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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lbgcolor=#595959><colcolor=#ffffff> 정수일 鄭守一 | Jeong Su-il | |
출생 | 1934년 11월 12일 ([age(1934-11-12)]세) |
만주국 길림성 화룡현 지신사 명천촌 (現 중국 지린성 연변 조선족 자치주 용정시 지신진 송정촌) | |
국적 | [[대한민국| ]][[틀:국기| ]][[틀:국기| ]][1] |
종교 | 불교[2] |
본관 | 연일 정씨[3] |
학력 | 연길고급중학[4] (졸업) 베이징대학 (아랍어과 / 학사) 카이로 대학교 대학원 (아랍어문학 / 석사) |
약력 | 평양국제관계대학 교수 평양외국어대학 교수 튀니지대학 사회경제연구소 연구원 말레이대학 이슬람아카데미 교수 단국대학교 사학과 초빙교수 |
수감일 | 1996년 7월 22일 |
출소일 | 2000년 8월 15일 |
소속 | (1974~1996) 한국문명교류연구소 (200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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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대한민국의 역사학자, 인류학자, 아랍어·아랍문화학자. 주 연구분야는 실크로드를 포함한 동서 문명 교류사로, 한국에 얼마 없는 중동 지역 역사, 문화학에 대한 권위자이다.과거 외국인에 대한 지식이 많이 부족했던 한국 사회에서 신분을 숨기고 아랍인 '무함마드 깐수(Muhammad Kansu)'라는 이름으로 위장하여 입국, 이슬람 문화에 대한 박식함과 유창한 아랍어로 단국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학과 교수직을 맡아 가르쳤으나 1996년 국가안전기획부 조사 도중 북한의 간첩이라는 사실이 드러나 체포되었다.
이후 당국에 전향서를 내고 간첩죄로 복역하였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학술적 성과와 적극적으로 간첩행위에 협조하지 않았다는 점 등이 인정되어 2000년 특별사면되었으며, 2004년 복권되었다. 복권된 이후에는 다른 북한이탈주민처럼 본명인 정수일로 활동하고 있으며, 한국문명교류연구소의 소장을 맡으면서 왕성한 연구를 하고 있다.
2. 생애
2.1. 무함마드 깐수로서
(※ 본 내용은 무함마드 깐수가 간첩이라는 사실이 밝혀지기 전 사람들이 알고 있었던 그에 대한 정보를 정리한 것이다.)1946년생 역사학자인 무함마드 깐수는, 필리핀인 아버지와 레바논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혼혈로 모국어는 아랍어이며 원래 아버지를 따라 필리핀 국적이었으나 7살 때 레바논으로 건너가 현지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레바논 국적으로 귀화했다.
1984년 말레이시아 말레이대에서 있던 중 「동아시아에로의 이슬람 문화 전파사」를 주제로 학위 논문을 준비하다가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한국에 처음 입국했다. 1984년 4월 연세대학교 어학당에서 공부하다가 그해 9월 단국대학교 사학과 박사 과정에 입학해 1989년 9월 <신라와 아랍·이슬람 제국 관계사 연구>란 논문으로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사실 한국과 인종적, 언어적, 문화적으로 인연이 있다고는 볼 수 없는 사람이지만, 한국에서 박사 과정을 할 수 있도록 단국대 측에서 배려를 많이 해 주었고 좋은 사람들도 만나면서 자연스럽게 눌러앉게 되었다.
동서 문명 교류사와 실크로드학의 권위자로 1990년 단국대 사학과 초빙교수, 1994년에는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교수로 재직하면서 동서 문화 교류사에 대한 강의를 계속했다. 80년대부터 KBS 3TV(지금의 EBS) 등의 교양 역사 프로에 고정 자문 위원으로 활약했고 이후 신문에 사설도 게재하고 저술 활동을 활발히 하면서 대한민국의 문명 교류사 분야에서는 독보적인 존재가 되었다.
1990년부터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동시통역대학원(현 통번역대학원)에도 출강하였다. 그러면서도 매우 연구를 열심히 해서 항상 밤늦게까지 연구실에 남아 연구하였다. 논문. RISS에 깐수로 검색해 보면 꽤 많이 나온다.
워낙 유명한 연구자이다 보니 그의 글이 1991년 중학교 1학년 교과서에도 실렸다. '스승은 제자가 자신의 업적을 능가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는 내용의 수필이다.
아랍어, 필리핀어, 한국어, 영어 외에도 불어, 독일어, 일본어, 한문까지 구사할 정도로 어학에 능통한 사람이었다. 한국어를 처음 배운 게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서였는데 불과 5년 만에 박사 학위를 취득할 정도로 한국어를 잘 했다.
이슬람의 주일인 매주 금요일마다 기도를 드리는 등 독실한 무슬림이었고 레바논과 한국이 축구 경기를 할 때는 늘 레바논을 응원했으며, 미국과 이라크가 전쟁을 할 때에는 미국에 비판적인 글을 신문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서울대 동양사학과 김호동 교수에 따르면 삼겹살은 잘 먹었다고 한다. 잘 알다시피 이슬람에서는 돼지고기가 하람 푸드로서 금지되어 있는데 돼지고기를 잘 먹은 것으로 보아 세속적인 반전 면모도 있었던 모양이다. 독실한 무슬림의 경우 돼지고기를 먹고 기도 때 알라에게 참회하기도 한다. 이슬람은 의외로 빡빡한 교리와는 달리 교리 위반 자체에 대해서는 기도해서 참회만 하면 다 용서가 된다고 보는 입장이라 해석 여하에 따라 널널하게 신앙생활을 할 수 있다.[6]
학생들에 따르면 깐수 교수는 "된장국까지 좋아할 정도로 한국을 사랑하시는 사람"이라고 다들 생각했다고 한다. 아내와는 1986 서울 아시안 게임 아랍어 통역을 하다가 만난 인연으로 1988년 11월 결혼했는데, 당시 깐수는 42세, 아내는 26세였다. 무려 16살 연하의 아내는 서울시내 종합병원 간호사로 재직하던 사람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자녀가 없다.
1992년 인터뷰에서 귀화 문제를 진지하게 고려하고 있다는 그는 『내가 귀화하면 「20세기 처용」[7]이 되는 것 아니겠느냐』며 크게 웃었다.
