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07-21 23:0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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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시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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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사례3. 기타4. 같이 보기

Proto-fascism

1. 개요

파시즘의 근간을 형성하거나 영향을 준 이념, 철학, 문화 등을 가리킨다.

2. 사례

사실 proto-fascism의 기준은 굉장히 모호한 편이다.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이라 사람마다 보는 기준이 다를 수 있기 때문.
  • 장 자크 루소 - 루소는 자신의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개인적인 이기심인 '개별 의지'를 버리고 사회 계약의 당사자로서 공동선을 추구하려는 '일반 의지'에 의하여 사회와 국가가 형성된다고 주장하였다. 루소는 사회적 계약인 국가의 법이라는 '일반 의지에' 복종하여 개인의 자유가 보장받는다고 주장하였으며, 일반 의지에 복종하지 않으면, 사회적인 합의가 깨지고, 국가가 존속 불가능하게 되므로, 일반 의지에 대하여 강제로라도 복종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루소는 저서 사회계약론에서 이것을 '자유를 위한 강제' (forcing to be free) 라는 역설적인 표현으로 말하였다. 이로 인하여 전체주의의 시조라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 자코뱅로베스피에르 - 근대 민족주의, 좌익 포퓰리즘, 급진 공화주의 성향을 가진다. 프랑스 대혁명 시기 방데학살이나 혁명재판소에 의한 공포정치로 유명한데, 루소의 일반의지 개념으로 이를 정당화하였다.
  • 귀스타브 르 봉 - 군중심리와 대중 사회, 인종과 민족, 문명에 대한 사회 심리학적 연구를 수행하였다.
  • 나폴레옹 3세 - 그의 정치적 행태를 분석한 카를 마르크스의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이라는 책은 파시즘에 대한 최초의 학술적 분석으로도 여겨진다.
  • 조르주 소렐 - 생디칼리슴 이론의 창시자며 혁명적 조합주의자이다.[1] 반민주주의, 반의회주의 성향을 가졌으며, 총파업을 노동자들의 무기이자 강력한 관념적 신화로 인식하게 하여 이를 토대로한 폭력적 총파업 혁명을 주장했으며 <폭력론>을 바탕으로 총파업 그 자체가 혁명으로 이어진다는[2] 사상을 펼처냈다. 생디칼리슴은 무솔리니의 파시즘에 적용되었고, 조르주 소렐이 직접 무솔리니를 찬양하기도 하였으며, 무솔리니는 소렐을 "내가 가장 큰 빚을 진 사람이 바로 소렐이다.", "파시즘의 가장 중요한 정신적인 아버지"라고 일컫기도 했으며# 훗날 국민생디칼리슴이나 초기 팔랑헤당 좌파도 여기에서 영향을 받았다.
  •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 - 리하르트 바그너의 사위이다. 아리아인 인종주의와 순혈주의를 주장했다.
그의 <비망록>에 나타나는 것처럼 괴벨스는 당시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의 <19세기의 기초>도 읽었다. 그 영국인은 프랑스인 고비뉴가 <인종 불평등론>이라는 논문에서 내세운 인종 이론을 '발전'시켰고, 아리안 종족이 '문화의 정수'이며, 순수한 인종은 아리안 종족과 유대 종족 둘밖에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리스의 예술과 철학, 로마 법, 기독교라는 고대의 유산을 계승한 아리안 종족은 '지배 인종'이며, 현재 지배적인 물질주의적 시대 정신을 극복하고 새로운 시대를 여는 종족으로 선택 받았다. 그러려면 먼저 인종의 '순화'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이는 "고귀한 인종이 물질주의라는 유대적 도그마 때문에 영원히 영혼을 잃고 '밝음을 추구하는 종족'으로부터 추방되기 때문이다. 이때 이러한 물질주의 도그마는 기독교와 달리 그 어떤 아리안적 영향도 받지 않은 채 유지되는 것이다." 괴벨스는 훗날 바이로이트에서 체임벌린 만나고 나서 그가 '선구자'이자 '예비자', 그리고 '우리 정신의 아버지' 라고 일기에 열광적으로 썻다. 체임벌린의 사상은 당시 26살이던 괴벨스의 세계관에 중대한 영향을 끼쳤다.
랄프 게오르크 로이트, 괴벨스 대중 선동의 심리학, 119~120p
  • 오스발트 슈펭글러 - 1차세계대전 직전 '서구의 몰락'이라는 책을 저술하였다. 서구 문명이 1800년대부터 노년기에 접어들어 쇠퇴하고 있으며. 1~2세기 안에 몰락할 것으로 보았다. 괴벨스가 청년시절 슈펭글러의 '서구의 몰락'을 읽고 큰 영향을 받았다고 한다.
슈펭글러와 서양의 몰락

슈펭글러는 제1차 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 이 책을 출판했는데 그에 대한 반응은 독일을 크게 놀라게 할 정도로 강력한 것이었다. 그는 헤겔과 니체의 영향을 받았으나 특히 후자의 역사관에 더 관심을 가졌다 "인간은 먹을 것을 찾는 맹수다. 모든 미덕과 사회윤리학자들은 단지 먹이를 찾기 위하여 이빨을 보이는 동물과 같다. 먹이를 찾는 큰 동물은 그야말로 정말 고상한 피조물이다. 진보도 목표도 인간성의 길도 없다. 전쟁은 높은 인간 존재의 영원한 형태이다. 국가는 전쟁을 위해서 있다. 세계 역사는 국가들의 역사이다."[3]

