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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아프리카 공화국/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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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유럽인의 이주 전(~1652년)
2.1. 선사시대~코이산족의 출현2.2. 반투 팽창
3. 네덜란드인들의 정착(1652년~1814년)4. 영국의 개입과 식민지배(1814년~1910년)5. 남아프리카 연방(1910년~1948년)6. 아파르트헤이트(1948년~1994년)
6.1. 아파르트헤이트의 도입기(1948년~1960년)6.2. 공화국 수립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전성기(1960년~1974년)6.3. 아파르트헤이트의 황혼기(1974년~1994년)
7.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1994년~)

1. 개요

현 남아공을 비롯한 남부 아프리카의 변천사를 보여주는 동영상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역사를 서술하는 문서.

2. 유럽인의 이주 전(~1652년)

현재의 남아프리카 공화국에는 유럽인들이 정착하기 전에는 기호학적인 상형문자[1] 등을 제외한다면 체계적인 문자가 존재하지 않았다. 때문에 이 시대의 역사는 구전 역사, 그리고 고고학, 인류학, 언어학적인 영역에서의 연구를 통해 알아낼 수 밖에 없다. 그렇기에 이 시기는 함부로 단정짓기 굉장히 어려운 역사이며, '글자가 없는 문화권은 미개하다'라는 오래된 유럽중심적 편견 때문에 한동안 객관적인 평가가 되지 않기도 했다. 그러나 남아프리카는 인류학적으로 굉장히 중요한 지역이며, 남아프리카가 현대의 모습이 되기까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이때의 부족사회와 유럽인들과 아프리카인들의 사회와 가치관이 어떻게 달랐는지를 이해하지 않으면 곤란하다. 1980~90년대의 한창 아파르트헤이트가 진행되던 때에 출판되던 남아공사 관련 서적들은 이 시기를 두세 페이지 정도로 수박 겉 핥기 수준으로 간략히 설명하고 유럽인의 도착 시기로 넘어가곤 했는데, 최근에는 대체로 옛날 책보다 훨씬 많은 분량을 할애하며 이때의 역사를 설명하고는 한다.

2.1. 선사시대~코이산족의 출현

남아프리카에서는 오스트랄로피테쿠스가 250만년 전 즈음부터 거주했다. 현재 남아프리카 지방은 인류의 진화에서 아주 중요한 지역으로, 현생 인류가 남아프리카에서 살기 시작한 것은 약 12만 5천년 전의 구석기 시대신석기 시대의 전환기부터인 것으로 추정된다. 현 남아공 영토에 정착한 당시의 현생 인류의 DNA는 흔히 '가장 오래된 인류'로 불리고는 하는 현재의 코이산족[2] 사람들에게 남아있다. '코이산'이란 단어는 코이코이족과 산족을 묶어 부르는 명칭인데, 산족은 전통적인 형태의 수렵채집사회를 이뤘으며 코이코이족은 유목 문화를 일구었다.

2.2. 반투 팽창

반투 팽창(Bantu Expansion)이란 반투어족, 즉 반투어군에 속하는 언어를 구사하는 민족들이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 전역으로 퍼져나간 것을 의미한다. 반투어족 사람들은 철기문화와 가축이라는 발달된 기술력으로 위에서 언급된 코이코이족과 산족을 몰아내고 우위를 점할 수 있었다. 이는 인도유럽어족의 팽창처럼 군사적인 정복 및 문화적인 확산과 혼혈이 병행되었으며, 기존 선주민들의 문화를 없애기보다는 느린 시간 동안 동화 및 흡수가 이뤄졌다.[3] 또한 반투어족 사람들의 정치체계와 기술력이 코이산족에게 전해짐과 동시에 많은 반투어군 언어[4]에도 코이산어의 흡착음이 유입되고 반투족은 부계혈통제도, 연령등급제도를 받아들이는 등 문화적, 언어적 상호작용이 존재했다.

여하튼 반투 사람들이 현재 남아공 영토에 당도한 것은 약 6세기 경으로, 반투 사람들은 코이산족을 훨씬 남동쪽으로 밀어낸 뒤 현 남아공 일대를 정복했다. 줄루족, 코사족, 스와티족, 은데벨레족으로 이루어진 응구니인들은 동쪽 해안을 중심으로 거주했으며, 츠와나족, 페디족, 소토족으로 위시되는 소토츠와나족들은 내륙 평원에서 살았으며, 렘바인, 벤다인, 그리고 총가족들은 현 남아공의 북동쪽 지방에서 살았다.

