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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밍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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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중국 국기.svg 중화인민공화국 윈난성의 성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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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밍시 | Kunming C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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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부 소재지 윈난성 쿤밍시 청궁구 진슈다제1호
云南省昆明市呈贡区锦绣大街1号
지역 시난
면적 21,015km²
기후 Cwb
하위 행정구역 7구 1현급시 3현 1자치현
시간대 UTC+8
인문 환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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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구 8,460,088명 (2020)
인구밀도 400명/km²
민족 구성 한족 86.17% | 이족 6.91%
후이족 2.46% | 백족 1.28%
HDI 0.729 (2016)
서기 류훙젠(刘洪建)
시장 류자천(刘佳晨)
GRDP 전체 $1,041억 7,200만 (2020)
1인당 $14,990 (2020)
상징 시화 동백꽃
시목 백목련
차량번호 云A
행정구역 약칭
행정구역코드 530100
지역전화번호 0871
우편번호 650000
ISO 3166-2 CN-YN-01 }}}}}}}}}
홈페이지
파일:쿤밍 빌딩 중국.jpg
2호선과 3호선이 만나는 둥펑광장역에 위치한 최고높이 349m짜리 헝룽광장(恒隆广场 Spring City 66)
파일:昆明.jpg
쿤밍 시내 모습과 뎬츠(滇池)호
파일:중국 쿤밍.jpg
대표적인 관광지인 석림 지질 공원. 도심에서 동쪽으로 40km 떨어진 스린 이족 자치현

1. 개요2. 역사
2.1. 중근세2.2. 근대2.3. 중일전쟁2.4. 현대
3. 기후4. 행정 구역5. 교통
5.1. 시내 교통수단5.2. 시외 교통수단
5.2.1. 항공5.2.2. 철도
5.2.2.1.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출발지
6. 사건 사고 관련 정보7. 전시장8. 진경관 고건축군9. 기타

[clearfix]

1. 개요

쿤밍은 중국 윈난성성도로, 성 중부에 있다. 인구는 640만명 이상으로 뉴욕보다 약간 적다.[1] 4계절 내내 봄 날씨가 유지되어 춘성(春城)이라는 별명이 있고, 여기에 중세 유적이 잘 남아있어 다리시리장시와 함께 운남의 주요 여행지 중 하나로 인기가 많다.

역사적으로 남조국 시기에 처음 도시가 세워진 이래로 원나라 시기 한족후이족이 유입되었고[2], 17세기 삼번의 난 말엽 오주의 수도였다. 20세기 중일전쟁기에 연합군 기지가 있었고, 한국광복군이 훈련하기도 했다. 현대에는 베트남, 미얀마, 태국 등 동남아와의 교역 창구로 중시되고 있다. 1999년 세계원예박람회를 개최했고, 2014년에는 중국판 9.11로 불리는 쿤밍역 칼부림 테러가 벌어졌다.

2. 역사

파일:쿤밍 당나라 중국.jpg
남조 시기에 건설된 동탑(둥시타). 400m 떨어진 서탑(스시타)과 대비를 이룬다.
파일:昆明圆通寺.jpg
남조 시기에 세워져 15~17세기에 확장된 원통사(圆通寺). 석가모니의 치아 진신사리가 있어 태국 등지의 후원을 받고 있다.

신석기 시대부터 남쪽의 뎬츠(滇池) 호수 일대에 인류가 거주했고, 고대에는 전나라(滇) 령이었다. 기원전 109년, 한무제가 전나라를 복속시킨 후 뎬츠 남안의 전지현(滇池縣)을 치소로 하는 익주군(益州郡)을 설치했다. 신나라 멸망 후 양한교체기에 공손술이 파촉에서 자립했을 때에도 익주 태수 문제(文齊)는 그에 복속하지 않고 버티다가, 서기 36년 후한이 파촉을 평정한 후에 복속했다. 225년 촉한제갈량이 남정을 한 후에는 건녕군(建寧郡)으로 개편되었고, 치소도 현 취징시인 미현(味縣)으로 이전되었다. 서진 시기에는 영주(寧州)가 설치되었고, 다시 전지현이 그 치소가 되었다.

