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차모-키르케네스 공세 러시아어: Петсамо-Киркенесская операция 독일어: Petsamo-Kirkenes-Operation | ||
독소전쟁중 라플란드 전쟁의 일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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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 | ||
1944년 10월 7일 ~ 10월 29일 | ||
장소 | ||
북극 지역, 페차모 및 노르웨이 국가판무관부 북부 | ||
교전국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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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관 | ||
결과 | ||
소련의 승리 | ||
영향 | ||
독일이 북극 지역에서 축출 | ||
병력 | 병력 133,500명 전차 110대 포 2,100문 | 병력 56,000명 포 145문 |
피해 규모 | 사망자 또는 실종자 6,084명 부상자 15,149명 | 사상자 및 실종자 8,263명 |
1. 개요
페차모-키르케네스 공세는 독소전쟁중 카렐리야 전선군과 북해 함대가 핀란드 북부, 페차모 지역 및 노르웨이 북부에 주둔한 독일군을 대상으로 수행한 공세 작전이었다.2. 전투 서열
2.1. 소련군
- 제14군 ( 사령관 : 블라디미르 셰르바코프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31소총병군단
- 제99소총병대
- 제131소총병군단
- 피가레비치 군단
- 제126경소총병군단
- 제127경소총병군단
}}}
2.2. 독일군
- 제20산악군 ( 사령관 : 로타르 렌둘릭 )
{{{#!folding [ 펼치기 · 접기 ] - 제19산악군단
- 제2산악사단
- 제6산악사단
- 388척탄병연대
- 제210보병사단 (요새사단)
- 사단 그룹 반 데르 후프(연대 병력)
- 노르웨이 자전거 여단(연대 규모)
}}}
3. 배경
독일과 핀란드의 합동 공세인 은색 여우 작전이 실패하면서 소련-핀란드 간의 전선은 고착화 되었고 격전지에서 벗어난 지역이라는 점과 혹독한 자연환경은 군사작전을 실행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이후 라플란드 전쟁으로 핀란드가 추축국에서 이탈하여 독일과 적대하자 잔여세력들은 핀란드에서 대피해 노르웨이 북부로 후퇴했다. 독일은 이 지역에 상당한 병력을 주둔시켜 전략적으로 중요한 핀란드의 페차모 니켈 광산을 확보하고, 연합군의 상륙작전에 대비해 노르웨이 북부 해안을 방어하고자 했다.
1944년 6월부터 8월 사이 소련군이 성공적으로 수행한 비보르크-페트로자보츠크 공세 덕분에 카렐리야-핀란드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대부분이 해방되었고, 핀란드는 전쟁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전쟁 전의 소련 국경은 북부 극단을 제외하고 거의 회복되었는데, 그 지역, 즉 무르만스크 서쪽의 작은 지역에서는 독일군이 여전히 방어선을 유지하고 있었다. 이 지역은 독일에게 전략적 원자재의 공급지이자 얼지 않는 항구가 위치한 요충지로, 독일 해군이 연합군의 북방 해상 보급로에서 활발히 작전을 전개할 수 있도록 해주는 매우 중요한 지역이었다.
독일군은 제19산악엽병군단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며, 이 군단에는 3개의 산악사단과 4개의 여단, 총 약 53,000명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들은 지형이 험준한 지역에 종심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에 맞서는 소련 카렐리야 전선군은 군사령관 K. A. 메레츠코프의 지휘 하에 약 113,000명의 병력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제7항공군과 북해 함대의 선박 및 부대가 작전을 지원했다.
메레츠코프는 북극 작전 환경에 특화된 두 개의 특별 편성 부대, 즉 제126 및 제127 경군단도 지원받았다. 이들은 경보병과 스키 부대, 해군 보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또한 소련군은 공병대대 30개, 말과 순록을 이용한 운송부대, 미국이 공급한 수륙양용차량으로 구성된 2개 대대도 보유하고 있었다. 총 병력 133,500명, 포병 및 박격포 2,100문 외에도 소련군은 항공기 750대, 장갑 전투차량 110대를 집결시켜 장갑이 전무한 독일군에 비해 압도적인 전력을 구성했다.