10세기-11세기 경에 이룩된 마풍구브웨 왕국은 현 짐바브웨의 전역, 보츠와나의 일부, 그리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북쪽 끝부분 영토를 차지했다. 마풍구브웨 왕국은 남아프리카의 첫 반투계 국가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었으며, 남쪽의 현 남아공 영토의 반투계 부족들에게도 아주 큰 문화적 영향을 미쳤다. 마풍구브웨 왕국은 남아프리카 전역의 부족들과 무역 관계를 맺었으며, 이 때문에 해당 지역의 반투인들의 정치 체계가 전문화 되었으며 농경과 목축, 교역 등 다양한 경제활동에 활기가 돌아 남아프리카 일대는 큰 문화적 발전을 겪었다. 다만 이 때문에 반투인들은 피그미족이나 산족과 같은 채집 부족이나 수렵 부족을 야만인이라 천시하게 되었고, 피그미들이나 산족은 식량이 부족할 때 반투족들의 농지로 와서 일을 해주고 그 대가로 식량을 얻어갔는데, 시일이 지남에 따라 종속의 정도가 심해져 마치 농노(農奴)와 같은 취급을 받기까지 했다.[출처1] 마풍구브웨 왕국은 동아프리카의 해안 국가들을 통해 인도, 아랍, 그리고 원나라까지 상아를 수출하기도 했다.[출처2] 마풍구브웨 왕국은 지나치게 건조해진 기후 때문에 가뭄이 연달아 들어 인구가 줄다가 13세기에 멸망했고, 짐바브웨 왕국에게 계승되었으며, 짐바브웨 왕국의 전성기에 세워진 그레이트 짐바브웨 같은 문화재는 아직까지도 건재하다. 이후의 짐바브웨의 역사는 그레이트 짐바브웨 문서와 짐바브웨 문서의 역사 문단 참고.

참고로 후에 폐허가 된 그레이트 짐바브웨[7]의 도시유적을 발견한 백인들은 "미개한 흑인들이 이런 걸 건축했을 리가 없어! 분명 백인인 페니키아 상인들이나 아랍 상인, 시바 여왕이 여기 정착해서 흑인들을 부린 것이 분명해!"(...)라는 기묘하기 짝이 없는 주장을 하며 로디지아의 건국을 정당화하는 명분으로 써먹었다.

여담으로 조선시대 초 제작된 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오렌지 강이 표시되었다 하며, 중세 시대 케냐와 탄자니아 스와힐리 해안 지방에서 무역하던 아랍인, 페르시아인들이 이 지역에 대해서 기록한 내용이 원나라로도 전해진 후 지도 제작에 반영된 듯 하다.

3. 네덜란드인들의 정착(1652년~1814년)

남아프리카 지역은 1488년 희망봉의 발견으로 포르투갈인들을 비롯한 유럽인에게 처음 알려졌으나 처음에는 유럽인들은 이 지역에 썩 관심을 보이지는 않았다. 당시 유럽인들의 주된 관심사는 인도향신료였고 이곳은 거기까지 가기 위해 잠깐 들리는 통로였을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네덜란드인들은 처음에는 이곳에 잠깐 정박해서 배를 재정비하고, 현지 아프리카인들에게서 음식을 구매하는 일종의 기지 같은 용도로만 사용했다.
파일:Charles_Bell_-_Jan_van_Riebeeck_se_aankoms_aan_die_Kaap.jpg
얀 판 리베이크가 케이프타운에 도착한 것을 묘사한 그림
이 지역에 최초로 본격적인 정착을 시작한 유럽인들은 17세기 얀 판 리베이크(Jan van Riebeeck)를 따라 정착한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 소속의 네덜란드인들로 대다수가 칼뱅주의 개신교도들이었다. 네덜란드는 동인도 제도와의 무역에 있어 중간보급항 차원에서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개척했고 그 명을 받은 판 리메이크와 그의 일행은 1652년 4월 6일에 남아프리카 땅을 밟았다. 이 시기 해당 지역에 살던 코이코이족은 처음 네덜란드인들과 교류하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물물교환을 위해 먼 길을 갈 필요가 없어져서 굉장히 만족했으나, 점점 많아지는 네덜란드인들의 수에 비해 그들이 만족할 만한 곡식이나 가축을 공급할 기술력이 코이코이족에게는 없었기에 네덜란드인들의 요구를 만족시키기는 불가능해졌고, 후에 네덜란드인들이 코이코이족의 목장을 습격하는 등 불화가 이어지자 코이코이족은 결국 물물교환을 중단했다. 때문에 판 리베이크는 네덜란드에서 더욱 많은 농부들을 모집해왔고, 유럽인들의 농장들이 점점 더 많아져 식민지의 영토는 계속 넓어졌다. 이때 남아프리카에 정착한 농부들의 후손이 후에 설명할 보어인(Boers, 아프리칸스어로 '농부'라는 뜻이며 '부르'라고 발음한다.[8])이 된다.

처음에는 케이프타운의 혹독한 기후와[9] 좀처럼 늘지 않는 인구 때문에 식민지 경영에 어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식민지 통치자들의 지속적인 노력과 위그노들의 합류[10]로 식민지의 규모는 점점 커지게 된다.

