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부 슐레지엔 공세 러시아어: Нижнесилезская наступательн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Niederschlesische Operation 영어: Lower Silesian offensive | ||
제2차 세계 대전중 동부전선의 일부 | ||
▲ 2월 4일과 24일 시점에서 양군의 전선[1] | ||
▲ 소련군의 진격로 | ||
날짜 | ||
1945년 2월 8일 ~ 2월 24일 | ||
장소 | ||
독일국 니더슐레지엔주 | ||
교전국 | 소련 | [[나치 독일| ]][[틀:국기| ]][[틀:국기| ]] |
지휘관 | 이반 코네프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사령관) 파벨 리발코 (제3근위전차군 사령관) 드미트리 렐류센코 (제4전차군 사령관) | 페르디난트 쇠르너 (중부 집단군 사령관)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제6항공함대 사령관) 프리드리히 슐츠 (제17군 사령관) 프리츠후베르트 그레저 (제4기갑군 사령관) |
결과 | ||
소련군이 브레슬라우를 포위하고 니더슐레지엔을 점령 | ||
영향 | ||
베를린 공세를 위한 좌익의 안전 일부 확보 | ||
병력 | 병력 980,000명 | |
피해 규모 | 전사/실종 23,577명 부상 75,809명 | 전사 10,349명[2] 실종 21,768명 부상 51,426명 |
[clearfix]
1. 개요
하부실레시아 공세 혹은 니더슐레지엔 공세는 소련군이 차후 진행할 베를린 공세에서 좌익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 진행한 공세이다. 결과적으로 브레슬라우를 포위하고 하부 실레시아[3]의 산업지대를 장악하는 데 성공은 했으나 브레슬라우에 공세 병력 중 꽤 많은 전력이 묶여버렸고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의 좌익을 완전히 확보하여 베를린 공세에 도움을 주려는 목적 달성에는 실패했다. 결과적으로 베를린 공세는 이후 여러 공세를 통해 체코와 실레시아, 오스트리아 서부까지 진출하고 나서야 시행될 수 있었다.2. 1945년 2월의 중부 전선
2.1. 소련군
비스와-오데르 대공세에서 소련군은 오데르 강에 도달했다. 그러나 측면에서 독일군의 저항이 점점 강력해지자 주코프는 공세를 멈췄다. 이후 며칠간 스타브카에서는 베를린으로 바로 진격할 것인가를 두고 엄청난 논쟁이 이어졌다. 추이코프와 주코프는 베를린으로 공세를 이어나갈 것을 주장했다. 그러나 스타브카와 스탈린의 생각은 달랐다. 스탈린은 측면의 독일군이 여전히 강력하게 저항하는 것을 걱정했다. 또한 전쟁이 곧 끝날 것이 분명한 상황에서 주코프의 기세를 꺾어 놓을 필요가 있다는 점도 작용했다. 스탈린의 이런 정치적 고려 말고도 측면에서의 위협은 분명한 사실이었다.비스와-오데르 공세에서 제1,2 벨라루스 전선군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주공을 맡으면서 서쪽으로 진군하는 동시에 북쪽에서는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이 동프로이센 공세를, 남쪽에서는 제4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서부 카르파티아 공세를 진행했다. 그러나 이 두 공세 모두 그다지 성과를 거두지 못하면서[4] 자연스럽게 제1 벨라루스 전선군만 돌출된 상태가 되었다. 이에 따라 소련군은 제2 벨라루스 전선군이 우익에서 동부 포메른 공세를,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좌익에서 하부 슐레지엔 공세와 상부 슐레지엔 공세를 진행하기로 결정했다.
