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 제125대 황제 요안니스 6세 Ἰωάννης ΣΤ΄ | |
<colbgcolor=#9F0807><colcolor=#FCE774,#FCE774> 이름 |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 Ἰωάννης Ἄγγελος Παλαιολόγος Καντακουζηνός |
출생 | 1292년 |
동로마 제국 콘스탄티노폴리스 | |
사망 | 1383년 6월 15일 (향년 90/91세) |
동로마 제국 펠로폰네소스 | |
재위 기간 | 로마 황제 |
1347년 2월 8일 ~ 1354년 12월 10일 (7년) | |
전임자 | 요안니스 5세 |
후임자 | 요안니스 5세 |
부모 | 아버지 : 미하일 칸타쿠지노스 어머니 : 테오도라 팔레올로고나 앙겔리나 |
배우자 | 이리니 아사니나 |
자식 |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엘레니 칸타쿠지니 |
종교 | 그리스도교(정교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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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로마 제국 제125대 황제이자 동로마 제국 팔레올로고스 왕조 제6대 황제.2. 생애
2.1. 제위에 오르기 전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1292년에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모레아의 지배자였던 미하일 칸타쿠지노스였다. 역사가 도널드 니콜은 그가 아버지 사망 이후에 태어났을 수 있고 아마도 고아로 자랐을 것이라고 추측했다. 그의 어머니 였던 테오도라 팔레올로고나 앙겔리나가 팔레올로고스 왕조의 일원이였기 때문에 팔레올로고스의 피도 섞여있었다. 또한 그의 아내였던 이리니 아사니나 역시 안드로니코스 3세의 육촌[1]이였기 때문에 팔레올로고스 왕조와는 탄탄하게 혈연적으로 연결되어 있었다.요안니스는 어려서부터 안드로니코스 3세와 친밀하게 지냈고, 안드로니코스 3세와 안드로니코스 2세의 조손간 내전 당시, 손자인 안드로니코스 3세를 도와 큰 공을 세운다. 그는 안드로니코스 3세가 내전에서 승리한 이후 메가스 도메스티코스에 임명되었고 안드로니코스 3세의 치세동안 최고 행정 사무관이 된다.
1341년 6월, 안드로니코스 3세가 죽을 때 그는 요안니스 5세의 섭정으로 임명되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가 숨을 거둘 당시 그의 아들 요안니스 5세는 고작 9살짜리 어린아이였다.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는 안드로니코스 3세 치세에 그의 여러 번의 공동황제 제의를 사양했으며 자신은 황제가 될 마음이 없다는 것을 황제에게 비추었다. 안드로니코스 3세 사후에도 요안니스 5세의 계승의 합법적 권리를 주장했으며 황제의 자리를 탐내지 않고 요안니스 5세가 성인이 될 때까지 행정 사무를 맡을 생각이었다. 동로마 중후기에 대한 많은 책을 쓴 Donald Nicol의 'The Reluctant Emperor: A Biography of John Cantacuzene, Byzantine Emperor and Monk, C.1295-1383'라는 서적도 존재한다.
물론 그의 충성심이 진심이었는지는 아무도 모르겠지만, 그는 적어도 요안니스 5세와 그의 모후 사보이아의 안나를 위해 헌신을 다했다. 하지만 요안니스 5세의 모후 안나는 그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또한 그와 전 황제의 관계와 당시 요안니스가 쥐고 있던 권력에 요안니스 5세의 예전 후견인들 이었던 총대주교 요안니스 칼레카스(John Kalekas)와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Alexios Apokaukos) 역시 시기심을 품고 있었다.[2]
이들은 여러 번 그를 섭정의 자리에서 쫓으려고 시도하였지만 실패했다. 하지만, 1341년 9월 요안니스가 펠로폰네소스의 십자군 공국들에 대해 원정을 나갔을 때 그를 섭정의 자리에서 내쫓고 자신들이 섭정단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요안니스는 새 섭정단과 협상을 하기를 원했지만 거절당했으며 새 섭정단은 그에게 군대를 해산할것을 명령했다. 거기에 새로운 섭정단은 콘스탄티노플에 있었던 칸타쿠지노스의 친척들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들을 추방하거나 수감시키기까지 했으며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의 어머니 테오도라는 가택연금을 당하고 이후 고통받다 사망하기에 이른다. 이 선까지 가버렸으니 칸타쿠지노스와 새 섭정단 간에는 더이상 대화의 여지가 없었으며 그의 군대는 새로운 섭정단을 부정하고 트리키아의 디비모티콘에서 칸타쿠지노스를 황제로 옹립하기에 이루다. 더이상 잃을 것이 없었던 칸타쿠지노스는 이것을 수락했다.