그가 말하는 역사는 세 가지만 있다. 희랍 역사(Greco-Roman History)와 아랍 역사와 서양 역사이다. 서양 역사는 영국과 독일에 의해서 이끌려 갔다. 이 가운데 영국은 노쇠했다. 그들의 부패는 위급하게 보인다. 독일만 남아 있다. 독일은 자유주의에 대항하면서 보수주의와 사회주의적 토리주의(Toryism)을 택한다. 사회주의는 모든 권력을 장악하는 국가주의를 의미한다. 빈부의 문제가 아니라 명령과 복종이 중요하다. 독일인에게는 봉사하고 따르고 존경해야 하는 막강한 필요성만 있다. 시저의 군대가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적(敵)은 영국을 대표로 하는 자유민주주의요, 국제연맹이요, 바이마르 공화국이다. 국가의 유일한 목적은 국민의 행복이 아니라 국가의 권력 장악이다.
영원한 진리는 없다. 모든 철학은 그 시대의 것에 지나지 않는다. 모든 문화는 사계절과 같다. 봄과 여름과 가을과 겨울이다. 겨울이 되면 문화는 문명으로 변한다. 국제적 이상이 분해되며 종족이 혼합되는 단계에 들어간다. 현재 서양문명은 바로 이 단계에 와 있다. 시인이나 철학자는 필요없게 되었다. 강력한 조직가만 필요하다. 운명적으로 정해져 있는 이 진행 과정을 되돌릴 수는 없다.
이와 같이 스펭글러는 서양문명, 즉 기독교문명은 종말이 왔다고 보았다.
조직신학대계- 종말론 (2), 40~41p, 이종성, 한국기독교학술원
  • 요한 고트프리트 헤르더 - 독일의 낭만주의 철학자이다. 게르만족이 인도에서 기원한 아리아인이라는 사상의 형성에 관련된 인물이다. 아리아인이라는 개념 자체는 비슷한 시기에 영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가 인도와 유럽 언어의 공통 기원을 주장하면서 만들어졌다. 헤르더는 모든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므로 인류는 단일하다고 주장하면서, 인류를 인종이나 문명의 발전 단계로 나누는 구분법에 반대하였다. 문화 상대주의적 견해를 처음으로 개진하며 인류 평등사상을 주장한 사람이었지만, 동시에 각 민족의 온전함과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인간의 존엄성을 모든 민족이 동일하게 가진다고 주장하면서도, 유대민족의 역사적 행적에 대해서는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다. 물론 유대인이 인종적으로 열등하다고 주장한 것은 아니다. 그는 창조 이래 인류의 단일성과 민족들의 공통 기원을 추적하면서, 그 기원을 중앙아시아에서 찾으려고 하였다.
헤르더의 체계는 네 권으로 된 <인류 역사의 철학에 관한 관념들 Ideen zur Philosophie der Geschichte der Menschheit>에서 완전한 형태를 갖추었다. 이 책은 인간이 유일하고 불가분한 신의 피조물이므로 인류는 단일하다고 주장하면서, 인류를 인종이나 문명화 단계 같은 하위 범주로 나누려는 시도들을 반대하는 데서 시작한다. 그런데 헤르더는 이렇게 인류라는 종의 단일성에서 출발했지만, 재빨리 다수성을 인정하면서, 세계 모든 민족이 비록 서로 다르긴 해도 존엄성 면에서는 동등하다고 주장했다. 그는 하나와 여럿 사이의 긴장이 여전히 풀리지 않은 채 남아 있는 문화 상대주의적 견해를 처음으로 개진한 사람들 중 하나다.
...
그러나 헤르더가 단일성에만 공감했던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는 각 민족의 온전함과 중요성을 강조했는데, (...) 헤르더의 견해에 따르면, 민족들을 형성하는 요소에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 요소는 거주하는 지역의 다양한 기후다. 그는 더위와 추위의 차이를 히포크라테스 식으로 이해했다. 예를 들어 더위와 추위는 단지 사람들의 기질이나 습관뿐 아니라 그들의 신체에도 강력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살아가게 됨에 따라, 그들의 모습과 그 지역의 풍광 사이에는 긴밀한 상관관계가 생겨나는데, 이는 둘 다 동일한 기후의 흔적을 지니게 되기 때문이다. 족내혼과 라마르크가 밝힌 획득형질 유전은 세대를 거듭하면서 이런 특징적 모습이 더 강해지게 만든다. 두 번째 형성 요소는 언어다. 언어는 한 민족의 환경과 역사적 경험을 반영하며, 그들의 사고와 사회적 관계의 구조를 만든다. 마지막 요소는 민족 형성(National builidng)으로, 각 집단이 자신의 문화적 정체성을 획득하고, 개개인이 이 집단의 구성원으로서 정체성을 획득하는 발전 과정이다.
헤르더는 <관념들>에서 신화에 대해 별로 언급하지 않았지만, 꼼꼼히 살펴보면 그가 신화에 아주 중요한 역할을 부여했음을 알 수 있다. 신화는 집단 정체성의 결정적 원천으로서, 기후와 민족 형성을 매개하는 언어적 형식이다. 그러므로 만약 환경이 어떤 민족의 신체에 직접적으로 흔적을 남긴다면, 그것은 신화를 매개로 그들의 관습과 습속에도 흔적을 남기며, 민족들은 신화를 이용해 그들의 주변 환경과 역사를 성찰하고, 조상의 전통을 한 세대에서 다음 세대로 전수한다. 신화는 보존력이 대단히 높아서, 망각과 변화에 맞서 역사적, 문화적, 실용적 지식을 실어 나르며, 동시에 민족의 특유한 가치들을(또한 오류들을) 지켜준다.
...
따라서 신화는 차별화의 담론이다. 즉 신화란 민족들이 서로 분리되면서 펼쳐내는 특유의 이야기들이며, 민족들은 신화를 통해 그들의 고유한 특징들을 상기하고 재생산한다. 이처럼 신화는 본질적으로 다중적이며, 인간의 원초적 단일성에서 떨어져 나온 일부이면서 동시에 각 민족의 귀중한 재산이다. 따라서 신화가 없었다면 각 민족의 정체성과 지속성은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런 다중성은 학자들에게 두 가지 해석 방식을 제공한다. 한편으로는 다양성에 관심을 가지고 신화를 읽을 수 있다. 즉 색다른 서사적 디테일들이 그 신화를 이야기하는 민족의 특유한 가치, 성격, 기후 등에 어떻게 상응하는가를 드러낼 수 있는 것이다. 또는 이와 달리 단일성에 초점을 맞추어 신화를 세계의 민족들의 공통 기원을 추적해가는 데 증거로 이용할 수도 있다. 헤르더는 <관념들> 제 10편에서 후자에 해당하는 작업을 했는데, 거기에는 인류의 단일성의 원초적 기반과 그 근원성 창조의 지점을 중앙아시아에서 찾으려는 기획도 포함되어 있었다.