또한 동인도 회사가 인도, 인도네시아, 동아프리카, 마다가스카르에서 잡아온 노예들도 인구 증가에 가세했다. 판 리베이크는 현지의 아프리카인들을 노예로 삼는 걸 옳지 못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동인도 회사를 통해 인도인과 자바인 노예들을 잔뜩 들여왔다. 결국엔 몇년 지나지 않아 동인도 회사의 설득에 동의하고 코이코이족, 산족과 계약노예(Indentured servitude) 조약을 반강제로 맺어 노예로 만들어 버리긴 하지만. 이렇게 노예가 된 사람들은 현재의 '케이프 컬러드(Cape Coloureds)'의 조상이 되었으며, 워낙 수가 많았기에 현대의 소위 '백인' 남아공인들도 혈통을 추적하면 이 유색인종 노예들의 혼혈들이 많다고 한다.

4. 영국의 개입과 식민지배(1814년~191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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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뢰국 Puppet State
이라크 왕국 · 이란 제국*
* 소련과의 페르시아 침공 협공으로 점령되어, 영소군 각각이 각 점령지에 주둔하였고 또한 각각의 점령지를 통치하는 분할 통치가 이뤄졌다.
군정 Military Administration
오가덴 · 에리트레아 · 소말릴란드 · 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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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를 점령하기 전, 네덜란드의 식민지는 이미 내륙의 오렌지 강을 경계로 할 정도로 확장해 있었다. 1795년 프랑스가 네덜란드를 점령하자 영국이 이를 빌미로 케이프 식민지를 점령해버렸다. 1803년 네덜란드에게 반환하였다가 1806년 재점령했다. 결국 1814년 런던 협약에 따라 네덜란드는 케이프 식민지를 포기하게 되었고 점차 영국인들은 영국군을 앞세워 정착하기 시작하여 본격적인 식민지화를 시작했다. 네덜란드인들은 이들을 피해 1836~1852년 사이 점점 내륙으로 들어가는 Great Trek이라 불린 대이동[11]을 했다. 이 과정 중에 토착 흑인 부족들과 때로는 싸우고, 때로는 교류도 하면서 점차 자신들을 독립된 민족적 주체로 인식하고 스스로를 보어인, 혹은 아프리카너(Afrikaner)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한편으로는 19세기 초반에 샤카 대왕의 지도 아래 동북부에서 줄루족이 대대적인 정복 전쟁을 펼치고, 1852년과 1854년 영국과 보어인이 샌드리버, 블룸폰테인 협약을 맺으면서 19세기 중엽 무렵에는 케이프타운 일대는 영국의 지배를 받고, 중부에는 트란스발 공화국과 오라녜 자유국을 필두로 한 아프리카너 국가들, 그리고 동부에는 줄루 왕국이 삼파전을 벌이는 형세가 되었다.

줄루 왕국은 치열한 전쟁 끝에 1879년 영국에 정복되었고, 보어인들은 트란스발 공화국, 오라녜 자유국 등을 건국했지만, 남아프리카 지역의 귀금속 채굴권을 둘러싸고 영국과 갈등을 일으킨 끝에 1899년 보어전쟁이 발생한다. 보어인들은 게릴라전과 독일의 물밑지원에 힘입어 영국군을 무던히도 괴롭혔지만[12] 결국 엄청난 병력 차이를 이기지 못하고 1902년 트란스발, 오라녜 연합군이 영국에 패전하면서 영국령으로 넘어갔다.

이 과정에서 보어인의 강력한 저항에 진절머리 난 영국군 역시 무자비한 강경책으로 나서 보어인 마을들을 초토화하고, 강제수용소에다가 보어인들을 수용시켰는데, 2만 8천 명에 가까운 여성과 어린이들이 수용소에서 영양실조와 학대로 죽어 영국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13] 역사학자 골드윈 스미스는 영국이 백년전쟁에서 잔 다르크를 화형시켜 죽인 이래 이처럼 비도덕적인 행위를 한 적이 없다고 비탄하기도.

5. 남아프리카 연방(1910년~1948년)

남아프리카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영국은 이미 노예제도를 폐지한 나라였으나, 네덜란드는 그렇지 않았다. 영국이 남아공을 식민화한 뒤에도 현지의 반발로 인해 법률을 존중해야 했으며 이로 인해 타 영 연방국가와 남아공의 법률 체계는 완전히 달라지게 되었다. 1910년에는 영국의 4개 식민지인 케이프 식민지, 나탈, 트란스발, 오렌지 자유주를 합쳐 내정에 대해 영국과 타 영연방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치령남아프리카 연방(남아연방)이 출범했다.

6. 아파르트헤이트(1948년~1994년)

6.1. 아파르트헤이트의 도입기(1948년~1960년)

1948년 5월 총선거에서 국민당이 집권, 다니엘 프랑소와 말란(Daniel Francois Malan) 내각이 들어서면서[14]부터 완전히 막나가기 시작해 그 해 6월, 프랑소와 에라스무스(Francois Erasmus) 국방장관은 컬러드와 흑인 부대를 해체한다고 선언했다. 이로부터 모든 군조직으로부터 비백인이 급속히 배제되었고, 10월 15일 에릭 로우(E. Louw) 외상은 영연방 가맹국들에게 남아프리카 연방의 내정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성명을 발표했다.

