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수정 시각 : 2024-11-19 05:23:04

A6M

제로 전투기에서 넘어옴

제2차 세계 대전의 일본 육·해군 항공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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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이더, 무동력기, 미사일 Ki-147, †Ki-148, †MXY8 아키구사
◈ 시제, 프로토타입 / † 페이퍼 플랜, 수입 실패 / ⓩ 제트 혹은 로켓 엔진 장착기 / ▼ 타 목적 기체를 유용함
국지전투기: 일본군이 운용했던 본토 방어 및 폭격기 요격 전용 전투기. 요격기 문서 참조.
※ 나무위키에 문서가 없거나 이 틀에 기재되지 않은 일본군의 항공병기 전체 목록은 일본 항공병기 설계안 문서 참조.
연합군(특히 미국)이 대전기의 일본 항공기를 지칭할때 사용했던 코드에 대해서는 연합국 코드명 문서 참조.
템플릿:일본 제국의 항공병기를 참조해 주세요. 전반적인 내용의 개선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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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A6M3_Zero_Thumbnail.jpg
零式艦上戰闘機 三菱 A6M
1. 개요2. 명칭3. 제원4. 개발5. 형식
5.1. A6M15.2. A6M25.3. A6M35.4. A6M45.5. A6M55.6. A6M65.7. A6M75.8. A6M8
6. 파생형7. 실전8. 사용 국가9. 장점
9.1. 저속기동성9.2. 항속거리9.3. 우수한 지속 상승률
10. 단점
10.1. 문제의 시작10.2. 엔진 출력 제로10.3. 통신 능력 제로10.4. 지나친 경량화
10.4.1. 방어력 제로10.4.2. 내구도 제로
10.5. 무장의 효율성10.6. 수납성 제로10.7. 문제점이 속출하는 개량과정10.8. 생산성 제로
11. 결론12. 미디어13. 모형화14. 기타15. 참고 문헌16. 둘러보기

1. 개요

A6M 비행 영상
영식함상전투기(零式艦上戰闘機) 미츠비시 A6M(三菱A6M) 또는 제로센(ゼロ戦, Zero Fighter)은 태평양 전쟁 당시 일본 제국 해군의 주력 함상 전투기이다.

96식 함상전투기의 차기 전투기로서 미쓰비시社가 설계한 기체로 날렵한 기동성과 긴 항속거리, 그리고 취약한 생존성이 특징이다. 중일전쟁 당시 국부군의 공군기와의 교전 경험 및 전훈을 바탕으로 제작되었으며, 육군기와 대등한 성능을 갖춘 함재기를 개발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진주만 공습 당시 보여준 활약으로 미군으로부터 '동양의 신비'라고 불리며 공포의 대상이 되었으나, 전쟁이 진행되면서 대응 전술이 개발되고, 기체가 노획되어 분석됨에 따라 열세에 몰리게 된다.[1]

제로센의 프로펠러는 미국제 프로펠러를 스미토모 사에서 라이센스 생산했다가 전쟁이 시작되자 그걸 복제해서 썼는데, A6M을 노획했던 미군이 이걸 보고 당황하기도 했고, 전후에 일본 정부가 해밀턴 사에 라이센스비를 지급하겠다니까 "그럼 1달러로 합시다."라는 회답을 받았다는 일화가 있다. 물론 쓸모없게 된 것이라서 1달러로 했다는 것보다는 적국의 무기 개발에 협력했다고 비난받을까봐 명목상으로 받았다고 보면 된다. 해밀턴 스탠다드사의 프로펠러는 독일도 한 수 접어줘야 하는 물건이긴 한데, 일본이 우려먹었던 건 구형 모델이다.

크게 나누어 초기생산형인 11형[2]과 이후 본격적으로 양산된 21, 32, 52형의 네 가지 변형이 있고 이 중 태평양 전쟁에 주력기로 투입된 기종이 21형.

중국 전선에 11형이 투입되어 첫 실전을 거쳤고 개전 당시에는 중일전쟁에서의 실전 데이터와 함께 함재기에 맞게 개수한 21형이 주력으로 사용되었다. 이후 엔진을 강화시킨 32형은 과도기적 기체였으며 이후 개량된 52형은 무장과 방호력을 강화시켰으나 근본적인 설계와 엔진의 한계로 결국 동네북이 되고 말았다.

