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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이탈리아의 역사적인 세력 구도와 인구 변화 등의 내용은 이탈리아/인구 참조.
2. 고대 이탈리아 및 로마 제국
자세한 내용은 고대 로마 문서 참고하십시오.이탈리아는 선사 시대부터 지중해성 기후와 비옥한 땅을 바탕으로 많은 인구를 보유하고 있었다. 여러 부족들이 포강을 중심으로 발전하였다.
이탈리아라는 이름은 이탈리아 반도의 중부에 살던 고대 이탈리아 민족인 오스크족[1]의 왕 이탈루스(Italius)[2]에서 유래한 것이다. 이후 로마인들이 사비니족[3], 삼니움족 등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부족들을 통칭하여 이탈리아인이라 표현하였다.
북부 이탈리아에는 갈리아인, 레트족[4], 리구레족[5], 베네티족[6] 등 여러 민족이 난립하였다.
중부 이탈리아에서는 에트루리아인[7], 라틴족[8], 사비니족, 팔리스크족[9], 오스크족, 움브리족[10] 등의 민족이 난립했는데, 초기에는 에트루리아 계열 도시국가들이 타민족 국가들보다 우위에 섰지만, 에트루리아의 간섭을 받던 라틴계 도시 로마가 공화정으로 전환된 이후부터 주도권이 로마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남부 이탈리아에서는 삼니움 등 토착 세력과 마그나 그라이키아라 불리는 그리스계 폴리스(도시국가)들이 공존했으며[11], 북아프리카의 페니키아계 국가인 카르타고가 시칠리아 및 사르데냐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리스인들과 대립했다.
이후 로마가 기원전 3세기에 이탈리아 반도를 통일하고, 포에니 전쟁을 거치면서 시칠리아와 사르데냐까지 포함하는 지금의 이탈리아 영토 전체를 하나로 통합했으며, 기원전 1세기 이후부터 이탈리아 반도는 지중해를 내해로 만들고 유럽 문화권의 형성에 기여한 로마 제국의 본토가 되었다.
그러나 5세기 무렵 로마 제국은 반달족에게 시칠리아와 사르데냐를 빼앗겼고, 내우외환에 시달리다가 476년에 오도아케르에 의해 서쪽의 로마 황제 로물루스 아우구스툴루스가 폐위되면서, 로마 제국이 이탈리아를 상실했다. 그리고 이탈리아는 게르만족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3. 중·근세
3.1. 중세 초기
서로마 제국이 사라지고 나서 이탈리아는 크게 북부 이탈리아, 중부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 사르데냐로 나누어진다. 초기 주요 세력은 오도아케르 왕국, 반달 왕국,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프랑크 왕국, 중세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 등이 있었고 나중에는 지역마다 독자적인 문화를 형성하기 시작했다.
이탈리아는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이후 오랜 기간에 걸쳐 고트족, 랑고바르드족 같은 수많은 이민족들의 침입을 받았다. 특히 게르만 지역과 가장 가까웠던 북부 이탈리아가 가장 많은 공격을 받았다. 중부 이탈리아와 남부 이탈리아는 돌아온 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1세 휘하의 명장 벨리사리우스와 나르세스의 활약으로 어느 정도 질서를 되찾았으나, 북부 이탈리아에서의 혼란은 여전하였다. 북이탈리아는 랑고바르드 족의 침입으로 로마 세력은 재정복 후 얼마 되지 않아 후퇴했다. 포 강 유역의 북이탈리아에서는 게르만계 세력의 몇몇 고립된 거점들이 562년에야 평정되었다고 하는데,[12] 568년에 랑고바르드족이 침략해 왔으니 돌아온 로마 제국의 통일된 이탈리아 통치는 몇년 가지도 못했다. 참고로 이때가 1300년 후 사보이아 가문이 통치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이탈리아 통일 이전 마지막으로 이탈리아 전역이 통일되어 있었던 때이다. 이 전쟁으로 이탈리아의 구 서로마 엘리트층은 친 동고트 파와 친 제국 파로, 랑고바르드 왕국의 성립 이후로는 랑고바르드 치하에 순응하는 이들과 제국령으로 랑고바르드를 피해서 들어간 이들로 나뉘었다. 이렇게 되자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된 이들을 로마라는 공통의 옛 정체성으로는 더 이상 묶기 힘들게 되었다.[13] 한편 동로마의 영토였던 베네치아에는 베네치아 공화국이 세워졌다.
3.2. 지역별 역사
3.2.1. 북부 이탈리아
이후 프랑크 왕국이 세력을 키워서 북부 이탈리아도 안정을 되찾았다. 프랑크 왕국이 셋으로 분열되고 이탈리아에 해당하는 중프랑크 왕국은 로타링기아를 서프랑크, 동프랑크에 넘겨주고 나서 이탈리아 왕국이 되고, 나중에는 독일 왕국과 합쳐져서 신성 로마 제국이 되었다.북부 이탈리아는 기존의 이탈리아 지역과 이민족 지역들이 난립한 가운데 알프스산맥이라는 지리적인 차단 요소, 신성 로마 제국의 황제와 교황 사이의 갈등 덕분에 여러 도시들이 독자적으로 성장할 수 있는 여건이 마련되었다. 이들은 자유 도시, 군주국, 공화국 등 각자의 실정에 맞는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였으며, 유럽의 금융과 무역을 지배하는 막강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이들 도시 국가 중 가장 유명한 국가는 지중해의 지배자 베네치아 공화국이다. 베네치아 공화국은 이탈리아의 다른 국가들과는 달리 신성 로마 제국과는 완전히 독립된 상태였다. 베네치아 공화국 외에도 밀라노 공국, 피렌체 공화국, 시에나 공화국, 피사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등이 들어섰으며, 제노바 공화국은 한때 지중해 무역에서 베네치아 공화국의 경쟁 국가로 성장하기도 하였다. 한편 통일 이탈리아의 전신인 사보이아 백국-사보이아 공국은 본래 신성 로마 제국의 프랑스어권인 아를 왕국에서 출발했으나, 시조 움베르토 1세의 막내아들 오도네가 피에몬테 일대의 토리노 변경백국의 상속녀 수사의 아델라이데와 결혼하며 이탈리아 왕국에 발을 들였고 한동안은 이탈리아와 프랑스 사이에서 애매한 정체성을 유지했다.
북부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유럽에서 가장 부유했고, 로마 제국의 중심지였던 지역들이라 각종 문화적 유산이 풍부하게 남아있어서 신학과 거기에 바탕을 둔 사상과 철학의 발전이 활발하였고 르네상스의 발원지가 되었다.