동진 시기인 320년대에 현지 찬씨(爨氏) 가문이 영주 자사직을 세습하다가 5세기 들어 사실상 자립했고, 이로써 운남 일대는 다시 서남이(西南夷)의 땅이 되었다. 수나라 시기 2차례의 원정으로 남녕주(南寧州)가 설치되었다. 한편 곤명의 유래인 곤미(昆彌) 혹은 곤림(昆淋)은 전한 시기부터 운남 서부의 민족을 지칭하는 이름이었는데, 7세기 무렵 곤명족(昆明族)은 바이족이 운남 서부를 장악하자 현 뎬츠호 일대로 이주했다. 그리고 619년, 당나라 시기 현 시가지 북쪽에 곤명현(昆明縣)이 설치된 것이 첫 지명으로의 용례이다. 다만 곧 당나라는 일대에 대한 통치력을 상실한다.

649년, 몽사(蒙舍) 부족이 서남이를 통합하고 대몽(大蒙)을 건국했다. 다만 대몽을 계승한 남조국은 옛 전지현 일대를 완전히 통치하지 못하다가, 750년대 안사의 난을 틈타 남녕주의 후신인 랑주(郎州) 일대까지 정복하여 운남을 통일했다. 그리고 765년, 남조왕 각라봉이 아들 봉가이를 보내어 현 시가지에 성을 세워 동방 진출 거점으로 삼았다. 해당 도시는 중국 사서에 척동(拓東)으로 기록되었다가, 점차 규모가 커지며 후일 백어로 제2 도시란 뜻인 선천성(鄯闡城)으로 개칭되었다. 명실상부한 제2의 수도였기에 동도(東都)로도 불렸고, 대리국 시기에는 선천부(鄯闡府)가 되어 중원과 버마 및 인도를 잇는 차마고도 상의 교역 도시로 번영했다.

2.1. 중근세

파일:Tomb_of_Sayyid_Ajall_Omer_Shams_al-Din.jpg
'중화식' 쿤밍을 세운, 정화의 5대조 샴스웃딘 부카리의 묘
파일:114167290_6f6034acaa_z.jpg
쿤밍 시내의 순성 청진사

1252년 (혹은 1254년), 선천부는 남송 원정에 앞서 대리국 정벌에 나선 몽골 제국군에게 정복되었다. 1255년 선천부는 선천만호부(鄯闡萬户府)로 개편되었고, 그 산하에 곤명천호소(昆明千户所)가 설치되며 곤명 지명이 부활했다. 1260년대 들어 쿠빌라이 칸은 아들 후게치를 운남왕에 봉하여 통치하게 했고, 1270년 선천만호부는 선천로(鄯闡路)로 개편되었다. 중앙집권을 꾀하던 후게치는 1272년 그는 현지인들에게 암살되었다. 이후 1274년 운남 총독으로 봉해진 호라즘계 무슬림 관료 세이드 아잘 샴스웃딘 우마르 부하리(سید اجل شمس‌الدین عمر بخاری)[한자][4]는 파괴된 선천성에 중국식 도시를 세우고 중경(中慶)이라 명명했다.

우마르는 2개의 모스크절(불교)문묘(공자묘)를 세웠는데, 향교 기능을 겸한 이 문묘는 운남 지역의 첫 유교 기관이었다. 1276년 원나라 하에서 운남행중서성(雲南行中书省)이 설치되었고, 선천로는 중경로(中慶路)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운남행성 및 중경로의 치소로써 기존 중경성에 곤명현이 설치되었고, 이후로 곤명은 대리(다리)를 대체하는 운남의 중심지가 되었다. 1279년 우마르가 사망한 후에는 아들 나스르웃딘이 직위를 계승했다. 한편 마르코 폴로동방견문록에서 중경은 '오리 연못 도시'란 뜻인 야츠푸(鸭池府)로 기록되었는데, 개오지를 패화(貝貨)로 쓰고 날고기를 먹는 등 중국식 도시가 세워진 직후라 그런지 상당히 미개하게 묘사되어 있다. 안습 14세기 들어 중경 대신 곤명 지명이 더 알려지게 되었다.