1949년에는 아파르트헤이트의 실행은 돌이킬 수 없는 것이 되어, 7월 8일 백인과 유색인의 결혼이 금지되는 '잡혼금지법'이 시행되었다. 1950년 5월 12일에는 1927년 이후 시행되어 온 이른바 배덕법(背德法, Immorality Act)이 강화되어 백인과 유색인의 성관계까지 금지되었다.[15] 7월 7일에는 주민등록법, 집단지구법, 원주민토지법이 제정·강화되어 인종 등록, 인종별 거주지구 지정, 유색인종의 강제이주가 합법화된다. 7월 17일에는 반공법이 제정되어 공산당이 불법화되었으며, 공산당뿐 아니라 모든 반정부 운동을 탄압할 수 있는 근거가 되었다.

1952년 7월 11일 패스법이 시행되어 18세 이상의 모든 흑인 남성은 정부가 발행한 '신분증' 휴대가 의무화되었는데,[16] 휴대하지 않을 경우 흑인은 도심과 백인거주지구에 출입할 수 없게 되었다.[17]. 이에 아프리카 민족회의(ANC) 청년동맹이 불복종 시위를 일으킨 것이 강제 진압되었으나, 이 사건으로 흑인사회에서 ANC의 권위가 급속히 높아졌다. 또한 의회에서 법원의 결정을 번복할 수 있는 법을 만들어 사실상 영국 추밀원으로 상고하여 결정을 뒤엎을 수 있는 방법 자체를 원천 차단했다(...).

1953년 3월에는 반정부 인사 탄압을 위한 공공치안법이 통과되었으며, 4월 15일 총선거에서는 국민당이 49%의 의석을 점유하였으나 야당의 분열로 국민당의 기반은 한층 강화되었다. 10월 9일에는 다른 인종이 같은 시설을 이용하는 것을 막는 공공시설 분리법, 1954년 1월 4일에는 교육에서 인종 분리를 추진하는 반투 교육법, 8월 1일에는 흑인들의 대도시 유입을 제한하는 반투 도시지구법이 시행되었다.

이런 연이은 막장 행각이 지속되자, 1955년 12월 6일 국제연합 총회는 남아프리카 연방 대표의 자격을 정지시켜 버렸다. 1956년 2월 1일 소련은 남아프리카 연방 주재 영사관을 폐쇄했다.

1954년 11월에 스트레이돔이 새 수상이 되었지만 아파르트헤이트는 계속 강화되었다. 1956년 3월 2일에는 5년 전 케이프주 고등법원이 무효화시켰던 '인종별 분리투표법'이 다시 시행되어 흑인은 투표권도 박탈되었다. 컬러드는 이익 대표 4석을 선출할 선거권이 있었지만, 그 피선거권은 백인만 가질 수 있었다. 16일에는 집회법이 시행되어 유색인종이 공공장소에서 집회를 가지는 것도 금지되었다.

1958년 스트레이돔 수상이 병사하고 헨드릭 페르부르트가 새 수상이 되었다. 그는 '자치'라는 미명 하에 백인과 유색인종이 완전히 분리된 사회를 목표로 하는 大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진행시켜간다. 1959년 6월 16일에는 반투 자치촉진법이 시행되었는데, 특정 부족집단으로 하여금 흑인 거주지구에 일종의 '자치 정부'인 홈랜드(Homeland)를 창설케 함으로서 영토 분리를 실현하는 것이었다.[18] 동시에 대학교육확대법을 시행하여, 유색인종 전용 대학인 웨스턴케이프 대학(University of Western Cape)이 설립되어 교육에서의 인종 분리를 더 진행시켰다.

6.2. 공화국 수립과 아파르트헤이트의 전성기(1960년~1974년)

이렇게 되자 영국과의 관계는 아예 틀어졌는데, 일단 영국 본토 정부에서는 남아프리카 연방의 인종차별 정책을 탐탁찮아 했던데다가 보어인 강경파는 영연방 왕국 체제를 불만스러워했는데, 1960년 2월 3일 해럴드 맥밀런 영국 총리가 남아공을 방문해 대놓고 '변화의 바람'이란 연설을 해버렸다.
해럴드 맥밀런은 어느 때에도 침착 냉정하기로 유명했지만, 그런 맥밀런마저도 남아프리카 총리의 초청을 받자 흥분한 기색을 감출 수 없었다. 페르부르트 박사는 아파르트헤이트를 종교처럼 숭배하고 "만사에 오직 나만이 옳다"는 신념을 가진 "끔찍한 생각"의 소유자였다. 이날 맥밀런은 남아프리카 연방 의회 앞에서 아프리카너 정권에 도전하는 연설을 했다. 긴장한 나머지 연설 직전에 몸이 아플 정도였다. 연설 자체는 철저한 준비를 거쳤다. 아프리카에는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고 그는 역설했다. 민족적 자각은 정책상 고려해야 할 정치적인 사실이었다.

