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19-12-06 09:29:47

상나라

은나라에서 넘어옴
중국의 역사 中国历史 中國歷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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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11px;margin-top:-6px;margin-bottom:-6px"
선진시대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206년
한당시대
기원전 206년 ~ 907년
송 · 원 · 명
907년 ~ 1644년
청 · 근현대 ~
1616년 ~ 현재
>||<-5><:><#CC0000><tablebordercolor=#CC0000><tablewidth=100%><tablealign=center>중국의 역사 기원전 1600년 ~ 기원전 206년||
BC 1600 ~ BC 1046 상(商)
BC 1046 ~ BC 256 주(周) 서주(西周)
동주(東周)/춘추전국(春秋戰國) 춘추(春秋)
춘추오패(春秋五覇)
전국(戰國)
전국칠웅(戰國七雄)
BC 221 ~ BC 206 진(秦)
후초(後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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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존속기간 기원전 17세기 ~ 기원전 11세기
별칭 은(殷)[2], 은상(殷商), 대읍상(大邑商)[3]
위치 중국 화북
수도 박(亳), 은허[4]
국가원수 왕(王), 제(帝)[5]
주요 군주 탕왕(기원전 16세기?)
반경(기원전 13세기)
주왕(기원전 11세기)
언어 상고 중국어
문자 갑골 문자
종교 중국 토속 종교[6]
종족 상족[7]
통화 조개 화폐
성립 전 황하 문명
멸망 후 주나라, 송나라[8]
현재 국가 중국

1. 개요2. 명칭3. 왕조사4. 도시 국가5. 상대의 기술과 문화6. 인신공양
6.1. 아즈텍 제국과의 비교
7. 창작물에서8. 기타
8.1. 한국 재야사학과 관련된 견해

1. 개요

중국의 고대 국가. 기원전 17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까지 존재하였다.[9] 한자는 商. 국성은 자(子). 수도은허. 은(殷)나라라고도 부른다.

한때 전설상의 국가로 인식되었으나 갑골문자의 발견으로 실존했던 중국 최초 국가로 인정받고 있다.

2. 명칭

은(殷)이라고도 불리기에 합칭하여 은상(殷商)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은은 반경(盤庚) ~ 제신(帝辛) 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인데, 당대에는 의(衣)[10] 혹은 대읍 상(大邑 商)이라는 별칭이 있었다.

대 성립부터 은이라 불렀던 것으로 보이며,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다. 그들 자신들은 자신을 상이라고 하였지 은이라고는 하지 않았다. 갑골문에서도 은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는다. 또 주대 초기 기록에도 상이라고 등장한다. 서구인들도 Shang이라고 하며,[11] 요즘 중국인들도 상이라고 부르는 추세다.

상인, 상업 등의 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다. 상나라의 유민들이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한다.

상나라는 역성혁명으로 망했지만, 주나라는 상의 유민들을 안정시켜야 했기 때문에 무왕은 제신(주왕)의 아들 무경(武庚)을 다시 은 지역에 분봉해 봉국으로 삼았다. 그게 송나라.

하지만 무왕이 죽은 후 그의 동생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은 주공단의 섭정에 반기를 들고 무경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고, 결국 주나라에게 진압당하면서 나라를 봉지로 받은 미자계의 후손만 제후 신분으로 남고 나머지는 전부 몰락하고 만다. 춘추전국시대 때도 송나라는 인신공양을 벌여서 유가에게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는 걸 볼 때, 상나라의 인습은 송나라 시절에도 여전했던 모양.

3. 왕조사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에 의해 건국되었다.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왕으로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언급된다. 다만 갑골문에서는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일 뿐 창시자는 아니다. 갑골문에서 상나라의 창시자는 삼황오제 중 하나인 제곡까지 거슬러 올라간다.[12] 다시 말해서, 삼황오제 시대와 상나라 사이에 하나라가 들어갈 자리가 없다.[13]

탕왕 이후 상나라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 번 천도를 하는데, 현재 발굴되어 확인된 상나라의 도읍은 중기의 수도인 박(亳)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다. 우리가 아는 갑골문은 주로 이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이다.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의 출토가 드물다.

