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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Post-modernism[1]서구 모더니즘의 이성중심주의를 의심하는 사상적 및 정치적 경향의 총칭. 이전 철학 사조의 흐름과 유사하게 포스트모더니즘은 지배적 사상이었던 모더니즘에 반(反)하는 사상을 갖고 출발하였다고 이해하면 쉽다. 간결하게 정리하자면, '기존 사회의 주류였던 이성, 합리성, 근대성, 거대 담론 등으로 대표되는 모더니즘을 해체하려는 사상적 경향성'이다. 이러한 포스트모더니즘의 범주를 이해하기 위해선 모더니즘과 포스트모더니즘에 관한 배경 지식이 필요하다.
2. 설명
근대의 이성은 규칙, 권위, 규율, 통제 등을 의미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이러한 것들을 해체하려는 경향이다. 1900년대 초에는 "모든 인간이 합리적이며, 합리성은 어떠한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모더니즘 사상이 지배하고 있었다. 그러나 두 차례의 세계 대전과 근대의 냉전을 겪으며 합리성에는 한계가 있음이 밝혀졌고 합리성이 옳은가에 대한 문제가 제기된다. 이에 "이성 자체가 문제를 지니고 있으며, 이성으로부터 벗어나야 한다."는 생각이 포스트-모던(탈현대) 사상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이때의 "Modern(현대)"은 1970년대 이전을 칭하며, 21세기인 현재의 시점에서는 근대로 볼 수도 있다.80년대 이전까지는 일련의 관련 사상가들이 그냥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로 뭉뚱그려 구분되었으나 1979년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가 <포스트모던의 조건 The Postmodern Condition>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용어를 명시적으로 사용함으로써 하나의 사상적 사조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쉽게 이야기하면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시대의 이성적 문화적 법칙을 만들어내려 했던 권위적인 모더니즘'과 달리 탈이성적인 것, 다양성과 탈권위적인 것을 추구한다. 거칠게 요약하자면 모더니즘은 규칙성, 이성성, 효율성, 남성성을 내포하는 사상이고[2], 포스트모더니즘은 그 반대의 속성을 지니는 사상이라고 보면 된다.
모더니즘의 핵심 철학인 '구조주의'를 보완하기 위해 나온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이 되는 '후기 구조주의' 철학은, 메시지와 그것을 받아들이는 사람이 생각한 메시지의 뜻이 다를 수가 있다는 것이다. 랑그가 인식 주체보다 먼저 존재하고 인식 주체는 그 랑그에 예속되어 있는 걸 전제로 삼은 게 구조주의라면, 후기 구조주의는 랑그는 언제나 파롤(개인)에 의해 동력을 얻을 수 있고 파롤에 의해 언제든지 해체될 수 있다고 본 것이 후기 구조주의다.
중요한건 여기서 말하는 해체가 무조건 지리멸렬한 카오스를 추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성의 부작용인 경직되고 획일화된 사고에 반대하고, 그동안 이성에 밀려 무시되어 왔던 비주류적인 요소를 재조명하자는 것이다.[3] 이와 같은 철학 사조가 등장하게 된 데에는 '언어적 전회'가 결정적이었는데[4] 이는 모더니즘의 '인식 주체와 사물(인식대상)'의 일치가 곧 진리라고 보았던 관념을 부정하고, 인식 주체와 사물 사이에는 언어라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언어는 인식 주체 이전에 먼저 존재하는 것이고 인식 주체는 그 영향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인식 주체가 언어를 해체한다고 할지라도 인식 주체는 각자마다의 관점이 다 다르다. 인식 주체를 둘러싼 구조는 인식 주체에 의해 해체될 수 있지만 더 이상 객관적 진리에 도달한다는 것은 가능하지 않다.
사회문화적 현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티(postmodernity)는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구분되는 용어로 사용되며, 일반적으로 알려진 포스트모더니즘은 사실 이 포스트모더니티와 혼동되어 쓰이는 경우가 많다. 이는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무엇인지 정의하기조차 애매모호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존의 기준에 대한 비판은 "대체 포스트모더니즘의 기준은 무엇인가, 나아가 예술이란 대체 무엇인가"란 회의를 낳기도 했다. 그냥 분석철학 아닌 현대철학은 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냐라는 비아냥을 듣기도 한 게 사실이다. 움베르토 에코는 이 사조가 각주만 자꾸 치는 철학이라면서 까기도 했다.[5]
일반인들 중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기존의 틀을 벗어난 창의적 실험적 시도"이라는 애매모호한 의미로 받아 들이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그림에 점 찍어 놓은 것, 직사각형 형태가 아니고 왠지 건드리면 무너질 듯 한 건물, 불협화음이 가득한 음악같은 것들을 포스트모더니즘이라고 지칭하는 사람들이 많다. 근데 이는 상당부분 잘못된 인식으로, 점 찍어놓은 그림은 애초에 추상화로 대표되는 모더니즘 화가들이 하던 짓이고, 불협화음을 그대로 드러내는 12음 기법을 시도한 아르놀트 쇤베르크도 모더니즘에 더 가까운 작곡가이다. 현대미술 항목을 참고할 것.
1990년대에는 세기말 분위기와 맞물려 2010년대의 특이점같이 유행어처럼 남용되던 용어 중 하나였다. 실제로 이 시절 잡지나 서적 등을 보면 이 단어가 상당히 애용된다.
3. 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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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더니즘 철학에 대한 안티테제로서 출현한 철학.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단어를 본격적으로 사용한 리오타르에 따르면, 포스트모던이란 메타 서사(métarécit)에 대한 불신으로 단언하고, 모던(moderne)을 메타 서사 혹은 거대 서사(grand récit/grand narrative)라는 정당화 담론에 의해 자신을 정당화하는 사상으로 규정한다.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에 따르면 모더니즘 시대에 보편적으로 받아들여져 오던 이른바 '해방의 서사'는 더 이상 신뢰될 수 없음을 주장한다.
쉽게 말하자면 메타/거대 서사는 담론, "세간의 인식" 내지 "일반적인 견해"라고 볼 수 있다. 더 나아가 "학계에서 당연시되는 논리"를 뜻하기도 한다. 이 (무식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서사를 더 믿을 수 없게 되었다는 것.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은 거대 서사가 지향하는 어떤 종류의 '완전한 이상향'에 대한 전망도 거부하며, 개별자들 간의 불일치와 차이(différence) 자체를 인정할 것을 요구한다. 인간의 이성과 완전성을 신뢰했던 모더니즘의 기획이 결과적으로 초래한 것은 오히려 아우슈비츠와 같은 산업화되고 합리적인 기술을 이용한 대량학살 등의 비극 뿐이었다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이제는 '인류'라는 거창한 이름이 아닌 수많은 개별자들 또는 개별자들의 차이 자체를 존중하는 이념이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것이다.
리오타르가 정의내리고 있는 포스트모더니즘의 기본적인 관점은 사상가들마다 각론의 차이가 있지만 '차이'에 대한 감수성과 위계에 대한 부정이라는 면에서 대체로 일치하며, 사회사상뿐만 아니라 과학적 담론과 문화 코드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이기때문에 필연적으로 격렬한 논쟁을 일으킬 수밖에 없었다.
