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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군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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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2. 특징3. 왕권신권대립
3.1. 왕실 인사(친가) 기용3.2. 외가 중용 방법3.3. 환관 중용
4. 조선의 경우5. 사례
5.1. 현재5.2. 과거5.3. 가상
6. 같이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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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 Despotic Monarchy, Autocracy[1]

군주제의 한 형태. 군주의 권력에 제한을 두지 않는, 즉 군주가 국가의 모든 통치권을 장악해 단독으로 행사하는 정치 체제다.

문화권을 막론하고 근대 이전에는 가장 흔한 정치 체제였다. 그러나 헌법으로 군주의 권한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 아예 군주를 인정하지 않는 공화제가 근대부터 널리 퍼지면서, 오늘날에는 사우디아라비아 등 극소수의 국가들[2]만이 전제군주제를 유지하고 있다.

2. 특징

전제군주국의 군주는 국가 자체와 동일한 신성 불가침한 존재로 여겨진다. 그렇기에 전제군주제에서는 입법, 사법, 행정의 결정권이 전부 군주에 집중되어 있어, 현대 국가정체에서 일반적인 권력의 분립상태가 존재하지 않는다. 즉, 전제군주제 하에서 대부분의 국가기관은 군주의 권력을 신민에게 투사하는 기관에 불과하다.

예를 들어 전제군주국의 입법기관은 군주의 뜻을 따라 일반적이고 포괄적인 을 제안하는 역할을 수행하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제안에 불과하며 입법권은 전적으로 군주에게 있다. 따라서 군주는 이와 전혀 다른 법을 제정하는 게 가능한 건 물론, 입법 절차 없이도 칙령을 포고해 하루아침에 국가와 국민에 어떠한 제한이라도 가할 수 있다. 사법기관 역시 기본적으로는 군주의 대리인으로서 무엇이 법에 맞는지를 선언하고 확인하는 역할을 하지만, 전제군주는 사법기관의 결정에 구속되지 않고 언제든지 그 결정을 취소하거나 변경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군주는 아무 근거나 절차 없이 처벌을 내릴 권력이 있다. 이처럼 모든 결정권이 군주 개인에게 있기 때문에 군주가 정치를 잘 하면 효율적이고 신속한 의사결정이 이뤄진다.

그러나 전제군주제는 군주가 절대권력을 차지하는 관계로 정치적 견제가 매우 어렵다는 한계점이 있다. 군주가 잘못된 판단을 내리거나 국가에 명백한 악영향을 끼치는 행위를 저지르더라도 이를 타개할 방법이 극히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전제군주제 국가는 군주의 약간의 실책만으로도 휘청거리기 마련이며, 군주가 태만할 경우 국정이 한없이 정체되기 쉽다. 이는 오늘날의 독재 국가와도 비슷한 문제다.

또한 전제군주는 명목상으로는 그 나라의 모든 권력을 독점한 존재지만, 그에 상응하는 막대한 실권을 휘두른 전제군주는 이상과 달리 의외로 많지 않다. 본질적으로 전제군주제는 종교가 아니라 정치철학과 합리적 의사결정에 입각한 정치 체제였던 만큼, 군주의 실권이 무소불위하고 무한한 국가는 역사상 존재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군주의 권한은 무한하다"라는 사상이 군주의 권한보다 위에 있고, 그 사상이 무력화되는 순간 군주의 권한도 무력화되는 것이므로 이를 "무소불위한 권한"이라 칭하는 건 모순이다.

한편 군주의 권력이 제한받을 수밖에 없는 이유는 현실적 문제도 들 수 있다. 아무리 강력한 권력이 보장되어 있다 한들, 군주도 결국은 한 명의 사람이라 모든 통치행위를 혼자 할 수는 없다. 그러니 군주를 보좌하고 명령을 집행하는 관료, 고위직을 독점하는 귀족사대부, 지방의 유력 소귀족 및 호족 등에게 권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다. 군주는 궁전 안에 고립된 존재인 반면 권력층은 혈연, 학연, 지연 등 각종 인맥으로 서로 맺어져 있으니, 군주는 이들과 온갖 이해관계를 조율하며 타협해야만 했다. 특히 중앙집권이 강력한 동아시아권 국가에서는 이론상으로 보장된 권력이 실제로는 중앙 관료 집단과의 마찰로 인해 흔히 방해받곤 했다. 이러니 아무리 막강한 전제군주라도 명령 한 마디에 모든 일이 일사불란하게 돌아가게 하기는 어려웠다.