기원전 12세기의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하였다. 그러나 왕조 말기의 왕인 제을(帝乙)과 제신(帝辛) 부자의 과도한 동방 정책[14][15]으로 서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산시성 지역의 주나라가 서방 부족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하였다.

결국 상나라는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만다.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된다. 그리고 상나라 왕족의 한 명이었던 미자(微子) 계(啓)에게는 공작위가 수여되어 제후국인 송(춘추전국시대)에 봉해졌다. 공자 또한 이 미자의 후손 중 하나라고 전해진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는 의고파가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하였으나,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상나라의 실존은 대부분의 학자들에게 인정되었다.

상나라의 역대 군주는 상나라/계보의 왕사 참조.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의 왕 시호(또는 이름?, 존호?)는 모두 십간으로 지어져 있다. 이것은 상나라가 제정일치적 성격이 강했던 면모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데, 놀라운 것은 그 순서가 사마천사기의 기록과 거의 일치한다는 것이다.

4. 도시 국가

이와 더불어, 하나라의 역사적 실체에 대한 엄밀한 이해가 필요하다. 하를 하나의 역사적 실체로 인정한다 하더라도, 하가 일개 성읍 국가의 명칭에 지나지 않는 것임을 인식할 필요가 있다. 당시 중원에는 하와 본질적으로 동일한 성격의 성읍 국가들이 수없이 공존하고 있었고, 하는 그 수많은 성읍 국가들로 구성된 국제 사회에서 중심된 역할을 수행하는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의 사마천 등 후대의 중국인 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 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하를 마치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던 것이다. 하를 이와 같은 개념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는 까닭은 하를 이었다는 상, 주 등 중원의 '왕조'들도 진, 한 등과 같은 후대의 왕조와는 달리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 김한규, 천하국가, 57쪽

중국 사학계에서는 하상주단대공정으로 고고학적으로 하나라의 존재가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지만, 이러한 설명은 중국 외부에서는 아직 인정받지 못한다. 심지어 중국 사학계 내부에서도 이런 하상주단대공정에 대한 비판이 있을 정도다. 이는 하나라 문서 참조. 이런 주장에서 하나라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하-상 교체기에 해당되는 듯한 유물의 전환 과정이 나타난다는 것, 그리고 탕왕의 존재가 갑골문으로 증명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전자의 경우 하 왕조의 존재 자체의 근거가 희박한 상태이므로 하나라와 다른 정치적 실체에서 상나라로의 변화거나 단순한 상 왕조 자체 내에서의 변화로도 해석할 수 있다. 갑골문에서는 탕왕이 하 왕조를 물리친 대역사의 흔적은 전혀 드러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 왕조의 창시자도 아니라는 점에서 무리가 있다.

갑골문에서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그중에서 하 왕조나 그에 해당되는 강한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아직 없다. 더구나 갑골문에서는 夏라는 글자조차 식별되지 않으며, 갑골문에서의 1년은 춘하추동이 아니라 단순히 춘추로만 구별했다.

다만 상이 실증적으로 확인된 최고(最古)의 왕조이기는 하나, 상이 《사기》 등에서 묘사된 바와 같이 중화 대륙의 단일한 중앙집권적인 왕조는 아니었다고 추정된다. 애초에 갑골문 기록에서 황하에 홍수가 나니 전 국토가 물에 잠겼다고 나왔을 정도다. 그리고 출토된 유물에 기반한 고고학적 연구 성과에 따르면 상의 통치 영역은 그리 넓지 않았다.

또 상의 통치 영역 바깥에는 그들이 남긴 문자는 없었지만 분명 다른 문명들이 존재하였다. 심지어 주나라 후기인 동주 시절에도 수도인 낙양 서쪽의 산에 이민족 부락이 있을 정도였으니 존재한다는 사실 자체는 성립하는 셈. 이렇게 각기 다른 문명들이 고대 시기(이를테면 춘추전국시대 즈음)를 거치면서 통합되는 과정을 거쳤을 것이다.