파일:妙湛寺金刚塔_左后方摄.jpg
원나라대에 세워진 티베트 불교 불탑
파일:Ancient_city_wall_in_Kunming_zoo,2022.07.22.jpg
위안퉁산 및 쿤밍동물원에 남아있는 명대 성벽

원명교체기 시기 (쿠빌라이칸의 운남 총독 바자르오르미명하의 침공을 격퇴하고 명하의 멸망 후에도 명나라에 복속하지 않고 원에 대한 충성을 유지했다. 다만 1382년, 후이족으로 구성된 명나라의 대규모 토벌군에게 패배한 바자르오르미는 자결했고, 남은 가족들은 제주도로 유배되었다.[5] 명조는 중경로를 운남부 (雲南府)로 개편했고, 운남승선포정사사 (云南承宣布政使司)가 배치되었다. 동시에 길이 4.5km, 높이 9m의 성벽이 둘러졌고 6개의 성문이 설치되었다. 또한 홍무제는 거센 저항에 대한 보복으로 기존 몽골 및 후이족 남성들을 학살 혹은 거세한 후 한족들을 정착시키켰다. 그렇게 거세된 후이족 소년 중에는 후일 정화로 개명하는 마화가 있었다.

명청교체기 시기 곤명은 진도(滇都) 혹은 진경(滇京)이라 불렸고, 남명영력제 정권의 수도로 기능했다. 다만 1659년, 청나라의 평서왕 오삼계가 운남을 점령했다. 이후 영력제는 버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 사로잡힌 후 곤명으로 압송되어 처형되었다. 그 공로로 오삼계는 삼번 중 하나로 봉해져 운남과 귀주를 통치했다. 1673년, 폐번에 반발한 오삼계는 삼번의 난을 일으키고 순식간에 사천과 호광을 장악했다. 1678년에는 칭제하고 형주부(현 징저우시)를 수도로 하여 오주를 건국했으나, 형주로 향하기 전 같은해에 곤명에서 사망했다. 이후 손자 오세번이 계승했으나, 청의 반격에 1679년 형주를 잃고 곤명으로 천도했다. 하지만 1681년, 청군이 곤명을 포위하자 오세번이 2달의 저항 끝에 자살하며 오주는 멸망했다.

2.2. 근대

파일:五家寨铁路桥_行摄梓地_20120905_162758.jpg
오가채 철교

19세기 들어 곤명은 크게 발전했다.1833년 지진으로 6천여 명이 사망하는 등 피해가 있었으나 곧 복구되었다. 한편 1845년 3일에 걸친 후이족 학살, 1853년 후이족 및 한족 광부 간의 갈등 등 운남의 정세는 점차 불안정해졌다. 그러다 1856년, 곤명에서 당국에 의해 3천여 후이족이 학살되자 운남 각지에서 대대적인 반청 봉기가 벌어졌고, 일대의 절(불교) 대부분이 파괴되거나 모스크로 바뀌었다. 특히 대리에서는 후이족 수령 두문수(유수)가 태평천국과 연계하여 평남국을 세우고 '술탄 술레이만'을 칭했다. 그는 1867년과 1869년 2차례 곤명을 공격했으나 함락하지 못했고, 청조의 반격으로 1873년 평남국은 멸망했다. 이때 조정의 편에 선 마여룡 등의 수니파를 제외한 후이족들은 학살을 겪었고, 살아남은 이들은 미얀마 북부의 와 지방으로 망명하여 '판사이'라 불리게 되었다.[6] 이로써 운남의 이슬람교 교세는 크게 쇠퇴했다. 현재는 윈난 인구의 1.4% 수준인 60만 정도 있다고 한다.

청일전쟁프랑스는 운남의 양귀비꽃철광석을 수입하고 서양 공산품, 인도차이나산 석탄, 무기, 건어물, 목재 등을 운남에 수출하기 위해 곤명과 베트남의 항구 하이퐁시를 잇는 곤하철로(昆河铁路)의 건설 권리를 얻었다. 이후 운남인들이 쿨리가 되어 철도 건설에 투입되었는데, 오가채 철교 건설 시에만 800여명이 희생되는 등 악조건이 계속되자 노동자들의 폭동이 일어났으나 프랑스 측이 전달한 신무기에 의해 진압되었다. 1903년부터 단계적으로 완공된 철로는 1910년 완전 개통했고, 홍강의 선박과 산길 등 1달 가까이 걸리던 운남~월남간 왕래는 하루 내로 단축되었다. 동시에 하이퐁 항을 통해 곤명은 나머지 중국 지역들과 빠른 교류가 가능해졌다. 그외에 곤명은 서쪽의 대리, 남서쪽의 버마 등과의 교역로가 있었다. 아직 사천(이빈시) 및 귀주(구이양) 방면은 당나귀가 겨우 지나갈 산길만 있어 왕래가 어려웠다. 이미 1908년 곤명은 개항지로 지정되었기에 서양인들의 왕래는 더욱 활성화되었다.

