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세아니아의 민족 | |||||||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5a99c5, #75b2dd, #5a99c5)" {{{#!wiki style="color: #fff; margin: -0px -10px -5px; min-height: 26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폴리네시아인 | 미크로네시아인 | 멜라네시아인 | ||||
호주인 | 뉴질랜드인 | 파푸아인 | |||||
통가인 | 하와이 원주민 | 사모아인 | |||||
{{{#!wiki style="margin: -16px -10.5px" | 마오리족 | 호주 원주민 | 인도계 피지인 | 유로네시아인 | }}} | ||
<bgcolor=#ccc,#666> ※ 현존 민족만을 표기 | |||||||
※ 다른 지역·국가의 민족 둘러보기 | }}}}}}}}}}}} |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Indigenous Australian)의 깃발. | 토러스 해협 제도인(Torres Strait Islanders)의 깃발. |
오스트레일리아 북부 배서스트 섬의 원주민. (1939년 촬영)[출처] |
현대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
1. 개요
오스트레일리아 대륙에 유럽인이 도래하기 전부터 거주하고 있었던 민족들을 총칭하는 말이다. 애버리지니(Aborigine, 어보리진이라 알려져 있다) 또는 Indigenous Australian(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라고 불리며 가끔씩 퍼스트 오스트레일리안(First Australian)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Indigenous Australian이라는 개념은 다시 어보리진 호주인(Aboriginal Australians)과 토레스 해협인(Torres Strait Islanders)으로 분류된다. 최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이 '애버리지니'라는 명칭을 선호하지 않음에 따라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표현이 권장되고 있다. 현재는 원주민에 대한 배려로 호주 국기를 게양할 때 대부분 원주민기도 함께 게양한다.2021년 기준으로 어보리진 호주인과 토레스 해협인을 합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 인구는 812,728명으로, 호주 인구의 3.2%를 구성한다. 특히 노던 준주(Northern Territory)에선 인구의 30%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지만 나머지 지역에선 비중이 적다.[2] 원래는 250여개의 다양한 언어를 사용했으나 지금은 상당수 언어가 사용되지 않으며 영어가 널리 사용된다. 그래도 칼라라가우야어나 피찬차차라어처럼 널리 쓰이는 언어도 존재한다. 이들 언어의 사용자 수를 모두 합치면 5만 명 정도로 호주 내 한국어 사용자 수와 비슷하다. 종교적으로는 기독교인이 3/4, 무종교인이 1/4이며 1%만이 전통종교를 믿고 있다.
2. 특징과 문화
파마늉아어족(연갈색)과 비 파마늉아어족(겨자색과 회색)의 분포 |
1885년 출간된 독일의 백과사전 Meyers Lexikon에서는 이들을 흑인으로 분류했고 한동안 이러한 분류가 널리 통용되었으나, 흔히 생각하는 아프리카 계열 흑인과는 유전적 특징이 전혀 다르다. 하플로그룹 조사 등으로 분석한 결과에 따르면 독자적인 그룹인 오스트레일리아 인종인 것으로 여겨진다. 호주 원주민의 조상은 유럽인과 아시아인의 공통조상과의 유전적 차이가 적어도 6~7만 년쯤은 떨어져있음이 확인되었는데 이를 토대로 추측하여 보면, 대략 5만 년 전에 아프리카에서 아라비아 반도인 예멘의 경류를 따라 남아시아로 진출한 뒤 다시 오세아니아로 나아갔다고 볼 수 있다. 이주 루트가 뉴기니 지역을 통과해서 호주 대륙으로 정착한 것으로 본다. Y염색체 기준으로 따졌을 때 하플로그룹 S가 강하게 나타난다.
그리고 유럽인과 마찬가지로 특정 유전자 돌연변이가 발생하여 머리카락의 색이 다채로운 편이다. 갈색은 물론이고 금발도 흔한 편.[3] 물론 흑발도 많긴 하다. 그런데 사실 이들 중에는 완전한 금발이나 완전한 흑발보다는 금발과 흑발이 반반씩 섞여있는 경우가 훨씬 많아서, 호주 현지에서도 이처럼 금발과 흑발이 묘한 비율로 섞여 있는 형태의 머리를 원주민의 상징들 중 하나처럼 생각한다.