그를 처음 만난 한국인은 그의 완벽한 한국어 구사와 거침없는 매너에 그가 외국인임을 눈치채지 못하기 십상이다. 콧수염을 기르기는 했지만 한국 남성의 평균 신장과 몸무게를 벗어나지 않는 그의 체구와 튀지 않는 피부색, 평범한 의상은 지나가는 사람들의 이목을 끌지는 못한다. 게다가 고향을 충청도쯤으로 짐작게 하는 구수한 말투와 소탈한 웃음은 그가 외국인이라는 것을 알게 됐을 때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이유들이다.
1992년 중앙일보
1992년 중앙일보
성품도 선량한 사람으로, 사학과 석사생은 "성격이 밝고 쾌활해 학생들에게 인기 있는 외국인 선생님이었다"고 평하였다. 이웃들은 "자상한 '간디' 교수"라고 평하였다.
학부에서도 성적이 후하기로 유명한 교수였기에 수강신청이 몰리는 교수였으며 별명은 '에이쁠 폭격기'였다. 일례로 당시의 단국대학교는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로 학점을 주는 시기였다. 1990년대까지만 해도 대부분의 4년제 대학들은 지금처럼 상대평가가 아닌 절대평가 방식으로 학점을 부여하는 곳이 대부분이었다. 이후 2000년대 들어 평점 인플레 등 절대평가로 인한 단점들이 발생하자 대부분 대학들이 성적 부여 방식을 상대평가로 전환하게 된다. 정수일이 수업 시간에 면학 분위기를 심하게 해치는 학생에게 "자네는 이번 학기 B+이야!"라고 말한 것은 당시 단국대생들에게 매우 유명한 일화다. 가수 성시경이 마녀사냥에 출연해 이 일화를 이야기하기도 했다.
2.2. 정체
무함마드 깐수로 위장했을 때 사용한 증명사진 |
1934년 11월 12일 만주국 지린성 허롱(길림성 화룡, 1940년에 연길에 편입된 지역)에서 조선인 부모 사이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중국 조선족 최초의 고급중학인 연길고급중학(현 룡정고급중학)에 입학해서 역시 조선족 학교 졸업생으로는 최초로 베이징대학 아랍어과에 입학했다. 수석으로 졸업한 이후에는 중국 정부 국비장학생 1호가 되어 1955년~1958년 이집트 카이로 대학교 아랍어문학과에서 공부했다. 1958년에서 1963년 사이에는 주 모로코 중국 대사관에서 2등 서기관(외교관의 일종으로, 한국에서 외무고시(5급 공무원)를 통과하면 2등 서기관이 된다.)으로 활동했다. 당시 그를 눈여겨본 주은래(저우언라이) 총리가 인사담당관을 통해 혼담을 주선하기도 했을 정도로 촉망받는 인재였던 듯하다.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179쪽.)
모로코 국왕과 중국 고위직 사이의 통역을 맡았던 사진도 남아있다. 이렇듯 중국에서 엘리트 코스를 착실히 밟아왔고, 그 스스로도 그대로 살아간다면 부와 명예를 동시에 지닐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1963년 6월에 중국 국적에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였다. 당초 중국 내 소수민족 차별에 실망하여 귀화했다고 알려졌으나, 본인은 2018년 신간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 가출판 기념 기자간담회에서 민족주의를 자각한 뒤에 조국 통일에 기여하고자 내린 결심이었다고 밝혔다. # 본인은 중국에서 태어나고 자랐으나, 조선에서 태어나고 자란 조선인 부모의 영향으로 중국인이 아닌 조선인(한국인)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풍문에 대해 2022년 자신의 회고록에서 불쾌감을 드러내며 북한으로 간 사유와 과정을 명확히 밝히기도 했다.
이 중론이 어디서 튀어나온 건지, 또 누가 띄워놓은 허깨비 풍문인지, 출처와 진원지는 밝혀진 바가 전혀 없다. 한마디로, 사실무근의 망언으로서 사실에 대한 철저한 왜곡일 뿐만 아니라, 한 인격체에 대한 용납 못 할 모독이다. (중략) 오로지 민족적 분단을 극복하고 통일의 성업을 이루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것이 변곡점의 확고한 변이었다. 그렇지만 나와 중국 측은 이 변의 이념적 바탕에 관해 진정한 민족주의인가 아니면 협애한 민족주의민가를 놓고 맞장을 뜨지 않을 수 없었다. 당시 많은 사람들은 '계란으로 바위 치기'니 승산 없는 짓을 아예 그만두라고 선의의 권유를 했다. 그렇지만 나는 일찍부터 민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동서고금의 방대한 민족문제 관련 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섭렵한 데다가, 외교 일선에서 진정한 민족주의의 정체를 터득했기 때문에 당당히 맞장을 떴으며 (중략) 저우언라이 총리의 공식 허락 하에 합법적 환국을 보장받았다. 진정한 민족주의의 신승(辛勝)에 일말의 자부심을 느끼면서 신념을 더욱 굳혔다.
자신의 직속 상관이었던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 천이와 대판 싸우고도 북한으로의 귀화를 허락받지 못했기 때문에 끝내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에게 편지로 탄원해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하는데 성공했다. 문화대혁명을 피해 북한으로 도망갔던 조선족들은 대부분 종파 분자로 몰려서 숙청당했는데, 정수일은 저우 총리가 공식 발급한 허가증을 받고 귀화한 덕분에 이후 살벌한 숙청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때 저우 총리도 정수일과 같은 엘리트 인재가 떠나는 게 아까워서 직접 여성을 소개해 줄 테니 결혼해서 중국에 남아달라고 권유했지만, 정중히 거절하고 북한으로 가게 된다. 중국 소수민족 출신 일개 5급 공무원 외교관이 자신의 혈통상 모국으로 가겠다고 자진 사표를 냈는데 중국 부총리 겸 외교부 장관이 거절해서 격하게 싸우고, 중국의 국무총리가 직접 중매까지 서 주겠으니 가지 말라고 말렸음에도 불구하고 끝내 사직해서 귀화한 셈이라는 점에서 이 사람이 얼마나 비범한 삶을 살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또한 그 당시 중국의 2인자인 저우언라이에게 직통으로 편지를 넣어 탄원을 할 수 있었고[8] 그 사람이 허락해 주면서도 아쉬워했다는 것에서도 능력도 비범하다는 걸 알 수 있다.
북한으로 귀화한 후 1974년까지 평양 국제관계대학 교수와 평양외국어대 동방학부 아랍어학과 교수로 재직하였으며, 마지막에는 아랍어과 학과장까지 맡았다. 정수일은 북한에서 자신을 일개 어학 교수로 대접하며 매주 1, 2일씩 막노동을 강요하고 매주 25시간, 강의 외의 아랍어 방송으로 자신을 혹사시키는 것에 힘들어 했으며, 심지어 평형감각을 상실하는 귀의 미로염(전정신경염)을 앓았다고 한다. 1963년 9월 8일자 로동신문에는 아랍 대표단 방북 시 김일성의 통역을 맡는 사진이 보도되기도 했다.
