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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대학교/학부/법과대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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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교내 위상3. 연혁4. 역사
4.1. 법관양성소와 경성법전4.2.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4.3. 경성법전과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의 통합4.4. 문리과대학과의 강의실 분쟁4.5. 법학과와 행정학과4.6. 사법학과와 공법학과4.7. 법과대학 폐지와 법학전문대학원으로의 전환
5. 학생회6. 여담7. 출신 인물
7.1. 가상 인물

[clearfix]

1. 개요

서울대학교에서 가장 오래된 단과대학이었으며, 약칭은 서울법대. 더 줄여서 설법이라고도 불린다.

법학전문대학원의 도입에 따라 법학전문대학원 인가를 받은 대학은 학부 과정에서 법학과 관련된 학과를 폐지해야 하므로 마지막 졸업생이 배출된 2018년 2월을 끝으로 폐지되었다.

2. 교내 위상

서울대학교의 명실상부한 간판 학부였다. 입학하는 것만으로도 가문의 영광이 될 정도로 교내 모든 학부들 중에서도 최고의 위상을 자랑하였다. 여기에 사법시험까지 합격에 성공한다면 그야말로 엘리트 중의 엘리트 코스로 통하였다.

IMF 이후로도 꾸준히 입결이 높아지던 의예과가 2010년대 이후부터 입학하기 더욱 어려워진 원인과 인문계열 선호도 하락 및 자연계열 선호도, 그 중에서도 특히 메디컬 천하가 열린 이유 중 하나가 바로 행정고시의 메리트 감소 및 법과대학과 사법시험 폐지에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인문계를 지망하는 최상위권 학생들이 법학과가 사라지고 유예기간 후 사법시험도 폐지되어 입학하고 90%에 육박하는 합격률의 국가고시만 패스하면 안정적인 고소득을 올릴 수 있는 의사를 선호해 자연계로 진로를 틀었다는 것이다.[1]

3. 연혁

전문학교
1895 법관양성소
1909 한성법학교
1911 경성전수학교
1922 경성법학전문학교
1944 휴교[2]
1946 경성법과대학 학부
경성법과대학 예과
경성법과대학 전문부
경성제국대학
1926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률학과
1927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1937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제1류
1945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
서울대학교
1946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948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률학과[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4]
1953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행정학과
1975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과
1981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사법학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공법학과
1997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법학부
2009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개원
2018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부 폐지

4. 역사

4.1. 법관양성소와 경성법전

1895년 3월 조선 정부는 법부 산하에 법관양성소를 설립하였다. 한국에서 근대적인 법학교육이 이루어진 것은 이것이 처음으로, 서울법대는 법관양성소를 그 기원으로 보고 1895년을 개학연도로 삼고 있다. 다만 법관양성소는 오늘날 관점에서 엄밀히 말하면 그 기능이 사법연수원에 조금 더 가까운 편이었다.

법관양성소는 이준 열사, 함태영부통령[5]등을 배출하였으나, 사법권 상실 후 그 기능을 잃고 법학교로 개편되었다가 일제강점기에는 경성전수학교, 경성법학전문학교 같은 전문학교급으로 그 계통이 이어진다. 경성법학전문학교 졸업자들은 서기 등 법원직원이 되는 경우가 많았고, 고등문관시험이나 조선변호사시험에 응시해 사법관료 또는 변호사가 된 사람들이 종종 나오기도 하였다.

4.2.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

1926년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가 설립되었다. 경성제국대학 법과는 실무자 양성이 목표인 경성법학전문학교와 달리, 행정•사법관료 양성과 법학연구를 목적으로 하였다. 이 때문에 재학생 상당수가 고등문관시험 사법과나 행정과에 응시하였다.

일본 본토의 도쿄제국대학이나 교토제국대학과 달리 법학부가 아닌 법문학부 체제를 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법학과 단일 학과에서 법률학, 정치학, 경제학 등 지금보다 포괄하는 영역이 넓었다. 1930년대 중후반에 이르면 법학과 내에서 법률, 정치, 경제, 제 분야에 해당하는 이수코스를 분류하기도 하였으나, 마찬가지로 법문학부 체제를 채택하고 있는 도호쿠제국대학, 규슈제국대학과 달리 경제학사 학위과정을 끝내 제공하지 않았고, 경제학 집중과정에 해당하는 법학과 제3류 역시 그 구성이 순수경제학보다는 정책분야에 편중되었다.

