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23 13:25:55

성수대교 붕괴 사고

성수대교 붕괴사고에서 넘어옴
<colcolor=#fff> 성수대교 붕괴 사고
聖水大橋 崩壞 事故 | Sŏngsu Bridge Disaster
파일:external/photo.korea.kr/TVE9PV8y.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1994%EC%84%B1%EC%88%98%EB%8C%80%EA%B5%90_%EB%B6%95%EA%B4%B4_%EC%82%AC%EA%B3%A001.jpg
<colbgcolor=#bc002d> 발생일 1994년 10월 21일
[dday(1994-10-21)]일
발생 위치 서울특별시 성동구 옥수동 494-2 일대[1]
성수대교 10, 11번 교각
유형 건물 붕괴추락
원인 동아건설의 부실공사
서울특별시의 유지관리 미흡
인명
피해
<colbgcolor=#bc002d><colcolor=#fff> 사망 32명[2]
부상 17명
재산 피해 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파손 및 침수

1. 개요2. 전개3. 사고의 원인4. 조치 및 경과5. 형사 재판6. 여파7. 기타
7.1. 정치, 사회에서7.2. 대중문화에서
8. 유사 사례9. 관련 문헌10. 둘러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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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렇게 걱정들 했는데도 기어이 오늘 성수대교 붕괴 참사는 예고된 인재(人災)[3]였습니다."[4]
사고 당일 MBC 뉴스데스크 엄기영 앵커의 오프닝 멘션 중 #
부실공사 추방 원년의 해
건설부에서 지정한 1994년 슬로건
1994년 10월 21일 한강에 위치한 성수대교의 중간 부분이 갑자기 무너져내려 현장을 지나던 시내버스와 차량들이 그대로 추락하면서 큰 인명피해를 낸 사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 와우아파트 붕괴사고와 함께 대한민국 3대 붕괴 사고로 불리며 이미 연이은 사건사고로 사고 공화국이라는 오명을 쓰고 있던 문민정부 시대의 굵직한 기록으로 남겨진 참사다.[5]

32명이라는 사망자 수만으로 본다면 광복 이후의 인명참사 규모로 10위권 밖이다. 그러나 인명피해가 많은 사건들은 대부분 비행기가 추락, 배 침몰, 기차 탈선, 대규모 자동차 교통사고 등 애초에 어느 정도 사고 위험을 감수하고 이용하는 것들이었다. 반면 이 사고는 수도 한복판에 있는 한강 다리 일부가 갑자기 스스로 무너져 내리는 믿을 수 없는 사고이다. 영화에서도 테러나 사고가 아닌 이상 갑자기 다리가 혼자 무너지는 장면은 없다. 무슨 건설 후 100년~ 200년이나 된 낡은 다리도 아니고[6] 공진현상 등으로 흔들리다가 깨진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처럼 국민들의 뇌리에 남은 대형 사고이다. 물론 그 이전인 1992년에도 창선교 붕괴 사고, 신행주대교 붕괴사고 등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가 없진 않았으나 서울 한복판에서 한강의 주요 다리가 무너지는 사고는 처음이었기 때문에[7] 앞선 두 사고보다 훨씬 충격이 컸다. 결정적으로 앞서 언급한 두 사고는 인명피해도 이 사고에 비해 적었던데다[8] 1992 바르셀로나 올림픽에 국민들의 시선이 쏠려 있어서[9] 사고의 충격이 덜했다.

2. 전개



1994년 10월 21일 금요일 00시 20분 무렵과 02시 30분 무렵 1.3 x 2m 크기 철판이 성수대교 상판 이음새에 깔려 있음을 당시 운행하던 운전자들이 목격하였다. 상판 이음새 부분에 심하게 벌어진 틈새를 덮으려는 서울특별시의 땜질식 응급 조치였다. 하지만 균열은 시간이 갈수록 커졌다. 사고 당일 새벽 6시 무렵 성수대교를 통과하던 차량의 운전자는 이음매를 지날 때 충격이 너무 커서 서울특별시에 직접 신고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안일하게도 교량진입 통제 등 긴급조치를 취하지 않아 결국 비극적인 대형참사가 일어나고 말았다.

1994년 10월 21일 오전 7시 38분 성수대교의 제10·11번 교각 사이 상부 트러스 48m가 붕괴되었다. 사고 부분을 달리던 서울지방경찰청 제3기동대 40중대 소속 서울7구 9286 하늘색 기아 베스타 승합차 1대와 서울2트 2652 검은색 기아 세피아[10], 서울3호 9749 검은색 기아 프라이드 승용차 각 1대는 현수 트러스 상판과 함께 한강으로 추락했다. 붕괴되는 지점에 걸쳐 있던 서울3르 4675 흰색 대우 르망, 서울4프 7962 회색 현대 엑셀 승용차 각 1대가 물 속으로 빠졌고 르망 승용차 동승자였던 여성 김모 씨(여.37)와 여성 박모 씨(여.41)를 제외한[11] 엑셀, 르망 운전자와 동승자 등 3명[12]은 모두 사망했다. #1

이후에 서울대공원에서 번동 방향으로 가고 있던 한성운수 소속 서울5사 8909호 16번 시내버스[13]는 버스 기사 유모 씨가 붕괴 지점을 발견하고 최대한 급브레이크를 밟았지만[14] 전륜은 붕괴지점 밖으로 밀려나가고 후륜이 붕괴 부분에 걸친 상태로 정지했고 잠시 뒤 차체가 뒤집어지면서 추락했다.[15] 추락 과정에서 사고 버스 창문에 달려 있던 창틀과 창살은 수면에 충돌하며 큰 충격을 받아 심하게 파손되며 버스 밖으로까지 날아갔다. 몸이 뒤집혀진 채로 추락한 승객들은 충돌 순간 버스 천장에 머리 등을 크게 부딪히며 사망하였고 심지어 일부는 사지가 처참하게 찢겨 나갈 정도였다.[16] 이로 인해 구조 과정에서 참혹하게 목숨을 잃은 승객의 시신과 피범벅이 된 유품들이 많이 발견되었다. 당시 기사 16번 버스를 운전하던 사고 버스 기사 유 씨도 앉은 채로 목숨을 잃었다. 사고 버스의 바로 뒷 차의 운전기사였던 동료 최모 씨는 사고 당일 버스 안에서 동료의 죽음을 듣고 펑펑 울었고 사고 이후에도 그의 영혼을 위해 기도한다고 한다.관련 게시글

결국 버스 1대, 승합차 1대, 승용차 4대 등 모두 차량 6대[17] 탑승자 49명이 추락했고 이 중 32명(남성 19명, 여성 13명.)이 사망했다.[18] 사상자의 대부분이 거꾸로 뒤집혀 추락한 16번 시내버스에서 발생하였고 운전기사를 포함한 탑승자 31명 중 사망자가 29명이나 나왔다. 생존자였던 두 명은 각각 신원미상의 20대 남성, 43세 여성 권모 씨였는데 두 명 모두 출입문 쪽 자리에 앉아 있었다고 한다. 남성은 앞쪽 자리, 권씨는 뒤쪽 좌석이었다고 한다. 만약 거꾸로 뒤집혀서 추락하지 않았거나 하다못해 안전벨트를 매는 고속버스였다면 중상자가 많이 나올지언정 상당수가 살아남을 수 있었을 텐데 상황이 불운했다.[19] 당시 즉각적인 대처가 이루어지지 못해 사고 직후까지도 살아 있던 일부 생존자들이 결국 사망하기도 했다.[20] 이외 사망자 3명은 승용차에서 발생했고 침수되는 차량에서 탈출 하지 못해 익사하였다. 여기서 이 버스의 희생자들은 지금까지도 가장 불운하고 안타까운 사망 사례로 기록되었는데 10초만 더 빨리 갔거나 10초만 더 늦게 갔어도 이들은 사고를 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1994년 10월 21일 MBC아침만들기 진행 중 성수대교 붕괴 속보[21]

마침 사고 발생 시각이 아침 출근 및 등교시간이라 등교하던 학생들을 비롯해 출근하던 직장인과 교사 등 평범한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특히 그 버스를 타고 아침에 등교하던 무학여자중학교 학생 1명과 무학여자고등학교 학생 8명이 이 시내버스를 타고 가는 중이었다. 이 참사로 여학생 9명이 한꺼번에 세상을 떠나 무학여중고는 한동안 초상집 분위기였는데 강남 8학군에 진학 예정이었던 학생들이 많아서 더 심각했다.[22] 이로 인해 무학중학교와 무학여자고등학교는 사고가 발생한 지 20년이 넘게 지난 현재까지도 추모일을 지정하여 학생들의 넋을 위로하고 있다. 현재 무학중, 고등학교 졸업생의 증언에 의하면 추모기간은 있지만 행사 등은 하지 않고 있다고 한다.

서울교육대학교 재학생이던 이승영(당시 20세)은 교생 실습을 가느라 역시 16번 시내버스에 탑승했다가 그 사고로 인해 생을 마감했다. 사후 장기기증을 원했던 고인의 뜻을 가족들이 지켜 주려고 했으나 장기기증 시한인 사망 후 6시간을 넘겨 시신이 수습되어 고려대학교 의과대학에 시신을 해부 실습용으로 기증하는 것으로 대신해서 고인의 뜻을 기렸다. 고인의 모친은 보상금으로 교회를 통해 장학회를 운영하여 어려운 형편의 신학도들의 장학금 지급 및 강원도 전방 부대에 이동도서관 차량 기증 등의 선행을 베풀기도 했다.


성수대교 참사를 다룬 다큐멘터리(舊 소방방재청 제작)[23]

3. 사고의 원인

공식적으로 발표된 성수대교의 붕괴 원인은 크게 둘로 나뉜다.

