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슬림의 시칠리아 정복 전쟁 아랍어: الفتح الإسلامي لصقلية 영어: Muslim conquest of Sicily | ||
시기 | 827년 ~ 902년 | |
장소 | 시칠리아 | |
원인 | 동로마 제국의 내분과 아글라브 왕조의 확장 정책 | |
교전 세력 | 동로마 제국 [[베네치아 공화국| ]][[틀:국기| ]][[틀:국기| ]] | 아글라브 왕조 코르도바 토후국 나폴리 공국 |
지휘관 | 발라타 주스티아노 파르티시파지오 테오도토스† 스파타리오스 시메온 알렉시오스 모셀레 콘스탄티노스 콘토미티스 니키타스 오리피스 | 에우페미오스†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 무함마드 이븐 아부 엘 자와리☠ 아스바흐 이븐 와킬☠ 아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 알 파딜 이븐 야쿱 알 파지리 아부 알 아글라브 이브라힘 아브드 알 살람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 아부 알 아글라브 알 아바스 이븐 알 파딜 이븐 야쿱 알 파자리 카파야 이븐 수피안† 무함마드 이븐 카파야†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 후세인 이븐 라바 아부 알 아바스 압달라 이브라힘 2세 |
결과 | 동로마 제국의 시칠리아 상실, 시칠리아 토후국 탄생. | |
영향 | 무슬림의 지중해 장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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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827~902년, 마그레브에 기반을 마련한 아글라브 왕조가 동로마 제국령이었던 시칠리아를 정복한 전쟁.
2. 배경
제1차 포에니 전쟁에서 고대 카르타고를 꺾은 이래, 시칠리아는 로마의 수중에서 오랫동안 번영을 구가했다. 476년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뒤 동고트 왕국의 수중에 들어갔지만, 535년 유스티니아누스 1세의 서로마 고토 수복 전쟁에 의해 동로마 제국의 영역이 되었다. 568년 랑고바르드 왕국이 동로마 제국을 밀어내고 이탈리아의 영토 대부분을 장악했지만, 해군이 부실했기 때문에 시칠리아까지 노리지 않았다. 7세기 말 아프리카 총독부가 무슬림군에 무너지면서 시칠리아 건너편 북아프리카 전역이 무슬림의 수중으로 넘어간 뒤, 시칠리아는 무슬림과 동로마 제국의 최전선이 되었다.동로마 제국은 시칠리아 만큼은 반드시 지키고 싶어했다. 지중해 세계의 곡창지대이고 수많은 세입을 이곳에서 거두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지중해 중심에 위치하고 있기에 지중해의 안보를 확보하려면 반드시 이곳을 장악해야 했기 때문이다. 만약 시칠리아 마저 잃는다면, 랑고바르드 왕국의 공세에도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남이탈리아 일대가 위험해지고, 제국의 본토인 발칸 반도와 아나톨리아 마저 해상 공격에 더욱 시달릴 수 있었다. 이에 시칠리아를 사수하기 위해 방비를 굳건히 했다. 콘스탄스 2세는 661년 시라쿠사의 중심지인 시라쿠사에 궁정을 옮긴 뒤 아예 수도를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시라쿠사로 옮기려 했고, 690년경 콘스탄티노스 4세는 시칠리아 총독부를 설치하고 총독에게 민정과 군사를 동시에 관장하며 무슬림의 침략을 막아내게 했다.
무슬림 역시 시칠리아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기에 652년 시라쿠사를 습격한 이래 해상 습격을 여러 차례 감행했지만, 동로마 제국의 철통 방비에 막혀서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752~753년 이프리카야(Ifriqiya: 우마이야 왕조의 아프리카 속주) 총독 아브드 알 라흐만 알 파흐리가 시칠리아 인근의 섬인 사르데냐 원정에 착수했지만 도중에 베르베르 반란이 일어나는 바람에 철수해야 했다.
799년 아바스 왕조 칼리파 하룬 알 라시드에 의해 이프리키야 에미르로 인정받은 이브라힘 이븐 알 아글라브는 아바스 왕조에 충성을 바치면서도 현재 튀니지를 중심으로 실질적으로 독립된 국가를 세웠다.(아글라브 왕조) 그는 아바스 왕조에 적대적인 시아파가 세운 이드리스 왕조의 동진을 차단하는 데 전력을 쏟아붓고 싶었기에, 805년 시칠리아 총독과 평화 협약을 맺었다. 812년 이브라힘이 사망한 후 뒤를 이은 압둘라 1세와 지야다탈라 1세 역시 평화 협약을 준수했고, 양자는 무역 거래를 활발히 했다.