4.3. 경성법전과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의 통합

해방이 되자, 경성법학전문학교는 독자적으로 대학승격을 추진하였고 경성제국대학 역시 일제의 잔재를 떨쳐내고자 경성대학으로 개칭하고 법문학부 법학과를 법학부라는 하나의 학부로서 독립하고자 노력하고 있었다. 1946년이 되면 경성법학전문학교는 가칭 서울법과대학이라는 이름으로 학부과정, 전문부과정, 예과과정 편입생과 신입생을 모집하는 공고를 낼 만큼 독자적 대학승격운동이 진척을 본 상태였다. 경성대학 역시 법문학부 구성 및 법학부, 문학부의 승격에 있어서는 난항을 겪었으나, 기존의 법학과를 법학과, 정치학과, 경제학과로 분과하고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경성대학 1회 졸업생에게 경제학사 학위를 수여하는 등 성과를 거두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1946년 7월 미 군정이 국립서울대학교안을 발표하고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경성대학 법과계통을 '법과대학'이라는 하나의 단과대학으로 통폐합하기로 결정하면서 각 학교의 독자적인 노력은 무위로 돌아가게 되었다. 이른바 '국대안 파동'이라 불릴 만큼 국립서울대학교안에 대한 좌익계열 교수진, 학생의 반발은 격렬하였고 국립서울대학교가 출범한 9월경이 지나서도 동맹휴학 등 분란이 이어졌으며, 1년이 지난 1947년경에 이르러서야 학내의 혼란은 잦아들게 된다.

4.4. 문리과대학과의 강의실 분쟁

경성대학 법문학부 법학과와 경성법학전문학교가 통합하여 법과대학이 되었으나, 경성대학 법학과 학생들은 경성제대 예과보다 낮은 취급을 받았던 구제전문학교와 동격이 될 수 없다고 하여 경성제국대학의 정통 후신으로 여겨진 문리과대학에 정치학과를 만들어 그곳으로 소속을 옮겨버렸다.[6] 이로 인해 실질적으로는 경성법학전문학교가 바로 법과대학으로 이어지게 되어, 경성법학전문학교장이었던 고병국 교수가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의 초대 학장에 취임하였고 교수진 역시 경성법전 교수들이 주축이 되었으며[7] 캠퍼스 역시 청량리에 위치한 경성법학전문학교 교사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이후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측에서는 경성제대 법문학부 법학과의 몫에 해당하는 만큼 동숭동 교사를 사용할 권리가 있다고 보아 동숭동으로 교사 이전을 추진하였다. 하지만 동숭동 캠퍼스를 독점하고 있던 문리과대학 측은 '경성제대 법문학부의 온전한 계승은 문리과대학'이라는 이유를 들어 정치학과가 사용하고 있던 강의실 일부 양도를 거부하였고, 법과대학의 문리대 도서관[8] 사용도 불허하였다. 이로 인해 법과대학과 문리과대학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였는데 법과대학 학생들이 동숭동캠퍼스 강제 진입을 시도하였으나 실력 저지에 나선 문리대 학생들과 물리적 충돌 끝에 결국 법대 측이 패하면서 동숭동 캠퍼스로의 이전은 좌절되었다.

1948년 4월 서울대학교 이사회가 법과대학 교수들에게 문리과대학 교수연구실 일부를 배정하자 문리과대학 교수회는 이를 즉각 거부하고 이사진 총사퇴와 총장 인책을 결의하였다. 이에 이사회에서도 문리과대학장의 경질을 통보하며 강경하게 맞섰으나, 문리과대학 교수들이 집단 사직원을 제출하는 등 대응 수위를 높이면서 결국 이춘호 총장이 사태에 책임을 지고 사퇴하고 새로 취임한 제3대 장이욱 총장이 문리과대학 교수들에게 사과하였다. 법제상 국립서울대학교로 통합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여전히 개별 단과대학의 독립성이 막강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으로, 이를 계기로 서울대학교 운영의 주도적 역할은 학장회의에 넘어갔으며, 유명무실해진 이사회는 1949년 12월 교육법 공포로 소멸하였다. 어떻게 보면 사소한 문제라 할 수도 있겠으나, 국립종합대학의 규준이 될 서울대학교의 지배 구조 자체가 완전히 결정된 것이다.

법과대학은 구 경성공업전문학교 교사를 쓰고 있던 서울대학교 공과대학 일부 학과가 공릉동[9]으로 이전하면서 공실이 된 건물으로 이사하여 동숭동으로 이전하게 된다. 이후의 법대 캠퍼스를 문리대 캠퍼스와 합쳐 동숭동 캠퍼스라고도 부르지만, 법대만을 따로 가리킬 때는 낙산캠퍼스라고 한다. 법대 동창회가 운영하는 낙산장학회는 여기서 따온 이름이다. 지금의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초등학교, 서울대학교 사범대학 부설여자중학교 자리가 그곳인데, 현재도 법대 정문과 법대문방구가 남아 있다.

4.5. 법학과와 행정학과

법과대학 행정학과1948년 신설된 학과로, 이름과 달리 행정학을 가르치는 학과였다고 보기는 어렵다. 김증한의 회고에 따르면 당시 단과대의 소속 학과수에 따라 지원에 차등이 있었기 때문에 보다 많은 지원을 받기 위해 행정학과를 증설하였다고 한다. 일본의 구제 법학부(우리나라의 법과대학에 상당) 역시 법률학과, 정치학과의 두 체제였고, 경성제대 또한 3개의 류를 둔 전례가 있었기 때문에 단일학과보다는 두 학과를 두는 것이 자연스럽다는 판단도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추측된다.