원래는 항공모함 운용을 전제로 개발되었으나 일본이 여러 섬을 점령하면서 섬에 건설한 육상기지에서도 넓은 작전반경을 살려 많이 운용되었다. 유명한 제로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가 대표적인 육상기지 요원이었다. 또한 바퀴 대신에 플로트 장비를 한 수상기 버전[3]도 존재한다.

실전 투입 초기에는 신흥 열강이자 말석에 불과했던 일본이 이런 전투기를 만들었다는 것은 서양에게 대단한 충격을 안겨주었고, 연합군, 특히 미군 조종사들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4] 그래서 A6M은 강력했던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였다는 점과 남방 사령부의 유능한 에이스 파일럿들이 탔다는 이유로 전후 일본 사회의 자존심 회복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2. 명칭

이름 제식 명칭 영식함상전투기 / [ruby(零式艦上戰鬪機, ruby=れいしきかんじょうせんとうき)]
별칭 제로센 (ゼロ戰) ・ 레이센 (零戰) ・ 제로 파이터 (Zero Fighter)[5]
연합국
코드명
지크(Zeke)[6]
제식 기호&명칭(뜻) A6M 제식 채용년도 서기 1940년[7]
영문명 Japanese Navy Mitsubishi A6M (Zero-Fighter)

전투기의 정식 명칭은 '0식 함상 전투기()'로, 일본어 독음은 '레이시키칸죠-센토-키(れいしきかんじょうせんとうき)'이다. 영(零, 0)이라는 숫자가 붙은 이유는 군사장비 명명 전통에 따라 A6M이 제식 채용된 황기 2600년(서기 1940년)의 끝자리를 따 왔기 때문이다.[8] 한편 '제로센(zero-sen)' 이나 '레이센'이라는 별칭은 정식 명칭을 줄여서 부르던 통칭인 '영전(零戰)'의 일본어 독음으로, 특히 '제로센'은 이 기체를 가리키는 가장 유명한 명칭이다. 이미 이 전투기가 실전에 쓰이던 당대에도 제로센이라는 약칭이 민, 군을 막론하고 널리 쓰였으며 현대에는 완전히 제로센이라는 명칭으로 굳어졌는데, 이는 일본어에서 한자 '영()'자를 영어의 '제로'로 읽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그러나 영어에서 유래한 명칭이므로 극우파는 레이센 표기를 고집하는 경우가 있다.

연합국 코드명은 '지크(Zeke)'. 허나 이 기체를 상대했던 연합군 파일럿들은 적어도 1942년 초중반 필리핀 전역 시점부터는 발이나 케이트, 오스카 등과는 다르게 형식번호를 따서 제로(파이터)라고 주로 불렀다. 지크라는 발음은 아무래도 잡음이 잦은 당시 무전기 수준으로는 잡음으로 오해할 수 있어 좀 불안한 발음이었다. 군 통신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명확하게 들리냐 아니냐이기 때문에 발음은 매우 중요한 것이 어차피 코드명 부여는 적기의 기종명을 알 수 없어서 임의로 붙이는 건데, 제로는 그 명칭이 엄청나게 상징적이고 유명했으며 태평양전쟁 전에 완성되어 일본 제국 해군이 숨기기는 커녕 홍보했던 기체라 굳이 별도의 코드명을 쓸 필요성이 크지 않았다. 오히려 제로가 하도 유명했던 나머지 육군의 하야부사는 물론 전쟁 말기 히엔이나 하야테를 격추시키고도 제로를 격추했다고 보고해대는 불상사까지 벌어졌다.[9]

