 동조자들의 실익 때문에 필수적이오.
경계와 국경의 문제에 대해, 이를 의논하는 것이 지금으로서는 쓸모가 없고 시간을 낭비하는 것이며, 그들(아랍인들)이 여전히 그들을 다스리고 있는 정부(오스만 제국)의 손아귀 안에 있다는 등의 말씀을 하셨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각하께서는 그렇게 말씀하심을 통해 그대가 내보인 차가움과 망설임이 관계가 소원해지는 것이나 그와 같은 부류의 인상을 줄 수 있음을 혜량하고 인정하셔야 하오.
{{{#cf0921 우리가 요구한 경계와 국경은 한 사람을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며, 전쟁이 끝난 뒤에야 논의해야 할 것이 아니오. 우리 민족들은 최소한 그 경계 안에서 삶에 대한 그러한 새로운 제안들이 수행될 수 있다고 보며, 그들의 말은 이 말을 통해 하나로 뭉쳐 있소.
그러므로 그들은 이 점을 열강(Power) 가운데 신뢰와 신의를 느낀 최종적인 호소의 대상, 곧 이름 높은 대영제국과 가장 먼저 이 점에 대해 논의하는 것이 필수적임을 깨달았던 것이오.}}}[IO3본-1][AAC주4]
이 연합과 신뢰의 이유는 상호 간의 이익, 경계를 획정할 필요성과 그것을 통해서 어떻게 그들의 미래와 삶을 기초해야 할지 알게 될 그곳 주민들의 감정이며, 그것을 통해서 영국과 어떤 그 동맹 국가들도 그들의 결의와 상반되어 신께서 금하시는 대립하는 쟁점을 만드는 상황이 없도록 하려는 것이오.[IO3본-2][AAC주5]
{{{#cf0921 그러므로 그 목적은, 명예로운 판무관(Minister)이시어, 미래의 삶에 본질적인 원천을 보장할 기초 위에 세워진 진실이오.
그럼에도 그들은 그 경계 안에 외국의 인종이 거주하는 장소를 포함시키지 않았소. 그것은 헛된 말과 호칭의 과시일 것이기 때문이오.
신께서 칼리프국에 자비를 베푸시고 그곳의 무슬림들에게 위안을 누리게 하시기를.}}}[AAC주6]
나는 각하께서 내가 개인적인 이유로 이러한 경계를 요구하는 것이 아니며, 이 경계는 우리 인종만을 포괄하고, 그것이 경제적 삶에 필수적이라고 믿는 모든 사람들의 제의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을 것이라 확신하오.
그렇지 않소, 판무관(Minister) 각하?
말하자면, 각하, 우리는 그대가 말씀해 온 대로 우리를 만족스럽게 여기든, 그렇지 않아 분노하시든, 그대에게 보이는 충실한 마음에 대해 우리의 진실한 마음을 확고히 드러내고 우리가 호의를 보이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오.
앞서 언급한 그대의 언사에서 짚은 점, 곧 우리 민족의 일부가 아직 튀르크인들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최선을 다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는, 건전한 사고를 지닌 인간이신 그대라면 우리의 존재에 필수적인 것으로서 부정하실 리 없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요구들을 고려하시면서 그대의 선량한 마음(문자 그대로는 '완벽함')이 이를 그대의 차갑고 망설이는 어조의 변명거리로 쓰기를 허락하지 않을 것이오. 물론이오, 그것들은 본질적인 우리의 삶의 정수요, 물질이요, 도덕입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나의 지역에서 모든 일들을 이슬람 율법에 맞추어 수행하고 있고, 왕국의 나머지 지방에 이익이 될 일들을 수행하고 있으며, 신께서 다른 방향으로 인도하실 때까지 그런 일들을 계속할 것이오.
각하께 다시금 확답을 드리고자, 나는 그대가 말하는 튀르크인과 독일인들의 질서에 복종하는 이들을 포함한 모든 지역이 이 협상의 결과를 기다리고 있다고 선언하오. 그들은 오직 그대가 앞서 말한 경계 설정을 거부할지 수용할지의 여부에, 그리고 최우선적으로 종교를, 또 어떠한 위협과 위험으로부터 안전할 그 밖의 권리를 보호할 것이라는 그대의 선언에 달려 있소.
이 주제에 대한 정책으로서 대영제국의 이름 높은 정부가 이치에 맞다고 생각한다면 어느 것이든, 우리와 소통하고 우리가 따라야 할 방책을 명확히 해 주시오.
어떤 경우에나 신의 의지만이 실행될 것이며, 모든 것의 실제 인자는 신이실 것이오.
현지인들을 위한 곡물에 대한 우리의 요구와 와크프의 부서에 알려진 자금[47] 및 순례자 대상에 의해 이곳에 보내진 물품들에 대해서 말하자면, 각하시여, 이 문제에 대한 나의 의사는 그것이 온 세상에, 특히 무슬림 세계에 그대가 그대의 적대감은 모든 무슬림들의 권리를 포괄할 칼리프국의 권리를 빼앗은 당사자에 한정된다고 한 성명을 확언하여 준다는 것이오.
게다가 말씀드린 곡물은 특별한 와크프(Wakf)로부터 온 것이며, 정치와는 관련이 없소.
만일 그대가 정말 그렇다고 생각한다면, 2년 몫의 곡물을 특별한 증기선에 실어 제다로 보내되 공식적 방법으로 늘 그러듯이 모든 현지인들의 이름으로 보내시오. 그러면 증기선의 선장이나 매년 그러했듯이 그것들이 도착할 때 항구에서 그것들을 넘겨주도록 자세히 안내 받은 특별한 '마무르'[48]들이 제다에서 곡물을 맡은 마무르나 담당하는 관료에게 곡물을 가져가라고 하고 앞서 말한 곡물을 맡은 마무르의 서명을 받은 필요한 수령증(receipt)을 달라고 하여서 제다의 태수(Governor)에게 보낼 것이오. 그는 이 마무르가 서명한 것이 아니면 어떤 수령증도 받(지 않?)겠다는 조건을 내걸어야 하오.
증기선의 선장이나 (곡물에 대해 자세히 안내 받은) '마무르'에게 이렇게 정리된 사항과 상반되는 어떤 점을 발견한다면 화물을 가지고 본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것이라고 경고하라고 안내하시오. 그러면 그 마무르와 그에 대해 자세히 안내 받은, 현지인을 위한 곡물 위원회로 알려진 특별한 위원회가 적절한 방법에 따라 곡물을 수령할 것이오.
나의 안부와 인사를 성심껏 전해 받아 주시오.
이에 대해 답하려 하시거든, 전령(bearer)을 통해 보내주시오.
1333년 샤왈 29일.[ISL10-29]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3.4.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 → 후세인(4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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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iro, October 24, 1915.

Complimentary titles.
I have, with gratification and pleasure, received your note of the 29th Shawwal, 1333, and its tokens of sincere friendship have filled me with satisfaction and contentment.
I regret to find that you inferred from my last note that my attitude towards the question of frontiers and boundaries was one of hesitancy and lukewarmth. Such was in no wise the intention of my note. All I meant was that I considered that the time had not yet come in which that question could be discussed in a conclusive manner.
But, having realised from your last note that you considered the question important, vital and urgent, I hastened to communicate to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the purport of your note. It gives me the greatest pleasure to convey to you, on their behalf, the following declarations which, I have no doubt, you will receive with satisfaction and acceptance.
The districts of Mersin and Alexandretta,[GA주419-1] and portions of Syria lying to the west of the districts of Damascus, Homs, Hama and Aleppo,[GA주419-2]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must on that account be excepted from the proposed delimitation.
Subject to that modification, and without prejudice to the treaties concluded between us and certain Arab Chiefs, we accept that delimitation.
As for the regions lying within the proposed frontiers, in which Great Britain is free to act without detriment to the interests of her ally France, I am authorised to give you the following pledges on behalf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and to reply as follows to your note:
(1) That, subject to the modifications stated above, Great Britain is prepared to recognise and uphold the independence of the Arabs in all the regions lying within the frontiers proposed by the Sharif of Mecca;
(2) That Great Britain will guarantee the Holy Places against all external aggression, and will recognise the obligation of preserving them from aggression;
(3) That, when circumstances permit, Great Britain will help the Arabs with her advice and assist them in the establishment of governments to suit those diverse regions;
(4) That it is understood that the Arabs have already decided to seek the counsels and advice of Great Britain exclusively; and that such European advisers and officials as may be needed to establish a sound system of administration shall be British;
(5) That, as regards the two vilayets of Baghdad and of Basra, the Arabs recognise that the fact of Great Britain’s established position and interests there will call for the setting up of special administrative arrangements[GA주420-1] to protect those regions from foreign aggression, to promote the welfare of their inhabitants, and to safeguard our mutual economic interests.
I am confident that this declaration will convince you, beyond all doubt, of Great Britain’s sympathy with the aspirations of her friends the Arabs; and that it will result in a lasting and solid alliance with them, of which one of the immediate consequences will be the expulsion of the Turks from the Arab countries and the liberation of the Arab peoples from the Turkish yoke which has weighed on them all these long years.
I have confined myself in this note to vital questions of primary importance. If there are any other matters in your notes, which have been overlooked, we can revert to them at some suitable time in the future.
I have heard with great satisfaction and pleasure that the Sacred Kiswa[GA주420-2] and the charitable gifts which had gone with it, had arrived safely and that, thanks to your wise directions and arrangements, they were landed without trouble or damage in spite of the risks and difficulties created by the present deplorable war. We pray Almighty God that He may bring a lasting peace and freedom to mankind.
I am sending this note with your faithful messenger, Shaikh Muhammad ibn ‘Aref ibn ‘Uraifan, who will lay before you certain interesting matters which, as they are of secondary importance, I have abstained from mentioning in this note.
Compliments.}}}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October 24, 1915.

I HAVE received your letter of the 29th Shawal, 1333,[IO4본-1] with much pleasure and your expressions of friendliness and sincerity have given me the greatest satisfaction.
I regret that you should have received from my last letter[AAC주7] the impression that I regarded the question of the limits and boundaries with coldness and hesitation; such was not the case, but it appeared to me that the time had not yet come when that question could be discussed in a conclusive manner.[AAC주8]
I have realised, however, from your last letter that you regard this question as one of vital and urgent importance. I have, therefore, lost no time in informing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of the contents of your letter, and it is with great pleasure that I communicate to you on their behalf the following statement, which I am confident you will receive with satisfaction:–
The two districts of Mersina and Alexandretta and portions of Syria lying to the west of the districts of Damascus, Homs, Hama and Aleppo[IO4본-2]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should be excluded from the limits demanded.[AAC주9]
(2) Great Britain will guarantee the Holy Places against all external aggression and will recognise their inviolability.
(3) When the situation admits, Great Britain will give to the Arabs her advice and will assist them to establish what may appear to be the most suitable forms of government in those various territories.
(4) On the other hand, it is understood that the Arabs have decided to seek the advice and guidance of Great Britain only, and that such European advisers and officials as may be required for the formation of a sound form of administration will be British.
(5) With regard to the vilayets of Bagdad and Basra, the Arabs will recognise that the established position and interests of Great Britain necessitate special administrative arrangements[AAC주10] in order to secure these territories from foreign aggression, to promote the welfare of the local populations and to safeguard our mutual economic interests.
I am convinced that this declaration will assure you beyond all possible doubt of the sympathy of Great Britain towards the aspirations of her friends[AAC주11] the Arabs and will result in a firm and lasting alliance, the immediate results of which will be the expulsion of the Turks from the Arab countries and the freeing of the Arab peoples from the Turkish yoke, which for so many years has pressed heavily upon them.
I have confined myself in this letter to the more vital and important questions, and if there are any other matters dealt with in your letters which I have omitted to mention, we may discuss them at some convenient date in the future.
It was with very great relief and satisfaction that I heard of the safe arrival of the Holy Carpet and the accompanying offerings which, thanks to the clearness of your directions and the excellence of your arrangements, were landed without trouble or mishap in spite of the dangers and difficulties occasioned by the present sad war. May God soon bring a lasting peace and freedom to all peoples!
I am sending this letter by the hand of your trusted and excellent messenger, Sheikh Mohammed Ibn Arif Ibn Uraifan, and he will inform you of the various matters of interest, but of less vital importance, which I have not mentioned in this letter.
(Compliments.)
(Signed) A. HENRY McMAH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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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ن السير هنري مكماهون إلى الشريف حسين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إلى فرع الدوحة المحمدية وسلالة النسل النبوي الحسيب النسيب دولة صاحب المقام الرفيع الأمير المعظم السيد الشريف بن الشريف أمير مكة المكرمة صاحب السدة العلياء جعله الله حرزاً منيعاً للإسلام بعونه تعالى وهو دولة الأمير الجليل الشريف حسين بن علي أعلى الله مقامه.
قد تلقيت بيد الاحتفاء والسرور رقيمكم الكريم المؤرخ بتاريخ 29 شوال سنة 1333 وبه من عباراتكم الودية المحضة وإخلاصكم ما أورثني رضاء وسروراً .
أني متأسف أنكم استنتجتم من عبارة كتابي السابق أني قابلت مسألة الحدود والتخوم بالتردد والفتور، فإن ذلك لم يكن القصد من كتابي قط ولكني رأيت حينئذ أن الفرصة لم تكن قد حانت بعد للبحث في ذلك الموضوع بصورة نهائية.
ومع ذلك فقد أدركت من كتابكم الأخير أنكم تعتبرون هذه المسألة من المسائل الهامة الحيوية المستعجلة. فلهذا فإني قد أسرعت في إبلاغ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مضمون كتابكم وإني بكمال السرور أبلغكم بالنيابة عنها التصريحات الآتية التي لا أشك في أنكم تنزلونها منزلة الرضى والقبول.
إن ولايتي مرسين واسكندرونة وأجزاء من بلاد الشام الواقعة في الجهة الغربية لولايات دمشق الشام وحمص وحماة وحلب لا يمكن أن يقال أنها عربية محضة. وعليه يجب أن تستثنى من الحدود المطلوبة .
مع هذا التعديل وبدون تعرض للمعاهدات المعقودة بيننا وبين بعض رؤساء العرب نحن نقبل تلك الحدود.
وأما من خصوص الأقاليم التي تضمنها تلك الحدود حيث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مطلقة التصرف بدون أن تمس مصالح حليفتها فرنسا فإني مفوض من قبل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أن أقدم المواثيق الآتية وأجيب على كتابكم بما يأتي:
1.أنه مع مراعاة التعديلات المذكورة أعلاه ف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مستعدة بأن تعترف باستقلال العرب وتؤيد ذلك الاستقلال في جميع الأقاليم الداخلة في الحدود التي يطلبها دولة شريف مكة.
2.أن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تضمن الأماكن المقدسة من كل اعتداء خارجي وتعترف بوجوب منع التعدي عليها.
3.وعندما تسمح الظروف تمد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العرب بنصائحها وتساعدهم على إيجاد هيئات حاكمة ملائمة لتلك الأقاليم المختلفة.
4.هذا وأن المفهوم أن العرب قد قرروا طلب نصائح وإرشادات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وحدها وأن المستشارين والموظفين الأوروبيين اللازمين لتشكيل هيئة إدارية قويمة يكونون من الإنجليز.
5.أما من خصوص ولايتي بغداد والبصرة فإن العرب تعترف أن مركز ومصالح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الموطدة هناك تستلزم اتخاذ تدابير إدارية مخصوصة لوقاية هذه الأقاليم من الاعتداء الأجنبي وزيادة خير سكانها وحماية مصالحنا الاقتصادية المتبادلة.
وأني متيقن أن هذا التصريح يؤكد لدولتكم بدون أقل ارتياب ميل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نحو رغائب أصحابها العرب وتنتهي بعقد محالفة دائمة ثابتة معهم ويكون من نتائجها المستعجلة طرد الأتراك من بلاد العرب وتحرير الشعوب العربية من نير الأتراك الذي أثقل كاهلهم السنين الطوال.
ولقد اقتصرت في كتابي هذا على المسائل الحيوية ذات الأهمية الكبرى وإن كان هناك مسائل في خطابكم لم تذكر هنا فسنعود إلى البحث فيها في وقت مناسب في المستقبل.
ولقد تلقيت بمزيد السرور والرضى خبر وصول الكسوة الشريفة وما معها من الصدقات بالسلامة وأنها بفضل إرشاداتكم السامية وتدابيركم المحكمة قد أنزلت إلى البر بلا تعب ولا ضرر رغما عن الأخطار والمصاعب التي سببتها هذه الحرب المحزنة ونرجو الحق سبحانه وتعالى أن يعجل بالصلح الدائم والحرية لأهل العالم.
إني مرسل خطابي هذا مع رسولكم النبيل الأمين الشيخ محمد بن عارف بن عريفان وسيعرض على مسامعكم بعض المسائل المفيدة التي هي من الدرجة الثانية من الأهمية ولم أذكرها في كتابي هذا.
وفي الختام أبث دولة الشريف ذا الحسب المنيف والأمير الجليل كامل تحيتي وخالص مودتي وأعرب عن محبتي له ولجميع أفراد أسرته الكريمة راجيا من ذي الجلال أن يوفقنا جميعا لما فيه خير العالم وصالح الشعوب، أن بيده مفاتيح الأمر والغيب يحركها كيف يشاء ونسأله تعالى حسن الختام والسلام.
تحريرا في يوم الاثنين 15 ذي الحجة 1333.
نائب جلالة الملك
(السير أرثر هنري مكماهو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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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한국어 번역(《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1915년 10월 24일, 카이로.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1333년 샤왈 29일[ISL10-29]에 보내신 당신의 편지를 기쁨과 행복 속에 받았습니다. 그 안에 담긴 신실한 우의의 증언은 저에게 만족을 주었습니다.
지난 편지에서 변경과 국경의 문제에 대해 보인 보인 저의 태도가 망설임과 미온적인 모습으로 보였음을 알게 되어 유감스럽습니다. 그런 것들은 결코 제 편지의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제가 말하려 한 것은 문제를 결정적으로 논의할 수 있는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 생각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당신의 편지로부터 당신이 그 문제를 중요하고 중대하며 시급한 것으로 보고 있음을 깨달았으므로, 저는 당신의 서신의 요지에 대해 대영제국 정부와 소통하기를 서둘렀습니다. 저는 대영제국 정부를 대신해, 제가 생각건대 의심의 여지 없이 당신께서 만족스럽게 수용할 만한 다음과 같은 선언들을 전달할 수 있게 되어 몹시 기쁘게 생각합니다.
메르신과 알렉산트레타 구역들[GA주419-1] 및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GA주419-2]의 서쪽에 있는 시리아의 일부분은 순수한 아랍 지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그만큼의 몫은 제안된 구획안에서 배제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수정 사항을 조건으로, 또 우리와 특정한 아랍 수장(Chief)들 사이에서 결의된 조약들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그러한 구획안을 받아들입니다.
제안된 변경의 안에 있는 지방들에서 대영제국은 그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권을 훼손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신에게 대영제국의 정부를 대신해 아래의 약조들을 제시하며 또 당신의 서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 받았습니다.
(1) 앞서 언급한 수정 사항을 조건으로, 대영제국은 메카의 샤리프가 제안한 변경들 안의 모든 지역들에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하고 옹호할 준비가 되어 있음.
(2) 대영제국은 모든 외부의 위협(aggression)으로부터 성지(Holy Places)를 보장하고 위협으로부터 그곳을 보전해야 할 책무가 있음을 인정할 것임.
(3) 상황이 허락한다면 대영제국은 아랍인들에게 자문과 조력을 베풂을 통해 그 다양한 지역들에 적합한 정부의 수립을 도울 것임.
(4) 아랍인들은 이미 대영제국에게만 상의와 자문을 받기로 결정했으며, 그와 같이 행정의 건전한 체계를 수립하기 위해 필요한 유럽인 자문인과 관료들은 영국인으로 할 것.
(5) 바그다드와 바스라의 두 빌라예트에 대해서는 아랍인들이 대영제국의 기성의 지위와 이권에 의해 그 지역을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보호하고 그곳 주민들의 복지를 증진시키며 우리 상호의 경제적 이권들을 수호하기 위해 특별한 행정적 조치(special administrative arrangements)[GA주420-1]를 설정하기를 요구하는 것을 인정함.
저는 이 선언이 모든 의심을 넘어 당신에게 대영제국이 그 친우인 아랍인들의 열망에 공감함을 확신시켜 줄 것이며, 그들과 지속적이고 굳건한 동맹을 이루어 아랍 지역들에서의 튀르크인들의 퇴축과 그 모든 오랜 세월 동안 그들을 짓눌러 온 튀르크인들의 멍에로부터 아랍 민족들의 해방을 그 직접적인 결과 중 하나로서 이끌어낼 것임을 자신합니다.
저는 이 편지에서 가장 중요성이 높은 중대한 문제들에 대해서만 다루었습니다. 당신의 서신에서 간과된 다른 어떤 문제들이 있다면, 우리는 미래의 어느 적절한 때에 그 문제들을 되짚을 수 있을 것입니다.
성스러운 키스와(Kiswa)[GA주420-2]와 그와 동반하여 간 희사하는 선물들이 안전하게 도착했으며 작금의 개탄스러운 전쟁에 의해 생겨난 위험과 어려움들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현명한 지시와 조치 덕분에 그 물건들이 문제나 피해 없이 하역되었다는 말을 큰 만족과 기쁨 속에 들었습니다. 전능하신 신께서 인간들에게 오랜 평화와 자유를 가져와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저는 이 편지를 당신의 신실한 전령(messenger)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아레프 이븐 우라이판(Shaikh Muhammad ibn ‘Aref ibn ‘Uraifan)을 통해 보냅니다. 그는 당신에게, 그들의 중요도가 덜하여 이 편지에서는 언급을 생략한 특정한 흥미로운 문제들을 언급할 것입니다.
(미사여구)}}}

{{{#!wiki style="text-align: right;"
1915년 10월 24일}}}
1333년 샤왈 29일[IO4본-1][ISL10-29]에 보내신 당신의 서신을 큰 기쁨과 함께 받았습니다. 또한 당신이 친밀감과 진실된 감정을 표현해 주신 덕분에 저는 크게 만족했습니다.
지난 서신[AAC주7]으로부터 제가 경계와 국경에 대한 문제를 차갑고 망설이는 태도로 다루었다는 인상을 받으셨다면 유감스럽게 생각합니다.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만, 문제를 결정적으로 논의할 만한 때가 아직 오지 않았다고[AAC주8]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의 지난 서신으로부터 당신이 이 문제를 꼭 필요하고 시급한 중요성을 지닌 것으로 본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렇기에 저는 당신의 서신의 내용을 대영제국 정부에 지체 없이 알렸고, 매우 기쁘게도 정부를 대신해 당신이 만족스럽게 받아들일 것이라 확신하는 다음의 성명을 전달하려 합니다.
{{{#cf0921 메르신과 알렉산트레타 두 구역, 그리고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IO4본-2]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는 순수한 아랍 지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요구한 경계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상기한 수정 사항을 포함해, 또 아랍 수장(chief)들과의 사이에서 이미 맺어진 조약들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그러한 경계를 받아들입니다.
이 변경의 안에 존재하는 그러한 지방들에서 대영제국이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권을 훼손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대영제국의 정부의 이름으로 아래에 대해 보증하고 당신의 서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1)[IO4본-3] 상기한 수정 사항을 조건으로, 대영제국은 메카의 샤리프가 요구한 경계 안의 모든 지역에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AAC주9]
(2) 대영제국은 외부의 위협(aggression)으로부터 성지(Holy Places)를 보장하고 그곳의 불가침권(inviolability)을 인정합니다.
(3) 상황이 허락한다면, 대영제국은 아랍인들에게 그 다양한 강역들 안에서 가장 적절한 형태의 정부를 설립하는 데 조언을 제공하고 그들에게 조력할 것입니다.
(4) 다른 한편 아랍인들은 대영제국에게서만 자문과 지도를 받을 것이라고 결정했으며, 그와 같이 건전한 형태의 행정을 구성하는 데 필요한 유럽 자문인과 관료들은 영국인이어야만 할 것이라고 이해했습니다.
(5) 바그다드와 바스라의 빌라예트들에 대해서는 아랍인들이 그곳의 강역을 외국의 위협으로부터 지키고, 지역 인구의 복지를 증진시키며, 우리 상호 간의 경제적 이익을 수호하기 위해 대영제국의 기성의 지위와 이익을 위한 특별한 행정적 조치[AAC주10]를 필요로 함을 인정해야 합니다.
저는 이 선언이, 대영제국이 그 친우[AAC주11]인 아랍의 열망에 대해 갖는 공감의 감정에 대해 가질 수 있는 모든 의심을 넘어, 아랍 지역들로부터 튀르크인들을 몰아내고 튀르크인들에 의해 기나긴 세월 동안 무겁게 그들의 어깨를 누르던 멍에로부터 아랍인들을 자유롭게 하는 즉각적인 결과를 보증하여 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저는 이 서신에서 더 필요성이 높고 중요한 문제들에 대해서만 다루었습니다. 만일 당신의 서신에서 다루었으나 제가 언급에서 누락한 어떤 다른 문제들이 있다면, 우리는 미래의 가까운 시일에 이를 논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벌어지는 슬픈 전쟁에 의해 초래된 위험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당신의 명확한 지시와 훌륭한 조치 덕분에 문제나 불행한 사고 없이 성스러운 융단과 그에 동반하는 물품들이 안전하게 도착했음을 듣게 되어 몹시 안심되고 만족스럽습니다. 신께서 곧 모든 민족에게 오랜 평화와 자유를 가져다 주시기를!
저는 이 서신을 당신이 신뢰하는 훌륭한 전달자인 셰이크 무함마드 이븐 아리프 이븐 우라이판(Sheikh Mohammed Ibn Arif Ibn Uraifan)의 손에 맡겨 보냅니다. 그는 이 서신에서 제가 언급하지 않은, 이권과 관련된 다양하지만 논의의 필요성이 덜한 여러 문제에 대해 알려줄 것입니다.
(미사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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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서 헨리 맥마흔의 서명)}}}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3.5. 1915년 11월 5일 후세인 → 맥마흔(5차)

{{{#!folding [ 영문(《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Mecca, Zul-Hejja 27, 1333.
[November 5, 1915.]

Complimentary titles.
With great gratification have we received your note of the 15th Zul-Hejja [October 24] to which we would reply as follows.
First, in order to facilitate agreement and serve the cause of Islam by the removal of possible sources of hardship and tribulation, and in earnest of the particular esteem in which we hold Great Britain, we no longer insist on the inclusion of the districts[GA주421-1] of Mersin and Adana in the Arab Kingdom. As for the vilayets of Aleppo and Bairut and their western maritime coasts, these are purely Arab provinces in which the Moslem is indistinguishable from the Christian, for they are both the descendants of one forefather. And we Moslems intend, in those provinces, to follow the precepts laid down by the Commander of the Faithful, ‘Umar ibn al-Khattab (God have mercy upon him!), and the caliphs who came after him, when he enjoined upon the Moslems to treat the Christians on a footing with themselves, saying: they are to enjoy the same rights and bear the same obligations as ourselves. They will have, moreover, their denominational privileges, as far as the public interest allows.
Secondly, since the provinces of Iraq were part of the former Arab Empire, and indeed were the seat of government in the days of the Caliph ‘Ali ibn Abu-Taleb (God’s favour be upon him!) and of all the caliphs after him; and since it was in those very provinces (and more particularly in Basra which was the first centre of Arab culture) that the civilisation of the Arabs and the expansion of their power flourished – a fact that gives them in the eyes of all Arabs, both far and near, the precious significance of an unforgettable heritage; for these reasons, we should find it impossible to persuade or compel the Arab nation to renounce that honourable association. On the other hand, since the safeguards referred to in your clause 5 concerning Great Britain’s interests are naturally secured – for the safeguarding of British interests with which are bound up our own is one of our main concerns – we should be willing, in our desire to facilitate agreement, to allow those parts which are now occupied by British troops[GA주422-1] to remain so occupied for a period to be determined by negotiation, without prejudice to the rights of either party or injury to the natural wealth and resources of those parts. It being provided that, during the period of the occupation, the Arab Kingdom shall receive suitable pecuniary assistance towards the burden of expenditure which a nascent kingdom inevitably has to bear; and that the agreements in force with certain Chiefs in those parts will be respected.
Thirdly, your advocacy of speedy action seems to us to entail risks as well as advantages. In the first place, premature action might give rise among those Moslems who do not as yet appreciate the realities of the situation, to the criticism that, by proclaiming a revolt, we are seeking the disruption of Islam. In the second place, we have to consider what our position would be against Turkey who is aided by all the might of Germany, in the event of one of the Entente Powers weakening to the extent of being compelled to make peace with the Central Powers: what attitude would Great Britain and her remaining allies adopt to preclude the possibility of the Arab nation being left alone to face Turkey and her allies? We would have had no anxiety had the conflict lain between us and the Turks alone. These aspects of the question have to be considered, especially as, if we were to enter the War in an informal way, it might be contended by some of the belligerents that they have a right, in concluding the peace, to interfere in our affairs.
Fourthly, the Arabs firmly believe that, after the War, the German-ridden Turks will try to give them constant provocation, in religious as well as temporal matters, and to wreak the utmost vengeance upon them. On their side, the Arabs have resolved and vowed to fight the Turks and continue fighting them until not one of them (save for women and children) remains in any of the Arab countries. Our present deliberation is on account of the considerations stated above.
Fifthly, the moment the Arabs feel confident that, when the time comes for the conclusion of peace in Europe, Great Britain and her allies will not leave them in the lurch face to face with Turkey and Germany, but that they intend to help them and advocate their case effectively in the peace negotiations, from that moment will Arab participation in the War undoubtedly serve the general Arab interest.
Sixthly, our previous communication dated the 29th Shawwal, 1333, makes it superfluous for us to reply to clauses 3 and 4 of your letter, relating to forms of administration, advisers and officials, especially as it is clear from Your Excellency’s declarations that there will be no interference in our internal affairs.
Seventhly, we request a clear and final reply, in the shortest possible time, to the questions and problems set forth above, so that the necessary action may be taken with the least possible delay. In our desire to secure agreement which should be satisfactory to both sides, we have gone to the furthest lengths of concession. For we know that the outcome of this war for us can only be either to achieve victory, which will secure to the Arabs a life worthy of their ancient glory, or to find destruction in the attempt. Were it not for the determination shown by the Arabs to realise their aspirations, I would have elected to retire to some mountain-top. But they pressed me to lead the movement to its goal.
Compli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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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O5본-1]
November 5, 1915.

(In the name of God, the Merciful, the Compassionate!)
To his Excellency the most exalted and eminent Minister who is endowed with the highest authority and soundness of opinion. May God guide him to do His Will!
I RECEIVED with great pleasure your honoured letter, dated the 15th Zil Hijja[AAC주12] (the 24th October, 1915), to which I beg to answer as follows:–
1. In order to facilitate an agreement and to render a service to Islam, and at the same time to avoid all that may cause Islam troubles and hardships–seeing moreover that we have great consideration for the distinguished qualities and dispositions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we renounce our insistence on the inclusion of the vilayets of Mersina and Adana in the Arab Kingdom. But the two vilayets[IO5본-2] of Aleppo and Beirut and their sea coasts are purely Arab vilayets,[IO5본-3] and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a Moslem and a Christian Arab: they are both descendants of one forefather.
We Moslems will follow the footsteps of the Commander of the Faithful Omar ibn Khattab, and other Khalifs succeeding him, who ordained in the laws of the Moslem Faith that Moslems should treat the Christians as they treat themselves. He, Omar, declared with reference to Christians: “They will have the same privileges and submit to the same duties as ourselves.” They will thus enjoy their civic rights in as much as it accords with the general interests of the whole nation.
2. As the Iraqi vilayets[IO5본-4] are parts of the pure Arab Kingdom, and were in fact the seat of its Government in the time of Ali ibn Abu Talib, and in the time of all the Khalifs who succeeded him; and as in them began the civilisation of the Arabs, and as their towns[IO5본-5] were the first towns built in Islam where the Arab power became so great; therefore they[IO5본-6] are greatly valued by all Arabs far and near, and their traditions cannot be forgotten by them. Consequently, we cannot satisfy the Arab nations or make them submit to give us such a title to nobility.[IO5본-7] But in order to render an accord easy, and taking into consideration the assurances mentioned in the fifth article of your letter to keep and guard our mutual interests in that country as they are one and the same, for all these reasons we might agree to leave under the British administration for a short time those districts now occupied by the British troops without the rights of either party being prejudiced thereby (especially those of the Arab nation; which interests are to it economic and vital), and against a suitable sum paid as compensation to the Arab Kingdom for the period of occupation, in order to meet the expenses which every new kingdom is bound to support; at the same time respecting your agreements with the Sheikhs of those districts, and especially those which are essential.
3. In your desire to hasten the movement we see not only advantages, but grounds of apprehension. The first of these grounds is the fear of the blame of the Moslems of the opposite party (as has already happened in the past), who would declare that we have revolted against Islam and ruined its forces. The second is that, standing in the face of Turkey which is supported by all the forces of Germany, we do not know what Great Britain and her Allies would do if one of the Entente Powers were weakened and obliged to make peace. We fear that the Arab nation will then be left alone in the face of Turkey together with her allies, but we would not at all mind if we were to face the Turks alone.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take these points into consideration in order to avoid a peace being concluded in which the parties concerned may decide the fate of our people as if we had taken part in the war without making good our claims to official consideration.
4. The Arab nation has a strong belief that after this war is over the Turks under German influence will direct their efforts to provoke the Arabs and violate their rights, both material and moral, to wipe out their nobility and honour and reduce them to utter submission as they are determined to ruin them entirely. The reasons for the slowness shown in our action have already been stated.
5. When the Arabs know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is their ally who will not leave them to themselves at the conclusion of peace in the face of Turkey and Germany, and that she will support and will effectively defend them, then to enter the war at once will, no doubt, be in conformity with the general interest of the Arabs.
6. Our letter dated the 29th Shauâl, 1333[AAC주13] (the 9th September, 1915), saves us the trouble of repeating our opinions as to articles 3 and 4 of your honoured last letter regarding administration, Government advisers and officials, especially as you have declared, exalted Minister,[IO5본-8] that you will not interfere with internal affairs.
7. The arrival of a clear and definite answer as soon as possible to the above proposals is expected. We have done our utmost in making concessions in order to come to an agreement satisfying both parties. We know that our lot in this war will be either a success, which will guarantee to the Arabs a life becoming their past history, or destruction in the attempt to attain their objects. Had it not been for the determination which I see in the Arabs for the attainment of their objects, I would have preferred to seclude myself on one of the heights of a mountain, but they, the Arabs, have insisted that I should guide the movement to this end.
May God keep you safe and victorious, as we devoutly hope and desire.
27th Zil Hijja, 1333.[IO5본-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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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ن الشريف حسين إلى السير هنري مكماهون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إلى معالم الشهم الهمام ذو الأصالة والرياسة الوزير الخطير وفقه الله لمرضاته بملء الإيناس تلقينا مرسومكم الموقر الصادر وأحلناه محل التبجيل وعلى مؤداه نجيب الشهامة.
أولاً ـ تسهيلا للوفاق وخدمة للإسلامية فرارا مما يكلفها المشاق والأحن ولما لحكوم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من الصفات والمزايا الممتازة لدينا نترك الإلحاح في إدخال ولايات مرسين واطنة في أقسام المملكة العربية وأما ولايتي حلب وبيروت وسواحلها فهي ولايات عربية محضة ولا فرق بين العربي المسيحي والمسلم فإنهما ابنا جد واحد، ولتقوم فيهم منا معاشر المسلمين ما سلكه أمير المؤمنين عمر بن الخطاب من أحكام الدين الإسلامي ومن تبعه من الخلفاء أن يعاملوا المسيحيين كمعاملاتهم لأنفسهم بقوله "لهم مالنا وعليهم ما علينا" علاوة على امتيازاتهم المذهبية وبما تراه المصلحة العامة وتحكم به.
ثانيا ـ حيث أن الولايات العراقية هي من أجزاء المملكة العربية المحضة، بل هي مقر حكومتها على عهد علي بن أبي طالب كرم الله وجهه ثم على عهد عموم الخلفاء من بعده، وبها قامت مدنية العرب وأول ما اختطوه من المدن والأمصار واستفلحت دولهم فلها لدى العرب أقصاهم وأدناهم القيمة الثمينة والآثار التي لا تنسى، فلا يمكنا إرضاء الأمة العربية وارضاخها لترك ذلك الشرف ولكن تسهيلا للوفاق سيما والمحاذير التي أشرتم إليها في المادة الخامسة من رقيمكم آنف الذكر محفوظيها وصيانتها من طبقة وضرورة ما نحن فيه وحيازة ما نريد التوصل إليه، فإن أهم ما في هذا هي صيانة تلك الحقوق الممزوجة بحقوقنا بصورة كأنها الجوهر الفرد يمكنا الرضا بترك الجهات التي هي الآن تحت الأشغال البريطاني إلى مدة يسيرة، البحث فيما يقبل عن قدرها دون أن يلحق حقوق الجانبين مضرة أو خلل. سيما العربية بالنسبة لأمر مرافقها ومنابعها الاقتصادية الحياتية، وأن يدفع للمملكة العربية في مدة الأشغال المقدار المناسب من المال لضرورة ترتكبه كل مملكة حديثة الوجود. مع احترامنا لوفاقاتكم المشار عليها مع مشايخ تلك الجهات وبالأخص ما كان منها جوهريا.
ثالثا ـ رغبتكم في الإسراع بالحركة نرى فيه من الفوائد بقدر ما نرى فيه من المحاذير، أوله خشية لوم الإسلامية كما سبق الجاهل عن حقائق الحالة بأنا شققنا عصاها وأبدنا قواها، الثاني المقام تركيا معاضدتها جميع معاني قوى جرمانيا لجهلنا عما إذا حصل وهن إحدى دول الإتلاف وأوجبها على صلح دول الاتفاق، فكيف تكون خط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وحلفائها لئلا تكن الأمة العربية أمام تركيا وحلفائها معا إذ لا يهمنا ما إذا كنا والعثمانية رأسا لرأس.
وعلى هذا فضروري ملاحظة هذه الوجه ولا سيما عقد صلح اشتركنا في حربه بصورة غير رسمية يخول للمتصالحين البحث فيه عن شؤوننا .
رابعا ـ إن الأمة العربية تعتقد يقينا أن العثمانية عند وضع أوزار الحرب سيوجهون كل أعمالهم فيما يغضب العرب ويغتصب حقوقهم المادية والمعنوية وذهاب شعارهم وأحسابهم وإخضاعهم بكل معاني الإخضاع مع بقائها تحت النفوذ الألماني فهم عازمون على حربهم حتى لا يبقى لنا باقية وما يرى فينا الآن من التأني فقد سبق بيان علته .
خامسا ـ متى علمت العرب أن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حلفائهم لا يتركونهم عند الصلح على حالهم أمام تركيا وجرمانيا وأنهم يدافعون عنهم ويعاضدونهم ويدافعون عنهم الدفاع الفعلي فالدخول في الحرب من الساعة لا شك أنه مما يوافق المصالح العربية .
سادسا ـ إفادتنا السابقة الصادرة بتاريخ 29 شوال 1333 تغني عن إعادة القول في المادة الثالثة والرابعة من مرسومكم هذا الموقر في خصوصات الهيئات الحاكمة والمشاورين والموظفين سيما وقد صرحتم يا حضرة الشهم بأنكم لا تتدخلون في أمور الداخلية.
سابعا ـ وصول الجواب الصريح القطعي في أقرب زمن على ذكر أعلاه من الطلبات إذ أنا أستعملنا كلما يقربنا إليكم من التساهل الجدي الذي لا يراد به حقيقة جوهرية فإنا نعلم أن نصيبنا من هذه الحروب إما سعادة تضمن للعرب الحياة التي تناسب تاريخهم أو الاضمحلال في سبيلها. ولولا ما رأيتم ورأيت ما في عزمهم لاخترت العزلة في شواهق السراة، ولكن أبو علي يا عزيزي ـ أعزك الباري بمرضاته ألا أن يقودني إلى هذه المواقف.
ودم غانما سالما بما تحبه وتريده.
حرر في 27 من ذي الحجة 133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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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3년 둘힛자 27일
[1915년 11월 5일]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둘힛자 15일[ISL12-15]자 그대의 편지를 큰 기쁨과 함께 받았소. 우리는 다음과 같이 그에 회신하오.
첫째로, 고난과 시련을 불러올 수 있는 원천을 제거하여 협정을 성사시키고 이슬람의 대의에 봉사하기 위해, 또 우리가 대영제국에 대해 갖고 있는 각별한 존경심을 향해 진심을 다하여, 우리는 더는 아랍 왕국에 메르신과 아다나 구역[GA주421-1]을 포함시키리라고 주장하지 않을 것이오.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빌라예트들과 그 서쪽 해변에 대해서는, 그곳들은 무슬림들을 기독교인들과 구분할 수 없는 순수한 아랍 주(province)들인데, 그들 모두가 하나의 선조의 후손들이기에 그러하오. 또한 우리 무슬림들은 이 주(province)들에서 그가 "그들은 우리와 같은 권리를 향유하고 같은 의무를 질지어다."라고 말하며 무슬림들에게 기독교인들을 그들 스스로를 대하는 것과 같이 대하도록 명령한 신실한 사령관(Commander)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신께서 그에게 자비를 베푸시기를!)와 그의 뒤를 이은 칼리프들에 의해 내려진 계율들을 따르오. 나아가 그들은 공익이 허락하는 한 그들의 교파에 따른 특권을 누릴 것이오.
둘째로, 이라크의 주(province)들은 이전의 아랍 제국의 일부분이었고 실제로 그곳 정부의 왕좌는 칼리프 알리 이븐 아부 탈레브(‘Ali ibn Abu-Taleb)(신께서 그에게 은혜를 베푸시기를!)와 그의 뒤를 이은 모든 칼리프들의 것이었으며, 아랍인들의 문명과 그들의 세력 확장이 절정에 달했던 곳이 바로 그 주(province)들(더 구체적으로는 아랍 문화의 첫번째 중심이었던 바스라)에서였소. 이 사실은 먼 곳에 있거나 가까운 곳에 있거나를 가리지 않고 모든 아랍인들의 눈에 잊을 수 없는 유산으로서의 귀중한 의의를 부여하며, 그러한 이유들 때문에 우리는 아랍 민족이 그 영예로운 유대감을 포기하도록 설득하거나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하오. 다른 한편 대영제국의 이권을 고려하여 그대가 제시한 5항에서 언급한 보호 조치(safegurard)들은 우리의 이권과 밀접히 연계된 대영제국의 이권을 보호하는 것은 우리의 주된 고려 사항 중 하나이기에 자연히 보호 받으므로, 우리는 협정을 성사시키기를 희망함에 따라, 지금 영국 군대가 점령한 협상을 통해 결정될 때까지의 기간 동안 그 일부 지역에서 어느 이해 관계자의 권리를 침해하거나 국부와 자원들을 훼손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그 일부 지역들[GA주422-1]을 그대로 점령함을 흔쾌히 허가할 것이오. 점령 기간 동안 아랍 왕국은 왕국의 초석을 쌓을 때 불가피하게 감당해야 할 경비의 부담에 대해 적절한 금전적인 조력을 받을 것이며, 그 일부 지역들에 위치한 특정한 수장(Chief)들과 관련된 협정은 존중되어야 하오.
셋째로, 당신이 빠른 행동을 지지하는 것은 우리에게 이점 못지 않게 위험 부담을 지게 하는 것이오. 가장 먼저 때가 무르익지 않은 채로 행동하는 것은 아직 상황의 현실에 찬성하지 않는 무슬림들 사이에 반란에 대해 우리가 이슬람교계의 분열을 도모하고 있다고 하는 비판을 불러일으킬 수 있소. 다음으로 우리는 협상국 세력 중 하나가 쇠약해져 중부국(Central Powers)과 협상에 내몰릴 지경이 되었을 때 독일이 전력으로 돕는 튀르키예를 상대로 우리가 어떤 지위에 놓일지 고려해야 하오. 대영제국과 나머지 동맹 국가들이 아랍 국가가 튀르키예와 그 동맹 국가들을 상대로 홀로 남겨질 가능성을 방지하기 위해 어떤 태세를 취할 것이오? 우리는 우리와 튀르키예 하나만이 분쟁 상태로 남겨졌을 때에 대해서는 걱정하지 않소. 문제의 이런 측면들은, 특히 우리가 비공식적인 경로로 전쟁에 접어든 경우 어떤 교전국이 평화 조약(peace)을 맺으려 할 때 우리의 일에 간섭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할 수 있으므로, 고려되어야 하오.
넷째로, 아랍인들은 전쟁이 끝난 이후 독일의 마수 아래 있는 튀르크인들이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세속적인 문제에 대해서도 항구적인 문제의 불씨를 심고 최대한의 복수를 저지를 것이라고 확고히 믿고 있소. 그러한 측면에서 아랍인들은 튀르크인들에 맞서 아랍 지역들 내에서 (여성과 어린이를 제외한) 그들 중 단 한 명도 남지 않을 때까지 계속해서 싸울 것이라고 결의하고 맹세했던 것이오. 우리가 지금 신중한 것은 앞서 언급한 고려 사항들 때문이오.
다섯째로, 유럽에서 평화 조약을 맺을 때가 왔을 때 대영제국과 그 동맹 국가들이 그들을 튀르키예 및 독일과 그들을 마주하도록 그들을 저버리지 않을 것이며 그들을 도와 평화 협상에 그들의 실정을 효과적으로 옹호할 것이라고 아랍인들이 확신할 때, 바로 그 때부터 아랍인들은 전쟁에 의심을 갖지 않고 참여하여 보편적인 아랍의 이익을 위해 힘쓸 것이오.
여섯째로, 그대의 편지에 쓴, 행정과 고문관, 관료의 형식과 관련된 3항과 4항에 답하는 것은 1333년 샤왈 29일자[ISL10-29] 우리의 이전의 전언이 있었으므로 불필요한 것일 테요. 특히 각하께서 우리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셨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소이다.
일곱째로, 우리는 앞서 제시한 문제들에 대해 필요한 행동이 가능한 최소한만 지연되도록 가능한 한 가까운 시일 내에 분명하고 최종적인 회답을 바라오. 양 측 모두에게 만족스러운 협정을 보증하려는 우리의 희망에 따라 우리는 제시할 수 있는 최대의 양보를 내놓았소. 이는 우리가 이 전쟁에서 거둘 결과가 아랍인들에게 그들의 고대의 영광에 걸맞은 삶을 보증하여 줄 승리를 성취하거나 그 시도가 파멸에 이르는 것 중 어느 쪽만이 있을 뿐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이오. 아랍인들이 그들의 열망을 깨달았음을 보여주는 결심이 없었다면, 나는 어느 산 꼭대기로 물러나기를 택했을 것이오. 그러나 그들은 그 목적을 위해 나에게 운동을 이끌어달라고 밀어붙였던 것이외다.
(미사여구)}}}

[IO5본-1]{{{#!wiki style="text-align: right;"
1915년 11월 5일}}}
(자비롭고 우리를 아끼시는 신의 이름으로!)
드높은 권위와 의견의 건전함을 내려받으신, 가장 고귀하고 탁월한 판무관(Minister) 각하께. 신께서 그를 그의 의지대로 이끌어 주시기를!
둘힛자 15일[ISL12-15]자의 그대의 영광스러운 서신[AAC주12]을 크게 기쁜 마음으로 받았소. 나는 다음과 같이 삼가 답하오.
1. 협정을 가능케 하고 이슬람교계에 봉사를 제공하기 위해, 또 동시에 이슬람교계와의 사이에서 문제와 고난을 일으킬 수 있는 모든 것을 피하기 위해 - 더욱이 우리가 대영제국 정부의 차별화된 자질과 기질에 대해 깊이 고려하고 있으므로 - 우리는 아랍 왕국에 메르신과 아다나의 빌라예트들을 포함시키려는 우리의 주장을 포기하오. 그러나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IO5본-2]과 그 해안가는 순수한 아랍 빌라예트들[IO5본-3]이며, (그곳의) 무슬림과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 사이에는 차이가 없소. 그들은 모두 하나의 선조로부터 나온 후손이오.
우리 무슬림들은 기독교인들을 무슬림 스스로를 대하듯이 대하도록 무슬림 신앙에 따른 율법을 제정한 신심 깊은 사령관(Commander) 우마르 이븐 카타브와 그를 계승한 다른 칼리프들의 발자취를 따르오. 우마르, 그는 기독교도들에게 선언했소. "그들은 우리와 동일한 특권을 누릴 것이며, 같은 의무를 질 것이라." 그러므로 그들은 온 나라(nation)에서의 보편적인 이해 관계와 조화를 이루는 한 시민적 권리를 향유하오.
2. 이라크의 빌라예트들[IO5본-4]은 순수한 아랍 왕국의 일부분이며, 실제로 그곳 정부의 왕좌는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 시대와 그를 계승한 모든 칼리프들의 시대에 그들의 것이었소. 또한 그곳들로부터 아랍인들의 문명이 문을 열었고, [IO5본-5] 그곳의 도시(town)들은 이슬람에 의해 창건된 최초의 도시들이었으며 아랍의 힘이 몹시 강대하던 곳이었소. 그러므로 그곳들[IO5본-6]은 모든 가깝고 먼 아랍인들에게 몹시 가치 있는 곳으로 여겨졌으며, 그곳의 전통은 그들에게 잊힐 수 없소. 결론을 말하자면, 우리는 아랍 민족(nation)들을 만족시키거나 고귀한 그곳을 놓고 그러한 명목(title)을 우리에게 수여하도록 그들을 복종시킬 수 없소이다.[IO5본-7] 그러나 합의를 쉽게 이끌어내기 위해서, 또 그대의 서신에서 말한 5조에서 우리 상호의 이익이 하나이고 동일한 것이므로 그것들을 지키고 수호하겠다고 언급한 보증을 고려하여, 이러한 모든 이유들에 따라 우리는 어느 당사자의(특히 그들의 이해 관계가 경제적이고 생명과 연계된 아랍 민족의) 권리들을 침해하지 않고 새로운 왕국을 지원하려는 목적으로 한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점령 기간에 따라 적절히 합산하여 모든 아랍 왕국에 보상금을 지급한다면, 동시에 그곳의 구역들에서 셰이크들과 그대들이 맺은 협약, 특히 그것들 중에서도 본질적인 것을 존중한다면, 현재 영국 군대에 의해 점령된 구역들을 잠시 동안 영국의 행정 아래에 남겨 두는 데 동의하겠소.
3. 움직임을 서두르려는 당신의 희망에 대해 우리는 이점만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우려의 기초가 되는 요소들 또한 살피게 되는구려. 그것들 중 첫 번째는 (과거에 이미 불거졌던 것처럼) 우리가 이슬람교계에 맞서 반란을 일으켜 이슬람교계의 세력을 황폐화시키려 한다고 말할, 반대편에 설 무슬림들의 질책에 대한 두려움이오. 그 두 번째는 독일의 세력에 의해 지원받는 튀르키예에 맞설 때 협상국 세력의 하나가 약화되고 평화 조약(Peace)을 맺으려 할 때 대영제국과 그 동맹 국가들이 어떻게 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오. 우리는 그렇게 된다면 아랍 민족이 그 동맹 국가들과 함께 하는 튀르키예에 맞서 홀로 남겨질까봐 두렵소. 우리가 튀르크인들 하나와만 맞서야 한다면 우리는 절대 그러지 않을 것이오. 그러므로 우리가 우리의 주장을 (평화 조약에서) 공식적인 고려의 대상에 포함시키도록 하지 못한 채로 전쟁에 참여하게 된다면 당사자들이 우리 민족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는 평화 조약을 피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오도록 신경 써 주어야 하오.
4. 아랍 민족(nation)은 이 전쟁이 끝나고 나면 독일의 영향 아래 든 튀르크인들이 그들의 공력을 아랍인들을 들쑤시고 그들의 물적이거나 도덕적인 권리 모두를 침해하여서 아랍인들의 존엄성과 명예를 삭탈해 버리고 그들을 완전한 복종 아래 두어 아랍인들의 권리를 축소시키고자 하는 데 돌릴 것이라고 강하게 믿고 있소. 그들은 아랍인들을 완전히 황폐화시켜 버리려 결심했기 때문이오. 우리의 행동이 느린 이유들은 이미 언급하였소.
5. 아랍인들은 대영제국의 정부가 튀르키예와 독일에 맞서 평화 조약을 맺지 않을 동맹이며 그들이 아랍인들을 지원하고 효과적으로 방어해 줄 것이라는 것을 알게 되면 곧바로 의심 없이 아랍인들의 보편적인 이해 관계에 발맞추어 전쟁에 돌입할 것이오.
6. 1333년 샤왈 29일[ISL10-29]자 우리의 서신[AAC주13] 덕분에, 그대의 지난 서신에서 행정과 정부의 자문인 및 관료를 다룬 3조와 4조에 대해서는 우리의 의견을 반복하지 않아도 될 것이오. 특히 그대, 고귀하신 판무관(Minister)께서[IO5본-8] 그대들이 우리 국내의 사무에 대해서는 간섭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하신 덕분에 말이오.
7. 이상의 주장에 대한 가능한 한 빨리 명쾌하고 분명한 답신이 다다르기를 기대하오. 우리는 양 측 당사자를 만족시킬 협정을 창출하기 위해 최대한 양보했소이다. 우리는 이 전쟁에 운명을 걺으로써 아랍인들의 삶에서 그들의 과거의 역사를 재현하는 성공을 이루거나, 그러지 못하면 그들의 목적을 이루려 시도하다가 파멸을 맞이하게 될 것임을 알고 있소. 아랍인들에게 그들이 목적을 이룰 것이라고 보게 만드는 결단력이 없었다면, 나는 높은 산에 은둔하기를 택했을 것이오. 그러나 아랍인들은 앞서 말한 목적을 위해 내게 운동을 이끌어달라고 고집한 것이외다.
우리가 독실한 마음으로 바라고 또 희망하는 것과 같이 신께서 그대를 안전과 승리 속에서 지켜주시기를.
1333년 둘힛자 27[IO5본-9][ISL12-27]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3.6. 1915년 12월 16일 맥마흔 → 후세인(6차)

{{{#!folding [ 영문(《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Cairo, December 13, 1915.

