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성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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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iki style="margin: -10px -10px" | <tablealign=center><tablewidth=230><tablebordercolor=#F5F5F5> | 沃川 全氏 옥천 전씨 | }}} | |
관향 | 충청북도 옥천군 | |||
도시조 | 전섭(全聶) | |||
시조 | 전학준(全學浚) | |||
중시조 | 전유(全侑) | |||
파조 | 전광운(全光韻) / 전서공파(典書公派) | |||
전인숙(全仁淑) /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 ||||
전숙(全淑) / 판서공파(判書公派) | ||||
집성촌 | 대전광역시 대덕구·서구 강원도 양구군 충청북도 영동군·옥천군·진천군 충청남도 금산군 경상북도 봉화군·상주시·영주시 | |||
황해도 연백군 평안남도 용강군 | ||||
인구 | 47,681명(2015년) | |||
링크 | 옥천전씨 종친회(네이버 밴드) 옥천전씨 종친회(다음 카페) 옥천전씨 판서공파(네이버 카페) 옥천전씨 길야당파 종친회(홈페이지) |
1. 개요
충청북도 옥천군을 관향으로 하는 한국의 성씨. 옥천의 고호(古號)가 관성(管城)이므로 관성(管城) 전씨, 관산(管山) 전씨라고도 부른다.한국의 모든 전씨는 백제의 개국공신 환성군(歡城君) 전섭(全聶)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며, 옥천 전씨 역시 환성군의 후예임을 자처하고 있다. 때문에 전씨 종중에서는 본관을 일종의 분파처럼 말하여 옥천파(沃川派)라 일컫기도 한다.
2. 역사
2.1. 분적 이전
전섭(全聶)이라는 인물이 오간(烏干), 마려(馬藜), 을음(乙音), 해루(解婁), 흘간(屹干), 곽충(郭忠), 한세기(韓世奇), 범창(笵昌), 조성(趙成) 등 아홉 사람과 함께 고구려 동명왕(東明王)의 셋째 아들 온조(溫祚)를 도와 기원전 18년 백제 개국에 공을 세우고, 그로 인해 십제공신(十濟功臣) 환성군(歡城君)에 봉작된 것을 한반도 전씨(全氏) 역사의 시초로 본다.[1] 그 까닭에 현전하는 전씨들은 관적을 막론하고 전섭을 도시조(都始祖)로 모시는데, 옥천 전씨도 그 중 하나다.전섭의 후손인 전선(全愃)이 신라 때 정선군(旌善君)으로 봉해진 것을 계기로 정선을 관향을 삼았다 하며,[2] 전선의 후예인 전이갑(全以甲)은 왕건(王建)를 도와 고려 개국에 공을 세워 충렬(忠烈)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전해진다.
2.2. 분적 이후
옥천 전씨는 전이갑의 7세손이자 고려 때 동정(同正), 또는 영동정(領同正) 벼슬을 지낸 전학준(全學浚)을 시조로 한다. 이는 전학준 이전의 계대가 한동안 모호하였기 때문인데, 지금은 북한 지역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묘소에서 "이갑(以甲)의 11세손이자 검교도위(檢校都尉)를 지낸 필(弼)의 아들 관성(管城) 전공(全公) 유(侑)"라고 쓰인 묘지석(墓誌石)[원문]이 발굴되면서 비로소 옥천 전씨가 정선 전씨 충렬공 전이갑의 후예임을 알게 됐다. 다만 문중에서는 여전히 전학준을 기세조(起世祖)로 모시는데, 이는 전학준을 시조로 하여 초기 족보를 편수했던 전팽령(全彭齡), 전명룡(全命龍) 등 현조(顯祖)들의 유지를 잇기 위함이다.전학준의 현손[4]인 전유(全侑)가 고려 충숙왕 치세에 봉익대부(奉翊大夫)[5] 밀직부사(密直副使) 판도판서(版圖判書)[6] 상호군(上護軍)의 벼슬을 지내고 관성군(管城君)으로 봉해지면서 옥천을 관향으로 삼게 되었다.
1933년에는 부여군 외산면 무수리에 사는 윤난수(尹蘭秀)의 집에서 관성군 전유의 화상과 찬문(讚文)을 발견하였다. 윤난수의 6세조 소남(邵南) 윤동규(尹東奎)가[7] 중국에 있는 용도각(龍圖閣)에서 동국 13현(東國 十三賢)의[8] 진상(眞像)을 발견하고 화공(畵工)을 시켜 모본(摹本)을 그려 와 대대로 간직하여 왔다고 한다. 이를 관성군 20세손인 전용하(全用夏)가 구해와 몇 년간 간직했으며, 을해보 간행 다음 해인 1936년에 관향의 자손들의 합의로 개모하여 목담서원에 봉안하였다. 현재는 송정(松亭) 전팽령,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초상과 함께 봉안되어 있다.
관성군 전유는 세 아들을 두었으며, 후손들은 이들 삼곤계(三昆季)를 파조(派祖)로 하여 3개 파로 분파하였다. 관성군의 장남 전광운(全光韻)은 고려 말 정의대부(正議大夫)[9] 판비서감사(判秘書監事)를 지내고 이부전서(吏部典書)에 제수되었다가 치사(致仕)하였다. 이러한 까닭에 그 자손들을 전서공파(典書公派)라 한다. 차남 전인숙(全仁淑)은 봉상대부(奉常大夫)[10]에 올랐으며,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의 파조가 되었다. 3남 전숙(全淑)은 봉익대부(奉翊大夫)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역임하고 관성군(管城君)으로 봉해졌으므로[11] 그 자손들을 판서공파(判書公派)라 일컫는다.
고려 때 이미 옥천에 뿌리내린 까닭에 세종실록지리지에 옥천군의 토성(土姓)으로 옥천 육씨, 옥천 황씨에 이어 옥천 전씨가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온 성씨를 의미하는 내성(來姓)에도 전씨가 있는데 이는 옥천 전씨 삼곤계(전서공파, 봉상대부파, 판서공파)의 파조들이 관직생활을 하다 고려 멸망 후 관향으로 낙향한 것을 새롭게 이주했다고 기록자가 착각한 것으로 보인다.
조선조에 들어서는 단종 절신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 청백리 송정 전팽령,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12], 효자 쌍암(雙岩) 전엽(全燁), 인봉(仁峰) 전승업(全承業), 충간공(忠簡公) 사서 전식, 병자호란 때 순절한 호종공신 규천(虬川) 전극항(全克恒), 설월당(雪月堂) 전익희(全益禧), 영서(𤃡西) 전명룡 등 다수의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조에 활약한 옥천 전씨 인물들은 학맥 상 서인이나 동인 어느 한 쪽으로 편중되지 않은 편이다.[13][14][15] 다만 남인들의 계보인 남보(南譜)에 옥천 전씨가 기록되어 있고 여기에 송정 전팽령과 그의 형인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그리고 충간공 사서 전식의 이름이 있는 것을 보아[16] 현조를 중심으로 본다면 남인 즉 동인 계열이 주가 되는 편이다.[17]
3. 족보
1554년 송정 전팽령이 족보를 기록하는 등 계보는 꽤 일찍부터 확립되어 있었으나 인본은 현전하지 않는다.[18] 1635년 남은 사본을 바탕으로 족보를 새로 증수하였고 이후 주기적으로 대동보(大同譜)와 파보(派譜)를 만들어 왔다. 대동보는 1989년 기사보를 최신으로 하며, 봉상대부공파와 판서공파가 2019년 기해파보를, 전서공파가 2020년 경자파보를 간행하였다. 족보 간행 내력은 다음과 같다. 녹색은 대동보다.- 갑인보 1554년
현재 남아있지 않으며, 오직 당시 가선대부 행 상주목사였던 전팽령이 쓴 서문만 남아 전한다.
- 을해보 《옥천전씨족보》, 1635년
영천(榮川) 종인이 보관하던 족보를 서천부원군(西川府院君) 충익공(忠翼公) 백곡(栢谷) 정곤수(鄭崑壽)가 열람하려고 빌려갔다가 화재로 소실하고 말았으나, 호군 전극경(全克慶)[19]이 전팽령의 증손이 보관하던 세보를 정히 베끼고 증수하였으며 당시 조산대부 행 흥덕현감을 지내던 영서 전명룡이 발문을 달아 한 권으로 간행하였다.
- 무술보 《옥천전씨족보》, 1718년
이 즈음 홍천에 살던 전유행(全有行)이라는 사람이 정선 전씨 족보를 닦으면서 동정 전학준을 정선 전씨의 비조인 전호익(全虎翼)의 후예로 계대하였다. 하지만 증거가 마땅치 않다고 여긴 영천(榮川)의 여러 종인들이 이를 계기로 족보를 새로 증수하자고 나섰으며, 여기에 적하파의 생원 전재만(全在萬) 형제가 화답하였다. 결국 이곡파의 생원 정숙암(整肅庵) 전수산(全壽山), 모산파의 곡남(谷南) 전계선(全繼善)[20]이 주관하고 망동파의 전명호(全命祜)[21]가 함께 자료를 수집한 끝에 2권의 족보가 간행되었다. 흉년으로 인한 재정 문제로 상권은 옥천에서, 하권은 영천에서 마무리했다.