이런 국가들은 시대가 변화하면서 영향력이 감소하기 시작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으나 핵심적인 원인은 통합적인 세력 구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이탈리아 반도의 국가들에 비해 주변의 강대국들은 세력을 합쳐 나갔다는 것이다. 게르만족이 이탈리아를 지배하는 과정에서 여러 도시들이 인종적, 문화적으로 극심한 분열을 겪었으며, 이후로도 교황과 황제의 세력 다툼 속에 있었기 때문에 이탈리아는 통합이 이루어지기 어려웠다. 이탈리아는 동고트 왕국, 동로마 제국, 랑고바르드 왕국, 프랑크 왕국, 이탈리아 왕국, 신성 로마 제국으로 이어지는 지배층의 교체 기간이 오래되어서 하나로 통합되지 못했다. 서로 대립을 반복한 이탈리아 반도의 여러 국가는 주변 국가들에 거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다.
이렇게 분열된 채로 이탈리아 반도에서 대립하는 사이에 주변의 강대국들이 밀려들기 시작하였으며, 이탈리아의 많은 인재들은 보다 더 큰 프랑스, 독일, 스페인 등 주변국으로 다 빠져나갔다. 16세기에 들어서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이자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 1세였던 카를 5세가 외조부인 아라곤 왕국 국왕 페란도 2세로부터 물려받은 아라곤 왕국 덕분에 나폴리 왕국, 시칠리아 왕국, 사르데냐 왕국의 지배자가 되었고, 이탈리아 전쟁을 거쳐 밀라노 공국까지 손에 넣으며 이탈리아 반도 대부분에 대한 영향력을 확보했다. 피렌체 공화국이나 파르마 공국 등 소규모 국가들도 카를 5세에게 굴복했고 베네치아 공화국, 제노바 공화국, 루카 공화국 같은 해상 공화국이나 북부의 사보이아 공국, 중부의 교황령의 영향권에 있는 일부 지역들 정도만 어느 정도의 독자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14] 베네치아 공화국도 오스만 제국으로 인해 지중해 무역에서 손해를 보면서 서서히 쇠퇴해가는 와중에 유일하게 국력을 신장시킨 국가는 사보이아 공국이었다. 이탈리아 전쟁을 끝낸 카토캉브레지 조약으로 프랑스에게 점령당했던 사보이아 공국을 돌려받은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는 공국의 공용어를 라틴어에서 이탈리아어로 바꾸었고, 1561년 토리노로 천도하면서 이탈리아 정체성을 확고하게 다지는 한편 상비군의 도입, 신분제 의회 통합 등 중앙집권제 국가를 갖추기 위해 노력하였다. 에마누엘레 필리베르토의 후계자 카를로 에마누엘레 1세는 사보이아 공국을 이탈리아 반도에서 프랑스와 스페인에 대항할 정도로 국력을 갖추는데 성공했다.
16세기 말부터는 많은 국가들이 합스부르크 가문과 대립한 프랑스 등의 외세를 이용하려 하였다. 30년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혼란이 심해졌는데, 일부 국가는 신성 로마 제국 황제를 겸하는 합스부르크 제국 측에 서서, 일부 국가는 맞서싸우는 개신교 제후 및 프랑스 측에 서서 싸웠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달라진 것은 없었고 사보이아 공국, 제노바 공화국, 베네치아 공화국, 루카 공화국, 토스카나 대공국, 파르마 공국, 모데나 레조 공국 정도만 살아남았다. 18세기 사국 동맹 전쟁의 결과 사르데냐를 얻은 사보이아 공국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는 사르데냐 왕국을 칭했고,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을 거치며 파르마 공국은 스페인 부르봉 가문의 방계가 통치하기 시작했다.
프랑스 혁명 전쟁이 벌어지면서 이탈리아 반도 북부를 침공한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사르데냐 왕국의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롬바르디아, 사보이아를 빼앗고 제노바 공화국과 파르마 공국을 멸망시켜 프랑스 제1제국의 행정구역으로 편입시켰고, 토스카나 대공국은 에트루리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가 병합시켰으며, 합스부르크 제국으로부터 빼앗은 밀라노 공국과 베네치아 공화국을 멸망시킨 자리에 이탈리아 왕국이라는 괴뢰국을 세웠다. 나폴레옹의 몰락 이후 북부 이탈리아는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 오스트리아 제국의 합스부르크 가문 방계가 다스리는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 부르봉 가문이 복권된 파르마 공국으로 재편되었다.
3.2.2. 중부 이탈리아
중부 이탈리아의 일부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정벌 이후 동로마 제국의 땅이었으나, 동로마로부터 거리가 있었기 때문에 라벤나 총독부 이외에 로마 공령(Duchy of Rome)의 공(Dux), 교황 등이 지배했다. 로마 주교인 교황과 로마 공이 병존하며 통치했지만, 교황의 권위가 날로 강해지면서 로마 공은 물론 라벤나 총독의 권위까지 위협했고, 여기에 성상파괴운동을 레오 3세, 콘스탄티노스 5세 등 이사우리아 왕조의 황제들이 강제하자 반 제국 감정이 일반시민, 사회지도층 모두에게 강해졌다. 성상파괴운동 이전에도 발칸반도의 상당부분이 슬라브인 및 불가리아에게, 이탈리아의 상당부분이 랑고바르드에게 넘어감으로써 동로마령 이탈리아와 콘스탄티노플 본국 사이의 교통 통신이 불편해져서 안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커져가는 가운데 더 확대되었던 언어 문화적 차이에 성상파괴운동은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이외에도 분명히 옛 본국이고 발상지였는데 그때 와서는 지방 속주 취급 받던 것과 (콘스탄스 2세 참조), 유스티니아누스 탈환 이후로 본래 이탈리아의 귀족들이 독과점해오던 교황직 및 고위 사제직에 그리스어권 출신의 비중이 늘어남으로써 그들이 기득권을 침해받았다고 느낀 것도 영향을 미쳤다고 한다.[15] 8세기 중반 교황이던 동로마 제국 출신의 자카리아(마지막 동로마 출신 교황)는 동로마의 영향력을 경계하며 프랑크 왕국의 찬탈자 피핀 3세의 즉위를 인정하는 등 노련한 외교를 펼치고 있었다.그런데 751년 동로마 총독부가 있던 라벤나[16]가 랑고바르드 왕국의 아이스툴프 왕에게 점령되고 752년 아이스툴프가 로마에 공물 상납 및 점령의 인정을 요구하자, 752년 새로 즉위한 교황 스테파노 2세는 754년 본인이 직접 사절이 되어 프랑크의 피핀 3세에게 지원 요청을 했다. 당시 프랑크와 랑고바르드는 호의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니 이는 도박에 가까운 수였다. 하지만 피핀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랑고바르드에게 사절을 파견해 간을 보다 결국 군대를 이끌고 이탈리아로 남하해, 랑고바르드 왕국과 싸워 라벤나 등 이탈리아 중부를 점령하고 756년 교황에게 이를 기증했다. 원래 동로마 제국은 라벤나 총독부를 통해 교황을 통제했는데 이 사건으로 동로마 제국은 중부 이탈리아의 지배권을 상실했다. 결과적으로 중부 이탈리아와 유럽의 새로운 지배자인 프랑크 왕이 교황에게 인정받게 되었으며, 이렇게 동로마 제국령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령이 되었다.