Complimentary titles.
Your note of the 27th Zul-Hejja, 1333, has reached me, and I was glad to find that you consent to the exclusion of the vilayets[GA주423-1] of Mersin and Adana from the boundaries of the Arab countries.
I have also received with the utmost pleasure and satisfaction your assurances that the Arabs are resolved on following the precepts of the Caliph ‘Umar ibn al-Khattab (the blessing of God be upon him!) and of the other early caliphs, which guarantee equal rights and privileges to all creeds alike.
Your statement that the Arabs are prepared to recognise and respect all our treaties with other Arab Chiefs is of course taken to apply to all territories to be included within the frontiers of the Arab Kingdom, for Great Britain cannot repudiate agreements already concluded between her and those Chiefs.
As for the two vilayets of Aleppo and Bairut,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have fully understood your statement in that respect and noted it with the greatest care. But as the interests of their ally France are involved in those two provinces, the question calls for careful consideration. We shall communicate again with you on this subject, at the appropriate time.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as I have previously informed you, are prepared to give all the guarantees and assistance in their power to the Arab Kingdom. But their interests in the Vilayet of Baghdad necessitate a friendly and stable administration, such as you have outlined. The proper safeguarding of those interests calls for fuller and more detailed consideration than the present situation and the speed with which these negotiations are being conducted permit.
We fully approve your desire to proceed warily, and do not wish to impel you to hasty action which might obstruct the success of your objectives. But, at the same time, we deem it imperative that you should turn your endeavours to uniting the Arab peoples to our joint cause and to urging them to abstain from aiding our enemies in any manner whatsoever. On the success of your endeavours, and on the efficacy of the measures which, when the time comes, the Arabs will find it possible to take in aid of our cause, will the strength and permanence of our agreement depend.
In these circumstances,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have authorised me to declare to your Lordship that you may rest confident that Great Britain does not intend to conclude any peace whatsoever, of which the freedom of the Arab peoples and their liberation from German and Turkish domination do not form an essential condition.
In token of our good faith, and as a contribution to your endeavours in our joint cause, I am sending the sum of £20,000 with your trusted messenger.
Compliments.}}}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To Sherif Hussein:[IO6본-1]
December 14, 1915.

(After customary greetings and acknowledgment of previous letter.)
I AM gratified to observe that you agree to the exclusion of the districts[AAC주14] of Mersina and Adana from boundaries of the Arab territories.
I also note with great pleasure and satisfaction your assurances that the Arabs are determined to act in conformity with the precepts laid down by Omar Ibn Khattab[109] and the early Khalifs, which secure the rights and privileges of all religions alike.
In stating that the Arabs are ready to recognise and respect all our treaties with Arab chiefs, it is, of course, understood that this will apply to all territories included in the Arab Kingdom, as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cannot repudiate engagements which already exist.
With regard to the vilayets of Aleppo and Beirut,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have fully understood and[AAC주15] taken careful note of your observations, but, as the interests of our ally, France, are involved in them both,[AAC주16] the question will require careful consideration and a further communication on the subject[112] will be addressed to you in due course.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as I have already informed you, are ready to give all guarantees of assistance and support within their power to the Arab Kingdom, but their interests demand, as you yourself have recognised, a friendly and stable administration in the vilayet of Bagdad, and the adequate safeguarding of these interests calls for a much fuller and more detailed consideration than the present situation and the urgency of these negotiations permit.
We fully appreciate your desire for caution, and have no wish to urge you to hasty action, which might jeopardise the eventual success of your projects, but, in the meantime, it is most essential that you should spare no effort to attach all the Arab peoples to our united cause and urge them to afford no assistance to our enemies.
It is on the success of these efforts and on the more active measures which the Arabs may hereafter take in support of our cause, when the time for action comes, that the permanence and strength of our agreement must depend.
Under these circumstances I am further directed by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to inform you that you may rest assured that Great Britain has no intention of concluding any peace in terms of which the freedom of the Arab peoples from German and Turkish domination does not form an essential condition.
As an earnest of our intentions, and in order to aid you in your efforts in our joint cause, I am sending you by your trustworthy messenger a sum of twenty thousand pounds.
(Customary ending.)
(Signed) H. McMAHON.
}}}

{{{#!folding [ 아랍어판(아랍어 위키문헌 제공) 펼치기 · 접기 ]
من السير هنري مكماهون إلى الشريف حسين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إلى صاحب الأصالة والرفعة وشرف المحتد سلالة بيت النبوة والحسب الطاهر والمنسب الفاخر دولة الشريف المعظم السيد حسين بن علي أمير مكة المكرمة قبلة الإسلام والمسلمين. أدامه الله في رفعة وعلاء.
وبعد، فقد وصلني كتابكم الكريم بتاريخ 14 ذي الحجة 1333 وسرني ما رأيت فيه من قبولكم إخراج ولايتي مرسين وأضنه من حدود البلاد العربية.
وقد تلقيت أيضاً بمزيد السرور والرضا تأكيداتكم أن العرب عازمون على السير بموجب تعاليم الخليفة عمر بن الخطاب رضي الله عنه وغيره من السادة الخلفاء الأولين ـ التعاليم التي تضمن حقوق كل الأديان وامتيازاتها على السواء.
هذا، وفي قولكم أن العرب مستعدون أن يحترموا ويعترفوا بجميع معاهداتنا مع رؤساء العرب الآخرين يعلم منه طبعاً أن هذا يشمل جميع البلاد الداخلة في حدود المملكة العربية لأن حكومة بريطانيا لا تستطيع أن تنقض اتفاقات قد أبرمت بينها وبين أولئك الرؤساء.
أما بشأن ولايتي حلب وبيروت فحكوم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قد فهمت كل ما ذكرتم بشأنهما ودونت ذلك عندها بعناية تامة ـ ولكن لما كانت مصالح حليفتها فرنسا داخلة فيهما فالمسألة تحتاج إلى نظر دقيق ـ وسنخابركم بهذا الشأن مرة أخرى في الوقت المناسب.
إن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كما سبقت فأخبرتكم مستعدة لأن تعطي كل الضمانات والمساعدات التي في وسعها إلى المملكة العربية ولكن مصالحها في ولاية بغداد تتطلب إدارة ودية ثابتة كما رسمتم، على أن صيانة هذه المصالح كما يجب تستلزم نظرا أدق وأتم مما تسمح به الحالة الحاضرة والسرعة التي تجري بها هذه المفاوضات.
وأننا نستوصب تماما رغبتكم في اتخاذ الحذر ولسنا نريد أن ندفعكم إلى عمل سريع ربما يعرقل نجاح أغراضكم ولكنا في الوقت نفسه نرى من الضروري جدا أن تبذلوا مجهوداتكم في جمع كلمة الشعوب العربية إلى غايتنا المشتركة وأن تحثوهم على ألا يمدوا يد المساعدة إلى أعدائنا بأي وجه كان. فإنهم على نجاح هذه المجهودات وعلى التدابير الفعلية التي يمكن للعرب أن يتخذوها لإسعاف غرضنا عندما يجئ وقت العمل تتوقف قوة الاتفاق بيننا وثباته.
وفي هذه الأحوال فإن حكومة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قد فوضت لي أن أبلغ دولتكم أن تكونوا على ثقة من أن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لا تنوي إبرام أي صلح كان إلاّ إذا كان من ضمن شروطه الأساسية حرية الشعوب العربية وخلاصها من سلطة الألمان والأتراك.
هذا وعربون على صدق نيتنا ولأجل مساعدتكم في مجهوداتكم في غايتنا المشتركة فإني مرسل مع رسولكم مبلغ عشرين ألف جنيه.
وأقدم في الختام عاطر التحيات القلبية وخالص التسليمات الودية مع مراسم الإجلال والتعظيم المشمولين بروابط الألفة والمحبة الصرفة لمقام دولتكم السامي ولأفراد أسرتكم المكرمة.
مع فائق الاحترام .
تحريرا في 8 صفر 1333
14/12/1915
المخلص
نائب جلالة الملك بمصر
(السير أرثر هنري مكماهون)
}}}

{{{#!folding [ 한국어 번역(《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1915년 12월 13일[ISL2-9]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1333년 둘힛자 27일자의 당신의 서신이 제게 다다랐습니다. 저는 당신이 메르신과 아다나의 빌라예트들[GA주423-1]을 아랍 지역들의 변경에서 제외하는 데 동의하셨음을 알게 되어 기뻤습니다.
아울러 저는 아랍인들이 칼리프 우마르 이븐 알카타브(신께서 그를 축복하시기를!)와 다른 이전의 칼리프들의, 모든 교도들에게 마찬가지로 동등한 권리와 특권을 보장하는 계율을 따르기로 결의함을 당신께서 보증해 주시기로 한 말씀을 지극한 기쁨과 만족 속에 전해 받았습니다.
아랍인들이 다른 아랍 수장(Chief)들과 맺은 모든 우리의 조약들을 인정하고 존중할 준비가 되어 있다는 당신의 말씀은 물론 아랍 왕국의 변경에 포함되는 모든 강역에 적용되는 것으로 이해했습니다. 대영제국이 자국과 그 수장들 사이에 이미 결의된 협정들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에 대해서는, 대영제국 정부가 당신의 말씀을 존중 속에 온전히 이해하고 이를 가장 많이 신경 써야 할 것으로 숙지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해 관계가 이 두 주(province)와 관련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문제는 조심스럽게 고려될 필요가 있습니다. 우리는 적절한 때에 이 주제에 대해 당신과 함께 다시 한 번 소통할 것입니다.
대영제국의 정부는 일찍이 당신에게 알렸던 것과 같이 아랍 왕국에게 힘 닿는 한 최대한의 보장과 조력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바그다드의 빌라예트에서의 그들의 이해 관계에 대해서는 당신이 지적한 것과 같이 친의에 입각하고 안정적인 행정이 필요합니다. 그러한 이해 관계를 적절히 보호하기 위해서 현재의 상황과 이 협상들이 지금 진행되는 동안 허락되는 속도에 비해서 더 온전하고 상세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일을 조심스럽게 진행하려 하는 당신의 희망에 온전히 찬성하고, 당신에게 당신의 목표가 성공하는 것을 방해할 조급한 행동을 강요하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는 당신의 노력이 아랍 민족(people)들을 우리의 공동의 대의 아래 단결시키고 그들이 우리의 적들을 어떤 식으로든 절대 돕지 않도록 억제하려는 방향으로 향하는 것이 절실하다고 봅니다. 우리의 협정의 힘과 지속성은 성공을 위한 당신의 노력과 시일이 다가왔을 때 아랍인들이 우리의 대의를 도우려 나설 수 있게 할 조치들의 효과에 기대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대영제국의 정부는 저에게 합하께 대영제국이 독일과 튀르크인들의 지배로부터 아랍 민족(people)들의 자유와 그들의 해방을 본질적인 조건으로 하지 않는 어떠한 평화 조약을 절대 맺지 않으려 함을 확신하셔도 좋을 것이라고 선언할 권한을 허가했습니다.
우리의 선량한 신의의 증표로서, 또 우리의 공동의 대의를 위한 당신의 노력에 이바지하고자, 당신의 믿음직한 전령(messenger)을 통해 합계 2만 파운드의 금액을 보내 드립니다.
(미사여구)}}}

샤리프 후세인께[IO6본-1]
{{{#!wiki style="text-align: right;"
1915년 12월 14일[ISL2-9]}}}
(상투적인 인삿말과 이전 서신에 대해 인지했음을 말한 이후)
당신께서 메르신과 아다나 구역[AAC주14]을 아랍의 국경 안 강역에서 제외하는 데 동의하셨음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또한 아랍인들이 모든 종교의 권리와 특권을 보전하기로 하였던 우마르 이븐 카타브와 선대 칼리프들에 의해 만들어진 계율에 따라 행동하기로 결정하였음을 당신께서 보증하여 주신 데 큰 기쁨과 만족을 느낌을 언급해야겠습니다.
아랍인들이 아랍 수장들과 맺은 우리의 모든 조약들을 인정하고 존중하여 주실 준비가 있다고 말씀하신 데 대해서는, 물론 대영제국이 기존의 관계를 부정할 수 없으므로 아랍 왕국 내에 포함되는 모든 강역에 적용될 것으로 이해합니다.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빌라예트들에 대해서는, 대영제국의 정부가 당신의 견해를 충분히 이해하고[AAC주15] 주의해야 할 것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해 관계가 양자 모두와[AAC주16] 관련되어 있으므로, 이 문제는 조심스러운 숙고의 대상이 될 필요가 있으며 이 주제에 대해 적절한 과정을 거쳐 당신과 더 심도 깊은 소통을 진행할 필요가 있습니다.
대영제국의 정부는 일찍이 당신에게 알렸던 것과 같이 아랍 왕국에게 힘 닿는 한 최대한의 보장과 조력을 베풀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당신께서 스스로 인정한 것처럼, 그들은 이권 측면에서 바그다드의 빌라예트에서 친의에 입각하고 안정적인 행정을 요구하며, 그러한 이권들을 적절히 보호하는 데는 현재의 상황과 이 협상의 시급함이 허락하는 것보다 더 충분하고 상세한 숙고가 필요합니다.
우리는 주의 깊게 행동해야 한다는 당신의 희망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고, 우리의 계획이 최종적인 성공으로 나아가는 것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황급한 행동을 당신에게 강권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렇지만 그 동안 모든 아랍 민족들에게 우리의 단결된 대의를 인식시키고 우리의 적에게 더 이상의 조력을 베풀지 않도록 하는 노력을 아끼지 않아야 함이 본질적으로 가장 중요합니다.
우리의 협약이 갖는 지속성과 힘은 이러한 노력들의 성공과 행동할 때가 왔을 때 아랍인들이 그로부터 우리의 대의명분을 지지하러 나서려는 활동적인 조치들에 기초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저는 더 나아가 대영제국의 정부로부터 대영제국이 독일인들과 튀르크인들의 지배로부터 아랍 민족들의 자유를 얻는 것이 본질적인 조건이 아닌 어떠한 평화 조약도 체결할 의사가 없음을 보증하기로 하였으므로 당신께서 안심하셔도 좋음을 안내 드리도록 전해 받았습니다.
우리의 진실된 의도를 담아, 또 우리의 공통적인 대의에 대한 당신의 노력을 돕기 위해서, 당신의 믿음직한 전령(messenger)을 통해 당신에게 2만 파운드를 보내드립니다.
(상투적 맺음말)
{{{#!wiki style="text-align: right;"
(아서 헨리 맥마흔의 서명)}}}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3.7. 1916년 1월 1일 후세인 → 맥마흔(7차)

{{{#!folding [ 영문(《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Mecca, Safar 25, 1334.
[January 1, 1916.]

Complimentary titles.
I have received your note of the 9th Safar, 1334 [December 13, 1915], with the bearer of this, and noted its contents which have filled me with the utmost satisfaction and gratification, inasmuch as they set my mind at rest over one point, namely the arrival of Muhammad Sharif al-Faruqi and his interview with you.[GA주424-1] You will now have satisfied yourself that our attitude was not prompted by personal desires, which would have been foolish, but was the result of the decisions taken and the desires expressed by our people; and that our role in the matter was confined to conveying and putting into effect those desires and decisions, thus merely discharging a duty with which our people had invested us. It is, in my view, most important that Your Excellency should realise that.
As for your statements concerning Iraq and the compensation to be paid during the period of occupation, I would illustrate the friendly sentiments animating us towards Great Britain and the confidence we repose in her, both in word and in deed, in the spirit as well as the letter, by leaving the assessment of the compensation to her wisdom and sense of fair play.
With regard to the northern parts and their coastal regions, we have already stated, in our previous note, the utmost that it was possible for us to modify. We made those modifications solely in order to achieve the ends which, Almighty God willing, we desire to attain. In that same spirit, we have felt bound to steer clear of that which might have impaired the alliance between Great Britain and France and their concord during the calamities of the present war. On the other hand – and this Your Excellency must clearly understand – we shall deem it our duty, at the earliest opportunity after the conclusion of the War, to claim from you Bairut and its coastal regions which we will overlook for the moment on account of France.
I find it superfluous to point out that this arrangement also serves Great Britain’s interests best; that it safeguards them as fully – if not more – as it secures our rights; and that no other arrangement is possible by which it could fall to Great Britain to achieve the aim, which she has at heart, of seeing her friends in contentment and happiness. All the more so as the proximity of the French to us would be a source of difficulties and disputes such as would render the establishment of peaceful conditions impossible. To say nothing of the fact that the people of Bairut are resolutely opposed to such a dismemberment, and would drive us to take a stand which might cause concern and trouble to Great Britain on a scale not far short of her present preoccupations, owing to what we firmly believe to be the community, and indeed the identity, of your interests and our own, and to be the only explanation of our unwillingness to deal with anyone else but Great Britain in these negotiations.
Thus any concession designed to give France or any other Power possession of a single square foot of territory in those parts is quite out of the question. In proclaiming this, I place all my reliance on the declarations which concluded your note, and this reliance is such that, at our death, it shall be inherited by those who live after us.
Your Excellency may rest assured, and Great Britain may rest assured, that we shall adhere to our resolve to which reference has already been made, and which was made known to Storrs – that able and accomplished man – two years ago. We are only waiting for an opportunity in consonance with our situation. It appears to be drawing nearer, and the hand of destiny seems to be driving it towards us in timely and unmistakable fashion, as though to provide us and those who think like us with weapons for meeting the criticism and facing the responsibilities in store.
Your statement that you do not wish to impel us to hasty action which might obstruct the success of your objectives renders further explanation superfluous, except that we shall have to let you know in due course our requirements in the way of arms, ammunition and so forth.
Compli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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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nuary 1, 1916.

(In the name of God, the Merciful, the Compassionate!)
To his Excellency the eminent, energetic and magnanimous Minister.
WE [121] received from the bearer your letter,[IO7본-1] dated the 9th Safar (the 14th December, 1915), with great respect and honour, and I have understood its contents,[IO7본-1] which caused me the greatest pleasure and satisfaction, as it[IO7본-1] removed that which had made me uneasy.
Your honour will have realised, after the arrival of Mohammed (Faroki) Sherif and his interview with you, that all our procedure up to the present was of no personal inclination or the like, which would have been wholly unintelligible, but that everything was the result of the decisions and desires of our peoples, and that we are but transmitters and executants of such decisions and desires in the position they (our people) have pressed upon us.
These truths are, in my opinion, very important and deserve your honour’s special attention and consideration.
With regard to what had been stated in your honoured communication concerning El Iraq as to the matter of compensation for the period of occupation, we, in order to strengthen the confidence of Great Britain in our attitude and in our words and actions, really and veritably, and in order to give her evidence of our certainty and assurance in trusting her glorious Government, leave the determination of the amount to the perception of her wisdom and justice.
As regards the northern parts and their coasts, we have already stated in our previous letter what were the utmost possible modifications, and all this was only done so to fulfil those aspirations whose attainment is desired by the will of the Blessed and Supreme God. It is this same feeling and desire which impelled us to avoid what may possibly injure the alliance of Great Britain and France and the agreement made between them during the present wars and calamities; yet we find it our duty that the eminent minister should be sure that, at the first opportunity after this war is finished, we shall ask you (what we avert our eyes from to-day) for what we now leave to France in Beirut and its coasts.
I do not find it necessary to draw your attention to the fact that our plan is of greater security to the interests and protection[AAC주17] of the rights of Great Britain than it is to us, and will necessarily be so whatever may happen, so that Great Britain may finally see her friends[AAC주18] in that contentment and advancement which she is endeavouring to establish for them now, especially as her Allies being neighbours to us will be the germ of difficulties and discussion with which there will be no peaceful conditions.[AAC주19] In addition to which the citizens[AAC주20] of Beirut will decidedly never accept such dismemberment,[AAC주21] and they may oblige us to undertake new measures which may exercise Great Britain, certainly not less than her present troubles, because of our belief and certainty in the reciprocity and indeed the identity of our interests,[AAC주22] which is the only cause that caused us never to care to negotiate with any other Power but you. Consequently, it is impossible to allow any derogation that gives France, or any other Power, a span of land in those regions.
I declare this, and I have a strong belief, which the living will inherit from the dead, in the declarations which you gave in the conclusion of your honoured letter. Therefore, the honourable and eminent Minister should believe and be sure, together with Great Britain, that we still remain firm to our resolution which Storrs learnt from us two years ago, for which we await the opportunity suitable to our situation, especially in view of that action the time of which has now come near and which destiny drives towards us with great haste and clearness, so that we and those who are of our opinion may have reasons for such action against any criticisms or responsibilities imposed upon us in future.
Your expression “we do not want to push you to any hasty action which might jeopardise the success of your aim” does not need any more explanation except what we may ask for, when necessary, such as arms, ammunition, &c.
I deem this sufficient, as I have occupied much of your Honour’s time. I beg to offer you my great veneration and respect.
25th Safar, 13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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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ن الشريف حسين إلى السير هنري مكماهون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معالي الوزير الخطير الشهم الهمام
بأنامل الإبجال والتوقير تلقينا رقيميكم 9 صفر الجاري برفق حاملهم وعلمت مضمونيهما وأدخلا علينا من الانشراح والارتياح مالا مزيد لإزالتهما ما يختلج بصدري ألا وهو وقوف حضرتك بعد وصول أحمد شريف وحظوته بالجناب بأن كلما أتينا به في الحال والشأن ليس بنا شئ عن عواطف شخصية أو ما هو في معناها مما لا يعقل، وأنها قرارات ورغائب أقوام وأنا لسنا إلاّ مبلغين أو منفذين لها بصفتنا التي ألزمونا بها إذ هذا عندي من أهم ما يجب وقوف شهامة الجناب عليه وعلمه به. أما ما جاء بالمحررات الموقرة فيما يتعلق بالعراق من أمر التعويض مدة الأشغال فلزيادة إيضاح وقول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بصفاتنا في القول والعمل في المادة والمعنى وإعلامها بأكيد اطمئنانا باعتماد حكومتها المفخمة نترك أمر تقدير مبلغه لمدارك حكمتها ونصفتها، أما الجهات الشمالية وسواحلها فما كان في الإمكان من تعديل أتينا به في رقيمنا السابق. هذا وما ذاك إلا للحرص على الأمنيات المرغوب حصولها بمشيئة الله تبارك وتعالى وعن هذا الحس والرغبة هما التي ألزمتنا بملاحظة اجتناب ما ربما أنه يمس حلف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لفرنسا واتفاقهما أبان هذه الحروب والنوازل ألا أننا مع هذا نرى من الفرائض التي ينبغي لشهامة الوزير صاحب الرياسة أن يتيقنها بأن عند أول فرصة تضع فيها أوزار هذه الحروب سنطالبكم بما نغض الطرف عنه اليوم لفرنسا في بيروت وسواحلها ولا أرى لزوما بأن نحيطكم بما في هذا أيضاً من تامين المنافع البريطانية وصيانة حقوقها هو أهم وأكبر مما يعود إلينا، وأن لابد من هذا على أي حالة كانت ليتم للعظمة البريطانية أن ترى أخصاءها في البهجة والرونق التي تهتم أن تراهم فيه سيما وأن جوارهم لنا سيكون جرثومة للمشاكل والمناقشات التي لا يمكن معها استقرار الحالة عدى أن البيروتيين بصورة قطعية لا يقبلون هذا الانفصال ويلجئونا على حالات جديدة تهم وتشغل بريطانيا بصورة لا تكون بأقل من اشتغالنا الحالي بالنظر لما نعتقده ونتقينه من اشتراك المنفعة ووحدتها وحدها وهي الداعية الوحيدة لعدم الفاتنا لسواكم في المخابرات وعليه يستحيل إمكان أي تساهل يكسب فرنسا أو سواها شبرا من أراضي تلك الجهات أصبح بهذا مع اعتماد لكل جوارحي اعتمادا يرثه الحي منا بعد الميت بتصريحاتكم التي ختمتم بها رقيمكم الموقر. وعليه فليعتقد جناب الوزير الخطير ولتعتقد بريطانيا الكبرى أنا على العزم الذي أشير إليه ويعلمه منا جناب الأريب الكامل استورس التي اقترب وقتها مما تسوقه الأقدار إلينا بكل سرعة ووضوح لتكن حجة لنا وعن رأينا على الاعتراضات والمسؤوليات المقدرة وفي تصريحاتكم بقولكم "وأنا لسنا نريد أن ندفعكم إلى عمل سريع ربما يعرقل نجاح أغراضكم" يغني عن زيادة الإيضاح، ما عدا طلب ما نرى لزومه عند الحاجة من الأسلحة وذخائرها الحربية وما هو في معناها.[* 이 녹색 글씨로 표시된 부분에 대해서는 앞서 언급하였듯 아랍어 위키문헌에서 1915년 9월 9일의 서신 후반부가 1916년 1월 1일 서신의 이 부분에 해당하는 내용으로 잘못 대체되어 있고, 또 유사한 의미를 지닌 두 아랍어판이 다른 문형으로 쓰여 있다. 아랍어 위키문헌의 1915년 9월 9일 서신에 잘못 삽입되어 있는 1916년 1월 1일 서신의 이본은 다음과 같다.
"ولذلك نرى أن من واجبنا أن نؤكد لكم أننا سنطلب إليكم في أول فرصة بعد انتهاء الحرب ما ندعه الآن لفرنسا في بيروت وسواحلها.
]
واكتفى بهذا القدر عن أشغال شهامتكم بتقديم وافر احتشاماتي وجزيل توقيراتي لمقام المقر الموقر.
وحرر في اليوم الخامس والعشرين من صفر الخير 133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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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34년 사파르 25일
[1916년 1월 1일]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전령을 통해 1334년 사파르 9일[ISL2-9]자 그대의 편지를 받았고, 무함마드 샤리프 알-파루키가 도착해 그대와 대담했다는 점 덕분에 안심하면서 그 내용을 지극한 만족과 기쁨과 함께 확인했소.[GA주424-1] 그대는 이제 우리의 태도가 어리석은 일개인의 희망에 의해 촉발된 것이 아니라 우리 민족에 의해 도출된 결의와 희망의 결과라는 점에서, 또 이 문제에 대한 우리의 역할이 그러한 희망과 결의를 수행하고 실현하는 데 한정되며 우리 민족이 우리에게 부여한 의무를 이행하는 것일 뿐이라는 점에서 만족하게 되었을 것이오. 내 생각에 각하께서 이를 반드시 깨달으시는 것이 가장 중요하오.
이라크와 관련된 그대의 언급과 점령 기간 동안 보상금이 지급될 것이라는 점에 대해서는, 편지에 더해 보상금의 평정(assessment)을 대영제국의 지혜와 공정한 실행의 감각에 맡김으로서 말로나 행동으로나 영혼의 차원에서나 우리가 대영제국 앞에서 생동감을 갖게 하는 친애의 감정과 우리가 대영제국에 대해 갖는 신뢰를 표현하고 싶소.
북부 지역과 그 해변 지역들에 대해서는, 우리는 이전의 편지에서 이미 우리가 수정안으로 내놓을 수 있는 최대치를 언급했소. 우리는 그러한 수정안을 오로지 전능하신 신께서 원하시는 대로 우리가 성취하기를 희망하는 결말에 다다르기 위해서만 그 수정안을 도출한 것이오. 마찬가지 차원에서, 우리는 작금의 전쟁이 불러온 재앙 동안 대영제국과 프랑스의 동맹과 그들의 화합을 해칠 수 있는 일을 피하고자 최선을 다한 것이오이다. 다른 한편으로, 또 각하께서 분명히 아셔야 하는 것은, 우리는 전쟁이 종결되고서 가장 빨리 잡을 수 있는 기회에 프랑스 때문에 잠시 동안 눈 감아 두려는 베이루트와 그 해변 지역들에 대해 주장하는 일을 우리의 의무로 여긴다는 것이오.
이 조치가 대영제국의 이익을 최대한 제공하며,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는 것만큼, 어쩌면 그보다 더 온전히 그대들의 것들을 수호하고, 또 대영제국이 마음을 쓰는 대로 그들의 친우들이 만족과 행복 속에 있는 것을 보게 한다는 목적을 달성케 할 더 나은 다른 조치가 없을 것임을 지적하는 것은 불필요할 것이오. 더욱이 프랑스인들과 우리가 인접하는 것은 평화로운 조건이 성립하지 못하게 할 것이므로 곤란과 분쟁의 원천이 될 것이오. 베이루트 사람들(people)이 그러한 분리에 단호히 반대할 것이고, 우리는 이러한 협상 속에서 그대들과 우리 자신의 이익 간의 공동체 의식, 또 실제로는 정체성을 이룰 것이며, 이를 처리할 때 다른 누구에 대해서도 원치 않고 대영제국만이 유일하게 설명하여 줄 것이라고 확고히 믿기 때문에, 대영제국을 현재 대영제국을 번뇌케 하는 것에 비해 크게 적지 않은 규모의 염려와 곤궁에 몰아넣게 할 것임은 말할 필요가 없을 게요.
그러므로 이 지역들 안에서 프랑스나 다른 어떤 열강(Power)에게 한 발짝만큼의 강역이라도 내어주려고 계획하는 것은 절대 불가능하오. 이를 선포하면서 나는 그대의 편지에서 결정된 선언들에 의지하고, 또 우리가 죽더라도 우리의 뒤를 이어 살아갈 이들이 우리를 계승하여 그에 의지할 것이오.
각하께, 또 대영제국에게 우리는 이미 마음 먹은, 또 2년 전에 - 능력 있고 훌륭한 사람인 - 스토어스에게 알렸던 결의를 사수함을 보증하오. 우리는 우리의 상황에 걸맞은 기회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오. 이는 가까이 다가온 일인 듯하며, 운명은 우리, 그리고 우리와 유사한 생각을 하는 이들에게 비판에 맞서고 닥쳐올 책임을 마주할 수 있는 무기를 제공하려는 듯이 이를 시의적절하고 놓칠 수 없는 흐름(fashion)에 따라 우리의 앞에 가져오도록 인도하고 있는 듯하오.
그대가 그대의 목적을 성공시키는 것을 방해할 조급한 행동으로 우리를 내몰지 않기를 원한다고 한 그대의 말씀에는, 우리가 적절한 과정을 거쳐 무기와 탄약 등에 대한 요구를 알릴 것이라는 점을 제외하면, 더 많은 설명을 붙일 필요가 없을 것이오.
(미사여구)}}}

{{{#!wiki style="text-align: right;"
1916년 1월 1일}}}
(자비롭고 우리를 아끼시는 신의 이름으로!)
탁월하고 활기 넘치며 관대한 판무관(Minister) 각하께.
우리는 전령을 통해 사파르 9일[ISL2-9]자 그대의 서신[IO7본-1]을 깊은 존경과 명예를 느끼며 받았소. 나는 그 내용[IO7본-1]을 이해했고, 그 서신[IO7본-1]이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요소들을 날려주었기 때문에, 나는 몹시 기쁘고 만족스럽소.
명예로운 그대가 무함마드 (파루키) 샤리프가 도착하고 그와 회견한 뒤로, 현재에 이르는 우리의 절차가 여지껏 전혀 이해할 수 없던 개인의 의향이나 그런 부류의 것에 의한 것이 아니며 모든 것은 우리 민족들의 결정과 희망의 결과이고 우리는 그들이 우리를 세운 자리에서 그러한 결정과 희망을 전달하고 집행하는 이라는 것을 깨달았을 거요.
내가 생각건대 이러한 진실들은 몹시 중요하며 명예로운 그대의 특별한 관심 및 고려에 걸맞소이다.
명예로운 그대의 전언에서 이라크에 대해 보상과 점령 기간의 문제에 대해 다루며 말한 부분에 대해서, 우리는 우리의 태도와 말과 행동으로 대영제국에 대한 신뢰를 실제적으로 또 진정성 있게 증진시키기 위해서, 또 우리가 영광스러운 대영제국 정부를 신뢰한다는 진실성과 보증의 증거를 남기기 위하여, 그 액수를 결정하는 일을 대영제국의 지혜와 정의에 대한 통찰의 몫으로 남겨두겠소.
북부 지역과 그 해안가에 대해서, 우리는 이미 가능한 최대한의 수정안을 지난 서신에서 언급했소. 그 모든 것은 신성하신 지고의 신의 의지가 성취하기를 희망하시는 열망들을 만족시키려는 것일 따름이오. 대영제국과 프랑스의 동맹, 그리고 현재의 전쟁과 재앙 동안에 둘 사이에서 맺어진 협정을 상처 입힐 수 있는 것을 피하도록 우리를 추동해 온 것 또한 같은 감정과 희망이오. 그러나 전쟁이 끝나는 대로 탁월한 판무관(minister)께서 이를 확언하도록 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이므로, 우리는 그대에게 (오늘부터 우리의 눈을 돌려둘) 베이루트와 그 해안가에 대해 지금 프랑스에게 남겨두려는 건에 대해 따져묻겠소.
나는 우리의 계획이 우리에게 그러한 것보다 대영제국에게 이권과 권리를 보호[AAC주17]하기로 더욱 큰 몫을 보증하는 것이며, 앞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반드시 그러하리라는 사실을 따로 언급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그러므로 대영제국은 끝내 대영제국의 친우들을[AAC주18] 대영제국이 그들을 위해 확립하고자 애쓰고 있는 만족과 진보 속에서 마주하게[AAC주18] 될 것인데, 특히 대영제국의 동맹 국가들이 우리의 이웃이 되는 것은 평화로울 조건이 결여된[AAC주19] 채로 곤란함과 논의를 불러 일으키는 싹(germ)이 될 것이오. 베이루트의 시민들[AAC주20]이 분명히 그러한 분리[AAC주21]를 받아들이지 않을 것임에 더해, 우리의 믿음과 실제적인 우리 이익의 동질성 면에서의 호혜성의[AAC주22] 확실함이 다른 어떤 열강(Power)과 절대 협상하지 않고 그대들과 협상에 나서게 만든 유일한 원인이므로, 그들은 우리에게 새로운 조치들을 동원하게 할 테요. 그것은 분명히 대영제국이 지금 겪고 있는 문제보다 적지 않은 일이 될 것이오. 결론을 말하자면, 이 지역의 땅 한 뙈기라도 프랑스에게나, 다른 어떤 세력(Power)에게든 넘겨주겠다고 수정하는 것은 불가능하오.
나는 그대의 명예로운 편지의 결론에서 제시한 선언들에 대해 죽은 자의 것을 산 자가 계승할 것이라는 것을 선언하며, 그에 대해 확고한 믿음을 갖고 있소이다. 그러므로 명예롭고 탁월한 판무관(Minister)과 대영제국은 우리가 우리의 상황에 적합한 기회를 기다리면서 스토어스가 2년 전에 인지했던 우리의 다짐을 여전히 확고히 지니고 있고, 특히 그러한 행동의 관점에서 그러할 시간이 지금 가까이 다가와 운명이 우리를 몹시 재빠르고 명확하게 행동하는 길로 이끌고 있으며, 그렇기에 우리와 우리와 의견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미래에 우리에게 던져질 어떠한 비판이나 책임론에 맞서 그런 행동에 나설 이유들을 가슴에 품게 될 수 있음을 믿고 확인해 주셔야 하오.
'우리는 당신의 계획이 최종적인 성공으로 나아가는 것을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황급한 행동을 당신에게 강권할 생각이 없다'는 당신의 표현은 필요한 경우 우리가 요청할 것들, 예컨대 무기나 탄약 등과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더 설명할 필요가 없는 것일 테요.
명예로운 그대의 시간을 지나치게 많이 빼앗았소. 이 정도면 충분하리라 생각하오. 그대에 대한 공경과 존경이 전해지기를 바라겠소.
1334년 사파르 25일.[ISL2-25]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3.8. 1916년 1월 30일 맥마흔 → 후세인(8차)

{{{#!folding [ 영문(《아랍의 각성》본) 펼치기 · 접기 ]
Cairo, January 30, 1916.

Complimentary titles.
With great pleasure and satisfaction have we received your note of the 25th Safar, 1334, from the hand of your faithful messenger who never fails to give us your oral messages as well. We fully realise and appreciate the motives which animate you in the momentous issue with which we are concerned, and we do not question the fact that you are working for the good of the Arab nation without any ulterior motive whatsoever.
We have noted what you say with regard to the Vilayet of Baghdad, and we shall examine the matter with the utmost care after the defeat of the enemy, when the time comes for the conclusion of peace.
As for the northern regions, we note with great satisfaction your desire to avoid anything that might impair the alliance between Great Britain and France. It has not escaped you that it is our firm determination not to allow anything, however small, to stand in the way of our ending this war in complete victory. Moreover, when victory is attained, the friendship between Great Britain and France will be stronger and closer than ever, cemented as it will have been by the shedding of British and French blood – the blood of those who have fallen fighting side by side in the cause of right and freedom.
The Arab countries are now associated in that noble aim which can be attained by uniting our forces and acting in unison. We pray God that success may bind us to each other in a lasting friendship which shall bring profit and contentment to us all.
We are very glad to hear that you are endeavouring to gain all the Arab tribes over to our joint cause, and to prevent them from giving any assistance to our enemies. We leave it to your discretion to choose the most suitable opportunity for the initiation of more decisive measures.
You will doubtless inform us, through the bearer of this note, of the ways in which we can help you. You may rest assured that all your requests will always be carefully considered and most expeditiously dealt with.
You will surely have heard that Sayyed Ahmad al-Sharif, the Sanusi, has lent an ear to the intrigues of our enemies and started hostilities against us, and you will doubtless be sorry to hear that he has so far lost sight of Arab interests that he has thrown in his lot with our enemies.[GA주427-1] He has now fallen a victim to his own misguided ways, and met with adversity at every turn. This may yet convince him of his error and lead him back into the path of reason and of peace, out of pity for his poor followers whom he is guiding to destruction.
Your faithful messenger who carries this note to you will give you all our news.
Compliments.}}}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IO8본-1]
January 25, 1916.

(After customary greetings.)
WE have received with great pleasure and satisfaction your letter of the 25th Safar (the 1st January)[AAC주23] at the hands of your trusty messenger, who has also transmitted to us your verbal messages.
We fully realise and entirely appreciate the motives which guide you in this important question, and we know well that you are acting entirely in the interests of the Arab peoples and with no thought beyond their welfare.
We take note of your remarks concerning the vilayet of Bagdad, and will take the question into careful consideration when the enemy has been defeated and the time for peaceful settlement arrives.
As regards the northern parts, we note with satisfaction your desire to avoid[148] anything which might possibly injure the alliance of Great Britain and France. It is, as you know, our fixed determination that nothing shall be permitted to interfere in the slightest degree with our united prosecution of this war to a victorious conclusion. Moreover, when the victory has been won, the friendship of Great Britain and France will become yet more firm and enduring, cemented by the blood of Englishmen and Frenchmen who have died side by side fighting for the cause of right and liberty.
In this great cause Arabia is now associated, and God grant that the result of our mutual efforts and co-operation will bind us in a lasting friendship to the mutual welfare and happiness of us all.
We are greatly pleased to hear of the action you are taking to win all the Arabs over to our joint cause, and to dissuade them from giving any assistance to our enemies, and we leave it to your discretion to seize the most favourable moment for further and more decided measures.You will doubtless inform us by the bearer of this letter of any manner in which we can assist you and your requests will always receive our immediate consideration.
You will have heard how El Sayed Ahmed el Sherif el Senussi has been beguiled by evil advice into hostile action, and it will be a great grief to you to know that he has been so far forgetful of the interests of the Arabs as to throw in his lot with our enemies. Misfortune has now overtaken him, and we trust that this will show him his error and lead him to peace for the sake of his poor misguided followers.
We are sending this letter by the hand of your good messenger, who will also bring to you all our news.
With salaams.
(Signed) H. McMAHO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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من السير مكماهون إلى الشريف حسين القاهرة في 24 ربيع الأول سنة 1334، 30 يناير سنة 1916
تلقينا بسرور كتابكم المؤرخ في 25 صفر بواسطة رسولكم الموثوق به وأطلعنا منه على رسالتكم الشفوية.
وأننا لنقدر حق التقدير الدوافع التي تقودكم في هذه القضية الهامة ونعرف جيداً أنكم تعملون في صالح العرب وأنكم لا ترمون إلى شئ ـ في عملكم ـ غير صالحهم وحريتهم.
وقد عنيت عناية خاصة بملاحظاتكم بشأن ولاية بغداد، وسنبحث هذا الموضوع باهتمام وعناية زائدين عندما تتم هزيمة العداء ونصل إلى التسويات السلمية.
أما ما يتعلق بالجهات الشمالية فقد كتبت ملاحظة من رغبتكم في تجنب كل ما من شانه الإساءة إلى تحالف إنجلترا وفرنسا وسررت جدا بإبداء مثل هذه الرغبة.
وأظنكم تعرفون جيدا أننا مقررون قرارا نهائيا بالا نسمح بأي تدخل ـ مهما قل شأنه ـ في اتفاقنا المشترك في إيصال هذه الحرب إلى الفوز ثم متى انتهت الحرب فإن صداقة فرنسا وإنجلترا ستقوى وتشتد، وهما اللتان بذلتا الدماء الإنجليزية والفرنسية جنبا في سبيل الدفاع عن الحقوق والحريات.
والآن وقد قررت البلاد العربية أن تشترك معنا في الدفاع عن الحقوق وتعمل معنا في سبيل القضية الهامة فإننا لنرجو الله أن تكون نتيجة هذه الجهود المشتركة وهذا التعاون الوطيد، صداقة دائمة، تعود على الجميع بالسرور والغبطة.
وقد سررنا جدا للحركة التي تقومون بها لإقناع الشعب بضرورة الانضمام إلى حركتنا والكف عن مساعدة أعدائنا. ونترك لفطنتكم وتقديراتكم تقرير الوقت المناسب، لاتخاذ تدابير أوسع من هذ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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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6년 1월 30일, 카이로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당신의 구두 전언(oral messages)까지 빠짐 없이 전달한 당신의 충직한 전령(messenger)의 손을 통해, 1334년 사파르 25일[ISL2-25]자 당신의 편지를 큰 기쁨과 만족 속에 받았습니다. 우리는 우리가 염려하는 중대한 화제에 대해 당신이 생동감을 느끼게 하는 동기들에 대해 온전히 깨닫고 또 찬성하며, 당신가 어떠한 이면의 동기 없이 아랍 민족(nation)의 선의를 위해 일하고 있다는 사실에 의문을 갖지 않습니다. 우리는 바그다드의 빌라예트에 대해 당신이 말한 내용을 주의 깊게 숙지했으며, 적을 패배시키고 평화 조약을 결의할 때가 왔을 때 이 문제를 최대한 신경 써서 검토할 것입니다.
북부 지역에 대해서는, 대영제국과 프랑스의 동맹을 해칠 수 있는 어떤 일이라도 피하려 한 당신의 희망을 크게 만족하며 주목합니다. 우리가 이 전쟁을 완전한 승리로 끝맺는 것을 가로막으려는 것이라면 어떤 것이든, 얼마나 작은 것이라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우리의 확고한 결의를 모르시지 않을 것입니다. 나아가 승리에 이르렀을 때, 대영제국과 프랑스의 우의는 정당성(right)과 자유의 대의를 위해 나란히 싸웠던,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흘린 피로 굳건해져 어느 때보다 강해지고 밀접해질 것입니다.
아랍 지역들은 이제 우리의 힘을 합치고 함께 행동함으로써 성취될 수 있는 그러한 고귀한 목적을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께 그 성공을 통해 우리 모두에게 이득과 만족을 가져올 오랜 우의로 우리 각각을 이끄시기를 기도드립니다.
우리는 당신께서 모든 아랍 부족들을 우리의 공동의 대의에 끌어들이려 노력하고 그들이 우리의 적에게 어떠한 조력을 베풀지 못하도록 막으려 하심을 듣게 되어 기쁩니다. 더욱 결정적인 조치를 시작하기 위한 가장 적절한 기회를 고르는 데 대한 재량권은 당신의 몫으로 남겨두겠습니다.
당신은 분명히 이 편지의 전달자(bearer)를 통해 어떤 방식으로 우리가 당신을 도울 수 있을지에 대해 알려주시겠지요. 당신의 모든 요청은 조심스럽게 고려될 것이며 신속하게 처리될 것임을 보증합니다.
세누시사이드 아흐마드 알 샤리프(Sayyed Ahmad al-Sharif)가 우리의 적들의 음모에 귀를 기울여 우리에게 적대하기 시작했음을 들으셨겠지요. 당신께서는 분명히 그가 아랍의 이익에 대해 완전히 눈을 감고 우리의 적에게 그의 운명을 건 데 대해 유감으로 생각하실 것입니다.[GA주427-1] 그는 그 스스로 잘못 접어든 길의 희생자가 되었으며, 일의 모든 곡절마다 역경에 처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지금 그가 파멸로 이끄는 그의 불쌍한 추종자들을 긍휼히 여겨, 그의 잘못을 깨닫고 이성과 평화의 길로 되돌아가게 될 것입니다.
이 편지를 당신에게 전달할 당신의 충직한 전령(messenger)이 우리의 모든 새로운 소식을 전할 것입니다.
(미사여구)}}}

[IO8본-1]{{{#!wiki style="text-align: right;"
1916년 1월 25일[ISL3-25]}}}
(상투적인 인삿말 이후)
당신의 구두 전언(Verbal Message)을 전달한 당신의 믿음직한 전령(messenger)의 손을 거쳐 사파르 25일[ISL2-25]자 당신의 편지[AAC주23]를 몹시 기쁘고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우리는 그대가 이 중요한 문제로 당신을 인도한 동기를 충분히 깨닫고 온전히 이해하고 있으며, 우리는 당신께서 아랍 민족들의 이익을 위해, 또 그들의 복지 이외에는 무엇도 생각하지 않고 행동하고 계심을 잘 알고 있습니다.
바그다드의 빌라예트에 대해 우리는 당신의 언급을 주의 깊게 살피고 있으며, 적이 완전히 패배하고 평화로운 해결을 위한 시간이 도래할 때에 이 문제를 주의 깊게 숙고하면서 다룰 것입니다.
북부 지방에 대해서는, 대영제국과 프랑스의 동맹을 상처 입힐 수 있는 어떤 것도 피하려 하려는 당신의 희망을 만족스러운 마음으로 주목합니다. 당신이 알다시피, 이 전쟁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위해 우리가 단결하여 앞으로 나아가는 데 그 무엇도 조금의 방해조차 될 수 없다는 것이 우리의 확고한 결심입니다. 게다가 우리가 승리를 성취했을 때, 대영제국과 프랑스의 우의는 정당성(right)과 자유의 대의를 위해 나란히 목숨을 걸고 싸운 영국인과 프랑스인들의 피로 굳건해져 더욱 확고하고 영속적인 것이 될 것입니다.
이 위대한 대의 아래 아라비아는 함께 하게 되었으며, 신께서는 우리의 서로에 대한 노력과 협력이 우리를 우리 모두의 상호 간의 복지와 행복을 위해 계속될 우의 속에 하나되는 것을 허락하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하나된 대의에 모든 아랍인들을 끌어들이고자 당신이 행동에 나설 것이며, 우리의 적에게 어떤 조력도 베풀지 못하도록 그들을 설득할 것이라는 데 매우 기쁩니다. 우리는 한 발짝 더 나아간 더 결정적인 수단들을 통해 가장 호의적인 순간을 손에 넣는 것을 당신의 재량권(discretion) 아래 맡겨 두겠습니다.
아마도 당신께서는 분명히 이 서신을 전할 전령(bearer)을 통해서 우리가 당신에게 조력할 수 있을 방법을 알려주시겠지요. 우리는 언제나 당신의 요청을 즉각적으로 고려할 것입니다.
알 사이드 아흐메드 알 샤리프 알 세누시(El Sayed Ahmed el Sherif el Senussi)가 사악한 귀띔에 홀려 우리와 적대하게 되었음을 아셨을 겁니다.[155] 그가 그의 운명을 우리의 적에 걺으로써 아랍의 이권을 까맣게 망각하게 된 것을 알게 되시어 몹시 슬프실 듯합니다. 불운이 지금 그를 덮쳤고, 우리는 이를 통해 그가 그의 잘못을 알게 될 것이며 가엾게도 잘못 인도된 그의 추종자들을 지키고자 그가 평화의 길로 나아갈 것을 믿습니다.
당신에게 우리의 모든 소식을 전해주기도 할, 당신의 훌륭한 전령의 손을 빌려 이 서신을 보냅니다.
인사(salaam)를 담아.
{{{#!wiki style="text-align: right;"
(아서 헨리 맥마흔의 서명)}}}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구두 전언(oral messages/Verbal Message)에 대해서는 아래의 '1916년 1월 1일 후세인 빈 알리의 전령이 전달한 '구두 전언'' 단락을 참고.

3.9. 1916년 2월 18일 후세인 → 맥마흔(9차)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February 18, 1916.

