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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이토 히로부미 암살에서 넘어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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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중근 의사 하얼빈 의거
安重根義士哈爾濱義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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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안중근 의사 의거 기록화.png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장면을 다룬 민족기록화 (박영선作)
<colbgcolor=#000><colcolor=#fff> 일시 1909년 10월 26일 오전 9시 30분경
장소 러시아령 만주 하얼빈 하얼빈역
(現 중국 헤이룽장성 하얼빈시 난강구 푸순가 하얼빈역)
목적 조선 침략의 원흉 이토 히로부미 처단
대한제국의 주권 피탈·동양 평화 훼손에 대한 항의
원인 이토 히로부미의 조선 침략 정책
결과 이토 히로부미 사살 성공
영향 안중근 사형 선고 및 집행

1. 개요2. 한·일의 관점과 명칭
2.1. 한·일의 이토 히로부미 인식
3. 과정4. 결과5. 의의6. 여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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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캡션
소위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의 대세를 깊이 살피지 못하고 잔혹한 정책을 남용하여 동양 전체는 장차 어육지장(魚肉之場)[2]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아아! 천하의 대세를 원려(遠慮)하는 뜻있는 청년들이 어찌 감히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여 하얼빈에서 만인의 공평한 눈 앞 총포 하나로 늙은 도둑 이토의 죄악을 성토(聲討)하고 동양의 뜻있는 청년들의 정신을 깨우치고자[3] 하였다.[4]
한국 근대사료 DB, 통감부문서 7권, 안응칠 이토의 침략정책 규탄문 (1909년 11월 6일) 中
1909년[5] 10월 26일 러시아 제국 하얼빈(Харбин)[6]하얼빈역(Харбинский вокзал)에서 대한제국 출신 안중근일본 제국 초대 내각총리대신, 초대 귀족원 의장, 초대 추밀원 의장, 초대 한국통감을 역임한 이토 히로부미권총으로 사살한 사건.

2. 한·일의 관점과 명칭

대한민국에서는 일반적으로 저격의 의미를 기려 안중근 의사(義士)가 행한 의거(義擧)로 인식한다. '의거'는 정의를 위해 의로운 일을 도모한 것을 의미한다. 반면 사망한 이토 히로부미의 모국 일본에서는 전 총리[7]암살[8] 사건으로 인식하며 안중근에 대해서는 (꼭 극우가 아니더라도) 종종 테러[9] 행위자라고도 본다.[10] 윤봉길훙커우 공원 의거 등의 무장 독립투쟁도 그렇듯, 위키백과처럼 특정 국가의 이익을 대변하지 않는 위키에서는 해당 사건이 '테러'냐, '독립운동'이냐를 두고 유저들이 싸우는 일이 잦다. 일본은 이러한 무력 투쟁을 세계적인 제국주의 시대에 제국주의 정책을 펼쳤을 뿐인 자국 수뇌부에 대한 일방적인 테러 행위라고 인식하곤 한다.

이러한 시각에 대해 한국에서는 안중근의 이토 저격을 항일 의병, 즉 대한의군(大韓義軍)의 참모중장으로서 '군인'의 정체성을 띤 자의 정당한 '교전(交戰)' 행위라고 보곤 한다. 항일 의병과 일본군이 이미 수 년 전부터 전투를 벌이고 있었으므로 그 일환으로 안중근이 적국의 수뇌부 인물을 공격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적국 요인의 암살은 특수부대의 전형적인 특수작전으로 볼 수 있다고 해석한다. 안중근은 한때 항일 의병장으로서 병력을 동원해 적군과 교전했으나 이토를 저격할 당시에는 기차역에서 은밀히 비무장 상태의 목표에 접근했으며 일반적인 '전투' 상황 또한 아니었다. 그러나 전시에 특수부대원이 적국 후방에 침투하여 교란하고 요인을 암살하는 것은 현대에도 매우 유효한 전술이다. 이토 저격 또한 적 수뇌를 암살하기 위한 일종의 군(軍) 특수작전으로 보는 것이다.[11]

같은 인물, 사건, 그리고 시대를 놓고도 한국과 일본의 역사관은 차이가 명확하다. 한국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 당시 일본군 출동을 통한 농민군 학살 및 진압, 1895년 을미사변, 1905년 을사조약, 1907년 정미 7조약대한제국군 해산, 나아가 고종의 강제 퇴위 등을 주도하였던 '조선 침략의 원흉'으로 평가받았다. 한편 일본에서는 메이지 유신을 통하여 봉건 막부 정치를 타파, 쇄국 정책을 폐지하고 서양과의 교류와 문호 개방을 이끈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서 경제적 부강의 기틀을 마련한 선구자로 칭송받아 왔다. 동시에 일본 제국의 초대 총리라는 점에서도 국가적인 위인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때문에 한일 양국이 안중근의 이토 저격을 어떻게 평가하는지도 서로 상이하며 안중근과 이토를 각각 가해자, 피해자로 보는 구도에 대해서도 의견이 엇갈린다.

한국 입장에서는 이토 히로부미가 자국을 위하여 슬기롭게 근대화 및 번영을 이끌었을지언정 그의 강제적, 불법적인 조선 침탈이 정당화 될 수는 없다. 이토가 피해자이고 안중근이 가해자라는 건조한 이분법은 안중근의 이토 저격을 단순히 개인이 개인에게 행한 살인 행위로 보는 지극히 좁은 관점이며, 보다 거시적으로 따질 경우 해당 사건은 일제의 잘못된 침략 행위에 대해 한국인이 강한 저항 의지를 표명한 대승적인 의거(義擧)로 볼 수 있다.