3.1. 배경
포스트모더니즘이 등장하게 된 역사적 요인을 개략적으로 보면,인간의 합리적 사유에 대한 믿음 → 비판이론의 '도구적 이성' 비판[6] 기존 경제 생산체계인 포디즘의 몰락에 따라 철학적 관점도 변화 → 포스트포디즘의 등장으로 이와 조응된 철학에 관심.[7] 사유의 주체인 인간의 자율성에 대한 신뢰 → 프로이트의 잠재의식 발견[8] 문명과 인간성에 대한 신뢰 → 양차대전을 필두로 나치, 홀로코스트, 스탈린, 베트남 전쟁, 냉전기의 각종 핵위기 등 정보통신 기술의 발달로 인한 지식 유통양상의 변화 → 모호한 저자 개념, 하이퍼텍스트의 등장[9], 가짜 뉴스 |
한마디로 기존의 '이성을 통한 인간의 무한한 발전 가능성에 대한 신뢰'가 하나하나 깨져나가게 되어, 믿을 놈 하나 없다는 생각에서 지배적 패러다임 자체를 거부하는 상황으로 나간 것이다. 결국 각 학문에서 가장 기본이 되는 개념들마저도 해체하고 담론의 대상으로 삼고 있고,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절대적 진리라는 것 자체를 거부하기 때문에 애초에 하나의 통일된 이론이 생긴다는 것 자체가 자기모순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소위 '의심의 세 대가'로 불리는 프리드리히 니체, 지그문트 프로이트, 카를 마르크스 모두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다. 특히 니체야말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준 사상가라고 보아도 무방하다. 가장 쉬운 예로, 신은 죽었다라는 폭탄발언을 날려서 건드리면 안 되는 영역에 있던 신을 끌어내리지 않았던가. 이 선언으로 종교의 규범을 해체했다는 점이 포스트모더니즘과 맥락을 같이한다.
상대성 이론도 포스트모더니즘의 탄생에 간접적으로 영향을 주었다. 상대성이론은 사람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었는데, 특히 시간의 상대성이 철학자들의 세계관에 충격을 주었다. 시간은 전통적으로 순수한 이성에 의존하는 대상으로 여겨졌으나 이성만으로는 이해불가능한 대상일 수 있음이 밝혀졌기 때문이었다. 베르그송은 상대성이론이 시간을 공간화 시켰다면서 상대성이론을 공격했다. 화이트헤드도 베르그송의 공격에 동의했고, 상대성이론이 중요한 형이상학적 함의를 가진다고 보았다.
역사적으로 고대 그리스에선 로고스를 이성이자 우주의 질서라고 보았다. 칸트를 비롯한 철학자들은 이러한 전통을 이어받아 우주를 합리적으로 이해가능하다고 여겼다. 고대 로마 후반기 기독교가 유입된 이래로 근대까지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서양 특유의 강력한 절대주의 관념이 뿌리깊게 자리잡으면서 시간과 공간 개념 또한 절대적 지위를 가지게 되었다. 하지만 상대성이론은 절대적인 시간과 공간 관념이 착각이었음을 밝혀내어 서구인들의 세계관을 뒤엎었다.
다만 과학자들은 "상대성 이론 덕에 뉴턴 우주관 폐기 → 과학도 믿을 수 없다."로 이어지는 일부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반지성주의적 사고방식을 매우 경계한다. 동시성의 상대성 같은 게 나왔다고 과학을 믿을 수 없다는 건 논리적 비약이다.
포퍼와 쿤도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끼쳤다. 포퍼는 이성에 대한 신뢰의 근거를 공식적으로 제거해서 포스트모더니즘으로의 길을 닦았다는 평을 받는다. '열린 사회'를 주장한 포퍼는 철저한 자율적 이성에 근거하여 인간 이성의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포퍼는 과학철학에 있어 '반증원리'를 주장했다. '모든 과학적 주장은 반증가능성을 지니고, 반증불가능한 이론은 과학적 주장이 아니다'로 요약되는 이론이다. 기존의 논리실증주의적 검증주의는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보편명제로 구성된 과학적 법칙은 경험적 관찰에 의해서는 완전히 검증될 길이 없는데, 왜냐하면 모든 보편명제는 미래에 발생할 수도 있는 단 한 건의 부정적인 사실에 의해서도 반박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 그 이유였다.
사실 포퍼는 논리실증주의와 마찬가지로 과학이 합리성의 실현이라고 보았다. 포퍼는 상대성 이론이 예측한 빛의 휘어짐이 관찰을 통해 검증된 사실에 대해 감명을 받았는데, 이는 그가 반증주의를 발전시키게 된 원인중 하나기도 하였다. 포퍼는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이 반증가능하기 때문에 성공을 거둔 대표적인 예시라고 주장했다. 포퍼는 베이컨이 주장한 과학적 방법론을 반증가능성 개념을 통해 새롭게 정리했고, 연역에 기초한 합리적이고 이성적인 과학을 지키려 노력했다. 하지만 실증주의가 불가능하다며 반증주의를 주장했다는 측면에서 포퍼의 과학철학이 포스트모더니즘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있다.
<과학혁명의 구조>를 통해 패러다임과 공약 불가능성 개념을 제시한 토머스 쿤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의 대두에 영향을 미쳤다. 쿤은 뉴턴역학에서 상대성이론으로의 전환이 패러다임 전환의 대표적인 예시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과학철학의 선구자인 가스통 바슐라르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첨단과학을 철학적으로 해석하여 인문학계에 소개하는 일을 전문적으로 하던 학자였지만, 양자역학을 이해하는데에는 큰 어려움을 겪는다. 바슐라르는 불확정성 원리처럼 이성을 뛰어넘는 법칙이 존재하며 완전히 새로운 인식론이 필요하다는 주장을 펼쳤다. 그가 제시한 방법론은 포스트모더니즘을 열었다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 포스트모더니즘의 대가로 꼽히는 미셸 푸코, 자크 데리다 등 그의 영향 밖에 있는 사람은 없다고 할 수 있을 정도이다. 물론 바슐라르나 그 제자인 질베르 뒤랑의 철학은 포스트모더니즘과는 굉장한 차이가 있으며, 오히려 새로운 구조를 세우려는 것에 가깝긴 하다.
그 외에 저명한 세계주의 소설가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에게서도 어마어마한 영향을 받았다.