그는 아프리카너 민족주의를 아프리카 최초의 민족주의라고 찬사를 보냈지만, 여기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고 했다. 계속해서 불평등을 감내해야 한다면 흑인들은 공산주의로 돌아설 것이었다. 맥밀런은 아파르트헤이트에 대해 직접적인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정부는 개인의 권리를 존중해야 한다고 못박았다. 아프리카의 다른 지역에서도 영국의 정책은 변화하고 있으며, 따라서 "여러분에게 어려운 상황이 될 수 있다"고 꼬집었다." #

하지만 영국은 이빨 빠진 호랑이었고, 나머지 강대국들이 멀고 먼 남아프리카까지 군사 개입을 할 리가 없었던 걸 아는 남아공 정부는 대놓고 인종차별 정책을 그대로 밀고 갔다. 이미 페르부르트는 1960년 1월 20일에 "영연방 왕국으로부터 공화국으로 이행하기 위한 국민투표를 10월 5일에 실시하겠다"고 발표했다. 영국계 주민의 평균 연령이 더 높고 젊은 연령층이 적은 것을 고려해 투표 연령을 18세로 내리고, 독일령이었고 독일계와 네덜란드계 보어인들이 대다수였던 나미비아까지 본토의 일부로 포함시켜 투표하는 것이었다. 결국 5% 차이로 영국 국왕 엘리자베스 2세의 남아프리카 연방 국가원수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 결정되었고 1961년 3월 15일 영연방에서 탈퇴를 선언, 5월 31일에 국체를 정식으로 공화국으로 전환하여 남아프리카 공화국(남아공)을 선포해 영국과 완전히 결별했다.[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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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토리아에서 열린 공화국 선포식 (1961년 5월 31일)

1960년 11월 ANC의 지하 회의에서 사령관에 지명된 넬슨 만델라는 영연방 탈퇴 반대, 인종 차별 철폐와 민주 헌법 제정을 요구하며 저항 운동을 조직, 5월 29일부로 재택 파업에 들어가 흑인 노동자의 60~75%가 동참했지만, 당국의 탄압으로 파업은 실패로 돌아간다. 이후에도 넬슨 만델라 등은 지속적으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에 저항하였다. 12월 9일 ANC 의장 알베르트 루툴리노벨평화상을 받았다. 1962년 귀국해 무장 투쟁을 지휘하던 만델라가 8월 5일 체포되어, 이후 27년간 케이프타운 앞바다의 로벤섬 교도소에서 수형 생활을 하게 된다.

1961년 9월 26일에는 FIFA로부터 회원 자격을 정지당해 월드컵 예선조차 나가지 못하고, 1962년에는 UN으로부터 남아공과의 단교, 제품 보이콧, 수출입 금지, 선박과 항공기 보이콧 등을 요구하는 결의안이 통과되어 본격적으로 국제 사회로부터 제재를 당하게 된다. 1964년 6월 5일에는 만국우편연합(UPU)에서도 쫓겨났고, 8월 18일에는 IOC로부터 1964 도쿄 올림픽 출전 금지당하는 수모를 당하는 등[20] 국제 사회로부터 갖은 왕따를 당한다.

그럼에도 1966년부터는 남아공 내에서 흑인세력의 봉기가 거의 자취를 감추었고, 경제도 호황기에 접어들어 이 해부터 1974년까지는 아파르트헤이트 체제의 안정기로 평가된다. 1966년 9월 6일 페르부르트 수상이 암살당하자 취임한 법무장관 요하네스 포르스터는 페르부르트가 온건파로 보일 만큼(...) 강경파로, 2차 대전 당시에는 친나치 행보를 보인 인종주의자였다. 포르스터 내각 하에서 남아공의 경찰국가화는 가속되었다. 1966년 5월 31일 프리토리아에서는 5만 시민이 참석한 가운데 공화국 수립 5주년 경축 대회와 열병식이 대대적으로 열렸고, 12월 14일 푸케 농업장관은 "국제사회가 설령 그 어떤 제재를 가한다 할 지라도, 남아공은 최소 3년은 문제 없이 버틸 수 있다"고 큰소리를 쳤다. 1972년을 기점으로 포르스터 정권은 '계몽적 인종 정책'을 내걸고 일상 생활에서의 인종 분리인 小아파르트헤이트 관련 법이 일부 완화시켜 유색인종의 경제수준을 향상시키는 한편, 백인과 유색인종 간 영토 분리인 大아파르트헤이트를 촉진하는 정책 전환을 선전하였으나, 이러한 조치에 백인 강경파는 정책 후퇴, 대다수 유색인종도 기만적이라며 반발했다.

