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03 16:56:40

삼국지/지명

후한 13주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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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 三國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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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주요 도시들의 현재 지명
파일:1510194457947.jpg
1. 개요
1.1. 들어가기에 앞서1.2. 한자의 독음 문제
2. 후한 13주3. 위(魏)
3.1. 주요 지역
4. 촉한(蜀漢)
4.1. 주요 지역
5. 오(吳)
5.1. 주요 지역

파일:260년삼국시대주군지도.png

1. 개요

삼국지에 등장하는 지명을 정리한 문서.

, , , 삼국이 활약해 남긴 기반은 이후 서진-남북조시대-· 형성에 많은 기여를 하게 된다. 삼국시대는 실질적으로 중국 중세의 시작이다.

1.1. 들어가기에 앞서

각 군·현이 중복되어 기재되는 것을 막고자, 삼국 정립 체제가 본격적으로 막바지로 들어서는 260년 연말을 기준점으로 잡아, 260년 무렵의 상황을 기준으로 주·군·현 지명을 정리하였다. 그 결과 문서 내용이 길어진 관계로 각 군·현에 관한 상세한 정보는 주마다 하위 문서를 나눠 작성했다.

'양주'의 경우에는 이것이 '揚州'인지 '涼州' 구분하기 어렵다. 따로 괄호 안에 한자를 병기할 수도 있지만, 그 경우 가독성이 떨어지는 문제가 있다. 이에 하위 문서 이름과 연혁 정보에 한정해서 揚州는 '양주'로, '涼州'는 '량주'로 표기하였다. 비록 서진 때에는 익주에서 '양주(梁州)'가 분할되어 제3의 '양주'가 등장하긴 하지만, 별도로 하위 문서로 분리된 익주 지방에서만 등장하는 지명이므로, 따로 구분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기에 그대로 '양주'로 표기하였다.

연혁 정보는 『한서』 지리지·『속한서』 군국지·『진서』 지리지에 등재된 정보를 기준으로 하여, 이를 각각 '[전한]'·'[후한]'·'[서진]'으로 약칭했다. '[전한]'과 '[후한]'의 연혁 내용이 겹칠 때는 이를 '[한]'으로 줄여 표기했다. 진(秦)나라 때 실존이 확인되는 군·현은 그 연혁을 '[진]'으로 표기했고, 후한 말부터 280년 사이의 일이지만 정확한 연도를 확인할 수 없을 때는 '[삼국]'으로 표기했다. 그 외의 연혁은 대괄호([ ]) 안에 서력기원 연도 숫자만 표기했는데, 기원전 연도의 경우 '기원전'을 '-'로 표기했다. 예를 들면 '[-100]'은 '기원전 100년'을 의미한다. 삼국시대의 연혁 변동은 명확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없고, 『진서』 지리지 또한 후한 말 이후의 일들을 모두 서진 때 발생한 변동으로 뭉뚱그려 기술하는 문제가 있다. '[삼국]'이나 '[서진]'으로 줄여 표기한 정보들은 이 점을 주의하여 살펴볼 것을 권한다. 확실하지 않은 정보는 기울임꼴로 표기했다.

참고로 『한서』 지리지의 기준 연도는 군 이름과 호구 정보는 기원후 2년이고 현의 소속은 기원전 8년이며, 『속한서』 군국지의 기준연도는 140년 무렵이고, 『진서』 지리지는 283년을 전후를 기준으로 하지만 태강(太康) 연간인 280~289년의 정보가 혼합되어 있다. 후한 초기인 기원후 30년에 대규모의 현(縣) 통폐합이 있었기에 후한 때 폐지된 현들은 대체로 이 시점에 폐지된 것으로 추정되나, 이를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속한서』 군국지를 기준으로 하여 '[후한]'으로 표기하였다. 위나라 때에는 253년에 군·현 통폐합이 있었고, 촉한 멸망 이후인 263년에 익주를 재편했다. 서진 때에는 280년 통일 후에 전국을 재편하여 그 결과를 283년에 『태강지리지』로 정리하였는데, 『진서』 지리지는 이를 모본으로 한다. 지리지마다 다소 부정확한 점이 있어, 이를 정정했을 때에는 그 사항을 본문이나 각주로 명시하였다.

각 주별로 나눠진 하위 문서에서는 260년에 운영된 군(郡)을 기준으로 문단을 구성했고, 문단마다 표를 작성하여 그 군의 연혁을 정리했다. 지명·소속·치소(治所) 정보는 서진 때까지 그 군의 가능한 파악할 수 있는 연혁을 기술하였으며, 그 외에는 180~290년 사이에 발생한 변동과 그 군의 출신 인물이나 군을 식읍으로 수여받은 인물 정보도 표시하였다. 또한 한때 독립되었던 군이거나, 오(吳) 멸망 이전에 분리되는 군은 별도로 하위 문단으로 구분하여 쉽게 알아볼 수 있게 하였는데, 구분된 하위 문단에는 원칙적으로 연혁표를 작성하지 않았으나 오원군·삭방군·운중군·정양군·상군은 예외로 폐지 이전의 연혁을 따로 작성했다. 각 연혁표마다 서진 이전 시대의 연혁 정보를 따로 첨부하고 이를 접어두었다. 진나라의 연혁은 실존이 확인되는 현들의 목록만 적어두었다. 신나라 때 각 현의 소속은 명확히 알 수 없으므로 그 연혁은 대체로 왕망이 개명한 사례만 기재했는데, 왕망이 삼보를 6위군(尉郡)으로 재편한 것은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 경우에만 소속 변동을 반영하였다.

각 현(縣) 이름 아래에는 필요한 경우 그 현에 대한 설명을 적었다. 그 아래로는 하위 항목으로 현 이름 변동 연혁을 기재하고, 그 현의 소속에 관한 연혁 정보, 위치 정보, 봉작 정보 순으로 적었다. 현의 소속 연혁은 군 소속이 변동될 경우에만 기재했으며, 단순히 군(郡)의 이름만 바뀐 경우 역시 생략했다.

위치는 현 치소로 비정되는 곳을 원칙으로 표기했으며, 정확한 위치를 표현하고자 10진수의 위·경도 좌표를 겹화살괄호(《 》) 안에 표시하여 이를 웹 지도로 쉽게 확인할 수 있게끔 작성했다. 예를 들어, 낙양현(洛陽縣)의 위치는 "《34.72867, 112.62253》 허난성 뤄양시 멍진현 한·위낙양고성유지"로 표기했는데, "《34.72867, 112.62253》"는 위·경도 좌표를 의미하며, 각각 '북위 34.72867도'와 '동경 112.62253도'를 의미한다. 웹 지도에서 "34.72867, 112.62253"를 검색하면 해당 위치가 표시된다.(해당 좌표를 구글 지도에서 검색한 링크) 참고로 구글 지도는 중국 지역에 대해서는 실제 장소와 왜곡 처리가 되어 있어 일반 지도 모드에서는 이상한 위치가 표시되며, 정확한 실제 위치를 확인하려면 레이어를 '위성' 유형으로 변경해야 한다. 위치 정보가 나오지 않는 현은 정확한 위치를 파악할 수 없는 경우에 해당한다.

봉작 정보는 해당 지역에 봉토가 설정된 인물의 목록을 기재하며, 원칙적으로 처음 봉작을 받은 시봉자(始封者)의 이름만 기재하였으나, 후한 당시 황족들의 봉작에 한해서 황건적의 난 이후 작위를 승계한 것으로 확인되는 인물의 이름을 기재하였다. 연도는 그 지역에 봉토가 설정된 기간을 의미하며, 실제 통치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의 봉작은 취소선으로 표시하여 이를 구분하였다.

각 현의 마지막 항목에는 그 현에 소속되어 있거나 주변에 위치한 지역 중에 삼국시대에 언급되는 주요 지명들을 나열하고, 그 위치에 대한 위·경도 좌표를 기재했다.

1.2. 한자의 독음 문제

일부 한자에는 복수의 음(音)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있어, 몇몇 지명은 여러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 이 문서에서는 현대 한국어의 한자음을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며, 현대 한자음에 복수의 음이 있을 때는 기록된 반절음에 가까운 것을 우선하여 표기하였다. 특히 지명으로 쓰인 아래의 글자들은 일률적으로 다음과 같이 기재했다.
  • 樂: '락'. '악'·'요'로 읽을 수도 있으나, 지명으로 쓰이는 경우는 보통 '즐기다'의 의미로 쓰기 때문. 단, 두음법칙은 적용한다.
  • 父: '보'. 아버지나 친족을 뜻할 때는 '부'로 읽으나 그 외에는 '보'로 읽는 것이 원칙이다.
  • 復: '부'. 일반적으로 '복'으로 읽으나, 원래의 음이 '부'나 '북'에 가까워 어감상 이쪽으로 읽는 것이 자연스러운 경우가 많다.
  • 隊: '수'. 일반적으로 '대'로 읽으나, 遼隊縣이 遼隧縣으로도 표기되는 것처럼, '隧'와 의미상 통하게 쓰였기 때문.
  • 邪: '야'. '사'·'여'·'서'로 읽을 수도 있으나, 옛 지명에는 '야'로 쓴다. 琅邪郡을 낭야군으로 읽는 것이 그 예.
  • 氏: '지'. 일반적으로 '씨'로 읽으나, 옛 지명에는 '지'로 쓴다. 烏氏縣이 烏枝縣으로도 표기되는 것이 그 예. 단, '狋氏'는 '권정'으로 읽는다.
  • 降: '항'. '강'으로 읽을 수도 있으나, 보통 지명으로 쓰이는 경우는 '항복'의 의미로 쓰였기 때문.

'司隸校尉'의 '隸'는 본음이 '례'이므로 두음 법칙이 적용되지 않는 이상 그대로 발음하는 것이 원칙이나, 이를 '예'로 읽는 속음 현상으로 특별한 예외 규정이 없음에도 현실적으로 지켜지지 않는 사례가 있다. 대표적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서 '奴隸'는 '노례'라 하지 않고 '노예'로 등재되었으며, 마찬가지로 '家隸' 또한 '가예'로 등재되어 있다. 속음에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에, 전문 서적들에서도 司隸를 '사례'와 '사예' 양쪽으로 일관성 없이 표기하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일관성을 위해 이를 '사례'로 표기하나, 어느 쪽 표기가 옳다고 단정하지는 않는다.

2. 후한 13주

한나라에서 주(州)는 원래 행정구역이 아니라, 춘추전국시대에 유래한 구주 관념에 따라 중원 지역을 구분하는 '지방' 개념이었다. 현대 대한민국에서 부산광역시, 대구광역시, 울산광역시, 경상남도, 경상북도 등을 통틀어 '영남'으로 부르지만 그것이 행정구역은 아닌 것과 마찬가지이다. 한무제가 기원전 107년 자사(刺史)라는 감찰관을 보내기 시작했는데, 각 자사의 관할구역을 의미하는 '자사부(刺史部)'의 범위가 얼추 구주와 겹치는 부분이 있어서 그저 그 명칭에 따라 명명한 것에 불과하다. 자사의 감찰권 또한 태수를 직접 표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엄연히 태수나 현령 등을 보좌하며 행정을 총괄하는 승(丞) 이하의 관리들을 대상으로 할 뿐이었다.

중앙 정권의 권위가 무너지면 각지의 지방관들이 군웅으로 돌변하는 현실을 직접 목격한 광무제는 태수(太守)에게 지나친 군사권이 집중되는 것을 견제하고자, 원래 감찰관에 불과했던 자사들을 각 지방에 주둔시키면서, 여러 군(郡)이 공동으로 대처해야 하는 변란이 발생했을 때는 각 군에서 병력을 각출해 자사에게 보내고, 자사가 감군(監軍)이 되어 그 병력을 지휘하여 이를 대처하게 했다. 각 군에서 보내는 병력은 그 군의 일부에 불과했었으므로, 이 조치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자사가 태수의 상관으로써 태수를 지휘하는 입장은 되지 못했다.

영제 때 후한의 통치 질서가 붕괴하게 되자, 각지에서 할거할 세력을 도모하고 있던 이들은 여러 개의 군(郡)을 장악함과 동시에 세력 확장에도 나름의 명분을 부여할 수 있는 직책으로 자사의 가치를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유언은 이에 한술 더 떠서, 공식적으로 독자적인 군(軍)을 편성할 권한까지 갖는 주목(州牧) 자리를 만들어 내 익주목으로 부임했다. 반동탁연합이 결성된 이래 후한의 정치 질서가 완전히 무너지고 각지에서 군벌들이 할거하게 되자, 어느 정도 세력을 갖춘 군벌들은 제각기 주목이나 자사직을 자처하며, 부하들을 각지의 태수 등으로 임명해 보내 그들의 상관으로 군림하기 시작했다. 여러 주(州)를 장악한 뒤에는 자신의 친족이나 측근을 자사로 임명하고, 독자적인 징병권을 갖는 장군직과 임지 내에 주둔한 모든 부대에 대한 군사적 작전통제권을 의미하는 도독(都督)직을 겸임시켜, 자사 직책을 명실상부한 태수의 상관 직책으로 만들어 냈다. 바로 이때부터 각 주(州)는 소속된 군(郡)의 상위에 위치하는 행정구역으로 기능하게 된 것이다.