그러던 827년, 시칠리아 해군 사령관 에우페미오스가 반란을 일으켰다. 이보다 앞서, 그는 한 수녀에게 매력을 느끼고 그녀가 자신과 결혼하도록 강요했다. 이에 수녀의 형제들이 시칠리아 총독 콘스탄티노스 소우다스에게 고발했고, 콘스탄티노스의 보고를 받은 동로마 황제 미하일 2세는 에우페미오스를 체포하여 코를 자르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정보가 새면서 자신이 위험에 처했다는 것을 알게 된 에우페미오스는 반란을 결심했다. 그는 황제를 자칭하고 시칠리아의 수도 시라쿠사를 빠르게 공략했다. 콘스탄티노스 총독은 내륙으로 도피한 뒤 군대를 모아 반격을 가했지만, 가볍게 격파되었다. 콘스탄티노스는 카나타에 피신했다가 에우페미오스가 보낸 추격병에 잡혀 처형되었다. 그러나 얼마 후 팔레르모의 군사 사령관 발라타가 거병하여 시라쿠사를 공격했다.
에우페미오스는 발라타에게 참패하여 시라쿠사에서 축출된 뒤, 아글라브 왕조에 찾아가서 자신을 시칠리아의 지배자로 만들어준다면 매년 공물을 바치겠다고 약속했다. 지야다탈라 1세는 그의 제안에 매력을 느꼈다. 당시 아글라브 왕조는 호화로운 궁정을 짓고 사치스러운 생활을 했기 때문에 말리크파 법학자들로부터 반이슬람적이라는 비난을 받았고, 현지의 베르베르인들로부터 불만을 샀다. 이런 상황에서 시칠리아 원정을 성사시킨다면, 이슬람 포교를 위해 지하드를 수행한 셈이니 말리크파 학자들이 잠잠해질 테고, 불만이 많은 베르베르인들을 시칠리아로 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시칠리아는 부가 넘치기로 유명했으니, 그곳을 확보한다면 막대한 재원을 확보할 수 있었다. 지야다탈라 1세는 827년 6월 14일 카이루완 종교 법정의 판사를 역임하던 아사드 이븐 알 푸라트를 사령관으로 선임하고 기병 700명과 보병 1만 명, 함선 70~100척을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이리하여 70여 년간 이어진 전쟁의 막이 올랐다.
3. 전개
아사드가 이끄는 무슬림 함대는 3일간의 항해 끝에 시칠리아 남서쪽에 있는 마자라에 도착했다. 발라타는 이들을 막고자 했으나 마자라의 남동쪽 평원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참패했다. 이후 발라타는 엔나로 철수한 뒤 이탈리아 본토에 있는 칼라브리아로 철수한 후 더 많은 병력을 모으려 했으나 도중에 급사했다. 아사드는 마자라를 아부 자키 알 키나니에게 맡긴 뒤 시라쿠사로 진격했다. 그러던 중 아크라이에서 시칠리아 총독이 보낸 사절단을 만나 진격을 중단하는 대가로 공물을 바치겠다는 제안을 받았다. 아사드는 일단 사절단의 제안을 숙고하고 병사들을 휴식시키기 위해 며칠간 진격을 중단했다.그러는 사이, 에우페미오스는 아글라브 왕조가 시칠리아를 아예 집어삼키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눈치채고 그들을 끌어들였던 것을 후회했다. 그는 비밀리에 제국군과 접촉하여 무슬림군과 맞서 싸우라고 권했다. 얼마 후, 아사드는 총독의 제안을 거절하기로 하고 시라쿠사로 진군해 도시를 포위했다. 한편, 동로마 제국은 무슬림군의 크레타 침공에 신경이 쏠리느라 지원군을 시칠리아에 당장 파견할 수 없었다. 그 대신 동로마 제국의 보호령이었던 베네치아 공화국의 도제 주스티아노 파르티시파지오가 시라쿠사를 구하기 위해 함대를 이끌고 왔지만 적의 포위를 뚫지 못했다. 그러나 무슬림군은 828년 여름 전염병 창궐과 보급품 부족으로 인한 굶주림으로 인해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고, 지휘관 아사드 마저 병사했다.
