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일전쟁 淸日戰爭 First Sino-Japanese War | ||
청일전쟁의 전개도 | ||
<colbgcolor=#fecd21,#000080><colcolor=#00386a,#fefd48> 시기 | 1894년 (덕종 20년) 7월 25일 ~ 1895년 (덕종 21년) 4월 17일 | |
장소 | 조선, 청나라 요동, 산둥, 펑후 제도 | |
교전국 | <rowcolor=black> [[틀:깃발| (공세) 승 | ]][[틀:깃발| ]][[일본 제국| ]] [[청나라| ]][[틀:국기| ]][[틀:국기| ]] (수세) 패 |
주요 인물 | 지휘관 메이지 천황 이토 히로부미 아리스가와노미야 다루히토 고다마 겐타로 야마가타 아리토모 노즈 미치쓰라 오야마 이와오 가쓰라 다로 오시마 요시마사 이토 스케유키 가바야마 스케노리 도고 헤이하치로 | 지휘관 덕종 (청 황제) 서태후 이홍장 유곤일 송경 좌보귀 † 원세개 오대징 엽지초 정여창 † 등세창 † 유보섬 존 매클루어 |
병력 | 일본군: 240,000명 | 청나라군: 630,000명 |
피해 | 사상자: 17,069명 - 전사자: 1,417명 - 부상자: 3,758명 - 병사자: 11,894명 | 사상자: 35,000명 |
결과 | 일본 제국의 승리 - 일본 제국의 타이완 섬 및 펑후 제도, 요동 반도 확보 - 러일전쟁 및 청나라의 멸망 가속화 | |
영향 | 청나라의 변법자강운동 실시 - 조공관계 폐지 및 조선의 명목상 완전무결한 자주독립 - 조선 조정 내 친일 내각의 수립 |
언어별 명칭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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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 청일전쟁 | |
중국어 | [ruby(甲午, ruby=jiǎwǔ)][ruby(战争, ruby=zhànzhēng)] / [ruby(甲午, ruby=ㄐㄧㄚˇ ㄨˇ)][ruby(戰爭, ruby=ㄓㄢˋ ㄓㄥ)] | |
일본어 | [ruby(日清, ruby=にっしん)][ruby(戦争, ruby=せんそう)] ([ruby(日淸, ruby=にっしん)][ruby(戰爭, ruby=せんそう)][구자체])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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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일본군 보병의 일제 사격 |
일본이 승리하면서 청나라의 '상방지권(上邦之權)'을 파기하고 패권을 탈각시켰으며, 위압적으로 조선에 친일 내각을 수립시켰다. 이후 영국-이집트의 전례 등을 참조해, 갑오개혁 등으로 조선을 보호국화하고자 하였으나 삼국간섭으로 러시아가 개입하며 좌절되었다. 일본과 러시아가 대립하는 영향으로 조선에서는 수 차례 내각이 바뀌고 뒤이어 을미사변, 아관파천이 일어났다.
청일전쟁을 전후로 일본에서는 본격적으로 민족주의가 힘을 얻어 군국주의, 제국주의적 여론이 확산되었다. 승전 후 청나라로부터 막대한 배상금과 요동반도 등을 할양받았고 이후 근대화를 더욱 추진하여 러일전쟁에서 승리하는 기반이 되었다. 청조는 청불전쟁과 더불어 베트남과 조선에서의 실패를 반면 교사로 삼고자 했는데, 대외적으로는 티베트 및 몽골 속지의 종주권-주권 문제의 사례로써 활용했으며, 대내적으로는 청 조정이 변법자강운동을 주도하였다.
명칭도 청일전쟁이고, 실제 전쟁의 주체도 청과 일본이지만, 실제 청일전쟁의 전투들은 대부분 한반도에서 일어났다.
2. 발단
당시 청나라는 아편전쟁 등 서양 열강에 패전을 거듭하여 영토를 상실하였고, 청의 조공국이었던 베트남은 프랑스, 미얀마는 영국, 류큐는 일본의 식민지가 되어 주변국에 위력을 행사하지 못하게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재기를 위해 양무운동을 통해 힘을 모아 동아시아 패권국의 위치를 되찾기 위해 기존의 주변국, 조선에 대한 내정간섭과 상업 등 영향력을 강화하고 있었다.
일본은 메이지 유신 이후로 급격한 발전이 이루어졌고, 조선 침공에 회의적이던 인물도 대부분 그 의견을 접게 되면서 식민지 확장에 대한 야욕을 본격적으로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런 일본에게 제일 중요한 땅은 조선과 대만이었다. 조선을 얻게 되면 그 육로를 통해 러시아, 청나라를 넘어 유럽으로까지 길이 닿게 되고, 타이완 섬을 얻게 되면 그 곳을 통해 마찬가지로 유럽까지 이어질 해로를 개통할 기회를 노렸다.
이와 같은 상황에서 제정 러시아가 1891년 모스크바와 블라디보스토크를 잇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착수하고,# 영국 또한 캐나다 횡단 철도 건설에 착수하자 일본에서 동아시아에서의 이권 나아가 자신들의 자주권을 잃을 수 있다는 인식이 확산되었다. 이에 일본은 서구 열강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는 선에서 조선을 비롯한 동아시아권에 대한 이권을 유지 나아가 확대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 당시 조선에 대한 영향력은 1882년의 임오군란과 1884년의 갑신정변을 통해 갑신정변 이후 약 10년 정도 청나라가 크게 힘을 떨치고 있던 상황이었으며, 일본의 영향력은 상당히 감소된 상황이었다. 조선을 침공하기에는 이렇다할 명분도 없던 상황에서 일본에게는 운 좋게도 1894년 동학 농민 운동이 벌어진다. 농민 운동의 기세가 거세져 조선의 자체적인 군대로는 막지 못하게 되자 조선은 청나라에게 지원을 요청했고, 청나라는 아산만을 통해 2,800명의 병사를 파병하고# 톈진 조약에 따라 일본에게 파병 사실을 알렸으나 이미 일본은 청의 파병 통보 전부터 파병을 결정한 상태였으며, 일본인 거류민과 공사관을 보호하기 위해 일정 병력을 주둔시킬 수 있다는 제물포 조약을 빌미로 6월 9일부터 7월 10일 사이에 혼성 9여단 8,000여 명의 병력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4]
정작 양국의 파병 명분으로 쓰였던 동학농민군은 외국 군대가 상륙하자 그로 인한 궐기 목적의 변질을 두려워해 1894년 6월 11일(음력 5월 8일)에 전주 화약을 맺고 해산하였다.
3.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자세한 내용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문서 참고하십시오.6월 8일에는 청군의 아산 상륙, 다음날인 6월 9일에는 일본군 혼성 제9여단 선발대 450여명을 시작으로[5], 6월 13일과 6월 17일 혼성 제9여단 후발대 수천 등 7월 10일까지 8,000여명이 인천 제물포에 상륙했다. 이들은 6월 23일 한양으로 진격하여 용산에 본영을 두고 서울 시내를 진군하였다.[6]
이 소식을 들은 동학군과 조선정부군은 6월 11일(음력 5월 8일)에 화약을 맺고 조선 조정은 청나라와 일본에게 "반란군이 정부와 화약을 맺고 해산하였으니 청, 일 양 군은 본국으로 돌아가라"라고 요청했으나 양 군은 이에 응하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은 조선에 이른바 개혁을 요구하는 등 점점 내정 간섭을 하기 시작하더니 급기야 7월 23일 경복궁을 공격했다.[7]
당시 조선군 경군(京軍) 중 상당수가 동학농민전쟁 진압을 위해 한양을 비웠던지라 경복궁을 경비하던 병력은 장위영(壯衛營)과 통위영(統衛營) 병력 일부, 평양기영(平壤箕營)[8] 병력 일부에 불과하였다. 한편 인근 북한산성에는 경리청(經理廳)이 주둔하고 있었으나, 경복궁까지 거리가 있는터라 일본군이 고종을 사로잡을 즈음에서야 경복궁 주변 지역에 전개된 상태였다.[9] 서울에 주둔한 오시마 혼성 여단의 병력은 절반인 4천 명이었고, 이 중 1,000여 명이 경복궁 전투에 동원되었다.
7월 23일 0시 30분 용산에서 밤을 새우며 대기하던 일본군 제5사단 혼성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에게 "계획대로 실행하라"는 오오토리 케이스케 공사의 전보가 도착하면서 경복궁을 공격한다. 새벽 04시경 경복궁을 포위한 일본군은 영추문을 통해 궐내로 진입하려 하였으나[10], 일본군 공병대가 영추문 폭파에 실패하고 돌파가 지연되면서 영추문을 경비하던 평양 기영병(箕營兵)과 일본군 간 교전이 발생하였다.
