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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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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영욕의 18년 정치 인생 (채널A 제작)
박근혜의 삶에 대한 요약.
1. 정치 활동 이전2. 정치 경력
2.1. 대통령 이전 정치 경력
2.1.1. 첫 국회의원 출마2.1.2.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절2.1.3. 17대 대선 경선 석패와 이명박 정부2.1.4. 선거 이력
2.2. 제18대 대통령 선거2.3. 박근혜 정부
3. 파면과 파면 이후
3.1. 파면3.2. 구속3.3. 구속 이후
3.3.1. 자유한국당 제명3.3.2. 공천 개입 혐의로 추가 기소3.3.3. 1심 재판 중계방송3.3.4. 검찰의 항소 및 확정판결
4. 기결수
4.1. 옥중 서신4.2. 21대 총선 이후4.3. 2021년 재보궐선거 이후4.4. 특별사면복권
5. 사면 이후
5.1. 윤석열 정부 하5.2. 옥중서간집

1. 정치 활동 이전

파일:1920px-Park_Geun-hye_during_childhood.jpg

1952년 2월 2일, 경상북도 대구시(現 대구광역시)에서 박정희육영수 사이에 장녀이자 맏이로 출생했다.[1] 부친 박정희서울 중구 신당동에 집을 마련한 1956년 4월 전까지, 군인인 부친의 부임지를 따라 이곳저곳 이사를 자주 다녔다. 출생지는 대구 삼덕동 5번지였지만, 첫 돌은 전라남도 광주시 동명동 셋방에서 맞았으며, # 1953년 여름엔 서울 동숭동으로 이사했지만, 1954년 10월엔 다시 광주로 가 1955년 7월, 부친 박정희가 사단장을 달기 전까지 자랐다.[2] # 이렇게 성장기에 TK에서 살았던 기간은 짧기 때문에 본인의 공식 출생지이자 정치적 고향인 TK와는 어울리지 않게도 실제로는 대구 사투리보다는 충청도 사투리 억양이 살짝 섞인 서울말을 구사하는데, 이는 충청북도 옥천군 출신인 모친 육영수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서울장충초등학교[3]성심여자중학교성심여자고등학교를 거쳐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전자공학과(70학번)를 졸업했다. 이 중 중학교 진학 때 특혜를 받은 것이 알려졌는데, 박근혜는 1964년 3월 성심여중에 입학했다. 당시에는 입시를 치러 중학교에 진학했던 시기였고, 전 과목 모두 시험을 보았다. 그런데 박근혜가 중학교 입시를 치를 때는 "어린이들의 수험 부담을 덜어준다"는 이유로 2과목(국어, 산수[4])만 보았고, 박근혜는 성심여중에 합격했다. 이듬해부터는 다시 전 과목 모두 시험 보는 것으로 바뀌었고, 중학교 입시는 1969년에야 폐지되었다. #[5]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는 쭉 가톨릭 수도회에서 운영하는 미션스쿨을 다녔다. 성심여중고는 성심수녀회, 서강대학교예수회에서 제각기 운영한다. 성심여중 2학년이던 1965년에 박근혜는 가톨릭 세례성사를 받았는데, 집전자는 노기남 바오로 대주교였다. 다만 미션스쿨을 다니고 세례나 수계를 받았다고 해서, 모두 진실한 신자라고는 할 수 없다. 가톨릭 뿐 아니라 불교, 개신교, 이슬람교까지 모든 종교를 다 기웃거렸고, 결국 믿은 건 사이비종교영세교였으니.

박근혜는 1970년 3월, 서강대학 전자공학과에 입학하였다.[6] 학부 졸업 시 학점은 4.0 만점에 3.82로 상당히 높았다.[7]
서강대학교 공과대학 졸업 후 프랑스어학연수를 떠났으나[8], 재학 도중이던 1974년 8월 15일, 광복절 기념식에서 어머니 육영수가 피격으로 사망하자 귀국, 만 22세의 나이로 공석이 된 퍼스트 레이디를 대행했다. 퍼스트 레이디가 되기 전인 중학생 ~ 고등학생 시절부터 대통령의 딸로서 여러 외교행사에 참가해, '소녀 외교'라는 억지스러운 칭송을 듣기도 했다. 외교 행사에 참가한 영상을 보면, 공주처럼 차려입고 보좌해주는 어른들을 줄줄이 대동하고 가 하나부터 열까지 일일이 설명을 듣는다. 심지어 여성 보좌관에게 옷 매무새와 머리 모양 시중을 받는 모습이 나온다. 어느 날 김옥길 이화여자대학교 총장이 박근혜에게 "퍼스트 레이디 일은 다른 사람에게 맡기고,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게 어떻겠냐?"고 충고하자, 박근혜는 벌떡 일어나 김옥길 총장을 노려보며 "무슨 말씀이세요? 이 나라와 국민을 두고 외국에 가라니요? 퍼스트 레이디가 얼마나 중요한 자리인 줄 모르세요?"라고 소리치며 인사도 없이 나가버렸다고 한다.[9]

또한 나이 지긋한 교장선생님이나 지역의 원로 인사들을 모아 예행연습까지 시키며 몇 시간씩 줄지어 세워놓고 효도에 대한 강연을 하기도 하였으며, 시골의 할아버지나 할머니들이 박근혜를 향해 "영애님 오셨다!"라고 큰 절을 올리면 사양하지도 않고 그대로 절을 받았다고 한다. 당시 박근혜는 20대로, 그 어른들보다 한참 어렸다. 이를 본 당시 중앙정보부장 김재규는 "육영수는 물론이고 박정희도 이런 식으로 노인들의 절을 받지는 않았다."며 탄식하였다고 한다. #

문세광에 의한 육영수 여사의 피살 이후, "육영수 여사가 나에게 빙의되어 '딸을 도와달라.'고 했다."고 주장하는 최태민과 인연을 맺었다. 다만, 여동생 박근령과 제부 신동욱 부부의 증언에 따르면, 박근혜는 육영수 여사 피살 전부터 최태민과 알고 지냈다고 한다. 최태민이 발족시킨 '대한구국선교단' 명예 총재를 맡았으며, 이후 '새마음봉사단'으로 이름를 바꾸고 영세교의 최태민, 구원파의 유병언과 함께 사회 운동 '새마음 운동'를 주도했다. 이 과정 중에서 최태민의 5녀인 최순실과도 인연을 맺은 것으로 알려졌다.

1979년, 아버지 박정희마저 김재규총에 맞아 사망하고 박근혜는 청와대를 나오게 된다. 10.26 사건 당시 합동수사본부장 겸 보안사령관 전두환 육군 소장에게 6억 원(2023년 가치로 41억 원)을 받아 논란이 되었는데,[10] 이후 2012년 대선 토론회에서 이에 대해 해명하는 과정에서 증여세 납부에 대한 개념이 전혀 없음을 드러내, 또 다시 논란이 되기도 했다. 전두환의 5공 시절은 정통성이 부족한 정부에서 흠을 메꾸기 위해 독재자인 전임자인 아버지 박정희를 비난하던 상황이었는데, 박근혜는 이때를 "내 인생 최대 암흑기였다."고 말하기도 했다.

청와대에서 나오고 정치에 입문하기 전까지 소위 '은둔의 시기를 보냈다'고 전해지는데, 외부자들에서 전여옥 전 의원에 의하면 박근혜는 이런 말을 싫어했으며, 박근혜 본인은 이 시기에 대해 "정수장학회, 육영재단 등을 통해 활발히 활동했다"고 한다

2. 정치 경력

2.1. 대통령 이전 정치 경력

2.1.1. 첫 국회의원 출마

1997년 12월 10일[11] 한나라당 대선 후보 이회창 지지 선언들 통해 한나라당에 입당했다.[12][13] 그리고 이듬해인 1998년 4월, 대구광역시 달성군 국회의원 재보궐 선거에 나가 국회의원이 되었다.# 경쟁 상대는 새정치국민회의 엄삼탁 후보였다.

이때 엄삼탁 후보를 지원하러 대구로 간 추미애가 목격한 바에 의하면, 선거 유세에 나선 박근혜 후보를 본 아주머니들은 감격하여 펑펑 울거나 심지어 이고 가던 나물 그릇을 엎어버린 뒤 그 자리에서 대성통곡을 했다고 한다.# 이런 분위기 때문에 "도저히 선거 운동을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고 추미애는 회상하였다.
파일:6857915.1.jpg
한국미래연합 창당대회에서 당기를 흔드는 박근혜(2002년)

2.1.2. 국민의 정부-참여정부 시절

그 후 16·17·18·19대 국회의원으로 활동했다. 2000년 선출직 부총재에 올랐지만, 이회창과의 갈등으로 2002년 제3회 전국동시지방선거를 앞두고 탈당을 하여 선진 여성 정책의 구현과 양성평등을 기본 정책으로 하는 신당, '한국미래연합'을 창당하였다. 그 해 6월 치러진 지방선거에서 2명의 광역자치의회의 의원 당선자를 내는 등 초반에는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정몽준과의 3자 단일화 실패와 여러 악재가 겹치면서[14] 그해 대선 직전에 한나라당과 합당하였다. 2004년 이전만 해도 정치인 박근혜의 당내 입지는 보수당 텃밭의 흔한 지역구 국회의원 혹은 박정희 시대를 그리워하는 보수적인 유권자들의 지지를 유도하기 위한 얼굴마담에 불과했다.[15]

이런 그녀를 대권주자이자 보수정당의 핵심 주자로 키운 사건이 바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다. 당시는 노무현 탄핵 정국의 역풍이 강력하게 작용해 탄핵에 찬성했던 야당들은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는데, 당시 제1야당이었던 한나라당도 전통적 텃밭인 TK에서조차 유의미한 의석을 차지하지 못해 개헌선을 내주게 되리라는 전망이 대세였다. 하지만 당시 대표로 취임했던 박근혜가 천막당사 이전과 적극적인 사과와 반성을 통한 읍소전략을 적극적으로 내세운데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의 실언 파동을 계기로 기존 지지층들이 대거 결집, 당초 개헌저지선에 미치지 못할 거란 예상을 뒤엎고 120석 이상의 기대 이상의 성적을 거두게 되며, 보수 정치인 및 지지자들로부터 인정을 받게 된다.

당시 북한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초청을 받아 방북하여 김정일 위원장과 면담하기도 했는데, # 무단 방북 논란(사실이 아니다)에 시달리기도 했다. 그리고 2005년에 대표 명의로 김정일에게 보냈다는 편지가 공개되면서 통일부 허락의 문제와 북한에서 쓰는 주체연호를 써서 국가보안법 위반까지 문제가 번지고 있다. 편지 전문. 여기다가 TV조선에서는 "주체사상탑까지 가서 방명록까지 적고 왔다"고 폭로했다.
한나라당 이회창 후보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패하고 정계 은퇴를 선언하자[16], 한나라당에는 박희태 체제, 최병렬 체제 등이 들어섰다. 하지만, 한나라당차떼기 파동(불법 대선 자금)으로 몰락의 길을 걸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무현 대통령의 지역 구도 타파와 전국 정당을 표방한 열린우리당한나라당 내 개혁파 인사 김부겸, 이우재, 김영춘, 이부영, 안영근 등이 가담하면서[17] 한나라당 소속 박근혜 의원 또한 정치적 위기에 빠지게 되었고 이를 노무현 대통령에 대한 공격으로 극복하고자 하였다.[18] 박근혜 대통령의 복심 김기춘청와대 비서실장[19]은 이 당시 탄핵 서류를 제출하였고, 박근혜는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에 참여하였다.[20]

하지만 노무현 대통령 탄핵은 '우리가 뽑은 대통령인데 너희가 무슨 자격으로 탄핵을 하느냐[21]'는 수많은 국민들의 격노를 불러 일으켰고 새천년민주당에 이어 한나라당까지 엄청난 여론의 역풍에 휘말려 17대 총선열린우리당이 단독 과반은 따 놓은 당상이고, 잘 하면 180석~200석까지 차지할지도 모른다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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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핵 역풍으로 인해 당사를 헌납하고 천막 당사로 현판을 옮기는 당시 박근혜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

결국, 최병렬 대표가 사퇴하고, 박근혜 의원이 임시 당 대표에 올라 사태 수습과 선거 지휘에 나섰다.[23] 차떼기로 모금한 돈을 되갚기 위해 당사를 매각하고 '천막당사'를 차렸다. 물론 '천막 당사' 정치를 기획하고 주도한 것은 박근혜가 아닌 이상득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자 국회의원이었지만, 유권자들에게 미치는 영향을 극대화하기 위해 박근혜가 주도한 것으로 꾸몄다는 사실이 드러나고 있다. #남경필, 원희룡, 정병국 등 당내 소장파들이 탄핵 찬성 철회를 주장했으나, 이를 거부하여 지지층 이탈을 막는 한편, 거대 여당 견제를 부동층에 호소했다. 정동영 열린우리당 의장은 이를 막고자 하였으나[24] 오히려 한나라당의 지지율은 하락세에서 반등했다. 그 결과 열린우리당은 국회 전체 의석 299석 중 152석을 얻어 처음으로 원내 제1당 자리를 차지하는 기쁨을 안았으나, 180석~200석까지도 기대해볼 만하다는 분위기로 볼 때 솔직히 실망스럽다는 평가를 받았고,[25] 80석이라도 확보하면 다행이라던 한나라당은 기대 의석을 훨씬 웃도는 121석을 확보하며 기사회생했다.[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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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5년, 비서실장이었던 유승민 의원의 보고를 받는 박근혜

이후 박근혜 대표는 참여정부의 모든 정책에 반대하며 참여정부를 가열차게 공격하였고,[27] 사학법 개정에 반대한다고, 촛불을 들고 나가기도 했다.[28] 이로써 그녀는 한나라당을 장악하는 데에 성공하고, 가장 유력한 대권 주자로 떠오르게 된다. 그러나 그녀가 노무현 대통령을 비판하면서 했던 여러 비판들이 본인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는 건, 참 아이러니한 일이기도 하다.[29]

참여정부를 가열차게 공격하면서 의원 활동을 제대로 했냐 하면, 그것도 아니다. MBC 기자 출신 전 국회의원이었던 신경민 전 의원이 박근혜와 같은 상임위에서 활동했던 국회의원들에게 들은 바에 의하면, 박근혜는 상임위에 나오면 보좌진이 써준 질문지를 읽기만 하고, 장관들의 답변은 듣지도 않고 가버렸다고 한다. 보통 상임위에서 의원들의 질문에 장관들이 엉뚱한 답변이나 엉터리 답변을 하면 이를 알아채고 바로 잡아야 하는 것이 국회의원의 의무이나, 박근혜는 의정 활동 15년간 장관들의 답변에 한 번도 되묻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동료 상임 위원들의 말에 의하면, 박근혜는 자기의 질문 내용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에서 질문하는 것으로 보였다고 한다. # 그리고, 이 때의 실책은 본인이 대통령직에 있었던 2014년 한미 정상회담 당시 한미 공동 기자회견 때도 기자들의 질문을 잊어버리면서, 망신을 당했다. # 재밌는 건, 2015년에도 또 기자들의 질문을 잊어버렸다는 것.