그렇지만 교황은 가문으로 세습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지위가 불안정하였고, 대놓고 직접적으로 세력을 동원하여 영토 확장 전쟁을 벌이는 일도 불가능했다.[17] 그래서 처음에는 중부 이탈리아의 교황령 대부분이 실질적으로는 귀족들의 영지인 상태로 형식적으로만 교황의 통치를 받았다. 다만 교황들이 자신들의 지위를 이용해서 강력한 세력이 크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중부 이탈리아에서 교황과 견줄 만한 세력이 성장하지는 못했다.
오랜 세월에 걸쳐 교황들은 여러 수단을 써서 중부 이탈리아를 지배했으며, 중부 이탈리아는 교황의 영향력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로마와 볼로냐를 비롯해서 많은 지역이 교황령의 영향 아래에서 발전했다.
교황령은 일종의 종교 특구라서 이탈리아가 통합되는 일에 가장 큰 방해가 되었다. 교황은 많은 권위를 가졌고 주변 세력의 도움을 받았지만 일정 수준을 넘어선 성장은 방해를 받았다. 게다가 교황은 국경을 넘어 전세계의 가톨릭 신자에게 직접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사람이었기 때문에 교황령은 주변 국가들과의 이해 관계도 있었다. 이런 사람이 지배하는 지역이 통일 이탈리아라는 (강력할 것으로 예상되는) 국가에 종속된다는 것은 프랑스 왕국, 합스부르크 제국 등 가톨릭 국가 입장에서는 단순히 세력 구도 이상의 의미가 있었고 이탈리아의 완전한 통일을 막는 명분이 되기도 했다. 같은 이유로 교황령은 완전한 의미의 세속 국가로 변하기는 어려웠다.
중부 이탈리아는 이런 상황 때문에 이탈리아 통일 전쟁이 벌어졌을 때도 주변 국가를 포섭해야만 했다. 교황들은 어떻게든 프랑스를 이용해서 대항하는 것이 전부였고 다른 수단은 없었다. 결국 교황령이었던 중부 이탈리아는 이탈리아 왕국에 점령되었으며, 교황에게 남은 것은 바티칸 시국이 전부가 되었다. 라테라노 조약으로 매듭지어지기 전의 상태를 바티칸 포로라고 한다.
3.2.3. 남부 이탈리아
남부 이탈리아는 시칠리아 왕국과 나폴리 왕국이 지배했다. 북부 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는 750년대 동로마에서의 독립 및 교황령 성립 이래 계속 서유럽 문화권에 속했고, 종교개혁 이전까지는 그냥 속한 정도가 아니라 아예 서유럽 문화권을 이끄는 지역이었다. 하지만 남부 이탈리아는 1071년까지 동로마가 최소한의 영토는 항상 유지해 왔으며, 노르만족[18] 및 마그레브의 이슬람 세력이 침공해 국가가 세워지기도 하였던 등 서유럽의 라틴-게르만 문화권, 동로마의 그리스 문화권, 마그레브의 이슬람 문화권 간의 접경지대였다. 남부 이탈리아는 대강 동로마 제국과 랑고바르드계 공국들 간에 양분하던 시기(6세기 말 ~ 9세기 중반), 이슬람 세력이 치고들어와서 세 세력이 서로 합종연횡을 벌이는 중 노르만족이라는 신흥강자가 들어오게 된 시기(9세기 중반 ~ 11세기 중반), 노르만-독일계(신성로마제국)-프랑스계(앙주) 등으로 서유럽 카톨릭권 내에서 땅주인이 바뀌며 동방(십자군, 비잔티움)으로 향하는 전진기지로 활용하던 시기(11세기 말 ~ 13세기 말), 시칠리아의 만종 이래 프랑스 계열에서 스페인 계열로 주도권이 넘어간 시기(13세기 말 ~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 나폴레옹 전쟁 ~ 이탈리아 통일기로 나눌 수 있다. 노르만의 남이탈리아 통일 이전 난립하던 정치체들은 영어 위키백과의 List of south Italian principalities (남이탈리아의 소국들 목록)을 참조하면 좋다.먼저 유스티니아누스의 서로마 지역 점령 시기에는 대체적으로 동로마 제국의 영토였다. 그렇지만 동로마 제국의 상황에 따라 온갖 일을 겪어야 했다. 시칠리아는 과거부터 유명한 곡창 지대였고 이탈리아로 향하는 관문이어서 이슬람 세력의 주요 목표가 되었다. 그전에는 조금씩 찔러 봐도 별 소득이 없다가, 820년대 미하일 2세 시절 슬라브인 토마스의 반란으로 혼란한 가운데 에우페미오스가 반란을 일으켰고 실패하자 아글라브 왕조에 의탁하였다. 이로써 시칠리아 문제에 개입할 명분이 생긴 이슬람 세력이 시칠리아를 차지해나가기 시작했다. Muslim conquest of Sicily(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의 서문이나 문단구성에 의하면 827년 침공 시작, 831년 북서부의 팔레르모 함락, 859년 정중앙의 엔나 함락, 878년 남동부의 시라쿠사 함락 등이 주요 브레이크 포인트이고, 이후 한동안 이슬람계 세력 내 내분을 겪다가 수습한 후 902년 타오르미나 함락으로 거의 완전히 시칠리아를 통일했다. 시칠리아 토후국 문서도 참조하면 좋다. 에우페미오스 말고도 이따금씩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근거지로 하는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였다. 제국의 서쪽 끝이라 콘스탄티노플 본국과 멀기도 했으며, 남이탈리아 현지인 중에서 특히 랑고바르드계는 원래 이탈리아 선주민도 아닌 데다가 종파 또한 로마 교회(카톨릭)이어서 제국에 완전히 융화가 되지 않은 채 독자의식을 느꼈다고도 하고, 또한 제국군이 남이탈리아에 파견되었다가 돌아갈 때 현지인을 끌고 가서 동방에 노예로 팔아버리는 악습이 있었다가 대 니키포로스 포카스(니키포로스 2세의 친조부)가 악습을 없앴다고도 할 정도로 남이탈리아를 옛 본국은커녕 정식 영토만도 못한 식민지나 점령지 취급했던 것도 작용했다고 보인다.[19]
이후에는 기존의 세력이 아닌 노르만족이 등장하여 이 지역의 지배자가 되었다. 로마로 온 노르드인의 후예[20]인 기사들이 용병으로 활동하던 중 로베르 기스카르(Robert Guiscard)[21]가 남부 이탈리아에서 노르만인들을 규합하여 랑고바르드 계열 소국들[22], 동로마 제국 본국 및 동로마 계열의 소국들[23], 이슬람 세력 모두를 물리치고서 교황의 지지를 받고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에 공국을 세우게 된다. 기스카르는 궁극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공격하겠다는 목표를 세운다. 이전까지는 이슬람이 유럽으로 진출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노렸지만, 기스카르가 등장하고 나서는 노르만이 동로마로 진출하기 위해 남부 이탈리아를 지배했다. 이후 남부 이탈리아를 차지한 거의 모든 국가들은 동로마의 황제가 되기 위해 동로마를 노리게 된다. 즉 그동안 남이탈리아의 역할은 동로마 본토의 서쪽 완충지대였던 것인데 그게 무너진 것이다.
