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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줄: 대관식을 받은 적이 없는 로마왕이지만 사실상 황제였던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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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성 로마 제국 합스부르크 왕조 제2대 황제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 |||
<colbgcolor=#ffcc20><colcolor=black> 제호 | 막시밀리안 1세 (Maximilian I) | ||
출생 | 1459년 3월 22일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비너노이슈타트 | |||
사망 | 1519년 1월 12일 (향년 59세) | ||
오스트리아 대공국 벨스 | |||
재위기간 | 신성 로마 제국 황제 | ||
1508년 2월 4일 ~ 1519년 1월 12일 | |||
독일왕 | |||
1486년 2월 16일 ~ 1519년 1월 12일 | |||
오스트리아 대공 | |||
1493년 8월 19일 ~ 1519년 1월 12일 | |||
서명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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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르타뉴 여공작 안 (1490년 결혼 / 1492년 무효화) | |||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1494년 결혼 / 1510년 사망) | |||
자녀 | 펠리페 1세, 마르가레테 | ||
아버지 | 프리드리히 3세 | ||
어머니 |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공주 | ||
형제 | 쿠니군데 | ||
종교 | 가톨릭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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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합스부르크 가문 출신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이다.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의 선대 황제이자 조부이기도 하다. 마리 드 부르고뉴와의 극적인 결혼 과정과 본인의 적극적인 이미지 구축으로 인해 마지막 기사(Der Letzte Ritter)라는 별칭을 지녔다.적극적인 정략결혼을 추진하여 합스부르크 가문의 영지와 세력을 크게 넓혔다. 또한 이탈리아 반도를 놓고 프랑스와 맞서 대를 잇게 되는 지리한 싸움을 시작하기도 했다. 언어에 큰 재능이 있어서 11개 국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는데, 전쟁터에서 용병끼리 싸움이 났는데 서로 다 언어가 모두 달라서 누가 말리지도 못하는 와중 친히 개입해서 진정시켰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다.
2. 생애
1459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프리드리히 3세와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사이에서 태어난 막시밀리안은 1477년, 부르고뉴국의 군주 용담공 샤를의 외동딸인 마리 드 부르고뉴와 결혼함으로써 부르고뉴 공국과 저지대 지역[1]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프랑스와의 분쟁이 계속되어 1493년에 상리스 조약이 체결될 때까지 프랑스와 전쟁을 치렀다. 이 기간 중 마리가 1482년에 사망한 후 브르타뉴 여공작 안과 결혼을 하려고 시도했으나 어린 샤를 8세의 섭정이었던 안이 샤를의 약혼녀이자 막시밀리안 1세의 딸인 마르가레테를 돌려보내고 샤를과 브르타뉴의 안을 결혼시키는 일도 있었다.[2]한편 이 기간 동안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내의 합스부르크 영지 종주권을 자신에게 통합시키는 데 성공하였다. 특히 레오폴트계의 다른 후손으로 티롤 백작이자 외지오스트리아 대공이었던 지기스문트를 연금 하사 명목으로 내쫓고 얻은 티롤 후백국의 은광 획득은 중요한 성과였다. 이후 빈이 아닌 인스브루크를 거점삼아 활동하였으며, 1486년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열린 황제선거에서 독일왕으로 선출되었고 1494년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결혼함으로서 밀라노 공국으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1495년 보름스 제국의회에서 황권, 즉 중앙권력의 강화를 시도했으나 제국 내의 선제후들과 타 영방 군주들의 반대에 직면하여 이는 1504년에 반대파의 수장인 마인츠 대주교 베르톨트가 사망하고 독일 최대의 금융업자인 푸거 가문과의 신용협정을 통해서 막대한 자금을 융통받을 때까지 계속되었다[3]. 1499년에는 슈바벤 전쟁에서 패전하여 바젤 조약으로 스위스의 사실상 독립을 인정해야 했으나, 1495년 아들 필리프가 카스티야의 후아나와 결혼함으로써 훗날 스페인에 합스부르크 가문이 집권하는 계기를 만들었다[4]. 필리프와 후아나 사이에서 태어난 카를 5세는 제국의 차대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으로, 페르디난트 1세는 차차대 황제이자 오스트리아 대공 겸 보헤미아 왕국과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 국왕으로 선출되어 즉위했다.