6.3. 아파르트헤이트의 황혼기(1974년~1994년)

1976년 10월 26일 남아공의 지지 하에 홈랜드 중 최초로 트란스케이가 독립을 선언, 트란스케이 주민들은 남아공 국적이 박탈되었다. 같은 날 UN은 이 독립이 무효임을 반대표 없이 결의했으며, 남아공 정권에 대한 무력 투쟁을 정당화했다. 이후 벤다, 시스케이 등도 남아공에서 독립이라 쓰고 주민이 국적 박탈을 당한다.

아파르트헤이트 정권은 보수 기독교 국가를 표방하며 반공을 국시로 제창해서 비록 욕은 뒤지게 먹었을지언정 미국과 영국, 프랑스 등이 암묵적으로 지지하였고[21] 특히 1971년 2월에는 이스라엘과 상호 승인 조약을 체결하고 짝짜꿍이 맞아[22] 1975년 4월 비밀 군사동맹 협정을 체결, 이스라엘의 핵실험을 남아공 영토 내에서 돕고 남아공에 재래식과 비대칭 무기, 핵개발의 노하우가 이스라엘서부터 전래되었다. 1976년에는 前 나치 지지자인 포르스터 수상이 이스라엘을 방문했였는데 이 때문에 상당한 파문이 일었다. 또한 흑인 국가일지라도 국교를 맺고 서로 대통령이 교환 방문하는 등 친남아공 행보를 보인 말라위, 우호적 중립인 잠비아와도 우호 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1975년 포르투갈령 앙골라·모잠비크[23]의 독립, 1979년 같은 처지의 백인 국가인 로디지아의 붕괴(현재의 짐바브웨)로 남아공은 우호적이던 방파제 국가들을 잃고 지정학적 위기에 처함은 물론,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었다. 이에 따라 남아공은 포르투갈 대신 앙골라 내전에 개입하는 한편, 1984년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조금 완화했는데 이때 백인들만 참여할 수 있었던 의회[24]를 백인 의회, 컬러드(흑인-백인 혼혈) 의회, 아시아인 의회로 나눈 것. 다만 컬러드 의회와 아시아인 의회는 권한이 미약해서[25] 삼원제를 시행했을 당시엔 컬러드와 아시아인들의 투표율이 매우 저조했다.

1976년 1월 5일에는 남아공 최초의 TV 방송이 개시되었다. TV의 도입은 1950년대 이래 논의되어 왔으나, 정보 통제가 이완될 것을 우려해 망설이다가 이 때서야 시작된 것으로 처음부터 컬러 방송으로 시작했다. 그러나 검열 하에 해외 관련 정보는 여전히 최대한 통제되었다. 1980년에는 12월 26일 박싱 데이의 명칭을 굿윌 데이로 변경했다.

7. 아파르트헤이트 철폐 이후(1994년~)

1990년 감옥에 갇혀있던 넬슨 만델라를 석방하면서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은 공식적으로 철폐되고, 개헌이 이루어졌으며 1994년 만델라가 남아공 최초의 흑인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이 된 이후로 표면적인 인종차별의 역사는 종지부를 찍는다.

그러나 아파르트헤이트 치하에서 흑인들은 제대로 교육을 받지 못하고 경제력은 백인에 비해 형편없었다. 이걸 고치겠다고 흑인들의 경제력 신장을 대대적으로 높이기 위한 정책이었던 'Black Empowerment Plan'을 시행했는데 1995년에 백인들과 흑인들의 소득차는 4:1이었던 것이 아파르트헤이트 종결 6년 이후인 2000년의 호구조사에서는 6:1로 오히려 벌어졌다. 21세기의 첫 10년간 흑인 중산층(일명 블랙 다이아몬드)가 상당히 증가하고 있지만 아직도 전체적으로는 백인과 흑인간의 빈부격차가 심한 상태. 2011년 남아프리카의 1인당 명목 국민소득이 8천 달러인데도 불구하고, 전 국민의 25%가 하루 1.25달러 아래로 생계를 이어나가고 있다. 이 정도면 한국으로 치면 한국 국민의 25%가 하루에 4000원도 못 쓰는 수준.

흑인 대통령 및 그가 임명하는 각료와 공무원들에게 정치적인 권력이 집중되었는데, 이들은 무능하고 뇌물을 밝혀대는 노멘클라투라가 되었다. 또한 과거 국가 기간을 지탱한 백인 관료층이 축출되면서[26] 그간 유지되던 사회구조가 완전히 망가졌다. 사실 이는 선거제도가 영향을 준 것도 있는데 남아공의 국회의원 선거제도는 전국 단위 비례대표제로 선출된다. 이 때문에 의원들이 지역현안에 크게 신경을 안 써도 앞 번호만 받으면 당선이 되기 쉽고 이 때문에 유권자들과의 접촉이 많지 않기 때문에 자연스레 지역 관리에 소홀해지고 상대적으로 감시가 소홀해지기 때문에 인프라가 제때 확충되지 않는 결과가 나와서 빈민층들이 시위하는 일이 꽤 자주 있다.[27] 불안한 치안과 정치권의 부패, 그리고 인종간 빈부 격차 등은 남아공의 미래를 어둡게 하는 일면 중 하나.