기스카르는 동로마 정벌에 들어가기 직전에 병사한다. 기스카르의 일족들이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의 왕위에 오르면서 시칠리아 왕국이 탄생하였고, 이들 시칠리아 왕들의 목표는 여전히 동로마였다. 단 정복 자체는 1100년도 되기 전인 11세기에 이미 거의 완수했지만, 일족들에서 보이듯이 분할상속이었어서 이 상속 구도를 정리함과 동시에, 토착세력이 아니었던 탓에[24] 토착세력과의 관계를 구축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려서 1130년이 되어서야 정식 왕국으로 출범했다. 시칠리아의 왕 중에서 직접적으로 이러한 목표를 이룬 사람은 없었지만, 노르만인들은 이후 십자군 전쟁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고, 예루살렘이나 안티오키아 등지에 왕국, 공국 등을 세우며 동로마를 위협했다.[25]
이후 노르만인들의 왕위가 단절되었는데 마침 혼인으로 인연이 있는 신성 로마 제국의 호엔슈타우펜 왕조에서 시칠리아 왕위를 차지했다.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 역시 동로마 제국의 제위를 노려 동로마와 좋은 관계는 아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프리드리히 2세와 콘라트 4세의 사망으로 호엔슈타우펜 가문은 신성 로마 제국 제위를 상실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사생아인 만프레디가 시칠리아 국왕으로 즉위했지만 신성 로마 제국의 세력을 약화시킬 기회를 잡은 교황청은 프랑스에 남부 이탈리아를 넘기기로 결정하고 루이 9세의 동생인 앙주 백작 샤를을 지원해서 만프레디를 격파하여 시칠리아의 왕 카를루 1세로 등극시켰다. 콘라트 4세의 아들 콘라딘까지 처형한 카를루 1세는 목표를 동로마 제국으로 변경하여 계속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후 동로마 제국의 황제였던 미하일 8세가 외교와 정치 공작 등을 통해 만프레디의 딸과 결혼해서 호엔슈타우펜 왕가의 계승권을 갖고 있던 아라곤 왕 페로 3세와 연합해서 시칠리아의 민중 봉기를 일으켜 카를루 1세를 쫓아내 버린다.(시칠리아의 만종) 페로 3세는 시칠리아 왕위를 차지했고 동로마는 군사도 동원하지 않고 시칠리아와의 적대 관계를 없애 버렸다.
이 사건으로 카를루 1세는 시칠리아에서 쫓겨나 남부 이탈리아만 지배하게 되었으며, 시칠리아 섬을 점령하기 위해 교황은 조카인 프랑스 국왕과 연합해서 아라곤 십자군까지 일으켰지만 패배하였다. 시칠리아의 지배자라는 명분 등을 위해 카를로 1세와 그의 후예들은 시칠리아를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자신들의 왕국을 시칠리아 왕국으로 자처했다. 이렇게 시칠리아가 없는 시칠리아 왕국은 다른 국가들은 왕국으로 인정하지 않았고 편의상 수도의 이름을 따서 나폴리 왕국이라고 불렀다.
시칠리아는 페드로 3세가 시칠리아의 왕이 된 뒤 아라곤,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고, 아라곤은 시칠리아에서 지중해 동쪽으로의 진출을 노렸다. 나폴리 왕국은 왕위 계승 때문에 내분이 일어나, 이후 기회를 노리던 아라곤이 정복했다. 아라곤은 지중해 진출 대신 카스티야 왕국과 동군연합을 이루면서 스페인을 형성하고 신대륙 진출에 관심을 가졌다.
스페인은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를 통합시키기 않고 지배자는 같지만, 서로 다른 총독 관할[26]로 분리된 채로 동군연합을 형성하고 있다가 이탈리아 통일 전쟁 이전에는 양시칠리아 왕국으로 통합되었다.
이렇게 지배자들이 계속 바뀌어서 남부 이탈리아는 이슬람 문화, 그리스 문화, 노르만(-프랑스) 문화가 합쳐지게 되었다. 이를 지칭하는 (영어 위키백과)'Norman-Arab-Byzantine culture'라는 용어도 있다. 남부 이탈리아와 시칠리아는 서로 유사한 세력의 지배를 받았고 지리적으로 근접했지만, 북부 이탈리아와 중부 이탈리아는 상당히 다른 지역이었다.
3.2.4. 사르데냐
오늘날에는 사르데냐도 남부 이탈리아의 일부로 간주되지만, 중세 이래 다른 남부 지역과는 공통점이 없다고 봐도 무방한 역사를 가졌기에 따로 서술한다.사르데냐는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부터 9세기까지 동로마 제국의 지배를 받았으나, 이탈리아 반도의 정세 혼란으로 인해 동로마 중앙정부의 통제력이 약해졌고, 그 틈을 노린 무슬림 해적들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그러자 사르데냐의 지방 세력이 자체적으로 약탈에 대응하기 위해 사병을 조직하면서 실질적으로 독립한 상태나 마찬가지가 되었는데, 그들은 법관을 뜻하는 주디체(Giudice)라는 칭호를 사용했고, 그들의 영토는 주디카토(Giudicato)[27]라 불리게 되었다.