헤르더는 1785년에 나온 <관념들> 제2권에서 아시아가 인류의 원초적 고향이자 인류의 단일성의 지점이라는 이론을 펼쳤다. 1년 뒤, 영국의 동양학자 윌리엄 존스 경(1746~94)은 유명한 강연에서 훗날 다른 이들이 '아리아어', '인도-게르만어', '인도-유럽어'라고 부르게 될 언어의 공통 기원을 상정했다. 다시 3년 후 존스 역시 언어의 공동체의 본향을 중앙아시아에 두었다. 이런 우연의 일치는 두 학자가 서로에게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 아니라, 성서 독해에 기반을 둔 그들의 공통된 선입견 때문이었다. 존스의 '발견'에 관한 계보학은 이 책 4장에서 다룰 것이다. 지금 당장은 헤르더의 글이 독일인들에게 존스의 이론에 대한 의견을 준비하는 데 도움을 주고 그들의 반응을 좌우하였다는 점만 지적하고자 한다.
하지만 헤르더 혼자 기반을 닦은 것은 아니었다. 1760년대 이후로 게르만 민족주의자들, 그리고 낭만주의의 선배들과 초기 낭만주의자들은 언어와 문학이 민족정체성을 수립하는 데 관건이 된다고 보았다. 이러한 충동은 그들이 오시안, 고대 북유럽의 에다와 사가, <니벨룽겐의 노래> 같은 고대 독일 고지대의 담시, 그리고 민요와 동화 채집에 끌리게 만들었다.
...
존스의 이론은 아시아적 기원을 모든 인류에게 적용하지 않고, 게르만어를 포함하는 하나의 거대하고 중요한 어족에 적용했다. 그리하여 존스를 헤르더와 교차시키고, 헤르더가 민족을 언어와 동일시한 것을 강조함으로써 아리아의 공통기어(Ursprache)를 그에 상응하는 (원)민족(Ur)volk과 연관 짓고, 선사시대에 이 민족 집단이 아시아의 (본)향(Ur)heimar으로부터 이주하여 인도에서 아이슬란드에 이르는 세계를 정복해간 과정을 상상하는 것이 가능했다. 충실한 헤르더주의자들은 이 민족들이 이주 과정에서 새로운 환경과 만나면서, 이를 통해 자신들의 언어, 시, 관습 그리고 신체의 모습을 변화시켜가며 고유한 민족 문화를 획득하게 되었을 것이라고 여기곤 했다. 또한 그들은 이 민족들로부터 물려받은 그들의 신화 속에 그들 자신의 기원과 고대의 민족대이동(Volkerwanderungen)에 관한 기억들이 간직되어 있다고 생각하곤 했다.
게르만인들은 이런 선입견과 관심을 가지고 존스를 읽으면서, 금세 그들 스스로를 예전에 상상했던 어느 민족들보다도 깊고, 찬란하고, 영웅적인 과거를 지닌 하나의 민족으로 보게 되었다. 게르만인들은 더 이상 그리스인들이나 로마인들과 경쟁할 필요가 없었다. 이제 자신들이나 저들이나 똑같은 원초적 집단의 일원임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인도가 이 집단의 가장 오래된 구성원이라는 가정 아래, 산스크리트어에 대한 관심이 피어났고, 고대의 인도의 모든 위대한 것이 주목을 받았다. 특히 인도를 아리아인의 고향으로 만든, 프리드리히 슐레겔(Fredrich Schlegel)의 <고대 인도인의 언어와 지혜에 대하여 Uberdie Sprache und Weisheit der Indier>(1808)가 출판된 이후에는 더했다.
동시에 이스라엘은(이스라엘의 언어는 아리아 어족에 속하지 않는다) 완전한 타자로 규정되었는데, 이는 뿔뿔이 흩어져 있는 유대인들은 그들의 고향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온 민족이라는 헤르더의 주장을 따른 것이었다. 집단 정체성을 잃게 될 위험 속에 있던 유대인들은 그들이 정착한 땅의 민족들에게 위험한 존재로 여겨졌다. 헤르더가 유대인에 대한 그의 논의를 어떻게 마무리 짓는지 살펴보자. "하늘로부터 수천 년 동안 조국Vaterland을 부여받았던 신의 민족은 (사실, 거의 처음부터) 다른 민족들의 줄기에 빌붙은 기생식물이었다. 즉 그들은 거의 전 세계에 흩어져 있는 교활한 거간꾼들의 종족으로, 온갖 탄압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명예와 거처를 열망한 적이 없고, 어디에서도 자신들의 조국을 열망한 적이 없다."
신화 이론화하기, 102~107p, 브루스 링컨
  • 리하르트 바그너 - 낭만주의 음악가, 게르만 민족의 신화를 주제로 작곡활동을 하였으며, 반유대주의적 성향을 가졌다.
  • 프리드리히 니체 - 리하르트 바그너와 절친이었으며, 낭만주의적 성향을 가졌다. 포스트 모더니즘 학자들이 인종주의적 반유대주의는 없었다면서, 파시즘과의 연관성을 부정하면서 변호하지만, 파시즘과의 사상적 접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헤르더의 이론과 아리아인의 이해관계가 결합하면서 어떻게 인종, 언어, 문화에 대한 생각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다른 연구자들이 보여준 바 있다. 하지만 지금 나의 관심은 신화에 대한 논의가 어떻게 이런 그림에 맞아 들어갔는지를 살피는 일이다. 가장 뚜렷한 사례들 중 하나는 야코프 그립과 빌헬름 그림 형제의 사례다. 그들의 기념비적 연구는 언어와 신화에 대한 헤르더적 관심이 독일 민족을 정의하는 매개가 되고, 그리하여 그들이 하나의 민족으로 결집할 수 있었음을 보여준다. 야코프는 이런 동기들을 가지고 프란츠 보프와 함께 문헌학을 연구하고, <독일어 문법>(1819~37)을 편찬했다. 그의 <독일어 문법>은 다른 아리아 언어들과 독일어의 관계를 최초로 설명한 것이었다. 한편 빌헬름은 <독일 전설>(1816~1818)을 편찬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에다의 주석본 작업을 하고(1815), 방대한 독일어 사전을 편찬했으며(1854), 그 유명한 <그림 동화>(1812~15) 전집을 펴냈다.
게다가 야코프는 게르만 신화에 관한 최초의 백과사전적 집성으로, 20세기까지 게르만 신화의 공인된 원전으로 남게 된 <독일 신화 Deutsche Mysthologie> 네 권을 펴냈다. 이 책은 현학적일 정도로 엄밀하고 철저하게 여러 장에서 온갖 이교 신을 다루면서 어원학적 분석을 통해 그 신들을 인도-유럽의 다른 신들과 연관 짓고 있다. 이런 작업과 더불어 '숲', '샘', '산' 등에 대한 또 다른 논의가 아주 적극적으로 개진되고 있는데, 여기서 야코프는 환경이 신화의 내용을 틀 짓고 아울러 민족의 성격을 형성한다는 헤르더의 관점을 따라, 옛 신화들을 독일의 특유한 풍광과 연결 지었다.
이어서 야코프는 분명 틀에 박힌 종교적 감수성을 자극했을만한 그런 입장을 취해,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땅-신화-와-민족(land-myth-and-Volk) 이라는 집합체를 흩어놓았다고 주장했다. 토착 전통이 외부에서 들어온 것들의 압력에 굴복했고, 그것은 그 민족을 그들의 과거는 물론 그들이 태어난 땅과 맺고 있던 관계로부터 단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는 것이다. 대체로 건조하던 야코프의 문투는 이 과정을 묘사하는 대목에서 격정적으로 변한다. 그의 연구는 무엇보다도 기독교가 말살하고자 했던 모든 전통을 회복하고 그것을 다시금 친숙하게 만듦으로써 그 과정을 전복하고자 하는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림 형제는 리하르트 바그너에게 대단히 존경을 받았는데, 바그너는 학문이 아닌 예술을 통해 역시 신화와 민족을 다시 연결 짓고자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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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이어바흐의 가장 중요한 저작인 <기독교의 본질>은, 제목이 말해주듯이, 헤겔 좌파적 관점에서 기독교를 비판적으로 분석한 것이다. 그런데 한 장은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을 다루고 있어서 눈에 띈다. 바로 '유대교에서 창조의 의의' 라는 제목의 11장이다. 여기서 포이어바흐는 유대인의 심성과 그리스인의 심성을 날카롭게 구조적으로 대조시키고, 그 차이의 연원을 그들의 상이한 창조 신화에서 찾는다. 예를 들어 유대교의 경전은 신이 자연을 인간이 이용할 수 있는 대상으로 창조했다고 하는 반면, 그리스인들은 자연을 신들과 동일시했으며, 경외 속에서 자연과 신들에 대해 숙고했다. 이런 기본적인 가정들의 결과, 그리스인들은 미학적·이론적 감수성을 지니게 되어 예술과 과학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반면 유대인들은 자연을 착취하고 거시어 이익을 얻는 데만 관심이 있는 실질적이고 실용적인 민족이 되었다. 더군다나 포이어바흐의 논의 전체에서 관건이 되는 용어는 "이기주의"로서, 그는 이 말을 무려 스물한 번이나, 그리고 매번 유대인들의 특성을 지칭하기 위해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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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그너는 포이어바흐를 읽으면서 이기주의라는 주제를 포착했고, <미래의 예술 작품>에서 그것을 코드화된 준거로 삼았다. 민족의 적들을 부르주아 압제자에다 부르주아 '이기주의자들'로 만들면서, 그는 그들을 유대인과 동일시할 수 있었다. 이 글에서는 그의 반-셈족주의가 그래도 모호한 편이었다. 그러나 같은 시기에 그가 반격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익명으로 발표했지만 별 소용이 없었던 다른 글은 전혀 모호하지 않았다. 그 글은 <음악에서 유대교>로, 여기서 그는 세 가지 두드러진 주장을 펼쳤다. 첫 번째 주장은 가장 저속한 형태의 반-셈족주의에서 비롯된 것으로, 유대인을 도저히 부인할 수 없는 신체적 타자로, 그저 다를 뿐만 아니라 골상학적으로 볼 때도 본능적으로 불쾌한 타자로 규정했다. 두 번째 주장은 헤르더에 근거한 것으로, 유대인은 그들 자신의 언어를 가지고 있지 않으며, 그들이 쓰는 이디시어는 게르만어의 변질되고 타락한 형태라는 견해에서 비롯된다. 다른 이들에게는, 언어의 이러한 결핍은 (게다가 고향도 없는) 유대인이 진정한 민족이 아님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바그너는 자신만의 편견에 빠져서 새로운 방향으로 분석을 진행시켰다. 그는 노래가 발화의 가장 고귀한 형식이며 모든 음악의 기본이라고 단언하면서, 이어서 언어의 존재가 음악이나 시의 전제 조건이 되기 때문에 유대인은 어떤 음악이나 시도 만들어낼 수 없다고 주장했다. 셋째로, 그는 유대인이 혹시라도 음악과 맺을 수 있는 유일한 관계는 그것을 소비하는 능력에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다. 고리대금업을 통해 어마어마한 부를 축적했기에 그들은 이제 남들이 창조한 음악을 자기들을 위한 사치품으로 사들일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다시 한 번 자신들을 이방인으로, 심지어 민족에 반대되는 이방인으로 드러내면서, 음악과 문화의 세계까지 지배하려 한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은 <미래의 예술 작품>의 좀 더 확장된 논의를 통해 심화되었다. 이 글에서 바그너는 근대의 병폐를 문화적 데카당스의 과정과 연관시켰다. 헤르더에게서 이론적 가설을 취한 웅장한 역사적 서사를 통해, 그는 민족들이 본래 친족 관계에 기초한 공동체, 즉 전설과 의례적 축제 속에 그들의 혈통과 고향에 대한 지식을 보존하고 있던 공동체라고 설명했다. 이후 부족들이 민족을 이루게 되면서 그들은 더 웅장하고 효과적인 신화와 의례를 고안해냈으며, 이를 통해 더 대규모로 널리 퍼져 있는 사람들을 고무하고 통합했다. 그 가장 뛰어난 예는 그리스 비극으로, 거기서 신화는 공동체 전체가 함께 참가하고 누리는 심미적 산물이었다. 하지만 그리스 비극을 정점으로 그후에는 이런 예술적 능력이 약화되었는데, 특히 사치와 이기주의가 문화적 삶을 철저히 타락시킨 근대에는 그 정도가 더욱 심했다. 바그너가 예언자적이고 메시아적인 열정을 가지고 선언한 해결 방법은 고대 그리스의 예술과 같은 예술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음악, 시, 무용, 웅장한 극예술, 조소, 건축을 통합할 하나의 종합예술 작품(Gesamtkunstwerk)이었다. 게다가 그것은 그 자체로 민족의 목소리이자 민족의 산물로서, 모든 이기주의를 무너뜨릴 예술이었다. "마침내 우리가 민족이 필연적으로 미래의 예술가여야 함을 증명한 것이라면, 우리는 이제 이 사실을 알게 된 요즘 예술가들의 지적 이기주의가 모욕감에 치를 떨며 터져 나오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들은 개인의 절대적 이기주의가 하나의 종교로 고양된 시대 이전에 있었던 민족적 혈연-형제애의 나날들 - 즉 우리 역사가들이 신화와 전설의 시대라고 간주한 나날들 - 에는, 민족이 진정 유일한 시인이자 유일한 예술가였다는 사실을 완전히 잊고 있다."