파일:attachment/sungsu04.jpg

1. 교량 최초 시공사인 동아건설의 책임 부분
  • 유효단면적의 감소와 응력집중을 유발하게 한 용접시공의 결함과 제작오차 검사 미흡. 지어졌던 1970년대에는 파격적이었던 트러스 공법이 쓰였는데 설계와 시공이 미흡했고 유지보수도 부실했다. MBC가 사고 현장의 수중촬영을 하였는데 트러스의 강도만큼 중요한 볼트가 손으로 뺄 수 있을 정도로 허술했고 볼트의 구멍도 제멋대로 뚫려 있었다.

2. 교량 보수 및 관리기관인 서울특별시의 책임 부분
  • 피로균열의 진전을 예방하지 못한 점검 및 유지관리 미비
  • 급속도로 증가하는 차량 통행량에 대비하지 못함. 하루 통행량을 8만 대 정도로 설계했지만 실제 하루 통행량은 2배가 넘는 16만 대 이상이었다. 게다가 붕괴 전해인 1993년에 동부간선도로의 강북구 구간(성수~상계) 구간이 개통되면서 교통량이 폭증했는데 당시 서울시는 하중제한만 낮추는 형태로 대처하였고 그나마도 제대로 단속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는 청담대교가 건설되기 전[24]인 데다 성수대교 북단은 당시 일차 개통된 강변북로와 연결되지 않고 용비교와 연결되는 (현재의) 뚝섬로에 설치되어[25] 근교 교량 분산이 쉽지 않아 경부간선도로 입구 분기점에서 가장 가까운 언주로와 성수대교로 교통량이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26] 특히 당시 성수대교는 왕복 4차로에 불과했기 때문에 상습적인 교통체증이 심하여 붕괴가 가속화되었다. 이러한 교통량 문제로 노후화 논란이 가장 크게 일어나는 게 현재의 성산대교다.[27]
  • 피로균열을 가속화시키는 규정 이상 중량차량 통행 규제 소홀. 일반적인 대형트럭이 다닐 수 있을 정도인 18톤 하중으로 설계되었다. 하지만 성수대교 북단에는 바로 삼표산업 레미콘공장이 있었다.[28] 대당 중량이 최대 25톤에 이르는 레미콘 믹서트럭들이 아무런 규제 없이 통행했고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차량총중량(40톤 이하)과 축중량(10톤 이하)만 규정돼 있을 뿐 그에 따르는 추가 규제가 없기 때문이다. 차량총중량에 최원축간거리(맨 앞바퀴와 맨 뒷바퀴 사이의 거리)의 제한이 없고 축중량에 인접축간거리의 제한이 없다.

3. 건설업계의 능력 부족
성수대교는 경간 중앙부에 (문의 경첩과 같은) 힌지를 넣는 게르버보 형식으로 건설되었다. 구조계산이 쉬워 당시에 많이 사용했던 구조형식이다.

구조계산에 필요한 수치 중 '부정정차수'라는 것이 있다. 부정정차수가 높아질수록 구조해석을 하는 데 필요한 계산량이 껑충껑충 뛰어오른다. 오늘날에는 컴퓨터가 발달해서 구조해석이 쉽지만 당시에는 조금만 부정정차수가 높으면 슈퍼컴퓨터를 이용하더라도 해석에 걸리는 시간은 갑절로 늘어났다. 그런데 구조계에 힌지를 넣으면 부정정차수를 한 단계 낮출 수 있고 게르보 형식은 부정정차수가 0인 정정구조물이다.

정정구조물은 구조적으로는 안전하고 구조계산 방식이 간단해서 펜과 계산기만으로도 빠르게 계산할 수 있지만 부재(Member)가 하나라도 파괴되면 구조물 전체가 붕괴되는 위험을 내포한다. 직관적으로도 교량 중간에 힌지를 넣으면 위험함을 알 수 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성수대교이다.

4. 조치 및 경과

사고 당일 이영덕 국무총리가 김영삼 대통령에게 사직서를 제출했으나 1994년 10월 24일에 공식적으로 반려되었던 적이 있었다. 오후 7시에 참사의 책임을 물어 이원종 서울특별시장이 문책성 경질되었다. 참으로 얄궂게도 이원종이 서울시장으로 발탁된 것은 충청북도지사 시절인 1993년 1월에 발생한 우암 상가아파트 붕괴사고를 잘 수습한 솜씨가 높이 평가받은 덕이었다고 한다. # 다만 그 사고 당시의 책임자였기 때문에 내무부에서 경고를 받았다. #

경질된 이원종 시장을 대신해서 당시 경상북도지사였던 우명규 지사가 서울특별시 시장으로 긴급임명되었지만 우명규 신임 시장이 성수대교 건설 당시 서울시 책임자(서울특별시 건설본부장)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11일 만에 자진사퇴했다. 사고 당시가 지방자치제 부활 이전[29]이어서 지역민들의 선거로 뽑는 민선체제가 아닌 정부에서 임명하는 관선체제로 지방정부의 장이 선발되었기 때문에 이처럼 발빠른 인사이동을 할 수 있었다. 결국 다음달 3일 여당 전국구 의원 최병렬이 새로 부임했다. 최병렬은 서울의 마지막 관선시장이었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를 계기로 부실시공을 막겠다는 의지 표명으로 나름대로 의지를 가지고 일했지만 임기 종료 하루를 앞둔 1995년 6월 29일 서울 강남 한복판에서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민선으로 당선된 조순 신임 시장의 취임이 7월 1일이었기 때문에 경질이야 되지는 않았지만 최병렬 역시 서울시장으로서 대형참사의 책임을 안고 불명예스럽게 이임했다.

통행량이 많은 서울 지역에 주요 한강 교량이 끊겨서 교통체증도 심각해지리라 예상되어 서울시에서는 군 당국과 협의하여 군사작전용 부교 설치까지 검토했다. 그러나 부교가 일반차량 통행용이 아닌 군사작전용이기 때문에 훈련된 병력이 아니면 교량 통행에서 안전 문제도 있었고 결정적으로 부교가 왕복 4차선인 성수대교의 절반 규격이었기 때문에 설치효과도 미비할 터였으며 군사작전이나 보안상 문제가 될 소지도 있기 때문에 결국 철회되었다. 다행히 시민들이 우회도로를 사용하거나 대중교통을 이용했기 때문에 통행량이 잘 분산되어 생각보다 큰 체증이나 문제점은 발생하지 않았다.

사고 직후 서울특별시는 전문가들의 자문을 받아 정리 및 수습이 완료되는 대로 3개월 안에 성수대교의 붕괴부분을 재시공하고 완벽히 보수하여 재개통하겠다는 계획을 발표했다가 시민들에게 거센 항의를 받은 후 철회했다.

동아건설은 사고 직후 성수대교 시공 후 5년간 하자보수를 성실히 해 직접적인 책임이 없다고 발뺌했지만 여론의 뭇매를 맞고 결국 사과광고를 일간지에 게재했다. 수습이 마무리되면 1,500억 원을 들여 전면 재건설하고 한강교량의 전면 보수 및 관리를 위해 100억 원을 서울시에 기부하겠다고 발표했지만 이미 악화될 대로 악화된 여론에 다시 한 번 뭇매를 맞았다.

결국 시민들의 정서를 감안해 성수대교를 새로 건설하기로 결정했다. 1995년 4월 26일부터 현대건설이 새로 건설하기 시작해 1997년 7월 3일에 완공되어 차량통행이 재개되었다. 해외 감리업체인 High Point Rendel 社가 대한민국 최초로 해외 감리업체 자격으로 시공 감리에 참여하여 한국 감리회사와 공동으로 시공감리 업무를 담당하기도 했다. 당시 부실시공이 한국 감리사와 시공사의 담합이나 뇌물수수 등 비리에서도 비롯되었기 때문이었다. 가양대교 시공 때는 아예 해외 감리업체가 단독으로 감리업무를 담당했을 정도로 정부가 한국 감리업체를 심각하게 불신했다. 한국 감리업계가 얼마나 부패했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사례이다.

사고 발생 7년 후 대법원은 본 사고의 직접적 원인이 동아건설의 부실시공 때문이라고 확정 판결을 내렸다. 동아그룹 자체도 2001년을 끝으로 완전히 해체되면서 동아건설도 프라임개발을 거쳐 SM그룹 계열이 되었다.[30]

1999년에 피해자 한 명의 유가족이 성수대교 북단의 위령비 근처에서 목숨을 스스로 끊는 안타까운 일이 일어났다. # 후술할 조관우의 실락원 MV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와 유가족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제작되었다.

5. 형사 재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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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론
各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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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소송법
刑事訴訟法
외국에서의 사인에 의한 체포(2011도12927) · 미국문화원의 관할권(86도403) · 제3자 소유 임의제출물의 증거능력(2021도11170) · 원격지 서버에 대한 압수·수색(2017도9747) · 검사의 공소권남용 (2016도14772) }}}}}}}}}

대법원 1997. 11. 28. 선고 97도1740 판결
[업무상과실치사·업무상과실치상·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업무상과실자동차추락][집45(3)형,792;공1998.1.1.(49),184]
【판시사항】
[1] 성수대교 붕괴사고에서 교량 건설회사의 트러스 제작 책임자, 교량공사 현장감독, 발주 관청의 공사감독 공무원 등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 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 업무상과실자동차추락죄 등의 유죄를 인정한 사례

[2] 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죄에 있어서 '손괴'의 개념

[3] 구 형법 제189조 제2항에서 말하는 '업무상과실'의 주체에 해당한다고 본 사례

[4] 업무상과실로 인하여 교량을 손괴하여 자동차의 교통을 방해하고 그 결과 자동차를 추락시킨 경우, 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죄와 업무상과실자동차추락죄의 죄수관계

[5] 교량붕괴에 있어서의 과실에 의한 공동정범 성립 여부(적극)

[6] 독립행위 경합의 요건

[7]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소시효 기산점
【판결요지】
[1] 성수대교 붕괴사고에서 교량 건설회사의 트러스 제작 책임자, 교량공사 현장감독, 발주 관청의 공사감독 공무원 등에게 업무상과실치사상, 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 업무상과실자동차추락죄 등의 유죄를 인정한 사례.