2.1. 한·일의 이토 히로부미 인식

  • 한국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 일본에서의 이토 히로부미
    • 봉건적 막부 시대를 타파하고 메이지 유신을 이끌어 개혁개방에 앞장섬
    • 정한론을 통해 조선 침략과 제국주의적 팽창을 주도함
    • 일본을 부강한 근대적 경제 국가로 이끌고 선진 문물을 들여오는 데 큰 기여를 한 공로를 인정받음
    •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이자 현대 일본 정치와 일본 경제의 선구자로 불리며 인정받음
    • 근현대 일본 헌법을 제정한 시조로 인정받음[12]
    • 일본을 서구 열강과 동등한 국가로 만들어낸 선구자로 인정
    • 근대 일본의 초대 내각총리대신
      • 현재의 일본 우익들이 우상으로 여기며 그를 저격한 안중근을 단순 테러범, 살인범, 흉악범 등으로 평가절하함

3.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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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영효 등이 고종의 퇴위에 협조한 대신들을 암살하려다 처벌된 사건은 이완용이 고종 퇴위를 반대하던 대신들을 제거하기 위해 조작된 사건이라는 주장도 있음}}}}}}}}}


캡션

1905년 11월 대한제국과 일본제국 사이에 제2차 한일협약이라는 불평등 조약이 체결되었다.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상실했다. 이에 일본은 대한제국의 외교를 관리한다는 명분으로 수도 한성한국통감부를 설치했다. 그 해 12월 여러 차례 총리를 지낸 원로 정치인 이토 히로부미가 초대 한국통감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3월 한성에 부임했다. 통감부는 외교뿐만 아니라 대한제국의 정치, 경제 등 국정 전반에 간섭하였고 이완용 등이 이끄는 친일 내각을 세웠다. 고종 황제헤이그 특사 파견의 책임을 추궁당해 강제 퇴위하였고 제3차 한일협약이 체결되어 법령 제정, 관리 임명 등 주요 내정이 통감부에 장악당했으며 군대는 해산되었다. 이토는 1909년 6월 소네 아라스케에게 직책을 이임하고 귀국하여 제10대 추밀원 의장을 지내게 되었다.[13] 그러던 그는 일본의 만주 진출 정책과 관련하여 철도 문제, 경제 현안과 러일전쟁 뒷처리 등 여러 이해관계를 논의하기 위해 러시아 제국의 재무대신 블라디미르 코콥초프와 회담을 가지게 되었다. 이토와 코콥초프는 러시아가 청나라로부터 조차하얼빈에서 만나기로 했다. 이에 이토는 러시아가 제공한 특별열차를 타고 하얼빈역으로 향하기로 계획되었다.

이토의 침탈 정책에 대해 항일 의병은 그를 처단하려는 결심을 품고 있었다. 앞서 1909년 음력 2월 7일(양력 2월 26일) 안중근을 포함한 12명의 의병 동지들은 연해주 크라스키노(연추[14]) 인근에서 소수정예의 비밀 결사대 동의단지회를 결성하며 왼손 약지 끝마디를 잘라 그 피로 태극기의 4괘 자리에 '대한독립(大韓獨立)'을 쓰고 이토와 거물 친일파[15] 처단에 대한 결의를 다졌다.

1909년 10월 러시아 교민 신문 대동공보(大東共報)는 이토가 10월 26일 하얼빈을 방문하여 코콥초프와 경제 회담을 갖는다는 정보를 보도했다. 신문사 관계자들은 이 기회에 이토를 처단하고자 안중근에게 연락하여 함께 거사 계획을 구체화하게 되었다. 안중근은 21일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차를 타고 출발했고 우덕순 그리고 러시아어 통역 담당 유동하가 차례대로 합류하여 함께 22일 저녁 9시 15분 하얼빈역에 도착했다. 이들은 유동하의 사돈[16]이자 러시아 국적의 건축청부업자 교민 김성백의 집에 도착하여 신문을 읽고 이토의 하얼빈 도착 시각을 가늠했다. 23일 동지 일행은 이발하고 거사 계획을 점검한 뒤 기념사진을 찍었다. 또한 대동공보 하얼빈지국장 김형재의 중개로 하여금 러시아에서 세탁소를 운영하고 통역 일을 했던 교민 조도선이 어린 유동하를 대신하여 거사에 합류하게 되었다.

24일 안중근, 우덕순 그리고 조도선은 유동하에게 연락 업무를 맡기고 셋이서 삼협하(三峽河, 싼샤허) 행 열차에 올랐다. 이들은 삼협하에서 한 정거장 못 미치는 채가구(蔡家溝, 차이자거우)역에서 내려서 역사를 답사하고 거사 계획을 검토했다. 채가구는 러시아 소유의 동청(東淸)철도가 지나가는 역이었다. 러시아는 러일전쟁 이후 동청철도의 다롄~관성자(寬城子, 콴청쯔)[17] 구간 철도를 일본에 할양하였고 이는 일본의 남만주철도가 되었다. 이에 이토는 일본이 운영하는 남만주철도의 특별열차로 다롄에서 관성자까지 이동하고, 앞서 신문 기사에 따르면 25일 밤 11시 관성자에서 러시아의 동청철도 특별열차로 환승하여 채가구를 거쳐 26일 오전 하얼빈에 도착할 예정이었다. 안중근 일행은 채가구역 객사(客舍)에서 머물며 거사를 준비했다. 상황을 지켜보니 과연 러시아의 특별열차는 그날 밤 관성자로 향하기 위해 채가구를 지났다. 이 열차가 26일 아침 6시 다시 채가구에 도착한다는 사실 또한 조도선이 역 사무원으로부터 확인했다.

