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4 23:51:53

성 베드로 대성당

산 피에트로 대성당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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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9년

발 카모니카의 암각화
Incisioni rupestri della Val Camonica
1980년

산타 마리아 델레 그라치에 교회와
도미니코 수도원 및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최후의 만찬"
Chiesa e convento domenicano di
Santa Maria delle Grazie con
l'Ultima Cena di Leonardo da Vinci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Centro storico di Roma, le proprietà extraterritoriali della
Santa Sede e la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1982년

피렌체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Firenze
1987년

베네치아와 석호
Venezia e la sua laguna
1987년

피사의 두오모 광장
Piazza del Duomo di Pisa
1990년

산지미냐노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an Gimignano
1993년

마테라의 동굴 주거지와 암석교회
I Sassi e il parco del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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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4년

베네토의 비첸차 시와 팔라디오 양식 건축물
Città di Vicenza e le ville palladiane del Veneto
1995년

시에나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Siena
1995년

나폴리 역사 지구
Centro storico di Napoli
1995년

크레스피 다다
Crespi d'Ad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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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errara, città del Rinascimento,
e il suo delta del P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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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ulli di Alberobell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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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벤나의 초기 기독교 기념물
Monumenti paleocristiani di Raven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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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세르타의 18세기 궁전과 공원,
반비텔리 수도교, 산 레우초
Palazzo Reale del XVIII secolo di Caserta con il Parco ,
l' Acquedotto di Vanvitelli e il Complesso di San Leucio
1997년

사보이아 궁중저택
Residenze della Casa Reale di Savoia
199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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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rto botanico di Padov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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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토베네레, 친퀘테레와 섬들
(팔마리아 섬, 티노 섬, 티네토 섬)
Portovenere, le Cinque Terre e le isole
(Palmaria, Tino e Tinett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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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tedrale, Torre Civica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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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e archeologiche di Pompe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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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stiera amalfita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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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ea archeologica 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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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유산
1980년

로마 역사 지구
: 바티칸 시국의 유산들과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전
Centro storico di Roma, le proprietà extraterritoriali della Santa Sede
nella città e la basilica di San Paolo fuori le mura
1980년

바티칸
Città del Vatica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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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4대 가톨릭 대성전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라테란의 성 요한 대성전 파일:바티칸 국장.svg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대성당 성 베드로 대성전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성모 마리아 대성전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성 밖의 성 바오로 대성전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대성당
위치
[[바티칸|]][[틀:국기|]][[틀:국기|]]
종교 가톨릭
홈페이지 공식 홈페이지
지위 대성전(Major Basilica)
수석사제 마우로 감베티 추기경
건축 정보
축성 1626년 11월 18일
건축가
(공사기간)
도나토 브라만테(1506~1513)
줄리아노 다 상갈로(1513~1515)
프라 조콘도(1513~1515)
라파엘로 산치오(1514~1520)
발다사레 페루치(1520~1527)
안토니오 다 상갈로(1520~1546)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1547~1564)
자코모 델라 포르타(1585~1602)
카를로 마데르노(1602~1629)
잔 로렌초 베르니니(1629~1674)
양식 르네상스, 바로크
착공 1506년 4월 18일
완공 1626년 11월 18일
건축 내역
전체 길이 220 m
전체 너비 150 m
전체 높이 138 m
전체 면적 21,095 m²
내부 면적 15,160.12 m²
신랑 너비 27.5 m
후진 너비 24 m
정면 너비 114 m
정면 높이 51 m
외부 돔 직경 42 m
내부 돔 직경 41.5 m
드럼 둘레 190 m
드럼 높이 20 m
채광탑 높이 19 m
유네스코 세계유산
파일:유네스코 세계유산 로고(흰 배경).svg
이름 한글바티칸
영어Vatican City
프랑스어Cité du Vatican
국가·위치 바티칸 시국
등재유형 문화유산
등재연도 1984년
등재기준 (i)[1], (ii)[2], (iv)[3], (vi)[4]
지정번호 286
건설 과거의 대성당 현재의 대성당
<colbgcolor=#c2e68b,#496a16> 착공(정초식) 326년 11월 18일(실베스테르 1세) 1506년 4월 18일(율리오 2세)
완공(축성식) 360년 1626년 11월 18일(우르바노 8세)
파일:external/wp.patheos.com.s3.amazonaws.com/Tu-es-Petrus.jpg
TV ES PETRVS(Tu es Petrus, 너는 베드로다)


1. 개요2. 사진첩3. 지위4. 관련 어록
4.1. 마태오 복음4.2.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5. 역사
5.1. 과거의 대성당
5.1.1. 연혁5.1.2.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5.1.3.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5.2. 신축된 대성당
5.2.1. 도나토 브라만테5.2.2. 라파엘로 산치오5.2.3. 발다사레 페루치5.2.4.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반네5.2.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5.2.6. 자코모 델라 포르타5.2.7. 카를로 마데르노5.2.8. 잔 로렌초 베르니니
5.3. 보수 공사
6. 주요 건축7. 역대 수석사제8. 관람 시 주의사항9. 관련 건축
9.1. 크기 비교9.2. 외관이 유사한 건물들9.3. 이름만 같은 경우
10. 기념 화폐11. 기타12. 대중 매체13. 관련 문서

[clearfix]

1. 개요

바티칸에 있는 가톨릭 교회의 성당 등급 분류상 최고등급인 대성전(Major Basilica)중 라테라노 대성전에 이어 두 번째이다. 명칭의 유래는 '베드로(피에트로, 피터)의 무덤 위에 세워졌다'고 하여 성 베드로 대성당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성 베드로 대성당은 세계 최대 성당 건축물로,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비롯한 당대 최고의 건축가들 여럿이 건물을 설계했으며 수차례의 설계 변경을 거쳐 힘들게 완성된 건물이다. 부속된 예술품과 장식들도 르네상스와 바로크 시대를 대표할 만한 것들로 채워져 있다. 이에 따라 1984년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기도 하였다.

성 베드로 대성당 Virtual Tour
구글어스
라틴어 Basilica Sancti Petri
(바실리카 상티 페트리)
Basilica Vaticana
(바실리카 바티카나)
이탈리아어 Basilica Papale di San Pietro in Vaticano
(바실리카 파팔레 디 산 피에트로 인 바티카노)
영어 Papal Basilica of Saint Peter
St. Peter's Basilica
한국어 성 베드로 대성전

2. 사진첩

파일:external/img03.deviantart.net/basilica_di_san_pietro_by_lesogard-d36et3w.jpg
<colbgcolor=#ddd,#191919> 정면 사진[5]
파일:external/sv6.postjung.com/270847-53edfd203c4d8.jpg
하늘에서 내려다 본 사진
파일:external/c1.staticflickr.com/8645294469_53637ea3c8_b.jpg
실내 전경
파일:BaldaquinBerninSaintPierreVatican.jpg
위 사진의 가운데 보이는, 교황미사를 집전하는 제대와 발다키노(천개, 天蓋)[6]

3. 지위

여기가 가톨릭의 중심이라고 느끼기 쉽지만, 사실 로마 교구의 주교좌성당(Cathedral)은 여기가 아니고, 로마 시내에 있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따라서 유일무이한 교황좌(성좌)가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다. 그래서 가톨릭의 가장 으뜸가는 성당은 라테라노 대성당이다. 이는 라테라노 대성당이 '모든 성당의 어머니'라는 위치를 차지한다는 데에서도 알 수 있다. 성 베드로 대성당에 있는 의자는 베르니니가 만든 베드로의 성좌다. 자세한 내용은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문서의 첫부분 참고할 것. 그래도 여전히 상징성 면에서나 각종 예술품과 역사성을 따져볼 때 가톨릭의 중심처럼 여겨지기 쉽다. 흔히 전 세계 성당 중 가장 유명한 성당이라고도 불린다.[7][8]

매년 11월 18일은 '성 베드로 대성전과 성 바오로 대성전 봉헌 기념일(In Dedicatione basilicarum Ss. Petri et Pauli, apostolorum)'이며, 로마 보편 전례력상 이 축일은 선택적으로 기념할 수 있다.

다만 이제 교황궁은 더 이상 라테라노가 아닌 바티칸에 있으며, 따라서 교황의 주요한 업무나 미사, 전례는 모두 가까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된다.

4. 관련 어록

4.1. 마태오 복음

Et ego dico tibi: Tu es Petrus, et super hanc petram aedificabo Ecclesiam meam; et portae inferi non praevalebunt adversum eam.
Tibi dabo claves regni caelorum; et quodcumque ligaveris super terram, erit ligatum in caelis, et quodcumque solveris super terram, erit solutum in caelis.
Mt 16,18-19. 원문 링크. Nova Vulgata
▲ 대성당 쿠폴라에도 밑줄 친 글귀가 있다.

아래는 위의 한국어 번역.
너는 베드로이다. 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인즉, 저승의 세력도 그것을 이기지 못할 것이다.
또 나는 너에게 하늘 나라열쇠를 주겠다. 그러니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네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
마태오 복음 16장 18~19절. 원문 링크. 성경 ©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4.2.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라

서기 60년대의 로마 제국에서, 최초의 교황성 베드로로마의 테베레 강 서쪽에 있는 네로 경기장(Circus of Nero)[9]에서 역십자에 매달려 순교했다고 한다. 베드로의 시신은 그 자리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바티카누스 언덕에 매장되었다고 한다. 이 주변은 순교한 그리스도인들이 베드로의 곁에 묻히기를 원하면서 공동묘지로 발전했다. 서기 90년 아나클레토 교황베드로가 처형된 자리에 작은 사원을 지었다.

그런데 사실 베드로가 처형당한 곳은 불확실하다. 로마의 네로 경기장에서 남쪽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 성당(San Pietro in Montorio)도 베드로가 처형당한 곳이라는 전승이 내려온다.[10] 다만 가톨릭 학자들은 보통 이 성당의 주장보다는 네로 경기장에서 처형당했다는 것을 더 신빙성 있게 생각하는 듯하다.

교황미사를 집전하는 제대 밑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하며, 제대 뒤로는 베드로의 의자가 있어서 교황이 정통한 베드로의 계승자임을 강조한다.

5. 역사

세계 최대의 단일 종교의 본산에 걸맞게 장대한 역사를 자랑한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옛 대성당이 지어진 이후 그것을 철거하며 새 대성당이 다 지어지기까지 100년이 넘는 세월과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를 비롯한 르네상스바로크의 대표 예술가, 건축가들이 다수 투입되었다. 교회가 이렇게 엄청난 노력을 기울인 이유는 당대의 가톨릭고대 로마와 같은 고전적 권위가 필요했기 때문이며, 그 근원인 로마라는 도시와 그 곳의 성지인 베드로의 무덤을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새 성당이 막 지어질 즈음의 시기는 옛 대성당은 물론이고 도시 로마 자체가 상당히 쇠잔한 시점이었는데, 도시 재개발까지 병행하는 것을 각오하면서 엄청난 규모의 새 대성당을 지어야만 했다.


5.1. 과거의 대성당

5.1.1. 연혁

파일:external/www.pitt.edu/22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8px-Alfarano_map.jpg
복원 상상도
파일:external/www.learn.columbia.edu/Old-St-Peters.jpg
평면도: 네로 경기장, 과거의 대성당, 지금의 대성당 옛 대성당의 평면도 (추정)

그리스도교가 공인된 이후인 4세기, 콘스탄티누스 1세 시대에 베드로의 무덤이 있다고 믿어지는 곳에 대성당이 건축된다. 지금은 사라진 이 대성당을 새 대성당과 구별하기 위해 '옛 성 베드로 대성당'(Old St Peter's Basilica)라고 부른다.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은 326년 11월 18일 실베스테르 1세가 정초식을 거행한 후 완공까지 약 30년이 걸렸는데, 당시의 통상적인 교회 건물들과 마찬가지로 라틴 십자가 모양의 바실리카 양식이었다. 길이 118 m, 너비 64 m, 한 열당 기둥 22개가 총 4열로 늘어선 이중 측랑의 5랑식 바실리카 구조로 목조 트러스 지붕을 올렸다. 언덕을 깎아 건축을 해야 했기에 지반이 열악했지만, 얼마나 어렵던간에 콘스탄티누스의 의지는 확고했다. 옛 대성당의 모습을 살짝 추정할 수 있는 회화 자료 중 하나로, 라파엘로 산치오가 그의 제자들과 함께 사도 궁전의 보르지아 아파트에 프레스코화로 그린 보르고의 화재(火災)의 방(Stanza dell’Incendio di Borgo)이 현존하고 있다.

베드로의 무덤 위에 세워진 중앙 제대를 중심으로 옛 대성당 바깥의 장방형 정원에는 역대 교황의 무덤이 자리했다. 이곳에는 콘스탄티누스 1세의 모후 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예루살렘 성지순례 때 가져온 성 십자가, 성녀 베로니카의 수건, 롱기누스의 창과 같은 성유물이 봉헌되어 각국의 순례자들로 붐볐다.

사실 베드로의 무덤은 오랜 기간 믿음을 통해서만 이곳에 있다고 여겨지고 있었는데, 훗날 1950년 12월 23일, 비오 12세가 새 대성당의 지하실 기저 공간에서 성 베드로의 무덤을 확인했다고 공표했다. 여기서 출토된 유골을 감정한 결과 서기 1세기에 사망한 60대 중반 남자로 보인다는 결과가 나왔는데 발견 당시의 유골이 금실로 수놓인 자주색 천에 싸여 있었던 점,[11] 유골이 발견된 곳 주위의 벽면에 베드로라는 글자가 새겨진 낙서가 많았던 점 등을 볼 때 교황청에서는 베드로의 유해일 가능성이 높다고 보고 있다. 이거 맞다 1968년 6월 26일, 바오로 6세는 이 유골이 베드로의 유해가 거의 확실해 보인다고 발표한 후 그 다음 날 처음 발견된 자리에 다시 매장했다.