3. 제원

항목 A6M2b 21형 A6M5c 52형 병
운용국가 파일:일본 제국 국기.svg 일본 제국
그 외 다수
제조사 미쓰비시 그룹[10]
전폭 12.0 m 11.0 m
전장 9.05 m 9.05 m
전고 3.53 m 3.57 m
주익면적 22.44 m² 21.338 m²
자체중량 1,754 kg 1,970 kg
전비중량 2,421 kg 2,955 kg
익면하중 107.89 kg/m² 138 kg/m²
엔진 나카지마 사카에 12형 복렬 14기통
공랭식 성형엔진, 이승 940 hp
나카지마 사카에 21/31甲형 복렬 14기통
공랭식 성형엔진, 이승 1,130 hp
최대속도 533.4km/h[11](고도 4,550 m) 544.5km/h(고도 6,000 m)
최대 제한속도 629.7km/h,[12] 740.8 km/h[13]
항속거리 2,222 km(표준상태)
3,350 km(증조 장착시)
1,920 km(표준상태)
최대출력 30분+2,560 km(증조 장착시)
무장 기수 상면에 7.7 mm 97식 기총 2정(탄약 700발)
주익 양측에 20 mm 99식 1호 기관포 2정[14](탄약 60발)
30/60 kg 폭탄 2발 장착 가능
기수 상면에 13.2 mm 3식 기총 1정(탄약 230발)
주익 양측에 20 mm 99식 2호 기관포 4형 1정씩(탄약 125발)
주익 양측에 13.2 mm 3식 기총 1정씩(탄약 240발)
30/60 Kg 폭탄 2발/로켓탄 장착 가능[15]
가격 당시 생산단가 불명
현재 시세 약 3500만 엔[16]

4. 개발

영국 글로스터가 개발한 글로스터 F.5/34를 카피한 것이 기본 설계의 시작이었다.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는 독자설계임을 주장했지만, 외형설계[17]가 사실상 동일하다는 것이 1987년 오테몬가쿠인대학 연구논문에서 밝혀졌다. 일본 나카지마 항공은 글로스터의 복엽 전투기를 라이센스 생산한 적이 있어 일본 항공산업과의 교류가 어느 정도 있었고 7.7mm 기관총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은 영국제 무기의 영향을 상당히 받던 시기이다.

중일전쟁이 발발하고 일본은 넓은 중국 대륙을 폭격하게 되었다. 하지만 기존의 96식, 97식 등의 경우에는 폭격기를 먼 거리까지 호위할 수 있는 능력이 뒷받침되지 않았다. 당시의 전투기들은 폭격기들을 호위하는 역할이 중요했기 때문에 일본 해군은 기본 전투기들보다 더 빠르고 멀리까지 당도할 수 있는 전투기에 대한 필요성을 절감했다.

따라서 일본 해군은 기존에 개발된 A5M 96식 함상전투기의 후계기가 될 차기 함상전투기를 1937년 5월 나카지마社와 미쓰비시社에 각각 발주했으며, 96식 함전의 중국 전선에서의 전훈을 바탕으로, 10월 6일에 상세한 요구조건을 보냈다.
* 용도 : 호위기로서, 적 전투기보다 우수한 공중전 성능을 갖추고, 요격기로서 적의 공격기를 상대해 격추할 수 있을 것.
* 크기 : 전폭 12미터 이내
* 최대 속도 : 고도 4,000m 에서 270노트(약 500km/h) 이상
* 상승력 : 고도 3,000m 까지 3분 30초 이내로 상승할 수 있을 것.
* 항속거리
- 기체 내부 연료만으로 고도 3,000미터를 최대 출력으로 비행했을 때, 72분에서 90분간 비행이 가능할 것.
- 보조연료탱크를 설치한 과하중 상태에서 비슷하게 90분에서 120분간 비행이 가능할 것.
- 일반적인 순항 속도로 비행했을 때 6시간에서 8시간 비행이 가능할 것.
* 활주 거리 : 항공모함에서 발진할 수 있게 하기 위해, 맞바람 초속 12m를 가정할 시 70m 이내 (무풍 시 2.5배 내외)
* 착륙속도 : 58노트(약 107Km/h)이하
* 활주 강하율 : 3.5m/s 내지 4m/s
* 공중전 성능 : 96식 함상전투기 2호 1형에 뒤지지 않을 것.
* 기총 : 20 mm 기총 2정, 7.7 mm 기총 2정
* 폭장능력 : 30Kg 폭탄 2발 혹은 60Kg 폭탄 1발
* 무전기
- 일반적인 무전기(96식 공(空)1호 무선전화기)외에 전파에 따라 돌아오는 방향을 정확히 알 수 있도록 무선귀환방위측정기(쿠(ク,라이센스 해온 미국 페어차일드 세미컨덕터 크루시 RC-4에서 따와서)식 3호 무선귀투장치)를 설치할 것.
* 엔진
- 미츠비시 즈이세이 13형 (고도 3,600미터에서 최고 875마력), 혹은 미츠비시 킨세이 46형 (고도 4,200미터에서 최고 1070마력)을 사용할 것
* 기타 : 산소흡입장치 및 소화장치를 갖출 것, 하중배수 7, 안전율 1.8