일본군이 확보하고 있던 첩보에 의하면 한양의 조선군은 대부분 동학농민운동 진압을 위해 내려가 있어 경복궁을 지키는 병력은 얼마되지 않을 것으로 예상했으나 실제로는 장위영 및 평양에서 온 기영병 군사들이 궁내에서 일부 야영하고 있었고 상당수가 서울 각지에 주둔해 있었다.
같은 시간 반대편인 건춘문에서도 전투가 벌어졌다. 또한 장위영(壯衛營)이 지키는 광화문 일대에서도 일본군과 장위영(壯衛營) 군사들 간에 치열한 교전이 벌어졌다. 새벽 5시가 되자 영추문 인근 평양 기영병(箕營兵)이 제압당하고 일본군이 영추문을 폭파시키면서 궐내로 일본군이 진입하기 시작하였다. 광화문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병사들 역시 일본군에게 돌파당하고 만다. 이 때 첩자를 투입해 조선군을 속이는 등 공작을 통해 진입한 일본군 병력이 경복궁 안에서 함성을 지르면서 조선군이 겁을 먹어 스스로 붕괴되었다고 잘못 알려지기도 했으나, 실제 조선군은 경복궁 안팎에서 아침까지 만만찮게 저항했다.[11] 허나,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가 지휘하는 2대대 병력 일부가 고종의 신병을 확보하였다. 일본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大鳥圭介)와 함께 입궁한 2대대장 야마구치 케이조 소좌는 칼을 빼들고 고종을 위협하였으나 듣지 않았다.
고종이 붙잡히고도 전투가 끊이지를 않고 오히려 외곽에 있던 경리청과 기영병 군사들은 야포까지 끌고와 궁궐을 포위하려고 했다. 이에 김가진과 안경수가 고종의 가짜 명령서를 만들고 홍계훈을 협박해서 조선군을 무장해제시킨다. ‘일청전사 초안’은 그때 조선군의 발포가 “오후 2시에 이르러서도 그치지 않아 국왕이 사자(使者)를 보내 조선군의 사격을 저지시키자 비로소 총성이 완전히 끊어졌다”고 격렬했던 조선군의 저항을 기록하고 있다.#
'무기를 버리라.'는 김가진의 가짜 왕명이 전달되자 이들은 분을 이기지 못하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일부 병사들은 스스로 자신의 소총을 파괴하고 군복을 찢을 정도였다. 평양 기영병(箕營兵)들은 일본의 압박에 평양부로 돌아갔고, 한양에 있던 장위영(壯衛營), 통위영(統衛營), 경리청(經理廳) 병력은 모두 무장해제 당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군은 소총 3천 정과 야포 20문, 개틀링 기관총 8정을 압수했다.[12]
경복궁을 점령한 일본군은 효창원 일대(효창공원)를 숙영지로 삼아 기지를 두고, 만리창에 임시사령부를 둔 뒤 김홍집을 중심으로 한 친일 내각을 구성하고, 청나라로부터의 독립 선언을 하라는 등 개혁을 하라고 요구하였다.[13] 그리고 8월 26일 김홍집 내각을 통하여 서양의 내정 간섭 및 청나라의 무력 개입을 막는다는 명분과 동시에 조선은 일본에 협력한다는 조일 양국 맹약을 맺게 된다. 이는 조선 내 일본군의 활동이 매우 자유로울 수 있었던 기반으로 작용한다. 또한 일본은 자신들의 수중에 있는 고종에게 청과 맺은 모든 조약을 파기하게 하는 한편 자주국 선언을 강요했다. 그리고 더 나아가 고종의 이름을 빌려 조선에 주둔하고 있는 청군은 모두 떠날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는데 이로써 청군과 일본군 사이에는 전운이 감돌았다. 그러던 중에 일본군이 풍도 앞바다의 청나라 함대를 기습 공격하며 본격적인 전쟁으로 이어졌다.
한편 1894년 일본의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와 주청, 주한 전권 공사 오오토리 케이스케, 외무성 참사관 혼노 이치로는 청과의 개전을 위해 강경한 태도로 일관했으며 동시에 병력을 증원하였다. 이에 청나라도 위여귀가 이끄는 성군 6,000명을 평양부에 마옥곤의 의군 2,000명을 의주부에 각각 진출시켰다. 이홍장은 러 - 청 비밀 조약에 의거해 러시아에게 일본군 철병 권유를 부탁하였고 러시아는 2회에 걸쳐 철병을 권고하였으나 적극적으로 개입하려고는 하지 않았다. 영국은 청나라의 부탁을 받기는 했으나 일본과 비밀 조약을 맺고 전쟁이 양쯔강 유역까지 확대되지 않는 것을 약속받았다.[14]
4. 과정
4.1. 조선에서의 전투
4.1.1. 풍도 해전, 성환 전투
풍도 해전 |
성환 전투 |
4.1.2. 평양성 전투
청일전쟁 당시 평양부의 모습[15] |
일본군에 의하여 점령된 평양객사의 모습. | 노즈 미치쓰라 중장과 일본군에게 점령당한 평안감영과 선화당 |
9월 15일 새벽 일본군 17,000명은 평양부의 중심지역인 평양성에 주둔한 청군 14,000명을 공격했다. 3방향에서 평양성을 공격했고 북부와 남동쪽 지역을 돌파해 모란봉을 점령했으며, 후면에서 예기치 않은 공격으로 청군은 당황하였다.
이홍장은 자신의 기반인 군사력을 잃을까봐 군대에 불리하다 싶으면 바로 퇴각하라는 명령을 사전에 내려놓은 상태였다. 그리고 일본군을 맞아 싸우던 청의 장수 좌보귀가 패사하자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하던 섭지초는 일본군에 항복 제의를 하면서 도주하는 상황에까지 이른다. 일본군도 상황이 썩 좋지는 못해 잠시 퇴각해 전열을 정비하려고 했으나 소극적인 청군의 태도에 끝까지 밀어붙였고, 24시간의 일방적인 교전 끝에 청군은 을밀대에서 항복하고 일본군이 평양성에 입성한다. 일본군의 사상자는 180여 명에 불과했지만 청군은 2,000여 명이 전사하고 4,000여 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나머지 2,000명은 압록강변으로 퇴각하였다. 청군 포로들은 일본군에 의해 참수형을 당하는 등 가혹한 처분이 이어졌다.
일본이 급하게 들이친 것에 비해 청군은 생각 이상으로 방비를 충실히 해놓았고, 그 결과 초반에 일본은 지휘관도 부상당하는 등 큰 피해를 보고 탄약과 식량도 바닥날 지경에 이른다. 그러나 청군은 지휘 체계의 혼란 속에서 끝까지 우위를 지켜내지 못했고, 무엇보다 이홍장 라인으로서 전투에 소극적이었던 섭지초가 북쪽 방면에서의 일본군의 침투를 보고 너무나도 쉽게 백기를 내걺으로써 급속하게 붕괴된다. 2,000여 명에 이르는 청군 희생자는 대부분 이러한 혼란 속에서 발생하였다. 청군은 평양성에서 나름대로 처절하게 저항해 전투 말기까지는 전투력을 그런데로 유지했으나 전투 말기 지휘 체계가 붕괴되면서 대혼란이 닥쳐버렸다. 아무렇게나 내빼는 식의 패주 과정에서 그동안의 평양성 전투에서 청군이 잃은 병력의 몇배가 희생당했다.
청군이 평양성 전투에 배치한 포병들은 장비는 크루프사 야포로 준수하게 갖추고 있었지만 숙련도와 교리 이해도가 떨어지는 병력들이라 곡사 포격은 시도도 하지 못하고 직사 사격만 고수하는 등 인적 자원의 문제가 심각했다. 따라서 청군 포병대의 열세가 심했는데,마구잡이식 포격이 아니라 제대로 된 수학과 탄도학을 익힌 정예 포병들이 유럽 고문과 함께 조선으로 출병하다 죄다 황해에 수장되어버렸던 탓에 전투 끝까지 개선되지 못했다. 방어전이라는 특성상 청군 소총수들과 개틀링 포대는 끈질기게 싸운 편이었다.