또한 아르보레아(Arborea), 갈루라(Gallura), 토레스(Torres)[28], 칼리아리 등 4개의 주디카토는 사실상 독립 왕국이나 다름 없었기에, 해당 국가들은 왕국으로 의역되기도 한다.
그러나 13세기에 중부 이탈리아의 피사 공화국이 아르보레아 주디카토와 함께 칼리아리 주디카토를 분할한 것을 계기로, 피사 공화국과 그들의 라이벌인 제노바 공화국이 개입하기 시작했고, 14세기에 이르러서는 이베리아 반도의 아라곤 왕국까지 사르데냐에 개입하기 시작했다.
아라곤 왕국은 사르데냐를 이용하여 사르데냐 국왕을 칭했는데, 피사와 제노바 세력을 축출하면서 패권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1420년에는 마지막으로 남은 주디카토인 아르보레아까지 정복하면서 사르데냐 전체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후 사르데냐는 아라곤과 그 뒤를 이은 스페인의 지배를 받다가,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인해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으로 넘어갔고, 사국 동맹 전쟁으로 오스트리아가 사보이아 가문이 지배하던 시칠리아 왕국과 교환하면서[29], 사르데냐는 사보이아 가문의 지배를 받게 되었다.
사보이아 가문 출신 군주들은 사르데냐 국왕을 대표 칭호로 사용했지만, 그들은 북부 이탈리아 피에몬테의 토리노에 머물렀다. 애초에 처음 사르데냐 국왕을 자칭한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부터 사르데냐로 건너간 적이 없었다. 이후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와 비토리오 아메데오 3세도 본토라 할 수 있는 피에몬테, 발레다오스타, 롬바르디아 일부, 사부아, 니차 발전에 집중했지 사르데냐는 이 시기 거의 버려진 채 토착 귀족들에 의해 운영되었다. 카를로 에마누엘레 3세가 칼리아리 대학교와 사사리 대학교 발전에 힘쓰긴 했으나 거기까지였다.
프랑스 혁명 전쟁 시기에 본토를 상실한 사보이아 가문이 사르데냐로 몽진하면서, 사르데냐는 문자 그대로 사르데냐 왕국의 중심지가 될 수 있었지만, 나폴레옹 전쟁이 끝나고 실지를 회복하고 토리노로 복귀하면서 다시 지방으로 전락했다. 심지어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아예 왕국 이름을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으로 바꾸면서 피에몬테가 중심지임을 대놓고 나타냈다. 다만 나폴레옹 전쟁 중 사보이아 가문이 처음 사르데냐로 오면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1세는 동생 카를로 펠리체에게 사르데냐 부왕직을 맡기고 본인은 실지를 되찾으러 이탈리아 반도에서 대 프랑스 동맹에 열심히 참여하러 다녔는데 후진적인 사르데냐의 생활 풍습에 개탄한 카를로 펠리체는 형으로부터 양위받은 후 사르데냐의 근대화에 힘썼고 덕분에 사르데냐도 왕국 본토에 근접하게 생활 수준이 향상되었다.
이후 1847년 카를로 알베르토 국왕에 의해 기존에는 느슨한 동군연합에 불과했던 사보이아 가문의 영지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행정구역으로 개편되면서 사르데냐는 칼리아리 구, 누오로 구, 사사리 구로 나뉘었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이탈리아 통일을 주도하여 이탈리아 왕국으로 계승되었다.
4. 근대
4.1. 통일과 이탈리아 왕국
나중에는 북부 이탈리아는 대부분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았고 남부 이탈리아도 모두 스페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에 결국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과 교황령을 제외한 이탈리아는 모두 오스트리아 제국 합스부르크 가문[30]과 스페인 부르봉 가문[31]의 영향 아래에 있던 상태였다. 그래도 이탈리아 반도는 유럽의 다른 지역과 다른 동질성을 가지고 있었다. 분열된 이탈리아를 합쳐야 한다는 여론이 커졌고,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주도로 대부분의 국가들이 합쳐져서 통일을 이루었다. 주세페 가리발디[32]가 활약한 시기가 이 시기였다.당시 오스트리아의 개입을 막기 위해 프랑스 나폴레옹 3세와 연합해서 롬바르디아에서 오스트리아를 몰아냈는데, 이탈리아가 통일되지 않도록 견제하기 위해서 나폴레옹 3세가 프랑스군을 후퇴시키고 오스트리아와 종전해서 더 진군하지 못했고 이 사건으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재상이었던 카밀로 카보우르는 사임을 선언했다.[33] 프랑스와 다시 동맹하기 위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은 1860년 토리노 조약을 체결하여 토스카나와 에밀리아로마냐를 합병하는 조건으로 사보이아[34], 니차(Nizza 현 프랑스 니스)를 프랑스에 넘겨주었다. 1861년 3월 17일, 이탈리아 왕국이 선포되어 사르데냐-피에몬테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2세가 초대 이탈리아 국왕으로 즉위하였다. 이후에는 이탈리아계가 다수 거주하는 베네토, 티롤, 이스트리아 반도, 달마티아 지역을 점령하기 위해 오토 폰 비스마르크의 프로이센 왕국과 동맹을 맺었다. 동맹 직후에 일어난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에 참여하여 베네토 지역을 획득했으며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때문에 프랑스가 철수한 상황에서 교황령을 합병하여 이탈리아 통일은 일단락되었다. 원래부터 이탈리아는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지만 인구 증가가 느려지기도 했고 서로 합쳐져 있지도 않아서 영향력이 많지 않았는데 이탈리아가 통일을 끝낸 1870년 이탈리아의 인구는 27,900,000명으로 이미 주변의 강대국 수준의 인구를 확보해서 영향력이 커졌다.
그러나 통일만 되었지 이탈리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은 아직 형성되지 못한 상황이었고, 신생 이탈리아 왕국의 주요 기득권 세력이었던 기존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출신 관료들은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행정과 법 제도를 남부를 위시한 다른 지역에 적용하려 시도했다. 이때문에 남부에서는 거의 내전에 가까운 유혈 사태가 벌어졌으며, 움베르토 1세 치세 내내 이탈리아 왕국 사회는 불안으로 얼룩졌다.