소련군은 측면의 안전을 금방 확보하고 베를린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었다. 그러나 전선의 상황은 그렇게 녹록지 않았다. 모든 전력이 압도적이었지만 이제 진군해 나갈 독일 본토는 곳곳이 전쟁 전부터 지어진 요새로 가득했다. 또한 소련군 역시도 병력과 물자의 보충이 원활하지 못했고[5] 재편이 필요했으나 소련군은 늘 그랬듯 우리가 보충하는 사이에 적도 방어선을 재구축할 시간을 갖게 된다는 생각이 있었기에 곧바로 공세를 이어나갈 생각이었다. 그렇지만 공세 방향을 틀면서 복잡한 재배치 과정을 거쳐야 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2.2. 독일군
독일군은 2월 현재 오히려 반격 작전을 구상중이었다. 오데르강에서 지점 작전[6], 헝가리 근방에서 시작될 남풍 작전과 봄의 새싹 작전, 그리고 포메른 지역에서의 반격 작전 등을 계획 중이었는데 포메른 지역과 헝가리, 오스트리아 부근이 주요 관심사였고 슐레지엔 지방은 대신 강력한 방어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동부와 서부 모두 전선이 무너져내리자 히틀러는 드디어 동부 전선으로 다시 관심을 돌리고 있는 상황이었다. 항공전력과 기갑전력은 동부전선에 최우선적으로 보충됐다. 그러나 연료가 위태위태한 상황으로 꼭 필요한 작전에만 우선 보급되고 있었으므로 병력의 재배치조차도 힘든 상황이었다. 게다가 구데리안은 비스와강과 포메른의 비스툴라 집단군에 관심을 갖고 반격 작전을 구상중이었으나 히틀러는 헝가리의 유전에 더 관심을 갖고 있었고 남부 집단군에 기갑전력을 우선적으로 지원하길 원했기에 전력이 분산되며 안그래도 힘든 재배치 작업은 더욱 엉망이 되었다. 병력 역시 심각하게 부족했지만 히틀러는 보충 대신 새로운 부대를 편성하길 원했으므로 대부분의 제대가 이름보다 한 단계정도 낮은 전력을 보유중이었다.
3. 전투 서열
3.1. 소련군[7]
-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 ( 사령관 : 이반 코네프 소연방 원수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전선군 직할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근위기병군단
- 제1근위기병사단
- 제2근위기병사단
- 제7근위기병사단
- 제4근위전차군단
- 제12근위전차여단
- 제13근위전차여단
- 제14근위전차여단
- 제3근위차량화소총여단
- 제7근위기계화군단
- 제24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24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25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57근위전차여단
- 제7돌파포병군단
- 제10돌파포병군단
- 제4돌파포병사단
- 제150전차여단
- 제87근위전차연대
}}} - 제3근위전차군 ( 사령관 : 파벨 리발코 전차병상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6근위전차군단
- 제51근위전차여단
- 제52근위전차여단
- 제53근위전차여단
- 제22근위차량화소총여단
- 제7근위전차군단
- 제54근위전차여단
- 제55근위전차여단
- 제56근위전차여단
- 제23근위차량화소총여단
- 제9기계화군단
- 제69기계화소총여단
- 제70기계화소총여단
- 제71기계화소총여단
- 제91전차여단
- 제57근위중전차연대
}}} - 제4전차군 ( 사령관 : 드미트리 렐류센코 상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6근위기계화군단
- 제16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17근위기계화소총여단
- 제49기계화소총여단
- 제28근위중전차연대
- 제10근위전차군단
- 제61근위전차여단
- 제62근위전차여단
- 제63근위전차여단
- 제29근위차량화소총여단
- 제93전차여단
- 제13근위중전차연대
}}} - 제3근위군 ( 사령관 : 바실리 고르도프 상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1소총군단
- 제58소총사단