내전은 6년 동안 지속되었다. 양측은 외국의 군대와 용병들을 고용하며 소모전을 계속했으며 이 내전은 제국을 개판으로 만들어놓았다. 처음에 칸타쿠지노스는 세르비아로 가서 스테판 우로시 4세 두샨에게 자신의 안전과 발칸반도 장악을 위해 지원을 요청했다. 처음에는 칸타쿠지노스를 도왔던 세르비아 제국은 곧 칸타쿠지노스의 통수를 치고 새 섭정단쪽으로 갈아탔고, 칸타쿠지노스는 어쩔 수 없이 튀르크인들의 도움을 요청했다.
요안니스는 오스만의 지도자, 부르사의 베이였던 오르한 1세에게 자신의 딸을 내주면서 도움을 요청했고 또한 자신의 친우였던 아이딘 왕조의 우무르 베이에게도 지원을 요청했다. 동로마-오스만-아이딘 연합군은 요안니스 6세가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하도록 도왔고 칸타쿠지노스는 1346년, 늦어도 1347년에는 콘스탄티노플에 입성했다. 새로운 섭정단들은 모든 작위에서 해지되었으며 요안니스 6세는 공동황제가 되었다.
2.2. 치세
요안니스 6세의 치세동안 동로마 제국은 그가 제위하기 전에도 이미 충분히 몰락할대로 몰락했지만 제위 후에는 모든 부분에서 붕괴하기 시작했다. 제노바 공화국인들은 동로마 제국과의 조약을 어기고 갈라타를 무장시키고 더욱더 요새화 시켰다. 그들의 행동은 동로마 제국의 재정의 크나큰 문제로 다가왔다. 제노바는 보스포로스 해협의 87%를 장악했고 이는 그만큼의 수익이 제노바인들에게 돌아갔다는 것을 의미했다.칸타쿠지노스는 9척의 제대로된 함선과 100척의 작은 배들을 건조해 함대를 재건했다. 그는 이 재건된 함대를 이용하여 제노바인들을 몰아내고 다시 해양을 장악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바램과는 다르게 재건된 함대는 1349년 초반에 제노바 함대의 공격으로 괴멸되거나 나포되었다. 제노바 공화국는 협상을 강요했다. 갈라타의 주요 창고등이 피해를 입은 후 이에 대해 협상을 요구하였다. 동로마 제국은 남아있는 것이라도 지키기위해 베네치아와 동맹을 맺어 제노바에 대항하였다.이로 인해 동로마 제국은 1350년에 베네치아 - 제노바 전쟁에 휘말렸다. 그러나 파가니노 도리아(Paganino Doria)는 이후 콘스탄티노플에서의 피로스의 승리로 요안니스 6세(그리고 그가 조력해온 12척의 배들)를 전쟁에서 이탈시켰다.
1351년, 칸타쿠지노스는 15차 콘스탄티노플 공의회를 열었고, 이곳에서 그리고리오스 팔라마스(Gregory Palamas)의 헤시카즘 신학은 칼라브리아의 발람(Barlaam)과 다른 동로마 철학자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대해 정통으로 선언되었다.
그의 치세에 세르비아 제국의 스테판 두샨은 알바니아, 마케도니아, 그리고 에페이로스를 정복했다. 이에 요안니스 6세는 투르크족의 지원을 요청했다. 한편 1354년 엄청난 지진이 칼리폴리스(갈리폴리)를 강타했고, 이때를 틈타 오스만 베이국이 보스포로스 해협을 넘어 갈리폴리를 합병했다. 이것은 훗날 빈 공방전으로까지 이어지는 투르크인들의 동유럽 정복의 첫걸음이었다. 또한 그는 동년 여러 부채들을 부분적으로 상환하였다.