(In the name of the Merciful, the Compassionate!)
To the most noble His Excellency the High Commissioner, May God protect him.
(After compliments and respects.)
WE received your Excellency’s letter dated 25th Rabi El Awal, and its contents filled us with the utmost pleasure and satisfaction at the attainment of the required understanding and the intimacy desired. I ask God to make easy our purposes and prosper our endeavours. Your Excellency will understand the work that is being done, and the reasons for it from the following: –
Firstly. – We had informed your Excellency that we had sent one of our sons to Syria to command the operations deemed necessary there. We have received a detailed report from him stating that the tyrannies of the Government there have not left of the persons upon whom they could depend, whether of the different ranks of soldiers or of others, save only a few, and those of secondary importance; and that he is awaiting the arrival of the forces announced from different places, especially from the people of the country and the surrounding Arab regions as Aleppo and the south of Mosul, whose total is calculated at not less than 100,000, by their estimate; and he intends, if the majority of the forces mentioned are Arab, to begin the movement by them; and, if otherwise, that is, of the Turks or others, he will observe their advance to the Canal, and when they begin to fight, his movements upon them will be different to what they expect.
Secondly. – We purposed sending our eldest son to Medina with sufficient forces to strengthen his brother (who is) in Syria, and with every possibility of occupying the railway line, or carrying out such operations as circumstances may admit. This is the beginning of the principal movement, and we are satisfied in its beginning with what we had levied as guards to keep the interior of the country quiet; they are of the people of Hejaz only, for many reasons, which it would take too long to set forth; chiefly the difficulties in the way of providing their necessities with secrecy and speed (although this precaution was not necessary) and to make it easy to bring reinforcements when needed; this is the summary of what you wished to understand. In my opinion it is sufficient, and it is to be taken as a foundation and a standard as to our actions in the face of all changes and unforeseen events which the sequence of events may show. It remains for us to state what we need at present: –
Firstly. – The amount of £50,000 in gold for the monthly pay of the troops levied, and other things the necessity of which needs no explanation. We beg you to send it with all possible haste.
Secondly. – 20,000 sacks of rice, 15,000 sacks of flour, 3,000 sacks of barley, 150 sacks of coffee, 150 sacks of sugar, 5,000 rifles of the modern pattern and the necessary ammunition, and 100 boxes of the two sample cartridges (enclosed) and of Martini-Henry cartridges and “Aza,” that is [IO9본-1] those of the rifles of the factory of St. Etienne in France, for the use of those two kinds of rifles of our tribes; it would not be amiss to send 500 boxes of both kinds.
Thirdly. – We think it better that the place of deposit of all these things should be Port Sudan.
Fourthly. – As the above provisions and munitions are not needed until the beginning of the movement (of which we will inform you officially), they should remain at the above place, and when we need them we will inform the Governor there of the place to which they may be conveyed, and of the intermediaries who will carry orders for receiving them.
Fifthly. – The money required should be sent at once to the Governor of Port Sudan, and a confidential agent will be sent by us to receive it, either all at once, or in two instalments, according as he is able, and this [math(\displaystyle \begin{pmatrix} {V} \\ {Q} \end{pmatrix})][IO9본-2] is the (secret) sign to be recognised for accepting the man.
Sixthly. – Our envoy who will receive the money will be sent to Port Sudan in three weeks’ time, that is to say, he will be there on the 5th Jamad Awal (9th March)[IO9주-1] with a letter from us addressed to Al Khawaga Elias Effendi, saying that he (Elias) will pay him, in accordance with the letter, the rent of our properties, and the signature will be clear in our name, but we will instruct him to ask for the Governor of the place, whom you will apprise of this person’s arrival. After perusal of the letter, the money should be given to him on condition that no discussion whatever is to be made with him of any question concerning us. We beg you most emphatically not to tell him anything, keeping this affair secret, and he should be treated apparently as if he were nothing out of the way.
Let it not be thought that our appointment of another man results from lack of confidence in the bearer; it is only to avoid waste of time, for we are appointing him to a task elsewhere. At the same time we beg you not to embark or send him in a steamer, or officially, the means already arranged being sufficient.
Seventhly. – Our representative, bearer of the present letter, has been definitely instructed to ensure the arrival of this, and I think that his mission this time is finished since the condition of things is known both in general and in detail, and there is no need for sending anyone else. In case of need for sending information, it will come from us; yet as our next representative will reach you after three weeks, you may prepare instructions for him to take back. Yet let him be treated simply in appearance.
Eighthly. – Let the British Government consider this military expenditure in accordance with the books which will be furnished it, explaining how the money has been spent.
To conclude, my best and numberless salutations beyond all increase.
14 Rabi al Akhar, 1334.}}}

{{{#!folding [ 아랍어판(아랍어 위키문헌 제공) 펼치기 · 접기 ]
من الشريف حسين إلى السير هنري مكماهون 14 فبراير سنة 1916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إلى حضرة ذو الأصالة فخامة نائب جلالة الملك دام مرعيا
بعد فبأيدي التوقير والاحتشام تلقينا رقيم الفخامة المؤرخ 25 ربيع أول، وأن مضامينه أدخلت علينا مزيد الارتياح والسرور لحصول التفاهم المطلوب والتقارب المرغوب لأسأل الله أن يسهل المقاصد وينجح المساعي. ومن الإيضاحات الآتية نفهم الفخامة الأعمال الجارية والأسباب المقتضية:
أولاً ـ قد أعلمنا فخامكتم بأنا بعثنا بأحد أنجالنا إلى الشام ليرأس ما يقتضي عمله هناك، ولقد ظفرنا منه بتقرير مفصل يفيد به أن اعتسافات الحكومة هناك لم تبق من الأشخاص الذين نعتمد عليهم في الأمر سواء كانوا من الجند على اختلاف مراتبهم أم ممن لم يكونوا من ذلك الصنف إلا القليل مما كان في الدرجة التالية، وأنه ينتظر وصول القوات المعلن بقدومها من مواقع مختلفة أخصها من أهالي البلاد وما جاورها من القطار العربية كحلب وجنوب الموصل المشاع بان عددها ما ينوف عن المائة ألف على ما يزعمون. وأنه لابد يؤمل إن كانت الأكثرية من القوة المذكورة من العرب فهو عازم على إجراء الحركة والقيام بهم، وإن كان العكس يعني الأكثرية من الأتراك وسواهم فسيناظر تقدمهم نحو الترعة وعند اشتباك الحرب حركته بهم عندما يريدون.
ثانيا ـ عزمنا على إرسال نجلنا الكبير إلى المدينة المنورة بقوة كافية ليكون رداءاً لأخيه الذي بالشام ولكل احتمال واستيلائه على الخط الحديد وما هو في معنى ذلك مما تظهره الشؤون. وهذا هو المبدأ للحركة الأساسية المكتفين في مبادئها بما جندناه برسم المحافظة على راحة داخلية البلاد وبأهل الحجاز أهل المركز فقط لأسباب يطول شرحها:
(أولا) تعسر إحضار لوازمهم بصورة تجعل المشروع في حيز الكتمان، مع عدم الضرورة على ذلك وسهولة جلب الإمدادات عند الحاجة، هذا خلاصة ما رغبتم في الجواب عليه والاستفهام عنه. وفي ظني أن فيه الكفاية واتخاذه أساسا وقياسا في أعمالنا أمام كل التبدلات والطوارئ التي سير الحالة.
بقى علينا بيان ما نحتاجه والحالة هذه هو :
أولا ـ مبلغ خمسين ألف جنيه ذهبا لمشاهرة القوات المجندة ونحوها مما ضرورته تغني عن بيانه.فالرجا إحضارها بوجه السرعة الممكنة.
الثاني ـ إحضار عشرين ألف كيس أرز وخمسة عشر ألف دقيق وثلاثة آلاف شعير ومائة وخمسين كيس بن قهوة ومثلها سكر ومقدار خمسة آلاف بندقية من الطراز الجديد وما تحتاجه النسبة لها من المرميات وأيضا مقدار مائة صندوق من النوع المرسل منه مرميتين طيه. ومن مرميات بواريد مارتن هنري وبارودات غرا أعني بواريد معمل سانت أتين الفرنسية لاستعمال هذين الصنفين في بواريد أي بندقيات قبائلنا ولا بأس من جعل لكل نوعهما خمسمائة صندوق.
الثالث ـ أنا استنسبنا مركز سوقيات هذه المواد المرغوبة يكن بور سودان.
الرابع ـ بالنظر لكون المواد الغذائية واللوازمات الحربية الموضحة أعلاه لا حاجة لنا بها إلاّ عند ابتداء الحركة، وسنبلغكم إياها بصورة رسمية تبقى في الموضع المذكور وعند الحاجة إليها يبلغ أمير الجهة المذكورة وقائدها بالمواقع التي يقتضي سوقها إليها والوسائط التي سيكونون حاملين الوثائق بتسليمها إياهم.
الخامس ـ النقود المطلوبة يقتضي إرسالها في الحال إلى أمير بور سودان، وسيرده من طرفنا معتمد يتسلمها أما دفعة أو دفعتين على حسب استطاعته. وهذه علامة اعتماد الرجل.
السادس ـ مندوبنا في قبض المبالغ المذكورة سيتوجه إلى بور سودان بعد ثلاثة أسابيع، يعني يكون وصوله إليها في 5 من جماد الأول حامل كتاب منا باسم الخواجة إلياس أفندي وأنه يصرف له بموجبه ما لديه من إيجارات أملاكنا والإمضاء صراحة باسمنا، غير أننا معدينه يسأل عن عائد الموقع وأميره، فأنتم تخبروهم عن ذلك الشخص وبمراجعته يجري له ما يقتضي من صرف ما لديهم بشرط ألا يبحثوا معه في أي موضوع كان مؤكدين غاية التأكيد في عدم المظاهرة له وكتمان أمره ومعاملته في الظاهر بأنه لا شئ، لا يظن أن ثقتنا للشخص الأخير من اعتماد الأول حامله هذا لا بل لعدم ضياع الوقت لتعييننا له خدمة في جهة ثانية، مع تكرر رجائنا بعدم إركابه وابعاثه في بابور أو في شئ من هذه الرسميات فإن وسائطه كافية.
السابع ـ مندوبنا حامل هذا أكدنا عليه بالاكتفاء بإيصال هذا وأظن أن مأموريته في هذا الدور تمت، حيث أن الحالة علمت أساساتها وفروعها فلا حاجة في بعث شخص آخر، إذ أن اللزوم للمخابرة يكن منا، ولا سيما أن مندوبنا الأخير سيردكم بعد ثلاثة أسابيع يمكن في ظرفها إفادتنا بما يلزم له الحال وألا يعامل في الصورة الظاهرة إلا معاملة بسيطة.
الثامن ـ تعهد الحكومة البريطانية العظمى قبول هذه المصاريف الحربية بموجب الدفاتر التي تقدم إليها ببيان الوجهة التي صرفت فيها. وبالختام أهديكم أشواقي التي لا تعد واحتشامي الذي ليس له حد.
14 ربيع الآخر 1334 .}}}

{{{#!wiki style="text-align: right;"
1916년 2월 18일}}}
(자비롭고 우리를 아끼시는 그 분의 이름으로!)
가장 고귀하신 고등판무관 각하께, 신께서 그를 보호해 주시기를. (미사여구와 존중을 표현하는 말 이후)
라비울라왈 25일[ISL3-25]자 각하의 서신을 받았소. 그 내용은 요구했던 이해와 희망했던 친밀감이 성취된 결과였기에, 우리에게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만족을 가져다 주었소. 신께서 우리의 목적을 손쉽게 이루도록 하시고 우리의 노력을 번영케 하시도록 빌겠소. 각하께 진행 중인 사무와 그에 대한 이유를 아래에서 알려드리겠소.
첫째로, 우리는 각하께 우리가 내 아들 중 한 명을 시리아로 보내 그곳에서의 필수적인 작전을 지휘하도록 했다고 알린 바 있소. 우리는 그로부터 상세한 보고를 받았소. 거기서 언급한 바에 따르면, 그곳 정부의 폭정으로 인해 그들이 의지할 수 있는 사람들은 군인으로서의 계급이나 다른 어떤 계급을 가리지 않고 몇몇이 남았을 뿐 얼마 남지 않았고, 그들조차도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이들이오. 또한 그는 각기 다른 장소들, 특히 알레포와 모술 남쪽의 아랍 지역들을 둘러싼 지방들의 사람들로부터 소식을 알려온, 그들이 추산하기로는 합계하여 10만 명을 상회할 것으로 헤아려진 군세들이 다다르기를 기다리고 있소. 만일 언급한 군세의 다수가 아랍인들이라면 그들과 함께 움직임을 시작할 것이되, 그렇지 않고 튀르크인들이나 다른 민족들이라면 그는 그들이 운하로 진군하는 것을 관망하다가 전투가 시작되면 그들이 예상한 것과 다른 방향으로 그의 운동을 진행할 것이오.
둘째로, 우리는 시리아에 있는 그의 남동생의 활동을 돕기 위해 충분한 군세와 함께 메디나에 나의 맏아들을 보냈소. 그들은 상황이 허락하는 대로 어느 곳이든 철도 노선을 장악하거나, 일련의 작전들을 수행할 수 있을 게요. 이것들로써 주요한 운동이 시작될 것이오. 우리는 그가 지역 내부를 단속하는 경비대를 징집하여 일을 시작하는 데 만족하오. 그들은 헤자즈 사람들로만 구성되어 있고, 여러 이유로, 그 중에서도 무엇보다 기밀을 유지하면서 재빠르게(이런 예방 조치가 필수적인 것은 아니었소만) 그들에게 필요한 필수품들을 제공해서 일을 개진하는 데, 또 필요한 경우 그들을 손쉽게 증강하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릴 거요. 이것이 당신이 알고자 했던 것들을 요약한 것이오. 내 상각에 이 정도면 충분할 것이고, 이것이 사건의 결과로 나타날 모든 변화와 예측할 수 없는 사건들을 마주할 때 우리 행동의 기반이자 기준이 될 것이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을 말씀 드리는 일이 남았구려.
첫째로, 징집된 군대의 월급과 다른 필수품을 위해 지불할 5만 파운드 몫의 금이오. 따로 설명할 필요는 없을 거요. 최대한 빨리 보내주기를 간청하오.
둘째로, 쌀 2만 포대, 밀가루 1만 5000포대, 보리 3000포대, 커피 150포대, 설탕 150포대, 현대적 공정으로 만들어진 5000정의 소총과 필수적인 만큼의 탄약, 우리 부족이 쓸 두 종류의 소총인 마티니-헨리 소총카트리지와 프랑스 생테티엔의 공장에서 만들어진 소총의 카트리지 '아자(Aza)', 두 종류의 (밀봉된) 카트리지 견본 100상자가 필요하오. 두 종류 모두 500상자까지는 보내주어도 좋을 것이오.
셋째로, 이런 물품을 구비해 둘 장소는 포트 수단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넷째로, 위에서 말한 물자와 군수품은 운동을 시작할(것을 공식적으로 알릴) 때까지는 필요하지 않으므로 이것들은 앞서 말한 장소에 보관해 두시오. 우리에게 그것들이 필요해지면 그곳의 총독(Governor)에게 물건을 옮길 것이라는 것과 그것들을 받아오라는 명령을 전달할 중개인들을 알려줄 것이오.
다섯째로, 필요한 자금은 포트 수단의 총독에게 즉시 보내주시오. 우리가 신뢰할 만한 대리인을 보내 그것을 수령할 것인데, 그가 가능한 대로 한 번에 받거나 두 번에 걸쳐 분할해 받겠소. 이것[math(\displaystyle \begin{pmatrix} {V} \\ {Q} \end{pmatrix})][IO9본-2]은 그 사람을 식별할 때 쓰일 (비밀) 기호요.
여섯째로, 3주 뒤에 자금을 수령할 사절이 포트 수단으로 갈 것이오. 다시 말해 우리는 그를 주마달울라 5일[IO9주-1][ISL5-5]에 알 카와가 엘리아스 에펜디(Al Khawaga Elias Effendi)에게 도착할 서신을 챙겨 보낼 것이오. 그에게는 엘리아스가 그에게 서신의 내용에 맞춰 우리 재산의 임대료에 해당하는 돈을 지불할 것이라고 하여 보낼 것이고, 서명은 분명히 우리 이름으로 되어 있을 거요. 하지만 우리는 그에게 그곳의 총독을 찾아가 말을 묻도록 지시할 것이오. 총독에게는 그대가 그 사람이 도착할 것이라고 알려두시오. 그 서신을 꼼곰히 읽은 뒤에, 그에 대해서는 우리에 대해 어떤 질문도 하지 말고 어떤 논의도 하지 않은 채로 자금을 전해 주셔야 하오. 그에게는 이 일을 비밀로 하고 어떤 것도 말하지 말라고 절절한 마음으로 간청하오. 그에게는 덤덤하게 겉으로 드러난 대로만 대해주시오.
우리가 다른 사람을 임명한 것이 전령에 대해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아주시오. 그것은 그에게 다른 곳의 업무를 맡겼기 때문에 시간 낭비를 피하려는 것일 뿐이오. 동시에 그를 승선시키거나 증기선을 통해 보내거나, 공식적인 경로로 그를 보내지 말 것을 간청드리오. 이미 준비된 수단들로 충분하오.
일곱째로, 이번 서신을 전달한 우리의 대표자는 이 편지가 도착하도록 보증해 달라고 확실히 지시받았소. 나는 일반적으로나 상세하게나 일의 조건이 알려졌으므로 이번의 그의 사명이 끝났다고 생각하고 더 이상 다른 사람을 보낼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오. 정보를 보낼 필요가 있다면, 우리가 사람을 보내겠소. 다만 다음의 대표자는 3주 뒤에 다다를 것이니, 그대가 그의 손에 들려 보낼 지시를 준비할 수 있을 것이오. 그러나 그에 대해서는 겉으로 드러난 대로만 간결히 대해 주시오.
여덟째로, 자금이 어떻게 쓰여 왔는지를 설명하는 장부를 제공하겠소. 영국 정부는 이번의 군사적 지출과 그 장부가 부합하는지 살펴보시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헤아릴 수 없는 경의를 양껏 표하는 것으로 끝맺겠소.
1334년 라비울아키르 14일.[ISL4-14]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3.10. 1916년 3월 10일 맥마흔 → 후세인(10차)

{{{#!folding [ 영문(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펼치기 · 접기 ]
March 10, 1916.

(After customary greetings.)
WE have received your letter of the 14th Rabi el Akhar[AAC주24] (the 18th February), duly delivered by your trusted messenger.
We are grateful to note the active measures which you propose to take. We consider them the most suitable in the existing circumstances, and they have the approval of His Majesty’s Government. I am pleased to be able to inform you that His Majesty’s Government have approved of meeting your requests, and that which you asked to be sent with all haste is being despatched with your messenger, who is also the bearer of this letter.
The remainder will be collected as quickly as possible and will be deposited at Port Sudan, where it will remain until we hear from you officially of the beginning of the movement and of the places to which they may be conveyed and the intermediaries who will carry out the orders for receiving them.
The necessary instructions, as set forth in your letter, have been issued to the Governor at Port Sudan, and he will arrange everything in accordance with your wishes.
Your representative who brought your last letter has been duly facilitated in his journey to Jeizan, and every assistance has been given him in his mission, which we trust will be crowned with good results.
We have arranged that, on completion, he will be brought to Port Sudan, whence he will proceed by the safest means to join you and report the results of his work.
We take the opportunity, in sending this letter, to explain to you a matter which might otherwise not have been clear to you, and which might have given rise to misunderstanding. There are various Turkish posts and small garrisons along the coasts of Arabia who are hostile to us, and who are said to be planning injury to our naval interests in the Red Sea. We may, therefore, find it necessary to take hostile measures against these posts and garrisons, but we have issued strict instructions that every care must be taken by our ships to differentiate between the hostile Turkish garrisons and the innocent Arab inhabitants, towards whom we entertain such friendly feelings.
We give you notice of this matter in case distorted and false reports may reach you of the reasons for any action which we may be obliged to take.
We have heard rumours that our mutual enemies are endeavouring to construct boats for the purpose of laying mines in the Red Sea, and of otherwise injuring our interests there, and we beg of you that you will give us early information should you receive any confirmation of such reports.
We have heard that Ibn Rashid has been selling large quantities of camels to the Turks, which are being sent up to Damascus.
We hope that you will be able to use your influence with him in order that he may cease from this practice and, if he still persists, that you will be able to arrange for the Arabs who lie between him and Syria to seize the camels as they pass, a procedure which will be to our mutual advantage.
I am glad to be able to inform you that those misguided Arabs under Sayed Ahmed el Senussi, who have fallen victims to the wiles of Turkish and German intriguers, are now beginning to see the error of their ways, and are coming in to us in large numbers, asking for forgiveness and friendship.
We have severely defeated the forces which these intriguers had collected against us, and the eyes of the Arabs are now becoming open to the deceit which has been practised upon them.
The capture of Erzerum, and the defeats sustained by the Turks in the Caucasus, are having a great effect in our favour, and are greatly helping the cause for which we are both working.
We ask God to prosper your endeavours and to further the work which you have taken in hand.
In conclusion, we beg you to accept our warmest salutations and expressions of friendship.
(Signed) A. H. McMAHON.

6 Jamad Awwal, 1334.}}}

{{{#!folding [ 아랍어판(아랍어 위키문헌 제공) 펼치기 · 접기 ]
من السير هنري مكماهون إلى الشريف حسين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إلى ساحة ذلك المقام الرفيع ذي الحسب الطاهر والنسب الفاخر قبلة الإسلام والمسلمين معدن الشرف وطيب المحتد سلالة مهبط الوحي المحمدي الشريف ابن الشريف صاحب الدولة السيد الشريف حسين بن علي أمير مكة المعظم زاده الله رفعة وعلاء آمين.
بعد ما يليق بمقام الأمير الخطير من التجلة والاحتشام وتقديم خالص التحية والسلام وشرح عوامل الألفة وحسن التفاهم والمودة الممزوجة بالمحبة القلبية أرفع إلى دولة الأمير المعظم أننا تلقينا رقيمكم المؤرخ 14 ربيع الآخر 1334 من يد رسولكم الأمين، وقد سررنا لوقوفنا على التدابير الفعلية التي تنوونها وأنها لموافقة في الأحوال الحاضرة.
وان حكومة جلالة ملك بريطانيا العظمى تصادق عليها.
وقد يسرني أن أخبركم بأن حكومة جلالة الملك صادقت على جميع مطالبكم وأن كل شئ رغبتم الإسراع فيه وفي إرساله فهو مرسل مع رسولكم حامل هذا والأشياء الباقية ستحضر بكل سرعة ممكنة وتبقى في بور سودان تحت أمركم لحين ابتداء الحركة وابلاغنا إياها بصورة رسمية (كما ذكرتم) وبالمواقع التي يقتضي سوقها إليها والوسائط التي يكونون حاملين الوثائق بتسليمها إياهم.
إن كل التعليمات التي وردت في محرركم قد أعلمنا بها محافظ بور سودان وهو سيجريها حسب رغبتكم ـ وقد عملت جميع التسهيلات اللازمة لإرسال رسولكم حامل خطابكم الأخير إلى جزان حتى يؤدي مأموريته التي نسأل الله أن يكللها بالنجاح وحسن النتائج وسيعود إلى بور سودان وبعدها يصلكم بحراسة الله ليقص على مسامع دولتكم نتيجة عمله.
وننتهز الفرصة لنوضح لدولتكم في خطابنا هذا ما ربما لم يكن واضحا لديكم أو ما عساه ينتج سوء تفاهم، ألا وهو أنه يوجد بعض المراكز أو النقط المعسكرة فيها بعض العساكر التركية على سواحل بلاد العرب يقال أنهم يجاهرون بالعداء لنا والذين هم يعملون على ضرر مصالحنا الحربية البحرية في البحر الأحمر. وعليه نرى أنه من الضروري أن نأخذ التدابير الفعالة ضدهم ولكننا قد أصدرنا الأوامر القطعية انه يجب على جميع بوارجنا أن تفرق بين عساكر الأتراك الذين يبدءون بالعداء وبين العرب الأبرياء الذين يسكنون تلك الجهات، لأننا لا نقدم للعرب أجمع إلا كل عاطفة ودية.
وقد أبلغنا دولتكم ذلك حتى تكونوا على بينة من الأمر إذا بلغكم خبرا مكذوبا عن الأسباب التي تضطرنا إلى أي عمل من هذا القبيل. وقد بلغنا إشاعات مؤداها أن أعداءنا الألداء باذلون جهدهم في أعمال السفن ليبثوا بها الألغام في البحر الأحمر ولإلحاق الأضرار بمصالحنا في ذلك البحر، وأنا نرجوكم سرعة أخبارنا إذا تحقق ذلك لديكم.
وقد بلغنا أن ابن الرشيد قد باع للأتراك عددا عظيما من الجمال، وقد أرسلت إلى دمشق الشام، ونأمل أن تستعملوا كل ما لكم من التأثير عليه حتى يكف عن ذلك، وإذا صمم على ما هو عليه أمكنكم عمل الترتيب مع العربان الساكنين بينه وبين سوريا أن يقبضوا على الجمال حال سيرها، ولا شك أن في ذلك صالح لمصلحتنا المتبادلة.
وقد يسرني أن أبلغ دولتكم أن العربان الذين ضلوا السبيل تحت قيادة السيد أحمد السنوسي وهم الذين أصبحوا ضحية دسائس الألمان والأتراك قد ابتدؤا يعرفون خطأهم وهم يأتون إلينا وحدانا وجماعات يطلبون العفو عنهم والتودد إليهم. وقد والحمد لله هزمنا القوات التي جمعها هؤلاء الدساسون ضدنا. وقد أخذت العرب تبصر الغش والخديعة التي حاقت بهم.
وأن لسقوط أرضروم من يد الأتراك وكثرة انهزاماتهم في بلاد القوقاز تأثير عظيم، وهو في مصلحتنا المتبادلة وخطوة عظيمة في سبيل الأمر الذي نعمل له وإياكم.
ونسأل الله عز وجل أن يكلل مساعيكم بتاج النجاح والفلاح وان يمهد لكم في كامل أعمالكم أحسن السبل والمناهج.
وفي الختام ، أقدم لدولتكم ولكامل أفراد أسرتكم الشريفة عظيم الاحترامات وكامل ضروب المودة والإخلاص مع المحبة التي لا يزعزعها كر العصور ومرور الأيام.
تحريرا في 6 جماد الأولى 1334
الموافق 10 مارس 1916}}}

{{{#!wiki style="text-align: right;"
1916년 3월 10일}}}
(상투적인 인삿말 이후)
당신의 믿음직한 전령(messenger)에 의해 잘 전달된 라비울아키르 14일자[ISL4-14]의 서신[AAC주24]을 받았습니다.
당신이 취하려 하는 적극적 조치들을 알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그런 행동들이 현재의 상황에 가장 적합하다고 생각하며, 대영제국 정부는 이에 찬성했습니다. 대영제국 정부가 당신의 요청들에 맞추어 주는 데 동의하였음을 당신에게 알릴 수 있고, 또 최대한 빨리 보내달라고 요청하신 것을 이 서신을 전하는 당신의 전령 편에 보냄을 알릴 수 있어 기쁩니다.
나머지는 최대한 빨리 포트 수단에 모여 적재될 것입니다. 우리가 당신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운동의 시작과, 그것들을 옮길 장소와 그것들을 수령하기 위해 명령을 수행할 중개인들에 대해 공식적으로 알릴 때까지 그것들은 그곳에 남겨져 있을 것입니다.
필수적인 지시는 당신의 서신에서 제시한 대로 포트 수단의 총독에게 전달되었으며, 그는 당신이 바라는 바에 맞추어 준비해 놓을 것입니다.
지난 서신을 전달한 당신의 대표자는 적절한 과정에 따라 지잔을 향해 떠났으며, 그의 사명을 위한 모든 조력을 베풀어 두었습니다. 우리는 그가 그 덕분에 좋은 결과를 거둘 것임을 믿습니다.
그 일이 끝날 때 그가 포트 수단으로 와서 그가 가장 안전한 수단을 이용해 당신에게 나아가서 그가 한 일의 결과를 보고할 수 있도록 준비해 두었습니다.
이 서신을 보내는 덕분에 우리는 서신을 보내지 않았다면 당신에게 분명히 알려주지 못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 있었을 법한 문제를 설명할 기회가 생겼습니다. 아라비아의 해안을 따라 깔린 다양한 튀르크인들의 초소와 작은 주둔지들은 우리에게 적대적이고, 홍해에서의 우리 해군의 이익을 해치려 계획하고 있다고들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러한 초소와 주둔지들에 대해 적대적인 조치를 가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했지만, 우리의 선박들에게 적대적인 튀르크인의 주둔지와 우리와 친애의 감정을 향유하는 무고한 아랍인들의 주민들을 구별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라는 엄격한 지시를 내렸습니다.
우리가 해야만 하는 어떤 행동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잘못된 보고들이 당신에게 들어갈 수 있을 경우를 대비해 이 문제에 대해 안내를 드립니다.
우리 모두의 적들이 선박을 건조해 홍해에 기뢰를 설치하거나 그곳에서의 우리의 이권을 침해하려 애쓰고 있다는 뜬소문을 들었습니다. 당신께서 이러한 보고들에 대해 확실히 말해 줄 수 있는 정보를 얻는다면 조속히 정보를 알려주시기를 간청합니다.
이븐 라시드[167]가 튀르크인들에게 대량의 낙타를 판매하여 다마스쿠스로 보내지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우리 상호의 이익이 될 절차로서, 그가 그러한 행위를 중지하도록 당신께서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해 주실 수 있기를, 또 만일 그가 계속 저항한다면 그와 시리아 사이에 위치한 아랍인들이 그들이 지나갈 때 낙타를 탈취할 수 있도록 준비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당신에게 튀르크와 독일의 술수꾼들의 계략 속에 희생자로 전락한, 사이드 아흐메드 알 세누시에 의해 잘못 인도된 이들이 그들이 잘못된 길을 걷고 있음을 깨닫기 시작했고, 용서를 빌고 우의를 찾는 많은 수의 이들이 우리를 향해 다가옴을 알리게 되어 기쁩니다.
우리는 우리에 맞서 그 술수꾼들이 그러모은 그들의 군세를 크게 격퇴시켰고, 아랍인들은 그들에게 부려진 속임수로부터 눈 뜨게 되었습니다.
에르주룸[168]의 함락과 코카서스에서 튀르크인들의 연이은 패전은 우리의 길에 큰 효과를 주고 있으며, 우리가 함께 하는 대의를 크게 돕고 있습니다.
신께서 당신의 노력을 번영케 하시고 당신의 손에 쥔 일들이 더더욱 나아가게 하시기를 빌겠습니다.
마지막으로, 우리의 가장 따뜻한 인삿말과 우정의 표현을 받아주시기를 간청드립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아서 헨리 맥마흔의 서명)}}}
1334년 주마달울라 6일.[ISL5-6]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을 번역)

4. 서신과 관련된 직접적 참고 자료

4.1. 1915년 7월 14일 압둘라가 로날드 스토어스에게 전한 서신

{{{#!folding [ 영문(《아랍의 각성》 본) 펼치기 · 접기 ]
Mecca, Ramadan 2, 1333.
[July 14, 1915.]

(Complimentary titles.)
I send my affectionate regard and respects to your esteemed self, and trust that you will ensure, as you know how to, the acceptance of the enclosed note which contains our proposals and conditions.
In this connexion, I wish to give you and your Government my assurance that you need have no anxiety about the intentions of our people, for they realise how closely their interests are bound to those of your Government. Do not trouble to send aeroplanes or warships to distribute news and reports as in the past; our minds are now made up.
What we would request is that you should make it possible for the Egyptian Government to resume the consignment of the bounty of grain for the poor of Mecca and Madina, which was stopped last year. The arrival of this year's grain, together with last year's, would be valuable here for the promotion of our mutual interest. To a person of your quick understanding, this hint will suffice.
I beg of you not to send us any communications until you hear that our plans have matured, except for the reply to this letter and its enclosure, which should only be sent througn the bearer. Perhaps you will think fit to give him a written warrant to enable him to pass through to you whenever we think it necessary to send him. He is dependable.
(Compliments)}}}

{{{#!folding [ 영문(영국 인도국 문서철 수록) 펼치기 · 접기 ]
To the dear honourable, may God protect him,
I present to your dear honour my affectionate regards and respects, and hope that you will do your best to make the enclosed note, containing the proposed conditions, effective, as you are capable of doing.
And in this connnection I declare to you and your Government that you need not be anxious about the ideas of the people here, because they are closely bound to your Government by community of interests.
Do not be at pains to send aeroplanes or men-of-war to throw reports and rumours, as was done before, because the matter is now decided.
What we desire to beg you is to open the way for the Egyptian Government to send the charitable offerings of corn for the Holy lands, i.e., Mecca and Medina, which were stopped since last year.
For verily, the sending of this grain for this year and last would be an important factor in laying the foundations of our mutual advantage.
This should suffice for a person of your grasp.
In conclusion I offer you my best salaams and respects.
2nd Ramadan 1333 (14th July 1915).
Kindly do not trouble to send any correspondence until you see the result of our operations; except the reply to the note and its enclosure, which should be through the bearer only; and, if you should think fit, give him a written token to make it easy for him to reach you when we find it necessary.
He is all right.
(Unsigned)
}}}

{{{#!folding [ 아랍어판(아랍어 위키문헌 제공) 펼치기·접기 ]
بسم الله الرحمن الرحيم
مكة في 28/ رمضان سنة 1333 هـ (14/ يوليو سنة 1915م)
لصاحب السعادة والرفعة نائب جلالة الملك بمصر، سلمه الله .
أقدم لجنابكم العزيز أحسن تحياتي الودية واحتراماتي، وأرجو أن تعملوا كل ما في وسعكم لتنفيذ المذكرة المرسلة إليكم طيه، المتضمنة الشروط المقترحة المتعلقة بالقضية العربية.
وأود بهذه المناسبة أن أصرح لحضرتكم ولحكومتكم انه ليس هناك حاجة لأن تشغلوا أفكاركم بآراء الشعب هنا، لأنه بأجمعه ميال إلى حكومتكم بحكم المصالح المشتركة.
ثم يجب ألا تتعبوا أنفسكم بإرسال الطيارات أو رجال الحرب، لإلقاء المناشير وإذاعة الشائعات، كما كنتم تفعلون من قبل، لأن القضية قد قررت الآن.
وأني لأرجوكم هنا أن تفسحوا المجال أمام الحكومة المصرية، لترسل الهدايا المعروفة من الحنطة للأراضي المقدسة "مكة والمدينة" التي أوقف إرسالها منذ العام الماضي.
وأود أن ألفت نظركم إلى أن إرسال هدايا هذا العام، والعام الفائت، سيكون له أثر فعال في توطيد مصالحنا المشتركة وأعتقد أن هذا يكفي لإقناع رجل ذكي مثلك أطال الله بقاءكم.
حاشية: أرجو ألا تزعجوا أنفسكم بإرسال أي رسالة قبل أن تروا نتائج أعمالنا هنا، خلا الجواب على مذكرتنا وما تتضمنه.
ونرجو أن يكون هذا الجواب بواسطة رسولنا كما نرجو أن تعطوه بطاقة منكم ليسهل عليه الوصول إليكم عندما نجد حاجة لذلك. والرسول موثوق به.
}}}

{{{#!folding [ 한국어 번역(《아랍의 각성》 본) 펼치기 · 접기 ]
1333년 라마단 2일, 메카에서
[1915년 7월 14일, 1915.]

(미사여구로 수식된 직함)
명예로운 당신에게 호의와 존중을 보내며, 저는 당신이 어떻게 응할지 알고 계심에 따라, 당신이 우리의 제안과 그 조건이 담긴 동봉된 편지(enclosed note)를 수용하심을 확언해 주시리라 믿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당신과 당신의 정부가 우리 민족(people)의 의도에 대해 불안해 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을 보증하여 드리고 싶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이익이 얼마나 당신 정부와 밀접히 연결되어 있는지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저번처럼 새 소식과 보고 자료들을 배부하느라 항공기나 전함을 보내려 고심하지 마십시오. 우리는 지금 결심을 했습니다.
우리가 요구하려는 것은 작년부터 중단된, 메카와 메디나의 빈민들을 위해 쓰이는 자선 곡물의 배송을 이집트 정부에게 가능케 해달라는 것입니다. 작년분과 함께 올해분의 곡물이 도착하는 것은 이곳에서 상호의 이익을 증진시키는 데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당신은 이해가 빠른 사람이기 때문에, 이 정도 단서면 충분하겠지요.
이 서신 및 동봉한 건에 대한 회신은 꼭 이 전령(bearer)을 통해 전달해 주시고, 그것을 제외하고서는 우리의 계획이 무르익었다는 소식을 듣기 전까지 어떠한 연락도 보내시기 말기를 간청합니다. 아마 당신께서도 언제든 그를 보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실 때면 그가 당신을 거쳐서 문서로 쓰인 보증서를 받아가도록 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생각하실 겁니다. 그는 믿을 만한 사람이니까요.
(미사여구)}}}

명예로운 당신께, 신께서 그를 보호하여 주시기를.
명예로운 당신께 호의와 존중을 보내며, 제시할 조건들을 담은 동봉된 편지(enclosed note)가 의미를 다하도록 당신께서 최선을 다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그러실 수 있는 사람이니까요.
이와 관련하여 저는 당신과 당신의 정부에 대해, 그들과 당신의 정부의 이해 관계가 일치함에 따라 둘이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므로, 이곳 사람들의 사고에 대해 당신들이 불안할 필요가 없음을 선언합니다.
저번에 그랬던 것처럼 보고 자료와 소문들을 퍼뜨리고자 항공기나 군함(men-of-war)을 보내려 심려하지 마십시오. 일은 이미 결정되었습니다.
당신께 간청드리려 하는 것은 이집트 정부가 성스러운 땅, 다시 말해 메카와 메디나에 작년부터 멈춘 희사하는 곡물의 공여를 베푸는 길을 열어달라는 것입니다.
올해와 작년 몫의 이 곡물을 보내주시는 것은 우리 서로의 이득에 기초를 쌓는 데 진실로 중요한 요소가 될 것입니다.
당신과 같은 식견을 지닌 사람이라면 이것으로 충분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당신께 나의 최고의 인삿말과 존중을 보내 드립니다.
1333년 라마단 2일[ISL9-2]
이 편지와 동봉한 건에 대한 회신은 꼭 이 전령(bearer)을 통해서만 보내주시고, 그것을 제외하고서는 우리의 작전의 결과를 마주할 때까지 어떠한 서신(correspondence)을 보내고자 고심하시지 말기 바랍니다. 당신이 그것이 적합하다고 생각하신다면, 우리가 필요할 때 그를 당신께 보낼 때 그가 편의를 누리도록 서면으로 증표를 전해 주십시오.
그는 훌륭한 사람입니다.
{{{#!wiki style="text-align: right"
(무기명)}}}

(영국 인도국 문서철 수록 영문본을 번역)

위에서 언급되는 '동봉된 편지(enclosed note)'가 바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첫 번째 서신을 의미한다. 후세인-맥마흔 간 교환된 첫 서신에 날짜가 쓰여 있지 않으나, 이 서신에 '1333년 라마단 2일', 곧 1915년 7월 14일로 환산되는 날짜가 쓰여 있어 그 날짜를 확정할 수 있기도 하다.

한편, 그 내용 측면에서도 이 서신이 일정한 영향을 준 부분이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서신과 후세인의 1915년 7월 14일 서신에 대해 답하는 8월 30일 맥마흔의 서신에서 '아랍의 이익이 영국의 이익이며 영국 또한 아랍에 대해 그러하다는 것'을 언급한 것은, 후세인의 서신보다도 압둘라의 서신의 내용을 고려한 것에 가까워 보인다.

또한 이 서신을 통해 1915년 9월 9일의 서신에서 언급되는 곡물 운송 문제가 발생한 경위를 알 수 있다. 다시 말해 전쟁으로 인해 1914년과 1915년 이집트로부터 메카와 메디나로의 곡물 운송이 끊기면서 발생한 문제를 압둘라의 서신에서 인지시키고 있고, 맥마흔이 1915년 8월 30일 서신에서 '원하는 만큼의 곡물과 다른 희사할 선물들(whatever quantities of grain and other charitable gifts, 《아랍의 각성》본)'/'희사품의 공여(charitable offerings)(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를 충분히 베풀 수 있다고 언급한 것 또한 이 압둘라의 서신에서 등장하는, 특히 영국 인도국 문서의 '희사하는 곡물의 공여(charitable offerings of corn)'라는 번역에서 쓰인 표현을 보면 그 의미가 명확해진다. 나아가 후세인은 9월 9일 서신에서 헤자즈 측과 오스만 제국의 다른 지방과의 관계는 영국과의 신의를 훼손하는 것이 아니라 특히 이러한 메카에 대한 자선과 기증, 희사라는, 종교적으로 당위적인 사회경제적 관계로 대부분 해명될 수 있음을 밝히고, 일대의 재정적 문제에 대해서도 영국이 비밀리에 자선을 위한 곡물 운송에 참여해 달라고 하여 종교적으로 명분이 갖춰진 해결책을 제시하는 동시에 실익을 챙기고 있는 것이다. 맥마흔 또한 이에 대해 곡물뿐만 아니라 카바를 덮는 데 쓰이는 자수로 꾸민 융단(키스와, Kiswa)을 전달함으로써, 후세인과의 우의를 훼손하지 않기를 원함을 직간접적으로 분명히 하고 있다.

4.2. 1915년 10월 19일·20일 맥마흔-에드워드 그레이 간 교환된 전보

영국 국립 문서보관소 CAB 24/214, 우상단 기준 174~175쪽 수록[171]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It appears evident, from conversation with Faroki … that the Arab Party are at the parting of the ways. Germany, he says, has promised them the fulfillment of all their demands, and they will throw in their lot with that country unless we can give them immediate assurance of a nature to satisfy them. Should the Arabs decide to throw in their lot with Germany, we shall find all Islam in the East united against the Allies. On the other hand, their active co-operation with us, which they seem ready to offer, will greatly influence the course of the campaign in Mesopotamia and Syria. The matter is urgent, as further hesitation on the part of the Arab Party is impossible. They must act before Germany sends further assistance to Turkey. The possibility of the Young Arab Party eventually becoming as troublesome as the Young Turk Party must be carefully borne in mind, which adds greatly to the difficulties of our decision. The opinion expressed by Faroki is, I understand, that assurance on the following lines would be acceptable to the Arab Party: -(")
"'In so far as she is free to act without detriment to the interests of her present Allies, Great Britain accepts the principle of the independence of Arabia within limits propounded by the Sherif of Mecca, under British guidance and control. When situation admits, England will give the Arabs her advice, and help them to establish, in the territories concerned, whatever may appear the most suitable form of Government. The Arabs will in this territory recognise the influence of Great Britain only; they will work under British guidance and control, and will recognise the interests of Great Britain as paramount. To this end, such British Residents, Advisers or Officials as may be necessary to ensure sound administration will be recognised, but Arab Chiefs will continue to rule in the Arabian Peninsula itself. England to guarantee the Holy Places against external aggression and recognise their inviolability.'"
"The occupation by France of purely Arab districts of Aleppo, Hama, Homs and Damascus would be opposed by Arabs with force of arms, but with this exception Faroki thinks they would accept some modification of the North-Western boundaries proposed by the Sherif of Mecca.(")
"With regard to Basra Vilayet, Faroki accepts the fact that special measures of British control will be necessary, in view of Great Britain's interest there.(")
"Taking into consideration the Sherif's letter [of the 9th September, 1915] in the light of views expressed by Faroki, I am of opinion that no less wide assurances would be likely to be regarded as acceptable to the Sherif or the Arab Party.(")
"I should be glad to receive your instructions as to the reply I should give the Sherif, and what assurances I may give through Faroki to the Arab Party."}}}

"파루키와의 대화를 통해 볼 때 … (중략) … 아랍당(Arab Party, 알 아흐드)이 기로에 섰음 … (중략) … 이 분명해진 것 같습니다. 그가 말하기로, 우리가 그들을 만족시킬 수 있는 본질적인 보증을 즉각 해 주지 않는 한, 독일은 그들의 모든 조건에 맞추어주기로 약속했으므로 그들은 그 나라와 운명을 같이 할 것입니다. 아랍인들이 독일과 운명을 같이 하기로 한다면, 동방의 온 이슬람이 연합국에 맞서 단결하는 상황을 맞이하게 될 것입니다. 반대로, 그들의 우리와 함께 할 활동적인 작전들은 메소포타미아와 시리아 원정 과정에서 큰 영향을 줄 것입니다. 문제가 시급하여서 아랍당에 대해서 더 이상 망설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들은 독일이 튀르키예에 추가적인 조력을 보내기 전에 행동할 것입니다. 청년 아랍당(Young Arab Party, 알-파타트)이 결국 청년 튀르크당과 같이 문제가 되어서, 우리의 결정에 큰 어려움을 보탤 가능성을 조심스럽게 염두에 두어야 합니다. 파루키가 보인 의견은, 제가 생각건대, 아랍당에게 아래의 입장(line)과 같이 보장하여 주는 것이 아랍당에게 납득할 만하다는 것입니다.
"'현재의 동맹 국가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고 대영제국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한, 대영제국은 영국의 지도와 통제 아래 메카의 샤리프가 제시한 경계 안에서 아랍의 독립이라는 원칙을 받아들입니다. 상황이 허락하는 한, 영국은 아랍인들에게 조언을 제공하고 그들이 관련된 강역에서 어떤 것이든 가장 적절한 형태의 정부를 세우는 것을 도울 것입니다. 아랍인들은 이 영토 내에서 대영제국만의 영향력(influence)을 인정해야 합니다. 그들은 영국의 지도와 통제 아래 움직일 것이며, 영국의 이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할 것입니다. 이를 위해 영국의 거주민 및 자문인, 관료들과 같은 이들은 건전한 행정을 보장하기 위해 필수적이므로 인정될 것이되, 아랍 수장(Chief)들은 계속해서 아라비아 반도를 스스로 통치해 나가게 될 것이고, 영국은 계속해서 외부의 위협에 맞서 성지(Holy Places)를 보장하게 될 것이며 불가침권(inviolability)을 인정할 것입니다.'"
"알레포, 하마, 홈스와 다마스쿠스의 순수한 아랍 구역들을 프랑스가 점령하는 것은 무장한 아랍인들의 반대와 맞서게 될 것입니다. 그렇지만 파루키가 생각건대 그들은 메카의 샤리프가 제시한 북서쪽 경계에 대해 이곳을 예외로 두는 일정한 수정안은 받아들일 수 있을 것입니다.(")
"바스라 빌라예트에 대해서, 파루키는 이곳에서의 대영제국의 이권을 고려할 때 영국의 통제를 위한 특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1915년 9월 9일의) 샤리프의 서신을 살필 때, 파루키가 제시한 시각에 비추어 보면, 샤리프나 아랍당에게 더 이상 나아가서 (아랍 통일 국가의 영역을 줄여) 보증하는 것은 받아들여지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샤리프에게 보내야 할 회신과 파루키를 통해 아랍당에게 보증해 주어야 할 것에 대해 당신의 지도를 받을 수 있어 기쁩니다."

맥마흔은 10월 24일 후세인에게 서신을 보내기 전, 앞서 언급한 카이로에 머물던 자문역 무함마드 파루키의 의견을 상당 부분 인용하면서 후세인이 제시한 '아랍 통일 국가'의 독립안에 대해 10월 19일 '동맹 국가의 이익을 훼손하지 않고 대영제국이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는 한' 이를 수용해 지지하는 것이 좋겠다는 내용을 포함한 협상안 초안을 외무부 장관 에드워드 그레이에게 전보로 전달하였다.

파루키는 '알레포, 하마, 홈스와 다마스쿠스 순수 아랍 구역들(purely Arab districts of Aleppo, Hama, Homs and Damascus)'에 대해 프랑스가 접근하는 것은 무력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지만, 메카의 샤리프가 제시한 북서쪽 경계에 대해서는 협상을 통해 조정할 수는 있을 것이라고 보았다. 이를 통해 영국은 '동맹 국가의 이익을 훼손하'는 일을 피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것이 언급된 '순수한 아랍 지역'으로 명시된 4개 도시와 그 서쪽의 연안 지대를 나누는 기선을 통해 프랑스의 세력권과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을 나누려는 사고의 원형이 된다. 바스라 빌라예트에 대해서 영국이 특별한 통제 조치를 할 필요가 있다는 내용도, 파루키와 협의해 탄생한 것이었다. 파루키는 그 이상의 양보는 후세인 및 알 아흐드가 이를 수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You are authorised to give cordial assurances on the lines you propose in your personal telegram of the 19th October, and with your suggested reserve about our Allies.(")
"Unless it is necessary, in order to secure Arab consent, you should not include the stipulation that they will recognise British interests as paramound and work under British guidance, &c. Such stipulation might give rise in France to the impression that we are aiming not only at the securing of Arab interests, but also at the establishment of our own interests in Syria at the expense of the French.(")
"Holy Places and Mesopotamia. There are no difficulties on this point and you may speak without reserve. But the general reserve, which you propose is, more especially North-West boundaries, most necessary.(")
"Mesopotamia. In view of the special interests of the Bagdad Province and area actually in our occupation, the proposed sphere of British control, namely, the Basrah vilayet, will need extension. This will not, of course, prejudice our interests with Arab chiefs.(")
"To give an assurance that will prevent the alienation of the Arabs is the most important thing, and as the matter is urgent and time will not admit of the discussion of an exact formula, I must leave you discretion in this matter.(")
"Unless something more precise is required, and in that case you may give it, the simplest plan would be to give assurance of Arab independence, adding that, if they will send their representatives, we will proceed at once to discussion of boundaries."}}}

"그대가 10월 19일 개인적으로 보낸 전보에서 그대가 제시한 조항들과 우리의 동맹 국가들에 대해 제시한 유보 조항에 대해 우의를 담아 보증하는 것을 인가하오.(")
"꼭 필요하지 않다면, 아랍과의 동조를 지켜내기 위해 그대는 그들이 영국의 이권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정해야 한다거나 영국의 지도 아래 움직여야 한다는 등을 조건을 포함시켜서는 안 되오. 그러한 조건은 우리가 아랍의 이권을 보호할 뿐만 아니라 시리아에서 프랑스의 이권을 희생시키면서 우리 스스로의 이권을 챙긴다는 인상을 줄 수 있기 때문이오.(")
"성지(Holy Places)와 메소포타미아의 문제에 대해서는 곤란한 점이 없으며 그대는 거리낌 없이 말해도 될 게요. 그러나 그대가 제시한 일반적인 유보 사항이, 특히나 북서쪽 경계에 대해서는 필수적이오.(")
"메소포타미아. 바그다드 주(Province)에 대한 우리의 특별한 이익과 실질적으로 우리가 점유하고 있는 지역에 대해서는, 영국이 통제할 그대가 제시한 권역, 다시 말해 바스라 빌라예트가 확장될 필요가 있소. 이는 물론 아랍 수장(chief)들과 관련된 우리의 이권을 침해해서는 안 되오.(")
"아랍인들과 멀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 보증을 하여 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사안이 시급하며 정확한 격식(formula)에 맞춰 논의할 시간이 허락되지 않기 때문에, 나는 그대에게 이 문제에 대한 재량권(discretion)을 남겨두어야겠소.(")
"더 상세한 무언가가 필요치 않거나 그대가 처리할 수 있는 경우가 아니라면, 가장 간단한 계획은 아랍의 독립을 보증하는 것일 테요. 그에 더해, 그들이 그들의 대표자들을 보낸다면, 우리는 곧바로 국경의 문제를 논의하는 데로 넘어갈 수 있을 거요."

10월 20일 에드워드 그레이는 이에 대해 회신을 보내어 일부 주의해서 언급해야 할 것이라고 한 지점을 제외하고는 맥마흔의 견해를 대체로 인정하였다. 우선 (북서쪽 지역에 대해서) 대(大)시리아에서 프랑스를 희생시킨다는 인상을 주어서는 안 되므로 영국의 언급된 영국의 이권과 관련된 문제를 언급하기를 최대한 회피하도록 주문하고, '성지'와 메소포타미아에 대한 맥마흔의 초안에 대해서는 '이 문제에 대해서는 곤란한 점이 없으며 그대는 거리낌 없이 말해도 될 것(There are no difficulties on this point and you may speak without reserve)'이라고 언급하되, 이라크 방면에서는 영국의 이권을 더 확보하기를 바람을 넌지시 밝혔다. 이와 관련해 아랍 수장(chief)들과 관련된 이권을 침해하지 않기를 바란다는 언질 또한 1915년 10월 24일 서신에 조금 더 일반론적인 형태로 반영되었다. 한편 그레이는 북서쪽 경계 문제가 가장 중요하지만 이 협상에서 구체적인 방식에 대한 논의는 시간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라고 하여, 아랍에 대해서 되도록 독립을 보증하는 안을 최선으로 삼되 그 재량권을 맥마흔에게 넘긴다고 하였다.

4.3. 1915년 10월 26일 에드워드 그레이에 대한 맥마흔의 전보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I have been definite in stating that Great Britain will recognise the principle of Arab independence in purely Arab territory... but have been equally definite in excluding Mersina, Alexandretta and those districts on the northern coasts of Syria, which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where I understand that French interests have been recognised. I am not aware of the extent of French claims in Syria, nor of how far His Majesty's Government have agreed to recognise them. Hence, while recognising the towns of Damascus, Hama, Homs and Aleppo as being within the circle of Arab countries, I have endeavoured to provide for possible French pretensions to those places by a general modification to the effect that His Majesty's Government can only give assurances in regard to those territories "in which she can act without detriment to the interests of her ally France."}}}

저는 대영제국이 순수한 아랍의 강역에서는 아랍의 독립이라는 원칙을 인정할 것임을 분명히 언급했습니다. … (중략) … 그러나 마찬가지로 순수한 아랍이라고 말할 수 없으며 제가 프랑스의 이권이 인정되는 것으로 이해한 메르신, 알렉산트레타와 시리아의 북부 해안 구역들을 제외시킴에 대해서도 그와 같이 분명히 했습니다. 저는 프랑스인들이 시리아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지역의 범위나 국왕 폐하의 정부가 이를 인정하기로 한 곳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그러므로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알레포라는 도시들이 아랍 지역의 범주 안에 있다고 인정하면서, '그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권을 훼손하지 않고 행동할 수 있는' 강역들에 대해서만 대영제국의 정부가 보증하여 줄 수 있다는 취지로 이들 지역에 대한 보편적인 수정안을 마련함으로써 가능한 프랑스의 주장에 대한 몫을 제공하려 노력했습니다.
출처(아카이브) : 1976년 4월 3일 스펙테이터지 17쪽[172]

바로 위에서 언급한 것이 1915년 10월 24일의 협상안을 작성하기 전에 검수를 받을 목적으로 주고 받은 자료라고 하면, 이는 협상안을 작성한 직후 그 상황을 보고한 자료이다. '저는 프랑스인들이 시리아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지역의 범위나 국왕 폐하의 정부가 이를 인정하기로 한 곳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지 못합니다(I am not aware of the extent of French claims in Syria, nor of how far His Majesty's Government have agreed to recognise them)'라고 한 데서, 이 지역의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이 확정되지 않은 상태로 붕 떠 있었고 맥마흔 또한 이 지역에 대한 명확한 지리 인식을 갖고 있지도 못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맥마흔이 이에 대해 의도적으로 모호하게 해석될 여지를 남긴 채 대략적으로만 문제를 미봉하려 두려 했다는 의도 또한 이 자료를 통해 윤곽이 드러난다.

엘리 케두리는 이를 대(大)시리아 지역에 대해서는 어느 곳이든 영국이 프랑스가 이권을 주장할 여지를 최대한 깔아놓으려 기만을 펼치려는 모습이 투영된 자료로 보았다. 반면 1976년 스펙테이터지에 이 자료의 출처가 되는 글을 기고한 요크 대학교 J. S. F. 파커(J. S. F. Parker)는 아예 이 자료를 통해 볼 때 '시리아 북부 해안 구역들'에 팔레스타인이 들어갈 수 없으며 이는 친시온주의적인 해석이라고 못 박고 있다.

4.4. 1916년 1월 1일 후세인 빈 알리의 전령이 전달한 '구두 전언'

{{{#!folding [ 영문 펼치기 · 접기 ]
1. It is unworthy of the greatness of Great Britain to think that we believe false rumours; we know her justice, &c. &c., to her people.
2. You did well in allowing M. Sherif El Faruki to remain in Egypt; do not let him leave Egypt yet.
3. Money arrived.
4. Have written to the Yemen Zaidis to leave Lahej alone; also to Somali Mulla.
5. Not one camel of ours is going; some have been taken from the Kosseim and Ibn Saud's district; Sherif might have stopped Ibn Saud, but did not, being informed that he was friend of the British. Will stop him if desired.
6. I have warned Senussi through Idris, but he changed his mind; disapprove of his action and will squeeze Wakil in Mecca.}}}

1. 위대한 대영제국이라면 우리가 잘못된 헛소문들을 믿는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오. 우리는 대영제국이 국민들에게 베푸는 정의와 같은 것들을 알고 있소.
2. 무함마드 샤리프 알 파루키를 이집트에 머물게 한 것은 잘한 일이오. 아직 그가 이집트를 떠나게 하지 마시오.
3. 자금이 도착했소.
4. 예멘자이드파[173]에게 라히즈(Lahej)를 내버려 두라고 글을 써 보냈고, 소말리아의 물라(Mulla)[174]에게도 그렇게 했소.
5. 우리의 낙타는 한 마리도 가지 않소. 그들 중 몇 마리는 코사임(Kosseim)과 이븐 사우드의 구역에서 얻은 것이오. 샤리프는 이븐 사우드를 멈출 수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러지 않았는데, 그가 영국의 친우라는 말을 전해 들었기 때문이오. 원한다면 그를 저지하겠소.
6. 이드리스를 통해 세누시에게 경고를 보냈지만, 그는 마음을 바꾸어 먹었더군. 그의 행동에 반대하며, 메카에 있는 그의 대리인(Wakil)을 압박하겠소.

1916년 1월 1일 후세인이 맥마흔에게 서신을 보내면서 보낸 전령의 구술을 정리한 자료. 1916년 1월 30일 맥마흔의 서신에서 언급되며, 해당 서신에서 언급되는 세누시야의 문제에 대해서도 이 자료를 통해 후세인 빈 알리가 인지했음을 알 수 있다.

5. 교환 서신에 대한 당대 영국의 반응

교환 서신이 오고 갈 무렵 영국의 반응은 사실은 굉장히 회의적이었다. 특히 가장 명확하게 이에 대해 반대 의견을 보였던 것은 인도 제국의 부왕(Viceroy)을 맡고 있던 찰스 하딩, 또 인도 제국의 전직 부왕이었던 조지 커즌(커즌 경: George Nathaniel Curzon, Lord Curzon)과 같은 인물들이었다. 인도 제국은 잘 알려져 있듯 영국 국왕에게 황제의 관을 씌워준, 영국의 식민지 정책의 가장 중요한 핵심이 되는 곳이었고, 인도 내 이슬람교도의 비중 또한 적지 않았던데다가 아프가니스탄카자르 왕조에 보호령과 세력권을 뻗치고 있었으며, 식량 수입을 위해 페르시아 만을 거쳐 이라크 방면으로 이어지는 해로에까지 관여하고 있었다. 또한 다시 이 해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해 쿠웨이트와 네지드-하사 토후국의 이븐 사우드를 비롯한 아라비아 반도의 아미르들과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1907년 시점 인도 제국을 중심으로 한 영국의 식민지 및 세력권 지도

다시 말해, 인도 제국과 밀접한 연고를 맺고 있던 관료들은 아랍국 등을 중심으로 결집한 카이로의 관료들과 의외라면 의외로 이해 관계가 상당히 겹쳤다. 애초에 1916년 1월 카이로의 아랍국을 창출하는 단서가 된, 중앙 정부에 아랍 지역을 관리하는 부서를 두자는 마크 사이크스와 길버트 클레이턴 등의 주장을 찰스 하딩 등이 반대했던 것 또한 이처럼 인도 제국의 이권이 이슬람교도 및 아랍 지역과 직결되어 있는 상황 속에서 중앙에서 인도 제국에 간섭할 여지를 줄이려는, 또 다른 측면에서는 구태여 중앙 정부의 손을 거쳐 불필요한 지출을 늘리는 일을 막아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상황 속에서 가장 큰 아이러니는, 바로 아서 헨리 맥마흔 본인이 서신을 작성하던 바로 그 해, 1915년 이집트로 옮겨오기 직전까지 30년 남짓 동안이나(1885~1915) 인도 제국에서 복무하던 관료였다는 점일 것이다.[175]

더욱이 협상 대상으로서 후세인 빈 알리도 영국에게는 그다지 매력적인 대상이 아니었다. 이후 영국과 프랑스의 도움 없이는 헤자즈 지역조차 제대로 장악하지 못한 채 지지부진하던 후세인 빈 알리의 모습은 이미 영국 관료들에 의해 예측된 것이었다. 그렇기에 그를 꾀어내려 이전에 서신을 보냈던 로날드 스토어스조차 후세인 빈 알리의 첫 서신을 통해 다마스쿠스 의정서의 내용을 전해 받았을 때의 반응은 황당하기 그지없다는 것이었다. 맥마흔의 교섭 과정에 대해 앞서 말한 조지 커즌이나 찰스 하딩 등의 관료는 아랍인들이 이 덕분에 대대적으로 돌아서는 조짐조차 보이지 않는데 아라비아 반도와 시리아, 이라크를 통째로 떼어주자는 지킬 수도 없는 약속을 도대체 왜 하냐고 따지고 들었고, 냉정하게 말해 그것은 가감할 것 없는 현실이었다. 그럼에도 맥마흔은 이를 계속해서 밀어붙였고 이집트 총독에서 전쟁부 장관으로 영전한 허버트 키치너와 외무부 장관 에드워드 그레이(Edward Grey) 등이 은연중에 그의 편을 들었는데, 그나마 키치너는 후세인 빈 알리가 대아랍 봉기를 위한 첫 발걸음을 떼던 1916년 6월 5일 바로 그 날에 독일군의 기뢰에 배가 침몰당해 익사했다.

