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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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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
Tawantinsuyu[1]
파일:Tawa_chakana.svg.png 파일:잉카 제국 황실 문장.png
차카나[2] 국장[3]
파일:attachment/잉카 제국/inca.jpg
1527년의 최대 판도
1438년 ~ 1533년[4] / 1572년[5]
성립 이전 멸망 이후
쿠스코 왕국 스페인 제국
신잉카국
위치 남아메리카
수도 쿠스코
정치 체제 전제군주제
신권정치[6]
인구 12,000,000명
국가 원수 사파 잉카[7]
언어 케추아어
종족 잉카인 외 여러 남미 토착 부족들
종교 잉카 다신교
주요 사건 [ 펼치기 · 접기 ]
1197년 쿠스코 왕국 건국
1438년 파차쿠티 황제 즉위[8]
1529년 ~ 1532년 잉카 내전
1532년 카하마르카 전투[9]
1534년 잉카 제국 멸망[10]
1572년 신잉카국 멸망
면적 2,000,000km² (1527년)
현재 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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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볼리비아|]][[틀:국기|]][[틀:국기|]]

[[칠레|]][[틀:국기|]][[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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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비아|]][[틀:국기|]][[틀:국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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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어별 명칭
케추아어 Tahuantinsuyo[11]
스페인어 Imperio Inca
영어 Inca Empire
한국어 잉카 제국
중국어 印加帝國[12]

1. 개요2. 상징3. 국력4. 역사5. 경제6. 사회문화
6.1. 건축
7. 군사8. 종교9. 기술10. 인신 공양11. 멸망의 원인
11.1. 전염병으로 인한 내부 분열11.2. 학살과 주변 부족들의 반감11.3. 잔혹한 풍습
12. 평가13. 보물14. 역대 군주15. 대중매체16. 기타

[clearfix]

1. 개요

잉카 제국, 혹은 타완틴수유[13]는 1438년부터 1533년까지 약 100년 간 남아메리카 일대를 다스린 대제국이다.[14] 콜럼버스가 도착하기 이전의 남북 아메리카 대륙 전역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으로 군림하면서 남미 대륙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다스렸다.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서부, 볼리비아 남서부, 칠레, 아르헨티나 북서부, 콜롬비아 남서부 등 총 6개국에 걸친 광대한 영토를 통치하기도 했다.

잉카족은 12세기경 현재의 쿠스코 근방에 거주하던 부족이었다. 전설적인 지도자인 망코 카팍의 시대에 잉카 제국의 전신인 쿠스코 왕국이 세워졌으며, 정복군주이자 초대 황제인 파차쿠티-쿠시 유판키의 재위기에 인근의 창카족을 정벌하고 페루 지역 대부분을 빠르게 먹어치웠다. 쿠스코 왕국은 파차쿠티의 시대에 영토를 4방위로 나누고 지방관을 파견하는 등 소규모 부족국가에서 본격적인 제국으로서 탈바꿈했다. 파차쿠티가 1471년에 붕어하자 그의 아들인 투팍 잉카 유판키가 그의 뒤를 이어 치모르 왕국을[15] 정복하고 손자인 우아이나 카팍에콰도르 남부까지 진출하면서 잉카 제국의 강역을 최대로 넓혔다. 잉카 제국은 북쪽 뿐만 아니라 남쪽과 동쪽으로도 확장 사업을 펼쳤으나, 남쪽에서는 마푸체족[16] 극렬한 저항으로 더이상 영토를 넓히는 데 실패했고 동쪽에서는 아마조니아 원주민들의 게릴라전에 휘말려 포기했다.[17]

강대했던 잉카 제국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천연두로 붕어한 이후 형제들끼리 내전이 벌어지면서 흔들리기 시작했다.[18] 황제의 두 아들인 우아스카르아타우알파 사이에서 제위계승전쟁이 일어났고, 제국은 두 쪽으로 갈라져 분열되었다. 그 상태에서 결정적으로 스페인콩키스타도르들이 유럽에서 아메리카로 건너왔고, 168명의 스페인군이 옮겨온 전염균들에 면역이 없었던 잉카인들이 떼로 죽어나가면서 안그래도 약해진 잉카 제국은 더더욱 세력이 줄어들었다. 우아스카르를 내전에서 꺾고 황제에 오른 아타우알파는 잉카를 정복할 기회만을 노리던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계략에 휘말려 포로로 잡혔고, 몸값으로 방 하나를 2번 채울 정도의 황금을 바쳤으나 결국 풀려나지 못하고 처형되었다.

아타우알파 황제가 교수형 당해 죽은 이후, 피사로는 후임으로 망코 잉카 유판키를 새로운 꼭두각시 황제로 추대했고, 허수아비 제국을 부여잡은 채로 남미의 재물을 약탈하고 본격적인 식민지 건설에 열을 올렸다. 망코 잉카 유판키는 처음에는 스페인인들에게 협력하는 체 하다가 결국 빌카밤바[19] 도망가 신잉카국을 세우고 스페인에 대한 저항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이 저항운동마저 최후의 사파 잉카투팍 아마루가 사로잡혀 처형당하면서 끝났고, 이후 남아메리카 지방은 스페인 제국의 혹독한 통치하에서 신음하게 된다.

현대에는 마추픽추 등 험한 산꼭대기에 거대한 도시들을 세운 문명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보통 황금과 보물이 넘쳐났던 신비한 고대 문명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다.[20] 같은 아메리카 대륙의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과도 자주 혼동되는 편인데,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와는 달리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세우지 않았으며 정글이 아니라 상대적으로 건조한 산맥 지대가 주 터전이었다. 일반적인 경우에는 잉카의 신왕(神王) 제도와 막대한 부를,[21] 아즈텍의 호전성과 인신공양을, 마야의 신비스러운 분위기와 피라미드 등을 모두 모아 만들어진 가상의 문명들이 등장하기 때문에 더더욱 잉카와 아즈텍, 마야를 헷갈려 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2. 상징

잉카의 국장
파일:incabanner.png 파일:Retrato_de_Huayna_Cápac.jpg
사파 잉카의 상징[22] 마스카파이차를 쓴 우아이나 카팍[23]
잉카 제국은 타 남미 왕국들처럼 공식적인 국기가 없었다. 심지어는 독자적인 문자조차 갖추고 있지 못했다. 그렇다고 해서 제국을 상징하는 문장조차 존재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잉카인들은 자신들을 대표하는 문장으로 황제의 제관인 마스카파이차를 사용했다. '마스카파이차'는 쿠스코의 제2대 국왕 신치 로카가 고안해낸 독특하게 생긴 왕관으로, 속이 빈 황금 원통에 붉은색 털실을 꿰어 이를 이마 앞쪽으로 달고다니는 모양을 하고 있었다. 그 위에 카라카라 새의 깃털을 두 세 개쯤 꽂아 장식했다고 한다. 이 왕관은 절대적인 신성과 권위를 상징하는 기물이었고, 오직 황제 즉 사파 잉카만이 쓰고 다닐 수 있는 상징물이었다. 때문에 즉위할 때 잉카의 대사제에게 직접 건네받았고, 이를 건네받지 못한 황제는 정식으로 황제로 인정받지 못했다.

가끔씩 '잉카 제국의 국기'라면서 알록달록한 무지개색 국기를 보여주는 경우가 있다. 게이들을 상징하는 프라이드 플래그의 모습과도 굉장히 흡사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끄는 경우가 많은데, 결론부터 말하면 그 깃발은 잉카 제국의 깃발이 아니다. 해당 무지개 깃발은 잉카 제국의 깃발이 아니라 현대 쿠스코의 시 깃발이고,[24] 1973년에 처음 등장한 깃발이다. 다만 잉카의 후예들과 원주민들이 각종 축제나 행사에 이 깃발을 사용하면서 마치 잉카의 깃발인 것처럼 굳어진 것이고, 실제로 페루 의회에서도 이 깃발이 잉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고 인정한 바 있다.[25]

3. 국력

파일:rkkCxv2ShiOcmtv88StA_inca_empire.png
파일:cusco4.jpg
잉카 제국의 최대 강역 쿠스코 인근의 요새 유적 삭사이와만[26]
앞에서도 언급했지만 잉카 제국은 콜럼버스 도래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거대한 제국이었다. 현재의 페루, 에콰도르, 콜롬비아, 아르헨티나, 칠레, 볼리비아 등 6개국에 걸친 광활한 영토를 다스리는 대제국이었으며, 남아메리카 대륙의 태평양 연안 대부분을 지배했다. 당시 잉카 제국 동쪽으로는 빽빽한 산림이 우거진 세계 최대의 열대우림인 아마존 우림이 버티고 있고, 남쪽 지방은 추운 아한대 기후로 사람이 많이 거주하기 어려웠으며, 북쪽으로는 거의 콜롬비아까지 진출한 것을 감안해보면 당시 남미 대륙에서 인간이 대규모로 거주하고 있는 지방 대부분을 통치했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잉카 제국의 기술력도 최근들어 재조명받고 있는 주제들 중 하나이다. 유럽인들 이전의 아메리카에는 바퀴수레 같은 문명의 기초적인 발명품들이 등장하지 않았고, 심지어 철기 시대의 핵심인 도 제대로 사용하지 못했기에 구리청동 같은 기본적인 금속들에 머무르는 수준이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은 로마 제국에 비견될만큼 길고 탄탄한 도로들을 수도 쿠스코를 중심으로 전국 곳곳에 깔았으며, 끌과 망치같은 단순한 연장만으로 안데스의 험준한 산맥들에 길을 내고 이를 체계적으로 관리하기도 했다. 게다가 길을 낼 수 없는 절벽 등에는 줄로 다리를 꼬아 길을 잇는 등 여러모로 유라시아권의 문화와는 굉장히 다른 모습으로 기술을 발전시켰다.

잉카 제국이 광대한 영토를 경영할 수 있었던 요인들 중 하나는 걸어다니는 파발꾼 '차스키(Chasqui)'의 존재였다. 가장 건강하고 젊은 사람들 중에서도 가려 뽑았는데, 차스키들을 통하면 하루 240km에 달하는 속도로 메시지를 전달시킬 수 있었다.[27] 차스키들은 그냥 일반적인 파발꾼 따위가 아니었다. 오히려 차스키는 고도로 교육받고 훈련받은 일종의 엘리트였다. 메시지를 전달해야하니 매듭 언어 '키푸'를 이해할 수 있어야 했고, 수많은 부족들 사이를 왔다갔다해야하니 자유자재로 통역이 가능해야만 했다.

키푸의 일부 용어는 오직 차스키들끼리만 알고 있었기 때문에 차스키가 동석하지 않으면 해석조차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차스키들은 '푸투투'라 불리는 소라 껍질로 만든 나팔을 들고 다녔다. 차스키가 돌아다니던 도로에는 '탐보'라 불리는 휴식용 초소들이 곳곳에 세워져 있었는데, 차스키가 다음 탐보에 도착하기 직전에 메시지를 넘겨받을 다음 차스키에게 미리 준비하라는 신호로 푸투투를 불어 신호를 줬던 것이다. 메시지를 다음 차스키에게 전달하고 나면 탐보에서 쉬면서 다른 메시지를 기다렸다.

4.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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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경제

잉카 제국의 경제체제는 상평통보가 통용되기 이전의 조선을 비롯한 18세기 이전의 한반도 국가들과 상당히 비슷한 면모가 있었다. 금과 은의 매장량은 많았지만 금속화폐는 만들어지지 않았고, 그렇다고 아즈텍 제국의 카카오처럼 어떤 작물을 표준적인 화폐로 지정하지 않았다. 그나마 옷감이 화폐로 통용되었지만 옷감만 통용된것은 아니었고, 물물교환이 활발했다. '아이유'라고 불리는 집단 농장 단위로 경작하면서 교육, 음식, 보건, 의료와 같은 공공 서비스들을 함께 나누어 쓰기도 했다.

잉카인들은 화폐의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고, 농사지은 것으로 자급자족했으며 남는 곡물이나 옷감을 시장에 가서 교환하는 식으로 경제활동을 해나갔다. 농사와 조세를 포함한 대부분의 경제 활동은 대가족 단위로 진행이 되었고, 가족들의 모든 구성원들에게 무언가 맡을 일들이 주어졌다. 또한 산악 지방으로 이루어져 왕래가 불편한 상황속에서도 굉장히 조직화된 경제를 구축하는 데 성공했고, 제국의 북쪽 끝 콜롬비아의 특산물이 저 먼 아마조니아의 특산물과 거래되기도 하는 등 상당히 물산의 이동도 자유로운 편이어서 처음 이 곳에 도착한 스페인 군인들이 놀랐을 정도였다.

주된 산업은 당연히 농업이었다. 주로 척박한 곳에서도 잘 자라는 감자옥수수 등이 주요 작물이었다. 그 외에도 토마토칠리 페퍼, 목화, 땅콩 등을 주로 키웠으며, 퀴노아아마란스 같은 부식들도 따로 재배하고는 했다. 스페인은 남미를 정복한 직후 잉카의 작물들을 구대륙으로 가져가 널리 퍼뜨렸는데, 덕분에 유라시아 세계에 남미의 대표적인 작물이었던 감자나 고추 등이 전해지면서 식문화가 굉장히 풍요로워질 수 있었다.

주로 태평양과 인접한 해안 지대에서 농사를 많이 지었고, 안데스 산맥의 비탈에 계단식 밭을 만들어 농사를 짓기도 했다. 또한 비가 많이 내리는 아마존 일대에서도 나름대로 농사를 많이 지었다. 특히 이 안데스 산맥의 계단식 밭이 굉장히 유명한데, 잉카 제국은 이 계단식 농법 덕분에 인구가 크게 증가할 수 있었다. 계단식 농법을 쓰면 산의 토양이 비 등에 유실되지도 않고, 상대적으로 물을 끌어올리기도 쉬웠기에 산지가 대다수인 잉카에서는 이만한 농법이 또 없었다.

잉카인들은 '쿨카스'라고 불리는 창고들을 지어 이 곳에 생산물들을 저장했는데, 주로 옥수수나 감자, 퀴노아 등이 주된 저장물이었으며 안데스의 서늘한 바람을 이용해서 동결건조시켜 가루 형태로 저장하기도 했다. 감자를 발로 짓밟은 다음, 산에서 불어오는 바람과 태양빛을 맞히면서 몇 날 며칠간을 그대로 두면 이 감자가 바싹 말라 쉽게 썩지 않았던 것으로 이를 추뇨라고 불렸고, 이러한 감자를 물에 불리거나 삶아서 식재료로 활용하였다. 츄뇨는 최장 20년까지 저장이 가능했기 때문에 잉카의 창고에는 평소에 약 3년에서 7년치 정도의 식량이 쌓였을정도로 풍족한 식량저장이 가능하였으며, 이를 통해 기근에도 체계적인 대응이 가능했다. 잉카인들은 곡물 외에도 라마알파카 등 고산지대에 자생하는 동물들을 키워 단백질과 지방을 섭취했으며, 가끔씩은 야생 비쿠냐기니피그 등을 잡아먹기도 했다.

