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1 14:47:41

폭동적 시위진압

과잉 진압에서 넘어옴
대한민국 헌법 제21조 ① 모든 국민은 언론·출판의 자유와 집회·결사의 자유를 가진다.
② 언론·출판에 대한 허가나 검열과 집회·결사에 대한 허가는 인정되지 아니한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제3조 (집회 및 시위에 대한 방해 금지) ① 누구든지 폭행, 협박, 그 밖의 방법으로 평화적인 집회 또는 시위를 방해하거나 질서를 문란하게 하여서는 아니 된다.
② 누구든지 폭행, 협박, 그 밖의 방법으로 집회 또는 시위의 주최자나 질서유지인의 이 법의 규정에 따른 임무 수행을 방해하여서는 아니 된다.
③ 집회 또는 시위의 주최자는 평화적인 집회 또는 시위가 방해받을 염려가 있다고 인정되면 관할 경찰관서에 그 사실을 알려 보호를 요청할 수 있다. 이 경우 관할 경찰관서의 장은 정당한 사유 없이 보호 요청을 거절하여서는 아니 된다.

제22조 (벌칙) ① 제3조제1항 또는 제2항을 위반한 자는 3년 이하의 징역 또는 3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다만, 군인·검사 또는 경찰관이 제3조제1항 또는 제2항을 위반한 경우에는 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한다.

1. 개요

경찰은 자국민에게 법률에 따라 무력의 소유 및 사용이 정당하게 인정받는 집단이기 때문에 무력의 사용 또한 법률에 정해진 대로 정당한 절차에 따라서 대응하는 것이 올바른 시위진압 과정이다. 즉 평범한 시위라면 시위자들을 보호하는 것이 경찰의 임무이고 폭동에 대해서는 사회의 질서 유지를 위해 무력을 사용할 수 있는 것이 경찰이다.

폭동적 시위진압은 이러한 규정 등을 무시한 상태로 무력 사용을 극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물론 각 국가들이 가진 정부의 민주주의적 정당성에 따라 기준은 다르다. 즉, 아주 간단히 말해서 폴리스 라인을 넘지 않는 비무장, 비폭력 평화 시위에 대해서 경찰이 신변의 위협을 전혀 느끼지 아니함에도 집회 해산을 위해서 실탄을 발포하는 경우를 생각해보면 쉽다. 설령 해당 시위가 비폭력, 비무장 시위라도 불법적인 시위였다면 해산과 체포 작전의 결정은 합법으로 인정이 되지만 진압 방식에 있어서는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인정되며, 만약 그 불법 시위가 해당 국가의 법률상으로만 불법 시위이고 국제적인 관점에서 합법적인 경우[1] 국제사회는 한 술 더 떠서 홀로코스트 같은 학살로 정의한다.

가령 어떤 단체가 공공시설에서 벌이는 시위에 대해 경찰과 지자체에서 이 단체의 시위는 불법이므로 시위 참가자는 현행범으로 간주하고 즉시 진압하며, 시위자에 대한 무력 사용을 허가한다는 명령을 내린다고 가정해 보자. 이 단체의 시위가 해당 공공시설을 이용하는 시민들에게 심각한 불편을 초래하는 미신고 불법 시위라고 하면, 해산과 체포 작전의 결정은 합법으로 인정되며 시위 참가자에 대한 무력 사용 또한 허가된다. 그러나 진압 과정에서 곤봉으로 시위 참가자를 무차별적으로 구타하거나 시위자의 얼굴에 직접 최루액을 뿌리는 등 프린스에드워드역 폭력적 시위진압 사건처럼 시위자의 신체의 자유를 직접 침해하는 일이 발생한다면 진압 방식에 있어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인정되며 해당 경찰관은 징계를 받고 책임을 지기 때문에, 경찰은 강경진압을 벌일 아무런 명분도 이유도 없게 된다. 따라서 무력으로 그 단체를 진압하기보다는 민사상 손해배상을 청구하고 공무집행방해나 보조금 횡령 등으로 형사처벌을 받게 하는 식의 우회적 처벌수단을 사용하는 것이다.