평양외국어대 아랍어 교수로 재직하던 중 정수일의 뛰어난 능력에 관심을 가진 조선로동당에 의해서, 1974년 9월부터 4년 5개월에 걸쳐 간첩 교육을 받으면서 남파 간첩으로 변신하게 된다.
1979년 1월 공작금 1만 달러를 가지고 "레바논 국적을 취득해 남한에 잠입해 주요 정세 정보를 수집하라"라는 지령을 받았고 '이철수'라는 이름으로 평양을 출발하여 당시 전쟁으로 국내 사정이 혼란스러운 레바논 베이루트로 향했다. 친북 단체인 '레바논 조선친선협회'와 북한 대사관의 도움으로, 1979년 11월 '무함마드 깐수'(유럽으로 이주했던 실존 인물로 당시 33세.)란 이름으로 레바논 국적을 취득했다. '깐수'는 동방과 이슬람 사이의 교역지 이름이라고 한다. 사실 동방하고 이슬람 사이의 교역지로 유명한 지역 중 깐수와 가장 흡사한 지명인 곳은 간쑤성밖에 없다. 게다가 간쑤성은 이슬람을 믿는 주요 소수민족인 회족과 둥샹족, 그리고 위구르 지역과 가까워서 여기서 유래된 이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레바논 국적으로는 남한에서의 활동이 힘들다는 판단 하에 튀니지에 입국해 튀니지 대학원에서 석사 학위를 취득하고 사회 경제 연구소 연구원으로 일하면서 기회를 모색하였다. 튀니지는 호적 관계법이 잘 정비되어 있어 국적을 취득하기 힘들다고 판단하고, 말레이 대학 이슬람 아카데미 강사(1982.7)를 거치는 등 호주, 파푸아뉴기니,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등의 국적 취득 기회를 모색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1983년 4월 필리핀에 입국, 1984년 2월에 필리핀 아버지와 레바논 어머니 사이의 아들인 '무하마드 깐수'로 국적을 세탁해 한국으로 들어오는 데 성공했다.
1984년 연세대 어학당에 들어와서 한국어를 배운 것도 당연히 전혀 배울 필요 없는데 위장을 위해서 배우는 척한 것이다.[9]
사실 더 일찍 잡힐 수도 있었다. 1984년 5월에 방을 구할 때 한국의 화폐 단위를 원화가 아닌 구 화폐 "환"으로 착각해버렸다. 환이 원화로 전환된 것은 1962년으로, 이미 22년이나 지난 시점이었다. 때문에 서울시 용산구 한남동의 복덕방 주인에게 의심을 샀고, 은연중에도 북한 사투리가 강하고 연락처가 없다는 점에서 수상함을 느낀 복덕방 주인이 신고했으나 대한민국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 보증을 해줘서 풀려났다.[10] 이 사실은 수사 기록에도 남지 않은 채 오랫동안 잊어졌고, '깐수'가 거리를 활보하는 것을 본 복덕방 주인은 미안한 마음까지 들었다고 한다.
1984년 6월부터 단파라디오 수신기(1993년까지 개인이 소지하는 것은 불법이었다.)를 이용해 1996년 7월까지 161차례에 걸쳐 북한의 지령을 수신했다. 한국에 와 있는 동안 상부에서는 구체적인 첩보 활동을 요구했고, 그는 월간 잡지에 나온 '신상옥 · 최은희의 최근 소재지', '클린턴의 방한', '남조선 학생 운동권의 최근 동향'[11], '최신형 전차 생산 및 첨단 첩보기 도입' 같은 기사들을 편집, 분석하여 중국 베이징시와 선양으로 보냈다.
1987년 2월부터 1995년까지 4차례 밀입북하여 김일성 부자 충성 맹세문과 "조국 통일상"을 수상하고, 단파수신기, 암호표, 독약앰풀, 공작금 19,000달러 등을 받기도 했다. 흔히 생각하는 첩보 방식과 비교하면 원시적인 행위였지만, 그 당시 이 방법은 굉장히 안전했다. 1996년 2월까지는 암호 편지를 이용해 약 75회 정보를 보냈고 안기부에서는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겉으로는 영어로 쓴 편지지이지만, 뒷면에 특수 잉크로 정보 보고문이 작성되어 있었다. 이 잉크는 작성 뒤 20분 정도 지나면 육안으로 절대 확인할 수 없으며, 특수 약품 처리를 해야 글씨가 나타난다.
그러다 1996년 3월부터 팩스로 전송 수단을 바꾸는 바람에 잡혔다. 1996년 3월 안기부는 도청을 통해 '서울 시내 특급 호텔 비즈니스센터 팩스'를 통해 남한의 군사 정치 정보가 외국으로 전송된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팩스의 수신지는 북경 주재 북한 대사관이었다.
그래서 안기부는 시내 각 호텔 근처에 CCTV를 설치해 감시했고, 그 결과 비즈니스센터를 이용해 특정 시간대에 북경으로 팩스를 전송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안기부는 몽타주를 만들어 시내 각 호텔에 돌리면서 신고를 부탁했고, 결국 1996년 7월 호텔에서 팩스를 발송하려고 시도하던 중 호텔 직원 김 모 양(26)이 팩스 고장을 가장해 전송을 지연시키면서 간첩신고를 해 체포하게 된 것이다.