이탈리아 반도에서는 1495년부터 본격적으로 개입을 시작하여 샤를 8세의 나폴리 왕국 정복을 저지했고, 베네치아 공화국과도 상당한 기간동안 대립하고 있었다. 교황이 황제 대관식을 해주기로 했으나 베네치아가 끼어들어 막시밀리안 1세의 안전한 통과를 방해했기 때문에 이탈리아와 가까운 트리엔트[5]에서 교황의 대리인 자격으로 트리엔트 대주교가 대관식을 주관해주었다. 그러나 이미 이시기엔 교황의 황제 대관은 황제 즉위와 상관 없었다. 스스로 그 이전부터 황제 칭호를 썼고 아무도 트집잡지 않았다. 훗날 그가 심혈을 기울여 기반을 닦아준 손자 카를 5세는 클레멘스 7세를 사로잡고 볼로냐에서 교황에 의해 대관식을 치렀고, 페르디난트 1세는 아헨에서 독일왕 대관식을 치른 이후 황제로 따로 대관식을 치르지 않았다. 이후 합스부르크 가문의 선출 황제들은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선거 결과가 나오면 바로 프랑크푸르트 대성당에서 대관식을 치렀다.
막시밀리안의 진정한 시련은 밀라노 공국에서 일어났다. 모계를 통해서 비스콘티 가문을 잇고 합스부르크와 평생에 걸친 항쟁에 들어간 프랑스 국왕 프랑수아 1세는 자신이 밀라노 공작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전쟁을 일으켰고, 결국 1515년 마리냐노 전투에서의 패배와 이를 추인한 브뤼셀 조약을 통해서 밀라노 공국을 프랑스에게 넘겨야만 했다. 밀라노는 뒤에 손자 카를 5세가 수복할 때까지 프랑스령이 되었다. 비록 원정은 실패했지만 이탈리아 원정비용을 제공한 야코프 푸거에게 제국백작을 수여했다. 훗날 야코프 푸거는 장손자 카를 5세의 황제선거 자금 대출을 해줘서 당선에 공헌했고, 면죄부 판매자금을 대출과 로마 교황청 송금을 맡아서 종교 개혁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말년에는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를 약화시키고자 둘째 손자 페르디난트를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국왕 울라슬로 2세의 딸 언너와, 셋째 손녀 마리아를 울라슬로 2세의 상속자 러요시와 결혼시키고 울라슬로 2세의 막내 동생인 폴란드 국왕 겸 리투아니아 대공 지그문트 1세의 보헤미아-헝가리-크로아티아 상속을 배제시켰다. 당시에는 그저 폴란드 왕국-리투아니아 대공국 야기에우워 왕조의 보헤미아와 헝가리-크로아티아에 대한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합스부르크 가문의 동유럽 영향력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정도의 결혼 정책이라 여겼으나 러요시 2세가 후사도 없이 모하치 전투에서 전사하면서 졸지에 보헤미아, 헝가리, 크로아티아가 합스부르크 가문에게 넘어오는 행운을 맞이하게 된다. 또한 교황청에서 마르틴 루터를 체포하고 처벌하라는 압력에는 냉담한 반응을 보였다. 스페인에서는 사돈인 아라곤 국왕 페란도 2세를 설득하여 장손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로 즉위할 수 있도록 조처했고, 이후 장손의 순조로운 황제 선출을 위해 오스만 제국에 대항하는 동맹을 구성하는데 전념하다가 1519년 1월에 니더외스터라이히의 벨스에서 사망하였다.
란츠크네히트를 창설하는 등 군사적인 업적에서 재능을 발휘했고, 중요한 군사개혁과 행정개혁[6]을 실속있게 시행했으며 중세적 사고가 기반임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사고에도 관대하였으며, 예술과 문학 및 과학의 발전에도 상당한 정력을 기울였다. 특히 군주의 기사도적인 면모를 보이는 데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나 경제문제에는 문외한이었으며 재정적으로도 믿음직하지 못했기에, 결국 군사력 확보에 어려움을 겪어 이탈리아반도에서는 손해만 보았다.
