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4-18 23:04:32

유시민/일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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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년 시절3. 학창 시절4. 대학 시절
4.1. 서울역 회군4.2. 군복무4.3.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방관4.4. 서노련 활동4.5. 작가 및 MBC 활동
5. 정계 입문
5.1. 이해찬 의원 보좌관5.2. 독일 유학
6. 김대중 정부
6.1. 시사평론가6.2. MBC6.3. 개혁국민정당 창당
7. 노무현 정부8. 이명박 정부
8.1.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8.2. 경기도지사 낙선8.3. 통합진보당 합당8.4. 정계 은퇴
9. 박근혜 정부
9.1. 정치평론가 활동9.2. 19대 대선과 정계 복귀설
10. 문재인 정부
10.1. 2017년10.2. 2018년10.3. 2019년10.4. 2020년10.5. 2021년10.6. 2022년
11. 윤석열 정부
11.1. 2022년11.2. 2023년

1. 개요

유시민의 일생을 다룬 문서이다.

2. 유년 시절

1959년 7월 28일 경상북도 월성군(現 경주시) 내남면 망성리 163번지[1]에서 아버지 유태우(柳台佑, 1920 ~ ?)와 어머니 이천 서씨 서동필[2] 사이에서 2남 4녀 중 다섯째이자 차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교사[3], 어머니는 요즘의 슈퍼마켓 같은 구멍가게를 하는 평범한 집안이었다. 저서 《나의 한국 현대사》에서 이 시절을 회고하길, 자기 집은 그래도 밥은 꼬박 먹었는데 학교에서 주는 탈지분유와 옥수수죽을 받아서 먹는 친구들을 보고 가난이 뭔지 그 차이에 대해 어린 마음에 고민했다고 한다. 그래서 본인을 프티부르주아 리버럴(자유주의적 소시민계급) 태생이라고 말한다. 교사였던 아버지는 어릴 적부터 자식들에게 각종 어린이 신문을 구독하게 하였고 식사 시간에는 자주 역사 이야기를 들려주거나 한 주제를 두고 자식들과 진지하게 토론했다고 한다.

3. 학창 시절

대구 수성초등학교, 대륜중학교[4], 심인고등학교[5]를 졸업했다.

중학교 때까지는 평범한 학생이었으나, 고교 시절부터 성적이 아주 우수했다고 한다.[6][7] 그러나 유시민의 말에 의하면 수학에는 재능이 없어서, 당시 본고사 대비를 위해 수학책 세 권[8]을 통째로 암기(주입식)했다고 술회했다.

참고로 유시민은 박정희 전 대통령에 의해 실시된 이른바 고교 평준화 2기다.[9] 그리고 유시민이 초등학교[10]를 졸업하기 두 해 전에 중학교 입시가 폐지되었다. 그래서 유시민은 초등학교 시절에는 시간만 나면 축구를 하면서 신나게 놀았다고 한다. 한편 유시민은 박정희가 가장 잘 한 일로 고교 평준화를 수차례 꼽은 바 있으며[11], 한 주간지에 기고한 칼럼에서는 "고교 평준화는 하나의 '사회혁명'이었다. 박정희라는 절대권력자의 말이 곧 법이 되는 권위주의 체제가 아니었다면 할 수 없었을 '사회혁명'이었다. 대한민국을 지배해왔고 지금도 그 지배력을 일부 유지하고 있는 '명문고 학벌'을 해체했기 때문이다."고 평가한 바 있다.#

고교 졸업 후 진로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그의 아버지는 영어영문학과에 진학해 영어를 배워 서양으로 가서 서양 철학을 배우고 다시 귀국해 동양 철학을 배워 동서양을 잇는 철학자가 되라고 조언했다. 반면 유시민은 역사학이나 언어학을 공부하고 싶었다고 한다. 하지만 유시민의 회고에 따르면, 고교생이던 당시엔 정보가 없어서 공부를 잘하면 장학금도 받고, 유학도 갈 수 있다는 것을 전혀 몰랐고, 자신은 환경상 학문을 할 수 없을 것으로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막연히 법학과에 가서 사법시험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고,[12] 서울대학교 사회계열에 입학하였다.[13]

4. 대학 시절

입학 후 농촌법학회[14]라는 서클에 가입하는데, 신입생 환영회에서 "역사는 발전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변하는 것이다."[15]라고 주장해 선배들을 당혹시켰다. 왜인가 하니, 당시 운동권의 주류사상은 카를 마르크스의 사상이었기 때문이다. 마르크스는 변증법적 유물론에 기초하여 사적 유물론을 전개하였는데, 역사는 고대 노예제, 중세 봉건제, 근대 자본주의를 거쳐 공산주의로 필연적인 발전을 겪는다고 보았다. 그런데 유시민이 운동권의 중심에서 이걸 정면에서 부정했으니 당황할 수밖에. 여튼 그때부터 그의 토론 실력은 발군이었다고 한다.

유신헌법하 긴급조치 위반으로 선배들이 처벌받는 현실을 보면서, 유신헌법을 공부하는 일, 그것으로 시험을 보는 일, 그리고 박정희 정권 밑에서 판검사로서 일하는 것은 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2학년 올라갈 때 결정하는 전공진입에서 원래 지망했었던 법학과가 아닌 경제학과를 선택한다.[16][17] 이후 공업단지의 노동자들을 대상으로 한 야학에 활발히 참여하는데 이때 그를 야학으로 이끌어 준 사람이 바로 서울대 총학생회장 심재철.

그리고 당시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이자 운동권 선배였던 이해찬하고도 인연을 맺게 된다. 하술한 것처럼 처음엔 선후배 간의 멱살잡이 싸움이라는 독특한 악연으로 첫 만남이 시작되었다.

4.1. 서울역 회군

1980년 봄 개학이 되면서 학생 운동이 가속화되었다. 유시민은 1980년 서울대 총학생회 대의원회 의장이 되었다.

서울역 회군이 있기 며칠 전 유시민은 군이 출동한다는 첩보를 받고 학교를 지키던 300~400명을 집으로 돌려보냈다. 그러나 허위정보였고, 다음 날 일일이 교실을 찾아다니며 학생에게 사과해야 했다.

5월 15일 서울역에서 대규모 시위가 일어난다. 이날 서울역 광장에서 수만 명의 학생이 계엄 해제 및 신군부 퇴진을 요구한다.

서울역 회군 이틀 후 5월 17일, 유시민은 학교에 군대가 들이닥친다는 소문을 다시 듣고 학생회관에 머무르다 신군부에 체포되어 보안사에 끌려가 두 달 동안 고문을 받고 풀려났다.
밤 10시가 다 되어 학교를 나오다가 유시민 군을 만났다. 빨리 나가자는 말에 뜻밖에 그는 자기는 학교에 남겠다고 했다. 어떻게 군인들에게 텅 빈 학교를 내줄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도 그렇지 일단 피해야지 무슨 얘기냐는 내 말에 유시민 군은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본의 아니게 양치기 소년이 됐던 그날, 학생회의 책임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던 나는 그저 민망한 일로 여겼던 반면, 대의원회 의장인 그는 군인들이 의기양양하게 텅 빈 학교에 주둔하는 광경을 그렸던 것이다. 망해가는 나라에서 황현과 같은 선비가 목숨을 끊은들 그게 대세에 무슨 영향이 있겠냐마는, 황현처럼 목숨을 끊는 선비 하나 없었다면 조선의 망국이 얼마나 더 참담했을까? 유시민 군을 남겨두고 통금이 다 되어 집에 들어와 텔레비전을 켜니 긴급 뉴스로 비상계엄 전국 확대의 소식이 나오고 있었다. 그 뒤로 나는 현실에서건 역사에서건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일을 보게 될 때면, 광주 학살의 전야에 그 넓은 관악캠퍼스의 불 꺼진 학생회관에 홀로 남은 유시민을 떠올렸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의 그는 다가오는 카타필라의 굉음을 들으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
한홍구 교수의 유시민처럼 철들지 맙시다
건장한 남자들이 쇠사슬로 묶어둔 학생회관 4층 복도 현관문을 뜯어내고 있었다. 그때 전화벨이 울렸다. 공주사대 총학생회에서 온 전화였다. '여기에도 계엄군이 진입했으니 빨리 피하세요!' 그렇게 외치고 돌아서는데 이단옆차기가 날아왔다. 허벅지를 밟혔다. 이마에 닿는 권총 총구가 서늘했다. 나는 계엄사 합동수사본부에 편입되어 있던 경찰청 특수수사대로 끌려갔다. 계엄군은 교정과 기숙사에 남아 있던 모든 사람을 소총과 몽둥이, 군홧발로 짓밟았다. 모든 대학 교정에서 비슷한 상황이 펼쳐졌고 '서울의 봄'은 그렇게 막을 내렸다.
ㅡ 유시민의 『나의 한국현대사』
2019년 4월 20일 유시민은 KBS 대화의 희열이라는 방송에서, 합수부에서 조사를 받고 진술서를 썼지만, 비밀조직에 속한 동지들을 지킬 수 있었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서울역 회군의 주역이었던 심재철은 이를 반박하면서 당시 유시민이 보안사에서 밀고하였다고 주장하면서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유시민은 자신이 밀고했다는 주장을 부인하여 진실 공방으로 이어졌다.

4.2. 군복무

1980년 이른바 녹화사업[18]에 징집되어 화천군에서 복무한 후 1983년 육군 병장으로 만기전역했다. 녹화사업은 당시 민주화운동가와 대학생들을 감옥에 보내는 대신, 최전방으로 입대시키는 제도였다. 화천 7사단에 입대해서도 군사정권에 의해 관심사병으로 지정되어 몇 번이고 전출과 전입을 반복하고 사상 검증이랍시고 끌고 가서 고초를 겪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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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의 군대 시절.
인터넷에 떠도는 그의 군대 시절 일화 중에는 사격과 축구를 잘했고, 부친의 수술을 앞둔 후임을 위해 자신의 포상 휴가를 반납하고 그 후임의 청원 휴가를 보내줬다는 미담이 있다.# 본인 역시 이후 항소 이유서에서 밝힌 군 시절의 소회를 아래와 같이 표현한 바 있다.
본 피고인은 민족 분단의 비극의 현장인 중동부 전선의 최전방에서, 그것도 최말단 소총 중대라는 우리 군대의 기간 부대에서 3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크나큰 행운으로 여기며 남에게 뒤지지 않는 훌륭한 병사였음을 자부합니다.
ㅡ 유시민의 항소 이유서 中

4.3.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 방관

1983년 5월 군에서 만기전역했다.

1983년 12월 제적 학생 복교 조치가 내려졌지만 유시민은 녹화사업 폐지 및 학원 민주화를 주장하며 복교하지 않고 제적 학생 복교추진 위원회를 결성하여 투쟁을 하였다.

1984년 8월말 가을학기에 서울대에 복교했고, 곧이어 서울대 복학생협의회 회장에 취임하였다.

1984년 9월 서울대 민간인 감금 폭행 고문 사건(서울대 프락치 사건)이 발생했다. 유시민은 직접 폭행, 고문을 가하지는 않았으나, 폭행, 고문을 주도하였고 고문 장면을 직접 참관하였다. 유시민은 이 사건으로 복학한 지 한달만인 10월 4일[19]에 구속[20]되어 반년 뒤인 1985년 4월 1일, 1심에서 1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당시 선고를 받고 구치소로 끌려가면서 외쳤던 말이 영상으로 남아 있어 상당히 유명한데, 사실 오해가 있었다고 한다. 영상을 본 사람들은 전두환의 멸칭인 전대가리를 이용하여 "전대가리의 개들아"라고 외쳤다고 생각했는데, 훗날 유시민이 노무현재단 이사장이 된 뒤 KBS 방송인 대화의 희열[21]에 출연하여 개들이 아니라 "전대가리 깨져라"[22]라고 외쳤다고 고백하였다. 30년이 넘는 세월이 지나서 알고보니 전두환의 대가리가 깨지라는 뜻[23]이었다. 이후 1심 선고에 대해 항소이유서를 제출하였다.[24] 그리하여 2심을 했는데, 실제로 형량이 줄어 징역 1년으로 바뀌었고, 1985년 10월초에 출소했다. 3심은 가지 않았다. 참고로 당시 서울대 프락치 사건에서 실제 폭행을 했었던 사람인 백태웅도 비슷하게 징역이 나와서 1985년말에 출소했다.


4.4. 서노련 활동

서울대 프락치 사건으로 복역하고 출소한 후, 1985년말 겨울 김문수, 심상정, 박노해, 백태웅 등이 주도하여 창설된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에 가입하여 핵심 인물 중 하나로 활동하였다.

4.5. 작가 및 MBC 활동

운동권 선배들이 경영하는 출판사에서 간간이 일을 하였다. 김학민이 대표로 있던 학민사에서 편집부장을 지내기도 했다.

그와 친한 MBC PD의 덕에 드라마 각본가로도 활동했는데, '유지수'라는 가명을 쓰기도 했다. 앞서 서술했던 학생 운동 때문에 수배령이 내려진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가 각본을 썼던 1988년에 방영한 MBC 드라마 『그것은 우리도 모른다』에서도 '극본 유지수'라고 소개되었다. 썰전에서 유지수 시절을 흑역사라고 말한 적 있다.[25] 하지만 가명을 사용하기에 아까웠는지 초창기 몇 편 이후에는 본명을 사용했다. MBC 베스트극장의 극본('신용비어천가')도 제작한 적이 있다.

창작과 비평 1988년 여름호(통권 60호)에 신인추천 중편소설 『달』로 소설가로 등단하기도 했다.

1989년 그동안 국내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공산주의 현대사 등을 다룬 『거꾸로 읽는 세계사』를 출간했다.

5. 정계 입문

5.1. 이해찬 의원 보좌관

1988년 제13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당선된 이해찬 당시 평화민주당(평민당) 의원의 의원실에서 보좌관으로 일하게 되면서 처음 정계에 입문했다. 이때는 공식 보좌관이 아니라 다른 보좌관의 급여를 나눠서 썼다고 한다.[26] 유시민의 말에 의하면 이해찬 의원이 초선의원일 땐데 자기 보좌관 하면 수배도 풀어주고 그런다고 해서, 보좌관 생활을 시작하게 됐다고...

참고로 이해찬과 유시민은 대학생 때이던 1980년경부터 서로 잘 알던 운동권 선후배 사이였다. 그러나 재밌는 건, 이 둘의 첫 만남은 멱살잡이 싸움으로 시작되었다는 것이다. 당시 1학년생들의 병영집체훈련 응소 문제를 두고 운동권 내부에서도 총학생회측과 복학생협의회 사이에 의견이 달라서 노선 싸움이 있었다. 이 문제에 대한 집회에서 총학생회 간부였던 유시민이 사회를 봤는데 복학생협의회 측에 발언권을 주지 않고 집회를 끝내려 하자 복학생협의회 소속이었던 이해찬이 달려들어 유시민의 멱살을 잡은 뒤 욕설을 했고 이어서 주먹을 날리려던 찰나에 사람들이 말려서 다행히 주먹다짐으로 번지진 않았다고 한다.# 그 뒤로 둘은 화해를 했고 절친한 운동권 선후배 사이로 남게 되었으며,[27] 훗날 잘 알려졌다시피 이해찬이 1980년대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자 유시민을 보좌관으로 영입하게 되어 유시민이 중앙정치계와 첫 인연을 갖게 되었을 뿐 만 아니라, 그로부터 30년 뒤에는 유시민에게 노무현재단 이사장 자리도 강요(?)했을 정도가 되었다. 유시민 본인이 "이해찬 대표께서 강요에 가깝게 설득하셨다. 사실 처음에는 안 하겠다고 했는데 '니가 꼭 해야 한다'고 강하게 요구하셔서 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정도였다.

이 당시 보좌관으로 일할 때 노무현 전 대통령과의 인연이 시작됐다고 한다. 당시 노무현 통일민주당 의원과 이해찬 평민당 의원이 모두 국회 노동위 소속이었기 때문이라고. 유시민은 한눈에 노무현 의원이 대통령감임을 알아봤다고 한다. 유시민은 "당시는 내가 일방적으로 노 의원을 좋아하고 존경하는 관계였다."라고 말한 바 있다.