옛 대성당에서 800년 카롤루스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이 열리는 등 천 년이 넘는 세월 동안 역사가 쌓이면서 확고한 가톨릭성지로 자리매김 했다. 그러나 로마를 침략한 서고트족, 반달족, 사라센족, 노르만족과 같은 이민족들에게 약탈당해 그때마다 만신창이가 되었다. 더욱이 천 년이 넘도록 너무 오랫동안 사용한 데다, 아비뇽 유수교황청이 대성당을 신경 쓸 겨를이 없는 상황이 지속되자, 낡을 대로 낡은 건물은 틈틈이 계속된 보수 공사에도 결국 붕괴 직전의 상황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니콜라오 5세(1447-1455 재위)는 레온 바티스타 알베르티(Leon Battista Alberti)와 베르나르도 디 마테오 델 보라 감베렐리(Bernardo di Matteo del Borra Gamberelli)에게 보수 공사를 맡기면서 성당을 신축하는 수준의 설계도를 작성하도록 했으나 교황이 사망하면서 무위로 돌아갔다.

5.1.2. 신성 로마 제국 황제의 대관식

프랑크 왕국의 군주 카롤루스800년 교황 레오 3세가 집전한 신성 로마 황제 대관식을 거행한 이래 1452년까지 600년 넘는 세월 동안 옛 대성당에서는 23명의 황제가 교황이 머리에 얹어주는 제관을 통해 권위를 과시했다.[12] 이들 23명의 대관식이 거행된 날짜, 이름, 대관식을 주재한 교황은 다음과 같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affaello_Sanzio_-_The_Coronation_of_Charlemagne_-_WGA18761.jpg
카롤루스 대제 대관식, 라파엘로 산치오, 1516~1517년, 프레스코, 670cm, 바티칸 사도 궁전
대관식 거행일 황제 대관식 주재자 대관식 거행일 황제 대관식 주재자
<colbgcolor=#c2e68b,#496a16>800년 12월 24일카롤루스 대제성 레오 3세<colbgcolor=#c2e68b,#496a16>823년 4월 5일로타리우스 1세성 파스칼 1세
850년 12월 5일루도비코 2세성 레오 4세875년 12월 25일샤를 2세요한 8세
881년 12월 25일카를 3세요한 8세891년 2월 21일귀도 3세스테파노 5세
896년 2월 22일아르눌프포르모소901년 2월루이 3세베네딕토 4세
915년 3월 24일베렝가리오 1세요한 10세962년 2월 2일오토 1세요한 12세
967년 12월 25일오토 2세요한 13세996년 5월 21일오토 3세그레고리오 5세
1014년 2월 14일하인리히 2세베네딕토 8세1027년 3월 26일콘라트 2세요한 19세
1046년 12월 25일하인리히 3세클레멘스 2세1111년 4월 13일하인리히 5세파스칼 2세
1155년 6월 18일프리드리히 1세하드리아노 4세1191년 4월 15일하인리히 6세첼레스티노 3세
1209년 10월 4일오토 4세인노첸시오 3세1220년 11월 22일프리드리히 2세호노리오 3세
1312년 6월 29일하인리히 7세[13]1355년 4월 5일카를 4세오스티아 주교 피에르 베르트랑[14]
1433년 5월 31일지기스문트에우제니오 4세1452년 3월 19일프리드리히 3세니콜라오 5세

5.1.3.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옛 성 베드로 대성당 건물이 완성된 후 이곳에 처음 묻힌 교황461년에 사망한 성 레오 1세였다. 이후 1591년에 사망한 인노첸시오 9세에 이르기까지 1,000년 넘는 세월 동안 교황 100여 명이 성당 내부 곳곳에 안장되었다. 하지만 새로운 대성당 건축을 목적으로 율리오 2세가 임명한 수석 책임자 도나토 브라만테는 옛 대성당을 철거하면서 새 건물의 기반을 다지는 과정에서 교황들의 무덤 대부분이 파괴되어 자취를 감추었다. 옛 대성당에 있던 무덤 중에서 현존하는 것, 즉 무덤 또는 석관 자체를 옮겼거나 석관의 파편 또는 유골만이라도 남은 경우는 음영표시로 나타냈다(참고).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 무덤 및 현존 여부
성 레오 1세성 심플리치오성 젤라시오 1세아나스타시오 2세성 심마쿠스성 호르미스다스
성 요한 1세성 펠릭스 4세보니파시오 2세요한 2세성 아가피토 1세펠라지오 1세
요한 3세베네딕토 1세펠라지오 2세성 그레고리오 1세사비니아노보니파시오 3세
성 보니파시오 4세아데오다토 1세보니파시오 5세호노리오 1세세베리노요한 4세
테오도로 1세성 에우제니오 1세성 비탈리아노아데오다토 2세도노성 아가토
성 레오 2세성 베네딕토 2세요한 5세코논성 세르지오 1세요한 6세
요한 7세시신니오콘스탄티노성 그레고리오 2세성 그레고리오 3세성 자카리아
교황선출자
스테파노
스테파노 2세성 바오로 1세스테파노 3세하드리아노 1세성 레오 3세
스테파노 4세에우제니오 2세발렌티노그레고리오 4세세르지오 2세성 레오 4세
베네딕토 3세성 니콜라오 1세하드리아노 2세요한 8세마리노 1세스테파노 5세
포르모소보니파시오 6세스테파노 6세로마노테오도로 2세요한 9세
베네딕토 4세세르지오 3세아나스타시오 3세란도레오 6세스테파노 7세
요한 11세레오 7세스테파노 8세마리노 2세레오 8세베네딕토 6세
요한 14세요한 15세그레고리오 5세베네딕토 8세요한 19세그레고리오 6세
성 레오 9세복자 우르바노 2세복자 에우제니오 3세하드리아노 4세그레고리오 9세첼레스티노 4세
니콜라오 3세보니파시오 8세우르바노 6세보니파시오 9세인노첸시오 7세니콜라오 5세
바오로 2세식스토 4세인노첸시오 8세[15]비오 3세클레멘스 7세바오로 3세
율리오 3세마르첼로 2세그레고리오 13세그레고리오 14세인노첸시오 9세

5.2. 신축된 대성당

1505년에 율리오 2세가 옛 대성당 건물을 헐고 그 자리에 새 성당을 짓기로 결정해 대역사가 시작되었다. 다만 옛 대성당이 바로 다 헐리진 않았고, 필요한 만큼만 헐고 새 대성당을 지어나갔다. 교황 21명이 재위한 120년 동안 쉴새없이 계속된 이 과정에서 최고의 예술가들을 기용하면서 숱한 역사를 남겼다. 예를 들면 천문학적인 공사비를 충당하기 위해 몇몇 지역 교구에서 돈 받고 흔히 면죄부로 불리는 대사를 남발되면서 종교개혁이 발발하였다. 그로 인해 성당의 건축가들도 건축비를 줄이기 위해 고심해야만 했다.[16]

5.2.1. 도나토 브라만테

브라만테가 수석 책임자였던
1506~1513년까지의 교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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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farm1.staticflickr.com/525035475_45e3dc6673_o.jpg
율리오 2세[17] 브라만테가 남긴 설계안으로 추정한 입면도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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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리오 2세가 과감히 새로운 성당의 건설을 결심하고 설계를 공모하였고, 승자는 그의 총애를 받던 건축가인 도나토 브라만테(Donato Bramante)였다. 브라만테는 율리오 2세와 함께 쇠락한 로마의 재개발을 도맡아 했던 인물로, 오래된 건물을 빠르게 철거하고 새 건물을 올려 '파괴자(Il Rovinante, 일 로비난테)'라는 별명을 얻었던 인물이다.

1506년 율리오 2세플라비아 율리아 헬레나성상이 놓일 북서쪽 벽기둥의 초석을 놓으면서 이 성당의 장대한 공사가 시작된다. 르네상스 건축가가 그렇듯 고대 로마의 건축을 연구한 브라만테는, 이 성당의 중앙에 고대 로마의 건축인 판테온을 모델로 한 거대한 을 얹고 싶다고 말했고,[18] 그 아래에는 역시 거대한 기둥벽(pier) 4개가 하중을 지탱하게 설계했다. 그리고 성당의 평면은 동서남북이 비슷한 길이인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삼고, 주변에 작은 돔 4개와 종탑 4개를 배치해 대칭성을 강조했다. 그리스 십자가 평면은 공간이 중앙에 집중되는 '중앙 집중형 건축'의 대표적인 사례인데, 이러한 건축은 방문자에게 거대한 공간으로 깊은 인상을 주기 때문에 당대의 르네상스 건축가들의 주요한 관심사였다.

공사 부지의 지반이 약했기 때문에 브라만테는 본격적으로 건물을 올리기에 앞서 토대부터 단단히 다지는 작업을 했는데, 이 과정에서 콘스탄티누스 이래 천 년간 존속하던 지하에 매장된 역대 교황성인들의 무덤이 파괴되어 오늘날에는 그 흔적이 전혀 남아 있지 않다. 물론 무덤이 파괴되기 전에 유해는 미리 발굴해 옮겨 둔 상태였다. 다만 이 성당의 존재 이유인 베드로의 무덤만은 파괴되지 않았다. 브라만테는 베드로의 무덤을 대성당 내부의 다른 곳으로 옮길 것을 권했지만, 율리오 2세는 "베드로의 무덤이 원위치에 그대로 있어야 한다"고 잘라 말하며 그의 요청을 거부했다. 또한 옛 대성당 건물이 이 시기에 다 철거된 것은 아니다.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미사를 드려야 했기 때문에 옛 건물은 순차적으로 철거되었다.

한편 율리오 2세는 신축될 대성당의 중앙부에 자신이 안장될 거대한 영묘를 세우려고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에게 설계와 조각을 맡겼으나, 곧 교황이 영묘에서 관심을 돌려 미켈란젤로에게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 천지창조를 그리라고 명령하는 바람에 영묘 건설은 흐지부지되었다.[19]

돔이 건설될 중앙부에는 거대한 기둥벽이 세워지기 시작했으나 브라만테는 그 사이에도 계속 설계를 변경했다. 그러던 와중 1513년 율리오 2세가 사망하고 레오 10세가 즉위하면서 브라만테는 수석 책임자 자리에서 교체되었고, 1년 뒤인 1514년 브라만테도 사망한다.

5.2.2. 라파엘로 산치오

라파엘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14~1520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affael_040.jpg 파일:external/www.repro-tableaux.com/xir157492.jpg
레오 10세[20] [21][22]
사진 설명
파일:external/faculty.etsu.edu/raphael.1500s.planforstpeters.jpg
1513년에 레오 10세가 줄리아노 다 상갈로(Giuliano da Sangallo)와 프라 조반니 조콘도(Friar Giovanni Giocondo)를 건축가로 선정하였으나, 1514년에 선정된 건축가 라파엘로 산치오(Raffaello Sanzio)가 이 성당을 설계를 책임지게 되었다. 줄리아노 다 상갈로와 프라 조반니 조콘도는 1515년에 사망하였다.

라파엘로는 브라만테의 설계를 전면적으로 수정했다. 라파엘로의 최종 설계에서는 브라만테가 남긴 은 유지되었지만, "신자들을 수용할 공간이 필요하다"는 사제들의 요구를 받아들여 평면구조를 그리스 십자가에서 라틴 십자가로 바꿔 신랑의 길이를 늘렸다. 이외에도 외벽의 벽체를 보다 두텁게 계획하였고 기하학적으로 단순하게 만들어 그 경계를 선명하게 드러냈다.[23] 하지만 그가 단독 책임자로 설계에 참여한 지 5년 동안 좋지 않은 주변 상황과 교황의 소극적 태도로 인해 라파엘로의 안대로 공사는 추진되지 못했고, 라파엘로는 브라만테가 남긴 중앙의 벽들과 기초를 보강하는데 시간을 보내야만 했다. 결국 1520년에 라파엘로가 젊은 나이에 사망했다.

5.2.3. 발다사레 페루치

페루치가 수석 책임자였던 1520~1527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640px-Sack_of_Rome_of_1527_by_Johannes_Lingelbach_17th_century.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affael_040.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Hadrian_V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ope_Clement_VII.jpg
레오 10세 하드리아노 6세 클레멘스 7세 1527년 로마 약탈[24]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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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요절하자 1520년에 다음 주 건축가로 발데사레 페루치(Baldassare Peruzzi) 및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반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25] 안드레아 산소비노(Andrea Sansovino)가 임명되었다.

페루치는 라파엘로의 설계안을 이어받아 작업하게 되었다. 그동안 1521년 레오 10세가 사망하고 하드리아노 6세(1522-1523 재위)의 짧은 재위기간을 거쳐 클레멘스 7세가 즉위했다. 1527년 신성 로마 제국황제 카를 5세사코 디 로마로 압박하자 클레멘스 7세는 산탄젤로 성로 피신한 뒤 7달 동안 사실상 연금당했고, 로마는 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만신창이가 되었다. 아직 공사중인 성 베드로 대성당 앞 계단에서는 카를 5세의 제국군이 교황청에 고용된 스위스 근위대의 항전을 제압했고, 하느님의 심판을 예언하며 잘못을 회개하라고 외친 구약성서의 예언자들을 천장화에 그려 넣어 미켈란젤로교황청에 경종을 울리려 한 지 고작 15년밖에 지나지 않은 시스티나 경당도 제국군과 폭도들의 약탈을 피할 수 없었다. 이런 뒤숭숭한 시대적 상황과 열악한 재정 문제 때문에 성당 공사는 제대로 진행될 수 없었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 페루치는 1534년부터 보다 독자적인 설계안을 내놓게 된다. 그는 라파엘로의 설계안을 대체적으로 유지했으나, 라틴 십자가 평면에서 그리스 십자가로 회귀해 신랑(nave)의 길이가 다시 축소되었다. 또한 페루치는 이 성당의 내부 공간을 좀 더 섬세하게 나누고, 성당 외부에 이를 둘러쌀 부속 건물들을 설계했으나 이는 다소 지나치게 복잡한 안이라고 평할만 하다. 그러나 페루치는 자신의 설계안을 실현시키지 못한 채 1536년 사망한다. 1536년의 현장을 그린 그림[26]

5.2.4.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반네

안토니오 다 상갈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20~1546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s-media-cache-ak0.pinimg.com/845773e8dd1b345000ffe23256378310.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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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레멘스 7세[27] 바오로 3세[28] 안토니오 다 상갈로의 설계안에 따른 입면도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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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36년 발데사레 페루치 사망 이후 남아있던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반네(Antonio da Sangallo il Giovane)[29]는 천재적인 감각의 건축가라기보다는 사교적이고 사업적 수완이 뛰어난 건축가였고, 그답게 전임자들의 설계안을 절충하여 융합시키고자 했다.