- 병인보 《옥천전씨세보》, 1806년
무술보가 간행된지 거의 90년이 지난 까닭에 망동파 전현국(全顯國)[22]을 비롯한 영천(榮川) 종중 유지들이 새로 족보를 닦을 것을 결의하고 통문을 돌려 족보 편찬 사업이 비로소 시작되었다. 이 즈음 다시 정선에서 동보(同譜)하기를 권유하였고 전씨를 하나의 동족으로 묶은 동원록(同源錄)이 세상에 나돌고 있었지만 증거가 명확하지 않아 함부로 계대를 잇기 어렵다는 무술보의 주장을 계승하기로 결정했다. 모산파의 정헌(靜軒) 전여정(全汝錠)[23]이 종맹(宗盟)의 장을 맡아 사업을 주관하였으며, 처음엔 영천에 보소를 설치하였으나 후에 옥천으로 옮겨 인쇄까지 완료하였다. 이로써 시작한지 3~4년만에 총 5권의 족보가 간행되었다.
- 기유보 1849년
판서공파보이다.
- 정사보 《옥천전씨세보》, 1857년
이 즈음 안의(安義)에 사는 전치선(全致善)이 주관하여 전씨를 한데 묶은 대동보를 간행하려 하였는데, 옥천 전씨 종인들은 선대의 경계를 유념하여 서울 종회에 단자를 제출하지 않고 돌아와 새로 족보를 닦을 것을 결의하였다. 마침 휴계 전희철이 서원에 배향되는 경사가 있어 이를 수록하기 위해 영천(榮川) 종인들이 족보 편찬을 주창하였고, 결국 상주에 모여 임원을 정하고 모산파 전도권(全道權)[24], 구천파 구암(龜庵) 전수동(全秀東)[25], 노동파 전종한(全宗漢)[26]의 주관 하에 충렬사(忠烈祠)에서 수보 사업을 진행하였다. 관동(寬洞) 선영과 관련된 산송으로 위토를 탕진한 상황에서 수보에 부족한 비용을 힘들게 충당하는[27] 고난 끝에 5권의 족보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도중 의견 차이가 발생하여 판서공파의 일부 파가 분파하여 따로 2권의 족보를 간행해버린 까닭에 온전한 대동보가 되지는 못했다.
- 갑진보 《옥천전씨세보》, 1904년
판서공파보다. 본래 정사보 이후 시간이 오래되었으므로 영천(榮川)에 보소를 설치하여 족보를 편찬하려 하였으나 옥천으로부터 거리가 멀어 비용이 과다하게 든다는 반론들이 있었다. 때문에 대동보를 이루지 못하고 대신 옥천 영당(影堂)에 보소를 설치하여 전세린(全世麟), 전예한(全禮漢), 전용한(全龍漢) 등의 주관으로 총 4권의 파보를 간행하였다.
- 신해보 《옥천전씨세보》, 1911년
전서공파보이며, 총 7권으로 간행되었다.
- 을해보 《옥천전씨세보》, 1935년
비록 직전 족보를 간행한지는 30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나 병인보 이후로는 대동보가 없었기도 하거니와, 또 전씨 갑자총보(甲子總譜) 간행 및 관성군 묘지석 발현 등의 굵직한 사건들을 맞아 모산파, 학촌파, 목담파를 중심으로 동보를 제작하자는 의론이 일었고, 마침내 총 9권으로 간행되었다. 다만 영주의 여러 파들이 참여하지 않는 흠결이 있었다. 이 때부터 파명을 관성군 아들 삼형제의 관직을 따라 '전서공파', '봉상대부공파', '판서공파'로 하고, 그 아래 분파들은 자손들의 세거지 이름을 따서 부르는 규례가 확립되었다.
- 무술보 《옥천전씨세보》, 1958년
전서공파, 판서공파가 각 파보를 발간하였다.
- 갑인보 《옥천전씨대동세보》, 1974년
- 기사보 《옥천전씨대동보》, 1989년
대동보이며, 총 6권으로 간행되었다.
- 기해보 《옥천전씨봉상대부공파보》; 《옥천전씨판서공파보》, 2019년
봉상대부공파, 판서공파가 각각 2권, 4권의 파보를 발간하였다.
- 경자보 《옥천전씨전서공파보》, 2020년
전서공파보이며, 총 5권으로 간행되었다.
4. 유적
4.1. 묘역
- 음산
대동보에 "천안전씨세보에 따르면 (시조 전학준의 묘소는) 음산(陰山)에 있다 함"이라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음산이 어딘지는 현재 확실치 않다. - 전학준 (全學浚, 始祖)
-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28]
중시조인 관성군 전유의 묘소는 한참 전 실전되어 설로만 풍덕에 있다고도 하고 장단에 있다고도 하였다. 단지 개성 옛 남문 밖 동쪽 2리 되는 곳에 전판서(全判書)[29]의 집터가 있다는 얘기만 그 지역 사람들 사이에 나돌았다고 한다. 1925년 전국에 큰 홍수가 나 현재는 북한 지역인 경기도 장단군 진서면 경릉리 다대곡(多大谷)이라는 곳의 토양이 유실되었는데 그 결과 땅 속에 묻혀 있던 전유의 묘지석(墓誌石)을 발견하게 되었으며, 그제야 비로소 전유 묘소의 정확한 위치를 알고 상석(床石)을 갖추어 수호할 수 있게 되었다 한다. - 전유(全侑, 5世)
4.1.1. 전서공파
- 충청북도 옥천군 군북면 환평리 산26 (공연)
전서공 전광운의 장손인 통례문봉례랑 전귀덕(全貴德)이 생전 공자가어(孔子家語)와 안회의 사물잠(四勿箴)을 송독하며 마음에 새긴 까닭에 이곳의 이름을 '공연(孔淵)'[30]이라 하였다 전한다.
- 대전광역시 동구 마산동 산18-2 (관동)
전귀덕의 차남인 선차지인 가각부록사 전예(全禮)가 여말선초에 외가인 회덕 황씨의 본향이자 외가 쪽으로 인척이 되는 은진 송씨의 세거지인 회덕에 살기 시작하여 이곳에 묘소를 쓰게 되었다 한다.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 산87
전예의 장남인 휴계 전희철(全希哲)이 단종이 왕위를 찬탈당할 때 분개하여 부인 감천 문씨의 본향인 영천(榮川)으로 은거한 까닭에 이곳에 묘역이 조성되었다. 이후 장남 내자시첨정 전호는 선대의 묘소를 수호하기 위해 고향 옥천으로 돌려 보내고 은거지에는 차남 현릉참봉 전박(全珀)과 함께 살았다고 전한다. 칠성루(七星樓)와 휴계재사(休溪齋舍)가 있다.
4.1.2. 판서공파
4.2. 서원
4.3. 재실
- 염수재(念修齋)
정봉(正峰) 전유장(全有章)을 추모하기 위한 재실이다.
소재지: 대구시 달성군 가창면 행정리
5. 분파
크게는 관성군 전유의 세 아들을 각각 파조로 하여 전서공파, 봉상대부공파, 판서공파로 나뉜다. 이들 삼곤계 아래로 세거지의 명칭을 파명(派名)으로 삼는 소파(小派)들이 다시 나뉜다.5.1. 전서공파(典書公派)
파조 전광운은 고려 말 정의대부 판비서감사를 지내고 이부전서에 제수되었다가 치사했다. 현손인 휴계 전희철의 옛 묘갈에는 '전광원(全光遠)'이라 기록되어 있었다고 전하며,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이 지은 송석충(宋碩忠)의 묘갈에도 '전광원'이라 기록되어 있다.[72] 관향인 충청북도 옥천군·영동군을 비롯해 경상북도 영주시·봉화군, 충청남도 금산군 등지에 세거한다. 휴계 전희철, 영서 전명룡, 야옹 전응방, 설월당 전익희, 언눔 전우익 등이 전광운의 후손이다.5.1.1. 지파
옥천 전씨 전서공파 세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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派名 | 진목정파 | 서정자파 | 이곡파 | 모산파 | 학촌파 | 연기파 | 공주파 | 진잠파 | 삼정파 | 강화파 | 진산파 | 구천파 | 망동파 | 거촌파 | 이계파 | 계천위파 | 안남파 | 산대파 | 신창파 | 조운파 | 조운파 | ||||||||||||||||
※ 좌측부터 장파(長派)임. † 입후한 인물. | }}}}}}}}} |
- 진목정파(眞木亭派): 파조는 참봉(參奉) 전만령(全萬齡, 12세). 세거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금성면 화림리 참나무정이(眞木亭)다.