물론 자사 직책은 여전히 본질적으로 감찰관에 불과할 뿐, 어디까지나 장군직과 도독직이 결합하여 초유의 권한을 갖게 되는 것에 불과했다. 그러나 구품관인법이 시행되면서 자사에게 공식적으로 각 군·국의 중정(中正) 임면 권한이 주어짐으로써 자사는 인사권까지 갖게 되었고, 결국 그 자체로 명실상부한 태수의 상관으로 입지를 다졌다.

사마염이 삼국통일 이후에 이렇게 각 주의 자사가 태수의 상관으로 군림하게 된 것을 시정하고 특히 각 군에 대해 치민(治民) 권한을 더 이상 행사하지 말라고 명령했지만, 이미 구조적으로 태수를 압도하는 권한을 갖게 된 자사가 원래대로 감찰관으로 돌아갈 리는 당연히 없었다.

후한 13주
사례
司隸
연주
兗州
예주
豫州
기주
冀州
유주
幽州
병주
幷州
옹주
雍州
양주
涼州
익주
益州
청주
靑州
서주
徐州
형주
荊州
양주
揚州
교주
交州

  • 190년 무렵: 공손도가 평주목(平州牧)을 자칭하며 자신의 유주 영역을 평주(平州)로 분할함.
  • 193년: 양주(涼州)의 하서회랑 지역을 옹주(雍州)로 분할함.
  • 201년: 교지자사 장진이 교주목(交州牧)으로 승격하면서 교주(交州)가 형성됨.
  • 209년: 적벽대전 이후 유비가 형주목(荊州牧)을 자칭하면서 형주가 분할됨.
  • 213년: 조조구주를 회복한다는 구실로 13주를 9주로 재편함.
    • 사례교위부: 폐지되어 각 군이 예주·기주·옹주 소속으로 변경됨.
    • 양주(涼州): 폐지되어 옹주에 병합됨.
    • 기주: 10군(郡)이 위공(魏公)의 식읍으로 설정되어 위국(魏國)에 소속됨.
    • 유주·병주: 폐지되어 기주에 병합됨.
    • 교주: 폐지되어 각 군이 형주·익주 소속으로 변경되었으나, 실제로는 손권의 영역이라 실현되지 못함.
  • 220년: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사례교위와 유주·병주·양주(涼州)자사를 다시 설치함.
  • 222년: 위나라가 자신의 형주 영역을 분할하여 영주(郢州)를 설치했으나 취소함.[1] 손권이 여범을 양주목(揚州牧)으로 임명함.
  • 226년: 오나라에서 교주를 분할해 광주(廣州)를 설치하려 했으나 취소함.[2]
  • 238년: 동연의 패망으로 평주가 폐지되어 원상복구 됨.
  • 263년: 촉한 멸망. 교주의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위나라에 투항함. 사마소가 익주를 분할해 양주(梁州)를 설치함.
  • 264년: 오나라에서 교주를 분할해 광주를 설치함.
  • 269년: 서진이 옹주의 농우 지방을 진주(秦州)로 분할함.
  • 271년: 서진이 익주의 남중 지방 일부를 분할해 영주(寧州)를 설치함. 오나라가 교주 3군을 회복함.
  • 276년: 서진이 평주를 다시 설치함.
  • 280년: 서진이 삼국을 통일한 뒤 사례교위를 폐지하고 사주(司州)자사를 임명함.[3]

2.1. 지방 행정구역 단위

군현제에 따른 지방 행정구역 단위는 군-현·도-향 3단계로 나뉜다.
  • 군(郡): 상급 행정 단위. 수(守)가 임명되는데, 한나라 때 태수로 바뀌었다.
  • 현(縣): 여러 개의 향을 관할하는 중급 행정 단위. 령(令)이나 장(長)이 임명된다.
  • 도(道): 이민족들을 대상으로 하는 현급 행정구역. 령(令)이나 장(長)이 임명된다.
  • 향(鄕): 현급 행정 단위 아래에 위치하는 기초 행정 단위. 현에서 색부(嗇夫)를 보내 업무를 담당시켰다.
  • 리(里): 향의 치소인 읍(邑)·취(聚) 내부나 전지(田地) 인근에 있는 거주 구획으로, 엄밀한 의미에서 지방행정 단위는 아니다.

관례상 제후의 식읍은 '국(國)'으로 구분하였는데, 이를 봉국(封國)이라 한다. 봉국을 소유한 제후가 통치권을 가지고 있어, 제후가 임명한 상(相)이 그 통치권을 대행하는 구조였다. 진(秦)나라 때는 이러한 식읍들 위에 현(縣)이 설치된 개념이었기에, 식읍에 어느 정도 독자성이 인정되어도 현의 행정력과 사법권을 넘어서는 수준으로 양립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진나라가 무너지면서 여러 개의 군(郡)을 자신의 영토로 갖는 왕(王)이 등장했고, 열후나 공주가 장악한 봉국은 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통치를 하게 되었는데, 전한이 성립된 이후에도 이런 양상이 지속되어 군국제의 형태로 정립되었다. 오초7국의 난을 거치고 추은령(推恩令)이 시행되자, 왕(王)의 봉국은 점차 1개 군(郡) 수준으로 줄어들었으며, 각 국의 상(相)은 더 이상 제후가 아니라 황제가 임명하는 관직이 되어, 왕·열후·공주 등은 명목상 봉국의 통치자일 뿐, 실제로 그 봉국은 황제가 통치하는 지방 행정구역 단위 중 하나가 되어버렸다. 또한 열후 등의 수조권도 박탈하여 수여된 식읍의 호(戶) 단위에만 맞춰 그에 해당하는 급여를 지급하는 것으로 대체했다.

따라서 왕의 봉국은 군(郡)과 동급의 행정구역으로 간주되었고, 그 아래에는 현(縣)이 있었다. 열후에 책봉되거나 이왕삼각의 예에 따라 공(公)의 칭호를 받게 된 제후들의 봉국은 현(縣) 동급의 행정구역으로 간주되어, 새로운 책봉이 이뤄지면 그 봉국을 현에서 독립시켰다. 현과 동급의 봉국은 왕의 경우와 구분하기 위해 보통 '후국(侯國)'으로 통칭했다. 공주와 같이 열후로 책봉되지 않는 사람이 명목상 통치권을 갖는 식읍을 하사받으면 마찬가지로 현에서 독립시켰는데, 이 경우 국이라 하지 않고 '읍(邑)'이라고 불렀다. 읍에는 상이 임명되지 않고 그대로 령(令)·장(長)이 임명되었다.

후한 광무제는 열후 등이 책봉되면 그 봉국을 무조건 현에서 독립시키는 것이 인력 낭비가 심하고 매우 비효율적이라고 생각하여, 열후를 식읍의 규모에 맞춰 현후(縣侯)-향후(鄕侯)-정후(亭侯) 3단계로 구분하고, 정후는 정부(亭部)를, 향후는 향을, 현후는 현을 봉국으로 삼아, 현후의 경우에만 봉국을 현에서 독립하도록 만들었는데, 사실 그마저도 기존의 현을 국으로 개편한 것이 대부분이었다. 후한 말에는 현후-도향후(都鄕侯)-향후-도정후(都亭侯)-정후 5단계로 늘어났는데, 마찬가지로 열후가 보유한 식읍의 규모에 따른 구분이었다. 본래는 식읍의 규모만 의미하고 서열을 의미하는 개념은 아니었는데, 위나라 때부터는 열후 내의 서열로 규정되었다.

후한 말에는 군웅들이 열후를 자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친족·부하나 동맹 측 인물들까지 제멋대로 열후로 책봉했다. 자신의 영역 내 지역에 열후를 책봉한 것도 아니었고, 멋대로 임명된 열후의 식읍이 실제 봉국으로 운영될 리도 없었다. 작위의 이름만 있을 뿐 봉국은 운영되지 않고, 그저 수여한 식읍 규모만큼 규정된 별도 급여를 받는 형태의 책봉을 학자들은 '허봉(虛封)'이라고 하는데, 삼국시대에는 이러한 허봉이 일반적인 책봉 형식이 되었다. 촉한과 오는 황족들마저 대놓고 위나라의 영역을 식읍으로 수여했다.[4] 위나라의 경우에는 황족들만 봉국을 설치하고 그 외에는 허봉이었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264년에 사마소가 도입한 오등작이 실제 봉국을 설치하는 것으로 열후와 차별화되었기 때문이다.

다만 오등작도 현왕 미만은 실제 군·현이 아닌 관념상 리(里) 단위로 설정된 봉국을 받았으므로, 왕으로 책봉되거나 이왕삼각의 예우를 받는 경우에만 식읍으로 받은 군·현이 봉국으로 개편되었다. 군공이나 군후 또한 원칙적으로 그 식읍이 봉국으로 개편되지는 않았으며, 275년에 개국공신으로 추숭된 인물들의 식읍만 봉국으로 격상되었다. 따라서 군급 봉국 아래에 다른 제후의 봉국이 설정되기도 했고, 같은 현에 여러 봉국이 설정되기도 했다. 이런 경우에는 별명이나 옛 지명을 사용하여 봉호(封號)를 달리하였다. 현후 이상이 책봉된 군·현의 장관은 이전처럼 상(相)으로 임명했다. 289년에 왕국의 상이나 왕국에 소속된 지군(支郡)의 태수는 내사(內史)로, 오등작 봉국이 있는 현의 상은 국상(國相)으로, 현후 식읍이 있는 현의 상은 후상(侯相)으로 구분했다.

위에서 살펴본 대로 지방 행정구역 단위는 실질적으로 군·국(왕국)-현·도·국(후국)·읍-향·국 3단계의 6종류가 되었다. 각급 단위에 임명되는 지방관은 아래와 같다.
  • 태수(太守): 군(郡)의 장관으로, 당시에는 황제 직속의 제후와 같은 존재로 여겨지기도 했다. 현령 등과 가장 큰 차이를 갖는 것은 군사권이라고 할 수 있는데, 태수들은 자신의 임지에서 군대를 편성하여 임지 바깥으로 출정할 수 있는 권한을 가지고 있었다.[5] 각종 기록에서 태수가 군 지휘관으로 등장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 상(相): 국(國)의 실질적인 장관. 태수나 현령 등으로 불리지 않고 국호에 따라 '○○상'으로 불렸다. 봉국의 등급에 따라 명칭은 구분되지 않았으나, 왕국(王國)의 상은 태수와 동급, 후국의 상은 현령과 동급으로 취급되었다. 의전상 서열은 동급의 태수나 현령보다는 앞서긴 한 듯.
  • 도위(都尉): 원래는 각 현 단위에 파견된 위(尉)를 통솔하는 직책으로, 왕국에선 중위(中尉)가 도위 역할을 맡았다. 후한에선 원칙적으로 도위를 폐지해 치안 업무는 태수가 맡도록 했는데,[6] 군의 영역이 너무 넓거나 치안 상황이 악화되면 태수가 이를 모두 감당하기 어려운 만큼, 특별한 사정이 있을 때는 도위를 두었다.
  • 령(令)·장(長): 현급 행정구역의 장관. 1만 호(戶) 이상일 때 령이, 1만 호 이하에는 장이 임명된다.[7]
  • 위(尉): 현급 행정구역마다 보통 1명씩 임명되는 치안 분야 총책임자이다.[8] 령·장의 지휘를 받지 않는 별개의 직책으로, 전한 때에는 도위의 지휘를 받았으나 후한 때에는 도위가 폐지되었기에 태수가 직접 통솔하게 되었다.
  • 승(丞): 현대에 쓰이는 표현대로라면 '행정 수석 보좌관' 정도의 의미를 갖는 보편적인 관직명으로, 지방에서는 태수·상·도위·령·장의 보좌관이었으나 실질적으로 행정 업무를 총괄했다.[9]
  • 장사(長史): 일부 군이나 도위부에는 승보다 서열이 높은 장사가 임명되기도 했다. 요동속국 장사였던 공손찬의 사례를 볼 때, 승과 장사의 차이점은 태수의 군권까지 대행할 수 있는가에 따른 것 같다.

진(秦)·한(漢)에는 '부(部)'라는 이름을 갖는 권역도 있는데, 이것은 어느 관리의 그 임무 책임이나 권한이 미치는 범위, 즉 관할구역을 의미하는 개념이다. 예를 들면, '정부(亭部)'는 정장(亭長)의 책임 범위에 가까운 개념으로 몇 개의 리(里)에 걸쳐 있는데, 그렇다고 하여 그 정장이 정부에 소속된 리를 담당하는 행정관이 되는 것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정장 본연의 책임과 권한이 그 리에만 미친다는 개념이다. 따라서 '○○부'가 여러 행정구역에 걸쳐 설정되더라도, 그 관리가 그 부에 소속된 행정구역 장관들의 상관이거나, 그의 지시를 받는 개념이 결코 아니다. 감찰관의 감찰 범위 개념인 자사부(刺史部)나 독우부(督郵部)도 마찬가지 개념이며, 도독부(都督部) 또한 어디까지나 도독의 작전통제권 행사 범위만을 의미할 뿐, 결코 태수나 현령 등을 통할하는 개념의 행정구역 단위는 아니다.