그는 전임자 브라만테, 라파엘로, 페루치의 설계안이 의도한 특징을 고루 살렸는데, 본당은 브라만테와 페루치가 의도했던데로 그리스 십자가로 회귀한듯 했지만 정면 쪽에 본당과 연결된 또 다른 건물을 덧붙여 사실상 긴 신랑처럼 만들어 진입로가 길어지게 만들었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녀 그리고 평면의 형태 자체는 라파엘로의 설계에 가까웠다. 한편 정면의 양쪽에는 높은 종탑을 배치했으며, 외벽에는 열주들이 층을 이뤄 늘어서게 하였고, 브라만테가 처음 구상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을 원안보다 더 크게 만들고 드럼 바깥에도 열주를 2층으로 둘러 웅장함을 강조했다. 이를 바탕으로 그가 제작한 목재 모형은 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에 소장되어 있다.

1527년부터 중단된 공사는 1539년이 되어서야 다시 진행되기 시작했다. 상갈로는 브라만테가 남긴 기둥벽(pier)들을 개보수하며, 자신의 안대로 공사를 해 나아갔다.[30] 이 공사가 진행되는 동안 클레멘스 7세가 1534년 사망하고 바오로 3세가 선출됐다. 바오로 3세 시대에도 상갈로는 공사를 이어갔지만, 1546년에는 상갈로가 사망한다.

5.2.5.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미켈란젤로가 수석 책임자였던 1547~1564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cdn.quotationof.com/pope-paul-iii-4.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86px-Girolamo_Sicciolante_-_Paus_Julius_III.jpg 파일:Marcellus II.jpg 파일:Paulus IV.jpg 파일:external/www.papalartifacts.com/1279826529_pius-iv.jpg
바오로 3세 율리오 3세 마르첼로 2세 바오로 4세 비오 4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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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www.carlovirgilio.it/peter-ritig-papa-paoloIII-farnese-visita-michelangelo-nel-suo-studio.jpg
[31]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방문한 바오로 3세[32]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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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46년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조반네가 사망하자 다음 수석 책임자로 내정된 사람은 줄리오 로마노(Giulio Romano)였지만 3개월이 지나기 전에 사망해버렸고, 그 다음으로 내정된 자코포 산소비노(Jacopo Sansovino)가 직위를 거절하자, 바오로 3세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Michelangelo Buonarroti)에게 억지로 자리를 떠맡겼다. 당시에 이미 70세를 넘긴 미켈란젤로에게는 내키지 않는 작업이었으나 곧 마음을 바꿔 정력적으로 공사에 참여했으며, 그의 설계안은 성 베드로 대성당 건설에서 중요한 의의를 갖는다

그는 "상갈로의 설계대로 건축할 경우 언제 공사가 끝날지 모르는 데다가 비용은 비용대로 눈덩이처럼 불어날 게 뻔하다"고 지적했다. 또한 "외부에는 필요 이상으로 열주가 많이 늘어서 있고, 내부는 과도하게 분할되어 조명이 불충분한 탓에 어둡고 은밀한 장소가 너무 많아 범죄의 소굴로 전락할 것"이라고 비판 디스했다. 자신이라면 상갈로보다 더 적은 비용을 들여 더 멋진 건물을 더 빠르게 지을 수 있다고 장담하면서, 미켈란젤로는 기존 인사에 대한 물갈이 작업에 들어갔다.

미켈란젤로가 상갈로 휘하에서 공사에 참여했던 건축가 난니 디 바치오 비기오(Nanni di Baccio Bigio)[33]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을 내쫓고, 설계에 개입하려는 건축 위원회의 시도를 저지하는 강경한 태도로 일관하자, 상갈로 지지자를 포함한 기존의 공사 관계자들이 강하게 반발하면서 미켈란젤로와 대립각을 세웠다. 일부에서는 "미켈란젤로가 노망이 났다"거나, "나이가 너무 많아 책임자가 된다 한들 얼마 못가서 죽을 거다"라고 악담을 퍼부었으나 정작 미켈란젤로는 말짱한 정신으로 17년 동안 공사를 담당했다.

결국 바오로 3세는 불협화음을 끝내기 위해 대성당 공사에 관한 전권을 미켈란젤로에게 부여하면서, "건축 당국은 오직 미켈란젤로의 설계에 따라서만 공사를 진행해야 하며, 그 누구도 설계에 간섭할 수 없다"고 천명했다. 이에 미켈란젤로는 "보수를 받지 않고 공사에 임하겠다"고 밝혀 교황의 신뢰에 응답함과 동시에, 공사비로 사욕을 채우려 한다는 상갈로 지지자들의 비방을 차단했다. 그리고 공사중으로 남아있던 상갈로 설계에 따른 외벽들을 철거하여 그의 설계를 걷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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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에 참여했던 이전까지의 어떠한 건축가들도 받지 못한 특권을 얻은 미켈란젤로는, 기대에 부응하듯 천재적인 감각을 통해 르네상스 건축의 종지부를 찍는 걸작을 내놓는다.

그는 작은 기둥들이 늘어선 상갈로의 설계를 거대 기둥(giant order)들이 쌍으로 늘어선 외벽으로 바꿔 가톨릭의 본산에 걸맞은 거대 기념비적 건축물의 장중한 외형을 만들었다.[34] 건축물의 평면 계획 역시 기하학적으로 아름답게 정리하고, 내부의 공간 구획을 최대한 단순, 집중화시켜 중앙 집중형 건축의 본질에 걸맞은 거대한 공간을 창출하였다. 성당 정면에는 신전처럼 기둥들이 늘어선 열주랑으로 이루어진 현관을 붙였다.

그러나 그가 전임자들의 모든 것을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는 전임자들이 남긴 설계안들을 참고해 신랑의 길이를 줄여 성당의 평면구조를 다시금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 형태로 회귀했다고 볼 수 있다. 미켈란젤로는 브라만테의 그리스 십자가와 돔을 유지시켜 중앙 집중형 공간의 웅장함으로 가톨릭의 총본산다운 권위를 보여주려고 하였다. 이는 성 베드로 광장에서 성당을 올려다 보았을 때 거대한 중앙 돔이 관람자의 시선에 곧바로 들어오게끔 한 것이기도 하다. 반면 미켈란젤로는 건물 외각에 있는 벽체들이 지나치게 얇고 분절되어 있어 유약해보이는 브라만테의 설계를 답습하지 않고 외벽을 두텁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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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켈란젤로는 기존의 설계안을 참고해 역시 다시 설계했다. 2겹의 벽돌 외피로 된 반구 형태의 돔은 16개의 리브로 둘러져 있으며 그 아래의 원통형 드럼에는 2겹으로 늘어선 기둥들이 리브 아래에 위치한 형태였다.[35] 이를 위해 그는 조카를 통해 피렌체에 있는, 당시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였던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돔을 측정하였다. 자존심 강한 미켈란젤로였지만 그의 돔이 건설 당시부터 경이로운 위업으로 평가받은 필리포 브루넬레스키의 돔을 구조적으로 능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실제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내부 지름은 41.47m로, 피렌체 대성당의 돔의 43m보다 약간 작다.

아흔이 다 된 고령의 미켈란젤로는 자기가 죽은 후에 책임자 자리를 넘겨 받을 후임자가 자기가 그랬던 것처럼 설계를 임의로 수정하는 일이 벌어지지 않도록 건물의 중요한 부분들을 동시에 공사했다. 1564년, 돔을 받치는 원통형 벽체 부분인 드럼의 일부만 만들어진 상태에서 미켈란젤로가 사망하자 비오 4세(1559-1565 재위)는 "미켈란젤로가 결정한 것에 대해서는 무엇 하나라도 절대 바꾸지 말라"고 명하고, 미켈란젤로의 조수 자코모 바로치 다 비욜라(Giacomo Barozzi da Vignola)를 미켈란젤로의 친구이자 열렬한 찬미자였던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와 함께 감리로 임명해 미켈란젤로의 설계안대로 공사를 진행했다.

5.2.6. 자코모 델라 포르타

델라 포르타가 수석 책임자였던 1585~1602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El_Greco_050.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egory_XIII.jpg 파일:external/cdn.dipity.com/f9fd2ed895fd4b136520ebbf65e92138_1M.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rban_VI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GregorioPPXV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Innocent_IX_2.jpg
비오 5세[36] 그레고리오 13세[37] 식스토 5세 우르바노 7세 그레고리오 14세 인노첸시오 9세
사진 단면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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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external/4.bp.blogspot.com/St.PetersDomeSection.jpg
비오 4세의 후임자인 비오 5세는 1573년에 자코모 델라 포르타(Giacomo della Porta)를 건축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그는 성당의 세부적인 장식을 조금 변화시키거나 추가하는 정도에 그쳐 성당의 디자인에는 큰 변화를 주지 않았지만, 조수 도메니코 폰타나(Domenico Fontana)와 함께 성당과 미켈란젤로의 거대한 돔을 실체화시킨 인물이다.

델라 포르타가 있는 동안 성 비오 5세가 사망하고 그레고리오 13세(1572-1585 재위)를 거쳐 식스토 5세가 즉위했다. 1588년에는 드럼 외에 돔이 거의 공사되어 있지 않았지만, 인력을 집중 투입하여 놀랍게도 22개월만 소모하고 1590년에 돔을 완공한다. 이는 식스토 5세의 치세 마지막 해였으며, 성대한 장엄미사(Solemn Mass)와 불꽃놀이로 기념했다고 한다. 외부 직경 42m, 내부 직경 41.47m, 높이 138m에 달하는 이 거대한 돔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높은' 돔이었다.[38]

다만 그는 미켈란젤로가 디자인한 반구형 돔이 가진 높이를 다소 높게 수정하여 돔의 곡률을 피렌체 대성당의 돔에 가깝게, 다소 뾰족하게 고쳤다.[39] 이외에는 미켈란젤로가 설계한대로, 피렌체 대성당의 돔과 비슷하게 이중의 표피를 가진 구조를 만들었으며, 벽돌을 헤링본 방식으로 맞물리게 쌓아 돔을 건설하였다. 그리고 거대한 철제 사슬 고리들로 돔을 죄어 돔이 하중으로 파열되는 것을 막았다

이후 단명한 교황인 우르바노 7세를 거쳐 그레고리오 14세 때 돔 위의 첨탑인 랜턴까지 완성되었다.

5.2.7. 카를로 마데르노

마데르노가 수석 책임자였던 1602~1629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pst_Clemens_VIII_Italian_17th_century.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Leo_XI_2.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Paul_V_Caravaggio.jpg
클레멘스 8세 레오 11세 바오로 5세[40]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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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대한 돔이 완공된 이후에도 막바지 공사는 진행되었고, 임기가 짧았던 그레고리오 14세인노첸시오 9세를 거쳐 클레멘스 8세(1592-1605 재위)에 이르러서야 대성당 내의 첫 십자가를 세운 것을 기념하는 성대한 축하행사가 거행되었다. 그리고 다시 레오 11세를 지나 바오로 5세(1605-1621 재위)가 즉위했다. 바오로 5세는 돔의 공사에 참여했던 도메니코 폰타나의 조카인 카를로 마데르노(Carlo Maderno)를 수석 책임자로 임명했다. 바오로 5세가 선출된 지 5개월이 지난 1605년 9월 17일, 미사 도중 옛 대성당의 일부가 붕괴되자 그때까지 남아 있던 옛 대성당 건물은 모두 철거되었다.

마데르노가 수석 책임자로 임명될 당시 성당 건물은 신랑과 정면의 공사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신랑 길이를 늘리지 않은 그리스 십자가 평면으로 할 것인지 아니면 신랑 길이를 늘린 라틴 십자가 평면으로 할 것인지를 둘러싼 논란이 있었다. 이 과정에서 '새로운 성당 건물은 옛 대성당이 있던 자리를 모두 포함해야 한다.'는 자신의 요구에 따른 마데르노의 설계를 채택한 바오로 5세와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고수해야 한다"고 주장한 마페오 바르베리니 추기경(미래의 교황 우르바노 8세)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

바오로 5세가 마데르노의 설계의 당위성을 주장하면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이를 반박하며 "미켈란젤로의 설계에서도 교황이 원하는 바를 얼마든지 구현할 수 있다."라고 지적하는 형식이었는데, 열띤 논쟁 끝에 바르베리니 추기경이 "다른 교황이라면 미켈란젤로의 설계를 지키기 위해 마데르노의 설계를 파기했을 것"이라고 말하자, 이에 대해 바오로 5세는 "짐은 앞으로 어떤 교황도 마데르노의 설계를 파기하지 못하도록 하겠다"고 맞받아치며 자신의 의도대로 공사를 밀어 붙였다.

이러한 논쟁에는 당시 벌어지던 종교개혁의 영향도 있었는데, 원래 가톨릭에서는 사제와 신자의 위계를 강조하면서 신자들을 수용하기 위해 긴 평면의 라틴 십자가형 성당을 선호하였으나 개신교에서는 위계 없이 목사의 설교를 잘 설파하기 위해 교인들이 중앙으로 모일 수 있는 그리스 십자가형 평면 예배당을 선호하였다. 그렇기에 이 민감한 시기에, 가톨릭의 상징이 될 이 성당을 라틴 십자가로 설계하기로 결정했던 것.[41]

마데르노는 종탑 2개와 교황 전용 발코니가 설치된 화려한 정면을 설계했고, 기존의 신랑을 확장시켜 더욱 웅장하고 권위있게 보이는 효과를 극대화시켰다. 이 공사는 1607년에 시작해 1614년에 끝났는데, 정면부터 지어졌으며 인력을 늘려 이전보다 공사를 서둘러 진행했다.