또한 머리카락을 통해 성적 이형성(sexual dimorphism)이 발현되는 사례라서 남성들은 위의 사진과 같이 돌돌 말린 심한 곱슬머리가 나타나지만 여성들의 경우는 물결형의 머리가 많다. 이는 파푸아뉴기니를 포함한 멜라네시아 지역도 동일.
파푸아뉴기니 원주민들과 같이 문자를 사용한 적은 없지만 그만큼 기억력이 뛰어나다. 호주 원주민 언어를 조사했던 언어학자 니컬러스 에번스는 원주민들이 5년 전 봤던 메이저리그 경기에서 어떤 선수가 뛰었는지(!)까지도 낱낱이 기억했다는 일화를 본인의 책에 서술했다. 이는 문자의 부재로 인해 부족의 문화와 전통 및 지식을 전부 기억에 의존해 다음 세대에 물려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호주 원주민 남성들의 경우 성인식으로 워커바웃(walkabout)[4]이라는 의례를 거쳤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부족별로 발치, 문신, 몸에 상처내기, 피 흘리기, 할례 등 고통을 참는 의례가 행해졌다. 아폴리지니 사회의 부족들은 통상적인 할례에서 끝나지 않고 요도를 절개하는 할례의식이었다.[5] 이러한 풍습은 잔혹성 때문에 20세기 이후로 사라졌지만 정신 수양에 불과한 워커바웃은 호주의 전통 문화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그 밖에도 성인식을 소년들의 머리에 숯불을 붓거나(!), 약간의 불씨가 남은 숯 위에 엎드리게 하고서 소년들의 어머니들이 아들의 등을 밟는 후덜덜한 방식으로 치르는 부족도 있었다. 할례나 숯불 붓기 등 하드코어한 성인식은 주로 중부 사막에 살던 부족들 사이에서 이루어졌다. 고통을 참지 못하면 부족의 성인이 될 자격이 없는 것은 물론 대대로 이어져 오는 역사와 신성한 비밀의 의식을 이어나가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호주 원주민들은 창, 활, 투석무기 등 다양한 무기를 만들어 사용했고, 캥거루나 주머니쥐 등 유대류의 가죽을 이용한 옷과 망토를 만들어 입었다. 옷과 망토에는 식물에서 추출한 염료로 원주민 고유의 문양을 그려 넣었다. 바디페인팅 역시 호주 원주민의 특징으로, 다양한 자료에서 얻은 염료로 몸을 장식했다. 개중에는 나체로 사는 부족도 있었다.
이들이 사용한 유명한 도구인 사냥도구 부메랑과 악기 디저리두가 있다. 해당 항목 참고.
중앙 오스트레일리아 지역의 아렌테(Arrente) 사회에서는 쿠르다이차(kurdaitcha)라는 주술사 겸 사형집행인이 있었다. 말이 주술사지 며칠이고 몇달이고 범인을 계속 스토킹하며 결국 죽음에 이르게 만드는 저승사자에 가까웠다. 쿠르다이차는 장로들의 비밀 회의를 통해 마을에서 가장 영력이 강하다고 생각되는 주술사에게 비밀리에 선발되었고 특정인에 대한 범죄나 죽음[6] 등 보복의 목적으로 집행되었다. 쿠르다이차는 흔적을 남기지 않기 위해 캥거루 가죽과 에뮤 깃털 가면으로 분장하고 에뮤 깃털과 머리카락으로 만든 특수 신발을 신고 범인을 추격했으며, 뾰족하게 다듬은 캥거루 뼈로 범인을 가리키며 저주의 주술을 퍼부었다고 한다. 실제로 이 저주는 효과가 있었고 범인으로 지목되어 저주받은 사람은 점점 쇠약해지더니 결국 며칠 만에 바로 죽었다고 한다. 2004년 원주민이 주도하는 정부기관인 원주민 및 토레스 해협 섬 주민 위원회의 폐지에 동의하지 않은 호주 원주민 여성이 존 하워드 호주 총리를 뼈로 가리키며 저주한 일도 있었다.