- 서정자파(西亭子派): 파조는 전억령(全億齡, 12세). 세거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서정리 서정자(西亭子)이다.
- 이곡파(伊谷派): 파조는 설봉(雪峰) 전주(全宙, 13세). 동생 전안(全安)의 아들인 전천기(全天紀)가 대를 이었으므로 혈통상으로는 모산파, 학촌파, 연기파, 공주파, 진잠파와 마찬가지로 전안의 후손이다. 세거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이르실(伊谷)이다.
- 모산파(慕山派): 파조는 증판결사(贈判決事) 전결(全潔, 15세). 세거지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모산(慕山)이다.
- 학촌파(鶴村派): 파조는 고산(孤山) 전설(全渫, 15세). 세거지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학산리 황새끼미(鶴村)이다.
- 연기파(燕岐派): 파조는 전황(全滉, 15세). 세거지는 세종특별자치시 옛 연기군 일대이다. 전황의 아들 전세승(全世承)이 처음 입향한 것으로 전해진다.[a]
- 공주파(公州派): 파조는 화암(花岩) 전택(全澤, 15세). 세거지는 충청남도 공주시 일대이다.[a]
- 진잠파(鎭岑派): 파조는 삼성재(三省齋) 전길(全洁, 15세). 세거지는 대전광역시 유성구 진잠동 일대이다.[a]
- 삼정파(三政派): 파조는 공산현령(公山縣令) 전관(全寬, 13세). 세거지는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봉소리 삼정골(三亭)이다.
- 강화파(江華派): 파조는 전희철의 증손 전성(全宬, 13세). 세거지는 인천광역시 강화군 일대이다. 옛 족보의 방주에 자손이 서울에 산다고 되어 있으며, 조선시대 중인의 가계를 수록해 놓은 성원록(姓源錄)에 후손이 일부 기록되어 있다.
- 진산파(珍山派): 파조는 죽담(竹潭) 전지영(全摯頴, 12세). 세거지는 충청남도 금산군 일대이다.
- 구천파(龜川派): 파조는 야옹(野翁) 전응방(全應房, 12세). 동생 전응삼의 손자인 전이헌(全彛憲)이 승중하였으므로 혈통상으로는 이계파와 같이 전응삼의 후손이다. 세거지는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 귀내(龜川)이다.
- 망동파(望洞派): 파조는 송파(松坡) 전응두(全應斗, 12세). 세거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 보름골(望洞)이다.
- 거촌파(巨村派): 파조는 숙릉참봉(淑陵參奉) 전응벽(全應璧, 12세). 세거지는 경상북도 봉화군 봉화읍 거촌리 일대이다.
- 이계파(伊溪派): 파조는 칠리수(七里叟) 전응삼(全應參, 12세). 세거지는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이르실(伊溪)이다. 이계파, 성주파(星州派), 대구파(大邱派), 만촌파(晩村派), 행정파(杏亭派), 호매파(湖梅派), 이계파(伊磎派)로 세분된다.
- 계천위파(啓川尉派): 파조는 계천위(啓川尉) 전희윤(全希尹). 세거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일대이다.
- 안남파(安南派): 파조는 통덕랑(通德郞) 전상문(全尙文, 14세). 세거지는 충청북도 옥천군 안남면 일대이다.
- 산대파(山垈派): 파조는 전상길(全尙吉, 14세). 세거지는 대전광역시 대덕구 장동 산디(山垈)이다.
- 신창파(新昌派): 파조는 전우적(全佑迪, 12세). 세거지는 충청남도 아산시 신창면 일대이다.
- 조운파(朝雲派): 파조는 선교랑(宣敎郞) 전미덕(全美德). 세거지는 현재 북한 지역인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일대이다.
- 조운파(朝雲派): 파조는 선교랑(宣敎郞) 전감(全瑊). 세거지는 현재 북한 지역인 평안남도 평원군 조운면 일대이다.
5.1.2. 종친회
- 옥천전씨 순여공파 종친회[76]: 대전 서구 길마루길 117-81
- 옥천전씨 정봉공파 종중[77]: 대구광역시 달성군 가창면 가창동로 137
- 옥천전씨 전서공파 대종회: 충북 옥천군 군서면 오동2길 133-19
5.2. 봉상대부공파(奉常大夫公派)
관성군 전유의 둘째 아들인 전인숙(全仁淑)의 후손들이다. 전인숙은 봉상대부 벼슬에 올랐다. 전인숙의 손자 전동(全棟)은 본래 진사였으나 조선 국초에 회유에 굴하지 않아 옥천의 호장(戶長)으로 강등되고 거느리던 노비는 관노비로 삼았다고 전한다. 자손들은 관향 옥천에 주로 분포한다. 독립운동가 단여(檀如) 전좌한(全佐漢) 등이 이에 속한다.5.2.1. 지파
옥천 전씨 봉상대부공파 세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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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 | 전윤해 | ||||||||||
8世 | 전동 | ||||||||||
9世 | 전충강 | 전의강 | 전현강 | 전우강 | |||||||
10世 | 전임 | 전벽 | 전당 | ||||||||
11世 | 전석복 | 전원복 | |||||||||
12世 | 전해 | 전성 | 전이중 | ||||||||
13世 | 전의립 | 전무립 | 전경민 | ||||||||
14世 | 전명택 | 전명우 | 전명승 | ||||||||
15世 | 전동립 | 전동식 | 전초현 | 전국현 | 전초웅 | ||||||
派名 | 관향파 | 관향파 | |||||||||
※ 좌측부터 장파(長派)임. | }}}}}}}}} |
- 관향파(貫鄕派)
5.3. 판서공파(判書公派)
파조 전숙은 봉익대부 판도판서를 역임하고 관성군으로 봉해졌다. 이러한 이유로 전숙을 후(後) 관성군 이라부르기도 한다. 관향인 옥천·영동과 경상북도 상주시, 충청남도 금산군일대에 세거한다.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 송정 전팽령, 쌍암 전엽, 인봉 전승업, 충간공 사서 전식, 규천 전극항, 창주(滄州) 전극념(全克恬) 등이 전숙의 후손이다.5.3.1. 지파
옥천 전씨 판서공파 세계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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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世 | 전사추 | 전도 | ||||||||||||||||||||||||||||||||||||||||||||||||||||||||||
8世 | 전오이 | 전오례 | 전오용 | |||||||||||||||||||||||||||||||||||||||||||||||||||||||||
9世 | 전효순 | |||||||||||||||||||||||||||||||||||||||||||||||||||||||||||
10世 | 전응경 | 전응보 | 전원계 | 전원말 | ||||||||||||||||||||||||||||||||||||||||||||||||||||||||
11世 | 전팽조 | 전팽수 | 전팽령 | 전수부 | ||||||||||||||||||||||||||||||||||||||||||||||||||||||||
12世 | 전형 | 전혼 | 전환 | 전열 | 전영립 | 전엽 | 전황 | 전득수 | ||||||||||||||||||||||||||||||||||||||||||||||||||||
13世 | 전이근 | 전이신 | 전이공 | 전이경 | 전여즙 | 전여림 | 전여주 | 전경남 | 전복남 | 전수남 | 전이일 | 전흔 | 전순 | 전한 | 전돈 | 전승업 | 전창국 | 전신국 | 전성국 | |||||||||||||||||||||||||||||||||||||||||
14世 | 전식 | 전굉 | 전준 | 전면 | 전낙 | 전해 | 전속 | 전철 | 전극경 | 전급 | 전징 | 전익 | 전계 | 전의원 | ||||||||||||||||||||||||||||||||||||||||||||||
15世 | 전극항 | 전극념 | 전극항 | 전극침 | 전극징 | 전극층 | 전극성 | 전극선 | 전극황 | 전극민 | 전극순 | 전극관 | 전극용 | 전극문 | 전호태 | 전호점 | 전호림 | 전호진 | 전호익 | 전호택 | 전세량 | 전세기 | 전세회 | 전세백 | 전세정 | 전세림 | 전세권 | 전세빈 | 전세주 | 전세장 | 전세춘 | 전명휘 | 전명규 | 전명위 | ||||||||||||||||||||||||||
派名 | 각신파 | 자부파 | 노동파 | 창주공파 | 간목파 | 화룡파 | 오덕파 | 적하파 | 성당파 | 은풍파 | 무주파 | 적하파 | 용산파 | 서산파 | 연산파 | 홍성파 | 목담파 | 진천파 | 서화파 | 봉산파 | 율림파 | 독곡파 | 홍산파 | 목담파 | 옥산파 | 이평파 | 의정부파 | 갈전파 | 필력파 | 길왕파 | 중가파 | 구일파 | 양구파 | |||||||||||||||||||||||||||
※ 좌측부터 장파(長派)임. | }}}}}}}}} |
- 송로공파(松老公派): 파조는 송로(松老) 전팽조(全彭祖, 11세)[b]
- 각신파(覺新派): 파조는 습독(習讀) 전이근(全以謹, 13세).