그러나 신랑의 확장으로 인해 정면부가 돔을 가리게 되었고, 성당에서 어지간히 멀리 떨어지지 않고는 광장에서 미켈란젤로의 돔을 올려다보는 것이 어렵게 되었다는 비판을 시공 당시부터 오늘날까지 받게 되었다.[42] 그렇지만 그렇게 하라고 명령한 사람이 다름 아닌 교황이었기 때문에 마데르노로서도 뾰족한 수가 없었다. 애초에 마데르노에게 미켈란젤로에 부여되었던 것과 같은 자유로운 설계상의 재량권이 없었다.

마데르노는 로마에 있는 성 수산나 성당 정면을 바로크 양식으로 설계했던 경험을 되살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을 설계했지만, 워낙 대성당 정면의 너비가 길어 비례가 다르고, 크기 차이 있어 상대적으로 작은 성당인 성 수산나 성당의 정면이 가졌던 특유의 미적 효과가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는 다소 떨어진다는 평을 받는다.[43]

성당 정면의 좌 우 지반의 강도가 달라 열악했기 때문에 정면에는 작은 균열들이 생겼으나, 더 커지진 않았다. 그러나 1618년에 정면의 좌 우에 종탑(Campanile)을 만드는 공사 중 지반에서 샘이 발견되어 결국 마데르노는 종탑을 정면 높이 이상으로 올리지 못했다.

한편 교황 율리오 2세 때 옛 대성당 지하에서 발굴했던 역대 교황성인들의 유해 및 보물과 예술품이 바오로 5세의 명령에 따라 새로운 대성당의 지하 묘소로 속속 이장되었다.

5.2.8. 잔 로렌초 베르니니

베르니니가 수석 책임자였던 1629~1674년까지의 교황
파일:external/www.nndb.com/gregory-xv-1-sized.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Urban_VIII.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Retrato_del_Papa_Inocencio_X._Roma%2C_by_Diego_Vel%C3%A1zquez.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391px-Giovanni_Battista_Gaulli_-_Portrait_of_Pope_Alexander_VII_%28Fabio_Chigi%29_-_Walters_37598.jpg 파일:external/cultured.com/7974_o_carlo_maratta.jpg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Clement_X.jpg
그레고리오 15세[44] 우르바노 8세[45] 인노첸시오 10세[46] 알렉산데르 7세[47] 클레멘스 9세[48] 클레멘스 10세[49]
사진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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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당의 전체적인 모습이 거의 완성되어 가는 동안 바오로 5세가 사망하고 그레고리오 15세(1621-1623 재위)를 거쳐 우르바노 8세(1623-1644 재위)가 즉위했다. 1626년 11월 18일에 대성당의 축성식이 거행되니, 성 실베스테르 1세가 옛 대성당의 정초식을 거행한 326년 11월 18일로부터 정확히 1,300년 뒤였다. 우르바노 8세는 1626년 잔 로렌초 베르니니(Giovanni Lorenzo Bernini)를 마데르노의 후임 수석 책임자로 선정했다. 베르니니는 교황의 전폭적인 지원에 따라 이후 반 세기 가까이 성당의 세부적인 장식을 설계했다.

우선 돔 아래에 있는 중앙 제단과 제단 위를 덮은 발다키노를 1625년부터 1633년까지 8년여에 걸쳐 제작했다. 마데르노의 설계를 토대로 베르니니가 완성한 발다키노는 당시까지 보지 못한 새로운 것이었기에 '발다키노답지 않다.'는 비판을 받았지만 우르바노 8세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또한 베르니니는 중앙 제대 주변의 네 벽감을 장식하기 위해 1629년부터 1640년에 걸쳐 성인들의 대형 성상을 만들었다. 마데르노가 정면 높이까지만 만들어 놓고 아직 완공하지 못한 종탑을 다시 올리기로 결정하고 베르니니의 설계를 1636년 채택했다. 베르니니는 정면과 종탑을 분리시키려고 했지만[50] 이를 승인받지는 못했고, 마데르노처럼 정면과 이어진 종탑으로 변경할 수밖에 없었다. 완공 상상도. 교황과 건축위원회의 승인을 받은 뒤, 베르니니는 1638년부터 마데르노의 종탑보다 더 크고 무거운 야심찬 종탑을 건축하기 시작해 1641년 남쪽의 종탑(좌)은 거의 완성했으나, 남은 부분의 형태를 두고 논란이 일어나 공사가 멈추었다. 이런 상황에서 베르니니를 후원한 우르바노 8세가 1644년 사망하고, 베르니니에게 냉담했던 인노첸시오 10세(1644-1655 재위)가 즉위했다.

새 교황이 즉위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종탑 때문에 정면에 있던 마데르노 시절부터 존재하던 균열이 크게 벌어졌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리하여 인노첸시오 10세는 로마의 건축가들을 불러들여 종탑을 어떻게 해야 할지 토론하도록 시켰다. 여기에 참여한 베르니니의 라이벌이었던 건축가 프란체스코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는 베르니니를 신랄하게 혹평했고, "종탑을 놔두면 정면부까지 붕괴할 것입니다."라고 비판했다. 보로미니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결국 종탑은 1646년 모두 철거되었고, 철거 비용도 베르니니가 지불해야만 했다. 이는 당대의 큰 스캔들이었다. 승승장구하던 베르니니 최대의 실패가 되었고 결국 이전부터 좋지 않았던 베르니니와 보로미니의 관계는 최악으로 치달았다.[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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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인노첸시오 10세를 이은 알렉산데르 7세(1655-1667 재위)는 베르니니가 그동안 쌓은 성과를 높게 평가하여 그에게 다시 중책을 맡겼다.

이에 따라 그는 성 베드로 광장을 1656년에 착공해 1667년에 완공했다. 광장 입구에서부터 성당 입구까지의 길이가 300 m, 폭 246 m에 달하는 성 베드로 광장 둘레에는 높이 16 m인 대리석 기둥 284개가 각각 4열로 늘어선 대회랑이 있고, 그 위에는 3.2 4m 높이인 역대 교황과 성인들의 성상 140개가 장식되어 있다. 카를로 마데르노가 미켈란젤로의 설계안에 추가시킨 신랑에 이 가려지게 되어 관람자가 성당 정면에서 멀찌감치 떨어지지 않고서는 돔을 제대로 볼 수 없게 된 가운데, 베르니니는 광장의 평면을 원형이 아니라 타원형으로 설계하였다.[52] 광장 가운데에는 1586년에 식스토 5세가 네로 경기장 한가운데 있던 것을 옮겨온 오벨리스크가 있다.[53] 그 양쪽에는 분수대가 하나씩 있는데, 오른쪽은 카를로 마데르노의 작품이고 왼쪽은 카를로 폰타나의 작품이다.

이외에도 1666년 베드로의 의자를 제작하고 1676년 성체 경당의 장식을 맡아 시공했는데 이것이 그가 참여한 마지막 설계였다. 베르니니는 오랜 기간 수석 책임자를 맡으면서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 베드로 대성당을 만드는 데 기여하고 1680년,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5.3. 보수 공사

성 베드로 대성당은 워낙 건물의 규모가 큰 탓에, 작게는 모자이크화에 사용된 돌조각을 갈아끼우는 것부터 크게는 건축 부재를 보수하는 것에 이르기까지, 성당 곳곳에서 크고 작은 보수 공사가 끊이지 않고 진행된다.

첫 건축가 도나토 브라만테는 야심찬 설계에 따라 중앙부에 거대한 기둥벽(Pier) 4개를 남기고 죽었는데, 이후에 공사를 맡은 건축가들은 불안감에 시달리며 끊임없이 이것을 보수해야만 했다. 기둥벽 사이의 거리가 선례없이 넓었기에 실제로 이 위에 거대한 돔과 볼트 천창이 올라갈 수 있을지에 대한 우려가 있었다. 또한 브라만테가 죽은 이후 기둥벽에서 몇 번의 시기에 큰 균열이 발생하였고, 그 시기의 건축가들은 당대의 콘크리트를 균열에 흘려넣는 방법 등을 사용하여 균열을 매꾸고 기초를 더 튼튼하게 보강해야만 했다. 결국 미켈란젤로는 기둥벽을 더 두텁게 보강하면서 기둥벽 사이의 거리도 다소 좁혔다.[54]

건설된 에서도 다수의 균열이 발견되었다. 원래 1590년에 델라 포르타가 이 거대한 돔을 완공하면서 설치한 각각 1만 6500~1만 8천 파운드에 달하는 큰 철제 사슬 고리 3개가 돔의 팽창을 막기 위해 돔을 죄었고다. 이후로 2개를 더 설치했다.

그러나 고리를 5개나 걸었음도 불구하고 돔에는 균열이 생겼다. 1636년에는 돔에 균열이 생긴 것이 밝혀졌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루머가 있다. 베르니니가 중앙부의 기둥벽(pier) 안에 벽감(niche)과 계단을 파다가 돔에 균열이 생겼다. 이후에 미켈란젤로가 '벽감 같은 것을 파느라 기둥벽을 건드리지 말라.'고 쓴 비망록이 발견되었고[55] 베르니니가 돔의 균열을 수습하려고 철제 고리를 돔에 씌웠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교황이 분노해서 베르니니를 교수형에 처하려다가 겨우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의 분수를 만드는 것으로 속죄하게 했다는 이야기를 담은 18세기 편지가 있다.[56]

이러한 풍문이 돔의 균열이 발견된 1636년부터 돌았었지만, 이는 베르니니의 정적이었던 인물(Ferrante Carli)이 돔의 균열을 발견하고는 베르니니 탓을 한 것에 기인한다. 세간의 소문과는 달리 실제로는 베르니니의 작업 때문에 돔의 균열이 생기진 않았고 그도 처벌받지 않았다. 여담으로 베르니니가 이 성당 중앙부 벽감에 있는 성녀 베로니카(St. Veronica) 성상의 조각가 프란체스코 모치(Francesco Mochi)에게 "베로니카 성상의 휘날리는 성스러운 베일(veil)을 날리는 바람이 어디서 부냐?" 하고 묻자 모치는 "'네가 만든 돔의 균열'에서 바람이 부는 거야."라고 비꼬며 대답했다고 한다.

18세기 들어서는 하중을 견디지 못하고 돔이 팽창하면서 균열이 다수 생겼음이 발견되었다. 이에 철제 고리 5개를 추가했지만 이것을 설치하는 과정에서 16세기의 것 하나가 파손되었음이 드러나 1개를 추가로 설치했다. 그래서 지금은 고리 총 10개가 설치되었고 돔의 구조는 안정된 듯하다.

이외에도 완공 이전에 종탑 기초에 균열이 생겼다는 설명을 보면 짐작할 수 있듯이, 전면부 왼쪽 상단을 비롯한 여러 곳에 균열이 다수 있다. 강에 가까운 등 이유로 대성당의 지지 기반이 열악한 데다가, 전면부의 좌우 지면의 강도가 달라 일부분이 침강하면서 균열이 발생한 것. 원래 로마 시대의 구 성당을 지을 때 베드로의 무덤이 있는 언덕을 보존하기 위해 언덕의 일부분을 깎아내고 낮은 곳을 채워 평탄한 부지를 마련했으며, 정면이 세워질 때만 해도 정면부 좌측의 지형이 우측보다 더 낮았다. 샘도 있어서 종탑을 만들 때 지면 속에 말뚝 등을 박아넣었지만, 당시 기술로는 문제를 완전히는 해결할 수 없었던 모양이다. 다만 종탑을 짓기 위해 자재를 올릴 때 균열이 커졌고 종탑을 제거하자 균열이 더 벌어지지 않았다는 것을 보면, 지금은 그냥 현상유지가 되는 듯하다. 물론 균열을 막는 보수공사도 있었다.

이외에도 건물 외부의 성상을 고정하기 위해 박은 철제 자재들이 부식되어 성상들이 불안정해지고 성상도 부식시키는 문제 등도 있다. 특히 성당의 정면부는 카를로 마데르노가 1607~14년 완공한 이래 3세기 넘는 시간이 지나면서 산성비와 같은 환경오염 등으로 석재에 금이 가거나 빛이 바래고 부식되었다. 이를 개선하고자 성 베드로 대성당 관리소(Reverenda Fabrica Sancti Petri)미국에서 1882년 설립된 세계 최대 규모의 가톨릭 신심우애단체인 콜럼버스 기사단(Knights of Columbus)의 지원을 받아 1985~1986년 성당 정면부 보수공사를 진행했다. 요한 바오로 2세는 콜럼버스 기사단의 지원에 감사를 표하는 의미로, 대성당 정면부 위에 올려진 구세주 그리스도상이 왼팔로 안고 있던 청동 십자가를 새 것으로 교체하면서 기존의 청동 십자가를 기사단에 선물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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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사 이전 공사 이후

6. 주요 건축

성 베드로 대성당 내부에는 미켈란젤로피에타를 비롯해 수많은 성상들이 있고, 모자이크로 유화를 재현한 호화로운 벽화도 많이 있다. 그야말로 대성당의 한구석 한구석 모두 예술품이라고 할 만하다. 이 성당의 실내 장식은 원래 르네상스 양식에 따라 지금보다는 덜 화려했었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조금씩 조각과 모자이크 등이 추가되며 바로크 양식으로 변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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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역대 수석사제

에우제니오 파첼리 추기경(1930~1939년) 이후 역대 성 베드로 대성당 수석사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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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 테데스키니
(1939~1959)
D. 타르디니
(1959~1961)
P. 마렐라
(1961~1983)
A. 사바타니
(1983~1991)
V. 노에
(1991~2002)
F. 마르치사노
(2002~2006)
A. 코마스트리
(2006~현재)

성 베드로 대성당,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당,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 등 로마 4대 대성전에는 수석사제(archipresbyter)가 있어서 각 대성전의 본당사제로 재직한다. 기록이 남아 있는 1053년부터의 성 베드로 대성당 역대 수석사제는 아래와 같으며, 이들 중 3명이 훗날 교황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교황으로 선출된 수석사제는 굵게 표시했다.