2008년 만델라의 후임인 음베키 대통령이 하야하고 후년에 강경 좌파인 주마 대통령[28]이 등극해 흑인우월주의가 더 심화되는 것이 아니냐는 위기감이 있었지만 월드컵 의 성공적인 개최 및 투자 유치로 잠깐 남아공 경제가 호황세를 맞이하여 여태 모든 우려가 마치 기우 인 것 처럼 보였었다. 하지만 그 후 부정부패와 무능한 국정운영 으로 인해 상당수의 공기업들의 디폴트가 발생하고 고용률은 곤두박칠 쳤으며 전반적인 인프라가 노후화 됐는데 그걸 개선할 돈은 없는 상황이 겹쳐 월드컵 전후 1~2년을 제외한 2010년대 내내 남아공은 어려운 상황을 맞았다. 그러다 주마 대통령도 2018년에 전임인 음베키 처럼 하야하게 되었고 부통령 이었던 라마포사가 승계, 그리고 2019년도 선거에서 아프리카민족회의 가 승리하면서 당수인 라마포사가 보궐이 아닌 정식으로 대통령에 취임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1] 은데벨레족 사람들이 가옥의 벽을 꾸밀 때 밝은 색으로 그리거나 줄루 여성들의 장식품에 새겨졌던, 문자로서의 역할보다는 예술작품에 더 많이 사용되었다.[2] 과거에는 '부시맨'이라는 이름으로 일컬어지곤 했으나 이는 현대에는 멸칭으로 받아들여지므로 유의.[3] 오늘날 줄루어에도 코이산 제어 특징과 영향이 많이 남아있다.[4] 이는 현대에도 많은 모어 화자를 거느린 줄루어, 코사어, 소토어 등에서도 들을 수 있다.[출처1] 네이버 지식백과: 줄루전쟁의 역사적 배경 - 줄루전쟁 (1) (전쟁사, 김성남)[출처2] 유네스코 - 마풍구브웨 유적지[7]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종교적인 용도로 이용되었기에 사람이 살았으나, 1830년대 남아프리카의 줄루 제국이 팽창하면서 북쪽으로 밀리던 응구니족이 그레이트 짐바브웨에 거주하던 이들을 쫓아내버려 폐허가 되었다.[8] 흔히 한국어로는 보어라고 옮겨지는데, '보어'는 영어식 발음이다.[9] 남아프리카 공화국 남부 해안지역은 지중해성 기후도 나타나는 등 농산물을 수확하기에는 좋은 기후 조건을 갖고 있으나, 케이프타운 인근 지역은 바닷바람이 거세 농경에는 신통치 않았다.[10] 루이 14세의 낭트 칙령 폐지로 상공업에 종사하는 25만 명의 위그노들이 유럽 각지로 탈출했고, 일부 위그노들이 케이프타운 식민지로 유입된다. 이들의 포도주 양조 기술 전파는 현재까지도 남아프리카 공화국이 포도주를 빚고 수출할 수 있게 된 계기이다. 이들은 네덜란드계와 종교가 통했기 때문에 프랑스어를 버리고 네덜란드어로 갈아탔으며 얼마 안가 네덜란드계와 완전히 동화되었다.[11] 아프리칸스어로 대이동을 감행한 사람들을 보르트레커(Voortrekker). 개척자라는 뜻으로 불렀다.[12] 초기 영국 원정대 지휘관의 삽질도 한 몫 했다. 자세한 것은 '아집과 실패의 전쟁사(세종서적 출판)'를 참조할 것.[13] 그리고 보어인 수용소는 현재 나치 독일의 강제수용소의 원형으로 평가받고 있다.[14] 사실 당시 득표율로 보면 국민당은 37%, 연합당은 49%를 득표했다. 여기서 보이듯 유권자들(물론 대다수의 유색인종을 뺀 백인과 컬러드 한정)의 다수가 아파르트헤이트를 지지한 건 아니었지만 선거구 조정이 제때 안되는 바람에 인구가 적은 선거구(주로 보어인 유권자들이 밀집해있었던 곳이 다수였다)에서 국민당이 우세했고 결국 집권에 성공했던 것.[15] 1950년대라면 당시 기준으로 별로 이상한 건 아니였다. 미국은 소위 Jim Crow Laws 일컬어지는 법을 각 주마다 통과시켜서 사실상 백인과 비백인의 결혼을 무효화 혹은 원천 봉쇄했으며, 학교나 공공시설도 백인, 비백인이 따로 있었다. 아이러니하게 흑인보다 아시아인들(정확히는 중국인) 히스테릭컬하다고 할 정도로 민감하게 반응을 보인 게 캘리포니아주로 결혼, 교육, 주거, 투표, 피선거권은 물론이요 술 사먹을 권리까지 제한했다. 주 헌법적으로 아시아인(중국인)의 존재를 악한 것으로 규정했을 정도(...)