훗날 재판 과정에서 공개된 바에 따르면 첩보 내용만 보면 북쪽에서 도움이 될 만한 가치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판결문에도 그런 점이 반영되어 구형인 사형에서 12년형으로 선고되었다. 사실 그가 보낸 잡지나 신문 기사 따위는 정보 분석자의 손을 거쳐 유용한 정보로 사용할 수 있으나, 그런 것들은 일본 혹은 제3국을 통해서 실시간으로 얻을 수 있기 때문에 획득은 어렵지 않아서 북한한테는 있으나 마나 한 정보원이었다. 인간 정보가 효과를 발휘하려면 아무래도 대학 교수보다는 군 간부나 고위 공무원 같은 사람들이 훨씬 유용하다. NL운동권에 대한 정보도 전하긴 했지만, 1990년대 중반이 되면 대학가에서도 현실감각이 없다는 평을 들으며 여론 주도 능력을 상실하는 등 기세가 꺾이던 상황이었고 국회에서도 한 명의 당선자도 못 내던 상황이었다. 이때 NL의 위상이 높게 평가되었던 것은 대졸자가 적어 대학의 위상이 높았던 시절이었던 데다가 학생운동으로 나라를 뒤엎었던 경험이 있었고 대규모 시위에서 몸빵 역할을 적극적으로 맡았고 또한 나름대로의 여론 주도 능력도 있었기 때문에 그 잠재력이나 당위성이 높게 평가된 것이었다. 6월 항쟁에서 김영삼, 김대중 지지자가 시위 참여의 주된 세력이었지만 학생운동의 영향을 무시하지 못하는 이유와 같다. 그래서 역설적으로 대학가에서는 진보운동의 세가 컸지만 정작 원내에는 진출하지 못하거나 기성정당에 입당하는 역설적인 상황이 벌어진 것이다. 이를 그대로 북한에 올려보내자 북한 측 정보 담당자에게 "우리가 원한 건 이런 정보가 아니다"라며 외려 지적받았다고 한다.
위장이 철저하다 보니 아내조차도 정수일이 검거되기 전까지는 간첩인 줄 전혀 몰랐는데, 잠꼬대도 아랍어로 했다고 한다. 다만 정수일은 처용에 관한 다큐멘터리에 출연한 적이 있는데, 당시 아랍어가 아주 자연스럽지는 않았다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웬만한 전공자들과 교류하는 대학 교수로서 10년간 정체를 숨기는 데 성공할 정도라면 일정 수준을 넘는 구사능력이 있던 건 부정할 수 없다. 그리고 철저히 정치적 발언을 입에 담지 않았으며, 가끔 가다 무슬림들의 생활 방식을 따르는 코스프레까지 하는 등 정말 철저했다. 또한, 교수로 활동할 당시 학생들의 말에 의하면 한국과 아랍권 국가가 축구 경기를 할 때면 늘 아랍 국가를 응원했다고. 교수 임용을 할 때도 신원 조회 절차가 있었지만 워낙 치밀하게 위장해 놔서 걸리지 않았으며, 앞서 나왔듯 복덕방 주인의 신고로 조사를 받았을 때도 대한민국의 이슬람 지도자들이 신원을 보증해 줘서 별다른 의심 없이 풀려났다. 사실 1980년대는 한국에서 이슬람권으로 가서 일하던 노동자는 상당히 많았지만 반대로 이슬람권에서 한국으로 일하러 오는 외국인 노동자는 별로 없던 시절이었고, 있어도 사실 그들이 무함마드 깐수라는 인물을 의심할 이유가 딱히 없다. 레바논이라는 나라 자체가 해외로 이주한 사람들이 많은 나라이고 또한 레바논인 이민자들이 중동은 물론이고 중남미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서도 상당한 경제적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는 데다가[12], 필리핀도 민다나오 섬에 모로족이라 해서 이슬람을 믿는 민족들이 상당수 존재한다. 그렇기 때문에 필리핀 출신의 레바논계라는 배경도 이러한 맥락에서 이해되었던 것이었다. 또한 레바논이 한창 전쟁 중이었던 나라인 데다다 굴지의 산유국도 아니기에 이미 상당수의 한국인들이 건설노동자나 출장차 오가던 사우디, 이란, 이라크, 쿠웨이트, 리비아 등의 국가들과 다르게 오가는 한국인들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한국인들 사이에서 레바논이라는 나라에 대한 인식은 내전으로 개판이 된 나라라는 인식이 고작이었고, 해외여행 자유화 이전 시기라 외국인을 실제로 접하는 상황도 드문 시절이었기 때문에 필리핀에서 온 레바논인(아랍인)이라고 하면 굳이 의심을 하기도 어려웠다.
정수일은 남한에서 한 결혼이 초혼이 아니었고 북한에 아내와 세 딸이 있었다. "간첩 활동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부인이 알고 있었나?"라는 질문에 북한의 조강지처 이야기부터 먼저 꺼냈다. 당시 정수일이 62세로, 아내 박광숙(61, 당시 평양 모란봉극장 안무지도자), 장녀 정미란(33, 김일성종합대학 프랑스과 졸업 후 당시 평양시당 선전국 홍보원), 차녀 정달미(31, 김일성종합대학 문학과 졸업 후 중앙통신사 기자), 삼녀 정소나(30, 평양무역대 졸업 후 당시 무역회사 근무)가 북한에 있었다.
처음에는 무하마드 깐수라고 극구 주장하다가 안기부 수사관이 서류상 고향인 필리핀 민다나오 섬 사투리(민다나오의 남부 지방 사투리만 해도 4종류가 있다.)를 물어보자 대답을 하지 못했다. 이후 그가 더 이상 빠져나갈 구멍이 없다고 판단한 듯 자백하기 시작했다.
서류상으로는 필리핀 국적이었다가 레바논 국적으로 귀화했으므로 정수일은 국제법상 국외 추방을 요구할 수 있었다. 처음에 그가 수감된 곳도 구치소가 아니라 출입국 관리법과 관세법 위반자들이 수용되어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그는 출국할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포기하고 자기의 국적은 분명히 '북조선'임을 밝혔다. 체포되었을 당시에는 약간 어수룩한 한국어를 쓰던 외국인으로 행세 중이었는데, 체포된 이후부터는 취조부터 재판까지 아주 멀쩡한 한국어를 구사해서 간첩 혐의를 수사하던 담당자들을 놀라게 하는 등. 결국 재판에서는 사형을 구형받았다.
체포 당시, 방대한 자료와 주석을 붙인 《동방교역사(가제)》(출옥 다음 해 《고대문명교류사》란 제목으로 출판)의 원고 마지막 부분을 정리하던 상태였고 , 검사는 그를 취조하던 도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형이 구형된 후 선고 전날, 검사가 압수당한 원고가 저장된 컴퓨터를 가져다 주어, 검사실에서 몇 시간 동안 정리하도록 배려해 주었다고 한다.
전향하지 않으려는 이유는 북한의 아내가 받을 고통을 생각해서였다. 남한에서 만난 후처에게도 '나를 잊어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하지만 뜻밖에도 후처는 매달 2번씩 면회를 오면서 편지를 계속 교환했다. 둘의 부부 관계는 투옥 이후 새롭게 시작된 것과 다름없었으며, 지극한 옥바라지에 흔들렸다고 한다. 결국 1996년 11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초기에는 사형이 구형되었다. 그러나 변호인단은 물론 재판부도 사연과 그 동안의 연구 성과, 전향 의사, 그리고 조사 결과 '언론 보도 사실만 북측에 전달했기 때문에 국가 기밀 탐지 혐의가 거의 없다'는 점을 감안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2년형이 선고되었다. # 이후 2000년 광복절 특사로 4년 만에 출소한 후 2003년에 특별 사면 및 복권을 거쳐 학계로 돌아왔다.