- 제253소총사단
- 제329소총사단
- 제76소총군단
- 제127소총사단
- 제287소총사단
- 제389소총사단
- 제120소총군단
- 제106소총사단
- 제149소총사단
- 제197소총사단
- 제25전차군단
- 제111전차여단
- 제162전차여단
- 제175전차여단
- 제20차량화소총여단
- 제374근위중자주포연대
- 제938자주포연대
}}} - 제5근위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3돌파포병사단
- 제8자주포여단
- 제39전차연대
- 제226전차연대
- 제349근위중자주포연대
- 제1889자주포연대
- 제32근위소총군단
- 제13근위소총사단
- 제95근위소총사단
- 제97근위소총사단
- 제33근위소총군단
- 제9근위공수사단
- 제14근위소총사단
- 제78근위소총사단
- 제34근위소총군단
- 제15근위소총사단
- 제58근위소총사단
- 제118소총사단
- 제6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22소총군단
- 제218소총사단
- 제309소총사단
- 제74소총군단
- 제181소총사단
- 제273소총사단
- 제359소총사단
- 제13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1근위돌파포병사단
- 제88전차연대
- 제327근위중자주포연대
- 제372근위자주포연대
- 제768자주포연대
- 제1228자주포연대
- 제24소총군단
- 제147소총사단
- 제350소총사단
- 제395소총사단
- 제27소총군단
- 제6근위소총사단
- 제112소총사단
- 제280소총사단
- 제102소총군단
- 제117근위소총사단
- 제121근위소총사단
- 제172소총사단
- 제21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3근위박격포사단
- 제13돌파포병사단
- 제27중전차연대
- 제98중전차연대
- 제1198자주포연대
- 제1238자주포연대
- 제1403자주포연대
- 제55소총군단
- 제225소총사단
- 제229소총사단
- 제285소총사단
- 제117소총군단
- 제72소총사단
- 제120소총사단
- 제125소총사단
- 제118소총군단
- 제128소총사단
- 제282소총사단
- 제291소총사단
- 제31전차군단
- 제100전차여단
- 제237전차여단
- 제242전차여단
- 제65차량화소총여단
}}} - 제52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48소총군단
- 제111소총사단
- 제116소총사단
- 제213소총사단
- 제73소총군단
- 제50소총사단
- 제254소총사단
- 제294소총사단
- 제78소총군단
- 제31소총사단
- 제214소총사단
- 제373소총사단
- 제124중전차연대
- 제222중전차연대
}}} - 제59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43소총군단
- 제13소총사단
- 제80소총사단
- 제314소총사단
- 제115소총군단
- 제92소총사단
- 제245소총사단
- 제286소총사단
- 제135소총사단
}}} - 제60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야전군 직할
- 제31돌파포병사단
- 제152전차여단
- 제368근위중자주포연대
- 제15소총군단
- 제9소총사단
- 제107소총사단
- 제336소총사단
- 제28소총군단
- 제246소총사단
- 제302소총사단
- 제322소총사단
- 제106소총군단
- 제100소총사단
- 제148소총사단
- 제304소총사단
- 제2항공군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4폭격항공군단
- 제202폭격항공사단
- 제219폭격항공사단
- 제6근위폭격항공군단
- 제1근위폭격항공사단
- 제8근위폭격항공사단
- 제1근위돌격항공군단
- 제8근위돌격항공사단
- 제9근위돌격항공사단
- 제12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근위돌격항공군단
- 제5근위돌격항공사단
- 제6근위돌격항공사단
- 제3돌격항공군단
- 제307돌격항공사단
- 제308돌격항공사단
- 제181전투항공사단
- 제2전투항공군단
- 제7근위전투항공사단
- 제322전투항공사단
- 제5전투항공군단
- 제8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56전투항공사단