수석사제 = 본당사제, 즉 주임신부가 아니다.

이들이 주임신부 또는 본당신부라고 해서 현재 한국 가톨릭에서 각 본당별로 있는 단순한 주임신부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

4대 대성전은 교황직속 성당들로서, 교회법에 따르면 교황은 매주일마다 이들 성당에서 1번의 미사를 집전해야 할 의무가 있다.

이는 전 세계 가톨릭 교구에서 교구장 주교가 미사 예물을 받지 않고 교구 신자들을 위해 교중 미사를 집전해야할 의무가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따라서 아래에 서술된 주임신부들은 가톨릭 교회에서 "수석사제"라는 이름으로 부르며, 수석 사제 아래에 별도의 주임신부가 있으며, 담당업무가 나뉘어져 있는 교구 소속 보좌신부나 특별임무나 대성전 내의 특별구역 관리를 맡는 수도회 신부들이 주임신부와 수석사제를 보좌한다.

따라서 수석사제는 교황의 이름으로 각자의 임무를 담당하는 사제들과 대성전 주임신부로 구성된 사제단의 수석의 위치와 대표라는 성격과 지위를 지닌다.

이들 수석사제는 교황의 대리자로서 대성전을 관리하고, 교황의 이름으로 미사를 대리집전하는 역할을 하므로, 가톨릭 교회건물 지위등급 10종류에 따른 서열기준에 맞춰서 추기경이나 주교가 임명되거나 주교가 아니라면 주교와 비슷한 예우를 받는다.

이를 조선시대로 비교하면, 선왕들의 기일에 조선 조정에서 별도의 관리나 왕릉을 지키는 능지기 참봉에게 왕이 명령을 내려서 왕의 이름으로 다례나 기제례를 집행했던 예를 비춰서 이해하면 쉽다.
수석사제 출생 사망 재임시작 재임종료 재임기간
조반니(Giovanni)??1053?
데우스데디트(Deusdedit)??1092?
아초(Azzo)??110311041년
루스티코 데 루스티치(Rustico de' Rustici)??1128경1131?3년?
그리포네(Griffone)??113811391년
피에트로(Pietro)??1140경?11444년?
베르나르드(Bernard)??1145?1176?31년?
조반니 다 수트리(Giovanni da Sutri)?11801176/7811802년/4년
우골리노 디 세니(Ugolino di Segni)??1191/1200경12066년/15년
귀도 피에르레오니(Guido Pierleoni)??1206/7122821년/22년
스테파노 콘티(Stefano Conti)??1229125425년
리카르도 안니발디(Riccardo Annibaldi)1200/12101276.10.41254127622년
조반니 가에타노 오르시니(Giovanni Gaetano Orsini)1225경1280.8.22127612771년
마테오 오르시니 로소(Matteo Orsini Rosso)??1277/1288130517년/28년
나폴레오네 오르시니 프란지파니(Napoleone Orsini Frangipani)12631342.3.241306134236년
안니발도 디 체카노(Annibaldo di Ceccano)??1342135012년
기욤 드 라 주지(Guillaume de La Jugie)13171374.4.28136213653년
리날도 오르시니(Rinaldo Orsini)??136613748년
위그 드 생마르샬(Hugues de Saint-Martial)??137413784년
필리프 달랑송(Philippe d'Alençon)??1378139719년
크리스토포로 마로니(Cristoforo Maroni)??139714047년
안젤로 아차이올리(Angelo Acciaioli)1349.4.151408.5.31140414084년
안토니오 칼비(Antonio Calvi)??140814113년
페드로 페르난데스 데 프리아스(Pedro Fernandez de Frias)??141214208년
안토니오 코레르(Antonio Correr)1369.7.151445.1.191420143414년
조르다노 오르시니(Giordano Orsini)1360/13701438.5.29143414384년
줄리아노 체사리니(Giuliano Cesarini)13981444.11.10143914445년
피에트로 바르보(Pietro Barbo)1417.1.231471.7.261445146419년
리처드 올리비에(Richard Olivier)??146414706년
조반니 바티스타 제노(Giovanni Battista Zeno)1439/14401501.5.71470150131년
후안 로페즈(Juan López)1455경1501.8.51501.5.111501.8.586일
이폴리토 데스테(Ippolito d'Este)1479.3.201520.9.31501152019년
마르코 코르나로(Marco Cornaro)??15201년 미만
프란치오토 오르시니(Franciotto Orsini)14731534.1.101520153010년
프란체스코 코르나로(Francesco Cornaro)14781543.9.261530154313년
알레산드로 파르네세(Alessandro Farnese)[57]1520.10.51589.3.21543158946년
조반니 에반젤리스타 팔로타(Giovanni Evangelista Palotta)??1589162031년
스치피오네 카파렐리-보르게세(Scipione Caffarelli-Borghese)1577.9.11633.10.21620163313년
프란체스코 바르베리니(Francesco Barberini)1597.9.231679.12.101633166734년
카를로 바르베리니(Carlo Barberini)1630.6.11704.10.21667170437년
프란체스코 네를리(Francesco Nerli)??170417084년
안니발레 알바니(Annibale Albani)1682.8.151751.9.211712175139년
헨리 베네딕트 스튜어트(Henry Benedict Stuart)[58]1725.3.21807.7.131751180756년
로무알도 브라스키-오네스티(Romualdo Braschi-Onesti)1753.7.191817.4.3018071817.4.3010년
알레산드로 마테이(Alessandro Mattei)1744.2.201820.4.2018171820.4.203년
피에트로 프란체스코 갈레피(Pietro Francesco Galleffi)1770.10.271837.6.181820.5.51837.6.1817년 51일
자코모 주스티니아니(Giacomo Giustiniani)1769.12.201843.2.241837.7.11843.2.245년 239일
마리오 마테이(Mario Mattei)1792.9.61870.10.71843.3.111870.10.727년 217일
니콜라 클라렐리 파라치아니(Niccola Clarelli Parracciani)1799.4.121872.7.71870.10.81872.7.71년 273일
에도아르도 보로메오(Edoardo Borromeo)1822.8.31881.11.301872.7.10.1881.11.309년 145일
에드워드 헨리 호워드(Edward Henry Howard)1829.2.131892.9.161881.12.121892.9.1610년 281일
프란체스코 리치 파라치아니(Francesco Ricci Paracciani)1830.6.81894.3.91892.10.61894.3.91년 154일
마리아노 람폴라 델 틴다로(Mariano Rampolla del Tindaro)1843.8.171913.12.161894.3.211913.12.1619년 274일
라파엘 메리 델 발(Rafael Merry del Val)1865.10.101930.2.261914.1.121930.2.2616년 49일
에우제니오 파첼리(Eugenio Pacelli)1876.3.21958.10.91930.3.251939.3.28년 344일
페데리코 테데스키니(Federico Tedeschini)1873.10.121959.11.21939.3.141959.11.220년 238일
도메니코 타르디니(Domenico Tardini)1888.2.291961.7.301959.11.141961.7.301년 259일
파올로 마렐라(Paolo Marella)1895.1.251984.10.151961.8.141983.2.821년 183일
아우렐리오 사바타니(Aurelio Sabattani)1912.10.182003.4.191983.2.81991.7.18년 145일
비르질리오 노에(Virgilio Noè)1922.3.30.2011.7.241991.7.12002.4.2410년 300일
프란체스코 마르치사노(Francesco Marchisano)1929.6.242014.7.272002.4.242006.10.104년 170일
안젤로 코마스트리(Angelo Comastri)1943.9.17현재2006.10.10현재현재

8. 관람 시 주의사항

로마 시의 모든 성당들과 같이 성 베드로 대성당의 입장이 무료다.[59] 따라서 유료인 바티칸 미술관으로 입장해서 대성당으로 들어가는 게 아닌 한, 무조건 줄을 서서 들어가야 한다. 종종 가이드를 자처하며 "줄을 생략하는 티켓이 있다"고 말하는 인간들이 있지만 사기이니 무시하자. 또 주의해야 할 점으로,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미사 티켓이라며 정체불명의 티켓을 판매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사기니 절대 구입하지 않는 것이 좋다.[60] 소매치기도 많다고 하며, 특히 피에타 상 앞에서 털리기 쉽다는 이야기가 있다.

성당이니까 당연히 미사도 드릴 수 있는데, 미사 시간에 맞춰서 맨 안쪽으로 들어가면 된다. 너무 늦게 가면 안 들여보내주기도. 물론 주제대에서 사제가 봉헌하는[61] 미사에 참례하려면 미사 시간에 맞추어 성당에 들어가야 하지만, 성당의 허가만 있다면 사제가 주제대를 제외한 성당 내 부속제대에서 자유로이 미사를 집전할 수 있다. 보통 해외에서 성당 단위로 성지순례 온 신자들이 미사에 참례할 때 쓰는 방법. 그래서 일부 배낭여행자들은 "나 성 베드로 성당에서 한국어 미사에 참례했음"이라는 말이 종종 들리기도 한다.

입장 시 엄격한 복장 제한이 있어서[62] 기본적으로 이곳에 들어가려면 단정한 복장이 요구된다. 사실 꼭 성 베드로 대성당을 포함한 유럽의 다른 오래된 성당이 아니라도, 성당에 들어갈 때 단정한 복장을 갖추는 것은 기본적인 예절이지만 유독 이 성당은 더 엄격하다. 어깨가 노출되는 민소매탱크톱, 무릎이 노출되는 미니스커트, 반바지 등을 입고 들어갈 수 없으며,[63] 슬리퍼 종류의 신발도 입장불가. 이 때문에 성당 앞에 복장 제한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으며, 입구에서 입장객들의 복장을 육안으로 일일이 검사한다. 이곳에 다녀온 여행객들의 경험담을 보면 이 복장 규제 때문에 성당 주변에 얇은 스카프 등을 파는 상인들이 많이 있다.

9. 관련 건축

9.1. 크기 비교

피렌체 대성당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있던 시절인 1349년에, 이미 공사중이던 성당의 크기를 더 키워 세계 최대급의 성당을 목표로 하였다. 다만 그래도 산 파올로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보단 실내 면적이 좀 작다. 부피로는 넘었겠지만. 물론 이 성당의 크기는 새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는 거의 모든 면에서 작다. 그러나 크기만큼은 새 성 베드로 대성당 돔보다 크다.

볼로냐에서도 1390년부터 옛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더 큰 성 페트로니우스 대성당을 지으려고 하였다. 공사상의 난점들로 인해 이 성당의 건설은 중지되었고, 이 성당은 오늘날까지 신랑(nave)만 남아있다. 신랑만 가지고도 어지간한 성당보다 크다(...). 전설에 따르면 교황 비오 4세가 이 성당의 주제넘은 야심을 비판하며 이 성당의 근처 대학을 후원해 건물을 확장시켜 성당의 완공을 막았다고도 한다.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지기 직전에는 1434년부터 지어지기 시작해 1506년에 완공된 스페인 세비야 대성당이 세계에서 가장 큰 성당이었다. 다만 이 쪽은 면적이 넓고 높이는 낮은 모스크와 성당이 합쳐져 거대해진 케이스다. 1383년부터 지어지던 밀라노 대성당은 면적이 세비야 대성당 다음 가는 크기지만, 완공이 20세기로 너무 늦어버렸다. 클뤼니 대수도원(Cluny Abbey) 중 가장 규모가 컸던 클뤼니 제 3 수도원(Cluny III)도 굉장히 규모가 컷던 곳으로, 이곳을 새 성 베드로 대성당 이전에 가장 컸던 성당으로 보기도 한다. 지금은 파괴되었다.

1506년부터 공사하여 1626년에 새 성 베드로 대성당이 완공된 이후 교황청은 "가톨릭 성당을 이보다 더 크게 지을 수 없다"고 못박았다. 이런 요구는 긴 시간동안 잘 지켜졌지만 근대에 들어 몇가지 부문에서 이를 넘는 사례들이 나왔다.

1876년 완공된 첨탑 높이 151m의 루앙 대성당이나 1880년 완공된 첨탑 높이 157.4m의 쾰른 대성당은 성 베드로 대성당의 높이인 138m를 추월했다. 쾰른 대성당은 높이에선 161.5m인 울름 대성당의 새 첨탑이 만들어진 이후 가톨릭 성당의 2인자가 되었으나 울름이 1894년 가톨릭에서 탈퇴하였고,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만들어지기 전까진 최고였고 여전히 가톨릭의 성당 중 2번째로 높다. 다만 고딕 양식 성당들이 워낙 가늘고 높은 편이고, 애초에 가톨릭에서는 성당의 높이까진 까다롭게 간섭하진 않았던 듯하다. 142m의 스트라스부르 대성당처럼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더 오래되고 높은 성당들이 이미 있었다. 한편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신랑(nave)의 실내 높이는 45~46m인데, 가장 높은 신랑 높이를 달성한 47m의 보베 대성당 다음이다. 그러나 보베는 자꾸 무너져 완성이 되지 못한 성당이다. 성 베드로 대성당의 실내가 얼마나 높은지 실감할 수 있는 부분.

1958년 스페인독재자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건설한 전몰자의 계곡은 길이에서 문제였다. 이곳에는 화강암 산의 암반을 굴착해 조영한 '전몰자의 계곡 성 십자가 대성당'이 있는데, 전체 길이가 220m인 성 베드로 대성당의 길이보다 40m나 더 길어지자 성 베드로 대성당보다 1m 짧은 지점에 격벽과 중문을 만들어 '이곳부터 성당'이라고 주장하는 꼼수를 썼다.

1989년 아프리카코트디부아르에 성 베드로 대성당을 모델로 지어진 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는데, 야외 부지가 30,000m²로 워낙 넓기 때문에 가장 부지가 넓은 성당의 타이틀은 넘겨주게 되었다. 건물의 높이 역시 158m의 이 성당이 성 베드로 성당보다 높다. 이 때문에 기네스북에서는 이 성당을 가장 큰 성당으로 보고 있다. 교황청에서는 이제 이런 타이틀에는 집작하지 않는지 특별히 제한을 두거나 하지 않았고 1990년에 이 성당을 축성하였다. 다만 여전히 성당의 실내 면적에서는 성 베드로 성당이 더 크다. 이 때문에 여전히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가장 큰 성당으로 보는 자료들이 많다. 실내 면적 부문에서 성 베드로 대성당의 다음으로는 1980년에 완공된 브라질아파레시다 대성당(Basilica of the National Shrine of Our Lady of Aparecida)을 꼽는다.