- 자부파(自富派): 파조는 종학전(宗學典) 전이경(全以敬, 13세).
- 노동파(魯洞派): 파조는 규천(虯川) 전극항(全克恒, 15세).
- 창주공파(滄州公派): 파조는 창주(滄州) 전극념(全克恬, 15세).
- 간목파(干木派): 파조는 만산(蔓山) 전극항(全克㤚, 15세).
- 화룡파(化龍派): 파조는 전력부위(展力副尉) 전극황(全克愰, 15세).
- 오덕파(五德派): 파조는 훈련봉사(訓鍊奉事) 전면(全沔, 14세).
- 적하파(赤下派): 파조는 전극관(全克寬, 15세).
- 성당파(聖堂派): 파조는 통덕랑(通德郞) 전극문(全克文, 15세).
- 은풍파(殷豊派): 파조는 전수남(全壽男, 13세).
- 무주파(茂朱派): 파조는 전이일(全以日, 13세).
- 송오공파(松塢公派): 파조는 송오(松塢) 전팽수(全彭壽, 11세)[b]
- 적하파(赤下派): 파조는 전호태(全好泰, 15세).
- 용산파(龍山派): 파조는 전호익(全好益, 15세).
- 서산파(鋤山派): 파조는 희암(希菴) 전호택(全好澤, 15세).
- 연산파(連山派): 파조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전돈(全惇, 13세)
- 홍성파(洪城派): 파조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전영립(全永立, 12세).
- 송정공파(松亭公派): 파조는 송정(松亭) 전팽령(全彭齡, 11세)[b]
- 목담파(<牧+鳥>潭派): 파조는 전급(全汲, 14세). 목담파, 무주파(茂朱派), 능월파(陵月派), 황호파(黃湖派)로 세분된다.
- 진천파(鎭川派): 파조는 전세기(全世杞, 15세).
- 서화파(西華派): 파조는 전세회(全世檜, 15세).
- 봉산파(鳳山派): 파조는 장사랑(將仕郞) 전세백(全世栢, 15세).
- 율림파(栗林派): 파조는 장사랑(將仕郞) 전세정(全世楨, 15세).
- 독곡파(獨谷派): 파조는 전세림(全世林, 15세). 독곡파, 유성파(儒城派), 소독곡파(小獨谷派), 이인파(利仁派), 우산파(牛山派)로 세분된다.
- 홍산파(鴻山派): 파조는 통덕랑(通德郞) 전세권(全世權, 15세).
- 목담파(<牧+鳥>潭派): 파조는 전세빈(全世彬, 15세).
- 옥산파(玉山派): 파조는 전세주(全世柱, 15세).
- 이평파(梨坪派): 파조는 전세춘(全世春, 15세). 이평파, 노성파(老城派), 대덕파(大德派), 궁촌파(弓村派), 진안파(鎭安派), 예의동파(禮儀洞派), 장수파(長水派), 탄부파(炭釜派)로 세분된다.
- 의정부파(議政府派): 파조는 사산감역(四山監役) 전황(全煌, 12세).
- 그외 파계
- 갈전파(葛田派): 파조는 전응보(全應輔, 10세).
- 필력파(筆力派): 파조는 군자감주부(軍資監主簿) 전창국(全昌國, 13세).
- 길왕파(吉旺派): 파조는 전명휘(全命輝, 15세).
- 중가파(中加派): 파조는 전명위(全命偉, 15세).
- 구일파(九逸派): 파조는 사과(司果) 전원말(全元末, 10세).
- 양구파(楊口派): 파조는 남해현령(南海縣令) 전오용(全五用, 8세).
5.3.2. 종친회
- 옥천전씨 판서공파 종회: 충청북도 옥천군 동이면 금암1길 10
6. 항렬
옥천 전씨 항렬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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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해 1911 | 무술[81] 1958 | 경자 2020 | 갑진 1904 | 을해 1935 | 갑인 1974 | ||||
1世 | 同正公 全學浚 | ||||||||
26世 | 준○ 埈○ | 달○ 達○ | 재○ 在○ | ||||||
27世 | 우○ 遇○ | 만○ 萬○ | 우○ 遇○ | ○호 ○鎬 | ○옥 ○鋈 | ○기 ○錡 | 우○ 遇○ | ||
28世 | ○구 ○九 | ○훈 ○勳 | ○구 ○九 | 해○ 海○ | 철○ 澈○ | 영○ 泳○ | ○구 ○九 | ||
29世 | 병○ 丙○ | 기○ 基○ | 병○ 丙○ | ○식 ○植 | ○병 ○秉 | ○근 ○根 | 병○ 丙○ | ||
30世 | ○녕 ○寧 | ○종 ○鍾 | ○녕 ○寧 | 병○ 炳○ | 경○ 烱○ | 혁○ 爀○ | ○기 ○基 | ||
31世 | 성○ 成○ | 수○ 洙○ | 성○ 成○ | ○균 ○均 | ○배 ○培 | 용○ 鎔○ | 승○ 丞○ | ||
32世 | ○범 ○範 | ○상 ○相 | ○범 ○範 | ○우 ○雨 | ○종 ○宗 | ||||
33世 | 용○ 庸○ | 환○ 煥○ | 용○ 庸○ | 상○ 相○ | 정○ 正○ | ||||
34世 | ○재 ○宰 | ○신 ○新 | ○섭 ○燮 | ○헌 ○憲 | |||||
35世 | 정○ 廷○ | 중○ 重○ | 정○ 廷○ | 오○ 五○ | |||||
36世 | ○규 ○揆 | ○규 ○揆 | ○호 ○鎬 | ○혁 ○赫 | |||||
37世 | 보○ 輔○ | 일○ 壹○ | 영○ 泳○ | 택○ 宅○ | |||||
38世 | ○종 ○宗 | ○주 ○柱 | ○익 ○益 | ||||||
39世 | 승○ 承○ | 환○ 煥○ | 욱○ 旭○ | ||||||
40世 | ○헌 ○憲 | ○채 ○埰 | ○구 ○求 | ||||||
41世 | 오○ 五○ | 진○ 鎭○ | |||||||
42世 | ○혁 ○赫 | ○철 ○澈 | |||||||
43世 | 택○ 宅○ | 계○ 桂○ | |||||||
44世 | ○기 ○琪 | ○영 ○榮 | |||||||
45世 | 욱○ 旭○ | 규○ 圭○ | |||||||
46世 | ○박 ○博 | ○태 ○兌 | |||||||
47世 | 호○ 浩○ | ||||||||
48世 | ○병 ○秉 | ||||||||
49世 | 형○ 炯○ | }}}}}}}}} |
매 수보 때마다 천간법(天干法), 오행상생법(五行相生法), 수교법(數交法)을 고루 사용하여 항렬자를 제정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타성에 비해 대동항렬을 철저히 지키는 편은 아니며, 파별로 다른 항렬자를 사용하기도 한다. 특히, 삼곤계는 서로 다른 항렬자를 사용하는 편이다.