시간이 지나며 박근혜에게 참여정부 국정 발목잡기는 아예 만성화되어 버린 듯한 정황도 보인다. 전여옥 전 의원이 목격한 바에 의하면 박근혜 당시 당 대표는 기자들과의 만남에서 뜬금없이 '여당과 전면전을 하겠다'는 폭탄발언을 던진다. 놀란 기자들은 데스크에 박근혜의 발언을 보고하기 위해 하나둘씩 자리를 비운다. 그러나 자기가 던진 말의 중대함조차 파악하지 못한 박근혜는, 해맑은 얼굴로 미소를 짓더니 전여옥 전 의원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한다. "그런데 왜 기자들이 하나둘씩 자리를 뜨죠?"[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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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발생한 커터칼 피습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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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습사건 이후 수술을 받고 있는 박근혜 대표

2006년 5월 20일, 제4회 지방선거를 11일 앞두고 피습 사건이 터졌다. 당시 박근혜 대표는 오세훈 서울시장 후보의 유세를 위해 신촌 현대백화점 앞에서 유세차에 오르던 중 지충호에게 커터칼로 피습을 당해 11cm 깊이의 자상을 입었다. 이 날 박근혜가 입었던 상처는 아슬아슬하게 급소와 대동맥을 빗나갔다고 하며, 만약 몇 cm만 빗나갔어도 그 자리에서 사망하거나 안면마비로 정계를 은퇴했어야 할 지 모르는 큰 부상이었다. 박근혜는 일주일 동안 신촌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치료를 받았고, 퇴원한 뒤에는 곧바로 대전시장 후보의 지원유세를 위해 대전으로 갔다. 막판 피습사건으로 일어난 지지층의 결집과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급격한 지지율 하락으로 제4회 지방선거는 한나라당의 압승으로 끝난다. 이로써 박근혜는 차기 대권주자로서의 위치를 더더욱 곤고히했으며, 지방선거가 끝난 뒤 대표직에서 물러났다. 여담이지만, 박근혜는 한나라당 창당 이래 임기를 정상적으로 끝내고 퇴임한 첫 당대표이다.

2.1.3. 17대 대선 경선 석패와 이명박 정부

2007년 참여정부레임덕이 왔다. 노무현 대통령 개인의 지지율은 상향세였지만, 야당이나 대권 주자들의 지지도가 그보다 더 높았던 것이다.[31] 한나라당은 박근혜 대표가 잡고 있었으므로 그녀가 다음 대통령이 될 것이 유력할 상황이었으나, 독재자의 딸이라는 거부감, 참여정부와의 대립 과정에서 보인 강경함은 지지율 외연 확장에 방해가 되고 있었고, 당내 지지는 다소 부족했지만, 국민적 인기가 높았던 이명박 당시 서울시장이 강력한 경쟁 상대로 떠올랐다. 이 당시 분위기는 한나라당의 대선 승리가 거의 확실했기 때문에 한나라당 대통령 후보로 결정된 사람이 곧 다음 대통령이나 다름없었던 그런 분위기였다.

둘은 제17대 대통령 선거에 출마를 선언했고, 박근혜 대통령과 관계가 안 좋기로 유명한 김무성 전 대표와 유승민 전 원내대표도 이 당시에는 박근혜 후보 캠프에서 각각 조직 담당, 정책 담당으로 일했다. 그런데 이때 한나라당은 각 후보를 지지하는 정치인을 중심으로 친이계친박계로 갈라져 살벌하기 짝이 없는 폭로전을 이어갔다. 이 당시 싸우면서 생긴 감정의 앙금이 후술할 18대 총선 당시 일어난 친이계친박계 공천 학살과 19대 총선 때 일어난 친박계친이계 공천 학살로 이어졌고, 그 원한은 20대 총선새누리당을 흔들었던 친박계비박계 숙청으로까지 이어졌으며 결국 새누리당이 분당되어 자유한국당바른정당으로 갈라지기에 이른다.

또한 두 사람에 대한 의혹은 상당수가 이때 나온 것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그 유명한 여러분 이거 다 거짓말인 거 아시죠[32]엄청난 검증의 쓰나미가 몰아닥칠 것입니다가 이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 나온 말이기도 하다. 하지만 북한 핵실험과 보궐선거 패배로 박근혜에게 불리한 요소가 하나 둘씩 터졌고 경선 룰 공방을 거쳐 결국 이명박서울시장이 여론조사에서 우위를 바탕으로 승리했다. 박근혜 전 대표는 경선 결과에 승복하며 다음 대선으로 기회를 미루게 된다.[33]

결국, 이명박 후보는 제17대 대통령 선거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17대 대선이 끝나고 얼마 안 있어 18대 총선이 시작되자 이명박 대통령의 계파인 친이계는 박근혜 의원을 따르는 친박계 인사들을 공천에서 대거 탈락시켰다. 이에 공천에서 탈락한 친박계 인사들은 한나라당을 나와 친박연대라는 사상 초유의 가설 정당[34]을 만들어 18대 총선에 출마했고, 친박 연대에 들어가지 않은 사람들은 '친박 무소속 연대'라는 이름으로 출마했다.

이 때 박근혜 의원은 한나라당 공천 심사에서 합격했으나 말 그대로 팔다리가 다 잘린 상태였고, 기자회견을 연 뒤 눈물을 보이며 "저도 속고 국민도 속았습니다"라는 말을 남긴다. 또 탈당한 친박계 사람들에게 '살아서 돌아오라'는 메시지를 남기기도 했다.

지난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열린우리당의 압승이 예상되었던 것처럼 제18대 국회의원 선거한나라당의 압승이 예상됐다. 그러나 18대 총선 결과 한나라당은 국회 전체 의석 300석 중 153석을 얻어 턱걸이 과반에 만족해야 했다. 잘하면 200석도 차지할 수 있을지 모른다던 기대에서 한참 못 미치는 성적이었다. 반면 친박연대는 박근혜 의원의 본거지인 대구광역시경상북도에서 돌풍을 일으켜 14석을 얻어 원내 제4당이 되는 기염을 토했고, 친박 무소속 연대도 12~16명의 당선자를 내면서[35] 무려 26명의 친박계 인사들이 살아남았다. 박근혜 본인도 비상대책위원장으로서 선거 기간 내내 전국을 돌며 선거 유세를 했던 17대 선거와는 다르게 18대 선거에서는 자신의 지역구인 대구광역시 달성군 바깥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지 않는 등 사실상 당의 지원 유세조차 거부하였다.[36]

예상 밖의 선거 결과에 한나라당은 내부 진통을 겪긴 했지만 탈당해서 생환한 친박계 사람들을 다시 받아들이기로 결정하였고, 거기에 보수 성향의 무소속 의원들까지 더해진 결과 한나라당은 무려 183석에 달하는 절대 다수의 의석을 가진 초거대 여당으로 급성장하게 된다. 이때 박근혜 의원은 '여당 안의 야당' 역할을 하며 세종특별자치시 문제 같은 중요한 이슈가 생겼을 때 이명박 대통령과 정면으로 반목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차기 대권 주자로서의 이미지를 굳혀 나갔다.

반면 이명박 대통령은 임기 만료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그의 인기도 덩달아 바닥을 찍어, 땅속을 뚫기 시작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오세훈 서울시장이 '보편적 급식(무상급식)' 문제로 셀프 탄핵을 하면서 공석이 된 서울특별시장 자리를 채우기 위해서 2011년 10월에 실시된 서울특별시장 재보궐선거 결과 친이계로 분류되던 나경원 후보가 무소속 박원순 후보에게 패배하고 말았고, 이때를 시작으로 친이계의 힘이 상당한 속도로 빠지기 시작했다. 고승덕 의원이 홍준표 체제가 선출된 전당대회에서 돈 봉투가 돌았다는 이야기를 폭로하고, 선거관리위원회에게 디도스 공격을 가한 범인이 한나라당 당직자라는 의혹이 제기되면서 홍준표 체제는 붕괴됐고 한나라당의 분위기는 급격하게 식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이명박 정부에게 레임덕의 그림자가 급속도로 드리워지기 시작한 것도 당연지사.

결국 당의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유력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 의원을 위원장으로 하는 비상대책위원회가 꾸려졌다. 박근혜 비대위는 한나라당이라는 이름을 새누리당으로 바꾸고, 외부 인사들을 비대위로 영입하였으며, 당의 색깔을 공산주의의 상징인 빨간색으로 바꾸는 파격적인 변화를 보여주었다. 당의 전권을 거머쥔 박근혜 위원장은 18대 총선 때 겪었던 수모를 고스란히 친이계 공천 학살로 되갚아줬다.[37] 그런 가운데 치러진 19대 총선김용민 막말 파문이 터지면서 민주통합당이 승리할 것이라는 모두의 예상을 깨고 새누리당의 승리로 끝나 박근혜라는 이름의 가치를 최대치까지 올려놓았다.

그리고 그 여세를 몰아 박근혜 의원은 18대 대선에 출마할 것임을 공식 선언하였다. 친이계+비박계의 여러 후보들이 경선에 참여했으나 박근혜라는 이름 앞에 모두 듣보잡 취급을 받았고, 새누리당의 대통령 후보 경선은 박근혜 의원의 싱거운 승리로 끝났다. 그리고 2012년 18대 대선에서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가열찬 대결을 펼친 끝에 51.6%의 득표율을 얻어 18대 대통령에 당선, 숙원을 풀게 되었다. 여촌야도 현상은 이 때 비로소 자리를 잡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행 헌법이 탄생한 9차 헌법 개정 후 제6공화국이 출범하며 역대 대통령들이 김영삼 대통령의 '문민정부'를 시작으로 김대중 대통령의 '국민의 정부', 노무현 대통령의 '참여정부' 등 정부의 가치나 목표를 나타낼 수 있는 슬로건 같은 정부 명칭을 붙여왔다.

이는 사실 대한민국 역사 속에서 이승만 대통령의 제1공화국, 장면 내각과 윤보선 대통령의 제2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제3공화국, 박정희 대통령의 유신 정권을 의미하는 제4공화국, 전두환대통령의 제5공화국, 또 후임 정부들이 명칭을 달리하여서 노태우 대통령 정권을 뜻하게 된 제6공화국처럼 새로운 대통령이 선출되어 새로운 행정부가 출범하면 공화국 호칭이 달라지며 별도의 호칭으로 정권을 구분해온 역사와 관련이 있다.

그러나 이는 엄연히 말해, 대한민국 헌법이 개정됨에 따라 공화국의 번호가 달라진 것이기에 새 행정부의 출범과는 관계가 없다. 이처럼 헌법이 달라져서 공화국을 구분해온 것이기 때문에 동일한 헌법 질서하에 있는 정부들이 대통령이 다르다는 이유로 명칭을 달리할 수 없다는 법률적 논쟁이 발생했다. 이러한 흐름에 따라 이명박 대통령 당시에는 '실용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다가 무산되었다. 후임인 박근혜 대통령 또한 별도의 명칭을 사용하지 않으며 박근혜 정부로 명칭이 결정되었다. 다만, 한동안 '민생정부'라는 명칭이 고려되었다.

사실 일반적인 경우에서 특정 정부를 칭할 때,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참여정부, MB 정부 등으로 칭하는 것은 명확한 의미가 잘 구분되고 의사소통에 어려움이 없다면 제재될 이유가 없다. 다만 헌법학적 관점에서 모두 현행 헌법 질서하에 있는 제6 공화국 정부라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정부별 명칭을 달리 하는 걸 꺼림을 명심하자.