3. 왕권신권대립

전제군주가 권력을 장악하려 할 때를 왕권강화, 신하(조선양반, 서유럽귀족, 동유럽보야르, 일본다이묘 등)들이 권력을 장악하려 할 때를 신권강화라고 한다. 전제군주정의 역사에서는 왕과 신하의 주도권 다툼이 끊이지 않았다. 이런 상황을 타파하고자 몇 가지 편법이 사용됐는데, 통상적으로 많이 쓰이는 방법은 왕의 친가인 왕실 인사의 기용, 왕의 외가인 외척 기용, 환관의 중용이었다. 세 가지는 널리 쓰이는 만큼 효과가 있었지만 부작용도 심했다.

3.1. 왕실 인사(친가) 기용

친가인 왕실 인사 기용은 혈연을 통해서 권력의 통제가 가능하다는 것이 장점이다. 왕족인 만큼 신분상의 권위도 더 높으며 충성을 받아내기도 쉬웠다. 현대에도 이런 사례가 있는데, 사우디아라비아의 무함마드 빈 살만 왕세자는 사우디 총리를 겸직한다.

문제는 이런 식으로 권력을 가진 왕실 인사는 왕위 계승권이 있기에 반역을 꾀할 수도 있다는 점이었다. 특히 중앙의 권위가 약할수록 반역의 가능성이 높아졌다. 가령 신라에서는 상층부가 전부 진골 귀족들이었고 이들은 대부분 왕위 계승권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신라 하대의 혼란을 초래했다. 중국 역사에서도 서진에서 일어난 팔왕의 난이 있었다. 심지어 직계 왕자들에게 관직이나 군권을 나누어주었던 조선 초기의 경우엔 왕자의 난이나 계유정난 같은 정변이 계속 되었다.[3]

왕실 기용의 폭이 클수록 지배층의 반발도 커지기 때문에 어느 정도 체제가 정비된 국가일수록 왕실 기용의 폭이 줄어들 수밖에 없었다.

특이한 경우는 상황으로 물러나 정권을 휘두른 헤이안 시대의 일본이 있는데, 결국 상황과 천황의 갈등으로 조정권위에 떨어지고, 명목상으로 천황의 신하인 무사들의 정권 막부에 의해 실권을 빼앗기게 된다.

3.2. 외가 중용 방법

왕실 인사의 단점을 해소하면서 혈연이 있는 인척을 기용하기 위해 왕의 외가를 중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외척은 왕이라는 존재가 있는 모든 국가에서 사랑받는 권력 장악 수단이었다. 일단 외척은 왕가와 혼인으로 이어진 혈족이므로 왕과 이익을 공유하는 면이 있다. 또한 왕실과 혼인할 정도면 어느 정도 세력이 있어 지배층 내에서 상당한 발언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관료통제에도 용이했다. 그렇기에 설사 고위직을 맡기더라도 반발이 적었고 여론을 이끌기도 쉬웠으며, 결과적으로 왕실에 충성하는 당을 만들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왕위 계승권은 없었거나 왕실 부계 본가보다는 우선순위에서 밀렸으니 훨씬 안전했다. 뿐만 아니라 중앙집권이 강할수록 왕에 의지해서만 권력을 가질 수 있는 외척은 더더욱 왕에게 충성할 수밖에 없었다. 거기다가 외척의 세력 기반 자체는 오히려 왕이 아니라 외가인 왕비대비의 존재에 있기 때문에 왕비와 대비가 사망하거나 역모 수준의 큰 죄를 지어 폐위되면 왕 본인이 토사구팽하기도 용이했다.[4][5]

그러나 이것이 완전한 해결책은 아니었다. 외척을 이용하다 보면 필연적으로 한 가문, 집단에게 권력을 몰아주게 되는데 이는 왕실에 필적하는 세력의 등장을 의미했다. 새 왕이 즉위해서 외척이 바뀌면 문제가 해결되지만 이 경우에는 구 외척과 신 외척의 갈등이 발생한다.[6] 그렇다고 구 외척을 계속 중용하면서 혼인을 맺다가는 외척이 왕을 잡아먹는다. 왕망은 외척으로서 전한을 몰락시키고 을 건국했고 조선안동 김씨 세도가 기어코 나라 말아먹는 제1보가 돼버렸다. 일본후지와라 씨 내부의 아웅다웅 끝에 북가가 최후의 승자가 되고 이후 수세기 별탈 없다가 무사들에게 권력이 점점 잠식당하면서 겐페이 전쟁이 벌어졌다.