안중근 일행은 러시아 특별열차가 채가구역에 정차하여 이토가 잠시 휴식을 취하기 위해 하차했을 때 그를 저격하고자 하였다. 다만 채가구역 도착 예정 시각이 해 뜰 무렵인 이른 아침이므로 하차 여부가 불분명한 점 등의 여러 변수가 있었다. 안중근은 채가구에서 저격에 실패할 것을 고려하여 열차의 최종 도착지인 하얼빈에서도 대기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채가구역에서 하룻밤을 보낸 안중근은 25일 우덕순과 조도선을 채가구에 대기시키고 오후 2시경 홀로 열차에 올라 하얼빈으로 이동하여 김성백의 집으로 돌아갔다.

이토를 태운 특별열차는 예상대로 26일 아침 채가구에 왔으나 거사는 무산되었다. 철도들의 분기점[18]인 채가구역은 경비가 삼엄했고 러시아 육군 병력이 보안을 이유로 열차가 지나갈 때까지 숙소의 문을 잠가 버렸다. 아침 7시경 안중근은 FN M1900 권총을 챙기고 김성백의 집을 나서서 하얼빈역으로 향했다. 기차역에는 양국 수뇌를 환영하기 위해 일본인러시아인, 중국인[19]이 나오게 되었고 신변 경호를 위해 러시아 육군 헌병 및 청 육군이 경계를 서고 있었다. 다만 환영객에 대한 러시아 측의 검문과 수색 대비는 허술했고 안중근은 의심받지 않은 채 구내 찻집에서 열차의 도착을 기다릴 수 있었다.

드디어 9시경 이토 일행을 태운 특별열차가 하얼빈역에 도착하고 기차 안에서 그들이 모습을 드러내자 군중은 러시아 제국 국기일장기를 흔들며 환영했다. 역사에서 대기하고 있던 코콥초프 일행은 이토의 객차에 올라 20분가량 환담을 나누었다. 이윽고 9시 25분경 중절모를 쓴 이토가 수행원 그리고 러시아 측 인사들과 함께 열차에서 내렸다. 군악대의 연주 속에서 이토는 군중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고, 러시아 무관과 각국 영사들이 인사를 나누기 위해 플랫폼에 나와 있었다.[20] 러시아군 의장대 뒤에서 대기하던 안중근은 저격 기회를 노려 의장대 사이로 나와 품 속에 있던 권총[21]을 꺼내 열 발자국 거리 앞에 있는 이토를 향해 조준하고 이토의 우측부를 향해 첫 발을 쏘았다. 첫 발은 이토의 팔을 뚫어 가슴에 도달했고 안중근은 계속해서 2~3발을 추가로 발포했다.[22] 이토는 결국 땅바닥에 쓰러졌고 안중근은 혹시 다른 사람이 이토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일행들 중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川上俊彦),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다이지로(森泰二郎), 남만주철도 이사 다나카 세이타로(田中淸次郎)에게도 총탄을 발포하여 중상을 입히고 총알 한 발을 남겼다.[23][24]

안중근은 즉시 청과 러시아의 호위병들에게 체포되었고 "코레아 우라!(Корея Ура!, 대한국 만세!)"라고 외쳤다.[25][26][27][28]

한편 이토는 총탄을 맞은 직후 기차 안으로 옮겨져 자신을 수행하던 의사 고야마 젠(小山善)의 응급 처치를 받았지만 약 30분 만에 숨이 끊어졌고 동행했던 그의 손자가 유언은 없다고 공식적으로 확인했다.

이후 우덕순, 조도선은 오전 11시경 채가구역 객사에서 러시아 육군 헌병의 검문을 받았고 몸에서 총기가 적발되어 체포 후 압송되었다.

하얼빈은 청나라 땅에 러시아 조계지이므로 러시아 내지는 청나라에서 조사 후 재판받는 게 맞았다. 실제로 한국인 변호사들은 러시아 헌병이나 청나라 경찰이 사건을 조사하고 청나라에서 재판하기를 원했지만 청나라에 있었던 일본 제국 경찰 영사는 상황의 심각성에 따라 안중근의 신병을 일본으로 넘겨 버렸다.