잉카인들은 주로 생선이나 채소를 중심으로 한 식단을 가지고 있었으며, 옥수수로는 '치차 맥주'를 만들어 먹었다. 이 치차 맥주를 만들었던 방법이 참 희한했는데, 여자들이 옥수수를 열심히 씹은 다음, 그 옥수수를 커다란 자루에 모두 뱉는다. 이 상태로 며칠 놓아두면 침 속의 효소와 옥수수의 영양분들이 발효되면서 치차 맥주가 만들어진다.[28] 이후 이 자루 속 액체를 거름망에 거르면 완전한 치차 맥주가 되는 것이다.

6. 사회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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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Geschichte-des-Kostüms-(1905)-(14761457936)_main_1481112783317.jpg

잉카는 시민들을 미타(mit'a)라는 노동력 단위의 세금으로 관리했다. 잉카의 시민은 1년에 108일 동안 국가에 자신의 노동력을 바쳐야 했다. 이 시기에는 부역에 나가 도로를 닦고, 요새를 건설하며, 신전을 건설하는 등 노동을 해야했다. 또한, 노동을 하는 날짜를 가족에게 나누어줄 수도 있었는데, 가족이 4명일 경우 1인당 27일을 일하고, 가족이 12명이면 1인당 9일을 일했으며, 가족이 54명이면 1인당 이틀을 일했다(15~60세의 남자에게만 해당한다). 이런 이유로 잉카의 가족은 대부분 대가족이었다.

잉카 정부는 주민을 원시적이지만 효과적인 방법으로 관리했다. 10개의 푸릭(가구)을 충카라고 불렀으며, 충카의 관리자를 충카 카마욕이라고 했다. 그리고 충카 카마욕, 파차카 쿠라카(100명), 와랑가 쿠라카(1,000명), 우누 쿠라카(10,000명)가 각각 10개의 하위 '쿠라카'를 관리했다. 이것이 잘 되고 있는지 감시하는 사람이 '모든 것을 보는 자'라는 뜻의 토코이리콕이었으며, 우누 쿠라카와 토코이리콕의 상관이 전국 88개 지방 수도를 담당하는 토크리콕이었다. 그리고 토크리콕의 위에는 아푸라고 하는 4개의 수유(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를 관리하는, 사파 잉카(황제) 바로 아래에 위치하는 최고 귀족이 존재했다.

잉카의 정복 전쟁은 격렬하고 매우 잔인했으나, 일단 정복한 뒤에는 그 지방의 풍습을 인정하고 그곳의 우두머리를 쿠라카(curaca)라는 관리로 인정하여 고향을 다스리도록 했다. 가장 작은 행정 단위로 아이유라는 집성촌 비슷한 것을 만들고, 한 사람이 10명씩을 책임지고 이런 책임자 몇몇을 또 다른 한 사람이 책임지고 하는 식으로 사회를 구성했다.[29] 아이유는 위에서도 말했듯 집성촌 같은 것으로 잉카가 정해준 땅을 마을에서 함께 관리했다. 즉 마을 땅, 종교행사에 쓸 물건을 얻으려고 쓰는 땅, 잉카의 땅으로 나뉘었다. 전쟁에 징병되는 것도 세금의 하나였다. 잉카는 백성들이 놀고 먹는 것을 싫어하여 엄청 가난한 사람들의 경우, 해마다 벼룩을 잡아서 바치게 했다.[30]

일을 할 수 없을 만큼 늙었거나(50세 이상이 기준) 병든 사람, 과부와 부모를 잃은 고아들은 마을에서 무조건 도와주도록 되어 있었다. 어쩌다 가뭄이라도 나면 마을 창고를 열고, 그것으로도 모자라면 잉카의 창고를 열어 먹을 것을 나눠주었다. 또한 제국 차원에서의 의료제도도 상당한 수준으로 정비되어서 평민도 질병이 들면 당대 기준으로 상당한 의료 혜택을 받을수 있었다. 다만 이 혜택은 전부 통치자인 쿠스코의 잉카인에게 해당되는 내용이었으며, 정작 변방이나 국경 지대의 피지배 부족에겐 전혀 해당되지 않았다.

잉카는 아즈텍 제국과 비슷하게 지방 영주의 자치권을 인정하고, 통치에는 잘 간섭하지 않았다. 각 지방마다 정기적으로 특산품을 일정량 공물로 부과했는데 이 양이 너무 막대하고 과중하여 반란의 불씨를 낳기도 했다. 예를 들면 아마존 지방의 부족에겐 마코앵무새의 꼬리깃을 모아오라는 식으로 그 지방에서 생산되는 특산품을 공물로 부과했다. 물론 수확물과 모직물 등 다른 형태의 공물도 꾸준히 받았다.

잉카 제국은 또한 마을 주민의 강제 노동을 이용하여 산비탈을 개간하거나 계단식 밭을 일구어 새 경작지를 만들었고, 이 새 경작지는 당연하게 쿠라카나 잉카의 군사 지도자들 혹은 잉카 제국에 공을 세운 귀족에게 돌아갔다. 이 사유지들은 아이유 공동제가 아니라 야나코나라는 잉카 제국에 의해 탄생한 새로운 노예 계층에 의해 경작되었다.[31] 또한 복속된 부족은 미타라는 제도하에서 길을 닦고 관개용 운하나 성채 건설에 무급으로 동원되었으며, 광산에서 일해야 했고, 병사나 귀족에게 입힐 일정량의 옷을 생산하여 바쳐야만 했다.

미타는 스페인 식민지 시기에도 포토시 은광 같은 중노동에 동원할 인원을 차출하는 용도로 유지되었다. 이런 통치 방식에서 잉카를 과도하게 찬양하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사회주의나 복지국가의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다. 당시 잉카의 각종 사회보장제도들은 피지배 민족이 아닌 잉카 황족, 귀족, 사제, 전사, 관리 등 오직 잉카인들만을 우대하는 방식이었다. 잉카 제국이 한 일은 국가의 땅이나 사원의 땅에서 농민들의 강제 노동으로 생산된 물건을 보관하는 창고를 세우는 것뿐이었다. 이 창고에 보관된 옷과 곡식은 군대, 황제를 위해 일하는 수공업자, 공공사업을 위해 징모된 노동자, 쿠스코와 그 외 도시에 거주하는 관리들을 입히고 먹이기 위한 것이었다.
파일:incasociety01.jpg
파일:15177_329844.jpg

잉카의 여인들은 보통 16세 정도에 결혼했고, 남성의 경우 20세 정도가 결혼 적령기였다. 신분이 낮은 남자들은 오직 일부일처제만이 가능했으나 지방의 유력자들처럼 많은 아내들을 모두 먹여살릴 수 있는 경우 일부다처제도 상관없었다. 때문에 많은 아내를 거느린다는 것은 곧 해당 남성의 능력과 재력, 사회적 위치를 상징하는 것이기도 했다. 때문에 하류층 남성들은 오직 하나의 아내와만 평생을 살아야한다는 것에 대해서 상대적으로 박탈감이 있었다고 하며, 아내가 마음에 들지 않을시 조용히 죽인 다음 새로운 아내를 찾는 경우도 왕왕 있었다고 한다.[32] 때문에 잉카에서는 아내가 갑작스레 사망하고 홀아비가 된 남편이 새 아내를 들이기 위해서는 자신이 아내를 해하지 않았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다.

잉카 결혼 문화에서 굉장히 독특한 것이 바로 동거 제도였다. 아직 미혼인 두 남녀가 서로 같이 1년 정도 동거하면서 서로가 마음에 드는지 알아볼 수 있었고,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바로 집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마음에 들었다면 곧바로 예식을 올렸고, 보통 비슷비슷한 계급의 사람들끼리 혼인했다.[33]

한편 의복의 경우, 관료들은 독특한 문양의 화려한 튜닉을 입고 다니며 스스로를 구분했다. 이 문양들을 가지고 관리들의 계급과 하는 일들을 구분할 수도 있었는데, 예를 들어 흑백 체크무늬에 분홍색 삼각형으로 장식이 된 튜닉을 입고 다니는 자들은 군대에 종사하는 장교들이었다. 잉카의 복식은 크게 3개로 나뉘었는데, 맨 첫 번째 갈래가 '알라스카'라고 불리는 일상복이었다. 이는 주로 라마의 털로 만들었다. 상대적으로 더 고급품이었던 두 번째와 세 번째 갈래를 묶어서 '큅스'라고 부르는데, 큅스도 각자 종류가 달라서 남성들이 알파카 털로 짰던 옷들은 주로 세금으로 사용되었으며 제국 전역에서 활발하게 생산되었다.

그러나 태양신전에 소속된 신녀들이 짠 큅스는 그 차원이 달랐는데, 값비싸고 부드러운 비쿠냐 가죽으로 직접 만들었으며 주로 황제나 고위급 신관들만이 입을 수 있는 최고급품이었다. 의복 외에도 상류층들은 '라우투'라고 하는 머리장식을 하고 다니기도 했고, 황제 아타우알파의 경우에는 과시를 위해서 흡혈박쥐로 만든 머리 장식을 하고 돌아다녔다고 한다.

당대 잉카에서 가장 중요했던 식물들에는 현재 마약으로 분류되는 코카나무가 있었다. 진통제 기능과 환각 기능이 있는 코카나무의 잎사귀를 잉카인들은 신이 내려준 작물로 신성시했고, 주로 의료용이나 마취용, 혹은 마약 대용 등 만능통치약처럼 사용했다. 사람들은 코카 잎사귀를 씹어 기력을 보충하거나 각성제처럼 주로 썼고, 일부 지방에서는 화폐처럼 쓰기도 했다.

잉카인들의 의료 수준은 우리의 예상외로 꽤나 높았는데, 두개골을 열어 머리 안쪽에 찬 '사악한 기운'을 몰아낸다는 명목으로 천공 수술도 실시했고, 환자의 생존율도 무려 80%에 달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에 재운 박쥐를 통째로 씹어먹기도 했고, 키나 나무에서 추출해낸 퀴닌 성분으로 해열제를 만들어 썼다. 다만 당연히 동시대 유럽이나 아시아 지방에 비해서는 의료 수준이 현저히 떨어졌고, 질병에 걸리면 주로 미신이나 사제들에게 의존하는 등 전반적인 수준은 원시적인 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고 한다.

6.1. 건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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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인들의 가옥 유적[34] 보편적인 잉카식 건물의 단면도 당대 잉카 마을의 재현도
고대 잉카에서 가장 독특한 특징으로 꼽히는 것이 잉카의 건축물들이다. 잉카 건축은 2세기경의 티와나쿠 문화에서부터 전해져 내려오는 건축술을 그대로 물려받았으며, 반쯤 깎아놓은 거친 돌들을 틈 하나 없이 일일이 짜맞추어 벽들을 쌓아올리는 것이 특징이다. 비유가 아니라 정말로 면도날조차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정교하다. 유라시아 지방과는 달리 돌 사이사이에 석회시멘트를 쓰지 않은 것이 특징으로, 실제로 현재 남아있는 유적을 보면 모두 돌 사이에 아무 것도 고정하고 있는 물질이 없다. 또한 목재가 흔하지 않았던 안데스 산지 특성상 보통 석재를 사용해서 건물들을 지었다. 잉카 제국에서 가장 흔한 형태의 건물은 직육면체로 지은 낮고 긴 형태의 석조 건물로, 내부에는 지탱할 벽이나 기둥이 없었고 목재로 대들보와 서까래를 얹은 뒤에 짚이나 풀 등으로 지붕을 올렸다.

건물 내부에 지탱용 벽이나 기둥들이 없었기에 당연히 유라시아의 건물들처럼 넓은 내부공간을 만드는 것은 불가능했고, 아무리 건물이 커봤자 몇 십평을 넘기지 못했다. 이는 황제의 궁전에서부터 일반 평민들의 가옥까지 두루 적용되었고, 심지어 제국 전체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이었던 코리칸차 역시 유럽의 건물들과 비교해보면 딱히 거대한 편은 아니었다. 다만 워낙 그 안을 황금으로 도배해놓았기에 그 화려함으로 유명했던 것뿐이지 그 크기 때문에 유명하지는 않았다.

또한 대부분의 건물들은 단층 건물이었고, 2층 건물들의 경우는 찾아보기가 극히 힘들었다. 굳이 만든다고 해도 경사진 지반 위에 건물을 짓기 위해서 간이로 2층과 1층을 구분하는 정도였다. 이 경우에는 보통 계단을 만들어서 1층과 2층을 이었으며, 아예 건물 내부에는 1층과 2층을 연결하지 않고 외부에서 각각 출입할 수 있도록 만들기도 했다. 또한 대다수의 건물들은 딱딱한 직선 모양이었으며, 만드는 데 오랜 시간이 필요한 부드러운 곡선의 벽을 가진 건물들은 일부를 제외하면 없었다. 담장이나 벽 역시 마찬가지여서 현재 잉카의 유적들을 보면 모두 곧은 직선형의 벽들만이 주를 이루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잉카의 주된 건물 배치법을 '칸차'라고 불렀는데, 중앙의 공터를 중심으로 3개에서 4개 정도의 낮은 직육면체 모양의 건물들이 공터를 둘러싸고 있는 구조였다. 황제의 궁전, 태양신의 신전, 귀족의 저택, 평민들의 집들 모두가 이러한 형태로 지어졌으며, 차이점으로는 건물들의 수와 장식하는 화려함의 정도만이 있었다. 현재 가장 잘 보존되어 있는 잉카의 칸차 유적은 오얀타이탐보 지역에 남아있는 유적으로, 잉카 정착민들이 새로운 도시들을 개척할 때 지었던 칸차 건물군들이 일부 남아있다.

잉카 건물들의 출입문들은 대부분 사다리꼴 모양이었고, 그에 맞게 문을 만들어 달거나 천으로 만든 휘장을 드리우기도 했다. 또한 벽에 난 창문들은 좁은 사각형 모양이었으며, 창문틀을 따로 만들거나 할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건물 외관과 내관 모두를 장식하는 경우가 많지 않았는데, 기껏 해보았자 금속으로 긴 띠를 만들어 이를 건물 외벽에 두르거나 아니면 가죽을 마치 태피스트리처럼 장식하는 정도에 그쳤다. 극히 일부만이 벽에 기하학적인 문양을 그려넣기도 했지만, 이는 정말 극히 소수였고 대부분의 건물들은 벽이 황량했다. 잉카인들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건물들을 꾸미고 살지 않았다.