체포된 뒤 단국대학교에서도 극심한 혼란이 있었다. 정수일이 구속되는 바람에 학부와 대학원에 개설된 강좌가 폐강되는 등. 제자 대학원생들이 법정에 방청하러 왔는데, 정수일은 그들을 보고 담당 교수로서의 죄책감에 눈물을 흘렸다고 회고한다. 학부 강의야 강사로 대체한다든지 방법이 있지만 대학원은 실상 교수 하나만 보고 따라가는 것과 다름이 없고 동서문명교류라는 분야 자체가 국내에서 희소한 분야라 그냥 말 그대로 대학원 과정 자체가 붕 떠버리는 것이다. 특히 박사 과정생들에겐 학위 논문 연구 자체에 타격을 받을 중대한 일이다. 게다가 정체를 생각해 보면, 애꿎게 '간첩의 제자' 소리를 들으며 낙인이 찍힐 수도 있는 것이다. 이러니 제자들에게 미안해할 수밖에 없다.
단국대학교 대학원에서는 그의 박사학위를 취소해 버렸는데, 무함마드 깐수라는 거짓 신분으로 행세하며 학교를 속여 받은 학위였고 시대가 그런 시대였으니 불가피한 처사였다 해도 학문을 평생의 업으로 하여 살아온 뼛속까지 학자인 정수일에겐 가슴 아픈 일이었다고 한다. 이 때 취소된 박사학위는 사면 후에도 복권되지 않았으며, 그래서 네이버에서 정수일을 검색하면 '베이징대학교 동방학부 학사'까지만 학력이 표기되어 있다.
2.3. 언어 천재
어학에 대해서도 '한국어 외 6개 언어'(아랍어, 타갈로그어, 한국어, 영어, 불어, 독일어, 일본어)는 간첩 활동을 위한 거짓말이었다. 실제로는 가능 언어가 더 많아, 놀랍게도 조선어-한국어를 제외하고도 총 11개 외국어를 구사했다는 사실이 밝혀진다. 그가 젊은 시절 모국어로 익힌 언어와 한국 표준어는 인터넷의 정치적 극단주의적 여론을 제외하고는 함경도 방언이든 문화어든 같은 언어로 취급된다. 순수하게 표준어와 차이가 심하다는 함경도 북부의 육진 방언조차 그렇게 이질적인 방언이 아니기에 학계에서 별도의 언어로 보는 시각은 소수이며, 문화어는 아예 언어적으로는 서울 방언에 기반했기에 현재도 문법[13]이 서울 사람에게는 전라도나 경상도 사람이 구사하는 사투리보다 가까우며 이를 다른 언어로 보는 학자는 없다.러시아어, 중국어 등은 당시 한국의 적국이었으므로 의심을 살까 봐 숨겼다. 그가 옥중 서신으로 밝힌 외국어 습득은 다음과 같다. 아래 목록을 보면 정말 언어감각이 뛰어나다고 볼 수 밖에 없는게, 중국 외교관으로 근무했고 통역을 했을 정도니 중국어는 원어민에 준하는 수준일 테고, 중국어-아랍어 통역을 한 데다 전공도 했고 심지어 아랍인으로 착각했을 정도니 당연히 아랍어 역시 원어민에 가까울 것이다. 타갈로그어는 필리핀 국적 취득을 위해 배웠으니 저 정도는 아니라도 굉장히 유창할 것이고, 러시아어나 일본어는 원서로 볼 정도, 영어도 공용어로 쓰이는 국가에서 오래 살았으니 높은 수준이라 볼 수 있으며, 마인어는 말레이시아에서 교수생활을 했었으니 마찬가지로 상당한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즉 모국어 외에 최소 2개 국어를 준 원어민급으로, 3~5개 국어는 웬만큼 그 언어를 전공으로 공부하는 사람 수준, 나머지 4개 국어는 일상생활이 가능한 수준으로 한다는 것. 학문적 성과를 제쳐두고 언어능력만 봐도 확실히 천재이다.
번호 | 언어 | 비고 |
1 | 한국어 (조선어) | 모어. |
2 | 일본어 | 어릴 때부터 시작. (당시 만주국 시절) 수감 중에도 일본 서적을 읽음. |
3 | 중국어 | 고등학교 때 시작. 중국 외교관으로 근무하면서 고위직 통역을 담당할 정도. |
4 | 러시아어 | 고등학교에서 배우고 대학 교재 원서로 또 배웠으며, 북한 학계에서 러시아어 원전이 보편적이다 보니 연구를 위해 더 배움. |
5 | 영어 | 대학에서 시작. 이집트 유학 중 공용어[14]여서 계속 배움. |
6 | 아랍어 | 전공. 10년간 현지에서 살았고 남북한 모두 대학 교수로서 강의.[15] |
7 | 독일어 | 카이로 대학 유학 시절 아랍어 고전을 연구하다 보니 필요해서 '어느 정도' 익힘. |
8 | 프랑스어 | 중국 외교관으로 구 프랑스 식민지 (알제리, 모로코 등) 체류 시 업무 목적으로 반드시 필요해서. |
9 | 스페인어 | 중국 외교관으로 모로코[16] 체류 시 스페인과 접할 기회가 많아 취미로 배움. |
10 | 페르시아어 | 이란인과 자주 어울리다 보니 웬만한 대화 가능. |
11 | 마인어 | 말레이시아 대학 교수 재직 시. |
12 | 타갈로그어 | 필리핀 국적 취득 목적. |
그러니까 한 마디로 전 세계 인구의 70% 이상과 통역 없이 프리토킹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어권(8천만)[17], 일본(1억 2천만), 중화권(13억 5천만)[18], 러시아어권(2억 6천만), 영미권(14억 5천만)[19], 아랍(3억 6천만), 독일어권(1억)[20], 프랑스어권(2억 7천만), 스페인어권(5억), 페르시아어권(1억 3천만)[21], 마인어권(2억 9천만)[22], 필리핀 일부(7천만)를 합치면 약 50억 정도가 된다.