서울 인천과 경기 충청 강원도, 평안도, 황해도 등 조선 전역에서 양군의 민간인 징발과 약탈로 피해를 입었고 특히 평양부 주민들은 청나라군과 일본군 양측으로부터 엄청난 피해를 입었다. 이후 평안도 경제가 파탄나고 세입이 전혀 되지 않아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하는 원인이 되었다.
4.1.3. 황해 해전
9월 17일 황해(압록강 근해)에서 청, 일 양국의 해군이 다시 전투를 벌였다. 청은 정여창의 기함 정원을 선두로 군함 11척이 출전하였고, 일본은 이토의 기함 마츠시마를 선두로 군함 10척이 맞섰다.[16] 양측의 군함 숫자는 비슷했으나 일본 연합 함대가 전체적으로 3천 톤 이상의 견실한 순양함들인 반면, 청국은 전함인 정원과 진원을 제외하면 2,000톤 내외의 작은 순양함들이었다.다만, 일본 제국 측은 기함 마츠시마마저 4천 톤대 순양함급이었던 반면에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이었던 정원과 진원은 7천 톤이 넘었기 때문에 개함 전투 능력은 청나라가 좀 더 유리했다. 하지만 6시간에 걸친 전투 끝에 청나라의 북양함대는 일본 연합 함대에 의해 패퇴하였다. 청나라 함대는 5척이 침몰하였고 3척은 1개월 이상 취역할 수 없을 만큼 파손되었다. 다만, 제일 중요한 정원과 진원은 정원이 파손된 것을 제외하면 무사했다. 이때 정원의 포술장으로 탑승하고 있던 리위안훙이 물에 빠져 죽을 뻔했다. 반면에 일본 연합 함대는 4척이 손상을 입는데 그쳤다. 이는 오합지졸에 가까웠던 청군의 훈련 상태도 한몫하였고, 청군의 중소 구경 속사포 부족도 커다란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지휘관부터 아편 중독자에 청나라 순양함 '제원'은 전투가 시작되자마자 적전 도주하였고 무장에서도 청군은 대구경 주포에서는 앞서 있었지만 중소 구경 속사포에서는 일방적인 열세였다. 그 결과, 초전부터 일본군의 명중률 높은 속사포 사격에 제대로 난타당하였다. 전쟁 발발 3개월 전 영국은 청나라에게 순양함 2척을 사라고 권유하였으나, 청나라는 그 돈을 서태후의 생일 축하 비용으로 써야 한다는 이유로 거부하였다.[17] 이 2척은 일본이 구입하였고 그 중 1척이 요시노. 그래서 정여창은 전투 후 이홍장을 직접 찾아가 병력 증원을 요청하였으나, 이홍장은 거부하면서 단지 위해만 수비하라고 지시했다.
평양성 전투와 마찬가지로 청군이 졸전한 전투는 아니었다. 일본군이 전황을 주도한 것은 분명하나, 청군 또한 의도대로 일본군 단종진 일부를 끊어내는 데 성공하는 등 일방적으로 끌려다닌 것은 아니었고, 상술했듯 중소구경 속사포 전력 열세 상황에서도 적잖은 전과를 올렸다. 전투 초반 청군 기함의 마스트가 피격되어 깃발 신호 지휘가 힘들어진 부분도 일본군의 상당한 행운이었다. 일본군 입장에서도 4척 손상이 경미한 것만은 아니었고[18] 피로 및 피해로 인해 즉각적인 추격은 포기했다. 또한 군령부 총장이 여객선을 타고 연합함대를 따라다니다 청군에게 고립당해 나포 내지 격침당할 뻔 하는 등[19] 나사빠진 모습을 보여주기도 했다. 청군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이탈리아 왕국 사이의 해전을 전훈으로 삼은 독일인 고문의 조언대로 충각 공격도 시도했으나 성공하지 못했다.
그러나 청군의 패배는 패배였고 일본군은 마침내 황해 전투를 승리했다. 평양성 전투와 함께 이 전투는 대첩이 되었다. 이후 북양함대가 위해위에 틀어박히면서 일본은 전략적으로 승리를 거두었으며 이어지는 위해위 전투에서 북양함대를 궤멸시키는 데에 성공하면서 황해 해전은 일본군의 대승이 되었다. 사실 청군의 주력함들은 심각한 피해에도 불구하고 대부분 생존해 모항으로 퇴각했고 이후 현존함대 역할 수행과 함포를 통한 지상 방어전 지원을 시도하는 등 황해 해전 이후에도 존재감을 드러냈으나 종전 이후 대부분 나포되어 배상함으로 끌려갔다.
이렇게 청군은 일본군에게 패전을 거듭했다. 청군은 전쟁을 이홍장의 회군에 전적으로 일임했다는 점이다. 특히 이홍장은 자신의 지지 기반을 잃을까 우려하여 전쟁에 소극적이었다. 육군은 지킬 수 있으면 지키고 그러지 못할 것 같으면 무조건 퇴각, 해군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배를 잃지 말아야 하며 대양에서는 싸우지 말라고 지시하였다. 청 내부에서 보수파에게 끊임없이 공격당하던 양무파 기반이라는 정치적인 이유도 컸고 이홍장 본인이 서양 현존함대 전략을 모방한 나름의 전략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가장 큰 해상전 패배였던 황해 해전에서도 청 해군이 분전했으나 전투 내내 지나치게 소극적인 태도로 주도권을 찾을 기회를 여럿 잃었고, 이 전투를 패한 것이 결정타였다. 청군은 이홍장 휘하 지휘관이 소극적으로 전투를 벌이다 퇴각하기 일쑤였고, 청나라 말기에 들어서면서 부패가 심화해 장교와 병사 훈련도도, 사기도 낮아져 일본군이 거침없이 진격할 수 있었다. 일본은 먼저 발해해 방향으로 돌파하기 위해 웨이하이와 뤼순을 공격, 점령하기로 결정한다.
4.2. 청에서의 전투
4.2.1. 요동 전투
야마가타 아리토모의 제1군은 의주, 신의주를 거쳐 압록강을 넘어 단둥으로 진격해 요동 반도에 교두보를 구축했고, 이는 임진왜란 당시 가토 기요마사의 일본군이 두만강을 건너 여진족 노토 부락을 친 이래 두 번째 일본의 대륙 침공이었다. 오야마 이와오의 제2군은 화위안커우에 상륙하여 진저우, 다롄을 공격했고, 다시 여순(뤼순)을 점령했다. 뒤이어 개평과 잉커우까지 일본군이 점령하면서 요동 반도는 완전히 제압당했다.다롄과 뤼순에서 청군의 활동은 졸전에 가까웠다. 청은 보하이만 통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두 항구를 오랜 시간에 걸쳐 근대적으로 요새화했지만, 청군 지휘관들은 북양함대가 웨이하이에 틀어박혀 해상 보급을 해주지 않는 상황에서 쉽게 두 요새를 내주고 퇴각했다. 그나마 뤼순에선 후퇴하지 못한 병력 1만이 항전했으나 하루만에 함락되었다. 이때 일본군은 청군에게 포로로 잡힌 일본군들이 처형되고 시신까지 처참하게 훼손된 것을 발견하고[20] 이에 격앙된 일본군은 뤼순에서 대규모 학살을 자행했다. 이때 일본군이 벌인 학살로 뤼순에선 군인과 시민 20,000여 명이 죽고 단지 40명만이 살아남았다고 영국의 타임즈지가 보도했다.[21]
일본군은 순탄하게 요동 반도 전체를 접수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다롄·뤼순 및 압록강 근처의 안둥·펑청을 장악한 후부터는 요동 내륙에서의 살인적인 추위와 수만명에 달하는 청군의 방어로 상당히 피해를 입었다.[22] 예로, 파병된 일본군은 '짚신' 을 신고 있었는데 요동의 추위에서 동상자가 대량 발생했다 한다.(일본의 산업화는 아직 미비했고, 제대로 된 가죽 군화를 신겨주는 건 러일전쟁기에나 가능했다)전략적 이득도 걸려있지 않던 요동 내륙으로의 무리한 겨울철 진군을 주도한 야마가타 아리토모는 폐렴을 명목으로 1군 사령관 직을 사임하고 귀국해야 했다. 전쟁 내내 고전하던 청 지상군이 청 본토에서 저지선을 확보하는데 처음으로 유의미하게 성공했던지라 청군으로서는 유일하게 체면치례를 한 전선인 셈.