당시의 중국 대륙은 지금과는 달리 대부분의 땅이 밀림이었으며, 그곳에는 코끼리코뿔소, 호랑이 같은 맹수, 전설의 의 원형이 되었을 악어 같은 대형 파충류나, , 의 원형이 될 듯한 조류가 살고 있는 험악한 땅이었다. 춘추전국시대로 가면 황하 일대는 싹 다 전란통에 평야가 되고 장강 일대만 밀림이었다가 한나라 이후에 개간되지만, 상나라 시절에는 그냥 밀림 문명이 맞다. 어찌보면 하단에 나오는 그 기괴한 인습도 마야아즈텍 제국과 같이 밀림 문명권이라서 생겨난 것이다.

이런 밀림 사이에 세워진 극소수의 '성읍 국가'들은 다양한 문자 문화와 금속 문명을 가지고 있다가 일부 국가는 후대의 중국 문명으로 계승되고 일부는 단절되었다. 당연히 성읍 국가 이외의 지역에는 아예 인간이 살지 않거나 완전히 다른 풍속을 지닌 이민족이 살고 있었다. 따라서 하 왕조 역시 상 왕조와 함께 존재한 다른 왕조였으며 한때 하 왕조가 우세했다가 이후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가져갔다고 해석한다면 갑골문의 기록과 모순되지는 않는다.

다만 어디까지나 "이렇게 하니까 정황상 말이 되네" 수준일 뿐, 하나라의 존재가 고고학적으로 확정된 것은 아니다. 또한 상 왕조가 주도권을 갖게 되었다고 하더라도 탕왕이 천하를 제패하는 대규모의 정복전은 없었던 듯하다. 그냥 하나라의 패권이 상나라로 옮겨온 정도.[16]

그렇다면 사마천은 왜 상 왕조를 전국을 통일한 국가로 인식하였을까? 사기 오제본기를 보면 천하가 9주로 나뉘었다고 하는데 얼핏 보아도 한나라의 행정 체계와 비슷함을 눈치챌 수 있다. 실제로 사마천이 살았던 시기에도 사료가 극심하게 부족하여 오제본기에서 사마천이 사람들이 오제의 덕을 칭송하면서도 자료는 부족하다고 논평했다.

갑골문 자료와 사기를 대조해본 결과, 사마천의 기록이 꽤 정확하다는 점은 주목받을 만 하지만, 사마천이 입수했던 자료로는 상나라의 체계를 정확히 이해하기는 힘들었다. 여기에 주나라의 역사왜곡과 천하를 주유하던 세객들의 입담 및 민간전승으로 인해 상 왕조에 대해 더욱 더 골격을 잡지 못한 채 은본기를 써내려갔을 가능성이 높다.

5. 상대의 기술과 문화

파일:attachment/vasefromShangdynasty.jpg
상대의 청동 항아리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무엇보다도 도철문[17]이 아로 새겨진 청동기다. 즉 상나라청동기 문명권이었다는 걸 알 수 있다.[18]

이 시기의 청동기들은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 등이 상, 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상당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들은 종류까지 참으로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는 데 애를 먹는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은 주나라 이후처럼 대량생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청동기들은 주로 제사에 쓰였다. 주나라 시대로 가면 오히려 청동기 주조 기술이 퇴보하지만, 이는 단순히 주조 기술의 후퇴라기보다는 청동기의 용도가 단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나라의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에 유물의 주인이 주 왕실로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 자랑에 대한 내용이 구구절절하게 새겨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래서 사료적 가치는 오히려 주나라의 것이 더 높다.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나라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다.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19] 자주 지붕을 갈아줘야 하는 것은 둘째치고, 한 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인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자주 있어서, 건물을 짓기 전 인간 제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해지기를 기원하기도 했다. 이런 풍습은 지진으로 건물이 자주 무너지던 일본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시 문명에도 있던 풍습으로, 덕분에 상대의 건축물 기둥 유적 아래에서 사람의 해골이 대량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다.