이해찬 보좌관으로 일할 당시 유시민은 김대중 평민당 총재가 종종 보여주는 상인적 현실 감각이 마음에 들지 않았고 이점을 당내 비공개 모임에서 비판적으로 말한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러자 동교동계였던 설훈이 김대중 총재 비서관을 제안했다고 한다. 하지만 유시민은 김대중 총재의 상인적 현실감각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기 때문에 비서관 제안이 전혀 내키지 않았고 거절했다고 한다. 당시 유시민은 평민당 내에서 '나는 여기서 잠깐 보좌관 일 하는 것이고 이 일이 끝나면 (평민당을 탈당하고) 다른 곳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고 언급했다. 실제로 1991년 지방선거에서 평화민주당의 서울시의원 후보 공천을 받았지만 인접 지역구에서 벌어진 돈 공천 추문에 항의하면서 탈당했다고 후불제 민주주의에서 밝힌바가 있다.

5.2. 독일 유학

1991년 8월, 13년 6개월 만에 서울대를 졸업했다.

1992년 아내[28]와 함께 독일로 유학을 떠나서 5년 3개월 동안 있었다. 유시민의 회고에 의하면, 3당 합당 날치기 하니까 국회가 재미없던 차에, 아내가 독일 유학을 제안해서 국회의원 보좌관을 그만두고 독일로 유학을 갔다고 한다. 독일로 유학을 떠난 92년도에는 <부자의 경제학 빈민의 경제학> 책을 내기도 했다.

독일에서 석사 과정을 밟으며 한 전공은 보건경제학인데, 대학 다닐 때에는 시위하느라 공부를 제대로 하질 않아서, 독일 가서 비로소 경제학을 새로 공부한 거나 다름없다고 한다. 유학지로 독일을 선택한 이유는 미국은 너무 비싸고 장학금 받을 수도 없는데 반해, 독일은 학비를 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32살 때 독일로 갔는데 마흔 되기 전에는 돌아오자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런데 막상 독일로 가보니 독일 공부가 장난이 아니었다고. 우선 외국어인 독일어로 공부해야 하는 데다가, 한국에서 대학 다닐 때는 운동권 활동하느라 경제학 공부를 거의 하지 못해서 기초도 부족하여 석사할 때 무려 4년이 걸렸다고 한다.[29]

독일에서 유학해 있는 동안에도 『말』지, 한겨레 신문에 계속 기고했다. 1995년에는 한겨레 독일통신원이 되었다.

유시민과 노무현 두 사람이 좀 더 가까워진 것은 유 의원이 독일 유학 중일 때라고 한다. 5년의 유학 기간 중 잠시 한국에 들어올 때마다 노무현 당시 의원을 만났고 주로 경제와 관련한 지식을 공유했다고 한다.

독일에서 박사 과정을 밟고 있는 중인 1997년 학업을 포기하고 귀국했다. 유시민은 1997년에 IMF 사태가 터지는 바람에 아내는 독일에 남아 계속 공부하고, 자신은 아내에게 돈을 벌어 보내주기 위해 귀국했다고 말했다.

6. 김대중 정부

6.1. 시사평론가

독일유학을 끝내고, 1997년 귀국 후에는 정치시사평론가로 활동하면서 일간지, 주간지, 월간지 등에 많은 글을 기고했다.

대선이 진행 중이던 1997년 그는 "97대선 게임의 법칙"이라는 책을 저술하여 "김대중 대선 필패론"을 주장하여 야권에 파문이 일었다. 이 책에서 유시민은 "전라도 혐오증", "반 김대중 정서"로 인해서 "김대중의 대통령 당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고 단언하면서, 야권이 대선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김대중이 대선 후보를 양보하고 조순 서울시장을 대리후보로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 책을 저술한 이후 그는 야권에서 "영남 패권론자", "호남 혐오론자"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99년 12월에는 "김대중 대통령님께"라는 기고문을 통해 김대중 정부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유시민의 세상읽기] 김대중 대통령님께

미증유의 경제 난국을 극복하느라 불철주야 애쓴 노고에 우선 깊은 감사와 위로의 말씀을 드립니다. 보도에 따르면 99년 경제성장률이 무려 10%에 육박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대통령에 대한 국민의 지지는 바닥을 치고 있으며 집권당 국민회의는 ‘수평적 정권교체’의 기쁨을 맛본 지 불과 2년만에 간판을 내리게 됐습니다. 도대체 무엇이 잘못됐던 것일까요?

저는 김대중 정부의 성공과 나라의 번영을 바라는 유권자로서 대통령님의 상황 인식과 대처방식에 대한 이견(異見)을 말하고자 합니다. 5월 김태정씨를 법무부장관으로 발탁했을 때 참여연대는 “신은 너무 멀리 있고 황제는 너무 높이 있다”는 러시아 속담을 인용하면서 청와대로 보내던 ‘개혁통신’을 중단한 바 있습니다. 그때 저는 국민여론에 맞서 ‘정치적 충돌실험’을 감행하는 대통령이 우리가 알고 있던 그 ‘정치인 김대중’이 맞는지를 물었습니다. 대통령님은 이 모든 항의를 묵살했습니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인의 장막’을 경계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았습니다.

김대중 대통령님.

저는 대통령님이 현금의 정치적 난국을 극복하기 위해 내놓은 대안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가칭 ‘새천년 민주신당’은 정치적 신념과 전력을 따지지 않고 사람을 끌어모아 무슨 개혁을 어떻게 하려는 것인지 도무지 짐작할 수 없습니다.

87년 평민당을 창당하면서 “대통령 선거에서 지면 좋은 정당을 만들겠노라”고 한 말을 기억합니까? 이 약속은 아직 지켜지지 않았고, 이대로 나가면 민주신당 역시 민주적으로 스스로 노선과 정책을 결정하지 못하고 총재의 뜻만을 받드는 ‘DJ당’이 되고 말 것입니다.

경제분야와 대북정책에서 거둔 성공에도 불구하고 정부 여당이 정치적 궁지에 빠진 원인이 무엇입니까. ‘수구세력의 저항과 음모’ 때문이 아니라 개혁 의지를 포기하고 제풀에 무너졌기 때문입니다. 인사청문회와 특검제 등 중요한 선거공약을 폐기하거나 지키는 시늉만 했습니다. 국정원과 검찰 등 권력기관을 곁에 두고 편하게 정치를 하는 길로 너무 일찍 들어서 버린 탓으로 ‘언론문건 파동’과 ‘옷로비 은폐조작 파문’ 따위의 정치적 추문이 연이어 터진 것입니다.

동교동계 참모의 전진 배치’로는 국민의 신뢰를 회복할 수 없습니다. 대통령님은 청와대 비서실장과 정무수석 자리를 이른바 ‘동교동 가신’으로 채웠습니다. 민주신당에서 조직과 기획을 담당하는 요직도 모두 동교동계 의원들이 차지했습니다. 게다가 대통령님은 며칠전 국민회의 의원들을 불러모아 거의 혼자서만 하고 싶은 말을 하면서 ‘애당심’을 특별히 강조했습니다.

이 모든 것이 그간 국민회의를 지지했던 사람들에게 좌절감을 안겨줍니다. 나름의 뚜렷한 소신과 역량을 가진 정치인들이 국민회의에 많이 있는데도 대통령님께서 ‘예스 맨’만을 중용한다는 비판이 들리지 않는지요.

대통령님.

싫은 소리를 하는 사람을 가까이 두십시오. 대통령님의 독선을 지적하는 지식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저 개인은 앞으로 대통령님을 비판하지 않을 것입니다. 희망과 애정을 잃으면 비판할 의욕도 잃게 됩니다.

저는 대통령님에 대한 기대를 이제 온전히 접었습니다. 2년이면 실망하기에 충분히 긴 세월이었습니다. 미움보다 더 아픈 것이 냉소와 무관심임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대통령님의 건승을 기원합니다.

유시민(시사평론가) [email protected] 원문

6.2. MBC

2000년 1월 17일부터 2000년 10월 29일까지 MBC 라디오의 'MBC 초대석' 진행을 맡았다. MBC 초대석은 화제의 인물이나 명사가 출연해 대담을 나누는 시사 교양 프로그램으로, MBC 라디오의 간판 프로그램이었으며, 역대 진행자를 보면 김한길, 한선교, 안정효, 이득렬, 차인태 등 거물들이 맡아왔다. 2000년 10월 100분 토론 진행에 전념하겠다면서 라디오 프로그램의 진행을 사임했다.

2000년 6월 초부터 2002년 1월까지 1년 반 동안 MBC 100분 토론의 진행을 맡았다.[30]

MBC 초대석과 100분 토론을 진행하면서 주요 사회적 이슈에 대해 진보적인 견해를 뚜렷하게 밝혀와 토론 진행자로서 중립성을 지키지 못했다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러한 비판에 대해 유시민은 "완전히 공정하고 객관적인 진행이란 사실 불가능하며, 정도의 문제일 뿐"이라고 말하면서 중립을 철저히 지킬 의사가 없음을 다시 한번 밝혔다. #

6.3. 개혁국민정당 창당

당시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대통령 후보는 연이은 악재를 겪으며 큰 위기에 빠져 있었다. 4월 30일 이른바 ‘YS 시계사건’이 발생했다. 당시 노무현 후보는 3당 합당 이후 완전히 척을 졌던 김영삼 전 대통령의 자택을 돌연 찾아가 그의 지지표명을 얻기 위해 예전에 그에게 받은 시계를 보여주며 "이게 총재님(YS)이 주신 시계입니다. 총재님 생각날 때마다 꼭 차고 다녔습니다."라고 말하며, 3당 합당 시절 자신의 판단이 잘못되었을 수도 있다고까지 말하는 등 온갖 아부를 떨며 ‘굽신’거린 사건이다. 이에 일부 지지자들이 노무현에게 실망하며 이탈하여 YS 시계 사건 직전 51%에 달했던 지지율이 사건 직후 43%로 추락하고 말았다. 게다가 6·13 지방선거에서 새천년민주당이 패하고 말았다. 7월 22일 노무현 후보는 DJ의 햇볓정책을 비판하여 파문이 일었다. 호남계 민주당 지지자들이 반발하며 이탈했고, 이에 일부 민주당 의원들은 노무현의 후보 사퇴를 주장하기까지 했다. 8·8 재보선에서 새천년민주당은 다시 패하고 말았다. 게다가 2002 월드컵 4강 열풍을 타고 정몽준 대한축구협회장이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 이러한 연이은 악재 속에서 노무현 후보의 지지율은 17%까지 곤두박질쳤다.

2002년 4월, 유시민은 노무현 후보를 돕기 위해 민주노동당 권영길 후보의 사퇴를 종용했다. "권영길 후보에게 갈 표는 사표가 될 것"이라고 말해 민노당 후보들에게 반발을 샀다. 유시민의 이러한 사퇴 압력에 대해 권영길 후보는 “중도사퇴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유시민은 노무현 후보가 대통령에 당선된 후에도 권영길 후보가 끝까지 사퇴하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

2002년 8월초 유시민은 노사모 강연 등에서 "새천년민주당 비노·반노그룹이 노무현을 아무런 이유없이 낙마시키려 하고 있다. 화염병을 들고 바리케이드로 뛰어드는 절박한 심정이다. 위기에 빠진 노무현을 구하는 것이 곧 정치개혁"이라 말하면서 새천년민주당을 극렬히 비난했다.

8월 13일, 유시민은 절필을 선언하고 전업 정치인으로의 전향을 선언했다.

8월 27일 유시민은 노무현을 중심으로 한 신당 창당 추진을 선언했다. 창당 작업은 일사천리로 진행되어 11월 16일 개혁국민정당이 정식으로 창당식을 가졌고, 유시민은 당대표가 되었다. 막바지로 치닫는 2002 대선은 막판에 김대업 병풍 사건으로 인한 루머가 인터넷 등에서 기승을 부리면서 결국 막판에 노무현 후보가 극적으로 이회장 후보를 역전하여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막을 내렸다.

대선 당시 유시민이 신당을 창당한 것은 새천년민주당을 못마땅해하던 노무현 후보 본인이 직접 유시민에게 자신을 위한 신당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 나중에 밝혀졌다. 당시 노무현의 최측근이었던 안희정의 회고에 따르면 6.13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노무현과 안희정은 서울 모처에서 유시민을 만났는데, 그때 노무현이 "유(시민)작가가 구명보트를 좀 준비해 주세요. 이 배(새천년민주당)가 난파선이 됐을 때 갈아탈 수 있는 구명보트(개혁국민정당)가 하나라도 있어야 되지 않겠습니까?"라면서 유시민에게 민주당 외부에서 새로운 친위 정당을 만들어 줄 것을 설득했고, 유시민이 여기에 설득당했다고 한다.

7. 노무현 정부

7.1. 제1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

2003년 4월 치뤄진 제16대 국회의원 보궐선거에서 고양시 덕양구 갑 지역구에 개혁국민정당(개혁당) 후보로 출마했다. 당시 유시민은 무슨일이 있어도 새천년민주당(민주당)과 단일화나 공조하지 않겠다고 격앙된 목소리로 선언하여 개혁당원들의 열렬한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막상 선거가 시작되자 유시민은 또다시 말을 바꾸어 민주당 측과 후보 단일화를 하게 된다. 이에 개혁당 내부에서 극심한 반발이 일어났고 결국 당이 분열되기에 이르렀다. 외부에서도 비판이 이어졌는데, 진보 언론인 오마이뉴스까지 유시민의 말바꾸기를 비판했다.

어쨌거나 유시민은 보궐선거에서 국회의원에 당선되어 여의도에 입성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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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회의원 선서를 하는 첫날부터 백바지[31][32]에 라운드 티셔츠라는 당시로선 상상도 할 수 없는 전대미문의 복장으로 참석해 어마어마한 관심을 끌었다. 당시 한나라당은 물론이고 민주당계 의원들 역시 경악을 금치 못할 정도로 충격적인 일이어서, 해당 복장을 받아들이지 못한 의원들이 대거 퇴장해버리면서 선서를 이튿날로 미루는 참사가 벌어졌다. 2020년대가 된 오늘날에는 류호정 의원이 여름용 원피스를 입고 등원해도 그걸 욕하는 사람이 오히려 욕을 먹는 시대가 되었지만, 당시에는 외견상의 엄숙주의가 정치를 지배하던 시절이었고, 문제적 인물이었던 유시민이 국회의원이 되는 첫날 트집을 잡아 기선제압을 하고 싶었던 일부 의원들의 태도까지 겹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났다고 봐야 할 것이다.

이튿날 일반적인 정장 차림으로 참석하여 정상적으로 선서를 함으로써 사태는 일단락되었다.

7.2. 열린우리당 창당

2004년 총선을 앞두고 2003년 하반기에 열린우리당 창당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울러 개혁당을 열린우리당에 합당시키고 당을 해산하려 했으나 당내 잔류파의 반발이 일어났다. 결국 개별 당원들의 탈당 후 열린우리당 입당의 방식을 취했다. 이후에도 당사 등의 문제로 분쟁이 이어졌고 일부 잔류파 당원들은 유시민 등 탈당하여 열린우리당에 합류한 중진들에게 법적 소송을 제기했다.

2004년 제17대 국회의원 선거열린우리당 소속으로 고양시 덕양구 갑 지역구에 출마하여 재선에 성공했다.[33] 이후 열린우리당 경기도당 위원장을 맡았다.

2004년 총선에서 유시민은 “민노당에 던지는 표는 권영길 후보의 경남 창원을 등 2곳을 빼고 모두 사표”라며 민노당 대신 열린우리당에 투표하라고 촉구하였다. 그러자 진중권이 격렬하게 반발했다. 진중권은 <유시민의 혼은 죽은 혼>이라는 제목을 글을 올려 "정치판에 들어가더니 이 인간 완전히 망가졌다. 선거에 눈이 뒤집혀 그깟 몇 석 더 얻으려고 지지자들 불쌍하게 앵벌이나 시키는 게 바로 열린우리당의 꼬라지. 이 거대한 패러다임의 변화 앞에서 적응하지 못하는 열린우리당의 한계"라면서 유시민과 열린우리당을 비판했다.