3. 역사
3.1. 식민지 개척 이전
선사시대 벽화 |
유럽인 도래 이전의 부족별 영토 |
한편, 물이 풍부하고 상대적으로 기후가 적합한 동남부 지역에서는 야생 기장을 수확하고 화전을 통해 지력을 향상시키는 방식을 통한 원시적인 농업이 행해졌으며 어장과 수로를 통한 물고기의 양식도 이루어졌다. 하지만 인근의 마오리족, 뉴기니 섬 등과 비교해도 기술적으로는 발전 정도가 낮았다.[8] 만일 마오리족이나 파푸아인들이 기후가 비슷한 호주 동남부 원주민들과 인접해 있었더라면 이들의 농업기술이 호주에도 대대적으로 전해졌겠지만 뉴기니와 뉴질랜드의 거리는 호주 남동부와는 너무 멀었고, 말레이인 선원과 상인들도 호주 동남부 지역으로 향해와 무역만 하고갔지, 대규모로 정착하지는 않았다.
이외에도 노던 준주나 퀸즐랜드에 살던 원주민들은 해삼 채집을 위해 온 동남아시아, 특히 인도네시아인들과 자주 접촉했고, 교역도 이루어졌으며 인도네시아 역사책에서도 호주 원주민에 대한 내용이 일부 나오기는 하지만, 카누 제조법과 같이 원주민의 관점에서 쓸모있어 보이는 몇몇 기술을 제외하곤 이들이 보여준 농경이나 철 제련법을 받아들이지 않았으며, 발전된 형태의 국가도 나오지 않았다. 인도네시아의 국가들도 호주에 별다른 대세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음에도 정복하려는 시도를 굳이 하지 않았는데, 수마트라, 자바 섬, 발리 섬과 가까운 호주 서북부 일대는 사막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황무지이고, 사람 살만한 땅이 많은 동남부는 거리가 지나치게 멀리 떨어져있어 군사력을 동원하거나 개척민들을 대규모로 정착시켜 정복하기 어려웠기 때문이었다. 호주가 금과 은, 석유, 철광석이 풍부하게 난다고는 하지만, 굳이 호주까지 가서 개척해서 채굴할 바에 자국에서 채굴하는 것이 더 쉬웠고, 부족한 부분은 인도와 중동, 중국에서 무역으로 얻는 것이 훨씬 수지타산이 맞았다. 그래도 호주에서 나는 특산품들은 인도네시아를 통해 타국에서 거래되었기는 했고, 특히 당시에는 해삼무역이 크게 이뤄졌기 때문에 호주 북부지역에서 해삼채집이 광범위하게 벌어졌으며 일부 중국인 상인들도 호주에까지 와서 해삼을 사왔다.
다만 일부 호주 극우파들을 중심으로 호주 원주민들이 불을 피울 줄 몰랐다는 황당한 얘기가 돌기도 하는데, 이는 태즈메이니아 섬에서 고립된 원주민들이 불을 피울 줄 모른 것을, 호주 전체 원주민들이 그러기라도 한 냥 뒤집어 씌운 것에 불과하고, 또한 당대로써는 나름대로 문명국이라 할 수 있는 인도네시아와의 교류가 이루어졌다는 점을 무시했다. 호주 원주민들이 남긴 유물들 중에는 현지의 스피니펙스 (Spinifex) 관목에서 고무를 채취해서 활용한 물건들이 많이 보이는데[9] 고무를 실생활에 쓰일 수 있게 가공한다는 것 자체가 불을 사용하지 않았다면 불가능하다.