참고로 이때 건축물들이 어땠냐 하면...
파일:external/2.bp.blogspot.com/fig+x+shang+dynasty+building+n.jpg파일:external/www.sott.net/china_huanbei.jpg
다른 링크이게 건물터. 참고로 이 건물들의 정체는 바로 당시의 궁전이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Yinxu.jpg
은허 박물관에서 복원한 상나라 시대의 궁전. 지붕은 짚으로 되어 있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하였던 신은 (帝)였다.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가 된다고 믿었다. 즉 인간을 신적 존재로 받드는 고대 신정국가였다. 왕은 제와 소통할 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으로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하였다. 제는 혈통적인 의미가 담겨 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게 되었다. 이를 통해 상나라가 씨족들이 모인 도시국가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6. 인신공양

정사일에 점을 친다. 장차 불로 지내는 제사를 하(河, 황하)에 지내려는데, 우리에서 기른 소와 첩을 강물에 빠뜨릴까? (丁巳卜:其燎于河, 牢沈妾?)
갑골문합집 32161[20]
병술일에 점을 치며 정인 대가 묻는다. 특정 사안을 고하며 포로를 바치는 제사를 하(河)에 지낼 때 불로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소 세 마리를 황하에 빠뜨릴까?(丙戌卜, 大貞: 告執于河燎, 沈三牛?)
갑골문합집 22594
갑자일에 점을 치면서 묻는다.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에 주술사(巫)를 쓸까? (甲子卜,㱿貞:妥以巫)
갑골문합집 5658
묻는다. 오늘 병술일에 재라는 주술사를 불로 태우면 큰 비가 있을까?(貞: 今丙戌燎ㅁ,[21] 有從雨?)
갑골문합집 9177


파일:external/farm3.staticflickr.com/4472211245_9211423faa_b.jpg
성을 쌓으면서 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사람은 귀족 무사이고 뒤쪽의 도끼를 든 사람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다. 머리를 풀고 윗옷이 벗겨진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

실제로 인신공양의 제물로는 동쪽의 이(夷)족과 양을 치는 유목민들인 강(羌)족이 주된 희생양이었다. 동이의 어원은 상나라가 자기들보다 동쪽에 있던 이민족들을 부르던 말에서 유래된 것으로, 상나라는 동이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을 벌이며 진출했다 서쪽의 주나라와 그 연합 세력들의 공격으로 망했다고 한다.

상나라는 훗날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행했다. 그 내용과 방법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설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다. 또 갑골문의 기록을 볼 때 농사가 안 되거나 천재지변이 벌어지면 주술사를 제물로 썼다고 한다.

인신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 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한다.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다.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나 되었다. 십이지의 하나인 묘(卯)자가 형벌의 한 종류로 쓰이기도 했다. 한자의 모양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제물로 삼기 위해 세로로 두토막을 내는 방법으로, 소나 돼지같은 동물을 정형할때 모습을 상상하면 편할것이다. 갑골문 기록 중에 사로잡은 적국의 고위 여성을 이렇게 죽일까? 하고 점치는 기록이 있다. 한자 피 혈(血) 역시 그 형상이 제기(皿)에 담긴 사람의 피를 나타내고 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 주왕 제신포락지형 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 점은 사기의 기록이 약간 잘못된 것이다. 이건 딱히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쓰기 시작한게 아니라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무도한 짓을 많이 했다.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고 했는데,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어 사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사실 포락 정도의 혹형은 실제 고고학과 갑골문을 통해 밝혀진 상나라의 많고 많은(...) 잔악한 짓들의 일람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이렇게 인신 공양에 처해지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 꿇린 뒤 밧줄로 묶었다.[22]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툭하면 제물로 바치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 문자로 눈(目)을 상처내어 멀게 하는 모양을 뜻한다고 한다. 즉 민民의 기원은 매우 잔인했다. 사실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人은 지배층만 부르는 개념이었는데, 저 시대에는 오죽했겠냐마는.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게 아니라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다.[23][24] 그리고 이 잘린 머리들은 골기 공장(뼈 공장)으로 보내져 골기(뼈 그릇)를 만드는 데 쓰였다. 이곳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은 윗부분이 톱 같은 도구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다.