아사드 사후 새 지휘관에 선임된 무함마드 이븐 아부 엘 자와리는 포위를 이어갔지만 동로마 함대가 접근해오자 포위를 풀고 아프리카로 돌아가려 했다. 그러나 동로마 함대가 이를 차단하자 배를 불태우고 내륙으로 퇴각한 뒤 미네오 성으로 진군해 사흘간의 짧은 공방전 끝에 함락시켰다. 이후 무슬림군은 둘로 갈라졌다. 한 부대는 서쪽의 아그리젠토로 이동했고, 다른 한 부대는 에우페미오스와 함께 엔나로 진격했다. 이때 엔나의 수비대는 아랍군을 물리쳐준다면 에우페미오스를 지도자로 인정하겠다고 제안했다. 에우페미오스는 이에 혹해 소규모 호위병들을 거느리고 구체적인 협상을 위해 엔나의 사신 2명과 접촉했지만, 그들이 숨기고 있던 검으로 찌르면서 현장에서 피살당했다.
829년 봄, 미하일 2세는 테오도토스가 이끄는 새로운 함대를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테오도토스는 시칠리아에 상륙한 뒤 여전히 무슬림군에 포위되어 있던 엔나로 행진했으나 무슬림군에게 참패한 뒤 요새로 피신했다. 무슬림들은 이에 고무되어 시칠리아 섬에서 동전을 주조했다. 얼마 후 무함마드 이븐 아부 엘 자와리가 병사했고, 주바이르 이븐 가우스가 새 지휘관이 되었다. 테오도토스는 적이 지휘관 교체로 인해 분주한 틈을 타 엔나에서 출격하여 무슬림군 진영을 습격해 1,000명을 죽이고 나머지 적군을 한 요새로 몰아넣었다. 무슬림들은 야간 기습을 시도했지만 테오도토스가 이를 예상하고 매복 공격을 하는 바람에 참패했고, 살아남은 이들은 미네오 성으로 도주했다. 테오도토스는 곧바로 미네오 성을 포위했고, 무슬림들은 말과 개를 잡아먹어야 할 정도로 굶주림에 시달렸다. 이 소식을 접한 아그리젠토의 무슬림군은 도시를 버리고 마자라로 도주했다.
이제 무슬림이 시칠리아에서 쫓겨나는 건 시간문제인듯 했지만, 830년 초 코르도바 토후국이 파견한 베르베르 지휘관 아스바흐 이븐 와킬이 시칠리아에 도착하면서 상황이 반전되었다. 그는 미네오에 포위된 수비대와 연락을 취했고, 자신이 그들을 구하는 대신 시칠리아 방면 무슬림군 총사령관이 되기로 했다. 830년 7월 또는 8월, 테오도토스는 아스바흐와 미네오 수비대의 합동 공격에 버티지 못하고 엔나로 퇴각했다. 그 후 무슬림군은 미네오를 불태운 뒤 바라프랑카를 포위 공격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 역병이 또다시 발생하면서 아스바흐를 포함한 수많은 무슬림들이 죽었다. 무슬림들은 가을 무렵에 바타프랑카를 함락했지만, 숫자가 매우 줄어들었기 때문에 테오도토스의 역습에 버티지 못하고 서쪽 해안 요새로 도주했다. 그러나 테오도토스 역시 이 시기에 알려지지 않은 전투를 치르던 중 전사했다.
한편, 마자라로 피신했던 무슬림군은 아프리카 본토에서 온 병력과 일부 코르도바인들을 규합한 뒤 팔레르모로 진격했다. 팔레르모는 831년 9월까지 1년간 스파타리오스 시메온의 지휘하에 격렬하게 항전했다. 그러나 구원군이 올 기미가 없고 식량이 바닥난데다 전염병까지 돌면서 더 이상 버틸 수 없게 되자, 시메온은 도시의 고위 관리들과 수비대가 안전하게 떠나는 대가로 항복했다. 아랍 역사가 이븐 알 아티르에 따르면, 본래 팔레르모에는 7만 명이 있었지만 공방전이 끝났을 때 3천 명만 남았고, 그들 모두 노예로 끌려갔다고 한다. 832년 3월 아글라브 왕조가 파견한 왈리(총독) 아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가 팔레르모에 도착한 뒤 통치를 시작했다. 그는 이베리아 반도에서 온 무슬림과 아프리카에서 온 무슬림 간의 불화를 누그러뜨리고 현지 주민들을 온화하게 대하는 등 국정을 잘 다스렸다.