1353년, 그의 아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를 공동황제로 임명하였다. 하지만 부채상환을 위한 증세는 여러 반감을 불러왔고, 1354년 전임 황제였던 요안니스 5세는 그의 후견이이었던 요안니스 6세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리고 1354년, 요안니스 6세 칸타쿠지노스는 퇴위하여 수도원으로 들어갔다.
2.3. 말년
칸타쿠지노스는 수도자가 된 이후 요아세프 크리스토불리오스로 이름을 바꾼 후에 저술 활동에 집중했다. 그의 4권 분량의 책, 1320년부터 1356년까지 역사를 담은 역사서는 그의 행동에 대한 사죄를 위해 저술되었다. 물론 요안니스의 저서가 완벽하게 진실만을 담았다고는 할 수 없다. 그의 역사서는 그 자신의 행동을 담고 있었기 대문이다. 이후 이 책은 니키포로스 그레고리아스에 의해 보완된다.1367년, 칸타쿠지노스는 정교회의 대표자로 임명되어 정교회와 가톨릭 교회의 화해를 시도하기 위해 라틴 총대주교 파울루스와 협상했다. 그들은 교황과 대주교, 동방과 서방의 주교들이 참석할 대 에큐메니컬 공의회 소집에 동의하였다. 하지만 이 계획은 이후 우르바노 6세에 의해 거부되었고, 협상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졌다.
1383년 6월 15일, 칸타쿠지노스는 파란만장한 생을 마감하였다. 그는 펠로폰네소스 반도에서 세상을 떠났으며 라코니아(Laconia)에있는 미스트라(Mistra)에 그의 아들들에 의해 묻혔다.
3. 가족
그의 아내는 이리니 아사니나였으며 그녀는 안드로니코스 아센(불가리아의 이반 아센 3세과 이레네 팔라이올로고나 -미카일 8세의 딸- 사이의 아들)의 딸이였다. 요안니스는 그녀와 여러 자식을 두었다.- 마테오스 칸타쿠지노스, 공동황제(1353-1357)로 제위, 이후 모레아의 공작 (1325 – 1383)
- 마누일 칸타쿠지노스, 모레아의 공작 (1326 – 1380)
- 안드로니코스 칸타쿠지노스 (1347)
- 마리아 칸타쿠지니 , 에페이로스의 니키포로스 2세 오르시니와 혼인
- 테오도라 칸타쿠지니, 오르한 1세와 혼인 (1332~1381년 이후)
4. 게임에서
파워업키트에서 추가된 1370년 시나리오에서 비잔틴 장수로 등장한다. 내전 끝에 자포자기 상태로 제위에서 물러나 수도원에 박혔던 점을 감안한 것인지 능력치는 좋지 못하고 고령이라 내정으로 돌리는 게 편하다.능력치 | 특기 | 병과적성 |
정치 56 전투 53 지모 48 | 상업, 건설 | 보C 궁C 기C 수D |
레이스 영웅으로 등장한다. 내전과 모략으로 무너지는 로마 제국을 되살리기 위해 분투했던 것을 반영하였는지 좋은 스탯을 가지고 있으며 미하일 8세 팔레올로고스(아칸)이 죽을시 배틀이 나왔다 사라지는 패시브를 가지고 있다. 또 바랑인 친위대로 알려진 용병인 앵글로 바랑기(구이 몬태그)가 6기 죽을때 마다 히드라 1기와 앵글로 바랑기 1기를 반환해주기 때문에 로마 제국 플레이어 입장에서는 무조건 살려야 하는 영웅들 중 하나이다.
5. 참고 자료
영문위키피디아 , 이탈리아 모데나 에스던스 장서고, 사이트: (Kavrako blog, Bizans İmparatorluğu 93| Paleologos Hanedanı)[1] 아버지의 고모의 아들의 딸.[2] 다만 최근 들어 알렉시오스 아포카브코스는 단순 시기심 문제가 아닌 그가 속한 관료파와 요안니스 칸타쿠지노스가 속한 귀족파간의 근본적 대립의 일환이라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