게다가 인신공양 제사의 흔적으로, 발굴된 청동 솥 안에 삶아진 사람 머리가 들어있었다. 결국은 상나라의 멸망도 아즈텍 제국의 멸망과 마찬가지로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에 질릴 대로 질린 주변 민족들이 모두 주나라 편을 들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주나라는 상나라에 비해서 잔인성이 약해졌지만, 인신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이 완전히 없어지지는 않았다. 춘추전국시대에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25]을 받는 가운데 이따금 보이다가[26] 통일 진나라에 접어들면서 대체로 사라진다.

6.1. 아즈텍 제국과의 비교

밀림 속에 있는 도시 국가 + 주변의 이민족들 + 대규모 인신 공양이라는 특징을 놓고 볼 때 역사 속에서 상나라와 가장 닮은 문명은 신 대륙에 위치한 아즈텍이다.

당시 기록에는 상나라의 식인 행위도 자주 사료[27]에 나오는데, 이 또한 아즈텍과 비슷하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기록에 나오는 식인은 아즈텍과 달리 사회적으로 만연한 게 아니다. 위의 주 문왕의 사례 및 춘추전국시대에 나오는 식인 일화는, 당대 서술에도 극악한 죄라고 낙인 찍힌 친지를 요리해 짐승 고기라고 속이고 먹임으로서 씻을 수 없는 죄의식과 굴욕을 느끼게 하는 패륜이었지 제도적이고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뭐 이 발상이 나온 시점에서 잔인한 것도 맞다만.

아즈텍은 인육 자체가 사회적 금기로 치부되기는 커녕 적극적으로 권장되었다. 구대륙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식인은 단발성 소규모라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게 보통이다. 하지만 아즈텍은 전쟁조차도 살해가 목적이 아닌 생포해서 먹는 방향으로 무기와 전술 자체가 기형적으로 변이될 만큼 인육이 군사, 사회, 정치를 잠식했다. 이 방식은 훗날 에르난 코르테스와의 전쟁 당시 이들에게 지장이 되었을 정도. 살상 목적이 아니라 잡아가서 먹으려고 생포하기 위한 전투를 하니 무기도 날카롭지 않고 적당히 상처를 입히는 식으로 발달했는데, 코르테스 이하 쳐들어온 스페인 용병들은 당연히 살상 목적으로 최대한 위력이 강한 무기들을 들고 있었다.

더군다나 황하 문화권은 대중의 참여보다는 귀족이나 주술사 같은 제의 당사자의 복잡한 예식과,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덜 자극적인(...) 생매장과 수몰을 선호했다. 착각하지 않게 적는데, 끓는 물에 삶아 죽이거나, 산채로 포를 뜨거나, 젓갈로 담그는 행위는 인신공양이나 식인을 위한 목적의 방식이 아니다. 공포로 권위를 굳히기 위한, 최대한 잔인해 보이는 처형 목적의 형벌로 쓰였다. 이게 끔찍한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다는 뜻이다.

반면 아즈텍 제국을 위시한 메소아메리카에서는 북적북적한 축제를 벌이며 사방에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시 중심부의 높은 제단에 희생자를 눕힌 후 배나 가슴을 가르는 모습을 보며 군중이 환호하는 퍼포먼스가 하이라이트였던 자유분방함이 특징인 대중적인 오락거리였던 점이 다르다. 즉 대놓고 타부족 사람들 죽이고 잡아먹는 게 일상이었고 그걸 즐거운 행사로 삼았다. 이쯤 되면 문화상대주의고 뭐고 변명할 방법이 없다. 그냥 힘센 나라가 주변 약소국에 갑질한 수준(...).

즉 아즈텍의 식인은 너무 자주, 많이 일어났고 결과적으로 주변국과의 관계를 막장으로 만들었다. 단순히 시대나 환경적 한계로 인해 어쩔 수 없었던 수준을 넘어섰다. 농담이 아니라 하도 주변 타부족 사람들 잡아먹어서 원한을 사는 바람에 코르테스 쳐들어오자 연대해서 방어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동참해서 신나게 복수당해서 망했다.[28] 아즈텍의 식인이 그 문화권에서 납득이 되는 수준이었다면, 굳이 주변국에서 복수할 이유가 될 만큼 큰 원한을 사지는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애초에 상나라도 인신공양 때문에 주변 국가에서 원한을 사 무너진 걸 생각하면(...) 상나라보다 더했던 아즈텍은 더 이상 말이 필요없다.