[2] 구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89조 제2항, 제185조에서 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의 한 행위태양으로 규정한 '손괴'라고 함은 물리적으로 파괴하여 그 효용을 상실하게 하는 것을 말하므로, 이 사건 성수대교의 건설 당시의 부실제작 및 부실시공행위 등에 의하여 트러스가 붕괴되는 것도 위 '손괴'의 개념에 포함된다.

[3] 구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89조 제2항에서 말하는 '업무상과실'의 주체는 기차, 전차, 자동차, 선박, 항공기나 기타 일반의 '교통왕래에 관여하는 사무'에 직접·간접으로 종사하는 자이어야 할 것인바, 성수대교는 차량 등의 통행을 주된 목적으로 하여 건설된 교량이므로, 그 건설 당시 제작, 시공을 담당한 자도 '교통왕래에 관여하는 사무'에 간접적으로 관련이 있는 자에 해당한다고 본 사례.

[4] 업무상과실로 인하여 교량을 손괴하여 자동차의 교통을 방해하고 그 결과 자동차를 추락시킨 경우에는 구 형법(1995. 12. 29. 법률 제5057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제189조 제2항, 제185조 소정의 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죄와 같은 법 제189조 제2항, 제187조 소정의 업무상과실자동차추락죄가 성립하고, 위 각 죄는 형법 제40조 소정의 상상적 경합관계에 있다.

[5] 성수대교와 같은 교량이 그 수명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건설업자의 완벽한 시공, 감독공무원들의 철저한 제작시공상의 감독 및 유지·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철저한 유지·관리라는 조건이 합치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위 각 단계에서의 과실 그것만으로 붕괴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쳐지면 교량이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따라서 위 각 단계에 관여한 자는 전혀 과실이 없다거나 과실이 있다고 하여도 교량붕괴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붕괴에 대한 공동책임을 면할 수 없다.

[6] 2인 이상이 상호의사의 연락이 없이 동시에 범죄구성요건에 해당하는 행위를 하였을 때에는 원칙적으로 각인에 대하여 그 죄를 논하여야 하나, 그 결과발생의 원인이 된 행위가 분명하지 아니한 때에는 각 행위자를 미수범으로 처벌하고(독립행위의 경합), 이 독립행위가 경합하여 특히 상해의 경우에는 공동정범의 예에 따라 처단(동시범)하는 것이므로, 상호의사의 연락이 있어 공동정범이 성립한다면, 독립행위경합 등의 문제는 아예 제기될 여지가 없다.

[7] 공소시효의 기산점에 관하여 규정한 형사소송법 제252조 제1항에 정한 '범죄행위'에는 당해 범죄행위의 결과까지도 포함하는 취지로 해석함이 상당하므로, 교량붕괴사고에 있어 업무상과실치사상죄, 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죄 및 업무상과실자동차추락죄의 공소시효도 교량붕괴사고로 인하여 피해자들이 사상에 이른 결과가 발생함으로써 그 범죄행위가 종료한 때로부터 진행한다고 보아야 한다.
대법원 1997. 11. 28. 선고 97도1741 판결
[업무상과실치사·업무상과실치상·업무상과실일반교통방해·업무상과실자동차추락·허위공문서작성·허위작성공문서행사·사문서위조·위조사문서행사][공1998.1.1.(49),191]
【판시사항】
[1] 성수대교 붕괴사고에서 교량의 유지·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서울시 도로국 및 산하 동부건설사업소 소속 공무원들에게 교량 제작 시공자들과의 공동과실 책임을 인정한 사례

[2] 사문서위조죄에 있어서 추정적 승낙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한 사례
【판결요지】
[1] 성수대교 붕괴사고에 있어서 교량의 유지·관리 책임을 맡고 있던 서울시 도로국 및 산하 동부건설사업소 소속 공무원들에게 교량 제작 시공자들과의 공동과실 책임을 인정한 사례.

[2] 사문서위조죄에 있어서 추정적 승낙이 있다고 볼 수 없다고 한 사례.

이 사고의 판례를 다룬 판결문(97도1740)이 법학계에서 큰 논란이 되었다. 해당 판결문 전문[31] 어마어마한 부실공사 사고였기 때문에 사고의 책임을 책임자들이 확실하게 져야 했으므로 대법원에서는 과실범의 공동정범이라는 개념을 동원하여 설계 및 시공 관련자를 싸그리 잡아넣었다.

내용은 다음과 같다.
대법원 1997. 11. 28. 선고 97도1740 판결
이 사고 성수대교와 같은 교량이 그 수명을 유지하기 위하여는 건설업자의 완벽한 시공, 감독공무원들의 철저한 제작시공상의 감독 및 유지·관리를 담당하고 있는 공무원들의 철저한 유지·관리라는 조건이 합치되어야 하는 것이므로, 위 각 단계에서의 과실 그것만으로 붕괴원인이 되지 못한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합쳐지면 교량이 붕괴될 수 있다는 점은 쉽게 예상할 수 있고, 따라서 위 각 단계에 관여한 자는 전혀 과실이 없다거나 과실이 있다고 하여도 교량붕괴의 원인이 되지 않았다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붕괴에 대한 공동책임을 면할 수 없다고 봄이 상당하다 할 것이다.

이 사고의 경우, 피고인들에게는 트러스 제작상, 시공 및 감독의 과실이 인정되고, 감독공무원들의 감독상의 과실이 합쳐져서 이 사건 사고의 한 원인이 되었으며, 한편 피고인들은 이 사고 성수대교를 안전하게 건축되도록 한다는 공동의 목표와 의사연락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므로, 피고인들 사이에는 이 사고 업무상과실치사상등죄에 대하여 형법 제30조 소정의 공동정범의 관계가 성립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판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다. 주로 과실범의 공동정범에 관한 비판이 쏟아졌다.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공모공동정범을 인정한다 쳐도 최소한 공모(혹은 행위지배)는 있어야 한다. 그러나 다수의 과실범 같이 법적 주의의무를 위반한 실수들 때문에 범행이 일어났다면 서로 간의 암묵적인 동의나 묵시적 행위는 있었을지언정 공동정범 개념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구체적인 합동의 실행 사실은 있을 수 없기에 과실범의 공동정범이란 개념은 있을 수가 없다는 이야기다.

하지만 그런 학설과는 달리 대법원은 구체적인 범행의도를 가지고 범행을 한 사실이 없더라도 그들 간의 행위를 묵인한 탓에 일어날 사고 결과를 피고인들이 예상할 수 있었다면 과실범도 공동정범이 인정된다는 입장을 밝혔으니 합리적인 결론이긴 해도 법학적인 통설, 즉 공동정범 이론이 발전되어 학설적으로 지배적 이론이 된 '기능적 행위지배설'[32]과는 대치되는 결론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고의는 최소한 결과 발생에 대한 의지가 있어야 성립하는 것인데 그런 의지요소가 없는 과실범이 공범으로 범죄를 저지르겠다는 기능적 역할분담을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성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다만, 해당 개념을 학설대로 엄격히 적용한다면 당 사고의 책임자들은 과실은 분명히 인정되지만 누가 구체적으로 결과발생에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는지를 입증하지 못한다면 현행 형법상 해당 범죄의 미수로 처벌될 뿐이다.[33] 그런데 과실범의 미수범은 현행법상 처벌 규정이 없으므로 잘못한 사람은 있는데 책임자 전원이 형법상 무죄라는 결론을 수긍해야 한다. 이런 결론은 죄형법정주의에 의거한 것이지만 일반 국민의 법감정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것이었다. 중대한 사고에 기존의 법적 안정성을 해치지 않기 위해 엄격하게 해석하여 전원 무죄를 선고했다가 발생하는 법감정의 동요와 법에 대한 불신은 오히려 향후의 법적 안정성을 더 크게 해칠 위험성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대법원은 '적극적 의견'을 내세우면서 일부 실행에 가담자 전원의 연대책임을 원칙으로 하는 공범 규정을 끌어들인 것이다. 거칠게 풀어쓰자면 '너희 각각이 이 사고의 모든 원인이라고는 말하지 못해도 각자의 행위가 더해져서 결과가 발생한 것은 명백하니 너희는 전부 유죄'라는 것이다.

이러한 판례태도는 이 사고 이전에도 존재하였으며 이후에도 일관적으로 인정되었다. 이와 같은 법리로 구포역 무궁화호 열차 전복 사고에서 도급 건설회사의 현장소장과 한전의 지소장이 업무상과실치사상의 공동정범으로 처벌되었으며(94도660) 경산 열차 추돌사고에서 116호 무궁화호의 기관사와 부기관사는 과실의 공동정범이 인정되어 관련법률로 처벌을 받았고(82도781)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도 견축계획의 수립, 건축설계, 건축공사공정, 건물 완공 후의 유지관리 등에 있어서의 과실이 복합적으로 작용하여 건물이 붕괴되어 많은 사람이 사상에 이르른 상황에서 각 단계별관련자들을 업무상과실치사상죄의 공동정범으로 처벌하였으므로(96도1231) 판례의 연속성상에서 볼 때 이 사고가 특이한 사례라고는 할 수 없다.

이러한 판결은 다수설과는 시각차가 있더라도 실질적 법치주의를 위해선 그런 판결이 필요하다고 본 것이고 그런 이유로 판례의 결론을 지지하여 과실범의 공동정범을 인정하는 학자들도 있다. 덧붙여 판례를 비판하는 학자들도 그렇게 판례의 결론이 나오게 된 당시 시대상황과 국민들의 법감정을 이해하고는 있다. 단지 판례가 당시의 구체적 타당에만 몰두하여 과실범의 공동정범을 인정할 때 좀 더 구체적이고도 명확한 법이론을 제시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아쉬워하는 것이다.

