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 대전의 독일 해군 함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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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smarck 비스마르크 | Tirpitz 티르피츠 |
Die Schlachtschiffe der Bismarck-Klasse |
1. 개요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제2차 세계 대전때 등장한 나치 독일 해군의 고속전함이다. 중후한 디자인과 함께 특히 1번함 비스마르크의 활약과 최후가 매우 드라마틱하고 장렬한데다 2번함 티르피츠도 나름대로 존재감을 과시하다 최종병기급 항공폭탄의 공습으로 장렬하게 퇴장했기에 군사무기 매니아 사이에서 많은 사랑을 받았다. 등장 시점에 영국 해군의 자존심이라 불리던 순양전함 후드의 배수량을 뛰어넘어 미합중국 해군의 아이오와급 전함과 일본군 해군의 야마토급 전함의 등장 이전까지 세계 최대의 전함이라는 타이틀을 보유했으며 건조되었던 2척 모두 영국 해군의 신경을 많이 긁었던 전함이다.1번함인 비스마르크의 어원은 철혈재상으로도 유명했던 오토 폰 비스마르크에서 따왔으며 2번함인 티르피츠의 어원은 1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제국 해군 원수인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제독의 이름에서 따왔다. 두 함선 모두 기원이 된 인물들의 이름에서 성만 따왔다.
2. 제원
비스마르크급 전함 Schlachtschiff der Bismarck-Klasse | ||
<colbgcolor=#000> 이전급 | 샤른호르스트급 | |
다음급 | H급 (취소) | |
구분 | 비스마르크 | 티르피츠 |
표준배수량 | 41,700톤 | 42,900톤 |
만재배수량 | 50,300톤 | 52,600톤 |
전장 | 251m | |
전폭 | 36m | |
흘수 | 9.3m | |
출력 | 148,120SHP | 160,795SHP |
항속거리[1] | 15,788km | 16,430km |
최고 속력 | 30노트 (약 56km/h) | |
동력 | 바그너 보일러 12기 | |
증기 터빈 3기 | ||
승조원 | 장교 103명 + 수병 1,962명 | |
무장 | 2연장 38cm SK C/34 함포 4기 | |
2연장 15cm SK C/28 함포 6기 | ||
2연장 10.5cm SK C/33 함포 8기 | ||
2연장 3.7cm SK C/30 양용포 8기 | ||
2cm FlaK 30 대공포 20문 | ||
533mm 어뢰 발사관 8문[2] | ||
장갑 | 격벽: 220mm | |
측면: 320mm | ||
포탑: 360mm | ||
주갑판: 100 ~ 120mm | ||
함재기 | 아라도 Ar 196 수상기 4기 | |
함재기 시설 | 캐터펄트 1기 |
3. 동형함 목록
Bismarck 비스마르크 | Tirpitz 티르피츠 |
함명 | 기공 | 진수 | 취역 | 비고 |
비스마르크 (Bismarck) | 1936년 7월 1일 | 1939년 2월 14일 | 1940년 8월 24일 | 1941년 5월 27일 격침 |
티르피츠 (Tirpitz) | 1936년 11월 2일 | 1939년 4월 1일 | 1941년 2월 25일 | 1944년 11월 12일 격침 |
4. 계획 비화
제1차 세계 대전이 종결된 후 재무장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3년, 독일 국가해군의 처지는 매우 참담했다.한때, 영국 해군과 해군 군비경쟁을 하며 더 나아가 세계의 바다를 지배하겠다는 독일 제국 해군은 전쟁에 패배한 후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으로 인해 쓸만한 함선 대부분이 고철이 되었으며, 그나마 남은 함선도 베르사유 조약 때문에 승전국에게 배상함으로 빼앗기는 바람에 허용된 전력이라곤 구식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도이칠란트급 전함과 약간의 보조함 전력이 전부였기 때문이었다. 냉정하게 현실을 말하자면 자국 해역의 제해권도 보장못할 3류 해군의 처지였다.
하지만 이렇게 독일 해군의 발목을 잡아끌던 베르사유 조약은 점점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당시 베르사유 체제의 실질적인 주도국은 1차 대전에서 가장 큰 피해를 입었던 프랑스였지만 이에 협조하는 당사국중 하나인 영국이 손을 떼어버릴 경우 프랑스로서도 딱히 방법이 없었다.
게다가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참전한 각 국가들은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고 인구 자체가 부족했던 프랑스의 경우 그 타격이 심각하여 1 ~ 1.5세대 남성 인구가 상당히 줄어든 상태였고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20년이 경과한 시점에서도 그 후유증이 차마 회복이 되지 못한 상태였기에, 인구부족으로 인해 최소 30년간은 유럽에서 산업, 군사적으로 적극적으로 나서기 힘들다는 갑갑한 미래가 있었다.
그러던 와중 1927년, 베르사유 조약 감시단이 독일을 떠나자 1933년 집권한 아돌프 히틀러는 기존의 독일 정부가 예전부터 천천히 비밀리에 시행해서 이미 베르사유 조약에서 지정한 것 이상의 성과가 있었던 군비증강을 자신이 주도해서 더욱 적극적으로 진행했다. 이미 독일의 통제권 밖인 라인란트 지방에서도 군수품을 생산하고 유령회사를 만들어 잠수함 기술 등을 연구했지만 프랑스와 영국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 그 예로 1936년의 라인란트 지방을 주민투표로 점거하고 군대를 주둔시켰음에도 프랑스와 영국은 나치 독일이 자신의 앞마당에 걸어 들어간 것이라고 자위하며 별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불안감에 프랑스는 마지노선을 보수하고 영국은 독일을 공습할 계획을 승인했으나 네빌 체임벌린이 수상이 되면서 전부 무산되었다. 체임벌린은 폴란드 침공이 터지기 직전까지 히틀러가 전쟁을 일으키지 않을 것이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절호의 호기를 맞아 나치 독일 해군은 야심찬 건함계획을 세웠고 그 프로젝트의 결과물이 비스마르크급 전함이다.
5. 기술력 단절의 배경
비스마르크급 전함이 스펙 및 카탈로그에서의 강력한 모습과 달리 뭔가 나사가 하나 빠진듯한 모습을 보이는 이유는 10여년간의 기술력 단절과 함께 설계국이 쇠퇴했기 때문이다. 이후에 나오는 여러가지 문제점은 바로 이런 점을 참고해야 한다.예시5.1. 독일 제국 해군청 시절
제1차 세계 대전까지 독일 제국의 함선 설계를 담당했던 조직은 독일 제국 정부의 해군부인 제국 해군청(Reichsmarineamt)으로, RMA라는 약자로 불린다. 이 조직은 선진적인 연구체계를 갖추고 있었으며, 독일 대양함대를 영국 왕립해군에 대항할만한 성능으로 올려놓았다.- 알프레트 폰 티르피츠 원수가 직접 보호하고 큰 권한을 주는 RMA는 외부의 부당한 간섭을 대부분 차단가능했다. 설계의 향상을 위해 현장의 경험을 청취하기는 했으나 어디까지나 모든 설계 방향성은 RMA의 주도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 RMA가 목표로 삼을 주요 목적이 이미 분명하게 결정되어 있었다. 대영제국의 함대에 맞설 수 있는 함선을 설계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시간도 충분히 주어지고 다량의 건조를 통해 피드백도 RMA로 빠르게 들어온다.
- RMA 내부는 그냥 제복을 입은 민간인같은 조직으로, 내부 구성원은 모두 해당 분야의 전문가로써 서로를 존중했다. 그리고 실제적인 영향력은 계급의 차이가 아니라 성과의 차이로 결정되었다.
- RMA에 신규 설계자로 들어오려면 길고 험한 길을 거쳐야 했다. 일단 기본적으로 전문고등학교 졸업후 2년간 연습을 하는 것부터 시작해서 대학 졸업후 공학 석사학위를 취득해야 했고, 그 다음에는 독일 제국 해군에 입대해서 4년을 보내야 했는데, 그 중 1년은 장교 후보자 자격으로 직접 군함에 승선해 근무해야 했으며, 병역을 완수해도 IM 조선소에서 3년을 더 추가로 근무한 후 지금까지의 현장 경험으로 무엇을 얼마나 배웠는지를 알아보는 엄격한 시험을 통과해야 했다. 그리고 이 시험을 통과해도 그제서야 전체 과정의 중반에 진입한 정도라, 보조 기술자로 3년을 더 근무한 후에야 가장 중요한 시험을 통과할 자격이 주어졌다. 이 시험에는 6주간의 선박 설계 프로젝트가 포함되었으며 시험과목중 하나라도 떨어지면 그냥 완전 탈락이었다. 이 최종 테스트를 통과해야 비로소 견습 딱지를 떼고 정식 공무원이 되었고, 몇 년간의 기간을 지나서 경험이 풍부하면서도 혁신적이라는 평가가 나오면 그제서야 RMA에 설계자로 들어오라는 제안을 받을 수 있었다. 여기까지 도달하면 명함만 신규 설계자이고 실제로는 업계 중견급 설계자가 된다.
- 신규 설계자가 들어가는 설계팀은 경험이 풍부한 수석 설계자가 이끌고 경력 높고 실력 좋은 선배 설계자가 직접 신규 설계자를 가르치는 거대한 팀이었다. 여기서 군함을 설계할 때 따라야 할 기본 설계 이념을 배우고 이를 응용하게 된다.
- RMA 내부에는 설계팀이 몇 개 안되었기에 기본적으로 서로 보완해주는 관계였다. 이는 자연스럽게 쓸데없는 과잉한 경쟁은 피하며 팀의 성과가 개인의 성과보다 우선시되는 환경이 이루어졌다. 그렇다고 개인의 성과를 무시하는 것은 아니라서 개인의 성과가 팀의 성공에 영향을 주면 해당 개인은 더 발언권이 세지고 모두에게 인정받는 구조였다.
종합해보면 당시 시대의 한계성을 감안할 경우 그 당시 설계자에게 있어서는 꿈의 조직이나 마찬가지였다. 설령 설계자로 들어와서 눈에 번뜩이는 아이디어를 못내놓아도 팀 내에서 다른 성과를 내면 모두가 인정해주며, 만일 신입 설계자가 좋은 아이디어를 내서 그게 팀의 성공에 기여했다면 직급은 최하위라고 해도 영향력은 최상으로 올라갈 수 있다. 그리고 실무 경험과 현장 경험을 두루 갖춘 팀장과 선배들이 새로운 아이디어나 신기술에 대한 위험성을 평가하므로 당장 전쟁에서 쓸만한 신뢰성을 가지면서도 성능이 좋은 함선을 설계할 수 있었다.
다만 달리 살펴보자면 이는 일개 정부부서에 대한 정당한 제지가 거의 불가능했다는 말도 된다. 식민제국 건설에 대한 국민적 열망, 그리고 황제와 티르피츠 원수의 보호는 독일 제국 해군의 대대적인 확장과 해군청의 설계자들에게 날개를 달아 주었다. 그러나 이는 독일 국가적인 측면에 있어서는 막심한 재정적 출혈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건함 예산이 너무 막대한 나머지 재정 부채가 심각하게 누적되었고, 독일 제국의회는 해군청이 청구하는 영수증에 찍히는 금액이 나날이 증가하는 것에 항상 진절머리를 냈다. 독일 국가예산의 거의 40%가량이 해군에 쓰였을 정도였는데, 당연하게도 이는 정상적인 국가에서 볼 수 있는 수치가 전혀 아니었다. 결국 독일 사민당이 집권하며 해군 예산을 대폭 삭감했고, 곧 전쟁이 벌어지면서 해군청의 행복한 나날은 종말을 고한다.
5.2. 제국 멸망과 기술력 단절
이후 1차대전에서 독일 제국은 패배하였고 RMA는 해산되었으며 베르사유 조약이 체결되었다. 비록 설계기능을 완전히 포기할수는 없어서 독일군의 산하 조직으로 설계국이 들어갔지만 기존 인원의 80%가 날아갔다.설상가상으로 한스 폰 젝트같이 독일군의 재무장을 비밀리에 추진하던 국가방위군 수뇌부 역시 육군 살리기에 급급해서 해군까지 손댈 여유가 없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정치인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독일의 민주주의를 공공연히 위협하는 독일 군부와 마찰이 잦았다. 또한 해군에 대해서는 아예 존속가치가 없다고 보았다.
여기에 더해서 스캐퍼플로 독일 대양함대 자침 사건과 베르사유 조약을 거치며 전후 독일 수중에 남은 대형군함들은 도이칠란트급 전함같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 몇 척에 불과하였다. 이는 10여년의 기술력 단절로 이어진다.
5.3. 해군청의 재창설
아돌프 히틀러가 본격적으로 집권한 1933년부터 재무장을 본격적으로 추진하면서 함선설계국이 다시 필요해졌다. 하지만 전간기 때 Marineamt로 이름이 변경되고 MA로 약자까지 변경된 설계국은 이미 변질된지 오래였다.- 자율성 보장 없이 에리히 레더 같은 해군 총제독까지 수시로 말도 안되는 사양으로 압박을 넣는 동네북 처지로 전락했다.
- MA가 따라야 할 목적이 불분명했다. 8년 이내에 독일 해군이 전투준비가 되어있어야 한다는 소리는 그럴듯 하지만 목적의 주요 요소인 무엇을 위해 누구를 상대로 구체적으로 언제까지 준비를 해야하는지도 빠져있는데다가 해군이 쓸 구체적인 전략과 전술도 설계국에 제대로 소개가 안된 답없는 상태였다.
- 설계국의 존재가 함선 설계가 아니라 전간기에 극단적으로 감축된 독일군의 소중한 장교들에게 어떻게든 보직을 줘서 군대 안에서 보호할 목적으로 오용되면서 상층부에는 설계라고는 전혀 모르는 일선 장교가 배치되었다. 심지어 상당수는 대형 군함을 본 적도 없는 사람들이었고 아예 일부는 낚시배도 본적 없는 육군 소속도 더러 있었다. 이 때문에 군대의 안좋은 문화인 까라면 까 문화와 경직된 관료 체계 및 실력에 관계없이 무조건 계급이 모든 것에 우선되는 군대 막사식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 MA에 신규 설계자로 들어가려면 공학 석사 학위만 있으면 충분했다. 그나마 이건 양반인것이 아예 무자격자도 많았으며 설계국에 들어오기 전에 군함이라는 것을 본 적도 없는 답없는 인간들이 많았다. 군함을 어떻게 설계해야 하는지 기본개념도 못잡은 상태라는 것이다.
- MA 내부에서 경쟁을 장려하면서 하나의 프로젝트에 2개 이상의 설계팀이 피튀기는 경쟁을 해야 했으며 팀의 성공보다는 개인적인 성공이 더 중요해졌다. 결국 실전적이고 합리적인 설계보단 윗선에 눈에 띌 특이한 아이디어만 어떻게든 포장해서 내놓는 일이 남발했다.
- 1933년부터 급격하게 인원을 증대시켰지만 1935년 영국-독일 해군조약이 성립된 후부터는 MA는 성과를 당장 내놓으라는 급박한 압박에 시달렸다.
한마디로 말해서 설계에 있어서는 최악의 조직이 된 것이 MA였다. 무자격자나 초보가 MA에 들어가서는 군대의 악습이나 배우면서 계급이나 빨리 올리려고 하고 개인적 성공에만 매달리고 이를 교정해줄 상층부도 답없기는 매한가지라서 전혀 교정이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와중에 경쟁이 가속화되고 상부에서 빨리 성과내놓으라는 압박이 추가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냥 1차대전 때 쓰던 설계도를 카피하고 여기에 신요소로 검증되지 않는 기술이나 실전에는 쓸모없는 이상한 아이디어를 추가해서 신규 함선이라고 포장만 잘해서 내놓게 되는 답없는 결과가 나오게 된다. 결국 이런 문제는 실전에서 피박을 쓰게 되는 원인이 된다.
6. 건조 계획
1941년의 비스마르크급 전함 1번함 비스마르크 | 1944년의 비스마르크급 전함 2번함 티르피츠 |
비스마르크급 전함에 대해 논하기 전에,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만들고 운용한 독일 해군의 의중을 먼저 알아볼 필요가 있다.