3.2. 식민지 개척 이후
여기도 아메리카 원주민들처럼 유럽인 도래 이후 학살과 억압 정책의 피해를 당했는데 초기에는 아예 사람이 아니라 원숭이보다는 낫지만 인간보다는 열등한 유인원의 일종으로 여겨지기도 했다.[10]18세기 후반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전염병이 들어와 1788년부터 1900년까지 원주민의 90%가 감소했으며 19세기경엔 이에 학살까지 더해져 감소속도는 더욱 빨라졌다. 원주민들은 백인들의 침략에 저항해 2,000~2500여 명을 살해했지만[11] 백인 이민자들은 이보다 많은 수를 살해해 (약 4만명 이상) 원주민 인구는 18세기 약 50만여 명에서 5만 명으로 10분의 1으로 줄어들었다. 원주민 인구 50만이 다시 회복된 건 2000년대에 들어와서 였다.흔히 원주민들은 오랜 옛날부터 북서부를 중심으로 살았다는 통설이 돌고 있지만, 《총, 균, 쇠》에 따르면 사실은 유럽인들이 들어오면서 동부에서는 다 죽거나 쫓겨나고 백인들이 그 곳에 적합했던 지중해성 작물을 기반으로 정착하면서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실제로 엄밀히 따져보면 현재 원주민 비율이 30%에 육박하는 노던 준주의 경우 분류상 동부에 속한다. 그리고 지금도 원주민 인구만 놓고 보면 동부에 가장 많이 거주하는 건 마찬가지로 2016년 기준 원주민 인구 64만 중 뉴 사우스웨일스와 퀸즐랜드, 빅토리아 주에 사는 원주민 수를 합치면 45만에 육박한다.
백인들이 호주를 완전히 장악한 이후 원주민들은 광산 등에서 노동자로 일했으며 세계대전 때에도 군인으로 참전되기도 하였다. 1930년대부터 원주민 인구는 다시 늘기 시작했으나 이미 태즈메이니아에서는 절멸된 후였다. 다만 원주민 중에 일부 백인과의 혼혈들은 남아 있다. 마찬가지로 적지 않은 원주민들에게는 백인 (주로 아일랜드계[12])의 피가 흐른다.[13]
비교적 자신의 입지를 빨리 확립한 뉴질랜드의 마오리족과는 달리 20세기 중반까지 상당히 핍박받으며 지내왔다.[14] 심지어는 시민이 아니라 자연 유산으로 분류되기도 했을 정도.
1900년부터 1972년까지 호주 정부와 교회는 원주민 개화 정책으로 원주민 아이들을 부모로부터 강제로 분리해 10만 여 명이 입양되거나 수용소로 끌려갔으며, 원주민 언어는 금지당했고 부모들이 찾지 못하도록 아이들은 어디로 보내졌는지 알 수 없게 되었을 뿐더러 방문과 편지조차 금지되었다. 이들은 빼앗긴 세대(도둑맞은 세대)(Stolen Generation)라 불린다.[15] 2007년 9월에 들어서야 이들에 대한 보상이 이루어지기 시작했으며 2008년 호주 총리 케빈 러드가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사과하였다. 그리고 호주 정부는 원주민들에 대해 피해자 배상을 시작했다.#
19세기 후반 이래 주에 따라 사실상 원주민의 투표가 사실상 제한되거나 금지되는 지역이 있었으며, 1962년에서야 투표권을 받았다. 결정적인 권리 향상 계기는 1967년 5월 27일 노던 준주를 제외한 백인들만의 국민투표 결과 90.77%의 찬성을 받고 호주인으로 인정받고 (더 이상 '자연 유산'이 아닌) 인구조사 대상에 포함되고부터였다. 그리고 1984년이 되어서야 일반 호주인에게 적용되는 의무투표제의 적용을 받았다. #
4. 현재 상황
호주의 많은 원주민들은 저소득층으로써, 소득은 호주의 타 인종의 평균 3분의 1에 불과하다. 또한 실업률과 범죄율은 3배 이상에 달하며 평균수명은 타 인종보다 20세가량 짧은 60세 남짓에 불과하다.
호주 원주민들은 비원주민 인구에 비해서 사회적으로 불리한 입장에 있다. 원주민들의 대다수는 도시 외곽이나 빈민촌에 살아서 인프라와 공공시설의 부족 등으로 인해서 비원주민보다 평균수명이 짧다.
또한 교육수준도 낮아 12학년을 모두 마치는 비율도 39%에 불과하다(일반 호주인은 75%). 또한 그들은 아직도 남아있는 인종차별 등으로 인해 취직하기도 훨씬 어렵고 원주민들은 비원주민 인구에 비해 수감율이 15배나 높고 특히 청소년 수감율은 28배나 높다. 인종차별은 그 외에 원주민에 대한 여러 비하어에서도 나타나고, 인종차별주의자들은 이들을 알코올 중독자라든가 살인자, 강간범, 도둑 등으로 여기는 선입견을 가지기도 한다.