7. 과거 급제자
7.1. 문과
- 전익희(全益禧, 1598~1659) - 전서공파(망동파)
인조 2년(1624년) 식년시 병과 7위
字 자수(子綬) 號 설월당(雪月堂)
父 전뢰(全磊) 祖 전개(全漑) 曾祖 전응두(全應斗)
- 전명룡(全命龍, 1606~1667) -전서공파(모산파)
인조 5년(1627년) 식년시 병과 12위
字 백유(伯兪) 號 영서(𤃡西)
父 전대승(全大承) 祖 전결(全潔) 曾祖 전천성(全天性)
7.2. 무과
7.3. 생원시
- 전팽령(全彭齡, 1480~1560) - 판서공파
연산군 10년(1504년) 식년시 2등 9위
字 숙로(叔老) 號 송정(松亭)
父 전응경(全應卿) 祖 전효순(全孝順) 曾祖 전오례(全五禮)
- 전응방(全應房, 1493~1556) - 전서공파(구천파)
중종 20년(1525년) 식년시 3등 1위
字 이기(而紀) 號 야옹(野翁)
父 전박(全珀) 祖 전희철(全希哲) 曾祖 전예(全禮)
- 전유익(全有翼, 1595~1624) - 전서공파(이계파/대구파)
인조 2년(1624년) 식년시 2등 4위
字 여필(汝弼) 號 태암(泰岩)
父 전시헌(全時憲) 祖 전해(全海) 曾祖 전응삼(全應參)
- 전명룡(全命龍, 1606~1667) - 전서공파(모산파)
인조 2년(1624년) 증광시 3등 20위
字 백유(伯兪) 號 영서(𤃡西)
父 전대승(全大承) 祖 전결(全潔) 曾祖 전천성(全天性)
- 전효승(全孝承, 1608~1663) - 전서공파(학촌파)
인조 20년(1642년) 식년시 2등 22위
字 인술(仁述) 號 취죽헌(醉竹軒)
父 전설(全渫) 祖 전천성(全天性) 曾祖 전안(全安)
- 전명직(全命稷, 1626~ ? ) - 전서공파(모산파)
효종 3년(1652년) 증광시 3등 14위
字 성유(聖兪) 號 송월당(松月堂)
父 전대승(全大承) 祖 전결(全潔) 曾祖 전천성(全天性)
- 전수산(全壽山, 1671~1746) - 전서공파(이곡파)
숙종 34년(1708년) 식년시 2등 14위
字 여인(汝仁) 號 정숙암(整肅庵)
父 전성삼(全省三) 生父 전계삼(全戒三) 祖 전명열(全命說) 曾祖 전유승(全有承)
- 전계선(全繼善, 1686~1749) - 전서공파(모산파)
숙종 45년(1719년) 증광시 2등 12위
字 효칙(孝則) 號 곡남(谷南)
父 전시하(全始夏) 祖 전명룡(全命龍) 曾祖 전대승(全大承)
- 전필기(全必錡, 1691~1756) - 전서공파(이곡파)
경종 3년(1723년) 증광시 1등 3위
字 기숙(器叔) 號 농수(聾叟)
父 전수억(全壽億) 生父 전수산(全壽山) 祖 전성삼(全省三) 曾祖 전명열(全命說)
- 전구(全球, 1724~1806) - 전서공파(거촌파)
정조 1년(1777년) 식년시 2등 15위
字 사정(士貞) 號 반암(半岩)
父 전성초(全性初) 祖 전옥현(全玉賢) 曾祖 전성원(全聖源)
- 전일흠(全一欽, 1762~1798) - 전서공파(망동파)
정조 7년(1783년) 식년시 3등 58위
字 성중(聖中) 號 성봉(星峰)
父 전상철(全尙喆) 祖 전달국(全達國) 曾祖 전덕구(全德久)
- 전경희(全敬熙, 1764~1833) - 전서공파(이곡파)
순조 1년(1801년) 식년시 3등 67위
字 이직(以直) 號 동곡(同谷)
父전응렴(全應濂) 祖 전필기(全必錡) 曾祖 전수억(全壽億)
- 전규병(全奎炳, 1840~1905) - 전서공파(이계파/이계파)
철종 12년(1861년) 식년시 3등 46위
字 여명(汝明) 號 우엄(愚广)
父 전승렬(全承烈) 祖 전수행(全秀行) 曾祖 전택홍(全宅泓)
7.4. 진사시
- 전응삼(全應參, ? ~ ? ) - 전서공파(이계파)
명종 1년(1546년) 증광시 3등 9위
자(字) 수부(秀夫), 호(號) 칠리수(七里叟)
父 전박(全珀) 祖 전희철(全希哲) 曾祖 전예(全禮)
- 전극항(全克恒, 1590~1636) - 판서공파(노동파)
광해군 4년(1612년) 증광시 3등 16위
字 덕고(德古) 號 규천(虬川)
父 전식(全湜) 祖 전여림(全汝霖) 曾祖 전혼(全焜)
- 전극념(全克恬, 1597~1660) - 판서공파(창주공파)
인조 11년(1633년) 식년시 3등 26위
字 유안(幼安) 號 창주(滄州)
父 전식(全湜) 祖 전여림(全汝霖) 曾祖 전혼(全焜)
- 전유장(全有章, 1612~1675) - 전서공파(이계파/대구파)
현종 1년(1660년) 증광시 3등 7위
字 여환(汝煥) 號 정봉(正峰)
父 전시헌(全時憲) 祖 전해(全海) 曾祖 전응삼(全應參)
- 전계선(全繼善, 1686~1749) - 전서공파(모산파)
숙종 45년(1719년) 증광시 2등 10위
字 효칙(孝則) 號 곡남(谷南)
父 전시하(全始夏) 祖 전명룡(全命龍) 曾祖 전대승(全大承)
- 전구(全球, 1724~1806) - 전서공파(거촌파)
정조 1년(1777년) 식년시 1등 3위
字 사정(士貞) 號 반암(半岩)
父 전성초(全性初) 祖 전옥현(全玉賢) 曾祖 전성원(全聖源)
7.5. 잡과
7.5.1. 역과
8. 집성촌
8.1. 대전광역시
- 대전광역시 대덕구
- 대전광역시 서구 오동
8.2. 강원도
- 강원도 양구군 남면 가오작리
8.3. 충청도
- 충청북도 옥천군
- 충청북도 영동군 학산면 박계리·아암리[82]·학산리
- 충청북도 진천군
- 충청남도 금산군 추부면 요광리
8.4. 경상도
- 경상북도 봉화군 상운면 구천리[83] 참고
- 경상북도 상주시 모서면 득수리·정산리
- 경상북도 상주시 사벌국면 화달리
- 경상북도 영주시 문수면 월호리 참고
- 경상북도 영주시 상망동[84]·적서동 참고
- 경상북도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참고
8.5. 북한
- 황해도 연백군 목단면 동운리
- 평안남도 용강군 신녕면 오학리
9. 인물
9.1. 역사인물
- 전희철 (全希哲, 1425-1521; 전서공파)
자(字)는 원명(原明), 호(號)는 휴계(休溪). 조선 초 생원시, 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무과에 올라 사직(司直)의 벼슬을 지냈다.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고향인 옥천으로 낙향하였다가 곧 아내 감천 문씨(甘泉 文氏)의 집안이 자리잡은 경상북도 영주시 일대로 이거했다.[85] 이때 호를 휴계라 했는데, 현재 영주시 휴천동 일대의 지명을 딴 것이다. 단종이 승하하자 복상(服喪)하고 자손들에게 단종의 묘소를 찾아뵙도록 분부했다. 이로 인해 단종 때 절신들의 위패를 모신 동학사 숙모전에 봉안되었다.[86]
- 전주 (全宙, 1501-1559; 이곡파)
자(字)는 태허(太虛), 호(號)는 설봉(雪峰). 휴계 전희철의 증손이자 이곡파의 파조이다. 무과에 급제하여 인의, 선전관과 같은 관직을 두루 거치고 온성, 강릉, 홍원 등지의 지방관을 지냈다. 홍원 읍지(邑誌)의 관안(官案)에 중종 31년에 현감으로 부임했다가 33년 체임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강릉판관으로 재임할 때 형인 참봉 전우(全宇)의 유일한 아들 전천석(全天錫)이 사망하였는데, 전천석은 슬하에 1남 2녀를 두었으나 그 중 아들 하나와 딸 하나는 모두 서자녀로서 승통(承統)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아들이 없고 줄곧 외직으로 지방에 부임해 있는 처지였으므로 동생인 부사용 전안(全安)에게 가산을 일부 떼어주면서 제사를 이어나갈 것을 부탁했다. 벼슬을 그만두고는 증조부 전희철이 낙향했던 영주 이산면 지동리 일대의 이르실이라는 곳에 99칸 집을 지어[87] 거처하고 후학을 양성하며 만년을 보냈다. 평소 시경의 추우(騶虞) 장을 즐겨 읊었는데, 이는 주 문왕의 교화를 제후들이 받들어 정치를 하자 온 나라에 초목과 짐승이 번성했음을 노래한 것이다. 동생 전안의 둘째 아들인 봉사 전천기(全天紀)가 양자가 되었는데, 양부에 대한 효성이 깊어 시묘살이한 곳을 향내 사람들이 빈소골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영주시 이산면 지동리 이르실 부근에 빈소골이라는 지명이 여전히 남아있다.
- 전설 (全渫, 1563-1609; 학촌파)
자(字)는 시응(時應), 호(號)는 고산(孤山). 휴계 전희철의 5대손이자 학촌파의 파조이다. 중봉 조헌과 읍청당 박사종의 문인으로 활계 이대유, 비암 박이항 등과 교유했다. 옛날 중국 난정(蘭亭)에서 명사들이 계회를 연 일을 흠모하여 이대유, 박이항, 사촌 화암(花巖) 전택(全澤) 등 뜻을 같이하는 친우들과 함께 고당덕업계(高塘德業契)[88]를 결성하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스승 조헌이 의병을 일으켰는데 당시 관찰사였던 윤선각이 손 놓고 관망만 하고 있자 분개하여 상소문을 작성하였으나 조정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 이후 조헌과 합류하고자 했지만 2차 금산 전투에서 조헌이 전사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를 한으로 여기고 상주에 은거하고 호를 고산이라 했다.
- 전식 (全湜, 1563-1642; 판서공파)
자(字)는 정원(淨遠), 호(號)는 사서(沙西), 시호(諡號)는 충간(忠簡)이다.[89]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며 청요직과 당상관을 두루 지낸 명신(名臣)이다.