결국 1916년 6월 봉기 이후에도 예상한 그대로 아라비아 반도 내에서조차 헤자즈 세력은 절대적 우위를 지키지 못했으며, 그 점에서도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은 실현하는 것이 불가능했다. 이미 서술한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이후 결국 헤자즈 왕국을 멸망시키는 직접적인 비수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군사적으로도 월등한 능력을 보여 그들이 일으키는 각종의 소란에도 영국이 그들을 포기하지 못하게 만들었다. 오스만 제국 측에 선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은 결국 헤자즈 왕국이 자력으로 제압하지 못해 휴전한 채로 관계가 끝났고, 예멘 왕국은 헤자즈 왕국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독립했음에도 헤자즈 왕국이 실력을 행사하지 못했다. 거의 유일하게 헤자즈 왕국이 실력을 행사한 곳이라면 이미 오스만 제국의 통치에서 벗어나 있던 아시르 토후국으로부터 1916년 8월 상부 아시르 셰이크국을 독립시켜 영향권에 둔 정도였는데, 이는 오히려 아시르 토후국에게 원한을 사는 결과를 낳았다. 후세인 빈 알리는 이에 대해 당시 패권을 누리던 여러 아미르들이 칼리프인 그의 아래 형식적으로 복속하는 느슨한 연합의 형태를 구상했던 듯도 하나, 그 아미르들을 복종시킬 방법은 결국 영국의 힘을 빌리는 것 이외에 마땅한 것이 없었다.

게다가 정작 그렇게 현지 왕조를 통해 아랍의 패권을 채 오자는 측면에서라면, 더 매력적인 대상은 따로 있었다. 1915년 1월부터 이미 네지드-하사 토후국과 감정의 골이 깊었던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이 전쟁 상태에 접어들고 있었으며, 영국과 오스만 제국은 각각 전자와 후자에 가담해 아라비아 반도 내륙의 패권을 결정 지으려는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이 때 네지드-하사 토후국의 패전 당시 영국의 피해로 인해 양국의 관계는 소원해져 있었으나, 1915년 12월이 되면 네지드-하사 토후국이 영국의 보호령이 되는 조건으로 영국의 파병을 요청함을 받아들여 양국 간에 다린 조약(Treaty of Darin, 앵글로-네지드 조약)이 맺어지며 영국은 네지드-하사 토후국에 대한 확고한 지지를 재확인하게 된다. 이들의 관계는 인도국(India Office)을 통해 맺어졌고, 졸지에 이븐 사우드를 자신의 뒤에 줄 세운 인도국과 맥마흔의 어깨에 손을 얹은 외무부가 경쟁하는 식의 판이 짜였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볼 때, 최소한 현실적인 부담이 덜하고 더 일관적인 선택을 한 것은 인도국 쪽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맥마흔이나 에드워드 그레이가 이를 밀어붙인 논리는 후세인 빈 알리의 무력함이 사실이 아니라고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는 발상에 가까운 것이었다. 맥마흔은 자신도 아랍 왕국이 실제로 창설될 가능성은 낮다고 본다고 말하며 아랍인들을 움직이는 것 자체가 중요할 뿐이라고 자신을 방어했고, 한 술 더 떠 맥마흔을 지원했던 외무부 장관 에드워드 그레이가 맥마흔의 편을 들어준 이유는 아예 '어차피 실현될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후세인 가는 아마 오스만 제국을 견뎌내지 못할 것이지만, 그 자들이 어떻게 되든 오스만 제국의 후방에서 분탕이나 쳐 주면 그걸로 성공이라는 것이 그들의 논리였다. 오히려 그나마 후세인 빈 알리가 오스만 제국의 발목을 잡고 있는 것만으로 충분한 역할을 하고 있으며 와하브파로서 아랍의 종교 지도자로서 모두의 동의를 받을 수 없는 이븐 사우드에 비해 메카와 메디나를 거느린 후세인 빈 알리가 충분히 가치 있는 교섭 대상이라고 설득하려 애 쓴 사람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 본인의 구상을 짜 맞추느라 머리를 싸매던 마크 사이크스 정도였는데, 그나마 그조차도 전쟁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1919년 2월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 결과 뒤늦게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과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조건을 서로의 빈 틈에 쑤셔박으려던 그의 아슬아슬한 곡예 외교적 절충안조차 의미 있게 논해지지 않았다.

마침내 이 무책임한 태도 속에 후세인 빈 알리에게 영국이 본 객관적인 실력에 비해 압도적으로 큰 권리를 보장하여 주기로 하는 약조가 맺어졌고, 이미 벌어진 일을 되돌릴 수 없는 판 속에서 영국은 막대한 전비를 들여 아랍 전선을 유지해야 했다. 결국 후세인 빈 알리의 헤자즈 왕국은 살아남았고, 이렇게 되자 당연히 지켜질 수 없는 수준의 약속을 전후에 급급히 처리하려는 영국의 행보는 말 그대로 난장판이 되었다. 이에 대해서 헨리 맥마흔은 스스로 크게 후회하고 못마땅하게 여긴다고 진술하곤 했지만, 그가 이런 말을 꺼냈던 것조차 스스로 엎질러버린 물에 대해 푸념과 변명을 늘어놓으면서였다. 전후의 혼란은, 결국 그의 무책임한 펜대 아래 정해진 것이나 다름 없었던 것이다.

6.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의 해석 문제

The note which McMahon despatched in reply is by far the most important in the whole correspondence, and may perhaps be regarded as the most important international document in the history of the Arab national movement. It contains the pledges which brought the Arabs into the War, openly on the side of the Allies. In the years that followed the War, it became an outstanding bone of contention; and, down to the present day, is still invoked as the main piece of evidence on which the Arabs accuse Great Britain of having broken faith with them.
맥마흔이 (후세인의 2번째 편지에) 회신으로 보낸 편지는 전체 교환 서신 중 단연코 가장 중요하며, 또 아마도 아랍 민족 운동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국제 문서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아랍인들을 공개적으로 동맹 국가들의 편에 서도록 전쟁에 끌어들인 약조를 포함한다. 전쟁에 뒤이은 여러 해 동안 이는 논쟁의 두드러진 뼈대가 되었으며,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도 여전히 아랍인들이 대영제국을 향해 그들과의 신의를 깼다고 몰아붙이는 증거의 중추로서 제시되어 왔다.
조지 안토니우스(1938), 《아랍의 각성》, 169쪽
파일:HMCMap-2-b.png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 대한 양측의 이해를 정리한 한 안[176]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특히 가장 큰 쟁점이 되는 것은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보낸 서신에서 확인되는 다음 문장이다.
The two districts of Mersina and Alexandretta and portions of Syria lying to the west of the districts of Damascus, Homs, Hama and Aleppo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should be excluded from the limits demanded.
With the above modification, and without prejudice to our existing treaties with Arab chiefs, we accept those limits.
메르신과 알렉산트레타 두 구역, 그리고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는 순수한 아랍 지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요구한 경계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상기한 수정 사항을 포함해, 또 아랍 수장(chief)들과의 사이에서 이미 맺어진 조약들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그러한 경계를 받아들입니다.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보낸 2번째 서신(전체 4번째 서신) 中

여기서 말하는 '시리아'는 앞서 언급했듯 현재의 국가 시리아보다 넓은 지역으로서의 대(大)시리아를 의미하는데, 그 중에서도 현재의 국가 시리아에 포함되는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 등의 지역보다 서쪽에 위치한 지역에 대해서 맥마흔은 독립할 아랍 지역에서 제외되어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때 이것이 앞서 언급한, 1915년 5월 23일 다마스쿠스 의정서에서 기초되고 1915년 7월 14일 후세인의 서신을 통해 영국 측에 전달된, 대(大)시리아 전체를 포함한 아랍 국가 영토의 초안을 가장 기초적인 전제로 하고, 맥마흔은 그로부터 일부 영토를 예외적으로 제외하기를 바라고 있음이 인지되어야 한다. 일반적으로, 위의 밑줄 및 강조한 문구를 제외하고 영국이 아랍 국가의 영토에서 팔레스타인을 빼려 하는 의도가 있었다고 해석될 조금의 여지라도 있는 문구는 없다고 여겨진다. 곧 아래에서 언급되듯 후세인이 이에 동의하지 않았음을 아예 고려하지 않더라도, 위의 문구를 통해 맥마흔이 팔레스타인을 배제하려 했음이 명확해야 영국의 최소한의 주장이 성립된다.
… we renounce our insistence on the inclusion of the vilayets of Mersina and Adana in the Arab Kingdom. But the two vilayets of Aleppo and Beirut and their sea coasts are purely Arab vilayets, and there is no difference between a Moslem and a Christian Arab: they are both descendants of one forefather.
… (전략) … 우리는 아랍 왕국에 메르신과 아다나의 빌라예트들을 포함시키려는 우리의 주장을 포기하오. 그러나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는 순수한 아랍 빌라예트들이며, (그곳의) 무슬림과 기독교를 믿는 아랍인 사이에는 차이가 없소. 그들은 모두 하나의 선조로부터 나온 후손이오.
1915년 11월 5일 후세인이 맥마흔에게 보낸 3번째 서신(전체 5번째 서신) 中

이에 대해 후세인 빈 알리는 1915년 11월 5일 맥마흔에게 보낸 서신에서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는 현재의 튀르키예 남부인 메르신, 아다나와 달리 순수한 아랍의 지역이라고 하며, 메르신·아다나와 달리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를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에서 배제시키는 데 대해서는 완강히 거부하였다. 만일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과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와 같은 뜻이라면, 팔레스타인이 후자에 포함된다고 보더라도 아랍 측은 이를 정확히 거부한 것이므로 영국의 논리가 성립하지 않는다고 볼 여지가 크다.

다시 말해,
(1) 1915년 10월 24일 맥마흔이 언급한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에 팔레스타인이 포함되고
(2) 1915년 11월 5일 후세인이 언급한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는 맥마흔이 앞서 언급한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와 다른 뜻으로 팔레스타인이 포함되지 않아야
아래에 소개하는 영국의 논리가 온전히 성립한다.

1915년 11월 5일의 후세인 측의 주장에 대해, 1915년 12월 16일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보낸 서신에서는 알레포 및 베이루트 빌라예트에 대해서 영국 측이 프랑스와의 이권을 고려하여 적절한 과정을 거쳐(in due course) 논의할 필요가 있다면서 논의를 추후로 미룰 것을 주장하였다. 1916년 1월 1일 후세인은 굉장히 불편한 기색을 보이면서도 아랍 봉기에 대한 문제로 논의를 진행시키고자 이 문제를 일단 미루어두겠다는 듯 명목상으로는 이 문제에 대해 유보 상태로 물러나기는 했으나, 그러면서도 북부 지역과 그 해안가에 대한 11월 5일의 주장을 고수한다고 하면서 베이루트와 그 해안가를 프랑스를 비롯한 어느 세력이 점령하더라도 강한 반발이 일어날 것이며 그 경우 영국이 더 큰 곤경에 처할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명시적으로 땅 한 뙈기도, 프랑스뿐만 아니라 다른 어느 세력에게도 내어줄 수 없다고 하며, 결국 협상을 통해 양보할 의지가 없음을 명확히 했다.

1916년 1월 30일 맥마흔은 이에 대해 '북부 지역에 대해'라는 서두를 붙인 뒤 '프랑스와 영국의 동맹은 굳건하고 앞으로 더 굳건해질 것이며, 아랍인들이 이 대의에 동참함을 기쁘게 여긴다'고 답하여, 사실상 문제를 회피하는 동문서답을 내놓으면서도 은근슬쩍 자국의 주장을 고수하는 단서를 심어놓았다. 이는 교환된 서신에서 에둘러 한 말로나마 마지막으로 이 문제를 언급한 것이며, 이후 2편의 서신에서는 다가온 봉기 문제를 논의하는 것으로 화두가 넘어가 이 문제는 결국 완전히 합의되지 않은 채 언급에서 사라졌다.

이 서신에서 언급한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는 애초에 프랑스의 이권과 관련하여 문제가 되었다. 그러나 정작 아랍 봉기와 대오스만 전쟁이 끝난 뒤에는 애초에 서신 교환의 당사자가 아니었던 프랑스는 잠시 동안의 유보 이후에 아랍 측에 무력을 행사하면서 식민지를 건설하려 나서 아랍인들을 힘으로 짓밟아 버렸기 때문에, 일단 영국과 아랍의 분쟁 지역이라는 데 이견의 여지는 없던 다마스쿠스 북서쪽 해안에 대해서는 정작 애초에 논의 자체가 성립하지 않는 상황이 되었다. 결국 교환 서신의 당사자인 영국이 점령한 팔레스타인에 대해서 각각의 문구가 팔레스타인을 포함하는지, 양자가 일치하는지의 여부가 이후 양 측 사이에서 큰 쟁점이 되었다. 그러나 팔레스타인을 자국의 점령지 안에 두고 있던 영국이 이를 내어주지 않으려는 동안 아랍 지역의 정세 또한 상당한 요동을 겪고 끝내 아랍 통일 국가 설립 운동이 좌절되면서 결국 이때의 점령지가 영국이 위임통치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기초가 되었다. 이는 당대로부터 아랍인들 사이에 서방에 대한 크나큰 반감을 불러일으켰으며, 끝끝내 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정착한 유대인들이 오늘날 이스라엘의 건국 기반이 되고 현재까지 이어지는 중동 지역의 적지 않은 분쟁에서 진앙 역할을 하게 되면서 이 문서의 해석 문제는 아직까지도 역사적 논쟁의 중심에 서 있다.

6.1. 영국 측의 해석

파일:HMCMap-B3-a.png
영국 측의 입장에서 본,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논의된 북쪽 경계 제외의 기선(예루살렘 단독 제외안)
  •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는 오스만 제국의 베이루트 빌라예트뿐만 아니라 다마스쿠스 빌라예트의 남서쪽에 위치한 팔레스타인이 포함된다고 볼 수 있으며,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는 오스만 제국의 알레포 빌라예트와 베이루트 빌라예트만을 지칭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은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 기선 내에 포함될 수 있으며, 영국 측이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에서 배제하기를 요구한 지역에는 포함되나 아랍 측이 다시 영유권을 주장한 지역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 오스만 제국의 후기 행정 구역인 빌라예트(vilayet)는 일반적으로 주(州)로 번역되고, 산자크(sanjak)는 군(郡)·시(市) 정도로 번역될 수 있다. 이 빌라예트 아래에 산자크가 두어지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지도에서 보이듯 예루살렘은 다종교의 성지로서 갖는 특수성 때문에 1872년부터 '독립적인' 산자크로서[177] '총독'에 대응될 수 있는 무타사리프(Mutasarrif)에 의해 특별한 대우를 받는 무타사리프령(Mutasarrifate)으로 개편되었다. 이 무타사리프령은 행정적으로도 빌라예트의 소속으로부터 벗어나 있었고, 예루살렘 무타사리프령은 베이루트 빌라예트의 남쪽, 다마스쿠스 빌라예트(시리아 빌라예트)의 서쪽에 위치했다.
    따라서 이후에 팔레스타인(현재 이스라엘)에 해당하게 되는 오스만의 독립적인 특별구역인 예루살렘 무타사리프령에 대해서 이 교환 서신에서는 '직접적으로는' 일절 언급되지 않았지만, 알레포·하마·홈스·다마스쿠스 기선의 서쪽, 특히 다마스쿠스 빌라예트의 서쪽에 해당하는 지역 가운데 베이루트 빌라예트를 제외한 예루살렘 무타사리프령은 맥마흔 측에 의해서 배제될 곳으로는 언급되었으나 후세인 측에 의해서 다시금 영유권을 주장할 곳으로는 언급되지 않은 것으로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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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HMCMap-B4-a.png
영국 측의 입장에서 본,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논의된 북쪽 경계 제외의 기선
(예루살렘·레바논 동시 제외안)
  • 한편, 영국은 이와 같은 논리로 바로 위의 지도에는 회색으로 표시된 레바논 산 무타사리프령(Mount Lebannon Mutasarrifate) 또한 다마스쿠스(빌라예트)의 서쪽이면서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에 해당하지 않는다고 하여, 현재의 레바논 지역 또한 맥마흔이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에서 배제하기를 요구하고 후세인은 문제를 제기하지 않은 곳이라는 해석을 고안한다. 영국 국가 기록보관소 CAB 24/68/86, 5쪽 참고. 이는 1918년 11월 7일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위해 도출된 것이나, 곧바로 이는 해석을 둘러싼 문제로 비화되었다.
  • 맥마흔이 이 지역을 아랍 측의 영토에서 배제하기를 요구한 가장 큰 이유는 영국의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권을 침해할 우려가 있다는 문제 때문이었다. 그런데 1912년 발칸 전쟁 당시 프랑스가 개입 의사를 타진하며 이권을 요구한 대(大)시리아 지역에는 팔레스타인이 포함되며, 그 기원은 1838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영사관을 개설한 데 이어 1843년 프랑스가 팔레스타인에 영사관을 개설한 일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78] 따라서 맥마흔이 영토에서 배제하기를 요구한, '프랑스의 이권과 관련된' 지역에는 팔레스타인이 포함된 것으로 보아야 하며, 이를 포함한 기선에는 문제가 없다고 할 수 있다.
  • 애초에 교환 서신 자체가 조약(Treaty) 또는 협약(Agreement)으로서의 성격을 갖지 않는다. 따라서 이를 조약 또는 협약으로 보고 그 내용을 이행할 것을 요구하는 것은 불합리하며, 그럴 수도 없었다. 예컨대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은 아라비아 반도 내에서 아덴을 제외한 모든 영역을 포함하는데, 이미 다린 조약(앵글로-네지드 조약)이 체결되어 네지드-하사 토후국을 자국의 보호령으로 삼고 이들의 숙적이었던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을 멸망시키려 나서기까지 하던 영국에게 아랍 유일의 패권자로 후세인을 인정하며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을 조약 내지 협약으로서 이행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 가운데 마지막으로 후세인이 보낸 서신에서 후세인은 시리아에 10만 명을 넘는 군대가 집결할 것이며 아랍인이 다수라면 파이살이 이들을 이끌고 다른 민족이 다수라면 이들에 대한 교란 작전을 펼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결과적으로 볼 때 이는 제대로 된 실행 단계에조차 들어서지 못한 채 완전히 실패했다. 실제로 봉기한 병력은 대아랍 봉기의 마지막 단계에서조차 최대치가 5만 명 전후로 추정되며, 헤자즈 왕국에 직속된 병력은 수천 명 단위에 불과했다. 따라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을 양 측의 '계약'으로 이해하더라도, 먼저 '계약'을 이행하지 못한 것은 아랍 측이다.

6.2. 아랍 측의 해석

파일:McMahonHusseinArabView.png
아랍 측의 입장에 기초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논의된 북쪽 경계 제외 기선의 한 안(출처)[179]
파일:HMCMap-A2-a.png
아랍 측의 입장에서 본,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논의된 북쪽 경계 제외의 또 다른 안
  •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은 문자 그대로 다마스쿠스-알레포에서 서쪽으로 직선으로 이어지는 기선을 따르거나, 레바논 산 무타사리프령 북쪽의 베이루트 빌라예트의 경계에 따른 기선, 또는 적어도 그 남한계선은 다마스쿠스-베이루트를 연결하는 기선에 준해야 하며,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는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과 일치한다. 따라서 팔레스타인 지역은 애초에 맥마흔이 포기할 것을 요구하고 후세인은 이에 동의할 수 없다고 맞선 논쟁의 대상조차 된 적이 없으며, 팔레스타인은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에 포함되어야 했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성립 근거 자체가 부족하다.
  • 교환된 서신 내에서 빌라예트(아랍어로는 '윌라야')는 행정 구역의 명칭으로 쓰인 것이 아니라, '지방'이라는 일반명사적인 의미로 쓰였다고 보아야 한다. 예컨대 후세인 빈 알리는 1915년 11월 5일 서신에서 '메르신과 아다나의 빌라예트들'(the vilayets of Mersina and Adana)라는 표현을 쓰는데, 실제로는 둘 중 아다나는 빌라예트지만 메르신은 아다나 빌라예트 아래의 산자크로서 빌라예트가 아니다. 또한 애초에 1915년 10월 24일 서신에서 맥마흔이 사용한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district)'이라는 표현 그 자체에서 빌라예트인 알레포, 다마스쿠스와 산자크인 홈스, 하마가 구분되지 않고, 따라서 맥마흔이 언급한 구역(district)은 고유명사로서 빌라예트와 산자크 어디에도 대응시킬 수 없다.
    애초에 주(州)에 대응시킬 법한 광역 행정 단위로서 알레포 빌라예트와 베이루트 빌라예트는 당연히 해안까지 포함하는 권역이기 때문에,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라는 표현이 빌라예트라는 광역 행정 구역에 기반을 둔 구획이라면, '그 해안가(their seacoasts)'라는 표현은 역전앞과 같은 표현으로서 명기될 필요도 없다는 점 또한 근거로 언급된다. 나아가 만일 '다마스쿠스'가 '다마스쿠스(시리아) 빌라예트'를 의미하여 그 '빌라예트' 단위로 서쪽의 땅을 논하고자 한 것이라면, 마찬가지로 빌라예트인 알레포 빌라예트의 서쪽으로 북위 37도선 남쪽 지방은 곧장 바다로 땅이 없는데 '알레포'는 왜 언급한 것인지도 해명되지 않는다. 또한 그러므로 맥마흔이 다마스쿠스 빌라예트를 의도하고 다마스쿠스를 언급했다고 볼 수 없으며, 영국 측이 오스만 제국 측의 지리 인식을 엄밀히 반영하여 이 논의를 진행하였다고는 볼 수 없고, 예루살렘 무타사리프령을 영국이 포함시켰는데 아랍 측은 배제했다고 보는 근거로도 쓸 수 없다.
  • 상기한 1918년 11월 무렵 영국이 도출해 낸 주장, 다시 말해 팔레스타인뿐만 아니라 레바논 또한 알레포와 베이루트의 두 빌라예트들과 그 해안가에서 제외된다는 주장은 일반적으로 거의 언급되지 않는데, 이에 따라 지도를 그릴 경우 팔레스타인처럼 기선 문제로 보일 수 있는 수준을 넘어 베이루트 빌라예트의 가운데가 뻥 뚫린 기형적 지도가 그려지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 가운데 베이루트는 또 이름답게 베이루트 빌라예트의 치소로 레바논 산 무타사리프령에 속하지 않고 베이루트 빌라예트에 포함되며, 1916년 1월 1일의 서신에서 베이루트의 시민들이 저항할 것임이 언급되어 아랍 측에서 영토에서 배제하기를 분명히 거부한 지역이었다. 이에 따라 다시 레바논 산 무타사리프령에서 베이루트를 분리시키고 나면, 베이루트가 다시 한 번 섬과 같은 형태의 월경지가 되어 그 기형적 성격이 더더욱 심화된다. 때문에 이 두 지역 간의 복잡한 성격은 결국 영국과 프랑스 스스로에 의해 단순화되어 프랑스가 베이루트를 실질적으로 점령하였다. 그로 인해 애초에 영국이 창출해 낸 이 해석이 오히려 영국 측의 해석을 지지하는 데도 잘 인용되지 않는 데서, '무타사리프령 분리론'이라고 할 레바논, 나아가 애초에 같은 원리로 논해진 예루살렘의 분리론이 갖는 모순적 성격을 잘 알 수 있다.
  • 영국 측에 따르면 교환된 서신의 내용 가운데 맨 처음에 영국 측에서는 팔레스타인을 포함해 언급했으나 아랍 측은 별도의 언급 없이 팔레스타인을 빼고 논의를 진행했다는 것이 되는데, 전혀 문맥상 자연스러운 흐름이 아니다. '바그다드와 바스라 빌라예트', '이라크의 빌라예트들', '바그다드의 빌라예트' 등의 표현이 마찬가지로 혼재된 현재의 이라크 지역에 대해서는 원만한 합의가 이루어졌는데, 이는 양자가 표현은 다를지언정 서로가 같은 지역을 지칭하고 있음을 명백히 인지했기 때문이다.
  • 드 분센 위원회의 내용에서 보듯, 영국은 1912년 프랑스가 대(大)시리아에 대한 이권을 요구한 데 대해 대(大)시리아 북부와 시리아 남부를 분리시키기 위해 애쓰고 있었으며, 프랑스의 이권을 고려하여 프랑스에 양보할 수 있는 대(大)시리아의 지역에 팔레스타인을 포함시키지 않았다. 아이러니하게도, 아랍 측의 입장을 배제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적 야욕이 여실히 투영된 그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조차 프랑스의 권역은 철저히 팔레스타인보다 북쪽으로 제한된다. 따라서 다마스쿠스·하마·홈스·알레포라는 기점이 언급된 것 또한 프랑스와 이권 문제가 발생하는 다마스쿠스까지의 영역, 팔레스타인보다 명백히 북쪽의 선을 염두에 두고 언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그러므로 프랑스가 팔레스타인의 이해 당사자라는 해석은 도출할 수 없으며, 자연히 맥마흔은 팔레스타인을 염두에 두지 않은 채 해당 권역을 언급한 것으로 보아야 한다.
  • 교환 서신 내에서 '협약(agreement)'이라는 내용은 직접적으로 여러 차례 언급되며, 대부분은 후세인에 의한 것이지만 맥마흔 또한 1916년 1월 14일 4차 서신 내에서 "우리의 협약이 갖는 지속성과 힘은 이러한 노력들의 성공과 행동할 때가 왔을 때 아랍인들이 그로부터 우리의 대의명분을 지지하러 나서려는 활동적인 조치들에 기초해야 할 것입니다(It is on the success of these efforts and on the more active measures which the Arabs may hereafter take in support of our cause, when the time for action comes, that the permanence and strength of our agreement must depend)"라고 한 데서 확인된다. 또한 1919년 파리 강화 회의 4인 위원회에서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아랍인들과의 조약(the Treaty with the Arabs, 17~18행)'이라는 표현을 언급했다. 따라서 영국 측에서 이를 조약 내지 협약에 준해 이해하지 않았다고 볼 수 없다.[180]

1939년 아랍-영국 위원회의 기록 또한 참고. 이 위원회는 1936년 팔레스타인 대반란이 겨우 수습된 이후,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이 아랍 측 논자들에 의해서도 어느 정도 분석된 이후에 진행되었고,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영국 측에서 아랍의 민심을 다스리기 위해 열린 것으로, 그로 인해 아랍 측의 가장 기초적인 반론도 이 위원회의 내용에 나타나 있다.[181]

6.2.1. 영국 측의 해석과 반하는 영국 측 자료

아랍 측에서 영국에 대해 억울한 만한 또 다른 문제는 그나마 유보적인 표현을 남겨놓은 맥마흔과 달리, 영국 본국에서는 애초에 후세인 빈 알리에게 팔레스타인을 양보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각종의 문서가 확인되었다는 점이다.
  • 예컨대 1918년 11월 21일 영국 외무부 정치정보국 문서에서는 "팔레스타인(요르단의 서쪽)은 … (a.) 우리는 후세인 왕에게 이 영역이 '아랍'이며 '독립'해야 한다고 약조했습니다."[182]고 기록하였다.
  • 또한 1918년 12월 5일 조지 커즌은 "우선 헨리 맥마흔 경이 1915년 10월 24일 후세인 왕에게 보낸 서신이 있는데 거기서 우리나라는 그에게 헤자즈, 우리가 보통 메소포타미아라고 부르는 붉은 영역, 갈색 영역 또는 팔레스타인, 아크레-하이파 거주 지구(enclave), 넓은 (A)와 (B) 아랍 지역, 그리고 아덴까지 이어지는 아라비아 반도 전체가 아랍의 땅으로 독립할 것임을 보증했습니다."[183]고 발언했다.
다만 이는 영국 내부의 논의이며, 영국의 일관적이지 못한 태도를 지적할 수는 있으나 국제적인 협의의 근거로 내놓기는 어렵다. 러스크 서한이 의미를 갖지 못하는 이유와 동일한 이유.

6.3. 기타 쟁점 및 문제점

  • 결국 이러한 상황을 한 발 물러나서 생각해 보자면, 맨 처음에 언급된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이라는 표현 자체가 네 도시를 잇는 남쪽으로 닫혀 있지 않은 선 이외의 어떤 기선으로 인식하기에는 불명확했다는 점이 문제의 가장 큰 불씨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이 표현에는 빌라예트 단위와 산자크 단위가 혼재되어 인용되고 있으며, 아랍 측이 지적하는 대로 적어도 이에 대해서 맥마흔이 명확한 인식을 가졌을 가능성은 0에 가깝다.[184] 이 문제는 이미 1915년 10월 26일 맥마흔이 "저는 프랑스인들이 시리아에서 권리를 주장하는 지역의 범위나 국왕 폐하의 정부가 이를 인정하기로 한 곳이 어디까지인지를 알지 못합니다."라고 한 것이나, 1916년 4월 19일 영국 아랍국(Arab Bureau)의 맥마흔에 대한 서신에서 아랍의 독립을 보장하기로 한 선을 페르시아 서쪽-페르시아 만인도양 북쪽-홍해지중해 동쪽 지역의 북위 33도와 37도 사이 가운데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와 알레포 내륙 서쪽의 불확실한 선 너머"로 언급하듯[185] 논쟁이 되기 전부터 인지된 문제점이었는데, 애초에 추후에 외교 문제를 일으키지 않고자, 그러나 달리 말하면 여차하면 자국과 동맹 국가에 유리하게 해석하고자 의도적으로 모호한 문구가 삽입된 것이다.
    후세인 측 또한 시일의 촉박함에 더해 그 스스로도 빌라예트인 '윌라야'와 빌라예트가 아닌 '윌라야'를 구분하지 않으며 예루살렘을 명명백백하게 언급하지 않는 등 복기해 보면 실책이 된 엄밀함이 부족한 표현을 사용했는데, 물론 도의적으로 후세인에게 책임을 묻는 것은 식민주의제국주의에 동조한다는 비판까지 받을 수 있는 굉장히 잔인한 일이겠지만, 어쨌든 근대 법리에 익숙하지 못한 채로 근대 법리의 농간 앞에 욕을 당한 안타까운 상황이라고 표현할 수는 있을 것이다.
  • 한편, 다마스쿠스 의정서 및 교환 서신의 내용에는 헤자즈와 대(大)시리아를 제외한 아랍 수장들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으며, 상기하였듯 그나마 대(大)시리아를 중심으로 한 알-파타트와 알 아흐드 조직은 봉기 전에 이미 오스만 제국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어 있었다. 후세인 본인 또한, 군사적 재능은 냉정하게 말해 보잘 것이 없었다. 이 결과 후술하듯 봉기 초기 후세인에게 동조하는 아랍 세력은 미미했고, 후세인 측은 헤자즈 내에서조차 초기에 기선을 제압하는 데 실패했다. 영국은 이에 대해 크게 실망했고, 실질적으로도 막대한 인력과 전비를 소모해야 했으며, 이는 헤자즈 왕국을 영국이 외면하는 원인 중 하나가 된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영국의 시각에 헤자즈 왕국은 '아랍 통일 국가를 이룰 주도 세력'이 아니라 '아랍 지역의 수많은 토착 국가 중 하나'로 전락했다.
    이 결과 1918년 이후 본격적으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을 놓고 대(大)시리아가 동요할 때 헤자즈 왕국 계통의 파이살이 주도적인 역할을 한 것과 별개로 헤자즈 왕국은 같은 아랍 세력인 네지드-하사 토후국과의 전쟁에서도 수세에 몰려 그들을 도울 여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자연히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호소력은 대(大)시리아와 이라크 정도에 미치는 정도로 축소되었으며, 그로 인해 대(大)시리아 문제가 더욱 부각된 측면도 있다.
  • 더 물러나서 아예 오스만 제국의 입장에서 보면, 사실 이 교환 서신의 내용도 아랍 측에서 욕하는 사이크스-피코 밀약과 그다지 다를 바 없는 더러운 노름판일 것이다(...). 단지 오스만 제국은 멸망하고 세브르 조약으로 아나톨리아 반도 내부까지 땅따먹기의 대상이 되는 참사가 날 뻔한 상황에서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영토를 수복한 대로 로잔 조약을 맺으면서 독립한 아랍 지역을 포기했을 뿐. 또한 어쨌든 튀르키예는 현재 반서방적인 입장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지하는 국가이니만큼 이 문제를 굳이 아랍 측을 비판하면서 공론화할 리는 없을 것이다.
  • 한편 아예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이 팔레스타인에 (독자적인) 독립 국가를 보장한다고 이해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는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한다고 해석하는 한국 일각에서 반복되고 있는 지극히 곡해된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을 철저히 아랍 측에 유리하게 해석하더라도, 팔레스타인은 아랍의 일부로 이해된 것이지 여타의 아랍 지역과 분리된 지역으로 이해되지 않았다. 정작 후세인 빈 알리가 통일된 아랍 국가를 창건하기 위해 애를 썼음을 생각하면 오히려 후세인 빈 알리가 무덤에서 일어날 황당한 소리일 것이다. 이에 대비되는 팔레스타인 독립 운동은 1936년 팔레스타인에서의 아랍인 봉기에서 싹을 틔우기 시작하지만, 제1차 중동전쟁 당시 아랍 국가들조차도 오히려 이스라엘의 땅을 '아랍 국가의 일부'로서 자국에 편입시키기 위해 참전했으며[186] 그로 인한 현지 아랍 민병대와 아랍 국가의 불통이 제1차 중동전쟁에서 아랍 측이 참패하는 데 큰 역할을 했음이 잘 알려져 있다.

7. '아랍 통일 국가' 건국의 좌절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은 팔레스타인의 영유권 문제를 둘러싼 영국과 아랍 양 측의 논쟁으로 잘 알려져 있지만, 사실 그 무엇보다 중요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은 다마스쿠스 의정서에서 연속되는 아랍의 통일된 칼리프제 독립 국가의 건설이었다. 그러나 1916년 6월 아랍 반란이 일어나 헤자즈 왕국이 건립된 전후, 그리고 또 그 이후로 영국의 지속적인 말 바꾸기와 프랑스의 개입, 남쪽에서 치솟듯 북상한 네지드-하사 토후국(이후의 네지드 술탄국)이라는 변수 등이 맞물려, 헤자즈인들이 꿈 꾸었던 통일된 아랍 국가는 실현되지 못한 채 역사 속의 꿈으로 사라지고 만다.

7.1. 사이크스-피코 밀약(1916.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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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sykes-picot.png
파일:HMCMap-C2-d.png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과 사이크스-피코 밀약이
중첩되었을 경우의 상황을 정리한 한 안

후세인 빈 알리와 헨리 맥마흔 사이에 서신이 교환되던 것과 거의 같은 시기인 1915년 11월부터 1916년 3월에 걸쳐 영국과 프랑스가 비밀리에 중동 분할안을 논의했다. 그 결과 1916년 5월 체결된 이 협정의 이름을 협상을 담당했던 베이루트 주재 프랑스 총영사 샤를 조르지 피코와 영국 정부에서 파견한 중동 전문가 마크 사이크스의 이름을 딴 사이크스-피코 협정, 또는 사이크스-피코 비밀협정, 사이크스-피코 밀약 등으로 부른다.[187]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이 실행에 옮겨지지 못한 가장 큰 원인이자, 비교적 모호한 문구로 재해석의 여지라도 남아 있던 밸푸어 선언과 달리 명백한 이중계약. 구체적으로는 이라크 해안 지대와 아크레-하이파를 영국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팔레스타인을 국제 지구(international zone) 관할, 튀르키예 남부 및 현재 시리아 지중해 연안부 및 레바논을 프랑스의 직접적인 통제 아래 두고 그 사이의 지역을 나누어 영국(남쪽 및 동쪽)과 프랑스(북서쪽)의 세력권으로 가른다는 내용의 조약이다. 이후 튀르키예 남부에서 협상국이 격퇴당하여 프랑스의 의도가 차단된 것을 제외하면 이 판도에서 다소의 변화는 있으나, 아랍 세계는 사실상 이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내용과 큰 차이가 없는, 그마저도 영국과 프랑스에게 조금씩의 이권이 더 보장된 형태로 재편되게 된다.

이 협정은 비밀 협상으로서 체결 당시에는 공개되지 않았으나, 1917년 11월 23일 러시아 제국뒤엎은 볼셰비키들이 프라우다에 공개해 버렸다. 이로 인해 아랍 지역에서는 영국과 프랑스에 대한 짙은 불신이 쌓이게 된다.

한편 밀약의 누출 이전, 1917년 5월 사이크스와 피코는 제다에서 후세인과 접견해 시리아에 대한 프랑스의 이권을 인정하여 주기를 요청했다. 이 자리에는 파이살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도 동석했다. 엘리 케두리(Elie Kedourie)는 이를 들어 후세인 빈 알리가 이 때 사이크스-피코 밀약에 대해 인지했다고 주장하는 반면, 조나단 슈니어(Jonathan Schneer)는 사이크스와 피코, 특히 사이크스는 시리아에서 프랑스의 이권은 이라크에서 영국의 이권이 지켜지는 방식, 곧 '특별한 행정적 조치'에 상응하는 형식으로 행사될 것이라고 하여 후세인을 설득했고 후세인은 영국에 대한 신뢰를 근거로 이에 동의한 것이라고 보았다.[188] 그러나 협상의 당사자 모두 적당히 상대를 기만하고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려는 속내에서 협의를 진행한(때문에 회동 직후 파이살은 그 내용에 대해 의문을 표했던), 기묘하디 기묘한 회동이었다.[189]

또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에 따르면 대략 1918년 5월 초 무렵 이전에[190] 파이살은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내용을 인지하였다. 《지혜의 일곱 기둥(Seven Pillars of Wisdom)》 101장에 따르면 제말 파샤가 파이살에게 휴전을 제의한 일이 있었는데, 이 때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는 "그들의 가장 강력한 패는 사이크스-피코 협정이었으나(Their strongest card was the Sykes-Picot agreement)" "다행히도 나는 일찍이 조약의 존재를 파이살에게 누설한 적이 있었다(Fortunately, I had early betrayed the treaty’s existence to Feisal)"고 하기 때문이다. # 물론 이는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이라기에는 무리가 있으므로, 이후 후세인과 파이살의 태도에도 변명의 여지는 있다.

7.2. 아랍 반란헤자즈 왕국의 건국(1916. 6.), 영국 치하 이집트군의 북상(1917. 1.~1918. 12.)

후세인은 맥마흔과의 마지막 서신에서 언급했듯 메디나에 알리 빈 후세인을, 시리아에 파이살을 보내었고, 1916년 6월 5일에는 메디나에서 봉기를 일으키기 위한 공작을 시작했으며, 6월 10일에는 마침내 정식으로 헤자즈 왕국의 건국을 선포하면서 오스만 제국에 대한 공식적인 반란에 진입했다. 영국은 이에 대해 해로를 통해 후세인군을 지원하고 나섰다.

그러나 10만 명 이상의 아랍인들이 모여들 것이라며 호언장담한 것과 달리 실제로는 오스만 제국군에 잔류한 장교들이 대부분이었고, 반란 초기의 기세는 주춤했다. 프랑스와 영국 해군의 지원을 받아 제다를 6월 16일에 함락시킨 것을 제외하면, 메디나에서의 반란 공작은 최초에는 실패했으며, 메카 또한 시가전 끝에 1달가량의 시간의 걸려 7월 9일에야 함락되었다. 이후 아랍 봉기군은 방어 시설이 미흡했던 얀부를 7월 27일 함락시켰고 이집트로부터 포병을 지원 받으면서 9월 22일 타이프를 함락시켰으며 비슷한 무렵 항구 도시 라비그(Rabigh)를 손에 넣었으나, 10월 메디나에 대한 공세는 끝내 실패했다.

그래도 헤자즈 왕국이 제다와 얀부, 라비그 등을 손에 넣으면서 홍해 방면의 해로가 확보되었고, 이를 통해 영국과 프랑스의 고문이 파견되었다. 대표적으로 1916년 10월부터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아랍 지역에서 활동했다. 그 스스로가 행적에 대해 과장하여 매스미디어에서 그 경향이 증폭되었다는 비판도 있으나, 어쨌든 이 시기 그의 활동은 아라비아의 로렌스라는 작품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191] 또한 1916년 9월부터 에두아르 브레몽(Édouard Brémond)이 이끄는 프랑스 군사고문단이 머물며 아랍 봉기군을 도왔다.

그러나 이 무렵 헤자즈 왕국의 군사적 성과에 대해 영국은 굉장히 불만스러워 했다. 1915년 이미 알-파타트와 알 아흐드 등이 큰 타격을 입은 탓에 봉기 초기 대(大)시리아 지역에서 집결한다던 아랍 봉기군은 소식이 없다시피 했고, 영국의 해안에서의 지원 없이는 헤자즈군이 딱히 거둔 성과랄 것이 없었다. 냉정하게 말해, 후세인에게도 군사적 기반과 재능이랄 것이 없었다. 그럼에도 후세인은 영국의 영향력 확대를 우려하여 내륙으로 영국군이 침투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이는 영국뿐만 아니라 전장에서 누구라도 손을 보태는 것이 절실했던 그의 아들들의 견해와도 충돌하는 것이었다.

그와는 별개로 1916년 9월 이후 헤자즈 왕국 인사와 카이로의 영국 관료들, 인도 제국의 관료와 프랑스군은 라비그를 중심으로 회동하면서, 곧 오스만 제국군이 상실한 지역을 탈환하기 위해 공세에 나설 것임을 예감했다. 카이로의 관료들과 이곳에 직접 힘을 쓰기 어려웠던 프랑스는 영국에 조속한 파병을 요청했으나, 소식을 전해 받은 영국 본국에서는 아랍 전역의 지지부진했던 전황을 바라보며 이곳이 제 2의 갈리폴리가 되는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두려워했다. 파병 찬성파는 현장에서는 정작 힘에 부친다며 곡소리를 내던 프랑스군의 상황을 눈 감고 여차하면 영국 대신 프랑스가 개입해 팔레스타인의 이권을 노릴 수 있다고 주장하며 파병 반대파를 압박했고, 파병 반대파는 오스만 제국에 맞서는 헤자즈 왕국의 편을 드는 것이 오히려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을 자극할 것이라며 파병 찬성론을 물리치며 의견을 다투었다. 그 결과 이 '라비그 위기(Rabigh Crisis)'는 1917년 초까지 하염없이 길어졌다.

그렇지만 오스만 제국군이 헤자즈 방면에서는 1916년 12월 얀부에, 이집트 방면에서는 12월 마그다바(Maghdaba)·1917년 1월 라파흐에 쏟아부은 공세는 역으로 그들의 참패로 돌아갔다. 그 기세를 타 헤자즈 왕국군은 북상하여 1917년 1월 하순 이후 중요한 작전 기지가 되는 와즈(Wajh)를 점령하기도 하면서 새로운 기회를 잡았다. 1917년 초부터 헤자즈군이 철로를 끊으며 오스만 제국군의 자금 및 물자를 탈취하고 보급을 단절시키는 작전이 성공적으로 가동되기 시작했고, 1917년 7월에는 홍해의 북쪽 끝 출구인 아카바를 함락시켰다. 이 무렵 영국은 에드먼드 앨런비를 이집트에 취임시켜 이집트 원정군(Egyptian Expeditionary Force)을 재정비하였으며, 1917년 초부터 영국-헤자즈 연합군은 시리아 전선으로 북상하면서 '팔레스타인에 있는 아랍 장교와 군인들에게' '모든 아랍인을 해방'시킨다는 내용이 담긴 후세인의 성명서를 '팔레스타인의 영국군'의 서명을 담아 배포했다. 이들은 1917년 상반기부터 헤자즈 왕국군과 직접적으로 합류했고, 또 영국 본국과 오스트레일리아 등지에서 지원군이 증원되었다. 그 결과 긴 공방전 끝에 오스만 제국군의 전력이 소모된 10월에는 가자를, 12월에는 예루살렘을 점령하고, 1918년 9월에 예리코, 10월에는 베이루트와 다마스쿠스와 알레포 등을 차례로 함락시켰다. 한편 메디나는 고립된 상태에서도 끝까지 버티다가 1919년 1월에야 항복했다.

한편 이 무렵 오스만 제국에서 아르메니아인과 그리스인에 대한 대학살이 일어나자, 후세인은 1916년 11월부터 오스만 제국을 비판하고 나섰고 1917년부터 후세인과 파이살은 직접적으로 아르메니아인들을 수용하고 이들을 보호하였다. 이는 현대에도 아르메니아와 요르단 등의 아랍 국가의 우호 관계를 다지는 데 중요하게 인용되는 사례가 되었다.

이때 점령된 영역은 영국군 점령 적지 행정부(Occupied Enemy Territory Administration, OETA)로 편성되었는데, 대략 알레포-갈릴리 호-사해-아카바를 잇는 선을 기점으로 점령구 동구가 북구(서구) 및 남구와 구분되었으며 하이파로부터 시작되는 기선을 따라 북구와 남구가 다시 나뉘었다. 이후 북구는 영국군이 관할하다가 1918년 9월 프랑스군의 관할로 넘어가고 남구는 영국군에게 직속되었으며, 동구는 영국-헤자즈 연합군의 관할로서 헤자즈 왕국이 당시부터 가장 직접적으로 영유권을 주장했다. 지도 1, 지도 2 참조. 이 가운데 남구의 서쪽·남쪽·동쪽 경계는 현재의 이스라엘의 국경과 거의 일치하며 북쪽 경계만이 조금 더 남쪽에 위치하는 등, 후대의 입장에서 보면 이스라엘이 자리 잡는 단초가 구체적으로 이때부터 마련되고 있었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황이 타개되어 영국-헤자즈군이 최종적인 승리를 거둔 시점에도 헤자즈 왕국에 대한 영국의 불만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1916년 10월 30일 후세인은 일대의 아랍인들을 소집해 그를 이전에 예고했던 '아랍인들의 왕(King of the Arabs)'으로 선언했는데, 영국과 프랑스, 미국은 그를 '헤자즈의 왕'으로만 인정했으며 이븐 사우드와 같은 다른 아랍 국가 또한 이를 고깝게 여겼다. 대신 영국이 눈을 둔 것은 아랍 전역에서의 막대한 국력 소모였다. 로날드 스토어스는 그의 회고록에서 후세인의 봉기를 위한 전비로 자그마치 1100만 파운드가 지출되었다고 기술했고, 영국은 1919년 3월 20일 파리 강화 회의 4인 위원회 회의에서 튀르키예 및 코카서스 전선에 90만 명에서 100만 명가량의 전력을 투입해 유지해야 했다며 자국이 막대한 피를 흘렸음을 주장했는데 이는 아랍 측의 병력을 어떻게 추산하더라도 압도적인 것이었다. 헤자즈 왕가가 받은 호평이라면 시리아 전역에서 앞장서 나선 파이살이 좋은 인상을 남긴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와 같은 영국의 불만은, 이후 그들이 헤자즈 왕국을 냉소적인 태도로 바라보는 한 원인이 된다.

7.3. 밸푸어 선언(1917.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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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 전역이 격동에 휩싸여 있던, 예루살렘을 포함한 팔레스타인 인근으로 이집트 주재 영국군이 북상하던 1917년 11월 2일, 시온주의자들과 이들을 지지하는 영국의 정치인들의 의사가 맞물린 끝에 영국의 아서 밸푸어에 의해 이른바 밸푸어 선언이 발표된다. 이는 길지 않은 내용으로 주요한 내용을 불과 3줄로 요약할 수 있지만, 그 3줄의 한 줄 한 줄이 이후 역사의 방향성을 결정 짓는 중요한 내용이었다.
① 영국이 팔레스타인에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a national home for the Jewish people)'을 건설하는 것을 지원함
: 흔히 알려진 것처럼 시오니즘에 의한 유대인 이주를 지지하는 것으로서 의미가 큰 것은 사실이지만, 유대인의 '국가(nation)'가 아닌 '민족적 고향(a national home)'이라는 표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당시부터, 압도적으로 아랍인들의 인구가 다수인 팔레스타인 지역에 곧바로 유대인의 국가를 건설하는 것은 영국조차도 불가능하다고 판단했으며, 시온주의에 대한 찬성파 못지않게 전쟁에 휩싸인 본국의 시급함을 놓아두고 팔레스타인에 여력을 '낭비'하는 데 대한 반대파의 의견 또한 거셌기 때문이었다. 이와 같은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판단은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영국이 팔레스타인 지역에 대한 협의안을 '국제 기구의 통제를 받는 특수 지역'으로 유도하는 계기가 된다.
반면 시온주의자들은 이에 대해 온전한 '국가'의 건립 선언을 이끌어내지 못했다고 하여 오히려 실망하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으며, 이는 이후 바이츠만 등의 인사가 결국 영국 측의 일종의 조정안에서 의도한 수위조차 넘는 강성 주장으로 넘어가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파이살과 논의했던 협의안조차 파행을 맞게 되는 원인이 된다. 이후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성립 과정과 성립 이후에도, 시온주의자들뿐만 아니라 윈스턴 처칠을 비롯한 영국의 정치인들은 의제에 따라 유대인들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며 '민족적 고향'이 '국가'로 발전할 수 있음을 강조하곤 했다.
② 이는 팔레스타인에 이미 존재하는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인 권한에 대해서나, 타국에서 향유되는 유대인의 권리 및 정치적인 지위에 대해 아무런 위해를 가하지 않아야 함
: 밸푸어 선언의 발표 이전부터 조지 커즌과 유대인 관료이면서도 반시온주의자였던 인도부 장관 에드윈 몬테규(Edwin Montagu) 등은 밸푸어 선언에 대하여 비판하는 입장이었으며, 이들의 반대를 누르기 위해 이러한 문구가 삽입되었다. 이러한 내용이 명시되어 있다는 사실은, 이후 후세인 빈 알리에 대한 호가스 메시지에서 보이는 설명이나 파이살과 바이츠만의 협의를 이끌어내는 근거가 된다. 물론 그러한 '협의' 단계를 넘어선 이후, 아랍 지역의 정치적 통일성이 붕괴되고 팔레스타인의 위임통치가 통치의 궤도에 오른 시기부터 그러한 약속은 사실상 지켜지지 않았다.
③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을 밸푸어 선언에서 확인되는 영국의 의사를 전달하는 창구로 공식적으로 언급함
: 정확히는 1899년 창설된 영국 및 아일랜드 시오니스트 연합(Zionist Federation of Great Britain and Ireland)을 가리킨다. 이곳에서 활동하던 하임 바이츠만은 이후 1918년 3월 팔레스타인 시온주의자 위원회(Zionist Commission for Palestine)를 창건하였으며, 이곳이 이후 팔레스타인에서 활동하는 시온주의자들의 창구 역할을 하게 된다. 이들은 ①과 ②에서 의도된, '국가' 건립을 명시한 것이 아니며 아랍인들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겠다는 내용이 명시되었음을 근거로 후세인 빈 알리와 파이살 등을 설득했고, 결국 후세인 빈 알리는 호가스 메시지에 더해 이들의 설득을 받아들여 아랍 봉기를 계속 이어나갔으며 파이살 등과는 파리 강화 회의까지 그 뜻을 같이 한다.

앞서 언급한 세계사 교과에서부터 한국에서는 '맥마흔 선언'과 밸푸어 선언이 정면 충돌하며, 영국이 일종의 '이중계약'을 체결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의 독립 국가 건설'을 명시한 '맥마흔 선언'과 '유대인의 국가 건설'을 명시한 밸푸어 선언이 서로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으로 그려지기도 한다. 그렇지만 다음과 같은 점에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 밸푸어 선언의 내용은 1 대 1로 직결하여 대응시켜 보기는 어려우며 양립할 여지가 남아 있었다.
  •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과 밸푸어 선언은 논의의 범주 자체가 다르다.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은 이미 여러 차례 언급했듯 홍해 연안부터 시리아, 이라크에까지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의 아랍인들이 통일된 독립 국가를 건설하는 데 대한 문제이며, 이런 의미에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은 거의 같은 지역을 놓고 영국과 프랑스가 땅따먹기 놀음을 벌인 사이크스-피코 협정에 가깝다. '이중계약'의 오명 또한 이 쪽에 붙는 것은 일말의 반론의 여지도 없다. 반면 밸푸어 선언은 전체 아랍 지역이 아닌 팔레스타인 지역에 국한된 내용으로, '통일된 아랍 국가의 건설'이라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주제에 비해서는 곁가지에 가까운 지역에 한정된 문제를 다루고 있다.
    아랍 독립 운동이 마무리된 이후에도 프랑스와 네지드-하사 토후국 등의 외력을 억제하고 영국군 점령지를 양도받는 등의 조건이 필수적이었으므로 아랍 통일 국가가 설립되는 것은 영국의 각종의 지원이 없으면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러한 현실적 여건 상 영국이 아랍 통일 국가라는 대의를 지원한다면 아랍 측에서 협상에 나설 가능성은 없었다고 볼 수 없는데, 당장 파이살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팔레스타인을 국제 기구의 관할 아래 두기로 하고 명시적으로 독립을 주장하는 영역에서 팔레스타인을 배제하면서까지 아랍 통일 국가의 설립을 위한 합의를 시도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국이 결과적으로 이 가장 큰 대의를 저버리면서, 아랍 측은 당장 합의에 나설 주체와 양보할 여지부터 잃게 되며, 결국 양 측이 합의조차 할 수 없는 상황에 던져져 아랍 측에게 이는 큰 원한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 영국과 아랍 사이에 논쟁의 핵심이 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을 둘러싼 논쟁은 밸푸어 선언에 의해서가 아니라,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 자체의 불확실한 영토 기선 설정에 의해 발생했다. 물론 영국이 자국의 주장을 고수하게 된 데 밸푸어 선언의 영향이 없었다고 하는 것은 어불성설에 가깝지만, 애초에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양 측의 설전이 벌어질 때부터 팔레스타인 문제 이전에 대(大)시리아 해안 지구에 대한 논의 자체에 대해 온전한 합의가 성립해 있지 않았다. 곧 밸푸어 선언이 없었더라도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 자체에서부터 영국이 아랍의 영토를 배제하려 시도하는 한, 이에 대한 논쟁은 얼마든지 발생할 여지를 안고 있었다.
  • 밸푸어 선언에서는 유대인 '국가'의 건설이 명시되지 않았으며, 애초에 현실적으로 그럴 수도 없었다. 1914년 팔레스타인의 유대인 인구는 9만 4000명 가량으로 팔레스타인 전체 인구의 13.6%에 불과했으며, 52만 5000명 가량의 인구로 76.2%의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던 아랍인들을 압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1922년에는 오히려 아랍 독립 전쟁의 여파로 유대인 인구는 8만 4000명 가량(11.2%)으로 줄었으며, 아랍 인구는 58만 9000명 가량(78.3%)으로 늘어났다. #
    이 때문에 1919년 초까지는 하임 바이츠만과 같은 인물조차도 아랍인들과의 협의를 통해 유대인의 입지를 인정받으려는 활동을 계속해야만 했고, 팔레스타인을 분명히 아랍인들의 영토에 포함시키려 의도했던 후세인 빈 알리조차도 밸푸어 선언에 대한 호가스 메시지에서의 해명을 확인하고 그 직후에는 밸푸어 선언에 대한 문제 제기를 눌러 두었다. 더 나아가 파이살은 1919년 초까지도 이 지역의 인구 집단을 존중하는 한 팔레스타인이 국제 기구에 의한 중립 지역이 되더라도 결국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아랍인들이 주도권을 행사하게 될 것이라고 보아 바이츠만과의 협의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러나 바이츠만 또한 파리 강화 회의 이후에 유대인들의 이권을 챙기기 위해 유대인의 보호와 이주에 대한 주장을 내세우고, 현지 아랍인들의 시온주의에 대한 반감이 고양된 상태에서 파이살조차 아랍인들의 여론에 대한 배신자로 몰릴 정도가 되어 양 측의 의견이 반대 방향으로 향하며 파이살 또한 협정에 의한 합의를 포기하게 된다.