유시민과 진중권은 설전은 이어졌다. 총선이 눈앞에 다가온 4월 12일, 진중권은 진보누리에 글을 올려 "유시민이 쇼를 해도 빠져나갈 표 별로 없을 것이다. 노무현에 대한 환상은 이미 다 깨졌다. 열린우리당에 대한 기대? 별로 없다. 열우당은 툭하면 '깜짝 쇼' 하면서 이벤트 정치 벌여왔지만, 시민들은 그거 봐주는 데에도 지쳤다."라고 공세를 이어갔다.

그러자 유시민은 <민주노동당은 열린우리당의 경쟁상대일 뿐입니다>라는 글을 올려 맞대응했다. 유시민은 “민주노동당은 성역이 아니다. 민주노동당은 이번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이 상대해야 하는 경쟁상대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열린우리당을 포함한 모든 보수정당을 전방위로 까대어서 민주노동당 호감도를 높이는 민주노동당 노회찬 선대본부장의 방송토론 역시 같은 비난에 직면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국회의원 당선 후 유시민은 야구 경기나 학교 운동회 등 국가 업무와 관련되지 않는 곳에서 하는[34] 국기에 대한 경례파시즘적이라며 반대의사를 표명하기도 했다.

2004년 노무현 정부 시절인 여당인 열린우리당은 한나라당을 친일 정당이라고 맹공하면서 적극적인 친일 청산 운동을 벌였다. 하지만 그 결과 오히려 당시 열린우리당의 실세였던 신기남(열린우리당 의장), 천정배(열린우리당 원내대표, 법무부 장관), 정동영(열린우리당 원내대표, 통일부 장관), 김희선('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 회장) 의원의 선친들의 친일 부역 행위가 줄줄이 드러나며 국민들을 충격에 빠뜨렸다. 이 사태의 여파로 열린우리당 의장이었던 신기남 의원과 김희선 의원 등은 제기불능 상태에 빠졌고, 천정배 의원도 당시 가장 강력한 차기 대선 주자의 입지가 완전히 박살나고 말았다. 이때 유시민의 부친과 백부 또한 친일파였다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이에 유시민은 '나, 아버지 그리고 국가정체성'이란 글을 올려 친일파 논란에 대한 소회를 밝혔다. #

7.3. 보건복지부 장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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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2월 10일부터 2007년 5월 25일까지 1년 3개월가량 노무현 정부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재임했다. 참고로 유시민은 독일 유학시절 보건경제학을 전공했다.[35][36][37]

장관 임명 과정 자체도 매우 험난했다. 유시민이 입각하기 직전 한나라당 박근혜 대표는 당시 정계의 화두 중 하나였던 상시 청문회법을 확대하여, 국무총리가 아닌 국무위원의 임명에도 인사청문회를 의무화하는[38] 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열린우리당이 이를 극렬히 반대했다. 결국 여야의 대립 속에서 표대결에 의해 한나라당이 발의한 개정 인사청문회법이 통과되어 공포되었다.[39] 하필이면 빽바지 사건 등으로 찍힐 대로 찍힌 유시민이 개정된 인사청문회법의 첫 적용대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사실 유시민은 과거 인사청문회 도입을 강력하게 주장했었다. 그러나 정작 본인이 그 대상자가 되자 이에 불만을 표했다.

장관 청문회를 앞두고 유시민에 대한 검증 과정에서 의혹들이 터져 나왔다. 특히 1999년 7월부터 2000년까지 국민연금을 1년 이상 미납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에 국민연금을 관할하는 보건복지부 장관으로서 부적격하다는 비판적인 여론이 일었다. 유시민은 고의는 아니었다고 해명했다. 또 유시민의 학력 위조 문제도 불거졌다. 그동안 유시민은 마인츠 대학교 경제학 박사라고 학위를 기재해 왔으나 실제로는 석사 학위만을 취득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에 대해서 유시민은 본인이 아니라 출판사 등에서 잘못 기재한 것이라고 해명했다.

인사청문회라는 난관을 뚫기 위해 유시민은 직접 한나라당을 방문하여 박근혜 최고위원을 비롯한 여러 한나라당 의원들을 만나 설득하는 로비 활동을 했다. 이 과정에서 한나라당 의원들을 만나 설득하는 장면은 YTN 돌발영상 레전드로 남아있기도 하다. 박근혜 최고 위원과의 면담. 결국 인사청문 적격 보고서는 채택되지 못했지만 노무현 대통령이 장관 임명을 강행하면서 보건복지부 장관이 되었다. 유시민은 적십자비 한 번 안 내서 절대 부적격 장관 취급당했다며 한나라당 등 자신을 꺼린 의원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당시 유시민의 장관 임명에 대해선 유시민이 속한 여당인 열린우리당 의원들도 극렬히 반대해서[40] 이런 의견을 수렴한 이해찬 국무총리가 노무현 대통령에게 유시민을 장관으로 임명하면 안 된다고 주장해서, 임명을 강행하려는 노 대통령과 총리 사임을 운운하며[41] 다투기까지 했다.

우여곡절 끝에 장관으로 임명된 후에 여러 정책을 펼쳤다.

기초노령연금과 노인장기요양보험 도입을 추진하여, 장관 퇴임 직전인 2007년 4월 국회에서 관련 법률을 통과시켰다.# 유시민 본인은 이 때를 정치인으로서 가장 보람 있었던 때로 꼽는다.# 보통 고령자들은 유시민을 버릇없다고 싫어하는 경우가 많은데 많은 노인들이 유시민 덕을 보고 있으니 아이러니.

재임 중 국민연금의 소득대체율을 기존보다 30% 낮추었다. 이에 대해서 엄청난 비난을 받았고 지금도 받고 있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기존의 연금제도가 부도덕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라고 해명한 바 있다.# 국민연금이 도입되던 1988년대와 그 전후의 노년 세대에 대한 대책은 빠져있어서 노인세대에 대한 책임을 가정에게 떠넘겼으며 또한 보험요률이 3%, 인상한 뒤에도 9% 크게 높지 않은 데 비해 소득대체율은 60%로 높은 편이라 그 부담을 후세대에게 떠넘기는 것이 되기 때문에 부도덕하다는 게 그의 주장이었다.

인구 구조가 노년 세대보다 청년 세대가 더 줄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기존 소득대체율을 유지하자면 미래세대에 주어지는 부담이 너무 과중하다는 점과 만약 소득대체율을 더 높이고 싶다면 세금을 더 높이는 것이 불가피 한데 국민 정서상 세금을 더 부과하면서 연금 지급액을 높이는 것은 너무 저항이 클 것이라고 생각해서 소득대체율을 낮추고 미래세대의 부담을 덜어주는 쪽으로 결정을 했다고 설명하고 있다. 이 역시 한나라당의 극심한 반대로 보험료율을 15.9%로 인상하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60%에서 2028년까지 40%로 점진적으로 인하시키는 것으로 타협했다.

대체로 '복지 확대를 위하여 노력하지만 그렇다고 국민 여론을 거슬러가면서 세수나 예산은 확장하지는 않는다'는 생각을 가지고 보건복지부 장관 업무를 수행한 듯하다. 위에서 이미 언급한 국민연금 문제가 생겨났을 때도 처음에는 유시민도 세율을 높여서 소득대체율을 60% 정도로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한나라당의 격렬한 저항과 세금 인상에 따른 국민 여론의 저항을 뚫지 못하고, 혹은 뚫지 않고 세율을 덜 높이는 대신 소득대체율을 크게 낮추었다.

이외에도 최근 문제가 되고 있는 국공립유치원 문제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이다. 그가 보건복지부 장관 재직 당시 다른 국무의원들에게 건의했었고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 재차 이야기한 바에 따르면 국민들이 유아 보육에 추가로 세금을 납부하는 데 합의하지 못한다면 애써 국공립유치원을 늘리는 것은 힘들다는 입장이다. 즉 기성정당들이 주장하는 보육료 인하와 국공립 확장, 그리고 보육교사 처우 개선 문제는 병립하기 힘들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만약 국공립유치원을 늘리고 보육교사를 공무원으로 전환한다면 마땅히 더 많은 예산이 필요하다. 이 예산을 부유층에서만 끌어올 수는 없는 노릇이고 소득에 상관없이 전 국민이 더 많은 세금을 부담해야 한다. 만약 세금을 높이지 못하고 국공립유치원만 늘리고 보육 공무원을 늘린다면 너무 재정 압박이 심해진다. 국민 여론이 세금 인상에 호의적인지 굉장히 회의적임으로 기존의 국공립유치원은 저소득층과 장애아동, 편부모가족 등 취약계층을 위한 복지시설로 재편하고 일반 가정에게는 유동적으로 예산조정이 가능한 육아 바우처를 지급해 민간 보육원 이용요금을 보조하자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이 당시 경험 때문인지 정계를 은퇴한 지금도 유독 기획재정부에 대한 평이 상당히 짜다. 유시민 왈: 기재부가 참... 나빠요. 이는 복지 증진을 이유로 걷은 국세가 정작 주무 부처인 보건복지부가 아니라 기획재정부 주도로 다른 곳에 쓰고, 결과적으로 늘어난 복지 수요에 비해 보건복지부가 가진 예산은 크게 변한 게 없고 예산이 없으니 복지 정책도 제자리걸음인 것을 두고 사람들은 보건복지부만 욕 한다는 게 그 이유. 담뱃세 같은 경우를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결론적으로 ‘보건복지부 장관 유시민’은 높은 평가를 받았다. 임명 과정은 험난했고, 임기 내내 욕도 많이 먹었다. 그러나 밀려있던 보건복지 분야의 개혁을 추진한 것도 사실이다. 이는 유시민 본인의 의지와 능력, 대통령의 개혁 의중이 맞물렸기 때문이다.[42] 세수와 복지 사이에서 균형을 잡는 정책은 유시민 이후의 보건복지부 장관들의 기본 골자가 되었고, 건강보험, 국민연금 역시 유시민 이전 시절에 비하면 평가가 좋아졌다고 자평하고 있다.[43][44]

7.4. 제17대 대통령 선거 출마

참여정부 말기에 노무현 대통령의 지지율이 10% 아래로 떨어짐에 따라 집권여당인 열린우리당은 와해되어가고 있었고 당의 해체는 시간 문제인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유시민 당시 보건복지부 장관은 2007년 2월 19일 취임 1주년 기자간담회에서 "열린우리당 해체는 예정된 수순. 열린우리당은 (분당으로) 곧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또 "한나라당 집권가능성 99%"라는 발언을 하는 등 정치 현안에 대해 속내를 숨기지 않고 털어놓았다. 열린우리당이 분당 내지는 해체 수순을 밟고 있었고, 한나라당으로 집권당이 교체될 것은 명약관화한 일이긴 했지만 대통령의 심복 중 하나인 유시민이 직접 이같은 발언을 하자 일부 여권 지지자들은 유시민이 성급한 발언을 했다면서 비판하는 등 만만치 않은 파장을 낳았다.

그러나 열린우리당 창당의 주역이었던 유시민은 이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열린우리당 고수를 주장했고, 탈당파 내지는 신당파를 극렬히 비난했다. "김한길, 정동영, 김근태, 천정배가 당을 새롭게 만든다지만 절대 그럴 수 없다. 당을 만들려면 이념이라는 깃대를 꼽고 돈과 사람이라는 '자재'가 들어가야 완전한 집이 된다. 원내교섭단체를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걸로 끝이다."라고 말했다.

결국 중도 좌파 세력들은 이른바 중도 세력 통합의 기치를 내걸고 2007년 8월 5일 대통합민주신당을 창당했다.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 중 무려 80여명이 대통합민주신당 창당에 참여했고, 결국 8월 20일 열린우리당이 해산하여 대통합민주신당과 합당했다.

과거 민주당을 호남지역당이라며 극렬하게 비난하면서 개혁당과 열린우리당 창당에서 주된 역할을 했던 유시민은 열린우리당 수호를 외치며 대통합민주신당을 격렬히 반대했다. 하지만 대세가 완전히 신당쪽으로 기울자 결국 통합민주당에 합류했다.[45]

한편 대통합민주신당은 열린우리당과의 합당 다음날인 8월 21일부터 후보자 등록을 받으며 대선 일정에 돌입했다.

유시민은 2007년 6월말 자신의 홈페이지를 통해 대통령 선거 출마 의사를 표명하였고, 8월 18일 대통령 선거 출마를 공식 선언했다. 그리고 대통합민주신당의 대선 후보 경선에 참여했다. 하지만 유시민의 대선 공약은 여권 내부에서도 많은 논란과 비판을 낳았다.
"새만금에 골프장 100개 짓겠다."
"한미FTA는 하루빨리 이번 국회 회기 내에 비준처리해야 한다. 국정조사도 할 이유가 없다."
"광우병 쇠고기 위험 과장하지 말라. 미국산 쇠고기는 시민단체 사람들도 미국 가면 다 잘 먹고 온다."
"분양원가 공개는 부작용이 크다. 원가연동제가 도입되면 분양가가 20% 가량 떨어질 것이다"(실제 원가연동제 도입했으나 이후 부동산 가격 폭등)
"나중에 기존 정책을 수정하거나, 다른 당 후보의 공약을 수용하더라도 지지자들은 나에게 배신했다고 말하지 않겠다고 약속하라."
"지지자와 지도자가 뜻이 다를 때는 지도자의 결정을 따라야 한다. 이것이 나의 조직운영의 대원칙이다."
"조건이 달라지면 공직자가 말 바꾸는 건 당연하다. 말 안 바꾸는 사람은 공직을 할 자격이 없다"
대통령病에 '지대로' 망가지는 '유시민' - 진보와 정론의 인터넷 신문, 대자보
유시민의 대선 공약을 본 여권 성향 지지자들은 수구꼴통의 주장만 모아놓았다고 비난했다.

새만금에 골프장 100개를 짓겠다는 공약은 전라북도의 표를 얻기 위한 전략이었다. 하지만 환경단체 및 개혁·진보진영의 강력한 반발에 직면하게 되었다. 게다가 유시민은 2002년에 자신이 발간한 <유시민의 경제학 카페>라는 책에서 새만금 사업을 '예측하기 어려운 규모의 환경 파괴를 동반하는 사업'이라고 규정하며 극력 반대했었다. 게다가 나중의 일이지만 유시민은 2010년 경기지사 선거에 나와 골프장 건설 금지를 공약으로 내세우며 다시 한번 스스로의 말을 뒤집었다.
"한때 유시민 후보는 새만금에 대해 부정적 입장을 여러 차례 표명한 바 있고 그의 저서는 물론 2005년 열린우리당 당의장 경선 당시에도 그러했다. 그랬던 유시민 후보가 이제와 ‘물막이 공사가 끝난 마당에 전북과 대한민국의 발전을 도모할 수 있는 대안’이라며 내놓은 것이 기껏 골프장 100개와 각종 환경 파괴 레저 단지인가. 스스로 했던 과거의 발언을 뒤엎는 발언은 정치판 ‘철새’만큼이나 우스꽝스러운 법이다. 지금 유시민 후보에게 필요한 것은 국민에게 감동을 주는 대한민국의 비전이지, 이명박 후보의 경부운하가 부러워 내뱉는 선심성 공약이 아니다. 표를 얻기 위한 관광단지니 골프장이니 하는 박정희식 ‘삽질’ 공약들은 일견 추하기까지 하다"
민노당, "유시민의 '박정희식 삽질 공약' 추악"
하지만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유시민 후보는 새만금 골프장 건설 공약을 굽히지 않았다.
"골프장 1백개라고 하니까 굉장히 놀라는데, 사실은 36홀짜리 골프장 50개에 해당한다. 새만금의 4천만 평 정도의 땅에 골프장 1천8백홀 정도를 포함해서 아주 종합적인, 국제적인 레저 파라다이스를 짓는 그런 쪽으로 땅을 쓰자는 이야기다. 골프장, 문화시설, 놀이시설, 슈퍼몰 이런 것까지 다 포함해서 그렇게 종합적인 레저단지로 이것을 쓰자는 제안을 한 것이다. 이건 매우 타당성이 있는 사업이고 단기간 내에 시작할 수가 있다.

국내에서 골프치기가 힘들어서 외국 나가서 우리가 1조3천억 정도 해마다 적자가 나고 있다. 새만금을 중심으로 비행기로 1시간 이내의 거리에 백만명이 넘는 도시가 한 60개 정도 되며, 동아시아쪽 골프인구만 해도 빠르게 늘고 있다. 새만금에 골프장을 건설하면, 국내 전국의 모든 골퍼는 물론 동남아에서도 새만금에 골프치러 올 것이다.