6. 여파

이듬해에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까지 일어나면서 1980년대와 1990년대 초에 지어진 건물들에 대한 공포와 회의적 시각이 확산되어 대한민국 정부는 전국의 모든 건물들에 대한 안전 평가를 실시했는데 그 결과는 다음과 같다.
  • 전체 고층 건물의 1/7(14.3%)은 개축이 필요한 상태였다.
  • 전체 건물의 80%는 크게 수리할 부분이 있었다.
  • 전체 건물의 2%만이 안전한 상태였다.

특히 한강에 있는 다리들 역시 안전성이 의심되면서 참변 이후 한강의 모든 다리들의 안전성 정밀 검사를 실시한 적이 있다. 이 중 서울 지하철 2호선의 서쪽 철교인 당산철교가 안전성에 문제가 있다는 판정을 받았는데 상태가 매우 심각해서 성수대교가 안 무너졌으면 당산철교가 먼저 무너졌을 것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사실 당산철교는 워낙 상태가 심각해서 이미 이 사고 이전부터 위험성이 몇 번 보도되기도 할 정도였다. 그 덕분에 성수대교 붕괴 전에도 이례적으로 지속적인 관리가 이뤄지고 있었고[34] 이를 인지한 서울지하철공사에서도 당산철교 통과 시 평소 속도보다 서행 운행하고 있었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버텨 붕괴를 막을 수 있었다. 결국 당산철교는 붕괴된 성수대교와 마찬가지로 전면 재시공에 들어갔다. 아니나다를까 당산철교는 철거 공사 도중 스스로 무너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다행히 공사 인부도 들어가 있지 않았을 때라서 당시 인명피해는 없었다.

이 사고 이후 광진교한남대교, 마포대교, 양화대교도 재시공되거나 전면보수에 들어갔다. 광진교는 이 사고 이전부터 너무 낡아서 재시공 이야기가 끊임없이 나왔다. 한남대교도 이전부터 상판에 구멍이 뚫리는 등 문제가 있었다. 양화대교는 큰 문제는 없었지만 너무 낡아서 붕괴위험이 있다는 결론이 나왔다. 결국 광진교는 철거 후 완전히 재시공했고 한남대교는 확장도 할 겸 하류 쪽에 새 교량을 건설하고 기존 교량은 상판을 뜯은 뒤 재시공했으며[35] 양화대교도 상판을 뜯은 뒤 재시공했다. 마포대교는 때마침 확장 계획이 잡혔기 때문에 신교량을 2000년에 건설하고 기존 교량을 철거하고 다시 지었다.[36]

해당 사고로 인해 시설물 안전관리 시스템에도 변화가 생겼다. 정부는 1995년 1월 5일에 준공된 지 10년 넘은 주요 시설물을 외부 전문기관에 정밀안전진단을 맡기도록 하는 '시설물의 안전 및 유지관리에 관한 특별법'(약칭: 시설물안전법)을 제정하여 4월 6일 시행했고 이를 책임질 기관으로 한국시설안전공단을 세웠다.

그러나 성수대교가 무너진 지 만 8개월, 시설물안전법이 시행된 지 만 2개월이 지난 1995년 6월 29일[37]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가 일어나고 말았다.

7. 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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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고 차량 중 인양되는 파란색 기아 베스타 승합차에는 경찰의 날을 맞아 우수 중대로 선정되어 표창을 받기 위해 본대로 가던 의경들이 타고 있었는데 교량을 통과하다가 상판 한복판에서 바닥째로 그대로 추락했지만 사진에서 볼 수 있듯이 차량의 파손 없이 안전하게 착지했다.[38] 이 차에 탄 의경들은 대부분 다치지 않았기 때문에 사고 발생 후 헌신하여 다른 피해자들을 구조했다. 하지만 한성운수 소속 16번 시내버스는 붕괴된 부분에 아슬아슬하게 걸렸다가 결국 거꾸로 뒤집어지면서 무너진 상판 아래로 추락하는 바람에 다수의 사망자가 생기고 말았다. 사고 발생 20주기를 맞아 JTBC 뉴스룸에서 이들 중 한 명과 인터뷰를 진행하였는데 이들은 사고 발생 후 며칠 동안 경찰병원에 입원한 거 말고는 아무런 피해 보상이나 추가로 받은 치료가 없었다고 하며 역시 PTSD(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에 아직도 시달린다고 한다.[39][40] 2021년 인터뷰[41]

사고 초기 대응이 늦었다고 비판을 받기도 했는데 그도 그럴 것이 1994년 서울 한강 다리 한가운데가 뚝 끊어졌다는 말을 곧이 곧대로 믿을 사람이 없을 만큼 말도 안 되는 사고였기 때문이다. 1990년대에는 장난전화를 하는 사람도 많았던 만큼 접수 직원도 장난전화로 치부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장 큰 붕괴 원인이 과도한 하중으로 인한 교량 구조물 피로였던 만큼 한강 교량에 통행하는 차량을 대상으로 과적차량 단속이 체계적으로 시행되기 시작하였으며 한강 교량을 비롯해 전국의 교량점검도 크게 이루어졌다.

공교롭게도 사건이 발생 한지 3일만에충주 제5호 화재사고가 났다.

사고 이후 새로 지어진 성수대교는 사고의 여파로 인해 집중관리대상으로 분류되어서 철저히 점검받고 있다. #
다리에 구멍이 났다는 제보로 나갔는데 무너진 상판 위로 버스가 추락해 있었다. 상상도 못했던 상황... 할 말도 없고, 도망가고 싶었다. 그렇게 7시간 동안 중계차를 탔다.
ㅡ 양찬승 기자[42]

MBC 뉴스데스크에서는 사고가 나기 1년 전부터 한강 교량의 보수 및 관리가 매우 부실하여 붕괴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보도를 시리즈로 내보낸 적이 있었다. 물론 당시 집중적으로 보도했던 부분은 교각 구조물 아랫부분의 침식 및 구조강성 약화 문제로서 성수대교 붕괴 원인의 직접적인 부분과는 별로 관계가 없었지만 전반적으로 교량 보수가 시급하다는 진단 및 붕괴의 위험성도 무척 강조했다. 이러한 문제점에 대해 서울시 당국에 공식적으로 문제 제기를 했지만 서울시는 안일한 대처와 반응을 보이기만 해 고발적 성격으로 이들의 인터뷰를 뉴스에 보도하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시 당국은 이런 참사가 나기까지 교량의 위험성을 방치하였고 참사 이후 MBC에서는 이 보도를 다시 방송해 주면서 결국 서울시 당국은 붕괴 사고 책임에서 빼도 박도 못하게 되었다.[43]

사고 이후 서울 시내 인문계 고등학교 입학생의 학교 배정 최우선 원칙으로 절대 한강을 건너게 하지 않는다[44][45]는 조항이 새로 생겨 거의 10여 년 동안 유지되었다가 사라졌다.[46] 여기서 사망한 학생들은 이후 명예 졸업장을 받았다.

사망한 무학여고 학생들 중에는 일원동수서동 출신들이 많았다. 일원·수서동 일대의 아파트 단지가 1992~1994년에 입주가 시작되었는데[47] 이 때 이사 온 학생들은 거주 기간[48] 부족으로 인해 강남 지역의 고등학교로 배정받지 못하고 한강 건너의 무학여고로 배정받았다. 당시 일원·수서지구 학생들의 타학군 배정에 대해서 논란이 많았다.[49] 대단위 신설 아파트 지역 학생들이 전원 타학군으로 배정되는 것은 유례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자 당시 서울특별시교육청은 일원·수서지구를 특수 학군화하여 해당 지역 학생들을 거주 기간에 관계없이 당시 일원 지구 내에 개교 예정이었던 중산고등학교나 이들 지역에서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위치한 송파구의 잠실여고, 가락고 등으로 배정하려고 하였지만 다른 강남 지역 학생들과의 형평성, 송파 지역 학부모들의 반발 등이 문제가 되자 결국 일원·수서지구 학생들 역시 동일하게 거주기간제를 적용해 최종적으로 통학시간만 1시간이 넘는 타 학군 학교로 배정하게 되었는데 결국 이것은 불행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8학군 고등학교의 과열현상으로 인해 코 앞의 학교를 두고 먼 거리를 통학해야만 했던 것도 안타까운데 결국 이런 일까지 일어나 사람들을 더욱 안타깝게 만들었다.

사고 이후 강남구에서 무학여고로 통학하는 학생들이 불편을 겪자 당시 서울시교육청 측에서는 강남 일대와 선릉역, 삼성역을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무학여고 측에서는 왕십리역과 무학여고를 순환하는 셔틀버스를 운행하기도 하였다.[50]
사망자 32명 중에는 필리핀 국적의 외국인도 1명 포함되어 있었다.