4.2. 이탈리아 왕국의 팽창: 이탈리아 제국
통일 이후 이탈리아는 리비아, 소말리아 등을 합병하고 티롤, 이스트리아, 달마티아 지역 등을 지배하려고 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독일 제국과 더불어 삼국 동맹을 형성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전쟁을 일으키는 데에 사전 협의가 없었다는 명목으로 중립을 유지한다. 얼마 지나지 않아서 런던 조약을 통해 아직 오스트리아가 다스리는 이탈리아 지역을 대가로 협상국으로 전쟁에 참여하게 되고 승전국이 되어서 북부 티롤, 달마티아 지역을 제외한 지배하려고 했던 모든 영토를 획득했다.이 시기에 대체적인 이탈리아 왕국의 영역이 확정되었다. 이러한 이탈리아의 대외 정책을 신성한 이기주의(Sacred Egoism)라고 하는데, 전쟁 당시 총리였던 안토니오 살란드라의 연설에서 처음 등장한 말이다. 전쟁이 일어나기 전이던 1910년 이탈리아의 인구는 37,200,000명으로 주변의 강대국과 비교해도 부족하지 않았고 산업력도 엄청나지는 않아도 무시할 수 없을 정도였기 때문에 이러한 정책에 대한 지원이 있을 수 있었다.
그러나 승전국 이탈리아의 보상은 세계 양강이었던 영국과 프랑스는 물론이고 신흥 강국으로 부상한 미국[35]에도 밀려서 2류 취급을 받았다. 피흘려 싸워 이뤄낸 고생에 비해 승리의 기쁨은 아주 잠깐이었고 정치/경제적인 문제는 더욱 심해져 갔다. 남북 문제는 더욱 심화되었고 당시 정치인들은 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했다. 나라 곳곳에서 사회주의자들이 공화정을 주장하며 파업과 시위를 조장하는 등 반정부 공작을 벌였고, 국민들도(특히 남부에서) 마을 단위로 총칼 무장하여 공장/농장/관청을 무단 점거하고 자본가, 지주, 공무원들을 쫓아냈으며 정부에 세금 납부까지 거부했다. 더 이상 상황이 심각해지면 무정부 사태를 우려해야 하는 지경까지 오게 된다.
4.3.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2차 대전
이후 파시즘이 생겨나서 베니토 무솔리니가 국가 파시스트당을 창설하고, 로마 제국의 부활을 외치며 국가의 영도자(일 두체)가 되어서 정권을 잡는다. 알바니아를 합병하는 등 정복 전쟁을 하다가 에티오피아를 침공하고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켰다. 하지만, 그리스에게 이탈리아령 알바니아 1/4를 빼앗기고 아프리카에서 10만명이 넘는 대병력을 손실할 정도로 전쟁에서 참패한 무솔리니는 전쟁 도중 축출되어 감옥에 갇혔다가 독일군의 구조로 살아나고 다시 게릴라 부대에게 붙잡혀 처형당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패배로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얻은 이스트리아 지역은 트리에스테 자유 지구로 재편되었고, 리비아도 영국과 프랑스가 분할 점령했다가 독자적인 국가를 형성시켜버린다.당시 국왕이었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의 전횡을 조장했고, 독일군이 이탈리아에서 계속 전쟁을 벌이는 상황에서도 제대로 대처하지 못해 국민들의 비난을 받고 퇴위했고 움베르토 2세가 즉위했다. 그러나 그것으로 왕정에 대한 비난 여론을 없애지 못해서 결국 공화정과 왕정 중 하나를 선택하는 개헌 국민투표를 실시하고 공화제 찬성파가 과반수를 득표하여 공화제를 채택하기로 하고, 움베르토 2세를 비롯한 사보이아 왕조 일가는 이탈리아에서 추방되어 포르투갈과 스위스, 미국 등지로 망명했다.[36] 이후 제헌 의회가 선출되고 제헌이 이루어져 이탈리아는 공화국이 되었다.[37] 공화국이 된 이탈리아는 여전히 주변의 강대국에게 영향력을 인정받았고 인구도 1950년 47,100,000명으로 그동안 꾸준하게 증가해 왔어서 기본적인 역량은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이후에도 발전을 이룰 수 있었다.
5. 현대: 이탈리아 공화국
5.1. 냉전
2차 대전 이후 이탈리아는 미국의 서유럽 재건 프로젝트인 마셜 플랜의 수혜를 받아 제조업이 크게 발전해 50년대 후반부터 경제 대국으로 부상했다.50년대 후반부터 60년대까지 일명 Il Boom(일 붐)이라 불리는 경제 기적의 시기를 거치며 이후로도 이탈리아는 경제적으론 고도 성장을 계속했다. 1958년엔 밀라노에 127m 마천루인 피렐리 타워가 세워지고, 1964년엔 유럽에서 영국에 이어 2번째 인공위성 보유국이 되는 등 서방 대표 선진 국가 중 하나로 자리 잡게 된다.
그러나 고질적인 남부 문제와 마피아는 여전히 남아있었고 기독교민주당의 장기 집권속에서도 68혁명 이후 70년대는 일명 납의 시대라는 극좌 및 극우 테러리즘의 준동을 겪으면서 정치, 사회적으로 혼란스러운 시기를 보냈다.
이탈리아는 프랑스와 더불어 제1세계 자유진영 국가 중 사회주의 세력이 강했던 나라로 1976년에는 이탈리아 공산당이 상원의 33.8%, 하원의 34.4%를 차지하기도 했다.
외교적으로는 1949년 NATO 창설 당시 가입, 1975년 G7 가입 등 21세기인 현재 보다 20세기 중후반에 국제적으로 더 높은 지위를 누렸다.
80년대에는 납의 시대의 종식, 국제 유가 안정으로 경제 부흥기가 다시 도래하여 밀라노 젊은이들을 중심으로 소비주의, 향락 추구 문화가 퍼진다. 이는 MTV와 패스트푸드 등 미국 대중 문화의 유행, 학생들의 고가 명품 구입[38] 등으로 대표된다. 하지만 이러한 물질과 성공 중시 풍조는 퇴폐적으로 변질되어 이탈리아 정치의 도덕적 타락으로 이어지게 됐다고 평가받는다.
5.2. 냉전 이후
1989년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의 여파로 인해 공산주의 이데올로기가 설득력을 잃자 이탈리아 공산당은 공산주의를 포기하고 좌파민주당으로 재창당했다.[39]이듬해인 1992년에는 이탈리아 사회당 간부의 비리가 드러난 것을 계기로, 이탈리아 국회의원의 절반 이상이 뇌물 비리 혐의로 기소되는 대규모 부정부패 타도 프로젝트 마니 풀리테(깨끗한 손) 운동이 시작된다.