3.3. 환관 중용

한편 혈연적 관계가 없는 환관을 이용하는 방법도 있었다. 환관은 왕의 사유재산이나 마찬가지였으며, 궁궐에서 고립된 왕이 어려서부터 가까이 지낸 사람이기에 인간적 관계도 가까웠다. 게다가 관료제 밖의 존재라는 점 덕분에 지배층과 연결될 고리도 적었고[7], 권력이나 재물을 몰아줘도 고자라서 물려받을 자식이나 가족이 없으니 사후 재산을 회수할 수도 있었다. 이러한 이유로 혈연 못지않게 환관들은 왕들에게 사랑받던 존재였다.

권력을 부여받은 환관은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하기도 했다. 중국의 환관들은 조직화하여 단순한 왕의 명을 받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기밀관리, 군대 감독을 맡더니 급기야는 군대 지휘와 관료 감시까지 담당하게 된다. 명의 강력한 황제권 뒤에는 동창으로 대표되는 거대한 환관 조직이 있었다. 동로마 제국나르세스 같은 환관 장군이 있었다.

중국사에는 환관의 국정농단이 문제를 일으킨 사례가 많았다. 기본적으로 환관은 궁정 사무를 처리하는 존재였고 신분이 비천했으며 학문적 소양이 높지 않았고 높을 필요도 없었다. 이렇다보니 철학이나 비전도 없었고 권력을 얻으면 그저 자기 욕구를 해소하는 게 우선이었다. 거기다 군주에게 가까운 사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획득한 만큼 윗사람에게 잘보이는 아부와 처세술이 뛰어난 전형적인 간신, 무능력한 상사가 권력을 가지기 쉬웠다. 중국을 통일한 진나라에선 환관 조고가 국정 농단과 황제시해를 자행했고, 후한도 환관의 농단과 십상시의 전횡으로 결정타를 맞고 망했으며 당나라는 황제가 환관의 반란으로 노예인 환관의 포로이자 사실상 노예라는 처참한 상태가 되었다. 강력한 황제권을 가진 명은 황제가 환관에게 농락당하지 않았지만 대신에 환관이 황제를 홀리고 권력을 대신 휘두르면서 나라를 망하게 만들었다.[8]

4. 조선의 경우

동아시아에서는 전제군주제가 일찍이 확립되었고, 조선 또한 전제군주제 국가이다. 그런데 조선의 경우 조금 특이한 면이 있었다.

유가는 이미 법가[9]를 비롯한 다양한 사상을 받아들여 군주권을 정당화한 상태였다. 기본적으로 백성(民)보다는 천(天)의 개념이 절대적 권위의 가장 큰 근거라는 점을 생각하면[10] 근대 법치주의와는 큰 차이가 있다. 경국대전 같은 법전도 왕은 그 법 위에 있는 것을 전제로 만들어졌다.

물론 조선은 개국 이래로 신권이 드셌고, 군주가 어떤 정책을 추진하면 "아니되옵니다, 전하" 또는 "통촉하여 주시옵소서!"를 외치면서 제동을 거는 신하들이 많았다. 하지만 조선이 신권이 강했다고 해도 왕의 권력이나 권위가 약했다고 보는 것 또한 겉보기만 보고 섣불리 판단하는 것이다. 조선은 오히려 한국사에서 가장 왕권이 강한 나라였다.

