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색 여우 작전 Мурманская операция Unternehmen Silberfuchs Operatoin Silver Fox | ||
제2차 세계 대전 중 계속전쟁 및 독소전쟁의 일부 | ||
▲ 진격하는 핀란드 공화국 육군 제3군단 제40기갑대대 소속 3호 전차[1] ▲ 소련 육군의 버려진 각종 무기 및 장비들 ▲ 숲을 통과하여 케스텐가 동쪽으로 이동하는 핀란드 공화국 육군 보병들 | ||
날짜 | ||
1941년 6월 22일 ~ 11월 17일 | ||
장소 | ||
소련 러시아 SFSR 무르만스크 인근 | ||
교전국 | [[틀:깃발| [2] | ]][[틀:깃발| ]][[소련| ]] |
지휘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발레리안 프롤로프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로만 파닌 | ]][[틀:깃발| ]][[마르키안 포포프|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에두아르트 디틀|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한스 파이게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햘마르 실라스부오 | ]][[틀:깃발| ]][[니콜라우스 폰 팔켄호르스트| ]]
결과 | ||
소련의 승리 무르만스크 사수 성공 | ||
영향 | ||
북극 전선 교착화, 연합군의 안정적인 렌드리스 거점 확보 | ||
전력 | ||
[[틀:깃발| - 제14군 - 제7군 | ]][[틀:깃발| ]][[소련 육군| ]] 약 10만 명 [[틀:깃발| - [[틀:깃발| ]][[틀:깃발| ]][[독일 육군(나치 독일)| ]] 노르웨이 산악 군단 - [[틀:깃발| ]][[틀:깃발| ]][[독일 육군(나치 독일)| ]] 제36군단 - [[틀:깃발| ]][[틀:깃발| ]][[핀란드 육군| ]] 제3군단 | ]][[틀:깃발| ]][[독일 육군(나치 독일)| ]] 약 20만 명 + [[틀:깃발| ]][[틀:깃발| ]][[핀란드 육군| ]] 약 2만 8천 명 |
피해규모 | ||
[[틀:깃발| - 전사 및 포로 9,500명 - 부상 13,000명 | ]][[틀:깃발| ]][[소련 육군| ]] 사상자 22,500명 총 사상자 44,000명 - [[틀:깃발| ]][[틀:깃발| ]][[틀:깃발| ]] 38,000명 - [[틀:깃발| ]][[틀:깃발| ]][[핀란드 육군| ]] 6000명 |
1. 개요
1941년 6월부터 11월까지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소련의 주요 북극해 부동항이었던 무르만스크의 점령을 시도한 작전이었다. 계속전쟁과 독소전쟁의 일부로 취급된다.2. 배경
1941년,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기 직전, 독일군은 소련의 주요 북극해 항구이자 부동항인 무르만스크의 점령을 계획한다. 여기에는 이유가 있었는데, OKW(국방군 최고 사령부)는 미래에 서방 연합군이 소련에게 해상으로 물자를 지원한다면 소련이 북극해에서 보유한 가장 큰 부동항인 무르만스크가 매우 중요해질 것이라고 예측했고, 따라서 무르만스크를 점령하여 이를 미리 차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하지만 아무리 독일군이 강하다 한들 상대적으로 중요성이 떨어지는[3] 북극 전선에 많은 병력을 투입하는 것은 어려웠다. 게다가 독일군은 북극 전선에서 필수적인 산악전 경험도 노르웨이 침공 정도를 제외하면 많지 않았기 때문에, 독일 입장에서는 산악전과 북극 전선에서 싸운 경험이 많았던 핀란드의 도움이 필수적이었다. 한편 겨울전쟁 이후 사실상 독일 이외의 국가들로부터 지원이 끊긴 핀란드 입장에서도 소련과의 전쟁은 일종의 복수전인 데다가 동맹국 독일과의 관계를 강화할 수 있는 기회였으며, 국제적 명분도 충분했기 때문에, 내부적으로 독일을 돕기로 결정하였다.