막시밀리안은 카롤루스 대제의 제국을 부활시키려고 했지만, 그 많은 결혼과 전쟁에도 불구하고 그 당대에 얻은 것은 보잘 것 없었다. 다만 이것은 후대에 가서 엄청난 효과와 역사적 사건들을 야기하는데, 그의 유업은 손자인 카를 5세와 페르디난트 1세에 의해 계승되어 카를 5세는 스페인, 이탈리아 반도, 아메리카, 필리핀을 추가하여 합스부르크 사상 최대 판도의 대제국을 이룩하는 위업을 세우고, 페르디난트 1세는 할아버지가 시킨 결혼 덕분에 오스트리아 대공국에 보헤미아 왕국, 헝가리 왕국, 크로아티아 왕국을 추가하여 동유럽을 호령할 합스부르크 군주국을 출범시켰다는 것이다. 자세한 것은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항목 참조.
3. 가족
3.1. 조상
본인 | 부모 | 조부모 | 증조부모 |
막시밀리안 1세 (Kaiser Maximilian I.) | <colbgcolor=#fff3e4,#331c00> 프리드리히 3세 (Kaiser Friedrich III.) | <colbgcolor=#ffffe4,#323300> 오스트리아 공작 에른스트 (Erzherzog Ernst der Eiserne) | |
오스트리아 공작 레오폴트 3세 (Herzog Leopold III. von Habsburg) | |||
베르데 비스콘티 (Verde Visconti) | |||
마조프셰의 침바르카 (Cymbarka mazowiecka) | |||
마조프셰 공작 시에모비트 4세 (Siemowit IV, Książę mazowiecki) | |||
리투아니아의 알렉산드라 (Aleksandra Olgierdówna) | |||
포르투갈의 레오노르 (Leonor de Portugal) | |||
두아르트 1세 (Rei Duarte I de Portugal) | |||
주앙 1세 (Rei João I de Portugal) | |||
랭커스터의 필리파[7] (Philippa of Lancaster) | |||
아라곤의 레오노르 (Elionor d'Aragó) | |||
페란도 1세 (Rey Fernando I de Aragón) | |||
알부르케르케의 레오노르 (Leonor de Alburquerque) |
3.2. 아내
3.2.1. 마리 드 부르고뉴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마리 드 부르고뉴 |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의 유일한 자식이자 상속녀로 당시 황금의 신부, 부귀공 마리 등등으로 불렸던 여성이다. 마리와 막시밀리안은 서로 6촌 사이였다. 아버지 샤를이 부르고뉴 전쟁으로 1477년 로렌 공작 르네 2세와의 낭시 전투에서 로렌 공작이 고용한 스위스 용병대에 의해 전사하자 그녀는 약관의 나이로 부르고뉴와 저지대 국가를 물려받았다. 이 당시 발루아부르고뉴 가문이 통치하던 영지, 특히 특히 플랑드르를 위시로 한 저지대 국가는 유럽 내에서도 손꼽히는 부유한 지역이었던지라 서로 마리와 결혼해 영지를 가지고 싶어했다. 특히 마리와 같은 발루아 왕조이자 부르고뉴 공국의 명목상 종주국이던 프랑스가 적극적이어서 당시 프랑스 국왕 루이 11세는 샤를이 전사하자마자 남자 계승자가 없다는 이유로 부르고뉴를 침공하여 합병하였고, 저지대의 백성들을 선동하여 마리를 겐트 성에 가둬버린 후 자신의 7살 난 아들과의 결혼을 강요할 정도로 노골적으로 야욕을 드러냈다. 당시 20대였던 마리는 당연히 이를 거절했고, 분노한 루이 11세는 마리를 영원히 성에 가두어 굶겨죽이려 하였다. 프랑스의 위협이 목전에 다가왔고 공국 내에서 도와줄 이는 아무도 없게 되자 마리는 자신을 보호해 줄 보호자가 필요했기에 아버지의 유언대로 생판 모르는 오스트리아 대공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의외인 점은 용담공 샤를의 아버지 선량공 필리프 시절만 하더라도 알자스를 두고 부르고뉴와 오스트리아가 대립했으며, 심지어 막시밀리안의 아버지 프리드리히 3세는 용담공 샤를의 로타링기아 국왕 수여를 앞두고 트리어에서 도망친 전적도 있었다. 그러나 부르고뉴에게 더 큰 위협은 프랑스였기에 샤를은 마리에게 자신이 죽으면 오스트리아에게 도움을 요청하라는 유언을 남겼다.막시밀리안은 마리의 구원 요청을 받자마자 가문의 사비를 털고 쾰른으로 건너가 대출까지 받아서 병사들을 모집한 다음 마리가 있는 겐트에 입성해 마리를 구출했다. 이를 계기로 마리는 막시밀리안 1세와 결혼했다.[8] 아름답고 부유하며 잘 배운 여성이였다고 전해지는 마리를 막시밀리안은 매우 사랑했고 둘 사이에는 두 명의 아이가 태어나게 된다. 장남 필리프[9]와 장녀 마르가레테[10]를 남긴 후 마리는 세 번째 아이를 임신하고 있던 중 즐겨하던 사냥을 갔다가 말에서 떨어지는 바람에 향년 25세로 사망했다. 이후 막시밀리안은 평생 마리를 그리며 살아가게 된다. 사망 후 마리가 고향인 브뤼헤에 묻히자 막시밀리안은 자신의 사후 오스트리아에 묻힐 자신의 시신에서 심장을 꺼내 마리 곁에 묻어달라고 유언을 남길 정도. 그래도 황후 자리를 비워둘 순 없어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와 정략결혼을 했지만 결혼생활 중에서도 동침을 이런저런 핑계로 미루는 등 부부관계는 매우 냉랭해서, 결국 1500년 이후에는 별거하는 것으로 피크를 찍는다.