바그너가 초기 저술들에서 주로 게르만 민족에 대해서 언급하긴 했지만, 그가 <비벨룽겐>에서 그들의 기원을 아시아까지 소급해갔다는 사실은 그가 게르만족을 아리아 디아스포라의 일부로 이해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이점은 인종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연구인 <인종 불평등론>의 저자로서, 바그너가 1878년에 처음 만나게 된 아르튀르, 콩트 드 고비노와 우정을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되었다. 당시에 고비노의 인종론은 독일에서 잘 알려져 있는 편이 아니었는데, 바그너는 그의 이론을 열심히 수용하여 고비노의 염세적인 면은 약화시키고 반-셈족주의적인 견해는 강화시켰다. 고비노의 인종론은 이렇게 수정된 형태로 바그너 주변의 바이로이트 사람들에게 추종되었다. 그중에는 <바이로이트 신문> 편집장 루트비히 셰만과 바그너의 사위이자 나치 이데올로기를 발전시키는 데 기초가 된 <19세기의 토대>의 저자 휴스턴 스튜어트 체임벌린도 있었다. 말년에 바그너는 고비노의 용어를 빌려, 수십 년 동안 자신이 견지해온 관점을 개괄했다. 1881년 5월 16일, 베를린에서 <니벨룽의 반지>를 초연한 후 바그너가 바이에른의 루트비히 2세에게 쓴 편지가 바로 그것인데, 이 편지는 온통 자기 공치사와 인종주의적 오만, 그리고 현학으로 얼룩져 있다.
"<니벨룽의 반지>는 의심할 바 없이 아리아족의 특징을 가장 잘 보여주는 예술 작품입니다. 아리아족만큼 자신의 기원과 기질을 그렇게 명확히 인식한 민족은 세상에 없지요. 이들은 아시아 북부에서 유래했으며 유럽 문화에 가장 늦게 진입하였고, 그때까지는 다른 모든 백인 종족보다 그 순수성을 더 잘 보존해왔습니다. 이런 훌륭한 작품의 성공을 목도하면서 우리들 가운데 누군가는 커다란 희망을 느낄 수 있을 겁니다!"