위 같은 사례에도 폭동적 과잉진압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가 존재하는데 주로 전체주의, 권위주의 국가들이 대표적이며, 이는 정부가 합법적인 정치 조직으로 인정받지 아니하고, 폭행 살인 카르텔 집단으로서 국가를 불법적으로 점거하고 있는 정치범죄집단임을 국제적 여론, 언론, 국제사법재판소가 암묵적으로 동의하고 인정하고 있는 나라들에 해당된다. 정부 측의 학살 행위와 연관되어 있는 경우가 많아서 학살 문서의 목록도 참고할 것.

영어로는 Police Brutality라고 표현한다. 직역하면 경찰의 과격행위. 또 다른 표현으로는 Police Riot이 있으며, 직역하면 경찰 폭동이라는 애매한 표현이 되기 때문에 법 혹은 학술 관련이 아니라면 한국에서는 보기 힘든 표현이다.[2] 단, 이 표현을 적용하는 경우가 있는데 5.18 민주화운동 관련으로 당시에 집행된 시위 진압에 대해서 '폭동적 시위진압행위'라는 표현을 사용한 사례가 있다.
[10] 5·18민주화운동에 대한 폭동적 시위진압행위가 국헌문란에 해당하는지 여부(적극) [10] 5·18내란 행위자들이 1980. 5. 17. 24:00를 기하여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하는 등 헌법기관인 대통령,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강압을 가하고 있는 상태에서, 이에 항의하기 위하여 일어난 광주시민들의 시위는 국헌을 문란하게 하는 내란행위가 아니라 헌정질서를 수호하기 위한 정당한 행위였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난폭하게 진압함으로써,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에 대하여 보다 강한 위협을 가하여 그들을 외포하게 하였다면, 그 시위진압행위는 내란행위자들이 헌법기관인 대통령과 국무위원들을 강압하여 그 권능행사를 불가능하게 한 것으로 보아야 하므로 국헌문란에 해당한다.[3]

2. 사례

2.1. 아시아

2.1.1. 대한민국

대한민국에서는 군사독재 치하에서 공권력이 군사정부의 하수인으로 복무한 전과가 있어 민주화 이후 공권력의 힘을 무지막지하게 줄이게 되었다. 단순 시위진압 뿐만 아니라, 이 당시의 행적 때문에 대중이 공권력을 불신하게 되면서 일선 경찰관들이 실탄을 발포할 권한에 크나큰 제한이 생겼다. 실탄 사용뿐만 아니라 대구 칠성시장 기관단총 노출 논란 사례처럼 공권력이 공공연하게 무기를 휴대하는 것 자체를 안 좋게 본다. 이로 인해 아예 작정하고 흉기를 휘두르는 용의자를 상대로도 총기를 사용하지 않으려다가 경찰관들이 희생되는 경우가 발생한다.