3.2. 특징
해체주의와 상대주의가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단순한 좌파 철학 정도로 간단하게 생각해서는 곤란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의 서술에서는 주체와 객체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으며[10], 주체는 개별적인 특징이나 독창성이 아닌 상대적인 차이로서 존재한다고 보기에 존재를 지목하는 방식이 잘 쓰이지 않는다. 그 외에도 하이픈(-)을 이용한 글쓰기가 난무하는 등 문법 자체도 근대적인 권위로 보고 파괴하려는 속성이 강하다. 욕망, 탈주, 차연(差延), 이미지 해체, 타자성 등의 단어가 전매특허. 그래서 처음 포스트모더니즘 철학 서적을 접하는 사람들은 심히 당황하고는 한다.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질문하고 반발하는 행위 그 자체를 의의로 삼기도 한다. '삼는다'가 아니라 이렇게 서술하는 이유는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하나의 성격이나 방법론을 특징으로 갖기를 거부하기 때문이다. 다만 기존 이론에 대한 반박은 철학의 전반적 특징이며 포스트모더니즘만의 고유한 특징은 아니긴 하다. 어쨌든 근대적 주체(cogito)의 존재, 인과율 등 인간이 의심해보지 않았던 것들에 의문을 던지려는 시도는 분명 긍정적으로 평가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사용되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과 탈구조주의(post-structuralism)는 조금 다른 개념이다. 후기 구조주의는 소쉬르의 구조주의에 대한 후속개념으로 이어져 내려왔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은 모더니즘에 대한 대항마로 출발하였지만, 포스트모더니즘의 철학적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후기 구조주의를 차용했을 뿐이다. 따라서 후기 구조주의 철학자들이 포스트 모더니스트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11] 일반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과 포스트구조주의(탈구조주의이며 후기 구조주의인)는 호환되는 개념 정도로 이해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때문에 후기 구조주의 자체는 구조주의에 대한 반발이 아니라 계승 혹은 보완이라고 할 수 있다. 마르크스주의자이자 구조주의자인 루이 알튀세르와, 그의 제자였으나 반발하여 후기 구조주의자[12]가 된 미셸 푸코의 관계에서도 볼 수 있듯이 후기 구조주의는 구조주의의 반발이면서 계승의 성격을 띠기도 한다. 특히 후기 구조주의의 몰락에는 마르크스의 몰락이 전제가 된다. 요컨데 마르크스 → 구조주의 → 후기 구조주의는 운명 공동체였던 셈이다.
그러나 2010년대부터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은 침체에 빠져들었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에 서유럽과 한국 학계에서 선풍적 인기를 끌었던 것에 비하면 몰락이라고까지 할 만하다. 포스트모더니즘 자체가 아예 사장된 것은 아니고 여전히 인문학에서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는 하다. 그러나 전성기에 비하면 발표되는 논문의 양질은 충격적으로 줄었다. 이는 세계적인 경제 위기 이후에 나타난 변화이다. 현실의 문제가 커지다보니 포스트모더니즘처럼 다소 형이상학적인 분야보다는 현실의 문제와 연관된 학문의 수요가 커진 것이다.
다만 이러한 주장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비판 담론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쇠락을 불러일으켰다는 것과, 포스트모더니즘이 실제적으로 저러한 성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몰락했는가는 다른 문제이다. 즉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저렇게 생각했기 때문에 포스트모더니즘이 망했다는 게, 곧 포스트모더니즘이 진짜 저래서 망했다가 되는것은 아니다라는 것이다.
애초에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보기엔 이슬람 극단주의 같은 사회문제 역시 거대 서사 담론, 즉 모더니즘의 산물이다. 거대 서사로서의 자본주의에 대항했던 또다른 거대 서사인 공산주의가 결국 개인과 인격의 말살을 불러온, 처참한 모더니즘의 실패였던 것과 마찬가지이다. 결국 현대의 문화 충돌 현상도 포스트모더니즘의 실패가 아닌, 오히려 모더니즘의 실패로 볼 수 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실패한 것은 결국 포스트모더니즘도 하나의 거대 담론이 되었기 때문이다. 극단적 상대주의, 단순한 반달리즘, 모든게 OK 등, 포스트모더니즘으로 '오해'되는 수많은 것들은 오히려 그것을 '덜 해체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사실 앞에 달린 포스트모더니즘의 관점에서 적은 글 역시 포스트모더니즘적이지 않다. 쉽게 얘기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어쩌고 저쩌고'를 얘기하는 것이 곧 포스트모더니즘적이지 않다. 하나의 철학적 사조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분류할 수는 있지만, 철학적 관점으로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즉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해 스스로 정의하려는 시도를 무산시킨다. 사실 이것이 포스트모더니즘의 딜레마이기도 하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기존의 사상에 무조건 반대하는 사상이 포스트모더니즘은 아니다. 가끔 반 계몽주의를 자처한다며 모든 지식인들을 현실을 전혀 모르는 현학적 계몽주의자로 몰아가며 아무것도 배우지 않으려는 사람도 존재하는데, 기존 체계에 대항하려면 적어도 그 기존 체계가 어떻게 생겨먹었는지는 알고 비판하자. 포스트모더니즘 사상은 결코 반지성주의가 아니다.[13]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에 포함시킬 수 있는 유명한 사상가들로는 장 보드리야르, 지그문트 바우만등 (사회학),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철학), 질 들뢰즈(철학), 펠릭스 가타리(정신분석학), 자크 데리다(철학), 롤랑 바르트(문학이론, 기호학) 등을 들 수 있다. 주로 프랑스인들이 많은 이유는 세계대전의 폐해를 직접적으로 경험했고, 프랑스에서 강하게 일었던 68혁명의 영향 때문이다. 68혁명 이전까지 후기구조주의가 특히 프랑스 위주로 입지를 갖고 있었다는 점이 크게 작용한 듯. 기성 권력이나 사회구조, 이성중심 사고관에 회의를 품은 것이 직접적인 발생원인이라 보는 것이 옮을 듯하다. 영미권에서는 프레드릭 제임슨(문학)이나 데이비드 하비(사회지리학) 등이 마르크스주의적 입장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을 비평했으며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에 일정부분 동의하면서 대안적 담론 자체를 차단하는 지나친 상대주의에는 비판적인 입장이다. 테리 이글턴 등의 강경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이 제기하는 인식의 틀 자체에도 비판적이다.
대학에서도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을 직접 소개하는 강의는 흔치 않으며, 문화철학 내지는 현대 프랑스 철학과 같은 명칭을 통해 소개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이 궁금하다면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 들뢰즈와 가타리가 공저한 <천 개의 고원>, <안티 오이디푸스>,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 자크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의 대하여> 등을 찾아서 읽어보자. 국내 저자가 쓴 포스트모더니즘 개론서로는,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해석학과 문화철학을 전공한 신국원의 <포스트모더니즘>이 있다. 저 저술들을 읽기 전 보르헤스의 환상소설 단편집인 <픽션들>을 읽어본다면 그나마 철학에 대한 흥미를 잃지 않으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에 접근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국내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80년대 후반 불문학자이자 문학평론가인 김현이 푸코의 저작을 소개하면서 조금씩 알려졌으며 90년대부터는 김성기, 이진경 등 민중민주주의 계열의 진보적인 학자들에 의해 본격적으로 연구되었다. 현재는 주로 '연구공간 수유+너머'주소를 비롯한 대안적 학술공간이나 문학이론 쪽에서 연구되며 제도권에서는 이미 기존 체계에 상당부분 흡수되거나 유행이 지나 관심도가 떨어진 상황. 사회과학이나 문화이론에서 푸코나 보드리야르의 이론은 국내외를 막론하고 이미 교과서적인 의미의 주류로 자리잡았다. 특히 현대 사회학과 정치학에서 푸코의 비중은 대단히 크다. 즉 포스트모더니즘이 완전히 폐기된 것이 아니라 순화되어 주류로 편입된 부분이 많다. 그래도 아직 수유+너머에서는 관련 세미나도 진행하고 읽을거리들도 있으니 관심 있으면 들어가보자. 이정우, 고병권, 이진경, 김재인[14] 씨 등이 우리나라에서 꽤 알려진 포스트 모더니즘 연구자들이다. 다만 90년대의 포스트모더니즘 유행은 주로 마르크스주의를 버리면서 포스트 모더니즘을 택한 학자들에 의해 주도되었기 때문에 현재도 정통 좌파 이론가들은 국내 포스트 모더니즘 철학을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많다.[15] 놈 촘스키, 앨런 소칼, 리처드 도킨스[16], 에릭 홉스봄 등은 포스트모더니즘 신좌파들을 일종의 입진보 취급한다.