<니벨룽의 반지>가 바이로이트에서 초연된 뒤 프리드리히 니체는 바그너와 완전히 절연했다. 하지만 그가 초기에 바그너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니체가 바그너의 이론을 자신의 출발점으로 삼으면서 신화라는 테마를 가장 뚜렷하게 다룬 것은 초기 저작들에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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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비극의 기원을 서술하면서 그가 살았던 시대의 문화와 정치에 관해 언급했듯이, 비극의 소멸을 이야기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의 생각에, 비극을 소멸시킨 악당은 다름 아닌 소크라테스였다. 니체는 소크라테스가 예술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과학 정신, 영감에 고취된 시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신랄한 탐구, 열정에 반하는 것으로서의 합리성에 책임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기원전 5세기 말에 이르러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이러한 가치들이 우세해짐에 따라, 그것들은 신화를 무력화하고 따라서 음악에도 손상을 입혔다는 것이다. 비극은 종말을 고하고, 다른 저급한 문화 형식들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니체가 문제 삼았듯이 소크라테스라는 인물은 분명히 과도한 영향을 미쳤고, 사람들의 많은 특징, 성향, 행동, 유형을 좌우했는데, 니체는 이 모든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합리성, 낙관주의 그리고 일방적인 아폴론주의가 바로 그런 것들이었다. 더 나아가 그는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알렉산드리아와 로마, 그리고 소크라테스를 핵심적인 성인이자 영웅 중 하나로 떠받들었던 프랑스 계몽주의와 은연중에 연관시켰다.
니체는 이런 연관성들 중 일부를 초기 낭만주의, 특히 프리드리히 슐레겔과 아우구스트 슐레겔의 글에서 받아들였지만, 그 밖의 것들은 니체 자신의 생각이었다. 니체 자신의 생각은 <비극의 탄생>에도 얼마간 녹아들어 있지만, 그가 바젤에 있는 자유학문협회에서 1870년 1월 1일에 행한 <소크라테스와 비극>이라는 제목의 초기 강연에서 더 두드러지게 나타난다. 여기서 그는 그의 첫 번째 책인 <비극의 탄생>에 담기게 될 많은 주장을 미리 선보였다. 하지만 그가 상당히 더 나아가게 된 결정적인 시점은 바로 바그너의 망상에 호응하면서, 소크라테스의 철학을 '현대 유대인 언론'과 동일시하고, 그것을 위대한 비극 예술의 주적으로 간주했을 때였다. 이는 적절함의 한도를 넘어섰고 격렬한 비판을 초래했다. 바그너는 니체의 주장을 지지하긴 했지만, 자신을 숭배하는 이 젊은이에게 편지를 써서 공적으로 견해를 발표할 때는 좀 더 신중해질 것을 권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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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고전 문헌학 분야에서 학문적 훈련을 받았다. 그 결과 그는 인도-유럽 언어와 신화 연구에 정통하게 되었다. 그가 알거나 탐독했던 이들 중에는 아달베르트 쿤(Adalbert Kuhn)이 있었다. 쿤은 독일에서 '비교신화학'의 가장 영향력 있는 주창자로서, <비교 언어학 잡지>의 발행인이자, 인도-유럽어 연구를 개척한 사람이었다. 주저인 <불 훔치기와 신의 음료>에서 쿤은 '아리아' 신화 하나를 재구성했는데, 그 신화의 주인공은 신들로부터 무언가를 훔쳐 그것을 필요로 하는 인간에게 전해줌으로써 천상과 지상을 매개했다. 주인공이 훔쳐다준 선물은 때로는 문명의 필수 도군인 불이었고, 때로는 불사의 음료였다. 그는 불사의 음료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인도와 스칸디나비아에서 가장 많이 찾아냈다. 불에 관한 이야기는 프로메테우스 신화에서 전형적으로 나타나는데, 쿤은 허울만 그럴듯했기에 오랫동안 버려져있던 비교언어학을 바탕으로 프로메테우스가 궁극적으로 아리아족에서 기원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모든 경우에 그는 이런 신화들이 자연현상, 무엇보다도 생명 유지에 필요한 물과 불을 천상에서 땅으로 쏟아붓는 격렬한 천둥에 대한 우의화된 설명이라고 해석했다.
니체는 초기 미발표 원고들에서 경멸적으로 언급한 것에서도 볼 수 있듯이, 니체는 그리스신화를 우의적으로 해석하는 일에는 거의 관심이 없었다. 하지만 그는 - 바그너, 괴테, 그리고 다른 낭만주의자들과 마찬가지로 - 창조적이고 반항적이며 불경한 천재 프로메테우스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1869년 11월, 그는 <불 훔치기>와 인도-유럽 신화 및 언어에 대한 그 밖의 많은 책을 바젤도서관에서 빌렸다. 그중에는 벨커의 <그리스신화학>도 있었는데, 이 책은 쿤의 관점을 확장하여 '아리아'의 프로메테우스와 '히브리'의 타락 신화를 대조한 것이었다.
이것은 니체가 바그너와 관련된 내용을 첨가하기 전에 쓴 <비극의 탄생> 원본의 일부인 §9의 배경이 되었다. 이 장에서 니체는 자신의 초점을 그리스 문명 내부의 아폴론적인 것과 디오뉘소스적인 것 사이의 대립으로부터 그리스인들과 그들에 반대되는 타자들 사이의 대립으로 옮겨갔다.
프로메테우스 이야기는 모든 아리아 민족사회의 근원적 재산이며, 심오한 비극성에 대한 그들의 천부적 재능의 증거다. 실로 원죄 신화가 셈족의 특성을 규정하는 의의를 가지는 것처럼 프로메테우스 신화가 아리아족의 특성을 규정하는 의의를 지니거나, 두 신화 사이에 남매간 같은 관계가 존재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비극의 탄생 §9 70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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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는 후기 삶과 저작들에서 바그너의 경배할만한 바이로이트 극장 설립에서 저속한 반-셈족주의와 편협한 쇼비니즘을 감지하고는 혼란에 빠졌다. 따라서 <도덕의 계보> 첫 권과 같은 저작들에서 그는 기존의 아리아족과 셈족의 대조를 더 이상 단순하게 그리스인과 유대인의 대조를 반영하는 것이 아니게끔 재조정했다. 대신 그것은 이제 그리스인과 기독교인의 대립으로 마무리 되었고, 기독교는 유대교의 혐오스러운 모든 요소가 극단화된 형태로 나타난 것으로 취급되었다.
신화 이론화하기, 107~123p, 브루스 링컨
나는 니체의 모든 글에서 가장 악명 높은 말-"금발의 야수 the blond beast"-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이 말은 총 다섯 번, 즉 <도덕의 계보>(1886)에 네 번, <우상의 황혼>(1888)에 한 번 등장한다. 금발의 야수는 니체가 고대 전사 귀족의 유형을 서술하는 단락에서 처음 등장하는데, 여기서 고대 전사는 그들이(혹은 니체가) 더 열등하다고 간주한 민족들을 향한 행동에서,
고삐 풀린 맹수보다 더 나을 것이 없다. 거기서 그들은 모든 사회적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음미하며, 사회의 평화 속에 오랫동안 감금되고 폐쇄되어 생긴 긴장을 황야에서 풀며 보상받고자 한다. 그들은 소름 끼치는 일련의 살인, 방화, 강간, 고문으로 유쾌해지고 영혼의 평정을 찾는 의기양양한 괴물처럼 순전한 맹수의 심성으로 되돌아간다. 그것은 마치 학생들의 장난질처럼 저질러지며, 그들은 자신들이 시인들에게 훨씬 더 많은 노래와 칭송 거리를 선사했다고 확신한다. 이러한 모든 고귀한 종족의 밑바닥에서 맹수, 즉 먹잇감과 승리를 갈구하며 어슬렁대는 눈부신 금발의 야수를 놓쳐서는 안 된다. 이런 숨겨진 본성은 때때로 분출될 필요가 있으며, 짐승은 다시 풀려나 황야로 되돌아가야 한다. 로마, 아라비아, 게르만, 일본의 귀족계급, 호메로스의 영웅들, 스칸디나비아의 바이킹들-그들은 모두 이런 욕구를 가지고 있다. 고귀한 종족이란 그들이 가는 곳마다 '야만인'이라는 개념을 자취로 남겨놓은 자들이다.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40~41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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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도덕의 계보>에서 니체는 국가의 기원을 "수적으로는 어마어마하게 우세하겠지만 여전히 특정한 형태 없이 유랑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주저 없이 무서운 발톱을 들이대는, 전투적으로 조직되었고 전투적 조직력이 있는 금발의 맹수 무리, 정복자이며 지배자인 종족"에서 찾는다. 하지만 모든 작용에는 반작용이 있게 마련이다. 전사 귀족들이 '나쁘다'고 여기던 약한/미천한 하층민들이 원한으로 가득차면, 하층민들은 그들 자신과 그들 특유의 겸손하고 소심한 태도에 '선하다'는 말을 쓰고, 압제자들을 '사악하다'고 규정함으로써 형세를 역전시킨다. 도덕적 담론의 이러한 혁명을 통해 그들은 귀족 종족들을 깎아내리고 길들였다. 니체는 이런 식의 가치 재규정을 문화의 기초로 인정하면서도, 그것은 커다란 불행이었다고 비난했다.
이들 보복을 갈구하는 포악한 본능의 소유자들, 유럽이나 비유럽 모든 노예의 후예, 특히 모든 선-아리아 종족들의 후예, 그들은 인류의 퇴보를 나타낸다! 이러한 '문화의 도구'는 인류의 치욕이며, 오히려 '문화' 일반에 대한 비난이자 반론이다! 사람들이 고귀한 종족의 핵심에 있는 금발의 야수에 대한 공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경계하게 되는 것도 당연한 일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두려워하지 않는 대신 영원히 불구에, 왜소하고, 쇠약하고, 중독된 자의 구역질 나는 모습에서 벗어날 수 없다면, 차라리 경탄하면서 두려움을 맛보는 것이 백 배 낫지 않을까? 그리고 그것이 우리의 운명 아닌가?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43p
이 폭언들에서 엄밀한 명제적 일관성을 기대하는 것은 너무 무리한 요구일지도 모른다. 니체의 폭언들은 적나라한 폭로라기보다는 논쟁적인 도발이며, 니체의 표현을 빌리자면 육중한 흉기, 또는 "망치 들고 철학하기"다. 그래도 몇 가지는 분명하다. 첫쨰, 금발의 야수라는 말은 하나의 특정한 종족이 아니라 각각의 다수의 고귀한 정복자 종족을 포괄하는 범주로서 특권적인 인간 유형을 지칭한다. 둘째, 여기서 고대 아리아족이 특별히 중요하기는 하지만, 그들이 이러한 유형의 유일한 예인 것은 아니다. (...) 니체가 이미 초기 저작들부터 이 용어를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는 금발의 야수에 아랍인과 일본인도 포함되도록 이 범주를 신중하게 해석했으며, 따라서 그것은 순전한 인종적 실체보다는 범위가 넓고, 특정한 체형보다는 특징적인 기질과 행동 양태에 의해 정의된 범주였다. 하지만 그가 제시한 비-아리아족의 두 가지 예인 아랍인과 일본인은 이 정도 역할만 하고는 텍스트에서 자취를 감춘 채 더 이상 고려 대상이 되지 않는다. 대신 그는 그리스인과 게르만족, 특히 후자에 온통 집중하여 상세한 논의를 진행했다. 셋째, 니체는 사나운 금발의 야수 민족들을 그들의 다소 애처로운 후손들로부터 분리시키는 역사적 단절을 가정했다. 이런 방침에 따라 그는 고대 게르만인과 현대 독일인을 각각 게르만족(die Germane)과 독일인(die Deutschen)으로 지칭함으로써 양자를 뚜렷이 구분했는데, 이 구분은 다른 언어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종종 지워지고는 한다. 넷째, 국가는 금발의 야수들에 의해 폭력적인 과정을 거쳐 창조된 불안정한 실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다시피 지금 국가는 문화보다는 더 나은 것으로 남았다. 마지막으로, 도덕을 교정하고 문화를 건설함으로써 정복자들에게 복수한 피정복 민족들은 셈족만이 아닌, 선-아리아 종족들로 규정된다.