이미 물막이를 다 끝냈고 땅은 죽어가고 있는, 갯벌은 죽어가고 있는 상황에서 언제까지 환경이냐 개발이냐 이 논쟁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건 보통 수도권이나 이런 데 산을 깎아서 골프장 만드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여기는 토목공사가 필요없고, 그냥 갯벌 위에다 흙 덮어서 잔디 깔면 골프장이다. 대규모 토목공사가 전혀 필요없는 것이고 매우 저렴하게 골프장을 만들 수 있다. 그리고 계곡이 파괴되거나 숲이 없어지거나 이런 거 전혀 없다. 아무런 환경파괴 없다. 문제가 된다면 골프장에 쓰게 될 농약이 문제인데 최근에는 매우 친환경적인, 해가 덜 한 농약들을 골프장들이 개발하고 있다. 새만금만큼 환경파괴 없이 골프장을 만들 수 있는 곳은 없다."
2007년 9월 5일 평화방송 '열린세상 오늘 이석우입니다'와 인터뷰
그러자 진보 언론들은 유시민의 해명은 궤변에 불과하며, 저렇게 많은 골프장을 지었다가는 줄도산할 것이 뻔하고 결국 전라북도는 재정적자로 도산하고 말 것이라고 비판했다.
당적을 바꾸는 것보다 더 위험한 철새 정치인은 바로 '생각'을 바꾸는 이다. 유 의원은 아니라고 자신할 수 있는가? 새만금 개발 사업 계획만 놓고 보면 유 의원은 이미 경부운하 만들겠다는 이명박 한나라당 대선 후보와 시쳇말로 '통'했다.
프레시안, "유시민, 새만금에서 이명박과 '통'하니 좋더냐"
이명박 후보의 대운하를 시대착오적 환경재앙 공약이라고 비난해온 유 후보가 이 후보를 비웃는듯한 '건설족 공약'으로 맞승부를 거는듯한 한편의 블랙코미디다.
view&news, 유시민의 궤변, "동남아도 새만금에 골프 치러 올 것"
또 유시민은 대선 공약으로 특전사 공수부대를 동원하여 멧돼지를 소탕하겠다는 공약을 내세워 논란이 일어났다. 일단은 이색 공약, 해프닝으로 여기는 분위기가 많았다. 그러자 유시민은 "멧돼지 공약은 진지한 공약"이라고 거듭 강조하기도 했다.
"멧돼지 발언 보도에 '튀는 공약', '이색공약' 이렇게 제목이 붙었던데 이것은 '튀는 공약'도 '이색 공약'도 아니고 매우 진지한 공약이고 매우 중요한 국가 과제에 대한 공약이다. 보도를 보면서 제가 참 슬프다는 생각을 했다. 2007년도의 대한민국에서 사람들이 이렇게 다른 모습, 다른 정서를 가지고 있구나. 이 멧돼지 문제는 실제로 멧돼지 때문에 사망한 분이 계시고 다친 분도 많고 농작물 피해가 어마어마하다."
2007년 8월 24일 기자간담회
유시민은 멧돼지 공약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담은 UCC 동영상을 만들어 <대통령 긴급특명 "멧돼지를 잡아라">라는 제목으로 인터넷에 올리는 등 멧돼지 공약에 대한 논란을 정면 돌파하겠다는 의지를 보였다.

하지만 군대를 멧돼지 잡는데 동원되는 것은 적절치 않다는 반응이 많았다. 또 환경운동가, 동물보호주의자들도 반대하고 나섰다. 결국 한 언론 매체에서 이 공약에 대한 여론조사에 들어갔고 조사 결과 국민의 과반수 이상이 이 공약에 반대했다. 반대의 주된 이유는 군 본연의 목적에 맞지 않기 때문이라는 응답이었다.
또 유시민은 대선 후보 공약으로 "서울대 학부 폐지"를 내걸었다.

대통합민주신당 대선 후보 경선에는 유시민 이외에 손학규, 정동영, 이해찬, 한명숙 등이 참여했다. 대통합민주신당은 처음부터 친노와 반노, 비노 간의 대립 양상을 띄었는데, 대선후보 경선에서 비노 세력으로 정동영이, 반노 세력으로 손학규가 나온 반면에 친노 세력으로는 이해찬, 한명숙, 유시민 등 세명이나 출마하게 되었다. 이에 친노 세력들 간에 후보 단일화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한명숙은 경선 레이스 직전에 이해찬 지지를 선언하고 후보를 사퇴했다.

경선이 시작되자 유시민은 경선 첫날부터 꼴찌를 차지했다. 이에 친노 진영은 더 높은 지지율을 획득한 이해찬을 중심으로 후보를 단일화하라고 목소리를 높였고, 결국 이러한 압박에 유시민은 중도에 후보를 사퇴하면서 다른 친노 후보인 이해찬 지지를 표명했다.


하지만 이해찬 역시 남은 후보 중에 꼴찌를 차지했고, 정동영이 당내 경선에서 최종 승리했다. 하지만 정동영은 대선에서 26.1%라는 저조한 득표율을 기록하며 이명박에 압도적인 표차로 대패해 맥없이 낙선하고 말았다.

8. 이명박 정부

8.1. 제18대 국회의원 선거 낙선

콩가루 그 자체였던 대통합민주신당은 대선 참패 후 겉잡을 수 없을 정도로 표류했다. 결국 18대 총선을 앞두고 2008년 1월 10일 친노계 이해찬이 탈당했고 며칠 후 유시민도 탈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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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시민은 2008년 4.3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했으나[46] 이를 번복하고 총선에 출마했다. 그런데 이미 두 차례나 당선되었던 자신의 지역구인 고양 덕양갑을 버리고 대구광역시 수성구 을 선거구에 무소속으로 출마했다. 초, 중, 고교를 대구에서 다녔으니 연고가 없는 건 아니지만... 유시민은 1월 16일 자신의 홈페이지에서 대구 출마를 선언하며 "어머니가 계신 대구로 돌아와 '사람 구실은 하는구나'하는 소리를 들으며 정치를 하고 싶다. 제가 자란 곳에서 정치해보고 싶었다."로 밝혔다.

당시 대구 수성 을에는 현직 지역구 국회의원이었던 한나라당 주호영 의원이 재선을 위해 출마했다. 그러나 주호영은 이명박 대변인을 역임했고, 또 이명박 정권에서 초대 특임장관을 지낸 대표적인 친이계 인물이었기 때문에 박근혜 후보를 강력하게 지지했던 대구에서는 대선 경선 과정에서 크게 앙금이 생긴 친이계 주호영을 적대적으로 보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정도로 분위기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수성구는 젊은층이 많고 부자 동네인 관계로 대구에서 지역색이 상당히 희석된 지역이었다. 때문에 이런 분위기를 노리고 대구 수성 을에 출마한 것이다. 실제로도 선거에서 친박계 지지자들이 일부 이탈하여 유시민에게 투표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스스로 '노무현 적자론'을 내세웠음에도 불구하고 32%를 득표하며 맥없이 낙선했다.

선거에서 참패했지만 그의 지지자들은 보수 정당 지지율이 높은 대구에서 이정도 성과를 거둔 것은 선전이라며 자축했다. 수성구 을 지역에서 민주당 진영 인사가 30%를 넘긴 경우는 수성구 을 선거구가 생긴 이래로 유시민이 처음이었고, 이전에 민주당 계열 정당은 20%를 넘을까말까 했다는 것. 게다가 이때는 반노 정서가 하늘을 찔렀던 18대 총선이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고 말한다. 유시민 지지자들에 따르면, 유시민의 선거 결과에 민주당이 크게 고무되었고 이후 김부겸이 대구에서 도전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평하고 있다.

하지만 실상을 짚어보자면 유시민 이전에는 민주당 진영에서는 대구는 처음부터 포기했기 때문에 아예 후보를 내지 않거나 후보가 나왔다 한들 출마한 후보들 자체가 매우 경쟁력이 떨어졌었다. 지난 정권의 실세였고 유시민 스스로도 '노무현의 적자'임을 내세워서 선거전을 치웠다는 점을 생각하면 고향에서 30%를 겨우 넘긴 것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는 냉정한 시각도 존재한다. 애초에 냉정히 말해 민주당의 텃밭으로 분류되는 고양 덕양에서조차 여론조사에 밀렸기 때문에 떨어져도 잃을게 없는 대구로 내려온 것 아니냐는 비평도 있다. 민주계 정당 지지율이 높은 고양 덕양에 출마해서 패했다면 정치적 타격이 훨씬 컸겠지만, 대구에서 떨어지면 원래 보수 성향이 강한 곳이어서 패했다는 변명을 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선거이 끝나자 아니나 다를까 유시민은 곧바로 대구를 떠나버렸고, 대구 사람들은 역시나 그럴 줄 알았다 하는 반응이었다.

애초에 분명히 짚고 넘어갈 점은 유시민은 민주당 후보가 아니라 무소속이었다. 유시민이 대구에서 32%의 지지율을 얻은 것은 민주당 후보로서가 아닌 무소속 후보로서 얻은 지지율이라는 사실은 분명하게 알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유시민은 친노였을 뿐 민주당의 주축인 호남계를 극도로 혐오했다. 그는 97대선에서 "김대중은 절대 당선 가능성이 없다"면서 "김대중은 야권 대통령 후보 자리를 유시민 본인의 스승인 조순에게 양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나중에는 "김대중 대통령은 측근 비리로 얼룩진 식물 대통령"이라면서 "대통령직 하야"를 촉구하기도 했다. 열린우리당 시절에는 뜬금없이 열린우리당내 대표적 호남계인 "정동영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해서 당내 풍파를 일으킨 바 있었다. 이렇게 호남계를 혐오했던 유시민은 이후 열린우리당이 무너진 후 후신인 대통합민주신당에서 정동영을 중심으로 호남 세력이 강해지자 미련없이 탈당을 했고, 이후에도 친노 지지자들의 거듭된 요구에도 불구하고 민주당에 결코 복귀하지 않았다.

실제로 유시민의 행보가 김부겸에 딱히 도움이 되었다고 할 수는 없는 게, 실제로 유시민이 대구에 뼈를 묻을 것 같이 굴다가 대구 사람들에게 어떠한 언급도 없이 서울시장을 도전하겠다고 떠났고, 그마저도 여의치 않자 2010년 6.2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 후보로 출마하면서 수성구 주민들은 배신을 당한 기분이었다. 대구에 내려와 '대구의 아들' 운운하며 민주당 계열 후보로서는 고무적인 30%대의 지지율을 받아놓고도 다시 한 번 도전할 생각 없이 대구를 포기하고 경기도로 가버렸으니 그를 지지했던 많은 이는 나중에 김부겸이 수성구 갑에 첫 출마를 했을 때도 '유시민처럼 한 번 떨어지면 그냥 도망가겠지'라고 생각하여 투표를 망설이게 되었다.

하지만 김부겸이 유시민과 달리 대구에서 2회 낙선하고도 3번째로 도전하자 수성구민들이 김부겸을 선택했다. 어떤 사람들은 만약 유시민이 이때 1회성 출마에 그치지 않고 김부겸처럼 대구시장 등을 비롯해 대구의 장벽을 뛰어넘으려고 했다면 김부겸과 같이, 운이 따라줬다면 김부겸보다 더 일찍 대구에 입성했을지도 모른다고 말한다. 만약 그러한 성공을 거두었다면 김부겸 의원처럼 민주당 진영의 유력한 대권 다크호스로 주목받았을 지도 모른다. 김부겸 의원은 한때 한나라당 소속이었지만, 유시민 전 장관은 보수 진영에 한 번도 몸담아 본 적이 없는 대표적인 친노 성향의 정치인이었으니 대구에서 당선됐다면 김부겸 의원보다도 더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을 것이다. 문재인 더민주 전 대표와 대등한 양강 구도를 형성했을 가능성도 높다.

반론을 쓰자면 당시의 정치적 시대 상황에 대해 고려해서 평가했을 때 양강구도에 대한 고려는 국회선진화법 이후 정치가 안정된 지금을 기준으로 바라보는 평가일 수 있다. 법 날치기나 국회 내에서 일어나는 각종 폭력행위 등이 일어나는 상황에서 보스정치/폭력적인 정치문화가 뿌리깊게 잡혀있는 상황에서 1번의 낙선 또는 여러번의 낙선은 정치적 죽음을 의미했다. 실제로 노무현 대통령도 부산 개척을 위해 종로 지역구를 포기하고 내려가서 여러번 도전했지만 끝내 개척하지 못하고 전국적인/부산PK의 지지세를 대선이라는 더 큰 정치적 구역에서 획득하게 되었고 지역구가 개척된 건 문재인/김부겸이 당선된 2010년대였다. 문재인 이전에 조경태 의원도 있긴 했지만 안타깝게도 대중적인 지지세를 받지 못했고, 사상구에서 정치 신인인 손수조 후보를 만나는 대신 공천에서 떨어진 장제원 의원을 상대로 만났더라면 당시 상황상 당선을 장담하긴 어려운 상황이었다.

실제로 김부겸이 대구로 내려와 2번 낙선 이후 당선이 되기 전에 친노 정치인이었던 이강철 또한 동구을을 개척하기 위해 내려왔었다. 당시 비례대표로 초선당선된 KDI 출신 유승민이 방어형 저격공천을 하기 위해 동구을로 내려와 막을 정도로 필사적이었고 지지율은 견고했다. 당시에는 여러 정치인을 기준으로 놓고 보았을 때, 지역적 성향에 따라 부산조차도 난공불락이었던 영역이었기에 대구에서 계속 도전하는 건 정말 당시 누구에게 물어봐도 말이 안되는 일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계속 도전하지 않고 수도권으로 올라가서 출마를 한 건 대구 사람들에겐 서운해보일 수 있지만 당장의 생존이 중요한 정치인에게는 반드시 해야할 합리적인 선택이었다.

2009년에는 경북대학교에서 "생활과 경제"라는 명칭의 경제학 교양 강의를 맡았다.[47]

8.2. 경기도지사 낙선

국민참여당 창당
유시민은 과거 개혁국민정당열린우리당 출신들, 참여정부 시절의 청와대 참모들, 그리고 참여정치실천연대 출신들 등을 규합하여 2010년 1월 17일 국민참여당을 창당했다. 국민참여당은 과거 유시민 본인이 창당했다가 해산시킨 개혁국민정당을 계승하였다. 개혁국민정당과 마찬가지로 인터넷과 휴대전화를 이용한 참여를 표방했다. 국민참여당은 2011년 12월 4일 통합진보당에 통합되며 해체될 때까지 23개월간 지속되었다.

경기도지사 출마
유시민은 2010년 6월 2일에 치뤄진 제5회 지방선거에서 경기도지사에 출마했다. 야권 단일화 경선에서는 민주당의 김진표 후보와 맞붙어 승리하는 이변을 연출했다. 하지만 애초에 민주당국민참여당이 한 지역씩 주고받는 연대 방식을 취할 수 있었음에도, 한 자리가 아쉬운 민주당과 경선을 통해 단일화하는 방식을 고수해서 정치적 권모술수를 적극 활용하는 마키아벨리스트라는 비난도 받았다. 선거 본선에서도 막판에 진보신당심상정 후보가 사퇴하면서 단일화를 이루는데 성공했다. 이때 심상정이 막판 후보에서 사퇴하며 완전히 김문수 대 유시민 싸움으로 갔음에도 졌는데, 심상정은 군소 후보 주제에 늦게 사퇴했다는 명목하에 자칭 야권 지지자들에게 온갖 비난을 다 들었다.[48]

이러한 잡음 끝에 야권 단일 후보가 되었지만, 현직 경기도지사인 한나라당 김문수 후보에게 밀려 낙선하고 말았다. 표차가 4%p에 불과했던 점, 심상정 당시 진보신당 후보와의 뒤늦은 단일화로 인해[49] 발생한 무효표[50]김문수 당선자와의 격차에 거의 근접할 수준으로 많이 나왔다는 점 때문에 지지자들의 아쉬움이 많았다고 한다. 개표 결과가 나온 후에 그의 지지자들은 무효표 논란을 일으키며 재투표하자는 주장까지 제기하기도 했다. 그러나 무효표가 100% 유시민에게 갔다 하더라도 김문수의 득표가 앞서기 때문에 투표 결과는 달라질 일은 없었다.