물론 민주화로 문민통제가 정착된 후에도 2000년 롯데호텔 총파업이나 2001년 대우자동차 총파업 등 폭동적 시위진압이 일어난 사례들은 분명히 있고, 의심되는 경우도 있으나 정보화 시대에 들어서면서 진보언론 또는 인권단체, 진보성향 네티즌들 vs 보수언론 및 보수성향 네티즌, 전의경 출신자 같은 구도로 지나친 과잉진압인지, 정당한 공권력의 행사인지의 여부를 두고 대립이 잦으며, 양측 사이에서 편향되거나 편집된 자료를 두고 다투는 경우가 있어 확실성 여부를 결론짓기 힘들어지게 되었다.
  • 1947년 제주도 3.1 시위의 경찰 발포
    제주도 4.3 진상규명보고서에 따르면 당시 도민들이 하였던 시위는 합법적인 시위였는데 원인은 기마경찰이 군중속을 다니다가 실수로 어린아이를 치고 지나가자(당사자 경찰은 몰랐다고 전해짐) 그걸 본 군중은 따지기 위해 경찰서로 몰려갔고 그 사실을 모르는 경찰은 시위대의 공격으로 오인하고 자위권 행사, 즉 시위대에 발포했다. 6명 사망, 6명 부상. 경찰이 과잉대응한 원인 중 하나는 대구 10.1 사건의 기억이 있다. 이 때 제주도 경제나 사회가 혼란스러워지면서 경찰들도 워낙 민감해진터라 무고한 제주도 시민들한테까지 오해한 것. 이 사건은 이후 같은 해 3월 10일의 총파업을 거쳐 제주 4.3 사건의 시작이 된다.
  • 1960년 3.15 의거 당시 경찰의 진압행위
    경찰의 발포로 7명이 넘는 시위자들이 사망했다. 이 때 김주열은 경찰이 최루탄을 직각으로 사격해 눈에 최루탄이 박혀 사망했는데 김주열의 시신이 마산 앞바다에서 인양되어 참혹한 몰골이 공개된 것을 계기로 2차 마산항쟁이 일어났으며 2차 때는 10명이 넘는 시민들이 사망했다.
  • 1960년 4.19 혁명 피의 화요일
    경찰의 집단발포가 시작되자마자 20명이 넘는 시민들이 현장에서 사망했고 서울로만 한정해도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사망했다. 참고로 4.19 혁명 개시 후 1주일 동안 민간인 사망자는 186명, 부상자는 무려 6026명에 달했다.
  • 1979년 YH 사건 '101호 작전'
    경찰기동대의 무자비한 진압으로 여성 노동자 김경숙이 사망하고, 김영삼을 포함한 수십명이 중경상을 입었다. 이는 후술할 부마민주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다.
  • 1979년 부마민주항쟁 당시 계엄군의 진압행위
    유신체제에 반대하며 진행한 평화시위를 하던 사람들에게 당시 대통령이던 박정희가 직접 투입을 지시한 계엄군이 무자비한 폭행을 퍼부어 부산에서만 100명이 넘는 사람들이 다쳤고, 심지어 마산에서는 아예 노동자 1명이 계엄군에게 맞아죽었다.
  • 1980년 5.18 민주화항쟁 당시 계엄군의 진압행위
    쿠데타를 일으킨 전두환에 대항하는 시민들의 시위를 계엄군이 구타는 물론이고 무자비한 총격으로 진압하였고, 그 결과 10일도 안되는 기간 동안 공식 수치로만 임산부와 초등학생을 포함한 민간인 165명이 사망하고 3,515명이 부상을 입었다.[4]

2.1.2. 북한

  • 1945년 11월 23일, 신의주 반공학생사건에 대한 소련군과 좌익 보안대의 진압. 20~150명이 사망했다고 추정된다. 참고로 이 시위에 참가했던 인사 중에는 민주화 운동가중 한 명인 함석헌도 있다. 이 사건은 38선의 통제가 조금 느슨하던 시기에 일어나 남한에서도 당시에 보도가 되었고# 2020년대 남한에서도 기념하는 사람들이 있다.
  • 1946년 3월 13일, 함흥의 학생 2,640여명이 모인 시위에서 보안원의 시위 진압. 2명이 사망했다고 한다.
  • 1976년 해주폭동 - 해주에서 일어난 반정부 시위 진압 과정에서 3만 명이 사망했다는 주장이 있으나 실제로는 아무런 근거도 없는 날조된 사건이다.[5]
  • 1981년 11월에 신의주에서 반정부 폭동이 일어나 정규군의 유혈 진압으로 수백 명이 사망하고 수많은 사람들이 중국으로 피난을 갔다는 보도가 있다. #
  • 1995년 중앙일보는 탈북민의 발언을 소개하여 군생활 10년을 거치고 제대한 사람 200명을 국가에 봉사하라는 명목으로 평안남도 회창군의 금광에서 일하게 하더니, 2년 후 이곳에 강제 정착시키려는 당국의 행태[6]에 이 제대군인들이 당위원장에게 항의를 한 일화를 전했다. 당위원장은 이 항의를 상부에 보고를 했고, 평양에서 특공대가 파견되어 제대군인 70% 가량이 숨지고 살아남은 사람은 고향과 정착 중 하나를 택하게 했다고 한다. 이 증언이 사실이라면 140명 가량이 항의의 대가로 숨졌다는 소리다. # 엄밀하게 보면 중국 천안문에서 드러나는 식의 시위를 진압한 것은 아니다.
  • 1998년 송림사건 - 실제로는 시위도 안 일어났으며, 탱크로 사람을 밀어버렸다는 허위증언이 나돌아 다녔는데, 탱크를 끌고 와 조용히 마무리 되었다는 다른 식으로 충격적인 주장이 더 사실에 가깝다고 한다. 다시 말해 집단적으로 반발하는 목소리가 나오는 자체를 막기 위해 탱크를 동원했다는 것이다.