제일 많은 인명피해가 난 한성운수 소속 16번 버스 기사였던 유모 씨[51]도 목숨을 잃었다. 유 씨는 원래 전세버스 기사로 근무했으나 전세버스 기사를 그만 둔 뒤 1992년에 한성운수 번동 본사로 이직한 후 전세버스 기사에서 시내버스 기사로 전향했으며 1992년에 29번(번동-무학여고-성수대교-고속터미널-방배동, 현 간선 148번) 노선을 운행했다가 1년 뒤인 1993년부터 이듬해 붕괴 사고 직전까지 16번 노선에서 운행했다. 16번 버스 기사 유 씨의 부인인 이모 씨는[52] "남편이 새벽에 일 하러 나갈 때 춥다며 옷을 두껍게 입고 나갔다"[53]며 "그 때 속옷까지 갈아 입혔는데 마지막이 될 줄 몰랐다."고 몸부림을 치면서 오열했고 같은 회사의 동료 버스 기사인 김모 씨는 "유 씨가 계속 29번 버스를 운행해 왔다면 이런 끔찍한 사고가 없었을 것"이라고 안타까워했다. 관련 기사 1, 관련 기사 2

당시 한성운수 버스기사들은 '유 씨가 동료기사들을 대신해 희생한 것으로 생각한다' 며 안타까워했다. 링크

이 사고로 무학여고에 다니던 딸을 잃은 아버지 장모 씨는 5년 후인 1999년 8월 18일 성수대교 북단에 건립된 희생영령 위령비[54] 앞에서 농약을 마시고 닷새 뒤인 8월 23일에 세상을 떠나 딸과 운명을 같이 하면서 주위를 안타깝게 했다.[55] 참고로 이 위령비의 정확한 위치는 한남대교 방면 강변북로 진/출입로 쪽인데 위령비와 주차장 사이는 자동차 도로로 막혀 있어 접근이 쉽지 않을 뿐더러 횡단보도나 보행자 신호등 같은 안전시설도 없고 위령비 주차장도 화단으로 막혀 있어 진입로를 지나칠 수 있다. 더군다나 위령비를 관리하던 공무원조차도 현재는 모두 퇴직한 상황이라 제대로 관리조차도 되지 못하고 방치된 상태이다. #[56]

만약 이 사고가 21세기에 일어났다면 희생자들과 관계된 사람들이 심리치료를 받는 등 후속조치가 곧바로 이루어졌을 것이지만 당시에만 해도 그런 식의 개념 자체가 잘 없었고, PTSD란 개념 자체도 생소했다. 특히 지금도 그렇지만 미성년자들이 정신과 치료를 받는다는 것에 대한 이미지는 더욱 좋지 않았다. 그래서 큰 사고로 많은 희생자가 났음에도 불구하고 무학여고 학생들은 바로 다음날 아침 추모식을 잠깐 가진 뒤 곧바로 정상수업에 들어갔고 공적으로 어떠한 심리적인 치료나 상담을 받을 수 없었다. 이 사고는 수능 시험을 한 달 정도 앞두고 일어난 사고였기 때문에 당시 3학년 희생자와 같은 반에 있던 학생들이 특히 여파가 컸다고 한다. 링크

당시 학교로 등교하던 딸을 참사로 잃은 어느 아버지를 참사 당일 MBC에서 취재했는데[57] 당국의 무관심과 무책임한 대처에 분노와 울분으로 가득찬 아버지의 인터뷰 내용이 꽤 섬뜩했다. #

이러한 참상들은 이틀 뒤 발생한 납북 국군포로 조창호탈북으로 서서히 잊혀가는 듯했다.

성수대교 붕괴 참사 이후에 이보다 인명피해 규모가 훨씬 큰 참사(대형사고)들이 잇따라 속출했다. 2007년 미국에서 미시시피 강 교량 붕괴 사고가, 2018년 이탈리아에서 제노바 모란디 교량 붕괴 사고가, 2019년 대만에서도 난팡아오대교 붕괴 사고가 일어났다.

서울시 시내버스는 일부 잔존했던 1988년 이전 출고분으로 해당 사고 차량의 도색과 동일한 보라돌이 색[58]이 적용된 차량들도 사고 당시를 떠올리게 한다는 일부 반응에 1995년 냉방화를 전후로 대부분 재도색을 거치거나 일부는 조기대차되기도 했다. 특히 사고 버스 업체였던 한성운수도 1/3이 보라돌이색이였는데 두말 할 것 없이 해당 도색을 전부 없앴다.[59] 1990년대 후반에는 1988 서울 올림픽에 맞춰 도입되었던 4종 파스텔톤 도색과 냉방화에 맞춰 도입된 몬드리안 도색차량만 공존하게 되었다.

참사가 일어난 직후인 1994년 11월 10일 북한이 정오에 '중대방송'을 내보내자 정부에서 긴장이 엄청났는데 느닷없이 김정일이 청류대교 2단계 공사를 지시했다는 보도가 나오자 일부에서는 이 사고를 이용해 남한을 조롱하고자 하는 북한의 심리전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했다. 동아일보, 한겨레

이 다리를 지은 동아건설은 1990년대의 건설사들이 그랬듯이 해외 공사 수주와 한국의 부동산 붐 등으로 잘 나갔고 동아그룹의 모기업이란 메리트가 있었지만 해외 공사에 치우친 탓에 한국에선 아파트 신축하는 경쟁사들과 달리 재개발재건축밖에 못 땄고, 막대한 이주 비용 때문에 제2금융권으로부터 단기자금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안 그래도 회사 내부부터 어지러운 통에 해당 사고로 신뢰도가 쓰레기통에 처박히자 동아건설은 큰 타격을 입고 1997년 외환 위기의 여파로 1998년에 최원석 회장이 물러나고 워크아웃을 겪다가 2000년에 부도맞고 그룹이 해체되었다. 이때 동아그룹의 계열사 중 대한통운이 있었다. 대한통운은 본디 국영기업이었지만 민영화하면서 동아그룹이 인수해서 회생에 성공했는데 외환 위기의 여파로 2000년에 독립했으나 모기업의 부도 여파로 채권단이 관리했고 2008년에 금호아시아나에 팔리더니 CJ그룹으로 갔다. 반면 동아건설은 2001년 파산 이후 2007년부터 프라임개발을 거쳐 SM그룹 계열사가 됐다.

포털에서 '성수대교 붕괴' 검색어를 이용해 오래된 기사 순으로 검색하면 그 당시 연합뉴스가 된 연합통신에서 출고된 기사들을 쉽게 확인할 수 있다. 사고현장의 시간별 상황이나 피해자 구조·치료 현황, 자원봉사 현황, 사고 원인에 관한 기사뿐만 아니라 기자들이 출입하던 정부 부처의 분위기를 다룬 스케치 기사, 사고 직후 PC통신에 올라온 글들도 기사화했다. 기사가 올라온 시각을 보면서 읽다 보면 당시의 긴박하고 참혹했던 분위기를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성수대교와 가까운 한양대학교 서울캠퍼스에서는 성수대교가 무너졌다며 친구들이 난리를 치기에 사고 현장을 멀리서 보았다는 목격담이 전해진다.

당시 오렌지족, 야타족 등의 말이 나올 정도로 유명했던 압구정 로데오거리 상권도 이 사고의 여파로 잠시 위기를 맞았던 적이 있었다. 성수대교가 재개통하면서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이후 이웃한 가로수길 상권의 성장, 젠트리피케이션 등으로 인해 쇠퇴했다. 그나마 2020년대 들어서 재기하고 있지만.

시사평론가 김용민은 성수대교 사고 당시 대학생 신분의 극동방송 리포터였는데 등교 중 성수대교 근처를 지나다 붕괴를 목격했고 인근 시멘트 회사로 달려가 전화를 빌려 회사에 보고한 뒤 갖고 있던 녹음기와 공중전화를 통해 현장 상황을 생중계했다. 이후 극동방송 PD로 입사했다.

윤종신은 곡 작업을 끝내고 사고가 일어나기 15분 전에 성수대교를 건넜는데 붕괴 소식을 접하고 충격을 받았다고 회고했다.#

사고가 일어난 1994년 10월 21일은 전체적으로 따뜻했던 당시 10월 중 유독 유일하게 기온이 낮았다고 한다. 최고기온부터 10.4℃에 불과했다.



출발! 서울의 아침의 타이틀로 방영한 마지막 날이 바로 성수대교 붕괴 사고 당일이다.

이 사고 이틀 후 LG 트윈스1994년 한국시리즈 우승을 확정지었다.[60]

2024년 10월 21일 참사 30주기를 맞아 합동 위령제가 열렸다. 선배들을 기리기 위해 무학여고 후배들도 마음을 모았다. 유족들은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희생을 헛되이 하지 말라며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어야 한다", "더 이상의 참사는 없어야 한다"고 호소했다. 또한 위령탑이 눈에 띄지 않고 접근이 어렵다[61]며 인근 서울숲으로 이전을 요구했다.

이에 서울시는 난색을 표했다. 지난 2005년 주변 도로 공사로 도보 통행로가 없어질 때 위령탑을 이전하려 했으나 당시에는 유족들이 반대해 이전하지 못했다는 것. 유족들이 원하는 서울숲으로 위령탑을 옮기려면 부지 마련을 위해 숲의 나무를 훼손해야 한다고 이전 불가 이유를 설명했다. 다만, 횡단보도 안전 유도등 설치 등 교통안전 시설을 보완하고 주차 공간 등을 확대해 유족과 시민들의 접근성을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 #

7.1. 정치, 사회에서

김영삼 대통령은 대국민 사과문을 발표하고 사고로 숨진 고인들의 명복을 빌고 유족들에게 위로를 보냄과 동시에 차후 이러한 붕괴 사고가 일어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입장을 밝히는 한편 이 사고를 두고 10월 22일 오후 미국 페리 국방장관과의 면담 중 "부실기업을 떠맡은 기분"[62]이라고 말했다가 비난을 받었고[63] 야당들도 일제히 비판했는데 민주당박지원 대변인은 "경복궁이 무너지면 대원군이 책임져야 한다고 주장할 것이냐?" 며 김영삼 대통령을 비판했다.[64]

그에 대한 책임으로 이원종 서울시장을 전격 경질하고 우명규 경북도지사가 서울시장으로 긴급임명되어 서울시 행정 및 성수대교 참사를 책임지게 하였고, 경북도지사에는 심우영 총무처 차관을 긴급 임명했다. 그런데 신임 우명규 시장도 이 사고에 간접적으로 연루되었다는 의혹이 일면서 취임 며칠만에 또 경질되었고 후임 시장으로 최병렬 전 노동부장관이 임명되었다. 이영덕 국무총리 역시 책임을 지고 총리직에서 사임하는 등 정부 및 행정인사들도 문책을 받거나 사임을 요청했으나 대통령이 사고를 수습해야 하는 책임을 처리해야 하기 때문에 반려하였다.