한국에서만 봐도 계급투쟁을 강조하는 정통 좌파들에게는 포스트모더니즘은 본질을 흐리는 부르주아적 이데올로기로 비추어지곤 했으며, NL들에게도 그리 관심을 받지 못했었다. 그러나 90년대 이후 페미니즘과 소수자 운동 등을 중심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이 스며들기 시작했다.[17] 그리고 민주노동당 정파갈등 등을 거치며 2000년대로 접어들며 한국의 운동세력의 힘이 약해지고 정통적 마르크스주의에 거리를 두는, 혹은 오른쪽으로 이동하게 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노동계급 중심성'에 대한 대안이 화두로 떠올랐다. 이는 진보신당에서도 뜨거운 화두였고, 이에 대해 구태의연한 운동권 문화, 투쟁 중심, 마르크스주의 신봉 등을 강하게 비판하며 여성, 소수자, 생태, 평화 등을 강조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게 나오게 되었는데, 이러한 경향은 포스트모더니즘 철학에서 영향을 받은 부분이 많다.[18] 지금도 저러한 키워드를 강조하는 운동세력, 정당, 시민단체 등은 포스트모더니즘적 영향이 큰 편이다. 반면 포스트모더니즘적 신좌파를 가장 강하게 비판했던 쪽에는 정통 마르크스주의적 운동가들과 함께 의회주의-사회민주주의 지지자들[19]이 있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은 역사 발전론에 비판적이라는 특징이 있다. 역사 발전론 또한 거대담론의 일종이며 극복의 대상이라는 것이다. 반면 <역사의 종언>의 저자인 프랜시스 후쿠야마와 같은 자유주의자들은 포스트 모던과 후기 구조주의가 이미 죽었다고 평가한다. 역사의 종언의 주된 내용은, 자유 자본주의는 공산주의와의 이데올로기 대결에서 압승을 얻어 버렸으니 앞으로 인류 역사는 현대 자유 자본주의에서 변하지 않고, 때문에 역사의 변화도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과는 달리 자본주의나 자유민주주의도 완벽한 체제라 할 수 없으며 역사의 종언 테제는 잘못되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후쿠야마는 대대적인 공격을 받고 자신의 논리를 번복하는 논문을 냈지만 저 전제는 두고두고 까이고 있다.
역사 발전론을 주장하는 마르크스주의와도 사이가 좋지 않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에 일정한 경향이 존재한다고 해석한다는 점에선 프랜시스 후쿠야마의 주장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역사를 하부구조와 갈등 중심으로 해석하기 때문에 후쿠야마의 주장과 달리 사회주의-공산주의 사회가 '역사의 종언'을 맞았다고 보지 않으며, 사회가 발전하면서 나타나는 갈등은 계속될 것이라 본다. 마르크스주의자의 입장에서도 모든 사상은 그 시대의 사회경제적 토대와의 관계 속에서 존재한다고 보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수명이 끝난 사상, 혹은 보편타당하게 영원히 존재할 사상은 없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볼 때, 자본주의를 영원하다고 생각하는 사고 방식이 비합리적인 이유가 이것이다.
정리하여, 하나의 사상으로서의 포스트모더니즘 자체의 전망은 밝아보이지 않지만, 모든 것에 대한 안티로서 존재하므로, 모든 것이 존재하는 한 완전히 사라질 것 같지 않은 철학일지도 모른다. 자연과학과 달리 사회과학, 인문학은 명확한 진리에 도달하기 어려우며, 그의 존재 역시 의심스러운 것은 차치하고, 결국 나왔던 말들이 계속 반복되는 측면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사라져도 다시 새롭게 비슷한 주장이 나올 수 있다. 어떻게 보면 포스트모더니즘의 문제의식도 소피스트 때까지로 거슬러 올라간다고도 볼 수 있으니깐 말이다. 그래서 누군가는 말한다. 남을 것은 오직 담론 뿐이라고.
3.3. 타학문과의 관계
과학의 객관성과 합리성을 비판하는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자연과학, 그리고 경제학, 고고학 등 과학적 방법론을 사용하는 일부 사회과학과는 사이가 많이 안좋다. 과학이론에 대해 사회구성주의를 주장하여 과학이론이 만들어지지 않았거나 전혀 다른 형태가 될 수 있었다는 주장을 펼쳤다. 과학계의 포스트 모더니즘에 대한 가장 노골적인 비판은 앨런 소칼의 지적 사기 사건을 참고.심리학의 경우에는 워낙 분야가 방대하고 이질적인지라 몇몇 분야는 거의 경성 과학과 차이가 없을 정도의 과학적 방법론을 보여주지만(다르게 말하면 생물학 등의 인접 학문과 함께 뇌과학, 인지과학, 행동과학으로 같이 묶이는 부분들), 적지 않은 부분들은 연성과학이나 인문학적 성향을 보여 포스트모더니즘과 접점을 가진다.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은 자연과학 쪽에서 주장하는 사회과학, 인문학을 생물학적으로 해석하는 환원주의적 통섭을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위협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이들은 인간의 사고나 감정, 윤리, 사회현상을 생물학적 혹은 물리학적으로 단순하게 서술할 수 있느냐며 통섭에 대해 반론을 제기한다. 인지과학에서는 인간의 감정이나 사회집단현상도 결국 뉴런 같은 신경세포들의 화학적, 전기적 반응의 결과로 받아들이는데, 그렇다고 "나치의 학살은 히틀러의 뉴런 세포가 아드레날린의 영향을 받아 폭주했기 때문" 같은 식으로 서술하는건 지나치게 단편적인 서술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과학자들은 통섭이 이념적으로 볼 때 중립적이라고 받아들이며, 통섭이 인문학에게 줄 수 있는 가치가 크다고 주장한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근대적인 해방 이론과 변혁주체로서 계급의 존재를 부인하기에 마르크스주의와도 상극이다. 이론적 차이를 제외하더라도 현실의 공산주의가 굴라그 등 억압적인 모습을 보였기에 마르크스주의를 극복의 대상으로 여기게 된 면도 존재한다. 대표적으로 미셸 푸코는 소련의 실태를 깨닫고 반공주의를 표명했다. 포스트 모더니즘은 마르크스주의와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급진적인 모습을 많이 보이고 현대문명비판에 큰 기여를 했다는 공통점을 가지지만, 그러한 공통점 때문에 이들은 서로 주도권 다툼을 하게 되었다. 그렇다고 마르크스주의를 제외한 다른 사상들과는 사이가 좋다는 뜻은 절대 아니고 특히 저 쪽에서 태클을 자주 건다는 뜻.