2.1.3. 일본

2.1.4. 중화권

  • 천안문 6.4 항쟁 - 1989년 6월 4일 중국공산당에 의한 유혈진압이다. 천안문 광장에 모인 수십만 명의 비무장 시위대를 중국 인민해방군이 탱크, 기관총, 소총 등으로 무력진압한 희대의 사건이다. 정확한 사망자와 부상자 수는 헤아릴 수 없으며 적으면 수백, 많으면 수천 명이 희생당했다고 추정만 할 뿐이다.[7] 문화대혁명대약진 운동 등의 흑역사는 중국도 어느 정도 인정하고 비판도 허용하지만 천안문 학살은 중국 당국에선 대내외적으로 철저히 검열하고 가급적이면 절대 언급하려 하지 않는다.
  • 광둥성 화학공장 반대 시위 - 2014년 15명이 사망하고, 300여 명이 부상을 입었다.
  • 그 외에는 자세히 알려진 정보가 부족하고 중국의 폐쇄성으로 자세히 알려진 사실이 거의 없어서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국제사회의 보편적 기준에서 보자면 중국 내에서 발생되는 대부분의 반정부 시위에 대한 진압의 양상은 충분히 폭동적 시위진압으로 정의할 수 있다. 특히 위구르족, 티베트인들에게 가하는 행위가 심각할 것이라 예상된다. 자세한 것은 신장 위구르 자치구, 티베트 독립운동 참조. 기타 중국의 인권 문제는 중국/인권 참조.
2.1.4.1. 홍콩



2019년 9월 20일, 국제앰네스티에서 홍콩 범죄인 인도법 반대 시위 관련 보고서가 출간되었다. 앰네스티는 시위 기간 동안 홍콩 경찰이 폭동적 시위진압 하고, 체포한 시위대에 대해 고문을 자행하고 자백을 강요하며 폭력을 행사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신계 지역 시위를 하다가 체포된 사람에 따르면, 이 인원은 시위를 마치고 집에 가는 도중에 홍콩 경찰에 체포되어 경찰서로 압송된 후, 경찰서에서 경찰에 의해 집단구타를 당하고 자백을 안 한다며 물고문을 당했다고 진술하였다. 또다른 시위 참가자는 홍콩 경찰이 "자백하지 않으면 전기고문을 시행하겠다"고 협박했다고 진술했다. 국제앰네스티는 홍콩 행정부, 중국공산당 등 유관기관과, UN유럽연합국제기구에 홍콩 인권 상황 관련 해당 보고서를 제출할 예정이다. 기사 블룸버그는 이 보고서의 내용을 인용하며, 홍콩인들의 홍콩 경찰 신뢰도가 낮고 반감이 매우 큰 상황에서, 국제앰네스티의 고문 사용 보고서가 알려질 경우 시위 규모를 매우 극단적으로 키울 것이라고 우려했다. 기사(현재 삭제됨), 대체 기사