베르사유 조약으로 독일 해군은 전함을 가질 수도 없었고 기술 연구를 위한 목업도 없이 그저 설계도를 구상하는 정도에 그첬다.
이후 영국-독일 해군조약으로 독일의 오랜 꿈인 전함보유가 인정되면서 라이히스마리네는 북해와 폴란드 해군, 프랑스 해군을 상대하는데 적합한 35,000t급 조약형 전함 설계안을 내놓았다. 이 설계안은 해역 폭이 좁고 해안포가 많은 북해 특성상 최대한 신뢰성과 방호력에 집중한 형태였고, 13인치 2연장 주포탑 4기와 14인치 측면장갑, 30kn의 고속성이 주된 특징이었다. 특이하게도 이 설계안은 중량 증가를 우려하여 프랑스 해군과 같이 4연장 주포탑을 채택하는 방안 또한 고려되었다.
그리고 1935년부터 독일 해군의 사령관은 에리히 레더 제독으로 바뀌었는데, 레더 역시 당시에 흔하디 흔했던 거함거포주의 신봉자였고 당시로는 독일 해군 내에서는 해상전의 최고 권위자였다. 이것까지는 아무런 문제점이 없는 것이 당시 항공모함이 무지막지하게 중요한 전력으로 급부상할 거라고 내다본 사람은 일본의 야마모토 이소로쿠와 미국의 체스터 니미츠 정도였고, 1960년대까지도 대구경 함포의 군함은 위협적인 존재로 남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임자들과는 달리 레더 제독은 '영국 해군은 식민지 유지를 위해 3대양에 순양함들을 한가득 배치해놓은 상태고 본국함대인 홈 플릿에는 속력이 느린 전함들 뿐이니 우리 독일 해군은 중순양함과 순양전함, 고속전함으로 이루어진 고속타격대를 편성해 선발대의 영국 해군 주력함을 한 두 척 잡고 주력부대를 고속으로 따돌린 뒤 통상파괴전을 실시해야 한다' 라는 의중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이런 레더의 의견을 들어본 아돌프 히틀러는 이 견해를 적극 채용하여 폴란드 해군과 프랑스 해군 뿐만 아니라 영국 해군에도 대응할 수 있는 수상함대 건설을 지시했다.
그리고 이런 분위기 속에 결정된 초창기 비스마르크급의 ROC(운용요구조건)는 프랑스 해군의 리슐리외급 전함이 등장하는 한편, 가상적군을 영국 해군까지 포함시키면서 ROC를 대폭 수정했다. 리슐리외급의 31kn에 맞춰 동등 혹은 이상의 속력이 필요했고, 영국 해군과 프랑스 해군을 상대할 수 있는 15인치급 포를 탑재하는 등 요구능력과 제약사항이 한층 더 늘어났다.
하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패전 후, 독일 해군은 이 모든 것을 조속한 시일 내에 3만 5천톤급 선체로 건조할 기술력은 없었다. 결국은 배수량을 대폭 늘린다는 무식하면서도 확실한 방법을 채택했고 대외에는 3만 5천톤이라고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4만톤급의 거함을 만들게 되었으며, 이로 인해 비스마르크급은 아이오와급 전함과 야마토급 전함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세계 최대의 전함이라는 비공식 타이틀을 얻었다.
비슷한 시간, 당시 영국과 미국은 군축조약 내에서 최대한 성능을 뽑아내기 위해 갖가지 전함을 개발한 것과 대조적이다. 한편 일본 제국 해군은 신형 전함을 건조할 수 없던데다가 일본이 나가토급 전함 2번함인 무츠를 살리겠다고 강력하게 주장하여 영국, 미국, 일본간의 조율이 이루어져서 일본은 무츠를 살렸고 영국과 미국은 16인치 주포를 장착한 전함 2척을 추가로 건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해서 영국은 넬슨급 전함 2척을 새로 건조하였고 미국은 콜로라도급 2척을 추가로 건조할 수 있었던 사태까지 발생하여 기존에 보유한 전함들인 공고급 순양전함, 후소급 전함, 이세급 전함, 나가토급 전함들을 개장하고 있었고 결국 조약을 탈퇴해서 만든게 야마토급 전함이다.
당시 각 열강의 해군은 과도한 건함경쟁을 억제하기 위해 군함의 배수량과 무장에 제한을 두기 위해 워싱턴 해군 군축조약과 런던 해군 군축조약을 체결했고 이 조약 내에서 최대한의 성능을 뽑아낼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위에서 서술했듯이 독일은 영국과 미국처럼 이 조약 내에서 성능을 뽑아낼 정도의 기술력은 가지고 있지 않았고 제한된 시간 내에 보수적인 설계로 원하는 성능을 뽑아내기 위해 배수량을 잡아늘려버렸다. 사실 크기가 커지면 요구되는 예산이 엄청나지는데, 히틀러의 입장에서는 의회 자체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모든 의원이 나치당원들로 채워져 있었고 수권법에 의해 예산에 관한 권한을 포함한 모든 권한이 내각에 양도된 상태였기에 사실상 있으나마나 한 구색 맞추기용 허수아비나 다름 없었기에 별 문제가 없었다. 덕분에 예산 문제는 미국과 영국에 비해 해결하기 쉬웠다.
이렇게 해서 불법적으로나마 넉넉한 배수량을 보유할 수 있게 되자 검증된 구식기술로도 성능 향상을 달성할 수준의 용적이 주어졌고 독일 기술진은 터틀백 형식의 선체방어구조와 구형 전함 바이에른급 전함의 3 샤프트식 설계를, 공격력 향상을 위해 비교적 경량의 고속탄을 선택했다. 알고보면 결국 2차대전형 전함이 아닌 1차대전형 전함인 것이다.
이에 비해 비스마르크가 상대한 HMS 후드 역시 장갑만 강화된 제1차 세계대전형 순양전함이었다. 전간기에는 전쟁혐오와 군축 분위기가 강해서, 엄청난 국력이 필요한 신형 전함 개발은 물론 기존 전함들의 개량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영국 해군도 후드가 시대에 뒤떨어진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하필 대공황의 여파로 돈이 없어서 개량 시기를 놓쳤다는 걸 생각하면 신규전함을 구형설계로 만드는 것의 무리함을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기본적인 배의 디자인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을 답습하고 있으나 배수량과 용적, 덩치가 커지고 11인치 3연장 주포 대신 빠른 장전속도와 포구초속을 가진 14.96인치 2연장 주포를 탑재했다. 또한 5.9인치 부포 및 4.1인치 대공포의 숫자도 증가되어 제1차 세계 대전 후 20년 만에 만들어진 독일 해군 전함치고는 그럭저럭 쓸만한 전함이 나왔다.
7. 장점
7.1. 속력
비스마르크의 속력은 동시대의 전함중 가장 뛰어난 수준이었다. 당시 비스마르크급을 추격할 수 있는 전함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됭케르크급 전함, 리슐리외급 전함 정도인데 됭케르크급은 화력도 떨어지는데다가 방어력이 상당히 부실한 편이고 샤른호르스트급은 같은 국가의 함선이니[3] 논외로 한다면 리슐리외급 정도이다.미국의 표준형 전함들은 21노트 전후의 느린 속력이었고 영국 또한 리벤지급 전함이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같은 구식전함이나 넬슨급 전함같이 공방능력은 우수하지만 속력은 느린 전함만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그나마 빠른편인 일본의 나가토급 전함도 다른 전함에 비해서 빠를뿐 비스마르크의 속력에는 한참 못 미쳤다.
물론 영국이 보유한 순양전함들은 추격이 가능하지만 장갑이 얇아 전면에서 포화를 주고 받기는 여러모로 무리이고 비스마르크의 공방에 문제가 많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전함은 전함인 만큼 상당히 위협적일 수 있는 것도 사실이었다. 물론 이건 비스마르크급까지 갈 필요도 없이 샤른호르스트급만 되도 충분한 수준이지만.[4]
그러나 동시대의 폭을 너무 적게 잡은 한계는 명확했다. 당장 몇 년도 지나지 않아서 출현한 아이오와급 전함에게는 오히려 속력에서 밀리며 뱅가드(전함)에게도 따라잡힌다. 세계대전이라는 게 1년에서 2년 하고 끝나는 전쟁도 아니고 이미 1차대전에서도 독일의 11인치급 주포를 가진 초기형 드레드노트급 전함들이 몇 년 차이도 나지 않는데 강력한 15인치급 주포를 가지며 당대에는 고속전함 취급 받던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과 정면충돌하는 사태가 발생했는데 동시대의 폭을 적게 잡는다고 이런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사실상 세계대전급 거대 전쟁에서 몇 년 차이란 동시대라는 소리나 마찬가지인 것이다.
그리고 이들 전함 이전에 출현한 킹 조지 5세급 전함이나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에게도 속도의 차이가 그렇게까지 크지는 않아서 군함 특성상 근거리 포격전을 중심으로 설계된 비스마르크급 전함이 유사시에 발을 빼서 후퇴하기가 곤란해진다. 원거리 포격전 중심의 전함이었다면 원거리에서 포격 좀 하다가 적의 주력부대가 나타나면 바로 후퇴해도 큰 문제가 아니지만 근거리 포격전 중이었다면 후퇴하다가 원거리 사격 맞고 속도가 느려져서 따라잡힌 후에 두들겨 맞게 된다.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1번함 샤른호르스트의 최후인 노스케이프 해전이 대표적인 사례다.
설상가상으로 이들 전함들이 비스마르크급 전함보다 늦게 나온 이유는 제2차 런던 해군 군축조약 덕분이다. 이미 이탈리아와 일본이 빠져나간 상황에서 영국이 군축조약으로 미국과 프랑스의 발목을 묶어서 결국 자살 및 팀킬급에 가까운 영향을 주었기 때문에 미국, 영국, 프랑스의 신예 주력함들이 기존 설계안 다 버리고 설계 변경을 하느라고 건조가 늦어진게 주 원인이었던 것이다. 만일 해당 조약이 없었으면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상대할만한 전함들이 일찍 등장했을 것이다.
나치 독일도 이 문제를 나름대로 고민 많이 했고 H급 전함에서 건조 중 취소된 H-39는 주포를 16인치로 교체하고 배수량과 장갑을 크게 늘려서 유사시에 두들겨 맞더라도 버티면서 16인치 주포의 화력을 사용해서 필사적으로 탈출할 확률을 늘렸으며 그 다음 계획인 H-40 계획들은 속도를 32.2노트로 늘리게 된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설계한 사람들도 현재 수준보다는 속력이 더 빨라져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고 대책도 세워놓은 것이다.
7.2. 주포의 명중률
그리고 관련 링크에 있는 글 작성자의 주장에 따르면.2차대전기에 독일이 비스마르크급 2번함 티르피츠로 포격 훈련을 한 기록을 보면 상당히 흥미로운 결과가 나오는데, 독일의 포격 훈련 실험 데이터가 포함된 독일의 전시 GKdos-100 파일에서 나온 정보에 따르면, 티르피츠의 포탄 분산도는 21km에서 112m의 분포를 보였다고 한다. 저 기록대로라면 티르피츠는 2차대전의 전함 중 가장 좁은 포탄 분산도를 가진 것으로 보인다. 그뿐만 아니라, 1940년대 동안 일본, 영국 또는 미국 전함이 21km에서 112m의 분산도를 보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일본, 영국 또는 미국의 전시 포격 훈련 기록이 없다고 한다. 여기에는 아이오와급 전함도 포함되어있다고 한다. 대개장 후 지상목표 포격에서 최고의 집탄을 자랑하던 웨스트버지니아도 포함되었는지는 불명.
티르피츠는 함생동안 여러 번 실사격 훈련을 했는데, 예를 들어 1941년 8월에는 기동하는 140m 길이의 전노급 전함 "HESSEN"을 표적으로 하여 발사했다. HESSEN은 무선으로 조종되는 표적 함선으로써, 본래는 브라운슈바이크급 전함 3번함 SMS 헤센이었다. 헤센은 전드레드노트급 전함임에도 불구하고 장갑이 좋았기에 스크랩되는 대신 표적함으로 개조된 함선이었다. HESSEN은 최대 21노트로 움직일 수 있었고, 포격 훈련 당시에는 사격 난이도를 더 어렵게 하기 위해 선회기동도 하고 있었다고 한다. HESSEN은 무선으로 속도를 바꾸고, 선회하고, 적극적으로 연막을 작동시킬 수 있었다고 한다.
흥미롭게도, 테스트 도중 25km (27,340야드)의 거리에서 티르피츠의 38cm 포탄은 HESSEN에 9발의 명중탄을 낸 것으로 기록되었는데, 25km 내에 있는 목표물에 9발 명중은, 1940년대 어떤 전함에서도 기록된 적이 없고, 자신이 아는 바로는 이 성능은 타국 전함들이 동일하거나 능가한 적이 없었다고 글 작성자가 주장했으며, 이 실험이 1941년 8월에 티르피츠의 기록이었기에, 후에 추가적인 업그레이드를 받은 티르피츠의 실제 포격 명중률은 좀 더 높았을 것이라는 추측도 있었다.
다만 티르피츠의 경우에는 실전에서 적함 상대로 포격을 한 적이 없고 유일한 실전 참가 기록이 포격 목표가 적함이 아니라 노르웨이 저항군이 점거한 섬이라서 저 기록이 실전에서도 그대로 나왔을지는 알 길이 없다는 것이 문제이다.
여기에 더해서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포탑은 2연장 주포탑치고는 매우 크고 포신 간격도 넓어서 포격시 포탄이 비행중에 서로 간섭을 일으켜서 탄도가 흐트러지는 것이 최소화되므로 거의 단장 주포탑에 버금가는 이점을 얻을 수 있어서 명중률이 높을 수 밖에 없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
8. 문제점
하지만 비스마르크급은 결론적으로 제1차 세계 대전형 설계를 가지고 있었기에 제2차 세계 대전에 본격적으로 내놓기에 만족스러운 전함은 아니었다.그나마 당시 동원할 수 있던 나치 독일 해군이 동원한 기술력과 자원들이 모여 만들어진 총아였으나, 사상이나 개념적으로 1년 늦게 건조된 미국과 영국 해군의 신형 전함들과 비교를 할 경우 "구식 전함" 이라는 점은 변하지 않았다. 물론 1차대전 시절에 비해 개선된 점도 있다. 속도는 명확히 빨라졌고 포곽식 부포 대신 부포탑을 도입했다. 그럼에도 문제점이 너무 많았다.
심지어 과거의 산물이자 바이에른급 전함의 후계함급인 L 20 α급 전함의 경우 비스마르크급보다 기초가 탄탄한 설계를 보여준다.
8.1. 화력
전반적으로 덩치에 비해 주포건 부포건 대공포건 영 신통치 않다는 게 문제였다.8.1.1. 주포
비스마르크에 탑재된 주포인 38 cm SK C/34은 380mm 52구경장 2연장 주포탑 4기로 구성되어 있다. 경량 고속탄이란 개념하에 크루프 사에서 개발했으며 보고서에 따르면 전함용 거포중에서는 가장 빠른 속사능력을 가진 주포라고 평가받았다. 크루프 사의 공식문서에서는 탄체와 장약을 장입하고 4도 고각까지 주포를 고정하는데 26초가 걸렸으며 숙련병들이 다룰 경우 분당 3발을 사격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동시기 타국 16인치 전함들이 분당 2발 수준이란 걸 감안하면 빠른 장전속도를 가졌다. 그러나 그러나 호이스트 설계의 문제와 독일 수병의 훈련도 때문에 실제로는 분당 2.3발의 사격속도를 발휘했다.그 외의 성능은 포신부앙각도가 -5.5도에서 +30도이며 포신부앙속도는 초당 6도이고 포탑선회속도는 초당 5도이며 +2.5도에서 장전하며 영거리 사격시 측면장갑 742mm를 관통하며 35,000m에서 갑판장갑 170mm를 관통한다. 일반적인 포격전이 벌어진다고 보는 20km ~ 30km 사이에서는 18km에서 측면장갑 419mm 와 갑판장갑 75mm를 관통하며 22km에서는 측면장갑 393mm와 갑판장갑 104mm를 관통한다. 27km에서는 측면장갑 304mm와 갑판장갑 126mm를 관통한다. 최대사정거리는 +30도에서 36,520m이며 포탄 적재량은 1문당 108발이다.