4. 결과

이 사건으로 이토 히로부미는 덤덤탄에 맞아 사망하였고 일행 중 일부는 총상을 입어 사상자가 발생했다. 안중근 그리고 우덕순, 조도선, 유동하 등 관련자들은 러시아 헌병대와 청나라 경찰에 체포된 후 러시아 검찰로부터 간단한 조사를 받았다가 저녁에 하얼빈 일본영사관을 거쳐 10월 28일에는 일본의 식민지관동주 뤼순감옥으로 이송, 수감되어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극비(極秘) / 메이지 42년(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 제출

한국인 안응칠 소회(所懷)
하늘은 백성을 낳으시고 사해 안의 모든 이들은 형제와 같다. 각자는 자유를 지키고 생명을 좋아하며 죽음을 싫어하는 것이 상정(常情)이다. 오늘날 세상 사람들은 문명 시대라고 일컫는다. 그러나 그렇지 않음에 나는 홀로 깊이 탄식한다. 문명인은 동양과 서양, 현명한 이와 어리석은 이,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각자 천부(天賦)의 본성을 지키며 도덕을 숭상하고, 서로 경쟁하는 마음이 없으며 편안히 살면서 맡은 직업을 즐기고 태평을 함께 누린다. 이것을 문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는 그렇지 않다. 소위 상등(上等) 사회, 고등 인물들이 논하는 것은 경쟁의 이론이며 탐구하는 것은 살인 기계이다. 고로 동서양 육대주에서는 하루도 포연탄우(砲煙彈雨)[29]가 끊이지 않는다. 어찌 개탄(慨嘆)하지 않겠는가? 지금 동양의 대세(大勢)를 말하자면 더욱 심히 부끄러운 형상에 참으로 기록하기 어렵다. 소위 이토 히로부미는 천하의 대세를 깊이 살피지 못하고 잔혹한 정책을 남용하여 동양 전체는 장차 어육지장(魚肉之場)[30]을 면하지 못할 것이다. 아아! 천하의 대세를 원려(遠慮)하는 뜻있는 청년들이 어찌 감히 속수무책으로 앉아서 죽음을 기다리겠는가? 그리하여 나는 끊임없이 생각하여 하얼빈에서 만인의 공평한 눈 앞 총포 하나로 늙은 도둑 이토의 죄악을 성토(聲討)하고 동양의 뜻있는 청년들의 정신을 깨우치고자[31] 하였다.[32]
한국 근대사료 DB, 통감부문서 7권, 안중근 관련 1건 서류, (144) 안응칠 이토의 침략정책 규탄문.

당시 안중근 의사는 자신이 이토를 죽인 이유를 말하며 그의 15가지 죄악을 나열했다.[33] 다음은 검사 미조부치 다카오(溝淵孝雄)[34]의 심문을 받을 때 제시한 이토 히로부미의 죄악(罪惡)이다.
메이지 42년(1909년) 11월 6일 오후 2시 30분 제출

이토 히로부미 죄악
1. 1867년 대일본 명치 천황[35] 폐하의 부친 태황제 폐하를 시살(弑殺)한 대역부도(大逆不道)의 일[36]
2. 1894년 한국에 사람을 부려 병사를 황궁에 돌입시켜 대한 황후 폐하시살한 일
3. 1905년 병력을 돌입시켜 대한 황실을 위협하여 황제 폐하께서 다섯 조항의 조약을 강제로 체결하게 한 일
4. 1907년 다시금 많은 병력을 한국 황실에 돌입시켜 칼을 빼 들고 위협하여 일곱 조항의 조약을 강제로 맺게 한 후 대한 황제 폐하를 폐위시킨 일[37]
5. 한국 내 산림, 하천, 광산, 철도, 어업, 농·상·공업 등을 일일이 늑탈(勒奪)한 일[38]
6. 소위 제일은행권을 강제로 사용케 하고 단지 한국 내에서 유통시켜 전국의 재정을 고갈시킨 일[39]
7. 국채 1,300만 원을 한국에 강제로 지게 한 일[40]
8. 한국 내 학교의 서책을 압수하여 불사르고[41] 내외국의 신문을 민인들에게 전하지 못하게 한 일[42]
9. 한국 내에서 많은 의사(義士)가 봉기하여 국권을 되찾고자 하였으나 그들을 폭도로 칭하여 발포하거나 목 졸라 끊임 없이 살육하고 심지어 의사의 가족까지 전부 십여만 명을 참혹히 죽인 일
10. 한국 청년의 외국 유학을 금지한 일
11. 소위 한국 정부의 대관이라는 오적, 칠적 등과 일진회 무리를 체결하여 한인은 일본의 보호를 받고자 한다고 운운한 일
12. 1909년 다시금 다섯 조항의 조약을 강제로 체결한 일
13. 한국의 3천 리 강토(疆土)를 일본의 속국으로 삼고자 한다고 선언한 일
14. 1905년 이후 한국은 하루도 평안한 날 없이 2천만 생령(生靈)의 곡소리가 하늘에 진동하고 살육이 끊이지 않으며 포성과 탄우(彈雨)가 지금까지도 그치지 않는데, 다만 이토는 한국이 태평무사한 것처럼 명치 천황에게 보고한 일
15. 이로써 동양의 평화를 영영 파괴하고 수많은 인종이 장차 멸망을 면치 못하게 한 일

수많은 죄를 낱낱이 거론할 수 없으며, 이와 같이 교활한 전후 소행은 외부적으로는 열강의 신의를 잃고 내부적으로는 이웃 나라와의 교의(交誼)를 단절시켜 먼저 일본을, 나중에는 동양 전체를 멸망시키고자 하니 어찌 통탄하지 않겠는가? 동양의 뜻있는 청년 여러분이 깊이 살펴야 하겠도다.[43]
한국 근대사료 DB, 통감부문서 7권, 안중근 관련 1건 서류, (144) 안응칠 이토의 침략정책 규탄문, 별지 이토 히로부미 죄악.[44]