- 전극항 (全克恒, 1590~1636; 노동파)
자(字)는 덕고(德古) 또는 덕구(德久)이고, 호(號)는 규천(虯川). 사서(沙西) 전식(全湜)의 장남이다. 아버지와 함께 상사(商社)의 삼로(三老)라 불린 상주의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와 창석(蒼石) 이준(李埈)의 문하에서 배웠다.[90] 광해군 4년 진사시에 합격하고 인조 2년 문과에 급제하였다. 대교,예문관검열 등을 역임한 후 예조정랑을 지냈다. 예조정랑으로 있던 1636년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에서 호종하던 중 한성을 지키라는 명을 받고 가서 수십 일을 머물며 지키다 결국 전사했다. 이 공으로 사후 도승지로 추증되었고 정조 10년 국가에서 정려(旌閭)가 내려졌다. 시와 문장으로 당대에 명망이 있었으며 그 명성이 멀리 한양에도 퍼져 이에 대해 은근히 자부하는 시가 존재한다.[91] 본인 외에도 아버지인 전식과 동생인 창주(滄州) 전극념(全克恬) 또한 문장으로 명성이 있어 666년 역사를 지닌 상주의 유명 시회(詩會)인 낙강시회에 삼 부자가 참석하였다.[92][93] 그의 문집(文集)으로 규천문집(虯川文集)이 있다.
- 전명룡 (全命龍, 1606-1667; 모산파)
자(字)는 백유(伯兪), 호(號)는 영서(𤃡西). 생원시와 문과에 급제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친 인물로, 특히 지방관을 지내면서 업적이 많았다.
- 전필기 (全必錡, 1691-1756; 이곡파)
자(字) 기숙(器叔), 호(號) 농수(聾叟). 설봉 전주의 7대손이자 정숙암 전수산(全壽山)의 아들로 족숙 전수억(全壽億)의 양자가 되었다. 형 전필구(全必銶)와 함께 나란히 생원시에 합격했는데, 생부인 전수산도 생원이었으므로 향내의 사람들에게 소순, 소식, 소철 부자와 비견된다는 평가를 받았다. 이인좌의 난 때 의병에 참여하였다. 영남 유생의 일원으로 영조와 대리청정 중이었던 왕세자에게 이광좌 등을 역적으로서 처벌할 것을 여러 차례 상소하였고, 이와 함께 이종성, 박문수 등을 함께 논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9.2. 현대인물
9.2.1. 전서공파
9.2.1.1. 학촌파
9.2.1.2. 구천파
9.2.1.3. 망동파
9.2.1.4. 만촌파
9.2.1.5. 행정파
9.2.2. 판서공파
9.2.2.1. 화룡파
9.2.3. 계보 불명
10. 인구 분포
순위 | 시/도 | 지역별 인구비율(‰) | 인구수(명) |
1 | 대전광역시 | 3.491 | 5,304 |
2 | 충청북도 | 2.197 | 3,402 |
3 | 세종특별자치시 | 2.184 | 436 |
4 | 경상북도 | 1.300 | 3,409 |
5 | 대구광역시 | 1.254 | 3,055 |
6 | 충청남도 | 1.226 | 2,497 |
7 | 인천광역시 | 1.021 | 2,882 |
8 | 경기도 | 0.931 | 11,202 |
9 | 서울특별시 | 0.895 | 8,562 |
10 | 강원도 | 0.708 | 1,062 |
11 | 울산광역시 | 0.654 | 743 |
12 | 부산광역시 | 0.627 | 2,135 |
13 | 전라북도 | 0.554 | 1,000 |
14 | 경상남도 | 0.408 | 1,323 |
15 | 제주특별자치도 | 0.303 | 179 |
16 | 광주광역시 | 0.163 | 242 |
17 | 전라남도 | 0.141 | 248 |
전국 | 0.959 | 47,681 |
대체로 관향 옥천을 비롯하여 집성촌들이 위치한 충청 지역과 영주, 상주 등 주요 현조(顯祖)들이 터전을 닦은 곳들이 있는 경북 지역에 높은 비율로 분포한다. 반면, 호남과 제주 일대는 상대적으로 인구비율이 낮은 편이다.
11. 여담
- 옥천지역 양반연구에 관한 논문에 따르면 옥천 지방 사람들이 일컫기를 옥천을 대표하는 양반가문으로 6토반(土班)과 8대반(大班)이 있다고 한다. 여섯 토반에는 옥천 전씨, 옥천 육씨, 무송 유씨, 순흥 안씨, 초계 주씨, 봉화 금씨이고 여덟 대반에는 선산 곽씨, 인천 이씨[94], 하동 정씨, 은진 송씨, 연일 정씨, 전주 이씨, 청풍 김씨, 연안 김씨이다. 토반 중에서 옥천 전씨와 육씨는 오래전부터 지역의 유력 가문으로 살아온 토성(土姓)이고 그 외의 가문은 다른 지역에서 옮겨온 내성(來姓)이다. 대반은 모두 내성(來姓)이다. 토반중에서 무송 유씨, 순흥 안씨, 봉화 금씨 그리고 대반중에서 하동 정씨가 옥천 전씨와 혼인을 통해 옥천으로 입향한 가문이다. 다만 이 둘을 구분하는 기준은 명확하지 않다고 한다. 하지만 위의 성씨들이 옥천 지역의 사마안[95]에 기록된 사람들의 본관 중, 사마안에 따라 조금의 차이는 있지만 최대 61%의 비중을 차지한다는 점에서 위의 성씨들은 모두 옥천에서 향론을 주도하는 가문이었을 것이다.[96]
- 옥천 전씨는 여말선초 시기부터 지속적으로 여러 유력자와 통혼을 하여 세력을 키웠다. 이를 알 수 있는 자료로 옥천 사마안에 기록된 사람 중 조선전기에 입록되는 사람들의 입향조를[97] 보면 총 10개 가문 중에서 입향 동기를 알 수 없는 구례 장씨, 문화 류씨, 초계 주씨, 인천 이씨 그리고 옥천 황씨, 옥천 육씨와 혼인을 통해 입향한 선산 곽씨를[98] 제외한 다섯 가문 즉 남원 양씨, 순흥 안씨, 울산 박씨, 진위 이씨, 하동 정씨가 옥천 전씨와 혼인을 통해 옥천으로 입향했다. 또한 조선후기에 처음 입록되는 가문의 입향조를 봐도 총 7개 가문 중 입향 동기를 알 수 없는 풍천 임씨, 연일 정씨, 여흥 민씨 그리고 선산 곽씨와 혼인하여 입향한 은진 송씨를 제외한 봉화 금씨, 무송 유씨가 옥천 전씨와 혼인하여 입향했고 함양 여씨 입향조는 매제가 옥천 전씨인 인연으로 입향하였다.#
- 옥천과 그 인근 지역은 옥천 전씨를 필두로 한 혈연적, 학연적으로 강하게 이어진 세력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했는데[99] 그 영향력을 짐작하게 해주는 일화가 바로 삼계서원의 건립과 이를 둘러싼 갈등이다.[100] 삼계서원과 서원을 이끄는 가문들에 불만이 컸던 반대 세력이 서원을 없애기 위해 상소를 올려 임금의 윤허를 받아 없애려고 했는데 서원을 이끄는 세력의 권세가 너무 강해 명망있는 방백과 수령(名公望士)이 와도 없애기는 커녕 위패조차 건들지 못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그 권세가 막강했다.[101] 또한 삼계서원이 철폐된 이후 서인이 강세를 보이는 지역인 충청북도에서 동인 계열의 지지를 받는 전팽령을 모신 영당(影堂)으로 대곡영당(代谷影堂)을 짓고 대곡영당이 훼철된 후에도[102] 이를 잇는 목담서원을 다시 지어 위패를 모신 것을 보면 서인의 힘이 강한 조선후기의 충청북도에서 옥천 전씨는 지역의 동인계 가문인데도 불구하고 가문의 영향력이 줄어들지 않았다.