잉카인들이 거대한 암석들을 정교하게 하나하나 맞추어서 쌓아올린 석벽을 보고 옛날에는 외계인이 지은 것이 아닐까하는 소리까지 나왔지만, 실제로 분석해보면 이 석벽을 만드는 데에는 큰 기술력이나 건축 기술을 요하지 않는다. 잉카인들은 석회암이나 화강암처럼 주변에 널린 암석들을 가지고 벽들을 지었고, 자연적으로 갈라진 금을 따라서 구리청동으로 만든 끌로 대충 다듬은 다음 이 선에 맞춰 돌들을 쌓아올린 것에 불과하다. 이런 식으로 다듬는 공법은 현대에도 비슷한 기술이 이미 있다.

바퀴나 수레가 없었으니 이 암석들을 겹겹이 쌓을 때는 통나무를 굴려서 올렸고, 공공건물이나 성벽을 만들 때 필요한 인력은 사회공동체 단위인 '미타'에서 충원했다. 보통 15세에서 50세 사이의 건장한 남성이라면 누구나 이 노역에 동원되었다고 한다. 또한 잉카인들은 건물의 벽들을 쌓아올릴 때 일부러 약간 안쪽으로 경사지게 지었고, 기초적인 내진설계를 갖추도록 만들었다.

건물에 석회를 쓰지 않았던 덕에 지진이 일어났을 때에 건물이 통째로 흔들려 무너지지 않았고 대신 짜맞추어진 돌들이 서로 흔들리다가 알아서 제 자리로 돌아갔으며, 과도하게 하중이 집중된 부분도 없었다고. 이 덕분에 스페인 통치 시절 쿠스코에 대지진이 일어났을 때 신전 코리칸차 위에 지어진 성당은 무너졌음에도 불구하고 잉카인들이 지은 벽과 기반만은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는 후문이 있다.[35]

7. 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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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의 군대는 수많은 민족과 부족들이 모여 만들어진 혼성 군대였다. 우아이나 카팍 황제 시기에 규모 면에서 절정을 찍으면서 이때는 정규군으로만 무려 200,000명에 달하는 대군을 운용하기도 했다. 병사들은 모집병이나 징집병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징집된 경우에는 국가에서 고향의 가족들에게 식량과 의복 등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대주었다. 때문에 잉카 제국에서는 몸이 좋고 무술이 뛰어나다면 집에 묶여 농사를 짓기보다는 차라리 군대에 말뚝을 박는 것이 썩 나쁜 선택이 아니었고, 오히려 사회 피라미드 내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었던 몇 안되는 사다리들 중 하나였기에 패기 넘치는 청년들이 다수 군대에 자원하고는 했다.

참고로 군의 장교들은 젊은이들이 모여 스스로를 증명하는 행사였던 '와라치쿠이' 축제에서 뽑혔다. 이 축제에서 장교 지원자들은 격투술이나 리더십, 지휘 능력 등 기본적인 장교로서의 소양은 물론, 얼마나 오랫동안 깨어있을 수 있는가 등 다양한 면에서 시험을 받았다.[36] 이들중 훌륭한 성과를 낸 남자들만이 장교로 임관할 수 있었고, 실력이 매우 좋은 사람들은 특별히 황제의 근위대로 뽑혀가기도 했다.

잉카의 군대 모집력은 꽤나 좋은 편이었다. 농사와 제사처럼 기본적인 의식주를 공동체 내에서 해결했던 잉카 사회에서는 '미타'라고 불리는 사회 공동체를 만들어 생활했고, 군병들을 모집할 때도 이 미타를 기준으로 젊은 남성들을 데리고 갔다. 잉카 정부는 시민들에게 약 6~7년 정도의 병역의 의무를 지웠고, 대략 25세에서 50세 사이의 남성들이 주요 징집 대상이었다. 고산 지대의 마을에서는 이 병역을 이행하는 것이 사회적 명예이자 신분 상승의 기회로 여겨졌고, 특히 귀족들의 경우 병역을 이행하지 않는 것에 대해 굉장히 수치스럽게 생각했다.

어쨌든 이렇게 모은 징집군들을 케추아어로 와카 카마유크라고 한다. 와카 카마유크는 투석부대, 투창부대, 그외의 일반 보병으로 나누어져 있었으며 이들 중 투석부대는 케추아어로 와라카라고 불렸다. 와라카들이 사용했던 투석구볼라는 위력이 굉장히 강했는데, 상태가 좋지 않은 철제검을 두동강내버릴 정도라고 전해진다.[37][38]

한편 투창부대는 아틀라틀과 유사한 투창기를 사용했다. 이들 중에는 아이유스라는 볼라로 무장한 병사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대 기병 부대였고, 볼라로 기수나 말을 넘어뜨릴 수 있었다고 한다.

일반 보병 대부분은 '촌타'라는 나무로 만들어진 나무곤봉으로 무장했으며 돌도끼나 나무곤봉에 날카로운 청동을 두른 둔기로 무장한 경우도 있었다. 이렇게 모인 병사들은 지방의 유력자들인 '쿠라카'들이 명목상의 총사령관을 맡았고, 전장에서의 야전 지휘관들은 충분한 능력을 갖춘 장교들이 맡았다.

잉카 군대가 전장에서 사용했던 전술은 대략 이렇다. 먼저 전투가 개시되면, 일단 소리를 질러 적들의 기세를 꺾은 다음 요란한 음악과 춤을 추면서 아군의 전의를 붇돋았다. 병사들은 열과 줄을 정확히 맞추어 서있었고, 대체적으로 침묵할 것을 요구받았다. 이들이 소리를 지를 때는 오직 전투 개시 직후에 적들에게 고함을 지를 때 뿐이었다. 보통 전선의 맨 앞줄에는 투석구를 사용하는 병사들과 투창병, 궁병처럼 상대적으로 원거리 공격이 가능한 병사들이 자리했고, 이들은 전투 초반에 최대한 적에게 피해를 많이 입히는 것이 목표였다. 이후 적과 아군 사이의 거리가 가까워져 근접전이 예상되면 이들은 곧바로 뒤로 빠졌고, 그 뒤에 버티고 있던 도끼와 장창 등으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난전을 벌였다.

난전을 벌이기 시작하면 군대는 크게 3갈래로 나뉘어 중앙의 군대는 적들의 공격을 막아냈고, 나머지 2갈래의 병사들이 뒤로 우회하여 적들의 측면을 찔렀다. 참고로 이같은 전법이 거의 언제나 먹혔던 이유는 잉카 군대의 압도적인 물량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당시 남미 지방에는 잉카와 같은 대제국을 상대할만한 세력은 없었고, 그랬기에 잉카의 대군과 적대 세력이 맞붙으면 거의 항상 잉카의 승리로 끝났다. 황제 등 고위급 사령관들은 뒤에서 전투의 형세를 지켜보았고, 간혹 눈에 띌 정도로 용맹한 병사가 있으면 전투가 끝나고 그에게 훈장을 내려주기도 했다.

잉카 군대는 언제나 엄청난 수의 민간인들을 함께 데리고 다녔다. 대부분이 병사들의 아내나 가족들이었는데, 주로 남편의 옷을 손질해주거나 음식을 만드는 역할을 맡았다. 전투가 끝난 후에는 병사들을 구조하고 상처를 치료하고 시신들을 수습하는 등 전형적인 비전투인력의 모습을 보였다. 참고로 잉카 군대는 절대로 밤에 싸우지 않았다. 이유는 밤에 전투를 벌이면 태양신 인티의 가호를 받지 못해서. 잉카 군대는 종교적인 이유로 사제들도 함께 모시고 다녔고, 이 종군사제들은 주로 신에게 제물을 바쳐 승리를 기원하거나 적들에게 저주를 퍼부어 병사들의 심리상태를 안정시켜주는 역할을 했다. 또한 물자 수송이나 무기 운송의 경우 라마를 주로 활용했다.

잉카 군대에서는 궁수를 거의 쓰지 않았다.[39] 궁수들은 안티스(아마존 강 유역 원주민)에서 지원받은 부대로, 극소수였다. 하지만 궁수와 같은 사격 병력이 소수에 불과하니 스페인 군인들한테 큰 피해를 입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잉카 군대 역시 돌팔매 부대처럼 원거리 공격에 특화된 부대가 있기는 했지만, 이 투석구라는 것이 활이나 총보다는 그 정확성이 지나칠 정도로 떨어졌고 말그대로 짱돌을 던지는 것이다보니 그 살상력도 스페인 병사들이 가지고 있던 총기류와 비할바가 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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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군대가 타 선아메리카 문명의 군대와 확연히 달랐던 점은 지휘체계가 굉장히 일사불란했다는 점이었다. 고대 로마처럼 잉카 역시 10인장, 50인장, 백인장, 오백인장, 천인장, 만인장까지 지휘할 수 있는 병사의 수들에 따라서 장교의 계급이 나뉘었다. 잉카 군대에서 장교들 중 가장 계급이 낮았던 십인장은 10명의 병사들을 지휘할 수 있었고, 춘카 카마유크라고 불렸다. 굳이 현대식 계급으로 따지면 중위 정도에 해당한다. 그다음으로 50인장은 피시카 춘카 카마유크라고 불렸고, 현대의 대위에 해당했다. 백인장인 파치크 카마유크는 현대의 소령 정도였고, 500인장인 피시카 파치크 카마유크중령 정도였다. 천인장인 와란카 카마유크대령이었고, 오천인장인 피시카 와란카 카마유크준장이었으며 만인장인 우누소장부터 시작해서 대장까지에 해당하는 고위 계급이었다. 마지막 대원수에 해당하는 계급인 아푸키스페이는 군대의 총사령관이었으며, 지휘할 수 있는 병사들의 수에 한계가 없었고, 대부분 황제가 맡았다.

잉카의 군인들은 당시 남미의 병사들에 비해서 상대적으로 발달된 장비를 사용했다. '야퀼라'라고 불리는 두꺼운 알파카 털로 만들어진 망토를 둘렀으며, 이 망토는 워낙 두꺼워서 전투 도중 가벼운 화살이나 심지어는 가벼운 총탄까지도 막을 수 있었다. 또한 장교들의 경우에는 두꺼운 솜으로 만들어진 체크무늬의 흉갑을 둘러 가슴 부분을 보호했으며, 목판을 붙여서 보강하기도 했다. 황제나 최고위 장군들은 전장에서 구분을 위해서 흉갑에 황금으로 장식을 했다.

'우마 추쿠'라고 불리는 투구를 쓰고 다니기도 했고, 이 투구에 깃털이나 목재를 덧붙여서 보강했다. 한편 주요 방어구였던 방패는 두꺼운 목재로 만들어 가죽으로 위를 덮어 만들었고, 방패 아래쪽에는 가죽으로 치렁치렁하게 띠를 늘어뜨려서 다리 부분까지 가볍게 방어할 수 있도록 했다. 주된 형태는 직사각형이나 사각형, 원형 모양이었으며 체크무늬나 줄무늬를 넣어서 장식했다.

한편 무기도 다양하게 사용했다. 주 무기는 '치크타나'라고 불리는 도끼로, 잉카 제국 전역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는 가장 흔한 무기였다. 도끼 다음으로 흔하게 사용되던 무기가 볼라라고 부르는 돌을 줄에 묶어 휘두르는 무기였다. 대략 3개에서 4개의 돌들을 줄에 묶어서 휘둘렀으며, 공격 범위가 상당히 넓었기에 잉카 제국에서 주된 무기였다. 짱돌치고는 꽤나 위력도 강하고 잘만 던지면 녹슨 칼도 부술 정도로 강력했기에 그나마 스페인 군대에 맞서 싸울 때에 위력을 발휘한 무기들 중 하나였다고 한다. 활도 있기는 있었다. '와키나'와 '와키'라고 불렀으며, 잉카 군대의 주력 병종은 아니었고 지방 소왕국에서 올라온 병사들이 간간히 사용하는 정도였다.

'와크타나'라고 하는 나무 곤봉도 자주 썼다. 기다란 목재 곤봉으로 돌조각이나 청동 조각을 박아 살상력을 극대화했으며, 전장에서는 워낙 무거웠기에 두 손으로 사용해야만 했던 양손무기였다. 다만 그 무게 때문에 전사들이 애용하지는 않았고, 주로 과시용으로 썼다. 잉카 보병들이 야전에서 가장 많이 쓰던 무기는 '참피'라고 부르는 메이스였다. 별모양의 뾰족뾰족한 금속을 막대기 끝에 달아 사용했다. 한편 활이 없었으니 대신에 투석구를 사용했는데, 이 투석구를 다루는 군인들을 후아라카라고 불렀으며 어릴 때부터 특수 교육을 시켜 만들어낸 특수 병종이었다. 잘만 던지면 시속 120km에까지 달하는 속력으로 돌을 던질 수 있었다고.

8. 종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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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양신 인티 창조신 비라코차 달의 여신 마마퀼라
인티(Inti)라는 태양신을 중심으로 하는 다신교 체제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었다. 인티는 흔히 어린 소년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빛을 내뿜는 얼굴이 그려진 황금 원반이 그의 상징이었다. 수도인 쿠스코에 이 인티를 모시는 대신전이 있었으며 이 신전을 코리칸차라고 불렀다. 코리칸차는 잉카 제국에서 가장 중요한 신전으로, 순금으로 만든 모형 옥수수들로 가득찬 황금 옥수수밭이 있는 등 극도로 호화로운 신전이었다.