9월 20일 국제앰네스티가 발간한 홍콩 경찰이 폭동적 시위진압 및 시위대 폭력, 고문 등의 행위를 저질렀다는 보고서에 대해, 스티븐 로 홍콩 경찰청장은 "홍콩 경찰이 폭력을 사용했다는 사실이 전혀 없다. 순수한 거짓말(Pure Lying)이다. 국제앰네스티는 홍콩 경찰을 모욕하고 있다"며 혐의를 전면 부인하고 국제앰네스티를 거세게 비난했다. 기사

2.1.5. 동남아시아

2.1.5.1. 태국
  • 1976년 탐마삿 학살: 영락없는 동남아시아판 5.18 민주화운동.
  • 1992년 '검은 5월': 군부의 정권 연장에 항의하는 국민들의 시위에 군이 발포하여 3일 만에 52~100명이 사망하고 175명이 실종되었다.
  • 2010년 타이 시위: 이 역시 민주화 시위에 군이 발포하여 2달 동안 91명이 사망하고 2100명 이상이 부상을 입었다.
2.1.5.2. 동티모르
  • 1991년 산타크루즈 대학살[8] : 인도네시아군에 의해 사살된 동티모르인 청년을 추모하기 위해 산타크루즈 묘지에 모여 평화적인 시위를 하는 시위대에게 인도네시아군이 2분간 집단발포를 퍼부어 273명이 사망하고 255명이 실종되었으며 355명이 다쳤다. 심지어 군인들은 병원에 옮겨진 부상자들까지 '증언자를 없애기 위해' 사살하기까지 했다. 이 사건을 통해 동티모르 식민지배의 비극은 전 세계적으로 유명해졌다.
2.1.5.3. 미얀마

2.1.6. 남아시아

2.1.6.1. 방글라데시

2.1.7. 중동

2.1.7.1. 이스라엘
이스라엘은 이 분야에서 특히나 국제적으로 악명높으며 요르단강 서안지구, 가자 지구에서 많이 일어난다.
  • 제1차 인티파다, 제2차 인티파다(팔레스타인인들의 봉기) 진압- 이 인티파다도 시위하는 팔레스타인이나 거기에 얼떨결에 휩쓸린 군중을 사살해서 일어난 것이다.
2.1.7.2. 이란
이스라엘의 라이벌 이란 역시 이 분야에서 뒤지지 않는 잔혹성을 자랑한다.

2.1.8. 중앙아시아

2.1.8.1. 우즈베키스탄
2.1.8.2. 카자흐스탄
  • 2022년 카자흐스탄 시위 - 9일 동안의 시위에서 나온 사망자가 무려 164명으로, 5.18 민주화운동의 기간과 공식 사망자와 사실상 똑같다.

2.2. 유럽

2.2.1. 서구권

2.2.1.1. 영국
  • 1819년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 - 아서 웰즐리에 의해 벌어진 사건으로, 영국 공업도시인 맨체스터에서 보편선거를 요구하는 빈민들의 집회(차티스트 운동)가 열리자 기병대를 출동시켜 군중들을 깔아뭉갰다. 사건이 벌어진 장소가 맨체스터의 성 피터 광장이었기에 워털루 전투에 빗대어 '피털루 학살(Peterloo Massacre)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2.2.1.2. 북아일랜드
  • 1972년 피의 일요일 사건 - 이 사건으로 14명이 사망했으며, 북아일랜드 분쟁을 한층 격화시키는 트리거가 되었다.
2.2.1.3. 프랑스
  • 세티프 구엘마 학살 -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가던 1945년 5월 8일 나치에 맞서 프랑스를 도운 알제리인들이 평화적인 독립 시위를 벌이자, 프랑스 당국이 경찰과 군대를 투입해서 대대적인 학살을 벌인 사건이다. 대략 1달 동안 진압을 했는데, 최소 6,000명에서 많게는 3만 명의 알제리 민간인이 무차별 학살당했다.
  • 1961년 파리 학살 - 나치 독일에 부역했음에도 샤를 드골에 눈에 들어 승승장구한 모리스 파퐁 당시 파리 경찰서장의 지시로 경찰들이 프랑스 내 알제리인들의 평화시위를 유혈진압한 사건. 이 사건으로 공식적으로만 48명, 최대 300명 이상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 1962년 샤론 지하철역 학살 - 1962년 2월 8일에 알제리 독립에 찬동하며 지하철역에서 평화적으로 시위하던 시위대를 모리스 파퐁이 투입한 파리 경찰이 유혈진압해 현장에서 8명이 사망한 사건.