조선의 왕은 관습법적으로 국가 내에 존재하는 토지와 재산에 대한 전면적인 소유권과 신민에 대한 생살여탈권이 인정되었다.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죽일 수 있었고, 누구의 재산도 빼앗을 수 있었다. 왕과 신하에게 여러 가지 조언을 올리는 기관인 삼사(사헌부, 사간원, 홍문관)가 존경을 받았던 이유가 바로 그들의 일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해야 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진짜로 죽이면 폭군을 자청하여 민심을 잃는 꼴이라 실행에 옮기는 경우가 드물었으나, '죽일 권리'가 있었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보통은 그냥 귀 닫거나 파직 또는 유배형으로 끝냈지만, 숙종송시열을 기어코 처형한 것처럼[11] 이론상 왕이 마음만 먹으면 아무리 수천의 제자가 있고 현인으로 칭송받는 거물이라 할지라도 살아남을 수 없었다. 제도 내에서 왕의 폭주를 제어할 장치가 미흡하기 때문에 연산군 같은 미치광이가 왕위에 오르면 쿠데타를 일으켜 몰아내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조선에서는 이론적으로 왕은 모든 신하들의 의견을 들어보고 중론을 취합하여 실행하는 것을 관례로 삼았다. 이러한 관례하에서 이루어진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마치 왕들은 모두 우유부단하고, 그저 신하들의 뜻에만 따라 이러저리 움직이기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실제 정치에서 왕이 신하들의 중론을 따르건 따르지 않건 그것은 왕의 마음이었고, 반대로 왕은 신하를 파직시키거나 귀양보낼 수도 있었으며, 다시 복직시키는 것도 왕의 재량이었다. 그러한 만큼 생살여탈권까지 가지고 있었다. 특히 사림이 대두되기 전인 초기~중기 무렵의 조선의 왕들은 '신하들의 언로'를 통제하는 것이 가능했다. 이 시기에도 한명회처럼 왕조차 쉽게 다루지 못하는 대신들이 존재하긴 했으나, 그 역시 이시애의 난에서 소문이 잘못 돈 것만으로 감옥 신세를 졌다. 즉, 왕이 신하들을 존중하는 것은 대부분 세자 책봉 및 후계자 교육 과정에서 최대한 정상인들을 뽑기 때문에 일단 본인부터 인성에 큰 문제가 없었고[12] 안정적인 통치에는 신민의 암묵적인 동의가 어찌 됐건 필요하기 때문에 그렇게 한 것이다.

여기에 중기 이후의 사림의 대두, 특히 '산림'의 등장은 이러한 기존의 정치 공식을 파괴하는 것이었다.[13] '산림'이란 존재의 가장 대표적인 특징인 '과거에 매달리지 않는다', 즉 정부의 녹을 먹지 않으며, 따라서 왕이 주도하는 조정의 여론몰이에서 자유롭다는 점은 왕 주도하의 여론몰이를 사실상 무력화시켰으며, 향촌의 사족층은 이들 산림을 중심으로 지방에서의 여론을 형성하여 왕이 인위적으로 언로를 통제하는 것을 크게 저해했다. 이는 다시 이러한 지역 기반을 토대로 하는 조정 대신들에게 힘을 실어주는 격이 되어 조정 내에서의 언로 또한 왕이 원하는 대로 움직이지 않는 상태가 된다. 거기다 선조부터 현종 때까지 조선의 왕들은 정통성 측면에서 상당히 불리한 상태였고, 이들 향촌 사족과 그들의 대표격인 산림의 지지가 절실했기 때문에, 이전처럼 마음대로 언로를 통제하여 원하는 대로 정국을 주도하기 힘들었다.

산림의 득세는 조선의 왕들에게는 상당히 큰 장애 요소였다. 결국 정통성이 가장 튼튼한 왕이었던 숙종부터 시작하여 환국정치, 영조의 산림 부정, 정조의 향악 통제 등 지방 여론의 장악에 나서 이를 달성한다. 정조심환지에게 보낸 어찰 등에서 보이듯 정조대가 되면 다시 조선의 왕들은 조정 내에서의 언로와 지방의 여론을 통제하는데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정조대의 이러한 언로 통제는 한편으로는 세도정치를 불러오는데 크게 기여하기도 했다.