이러한 요구사항은 사실상 당시의 일본 공업 기술력으로는 달성이 불가능한 수준이었기에, 나카지마 비행기는 도중에 입찰을 포기했고, 미츠비시의 주임 설계기사 호리코시 지로[18]는 '없는 것 조르기 (無い物強請り)'라고 평할 정도였으며, 1938년 1월 17일에 12시(試) 함상전투기[19]의 계획요구서에 관한 민관 합동 연구회가 열렸을 때 미츠비시 설계진 측에서 일부 요구사항을 낮춰줄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으나, 이 요구는 기각되었다.

주임설계기사 호리코시 지로를 필두로 한 설계팀은 이런 무리한 요구사항에 맞춘 기체를 만들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다. 엔진 선정 과정에서도 킨세이 46형이 출력은 더 높지만 직경이 122cm로 즈이세이 13형보다 9cm 크며, 예상무게도 3톤으로 즈이세보다 700kg 정도 더 나갈 것으로 예측되어 기체 크기와 연료소모량을 우려해 즈이세이 엔진을 탑재하기로 결정했다.[20]

제로의 개발 과정에서 무엇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진 것은 바로 경량화였다. 터무니없는 수준의 요구를 충족하기 위해서는 기체를 최대한 가볍게 만들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당시 일본의 비행기 계획 요령서에는 항공기가 부담할 수 있는 최대하중을 7G로 규정하고 있었고, 여기에 안전율로 제한하중계수와 극한하중계수 비율 x1.8을 적용해야 했으므로 경량화를 거친 비행기도 12.6G의 하중을 견딜 수 있어야 했다.

일단 재질부터 초초두랄루민(ESD) 등의 최대한 가벼운 것으로 선택했고, 상대적으로 하중 부담에서 자유로운 부품들에 대하여 안전율을 낮추고, 주익 전체를 하나로 제작하여 연결부를 없앴다. 가벼운 몸으로 20mm 기관포의 반동을 견뎌내기 위해 동체가 전반적으로 길어졌고, 호리코시 지로의 수기에 의하면 기체 전체 중량의 10만분의 1도 안되는 중량이라도 철저히 관리한다는 방침으로 작업이 이루어졌다 한다. 한 설계도면을 받고 75g의 중량 절감이 가능할 거라고 여겨 돌려보낸 적도 있을 정도. 결과적으로 12시 함전 시제 1호기의 기본 중량이 1565.9kg, 연료와 윤활유 및 모든 부품을 포함한 자체 중량이 1620kg이라는 가공할 수준의 경량화를 달성해낼 수 있었다.

그러면서도 12시 함전의 공중전 성능을 극대화시켜야 했기 때문에 시야 확보를 용이하게 하기 위해 동체에서 튀어나온 형태의 캐노피를 사용하고, 주익은 미츠비시 118번형의 형상을 기반으로 다른 요구성능을 충족하기 위해 익폭은 최대치인 12m로 맞추고 주익의 붙임각(incidence angle)이 끝으로 갈수록 점점 줄어드는 워시아웃 형태의 설계를 도입하기도 했다.

전체적인 면을 보면 주익 내의 골조로 지지되는 단엽 구조에 밀폐식 조종석, 접이식 랜딩기어를 채용한 A6M은 당대 기준으로 현대적인 기체였으며 특히 낮은 실속 속도와 우수한 저속 선회력이라는 장점을 가진 기체였다.

5. 형식

개전부터 종전까지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로 사용되었기에 형식이 다양하다. 육상기지 특화형, 수상기, 카미카제 특화형 등 다양한 바리에이션을 가지고 있다.

뒤에 붙는 두 자리 숫자는 첫번째가 기체 버전, 두번째 숫자가 엔진의 버전이다. 52형이라고 하면 기체 ver 5+엔진 ver 2라는 의미. 이걸 알고 있으면 22형이라는 이름이 어디서 왔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1942년 여름 이전까지는 X호(엔진 버전) X형(기체 버전)으로 분류되었지만, 명명법이 변경되며 1호 1형을 11형, 1호 2형을 21형, 2호 A6M이라 불리던 신형을 32형으로 바꾸어 불렸다. 이 두 숫자는 엄밀히 따지면 별개이기 때문에 '이십일형' '오십이형'이 아닌 이일형, 오이형으로 읽는다. 전면 개량이 아닌 무장 교체 등 사소한 개량에는 갑, 을, 병 순으로 기호를 붙인다. 영문으로는 A6M5a (52형 갑) 식으로 소문자 알파벳을 붙인다.