전함 주포의 파괴력은 운동 에너지에 크게 의존하며, 주포의 파괴력은 포탄 중량과 포구초속을 늘리면 된다. 그런데 비스마르크 주포탄의 무게는 800kg으로 885kg인 이탈리아 해군의 15인치 포탄이나 884kg의 프랑스의 15인치 포탄은 물론이고 영국 15인치의 879kg에 비해 가볍다. 포구초속은 820m/s이므로 영국 15인치 42구경장 Mark 1 함포의 804m/s(수퍼차지)와 비교하면 빠르다. 그러나 이탈리아 15인치 함포는 850m/s에 달하며 프랑스의 15인치도 830m/s라는걸 감안하면 타국 15인치보다 명확히 빠르다고 볼 수 없다. 게다가 포탄의 중량까지 가벼워서 장점이 없다.
가장 큰 문제로 비스마르크의 주포는 낙각이 크지 않은 저각 함포였기 때문에 갑판에 착탄시켜 적을 격파하기 어려웠다. 2만m 구역에서의 낙각은 16.4 ~ 23.8도 사이로 영국의 22.2도 ~ 29.9도와 비교할 시 2만m 이상의 구역에서는 갑판보다는 측면을 타격할 확률이 영국 함포보다 높았다.
포신의 내구력도 문제가 되었다. 크루프 사에선 이탈리아 15인치 주포처럼 좋은 성능을 얻는 대신 130발이라는 처참한 내구력을 가지는 건 지양했고, 결국 포신수명을 180발에서 210발 내외로 설계하였다. 이 수명은 영국 해군 15인치 포의 330발보다 짧지만 독일 해군의 요구를 충족시켰다.
그리고 여기서 감안해야 할 점이 있다. 이탈리아의 경우 지중해, 프랑스의 경우 도버 해협, 크게 봐도 베트남같은 일부 식민지가 아니면 작전범위가 극단적으로 좁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이탈리아 프랑스 두 국가 모두 일본, 미국, 영국에 비해 매우 높은 포구초속를 가진데 비해 포신의 수명이 매우 짧다는 단점이 있는데, 이를 본국의 보급으로 때운 것이다. 애초에 두 국가의 전함 설계 이념부터가 그랬다. 강력한 성능의 대가로 희생한 포신 수명은 전함이 모항에 복귀해서 정비에 들어갈 때 포신을 새 것으로 교체함으로써 해결한다는 것이다. 작전 반경이 넓었다면 적용할 수 없는 발상이다.
여기에 더해서 영국 해군의 16인치 포와 야마토의 18.1인치 포의 수명은 250발 정도이니 이들보다다는 수명이 조금 짧고 200발의 수명을 가진 프랑스 해군의 15인치보다는 수명이 약간 길다. 자국의 함포와 비교하자면, 헬골란트급, 카이저급, 쾨니히급에 쓰인 12인치 포의 수명은 200발로 비스마르크급의 주포보다 약간 수명이 짧고 바이에른급 전함의 15인치와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의 11인치의 수명은 300발이어서 수명이 더 길다. 샤른호르스트 쪽은 구경이 원체 작아서 포신수명이 긴 것도 있다는 것까지 감안하면 비스마르크급의 주포 수명은 큰 문제는 없는 편이다.
전략적으로는 다음과 같은 이유가 있었다.
1. 레더 제독은 영국 주력대의 집결 전에 기동력을 살려 통상파괴전을 실시할 것을 상정했다. 그런데 독일 해군은 대서양으로 나가기 위해 발트해와 북해를 거칠 것이므로 영국 해군이 경로를 예측하기 쉬웠다. 도버 해협은 영국의 홈 플릿이 막을 것이고, 독일 해군이 대서양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북해로 우회하는 루트 밖에 없다. 이렇게 지형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니 나가기 힘든 만큼 일단 나가면 무조건 밥값은 하고 와야 남는 장사라는 건 당연하다. 따라서 작전 수행시 수리 및 보수를 장기간 받지 못할 것을 상정하여 위력보다 신뢰성을 우선시했다.
2. 독일 해군의 홈그라운드인 북해는 항해하기 매우 가혹했으며, 근접 조우전이 다발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장전 속도를 빠르게 하는게 유리했다.
3. 독일 해군은 포탑을 3연장화 하면서 포탑의 수를 3개로 줄이는 것보다 2연장 주포탑 4개를 유지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포탑의 수가 많으면 포격을 통한 측정과 오차수정의 기회가 많아지므로 협차사격을 위한 제원을 더 빠르게 낼 수 있고 그러면 유효타를 내는 것이 더 빨라지므로 그것이 더 효율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3연장 주포탑 4개의 경우 밸런스 문제 때문에 포기하였다. 속도를 포기하든가 항속거리를 포기하든가 방어력을 포기하든가 어느 한 부분을 포기해야 하는데 포기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 때문에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당시 세계 최대급 전함에 걸맞지 않은 약한 화력을 가지고 있었다.
여기에 더해서 독일이 적으로 상정한 영국의 주력 전함은 퀸 엘리자베스급이나 리벤지급, 리나운급의 전함 내지는 순양전함들이었으니 그들을 상대로 한 비교에서는 마냥 약한 화력이라고는 할 수 없다. 넬슨급은 16인치였지만 속력으로 따돌릴 만했고, 수도 두 척으로 적었다. KGV급은 포가 2문 더 많았지만 구경이 비스마르크보다 1인치 작았으므로 일견 괜찮아 보인다.
하지만 영국 해군만을 상대로 생각한 것은 근시안적인 판단이다. 전쟁이 진행되면 미국이 참전할 것인데[5] 미국의 신(新) 전함 중에서 가장 약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만 하더라도 16인치 45구경장 MK.6 주포 9문에다가 초중량탄인 MK.8을 상대해야 하는데 속도도 27노트라서 유사시에 따돌리기가 곤란하다. 실제로 티르피츠 대책으로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이 대서양에서 대기하거나 아예 영국에 주둔한 사실이 있다.
그리고 포신 수명을 따지기에 앞서서 일단 살아남아야 한다. 말 그대로 적이 몰려들기 전에 한 두척 정도는 손쉽게 정리하고 튀어야 하는 것이다. 함급에 걸맞은 화력이 있는 것은 다 이유가 있다. 그래서 독일도 H급 전함에서 가장 초기형인 H-39부터 16인치 주포를 도입하고 이를 실제로 제작했다가 건조 계획이 엎어지면서 해안포로 사용한 것이다.
여기에 더해서 북해의 험난함이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했다. 북해라고 1년 내내 험악하지는 않으며 항공기 세력도 날뛰는 상황에서 근거리 포격전만 일어난다는 것도 넌센스고 실제로 샤른호르스트가 장거리 사격으로 치명타 먹고 당했다. 무엇보다 통상파괴전이 본격적으로 이루어지는 해역은 북해가 아니라 북대서양이고 북대서양은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해역이다. 북해를 독일보다 더 많이 접하는 영국이 전함들을 북해 특화용으로 건조하지 않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물론 신뢰성은 병기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다. 신뢰성은 보통 부품의 품질을 높여서 불량률을 낮추는 방식으로 챙기거나 성능을 한계까지 끌어내지 않고 여유를 두는 방식으로 챙기게 된다. 일반적으로는 두 방법 모두를 사용하지만 아무래도 어디에 더 중점을 두는지의 차이가 있다. 비스마르크급의 경우 후자에 더 중점을 뒀다고 볼 수 있는데, 성능에 여유를 두는 방식의 경우는 부족한 성능을 수량으로 충당하는 것이 정석이다. 이미 육군 병기나 해군 보조함 등에서 그러한 사례가 많이 보이며 해군 전함만을 본다면 킹 조지 5세급 전함 정도를 들 수 있겠다.
그러나 비스마르크급이 여기에 들 수 있을지를 생각해보면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다. 고작 2척이 전부기 때문이다. 독일 해군의 여건을 고려하면 추가적인 건조가 힘들 것이라는 점은 기정 사실이다. 그래서 성능을 생각해 해군 군축조약까지 어겨가면서 건조했겠지만 어설프게 신뢰성을 챙기려다가 이도저도 아닌 결과물이 나온 것이다. 당장 군축조약에 묶인 미국이나 영국의 경우는 배수량을 정해두고 그 안에서 성능을 정했지만 독일은 성능을 정하고 배수량을 끼워맞췄다. 기왕 조약을 어겨가며 배수량을 넉넉히 잡을 것이라면 성능을 높이는 편이 합리적이다.
이외에도 비스마르크는 14.96인치 2연장 주포를 선수, 선미에 각각 포탑 2기씩 총 8문을 운용하는 설계였는데 이미 타국에서는 16인치 이상의 주포를 3연장화해 3연장 3기씩 총 9문의 함포를 운용할 수 있었다. 당시 독일 해군은 14인치급 이상의 포탑을 3연장화하지 못했을 때 타국의 신형 전함들인 야마토급 전함, 리토리오급 전함, 사우스다코타급 전함, 아이오와급 전함, 넬슨급 전함들은 3연장 주포탑을 채택하여 비스마르크급에 비해 화력은 강화가 되면서 주포탑 하나를 없애서 주포탑에 할당되는 용적 및 무게를 절약할 수 있었고 부가적으로 위험한 피격구획인 주포탑 1기를 줄인 덕에 상대적으로도 피격에 안전했다. 그리고 주포탑을 줄이지 않는 선택을 한다면 3연장 주포탑을 4기 탑재해서 주포를 12문 탑재하는 것이 가능하므로 2연장 주포탑 4기를 탑재한 전함보다 총합화력이 50% 늘어난다. 따라서 이 분야에서도 비스마르크는 문제점을 노출할 수밖에 없었다.
물론 주포탑의 주포 수를 늘리는 것이 그냥 1문 더 설치하고 마는 것이 아님을 감안해야 한다. 포탑에 주포를 증설하게 되면 포탑이 커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일반적으로는 바벳도 덩달아 커진다. 당연히 배수량은 그만큼 더 늘어나게 된다. 일단 비스마르크급의 덩치를 생각하면 3연장 포탑도 들어가기는 했을 것이나 건조나 개수 난이도가 올라가는 것은 사실이다.[6]
그러나 이미 함체 크기만으로도 대략 4만6천톤급 배수량을 가진 후드와 비슷한 판국이라 이미 타국에게 조약 위반 사실을 모조리 들킨 후였다. 함체 크기는 원거리 항공사진 촬영만 당해도 자국에서 자국 함선 상대로 동일고도에서 촬영한 사진과 비교하면 쉽게 예측이 가능하며 이에 따른 배수량 예측도 수월하기 때문이다. 이에 비해서 주포 구경은 직접 탑승해서 측정하지 않는 한 원거리에서 촬영한 사진 정도로는 판별하기가 쉽지 않아서 2연장이건 3연장이건 간에 주포를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처럼 11인치급 소구경 썼다고 하는 식으로 속일 수도 있으며 야마토급 전함의 94식 40cm 45구경장 함포도 그런 식으로 실제 구경인 46cm을 전쟁 말기까지 미국이 알아채지 못하게 할 수 있었다. 애초부터 영국-독일 해군조약에서 영국이 독일을 제대로 감시하지 못했으며 이에 따라서 주포의 다연장화는 비스마르크급이 가능하면 꼭 해야 했던 사안이 맞다.
8.1.2. 부포와 대공포
그나마 주포는 나름대로의 이유도 있고 그럭저럭 쓸만은 했지만 부포와 대공포의 경우에는 성능 전반에 걸쳐서 평균내지 평균 이하 수준에 머무르는 한편 일부 중대한 결점을 지녔고, 그 중 대공포의 약점 때문에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는 훗날 침몰 당하게 된다.당장 당면한 적인 영국 해군이 5.25인치 대공/대수상 양용포를 도입했고, 이 함포는 상당한 고위력을 자랑하는 양용포였으나, 고각에 문제가 있었고 장전속도도 느린데다가 포탑 자체의 무게도 무거워서 말이 양용포지, 사실상의 대수상용 부포나 다름없었다. 이는 영국의 생각이 잘못된 것으로 대공방어는 항공기의 영역이었던데다가, 개전 당시 추축군의 항공세력의 기동력과 화력을 과소평가하고, 식민지 영연방군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한 탓이 크다.[7]
하지만 곧 잘못을 깨닫고 미국에게서 받은 VT신관을 적용하고 RP시스템을 이용하여 레이더와의 연동을 꾀했으며 뱅가드에 이르러서는 CRBF(단거리 무시야 사격)능력을 보유하여 262형 레이더의 통제 하에 모든 대공포문이 자동으로 조준되는 선진적인 시스템을 도입했다. 그리고 5.25인치 양용포가 실패로 돌아간 것을 깨닫고 4.5인치 구경의 양용포를 새로 개발해서 주력으로 썼다.
미 해군의 경우는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가 있다. 이 함포는 VT신관을 적용하여 강력한 화력과 뛰어난 대공 명중률, 분당 26발의 빠른 연사속도와 빠른 회전속도를 보유했으며 현재까지도 5인치 함포가 명맥을 유지하게 만든 원인이 된 명품 양용포다. 거기다 수색레이더와 조준레이더의 정보를 받아서 Mark 37 사격통제장치의 지휘 하에 무시무시한 예측사격능력까지 보유했다. 당장 필리핀 해 해전에서 보듯이 VT신관과 이 대공지휘 시스템의 연동으로 미 해군은 공포적인 대공능력을 발휘했다. 물론 이건 1944년의 이야기이고 VT신관의 도입도 1943년의 이야기이므로 공정한 비교는 아니기는 하지만 5인치 양용포 자체는 1934년부터 운용하기 시작한 물건이고 대공성능은 그 전부터 인정받았으므로 포 자체는 비교해볼 가치가 있다.[8]
하지만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수상용 부포와 대구경 대공포를 따로 장비했다. 이것까지는 다른 추축국 국가에 비해 떨어지는 발상은 아니었다. 당장 일본과 이탈리아는 활동 반경 내에서 항공기 지원을 받고, 자국의 구축함 세력의 주요 목적이 주력함의 호위가 아니거나 구축함 수량이 부족했다. 그래서 일본은 개함 전투력을 높이고, 이탈리아는 전함에 순양함 주포급의 대수상용 대구경 부포를 장비한 것이다. 독일도 비스마르크가 단독으로 항해하며 구축함 같은 함정과 맞서야 할 상황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수상함용 150mm 부포는 필수적인 요소로 생각했다.
그러나 독일의 경우는 다른 추축국과 상황이 전혀 달랐다. 아예 호위 세력이 없는 상황에서 사방에서 육상 비행장에서 날아오는 항공기 항속거리 안에 들어가므로 시작부터 공습을 처맞는데다가 영국은 항공모함까지 가지고 있으니 함재기까지 가세해서 공습에서 살아남는 난이도가 가장 높았기 때문이다. 적의 구축함 같은 걸 따지기에 앞서서 공습에 대비해서 모든 화기를 쏟아부어도 모자랄 판국이었던 것이다.
이 문제 때문에 공간은 물론 중량에서도 동시기 미국/영국 해군 전함과 비교해 많은 점이 불리했다. 당장 포탑 중량만 따져도 미국 전함과 비슷한 대공화력을 뿜어내기 위해 400톤 ~ 500톤을 더 소모해야 했고 그에 필요한 탄약고도 따로 장비해야 했기 때문에 용적/무게 분배 효율이 나쁜편이다. 또한 위에서 설명한 문제 외에도 사용하는 포탄들의 종류가 여러가지이기 때문에 보급 면에서도 불편할 수밖에 없는 구조이다.