마니 풀리테 운동을 겪으면서 기존 이탈리아 정계를 주도하던 줄리오 안드레오티의 기독교민주당은 1994년 총선을 앞두고 자진 해산을 선언했고,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민주당이 그 반사이익을 얻어 집권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자, 기업가 출신 정치인 실비오 베를루스코니가 창당한 전진 이탈리아가 주도하는 정당연합인 자유의 집이 구 기민당 우파를 흡수하여 선거를 치렀다.[40]
그 결과 자유의 집이 승리하여 실비오 베를루스코니 내각이 출범했고, 좌파민주당은 공산당 시절과 마찬가지로 집권에 실패했으며, 기민당의 연정 파트너였던 사회당은 군소정당으로 전락하여 자진 해산을 선언했다.[41]
이와 같은 대규모 정계 개편은 비록 개헌은 없었으나 체제의 변혁이나 다름 없는 효과를 가져왔고, 이로써 1948년부터 이어지던 이탈리아 제1공화국은 막을 내리고 제2공화국이 시작되었다.
그리고 제1공화국 붕괴의 가장 큰 수혜자가 된 실비오 베를루스코니는 네 차례에 걸쳐 총리직을 역임하며, 2차 대전 이후 최장기 집권 기록을 세우기도했다.
이때 좌파는 베를루스코니와 경쟁하며 중도층으로의 확장을 시도하는 과정에서 점점 색채가 옅어졌는데, 공산당의 후신인 좌파민주당은 민주사회주의 좌익 정당이었으나, 1998년 좌파민주주의자[42]으로 재창당하면서 사회민주주의 중도좌파 정당이 되었고, 2007년에는 아예 기민당을 계승한 기독교 좌파 정당인 라 마르게리타와 합당하여 민주당이 되었다.
2008년 대침체의 여파로 인한 이탈리아 경제의 계속된 저성장과 고질적인 정치권의 부정부패로 국가 성장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에서 대봉쇄등을 겪으면서 극우파의 부활, 지역갈등의 심화 등을 겪고있다.
이탈리아의 정치 관련 소식이 한국에 보도될 때는 주로 우익 정치인 관련 뉴스라 우익 세력이 압도적이라고 인식될 수 있으나 사실 21세기 이탈리아는 우익-좌익-중도 성향 총리가 번갈아가며 계속 정권을 잡은 편이다.
6. 관련 문서
- 이탈리아 반도
- 이탈리아/인구
- 에트루리아
- 고대 로마
- 동고트 왕국
- 랑고바르드 왕국
- 프랑크 왕국
- 베네치아 공화국
- 교황령
- 이탈리아 왕국(신성 로마 제국)
- 시칠리아 왕국
- 나폴리 왕국
- 사르데냐 왕국
- 이탈리아 통일
- 이탈리아 왕국
[1] 이탈리아어파 오스크움브리아어군에 속하는 오스크어를 사용하던 민족.[2] 이탈로스(Italos)라고도 한다.[3] 이탈리아어파 오스크움브리아어군에 속하는 사비니어를 사용하던 민족[4] 고립어 또는 티레니아어족으로 추정되는 레트어를 사용하던 민족이다.[5] 고립어로 분류되는 고대 리구리아어를 사용하던 민족으로, 리구리아라는 지명의 기원이 되었다. 이들의 언어는 로망스어군에 속하는 현대 리구리아어와는 별개의 언어다.[6] Adriatic Veneti. 베네치아 및 베네토라는 지명의 유래가 된 민족으로, 켈트어파 또는 이탈리아어파와 근연 관계로 추정되는 베네티어[43]를 사용했으며, 갈리아인의 일파인 베네티족이나 슬라브의 원류로 추정되는 비스툴라 베네티와는 이름이 비슷할 뿐 접점이 없다.[7] 고립어 또는 티레니아어족으로 분류되는 에트루리아어를 사용했으며, 지금의 토스카나를 중심으로 하여 세력을 확장했다.[8] 라티움 지방에 거주했으며, 라틴이라는 명칭 역시 라티움에서 유래했다.[9] 이탈리아어파 라틴팔리스크어군에 속하는 팔리스크어를 사용하던 민족[10] 이탈리아어파 오스크움브리아어군에 속하는 움브리아어를 사용하던 민족으로 움브리아라는 지명의 유래가 되었다.[11] 타라스, 네아폴리스, 시라쿠사, 메시나 등이 대표적인 그리스계 폴리스였다.[12] 영어 위키백과 Gothic War (535–554) 중 'The lands and cities across the River Po were still held by Franks, Alemanni and Goths and it was not until 562 that their last strongholds, the cities of Verona and Brixia, were subjugated.'[13] 'Transformations of Romanness' 38p, 원문: 'In Italy, the Gothic war effectively split the Roman elites into those who supported Gothic rule (such as Cassiodorus) and those who favoured the imperial side; and later, into those who acquiesced to Lombard rule and those who withdrew to lands under Roman control. Shared Roman identity ceased to provide a sense of social cohesion.'[14] 카를 5세는 자신의 첫 영지였던 부르고뉴를 북이탈리아와 맞바꿀 정도로 이탈리아에 대한 집착이 강했고, 경쟁자인 프랑스 왕국을 누르고 유럽을 평정하다시피 했기 때문에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이탈리아의 국가들은 주변 국가를 이용하면서 서로 대립했다.[15] 영어 위키백과의 'Byzantine Papacy' 문서에는 'Greek-speakers from Greece, Syria, and Sicily replaced members of the powerful Roman nobles in the papal chair during this period.'(그리스어권 출신자들이 로마 귀족들을 제치고 교황좌를 차지했다.), 'By the beginning of the eighth century, bilingual liturgies were common place, with Greek taking precedence.'(8세기 초에는 그리스어 및 라틴어 두 언어로 하는 전례가 일반적이었는데, 우선권은 그리스어에 있었다.), 'Greek was the language of choice during this period as countless Easterners rose through the ranks of the clergy. According to Ekonomou, between 701 and 750, "Greeks outnumbered Latins by nearly three and a half to one".'(수많은 동방출신들이 (교황청 내) 고위 사제직에 올라감에 따라, 이 시절 그리스어는 고급 언어였다.