다만 여기에는 의외의 요소가 발목을 잡았는데, 겨울전쟁 종료 이후, 핀란드군은 독일과 맺은 협상에 따라 소련이 선제공격하지 않는 이상 중립을 유지하겠다고 주장했고, 이것이 받아들여졌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직전 핀란드를 추축국과 독소전쟁에 끌어들일 명분이 필요했던 독일은 소련을 도발하여 어떻게든 소련이 핀란드를 선제공격하도록 유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1941년 6월 22일, 바르바로사 작전이 개시되었고 독일 국방군은 전면적으로 소련을 침공했다. 동시에 독일 공군은 고의적으로 핀란드 공군 기지에서 이륙하여 소련 영토를 폭격하였고, 핀란드군은 올란드 제도에 병력을 배치하는 등 본격적으로 전쟁 준비에 들어가는 모습을 보이기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도 핀란드 정부는 계속해서 명목상으로는 중립을 주장하고 있었지만 소련은 이러한 행위로 미루어보아 이미 핀란드를 가상적국이자 추축국으로 취급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소련의 북부 도시들에서는 초비상이 걸렸고, 6월 22일 당일에는 무르만스크에서 5만 명의 병력이 긴급히 징집되었으며, 민간인들을 주축으로 요새 및 방어선 건설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6월 25일, 소련 공군이 헬싱키, 투르쿠, 라티 등 핀란드의 주요 도시들을 일제히 폭격하면서 핀란드는 전쟁에 뛰어들었다.
3. 작전의 진행
은색 여우 작전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세 작전은 각각 "순록 작전(Unternehmen Rentier)", "백금 여우 작전(Unternehmen Platinfuchs)", 그리고 "북극 여우 작전(Unternehmen Polarfuchs)"이라고 명명되었다. 작전은 크게 무르만스크를 노리는 북부와 살라(Salla) 및 칸달락샤를 노리는 남부로 나뉘어졌는데, 북쪽으로는 에두아르트 디틀의 지휘를 받는 노르웨이 산악 군단 소속 2개 사단이, 남쪽으로는 한스 파이게(Hans Faige)의 지휘를 받는 36군단 소속 제169 보병사단, 제6SS산악사단, 그리고 핀란드 3군단이 진격할 예정이었다. 이들의 목표는 독일군이 살라를 빠르게 점령하고 그 사이 핀란드군이 남부를 공략, 이후 합동으로 칸달락샤를 빠르게 점령한 다음 쭉 북진하여 노르웨이 산악군단과 함께 무르만스크를 점령하는 것이었다.
3.1. 순록 작전
렌티어(Rentier, 순록) 작전은 바르바로사 작전 당일 바르바로사 작전과 동시에 개시되었다. 독일군은 페차모(Petsamo) 일대로 맹공을 가했고, 이에 반해서 바르바로사 작전 당시 소련군의 대부분의 부대가 그러하였듯이 북극 전선의 소련군은 그야말로 무방비 상태로 독일군을 맞이하여야 했다. 따라서 작전은 매우 성공적이었으며, 작전이 개시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순록 작전 당시 목표였던 소련의 북부 니켈 광산들은 신속히 독일군의 손에 넘어갔다.순록 작전이 종료된 이후, 에두아르트 디틀의 병력들은 백금 여우 작전을 위하여 재편성되었다. 한편 그 사이 한스 파이게가 이끌던 36군은 남쪽으로 기동하여 살라에 대한 공격을 준비했다.
3.2. 백금 여우 작전
1941년 6월 29일, 디틀이 이끄는 제2 산악사단과 제3 산악사단은 핀란드군의 지원을 받아[4] 무르만스크를 목표로 동쪽으로 진격했다. 이들은 이 과정에서 소련군 제14군 소속 제14 소총병사단과 제52 소총병사단의 반격에 직면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기 진격 자체는 성공적이었다. 제2 산악사단은 리바치 반도의 입구를 확보했고, 제3 산악사단은 티토프카 계곡 일대의 소련군 방어선을 돌파하여 교량들을 차지할 수 있었다.하지만 그 이후부터는 점점 작전이 꼬이기 시작하였다. 북극 전선의 환경은 모스크바 저리 가라 할 정도로 가혹하였고, 이는 독일군의 진격을 둔화시켰다. 게다가 소련군 역시 이후부터는 정신을 차리고 지형을 이용한 제대로 된 방어전에 들어가면서 독일군은 점점 더 큰 피해를 입었다. 결국 제2 산악사단은 리바치 반도 점령을 포기하고 반도 입구 쪽에 방어선을 구축하는 쪽으로 전략을 바꾸었다. 이 과정에서 일부 병력은 제3 산악사단을 지원하기 위해 차출되기도 하였으며, 이렇게 증원을 받은 제3 산악사단은 공격을 재개, 리차 강에 도달하는데 성공했고 그곳에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제3 산악사단은 추가적으로 동쪽 방면의 교두보를 확장하려고 시도하였으나 소련군이 북쪽에 기습 상륙해 독일군의 측면을 압박하는 바람에 실패한다. 한편 전황이 계속해서 악화되자 디틀은 본국에 증원을 요청하나 당장 모스크바 먹기도 바쁜 독일군 사령부는 미적지근한 반응을 보였고, 결국 극소수의 병력만이 노르웨이에서 충원되었다.