따라서 호가스 메시지 단계에서 후세인 빈 알리가 생각했을 가능성이 있는 아랍 국가 내의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의 건설이라는 식의 대안이 마련되거나, 훨씬 더 물러나더라도 호가스 메시지의 (2)에서 단서를 찾을 수 있거나 파이살이 생각한 다수의 아랍인 주도의 국제연맹 위임통치 하 특수지구 내 유대인의 '민족적 고향'의 건설이라는 안이 실현될 가능성은 최소한 역사 속에서 실제로 제창된 목소리를 통해 살펴볼 때도 없지는 않았다. 이에 비하면 실제 역사에서 실현된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형태는 아랍인의 통치도, 다수 아랍인의 의사 반영도 이루어지지 않은 것으로 1918~1919년 당시의 타협주의적 대안에 비해서도 훨씬 더 기울어진 방향으로 나간 것이다. 아울러 결과적으로, 이 문제를 완전히 파행으로 던져넣은 것은 영국의 말 바꾸기와 시온주의자들의 극단화, 프랑스와 네지드 술탄국의 무력 개입으로 인한 아랍 측 교섭 주체의 붕괴 등 굉장히 복잡한 문제를 내포하고 있다. 물론 최종적으로 이 문제가 파행에 이르는 데 대해서 영국의 태도가 굉장히 더러웠다는 데는 이견의 여지가 없다.

7.4. 호가스 메시지(1918. 1.)와 바셋 서신(1918. 2.)

영국 측의 밸푸어 선언 자체가 아랍 측을 자극할 만한 내용을 담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밸푸어 선언이 발표되고 얼마되지 않은 1917년 11월 23일, 앞서 언급했듯 러시아 제국이 무너지고 러시아 혁명 정부가 성립하면서 외교 문서들이 노출되어 사이크스-피코 협정이 국제적으로 알려졌다. 영국 언론에 실린 소식은 이집트로 전해졌고, 다시 이집트로부터 아랍으로 두 충격적인 소식이 전해지면서 아랍인들은 혼란에 빠졌다. 후세인 빈 알리는 이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며 해명을 요구했고, 영국 정부는 우선 밸푸어 선언에 대한 항의에 대응하기 위해 1918년 1월 카이로 아랍국의 데이비드 조지 호가스(David George Hogarth) 중령을 파견해 후세인과 호가스가 면담하도록 했다. 영국 정부는 호가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기조의 내용을 전달하기를 요구했으며, 그 내용이 이른바 호가스 메시지(Hogarth Message)로 알려져 있다.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1) The Entente Powers are determined that the Arab race shall be given full opportunity of once again forming a nation in the world. This can only be achieved by the Arabs themselves uniting, and Great Britain and her Allies will pursue a policy with this ultimate unity in view.
(2) So far as Palestine is concerned we are determined that no people shall be subject to another, but
 (a) In view of the fact that there are in Palestine shrines, Wakfs and Holy places, sacred in some cases to Moslems alone, to Jews alone, to Christians alone, and in others to two or all three, and inasmuch as these places are of interest to vast masses of people outside Palestine and Arabia, there must be a special regime to deal with these places approved of-by the world.
 (b) As regards the Mosque of Omar it shall be considered as a Moslem concern alone and shall not be subjected directly or indirectly to any non-Moslem authority.
(3) Since the Jewish opinion of the world is in favour of a return of Jews to Palestine and inasmuch as this opinion must remain a constant factor, and further as His Majesty’s Government view with favour the realisation of this aspiration, His Majesty’s Government are determined that in so far as is compatible with the freedom of the existing population both economic and political, no obstacle should be put in the way of the realisation of this ideal.}}}

(1) 협상국은 아랍 인종에게 다시 한 번 세계 무대에서 국가를 이룰 온전한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이는 아랍인들 스스로가 단결함에 의해 성취될 수 있고, 대영제국과 그 동맹 국가들은 가시적으로 이러한 궁극적 통합을 이룰 수 있는 정책을 추구할 것입니다.
(2) 팔레스타인에 한정하면, 우리는 어떤 민족(people)도 다른 이에게 복속되지 않아야 한다고 결정했습니다. 그러나
(a) 팔레스타인에 어떤 경우에는 무슬림들에게만, 또 유대인들에게만, 기독교인들에게만 신성한, 또 그렇지 않으면 두 종교인들 또는 세 종교인 모두에게 그러한 성소(shrine)들, 와크프(Wakf)들과 성지(Holy place)들이 있음을 고려하고, 또 이러한 장소들이 팔레스타인과 아라비아 바깥의 무수한 대중들의 관심(interst)을 받는 장소이므로, 이곳에는 세계에 의해 찬성을 얻은, 이러한 장소들을 다룰 특별한 정권이 존재해야 합니다.
(b) 오마르 모스크는 무슬림들에게만 관련된 것으로 간주될 것이며, 직접적, 또는 직접적이지 않은 형태로 어떤 비무슬림 권위에 복속될 수 없습니다.
(3) 세계적인 유대인의 견해가 유대인들이 팔레스타인으로 돌아가는 것을 찬성하며 이러한 견해가 항구적 요소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에, 그리고 더 나아가 국왕 폐하의 정부가 이러한 열망을 실현하는 일을 호의를 갖고 바라보기 때문에, 국왕 폐하의 정부는 기존 인구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 모두와 양립할 수 있는 한 이러한 이상이 실현되는 데 장애물이 있어서는 안 된다고 결정했습니다.

호가스는 (1)에서 협상국이 아랍인들의 국가 건설을 지지하고 있다고 밝히면서, (2)의 (a)에서 팔레스타인의 종교적 장소들이 세 종교인 모두, 또 팔레스타인 바깥의 세계인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음을 들어 이 지역에 '특별한 정권(special regime)'이 성립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3)에서는 영국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 지지 의사를 밝히면서도 '기존 (팔레스타인) 인구의 경제적 그리고 정치적 자유'가 준수되어야 함을 밝혔다. 이 '정치적 자유'라는 문구는 밸푸어 선언에 쓰인 기존 비유대인 공동체의 '시민적 그리고 종교적 권한'에 비해 명시적으로 팔레스타인에 거주하는 아랍인들의 자결권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에서 보이는 '특별한 정권'과 (3)에서 보이는 비유대인들의 '정치적 자유'라는 표현은, 완전한 독립을 인정하는 것에 비해 충분히 영국이 농간을 부릴 여지를 남겨 놓는 것이었으며 이후 팔레스타인에 대해 주장된 정치 체제를 고려하면 이는 굉장히 암시적인 것이었다. 한편 이 무렵까지, 바이츠만을 비롯한 현지의 시온주의자 인사들 또한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들의 정부를 목표로 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아랍인들을 자극하지 않기 위한 유화적 태도를 보였다.

호가스 중령이 본국에 보고한 바에 따르면, 호가스가 영국이 그럴 것이라고 경고하라는 지시를 받지 않았음에도 후세인은 팔레스타인에 유대인들의 독립 국가를 인정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언급했다. 다른 한편 호가스가 보기에 후세인은 실제 현황으로서로나 추후 있을 법한 팔레스타인의 경제성을 전혀 알지 못했고 유대인들의 정착이 큰 가치가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호가스는 후세인이 아랍인과 유대인의 협력을 통해 재정적 이익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하는 데 동의한 듯하다고 주장했다. CAB 24/68/86, 9쪽

다른 한편,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내용에 대해서는 같은 해 2월 8일 제다에 체류하던 J. R. 바셋(J. R. Bassett) 중령에 의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서신이 전달되었다. 원문은 아랍어판이며, 1938년 조지 안토니우스(George Antonius)의 《아랍의 각성(The Arab Awakening)》에 따르면 아랍어 원문은 후세인이 직접 제공한 사진의 복사본의 형태로 아랍 언론에 자주 게재되었다. 본문 하단 쪽수 기준 431쪽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The loyal motives which have prompted Your Majesty to forward to the High Commissioner the letters addressed by the Turkish commander-in-chief in Syria to His Highness the Amir Faisal and to Ja'far Pasha have caused His Majesty's Government the liveliest satisfaction. The steps taken by Your Majesty in this connexion are only a token of the friendship and mutual sincerity which have always inspired the relations between the Government of the Hejaz and His Majesty's Government. It would be superfluous to point out that the object aimed at by Turkey is to sow doubt and suspicion between the Allied Powers and those Arabs who, under Your Majesty's leadership and guidance, are striving nobly to recover their ancient freedom. The Turkish policy is to create dissension by luring the Arabs into believing that the Allied Powers have designs on the Arab countries, and by represent to the Allies that the Arabs might be made to renounce their aspirations. But such intrigues cannot succeed in sowing dissension among those whose minds are directed by a common purpose to a common end.
His Majesty's Government and their allies stand steadfastly by every cause aiming at the liberation of the oppressed nations, and they are determined to stand by the Arab peoples in their struggle for the establishment of an Arab world in which law shall replace Ottoman injustice, and in which unity shall prevail over the rivalries artificially provoked by the policy of Turkish officials. His Majesty's Government re-affirm their former pledge in regard to the liberation of the Arab peoples. His Majesty's Government have hitherto made it their policy to ensure that liberation, and it remains the policy they are determined unflinchingly to pursue by protecting such Arabs as are already liberated from all dangers and perils, and by assisting those who are still under the yoke of the tyrants to obtain their freedom.}}}

폐하(후세인)께서 고등판무관(헨리 맥마흔)에게 시리아의 튀르크인 총사령관에게서 아미르 파이살 전하와 자파르 파샤에게 전하려 한 서신들을 보내신 일은 국왕 폐하의 정부(영국)에 가장 생생한 만족을 불러일으키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이와 관련하여 폐하(후세인)의 행보들은 언제나 헤자즈 정부와 국왕 폐하의 정부(영국) 사이의 관계를 고무시키는 우정과 상호간의 신실성의 증표가 되었을 따름입니다. 튀르크인들이 목표로 해 온 것이 동맹 국가들과 폐하(후세인)의 영도와 지도 아래 있으면서 오래 된 자유를 회복하려 영광스럽게 분투하고 있는 아랍인들 사이에 의심과 불신의 씨앗을 심으려는 것임을 지적하는 것은 불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튀르크인들의 정책은 아랍인들을 동맹 국가들이 아랍 지역들에 대해 꿍꿍이(design)를 갖고 있다고 믿게 꾀어내고 동맹 국가들에게 아랍인들은 열망을 포기할 것이라고 표현함으로써 불화를 일으키는 것입니다. 그러나 공동의 목표를 위해 공동의 결말을 이루고자 하는 마음을 갖는 이들에게 그렇게 불화의 씨앗을 심으려는 계략은 성공할 수 없습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와 그 동맹 국가들은 압제 받는 국가들의 해방을 목표로 하는 모든 대의를 변함없이 지지하며, 오스만 제국의 불의를 대체할 법률을 세울 아랍 세계의 성립을 위한 아랍인들의 곁에 서기로 결정했습니다. 또한 단결한 아랍인들은 튀르크인 관료들의 정책에 의해 인위적으로 촉발된 경쟁을 넘어 승리를 누리게 될 것입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아랍인들의 해방과 관련된 이전의 약조를 재확인합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현재까지 해방을 보장하는 정책을 추진하여 왔으며, 아랍인들과 같이 이미 모든 위험과 위협으로부터 해방된 이들을 지지하기로, 또 폭군의 멍에 아래서 자유를 얻으려 하는 이들을 돕기로 흔들림 없는 결정을 내리는 정책들을 도출해 왔습니다.

곧 사이크스-피코 밀약에 대한 정보는 오스만 제국에 의한 교란 정보이며, 영국과 그 동맹 국가들이 아랍의 독립을 보장하려는 의도는 변함이 없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이 두 서신의 내용에 후세인이 어느 정도까지 동의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으나, 이후 후세인의 행보는 계속해서 영국의 편에 서서 아랍인들을 독려해 전쟁에 나서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적어도 어느 정도 이상 영국에 대한 신뢰를 유지하기로 했다고 볼 수 있는데, 결과적으로 영국이 어떤 형태로 구상했든 아랍인들에게 경제적·정치적 자유를 보장하겠다는 호가스 메시지의 내용과 사이크스-피코 밀약이 오스만 제국의 교란 작전에 불과하다는 영국의 주장은 늦어도 1920년 이후 모두 기만이 되었다.

덧붙여 이 무렵(1918년 1월 8일), 우드로 윌슨에 의해 14개조 평화 원칙이 발표되었다. 그 중 12조에서 우드로 윌슨은 오스만 제국 내 비튀르크인들의 자치에 의한 발전과 생명의 보장을 누려야 한다고 주장했으며, 자연히 영국을 비롯한 협상국은 이에 대해서 동의했다.

7.5. 7대인에 대한 선언(1918. 6.)

영국은 일단 호가스와 바셋을 통해 입장을 전달하고 후세인을 달래며 어영부영 후세인과의 직접적 갈등은 봉합해 두었지만, 아랍 현지의 민심을 수습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다. 애초에 대(大)시리아 지역은 이제서야 영국과 헤자즈 왕국의 연합군이 시리아 지역으로 북상하여 주요 도시를 공략하는 단계에 있었기 때문에, 헤자즈 왕국의 본토를 벗어난 지역에서 현지의 민심이 돌아선다면 향후의 향방을 알 수 없게 될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던 중 1918년 6월 16일, 시리아의 명사 7명이 완전한 독립을 보장해 줄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제출했다. 이 7인은 라피크 알-아즘(Rafiq al-Azm), 셰이크 카말 알-카삽(Sheik Kamal al-Qassab), 무흐타르 알-술흐(Muhtar al-Sulh), 압둘 라흐만 샤흐반다르(Abdul Rahman Shahbandar), 칼리드 알-하킴(Khaled al-Hakim), 파우지 알-바크리(Fauzi al-Bakri), 하산 히마데(Hasan Himadeh)였으나, 성명은 익명으로 제출되었다. 이에 대해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기초한 마크 사이크스가 작성하여 이 7명의 명사에게 영국이 아랍 피치자의 동의라는 원칙에 입각해 수립될 정부를 지지할 것이라는 선언을 제출한다. 이를 7대인에 대한 선언(The Declaration to the Seven)이라고 하며, 내용은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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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DECLARATION OF THE SEVEN

His Majesty's Government have considered the memorial of the seven with the greatest care. His Majesty's Government fully appreciate the reasons why the memorialists desire to retain their anonymity, and the fact that the memorial is anonymous has not in any way detracted from the importance which His Majesty's Government attribute to the document.

The areas mentioned in the memorandum fall into four categories : —
1. Areas in Arabia which were free and independent before the outbreak of war;
2. Areas emancipated from Turkish control by the action of the Arabs themselves during the present war;
3. Areas formerly under Ottoman dominion, occupied by the Allied forces during the present war;
4. Areas still under Turkish control.

In regard to the first two categories, His Majesty's Government recognise the complete and sovereign independence of the Arab inhabiting these areas and support them in their struggle for freedom.

In regard to the areas occupied by Allied forces, His Majesty's Government draw the attention of the memorialists to the texts of the proclamations issued respectively by the General Officers Commanding in Chief on the taking of Baghdad and Jerusalem. These proclamations embody the policy of His Majesty's Government towards the inhabitants of those regions. It is the wish and desire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at the future government of these regions should be based upon the principle of the consent of the governed and this policy has and will continue to have the support of His Majesty's Government.

In regard to the areas mentioned in the fourth category, it is the wish and desire of His Majesty's Government that the oppressed peoples of these areas should obtain their freedom and independence and towards the achievement of this object His Majesty's Government continue to labour.

His Majesty's Government are fully aware of, and take into consideration, the difficulties and dangers which beset those who work for the regeneration of the populations of the areas specified.

In spite, however, of these obstacles His Majesty's Government trust and believe that they can and will be overcome, and wish to give all support to those who desire to overcome them. They are prepared to consider any scheme of cooperation which is compatible with existing military operations and consistent with the political principles of His Majesty's Government and the Allies.

June, 1918.}}}

7대인에 대한 선언

국왕 폐하의 정부는 7대인의 청원을 신경 써야 할 가장 중요한 대상으로 여깁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청원한 인사들이 익명성을 유지하기를 원하는 이유에 대해, 또 청원이 익명이라는 사실이 어떤 식으로든 국왕 폐하의 정부가 이 문서를 작성하게 만든 중요성을 훼손시키지 않음을 온전히 인식합니다.

청원서에 언급된 지역들은 네 가지 범주로 나뉩니다.
1. 전쟁 이전부터 자유롭게 독립하여 있던 아라비아 지역
2. 현재의 전쟁 동안 아랍인들 스스로의 행동에 의해 튀르크인의 통제로부터 해방된 지역
3. 이전에는 오스만의 지배 아래에 있었으나, 현재의 전쟁 동안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
4. 여전히 튀르크인들의 통제 아래 있는 지역

먼저 언급된 두 범주에 대하여, 국왕 폐하의 정부는 이곳에 거주하는 아랍인의 완전하고 자주적인 독립을 인정하며 그들의 자유를 위한 투쟁을 지원합니다.

연합군에 의해 점령된 지역에 대하여, 국왕 폐하의 정부는 청원자들에게 지휘부 사령관(General Officers Commanding in Chief)이 바그다드와 예루살렘으로 진군함에 따라 각각 제시된 성명문에 주목하기를 바랍니다. 이러한 성명들은 이 지역들의 거주민들에 대한 국왕 폐하의 정부의 정책을 나타냅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이 지역에서 미래의 정부가 피치자들의 동의라는 원칙에 기초하여야 하며, 이러한 정책이 국왕 폐하의 정부의 지원을 얻고 또 계속해서 얻게 되기를 희망합니다.

네 번째 범주로 언급된 지역에 대하여, 국왕 폐하의 정부는 이곳의 압제 받는 민족들이 그들의 자유와 독립을 이룩하여야 할 것이라고 희망하고 있으며 이 목적의 성취를 위해 국왕 폐하의 정부는 계속해서 힘쓸 것입니다.

국왕 폐하의 정부는 지목된 지역에서의 주민들의 회생을 위해 일하는 이들을 괴롭게 하는 고난과 위험에 대해 온전히 인지하고 있고, 염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장애물들에도 불구하고 국왕 폐하의 정부는 그러한 이들이 이를 극복할 수 있고 극복하게 될 것임을 믿고 있으며, 이를 극복하기를 바라는 이들에게 모든 지원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정부는 현재 진행되는 군사 작전과 양립할 수 있고, 국왕 폐하의 정부 및 동맹 국가들의 정치적 정책과 일치하는 어떠한 협력의 방책이라도 고려하도록 준비되어 있습니다.

1918년 6월

이는 곧 이라크 및 시리아 지역에서 연합군에 의해 해방된 지역은 아랍인들 스스로에 의한 통치를 누리게 될 것임을 말하는 것이었으며, 아직 오스만 제국의 통치 아래 있는 지역에 대해서도 독립을 지원한다는 내용의 선언이었다. 이는 아랍인들로부터 지지를 받아 불신의 해소에 도움이 되었으며, 아랍 독립 운동 세력에게도 활력이 되었다. 결국 10월에 들어 영국군과 헤자즈 왕국군은 앞서 언급하였듯 시리아 지역에서 다수의 도시를 점령하는 데 성공하나, 이 무렵에 들어 문제를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하는 또 다른 사건이 터진다.

7.6. 헤자즈 왕국기 하기 사건(1918. 10. 8.)과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1918. 11. 7.)

대(大)시리아 내에서도 오스만 제국의 세력은 이제 함락되지 않은 도시들 안으로 고립되었고, 아랍 독립 국가의 건설이 눈 앞에 다가왔음을 느낀 아랍인들의 사기 또한 높아졌다. 이렇게 함락된 시리아의 도시들에는 흑색·녹색·백색의 삼색 선 왼편에 적색 삼각형이 그려진 헤자즈 왕국기가 내걸려, 그곳이 아랍인들의 영역임을 분명히 나타났다. 헤자즈 왕국기의 실물

그러나 아랍인들의 영역을 논한다면, 영국과 아랍 사이에는, 또 다른 당사자인 프랑스를 불러들여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미루어두었으나 이제는 정산해야 할 빚이 아직 남아 있었다. 영국은 이미 언급했듯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으로 대(大)시리아의 서부 해안가를 통치령으로, 시리아 북부 내륙 등을 세력권으로 삼기로 계획하고 있었으며, 1918년 9월 영국과 프랑스는 해당 지역 내의 영국 점령지를 양도하는 안건을 놓고 협상을 시작했다. 그 결과 1918년 9월 30일 영국-프랑스 잠정 협정(Anglo-French Modus Vivendi)으로 영국 점령 적지 행정구 북구의 행정적 양도가 결정되었으며, 그 이전인 9월 25일 영국 육군성(War Office)에서 모든 민정 지역에 프랑스 관료들을 포함시키라는 명령이 에드먼드 앨런비에게 하달되었다. 이는 내용상 명백히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실현을 목적으로 했다.

그러는 동안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언급되었던 도시 중, 10월 1일 다마스쿠스가 영국-헤자즈 왕국 연합군의 손으로 넘어왔다. 이 때 특히 다마스쿠스에 대해서는 영국은 파이살을 입성시키는 것으로 공식적인 '함락'을 마무리하기를 원했으나, 당시 파이살은 다마스쿠스로부터 꽤 멀리 떨어져 있어 그는 10월 3일에야 다마스쿠스에 도착할 수 있었다. 대신 다마스쿠스 내부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물러난 직후인 9월 30일 오후, 아랍군이 먼저 진입해 사이드 아브드 알 카디르(Said Abd El Kader)에 의해 헤자즈 왕국기가 게양되었다.

10월 3일, 마침내 다마스쿠스에 입성한 파이살은 앨런비 및 해리 쇼벨(Harry Chauvel) 등과 회동했으며,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이 자리에 동석했다. 앨런비는 이 때 영국과 프랑스 사이에 맺어진 '협약'의 내용을 상세히 설명하려 했다. 이에 따르면 파이살은 후세인의 대리인으로서 시리아를 통치하되 시리아는 프랑스의 보호령이 되며 '레바논'은 시리아에서 분리된다는 것이었다. 파이살은 이 문제에 대해 프랑스의 개입을 전혀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며 항의했지만, 앨런비는 앨런비대로 로렌스를 향해 파이살에게 시리아가 프랑스의 보호령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았냐고 따졌다. 로렌스의 답은 "아니오, 각하. 그러지 않았습니다.(No, Sir. I did not.)"라는 것이었다.

앨런비의 발언은 분명히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염두에 둔 것이었고, 그의 발언이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의미한 것이었다면 분명히 로렌스는 거짓을 말한 것이고 파이살 또한 순수했다고 하기는 어렵다. 앞서 언급했듯 1917년 5월 후세인과 사이크스의 회동 당시 두 사람이 동석했고, 적어도 (1926년 시점에서 저자 자신에게 유리하게 쓰였다고 비판받는 자전적 저술에 따라 볼 때조차) 1918년 5월 이전 로렌스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존재를 파이살에게 알렸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적어도 그것들이 영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니었으므로, 앨런비가 파이살에게 그것을 따져 묻는 것도 난감해진 것은 사실이었다. 결국 앨런비는 지금의 조치는 임시 조치일 뿐이며 전후의 패전 처리 과정에서 아랍인들이 대표를 보내어 의견을 표출하는 데 해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하면서 상세한 논의를 뒤로 미루기를 요청했고, 파이살도 일단 이 시점에서 뒤로 물러났다.[192]

그러나 10월 3일의 회의가 끝난 이후 파이살은 다마스쿠스로의 입성 의례를 치르는 동시에 9월 30일 오스만 제국군이 철수한 베이루트에 별동대를 보냈다. 그 결과 알-파타트 소속으로 제말 파샤에 의해 사로잡혀 다마스쿠스의 감옥에 구금되어 있다가 도시의 함락과 함께 석방된 슈크리 파샤 알-아유비(Shukri Pasha al-Ayyubi)가 10월 5일 파이살의 이름으로 아랍 독립 국가의 건설을 선포하며 베이루트에 헤자즈 왕국기를 게양했고, 베이루트의 자치를 맡고 있던 오마르 베이 알 다우크(Omar Bey bin Muhammad Al-Daouk)는 이들을 기쁘게 맞이했다. 프랑스는 화들짝 놀라 이튿날인 10월 6일 군함을 급파했고 소규모 분견대를 상륙시켰다. 그러고서는 헤자즈 왕국기의 게양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이에 대해 강하게 항의하고 나섰고, 10월 8일이 되어서는 프랑스군과 영국군 모두 베이루트에 진입했다. 영국의 에드먼드 앨런비는 프랑스군의 주장을 받아들여 아랍인들에게 깃발을 내릴 것을 명령하면서 파이살 산하의 군대를 철수시키려 했고, 이 날부터 프랑스군은 시리아 해안 지역을 접수해 나가기 시작했다. 슈크리 파샤 알 아유비는 며칠 간 버티고 나섰으나 결국 영국군의 압력에 의해 물러났다.

그러나 이는 아랍 측에는 받아들일 수 없는 상황이 도래한 것이었다. 앞서 언급했듯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누출은 영국의 아랍에 대한 배반으로서 아랍의 여론을 크게 뒤흔들었다. 그것이 바셋 서신과 7대인에 대한 선언 등으로 겨우 수습된 상황이었는데, 그것이 영국의 기만에 불과하며 프랑스라는 외세가 시리아의 식민화에 나서려 함이 이 사건으로 드러남에 따라 여론이 크게 들끓었다. 결국 영국이 덮어두려 한 모든 문제들이 한 점에 모여 전쟁이 끝나는 이 시점에 곪아가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후 10월 30일 오스만 제국이 무드로스 휴전 협정에 나서 실질적으로 항복하고 난 이후, 11월 7일이 되어서야[193] 영국과 프랑스가 협력해 '토착적 정부'의 설립을 지지할 것임을 알리는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Anglo-French Declaration)이 발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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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object aimed at by France and Great Britain in prosecuting in the East the War let loose by the ambition of Germany is the complete and definite emancipation of the peoples so long oppressed by the Turks and the establishment of national governments and administrations deriving their authority from the initiative and free choice of the indigenous populations.

In order to carry out these intentions France and Great Britain are at one in encouraging and assisting the establishment of indigenous Governments and administrations in Syria and, Mesopotamia, now liberated by the Allies, and in the territories the liberation of which they are engaged in securing and recognising these as soon as they are actually established.

Far from wishing to impose on the populations of these regions any particular institutions they are only concerned to ensure by their support and by adequate assistance the regular working of Governments and administrations freely chosen by the populations themselves. To secure impartial and equal justice for all, to facilitate the economic development of the country by inspiring and encouraging local initiative, to favour the diffusion of education, to put an end to dissensions that have too long been taken advantage of by Turkish policy, such is the policy which the two Allied Governments uphold in the liberated territories.}}}

동방에서 프랑스와 대영제국이 독일의 야욕에 의해 벌어진 전쟁에서 추구한 목표는 오래도록 튀르크인들에 의해 압제받은 민족들의 완전하고 명백한 해방, 그리고 토착 주민들의 주도와 자유로운 선택에 의한 국가적 정부 및 행정의 수립이었습니다.

이러한 의도를 실행하기 위해 프랑스와 대영제국은 지금 연합국에 의해 해방된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토착적 정부와 행정 기구의 설립을 북돋우고 도우며, 또 그들(주민)이 해방을 위해 힘쓰는 강역 내에서 그러한 기구들이 실질적으로 설립되는 대로 이들을 보호하고 인정하는 데 한 뜻을 모으고 있습니다.

두 나라는 이 지역의 주민들에게 어떠한 특정한 제도(institution)를 강요하려 하는 것이 아니며, 주민들 스스로에 의해 자유롭게 선택된 정부와 행정 기구가 그들(주민들)의 지원과 적절한 협조를 얻어 정규적으로 작동하는 것을 보증하는 것만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모두를 위한 불가분의, 그리고 동등한 정의를 수호하고, 지역의 주도를 일깨우고 북돋움에 의해 지역(country)의 경제적 발전을 창출하며, 교육의 확산을 돕고, 튀르크인들의 정책에 의해 오래도록 길러져 온 불화를 종식시키는, 그러한 것들이 두 동맹 국가의 정부가 해방된 강역에서 유지하려는 정책입니다.
(1939년 영국-아랍 위원회 영문 번역본, 출처 및 1947년 국제연합 팔레스타인 특별위원회 영문 번역본은 링크 참고)

영국과 프랑스는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에서의 토착적 정부와 행정 기구의 설립'을 지지한다는 시리아의 아랍인들에게 큰 환영을 불러일으켰지만, 전쟁이 마무리된 이 시점에서 이 선언에 '독립'이라는 문구를 넣지 않을 것을 요구한 프랑스는 물론이고 영국의 태도 또한 이미 달라지고 있었다. 이 선언이 공표되기 전에, 밸푸어 선언 1주년인 1918년 11월 2일 예루살렘에서 유대인들의 항의 시위가 벌어지자 팔레스타인은 이 선언에서의 시리아에서 제외된다는 해석을 담아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을 미리 유출했고, 이에 대해 이번에는 아랍인들의 항의가 이어지자 영국은 이를 얼버무리고 아랍인들의 단체 행동을 방해하고 나섰다. 또한 영국 외무부에서는 앞서 언급한, 다마스쿠스(빌라예트)의 서쪽에서 알레포 및 베이루트 두 빌라예트의 영역을 제외한 레바논 산 무타사리프령과 예루살렘 무타사리프령은 맥마흔의 서신에 대한 답신에서 후세인이 영유권을 주장하지 않았다고 볼 수 있고, 따라서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에서 언급되는 '시리아'에서도 배제할 수 있다는 해석을 고안해 냈다.[194]

애초에 영국은 드 분센 위원회에서 그러했듯 대(大)시리아에서 식민지를 만드는 방안을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지만, 프랑스의 시리아에서의 패권이 일정 이상 커지기를 원하지도 않았다. '아랍 독립 국가'를 지원한 것 또한, 오스만 제국이 없다면 이들을 통해 프랑스의 패권을 억제하기를 바란다는 속내가 숨어 있었다. 그렇지만 동시에 동맹 국가이자 이제 승리의 전리품을 나누어 갈라먹을 승전국으로서 프랑스와 충돌하는 것도 원하지 않았으며, 그 결과 프랑스와의 협상에서 물러날 수 없게 될 때 영국의 선택은 프랑스가 발을 뻗치지 못하도록 자신의 손을 뻗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물러서려고 하면, 이젠 스스로 전장에 끌어들인 시온주의자들이 등을 떠밀어 뒷걸음질치기조차 힘들어졌다. 결국 영국의 행보는 아랍의 이권을 갉아먹어나가는 방향으로 진행되었으며, 이를 위한 영국의 기만은 이미 일의 앞뒤가 뒤바뀔 정도로 숨길 수 없이 드러나 명백한 모순적 태도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다른 한편 영국은 전쟁 전 튀르크 석유 회사(Turkish Petrolum Company)에 75%의 지분을 투자해 석유 개발권을 취득했던[195] 모술을 놓치지 않고자 하는 욕심으로, 휴전 협정 이후 시점인 11월 10일 모술을 점령했다. 이것이 이후 튀르키예와 1926년 앙카라 조약에서야 마무리되는 국제 분쟁(모술 문제, Mosul Question)의 발단이 된 것은 논의의 주제에서 벗어나니 차치하더라도, 이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에서 프랑스의 세력권으로 규정되었던 이라크 북부의 이권을 침해할 여지가 있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12월 1일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는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와 구두 협의를 이끌어내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로이드 조지-클레망소 협정(Lloyd George-Cleamenceau Agreement)으로 지칭된다. 클레망소는 모술을 양도하는 대신 그곳의 석유로부터 나올 수익의 상당 부분을 받기로 했는데, 이때의 협의 과정에서 프랑스가 팔레스타인도 포기한다는 언급을 얻어냈다. 이는 독일 방면에서 영국과 협의하는 데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해 비교적 중요성이 덜하다고 판단된 아랍 지역을 양보한 것이었지만, 문서로 남지 않은 이 협의는 추후 또 다른 분쟁의 소지를 낳게 된다. 나아가 영국은 이 지역을 확고한 세력권으로 삼고자 1919년 쿠르드인들을 통합시켜 자치 정부를 세우려 했는데, 이는 오스만 제국의 불만을 샀을 뿐만 아니라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 또 다른 측면에서 위배될 여지가 있었지만, 이 시도는 현지에서 세 차례의 봉기가 일어나며 실패했다.

한편 후세인과 파이살의 곁에서 고문 역할을 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조차도, 1918년 11월 '아랍 통일 국가'를 제시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 어긋나는 전후 처리안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는 팔레스타인과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프랑스에 양도하기로 한 해안가를 제외한 시리아 지역에서 파이살을, 바그다드 등 이라크 남부에서 압둘라를, 모술을 비롯한 이라크 북부에서 후세인의 넷째 아들로 영국에서 유학했던 자이드 빈 후세인(Zeid bin Hussein)을 통치자로 세워야 한다고 보고, 이라크 남부는 영국의 직할 통치 아래, 이라크 북부는 영국의 세력권에 두는 안을 제시했다. 지도 참고 이는 튀르키예 남부의 점령지를 프랑스가 아닌 아르메니아에 넘기는 것을 포함해 프랑스의 세력을 최대한 억제하려는 것이 주된 목적이었지만, 후세인 빈 알리의 시리아와 이라크에서의 통치권을 배제하고 '아랍 통일 국가'를 분할하는 안으로서는 명백히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약속을 저버리는 것이었다. 이 아랍 분할안은 정세의 빠른 변화에 따라 비록 그 내용과 논의 주체가 크게 달라졌지만 영국의 유서 깊은 식민 정책인 분할통치(Divide and Rule)에 부합하는 것으로서, '샤리프 해결책(Sharifian Solution)'으로 불리며 이후 영국이 아랍 지역을 다루는 중요한 수단 중 하나로 자리 잡는다.

그럼에도 아직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은 오히려 아랍의 파이살이었다. 그는 영국-헤자즈 연합군의 시리아 점령 당시 전선에 직접 나서기를 마다하지 않은 아랍 독립 전쟁의 선봉으로 어느새 시리아 아랍 민족주의에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되어 있었고, 또 그 과정에서 영국의 기만적 행위들을 바라보며 불신감을 느끼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프랑스에 맞서기 위해서는 영국의 도움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하고 이를 위한 국제적 합의의 중요성을 높이 사 영국에 대해 몇 차례나 물러섰다. 실제로도 그나마 그를 이중적 태도로 속였다고 할 수 있는 영국보다 더 나아가, 프랑스는 아예 파이살을 사이크스-피코 밀약에서 약속된 건을 지키지 않으려 영국이 이용하는 꼭두각시로 보아 그의 아랍의 대표자로서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고 철저히 냉대했다. 그는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의 내용을 아랍인들을 설득하기 위해 이용하고 영국과 프랑스의 점령지 분할에 항의했다. 나아가 파이살은 영국과 프랑스에 직접 방문해 이들을 설득하려 했으나, 철저히 외면당했다. 그럼에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고, 또 프랑스의 냉담한 태도를 바라보며 그는 영국과의 협조가 필수적이라는 생각을 굳혔다. 그러던 중 어느새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한 파리 강화 회의가 열렸고, 그는 후세인의 위임을 받아 헤자즈 왕국의 대표로 파견되었다.

7.7. 파이살-바이츠만 협정(1919. 1.)과 파리 강화 회의

후세인은 파리 강화 회의에 파이살을 보내며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후세인이 제시한 아랍 독립 국가의 영토를 양보하지 말고 명백한 아랍의 독립을 인정 받기를 원했다. 그러나 파이살의 의중은 달랐다. 그는 이미 영국과 프랑스를 비롯한 승전국들의 비협조적 태도를 잘 알고 있었고, 영국과의 협조 없이는 국제 무대에서 아랍의 의사를 인정 받기 어려워졌음을 인지했다. 그로 인해 그가 염두에 둔 것은, 놀랍게도 시온주의자들과의 협의였다.

시간을 거슬러 1918년 6월 3일, 아카바에서 영국 정부의 주선으로 하임 바이츠만과 파이살이 만났다. 둘 사이의 대화를 앞서 언급한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가 통역했다. 이때 바이츠만은 파이살에게 유대인들이 원하는 것은 팔레스타인에서의 독립 정부 수립이 아니며 다만 영국의 보호 아래 팔레스타인을 개발하기를 바랄 뿐이라고 주장했다. 이때의 회담 내용을 영국 정보 장교 길버트 클레이튼(Gilbert Clayton)이 기록하여, 6월 4일 영국에 전보로 보고하였다. #

보고서의 내용은 파이살은 유대인과 아랍인의 이익은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고, 바이츠만은 유대인이 팔레스타인에 있음으로써 아랍 왕국은 유대인의 지원을 받고 아랍 왕국의 발전을 도울 것이라고 하는 등, 양자가 서로의 협력을 필요로 하며 그것이 서로에게 도움이 될 수 있음을 말하는 내용이었다. 다만 바이츠만은 시온주의자들이 유대인 정부를 세우려고 의도하지 않는다고 주장하며 시온주의자로서의 성향을 가렸고, 파이살은 유대인 국가 또는 영국 지도 아래 하나의 국가로서 팔레스타인의 미래에 대해서는 토론할 수 없다고 선을 그었다. 파이살은 그 스스로가 아버지 후세인의 대리인이며 독일과 오스만 제국의 선전에 이용될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 논의에 조심스러운 태도를 보였으나, 양자의 대화는 분명히 서로에게 호의적이었다. 그러나 바이츠만은 이후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비하하고 심지어는 파이살 또한 그러한 생각을 가졌다고 주장하는 등, 명백히 팔레스타인 아랍인들을 북부 시리아와 분리시키고 또 낮추어 보는 인물이었다. 후대의 입장에서 보기에는, 그가 속내를 숨기고 있었다고 보기에 충분하다.

파이살은 1918년 12월 11일~13일 런던에서 바이츠만과 만나 파리 강화 회의에서 제안할 내용을 함께 준비했다. 이때 양자의 협의는 아랍인들의 민족주의와 유대인들의 시온주의 사이에서 아랍인과 유대인이 서로의 목표를 이해하고 협력하며, 파리 강화 회의에서 의견을 교환하여 그 결과를 이끌어낸다는 내용의 것이었다. 이는 언뜻 이상적인 합의로 보이기도 하지만, 이로써 파이살은 후세인의 의도를 저버리고 팔레스타인을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에서 제외하고 이를 국제 기구의 손에 맡긴다는 대담한, 바꾸어 말하자면 위험한 결정을 하게 된다. 이후 파이살은 1919년 1월 1일, 파리 강화 회의에 제출하는 제의서에서 팔레스타인과 아랍 독립 문제에 대해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folding [ 영어 원문 펼치기 · 접기 ]
The country from a line Alexandretta - Persia southward to the Indian Ocean is inhabited by "Arabs" - by which we mean people of closely related Semitic stocks, all speaking the one language, Arabic. The non-Arabic-speaking elements in this area do not, I believe, exceed one per cent, of the whole.
The aim of the Arab nationalist movements (of which my father became the leader in war after combined appeals from the Syrian and Mesopotamian branches) is to unite the Arabs eventually into one nation. As an old member of the Syrian Committee I commanded the Syrian revolt, and had under me Syrians, Mesopotamians, and Arabians.
We believe that our ideal of Arab unity in Asia is justified beyond need of argument. If argument is required, we would point to the general principles accepted by the Allies when the United States joined them, to our splendid past, to the tenacity with which our race has for 600 years resisted Turkish attempts to absorb us, and, in a lesser degree, to what we tried our best to do in this war as one of the Allies.
My father has a privileged place among Arabs, as their successful leader, and as the head of their greatest family, and as Sherif of Mecca. He is convinced of the ultimate triumph of the ideal of unity, if no attempt is made now to force it, by imposing an artificial political unity on the whole, or to hinder it, by dividing the area as spoils of war among great Powers.

The various provinces of Arab Asia — Syria, Irak, Jezireh, Hedjaz, Nejd, Yemen — are very different economically and socially, and it is impossible to constrain them into one frame of government.
We believe that Syria, an agricultural and industrial area thickly peopled with sedentary classes, is sufficiently advanced politically to manage her own internal affairs. We feel also that foreign technical advice and help will be a most valuable factor in our national growth. We are willing to pay for this help in cash; we cannot sacrifice for it any part of the freedom we have just won for ourselves by force of arms.
Jezireh and Irak are two huge provinces, made up of three civilised towns, divided by large wastes thinly peopled by seminomadic tribes. The world wishes to exploit Mesopotamia rapidly, and we therefore believe that the system of government there will have to be buttressed by the men and material resources of a great foreign Power. We ask, however, that the Government be Arab, in principle and spirit, the selective rather than the elective principle being necessarily followed in the neglected districts, until time makes the broader basis possible. The main duty of the Arab Government there would be to oversee the educational processes which are to advance the tribes to the moral level of the towns.
The Hedjaz is mainly a tribal area, and the government will remain, as in the past, suited to patriarchal conditions. We appreciate these better than Europe, and propose therefore to retain our complete independence there.
The Yemen and Nejd are not likely to submit their cases to the Peace Conference. They look after themselves, and adjust their own relations with the Hedjaz and elsewhere.
In Palestine the enormous majority of the people are Arabs. The Jews are very close to the Arabs in blood, and there is no conflict of character between the two races. In principles we are absolutely at one. Nevertheless, the Arabs cannot risk assuming the responsibility of holding level the scales in the clash of races and religions that have, in this one province, so often involved the world in difficulties. They would wish for the effective super-position of a great trustee, so long as a representative local administration commended itself by actively promoting the material prosperity of the country.
In discussing our provinces in detail I do not lay claim to superior competence. The powers will, I hope, find better means to give fuller effect to the aims of our national movement. I came to Europe, on behalf of my father and the Arabs of Asia, to say that they are expecting the Powers at the Conference not to attach undue importance to superficial differences of condition, and not to consider them only from the low ground of existing European material interests and supposed spheres. They expect the powers to think of them as one potential people, jealous of their language and liberty, and ask that no step be taken inconsistent with the prospect of an eventual union of these areas under one sovereign government.
…}}}

알렉산트레타-페르시아를 잇는 선의 남쪽으로 인도양까지 이어지는 곳에 위치한 지역(country)에는 '아랍인'들이 거주하고 있습니다. 이 단어를 통해 우리는 셈족의 후예라는 개념과 밀접히 연관된 민족을 나타내며, 이들은 하나의 언어, 아랍어로 말합니다. 이곳에서 아랍어 구사자가 아닌 구성원들은, 제가 생각하기에, 전체의 1%를 넘지 않습니다.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운동(제 아버지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의 지파로부터의 호소를 규합하여 전쟁 동안 지도자가 된)은 아랍인들을 통합하여 결과적으로 하나의 국가를 창출하려는 것입니다. 시리아 위원회(Syrian Committee)의 한 오래 된 구성원으로서 저는 시리아 반란을 지휘하였고, 시리아인들, 메소포타미아인들, 아랍인들을 휘하에 두었습니다.
우리는 아시아에서의 아랍 통일에 대한 우리의 이상이 논쟁의 필요성을 넘어 정당성을 얻을 수 있다고 믿습니다. 논쟁이 필요하다면, 우리는 미국이 연합국에 합류했을 때 연합국들이 수용했던 일반 원칙들, 우리의 눈부신 과거, 튀르크인들이 우리를 흡수하려 했을 때 600년 동안이나 저항했던 우리 인종의 끈기, 그리고 그보다는 작은 목소리로, 연합국의 일원으로서 우리가 이 전쟁에서 최선을 다했음을 지적하고자 합니다.
저의 아버지는 그들의 성공적인 지도자로서, 또 그들의 가장 훌륭한 가문의 수장으로서, 또 메카의 샤리프로서 아랍인들 사이에서 특권적인 지위에 서 있습니다. 그 분은 통합의 이상이 궁극적으로 승리할 것이라는 확신에 차 있습니다. 전체적으로 인위적인 정치적인 통일을 강요하거나, 또 열강들의 전쟁에서의 전리품으로서 이 지역을 분할함으로써 그것을 방해하고자 지금 강제력을 행사하려는 시도가 없다면 말입니다.
… (중략) …
다양한 아시아의 아랍 지방들 - 시리아, 이라크, 자지라(Jezireh), 헤자즈, 네지드, 예멘 - 은 경제적으로나 사회적으로 몹시 다르며, 이들을 하나의 정부의 틀 아래 제약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농업적·산업적 구역으로서 계층화된 정착민들이 밀도 높게 거주하는 시리아가 자신의 내부 사무에 대해 다룰 수 있을 만큼 정치적으로 충분히 진보해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또한 외국의 기술적 자문과 조력이 우리의 국가적 성장에 가치 있는 요소가 될 것이라고 느낍니다. 우리는 이러한 조력에 금전적 대가를 지불할 의사가 있습니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를 위해 무력으로서 얼마 전 획득한 자유의 어떤 부분도 희생할 수 없습니다.
자지라와 이라크는 문명화된 도시들로 구성되어 있고 반유목적인 부족들이 낮은 밀도고 거주하는 넓은 황무지로 나뉜 두 개의 큰 지방입니다. 세계는 메소포타미아를 빠르게 개발하고자 하므로, 우리는 그곳에서의 정부 체계가 강력한 외국 세력의 인력과 물적 자원에 의해 지탱될 수 있다고 믿습니다. 우리는, 그러나, 그 정부가 원칙과 정신의 차원에서 아랍이어야 할 것과, 광범위한 기초가 이루어지기를 시간이 허락할 때까지 소외된 지구에서는 선출제 원리보다 선별적 원리가 준수되기를 주문합니다. 이곳에서 아랍 정부의 주요 의무는 도시에 있는 부족들의 도덕적 수준을 진보시킬 교육적 과정을 감독하는 것이 될 것입니다.
헤자즈는 기본적으로 부족적인 지역이며, 정부는 과거에 그러했던 것처럼 가부장제적인 조건에 적합한 채로 유지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유럽보다 잘 이해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이곳에서 완전한 독립을 보유할 수 있도록 하기를 제안합니다.
예멘과 네지드는 강화 회의에 그들의 사례를 제출할 가능성이 낮습니다. 그들은 그들 스스로를 감독하고 있으며, 헤자즈 및 다른 지방과 그들 스스로의 관계를 조정하고 있습니다.
팔레스타인에서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아랍인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아랍인들과 혈통적으로 가깝고, 두 인종 간의 성격에 마찰은 없습니다. 원칙적으로 우리는 절대적인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랍인들은 이 한 지방에서 일어나 때때로 세계를 곤란에 빠뜨리곤 했던 인종과 종교 간의 충돌에 대해 저울대를 쥐는 책임을 감당할 수 없습니다. 그들은 지역의 물질적 번영을 촉진할 수 있는, 스스로에 의해 인정 받은 대표에 의한 지역 행정이 이루어지는 한 효율적인 초월적 위치의 거대한 신탁 관리자(trustee)를 원할 것입니다.
우리의 지방들을 상세히 논의하면서, 저는 (우리의) 우월한 역량을 주장하지 않습니다. 저는 열강들이 우리의 국가적 운동의 목표를 이루는 데 더 온전한 효과를 이끌어낼 수 있는 더 좋은 수단을 찾기를 바랍니다. 저는 제 아버지와 아시아의 아랍인들을 대신하여 유럽에 와서, 그들이 회의에 참석한 열강에게 피상적인 조건의 차이에 과도한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게 하기를 기대하고 있음을 말하려 합니다. 또 현존하는 유럽인들의 물질적인 이익 및 가정할 수 있는 범위의 낮은 수준에서만 그들을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자 합니다. 그들은 열강이 그들을 하나의 잠재력 있는 민족으로서, 언어와 자유를 지키려 애쓰고 있다고 생각하기를 기대하며, 하나의 주권적 정부 아래 이러한 지역들이 최종적인 연합을 이룰 것이라는 전망과 모순되는 어떠한 행보도 밟지 않기를 요구합니다.
… (후략) …
(출처, 1번째 문서)

곧 아랍의 여러 지역이 현지의 상황에 따라 다양한 형태의 정부를 구성할 것이지만 아랍인들은 하나의 연합을 이룰 것이라는 내용이나, 언급으로부터 팔레스타인을 완전히 배제하지는 않고 팔레스타인 인구의 다수가 아랍인임을 주지시키고 유대인과 아랍인은 원칙적으로 하나임을 강조하면서도 자치적 원리가 지켜지는 조건 하에 '신탁 관리자(trustee)'가 두어질 수 있음을 언급하였다. 한편 여기서 '자지라'가 언급되는데, 이는 현재의 튀르키예 남부 일부까지 포함하는 것으로서 오히려 다마스쿠스 의정서의 범주를 넘어 프랑스가 튀르키예 방면으로 북상해 확보한 영토까지 포함시킨 것이었고, 네지드와 아덴이 위치한 예멘 또한 아랍 연합의 구상에 포함되었다.

다만 파이살이 언급한 다른 내용을 고려하면, 그가 팔레스타인에 대해 염두에 두고 있는 지점 또한 어떤 의미의 것인지는 분명하다. 팔레스타인에서 70%를 넘어 80%에 조금 못 미치는 인구의 압도적 다수는 아랍인이었으며, 이들이 '자치' 또는 '자결'을 수행하는 한 이 지역은 아랍인들의 의사를 중심으로 운영될 것이 분명했다. 따라서 파이살은 이 지역이 국제적인 관리 아래 놓이더라도 결국 아랍인들의 의사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판단하고 이런 결정을 내린 것으로 보인다.

이후 이로부터 멀지 않은 1919년 1월 3일,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의 통역을 거쳐 파이살-바이츠만 협정(Faisal-Weizmann Agreement)이 서명되었다. 이 협정은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의 협력을 강조하면서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의 특수한 형태의 정부 조직)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구체적으로 협력을 진행하기 위한 다양한 방책들이 제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folding [ 영문 펼치기 · 접기 ]
His Royal Highness the Amir FAISAL, representing and acting on behalf of the Arab Kingdom of HEJAZ, and Dr. CHAIM WE1ZMANN, representing and acting on behalf of the Zionist Organisation, mindful of the racial kindship and ancient bonds existing between the Arabs and the Jewish people, and realising that the surest means of working out the consummation of their national aspirations, is through the closest possible, collaboration in the development of the Arab State and Palestine, and being desirous further of confirming the good understanding which exists between them, have agreed upon the following Articles:

Article I. The Arab State and Palestine in all their relations and undertakings shall be controlled by the most cordial goodwill and understanding and to this end Arab and Jewish duly accredited agents shall be established and maintained in their respective territories.
Article II. Immediately following the completion of the deliberations of the Peace Conference, the definite boundaries between the Arab State and Palestine shall be determined by a Commission to be agreed upon by the parties hereto.
Article III. In the establishment of the Constitution and Administration of Palestine all such measures shall be adopted as will afford the fullest guarantees for carrying into effect the British Government's Declaration of the 2nd of November, 1917.
Article IV. All necessary measures shall be taken to encourage and stimulate immigration of Jews into Palestine on a large scale, and as quickly as possible to settle Jewish immigrants upon the land through closer settlement and intensive cultivation of the soil. In taking such measures the Arab peasant and tenant farmers shall be protected in their rights, and shall be assisted in forwarding their economic development.
Article V. No regulation nor law shall be made prohibiiting or interfering in any way with the free exercise of religion; and further the free exercise and enjoyment of religious profession and worship without discrimination or preference shall for ever be allowed. No religious test shall ever be required for the exercise of civil or political rights.
Article Vl. The Mohammedan Holy Places shall be under Mohammedan control.
Article Vll. The Zionist Organisation proposes to send to Palestine a Commission of experts to make a survey of the economic possibilities of the country, and to report upon the best means for its development. The Zionist Organisation will place the aforementioned Commission at the disposal of the Arab State for the purpose of a survey of the economic possibilities of the Arab State and to report upon the best means for its development. The Zionist Organisation will use its best efforts to assist the Arab State in providing the means for developing the natural resources and economic possibilities thereof.
Article VIII. The parties hereto agree to act in complete accord and harmony in all matters embraced herein before the Peace Congress.
Article IX. Any matters of dispute which may arise between the contracting parties shall be referred to the British Government for arbitration.

Given under our hand at LONDON, ENGLAND, the THIRD day of JANUARY, ONE THOUSAND NINE HUNDRED AND NINETEEN.
〔Translation〕 Provided the Arabs obtain their independence as demanded in my Memorandum dated the 4th of January, 1919, to the Foreign Office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I shall concur in the above articles. But if the slightest modification or departure were to be made 〔sc. in relation to the demands in the Memorandum〕 I shall not be bound by a single word of the present Agreement which shall be deemed void and of no account or validity, and I shall not be answerable in any way whatsoever.
…}}}

헤자즈 아랍 왕국을 대표하고 대행하는 아미르 파이살 전하와 시온주의자 기구(Zionist Organisation)를 대표하고 대행하는 하임 바이츠만 박사는 인종적 친밀성과 아랍인과 유대인 사이에 존재하는 고대로부터의 유대를 유념하고, 그들의 국가적(national) 열망을 성취하는 가장 확실한 수단이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의 발전을 위한 최대한 긴밀한 협력을 통해서임을 깨달아, 그들 사이에 존재하는 선의의 이해를 더더욱 확실히 하고자 하여 아래의 조항들에 동의하였다:

1조.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모든 관계와 사업에서 가장 우호적인 선의와 이해에 의해 제어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아랍과 유대인은 적절히 인가된 대리 기구를 각각의 영토에 설립하고 유지해야 한다.
2조. 강회 회의의 숙의가 완료되는 대로,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 사이의 명확한 경계를 그 당사자에 의해 동의를 얻은 위원회에 의해 결정해야 한다.
3조. 팔레스타인의 헌법과 행정 기구를 수립할 때에는 1917년 11월 2일 영국 정부의 선언을 실행을 최대한 보장할 모든 수단을 도입해야 한다.
4조. 대규모로 유대인의 팔레스타인으로의 이주를 북돋우고 고무시키며, 또 가능한 한 빨리 유대인 이주민을 밀도 높은 정착을 통해 땅에 정착시키고 농지를 집약적으로 경작하기 위해 모든 필요한 수단들이 이용되어야 한다. 이러한 수단들을 이용할 때 아랍 농부들과 소작농들의 권리는 보호 받아야 하며, 그들의 경제적 발전을 추진할 때에 보조를 받아야 한다.
5조. 종교의 자유를 행사하는 것을 금지하거나 방해하는 어떠한 규제나 법률도 제정되어서는 안 된다. 나아가 차별이나 선호 없는 신앙 고백과 숭배의 행사와 향유는 영구적으로 허가되어야 한다. 시민적 또는 정치적 권리의 행사는 어떠한 종교적인 시험을 받아서는 안 된다.
6조. 무슬림의 성지는 무슬림의 통제 아래 두어야 한다.
7조. 시온주의자 기구는 지역의 경제적 가능성을 조사하고 그 개발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보고하기 위해 전문가 위원회를 파견할 것을 제안한다. 시온주의자 기구는 아랍 국가의 경제적 가능성을 조사하려는 목적을 위해, 또 그 개발을 위한 최선의 수단을 보고하기 위해 아랍 국가가 원하는 대로 활용할 수 있도록 앞서 언급된 위원회를 둘 것이다. 시온주의자 기구는 상기한 천연 자원과 경제적 가능성을 발전시키기 위한 수단을 제공하도록 아랍 국가를 지원하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할 것이다.
8조. 상기한 당사자들은 강화 회의 이전에 이 문서에 포함된 모든 사안에 대해 완전한 합의와 조화를 이루기 위해 행동할 것에 동의힌다.
9조. 계약한 당사자 사이에 발생할 수 있는 어떠한 분쟁의 문제는 중재를 위해 영국 정부에 회부될 것이다.