일부 공통점을 가지고, 이하동서설에 기초한 '용봉문화원류'라는 중국 책에서는 아즈텍을 중국과 같은 계통에서 갈라진 나라라고 주장했다. 물론 시간, 공간적으로 이러한 주장은 근거가 전혀 없다. '정글'에 둘러싸인 자연 환경과, 기술적으로 지배 능력의 한계와 부양 인구의 한계가 있는 고대 도시국가의 문제점으로 비슷한 문화 현상이 나타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인신 공양 외에도 아즈텍과의 공통점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칭하는 명칭과 외부 민족들이 칭하는 명칭이 각기 달랐다는 점. 스스로 메시카(Mēxihcah)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 아즈텍이라 불렸고, 상 또한 주변 민족에 의해 은이라고 불렸던 점이 유사하다. 이 메시카가 멕시코의 어원이다.[29]

7. 창작물에서

  • 아무래도 상나라를 다룬 창작물 중에서 가장 유명한 건 고전 소설 봉신연의일 것이다. 오덕계에서도 봉신연의(만화) 덕분에 은나라가 친숙한 소재이며, 코에이의 게임 배틀 봉신 시리즈도 봉신연의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
  • 에이지 오브 엠파이어 제1편에도 등장. 은나라가 아니라 상(Shang)으로 등장한다. 빠르게 일꾼 뽑아 성벽을 두르자. 실제로 일꾼이 20% 싸고 빠르게 나오며, 성벽의 내구도가 다른 문명의 두 배다.
  • 날온라인의 신규 캐릭터 생성 후 시작 동영상에 나오며 게임 내에 은나라 말기 시대의 도시가 구현되어있다.
  • SCP 재단에서는 초 오버 테크놀로지 국가로 등장한다.
    허블 팽창에 대해 알고 있으며, 옥 상자 속에 든 모래 위에 그림을 통해 은하계의 배열을 바꿔 버리는 능력을 갖고 있다(SCP-2070).

8. 기타

경상북도 청송군주왕산이라는 이름의 산이 있지만 상나라 주왕과는 관련이 없다. 다만 산에 달기란 이름이 붙은 자연물이 많은데, 이는 후대에 와서 붙여진 것으로 보인다. 산과 관련된 설화는 해당 항목을 참조.

8.1. 한국 재야사학과 관련된 견해

국내에서 은나라가 우리 민족이라는 주장이 있다. 대표적으로 유명한 것이 90년대 퇴마록이고, 2015년 한국인 작가의 책 중 가장 많이 팔린 책으로 집계된 김진명의 글자 전쟁에서는 아예 은이 우리 조상이기 때문에 갑골문과 한자도 모두 우리 문자라는 설정이 있으며, 김진명 본인은 소설의 내용은 허구지만 그 속에 진실이 있다고 주장하며 은이 우리나라인 것이 사실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 외에도 서울대 박사 과정 출신의 사교육 강사인 김정현이 수업 때 은이 우리 민족이고 한자가 우리 문자인 것이 역사적 사실이라고 가르치는 등, 위에 언급한 것 외에도 이런 종류의 주장들이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전파되고 있다.

근거라면 부사년, 고힐강중화민국 초기의 학자들이 주장한 이하동서설일텐데, 그들이 동이를 한국인의 조상을 포함한 계통으로 보기도 했다. 그러나 동시대의 문화 차이로 보았던 현상이 실제로는 시대적 차이임이 고고학에 의해 밝혀진 현대에는 이러한 관점이 거의 폐기되었으며[30], 중국이 편입한 '동이'가 한민족과 연결되니 한국사에도 중국이 손을 뻗칠 권리가 있다고 주장하는 동북공정을 비롯한 매우 극소수의 가설에만 흔적이 남아 있다.