창조신과 최고신이 동일하지 않았는데, 창조신은 비라코차라고 해서 따로 있었다. 잉카 신화에서 비라코차는 만물의 창조주로, 티티카카 호에서 인간을 창조하고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친 후 사라졌다고 한다. 잉카인들은 처음에 하얀 백인들을 보고 비라코차의 재림이 아닌가 여겨 이들을 극진히 대했으나, 이 환상은 백인들의 만행과 가혹함 때문에 얼마 지나지 않아 깨졌다고. 참고로 비라코차는 창조주였음에도 불구하고 인티에 비하면 대접이 좋지 않았다. 인티는 새해부터 연말까지 기리는 행사가 넘쳐났던 반면, 비라코차에게 봉헌된 주요 행사는 한 개도 없었으며 사제와 신전들의 수도 많지 않았다.[40]

그 외에도 폭풍과 날씨의 신인 일라파가 있었다. 인티와 동일시되기도 한 이 신은 주로 번개가 상징이었으며, 비를 관장하면서 농업의 신이기도 했다. 사제들은 일라파를 주로 돌팔매를 들고 있는 건장한 남성으로 묘사했는데, 일라파가 돌팔매를 던질 때마다 천둥과 번개가 친다고 믿었다. 또한 의 여신인 마마퀼라가 있었다. 인티와 비슷하게 빛을 내뿜는 얼굴이 그려진 은빛 원반의 모습으로 묘사되었으며, 태양신 인티의 아내였고, 달력을 관장하는 여신이었다.[41] 여신이었기 때문에 마마퀼라를 모시는 사제들은 모두 여성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풍요와 대지의 여신인 파차마마 여신도 있었는데, 주로 풍작을 바라는 농부들이 파차마마를 많이 섬겼다. 호수와 강의 여신인 마마코카 여신도 인기가 있었으며, 각종 별자리들에도 신격이 부여되어서 잉카인들의 섬김을 받았다. 또한 잉카 종교의 특성 중 애니미즘과 비슷한 교리로 후아카라는 존재들이 있었는데, 즉 사람과 동물, 식물과 무생물 등 만물에 신성한 영(靈)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잉카인들은 그 사물의 크기가 곧 후아카들의 힘을 결정한다고 믿었는데, 때문에 산 같은 거대한 것들의 후아카에게 기도를 올리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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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칸차 신전 복원모형[42] 코리칸차 내부도[43] 현재 남아있는 코리칸차의 잔해
잉카 제국의 황제들은 자신을 태양신 인티의 화신이자 대리자로 포장해서 황권을 강화하는 데 유용하게 써먹었다. 때문에 잉카는 신정정치 사회로 분류되기도 한다. 황제, 즉 사파 잉카들은 스스로를 살아있는 신이라며 대내외적으로 알렸고, 제국민들도 이를 자연스레 받아들이면서 당대 황제의 권력과 권위는 그야말로 어마어마했다. 반면, 그만큼 사파 잉카를 얽매는 풍습도 많았다.

가령 사파 잉카는 태양과 동일시되었으므로, 모든 물건은 그의 손이 닿는 순간 버려졌다. 태양이 하루에 한 번 지면 다시 새로운 태양이 뜬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때문에 사파 잉카가 하루 입은 옷은 하루가 지나고 나면 불태워졌으며, 사파 잉카가 신던 신발도 역시 하루가 지나면 불태워졌다. 사파 잉카가 한 번 동침한 여자도 마찬가지로 하루가 지나면 그걸로 끝났다. 물론 죽이거나 한 건 아니고, 태양의 처녀라는 일종의 궁녀 신분으로 만들어 평생 사파 잉카를 위해 이런저런 잡일을 했다.

사파 잉카는 너무나도 신성했기에 두 다리로 스스로 걸어서는 안 되었으며, 어딜 가든 황금가마를 타고 움직여야 했다. 그리고 누구든 사파 잉카에게 직접 말을 거는 것은 금지되어 있었다. 차스키(Chasqiy)라고 불린 파발꾼들은 사파 잉카에게 보고할 때 먼저 대리인에게 보고했고, 그 대리인이 사파 잉카에게 다시 보고하면, 사파 잉카가 이에 대한 조치사항을 대리인에게 지시하고, 그 대리인이 다시 차스키들에게 전달하는 식으로 의사소통이 이루어졌다. 아무리 고관이라 하더라도 사파 잉카의 얼굴을 직접 보는 행위 또한 금지되어 있었다. 사파 잉카를 알현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의 허락이 필요했고, 그마저도 얇은 베일에 가린 사파 잉카의 얼굴을 겨우 알현하는 방식이었다.

사파 잉카의 특전은 이뿐만이 아니었다. 사파 잉카는 너무나도 신성했기에 함부로 한 올의 머리카락도 흘리고 다녀서는 안되었다. 때문에 주변을 돌아다니고 있던 시녀들이 만일 황제가 흘린 머리카락이 있다면 다른 사람이 만지기 전에 빠르게 직접 주워먹었고, 그 외의 체모도 떨어진 것을 먹고는 했다.[44] 또한 황제가 침을 뱉고 싶어한다면 주변의 시녀를 불러 손을 내미라고 한 다음 그 손 위에 침을 뱉었고, 시녀는 이것 역시 그대로 먹었다. 어떻게 보면 괴이할 정도로의 대접이지만, 당시 사파 잉카를 태양신 그 자체라고 여겼던 잉카인들은 이걸 실제로 했다.

또한 황제의 여인이라고 할지라도 함부로 사파 잉카의 몸에 손을 대는 일은 절대적으로 금지되었고, 오직 황제가 원할 때만, 그리고 원하는 여인만이 옥체를 만질 수 있었다. 또한 사파 잉카를 위해서는 매번 엄청나게 호화로운 식사가 준비되었는데, 사파 잉카의 신성을 보존하기 위해서 그가 먹고 남긴 음식들 역시 모조리 다 태워버렸다. 왕이 먹고 남긴 수라상을 궁녀들에게 넘겨준 조선과는 완전 반대인 셈.

사파 잉카들의 대접은 죽은 후에도 끝나지 않았다. 죽은 사파 잉카들은 미라로 만들어 코리칸차 대신전의 황금 옥좌에 안치했고, 각종 행사가 있으면 끌어내어 생전과 똑같이 대우했다. 미라를 불러들이고 생전의 황제에게 하듯이 각종 의식을 시행하고 제물을 바쳤으며 옷을 입히고 치차 맥주를 마시게 하는 등 호사스러운 축제를 벌이곤 했다. 때문에 죽은 황제들에게 공경하느라 들어가는 국가 예산이 장난이 아니었다고 한다. 참고로 아타우알파의 이복형인 우아스카르는 이것을 탐탁지 않게 여겨 미라 숭배를 중단시키려다 사제 계급의 미움을 샀고, 내전에서 동생 아타우알파에게 패배하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잉카인들은 죽은 황제가 사후세계에서도 충분히 자신들에게 소통할 수 있다고 믿었고, 때문에 예언자를 앞에 두고 죽은 황제의 미라들에게 조언을 구하거나 판결을 요청하고 답변을 들었다. 그 답변이 죽은 황제의 것인지, 예언자의 것인지는 스스로의 판단에 맡긴다. 스페인 군인들은 이미 죽어버린 시체에 대해 경배하는 잉카인들의 풍습을 굉장히 야만스럽게 여겼고, 결국 잉카를 정복한 이후에는 코리칸차의 미라들을 끌어내어 리마의 한 병원에 처박아버렸다. 이후 미라들은 약 80여 년간 그 곳에 보관되어 있었으며, 이후의 행방은 불분명하다. 가장 유력한 설은 미라들을 꺼림칙하게 여긴 스페인 총독이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하게 태워 묻어버렸다는 것.

그 밖에 스페인의 콘키스타도르들이 수녀로 잘못 안 여자들이 있었는데 이들을 아클라(Aclla)라고 한다. 이들은 예쁘거나 핏줄이 좋거나 해서 뽑혔다. 죽을 때까지 처녀로 한 곳에 모여 살면서 고급 직물을 짜고, 술을 빚고, 이런 저런 일을 해야 했다. 이 중 일부는 사파 잉카가 후궁으로 삼거나 쿠라카(잉카 제국의 유력자)들에게 역시 첩으로 선물하기도 했다. 하렘과는 좀 다른 것이 아클라들이 사는 수녀원(?) 같은 것이 곳곳에 있었고 사파 잉카라도 마음대로 이 여자들을 건드릴 수는 없었다. 아클라를 건드리는 보통 남자는 사형에 처했고, 그 가족까지 모두 죽였다. 한 때 이를 중동의 하렘과 같은 것으로 인식하고 잉카가 여성을 매우 억압적으로 대했다는 근거로 보는 시각도 있었으나 현재는 사실이 아니라는 게 정설이다. 오히려 최근의 발굴 결과에 따르면 잉카 제국의 전신들 중 하나인 모치카 문명에서는 여왕들도 많았다.

9. 기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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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의 밧줄다리 잉카의 석벽
바퀴를 쓰지 않았기에 수레가 없었고,[45] 문명의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한 도 쓰지 않아서 상대적으로 유라시아에 비해서 뒤떨어진 문명으로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잉카 제국은 이미 정밀한 태양력을 사용하는 고도의 천문학 기술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땅심이 쉽게 빠지지 않는 계단식 밭이나 도시를 흐른 수도 시설, 면도칼 하나도 들어가기 힘들 만큼 정교하게 짜맞춘 바위벽[46] 같은 것을 보면 상당히 발달한 기술력을 지닌 문명이었다. 물이 부족한 안데스의 기후 탓에 농사를 짓기 위해서 강에서 밭까지 물을 끌어오는 수로 시설과 관개 기술도 발전했고, 1년을 12달로 분류하고 태양의 주기에 맞추어서 하루를 더하거나 빼는 등 상대적으로 정교한 산술 계산도 가능했다.

잉카 제국 곳곳으로 곧게 뻗은 잉카의 도로 역시 유명하다. 마치 로마 제국의 도로들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오늘날에도 차도 등으로 이용되는 로마의 도로처럼 잉카의 도로 역시 상당수가 현재까지도 사용되고 있다. 물론 그 모두가 차도로 쓰인다는 것은 아니고 보통 보도로 쓰인다. 로마의 도로는 말, 혹은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넓다랗게 설계되었지만, 교통수단으로서의 가축이 아메리카에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스페인이 잉카를 정복한 이후로 많은 길들이 버려졌는데, 마차와 우차가 다니기에는 부적합했기 때문이었고, 천연두를 비롯한 전염병의 전파로 인해 원주민 인구가 급속히 감소하면서 많은 마을들이 버려졌기 때문에 유용성이 감소했기 때문이었다. 잉카의 도로들은 산을 오르는 데 가장 효율적인 경사를 따라서 놓였고, 해발 4,000m이상의 고산지대에서 차를 끌고 다닐 일은 많지 않기에 상관없기는 하다. 잉카의 다리 제작 기술 또한 대단하였는데 식물섬유를 꼬아서 깊은 낭떠러지나 높은 계곡 사이에 구름다리를 만들수 있었다.

이들 중 상당수가 19세기까지도 그대로 사용하였으며, 오늘날에도 험준한 곳에 자리잡은 시골 동네에서는 꽤 자주 보인다. 해마다 다리를 보수해야만 하는 문제가 있어 현대의 다리와 견주긴 뭣하지만 처음 이 다리를 본 스페인의 정복자들에겐 놀라운 건축 기술로 보였을 것이다. 천길만길 낭떠러지 사이에 어떻게 저런 걸 만들었나 싶었을지도. 무엇보다도 이 다리는 방어에도 효과적이었는데, 외부 세력이 침략해올 경우 다리를 끊어버리게 되면 상대측 입장에서는 이 마을로 진입할 수 있는 방법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다리를 새로 구축하려 한다 하더라도 마을에서 견제가 가능할 테고. 참고로 이 다리들은 썩어서 붕괴할 위험을 막기 위해서 매년 새롭게 만들어서 다시 놓았다.

참고로 잉카의 채취 기술은 스페인이 이 지역을 정복한 뒤로도 한참 동안 계속 쓰였고 특히 풍부한 은광이 있지만 산소가 희박한 고산 지대 포토시에서 각광받았다. 당시의 스페인식 기술로는 산소가 부족한 이 지역에서 고열을 일으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1572년 획기적인 '수은 아말감법'이 개발되면서부터는 잉카의 재래식 은 채취법은 씨가 말라버린다. 참고로 '회취법'이라고도 하는 이 방법을 사실 잉카인들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이 방식이 을 제련하는 방법으로는 전통 방식보다 더 효율적인 것도 알고 있었지만, 막상 잉카인들이 이 방법을 안 쓴 이유는 수은 중독을 우려해서였다. 그래서 이 기술이 대세가 된 뒤로는 잉카인이나 스페인인이나 모두 평등하게 수은 중독으로 죽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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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푸(Quipu)'의 모습 키푸의 숫자 표시법
문자는 가지고 있지 않았다. 중앙아메리카 대륙과 다르게 안데스 일대에서는 발전된 형태의 문자가 쓰이지 않았고, 그래서 기록물들도 남은 것이 없기 때문에 잉카 이전의 역사는 구전된 서사시나 설화, 신화나 고고학에 의존하는 비율이 높다. 본격적으로 잉카 역사에 대한 기록이 남겨지기 시작한 시기는 스페인 정복자들이 들어온 이후였는데, 이때 스페인인들이 자신들의 식민화를 정당화하기 위해서 잉카 고유의 역사를 깎아내렸기에 잉카 고대사 연구에 차질이 있기도 하다. 다만 '키푸'(Quipu)라 하여 매듭을 묶는 방식으로 숫자를 나타내는 방법이 있었던 것은 확실하다.[47]

키푸를 만들 때에는 형형색색의 끈들을 사용했으며, 매듭을 묶은 방법과 매듭 사이의 간격 등으로 숫자를 표시했다. 4개의 길게 묶은 매듭은 40을 의미하고, 짧게 묶은 매듭 3개는 3을 의미하는 식으로.... 키푸카마욕이란 관리들이 키푸를 다루었는데 이 방법은 스페인의 정복 이후에도 조세를 위해서 한동안 쓰였고 키푸카마욕들은 지역 정보를 지닌 사람으로서 어느 정도 지위를 누린 듯하다. 그 중에는 돈을 잘 벌어 무역선을 산 사람도 있었다. 그러나 스페인인들이 키푸를 읽지 못하는 것을 이용해서 키푸카마욕들이 세금을 횡령하자, 스페인도 이를 눈치채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모두 아라비아 숫자로 대체해버린 후 키푸를 공식적으로 폐지했다. 또한 남은 키푸들은 선교사들이 이교도의 산물이라면서 태워버렸는데 때문에 잉카 시대 당시의 키푸 해독법은 현재 어느 정도 실전되어버린 상태이다.

10. 인신 공양

잉카는 멕시코와 북중미 지역의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처럼 대규모까진 아니었지만 어린아이를 제물로 바침으로써 국가에 닥치는 재난을 막을 수 있다고 믿었으며, 매년 정기적으로 피지배민족들에게 받는 공물의 리스트에 지배층의 어린아이를 포함시켰다. 잉카는 항상 외부 부족들의 어린아이를 희생시켰다. 이것은 잉카의 지배력과 권위를 각인시키기 위한 방침이었고, 덕분에 어쩔 수 없이 자신들의 아이를 바쳐야만 했던 지방 영주들에게 악감정을 불러 일으켰다.