그렇다고 부포가 성능이 좋은가 하면 그것도 아니었다. 부포인 15 cm/55 SK C/28은 2연장 포탑인데 포신부앙각도가 -10 / +40도에 불과하며 포신부앙속도도 초당 8도에 포탑선회속도도 초당 9도에 불과하며 포신수명이 1,100발인데 포구초속은 875m/s이며 연사속도까지 분당 6 ~ 8발 수준이기 때문에 대공사격용으로는 종합적으로 볼 때 사실상 무쓸모하며 심지어 근접하는 구축함을 상대하기에도 연사속도와 반응속도가 모두 딸렸기 때문이다. 심지어 포탄적재량까지도 1문당 105발에서 150발이라서 포탄 난사시 쉽게 탄약고가 비어버리므로 비스마르크 추격전에서 비스마르크가 근접하는 영국군 구축함을 포격으로 제대로 쫒아내지 못한게 다 이유가 있다.
10.5 cm/65 SK C/33 |
주력 대공포인 105mm 대공포의 경우 구체적으로 살펴 본다면 포신부앙각도는 -8도나 -10도에서 +80도이며 포신부앙속도가 초당 10 ~ 12도고 포탑회전속도는 초당 8 ~ 10도며 3축 안정방식이라 3축 안정각도는 -17도에서 +17도이며 3축 안정속도는 초당 5 ~ 10도이다. 분당 연사속도는 15발 ~ 18발이고 포신수명은 2,950발이며 사정거리는 45도 각도로 17,700m이고 대공사격시 +80도 각도로 12,500m까지 대공포탄을 날릴 수 있다. 포탄적재량은 1문당 400발이었으며 포구초속은 900m/s 였다.
일단 포와 탄도 자체는 105mm급으로는 딱히 나무랄데 없는 대공포였으나 날이 갈수록 빨라지는 항공기에 대응하기에는 한참 모자라는 포신부앙속도와 포탑회전속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미 해군의 5인치 38구경장 양용포 처럼 전기 모터 구동식이 아닌 유압 구동식이기 때문에 피탄을 당할 경우 화재가 발생할 확률도 높았다.
그러나 이것은 약과였다. 사진을 보면 알겠지만 포탑인데 포좌만도 못한 반쪽짜리 포탑이었다. 포탑의 하부만 존재하는 구조기 때문에 포미를 포함한 포신 전체 및 구조물이 아무런 방어조치 없이 노출되어 사소한 피탄이나 포탄 파편이 쏟아져도 동작정지 될 수 있으며, 심지어는 바닷물이 고스란히 들어오는 구조라 북해의 험한 파도로 인한 전기고장에 수시로 시달렸다고 한다.
3축 안정식 구조는 표적 획득 상태를 유지하는 것에 용이했으나 기술력 부족으로 신뢰성이 바닥을 기었으며, 구경 자체도 대함전에 사용하기에는 타격력이 모자란 105mm라 구축함 상대하기도 곤란해지는 통에 대체로 대공포로 사용했다.
종합적으로 따지자면 심지어 사람의 힘만으로 움직인다는 일본 제국 해군의 대공포에 비견되거나, 그보다 일부 뒤쳐지는 수준이었다. 일본의 주력 대공포인 89식 대공포는 최후기형이 포신부앙속도는 초당 16도, 포탑회전속도는 초당 16도를[9] 움직이는 반면에 비스마르크의 대공포는 포신부앙속도가 초당 10 ~ 12도며 포탑회전속도는 초당 8 ~ 10도로 일본 해군보다 못한 수준이다. 물론 분당 연사속도는 15발 ~ 18발로 "'스펙상"' 14발인[10] 일본 해군보다 1 ~ 4발 앞서기는 하지만 일본의 주력 대공포는 127mm이기 때문에 구경이 더 크고 무거운 포탄을 발사하므로 속사능력에서 더 뛰어나다고 보기도 어렵다. 사실 89식 대공포는 여러가지 심각한 문제점에도 불구하고 최우등까지는 아니더라도 추축군 입장에서는 그럭저럭 평균적인 성능을 가진 대구경 대공포라는 평가를 받고 있으며, 적어도 바닷물이 침투해서 고장난다던가 하는 기초적인 문제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일본 해군의 자랑거리인 98식 10cm 65구경장 함포와 비교하면 참담해지는데 구경이 비슷한 100mm임에도 불구하고 밀폐포탑인데다가 포신부앙각도가 -10도에서 +90도이고 포신부앙속도는 초당 16도, 포탑선회속도는 초당 11도에서 16도이며 분당 연사속도는 15발에서 21발이었다. 일본이 양산능력이 딸려서 169문밖에 못만들고 포구초속이 1,000m/s라 대공사격고도 13,000m를 얻는 대신 포신수명이 전함 주포 수준으로 매우 짧아서 대공사격전시 순식간에 포신 수명이 다할 수준인 350발에서 400발이라는 약점이 생기는 등 여러가지로 상당한 문제가 있었지만 추축군 해군이 운용했던 대공포 중에서 이것과 견줄만한 물건이 거의 없었다. 당연하게도 비스마르크급의 105mm 대공포에 대해서도 엄청난 우위를 가진다.
여기에 더해서 저렇게 결함많은 대구경 대공포를 유지하는 시간도 너무 길었다. 비스마르크는 1941년 5월 27일에 침몰해서 개선할 시간이 없다는 변명을 할 수 있지만 티르피츠는 1944년 11월 12일에 침몰했음으로 개선할 시간이 넘치는데도 불구하고 끝까지 해당 대공포를 철거하지 않고 그대로 유지했다. H급 전함의 마지막인 H-44까지 주력 대공포가 10.5 cm/65 SK C/33 인것을 생각하면 채용은 유지해놓고 계속 개량해볼 생각이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이 정도로 심각한 수준이면 포기하고 대안을 찾아야 하는데 그것도 못한 게 문제였다. 덤으로 해당 대구경 대공포의 개량도 지지부진했다.[11]
티르피츠가 침몰할 때까지의 시간이라면 나치 독일 육군의 12,8cm FlaK처럼 이미 실전에서 검증된 대공포를 해상용으로 도입 가능한 충분한 시간이기도 하다. 개조 편의성도 용이한 것이 애초에 12,8cm FlaK은 나치 독일 해군의 구축함용 함포인 12,8cm를 기반으로 개발한 것이기 때문에 개조하면서 부품이나 탄약의 호환성도 충분히 살릴 수 있다. 그리고 나치 독일 육군의 대공포들은 유사시에 지상목표를 상대로 사격하기 위해서 저각이나 부각(俯角)으로 포구를 내리는 것도 가능하고 포구를 내린 상태를 장시간 유지하면서 사격을 지속하는 것도 가능하며 전차같은 장갑을 가진 목표를 공격하기 위한 철갑탄도 있으므로 양용포로 근본적인 개조를 시행하는 것도 어렵지 않다. 급속하게 기술력이 올라가는 세계대전 당시 상황에서 3년이라는 긴 기간을 가진다면 나치 독일의 기술력을 감안할 경우 충분히 가능한 일이기도 하다.[12]
이미 육상용 대공포를 해상에서 실전운용한 경험도 충분했다. 영국 해협 돌파작전에서 대공화력 증강을 위해 샤른호르스트급 전함 2척과 아트미랄 히퍼급 중순양함 프린츠 오이겐의 상부구조물에 나치 독일 육군의 대공포를 임시 설치해서 실전에서 영국 공군과 전투해서 효과를 본 경험이 있는데도 불구하고 육상용 대공포를 해상용으로 개조해서 설치해보겠다는 노력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심지어 일본 제국과 U보트로 기술 교류를 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 제국에게 상응하는 대가를 지불하고 89식 12.7cm 40 구경장 함포나 98식 10cm 65구경장 함포의 설계도를 수입하거나 견본품을 입수한다라는 노력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 그리고 10.5 cm/65 SK C/33의 포신수명이 2,950발이라는 것을 생각해본다면 일본 제국의 대공포를 수입한 후 독일제 포신을 장착하고 주요 부품을 독일제로 교체하면서 세부 조정하는 기본적인 개조를 거치는 것만으로도 원본보다 뛰어난 능력을 발휘할 가능성이 높다.
거기다 대공포와 대수상용 포들을 따로따로 장비해야 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부포의 개수는 늘어났고 부포 탄약의 유폭에 따른 데미지 컨트롤 능력에도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부포탑의 방어력이 높지 않음을 고려하면 피탄시 중앙부 갑판에까지 화재가 번지고 유폭마저 일으킬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부포와 대구경 대공포의 이러한 문제점 때문에 실전에서 쓴 맛을 본 후에는 부포의 탄약 적재량 대다수를 대공사격용 시한신관도 달 수 있는 대공포탄 겸용 고폭탄으로 바꾸고 철갑탄은 소수만 보유했으며 대구경 대공포의 경우에는 철갑탄도 도입하여 제한적으로나마 대함공격용으로도 사용하도록 탄약배치와 종류를 바꾸었다. 여기에 더해서 주포와 부포에 일본의 3식 통상탄 비슷한 대공포탄을 개발해서 추가했으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워낙 포 자체의 기본 능력이 딸리니 답이 없었고 새로 도입한 대공포탄도 별로 성능이 안좋았다. [13]
부포와 대구경 대공포가 문제라면 소구경 대공포라도 좋아야 하는데 실제로는 설상가상이었다. 대구경 기관포로서 장비한 3.7 cm/83 SK C/30 2연장 대공포는 단발식이다. 운용인원만 쳐도 일본제 25mm 3연장 대공포보다 많은데다가 분당 30발이라는 처참한 발사속도를 지녀서 소드피시 같은 허접한 뇌격기조차도 격추시키기 힘들었는데다, 이게 여기저기 고슴도치처럼 많이 박혀있던 것도 아니고 고작 16문만 장비되었다. 설상가상으로 37mm 포는 함교나 함재기 격납고 같은 상부 구조물 옆에 설치되었으므로 현측으로 사격 가능한 포문은 실질적으로 8문이다.
이렇게 된 이유는 어이없게도 항공기 저격을 노린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포좌는 3축안정 방식이었고 포탄은 미넨게쇼스까지 도입해서 작약을 꽉 채워놓았다. 이래놓고 제대로 된 사격통제장치와 조준장치를 갖추지 않았고 포신부앙과 포좌선회를 모조리 수동으로 하기 때문에 실제 대공사격은 말 그대로 마탄의 사수급 포수가 있어야 제대로 가능했다. 물론 옆에서 광속의 속도로 장전해주는 장전수와 포신부앙과 포탑선회를 고속으로 시행하기 위해 수동핸들에 불이 나도록 미친듯이 돌리는 보조인원도 있어야 할 지경이다.
독일이 이럴 동안 미국의 조약형 전함인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에도 건조 당시 1.1인치 기관포가 16문이 있었다. 해당 기관포도 성능 면에서는 영 좋지 못했는데 작동불량이 잦았고 근접방어수단으로서는 그 크기와 무게 때문에 부적절했으며 그러면서도 기관총과 양용포 사이의 간극을 메꿔주기에는 위력과 사거리가 부족했다. 이 때문에 대부분 오리콘 20mm 기관포와 보포스 40mm 포로 신속하게 대체되었으며 대공화력의 부족을 빨리 지적받아서 수량도 대대적으로 늘린 것을 생각하면 대공사격에 대한 독일의 태도가 방만스럽기 그지없었음은 일목요연 하다.
결국 실전의 쓴맛을 본 이후에나 티르피츠는 개장을 거치며 2cm C/30기관포를 58문씩 도배를 했지만 2 cm/65 C/30의 성능은 96식 25mm 고각기총 수준이었다. 당장 20발 탄창으로 장전하는 방식 덕분에 카탈로그상 분당 280여발이 실전에서 120발 수준으로 떨어진 것도 똑같다. 그 외에도 일장일단이 있으나 전반적으로 도토리 키재기다. 설상가상으로 3.7 cm/83 SK C/30는 그대로 유지되었고 그보다 대구경의 대공무장은 일체 증설되지 않았다.
주포 항목에서도 언급했지만 북해의 험난함이 작전에 미치는 영향을 과대평가해서 북해의 날씨만 믿고 공습에 대한 생각도 제대로 못갖춘 것도 답이 없다. 당장 자기네들의 Bf 109, Fw 190, Ju 87, Ju 88같은 항공기를 보면서 적 항공기가 이들의 성능의 절반만 된다는 만용스런 생각을 가지더라도 공습에서 살아남기가 힘들겠다는 생각을 가질 수 있는데 이것도 못한 것이다.
이게 왜 문제가 되는 가 하면 PQ-17 호송선단의 경우만 봐도 충분히 알 수 있는데 북극해에 가까운 노르웨이 지역에서 악천후가 펼쳐졌음에도 독일 공군은 성공적으로 공습을 수행하여 호송선단에 궤멸적인 피해를 입힌 바 있다. 그 외에도 대서양 전투나 몰타 항공전을 보기만 해도 알 수 있듯이 독일군의 전투기가 제공권을 빼앗고 급강하폭격기와 뇌격기가 영국 해군에게 상당한 타격을 주고 있는 상황인데 양용포와 대공화기로 군함을 도배하고 항공모함의 함재기까지 상공엄호기로 동원한 영국 해군도 곤란을 겪는 것이 눈에 뻔하게 보이는데도 북해의 날씨는 험난하다는 식의 핑계거리나 대면서 대공화기를 저런 쓰레기급으로 달아주고 개선도 없는 것 자체가 아무런 생각이 없는 것이다.
실제로도 이런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 해군의 연습전에서 자국의 공군이나 해군 항공대가 참가하여 자국의 해군을 공습하는 일이 자주 벌어지며 특히 미국 해군이 해당 분야에서 선두를 달려서 연습전시마다 각종 문제점을 발견해서 보고서를 올리고 자국의 함재기를 계속 개량 및 개발했다. 그러므로 자국의 항공력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거나 항공력을 경시하는 것 자체가 요식행위 수준의 함대공습 훈련도 안해봤거나 하더라도 일부러 편견을 가지고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중 하나이므로 답이 없다고 보면 된다.
그래서 나치 독일 해군의 문제점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뽑히는 문제점이자 이론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이 대공화기의 부실함이며 개선의 미흡함과 대안이 있는데도 채택하지 않는 등의 대삽질이 항상 언급되는 것이다.
그와중에 일부 순양함이나 구축함에는 4cm Flak 28, 즉 독일제 보포스 40mm 포를 달곤 했다. 사실 이것도 처음부터 단 것이 아니라 나중에 대공화력 부족 문제를 인식하고 증설한 것이다. 설상가상으로 그 전에는 노획한 타국의 보포스 기관포를 철광석 대금 대신 스웨덴에 억지로 넘기다가 스웨덴이 거부한 후에나 멈추었다는 흑역사도 있다.
그런데 사실 독일 육군이나 독일 공군이 쓰는 육상 대공포로는 3,7cm Flak 37 같이 좋은 발사속도(분당 150발)가 나오는 40mm급 대공기관포 및 8,8cm FlaK 같은 훌륭한 대공포가 충분히 있었다. 왜 이런 좋은 대공포를 해군에 도입하지 않고 쓰레기같은 SK C/30을 고집했는지는 의문이다. 독일 해군도 5.5 cm/77 Gerät 58같은 대체품을 개발하고 있었으나 1944년에 설계를 시작한 후 패전까지 프로토타입 1문만 만들고 끝났다.[14]
만약에 비스마르크가 이후까지 살아남아 개장을 거칠 기회가 있었더라면 적어도 티르피츠 수준으로 대공 무장이 증설되는 것을 기대할 수 있었을지는 몰라도 1943년 ~ 1944년 시점에서도 티르피츠의 대공능력은 여전히 좋다고 말해주긴 애매한 만큼 근본적인 문제가 해결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결국 1944년 11월 12일에 벌어진 캐테시즘 작전(Operation Catechism)에서 티르피츠는 주포와 대공포등 가용한 화기를 총동원해서 대공사격을 했으나 아브로 랭커스터처럼 기본적으로 크고 둔중한 4발 중폭격기가 톨보이같이 5톤이나 되는 무겁고 큰 폭탄을 적재해서 속도 및 회피력이 추가로 크게 하향된 폭격기들이 공습하는 것도 막지 못하고 2발의 직격탄과 4발의 지근탄을 얻어맞고 전복되며 침몰한다. 이미 그 전의 공습에서도 악천후 상황이거나 호위기가 있어야만 대공방어가 성공했고 그렇지 않다면 직격탄이나 지근탄이 나와서 티르피츠에 피해가 나왔다는 것을 감안해본다면 이미 예견된 재앙이었다.