당 대표 취임, 2011 김해 보궐선거
2011년에는 국민참여당 대표에 취임하여 2011년 상반기 재보궐선거 경상남도 김해시 을 지역구 국회의원 선거를 지휘하게 되었다. 그로서는 의석을 확보한다면 이전까지의 패배를 만회하고도 남을 의미 깊은 선거였다. 김해시는 국민참여당의 모토인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출생지이기도 하고 PK 중에서도 민주당 지지세가 제법있는 지역이기도 했다.[51]

당시 민주당 후보로 강하게 주장되었던 김경수에게 '김해는 노 전 대통령의 고향인 만큼 국참당 후보가 범친노단일후보로 결정되어야 한다'[52]란 주장을 하며 후보 단일화를 압박했고, 이마저도 단일화 경선에서 자신의 뜻대로 진행되지 않으면 잇달아 판을 깨는 등 수없이 많은 어거지 끝에 결국 이봉수를 후보로 내세우는데 성공하고 원내 진출을 꿈꾸었으나 김태호 후보에게 밀리며 좌절되었다. 김태호는 경남도지사 출신에 최연소 총리 후보자라는 화려한 타이틀을 가졌음에 반해 이봉수는 김해 출신이라는 점 빼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경력은 정당원으로서 후보 뒷바라지가 전부. 민주당 측에서는 여론조사에서 당선 가능성이 높았지만 야권분열, 이강철 전 청와대 시민사회수석, 권양숙 여사, 민주당이 유시민을 죽이려 든단 모함 끝에 불출마한 김경수, 막판 이해찬과 문재인의 중재에 따라 단일 후보를 양보한 곽진업 등의 희생이 있었기에 단일화를 강하게 밀어붙였던 유시민에게 엄청난 비난이 쏟아졌다. 당시 민주당측에서 협상을 진행하던 이인영은 유시민이 저런 사람이었냐며 치를 떨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때까지만 해도 높은 인지도와 나름의 팬덤을 바탕으로 야권 대권 주자 1위를 굳건히 지키던 그였으나 그것마저도 손학규에게 넘겨주게 되었다.

8.3. 통합진보당 합당

자세한 내용은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 통합진보당 아메리카노 커피 사건 문서를 참고하십시오.

잇따른 타격을 입은 국민참여당은 존재 의의를 잃어버린 채 민주당에 흡수될 위기에 처했으나, 우여곡절 끝에 민주노동당, 진보신당과 합당하여 대통합 진보 정당인 통합진보당을 탄생시키면서 반전의 기회를 찾는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이 통합은 그의 정계 은퇴의 시발점이 된다.

창당 후 통합진보당의 공동 대표로 활동했으며, 당시 경기동부연합 계열 인물들에 대한 친북 논란이 보수 언론에서 제기되자 매카시즘이라고 항변했다.#

2012년 총선에서는 비례대표 12번으로 출마하였다. 기사 중진급 정치인은 비례대표보다는 지역구에 출마하는게 일반적이지만, 간혹 이렇게 비례대표 후순위로 출마하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예는 1996년 총선때의 김대중. 비례표를 최대한 끌어모으기 위해 일종의 배수의 진을 친 셈이지만 결국 낙선했다.

그러나 통진당 내부에서는 계파 갈등이 만연하였고, 유시민은 이를 비판하면서 당무 거부와 복귀를 반복했다. 결국 통합진보당 비례대표 후보 부정경선 사건이 터지게 되고, 유시민은 '총체적 부정선거'임을 인정하고 비례대표 전원 사퇴를 주장하였으나 경기동부연합 계열의 당권파가 반발하며 계파 갈등은 폭발하게 된다. 결국 비당권파 당원들의 대규모 탈당이 시작되었고 유시민도 그 중 하나였다.

8.4. 정계 은퇴

통합진보당 탈당파는 진보정의당(현 정의당)을 결성했으나, 유시민은 2013년 2월 19일 정계 은퇴를 선언했다. 다만 당을 탈당하지는 않았고 평당원으로 남았다.

정계 복귀할 생각은 없냐는 질문이 주기적으로 이어져 왔지만, 그때마다 '정계를 떠난 지금의 삶이 더 행복하다'라며 단호히 선을 그었다.[53] 하지만 다른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지만 유시민 본인 역시 정치인으로서 여러차례 말을 바꾼 전례가 있기 때문에 유시민의 정계 복귀 및 대선 출마 가능성이 끊임없이 정계 주변에서 제기되고 있다.[54]

이후 2018년, 정치에서 한 걸음 더 물러나고 싶다며 정의당을 탈당하였다.

9. 박근혜 정부

9.1. 정치평론가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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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로 돌아온 유시민.
2013년 당시 딴지라디오 아까부터 팟캐스트 시대에서 유시민 백수님이라고 하면서 소개를 해 줬고 이때 유시민 본인의 목소리를 녹음한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책의 홍보 광고가 꾸준히 방영됐는데 컬트적인 인기(?)를 끌면서 나름 유명해졌다. 그런데 이 책 광고에 관한 비화가 있는데, 원래는 1개월만 방영하기로 계약하였는데 계약이 끝난 줄 모르고 계약기간을 초과해서 계속 어뜨케... 살 끄신가...가 계속 방영되었다고 한다.

이때 같은 딴지라디오의 '딴지 이너뷰'에 출연해서 물뚝심송이 인터뷰를 했는데 제목이 정신승리의 달인 백수 유시민이라고 당시의 근황을 확인 사살 당했다. 이 방송을 통해 서울대 성폭력 대책위 사건의 피해자인 유수진 前 사회과학대학 학생회장이 소개되기도 했고, 그 사실을 아버지가 뉴스를 보고서야 알았다고 한다. 자세한 사정은 해당 사건이 벌어져서 고초를 겪은 이후 딸 유수진 씨가 남동생에게 부모님에겐 말하지 말자고 했고 유시민의 아들이 그걸 지켜서 자신은 집에서 몰랐던 것이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팟캐스트 <노회찬, 유시민의 저공비행>을 진행했으나 그 이름값에 비해 현저히 낮은 재미에 결국 망했다가 2014년부터 진중권 교수까지 참여한 노유진의 정치카페 고정멤버로 출연 중이다. 노유진의 정치카페에서는 '유시민의 타임라인'이라는 코너를 맡아 진행하고 있다. 한 주간 있었던 굵직한 시사 문제에 대해 분석하고 향후 상황이 어찌 될지 예측을 내놓는 시간인데, 유시민 작가의 예측이 들어맞는 경우가 은근히 많아 댓글란에 '돗자리 깔았다'라는 댓글이 달린다.

예측이 계속해서 적중하자, 사회자 진중권 교수도 "이번에도 돗자리 까는 겁니까?"하며 능청을 떨며 언급할 정도. 유시민의 논리적 사고와 추론, 그를 뒷받침하는 정보력과 명확한 사실관계 파악을 고려할 때, 예측이 틀리는 게 이상하다. 특히 많은 정당에 몸담았던 경험 때문에 다른 진행자들에 비해 그쪽에 대해 빠삭한 편이며 재선의원 및 보건복지부 장관으로 일하며 정부, 국회, 청와대를 드나들었던 경험이 있어서 내각 시스템이나 청와대 시스템에 대해서도 두 진행자들에 비해 아는 게 더 많다.

한참 국정 국사 교과서 문제로 시끄러웠던 무렵인 2015년 11월에는 모교인 심인고등학교를 방문해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 문제에 대한 강연을 했다.

2016년 1월부터 JTBC의 시사 예능 프로그램인 썰전이철희의 후임자로 진보 측 패널로 출연하고 있다. 보수 진영을 대변할 패널로는 전원책 변호사가 결정됐다. 첫 방송인 2016년 1월 21일 방영분의 시청률은 4.2%로 자체 최고 시청률을 갱신했으며, 정말이지 적절하다고 밖에 할 수 없는 두 패널의 조합으로 인기를 끌고 날마다 시청률이 늘어가면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때에는 시청률이 10%를 달성하기까지 했다. 정치를 하던 시절 출연했던 생방송 토론과 다르게, 썰전은 녹화방송이라 제작진이 편집을 잘 해 줘서 좋다고 한다. 스스로 "썰전은 소풍 가는 기분으로 가죠."라고 언급했다.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심화되면서 거국중립내각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니냐는 의견이 대두될 때, 자신이 총리가 되었을 때를 가정하여 총리로서 해야 할 일을 설명하기도 했다. 대통령이 실질적 권한을 국무총리에게 이양할 것을 전제로 내걸었고, 전원책 변호사는 총리가 대통령의 권한을 사용한다는 것은 반헌법적 생각이라고 비판하였다. 한편 유시민을 국무총리로 선임해야 하는 것 아니냐는 의견이 온라인 일각을 중심으로 나왔다. 당시 유시민의 가정법(내가 국무총리가 된다면 ~~을 했을 것) 때문에 그가 총리직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것으로 생각, 정치하길 원했던 지지자들이 그런 것이다. 그러나 유시민에 따르면 정치를 하지 않겠다는 말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며, 별 의미 있게 말한 건 아니라고 밝혔다. 또한 본인도 본인이 총리가 된다면 보수정당은 물론 진보정당 내에서도 상당히 반발이 많을 거라고 예상하였다.

2016년 10월 7일 언니들의 슬램덩크에 환경에 관한 주제를 다루면서 게스트로 출연하였다.

2016년 12월 9일 박근혜 대통령 탄핵 소추안 가결 후 JTBC 뉴스룸에 출연해 손석희와 인터뷰하였다. 탄핵 소추안 가결이니만큼 유시민에게 당연한 것이겠지만, 썰전에서도 쉽게 보이지 않았던 광대승천 수준의 미소가 나왔다.

그리고 2017년 1월 3일 뉴스룸 토론에 출연하였다. 이 토론에 대해서 평한 딴지일보 에서 유시민은 이제 좀 있으면 구름을 타고 다닐 법한 해탈의 지위로 평가되었다. 물론 딴지일보 총수가 누구인지를 생각해보면... 같이 썰전에 출연했던 전원책의 토론 태도가 크게 논란이 되면서 더 부각된 것도 있다.

광주·전남 향토기업보해양조㈜의 사외이사를 맡는다고 한다.# 3월 24일 목포 보해양조 본사에서 열리는 주주총회에서 해당 안건이 통과될 경우 유시민 작가는 오는 2020년까지 보해양조 사외이사로 활동하게 된다고 한다. 유시민 작가는 "이전부터 보해양조에서 사외이사를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다. 민간기업에 관련된 일은 새로운 일이라 호기심도 있어 수락했다"고 사외이사 수락 배경을 밝혔다. 이는 큰 화제가 되어서 기사가 나오자마자 보해양조의 주가가 크게 올랐다가 3월 9일쯤에야 안정을 찾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24일 주주총회 때 사외이사에 선임되었다.# 이에 대해 일부에서는 '공직 안 하려고 도망친다'라는 농담 섞인 반응도 나오고 있다.

9.2. 19대 대선과 정계 복귀설

뭐 사진 같은거 이런 거 갈무리 해가지고 짤 만들고 이래 가지고 명왕이 뭐, 산채로 잡아오라 했다는둥 그런 얘기 나오고 있어가지고요......
(중략)
저는 제 개인적인 거는... 저는 공무원이 될 생각이 없어요.
- 김어준의 파파 이스 144화 中
본래 유시민의 정계 복귀는 정치계의 오랜 떡밥이다. 특히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이후 더불어민주당의 지지율이 높아지고 문재인제19대 대통령 선거의 유력한 대선 주자로 등장하자 친노-친문 세력 및 지지자들과 각별한 관계인 유시민에 대한 관심도가 더욱 커졌다. 그렇지 않아도 2015년 말부터 문재인의 주도로 민주당이 각계각층의 명망 있는 인사들을 대규모로 영입하는 상태이다. 이런 상황에서 유시민의 영입 및 정계 복귀의 여부를 두고 관심이 적을 리가 없다. 한 예로 위에서 언급했듯이 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당시 거국중립내각 및 책임총리제를 놓고 논란이 커졌는데 이때 썰전에서 유시민이 반 농담 삼아 '저는 총리를 하라고 하면 할 것 같다'라고 말하자 바로 책임총리 후보의 하마평으로 유시민의 이름이 오르내린 것이 그 예이다.

그래서 문재인 및 유시민 지지자들이 많은 커뮤니티에서는 유시민을 두고 '썰전에서 짤리게 하자', '책 안 팔려서 돈 못 벌게 하자', '산 채로 잡아와라', '무슨 방법을 써서라도 문재인에게 데려가야 한다' 등과 같은 농담 글들이 자주 올라오고 있다. 보해양조의 드립도 이런 상황에서 나오는 말. 유시민은 정의당 당원이란 지적이 나오면 '정의당과 연정하는 셈 치자'라는 말도 나온다. 물론 반대로 '그전에 정의당에서 나오시죠'라는 드립도 있었다. 그 외에도 문재인 대선 캠프 및 더불어민주당 등에서 차기 내각 인선과 같은 인사 관련 기사가 나오면 높은 확률로 유시민의 이름을 언급한다. 특히 위의 총리 드립 때문에 국무총리 직이 가장 많이 거론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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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썰전 출연 대기실 썰전 200회 인터뷰 중
그리고 앞서 문재인 후보가 썰전에 인터뷰로 출연할 당시 유시민의 정계 복귀에 대해 의미심장한 말을 하는 바람에, 위의 왼쪽 사진처럼 유시민을 보는 문재인 사진을 이렇게 만들기도.[55].왼쪽 사진은 유시민의 표정이 다소 이상하게 나왔는데, 이걸 두고 유시민이 일부러 바보 흉내를 해서 도망치려 한다는 드립도 있다. 2월 5일 썰전 205회에서 문재인 후보가 직접 출연해서 이 발언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전원책이 '그저 덕담 아닙니까'라고 말하자 유시민은 '그건 덕담이 아니라 악담이지.'라고 받아쳤다. 이에 문 후보가 '국민들이 러브콜을 하면 그게 운명이 되는 것'이라고 말하자 '국민들이 저를 러브콜할 방법이 없으니 그건 마음이 놓이죠.'라며 다시 받아쳤다.

물론 유시민의 복귀 여부는 어디까지나 유시민 본인의 의사에 달려 있다. 따라서 이런 드립들은 이를 알면서도 일부러 하는 장난들이다. 대부분은 그냥 유시민이 지금처럼 편하게 사는 모습이 보기 좋다고 평가하는 편이다. 그래서 오히려 이런 장난을 더욱 재미있어 하는 것. 물론 진짜 정계 복귀를 바라며 드립을 치는 사람들도 있다.

또 한편으로는 유시민이 정치를 안 하는 이유가 노무현 전 대통령의 충고 때문이라며 이런 드립 자체를 안 좋아하는 사람도 더러 있다. 서거 이후에도 정계에서 살아남으려 했으나 연거푸 낙선했으니 이제는 그 충고대로 따르는 것 아니냐는 의견도 있다. 한편으론 문재인과 일하면 정치적, 정신적인 부담뿐만 아니라 과로 등 육체적으로도 힘들다는 걸 뻔히 알고 있기 때문에 더 놀고 싶어서 그러는 것 아니냐는 더 농담 섞인 의견도 있다. 마침 문재인은 대단한 워커홀릭이어서 그 휘하에서 일한 보좌진들이 생고생을 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위에 언급한 농담 글 중에는 유시민과 문재인을 마치 '게으름뱅이 부하'와 '악덕 상사'처럼 표현한 글도 적지 않았는데 바로 이를 반영한 것.

5월 2일 tvN에서 유희열과 함께 나영석이 연출하는 윤식당의 후속 프로그램 알쓸신잡(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 사전)에 출연한다는 소식이 떴다. 어째 점점 방송에 더 많이 나가는 걸 보니 점점 연예인이 되어가는 것 같은 모습이다. 그리고 문재인-유시민 지지자들 사이에선 '또 어딜 도망가십니까', '마지막 휴가는 즐기게 하자' 등의 드립이 나왔다. 정작 본인은 예고편에서 굉장히 해맑은 모습으로 프로그램 컨셉이 마음에 들어 어쩔 줄을 모르는 모습을 보였다.