잉카 제국은 카파코차(capacocha)라고 해서 태양신 인티와 창조신 비라코차를 위해 희생시키는 아이들을 1년간 먹이고 재운 뒤 신에게 바치는 풍습이 있었다. 산 위에서 몽둥이로 때려 죽이거나 얼어죽게 방치하는 방법이 대표적이었지만 동굴에 가둬 죽이는 방식도 사용했다. 흔히 제물들을 현인신으로 여겨 잘 대우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이것은 아즈텍 제국과 헷갈린 것이다.[48] 그렇다고 해서 잉카가 어린아이들을 학대한 것은 아니었다. 발견된 미라의 내장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반년 이상은 감자를 먹으며 평민들처럼 평범한 생활을 하다가, 죽기 직전에 귀족들이나 먹는 라마 고기 등을 먹였다고 한다. 아마도 잉카가 산제물들을 잘 대접했다는 이야기는 여기서 와전된 것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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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에게 바쳐진 소녀의 미라 웅크린 채 얼어죽은 소녀의 미라
아이들은 1년간 신전에서 집단 생활을 한 다음 각자 출신지로 돌아가 산 정상에서 교살당하거나 둔기로 맞아 사망하거나, 혹은 그냥 얼어 죽게 방치되었다. 또는 동굴에다 집어넣고 문을 폐쇄해 아사시키는 방법도 썼다. 한 장소에서 2~3구의 미라가 동시에 발견되며, 이런 방식으로 대략 연간 수십명 정도의 어린이를 희생시켰다고 한다. 물론 국가적 재난이나 새 황제의 즉위식, 장례식 같은 특별한 시기에는 수백 단위로 어린이들을 바치곤 했다.관련 기사

축제 때 황제들의 미라를 꺼내 어린이들을 참수하고 그 피로 미라의 얼굴에 표식을 그리거나, 우상의 주변을 걷게 한 다음 죽이는 일도 있었다.

순장과 인주(人柱) 풍습이 매우 극심하여 주변 민족들의 반발을 샀다. 신전을 새로 지을 때마다 대량으로 어린이를 죽여 파묻었다. 수도 쿠스코에 위치한 코리칸차 태양신전의 건공식에서 잘 차려입은 어린이들이 교살되어 신전 바닥에 묻혔다. 이 기록은 베르나르데 코보, 베탄소스, 몰리나, 감보아 등의 연대기 작가들의 기록에 공통적으로 등장하기 때문에 교차 검증도 가능하다.

파차쿠티 황제의 장례식에는 약 1,000명의 어린이를 둔기로 때려 죽이고 시체를 파묻었다. 고대 중국의 왕조들과 마찬가지로 사후 세계에서 황제에게 봉사하라는 의도로 그렇게 했다고 한다. 황제의 명으로 잉카 제국의 전역에서 500쌍의 남녀 어린이를 뽑은 다음 제물로 희생시켰다. 이 기록은 스페인 역사가인 베탄소스의 《잉카 제국 연대기》에 등장하는데, 베탄소스는 잉카 황실의 황녀와 결혼하여 잉카에 대해 우호적으로 묘사한 역사가였다. 그런데도 이런 기록이 등장했다는 것은 잉카 제국에서 순장이 드문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잉카 제국이 완전히 몰락한 뒤, 망코 잉카 황제와 그를 따르는 가신들이 스페인의 추격을 피해 도망쳐 세운 망명정권인 빌카밤바(에스피리투 팜파) 유적지에서도 어린이 인신공양의 흔적이 발견되었다. 빌카밤바는 오래 전부터 잉카인들의 성소로 여겨졌고, 이 시기에 망코 잉카는 한가하게 인신공양이나 할 처지가 아니었기에 투팍 유판키 황제 시기에 인신공양된 어린이들의 유해로 추정된다. 물론 강제적인 순장만 있는 것은 아니었고, 아타우알파 황제가 처형되자 그의 처들도 황제를 저승에서 섬기기 위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순사도 있었다고 한다.

다만 아즈텍, 마야와는 달리 이렇게 바쳐진 제물을 먹지는 않았다. 그냥 바치고 끝. 왜냐하면 아즈텍이나 마야와 달리 인간보다 훨씬 효율적인 고기 공급원인 알파카라마가 있었기 때문이다.

11. 멸망의 원인

잉카 제국의 몰락 원인은 여러모로 멕시코 지역에 있었던 아즈텍 제국과 흡사하다. 중앙정부의 잔인한 학살과 폭정으로 반감을 사고 있던 와중에 스페인인들이 들어와 반란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고, 잉카 제국은 거기다 내전 문제까지 겹쳐 그야말로 망하기 딱 좋은 상태라고 할 수 있었다. 잉카 제국은 아즈텍 제국보다 인신공양을 적게 했으므로 인신공양 풍습이 문제가 되지는 않았으나[49], 대신 반란을 일으킨 지역에서 모든 남자들을 학살하거나 인구의 절반 이상을 쓸어버리는 등 잔인한 보복은 오히려 아즈텍보다 더 심했다. 다만 잉카 제국이 무작정 사람들을 죽여대는 살인 국가라고 생각하면 곤란하다. 잉카인들은 기본적으로 영토를 확장할 때에 평화로운 외교술을 선호했고, 언제나 친선 사절을 먼저 보내 복속 여부를 물었으며 평화적으로 해결될 일이라면 그렇게 했다. 하지만 반란을 일으키거나 자신들을 거부하는 자들에게는 얄짤없이 잔혹하게 보복했다.

11.1. 전염병으로 인한 내부 분열

아즈텍을 멸망시킨 전염병은 이미 스페인의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들어오기 한참 전부터 잉카 제국의 국력을 깎아놓았다. 아즈텍 제국의 멸망보다도 잉카 제국의 멸망에서 전염병이 차지한 비중이 더욱 컸다. 왜냐면 중앙아메리카에서 서서히 남하 중이었던 천연두가 에콰도르에 도달했고, 마침 이 지방의 반란군을 진압중이었던 선대 황제인 우아이나 카팍을 감염시켜 그를 사망하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우아이나 카팍은 곧바로 죽은 것이 아니라 후계자를 지명하고 죽었으나, 이미 최고 존엄인 사파 잉카까지 감염될 정도로 천연두가 널리 퍼졌는데 다른 황족들이라고 무사할 리 없었다. 후계자로 지명된 장남 니난 쿠요치마저 사망하자, 잉카 제국은 우아스카르아타우알파라는 두 황자 간의 피로 피를 씻는 내전을 맞이하게 된다. 이 내전이 사실 전염병 때문에 촉발된 것이 아니라 우린과 하난의 계승 의식이었다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어찌되었든, 우아스카르와 아타우알파의 전쟁은 매우 치열하고 잔인했다. 같은 잉카인들끼리 서로의 가죽을 벗겨서 인간 북으로 만들거나 해골로 술잔을 만드는 일까지 벌어졌다.

처음엔 우아스카르가 유리했으나, 선대 황제인 우아이나 카팍을 따라다니며 군인으로서 두각을 드러낸 아타우알파가 이복형을 꺾고 최종 승리를 거머쥐었다. 아타우알파는 끌려온 이복형에게 매우 악랄한 보복을 했는데, 우아스카르를 처형할 때 그가 보는 눈 앞에서 측근들의 두개골을 박살내고 가죽을 벗겼으며, 아내를 한 명씩 죽여서 매달았다. 임신한 아내의 배를 갈라 태아를 끄집어내고 탯줄로 어머니의 발에 목을 매달아 놓는 인면수심의 짓거리까지 했다고 한다.[50]

이렇듯 잉카 제국은 피사로가 들어오기 바로 직전에 서로 내전을 하느라고 정예 병력들을 소모한 상태였다. 특히 잔인하고 오만한 성격이었던 아타우알파가 보복을 하겠답시고 형을 지지한 도시의 시민들을 마구잡이로 도륙하다보니 증오를 받아 민심이 등을 돌린 것도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게다가 승리 때문에 한껏 거만해진 아타우알파는 자만심에 취해 스페인인들을 자신의 제국에 무혈 입성시켜주었다.

한마디로 잉카 제국에 대한 주변 원주민 부족들의 반감이 최고조로 올라 있고, 황제 아타우알파 본인은 승리에 취해있으며, 제국은 천연두로 인한 선대 황제 우아이나 카팍과 그의 아들 니난 쿠요치의 병사가 촉발시킨 내전으로 병력이 소진되고 국력이 약화된 시점에 피사로가 이끄는 스페인 군대가 남아메리카 대륙으로 들어온 것이었다.

11.2. 학살과 주변 부족들의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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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군대의 학살로 피로 물들었던 야와르코차 호수
아즈텍과 마찬가지로 잉카 제국과 주변 민족들의 사이는 그야말로 최악이었다. 흔히 사람들은 프란시스코 피사로디에고 데 알마그로가 순수하게 콩키스타도르 병력의 힘만으로 잉카 제국을 정복한 것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에르난 코르테스와 마찬가지로 원주민 동맹군들의 역할이 없었더라면 결코 수백명의 병력으로 수백만명의 인구를 지닌 대제국을 정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스페인인들을 지원하는 주력군은 언제나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이었다. 이 중에서 가장 잉카인들을 적극적으로 배신한 민족은 에콰도르의 카나리족이었다. 이는 투팍 유판키 황제에게 정복당한 과거가 불과 몇십년 전의 일이었고, 피사로가 들어오기 얼마 전에는 투메밤바라는 도시가 아타우알파에 의해 잔인하게 학살당한 과거가 있기 때문이었다. 이때 황제인 아타우알파는 도시 시민 50,000명 중 38,000명을 처형할 것을 명령했다. 사실상 도시 인구의 80%을 한꺼번에 몰살할 것을 지시한 것이다.

그 밖에도 과거 잉카의 적수였으나 패배해서 정복된 창카족, 우앙카족, 아마존의 차차포야족이 스페인군을 지지했다. 아마존 부족들은 잉카 황제가 과거 자신들의 족장의 껍질을 벗겨 북으로 만들어버린 원한을 갖고 있었다고 한다.[51] 잉카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정복당한 치모르(치무)족도 스페인군의 길잡이 역할을 했고, 잉카 내부의 사정을 소상하게 알려줘서 스페인이 잉카 제국을 무너뜨리는데 큰 기여를 했다.

잉카 제국은 단기간에 폭발적으로 성장한 탓에 주변 남미 원주민 부족들을 아우를 수 있는 능력이 조금 모자랐다. 특히 에콰도르 지방은 투팍 유판키-우아이나 카팍-아타우알파 3대에 걸쳐 끈질기게 잉카에 저항한 탓에 극심한 탄압을 당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피의 호수' 사건인데, 1520년 우아이나 카팍 황제가 카란키 반군을 진압한 다음 이 지방의 모든 남성들을 학살하고 호수에 던져 피가 새빨갛게 물들었다는 전설이다. 이때부터 이 호수의 이름이 피의 호수라는 의미를 가진 야와르코차 호수로 바뀌었다. 이 학살로 대략 30,000명에서 50,000명의 카란키족 남성들이 살해당했고 이 지방에서 잉카에 대한 악감정은 최고조로 치솟았다.[52]

툼베스를 파괴한 것도 아타우알파에게 악재로 작용했다. 잉카 내전 시기 쿠스코로 가는 요충지에 위치한 툼베스 시는 아타우알파군에 의해 완전히 파괴되었다. 나중에 피사로가 생존자 소년을 한 명 데려다가 스페인어를 가르치고 통역관으로 삼았는데, 이 아이의 세레명이 '펠리피요'였다. 펠리피요는 자신의 고향이 파괴된 복수로 아타우알파 황제를 죽이기 위해 일부러 거짓되게 통역했고, 결국 피사로는 아타우알파의 처형을 명령하는 오판을 저지르고 말았다.[53]

잉카를 적대하는 부족들로 구성된 약 30,000명의 원주민 지원군은 에르난도 피사로와 후안 피사로의 지휘를 받는 스페인 군대 200명이 쿠스코에 포위되어 있을 때 봉기한 망코 잉카의 100,000명의 잉카 대군에 맞서 싸웠다. 이 전투가 바로 쿠스코 공방전이다.

참고로 잉카 제국도 흉흉한 민심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반란을 방지하기 위해 정복한 지방의 백성들을 일부 강제 이주시키고, 잉카에 충성스러운 지방 시민들을 채워넣는 방법을 사용했다. 하지만 그런데도 잉카의 지배가 워낙 가혹했기에 반란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결국 잉카는 정복한 지방을 또 정복하기 위해 출정하는 일이 상당히 잦았다고 한다. 이 강제 이주 정책은 아시리아이오시프 스탈린 집권 당시 소련의 정책과 굉장히 유사하다. 항목 참조.

11.3. 잔혹한 풍습

최근 아즈텍의 실체를 까발리는 여러 사실들이 알려지며 인터넷에서 아즈텍에 비교하며 잉카가 마치 잔인한 일을 하지 않았다는 듯이 미화하는 글이나 댓글이 많이 보이는데, 아즈텍 및 멕시카 문화권의 것이 워낙 잘 알려졌고 규모가 큰데다 독보적으로 잔인해서 그렇지 잉카 역시 잔혹한 풍습을 가지고 있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인간 북(runa-tinya;루나 티냐)[54]이다. 잉카 제국에선 사람의 가죽을 그대로 떠서 북으로 만드는 형벌이 있었다. 산 채로 가죽을 벗긴 다음, 그 안에 짚을 채우고 배 부분에 북을 집어넣어 멀리서 보면 뱃가죽이 부풀어오른 사람처럼 보였다고 한다. 바람이 불 때마다 팔다리가 마구 흔들려서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고, 바람에 휘날리는 팔다리가 배부분을 때리도록 조정해놓아서 바람이 불면 스스로 북소리가 났다고 해서 '인간 북'이라고 불렸다. 이 형벌은 잉카 원주민 역사가인 펠리페 구아만 포마 데 아얄라나, 잉카 가르실레소 데라베가처럼 잉카에 대해 우호적으로 서술한 스페인 역사가들의 책에도 등장한다.

잉카는 인간 북을 주로 반란군 지도자나 정복지의 군주들을 처형할 때 만들었다. 에콰도르의 카란키족 지도자들, 창카족 지도자, 아마존 부족장들이 이 형벌을 받았다. 나중에 아타우알파는 사로잡은 우아스카르 일당을 처리할때 이 방법을 사용하기도 했다.

그 밖에도 죽은 이의 이빨을 뽑아 목걸이를 만들기도 했고, 인간의 갈빗대에 구멍을 뚫어 뼈 피리[55]를 만들어 의식에 이용하기도 했다. 스키타이불가리아 제1제국크룸과 동일하게 해골술잔을 만드는 풍습도 있었다. 파차쿠티 황제가 창카족 군주들의 해골로 술을 마셨고, 아타우알파의 경우, 우아스카르의 최측근인 아토크 장군의 두개골을 도금하여 술을 마시는 모습이 목격되었다고 한다.

특히 잉카의 이런 잔혹행위는 주변 부족들이 모두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 아즈텍과 달랐다.[56] 예를 들어 인간 북의 경우, 오직 잉카 제국에서만 개발된 특수한 처형법이었는데 인근 부족들 중에서 이런 풍습을 가진 민족이 존재하지 않았다.[57] 해골 술잔, 뼈 피리, 이빨 목걸이 등도 잉카 제국 이외의 문명에선 흔한 것들이 아니었다.