싱가포르의 영자신문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1909년 12월 2일자의 하얼빈 비극(The Harbin Tragedy) 기사에도 이토의 15가지 죄악이 소개되었다. # 다만 통감부문서의 한문 자료와는 정확한 내용과 순서가 다르다.
예비 조사에서 암살범은 자신의 행동을 변호하여 15가지 이유를 제시했다고 한다. 그는 이토 공이 다음과 같은 책임이 있다고 주장했다.
(1) 한국의 고(故) 여왕살해한 일
(2) 1905년 11월 한국이 일본의 보호국이 되게 한 조약의 설치
(3) 1907년 7월 일본에 의해 한국에 강제된 새로운 조약
(4) 전 황제의 폐위
(5) 한국군의 해산
(6) 무고한 사람들의 학살
(7) 한국인의 권리 박탈
(8) 한국 교과서를 불태워 파괴
(9) 한국인의 신문 기고 금지
(10) 은행권의 문제
(11) 한국이 3백만 파운드의 국채를 책임지게 함
(12) 동양 평화의 방해
(13) 조건들의 진정한 의미에서 일본의 한국 보호권 정책 수행 실패
(14) 일본 황제의 아버지 고(故) 고메이 황제 살해
(15) 일본 그리고 세상을 속임
더 스트레이츠 타임스(The Straits Times) 1909년 12월 2일자, 5페이지 '하얼빈 비극(The Harbin Tragedy)' 기사 중에서 번역.

재판에서 안중근 의사는 "조선의 국모 명성황후를 살해한 미우라는 무죄, 이토를 쏴 죽인 나는 사형, 대체 일본법은 왜 이리 엉망이란 말입니까" 라고도 항변하였다.

이후 관동도독부 법원에서 1910년 2월 14일 사형 선고를 받고[45] 동년 3월 26일에 교수형으로 순국했다.

거사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하얼빈역 개보수로 저격지점에 화단 등이 배치돼 실제 저격 지점을 알 수 없었으나 2006년에야 하얼빈시 철도국이 안중근 의사가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바로 그곳에 화살표 모양의 타일을 설치했으며 이토 히로부미가 저격당한 지점에는 마름모 모양의 타일이 배치돼 그때의 일을 증명하고 있다. 당시 박근혜 대통령의 기념비 설치 제안에 일본이 반발하자 중국은 아예 안중근 기념관을 건설하였다.

5. 의의

대한제국은 1905년 을사조약 체결로 일본의 보호국으로 전락한 상태였다. 이에 조선 보호론 실현의 주역인 이토 히로부미를 암살함으로써 보호국화의 국제법불법성을 널리 알리고자 했다. 일부 한국인들의 강력한 항일 투지와 의지를 보여준 사건이었지만 실질적으로 영향을 끼칠 수는 없었기 때문에 일본은 예정대로 1910년 한일병합조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을 식민지화했다.#[46]

한편 일본에서는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의 식민 지배가 시작되었음에도 안중근 연구회가 만들어지는 등 안중근에 대해 일부 긍정적 시각이 대두하기도 했다. 특히 놀라운 사실은 뤼순 감옥의 간수들 가운데 그의 전담 간수이던 지바 도시치를 비롯해 여러 일본인들이 그의 인품에 감화되어 스스로 일본인임이 부끄럽다고 할 정도였다는 것이다.[47][48] 안중근을 심문하던 검찰관이나 감시하던 간수, 또 전담 통역관과 의사, 승려 등 많은 일본인이 안중근에게 붓글씨를 부탁하여 소중히 간직하게 되었고 현재 31점은 한국에 기증되거나 매입되어 보물 안중근 의사 유묵으로 지정되었다.

6. 여담

  • 일부 일본인 음모론자들은 안중근은 사실 '진범'이 아니며 러시아 측에서 배치한 저격수가 카빈총으로 이토를 쏘았다고 주장하는데 이토가 맞은 총탄이 러시아군에서도 사용하는 탄약이고 총탄이 맞은 각도가 수평으로 날아온 것이 아니고 위쪽에서 내려쏘았다는 게 근거라고 한다. 물론 어디까지나 음모론일 뿐이다.
  • 항일 언론 활동을 하던 대한매일신보에서는 이 하얼빈 의거 소식이 알려지자 사옥에 태극기를 내걸고 축배를 들면서 잔치를 열었다고 한다.
  • 일본 법을 적용하여 안중근에게 사형 선고를 내린 사람이 관동 도독(만주 총독)이었던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였는데, 바로 아베 신조의 진외고조할아버지(아베의 증조할머니의 친정아버지)였다. 즉 아베는 안중근을 처형한 사람의 현손이다. 아베의 최후를 생각한다면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겠다.
  • 역사학자 임용한과 종군기자 태상호의 하얼빈 의거 당시 사용된 안중근 의사의 사용 총기 분석과 상황 해설 영상.#1, #2
  • 안중근이 사용한 FN M1900 자동권총은 일본이 증거품 명목으로 압수했는데, 이후 행방이 묘연하다. 1923년 관동 대지진 때 망실되었다는 추정도 있으나 명확한 증거는 없다.