1910년부터 독일 회사가 수룡파 댐을 세워 중국 최초의 수력발전소를 건립했고, 1912년 4월부터 시내에 전기가 공급되었다.[7] 신해혁명 이후 운남부가 폐지되며 곤명현은 운남성에 직속되었고, 차이어를 시작으로 전계군벌이 통치했다. 1920년대 운남을 통치한 탕지야오는 1909년 자신이 쿤밍에 세운 군사학교인 육군강무당에 한국인 독립운동가들을 입학시켜 주었다. 육군강무당 출신으로는 주더펑더화이, 이범석이준식, 김관오 등이 모두 육군강무당 출신이었다. 그는 또한 1922년 운남의 첫 대학(현 윈난대학)과 첫 공항인 우쟈바 비행장을 세웠다. 이후 1929년까지 23개의 비행장이 들어서 후일 항일전쟁기에 큰 도움이 되었다. 1930년대에는 쿤밍~구이양~충칭 간의 도로가 개설되었어 운남과 중국 주요부와의 교류가 수월해졌다. 1927~1945년의 18년간 룽윈이 운남성을 계속 지배하여 운남왕이라 불렸다.

2.3. 중일전쟁

파일:1280px-Kunming_Yunnan_Lujun_Jiangwutang_Jiuzhi_2014.09.26_18-26-32.jpg
1909년 탕지야오 세운 육군강무당. 한국 독립운동가들도 배출했다.
파일:The_Hump_and_Burma_Road.png
버마 & 레도 로드 (실선)와 험프 로드 (점선)

중일전쟁은 쿤밍시의 근현대사에 있어 중요한 변곡점이었다. 1938년 들어 일본군이 중원 지역을 휩쓸며 많은 피난민들이 사천과 운남으로 몰려들었다. 동시에 베이징대학, 칭화대학 등이 이전되어 국립서남연합대학을 아루는 등 중요 기관들이 옮겨왔고, 후난 등지에서 해체된 기계들을 들고 온 공업가들은 일본군 폭격기의 활동 범위 밖인 곤명에 잇따라 공장을 설립했다. 따라서 국민당 충칭정부 시절 곤명은 제조업중공업을 중심으로 전자, 구리, 시멘트, 제철, 제지, 직물 공업이 발달하는 등 중화민국의 산업 중심지로 거듭나 경제적으로 크게 성장했다. 군사적으로는 중국공군학교가 쿤밍의 우쟈바 비행장으로 옮겨지며 시설이 확장되었고, 1938년 여름부터 장제스의 군사고문 클레어 셔놀트플라잉 타이거즈와 함께 중국 조종사들을 훈련시켰다. 동시에 우쟈바에는 제18 전투기 부대와 제41 추격대 등이 주둔했고, 한때 프랑스 자원 항공대도 있었다.

1939년 말, 일본군이 광서에 상륙하여 난닝을 함락하자, 중화민국은 모든 해안 지역을 상실하고 내륙에 고립되고 말았다. 그나마 뒤이은 쿤룬관 전투는 국민혁명군이 승리하여 인도차이나와의 육상 교통로인 버마로드(Burma Road)는 지켜낼 수 있었다. 모든 항구가 점령당하여 외부와의 교류가 어려워진 중화민국은 곤하철로를 통해 하이퐁 항으로 물자를 공급받았다. 이에 일본군이 1940년 들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압박했고, 그해 10월 일본군이 직접 철로를 따라 침공 계획을 수립하자 국민혁명군이 중간의 다리를 폭파하여 무용지물로 만들었다. 따라서 1940년 말부터 버마로드는 중화민국과 외부 세계를 이어주는 유일한 교역로로 남았고, 영국령 버마를 통해 공급된 군수 물자는 항일전선을 유지하는 데에 필수적이었다.