이런 풍습들은 아시리아와 마찬가지로 정복당한 민족들에게 공포감을 심어주기 위한 심리전의 일환으로 실행되었다는 설이 유력하다.[58]

12. 평가

위와 같은 잔인한 만행들에도 불구하고, 후세의 잉카 제국에 대한 평가는 그다지 나쁘지 않다. 소규모의 부족 중심 사회를 이루고 있었던 남미 지방을 강력한 군사력으로 정벌하고 중앙집권적인 제국으로 건설한 것, 그리고 전국 곳곳에 널찍한 도로를 뚫고 수로들을 개수한 것, 뛰어난 건축 기술로 험준한 산악 지대에 아름다운 도시들을 세우고 문명을 꽃피운 것 등 대체적으로 좋은 것들이 현재 잉카 제국의 주된 이미지이다. 결정적인 이유는 잉카 제국을 멸망시키고 새롭게 등장한 스페인 제국이 이후 약 300여 년 동안 원주민들에게 한 짓들이 너무나도 악랄했기 때문에 잉카 제국의 악행들이 묻혔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남미 원주민들을 정신적으로 통합하는 매개체가 되어주었기 때문이다.

페루의 독립운동가들은 '잉카의 후손'이라는 기치를 내걸며 스페인의 압제자들에 맞서 싸웠고, 몇 백여년에 걸친 탄압에도 불구하고 잉카의 신년의식이나 전통들을 보존하면서 잉카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덕분에 잉카 제국에 대한 이미지가 상당히 희석될 수 있었고, 심지어 일부는 미화되기까지 하면서 현재 잉카 제국에 대한 평가는 원주민들이 세운 남미 최대의 대제국 정도로 어느 정도 좋은 편이다.[59]

'잉카 제국의 적통'을 주장하는 페루에서는 당연히 잉카 제국을 자랑스러운 자신들의 역사로 생각하고 있다. 고대부터 전해내려오는 몇 천년에 걸친 문명의 발원지일 뿐만 아니라, 콜럼버스 이전의 아메리카 대륙에서 가장 강대했던 제국의 고향이라는 것에 굉장한 자부심을 품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제국이 멸망하고 약 200여 년이 지난 1700년대에 스페인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할 적에도 최후의 사파 잉카투팍 아마루의 혈족을 주장한 투팍 아마루 2세가 등장하여 잉카의 후예를 자칭하면서 사람들을 이끌었던 적도 있고, 이 '잉카의 후예'라는 타이틀로 몇 만명에 가까운 페루인들을 끌어모으는 데 성공하기도 했다. 그만큼 당시 페루인들 사이에서 스페인 식민통치에 대한 반감이 심했을 뿐만 아니라, 잉카 시절의 영광에 대해서 어느 정도 향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이야기였다.

페루 학계 측에서는 잉카의 수도인 쿠스코가 페루 영토 안에 있고, 자국민들 중 케추아족의 구성 비율이 50%가 넘는 것을 근거로 페루가 남미에서 가장 정통성있는 잉카의 후계국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칠레에콰도르, 아르헨티나 등 여타 남미 국가들은 잉카 제국이 단순히 페루 뿐만이 아니라 여러 국가와 민족들에 걸친 다민족 제국이었으므로 오직 페루만의 역사로 보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만큼 잉카 제국에 대한 세계인들의 시선이 상대적으로 괜찮은 것에는 제국이 멸망한 이유 때문이기도 하다. 무굴 제국, 청나라, 조선 등 아시아 지역의 전통적인 국가들은 온갖 부정부패에 찌들은 채로 몇 십여년 간 외세에 잠식당하다가 결국 타국의 식민지가 되거나 이권의 각축장이 되어버리는 등 꽤나 추한 모습으로 역사에서 퇴장당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은 아예 '완전히 새로운 문명과의 조우'라는 전대미문의 상황 속에서 멸망했고, 듣도보도 못한 신무기를 사용하는 적들에게 기술의 완벽한 열세, 그리고 구대륙에서 넘어온 전염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멸망의 길을 걸었다. 즉 멸망할 만한 충분한 변명거리가 있는 것이다.[60] 게다가 망해가는 국가들이 국가 멸망 테크를 시전하고 있을 때 보통 황족들이나 귀족층들이 새로운 침략자들에 빌붙어 기생하는 것과는 달리, 잉카 제국의 황족들은 산속의 빌카밤바로 도망가면서까지 끝까지 스페인의 압제에 저항했으며 최후의 황제인 투팍 아마루 역시 당당한 태도로 마지막까지 스페인에 대항하다가 의연한 죽음을 맞았다. 이같은 태도는 훗날 페루의 독립운동가들에게 모범이 되어주었고, 몇 백년에 걸친 스페인의 식민통치 속에서도 잉카인들이 스스로에 대한 자긍심을 유지할 수 있는 바탕이었다.

현대 세계인들이 잉카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는 보통, 안데스의 험준한 산맥에 도시를 지은 위대한 건축 문명, 혹은 황금이 넘쳐났던 미지의 풍요로운 국가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다. 상당수의 사람들이 같은 선콜럼버스 시대의 문명인 마야 문명이나 아즈텍 제국과 혼동을 하는 경우가 많아서 정교한 달력을 제작했다거나 정글 속의 문명이라고 착각하기도 하는데, 잉카의 달력은 예상 외로 마야의 그것만큼 정확하지는 않았으며 잉카 제국 영토의 대부분은 정글이 아니라 안데스의 산악 지방이었다. 또한 황금에 관해서라면 분명 잉카 제국에는 한때 보물이 많았던 것은 맞다.[61] 황제가 대놓고 방 2개를 가득 채울 만한 황금을 바치겠다고 공언할 정도였으니.

보통 '아즈텍', '마야'와 함께 중남미 3대 문화권 정도로 에둘러서 표현되지만, 사실 잉카는 저 둘과는 아예 문명권 자체가 달랐던 지역이었다. 메소아메리카와 안데스 문명은 꽤 차이가 크다. 아즈텍/마야를 잉카와 동일시하는 것은 한자문화권과 이슬람문화권을 동일시하는 수준에 가깝다. 결정적으로 서로 교류가 없었기 때문에 아즈텍/마야와 잉카는 유럽 침입자들이 오기 전까지 서로의 존재조차 몰랐다.

그러나 스페인의 식민통치기에 잉카 예술품들의 문화적 가치에는 관심이 없던[62] 스페인 관리들이 눈을 뒤집고 제국 전역에 있는 금붙이란 금붙이는 모조리 쓸어가버렸고, 이를 모두 녹여버린 다음 금괴로 주조해 스페인 본국으로 보내버렸다.[63][64] 이 덕분에 스페인에는 몇 만톤에 달하는 금과 은이 그대로 유입되었고, 스페인 제국은 아메리카 식민지의 고혈을 짜낸 덕분에 한시적으로는 유럽 최강대국을 유지할 수 있었다.[65] 어찌되었든 이 시절에 잉카 제국의 황금 유물들이 대부분 소실된 덕에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금 유물들은 스페인에게 넘겨지지 않은 극소수의 유물이거나 후대에 발견된 것들이다.

다만 최근들어서는 아즈텍 제국과 함께 잉카 제국에 대한 재평가가 이루어지면서 이전처럼 무작정 백인 침략자에게 당한 무고한 제국이라는 환상은 점차 사라지고 있다. 앞서 말했겠지만 잉카 제국 역시 굉장히 잔혹한 방식으로 영토를 확장하면서 인근 부족들에게 강한 반감을 샀고, 인간 북을 만들어 전시하는 등 매우 잔인한 국가였다. 잉카인들이 워낙 잔혹했고 복속된 부족들이 워낙 잉카에 대한 반감이 강했기에 몇 백명도 안되는 스페인인들이 이를 이용해서 거대한 제국을 정복할 수 있었던 것이다.[66]

그렇다고 잉카인들이 무작정 쳐들어가서 모두 죽이고 노예로 삼았다는 것은 아니다. 잉카인들은 일단 군사적인 방법보다는 외교술을 선호했고, 평화적으로 끝날 수 있는 일이라면 그렇게 했다. 다만 자신들에게 반란을 일으키거나 반대하는 세력에게는 한없이 잔인해졌을 뿐이다. 그외에도 잉카인들은 어린이들을 산지의 추운 동굴로 끌고가 그대로 신에게 제물로 바치는 등 현대의 기준에서 굉장히 야만적인 풍습들도 그대로 유지했다. 또한 아프로-유라시아에서는 몇 백년 전에 사라진 인신공양 풍습도 있어서 황제의 장례식 등 중요한 행사들에 수많은 사람들을 순장해 바치는 등 좋은 풍습만 있다고 할 수는 없었다.

13. 보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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잉카 제국이 현대의 대중문화에 등장한다면 그 이유는 백이면 백 잉카의 막대한 양의 황금보물 때문이다.[67]

실제로 잉카인들은 스페인 병사들에게 황금을 빼앗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 몰래 산 속의 동굴 등에 보물들을 숨겨 놓았고, 스페인 사람들은 또 이 보물들을 찾아 일확천금을 누리겠다고 전 남미 대륙을 헤집고 다녔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랑가나티스의 보물이다. 랑가나티스의 보물에 얽힌 이야기는 이렇다. 프란시스코 피사로가 황제 아타우알파를 감금하고, 대화를 나눈 결과 아타우알파는 스페인이 황금을 노리고 이곳까지 왔다는 것을 알게되자 방들을 가득 채울만큼의 엄청난 양의 황금과 은을 줄테니 자신을 풀어달라고 요구했다.

피사로는 이를 받아들였고, 아타우알파는 곧바로 명을 내려 전역의 보물들을 피사로에게 가지고 오도록 시켰다. 그러나 아무리 보물들을 많이 갖다주어도 스페인 사람들은 만족을 모르고 더 많은 것을 요구했다. 일부 매체에서는 아타우알파는 황금을 그저 장신구에 곁들이는 하나의 광물로 취급하였기에 무수한 황금에 눈 돌아간 스페인인을 보고 미개하다고 했다는 일화도 있다.

그와중에 스페인 병사들 사이에서 잉카의 대군이 자신들을 죽이고 황제를 구출할 것이라는 헛소문이 돌기 시작했고, 사실상 적진 한가운데에 갇혀있던 스페인 병사들은 히스테리 증세에 빠지고 만다. 병사들은 약속을 어겼다고 여긴 황제를 죽일 것을 요구했고, 피사로는 원치 않았지만 거센 여론에 밀려 결국 아타우알파를 처형하고야 만다. 여기서 문제는 황제가 죽은 그 시점에도 수많은 보물들이 여전히 스페인 군대의 주둔지로 운송되고 있었던 것이다.

황제가 살해당했음을 전해들은 수송 책임자 루미나후이 장군은 당연히 보물들을 그대로 스페인 군대에게 갖다 바치는 것을 거절했고, 곧바로 당시 750톤에 달하는 보물들을 에콰도르의 랑가나티스 산맥의 어딘가에 숨겨버렸다고 한다.[68] 이후 루미나후이 장군은 스페인 군대에게 포로로 잡혀 모진 고문을 받으면서도 보물들의 위치를 불지 않았고, 덕분에 스페인 군인들은 이 보물들을 찾는 것에 실패했다.

이후 스페인 탐험가와 도굴꾼들 사이에서 루미나후이 장군이 숨겨놓은 보물에 대한 소문이 일파만파 퍼져나갔고, 그때부터 이를 '랑가나티스의 보물'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이 외에도 잉카인들의 잃어버린 보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꽤나 많은 편이다. 파이티티라고 부르는 잉카인들의 도피처이자 황금 도시에 관한 전설도 있고, 스페인의 약탈을 피해서 일부러 땅에 보물들을 파묻었다는 소문들이 심지어 현대까지도 페루의 각 지방에 전해져 내려오고는 한다.

남미에서 보통 숨겨진 보물이라고 하면 상당수가 잉카 제국과 연관이 있는 것들이다. 아즈텍 제국몬테수마 2세의 황금을 제외하면 딱히 내려오는 전설이 없고, 기본적으로 평화나 문화발전보다 전쟁을 좋아하는 호전적인 성향이었던 데다가 중앙집권적인 제국이 아니라 도시국가들의 연합체라서 잉카 제국보다 황금의 절대적인 양이 적었다. 또한 유럽인들이 도착하고 2년여 만에 폭삭 망했으니 보물을 숨길 시간 자체가 없어서 말 그대로 싸그리 털려나갔다. 게다가 마야 문명은 이미 유럽인들이 당도했을 때 최전성기였던 고전기가 다 지나가고 몰락해서 폐허가 된 돌더미와 도시 유적들 밖에 남지 않았던 상태였고, 결정적으로 제대로 된 야금술이 발달하지 않아 정교한 황금 유물을 만드는 것이 불가능했다.

그러나 잉카 제국은 확실히 달랐다. 일단 100여 년에 걸친 확장 사업을 펼치면서 엄청난 양의 재물들을 꾸준하게 축적했고, 행정구조가 하나로 통일되어 있었기에 사회도 아즈텍 등보다 훨씬 부유하고 안정적이어서 모아둔 보물들의 양이 굉장히 많은 편에 속했다. 또한 무려 40여 년 동안이나 유럽인들에게 끊임없이 저항하면서 필사적으로 보물과 영토, 그리고 주권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기에 숨겨둘 수 있었던 보물들도 생각 외로 꽤 되었다. 스페인 탐험가들도 이를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눈에 불을 켜고 잉카인들의 황금을 노리고 다녔고, 마추픽추를 발견한 것도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질 수 있었다.[69]

스페인 정복자들이 보관한 정확한 회계 기록에 따르면 아타우알파피사로에게 넘겨준 황금 보물의 총 가치는 1,326,539페소[70]에 달했으며, 특히 아타우알파의 보물은 22k 금 221,089온스에 달했는데, 이는 톤으로 환산하면 약 6.27톤이었다고 한다.[71][72] 물론 화폐가치로 따지면 대략 분만 아니라 잉카 제국에 있던 모든 금의 양은 당시 유럽 전역에 있던 금의 14배에 달했으며, 피사로가 약탈한 금액은 오늘날 기준으로 3억 8,700만 달러(약 4644억 원) 이상의 가치가 있을 것이라고 한다. 사실 아타우알파가 가진 금의 가치를 한화로 환산한 것만 해도 약 6000억 수준인 만큼 크게 보면 피사로가 잉카 제국에서 조 단위 가치를 약탈했을 가능성도 높긴 하다. # 1848년 미국의 골드러시 이전 인류가 채굴한 금의 총합이 1만 톤이라는 것을 감안하면 아타우알파가 얼마나 어마어마한 갑부였는지 짐작할 수 있다.