12. 참고자료
-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시스템
- 한국고전종합DB
- 朝鮮後期 沃川地方 士族의 存在形態 : 司馬案을 中心으로
- 17-18세기 沃川地方 在地士族의 動向 : 三溪書院의 置廢를 중심으로
- 17세기 沃川 三溪書院과 斯文是非
- 沃川의 三溪·三陽書院 硏究
[1] 물론 오간, 마려를 제외한 인물들의 이름이 정사(正史)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고, 기원전 18년경은 한반도에 성씨라는 개념이 안착하기 훨씬 이전 시기이므로 이는 단지 전씨의 기원을 설명하기 위해 생긴 오래된 전승 중 하나일 가능성이 높다. 다만 적어도 7세기 이전부터 전씨(全氏)로 일컬어지는 씨족집단이 백제 사회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2] 이와 관련한 자세한 내용은 전씨, 정선 전씨 항목을 참조.[원문] '旌善君以甲十一世孫檢校都尉弼之子忠肅王朝奉翊大夫密直副使版圖判書上護軍封管城君管城全公侑之墓'[4] 전학준-전효격(全孝格)-전대부(全大富)-전필-전유[5] 고려 후기의 종2품 문산계.[6] 일부 족보에는 민부전서(民部典書)라고도 전한다.[7] 본관은 파평이며 성호사설의 저자 이익의 제자로 조선 후기의 실학자이다.[8] 동국 13현 명단: 문성공(文成公) 안유(安裕), 관성군(管城君) 전유(全侑), 문희공(文禧公) 유경(劉敬)[103], 최유경(崔有慶), 김진손(金振孫), 추수경(秋水鏡), 정래(鄭萊), 전득시(田得時), 문래(文萊), 조대림(趙大臨), 강지(姜漬), 이익재(李益齋), 황면재(黃勉齋)[9] 고려 후기 정3품 문산계.[10] 고려 후기 정4품 문산계.[11] 때문에 전숙을 후관성군(後管城君)이라고도 한다.[12] 휴계 전희철의 손자이다. 소과에 합격했지만 조부의 유언을 본받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정자인 야옹정(野翁亭)을 건립한 후 산수를 즐기고 후학을 양성하며 평생 은둔하는 삶을 살았다. 퇴계 이황과도 교류하여 동인과 관계를 맺었다. 이황과의 교류를 알 수 있는 사례로 야옹정의 현판이 퇴계 이황의 친필이며 현판과 함께 정자 건립을 축하하는 시도 한 수 지어주었다고 한다.[13] 세거지가 기호학파의 주요 지역인 회덕과 영남학파의 본거지 중 하나인 안동 인근에 모두 집중되어 있기는 하지만 지역과는 상관없이 영남 지방인 대구에 거주하는 인물이 서인으로 활동한 경우가 있는 반면 서인이 지배적인 충청좌도(現 충청북도)에서 동인 세력으로 꾸준히 영향력을 발휘한 경우도 있다.[14] 전서공파는 야옹 전응방이 퇴계 이황과 교류하며 동인과 관계를 맺었다. 이 후 증손인 전해(全海)가 풍산 류씨 류경심(柳景深)(족질(族姪)이 류성룡)의 사위가 되며 류성룡의 문하에 들어간다. 이렇듯 15세기 중반 영주의 옥천 전씨는 퇴계 이황과의 교류, 풍산 류씨와 혼인을 계기로 동인의 일원이 된다. 옥천 전씨와 풍산 류씨의 관계는 옥천 전씨 중 일부가 대구로 이거한 뒤에도 이어진다. 전유장(全有章)이 류성룡의 아들인 류진에게 방문하고 류경심의 문집인 구촌집(龜村集) 편찬에 참여하는 등의 인연을 이어갔다. 전해의 사후 전해의 삼남 전시헌(全時憲)이 밀양 손씨와 혼인을 계기로 대구로 이거하게 된다. 이들은 새롭게 입향하여 대구에서는 기반이 적었기에 영천 이씨와 경주 최씨 등 기존에 정착한 가문과 혼인을 하였고 혼인이 이어진 가문이 한강 정구의 문인인 것을 기반으로 17세기 중반까지는 남인계로 활동했다. 특히 전유장은 대구의 수서원(首書院)이자 남인계 사족의 거점이 되는 연경서원의 원장을 맡는 등 남인 사이에서 인정받는 인물이었다.[15] 그러나 시간이 흘러 전유장은 대구부사와 경상도관찰사로 온 이유겸, 홍처후, 한수원, 이상진과 교류를 통해 서인으로 기울게 된다. 남인 사이에서 인정받던 인물이었으나 서인으로 전향하였기에 전유장은 당시 향촌 사회에서 비판을 받는데 이러한 비판에도 불구하고 서인으로 활동한 이유는 대구의 옥천 전씨는 전유장이 서원의 원장을 맡으면서 사회적 지위는 확보되었으나 충분한 경제적 기반이 마련되지는 않았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17세기 후반의 조선은 경신대기근을 대표로 하는 여러 대기근을 겪으며 엄청난 경제적 위기를 맞이한 시기였기에 대구의 옥천 전씨는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수단으로 서인 계열인 관찰사의 천거를 통한 관직 진출에 주목한 것이었다.#[16] 17세기 忠淸道 沃川 資風書堂의 운영과 인적구성-고수연[17] 남보에 기록된 옥천 전씨 인물 3명이 모두 판서공파 인물이듯이 판서공파에 소속된 종파 중 대부분은 동인의 계열을 이어나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옥천에 집성촌이 있는 종파의 경우 조선 후기에 들어 옥천이 서인이 지배적인 지역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영향력이 강했다. 문중서원인 목담서원이 동인의 서원인데도 노론 집권 시기에 건립된 점, 충청북도에 건립된 8개의 문중서원 중 서인계 서원이 아닌 곳이 목담서원과 백록서원 두 곳인 점, 제향 인물에서도 남당서원의 이황, 기암서원의 강백년, 목담서원의 옥천 전씨 인물, 백록서원의 권상을 제외하면 모두 서인계 인물인 것과 옥천에 남아있는 옥천 전씨와 관련된 유적지를 보면 중앙 정계와 옥천에 서인이 집권했더라도 옥천에서의 영향력은 여전히 유지되었다.#[18]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족보는 1476년에 발행된 안동 권씨성화보(成化譜)이고 족도(族圖)로 범위를 넓히면 1401년에 발행된 해주 오씨의 족도가 가장 오래되었다. 이외에 16세기에 발행된 족보로는 1562년에 발행된 문화 류씨가정보(嘉靖譜) 그리고 1565년에 발행된 강릉 김씨을축보(乙丑譜)가 대표적이다. 비록 현존하지는 않지만 1554년에 발행된 기록이 있기 때문에 족보가 발행된 시기는 다른 가문의 오래된 족보와 비교해도 큰 차이가 없다.[19] 전팽령의 형인 전팽수의 증손이다.[20] 족보 간행 이후 생원시와 진사시에 입격하였다.[21] 송파 전응두의 5대손[22] 전응두의 6대손[23] 무술보의 사업을 주관한 모산파 곡남 전계선의 아들로, 숙부 전술선(全述善)에게 입후하였다.[24] 전결의 7대손이자 영서 전명룡의 방5대손.[25] 야옹 전응방의 9대손[26] 규천 전극항의 6대손[27] 당시 성인은 한 냥, 아동은 닷 돈의 수단 비용을 받았으나 경비가 부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8] 現 개성시 장풍군 대덕산리[29] 전유의 관직이 판도판서(版圖判書)였으므로 이렇게 부른 것이다.[30] 안회의 자가 자연(子淵)이므로 통상 '안연'이라 불린다.[31] 파조 이부전서 전광운의 손자.[32] 배위 회덕 황씨의 묘소는 충청북도 옥천군 옥천읍 서정리 산13에 있다.[33] 전귀덕의 장남.[34] 전의의 차남,[35] 전귀덕의 차남인 전예의 장손. 부친인 휴계 전희철이 영천(榮川)으로 은거한 후에 선조의 묘소를 돌보지 못할까 우려하여 장남을 옥천으로 돌려 보냈다고 전한다.[36] 전희로의 손자. 진목정파의 파조.[37] 전희로의 손자이자 전만령의 동생. 서정자파의 파조.[38] 전호의 장남.[39] 전사영의 3남.[40] 전사영의 4남. 삼정파의 파조.[41] 전안의 장남.[42] 전천성의 손자이자 학촌파조 전설의 3남.[43] 파조 전광운의 증손이자 전귀덕의 차남.[44] 배위 상산 김씨의 묘소는 충청북도 옥천군 군서면 오동리 산56에 있다.[45] 파조 전광운의 현손이자 전예의 장남.[46] 전희철의 차남.[47] 전박의 장남,[48] 전박의 차남. 구천파의 파조.[49] 전박의 3남. 망동파의 파조.[50] 전박의 4남. 거촌파의 파조.[51] 전박의 5남. 이계파의 파조.[52] 전응복의 아들.[53] 후(後) 관성군, 판서공파의 파조.[54] 판서공파조 전숙의 차남.[55] 전도의 차남인 전오례의 아들.[56] 전효순의 장남.[57] 전응경의 장남.