이후로 독일군은 더 이상 동쪽으로 진격하지 못했다. 공세를 재개하려는 노력은 몇 번 있었으나 모조리 실패로 끝났고,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소련 공군이 영국 공군과 손잡고 노르웨이 해안을 타격해 독일군의 보급품 수송을 지연시켰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나 리차 강 동쪽의 독일군 교두보는 붕괴되었고 소련군에게 넘어갔으며, 사령부에서는 반격 대신 현재 지역 사수를 명령하여, 9월 21일을 야심차게 시작했던 백금 여우 작전은 끝내 막을 내리고 만다. 이후 소련군도 추가적으로 북극 지역에 대한 공세를 펴진 않았던 관계로 이 지역은 소련이 다시 대대적으로 공세를 시작한 1944년이 되기 전까지는 전체적으로 조용했고, 스키 부대를 위시한 소규모 부대들간의 교전만이 벌어졌다고 한다.
3.3. 북극 여우 작전
진격하는 제40 기갑대대 소속 병력들.
북극 여우 작전은 7월 1일에 개시되었다. 이들의 주 목표는 살라였으며, 제169 보병사단과 제6SS 산악사단 노르트, 핀란드군을 주축으로 한 파이게의 군대는 소련군 제14군 소속 제122 소총병사단, 제104 소총병사단, 그리고 제1기갑사단을 상대했다. 좀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독일군은 전부 살라 공격에 동원되었으며, 핀란드군은 남부로 우회하여 카이랄리(Kayraly)를 공격하는데 집중했다.
이 작전 이전까지 독일군은 노르웨이 침공 말고는 유의미한 산악전이나 북극전 경험이 전무했던 관계로, 첫 단추 끼우기였던 살라 점령 과정에서부터 상당한 출혈을 입으며 삽질만을 반복했다. 특히 전직 경찰 출신들로 이루어졌으며 이름과는 다르게 산악전 경험은 없다시피한 제6SS산악사단의 피해가 특히 컸는데, 이들은 소련군의 방어선을 뚫는데 상당히 고전하였다.[5] 결국 계속되는 공격이 모조리 실패하자 파이게는 36군단 휘하의 모든 부대들을 통합시켰고, 독일군의 단독 공세였던 기존의 계획을 수정하여 핀란드 제6사단의 도움을 받으며 7월 6일 간신히 방어선을 돌파하였다. 살라는 작전이 개시된 지 1주일째였던 7월 8일 점령되었고, 잔존한 소련군은 카이랄리로 일제히 후퇴하였다. 살라를 점령한 제36군단은 패잔병을 추격했고 7월 9일 카이랄리에 도달하였지만, 소련군은 카이랄리에 방어진을 친 상황이었고, 설상가상으로 카이랄리는 큰 호수에 둘러싸인 지역이라 공격이 매우 어려웠다. 결국 36군단의 진격은 카이랄리 앞에서 멈추게 된다.
핀란드 병사들에게 철십자 훈장을 수여하는 한스 파이게.