도위부(都尉部)는 경우에 따라서 행정구역이기도 했다. 진나라와 전한에서는 원칙적으로 군(郡)에 도위 1명만을 두었으나, 군의 관할 영역이 넓을 경우에는 여러 명의 도위를 두었는데, 이럴 때 도위부는 본 군의 도위와 별개로 임명된 도위가 맡는 단순한 경비구역을 지칭하는 것이었다. 후한 때에는 원칙적으로 군에 도위를 두지 않게 되었으므로 특수한 사정으로 도위가 설치되면 그 도위가 담당하는 권역이 곧 도위부가 되었는데, 후한 때 설치된 도위들 중에는 간혹 치민(治民) 권한이 부여된 경우가 있었다. 치민 권한을 갖는 도위부는 당대에도 군과 동격의 행정구역으로 인식되었고, 정식으로 군으로 독립한 상태가 아님에도 이를 군(郡)으로 칭하는 사례들도 보인다. 마찬가지로 도위를 태수로 오인하는 경우도 있다. 특히 이런 도위부는 결과적으론 군으로 독립하기에 도위부 설치를 군 분할의 준비단계 정도로 볼 수 있다.

속국도위(屬國都尉)는 더 복잡하다. 이 관직은 흉노의 혼야왕(渾耶王)이 투항하자 혼야왕의 영지에 장액군(張掖郡)을 설치하면서, 장액군에 원래 중앙의 전속국(典屬國)이 담당해야 할 임무를 대신할 관리로써 도위를 파견하여 만들어진 관직이다.[10] 후한안제는 이민족이 대부분을 차지하는 변경 지역에는 최소한의 한인(漢人)만 몇 개의 현(縣)에 남겨두어, 별도로 속국도위를 파견해 그로 하여금 이민족들을 징집하여 치안 업무를 담당하게 하고, 도위 관할구역 내의 현에 있는 한인의 치민 권한까지 부여했다. 따라서 안제 때 설치된 건위·광한·요동·촉군·장액거연·주천속국도위와 그 이후에 설치된 경우에는 그 도위부를 군과 독립된 동격의 행정구역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는데, 기존에 설치되어 있던 다른 속국도위들은 별개의 행정구역으로 볼 수 없다.

또한 둔전제가 시행되고 있던 구역에는 전농도위(典農都尉)·전농교위(典農校尉)·전농중랑장(典農中郞將) 등이 보내졌는데, 이들은 명백히 치민 권한을 갖는 지방관들이라, 이들의 부(部)는 엄연한 독립된 행정구역으로 봐야 한다.[11] 오나라에는 현 자체를 폐지하고 그 대신에 교위나 도위 등을 임명한 사례가 있다. 그러나 각 군의 도위·속국도위나 전농관들은 원칙적으로 해당 지역 태수의 관할을 받는 관직이었으며, 공손도가 요동태수로 부임한 뒤에 사적 원한이 있던 속국도위 공손소를 양평으로 소환해 때려죽인 사례가 있을 정도다.

혹자는 속국도위부를 이민족 특별자치구역 개념으로 보기도 한다. 그러나 후한은 기본적으로 어디에서든 이민족들을 직접 군·현에 소속시켜 통치하려 하지 않았고, 그저 이민족 수장들을 읍장(邑長)·읍군(邑君)·귀의후(歸義侯)·솔중왕(率眾王) 등으로 책봉해 조세와 징병의 의무 정도만 부과하는 방식을 선호했기에, 이를 자치구역 개념으로 보는 것은 적절하지 못하다. 속국도위는 어디까지나 별개의 군(郡)으로 분할해 운영하는 것이 지나친 낭비라 여겨서 설치했던 것에 불과했다. 간혹 이민족들을 징집할 수 있는 권한을 중랑장·교위·호군 등의 관직 형태로 부여하고, 이민족 각 부락을 그 예하 부대인 부(部)로 편성하여, 이민족들에 대한 징병을 법제화하기도 했다. 이런 관직은 보통은 태수나 자사가 겸임했지만, 따로 독립적으로 운영되기도 했다. 또한 위나라 때는 이민족 수장들도 이민족 편성 부대의 중랑장(中郞將)·도위(都尉)·백장(伯長) 등으로 임명하기도 했다.

2.2. 군웅할거 세력도(190~220)

 
[[삼국지/지명/량주|
양주(凉州)
]]
(한수, 장맹, 조조)
[[삼국지/지명/병주|
병주(幷州)
]]
(정원, 장연, 고간, 조조)
[[삼국지/지명/유주|
유주(幽州)
]]
(공손찬, 공손도, 원소, 조조)
[[삼국지/지명/기주|
기주(冀州)
]]
(한복, 원소, 조조)
[[삼국지/지명/옹주|
옹주(雍州)
]]
(동탁, 이각, 마등, 조조)
[[삼국지/지명/사례교위부|
사례(司隸)
]]
(동탁, 장양, 왕읍, 조조)
[[삼국지/지명/연주|
연주(兗州)
]]
(교모, 장막, 유대, 조조)
[[삼국지/지명/청주|
청주(靑州)
]]
(장각, 공융, 원담, 조조)
  [[삼국지/지명/예주|
예주(豫州)
]]
(공주, 원술, 조조)
[[삼국지/지명/서주|
서주(徐州)
]]
(도겸, 유비, 여포, 조조)
 
[[삼국지/지명/익주|
익주(益州)
]]
(유언, 장로, 유비, 맹획)
[[삼국지/지명/형주|
형주(荊州)
]]
(원술, 유표, 장수, 조조, 손권, 유비)
[[삼국지/지명/양주|
양주(揚州)
]]
(원술, 유요, 엄백호, 왕랑, 손책, 조조)
 
 
[[삼국지/지명/교주|
교주(交州)
]]
(사섭, 손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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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사례교위부(司隸校尉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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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동탁이각·곽사: ~198
    189년 십상시의 난의 난으로 하진이 피살 당한 뒤에 동탁은 정권을 장악하여 하진의 세력을 흡수했다. 동탁의 정권 장악에 반발하여 반동탁연합이 결성되었고, 191년 2월에 연합군에 가담한 손견양인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위협을 느낀 동탁은 관중 지방의 장안으로 천도하여 삼하 및 홍농군 일대를 포기했다. 동탁은 192년에 왕윤여포에게 피살되었고, 왕윤과 여포를 축출한 이각·곽사가 주도하는 연립정권이 형성되었다. 195년에 헌제 이각과 곽사가 대립하는 틈을 타서 장안을 탈출했고, 헌제를 놓치면서 이각과 곽사의 세력은 점차 와해되었다. 결국 헌제를 확보한 조조의 공격을 받아 198년에 멸망했다.
  • 주준: 191~192
    동탁이 장안으로 천도할 당시 주준은 낙양에 남아서 주둔하고 있다가 반동탁연합에 합류하였다. 192년에 동탁이 죽자 자신이 능히 이각과 곽사 등을 통제할 수 있을 것이라 오판하여 장안으로 옮겼으나, 명예직인 태위에 임명되면서 실권을 잃었다.
  • 장양수고: 192~199
    장양은 반동탁연합군으로 활동하였으나 원소공손찬의 대립이 거세지면서 192년에 동탁의 회유로 원소를 떠나 하내태수가 되었다. 삼보의 난 당시 헌제에 합류하려고 하였으나, 양봉·동승 등과 충돌하면서 하내군으로 돌아왔다. 198년에 조조가 서주를 장악한 여포를 공격하자 여포에 호응하였지만 큰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부하인 양추에게 피살당했으며, 세력은 양추를 죽인 수고에게 넘어갔다. 수고는 원소에 호응하여 조조와 맞섰으나, 조조가 보낸 악진·서황 등에게 멸망당했다.
  • 장제: 192~195
    이각과 곽사가 정권을 잡은 뒤 홍농군에 주둔했는데, 두 사람이 반목하자 헌제를 홍농으로 옮겨 정권을 장악하려 획책했으나 무산되었다. 헌제가 낙양으로 탈출하는 데 성공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으나, 마침 원술의 세력이 형주 남양군에서 철수하면서 식량을 확보하고자 남양군으로 세력을 옮겼다.
  • 왕읍: ?~205
    삼보의 난 당시 하동태수였으며, 고간이 조조를 배반할 무렵에 종요의 탄핵을 받았다. 왕읍의 속관이었던 위고(衛固)와 범선(范先)은 고간에게 호응하고자 왕읍의 복직을 요구하면서 군권을 반납하지 않고 버텼으나, 왕읍은 직접 허도로 가서 태수의 관인을 반납했다. 왕읍의 후임으로 두기가 임명되었고, 반란을 일으킨 위고와 범선 등은 두기에게 토벌되었다.
  • 단외: 195~198
    삼보의 난으로 이각과 곽사가 분열하는 동안 홍농군 화음현에 주둔하면서 독자세력이 되었다. 당시 장안을 탈출한 헌제를 영접하고자 했으나 후장군 양정과의 대립으로 무산되었으며,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한 이후 배무를 보내 이각과 곽사를 토벌하려 하자 조조의 세력으로 합류했다.
  • 조조위(魏): 196~
    협천자 이후 이각·곽사의 잔여세력을 토벌하고, 장안에 사례교위 종요를 주둔시켜 관중제장들을 관리하게 했다.

2.4. 연주(兗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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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교모: ~191
    반동탁연합을 주도했던 동군태수였으나, 연합군이 해산된 뒤에 연주자사 유대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장막장초: ~195
    장막은 반동탁연합 이전부터 진류태수를 맡고 있었으며 원소·조조와 친분이 있었다. 하지만 원소와는 반목하게 되었는데, 원소는 동군태수로 임명한 조조를 시켜 장막을 토벌하려 했으나 조조의 거부로 무산되었고, 장막은 원소에게 축출당한 한복이나 여포 등을 받아들이면서 원소를 자극했다. 194년에 조조가 도겸을 다시 공격하자 장막은 보호하고 있던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우며 조조에게 반기를 들었고, 연주의 군·현 대다수가 조조에게 이탈했다.[12] 연주에 잔류하고 있던 하후돈순욱 등이 조조가 서주에서 회군할 때까지 견성현(鄄城縣)·범현(范縣)·동아현(東阿縣)을 유지하며 버티는데 성공했고, 마침 메뚜기가 대량으로 발생하면서 조조와 장막 양측의 공방이 장기화되었다. 원소의 지원을 받아 세력을 회복한 조조가 반격을 개시하면서 반조조 세력은 와해되어, 여포는 서주로 도주하고 장막은 부하에게 피살당했다. 장막의 동생 장초는 옹구현(雍丘縣)에서 끝까지 농성하였으나 성이 함락되면서 자결했다.
  • 유대김상: 189~193
    유대는 동탁이 임명한 연주자사였으나, 반동탁연합에 참여했다. 이후 192년에 청주의 황건적을 토벌하다가 전사했는데, 유대의 세력은 평원상 포신진궁의 설득으로 조조에 합류했다. 조정에서는 유대의 후임으로 김상을 보냈는데, 세력이 없는 김상은 원술에게 의탁하여 진류군 봉구현(封丘縣) 일대를 점거했지만, 조조는 193년에 연주 일대에서 원술의 세력을 완전히 격퇴했으므로 김상도 함께 축출된 것으로 판단된다.
  • 공손찬: 191~193?
    부하인 선경을 연주자사로 임명하여 보냈는데, 계교 전투 이후 공손찬이 도겸을 동군 발간현(發干縣)에 주둔시켰던 것으로 보아 기주와 청주 인근의 군·현을 장악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공손찬이 유우를 살해한 뒤로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면서 선경 또한 연주에서 축출당한 것으로 추측된다.
  • 조조위(魏): 191~
    반동탁연합 와해 이후 원소의 부하로 활동하다가, 191년에 원소의 명령으로 동군의 흑산적을 토벌하여 원소에 의해 동군태수로 임명되었는데, 시기적으로 교모가 멸망한 이후로 보인다. 이듬해 연주자사 유대의 세력을 흡수하게 되자 원소는 조조를 연주목으로 추대했으며, 이후 조정에서 임명한 연주자사 김상과 공손찬이 임명한 연주자사 선경 등을 축출하여 연주를 장악했다. 194년에 서주에 재차 침공하던 도중 진류태수 장막의 공격을 받아 위기에 빠졌으나 반격에 성공하여, 이듬해 장막 세력을 멸망시키고 조정에서 연주목 지위를 정식으로 승인받았다.
  • 도겸: 193
    천자를 자칭한 궐선과 함께 태산군의 화현(華縣)·비현(費縣) 등을 점거하고 임성국 일대까지 진출했는데, 곧 궐선을 죽이고 세력을 흡수했다. 하지만 같은 해 조조의 침공을 받아 세력이 위축되었는데, 이때 차지하고 있던 연주 영역을 잃은 것으로 추측된다.