1959년 행정대학원이 설립되면서 행정학과의 교과과정 및 학칙도 개편되어 1963년도 졸업생부터 행정학사 학위를 수여하기로 예정되었다. 그러나 내부의 반발로 교과과정은 복구되었고, 1968년도 졸업생까지는 원하는 자에 한하여 행정학사 학위를 수여하고, 1969년부터는 학과 불문 법학사만을 수여하게 되었다.

종합화 과정에서 행정학은 사회과학에 해당하고 사회과학대학에는 이미 유사학과인 정치학과가 있으므로 행정학과를 폐과하여야 한다는 의견이 강하게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행정학과는 1975년 관악캠퍼스 이전과 함께 폐지되었다.

그러나 경성제대 법학과 제2, 3류 내지 법과대학 행정학과의 유산은 2000년대까지도 남아 있었는데, 법대 전공과목에 정치학, 행정학, 정책학, 외교사, 미시경제론, 거시경제론, 재정학 등이 있었던 것이 그 예. 정치학, 경제학 계열 과목은 2000년대 중반경 교과과정에서 사라졌으나, 대신 정치학과, 경제학부의 유사 과목을 전공선택과목으로 인정하였다.

4.6. 사법학과와 공법학과

행정학과의 인원은 법학과가 전부 수용하였으나, 학사행정상 단일 과에서 법대 정원을 모두 감당하기가 어렵다는 문제가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다. 결정적으로 1981년부터 졸업정원제가 실시되면서, 법과대학 입학 정원은 300명으로 크게 늘어났다. 이에 따라 교수회의 결의로 사법학과와 공법학과로 분리되었다.

일단 법학과로 입학하였다가, 2학년에 올라갈 때 사법학과, 공법학과 중에 선택하였다. 두 과의 인원을 거의 같게 나누므로 성적에 따라 '잘리는' 인원이 생길 수 있었다. 두 과는 전공필수과목이 조금 다를 뿐 별다른 차이는 없었다. 과가 다르답시고 사법학과끼리 공법학과끼리 따로 노는 것도 아니었고.

법학과, 행정학과 시절의 압도적인 법학과 선호만큼은 아니지만, 여전히 사법학과가 공법학과보다 학생들의 선호에 있어 강세를 보였다. 때가 때이니만큼 공법학과에는 학과 공부에 소홀할 수밖에 없는 운동권 학생이 많았다.[10]

당시 법대 단과대 학생회를 중심으로 두 학과 분리에 항의하는 차원에서 절반은 사법학과, 절반은 공법학과를 일률적으로 지망하자는 결의가 거의 매년 이루어졌는데,[11] 사법학과보다 공법학과에 당장 실무에 크게 관련이 없는 전공필수과목이 조금 더 많았기 때문에, 모두의 동참을 이끌어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예컨대 사법학과에서는 당시 사법시험 1차 선택과목 중 절반 이상이 선호하던 국제사법 같은 과목이 전공필수라 이걸 수강하면 그냥 시험준비까지 겸하게 되는 것인데,[12] 공법학과는 같은 1차 선택과목이라도 공부분량이 많아 선호가 떨어지는 노동법이나 국제법 같은 과목이 전공필수였다. 사법시험에서 국제사법을 선택하고 싶은 학생의 경우 공법학과를 가면 (먼 훗날 실무를 하다 보면 결국은 다 쓸모 있는 내용이니 인생 전체로는 손해라고 할 수 없지만) 당장 임박한 시험에 쓸 시간을 전공필수 공부에 투입해야 하는 페널티가 생기는 것. 그래서 90학번 정도까지만 해도 학생회의 결의에 90% 이상 따르는 분위기였지만, 그 이후에는 학생운동의 힘이 약해져 가면서 저학년 때부터 사법시험 공부를 시작하는 학생들이 늘어나던 시절이라[13] 학생들의 총의를 모으기 힘들어지면서 위와 같은 결의를 하지 못하거나, 하더라도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하게 된다.[14]

1997년 사법학과, 공법학과를 없애고 법학부로 통합하기로 하면서, 96학번부터 양과 구별이 없어졌다. 당시 학부제를 실시하면 예산을 더 많이 받을 수 있다고 하여 법학부로 개편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4.7. 법과대학 폐지와 법학전문대학원으로의 전환

법학전문대학원 제도가 도입되고 서울대가 로스쿨 인가를 받으면서, 2018년에 마지막 졸업생을 배출했다. 2018년 전기 졸업식에서 10명이 법학사 학위를 수여받았는데 이들이 학사과정이 완전히 없어지기 전의 마지막 졸업생이 되었다.# 2018년 2월 28일을 기준으로 3명[15]이 아직 졸업을 하지 못한 상태여서, 법학전문대학원 위탁교육[16]을 통해 학점을 취득케 하여 졸업을 시킬 방침이라고 한다.#

2018년 2월 마지막 졸업식을 갖고 폐지되었다. 명성의 주 요인이었던 법학부[17]는 사라지지만, 법과대학 폐지 이후 기존 법대의 인프라와 교수진은 당연히 전부 로스쿨 소속으로 옮겨가게 된다. 교수들은 2009년 3월 ~ 2018년 2월의 기간 동안 '법과대학 교수', '대학원 법학과 교수'이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였지만, 법대가 폐지되면서 '대학원 법학과 교수'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로만 남게 되었다.