금발의 야수에는 화려하고 유감스러우면서도 전적으로 무의미하고 수사적인 제스처 이상의 무엇이 있다. 오늘날 니체를 비판적 사고의 모범이자 아이콘으로 삼는 이들은 일반적으로 무시하지만, 금발의 야수는 니체의 후기 저작들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고, 1945년까지 나치 이데올로기 신봉자들에게 상당한 호감을 샀다. 포스트모던의 유행에 따라 니체가 부각되면서 영어권에서 주로 월터 카우프만(Walter Kaufmann)이 짊어졌던 과제, 즉 전쟁 이후 니체의 명성을 구해내기 위해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을 들였는지를 기억하는 이는 많지 않다. 카우프만은 고압적인 투로 이렇게 단언했다. "금발의 야수는 인종적 개념이 아니며, 나중에 나치가 지나치게 주장했던 것처럼 북유럽 인종을 지칭하지도 않는다. 니체는 고대 튜턴 종족들에 대한 것 못지않게 아랍인과 일본인, 로마인과 그리스인에 대해 명확히 언급했으며, 이때 그는 이 악명 높은 용어를 처음으로 소개했다. 여기서 금발이라는 것은 인간을 지칭한다기보다는 야수나 사자를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4]
이후 개정판에서 카우프만은 금발의 야수라는 말이 무해하다고 확언하면서, "악명 높은"이라는 표현을 삭제했다. 만약 문제의 "금발"이라는 말이 단지 사자를 지칭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나치주의자들과 그 밖의 사람들이 인종이라는 말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 니체의 글을 함부로 해석한 것이라고-그것은 니체의 논점이 아니라 그들의 논점이었다고-결론지을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금발이 사자를 의미한다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다. 니체는 금발이 무엇을 의미하고, 누가 거기에 속하는지에 대해 상당히 명확했다. 일찍이 <도덕의 계보>에서 금발의 야수가 등장하는 대목의(I § 11) 몇 단락 앞에서(I § 5) 니체는 "금발의 아리아 정복 종족"에 대해 언급하면서 몇 가지 어원학적 방식을 써서, 그것이 언어학적으로 모호하다는 점을 드러냈다.
라틴어 말루스malus[나쁜](이 말 옆에 나는 멜라스melas[검은]라는 말을 두겠다)라는 말에서 평민은 피부색이 짙은, 특히 머리색이 검은 사람들로, 지배자가 된 금발의 아리아 정복민과는 피부색으로 아주 분명하게 구별되는 이탈리아 땅의 선-아리아 거주민으로 특징지을 수 있다. 어쨌든 게일어는 우리에게 이에 정확히 상응하는 경우를 제공한다. (예를 들어 핀-갈 Fin-Gal 이라는 이름에서) 핀fin은 귀족을 나타내는 품위 있는 말로, 짙고 검은 머리의 원주민들과는 반대로, 선하고 고결하고 순수 혈통인 사람을, 원래 금발인 사람을 의미했다. 그런데 켈트족은 완전한 금발의 종족이었다. 그러므로 좀 더 정밀한 독일의 민족지 지도에서 나타나는 본래 검은 머리색을 지닌 사람들의 분포를 비르코프virchow가 주장하듯, 켈트족이라는 연원이나 혈통의 혼합과 연관 짓는 것은 맞지 않다. 오히려 이 지역들에서 나타나는 검은 머리의 사람들은 독일의 선-아리아 민족이라고 할 수 있다. 이는 거의 유럽 전역에서도 마찬가지다. 피지배 종족이 점차 피부색과 짧은 두개골에 있어서, 또한 아마 지적으로나 사회적인 직관에 있어서도 다시금 우세한 지위를 회복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 누가 말할 수 있겠는가? 현대의 민주주의, 더 현대적인 아나키즘과 특히 현재 유럽의 모든 사회주의자들이 공감하는 '코뮌commune'에 대한, 가장 원시적 사회형태에 대한 지향이 엄청난 반격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고(또 정복자이며 지배 종족인 아리아족이 생리학적으로도 굴복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고.)
프리드리히 니체, 도덕의 계보 30~31p
이 단락에서 니체는 두 가지 빈약하고 오도된 "증거" - 음운학적으로 불가능함에도 불구하고 라틴어 말루스('나쁜')를 그리스어 멜라스('검은')와 결부시켰고, 아일랜드어 핀finn을 '깨끗한, 눈부신, 빛나는'이 아니라 편협하게 '금발'로 번역했다 - 를 아주 광범위한 몇몇 결론의 근거로 사용했다. 외면상으로는 이 빈약한 근거 위에서 그가 금발 머리를 아리아족 정복자들 및 도덕적으로 선한 것에 등치시키고, 검은 머리를 그 반대의 것들, 즉 셈족이 아닌 불특정한 종류의 혐오스러운 선-아리아 종족들과 등치시킨 것으로 보인다. 위에 인용한 단락의 마지막 문장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완곡하게 슬쩍 괄호가 쳐져 있기는 하지만, 이 문장은 니체가 혐오했던 민주주의, 아나키즘, 사회주의 공산주의 등의 정치 운동들에 대한 그의 인종주의적 재해석을 담고 있다. 그는 이런 모든 정치 운동이 짧은 두개골에 검은 머리를 지닌 선-아리아 종족들의 복수라고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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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의 계보>을 탈고하고 나서 몇 달 후, 니체는 고대 인도의 윤리, 종교, 사회구조에 관한 <마누법전>을 발견하고 대단히 흥미를 느꼈다. 1888년 페터 가스트에게 쓴 편지를 보면 니체는 매우 열광하고 있다.
나는 요 몇 주 동안 아주 중요한 것을 배웠다네, 가장 탁월한 사제들과 학자들의 엄격한 감독 아래 인도에서 작성된 <마누법전>의 불어 번역본을 발견했지. 아리아인들의 것임이 분명한 이 책은 베다에 근거한 도덕성에 관한 성직자들의 사본으로, 카스트 관념과 아주 오래된 고대의 전통에 기반하고 있는데(매우 성직자풍이면서도 염세적이지 않은) 가장 탁월한 방식으로 종교에 대한 나의 관점을 보충해준다네. 고백하건대 우리가 지닌 도덕적 입법이라고 하는 것 등의 모든 것이, 내게는 <마누법전>의 모방이나 캐리커처에 불과한 것으로 보인다네. 이집트학이 분명히 그렇지 않은가. 플라톤조차 내게는 모든 주요 요점에 있어서 단지 한 사람의 브라만에 교육을 잘 받은 것에 불과해 보인다네. 그 책은 유대인들을, 한 명의 사제 카스트가 한 민족을 조직하는 지도자가 되게 해주는 원리들을 그 지도자들에게서 배우는 찬달라Chandala무리처럼 보이게 만든다네.
아나클레토 베레치아와 크리스티아노 그로타넬리가 확인해주었듯이, 니체가 수중에 넣었던 프랑스어 번역본은 루이 자콜리오의 1876년판이다. 윌리엄 존스 경의 최초 번역본(1794)이나 이후의 모든 번역본과 대조적으로, 이 특이한 번역본은 산스크리트어 원전이 아닌 타밀어 원전에 기초한 것이었다. 자콜리오는 (그가 배운 인도 남부 지방 선생들을 따라) 타밀어 원전이 가장 오래되고 믿을만하다고 오해했으며, 그의 풍부한 주석들도 여러 단계에 걸쳐 터무니없이 특이한 주장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예를 들어 그는 인도 고유의 종교와 문화를 이상화하면서, 카스트제도는 부산물일 뿐이라고 보았다. 그가 보기에, 카스트를 구성하는 담론과 실천이란 브라만들에 의해 조장된 것이고, 브라만들이 시민 생활, 정치 그리고 종교 생활의 방향을 설정하는 수단이었다. 카스트제도의 희생양이 된 이들과 관련하여, 니체는 누구보다도 큰 고통을 받은 것은 산스크리트어로 '찬달라'라 불리던 최하층의 부랑자 천민들이었으며, 그들 중 많은 수가 북쪽이나 서쪽으로 이주함으로써 스스로를 그 억압적 상황에서 구출하고자 했다고 주장했다. 그리하여 다양한 찬달라 집단이 메소포타미아에 정착하게 되었고, 거기서 그들은 바빌로니아인들과 칼데아인들의, 그리고 칼데아에서 다시 이스라엘로 이주한 히브리인들을 포함해 '셈족'이라고 잘못 불린 모든 사람의 선조가 되었다는 것이다. "공인된 학문이 셈족이라 부르는 이들"과 관련해 자콜리오는 이들을 곧잘 "인도-아시아" 민족으로 간주하고는 했다. 그는 전 세계 사람이 인도에서 유래했는데, 그중에서도 서쪽 사람들(이집트인들과 유럽인들)은 좀 더 높은 카스트 계급에서 유래했다고 보았으며, 그들에게 그는 "인도-유럽인들"이라는 호칭을 붙였다. 자콜리오가 인도의 찬달라들에게 동정을 보이긴 했지만, 국외로 추방된 그들의 후손들에 대한 그의 태도는 훨씬 더 가식적인 겸손함을 띠었고, 심지어 종종 경멸적이기까지 했다. 이 점은 그들의 종교에 대한 자콜리오의 다음과 같은 표현에서 가장 확연히 드러난다. "이른바 셈족은 그들 스스로가 너무나도 이주민인 찬달라 노예들다워서 결코 모국에서 가져온 저급한 관념들 이상으로 성장할 수 없었다. 무지한 찬달라들은 평민에게도 개방되었던 힌두교식 숭배의 겉모습만 보아왔을 뿐이었다. 칼데아인들과 그 후손들에게는, 그들이 한때 브라만의 철학적이고 영적인 믿음 위에서 길러졌다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았다."