그 후 시칠리아 전쟁은 2년간 소강 상태였다. 무슬림들은 새로 확보한 지역의 통치력을 강화하는 데 주력했고, 동로마 제국은 아바스 왕조 칼리파 알 마문이 아나톨리아 지역을 잇따라 침략하고 콘스탄티노폴리스를 위협했기에 멀리 떨어진 시칠리아에 지원군을 새로 보낼 여력이 없었다. 그러던 834년 초, 아부 피르 무함마드 이븐 압달라는 엔나 원정에 착수했다. 그는 수비대를 격파한 뒤 포위를 벌였지만 쉽게 공략되지 않자 철수했다. 835년 다시 시칠리아 중부로 진군해 동로마군을 격파한 뒤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사령관의 아내와 아들을 포로로 잡았다. 이후 아부 피르는 시칠리아 동부로 깊숙이 진군하려 했지만, 도중에 그에게 불만을 품은 무슬림인들에게 살해당했다.
아글라브 에미르 지야다탈라 1세는 아부 피르가 살해되었다는 소식을 접하자 알 파딜 이븐 야쿱 알 파지리를 새 왈리로 선임했다. 야쿱은 도착하자 마자 시라쿠사 주변 지역을 습격한 뒤 엔나 주변 지역을 잇따라 공격했다. 로마군은 이들을 무찌르러 출격했지만, 습격대는 적이 쫓을 수 없는 산악지대와 울창한 숲 지역을 가로질러 철수했다. 이에 로마군은 철수했지만, 도중에 매복하고 있던 소규모 무슬림군에게 습격당하자 전의를 잃고 달아났다. 무슬림군은 상당량의 무기, 장비, 동물들을 확보했다.
하지만 야쿱은 그해 9월에 자야다탈라 1세의 사촌인 아부 알 아글라브 이브라힘으로 교체되었다. 이브라힘은 팔레르모로 함대를 끌고 가던 중 동로마 함대의 급습을 받고 후퇴하다가 폭풍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가까스로 팔레르모에 소규모 잔여 함대와 함게 도착한 이브라힘은 판텔라리아 등 여러 해군 기지를 급습한 후 포로로 잡은 기독교인들을 참수하는 방식으로 복수했다. 이와 동시에, 무슬림 기병대가 에트나 산 주변 일대를 습격하여 마을과 농작물을 불태우고 주민들을 붙잡아 노예로 삼았다.
837년, 아브드 알 살람 이븐 아브드 알 와하브가 이끄는 무슬림군이 엔나를 공격했으나 크게 패했고, 아브드 자신도 포로로 전락했다. 이브라힘은 이에 대응해 엔나를 포위 공격했다. 838년 겨울, 무슬림군은 도시로 통하는 산길 하나를 찾아내고 이를 통해 도시를 급습하여 성채를 제외한 도시 대부분을 장악했다. 이후 성채를 마저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하자, 이브라힘은 수비대와 협상한 끝에 거액의 몸값을 받는 대가로 철수하기로 했다.
838년 봄, 테오필로스 황제의 명령을 받들어 시칠리아 구원 작전에 착수한 알렉시오스 모셀레가 현장에 도착했다. 알렉시오스 모셀레는 당시 남자 후계자가 없었던 테오필로스에 의해 카이사르(부제)로 지명되었고 황제의 막내딸 마리아 공주와 결혼한 인물이었다 그는 먼저 무슬림군에 포위되었던 세파루 요새를 구원한 뒤 여세를 몰아 서쪽으로 진격하여 그들에게 몇 차례의 패배를 안겼다. 그러나 838년 말 새로운 무슬림 지원군과의 전투에서 패배하면서 공세가 중단되었다.