[1] Baxter-Sagart의 재구에 의하면 상고한어 발음은 S-taŋ, 현대 중국어로는 Shāng. 商은 현대의 한자이며 갑골 문자로는 다음과 같다. 참조[2] 현대 중국어로는 Yīn.[3] 읍은 현대 한국에서 면(面)보다 큰 행정단위의 의미가 있으나 상나라 시대에는 나라(國)를 의미한다.[4] 은허는 은의 터, 유적이라는 뜻이고 당시 명칭은 그냥 은이다. 은허는 반경(盤庚) 시대부터의 수도이고 상 전기에는 박을 비롯하여 여러 곳을 옮겨다녔다.[5] 당시 帝는 황제라기보다는 신(神)의 의미가 있었고 상나라 군주들이 왕권을 드높이기 위해 帝를 자처하였다.[6] 최고신으로 상제(上帝)를 섬겼다.[7] 중국(中國)이라는 단어는 주나라 시대부터 자리잡기 시작한다. 한편 상나라 사람들은 다른 종족을 方이라고 불렀다.[8] 비록 상나라 본토는 주나라에게 상실 했지만, 상나라 왕실과 유민들은 그대로 송나라로 옮겨졌기 때문에 송나라가 상의 후신이다[9] 문헌과 고고학적 자료로 추정한 것이며, 정확한 건국 및 멸망 연도는 알기 어렵다. 멸망 시점에 대해서 기원전 1112년설이나 기원전 1046년설도 있지만 딱히 신뢰성이 있는 건 아니다.[10] 衣와 殷은 고대 중국어에서 소위 음양 대전의 관계로서, 같은 지명에 대한 다른 방식의 두 가지 가차자이다.[11] 참고로 은은 한어 병음 표기에 따라 Yin.[12] 다만 상나라의 시조 설(卨, 契)이 제곡과 연결되는 것처럼, 주나라의 시조 후직(后稷) 역시 제곡과 연결된다. 이를 보면 제곡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계보는 그저 프로파간다에 불과할 수 있다. 그리고 후대의 역사서에서야 이 당시의 중국이 일통된 국가인 양 묘사되는 것이고, 당시 실상은 민족부터 다른 완전 별개의 남남인데 그냥 힘이 없어 부하 노릇하던 수준이었다. 그렇기에 탕왕이 하나라를 박살내고 패권을 쟁취했다고 한들 그걸 건국으로 생각하지 않았을 수 있다. 사기에서도 상의 시조 설을 상나라에 봉한 게 순 임금 시절이라는 기록이 나온다. 상나라는 이때 건국되었으되 하나라를 내쫓고 중원의 일인자인 천자가 된 건 탕왕이라는 것이 사기의 기록.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기록상의 모순이 아니라 시각의 차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리고 이는 상의 뒤를 잇는 주나라에도 똑같이 적용된다.[13] 사기에서는 하, 상, 주의 조상이 모두 황제로 나오는데, 이것을 사실로 가정할 경우, 가장 이상한 경우는 주나라다. 황제에서 하나라 마지막 군주 까지 총 20대, 황제에서 탕까지 총 17대이며, 황제에서 상나라 마지막 군주 제신까지는 총 46대이다. 그런데 황제에서 주나라 무왕까지 총 19대에 불과하다. 밀양 박씨에서 약 천 년 동안 약 20대가 벌어졌는데, 이를 적용하면 주나라는 직계에서 매우 먼 자손이 되어버린다. 너무 티가 나는 주나라의 족보 조작?[14] 오거가 (걱정하며) 말하였다. "(하나라) 걸왕은 유잉에서 회맹한 후 유민에게 배반당했고, (상나라) 주왕은 여산에서 회맹한 후 동이에게 배반당했으며, (주나라) 유왕은 태실에서 회맹한 후 융적에게 배반당했습니다. 어떤 일이든 마지막이 중요하니 신중하시기 바랍니다." 伍舉曰 "桀為有仍之會 有緡叛之 紂為黎山之會 東夷叛之 幽王為太室之 戎 翟叛 君其慎終" - 사기[15] 이러한 사실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된다.