- 제6근위전투항공군단
- 제9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2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3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08야간폭격항공사단
}}}
}}}
}}}
}}}
}}}
}}}
3.2. 독일군[8]
- 중부 집단군[9][10] ( 사령관 : 페르디난트 쇠르너 상급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4기갑군 ( 사령관 : 프리츠후베르트 그레저 기갑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40기갑군단
- 제100여단
- 제36무장척탄병사단 "디를레방어"[11]
- 제608국민척탄병사단
- 제24기갑군단
- 제342보병사단
- 제72보병사단
- 제16기갑사단
- 제25기갑사단
- 기갑군단 "그로스도이칠란트"
- 기갑척탄병사단 "브란덴부르크"
- 제1강하기갑사단 "헤르만 괴링"
- 제20기갑척탄병사단
- 프리드리히 그룹
- 제21기갑사단
- 제6국민척탄병사단
- 제17기갑사단
- 제17군 ( 사령관 : 프리드리히 슐츠 보병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57기갑군단
- 제103기갑여단
- 제8기갑사단
- 제408보병사단
- 제48기갑군단
- 제269보병사단
- 제10보병사단
- 제208보병사단
- 브레슬라우 그룹
- 브레슬라우 요새 수비대
- 제609국민척탄병사단
- 제17군단
- 제19기갑사단
- 제20기갑사단
- 제254보병사단
- 제8군단
- 제100엽병사단
- 제45국민척탄병사단
- 제20무장척탄병사단 "제1 에스트니아"
- 제6항공함대 ( 사령관 : 로베르트 리터 폰 그라임 상급대장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동프로이센 공군사령부
- 동프로이센 전투기항공사령부
- 제2항공군단
- 제8항공군단
- 제3항공사단
- 제200항공여단
- 제1대공포군단
- 제1항공지구사령부
- 제8항공지구사령부
}}}
}}}
}}}
}}}
4. 전개
4.1. 초기 공세
2월이 막 시작되는 시점에서 슐레지엔의 양측 전선은 대부분 오데르 강이었고 코네프는 브레슬라우 남북의 교두보에서 공세를 가할 생각이었다. 목표는 나이세 강을 넘어 드레스덴과 엘베 강에 도달하는 것이었다. 북쪽 교두보에서의 공세가 주력으로 3근위군, 6군, 13군, 52군과 3근위 전차군, 4전차군, 25전차군단과 7근위기계화군단을 투입했고 남쪽에는 5근위군, 21군과 4근위전차군단, 31전차군단을 투입했다. 전선군 좌익에서는 조공으로 59군과 60군이 공세를 펼칠 예정이었다. 소련군 주력의 진격로에는 독일 4기갑군이 배치되어 있었다. 4기갑군은 북쪽부터 40기갑군단, 24기갑군단,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군단이 배치되어 있었고 4기갑군 우익에는 17군의 57기갑군단이 있었다. 소련군은 대체로 보병은 2:1, 포병은 5:1, 전차와 자주포는 4:1정도의 우세를 갖고 있었으며 브레슬라우 북쪽에는 전력이 집중됐으므로 격차가 훨씬 심했다.2월 8일부터 공세가 시작됐고 전선군 우익의 공세는 성공적이었다. 4전차군은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군단을 돌파했고 3근위전차군은 57기갑군단을 돌파했다. 25전차군단의 지원과 함께 3근위군은 4전차군 좌익에서 24기갑군단을 돌파했고 글로가우에는 8,000명 정도의 독일군이 갇혀버렸다.
남쪽에서의 공세는 쉽지 않았다. 59군과 60군은 시작부터 1기갑군의 강력한 저항을 만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공세를 중단했다. 브레슬라우 바로 북쪽의 6군과 남쪽의 5근위군과 21군도 힘들게 진격하고 있었다. 13일, 북서쪽에서 내려온 7근위기계화군단과 남동쪽에서 올라온 31전차군단이 만나면서 브레슬라우에는 약 40,000명의 독일군과 수십만 명의 민간인이 갇혔다. 19기갑사단이 포위망을 잠시 뚫었으나 15일, 북쪽에서 내려온 3근위전차군의 지원으로 다시 포위망이 닫혔고 이후 기나긴 포위전이 이어지게 된다.