5월 4일 썰전에서 전원책이 대놓고 "총리 이야기 왔느냐"고 물었지만, 유시민은 "(총리는 호남이라는데) 난 영남이잖아요"라며 농으로 받아넘겼다. 해당 방송에서 유 작가가 밝히기론, 문재인 후보가 총리감을 내정해두긴 했는데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아서 아는 사람이 없다고.

5월 5일 김어준의 파파 이스144에 출연했다. 유시민 파트 풀영상 김어준이 '혹시 내가 총리가 될 수 있지도 않을까란 설레발 아닙니까'라며 위의 총리 드립을 말하자 당연히 방청석은 환호의 도가니. 유시민 본인도 '산 채로 잡아와라' 등의 드립을 알고 있단다. (총리는 비영남 쪽으로 한다고 했으니 자신은 해당이 안 된다는 유시민에게) '그럼 두 번째 총리를 해야지', '속으론 문재인에게 가고 싶은 거 아니냐'라고 계속 깐족거리는 김어준과 어떻게든 변명(?)하는 유시민의 대화가 일품이다.

일단은 공직에 나갈 생각은 없다고 단언했다. 자신이 더불어민주당 내에서도 찬반이 갈리는 인사라는 것을 알고 있고, 또 자신은 장외에서 (자칭)'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어서 지원하는 형태를 더 원한다고. 이는 당일 유시민 작가가 지적하듯, 노무현 대통령 당시 (보수언론/지식인이야 당연히 비판적이고) 소위 '누구에게나 공정하다'는 진보 특유의 기계적 중립주의인 척 위장한 반노의 위치로 보수 진영에 합세해 참여정부를 맹렬히 비판하고 그 결과 참여정부를 좌우 양쪽으로부터 고립시킨 진보 언론/지식인들에 대한 비판적 인식에 의거한 입장이다. 실제로 친노/친문 지지자들의 한경오에 대한 정서는 결코 우호적이지 않다. 이 글을 참고하자. 즉 공정성, 중립 운운하며 비판만 할 게 아니라 어느 정도 감싸주고 편을 들어주는 장외 지식인을 스스로 자처하겠다는 뜻. 유시민의 우려대로 문재인 정부가 출범한 이후 한경오를 비롯한 진보 언론과 친문 지지자 간의 대립이 대단히 심각해지고 있다.

또한 끝 무렵에 지금까지 유시민이 왜 정의당에 당적을 두는지, 인터넷에 유시민에게 정의당 탈당하라는 목소리에 대한 간접적인 답변이 나온다. 대략적인 요지는 "정의당은 모든 걸 다 하려다 보니까 그게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고, 컨디션 기복이 심하다." 정도로 해석된다고 본다.

5월 9일 제19대 대통령 선거JTBC 2017 우리의 선택 특집 뉴스룸에 출연했다.

조기숙 교수가 페이스북에서 밝힌 바에 따르면 유시민 작가가 문재인 대통령에게 '대통령으로서의 재량권만으로 할 수 있는 일을 먼저 하시라'라는 조언을 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문재인 정부 초기의 행보는 유시민 작가가 썰전에서 '이렇게 하면 된다'라고 제안했던 부분과 대체로 일치한다. 이로 미루어보아 두 사람 사이에 연락이 오고 갔고 그 과정에서 유시민 작가의 현 포지션에 대한 교감이 이미 있었던 모양.

문재인 정부가 공식 출범한 이후엔 유시민의 정계 복귀는 이젠 일종의 이 되었다. 노무현, 문재인 지지자들은 유시민이 도와주길 바라는 사람이 대다수이지만,[56] 한편으로는 그에게 또 다른 고생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모순된 감정이 교차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용 지식인이 되어서 도와준다 했으니...

많은 사람들이 유시민의 정계은퇴가 번복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의 사례가 이미 있기 때문이다. 이미 전현직 정치인들이 자신의 발언을 번복하는 것은 흔한 일이라는 것이다.

또한, 유시민 본인이 썰전을 하차하면서 '정치에서 더 멀어지고 싶어 정치비평의 세계와 작별하려 한다'는 발언과는 달리 야당을 비판, 비난하고 여당과 현 정부를 옹호하는 등 정치비평은 물론이고 정치적인 발언들을 이어나가고 있다. # 그렇기에 유시민이 정계 복귀를 할 것이라는 예측 또한 계속되고 있다.

정두언 전 의원 역시 유시민이 정치 활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출마 선언만 안했을 뿐이라고 언급한 바 있다.#

대개는 정당에서 직위를 갖고 있거나 선출직 공무원인 사람들을 정치인으로 일컫기도 하나 무소속, 또는 정치활동을 이어나가는 사람에게도 정치인으로 부른다. 유시민 역시 정당인, 선출직 공무원은 아니나 정치적 성격이 강한 노무현재단 이사장, 현 정부와 여당 옹호 정치평론을 이어나가고 있기 때문에 본인이 정치인이 아니라는 부정에도 동의하지 않는 사람들은 여전히 존재한다. 게다가 노무현재단 이사장 취임 후 뉴스공장에서 정계복귀설에 대해 '그런 의심은 당연한데, 제가 증명할 필요가 있나. 정치 하고 말고는 제 마음이다. 나중에 제가 하게 되면 욕하시라'란 발언을 하면서 정계 복귀에 대한 입장을 선회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정치인은 아니면서 정치에 발을 걸쳐놓는 위치가 가장 발언의 신뢰성을 더하면서 발언에 부담이 없기 때문이다. 유시민이 정치평론가들이 정치인이 아니듯 본인도 정치인이 아니라는 발언을 한 바 있으나 정치평론가들의 상당수가 정치 입문을 목적으로 정치평론을 하는 경우가 흔하다는 것을 상기하게 된다. 유시민의 정계 복귀 논란은 지지, 비판 성향을 떠나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10. 문재인 정부

10.1. 2017년

5월 13일 지지자들과 함께 봉하마을을 방문한 자리에서 문재인 정부에 대한 소감을 밝혔다. 문재인 정부에 들어가지 않겠다고 강조하였으며 문재인과 연락을 너무 자주하면 비선이 될 수 있어서 자제하고 있다고 밝혔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한 '진보 어용 지식인'이 되어서 외부에서 지원하겠다고 말했다.

5월 28일에는 마이 리틀 텔레비전의 김구라의 방에 출연해 전반전 시청률 1위를 달성하는 화력을 보여줬다. 방송 말미에는 피디가 편집할 거 아니냐며 팟수들의 질문에 대해 짤막짤막하게 답변을 해주기도 했는데 마리텔에 출연하게 된 이유는 어차피 문 닫는 방송에 조문차 출연하게 되었다고.[57] 이언주 의원이나 자유한국당 의원들의 문자테러 논란에 대해서는 '새로운 정치행위로써 정치인은 관심을 먹고 사는데 문제있나'란 반응이었고 마리텔이 시청률 때문에 100회에서 폐지하게 되었다는 얘기가 나오자 "그럼 뉴스데스크는 왜 폐지 안하는데? 그것도 아무도 안 보잖아."라며 시크하게 깠다.

6월 2일부터 나영석 PD의 알아두면 쓸데없는 신비한 잡학사전에 출연한다. 쟁쟁한 멤버들 가운데에서도 특유의 말빨이 전혀 묻히지 않는 모습을 보여줬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는 정계 복귀 떡밥에 대해서는 "자연이 진공을 허용하지 않는 것처럼, 권력도 공백을 허용하지 않는다.", "내 공백은 젊은 인재들이 메워줄 것이다." "고령화 사회일수록 리더쉽이 젊어야 한다."등의 말로 입장을 밝혔다.

한국인이 사랑하는 프로 1, 2, 3위 중 2위(썰전)와 3위(알쓸신잡) 프로 양쪽에 출연하는 유일한 인물이며, 심지어 양쪽 모두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자랑하고 있다. 상기 마리텔에서 보여준 화력도 그렇고, 여러모로 방송인으로서의 네임밸류가 상당한 수준임을 보여주고 있다. 실제로 알쓸신잡 1회에서 유희열은 '자기안에서 요즘 가장 핫한 방송인'으로 유시민을 꼽기도 했다. 2017년 시사저널에서 시행한 '누가 한국을 움직이는가' 설문조사에서는 전체 영향력 3위, 문화예술계 2위에 올랐다. 활발한 대외 활동이 영향을 끼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예능 프로그램에서 보이는 유머러스하고 지적인 모습으로 기존에 정치인으로 활동하던 시절 가지고 있던 소위 '재수없는 진보' 이미지를 벗고 장년층 들에게 호감을 받고 있다.

12월 12일 청와대 국민청원청원을 올렸다! 청원의 내용은 초등학교 일부 빈 교실을 아동 육아 공간으로 사용하자는 것이었고 이를 위해서 여러 부처가 힘을 합쳐야 하는 만큼 청와대와 총리실이 직접 나서주길 바란다는 내용이다.[58][59] 그리고 연합뉴스전화 통화에서 본인이 쓴 글이 맞다고 인증했다. 그리고 해당 청원의 서명 글 중에는 '청원인을 책임자로 직접 임명해야 한다', '산 채로 잡아가세요' 라는 드립이 쏟아지고 있다. 청원은 하루만에 2만명을 넘는 기염을 토하고 있으며 13일 오전 12시 기준 청원인 2만 6천명을 돌파했다. 유시민의 이 청원 소식은 글이 올라온 당일 JTBC 뉴스룸비하인드 뉴스에 등장하기도 했다. 키워드도 '시민의 청원'으로 중의적인 표현. 최종 서명 수는 75,294 명으로 의무 청원자 수인 20만을 넘지는 못했다.

12월 23일 무한도전에 출연하였다. 무한도전에서 뽑은 올해의 인물로 김생민, 윤종신, 진선규, 송은이와 함께 유시민이 꼽혀서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

10.2. 2018년

1월 13일, 당시 암호화폐 논란에 대해 '엔지니어가 만든 이상한 장난감'이라며 비판했다.

1월 18일 암호화폐 논란을 주제로 한 JTBC 특별 토론회에 패널로 출연했다. 토론 내용은 JTBC 뉴스룸/긴급토론 - 가상통화 신세계인가, 신기루인가 문서를 참고할 것.

4월 10일 약 7개월 만에 방송을 재개하는 100분 토론에 패널로 출연한다. 주제는 10차 개헌의 내용을 다룬 '대통령제 vs 책임총리제, 30년만의 개헌 가능할까'이다. 함께 출연하는 패널은 박주민 의원, 나경원 의원, 장영수 고려대 교수[60]이다. 해당 토론에서는 개헌안에 포함된 특정한 동기나 의도를 찾기보다는 헌법에 부합하고 합리적이고 국민의 삶의 질 향상에 도움이 되는지 검토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썰전 272회에서 최저임금 상여금 산입 문제에 대해서 기본급은 낮고 상여금 , 복리후생비로 최저임금 보다 높은 수준의 임금을 받던 노동자들이 이번 개정으로 임금이 낮아졌다고 삭감이라고 하면서 반발하는건 논리적이지 않다고 했다. 네이버 뉴스 , 고용노동부

6.13 지방선거 당일 MBC 선거방송에 전원책 변호사와 함께 출연하면서 현재 정의당 평당원이 아님을 밝히면서 정의당을 탈당한 것으로 확인되었다[61]. 현재는 무소속. 당적도 버려 완벽하게 민간인의(?) 신분으로 돌아와서 그런지 "싹쓸이해서 그렇게 좋으냐."는 전원책 변호사의 투덜거림에 "솔직히 속이 다 시원하다."고 솔직한 답변을 내놨다. 그리고 친문 성향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는 '이제 정의당 눈치 볼 것도 없으니 빨리 산채로 잡아와야 한다'라는 드립이 다시 등장했다. 단 드립은 드립일 뿐, 유시민 작가가 정의당을 탈당한 이유가 다른 정치 활동을 시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정치와 조금 더 멀어지기 위함이므로 실현될 확률은 매우 낮다.

정의당 탈당을 이어 6월 28일 방송을 마지막으로 썰전에서도 하차한다. 말 그대로 정치와 정치비평과 떨어진 삶, 작가와 비평가로서의 삶을 위해 정치 주제를 계속 해야하는 썰전을 떠난다고.기사

7월 23일 노회찬 의원이 투신자살하자 곧바로 빈소를 찾아 조문하고, 상주 역을 자처하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 특히 조문 당시에는 9년 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와 마찬가지로 오열했다. 발인식에도 참석했고, 모란공원까지 동원하며 심상정, 이정미를 위로했다.

7월 29일부터 패키지로 세계일주 - 뭉쳐야 뜬다에 게스트로 출연했다. 여행지는 일본 대마도로, 유시민의 전문인 역사 상식과 낚시를 주제로 한 패키지 여행이었다.

9월 26일 유시민 작가가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으로 내정됐다는 소식이 보도됐다.# 현직 이사장인 이해찬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최근 사의를 밝혔고 이에 후임자를 물색하는 과정에서 이해찬 대표가 유시민 작가를 직접 후임으로 낙점해 이사장직을 제안, 유시민 작가가 이를 승낙하여 노무현재단의 이사장을 맡게 됐다는 것이다. 이사회 의결 등 공식 절차를 거쳐 10월 즈음에 이사장으로 공식 선임된다고 한다.

10월 2일, 공식으로 노무현재단 이사장으로 선임됐다. 임기는 5일부터 시작된다.

일각에서는 유 작가의 노무현 재단 이사장 복귀를 두고 ‘정계 복귀 신호탄’이 아니냐는 의견이 나온다. 썰전에서 호흡을 맞추었던 박형준 교수는 “방송을 같이 하면서 유시민이 결국엔 정치를 재개할 것이란 인상을 받았다. 또 친노 진영 입장에선 다음 정권도 자신들과 같은 정체성을 가진 인사가 대권을 잡는 것이 절실하다. 그러나 안희정이 낙마한 지금 그럴 자격이 되는 이는 유시민과 김경수 경남지사 정도다. 유시민의 이사장 취임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는 견해를 내놓았다.

민주당 수도권 중진 의원은 “이해찬은 노무현 정부에서 총리를 지내던 시절 자신이 ‘문 실장’으로 불렀던 문재인을 2012년 대선에 출마시켜 5년 뒤 대통령이 되는 기반을 마련하게 한 데 자부심을 느끼고 있다. 자신이 ‘유 보좌관’으로 불러온 유시민이 또다시 대권 주자 반열에 낀다면 2번 연속 킹메이커 역할을 하게 된다.”며 이해찬 대표의 유시민 영입은 더불어민주당의 '대권 잠룡' 풀을 늘리기 위함이라는 견해에 힘을 실었다.

하지만 친문계 김정호의원은 “유시민이 정치를 떠난 사람이기에 이해찬 대표가 낙점한 것”이라고 평했다. 이해찬 대표에게 노무현 재단을 둘러싼 정치색이 부담이었는데 5년 넘게 정계를 떠나있는 유시민이 이사장을 맡으면 그런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 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정치적 경호실장’이란 별명이 붙어있을 만큼 친노로서 ‘정통성’이 있기에 이해찬이 그를 골랐을 것이란 주장이다.*

10월 15일, 노무현재단 이사장 취임식을 가졌다. 유 이사장은 이 자리에서 "임명직 공무원이 되거나 공직선거에 출마하는 일은 제 인생에 다시는 없을 것임을 분명하게 말씀드린다"고 강조했다. 유 신임 이사장이 이사장 취임에 앞서 제기된 정계 복귀 가능성을 일축한 것으로 풀이된다.

12월 22일, 노무현 전 대통령 관련 가짜뉴스에 대한 대응과 현 정부의 정책 소개와 이슈 정리를 목적으로 하는 인터넷 방송을 팟캐스트, 유튜브 등에서 할 것이라고 밝혔다. 본인 말로는 "은퇴 비슷하게 했지만, 어용지식인으로 복귀하겠다"고. 이로 인해 또 언론에서는 정치복귀설이 흘러넘치지만, 본인은 그런 해석을 경계했다. 장윤선 기자에 따르면 "유시민이 기침하면 여의도엔 독감이 돈다."는 말이 돌 정도라고. 본인 의사와 무관하게 정치적 위상은 리즈를 찍는 중.