[1]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2] 어육(魚肉)은 짓밟고 으깨어 아주 결딴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육지장(魚肉之場)은 곧 그런 참혹한 장소를 의미.[3] 한문 원문의 표현은 정신을 차려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타일러 깨우친다는 뜻의 경성(警醒).[4] 원문: 所謂伊藤博文, 未能深料天下大勢, 濫用殘酷之政策, 東洋全幅, 將未免魚肉之場. 噫遠慮天下大勢有志靑年等, 豈肯束手無策坐以待死可乎. 故此漢, 思之不巳一砲於哈爾賓萬人公眠之前, 欲爲聲討伊藤老賊之罪惡, 警醒東洋有志靑年等之精神的也.[5] 경술국치 이전이지만 당시 대한제국을사조약 등으로 주권을 사실상 상실한 상태였다.[6] 지금은 중국의 헤이룽장성에 위치한 지역이지만 당시에는 러시아가 조차하고 있었다.[7] 이토 히로부미는 초대 그리고 제5, 7, 10대 총리를 지냈다.[8] 본 사건의 위키백과 일본어판의 표제어는 '이토 히로부미 암살 사건(伊藤博文暗殺事件)'이다. 사실 한국어판 표제어 또한 비슷하게 중립적인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이다.[9] 테러의 의미는 '무력을 통해 정치적인 의사를 표출하는 행위' 내지는 '정치적인 목적을 위한 폭력 행위'다. 따라서 행위의 형식만 보면 사전적 의미의 '테러'지만, 이러면 전쟁도 테러고 적성 국가 요인 저격도 테러다. 즉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논리가 되어버리므로 일반적으로는 '불법적인 민간인 학살 행위'를 테러로 지칭한다. 사실 정치적 의도의 여부보다는 이러한 방식, 즉 민간인을 대상으로 한 불법적, 무차별적 공격이 테러 성립 여부를 가르는 큰 기준인 편인데, 이를 무시하고 무력을 동원한 모든 행위가 곧 테러라고 지칭하는 것은 명백히 잘못이다.
따라서 독립운동을 테러라 지칭하는 경우는 세계적으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다. 대표적으로 프랑스의 2차 대전기 레지스탕스를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의열(義烈) 투쟁'이라고 한다. 물론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의 독립운동과 이를 지원하고 명령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행보까지 의열 투쟁이라고 칭한다.
[10] 사실 일본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사전인 코지엔(広辞苑)이나 macOS에 기본 탑재되어 사용율이 꽤 높은 다이지린(大辞林) 같은 사전에서는 안중근을 독립운동가로 소개하고 있다. 코지엔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안중근: 조선의 독립운동가. 가톨릭교도이며 학교를 설립. 또한 의병을 조직. 1909년 10월 26일 전(前) 한국 통감 이토 히로부미를 하얼빈에서 살해하여 사형. 한국 / 북한에서 의사로 칭해진다. (1879년 ~ 1910년)"[11] 제2차 세계 대전 시기 체코 군인들이 나치 독일 최고위층인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를 암살한 유인원 작전과도 비슷한 맥락이다. 물론 유인원 작전의 주동자들을 순전한 테러리스트라 우기는 자들은 네오나치 말고는 드물 것이다.[12] 구 일본 헌법 제정 당시 추밀원 의장이었다. 당시 총리는 구로다 기요타카.[13] 이토는 이전에도 초대·제3대·제8대 추밀원 의장을 지냈다.[14] 한자 표기는 延秋, 煙秋, 烟秋 등.[15] 내각총리대신 이완용, 중추원 고문 박제순, 내부대신 송병준[16] 유동하의 여동생과 김성백의 남동생이 약혼한 사이었다.[17] 창춘 인근의 마을이다.[18] 지방에 위치한 시골 역이었기 때문에 규모가 작아 경비 인력이 역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19] 사실 중국인이 제일 많았다. 비록 러시아의 조계지이긴 했어도 엄연히 청나라의 영토였기 때문이다. 영국령 홍콩이 영국 조차지였지만 한족 홍콩인이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한 것과 마찬가지다.[20] 이때까지만 해도 안중근은 이토 히로부미와 면식이 없었던 탓에 수많은 군중과 섞여 있는 이토를 알아보지 못했고 일을 그르치는가 했다가 일부 군중이 이토의 이름을 부르자 백발에 길고 흰 수염을 가진 남자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을 보고 그가 바로 이토임을 인식했다.