그나마 위안거리를 찾자면, 프랑스 해군의 리슐리외급 전함도 비스마르크급 전함에 비해 나을 것이 없는 빈약한 대공무장을 갖추고 있었다. 그러나 이건 건조 중 프랑스 침공으로 완성이 안된 탓이 크며 자유 프랑스 소속이 된 후에는 미국의 도움을 받아서 대공화기를 미친듯이 증설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급 전함이 동시기에 건조된 전함 중 최하위급의 대공무장을 갖추고 있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8.1.3. 사격통제장치
숨겨진 사실이지만 사격통제장치쪽에 상당한 문제점이 있었다.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일 해군은 우수한 광학측거의로 높은 포격정밀도를 자랑했다. 독일은 과거부터 전통적인 광학측정기기 제작 강자였다. 당장 현대에도 광학기기 분야에서는 최상급으로 꼽히는 칼 자이스가 어느 나라 회사인지를 생각해 보면 편하다. 그러나 급격한 해군력 증강과 드레드노트급 전함이라는 패러다임을 자력으로 추격하는 상황에서 광학측거의는 선두를 달렸으나 사격방위반 등의 사격 시스템 개선은 상대국 영국에 뒤쳐져 있었다.
영국의 경우 제1차 세계 대전부터 독일보다 뒤쳐진 광학측거의 기술을 따라잡기보다는 사격통제장치인 사격방위반의 개발로 선회하였고 타이거급 순양전함에 탑재된 사격방위반 시스템은 기존의 인력계산에 의존하던 방식에서 자동으로 사격제원이 송출되는 방식으로 바뀌었고 따라서 영국 해군은 독일 해군보다 월등히 빠른 속도로 사격제원을 송출할 수 있었으며 이러한 통합된 사격제원을 각 함포의 관제장교에게 넘겨 목표로 설정한 타겟에 대해 함이 보유한 전체 화력을 통합적으로, 신속하게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런 균일한 트리거 타이밍으로 인해 영국 전함의 전체 포문은 발포간격이 동일함은 물론 동일 사격제원이기 때문에 탄착확인이 훨씬 간단했다. 이러한 이유로 탄착수정이 훨씬 정확했고 개별 전함의 화력은 더욱 효과적으로 발휘되기 쉬웠다.
물론 독일 제국 해군 역시 사격방위반 개발을 시도했지만 실전배치 전에 패전했고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인해 사격방위반 개발 지속은 불가능해졌다. 이후 가까스로 전간기에 부활한 나치 독일 해군은 오랜 기술 단절의 여파로 여전히 이 사격방위반을 개발하지 못해 화력통제 시스템에서 적국인 영국에게 뒤쳐져 있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했으며 결국 비스마르크급 전함에까지 와서도 이 문제는 해결되지 못했다. 이 부분은 일본과 비교해도 뒤떨어지는데, 일본은 연합국 것보다는 계산속도가 떨어지고 자동화가 덜 되기는 했지만 독일처럼 20년 가까이 기술단절이 벌어지는 사태는 없었기 때문에 정확도는 꽤 높은 사격방위반 시스템을 갖추고 있었다. 차라리 일본으로부터 기술을 도입하는 것이 독일로써는 나은 선택이었을 것이다. 결국 사격제원 계산에 실패해서 짝포가 나거나 일부 포문은 아예 아무것도 안하고 놀고 있는등 많은 문제를 도출했다.
설상가상으로 충격에도 약해서 비스마르크의 레이더와 사격통제장치는 자신의 주포가 처음으로 포격을 시작했을 때 고장이 나버렸고 침몰 직전때까지 제대로 수리되지 못했다.
애초에 이건 이론상 최강만 고집한 결과물이었다. 그 결과 지나치게 복잡하고 무거우며 민감한 사격통제장치가 탄생했으며 포를 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해지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는 1939년 가을에 3만미터에 달하는 쓸데없는 전선과 부속물을 제거한 개량형이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에 장착되었고 비스마르크급 전함에는 애초부터 개량형이 탑재되었지만 실전에 쓸만한 신뢰성과 내구성은 아직 부족했던 결과였다.
물론 어찌되었거나 비스마르크가 후드를 일격에 잡긴 했다. 그 이유는 후드 자체가 워낙 강력한 함선이라 일선에서 빼내어 현대화 개장작업에 착수하지 못했던 점도 있었으며 후드는 비스마르크가 최신예 전함답게 대응방어가 된 고속전함인 것으로 착각하고 근접격투를 노리고 급속으로 접근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비스마르크가 포탄을 명중시키기 편했던 것을 감안해야 한다.
그나마 주포나 부포쪽 사격통제장치는 양호한 편이었다. 대공사격용 사격통제장치는 말 그대로 재앙이었다. 수량도 부족한게 성능은 최악이었고 중량은 무거웠으며 유지보수도 곤란했다. 심지어 이걸 만든 회사에서도 2만명의 임직원중 이 장치를 유지보수하거나 능숙하게 사용가능한 사람이 고작 12명이었다. 이렇게 실험실에서 프로토타입으로 만들어져도 욕먹을 물건이 납품되었으니 그걸 다를 수병들의 입장이 어떠하였는지는 이하 생략.
이렇게 된 가장 중요한 이유중 하나는 기술력도 없으면서 3축 안정화를 도입하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독일의 수준으로는 2축 안정화부터 시작하고 피드백을 받아서 개선하는 것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영국만 보고 이론상 최강에만 매달려서 3축 안정화를 바로 도입했으니 답이 안나오는 것이다.
레이더는 일본과 소련을 빼면 개전 초기 기준으로 독일, 미국, 영국이라는 3국이 모두 비슷한 기술 수준이었지만 전간기 동안 해군에 손을 놓은 대가는 매우 컸다. 그나마 아예 레이더를 달지 않은 일본보다는 나았으나, 독일 해군의 레이더는 사격통제장치와 마찬가지로 충격에 약하고 성능향상이 미흡했다고 평가받는다.
8.2. 방어력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장갑구조 |
한때 말이 굉장히 많았던 요소이다.
장갑재의 수준은 당대 세계최고 수준을 자랑했다. 하지만 상부의 급작스런 요구성능 변경과 촉박한 시간 때문에 비스마르크를 포함한 독일 전함은 방어 효율성이 매우 낮았다.
비스마르크의 방어구조는 1차대전때의 터틀백 장갑 구조 + 다층 방어구조를 갖추고 있다. 이 방어구조는 10도 내외의 낙각을 가지는 즉, 저각으로 날아오는 포탄을 막아내는 데에는 상당히 유리한 구조지만, 15도 이상까지 올라가는 낙각을 가지는 포탄을 방어하기에는 무리가 많은 구조이다. 영국 해군의 15인치포가 2만m에서 22.2도 이상의 낙각을 가지고 있으며 미 해군의 16인치 초중량탄은 같은 거리에서 25도를 자랑한다.
측면장갑은 320mm로 되려 350mm급인 샤른호스트급 전함보다 약하며, 하부 주장갑은 320mm, 상부 주장갑은 145mm 장갑이다. 미국의 디모인급 중순양함의 측면장갑이 152mm라는 것을 생각한다면 상당히 모자라 보인다.
더군다나 320mm 측면장갑의 절반은 물 속에 잠겨 있는 구조이다. 측면장갑의 가장 두꺼운 부분은 가급적 수면 위로 최대한 올라와야 하며 수면과 닿는 부분은 최하단부의 일부 정도며 이 지점은 벌지가 붙는 지지점이 된다. 그런데 주장갑이 절반이나 수면 아래에 있으니 수면 위에서 측면 주장갑이 방호하는 면적이 크게 줄어들고 높이도 크게 낮아져서 적의 주포탄을 막기 위해 설치한 장갑이 무용지물이 된 셈이다. 성벽으로 비유하자면 주요 성벽 높이가 갑자기 절반이 된 것이나 마찬가지다. 이 때문에 포격전이 벌어지면 날아오는 포탄의 상당수가 측면 주장갑 위로 통과해서 얇은 상부 측면장갑을 관통한다는 이야기다. 전형적인 과적에 따른 문제점이 터진 것이다.
의외지만 이 구조 덕분에 어뢰방어에 대비한 구조가 부실했음에도 어뢰공격을 버틸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원래 측면장갑은 어뢰 방어책의 주력이 아니라 보조를 해야 하는 것이고 이렇게 되면 측면장갑에 금이 가서 침수가 더 빨라지는 문제점까지 있다. 수중탄을 대비한 것일 수도 있으나, 그런 이유라면 아래로 갈수록 두께가 서서히 얇아지도록 만들면 방어력에 영향을 주지 않는 선에서 배수량 절감이 가능했을 것이다. 덤으로 벌지도 측면장갑 앞에다가 많이 깔아두어야 한다.
따라서 145mm 장갑 부위에 착탄시엔 30mm 내부장갑과 2단식 장갑, 220mm 포탑 바벳장갑만이 남게 된다. 비슷한 방어구조를 가진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에서 이와 같은 상황이 실제로 발생했다. 샤른호르스트가 듀크 오브 요크에게 피격당했을 당시, 포탄이 상부측면장갑과 2층 갑판장갑을 뚫고 보일러실을 타격했는데, 이는 샤른호르스트가 도망치지 못하고 침몰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샤른호르스트급 전함에서도 문제가 되는 사안인데 그보다 더 큰 기준배수량 42,000t급 전함이 이런 부실한 방어력을 발휘한다면 당연히 문제가 된다. 또한 구형 터틀백 구조를 채택하였으므로 방어효율도 나쁘다.
함급 | 비스마르크급 전함 | 뱅가드급 전함 |
총배수량 | 53,500t | 52,250t |
장갑중량 | 17,450t | 15,000t |
측면장갑 | 320mm | 356mm |
갑판장갑 | 80 + 50mm | 152mm |
배수량 대비 장갑비율 | 32.6% | 28.7% |
표로 비교해보면 이러한 사실은 더욱 명확히 드러나는데, 뱅가드급 전함은 비스마르크보다 장갑을 덜 둘렀음에도 실제 방어력은 훨씬 높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바벳 앞부분에도 측면장갑을 할당시키는 등 과방어로 인해 중량과 용적 낭비도 심한편이었다. 반면 신형 전함의 방어구조는 중요한 부분에만 장갑을 올인한다는 집중방어이론를 한층 더 개선하여 실제 방어력을 증가시키고 중량과 용적 낭비를 억제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러한 점이 미흡한 전함이었다.
갑판장갑 또한 방어력이 약했다. 갑판장갑은 50mm + 80mm로 이중식이며 총합 130mm의 다층방식인데 이는 미국의 표준형 전함들과 동등 이하이며 신형 전함의 152mm+급보다 명백히 약하다. 킹 조지 5세급 전함은 갑판장갑이 6인치였고, 사우스다코타급과 아이오와급의 경우 6인치급 갑판장갑과 추가적인 피해감소를 위한 스플린터 덱이 있었다. 일본의 경우 나가토급은 건조 시기의 한계로 인해 다층방식이긴 하나 70mm + 127mm로 총합이 197mm에 달하였고 이렇게 된 이유도 1차대전 때 설계된 탓에 비스마르크처럼 터틀백 + 다층 방어구조를 갖추고 있어서 애초에 구시대에 설계되어 구식 방어구조를 갖춘 것이며, 최초부터 70 + 75mm라 만만치 않았는데도 일본은 갑판 방어력에 문제가 있음을 인지하고 갑판장갑을 강화했다. 훗날 야마토급 전함 설계시에는 신식 방어구조를 완벽히 구현해서 야마토급의 갑판장갑은 200 - 226mm (7.87 - 8.9인치)였다. 터틀백 구조를 채용한 프랑스 해군의 리슐리외급은 집중방어 이론에 맞추어 최적화를 실시, 실제 갑판 방어력은 주장갑 150mm + 스플린터 덱 40mm로 터틀백 구조 답지 않게 우수한 성능을 자랑했다. 즉, 비스마르크급은 타국보다 갑판 방어력이 매우 떨어졌다.
이뿐만 아니라 다층방어 시스템의 특성상, 포탄을 내부에서 막아내는 체계이기 때문에 함선에 상당한 무리를 줄 수 있었다. 내부탄편장갑이 강하더라도 일단 내부로 포탄이 들어와서 작렬하는 것 자체가 큰 문제인 것이다. 신형전함일수록 밖에서 포탄을 막으려는게 다 이유가 있다.
주포탑의 장갑도 좋다고 볼 수 없었다. 근접 저각 포격전을 상정하고 만든 전함임에도 불구하고 가장 중요한 포탑 바벳장갑의 두께는 220mm다. 물론 주장갑 위로 솟아오른 2,3번 바벳의 특정부위는 340mm이나.. 약간 뒤늦은 시기에 등장한 노스캐롤라이나조차도 최소 292mm, 주장갑 밖으로 튀어나온 장갑은 374mm이다. 더군다나 노스캐롤라이나급은 측면장갑만 15도의 경사를 가지는 12.75인치 경사장갑인지라 측면장갑 + 바벳까지 다 합쳐도 넘사벽이다. 여기서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노스캐롤라이나급은 14인치 대응방어를 상정한 방어력을 갖추었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14인치 대응방어를 상정한 전함보다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방어력이 더 약하다는 것이다.
덤으로 주포탑에 경사장갑을 잘못 적용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타국 전함은 측면장갑과 상면장갑이 약 90도로 연결되므로 측면 착탄시엔 측면장갑으로, 수직 착탄시엔 천장장갑으로 막지만, 독일은 측면장갑 위에 45도 각도의 경사장갑이 있고, 이 장갑 다음에 상면장갑이 있는 구조다. 따라서 측면 착탄시 50%가 상부 경사장갑에 명중한다. 문제는 아무리 경사장갑이라도 일부 측면은 150mm였으므로 경사장갑을 사용해도 전함의 주포탄을 방호할 수 없다. 설상가상으로 전면장갑 상부의 상부 경사장갑은 180mm라서 조금만 낙각이 올라가면 방호를 보장할 수 없다. 포탄이 갑판에 착탄할 수준의 높은 각도로 포탑을 타격한다면 포탑 경사장갑의 경사각이 상쇄되기 때문에 수직장갑으로 막는것이나 다름없게 된다. 결국 주포탑 설계가 미흡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문제는 실전 당시 1,2번 주포탑인 안톤, 브루노가 영국의 넬슨급 전함 2번함 로드니가 쏜 16인치 주포 일제사격 1번에 침묵해버리는 문제를 터뜨리고 말았다. 전함의 일제사격이 말과는 달리 실제로는 목표에 1 - 2발 맞으면 다행이라는 점을 감안하고, 비스마르크급의 주포가 2연장 주포탑 4기로 총 8문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포탄 1 - 2발 명중으로 화력이 절반으로 떨어진 셈이다. [15]덕분에 적의 일제사격을 맞기 전에 애써서 적들의 전함을 먼저 협차했는데도 불구하고 명중탄을 내지 못했다. 결국 영국 함대가 비스마르크의 주포가 침묵하자 초근접거리로 접근, 포탄과 어뢰까지 발사하는 상황이 일어났다.
비스마르크 추격전 당시 비스마르크가 킹 조지 5세와 로드니의 집중포격을 받고도 침몰하지 않고 버틴 것은, 근거리에서 포격을 당했기에 원거리 포격이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근거리 포격전이 벌어졌기 때문에 위에서 언급된 근접전 특화 구조가 설계자가 의도한대로 작동한 것이다. 만약 샤른호르스트가 격침될 당시의 상황처럼, 중거리 이상에서 대낙각탄을 맞았다면 큰 피해를 입었을 가능성이 높다.
8.3. 단점에 대해 고려할 점
여기에 대해서 다음과 같은 변명을 해볼 수 있다.1. 독일이 금속이나 기계에 관련한 기술은 최고수준이었기에 비스마르크의 장갑판은 니켈 크롬 몰리브덴 강판이라는 당시에선 손에 꼽히는 최첨단 철판으로 만들어졌다. 다만 이 판을 적용하고 설계를 하는 과정에서 1932년 기준 최신식 정보가 없던 독일 해군은 당시 건조중인 프랑스의 전함이 15인치 미만의 주포를 올릴 것으로 판단했었다. 따라서 15인치 대응방어를 갖춘 전함에 그 이상을 바라기는 무리가 있다. 실제로 라인연습작전당시 프린스 오브 웨일즈와 후드와의 교전에서 큰 피해를 입지 않았다.