14. 역대 군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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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대 제2대 제3대 제4대
망코 카팍 신치 로카 료케 유판키 마이타 카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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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차쿠티 이전에 잉카를 다스렸던 통치자들의 재위기간 및 생몰년도는 정확한 기록이 부족한 상태이다. 역대 통치자 목록에 니난 쿠요치가 우아이나 카팍, 우아스카르 사이에 들어가는 경우도 있지만 우아이나 카팍이 죽고 니난 쿠요치는 즉위하기 전에 전염병으로 죽었기 때문에 사실상 통치하지도 못했다.
순서 이름 재위기간 생몰년도 비고
01 망코 카팍
Manco Cápac
1200년?~1230년? ? ~ 1230년? 잉카 건국시조.
02 신치 로카
Sinchi Roca
1230년?~1260년? ? ~ 1260년?
03 료케 유판키
Lloque Yupanqui
1260년? ~ 1290년? ? ~ 1290년?
04 마이타 카팍
Mayta Cápac
1290년?~1320년? ? ~ 1320년?
05 카팍 유판키
Cápac Yupanqui
1320년? ~ 1350년? ? ~ 1350년?
06 잉카 로카
Inca Roca
1350년? ~ 1380년? ? ~ 1380년? 하난 왕조의 시조.
07 야와르 우아칵
Yáhuar Huácac
1380년?~1410년? ? ~ 1410년?
08 비라코차
Viracocha
1410년? ~ 1438년 ? ~ 1438년
09 파차쿠티
Pachacuti
1438년 ~ 1471년 ? ~ 1471년 잉카 제국 성립.
10 투팍 잉카 유판키
Túpac Inca Yupanqui
1471년 ~ 1493년 ? ~ 1493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영토 확장.
11 우아이나 카팍
Huayna Capac
1493년 ~ 1527년 1468년? ~ 1527년 잉카 제국의 최전성기. 천연두로 사망.
12 우아스카르
Huáscar
1527년 ~ 1532년 1503년 ~ 1532년 아타우알파에게 폐위됨.
13 아타우알파
Atahualpa
1532년 ~ 1533년 1500년? ~ 1533년 잉카 제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 카하마르카에서 스페인에게 포로로 붙잡히고 이후 살해됨.
14 투팍 우알파
Túpac Huallpa
1533년 ? ~ 1533년 스페인의 괴뢰황제.
15 망코 잉카 유판키
Manco Inca Yupanqui
1533년 ~ 1544년 1516년~1544년 스페인의 괴뢰황제였으나 스페인에게 대항하여 봉기한 뒤 빌카밤바에서 망명정부 수립.
대립황제 파우유 잉카
Paullu Inca
1536년 ~ 1549년 1518년 ~ 1549년 스페인의 괴뢰황제로 망코 잉카 유판키의 빌카밤바 망명정부와 대립함.
16 사이리 투팍
Sayri Túpac
1544년 ~ 1560년 1535년? ~ 1560년 망코 잉카 유판키의 적남으로 스페인의 회유에 넘어가 빌카밤바를 떠나 스페인에게 영지를 받음
17 티투 쿠시
Titu Cusi
1563년 ~ 1571년 1529년 ~ 1571년 형이 회유에 넘어가 투항하고 황제위를 내놓고 떠나자 즉위함. 이후 의문사.
18 투팍 아마루
Túpac Amaru
1571년 ~ 1572년 1545년 ~ 1572년 티투 쿠시의 아들로 빌카밤바가 함락된 후 쿠스코에서 처형당함. 잉카 제국의 완전한 멸망.

15. 대중매체

  • 테메레르 시리즈》에서는 원래 역사보다 훨씬 번영해서 남미 최남단 마젤란 해협까지 영역을 넓혔다. 이 때문에 국명도 타완틴수유(네 개의 주)가 아닌 푸산틴수유(8개의 주)로 바뀌었으며 나름 번영하고 있지만[73] 전염병으로 인해 인구가 크게 줄어버린 피해는 100년 넘게 지났는데도 아직 복구하지 못했다.[74] 영국인들이 여기서 용알을 사려다 실패했다.
  • 문명 시리즈에서는 문명 3부터 남아메리카 지역을 대표하는 문명 가운데 하나로 등장하고 있으며, 문명 2의 파일 중에는 정규 문명으로 내려다 취소된 흔적이 남아 있다. 역대 지도자는 파차쿠티(3, 5~6), 우아이나 카팍(4), 아타우알파(2) 등이며, 문명 4를 제외하면 역대 작품 내내 다른 문명들은 도시를 세우기 곤란해하는 산과 언덕이 많은 지형에서 오히려 번창할 수 있는 특징을 가지고 있다.
  • 라이즈 오브 네이션즈에서는 다른 문명들이 다량으로 확보하기 힘든 자원인 재화를 광산에서 그냥 얻을 수 있는 강력한 보너스를 가지고 등장한다. 불가사의인 콜로서스를 건설하고 희귀 자원인 호박까지 확보한다면 돈으로 찍어누른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상대에게 가르쳐 줄 수 있다는 평가를 받을 정도. 다만 고유 유닛들이 하나같이 평범하다는 것이 옥의 티로 여겨진다.

16. 기타

  • 사파 잉카들의 이름의 뜻을 해석해보면 꽤나 독특했다. 제3대 사파 잉카인 로퀘 유판키는 이름 뜻이 '위대한 왼손잡이'였고 파차쿠티의 이름의 뜻은 '천지개벽'에 가까웠는데 그렇게 이름이 붙은 사연이 있긴 하지만 현대인이 보기엔 참 희한해 보인다.[75]

파일:inca-kolaa.jpg
  • 페루의 국민 음료수잉카콜라가 이 문명에서 이미지를 따온 음료수다. 코카콜라가 페루에서 이기질 못해 결국 생산 회사 지분을 사서 소유해버렸을 정도로 인기가 좋다. 짙은 갈색인 일반적인 콜라와 달리 노란색인 것이 가장 큰 특징. 페루 여행시 한 번쯤 먹어보는 필수품으로 여겨진다.
  • 총, 균, 쇠》에 따르면 아즈텍 제국과는 4,200km의 밀림과 고산지대를 사이에 두고 있고, 조선해운업이 발달한 것도 아니라 서로 있는 줄도 몰랐다고 한다.
  • 잉카인들은 등산 기술이 가장 앞선 민족이었다. 아르헨티나의 해발 6,739m 유야이야코(Llullaillaco) 산의 정상에서 무려 아메리카 대륙 발견 이전의 정상 등정 흔적(3구의 어린이 시체, 부서진 제단)이 발견된 것. 유럽인들이 비슷한 고도에 등반이 가능해진 것이 19세기 중엽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몇 세기를 앞서나간 셈이다. 또한 이것은 1897년 아콩카과산이 유럽인에 의해 등정되기 전까지 인류가 가장 높은 고도에 등반한 기록이었다.
  • 미디어에서 '잊혀진 남미의 제국', 혹은 '황금이 넘쳐나는 고대 도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면 열이면 아홉 정도가 모티브를 잉카 제국으로 하고 있다. 다만 초가집과 비슷하게 생긴 잉카의 건축물들을 미디어 속에 그대로 재현하면 느낌이 안살기 때문에 보통 거대한 피라미드들을 지은 아즈텍 제국이나 마야 문명의 특징들도 함께 차용해서 사용한다.
  • 프란시스코 피사로 일당에게 멸망했다고 알려져 있으나 스페인군의 입성 2년만에 멸망한 아즈텍과는 다르게 쿠스코 점령 후에도 망코 잉카, 투팍 아마루 등의 살아남은 잉카인들이 상당히 오랫동안 항전해서 잉카 전역이 스페인에게 완전히 정복될때까지는 거의 40년에 가까운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스페인 식민지배가 확고해진 18세기에도 투팍 아마루의 후손을 자처한 원주민 독립운동가 투팍 아마루 2세(1742~1781)에 의해 원주민 봉기가 일어나기도 했으며, 페루와 우루과이에서 투팍 아마루 2세의 이름을 딴 무장단체가 등장하는 등[76] 라틴아메리카에서 투팍 아마루는 해방과 혁명의 상징이다. 이 잉카인들이 숨긴 황금의 양이 어마어마할 것이라 하고, 이를 찾아 헤매다 하이럼 빙험이 마추픽추를 발견하기도 했다. 근데 정말 숨긴 황금이 있었는지 지금에 와선 알 수 없다.[77] 심지어 남아메리카가 독립하는 1816년에도 사파 잉카를 옹립하고, 쿠스코를 수도로 하는 제3잉카국을 세우자는 잉카 계획이 제안되기도 했다.
  • 남미 지방을 단기간에 석권했으나 잔혹한 풍습과 피지배민족에 대한 학대로 인해 몰락했다는 점에서 고대 오리엔트의 아시리아와 유사하다. 실제로 주변 민족들에 대한 학살을 자주 저지르고, 저항한 부족의 씨를 말리며 도시를 완전히 파괴하는 일이 잦았고, 남들과 비교해도 상당히 특출나게 잔혹한 풍습을 갖고 있었다는 점에서 매우 비슷하다. 잉카와 아시리아 둘 다 정복지의 반란에 시달리느라 광활한 영토를 안정적으로 통치하지 못했다는 것도 흡사한 점이다.[78]
  • 현재 잉카 제국의 발상지이자 중심지였었던 페루는 잉카 제국은 페루의 역사라며 현재까지도 잉카 문명의 적통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아예 해외에 페루 관광 홍보를 하면서 잉카 제국과 마추픽추, 쿠스코와 같은 잉카 제국 시대의 유적지와 유물들을 앞세우며 잉카의 후손이라고 대외적으로 홍보할 정도. 하지만 스페인 침략 이전 페루와 같이 잉카 제국의 영토에 속해 있었던 에콰도르, 칠레, 아르헨티나, 볼리비아, 콜롬비아가 페루의 이러한 행동에 지금 역사 도둑질하냐며,[79] 잉카는 페루뿐만 아니라 스페인 식민지화 이전 남미 공통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따라서 페루의 잉카 제국 적통 주장에 반대하고 있다.[80] 해당 국가들 중 특히 잉카 제국의 역사를 중요하게 여기는 나라는 볼리비아인데, 볼리비아는 케추아계 및 아이마라계 주민들이 주류인 점에서 페루와 매우 가깝다.
  • 유로파 유니버설리스 4에도 등장. 다만 시작 년도가 1444년인지라 쿠스코라는 이름으로 쿠스코 근처만을 지배 중이다. 다만 근처에 있는 나라들 중에 가장 입지도 좋고 수도인 쿠스코는 남미에서 가장 개발도가 높은 땅이며, 여러 고유 이벤트나 중남미 국가 종특인 종교개혁을 통해 단기간에 엄청나게 강해져 원 역사의 판도를 구현할 수 있다. AI가 잡아도 스페인이 도달할 때 쯤이면 십중팔구 원 역사와 비슷한 판도를 구현해 있다.