자콜리오의 견해에 근거하기는 했지만, 니체는 이를 상당 부분 수정하여, 격렬한 원한을 찬달라 계급과 그 후손들의 탓으로 돌린 후, 두 종류의 도덕적 구상을 구분해갔다. 그는 그 두 가지 모두를 카스트제도와 관련지었다. 그증 첫 번째 것을 그는 "양육"이라 불렀으며, 이것을 <마누법전>에 의해 수행된 과업, 즉 네 계급으로 나뉜 카스트 및 찬달라 계급에게 강제되는 복종을 위한 인간 주체들의 교화라고 보았다. 그는 두 번째 것을 "길들이기"라고 불렀고, 이것을 원한에 찬 찬달라 계급의 반응, 특히 그들이 스스로 만든 체제 속에서 사제가 되었을 때의 반응과 관련지었다. 인도의 자료들은 대체로 무시하고, 자료에 대한 인도인들의 입장에는 그다지 관심을 쏟지 않은 채, 니체는 이 자료들을 다른 예에 적용하기 위해 자콜리오의 기묘한 관점들을 전유했다. 그 예란 바로 (그가 상상한) 중세 사제들(칼데아인들의 후손인, 그래서 결국엔 찬달라 계급의 후손인 유대인들, 그 유대인들의 후손인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고대 게르만인들의 정신을 파괴했는가 하는 점이었다.
어떤 짐승을 길들이는 것을 그 짐승의 '개선'이라고 부르는 것은 우리의 귀에는 거의 농담처럼 들린다. 동물원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아는 사람이라면 그곳에서 야수들이 '개선되고 있다'고 믿지는 않을 것이다. 그 야수들은 유약하고 덜 위험스럽게 만들어지며, 침울한 공포감과 고통에, 상처와 배고픔에 병든 야수가 되어버린다. (성직자가 '개선시켜' 길들여진 인간의 경우에도 사정은 다르지 않다. 실제로 교회가 다름 아닌 동물원이었던 중세 초기에, 사람들은 어디서나 '금발의 야수'의 가장 그럴듯한 표본을 찾아 사냥을 했다.) 예를 들어 그들은 고귀한 튜턴족 게르만인을 '개선시켰다'. 그런데 그렇게 '개선되고', 수도원으로 유혹되었던 튜턴족의 나중 모습은 어떠했던가? 인간의 희화화이자 실패작과도 같았다. 그들은 '죄인'이 되어버렸고, 우리에 갇혔으며, 사람들은 그들을 완전히 끔찍한 개념들 속에 가두어버렸다.
프리드리히 니체, Twilight of th Idols, "The 'Improvers' of Mankind" 66~67p
니체가 끔찍하다고 생각한 이 경우들과 비교하면, <마누법전>의 '양육' 체계가 훨씬 낫다. "여기서 명백한 것은 우리가 더 이상 조련사들 사이에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런 종류의 양육에 대한 계획을 구상하기 위해서는 백배나 더 온화하고 이성적인 종류의 인간이 전제되어야 한다. 기독교의 매캐한 지하 감옥 같은 대기에서 빠져나와 이런 더 건강하고, 더 높고, 더 넓은 세계로 진입하면서 우리는 안도의 숨을 쉬게 된다. <마누법전>에 비하면 신약성서라는 것은 얼마나 보잘것없으며 얼마나 악취를 풍기는가!" 이것으로도 성에 차지 않았는지, 니체는 자신의 관점을 좀 더 확실하게 표현한다. 즉 <마누법전>이 "아리아족의 너무나도 순수하고 너무나도 원초적인 인간성"의 체계인데 반해, "유대인의 뿌리에서 자라났으며 그런 토양의 산물로서만 이해할 수 있는 기독교는 양육의 도덕성, 종족의 도덕성, 특권의 도덕성에 맞서는 대응을 나타낸다. 발군의 반-아리아적 종교인 기독교는, 모든 아리아적 가치의 평가절하이고, 찬달라적 가치의 승리이며, 가난하고 미천한 자들에게 설교되는 복음이자, 짓밟히고, 비천하고, 조잡하고 특권 없는 모든 것들이 '아리아족'에 맞서는 집단 폭동으로서, 사랑의 종교로서의 찬달라의 영원한 복수다." 그리하여 금발의 야수에 관한 담론 속에서 기독교인과 아리아족의 대립으로 절정에 이르는, 구조화되고 편협한 대조 관계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상징적 우주가 구성된다. 여기서 유대교는 불완전하고, 덜 강력하고, 덜 위험한 예비 단계의 기독교로 규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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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령 우리가 금발의 야수에 관한 니체의 언급들이 나치가 생각한 것만큼 판에 박힌 반-셈족주의를 보여준 것은 아니라고 결론지을 수 있다 해도, 이 덕분에 금발에 대한 그의 논의가 순수해지는 것은 결코 아니다. 한 중요한 글에서 데틀레프 브레네케는 금발의 야수는 진짜로 사자를 지칭하는 것이며 따라서 니체는 잘못이 없다고 보는 카우프만의 생각을 왜 받아들일 수 없는지에 대해 몇가지 적절한 이유를 제시했다. 첫째, 19세기 용법으로 금발의blond 라는 독일어 형용사는 사람에게 쓰였지 동물에게는 거의 쓰이지 않았다. 둘째, 금발 머리에, 키가 크고, 야만스런 게르만인의 이미지는 고대부터 깊이 뿌리박혀 있던 통념이며, 니체와 그의 동시대인들에게 그런 식으로 널리 인식되고 있었다.
신화 이론화하기, 177~193p, 브루스 링컨
  • 주세페 마치니 - 이탈리아 리소르지멘토 운동의 급진파로, 자코뱅주의적인 좌익 포퓰리즘, 낭만주의, 공화주의, 민족주의 성향을 가졌으며, 공리주의와, 물질주의, 개인주의, 자유주의를 비판했다. 공리주의와 자유 경쟁과 사회주의를 낳는 일체의 “권리의 이론”에 맞서 이른바 “의무의 종교(religione del Dovere)”를 제창하였다. 소위 “권리의 이론”들은 이기심의 표현일 뿐이라고 주장했지만, 그렇다고 권리를 무시한 것은 아니고, 권리를 보장하기 위해서는 일단 의무가 지켜져야 권리도 따라온다는 입장이다.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비판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공산주의에 우호적이지도 않았는데, 공산주의는 물질주의와 무신론적 유물론으로 인하여 인간을 물질적 이해관계로만 보면서, 계급갈등론으로 사회를 분열시키고, 사랑 대신에 증오와 갈등을 부추긴다고 보았다.#
  • 이탈리아 민족주의 협회(Associazione Nazionalista Italiana, ANI)[5] - 무솔리니의 민족파시스트당의 전신
  • 이온 드라구미스 (Ion Dragoumis) - 그리스의 낭만적 민족주의자. 다만 드라구미스 개인은 사회주의자에 가깝지만 nation이 state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는 등 일반적인 좌파와는 괴리감이 있었다.[9]
  • D. H. 로런스 (D. H. Lawrence) - 영국의 문학평론가로 자발성, 생기, 본능, 힘을 강조했다. 노동 운동을 적극 지지하면서도 프랑스 혁명(자유, 평등, 박애)을 세 이빨의 독사라고 부정했다. 그는 성평등을 지지했으며 작품들은 의존적이지 않으며 강인하고 주도적인 여성상을 나타내는 경우가 많았으나 당시 '남성성'으로 표상대는 가치에 깊은 우월감을 가지고 있었다.[10][11]
  • 시온 의정서 - 러시아 제국에서 사회 불만을 유대인에게 돌리기 위해 조작한 문서이다. 유대인 세계 지배 음모론을 주장하였다.