2.1.4. 선거 이력

박근혜가 당대표로 선거 캠페인을 지휘할 때 한나라당은 승리를 계속 거두었다. 위의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를 시작으로, 2006년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2년 제19대 국회의원 선거까지 총 3번의 선거를 당대표 또는 비상대책위원장으로 진두지휘하면서 승리를 이끌었다.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한나라당이 121석을 가져서 열린우리당의 과반 의석 확보를 막는 데에는 실패했으나, 원래 탄핵 정국에서 열린우리당 180~200석 vs 한나라당 60~80석까지 밀릴 것으로 예상되던 것을 크게 반등해서 이 정도로 막아낸 것은 천막당사, 거대 여당의 폭주를 막을 야당의 존재 어필 등 박근혜 대표의 캠페인의 역할이 컸다고 평가된다.

제4회 전국동시지방선거는 워낙 열린우리당노무현 정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이 높아서 이기기 쉬운 선거였지만, 유일한 광역자치단체 접전지였던 대전광역시에서는 열린우리당이 앞서고 있었다. 그런데 박근혜 대표가 서울특별시에서 유세 도중 괴한이 휘두른 커터칼에 얼굴을 피습당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때 수술 직후 깨어난 박근혜가 당직자에게 첫 마디로 "대전은요?"라고 선거 판세를 물은 것이 큰 화제가 되고, 결국 대전광역시장 판세가 역전되어 한나라당 박성효 후보가 승리하였다. 이때 한나라당은 보수정당의 험지들인 호남과 제주를 제외한 광역자치단체 12곳을 모조리 이기는 역대 최고의 승리를 거둔다. 그나마도 제주특별자치도지사 연임에 성공한 김태환 지사는 공천 문제로 탈당한 한나라당 출신인지라 사실상 13곳을 얻은 셈이다.

2008년 제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는 이명박 대통령과 가까운 친이계가 한나라당 당권을 장악하면서, 친박계 현역 의원이 대거 공천에서 탈락한 이른바 '친박계 공천 학살'이 일어났다. 이에 불복한 친박계 인사들이 대거 탈당하여 이른바 친박 무소속[38]으로 출마하거나 친박연대[39]라는 당을 급조해 출마했고, 박근혜 본인은 탈당은 안 했으나 "저도 속았고 국민도 속았습니다."와 같은 발언으로 은근히 친박 세력을 지원했는데, 이것이 또 한 번 대박을 낸다. 친박연대는 무려 지역구 6석, 비례대표 8석(정당 득표율 13.8%)으로 14석이나 의석을 확보했고, 이와 별도로 친박으로 분류되는 약 16명의 무소속 지역구 의원도 당선되었다. 이들 친박 후보들 덕분에 한나라당은 최대 200석까지도 가능하다는 예상을 뒤엎고 반수를 조금 넘기는 대패를 당했고, 친박 세력은 한나라당 내의 친박 의원 10여 명과 함께 '한나라당 내 야당' 역할을 톡톡히 하게 된다.[40]

제19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박근혜는 본인의 오랜 지역구에 출마하지 않고 당해 대선 출마를 결심하고 대신 비례대표에 출마하여 당선되었고[41], 동시에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장으로도 추대되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제5회 전국동시지방선거,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2011 서울특별시 무상급식 주민투표, 2011년 하반기 재보궐선거까지 모든 선거들을 4연속으로 모조리 패배한 상태에 정권 심판론에 따른 당 지지도 추락까지 겹친 위기 상황이었다. 이대로는 앞으로의 총선과 대선에서 또 모두 필패는 뻔할 뻔자라는 위기감이 고조되면서 대권 주자였던 박근혜에 일시적으로 당권을 쥐어 주고[42], 강력한 쇄신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다. 그는 당명을 새누리당으로 고치고, 김종인, 이상돈 등 개혁적 인사와 이준석, 손수조, 이자스민, 문대성 등 젊은 인사를 영입하였으며[43], 경제민주화와 같은 개혁적 공약과 행보를 보였다. 때마침 민주통합당의 당내 공천 문제와 통합진보당과의 단일화 갈등에 결정적으로 민주통합당 후보로 출마한 김용민의 막말파문이 터지면서 선거 판세는 참패 위기에서 '(과반까진 힘들겠지만) 그래도 제1당은 할 수 있겠다' 정도로 회복되었다. 그런데 뚜껑을 열고 보니 152석의 단독 과반 확보.

이를 기반으로 박근혜의 선거의 여왕 이미지는 확고해졌으며, 그 후 자연스레 새누리당의 유일한 대선주자로 발돋움했고, 아버지 박정희 대통령의 독재에 대해서 사과하며 아버지와 선 긋기에 나서면서 차별화된 모습을 보이며 이미지 쇄신에 성공, 대한민국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참고로 대통령이 된 후에도 모든 선거들(재보궐선거 포함)을 새누리당의 승리로 이끄는 기염을 토하기도 했다.[44] 비록 선거를 직접 지휘하지는 않았지만, 필요에 맞게 자신의 이미지 어필을 잘 조절했다는 평.

그러나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야당분열되는 호기를 맞았음에도 새누리당 내부의 공천 파동, 진박쇼, 낡아빠진 북풍, 그간 보여온 무능한 모습들 때문에 유권자들의 민심이 돌아서면서 대통령에 당선된 이후 치른 선거에서 새누리당이 유례 없는 대참패의 모습을 보였다. 이는 향후에 남은 임기 동안 극심한 레임덕에 시달리게 되는 초석으로 작용되었다.

2.2. 제18대 대통령 선거

파일:대한민국 투표 도장 문양(흰색 테두리).svg 제18대 대통령 선거 후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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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005BA6,#FFC224> 기호 정당 이름 비고
1 새누리당 박근혜 당선
2 민주통합당 문재인
3 통합진보당 이정희 사퇴*
4 무소속 박종선
5 김소연
6 강지원
7 김순자
* 민주통합당 문재인 후보와 단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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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선 후보 포스터
준비된 여성 대통령
- 대선 당시 슬로건

선거캠프에서 처음 발표한 슬로건은 "내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였으나, 2012년 11월 18일 부로 "준비된 여성 대통령"으로 변경하였다. 새누리당 내부에서는 박근혜와 대적할 만한 인물이 없다시피 했기에, 경선에서는 이전과는 달리 84%에 달하는 득표율로 어렵지 않게 통과하며 새누리당 후보로 확정되었고, 본선에서는 민주통합당문재인 후보와 빅매치를 벌이게 되었다.

선거 과정에서 토론회에서 눌변을 보이기도 하며 안 좋은 의미로 화제가 되기도 했으며[45] 통합진보당 이정희 후보에게 면전에서 "박근혜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서 나왔습니다."라는 발언을 들으며 곤욕을 치렀다. 하지만 이는 도리어 보수층의 결집을 불러일으켜 박근혜 당선에 한 몫 하는 아이러니를 불러 일으켰다.

갤럽 여론 조사에 의하면 박근혜를 대통령으로 뽑은 가장 큰 이유는 여성이라서, 여성대통령 한 번 나올 때가 되었다는 이유 때문이었다.[46] # 또한 동정심이나 감정이입 등 감성적 동기 역시 꽤 큰 비중을 차지했다. 젊은 나이에 부모를 총격으로 잃었다는 것이 주된 이유. 또한 부친 박정희의 후광효과 역시 무시할 수 없어서, 세월호 참사 및 국정농단 사건이 벌어지기 전까진 콘크리트 층이 확고했다.

그러나 '선거의 여왕'이라는 이명이 무색하지 않게 복지 관련 공약을 선점하며 문재인 - 안철수 후보 단일화에도 단 한 번의 지지율 역전도 허용하지 않고 승세를 이어갔다고[47] 알려졌는데 사실은 선거 일주일 전 여론조사 공표 금지 기간 내 조사에 따르면 문재인 46.0%, 박근혜 45.8%로 잠시 골든 크로스가 있었던 게 2017년 9월 23일, 그것이 알고싶다에서 밝혀졌다. 2012년 12월 19일 실시된 제18대 대통령 선거를 통해 51.6%의 득표율[48]과 역대 최다 득표 수를 보이며 제18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대통령 선거 다음날 KBS에서 본인의 일생을 담은 3일 다큐를 방영하기도 하였다. 1편, 2편, 3편, 4편, 5편

18대 대선 진행 과정에서 국가기관의 여론 조작 의혹으로 인해 대선 무효 주장이 표면화되자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자세한 내용은 하단 참고.

2.3. 박근혜 정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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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1. 임기 중 주요 사건 및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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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2. 국정 농단 사태파면

선거의 여왕이라는 찬사와 함께 수많은 정치 경력을 거친 끝에 마침내 권력의 정점인 대통령직에까지 올랐던 영광의 정치인 박근혜. 그러나 그녀는 본인이 자초한 헌정 사상 최악의 국정 농단 사건이 만천하에 드러나며 결국 처절히 몰락하게 된다.

국정 농단 사건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문서를, 대통령직에서 파면된 과정에 대해서는 박근혜 대통령 탄핵 문서를 참조할 것.

3. 파면과 파면 이후

3.1. 파면

2016년 12월 9일 오후 4시 10분, 국회에서 탄핵 소추안이 가결되었으며, 2017년 3월 10일 오전 11시 21분 헌법재판소가 탄핵을 인용하면서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래 최초로 파면되었다. 헌재, 박근혜 대통령 파면 결정…재판관 8대 0 파면되면서 의전, 연금, 비서관 및 운전 기사, 기념 사업 추진비, 사무실 제공, 국립묘지 안장 등, 경호와 경비를 제외한 전직 대통령에 대한 모든 예우가 박탈당했다.[49] 2017년 3월 21일 전두환, 노태우, 노무현에 이어 헌정 사상 4번째로 검찰 조사를 받는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17년 3월 31일 새벽 3시,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 헌정 사상 3번째로 구속된 전직 대통령이 되었다. 2017년 11월 3일, 자유한국당으로부터 강제 제명 조치를 당했다.

대한민국 대통령 박근혜의 기존 퇴임일은 2018 평창 동계올림픽 폐막 전날인 2018년 2월 24일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탄핵 인용으로 인해 임기 중 11개월 14일을 채우지 못하고 불명예스럽게 물러났다.

탄핵당한 직후, 삼성동 자택으로 거처를 옮길 예정이었으나 삼성동 자택이 입주할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해 탄핵당한 당일에는 청와대에서 숙박하였으며 탄핵에 대해서는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다. 참모 중 하나는 "사실상 정치적 사형 선고인데, 이에 대한 메시지를 바라는 것은 너무 잔혹한 것이 아니냐?"고 말했다. "헌재가 정치적 판단을 했다"는 내부 의견도 있었다. 헌재 중 탄핵 심판은 대통령의 직무 위반 행위를 갖고 판단하므로, 정치성이 아예 배제될 수 없다. 법리를 저버리고 정치적으로만 판단하는 것은 안 되겠지만, 탄핵 심판에 정치성이 가미되는 건 불가피하다. 애초에 박근혜 변호인단도 태극기 집회와 촛불 집회의 정치적 대립 싸움으로 재판을 몰고 가려 했다. 본인들의 변호 과정에서는 정치적 이념을 들먹여놓고 막상 판결에 정치성이 가미됐다고 비판하는 건 모순이다.

이와 같은 행보에 대부분 언론에서는 박근혜 대통령의 침묵에 대해 비판했다. 국론 분열을 막기 위해서는 최대한 빨리 수용 의사를 밝혀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감정인지 아니면 불순한 의도인지 계속해서 시간을 끌어 혼란을 유발하고 있다는 것이다.[50] 실제로 박사모 등에서는 탄핵 이후 시간이 지날수록 폭력적 양상이 짙어지면서, 사고로 인한 사망자가 3명으로 불어났다.

파면됨으로써 대통령직을 박탈당했으면 청와대를 떠나야 하지만, 탄핵이 인용된 지 이틀이 되도록 청와대를 떠나지 않았으며, 이에 노동당은 박근혜를 건조물 침입 (정확히 말하자면 퇴거 불응) 혐의로 형사고발했다. 본디 청와대는 군사적으로 매우 중요한 시설이기 때문에, 이 시설과 관련된 직위에서 물러나면 무조건 퇴거해야 한다. 일각에서는 "증거 은폐를 위해 이틀이나 청와대에 있었던 게 아니냐"는 말도 나오고 있다. 한편, 청와대에서 퇴거하게 되면서 키우던 진돗개 9마리가 주인을 잃을 위기에 놓이기도 했다. #

마침내 3월 12일 오후 7시 16분에 청와대에서 퇴거해서 독립문, 서울역, 삼각지역, 반포대교를 거쳐 오후 7시 39분에 삼성동 자택에 도착했다.[51][52]

삼성동 자택으로 이동하는 도중 취재진들이 뒤쫓는 모습이 추격전을 방불케 했다. 취재진들이 이동하는 도중 올림픽대로에 진입했는데, 자동차 전용 도로였기 때문에 오토바이로 이동하던 취재진들은 따라가지 못했다. 자택 앞에는 김진태, 조원진 등의 친박계 자유한국당 의원들과 박근혜 지지자들 500명 가량 모여 "탄핵은 무효"라고 외치며 모여 있었으며, 경찰은 2개 대대(8개 중대, 800여 명)를 배치하였다. 일부 지지자들은 대형 태극기로 생중계하는 기자들의 카메라를 막거나, 소란을 피웠다. 박근혜는 2번째 차량에서 내린 뒤, 친박계 의원들과 지지자들에게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고 공식 입장 발표 없이 7시 39분에 자택 안으로 들어갔다. 이후 집 안에서 인터뷰를 했고, 탄핵 인용 이후 처음으로 간단히 입장 표명을 했다.