10.3. 2019년

2019년 1월 2일 JTBC에서 주최한 토론 '2019 한국 어디로 가나'에 김상조, 신세돈, 김용근과 함께 출연했다. 토론회에서 유시민은 최근 일부 언론 등이 제기하는 경제위기론에 대해 "보수 기득권층의 이념동맹이 문재인 정부 경제정책을 이명박·박근혜 때로 똑같이 돌려놓기 위한 작업이라고 본다"고 밝히며 주류 언론의 경제 기사에 대해 깊은 불신을 거듭 드러냈다.

1월 4일, 팟빵, 유튜브, 카카오tv 등에서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했다. 이름은 '유시민의 알릴레오'. 유튜브 방송을 업로드하는 노무현재단 채널은 티저가 나온 뒤로 구독자 수가 급상승했는데[62], 1월 5일에는 홍카콜라, 정규재TV마저 뛰어넘은 35만을 찍고, 다음 날인 1월 6일에는 45만을 달성하고 극우 채널 중 가장 많은 구독자수를 자랑하는 신의한수마저 꺾었다. 마침내 1월 7일 오전 11시 25분 구독자 500,000명을 달성하는 저력을 보여줬다.[63] 그리고 유시민의 알릴레오 1화는 1월 5일 기준 조회수 100만을 달성한 것도 모자라 1월 7일 59시간 만에 200만을 달성했다.

이 상황을 두고 보수 성향 네티즌들이 유튜브로 대거 결집 하면서, 위기의식을 느낀 진보 성향 네티즌들이 마침 유튜브 방송을 연 유시민에게 총집결을 한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 사실 그 전에 직접적으로 보수 성향 유튜브 채널을 직접적으로 견제하기 위해 더불어민주당 측에서 '씀'이라는 채널을 개설했으나, 당내외에서 여러 악재들이 겹치고 방송 내용 자체도 별 재미가 없다는 이유 때문에 1월 6일이 돼서도 구독자 수가 3만을 못 넘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알릴레오가 뜨고 난 뒤의 방송분에서 이해찬 대표가 개그맨 강성범을 초대하여 버럭금지(...) 서약서를 작성해가면서 부랴부랴 방송 재정비를 나서는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64]

2019년 1월 7일 팟캐스트와 유튜브를 통해 공개한 '고칠레오' 1회에서 자신은 차기 대선 주자 최상위권에 오른 현재의 모습들에 대해 소감을 묻는 질문에 딱 잘라서 "난감하다"고 대답했다. 정치를 안 해봤으면 그런 소리를 듣고 기분 좋다고 할 수도 있겠는데 정치를 10여 년 해본 상황이고 그런 쪽으로 이름이 오르는 것이 좋은 게 아닌 줄을 알고 있고[65] 언론을 통해 보도되는 그런 소식이 오히려 여론을 왜곡하는 것이 아니냐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고(...) 그러면서 2년 뒤에도 그래도 자신을 계속 부른다면 왕조 시대 임금의 부름을 거절하던 선비들이 하던 대로 칭병하거나 아니면 은둔하겠다고 밝혔다.#[66]

이에 대해 김대중 전 대통령이나 문재인 대통령의 사례처럼 정치인의 말은 믿을 게 못된다는 반론도 나오나, 유시민은 그런 반응을 예상하며 "나는 정치인이 아니다"는 입장을 분명히 하면서, 자신의 팟캐스트 '알릴레오' 창설 자체가 다른 형태의 정치라고 하는 언론 보도에 대해서 "정치 현안에 대해서 정보를 제공하는 언론활동이 정치라면 정치 현안을 보도하는 언론 뉴스 앵커나 시사 예능에 나오는 정치평론가들도 모두 정치인으로 분류되어야 하느냐"고 답했다.

또한, MBN 등에 출연하는 다른 정치비평가들은 유시민이 정계 복귀를 떠밀려서 나올 것이라는 예측을 하기도 했다. 은퇴를 번복했던 일부 정치인이 그랬듯이, 자신은 별로 원하지 않더라도 지지자가 원해서 어쩔 수 없이 나올 확률이 높다고.[67] '정치인의 정치 생명은 자신이 결정할 것이 못된다.' 라는 논리다.

그리고 알릴레오 4화에서는 정태호 청와대 일자리수석이 (청와대 근무강도가 높아) “이빨이 나갈 정도니까” 러고 하자 유시민은 “난 절대 (청와대) 안 갈거야. 안 그래도 이빨 안 좋은데…”라고 하며 자신의 차기대선 불출마 의사를 분명히 밝혔다.#

그러나, 아직 대선 후보로의 꼬드김은 끝나지 않았다. 이런 대선 후보를 하라는 압력을 버텨낼 수 있을지 귀추가 주목된다.

2019년 2월, 한 강연에서 "20대 남성의 대통령 지지율 하락 원인”에 대한 질문에 대해 “자기들은 축구도 봐야 하는데 여자들은 축구도 안 보고 자기들은 롤도 해야 하는데 여자들은 롤도 안 하고 공부하지. 모든 면에서 우리가 불리해"라며 20대 남성 세대를 일반화하고 조롱하는 듯한 발언을 해서 논란이 되었다.#

10.4. 2020년

1월 1일 JTBC 신년 토론회에 참가했다. 이날 진중권 교수의 극딜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보였는데 후에 유튜브에서 진 교수가 어떻게 나올지 예상이 돼서 굳이 그 자리에서 따지고 싶지 않았다지만 길이 갈린 사람과의 작별의 시간을 갖는 본인의 방식이라고 말했다. 알라뷰 리뷰:알리뷰] 유시민이 찌는 JTBC 신년토론 후기

3월 31일 MBC 뉴스데스크가 보도한 채널A 기자 취재윤리 위반 사건의 피해자 중 하나로 연루되고 있다. 유시민 본인은 알고 있었다고 하면서도 이를 "어떤 경우건 간에 괴물의 모습"이라고 평했다.

제21대 국회의원 선거를 코앞에 둔 주말, '범진보 계열의 180석 확보 발언'으로 큰 화제가 되었다. 주말 여론조사로 위기감을 느낀 미래통합당에선 유시민의 이 발언을 문제 삼으며 정권, 여당 견제론을 펼쳤다. 하지만 총선은 '범진보 계열의 180석 확보'가 아닌 '더불어민주당과 더불어시민당 만의 180석 확보'라는 전대미문의 결과를 냈다. 유시민의 발언이 결코 실언이 아니었음을 반증하는 결과. 실제로 유시민은 KBS '정치합시다'에 출연해 여당과 진보계열의 압승을 조심스레 예측했었다. 특히나 총선 전 여러 가지 여론조사와 데이터를 분석하며 예측한 수치라는 데 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이번 총선 전 결과 예측을 했던 대부분의 평론가들이 틀린 반면, 유시민이 유일하게 결과를 거의 100% 맞추며 '유시민의 이름값'을 다시 한 번 증명하게 되었다.

하지만 위 발언으로 인해 개인적인 마음고생은 심했던 것으로 보인다. 4월 15일 KBS 개표 방송에서 정치적 발언도 하지 않는 완전한 자연인으로 돌아가겠다고 밝혔다. 유튜브 노무현재단 채널에서 진행 중인 알릴레오 또한 마무리 될 예정이다. 개표 방송이나 알릴레오에서의 발언에 따르면, 유시민/비판과 논란 문서에도 나오는 '21대 총선 "범진보 180석" 발언'을 굉장히 자책하고 이러한 논란으로 인해 자신이 책임질 수 없는 행동을 하여 여당 등에 피해를 끼칠 것을 우려해 더 이상 하지 않겠다고 말했다. 객관적인 예측은 정확했으나 그 발언으로 인해 수도권, 충청, PK 등에서 아쉽게 패배한 민주당 후보들에 대한 미안함이 큰 것으로 보인다. 본인이 직접 언급한 인물은 인천 동구·미추홀구 을에서 석패한 남영희, 충남 공주시·부여군·청양군박수현, 부산 부산진구 갑김영춘이다. 모두 아쉽게 패한 민주당 주력 후보들이었다. 그래서 낙선한 후보들도 '낙선한 건 우리가 부족해서 그런거지 유시민의 잘못이 아니다'라며 유시민을 달래주었다. 참고로 이후 22대 총선은 자신이 직접 예측치를 내지 않는 대신 민주당의 안정적 우세라고 하면서 예측치를 내는 방법을 공개했다.

정치 비평을 그만두겠다고 말한 것과 달리 도서 비평을 천명한 알릴레오 시즌 3에서 종종 정치적 발언을 하여 논란이 된다는 주장이 있다. 특히 20년 말 문재인 정부의 최대 화두였던 부동산 정책 및 검찰개혁 관련 발언이라 더 논란이 되는 중. 그러나 일부 발언 이외에 주요 언론에 정치적 비평이나 활동이 드러나지 않고 있으며 오히려 친정부 커뮤니티에서는 그의 정치 참여가 사라진 데 대해 아쉬워하는 의견도 올라오기에, 위의 논란은 그다지 부각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68]

10.5. 2021년

12월 9일 MBC 라디오 김종배의 시선집중에 출현해 정치비평 복귀를 선언했다. 12월 24일부터 대선 때까지 매주 KBS 정치합시다 시즌2에 고정출연할 예정이다. 21개월만에 공식적으로 정치 비평에 복귀했으며, 전원책과 함께한 정치합시다 첫 회차는 하루만에 조회수 100만 회를 돌파했다.

역대급 비호감 선거로 불리는 20대 대선에서, 진보 진영이나 보수 진영이나 대중에게 호감도가 높은 스피커마저 거의 없는 상황인지라 민주당 지지자와 민주당에 좀더 우호적인 중도들에게 큰 영향을 줄 수 있다는 시선이 많다.

10.6. 2022년

KBS의 시사 프로그램인 정치합시다에서 전원책 변호사와 함께 출연하고 있다. 제20대 대통령 선거 예측에 대해서 이재명에게 500원을 걸겠다는 발언을 하였다.

이어 윤석열이 당선되면 한일 위안부 합의를 되살리고, 아사히 맥주 마시고, 유니클로를 입을 것이라는 예측도 내 놓았다.# 당연하지만 아사히 맥주를 마시든 유니클로를 입든 도덕적으로 아무런 비판을 받을 이유도 없고, 이것이 한일 위안부 합의와 연결되어야할 당위성도 없다.

3월 3일 100분 토론 951회 제20대 대선 특집편에 민주당 측 패널로 출연하여 국민의힘 패널로 출연한 원희룡과 토론했다.유시민 발언 7분 모음

2022년 3월 6일, 김어준의 다스뵈이다#에서 '1번남'은 자신이 1번남이라고 말할 수 있을 텐데, '2번남'은 자기가 2번남이라고 말을 할 수 없다.'라며 이재명을 찍은 남자와 윤석열을 찍은 남자의 차이점에 대해 의견을 냈다.

2022년 3월 9일, KBS 대선 개표방송 패널로 참석했다. 자정을 넘어가 윤석열 후보의 당선이 유력시 되자 마지막 소감발표에서 이재명 후보에게 위로를 남기며 울먹이기도 했다.

2022년 4월 7일 검찰이 한동훈 사법연수원 부원장(검사장)의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기소된 유시민에게 징역 1년을 구형했다. #

11. 윤석열 정부

11.1. 2022년

6월 9일, 선고공판에서 벌금 500만원의 형이 선고되었다. 선고 이후 언론 인터뷰에서 검찰 측이 항소할 의지가 있음을 드러냈고, 본인도 항소할 뜻을 나타내었다.

11.2. 2023년

7월 6일, 한동훈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항소심 첫 재판이 진행되었다.

9월 22일, 이재명 민주당 대표의 체포동의안이 가결된 것에 대해 2030 남자 유권자들의 책임이 많다며, 에펨코리아 유저들을 향해 쓰레기라며 비난하여 에펨코리아 및 국민의힘 지지자들, 각 당의 청년정치인들에게 비난받았다.

12월 21일, 한동훈 명예훼손 혐의에 대한 항소심 선고 공판에서 벌금 500만원의 형이 확정되었다.