7.2. 대중문화에서


  • 1995년 발매된 DJ DOC의 정규 2집에는 이 참사를 모티브로 한 '뉴스속보'와 '성수대교'라는 제목의 트랙들이 특별히 수록되어 있다. '뉴스속보'는 '성수대교'의 인트로 성격의 나레이션으로 실제 참사 당일 MBC 뉴스데스크 보도실황을 그대로 녹취하여 인용한 것이고 '성수대교'에서는 참사를 일으킨 당국의 무책임한 태도의 분노와 희생자와 유족의 슬픔을 가사로 표현했다. 현 사회의 황금만능주의를 제대로 까는 가사다. 참고로 보컬이 없는 랩이다.[65]
1절: 우리들은 이제 더이상 용서할 수 없다 그 어떤 변명 핑계 용납할수 없다 무너져 버린 다리에 끊어져 버린 꿈 무너져 버린 사랑 무너져 버린 믿음 어른들의 치졸함에 누명을 쓰고 가버린 친구들을 우리들은 기억해야 한다 아니꼽고 치사하고 유치하고 비겁한... 아-

후렴: 성수대교 성수대교 1994 부실공사 추방원년 1994

2절: 무학여고 졸업식에 싸늘하게 비어있는 8개의 빈 자리에 눈물젖은 흰 국화 그들을 대신해서 졸업장을 받았고 교우들은 먼저 간 친구의 이름을 부르며 서로를 부둥켜 안고 울어야만 했다 어느 아버지는 졸업식을 빠져나와 성수대교 한복판에서 딸의 이름을 통곡하며 부르짖으며... 아 -

후렴: 1994 부실공사 추방원년 1994

  • 신해철이 주축이 되어 결성된 록 그룹 N.EX.T의 3집에도 등장한다. 3집 앨범 <The Return of N.EX.T Part 2 : World>의 서두를 장식하는 프로그래시브 대곡 '세계의 문' 2번째 파트[66] "우리가 만든 세상을 보라"의 가사는 다음과 같다.
아직도 세상을 보이는 대로 믿고 편안히 잠드는가
그래도 지금이 지난 시절보다 나아졌다고 믿는가
무너진 백화점 끊겨진 다리는 무엇을 말하는가
그 어느 누구도 비난할 순 없다 우린 모두 공범일 뿐

발전이란 무엇이며 진보란 무엇인가
누굴 위한 발전이며 누굴 위한 진보인가... (후략)

  • 전술했듯이 이 사고와 유가족 자살 사건을 모티브로 뮤직 비디오가 만들어지기도 했다. 조관우의 5집 타이틀곡 '실락원'이 그것으로 당대 명배우 유인촌과 청춘스타 박시은이 각각 아버지와 딸 역으로 연기했다. 조관우의 미성과 유인촌의 열연이 어우러지면서 눈물 없이는 볼 수 없을 만큼 사고 당시의 유족의 아픔이 생생하게 녹아 있다. 그러나 가사 및 뮤직비디오가 자살을 미화했다는 이유로 방송이 금지되었다.
  • 2006년작 영화 타짜에는 고니가 성수대교 붕괴를 전하는 뉴스를 보면서 평경장에게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고 한탄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러자 평경장은 "넌 세상이 아름답고 평등하다고 생각하냐?"며 고니에게 묻자 고니는 "당연히 그래야 하는 거 아니냐?"고 반문한다. 그러자 평경장 曰 "썅간나새끼, 세상이 아름답고 평등하면 우린 뭘 먹고 사니? 연습이나 하라우!" 그리고 정마담의 내레이션이 이어진다.
"다음 해에 서울에서 백화점이 무너졌을 때, 고니는 더 이상 놀라지 않았어요."
  • 당시 아이큐 점프에 연재 중이던 만화 달숙이에서 '성수대교에서 억울하게 죽은 사람'으로 졸다가 정류장 지나친 사람, 벨 고장난 줄 모르고 계속 벨 누르다 정류장 지나친 사람, 껌팔이를 꼽는 고인드립 개그가 나오기도 했다.[67] 21세기라면 "부적절하다며" 폭풍같이 까였겠지만 당시엔 PC통신이 있긴 했어도 인터넷 커뮤니티 문화가 대중들에겐 생소한 터라 그냥 조용히 묻혔다.
  • 가수 윤종신이 알쓸범잡에서 성수대교가 붕괴되기 불과 15분 전에 성수대교를 지났었다며 그때의 기억을 회고했다.
  • 다음 만화속세상에서 연재됐던 이림 작가의 '봄, 가을'이란 웹툰에서 주인공 이봄이 이 사고로 아버지를 잃는다.
  • 정윤철 감독이 1997년 아마추어 시절 이 사고로 숨진 여학생의 이야기를 토대로 단편영화를 제작하기도 하였다.
  • 2013년작 tvN 일일시트콤 감자별 2013QR3의 주인공 나진아의 아빠가 성수대교 붕괴 사고로 인해 사망했다고 나온다.
  • 2016년 tvN 10주년 특별기획 시그널에서 한영대교 붕괴사고라는 이름으로 나왔다.[68]
  • 테러맨에서 양화대교가 붕괴되는 사건이 나오는데 성수대교 사건을 모티브로 한 것으로 보인다.
  • 영화 벌새에서도 후반부의 주요 사건으로 등장한다.
  • 2013년작 영화 더 테러 라이브에 타 방송사 기자의 대사 중 "성수대교 붕괴 이래 처음 있는 일로...."라는 대사가 나온다.
  • 윤태호 작가의 대표작 야후에서도 주인공이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에서 내면이 폭발되는 고통을 겪은 여러 트라우마 중 하나가 되는 사건으로 등장한다.
  • KBS의 다큐멘터리 모던코리아의 삼풍 편에서도 제법 비중 있게 언급되었다. 삼풍아파트가 개발되기 위해 철거된 서초동 꽃마을을 다루는 파트 중 철거민의 애환을 그린 영화(?)에서 어린이들이 살던 철거된 집(?)의 잔해를 뒤지다가 BB탄 총을 발견하는데 아이가 총을 들면서 빵빵빵빵! 외치는 장면에서 다리 붕괴 재현 모형으로 넘어가고[70] 본격적으로 성수대교 사고 이야기로 넘어가는 편집이 킬포인데 소름끼치는 한편 서글프다.
  • 웹툰 제왕에서 등장인물 김남훈이 1997년 외환 위기를 예견하고 그의 아버지가 "정부에선 한국은 경제 기초 체력이 튼튼해서 절대 그럴 일이 없다잖아." 라고 부정하자 "아버지, 정부 말대로면 다리도 백화점도 절대 무너질 일이 없었겠죠."라고 삼풍백화점 붕괴 사고와 같이 언급하며 반박한다.

8. 유사 사례

9. 관련 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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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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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9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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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6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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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5년 1월 11일
38 양강교 버스 추락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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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영덕 시루봉 CH-53 추락 사고
1984년 1월 1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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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10월 9일
25 아웅 산 묘소 폭탄 테러 사건
1983년 9월 1일
269 대한항공 007편 격추 사건
1983년 4월 18일
25 대구 초원의집 화재
1982년 6월 1일
53 청계산 C-123 추락사고
1982년 4월 26일
62 우순경 사건
1982년 2월 5일
53 제주 C-123 추락사고
1981년 11월 22일
33 부산 금정산 버스 추락사고
1981년 5월 14일
55 경산 열차 추돌사고
1981년 2월 28일
24 대림호 침몰 사고
1980년 6월 5일
23 광주 지하살롱 화재 사고
[ 197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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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10월 27일
26 은성탄광 화재
1979년 4월 14일
44 함백 탄광 폭발사고
1978년 7월 23일
33 한강대교 버스 추락 사고
1977년 11월 11일
59 이리역 폭발사고
1976년 10월 28일
34 동해 어선 조난 사고
1976년 5월 18일
23 답곡리 버스 추락사고
1976년 2월 28일
32 화천 버스 추락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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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 대왕코너 화재사고
1974년 6월 28일
28 대한민국 해경 경비정 제863호 침몰 사건
1974년 2월 22일
159 YTL30호 침몰 사건
1973년 8월 12일
32 영동역 유조열차 폭발 사고
1973년 5월 16일
22 영일 건널목 열차 추돌사고
1972년 12월 24일
30 파크로버호 침몰 사고
1972년 12월 2일
53 서울시민회관 화재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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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의암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12월 25일
166~191 대연각호텔 화재
1971년 10월 13일
20 남원역 열차 추돌사고
1971년 5월 10일
80 청평호 버스 추락 사고
1971년 5월 10일
31 질자호 침몰 사고
1970년 12월 15일
326 남영호 침몰사고
1970년 11월 5일
31 의암호 선박 전복 사고
1970년 10월 14일
46 모산 수학여행 참사
1970년 8월 21일
25 추풍령 고속버스 추락 참사
1970년 4월 8일
33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