아래는 민경욱 의원의 대독을 통해 밝힌 입장 전문.
제게 주어졌던 대통령으로서의 소명을 끝까지 마무리하지 못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저를 믿고 성원해주신 국민 여러분께 감사드립니다.
이 모든 결과에 대해서는 제가 안고 가겠습니다.
시간이 걸리겠지만 진실은 반드시 밝혀진다고 믿고 있습니다.

사실상 헌법재판소의 판결에 불복을 선언한 것으로 해석된다. #, # 친박계 의원 민경욱은 헌재 결과 승복한다는 말이 없다고 말했다. # 앞으로의 검찰 수사를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승복한다는 말은 할 수 없다면 이미 지지자가 3명이나 사망한 상황이므로 적어도 지지자들의 안전을 위해서 집회를 자제해달라고 하는 게 마땅한 도리인데도 그것조차 없었다. 갈등이 계속 나오든, 유혈 사태가 일어나든 상관이 없다는 뜻일 뿐이다.

3.2. 구속

그리고 마침내 3월 21일, 박근혜가 피의자 신분으로 서울중앙지검에 출석하는 것이 결정되었다. 수사 받은 혐의가 뇌물수수 등 13가지에 달하기에 그만큼 오랜 시간이 걸린다.

3월 21일 오전 9시 16분에 삼성동 자택에서 출발하였으며 2호선 선릉~서초구간 및 테헤란로를 따라 이동하였다. 경찰 경호 및 교통 통제 덕분에 7분만에 서초역 인근 서울중앙지검에 도착했으며, 포토라인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국민 여러분께 송구스럽게 생각합니다. 성실하게 조사에 임하겠습니다."

그리고 곧바로 조사실로 올라갔다. 이 과정에서 검찰 수뇌부와 티타임을 가진 후 조사가 시작되었다고 한다. 탄핵 이후 검찰 수사에 대한 상세한 사항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검찰을 참고.

3월 27일, 전두환, 노태우에 이어서 3번째 전직 대통령 신분으로 구속 영장이 청구되었다. 사유는 다음과 같다.
  • 도주 및 증거인멸 가능성 매우 높음.
  • 최순실 및 그 일당들과의 형평성 고려.
  • 대통령에서 파면될 정도의 무거운 혐의. 애초에 불구속일 정도의 혐의였으면, 대통령에서 파면당하지도 않았다.
  • 공무상 기밀을 누설한 것은 국가 존치에 큰 악영향을 끼침.
  • 권력 남용이 너무 심함.

이에 대해 박근혜 본인은 "매우 억울하고 충격적"이라는 반응을 보였다고 한다. 본인이 기자들에게 직접 밝히거나, 하다못해 변호사를 통해 밝힌 것도 아니라 측근에게 전해진 것으로 알려진 내용인 만큼 적당히 걸러 들을 필요는 있지만, 지금까지의 언행이나 정황을 볼 때[53]

또한 구속영장이 청구된 날 자신의 팬클럽인 '근혜동산'의 회장에게 전화를 걸어 ''앞으로도 열심히 활동해주길 바란다"는 메시지를 전달하였다.

2017년 3월 31일, 강부영 판사에 의해 구속 영장이 발부되었다. 서울구치소에 수감되었고 수인번호는 503번.

1심 선고는 2018년 4월 6일에 내려졌다.

3.3. 구속 이후

9월 13일 자유한국당 혁신위원회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서청원, 최경환 의원에게 '탈당 권유'를 할 것을 지도부에 권고했다. 박 전 대통령은 별 다른 입장을 밝히지 않았다.

박근혜 전 대통령의 구속 만기일(10월 16일)을 앞두고, 박 전 대통령이 "자택에 내가 좋아하는 능소화배롱나무를 심어달라"거나 인테리어에 관련해 여러 부탁을 했다고 한다. 법률지원단 관계자는 '박 전 대통령이 구속 만기 출소에 대해 큰 기대를 가진 것은 아니다', '각오를 하고 계신 듯 하다'고 말했다.#

9월 26일 검찰이 법원에 박 전 대통령에 대한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해달라고 요청했다. 박 전 대통령 변호인 유영하 변호사는 검찰이 추가로 영장을 발부해달라고 한 공소사실인 SK와 롯데 관련 뇌물 사건에 대해 "구속 영장은 수사 필요성에 따라 발부되는데, 재판 단계에서 이미 심리가 끝난 사건에 대해 추가 영장이 필요한가"라며 반대 의견을 밝혔다. #

9월 27일 박 전 대통령 측이 병원 진료기록을 떼간 것으로 확인됐다. 불구속 재판을 받아야 하는 근거로 삼으려는 듯하다. #

10월 11일 교정당국과 정치권 등에 따르면, 10.6m² 크기의 독방에서 지내는 박 전 대통령은 재판이 열리지 않을 때 주로 소설 대망을 읽는다는 기사가 나왔다고 한다. 측근들에 따르면, 자신을 도쿠가와 이에야스에 투영하는 것 같다고. 박 전 대통령은 2007년 대선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한나라당 대선 후보 자리를 내준 뒤에도 이 책을 읽었는데 당시에도 측근들은 “박근혜 전 대표 심정이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비슷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

2017년 10월 13일, 1심 재판부의 직권으로 구속 기간이 연장되었다. 이로써 박근혜는 1심 선고가 나오지 않는 한, 2018년 4월 16일까지 구치소를 나올 수 없게 되었다. 참으로 아이러니하게도 연장된 만기일이 탄핵되는데 한 일익을 한 세월호 침몰 사고 4주기가 되는 날이다. 법원은 1심 선고일을 2018년 4월 6일로 정했다.

10월 16일 박근혜 전 대통령 변호인측이 법원의 구속영장 재발부 결정에 반발해,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 할 것을 밝혔다. 유영하 변호사는 "무죄 추정과 불구속 재판이라는 형사법의 대원칙이 힘없이 무너지는 현실을 목도하면서 피고인을 위한 어떤 변론도 무의미하다는 결론에 이르렀다"는 말로 사임 이유를 설명했다. 변호인단이 전원 사임한 이유로 '유죄 심증 형성'을 막기 위해, 보석을 청구하기 위한 포석, '정치적 희생양'이라는 프레임을 각인 시키기 위해 등 여러 추측이 나왔다.

박근혜는 구속 연장이 결정되자 "법치의 이름을 빌린 정치 보복은 제게서 마침표가 찍어졌으면 한다. 이 사건의 역사적 멍에와 책임은 제가 지고 가겠다"며 자신이 모든 걸 떠안겠다는 뜻을 드러냈다. 그러면서 "저를 믿고 지지해주는 분들이 있고 언젠가는 반드시 진실이 밝혀질 테니 포기하지 않겠다"라는 입장을 전하며 사실상 재판 보이콧을 선언했으며, 실제로 해당 발언 이후 재판에 출석을 하지 않고 있다. #

3.3.1. 자유한국당 제명

10월 20일 자유한국당 윤리위원회에서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탈당 권유' 징계를 확정했다. 열흘 내에 박근혜가 스스로 탈퇴하지 않으면 10월 30일에 자동 제명된다. # 박근혜는 무조건 자유한국당에서 퇴출된다는 뜻이다.

11월 3일 박근혜의 최측근으로 불리며 문고리 권력을 휘둘렀던 정호성, 이재만, 안봉근 3인방이 국정원의 특수 활동비를 주기적으로 상납받았고 그중에서 5억 원이 20대 총선에서 진박 공천을 위한 여론 조사에 쓰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더욱이 이재만 전 청와대 비서관이 자신은 단순한 전달책이라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으로 확인되면서 박근혜는 경제 공동체인 최순실을 통해 기업들로부터 뇌물을 수수했다는 혐의에 대한 수사 및 재판을 받은 것에 이어서 국정원으로부터 직접적으로 뇌물을 수수한 것에 대한 수사도 받게 될 것으로 보이면서 국정농단 사건의 판이 새로 짜여졌다.

그리고 같은 날, 홍준표 대표는 당대표 직권으로 박근혜를 자유한국당에서 제명시켰다. 대통령 출신으로 소속 정당으로부터 강제 출당된 것은 헌정사 최초다.[54] 그러나 박근혜 본인은 재판을 보이콧하고 자신의 변호인단을 포함한 외부인들과의 소통을 일체 차단하고 있는 상황이라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불명이다.
파일:박근혜 20180121.jpg
최근 모습 (2018년 1월 21일)[55]

국정원 특활비 수취 건으로 추가 혐의를 받게 되자 2018년 1월 4일에 유영하를 변호인으로 재선임했다. 공식 접견도 재개했다고 한다. 검찰로부터 2018년 2월 27일 징역 30년 형이 구형되었다.

3.3.2. 공천 개입 혐의로 추가 기소

2018년 2월 1일 조윤선, 김기춘 등과 함께 추가 기소되었다. 사유는 6.4 지방선거 당시 친박계 공천 개입 혐의이다. #

3.3.3. 1심 재판 중계방송

박근혜1심 재판이 2018년 4월 6일 오후 2시 10분에 텔레비전을 통해서 생중계가 되었다. 최순실, 우병우 등의 재판과는 달리 한때 대한민국의 대통령이었던 인물이고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화제성이 큰 인물이라는 점이 감안되어 재판 과정을 방송국에서 특별 프로그램으로 편성했다.

박근혜의 인물 특성 상 무죄 석방이나 집행유예가 아닌 이상 무조건 항소를 할 것으로 보이며 이 재판은 장기전 양상에 돌입할 확률이 매우 높아졌다.

3.3.4. 검찰의 항소 및 확정판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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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찰 측은 항소에 들어갔다. 검찰은 뇌물수수 혐의를 무죄로 인정한 것에 불복했고 박근혜의 변호인은 박근혜 측은 판결이 너무 가혹하다며 판결에 불복했다.

한마디로 검찰 측은 아무리 못해도 징역 30년 이상은 무조건 때려야 한다"라는 입장인 반면, 박근혜 측은 그래도 한 때는 대한민국 대통령이었는데 너무한 것 아니냐"라는 입장인 셈이다. 그리고 항소장은 박근혜의 여동생인 박근령이 냈다. 그러나 정작 박근혜 본인은 항소 포기서를 제출해 항소하지 않았다. 한마디로 무효. 항소는 본인이 해야 효력이 있다. 직계 가족이 대신 항소장을 낼 수는 있으나 어디까지나 본인이 항소 의사가 있을 때 대리해서이지, 피고의 의사를 거스르며 가족이 항소할 순 없다.

검찰 측에서 항소가 들어간 이상 2심은 불가피해 보인다. 항소를 하지 않아 의외라는 반응이 나왔지만 이미 자신이 받고 있는 재판을 '정치 재판'으로 규정한 만큼 예상되는 행보였다는 말도 나왔다. 일각에서는 법리적으로 다툴 여지가 없는 만큼 사면을 노린 정치적인 행보라고 분석했다.

2018년 7월 20일, 2심에서 징역 30년이 구형되었다.

2018년 8월 24일, 국정농단 사건 2심에서 기존 형량에서 1년 더 늘어난 25년형과 벌금 200억 원을 선고 받았다.

2018년 11월 28일 자정, 박근혜의 상고 포기로 공직선거법 위반으로 선고된 징역 2년이 확정되었다. 이는 관련 재판 중 첫 확정 판결이다. #

4. 기결수

구속 기간이 만료됨에 따라 2019년 4월 17일 0시 자로 기결수로 신분이 전환되었다. 기존 구속 사유인 국정농단 사건과는 별개인 공직선거법 위반에 따른 복역이기에 미결 구금일수는 산입되지 못한다. 따라서 국정농단과는 별개로 최소 2021년 4월 16일까지는 복역해야 한다. 다만, 국정농단 재판이 진행 중이라 노역에서는 제외된다고 한다.

비슷한 시기에 허리 통증 등을 이유로 검찰에 형집행정지를 신청했으나 기각되었으며, 9월 초에 신청한 2번째 형집행정지 요청도 기각되었다. 그러나 어깨근육 파열이 심각해 수술이 불가피하다는 진단이 나와 이틀 뒤 법무부에서 입원치료 허가가 났으며, 이에 따라 900일 만에 구치소 밖에서 생활하게 되었다. 그동안 통원치료를 받던 서울성모병원의 VIP실에 입원하게 된다. 국내 최고액 병실로 유명하여 요금은 하루 300만 원에 달한다. 형 집행 정지가 아니므로 구속 기간에 포함되며, 따라서 일과는 구치소와 똑같을 것이라고 한다.