이 외에 고대 그리스의 스파르타, 로마 공화정을 붕괴시키고 독재를 한 율리우스 카이사르 등도 파시즘에 큰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proto-fascism으로 보는 학자들도 있다.

3. 기타

한국의 논문이나 서적 등에서는 proto-fascism을 '원형 파시즘'이라고 번역하는 경우가 많지만 움베르토 에코가 말하는 Ur-fascism도 '원형 파시즘'으로 번역하기 때문에 용어 혼란에 주의해야 한다.[12] 둘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또한 간혹 '유사 파시즘'이라고 번역하는 논문도 있는데 이는 엄밀히 따지면 틀린 번역인게 proto-fascism은 파시즘이 등장하기 이전이나 초기 파시즘 사상에 영향을 준 파시즘과 유사한 (좁은 의미의 파시즘은 아닌) 사상이나 이론, 혹은 사회적 현상을 가리킨다. para-fascism[13]유사 파시즘이라고 번역하는게 더 적절하다.

4. 같이 보기



[1] 여담으로 초기 파시즘은 딱히 인종주의나 제국주의 노선을 추구하진 않았다.[2] 총파업이 혁명의 방법이 아니라, 총파업 그 자체가 혁명의 과정 혹은 유일한 방법이란 뜻이다.[3] Oswald Spengler, The Decline of the West; W. R. Inge, The End of An Age,1949, p.4.[4] Walter Kaufmann, Nitzsche: Philosopher, Psychologist, Antichrist (Princeton, NJ: Princeton University Press, 1950) p.196.[5] Payne, Stanley G. 1996. A History of Fascism, 1914-1945. Routledge.[6] Peter Davies, Derek Lynch. The Routledge Companion to Fascism and the Far Right London, England, UK; New York, New York, USA: Routledge. p. 94.[7] Michael N. Dobkowski, Isidor Wallimann (1989). Radical Perspectives on the Rise of Fascism in Germany, 1919-1945. p. 178[8] Ismael Saz, Zira Box, Toni Morant, Julián Sanz. Reactionary Nationalists, Fascists and Dictatorships in the Twentieth Century: Against Democracy. p. 22[9] state는 단순한 체계로써의 '국가'지만 nation은 민족주의적 의미의 '국가'에 가깝다. 당시 좌익 내셔널리스트들도 nation의 우월성을 주장하는 경우는 드물었다.[10] 이는 모순이라고 보긴 어려운게 쉽게 말해 전통적 보수주의와 가부장주의에는 동의하지 않았지만, 남성과 여성 할 것 없이 능동적이고 주도적이고 가학적인 인간상을 좋아했다고 보면 된다. 좋게 말하면 기존의 (여성이 가지기 힘들다고 여겨진)이상적인 남성상의 우월적 면모로 여겨졌던 것을 여성도 충분히 가질 수 있다고 주장한 것이고 나쁘게 말하자면 남녀 할 것 없이 마초적이고 권위적인 인간상을 낭만적으로 여겼다는 의미다. 이러한 성향 때문에 그가 당대 기준에서는 여성 투표권과 여성의 사회 참여를 적극 지지했음에도 페미니스트들은 로런스를 혐오한다.[11] 비슷한 사례로 고대 스파르타의 여성관이 있다. 스파르타는 소수민족, 장애인, 그 외 약자에게 매우 가혹했지만, 여성을 가정에 종속시켰던 아테네를 비롯한 다른 고대 문명사회와는 당시 기준으로썬 매우 진보적이였고 여성이 적극적으로 사회에 참여하였다.[12] 다만 Ur-fascism의 경우 Eternal Fascism(영원한 파시즘)의 약칭이기 때문에 헷갈릴 일은 적다.[13] 대표적으로 프란시스코 프랑코, 안토니우 드 올리베이라 살라자르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