이러한 천재적인 학습 능력과 관련해 2022년 출간한 회고록에서 자신이 완전기억능력을 갖고 있음을 겸허히 밝히기도 하였다. 그러나 본인은 자신이 천재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으며, 소위 천재의 비밀이라는 것은 두뇌보다 땀과 노력에 있다고 생각한다고. 다만 아래에 적혀 있듯 세월의 한계가 있는지라 점점 기억능력이 무뎌지는 게 실감난다고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광복 후 각급 교육과정에서 줄곧 맞닥뜨린 시험에서 발생한 돌변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은 털어놓기가 민망스럽기까지 해서 나름대로 이름 지은 '재생적 환각(再生的 幻覺, 엄밀한 학술적 용어는 아니다)'이다. 한마디로 이 환각은 몇 번 읽어본 글이 마치도 칠판이나 컴퓨터 화면에 재현되는 듯 눈앞에 나타나는 현상이다. 시험을 치를 때면 여러 환각 조각들을 한데 뭇는(이어 붙이는) 대로 답안이 된다. 글을 쓸 때도 이러한 환각은 크게 도움이 된다. 그러나 아쉽게도 만고의 섭리를 좇아 육체적 노쇠와 함께 환각의 활력도 점차 무디어 간다.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2022) 125p)
2.4. 근황 및 연구 활동
2008년 프레시안과의 인터뷰에서 촬영된 사진 |
뉴스위크에서는 그를 가리켜 "분단 시대의 불우한 천재 학자," "문명교류학의 세계적 권위자"라고 평가하였으며 황석영도 극찬했다.
# 수감 중 편지도 명문에 옥중에서 한 학문적 연구까지 담겨 있다. 반북 성향이 강한 조선일보마저도 그의 학문적 업적에 대해서는 찬사를 보냈을 정도였다. 게다가 수감 중 남한의 아내도 그를 버리지 않았고, 계속 옥바라지를 했다고 한다. #
지금은 '정수일' 본래 이름으로 돌아와 아랍 연구와 실크로드나 유라시아 관련 연구 책을 쓰며 활동 중이다. 아직도 일부 사람은 그가 간첩이라고 하며 부정적으로 보고 있지만, 위에 언급한 대로 그가 진짜 간첩으로 활동하던 시기에 북한으로 전달한 문건도 아랍의 역사 및 연구 관련 정보를 많이 보냈기에 북한에서도 "이딴 걸 뭐 하러 보내느냐?"고 짜증을 냈다는 이야기도 있었다. 이는 북한 당국의 무능함을 드러내는 것으로, 영화 모가디슈에서 볼 수 있듯이 이슬람권 국가 중에선 남북한과 동시 수교를 한 나라들이 많다.
즉 이슬람권 국가는 남북한의 치열한 외교전이 펼쳐지는 곳으로 이런 관점에서 보면 정수일의 연구 성과는 이 지역에서의 외교에 기여할 매우 중요한 자료였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외무성의 사정이고 정수일이 소속된 국가보위성의 대남첩보부서는 정수일의 보고가 당장의 직접적인 실적으로 연결되지 않으니 그 가치를 알아보지 못했다. 결국 부서 이기주의에 매몰되어 장기적으로 챙길 수 있었던 국익을 등한시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그가 구금되어 있을 당시 한국 역사학계는 적극적으로 그를 옹호했었다.
사학자들도 그가 보낸 정보도 역사학 자료였으며 그가 가진 지식은 한국 역사학계에 크나큰 재산이 된다고 주장했다. 정수일의 증언에 따르면 북한의 아랍 분야 인문학 연구가 남한보다 뒤쳐져 북한 학계가 연구에 참고하길 바라면서 보냈다고 했다. 실제로 북한에서도 같은 사회주의 아랍 국가들과의 교류에 관심을 가져 시리아, 리비아, 이집트 등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아랍어 학생들을 정책적으로 육성했다. 하지만 북한 당국이 정수일에게 원한 정보는 그런 종류의 정보가 아니었다.
애당초 그는 전문적으로 훈련된 첩보요원도 아니고 군사나 외교 전문가가 아니다. 때문에 군사 정보 같은 국가기밀 취득을 목적으로 한 간첩으로 부적합했다. 사람을 잘못 골랐던 것이다. 북한이 그를 남파한 뒤 그로부터 얻은 정보와 남파된 그가 전향을 한 지금까지 대한민국의 학계에서 공유 · 발전시킨 정보를 비교해 본다면 북한이 압도적으로 손해를 본 것이다. 즉 북한은 아랍 분야의 천재 학자 한 명을 공짜로 남한에 퍼준 셈이다.
정수일이 이룩한 대표적인 학문적 성과는 다음과 같다.
- 쿠란의 표기(코란, 쿠란, 꾸란)에 대한 논쟁을 종결시키기도 했다. 이는 그가 대한민국의 아랍 학계에서 차지하는 독보적 위치를 잘 보여주는 사례로 대한민국의 아랍 학계에서는 이 쿠란 표기법을 두고 매우 심한 논쟁이 있었다. 쿠란이 필수 아랍어 단어지만 한글로 표기할 수 없는 발음들이 가장 중요한 발음들 - q, r, ء 이었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수일은 "꾸란"이라는 표기는 틀렸다는 입장을 보이고 "꾸르안"이라는 표기를 사용했으며, 최종적으로 표준안은 "쿠란"이 채택되었다.
- 처용의 중동 도래인설을 최초로 주장한 학자이기도 하다. 실크로드의 동쪽 끝을 신라의 수도인 금성, 현 경주로 제시할 만큼 실크로드와 한국과의 관계에 대한 이해가 깊고 의미 있는 주장을 제시했다.
- "이븐 바투타 여행기"를 프랑스어, 영어에 이어 세계 세 번째로 완역하여 2001년 출간했다. 1858년 프랑스어 번역에 이어 1994년 영역본이 나왔다. 정수일이 감옥에서 번역을 완료했을 때는 1994년 영역본의 완성을 알지 못해 세계 두번째 완역본인 것으로 잘못 알려졌으나 자신의 자서전(2022년)에서 세번째 번역으로 바로 잡았다. 프랑스어 번역이 두사람이 5년간, 영어 번역이 한사람이 13년간 번역하다 번역자 사망 이후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 23년 후에 출간된 것에 비해 한국어 번역은 1년 9개월만에 완역되었다. 옥중 생활의 약 3분의 1이나 되는 시간을 이 책을 번역하는 데 썼을 정도로 학문적인 열정을 보였다.[23]
더 나아가서 정수일 교수가 한국과 중동 국가(특히 이란)의 관계 개선에 많은 공을 세웠고, 지금도 하고 있다. 한국이 북한 정보를 얻는 중요 라인 중 하나가 이란이다. 특히 이란은 북한 무기를 직접 사 주는 몇 안 되는 나라이기도 하다. 정수일이 직접 북한에 준 남한 정보보다 간접적으로 남한에 준 북한 정보가 훨씬 더 양도 많고 가치는 비교가 안 된다. 사실 정수일이 북한에 준 정보는 지금으로 따지면 굳이 간첩을 파견하지 않아도 평양에서 정보전사가 VPN으로 우회해서 볼 수 있는 것에 불과하다.