4.2.2. 웨이하이 전투: 북양 함대의 궤멸
1895년 1월 19일 일본군은 웨이하이 공격에 나선다. 청국의 북양함대는 청 육군과 호응하여 해상에서 육지의 일본군에 포격하였으나 일본군 육군은 열흘에 걸쳐 청 육군을 쉽게 몰아내고 해안 포대를 점령했다. 일본군 해군이 만의 입구를 봉쇄하자 청 해군은 항구 안에 갇혔다. 청 해군의 대응은 포위 상황임을 감안하면 졸전은 아니었으나, 그다지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주지도 못했고, 결국 일본군에게 궤멸당했다. 정여창은 휘하 외국인 장병들이 항복을 촉구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이를 해산시키고 음독 자살했다. 정여창 휘하의 장교인 유보섬, 황응양도 이때 자결했다. 일본군은 청국 함대 12척을 나포했는데, 이 중 1척인 연습선 강제호(康済号)를 이토 스케유키 제독의 주선으로 정여창의 군인 정신에 대한 예를 표하며 그의 유체를 수송하는 데 사용하도록 돌려주었다.5. 정전 협정
청나라는 상군을 투입하였으나 전세는 기울어 상군도 패했고 결국 주화파 공친왕 혁흔이 총리가 되면서 화친 쪽으로 기울게 되었다. 결국 미국의 중재로 일본과 화친을 맺기 위해 호부 시랑 장음환과 호남 순무 소우렴을 히로시마에 파견한다. 그러나 장음환은 청나라의 전권 대사가 아니었기 때문에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 무츠 무네미츠는 거부하였고 혁흔이나 이홍장이 직접 와야 한다고 요구하였다. 이 동안에 일본은 대만과 팽호 열도까지 점령하며 청나라의 목을 더욱 조여들었고 더 나아가 수도 베이징을 위협했다.마침내 3월 30일 일본의 시모노세키에서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 사이에서 정전 회담이 벌어졌다. 이때 일본은 아래의 사항을 요구하였다. |
- 타구(大沽), 톈진, 산해관의 성지와 보루는 모두 일본군이 점령하고 청군의 군수품 일체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톈진, 산해관간의 철도는 일본군이 관리한다.
- 정전 기간 내의 일본 군비는 청국 측이 부담한다.
- 정전 일시 및 양군의 경계선 등 세부 사항은 중국이 전기 3항에 동의했을 때 다시 논의한다.
얼핏 살펴만 봐도 막대한 전비 배상은 물론이거니와 청나라의 수도 코앞에 진지를 구축하겠다는 심산까지 나타났으므로 이홍장은 얼굴빛이 창백해지며 "가혹! 가혹!"이라는 말을 연발하였다. 몇 차례 회담이 벌어지던 중 이홍장이 고야마 도요타로(小山豊太郎, 1869 ~1947)라는 일본인에게 저격당해 중상을 입는 사건이 벌어진다.[23] 이에 일본은 이홍장에게 사죄하며 무조건 정전하겠다며 태도를 바꾼다. 이홍장은 참의 이경방을 대리로 내세워 회담을 이어갔고 1895년 3월 30일에 먼저 6개 조항의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후 휴전 기간 동안 강화 협상을 진행하여 4월 17일 전문(全文) 11개 조항의 강화 조약, 각 3조항의 의정서(議政書) 및 별약(別約), 2조항의 추가 휴전 협정을 체결하였다. 이 협정이 바로 시모노세키 조약이었다.
이 조약으로 청나라는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하던 입장을 포기하고 조선을 자주국으로 인정했다. 또한 요동 반도, 대만과 그 부속 도서, 펑후 제도를 할양하였고 고평은 2억 냥을 7년 이내에 배상하기로 했다. 이를 당시 일본 화폐로 환산하면 3억 6천만 엔으로 일본 정부 4년치 세입이다. 또한 일본은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되었다.
그러자 러시아 재무장관 세르게이 비테는 일본이 요동 반도를 점령하는 것은 러시아의 이익에 해를 끼치며 극동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라고 주장하며 프랑스, 독일 제국과 연합하여 일본에 삼국간섭을 벌이며 압력을 가했다. 당황한 일본은 영국이나 미국에게 도움을 요청하였으나 반응이 없자 결국 압력에 굴복하고 만다. 그래도 요동 반도를 돌려주는 대가로 청나라로부터 해남도 할양을 요구하려다 너무 멀어서 대신 은 3천만 냥을 추가로 뜯어냈다. 그리고 러시아, 프랑스, 독일은 요동 반도 반환에 대한 대가로 각종 이권을 차지하였다.
6. 결과
일본에서 그려진 승전 기념화.
6.1. 청과 일본에 미친 영향
영국의 주간 잡지 '펀치'에 실린 청일전쟁 풍자화.[24] |
청은 이 전쟁에서의 패배로 양무운동에 대한 회의론이 늘어나기 시작했고 단지 서구의 기술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 일본의 유신처럼 체제 자체를 뒤엎자는 변법자강운동이 벌어지는 계기가 된다. 이러한 변법자강운동의 경험이 나중에 신해혁명으로 어느 정도 결실을 얻으니, 사실상 청을 멸망으로 몰고 간 한 가지 원인이 되었다.
아편전쟁 등 서양 세력과의 전쟁에서 계속 패배하던 것에 재수없게 지나가던 미친 개에게 물린 일 정도로 여기던 중국인들에게 청일전쟁은 큰 충격이었다. 자기네 문화권에서 별 볼일 없었던 변방의 섬나라, 한낱 오랑캐로 생각했던 야마토 민족에게 어처구니없이 털리고 앞마당 조선에서 영향력을 상실하자, 비로소 중국이 천하의 중심에서 물러났다는 사실을 깨달으며 엄청난 충격을 느꼈다.[25]
중국인들은 서양한테 지고있는 상황에서도 이를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정신승리했었다. 수도까지 점령 당하고 궁전이 불탔는데 이 무슨 정신승리냐 하겠지만 사실 중국 역사에 보면 타국에게 힘의 우위에 있지 못할 경우 그들이 원하는 것을 들어주면서 시간을 버는 대신, 중국이 가진 막대한 인구와 농업 생산력, 문화력이라는 사기적인 역량을 발휘해 장기적으로 재탈환하는 경향이 있다. 초기 한나라나 송나라는 주변국에게 세폐를 바치더라도 이것을 크게 자존심 상해한다기 보다는[26] 하나의 전략으로 생각하고 꺼릴 게 없어하는 경향이 있다. 실제로 중국은 유목 민족들과의 전쟁에서 때로는 나라가 통째로 점령당했지만 결국에는 압도적인 인구수를 바탕으로 소수 지배계층인 유목 민족들을 동화시켜나갔다. 그러나 르네상스를 거쳐 산업 혁명까지 도달한 서구의 문명수준은 어마어마 했기 때문에 과거 유목민과 달리 이번에는 오히려 중국이 양무운동으로 서양 문명을 배워야 하는 처지가 되었고 양무운동 자체는 끝내 실패로 돌아갔지만 당대에는 분명히 어느정도 성과를 내고 있었다. 그러나 청의 수뇌부는 여전히 이런 시대의 변화를 읽는 눈이 어두웠기에 야쿱 칸과의 전쟁을 유리하거나 비등하게 이끌고도 러시아 제국에게 중앙아시아 일대의 영토를 상당 수 내주고 청프전쟁에서도 전황을 자신들 쪽으로 어느 정도 이끌고도 프랑스 제3공화국만 좋은 조약만 맺고 끝낸 한심한 지도력을 보여주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이런 문제는 청일전쟁에서 청군이 이전과는 달리 제대로 된 전투력을 보이지 못하고 패전하는 추태로 이어졌다.
청일전쟁 이전에는 청나라의 군사력을 얕보지 않으려던[27] 열강들은 전쟁 이후 대놓고 청나라를 무시하기 시작했으며, 이에 따라 열강들의 청 침탈이 가속화되게 되었다. 제정 러시아는 1898년 동맹을 빌미로 만주 지역의 철도 부설권 및 뤼순을 조차했으며, 독일은 1897년 선교사 2명이 살해되었다는 것을 빌미로 자오저우만을 조차했다. 이외에도 프랑스는 1899년 광저우만을 조차했으며, 영국과 미국, 일본도 이권 획득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1898년 변법 자강 운동의 실패와 1899년 의화단 운동으로 외세의 열강들이 아편전쟁 때보다 더 확실하게 중국 대륙을 짓밟아버리자, 중국 지식인들은 그제야 비로소 일본을 모델로 한 입헌군주제 개혁이 아닌, 공화정 수립을 목표로 하는 혁명 운동으로 노선을 바꾸었다.