법과대학, 법과대학원 법학과와 법학전문대학원은 서로가 별개의 조직으로 편제된 것이기에, 일반대학원 법학과는 그대로 존속되어 있다.

그런데 동문회 측에 따르면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역시 약칭으로는 '서울법전원'이 아닌 '서울법대'를 사용하기로 하였다고 한다. 법전원생들도 과잠바를 보면 서울대 로고 안에 法大라고 쓰고 다닌다. 아무래도 서울법대의 명성을 이어받고 싶은 듯하다.[18] 또한 과거 법과대학 동문회에서는 경성제국대학 법문학부 법학과[19] 학사 출신과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학사 출신에게만 동문 자격을 주었지만, 법과대학 학부 신입생을 더 이상 뽑지 않게 된 2009년 이후로는 일반대학원 법학과 석박사 졸업생, 법학전문대학원 졸업생에게도 서울법대 동문회 정회원 가입 자격을 주고 있으며 서울법대 최고지도자과정(ALP) 수료생에게는 준회원 자격을 주고 있다.

로스쿨 관련 내용은 서울대학교/대학원/법학전문대학원 문서 참조.

5. 학생회

단과대학 학생회 슬로건: 살아 있다는 것은 싸우는 것이다.

각 반 및 반 내 학회 배정은 신입생 성명순이었다고 한다.

분반 명칭: A반, B반, C반, D반.

학생회가(歌)가 있다[20]. 로스쿨에서도 이어받아 오고 있다.
1. 동포의 가슴에 동트는 새날 / 살아 살아 일어선 청년학도여 / 하나로 주인되는 해방의 한 길 / 열고 열어 나서자 굴레를 깨고 / 학생회 깃발 아래 내 사랑 법대여 / 온몸으로 난타하라 정의의 종을
2. 그대의 가슴에 날리는 깃발 / 민중의 아들딸 청년학도여 / 자주 민주 통일의 피어린 역사 / 이어서 이루리 사슬을 끊고 / 학생회 깃발 아래 내 사랑 법대여 / 온몸으로 난타하라 정의의 종을

6. 여담

  • 고시 합격자를 상당히 많이 배출한 학과이지만, 정작 고시 공부에 대한 지원이 전무에 가까운 것으로 악명이 높았다. 어느 재학생 사시 합격자는 합격기에다 '고시 공부를 도와 주기는커녕 오히려 방해를 하는 듯한 서울 법대'라고까지 대놓고 적었을 정도. 고시반 같은 것은 당연히 그런 거 없다. 법학도서관에 수험서를 비치해 주고[21], 열람실을 마련해 주고, 학기를 좀 일찍 마쳐 주는 것 정도가 고시에 대한 지원 아닌 지원이었다. 행정법학자인 모 교수의 경우는 정도가 더욱 심해서, 사시 2차 준비 중인 대학원생들도 블록 세미나에 끌고 갈 정도였다. 교내에서 하루 종일 하는 블록 세미나면 그나마 양반이고, 심지어 자기 고향인 경상북도 안동시에 학생들을 데려간 적도 있다. 그렇게 학생들 고시 공부를 방해하는 이유가 걸작인데, 자기도 대학원 다니다가 사시에 합격했기 때문이라고.[22] 2000년대에 가서야 '가이우스 프로그램'이라는 사법시험 모의고사반을 만들었는데, 학생들이 "혹시나 하는 마음에 응시는 해 보지만, 역시나 거기서 출제된 문제는 예상 문제에서 제끼게 된다."라는 말까지 할 정도로 평이 좋지 않았다. 어쨌거나 문제의 고시반 아닌 고시반은 법대가 로스쿨로 바뀌고 난 지금도 남아 있다.[23]
  • 고시 합격자 발표가 나더라도 축하 현수막을 붙이는 등의 일은 전혀 없었다. 이는 법대만의 현상은 아니고 서울대학교의 공통적인 현상인데, 그런 짓을 하는 것 자체가 남사스럽다고 여기는 게 교풍 아닌 교풍이기 때문이다. 괜히 다른 학교를 자극한다는 인상, 즉 너 잘났네 하는 인상을 받을까봐 쉬쉬하는 게 있다.[24] 원체 서울대학교 자체가 모교 부심이 아예 없기로 악명 높아서 졸업생 성과에 아예 관심이 없는 경우가 많고, 별 거리낌 없이 출신 학교 이름을 밝히는 타대학 출신과 달리 서울대 학생들은 그냥 "저기 과천 어딘가에 있는 산기슭에 있는 학교" 다닌다는 소리로 떼워버린다. 다만, 동창회보에는 합격자 명단을 실어 줬는데, 기이한 것은 공식적으로는 알 수 없는 합격자의 한자 성명과 졸업 기수를 한 사람도 빠짐없이 다 파악해서 게재하였다는 것.
  • 박정희 정부 때에는 워낙 학사운영이 파행하다 보니, 학생들이 서울대학교 교가를 다음과 같이 패러디하여 자조했다고 한다.#
    가슴마다 엉큼스런 야심을 품고