5.1. A6M1

파일:A6M1_Zero.jpg
A6M1
A6M의 프로토타입. 2기가 만들어졌다. 2호기는 공중분해 사고로 손실되었다. 프로토타입이라고 해서 창작물처럼 양산형보다 성능이 좋거나 한 것은 절대 아니고[21] 딱 현실의 프로토타입대로 데이터 수집 등의 역할을 수행하는 정도에 그쳤다.

기후현 가카미가하라에 있는 기후 가카미가하라 항공 우주 박물관에 최대한 유사하게 구현된 레플리카 1기가 소장되어 있다.

5.2. A6M2

파일:A6M2_Zerosen_Thumbnail.jpg
A6M2
중일전쟁에 투입되어 최초로 실전을 치른 A6M이 이 타입이다. 엔진을 즈이세이에서 사카에로 교체, 780 마력에서 940 마력으로 출력을 끌어올렸다.

세부 형식은 총 2개로, 초기형인 A6M2a 11형과, 후기형인 A6M2b 21형이 존재한다. 11형은 항모 이착함 장비가 없는 선행양산형으로, 항모 이착함 능력은 21형부터 갖추어졌다.

21형부터 본격적인 항모 운영이 가능하게 되어 태평양전쟁 전부터 생산을 시작하여 개전 초 420대가 배치되어 있었으며,이후 총 3500대 가까이 생산되어 태평양 전쟁 초기 주력으로 사용된 기종이다. 동체와 수직 미익의 컬러 띠는 그 기체의 소속 항공전대와 항공모함, 그리고 그 기체에 탑승한 파일럿의 직책(편대장, 비행대장 등)을 표시한다.

예시)
1항전(아카기, 카가) : 빨간색 /동체의 띠 하나는 아카기, 두개는 카가이다.
2항전(히류, 소류) : 파란색 / 띠 하나는 소류 , 두개는 히류이다.
5항전(쇼카쿠, 즈이카쿠) : 하얀색 / 띠 하나는 쇼카쿠, 두개는 즈이카쿠이다.
파란색 띠는 육상기지 소속 제로다.

날개 끝만 접히는[22] A6M 특유의 날개 변형 기구는 바로 이 21형의 특징이다.

5.3. A6M3

파일:A6M3_Zero_N712Z_1.jpg
A6M3
A6M3는 A6M2를 베이스로 날개를 절단한 형식으로, 초기형인 32형과, 후기형인 22형 '2호 영전 改'가 존재한다.

32형은 엔진이 2단 슈퍼차저가 장착된 1130마력의 사카에 21 엔진으로 교체된 형식이다. 가장 큰 구분점은 주익 형상의 차이. 날개 끝단을 접어올리는 구조를 생략하고 날개 길이 자체를 줄여버렸다는 점이 A6M2 21형 및 A6M3 22형과 쉽게 구분된다. 날개의 형상이 변경되고 에일러론이 개량되어 최고속도와 (시속 250km 이상에서의) 롤 능력 등이 증가했으나 익면적이 줄어들어 익면하중이 높아진 덕에 장기이던 선회력은 소폭 감소했다. 더불어 이전 형식의 제로에 비해 최대 행동 반경이 줄어 21/22형의 항속거리 기준으로 작전하다 연료 부족으로 불시착하는 난감한 상황이 종종 발생했는데, 가장 큰 원인은 엔진 교체와 그에 따른 연료 탑재량 저하였지만 변경된 날개도 공기역학적 문제가 있었다고 설계부주임 소네 요시토시는 지적하고 있다. NHK의 다큐멘터리 '제로센에 결함 있다'에서 공개된 소네의 설계 노트를 보면 시간당 연료 소모량이 76.5l에서 83.3l로 늘어났고, 연료탱크 용적 감소와 맞물려 실제 항속거리는 400km 정도 줄어들었다.