4.2. 독일군의 반격
나이세 강을 향해 진군하던 4전차군은 13일에 보버강(Bober River)[12]에 도달했다. 이어 선도 부대들은 구벤(Guben)과 포르스트(Forst)로 나아갔다. 여기서 나이세 강 서쪽의 교두보를 확보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독일군은 본격적으로 반격하기 시작했다. 북쪽에서는 35SS 경찰척탄병 사단과 36SS 무장척탄병 사단[13]이 국지적인 반격을 가해왔고 14일에는 본격적인 반격이 시작됐다. 북쪽에서는 40기갑군단의 지원을 받은 24기갑군단이 36SS 무장척탄병사단, 16, 25기갑사단과 3개 보병사단으로 공격해왔고 남쪽에서는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군단이 20기갑척탄병사단, 그로스도이칠란트 기갑전투단 보버강에서 4전차군의 후방을 차단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4전차군 후방의 17근위기계화소총여단과 63, 93전차여단은 아군이 도착할 때까지 버티면서 악착같이 통로를 지켜냈다. 5일간의 격전 끝에 3근위군과 52군이 도착하면서 독일군은 소련군을 포위하는데 실패했다. 25전차군단은 24기갑군단을 밀어냈고 남쪽에서는 22자주포여단과 폭격기들의 지원 속에 19일부터 독일군이 물러났다. 4기갑군은 전선을 나이세 강 너머로 후퇴시켰다.4.3. 소련군의 공세 계획 변경
16일이 되자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이 엘베 강에 도달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코네프는 스타브카의 승인을 받아 계획을 변경했다. 포위한 글로가우와 브레슬라우를 정리하는데 집중하며 제일 성공적으로 진격한 우익을 이용하여 나이세 강 서쪽에 교두보를 확보하는 것으로 목표를 축소한 것이다. 이후에는 상부 슐레지엔 공세를 통해 나머지 슐레지엔 지방을 점령하기로 했다.16일 현재 전선은 보버 강을 따라 사간(Sagan)-번즐라우(Bunzlau)를 잇는 축선에 위치해 있었다. 19일부터 4전차군과 13군은 전선군 우익에서 나이세 강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18일부터 구벤을 놓고 치열한 격전이 이어졌고 강 서안 교두보를 차지하기 위한 공방전은 공세가 끝나고도 3월까지 이어졌다.
좀 더 남쪽에서는 3근위전차군이 괴를리츠를 향해 진격했다. 18일에는 8기갑사단과 19기갑사단이 기습적인 반격을 가해왔으나 역부족이었고 독일군은 일주일만에 괴를리츠까지 밀려났다. 여기서도 공세 막바지까지 교두보를 놓고 공방전이 이어졌으나 소련군은 독일군의 반격으로 강 동쪽으로 밀려났다. 그래도 3근위전차군은 괴를리츠-오스트라바 철도를 차단하면서 상부 슐레지엔으로 이어지는 보급로를 차단했다. 전선군 좌익에서도 5근위군이 공세를 하긴 했으나 거의 진격하지 못하고 시비드니차에 멈춰버렸다.
4.4. 공세 종료 : 브레슬라우 포위전
24일부터 소련군이 방어로 돌아서면서 하부 슐레지엔 공세는 끝났다. 그러나 13일부터 이어지고 있던 브레슬라우 포위전은 종전 직전인 5월 6일까지 이어지게 된다. 슐레지엔 공세가 그리 큰 공세도 아니고 주요 공세도 아니기 때문에 잘 알려져 있진 않지만 브레슬라우 전투는 2차 대전에서 가장 처절한 포위전 중 하나였다.슐레지엔의 주도이자 인구 약 63만 명의 브레슬라우는 슐레지엔을 넘어 동부 독일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33년 총선에서는 20만 명의 시민이 나치당을 지지할 정도로 친 나치 도시이기도 했다. 1941년부터 니더슐레지엔 관구장이었던 카를 한케 SS대장[14]이 도시를 담당하고 있었고 1944년 8월 24일, 히틀러는 브레슬라우를 요새 도시로 선언했다. 그러나 당연히 추가 지원은 없었고 한케는 도시 방어를 위해 민병대를 조직하고 물자를 모았다. 한케는 1월 19일까지 민간인들의 대피를 금지했고 이 때문에 소련군이 코앞까지 온 20일부터 시작된 대피는 도보로 이루어져야했다. 이 과정에서 100,000명에 달하는 민간인들이 얼어 죽었고 한케는 1,000명이 넘는 사람들을 처형하는 만행을 저질렀다.[15]
2월 2일, 쇠르너는 한스 폰 알펜 소장을 브레슬라우 요새 사령관에 임명했다. 2월 8일부터 시작된 하부 슐레지엔 공세로 13일에 브레슬라우는 포위되었고 19기갑사단이 간신히 좁은 통로를 유지했으나 15일부터 브레슬라우는 외부와 완전히 차단됐다. 코네프는 적이 곧 항복할 거라 생각해서 도시 공략에 큰 관심이 없었고 6군이 도시 점령을 담당하게 된다. 6군은 31돌파포병사단과 22소총군단[16] 및 74소총군단[17] 휘하 5개 소총사단을 보유중이었고 52군에서 294소총사단과 전선군에서 포병 여단, 중자주포 연대 및 중전차 연대가 추가로 배속됐다. 전선군 직할인 7근위기계화군단도 상,하부 슐레지엔 공세기 사이에 도시 공략을 지원했다. 독일군은 609국민척탄병사단, 294보병사단의 일부를 중심으로 SS연대와 민병대, 공병대대와 요새부대를 합쳐 약 45,000명이 있었고 18문의 88m포와 15대의 전차 및 자주포를 보유중이었다.