2.5. 예주(豫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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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총: ~197
    진왕(陳王) 작위를 세습한 황족으로, 본래 이 시점의 제후왕은 실권이 없는 명예직에 가까운 존재였으나, 황건적의 난을 기점으로 후한 조정의 통제력이 약화되고 변란에 휘말린 제후왕들이 봉국을 버리고 도주하는 와중에도 유총은 봉국을 지키는데 앞장섰기에, 당시 진국상 허창의 협조로 세력을 모을 수 있었다. 반동탁연합 와해 이후 유총은 보한대장군(補漢大將軍)을 자칭하여 할거했으며, 허창의 후임인 낙준과 함께 세력을 이끌었다. 원소를 축출하여 예주를 장악한 원술은 진국(陳國)에 병량을 보낼 것을 요구했지만 유총과 낙준에게 거부당하자, 이에 원한을 품고 197년에 자객 장개양을 보내 두 사람을 제거하여 유총의 세력은 와해되었다.
  • 이통: ~200
    여남군의 낭릉현(郎陵縣)·양안현(陽安縣) 일대에서 할거하던 군소 군벌로, 198년에 조조에게 세력을 인정받아 양안도위로 임명되었다. 관도대전 직전에 예주의 여러 군·현이 원소에 호응하는 와중에도 이통은 조조를 지지했고, 그 보답으로 관도대전 이후에 여남태수로 승진했다. 이통의 독자 세력은 이 시점을 기준으로 조조에게 완전히 흡수된 것으로 판단된다.
  • 공주: 189~191?
    동탁에 의해 예주자사로 임명되었으나 반동탁연합에 가담했다. 191년에 원술과 원소가 제각기 예주자사를 내세운 점으로 보아 그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정된다.
  • 원술: 191~197?
    사실상 수족처럼 부리던 손견을 예주자사로 내세우며 예주 일대의 군·현을 장악했다. 원소 세력을 예주에서 축출한 이후에 예주에서 가장 강력한 세력을 이뤘으나,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하면서 점차 영향력이 약화되었는데, 197년에 황제를 참칭하면서 영향력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판단된다.
  • 원소: 191~193, 200
    손견이 동탁과 싸우고 있는 틈을 타서 원소는 주우를 예주자사로 내세우며 영천군 양성현(襄城縣)을 차지했는데, 이에 원술은 공손찬과 동맹을 맺어 원소와 맞섰고, 주우는 손견과 대치하면서 열세를 보였다. 193년에 원소가 주우의 형인 주앙을 구강태수로 임명하여 원술을 공격하게 하자, 주우도 참전했으나 원술 세력의 손분에게 크게 패했다. 주우는 예주로 복귀하지 않고 고향인 회계군으로 돌아갔는데, 이 때에 세력을 완전히 잃은 것으로 추측된다.
  • 도겸유비: ?~197
    193년에 조조의 침공을 받은 이후, 공손찬이 보낸 원군 중 하나였던 유비를 예주자사로 내세우며 소패(패국 패현)에 주둔시켰다. 이를 보면 최소한 193년 이전에 예주 동부 일대로 진출하여 세력을 형성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194년에 도겸이 죽자 유비는 도겸의 세력을 물려받아 서주목이 되었으며, 연주에서 쫓겨난 여포를 받아들여 소패에 주둔시켰다. 하지만 196년에 유비가 원술과 싸우는 틈을 타서 여포는 서주를 차지했고, 유비는 이듬해에 여포와 화해하여 다시 소패에 주둔하게 된다. 유비가 세력을 다시 모으자 이를 경계한 여포는 유비를 재차 공격했고, 유비는 조조에게 의탁했다. 조조는 유비를 정식으로 예주목에 임명했고, 여포와 원술을 견제하게 만들었다. 여포가 제거된 이후 의대조 사건을 전후하여 유비는 다시 서주를 차지했지만, 조조의 공격을 받아 쫓겨나 원소에게 의탁했다. 원소는 조조를 공격할 명분 중 하나로 의대조 사건을 이용했는데, 출신지인 여남군을 중심으로 예주의 여러 군·현이 원소에 동조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소는 이 무렵에 유비를 여남군으로 보내서 유벽 등과 함께 허도를 공격하도록 했는데, 관도대전에서 크게 패하면서 다시 예주 일대의 영향력을 잃었고, 유비는 형주의 유표를 의지하게 된다.
  • 조조위(魏): 193?~
    『삼국지』 무제기에는 193년에 조조가 봉구현을 공격한 것을 시작으로 원술을 구강군 수춘현(壽春縣)으로 쫓아낸 것으로 기술되어 있어, 이 무렵을 기점으로 예주를 장악한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원술은 여전히 예주에서 세력을 유지하고 있던 점에서, 조조의 세력이 예주 일대에 진출하기 시작한 것을 과장한 기록으로 보인다. 이후 조조는 도겸을 공격하다가 장막의 기습을 당해 본거지인 연주에서조차 일시적으로 세력을 잃었다. 협천자 이후 조정을 장악하면서 예주 일대의 공권력을 확보했으며, 원술이 황제를 참칭하고 유총을 죽인 것을 계기로 본격적으로 원술을 공격하기 시작했다. 이후 원술과 여포의 세력이 몰락하면서 예주를 통일했다.

2.6. 기주(冀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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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복원소원상: 189~204
    동탁이 정권을 차지한 이후에 발해군 일대에서 할거하던 원소를 발해태수로 임명하면서, 원소를 감시하기 위한 목적으로 한복을 기주목으로 임명해 보냈다. 반동탁연합이 결성되면서 한복은 대세에 떠밀려 이를 추인할 수밖에 없었으나, 원소의 활동을 방해했다. 한복의 부하였던 국의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실패했는데, 191년에 원소는 공손찬과 야합하여 한복을 협박해 기주목 직위를 강탈했다. 이후 192년 계교 전투에서 공손찬을 격파하면서 기주 지방 대부분을 장악했다. 202년에 원소가 죽은 뒤 세력은 삼남인 원상이 물려받았으나, 장남인 원담과 조조의 협공을 당해 기주에서 물러나게 된다.
  • 공손찬: 191~199
    원소가 기주를 차지한 이후, 원소는 주우를 예주자사로 내세우며 원술과 대치했다. 공손찬은 이때 원술을 도와 원소를 견제하기 시작했고, 엄강을 기주자사로 임명했다. 하지만 계교 전투에서 크게 패하면서 엄강은 처형당하게 된다. 193년에 역후(易侯)로 봉해졌는데, 이를 기점으로 하간군 역현(易縣)에 역경루라는 성채를 쌓고 세력의 근거지로 삼게 된다. 195년에 포구(鮑丘)에서 패배한 뒤 역경에 틀어박혀 4년간 버텼으나, 결국 성이 함락당하자 남은 가족들을 모두 죽이고 분신했다.
  • 조조위(魏): 204~
    원상에게서 위군 업현(鄴縣)을 점령한 뒤, 같은 해에 원상과 원담 형제를 구축하여 기주 전역을 장악했고, 연주목 직위도 기주목으로 옮겼다.

2.7. 유주(幽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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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손찬: ~195?
    후한 말부터 유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무장으로, 오환족장거·장순의 난을 토벌하면서 엄청난 활약으로 명성을 쌓았는데, 이러한 공적으로 191년에는 분무장군(奮武將軍) 및 계후(薊侯)로 봉해졌다. 이후 명성과 휘하의 병력에 근거하여 유주 서부 지방을 중심으로 할거하는 군벌이 되었다. 군웅할거 초기에는 주변의 기주·병주·청주에 측근들을 자사로 임명해 보냈을 정도로 하북 지방에서 매우 강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유주목 유우와의 불화가 극심하여 결국 193년에 유우를 살해하면서 단훈을 유주자사로 내세우고 만다. 이를 기점으로 민심을 잃어 세력이 급속도로 위축되었고, 195년부터는 역경(易京) 일대에서 농성할 뿐 유주 지방에서 세력을 완전히 잃었다.
  • 유우선우보: 189~205
    장거·장순의 난 토벌을 위해 유주목으로 파견되었는데, 당시 유주 지방에서 활동하던 공손찬과 반목하였다. 반동탁연합이 결성된 이후에도 특별히 세력을 형성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이나, 유주 서부를 근거지로 할거하는 공손찬을 견제하면서 불화가 극심해졌다. 결국 공손찬이 반동탁연합 결성 당시에 유우가 원소에 의해 황제에 추대되었으나 거절했던 일을 들어 유우를 모함하고 끝내 처형하고 만다. 이에 유우의 종사였던 선우보는 염유를 오환사마로 내세우며 세력을 모았고, 원소는 억류하고 있던 유우의 아들인 유화를 내세우며 반공손찬 선전을 이어갔다. 이윽고 선우보는 공손찬이 임명한 어양태수 추단을 살해하고 어양태수를 자처했다. 선우보·오환족과 원소의 연합에 공손찬의 세력은 위축되었고, 유주 서부는 원소가 장악하게 되었다. 하지만 선우보는 독자행보를 이어가다가 원소가 조조와 반복하자 조조를 지지했으며, 이후 조조의 세력이 유주에 진입하자 이에 합류하여 조조의 오환 정벌에 종군하기도 했다.
  • 공손도공손강공손공공손연: 189~238
    요동태수로 임명된 공손도는 190년 무렵에 요동후(遼東侯)를 자칭하며 유주 동부 지방을 장악했다. 공손도의 세력은 대를 이어 세습되었는데, 208년에 원소 일가의 원희·원상 형제가 망명해 오자 그들을 참수하여 그 목을 조조에게 바친 이후로 조조의 추인을 받게 된다. 하지만 제갈량이 죽은 이후 한동안 촉한 및 오나라와의 전선이 소강 상태에 이르게 되자, 위나라는 본격적으로 공손연을 토벌하기로 한다. 237년에 유주자사 관구검을 격퇴한 공손연은 연왕(燕王)을 자칭하며 완전한 독립을 시도했으나, 이듬해 사마의에게 토벌되어 멸망했다.
  • 원소원희·원상: 195?~208
    공손찬이 몰락한 것을 계기로 유주 서부를 차지했으며, 이후 자신의 차남인 원희를 유주자사로 보냈다. 원소가 죽은 뒤에 원희는 동생인 원상을 지지했으나, 형인 원담과 조조의 협공을 받아 원상이 기주에서 축출되었다. 이후 원희·원상 형제는 조조에 항거하는 오환족들을 모아 저항 활동을 지속했지만, 3군 오환의 수령인 답돈이 요서 지방의 백랑산(白狼山)에서 패사하면서 근거지를 완전히 상실하고 공손강에게 망명하는 처지가 되었다. 하지만 공손강은 이들을 죽이고 조조와 화친했다.
  • 조조위(魏): 205~
    원희 휘하의 초촉이 유주자사를 자칭하며 반란을 일으키자 원희·원상 형제는 오환 땅으로 도주했고, 초촉은 곧 조조에게 투항했다. 이 공으로 초촉은 탁군태수에 임명되고 열후로 봉해졌다. 이후 조조는 원씨 일가를 지지하던 오환 정벌을 시작하여 원씨 가문의 잔여세력을 완전히 소탕했다.

2.8. 병주(幷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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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원
    십상시의 난 당시의 병주자사. 동탁이 집권하는 과정에서 가장 유력한 경쟁 세력이었기에 여러 매체에서 중요하게 다뤄진다. 다만 정원이 활동하던 시기는 군웅할거 이전에 해당되며, 정원은 병주 전역을 호령하던 대세력가가 아니라 단순히 병주자사로서 병주 각지에서 징발된 병력을 지휘하고 있던 것에 불과했다.
  • 남흉노: ~216
    흉노는 후한 초기 팽총의 반란에 합세하여 병주 일대를 차지했는데, 호한야 선우 때 남·북으로 분열되고 48년에 남흉노의 혜락시축제 선우가 한에 귀부하면서 후한에 종속되었다. 215년에 조조가 오원군·삭방군·운중군·정양군 4군을 폐지하면서 그 일대에 거주하던 남흉노 또한 강제로 이주시키고 5부로 나눴으며, 216년에는 남흉노 선우 호주천업성에 억류하여 좌현왕 유표와 우현왕 거비를 통해 남흉노를 통제했다.
  • 흑산적: 184?~205
    후한 말기에 병주 전역에서 활동하던 집단. 장연이 이 세력의 대표격으로 거론된다. 흑산적 집단의 규모가 100만에 이르러 이들을 토벌할 방법이 없어지자, 185년에 조정에서는 장연을 평란중랑장으로 임명해 그 세력을 추인할 정도였다. 이후 공손찬과 연합하여 원소를 견제했는데, 193년에 원소의 객장으로 활동하던 여포의 활약으로 세력이 다소 위축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205년에 조조가 원희·원상을 격파하자, 장연은 조조에게 귀부하여 평북장군(平北將軍)에 임명되고 안국정후(安國亭侯)로 봉해졌다.
  • 백파적: 188~195
    병주 남부의 서하군 일대에서 활동하던 황건적의 잔당. 이름도 이들의 근거지인 백파곡(白波谷)에서 근거했다. 군웅할거 이후 가장 두각을 나타내던 것은 한섬양봉으로, 삼보의 난 당시에 헌제에게 포섭되어 헌제의 장안 탈출을 돕는 중대한 역할을 맡았었다. 하지만 이후 협천자에 성공한 조조와 대립하다가 실각하여, 세력을 잃고 원술에게 의지하게 된다.
  • 공손찬: 191~193?
    수하인 추단을 병주자사로 임명했다. 추단은 194년에 선우보의 공격을 받아 죽을 당시에는 어양태수를 맡고 있었는데, 아마도 공손찬이 유우를 살해하면서 세력이 위축되어 유주로 물러났던 것으로 보인다.
  • 원소고간: 193?~206
    원소가 기주를 장악한 뒤에 공손찬의 세력이 위축되면서 병주 일대에 영향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던 것으로 추측되며, 흑산적인 장연과 공방을 이어갔다. 원소는 외조카인 고간을 병주자사로 임명했다. 202년에 원소가 죽은 뒤, 원담이 조조와 연합하여 원상을 공격하자 고간 또한 조조에 합류해 세력을 추인받았다. 조조가 오환 정벌을 시작하자 그 틈을 타고 반기를 들어 사례 지방을 침공했으나, 조조에게 격퇴당하여 남흉노를 의지하려 했는데, 좌현왕 유표에게 거부당했고, 형주로 망명하던 도중에 부하에게 살해당해 멸망했다.
  • 조조위(魏): 205~
    205년에 장연과 고간의 귀부를 받아들인 것을 시작으로 병주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215년에 오원군·삭방군·운중군·정양군 4군을 폐지하여 그 주민들을 신흥군에 교치하고, 남흉노를 그 주변에 배치시켰다.