[ 196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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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년 9월 17일
37 창녕 기관선 - 남지교 충돌 사고
1969년 1월 31일
41 천안 열차 추돌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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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산청 버스 추락 사고
1968년 1월 8일
41 함양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10월 16일
42 금릉 버스 추락 사고
1967년 9월 15일
29 삼양수산 원양어선 침몰 사고
1967년 4월 8일
80 서울 청구동 C-46 추락사고
1967년 1월 19일
39 해군 당포함 격침 사건
1967년 1월 14일
93 한일호-충남함 충돌 사고
1967년 1월 1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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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1월 18일
22 중구 남산동 판자 아파트 화재
1964년 7월 29일
95+ 서해 어선단 실종 사고
1963년 10월 23일
49 여주 조포 나룻배 침몰 사고
1963년 6월 25일
70 거제 장승포 산사태
1963년 1월 1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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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2년 9월 7일
36 한남동 나룻배 침몰 사고
1960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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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한강 미 공군 C-124A 추락 사고
1956년 1월 1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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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5년 3월 2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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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3년 1월 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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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2년 11월 16일
25 강릉 공항 미 공군 C-46D 추락 사고
1952년 10월 16일
44 양평 미 공군 C-119C 추락 사고
1951년 7월 11일
94 제5편리호 침몰 사고
1951년 7월 11일
30+ 제13호 침몰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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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부산 미 공군 C-54G 추락 사고
[ 1940년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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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10월 5일
71 평해호 침몰 사고
1949년 8월 18일
51 대강 터널 질식 사고
1948년 6월 8일
150 미군 독도 오폭 사건
1947년 8월 19일
23 태양환호 침몰 사고
1946년 11월 13일
42 영등포역 열차 충돌 사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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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9 어청도 기뢰 폭발 사고
1945년 9월 29일
73 대구역 열차 충돌 사고
1945년 8월 2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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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표에는 법원의 유죄 확정 판결이 나지 않은 사건도 포함되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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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성수동압구정동을 잇는 다리에서 사고가 났는데 웬 옥수동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성수대교 진입부와 진출부는 각각 성수동과 압구정동에 있고 한강 한가운데는 현재는 사라진 저자도의 영향으로 옥수동이 관할한다. 지도를 보면 옥수동 땅이 한강 동쪽으로 쭉 튀어나와 성수대교 중간까지 관할하는 것이 보인다.[2] 모두 붕괴된 부분에 걸쳐 있다가 추락한 차량들에서 나온 사망자들이다. 29명은 걸쳐 있다가 뒤집힌 16번 버스 탑승자들이었고, 나머지 3명은 걸쳐 있다가 물에 빠진 승용차 탑승자들이었다.[3] 이 사고로부터 약 2년 전 발생한 창선교 붕괴 사고를 보도할 때도 MBC는 앵커멘션에서 '예고된 참사'라는 표현을 언급했다.# 결국 2년만에 이러한 일이 반복되었다. 이러한 인재로 인한 참사는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후에도 사라지기는커녕 이어지고 있으며 현재진행형이다.[4] 이 사건이 일어나기 약 1년 전에 최일구 앵커가 성수대교 현장을 보도한 적이 있다. 참고로 최일구 앵커는 이 사건이 일어난 후 당산철교 현장에도 카메라 출동으로 보도한 적이 있다. 어릴 때 와우 아파트에 살았던 기억이 있어 부실공사에 예민하다고 한다.[5] 물론 성수대교는 박정희 정권 시절에 만들어진 것이고 1차 관리 책임이 당시 건설업체인 동아건설산업에서 서울특별시로 넘어갔으니 김영삼 정부 입장에서는 다소 억울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고 1년 전부터 지상파 메인 뉴스에서 보도할 만큼 문제가 인식되는 상황이었기 때문에 대통령이 직접 임명한 서울시장이 유지관리를 하지 않음과 가파른 차량 수의 증가를 고려하지 못한 점은 비판받아야 할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 역시 사고 전에 취임 1주년 기념사에서 '반드시'란 단어를 12번이나 사용했고 10월 18일 국회 시정 연설에서 확고히, 혼신의 힘을 다해, 법정 최고형으로, 결코 용납하지 않을 것, 어떠한 희생이 뒤따르더라도, 막대한, 근본적으로, 차질 없이 등의 단어를 총동원해서 굳센 의지를 다졌지만 그마저도 막지 못했다.[6] 준공된 지 불과 15년 후였다.[7] 창선교는 경상남도 남해군에 있고, 신행주대교는 경기도 고양시와의 경계에 있다.[8] 행주대교는 건설 중에 붕괴되어 사망자가 아예 없었다.[9] 1988 서울 올림픽의 차기 대회였기 때문에 국민들의 관심도가 매우 높았다.[10] 세피아 운전자 기모 씨는 끝부분에 걸쳐서 물이 차오르는 것을 보고 조수석 유리창을 깨고 탈출했다고 한다.[11] 김씨와 박씨는 깨진 유리창을 통해 탈출했으나 중상을 입었고 동료였던 운전자와 다른 동승자는 사망했다.[12] 르망 운전자 최모(54)씨, 동승자 윤모(여.60)씨, 엑셀 운전자 김모(54)씨로 확인되었다.[13]145번 버스의 전신. 당시 사고 차량은 1988년식 대우 BS105L 2기 모델이었으며, 1980년식 BF101 전중문형 대차분으로 도입되었다.). 사고를 당한 한성운수 소속 16번 입석노선에 대한 자세한 정보는 해당 문서 참조.[14] 하필 사고 당일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중이어서 노면이 젖은 상태라 제동거리가 길어질 수밖에 없었다.[15] 리어엔진 버스 구조상 디젤 엔진이 차체 뒤에 있어서 무게가 그 쪽으로 쏠린 나머지 추락하고 말았다.[16] 당시 구조에 참여한 의경(사고 당사자)의 증언에 따르면 버스에 진입해 뒷쪽 엔진룸 쪽을 쳐다보자 학생들의 머리만 보였다고 한다.[17] 각 차량 운전자 명단.[18] 사망자 명단[19] 실제로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하여 호남 지역으로 가는 버스들이 성수대교를 건넌다.[20] 구조에 참여한 사고 당사자인 의경이 아저씨를 한 명 구출해 나왔으나 아저씨는 과다 출혈과 저체온증으로 살려 달라는 말을 반복하던 중 구조 보트가 오자마자 사망했다고 한다.[21] 3:12초에도 성수대교 붕괴를 말했으나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22] 한 학교에서 사망자가 너무나 많이 나왔기 때문에 참사의 책임이 있는 성수대교의 시공사 동아건설은 3억 원을 무학여중고에 기부하여 생활관을 지어줬다.[23] 단, 다큐멘터리에 나온 몇몇 중간의 자료 화면은 MBC의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의 '대형참사(1999년 9월 2일 방송분)' 편 중 성수대교 붕괴 참사 에피소드에서 가져온 자료 화면들을 사용했다.[24] 청담대교는 2000년 서울 지하철 7호선 3단계 개통과 동시에 (완전) 개통되었다.[25] 비슷한 경우로 현재 성산대교 남단이 올림픽대로가 아닌 노들로에 설치되었음을 생각하면 된다.[26] 지금도 딱히 변한 것은 없지만 청담대교는 성수대교와 달리 자동차 전용 도로라 더 빨리 달릴 수는 있다. 반면 성수대교는 강변 2개 도시고속도로 상호환승이 되는 데다 강남 직결이 가능하기 때문에 2004년에 최종확장 종료가 되었음에도 상습적으로 정체된다.[27] 성산대교는 성수대교와 비슷한 시기(1980년)와 비슷한 형태(게르버 트러스 교량)로 개통된 데다 구조상 확장이 곤란하고 서해안고속도로-서부간선도로-내부순환로-성산로 등 주요 교통로까지 직결되어 교통량이 몰리므로 노후화 논란이 일찍부터 있었다. 결국 월드컵대교 건설과 성산대교 수리를 병행하고 있다.[28] 2013년까지 글로벌비즈니스센터 부지로 계획되었던 곳이다. 