9월 16일 입원을 위해 서울구치소를 나왔는데, 무려 3개월간 병원에서 입원 및 재활치료를 할 계획이라는 보도가 나가자 특혜 시비가 일었다. 일반인이 같은 병명으로 입원하는 기간은 길어야 2주이며, 다른 재소자의 경우 겨우 4일 입원한 뒤 다시 구치소로 복귀해 통원 치료를 받은 바 있는데 왜 박근혜만 장기 입원을 하냐는 것. 법무부는 별다른 문제가 없다는 입장만 내놓고 있다.

탄핵으로 전직 대통령 예우가 박탈되었기 때문에 병원비는 박근혜 본인이 부담하게 된다. 3개월 풀로 입원할 경우 추산 병원비는 무려 3억 원인데, 이에 민경욱 전 의원은 박 전 대통령의 병원비를 모금하자는 주장을 펼쳤다.

4.1. 옥중 서신

제21대 총선을 약 1달 남짓 앞둔 2020년 3월 4일, 옥중 서신을 통해 메시지를 발표하였다. 기사.

아래는 전문.
국민 여러분, 박근혜입니다.
먼저 중국으로부터 유입된 신종 바이러스 감염증인 ‘코로나19’의 국내 확진자가 수천 명이나 되고 30여명의 사망자까지 발생했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특히 대구, 경북 지역에서 4천명이 넘는 확진자가 발생하였고 앞으로 더 많은 확진자가 발생할 수 있다고 하니 너무나 가슴이 아픕니다. 부디 잘 견디어 이겨내시기를 바랍니다.
국민 여러분. 저는 지난 2006년 테러를 당한 이후 저의 삶은 덤으로 사는 것이고 그 삶은 이 나라에 바친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비록 탄핵과 구속으로 저의 정치 여정은 멈추었지만 북한의 핵위협과 우방국들과의 관계 악화는 나라의 미래를 불안정하게 만들 수 있기에 구치소에 있으면서도 걱정이 많았습니다.
많은 분들이 무능하고 독선적인 현 집권 세력으로 인하여 살기가 점점 더 힘들어졌다고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고 호소를 하였습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정말 나라가 잘못되는 것이 아닌가 라는 염려도 있었습니다. 또한 현 정부의 실정을 비판하고 견제해야 할 거대야당의 무기력한 모습에 울분이 터진다는 목소리들도 많았습니다.
하지만 저의 말 한 마디가 또 다른 분열을 가져올 수 있다는 우려에 침묵을 택했습니다.
그렇지만 나라 장래가 염려되어 태극기를 들고 광장에 모였던 수많은 국민들의 한숨과 눈물을 떠올리면 마음이 편하지 않았습니다. 진심으로 송구하고 감사합니다.
국민 여러분, 나라가 전례 없는 위기에 빠져 있고 국민들의 삶이 고통을 받고 있는 현실 앞에서 정치적 유불리에 따라 이합집산을 하는 것 같은 거대 야당의 모습에 실망도 하였지만 보수의 외연을 확대하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으로 받아들였습니다.
나라가 매우 어렵습니다. 서로 간의 차이가 있을 수 있고 메우기 힘든 간극도 있겠지만 더 나은 대한민국을 위해 기존의 거대 야당을 중심으로 태극기 들었던 여러분 모두가 하나로 힘을 합쳐주실 것을 호소드립니다.
서로 분열하지 말고 역사와 국민 앞에서 하나 된 모습 보여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애국심이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습니다. 저도 하나가 된 여러분들과 함께 하겠습니다.

해당 메시지가 공개된 이후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계는 화색을 표하고 있다. 아예 2016년 총선 공천 내분 직후부터 선거의 여왕 어디갔냐'며 반박(反朴)으로 돌아선 이들도 이번 옥중 서신 공개 이후엔 선거의 여왕이 돌아왔다는 긍정적인 표현까지 아끼지 않고 있다. # 그럴 만도 한 것이 탄핵 사태로 분열된 보수계가 아직까지도 좀처럼 통합을 이루지 못한 데에는 여전히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심에 있었기 때문.

사실상 "보수 궤멸"이라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치러진 제19대 대선에서 선거비 보전만 받아도 성공이라던 초반 상황을 딛고 저력을 확인한 자유한국당(현 미래통합당)은 외연 확장을 시도 하려 해도 탄핵 찬성파와 반대파 중 어느 쪽을 품고 갈 것인지를 좀처럼 정하지 못했다. 모두 품자니 내부 반발이 강력했고, 그렇다고 한쪽을 잘라내자니 너무 아까운 상황. 결국 수 년째 결정하지 못하고 갈팡질팡하고 있는 상황이었다.[56] 아예 2018년 지방 선거에선 난립하는 당내 갈등을 봉합하지 않고 방치 하고있다가 신(新) 북풍까지 맞물려 그야말로 대패하기까지 했다. 그나마 2019년, 홍문종을 대표한 친박계가 알아서 당 내에서 떨어져 나갔고, 바른미래당손학규의 아집으로 분열하며 이 틈을 타 바른정당계와 기타 보수 인사들을 불러모아 미래통합당을 출범 시켜 어느정도 탄핵찬성파를 위시한 재결합은 마친 상황이었다. 그러나, 여전히 당 내에서 떨어져 나간 친박계가 총선에서 보수 표를 갉아 먹을 것이란 위험요소가 아직 도사리고 있었고[57] 이런 시점에서 탄핵 당사자인 박근혜가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뭉쳐달라'는 의미로 보여지는 메시지를 보냈으니 반색하는 분위기인 것은 당연지사. 반면 태극기 부대로 불리는 박근혜 골수 지지자에 기대 창당한 자유공화당은 하루아침에 존속 의미를 상실했다.

한편 박근혜의 옥중 서신으로 인한 진보계의 파장도 상당하다. 아예 민주당과 정의당은 곧바로 반발했다. 상기한 바와 같이 총선을 앞두고 보수 세력의 분열 원인이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완전히 뭉칠 근거를 제시했기에, 비례 정당 문제로 갈등을 겪고 있는 진보계에서 반발을 표하는 건 어쩌면 당연하기도 하다. 특히 정의당은 선거법위반으로 옥중의 박근혜를 고발하기에 이른다. 기사. 서신에서 언급한 '거대 야당'이라는 표현은 미래통합당을 가리키는 것이 명백한데, 이를 과연 선거법 위반으로 볼 수 있느냐가 쟁점이 될 듯하다.[58] 박근혜 측도 선거법 위반을 의식하여 일부러 미래통합당을 명시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그럼에도 일반적으로 미래통합당을 연상시키는 것 자체로 위법이 될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의외로 북한에서도 빠른 반응을 보였는데, '마녀의 옥중주술'이라는 표현까지 쓰며 강하게 비판했다. 기사.

이 서신이 선거에 어떤 영향을 끼칠지는 불투명하다. 요약하자면 양날의 검으로, 성공한다면 보수 통합. 나름대로 총선 분위기 이후 쇄신과 합당을 거듭하며 중도층 지지를 끌어오려 하고 있던 미래통합당으로서는 보수 완전 통합의 명분이라는 긍정적인 요소가 생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되려 역효과만 난다. 이들로 인해 공천 문제가 발생하면 반대로 그간 포용을 위해 노력하던 중도층의 지지를 도로 상실할 위험이 있으며, 민주당에게는 위기감이 반대로 지지층이 결집할 수 있다는 기대감을 갖게 해준다는 분석도 있다. 대중적인 반응은 박근혜 전 대한민국 대통령이 의외로 구속 수감 이후 정치적인 메시지를 일절 내지 않고 있던데다, 문재인 정부가 여러 악재가 겹치기도 했고 정치력에 대한 실망감이 높아진 시점에서의 메시지라 여론이 마냥 부정적이지만은 않은 상황. 일각에서는 '이번 총선은 문재인 vs 박근혜가 될 것이다'는 관측도 내놓고 있다. 때문에 이 메시지가 대중에게 어떻게 비쳐졌는지가 총선에 상당한 영향을 끼칠 것이라는 점은 자명해 보인다.

하지만 이러한 박근혜의 옥중 서신이 무색하게 미래통합당의 공천 결과는 친박을 배제하는 움직임을 보였다. 우선 친박계로 분류되는 김순례, 윤상현[59], 백승주, 장석춘, 정태옥, 김재원[60] 의원 등이 줄줄이 배제되었고, 황교안 대표는 친박세력으로 불리는 자유공화당과의 연계를 거부하였으며, 심지어는 미래한국당 비례대표 공천에서 옥중 서신을 전달한 유영하 변호사마저 탈락시켰다. # 이러한 결과는 미래통합당이 박근혜의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워지고 박근혜와의 연계가 도리어 독이 된다는 판단 하에 이루어진 결정이라 분석되고 있다. 결국 박근혜 본인이 원하는 미래통합당을 중심으로 한 보수 통합이 이루어지지 못할 가능성이 커진 것이다.

4.2. 21대 총선 이후

결국 2020년 4월 15일, 21대 총선더불어민주당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나면서 그녀가 희망하던 보수통합도 정권심판도 이루어지지 못했다. 또한 그녀가 통합의 구심으로 지목하고 지지했던 미래통합당은 친박계 인사들을 공천에서 대거 배제해 보수 진영에서 가진 박근혜의 영향력도 더 이상 예전만 못하다는 것을 증명했다. 친박이 기대하던 예전 선거의 여왕은 이미 지나가버린 옛 영광이자 그들만의 허상이었고, 전략적으로는 별 소득이 없었다.

박근혜에게는 더 악재인 것이 박근혜와 경제 민주화로 큰 갈등을 겪은 김종인이 비상대책위원이 되었고, 그 김종인이 최대한 비박계들을 지도부에 선임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게다가 박근혜와 불편한 관계를 맺은 홍준표무소속으로 수성구 을에서 당선되었다.

유승민친유계도 세를 확장하였다. 특히 박근혜의 홈그라운드인 대경권에서 류성걸, 강대식, 김상훈[61], 김희국[62]이 경선에서 친박들을 이기고 본선에서도 여유롭게 당선되었다. 부울경에서도 조해진, 하태경 등이 당선되었고, 수도권에서는 김웅, 김은혜, 권영세, 유경준, 유의동이 당선되었다. 유승민 본인도 친박들의 바람과 달리 측근인 강대식이 당선되면서 지역 기반에서 아무런 타격이 없었다.

친이계도 주호영, 박진, 강기윤, 장제원[63], 정운천[64], 이채익, 류성걸[65], 김희국[66], 조해진[67], 김은혜[68], 윤한홍[69], 박성중[70], 권성동[71], 정진석[72] 등이 당선되며 세력을 확장하게 되었다.

친이와 관련해서 박근혜, 친박, 친황에게 더 무서운 사실은 이들친유, 소장파, 친무, 친홍과 동맹을 맺고 친박, 친황을 견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미 친이계 인사 중 계파가 겹치는 인사도 있고, 중진인 인사도 있다. 당장 現 국민의힘 원내대표20대 총선 당시 컷오프된 후 무소속으로 당선된 친이계 중진인 주호영이다.

정의당이 박근혜의 옥중 서신에 대해 공직선거법 위반이라며 검찰에 고발하였으나, 서울중앙지검에서는 무혐의 결론을 내렸다.#

2021년 1월 1일 신년을 맞아 이낙연 국무총리가 이명박, 박근혜에 대해 사면을 건의하겠다고 발언했다. 이에 홍준표 의원이 처음으로 사면론에 대해 긍정적 견해를 표했다. #

2021년 1월 14일, 대법원에서 징역 20년·벌금 180억원이 최종 확정되었다. 기사. 중간에 사면되지 않는 한 2039년 3월 30일까지 교도소에서 지내게 되었다.

4.3. 2021년 재보궐선거 이후

국민의힘이 압도적인 지지를 얻으면서 사면론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재보궐선거에서 당선된 오세훈, 박형준 두 후보는 문재인 대통령과의 오찬에서 박근혜의 사면을 바로 건의했다.

2021년 6월 18일에는 청와대가 박근혜를 광복절특별사면하는 것이 확정되었다는 기사가 보도되어 논란이 되었다. 그러나 청와대는 곧 이를 부정하였고, 매일신문을 제외한 대부분의 제도권 언론사들은 이를 언급하지 않았다. 매일신문 기사. 결국 2021년 광복절에 사면은 없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유력 후보 중 하나인 최재형 전 감사원장이 즉각 석방을 요구했으며, 홍준표 의원도 계속해서 박근혜의 석방을 주장했다. # 윤석열 전 검찰총장 또한 연세도 있고 여자분인 대통령을 장기 구금하는 점은 국민들이 안타까워한다 꼬집었으며, # 추가로 박근혜 수사 비판을 이해하고 송구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

이때까지만 해도 박범계는 박근혜의 사면은 시간상 불가능하다는 입장을 밝혔다.