1941년 태평양전쟁 발발 후 쿤밍에는 제1특무대 등 연합군 지휘부가 설립되었고, 동남아시아미군/영국군/프랑스군과 협력했다. 1942년 일본군이 버마를 장악하여 버마로드가 끊긴 후에는 험프(The Hump)라 불리는 인도와의 히말라야 산길 및 항공기를 통한 제한적인 보급만이 이루어졌다. 플라잉 타이거즈와 쿤밍 주둔 중화민국 공군은 험프 수호에 전력을 다했다. 외딴 위치와 공군 전력의 존재 덕에 쿤밍은 충칭이나 청두에 비해 비교적 일본군의 공습에 덜 노출되었고, 국민당 정부는 충칭이 함락되는 최악의 시나리오를 대비하여 지하 방공호를 조성하는 등 유사시의 임시 수도로 준비해 두었으나 다행히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8] 2년 반 동안의 악조건 후, 1945년 초에야 미얀마 북부가 연합군에 수복되며 레도 도로를 통한 보급이 활성화되었다.

2.4. 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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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한 저택

전쟁의 상흔을 간직한 쿤밍은 중일전쟁 전후 또다시 국공내전이 임박하자 학생들이 반전 운동에 나섰으나 국민당 정권에 의해 유혈 진압되었다. (12.1 사건) 이후 내전의 판세가 기울자 국민당 정부는 재차 쿤밍 천도를 고려했으나, (청두가 함락될 무렵인) 1949년 12월에 운남 사령관 루한이 중국공산당에 항복해버렸다. 이후 쿤밍 시장 장페이춘은 국부천대 대열에 끼어 대만으로 도주했고, 1950년 1월 중국인민해방군이 진주했다. 신중국 설립 3년 후인 1952년, 시당국은 도로 건설을 위해 성벽 철거에 나섰다. 여기에 청년들이 적극 나섰고, 동문로는 칭녠로로 개칭되었다. 성벽의 벽돌들은 그대로 새 도로의 바닥 자재가 되어 현재에 이른다.

중화인민공화국 들어 쿤밍은 철강, 화학 공업 분야에서 크게 발전하여 충칭 및 청두와 함께 시난 지역의 주요 산업도시로 부상했다. 또한 다양한 민족들을 아우르기 위해 1950년대에 소수민족 협회를 설립, 소수민족에 대한 이해와 고등교육의 평등을 위해 노력했다. 다만 아직도 주류 한족 사회에서 쿤밍은 변방 도시로 여겨졌고, 문화대혁명 시기 실각한 인사들의 유배지 중 하나였다. 1960~70년대 베트남 전쟁중월전쟁 시기 쿤밍은 중국군의 후방 보급 기지였고, 1957년 복구되었던 하이퐁과의 철로는 1979년 중월전쟁기에 재차 끊기고 말았다. 1980년대 개혁개방시기 쿤밍 역시 해외의 투자와 관광객 유치로 크게 성장했고, 도심이 재개발되었다. 해외 관광객 중에는 왕실을 포함해 중국계가 많은 남쪽의 태국이 두드러졌다.