정수일은 아랍어에 능통한 데다 그쪽 지리 및 여러 지식도 매우 많아서 현재 대한민국에서는 매우 보기 드문 아랍 및 이슬람 관련 전문가로서도 높이 평가를 받고 있다. 실제로 이슬람 분야와 관련된 여러 가지 분야에서도 괄목할 만한 성과를 올리고 있는 중이다. 석방 이후의 저술을 보면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한 측면이 종종 드러난다. 사실 그는 1963년 북한국적 취득 당시 중국에서도 상당한 엘리트로 대접받는 처지였으면서도 민족적 자존심 하나 때문에 당시 직속상관으로 중국의 제1부총리 겸 외교부장(장관) 천이와 얼굴을 맞대고서 대판 싸운 끝에 북한 국적 회복을 허락받았을 정도로 민족주의 성향이 강하다. 하지만 역사학자로는 비교적 중립적인 시각에서 역사를 서술하고 있다. 그래서 정수일은 세계적으로도 권위 있는 이슬람권 역사학자로 극진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 만일 정수일이 계속 북한에 남아서 북한의 중동외교 자문역할을 시켰더라면 북한-중동, 그리고 북한-이란 관계가 훨씬 견고했을지도 모른다.
이 사건 때문에 연세대학교와 단국대학교가 크게 곤욕을 치렀다. 체포 당시 단국대학교 초빙교수였기 때문. 연세대는 어학당에 다녔던 정도지만 현직에서 교편을 잡고 학문 활동을 했던 곳인 만큼 단국대학교 측이 훨씬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그래서 교내 역사학 교수들 중에서 정수일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교수가 종종 있다.
정수일 교수는 동아시아사, 특히 이슬람 관련 역사를 다루는 학문 분야에서는 반드시 전문가로 꼭 언급된다. 실제로, 단국대 사학과[24] 교수들은 당시 한남동 서울캠퍼스와 천안캠퍼스를 오가면서 강의하는 일이 많았다. 특히, 정수일 교수를 아는 사람들은 대부분 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다. 1984년 이후부터 단국대학교에서 교수로 근무했던 사람들은 이제 대부분 은퇴했을 것이고, 이 시절에 석박사 과정을 밟은 사람들은 아직 학교에 제법 남아 있을 것이다.
2011년에는 중국으로 가서 조카 쪽 가족들과 50년 만에 재회하기도 했으며 모교 방문 등의 활동을 했다. 모교 측에서는 그 학교에서 처음으로 북경대에 진학한 두 명의 학생 중 한 명[25]이라는 사실을 알고 바로 정수일과 다른 학생의 사진을 확대해서 학교의 역사 자료관에 걸어뒀다고 한다. 중국에 있는 가족과 친척들과 재회해서도 정수일의 조카들과 조카 손자들이 중국어만 하고 한국어를 잘하지 못하자 굉장히 안타까워했다고 한다. #[26]
여담으로 정수일 교수의 이슬람 관련 한국어 번역은 중국 내의 중국어를 사용하는 무슬림인 회족, 회교도들이 이슬람 종교 용어 관련하여 사용하는 한자어 어휘들을 굉장히 많이 사용하는 편이다. 비교하자면 사우디아라비아의 지원을 받아 쿠란을 한국어로 완역한 최영길 교수의 경우 한국어 필력이 별로 좋지가 못해서 한국어 번역 성경에 나오는 어휘들을 어정쩡하게 사용하는 것을 비판받는 것에 비해, 정수일 교수가 사용하는 아랍어 번역 문구는 깔끔하고 명료한 것으로 호평을 받고 있다. 원래대로라면, 한국에서 잘 쓰지 않는 중국 회족들이 쓰는 한자어를 사용하는 정수일 교수의 아랍어 번역문이 더 읽기 어려워야 정상인데, 오히려 최영길 교수의 번역문이("읽어보시요". "파라오족을 익사케 했나니" 등등) 읽기 어색하고 더 어렵다.
2013년에는 2013 경주-이스탄불 세계문화엑스포와 관련된 활동을 했다고 한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고령의 나이에도 한국문명교류연구소장으로서 활동하고 있다. 2023년 현재에는 건강상 외부 활동은 삼가고 있다. 그래도 건강한 편인지 한국문명교류연구소 주관 강의에서 강사로도 가끔 활동하고 있다.
단국대학교 사학과에 재학했던 학생의 증언에 따르면 리포트는 아무 언어로나 써서 제출해도 상관없다고 했다고 한다. 그만큼 언어의 귀재[27]라는 것을 알려주는 부분.