4.4. 특별사면복권

2021년 12월 24일 한명숙총리와 함께 사면 명단에 포함됐다. 이번 특별사면으로 4년 9개월 만에 수감 생활을 마치게 됐고, 2021년 12월 31일 사면되었다. 본래 법무부는 특별사면을 검토하지 않았으나 박근혜의 건강이 심하게 악화되어 문재인 대통령이 특별사면을 검토해서 이후 사면이 확정되었다고 한다.#[73]#

이번 복권으로 박 전 대통령은 제20대 대통령 선거에서 투표할 수 있게 되었다. '사면법'에 근거한 '복권'은 '공민권(선거권·피선거권)'을 회복한다는 것일 뿐 기존에 선고된 형의 효력을 잃게 하거나 기존에 박탈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가 회복된다는 의미가 아니다. 복권이 되더라도 탄핵되었다는 사실이나 '형의 선고를 받은 일이 있는 자'라는 사실은 변하지 않고, 예우의 박탈 또한 유지된다. 따라서 박 전 대통령은 사면 이후에도 경호 이외에 법령에 규정된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는 누릴 수 없게 된다.[74]

경호와 경비의 경우엔 탄핵이나 사면과 상관없이 원래부터 법령(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및 시행령)이 정한 기간만큼 제공받는다. 이는 탄핵되거나 금고 이상의 형을 받은 대통령이라도 최고 수준의 국가기밀을 다뤘던 인사라는 점에서, 국익에 손해가 되는 일을 막기 위해 적절한 수준의 경호는 필요하다는 취지에서이다. 이전에 먼저 예우를 박탈당한 전두환, 노태우 두 전직 대통령들도 사망할 때까지 경호와 경비를 받았다. #

문재인 대통령의 박근혜 전 대통령 사면 결정에 대해 서던포스트가 CBS 의뢰로 조사한 여론조사에선 잘한 결정이란 응답이 59.8%, 잘못된 결정이란 응답이 34.8%로 집계됐다. 20대(27.8%:64.2%), 30대(44.8%:50.8%)에선 사면을 부정적으로 보는 비율이 많았는데 40대(59.0%:34.9%), 50대(66.7%:27.9%), 60대 이상(82.9%:13.8%)에선 연령대가 높아질수록 사면을 긍정적으로 봤다.#

박범계 법무부 장관은 "국민 대화합을 이뤄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박근혜 전 대통령을 특별사면 및 복권[75]하기로 했다."고 밝혔다.#

박근혜 본인은 이에 대해 유영하 변호사 등 대리인을 통해 문재인 대통령과 정부 당국에 사의를 표한다고 했다.#

송영길 더불어민주당 대표는 "특별사면은 대통령 고유의 권한이고 민주당은 이를 존중한다." 라고 밝혔다. #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선후보는 사면 결정은 존중하되, 진심어린 사과가 있어야 한다고 밝혔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는 "정치하는 모든 사람에게 강한 법리가 적용될 수 있다는 것을 새기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밝혔고#, 윤석열 국민의힘 대선후보는 늦었지만 환영한다며 건강이 회복되길 바란다고 전했다.#

정의당은 촛불정신을 배신했다며 강력히 반발했다.보도자료

안철수 국민의당 대표는 환영의 의사를 밝히며 이명박 전 대통령도 사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한편 한명숙 전 총리의 복권과 이석기 전 의원의 가석방에 대한 물타기가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내비췄다.# 다만 박근혜 사면에 전부 묻혔고 현재 대부분의 교도소가 포화 상태라 강력범이거나 감옥 내에서 문제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면 형량의 3/4 이상을 산 수형자를 가석방하는 추세라 별 반응은 없었다.

용혜인 기본소득당 원내대표는 명분 없는 사면이라고 주장했으며#, 오준호 대선후보는 사면과 복권을 철회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조원진 우리공화당 대표는 "정의를 되찾는 국민의 승리"라며, 박 대통령 명예회복운동을 국민과 함께 전개하겠다고 밝혔다.#

세월호 사건 유족 단체들은 문재인 정부가 촛불을 배반했다고 주장하며 박근혜 사면 결정을 강하게 비판했다.#

5. 사면 이후

당초 보유했던 내곡동 사저는 팔린 상태로, 보유한 집이 없는 상황이다. 우선 건강을 위해서 삼성서울병원에서 입원 치료부터 할 예정이다. 내곡동 사저의 낙찰자인 아이오케이컴퍼니는 박 전 대통령에게 건물을 임대해줄 의향을 내비쳤고, # 남동생 박지만 (주)EG 회장도 거처를 알아보는 중이다. # 참고로 이때 낙찰된 금액으로 추징금은 완전히 충당되었다.

건강이 좋지 못하고 공매된 자택에서 짐을 모두 창고로 옮긴 상태라 한동안은 병원 생활을 계속할 전망이다. 원래 한 달 입원이 예정되었으나, 6주 더 연장될 예정이다. 서울구치소에 반입했던 개인 짐들은 대리인이 찾아갈 예정이며, 퇴원 후 거주할 자택은 여러 곳에서 알아보고 있는 중이다. 윤상현 의원의 말에 따르면 1차적으로 내곡동 집을 두고 협상하고 있지만, 제3의 장소를 배제하는 것은 아니라고 한다. 또한 대국민 메세지가 조만간 나올 예정이지만, 특별히 정치인을 만나는 등 대외 행보는 자제하겠다는 입장을 밝혔다.

2022년 2월 11일에 퇴원 후에는 본인의 정치적 기반 지역이었던 대구광역시 달성군으로 낙향하기로 했다는 소식이 나왔다. 기사.

2022년 3월 5일에는 입원 중인 삼성서울병원 인근에 위치한 제20대 대통령 선거 사전투표소에서 남색 코트를 입고 사전투표를 마쳤다고 한다. 이 남색 코트를 입고 투표에 참여한 것을 보고 이재명을 지지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도 있었지만[76], 박근혜 측은 그저 평소에 입던 옷일 뿐이라며 부인했다. #

2022년 3월 24일에 퇴원했고, 먼저 국립서울현충원에 들러 아버지인 박정희 전 대통령과 어머니인 육영수 전 영부인의 묘역에 참배를 한 뒤 대구 사저로 내려가서 인터뷰를 했다. 퇴원할 때는 삼성병원 앞에 일반인 지지자들 뿐만 아니라 황교안 전 국무총리를 비롯해서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 조윤선 전 문화체육관광부 장관, 윤상현 의원, 김재원 최고위원 등 수많은 친박인사들도 마중나왔었다. 인터뷰 도중 한 남성이 10m 근처에 유리병을 던지는 소동이 있었지만 곧 경호처 경호원들에 의해 제지당했다. 유리병을 던진 범인은 현행범으로 체포되었다. 이미 과거에 커터칼 테러를 당한 경험이 있던 박근혜 전 대통령은 돌발상황에 크게 당황하지 않고 덤덤하게 인터뷰를 이어갔다. 이웃들에게 이사떡도 돌렸다고 한다.

이준석 국민의힘 대표가 비서실장인 박성민 의원을 통해 난을 전달하려 했지만 "뻔뻔스럽다", "병 주고 약 주냐" 라는 등 박근혜 지지자들의 항의를 받고 한 차례 전달에 실패하고 철수하는 일이 있었다.#[77]

2022년 4월 1일 자신의 법률대리인인 유영하 변호사가 대구광역시장 선거에 출마선언을 함에 따라, 박근혜가 유영하 변호사의 후원회장을 맡기로 하면서 지지선언을 했다. 그러나 정작 국민의힘 경선에서는 홍준표가 승리하고 유영하는 꼴찌로 탈락하여, 박근혜는 찻잔 속 태풍 그친 '선거의 여왕' 등판이라는 평을 들어야 했다.

5.1. 윤석열 정부 하

2022년 5월 10일 윤석열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였다. 윤대통령의 취임사를 경청하며 고개를 끄덕이는 모습을 보였으며 이날 썬글라스를 쓴 모습이 국민들에게 화제를 모았다. 참석 후 전직 대통령으로서 처음으로 취임 대통령의 배웅(환송)을 받으며 대구 사저로 귀가하였다.[78]

그리고 그 후 소식이 없다가 약 3주 후, 지방선거 사전투표를 위해 투표소를 찾아 투표를 하고 간 모습이 포착되었다.

지방선거 이후 또 다시 무소식이었다가 8월 말에 강남구의 한 호텔 중식당에 방문한 모습이 포착되었다.#

2022년 10월 25일 박정희 전 대통령 내외 묘역에 참배했다. 이 날 저녁까지 달성군 사저로 귀가하지 않은 것으로 확인됨에 따라 참배 이후 서울에서 별도의 일정을 가진 것으로 관측된다. 자세한 세부 일정은 알려지지 않았다.#

2023년 1월 31일, 생일을 앞두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축하 난을 받았다. 전희경 정무1비서관을 통해 보낸 난은 유영하 변호사가 대리 수령해 박 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고 한다.# 이에 박근혜 대통령은 윤석열 대통령에게 감사하다고 말했다고 한다.

2월 2일, 생일을 맞아 지지자들이 사저 근처에서 생일 축하 행사를 열었다. 국민의힘 전당대회에 출마한 황교안 전 대표, 윤상현 의원도 방문했으나 만남은 불발됐다.#

공개활동을 극도로 자제하는 모습과 생일 축하 행사에서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서 건강이상설이 지지자들 사이에서 퍼지기도 했으나 박 전 대통령 측은 "(박 전 대통령의 건강이) 잘 회복되시고 있다. (지지자들께서) 너무 큰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된다"고 확대 해석을 경계했다. 또 알려지진 않았지만 지역정치권에 따르면 2022년 7월쯤 국회의원 시절 자신이 조성을 추진한 테크노폴리스 일대를 둘러봤다고 한다. #

4월 11일, 사면 이후 첫 공식일정으로 대구 동화사를 방문했다.#

4월 19일,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와 자택에서 면담할 예정이었으나 김기현측에서 당내 일정을 이유로 연기를 요청해 만남이 불발되었다고 한다.

7월 21일 주간조선유영하 변호사의 인터뷰를 통해 근황이 소개되었다.# 유영하 변호사에 따르면 건강에는 이상이 없으며 대외활동도 했으나 언론에 보도가 되지 않았을 뿐이라고 한다.[79] 구 최근 친박계 인사들의 총선 출마 가능성에 대해선 '친박은 없다', '이제 정치하는 사람들은 자기들이 자기 정치하면 됐지, 나랑 연관시킬 이유가 없지 않냐'고 이야기 했다고 한다.

8월 15일에는 어머니 육영수 여사의 기일을 맞이해서 구미의 박정희 전 대통령 생가를 현직 대통령이던 시절인 2014년 이후 약 9년만에 방문하며 오랜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 추모관을 찾아 참배를 한 뒤, 인근에 있는 박정희대통령 역사자료관도 처음으로 관람하였다.[80] 이후 몰려든 지지자들과 인사를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다. 김장호 구미시장의 안내를 통해 역사자료관을 관람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기도 했는데, 김장호 시장은 2017년 2월에 청와대 행정관을 역임했던 인연이 있다. 물론 청와대 직원들이 많다 보니 박근혜는 알지 못했다가 김장호 시장이 말해주자 놀라면서 반가워했다고 한다. 한편 같은 날 윤석열 대통령의 아버지인 윤기중 연세대 응용통계학과 명예교수가 별세하면서 조화를 보내 애도의 뜻을 표했다. 직접 서울로 상경해 조문할 예정이었으나 당일 구미 방문 후 컨디션이 저하 되어 조문은 못가고 윤석열 대통령에게 미안하다고 전화했다고 한다.

9월 13일, 국민의힘 김기현 대표가 예방해오자 반갑게 맞이하며 50여분간 회동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김기현 대표에게 22대 총선 승리가 중요하다며 여당 대표로서 막중한 책임감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9월 25일, 추석을 앞두고 달성군 현풍시장에 방문해서 장을 봤다.#

9월 26일, 중앙일보와 9월 11일에 했던 단독 인터뷰가 공개됐다.# 이후 매주마다 자신의 회고록을 담은 기사가 나오고 있다.

10월 26일, 아버지 박정희 전 대통령 제44주기 추도식에 11년만에 참석했다. 윤석열 대통령 역시 현직 대통령으로는 처음으로 추도식에 참석했는데, 윤 대통령과 반갑게 인사하면서 옆자리에 앉았다. 추도사에서 참석해준 윤 대통령에게 감사 인사를 전했다. 추도식이 끝난뒤에는 윤 대통령과 같이 부모님인 박정희 대통령과 육영수 여사의 묘소에 참배하기도 했다.#

11월 7일, 대구를 방문한 윤석열 대통령이 달성 사저에 방문해 1시간 가량 오찬을 함께하고 정원을 산책했다. 윤대통령이 좋아하는 과일인 감과 배 등을 준비했으며 밀크티를 준비했다고 한다.#

12월 측근인 유영하 변호사에 의하면 내년 1월을 목표로 회고록 집필 작업을 마무리 하고 있다고 하며 최근 수성구에서 대구경북 지역 언론인들과 점심 식사를 함께 하며 근황을 나누기도 했다고 한다. 식사 자리에서 6차례나 아재개그를 던지며 분위기도 주도 했다고 하며 앞으론 국민들 곁에 더 다가가겠다 더 많이 만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한다.

12월 29일, 한남동 대통령 관저를 방문해서 윤석열 대통령과 김건희 여사와 함께 오찬을 함께했으며 오찬 이후엔 윤석열 대통령의 안내를 받으며 함께 관저를 산책하며 이야기를 나누었다.[81] 이는 전직 대통령으로서는 최초로 대통령 관저를 방문한것이다.#[82]

2024년 2월 2일, 72번째 생일을 맞이하여 윤석열 대통령에게 축하난 및 선물과 축하 전화를 받았다. 추운 날씨에 건강을 잘 챙기라는 이야기 및 국민들을 더 많이 만났으면 좋겠고 국민들이 박근혜 대통령의 업적을 기억해줬으면 좋겠다는 이야기를들었다고하며 박근혜 본인도 설 명절에는 윤석열 대통령 내외분이 편히 쉬시라고 했다고 한다.