(choice에는 질 좋은, 고급의 라는 뜻도 있다.) Ekonomou에 따르면 8세기 전반에 (고위 사제직에서) 그리스인들(즉 동방 출신)이 라틴인(즉 서방 출신)을 거의 3.5:1로 압도했다고 한다.) 등의 대목이 있다.[16] 이탈리아의 동해안이라 발칸 반도에 있는 동로마 본국과 왕래가 쉬웠다.[17] 교황의 사주로 특정 국가가 다른 국가에 전쟁을 일으키는 일은 많았다. 그래도 이런 식으로 일을 벌이는 게 직접 쳐들어가는 것보다는 힘들었다.[18] 단 워낙 멀리서 치고들어와서 외부자로 간주되지만, 문화적으로는 10세기 초 노르망디 공국 성립 이래 이미 서프랑크(프랑스) 문화에 동화되었다.[19] 영어 위키백과 'Nikephoros Phokas the Elder 중, 'The 11th-century historian John Skylitzes furthermore reports that Nikephoros brought an end to abuse against the local population, by ending the practice of returning Byzantine soldiers carrying off local Italians to be sold off in the East as slaves. According to Skylitzes, the grateful Italians dedicated a church in his honour.'[20] 사실 이전에 이미 프랑스 북부 일대의 라틴인에 동화된 상태였다.[21] 이 이름은 프랑스식인데, 대부분의 서적에서는 프랑스식 이름으로 주로 기술된다. 이탈리아식으로는 로베르토 귀스카르도(Roberto il Guiscardo)다.[22] 베네벤토 대공국을 원조로 하여, 851년에 Principality of Salerno (살레르노 대공국)이, 981년에 Principality of Capua (카푸아 대공국)이 떨어져 나갔다. 이쪽은 지도층이 그리스-로마계 선주민이 아닌 롬바르드계라서, 동로마의 위상을 명목상으로만 존중하거나 혹은 아예 그런 것도 없이 쌩 외국으로서 맞서싸우기도 했다.[23] 영어 위키백과 Duchy of Naples (나폴리 공국), Duchy of Gaeta (가에타 공국), Duchy of Amalfi (아말피 공국) 등. 이곳들은 공통적으로 이탈리아 남서해안의 티레니아 해에 위치해 있는데, 820년대 이슬람의 시칠리아 진출 이후로 메시나 해협 너머의 서지중해와 동로마 본국 간의 연결이 원활하지 못하게 되어 차츰 제국 직할령에서 벗어나 (반)독립 상태가 되었다. 또한 넓지는 않아도 상당한 영역을 갖고 있던 랑고바르드계의 Principality들과 달리, 이 Duchy들은 거의 도시국가 수준이었다. 또한 중·북부와는 달리 남부는 도시 성립 자체가 그리스인들이 세웠던 마그나 그라이키아에 뿌리를 두는 곳이 많았고, 롬바르드계가 아닌 선주민들은 라틴-이탈리아인들과 그 그리스인이 통혼해서 내려온 자손들이었다. 그래서 라틴적인 모습을 많이 버리고 그리스적으로 제법 변모했던 동로마 제국에 대한 이질감이 중·북부보다 확실히 덜했다. 그래서인지 동로마로부터 그리 독립적이지는 않았고 주화, 작위 등을 하사받아서 사용했다. 영어 위키백과 Hypatos (이파토스)가 집정관(콘술)의 그리스어 번역어였다가, 이후 동로마 계열 도시국가들의 지배자를 지칭하게 된 용어이다.[24] 기존의 3대세력인 동로마, 랑고바르드, 이슬람 중 가장 남이탈리아에서의 역사가 짧은 이슬람조차 History of Islam in southern Italy를 보면 나오지만 시칠리아에서는 827년, 남이탈리아 본토에서는 바리 에미르국(Emirate of Bari)를 세우는 847년까지 거슬러올라가기 때문에 이 시점에서의 역사가 250년 정도 되어서 충분히 토착세력이라고 여길 만하다.[25] 결국 중근동에 진출한 십자군들은 베네치아 공화국과 협력하여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점령해서 동로마 제국의 몰락에 일조했다.[26] 밀라노 총독과 시칠리아 총독[27] 복수형으로는 주디카티(Giudicati)라고 한다.[28] 로구도로(Logudoro) 주디카토라고 불리기도 한다.[29] 말이 교환이지 카를 6세가 국력을 앞세워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를 반쯤 협박해 강권한 것에 가깝다. 사르데냐보다 시칠리아가 경제적인 가치도 높았고,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으로 얻은 나폴리 왕국과 붙어있는 시칠리아 왕국이 통치에 훨씬 유리했기 때문이다.[30] 롬바르디아-베네치아 왕국은 오스트리아 제국 직할령이었고, 토스카나 대공국과 모데나 레조 공국은 합스부르크 가문의 방계가 통치했다.[31] 양시칠리아 왕국과 파르마 공국을 스페인 부르봉 방계가 통치했다.[32] 애초에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 니차 출신이었다. 니차는 오늘날 프랑스의 니스.[33] 얼마 지나지 않아서 카보우르는 다시 재상에 임명되었다.[34] 사보이아 왕조의 본관을 양도할 정도로 통일에 대한 사르데냐-피에몬테 왕국의 열망이 컸다.[35] 다만 식민지 쟁탈전에 늦게 뛰어든데다 강대국 간의 전쟁에 엮인 적이 거의 없어서 후발주자 취급을 받았을 뿐, 경제 규모로는 이미 영국을 추월하여 세계 1위를 달성한 상태였다.[36] 사보이아 가문은 2002년에야 입국 금지령이 해제되어 이탈리아 귀국이 허용되었으며, 구 왕가의 일족들 대부분은 현 이탈리아 공화국 정부를 이탈리아 정식 합법 정부로 인정하고 이탈리아로 돌아와서 공화국 국민이 되었다.[37] 실제로 이탈리아는 왕국 시절에도 왕정에 반대하는 공화주의 운동이 꽤 있었으며 이탈리아 통일 운동의 주역이었던 정치가 주세페 마치니 역시 공화주의자였다.[38] 몽클레르 패딩이 유행했다.[39] 이때 공산주의를 고수하자고 주장한 소수파는 공산주의 재건당을 창당했다.[40] 반면 기민당 좌파는 기민당의 전신인 구 이탈리아 인민당에서 이름을 따온 이탈리아 인민당을 창당하여 선거에 임했다.[41] 최초의 사회당 출신 총리였던 베티노 크락시가 마니 풀리테의 수사 대상에 오른 것이 결정적 요인이었는데, 사회당 해산 이후 크락시는 튀니지의 함마메트로 빤스런망명하여 독재자 지네 엘 아비디네 벤 알리의 보호를 받으며 연명하다가, 다시는 이탈리아 땅을 밟지 못하고 객사했다,[42] 직역하면 이런 이름이지만, 한국에 '~자'로 끝나는 당명이 없다는 이유로, 전신처럼 좌파민주당로 의역되는 경우가 많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