단 '자율주의자' 안토니오 네그리는 일단 제외. 그리고 하비 등 마르크스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의 접점을 찾는 시도도 늘고 있다.
4. 예술
자세한 내용은 포스트모더니즘/예술 문서 참고하십시오.예술계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은 상당히 크다. 예술은 이성만큼이나 감성과 관련이 깊고[20] 사회 부조리에 더 크게 공감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시기가 되면서 '미술'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 빈도가 점차 줄어들고 있다. 행위예술(퍼포먼스 아트)이나 매체예술(미디어 아트)처럼, 최근의 예술은 여러 예술 분야들이 뒤섞여 종합예술화 되고 있기 때문. 이전처럼 시각예술(회화, 조각), 공연예술(연극, 무용, 음악), 실용예술(판화, 공예, 건축, 디자인), 기계매체예술(사진, 만화, 애니메이션, 영화, 게임) 등이 따로따로 제 갈 길만 가는 게 아니라 서로 융합되는 양상을 보인다.
5. 문학
자세한 내용은 포스트모더니즘/문학 문서 참고하십시오.네이버 지식백과 문학비평용어사전의 해당 항목을 참조하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의 중요한 특징 중 하나는 고급문화와 하급문화 사이의 구분을 해체하는 것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의 그러한 속성은 결과적으로 모든 장르와 매체 사이의 경계소멸과 혼합을 초래했다.
문학의 경우, 그러한 현상은 모든 텍스트들이 내적으로 상호 연결되어 있다는 소위 '상호텍스트성' 이론을 만들어내었으며, 비평과 창작의 경계가 소멸된 '메타픽션'이나 '메타비평' 또는 '크리티픽션'의 등장을 촉진시켰다. 예컨대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롤랑 바르트, 존 바스, 로버트 쿠버, 레이먼드 페더만 같은 포스트모더니즘 작가들의 소설은 그것이 현실인지 허구인지, 또는 역사인지 자서전인지, 아니면 소설인지 비평인지 확연한 구별이 되지 않는다.
이에 더하여 위키피디아에서 꼽히고 있는 관련 작가들로는 『롤리타』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장미의 이름』의 움베르토 에코, 『제5도살장』의 커트 보니것, 『미국의 송어낚시』의 리처드 브라우티건, 『제49호 품목의 경매』의 토머스 핀천, 『광막한 사르가소 바다』의 진 리스, 『뉴욕 삼부작』의 폴 오스터, 『소중한 사람들』의 토니 모리슨,『거미 여인의 키스』의 마누엘 푸익,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의 밀란 쿤데라 등이 있다. 희곡에서는 사뮈엘 베케트의 부조리극이 끼친 선구자적 영향이 대단하단 것 또한 언급된다.
6. 공연, 영상
포스트모더니즘이 영화에 적용되면 플롯과 논리적 서사에서 벗어난, 혹은 그것을 중요하게 여기지 않는 작품적 경향이 드러나기도 한다. 멀홀랜드 드라이브, 홀리 모터스 같은 작품이 그 예이다.영화 매트릭스를 만든 워쇼스키 형제는 포스트 모더니즘 사회학자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와 시뮬라시옹>에 큰 영감을 받았다고 말한 바 있는데, 정작 보드리야르는 <매트릭스>는 자신의 책과는 관련이 없다고 답했다. 인과율에 집착하는 메로빈지언의 모습이라든가, 이유를 찾아 헤매는 네오라든가, 현실과 가상 세계가 명확히 분리되어 있는 것을 볼 때 <매트릭스>는 포스트모더니즘 사상보다는 훨씬 온건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21]
7. 음악
즉흥연주, 우연성, 거리음악, 미니멀리즘, 뉴에이지, 크로스오버 등 소리를 정의하거나 지배하지 않으려는 경향이 나타난다. 이를테면 뉴에이지 음악가들은 (자신의 음악이 뉴에이지 사상을 추구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동-서양, 또는 장르에 구애받지 않고, 누가 듣더라도 편안하고 조화로운 음악을 추구했다. 이 지점은 포스트모더니즘의 다원주의적 특성과 일정 부분 일치한다.대표적인 미니멀리즘 음악가는 필립 글라스, 존 케이지, 스티브 라이히 등이 있다. 대중음악계에서는 비틀즈, 칸예 웨스트가 상징이다.#
8. 건축
건축계에서는 1972년 7월 15일 오후 3시 22분에 모더니즘은 끝났다고 선언한 뒤, 모더니즘의 대안으로 그 이전 세대의 전통을 그대로 추앙하는 의미로 그 전통을 가능한 한 그대로 계승하려는 신고전주의 등과 달리, 그 전통을 일부 혹은 전체를 재해석하거나 전혀 엉뚱한 방법으로 재현하고 여러 가지 다른 시대의 다른 전통을 마구 뒤섞기도 하는 등의 경우를 말한다. 즉, "건축에서 계속되는 모더니즘에 대해, 그 이후에 살고있는 우리가 이제 그 것을 어떻게 생각할 것인가?"라는 의문점이 계속되는 것이다.건축가 필립 존슨과 존 버지가 설계한 AT&T 빌딩 |
철학의 경우에서처럼 건축도 1940~50년대 모더니즘 시대는 진지하고 기능에 충실하고 자잘한 장식을 배격하고 단순/순수하고 궁극적인 건축을 추구했지만, 이후 포스트모더니즘 시대로 와서는 이런 엄숙주의와 극단적 기능주의가 비웃음 당하고, 그렇다고 모더니즘 이전의 종교와 인습에 얶매인 구시대로 돌아가기도 뭐해서, 모더니즘과 구시대의 전통을 존중하지 않고 오직 표현의 소재이자 수단으로 막 뒤섞어 인용하면서 표현하는 것이다. 이를 표현하는 선언문으로 "Less is Bore"가 있다.[22] (모더니즘이 지루하다는 뜻으로 대표적인 모더니즘 건축가이자 저 말을 했던 미스 반 데어 로에의 디스)
이런 점에서 건축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철학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과 마찬가지로, 무엇이 진리인가, 어떻게 그 진리를 찾아가야 하는가 같은 것이 중요성을 잃거나 그 것이 계속되는 경우도 있으며, 본질과 실존과의 경계도 모호해지며, 과거와 현재와의 경계도 모호해진다. 대중예술에서 이른바 키치의 등장은 이러한 포스트모더니티의 관점에서 해석할 수 있다. 이미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문화적 코드가 본질이나 맥락을 벗어나 순수한 유희 또는 장식적 목적으로 사용되는 것이 바로 키치 문화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1990년 이후에는 건축계의 대세가 포스트모더니즘 중에서도 더 과격하고 원초적인 해체주의로 표현되기도 한다. 대표적인 작가로 프랭크 게리가 있다. 그리고 너무 막 나가다가 현실과의 괴리에 부딪혀 흑역사가 되기도 했다.[23] 한국의 경우 서울특별시청이 대표적인 사례다.