이후 성수동 건설이 불가능해지면서 삼성동으로 부지를 이전했다.[29] 정부 수립 직후인 1949년부터 1961년까지 실시되었으나 5.16 군사정변 이후 폐지되었고 1995년에 완전히 부활했다.[30] 1997년 외환 위기를 거치면서 동아그룹은 최원석 회장이 학교법인 공산학원(동아마이스터고등학교, 동아방송예술대학교)을 건지는 선에서 나머지 계열사를 모두 해체, 매각했다.[31] 사문서위조죄에 대한 판례는 링크 참조. 판결문 97도1741[32] 간단히 쓰자면 '가해자들이 각자 범죄를 일으킨 기능을 맡음으로써 결과적으로 그들의 행위가 합쳐져 당 범죄행위의 전부를 지배한 결과가 나온다면 해당 가해자들은 공범이 된다'는 학설이다.[33] 형법 제19조(독립행위의 경합) : 동시 또는 이시의 독립행위가 경합한 경우에 그 결과발생의 원인된 행위가 판명되지 아니한 때에는 각 행위를 미수범으로 처벌한다.[34] 물론 관리라고 해도 근본적인 방법(철거)을 무시한 채 균열을 멈추기 위한 스톱홀 공사만 반복하는 등 부실한 관리는 여전했다.[35] 이때 한남대교 북단 분기점을 신설했다. 이전에는 한남대교 역시 동호대교처럼 강변북로와 연계되지 않았다. 그러다보니 한남대교는 엄밀히 경부고속도로 교량이 아님에도 램프가 고속도로 규격에 준하게 지어졌고 다른 강변북로 램프와는 달리 한남대교와 성수대교는 일반 자동차도처럼 우측으로 램프를 건설했다. 청담대교는 구조와 목적 자체가 전혀 달랐기에 좌측으로 놓은 것이므로 제외.[36] 이 때문에 마포대교 북단 분기점은 한동안 진출입이 제한되었다. 다만, 한남대교, 성수대교와는 달리 이미 서호교가 건설된 상태였기 때문에 진출로는 여전히 좌측에 있다. 서호교는 내부순환도로를 지을 때 계획의 일환으로 지은 도시고속도로 교량이었기 때문이다.[37] 이 날은 성수대교 붕괴사고 원인백서가 완성되어 편찬(발행)되기 직전이기도 했다.[38] 근처에 있던 프라이드도 마찬가지로 파손되지 않았다.[39] 예컨대 다리를 건너면 불안감을 느껴 빨리 지나가려고 하고 흔들림에 민감하게 반응한다고 한다.[40] 16번 시내버스의 처참한 내부를 목격했다면 어찌보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당시의 소홀하기 짝이 없는 군인과 의경의 대우를 여실히 보여준다.[41] 위의 뉴스룸에서 인터뷰한 생존자와 동일인물이다.[42] 1964년생. 당시 현장에서 사고 소식을 전달하던 MBC 기자였으며, 양찬승 기자의 사연은 MBC의 다큐멘터리인 신 인간시대(1994년 10월 24일 방송분)의 "현장에서"라는 에피소드에서 다루었다. 2021~2024년까지 포항문화방송 사장 직을 역임했다.[43] 이걸 조사→취재→보도한 기자가 최일구인데 무릎팍도사에 나와서 와우 시민아파트 붕괴사고로 어릴 때 집이 무너진 트라우마가 있어서 건물 부실에는 분노한다...는 식으로 밝힌 적이 있다.[44] 당시에는 교차배정(또는 타학군 배정)이라고 불렀다. 강남 8학군 학교들의 학력이 높아지면서 8학군이 대학 진학에 유리하다는 통념이 형성된 지 얼마 안 되던 시기라 다른 구에 살다가 자녀의 중고등학교 진학에 맞춰 강남구로 이사 오는 부모들이 워낙 많다 보니 8학군 안에서도 모든 학생들을 다 진학시킬 수 없게 되었고 할 수 없이 먼저 이사온 순서대로 끊어서 8학군에 배치한 후 남은 학생들은 가장 가까운 인접학군으로 배치하는 배정 방법이었다. 교차배정을 받은 학생들은 재배정 포기각서를 쓰지 않는 한 재배정 대상 목록에 올랐고 8학군 중고등학교 안에 빈 자리가 생기면 그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사는 학생부터 재배정을 받았다. 반면 8학군 출신 학생들은 대체로 성적이 우수했기 때문에 이들을 교차배정받은 학교에서는 온갖 수단을 동원해서 학생들에게 재배정 포기각서를 받아내려고 했다. 무학여고도 당시 성적 순위를 보면 학년 상위 20%는 강남에서 통학하는 학생들이 거의 다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교차배정은 부작용도 많았다. 링크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도 강북 학생과 강남 학생들 간의 빈부격차가 컸기 때문에 그로 인한 위화감이 문제가 되었다. 성적이 좋은 학생이나 학교 임원진 학생들이 학교를 떠나게 될 경우 남아 있는 학생들이 느끼는 사기저하와 무력감 등이 문제가 되기도 하였고 강남 학생들의 잦은 전출로 인해 학교 분위기가 어수선했으며 일부 학교는 강남 학생들의 유출을 막기 위해 강남 출신 학생들만 따로 모아 특별반을 만들어 우대해 물의를 빚기도 하였다. 이 배정 방식은 특목고 열풍 등으로 8학군에 대한 열기가 점점 가라앉으면서 1997학년도부터 사라졌다.[45] 타 지역에는 큰 강을 건너지 않게 한다는 조항이 없는 듯 하다. 부산을 예로 들면 학군에 따라 낙동강서낙동강을 건너는 학생들이 많이 있으며 평강천으로 인해 학군이 갈려서 심지어 명지도는 사하구, 원도심과 같은 서부학군 내, 대저도는 북구, 사상구와 같은 북부학군 내에 있다. 맥도는 북부학군에 속하지만 지리적 이유로 서부학군으로 교차배정되는 경우가 빈번하다.[46] 2010학년도부터 고교 선택제가 시행되면서 공식 폐지. # 단, 이전부터 성동구에 사는 학생의 일부가 강남의 압구정고나 현대고로 배정되기도 했다. 이는 성동구 일부 지역의 고등학교 부족 문제에 근거하며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전에 행한 배정 방식과는 방향이 반대다.[47] 일원동과 수서동에 지하철이 들어온 것은 서울 지하철 3호선 연장구간이 개통된 1993년 10월 30일이었다.[48] 거주 기간도 남학생과 여학생의 기준이 달랐다.[49] 「수서입주 고교진학생 전원 타학군 배정 물의」 세계일보 1993-01-07, 「2만여가구 입주 수서지구 고교진학생 타학군 배정 불가피」 세계일보 1992-10-12 등 참고.[50] 무학,한양여고 학생 24명,내년 강남 재배정..성수대교 관련, 성수대교 붕괴 그후 한달-무학여고[51] 1948년생. 두 딸과 봉제 공장에서 일하는 부인 이모 씨를 두었으며 생전에는 동료들과 잘 어울리는 아주 성실한 사람이었다고 한다.#[52] 버스 기사 유 씨의 부인이자 유족인 이 씨도 2004년에 유가족들이 대형 참사 이후 PTSD를 다룬 모 다큐멘터리에 출연했다. 남편 유모 씨를 잃은 후 이 씨의 시어머니와 시누이가 사고 소식을 듣고 남편 유 씨를 잃은 충격에 세상을 떠났고 PTSD를 앓고 있다고 오열하면서 인터뷰를 했다.[53] 참고로 16번 버스를 운전했던 버스 기사 유 씨는 원래 붕괴 사고 당일에는 휴무였다고 한다.(다섯 번째 댓글 참조)[54] 1997년에 세워졌으며 2013년 서울미래유산으로 선정되었다.[55] 이 사연은 조관우의 실락원이라는 곡의 소재가 되기도 하였다. 후술할 실락원 뮤직비디오도 이를 모티브로 찍은 것이다.[56] 그 근방에 서울숲이 있다. 유사 사례로는 1982~2014년까지 제주 서귀포시 상효동 돈내코에 방치됐던 남영호 참사 위령탑이 있었다.[57] 당시 취재했던 기자가 국민의힘 소속으로 제21대 국회의원을 지내고 경기도지사 지방선거에 나왔던 김은혜다.[58] KD의 보라색은 이 사고 이후인 1996년에 대원관광을 시작으로 적용한 도색이며 시외 / 고속부는 이듬해인 1997년에 처음으로 적용하였고 5톤색(KD운송그룹 시외버스 도색이 단색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데 실제로는 톤이 5가지이다.)이라 보라색+흰색 투톤인 당시 도색과는 무관하다. 해당 도색은 1985년 3월 도입된 당시 노선별 적/청색 정류장 분리 정차 제도에 따라 제정되었지만 나머지 30%의 도심 구간 입석 버스와 외곽 구간만 운행하는 입석버스는 이듬해 1986년 8월까지 마린블루 도색이 적용되었다. 하지만 보라색을 음산하게 여겼던 반응 등으로 도입 3년 만에 1988 서울 올림픽 개최 4개월 전인 1988년 5월부터 밝은 색 계통의 4종 파스텔톤 도색이 도입되는 계기가 되었으나 도색 유지 보수가 간편하고 파스텔톤 도색이 기존 보라색 도색보다 때가 잘 탄다는 단점이 있어 운수 사에서는 나름 선호한 바 있었고 1988년 이후에 출고한 차량임에도 일부러 재도색하는 일도 있었다. 사고를 당한 해당 차량의 도색도 같은 케이스.[59] 당시 사고 차량에 적용된 도색은 성수대교 붕괴 사고 이전인 1988년 4월 1일 사망자 19명이 발생한 천호대교 버스 추락 사고의 사고차량에도 적용된 도색이었기 때문에 어떤 이들에게는 사고 당시를 떠올리는 등 꺼림칙한 느낌이 들 수도 있었다. 이 사고 이후 사고 차량과 동종 차종인 BS105L을 운행하는 업체들은 BS105L만큼은 1988년 이전 출고분이라도 밝은색 4종 파스텔톤 도색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서 재도색하기도 했다. PTSD 항목과 재개통한 성수대교의 도장이 기존의 하늘색에서 붉은색으로 바뀐 점, 무엇보다 JR 후쿠치야마선 탈선사고 때 207계의 후속으로 도입 예정이었던 321계 전동차뿐만 아니라 동종 차량인 207계의 도색을 전부 바꾼 이유를 생각해 보면 이는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60] 사고 당일은 비로 인해 경기가 열리지 못했다.[61] 위령탑이 도로로 둘러싸인 곳에 설치돼 있다 보니 차를 타지 않고 걸어서는 위령탑에 방문할 수 없는 구조이다.[62] 성수대교가 1979년 완공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고의 원인 문단에서도 언급되었듯이 유지관리 부실도 큰 원인이었다.[63] 한겨레신문 1994년 10월 23일, "잘되면 문민 덕 못되면 과거 탓"[64] 출처: 한겨레신문 1994년 10월 25일, "'부실기업' 발언 비난" 정말 기막히게 터진 레전드 발언으로 이후에도 종종 회자된다. 2021년에도 홍준표 의원이 문재인 대통령을 비판할 때 이 문장을 인용할 정도였으며 2023년 한반도 폭우 사태가 터진 후 윤석열 정부를 비판할 때도 인용되었다.[65] 때문에 이 노래에는 정재용과 이하늘만 참여하고 김창열은 참여하지 않았다.[66] 파트 1은 "유년의 끝"이란 부제가 붙어 있으며 조용한 곡조와 신해철의 자전적 내레이션이 붙어 있고 2번째 파트부터가 사실상 본래의 프로그래시브 락 본편이다.[67] 사실 성수대교 사고 이전부터 '버스 사고가 났을 때 가장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이란 제목으로 나돌아다니던 개그를 활용한 것이다. 다른 버전에서는 버스 놓칠 뻔 했다가 간신히 탄 사람, 버스 잘못 탔다가 죽은 사람, 내일이 결혼식인 사람 등을 꼽기도 한다.[68] 극중 등장인물인 이재한(시그널)의 지인인 오경태의 딸이 이 사고에 휘말려 사망하게 된다.[69] 둘 다 비슷하게 부실공사로 무너진다. 영화 초반부에 다리 붕괴전에 초반에 인부들이 다리 위에서 도로를 보수공사하던 중 갑자기 도로에 금이 가더니 다리가 서서히 붕괴된다. 다만 영화에서 붕괴 장면은 타코마 다리에서 따왔다.[70] 실제 사고와 달리 폭발이 일어나면서 다리가 동강나는데 이는 성수대교 사고가 일어나기 전인 군사정권 시절 북한에 대한 경각심을 고취시키기 위해 만든 북한 남침 모의 시뮬레이션에서 북한군이 다리를 공격하는 것을 구현한 모형으로 보이지만 다리가 붕괴되었다는 점 때문에 차용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