화교들 외에도 윈난을 선조들의 땅으로 인식하는 타이족들이 대거 방문했고, 태국 은행의 지점이 개설되었으며 라마 9세의 딸이자 계승 서열 2위이던 시린도른 공주가 여러 차례 양국의 친선을 위해 쿤밍을 방문하기도 했다. 1990년대에는 중국이 아세안 지역에 대한 관심을 보이며 1996년 쿤하철로가 현대화되어 재개통되었고, 2005년 7월 쿤밍에서 열린 2차 매콩강유역개발사업 (GMS)[9] 회담에서 중국은 회원국들이게 10억 달러의 차관을 약속하며 중국-아세안 자유무역지대 설립을 추진했다. 그 결과, 2004년 중국-아세안 FTA가 체결되었고 쿤밍은 동남아와의 교역 창구로써 해외 은행이 위안화로 사업할 수 있는 18개 도시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동남아시아와의 교역 외에도 쿤밍은 1999년 세계원예박람회를 개최했고, 그 준비 과정에서 기존 인프라의 정비 및 마천루 건설이 이루어져 현대적인 도심 풍경을 갖추게 되었다. 2006년에는 치타공~만달레이~쿤밍간 도로 건설이 합의되었다. 2008년 7월의 버스 폭탄 테러[10]에 이어 2014년 3월 1일, 동튀르키스탄 (위구르) 분리 독립운동가들에 의한 쿤밍역 칼부림 테러 (3.1 사건)가 발생하여 29명 사망하고 130명 부상당하는 비극이 있었다. '중국판 9.11'이라 불리는 이 사건으로 위구르 지역에 대한 중국 당국의 감시와 위구르족 정체성 탄압이 강화되었다. 2010년 기준 쿤밍 주민의 민족 분포는 한족 86%, 이족 7%, 후이족 2.5%, 바이족 1.5% 등이다.

3. 기후

타이베이와 비슷한 위도적도에 가까운데 해발고도(1,890m)가 높아서 1년 내내 봄철같은 아열대고원기후(온대기후이면서 동시에 고산기후)에 해당한다. 사계절이 과 같다 하여 춘성(春城)이라고도 불린다.그래서인지 일본 오키나와, 남큐슈와 함께 한국 스포츠팀의 동계전지훈련의 명소 중 하나로 꼽힌다.

고산지대 축구 경기장이 있기에 중국이 월드컵 예선 때 아랍 중상위팀이랑 벌이는 홈경기에서 일부러 고산지대인 이곳을 골라 경기를 벌였음에도 비기거나 지는 일도 있어 그다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볼리비아처럼 3,000m 이상이라면 모를까

4. 행정 구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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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정부

청궁구
呈贡区
우화구
五华区
판룽구
盘龙区
관두구
官渡区
시산구
西山区
둥촨구
东川区
진닝구
晋宁区
푸민현
富民县
이랑현
宜良县
쑹밍현
嵩明县
자치현 스린이족자치현
石林彝族自治县
루취안이족먀오족자치현
禄劝彝族苗族自治县
쉰뎬후이족이족자치현
寻甸回族彝族自治县
현급시 안닝시
安宁市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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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밍이라는 지급시 안에 온천으로 유명한 안닝(安宁)이라는 현급시가 위성도시로 있는데 지명을 한국 한자음으로 읽으면 안녕이다. 그리고 간제차로 썼다는 차이가 있지만 우리가 말하는 그 안녕과 한자도 같다.

5. 교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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쿤허철도의 옛 쿤밍역 역사

5.1. 시내 교통수단

시내 교통수단으로는 버스, 택시 그리고 쿤밍 궤도교통이 운영중이다.

5.2. 시외 교통수단

5.2.1. 항공

옛날에는 1923년도에 건립된 우자바국제공항이 있었는데 2012년 6월 쿤밍 창수이 국제공항을 만들어 운영하고 있다.

5.2.2. 철도

베트남식민지로 삼던 프랑스가 20세기 초반에 이곳 쿤밍과 베트남하이퐁시를 연결하는 협궤철도인 톈웨철도(滇越铁路 Yunnan-Vietnam Railway)[11]를 부설하면서 철도의 역사가 시작되었다.[12] 그만큼 쿤밍은 예전이나 지금이나 중국의 철도망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데, 1966년 이후 중국 국내 주요지방을 잇는 구이쿤, 청쿤, 네이쿤, 난쿤철도 같은 장거리 간선철도가 개통되어 쿤밍역과 함께 운영되어 오고 있다.

21세기에 들어서서 중국철도총공사가 2001년 1월 계획한 초기의 4종4횡계획의 연장선상의 8종 8획계획으로 건설된 후쿤고속철도난쿤고속철도가 동부 상하이와 남부 난닝에서 연결되어 쿤밍난역이 설치되어 운영되고 있으며, 동남아를 향한 일대일로 영향으로 쿤밍난역은 라오스를 종단하는 중국 라오스 철도의 시발지가 되었다.
5.2.2.1. 동남아시아를 향한 일대일로의 출발지
시진핑 정부의 동남아에 대한 일대일로One belt One road 정책을 토대로 건설된 쿤밍난역은 중국과 베트남의 국경도시 허커우로 이어지는 쿤위허철도(昆玉河铁路)와 중국과 라오스의 핵심 국경인 모한국경(磨憨口岸)까지 건설중으로 위시역에서 분기되는 위모철도(玉磨铁路) 열차의 시발점이 되어 미래에는 라오스와 태국 그리고 말레이시아를 거처 싱가포르까지 연결되는 철도(泛亚铁路, 범 아시아 철로)가 건설될 것이다.