9. 디자인
디자인 분야에서는 모더니즘의 심플하고 미니멀리즘한 디자인 경향에서 벗어나려는 시도가 이루어진다. 딱딱한 직선과 입방체 구조를 기본으로 했던 모더니즘 디자인에서 벗어나, 곡선과 유기적 구성을 활용하려 시도했다. 대표적 작가로 자하 하디드가 있다. 다만 하디드가 설계한 동대문디자인플라자는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고 있다.10. 역사학
역사학계에서의 포스트모더니즘은 위에서 기록된 역사가 아니라 아래에서 기록된 역사를 중점으로 역사를 서술하자는 흐름이다.[24]위로부터 기록된 역사란 그 시절의 도표, 농업 생산량, 정책적 논의 등에서 기록된 역사를 토대로 과거를 구성하는 해석 방법이다. 현대의 도표로 현대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것과, 과거의 도표로 과거의 생활상을 표현하는 건 당연히 괴리가 있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식으로 위로부터 기록된 역사를 해석하는 과정에서 당대 현실의 차이가 발생하자, 아래로부터 기록된 역사를 해석하여 당대 현실을 분석하자는 기조가 나오게 되었고, 이것은 역사학계에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과거의 민간 신화, 소설, 민담 등에서 당시 상황과 사상을 유추해 내고, 다들 알고 있는 이야긴데 단지 그 시절 누군가 이름을 붙여 식자들 사이에서 설레발을 친다고 보는 부류이다.[25] 간단히 말해 흥부놀부 민담에서 놀부는 벌받고 흥부는 흥하는 걸 표현한 걸로 봐서, 그 당시 누가 빈부격차라고 정하진 않았지만 현대인 수준의 빈부격차 개념은 있었다고 보는 경향이다.
기존 역사학, 모더니즘적인 관점에선 사실 중심의 서술을 사용하였다. 사실 중심의 서술은 니체를 비롯 많은 철학자들이 지적했듯 동어반복의 함정에 빠지기 쉽다. 예를 들어 계몽 사상이 번졌던 18세기의 프랑스는, 그 이전엔 계몽 사상이라는 서술이 없었으므로 계몽 사상이 없었다고 밖에 표현할 수 없는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이다.[26] 이러한 근대사학의 한계를 담론과 의심, 그리고 비판을 통해서 뛰어넘으려는 것이 포스트 모더니즘 사학의 큰 관심사다.
위의 언급된 것만 보자면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의 한 분파로 자리잡은 듯한 느낌도 들겠지만, 이건 미시사나 해석론과 엮여서 소환된 경우이다.
실제로 포스트 모더니즘이 역사학과 처음 충돌(접목 정도가 아니다)했을 때는 이정도가 아니었다. 특히 극도로 비판받은 것이 랑케로 대표되는 "역사학에 과학성을 도입한 부류"[27]이고, 그에 대칭적이라는 카 마저도 비판 대상이 되었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을 바라본 시각을 단적이자 단정적으로 말하면 역사학이 만약 과학성을 추구한다면 역사학 자체가 존재할 수 없다 수준이었다. 역사는 그 도구의 불완전성으로 인해서 과학일 수도 없고[28], 역사학자들이 그 나름대로 그 텍스트를 해석한 '과거에 이런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수준으로는 아무런 의미도 없기 때문에[29] 마땅히 해체해야 한다는 수준까지 나간 것이다. 때문에 포스트 모더니즘 관점에서 역사는 당연히 역사학자의 '주장'[30]으로, 문제는 역사가 '무엇'이냐가 아니라[31] 역사가 '어떻게' 형성되어왔느냐이다. 실제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책들은 역사 자체를 다룬 글보다는 역사학자들이 역사를 다룬 형태를 해체한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이에 대한 흡수와 반응이 아날학파, 미시사, 현재주의 역사학, 오리엔탈리즘, 포스트 콜로니얼리즘, 포스트 히스토리, 환경사 등으로 제각각 등장하는 것이다. 다만 워낙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학이 난해하다 못해서 도저히 공감대를 형성하지 못했기 때문에[32], 그나마 기존 역사학계에서 공감대를 형성한 미시사 등이 자리를 잡아가는 추세이다. 또한 포스트모더니즘이 역사학계에 낳은 논쟁(문학과 역사학의 차이점이 무엇이냐?)에 대한 역사학계의 대답은 이렇다. 문학은 창작을 위한 것이지만, 역사학은 객관적 사실을 위한 것이다. (비록 역사학이 주관적일 수밖에 없는 학문일지라도 과학적 방법론을 가지고 사실에 접근하고자 한다는 것이다.)
관련 책으로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학 자체를 다룬 것으로 좀 정리된 책은
- 누구를 위한 역사인가
- 포스트 모더니즘과 역사학
- 역사학을 위한 변론
- 새로운 문화사
미시사에서는
- 고양이 대학살
- 치즈와 구더기
- 마르탱 게르의 귀향
아날학파는 포스트모더니즘과 상극이다. 아날학파는 기본적으로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이 등장하기 훨씬 이전에 등장했다. 더욱이 아날의 기본적인 사관은 개량적 사회경제사다. 이후 아날 3~4세대로 가면서 문화사를 강조하긴 하지만 여전히 그 기반은 '물질'이다. 포스트모더니즘 사관의 영향을 받은 신문화사와 아날 후세대가 겹치는 바가 있어서 종종 오해를 받지만 둘은 정말 다르다.
환경사에서는
- 녹색세계사
11. 지리
지지적 성격이 강한 지역지리 사조와 이에 대한 반발로 등장한 계통지리 사조는 지리학의 발전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지리학이 현실문제에 얼마나 관심을 가지는가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었고, 데이비드 하비의 논문은 학계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다. 이러한 관점은 자본주의에 대한 비판이라는 측면에서 지리학적인 접근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았고 이러한 사조를 구조주의 지리학이라 부른다.지역지리와 계통지리 그리고 구조주의는 현대 지리학을 이끌어오는 주요 핵심 개념이었으나, 이러한 사조에 모두 인간이 배제되었다는 비판에 직면한다. 이후 인간이 장소를 어떻게 인지하는가, 장소는 어떤 식으로 구성되는 것인가 하는 논의가 이어지고, 이는 인간주의 지리학의 등장이라고 본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다양한 학문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개별 학문에서 받아들인 의미는 상이하다. 마찬가지로 지리학 전반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쓰이고 있긴 하지만 각 분과학문별로 의미가 약간씩 다르다.
문화지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신문화지리와 연계되어있다. 기존에는 문화현상의 분포나 이동, 확산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면 신문화지리에서는 경관의 이면에 담긴 의미를 살펴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정치지리, 사회지리, 도시지리, 경제지리 등 분과학문 이외에도 현상학, 해석학, 도상학, 민속학 등 다양한 인접학문의 도움을 받는다. 한국의 문화경관은 긴 역사동안 다양한 인간의 모습이 녹아있으므로 이러한 신문화지리적인 접근이 관심을 받고 있다.