2.9. 옹주(雍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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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년에 장안으로 천도한 이후 동탁이각·곽사의 세력은 관중 지방에 위치하였으나 편의상 사례교위부 문단에 포함시켰다. 한수는 관중제장 중 한 명으로 분류되지만, 농우 지방에 근거한 세력인 만큼 량주 문단에 별도로 포함시켰다. 또한 관중제장의 세력이 존속한 시점에 관중 지방은 사례교위부 소속이었고 농우 지방은 양주(涼州) 소속이었으나, 두 지방 모두 220년 이후로는 옹주에 소속되었으므로 이 문단에 표기하였다.
  • 송건: 184~214
    농서군 부한현(枹罕縣)을 차지하여 하수평한왕(河首平漢王)을 자칭했던 인물이다. 214년에 하후연에게 토벌당해 멸망했다.
  • 관중제장: 192~211
    마등, 후선, 정은, 이감, 장횡, 양흥, 성의, 마완, 양추 등 관중 지방에 세력을 두고 있던 군소 군벌들을 통칭하는 개념으로, 한수는 농우 지방의 금성군에 근거한 세력이었으나 편의상 관중제장으로 통칭되고 있다.[13] 정권의 지지 기반이 약했던 이각곽사가 관중 각지에서 할거하고 있던 세력들을 추인하면서 형성되었다. 192년 이후 마등은 우부풍 미현,[14] 양추는 안정군 일대, 양흥은 좌빙익 부현(鄜縣)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고, 그외 나머지는 파악되지 않는다. 이들은 211년에 조조가 한중을 공격한다는 소식에 자신들이 표적이 된 것으로 판단하여 동관(潼關)을 점거하고 조조와 대치하였으나, 세력이 단합되지 못하여 결국 와해되어 격파당했다. 이감·성의는 동관 전투 후 붙잡혀 죽었고, 업에 머물고 있던 마등 일족은 처형당했다. 마초와 한수는 각자 농우 지방으로 물러나 조조와 항전을 이어갔고, 장횡·마완의 행적은 알 수 없다. 양흥은 본거지로 돌아가 약탈을 하다가 이듬해 정혼에게 토벌되었으며, 양추는 조조에게 귀부하여 세력을 보존했다. 후선과 정은은 한중의 장로에게 의지하였는데, 215년에 장로가 조조에게 항복하자 함께 귀부했다.
  • 조조위(魏): 196~
    이각·곽사를 토벌하고 장안을 점거하면서 관중 지방에 진출했다. 동관 전투 이후 212년에 농우 지방에 진입하기 시작하여, 213년에 마초를 한중으로 쫓아내고 214년에 흥국 전투에서 승리하여 한수의 세력을 금성군 일대로 위축시켜, 옹주 전역을 확보했다.

2.10. 양주(涼州), 일명 서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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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웅할거 시기 당시에는 옹주(雍州)였으며, 213년에 양주(涼州)와 통합되었다가 220년에 다시 분할되면서 원래 옹주였던 지역이 양주가 되었다.
  • 한수: 184~215
    본래 북궁백옥·이문후·송양 등이 일으킨 반란에 휘말린 금성군 호족이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이들이 수장으로 내세웠던 변장이 죽자 반란군의 수장으로 추대되었다. 한수는 그들을 죽이고 세력을 차지했으며, 187년에는 농서군과 한양군을 함락시켰다. 이후 마등과 함께 왕국을 수장으로 내세웠으나, 황보숭에게 연달아 패하자 왕국을 살해했다. 이렇게 반란군이 와해되는 위기를 겪었으나, 192년에 정권의 기반이 미약했던 이각·곽사 등이 한수의 세력을 추인하면서 금성군 일대에서 할거하게 되었으며, 이후 장맹을 공격하여 하서 지방을 차지했다. 211년에 조조와 대립하기 시작했고, 214년에 금성군·서평군을 제외한 농우 지방을 완전히 상실했다. 이후 서평군에서 죽으면서 세력은 조조에게 흡수되었다.
  • 장맹: 194~210?
    후한 말 하서 4군을 병탄할 야심을 품어, 조정에 하서 4군을 옹주로 분리시킬 것을 건의한 장본인이다. 이때 무위태수로 임명되고, 옹주자사로는 친구인 한단상(邯鄲商)이 부임했다. 장맹은 하서 지역에 새로운 군을 설치하는 등 한단상을 끼고 옹주 전역을 장악했던 것으로 보이는데, 한단상과 갈등이 생겨 서로 반목하였다. 결국 206년 또는 209년에 한단상을 살해하고 마는데, 이를 명분으로 삼은 한수가 한단상이 죽은 다음해에 장맹을 멸망시켜 그 세력을 흡수했다.
  • 조조위(魏): 215~
    한수가 죽은 뒤에 그 세력을 흡수하여 옹·양주 전역을 확보했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서평군의 국연, 주천군의 장진, 장액군의 황화 등이 반란을 일으키기도 했으나, 소칙학소에게 토벌되었다.

2.11. 익주(益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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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유언유장: 188~214
    유언은 주목(州牧)직을 부활시킨 장본인으로, 본래 교주에서 할거할 생각을 품고 있었으나 익주에 천자의 기운이 서려있다는 도참설에 혹하여 익주목으로 부임했다. 부임 직후 익주 각 군·현을 장악하였으나, 194년에 죽으면서 아들인 유장이 세력을 이어 받았는데, 유장은 장로나 익주의 호족들을 유언만큼 제어하는 데에는 실패했다. 211년에 조조가 한중의 장로를 공격한다는 소식에 유장은 조조와 직접 대치할 것을 두려워하여, 형주의 유비를 끌어들여 장로를 병합하려고 했으나, 유비는 익주를 차지할 생각으로 이에 응했다. 213년에 유비의 계획이 탄로나면서 유장은 장로와 연합해 유비와 대치하였으나, 유비는 유장 세력을 차례로 격파하고 장로가 보낸 마초의 투항을 받아, 결국 유장이 항복하게 된다. 이후 유장은 형주로 옮겨졌는데, 손권이 219년에 유비의 형주 영역을 합병하면서 손권에 의해 대립 익주목으로 임명되었지만 얼마 뒤에 죽었다.
  • 장로: 200~215
    당시 익주 지방에서 유행하던 오두미교의 교주로, 익주목 유언에게 협력하여 191년 무렵에 한중태수 소고(蘇固)를 죽이고 유언에 의해 태수로 임명된다. 200년에 유언이 죽자, 유언의 아들인 유장과 반목하여, 스스로 사군(師君)을 자칭하고 한중군을 한녕군(漢寧郡)으로 개명해 사실상 신정국가(...)를 세워 독립했다. 장로의 세력은 한중군 전역과 파군 일부에 이르렀으며, 익주 전역에서 오두미교가 영향력을 발휘하던 상황이라 유장에게 가장 심각한 위협이 되었다. 214년에 유비가 유장의 세력을 흡수하자, 이에 놀란 조조가 급히 장로를 공격하기 시작했고, 결국 파중(巴中)에서 조조에게 귀부한다.
  • 유비촉한(蜀漢): 211~
    211년에 장로를 구축하려던 유장에 의해 익주로 진입하였으며, 214년에 유장의 세력을 흡수한 뒤 219년에 한중 지방을 장악하여 익주 전역을 차지했다. 이후 221년에 제위에 올랐으나 223년에 파동군의 백제성에서 죽었다. 유비가 죽자, 손권의 지원을 받은 옹개가 촉한에 반기를 들어 남중 지방의 호족들을 규합하였으나, 225년에 제갈량이 반란을 진압했다. 『삼국지연의』에는 남만왕 맹획의 주도로 남중 지방에 반란이 일어났던 것으로 묘사되었으나, 당시 남중 지방의 이민족은 '남만'이 아니라 '서남이(西南夷)'로 지칭되었으며, 맹획 또한 이민족이 아니라 익주군 출신 호족으로, 반란을 주도한 인물이 아니라 당시 반란군을 이끌던 옹개 등의 수괴들이 내분을 일으켜 자멸하면서(...) 잔여 세력을 이끌고 있던 것에 가까웠다.
  • 조조: 215~219
    215년에 장로의 세력을 흡수하고 음평군 일대의 저족의 지지를 받아 익주로 진입하였으나, 한중 공방전에서 패퇴하여 익주를 상실하고 무도군과 음평군을 무인지대로 만들게 되었다.

2.12. 청주(靑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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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공융: 189~193
    동탁이 집권한 이후 동탁에게 밉보였던 공융은 당시 청주에서 황건적이 가장 강성했던 북해국으로 보내졌으나, 동탁의 기대와는 달리 황건적을 소탕하면서 각 현을 수복했다. 하지만 결국 황건적의 침공으로 세력을 잃고 서주의 도겸에게 의탁하게 된다. 이후 195년 무렵에 서주목 직위를 물려받은 유비의 지지를 받아 청주자사로 추대되어 청주에 다시 진입하고자 했으나, 원담의 공격을 받아 격퇴된다. 때마침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하자, 헌제의 조정에 합류하게 된다.잘못된 만남
  • 공손도공손강: 190?~205
    190년 무렵에 요동 지방에서 할거를 시작한 공손도는 바다를 건너와 동래군의 몇 개의 현을 점령하고 영주자사(營州刺史)를 두었다. 조조가 원담을 공격하고자 장료를 청주 방면으로 보냈을 때 장료는 요동 소속의 유의를 격파하였는데, 이때를 기점으로 요동의 공손씨 세력은 청주 지방에서 세력을 잃은 것으로 판단된다.
  • 공손찬: 191~193?
    후한 말의 청주자사 초화가 죽자, 공손찬은 부하인 전해를 청주자사로 임명해 보냈으며, 유비를 평원상으로 임명했다. 당시 청주에서 할거하던 세력 중 한 축을 담당했던 것으로 보이지만, 193년에 조조의 침공을 받은 도겸을 구원하기 위해 전해와 유비가 서주로 파병되었는데, 같은 해 공손찬이 유우를 살해하면서 세력이 위축되어, 유비는 서주에 잔류했고 전해 또한 기주로 물러난 것으로 보인다.
  • 원소원담: 191~205
    청주자사 초화가 죽은 뒤 원소는 장홍을 청주자사로 임명하여 청주를 장악하려 했다. 2년 뒤에 원소는 장홍을 동군태수로 전임시켰고, 장남 원담을 청주자사로 임명하였다. 마침 공손찬의 세력이 위축되고 있었기에, 원담은 신속하게 대립자사인 전해를 구축할 수 있었고, 청주에 재진입하려던 공융을 격퇴하여 청주를 대부분 장악하게 되었다. 원소가 죽은 뒤에 원상과 대립하게 되어 조조와 연합을 맺었으나, 원상 세력이 쫓겨난 뒤 기주를 차지하려 했다가 조조의 공격을 받아 멸망한다.
  • 조조위(魏): 198~
    198년에 여포를 멸망시킨 직후 조조는 성양군과 장광군을 설치하여 청주 동남부 일대에 진출하기 시작했다. 205년에 장료를 청주 지방으로 보내 원담 세력을 멸망시키고 유의를 격파해 청주 전역을 차지했다.