호주 백인이나 아시아계들에 비해 출산율이 높은 편이다. 2001년 1.77명이던 것이 2021년에는 2.34명으로 증가하여 갈수록 인구가 증가하고 있다. 2001년에 11,400명이 태어나던 것이 2021년에는 연간 23,500명이 태어났는데, 이는 리투아니아 같은 유럽 소국보다 출생아가 더 많은 것이다! # 2020년대 전반기에 100만을 돌파할 가능성이 높다. 북미 원주민들의 비참할 정도로 낮은 출산율과는 대조적.
캔버라의 옛 국회의사당 앞에는 호주를 침략한 백인들에게 항의하기 위한 원주민 천막대사관이 있다. 이 대사관은 1972년 4명의 애버리진들이 비치 파라솔을 펴서 시작한 시위였다.
한편 2011년 호주의 최대 야당인 자유당의 토니 애벗 대표[16]가 애버리지니 천막대사관이 무의미하다고 철거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자 원주민 시위대가 백인의 도착을 기리는 호주의 날 행사에 참석한 총리를 습격하고 국기를 불태우기도 했다. 이 때 전 뉴사우스웨일스 주지사 밥 카는 "원주민 천막대사관은 진작에 없어졌어야 했다"며 원주민의 과격한 행동을 비난하기도 하였다.[17]
전통적인 소유자(traditional owner) 또는 전통적인 관리인(traditional custodian)이라 하여 유럽인 도래 이전부터 해당 지역에 살던 원주민 공동체를 해당 지역의 토지, 관리 및 문화 소유인으로 인정하고, 이들을 존중하고 인정하는 공식 법이 있다. 이 지역을 조사하거나 개발하는 등의 일이 있을 때 원주민 공동체에게 인정받아야 한다는 내용이며, Welcome to country라는 공식 지역별 행사도 있다.
최근에는 기념일인 호주의 날(1월 26일)을 원주민 입장을 고려해 침략의 날로 간주하여 기념일 날짜를 다른 날로 바꾸자는 의미로 SNS 상에 해시태그인 #changethedate를 붙이는 운동도 진행되고 있다.
호주 공영방송 ABC 방송은 앨리스 스프링스의 한 호텔에서 원주민 투숙객들에게는 상태가 좋지 않은 방으로 안내하라는 등 직원들에게 지시했다고 폭로했다. #
2020년 5월, 호주의 광산 회사인 리오 틴토가 철광석 광산을 확장하기 위해 웨스턴오스트레일리아 주에 위치한 4만 6000여년 전 어보리진들이 거주하던 동굴 유적을 파괴하여 거센 비판을 받았다. 호주 정부는 해당 기업을 원주민 유적법 (National Heritage Act)에 따라 고발하였으며, # 동년 9월에 경영진들의 대거 사퇴가 이루어졌다. 기업 측은 공식적인 사과를 하였으며, 원주민을 회사의 리더 역할로 끌어들이는 데 전념하기로 했다.
2023년 6월. 시드니모닝헤럴드(SMH)가 185년 전 호주 뉴사우스웨일스 주에서 벌어진 원주민 대량 학살 사건과 관련해 당시 인종차별적인 보도를 한 데 대해 고개를 숙였다. #
2023년, 호주 노동당 정부는 원주민을 국가의 최초 국민으로 헌법에 명시하고, 이들의 정책을 자문할 기구의 설립을 제안하는 개헌안을 국민투표에 부쳤다. 그러나 이 기구가 의회의 권한을 침해할 수 있다는 우려와 개헌안의 내용이 명확하지 않다는 찬반 논쟁이 일면서, 결국 국민투표에서 부결되었다.