따라서 이러한 전후 사정을 살펴가면서 실록에서 조정의 논의를 살피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조선 정치의 흐름이 아닌, 시기에 따른 왕의 정통성과 정치적 상황, 시대에 따른 향촌 사족층의 영향력의 증감[14] 등을 세부적으로 따져야 할 것이다. 신하들에 의해 정치적으로 왕이 흔들려 다녔다거나, 그 반대로 왕이 대부분의 논의를 마음대로 주도했고 조정 내에서의 논의는 왕의 행보를 추인하는 과정에 불과했다고 말한다면 이는 지나치게 단순화한 의견일 것이다.

신권이 관례적으로 보장을 받았다고는 해도, 유교적인 군신관계는 '충성'을 담보로 하는 관계이므로 현대적인 공화제와는 분명 비교할 수 없다. 사실 이러한 조선의 정치적 특성 때문에 유길준서유견문에서 조선의 정치체제를 왕이 명령하는 체제라고 하면서 조선은 법으로 정해지지는 않았지만 신하들과의 공론으로 결정한다고 했다. 사실 이럴 수밖에 없는 게 명예혁명에서도 보이듯 입헌주의는 귀족들과 왕의 합의체제로 생겨났는데, 조선은 그와는 좀 경우가 다르지만 상당히 세련된 정치체제를 이미 갖고 있었는 데다가 삼권분립도 이미 고려의 2성 6부제로 어느 정도 경험한 바 있기 때문이다.[출처]

5. 사례

5.1. 현재

명목상 입헌군주제의 요소를 차용했으나 실질적으로는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사례도 포함한다. 이 경우는 법률상에는 주권이 국민에게 있다거나 헌법으로 입헌군주제라는 등의 문구를 추가하고 있지만 형식상일 뿐이고 실제로는 군주의 권한이 막강하다. 이러한 군주제 국가들은 군주 자신의 정치력이 부족해도 전반적인 국가 운영을 정부수반인 총리가 행함으로써 국가가 유지될 수 있다. 그러나 군주 자신들에 대한 견제 장치가 없고, 정부수반이 뜻에 맞지 않을 경우 해임을 취할 수도 있다.

완전한 전제군주제는 볼드체. 특수한 경우 ★표.

  • 유럽

  • 엄연히 스스로의 정부 체제를 전제군주제라고 규정하고 있다. 전제군주제이면서 선거군주제인 특이한 국가로, 국토도 좁고 이탈리아에 둘러싸여있으면서 인구가 500명이 안 되는 소국이지만 거대종교인 가톨릭의 수장이기 때문에 교황의 영향력은 매우 강하다.



  • 오세아니아

  • 일단은 입헌군주제로 의회가 있기는 하지만 총리와 각료를 국왕이 임명한다는 점과, 의회를 구성하는 30명 중 이 각료가 12명, 귀족 중 선출되는 의원이 9명으로 2/3를 넘는다는 점에서 전제군주제에 가깝다. 평민이 선출 가능한 의원은 단 9명이다. 그나마 아킬리시 포히바 전 총리를 비롯한 민주화 진영의 투쟁으로 인해 투포우 5세 즉위 이후 상당 부분 민주화가 이루어졌으나 2006년 11월 16일에도 민주화 시위가 일어났고 반란으로 번졌다.

5.2. 과거

전근대 국가는 대부분 전제정이었기 때문에 일일히 나열하면 끝이 없다. 본 목록에서는 과거의 전제군주제 중 특기할 만한 사례만 기재한다.
  • 파일:부탄 국기.svg 부탄 (1949년 ~ 2008년, 2008년 입헌군주제 전환)

    • 국왕이 직접 정치제도를 전제군주제에서 민주주의로 제도를 바꾸려고 노력했고, 오히려 이를 자국 국민과 신하들이 반대했다. 그러나 국왕의 지속적인 설득을 받아들여 부탄은 전제군주 본인의 의지로 전제군주제가 폐지되고 입헌군주제 국가가 되었다. 외세나 혁명 등 타의로 입헌군주제가 된 대부분의 나라들과는 대조적인 특이한 사례다.
  • 파일:스페인국 국기(1945–1977).svg 스페인
    현재는 국왕의 권한이 제한된 입헌군주국이지만 1975년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사망한 직후 후안 카를로스 1세가 즉위했을 때 국왕이 절대권력을 쥐는 전제군주제가 잠시나마 시행된 적이 있었다. 후안 카를로스 1세는 독재자 프랑코가 키운 후계자로서 즉위했기에, 그가 휘둘렀던 절대권력을 고스란히 물려받은 상태였다. 스페인 왕국프랑코 체제의 연장선이라서 가능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후안 카를로스 1세는 자신의 권력을 바탕으로 민주화 개혁을 추진하였고, 스페인의 전제군주정은 오래지 않아 막을 내렸다.