2.2.2. 동구권

2.2.2.1. 러시아
  • 피의 일요일 사건 - 1905년 1월 22일에 니콜라이 2세 황제의 숙부의 명령에 따라 군이 황제에게 청원하러 가던 민간인에게 총격을 가해 단 하루 동안 143명이 죽고 439명이 부상을 입은 것으로 추정되며[10] 6831명이 체포되었다. 결국 이 사건을 계기로 러시아 제국의 권위가 추락하고 러시아 혁명의 원인이 된다.
  • 1962년 노보체르카스크 학살 - 1962년 6월 2일에 로스토프주 노보체르카스크에서 파업을 하던 전기기관차 공장 노동자들에게 소련군이 탱크를 동원하고 기관총을 발포하여 26명이 사망하고 87명이 부상을 입은 사건.[11] 소련 정부는 이 사건을 철저히 은폐하여 1992년까지 공식적으로 이 학살을 비밀로 유지했다.
2.2.2.2. 우크라이나
  • 2013년 유로마이단 혁명: 한국의 4.19와 5.18에 뒤지지 않는 심각한 폭동적 시위진압과 학살이 벌어졌다.
2.2.2.3. 동독
2.2.2.4. 헝가리
2.2.2.5. 체코
2.2.2.6. 루마니아
  • 1957년 루마니아 바두 로슈카(Vadu Roșca) 마을의 반정부 시위 진압: 게오르게 게오르기우데지가 주도하는 토지 몰수와 집단농장 설치에 반대하는 농민들이 시위를 벌였는데, 육군 중장 니콜라에 차우셰스쿠가 시위 현장에서 직접 군인들에게 발포를 명령하여 14살 소년 1명을 포함한 9명을 살해하고 48명에게 부상을 입혔다.
  • 1989년 12월에 있던 루마니아니콜라에 차우셰스쿠 반대 민주화 시위 진압 : 이 항목을 보면 알 수 있듯, 차우셰스쿠가 직접 발포를 명령하며 5.18의 그것과 완전히 똑같은 방식으로 반독재 시위대를 진압하여 티미쇼아라에서 시위가 시작된 12월 16일부터 12월 22일까지 1주일도 안 되는 기간 동안 전국에서 2살짜리 아기와 69세의 노인을 포함한 162명이 사망하고 1,107명이 부상을 입었다. 물론 차우셰스쿠는 바로 이 달에 권좌에서 쫓겨난 후 처형당했다.
2.2.2.7. 벨라루스

2.3. 미국

  • 헤이마켓 사건
    시위자 중 정체모를 한 사람이 폭탄을 터트리자, 경찰이 모든 시위자들을 향해 집단발포를 벌여 70명이 넘게 사망했다.
  • 러들로 학살
    파업 중인 탄광 노동자들을 상대로 주 방위군과 용병이 기관총 사격을 했고, 이로 인해 12명의 어린이, 8명의 성인이 사망했다.
  • 보너스 군대 사건 - 대공황으로 인한 생활고로 미지급된 수당의 조기지급을 원하는 퇴역군인들을 더글러스 맥아더가 강경 진압했다. 2명 사망, 1,017명 부상.
  • 반나치 시위 진압 - 미국과 나치가 적국이 아니었을 때, 나치를 반대하는 평화시위자들을 경찰이 폭력으로 진압했다. 하워드 진은 자서전에서 이때 몽둥이를 맞고 미국 체제에 대해 실망했다고 한다.
  • 베트남 반전 시위
    시카고에서 열린 1968년 미국 민주당 전당대회 중에 발생한 시위 진압 과정에서 과잉 진압이 발생하였으며, 이후 조사 과정에서 police riot이라는 표현이 처음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
  • 톰킨스 스퀘어 공원 폭동
  • 루비 능선 대치
    1992년 8월 미국 연방정부가 분리주의 성향이 있던 위버 가족을 상대로 체포영장을 집행하는 과정에서 소년, 여성, 그리고 연방보안관 각각 한 명씩 사망한 사건이다.
  • 웨이코 포위전
    1993년 4월 19일, 웨이코에서 미국 연방정부가 종교집단 다윗교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영유아를 포함한 82명의 신도와 4명의 ATF 요원이 사망한 사건이다.