소련군의 2개월간 준비작전은 독일군에도 감지되었다. 북극전 전체의 사령관이자 제20 산악군 지휘관이던 렌둘리치는 소련군의 공세가 임박했음을 인식하고, 공세 시작 전에 페차모를 10월 15일, 키르케네스를 11월 초에 포기하라고 명령했다.
4. 전개
10월 7일 아침, 포병 사격 이후 소련군의 공세가 시작되었다. 치밀한 사전 준비에도 불구하고 소련군의 공세는 초기부터 어려움을 겪었다. 악천후로 인해 포병 및 항공 지원의 조율이 어려워 공격이 지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격렬한 전투 끝에 소련군은 자파드나야 리차 강과 티토프카 강에 걸쳐 있는 독일 방어선을 돌파하였고, 독일군은 다리를 폭파한 뒤 후퇴하였다. 소련군은 이를 추격했고, 독일군의 퇴로를 차단하고 선도 부대를 포위하기 위해 여러 차례 상륙작전을 시도했다.10월 10일, 철수 중이던 독일 제163사단이 페차모 방어 강화를 위해 투입되었다. 10월 10일 밤에는 콜라 반도 본토와 미들 반도 사이에 위치한 작은 볼로코바야 만 남안에 상륙 부대가 침투하여 적의 측면과 후방을 타격하며 저항을 무너뜨렸고, 10월 13일, 소련군은 페차모 일대에서 독일군을 공격할 준비를 마쳤다. 제126군단 부대는 독일군의 유일한 탈출로에 도로 차단을 구축했으나, 10월 14일 데겐 장군의 제2산악사단이 이를 돌파해 렌둘리치의 병력 철수로를 확보했다. 10월 12일부터 14일 사이에 실시된 또 다른 전술 상륙 작전을 통해 리이나하마리 항구가 접수되었다. 10월 15일, 소련군은 페차모를 점령했으나 보급 문제로 인해 3일간 공세를 중단할 수밖에 없었다. 사흘 간의 격렬한 전투 끝에 주요 전선에서 적 방어선을 최대 16km 깊이까지 돌파하는 데 성공하였다. 남쪽으로 우회 기동한 소련군은 적을 포위할 위협을 가하며 철수를 강요했다.
이후 소련군은 독일군의 후퇴를 추격하며 여러 차례 독일 부대를 포위 및 차단하려 했으나, 자체적인 보급 부족과 독일군의 지연 작전으로 인해 일부 병력을 도로 복구 등에 투입해야 했다. 이로 인해 소련군은 결정적인 성과를 거두지 못했고, 독일군은 대부분의 병력을 보존한 채 철수에 성공했다. 독일군은 10월 25일 키르케네스를 포기했고, 소련군은 10월 27일 나우치(Nautsi), 10월 29일 나이덴(Neiden)을 점령한 뒤 남서부로의 추격을 종료하고 정찰 작전만 유지했다.
5. 결과
이 작전은 명백한 소련의 승리였지만, 스타프카가 의도했던 만큼 결정적인 승리는 아니었다. 제20산악군은 핀란드군을 상대로 한 비르케 철수 작전 때와 마찬가지로 주력 병력을 보존한 채 질서 있게 철수하는 데 성공했다. 독일군이 지역의 모든 도로망을 효율적으로 파괴한 탓에 소련군은 심각한 보급 문제를 겪었고, 특히 중화기 및 포병의 전방 투입이 제한되면서 장비 면에서도 불리했다. 도로는 시야상 확인 가능한 손상 외에도 매설된 지뢰로 인해 보급 속도가 급격히 떨어졌고, 이는 결정적 타격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6. 참고문헌
- James F. Gebhardt – The Petsamo-Kirkenes Operation: Soviet Breakthrough and Pursuit in the Arctic, October 1944
- Holtsmark, Sven G. 2021. “Improvised Liberation, October 1944: The Petsamo-Kirkenes Operation and the Red Army in Norway. Part I.”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4 (2): 271–302. doi:10.1080/13518046.2021.1990554.
- Holtsmark, Sven G. 2021. “Improvised Liberation, October 1944: The Petsamo-Kirkenes Operation and the Red Army in Norway. Part 2.” The Journal of Slavic Military Studies 34 (3): 426–58. doi:10.1080/13518046.2021.19927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