2. 1935년 독일 재무장 선언 당시에도 16인치까지 주포 제한이 풀렸으나 톤수 제한은 그대로 35,000톤이었기 때문에 독일의 뒤쳐진 건함 기술로는 조약 안쪽에서 꾸역꾸역 전함을 만드는 것에 무리가 있었다. 그래서 조약을 맞춰가며 공격과 방어의 밸런스가 맞는 배를 만드는 부분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같은 제약에 걸렸다고 하더라도 전함의 특성이 달라질 수 밖에 없으며 이는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과 킹 조지 5세급 전함을 비교하면 알 수 있는 부분이다.
3. 독일 해군의 모토는 통상파괴작전이었다. 그 때문에 긴 항속거리와 30노트의 타국 고속전함들과 속력 만큼은 동급으로 만든것. 통상파괴작전은 적의 주력함과의 교전이 아니라 수송선단 등을 습격하는 작전이므로 전함끼리의 직접적인 함포전을 염두에 두고 만든 배들에 비해서 전함에 대응하는 능력이 떨어진다고 할 수 있기는 하다.
그러나 이러한 변명은 다음과 같은 문제가 있다.
1. 비스마르크급의 문제는 장갑재의 재질이 아니라 문제많은 장갑 구조인데 여기에 장갑재의 재질이 좋다고 하는 것은 문제점이 무엇인지 파악하지 못한 주장일 뿐이다. 라인 연습 작전의 경우 15인치 대응방어를 갖춘 전함이 14인치포를 장착한 전함한테 큰 피해를 입으면 그거야말로 망신거리인 것이고 막아낸 것은 당연한 것이다. 15인치 주포를 장착한 후드는 프린츠 오이겐을 먼저 공격하다가 비스마르크는 제대로 공격하지도 못하고 격침되었으니 비스마르크의 방어력을 논하기는 부적절하다. 그리고 프린스 오브 웨일스가 쏜 포탄이 비스마르크의 연료탱크를 파손시켰기 때문에 이는 방어력을 설명하기에 적절한 사실이다.
2. 배수량의 제한으로 전함의 특성이 달라질 수 밖에 없는것은 사실이고 킹 조지 5세급 전함과 노스캐롤라이나급의 예시는 이에 부합하는 사례가 맞다. 그러나 이것도 조약에 맞춰서 35,000톤의 전함을 만들었을때나 할 수 있는 변명이지 조약을 무시하고 42,000톤급 전함을 찍어내고도 성능이 저 모양인 것에 대한 변명은 못된다. 비슷한 크기의 전함과 비교하자면, 이탈리아의 리토리오급 전함은 적어도 화력은 15인치급치고는 매우 우수했고(그 화력을 얻은 대신 치명적 단점이 생겼지만) 방어력도 매우 준수했다. 그러면서도 비스마르크처럼 속도도 충분히 빨랐다. 시기상 차이가 있지만 미국은 조약 배수량 내에서 16인치 주포를 장비하며 일반적인 16인치 포탄[16]에 대한 대응방어를 달성하고도 27노트로 움직일 수 있는 사우스다코타급 전함을 건조해냈다. 노스캐롤라이나급과 킹 조지 5세급의 사례는 14인치급으로 설계되던 전함들이 일본이 조약에서 탈퇴하면서 갑자기 16인치로 업건이 가능해졌기 때문에 공수 밸런스를 찾지 못한 것으로 이해해야지, 그 국가들이 밸런스를 맞출 능력이 없었다고 이해하면 안된다. 처음부터 16인치 주포를 장비할 것을 염두에 둔 채로 설계에 들어갔다면 충분히 밸런스를 찾았을 가능성이 높은 전함들이다. 영국은 검증이 안된다 하더라도 최소한 미국은 사우스다코타급에서 그 밸런스를 맞추어냈다.
3. 통상파괴전이라도 적 전함과의 교전을 상정해야 한다. 영국은 수송선 호위에 적극적으로 전함을 투입하였고 그 수준도 리벤지급같은 구식전함은 물론이고 신형 전함인 킹 조지 5세급도 아낌없이 투입했으므로 최신형 전함과의 교전 또한 상정해야 했다. 그러나 배수량은 7,000톤이 더 높음에도 성능에서 비슷하거나 특별히 나을게 없다는 사실은 비스마르크급의 성능 문제에 대한 충분한 변호가 되지 못한다. 전함이 없는 수송 선단만 골라서 털겠다면 샤른호르스트급만으로도 임무를 수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4. 35,000톤급의 함선을 크게 한거지 42,000톤급을 생각하고 만든게 아니라는 이유로 35,000톤급 함선과만 비교해야 한다는 이야기가 있는데 어불성설이다. 적의 약한 상대만 비교대상으로 삼는 아전인수적 비교라는 것이다. 원래 전함은 대응방어를 생각하고 건조하므로 기본적으로 배수량 동급 전함을 상대하는 기준으로 만들어진다. 35,000톤급의 함선을 크게 한거라는 것 자체가 독일의 기술력과 생각의 저열함을 입증해주는 자가당착적 생각이다.
결론적으로 비스마르크는 전반적인 설계에서 세계적 추세를 따라가지 못함에 따라 덩칫값을 못하게 된 전함이라고 할 수 있다.
9. 총평
이런 평가가 나오는 이유는 너무나도 많은 것이 뒤바뀐 상황에서 배를 설계했기 때문이다. 방어구조는 1차대전 수준에 정체되어 있었고 사격통제능력, 대공능력에 대해서도 정체되어 있거나 심각한 문제점을 도출해냈다.독일 해군의 낮은 승조원 훈련도도 문제가 되었는데 당장 적국인 영국 해군은 비록 돈에 쪼들려도 매년마다 실탄 포격훈련을 철저히 하고 있었는데 독일 해군은 뭐 해보기도 전에 전쟁을 맞아버렸다. 이 훈련 부족문제는 페어리 소드피시 뇌격기의 공격이나 티르피츠 격침작전의 몇 가지 예에서 보듯 효율적인 대공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문제를 만들어냈고 데미지 컨트롤에 대해서는 아예 이것이 어떻다 라고 추정할만한 근거조차 만들어 내지 못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이 시도할 함대 결전을 회피하고 통상파괴전 및 통상파괴 전력 구축을 위해 마구마구 달려들 영국 해군 순양함 세력을 견제할 전력을 구축하나 노르웨이 침공에서의 치명적인 해군 전력 손실로 피해는 영국 해군쪽이 더 많이 입었지만 그 과정에서 독일은 얼마되지 않는 구축함 전력을 거의 다 잃어서 한때 상시운용전력이 구축함 3 ~ 4척에 순양함 2 ~ 3척까지 줄어든 전력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영국 전함 및 주력 함대와의 조우를 극도로 회피하는 상황에 이르렀다.
원래부터 해군강국이거나 나름대로 컨셉을 잡고 지속적인 발전과 여러가지 시도를 계속했던 당대 3대 해군국인 영국, 미국, 일본의 신전함들과의 비교는 말할 것도 없고, 1차대전 당시에만 해도 독일보다 해군력으로서는 뒤떨어졌던 이탈리아의 리토리오급 전함, 프랑스의 리슐리외급 전함과 비교해도 비스마르크는 야마토급 전함 등장 이전에는 최대급이었다는 배수량 외에는 내세울 것이 없다. 근접전에 특화된 화력은 16인치에 근접하는 현측타격 화력을 지닌(대신 희생한 것도 많았다) 리토리오급 전함보다 못하고, 공-방-주의 균형성은 리슐리외급 전함을 따라잡지 못한다. 비스마르크의 공방능력은 1차 대전기의 구식 전함인 퀸 엘리자베스급 전함보다 약간 나은 수준밖에 되지 못한다.
그나마 2번함 티르피츠가 썩어도 준치라고 연합군에게 자신의 존재만으로도 지속적인 압박을 주었고 그렇게 하여 북해에 해군전력 일부가 묶일 수 밖에 없었다. 항공모함이 해전의 주축이 되었던 2차대전에서 전함을 잘 이용한 사례의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좋은 성능을 가졌지만 지휘부의 한심한 운용 덕분에 아무것도 못했던 야마토와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적과 전투를 벌여서 싸웠고 자매함 2척을 전부 포함해도 아무런 전적도 쌓지 못한 야마토급 전함들과는 달리 비스마르크는 어쨌든 순양전함 1척을 격침시키고 전함 1척을 중파시키는 전과[17]를 보유했고, 티르피츠는 항구를 돌아다니는 것만으로도 영국 해군의 신경을 마구 긁어서 결국 영국 공군까지 나서서 합동공격으로 지진폭탄을 동원해서 티르피츠를 격침시킨다. 설계가 신식이지 못하지만 어느 정도 좋은 활용이 받쳐준다면 그럭저럭 활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는 했다.
여기에 더해서 나치 독일이라는 국가의 혼란상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당장 일본 제국군처럼 육군과 해군이 서로 적대관계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독일 나치군 내부에서도 서로 알력다툼이 있다는 걸 상기하자. 그 유명한 공군 야전사단을 만든 괴링이라던지, 육군 내부 간의 돌격포 및 구축전차 등의 배치 싸움 같은 경우가 있었고, 여기서 기술 단절로 다시 재건해야하는 해군은 이 육군과 공군의 대립 문제로 해군에게도 악영향 끼치고 있다는 점을 생각하자. 무엇보다 자원까지 제한된 상황이었고, 심지어 혁신적인 기술 개선 경우 일본제국군처럼 정치적 문제만 아니라 편견과 고정관념 등 여러가지 요소가 겹치면서 개선할 여지가 많지 않았다. 설령 있더라고 그건 대부분 히틀러와 그 관계자들의 개인적인 이유로 나온 경우가 주를 이룬다. 그러니 비스마르크급 전함이 저 꼴이 날만한 사유가 존재하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현대인의 시각에서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평가하면 안되고 나름대로 독일의 노력을 많이 긍정적으로 평가해줘야 한다는 옹호론이 있긴 한데 일고의 가치도 없는 이야기다. 당대의 시각으로 보더라도 함선 설계국인 Marineamt를 방사능 폐기물급 쓰레기로 만든 것도 나치 독일이고 그렇게 망가진 설계국에서 나오는 1차대전 설계도 짜집기에 검증되지 않은 아이디어를 섞은 쓰레기 설계안을 제대로 검토도 안해보고 통과시킨 것도 나치 독일이다. 심지어 자신들의 기술력이 매우 낮은 수준이라는 것도 전혀 몰라서 프랑스 침공 이후 리슐리외급 전함 3번함 클레망소가 미완성 상태로 도크에 처박힌 것을 도크 재사용을 위해서 치우는 작업을 하면서 살펴보다가 그제서야 프랑스의 해군 기술력이 나치 독일의 해군 기술력보다 압도적으로 우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지경이었다. 승조원 훈련도 부족이나 나치 독일의 내부 혼란성 같은 것도 다 나치 독일이 스스로 선택한 결과였다. 이렇게 스스로의 잘못된 선택의 연속으로 망한 경우에는 당대는 물론이거니와 후세에도 똑같이 욕먹는다. 밖을 봐도 엉망이고 내부를 봐도 개판인데 전혀 옹호할 거리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독일의 노력을 매우 긍정적으로 볼 수 있는 항목은 독일 제국 해군이다. 1867년에 창설된 연방해군 시기에는 사실상 해군력이 없다시피 해서 약소국인 덴마크 해군도 못이기는 수준이었으며 1888년까지 육군 장교가 해군을 지휘하는 촌극까지 벌어지던 상황을 1872년 부터 함대를 현대화 하기 위해 10년 계획으로 총 2억 2천만 금마르크를 투입하는 것을 시작으로 빌헬름 2세가 본격적으로 해군육성을 한 결과 1900년에 이미 세계 2위의 해군을 달성하고 영국이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들어서 해군의 패러다임을 뒤집자 어떻게든 자력으로 따라잡아서 1907년부터 나사우급 전함으로 드레드노트급 전함을 만들고 1913년에는 15인치급 주포를 가진 슈퍼 드레드노트급 전함인 바이에른급 전함까지 만들어서 양적으로는 영국 해군력의 60%까지 따라잡고 질적으로도 별로 차이가 없을 수준까지 올라갔다.
그래서 1차대전에서 현존함대 전략을 사용하는 등 부적절한 운용을 하여 투자한 돈값도 못하고 11인치급 함포에 집착하여 함포의 대구경화가 늦어지는 등 급격한 해군력 발전에 따른 몇 가지의 심각한 부조화가 발생했음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도 독일의 노력 자체는 크게 인정받았고 현대에도 육군국이자 해군의 불모지 국가가 저 정도 수준의 해군을 육성했으면 아주 대단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하지만 비스마르크급 전함은 위의 경우와는 전혀 정반대이므로 전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미 1차대전 시기에도 미국이 영국 본토에 14인치 주포를 가진 뉴욕급 전함 이하의 전함들을 파견하여 독일 제국의 대양함대를 견제하게 한 적이 있으며 2차대전 시기에도 미국이 16인치 주포를 가진 노스캐롤라이나급 전함을 빠르게 파견해서 비스마르크급 전함 티르피츠를 견제하게 만든 역사적인 사실이 있다. 그런데도 1차대전에서 이미 미국 전함이 영국 본토에 와서 주둔한 꼴을 본 뒤에도 2차대전 시기에 태평양 전쟁이 터졌으니 미국의 해군력이 태평양에만 갈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역사적 교훈에서 배운 것이 아무것도 없음을 제대로 입증해주며 심지어 당대의 독일 해군 관계자중 머리가 돌아가는 사람은 미국과 전쟁 상태에 돌입하는 즉시 미국 해군과 영국 해군이 본격적으로 합동작전을 할 것이라고 예측까지 했다. 따라서 비스마르크급 전함의 종합적인 평가가 낮은 것은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10. 기타
비스마르크의 침몰에 대해 영국 측은 '격침'을 주장한 반면 독일 측은 '자침'을 주장했다. 독빠 성향의 제임스 카메론 감독의 '비스마르크의 비밀'이라는 다큐멘터리[18]에서도 생존한 승조원들의 증언을 통해 은근슬쩍 자폭설을 내비치고 있다. 실제로 비스마르크의 잔해를 조사한 결과 수문이 열려있는 것이 확인되기는 했고, 승조원들의 증언을 참고할 때 지침 시도가 실제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하다.[19]하지만 자폭설을 따르더라도 방어구조가 '최대한 격침당하지 않기' 컨셉이라 격침을 안당했을뿐 최후의 전투에서 영국의 전함 '킹 조지 5세'와 '로드니'에게 얻어맞고 44분의 교전만에 앞서 언급한 얇은 장갑을 가진 주포탑과 바벳이 박살나면서 모든 포탑이 파괴되었으므로 사실상 이미 전투불능 상태였다. 이후로는 그냥 두들겨맞았는데 후드때와 마찬가지로 비스마르크를 너무 과대평가한 영국전함 두 척이 근접거리로 너무 접근한 탓에 현측만 죽어라 포격한 덕분이었다. 20km 이상의 거리에서 갑판을 두들겼으면 비스마르크가 저렇게 전설로 남지도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 상황에서 영국 해군이 비스마르크를 내버려뒀다고 하더라도 비스마르크가 자력으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했고 이미 포격전 이전에 비스마르크는 뇌격기의 공격으로 키가 부러지고 꺾여서 방향전환을 할 수 없는 신세였기에 결국 격침되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므로 설사 자침시도가 있었다고 하더라도 사실상 격침이라고 봐야 한다.[20]
격침기록은 후드 하나뿐이지만 그 하나가 탑 오브 탑이다 보니 그 때문에 이름값만큼은 엄청나게 높다. 배치시점에서 세계최대의 거함이라는 그 상징성에다 첫 출격에서 영국의 후드[21]를 격침시켰고 비스마르크를 잡기위해 영국 해군이 투입한 전력도 엄청나다. 롬멜처럼 영국이 일부러 띄웠던 사정도 있다고... 첫전투에서 영국 해군 최대의 거함인 후드가 별다른 타격도 주지못하고 격침당하고 신예전함이었던 프린스 오브 웨일즈 역시 두드려 맞고 도주해야 했으니... 게다가 2차 대전중 전함 간의 고전적 포격전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대서양에는 사실상 이 전투가 유일했기 때문이다. 샤른호르스트 추격전 당시 샤른호르스트와 듀크 오브 요크는 아무래도 체급이 다르다.