2.13. 서주(徐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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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도겸유비: ~197, 199~200
    도겸은 반동탁연합 당시 서주자사로, 고향 단양군 출신의 사병집단인 '단양병(丹楊兵)'을 기반으로 세력을 모아 서주를 장악했다. 191년 무렵에 서주목으로 승격했으며, 194년에 죽으면서 세력을 유비에게 물려줬다. 196년에 유비가 원술을 공격하던 중에 단양병 집단이 여포를 불러들이면서 여포가 하비국 일대를 점거했고, 유비는 광릉군에 주둔하면서 여포와 대치했다. 이듬해 병량이 부족해지자 유비는 여포와 화해하고 세력을 소패로 옮겼는데, 또다시 여포의 공격을 받게 되어 조조에게 의지했다. 여포가 멸망한 이후, 199년에 유비는 서주자사 차주를 살해하고 일시적으로 서주를 되찾았으나, 곧 조조의 반격을 받아 쫓겨났다.
  • 장패·손관·오돈·윤례·창희: ~198
    서주 북부 일대에서 활동하던 군소 군벌들로 서주목이 바뀔때마다 그들을 추인하며 세력을 보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여포가 멸망한 이후 조조에 귀부했다.
  • 여포: 196~198
    195년에 연주에서 쫓겨난 이후, 유비를 의지하여 소패에 주둔했다. 196년에 단양병 집단이 유비를 배반하는 틈을 타서 서주를 장악했지만, 곧 조조의 공격을 받아서 멸망했다.
  • 조조위(魏): 198~
    여포가 멸망한 이후 그 세력을 흡수하고, 서주 북부에서 할거하던 군소 군벌들을 종속시켜 서주의 세력을 통일했다.
  • 오(吳): 250~
    유수구 전투 이후인 213년 무렵에 조조는 손권과의 대치가 장기화될 거라 여기고 회수(淮水) 이남과 장강 이북 사이에 있는 지역의 주민들을 회수 이북으로 이주시키려 했으나, 이 소식을 들은 광릉군과 하비군 주민 10만 호가 장강을 건너가 손권에 귀부해 버리면서 회수 이남 지역은 무인지대화, 광릉군 11현 중 9현이 사실상 폐지되었다. 250년에 손권이 장강을 도하하여 도당(涂塘)을 건설했고, 255년 손준이 관구검에게 호응하여 회수 이남에 상비군을 주둔하고자 광릉군 남부 일대를 점거하였으나 실제로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곳이라 소득이라 할만한 일이 되진 못했다.

2.14. 형주(荊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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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술: 189~195?
    동탁이 집권하자 원술은 형주자사 왕예를 살해한 장사태수 손견을 끌어들여, 손견이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게 하고 남양군을 차지했다. 왕예의 후임으로 부임한 유표는 처음에는 원술을 남양태수로 인정하는 유화적인 태도를 보였으나, 이후 원소와 연합하여 원술을 견제하게 된다. 이에 손견을 보내 유표를 공격하게 했으나, 유표는 압도적인 열세를 보였음에도 기여코 손견을 전사시켜 세력을 보존했다. 195년에 삼보 지방에서 밀려난 장제 세력이 남양군 일대로 진입하였음에도 원술이 대처하지 못했던 것을 보면, 이를 전후하여 형주에서 축출당한 것으로 판단된다.
  • 유표유종: 190~208
    왕예의 후임으로 형주자사로 부임하면서, 채모·괴월 등 양양현(襄陽縣) 일대 호족들의 지지를 기반으로 다른 호족들을 제압하고 남양군 일대를 제외한 형주 전역을 장악했다. 200년에 장수가 조조에게 항복하자, 유비를 받아들이고 신야현(新野縣) 일대에 주둔시켜 조조와의 대치를 이어갔다. 하지만 내부적으로 양양 호족들은 조조에게 귀부할 것을 요구하고 있던 것으로 보이는데, 결국 유표가 죽자 양양 호족들은 유표의 차남인 유종을 후계자로 옹립하는 동시에 조조에게 투항했다.
  • 장제장수: 195~200
    삼보 지방에서 밀려난 장제는 남양군 일대를 약탈하던 중에 전사했는데, 조카인 장수가 세력을 이어받아 완현(宛縣)을 차지하고 남양군을 점거한다. 유표는 조조의 남하에 대비하기 위해 장수 세력의 남양 점거를 승인하고 후원했다. 장수는 197년에 조조에게 투항하기로 했으나, 조조가 장제의 과부를 건드리자 조조를 습격하여 쫓아냈다. 이후 200년에 다시 조조에게 귀부하여 세력은 흡수되었다.
  • 장선장역: 198?~200?
    장선은 유표와 반목하고 있던 장사태수로, 유표가 장제-장수의 무리들을 받아들인 것을 명분으로 영릉군·계양군과 함께 유표에 반기를 들었다. 관도대전 무렵에 유표가 원소에 협력하자, 장선은 조조에 호응하면서 유표의 침공을 받았다. 장선이 죽은 뒤 아들 장역이 세력을 물려받았으나 끝내 유표에게 진압당하여 멸망했다. 장선이 유표에게 반기를 든 시점과 장역이 멸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다소 논란이 있다.
  • 조조위(魏): 200~
    장수의 세력을 흡수한 것을 시작으로 형주 지방에 진출했다. 208년에 유종의 항복을 받아 그 세력을 흡수하였으나, 적벽대전에서 패하여 장강 이남 군·현의 통제력을 잃었고, 209년에 조인이 강릉현(江陵縣)에서 물러나면서 남군 이남 지역을 상실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도 양양군과 남군을 경계로 오나라와 대치를 이어갔다.
  • 손권오(吳): 208~
    208년에 강하태수 황조를 살해하면서 형주 동부에 진출했다. 215년에 유비와 형주 분할에 합의하여 강하군·장사군·계양군을 확보했으나, 이후 조조와 연합하여 219년에 관우가 북상한 틈을 타서 유비의 형주 영역을 차지했다.
  • 유기유비: 208~219
    유표가 죽은 뒤에 유표의 장남인 강하태수 유기는 조조에 투항을 거부했고, 장판파 전투에서 세력이 와해된 유비와 합류했다. 이후 적벽대전에서 승리한 뒤에 유비는 유기를 형주목으로 추대하며 세력을 모았고, 유기가 죽은 뒤 자신이 형주목 직위를 승계했음을 주장했다. 조조가 임명한 무릉군·영릉군·장사군·계양군 태수들의 항복을 받았으며, 210년에 손권과 형주 점유를 합의하여 남군과 임강군 전역을 확보했다. 214년에 유장 세력을 흡수하여 익주를 차지하자, 손권은 형주 반환을 요구하였는데 유비는 이를 거부했다. 결국 실력을 행사한 손권과 장사군 익양현(益陽縣)에서 대치하다가, 조조가 한중군을 차지했다는 소식에 손권과 형주 분할을 합의하였다. 이후 219년에 관우가 양양군 일대로 북상한 틈에 손권의 침공을 받아 형주를 상실했으며, 221년에 형주 탈환을 시도했으나 이듬해에 이릉대전에서 대패하면서 손권과 화해하게 된다.

2.15. 양주(揚州), 일명 강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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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온유요: ~198
    진온은 후한 말기에 양주자사를 지낸 인물로 반동탁연합에도 참여한 행적이 있다. 진온이 병으로 죽자 후임으로 유요가 193년에 임명되었으나, 임지인 구강군 일대는 이미 원술이 장악한 상황이라 부임하지 못하고 있었다. 결국 오군 곡아현(曲阿縣)에 치소를 두어 원술을 상대로 항거하자 주호 등 강동 호족들의 지지를 받았고, 도겸이 팽성상 설례와 하비상 착융을 보내 도왔으며, 조정에서는 유요를 양주목으로 격상시켰다. 하지만 원술이 보낸 손책의 공격을 받아 유요의 세력은 와해되었으며, 이어서 손책은 197년에 오군태수 허공과 회계태수 왕랑을 차례대로 격파하고, 그 일대에서 할거하던 추타(鄒他)·전동(錢銅)·왕성·엄백호 등을 멸망시켰다. 유요는 예장군 일대로 옮겨가 끝까지 손책에 저항하였으나, 198년에 병사하고 말았으며 예장태수 화흠은 손책에게 합류했다.
  • 육강: ~195
    후한 말기에 여강태수를 지냈다. 193년에 원술은 서주를 공격하고자 육강에게 군량을 요구하였으나, 육강이 이에 불응하자 손책에게 여강태수 자리를 약속하며 육강을 공격하게 했다. 결국 195년에 육강이 병사하고 세력은 멸망하였으나, 원술은 당초의 약속을 깨고 유훈을 여강태수로 임명한다.
  • 정보·장다·허건: ~199?
    양주 북부에서 활동하던 군소 군벌들로, 이들 가운데 정보의 세력이 가장 강성했다고 한다. 정보가 유엽에게 살해당한 뒤에 세력은 여강태수 유훈에게 흡수되었다.
  • 동지: 191~199?
    후한 말에 예장군 남부에서 할거하여 여릉태수를 자칭했던 인물로, 손책이 여강태수 유훈을 멸망시킨 뒤에 사촌인 손보를 여릉태수로 임명하여 동지와 싸우게 했다. 참고로 동지를 멸망시킨 손보는 이후 조조에게 평남장군(平南將軍) 및 교주자사 직위를 받았는데, 손책이 죽고 손권이 세력을 승계하자 조조에게 투항하여 강동 전역을 바치려 했다. 그 시도를 먼저 눈치챈 손권이 손보를 제압하고 그를 유폐시켰다.
  • 원술유훈: 192?~199
    양주자사 진온이 죽자 원술은 진우를 양주자사로 내세워 구강군 일대를 장악했다. 193년에 광정(匡亭)에서 조조에게 패한 뒤 원술은 구강군 수춘현(壽春縣)으로 후퇴했는데, 진우는 원술의 진입을 거부했다. 세력을 재정비한 원술이 진우를 쫓아내고, 손책의 외삼촌인 오경을 단양태수로 임명하여 원소와 협력하는 단양태수 주흔을 공격했다. 이에 원소가 사촌인 원유를 양주자사로 임명하여 원술을 견제했으나, 원유는 원술에게 격파당해 패주하던 중에 죽었다. 이후 손책을 보내 여강태수 육강을 공격하고 조정에서 임명된 양주자사 유요와 대립하면서 양주 지방에서 세력을 확장하려 시도했다. 하지만 조조가 협천자에 성공하여 조정을 장악하면서 예주 지방에서의 영향력을 잃어갔으며, 서주의 유비와 대치하고 손책 또한 독립 행보를 걸어가면서 세력 확장은 좌절되었다. 결국 197년에 황제를 참칭하고 중나라 건국을 선포했으나, 오히려 세력 이탈만 불러일으켰고 조조의 공격을 받아 세력은 멸망했다. 이후 대립해왔던 원소에게 의탁하고자 청주로 향하던 중에 유비에게 저지당하여 199년에 객사하고 만다. 원술의 잔여 세력은 손책에 합류하려 했으나, 여강태수 유훈이 그들을 습격하여 병력과 물자를 가로챘다. 이후 유훈은 정보 등의 군소 세력을 흡수하면서 세를 늘렸으나, 손책의 공격을 받아 멸망했다.
  • 손책손권오(吳): 195~
    육강이 멸망하면 손책을 여강태수로 임명하겠다는 약속을 원술이 깨면서, 손책은 독립을 모색하게 된다. 마침 양주자사 유요가 세력을 모아 원술이 임명한 단양태수 오경을 쫓아내고, 원술이 임명한 대립자사 혜구가 유요를 상대로 고전하자, 손책은 유요 정벌을 명분으로 원술을 설득하여 강동 지방으로 출병했다. 197년 무렵에 강동 지방 대부분을 장악했으며, 원술과는 황제 참칭을 명분으로 관계를 완전히 단절했다. 손책은 200년에 병사하면서 세력을 동생인 손권에게 물려줬다.
  • 이술매성·뇌서·진란: 200~209?
    이술은 손책이 유훈을 토벌하면서 임명한 여강태수였으나, 손책이 죽고 손권이 세력을 승계하자 손권의 권위에 도전했다. 결국 손권이 이술을 습격하여 죽이고 그 사병들을 오군으로 옮겼는데, 이로 인하여 여강군은 이술을 따르고 있던 매성·뇌서·진란 등 군소 군벌들이 할거하는 양상이 되었다. 이들은 적벽대전 이후 조조와 손권 세력이 여강군 일대에서 대치하면서 정리된다.
  • 조조위(魏): 200~
    원술이 멸망한 뒤에 어사중승 엄상을 양주자사로 임명하여 구강군 일대에 남겼으나, 엄강은 손책의 지시를 받은 이술의 공격을 받아 피살되었다. 조조는 엄강의 후임으로 유복을 임명하였는데, 마침 손책이 죽고 손권과 이술이 대립하자 유복은 그 틈을 타고 합비현(合肥縣)을 확보해 치소를 마련했다. 이후로 손권은 여러차례 합비를 공략하였으나 번번히 실패하여, 위나라는 구강군 전역과 여강군 북부를 확보하게 되었다.