5.3. 가상

6. 같이보기


[1] 직역하면 '자체(Auto, 自體)(-cracy, 政).' 왕권은 신으로부터 부여된 것이라는 왕권신수설 혹은 인민으로부터 부여받았다는 주권재민적 담론과 구분되는 의미에서, 왕권의 근거를 왕 개인 자체(Auto)에서 찾는 것을 말한다.[2] 북한은 대외적으로 사회주의를 표방하나, 사실상 전제군주제 국가라고 볼 수 있다.[3] 다만 왕자의 난은 건국주인 태조 재위 중에 일어난 것이기에 시행착오과정에 가깝기에 특별히 친가에게 권력을 몰아준 탓에 벌어졌다보긴 어렵다. 계유정난조차 세종 치세 이후 왕실 질서가 잘 확립되어 왕자들의 권한이 커도 문제가 없었지만 현덕왕후와 소헌왕후 사망 이후에 왕비를 새로 들이지 못한채 연달아 세종과 문종이 죽으면서 어린 나이에 즉위한 단종 대신 수렴청정(섭정)을 하면서 왕실 인사들을 통제해야할 웃어른인 왕대비가 부재했던게 컸다.[4] 실제로는 죄가 없더라도 왕이 뒤집어 씌우는 경우도 흔했다.[5] 조선시대 기준으로는 대비가 폐위된적이 없기 때문에 대비의 가문은 대비의 사망 이후 숙청되거나 높은 권세를 금방 잃었다. 대표적으로 숙종 대에 명성왕후를 뒷배로 두어 기세등등하게 국왕인 숙종과 같은 서인들의 어그로까지 끌던 김석주는 아예 명성왕후 사망 직후 바로 사직을 하고 1년 뒤 병사했으며 청풍 김씨 가문은 정계에서 주도권을 상실했다.[6] 이는 고부갈등으로도 연결된다. 구 외척은 주로 대비가, 신 외척은 왕비가 중심이 되는 것. 물론 대비가 보통 나이가 더 많아서 별일 없이 시간만 지나면 대비가 노환으로 죽기 때문에 젊은 왕비가 중심인 신 외척으로 세력이 쏠리게 되지만 왕대비는 권한이 매우 제한적인 서양 군주국에서도 무시할 수 없는 왕실 최고 어른이기에 왕조차 함부로 하기 어려워서 왕비를 중심으로 한 신 외척은 대비가 살아있는한 구 외척에게는 밀리기 마련이다.[7] 예를 들어, 만에 하나 환관이 군주를 시해하더라도, 그 환관이 군주가 되기는 매우 어렵다. 막대한 권력을 쥐었던 조고조차도 이세 황제 시해 이후 자신이 왕이 될 수 없어 영자영을 왕에 올렸을 정도다.[8] 여담으로 조선은 이런 환관제의 폐단을 중국사와 고려말부터 파악해 환관의 전횡을 제도적으로 차단하려 노력했는데 그중 제법 효과적이었던게 환관에게 가정을 이뤄준 것이다. 환관들에게 결혼과 입양을 통한 가족형성을 적극적으로 권장하면서 환관들이 가족 관계를 통해 권력 외에 관심을 기울일 부분을 만드는데 노력했으며 이것이 제법 효과를 보아 경종 초기 등 특별한 상황을 제외하고는 환관이 전횡을 부리는 경우가 없었다. 그외에도 이런 가족제도 덕분에 조선에서는 (입양을 통하여) 대를 이어 환관을 하는 환관 가문들이 존재했다.[9] 흔히 법가가 왕의 통치를 정당화하고 법을 왕의 마음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알려져 있지만 전혀 그렇지 않다. 법가에서 왕은 법률의 집행자에 불과하다. 다만 법가에서 말하는 법은 근대 법치주의와는 상당히 다르다.[10] 단 유교에서는 민심을 곧 천심이라 보고 있으므로 어느 정도 참작할 여지가 있다. 인간은 누구나 이러한 천(天)의 속성(道)을 이어받았으며, 따라서 이것이 민본주의를 뒷받침한다. 이러한 속성은 맹자성리학을 거치면서 세계 자체를 유교 질서 아래에 포괄하는 원리로 발전한다. 법가의 효율성이 훨씬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동아시아 사상계에서 유교가 끝까지 살아남은 건 이러한 절대적인 정당성과 발전하는 포괄성 때문이다. 