그러던 중 테오도로스의 막내딸이자 자신의 약혼자였던 마리아가 사망했다. 이로 인해 테오필로스와의 인맥이 끊긴 데다, 정적들이 그가 무슬림들과 결탁하여 시칠리아에서 황제가 될 음모를 꾸미고 있다고 모함했다. 테오필로스는 시라쿠사 대주교 테오도로스 크리티노스를 보내 신변의 안전을 보장할 테니 콘스탄티노폴리스로 오라고 권고했다. 그는 황제의 부름을 받고 콘스탄티노폴리스로 갔다가 직위를 박탈당하고 투옥되었다.[1]
838년 6월 11일, 시칠리아 정복 전쟁을 이끌었던 지야다탈라 1세가 사망하고 형제 알 아글라브 아부 이칼이 계승했다. 그는 시칠리아에 새 병력을 파견해 전쟁을 조속히 마무리하려 했다. 무슬림군은 콜레오네, 플라타니, 칼타벨로타, 마리노, 게라치 등 여러 요새를 공략하고 841년 엔나에서 그로테까지 공격했다. 이 무렵, 베네벤토 공국의 침략에 시달리고 있던 나폴리 공국이 시칠리아의 무슬림군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그들은 이를 빌미삼아 이탈리아 본토로 쳐들어가서 브린디시를 약탈했다. 얼마 후 베네벤토 공국에서 내전이 발발하자 이 기회를 노려 840년 타렌툼을 함락하고 847년 바리를 공략한 뒤 자신들의 근거지로 삼았다. 바리 토후국은 871년 동로마 제국군에 의해 무너질 때까지 30년 가까이 이탈리아 해안과 아드리아 해 연안지대를 주기적으로 습격했다.
842년 말 또는 843년, 무슬림군은 나폴리 공국의 지원에 힘입어 메시나를 정복했고 845년 모디카 요새 역시 함락했다. 동로마 제국은 아바스 왕조와 평화 협약을 맺은 뒤 시칠리아로 증원군을 보내 이에 대응하고자 했다. 양자는 부테라 인근에서 격돌했는데, 그 결과 동로마군이 10,000명의 병력을 잃고 패퇴했다. 무슬림군은 여세를 몰아 846년 레온티니를 공략했고 848년 라구사를 포위해 몇 개월간 공격한 끝에 굶주림에 시달린 수비대의 항복을 받아낸 후 요새를 철저히 파괴했다. 847년 후반 또는 848년 팔레르모 인근에 상륙하려던 동로마 함대를 격퇴했다.
851년 아부 알 아글라브 이브라힘이 사망했다. 이에 시칠리아 무슬림들은 부테라 전투를 승리로 이끈 아부 알 아글라브 알 아바스 이븐 알 파딜 이븐 야쿱 알 파자리를 새 왈리로 삼았다. 새 왈리는 아글라브 왕조의 왈리 취임 승인을 기다리지 않고 시칠리아 북부 요새인 칼타부투로를 공격해 함락시킨 뒤 시칠리아 중부의 여러 마을을 약탈했다. 852~853년 발 디 노토를 초토화한 뒤 부테라 요새를 5~6개월간 포위했으나 함락에는 실패하고 주민들로부터 5,000~6,000명 가량의 포로에 대한 몸값을 받아낸 후 철수했다. 857년 세파루를 포함한 여러 요새를 함락시킨 뒤 여세를 몰아 갈리아노를 포위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858년 여름 아바스의 동생 알리가 풀리아 근해에서 동로마 해군과 두 번 맞붙었다. 첫번째 해전에서는 40척의 적선을 격파했지만, 두 번째 해전에서는 참패하고 겨우 목숨만 건져 달아났다.
859년 1월 24일, 무슬림군은 그동안 번번이 공격했으나 함락에 실패했던 엔나를 마침내 공략했다. 그들은 엔나를 대대적으로 약탈하고 주민들을 대부분 학살했다. 이제 동로마 제국의 영역은 시라쿠사와 타오르미나 사이의 시칠리아 동쪽 해안 지대로 줄어들었다. 859년 가을, 콘스탄티노스 콘토미티스 휘하의 300척 함대가 시라쿠사에 도착해 전세를 뒤집으려 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 후 무슬림 해군과 맞붙어 3분의 1을 잃는 참패를 당했다. 아바스는 동로마군의 대규모 증원에 호응하여 반란을 일으킨 주민들을 모조리 진압한 후 시라쿠사로 진군했고, 콘스탄티노스 콘토미티스 역시 응전하러 진격했다. 이후 벌어진 세피루 인근 전투에서, 콘토미티스는 참패를 면치 못하고 시라쿠사로 도주했다. 아바스는 파괴당했던 엔나를 재건하고 팔레르모에 이은 무슬림의 또다른 근거지로 삼았다.