[16] 1956년 8월 9일에는 법이 개정되어 흑인 여성들도 신분증 휴대가 의무화된다.[17] 휴대한 경우라도 야간엔 출입이 불가능[18] 이런 백인과 유색인종 간 영토적 분리를 大아파르트헤이트라 부르는데, 일상생활에서의 인종 분리를 小아파르트헤이트에서 더 나간 개념이었다.[19] 마지막 총독 스와르트가 그대로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국기 중앙부에 그려진 유니언 잭은 그대로 남아있었다가 후 1994년 국기변경 이후로 사라졌다.[20] 이후 28년간 올림픽 출전이 금지된다. 1970년 5월 15일에는 IOC로부터 아예 제명당한다.[21] 정확히 말하면 암묵적 지지와 제재를 왔다갔다 하는 수준[22] 사회적으로는 남아공이 흑인, 이스라엘이 팔레스타인인들 컨트롤에 애를 먹는 동질감이 있었고 둘 다 제2세계, 특히 소련하고 아주 사이가 엿같아서 국제사회 에서 제재를 당했다는 데 있다. 여기에 1970년대 유엔에서 나가 외교적 고립을 겪던 대만도 1976년 4월 남아공과 수교, 이 유대 관계에 합류해서 이 세 국가 사이 아주 깊은 유대와 연대가 자리하게 된다. 1977년 4월 외무장관에 취임한 피크 보타(Pik Botha)는 취임사에서 "마사다 정신'으로 외부의 적들에게 '항전'할 것"을 국민들에게 호소하기도 했다.(...)[23] 1964년 10월 남아공은 포르투갈과 상호 원조 협정을 체결, 대규모 투자를 감행하여 동맹 관계를 형성했다.[24] 1950년대 초반까지는 컬러드, 아시아계(여기서의 아시아계는 동아시아가 아닌 남아시아계를 의미한다. 동아시아계 중 한국계, 일본계, 대만계는 honourary white, 즉 명예백인 으로 준 백인 대접을 받아 백인지역 에서 윤택한 삶을 살 수 있었고 아파르트헤이트 를 겪은 한국 교민들도 증언하기를 당시 남아공은 비백인 인종을 갈아넣어 가능했지만 서도 유럽의 선진국 과도 같았다고 말한다. 반면 중국 대륙 출신들은 흑인과 같이 취급당해 차별받았고 이는 94년 이후 상황이 역전되어 BEE가 시행될때 중국인들은 흑인과 같은 대접을 보장받아 유리한 위치를 점하게 되었다. 역사의 아이러니.)도 투표권을 행사할 수 있었으나 1953년 선거에서도 국민당이 승리를 거두면서 연합당의 표밭(당연히 컬러드나 아시아계 유권자들이 아파르트헤이트 정책을 시행하는 정당인 국민당에 투표할 리는 없었으니까)인 컬러드와 아시아계 유권자들의 피선거권을 없애고 몇 명의 의원들(그것도 백인)만 뽑을 수 있게 투표권도 제한했으며 1970년대 들면서 이마저도 없애버렸다. 정확하게는 아파르트헤이트 원칙에 따라 따로 의원을 뽑자고 명분을 내세우며 따로 의회를 만들었긴 했는데... 권한이 별로 없다보니 허수아비나 마찬가지라 실상은 완전히 폐지된 거나 다름없었다.[25] 인구의 90% 가까이 차지하는 유색인종 가운데에서도 합쳐서 10% 가량의 컬러드와 아시아인(남아시아계)만 대표권을 얻었고, 그나마 두 의회를 합쳐서도 비슷하게 10% 정도였던 백인 의원석보다 적었다. 나머지 80%에 달하는 흑인들은 여전히 대표권을 못 얻었다. 1960년 샤프빌 시위와 1976년 소웨토 학생운동처럼 이전에도 반 아파르트헤이트 시위가 있었지만 격화된 건 1980년대였고, 그 가장 큰 이유는 불평등한 삼원제 때문이었다.[26] 남아공에서 가장 규모가 큰 도시이며 가장 심각했던 사례 중 하나인 요하네스버그의 경우 80%에 달하는 관료들이 순식간에 증발했다.[27] 남아공이 그럼에도 완전 비례대표제를 채택한 이유는 종족 간 대표성 문제에 기인한다. 인구수가 적고 특별히 다수를 차지하는 지역이 없는 백인이나 아시아인의 경우 만약 소선거구제가 실시되면 의회에서 대표되기 더욱 어려워질 수 있다.[28] 원래 공산당 소속 이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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