[21] FN M1900 자동권총을 사용했으며 S&W M2 리볼버(육혈포)는 소지했으나 사용하지 않았다.[22] 이는 이토 히로부미의 얼굴을 정확히 모르기 때문이었는데 이미 이토는 이전에 원태우 의사에게 죽을 뻔했기 때문에 신변의 위협을 느껴 자신의 사진이 나도는 걸 막았다.[23] 이걸 자결용이라고 추측하는 경우가 많은데, 안 의사는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다. 가톨릭에서 자살은 과거에는 장례 미사도 치러 주지 않았을 정도로 큰 죄악이다. 당시 자결할 생각이 추호도 없었고 이토 처단 후 재판에서 이토의 죄를 낱낱이 밝힐 생각이었다고 여러 번 진술했다. 총알 한 발을 남긴 건 이미 이토가 쓰러져서 더 쏠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한다.[24] 이 총알 한 발을 하나의 메시지로 해석하는 이야기도 있다. 당시 안중근은 이토를 저격하고도 혹여 변장했을까 싶어 이토 히로부미 주변의 일본인들도 저격했는데 이토가 쓰러졌으니 쏘지 않았다는 건 모순이라는 것이다. 이 관점에서의 해석은 자신이 무차별적으로 사람을 죽인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한 발을 일부러 남겼다는 것이다.[25] 당시 안중근이 과연 어느 언어로 이 말을 외쳤는지는 불분명하다. 통상적으로는 러시아어라고 받아들여지나 서로 충돌하는 1차 사료가 많아 해석이 난해한 편이다. 에스페란토라는 설도 있으나 널리 받아들여지지는 않는다. 이에 관한 자세한 내용은 신현규 교수가 낸 관련 논문(PDF 자동 다운로드 링크), (KCI 등재)을 참고해 보면 좋다.[26] 흔히 대한민국 만세라고 외쳤다고 생각하지만 암살 시점은 아직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생기기 10년 전이었으므로 대한국 만세 혹은 대한제국 만세라고 외쳤다고 보는 게 옳다. 사실 임시정부 수립 시도 중 대한민국이란 이름을 지을 때조차도 논쟁이 있었기 때문에 안중근이 대한민국이란 어휘를 미리 알았을 리가 없다. 임시정부 수립 논의 당시 20여년 잠깐 썼던 대한제국을 따서 만든 대한민국이란 말 대신 500년짜리 전통이 살아 있고 해외에도 기록이 많이 남은 국호인 조선임시정부로 하자는 의견이 꽤 있었다.[27] 최소한 그냥 대한이거나 대한제국을 의미하는 게 옳을 것이다. 안중근이 공화주의자인지 알 수 없는 데다가 의거 이후의 모습을 보면 근왕주의에 가깝기 때문이다.[28] 코레아 우라라고 외친 게 맞다면 위의 논쟁은 사실 큰 의미는 없다. 어차피 외국인에게는 조선도 대한제국도 대한민국도 다 코레아이기 때문이다.[29] 총포의 연기와 비 오듯 하는 탄알. 그만큼 치열한 전투를 이르는 말이다.[30] 어육(魚肉)은 짓밟고 으깨어 아주 결딴낸 상태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이다. 어육지장(魚肉之場)은 곧 그런 참혹한 장소를 의미.[31] 한문 원문의 표현은 정신을 차려 그릇된 행동을 하지 않도록 타일러 깨우친다는 뜻의 경성(警醒).[32] 원문:韓國人安應七所懷.
天生蒸民四海之內, 皆爲兄弟. 各守自由, 好生厭死, 人皆常情. 今日世人例稱文明時代. 然我獨長嘆不然. 夫文明者, 勿論東西洋賢愚男女老少, 各守天賦之性, 崇常道德, 相無競爭之心, 安土樂業, 共享泰平. 是可曰文明也. 現今時代不然. 所謂上等社會, 高等人物者, 所論者競爭之說, 所究者殺人機械. 故東西洋六大洲, 砲煙彈雨, 無日不絶. 豈不慨嘆哉. 到今東洋大勢, 言之則慙狀尤甚, 眞可難記也. 所謂伊藤博文, 未能深料天下大勢, 濫用殘酷之政策, 東洋全幅, 將未免魚肉之場. 噫遠慮天下大勢有志靑年等, 豈肯束手無策坐以待死可乎. 故此漢, 思之不巳一砲於哈爾賓萬人公眠之前, 欲爲聲討伊藤老賊之罪惡, 警醒東洋有志靑年等之精神的也.
[33] 안중근의 의거를 주제로 한 뮤지컬 영웅의 넘버 중 가장 유명한 누가 죄인인가의 가사 내용이기도 하다.[34] 이 사람은 아래의 15가지를 듣고 그대는 정말 깊은 뜻을 품고 행동했다면서 사형을 선고받는 일은 없게 해 보겠다고 칭찬했다고 한다. 그러나 7번째 심문까지는 점잖았던 태도가 안중근을 살인범으로 대하라는 명령을 받은 뒤 8차 심문부터는 고압적이고 험하게 바뀌었다.[35] 메이지 천황이 붕어하고 다이쇼 천황이 즉위한 해는 1912년이므로 의거가 일어난 1909년에는 연호를 붙인 '명치 천황'이 아니라 현임 군주라는 의미의 '금상 폐하'로 불렸다. 연호를 붙인 건 죽은 이에게 붙이는 시호에 해당하여 생존 천황에게는 쓰지 않았다. 그러나 원문을 적어 놓은 공사관 기록 홈페이지에는 메이지 천황으로 적혀 있어 이해하기 어려운 부분이다.