6.2. 조선에 미친 영향
조선을 밟고 가는 일본군, 청군 그리고 이를 지켜보는 러시아 |
1894년 7월 청일전쟁이 발발해 일본군이 서울을 점령했다. 외국인들은 자국의 공관으로, 조선인들은 시골로 피란을 떠났다. 부모들이 버렸거나 인파 속에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이들이 숱하게 보였다. 전쟁이 무자비하게 휩쓸고 지나간 평안에는 길이가 수 마일에 넓이가 몇 야드나 되는 만주군 기병대와 말의 송장더미가 전쟁이 끝나고도 3주가 넘도록 그로 방치돼 도시를 오염시켰다.
-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 릴리어스 호턴 언더우드 '상투 튼 사람들과 함께한 15년(Fifteen Years Among the Top-knots)'#
6월 10일 일본 혼성여단이 인천으로 상륙하였습니다. 이에 놀란 청국 상인이 6월 중순 귀국길에 오르기 시작했고, 불안을 느낀 조선인들이 앞다퉈 각 지방으로 피난길에 올랐습니다.(인천 영사관 보고서)
일본군이 서울 성내에서 행군하고 있던 6월 23일경부터 이고 지고 하여 난을 피하는 사람이 길을 잇고 부유한 집안 또는 귀인의 가족들은 이미 8, 9할까지 시골로 달아났다.(일본 신문 기사)
7월 5일 일본의 인천주재 병참감의 비밀보고에 의하면, 일본 혼성여단의 병참업무가 극히 어려움에 처하였으며 일본군의 사역을 기피하는 조선 인부를 전쟁터에서 필히 사용하기 위해서, 즉 후일 탄환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조선 인부를사역시키기 위해 한두 명을 고의적으로 죽여서 수십 명을 공포에 몰아넣는 방법을 써서 인부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7월 14일, 강경․황산 주변의 주민들은 큰 길에 나왔다가 통행하는 관군이나 청나라 병사 또는 관리 등에게 잡혀 졸지에 사역될까 두려워 누구도 전주 이남엔 가지 않으며(……)군대ㆍ관리들이 모내기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잡아다가 사역시키므로 농민들은 모두 두려워서 도피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수의 일병,청병이 함께 옴으로써 향후 어떠한 형세에 이르게 될지 알 수 없으며 경성주민 같은 경우 10중 8, 9는 충청ㆍ전라 지방으로 피난 가겠다고 하여 인심이 흉흉하며(……)(일본무역상의탐문보고서)
7월 23일의 소위 ‘경복궁점령사변’으로 경성의 성 안 거주민의 6~7할이 피난하였다.(주한 일본 외교관의 자서전)
7월 23일을 맞이하자 하늘에 울려 퍼지는 포성에 잠을 깬 한인 수만명은 일시에 당황하여 도망 다닌다. 토민이 도망가는 참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상태다.(일본 신문 기사)
7월 23일:조선 선박이 평안도로부터 (황해도로) 오는 것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들어보니 이들 모두 의주지방에 청병이 거의 5만 명이나 온다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가재도구는 약탈당하고 부녀자들은 욕을 당할 것이라 하여 피해오는 자를 태워 주었다.(일본인 선장의 보고)
7월 25일:지난 6월 초순 아군이 입경한 이후 이곳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 매우 큰 놀라움과 동요를 주어 시민의 7, 8할은 성 밖으로 도망가서 장사가 안 되고 영세민은 호구책이 막연하여 얼마간 참상을 띠고 있다.(일본공사가 본국으로 보낸 보고)
8월 초순, 일본 군대가 처음 원산으로 상륙하자, 韓商은 처자를 데리고 멀리 내지로 피난한 자가 많다. 원산진은 거의 빈집이다.(원산 영사관의 보고)
8월 초순경31):일본이 군사행동을 함과 동시에 원산에 군대를 상륙시키자 조선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봉산마을에 사는 약 1만 명의 주민들은 자기 집을 버리고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러시아장교의 여행기)
8월 5일: 畿營,交河에 주둔한 일본 군인들이 촌락으로 출몰하여 부녀와 가축을 겁탈하고 약탈하므로 모든 인민들이 도망가 숨었음을 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첩보하여 오다.(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8월 12일:어제 오후 原州지방에서 온 은 군복 또는 복장을 하고 무기까지 갖고 있었는데 의 민가에서 식품을 탈취하여 오늘 새벽 지방을 향하여 출발했다고 한다.(……)이 때문에 춘천주민은 일시 동요하여 피난간 자가 많다.(춘천전보국에서 일본공사관으로 보낸 춘천 상황보고)
8월 15일:청병이 육로로 도착할 예정인데(……)(평안감사 민병석은) 그 병력에 공급할 쌀과 우마를 징수하여 속히 송부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안주현감이 명령에 응하여 징집에 착수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불평을 호소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자 도망하는 자가 많았습니다.(일본의 원산주재 영사가 경성의 일본공사에게 보고)
8월 16일 전후 상황:청군의 역부는 식량이 없어서 이곳(평양) 부근의 촌락에 와서 소ㆍ돼지 같은 것을 강탈하여 기아를 면하거나(……)이는 거의 백주의 강도로, 지방민의 곤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방민은 점차 도피하는 사람이 많아져 평양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겨우 3분의 1 정도입니다.(원산주재 영사가 고용한 韓語敎師가 평양을 정찰하고 제출한 偵察記)
8월 20일경:(청의 아산 패잔병이) 가는 곳마다 악행이 무변하야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젊은 부녀들을 마음대로 능욕․강간하며 길가에 있는 개, 닭과 소와 말은 있는 대로 다 잡아먹고 끌어가며, 골골마다 우리나라 관가에서 인민을 강제로 징발하야 짐도 지우고 교군(가마)도 메게 하는데(……)(당시 9세였던 목격자의 회고 글)
8월 20일경:(일본)이 멀리 북진하는 길, 거리의 인민은 모두 마음을 적(청군을 일컬음:필자)에게 의지하고 도망가 숨어서 사역에 응하지 않는다. 때때로 남아 있는 자는 적을 위해서 정찰을 하는 것이다. 瑞興府使洪鐘淵이 하는 바가 이와 같다.(종군기자의 기사)
8월 29일:앞서 경상도 宣撫使李重夏가 嶺南沿路의 일본 遊兵이 마을로 난입하여 작폐하는 일이 자못 많아 민정이 더욱 소요하다고 외무아문으로 알려오다. 이날 외무대신 김윤식이 일본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에게 공함을 보내어 유병들에 대한 沿路滋弊禁止告示文을 만들어 보내줄 것을 요청하다.(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9월 2일, (일본의) 원산 지대가 양덕에 도착했을 때, 양덕부의 서쪽지역 인민은 모두 일본의 조선침략을 반대하여 일본군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하였으며 부사나 현관 역시 한 명도 남은 자 없었으며 관청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종군기자의 기사)
병참부의 추송에 있어서, 원산에서 양덕까지는 줄곧 조선 인부를 이용하였고, 여기서 성천까지는 때로는 조선인 때로는 태우를 이용하였다. 성천에서 평양까지는 조선 인부가 모두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얼마 안되는 일본 인부와 태우로써 운반하였다.(종군기자의 기사)
9월 3일 개성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청석관의 성문을 거쳐 청석진을 나오니 연도의 가옥 모두 비어있다. 인민은 난을 피해 재령 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전쟁견문록)
9월 15일 이전:일본군이 경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 연도의 군읍은 이미 청군에 의해 모두 약탈당했고, 주민은 사방으로 도망가 숨어버려 밥 한 그릇 물 한 잔 구할 곳이 없다.(뉴욕헤럴드 종군기자의 기사)
평양전투 직전 평양 상황:원래 전쟁이 나면 전투지의 주민이 두려워 다른 지방으로 피난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번처럼 연도의 주민이 일제히 피난가는 것은 드문 현상이다.(종군기자의 기사)
- 청일전쟁 당시 조선 전쟁터의 실상
6월 중순부터 일본이 점령한 인천과 서울을 시작으로 피란민이 발생하였고 경복궁 점령 이후 6~8할의 서울 주민이 피란하였다. 평안도에서는 청군의 남하로 많은 평양도민이 황해도로 피란하였다. 청일 양군은 군량 보급없이 현지 조달로 이뤄져 경기, 충청, 평양에서 쌀과 목재 등 생필품의 가격이 7~9월 간 2배에서 5배로 폭등하였고, 9월부터는 석유를 포함해 생필품의 거래가 끊겼다. 8월부터는 성환에서 패배해 북상하는 청군과 원산에 상륙한 일본군의 약탈이 자행되었다.#일본군이 서울 성내에서 행군하고 있던 6월 23일경부터 이고 지고 하여 난을 피하는 사람이 길을 잇고 부유한 집안 또는 귀인의 가족들은 이미 8, 9할까지 시골로 달아났다.(일본 신문 기사)
7월 5일 일본의 인천주재 병참감의 비밀보고에 의하면, 일본 혼성여단의 병참업무가 극히 어려움에 처하였으며 일본군의 사역을 기피하는 조선 인부를 전쟁터에서 필히 사용하기 위해서, 즉 후일 탄환이 떨어지는 전쟁터에서 조선 인부를사역시키기 위해 한두 명을 고의적으로 죽여서 수십 명을 공포에 몰아넣는 방법을 써서 인부를 확보하지 않을 수 없었다고 한다.