여담이지만 동화 라푼젤의 모델이다. 그녀가 막시밀리안에게 청혼하며 편지에 자신의 머리카락을 잘라 보낸 것이 상상력을 불러일으켜 이야기의 모태가 된 것. 고립된 상황의 미녀라는 점에서 동일한 면모를 보인다. 또한 초상화에서 마리가 쓴 고깔모양의 모자는 그녀가 즐겨 쓰던 모자로 유럽에서 큰 인기를 끌었다.
3.2.2. 안 드 브르타뉴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안 드 브르타뉴 |
막시밀리안 1세와 대리혼까지 했는데도 프랑스에서 신부를 가로채갔다. 실제 결혼생활을 한 것은 아니라서 부인이라고 보기는 다소 어렵다. 자그마한 키에 예쁘장한 얼굴을 가진 안 드 부르타뉴는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로, 이전에 마리 드 부르고뉴를 빼앗긴 것이 못내 아까웠던지 프랑스 왕 샤를 8세가 그녀를 데려가 왕비로 삼았다. 그것도 원래 결혼 상대였던 막시밀리안의 딸 마르가레테까지 걷어차고. 즉, 자신의 새 부인을 사위가 되어야 할 샤를 8세에게 빼앗기고 딸은 사위에게 쫓겨나게 된 것이다. 이 불쌍한 여성은 이후 2명의 프랑스 왕과 결혼을 해서 내내 임신과 출산만 반복하다가 변변한 후계자도 남기지 못하고[11] 젊은 나이에 사망하게 된다. 브르타뉴 공국은 프랑스가 집어삼켰음은 물론이다. 샤를 8세의 거의 유일하다시피 한 업적이 바로 이 결혼을 통해 브르타뉴 공국을 프랑스 왕국에 공식적으로 합병한 것이다.
3.2.3.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colbgcolor=#ffd700><colcolor=black>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
밀라노의 공작인 갈레아초 마리아 스포르차와 두 번째 부인인 사보이아의 보나[12] 사이에 태어난 딸이다. 아버지인 밀라노 공작 갈레아초는 여자를 밝히는 데다 잔인하고 폭력적이기로 유명했다. 비앙카는 2살도 되기 전에 사촌인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1세와 첫 번째 결혼을 했는데 필리베르토 1세는 10살의 비앙카를 남겨놓고 일찍 죽어버렸다. 어린 나이에 과부가 된 비앙카는 아름다운 외모로 유명했지만 좋은 교육도 받지 못했고 세련되거나 교양이 있지도 않아 막시밀리안 1세의 첫 번째 부인인 마리와 많은 비교를 당했다. 막시밀리안은 "아름답다는 것은 인정하지만 마리만큼 지혜롭지 못하다"고 험담하기도 했다. 막시밀리안 1세와의 사이에서 아이가 없었고, 그나마 간간이 이어지던 부부 관계도 멀어져 1500년을 기점으로 별거하게 된다. 단 나이 차가 얼마 되지 않는 의붓자식들과는 사이가 매우 좋았는데 자식과 어머니라기보다는 남매같은 관계였다고 한다.