    육법전서 맡겨놓고 외상술이다

    고등고시 핑계 삼아 연애만 하니

    부모님과 애인에겐 크나큰 고통

    날고뛰는 농땡이들이 다 모여들어

    오늘 휴강 내일 종강 서울법대다
  • 대한민국에서 유일하게 로마법 전임교수가 있는 학교이다. 박사과정에서 로마법을 전공한 교수 자체는 전국적으로 몇 명 있으나, 대체로 로마법이 아닌 민법 과목 담당으로 되어 있다. 최병조 교수(재직기간 : 1985년 3월~2018년 2월)가 정년퇴임한 후 한동안 공석이었으나, 2023년 2학기에 이상훈 교수가 부임한다.#
  • 동창회에서 1994년에 《진리는 나의 빛》,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라는 동창생 수상록을 간행한 바 있다(현재 절판). 갓 고교 졸업한 신입생이 읽으면 '훌륭한 선배님들이 좋은 말씀 해 주시는구나'라는 감상이 들게 하는 글들이지만, 정작 필진의 상당수는 출세하기는 했지만 안 좋은 쪽으로 유명세를 떨친 이들이다. 김기춘, 행불상수 등...
  • 최종고 교수가 2013년 정년퇴임을 맞으면서 《서울법대시대: 내가 본 서울대 반세기》라는 책을 출간하였다. 저자의 주관이 상당히 들어가 있지만, 서울 법대의 이모저모에 관한 매우 상세한 보고이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 1990년대 이후에 관해서는 보고가 매우 부실하다.

7. 출신 인물

1990년 기준 신임 검사의 49%, 신임 판사의 61%가 본과 출신이었고, 그중에서도 대법관의 86%, 검사장급 이상 검사의 68%가 서울대 법대 출신이다. 대형 로펌의 경우도 머니투데이에서 2017년에 6대 로펌 인적 구성을 전수조사해 보니, 평균이 '서울대 법대를 나온 42세 남성'이더라하며, # 2018년에 '법률신문'에서 12대 대형로펌의 경영전담대표변호사의 평균을 전수조사해 보니 '서울 태생으로 서울대 법대를 나온 법원 출신의 56.25세 남성 변호사'로 나타났다.# 다만, 법학전문대학원 도입 이후 그 비율은 근래 들어 점점 희석되고 있다.[25] 2022년에는 윤석열 후보가 당선되며 서울법대 역사상 첫 대한민국 대통령을 배출하였다.

아래에서 ☆로 표시한 인물은 법조인이나 법학자가 아닌 사람이다. 물론 법조인이나 법학자가 아니어도 행정고시 출신 관료나 외무고시 출신 외교관, 정치인, 행정학자 등 어느 정도 연관 있는 분야에서 일한 사람들도 많지만, 사회탐구 강사인 이용재나 가야금 연주자 황병기, CJ그룹 회장 손경식, 언론인 김대중, 권석천, 송평인, 안병훈, 태영그룹 회장 윤세영, 인문학 교수인 김현섭(철학), 사회과학 교수인 최명(정치학), 이번송(경제학), 김난도(소비자학), 이헌미(국제정치학), 김재은(사회학), 경희대학교 설립자 조영식, 소설가 최인훈, 군사평론가 양욱, 아나운서 신용철, 이승준처럼 공직이나 정치와는 관계가 거의 없는 분야로 진출한 경우도 제법 있다. 논란 또는 사건사고 문서가 하위 문서로까지 생성되어 있거나 별도 사건사고 문서의 주역인 인물은 해당 문서를 주기하였다(...). 별도 문서 없는 인물은 번잡을 피하기 위해 제외.