1919년 1월의 셋째 날, 잉글랜드 런던에서 우리의 손에 의해 쓰임
〔조약문 아래 덧붙여진 파이살의 아랍어 기록〕[196] 영국 정부의 외무부에 1919년 1월 4일 내가 보낸 제의서에서 요구한 대로 아랍인들이 독립을 성취한다면 나는 상기한 조항에 동의할 것이다. 그러나 (제의서의 요구들과 관련하여) 약간의 변형이나 이탈이라도 있다면 나는 무효하거나 신뢰성·유효성이 없다고 여겨지는 현재의 협정의 단 한 마디에도 구속되지 않을 것이며, 절대 어떤 식으로든 책임을 지지 않을 것이다.

… (후략, 서명 등) …
(출처)

협정은 굉장히 다면적으로 읽히는데, 이 협정의 내용만을 살펴보면 아랍 측에서 굉장히 많은 양보를 한 것으로 보인다. 아랍 국가와 팔레스타인은 서로 협의 하에 '경계'를 설정하는 별도의 체제이며, 명시적으로 밸푸어 선언의 존중과 유대인의 이주를 지원하고 자원 개발이라는 차원에서 유대인 기구의 상당한 역할을 인정한다는 등의 내용이 삽입되었으며, 종교적으로도 아랍인이 다수인 상황에서 종교의 자유를 제도적으로 제약하지 말아야 한다는 협약의 의도는 뻔했다. 심지어 이러한 협약의 내용조차 '유대 국가'를 명시하려던 바이츠만의 의도를 파이살이 차단하는 등 원래 시온주의자들의 의도보다 축소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파이살은 이를 받아들였는데, 그의 불편한 동의는 조약문 아래 덧붙여진 파이살의 아랍어 기록에서 명확히 읽힌다. 파이살은 영국이 파이살의 제안대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조건 아래 팔레스타인의 양보에 동의한 것이었으며, 오히려 핵심은 그쪽에 가 있었다. 곧 파이살은 아랍 독립 국가, 그것도 다마스쿠스 의정서보다 한 발 더 나아간 것으로까지 볼 수 있는 형태의 아랍 연합 국가를 인정한다는 조건 하에 팔레스타인 문제에서 양보가 성립할 수 있음을 언급한 것이었다. 영국이 이 의사를 배반할 경우, 파이살은 언제든 이 협정을 휴지조각으로 만들어버릴 수 있는 권리를 요구한 셈이었다.

이런 불안한 합의 위에서, 파이살은 파이살대로, 바이츠만은 바이츠만대로 자신들의 의사의 방향으로 더 나아갔다. 1월 29일 파이살은 다시 한 번 요구를 제출해, '알렉산트레타-디야르바크르(Alexandretta - Diarbekr)' 남쪽에서 '직접적으로 관련된 사람들이 해결책을 자유롭게 수용하는 것을 기초로(upon the basis of the free acceptance of that settlement by the people immediately concerned)' 아랍 독립 문제를 해결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2번째 문서 2월 6일 10인 위원회(Council of the Ten)[197] 청문회에 참여한 파이살의 언급은 "그곳이 지닌 만국적인 성격 때문에, 그는 팔레스타인을 관련된 이해 관계자들 상호 간의 협의를 위해 별도로 두었습니다. 그 예외를 제외하고, 그는 그의 제의서에서 언급한 아랍 지역에 대해 독립을 요구했습니다.("Palestine, for its universal character, he left on one side for the mutual consideration of all parties interested. With this exception he asked for the independence of the Arabic areas enumerated in his memorandum.)"라는 것으로 인지되었다. 3번째 문서 곧 영국이 암시적으로 언급해 왔던 국제 지구로서의 팔레스타인을 용인하는 대가로, 열강으로부터 다른 아랍 지역의 독립을 분명히 인정 받으려 한 의사를 전달한 것이다. 반면 바이츠만은 바이츠만대로 2월 3일 10인 위원회 청문회에 제출한 제의서에서 팔레스타인에 대한 유대인의 역사적 소유권과 밸푸어 선언의 내용을 내세우며 공공연히 '유대인 연합체(Jewish Commonwealth)'를 언급하고 '국제연맹에 의한 영국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를 요구했으며,[198] 2월 27일 청문회에서 그 조건으로 '연간 8만 명의 유대인 이민 허용'을 내세웠다. 양자의 의견은 위태로운 합의로부터 서로가 서로에게 등을 돌린 방안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다만 그렇다고 파이살이 시온주의자들과 완전히 돌아서 적대한 것은 아니었으며, 이후에도 파이살은 시온주의자들을 설득하기 위한 노력을 계속했다. 그 의사를 확인하게 해주는 자료가 1919년 3월 3일 파이살이 미국 시온주의자 기구 의장 필릭스 프랭크퍼터에게 보낸 서신이다.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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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ar Mr. Frankfurter:
I want to take this opportunity of my first contact with American Zionists to tell you what I have often been able to say to Dr. Weizmann in Arabia and Europe.
We feel that the Arabs and Jews are cousins in having suffered similar oppressions at the hands of powers stronger than themselves, and by a happy coincidence have been able to take the first step towards the attainment of their national ideals together.
The Arabs, especially the educated among us, look with the deepest sympathy on the Zionist movement. Our deputation here in Paris is fully acquainted with the proposals submitted yesterday by the Zionist Organisation to the Peace Conference, and we regard them as moderate and proper. We will do our best, in so far as we are concerned, to help them through: we will wish the Jews a most hearty welcome home.
With the chiefs of your movement, especially with Dr. Weizmann, we have had and continue to have the closest relations. He has been a great helper of our cause, and I hope the Arabs may soon be in a position to make the Jews some return for their kindness. We are working together for a reformed and revived Near East, and our two movements complete one another. The Jewish movement is national and not imperialist. Our movement is national and not imperialist, and there is room in Syria for us both. Indeed I think that neither can be a real success without the other.
People less informed and less responsible than our leaders and yours, ignoring the need for cooperation of the Arabs and Zionists, have been trying to exploit the local difficulties that must necessarily arise in Palestine in the early stages of our movements. Some of them have, I am afraid, misrepresented your aims to the Arab peasantry, and our aims to the Jewish peasantry, with the result that interested parties have been able to make capital out of what they call our differences.
I wish to give you my firm conviction that these differences are not on questions of principle, but on matters of detail such as must inevitably occur in every contact of neighbouring peoples, and as are easily adjusted by mutual good will. Indeed nearly all of them will disappear with fuller knowledge.
I look forward, and my people with me look forward, to a future in which we will help you and you will help us, so that the countries in which we are mutually interested may once again take their places in the community of civilised peoples of the world.
Believe me,
Yours sincerely,
(Sgd.) Feisal}}}

프랭크퍼터 씨에게
나는 미국의 시온주의자들과 처음 접촉하는 차에, 아라비아와 유럽에서 바이츠만 박사에게 종종 말하곤 했던 것에 대해 말하고 싶소.
우리는 아랍인들과 유대인들이 그들보다 강한 힘의 손아귀 아래에서 비슷한 압제를 받던 사촌이라고 느끼며, 기쁜 기회 덕분에 국가적인 이상을 함께 성취하려는 첫 걸음으로 나아갈 수 있었소.
아랍인들, 그 중에서도 특히 우리 가운데 교육 받은 이들은 시온주의 운동을 깊은 공감과 함께 바라보오. 이곳 파리에서의 우리 대표단은 어제 강화 회의에 시온주의자 기구가 제출한 제안서를 온전히 인지했고, 그것이 적당하고 적절한 것이라고 여기오. 우리는 우리가 관련되어 있는 한 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할 것이오. 우리는 유대인들이 고향(home)으로부터 가장 따뜻한 환영을 받기를 기원할 것이오.
그대들의 운동의 수장(chief)들, 특히 바이츠만 박사는 우리들과 가장 밀접한 관계를 맺어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오. 그는 우리의 대의의 중요한 조력자이고, 나는 아랍인들이 곧 그들의 친절에 대한 일정한 보답을 할 수 있기를 바라오. 우리는 개혁되고 재생된 근동을 위해 함께 일하고 있고, 우리의 두 운동은 서로에 의해 완성될 것이오. 유대인들의 운동은 국가적이나 제국주의적이지 않소. 우리의 운동 또한 국가적이고 제국주의적이지 않으며, 시리아에는 우리 둘 모두를 위한 공간이 있소. 실은 나는 서로가 없이는 어느 쪽도 진정한 성공을 이룰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오.
우리의 지도자들과 당신들의 지도자들보다 잘 알지 못하고 책임감이 부족한 사람들은 아랍인들과 시온주의자들의 협력의 필요성을 무시하면서, 우리 운동의 초기 단계에서 팔레스타인에서 반드시 일어났을 지역적 어려움을 이용하려 애썼소. 그들 중 누군가는, 내가 걱정스럽게 여기는 것인데, 아랍 농민들에 대한 당신들의 목표와 유대인 농민들에 대한 우리들의 목표를 잘못되게 표현하더군. 이는 관련된 당사자들이 그들이 우리의 차이라고 부르는 것을 이용할 수 있게 하는 결과를 낳았소.
나는 이러한 차이들이 원칙의 문제가 아니라 이웃한 민족들 사이의 모든 접촉에서 필연적으로 발생하고, 또 상호 간의 선의로 쉽게 조정될 수 있는 사소한 부분의 문제라고 확언하여 주고 싶소. 사실 그것들의 거의 대부분은 더 온전한 지식에 의해 해소될 수 있소.
나는, 또 나와 함께 하는 나의 사람들은 우리가 그대들을 돕고 그대들이 우리를 돕는 미래를 지향하오. 그에 따라 우리가 서로 관계를 맺게 될 지역들 속에서, 다시 한 번 세계의 문명화된 민족들의 공동체 속에서 자리하게 될 수 있을 것이오.
나를 믿어주시게.
진심을 담아,
〔파이살의 서명〕

그러나 마침내 4월 28일, 파리 강화 회의에서 국제연맹의 결성을 위한 국제 연맹 규약(Covenant of the League of Nations)이 채택되면서 이 문제의 향방이 대략 결정되었다. 규약 22조에서, "이전에 튀르크 제국에 속하던 특정 공동체들은 그들이 홀로 설 수 있을 때까지 위임통치국에게 행정적 조언과 조력을 받는 조건으로 그들을 존재를 잠정적으로 독립 국가로서 인정받을 수 있는 발전 단계에 이르렀다. 위임통치국의 선택에는 이들 공동체의 희망이 원칙적으로 고려되어야 한다.(Certain communities formerly belonging to the Turkish Empire have reached a stage of development where their existence as independent nations can be provisionally recognized subject to the rendering of administrative advice and assistance by a Mandatory until such time as they are able to stand alone. The wishes of these communities must be a principal consideration in the selection of the Mandatory.)"고 언급되었다. 출처 이는 현지 주민들의 의사를 반영하는 절차를 일절 명시하지 않고 위임통치국의 '행정적 조언과 조력'만을 언급한 것으로, 팔레스타인에서 다수를 이루는 아랍인들의 의사를 중심으로 팔레스타인의 흐름을 이끌려 하던 파이살의 의사는 이를 통해 완전히 무너졌다. 반면 바이츠만 등 시온주의자가 추구하던 형태의 팔레스타인은 이제 눈 앞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결국 이 내용은 1919년 6월 28일 베르사유 조약의 체결과 함께 국제 사회에 공표되었다. 파이살의 타협안은 사실 아랍인들 사이에서도 지지는커녕 독립 전쟁의 영웅이었던 파이살에게 지탄이 가해지게 만들 정도로 아슬아슬한 것이었는데, 그마저도 '아랍인들의 지도자가 시온주의자들과 협의해 합의까지 했다'는 오명만을 남긴 채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당연하게도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을 부정했을 뿐만 아니라, 베르사유 조약에 대한 서명도 거부했다. 파이살의 노력이 이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지만, 이제 그는 더 이상 타협의 길을 택할 수 없었다. 이제는 적극적인 행동으로 그의 아랍 민족주의에 대한 진심을 보일 때였고, 그 일을 더 미룰 수 없었다.

7.8. 제1차 전 시리아 의회(1919. 6.~7.)

파리 강화 회의에서의 국제연맹을 통한 해결안이 결국 아랍의 민의를 반영할 수 없는 방향으로 결정되고, 4월 30일 베이루트로 돌아온 파이살은 5월 시리아를 방문했다. 후술하는 킹-크레인 조사위원회의 방문을 맞아 시리아인들의 결집을 이끌어내기 위해서였다. 시리아에서는 이 해 2월부터 알-파타트가 아랍독립당(Hizb al-Istikla al-Arabi)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재편하여 활동하고 있었으며, 이라크와 연결된 알 아흐드와 팔레스타인을 중심으로 한 이른바 '아랍 클럽(Arab Club, al-Nadi al-Arabi)' 또한 아랍 민족주의 활동에 박차를 가하고 있었다. 파이살은 이들을 지지하면서 대(大)시리아에서의 의회 구성을 위한 총선을 실시했다. 이때의 '시리아'는 프랑스가 점령한 점령 적지 행정구 북구(서구)와 영국이 점령한 남구가 포함되었으며, 영국과 프랑스는 집회를 금지하는 등의 방법으로 이를 방해했으나 이 결과 85명의 대표(또는 기록에 따라 88명)가 선출되었다.

6월 7일, 파이살은 다마스쿠스에서 이들의 회의를 소집하였는데 이를 제 1차 전 시리아 의회(The General Syrian Congress)라고 한다. 프랑스 군정의 방해로 69명(또는 기록에 따라 66명)의 의원만이 참석하기는 했으나, 이들은 7월 2일 10개조의 결의를 채택하였다. 이 10개조 가운데 5조를 제외한 안건은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5조 또한 거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동의로 채택되었다. 그 내용은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거부하면서 파이살을 왕으로 하는 입헌군주제 국가를 건립하고 팔레스타인으로의 유대인 이주와 유대인 연합체(Jewish Commonwealth) 건설을 반대한다는 내용 등이었다.
{{{#!folding [ 영문 펼치기 · 접기 ]
We the undersigned members of the Syrian General Congress, meeting in Damascus on Wednesday, July 2nd, 1919, made up of representatives from the three Zones, viz., the Southern, Eastern, and Western, provided with credentials and authorizations by the inhabitants of our various districts, Moslems, Christians, and Jews, have agreed upon the following statement of the desires of the people of the country who have elected us to present them to the American Section of the International Commission; the fifth article was passed by a very large majority; all the other articles were accepted unanimously.

1. We ask absolutely complete political independence for Syria within these boundaries: The Taurus System on the North; Rafah and a line running from Al Jauf to the south of the Syrian and the Hejazian line to Akaba on the south; the Euphrates and Khabur Rivers and a line extending east of Abu Kamal to the east of Al Jauf on the east; and the Mediterranean on the west.
2. We ask that the Government of this Syrian country should be a democratic civil constitutional Monarchy on broad decentralization principles, safeguarding the rights of minorities, and that the King be the Emir Feisal, who carried on a glorious struggle in the cause of our liberation and merited our full confidence and entire reliance.
3. Considering the fact that the Arabs inhabiting the Syrian area are not naturally less gifted than other more advanced races and that they are by no means less developed than the Bulgarians, Serbians, Greeks, and Roumanians at the beginning of their independence, we protest against Article 22 of the Covenant of the League of Nations, placing us among the nations in their middle stage of development which stand in need of a mandatory power.
4. In the event of the rejection by the Peace Conference of this just protest for certain considerations that we may not understand, we, relying on the declarations of President Wilson that his object in waging war was to put an end to the ambition of conquest and colonization, can only regard the mandate mentioned in the Covenant of the League of Nations as equivalent to the rendering of economical and technical assistance that does not prejudice our complete independence. And desiring that our country should not fall a prey to colonization and believing that the American Nation is farthest from any thought of colonization and has no political ambition in our country, we will seek the technical and economical assistance from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provided that such assistance does not exceed 20 years.
5. In the event of America not finding herself in a position to accept our desire for assistance, we will seek this assistance from Great Britain, also provided that such assistance does not infringe the complete independence and unity of our country and that the duration of such assistance does not exceed that mentioned in the previous article.
6. We do not acknowledge any right claimed by the French Government in any part whatever of our Syrian country and refuse that she should assist us or have a hand in our country under any circumstances and in any place.
7. We oppose the pretentions of the Zionists to create a Jewish commonwealth in the southern part of Syria, known as Palestine, and oppose Zionist migration to any part of our country; for we do not acknowledge their title but consider them a grave peril to our people from the national, economical, and political points of view. Our Jewish compatriots shall enjoy our common rights and assume the common responsibilities.
8. We ask that there should be no separation of the southern part of Syria known as Palestine, nor of the littoral western zone, which includes Lebanon, from the Syrian country. We desire that the unity of the country should be guaranteed against partition under whatever circumstances.
9. We ask complete independence for emancipated Mesopotamia and that there should be no economical barriers between the two countries.
10. The fundamental principles laid down by President Wilson in condemnation of secret treaties impel us to protest most emphatically against any treaty that stipulates the partition of our Syria country and against any private engagement aiming at the establishment of Zionism in the southern part of Syria; therefore we ask the complete annulment of these conventions and agreements.

The noble principles enunciated by President Wilson strengthen our confidence that our desires emanating from the depths of our hearts, shall be the decisive factor in determining our future; and that President Wilson and the free American people will be our supporters for the realization of our hopes, thereby proving their sincerity and noble sympathy with the aspiration of the weaker nations in general and our Arab people in particular.
We also have the fullest confidence that the Peace Conference will realize that we would not have risen against the Turks, with whom we had participated in all civil, political, and representative privileges, but for their violation of our national rights, and so will grant us our desires in full in order that our political rights may not be less after the war than they were before, since we have shed so much blood in the cause of our liberty and independence.
We request to be allowed to send a delegation to represent us at the Peace Conference to defend our rights and secure the realization of our aspirations.}}}

우리, 남구·동구·서구 세 구역의 무슬림·크리스트교도·유대인들의 다양한 구역의 거주민의 신임과 허가를 받은 대표들로 구성되어 1919년 7월 2일 수요일 다마스쿠스에서 만나 이 문서에 서명한 전 시리아 의회의 구성원들은 국제 조사위원회의 미국(America) 분과에 대해 그들(의 의사)을 표명하기 위해 우리를 선출한 지역들의 사람들이 요구한 다음의 성명에 동의하였다. 5조는 압도적 다수에 의해 통과되었으며, 나머지 모든 조항들은 만장일치로 수용되었다.

1. 우리는 다음의 경계들 내에서 시리아의 완전한 정치적 독립을 엄중히 요구한다.
북쪽으로, 타우루스 산맥.
남쪽으로, 라파흐, 그리고 알 자우프(Al Jauf)[199]로부터 시작해 시리아의 남쪽과 아카바로 이어지는 헤자즈의 선.
동쪽으로, 유프라테스 강·하부르 강(Khabur River)과 아부카말의 동쪽부터 알 자우프의 동쪽을 연장한 선.
서쪽으로, 지중해.
2. 우리는 시리아 지역의 정부가 폭 넓은 분권화의 원칙과 소수자의 권리 보호를 따르는 민주적 시민의 입헌군주제여야 할 것이라고 요구하며, 국왕은 우리의 해방이라는 대의를 위해 영광스러운 투쟁을 수행하여 왔고 우리의 온전한 신뢰와 전적인 지지를 받는 아미르 파이살이어야 한다.
3. 시리아 지역에 사는 아랍인들이 진보된 인종들에 비하여 자연적으로 뒤처지는 능력을 지닌 바 없고 처음 독립했을 때의 불가리아인, 세르비아인, 그리스인, 루마니아인에 비해 전혀 덜 계발되지 않았으므로, 우리는 우리를 발전의 중간 단계에 있는 국가들 사이에 두고 위임통치 권력이 필요하다고 한 국제연맹 규약 22조에 반대한다.
4. 강화 회의에서 우리가 이해하지 못할 어떠한 고려에 의해 이러한 정당한 항의를 거부할 경우, 우리는 전쟁을 수행하는 그의 목적이 정복과 식민화의 욕망을 종식시키려는 것이라는 우드로 윌슨 대통령의 선언에 기대어, 국제연맹 규약에서 언급된 위임통치를 우리의 완전한 독립을 가로막지 않는 경제적·기술적 조력을 제공하는 것에 상응하는 것으로만 받아들일 수 있다. 또한 우리 지역이 식민화의 먹이로 떨어지지 않기를 바람과 함께 미국이 우리 지역에 대해 식민화의 사고나 정치적 욕망으로부터 가장 멀다고 믿음에 따라, 우리는 그러한 조력이 20년을 넘어서지 않는다는 조건 하에 미합중국의 기술적·경제적 조력을 요구한다.
5. 만일 미국(America)이 조력에 대한 우리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는 대영제국의 조력을 요구할 것이며, 그러한 조력은 우리 지역의 완전한 독립과 통일을 침해하지 않아야 하고, 그러한 조력이 지속되는 기간은 상기한 조목에서 언급된 기간을 넘어가서는 안 된다.
6. 우리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주장된 권리의 어떤 부분에 대해서도 인정하지 않으며, 어떠한 상황, 어떠한 장소에서도 우리 지역에서 프랑스 정부가 우리에게 조력을 제공하거나 관여하는(have a hand)는 것을 거부한다.
7. 우리는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시리아의 남부에 유대인 연합체(Jewish Commonwealth)를 창설하려는 시온주의자들의 주장에 반대하며, 우리 지역의 어떤 부분에도 시온주의자들이 이민하는 것을 반대한다. 이는 우리가 그들의 직함(title)을 인정하지 않고 그들을 우리 민족에게 국가적, 경제적, 정치적 관점에서 심각한 위협으로 보기 때문이다. 우리의 유대 동포는 우리의 보편적 권리를 누릴 것이며 보편적 책임을 부담할 것이다.
8. 우리는 우리의 지역으로부터 팔레스타인으로 알려진 시리아의 남부와 레바논을 포함하는 서부 연안 지구가 분리되지 않아야 할 것임을 요구한다. 우리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분할되지 않는 우리 지역의 통일이 보장되기를 소망한다.
9. 우리는 해방된 메소포타미아의 완전한 독립을 요구하며 두 지역 사이에 경제적 장벽이 없어야 할 것임을 요구한다.
10. 윌슨 대통령에 의해 밀약(secret treaties)을 규탄하며 제시된 기초적 원칙들에 따라, 우리는 우리 시리아 지역의 분할을 명기한 어떠한 조약과 시리아 남부에서의 시온주의의 성립을 목적으로 한 사적 약속에 강력히 저항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러한 협정(convention)들과 협약(agreement)들의 완전한 무효화를 요구한다.

윌슨 대통령에 의해 주창된 고귀한 원칙들은 우리 가슴 깊이서부터 솟구치는 소망이 우리의 미래를 확정하는 결정적인 요소여야 하고, 윌슨 대통령과 자유로운 미국 시민들은 우리의 희망을 실현하는 데 우리의 지원자가 될 것이며, 그럼으로써 그들이 일반적으로는 약소국들, 구체적으로는 아랍 민족의 열망에 대한 진실된 뜻과 고귀한 동감을 증명할 것이라는 우리의 신뢰를 강하게 만든다.
우리는 또한 강화 회의에 대해 우리가 튀르크인들에 대해 봉기한 것은 우리가 동참했던 모든 시민적이거나 정치적인, 또 대표를 내세울 특권 때문이 아니라 그들이 우리의 국가적 권리를 침해했기 때문임을 깨달을 것이며, 그렇기에 해방과 독립이라는 대의를 위해 무수한 피를 흘린 우리가 전쟁 이전보다 이후에 더 적지 않은 정치적 권리를 바라는 열렬한 소망을 가짐을 인정할 것이라는 데 최대의 신뢰를 보낸다.
우리는 우리의 권리를 보호하고 우리의 열망의 실현을 보증하기 위해 강화 회의에서 우리를 대표할 대표자(delegation)를 보내는 것이 허락될 것을 요구한다.
(출처)

이로써 파이살은 시온주의자들과의 협의라는 이전의 활동과 완전히 결별하는 한편, 헤자즈 왕국으로부터도 독립적인 자신의 정치 영역을 확보했다. 한편 이러한 전 시리아 의회의 결의안은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에도 전달되었고, 이 결의로 시리아 전역에서 파이살 및 전 시리아 의회를 환영하는 여론이 결집하여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을 비롯한 외부에 시리아의 정치적 요구를 알리려는 활동이 활기를 띠었다.[200]

한편 1918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전쟁에서 발을 빼면서 공백지가 된 알레포의 서쪽 해안 일부 지역에서 알라위파 이슬람교도들이 민병대를 조직하였는데, 이들은 파이살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그러나 새롭게 진입해 온 프랑스군은 이들을 무장 해제시키려 했고, 알라위파 세력은 프랑스를 불만스럽게 바라보게 되었다. 그러던 와중 1919년 상반기 알-카드무스(Al-Qadmus) 지역에서 이들과 이 지역의 아미르를 포함한 이스마일파 사이 몇 차례의 갈등이 빚어지자 프랑스가 이를 중재하려 나섰으나, 중재는 실패하고 1919년 7월 셰이크 살레 알-알리(Saleh Al-Ali)를 중심으로 프랑스에 맞서는 반란이 일어났다. 이들은 라타키아타르투스까지 이어지는 해안 지대에서 게릴라전을 펼치며 튀르키예 및 일대 반프랑스 세력의 지원을 받았으며, 프랑스를 몰아내려 하는 파이살을 돕는 하나의 외적 요소로 작용했다.

7.9. 킹-크레인 조사위원단과 보고서(1919. 6.~8.)

한편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이 해의 3월 20일, 파리 강화 회의의 4인 위원회(Council of the Four)[201]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대(大)시리아를 포함한 아랍 지역의 전후 처리 문제를 놓고 크게 대립하고 있었다. 프랑스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에서 약속된 북부 시리아와 현재의 이라크 북부뿐만 아니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지역에 대한 자국의 이권을 주장하며 이 지역 전체에 대한 자국의 위임통치를 주장했으나, 영국은 전쟁에서 자국이 압도적인 병력을 파견한 반면 프랑스의 기여는 매우 적었음을 내세워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분할안과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을 고려할 때 프랑스가 이 지역 전체에 대한 이권을 주장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 자체가 아랍의 당사자로서의 발언권을 무시하는 것이라는 것은 차치하더라도, 사실 위에서 언급했듯 사이크스-피코 밀약뿐만 아니라 당장 몇 달 전의 로이드 조지-클레망소 협정에 따르면 프랑스는 모술과 팔레스타인에 대한 이권 주장을 포기해야 했다. 그러나 그 협정의 내용이 결국 프랑스에게 구체적으로 득이 되는 것이 없었으므로, 클레망소는 강화 회의에서 논의가 과열되자 당시의 협의가 공개적인 것이 아니었다는 점을 이용하여 팔레스타인과 모술 문제를 영국에게 불만을 표출하는 수단으로 삼은 것이었다. 결국 복잡하지만, 실체는 프랑스의 강짜에 가까운 것이었다.

그에 따라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을 '아랍인들과의 조약(the Treaty with the Arabs)'으로 부르며 그 구속력을 강하게 주장했다. 이 표현 또한 물론 아랍의 이권을 지켜야 한다는 표현인 것 자체는 분명하지만, 기실 그 속내는 (시각에 따라서는, '조약'의 입지에는 미치지 못하는 교환 서신을 격상시켜) 프랑스의 세력 확장을 억제하기 위해 철저히 수단적으로 아랍과의 약속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프랑스는 맥마흔과 후세인 사이 교환된 서신의 내용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도 못했다며 이를 묵살하려 했는데, 프랑스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당사자가 아닌 것 자체는 사실이었으므로 이 고압적으로 당사자로서의 책임을 부정하는 태도가 엄밀히 말해 아주 틀린 것은 아니기까지도 했다. 결국 프랑스는 프랑스대로 손해를 보기 싫었고, 영국은 영국대로 논의에 내세운 수단이 먹히지 않았다. 때문에 둘의 합의는 요원해지는 듯 보였다.

이와 같이 양국이 대립하는 데 대해, 미국은 프랑스가 무리하게 의견을 밀어붙일 경우 시리아에서 파이살을 필두로 한 아랍의 무력 저항을 감수해야 할 것이고 이는 팔레스타인에서의 영국도 마찬가지일 것이라고 타일렀다. 그와 함께 미국의 윌슨 대통령은 피치자의 동의라는 원칙을 내세우며 시리아 주민들로부터 직접 의사를 수렴하기 위한 조사위원단을 파견할 것을 요청하였다. 프랑스는 이에 조사위원단을 팔레스타인, 이라크 및 킬리키아, 아르메니아에도 파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영국을 압박하려 했는데, 영국은 호기롭게 이를 곧바로 수용한다고 나섰다. 1919년 3월 20일 파리 강화 회의 회의록

그 결과 3월 25일 4인 위원회에서 연합국 공동조사위원단(Inter-Allied Commission of Inquiry)의 파견이 결정되었다. 그러나 정작 실행 단계에서 영국과 프랑스는 대표 임명을 거부하여, 자국의 이권에 따라 아랍 지역을 주무르려는 야욕을 숨기지 않았다. 그로 인해 결국 남은 것은 미국의 조사위원단뿐이었다.

미국에서는 이에 헨리 처칠 킹(Henry Churchill King)과 찰스 리처드 크레인(Charles Richard Crane)을 위원으로 하는 이른바 킹-크레인 조사위원단(King-Crane Commission)을 파견했으며, 이들은 6월 10일 야파에 도착해 7월 21일까지 6주 간의 조사를 진행했다. 이 조사는 기본적으로 프랑스가 점령한 점령 적지 행정구 서구와, 영국이 점령한 점령 적지 행정구 남구(팔레스타인)를 포함하여 시리아 전체를 대상으로 했다. 이 상황을 알리고 행동을 촉구한 파이살의 노력 덕분에,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이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은 7월 2일 상기한 제 1차 전 시리아 의회의 결의가 위원단에 전달되었다. 이외에도 총 1863건에 달하는 청원이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에 제출되었으며,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이 수렴한 청원의 통계 [202]
점령 적지 행정구 남구
(영국 점령)
점령 적지 행정구 서구
(프랑스 점령)
점령 적지 행정구 동구
(영국-헤자즈 연합군 점령)
시리아 전체
(총합)
청원 수 백분율 청원 수 백분율 청원 수 백분율 청원 수 백분율
260 446 1157 1863
A. 영토 경계(Territorial Limi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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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1. 통일 시리아 찬성
(For United Syria)
221 85.0% 187 41.9% 1022 94.3% 1500 80.5%[203]
2. 팔레스타인의 분리 찬성
(For Seperate Palestine)
3 1.1% 1 0.22% 2 0.17% 6 0.32%
3. 프랑스가 시리아를 위임통치하는 경우, 영국의 통치 아래 팔레스타인의 분리 찬성
(For Separate Palestine under British if French have Syrian Mandate)
1 0.3% 0 0% 1 0.08% 2 0.1%
4. 시리아 국가 안의 팔레스타인 자치 찬성
(For Autonomous Palestine within Syrian State)
24 9.2% 0 0% 0 0% 24 1.29%
5. 대(大)레바논의 독립화[204] 찬성
(For Independent Greater Lebanon)
0 0% 196 43.9% 7 0.6% 203 10.9%
6. 대(大)레바논의 독립화 반대
(Against Independent Greater Lebanon)
0 0% 108 24.2% 954 82.0% 1062 57.0%
7. 시리아 국가 안의 레바논 자치 찬성
(For Autonomous Lebanon within Syrian State)
24 9.2% 0 0% 0 0% 24 1.29%
8. 베카(Bekaa)를 다마스쿠스에 포함시키는 데 찬성
(For Inclusion of Bekka with Damascus)
0 0% 1 0.22% 3 0.25% 4 0.21%
9. 베카(Bekaa)를 레바논에 포함시키는 데 찬성
(For Inclusion of Bekka with Lebanon)
0 0% 7 1.5% 4 0.34% 11 0.59%
10. 킬리키아아르메니아 국가에 포함시키는 데 찬성
(For Inclusion of Cilicia with Armenian State)
0 0% 3 0.67% 0 0% 3 0.16%
11. 킬리키아를 시리아 국가에 포함시키는 데 찬성
(For Inclusion of Cilicia with Syrian State)
0 0% 2 0.45% 0 0% 2 0.1% }}}}}}}}}}}}
B. 독립(Independence)
{{{#!wiki style="margin: 0 -5px -10px; color: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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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1. 시리아의 절대적인 독립 찬성
(For Absolute Independence of Syria)
174 67.0% 130 29.1% 1066 92.2% 1370 73.5%
2. 이라크(메소포타미아)의 독립 찬성
(For Independence of Iraq(Mesopotamia))
26 10% 76 17% 976 84.3% 1278 68.5%
3. 모든 아랍 지역의 독립
(For Independence of all Arab Countries)
30 11.5% 9 2% 58 5.0% 97 5.2% }}}}}}}}}}}}
C. 정부의 형태(Form of Government)
{{{#!wiki style="margin: 0 -5px -10px; color: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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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lding [ 펼치기 · 접기 ]
1. 민주적 왕정 찬성
(For Democratic Kingdom)
5 1.9% 96 21.5% 1006 87.0% 1107 59.3%
2. 아미르 파이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찬성
(For Emir Paisal as King)
2 0.8% 95 21.5% 1005 86.9% 1102 59%
3. 민주적 대의제 정부 찬성
(For Democratic Representative Government)
0 0% 26 5.8% 8 0.68% 34 1.82%
4. 소수자의 권리 보호 찬성
(For Guarding of Rights of Minorities)
4 1.5% 19 4.2% 1000 86.5% 1023 54.9%
5. 아랍어를 공용어로 지정
(Arabic to be Official Language)
10 3.8% 0 0% 1 0.08% 5 0.27%
6. 외국인의 특혜 조항 폐지 찬성
(For Abolition of Foreign Capitulations)
5 1.9% 0 0% 0 0% 10 0.53%
7. 시리아 모든 지방의 자치 찬성
(For Autonomy for all provinces of Syria)
0 0% 13 2.9% 1 0.08% 19 1.02% }}}}}}}}}}}}
D. 위임통치국의 선정(Choice of Mand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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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영국(British-)
a. 영국의 위임통치 찬성
(For British Mandate)
48 18.4% 4 0.9% 14 1.2% 66 3.53%
b. 불가피한 경우, 영국의 위임통치 찬성
(For British Mandate if mandate is obligatory)
0 0% 0 0% 0 0% 0 0%
c. 영국의 '조력' 찬성
(For British "Assistance")
0 0% 4 0.9% 0 0% 4 0.21%
1안으로서 영국 찬성 합계
(Total British First Choice)
48 18.4% 8 1.8% 14 1.2% 70 3.75%
d. 2안으로서 영국의 위임통치 찬성
(For British Mandate as second choice)
2 0.8% 26 5.8% 13 1.1% 41 2.19%
e. 2안으로서 영국의 '조력' 찬성
(For British "Assistance" as second choice)
0 0% 70 15.7% 962 82.2% 1032 55.3%
2. 프랑스(French-)
a. 프랑스의 위임통치 찬성
(For French Mandate)
17 6.5% 213 47.7% 41 3.5% 271 14.52%
b. 불가피한 경우, 프랑스의 위임통치 찬성
(For French Mandate if mandate is obligatory)
0 0% 1 0.22% 0 0% 1 0.05%
c. 프랑스의 '조력' 찬성
(For French "Assistance")
0 0% 1 0.22% 1 0.08% 2 0.1%
1안으로서 프랑스 찬성 합계
(Total French First Choice)
17 6.5% 215 48.1% 42 3.6% 274 14.68%
d. 2안으로서 프랑스의 위임통치 찬성
(For French Mandate as second choice)
0 0% 0 0% 3 0.25% 3 0.15%
e. 2안으로서 프랑스의 '조력' 찬성
(For French "Assistance" as second choice)
0 0% 0 0% 0 0% 0 0%
3. 미국(American-)
a. 미국의 위임통치 찬성
(For American Mandate)
2 0.8% 36 8% 19 1.6% 57 3.05%
b. 불가피한 경우, 미국의 위임통치 찬성
(For American Mandate if mandate is obligatory)
3 1.1% 3 0.66% 2 0.17% 8 0.4%
c. 미국의 '조력' 찬성
(For American "Assistance")
3 1.1% 86 18.2% 975 84.3% 1064 57.0%
1안으로서 미국 찬성 합계
(Total American First Choice)
8 3% 125 28.0% 996 86.1% 1129 60.5
d. 2안으로서 미국의 위임통치 찬성
(For American Mandate as second choice)
5 1.9% 3 0.66% 4 0.34% 8 0.4%
e. 2안으로서 미국의 '조력' 찬성
(For American "Assistance" as second choice)
0 0% 3 0.66% 0 0% 3 0.15%
4. 위임통치국의 선정을 다마스쿠스 회의[205]의 몫으로 남길 것
(Choice of Mandate left to Damascus Conference)
23 8.9% 0 0% 0 0% 23 1.23% }}}}}}}}}}}}
E. 시온주의자 계획(Zionist Program)
{{{#!wiki style="margin: 0 -5px -10px; color: #000000"
{{{#!wiki style="text-align: center"
{{{#!wiki style="margin: -1px -1px -1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 완전한 시온주의자 계획(유대 국가와 이민) 찬성
(For Complete Zionist Program(Jewish State and Immigration))
7 2.7% 2 0.45% 2 0.18% 11 0.59%
2. 시온주의자 계획의 수정안 찬성
(For Modified Zionist Program)
8 3% 0 0% 0 0% 8 0.4%
3. 시온주의자 계획에 반대
(Against Zionist Program)
222 85.3% 88 19.7% 1040 90.0% 1350 72.3% }}}}}}}}}}}}
F. 저항 및 비판(Protests and Criticisms)
{{{#!wiki style="margin: 0 -5px -10px; color: #000000"
{{{#!wiki style="text-align: center"
{{{#!wiki style="margin: -1px -1px -1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1. 반영(Anti-British-)
a. 일반적인 반영적 진술
(General Anti-British Statements)
0 0% 2 0.45% 1 0.08% 3 0.15%
b. 행정의 특정 사항 비판
(Specific Criticisms of Administration)
0 0% 0 0% 0 0% 0% 0%
c. 조사위원단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하는 것에 저항함
(Protests against Interference with Free Access to Commission)
0 0% 0 0% 0 0% 0% 0%
2. 반프랑스(Anti-French-)
a. 일반적인 반프랑스적 진술
(General Anti-French Statements)
4 1.5% 114 25.5% 983 85.0% 1129 60.5%
b. 행정의 특정 사항 비판
(Specific Criticisms of Administration)
0 0% 12 2.7% 12 1.04% 24 1.29%
c. 조사위원단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하는 것에 저항함
(Protests against Interference with Free Access to Commission)
0 0% 6 1.3% 5 0.51% 11 0.59%
3. 반아랍(Anti-Arab-)
a. 일반적인 반아랍적 진술
(General Anti-Arab Statements)
7 2.7% 23 5.1% 5 0.51% 35 1.87%
b. 행정의 특정 사항 비판
(Specific Criticisms of Administration)
0 0% 0 0% 4 0.34% 4 0.2%
c. 조사위원단에 대한 자유로운 접근을 방해하는 것에 저항함
(Protests against Interference with Free Access to Commission)
0 0% 0 0% 0 0% 0% 0%
4. 국제연맹 규약 22조에 반대
0 0% 78 17.4% 955 82.1% 1033 55.3%
5. 밀약, 특히 시리아를 분할하려는 조약에 반대
0 0% 48 10.7% 940 81.3% 988 52.9% }}}}}}}}}}}}

위의 조사는 다음과 같은 인구 통계를 기반으로 하였다.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의 조사 기반이 된 인구 통계
점령 적지 행정구 남구
(영국 점령)
서구
(프랑스 점령)
동구
(영국-헤자즈
연합군 점령)
시리아 전체
<colbgcolor=#cf0921> 인적 집단 인구 수
무슬림 515,000 600,000 1,250,000 2,365,000
기독교도 62,500 400,000 125,000 587,500
드루즈교도 60,000 80,000 140,000
유대인 65,000 15,000 30,000 110,000
기타 5,000 20,000 20,000 45,000
총계 647,500 1,095,000 1,505,000 3,247,500

위 통계는 1863건의 청원에 포함된 내용만을 기재한 것으로, 현대의 여론조사와 같이 면대면으로 개인의 의사를 표명하도록 한 것이 아님에 주의해야 한다. 예컨대 항목을 정리해 일거에 조사하는 여론조사와 달리, '아미르 파이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찬성'하는 청원에서 반드시 '소수자의 권리 보호 찬성' 문제를 논하리라는 법은 없으며, 특히 지엽적인 안건에 대해서는 언급 자체가 적을 것이므로 과소 반영되는 경향이 있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므로 위와 같은 방식으로는 어느 안건이든 그 결과가 통상적인 여론조사에 비해 축소될 수밖에 없는데, 그럼에도 청원에서 다수 언급된 안건은 당시부터 큰 지지를 받고 있었던 안건이라고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청원에서 50% 이상의 청원에서 지지하는 것으로 언급된 안건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었다(60% 이상의 청원에서 지지하는 것으로 언급된 안건은 굵은 글씨, 70% 이상의 청원에서 지지하는 것으로 언급된 안건은 굵은 글씨에 밑줄로 표시).
  • A-1. 통일 시리아 찬성(80.5%)
  • A-6. 대(大)레바논의 독립화 반대(57.0%)
  • B-1. 시리아의 절대적인 독립 찬성(73.5%)
  • B-2. 이라크(메소포타미아)의 독립 찬성(68.5%)
  • C-1. 민주적 왕정 찬성(59.3%)
  • C-2. 아미르 파이살을 왕으로 추대하는 데 찬성(59.0%)
  • C-4. 소수자의 권리 보호 찬성(54.9%)
  • D-1-e. 2안으로서 영국의 '조력' 찬성(55.3%)
  • D-3-c. 미국의 '조력' 찬성(57.0%)
    • D-3-a~c. 1안으로서 미국 (위임통치) 찬성 합계(60.5%)[206]
  • E-3. 시온주의자 계획에 반대(72.3%)
  • F-2-a. 일반적인 반프랑스적 진술(60.5%)
  • F-4. 국제연맹 규약 22조에 반대(55.3%)
  • F-5. 밀약, 특히 시리아를 분할하려는 조약에 반대(52.9%)

이 가운데 70% 이상의 청원에서 지지하는 것으로 언급되는 안건은 당시 대(大)시리아 지역의 가장 기본적인 동향을 짐작하게 해준다. 곧 시리아인의 다수는 절대적으로 독립한 통일된 시리아(및 메소포타미아의 독립)를 원했으며, 시온주의에 명확히 반대했다.

한편, 위 설문조사에서 아랍인이 관할에 참여했던 동구는 인구가 많이 집계되었음을 고려해도 대체로 청원의 수도 많고 특정 안건에 대한 찬성 비율 또한 높은 편인데, 이는 물론 파이살 등 아랍계 지도 인사들의 지도력이 많이 투영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영국이 관할하는 남구는 동구에서 압도적 찬성을 내놓은 안건을 비교적 덜 지지하는 편이고 의견이 크게 갈리는 안건도 있기는 하나 그래도 동구의 경향을 대체로 따르는 안건들이 있는 반면, 프랑스가 관할하는 서구에서는 그 구역 단독으로 보았을 때는 아슬아슬하게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원한다는 청원이 절반에 못 미친 채 과반의 지지가 도출된 안건이 없는 등 다른 구역과 경향이 상당히 다르고 다른 구역에서 압도적인 지지를 얻은 안건에 대해서도 수치상 반응은 미적지근해 보이기도 한다. 그럼에도 통계를 잘 살펴보면 영국에 비해서도 유독 두드러지게 청원에서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찬성하는 비율이 높은데도(D-2-a) 반프랑스적 진술 경향(F-2-a)이 유의미하게 나타나고 조사위원단의 접근을 방해하지 말 것을 주문하는 저항적 진술(F-2-c)이 보이는 데서, 그 실체가 무엇인지 쉽게 짐작할 수 있다. 이런 태도에서 볼 수 있듯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의 활동에 대해 갑작스럽게 뒤로 숨어버린 두 나라 가운데서도, 영국은 참고인과 증언자를 주선해 주는 기본적인 역할은 한 반면 프랑스는 그런 행위에 대해서조차 불만을 품었다. 이후 보고서의 향방과 관계 없이,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갈등을 심화시킨 요인 중 하나였다.

이후 8월 28일,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의 조사 결과가 이른바 킹-크레인 보고서(King-Crane Report)로 파리 강화 회의의 5인 위원회(Council of Five)[207]에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는 '시리아, 팔레스타인, 이라크의 위임통치에 동의'함을 전제로 하면서도 '조속한 시일 내에 독립 상태를 가져온다는 확고한 목적'에 따라 몇 가지 권고 사항을 제시했는데, 파이살을 군주로 한 시리아에서의 입헌군주제와 레바논을 시리아에 포함시킬 것, 유대인 이민의 억제 등을 포함했다. 이는 당시 전 시리아 의회의 결의를 비롯한 대(大)시리아의 여론을 적잖이 반영한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보고서의 내용은 미국 신문에 간략하게 소개되었을 뿐 비밀 문서로 취급되었으며, 1922년 12월 출판될 때까지 공개되지 않았고 파리 강화 회의의 전후 처리 문제에도 반영되지 않았다. 게다가 공교롭게도 미국의 우드로 윌슨은 이미 1919년 6월 29일자로 파리 강화 회의에서 떠나 있었으며, 국제연맹 가입을 위해 미국 국내를 설득하기 위해 나서며 유세하던 중 10월 2일 뇌졸중이 발병해 몸조차 움직이기 어려운 상태가 되었다. 이 때문에 자연히 미국은 의견 행사에 적극적으로 나서기 어려워졌으며, 공은 프랑스와 영국의 사이로 넘어가 킹-크레인 보고서의 내용 또한 강하게 주장되지 못했다.

7.10. 제1차 헤자즈-네지드 전쟁(1918. 7.~1919. 7.)

한편 이와 같이 대(大)시리아의 상황이 급박하게 진행되고 있을 때, 원래대로라면 파이살의 본가 격이 되는 헤자즈 왕국에서의 지원이 큰 도움이 되었어야 했을 것이다. 그렇지만 헤자즈 왕국은 대(大)시리아에서의 상황에 힘을 쓸 만한 상황이 되지 못했다. 제1차 세계대전이 마무리될 무렵 불거진 네지드-하사 토후국과의 국경 분쟁 때문이었다.

숙적이었던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과의 싸움에서 우위를 차지한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1917년 무렵에는 그들을 밀어내고 헤자즈와의 국경 지대에 접근했다. 이들이 거느린 핵심적인 병력 중의 하나가 바로 와하브파 베두인들이 이끄는 이흐완(Ikhwan)이었으며, 이들은 본래 유목민 출신으로 도시 생활에 합류한 이들로서 낙타를 이용한 게릴라전에 능숙했으나 간혹 예상치 못한 약탈을 벌여 주변국과 영국으로부터 눈총을 사기도 했다. 앞서 언급했듯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영국의 보호령으로 들어간 상태였고, 이들은 영국의 요구에 따라 1917년 헤자즈 철도를 약탈하며 오스만 제국을 괴롭혔다.

그런데 이런 상황이 되면서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서로 국경을 접했고 또 각국의 영토 확보를 위해 애쓰는 상황 속에서 특히 헤자즈 철도를 중심으로 양국의 개별적인 게릴라전이 지속되는 판에 놓였다. 반면 양국의 공통적인 적이었던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은 수세에 몰리면서 그들의 위협으로부터 멀어졌는데, 1917년 중후반기에 들어 영국이 대(大)시리아로 진출하면서 직접 군사력을 투사할 수 있게 되자 굳이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을 꺾어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하사 토후국을 북상시킬 필요성이 떨어졌다. 이에 영국은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이 약체화된 채로 세력 균형을 유지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판단해 1918년 하반기에 들어서면 헤자즈 왕국 및 네지드-하사 토후국의 화해를 주선하는 단계에 이르렀다. 헤자즈 왕국은 이에 응해 휴전에 나선 반면,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에 이를 갈고 있던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1918년 가을 그들의 군대를 저지하는 영국의 말을 따르면서도 이를 달갑지 않게 여겼다.

이 상황 속에서 헤자즈 왕국에게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골치 아프지만 어떻게든 아랍 통일 국가에 포함시켜야 할 미래의 목표였던 반면, 네지드-하사 토후국에게 헤자즈 왕국이 내세우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은 영국의 등 뒤에 숨어 자국의 주권을 마음대로 자기 손 안에서 주무르겠다는 뚱딴지 같은 소리에 지나지 않았다. 게다가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종교적으로도 거리가 멀었다. 메카에서 무함마드로부터의 맥을 잇는다는 전통적인 권위를 내세워 입지를 확보하고 있던 하심 왕가의 후세인과 기존 이슬람교계 역사의 변방에서부터 역사적으로 새로운 종교 근본주의 운동으로 세를 얻은 와하브파의 이븐 사우드는 인위적으로까지 느껴지는 상극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양국 사이에 국경 분쟁이 발생했다. 두 나라 사이에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자 목초지인 알-쿠르마(Al-Khurma)는 본래 헤자즈 왕국의 영향권이었지만, 1918년 6월 이흐완의 약탈로 헤자즈 왕국인들 수십 명이 사망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이와 같이 불씨가 던져진 상황 속에서, 메카와 알-쿠르마의 사이에 위치한 도시인 타이프의 아미르 칼리드 이븐 만수르 이븐 루와이(Khalid ibn Mansur ibn Luwai)가 7월 네지드-하사 토후국으로 망명했다.

이에 후세인의 아들 압둘라가 이끄는 헤자즈 왕국은 군대를 보내 알-쿠르마 오아시스를 점령했다. 그러자 7월부터 8월에 걸쳐 네지드-하사 토후국에서 이흐완 부대를 보내 이들과 격돌했다. 결과는 헤자즈 왕국의 참패였다. 애초에 군사적 기량만으로 아라비아 반도에서 자신의 입지를 재건한 이븐 사우드의 능력과, 군사적으로는 독립적인 기반도 성과도 변변히 내세울 것이 없었던 후세인 빈 알리의 한계가 여실히 드러나는 순간이었다.

이 문제는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다시 수면에 올라 양 측이 협의에 나섰지만, 둘의 이해 관계 충돌과 근본적인 사상적 차이를 좁히지 못하고 이는 또 다른 분쟁으로 번졌다. 1919년 5월 21일 헤자즈 왕국은 알-쿠르마에서 남서쪽, 조금 더 메카에 가까운 또 다른 거점인 투라바(Turaba(h), 지도 참고)를 점령했다. 이들은 압둘라의 지휘 아래, 영국으로부터 공급 받은 무기와 1월 메디나가 투항할 당시 확보한 오스만 제국 측의 무기로 무장한 헤자즈 왕국에서 내세울 만한 군대였다. 이에 대해 이븐 사우드는 경고 사절을 보내어 이흐완 부대가 이미 투라바 외곽에 자리 잡았다며 투라바에서 철수할 것을 요구했지만, 압둘라는 이 사절을 죽이며 항전 의지를 보였다.

그러나 이 전투는 허무하게 끝났다. 5월 25일 밤부터 5월 26일 새벽에 이르기까지, 이흐완 낙타 부대의 야습에 헤자즈 왕국군이 전투다운 전투조차 하지 못한 채 무력하게 무너지고 만 것이다. 압둘라조차도 죽음의 고비를 넘겨 겨우 달아났다. 그것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이븐 사우드는 아예 타이프와 메카가 노출된 이 틈을 타 헤자즈로 들이닥칠 기세였다. 네지드-하사 토후국이 헤자즈 왕국을 몰아붙일 준비를 하고 있던 그 때, 7월 4일 영국은 최후통첩을 보내는 한편 복엽기를 헤자즈 상공에 띄우며 네지드-하사 토후국에게 종전을 종용했다. 이에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영국에 불만이 가득 섞인 투의 언사를 보내기는 했지만, 원정을 중단하고 물러났다.

이로 인해 헤자즈 왕국의, 기반을 넘어 밑천이라고까지 해야 할 빈약한 힘이 만천하에 드러났다. 후세인은 압둘라를 질책하며 앓아누웠지만, 고작 그것으로 마무리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영국은 이 일로 후세인에게 다시금 크게 실망했다. 영국은 후세인에게 외무부를 통해 월 1만 2000파운드, 인도국(India Office)을 통해 이븐 사우드에게 월 5000파운드의 보조금을 지급하고 있었는데, 오히려 아라비아 반도를 장악할 힘은 그런 수치와는 정반대로 뒤집혀 있었던 것이다. 결국 후세인에 대한 후원금은 1920년 2월을 마지막으로 끊기게 된다.

일단 영국은 지금까지 후세인을 지원해 준 명분을 저버릴 수 없다는 이유로 1920년 8월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하사 토후국 사이의 휴전을 중개하고 헤자즈 왕국과 정식으로 국교를 맺으며 이 문제를 미봉해 주기는 했다. 그러나 '아랍 통일 국가의 통치자'라는 희망과 어긋난다는 점에서 그가 서명하지 않았던 베르사유 조약에 이어 팔레스타인을 유대인들에게, 시리아를 프랑스에게 내주는 것을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추가적인 전후 처리 조약인 세브르 조약에 대해서도 서명을 거부하는 후세인을 보는 시각은 점차 나빠지고 있었다. 단적으로 말해, 영국에게 그는 그런 무게를 짊어질 능력이 없어 보였다. 이미 1918년 11월 전후 처리에 의해 독립한 예멘 왕국을 그의 손에 맡기지 않고 별도로 독립시킨 데서 영국의 태도는 분명해졌으며, 영국은 그저 헤자즈 왕국이 현상 유지라도 하면서 장기말로 쓰일 수 있기를 바랄 뿐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은 점차 현실과 거리가 멀어지고 있었다.

한편 이븐 사우드의 헤자즈 방면으로의 진출은 저지되기는 했지만, 이븐 사우드는 군사 활동의 범위를 계속해서 넓혀 나갔다. 영국은 꾸준히 이흐완의 약탈적 활동에 대해 불만을 제기했지만, 이븐 사우드는 그럴 때면 유목민 출신의 이흐완에 대해서는 자국도 통제력이 확실하지 않다고 주장하며 문제를 회피해 나갔고, 튀르키예 전선과 대(大)시리아 및 이라크 지역의 전후 처리 문제에 정신이 없던 영국은 그런 그들의 뻔뻔하다고 할 태도에도 손을 쓰지 못했다.