[36] 메이지 천황의 아버지 고메이 천황은 1867년 급사하였는데 공식 사인은 천연두지만 에도 막부 측의 독살 혹은 그가 토막에 있어 보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 불만을 품은 존왕파의 독살이라는 설도 있다. 즉 이 부분에서는 존왕파의 이와쿠라 도모미고메이 천황을 독살했다는 주장을 취한 것이다. 다만 이는 심증 내지 카더라 뿐이지 사실로 밝혀진 바 없는 부분이므로 주의.[37] 고종 황제가 책임을 추궁당하여 강제 퇴위하게 된 일은 헤이그 특사의 파견.[38] 동양척식주식회사 등의 행보를 참조.[39] 지폐 이전에 사용된 동전은 구한말 한국 황실이 마구잡이로 찍어내는 등의 폐해가 컸다는 점과 휴대가 용이한 지폐가 보급되자 민중의 반응은 긍정적이었다는 점, 안중근이 과거 집필한 동양 평화론에서 한중일 삼국의 화폐 통합을 주장한 점을 들어 이 부분에 대해 되는대로 핑계를 댄 것이라고 주장하는 식민사관과 일본 학자들이 소수 존재하지만 삼국 화폐 통합은 어디까지나 오늘날의 유로처럼 한중일 삼국의 대등한 관계를 전제로 한 것이며 이미 화폐 정리 사업을 진행할 당시 일본의 행보는 안중근의 동양 평화론과는 거리가 많이 멀어진 상태였다.[40] 각종 불평등 조약을 통해 대한제국의 시설 개선, 개혁 등의 명목으로 강제로 진 빚이다. 당시 대한제국 1년 예산이 600만원 정도였으므로 2년치 예산이 넘어가는 셈. 이 빚을 갚는다는 명목으로 시작된 운동이 바로 대구에서 시작된 국채보상운동이다.[41] 조선교육령 문서 참조.[42] 신문지법 참조.[43] 원문:明治四十二年十一月六日 午後二時三○分 提出
伊藤博文罪惡
一. 一千八百六十七年大日本明治天皇陛下父親太皇帝陛下弑殺大逆不道事
二. 一千八百九十四年使人於韓國驅兵突入于皇宮大韓皇后陛下弑殺事
三. 一千九百○五年以兵力突入于大韓皇室威脅皇帝陛下勒定五條約事
四. 一千九百○七年更加兵力突入于韓國皇室拔劒威脅勒定七條約後大韓皇帝陛下廢位事
五. 韓國內山林川澤礦山鐵道漁業農商工等業一々勒奪事
六. 所謂第一銀行券勒用, 但換行于韓國內地, 沽渴全國財政事
七. 國債一千三百萬元, 勒負于韓國事
八. 韓國內地學校書冊壓收燒火, 內外國新聞不傳于民人等事
九. 韓國內地許多義士蜂起, 欲復國權者, 稱以暴徒或砲或絞, 殺戮不絶, 甚至於義士家眷全當奢戮者十餘萬人事
十. 韓國靑年外國遊學禁止事
十一. 所謂韓國政府大官五賊七賊等, 與一進會輩締結韓人, 欲受日本保護云々事
十二. 一千九百○九年更爲勒定五條約事
十三. 韓國三千里彊土, 欲爲屬邦於日本之樣宣言事
十四. 韓國自一千九百○五年都無安日, 二千萬生靈哭聲振天殺戮不絶砲聲彈雨到今不息然獨伊藤韓國以太平無事之樣上顯明治天皇事
十五. 自此東洋平和, 永爲破傷幾萬々人種將未免滅亡事
許多罪狀不可枚擧, 而前後所行如是犴猾, 外失信義於列强, 內絶交誼於鄰國, 欲爲先亡日本後滅東洋全幅, 豈不痛嘆哉. 東洋有志靑年諸公深察之哉.
[44] 안중근 기념관에서 실문서를 확인 가능하다.[45] 하얼빈이 러시아 조차지였기 때문에 원래는 베이징을 거쳐 러시아모스크바이르쿠츠크로 넘겨야 했다.[46] 애초에 일제는 한국을 최종적으로 식민지배할 계획이었지만 그 여력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일단 외교권을 강탈하고 친일적인 보호국으로 만들어 식민지배의 연착륙을 목표로 하였다. 그러나 고종의 헤이그 특사 등의 저항과 정미의병13도 창의군 등의 대대적인 의병 저항에 직면하여 일제는 기존의 정책을 폐기하고 조기합병으로 노선을 전환했다. 이미 이 시기의 이토는 본인의 정책실패를 인정하고 한국 병합에 찬성하는 입장을 표한 뒤 조선 통감에서 내려온 상황이었다. 따라서 이토의 사망과는 별개로 어차피 한일병합은 예정된 수순이었다.[47] 의외로 안중근은 일본의 우위를 인정했다. 그는 열렬한 한민족주의자였다기 보다는 아시아주의자임을 그가 저술한 동양평화론에서 잘 알 수 있는데 아시아에서 처음으로 근대화를 성공한 일본이 모범이 되어 한중일이 연합하자고 주장했다. 그가 이토를 살해한 것은 이토가 동양평화를 위협한다고 보았기 때문일 뿐 특별히 반일주의로 살해한 것은 아니었다. -강진구, 다문화주의 관점에서 본 아시아연대론, 2013[48] 게다가 일본도 안중근의 의거를 폄하하면서도 안중근의 인품에 많이 놀랐는지 안중근을 회유하려고 엄청 노력할 정도였다고 한다.[49] 김재규 당시 중앙정보부장이 박정희 당시 대통령(차지철 당시 대통령경호실장 포함)을 으로 쏜 사건인데 둘 다 총으로 벌인 암살이고 같은 탄약(.32 ACP)이 쓰였으며 한국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끼친 사건이라는 공통점이 있다.근데 명량 해전이랑 병인양요랑 청산리 전투도 사람이 죽은 건 맞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