9.2. 외관이 유사한 건물들

성 베드로 대성당이 지어진 이후 이 성당의 구조와 외관은 당연히 많은 성당에 영향을 주었다. 가톨릭 성당은 말할 것도 없고, 영국 성공회세인트 폴 대성당이나 러시아 정교회카잔 대성당, 독일 개신교베를린 대성당 등 타 국가의 타 종교 건물에도 영향을 주었을 정도다. 다만 이 경우들은 영향을 받았다곤 해도 나름대로의 재해석을 한 고유의 외형과 구조를 가진 성당들이며, 차이도 적지 않다.

다만 진짜로 이 성당의 외관을 복제하다시피한 성당들도 존재한다. 1875년부터 1894년까지 19년간 건설된 캐나다 퀘벡마리 렌 뒤 몽드 대성당(Cathedrale Marie-Reine-du-Monde)[64], 1865년부터 1892년까지 27년 동안 지어진 네덜란드 노르트브라반트 주 오덴보쉬의 성녀 아가타와 바르바라 대성당(Basiliek van de H.H. Agatha en Barbara)[65], 1985년부터 1989년까지 4년 동안 지어진 코트디부아르 야무수크로평화의 노트르담 대성당이 있다. 비록 디자인에선 독창성이 없지만 이 세 성당 모두 가톨릭에서 준대성전으로 인정받은 성당들이다.

바티칸 동쪽에 있는 나보나 광장(Piazza Navona)에는 베르니니가 만든 분수가 있고, 그 옆에 있는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Sant'Agnese in Agone)의 성당의 외관은 마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외형을 구불거리는 바로크 식으로 번안해 축소한 듯한 모습이다. 이 성당의 정면에는 2개의 종탑이 붙어있는데, 완성되지 못한 베르니니의 성 베드로 대성당의 종탑과 닮아있다.

대한민국 울산광역시 선암호수공원에는 천주교 성당, 개신교 예배당, 불교 사찰을 작은 크기로 만들어놓았는데(들어갈 수 있다), 그 중 '성 베드로 기도방'이 성 베드로 대성당을 축소해 2011년에 세워졌다. 최고높이 3.4m, 너비 1.4m, 길이 3.5m, 면적 4.8㎡의 아담한 규모로 겉보기에는 미니어처와 다를 게 없으나 내부에는 십자고상성모상, 성경이 있고 성인 1~2명이 들어가 기도할 수 있다. 성 베드로 기도방은 바로 옆에 자리한 불교 사찰 '안민사' 및 개신교 예배당 '호수교회'와 함께 한국기록원으로부터 우리나라에서 가장 작은 종교시설로 인증받았다. 사진

9.3. 이름만 같은 경우

이 경우는 한 지역에 성당이 2개 이상 존재하는 경우에 생길 수 있다. 아래 예시.

10. 기념 화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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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베드로 대성당 착공 기념주화, 크리스토포로 포파,
1506년, 지름 56.5 mm, 청동, 영국 런던 대영박물관
성 베드로 대성당 500주년 기념주화(1.5유로), 파리 조폐국,
2006년, 지름 37 mm,
율리오 2세는 성 베드로 대성당을 신축하기 시작한 해인 1506년에 이를 알리는 기념 화폐를 발행하도록 했고, 이에 따라 금세공사·조각가 크리스토포로 포파(Cristoforo Foppa, 1445~1527경)가 기념 화폐를 제작했다. 교황의 옆얼굴이 있는 면에는 IVLIVS·LIGVR·PAPA·SECVNDVS·MCCCCCVI(Iulius ligurini papa secundus millesimo quingentesimo sexto, 리구리아[67]의 율리오 2세 교황, 1506년)라는 라틴어 명문이, 브라만테의 설계안에 따른 성당 정면이 있는 면에는 TEMPLI·PETRI·INSTAVRACIO(Templi petri instauracio, 베드로 성전 재건)과 VATICANVS·M(Vaticanus mons, 바티칸 언덕)이라는 라틴어 명문이 새겨졌다.

그로부터 500년이 지난 2006년, 성 베드로 대성당 정초 500주년을 기념해 프랑스 파리 조폐국에서 1.5유로 기념 화폐를 발행했다. 성당 평면도가 묘사된 면에는 1 1/2 EURO 2006 RF LIBERTÉ - ÉGALITÉ - FRATERNITÉ(1.5유로, 2006년, 프랑스 공화국[68], 자유 - 평등 - 박애)라는 프랑스어 명문이, 성당 정면과 베네딕토 16세가 묘사된 면에는 500 ANS de la BASILIQUE SAINT-PIERRE(성 베드로 대성당 500주년)라는 프랑스어 명문이 새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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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면 뒷면
1985년부터 1986년까지 2년에 걸쳐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부, 그 위에 올려진 예수12사도의 성상, 대성당 정면부 앞에 놓인 성 베드로와 성 바오로 성상에 대한 보수 공사가 있었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보수 공사' 항목 참조. 작업이 끝난 후 이를 기념하는 기념 화폐가 발행되었다. 앞면에는 요한 바오로 2세의 옆얼굴과 ·JOANNES·PAVLVS·II·P.M.AN·MCMLXXXVI·PONT·SVI·VIII·(요한 바오로 2세 교황, 1986년, 교황 재위 8년째)라는 라틴어 명문이, 뒷면에는 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부와 ·RESTORATION·OF·THE·FACADE·OF·SAINT·PETER'S·BASILICA·1985·1986·(성 베드로 대성당 정면부 복원, 1985~1986년) 및 POPE·JOHN·PAUL·II·WISHING·TO·HONOR / THE·PRINCE·OF·THE·APOSTLES·RESORED·TO / ITS·FORMER·GLORY·THE·FACADE·OF·THE / PATRIARCHAL·VATICAN·BASILICA / THROUGH·THE·MUNIFICENT·GENEROSITY / OF·THE·ORDER·OF·THE·KNIGHTS·OF·COLUMBUS / AND·UNDER·THE·DIRECTION·OF / ARCHBISHOP·LINO·ZANINI·DELIGATE / OF·THE·R.F.S.P.(사도 베드로를 찬미하기를 바란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콜럼버스 기사단의 아낌없는 관대함과 성 베드로 대성당 관리소 대표 리노 자니니 대주교의 지도 아래 바티칸 대성당 정면부의 예전 영광을 회복하였다.)라는 영어 명문이 새겨졌다.

11. 기타

  • 웨식스의 왕 캐드왈라는 사실상 비신자 였으나 3년간 통치한 뒤 로마로 순례를 와 세르지오 1세에게 세례를 받았다. 며칠 뒤 그는 전쟁 중 입은 상처가 악화되어 죽었는데, 교황청은 그를 개종자들의 수호성인으로 시성하고 이 성당에 안치했다. 그의 비문에는 '색슨족의 왕'이라고 쓰여 있다.
  • 바티칸의 최고 수입원이자 동시에 최대 지출 요인. 관광 수입으로 막대한 돈을 벌어 들이지만, 그 이상의 돈이 미술품 및 건물 보수에 지출된다. 사진에서 성당에 도배를 하다시피 그려진 그림들부터 살펴봐도, 하나같이 르네상스 시대 최고의 화가들이 그린 걸작들인 것을 알 수 있다.[69] 모자이크 작품의 경우 벽에 박힌 돌이나 유리가 떨어지면 동일한 자재로 같은 자리에 다시 붙이는 작업을 반복해야 한다. 이는 베네딕토 16세 이후 바티칸 재정의 악화 요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 로마에 있는 4대 대성당과 산 로렌초 푸오리 레 무라 대성당을 포함한 5개의 성당들은 고대 그리스도교 세계의 5대 총대주교 관구(Pentarchy)들과 각각 연계되어 로마가 5개의 총대주교 관구들 가운데서도 그 정점에 있음을 나타냈는데, 성 베드로 대성당은 콘스탄티노폴리스와 연계되었다.
  • 스페인화가 프란시스코 고야가 젊은 시절인 1770년로마를 여행했을 때, 성 베드로 대성당의 돔 꼭대기까지 장비 없이 맨몸으로 올라갔다는 일화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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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프란치스코가 거행한 요한 23세요한 바오로 2세시성식, 2014년 4월 27일
* 어떤 사람을 복자성인의 반열에 올리는 시복식, 시성식이 거행되는 곳이다. 새 건물이 완성된 후 거행된 첫 번째 시복식은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62년 1월 8일 집전한 프란치스코 살레시오의 시복식이었다. 시복식은 반드시 이곳이 아니더라도 다른 장소에서 거행할 수 있지만, 시성식은 교황이 직접 주재하는 것이기 때문에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만 거행하는 것이 수세기 동안 이어진 원칙이었다. 아비뇽 유수 때를 제외하고 이 원칙이 깨진 첫 번째 사례가 바로 1984년에 방한한 요한 바오로 2세5월 6일 여의도 광장에서 거행한 김대건 안드레아, 정하상 바오로와 101위 동료 순교자 시성식이다. 당시 한국천주교회에서는 "교황 방한에 맞춰 시성식을 한국에서 열 수 없겠느냐"고 교황청 시성성과 협의했지만, 시성성은 한국 103위 순교복자 시성에 매우 협조적이었음에도 "성 베드로 대성당 이외의 장소에서 시성식이 열릴 경우 다른 지역 교회와의 형평성 문제 때문에 그 상징성이 퇴색할 수 있다"며 시성성 명의로 허가했을 때 혹여 선례로 남아 나중에 말썽이 되지는 않을까 우려해 반대했다.
그런데 시성성의 입장과 상관없이 교황이 친히 내린 결정으로 사안이 해결되면서 '한국에서 거행된 시성식은 어디까지나 1984년 교황 방한 때의 부대 행사이지 주된 행사가 아니고, 시성성의 동의 없이 교황의 의지로 관철한 극히 예외적인 사례이므로 이는 시성식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거행되어야 한다는 원칙에 대한 변경이 아니며, 다른 나라의 천주교회가 한국천주교회를 선례로 들어 자국에서 시성식을 거행해달라고 요청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다'는 구조가 정립되었다. 실제로 당시 시성성 장관[70], 차관[71]과 차관보[72]는 한국에서 열린 시성식에 참석하지 않았으며, 몇몇 시성청원인이 바티칸 이외의 지역에서도 시성식이 가능한지 문의했을 때 시성성에서는 "예외는 한 번뿐이며 앞으로 그런 일이 일어나는 건 결코 용납할 수 없다"고 답변했다.
  • 2012년에 마르셀로 디 피니치오라는 이탈리아의 자영업자가 "유럽연합과 이탈리아 정부의 정책 때문에 나의 비치 리조트 사업이 망하게 됐다"며 성 베드로 대성당 돔 지붕에 올라가 플래카드를 펼치고 24시간 동안 시위했다.#. 시위하는 사람이야 한두 명이 아니니 이런 행위가 특별할 것도 없겠지만, 이 사람은 2013년에도 돔 지붕에서 농성했고, 2014년에는 정치인들과 면담하기 전까지 절대 내려오지 않겠다면서 성당 정면부의 파사드 박공 지붕에서 농성했다. 돔 지붕이 아니라 파사드를 선택한 이유는, 보다 사람들 눈에 잘 띄기 때문이라고.
  • 2018년 10월 17일, '한반도 평화를 위한 특별미사'가 바티칸을 방문중인 문재인 티모테오 대통령과 영부인 김정숙 골롬바 여사가 참석한 가운데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교황청 국무원장 피에트로 파롤린 추기경 주재로 집전되었다.기사 영상 특히 미사 직후 문재인 대통령이 한반도 평화 정착을 주제로 10분간 연설한 것에 대해서 교황청은 '매우 특별하고 이례적인 것'이라고 밝혔다.
  • 2020년 6월. 바티칸 경찰이 보수, 유지하는 기구에 비리를 포착하고 압수수색을 하였다.#

12. 대중 매체

이 건물 자체가 바티칸을 의미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보니, 이를 무대로 한 작품에선 반드시 등장한다. 또한 콜로세움 등과 함께 로마 시내의 주요 랜드마크 중 하나이기도 해서 로마 시를 배경으로 한 작품에서도 자주 등장하는 편.

찰턴 헤스턴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로 등장한 영화 <고통과 환희(The Agony and the Ecstasy)>(1965년)에서는 새로 지어지기 전의 옛 성당 건물이 부분적으로 등장한다. 내용은 교황 율리오 2세가 미켈란젤로를 억지로 시스티나 경당의 천장화를 그리게 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시스티나 경당이 옛 성 베드로 대성전 옆에 있는지라 이 성당을 배경에서 종종 볼 수 있다. 다만 대성전 건축물의 고증 자체는 그다지 좋지 않다.

영화 2012에서는 성당이 지진 때문에 통째로 무너져서[73] 돔이 굴러가며 성 베드로 광장의 사람들을 깔아뭉개버린다. 영상. 물론 현실의 돔은 저렇게 굴러갈 정도로 단단하진 않다.

위대한 세기에서는 1500년대 초반임에도 불구하고 웅장한 모습으로 나온다. 여기서는 쉴레이만 1세오스만 제국을 방해하는 악의 소굴인 것마냥 나온다.[74]

비잔티움의 첩자로 국내에 유명한 미국 작가 해리 터틀도브의 단편 'Under St. Peter's'에서는 예수십자가에서 죽은 게 아니라 뱀파이어가 되어 성 베드로 대성당 지하에 갇힌 것으로 나온다.

신경숙소설 <엄마를 부탁해>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작은 나라에 가게 되면 장미나무로 만든 묵주를 사달라'고 한 엄마의 부탁을 기억한 주인공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 가 피에타를 보며 엄마를 추억하며 그리워하는 것이 마지막 장면으로 나온다.