2.16. 교주(交州)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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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섭: ~226
    후한 말부터 교지태수를 지내고 있었는데 196년에 교지자사 주부가 이민족에게 살해당하자 동생들인 사일을 합포태수, 사유를 구진태수, 사무를 남해태수로 임명하여 교주 남부에서 할거했다.[15] 201년 무렵에 교주목 장진이 피살당하고 유표가 교주로 진출을 시도하자, 조조는 사섭을 수남중랑장(綏南中郎將)으로 임명했는데, 정황상 사섭을 통해 유표를 견제하려던 것으로 보인다. 210년에 손권이 교주에 진출하자 손권에게 종속하였고, 226년에 죽을 때까지 교지태수 직위를 유지했다. 사섭이 죽은 뒤 오나라의 교주자사 여대는 사섭 일가의 영향력을 견제하기 위해 교주에서 사섭 일가의 영향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을 광주(廣州)로 분할하려고 했는데, 이에 반발한 사섭 일가가 반란을 일으켰으나 진압당했다. 사섭 일가가 멸망하면서 분할의 필요성이 사라지자 광주 분할 조치는 취소되었다.
  • 장진: 196~201?
    교지자사 주부의 후임으로 부임하여 201년에 교주목으로 승진했는데, 당사자인 장진은 승진 소식이 당도하기 전에 피살당했다. 주부가 죽은 당시에 사섭이 장악한 판도를 살펴보자면, 창오군과 울림군 일대에서 세력을 확보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 오거: 201?~211
    교주목 장진이 피살당하자 형주의 유표는 교주로 진출하기 위해 부하인 뇌공을 교주자사로 임명했는데, 창오태수인 사황이 죽으면서 유표는 부하인 오거를 사황의 후임으로 임명해 보냈다. 창오군을 장악하는데 성공한 오거는 뇌공을 쫓아내어 독립했다. 이후 손권 세력이 교주로 진출하자, 오거는 일단 손권에게 종속하는 행세를 하였으나 독립을 유지하려는 태도를 보였기에, 이러한 오거를 불신한 보즐에게 살해당했다.
  • 전박(錢博): 201?~220
    본래 교주목 장진의 부하였으나, 장진이 피살된 뒤에 합포군 동부의 현(縣)이 설치되지 않은 지역에서 할거하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220년에 손권에게 귀부하여 본래 영역의 통치권을 추인받아 고량서부도위(高涼西部都尉)로 임명되었다.
  • 손권오(吳): 210~
    210년에 보즐을 교주자사로 임명해 보내면서 교주로 진출했다.[16] 211년에 오거를 제거하여 교주 전역을 확보했고, 226년에 사섭이 죽은 뒤에는 사섭 일가를 제압했다. 촉한이 멸망한 직후에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위나라로 투항하였으나, 271년에 이를 탈환했다.

3. 위(魏)

국호인 '魏'는 예서 이전까지는 '委'와 '鬼' 외에도 '山'자까지 결합하여 쓰였는데, 대체로 '山'이 글자의 아래쪽에 붙어있거나 '鬼'자에 작게 붙는 형태로 쓰였다. 해서에서는 보통 '山'자를 생략하는데, 간혹 '巍'자를 쓰는 일도 있긴 하다. 삼국시대의 금석문에 '山'자가 결합한 형태로 쓰인 것을 '巍'로 판독하고 이를 멋대로 위조의 증거로 여기는 경우가 간혹 보이는데, 오히려 '山'자가 탈락된 것이 위조가 의심스러운 경우이다.

213년에 조조헌제에게 구석을 하사받으면서 위공(魏公)의 존칭을 받고 10개 군(郡)에 책봉되었는데, 이에 따라 위국(魏國)은 하동군·하내군·위군·조군·중산군·상산군·거록군·안평군·감릉군·평원군을 그 영역으로 삼았고, 위군 업현에 수도를 두었다. 이듬해에는 공식적으로 위공의 서열을 황족이 책봉되는 왕(王)보다 높게 했는데, 사실 이건 조조가 특별한 것이 아니라, 다른 공들은 이왕삼각에 따른 특전으로 천자의 빈객 대우를 받았기에 원래부터 공(公)은 왕보다 의전상 서열은 높았으며, 조조도 같은 대우를 받은 것뿐이다. 조조가 위공을 칭하다가 위왕으로 격을 높였기에 왕이 무조건 공보다 높았던 것으로 오해된다. 216년에 위공을 위왕(魏王)으로 높였고, 220년에 조조의 지위를 물려받은 조비가 헌제에게 선양을 받으면서 공식적으로 후한을 흡수했다. 이때 다시 하남윤 낙양현으로 수도를 정했다.

이런 짓은 사마소도 반복하여, 263년에 구석을 하사받으면서 진공(晉公)의 존칭을 받고 10개 군에 책봉되었다. 이에 따라 진국(晉國)은 태원군·상당군·서하군·낙평군·신흥군·안문군·하동군·평양군·홍농군·빙익군을 그 영역으로 삼았다. 264년에는 진공을 진왕(晉王)으로 높이면서 10개 군이 증봉(增封)되었는데, 이때 어떤 군을 더 받았는지는 사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의미가 없어 기록 안 한 듯 265년 사마소의 지위를 물려받은 사마염조환에게 선양을 받으면서, 위나라 역시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구석을 하사받아 공의 존칭을 받으면서 10군에 책봉되고 이후 왕으로 승작하여 10군을 추가로 받는 관행(...)은 이후 육조시대에 찬탈의 기본 형태로 자리 잡았다.

삼국시대 위나라는 익주와 교주를 제외한 모든 주(州)에 영역을 두었는데, 그중 형주와 양주(揚州)는 일부만 장악했다. 263년에 촉한이 멸망하면서 익주를 차지했고, 같은 해 교주의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위나라에 투항하면서 교주의 일부를 점거했으며, 서진으로 이어졌다.

271년에 오나라가 다시 교주 3군을 탈환했으나, 280년에 서진의 대대적인 침공으로 오나라가 멸망하면서 삼국 통일을 완수했다.

3.1. 주요 지역

  • 낙양: 사례 하남윤 낙양
  • 장안: 사례 경조윤 장안현 → 옹주 경조군 장안현
  • 홍농: 사례 홍농군 홍농현
  • 허창: 예주 영천군 허현 → 예주 영천군 허창
  • 여남: 예주 여남군 신식현
  • : 예주 패국 현 → 예주 초군 초현
  • 소패: 예주 패국 패현(소패현)
  • 하비: 서주 하비군 하비현
  • 북해: 청주 북해국 평수현
  • 평원: 청주 평원군 평원현 → 기주 평원군 평원현
  • : 기주 위군 현 → 사례 위군 업현
  • 남피: 기주 발해군 남피
  • : 유주 광양군 현 → 유주 연국 계현
  • 북평: 유주 우북평군 토은현
  • 양평: 유주 요동군 양평
  • 진양: 병주 태원군 진양
  • 상당: 병주 상당군 호관현
  • 진류: 연주 진류군 진류현 → 연주 진류국 진류현
  • 복양: 연주 동군 복양
  • 무위: 양주(涼州) 무위군 고장현
  • 안정: 양주(涼州) 안정군 임경현 → 옹주 안정군 임경현
  • 천수: 양주(涼州) 한양군 기현 → 옹주 천수군 기현
  • 수춘: 양주(揚州) 구강군 수춘현 → 양주 회남군 수춘현
  • : 형주 남양군
  • 신야: 형주 남양군 신야
  • 양양: 형주 남군 양양현 → 형주 양양군 양양현
  • 상용: 익주 한중군 상용현 → 형주 상용군 상용현

4. 촉한(蜀漢)

유언이 후한 왕조가 망할 것을 직감하여 지방에서 할거하고자 했는데, 당초에는 교지자사부로 가려고 했으나 익주에 천자의 기운이 서려 있다는 도참설에 혹해 188년에 익주목으로 부임했다.[17] 유언은 삼촉 지방을 신속히 장악하고, 오두미교 세력과 연계하여 파군과 한중군까지 장악했다. 한중군을 차지한 이후로는 오두미교의 교주 장로를 한중태수로 임명해 놓고 익주와 왕래하는 한나라 조정 관리들을 살해하면서, 오두미교 교도들을 일컫는 '미적(米敵)'이 익주의 길을 막는다는 핑계를 대며 사실상 독립하여 할거했다. 이후로는 익주에서 황제 흉내를 냈는데, 같은 시기 형주를 장악한 유표도 똑같이 황제 노릇 하던 때라 서로를 황제 행세하는 역적놈이라고 디스전을 펼쳤다. 이각곽사가 서로 반목하고 한수가 그 틈을 노려 그들을 공격하려 하자 유언은 관중 지방을 차지할 기회라 여겨 한수를 지원했으나, 이각 등이 한수를 격퇴하고 그 일로 아들 3명이 연달아 죽게 되어, 이로 인한 상심 때문인지 유언 또한 얼마 못 가 194년에 사망했다.

유언의 4남인 유장이 유언의 후계자로 추대되었으나, 유장은 장로와 반목했고 익주 내의 호족들을 완전히 제어하지도 못했다. 특히 장로와의 반목은 큰 위협이 되었는데, 당시에는 유장의 본거지인 삼촉 지방에도 오두미교가 큰 교세를 떨치고 있었고, 파군은 애초에 오두미교의 본거지였기에 장로가 독립하자 장로 세력으로 합류했기 때문이다. 재빠르게 파군을 장악하기 위한 조치를 폈으나 결국 파군 일부가 장로의 수중에 남게 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211년엔 조조가 장로를 멸하고 익주를 차지하려 한다는 소문마저 돌자, 유장은 당시 적벽대전의 승리로 한참 주가를 올리고 있던 유비를 데려와 장로와 조조에 대비하려 했다. 그러나 유비는 익주를 차지하려는 흉심을 갖고 있었으며, 그런 유비를 믿지 못한 유장이 먼저 유비를 배신하여 장로와 연합을 맺어 유비를 공격했다. 그러나 익주의 호족들이 유비를 지지했고 유장은 결국 213년에 유비에게 항복하여, 익주는 유비의 차지가 되었다.

이 소식에 놀란 조조는 급히 장로를 정복하기로 했다. 장로는 곧바로 조조에 항복할 생각이었으나 동생 장위의 반대로 항전했는데, 장위가 양평관에서 나름 성공적으로 조조를 막아내고 있었으나 야생 사슴 떼의 습격을 받아 진형이 무너졌고,안될 놈은 뭘해도 안 된다 양평관이 함락당하자, 장로는 한중을 포기하고 파중(巴中)으로 도주했다. 파중은 장로가 차지하고 있던 파군의 일부를 장로 세력 내부에서 지칭한 지방 이름이라 여겨진다. 장로가 215년에 조조에 항복하여 한중과 파중은 조조의 차지가 되었다. 그러나 한중 공방전을 거치며 조조가 패퇴하여 결국 유비가 익주 전역을 차지했고, 유비의 추가적인 북상을 우려한 조조는 무도군과 음평군 주민들을 옹주 우부풍으로 이주시켜 2군을 무인지대로 만들었다.

익주 전역을 차지한 유비는 한중왕(漢中王)을 자칭하여 인생의 최정점에 오른다. 한중왕표에 따르면 한중왕의 식읍은 한중군·파군·촉군·광한군·건위군 5개 지역으로 설정되었는데, 당시에는 이들 군에서 자동군·파서군·탕거군·고릉군·부릉군 등이 분할된 상태였기에, 실제로는 10군의 위국(魏國)과 맞먹는 10군의 한중국(漢中國)을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같은 해에 손권이 형주 분할의 합의를 깨고 유비의 형주 영역을 차지했다.

220년에 조비황제를 시해하고 제위를 찬탈했다는 소문이 돌자, 유비는 발상하여 죽은 황제에게 효민황제(孝愍皇帝)의 시호를 올렸고, 이듬해에 정식으로 황제로 즉위했다. 황제에 오른 유비는 손권에 대한 보복을 개시했으나, 이듬해에 이릉에서 크게 패배하여, 손권이 차지한 형주를 수복하는 데 실패했고, 이로써 촉한의 영역은 익주 한 지역으로 한정되게 되었다.

유비 사후 촉한의 익주 지배는 한때 위기를 맞이했으나 제갈량이 안정시켰고, 오히려 북벌이 시도되었다. 250년대에는 강유가 옹주 농서군의 임조현 일대를 점령하였으나, 262년 후화 전투로 상실하였다. 사마소가 찬탈을 위한 명분을 찾던 도중 촉한을 정복한 공으로 조조의 전례에 따르는 찬탈을 계획하면서, 263년에 정촉(征蜀)을 착수했으며 결국 그 해에 유선종회에게 항복하여 멸망하였다.

촉한의 정식 국호가 '한(漢)'임을 인정하지 않았던 위와 오는 사실상의 수도였던 성도현이 소속된 촉군의 이름을 따와 '촉(蜀)'으로 불렀다. 오에 사신으로 간 촉한 관리들이 오나라 관리들이 촉(蜀)자로 디스하는 것을 맞대응하는 모습도 보인다.