연료 탑재량이 줄어들었는데[23] 카탈로그 스펙상 항속거리를 (실제로 날아보기 전까지) 줄이지 않았다는 것은 얼핏 보면 이해하기 힘든 처사지만, 사소한 오차로 실제 운용에 문제가 있는 수준은 아니라고 여겨졌다. 문제는 과달카날 전역 항공전이 항속거리가 긴 게 자랑이라는 21형도 연료를 과적상태로 채우고 이륙해서 20분 미만의 공중전을 벌이고 돌아와야 하는 상식을 벗어난 초장거리 작전이었던 것이 문제가 되었다.

애초에 개량 당시 "날개를 꺾이게 만들지 말고 그냥 엘리베이터에 맞는 폭으로 짧게 만들면 되지 않는가?" 라고 할 때,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 본인이 "날개 형상이 변하면 공력 특성도 변하므로 함부로 손대면 안됩니다. 어떤 문제가 발생할지 예측할 수 없어요."라고 했음에도 설계자의 의견을 무시하고 개량작업을 강행했다고 한다.

결국 뒤늦게 일선에서 "신형 제로 몰아보니 항속거리가 확 줄었다. 어떻게 된 것이냐?" 하고 난리(일명 '2호 영전 문제')가 난 후에 문제 해결에 골몰했으나 결국 주익의 재설계 외에 다른 답은 없었고 이미 생산되어있는 32형은 상대적으로 필요 행동반경이 적은 육상기지 위주로 운용하는 수밖엔 없었다.

덕분에 1942년 4월 부터 본격적으로 생산, 배치되기 시작했지만 항속거리 문제로 인해 특히 과달카날 전투를 비롯 솔로몬 제도 인근에서 벌어진 주요전투에 제대로 투입되지 못했고 생산은 343기로 끝난다. 다만 항속거리 이외 최고속도나 횡전성능 등은 21형보다 개선되어 32형으로도 과달카날 항공전에 참여 가능한 부겐빌 섬 부인 비행장이 생긴 뒤로는 일선에서도 호평을 받았다.

연합군은 이 기체와 마주치고 '어, 쟤들이 새 전투기를 만들었군!'라고 생각해 얘 혼자만 Hamp(햄프)라는 코드네임이 따로 붙여져있다.[24] 나중에 제로의 바리에이션인 것을 알고 수정하긴 했다.

개발 중 실험용으로 30mm 2식 기관포를 달았으나 반동이 너무 심하다는 실험결과로 양산계획은 폐기됐다. 실험에 사용된 실기체는 1943년 7월에 5대가 생산되어 라바울에 배치되었는데, 3대는 폭격으로 파손되었고, 2대는 출격하여 1대는 자살했지만 나머지 1대는 적기에 공격을 감행했다.

A6M3 22형 '2호 영전 改'는 후기형으로, 넘버와는 달리 A6M3 32형보다 뒤에 등장한 버전으로 1942년 12월부터 배치되기 시작했다. 32형에서 주익 형상 변경으로 발생한 선회력 감소와 특히 항속거리 단축 문제 해결을 위해 '개량'된 버전인데... 사실상 32형의 동체에 21형의 살짝 접히는 긴 날개를 다시 붙인 버전 = 엔진이 강화된 21형 정도라고 보면 된다. 덕분에 항속거리는 어느 정도 회복될 수 있었지만 급강하 제한속도는 다시 21형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갑형'부터는 주익의 20mm 기관포를 느린 탄속 등으로 불평이 많던 99식 1형에서 성능이 향상된 99식 2형으로 교체해 개선했다.

이후 이를 베이스로 하여 터보차저 엔진을 장착한 "A6M4"라는 형식을 제작할 예정이었으나, 나카지마제 21형에 52형 갑과 같은 벨트급탄식 20mm 기총을 장비한 버전, 벨트급탄식 20mm의 완성보다 21형의 생산종료가 앞섰던 데다, 추가로 해당 엔진의 결과가 좋지 않아 계획이 취소된다.

5.4. A6M4

41형 또는 42형으로 추정. 터보차저가 적용된 사카에를 장비한 고고도용 요격기 또는 기관포를 벨트급탄식 99식 4호로 변경한 모델로 추정. 어느쪽이든지 미쓰비시 또는 요코스카 해군공창 사내 프로젝트 이상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5.5. A6M5

파일:a6m5-zero-acdb-morpg.jpg
A6M5
제로센의 실질적인 최종개량형이자, 총 6000여기 가까이 생산되어 대전기 제로기 중에 가장 많이 생산된 A6M5 제로센은 43년 8월에 등장하였다.