[58] 전응경의 차남.[59] 전응경의 3남.[60] 전팽조의 장남.[61] 전팽조의 차남.[62] 전팽조의 3남.[63] 전팽령의 장남.[64] 전엽의 장남.[65] 전환의 장남.[66] 전경남의 아들.[67] 전혼의 장손이자 전여림(全汝霖)의 장남.[68] 전식의 장남인 전극항(全克恒)의 아들. 사서집에 실린 행장, 시장, 묘갈명, 신도비명과 무술보(1718)에는 이름이 '<后+山>', 행장과 묘갈명 원문에는 이름이 '𦦛'라 되어 있다. 무술보와 행장, 묘갈명에는 전극항의 적장남으로 되어 있으나 시장과 신도비명에는 전극념의 차남으로, 전극항에게 사자(嗣子)가 없어 입후하였다고 되어 있다.[69] 전후의 6세손.[70] 전후의 6세손.[71] 전희(全曦) 계열[72] 송석충은 전희철의 사위이며, 박승임은 송석충의 외손서(外孫壻)다. 즉, 박승임의 부인인 예천(醴泉) 권씨(權氏)에게는 전희철이 외외증조부(外外曾祖父)가 된다.[a] 연기파, 공주파, 진잠파는 공히 길야당(吉也堂) 전천경(全天經)의 후손이므로 삼파를 묶어 길야당파(吉也堂派)라고도 한다.[a] [a] [76] 진잠파.[77] 행정파.[b] 갑인 대동세보에는 판서공파의 하위 분파로 송로, 송오, 송정공파가 있고, 그 아래 다시 지파로 나뉘는 것으로 기술하였지만 기사 대동보에서는 다만 세거지명으로 지파를 칭하고 그 위에 별도의 파명(派名)을 두지 않았다.[b] [b] [81] 遇는 甲에 해당하고, 甲은 木에 해당하므로 그로부터 오행상생의 원리에 따라 신해보에서 천간법으로 정한 항렬자를 정정하였음을 밝히고 있다.[82] 독립유공자 전기서·전만표와 전인평 전 중앙대학교 국악대학 교수 등이 이 마을 출신이다.[83] 작가 전우익이 이 마을 출신이다.[84] 독립유공자 전정석이 이 마을 출신이다.[85] 전희철이 영주에 우거하게 된 것은 영천 민씨(榮川 閔氏) 집안으로부터 비롯된 복잡한 혼맥으로 인한 것이다. 17세기 경 간행된 영주지(榮州誌)에 따르면 본래 여주에 살던 민용(閔庸)이 영주에 입향하면서 영천 민씨의 비조(鼻祖)가 되었고, 그 딸이 덕산 송씨(德山 宋氏) 송계(宋啓)에게 출가하였다. 송계는 본래 덕산에 살았으나 처가인 영주 화천(禾川), 즉 현 영주시 하망동 일대에 옮겨 살았다. 송계의 딸은 다시 감천 문씨 문손관(文孫貫)에게 출가하였고 문손관 역시 처가인 화천에 살았는데, 이 문손관의 딸이 바로 전희철의 부인이다. 즉, 3대에 걸친 처가살이로 인해 옥천 전씨들이 영주에 살게 된 것. 참고로 문손관의 손자인 창계(滄溪) 문경동(文敬仝)은 퇴계 이황의 처외조부다.[86] 송천(松泉) 최흥원(崔興源)이 지은 노송정(老松亭) 정지년(鄭知年)의 행장에 '사직 전희철 공과 함께 경회루에서 사육신과 울며 작별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후대에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가 전희철의 행적을 칭송하는 시를 지었고 성재(性齋) 허전(許傳)은 휴계전공유사서(休溪全公遺事序)라는 글을 통해 그의 행적을 칭송했다.[87] 100칸 이상은 왕족의 권한이었다. 따라서 99칸은 왕족을 제외한 범위에서 최고의 부자인 것이다.[88] 활계(活溪) 이대유(李大㽕), 충암(忠巖) 김대호(金大好), 고강(高江) 정곡(鄭谷), 풍뢰당(風雷堂) 박정필(朴廷弼), 의재(毅齋) 박이겸(朴以謙), 영모재(永慕齋) 박정로(朴廷老), 난고(蘭皐) 우흥룡(禹興龍), 비암(秘巖) 박이항(朴以恒), 심천(深川) 박정량(朴廷亮), 석계(石溪) 민욱(閔昱), 화암(花巖) 전택(全澤), 고산(孤山) 전설(全渫)이 계원으로서 결성한 계회.[89] 시호를 하사하는 교지가 현재까지 남아있는데 교지에 따르면 자신의 위험을 무릅쓰고 임금을 받들었다(危身奉上)하여 '충'이요. 정직하여 간사함이 없다(正直無邪)하여 '간'이라는 시호를 내렸다.[90] 정경세의 문집인 우복집(愚伏集) 제1권 시(詩)편에 제자인 전극항에게 부친 시가 있는데 전극항을 수재(秀才)라고 칭하였다. 전극항 이외의 제자에게 수재라는 표현을 쓴 경우는 권후(權垕)에게 부쳐준 시 밖에 없으며 우복집에 권후에게 준 시는 제2권에 수록되어 있지만 전극항에게 준 시는 제1권에 수록된 것을 보아 정경세가 전극항을 제자로서 매우 아꼈던 것으로 보인다.[91] 시문에 관한 일화로 9살에 우복 정경세의 문하에 처음 들어갈 때 우복이 산장(山庄)을 주제로 시를 짓게하니 그 자리에서 시를 지어 주위를 놀라게 했다. 다른 일화로 동생 전극념이 남긴 증도승지규천산인유사(贈都承旨虯川山人遺事)에 따르면 '그 재주가 민속(敏速)하기를 마치 귀신이 실어다준 것 같아 작은 종소리 울릴 시간에 사운시를 짓고 밥 한 그릇 먹을 시간에 회문시(回文詩)를 지었다. 장문대작(長文大作)이라도 문장에 어색함이 없고 어법이 신기하며 의취(意趣)가 표일했다. 독자로 하여금 어금니에 바람이 나게 하고 모골이 신선같이 느껴지게 하여 세상 사람들이 베껴 외우게 되니 거의 종이값을 올릴 정도였다. ...(중략)... 사람들이 이태백의 후신으로 볼 정도였다.'라고 전해진다.[92] 이 시회의 시작은 1196년 최충헌의 난을 피해 상주에 살았던 백운(白雲) 이규보부터이다. 시회는 1862년까지 총 51회 열렸는데 시회의 개최자나 참석자로 대표적인 인물로는 이규보, 김종직, 유호인(兪好仁), 김일손, 이황, 이준(李埈), 채득기(蔡得沂), 홍여하(洪汝河), 신석번(申碩蕃), 이만부(李萬敷), 정종로(鄭宗魯) 등의 인물이다. 이 인물들은 모두 한국 문학사에 이름을 남긴 문장가이므로 낙강시회는 상당히 높은 수준의 시회임을 알 수 있다. 시회의 역대 내력은 다음을 참고[93] 낙강시회의 역대 참석자 중 삼 부자가 함께 참석한 경우는 전씨 삼 부자가 유일하다.[94] 삼가(三嘉) 이씨라고도 한다.[95] 과거시험 중 첫 단계인 소과를 사마시라고도 하는데 이 사마시를 합격한 사람을 기록한 명단을 사마안이라 한다. 사극에 나오는 생원과 진사가 이 사마시를 합격한 사람이란 의미이다. 옥천에는 이 사마안이 현재 3가지가 남아있다. 대중의 인식과 달리 당시 양반은 한 사람을 기준으로 직계 4대조안에 과거시험에 합격한 사람이 없다면 그 사람을 양반으로 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양반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관직에 나갈 생각이 없더라도 최소 사마시에는 합격해야 양반으로 인정받을 수 있었다. 그렇기에 사마안은 해당 지역에서 특정 가문의 영향력을 유추하기에 좋은 자료이다.[96] 朝鮮後期 沃川地方 士族의 存在形態 : 司馬案을 中心으로 - 이정우[97] 입향조는 해당 지역에 처음 자리 잡은 조상이다. 지금과 달리 지역 간 이동이 흔한 시절이 아니기에 만약 지역을 옮긴다면 아내의 가문이 해당 지역의 유력가문인 경우에 그 지역으로 가서 아내의 가문을 바탕으로 터를 잡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대표적인 예로 양동마을의 여주 이씨가 있다. 만약 여러 가문의 입향조가 모두 같은 가문을 통해 입향했다면 그 가문은 지역에서 강한 영향력을 지닌 가문이라는 의미이다.[98] 일부 논문에서는 선산 곽씨 또한 옥천 전씨와 혼인을 통해 입향했다고 보기도 한다.[99] 세력을 이끈 중심 가문으로 옥천 전씨, 선산 곽씨, 하동 정씨, 인천 이씨 등이 있다. 이들은 삼계서원 건립의 중심이었을 뿐만 아니라 서원의 원장이 이들 가문에서 대부분 나왔을 정도로 서원의 운영에도 가장 많은 관여를 한다.[100] 조상의 위패를 모신 서원이 있다는 것은 그 가문이 지역의 유력한 양반가임을 의미하고 특히 여러 위패 중 가장 윗 자리에 모셔진 인물의 가문은 지역에서 영향력이 가장 강한 가문이라는 의미이다. 삼계서원과 이 서원의 뒤를 잇는 삼양서원에 모셔진 위패 중 가장 윗 자리에 모셔진 위패가 바로 옥천 전씨 가문의 인물인 전팽령의 위패였다.[101] 갈등의 자세한 내막은 삼계서원 문서 참고[102] 대곡영당은 계사년에 훼철되었다고 하는데 대곡영당이 사라져서 지은 목담서원이 1765년에 건립되므로 기록에서 말하는 '계사년'은 1713년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