동창회에서 1993년부터 '자랑스러운 서울 법대인'을 선정하여 시상하고 있다.
||<-7><tablewidth=100%><color=#fff><tablebordercolor=#003380><bgcolor=#003380>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출신인물 ||
<rowcolor=#fff> 이름 학번 경력 자랑스러운 서울 법대인 관련문서 비고 비 법조인
강경식 전 부총리
강금실 75
강만수
강성태 경성제대 졸업
강수진
강신옥
강신욱 강기훈 유서대필 조작 사건
강용석 88
강일원 78
강재섭
강효상
경대수
고승덕
고영권
고영한 74
공로명 24회
곽규택
곽노현 72
곽윤직 6회
국민수
권석천
권순일 77
권순정
권순호
권영세
권영준 89 대법관
권오승
권익환
권재진 72
금진호 21회
금태섭 86
김경한 22회
김기동
김기영
김기춘 58 김기춘/비판 및 논란
김기표
김난도 82
김능환
김대중 기자 13회
김덕주
김동건
김만복
김명수 77
김명주 정치인
김문석 77
김상철
김상헌 82
김상환 84
김선수 79
김성일
김세완 경성전수학교 졸업
김세윤
김소영 84
김수남
김승규
김승원
김영대 대성그룹 회장
김영란 75
김영무 28회
김영선
김영수
김영환 82
김오수
김완기
김외숙
김용균
김용래
김용남 정치인
김용빈 79
김용준 10회
김용철 8회
김윤일
김이수 72
김인규 전 장흥군수
김인호 26회
김재섭 06
김재원
김재형 대법관
김제식
김종구
김종민
김종률
김종호
김주수
김주익 한성학원 설립
김주현 81
김증한
김진모 84 국정원 특수활동비 청와대 상납 사건
김진우 헌법재판소 재판관
김진태 전 검찰총장
김진태 83 정치인
김진표 정치인
김찬진
김철수 13회
김태현
김택수 9회
김평우
김학근
김학원
김학의 김학의 별장 성접대 사건
김형기
김형태
김황식 전 국무총리 21회
김회선
김효종
나경원 82 자유한국당 원내대표
나석호
남효순
노승권 84 돈봉투 만찬 사건
노신영 11회
노준형
대성 77 승려
도진기
목영준
목요상
문병호 79
문유석
문형배 83
문희상 64
민복기 8회 경성제대 졸업
민유숙 83
민일영 74
박균택
박길배
박동서
박병대 76
박병원
박상옥
박상천
박성수
박세일 66 25회
박수영 82
박순용
박요찬
박상천 57
박일환
박정식
박종철
박주민 93
박주선
박주현
박철언
박춘란
박한철 26회
박형철
박희태 57
배명인
배성범
백태현
백형구
변영만 22회 법관양성소 졸업
변창훈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부상일
성낙인
서기석
서기호
서정욱 90
서정화
서형수 76
석동현 79
선우종원 9회 경성제대 졸업
성창호
손경식 57 10회
송강호 경찰
송광수
송기헌 82
송상현 14회
송언석 82
송영곤
송옥렬 88
송행수
신건
신광렬
신기남 70
신영철
신용철 SBS 아나운서
신오철
신평
신현수
신현확 8회 경성제대 졸업
심명보
심상명
심장수
심재륜
안경환 66
안대희
안병훈 57
안상수 [26] [27]
안태근 돈봉투 만찬 사건, 검찰청 내부 성추문 참조
안홍렬 정치인
양건 66
양승태 66 제15대 대법원장
양욱 95
양재식
양재호
양창수 27회
여상규 81
여운국 87
예세민 92
오경미
오민석
오유방
우병우 84
원세훈 국가정보원·국방부 여론조작 사건
원희룡 82 前 국회의원(3선), 제주특별자치도지사, 국토교통부장관
유기준 78
유남석
유명환 66
유상범 84
유창훈 93
유흥수
윤경식
윤동환 강사
윤병세 72
윤석열 79 제20대 대한민국 대통령 윤석열 정부 비상계엄
윤세영 56 9회
윤영철 15회
윤증현 28회
윤진수 73
윤형모
이강국 21회
이규용
이근식
이낙연 前 국무총리, 새로운미래 당대표
이대순 23회
이동흡
이두아
이범래
이명재
이범래
이봉성 경성법전 졸업
이사철
이상규 정치인
이상돈 정치인, 환경법학자 [28]
이상인 79
이석수
이석태
이석현
이선중 45
이세중
이수성 정치인 11회
이승우
이시윤 18회
이신범
이영렬 77 돈봉투 만찬 사건
이영범 59
이영애 67
이완규 79
이용구
이용배
이용재 강사
이용훈[29] 3회
이용훈[30] 21회
이은애
이은영
이인규 77
이인복 74
이인제
이재범
이재상
이정섭
이정렬
이정희
이종백
이종석 79
이종성 경성법전 졸업
이종왕
이주영 정치인
이주원
이준 9회 법관양성소 졸업
이진성
이진수 93
이철수 전 서울법대 교수
이철우 전 행정공무원
이철우 법학 교수
이탄희 97
이태영 6회
이한동 11회
이한성
이해봉
이헌재 62
이홍구 정치인 11회
이홍훈
이현주
이회창 6회
이흥구 82
임내현
임무영
임성근
임종헌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임채진
임항준
임호영
임홍빈
장기표
장승수
장승화
장윤석
장인종 82
장재식
전병관
전윤철
전주혜
전현정
전현준 84
정구영 경성전수학교 졸업
정기승 17회
정기호
정상명
정상조
정성진 58
정성호 81
정수봉 정윤회 국정개입 의혹
정연석
정영훈
정장현
정점식 84
정정길
정종섭
정종택
정준길 86
정준호 정치인
정창섭
정철승 89
정해창 15회
정형근
정형식 81
정호영
제성호
조국 82 조국 사태, 청와대의 울산시장 하명수사 의혹,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조대현
조대환
조배숙 75
조상철
조성기 소설가 26회 제15회 이상문학상 수상
조순형 20회
조영곤
조영래 12회
조영식
조용순 경성전수학교 졸업
조원룡
조의연
조응천
조재빈
조준웅
조진만 8회 경성법전 졸업
조해진 82
조희대 75
주영진
지원림 77
진경준 진경준 게이트
진영 71
진의종 11회 경성제대 졸업
차맹기
차한성
채동욱 77
채명성
천정배 72
최강욱 86 [31]
최거훈
최규성
최동규
최병국
최병렬
최상목 82
최유정 정운호 게이트
최윤수 84 박근혜 정부의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최인훈 12회 [32]
최재경
최재형
최종영 14회
태완선 19회 경성법전 졸업
최희준
하경철
하창우
한기정 82
한동훈 92 제69대 법무부 장관
국민의힘 비상대책위원장
한문철
한정길
한종호
한준호 공무원
한창기
함승희
함태영 제3대 대한민국 부통령 10회 법관양성소 졸업[33]
현경대
현승종 1회 경성제대 졸업
현석호 전 국회의원, 국방부 장관 경성제대 졸업
현홍주
홍석조 71
홍성유 소설가 소설 '장군의 아들'
홍승면 83
홍윤식
홍진 11회 법관양성소 졸업
홍진기
황병기 5회 '미궁'으로 유명한 가야금 연주가
황산덕
황산성 64
황우여
황인철
황찬현
황철규 83 국제검사협회 회장
황희석