경제지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포디즘과 연계되어있다. 사실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도 포스트포디즘에서 기인되었다. 현대의 생산방식과 소비성향의 변화를 지칭하는 포스트포디즘은 그 원인과 결과를 두고 다양한 논의가 전개되었다. 소비시장의 포화와 과잉공급으로 수요의 다변화가 발생하였고 이에 공급자 측면에서는 생산의 다변화를 추구하게 되었는데 이에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가 탄생하게 되었다고 본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질적이고 가시적인 하부구조를 중시하던 시야에서 벗어나 제도, 관습, 지역사회의 분위기 등 사회문화적인 요소를 중시하게 되었고 이는 지역혁신체계의 연구에서 중요한 기능을 하였다.
도시지리에서 포스트모더니즘은 포스트모더니즘 도시를 연구하는 방식으로 쓰인다. 기존의 도시 내부의 공간구조를 살펴볼 때에 도심과 주변지역, 주거지구의 형태 등을 모델화하려는 노력이 이어졌다. 이러한 시카고 학파의 견해에 반해 현대 도시를 그러한 성격으로 단순화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LA학파의 반박으로 등장하였다. 포스트모더니즘도시는 경관에서 포스트모던 건축양식, 사회에서는 주거지분화, 경제에서는 노동시장과 소비의 양극화, 정치에서는 신자유주의와 기업가주의 지역정부 등이 연관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12. 관련 문서
[1] 접두사 post-는 '후기' 와 '탈(脫)' 의 어긋나는 두 뜻이 있지만 여기에서는 '탈(脫)' 의 뜻으로 쓰여 modernism을 근대주의로 번역하는 글에서는 이를 탈근대주의로 번역하기도 한다. 후기 모더니즘은 Late modernism이 가리킨다.[2] 이탈리아의 미래파 시인 필리포 토마소 마리네티가 1909년 쓴 <미래주의의 기초와 미래주의 선언>에서 주창한 "우리는 힘과 위험에 대한 사랑을 노래하겠다. 이 같은 사랑은 대담무쌍함의 습성이다. ... 우리는 세상에서 유일한 위생학인 전쟁과 군국주의, 애국심과 자유를 가져오는 이들의 파괴적 몸짓, 목숨을 바칠 가치가 있는 아름다운 이념, 그리고 여성에 대한 조롱을 찬미한다."로 요약되는 일련의 정서가 모더니티를 과격하게 정의한다고 할 수 있다.[3] '중심부에 의해 소외되어왔던 주변부의 반란'이라고도 표현한다. 이때 이성을 '로고스'라 표현하는데 이는 이성을 명분으로 그 이외의 모든 것을 깎아내리던 과거. 혹은 서구중심주의적인 합리와 이성을 기준으로 비서구지역의 것들을 야만으로 몰어세우고 자기 자신은 문명인인 척 행세하던 과거를 반성하는 의미도 있다. 그때의 그 '로고스'는 폭력적이었고 이를 부정하는 것이 오늘날의 철학 담론이다. 그런데 이 맥락을 전혀 모르고 "포스트모더니즘은 이성을 부정한다"고 선동했던 것이 조던 피터슨이다.[4] '언어적 전회' 이전에 니체와 같이 포스트모더니즘 담론과 일치하는 철학이 등장하긴 했다.[5] 초기 움베르토 에코도 사실 초기 저작인 <열린 예술작품>(1962)에서는 당시 대세였던 롤랑 바르트 기호학의 영향을 받은 후기구조주의적 입장에 가까웠다. 중기 이후에는 미국 기호학자인 C.S 퍼스의 이론을 흡수하면서 일종의 절충주의적 관점으로 바뀌었다.[6] 원래 아도르노, 호르크하이머 등의 독일 프랑크푸르트 학파에 의해 제시된 개념으로, 기존의 이데올로기나 패러다임에 의문을 제기한다는 점에서 포스트모더니즘과 비판이론은 기본적인 문제의식을 공유하는 측면이 있다. 프랑크푸르트 학파 최후의 거장인 위르겐 하버마스가 이른바 '성찰적 이성'을 통한 이성의 재건을 주장하면서 본격적으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7]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인 포디즘은 과잉공급, 수요의 다변화, 그리고 강성노조등으로 인한 생산성 향상없는 임금 상승 등으로 위기를 맞게 되었고 이를 타개하기 위해 다품종소량생산을 추구하는 유연적 생산체계인 포스트포디즘이 등장하였다.[8] 정신분석학의 기본 원리 중 하나는, 인간의 외적 행동이나 감정, 생각은 정신 내적인 요인에 의해 결정된다는 정신적 결정론(psychic determinism)이다. 즉, 완전히 자유로울 것이라 생각했던 인간의 사고, 사유가 잠재의식이라는 요인에 의해 필연적으로 영향을 받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9] 장 프랑수아 리오타르의 <포스트모던의 조건>(1979)에서는 이 부분에 특히 주목한다.[10] 이 부분은 포스트모더니즘 이전에 인식론의 거장이었던 모리스 메를로 퐁티(Maurice Merleau-Ponty 1908~1961)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11] 예를 들면 미셸 푸코를 포스트모더니스트의 범주에 넣을 것인가 후기구조주의자로 간주할 것인가를 두고도 이견이 많다. 푸코가 지식의 구성적 특징과 역사적 구조변동에 따른 상대적 측면에 관심을 가진 것은 사실이나 그가 어떤 이즘(~ism)으로서의 다원주의 담론을 구축한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들뢰즈의 리좀 개념이나 바르트의 텍스트의 유희적 해석처럼 명확하게 다원주의적 담론을 지지하고 있는 것과 달리 푸코의 통치성 개념은 권력의 미시적 작동원리에 대한 해석에 가깝다.[12] 1960년대 후반 프랑스에서 대두된 철학으로 합리성과 객관성을 비판하고 보편성을 설명하기 위한 과학적 원리도의 적용도 비판하고, 기호학과 언어학을 중심으로 재편성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론이다. 그런데 그 기호학과 언어학도 해체해서 새로 썼기 때문에 다 깐 케이스이다.[13] 파블로 피카소는 20살이 되기도 전에 고전 미술을 섭렵했고, 알베르트 아인슈타인은 대학 시절부터 물리학과 수학에 두각을 보였다. 무언가를 비판하거나 새로운 걸 만들어 내려면 일단 기본적인, 혹은 그보다 더 나아간 지식을 배경으로 깔고 있어야 가능하다.[14] 휘문고 맞은 편에 김재인 철학학원이라는 논술학원을 운영했던 바 있다.[15] 이진경, 고병권은 마르크스주의자들이었지만 지금은 마르크스주의자와는 거리가 멀다. 물론 어느정도 그 영향을 이어받고 재해석하였다고는 볼 수 있다. 이진경은 그 유명한 '사회구성체론과 사회과학방법론'의 저자.[16] 몇몇 발언은 좌파들에게 물의를 일으키고 있지만, 한국 스켑틱 3호(스켑틱 협회 편집부, 바다출판사, 2015.09)의 셔머와의 대화를 보면 셔머가 보기에도, 도킨스 스스로도 진보라고 보는 듯 하다. 