3.3. 자녀
자녀 | 이름 | 출생 | 사망 | 배우자/자녀 |
1남 | 펠리페 1세 (Felipe I, Rey de Castilla) | 1478년 7월 22일 | 1506년 9월 25일 | 후아나 1세 슬하 2남 4녀[13] |
1녀 | 사보이아 공작 부인 마르가레테 (Margarete von Österreich, Herzogin von Savoyen) | 1480년 1월 10일 | 1530년 12월 1일 |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14] |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2세 |
4. 기타
여담으로 잉글랜드 국왕 헨리 8세처럼 무구에 조예가 깊어 맥시밀리언 아머에 이름이 붙은 그 인물이다. 방어구의 역사라는 책에선 갑옷 오타쿠라고 부른다. 그와 원수지간이 된 손자와는 달리 헨리 8세와 관계는 같은 취미를 가진 덕후로 나쁘지 않았는지 악마처럼 기괴한 모양의 철가면을 만들어 선물하기도 했다.두번째 부인의 사후에는 교황이 되기를 꿈꾸기도 했었다고 한다. 푸거 가문과 접촉해서 추기경들을 매수할 비용도 마련하고, 딸에게 편지를 쓰면서 "미래의 교황"이라고 서명도 할 정도였는데 어쩐 일인지 흐지부지되었다...
세간에 알려진 '마지막 기사', '훈남' 이미지와 달리 굉장히 우울했던 사람으로 말년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을 여행하면서 급사할 경우를 대비해 안치될 관을 함께 가지고 다녔다고 한다. 실제로 오스트리아 중부의 벨스(Wels)에서 사망했는데 생전에 그가 아꼈고 묻히기를 원했던 인스브루크는 서쪽에 있어 벨스와 거리가 멀었던 탓에 그가 태어난 비너노이슈타트(Wiener Neustadt)에 안장되었다.
교황의 대관을 받지 않은 것과는 별개로 일평생 교황에게 대관식을 받기 위해 애를 썼다. 심지어 푸거로부터 막대한 돈을 빌려 군대를 양성, 친히 로마의 대관식을 위해 이탈리아 원정에 나서기까지 했다. 정작 힘겹게 일으킨 원정은 연이은 외교적 마찰과 지독한 재정 결핍으로 인해 매번 실패로 끝났다. 이탈리아인들은 이를 멸시하듯 '가난한 막시밀리안'이라는 별명까지 붙여가며 그를 조롱했다.
5. 매체에서
2017년 오스트리아-독일 합작 방송으로 방영된 막시밀리안&마리(Maximilian – Das Spiel von Macht und Liebe)의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배우는 야니스 니뵈너(Jannis Niewöhner).이탈리아에서 살아남기에서도 동로마가 재건되자 그 축하 사절단의 대표로서 등장한다. 아직 황제는 커녕 로마왕도 안된지라 배경시점에서 가지고 있는 지위인 부르고뉴 공작으로 불리며 북이탈리아에서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는 밀라노 공작을 주목하고 있다. 이후 그에게 감시를 붙이기 위해 원역사보다 이른 시점에 비앙카와 결혼을 하기도 하며 외교 업무로 워낙에 소설에서 자주 모습을 보이는지라 독자들은 사실상 북이탈리아와 동롬 전담 외교관으로 보고있다. 최신화 기준 로마왕의 자리에 등극했으며 주인공을 경계하지만 잊을만하면 다른 곳에서 일이 터져 견제는 못하고 있다.
5.1. 게임
5.1.1. 도미네이션즈
막시밀리안의 투구가 유물로 등장한다.5.1.2. 유로파 유니버셜리즈4
기본적 등장은 1508년 캉브레동맹전쟁에서의 555 군주로 등장하나 그랜드 캠페인상에 이벤트로 등장가능하다아버지인 프리드리히 3세가 오스트리아 군주인 상태에서의 후계자는 그의 피 후견인인 라디오스황태자이나
이벤트로 라디오스가 죽거나 혹여 프리드리히가 죽고 라디오스 황태자가 즉위를 하여도 직후에 나타나는 후계자를
갈아버리거나 시일이 어느정도 지나면 특정 이벤트로 막시밀리안이 후계자로 등장하는 이벤트가 등장한다.