7.1. 가상 인물


[1] 실제로 대치동 유명 학원들의 경우 과거에 비해 자연계열 학생을 인문계열 학생보다 최대 2배 정도 많이 받고 있다.[2] 일제강점기 말기, 태평양 전쟁이 고도화되자 일제는 조선 내의 모든 자원을 효율적으로 관리한다는 명목하에 물자를 통제하기 시작했다. 교육 역시 태평양 전쟁 수행에 필요한 대로 변형시켰으며, 고등교육은 전쟁 시기의 자원을 낭비한다는 명목 하에 극도로 축소시켜버렸다. 이러한 조치로 경성법학전문학교 등 관립 전문학교(구제)는 휴교 상태에 들어가고 사립 전문학교는 조선총독부에서 몰수해 자기네들 입맛대로 통폐합시켜 버렸다.[3] 일반법학전공, 사법학전공, 형사법학전공, 비교법학전공의 세부전공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존재[4] 일반공법전공, 외교학전공의 세부전공을 설치하였다는 기록이 존재[5] 법관양성소 1회 수석졸업, 서울법대 동문회 1호 회원으로 등록되어있다. 윤석열 동문의 대통령 당선 이전까지는 서울법대 출신 중 최고위 선출직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6] 일제강점기는 물론 현대 일본에서도 정치학과는 법학부에 속해있는데, 일제강점기에 연원을 둔 서울대학교 정치외교학부가 오늘날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에 있는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7]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 학자들 역시 신기석, 박일경, 서임수, 김경수, 김성희의 예에서 볼 수 있듯 대부분 문리대 정치학과 교수로 취임했다. 경성제대 1회 졸업생인 유진오가 교수진을 구성한 고려대학교 법과대학에 오히려 경성제대 출신 교수가 많았다. 한국전쟁 이후 대학들이 재구성되면서 다수의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 학자들이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교수로 부임했으나, 유기천 총장의 황산덕 교수 파면사건에서 나타나듯이 일찍부터 법과대학 교수진을 잡고 있었던 도쿄제대파(東大派)와 이후 유입된 경성제대파(城大派)의 갈등이 상존했다고 한다. 유기천교수기념사업출판재단 한국법학과 유기천 18~21쪽 참조.[8] 舊경성제국대학 도서관[9] 경성제대 이공학부 자리이다.[10] 대표적으로 원희룡, 조국, 이정희가 모두 공법학과 출신이다. 운동권 출신이 아닌 인물로는 한동훈 국민의힘 비대위원장이 있는데, 사법학과를 지망했으나 성적이 밀려 공법학과로 갔다.[11] 구체적으로는 개개인의 성적과 관계 없이 1학년 때 2개 반은 사법학과, 2개 반은 공법학과를 지원하자는 방식이었다. 보통 1학년 때 가나다순으로 반편성이 되었는데, 방식은 매년 조금씩 다르지만 제비뽑기를 하거나 작년의 반대로 하는 방식으로 지망할 학과를 정한 후 일률적인 지원서 작성을 독려했다.[12] 사실 국제사법은 제대로 공부하자면 양이 적은 과목도 아니고 민사법 전체를 클리어한 상태라야 제대로 이해를 할 수 있긴 하지만, 결정적으로 조문 개수가 얼마 안 되어 이른바 헌민형과의 공부시간 배분계획에 유리하다는 점이 선호에 영향을 미쳤다. 2022년 전면개정 국제사법도 96조까지밖에 없지만, 법률명이 섭외사법이었던 당시에는 더 적어서 47개뿐이었다. 어차피 국제법이나 노동법 등을 공부한다고 해 봐야 학부 수준의 실력에서는 제대로 된 이해를 기대할 수 없는 건 마찬가지이니 양이라도 적은 과목이 선호될 수밖에 없는 것. 나중에 국제사법이 전면개정되면서 조항 수가 늘어나고, 국제물품매매계약에관한유엔협약이 시험범위에 추가되며 국제거래법으로 선택과목명이 바뀌었는데, 이후 선호도가 급감하게 된다.[13] 이와 같은 분위기가 큰 영향을 미치진 못했는지, 4학년에 합격하는 이른바 소년등과의 비율은 90학번인 사법시험 35회에 20명을 넘어서며 가장 높았고, 이후 점점 감소하면서 한 자리 수로 뚝 떨어졌다가 파격적인 증원이 이루어진 시기가 되어서야 겨우 두 자리 수를 회복하게 된다.