이와 반대로 핀란드 제3 사단과 제40 기갑대대[6]로 구성되었던 남쪽의 핀란드 3군단의 진격은 매우 성공적이었다. 핀란드 3군단은 작전 초기 소련군 제54 소총병사단을 상대로 대승을 거두었고, 이후로도 신속하게 북극의 많은 숲들을 통과하는 와중에도 저항하는 소련군 부대들을 격파하며 전투를 이어나갔다. 이러한 무공을 세운 핀란드 3군단은 결과적으로는 퍄오제로 호수와 토포제로 호수를 잇는 운하의 64km 지점까지 도달하는데 성공했으며, 이는 고전을 면치 못한 북쪽의 독일군 부대들과 비교하면 매우 뛰어난 공적이었다. 이러한 핀란드군의 맹활약에 감탄한 독일 육군 사령부는 핀란드군을 지원하기로 결정하였으며 그에 따라 36군단의 부대들이 차출되어 핀란드 3군단을 지원하였다. 8월 7일, 핀란드 3군단은 운하를 건넜고 케스텐가를 점령하는 동시에 우흐타 외곽 지점에 도달하면서 소련의 무르만스크 철도를 위협했다. 이에 놀란 소련군은 제88 소총병사단을 위시한 대규모 원군을 보내 이들을 막으려고 했고, 이 대규모 증원군이 도착하자 핀란드 3군단과 독일군의 진격은 둔화되었다.
한편 북쪽에서 카이랄리 바로 앞에 멈추었던 독일군 36군단은 8월 중순 공세를 재개하여 카이랄리의 소련군을 밀어 붙이기 시작했다. 이때 북쪽으로 기동한 제169 보병사단과 핀란드 제3사단은 도시를 포위하는데 성공하였고 36군단은 이에 호응해 동쪽으로 진격하였다. 하지만 곧 이들은 베르만 강 일대에서 소련군의 요새와 맞닥뜨렸고, 엄청난 저항에 직면했다. 결국 36군단의 진격은 거기에서 멈추었고, 독일군 36군단은 남쪽에 있는 핀란드군 제3 사단에게 지원병을 보내 방어를 도왔다. 이후 파이게 휘하의 모든 부대들은 9월 말 공세를 중지하고 방어전으로 돌입하였다.
한편 전술하였듯이 제36군단에게 지원병력을 받았던 핀란드 육군 제3사단은 1941년 10월 30일 기이어 다시 공세를 개시하였다. 당시 소련군은 방어를 강화한 상태였으나 이 전투에서도 놀라운 투혼을 보인 핀란드군은 일부 거점을 확보함과 동시에 비교적 안정적인 포위망을 구축하였다.
4. 전투 중지
하지만 11월 17일, 핀란드 사령부는 야전 사령관들의 긍정적인 전황 보고에도 불구하고 핀란드군의 추가 진격을 금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여기에는 미국의 강력한 외교적 압박이 적용했는데, 미국 외교관들은 핀란드 정부에게 무르만스크와 그 일대 도시들을 독일과 핀란드가 점령하여 소련에 대한 서방의 물자지원길이 막히면 핀란드는 그에 대한 대가를 치를 것이라고 경고하였고, 결국 핀란드는 이에 굴복, 북극해 지역에서의 모든 공세를 중지했다. 이후로도 핀란드군은 계속해서 전투를 하긴 했지만 더 이상 이전처럼 주도적으로 공세에 참여하지 않았고 방어전 및 겨울전쟁때 빼앗긴 영토 수복에만 집중하였다.[7]그리고 당연하지만, 전력의 절반 이상을 핀란드군에게 의존하던 독일군의 진격 역시 필연적으로 멈출 수 밖에 없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북극 여우 작전마저 종료되며 은색 여우 작전은 완전한 실패로 막을 내리고 만다. 물론 미국의 압력만으로 작전이 끝난 건 당연히 아니고 부동항을 지키고자 했던 소련의 맹렬한 방어와 저항으로 인해 추축국의 공격이 돈좌되고 보급도 부족해진게 컸다.