4.1. 주요 지역

  • 성도: 익주 촉군 성도
  • 한중: 익주 한중군 남정현
  • 무도: 익주 무도군 하변현
  • 영안: 익주 파군 어부현 → 익주 파동군 영안
  • 자동: 익주 광한군 자동현 → 익주 자동군 자동현
  • 강주: 익주 파군 강주
  • 건녕: 익주 익주군 미현 → 익주 건녕군 미현
  • 운남: 익주 익주군 농동현 → 익주 운남군 농동현

5. 오(吳)

연의에서는 손견18로 제후 중 하나로 등장하여, 이미 그 시점부터 독립 세력이었던 것으로 묘사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원술에 예속된 군소 군벌에 가까웠다. 원술이 손견에게 군량을 보내지 않았던 것 자체는 사실인데, 손견이 한창 싸우던 중에 했던 것은 아니었고, 손견이 단독으로 낙양에 입성하자 손견 세력이 성장하여 독립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한 행동에 가까웠다. 191년 무렵에 손견이 유표를 공격하다 전사한 것 역시 원술의 지시에 따른 것이었다. 193년에 여강태수 육강이 군량을 빌려달라는 원술의 요구에 응하지 않자, 원술은 손책에게 여강태수 자리를 약속하며 육강을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195년에 육강이 멸망했으나, 원술은 약속을 지키지 않고 유훈을 여강태수로 임명해 보냈고, 이 일로 손책은 독립을 모색했다.

당시 원술은 구강군을 점거하고 멋대로 양주자사를 임명했는데, 조정에서 정식으로 양주자사로 임명된 유요가 오군 곡아현에 거점을 두어 원술을 구축하려 했다. 손책은 이를 기회로 여겨 유요를 공격할 것을 자청하여, 자력으로 유요와 회계태수 왕랑 등을 멸망시켜 장강 이남에 세력을 구축했다. 마침 원술이 황제를 자칭했는데, 손책은 이를 빌미로 원술에게서 완전히 독립했고, 197년에 조조가 장악한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정식으로 관직을 받았다. 처음에는 회계태수에 기도위(騎都尉)를 겸하게 했는데, 다음 해에 기도위 직책이 토역장군(討逆將軍)으로 승진하고 오후(吳侯)로 책봉되었다. 그러나 200년에 사망하고, 그 세력은 동생인 손권이 물려받았는데, 조조에게 회계태수 직책을 물려받는 것을 인정받고 토로장군(討虜將軍)으로 임명되었다. 손권은 관직을 높이 데 관심을 두지 않고 아버지를 죽였던 유표에게 복수하는 것에 전념했고, 결국 208년에 유표 휘하의 강하태수 황조를 죽여 강하군·장사군·남군 등 3군의 일부 영역을 점거했다.

그러나 같은 해 유표가 죽고 조조가 형주에 남하했다. 이를 위협으로 받아들인 손권은 유비와 동맹을 맺어, 적벽대전에서 승리하여 조조의 남하를 저지했다. 이에 본격적으로 핵심 군벌로 대두했으나, 손권의 공식적인 관직이 회계태수 겸 토로장군인 점이 세력을 확장하고 유지하는데 발목을 잡게 만들었다. 군·현을 점거하여 사실상의 태수나 현령 등을 임명하는 것은 사실 그동안 해왔던 일이긴 했으나, 장군을 임명할 경우에는 그 직책상 손권의 권위로는 통제할 수 없었기 때문에 사실상 임명할 수 없었고, 토로장군의 부관 격인 비장군·편장군 등을 임명할 수 있는 것이 한계였다. 209년에 유비가 손권을 거기장군 겸 서주목으로 추대하는 형식으로 그 문제가 해결되었다. 211년에 창오태수 오거를 멸망시켜 본격적으로 교주로 진출했다. 219년에 유비를 배신하여 형주를 차지하자, 조조는 손권을 정식으로 형주목으로 임명하면서 남창후로 책봉했다. 220년에 조비가 선양을 받은 뒤에, 손권 세력을 공식적으로 위나라에 편입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권을 오왕으로 책봉했다. 그러나 손권은 작위만 받고 손등을 낙양으로 보내라는 요구에는 응하지 않았고, 점점 압박이 거세지자 유비와 화해했다. 222년에 조비가 직접 손권을 공격했으나, 이를 격퇴하여 사실상 오나라로 독립했다.

손권의 영역은 양주(揚州) 대부분과 형주 일부, 그리고 교주 전역에 달했다. 229년에 정식으로 황제를 칭했을 때, 촉한과 맹약을 맺어 천하를 분할하기로 정했는데, 촉한은 익주와 더불어 병주·양주(涼州)·기주·연주를 차지하고, 오는 양주(揚州)·형주·교주와 더불어 서주·예주·유주·청주를 차지하며, 사례교위부 지방은 함곡관을 기준으로 양분하는 것이었다.현실은 시궁창 250년대에는 서주 남부의 일부 현을 점령했으나, 이미 213년 무렵에 조조가 무인지대로 만들었던 지역이라 실익을 얻지는 못했다. 오히려 263년에 교주의 교지군·구진군·일남군이 위나라에 점령당했으며, 269년에는 건평군의 일부가 서진에게 점령되었다. 비록 271년에 교주 3군을 탈환하긴 했으나, 280년에 서진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멸망했다.

당초 손책은 공식적으로 회계태수였으나, 오후에 책봉되자 자신의 식읍이 된 오군 오국(吳國)에 거점을 둔 것으로 보인다. 적벽대전 이후인 209년에 손권이 오군 단도현의 경성(京城)으로 세력의 거점을 옮겼다. 이후 211년에 단양군 말릉현으로 이전하였고 이듬해 건업성이 완성되자 말릉현을 건업현으로 개명하고 건업성을 거점으로 삼았다. 219년에 유비를 배신하여 관우를 죽인 뒤에는 정식으로 형주목으로 임명되어 형주목 치소인 공안으로 이전했다. 223년에 조비를 격퇴한 뒤로 무창군(강하군) 무창현을 수도로 삼아 무창궁에 거주했다. 229년 황제로 즉위한 뒤에 건업성으로 천도했으나, 손호가 265년에 잠시 무창궁으로 옮겼다가 이듬해 다시 건업성에 소명궁(昭明宮)을 세우고 환도했다.

5.1. 주요 지역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우리나라 강원도의 강릉과 양양은 장강 유역 도시의 지명을 따온 것이다.
  • 건업: 양주(揚州) 단양군 말릉현 → 양주 단양군 건업
  • : 양주(揚州) 군 오현
  • 회계: 양주(揚州) 회계군 산음현
  • 건안: 양주(揚州) 회계군 건안현 → 양주 건안군 건안현
  • 시상: 양주(揚州) 예장군 시상현 → 형주 강하군 시상현
  • 여강: 양주(揚州) 여강군 서현
  • 강릉: 형주 남군 강릉
  • 강하: 형주 강하군 서릉현
  • 무릉: 형주 무릉군 임원현
  • 장사: 형주 장사군 임상현
  • 영릉: 형주 영릉군 천릉현
  • 계양: 형주 계양군 침현
  • 합포: 교주 합포군 합포현 → 교주 주관군 합포현
  • 남해: 교주 남해군 번우현
  • 교지: 교주 교지군 용편현

[1] 조비가 손권을 회유하기 위한 목적으로 손권이 차지하고 있는 양주(揚州)와 형주 영역을 형주로 합치고, 위나라 영역에 속한 형주 북부는 별도로 영주로 분할한 것인데, 곧 손권이 종속할 뜻이 없음을 확인하여 이를 취소했다.[2] 사섭이 죽은 뒤 교주자사 여대가 사섭 일가의 영향력이 강한 합포군·교지군·구진군·일남군 4군만 교주에 남기고 나머지 구역을 광주로 분할하는 구상으로 광주자사를 자처하여 손권의 승인을 받았다. 이에 격분한 사섭 일가가 반란을 일으켰다가 패망하면서 환원되었다.[3] 위나라 때부터 사례를 '사주'로도 부르기 시작했는데, 그 말엽에는 조환(曹奐)의 조서에서도 쓰일 정도가 되었다. 삼국 통일 뒤에 이 별칭이 공식화 된 것.[4] 손권이 황제에 오르면서 촉한과 천하를 분할하는 맹약을 했는데, 이때 예주는 오나라의 영역으로 설정되었다. 이로 인해 촉한에서 책봉된 노왕(魯王) 유영과 양왕(梁王) 유리는 촉한의 영역으로 설정된 기주 지역으로 봉호를 고쳤다.(...) 봉국이 수반된 제후 외에도, 명목상 교주자사에 임명되어 있던 내항도독 이회가 건녕태수로 보직이 변경된다. 촉한은 그 외에도 자신들의 영역 밖인 지역임에도 사례교위, 양주(涼州)자사 등을 임명하기도 했다.[5] 사실 수(守)의 원래 임무는 이쪽에 가깝다. 처음에 군(郡)은 지방에 설치된 군사 기지 개념이었고, 징병·훈련과 병기의 제작·보급 등을 담당했다. 그러다가 영토가 넓어지다 보니 본래 중앙 담당이었던 현(縣) 관할 업무를 일부 분담하게 되면서, 현 위의 상급 행정 단위가 돼버린 것.[6] 진나라와 전한에서는 태수의 군사권 발동을 제한하기 위한 목적으로 상비병력을 지휘하는 관직인 도위를 따로 두어 치안을 전담하게 했으나, 후한 때에는 자사를 지방에 주둔시키고 유사시에 군권을 부여하여 태수의 군사권 발동을 제약하였기에 도위를 둘 필요성이 사라졌기 때문이다.[7] 간독에는 현의 인구가 성장해 1만 호가 넘더라도 현장이 현령으로 승격하지 않는 사례들이 나타나고 있어, 처음 현을 세울 당시를 기준으로 한 것으로 보인다.[8] 규모가 큰 현에는 여러 명이 임명되었는데, 조조가 역임했던 낙양북부위(洛陽北部尉)가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현 외에도 주요 관(關)·진(津)에 임명되기도 한다.[9] 간독에서 승의 업무행태가 너무 포괄적이고 적극적으로 나타나는 나머지, 학자 중엔 승이 실질적인 장관이라 보는 경우도 있을 정도. 하지만 태수나 현령 등이 행정 외적으로도 바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승은 어디까지나 실질적인 행정 일을 도맡는 총무에 불과했던 것으로 보인다.2인자의 숙명[10] 전한 때에는 장액군·안정군·오원군·상군·서하군·북지군·금성군·천수군에 속국도위가 운영되었고, 이들 가운데 후한 초에는 장액군·안정군·오원군에만 남았다가 89년에 서하군·상군에 다시 속국도위를 설치했다.[11] 도위는 1현만 맡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에 현령을 대체하는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교위와 중랑장은 여러 현을 관할에 두었는데, 교위는 치민권을 갖는 도위와 비슷한 개념이었던 것으로 보이고, 중랑장은 태수처럼 주민들을 징집해 독자적인 부대를 운영할 수 있는 군사권이 더해진 것으로 추측된다.[12] 『삼국지』 등 역사기록에서 장막의 행동을 반역으로 기술한 영향으로 장막이 조조의 수하였다가 약해진 틈을 타서 배반한 것으로 이해되고 있으나, 당시 주목이나 자사는 태수의 상급자가 아니었으며, 조조는 조정에서 정식으로 임명된 주목조차 아니었다. 도리어 장막은 이 시점에 조조의 실질적인 상급자인 원소를 자극할 정도로, 조조의 권위로는 수하처럼 부릴 수 없는 독자세력에 가까웠다. 마찬가지로 장막이 여포를 연주목으로 내세운 것이 일종의 반조조 연합의 맹주 역할을 맡긴 것으로 해석할 수는 있더라도, 장막이 여포를 자신의 주군으로 옹립한 것은 전혀 아니었다.[13] 이들 가운데 괴리후(槐里侯) 작위를 보유한 마등이 공식적인 서열은 가장 높았다고 할 수 있으나, 세력은 농우 및 하서 지방을 통할하던 한수가 가장 강대했다.[14] 『삼국지연의』에서는 마등 일족을 서량(西涼)의 맹주처럼 묘사하고 있고, 코에이 테크모의 게임 삼국지 시리즈에서는 대체로 마등의 세력을 무위에 출현시키고 있기에, 마등의 세력이 무위군 일대의 하서 지방에 있던 것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시점에 무위군은 장맹이라는 인물이 할거하고 있었으며, 마등의 독자 세력은 하서 지방과는 전혀 무관한 관중 일대에 근거지를 두고 있었다.[15] 후한 말에 학정을 펼쳤던 것으로 거론되는 일남태수로 황개라는 인물이 있는데, 어느 시점에 태수를 맡았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이 시점에 사섭이 일남태수를 보내지 않은 점으로 보아, 황개가 아니더라도 최소한 일남태수로 재임하고 있던 인물이 별도로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16] 교주로 부임한 보즐은 남해군 번우현에 치소를 마련했는데, 본래 교주목의 치소였던 창오군 광신현이 오거의 영역이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를 보면 사섭이 임명했던 남해태수 사무는 210년 이전에 죽은 것으로 추측된다.[17] 그 외에도 유언은 오의여동생이 황후가 될 관상이라는 얘기를 듣고는 3남 유모와 혼인시켰던 적도 있었다. 그러나 정작 황제에 오른 것은 유비였고, 오의의 여동생 역시 유모와 사별했다가 유비가 익주목을 차지했을 때 유비와 재혼하여 황후가 된다. 즉, 모두 유언 자신과는 상관없는 예언이었던 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