[16] 주나라와 상나라의 관계만 보더라도, 주왕 이전에 이미 주나라가 상나라와 병존하고 있었다. 그리고 주왕의 몰락 이후에도, 송으로 이름이 바뀌고 패권을 빼앗겼을 뿐 상의 세력은 주와 병존했다.[17] 도철은 재물과 음식을 몹시 탐낸다는 상상의 동물.[18] 철기는 춘추전국시대 때 외부를 통해 유입되었다. 애초에 철기의 기원은 서아시아다.[19] 기와춘추전국시대에 처음 등장했다.[20] 이해 편의상, 갑골문 원문을 한자로 치환해서 적었으며 해석은 상명대 중국어 문학과 김경일 교수의 것을 참조했다. 다른 인용문도 같다.[21] 女와 才가 붙은 글자인데, 일단은 임시로 '재'라 읽었다.[22] 이를 묘사한 인형도 발굴되고 있다.[23] 이를 "죽어서도 생각을 못하고 명령에 순종하며 부림을 받게 하기 위해서" 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고대 중국에서는 생각하는 기관은 심장이라고 보았지 머리라고 보지는 않았다. 상나라 시대에는 인식이 달랐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 볼 근거는 없다.[24] 혹자의 경우 이를 무덤 주인의 혼의 기력(?)을 보충하기 위한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마치 실제 사람들이 건강을 챙긴다고 각종 보양식을 먹는 것처럼 일종의 혼의 보양식으로서 순장을 한 것이라고.[25] 공자와 유가의 제자들이 각지에서 인신 공양의 풍습을 철폐했다는 기록은 상당히 많은 곳에서 발견할 수 있다. 바꿔 말하면 많은 지방에서 여전히 인신 공양이 계속되었던 것이다.[26] 대표적으로 송양지인으로 유명한 송나라 양공. 그 외에 춘추오패에 버금가는 인물로 칭송받는 진나라 목공도 죽으면서 신하들을 같이 끌고 들어갔다.[27] 은주왕 제신주문왕의 장자 백읍고를 죽이고 요리해서 그것을 주 문왕에게 먹였다고 한다.[28] 당시 남미 대륙은 수많은 부족으로 나뉘어 있었고, 서로 같은 동족이라는 개념 자체가 없었다. 그나마 거기서 끝났으면 모르겠는데 아즈텍이 툭하면 포로 잡아가 잡아먹는 바람에 더 나빠졌다. 만약 아즈텍이 식인하지 않고 주변 부족과 사이가 좋았다면 코르테스의 침공은 실패로 돌아갔을 수도 있다.[29] 아즈테카란 명칭은, 국가가 존재했던 당시, 복속되거나 적대한 메소아메리카인들은 그렇게 부르지 않았고, 더군다나 스페인 콩키스타도르들도 아즈테카라고 부르지 않았다. 흔히 착각하는게, 아즈틀란 섬에서 남쪽 멕시코 고원지대로 이주했다는 설화는 메시카인들만이 아니라, 여러 나우아틀 부족들이 공유하던 신화 체계였지 특정 민족을 지칭하는것은 아니였다. 신화에서나 볼 수 있는 명칭일 뿐이란 말이다. 테노치티들란을 위시한 멕시코 영향권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로 정착한 것은 1843년 윌리엄 h 프레스콧의 저서 멕시코의 정복에서 스페인화된 이후로도 수도와 국명으로 쓰이는 멕시코란 명칭이 직관적이지 않다고 생각해, 스페인 점령 이전 멕시코를 "아즈텍"이라고 명명했던 게 역사학계에 커다란 영향력을 미쳐 어원이 굳어진 케이스다.[30] 이 주장이 가장 오랫동안 남은 것이 좀 당황스럽게도, 한영우의 다시 찾는 우리역사이다. 이 때문에 한영우는 기자조선까지 긍정했다. 물론 기자가 직접 온 것은 아니고, 기자의 계통인 동이족이 건너 온 것으로 이해 한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