7월 14일, 강경․황산 주변의 주민들은 큰 길에 나왔다가 통행하는 관군이나 청나라 병사 또는 관리 등에게 잡혀 졸지에 사역될까 두려워 누구도 전주 이남엔 가지 않으며(……)군대ㆍ관리들이 모내기에 종사하는 농민들을 잡아다가 사역시키므로 농민들은 모두 두려워서 도피하지 않을 수 없다.(……) 많은 수의 일병,청병이 함께 옴으로써 향후 어떠한 형세에 이르게 될지 알 수 없으며 경성주민 같은 경우 10중 8, 9는 충청ㆍ전라 지방으로 피난 가겠다고 하여 인심이 흉흉하며(……)(일본무역상의탐문보고서)
7월 23일의 소위 ‘경복궁점령사변’으로 경성의 성 안 거주민의 6~7할이 피난하였다.(주한 일본 외교관의 자서전)
7월 23일을 맞이하자 하늘에 울려 퍼지는 포성에 잠을 깬 한인 수만명은 일시에 당황하여 도망 다닌다. 토민이 도망가는 참상은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는 상태다.(일본 신문 기사)
7월 23일:조선 선박이 평안도로부터 (황해도로) 오는 것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들어보니 이들 모두 의주지방에 청병이 거의 5만 명이나 온다는 것을 들었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가재도구는 약탈당하고 부녀자들은 욕을 당할 것이라 하여 피해오는 자를 태워 주었다.(일본인 선장의 보고)
7월 25일:지난 6월 초순 아군이 입경한 이후 이곳에 거주하는 조선인에게 매우 큰 놀라움과 동요를 주어 시민의 7, 8할은 성 밖으로 도망가서 장사가 안 되고 영세민은 호구책이 막연하여 얼마간 참상을 띠고 있다.(일본공사가 본국으로 보낸 보고)
8월 초순, 일본 군대가 처음 원산으로 상륙하자, 韓商은 처자를 데리고 멀리 내지로 피난한 자가 많다. 원산진은 거의 빈집이다.(원산 영사관의 보고)
8월 초순경31):일본이 군사행동을 함과 동시에 원산에 군대를 상륙시키자 조선인들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큰 혼란에 빠지게 되었고, 봉산마을에 사는 약 1만 명의 주민들은 자기 집을 버리고 모두 산속으로 들어가 버렸다.(러시아장교의 여행기)
8월 5일: 畿營,交河에 주둔한 일본 군인들이 촌락으로 출몰하여 부녀와 가축을 겁탈하고 약탈하므로 모든 인민들이 도망가 숨었음을 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으로 첩보하여 오다.(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8월 12일:어제 오후 原州지방에서 온 은 군복 또는 복장을 하고 무기까지 갖고 있었는데 의 민가에서 식품을 탈취하여 오늘 새벽 지방을 향하여 출발했다고 한다.(……)이 때문에 춘천주민은 일시 동요하여 피난간 자가 많다.(춘천전보국에서 일본공사관으로 보낸 춘천 상황보고)
8월 15일:청병이 육로로 도착할 예정인데(……)(평안감사 민병석은) 그 병력에 공급할 쌀과 우마를 징수하여 속히 송부하라고 명하였습니다. 이에 안주현감이 명령에 응하여 징집에 착수하였는데, 백성들이 모두 불평을 호소하였지만 들어주지 않자 도망하는 자가 많았습니다.(일본의 원산주재 영사가 경성의 일본공사에게 보고)
8월 16일 전후 상황:청군의 역부는 식량이 없어서 이곳(평양) 부근의 촌락에 와서 소ㆍ돼지 같은 것을 강탈하여 기아를 면하거나(……)이는 거의 백주의 강도로, 지방민의 곤란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지방민은 점차 도피하는 사람이 많아져 평양 안에 거주하는 사람은 겨우 3분의 1 정도입니다.(원산주재 영사가 고용한 韓語敎師가 평양을 정찰하고 제출한 偵察記)
8월 20일경:(청의 아산 패잔병이) 가는 곳마다 악행이 무변하야 백성의 재물을 함부로 빼앗고 젊은 부녀들을 마음대로 능욕․강간하며 길가에 있는 개, 닭과 소와 말은 있는 대로 다 잡아먹고 끌어가며, 골골마다 우리나라 관가에서 인민을 강제로 징발하야 짐도 지우고 교군(가마)도 메게 하는데(……)(당시 9세였던 목격자의 회고 글)
8월 20일경:(일본)이 멀리 북진하는 길, 거리의 인민은 모두 마음을 적(청군을 일컬음:필자)에게 의지하고 도망가 숨어서 사역에 응하지 않는다. 때때로 남아 있는 자는 적을 위해서 정찰을 하는 것이다. 瑞興府使洪鐘淵이 하는 바가 이와 같다.(종군기자의 기사)
8월 29일:앞서 경상도 宣撫使李重夏가 嶺南沿路의 일본 遊兵이 마을로 난입하여 작폐하는 일이 자못 많아 민정이 더욱 소요하다고 외무아문으로 알려오다. 이날 외무대신 김윤식이 일본 특명전권공사 오토리 게이스케에게 공함을 보내어 유병들에 대한 沿路滋弊禁止告示文을 만들어 보내줄 것을 요청하다.(총리교섭통상사무아문일기)
9월 2일, (일본의) 원산 지대가 양덕에 도착했을 때, 양덕부의 서쪽지역 인민은 모두 일본의 조선침략을 반대하여 일본군이 온다는 소리를 듣고 도망하였으며 부사나 현관 역시 한 명도 남은 자 없었으며 관청은 완전히 비어 있었다.(종군기자의 기사)
병참부의 추송에 있어서, 원산에서 양덕까지는 줄곧 조선 인부를 이용하였고, 여기서 성천까지는 때로는 조선인 때로는 태우를 이용하였다. 성천에서 평양까지는 조선 인부가 모두 도망가서 어쩔 수 없이 얼마 안되는 일본 인부와 태우로써 운반하였다.(종군기자의 기사)
9월 3일 개성을 출발하여 서쪽으로 청석관의 성문을 거쳐 청석진을 나오니 연도의 가옥 모두 비어있다. 인민은 난을 피해 재령 지방으로 갔다고 한다. (전쟁견문록)
9월 15일 이전:일본군이 경성에서 평양으로 가는 길, 연도의 군읍은 이미 청군에 의해 모두 약탈당했고, 주민은 사방으로 도망가 숨어버려 밥 한 그릇 물 한 잔 구할 곳이 없다.(뉴욕헤럴드 종군기자의 기사)
평양전투 직전 평양 상황:원래 전쟁이 나면 전투지의 주민이 두려워 다른 지방으로 피난가는 것은 당연한 일이나 이번처럼 연도의 주민이 일제히 피난가는 것은 드문 현상이다.(종군기자의 기사)
- 청일전쟁 당시 조선 전쟁터의 실상
특히 양 군의 물자약탈과 노동 징발로 평양주민의 피해가 극심했다. 이후 평안도 경제가 파탄나고 세입이 전혀 되지 않아 극심한 재정난을 초래한다. 일본에 반기를 든 2차 동학농민운동은 일본 지휘하의 조선 관군들이 소탕하였는데, 여기서는 삼남 지방의 세입 체제가 붕괴된다. 이 때 벌어진 재정난은 대한제국 초창기까지 지속될 정도로 수년동안 큰 피해를 입혔다.