[1] 유시민 항소이유서 참조.[2] 서장수(徐漳洙 또는 徐璋洙, 1897. 11. 14 ~ 1963. 1. 27)의 넷째 딸이다.[3] 변희재가 몸담았던 『브레이크뉴스』가 '유시민 의원 선친이 일제하에서 교사를 지냈다'고 보도한 바 있으나 유시민 본인이 글을 올려, "선친은 해방 직후 미군정이 교사 요원 공채를 했을 때 동양사 분야에 응시해 합격해 최초로 교원 자격을 얻었고, 일제 때 교원 경력은 없는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다만 선친이 만주소학교에서 근무한 것은 유시민 본인도 인정했고 다만 그 업무가 교사인지 아닌지 모른다는 주장이다. 『브레이크뉴스』에서 제안한 '직계 가족이 신청할 수 있는 인사기록을 공개하라'라는 제안에는 취재 거절로 응수했다.[4] 19대 대선에 출마한 바른미래당유승민(대선 3년 후 국민의힘으로 당적 이동)과 2년 선후배 사이이다.[5] 평준화 이전에는 경북고등학교가 대구경북 지역의 최고 명문고였다면, 평준화 이후 1970년대 후반에서 80년대 학번에 이르기까지는 심인고등학교가 각계의 걸출한 인사를 많이 배출한 지역명문으로 꼽힌다. 유시민은 심인고등학교 출신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인사다. 국민의힘 소속의 정치인이자 청와대 정무수석비서관, 국회의원을 역임한 김재원, 국민의힘 소속의 백승주 전 국회의원, 윤두현, 김영식 국민의힘 국회의원도 심인고등학교 출신이다. 법조인 변창훈, 문재인 정부대통령비서실 경제보좌관 김현철 교수도 동문이며, 대구MBC 기자 출신으로 권영진 대구광역시장 지방선거 캠프 대변인을 거쳐 대구평생학습진흥원의 초대 원장인 장원용도 동문이다. 즉, 주요 동문들이 알게 모르게 정치계에 많은 편이다. 학교의 교기는 탁구이며 실제로 탁구부가 있는데, 출신 탁구 선수 중에서는 오상은이 잘 알려져 있다.[6] 본인뿐만 아니라, 유시민의 남매들은 모두 공부를 잘했다고 한다. 누나 유시춘은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하고 작가 활동 이외에도 교사, 시민사회운동가, 정치인이 되었고, 여동생 유시주는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국어교육과를 졸업하고 작가와 번역가, 기고가, 시민운동가로 활동했다.[7] 그뿐만 아니라 아내 한경혜씨는 1979년 예비고사 제주도 수석으로 서울대 수학교육과를 졸업했고, 딸 유수진 씨도 외대부고-서울대 사회학과를 나왔다. 중학교 때까지 축구밖에 몰라서 공부에 재능이 없다고 믿었던 아들도 고등학교 2학년인 현재 전교 1등이라고 한다. 그야말로 브레인만큼은 타고난 집안.[8] 공통수학 정석, 수학1 정석, 해법수학.[9] 유시민은 자신을 뺑뺑이 2기(…)라고 표현한다.[10] 당시에는 국민학교.[11] 썰전에서도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12] 하지만 법학 공부나 사법시험 공부를 진정으로 원했던 것은 아니고, 오히려 그다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그리고 유시민의 표현에 의하면 당시 대학에 갓 진학한 유시민은 `진짜로 하고 싶은 것도 그다지 없었지만, 하고 싶은 걸 못 해서 안달복달하지도 않은 촌놈`이었다고.[13] 당시 서울대학교는 신입생 선발 시 과별 모집이 아니라 계열별 광역모집제였고 2학년 올라갈 무렵에 학과를 정하도록 돼있었다. 사회계열 입학생들은 2학년 올라갈 때 법대, 사회대, 경영대 중에서 한 학과로 전공진입을 하는 구조였다.[14] 당시 농촌문제를 고민하는 서울법대생들의 모임으로 출발했지만 유신독재를 거쳐 서울의 주요 운동권 서클로 발전했다.[15] 이 말은 유시민이 만들어낸 말이 아니라, 독일의 역사학자 레오폴트 폰 랑케가 남긴 말이다. 이후에 유시민은 2009년에 쓴 《청춘의 독서》에서 당시 랑케의 《젊은이를 위한 세계사》를 읽고 랑케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바람에 나왔던 무지의 소치였다고 회고했다.[16] 1학년을 마치고 전공진입 결정 시기가 다가오자 처음엔 법학과 이외의 사회계열 학과들 중에서 사회학과나 신문학과에 가려고 했다고 한다, 하지만 어차피 자신은 시위를 하다가 잡혀가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게 될 운명이라고 생각하여 자신에게 학과 선택은 큰 의미가 없었다고. 또한 다른 학과를 선택하는 것보다 경제학과를 선택하게 되면 집에 설명하기 쉬웠던 것도 선택의 한 이유였다고 한다. 이에 대해 유시민은 김어준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을 했다. "경제학과는 범용학문으로 사회진출을 할 수 있는 길이 다양하고 넓고, 그래서 경제학과에 간다 그러면서 어머니, 이게 최고라니깐요, 이렇게 설명할 수 있잖아. 경제학에 흥미도 없었을 때지만."[17] 노무현은 이와는 반대로 군대를 전역한 1973년부터 사법 시험을 보기 시작해 3번째인 1975년에 사법시험을 합격했다. 본인 말대로는 고시생 시절에는 유신헌법이 만들어진 것을 보고 공부할 것이 또 늘어났거니 생각했다고.[18] 녹화의 실제 의미는 빨갱이를 녹색으로 바꾼다는 뜻이다.[19] 체포는 10월 2일로 알려져 있다.[20] 폭력행위 등 처벌에 관한 법률 위반[21] 2019년 4월 20일 방영분. KBS 유튜브 채널에는 대화의 희열을 전체를 올리지 않고 상당부분이 잘린, 편집한 영상만 올라가 있는데, 이 부분은 잘려 있어 유튜브로 볼 수는 없다.[22] 물론 방송이니 전대가리라고 하지는 않고 "전뭐뭐뭐 깨져라"라고 말했다고 고백했다. 그래봤자 전대가리는 영상에서 들리는 말이라 뻔한 것.[23] 이후 유시민은 기자 출신 방송인 주진우가 진행하는 라디오 방송 '아닌 밤중에 주진우'에 출연해서도 다시한번 개들아가 아니라 "깨져라"가 맞다고 확실하게 이야기 했다. 사실 그 이전에도 유시민이 한창 썰전에서 엄청난 인기를 끌던 2016년, 유시민을 (강연 뒷풀이 정도로 추정되는 상황인) 여러 사람들과 모인 사석에서 본 적이 있다는 오늘의 유머 회원이 유시민이 직접 "전대가리 깨져라"라고 말했던 걸 들었다고 쓴 글이 잠시 온라인상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널리 알려지지 못했으나 훗날 유시민 본인의 고백으로 모두 팩트로 밝혀졌다.[24] 정계 입문 전 유시민을 유명하게 만든 전설적인 글이다.[25] 2019년 4월 20일, 대화의 희열에서도 한번 더 언급됐다.[26] 참고로 유시민은 이해찬을 친노로 간주하지 않았고, 평화민주당과 뜻을 같이 하는 비호남 개혁파 운동권 정치인의 선두주자라고 평가했다.[27] 초, 중, 고 학창시절 때도 학기 초에 주먹다짐으로 싸웠던 사이가 오히려 그걸 계기로 무척 친해지는 경우가 많다.[28] 제주도 출신으로 서울대학교 수학교육과 80학번으로 만났다.[29] 이때 아내인 한경혜 박사는 수학사 석사와 박사를 취득했다.[30] 정운영 교수에 이어 2대 진행자였다. 후임은 손석희. 여담이지만 지금의 100분 토론 오프닝 타이틀곡은 유시민으로 진행자가 바뀌었을 때부터 계속 사용한 것이며, 손석희가 진행했을 때 한차례 바뀌었다가 손석희의 마지막 방송인 10주년 기념 방송에서 부활하여 지금까지 사용 중이다.[31] 야권 내부 갈등의 대명사로 유명한 난닝구 VS 빽바지 중 빽바지의 유래가 바로 이것이다.[32] 나중에 썰전 첫 녹화해서 고백하길 정확히는 빽바지는 아니고 베이지색 면바지였다고...[33] 이후에는 보수정당 계열 손범규(한나라당 / 18대), 진보정당 계열 심상정(통합진보당, 정의당 / 19-21대)이 당선되어 20년동안 고양 갑(구 고양 덕양 갑)에서 민주당계 정당 국회의원을 배출하지 못하다가 2024년 제22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더불어민주당 김성회 후보가 당선되면서 오랜만에 민주당 국회의원을 배출하였다.[34] 다만 공직자나 정치인이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는 것은 유시민도 당연하다고 인정한다. 가령 통합진보당 시절 당권파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자 유시민은 우리 당은 국가와 국민을 위해서 일하는 사람들인데 국기에 대한 경례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말도 안 된다고 지적했다.[35] 보건경제학은 경제학의 여러 분과 중에서도 마이너한 분과라, 국내에 이 분야 전공자나 전문가는 손에 꼽을 정도로 매우 적다. 즉 보건경제학 전공자는 그 자체로 희소성이라는 가치가 있는 것이다. 유시민이 가진 이러한 전문성도 노무현 전 대통령이 유시민을 보건복지부장관으로 기용한 이유이기도 하다.[36] 보통 어느 정도의 네임드 인물에게는 그전에 맡았던 가장 높은 직책을 붙여 불러주는 것이 관례인 만큼 현재도 유시민 前 장관이라고 꽤 불리는 편이다. 썰전에 같이 출연했던 전원책 변호사는 유 판서라고 불러준다. 조선시대와 비교하자면 판서는 장관급이라고. 이는 비아냥이 아니라 나름의 경칭이자 애칭이다. 다만 유시민 본인이 반기는 호칭은 아닌 것 같다.[37] 유시민 집안이 풍산 류씨 집안이고 서애 류성룡 후손이라서 전원책 변호사가 이를 보고 "양반 집안이시네"라고 하기도 했다.[38] 국무총리 임명은 국회 동의사항이지만, 국무위원 임명은 대통령 단독으로 할 수 있으므로 논리적으로 인사청문회가 불필요하고 현실적으로도 대통령이 인사청문회 결과를 생까면 그만이다.[39] 이때 여당인 열린우리당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대통령은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은 "마, 해줘라. 우리도 좀 불편하겠지만, 저것들이 정권 잡으면 난리가 날 끼다. 사람 빌리달라 칼지 모른데이." 노무현의 이같은 예상은 맞아떨어져 이명박과 박근혜 또한 큰 어려움을 겪었다. 노무현의 원래 말 뜻은 당시 한나라당 쪽에서 대통령이 나오면 청문회 때문에 고생할 거라는 내용이었고, 이명박과 박근혜는 실제로 인사문제로 인해 많은 비판을 받아야 했다. 이후, 인사청문회는 정부의 가장 큰 골칫거리 중 하나가 됐다. 대통령의 지지율을 추락시키기 딱 좋은 뇌관이 된 것이다. 문재인은 조국, 윤석열은 정순신 등... 그럼에도 감히 폐지시킬 수 없는 국회의 정부 견제 기능 중 하나가 됐다.[40] 한나라당 의원들보다도 오히려 열린우리당 의원들이 유시민을 더 싫어한다는 말이 있었을 정도로 우리당 의원들 사이에서 유시민에 대한 반감이 심했다. 같은 당 김영춘 의원의 “유시민은 옳은 말을 싸가지없게 한다.”라는 디스는 아직까지도 회자된다.[41] 장관 임명 시에는 국무총리의 제청이 필수인데, 이해찬 총리는 유시민 임명 제청을 하느니 총리 관두겠다고 했다고. 거기에 대고 노무현 대통령은 그럴 거면 총리 관두쇼라고 응수했다고. 이해찬 총리가 그렇게 강하게 임명을 반대했지만, 사실 유시민은 이해찬의 보좌관 출신이라는 점.[42] 또한, 유시민이 ‘친노의 황태자’라는 평을 들을만큼 대통령와 가까웠던 이유도 한몫을 했다. 보건복지부는 기재부, 법무부, 외교부 등과 달리 정치인이 임명되기 힘든 특수직, 혹은 ‘한직’으로 분류되기도 했다. 그 부처의 장관직을 맡을 정도의 전문성을 지닌 유시민이 특수 케이스. ‘실세 장관’이 등판한 보건복지부는 의욕적으로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43] 특히 당시 보수진영의 40~50대 층은 나이를 먹고난 후에 연금이나 보험을 타기 시작하면서 유시민의 평가는 "능력은 있으나 말하는 게 보기 싫다."로 변했다. 그 이전에 이놈 저놈에 비하면 굉장히 올라간 평가.[44] 후에 썰전 첫 출연 당시에도 보수 패널인 전원책에게 역대 최고의 보건복지부 장관이라는 평을 듣기도 했다.[45] 썰전에서 밝히길, 원래 대통합신당에 결사반대했으나 노무현 대통령의 충고를 듣고 합류하게 되었다고 한다.[46] 2007년 5월 자신의 총선 출마설에 대해 "볍씨를 뿌리지 않고 추수하는 격"이라고 부인하기도 했다.[47] 정보전산원 1층 강당(취업 시즌 때마다 취업설명회가 열리는 그곳)에서 강의했는데, 400명 분량의 답안지를 채점하느라 힘들었다고 술회했다.[48] 노회찬은 선거 완주해서 사표를 만드는 바람에 한명숙이 졌다고 더 욕을 먹었었고. 한편 노회찬 의원은 2014년 7.30 재보선 때 이때와 비슷한 이유로 낙선하게 된다.[49] 선거를 불과 하루 앞둔 단일화였기에 그때는 이미 투표용지가 인쇄된 후였고 투표용지에는 유시민과 심상정 두 사람의 이름이 모두 표기됐다.[50] 18만 표 정도였는데 이는 당시 경기도 전체 투표수에서 약 4%에 해당했다. 그러나 유시민 지지자들의 주장과 달리, 당시 나온 무효표가 모조리 유시민에게 간다는 비현실적인 가정을 하더라도 김문수가 살짝 앞섰기에 결과가 달라질 일은 없었다.[51] 지금도 PK에서는 손꼽히는 민주당계 강세 지역이다. 20대 총선에서 김해시 지역구는 모두 더민주 후보들이 당선됐고, 김해시장도 더민주 소속이다.[52] 민주당이 친노를 축출하면서 이에 치를 떨고 유시민을 필두로 민주당에서 빠져나간 부류가 참여계였다. 한편, 김경수는 노무현의 최후까지 같이해온 사람 중 하나였기도 했다.[53] 손석희 JTBC 보도 담당 사장이 같은 질문을 건넸을 땐 '다음 생에 하겠다'라고 하기도.[54] 이에 대해서는 밑의 문단의 정계 복귀 떡밥 참고.[55] 여담으로 저 당시 두 사람이 하던 대화는 이거[56] 선거 과정에서 정의당 참여계 당원들이 문재인을 위해 선거운동을 한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다. 실제로 문재인 캠프 직속 바람개비봉사단 등에는 정의당원들이 대거 활동하기도 했다. 과격파들이 정의당을 좌지우지하는 모습에 싫증 난 이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한 경우도 있으나, 이와 별개로 유시민이 참여계를 막후에서 움직여 문재인 캠프로 가도록 이끌었다는 증언도 있다. 사실상 문재인을 막후에서 지원했다는 썰.[57] 마지막 화였다. 사실 그 전에도 전화로 짤막하게 등장했었다.[58] 글 말미를 보면 "자랑은 아닙니다만, 저는 대통령도 알고 국무총리도 압니다. 대통령과 국무총리의 참모들도 많이 압니다. 그러나 잠깐 동안이었지만 중앙정부의 행정을 해본 경험에 비추어 생각해 보니, 그보다는 공개 청원이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라는 글도 있다![59] 썰전에서 mc김구라가 청와대청원에 청원을 한다면 어떤걸? 이라 질문하여 답변한바가 있었고 그이후 집에가 작성했다고한다.[60] 장수군수 장영수와는 동명이인[61] 말하는게 재밌는게, 출구조사 결과가 나오자 "이제 당원 아닙니다"라고 말했다. 출처의 트윗대로라면 탈당한지 제법 되었음에도 정의당 선거에 줄 영향을 생각해서 함구한 것으로 보인다[62] 알릴레오 티저 영상 공개 전에는 구독자수가 9,000명대 수준이었지만 공개 후에는 하루에 50,000~180,000명씩 증가하는 추세였다.파일:노무현재단 유튜브 구독자 추이.jpg[63] 이에 홍준표는 자신의 페이스북에 글을 올려서 "북한 조선중앙TV 같은 좌파 유튜버는 한 달 내로 소재가 고갈될 것이다. 국정홍보방송이 원래 그렇다. 그리고는 TV홍카콜라 비난 방송만 하게 될 것이다."라고 비난하고, 해당 채널 구독자 수 증가에 대해서도 "원래 좌파들은 잘 뭉치니까 단숨에 올라가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라며 "국정홍보 방송이라는 것은 원래 재미가 없어서 소재도 곧 고갈될 것이고 접속시간이나 접속자 수도 점점 떨어질 수밖에 없지만 우리는 앞으로 소재가 무궁무진하니 쉽고 재미있을 것", "TV 홍카콜라 혼자만으로도 청와대, 민주당, 친북좌파 다 이길 수 있다, 1대 100의 싸움도 이길 수 있다는 것을 한 번 보여드리겠다"고 호언했다.#[64] 이에 이해찬 대표는 유시민의 알릴레오를 마주하고 있는 더불어민주당 팟캐스트 '씀'을 '헬리콥터 앞 선풍기 바람'이라 표현하였다(...)[65] 유시민 자신의 말을 빌리면 세상에서 말하는 대권으로의 길과 그 길을 걷기 위한 과정, 어떤 사람을 만나고 어떤 관계를 맺고 보다 많은 사람들로부터 호감을 얻기 위해 자신뿐 아니라 자신의 가족들까지 을의 위치로 가야만 하는 상황이 싫다고... 그리고 노무현 전 대통령 서거 3주 전에 봉하마을을 찾았을 때 노 전 대통령과의 일화를 소개했는데, 노 전 대통령은 유시민에게 "자네는 앞으로 정치하지 말고 글을 써보라"고 권하면서 "대통령이란 자리는 사회 진보를 이루는데 적합한 자리가 아닌 것 같다. 보통 사람들의 평범한 일상의 행복을 누리도록 해 주는 것이 정치인데 그 일을 하기 위해서 내 행복은 어떻게 했는지 모르겠다. 희생해야 하는 것이 너무 많다. 세상을 더욱 나은 곳으로 만들어나가는 것이 정치를 통해서만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정치는 정치밖에 할 수 없는 사람한테 맡기면 되고, 자네는 정치 말고 다른 것도 할 줄 알지 않나"라고 했다고 한다. 여담으로 유시민의 대선 불출마 선언을 가지고 조사업체에 항의를 하는 사람들도 간간히 있으나, 조사업체는 의뢰업체에서 조사를 부탁했단 이유로 계속해서 유시민을 대선후보로 집어넣고 있는 상황이다.[66] 더불어민주당 이철희 의원도 썰전에 출연해 "야권에 있을 때가 자기 하고 싶은 말 막 하기 더 편한 줄을 본인이 훤히 아는데 뭐하러 지금 시점에서 여권 수비라는 쉽지 않은 일을 하려고 들겠나. 유시민이 정계 복귀나 대권을 노렸다면 이런 방송 시작을 아예 하지도 않았을 것"이라며 유시민의 정계복귀설을 일축했다. 한편으로 “직관적으로 쉽게 와 닿는 TV홍카콜라와 지적인 냄새를 풍기는 알릴레오, 두 채널을 비교하며 보는 것도 재미있을 것”이라 촌평하기도 했다.#[67] 해당 방송에서는 대표적인 예시로 김대중, 손학규가 제시되었다. 다만 정말 이들이 원치 않았는지는 시청자가 판단할 문제.[68] 실제로 모든 진보 인사들을 비롯해 진보를 지지하는 사람들은 유시민의 복귀를 절실하게 바라고 있다. 예전에는 외골수에 강골 이미지가 강해 안티가 많은 정치인이었으나 정계 은퇴 이후 방송에서의 긍정적인 이미지, 다소 온건해진 발언과 행동이 호평을 얻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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