영국의 지원을 받지 않은 전선에서 헤자즈 왕국이 뚜렷한 성과를 거뒀다고 말할 만한 곳은 1916년 8월 그들이 아시르 토후국으로부터 독립시킨 상부 아시르 셰이크국 정도였는데, 1920년에 들어 네지드-하사 토후국은 이곳을 점령하며 헤자즈 왕국의 남쪽으로의 활로를 끊었다. 또한 영국의 보호 아래 1899년 오스만 제국의 통치력을 물리쳤던 쿠웨이트에 대해서도 1920년부터 불확실한 경계 지대를 공략해 들어갔고, 쿠웨이트의 선전과 영국의 개입으로 쿠웨이트의 병합이라는 숨은 목표는 이루지 못했으나 1922년 우콰이르 의정서(협정)(Uqair Protocol/Convention)로 일정하게 확장된 영토를 확정 받았다. 나아가 숙적이었던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도 끝내 1921년 8월 병합했고, 이븐 사우드는 이를 계기로 일대에서 오스만 제국과 직접 비견될 수 있는 술탄의 지위에 올라(네지드 술탄국) 달라진 위상을 세상에 알렸다.

이 결과 헤자즈 왕국은 타이프 방면 전선도 안전하게 사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남쪽과 북동쪽으로 더 넓은 전선에 노출되었으며, 실질적으로 왕국의 운명은 자력이 아닌 외교적 입지의 지속에 달리게 되었다. 따라서 그들은 대(大)시리아 지역의 정세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는 채 머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후세인은 다마스쿠스 의정서 및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제시한 이상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으므로 영국과의 관계는 불편해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는 곧 제2차 헤자즈-네지드 전쟁에서 영국의 외면 속에 헤자즈 왕국이 멸망에 이르는 결과로 이어지게 된다.

7.11. 영국군의 철수와 시리아 아랍 왕국의 건국(1920. 3.)

한편 영국과 프랑스 두 나라 사이의 갈등은, 아이러니하게도 얼마지 않은 1919년 4월 이후 점차 풀리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부정하려 해도 이미 해 놓은 말이 있는 데다가 영국이 아랍 지역에서 프랑스에 비해 막대한 인력과 전비를 쓴 것은 사실이므로 사이크스-피코 밀약보다 더 많은 것을 내놓으라며 더 따지고 들 논리가 없었고, 영국은 많은 인력과 전비를 투자해 아랍 지역의 점령지를 유지하고 있었던 만큼 유지비를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또, 영국에서는 어차피 사이크스-피코 밀약에서 시리아 북부를 양보하기로 했던 만큼 자국군이 주둔할 이유 자체가 없는 시리아 북부에서 철수하는 것만으로 프랑스의 불만을 가라앉힐 뿐만 아니라, 자국이 그 부담을 질 필요 없이 갈수록 고조되는 아랍의 불만이 향하는 방향을 프랑스로 돌릴 수 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결국 로이드 조지-클레망소 협정에서 촉발된 논쟁 중 모술에 대한 논의는 4월 8일의 롱-베랑제 협정(Long-Bérenger Agreement)으로 다시금 정리되어 대체로 영국의 의견을 프랑스가 수용했다. 이어서 마침내 9월 13일, 영국이 팔레스타인과 모술 등지를 차지하되 11월 1일부터 영국군이 시리아 북부에서 철수하고 해안 지대를 프랑스에, 알레포부터 다마스쿠스까지의 도시 등을 포함한 내륙 지역을 아랍에 인계할 것이라는 내용의 합의가 성립하였다. 이 로이드 조지-클레망소 비망록(Lloyd George-Clemenceau Aide-mémoire)의 내용은 이틀 뒤인 1919년 9월 15일, 파리 강화 회의 5인 위원회에서 공표되었다(링크의 Appendix "B").

이를 위해 프랑스와 협상하는 도중에, 영국은 파이살에 대해서도 곧 영국군이 철수할 것이며 이 지역의 정책에 대해서는 앞으로 프랑스와 협의해야 할 것이라고 알려왔다. 그런 영국의 태도에 대해 파이살은 크게 당황했다. 이미 그가 파리 강화 회의를 위해 유럽에 머물던 4월, 파이살은 영국의 주선으로 클레망소 등 프랑스 등의 인사와 만났고 프랑스는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조건으로 아랍 지역의 자치를 허용할 수 있다며 파이살을 설득하려 했으나, 파이살은 이를 거부한 바 있었다. 그 뒤로 파이살은 시리아의 완전한 독립을 주장하는 시리아 민족주의자들과 손을 잡아 자신의 주장을 더욱 굳혀 왔고, 또 킹-크레인 조사위원단 등에 대한 프랑스의 비협조에 분노해 왔는데, 이제 더욱 더 물러서기 힘든 상황에서 협상장에 다시 나서야 되는 판이 된 것이다.

파이살은 영국에 호소하며 하다못해 영국군의 철수를 미룰 수라도 없냐고 로이드 조지에게 서신을 보냈으나, 외무부장관인 조지 커즌 등 아랍 지역에 대한 재정 지출에 비관적이던 관료들은 이를 전혀 받아들이지 않았다. 9월에 영국을 방문했을 때 영국은 되레 파이살과 클레망소의 협상을 강하게 주문했고,[208] 결국 파이살은 10월 20일 파리에 도착해 클레망소와의 협상에 나섰다. 영국군은 예정대로 11월 철수를 시작하여 12월 10일 철군을 마쳤고, 그 빈 자리는 기존의 6000명에서 2만 명으로 증원된 프랑스군이 채웠다.[209]

11월 동안에 걸친 협상의 결과, 그 달 말 놀랍게도 서로 늘 대립해 오던 두 지도자 사이에 잠정적으로 협상이 성립했다. 클레망소는 시리아를 명목상 독립시키되 이를 결과적으로 자국의 속국으로 만들기를 원했으며, 그 수단으로서 프랑스는 프랑스인들만 시리아 왕국의 고문관으로 참여하도록 하기를 원했다. 영국은 그 시리아 국가의 국왕으로 파이살을 앉히도록 중개했고, 파이살은 최소한 확실한 독립을 보장 받는다는 점에서 위임통치보다 나은 수단이라는 설득 끝에 끝내 이를 받아들였다. 또한 파리 강화 회의가 종결될 때까지 잠정적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의 연안 지대를 프랑스군이, 시리아 내륙 지역을 아랍군이 점령할 것을 서로 승인하기로 했다.

이 클레망소-파이살 협정(Clemenceau-Faisal Agreement)은 1920년 1월 6일 최종적으로 서로의 동의를 얻었으되, 공개적으로 발표되지는 않았다. 이는 두 가지 위험 부담 때문이었는데, 공교롭게도 양 측이 각각 우려하던 위험 부담이 끝내 둘 다 터져 버리고 말았다.

먼저 클레망소는 다가오는 1920년 1월 17일의 대통령 선거에서 시리아에 대해 독립을 '양보'한 일로 책을 잡히지 않기를 원했으며, 그로 인해 협정을 비밀로 돌렸다. 그러나 뚜껑을 열어보니, 클레망소는 정권을 잃었다고 표현하기도 민망할 정도로, 고작 6.10%를 득표하며 선거에서 처참하게 참패했다. 다음날 클레망소는 수상 자리에서 사임했고, 이로써 협정의 당사자 중 한 사람은 아예 정계에서 사라져 버렸다.

다음으로, 파이살은 1920년 1월 14일 시리아로 돌아와 1월 16일 의회에서 직접 의원들을 설득하려 애썼다.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에게 민감할 수 있는 내용인 만큼, 그 의견이 모두 일치하지는 않더라도 다수가 지지한다고 여겨진 자신이 직접 협정을 설명함으로써 반발을 누그러뜨리려는 의도에서였다. 그러나 의원들은 프랑스의 군대 주둔을 용인하고 독립한 시리아에 프랑스의 간섭의 여지를 남기는 협정의 내용에 전혀 찬성할 생각이 없었으며, 파이살이 최후의 수단으로 협정이 합의되지 못하면 프랑스와 전쟁을 벌여야 할 것이라고 주장하자 의원들은 아예 프랑스뿐만 아니라 영국과도 전쟁을 감수하겠다며 나섰다. 결국 1월 말 파이살-클레망소 협정은 시리아 의회에서 부결되었고, 상황은 오히려 대대적인 규탄 운동이 일어나 파이살을 매국노로 비난하는 지경으로까지 악화되었으며, 아랍인과 프랑스군, 이슬람교도와 기독교도 사이에 충돌이 발생했다.

결국 파이살은 급히 방향을 바꾸어, 프랑스에 맞서 시리아의 독립을 이끌어내겠다는 구호를 내세우며 민심을 수습하려 했다. 속내는 그러면서 프랑스와 협정을 맺자는 소수파를 규합할 때까지 시간을 벌자는 것이었지만, 이로써 자신들의 앞을 가로막는 견해가 사라진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은 전 시리아 의회를 다시 소집할 것을 요구했으며, 2월 27일에는 다마스쿠스에서 팔레스타인의 유지와 대표들이 여기에 합류해 팔레스타인 회의(Palestine Conference)를 열어 시온주의자들의 요구를 거부하고 팔레스타인이 시리아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3월 7일, 마침내 다마스쿠스에서 제 2차 전 시리아 의회가 열렸고, 의회는 파이살을 군주로 하는 입헌군주제 왕국을 세워, 레바논과 팔레스타인을 포함한 '자연적' 경계 내의 시리아가 완전히 독립함을 선언했다. 같은 날 이라크에서도 알 아흐드의 주도로 압둘라를 왕으로 모시는 이라크 왕국의 건국을 선포했다. 다음 날 압둘라는 이라크의 왕위에 오르기를 거부한 반면, 파이살은 대관식을 치르고 시리아 아랍 왕국(The Arab Kingdom of Syria)의 왕위에 올랐고, 시리아 헌법 기초위원을 임명했다. 이들은 이후 10주 동안 헌법을 제정하는 절차에 나섰다.

파이살의 이 행보에 프랑스는 3월 15일 독립 선포를 인정할 수 없다고 하면서 통교를 끊었고, 3월 22일에는 마론파를 중심으로 한 레바논의 기독교도들이 시리아 아랍 왕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선포했다. 한편 영국 또한 팔레스타인과 메소포타미아에 대해 다마스쿠스는 발언권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대외적으로는 프랑스를 질책하는 모양새를 취해 책임론을 프랑스의 몫으로 돌리는 한편 파이살에 대해서도 채널을 완전히 끊지는 않고 경고의 메시지를 전했다. 그러나 이미 파이살은 시리아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가속이 붙은 달리는 열차에서 내릴 수 없는 상황에 놓였으며, 그 스스로도 얼마만큼은 그들에 동조하며 프랑스를 몰아낼 방법을 궁리했다.

파이살에게 다행이었던 점은, 이 무렵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가 이끄는 튀르키예 독립 전쟁군이 마침 프랑스를 상대로 선전을 하고 있었다는 것이었다. 1920년 1월 하순부터 2월 중순에 걸친 마라쉬(Marash, 현재의 카흐라만마라쉬)에서의 전투에서 튀르키예군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뒀고, 튀르키예군이 잔혹하기까지 한 학살로 프랑스군과 아르메니아인들을 몰아내면서 시리아와 인접한 현재의 튀르키예 남쪽 국경 인근에서 활동 영역을 넓혀 시리아 방면으로의 길이 뚫려 있었던 틈을 타 시리아 아랍 왕국은 이들과 연합을 꾀하며 밀사를 교환했다. 또한 앞서 언급한 시리아 북부 해안의 살레 알-알리 등 알라위파 봉기군 또한 기본적으로 시리아 아랍 왕국에 우호적 태도를 보이며 프랑스에 대한 유격전을 벌였으며, 파이살은 이들 또한 지원하고 나섰다. 나아가 1920년 4월에는 알레포 서쪽의 해안 지대에서 이브라힘 하나누(Ibrahim Hananu)가 이끄는 반란이 일어나, 튀르키예 독립 전쟁군과 손을 잡고 프랑스군의 후방을 괴롭혔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 하심 왕가의 세력에게 늘 이어져 오던 문제이기도 했던, 아랍의 군사적 지도자로서 현지 기반이 약해 정작 자국군의 위력이 빈약하다는 문제는 여전히 잠재해 있었고, 시리아 아랍 왕국 스스로 나선 별다른 교전 또한 없었다. 이는 급박하게 숨을 고르던 프랑스에게 시간을 벌어주었으며, 결과적으로 이는 시리아 아랍 왕국이 반격에 몰리는 원인이 된다.

7.12. 산레모 협정(1920. 4.)과 시리아 아랍 왕국의 멸망(1920. 7.)

이처럼 아랍의 상황이 급박하게 돌아가자, 영국과 프랑스는 아랍 지역에 대한 사전의 계획을 빨리 실행 단계로 옮겨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1920년 2월부터 오스만 제국의 분할을 위해 이미 진행되고 있던 런던 회의(London Conference)[210]는 빠르게 합의 단계에 이르러, 4월 18일 이탈리아의 산레모(San Lemo)에서 연합국 최고 회의(Supreme Council)가 소집되었고 4월 24일 합의안이 도출되었으며, 이는 5월 5일 공표되었다. 이를 산레모 협정(San Lemo Agreement)이라고 한다.

이 협의에서 우선 제2차 전 시리아 의회의 결정으로 인한 시리아 아랍 왕국의 성립이 부인되었으며, 시리아와 레바논에서는 프랑스가, 팔레스타인과 이라크에서는 영국이 위임통치령을 세우기로 합의되었다. 다만 영국의 위임통치에 위배되지 않는 선에서, 팔레스타인의 가톨릭 교도에 대한 보호권을 프랑스가 갖기로 했다. 시리아와 이라크 사이의 국경선은 알레포-모술-바그다드의 철도선을 따라 획정되었다. 또한 모술은 영국에게 넘기도록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조정하되, 모술의 튀르크 석유 회사 총 생산량의 25%에 대한 처분권을 프랑스가 갖기로 했으며 페르시아 만과 지중해를 경유하는 송유관이 프랑스로 이어지도록 했다. 특히 석유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산레모 석유 협정(San Lemo Oil Agreement)이 맺어져 실질적인 방안을 논의했다.

그러나 강대국 사이에 협정이 맺어진 것과, 현지에서 이를 받아들이는 것은 다른 문제였다. 팔레스타인에서는 이미 모세를 기리는 나비 무사(Nebi Musa)에서의 축제를 위해 모인 아랍인들이 4월 4일부터 6일에 걸쳐 유대인들을 공격하고 수백 명의 사상자가 발생하는 사건이 벌어졌고, 이를 진압하려는 영국군의 행동은 시온주의자들에게는 미온적인 수습에 그치는 것으로, 아랍인들에게는 불평등한 탄압으로 비추어졌다.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 성립한 이후 7월 1일에는 이 지역의 고등판무관으로 유대인 허버트 새뮤얼(Herbert Samuel)이 임명되면서 아랍인들의 불만은 더욱 고조되었다.

시리아에 비해서는 비교적 저항이 덜했던 이라크에서도, 5월에 이르러서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지고 영국군 장교들은 납치, 암살당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는 6월에 들어서 대대적인 봉기로 발전했다. 이미 민족 감정이 고양되고 알 아흐드 등이 반영 운동을 펼치던 와중에, 오스만 제국 치하에서는 느슨한 간접 통치로 다스려지던 이라크 지역에 영국이 과세를 강행하려 하자 반영 여론이 들불처럼 번졌다. 6월 말부터 이라크 각지에서 벌어진 반영 봉기는 남쪽에서부터 북쪽으로 거침없이 확산되어, 7월에는 영국이 13만 명의 병력을 투입해야 하는 대규모의 사건이 되었다. 그럼에도 7월 말에는 오히려 봉기군이 유프라테스 중류 유역 대부분을 장악하며 봉기가 극성기에 이르렀다. 아랍인들과는 이해 관계가 달랐던 아시리아인들과 쿠르드인들이 비교적 소극적인 정도가 영국에게 위안거리였다.

시리아에서도 하심 알-아타시(Hasim al-Atasi)를 중심으로 뭉친 시리아 의회는 7월 초 헌법 초안을 만장일치로 통과시키며 독립 의지를 다독였으며, 아예 프랑스에 선전포고를 하라며 파이살을 압박했다. 그러나 그런 희망찬 전망은 얼마지 않아 깨어졌다. 프랑스는 5월 20일부터 튀르키예군과 20일 동안의 일시 휴전을 맺으며 숨을 고르고, 5월 27일 레바논 고등판무관이던 앙리 구로 장군을 통해 전쟁을 준비하도록 했다. 그러나 7월 초에는 레바논 마론파들조차 돌아서 시리아와의 협력을 결의하는 상황에 이르자, 프랑스는 아프리카 방면에서 9만 명의 병력을 레바논으로 옮겨 왔으며, 프랑스 혁명 기념일인 7월 14일 마침내 파이살에게 최후통첩을 보내 7월 17일 자정까지 프랑스의 위임통치를 수용하고 시리아 아랍 왕국의 군대를 해체하며 반프랑스 인사들을 구속시키라고 요구했다.

파이살은 이에 긴급히 전력을 점검했으나, 소유한 탄약이 2시간 분에 불과하다는 보고에 결국 긴급 각료 회의를 열어 최후통첩을 수용하고 왕국군을 해체하는 결정을 내렸다. 그러나 시간은 이미 7월 18일 오전 2시 남짓이 되어 최후통첩의 시한을 넘었고, 어떤 이유에서인지 7월 21일 전까지 프랑스 측에 전달되지도 못했다. 이 결과 7월 21일 프랑스군은 시리아를 향해 진군했다. 시리아 측은 단순히 위기에 몰린 것뿐만 아니라, 7월 20일 반프랑스 세력이 항복을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마스쿠스에서 봉기하여 도리어 무력으로 이들을 진압해야만 했고, 아랍군의 해산을 거부하며 전쟁장관(Minister of War) 유수프 알-아즈마(Yusuf al-Azma) 등이 유혈사태를 막으려던 파이살의 해산 명령을 듣지 않고 끝내 저항에 나서는 등 지도력 자체가 혼란스러운 상황이었다. 프랑스군은 진군하던 도중인 7월 22일 다시 한 번 협상을 걸어 와 더 엄격한 조건을 수용하기를 요구했으나 7월 23일 그 협상조차 엎어버렸고, 그 날 시리아 의회는 의회대로 최후통첩의 수용을 거부했으며, 유수프 알-아즈마가 이끄는 아랍군은 이미 출정에 나섰다. 결국 7월 24일, 마이살룬(Maysalun)에서 양국의 군대가 맞붙었다.

승부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다름 없었다. 프랑스군은 항공기와 전차, 기관총과 포병 등이 잘 갖추어진 최신식의 부대였고, 마이살룬 전장에 나선 1만 2000명의 군대만으로도 수적으로도 몇 배에 달하는 압도적 우위를 차지했다. 반면 아랍군의 무장은 민병대 수준에 그쳤으며, 이미 해산 명령이 내려진 상황에서 겨우 다시 수습된 군대인지라 사기와 규율 또한 내세울 상황이 못 되었다. 결국 하루가 되지 않는 동안에 프랑스군은 아랍군을 참패시켰고, 유수프 알-아즈마는 전사했다. 26일 다마스쿠스를 프랑스군이 점령했고, 27일 파이살에게 다마스쿠스를 떠나도록 강요했으며, 28일 파이살은 다마스쿠스에서 탈출해 지역 유지들과 손 잡으며 재기를 시도했으나 프랑스의 추적에 8월 1일 결국 영국령 하이파로 떠났다. 8월 8일 앙리 구로가 다마스쿠스에 입성했고, 시리아의 총독으로 취임했다.

이로써 아랍 민족주의의 가장 중요한 구심점 중 하나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북서부 해안에서 항전하던 살레 알-알리의 알라위파 봉기군 또한 1920년 11월 이후 프랑스군의 본격적인 대항 작전 끝에 무력화되어 1922년 살레 알-알리가 프랑스에 투항했으며, 1921년 10월의 앙카라 협정으로 프랑스와 튀르키예 사이의 전쟁이 끝난 이후 이브라힘 하나누의 봉기군 또한 힘을 잃어 1922년 하나누가 프랑스 당국에 체포되었다. 이를 비롯한 반프랑스 봉기를 진압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시리아와 레바논은 완전히 프랑스의 통치 아래에 떨어졌다. 다만 위임통치가 국제 사회의 승인을 받는 것은 연합군과 튀르키예와의 전쟁이 로잔 조약에 의해 공식적으로 마무리된 1923년보다도 늦어 1924년에서야 공인을 받았고, 4개 주(州)로 나뉘어 군정 아래 놓였던 (북부) 시리아에서 1922년 시리아 연합(Syrian Federation)을 거쳐 1924년 시리아국(The State of Syria)이 성립한 직후인 1925~1927년 동안에도 시리아 대반란(Great Syrian Revolt)이 발생하는 등, 시리아를 장악하는 과정에서 프랑스가 보인 각종의 폭압적인 행태로 인해 프랑스에 대한 아랍인들의 반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7.13. 트란스요르단 토후국(1921. 4.)과 이라크 왕국의 성립(1921. 8.)

한편 시리아 아랍 왕국이 무너지고서도 8월 중순 무렵까지 이라크에서 일어난 아랍 봉기의 기세는 꺾이지 않았으나, 8월 하순부터 점차 영국군이 승리하는 지역이 늘어나며 10월에는 봉기가 진압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승전하는 것과 질서를 회복하는 것은 별개였으며,[211] 영국은 4000만 파운드의 재정을 소모했고, 수천 명에 달하는 인원이 죽임을 당한 이라크 일대의 반영 감정도 꺾이지 않았다.

이에 대해 영국은 10월 1일 페르시아 대사인 퍼시 콕스(Percy Cox)를 메소포타미아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군정이라는 이름에서 나오는 불만을 해소하려 시도했고, 그는 11월 11일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여겨지는 수니파의 종교 지도자 나키브 알-아쉬라프(Naqib al-Ashraf)인 사이드 아브드 알-라흐만 알-가일라니(Sayyed Abd Al-Rahman Al-Gailani)를 수상으로 임명해 임시 국무 회의를 구성했다. 영국은 이라크 일대의 유력한 가문들에 이 국무 회의의 장관직을 배분하여 모양새를 갖추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영국인 고문을 부서마다 두어 이들을 통제했다. 그럼에도 정부가 행정력을 회복하는 것은 1921년 2월이나 되어서였고, 퍼시 콕스가 선거법 개정과 함께 정식으로 국민 의회를 소집할 것을 주창한 것과 달리 국민 의회의 구성을 위한 절차는 1922년까지 시작되지 않았으며, 1924년까지는 실제로 선거가 치러져 소집되지도 않았다.

그렇더라도 1920년 10월부터 제 나름대로의 방향성을 잡아가는가 싶던 영국에게, 예상치 못한 변수가 또 하나 떠올랐다. 반란이 한창일 때 파이살을 따르는 아랍인들을 하심 왕가가 이끌어 다시 프랑스에 맞서려 할 것이라는 소문이 이미 돌았던 차에, 11월이 되자 파이살의 시리아 아랍 왕국이 무너졌다는 소식을 들은 헤자즈 왕국의 압둘라가 군대를 이끌고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 바로 남쪽의 마안까지 북상해, 시리아와 레바논을 수복하겠다고 천명한 것이었다.

사실 헤자즈 왕국과 압둘라의 군대란 25명의 장교와 250명의 육군으로 구성되어 현지 아랍인들의 합류를 이끌어낸다는 것으로, 실질적인 활동을 기대하기는 어려운 것이었다. 그럼에도 영국이 두려워한 것은, 이들을 빌미로 프랑스군이 영국의 위임통치령에 개입할 권리를 주장하며 들이닥칠 가능성이었다. 이 무렵 적백내전과 튀르키예 독립전쟁, 아일랜드 독립 전쟁에서도 연달아 죽을 쑤었음이 분명해진 영국은 더 이상 전쟁과 군사 활동에 재정을 소모하는 데 노이로제가 날 지경이었고, 그렇다고 세력권을 잃고 싶지도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이 문제에 대해 덤비는 무모한 한 정치인이 나타났다. 바로 윈스턴 처칠이었다.

1920년에 전쟁부 장관이었던 그는 이 무렵 자유당보수당, 주전론과 주화론, 강경책과 유화책 사이에서 옮겨가기를 전혀 서슴치 않는 정계의 괴짜였다. 그는 1920년 12월 31일 본국의 식민부장관(Secretary of State for the Colonies) 아래 중동 부서(Middle East Division)가 두어지고 이전의 식민부장관이 퇴임하자, 그는 총리의 제의를 받고 잠시 망설인 끝에 그 직임을 수락했다. 그러고서는 이듬해 2월 그의 임기가 시작하기도 전에 중동 업무에 목소리를 떨치기 시작했다. 이라크의 아랍 봉기에 대해 강경 무력 진압을 내세운 그가 정작 협상이 가장 필요했던 이 시점에 아랍에 온 것도 아이러니였고, 그의 중동 정책에 보좌관 역할을 맡은 인물 중 하나는 아랍인들에게 유화적이며 되도록 토착 정부 성립을 선호하는 토머스 에드워드 로렌스였는데, 로렌스는 그러면서도 영국의 중동 정책에 지속적으로 비판을 가하고 처칠은 로렌스를 공직 생활에 맞지 않는 인물이라고 질책하는 기묘한 동거가 이어졌다.

처칠이 내놓은 정책도 당황스러운 것이었다. 메소포타미아에서 아랍인의 봉기를 막는 것이 더 이상 재정에 구멍이 나는 것을 막는 데 주효할 것이니, 항공기와 전차를 배치하면 봉기를 일으킬 엄두도 내지 못할 것이고 육군 주둔 병력을 줄일 수 있으므로 재정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많은 붕 뜬 말들 중에서 영국의 직접적인 재정 부담을 줄여야 한다는 방향성만은 주효했고, 그 점에서 후세인 가의 인물과 협상해 그들에게 통치를 맡김으로써 아랍의 지도력을 다시금 회복하자는 로렌스 등의 방향이 의외로 맞아떨어졌다. 그 목적을 위해, 1921년 3월 12일부터 22일까지 이른바 카이로 회의(Cairo Conference)가 열렸다.

이 목적을 위해 영국은 아랍 민족주의자들의 지지를 받던 파이살에게 이라크 왕위를 주어 아랍인들의 반발을 완화시키고, 명목상 요양차 암만에 이르렀다는(하지만 모두가 아랍 병력을 모으는 것을 의심했던) 압둘라에게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동부를 분할해 그곳의 군주 자리를 맡기는 대신 프랑스에 대한 공격을 포기하도록 설득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그 밖에 쿠르드인들은 잠정적으로 메소포타미아 위임통치령에 잔류시키고, 이븐 사우드에 대한 지원금을 10만 파운드로 늘린다는 등의 방침이 최종적으로 결의되었다.

파이살에 대한 결정은 이미 영국 본국에 의해 내려진 것을 전달한 것으로서 런던에 망명해 있던 파이살에게도 귀띔되었고, 압둘라에 대한 결정은 카이로를 떠나 3월 24일 팔레스타인에 도착한 윈스턴 처칠에 의해 암만에 머물던 압둘라에게 전달되었다. 압둘라는 예루살렘에서 처칠 등을 만나 팔레스타인 전체에 대한 권리를 주장했으나 이는 거부되었다. 영국 측은 요르단 강 동쪽만을 그의 몫으로 내어주는 대신 요르단 강 동쪽에 대해서는 팔레스타인과 동일한 정책이 적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했고, 요르단 강 서쪽의 팔레스타인에서도 유대인들의 이민을 억제하고 '유대인 정부'를 세우지 않을 것이라는 설득 끝에 결국 4월 1일 압둘라는 6개월의 시험 기간 동안 요르단 강 건너편, '트란스요르단'의 아미르가 되고 월 5000파운드의 지원을 받는 안에 합의했다.

1921년 4월 11일, 압둘라는 트란스요르단에 도착해 아미르 자리에 오르고(압둘라 1세),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 건국되었다. 그는 이곳에서 힘을 모아 언젠가 대(大)시리아를 회복하려는 이른바 '대(大)시리아 계획'을 품에 안고, 1921년 10월 약정한 6개월의 기간이 만료되었음에도 여전히 트란스요르단의 아미르로 자리했다. 한편 처칠과 압둘라의 협의에 의해 1921년 3월 25일 요르단 강 동쪽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에 대해서는 위임통치 법령의 적용을 보류하거나 제외할 수 있다는 조항이 삽입되었고, 이를 최종적으로 조정한 1922년 9월 16일의 트란스요르단 각서(Transjordan Memorandum)가 국제연맹에서도 승인되면서 명목상으로는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의 관할 아래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통치권이 양분된 형태의 관계가 정리되었다.

한편 영국의 제의를 수락하고 파이살은 런던으로부터 길을 떠나, 1921년 6월 24일 바스라에 도착했다. 그 사이 영국은 파이살의 즉위에 반대하는 공화파와 공산주의자 등의 반영 민족주의 운동가들을 제거하고 여론전을 펼쳐 파이살의 즉위에 우호적인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7월 11일 이라크 국무 회의는 파이살의 즉위를 만장일치로 승인했고, 7월 16일 그 비준을 위한 국민투표에서 파이살의 즉위는 96%의 지지를 얻었다. 마침내 8월 23일, 파이살이 왕위에 오르면서(파이살 1세) 이라크 왕국이 탄생했다.

그러나 파이살 1세는 위임통치를 거부하고 이라크의 독립을 요구하며, 즉위 이후 영국과 대립했다. 1922년 10월 10일 가까스로 체결된 영국-이라크 조약은 명목상 위임통치라는 문구를 뺐으나 향후 20년 동안 군사권과 외교권 등 주요한 권리는 모두 영국이 틀어쥐고 있었으며 정치, 경제 분야의 상당 부분에서 영국이 간섭하는 것을 용인하는 내용이었다. 파이살 1세는 일단 이 조약을 받아들였으나, 6개월 뒤 이라크의 저항에 의해 그 기한은 4년으로 축소되었고, 그나마도 국민 의회가 1924년까지 소집되지 않아 비준 절차를 거치지 못했다. 그러나 영국은 막대한 양의 석유로 대표되는 이라크의 경제권을 잃기를 원치 않았고, 이라크에는 독립을 원하는 쿠르드인의 봉기[212]와 남쪽에서 호시탐탐 북상을 노리는 네지드 술탄국으로부터 자국을 방어해 줄 힘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결국 1924년 이라크 왕국에서 국민 의회가 소집되어 영국-이라크 조약을 승인함으로써 4년 동안의 사실상의 위임통치가 성립하였고, 1926년 1월 국제 사회의 승인을 얻었다. 4년의 기한이 지나 1928년 조약이 만료된 이후에도 국제연맹에서 이라크의 독립을 승인하지 않을 것이라는 우려에 이라크는 영국의 통치 아래 잔류하며 2년 동안 기묘한 눈치싸움을 벌인 끝에, 1930년 영국-이라크 조약으로 2년간 위임통치를 연장하되 그 위임통치가 끝나는 대로 독립하는 합의를 이끌어냈다. 이로써 파이살 1세의 생이 다하기 1년 전인 1932년, 이라크는 영국의 위임통치에서 벗어나 독립한 이라크 왕국으로 국제 사회에 나섰다.

정작 이 틈바구니에서 가장 취약한 지위에 놓인 것은 요르단 강 서쪽의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었다. 트란스요르단 토후국과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이 사실상 분리되면서 요르단 강 서쪽은 유대인 식민이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고 아랍 지도자가 통치하는 요르단 강 동쪽 지역과 분리되었다. 처칠은 팔레스타인에 돈을 낭비하는 것이 싫다면서도 시온주의자들에게 공감을 표하며 '유대인 국가'로의 발전 가능성을 논하곤 했고, 또 아랍인들과의 협상에 나서 그들을 설득한다는 형식으로 정책의 정당성을 주장하면서도 스스로가 밸푸어 선언의 정당성을 논하며 화를 돋운 아랍인들의 반박에는 귀를 막고 입을 닫곤 했다. 이런 상황에서 1921년 5월의 야파 소요와 같은 유대인과 아랍인 사이의 충돌 사건이 벌어지기 시작했고, 그럴 때마다 영국의 대응은 양 측 모두에게서 불만을 샀다. 1922년 7월 24일 국제연맹에서 팔레스타인 위임통치령을 승인하면서 국제 사회의 인정은 받았고 일시적으로 통치가 안정되는 것으로 보였으나, 그 속내는 갈수록 곪아갔고 1929년 아랍 봉기와 1936년~1939년 팔레스타인 아랍 대봉기 등의 갈등은 갈수록 심해져 1947~1948년의 두 민족의 대대적 충돌과 이스라엘의 건국, 제1차 중동전쟁으로 이어지게 된다.

결과적으로 일대의 상황을 되짚어 보면, 로렌스와 같은 인물이 아랍의 입장을 나름대로 대변했다고는 하나 이 또한 영국인으로서의 입장에 의해 여과된 것으로, 다마스쿠스 의정서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그려졌던 '아랍 통일 국가'는 산산히 부서졌다. 로렌스가 주장하고 처칠을 설득해 완성된 이른바 '샤리프 해결책'의 공간에 정작 샤리프 후세인은 배제되었는데, 여전히 아랍 통일 국가의 이상을 꿈꾸던 그는 영국에게 이용 가치도 없고 도저히 설득할 수도 없는 인물로 여겨져 버려졌기 때문이었다. 그가 있어야 할 자리는 영국이 그의 아들들에게 몫을 떼어주는 식으로 정리되어, 결과적으로 영국이 식민지배에서 줄곧 원해 왔던 분할통치 계획에 걸맞은 형태의 성취가 남았다. 게다가 지도를 다시 펴 놓고 보면, 영국은 프랑스의 세력권으로 계획되었던 이라크 북부와 국제 지구로 계획되었던 팔레스타인을 위임통치령으로 챙겨가고 프랑스는 튀르키예 전선에서 발을 빼는 대신 시리아 내륙까지 위임통치령을 넓혔다는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그 결과물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을 정면으로 배반하는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분할안과 크게 다른 것이 없는 상태가 되었다. 이제 남은 단계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 역사 속으로 스러지는 것뿐이었다.

7.14. 제2차 헤자즈-네지드 전쟁과 헤자즈 왕국의 멸망(1925. 12.)

시리아와 이라크의 민족주의자들이 새롭게 재편되는 아랍 세계의 흐름에 휩쓸리고 영국은 어떻게 하면 손을 덜까를 고민하던 그때도 멈추지 않고 분주히 움직이던 세력이 있었으니, 바로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을 정복하고 술탄을 자칭한 이븐 사우드가 이끄는 네지드 술탄국이었다. 그는 멈추지 않고 계속해서 북쪽으로 발을 뻗어 나갔다.

트란스요르단과 이라크, 헤자즈 왕국과 네지드 술탄국 사이에는 알 자우프라는 지역이 위치해 있었다. 이 지역에서는 1909년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을 밀어낸 나와프 빈 누리 알 샤알란(Nawwaf bin Nuri al Sha'alan)이 아미르로 자리하고 있었고, 사카카(Sakaka)와 현재의 쿠라야트(Qurayyat)인 카프(Kaf)에 궁성을 지었다. 나와프는 1919년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에 밀려났고, 1921년 자말 샴마르 아미르국이 멸망하자 천연두에 걸려 사망한 나와프 빈 샤알란의 아들 술탄 빈 나와프(Sultan bin Nawaaf al Sha'alan)가 그곳을 차지했으나, 1922년 7월 이븐 사우드는 사카카에 군대를 보내 그에게서 투항을 받아내고, 알 자우프를 접수했다.

그런데 1922년 9월 트란스요르단에서 군대를 보내 카프를 일시 점령했고, 이에 질세라 네지드 술탄국의 이흐완 부대가 1923년까지 트란스요르단 남쪽과 접하는 시르한 계곡(Wadi Sirhan)을 장악해 나갔다. 이로써 두 나라가 국경을 맞대게 되자, 이흐완 부대가 1922년 8월과 1924년 8월 트란스요르단을 약탈하는 상황이 발생했다. 1922년 11월 우콰이르 의정서로 쿠웨이트 그리고 이라크와의 국경 분쟁이 마무리되자, 오히려 네지드 술탄국의 이흐완 부대는 풍선이 눌린 듯 트란스요르단 방면으로 몰아쳤다. 결국 영국은 아예 공군 폭격을 동원해 네지드 술탄국의 침공을 저지하며 강한 경고를 보냈다.

이 때문에 네지드 술탄국은 트란스요르단 방면으로 북상하는 것을 멈춰야 했지만, 그런 군사 활동을 마치고 보니 네지드 술탄국에는 또 다시 가치 있는 먹잇감이 놓여 있었다. 이제 알 자우프 방면으로도 국경이 노출된, 후세인 빈 알리의 헤자즈 왕국이었다. 게다가 그는 여전히 현실보다 이상에 무게를 둔 채, 이븐 사우드가 서쪽으로 군대를 돌릴 만한 명분을 던져주고 말았다.

1924년, 오스만 제국은 이미 2년 전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에게 정권을 잃고 튀르키예로 재편된 상태였다. 오스만 제국의 술탄-칼리프제는 마지막 술탄인 메흐메트 6세가 쫓겨나면서 마감되었고, 칼리프직만이 압뒬메지트 2세에게 이어져 잔존했다. 그러나 새로운 튀르키예의 기조는 명백한 세속주의 정책이었고, 마침내 1924년 3월 3일 칼리프직의 폐지가 결정되었으며 압뒬메지트 2세 또한 추방당했다.

오스만 제국은 물론 이슬람 세계의 유일한 제국은 아니었지만, 오스만 제국의 칼리프의 지위는 범이슬람주의의 중심으로서 여전히 정치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튀르키예 정부의 성립이라는 변화 속에 칼리프직이 풍전등화의 상황에 놓이자, 전혀 다른 이슬람 제국인 무굴 제국의 권역이었던 인도의 이슬람교도들이 칼리프직을 수호해야 한다고 영국에 요구하는 킬라파트 운동(Khilfat Movement)을 벌이기까지 했을 정도였다. 이제 그 직위가 세계에서 사라져 버렸다는 사실은 이슬람교 세계 전체에 동요를 불러 일으키는 것이었는데, 후세인 빈 알리는 이를 도리어 기회로 삼았다. 이스탄불의 칼리프가 사라진 이 달, 그를 대신해 메카와 메디나에서 군림하는 자신이 칼리프에 오르기로 한 것이었다.

후세인 빈 알리는 이탈리아로 망명했던 메흐메트 6세로부터 칼리프직을 승계함을 지지하는 언사를 전해 받았고, 같은 해 메카에서 이슬람 의회를 열어 수니파와 시아파를 가리지 않고 지지를 끌어모으려 애썼다. 그러나 반응은 극과 극이었다. 분명히 무슬림들 사이에 새로운 칼리프의 등극을 환영하는 사람들도 다수 있기는 했지만, 그들 또한 통일된 이슬람교 세계라는 이상에 근거해 칼리프직의 존속을 지지한 것일 뿐 직접적으로 헤자즈를 지원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영국으로부터 지원이 끊겨 재정적으로 빈곤해진 헤자즈 왕국은 일대의 지방 세력에게 더 이상 하사금을 내리지 못해 그들의 지지를 잃은 상태였고, 이슬람교 신학계에서는 자칭을 제외한 어떤 절차도 거치지 않은 후세인의 칼리프 등극을 환영할 일이 아닌 교리와 충돌하는 문제로 바라보기도 했다. 당연히 이븐 사우드 또한 그의 선언을 신성모독으로 간주하며 강하게 비판했고, 곧바로 그에 대한 공격을 준비해 나갔다.

그 해 8월, 네지드 술탄국 사람들의 성지순례가 거부당한 사건을 계기로 네지드 술탄국은 헤자즈 왕국을 향해 진격했다. 8월 29일 메카로 들어가는 관문 도시인 타이프는 큰 군사적 저항 없이 함락되었고, 후세인은 급히 지원을 요청했으나 영국의 램지 맥도널드 내각은 두 이슬람 국가 사이의 종교적인 문제에 관여할 수 없다며 이를 냉랭한 태도로 거부했다. 칼리프국으로서 후세인의 왕국을 인정하겠다던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에 대해 마지막까지 배반한 영국의 태도를 보여주는 동시에, 이미 싸늘해진 헤자즈 왕국과 영국 사이의 관계를 여실히 드러내는 사건이었다. 트란스요르단의 압둘라마저도 그에게 직접적인 군사 지원을 할 수 없다며 물러나자, 결국 10월 3일 후세인 빈 알리는 아들인 알리 빈 후세인에게 양위하고 10월 6일 제다를 거쳐 아카바로 달아났다.

알리 빈 후세인 또한 메카를 지킬 수 없다고 판단해 제다로 옮겨가면서 메카는 10월 13일 저항 없이 함락되었으며, 12월 5일 이븐 사우드가 메카에 입성했다. 와하브파에 대한 반감이 심했던 메디나와 얀부, 제다에서는 1년 가량의 저항이 더 이어졌으나, 1925년 1월부터 10개월 가량의 봉쇄가 이어졌고 그 사이 아카바의 저택에 머물던 후세인 빈 알리 또한 이븐 사우드가 영국을 압박한 결과 그 해 6월 17일 키프로스를 향해 강요된 망명길에 올랐다. 마침내 1925년 12월 메디나와 얀부가 함락되었고, 영국의 중재 끝에 같은 달 알리 빈 후세인이 망명하고 1926년 1월 8일 제다에서 네지드 술탄국 군대의 입성 의례가 치러지면서 헤자즈 왕국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다만 트란스요르단에서 남하해 헤자즈 왕국의 마안 및 그 인근 일부 지역과 병력 일부를 거두었을 뿐이었다.

이슬람교의 양대 성지를 확보한다는 거대한 성과를 얻은 네지드 술탄국의 이븐 사우드는 제다로의 입성 의례가 치러지던 그 날, 1926년 1월 8일 헤자즈 왕국의 왕위를 겸했고, 1927년에 헤자즈-네지드 왕국이라는 체제가 정식으로 출범했다. 한편 앞서 국경에서 분쟁을 벌인 트란스요르단과의 문제도 1925년의 하다 조약(Treaty of Hadda)과 1927년 제다 조약(Treaty of Jeddah)으로 헤자즈 왕국을 점령할 때 확보한 아카바 시역 대부분을 확보하는 등 일정한 성과를 거두면서 대략 해결되었다. 아울러 제다 조약에서 영국의 보호령이었던 헤자즈-네지드 왕국은 정식으로 독립했으며,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로 이름을 고쳐 오늘날에 이르고 있다.

사라진 헤자즈 왕국의 옛 왕 후세인 빈 알리는 키프로스에서 머무는 동안, 이곳의 아르메니아인들로부터 도움을 받아 그가 아르메니아인들을 도왔던 일의 보답을 받았다. 그러다가 1930년 신병이 심각해지고 아들들이 그의 마지막을 함께 하기를 요청함에 따라, 트란스요르단의 암만으로 옮겨간 뒤 1931년 끝내 꿈을 이루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 알리 빈 후세인은 이라크로 망명해 1935년 사망할 때까지 왕가의 일원으로서 대우를 받았고, 그의 아들인 압둘 알-일라는 5촌 조카인 이라크 3대 왕 파이살 2세의 섭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1958년 쿠데타로 이라크 왕국이 무너지면서 하심 왕가의 인물들은 참혹하게 살해당해 왕실이 자리를 잃었으며, 그 결과 하심 왕가의 정통성을 잇고 있는 것은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 1946년 영국에서 독립하면서 왕국으로 격을 높인 이후 1949년 이름을 고친 요르단 하심 왕국뿐이다.

8. 결과

프랑스의 군홧발 아래 (북부) 시리아가 짓밟히고 영국의 조정에 따라 분할된 위임통치령이 성립하며 헤자즈 왕국이 네지드 술탄국에게 무릎을 꿇음에 따라, 다마스쿠스 의정서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논의되었던 '아랍 통일 국가'의 꿈은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카타르아랍에미리트, 예멘오만 등 아라비아 반도 서부와 남부의 국가들을 제외하면, 아랍 지역의 국가들은 결국 사이크스-피코 밀약을 뿌리로 삼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한 경계선을 기초로 하여 나뉜 채로 통합되지 못하고 있으며 그 사이 이해 관계와 입장이 크게 갈려 지금은 다시 통합을 논하는 것조차 현실성을 잃은 논의가 되었다. 앞서 언급했듯, 결과만 놓고 보면 이는 일반적으로 식민지를 구성할 때 영국이 원하던 분할통치의 아주 모범적인 사례로 보일 정도이다.

결국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이 실행되지 못한 데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요인들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애초에 논의 주체인 영국과 후세인 가 모두, '대(大)시리아와 이라크, 아라비아 반도를 포괄하는 아랍 통일 국가'라는 거대한 구상을 감당할 만한 실력을 갖고 있지 못했다. 반란 초기 메카와 메디나를 장악하는 데서부터 난항을 겪었던 후세인 가는 물론이고, 영국조차도 아예 프랑스에게 넘어간 시리아 해안 지대와 네지드 술탄국 등 또 다른 현지 통치자들을 독립시키거나 그들의 자치에 맡긴 지역을 제외한 영역만으로도 인력과 재정 소모를 감당할 수 없어 제1차 세계 대전의 종전 이후에는 곡소리를 쏟아냈다.
  • 아랍 민족주의적 구상에도 불구하고, 아랍 지역 전체의 동의를 기반으로 출발한 것이 아니었다. 이로 인해 후세인 가의 권위가 절대적이지 못했다는 요소는 봉기 초기 아랍인들의 미온적인 반응, 대(大)시리아 지역에서 파이살로 대표된 헤자즈 왕국 계통 인사의 활동이 유지되기 위한 지속적인 선전전의 필요성, 전 시리아 의회의 소집 이후 파이살이 끝내 더 직접적이고 격한 반응을 보인 시리아 민족주의 세력을 통제하지 못하는 결과 등을 낳았다.
    물론 몇 차례 언급했듯 누구보다도 네지드 왕국 계통의 세력은 오히려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다른 측면을 묘사하는 데 자주 쓰이는 '이중계약'이라는 상황을 오히려 가장 제대로 당한 당사자나 다름 없었고, 이 사안에 절대 동의할 수 없었다. 결국 마지막 숨통을 끊는 것에 불과했다고 해도, 후세인 빈 알리를 압도해 파멸에 몰아넣은 것도 아랍 국가인 그들이었다.
  • 영국은 약속의 당사자이면서도 실행 단계에서 먼저 논의를 마친 아랍보다 분명히 후순위였어야 했을 프랑스의 이권을 먼저 고려했고, 또 그러면서도 프랑스와 완전한 신뢰 관계를 구축하지 못해 중요한 골목에서 갑작스러운 결정을 내리기 일쑤였다. 이것이 제국의 입장에서라도 현실적인 것이었다기에는, 이 논의의 장에 갑작스럽게 이상주의의 끝까지 가 있던 시온주의자라는 변수를 끌어들여 상황을 난장판으로 만든 것도 영국이었다. 지금까지도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의 약속을 저버렸다고 하여 가장 큰 문제가 되고 있는 팔레스타인 문제 또한, 결국 이 두 문제에서 출발한다.
    게다가 영국은 그렇게 변수를 늘려 상황을 복잡하게 만들어 놓고서도 상황이 파행으로 치닫지 않는 이상 손에 쥔 모든 떡을 놓지 않겠다는 태도를 보였는데, 그로 인해 극단에 이르러서야 선택을 해야 할 때 영국은 타협과 양보가 아닌 숱한 기만과 배반을 택했다. 결국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과 관련된 다자들에게 각각의 약점이 없지는 않음에도, 가장 큰 비난을 받고 있는 것이 영국인 이유가 바로 그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로 인해 양산된 영국의 기만을 목록화하는 것만으로도, 이 문제가 얼마나 심각했는지는 분명해진다.
    • 서신의 내용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이크스-피코 밀약 그 자체.
    • 서신의 자의적 해석을 통한 아랍 독립 지역에서의 팔레스타인 배제. 이는 애초에 서신이 쓰일 때부터 추후에 예기치 못한 일이 발생할 경우 그 내용의 '불확실한' 점을 이용하고자 의도된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런 해석을 도출한 문서에서조차 해석과 관련된 핵심적 문제인 '산자크'와 '빌라예트'의 차이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해 혼동한 흔적이 있는 등, 영국의 입장은 엉망진창으로 정리되었다.
    • 사이크스-피코 협정에서조차 '국제 지구'로 예정되었던 팔레스타인의 영국 위임통치령으로의 예정되지 않은 전환. 이는 본래 드 분센 위원회에서 그러했듯 영국에게는 오히려 선호했던 선택지가 아니었으며, 유사 시 프랑스를 막기 위해 군사적으로 점령할 필요가 있을 때만 골라야 할 것이라고 한 선택지를 고른 셈이 되었다. 이는 이후 밸푸어 선언에 영합하기 위한, 더 나아가 밸푸어 선언조차 자의적으로 해석하기 위한 목적 이외의 것으로 해석하기 힘들다.
    • 밸푸어 선언은 흔히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 충돌하는 것으로 가장 잘 알려져 있으며 그 내용이 아랍인들에게 자극적인 것이었음은 분명하지만, 반대파에 의해 선언 내에 두어진 안전 장치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고, 이에 대한 타협적 해석이 나올 여지가 없었던 것도 아니었으며, 실제로도 그런 시도가 없었던 것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영국은 지속적으로 시온주의자들에게 유리한 해석을 도출해 냈으며, 아랍 측의 의견을 그 해석에서 배제하려 시도했고 충분한 성과를 얻었다.
    • 호가스 메시지에서 영국은 갑작스럽게 팔레스타인에 대해 국제적 이해 관계를 고려해 '특별한 정권'을 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언급되었다고 보기 힘든 것이었던 반면, 사이크스-피코 밀약에서는 충분히 단서를 찾을 수 있는 것이었다.
    • 바셋 서신에서 사이크스-피코 밀약은 오스만 제국이 두 나라를 이간질하기 위해 뿌린 거짓 정보라고 주장했고, 영국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을 보장할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첫 번째는 명백한 거짓이었고 두 번째도 결과적으로 완전히 거짓이 되었다.
    • 영국은 아랍 지역에서 생명과 자치적인 발전을 위한 기회가 보장되어야 함을 주장한 우드로 윌슨의 14개조 평화 원칙에 동의했으나, 결과적으로 영국의 위임통치령은 대량의 사상자와 영국의 이권 탈취로 얼룩진 채 성립했다.
    • 7대인에 대한 선언에서 영국은 대(大)시리아 지역에서 성립할 정부가 피치자들의 동의에 의해 성립하여야 하며 영국은 이를 지원한다고 주장하였으나, 대(大)시리아 가운데 이미 프랑스에 넘기기로 한 지역이 있었던 점은 차치하더라도 이후 국제연맹 규약 22조를 통해 영국이 합의한 내용은 피치자의 동의를 얻는 절차 자체가 빠져 있는 것이었다.
    • 영국-프랑스 공동 선언에서 말하는 '토착적 정부와 행정 기구의 설립'은 '독립'이라는 단어가 빠져 있는 점에서부터 기만의 수단이 될 수 있도록 구멍을 뚫어 놓았음을 제외하더라도, 공식적인 발표 이전부터 시리아에 대한 자의적 해석을 본격적으로 이 문제에 적용하기 시작해 팔레스타인과 레바논을 시리아에서 배제하려 시도하였다.
    • 오스만 제국과의 휴전 이후에 자국의 경제적 이권을 위해 모술을 점령한 것은 오스만 제국이나 아랍뿐만 아니라, 프랑스까지 배반했다고 볼 여지가 있는 돌발 행동이었다.
    • 파리 강화 회의에서 시온주의자와의 합의라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리면서까지 자국의 독립을 주장한 파이살의 노력은 강대국의 위임통치령의 성립이라는 결론으로 귀결된 파리 강화 회의의 내용에 합의한 영국에 의해 배반당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파이살은 이미 이런 상황을 어느 정도 예상했는지, 아랍인들이 자신이 제시한 조건으로 독립하지 못할 경우 파이살-바이츠만 협정은 무효화된다는 조항까지 미리 삽입해 버렸다.
    • 시리아에 대해 연합국 공동 조사위원단을 파견하는 미국의 제안은 영국과 프랑스 모두의 동의를 얻었으나, 결국 영국과 프랑스 모두 위원단 구성을 거부하여 위원단은 미국의 위원만이 배정된 채로 파견되었다.
    • 네지드-하사 토후국의 군사 활동을 억제하려는 노력이 사후에 급급하게 미봉책을 동원하는 수준에 그친 것이나, 후에 예멘 왕국을 별도로 독립시킨 행보 등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언급한 '아랍 통일 국가'의 계획과 기본적으로 어긋나는 태도였다.
    • 시리아 아랍 왕국은 영국 정부가 여러 차례에 걸쳐 강조한, 시리아에서의 아랍인의 의사에 의한 정부 체제의 수립의 사례였음에도 영국은 공식적으로 왕국의 건국을 부정했으며, 그나마 그 책임조차 프랑스의 몫으로 돌리려 애썼다.
    • 이라크에서의 아랍 봉기 역시 피치자의 의사 표출로 보아야 할 사건이었으나 독립을 허용하기는커녕 사망자만 수천 명을 내며 학살에 가까운 행태로 응했으며, 팔레스타인에서도 아랍인의 의사를 수렴하는 적절한 절차 없이 소요를 진압하는 행보를 보여 아랍인과 유대인 모두에게 불신을 샀다. 덧붙여, 쿠르디스탄에 대해서도 자치 내지 독립을 보장할 것이라고 했다가 입장을 순식간에 철회해 아랍인과의 민족 갈등을 더 심화시켰다.
    • 파리 강화 회의 및 산 레모 협정에서 결의된 위임통치령 자체가 헤자즈 왕국과 시리아·이라크를 분리시킨 것으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언급된 '아랍 통일 국가'와 어긋나며, 실행 단계에서 팔레스타인과 이라크, 더 나아가 팔레스타인과 트란스요르단을 분리시킨 것 또한 이를 오히려 심화시킨 것이었다. 그 주체가 후세인이 아닌 후세인의 아들들인 것 또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 충돌하는 것이었다.
    • 결국 '아랍 통일 국가'의 중심이 될 수 있도록 할 것이라고 설득했던 헤자즈 왕국은 영국의 외면 속에 비참하게 멸망했다. 끝내 멸망의 원인이 된 칼리프 자칭 또한 본래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서 영국이 공인하여 주기로 했던 것이었으나 영국은 이 문제를 아랍 국가 사이에서 알아서 처리할 종교적인 일이라고 치부해 그를 지원하지 않았다.