16일부터 도시 공격이 시작됐다. 코네프가 쉽게 생각한 것처럼 6군도 도시가 금방 점령될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시가전은 규모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독일군은 격렬하게 저항했고 소련군은 2주만에 180대에 달하는 전차와 자주포를 손실했다. 3월부터 소련군은 전략을 바꿨다. 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그랬던 것처럼 대규모 포격을 가한뒤 건물 하나, 거리 하나씩 차근차근 점령하기 시작했다. 3월 7일부터 헤르만 니호프 보병대장으로 요새 사령관이 바뀌었고 소련군이 주력을 집중한 파모(Famo)공업지대에서 독일군은 장갑열차를 만들어 적을 효과적으로 막았지만 소련 공군의 공습으로 무력화됐다. 도시에서 격전지가 된 다른 곳은 간다우(Gandau)비행장이었다. 여기를 통해 독일 공군은 물자를 공중으로 보급하고 강하엽병부대[18]들을 도시에 투입했다.
4월 1일에는 북쪽에서 역시 포위된 상태로 저항중이던 글로가우가 항복했다. 6군은 추가로 112소총사단과 포병, 박격포 여단들, 중전차연대와 전차연대를 지원받아 간다우 비행장을 점령했고 6근위폭격항공군단은 150기의 폭격기로 파모 산업지대를 폭격했다. 독일 공군은 다른 소규모 비행장에 27일까지 공중 보급을 계속 했으며 두 달간 브레슬라우에 수송기를 최우선으로 투입했다. 여기에는 3개 수송항공단의 7개 대대[19]와 2개 폭격항공단의 2개 대대[20]가 투입됐다.
5월 2일, 베를린이 함락되자 독일군은 더 이상의 저항은 무의미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한케는 5일에 SS국가지도자가 되면서 니호프에게 도시에 관한 전권을 부여하고 탈출했고 프라하로 갔다가 사살됐다. 5월 6일 독일군이 항복하면서 3달에 걸친 포위전이 드디어 끝났다. 브레슬라우 포위전에서 독일군은 6,000명이 전사하고 23,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5,000명이 포로가 됐다.[21] 민간인 사상자는 80,000 ~ 170,000명에 달했다. 소련군은 7,000 ~ 13,000명의 전사자, 사상자 24,000 ~ 33,000명을 포함해 최대 60,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5. 결과
소련군은 드레스덴과 엘베 강에 도달하여 베를린 공세를 위한 좌익을 확보한다는 목표 달성에 실패했다. 대신 나이세 강에 도달해 제1 벨라루스 전선군의 좌익을 확보하기는 했다. 이 여파로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차후 베를린 공세에서 드레스덴을 향한 조공을 담당하게 된다. 그렇다고 의미 없는 공세는 절대 아니었다. 독일군은 더이상 소련군의 주공을 막아낼 전력이 없었기에 4기갑군은 나이세강 너머로 밀려났고 니더슐레지엔의 산업지대 대부분이 소련군에게 넘어갔다. 그러나 브레슬라우 포위전의 경우 3월이 넘어가면서부터는 의미 없는 싸움이 되어버렸다. 브레슬라우에는 나이세강으로 이어지는 철도와 도로가 지나기 때문에 2월에는 보급을 위해 의미가 있었지만 차후 공세에서는 큰 의미가 없는 지역이었다.[22] 결국 전쟁의 승패는 이미 결정된 상황에서 양측 다 의미 없는 피해를 본 것이다.소련군은 비스와-오데르 공세와 서부 카르파티아 공세로 중부 집단군[23]이 괴멸된 상태라고 판단했으나 독일군은 아직도 방어전을 수행할 능력이 남아있었다. 독일 본토로 진입하면서 전간기부터 건설된 수많은 요새지대와 함께 전선이 줄어든 독일도 전력을 집중시키기 수월해졌고 국민척탄병사단들은 전투력은 한심했어도 전선을 채우는데 도움이 되는 전력이었다. 제일 많이 밀려난 집단군 좌익의 4기갑군 전선에서도 소련군은 목표 달성에 실패했으며 중앙의 17군에서는 완강하게 버틴 덕에 결과적으로 소련군의 공세를 좀 더 조기에 종결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이로 인해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의 좌익이 지나치게 늘어나서 차후 염소 작전이라는 반격작전을 펼쳐 소련군을 약간 밀어내고 괴를리츠-오스트라바 철도를 다시 차지할 수 있었다.