3. 저서와 역서
수감 후 저작은 200자 원고지로 3만 장에 달한다고 한다. 역서는 모두 옥중 번역.연도 | 서명 | 출판사 | 비고 |
1994년 | 신라 서역 교류사 | ||
1995년 | 기초 아랍어 | ||
세계속의 동과 서 | |||
2001년 | 고대문명교류사 | 옥중 저작. | |
씰크로드학 | 옥중 저작. | ||
이븐 바투타 여행기1, 2 | \[역서] 프랑스어, 영어 번역 이후 3번째 아랍어 원전 번역판. | ||
2002년 | 문명의 루트 실크로드 | ||
이슬람 문명 | |||
문명 교류사 연구 | |||
중국으로 가는 길 | \[역서] | ||
2004년 | 소걸음으로 천리를 가다 | 옥중 에세이. | |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 \[역서] | ||
2005년 | 한국 속의 세계 상·하 | ||
2006년 | 실크로드 문명기행 | ||
2008년 | 시대와 소통 | 공저. | |
2009년 | 문명담론과 문명교류[28] | ||
2010년 | 초원 실크로드를 가다 | 창비사 | |
2013년 | 실크로드 사전 | \[역서] | |
2014년 | 실크로드 도록 : 해로편 | 창비사 | |
해상 실크로드 사전 | 창비사 | ||
2016년 | 문명의 요람 라틴아메리카를 가다 | 창비사 | |
2018년 | 문명의 요람 아프리카를 가다 | 창비사 | |
2019년 | 실크로드 도록 : 초원로편 | 창비사 | |
2020년 | 우리 안의 실크로드 | 창비사 | |
민족론과 통일담론 | 통일뉴스 | ||
2021년 | 문명의 모자이크 유럽을 가다 | 창비사 | |
2022년 | 시대인, 소명에 따르다 | 아르테 | 회고록 |
[1] 1963년 중국조선족에서 북한 국적으로 귀화했다. 이후 1996년 10월 전향서를 제출했다. 후술하지만 레바논, 필리핀 국적은 위장신분이었다.[2] 교도소에 수감되면서부터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2004년에는 불교인권상을 수상했다.[3] #[4] 現 연변제1중학.[5] 무함마드 깐수라는 이름으로 대한민국에서 간첩 활동을 하며 취득한 학위였던 탓에, 검거 후 실형 선고가 내려지는 과정에서 단국대학교 박사 학위가 취소되었다. 박사 학위는 아직도 복권되지 않은 상황이다.[6] 다만 자살은 용서받을 수 없는 중죄로 규정한다. 그래서 돼지고기라도 안 먹으면 아사할 상황이라도 돼지고기를 거부하고 죽으면 자살로 간주되어 용서받지 못한다고 본다. 그래서 차라리 이럴 때는 돼지고기라도 먹고 살아서 참회하는 게 낫다고 보는 게 정상적인 이슬람의 입장이다.[7] 정수일은 처용이 중동인이라는 학설을 제시하기도 하였다.[8] 즉, 탄원서를 넣기 이전부터 이미 친분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9] 남한지역의 말투와 언어습관을 습득하려는 목적이 있었을 가능성도 추측해 볼 수는 있으나, 보통 북한의 남파간첩 훈련 과정에 남한 말투 학습도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확증은 어렵다.[10] 만약 이때 풀려나지 못하고 그대로 간첩 혐의로 수감되었다면, 당시 시대가 시대인만큼 국가안전기획부로 끌려가 모진 고문을 받고 사형까지도 당할 수 있었을 것이다.[11] 당시 정수일은 북한 지도부의 선전과 달리 남한 학생 운동권은 '남한 혁명 운동'의 기수가 될 수 없으며, 재야 운동 역시 활발하나 '혁명의 선봉'으로는 역량이 부족하다고 평가했다. 1980년대 북한 지도부는 이 말을 믿지 않았으나 임수경 등의 운동권 세력의 방북 이후 교차 검증이 끝난 90년대 이후에는 북한마저도 이들의 정보를 요구하지 않게 된다. 정수일의 표현대로 이후의 NL 운동권 세력의, 북한이 자신들을 높게 평가한다는 착각에서 비롯된 연방제 통일 지지 행보는 말 그대로 '짝사랑'이 되었다.[12] 당장 르노의 수장이던 카를로스 곤이 레바논 출신이다. 레바논에서 브라질을 거쳐 프랑스로 정착한 케이스. 현재는 희대의 탈출극이던 카를로스 곤 구속 사건을 겪은 뒤 레바논으로 재정착.[13] 방송원 출신 이연아 씨, 류현우 같은 인사의 말투도 '북한 그대로의 말투'다. 이런 지식인 계층 탈북자는 말투가 너무 서울말 같기 때문에 말투를 고쳤다는 오해를 듣는다. 미디어나 종종 정식 교육에서도 북한에서 많이 안 쓰는 이질적 표현이나 심한 방언을 대중적인 북한말이라고 주장하며 나타난 오해다. 경상도는 물론 전라도조차 글로 쓰면 방언임이 인지되지만, 문화어는 한국 젊은 세대조차 읽으면서 문화어 서적을 읽으며 체제 찬양이 나오기 전까지는 북한말인 줄 모르는 사례까지 존재한다. # 북한의 문헌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대부분 북한의 정치경제적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에서 나타나는 것이며, 이런 지식이 필요없는 같은 사항(예를 들면 외국의 글을 번역할 때)을 묘사하면 서로가 대부분 이해한다.[14] 이집트는 구 대영제국 식민지 국가였어서 지금도 공용어가 영어다.[15] 여권상엔 필리핀인으로 되어 있지만 만나 봤던 사람들 대부분은 아랍인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필리핀인이라고 아랍인이 될 수 없는 것도 아니고 사실 절반은 레바논계이니 민족적으로는 아랍인이라고 해도 틀린 건 아니다만. 어차피 다 가짜 신분인데[16] 프랑스와 스페인의 식민지였으며 스페인령 세우타가 여전히 남아있다.[17] 대한민국과 국내외 한국계 거주 지역.[18] 중국 본토, 대만, 홍콩, 마카오, 싱가포르[19] 영국,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아일랜드, 몰타, 키프로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등[20]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내 독어권 지역, 리히텐슈타인[21] 이란+아프가니스탄+타지키스탄.[22]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브루나이, 태국 일부 남부 지역[23] 사실 인간은 24시간 중 3분의 1인 8시간 가량은 잠을 자며 보내고, 교도소는 규칙적인 시간표로 돌아간단 점을 생각해보면 기본적인 인간 생활 및 필수적인 교도소 내의 일정표를 준수하면서도 매우 빠른 속도로 작업을 마쳤단 얘기가 된다. 일반적인 학자가 아닌 수감자로서 시간을 오롯이 쓰지 못하면서도 이러한 성과를 냈단 것. 게다가 아래 저서목록을 보면 알지만, 수감중 쓴 글은 이 여행기 번역 외에도 많다.[24] 천안캠퍼스에서는 역사학과로 부르고 2016년까지 존속되었다. 천안에 있었던 학생들은 2012학년도 이전에 입학한 학생들이었던 셈이다.[25] 다른 한 사람은 북경대 철학부에 진학한 임원철로, 역시 문화대혁명 때 북한으로 건너갔지만 정수일과는 달리 불법 도강을 선택했기 때문에 후일 숙청당했다고 알려졌다.[26] 조선족들은 문혁 이후 중국에 아주 빠른 속도로 동화해 한국어를 잘 못하는 경우가 많다.[27] 모어인 한국어 외에 영어, 프랑스어, 표준 중국어, 일본어, 몽골어, 독일어를 현지인 수준으로 구사 가능한 김규식과 비슷하다.[28] 한국 문명 교류 연구소 학술 총서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