    가히 현란하다고 할 수 있다(...).
    억지로나마 원인을 찾자는 측면에서 접근하자면, 특히 영국의 의사 결정 주체가 굉장히 복잡했다는 점이 한 요인이 되었다. 영국 본국의 각 부서와 아랍국 등 카이로의 영국 관료들(및 이후의 점령지 관료들), 아랍 지역 및 이슬람교도와 또 다른 이해 관계를 갖고 있던 인도 제국과 연결고리가 있던 관료들, 영국의 시온주의자들이 각각의 의견으로 이 문제에 접근한 데다가, 알 파루키와 같은 현지 협력자는 되레 문제를 더 과장시켜 이성적인 의사 결정이 나올 수 없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로 인해 쏟아지는 의견들이 복잡하게 뒤섞이는 과정에서 공식적인 영국의 입장끼리도 서로 꼬여버리는 상황은 어찌 보면 차라리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중요한 것은 그러한 혼란이 도출될 수 있는 상황보다 책임의 문제다.
  • 시온주의자들은 영국의 의사 결정에 합류하여 특히 기만으로 인한 문제를 심화시켰다. 아랍인들이 인구의 70% 이상, 80%에 겨우 못 미치는 수준에 이르러 있는 팔레스타인에 유대 국가를 건국하자는 이상은 당대 영국뿐만 아니라 시온주의자가 아닌 유대인, 더 나아가서는 심지어 시온주의자인 유대인 중에서도 반대하는 사람이 나올 정도로 현실적인 것이 아니었다. 그런 극단적 담론을 현실에 끼워넣을 수 있는 방법은 결국 그 이상을 숨기고 아랍인들을 기만하는 것뿐이었으며, 그로 인해 아랍인들은 날이 갈수록 인구의 10% 남짓한 유대인들이 말을 바꾸면서 더 큰 이권을 요구하고 영국은 그들을 소수자랍시고 등 뒤에서 감싸주는 황당한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 인해 유대인들에게 품은 깊은 원한은,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이 지역에서의 갈등에 대해 가장 굵직한 한 줄기의 뿌리가 되었다.
  • 프랑스는 사실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당사자가 아니므로 이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책임을 피할 여지가 있다. 그러나 그들의 대(大)시리아에 대한 개입 자체가 실질적으로 수행한 것에 비해 숟가락 얹기나 다름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의 자세는 이곳에 이해 관계가 얽힌 여러 주체들 중에서도 가장 고압적이었고, 도덕성을 논하지 않고 제국주의의 주체라는 입장에서라도 동반자였어야 했을 영국과의 관계에서조차 자국의 배를 충분히 불려줄 사이크스-피코 밀약과 로이드 조지-클레망소 협정에서 합의된 사항까지 엎어버리려 시도하는, 욕심이라는 단어 이외에는 이해할 수 없는 행보를 보였다. 하물며 영국과 프랑스 모두 뱉은 말을 되삼키는 우스꽝스러운 행보를 보인 킹-크레인 조사위원단에 대해서조차, 영국은 최소한의 협조는 보인 반면 프랑스는 그러지 못해 불만이 제출되고 있음이 보고서에서 확인된다. 그로 인해 당대에 아랍인들이 가장 이를 악물고 저항했던 대상은 영국보다도 프랑스였으며, 그들이 마지막에 보여준 것은 9만 명의 군사로 아랍의 독립 시도를 무참히 밟아버리는 모습이었다.
  • 후세인 가에게 책임을 묻거나 과실을 따진다는 것은 사실 식민주의 내지 제국주의에 동조한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는 일일 것이다. 다만 그들에게 실제로 아랍 지역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 특히 군사력이 부족하다는 점은 크나큰 약점이었음이 분명하다. 이로 인해 아랍 진영은 영국이 몇 차례나 그들을 기만하고 프랑스가 그들을 강압으로 몰아붙여도 영국과 프랑스에 제대로 저항하지 못한 채, 이전의 안을 포기하고 새로운 판을 짤 수밖에 없도록 선택지가 좁아진 상태였다. 물론 사건이 처음 전개될 때 독립조차 하지 못한 상태였던 이들에게 강력하고 조직화된 군사력을 요구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겠으나, 결국 같은 아랍 국가로 범위를 좁혀 볼 때도 아라비아 반도의 패권을 쥔 네지드 술탄국 등에 비해서 그들이 가장 큰 약점을 노출한 부분이 이 지점이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또한, 후세인과 파이살로 대표되는 후세인의 아들들 사이에 방향이 크게 갈린 것 또한 상황에 예상치 못한 변수를 낳았다. 파이살이 파리 강화 회의에서 보였던 행보나, 위임통치 아래 압둘라와 파이살이 즉위한 상황 등은 후세인의 의도와는 분명히 빗나가는 것이었다. 후세인은 집요하게 아랍 통일 국가를 주장했던 반면, 그의 아들들은 그보다는 느슨한 형태의 타협안을 결국 수용했다. 일관적인 지향 가치와 현실에 대한 유연한 타협 모두 하나를 포기할 수 있는 가치는 아니겠으나, 양자 간의 협의가 이루어지지 않은 채 내려지는 결정이 빈발했음은 분명히 문제였다. 결국 영국은 후세인과는 소통의 문을 닫은 채 그를 고립시켜 버렸고, 그의 아들들은 연이은 기만과 배반으로 휘둘러 그들을 분열시키는 데 성공했다.

사실상 이 교환 서신에 의한 문제 해결 절차가 끝나버린 시점에도, 아랍 측에서는 이 교환 서신에 대한 영국의 해석을 반박하고 교환 서신에서 보장되었어야 했을 아랍 영역의 정당성을 입증하기 위해 애썼다. 이미 1921년 야파 소요에 대한 분석으로서 제출된 이른바 처칠 백서에서 위임통치의 정당성을 주장한 데 대해, 팔레스타인의 아랍 지식인들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에 대한 영국의 해석에 강한 비판을 내놓았으나 이는 묵살되었다. 이후 1936년~1939년 팔레스타인 대봉기으로 아랍 지역의 반영·반유대 감정이 고양되고 제2차 세계 대전의 어귀에서 아랍인들을 회유할 필요가 있었던 1939년 열린 영국-아랍 위원회에서 영국은 그 동안 일반에 공개되지 않았던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영문본을 제공하는 등 일견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아랍인들이 영국 측의 해석에 반박하는 정돈된 논리를 내놓았음에도 서신 내용에 대해서 완전한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이후 아랍 연맹아랍 연합 공화국을 비롯해 범아랍주의적인 통합 운동이 벌어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통합 운동은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논의에서 벗어나 있던, 그렇지만 특히 가말 압델 나세르나세르주의가 국제 사회를 뒤흔든 이후 아랍권의 또 다른 맹주로 부상한 이집트의 주도력이 강해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과는 일정하게 궤를 달리 한다.

9. 관련 문서



[1] 맥마흔 라인도 이 양반 작품이다.[2] 후술하겠지만 후세인 빈 알리가 맨 처음 카이로 관료들에게 전달한 서신은 동방 장관(Oriental Secretary)이었던 로날드 스토어스(Ronald Storrs)에게 보낸 것이었으나 그 업무를 맥마흔이 처리한 것이다. 그렇지만 그 첫 번째 서신이 이후 진행되는 논의의 가장 기초적인 것이었으므로 10편에서 이 서신을 따로 빼지는 않는다.[3] 현재의 국가 시리아보다 더 넓은 범주를 가리키는 말로, 엄밀히 정의된 바는 없으나 대체로 현재의 시리아·레바논·요르단·이스라엘-팔레스타인·사우디아라비아 북서부 일부 등지를 포괄한다. 레반트(Levant)라는 표현과 거의 등치되고 그 남부 해안 지역만을 가리키는 일종의 부분집합으로 가나안 내지 (지리적 명칭으로서의) 팔레스타인(팔레스티나)를 설정할 수 있으며, 유럽을 중심으로 본 타자적 표현에다가 용법 자체가 정말 나이롱(...)이기는 하나 근동부분집합이라고도 볼 수 있다.[4] 이 해 그는 이후 아시르 토후국을 이루는 무함마드 이븐 알리 알-이드리시(Muhammad ibn Ali al-Idrisi)의 봉기를 진압하는 오스만 제국군에 지원군을 이끌고 직접 참여하지만, 이때의 활동에서 오스만 제국군이 헤자즈에 개입할 가능성을 엿보게 되고 오스만군 사령관과 대립하기도 했다.[5] 다만 오스만 제국 측이 정말 완전히 무결하다고는 할 수 없는 사건으로 반영-친독적이던 이스마일 엔베르가 내각을 설득하는 데 실패하자 독단적으로 독일과 내통하여 벌인 일이었다.[6] 그가 해임된 자리에는 중앙 정계에서 헤자지 부족(Hejazi Clan)을 대표하는 나키브 알-아쉬라프(Naqib al-Ashraf)와 상원의회 부의장 등의 직임을 맡은 알리 하이다르 파샤(Ali Haidar Pasha)가 임명될 계획이 세워졌다. 이후 후세인 빈 알리가 1916년 6월 10일 반란을 일으키자, 그는 1916년 7월 2일 메카의 아미르로 임명되지만 실질적으로는 그 역할을 하지 못한 채로 1919년 오스만 제국에서 그 직임이 폐지될 때까지 자리를 유지했다.[7] Jamiat/Jamyat/Jama'at al-Arabiya al-Fatat. '아랍 청년회'/'청년 아랍당(Young Arab Party)'으로 번역된다. 1906년 프랑스 파리에서 결성된 청년 튀르크당을 모방하여 1911년 마찬가지로 파리에서 결성되었으며, 1913년 파리에서 아랍 회의(Arab Congress)를 개최하였다. 이후 1913년 본부를 베이루트로, 1914년 다시 본부를 다마스쿠스로 옮겼다. 후술하듯 아랍 독립 전쟁이 마무리된 1918년 12월 당규를 다시 정리하고 1919년 2월 아랍 독립당(Hizb al-Istikla al-Arabi)으로 재편된다.[8] Jamiat/Jamyat/Jama'at al-Ahd. 1913년 오스만 제국의 이라크 방면 아랍 군인들에 의해 결성된 단체로, '아랍당(Arab Party)', '규약회(Covenant Party)'라고도 한다.[9] 이를 적발한 것은 아이러니하게도 대아랍 봉기의 원인이 된 제1차 세계대전으로 오스만 제국을 몰아넣은 이스마일 엔베르였다.[10] 현재의 지즈레.[11] Schneer, J. (2010) The Balfour Declaration: The Origins of the Arab-Israeli Conflict. New York: Random House, p. 91: 이곳에서 재인용. 동쪽 카자르 왕조의 국경선에는 실제와 비교할 때 정확히는 약간 더 들고 난 부분이 있어 차이가 있다.[12] 빌라예트(vilayet)는 아랍어로 '주(州)', '지역', '지방' 등에 비교적 모호하게 대응되던 '윌라야(wilaya(t/h))'라는 단어를 튀르크어로 차용한 것으로, 1867년 지방 제도를 개혁할 때 최상위 광역 행정 구역의 이름으로서 고유명사로 쓰이게 되었다.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주(州)'로 옮겨진다.[13] 현재의 튀르키예 이스켄데룬.[14] 이에 대해 문장상으로 직접적으로 연결되지 않지만, 조금 뒤에 '영국의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권'이라고 하여 이후 구체적으로 서술되는 문제에 대한 단초가 제시된다.[15] 일반적으로 앞서 언급한 주(州)에 대응되는 오스만 제국의 행정 구역을 의미하지만, 아랍어 원어인 '윌라야(wilaya(t/h))'는 '주(州)', '지역', '지방' 등에 비교적 모호하게 대응되기도 한다. 이 단어의 다의성에 대한 해석의 문제는 이후 중요한 쟁점이 된다.[GA주414-1]VII장에서 논한 것과 같이, 1914년에 키치너 경이 아랍인들에게 접근한 건을 통해 볼 때.(i.e., in view of the overtures made to the Arabs by Lord Kitchener in 1914, as related in Chapter VII.)[GA주415-1] 곧 오스만 제국 안의 외국인들이 재정적·사법적 특권들을 향유할 수 있도록 한 오래도록 유지된 협약(convention).(i.e., the long-established Conventions by which foreigners in the Ottoman Empire enjoyed financial and juridical privileges.)[GA주415-2] 카이로의 영국 관료와 메카의 아미르 압둘라 사이의 비밀스러운 소통 내용을 전달한 전령. 앞의 VII장의 3절을 보라.(The messenger who had carried the secret communications between the British Agency in Cairo and the Amir 'Abdullah in Mecca. See Chapter VII, Section 3, supra.)[AAC주1] 날짜와 서명이 없으나 1333년 라마단 2일(1915년 7월 14일)자로 샤리프가 스토어스 씨에게 보낸 개인적 서신에 동봉되어 있었다.(Undated and unsigned, but enclosed in an unsigned personal letter dated 2nd Ramadan, 1333(14th July, 1915), from the Sherif to Mr. Storrs.)

(AAC주1에 덧붙임 : 본래 AAC주1은 서신의 제목으로 쓰인 'Translation of a letter from the Sherif of Mecca to Sir Henry McMahon, His Majesty's High Commissioner at Cairo'의 뒤에 붙어 있으나, 체제상 제목을 생략하였으므로 내용을 고려해 적절한 곳으로 옮김.)
[AAC주2] 이전의 독법 : "아메디 섬(자지라)."(Former Reading: "Amedia Island(Jezirah).")

(AAC주2에 덧붙임 :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 원문에서는 일부 각주를 '(2) Jezirat (Ibn ‘Umar), (2)'와 같은 형태로 표시하여 그 대상을 명확히 하였다. 여기서는 그와 다른 글의 체제와 가시성을 고려하여 그 대상이 되는 문구를 빨간 글씨로 표시하여 둔다.)
[IO1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알리 에펜디.(Ali Effendi.)'를 '알리 에프. ❊(Ali Eff. ❊)'라고만 썼는데 의미가 있는지는 불명이다. 2번째 서신에서는 '알리 에펜디'라는 이름이 온전히 그대로 쓰여 있다.[22] 'سينا'는 시나이를 의미하는 단어이며, 아랍 측에 의한 문헌 변조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자리에는 '메르신(مرسين)'이 들어가는 것이 옳다.[GA주414-1] [GA주415-1] [GA주415-2] [AAC주1] [AAC주2] [28] Capitulation. 오스만 제국과 서구 국가들 사이에 맺어진 조약에서 보장된 권한으로, 오스만 제국에 대한 서구 국가의 자국민 보호권,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보장하는 상업 혜택, 영사재판권치외법권 등을 포괄한다. 《아랍의 각성》에서의 번역에서 직접적으로 'Capitulation'이라는 단어를 써 그 의미가 더 명확하다.[IO1본-1] [AAC주3] 이전의 독법: "경계, 변경과 국경."(Former reading: "Limits, frontiers and boundaries.")[IO2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이 아래 '(분명히 1915년 8월 30일자일 것임.)((Apparently dated 30th August 1915.))'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어, 원문에는 날짜 표기가 없는 듯하다. 이 날짜는 후술하는 후세인의 맥마흔에 대한 2번째 서신(전체 3번째 서신)의 '1333년 샤왈 19일'로부터 환산한 것으로 보인다.[AAC주3] [IO2본-1] [IO3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그러므로 …(Therefore)"로부터 "깨달았던 것이오."/"… British Empire."로 끝나는 이 문장을 본문에 기록한 이후,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이고 있다.

(위 문장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 :
"그리고 그러므로 그들은 이제 그들의 논의에서 신뢰를 둘 첫 장소로 보고, 또 최종적인 호소의 축으로 믿을 곳을 찾았소. 그것이 눈부신 대영제국이었던 것이오."
((Literal translation of the above passage) :
“And therefore they saw the discussion in it first the place of their confidence and trust the axis of final appeal now and that is the Illustrious British Empire.”)
[AAC주4] 이 문구에 대해 다음 번역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요구한 경계와 국경은 전쟁의 종결을 기다릴 수 있는 한 개인에 의한 것이 아니며, 그들이 지금 신뢰와 믿음을 갖고 있으며 그들의 가장 궁극적인 호소 대상으로 여기는 세력, 다시 말해 대영제국을 이 점에 대해 논의할 최선의 대상이라고 결의한 우리 민족에 의한 것이오.”(It has been suggested that a better translation of this passage would be: “As the limits and boundaries demanded are not those of one individual whose claim might well await the conclusion of the war, but are those of our people who have decided to discuss this point in the first resort with the Power in which they now have their confidence and trust and whom they regard as their ultimate appeal, namely, the Illustrious British Empire.”)[IO3본-2]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이 목적과 신뢰에 대한 …"/"Their reason …"로부터 "없도록 하려는 것이오."/"… which God forbid."로 끝나는 이 문장을 본문에 기록한 이후, 다음과 같은 글을 덧붙이고 있다.

(위 문장의 문자 그대로의 번역은 다음과 같다) :
"그곳 주민들의 결의 앞에서 일이, 신께서 금하시는, 대영제국과 그 동맹 국가들과 대립하는 결과로 나아갔을 때 그 나라들을 마주하게 되면 어떻게 그들의 미래와 삶의 기초를 세워야 할지에 대해, 그들의 감정은 알려는 것이오."
((Literal translation of the above passage as follows) :
“The feelings of its inhabitants to know how to base their future and life for not to meet her or one of its Allies in front of their resolution when the thing comes to a contrary result, which God forbid.”)
[AAC주5] 이 문구에 대해 다음 번역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이 목적과 신뢰에 대한 그들의 이유는 이익의 호혜성, 영토 획정의 필요성과 그것을 통해 그들의 미래의 삶을 기초할 방법을 알게 되고 그들의 소망이 대영제국이나 그 동맹 국가들과 신께서 반대하시는 것과 같이 반대 입장에 서거나 충돌하는 상황을 피하려 하는 이 목적과 신뢰에 관련된 주민의 소망이오.”(It has been suggested that a better translation of this passage would be: “Their reason for this aim and confidence is the reciprocity of interests, the necessity of regulating territorial divisions and the wishes of the population concerned, so that they may know how to base their future life and avoid finding Great Britain or any of her allies in opposition to or in conflict with their wishes, which God forbid!”)[AAC주6] 이 문구에 대해 다음 번역이 더 나을 것이라는 의견이 제시되었다. “그러므로 우리의 목표는, 아아, 존경하는 판무관(Minister)이시어, 화려하게 문식된 문구들과 명목들이 아닌 실제에 기초한 우리의 미래를 보증하기 위해 필요한 조건들을 보증하는 것이오. 칼리프국을 위하여, 신께서는 그들의 영혼에 대해 자비를 베푸시고 무슬림들이 앗긴 것에 대해 위안을 주실 것이오.”(It has been suggested that a better translation of this passage would be: “For our aim, O respected Minister, is to ensure that the conditions which are essential to our future shall be secured on a foundation of reality, and not on highly decorated phrases and titles. As for the Caliphate, God have mercy on its soul and comfort the Moslems for their loss.”)

(AAC주6에 덧붙임 : 조지 안토니우스의 해석을 그대로 빌려온 것이다.)
[39] 아랍어 위키문헌에서 제공하는 아랍어 원문에서는 영문판의 "어떤 경우에나 신의 의지만이 실행될 것이며, 모든 것의 실제 인자는 신이실 것이오.(In all cases it is only God’s will which shall be executed, and it is God who is the real factor in everything.)"부터의 내용이 없다. 그 대신 1916년 1월 1일 서신의 후반부 내용이 들어가 있으나, 이는 위키문헌에 수록된 글이 잘못된 것이다.[ISL10-19] 샤왈(Shawal)은 이슬람력의 10번째 달로, 이 날짜는 그레고리력의 1915년 8월 30일에 대응된다. 이 문구에 의해 맥마흔이 후세인에게 보낸 1번째 서신(전체 2번째 서신)의 날짜를 확정할 수 있다.[ISL10-19] [IO3본-1] [AAC주4] [IO3본-2] [AAC주5] [AAC주6] [47] 원문은 아랍어 'ﺻُﺮَّﺓ(surra)'로 추정되는데, 원어 그대로의 의미는 '자금(money)'보다는 '꾸러미', '포대' 등에 가깝다.[48] 'Mamur'. 'مأمور'인 듯. 관료, 장교, 종복 등 여러 뜻을 지닌 단어인데, 조지 안토니우스는 '관료(officer)'로 번역했다.[ISL10-29] 그레고리력으로 1915년 9월 9일에 대응된다.[GA주419-1] 아다나 빌라예트에 위치한 메르신 항, 그리고 알레포 빌라예트에 위치한 알렉산트레타 항.(The port of Mersin lay in the Vilayet of Adana, and the port of Alexandretta in the Vilayet of Aleppo.)[GA주419-2] 다마스쿠스가 그 주도(州都)인 시리아 빌라예트에 위치한 도시들인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알레포는 그 이름을 딴 빌라예트의 주도였다.(The cities of Damascus, Homs and Hama lay in the Vilayet of Syria, of which Damascus was the capital. Aleppo was the capital of the vilayet of that name.)[GA주420-1] 팔레스타인 왕립 위원회의 보고서(Cmd. 5479), 1937, 19쪽의 '행정적 통제를 위한 특별한 조치(special measures of administrative control)'가 아니다. 아랍어 문구는 타다비르 이다리야 카사(tadābir idariya khāssa)'이다.(And not 'special measures of administrative control', as in the version printed in the Report of the Palestine Royal Commission, Cmd. 5479, 1937, p. 19. The Arabic text is: tadābir idariya khāssa.)[GA주420-2] 해마다 카바의 덮개로서 이집트에서 메카로 보내지는 자수로 꾸민 천.(The embroidered pall which is annually sent to Mecca from Egypt to be used as a covering for the Ka'ba.)[IO4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날짜인 '29일(29th)'에 대해 '19일(29일?)(19th(? 29th))'이라고 하여 서신의 날짜 기록에 오류가 있는 듯이 기록하였고, 연도 기록이 없다.[AAC주7] 2번째 서신.(No. 2.)[AAC주8] 이전의 독법: "그러한 것들이 가장 적절히 논의될 수 있는 순간이 아직 오지 않았다고".(Former reading: "that the moment had not yet arrived when they could be most profitably discussed.")[IO4본-2] 영국-아랍 위원회 영문본은 '이전의 독법(Former reading)'에서나 교정본에서나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Damascus, Homs, Hama, and Aleppo)' 순서인 반면,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다마스쿠스, 하마, 홈스 그리고 알레포(Damascus, Hama, Homs, and Aleppo)' 순서로 홈스와 하마의 순서가 바뀌어 있다. 그러나 CAB 24/68/86 및 CAB 24/214 C.P.271에서도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순서로 되어 있어 영국 인도국 문서의 오기로 보인다.[AAC주9] 이전의 독법: “메르신과 알렉산트레타 구역, 그리고 다마스쿠스, 홈스, 하마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에 위치한 시리아의 일부는 순수한 아랍 지역이라고 할 수 없으며, 제안된 경계과 국경에서 제외되어야 합니다. 상기한 수정 사항을 포함해, 또 아랍 수장(chief)들과의 사이에서 이미 맺어진 조약들을 침해하지 않는다는 전제 하에, 우리는 이러한 경계와 국경을 받아들이며, 이 안에 존재하는 강역의 부분에 대해서는 대영제국이 동맹 국가인 프랑스의 이권을 훼손하지 않고 자유롭게 행동할 수 있기 때문에, 저는 당신에게 대영제국의 정부의 이름으로 아래에 대해 보증하고 당신의 서신에 대해 아래와 같이 답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받았습니다.
(1) 상기한 수정 사항을 조건으로, 대영제국은 메카의 샤리프가 제안한 경계와 국경 안에 포함된 모든 강역에서 아랍의 독립을 인정하고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Former reading: “The districts of Mersina and Alexandretta and the portions of Syria lying to the west of the districts of Damascus, Homs, Hama and Aleppo cannot be said to be purely Arab, and should be excluded from the proposed limits and boundaries. With the above modification, and without prejudice to our existing treaties with Arab chiefs, we accept these limits and boundaries, and, in regard to those portions of the territories therein in which Great Britain is free to act without detriment to the interests of her ally, France, I am empowered, in the name of the Government of Great Britain, to give you the following assurances and make the following reply to your letter:–
Subject to the above modifications, Great Britain is prepared to recognise and support the independence of the Arabs within the territories included in the limits and boundaries proposed by the Sherif of Mecca.”)
[AAC주10] 이전의 독법: "행정적 통제를 위한 특별한 조치".(Former reading: "special measures of administrative control.")[AAC주11] 이전의 독법: "그 전통적 친우".(Former reading: "her traditional friends.")[ISL10-29] [GA주419-1] [GA주419-2] [GA주420-1] [GA주420-2] [IO4본-1] [ISL10-29] [AAC주7] [AAC주8] [IO4본-2] [IO4본-3] [AAC주9] [AAC주10] [AAC주11] [GA주421-1] 샤리프가 사용한 단어는 ‘윌라야(wilayat)’이며, 메르신 빌라예트가 없고 메르신 항과 지역을 포함한 아다나 빌라예트가 있었던 점에서 그는 명백히 일반적인 '지역'의 감각으로 이를 사용하고 있다.(The word used by the Sharif is wilayat, and he is obviously using it in the general sense of 'district' since there was no Vilayet of Mersin but a vilayet of Adana in which were contained the port and district of Mersin.)[GA주422-1] 이때 영국군은 바스라 주(州)와 도시 바스라를 점령 중이었으며 크테시폰으로 진격하고 있었다. 이는 타운센드 장군이 쿠트로 퇴각하기 몇 주 전이었다.(At that time, British troops were in occupation of the town and province of Basra, and were advancing on Ctephison. This was a few weeks before General Townshend's retreat to Kut.)[IO5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는 본문이 시작하기 전에 '(문자 그대로의 해석.)((Literal translation.))'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AAC주12] 4번째 서신.(No. 4.)[IO5본-2]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두 '빌라예트들(two vilayets)'이라는 표현이 '주(州)들(the provinces)'로 쓰여 있다. 1918년 11월의 CAB 24/68/86과 1930년 7월의 CAB 24/214 C.P. 271에도 같은 표기법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30년 7월 무렵까지 쓰인 역본의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IO5본-3]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순수한 아랍의 빌라예트들(purely Arab vilayets)'이라는 표현이 '순수한 아랍의 주(州)들(purely Arab Provinces)'로 쓰여 있다. 1918년 11월의 CAB 24/68/86과 1930년 7월의 CAB 24/214 C.P. 271에도 같은 표기법이 쓰인 것으로 보아 적어도 1930년 7월 무렵까지 쓰인 역본의 표기인 것으로 보인다.[IO5본-4]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이라크의 빌라예트들(the Iraqi vilayets)'이라는 표현이 '이라크의 주(州)들'(the Provinces of Irak)'로 쓰여 있으며, 이는 CAB 24/68/86에서도 같다.[IO5본-5]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그곳의 도시들(their towns)'을 수식하여 (영문 어순상 뒤에/한국어 어순상 앞에) '그 주(州)들에 속한(in those provinces)'이라는 문구가 붙어 있으며, 이는 CAB 24/68/86에서도 같다.[IO5본-6]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그곳들(they)'이라는 표현이 '그 주(州)들(those provinces)'로 쓰여 있으며, 이는 CAB 24/68/86에서도 같다.[IO5본-7]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우리에게 수여하도록(give us)'이라는 표현이 '포기하도록(give up)'으로 쓰여 있다. 곧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에 따라 '고귀한 그곳을 놓고 그러한 명목(title)을 우리에게 수여하도록 그들을 복종시킬 수 없소이다(we cannot … make them submit to give us such a title to nobility)'라고 풀이된 문장은 '고귀한 그곳에 대한 그러한 명목(title)을 포기하도록 그들을 복종시킬 수 없소이다(we cannot … make them submit to give up such a title to nobility)'라고 하여 뜻이 꽤 달라지게 된다. 1918년 11월 CAB 24/68/86에서도 'give up'으로 표기했으며, 조지 안토니우스는 이 문장에 해당하는 부분을 '우리는 아랍 민족이 그러한 영예로운 유대감을 포기하도록 … (중략) … 강제하는 것이 불가능함을 알아야 하오.(we should find it impossible to … compel the Arab nation to renounce that honourable association)'라고 풀이했는데 'give us/up'을 'renounce'에 대응되는 표현으로 본다면 오히려 수정 이전의 영국 인도국 문서의 내용이 더 적절한 표현이며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에서 오자가 생기거나 잘못 풀이한 것으로 보인다.[AAC주13] 3번째 서신.(No. 3.)[IO5본-8]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고귀하신 판무관(께서)(exalted Minister,)'이라는 표현이 '아아, 고귀하신 판무관이시어!(O, Exalted Minister!)'라고 쓰여 있어, 영탄법의 느낌이 훨씬 강하다.[IO5본-9]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같은 서신의 서두에서 '둘힛자 15일자(dated 15th Zul Hijj)'라는 월 표기를 쓴 것과 달리 '1333년 알 힛자 27일자.(Dated 27 el Hijj 1333.)'라고 써서, 끝부분의 월 표기를 달리 했다.[ISL12-15] 둘힛자(Zil Hijja)는 이슬람력의 12번째 달로, 이 날짜는 그레고리력의 1915년 10월 24일에 대응된다.[GA주421-1] [GA주422-1] [ISL10-29] [IO5본-1] [ISL12-15] [AAC주12] [IO5본-2] [IO5본-3] [IO5본-4] [IO5본-5] [IO5본-6] [IO5본-7] [ISL10-29] [AAC주13] [IO5본-8] [IO5본-9] [ISL12-27] 그레고리력으로 1915년 11월 5일에 대응된다.[GA주423-1] 아랍어로 ‘윌라야(wilayat)’로 쓰인 이 단어는 헨리 맥마흔 경이 샤리프와 마찬가지로 일반적인 '지역'의 함의로 이를 쓰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421쪽의 각주를 보라.(The word used in the Arabic text is wilayat, which shows thet Sir Henry McMahon, like the Sharif, was using it in its general connotation of 'district'. See footnote p. 421.)

(GA주423-1에 덧붙임: 1915년 11월 5일 《아랍의 각성》본 영문판의 'districts'에 대한 주석 GA주421-1을 말함.)
[IO6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서신 첫 머리에 수신처가 나오지 않고 '카이로/공관(The Residency,/Cairo)'이라고 하여 발신처가 쓰여 있다. 이 발신처 표기는 6번째 서신과 8번째 서신에만 보인다.[AAC주14] 이전의 독법: "빌라예트들(Former reading: "vilayets.")[109] CA 24/214 C.P. 271에서는 '우마르 이븐 카타브(Omar Ibn Khattab)'를 '칼리프 우마르(Caliph Omar)'라고 썼다.[AAC주15] 이전의 독법에서는 이 단어들을 빠뜨렸다.(The former reading omitted these words.)[AAC주16] 이전의 독법에서는 이 단어들을 빠뜨렸다.(The former reading omitted these words.)[112] CAB 24/214 C.P. 271의 발췌본에서는 '이 주제에 대해(on the subject)'라는 어구가 빠져 있다.[ISL2-9] 후세인의 맥마흔에 대한 4번째 서신(전체 7번째 서신)에서 쓰인 '사파르(Safar) 9일'로부터 맥마흔의 후세인에 대한 3번째 서신(전체 6번째 서신)의 날짜를 추론하였는데, 우선 '사파르'는 이슬람력의 2번째 달이다. 이 날짜에 대응하는 그레고리력 날짜로 CAB 24/68/86과 조지 안토니우스는 12월 13일, CAB 24/214 C.P. 271 발췌본은 12월 18일, 영국 외무부 문서는 12월 17일,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에서는 12월 14일을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후세인의 맥마흔에 대한 4번째 서신(전체 7번째 서신) 끝의 '사파르 25일'을 1916년 1월 1일에 대응시키는 데는 언급한 문서 모두 이견이 없으므로, 그로부터 16일 전인 12월 16일로 보는 것이 옳다. 이 환산이 틀리려면 '사파르 9일'이라는 표기에 착오가 있어야 한다.[GA주423-1] [IO6본-1] [ISL2-9] [AAC주14] [AAC주15] [AAC주16] [GA주424-1] 헨리 맥마흔 경의 서신에서는 파루키를 언급하지 않았다. 그러나 샤리프는 그로부터 직접 말을 전해 듣고 메카와 카이로를 오가며 서신을 전달한 사절에게서 맥마흔으로부터 그에 대한 구두 전언(oral message) 또한 전달받았다.(Sir Henry McMahon's note made no mention of Faruqi. But the Sharif had heard from him direct, and had also had an oral message from McMahon concerning him, with the emissary who carried the notes between Mecca and Cairo.)

(GA주424-1에 덧붙임 : 실제로는 후세인이 맥마흔에게 구두 전언을 전달하였다.)
[121] CAB 24/214 C.P. 271 발췌본에는 이 자리에 'have'가 삽입되어 있다.[IO7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그대의 서신(your letter)'이라는 표현이 '그대의 서신 2편(your two letters)'이라고 되어 있고, 이어지는 문장에서 이 표현에 조응하는 '그 내용(its contents)', '그 서신(it)'이라는 표현이 '그것들의 내용(their contents)', '그 서신들(they)'로 쓰여 있다. 영국 인도국 문서철의 다른 문서들 가운데 이 날 후세인 측이 수신했다고 볼 수 있는 명확한 문서가 없기 때문에, 실제로 또 다른 서신이 동반되었는지는 알기 어렵다. CAB 24/214 C.P. 271 발췌본에서는 영국 인도국 문서와 같은 표현을 사용하는 반면, 조지 안토니우스의 번역에서 대응되는 부분은 단수인 '그대의 편지(your note)'로 되어 있어 비교 대조할 수 있는 자료 사이에도 이 문제에 대한 표현이 엇갈린다.[IO7본-1] [IO7본-1] [AAC주17] 이전의 독법: "간주".(Former reading: "presumption.")

(AAC주17에 덧붙임 : 단어의 경우 그 단어의 뒤에 주석을 위치시킨 다른 주석과 달리 'protection'의 앞에 두어져 있으나 영국 인도국 문서를 참고할 때 'protection'의 위치를 가리키는 것이 분명하다.)
[AAC주18] 이전의 독법: "대영제국 자신 아래의 모든 민족들을 (…) 마주하게".(Former reading: "see all her own peoples.")[AAC주19] 이전의 독법: "마음의 평화가 결여된".(Former reading: "no peace of mind.")[AAC주20] 이전의 독법: "사람들".(Former reading: "people.")[AAC주21] 이전의 독법: "고립".(Former reading: "isolations.")[AAC주22] 이전의 독법: "우리 이익 측면에서의 호혜성의".(Former reading: "in the reciprocity of our interests.")[ISL2-9] [GA주424-1] [ISL2-9] [IO7본-1] [IO7본-1] [IO7본-1] [AAC주17] [AAC주18] [AAC주18] [AAC주19] [AAC주20] [AAC주21] [AAC주22] [ISL2-25] 그레고리력의 1916년 1월 1일에 대응된다.[GA주427-1] 1915년 11월, 튀르크인들의 선동과 적극적 도움의 결과로 세누시의 수장은 이집트를 침공하고 그가 이집트의 영역에서 마지막으로 구축당한 이듬해 3월까지 지속되는 적대 관계를 개시했다. 세누시의 원정에 대한 간단한 요약을 살피려 한다면 XI장의 2절을 보라.(In November 1915, as a result of Turkish incitement and active help, the Sanusi Chief invaded Egypt and began hostilities which lasted until the following March when he was finally driven out of Egyptian territory. For a brief summary of the Sanusi campaign see Chapter XI, Section 2.)[IO8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서신 첫 머리에 '카이로/공관(The Residency,/Cairo)'이라고 하여 발신처가 쓰여 있다. 이 발신처 표기는 6번째 서신과 8번째 서신에만 보인다.[AAC주23] 7번째 서신.(No. 7.)[148] CAB 24/214 C.P. 271 발췌본에서는 'avoid' 대신 'not to do'로 썼다.[ISL2-25] [GA주427-1] [IO8본-1] [ISL3-25] 후세인의 맥마흔에 대한 5번째 서신(전체 9번째 서신)에 쓰인 '라비울라왈(Rabi El Awal) 25일'로부터 환산하여 맥마흔의 후세인에 대한 4번째 서신(전체 8번째 서신)의 날짜를 밝혔는데, 일단 '라비울라왈'은 이슬람력의 3번째 달이다. 그러나 1930년 CAB 24/214 C.P. 271 발췌본과 영국-아랍 위원회 교정본에서 환산한 것처럼 이 날짜를 1916년 1월 25일에 대응시킬 수는 없다. 한 달의 길이가 유동적이며 변수가 많은 이슬람력의 특성을 고려하더라도, 한 달은 최소 29일이므로 맥마흔의 후세인에 대한 4번째 서신(전체 8번째 서신)이 보내진 '사파르 25일'(1916년 1월 1일) 뒤에도 '사파르'의 달에 적어도 4일의 날짜가 더 있어야 한다. 또한 후세인의 맥마흔에 대한 5번째 서신(전체 9번째 서신)에서 이 날짜가 '사파르'의 다음 달인 '라비울라왈'의 25일째로 기록되었음을 고려하면, '사파르 25일'(1916년 1월 1일)로부터 '라비울라왈 25일'까지 적어도 29일의 날짜가 경과했어야 한다. 따라서 1월 25일로 날짜를 환산한 데는 타당성이 없으며, '라비울라왈'의 '25일'이라는 숫자에 이끌린 오류로 추정된다. 《아랍의 각성》에서는 1월 30일로 환산하여 이를 따랐고,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날짜를 그레고리력으로 환산하지 않았다.[ISL2-25] [AAC주23] [155] 리비아에 위치한 세누시 종단은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식민화 시도에 맞서 싸우고 있었으며, 1911~1912년 이탈리아-튀르크 전쟁에서 패전한 오스만 제국이 오스만령 트리폴리타니아를 포기하면서 내륙에서 고립된 채 이탈리아와 맞서고 있었다. 그러다가 1915년 5월 이탈리아가 삼국협상 측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 참전하자, 세누시 종단은 오스만 제국과 손잡아 마침 웬수들만 줄줄이 모여 있던(...) 삼국협상군에 전쟁을 선포하고 1915년 11월 영국령 이집트를 공격했다. 이 무렵의 상황을 말하는 것으로, 이후 영국은 1916년 3월 무렵까지 반격에 나서 그들의 세를 꺾는다.[IO9본-1] 영국 인도국 문서에는 'that is those of …' 사이에 'of'가 하나 더 삽입되어 'that is of those of …'로 되어 있는데, 연문(衍文)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IO9본-2]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다음과 같은 형태의 기호로 다르게 그려져 있다.
파일:hmcsecretsign.png
[IO9주-1] 영국 인도국 문서에서는 그레고리력 날짜('9th March')가 주석으로 처리되어 있다.[ISL3-25] [IO9본-2] [IO9주-1] [ISL5-5] 주마달울라(Jamad Awal)는 이슬람력의 5번째 달로, 이 날은 그레고리력의 1916년 3월 9일에 대응된다.[ISL4-14] '라비울아키르(Rabi al Akhar)'는 이슬람력의 4번째 달로, 이 날짜는 그레고리력의 1916년 2월 18일에 대응된다.[AAC주24] 9번째 서신.(No. 9.)[ISL4-14] [AAC주24] [167] 압둘라 빈 알리 알 라시드(Abdullah bin Ali Al Rashid)가 창건한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의 세력을 가리키는 듯. '이븐 라시드(ibn Rashid)'란 '라시드의 아들'이라는 의미인데, 당시 자발 샴마르 아미르국의 아미르이던 사우드 빈 압둘아지즈 알 라시드(Saud bin Abdulaziz Al Rashid, 재위 1908~1920)의 아버지인 압둘아지즈 빈 무타이브 알 라시드(Abdulaziz bin Mutaib Al Rashid, 재위 1897~1906)가 '이븐 라시드'로 알려져 있었듯 아랍어 인명의 '알(Al)' 개념이 '이븐(ibn)' 개념과 혼동되는 사례가 존재했다.[168] 에르주룸은 아르메니아 대학살으로 인한 지역 사회의 붕괴가 가장 심각했던 지역 중 하나였으며, 결국 혼란 속에 남하한 러시아 제국군에 의해 1달 남짓 공방전이 벌어진 끝에 1916년 2월 16일 최종적으로 함락되었다.[ISL5-6] 그레고리력의 1916년 3월 10일에 대응된다.[ISL9-2] 라마단(Ramadan)은 이슬람력의 9번째 달로, 이 날짜는 그레고리력의 1915년 7월 14일에 대응된다. 이 날짜는 후세인의 맥마흔에 대한 1번째 서신(전체 1번째 서신)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으나, 해당 서신이 압둘라의 로날드 스토어스에 대한 서신에서 '동봉된 편지(enclosed note)'로 기록되어 있어 같은 날 보내진 해당 서신의 작성 일자를 알 수 있다.[171] 이하의 내용이 실제 전보 전문이 아닌 '중요한 문구들(important passages)'을 발췌한 것임이 밝혀져 있다.[172] 엘리 케두리(Elie Kedourie)의 연구에서 인용한 자료임이 언급되어 있다. 엘리 케두리는 이 문제에 대해 비록 영국 측의 입장을 대변한 연구자라고 하여 비판을 받기도 하나, 영국 내부의 외교 문서들을 치밀하게 연구하여 많은 자료를 발굴하고 관련 연구에 기초적인 토양을 제공하여 주었음을 부정하기 어려운 연구자로도 알려져 있다.[173] 이후 1918년 예멘 왕국으로 이어지는, 자이드파의 이맘 야햐 무함마드 하미드 앗딘(Yahya Muhammad Hamid ed-Din)의 세력을 가리키는 듯.[174] 데르비시 운동(Dervish Movement)을 이끌며 데르비시국을 건국하는 데 이른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 하산(Muḥammad ibn 'Abdallāh Hassan), 일명 '광인 물라(Mad Mullah)'를 가리킨다. 1899년 이후 이들은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등의 열강과 에티오피아 등 지역 강국과 대립했으며, 1913년 8월 4일 둘 마도바(Dul Madoba) 전투에서 큰 손실을 감수하고 영국군에게 일정한 피해를 입혔다. 이에 대해 영국은 군대를 보내려 했으나 제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이는 미루어졌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인 1920년이 되어서 데르비시국을 멸망시켰다.[175] 앞서 언급한 맥마흔 라인이 그의 손에 의해 그어질 수 있었던 이유가 이것이었다.[176] 빌라예트·산자크(및 무타사리프령) 간 경계선 및 철도선은 기본적으로 위키미디어 공용의 'Ottoman levant.png'를 따랐다. 다만 예루살렘 무타사리프령의 권역은 1906년 이집트-오스만 국경 협정(Egyptian-Ottoman Border Agreement)에서 오스만 측 대표자 중 한 명으로 시리아 빌라예트 총독이 아닌 예루살렘 무타사리프(Governor)가 참여한 점을 고려하여(영문판, 한국어 번역) 그 권역을 홍해에 닿는 것으로 그린 지도(#)를 따랐다.
한편, 후술하듯 '다마스쿠스, 홈스, 하파 그리고 알레포 구역의 서쪽'의 기선은 애초부터 정확히 정해진 적이 없었다. 따라서 기본적으로 행정 구역 간 경계선 및 영국 점령 적지 행정구(OETA) 남구 경계선을 따라 그렸으되 경계가 정확하지 않을 것이고, 얼마든 이견이 제시될 수 있을 것이며, 이는 피할 수 없는 것임을 밝혀둔다. 또한 저작권 문제가 없으면서 양 측의 입장을 모두 보여주는 지도가 없어 불가피하게 제작한 것이므로 저작권 문제에서 자유로우면서 더 사실에 가까운 지도가 있다면 얼마든지 교체 바람.
[177] 단순히 그 성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영문으로도 'independent Sanjak'로 특수하게 번역된다. 다만 무타사리프령은 여전히 산자크로도 불렸다.[178] 크림 전쟁의 원인 중 하나인 '성지 관할권' 문제가 이와 관련되어 있다.[179] 조셉 메리 네이글 제프리스(Joseph Mary Nagle Jeffries)(1939), 《Palestine : The Reality》. 단 이 지도 또한 일정한 오류가 있는데, 웬만큼 배배 꼬아 해석하지 않는 한 다마스쿠스·하마·홈스·알레포라는 네 도시에 대해서는 영국이든 아랍이든 이견 자체가 없이 '순수한 아랍'의 땅으로서 아랍 독립 국가의 영역에 포함시키는 것으로 이해했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정말 웬만한 경우라면 최소한 이 네 도시로부터 분명히 서쪽에 위치한 어느 기선의 또 다시 서쪽 해안가 지역만이 논의의 대상이 된다.[180] 이 점을 들어 'McMahon-Hussein Correspondence'를 '후세인-맥마흔 서신 협상'으로 번역하여야 한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181] 한편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영문본은 이때서야 처음으로 공개되었다.[182] "Palestine (west of Jordan).... (a.) We are pledged to King Husein that this territory shall be "Arab" and "independent." #[183] "First there was the letter to King Hussein from Sir Henry McMahon of the 24th October 1915, in which we gave him the assurance that the Hedjaz, the red area which we commonly call Mesopotamia, the brown area or Palestine, the Acre-Haifa enclave, the big Arab areas (A) and (B), and the whole of the Arabian peninsula down to Aden should be Arab and independent." # 배색과 (A), (B) 구역의 구분은 사이크스-피코 밀약의 원본 지도를 참고하면 쉽게 이해할 수 있다.[184] 이에 대해 1910년 브리태니커 대백과사전에 실린 시리아 지역 지도에서 다마스쿠스, 알레포, 홈스, 하마만이 도시(town)로 표기되어 있었고, 맥마흔이 프랑스가 철도를 연결했다는 점을 제외하면 사실 공통점이 별로 없는 이 네 도시를 한 데 묶어 언급한 것이 바로 그 영향이 아니냐는 주장까지 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의사 결정 과정 자체가 굉장히 어처구니 없는 수준이었던 셈이 된다.[185] "beyond by an indefinite line drawn inland west of Damascus, Homs, Hama and Aleppo" #[186] 가장 대표적으로는,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 작성 당사자의 증손자가 국왕이었던 요르단. 이때 요르단은 요르단 강 서안 지구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나, 1967년 제3차 중동전쟁에서 패배하면서 해당 지역을 상실한다.[187]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5쪽[188]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과 사이크스-피코 밀약이 기본적으로 충돌한다는 점에서 이를 사이크스의 또 다른 기만으로 볼 수 있겠으나, 사이크스 스스로는 '아랍의 독립'과 '영국·프랑스의 통제력 확보'라는 두 명제를 충돌하지 않기 위해 나름대로 있는 조건에서 꾀를 썼다고는 볼 수 있다. 최소한 그가 이라크와 시리아의 직접 병합에 반대하고 구태여 '특별한 행정적 조치'라는 단서를 이용하고자 다른 이들을 설득하려 했음은 확인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자체가 말장난에 불과한 것으로 여겨지기 충분했고, 그 가치를 최대한 인정해 준다고 하더라도 그 또한 본인의 지위로 결정 지을 수 없는 위태로운 곡예 외교에 불과한 것이었으며, 결국 문제가 사이크스의 손을 벗어난(더욱이 당사자인 마크 사이크스는 1919년 2월 사망했다) 종전 이후 시점에서 이는 영국과 프랑스의 입장에서 가장 자국에게 유리한 대로 해석되었다.[189] Jonathan Schneer(2010), 《The Balfour Declaration: The Origins of the Arab-Israeli Conflict》 16장 'Revelation of the Sykes-Picot Agreement'.[190] 후술하는 휴전의 조건으로 파이살이 "튀르키예가 암만에서 철수하고 이 지방을 아랍의 관할 아래로 넘겨줄 것(if Turkey evacuated Amman, and handed over its province to Arab keeping)"을 제시했는데, 암만은 1918년 9월 25일 영국-헤자즈군에 함락되었으므로 그 이전 시점이다. 또한 제말 파샤가 교섭을 시도한 시점에 대해 "앨런비가 살트에서 패전한 이후(After Allenby's defeat at Salt)"라는 단서가 붙어 있는데, 이 '에스 살트 급습(Es Salt Raid)'은 1918년 4월 30일~5월 3일간 벌어진 교전이므로 그 시기를 대략 짐작할 수 있다.[191] 젊은 독자를 위한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역사 Die Geschichte der Israelis und Palästinenser / 노아 플룩, 마틴 쇼이블레 지음 ; 유혜자 옮김, 서울 : 청어람미디어, 2016, 13쪽 15쪽[192] 1939년 영국-아랍 위원회에서 인용된 에드먼드 앨런비의 본국에 대한 보고, "저는 아미르 파이살에게 군사 행정 기간 도중에 취해지는 어떠한 조치든 그것은 완전히 잠정적인 것일 뿐이며 아랍인들이 대표를 보낼 수 있을 평화 회의에서의 최종적 결정을 해치지 않을 것이라고 공식적으로 보증하였습니다. 거기에 군정관(military governor)들에게 보내는 지시는 정치적 사무와 혼재되지 않게 할 것이며, 이러한 명령을 위반하는 이가 있다면 그들을 제거할 것이라고 덧붙였습니다. 저는 아미르 파이살에게 동맹 국가는 명예를 걸고 이곳 민족들이 바라는 바에 부합되는 결정을 내리는 데 이르기 위해 애쓰고 있음을 상기시켰으며, 그들의 선량한 신의를 믿으라고 권고했습니다."(I gave the Amir Faisal an official assurance that whatever measures might be taken during the period of military administration they were purely provisional and could not be allowed to prejudice the final settlement by the peace conference, at which no doubt the Arabs would have a representative. I added that the instructions to the military governors would preclude their mixing in political affairs, and that I should remove them if I found any of them contravening these orders. I reminded the Amir Faisal that the Allies were in honour bound to endeavour to reach a settlement in accordance with the wishes of the peoples concerned and urged him to place his trust whole-heartedly in their good faith.")(하단 'ANNEX H.' 참고)[193] 문헌에 따라 이를 11월 9일로 기록한 경우도 있다.[194] "It may be remarked that he(후세인) does not mention either the vilayet(수기로 'sanjak'로 고쳐 읽으며 쓴 메모가 있다) of Lebanon or the sanjak of Jerusalem - territories which were both excluded from the independent Arab State in the subsequent Anglo-French Agreement. But he has expressly claimed Lebanon on other occasions since then, and his reference to the Christian Arabs here implies its inclusion." CAB 24/68/86, 5쪽[195] 나머지 25%의 지분은 독일 몫이었다.[196] 원문 및 영문 번역본의 출처, 또 다른 번역에 대해서는 이곳을 참고.[197] 승전국의 국가 원수와 외상 등에 의해 구성된 위원회로, 위원은 영국의 우드로 윌슨 대통령·로버트 랜싱(Robert Lansing) 국무장관, 영국의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총리·아서 밸푸어 외무부 장관, 프랑스의 조르주 클레망소 총리·스테픈 피숑(Stephen Pichon) 외무장관, 이탈리아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총리·시드니 소니노(Sidney Sonnino) 외무장관, 일본의 사이온지 긴모치 특명 전권대사 등으로 구성되었다.[198] 이 때 제출된 제의서의 내용에 따른 팔레스타인의 경계는 더 급진적인 시온주의자들의 의견을 반영한 '이스라엘의 땅(Eretz Israel)'이라는 개념에 의해 확장되어 프랑스 점령지까지 넘나드는 것이었기 때문에, 영국조차도 이들의 의견을 누르는 데 골머리를 앓았다. 지도 1, 지도 2 참조.[199] 현재의 표기법으로는 Al Jawf. 현재의 사우디아라비아 북쪽의 자우프주에 대응한다.[200] 한편, 이러한 '국민적' 결집을 통해 형성된 이상은 이후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에서, 또 영국이 이 지역에서 철수한 이후에 대(大)시리아를 다시금 자신의 주도 아래 단일 국가 형태로 회복하려는 압둘라 1세의 이른바 '대(大) 시리아 계획(Greater Syria Scheme/Plan/Project)'의 단초가 된다. 이에 대해서는 전 시리아 의회가 시리아 민족주의에 미친 영향과 별개로 각국의 주권과 관련하여 아랍 국가 내에서도 크게 의견이 갈렸으며, 요르단의 요르단강 서안 지구 점령에 대한 의견이 일치하지 않는 원인이 된다.[201] 10인 위원회를 간소화하고 주요 승전국 가운데 일본을 배제한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의 국가 원수(우드로 윌슨,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조르주 클레망소,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로 구성된 위원회.[202] 1차 출처, 2차 출처.[203] 보고서 원문에서는 80.4%이나 오류이며, 정확히는 80.5152976066...%로 80.4%는 도출될 수 없다.[204] '시리아 독립'과 같은 오스만 제국이나 열강의 식민 지배로부터의 독립에 대응되는 것이 아니라, 팔레스타인의 '분리'와 마찬가지로 레바논을 다른 아랍 지역에서 떼어내려는 프랑스의 시도를 나타낸다.[205] 상기한 (제 1차) 전 시리아 의회를 지칭한다.[206] 타 안건과 달리 여러 안건의 합계이므로 밑줄로만 표시.[207] 미국,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일본의 외상으로 구성된 위원회.[208] 한편 영국은 이때 파이살이 인지하지 못했던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영문본 사본을 전달했다.[209] 점령 적지 행정구 동구에서는 11월 26일에 철군이 마무리되었기 때문에, 아랍 독립과 관련해서는 이 날이 기점으로 언급되기도 한다.[210] 런던에서 열린 국제회의가 한둘이 아니다 보니 고정적으로 쓰이는 명칭은 아니지만, 제1차 세계대전의 전후 처리를 위해 열린 경우에 한정하여 이를 제1차 런던 회의라고 하기도 한다. 이 회의가 세브르 조약의 기초가 된 것과 달리, 튀르키예 독립 전쟁군의 선전으로 세브르 조약에서 구상한 판도가 깨지자 그 뒤에 열린 1921년, 1922년의 런던 회의와 대비시키는 명칭.[211] 예컨대 앞서 언급한, 후세인-맥마흔 교환 서신의 내용을 작성하고 영국이 아랍 전선을 여는 데 중요한 기초가 된 조언을 한 무함마드 파루키는 1920년 10월 24일 산적 떼에게 약탈을 당해 모술 인근에서 사망했다.[212] 사실 영국은 1920년까지만 해도 튀르키예 땅을 뜯어낼 수단으로 쿠르드인들의 독립이라는 카드를 만지작거리고 있었으며, 적어도 자치령 수준의 권리를 보장해 줄 예정이었고 이는 1920년 8월 세브르 조약에 반영되어 있었다. 그러나 1920년 12월 소련이 남하해 아르메니아 제1공화국을 붕괴시키고 쿠르디스탄과 소련의 영역이 맞닿게 되면서, 화들짝 놀라 이 지역에 소련이 파고들 수 있는 불안 요소를 더 만들어서는 안 되겠다고 판단했다. 결국 영국은 1923년 로잔 조약에서는 쿠르디스탄과 관련된 언급을 쏙 빼버리며 쿠르드인들의 뒤통수를 치고(...) 이라크 아랍인들의 손을 잡는 쪽을 택했으며, 이런 상황이 전개되는 것을 바라보던 쿠르드인들은 이라크 왕국에 맞서 1922년 9월 마흐무드 바르잔지(Mahmud Barzanji) 등을 중심으로 독립을 위한 봉기를 일으켰다. 이는 1924년 7월에야 진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