12.1. 천사와 악마

랭던이 공중에서 산 피에트로 대성당을 본 것은 처음이다. 오후 햇살에 건물의 대리석 외관이 불꽃처럼 빛났다. 140명의 성인순교자들, 그리고 천사의 조상(彫像)으로 치장된 장엄한 건축물은 넓이가 축구 경기장 2개, 길이는 무려 경기장 6개를 이어놓은 것과 같다. 동굴 같은 대성당 내부는 6만 명 이상을 수용할 수 있다. 이 숫자는 세상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 시국 인구의 100배 이상에 달한다.
- 천사와 악마 1권
댄 브라운의 소설 및 이를 바탕으로 한 동명의 영화 천사와 악마에서는 일루미나티가 성당 내부에 있는 베드로의 지하무덤에 반물질을 숨겼다. 궁무처장이 폭발 직전의 반물질을 가지고 헬리콥터를 탄 채 수직 상승하다가[75] 바티칸 공중에서 반물질이 폭발하는데, 이때 발생한 충격파로 인해 성당 전체가 흔들리면서 돔 내부에 장식된 모자이크 성화들이 벽에서 떨어져나갔다. 영상

12.2. 베니스의 개성상인

597개의 대리석 기둥에 의해 떠받쳐지는 이 대규모 성전은 44군데의 제단과 4백여 개의 성상이 구비되며 1천 3백 개에 달하는 모자이크 그림으로 내부장식이 되게끔 설계가 되어 있었다. 그리고 원형인 광장으로부터 길쭉한 모양으로 뻗어 있어, 위에서 보면 마치 열쇠와도 같은 모양을 하고 있어서 '천국의 열쇠'라고도 불리고 있었다.
델 로치 상사가 이번에 응찰한 교황청 입찰은 성 베드로 대사원 개축공사에 추가되는, 1천 3백 개에 이르는 모자이크 유리와 교황청에서 쓸 용기, 그리고 거울용 유리였다.
- 베니스의 개성상인 1권 중

오세영의 장편소설 베니스의 개성상인에서도 주인공 안토니오 꼬레아가 상사의 명을 받고 이곳의 건축에 쓸 유리를 납품하는 임무를 맡는다. 베네치아의 유리 공예 기술을 빼돌린 피렌체가 입찰 중간에 끼어들어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결국 입찰을 따내고 안토니오가 승진하는 계기가 된다. 작중 시점인 1606년에 성당 앞에 광장이 있는 것으로 나오는데 잔 로렌초 베르니니가 만든 오늘날과 같은 모습의 성 베드로 광장은 아니지만, 그 이전에도 성당 앞은 '성 베드로 큰 길(Platea Sancti Petri)'이라는 이름의 사각형 모양 공터가 비어 있어서 광장과 같은 역할을 했다. 성 베드로 광장이 조성되기 이전의 모습을 담은 그림. 훗날 광장이 생길 자리에 'PLATEA S·PETRI'라고 적혀 있다.

12.3.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이 땅에는 베드로 씨가 잠들어 있으니 교회는 그 잠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고 유산 관리도 열심히 하겠습니다..., 라는 게 로마 정교의 의견이지 말입니다. 본래는 베드로 씨가 잠들어 있는 곳 바로 위에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성당을 봉헌 및 건설한 게 시초인 모양이지만 르네상스유쾌한 인플레가 일어나서 크게 개축되었어. 그게 미켈란젤로가 설계한 지금의 산 피에트로 대성당ㅡ 명실공히 세계 최대의 교회이자 죽은 이 위에 지은 성역이지."
-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 9권 중, 츠치미카도 모토하루

카마치 카즈마라이트 노벨 어떤 마술의 금서목록에서는 로마 정교의 본거지로 등장한다. 14권에서는 후방의 아쿠아가 대성당의 천장을 받치는 기둥 중 하나를 부러뜨려 로마 근교의 이교도들을 실험에 이용한 좌방의 테라를 후려쳐 두 동강 냈는데,[76] 로마 교황은 "역사적, 학술적인 가치를 생각하면 이곳에서의 전투는 삼가야 했어. 훌륭한 건물에 상처를 내고 말았군."이라고 핀잔을 줬다. 16권에서는 우방의 피암마를 막기 위한 로마 교황의 술식이 깨지면서 건물의 3분의 1이 박살나고 말았다.#

12.4. 어쌔신 크리드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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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어쌔신 크리드 2에서는 마지막 미션의 배경으로 등장하는데, 에치오 아우디토레로드리고 보르지아를 암살하기 위해 향한다. 그러나 여기는 알고보니 먼저 온 자들의 창고가 있는 곳이었고, 선지자였던 에치오만이 그 안으로 들어갈 수 있게 된다. 여기서 만난 미네르바는 에치오를 통해서 미래의 데스몬드 마일즈에게 앞으로 닥칠 위험을 경고한다.

후속작 어쌔신 크리드: 브라더후드에는 게임 내에서 보르지아 가문을 필두로 한 교황청 세력의 하수인인 '로물루스의 추종자들'의 소굴로 등장한다. 게임을 하면서 바티칸 영역을 가볼 기회는 꽤 있지만 성 베드로 대성당을 갈 수 있는 건 이 소굴을 통해서일 뿐. 하지만 공사가 막 실시될 즈음인 1500년대 초반이라는 시기상, 공사 중이기에 웅장한 모습은 잘 볼 수가 없다. 들어가면 보르지아 가문의 메신저 역할을 하는 추기경을 잡기 위해 한창 공사 중인 성당 내부를 뛰어다니게 된다. 시작은 추기경들이 미사를 집전하는 성당 내부인데, 여기도 나무로 막아놓은 벽들이나 공사 현장을 가리기 위한 천들 등 공사의 흔적이 곳곳에 존재한다. 물론 추격과 파쿠르 위주의 진행이기에 그것을 위한 지지대나 발판이 즐비해 있을 뿐, 맨 처음 장소를 제외하고는 성당 본면의 느낌은 거의 없는 상태. 곳곳에 인부들이 위치해 있어, 주변으로 뛰어가면 놀라서 연장을 떨어뜨리기도 한다. 마지막에 추기경을 쓰러뜨리고는 꼭대기에서 아래쪽 호수로 다이빙.

특기할만한 점은 구 성당의 일부분이 남아있는 상태에서 신 성당이 지어지고 있는 모습을 재현했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고증에 신경쓴 것. 다만 역사적으로는 아직 돔이 지어지지 않았던 시기다. 돔이 없으면 게이머들이 잘 못 알아볼테니까 의도적으로 고증 왜곡을 한 것 같다.

12.5. 트리니티 블러드

『너는 베드로. 나는 이 반석(베드로) 위에 나의 교회를 세우리라.』
그리스도의 첫 번째 제자이자 초대 교황인 성 베드로의 묘 위에 서 있는 산 피에트로 대성당은 그 자체가 거대한 묘비이다.
-트리니티 블러드 4 - 사일런트 노이즈, p.141

요시다 스나오라이트 노벨 트리니티 블러드에서는 2124년 핵전쟁으로 파괴된 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대성당과 율리오 2세의 대성당에 이어 3번째로 건설되었다. 이곳 지하 성당은 지상의 대성당에 필적하는 넓이와 30m나 되는 높은 천장을 갖추고 있으며[77], 각 교황의 묘별로 수십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 각각 석관과 묘비가 안치되어 있다. 이곳에 안장된 것으로 언급된 교황들 중 실존 인물은 요한 바오로 2세인데, 소설에서는 '대재앙(아마게돈) 이전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고 있던 사회과학적 무신론(커뮤니즘)과 싸운 요한 바오로 2세'라고 서술되었다.

성 베드로 광장은 여전히 있지만 광장을 둘러싼 회랑과 성당은 훨씬 더 커진 건물로 탈바꿈했다. 애니메이션에서의 모습 그리고 3번째 대성당의 축성식과 더불어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에 있던 로마 주교의 주교좌, 즉 교황좌가 이곳으로 옮겨졌다. 영어권 번역이 San Pietro Basilica가 아니라 San Pietro Cathedral인 것도 이 때문.

12.6. 바티칸 기적 조사관

동화에 나오는 새하얀 성보다 몇 십 배는 스케일이 크고 위엄 있는 건물이 바로 바티칸의 중심, 성 베드로 대성당이다. 대략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을 만큼 거대한 건축물이라고 하니 이쯤 되면 하나의 요새라 할 수 있으리라.
-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 중

후지키 린의 소설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의 프롤로그가 대희년을 맞아 2000년 12월 24일 교황이 거행한 성 베드로 대성당 성문 개문 행사를 묘사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소설의 두 주인공 히라가 요셉 코우로베르토 니콜라스교황궁 내에 있는 '성도의 자리'로 출근할 때마다 성당 내부를 지나가며, '성 베드로의 의자'가 있는 제대 앞에서 기도를 올리기도 한다. 또한 히라가가 사는 집이 성 베드로 대성당에서 가까운 곳에 위치해 있다.

주인공 두 사람이 바티칸에서 일하다 보니, 기적 조사 때문에 현지로 파견되는 곳에 있는 성당을 성 베드로 대성당과 비교해 "바티칸에는 못 미치지만, 규모가 작은 것 치고는 괜찮게 지었어."[78]라고 말하기도 한다. 바티칸에 맞먹는 성당이 전 세계에 얼마나 있다고