가장 큰 개량점으로 32형과 같이 날개 길이를 줄이고 주익 끝단의 접이식 구조를 생략했지만, 날개 끝단이 직선적인 형태로 잘려 있던 32형과 달리 22형과 같은 유선형으로 재설계한 날개가 달렸다.

주로 무장강화에 치중한 개량 작업이 가해져 필연적으로 중량이 증가했지만 집합식 배기관 등의 소소한 개량작업을 통해 A6M3 22/32형과 같은 엔진을 사용하면서도 최대속도는 오히려 조금 올라갔는데, 무장에 따라 몇개의 파생형으로 구분한다.

이후 무장 쪽이 개량되면서 52형 갑의 경우엔 벨트급탄식으로 교체하여 총 기관포 장탄수가 250발로 증가했다. 52형 을부터 무장이 개선되어, 기수의 7.7mm 기관총 2문 중 오른쪽 것을 13.2mm로 바꾸었다. 52형 병부터는 동체 후방에 방탄판를 장착하고 방풍유리가 방탄유리로 교체되는 등 조치가 취해진다. 또 기수 기총을 1문으로 줄이고 양 날개에 13.2mm 기관총이 추가되어 화력이 증강된다. F6F 헬캣F4U 콜세어에게 맞서기 위해 개량된 기종이다.

주목할만한 강화점이 있다면 바로 기골 내구성 향상. 파일럿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인해 52형 갑부터는 시덴과 거의 비슷한 수준의 급강하 내구성을 확보해 이전보다 일격이탈 능력이 훨씬 좋아졌다.

이전 모델과 차이점이라면 카울 모양이 좀 달라졌다. 이전 모델들은 배기구가 그냥 아래쪽으로(각 피스톤에서 나오는 배기가스를 모아서 아래쪽으로 일괄배출.) 나와 있지만 이 모델은 성형엔진 피스톤 하나마다 거진 하나씩 배기구가 나와 있다. 아무래도 엔진 출력이 부족한걸 배기구 가스로 메꿔보려는 노력으로 보인다.

하지만 무장과 내구성 등이 향상되었어도 이 정도로는 콜세어헬캣에게 우세를 점하기는 당연히 부족했고 장점이던 기동성마저 크게 저하되는 결과를 낳았으며, 무장과 방탄성능, 외판 강화로 인한 중량증가로 52형에서 564.9Km/h까지 올라갔던 최고속도도 52형 병에서는 544.5Km/h로 느려졌다.

그래도 여전히 익면하중이 매우 가벼운 편이어서 헬켓에 비해서 순간선회력의 우위를 가질 수 있었지만, 문제는 엔진 추력이 두배 가까이 차이나는지라 선회가 지속되는 상황에서는 잃어버리는 에너지를 상쇄하지 못하는 탓에 이점을 상실했고, 여전히 무전기는 시궁창이라 대규모 난전에선 장갑이 튼튼하며 무전기가 제대로 된 헬캣이 훨씬 우세했다.[25]

이 외에도, 52형 병을 기반으로 제작된 "A6M6 53형"이라는 파생형이 있었는데, 해당 기종은 자동방루연료탱크 등의 안전장치들이 추가로 도입된 기종으로서, 엔진도 메탄올 용액 분사장치를 도입한 사카에 31형으로 바뀌어 출력이 올라갔지만 한창 개발중 원자재 부족으로 대용재료를 사용한 52형의 엔진에서 발생한 결함 수정작업에 개발진까지 투입되면서 개발이 크게 늦어져 양산은 되지 못했다.

육군이 같은 엔진을 Ki-43 하야부사에 도입해 대전 후반기 약간이라도 성능을 끌어올려 그런대로 잘 써먹은 것과는 달리 해군에서는 시제기 1기의 도입으로 끝났다.

사카에 31형 갑이라고 불리는 형식은 31형에서 메탄올 용액 분사장치를 제외한 버전인데 그게 가장 큰 개량점이었다 보니 이전의 사카에 21형과 대동소이한 물건.

이밖에도, 이를 베이스로 한 또 다른 파생형이 바로 "A6M8"으로, 폭격기용 대형 엔진인 킨세이 62형을 장착한 최후기 시험 모델이다.