5. 결과와 후일담
은색 여우 작전은 추축국의 완벽한 패배였다. 독일군과 핀란드군은 어느 정도 진격하였고 많은 무공을 세우기는 했지만 작전의 목표였던 무르만스크 시와 무르만스크 철도 모두 점령하는데 실패하였기 때문이다. 좀 더 자세하게 들어가면 한스 파이게와 핀란드 지휘관이었던 햘마르 실라스부오가 이끌던 남쪽의 독일군과 핀란드군이 무르만스크 철도에 최대 30km 정도까지 접근하는 선에서 그쳤다. 그나마 이건 좀 나은 거였고 무르만스크 시를 목표로 했던 북쪽은 상황이 더 나빴는데, 에두아르트 디틀 휘하의 제2, 제3 산악사단은 작전기간 내내 무르만스크에 접근조차 하지 못했다.참고로 은색 여우 작전은 독소전쟁의 진행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무르만스크는 전술했듯이 아르한겔스크와 더불어 소련의 몇 없는 북극해 부동항들 중 하나였고, 따라서 서방 연합군이 소련으로 보낸 렌드리스의 약 25%는 무르만스크를 거쳐서 갔다.[8] 참고로 저 25%에는 5,218대의 전차, 7,411기의 항공기, 4,932문의 대전차포, 4억 3700만여발의 탄약, 그 외 각종 원자재들 등이 포함되었으며 이는 소련의 전쟁 수행에 큰 도움이 되었다. 괜히 미국이 외교적으로 개입하여 무르만스크 철도를 노린 핀란드군의 추가 공세를 막은 것이 아니다. 다만 저 시점에서 핀란드군이 추가 공세를 가했더라도 무르만스크 철도를 끊었을지언정 강력한 방어 상태를 유지하던 무르만스크의 직접 점령은 실패했을 가능성이 높다. 물론 철도를 끊었다면 무르만스크의 수송망에 타격을 줄 수는 있었을 것이고, 렌드리스 역시 어느정도 방해받았겠지만.
그리고 이후 북극 전선에는 한동안 큰 변화가 없었다. 이유는 간단한데 독일이나 소련이나 이곳을 중요한 전선으로 보지 않았던 관계로 양측은 모두 추가적인 병력 증원을 받지 못했고 따라서 대규모 공세나 전투가 벌어지지 않았으며, 핀란드군 역시 미국을 위시한 서방쪽의 눈치를 보느라 공세를 포기하였기 때문이다. 이후 1944년 9월 핀란드는 소련과 강화했고 평화 협정을 맺었으며, 그와 동시에 독일군은 로타르 렌둘릭의 지휘하에 대대적으로 독일 점령하 노르웨이로 후퇴하며 핀란드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 그리고 마침내 1944년 10월 소련군이 페차모-키르케네스 공세를 개시하였고, 이로 인해 잔존 독일군이 북극 지역에서 완전히 축출되며 북극 전선은 끝이 난다.
6. 여담
영국군이 전투에 크게 기여했다. 영국은 해군력을 동원해 북극해에서 독일 수송선들이 활동하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무르만스크에 비행단을 주둔시켜 작전기간 내내 소련군을 도왔다.[1] 실질적인 소속은 독일 육군[2] 해상지원 및 항공지원[3] 훗날 렌드리스의 중심지가 된 무르만스크가 왜 안 중요하냐고 생각할 수 있는데, 독소전쟁 당시 독일군의 목표였던 A-A선에 비하면 무르만스크의 전략적 가치는 아무것도 아니었다.[4] 전술했듯이 핀란드는 6월 25일 소련의 공습 이후 공식적으로 전쟁에 참전하였다.[5] 흔히들 SS 12개 사단 하면 정예부대를 떠올리지만, 사실 정예라고 평가받는 12개의 SS 사단들도 메이커 사단인 1,2,3 사단을 제외하면 초기에는 전투력이 영 아닌 경우가 많았다. 이들의 전설은 본격적으로 독소전에서 출혈을 감수하며 실력이 늘고 힘러가 전쟁 후기로 갈수록 신무기를 우선적으로 배치해주면서 이루어진 것이었지, 전쟁 초기에는 다른 국방군 부대들이랑 별 차이가 없었다.[6] 이 대대는 독일제 전차를 운용하였으며 승무원들도 전원 독일인으로 구성된 독일 부대였지만 핀란드군 휘하에서 핀란드군의 지휘를 받았다.[7] 이러한 행동에 대한 미국의 보답인지는 모르겠지만 핀란드군은 전후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에서 추축국으로 분류되지 않고 오스트리아, 태국, 발트 3국, 이탈리아 공화국, 그리고 한국과 함께 "특별 상태국"으로 따로 분류되었다.[8] 나머지는 이란을 통해서 육로로 가거나, 태평양 항구들로 갔거나, 또는 다른 부동항인 아르한겔스크를 통하여 전달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