5. 창작물에서
도둑맞은 세대에 관한 소설로 국내에도 번역 출간된 바 있는 《니웅가의 노래》가 있다. 저자는 원주민 혼혈로 외할머니와 외할머니의 오빠가 도둑맞은 세대 출신으로 이들의 증언을 바탕으로 소설을 썼다. 그 외 국내에도 개봉한 《토끼 울타리》라는 영화도 도둑맞은 세대에 관한 영화로 유명하다. 배즈 루어먼의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다루긴 했지만호주 국민영화라는 크로커다일 던디에서도 등장. 여러모로 모험물 클리셰 파괴자 역할을 한다. 처음 나올때 무슨 호러물 분위기처럼 밤중에 갑자기 천천히 나와 수가 깜짝 놀랐지만 던디가 제압하고보니 이들이야말로 던디와 수를 보고 놀라서 누군가 해서 긴장했다고... 그리고 애초에 던디와 안면이 있는 이들이었고 시계와 자동차도 쓰는 등 현대적으로 살아가고 있었다.[18]
도둑맞은 세대 이외에도 니컬러스 로그의 《워크어바웃》이나 워릭 손턴의 《삼손과 데릴라》, 프레드 세퍼시의 《지미 블랙스미스의 노래》, 롤프 더히어의 《열 척의 카누》와 《찰리의 나라》, 캐트리오나 매켄지의 《새틀라이트 보이》, 제니퍼 켄트의 《나이팅게일》 같은 영화에서도 이들의 문화와 힘든 현실을 다루고 있다. 특히 《워크어바웃》에 나오는 애보리지니 배우인 데이비드 걸필리는 이후 꾸준히 활동하면서 오스트레일리아 영화계에서 중견 배우로 자리잡았으며 《오스트레일리아》에서도 비중있는 역으로 출연한다. 영화 프리실라에서도 몇 명이 여행하는 주인공들과 마주쳐 그들의 공연을 보고 즐긴다.
호주를 배경으로 한 디스토피아 어드벤처 게임 Beneath A Steel Sky에서는 유니언 시티 바깥 야생지대인 갭에서 살고 있으며, 주인공 로버트 포스터를 키워준 부족이 등장한다. 안타깝게도 도입부에서 유니언 시티 측에게 폭격을 당해 전멸.
의외로 일본의 만화에도 등장하는데 맛의 달인에서 주인공 일행이 호주의 요리 소재로 대결을 벌이는 장기 에피소드 중에 한 편의 조력자로 등장하기도 한다. 여기서는 일본의 가타카나 발음을 따라 아보리지니라는 명칭으로 언급된다.
의외로 한국 만화에도 등장한다. 호돌이 세계 여행 호주 편에 타노아라는 인물이 나오는데, 서울 올림픽을 기념해 나온 만화인 만큼 아보리진이라고 불린다. 타노아는 주유소에서 차에 넣을 기름을 사 오다가 그를 강도로 몰며 다가온 백인들에게 이걸 뺏길 뻔한 모습으로 주인공 일행과 처음 만났고, 태돌이의 활약으로 기름을 되찾는다. 이후 철인 3종 경기에 나와 준우승을 차지한다.
월드 오브 다크니스의 변신족인 모콜레의 스트림 중 구미간 부족의 인간 친족이 이들로 나온다.
6. 해당 인물
오랫동안 사회 주류 계층인 유럽인들에게 핍박받은 고로 인종적인 문제를 덜 따지는 스포츠나 배우 등 예체능 계열 유명인이 많다.7. 관련 문서
[출처] 출처: 위키미디어 공용[2] 다만 비중이 적다 뿐이지,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은 뉴사우스웨일스 주로 원주민의 1/3이 이 곳에 거주하며, 노던 준주는 네 번째다. 남동 해안의 대도시에서 생활하는 원주민도 많다.[3] 이 금발 탓으로 일부 원주민 부족이 실은 표착한 백인의 후손이라는 주장도 제기된 사례가 있다.[4] 청소년들을 6개월 동안 먼 곳으로 장기여행을 보내 자급자족하며 살게 하던 정신 교육의 일종이다. 워커바웃을 마치고 돌아오면 성인 취급을 했다.[5] 중부 사막에 살던 일부 부족들 사이에서 행해졌다. 음경의 아래 부분의 요도구멍부터 기저부까지 세로로 절개하는 방식으로, 이 시술을 받은 소년은 여자처럼 쭈그리고 소변을 봐야 한다. 문화인류학자 M. 엘리어드 교수는 이러한 요도절개를 소년들에게 여성의 성기를 상징적으로 부여하는 행위라고 보고, 이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신(神)이 만든 완전형 인간을 뜻하는 양성구유(兩性具有)적 존재가 된다고 믿는다고 설명했다. 이 시술을 받으면 사정이 어렵기 때문에 학자들은 피임의 목적으로 시작된 것이 아닐까 추측하고 있다. 실제로 중부 사막의 원주민들은 척박한 환경 때문에 가끔 영아살해도 이루어졌다.