2.4. 중남미

2.4.1. 멕시코

2.4.2. 콜롬비아

  • 바나나 학살- 1928년 12월 5~6일에 콜롬비아의 시에나가(Ciénaga) 마을에서 파업중이던 유나이티드 프루트 컴퍼니의 노동자들이 콜롬비아 군에게 학살당한 사건. 이 사건으로 사망한 사람만 최소 47명이다. 소설 백년의 고독의 모티브가 됐다.

2.4.3. 칠레

  • 1983년 8월 11~12일에 있던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반대 시위 진압(칠레): 총 18,000명의 군인과 경찰이 진압에 동원되어 8세 소녀 1명을 포함한 29명이 사망하고 2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약 1천명이 구금되었다.
  • 1986년 7월 2일에는 칠레의 산티아고에서 반정부 시위를 하던 사람들에게 총격을 가해 5명이 사망한 데다가 10대 후반의 남녀 2명을 군인들이 구타한 후 불을 붙여 이들 중 1명이 결국 사망한 일까지 있었다.

2.4.4. 페루

2.4.5. 에콰도르

2.5. 아프리카

2.5.1. 중앙아프리카 제국

  • 1979년 방기 학살
    당시 황제였던 보카사 1세의 얼굴이 그려진 고가의 교복을[13] 학생들에게 강매하라는 조칙에 반발한 학생 중심의 국민들이 1월 18~20일과 4월 17~19일에 2차례나 수도인 방기에서 대규모 반제정 시위를 벌였는데, 보카사는 자이르인 군인들과[14] 황실 근위대를 투입하고 발포를 명령하며 무자비한 진압을 가해 각각 50~150여명/400여명에 달하는 엄청난 사망자가 나왔다[15]

2.5.2. 남아프리카 연방

  • 샤프빌 학살
    1960년 3월 21일 남아프리카 연방의 트란스발주 요하네스버그 샤프빌에서 국민당 정권 퇴진과 아파르트헤이트 폐지를 요구한 시위대를 학살한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69명의 사망자와 어린이 29명을 포함해 총 289명이 부상자가 발생하였다

2.5.3. 자이르(현 콩고민주공화국)

  • 1990년 루붐바시 학살 - 1990년 5월 11~12일 밤에 루붐바시 국립대학교에서 반정부 시위를 하던 대학생들을 모부투 세세 세코 당시 자이르 대통령의 경호 부대들이 잔혹하게 진압하여 50명 이상의 사망자[16]가 발생했다.

2.5.4. 기니

  • 2009년 코나크리 학살 - 대낮에 경기장에서 군사정권에 항의하는 시위를 열던 사람들에게 군인들이 무자비하게 AK-47 소총을 발포하어 단 하루 만에 최소 157명이 죽고 1,253명이 다쳤으며 수백 명이 구금되었다. 심지어 군인들은 학살을 넘어 대놓고 109명의 여성들을 강간하거나 상점을 약탈하기도 했다.