제2차 세계대전 직전의 상황에서는 기관공학의 발전으로 두터운 장갑을 두른 정규전함이 순양전함에 버금가는 속도를 내는 고속전함으로 발전했으므로, 전함에게 속도마저 밀리기 시작한 순양전함의 쇠퇴는 예견되어 있었는데, 이를 단적으로 보여준 전투가 기리시마와 워싱턴의 포격전이었다. 워싱턴의 경우 단 7분간의 일제포격으로 16인치 주포탄을 최소 9발을 명중시켜 기리시마의 주포를 몽땅 박살내고[23] 얇은 측면에 구멍을 숭숭 뚫어주며 기리시마를 완전히 뭉게버렸다. 비록 기리시마가 구식 공고급 전함이라는 점을 고려해도 이는 압도적인 전과였다. 야간에 대략 8,400 ~ 12,560 야드에서 레이더 조준 일제사격 8회 75발을 사격하여 기록한 것으로, 명중률은 12%다. 1930년대에 미국의 전함 사격훈련에서의 성적이 일본군의 3분의 1 정도인 10%대였다는 점에서 레이더가 미국 전함들의 주포 명중률을 매우 개선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4]한편 워싱턴이 기리시마를 향해서 발사한 5인치 부포탄은 107발이고 그 중 40발이 명중하였다.[25]
샤른호르스트는 나중에 킹 조지 5세급인 듀크 오브 요크의 손에 최후를 맞이했으므로 앙갚음은 한 셈이다. 덧붙여 기리시마는 미군 전함 워싱턴에 의해 격침되었다.
개전 당시 영국 해군 최대급의 함선이며, 나름 불침함으로 이름 날리던 순양전함 후드가 럭키샷[26]에 당한게 꽤나 뼈아팠던 모양인지 영국이 무척 띄워주고 있으며, 무엇보다도 당시 영국 수상인 처칠이 비스마르크급 전함에 노이로제에 가까운 집착을 보였다. 그래서 여러번의 공습으로 이미 앉은뱅이가 된 2번함 티르피츠를 초중량 항공폭격으로 항구에서 뒤집어버릴 때까지 계속 공격했다.
사실 야마토급 전함이 나오기 전까지는 최대급의 전함이었고 독일의 전함건조능력을 너무나 과대평가한 것은 미국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사실여부는 불명이나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 대통령은 비스마르크가 미국 동부 해안까지 와서 포격을 퍼부을까 두려워했다는 얘기도 있다.[27]
11. 모형화
거대한 덩치와 멋진 외형, 최상급의 인기와 전설적인 활약상을 자랑하는 전함답게 엄청나게 많은 양의 모형이 출시되었다. 엔터프라이즈, 미주리와 야마토/무사시도 많은 양의 모형이 출시되었지만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에게는 상대가 되지 않는다. 최초로 모형같은 모형이라고 평가받은 함선 모형도 타미야의 비스마르크이다. 함선 모형을 만드는 모형 제조사 중 비스마르크급 전함을 출시하지 않는 경우는 아주 드물다.한 가지 유의할 점이라면 티르피츠는 비스마르크의 단순 색놀이 버전으로 출시되는 경우가 상당하며, 그렇지 않더라도 티르피츠의 특징인 측면의 어뢰 발사관이나 주포탑 위에 올려진 대공포대 등을 살리지 못한 경우가 대부분이다. 예외라면 레벨의 1/350 티르피츠 정도.
원본 함선 자체가 전함치고도 큰 배라 가장 인기 있는 1/350 스케일 기준으로 길이 717mm, 폭 102mm으로 상당히 크다. 길이만 놓고 보면 표트르 벨리키, 리슐리외, 알래스카와 비슷하지만 폭이 저들보다 훨씬 넓다. 1/350으로 출시된 전함들 중 야마토, 몬태나다음으로 넓다. 구매 예정이라면 전시 공간에 대해 생각해 두어야 할 만한 크기이다. 1/700 스케일로도 결코 작지 않다. 특히 비스마르크는 다른 전함들에 비해 폭이 넓은 편이라 더욱 그렇다.
- 1/200
- 트럼페터
애리조나에 이어 두 번째로 출시된 1/200스케일 대형함이다. 준수한 조립성[28]과 좋은 디테일, 구성 대비 저렴한 가격으로 프로포션 문제를 제외하면 좋은 제품이라고 평가받는다. 하지만 프로포션 문제 때문에 결정판 타이틀을 받기에는 2% 부족한 느낌이다. 선체는 다소 뚱뚱한 느낌이고 상부 구조물은 빈약하다. 같은 시리즈의 다른 제품들과는 달리 보너스로 투명 외장 + 내부재현(포탑아래 3개층의 송탄기구 포함 내부구조) + 메탈 포신의 별도 디스플레이용 포탑 구조를 하나 포함하고 있다. 1/350과 마찬가지로 폰토스 모델에서 전용 디테일 업 세트를 출시했다.
- 1/350
- 린드버그
- 타미야
- 아카데미과학
- 미니 하비 모델스
- 레벨
- 트럼페터
최초의 1/350 비스마르크로, 이 시절 서양 함선 킷이 다 그렇듯이 품질은 기대하기 어렵다. 크기에 비해 싼 편이라는 것이 유일한 위안이다. 최초의 1/350 티르피츠이기도 하다.
1978년 출시된 제품으로, 완구 같은 함선 모형들만 가득하던 시절 군계일학스러운 품질을 자랑하는 제품으로 출시되어 모형계에 큰 충격을 준 제품이다. 오랜 시간 동안 결정판으로 자리잡았으나 이제 외서는 레벨과 트럼페터에게 밀리는 데다 조립성과 디테일도 이후 제품들에 비해 떨어져 선택하는 사람들은 많이 줄어들었다. 그래도 현재 기준으로도 나쁘지 않은 품질과 현지에서는 싼 가격 등 메리트가 아예 없는 것은 아니라 타미야 제품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다. 다만 티르피츠는 부품을 많이 돌려쓰는 바람에 재현도가 떨어져 비스마르크에 비해 평가가 좋지 못하다.
타미야 킷의 카피판이다. 의외로 디럭스 버전도 존재한다. 형편없는 조립성을 제외하면 품질은 타미야 킷과 크게 다르지 않다. 품질은 그렇지만 80년대 중반 첫 발매 이후 2020년대 이후가 되도록 큰 크기와 저렴한 가격(마트/온라인 실 구매가는 2만원대)으로, 모델러가 아닌 일반인들에게는 함선 모형 입문용 가성비템으로 군림하는 중.[29]
트럼페터가 미니하비 모델스 시절 발매한 제품으로 아카데미 킷과 마찬가지로 타미야 제품의 카피판이다. 조립성은 역시 형편없으나 아카데미 킷보다는 아주 약간 낫다는 평이다. 의외로 전용 에칭 셋이 존재한다.
2000년대 출시된 제품으로 타미야 제품에게서 결정판의 자리를 뺏어 온 좋은 제품이다. 나름 괜찮은 조립성과 에칭 없이도 준수한 디테일, 뛰어난 프로포션을 자랑한다. 디럭스 버전도 있으며 가성비가 좋으나 비스마르크 디럭스 버전은 구하기 힘들다. 하이라이트는 티르피츠인데, 최초의 제대로 된 티르피츠 모형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재현도가 뛰어나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현재까지도 최고의 티르피츠라고 할 수 있는 제품이다. 다만 타미야나 트럼페터에 비해 아쉬운 조립성과 에칭을 사용하지 않는 것을 염두에 둔 설계 등 아쉬운 점들도 있다.
2019년 출시된 제품으로 레벨에게서 결정판의 자리를 뺏어 온 제품이다. 레벨 제품 대비 한 수 위의 조립성과 정확도, 디테일을 자랑한다. 요즘 트럼페터 함선 킷답게 품질은 뛰어나지만 가격은 719위안으로 트럼페터/하비보스의 1/350 함선 중에서는 796위안의 키티호크와 769위안의 인트레피드 다음으로 비싸다. 현재 폰토스 모델에서 전용 디테일 업 세트를 내놓아 가장 퀄리티 높게 제작할 수 있는 비스마르크라고 할 수 있다. 에칭을 여러 장 포함하고 있어 스트레이트로 제작해도 충분히 퀄리티 높게 할 수 있다. 다만 2021년 출시된 티르피츠는 레벨 티르피츠 대비 재현도가 떨어져 비스마르크 대비 평이 좋지 않다. 티르피츠는 776위안으로 가격이 더 비싸고, 이후 비스마르크도 가격이 776위안으로 올랐다.
- 1/400
- 엘레르
- 에어픽스
- 즈베즈다
- 강남모형
자매함 티르피츠와 함께 출시되었으며, 강남모형의 다른 함선 모형들과 마찬가지로 가성비가 좋다는 평을 받았다. 다만 2009년 경 강남모형 폐업 이후에는 일반적으로 구하기는 어려워졌다. - 합동과학
강남모형 제품을 재생산하였다. 비슷하게 1/600 엔터프라이즈과 1/400 미주리도 강남모형 폐업 후 합동과학을 거쳐 2019~21년 사이 아카데미에서 재발매 되었는데, 1/400 비스마르크 급은 빠졌다. 아마도 이미 자사 1/350이 있기 때문으로 추정된다.
엘레르의 1/400 모형 킷들이 그렇듯이 상당히 오래된 재품이며 조립성과 디테일 역시 좋지 못하다. 입수 난이도도 낮지 않아 별 가치가 없다.
엘레르 킷의 재포장판이다.
마찬가지로 엘레르 킷의 재포장판이다.
- 1/570
- 레벨
1963년 출시된 오래된 제품이다. 구하기는 어렵지 않으나 굳이 이제 와서 구할 만한 가치는 없다.
- 1/600
- 에어픽스
1959년 출시된 오래된 킷이다. 오래된 제품이지만 최근에도 재판한 것으로 보인다.
- 1/700
- 아오시마
- 드래곤 모델
- 트럼페터
- 피트로드
- 레벨
- 이탈레리
- MENG Model
- 플라이호크 모델
피트로드와의 제휴를 통해 발매된 제품으로 그 덕에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품질은 준수하다. 비스마르크만 ILK 브랜드로 에칭과 목갑판을 포함하여 재출시되었다. 품질이 플라이호크 제품에 비해 밀리지만 가격이 더욱 싸고 구성이 좋기 때문에 메리트는 있다.
트럼페터 킷의 재포장판이다. 같은 제품이지만 트럼페터에 비해 가격이 비싸다.
드래곤 킷의 재포장판이다. 월드 오브 워쉽 버전으로 출시했다.
1/700 함선 라인업 중 최초로 출시되었다. 조립성이나 프로포션 등은 좋지만 간편한 조립을 지향하는 제품이라 그런지 디테일은 그리 좋지 못하다. 마치 건프라마냥 부품이 다색 사출되어 단순 조립만 해둬도 상당히 이쁘기 때문에 간편히 즐기고 싶다면 가성비는 나름 괜찮다. 티르피츠는 출시되지 않았다.
끝판왕급의 디테일을 보여준다. 워낙 깨알같은 부품들이 많아 조립 편의성은 그리 좋지 못하지만 핏 자체는 좋다. 일반판은 198위안, 에칭 5장과 금속 부품들을 포함한 특별판은 298위안이다. 티르피츠 역시 예고되어 있다.
- 1/800
- 1/830
- 니치모
- 1/2000
12. 대중매체
- 디스커버리 채널의 세계 톱10 군함편에서 7위를 차지하였다. 위협성과 화력에선 높게 평가를 받았으나 방어력, 혁신성, 운용기간에서 낮은 평가를 받았다.
- 사상 최악의 참사에서도 방영이 되었다.
- Naval Front-Line의 나치 독일 트리의 레벨50급 전함이다.
- 네이비필드2의 독일 전함 트리의 9티어와 10티어 함선으로 등장한다. 왜 둘로 나뉘는가 하면 하나는 1941년 개장형이라는 이름을 달았기 때문이다.
* 월드 오브 워쉽에서는 독일 전함 8티어로 비스마르크가 등장했고, 8티어 프리미엄 함선으로 티르피츠가 등장한다. 이 게임에서는 전투거리가 현실보다 짧다보니 미국의 고낙각이 미국 최악이 단점이 되어버린데다가[30], 오히려 전투거리가 짧은 전투에서 성능을 발휘하는 터틀백식 장갑 덕분에 집중 방호 구획이 잘 관통 당하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좋은 취급을 받는다. 거기다 어차피 어뢰 유폭 확률과 탄약고 유폭 확률은 거기서 거기기 때문에 나쁘지는 않다. 하지만 방뢰와 선회가 그리 좋지 않아서 어뢰에 약하다.[31] 2번함 티르피츠는 비스마르크에 없는 어뢰를 사용할 수 있다.
- 월드 오브 워플레인에서 야마토급 전함과 더불어 추축국 진영의 대형 중장갑 타겟으로 등장한다. 파괴 시 전술점수 32점을 획득하며, 상대방은 제공권의 최대 32%를 잃는다.
- 함대 컬렉션에 모에화되어 등장한다. 비스마르크(함대 컬렉션) 참고
- 워쉽배틀:2차세계대전에서 등장한다. 역시나 고증오류를 일으켜 함선 설명에 방어력이 강한 함선이라는 문장이 있다.
- 1941에서는 2스테이지 보스로 등장하는데 크게 어렵지는 않다.
- 벽람항로에서는 초반 튜토리얼에 등장한다. 해당 튜토리얼이 비스마르크 추격전을 모티브로 한지라 후드를 수만대의 대미지로 날려버리는 위엄을 과시한다. 단, 2년 가까이 소식이 없어서 대신 2번함인 티르피츠가 이벤트 보상함으로 먼저 나왔지만, 2019년 5월 23일 결국 플레이어블 캐릭터로 나왔다.
비스마르크 | 티르피츠 |
- Naval Creed:Warships에서 비스마르크는 4티어 2차 전함으로 등장하며, 티르피츠는 프리미엄 4티어 2차 전함으로 등장한다, 그리고 팔레트 스왑(?)버전으로 우주 비스마르크라는 함선도 존재한다.
* 워쉽 플릿 커맨드에서 비스마르크가 5성급 함선으로 등장한다. 유명세에 걸맞은 능력치를 보유했지만 동급의 전함에 비해 화력과 방어력이 약하다. 다만 속도는 빨라 빠르게 교차하는 전략을 사용할 때 유용하다.
* 모던 워쉽에서 FGS Bismarck라는 이름의 현대화 버전으로 등장한다. 2023년 12월 이벤트에서 전설 티어 전함으로 출시되었으며, 좀 아쉬운 방공 능력을 제외하면 기동성, 화력, 선회 등에서 모두 뛰어난 성능을 가지고 있다.
- Sabaton이 한국 시각으로 2019년 4월 23일에 공개한 노래, 'Bismarck'의 주역으로 비스마르크가 등장한다. 워게이밍 소속 월드오브워쉽 제작/운영진이 지원한 덕에 높은 영상미, 페어리 소드피시, 모함인 HMS 아크 로열, HMS 프린스 오브 웨일즈, HMS 킹 조지 5세, 어뢰를 날려대는 카운티급의 하위인 런던급 중순양함 HMS 도셋셔 포지션을 맡은 함[32][33]과 함께 등장하나, 노래 소재가 비스마르크 추격전인 만큼 가라앉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 스타워즈의 독립 행성계 연합에서 건조한 서브쥬게이터급 중순양함 1번함 멀레벌런스도 비스마르크를 모티브로 했다고 한다.