소련군은 늘어난 좌익을 정리할 겸 슐레지엔 지방을 완전히 장악할 겸 해서 전선군의 좌익으로 상부 슐레지엔 공세를 준비했으며 반대로 독일군은 이 늘어난 좌익을 공격하여 브레슬라우를 구출하기 이해 반격 작전을 준비했다. 독일군의 저항이 생각보다 완강한 것을 본 소련군은 이후 전쟁을 끝내기 위해 베를린과 빈에 집중했으며 그 사이 주데텐란트에는 큰 관심을 두지 않아 이후 전선의 변화가 거의 없었으며 이 지방은 종전하는 날까지 나치 독일이 보유하고 있던 몇 안되는 영토로 남아있었다.
[1] 지도 우측 상단, 제3 벨라루스 전선군은 동프로이센 공세를, 지도 좌측 상단 제1,2 벨라루스 전선군은 동부 포메른 공세를, 지도 좌측 제1 우크라이나 전선군은 하부 슐레지엔 공세를 진행중이었다.[2] 독일군의 피해는 공세 기간에 대한 자료가 없어 2월 한달간 중부집단군의 손실을 기입함[3] 실레시아 북서쪽[4] 공세 시작 시점의 차이로 측면의 독일군이 좀 더 강력한 상태였다.[5] 공세 시작 시점에서 편제의 50% 수준이었다.[6] Unternehmen Sonnenwende, 여기서 지점은 동지와 하지를 뜻하는 지점이다. 따라서 '동지작전'이라는 뜻도 된다.[7] 2월 1일 기준[8] 2월 19일 기준[9] 1월 25일 A 집단군에서 중부 집단군으로 개칭, 돈 집단군 -> 남부 집단군 -> A 집단군 -> 중부 집단군 순으로 이름이 바뀌었다.[10] 전투에 거의 참여 안한 1기갑군은 제외했다.[11] 사실상 여단[12] 나이세 강과 오데르 강 가운데 쯤에 있다.[13] 둘 다 편제상 여단급이었다.[14] SS상급집단지도자, 국방군 병과대장과 동급[15] 그래놓고 나중에 힘러의 뒤를 이어 SS국가지도자가 되자 곧바로 도망쳐버렸다.[16] 218, 309, 273소총사단[17] 181, 359소총사단, 나중에 294소총사단 추가[18] 공수부대[19] 1수송항공단 1대대, 2,3수송항공단의 1,2,3대대[20] 1폭격항공단의 1,3대대[21] 포로에 부상자가 들어가기도 하고 민병대의 규모가 불명확해 사상자의 규모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힘들다.[22] 의미가 있는 곳이었다면 소련군도 더 많은 전력을 동원했을 것이다. 한 개 야전군만을 동원한 것만 봐도 도시를 점령 못한 것이 아니라 안한 것에 가깝다.[23] 이 때는 A 집단군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