[1] 타완틴수유라고 읽는다. 잉카 제국 공식 언어인 케추아어의 로마자 표기. '네 방위 땅'이라는 뜻이다.[2] Chakana. '잉카 십자가'라고도 불린다. 십자가는 여러 개의 세계들을 상징하고, 중간의 구멍은 이 세계들을 이어주는 곳이자 영혼들이 드나드는 세상의 중심, 즉 쿠스코를 의미한다.[3] 황제인 사파 잉카의 문장. 쿠스코 왕국 제2대 군주인 신치 로카가 고안한 왕관으로, 붉은 술을 황금 원통에 꿰어 만든 모양을 하고 있었다.[4] 아타우알파의 처형과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잉카 제국 정복 기준.[5] 스페인에 끝까지 저항하던 망명 정권 신잉카국의 멸망 기준.[6] 황제는 태양신 인티의 대리인이자 화신 그자체였다.[7] 케추아어로는 '유일한 군주', 혹은 '위대한 군주' 정도로 번역 가능하다. 잉카 황제의 공식 명칭이었다.[8] 사실상 이때부터를 잉카 '제국'으로 친다. 이전까지는 쿠스코 계곡 내부의 소왕국 수준이었다.[9] 이 전투에서 아타우알파 황제가 피사로에게 사로잡히고 잉카는 반쯤 멸망한다.[10] 단, 황제와 황실은 형식상 유지[11] 케추아어는 독자적인 문자가 없어서 로마자를 사용해서 표기한다.[12] '잉카'의 중국식 음차. 한국식으로 읽으면 '인가'가 된다.[13] 타완틴수유는 잉카인들이 자국을 부르던 명칭으로, '네 방위의 땅'이라는 뜻이다. 의역하면 '사방을 다스리는 제국' 정도가 된다. 잉카인들은 잉카 제국을 크게 쿤티수유, 친차수유, 안티수유, 코야수유 등 4개의 부분으로 나누었는데, 각 수유의 이름은 서부, 북부, 동부, 남부라는 의미였다.[14] 잉카 제국의 전신인 쿠스코 왕국은 12세기 초에 세워졌으나, 우리가 '잉카 제국'이라고 부르는 대제국으로서의 잉카의 역사는 쿠스코 왕국의 제9대 군주이자 첫 제국의 황제인 파차쿠티 때부터 시작한다. 또한 1533년에 스페인에 정복된 이후에도 일부 잉카 황족들이 산악 지대로 도피하여 신잉카국을 세우고 저항운동을 계속했으나, 1572년에 완벽히 진압당한다. 이 때문에 학계 일각에서는 잉카 제국의 멸망 년도를 1572년으로 보기도 한다.[15] 당시 페루 지방에서, 잉카 제국에 맞설만한 국력이 있는 유일한 왕국이었다.[16] 칠레, 아르헨티나 지방의 토착 부족[17] 마푸체족은 남미가 독립한 뒤 이 지역에 칠레와 아르헨티나가 대대적인 학살을 벌이고서야 겨우 정복되었을 정도로 쉬운 상대가 아니었고 아마조니아는 최근에도 새로 발견되는 부족이 있을 정도로 오지다.[18] 유럽인들은 유럽의 전염균들을 함께 몰고 왔고,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이에 면역이 전혀 없었다.[19] 빌카밤바는 잉카 제국 최후의 수도이자 요새로, 약 30여 년 동안 잉카의 수도로 사용되었다.[20] <대항해시대>나 모험 판타지와 관련된 작품들의 판타지에서 자주 등장한다.[21] 잉카인들은 황제를 말그대로 살아있는 신의 현신으로 대접했다. 아즈텍이나 마야인들은 왕을 신과 인간의 중재자 정도로만 인식했지만, 잉카의 황제는 인세에 강림한 신 그자체였다.[22] 무지개 아래에 있는 조그만 황금 띠가 마스카파이차다. 엄밀하게 말하면 잉카 제국의 상징은 아니고, 황제인 사파 잉카의 상징이다. 그러나 잉카에서는 황제가 곧 국가였고, 딱히 다른 상징도 없기 때문에 잉카 제국을 상징하는 문장으로 꼽힌다.[23] 후대의 스페인 화가가 그린 것이라 일부 오차가 있을 수 있다.[24] #[25] 남미에는 '위팔라'라고 해서 각종 무지갯빛의 네모나 줄무늬로 만들어진 볼리비아인들의 전통 문양이 있다. 아마도 그때문에 더더욱 인식이 굳어진 듯하다.[26] 오차 하나없이 짜맞추어진 거대 암석 석벽으로 유명하다.[27] 물론 한 사람이 240km를 이동하는 게 아니라 다음 차스키에게 메시지를 전달해서 릴레이로 뛰게 하는 방식이었다.[28] 사실 이런 식으로 만드는 술이 별로 특이한 것은 아니다. 자연 상태에서도 당분이 많아 직접 발효시킬 수 있는 포도등의 과일과는 달리 전분이 많은 곡식은 일단 전분을 당화시키고, 그 당분을 다시 발효시켜야 알코올을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흔한 농작물 중에서는 당분이 많은 재료(=맛있는 과일 등)보다 전분이 많은 재료(=곡식 등)을 쉽게 얻을 수 있기에(=지금도 곡식보다 과일이 비쌈) 곰팡이나 효모등을 이용한 발효 양조법 개발되기 이전에는 사람의 침 속에 들어있어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아밀레이스를 이용하여 술을 만드는 방법이 일반적이었을 것이라 여겨진다. 이런 제법으로 만든 술이 '미인주'라 불리며 성적 어필의 대상이 된 것은 곰팡이, 효모등을 이용한 발효 양조법이 개발된 이후 '미인이 씹어 만든 술'과 같은 내러티브라도 있는 것이 아니면 더 이상 사람들이 남의 침이 들어간 술을 먹을 이유가 없어졌기 때문이다.[29] 사람을 10명으로 묶었다는 점에서는 진나라십오제와 유사하다.[30] 이상해보이겠지만, 일반적으로 가난한 사람에게 벼룩이 많이 꼬이는 건 당연하고 벼룩이 많이 꼬이면 전염병이 퍼지기 쉬운 만큼 벼룩을 잡게 함으로서 전염병이 퍼지는 것을 줄이는 효과가 있었을 것이다.[31] 스페인인에 의해 '영원한 하인'이라고 불린 이들은 아이유 공동체 내에서 차출해서 잉카 지배층에 보내야 했으며 이들은 잉카의 사원이나 궁궐에서 일하거나 개인적인 봉사를 수행했다.[32] 잉카에서는 아내가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를 제외하고는 이혼이 금지였고, 그 절차도 굉장히 까다로웠다.[33] 다만 하류층 여자들중 미색이 뛰어난 자가 상류층 남자를 만나 바로 신분상승을 하기도 했다. 잉카판 신데렐라와 유사한 셈.[34] 마추픽추에 남아있는 석조 잔해물로, 현재는 지붕이 사라져 돌로 지어진 벽들만이 남아있다.[35] 스페인 선교사들은 태양신 인티를 모시던 코리칸차 신전을 허물고 상징적인 의미로 그 위에 성당을 지었다. 때문에 현재까지도 쿠스코에는 코리칸차의 유적을 찾아볼 수 있다.[36] 어떤 사람은 1주일 동안 자지 않고 버틴 적도 있었다고 한다.[37] 에스파냐인 병사들이 이 무기로 큰 피해를 입었다. 망코의 봉기 당시 프란시스코 피사로의 동생인 후안도 이 무기에 의해 전사했다.[38] 훗날 잉카 부흥 운동을 이끌었던 투팍 아마루가 이끌던 부흥군도 상당수가 투석구로 무장했다. 상가라라 전투 당시 800여명의 부흥군이 교회 안에서 농성을 하면서 투석구로 토벌하러 온 스페인 전열보병 900명을 거의 전멸로 몰아넣었다. 당시 스페인군 전사자는 무려 578명에 달했다. 그에 반해 부흥군의 사상자는 고작 30여명이었다.[39] 왜냐하면 잉카인들이 살았던 지역은 나무가 부족하고 돌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화살도 지금으로 치면 총알과 같은 소모가 굉장히 심한 무기라서 나무가 부족한 지역에서는 만들어 사용하기가 어렵다. 그래서 잉카인들은 구하기 어려운 나무를 이용해 만드는 화살 대신에 자신들의 땅에서 쉽게 구할 수 있고 비용이 전혀 들지 않는 돌을 던지는 투석에 능숙했다.[40] 사실 창조신의 취급이 그리 좋지 않은 경우는 흔하다.[41] 잉카 달력에서는 달의 순환을 주기로 날짜를 셌다.[42] 석조 담장 위에 황금으로 벽돌을 쌓아 둘렀다.[43] 황금으로 만든 옥수수밭과 라마 모형이 보인다.[44] 잉카인들은 이 떨어진 머리카락 등에 사악한 영이 붙어 황제를 해하지 않을까 우려했다.[45] 그래서 발빠른 사람을 써서 물자 수송을 했다. 그들을 차스키라 불렀고, 하루에 250마일 정도를 걸을 수 있었다.[46] 한때 마법이나 초고대문명의 기술이니 그랬지만, 만드는 방법은 의외로 단순하다. 구리나 석재 끌로 깎아내고 모래로 맞춰지는 면을 연마한 것이다.[47] 의외로 밧줄매듭으로 수를 나타내는 방식은 잉카 뿐만 아니라 고대 중국, 티베트, 일본 등에서도 나타난다.[48] 현인신으로 대접받았던 케이스는 아즈텍의 축제인 톡스카틀제에서 희생되는 잘생긴 젊은이이다. 이 젊은이는 외부 부족이 아니라 언제나 아즈텍인들로부터 선발되었으며, 신의 대리인으로 여겨져 호사스런 생활을 하다가 제물로 바쳐졌다.[49] 아주 안 된 것은 아니다. 실제로 잉카인들이 주변 민족들에게 반감을 사게 된 원인 중에는 인간 제물을 공물로 상납시킨 것도 있었다. 하지만 인간 제물들은 지배 계층의 어린이에만 한정되었다. 오히려 평민들에게 악감정을 갖게 만든 것은 잔인한 억압과 무거운 양의 공물이랑 강제 노역이었다.[50] 출처 《잉카 최후의 날》, 킴 매쿼리, 옥당.[51] 출처 《잉카: 태양신의 후예들》, 카르망 베르낭, 시공사[52] 훗날 호수 바닥에서 진짜로 잉카군에게 살해당한 흔적이 있는 유골이 발견되었다고 한다.[53] 또 다른 설에 의하면 펠리피요가 아타우알파의 통역을 거짓되게 한 이유는 황제의 궁녀와 통정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54] 케추아어로 루나는 '사람', 티냐는 '북'을 의미한다.[55] '퀘냐'라고 불리는 페루의 전통 악기[56] 아즈텍의 것이 규모가 크긴 했지만 근본적으로 아즈텍 제국은 제국이라기보단 도시국가 연합에 가까웠고, 그 중심인 테노티치틀란 외에도 틀락스칼라 등에서도 대규모 식인과 인신공양 풍습을 공유했다.[57] 비슷하게 가죽을 전부 벗기는 풍습을 가진 민족이 안데스 지방에 존재하기는 했지만 심지어 산채로 가죽을 벗기는 풍습은 아메리카 전대륙에 거주하던 원주민들 사이에서 유행하던 일종의 처형방식 이었는데, 뱃가죽에 북을 넣을 생각을 한 것은 잉카가 최초이자 유일했다.[58] 어린이 학습도서인 앗! 시리즈의 《잉카가 이크이크》(테디 디어리 지음)에서 저자는 잉카인들이 '우리는 너희들의 가죽으로 북을 만들리라. 우리는 너희의 이빨로 목걸이를 만들고 너희들의 뼈로 피리를 불며 너희들의 두개골로 술잔을 만들리라' 라는 살벌한 노래를 부르는 대목으로 희화화했다. 물론 잉카인들이 실제로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는 기록은 없지만, 그들이 적들에게 잉카의 무력을 과시할 목적으로 이런 인간 공예품을 만들었다는 점은 사실이다.[59] 시간이 지나치게 오래 흐르면 사람들의 적대감은 희석된다. 가장 대표적으로 1300년대에 고려에 공녀를 요구하고 각종 재물을 수탈해갔던 몽골에 대한 적대감이 현대 한국인들 사이에서 거의 없는 것을 생각해보면 된다. 다만 무조건 맞는 말은 아니다. 서아시아에서는 아직도 몽골을 싫어하는데, 대표적으로 하자라족은 이란과 아프가니스탄 양국 모두에서 핍박받는데 그 이유는 이들이 몽골족의 후손이기 때문이다. 동유럽도 비슷하지만 그래도 서아시아가 철저히 갈려나간 것에 비하면 조금 대충 갈려나간 편이었다.[60] 상식적으로 당신이 아타우알파라고 생각해보자. 몇 십만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있는 당신이, 이상하게 생기기는 했다만 200명도 안되는 사람들에게 패하고 나라가 망할 것이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 아타우알파 황제가 스페인 군인들을 처음 마주할 때 방심한 것은 멍청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61] 쿠스코의 대신전인 코리칸차에는 황금으로 만든 옥수수밭과 숲, 그리고 순금 독수리나 라마 등 동물들까지 있었고, 외벽에는 황금으로 만든 두꺼운 벽돌을 두르고 두터운 순금 띠를 둘러 휘황찬란하기 그지없었다.[62] 엄밀히 말하자면 전혀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고, 꽤 쓸만한 구경거리가 되리라는 것 정도는 알았다. 그래서 잉카 제국에서 가져온 여러 황금 장신구로 전시회를 열기도 했다. 이 전시회는 여러 유럽인의 호기심을 자극했으며, 예를 들어 알브레히트 뒤러브뤼셀에서 열린 전시회를 참관한 뒤 이토록 내 마음을 기쁘게 한 것은 본 적이 없다고 찬탄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전시회가 끝난 뒤에는 몽땅 다 녹여서 금괴로 만들어버렸다.[63] 이런 풍조는 심지어 1900년대까지 계속되었다. 백인들은 잉카인들이 어딘가 비밀 도시를 만들어놓고 그곳에 숨겨놓은 황금이 있을 것이라 믿었다. 그래서 전국을 샅샅이 뒤졌으며, 마추픽추가 발견된 것도 사실상 이러한 과정 속에서 이루어졌다. 참고로 이같은 판타지는 아직도 이어지고 있어서 많은 미디어에 은밀하게 숨겨진 전설의 황금도시 같은 것을 흔하게 찾아볼 수 있다.[64] 다만 이에 대해서는 공정한 분배를 위해서는 문화적 가치를 알았어도 어쩔 수 없이 금괴로 만들어야 했을 거라는 의견도 있다. 실제 피사로도 그러했고.[65] 다만 스페인은 국내 제조업이 부실한 관계로 거의 모든 생필품을 외국에서 수입해 와야 했는데, 그런 이유로 잉카 같은 신대륙에서 힘들게 가져온 황금과 은을 죄다 물건을 산 값을 치르기 위해 이탈리아와 독일 같은 외국으로 보내버렸다. 그래서 신대륙에서 들어온 황금과 은도 정작 스페인 국내 경제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못했다.[66] 생각해보면 제아무리 총기와 말을 가지고 있던 피사로 일행이었을지라도 170여 명 정도밖에 안되는 인원으로 몇 만에 달하는 잉카 군인들을 상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피사로는 잉카 제국에 반감을 가진 부족들을 자신들의 품으로 회유했고, 사실상 이들의 힘을 빌려 제국을 무너뜨렸다.[67] 가장 대표적으로 인디아나 존스 시리즈나 툼 레이더 시리즈 등이 있다.[68] 동굴에 숨겼다는 소문도 있고 깊은 호수 속에 집어넣었다는 말도 있다.[69] 1900년대에 마추픽추를 발견한 하이럼 빙엄은 물론 순수 고고학자였으나, 발견하기까지의 과정에서 스페인 탐험가들이 남긴 기록의 도움을 받았다.[70] 그 당시 스페인에서 금은 6분의 1 온스에 해당하는 단위인 카스텔라 노스(금 페소)로 측정되다고 한다.[71] 2023년 11월 26일 기준으로 한국에서 22k 금 1g의 가격이 약 85,358원이니, 아타우알파의 보물은 오늘날 한화로 환산하면 약 5869억 원을 넘는다![72] 메디치 가문의 전성기 재산도 금화 700kg, 한화로 1600~1800억 원 정도에 불과했다.[73] 피사로가 아타우알파 황제를 인질삼아 막대한 보물을 뜯어낸 것까지는 원래 역사와 같으나, 아타우알파의 죽음을 알아채고 분노한 용들이 피사로 일당을 전부 죽여버리면서 잉카를 정복하지 못했다.[74] 전 인구가 300만에 불과해서 투리유를 관리하는 용들이 다른 지역에서 사람을 납치해 올 정도다. 유령도시도 적지 않다.[75] 사실 동아시아도 이름을 천하게 지으면 오래 산다는 미신 때문에 아기에게 희한한 이름을 지어주는 경우가 많았다. 다만 잉카인들의 이름은 고의적으로 천하게 짓는 것과는 상관이 없었다. 다만 이름을 짓는 문화가 독특했기에 이런 이름이 붙은 것이다.[76] 정작 잉카 문명의 영역권이었고, 틈만 나면 자국을 잉카 제국의 후예들이라고 자처하는 페루와 다르게 우루과이는 잉카 제국의 일부에 속한 이력도 없다. 다만 우루과이의 옆나라인 아르헨티나는 후후이와 살타 주 등 북서부 일부 지역들이 잉카 제국의 영역권에 속한 적은 있다.[77] 원주민들이 백인들을 얼른 쫓아내려고 "(우리 동네가 아니고)저기 옆 동네에 황금이 많대요"라면서 계속 거짓말을 해서 다른 지방으로 보냈다는 설이 유력하다.[78] 특히 3대에 걸쳐 잉카에 저항한 에콰도르 북부 지방의 반란이 가장 격렬했다. 게다가 오늘날에도 잉카 제국의 후예를 자처하는 페루와 이웃나라인 에콰도르는 사이가 좋지 않은데 스페인의 식민지배로부터 독립한 후에 영토 문제로 전쟁도 벌였었고, 축구 같은 스포츠 운동 경기에서도 양국 간 라이벌 전이 살벌하게 벌어지곤 한다.[79] 물론 아르헨티나와 에콰도르, 볼리비아에도 푸카라나 잉카피르카, 사마이파타 등 잉카 제국 시대의 유적지들이 더러 있긴 한데 페루의 마추픽추나 쿠스코 등에 비해서 외국인 관광객들도 많이 오지 않는다.[80] 심지어 페루는 스페인의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후 주변국들과 을 수없이 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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