2.6. 가상 사례

  • Warhammer 40,000 - Exterminatus
    다만 무작정 사용하는 것도 아니고 시위진압은 치안조직인 아르비테스에 의해서 이루어진다. 익스터미나투스는 단순한 시위진압이나 봉기에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진짜로 위협적인 카오스 세력이 준동하거나 제국군이 심하게 패퇴할 수준의 무력을 갖고있는 외계 종족, 혹은 기타 외부의 의한 폭동으로 행성 제어에 실패해서 행성이 점령당하는 것보다 행성을 파괴하는 것이 제국유지의 관점에서 부합하다고 생각되면 시행한다. 시행하는 것 역시 행성의 모든 인구를 싸그리 절멸 시키는것이라 오래동안 회의를 거치고 나서 살릴 수 있는 사람은 최대한 살리며 엄중한 선서를 한 뒤 진행하는 것이다.

3. 다른 경우

police riot이라는 표현 때문에 경찰만을 염두에 둔 표현처럼 보이겠지만 계엄령 등 특수한 상황에서 경찰의 역할을 대신하는 집단은 모두 대상이라고 할 수 있다. 당장 설명에서 예시로 사용된 '폭동적 시위진압행위'도 당시 광주에 투입된 진압 군병력에 대해서 사용된 표현이다.

4. 관련 문서



[1] 예를 들어 싱가포르처럼 집회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는 경우가 있다.[2] 직역 그대로 진짜로 현직 경찰들이 거리로 뛰쳐나와서 폭동을 일으키는 사태가 일어나는 경우도 있다. 임오군란처럼 국가가 완전히 개막장일 경우에나 가능한 일이지만.[3] 대법원 판례 96도3376.[4] 이것도 어디까지나 공식 수치라는 점에 유념해야 하며, 실제로는 공식 수치는 독재정권 하에서 축소된 수치이고 이보다 더 많은 민간인이 사망했을 것이라는 추측도 제기되어진다. 실제로 5.18 사망자 수가 정확히 832명이라는 5.18 당시 군 조사당국자의 증언이 있다.[5] 후술할 송림사건처럼 유사 사건은 존재했는데 학살이 있었다는 주장이 날조가 아니라, 아예 해당 봉기 자체가 아무런 실체가 없는 날조된 사건이다.[6] '무리배치'라고 하여 지금도 있는 행태다. 대표적인 북한의 인권 침해 사례로 꼽힌다.[7] 심지어 1만 명이 죽었다는 주장도 있다.[8] 사건 당시에는 인도네시아령 동티모르 주였다.[9] 게다가 이것도 축소된 수치라는 의혹이 있다. 현지에서는 무려 2000명 내지 5000명이 사망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만약 5천 명 사망설이 사실이라면, 2024년 방글라데시 시위는 명실상부 천안문 학살 이래 최악의 비전시 학살이 된다.[10] 황실 기록에서는 96명이 사망하고 333명이 부상당했다고 기록되었으며, 사망자가 243명이고 부상자가 800여 명이라는 기록도 있다.[11] 당시 노동자들은 스탈린 때가 더 나았다며 시위를 벌였는데, 이에 흐루쇼프가 민감하게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12] 경찰 측 121명 포함. 시위대 측 부상자 중에는 어린이도 있었다.[13] 이 교복 가격이 당시 가치로만 165달러로, 당시 제국의 1인당 GDP의 절반 이상이었다고 한다.[14] 심지어 이들은 용병도 아니었고, 문자 그대로 보카사가 시위 진압을 위해 자이르에 군대 파견을 요청해서 온 군대였다.[15] 심지어 보카사 1세는 2번째 시위가 벌어질 당시에 감옥까지 찾아가 수감된 학생들을 재판도 거치지 않은 채 직접 초법적으로 처형했고, 이후에도 상상을 초월하는 뻔뻔함을 보이며 국제적인 지탄을 받다가 이 학살으로부터 반 년도 안 되어 프랑스의 지원을 받은 전직 대통령 다비드 다코의 쿠데타로 쫓겨났다. 참고로 보카사는 정식 황제도 아니었고, 1966년에 다비드 다코를 쿠데타로 몰아내고 대통령에 집권했다가 1976년부터 황제를 참칭한 인물이었다.[16] 다만 자이르 정부가 이 학살의 진상규명을 은폐해서 이 학살의 정확한 사망자 수치는 불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