일본은 1년 뒤인 1895년 러시아와 연대하는 명성황후를 살해한 뒤 물러나있던 친일 내각을 재집권시켰고 이후 고종은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한다. 이렇게 러시아와 일본이 대립하는 가운데 1897년 대한제국이 건국된다.
7. 청일전쟁 당시 양국의 참전 해군 비교
청일전쟁에 참전한 양국 해군 비교 | ||||
<rowcolor=#000> 청나라 북양함대 | 일본 제국 해군 | |||
철갑함 | 정원(定遠), 진원(鎮遠) : 총 2척 | 철갑함 | 후소(扶桑) : 총 1척 | |
장갑순양함 | 경원(經遠), 내원(來遠) : 총 2척 | |||
방호순양함 | 치원(致遠), 정원(靖遠) : 총 2척 | 방호 순양함 | 마츠시마(松島), 이츠쿠시마(厳島), 하시다테(橋立), 나니와(浪速), 타카치호(高千穂), 야에야마(八重山), 아키츠시마(秋津洲), 요시노(吉野), 이즈미(和泉) : 총 9척 | |
어뢰순양함 | 제원(濟遠), 초용(超勇), 양위(揚威) : 총 3척 | 순양함 | 치요다(千代田) : 총 1척 | |
해양전투함 | 평원(平遠) : 총 1척 | |||
콜벳 | 광갑(廣甲) : 총 1척 | 장갑 콜벳함 | 히에이(比叡), 콘고(金剛) : 총 1척 |
8. 관련 문서
일본군 개인화기
청군 개인화기
8.1. 인물
- 일본
- 조선
9. 여담
- 대만에서 이 청일전쟁을 배경으로 한 애니메이션을 만들었는데 거기서 '도조' 라는 안경 쓴 인물이 등장한다. 후에 내각총리대신을 지내는 전범 도조 히데키는 청일전쟁 당시에는 어직 어린애였으므로 성씨만 같은 다른 인물로 추정된다.[28]
- 은단의 발명 계기가 되었는데, 모리시타인단(森下仁丹)주식회사의 창업자인 모리시타 히로시(森下博)가 대만 출병 당시 현지인들이 복용하던 약을 보고 은단을 개발한 것이다.
- 귀국하지 못했던 일부 청군 패잔병들이 을미의병에 가담했다고 한다. 신식무기의 보유 및 능숙하게 다룰 수 있으며 무엇보다도 근대적 전술에 대해 밝았다는 점에 주목한 일부 의병장들이 용병 형식으로 고용했다고 한다.#
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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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과정 | |||
{{{#!wiki style="margin:0 -10px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6px -1px -11px" | 1875년 9월 20일 | 운요호 사건 | 일본의 근대적 군사 도발 |
1876년 2월 27일 | 강화도 조약 |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 체결 | |
1882년 7월 23일 | 임오군란 | 군란을 제압한 청군 주둔 | |
1882년 8월 30일 | 제물포 조약 | 군란을 이유로 일본공사관 경비 병력 주둔 | |
1884년 12월 4일 | 갑신정변 | 일본의 지원을 받은 급진개화파의 정변, 청군에 의해 진압 | |
1885년 1월 9일 | 한성조약 | 갑신정변으로 입은 피해에 대한 사과 및 배상을 요구하는 일본의 함대 무력 시위. 이로 인한 조선과 일본의 협상 제물포 조약에 의거한 경비 병력 주둔 재확인 | |
1885년 4월 18일 | 톈진 조약 | 갑신정변 이후 조선에 대한 청일 양국의 논의 파병된 청일 양국 군대 철수 및 향후 조선 출병시 상호 통지 | |
1894년 7월 23일 | 갑오사변 | 동학 농민 운동 진압을 위해 청나라에 파병 요청, 제물포 조약과 톈진 조약을 빌미로 일본이 파병 전주 화약 후 조선의 양국 군대 철수 요청 이를 무시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친일내각을 구성하고 갑오개혁 추진 | |
1894년 7월 25일 | 청일전쟁 | 서해 아산만 풍도에서 일본군이 청군을 기습하며 전쟁 발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에 반발한 동학의 2차 봉기 | |
1895년 4월 17일 | 시모노세키 조약 | 청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로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종주권 상실 | |
1895년 4월 23일 | 삼국간섭 | 러시아, 독일, 프랑스의 압력으로 일본이 요동반도 반환 친일내각의 붕괴와 친러파의 대두 | |
1895년 10월 8일 | 을미사변 | 일본이 명성황후 살해 후 친일내각을 재구성 하고 을미개혁 추진, 이에 항거한 을미의병의 발발 | |
1896년 2월 11일 | 아관파천 | 고종이 감금돼 있던 경복궁을 탈출해 러시아 공사관으로 망명 친일 내각 몰락, 친러 내각이 구성되고 근대화 추진과 대한제국 구상 | |
1896년 5월 14일 | 베베르-고무라 각서 | 일본제국이 한반도 세력권은 러시아 제국에 포함됨을 공인함. 러일 양국이 각국의 군대를 조선에 파견하는 것을 동의함. | |
1896년 6월 9일 | 로바노프-야마가타 의정서 | 일본제국과 러시아제국은 조선이 개혁을 추진하기 위해 차관을 도입하고자 한다면 합의하에 제공하고, 러시아와 일본에 한반도 내 전신선의 보호권이 있음을 명시. 양국은 한반도에서 소요사태 발생시 군대를 투입할 권한을 지니고 있음을 확인함. | |
1897년 10월 12일 | 대한제국 선포 | 경운궁으로 환궁했던 고종이 황제에 오르고 제국을 선포, 광무개혁 추진 | |
1898년 4월 25일 | 니시-로젠 협정 | 러시아와 일본 간 협정. 대한제국에 대한 내정 불간섭, 대한제국의 군사적 지원 요청 시 상호협상 없이는 응하지 않을 것, 한일 양국 간 경제적 교류에 대해 러시아가 저해치 않을 것을 약속 | |
1902년 1월 30일 | 1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4년 1월 21일 | 대한제국 중립선언 | 대한제국은 러·일간 전쟁 시 중립임을 세계 각국에 선언 | |
1904년 2월 8일 | 러일전쟁 | 일본군의 러시아군 기습 공격으로 전쟁 발발. 일본군의 인천, 부산, 마산, 원산 상륙과 서울 및 경운궁 점령 | |
1904년 2월 23일 | 한일의정서 | 일본군의 대한제국 거점 주둔 | |
1904년 5월 31일 | 대한시설강령 발표 | 일본의 대한제국에 대한 이권 강화 | |
1904년 8월 22일 | 한일 외국인고문 용빙에 관한 협정서 (제1차 한일협약) | 외국인 고문을 두어 일본이 국정에 간섭(고문정치) | |
1905년 4월 1일 | 한일통신기관협정서 | 대한제국의 통신 주권 침해 | |
1905년 4월 16일 | 대한제국군 감축 | 일본의 강요로 친위대 해산, 시위대와 진위대 감축 | |
1905년 7월 29일 | 가쓰라-태프트 밀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종주권, 외교권을 대행할 것을 미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2일 | 2차 영일동맹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정치상⋅군사상⋅경제상 특별한 이익이 있다고 영국이 승인 | |
1905년 8월 13일 | 한국 연해 및 내하의 항행에 관한 약정서 | 대한제국의 연근해 주권 침해 | |
1905년 9월 5일 | 포츠머스 조약 | 일본이 대한제국에 대해 관리, 감독, 보호할 것을 러시아가 승인 | |
1905년 11월 17일 | 을사조약 (제2차 한일협약) | 대한제국의 외교권 박탈, 일본인 통감이 외교권 행사(통감정치), 한국의 보호국화 을사의병 발발 | |
1907년 7월 20일 | 고종 황제 퇴위 | 헤이그 특사를 파견한 고종 황제가 이토 히로부미의 협박으로 강제 퇴위, 순종 황제 즉위 | |
1907년 7월 24일 | 정미 7조약 (제3차 한일협약) | 일본인 차관의 내정 간섭(차관정치) 부속각서에 대한제국군 해산 명시 | |
1907년 8월 1일 | 대한제국군 해산 | 시위대 해산을 시작으로 8~9월 진위대 해산 남대문 전투, 정미의병 발발 | |
1909년 7월 12일 | 기유각서 | 대한제국의 사법권⋅교도 행정권 박탈, 일본이 대행 한국의 속령화 | |