특히, 이슬람에 관한 견해에서 다른 진보주의자들과 종종 충돌하는 듯.[17] 그리고 이러한 운동은 남성우월적 문화를 제거하는 장점도 있었지만 과거의 마르크스주의처럼 일종의 교의로 물화되고 그에 대한 비판이 허용되지 않음으로써 다시 하나의 폭력에 수렴되었다. 그럼에도 한 줌밖에 안 되는 운동권인지라 구 민주노동당 때까지만 해도 대충 묻어갔다 그러나 비슷하게 동상이몽이면서도 묻어갔던 NL우파들과 결별한 진보신당 이후부터는 페미니즘 같은 민권 운동 계열 서사에 대한 좌파 내부의 비판이 이루어지고 있으며 여전히 조심스러운 주제 중 주제이다.[18] 물론 포스트모더니즘이 아니라도 비판이론이라든지 다른 사상의 영향을 받았다고 해도 되긴 하지만, 2000년대까지 포스트모더니즘은 분명 유행이었다.[19] 최장집 전 교수의 영향을 받은 사람이 많다.[20] 예술을 이성보다도 감성과 관련이 크다고 두 요소 간의 우열을 가르는 것은 우리나라에서 두드러지는 편견이다. 예술은 학문 등 여타의 지성적 활동에 비해서는 분명히 감성적인 측면이 강하나 지극히 이성적인 활동이기도 하며, 파텐티르소스의 오류라 하여 예술가가 감성에 치중하여 균형을 잃어버리는 일을 지칭하는 용어도 있다. 또한 일반에서는 비이성성의 발로로 간주되기도 하는 현대적 추상미술 사조를 예로 들며 포스트모더니즘의 영향력을 강조하는 것도 어폐가 있는 것이, 추상미술의 시발점을 찍은 칸딘스키부터가 수학자였다. 치열한 사유를 통한 문제제기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이 현대미술이다. 각종 수식이나 이론으로 현상을 모델화하는데 치중하는 분석철학적 경향은 예술계에서 큰 호응을 얻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었다. 다만 미디어 아트의 경우처럼 점차 기술적, 방법론적으로 영향을 받고 있다.[21] 흔히 장 보드리야르의 시뮬라크르 이론에 대해서 '진실을 감추는 거짓 이미지로서의 현대 매체에 대한 비판' 이라고 오해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오히려 시뮬라크르 이론의 핵심은 '참된 진실VS거짓된 이미지' 의 구도 자체가 이미 하나의 이미지이며, 시뮬라크르를 벗어나는 참된 진실이란 것 자체가 시뮬라크르에 불과하다고 폭로하는 것이다. 시뮬라시옹 책 도입부에 있는 전도서의 인용구절인 '시뮬라크르란 결코 진실을 감추는 것이 아니다. 진실이야말로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숨긴다. 시뮬라크르는 참된 것이다'가 곧 시뮬라크르 이론의 핵심이다. 결국, 가짜 세계로서의 매트릭스와, 매트릭스를 벗어난 진짜 세계로서의 현실, 그리고 매트릭스를 깨부수기 위한 네오 일행의 투쟁을 담은 영화 '매트릭스'는 시뮬라크르 이론에 대한 흔한 오해를 기반으로 한, 오히려 시뮬라크르 이론과 정반대의 내용을 담고있는 영화이다.[22] 이 말을 한 로버트 벤츄리는 자신의 어머니를 위한 전원주택 Vanna Venturi House를 지었다. 그런데 이 주택은 1964년에 지어졌으나 다른 포스트모더니즘 건축물들에 비해 엄청 쓸 만하다. 이 주택을 기점으로 벤츄리는 포스트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건축가로서 활동을 개시한다.[23] 모더니즘은 차라리 공간은 잘 나오고 미스 반 데어 로에의 판스워스 하우스 같은 큰 결함이 있는 경우가 아니면 대부분 실용성 면에서 심각한 결함이 생기는건 드물었다. 워낙 단순하게 생겼고 이성을 중시했기에 아무거나 갖다붙이는 만행을 저지르지는 않았다. 그러나 해체주의 건축물들은 일단 신공법 등으로 어찌저찌 짓기는 지었는데 문제는 물이 샌다던가 죽는 공간이 지나치게 많이 발생하는 등 문제가 많았다. 포스트모더니즘이나 해체주의로 유명한 건축물에서 항상 일하는 경우(미술관 직원 등)는 정말 미칠 노릇이라는 반응이 대다수. 유리궁전은 사실 건설사와의 합작이니 쉴드를 쳐줄 여지는 있다.[24] 참고로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관만 아래로부터의 역사를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즉 아래로부터의 역사=포스트 모더니즘 사학으로 보기는 어렵다는 뜻. 오히려 이쪽에 대한 제대로 된 명칭은 미시사(↔거시사, 크게 보는 역사)에 가깝다. 미시사는 포스트 모더니즘 역사학의 주요한 분야이기는 하지만 전부는 아니다.[25]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게, 지식인들을 지금 시점에서 관찰해 보라. 공자도 맹자고 전부 옳은 소리만 한다. 예수님도 옳은 소리만 한다. 정치인들도 다 옳은 소리를 해서 표를 얻는다. 그 시절 도덕관념이 막장이었고 공자가 갑자기 내려와 배움의 기쁨을 설파한들 기록으로 남지도 않았을 것이고 사람들이 성인이라 부르며 몰려들지도 않았을 것이다.[26] 반면 당시 농민들은 자신들의 어려운 사정을 봉건제라는 말로 표현했는데, 공식적 역사학 개념에서 보자면 프랑스의 봉건제는 이미 끝장난지 오래였다. 이쪽은 자신들의 문제와 불만을 설명할 다른 용어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이전에는 이런 맥락을 무시하고 프랑스 혁명의 원인을 봉건제에서 찾는, 현재의 개념에서 보자면 바보짓을 한 것이다. 앙시앙 레짐(구체제)으로 설명한 서양쪽에서는 그나마 이것저것 다 포괄했지만, 프랑스 봉건제의 모순이라고 배운 대한민국 등의 경우에는...[27] 랑케의 수제자에서 일본의 쓰다를 거쳐서 이병도까지 이어진 문헌고증학류의 실증주의사학이 팽배했던 대한민국의 경우는 그야말로 직격타였다.[28] 역사는 텍스트로 기록되는데, 그 텍스트 자체가 과거 모든 것을 기록할 수 없기 때문에 근본적으로 불완전하다는 것이다. 계층적 문제점도 있지만, 텍스트는 작성된 시점에서 이미 사실과 차이가 있고, 그걸 해석하는 과정에서 한 번 더 틀어진다. 이 관점에서 보면 역사학은 '그림을 묘사한 말을 듣고 그려낸 새로 그려낸 그림이 이전의 그림과는 같은 그림일 수 없다'는 것만큼이나 자명하다. 여기에 그림을 묘사하는 사람의 언어적 능력, 배경이 포함된다면 더더욱 그렇다.[29] 오히려 이해를 제약하기 때문에 악이라고까지 이해된다.[30] 그래서 크로체 정도가 포스트모더니즘 역사학의 선구자로 꼽힌다.[31] 역사학자들이 그려내는 역사가 과거를 완벽하게 재현할 수 있다는 것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모든 사람이 인정할 수 있는 보편담론으로서의 역사학은 해체된다.[32] 역사학 해체하고 밥벌이 잃을 판인 기존 역사학자들은 물론이고 자기들끼리도 물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