2024년 2월 5일, 대구 수성구 만촌동에 위치한 호텔에서 본인의 회고록 북콘서트를 개최했다. 이 자리에 자신의 최측근인 유영하 변호사와 허원제 전 정무수석이 참석했고, 그외 내빈으로 초청 받고 참석한 인물들로는 김관용 전 경북도지사, 서상기 전 의원, 김재수 전 장관, 김관진 전 국방부 장관, 한민구 전 국방부 장관, 조윤선 전 여성가족부 장관등이 참석했다.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비상대책위원장은 화환을 보냈고, 과거 친박 출신 인사들 가운데 최경환 전 부총리와 조원진 전 의원등도 화환을 보냈다. 이 자리에서 자신은 누구를 원망하거나 미워하는 마음을 내려났고 이젠 다시 정치는 하지 않겠다고 이야기했다.[83] 회고록은 베스트셀러 3위에 안착했다.

2024년 3월 5일, 자신의 측근 유영하 변호사가 대구 달서 갑에 단수공천을 받으면서 22대 총선 국면에서도 박근혜라는 이름의 영향력이 살아있음을 보여주었고 건재함을 알렸다.

2024년 3월 26일, 자택에서 한동훈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과 처음으로 만남을 가졌다. 이 자리에서 한동훈 위원장에게 단합을 강조한것으로 알려졌다.#

측근 유영하 대구 달서 갑 국민의힘 후보에 따르면 선거 일주일을 앞두고 대구 지역에서 국민의힘 후보들의 선거 지원 유세를 계획하고 있다고 한다. 유세에 등판한다면 2012년 19대 총선 이후 12년만의 등판인데 당시 새누리당도 매우 불리한 정권심판론 속 선거에서 단독 과반을 확보한 적이 있다. 그러나 다음날인 4월 3일에 유세를 취소한다고 밝혔다. 수도권 판세에 악영향을 끼칠 것을 우려해서 내린 결정이라고 한다.

비록 22대 총선에서 딱히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진 않았지만, 자신의 대변인이나 다름없는 유영하가 무난하게 공천을 받고 당선되면서 국회 입성에 성공했다.

2024년 5월, 자신의 최측근인 정호성 전 비서관이 윤석열 정부 대통령실 시민사회제3비서관으로 임명됐다. #

2024년 8월 14일, 육영수 여사 서거 50주기를 앞두고 육영수 여사의 옥천 생가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는 최측근인 유영하 의원과 함께 지역 국회의원인 박덕흠 의원도 동행했다.#

11월 14일, 구미시에서 열린 박정희 전 대통령 탄생 107주년 기념식에 처음으로 참석했다. 이 자리에 몇 차례 환하게 웃고, 가벼운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

5.2. 옥중서간집

2021년 12월 30일, 박근혜가 수감 기간 동안 지지자들과 주고 받은 편지를 엮은 옥중서간집 <그리움은 아무에게나 생기지 않습니다>가 출간되었다. 탄핵을 비롯한 여러 정치 사안들과 관련 인물들에 대한 박근혜의 생각을 엿볼 수 있다.##
거짓은 잠시 눈을 가리고 귀를 막아 세상을 속일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진실이 드러날 것. 진실은 훗날 역사의 법정에서 밝혀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탄핵 결정에 대해)

주변 인물의 일탈로 혼신을 다한 일이 적폐로 낙인찍히고, 묵묵히 자신의 직분을 이행한 공직자들이 고초를 겪는 걸 보는 것은 참을 수 없는 고통이었다.

누구를 탓하거나 비난하는 마음은 버렸고 모든 멍에는 제가 짊어지겠다.

형식적으로는 합법적인 모습을 가지더라도 실질적으로 정당성이 없다면 법치주의라 할 수 없다.

수많은 수모를 감수하면서도 일주일에 4번씩 감행하는 살인적인 재판 일정을 참아낸 것은 사법부가 진실의 편에서 시시비비를 가려줄 것이라는 일말의 믿음 때문이었다.

말이 되지 않는 이유로 추가 구속영장을 발부하는 것을 보고 정해진 결론을 위한 요식행위라는 판단이 들었다. 더 이상 그런 재판부가 진행하는 재판에 참석하는 것이 의미가 없고 구차하다고 생각해서 변호인들에게 저의 의사를 밝힌 것. (국정농단 재판에 불출석한 이유)

어떤 사람을 평가할 때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뒤돌아 가보면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게 된다. 거짓말이 사람들을, 그것도 일부의 사람들을 잠시 속일 수는 있어도 모든 사람을 영원히 속일 수는 없다. 남을 속이려고 들면 들수록 더 깊은 거짓말의 수렁에 빠져버리는 평범한 이치를 알지 못하는 사람이 나랏일을 맡을 수는 없다고 본다. (윤석열이 조국을 수사하는 것에 대해)

그 날 몸이 좋지 않아 관저에서 보고를 받았다. 침몰 당시 상황과 관련해 해괴한 루머가 있었지만 진실의 힘을 믿었기에 침묵했다. (세월호 참사에 대해)