1909년 9월 1일 | 남한대토벌 | 10월 말까지 두달에 걸친 일제의 남한 내 모든 의병 소탕, 항일의병의 만주 이동 | |
1909년 9월 4일 | 간도협약 | 조선과 대한제국의 간도영유권 시도 전면 수포화, 일본의 만주 철도부설권 확보 | |
1910년 6월 24일 | 한일약정각서 | 대한제국의 경찰권 박탈, 일본이 대행 | |
1910년 8월 29일 (체결일 8월 22일) | 경술국치 (한일병합조약) | 대한제국 멸망, 한반도의 식민지화 | |
1951년 9월 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제2조 (a)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하고, 제주도, 거문도 및 울릉도를 비롯한 한국에 대한 일체의 권리와, 소유권 및 청구권을 포기한다. 1965년 6월 22일 한일기본조약 제2조 1910년 8월 22일 및 그 이전에 대한제국과 대일본제국간에 체결된 모든 조약 및 협정이 이미 무효임을 확인한다. |
청나라의 대외 전쟁·분쟁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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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일본 전쟁 | 소련 몽골 인민 공화국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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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두번째 전쟁은 태평양 전쟁의 중일전쟁이다.[2] 러시아는 청일전쟁과 중일전쟁 모두 같은 표기를 사용한다.[구자체] [4] 여기서 청과 일본의 상륙 지점을 보면 서로 목적이 확연한데, 동학 농민 운동은 한반도 남부에서 발생했으며 아산은 청나라의 위치를 고려할 때 반란 진압이라는 목적이 확실했다고 볼 수 있다. 그에 비해 일본군이 부산이나 군산 같은 곳이 아닌 서울 바로 옆인 인천에 정박했다는 것은 애초에 농민 운동의 진압이나 다른 조약은 그저 명분에 불과하며, 일본군은 처음부터 조선을 점령할 생각으로 왔다는 것을 드러낸 것이다.[5] 제9 혼성여단장은 소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로 아베 신조 전 일본 총리의 외고조부다.[6] 이 서울 시내 진군은 경복궁 점령을 준비한 예행 훈련이었다.[7] 이 사건에 대해서는 흥미롭게도 을미사변이나 다른 것과는 달리 분명한 명칭이 없어서 한 때는 "경복궁 전투", "경복궁 쿠데타"나 "경복궁의 변(變)" "경복궁 점령 사변"과 같은 불명확한 용어를 쓰고 있었다. 민영환은 1900년에 세운 장충단비에 '갑오사변'(甲午事變)이라 하였고,# 1983년 김경창은 '甲午倭亂 : 甲午,こ未,こ巳,경성의 궁중왜란'이란 책에서 '갑오왜란'(甲午倭亂)을 # 1988년 김상기는 〈甲午義兵의 歷史的 展開와 性格〉이란 논문에서 '갑오변란'(甲午變亂)이라 칭하였다.# 황태연은 2017년 '갑오왜란과 아관망명'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으로 '갑오왜란'이 벌어졌고 이에 반발해 일어난 2차 동학농민운동도 포함한 항일운동이라 저술하였다.# 중앙일보는 2017년 기사에서 일본군의 경복궁 침공으로 '갑오왜란'이 시작되었다고 하였다.#[8] 장위영(壯衛營)은 임오군란 이후 조선 중앙군이였던 친군영 중 전영과 좌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의 방위를 맡았고, 통위영(統衛營)은 친군후영과 우영, 그리고 기연해방영을 통합한 부대로 한양 및 수도권을 위수지역으로 하였으며, 경리청(經理廳)은 통위영에서 구 총융청 병력이 분리되어 창설된 부대로 북한산성 일대에 주둔하였다. 기영(箕營)은 평안감영을 지칭하는 것인데,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경군이 이동하자 정예인 평양 군대가 임시로 한양으로 들어온 것으로 보인다.[9] 결국 경리청(經理廳) 병사들은 일본군과 교전도 하지 못하고 무장해제 당한다.[10] 정문인 광화문에서 진입이 시도되었다면 경복궁의 배치도 상 약간 북쪽에 위치하는 침전의 왕이 도망갈 시간을 줄 가능성도 있었을 것이다.[11] 애초에 일본 쪽 기록에서 조선군을 그냥 쫓아냈다고 기록된 문서가 있는 것을 보면 일본 측에서 프로파간다의 목적으로 거짓 기록한 것이 대중들에게 알려진 것이였을 가능성이 높다.[12] 일부 무기는 조선군이 무장해제 당하기 전 자기 손으로 파괴하고 일본군이 압수한 조선군 무기는 연못에 던져버려 고장나게 만든다. 시위대는 이 총기를 건져다가 다시 무장했는데, 이 때문에 다음해 을미사변 때 또 경복궁에 처들어온 일본군과 전투할 때 궁궐을 호위하던 상당수의 시위대의 무기가 격발이 안되는 등 전투력 저하의 원인이 된다.[13] 임오군란 이후 청은 조선을 속방으로 규정했었다. 이는 나중에 시모노세키 조약에서 나온 조선의 독립국 문제에 대한 명시에서의 목적이 잘 드러나는 대목이다. 게다가 독립을 시킨 이유도 조선에서의 청나라의 종주권을 박탈하기 위한 것일 뿐 실제로 조선을 독립국으로 만들 생각 따위는 전혀 없었다. 독립 협회를 비롯한 조선의 수 많은 지식인이 이 문구에 속아 러일전쟁 때까지 일본을 응원했고, 1905년 11월에는 을사조약이 체결되었다.[14] 영국의 식민지 영향권에는 접근하지 말라는 것이었다.[15] 오른쪽 사진은 조선군과 청군 포로들을 찍은 것이다. 뒤쪽에 일본군도 보인다. 조선군은 장위영 소속의 병사들이다.[16] 어뢰정같이 배수량 1천 톤도 안되는 함선이나 전투 능력이 없는 수송선은 제외한 숫자[17] 이때 청나라는 순양함보다 훨씬 큰 전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2척 보유했으니 안 사도 충분히 자국 함대가 강하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이 중화적인 자신감은 청일전쟁에서 그 동안 깔봐왔던 일본에게 제대로 박살이 나면서 산산조각나지만.[18] 특히 전투 종반 기함 마쓰시마는 진원의 주포에 피격되어 유폭, 57명이 전사하고 50여 명이 부상당했다.[19] 놀랍게도 청군 함선 사이를 돌파해 빠져나갔다. 같이 고립된 소형 포함 중 하나는 피격당해 함장이 전사.[20] 과거 중국에는 처형된 사람의 시신의 일부를 소유하고자 하는 풍습이 있었다.[21] 실제 사망자 숫자는 2천명에서 수만명 사이로 추정된다.[22]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청군을 상대로 일방적인 교환비를 기록했다고 선전했지만, 실은 병사자 수가 비정상적으로 높다. 대부분 이러한 겨울철의 무리한 진공으로 발생한 것으로 여겨진다.[23] 고야마는 암살 혐의로 무기징역이 확정되었고 1907년 2월 11일에 황실전범증보제정에 의한 은사를 받아 가석방 되었고 이후 일본이 패전할 때 까지 살아있다 1947년 사망하였다.[24] 근대화를 시작한지 얼마 안 된 일본이 거대한 청 제국을 이겼다는 사실은 서구 사람들에게도 놀라운 사실로 받아들여졌다.[25] 한민족 국가는 중원 왕조들에게 상징성이 매우 컸다. 고조선 ~ 삼국 시대에 투닥거릴 때부터 동북방의 안보와 직접 연계되었고, 통일 신라 이후 조공 체제가 확립되고 중원의 중심이 동쪽 해안가로 옮겨지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앞마당으로 인식되었다. 만리장성의 개축과 한나라 이후 지속적인 토벌로 서북방 지역의 유목민 세력이 상대적으로 약해진 반대 급부로 만주 일대의 유목민들이 중원을 가장 위협하는 세력이 되었고, 이 지역을 중원 왕조들이 평정하려면 한민족 국가의 협조가 필수였기 때문이다.[26] 그러나 사료를 보면 속마음은 엄청나게 자존심 상해했다.[27] 야쿱 벡에 의한 위구르의 봉기를 최신 무기를 동원하여 신속하게 진압한 것이나, 청프전쟁에서 의외로 프랑스에게 큰 타격을 입혔던 사례 등에서, 양무운동은 외견상 청나라의 군사적 근대화를 꽤 완수시킨 듯이 보였다.[28] 10년 후에 벌어진 러일전쟁때 도조 히데키가 초급 장교로 참전한 적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