조선 말기의 실학자 최한기의 글을 보면 서양 과학까지 기(氣) 철학을 통해 이기론의 아래에 포섭하려고 했다.[11] 숙종도 송시열을 임의로 죽인 것은 아니고, 왕권을 확립하는 과정에서 송시열이 끝까지 반대하며 그를 구심점으로 한 세력이 계속 모여서 반기를 드니 어쩔 수 없이 죽인 것이다. 무엇보다 그의 가족과 지지자에게 해를 입히지 않았다.[12] 태종이 인성에 문제가 있었던 장남 양녕대군을 바로 폐세자 처리하고 삼남 충녕대군을 세자로 책봉하여 왕이 되기 위해서는 다른 것도 중요하지만 먼저 인간이 되어야 한다는 선례를 만들었기에 가능했다. 연산군 정도가 예외지만, 그 연산군조차 바로 막장성이 드러나지 않았고 즉위 후 10년까지는 오히려 훌륭한 군주였다. 그 외 다른 왕들 중에 광해군이나 인조, 선조처럼 특정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그 부분과 관련된 사안에 지나치게 민감한 사례가 있기는 하나, 적어도 기본 인성에 문제가 있어 신민들을 마구 죽이거나 말도 안 되는 정책을 강행한 왕은 의외로 조선시대에는 한 명도 없다.[13] 다만 산림의 존재에 대해서는 상당히 복잡하게 뜯어봐야 한다. 온갖 미화가 이뤄져 있지만, 정계에 진출할 수 있으면서도 자의로 정계에 나서지 않는 형태의 산림은 선조에서 시작해서 숙종에 이르는 지극히 제한적 시기에만 등장했다가 사라지는데, 이 시기는 붕당이 등장해서 다시 대립하고 본격화되는 시기와 맞물린다. 유교는 치국의 도이기 때문에 유교적 세계관에선 적극적인 현실 참여가 권장되므로, 정계에서 활동할 수 있지만 하지 않고 뒤에서 영향력만 행사한다는 형태는 특수한 상황에서만 존재한다.[14] 산림의 등장은 붕당 외에도 임진왜란을 비롯한 왜란과 호란의 시기와 연결되어 있다. 이 시기에 산림으로 표현되는 재지사족들은 약화된 영향력을 강화하고 수령과 결탁된 신향들과 영향력 대결을 펼쳐야 했다. 하지만 결국 수령의 힘을 등에 업은 신향과의 향전에서 패배하고, 붕당간의 정쟁은 더욱 심화되면서 상당수가 몰락하게 된다.[출처] < 탐스러운 동아시아사 9강>[A] 공식적으로는 입헌군주제로 분류되지만 군주의 실권이 상당히 강하기 때문에 전제군주제에 가까운 경우이다. 영위키에서는 이런 식의 형태를 executive monarchy라 해서 ceremonial monarchy, absolute monarchy와 구분한다.[A] [A] [A] [A] [21] 게임판에서는 그냥 자칭이며 따로 국가원수가 존재하지 않는다.[22] 타이타니아도 명목상 전제군주제지만 작품 초기에는 통치자가 우유부단해 왕권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실정이었고, 링폴드는 일종의 연맹왕국 체제다.[23] 명목상으로만 황제가 통치하는 전제군주국이지만 황제의 상태가 상태인지라 실질적으로는 세나토룸 임페리알리스가 통치하는 과두제에 가깝다.[24] 현재 에테리얼 슈프림인 아운바가 암살당하면서 공석인터라 집단 지도 체제에 들어갔다.[25] 섬의 궤적 2부터 섬의 궤적 4까지는 크로스벨 자치주노던브리아 자치주도 해당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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