13. 관련 문서


[1] 인간의 창의성으로 빚어진 걸작을 대표할 것[2] 오랜 세월에 걸쳐 또는 세계의 일정 문화권 내에서 건축이나 기술 발전, 기념물 제작, 도시 계획이나 조경 디자인에 있어 인간 가치의 중요한 교환을 반영[3] 인류 역사에 있어 중요 단계를 예증하는 건물, 건축이나 기술의 총체, 경관 유형의 대표적 사례일 것[4] 사건이나 실존하는 전통, 사상이나 신조, 보편적 중요성이 탁월한 예술 및 문학작품과 직접 또는 가시적으로 연관될 것[5] 사진으로 보다시피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정면에 서면 신랑의 길이 때문에 가까이선 돔이 보이지 않는다. 정면에서 돔을 보려면 정말 뒤로 멀리 가야한다. 이와 관련된 내용은 카를로 마데르노 항목에 후술.[6] 이걸 만들기 위해서 우르바노 8세판테온 현관의 청동판을 모조리 벗겨내도록 명령하자, 당시 로마 시민들은 "Quod non fecerunt barbari fecerunt Barberini(바르바로이(야만인)도 하지 않은 짓을 바르베리니(우르바노 8세의 가문)가 한다)"며 비꼬았다. 그렇지만 판테온에서 뜯어온 청동교황청 성채인 산탄젤로 성에 배치할 대포 주조에 사용되었으며, 발다키노에 소요된 청동베네치아에서 들여왔다는 주장도 있다.[7] 워낙 압도적인 규모와 웅장함 뿐만 아니라,예수의 수제자인 1사도 베드로의 무덤위의 성당이라는 타이틀 또한 가지고 있기에 더더욱 유명해질 수 밖에 없다.[8] 다만 성당 기준 방문하는 관광객수는 프랑스 파리 노트르담 대성당이 압도적으로 많다.[9] 혹은 칼리굴라 경기장(Circus of Caligula)이라고 한다.[10] 1502년 도나토 브라만테는 이 성당의 중정에 작은 사원인 '템피에토'(The Tempietto)를 건설했는데, 이를 본떠 베르니니가 성 베드로 대성당의 성체 경당(Blessed Sacrament Chapel)에 있는 작은 금속 성막(tabernacle)을 만들었다. 당시에 베드로와 산 피에트로 인 몬토리오와 관련성이 있다고 생각했던 것.[11] 자주색(보라색)은 로마 제국 시대에 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고귀한 색깔이었다.[12] 그러나 카를 4세 이래로 신성 로마 제국 황제들은 교황의 간섭을 꾸준하게 배제하려 했다. 결국 베네치아 공화국의 방해로 로마 대관식이 좌절된 막시밀리안 1세는 스스로를 '선출된 로마 황제(Erwählter Römischer Kaiser)'로 자처했고, 이후 막시밀리안 2세부터는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황제선거가 끝나는 즉시 마인츠 대주교의 주관으로 대관식을 거행했다.[13] 당시 교황 클레멘스 5세로마를 비운 상황이라 추기경들이 교황을 대신해 대관식을 거행했다.[14] 인노첸시오 6세를 대신해 대관식 거행.[15] 옛 대성당에 있던 교황들의 무덤 중 유일하게 무덤 전체가 온전한 모습으로 새 대성당에 옮겨졌다.[16] 이 성당의 눈에 띄는 부분은 석회암의 일종인 트래버틴(Travertine)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성당의 공사비가 워낙 막대해서 처음 이 성당을 설계한 도나토 브라만테는 구조체 등에 싼 벽돌이나 각력암(Breccia)을 많이 사용해야만 했다.[17] 율리오 2세, 라파엘로 산치오, 1511~1512년, 목판에 유채, 108 × 80.7cm, 영국 런던 내셔널 갤러리[18] 모양만 참고한 것이 아니라 재료나 구조도 참고했던 것으로 보인다. 브라만테의 돔은 판테온처럼 하나의 껍질로 이루어진 구조였으며, 재료도 실전된 고대 로마의 콘크리트와 비슷한, 석회석의 일종인 투파(tufa)와 경석(pumice)을 배합한 가벼운 콘크리트를 사용하여 지을 예정이었던 것으로 보인다.[19] 조각에 열정을 보인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는 영묘를 장식할 조각상 제작에 필요한 대리석을 직접 카라라까지 가서 사왔지만, 율리오 2세는 대금을 주지 않았다. 그래놓고 조각가에게 천장화를 그리라고 강요하여 미켈란젤로는 율리오 2세에게 불만을 가지게 된다. 이런 저런 일 끝에 걸작이 나왔지만..[20] 레오 10세와 두 추기경, 라파엘로 산치오, 1518~1519년, 154 × 119 cm, 목판에 유채, 이탈리아 피렌체 우피치 미술관[21] 브라만테, 미켈란젤로, 라파엘로에게 바티칸과 성 베드로 대성당 건축을 주문하는 율리오 2세, 에밀 장 오라스 베르네, 1827년, 캔버스에 유채, 프랑스 파리 루브르 미술관[22] 실제 있을 법한 광경을 그린 것은 아니다. 브라만테가 들고 있는 설계도는 브라만테가 죽은 이후 라파엘로가 만든 성 베드로 대성당 설계도이다.[23] 이외에도 반원형의 후진을 복도로 둘러 각각의 공간을 명확하게 구획했다. 긴 신랑에서는 측랑 외부 양쪽에 통로를 막아 경당을 만들었다.[24] 1527년 로마 약탈, 요하네스 린겔바흐, 17세기, 캔버스에 유채[25]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조카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건축가 동생 이름도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Antonio da Sangallo il Vecchio)였기 때문에 '늙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lo the Elder)와 '젊은 안토니오 상갈로'(Antonio da Sangallo the Younger)로 구별한다.[26] Martin van Heemskerck 작품. 왼쪽에는 대부분 철거되고 신랑만 남은 옛 성 베드로 대성당이 보이며, 오른쪽에는 중앙부의 거대한 벽체와 후진(apse) 일부분만 건설된 새 성당의 모습이 보인다.[27] 클레멘스 7세, 세바스티아노 델 피옴보, 1526년경, 캔버스에 유채, 145 × 110cm,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28] 바오로 3세, 티치아노 베첼리오, 1543년경, 캔버스에 유채, 113.7 × 88.8cm, 이탈리아 나폴리 카포디몬테 미술관[29]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조카로, 줄리아노 다 상갈로의 건축가 동생 이름도 '안토니오 다 상갈로' 일 베키오(Antonio da Sangallo il Vecchio)였기 때문에 '늙은 안토니오 다 상갈로'(Antonio da Sangallo the Elder)와 '젊은 안토니오 상갈로'(Antonio da Sangallo the Younger)로 구별한다.[30] 그 중 특기할 만한 것으로는 약 4m 정도 대성당의 바닥을 높혔다는 점이다. 정확한 이유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았다.[31] 비오 4세에게 성 베드로 대성당 모형을 보여주는 미켈란젤로, 도메니코 크레스티, 1618~1619년, 캔버스에 유채, 236 x 141 cm, 이탈리아 피렌체 카사 부오나로티[32] 미켈란젤로의 작업장을 방문한 바오로 3세, 페테르 리티쉬, 1834년, 캔버스에 유채, 190 x 138 cm[33] 사실 미켈란젤로는 비기오를 개인적으로도 싫어했다. 비기오도 산탄젤로 성의 개축 등 교황청에 관련된 일을 많이 했는데, 이 과정에서 미켈란젤로의 일감 몇가지를 뺏었다. 참고로 비기오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조각 피에타의 정교한 복제품을 만들기도 했다.[34] 미켈란젤로는 이전에도 캄피돌리오 광장에서 1층부터 2층까지 관통하는 거대 기둥들로 정면을 장식했다.[35] 사실 이는 상갈로의 돔과 구성이 유사하며, 상갈로의 안을 간략화시키고 미켈란젤로 특유의 감각으로 아름답게 재구성한 것으로 볼 수 있다.[36] 비오 5세, 엘 그레코, 1605년경, 캔버스에 유채, 개인 소장[37] 그레고리오 13세, 라비니아 폰타나, 캔버스에 유채, 116.5 × 97.5cm, 개인 소장[38] 산타 마리아 델 피오레 대성당의 높이는 114.5m[39] 미켈란젤로가 계획한 돔의 곡률은 반원에 가깝고, 델라 포르타의 것은 현수선에 가깝다. 왜 이렇게 변경했는지 확실한 이유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를 통해 돔의 하중을 좀 더 효과적으로 아래로 집중시킬 수 있었을 것이다. 또한 일반적으로 완전한 원은 르네상스의 주요 형태적 어휘이고, 타원은 바로크의 주요 어휘로 생각되는데, 미켈란젤로는 르네상스의 마지막 시기의 인물이고 델라 포르타가 돔 공사를 하던 시대는 초기 바로크 시기란 점도 거론된다.[40] 바오로 5세, 미켈란젤로 메리시 다 카라바조, 1505~1506년경, 캔버스에 유채, 203 × 119cm, 이탈리아 로마 보르게세 미술관[41] 물론 실제로는 가톨릭에도 그리스 십자가형의 성당이 있고, 개신교에도 라틴 십자가형 예배당이 있어서 평면의 형식만 가지고는 구별할 수 없다. 이후로도 많은 가톨릭 성당의 건축가들은 공간적인 매력 때문에 여전히 그리스 십자가 성당을 건설하고 있었고, 개신교에서는 가톨릭 성당을 개신교 예배당으로 바꿔 계속 라틴 십자가형 건물을 사용했다. 이상은 이상이고 현실은 현실인 것. 한편 예수회 성당에서 화려한 천장화로 성당을 장식하는 것도 비슷한 이유다. 검소한 개신교 예배당과 대립적인 방향으로 나아간 것. 물론 이쪽도 가급적 그러려고 했다는 경향이 있다는 것이지 화려하다고 다 가톨릭은 아니며, 반대로 검소하다고 다 개신교의 것은 아니었다.[42] 대표적인 예시로 르 코르뷔지에가 훗날 그의 저서에서 이를 심하게 깠다.[43] 원래 성 수산나 성당의 정면은 자코모 델라 포르타가 정면을 설계한 일 제수 교회를 본떠 마데르노가 설계한 것이다. 일 제수 교회는 예수회 계열 성당들의 정면 디자인의 모범이 될 정도로 당대에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 특징 중 하나는 기둥의 튀어나온 정도를 다르게 하여 입구를 강조한다는 점이다. 일 제수 교회의 바깥 기둥은 얕고, 점점 가운데 기둥에 가까워질수록 튀어나오며, 입구 주변의 원 기둥은 벽에서 독립되었다. 이렇게 차별화된 요소로써 자연스럽게 입구를 강조한다. 근데 성 베드로 대성당도 같은 원리로 구성되지만 그 효과가 다소 밋밋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우선 성당 정면의 좌우 너비가 워낙 넓다보니 각 기둥의 거리가 먼데, 더 많아진 기둥들 간의 입체감 차이는 상대적으로 적어져 입체감이 달라짐이 생각보다 잘 눈에 안띈다. 긴장감 역시 적은 편. 또한 정면의 크기에 비해 입구들이 작은 편인데 중앙으로 가면서 그 크기도 커졌다 작아졌다가 반복되며, 2층의 발코니 때문에 중앙의 입구 크기가 상대적으로 작다. 그런 작은 입구를 강조해야 하니 밋밋해보이는 것. 마데르노도 이러한 문제를 알았기에 좌우 양 끝은 종탑을 올려 높이를 다르게 하여 변화를 주려고 했지만, 지반 문제로 종탑을 올리지 못했다.[44] 그레고리오 15세, 조반니 프란체스코 바르비에리, 1622~1623년경, 캔버스에 유채, 133.4 × 97.8 cm, 미국 로스앤젤레스 장 폴 게티 미술관[45] 우르바노 8세, 피에트로 다 코르토나, 1624~1627년경, 캔버스에 유채, 199 × 128 cm, 이탈리아 로마 카피톨리니 미술관[46] 인노첸시오 10세, 디에고 벨라스케스, 1650년경, 캔버스에 유채, 141 × 119 cm, 이탈리아 로마 도리아 팜필리 미술관[47] 알렉산데르 7세,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1667년경, 캔버스에 유채, 90.1 x 76.7 cm, 이탈리아 로마[48] 클레멘스 9세, 카를로 마라타, 1669년, 캔버스에 유채, 158 x 119 cm,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 에르미타주 박물관[49] 클레멘스 10세, 조반니 바티스타 가울리, 51.3 × 43 cm, 캔버스에 유채, 73.5 × 59.5 cm, 바티칸, 주바티칸 영국대사관[50] 마데르노의 정면이 종탑과 붙어버려 좌우로 너무 길어졌다는 생각을 베르니니도 했기 때문에 종탑을 분리시켜 정면의 좌우 길이를 줄이려고 하였던 것이다.[51]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둘 다 바로크 시대의 대표적인 건축가로 꼽힐 정도로 재능이 출중했지만, 둘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성 베드로 성당의 발다키노 등을 작업할 때 보로미니가 형식적으로는 베르니니의 조수였지만, 사실 조각적 재능은 뛰어나지만 건축적 지식이 부족했던 베르니니가 어엿한 건축가인 보로미니의 보조를 받았던 것에 가깝다. 불화의 원인으로는 여러가지가 있는데, 베르니니가 구상한 것을 보로미니가 구현하는 식으로 업무가 분담되었지만 베르니니의 명성과 보수가 보로미니에 비해 훨씬 높았다. 또한 보로미니는 친척이자 스승이었던 마데르노를 좋아하였는데, 마데르노의 사후 그 자리를 차지한 것은 보로미니가 아닌 베르니니였다. 그리고 성격 역시 외향적인 베르니니와 달리 보로미니는 내향적이라 개인적인 면에서도 차이가 있었다. 아무튼 로마시 곳곳에는 라이벌이었던 그들이 경쟁한 흔적이 남아있다. 둘의 작품이 바로 붙어있는 곳도 있는데, 대표적인 곳이 나보나 광장의 분수(베르니니)와 성 아그네스 인 아고네 성당(보로미니), 산탄드레아 알 퀴리날레 성당(베르니니)과 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 폰타네 성당(보로미니)이다.[52] 다만 타원이란 아이디어 자체는 베르니니의 것이 아니라 교황 등의 다른 사람의 아이디어였을 것이란 점을 뒷받침하는 사료들이 있다. 형태가 굳이 타원인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다. 우선 타원은 완전한 원을 즐겨 쓰던 르네상스와 구별되는 바로크의 주요 어휘였다. 또한 가로로 긴 타원은 교황이 성당 정면의 발코니에서 군중을 내려다볼 때 군중을 교황에게 가급적 많이,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만드는 공간이었다. 그리고 마데르노의 정면이 좌우로 너무 길다는 평가를 받기 때문에, 좌우로 훨씬 더 긴 타원형 광장을 둘러싼 긴 열주를 성당 정면 주변에 배치하면 정면은 상대적으로 덜 길어보일 것이란 것을 의도하였다.[53] 이것을 가져온 이유는, 이것이 베드로순교를 '목격'한 오벨리스크이기 때문이다.[54] 약 21m에서 약 18m로.[55] 미켈란젤로는 기둥벽을 강화하기 위해 고심했고, 기존 설계안에 있던 큰 벽감과 계단이 있던 것도 없애버렸다.[56] 프레드릭 다사스, <바로크의 꿈> 시공사 디스커버리 한국어판 136p.[57] 바오로 3세의 손자.[58] 영국 국왕 제임스 2세의 손자이자 마지막 자코바이트 상속자.[59] 성 베드로 대성당뿐만 아니라 로마 시내의 모든 성당바티칸이 직접 관리하며, 일단 들어간 이후에 내부의 특정 사적에 대한 입장료를 받는 경우는 있지만 성당 자체에 들어가기 위한 입장료는 없다. 입구에서 입장료를 요구하는 경우 무조건 사기이니 속지 않도록 하자.[60] JTBC의 한 여행 프로그램에 따르면, 애초에 교황이 직접 주관하는 미사는 인터넷을 통해 사전 예약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무료로 참례할 수 있다고 한다. 해당 방송 제작진도 멋모르고 구입했다가 이걸 본 바티칸 관계자들이 대번에 "이건 사기입니다"라고 했고, 막판에는 현지 경찰까지 출동하기에 이르렀다.[61] 운 좋으면 교황이 직접 봉헌한다.[62] 이런 복장 규제는 유럽의 다른 유서깊은 성당들에서도 실시하고 있다.[63] 민소매나 탱크톱 상의의 경우 카디건 등 노출을 가릴 수 있는 별도의 겉옷을 준비해서 입으면 입장이 가능하다고 한다.[64] 성 베드로 대성당의 절반 크기로 축소해 지은 건물이다.[65] 파사드는 산 조반니 인 라테라노 대성당을, 신랑와 돔 및 내부 장식은 성 베드로 대성당을 본떴다.[66] 처음에는 정왕시장 인근에 건립됐지만, 현재는 이전하여, 시흥관광호텔 뒤쪽으로 한참 가야 나온다. 관할 구역은 성담스퀘어로부터 동쪽.[67] 율리오 2세가 속한 델라 로베레 가문이 리구리아 주 사보나에서 유래했다.[68] R.F. : République Française[69] 베드로 대성당에 그림을 출품할 수 있다는 것은 그 화가의 실력과 신앙심을 모두 보증함을 의미하기에 성당에 바칠 걸작을 그려내는 것은 그때 당시 화가들의 중요한 숙원이자 목표였다.[70] 피에트로 팔라치니 추기경(Pietro Palazzini), 1912.5.19~2000.10.11[71] 트라이안 크리산 대주교(Traian Crișan), 1918.5.21~1990.11.6[72] 파비얀 페라야 주교(Fabijan Veraja), 1923.1.20~2014.10.28[73] 이 장면에서 지진으로 성당 벽화들이 갈라질 때 <아담의 창조> 그림에서 하느님과 아담의 맞닿은 손가락에 균열이 일어나며 갈라지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하느님에게 버림받은 인간을 상징하는 연출인 듯하다.[74] 이건 이슬람의 시점에서 그리스도교이단으로 배척하는 데다, 당시 이슬람권과 가톨릭권인 유럽과 견원지간이었다는 것을 감안하면 이슬람 입장에서는 알라와 오스만의 적으로 보일 수밖에 없다.[75] 소설에서는 랭던과 궁무처장이 헬리콥터에 함께 탑승했다.[76] 코믹스판도 동일하게 묘사.## 애니판에서는 기둥을 부러뜨려 테라를 깔려죽였다.##[77] 실제 성 베드로 대성당의 지하 성당은 이 정도로 높지 않다.[78] 바티칸 기적 조사관 1권 검은 학교, p.2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