[1] 위로는 이복언니 박재옥이 있다.[2] 그래서 본인은 대구 출신이지만 1954년생 여동생 박근령은 서울 동숭동 출생이고, 1958년생 남동생 박지만은 서울 신당동 출생이다.[3] 정몽준 현대중공업 대주주,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과 동창이었다. 여동생 박근령과 남동생 박지만청와대와 가까운 종로구 서울청운초등학교를 졸업했다.[4] 6차 교육과정 시기에 수학으로 변경.[5] 이때 중학교 무시험 진학이 실시된 것도 표면 목적은 '중학교 의무교육화를 위한 과도기적 조치'였다지만 실제로는 박근혜의 남동생 박지만이 중학교 갈 시기와 비슷해서 특혜 의심을 받고 있다. 그리고 박지만이 고등학교 갈 시기에 고등학교 평준화 정책이 실시되었다.[6] 아버지인 박정희의 힘으로 서강대학이 종합대학서강대학교가 되었다는 낭설이 있다. 서강대학의 종합대학 인가는 1969년 12월에 이뤄졌고, 박근혜는 1970년 1월에 서강대 시험을 응시했다. 종합대학으로서의 개교는 신학기 시작에 맞춰 1970년 3월에 이뤄졌다. 박근혜의 입학과 동시에 종합대학으로 변한 것이다. 다만 이는 신빙성이 부족한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 이미 원서를 제출하기 전에 종합대학 승격이 확정된 뒤였고, 이의 준비 기간을 고려하면 박근혜를 위해 종합대학로 승격시켰다는 것은 개연성이 상당히 떨어진다.[7] 스캔한 성적증명서 참고.[8] "3월부터 8월까지 있었으므로 학위 과정을 위한 유학이 아니라 어학연수"라고, 제부 신동욱이 파파이스를 통하여 정정하였다.[9] 또한 김동길의 증언에 따르면 이후 박근혜가 영남대 이사장이던 시절 당시 문교부장관 김옥길과 영남대 이사회 문제로 대화하던 도중 "우리 아버지가 무슨 잘못이 있습니까?" 따지고 들었다고 한다.#[10] MBC 드라마 제5공화국에서는 이 부분을 전두환이 6억 원을 회수하지 않고 임의대로 박근혜에게 건내주는 바람에 정승화가 불같이 분노했다고 묘사되어 있다.[11] 그때 본인의 자서전에는 'IMF 사태를 보며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생각했다.'라고 적혀 있다.[12] 그런데 이때 당시 박근혜의 가족들 중 남동생인 박지만과 이복언니 박재옥, 사촌언니 박영옥, 작은이모 육예수는 정작 이회창이 아닌 국민회의의 김대중 후보를 지지했다. 사실 박지만의 경우 1997년 15대 대선 이전부터 육영재단의 경영권을 놓고 벌어진 누나 박근혜와의 싸움으로 박근혜와 적대관계에 놓여있었고, 박영옥은 당시 자신의 남편인 김종필 전 국무총리가 김대중과 함께 DJP 연합으로 서로 손을 잡은 상황인데다 남편 김종필과 사촌동생 박근혜와도 인간적으로 사이가 안 좋았었기 때문에 이러한 상황에서 박근혜보다는 김대중을 지지할 수밖에 없었다.[13] 실제로 박영옥은 1990년 박근혜와 박지만, 박근령 등 작은 아버지 박정희 소생의 사촌동생들이 육영재단의 경영권을 놓고 분란을 일으켰을 당시 박근혜나 박지만, 박근령 등 어느 한 쪽의 편을 들지 않고 오히려 중립으로 일관했었다.[14] 유시민은 한국미래연합을 "껍데기만 있고 미래는 없는 당"이라며 신나게 디스했다.[15] 박근혜가 정치에 입문했을 당시 한나라당김영삼이 정치에 입문시킨 민주계를 주축으로 이회창이 절대적인 카리스마를 발휘하며 당을 전적으로 장악하고 있었다. 전두환 시절의 민정계조차도 당에서 축출된 마당에 그 이전 세대인 아버지 박정희의 후광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박근혜의 당내 입지는 당연히 매우 형편없을 수밖에 없었다.[16] 2002년 지방선거를 앞두고서 당 총재직은 폐지되었다. 당 대표는 선출직인 대표 최고위원으로 바뀌었는데, 첫 선출직 대표가 훗날 친박계의 거두가 되는 서청원이었다. 이후 이회창 후보가 대선에서 패배하자 사퇴한다.[17] 당 총재가 공천권을 휘두르던 시절, 김영삼이 개혁 공천을 표방하면서 많이 끌어들이기도 했고, 1997년 15대 대선 직전 민주당이 정권 교체냐 3김 청산이냐의 갈림에 있을 때 3김 청산을 주장하던 인사들이 이회창 지지로 돌아서면서 넘어가기도 했다.[18] 대립의 근원을 앞으로 당긴다면 2000~2001년 전후로 나타나 이어진 민주당 정풍 운동부터 시작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고, 이후 대선 과정 및 대선 자금 수사, 대북 송금 특검 등으로 곪아 터졌다.[19] 박정희 대통령의 집권 시절인 1972년에 법무부 과장으로서 유신 헌법의 초안 작성에 핵심적인 역할로 관여하였고, 유신 정권 말기에는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인연이 있다.[20] 12년 뒤, 아이러니하게도 대통령 박근혜는 본인이 국회에서 탄핵 소추를 당하고, 노무현 대통령과 달리 탄핵이 인용되어 대통령직에서 완전히 파면되었다.[21] 엄밀히 따져 말한다면, 국회의원도 대의제라는 정치 제도하에서 국민이 정치적 정당성을 부여한 인물이기에 이 말은 옳지 않은 말이다. 하지만 당시 국민들이 한나라당에 대해 어떤 인식을 가지고 있었는지 생각해 보면... 그리고 국회의원과 달리 대통령은 전 국민이 투표해서 뽑는다는 차이도 있다. 다만, 박근혜가 파면된 탄핵소추는 '많은 국민들이 원했다'는 것이 노무현 대통령 탄핵 소추와는 성격이 다르다. '다른 사람은 뽑은 적 없다'는 점도 있고.[22] 그러나 정동영 의장의 노인 발언으로 막판 표심을 잃고, 최종적으로는 과반을 조금 넘긴 152석을 확보하게 되었다.[23] 지금은 숙적이 된 김무성 전 대표와의 인연도 이때 시작된 걸로 알려져 있다. 김무성 전 대표는 박근혜 대표 밑에서 당 사무총장으로 일했고, 17대 대선 후보 경선에서도 박근혜 캠프에서 조직 담당으로 일하며 친박계의 좌장으로 불렸지만, 2009~2010년 세종시 문제로 의견이 갈리게 되었고, 박근혜 의원은 '친박에 좌장은 없다'는 말로 사실상 그와 결별하였다.[24] 젊은이 투표 독려 발언 중 "60대 이상은 투표 안 해도 괜찮아요."라는 발언이 노인 폄하라는 논란이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정동영 문서 참조.[25] 정동영의 노인 발언 때문에 152석밖에 못 얻었다는 말이 정설이다.[26] 이것으로 박근혜는 차떼기 사건,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 및 심판 실패로 몰락하던 보수정당을 살려내며 유력 정치인으로 자리잡고 '선거의 여왕'이라는 명성을 얻게 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를 발판으로 2007년 제17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 후보로 떠오르지만, 후보자 선출을 위한 한나라당 내 경선에서 이명박 후보에게 패배하여 그해 대통령 선거에는 출마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2016년의 시점에서 보면 결국 자신이 살려냈을 당시의 모습보다 더한 지옥의 구렁텅이로 대한민국 보수정당을 추락시켜 버렸다.[27] 자유한국당이 그 당시 박근혜 대표 체제의 한나라당과 비슷했다. 다만, 지지율 결집은 없다는 것이 그 때와 다른 점이다.[28] 이 당시, 이명박 전 대통령(당시 서울특별시장)도 같이 촛불을 들고 나갔다.[29] 이 시기 참여정부를 비판했던 일 때문에 2009년 5월 노 전 대통령의 서거 후 봉하마을에 가서 조문하려 했지만 진입도 못하고 쫓겨났다. 사실 이 때 조문간 보수 인사들은 전부 조문하지 못하고 쫓겨났기에 박근혜 한 사람만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당시 노무현 대통령 장의의원회 관계자가 국민장 때 조문하라고 권고했다고... 결국 박근혜는 국민장에 참석하여 조문했다.[30] 출처는 전여옥 저서 《오만과 무능》[31] 여당인 열린우리당이 스스로 자기 무덤을 판 것도 있다. 그런 상황에서 지지율 1위를 달리던 고건 전 총리도 불출마 선언을 하자 완전히 동력을 잃었고, 노무현 대통령은 2007년 2월에 당적을 정리하면서 사실상 무소속이 된다.[32] 박근혜 진영에서 자신을 음해했다는 취지에서 한 발언.[33] 박근혜는 당원, 대의원, 국민 선거인단 투표에서 모두 승리했으나, 전화 여론 조사에서 뒤집혀 이명박에게 패배했다. 이 전화 여론조사도 사실 뒷말이 엄청 많은데 자세한 내용은 위키백과이명박에 대한 비판 문서에 나와 있다.[34] 처음부터 새로 만든 것은 아니고, 17대 대선 당시 정근모 후보를 내세웠던 참주인연합이라는 별개의 정당이었다. 이후 정근모가 낙선하면서 개점휴업 상태가 되자 친박계열이 이 당에 들어와 미래한국당이라는 이름을 거쳐 친박연대로 바꾼 것.[35] 12~16이라고 한 것은 친박계가 확실한 사람과 굳이 계파 분류를 하자면 친박계로 분류되는 사람을 포함한 표현이기 때문이다.[36] 이때 자신의 지역구에서만 선거 운동을 한 덕분에 무려 득표율 88.57%로 당선되었고, 이 득표율은 당해 총선 전국 2위의 기록이었다. 당시 1위는 박주선 의원.[37] 이 시기만 해도 친박이던 유승민 의원은 무사히 공천을 받아 출마해 당선됐지만, 세종시 수정안 등의 문제를 두고서 비박계로 돌아선 김무성 전 대표는 이때 공천에서 탈락됐다.[38] 김무성, 김세연 등이 유명하다.[39] 서청원이 당대표를 맡았고 홍사덕이 원내대표를 맡았다.[40] 총선 직후에는 이것이 상당한 충격이었다. 친박 세력이 전략적으로 야권과 공조하면, 친박+자유선진당+통합민주당+민주노동당+창조한국당 세력이 사실상의 여소야대를 이루며 친이계 한나라당의 정국 주도권을 뺏을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사천시에서, 당시 한나라당 사무총장이자 친이계의 실세로 평가받던 재선 의원 이방호가 민주노동당 강기갑에게 178표 차이로 패배했는데, 이것이 친박 성향 한나라당 지지층이 단지 이방호를 떨어뜨리기 위해 강기갑을 지지하면서 벌어진 결과라고 평가받았다. 비록 현실에서는 행정중심복합도시 문제만 제외하면 보수 성향에 맞춰 알아서 잘 협력했지만 말이다.[41] 박근혜가 떠난 빈자리는 초선 달성군수 출신이자 역시 친박인 이종진이 물려받았다.[42] 한국의 정당은 2000년대 초중반을 기점으로 모두 당권과 대권을 나누어 한 사람에게 권력이 집중되는 것을 막고 있는데, 이를 한 사람에게 몰아준다는 것은 말 그대로 정당과 정당 구성원의 생사여탈권을 넘긴다는 것을 의미한다.[43] 2017년 기준으로 손수조문대성을 빼고는 모두 나갔으며, 이준석은 3년 후 미래통합당에 합류하면서 친정으로 왔으나, 이자스민정의당으로 갔다.[44] 지방선거서 광역자치단체장이 새정치민주연합보다 1석 뒤진 점은 논외로 하더라도 기초자치단체장은 새누리당의 압승이었다.[45] 자세한 내용은 박근혜 화법 문단 참고.[46] 다만 문재인 지지세가 비교적 강한 2~40대의 박근혜 지지율은 여성보다 남성이 오히려 더 높았다. 이렇게 응답한 사람들이 여자라서 박근혜를 찍기로 결심했다기보다는, 일단 새누리당 후보를 찍기로 하고 이유를 찾았을 가능성이 크다는 말.[47] 초창기 박근혜 - 문재인 - 안철수의 3자 대결에서도 모두 우위를 이어갔다. 다만, 박근혜 - 안철수 양자 대결에서는 밀린 적이 있었다.[48] 1988년 직선제 도입 이후 최초 대선 과반수 이상 득표[49] 전직 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 제7조 (권리의 정지 및 제외 등) ② 전직 대통령이 다음 각 호의 어느 하나에 해당하는 경우에는, 제6조 제4항 제1호에 따른 예우를 제외하고는 이 법에 따른 전직 대통령으로서의 예우를 하지 아니한다. 1. 재직 중 탄핵 결정을 받아 퇴임한 경우 2. 금고 이상의 형이 확정된 경우 <이하 생략>[50] 서울신문에서는 "국가 분열 조장이나 다름없다"고 지적했고, "꼼수를 쓴다고 심판을 피할 수 없다"고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동아일보는 "지지자들에게 자제를 요구하고 변호인단에게도 비난 자제를 촉구해야 국민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고 지적했다.[51] 경호상 최단경로인 광화문 광장남산3호터널반포대교사평대로봉은사로 루트를 사용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기 때문에 이 루트를 선택할 것이라 추측되었고, 실제로 출발 1시간 전까지 이 루트로 방송을 통해 안내되고 있었으나, 갑자기 본문에서 언급한 루트로 바뀌었다. 일부 언론에서 이것이 "촛불집회의 본진인 광화문 광장을 보기 싫다는 박 전 대통령의 의지로 보인다"고 추측하였다. 그러나 광화문이나 종각을 거쳐 남산 터널로 갈 경우 어느 정도 예상된 경로라서 인파들을 많이 마주칠 수 있으므로 그것을 피해 좀 우회하는 경로로 갔을 수도 있다.[52] 방송국에 다수의 시청자가 원래 오후 5시경에 출발한다고 했으나 계속 30분씩 연기하다 오후 7시쯤에 관저 밖으로 나왔는데, 참모들과 인사하느라 시간을 지체했다.[53] 헌재의 탄핵 인용 직후 박근혜 본인을 포함한 청와대 쪽에서는 이틀 후 삼성동 자택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아무런 반응을 내어놓지 않았다. "대통령이 충격을 받았다"라는 기사만이 측근이나 대변인 정도를 통해 기자들에게 전해져 보도되었을 뿐, 공개적으로 입장을 밝힌 것은 없다. 그러나 박근혜가 삼성동 자택로 돌아가던 날 민경욱 의원을 통해 밝힌 내용, 탄핵 심판에서 대통령 대리인단의 행동 등을 통해 유추해 볼 때 박근혜 본인은 진심으로 탄핵이 인용되지 않을 것이라고 굳건히 믿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번에도 박근혜 측에서는 검찰에서 구속영장을 당연히 신청하지 않을 것이라고 본 듯하다.[54] 차기 정권 재창출을 위한 여당의 여론 악화 방지를 위해 대통령 본인이 자진 탈당한 경우는 그동안 여러 차례 있었다.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 노무현 등은 모두 임기 중에 탈당했고, 특히 노무현은 두차례의 탈당이 존재하는데 첫 번째는 열린우리당 창당을 위해 임기 초반의 탈당, 2번째는 상기한 차기 정권을 위해 퇴임 이틀 전 탈당한 기록이다. 이명박은 직선제 이후 탈당하지 않은 특이 케이스로서, 퇴임 후에도 한동안 당적을 유지하다가 2017년 1월 초에 자유한국당으로 변경되기 전 새누리당을 탈당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박근혜는 자진 탈당 제안에도 어떠한 움직임이 없었다고 한다.[55] 자세히 보면 안경을 쓰고 있다.[56] 탄핵 찬성파는 통합을 위해 탄핵 문제를 덮고 넘어가자는 입장인 반면, 탄핵 반대파는 탄핵문제를 짚고 넘어가기 전에는 함께할 수 없다는 입장으로 완전히 갈려있었다.[57] 실제 2019년 재보궐선거에선 자유한국당 강기윤 후보가 진보단일 후보 여영국 후보를 누르고 승리할 뻔 했으나, 친박계 후보로 인해 아쉽게 패했다.[58] 공직선거법 제60조 1항 3호 : 선거권이 없는 자는 선거운동을 할 수 없다.[59] 윤상현홍준표, 김태호, 권성동과 같이 무소속으로 살아남은 케이스이다. 사실 윤상현은 다른 친박과는 거리를 두기도 했고, 김무성 비하 논란와 기타 논란들과 별개로 지역구 관리는 출중하다.[60] 거기에 더해 김재원지역구본인20대 총선 당시 컷오프친이, 친유 출신인 김희국이 차지했다. 그것도 친박계 천영식 청와대 수석비서관을 압도적으로 경선에서 꺾었고, 본선에서는 79.30%, 고향인 의성군에서는 81.77%를 얻어 당선되며 전국 2위 득표율을 자랑하게 되었다.[61] 사실 김상훈은 범친유, 소장파로 분류되는 인사이다.[62] 그 중 유승민의 불출마 이후 새로 원내에 입성한 강대식과 친유계에서 이혜훈, 유의동과 더불어 새누리당 공천을 받은 김상훈을 제외한 두 명은 20대 총선 당시 컷오프된 인사들이다.[63] 친홍으로도 분류됨.[64] 친유로도 분류됨.[65] 친유로도 분류됨.[66] 친유로도 분류됨.[67] 친유로도 분류됨.[68] 친유로도 분류됨.[69] 친홍으로도 분류됨.[70] 친무로도 분류됨.[71] 친무로도 분류됨.[72] 청구동계로도 분류된다. 구 친박이라고 하지만, 육모방망이, TK 자민련 등을 언급한 것으로 봐서 친박보다는 비박으로 분류된다.[73] 정확한 정보가 공개되지 않았기에 얼마나 건강이 좋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지만 언론 보도에 의하면 치아 상태가 나빠져 음식을 씹을 수 없어 식사가 거의 불가능한 상태라고 하며 정신 건강도 나빠진 상태라고 한다. # 오랜 수감생활로 인한 스트레스성 질환과 본래 가지고 있던 지병이 악화된 것으로 보인다.[74] 1996년 내란혐의로 대법원으로부터 실형선고를 받은 전두환, 노태우도 사면을 받은 뒤 사망할 때까지 전직 대통령에 대한 예우를 누리지 못했다. 그나마 노태우는 사망 후 국가장이라도 받았지만, 전두환은 악화된 여론 때문에 청와대가 “국가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고 말하며 거절해서 가족장으로 치러야 했고 장지도 마련하지 못하는 처지가 됐다.[75] '전직대통령 예우에 관한 법률상 혜택'의 회복이 아니라 '국민으로서 누릴 수 있는 일반적 권리'의 회복을 의미한다.#[76]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박근혜를 수사했던 검사장들 중 하나가 윤석열이었다. 이 때문에 진성 친박들은 윤석열을 비토하는 성향이 강하고, 박근령은 이재명 지지를 선언하기까지 했다.[77] 선술했지만 윤석열은 검찰 시절 박근혜를 구속 수감시키는 역할을 했고, 구 바른정당 - 바른미래당 계열은 박근혜의 탄핵에 앞장섰기에 우리공화당을 비롯한 골수 친박 세력은 현 국민의힘을 극도로 싫어한다. 그중에서도 이준석은 박근혜가 직접 영입했던 인사였었다. 실제로 20대 대선 기간 내내 우리공화당은 국민의힘을 향한 네거티브로 일관했고, 아예 박사모는 홍준표 지지를 선언했다가 홍준표 낙마 후에는 일부가 이재명 지지 선언을 하고 민주당으로 이탈했으며, 박근혜의 여동생인 박근령이재명 선대위 특보단 상임고문직을 맡기도 했다. 이 배후에는 보수계 원로였다가 윤석열의 행보에 학을 떼고 보수 정당 생활을 정리한 뒤 민주당으로 넘어온 박창달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박창달도 민주당 입당 전에는 홍준표를 지지했었다.[78] 문재인윤석열 대통령이, 박근혜김건희 여사가 직접 안내하며 환송했다. 환송 과정에서 김건희 여사와 대화를 나누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79] 위에 동화사를 다녀오기 일주일전에는 경주에 방문해서 무열왕릉과 문무왕릉을 관람하고서 일반 대중식당에서 식사도 하면서 사람들과 같이 사진도 찍기도 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역 언론에서 조차도 보도가 안됐다고 한다.[80] 해당 자료관은 수감중이던 2021년도에 개관했다.[81] 윤석열 대통령의 반려견인 토리도 함께했다.[82] 참고로 이 대통령 관저는 아버지인 박정희 대통령이 건설을 지시해 박근혜 본인에게도 뜻깊은 장소이기도 하다.[83] 대통령은 연임이 불가능하기에 끝났고, 이론상으로는 다른 선출직 공무원에 출마할 수 있지만 탄핵소추로 대중적인 이미지가 완전히 박살났기 때문에 의미가 없다. 이미 70이 넘은 고령이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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