[14] 따라서 위에서 언급된 인사들 중 90년대 학번으로서 월간조선에 명시적인 출처가 있는 한동훈을 제외하고, 80년대 학번인 원희룡, 조국, 이정희 등은 사법학과를 지망했는데 성적이 밀린 것인지, 그냥 학생회 결의대로 지망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15] 07학번 군휴학생 2명, 08학번 재학생 1명[16] 로스쿨 소속으로 신분이 전환된 것이 아니다.[17] 주 요인이라고 했지만, 사실 대다수 일반인들에게는 '서울법대' 명성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18] 물론 기존의 약칭을 계속 쓰는 게 현실적으로 편하기도 하다.[19] 경성제대 법학과는 서울법대의 적통 전신으로 인정받았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경성법학전문학교와 그 후신인 경성법과대학 출신은 동문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반쯤 서자, 곁가지 취급만 받았다. 서울대학교가 각 단과대학의 전신 학교들을 '개학년도'로, 1946년을 '개교년도'로 삼아 어떻게든 경성제대 전신설을 부정하면서도 정작 경성제대만이 조선 유일의 학사 학위 수여 기관이었다면서 경성제대 출신만 동문으로 인정하고, 국대안 파동 당시 경성제대 출신들은 전문학교 합병이 격을 떨어뜨린다면서 반대하여 경성제대 법문학부 문학과와 이공학부 이학계가 합쳐져 만들어진 문리과대학만을 서울대 중의 서울대로 떠받드는 등 경성제대 혈통을 적통 취급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이는 것도 결국은 일제강점기 최고 학부라는 상징성도 놓치지 않으려는 욕심 때문이다. 더 우스운 건 서울법대의 전신이라는 법관양성소의 1기 수석 졸업생 함태영 전 부통령과 그 동기 이준 열사는 자랑스러운 서울법대인이라면서 동문으로 은근슬쩍 끼워넣는다는 것이다. 초대 동문회장 유진오는 경성제대 법학과 출신이었는데, 함 부통령이 법관양성소 1기 수석 졸업이랍시고 서울법대의 제1호 동문으로 추대하기도 했다. 혈통과 학벌에 집착하면서 독립운동가 및 고관대작은 동문으로 끼워넣는 상당히 이중적인 모습이다.[20] 이동민(85학번) 작사, 이헌영(86학번) 작곡.[21] 이마저도 도서관의 역할상 당연한 일이었다.[22] 사실 이런 점은 법대뿐만 아니라 서울대학교 여러 학과에서 공통적으로 일어났던 현상이다. 예를 들어 사범대학의 경우도 임용시험에 대한 지원이 없는 것은 물론 학과 졸업논문 제출은 스케줄대로 해야 했다. 즉 4학년의 경우 졸업논문 준비와 임용시험 준비를 동시에 해야 하는 것. 공대 등 이과계 학과도 마찬가지라 다른 대학처럼 4학년은 입사시험 준비하라고 강의를 빨리 마무리하라는 등의 배려가 없었다. 최근 들어서 조금씩 이런 점은 바뀌어 가고 있긴 하다.[23] 정종섭 교수의 주도로 만들게 되었다고 하는데, 법대만의 모의고사반이어서 졸업생은 응시할 수 있으나 타과 출신은 참여를 불허하였다. 가이우스(Gaius)는 고대 로마의 법학자 이름인데, 매우 개그스러운 사실은, 가이우스라는 사람은 시쳇말로 사법 시험에 못 붙어서 지방대 법대 교수를 하던 인물이라는 것이다.[24] 법대에서 합격자 축하연을 열어 준 적이 딱 한 번 있었는데, 정작 재학생들과 졸업생들의 반응은 합격자와 불합격자를 불문하고 이뭐병에 가까웠다는 이야기가 있다.[25] 2017년 현재 '전체' 2,061명의 검사 중 804명이 서울'대' 출신(39%)이고 '전체' 2,844명의 검사 중 1,581명이 서울'대' 출신(55.6%)다. 사시 합격자 중 설법과 설비법의 비율을 생각해 보면, 저 중 60% 이상은 법대라고 추정해볼 수 있다.[26] 검사 출신, 전 한나라당 대표. 전 창원시장. 전 인천광역시장[27] 안상수와는 동명이인(한자 이름은 다르다)[28] 고려대 법대 출신 형법학자인 이상돈(1961)과는 동명이인(한자 이름은 다르다).[29] 1927년생[30] 1942년생[31] 변호사 출신 정치인이자 前 열린민주당 대표, 21대 국회의원 前 문재인 정부 대통령비서실 공직기강비서관[32] 졸업을 못 하고 제적되었으나, 2017년 2월 24일 명예졸업장을 수여받았다.[33] 1회 수석 졸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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