[6] 호주 원주민들은 누군가가 죽으면 악령이나 저주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종종 고인이 죽어가면서 적이라고 생각되는 특정 인물을 지목하면 곧 그 사람이 죽인 것으로 생각했다.[7] 스웨덴의 경영학자 칼 에릭 스베이비의 《모든 것을 살아있게 하라》에 나오는 한 예로 달링 (Darling) 강 인근에 거주했던 바르킨지 (Barkindji) 부족은 농경을 시도해 보았지만 생산성 면에서 수렵이나 채집보다 못했기 때문에 결국 포기했다. 이외에 다른 원주민 부족들, 특히 물이 풍부한 뉴사우스웨일스와 빅토리아 지역의 원주민들은 원시적인 형태의 농경을 했다는 증거들이 남아 있다.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저서 총, 균, 쇠에서 만일 호주 대륙에 유럽인이 들어오지 않았더라면 이들 부족들을 중심으로 호주 남부에서 기장을 바탕으로 한 농경 및 물고기의 가축화가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예상했다.[8] 마오리족이 속한 폴리네시아인들은 뛰어난 항해술로 수백km가 넘게 떨어져 있는 인도양과 태평양의 섬들을 누비며 심지어 콜럼버스보다 300년도 더 전에 남미에 도달해 고구마를 가져와 경작할 정도로 높은 항해술과 그에 수반되는 높은 기술력을 가진 민족이다. 또한 뉴기니 섬에 살았던 원주민들은 척박한 땅에서 유럽인이 나타나기 전에도 이미 고구마 등의 작물을 재배하고 있었지만 이에 반해 항해술은커녕 농업조차도 제대로 발전시키지 못한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의 기술력은 이들에 비하면 턱없이 낮았다.[9] 유럽은 18세기까지도 고무를 실생활에 활용하지 못했다. 유럽인들이 고무를 발견한 것이 그로부터 200년 전인 대항해시대 시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상당히 늦은 것이다.[10] 이는 근현대 시기 여타 문화발달이 낮은 지역의 선주민들을 보는 시각이기도 했다. 흑인, 아메리카 원주민 등[11] 그중에는 페뮬우이라고 여러 부족을 규합하여 조직적으로 저항한 사람도 있다.[12] 당시 호주에서 아일랜드계들은 일제강점기의 조선인들과 비슷한 신분으로, 부유하지 않으면 결혼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원주민들과 피를 섞었다.[13] 노던 준주는 백인들이 잘 이주하지 않아서 순혈 원주민 비율이 높다.[14] 마오리족들은 백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저항한 탓에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대우받았다고 알려져있으나 백인들에게 처절하게 저항한건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본격적인 서구 침략 이전에 유럽과의 교역으로 서구 무기를 확보해 무장한 마오리족들과는 달리, 부메랑같은 원시적인 무기로 무장한 탓에 마오리 전쟁 당시 영국과 마오리족의 사상자 비율은 745 : 2154였으나 오스트레일리아 원주민들은 백인과의 사상자 비율이 2000~2500:40000이었다.[15] 이는 콰키우틀이나 알공킨, 크리, 하이다 족 등 캐나다의 아메리카 원주민들도 비슷하였다.[16] 이후 총리(2013~2015)를 역임한다.[17] 이 작자는 시드니 공과대학교에서 호주-중국 외교위원회장을 역임하며 일대일로를 찬양하는 친중 발언을 하며 호주에서도 많은 욕을 먹었다.[18] 기자인 여주인공이 사진을 찍으려고 하자 제지하는데 여주인공은 사진 찍으면 영혼이 빠져나간다는 미신때문이라고 짐작하나 사실은 여주인공이 마음이 급해서 카메라 렌즈 뚜껑도 안 연걸 본 원주민 청년이 뚜껑도 안열었는데 사진을 찍을수 없지 않냐며 그런 것이었다. 여러모로 오리엔탈리즘 클리셰를 부수는 캐릭터들.[19] 증조할아버지가 호주 원주민이며 빼앗긴 세대 피해자로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