생몰일이 고증일과 다르게 나타나긴 하지만 안그래도 막강한 초반 오스트리아 셋팅이 잘된경우 등장하면 오스만의 발칸반도
축출뿐 아니라 소아시아까지의 이른정복도 가능할정도
[1] 현재의 베네룩스 3국인 네덜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2] 이 결혼으로 브르타뉴는 정식으로 프랑스의 일부로 편입되었다.[3] 푸거 가문의 막대한 재력은 막시밀리안의 후계가 계속 제위를 차지하게끔 절대적 기여를 했다.[4] 다만 원래 신성 로마 제국 소유였던 합스부르크 네덜란드도 훗날 장손 카를 5세에 의해 스페인 소속으로 넘어갔다.[5] 지금은 이탈리아 영토이나 당시에는 오스트리아 대공국 영토였다.[6] 예를 들어 신성 로마 제국을 10개의 관구(Reichskreise)로 나눈 것이 막시밀리안 1세의 업적이다. 또한 독일 민족의 신성 로마 제국(Heiliges Römisches Reich Deutscher Nation)을 공식 국호로 사용했으며, 선출 황제(Erwählter Römischer Kaiser)를 자처하며 황제의 즉위에는 교황의 대관이 필요없다고 선언한 것도 막시밀리안 1세였다.[7] 에드워드 3세의 손녀다.[8] 마리를 구출한 다음 날 막시밀리안은 마리의 이니셜 M모양의 다이아몬드 반지를 선물하며 청혼했다고 한다. 이 반지를 후대의 결혼반지의 유래로 보는 견해도 있다.[9] 훗날의 카스티야 왕 펠리페 1세로 별명이 미남왕 또는 미남공이였다. 카스티야 여왕 후아나와 결혼했고 카스티야 귀족들은 후아나가 정식으로 즉위하자 그녀의 정신병을 이유로 남편 필리프를 공동 국왕으로 추대했다. 하지만 왕위에 오르기 위해 카스티야에 오자마자 필리프는 병으로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났고, 남편의 죽음에 정신줄을 놓은 후아나는 말그대로 미쳐버리고 마는데 그 유명한 미친 후아나(후아나 라 로카)라는 별명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물론 후아나의 외가 혈통이 정신적으로 취약하긴 했으나 그만큼 후아나가 필리프를 사랑했다는 사실은 유명해서 후대의 창작물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10] 루이 11세가 마리와 결혼시키려고 했던 프랑스 왕세자 샤를과 약혼했으나 왕위에 오른 샤를이 브르타뉴 공국의 영지를 얻기 위해 브르타뉴 공국의 상속녀 안과 결혼하면서 걷어차였다. 이후 마르가레테는 오빠 필리프의 아내인 후아나의 오빠이자 카스티야와 아라곤의 왕위 계승자였던 아스투리아스 공 후안과 결혼했으나 후안은 얼마 안 가 사망하였고, 다시 사보이아 공작 필리베르토 2세와 결혼하였으나 필리베르토 2세 역시 얼마 못 가 사망하였다. 이후 마르가레테는 결혼하지 않고 맏조카 카를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가 되어 스페인으로 떠나자 카를의 대리인인 합스부르크 네덜란드 총독으로서 저지대 지역을 통치하며 세월을 보냈다.[11] 루이 12세 사이에서 얻은 장녀 클로드와 막내 딸 르네를 제외하곤 다 요절해서, 클로드가 훗날 브르타뉴 여공작이 되며 프랑수아 1세와 결혼해 7명의 자녀를 낳지만 앙리 2세와 마르그리트를 제외하곤 다 요절하고 클로드도 24살이란 젊은 나이에 사망한다. 막내 딸 르네는 에르콜레 2세 데스테와 결혼해 페라라 공작부인이 된다.[12] 사보이아의 보나는 잉글랜드 국왕인 에드워드 4세가 엘리자베스 우드빌과 결혼하기 이전에 워릭 백작 리처드 네빌이 에드워드 4세의 결혼 대상으로 점찍어 뒀던 여성이다. 잉글랜드 왕국의 왕비가 될 수도 있었던 보나는 에드워드가 엘리자베스랑 홀랑 결혼해 버리는 바람에 갈레아초와 결혼하게 되었다.[13] 포르투갈과 프랑스의 왕비 엘레오노르, 카를 5세, 덴마크와 노르웨이의 왕비 엘리사베트, 페르디난트 1세, 헝가리와 보헤미아의 왕비 마리어, 포르투갈의 왕비 카타리나[14] 이사벨 1세와 페란도 2세의 아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