6. 사건 사고 관련 정보

2014년 3월 1일 쿤밍역 칼부림 테러가 발생한 곳이다.

7. 전시장

8. 진경관 고건축군

真庆观古建筑群

윈난 지역 최대 도교 사원으로, 원나라 시기 우당산 도사들이 세웠다. 본래 진무관이라 불렸으나 명나라대에 진경관으로 개칭되었다. 15, 18세기에 대대적으로 중축되었고 1881년 염상들이 염륭사를 더하여 대규모 복합단지가 되었다. 중화민국 기에 일부분이 공장으로 전환되었고, 1953년에는 학교로 변경되었다가 1983년에야 문화재로 지정되었다.

파일:2560px-真庆观_紫微殿.jpg
  • 자미전
1430년대의 명대 건축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어 가치가 높다.

파일:真庆观_老君殿.jpg
  • 노군전
노자를 모시는 건물로, 1780년대에 중건되었다.

파일:盐隆祠.jpg
  • 염륭사
19세기에 번성한 소금 상인들의 운을 비는 사당이자 회관이었다.

파일:盐隆祠_戏台.jpg
  • 염륭사 희대
각종 연극이 열리던 무대.

9. 기타

파일:Kunming_temple2.jpg
원통사
파일:공죽사1.jpg
공죽사

동명의 인민해방군 해군 구축함이 있다.

1999년 세계원예박람회가 쿤밍에서 열렸다.

쿤밍의 Apple Store는 맨해튼의 애플스토어와 비슷하게 입구는 지상에 통유리로, 스토어 자체는 지하에 위치해 있어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애플스토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홈페이지

[1] 이 수치는 인천의 2배가 넘으므로 결코 적은 수치는 아니나, 인구 14억인 중국의 성도치고는 상대적으로 적다.[2] 당시 총독이 호라즘인 샴스웃딘 우마르였다.[한자] 賽典赤 贍思丁(새잔적 섬사정)[4] 부하라에서 태어난 알리 이븐 아비 탈리브의 후손으로, 원나라의 재무감으로 일하다 운남 도지사가 되어 현 쿤밍을 건설하고 성양왕(咸陽王)에 추증됨. 손자 우마르는 안남(대월) 원정 시에 순교했다. 그의 5대손이 바로 명나라의 환관 항해가 마화(정화)이다[5] 이후 조선 조정은 (원 황족이라 그런지) 매년 쌀과 콩 100곡에 저포와 마포 10필을 내리는 등 우대했다고 한다.[6] 지금도 미얀마 북부의 팡롱의 주민 대부분은 후이족이다.[7] 480 킬로와트 규모, 뎬츠의 유일한 합류강인 당랑천에 세워짐[8] 10여년 후 국공내전 말엽에 국민당 정부가 재차 쿤밍 천도를 고려했으나 (청두가 함락될 무렵인) 1949년 12월 운남 사령관 루한이 중국공산당에 항복하며 무산되었다.[9] 중국, 베트남, 태국, 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 정상이 참가한 사실상 인도차이나 + 차이나 연맹[10] 2008 베이징 올림픽 직전에 2명 사망, 중국 당국은 "테러 혐의가 없다"고 밝혔으나, 위구르 분리주의 단체에서 자기들 소행이라 주장함.[11] 이중 중국 영토구간인 쿤밍과 허커우구간을 쿤허철도(昆河铁路)라고 부른다.[12] 현재는 협궤철도를 표준궤로 신설한 쿤위허철도로 대체하여 베트남 국경도시인 허커우까지만 열차가 운행하며 수도 하노이나 하이퐁에 가려면 국경 너머에 있는 라오까이역에서 베트남 열차로 갈아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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