861년 가을, 아바스가 사망했다. 시칠리아 무슬림들은 그의 삼촌인 아흐마드 이븐 야쿱을 새 왈리로 삼았지만, 862년 2월 아바스의 아들 압둘라가 정변을 일으켜 아흐마드 이븐 야쿱을 죽이고 왈리를 맡았다. 아글라브 왕조는 이를 인정하지 않고 862년 7월 압둘라를 왈리 직위에서 축출한 뒤 카파야 이븐 수피안을 새 왈리로 삼았다. 카파야는 863년 시라쿠사 주변을 급습했지만 동로마군에게 패배했다. 하지만 864년 2월과 3월에 동로마 배신자들의 도움으로 노토와 시클리를 점령했다. 866년, 카파야는 시라쿠사를 상대로 원정을 다시 이끌었다. 그는 해안을 따라 북쪽으로 행진하면서, 타오르미나와 "그들을 치지 않는 대신 시라쿠사를 돕지 않는다"라는 합의를 받아냈다. 무슬림군은 동로마군이 탈환했던 노토와 라구사를 다시 빼앗은 뒤 알 기란 등 몇몇 요새들을 점령했다. 원정 도중에 병에 걸린 카파야는 팔레르모로 돌아갔다가 867년 여름 회복한 뒤 다시 출진하여 시라쿠사와 카타니아 주변 지역을 약탈했다.
867년 9월, 동로마 황제 미하일 3세가 피살되고 바실리오스 1세가 새 황제로 등극했다. 그는 시칠리아를 회복하기로 마음먹고, 868년 니키타스 오리피스가 이끄는 해군을 파견했다. 그러나 오리피스는 이슬람 해군에게 패퇴했고, 무슬림군은 시라쿠사 주변 일대를 마음껏 약탈했다. 869년 3월, 카파야는 아들 무함마드에게 시라쿠사 주변 일대를 다시 얅탈하게 하고 자신은 란다초를 상대로 진군했다. 그러나 동로마군이 시라쿠사에서 출격해 무함마드를 격파하자, 마음을 바꿔 시라쿠사로 진군했다. 그는 몇 주 동안 시라쿠사를 포위 공격했지만 함락이 요원하자 팔레르모로 철수했으나, 도중에 베르베르 병사에게 피살당했다.
카파야 사후 아들 무함마드가 새 왈리로 등극했다. 그는 팔레르모에서 통치를 수행하면서 부하들에게 시칠리아의 남은 지역 공략을 맡겼다. 870년, 무함마드가 파견한 함대가 몰타의 수도 멜리테를 함락했다. 전승에 따르면, 섬의 공략을 이끌어낸 아흐마드 이븐 우마르 이븐 우바이달라 이븐 알 아글라브 알 하바시는 성당의 대리석 기둥들을 가져가 팔레르모 궁정에 전시하게 했으며, 멜리테 요새를 모조리 파괴했다고 한다. 몰타가 무너지면서, 동로마 제국이 시칠리아를 사수하는 것은 더욱 힘들어졌다.
871년 5월 27일, 무함마드가 궁정 내시들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 후 팔레르모 토후국에서 6명의 왈리가 취임하는 등 심각한 혼란이 벌어졌고, 자연히 시칠리아의 남은 지역에 대한 무슬림군의 공세는 미약해졌다. 동로마 제국은 이 때를 틈타 전열을 재정비했고, 871년 그동안 이탈리아와 아드리아 해 연안지대를 약탈하던 바리 토후국을 무너뜨렸다. 875년, 아글라브 왕조의 새 아미르로 이브라힘 2세가 즉위했다. 그는 시라쿠사를 공략하기로 마음먹고, 팔레르모의 새로운 왈리로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를 임명한 뒤 그를 돕기 위해 대규모 함대를 보냈다. 자파르는 877년 시라쿠사 주변의 일부 외곽 요새를 점령한 뒤 공성 무기를 대량으로 제작한 후 맹공을 퍼부었다. 9개월에 걸친 포위전 끝에, 878년 5월 21일 마침내 함락하고 2달간 심각한 약탈을 자행하면서 주민들을 모조리 학살하거나 노예로 삼았다.