- 대체 역사소설 내 독일에 나치는 필요없다에서는 작중 최고의 수혜 함선으로 등장한다. 역사가 바뀌어 민주주의 국가로서 영국과의 기술제휴와 프랑스제 380mm 4연장포 도입으로 본 역사의 단점들을 쇄신하여 영국, 폴란드 등과 함께하는 연합군이 된 독일 라이히스마리네의 주력함으로 영국 로열 네이비와 연합해 프랑스 해군과의 영국 해협 전투에서 됭케르크와 리슐리외를 격침시키고 4연장으로 주포를 교체하여 화력을 두 배로 뻥튀기하고 갑판장갑을 개량하는 등 대대적인 개조를 받고, 원래 역사에서는 앙숙이었던 후드와 같이 작전하면서 작중 최후반부 일본 제국과의 함대 결전에서는 1번함 비스마르크가 일본 제국 전함 나가토와 무츠와 난타전을 벌여 결국 승리하지만 끝내 격침되며 본래 역사와 다르게 화려한 함생을 살게 되었다. 2번함 티르피츠는 소련을 견제하기 위해 발트해를 봉쇄하며 버티며 전쟁 끝까지 살아남는데 성공한다.
- 이 독일은 총통이 필요해요
독일이 나치 대신에 민족혁명당이라는 민족주의 정당이 집권하면서 제국 시절 총리가 아니라 독일 민족영웅 이름인 아르미니우스의 이름이 붙는다.[34] 다른 자매함도 알라리크, 테오도리크 등 게르만족 시절 민족영웅이다.
- 유명한 함선이다 보니 모형화도 많이 되었다. 1/350 스케일의 경우 타미야에서 오래 전에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를 내놓았고, 이후 아카데미과학에서 타미야의 카피판으로 동일한 스케일을 내놓았다. 그리고 21세기 들어서 미국의 레벨에서 비스마르크를 모형화 하였는데, 준수한 퀄리티로 최종판 평가를 받는다. 가성비를 찾는다면 국산 아카데미 버전을 사는 것이 낫고, 각 잡고 제대로 건조하고자 한다면 레벨제를 사는 것을 추천. 타미야는 구형 금형을 우려먹는데다 아카데미와 레벨 사이에 껴서 이도 저도 아니어서 매력이 떨어진다.
1/700 워터라인 버전으로는 타미야, 트럼페터, 레벨, 드래곤 모델, 에어픽스 등 다양한 회사에서 발매 중이므로 선택의 폭이 넓다.
이외에도 트럼페터에서 1/200 스케일을 발매하였다.
13. 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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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상 및 정책 | 철혈 정책 · 국민보수주의 · 국가사회주의 · 복지국가 · 사회보장제도 · 비스마르크 체제 | |||
관련 전쟁 | 제2차 슐레스비히 전쟁,(1864.2.1~1864.10.30), ·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1866.6.14~1866.7.22), ·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1871),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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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타 | 독일 제국 · 프로이센 · 비스마르크 제도 · 비스마르크해 · 비스마르크급 전함 · 비스마르크슈트라세역 · 권신 · 세력균형 · 엠스 전보 사건 · 1864(드라마) · 철혈재상 · 문명 시리즈 · 명재상 | |||
보수주의 | }}}}}}}}} |
[1] 19노트 (약 35km/h) 순항 시[2] 개수 후 티르피츠에만 탑재됐다.[3] 게다가 이쪽도 주포가 11인치라는 빈약한 주포라 비스마르크에게 화력은 밀린다. 다만 방어력의 경우 측면 장갑만큼은 떡장이다. 효율이 좋지 않은 방어구조는 비스마르크도 똑같으니 논외.[4] 그런데 샤른호르스트급들은 영국의 순양전함인 HMS 리나운에 두들겨 맞고 그나이제나우의 주포가 고장나면서 쫓겨난 적이 있긴 하다.[5] 물론 미국도 영국을 상대로 전쟁 계획을 세우는 등 마냥 우호국으로 보고 있지는 않았다. 실제로 전간기 중에는 일본과 영국을 동시에 적대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런 점을 감안하더라도 영미관계의 특수성은 제1차 세계대전 이전까지 거슬러 올라가기 때문에 영국이 타국에게 얻어맞는다면 미국이 개입할 가능성을 항상 생각해야 했다.[6] 또한 2연장과 3연장의 포탑 크기에 따른 포의 회전 각도 제한과 그 무게에 따른 회전 속도도 영향이 있을 것이다.[7] 실제로 킹 조지 5세급에는 5.25인치 양용포를 단 것과 달리 그보다 수개월 일찍 취역한 일러스트리어스급에는 보다 나은 대공사격 능력을 지니는 QF 4.5인치(113mm) 2연장 볼터렛을 달아놓았음을 고려한다면, 5.25인치 양용포의 채택은 전함의 부포로서의 대수상 능력을 보다 중시한 결과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8] 물론 이녀석도 문제가 전혀 없는 녀석은 아니었다. 5"/38 caliber 양용포는 기존의 5"/25 caliber 대공포와 5"/51 caliber 대수상 함포를 단어 그대로 평균을 내어 양용포로 만든 것이었는데, 대공포로서는 구경장의 증대로 인해 포구초속이 올라가고 명중률이 향상되는 등 대체로 진보를 이룸과 동시에,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기존의 대공포 대비 포신이 길어졌음에도 포탑회전속도 등의 반응속도 또한 신속한 편에 속해 단점이라 할 만한 것은 없었다. 하지만 대수상 능력에 있어서는 우수한 연사력과 사격관제능력을 통해 명중탄을 보다 조기에, 보다 많이 낼 수 있게 되었음에도 포신이 잘려나간 것으로 인한 포구초속의 감소와 그에 따른 직사성능 내지 중장거리 관통력 저하는 피할 수 없었고, 이는 결국 함포 자체의 위력 저하로 이어졌다. 전함에서 5인치 양용포는 어디까지나 부포였기에 대공성능에서 고득점을 얻는 것으로 좋았지만, 대부분의 구축함과 일부 순양함에게 있어서 5인치 양용포는 주포였다. 따라서 함포의 위력저하는 순양함 이하급 함선간의 교전에 있어서 치명적이었는데, 특히 일본의 강력한 어뢰공격을 저지하기 어려워 보다 큰 손해를 입게 되었다. 말하자면 5인치 양용포는 빠른 연사와 우수한 사격관제로 어뢰정 등을 상대하는 데에는 별다른 문제는 없었으나 구축함 정도만 되어도 어느정도 버티는 등 빠르게 격침시키지 못해 뇌격을 허락하고는 했으며, 경순양함까지 오게 되면 영 힘을 못썼다. 순양함 전력의 사정 역시 좋지는 못했는데, 중순양함한테도 충분히 유효한 8"/55 구경장 함포의 경우에는 느린 재장전 속도로 인해 협차까지에 시간이 걸리거나 뇌격을 저지할 정도의 충분한 명중탄을 확보하기 어려웠고, 6"/47 구경장의 경우 8인치 만큼의 위력도 없는데 연사속도도 어중간했기 때문에, 결국 각 체급의 단점만이 부각되어버린 꼴이었다. 그럼에도 미해군은 종전 시점에 이르러서는 각각 5"/54 caliber Mark 16, 6"/47 Mark 16, 8"/55 caliber Mark.16 이라는 단순히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는 것 이상의 개선을 이루어 낸다.[9] 다만 이 후기형이라는게 최후기형의 얘기인지라 장착한 녀석이 1944년에야 취역한 마츠급 같은 애들 뿐이었다. 따라서 1940년 취역한 비스마르크의 부포와 직접적으로 비교하는 것은 곤란하다. 일반적으로 89식의 포탑회전속도는 초당 6도라고 일컫어진다.[10] 다만 고각 장전시의 경우 분당 6 ~ 8발 으로 떨어지고, 가장 이상적인 조건 하에서라도 인력 장전의 한계로 분당 10발이 최대였음을 고려할 필요도 있다.[11] 일단 포탑을 밀폐시킬 계획이긴 했으나 H급 자체가 취소되어 역시 취소되고 말았다.[12] 물론 1943년 시점에 대형함 폐기를 명령하고 수리가 거의 다 되어가던 차였던 그나이제나우 마저 무장해제 시키고는 주포와 부포를 떼어다가 해안포로 쓰던 차였던 만큼 기술력이 있고 없고를 떠나서 그냥 해군을 도외시해버린 탓도 있다.[13] 이 뒤에 미 해군은 부포체계를 통일했다고 서술한 내용이 있었는데 그것은 오류다. 전쟁 전에 미해군과 영국 해군 역시 독일 해군과 비슷해서 다양한 부포와 대공포를 혼용했다. 예를 들어 미해군이 전투함의 대공무장을 20mm 오리콘, 40mm 보포스, 127mm 38구경장 양용포로 일원화하기 시작한 것은 전쟁이 발발한 이후로도 조금 더 시간이 흐른 시점이다. 태평양함대 전함군은 진주만과 본토에서 수리하면서 교체했고, 상대적으로 대공위협이 적은 대서양함대의 전함군은 거의 개선없이 종전을 맞기도 했다. 반대로 태평양 전쟁 초중반기 그야말로 발로 뛰다시피한 요크타운급 항공모함은 거의 실시간으로 대공무장이 변하기도 했다. CV-6 엔터프라이즈의 경우 기존 1.1인치 4연장 "시카고 피아노"와 50구경 기관총 조합이었던 것이, 1942년 4월에는 50구경 기관총이 20mm 오리콘으로 대체되고, 같은해 6월에 1.1인치 4연장이 1기 증설되는가 하면, 그해 9월에는 1기를 제외한 1.1인치 4연장이 40mm 보포스로 대체되었으며 최종적으로 위의 구성을 따르게 되는 것은 1943년 10월에 이르러서이다.[14] 다만 이 문제는 육군과 공군이 대립하고 있던 점을 생각한다면 이쪽도 해군과의 정치적 알력다툼이 있다면 정치적 문제로 계속 썼거나 육군에서 내주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공군의 경우는 항공모함 건조 중에 괴링이 전투기 관련으로 간섭한 경우를 생각한다면 해군도 이러한 정치적 대립 문제로 도입이 안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결국 이쪽도 일본 제국 육해군의 대립보다는 못해도 엇비슷한 수준이었을 것으로 보인다.[15] 물론 로드니가 충돌의 위험이 있을정도로 초근접한 거리에서 발포한 것도 고려해야 한다.[16] 자국만 사용하는 16인치 초중량탄에 대한 완전한 대응방어는 달성에 실패했다.[17] 그 외에 전함 2척 소파. 중순양함과 구축함 각각 1척 소파시킨 전과가 있으나 전과산정에서 소파는 특이사항이 없다면 보통 고려하지 않는다.[18] 카메론 감독 작품답지 않게, 작중 독일 해군복 재현 수준이 개판이다.[19] 참고로 현재 영문 위키피디아의 비스마르크 전함 문서는 이 주장을 따라 비스마르크의 침몰 원인이 자침으로 기술되어 있다.[20] 미드웨이 해전에서 대파되었으나 일본군이 뇌격으로 처리한 일본군 항공모함들도 미 해군이 격침시켰다고 하지 일본이 자침시켰다고 하지 않는다. 만약 비스마르크가 자침이면 일본 항공모함들도 자침이라고 주장해야 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그냥 정신승리일 뿐이다.[21] 비스마르크 건조전까지는 세계최대의 거함 타이틀을 가지고 있었다.[22] 사실 샤른호르스트의 장갑은 방어구조가 막장일지언정 두께는 상당했던 비스마르크보다도 일부분에서는 더 두꺼웠다. 다만 화력이...[23] 1번, 2번 포탑 완파, 3번 포탑 회전불능(바벳 파괴), 4번 포탑 장전불능(약실, 장전기 파괴)[24] 얼핏 보면 차이가 없는데, 뭐가 개선이냐는 생각이 들겠지만, 보통 사격훈련은 목표에 명중하기 가장 이상적인 상황에서 한다. 일본에서 흔히 말하는 주간, 맑은 하늘에 잔잔한 바다, 정지 상태나 저속 항행이나 직선 항행 등의 편한 조건을 갖춘 상태에서 하는 것이다. 당연히 적의 공격을 피해 이리저리 실시간으로 변침하며 공격을 피해야 하고 언제 날씨가 급변할지 모르는 실전보다 명중률이 높을 수밖에 없는데, 워싱턴의 실전 명중률은 오히려 그 당시보다 높다. 그리고, 워싱턴이 전투한 때에는 시야 확보가 잘 안 되는 야간이다. 이를 고려하면 단순한 명중률 상승뿐만 아니라 주변 상황에 영향을 적게 받는 안정성도 확보했단 소리다.[25] 여기에 대해서 그 전 11,000야드 떨어진 경순양함을 상대로 16인치 42발을 쐈는데 전부 빗나갔고, 12%의 명중률은 8,400야드라는 초근접거리까지 다가간 덕이라고 봐야 하므로 결국 117발 중 9발이 명중한 셈이라는 헛소리가 있는데, 명중률은 단일 목표에 대한 명중률을 계산하므로 목표 자체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일고의 가치도 없다. 애초에 전함의 주포는 작고 빠른 경순양함 이하 함급에 대한 적절한 무기가 아니며, 이를 위해 부포가 따로 장비된다. 과달카날 해전에서도 야전에서 구축함 아야나미가 기리시마와 미 해군이 전투를 벌이기 이전에 워싱턴에게 덤볐는데, 워싱턴은 주포 대신 5인치 부포로 아야나미를 전투불능으로 박살냈다. 따라서 이런 것을 무시하고 명중률을 계산하면 이 세상에 명중률 높은 무기는 하나도 없는 셈이다. 공식적인 기록으로는 키리시마를 향해 75발의 16인치 포탄을 발사해서 9발 명중이라 되어 있지만 침몰한 키리시마 선체의 조사 결과 16인치 포탄이 20발 정도 명중했다는 설이 있다. #[26] 탄약고 엘리베이터를 통한 유폭에 의한 피해로, 이 부분은 침몰 이전부터 문제시되어 있었다. 영국도 바보는 아니었기에 갑판 장갑을 강화하여 유폭을 막아보려 했으나 개수가 이루어지기 직전 전쟁이 터지는 바람에 이 문제는 침몰 직전까지 해결되지 못했다.[27]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걱정을 했다는 것 자체는 충분히 타당하다. 나치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대서양으로 보냈던 뉴멕시코급 전함과 항공모함 요크타운은 태평양 전쟁이 발발하자마자 전력 공백을 메우기 위해 대서양함대에서 빼내 태평양으로 보냈기 때문에 대서양함대에는 애초에 들키면 그 길로 끝장인 항공모함인 레인저와 전함들은 비스마르크급과 정면승부가 안 되는 느려터진 구식 석탄엔진을 쓰고 주포도 14인치밖에 안되고, 14인치 대응방어밖에 안되는 뉴욕급 전함 2척, 그리고 이들보다 더 낡은 12인치를 단 드레드노트형 전함인 아칸소 정도가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그나마 좀 더 나중에 신형 전함인 워싱턴이 북극 항로쪽에 배치되기는 했지만, 이후 PQ-17에서 영국의 삽질을 본 미국이 분노해서 태평양 전쟁이 발발한 태평양으로 보내버렸고 그 이후 과달카날에서 대활약을 보인다.[28] 그 큰 하부 헐과 갑판 전체가 하나의 부품으로 되어 있다.[29] 비스마르크급의 함교는 야마토와 미주리보다 웅장한 맛이 있기 때문에, 원한다면 이것을 조립하고 개조해보는 것으로 전함의 시작과 끝을 볼 수 있다.[30] 저각포일수록 탄착시각이 빠르고 맞추기가 쉽기 때문에 고각포는 그리 좋지 않다.[31] 하지만 비스마르크에는 소나가 있어서 어뢰를 피하기는 어렵지 않다.[32] 다만 어뢰발사관 위에 갑판이 하나 더 있는것으로 보아 도셋셔 본함은 아니고 같은 카운티급의 세 하위함급들중 또다른 하나인것 같다.[33] 도셋셔는 어뢰 발사관 바로 위쪽에 갑판이 없는 완전 개방형 터렛이다.[34] 다만 본작의 주인공이자 총통인 아르민 로젠바움을 의식한 작명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