그러나 시칠리아의 무슬림들은 또다시 내분에 시달렸다. 자파르 이븐 무함마드는 그의 형제의 선동을 받은 노예들에게 피살당했고, 형제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려 했다가 모조리 타도된 뒤 아글라브 왕조로 이송되어 처형되었다. 이브라힘 2세는 잠시 자기 아들을 왈리로 삼았다가 후세인 이븐 라바를 새 왈리로 선임했다. 후세인 이븐 라바는 시칠리아 북동부의 타오르미나 요새를 상대로 원정을 개시했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880년, 동로마 제국은 나사르 장군이 이끄는 함대를 파견했다. 나사르는 아드리아 해에서 아글라브 함대를 격파하고 팔레르모 주변을 급습한 뒤, 스텔라이 해전에서 또다른 아글라브 해군을 격멸했다. 881~882년, 무슬림군은 타오르미나 요새를 공략하려 했으나 오히려 역공을 받아 대패했다. 이에 후세인 이븐 라바는 시칠리아 무슬림들을 대거 동원하여 수년간 카타니아, 타오르미나, 로메타 일대를 여러 차례 공격하여 주변 지역을 약탈했지만 요새 공략엔 실패했다.
이러한 일련의 군사적 실패로 인해 그동안 잠재되어 있던 지배층인 아랍인과 피지배층인 베르베르인 사이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대규모 반란이 벌어졌고, 아글라브 왕조는 반란 진압에 온 힘을 쏟느라 시칠리아에 별다른 지원을 하지 못했다. 시칠리아에서도 890년 3월 팔레르모에서 시칠리아계 아랍인들과 아프리카에서 온 아랍인들간의 갈등이 폭발하면서 유혈사태가 벌어졌고, 898년부터 베르베르인들의 대규모 봉기가 내전으로 확대되었다. 이에 900년 여름 아프리카에서 반란을 진압했던 이브라힘 2세의 아들 아부 알 아바스 압달라가 군대를 이끌고 시칠리아로 진군했다. 그는 팔레르모와 아그리젠토 사이의 분쟁을 조정하러 애썼으나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팔레르모 토후국을 징벌하기로 해 9월 18일 팔레르모를 함락했고, 많은 반란군이 타오르미나 요새로 피신했다. 심지어 일부 무슬림은 콘스탄티노폴리스에 망명했다.
동로마 제국은 이 기회를 틈타 메시나와 레지오에 병력을 집결하여 시칠리아를 장차 탈환할 기회를 노렸다. 아부 알 아바스 압달라는 낌새를 눈치채고 저들이 시칠리아로 넘어오기 전에 끝내고자 타오르미나와 카타니아를 공격해 주변 지역을 약탈했으며, 901년 7월 10일 레지오를 기습 공격해 함락시킨 뒤 막대한 전리품을 챙기고 15,000명의 주민을 노예로 끌고 갔다. 그는 시칠리아로 돌아오던 중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파견한 적 함대와 우연히 마주쳐서 궤멸시키고 30척의 배를 나포했다.
902년 초, 아글라브 왕조의 에미르 이브라힘 2세가 신하들에 의해 강제 폐위되었다. 아바스는 아바스 왕조에 의해 새 에미르로 선임되어 아프리카로 향했고, 이브라힘 2세는 팔레르모 왈리가 되었다. 이브라힘 2세는 폐위로 인해 실추된 위신을 되살리고자 성전을 이끌기로 마음먹고, 그해 여름 타오르미나로 쳐들어가서 적 수비대를 성벽 앞에서 격파한 뒤 요새를 포위 공격했다. 그 결과 8월 1일 타오르미나 요새가 함락되었고, 인근의 여러 요새도 모조리 함락되거나 공물을 바치고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그리하여 시칠리아를 온전히 무슬림의 땅으로 삼는 데 성공한 이브라힘 2세는 이탈리아로 넘어가 코센차를 포위했으나, 10월 24일 이질에 걸려 사망했고, 그의 군대는 곧바로 시칠리아로 돌아갔다.
4. 이후
시칠리아는 902년 타오르미나 요새 함락과 남은 기독교 요새들의 복속으로 무슬림의 영토가 되었다. 하지만 무슬림과 동로마 제국의 시칠리아 전쟁은 이것으로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 909년 아글라브 왕조를 멸망시킨 파티마 왕조는 시칠리아에서 자신들에 대항하여 봉기를 일으킨 시칠리아 토후국들을 짓밟는 데 힘을 기울여야 했다. 그 사이, 타오르미나 요새는 다시 동로마 령으로 돌아갔다. 그 후 그들은 50여 년간 버텼으나 962년 파티마 왕국군에 의해 함락당하고 주민 전원이 죽거나 노예로 끌려갔다.963년, 무슬림군은 시칠리아에 남아있는 마지막 기독교 요새인 로메타를 포위 공격했다. 니키포로스 2세는 로메타로부터 구원 요청을 받자 환관이었던 니키타스 아발란티스를 총사령관 겸 해군사령관으로, 본인의 조카인 마누일 포카스를 그 산하의 상륙군 사령관으로 하여 4만여 명에 달하는 대군을 일으켜 시칠리아로 파견했다. 동로마군은 메시나, 히메라, 타오르미나, 레온티니 등 시칠리아 북동부의 여러 도시를 쉽게 공략했지만, 적을 우습게 여기고 경계를 게을리 한 채 로메타로 진군하던 중 매복 공격을 받고 크게 패해 마누일이 전사한 뒤 메사나로 도주했다. 로메타는 구원을 받지 못하게 되자 항복했다.
이탈리아 본토에 있던 니키타스 아발란티스가 이끄는 동로마 함대가 메사나를 구하려고 출격했으나, 메사나 해협에서 파타마 함대의 급습을 받아 처참한 패배를 당했고, 니키타스 아발란티스 및 주요 간부들은 파티마 왕조에 끌려갔다. 이 참상을 목도한 메사나의 동로마군이 모든 희망을 잃고 항복하면서, 시칠리아 전역은 무슬림군의 수중에 완전히 넘어갔다. 이에 니키포로스 2세는 967년 파타마 왕조의 시칠리아 영유를 인정하고 연공을 바치는 대신 칼타브리아에 대한 약탈을 더 이상 안하게 하는 조건하에 평화 협약을 맺었다. 이 평화 협정으로 아발란티스를 포함한 포로들이 몸값과 교환되어 석방되었다.[2]
동로마 제국과의 전쟁에서 최종적으로 승리하면서 시칠리아를 장악한 무슬림들은 시칠리아 토후국을 세운 뒤 지중해 해안 지역들을 지속적으로 약탈하고 기독교인들을 노예로 팔아넘겼다. 그러면서도 지중해 해상 무역을 주관하면서 막대한 수익을 벌어들였고, 이를 발판삼아 이슬람 문화를 시칠리아에서 꽃피웠다. 하지만 동로마 제국은 여전히 시칠리아 탈환을 노렸다. 1018년 바실리오스 2세는 42년간 치렀던 불가리아 전쟁에서 승리해 불가리아를 완전히 정복한 뒤 시칠리아를 정벌하기 위한 대규모 군대를 준비했다. 그는 1027년에 시칠리아로 친정하려 했으나 1025년 12월 15일에 67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 후 원정은 10여 년간 미뤄졌다가 1038년 미하일 4세의 매제 스테파노스와 게오르기오스 마니아케스가 이끄는 대규모 군대가 시칠리아 원정을 단행했다.(마니아케스의 시칠리아 원정)
[1] 알렉시오스 모셀레는 나중에 콘스탄티노폴리스 총대주교 요안니스의 권고를 받아들인 테오필로스 황제에 의해 풀려난 뒤 지위와 재산을 회복했다. 그러나 840년 테오필로스가 아들 미하일 3세를 낳으면서 입지가 약화되었고, 842년 이전에 크리소폴리스의 안테미오스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했다.[2] 아발란티스는 포로생활 동안 어느 정도의 자유를 인정받았는지, 4세기의 3대 카파도키아인 교부들 중 두 명인 카이사리아의 바실리오스(대 바실리오스) 및 나지안조스의 그레고리오스의 설교집(Homilies)을 필사했고, 이 필사본은 현재 프랑스 국립도서관에 보관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