A6M과 킨세이 발동기의 인연은 의외로 길어, 12시 함전 시절부터 후보로 고려되었지만 결국 소형인 즈이세이/사카에가 선택된다.

이후 32형의 개발시에도 검토단계에 오르지만 폐기되었다. 다시 52형의 개발단계에서 완전히 구형화된 사카에 엔진을 완전히 단종시키기 위해 검토되지만, 시험 결과 제로의 약해빠진 기골에 기골 보강 없이 킨세이를 그냥 얹으면 항속거리 40% 감소/내구성 6G라는 일본군도 내다버릴 결과가 나왔고. 보강을 할 경우에도 일본군이 대단히 집착하던 항속거리의 20% 감소와 더불어 일본군이 더불어 집착했던 익면하중의 증가는 피할 수 없었고 당시 막 양산되기 시작한 J2M 라이덴보다 나은 게 없다는 이유로 역시 계획이 폐지되지만 라이덴이 계속 문제를 일으키면서 결국 52형이 개발되는 결과가 되었다.

이후 총체적 난국에 빠진 대전 말기, 카미카제용을 포함해 조금이라도 성능이 좋은 기체를 확보하기 위해 다시 킨세이 장착형 A6M이 등장한다. 45년 4월 시제기 2기가 완성되었지만 미군의 폭격으로 엔진 공장이 파괴되면서 계획이 파탄. 결국 양산은 되지 못하고 종전되었다.

시제기의 형식명은 54형이었지만 폭장능력이 추가된[26] 양산형의 형식명은 64형으로 예정되어 있었다.

5.6. A6M6

53형. 엔진을 메탄올-물 분사장치가 추가된 사카에 31a형으로 교체하였으나 신뢰성 부족으로 1대 제작 후 채택되지 않았다.

5.7. A6M7

파일:A6M7_ZEROSEN.jpg
A6M7
전체적으로 여러 스펙은 A6M5과 큰 차이 없는 기종으로, 동체밑에 폭탄 랙이 추가되어 250kg짜리 폭탄을 장착할 수 있게 하여 전폭기로서의 역할을 부여받게 되었으며, 카미카제용으로는 더 무거운 500Kg짜리를 달고 출격하기도 했다.

정식으로 채용 및 생산된 것은 대전 최후기인 45년 5월경이지만, 현지개조로 21형이나 52형에 폭탄 랙을 부착하는 경우도 더러 있었다. 특히 필리핀 해 해전에서 21형 폭전을 대량 투입했는데 느리고 회피도 안 되는 데다 방어무장도 없어서 구식화된 99식 관짝만도 못한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형식명은 62형 또는 64형.

5.8. A6M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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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6M8
제로센 54형. 소위 최후의 제로(Final Zero)로 불리는 기종으로 기골을 보강하고, 저출력의 원인이었던 후질구질한 사카에대신 폭격기용 킨세이 62형으로 교체하였다. 렛푸의 개발이 트러블 및 폭격으로 차질을 빚자 급한대로 생산량을 유지하기 위해 개발한 기종으로 대형 킨세이 엔진을 탑재하여 기수 및 엔진 카울이 재설계되었다. 대신 기수의 무장은 철거되어 주익으로 옮겨졌다.

엔진 출력이 증가한 덕분에 20mm 기관포, 13mm 기관총 각각 2정을 장착하였으며[27] 속력 또한 드디어 마의 600km/h대를 넘보게 되었으며 A6M5에서 저하되었던 기동성도 A6M2 수준으로 회복되었다.[28] 그러나 프로토타입 2대 만든 시점에서 전쟁이 끝나버려 실전에는 투입되지 않았다.

6. 파생형

6.1. 일본 제국

6.1.1. 수상기 개수형

6.1.1.1. 2식 수상전투기 A6M2-N
파일:Nakajima_A6M2N_Rufe.png
二式水上戦闘機 A6M2-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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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실전

파일:Zerosen_A6M2_Thumbnail.jpg
태평양 전쟁 당시의 일본 제국 해군 산하 5항전 즈이카쿠 함 소속 A6M2
이후 중일전쟁의 데이터를 통해 함재기로 개량된 A6M은 진주만 공격과 함께 태평양전쟁이 개전하면서 본격적으로 연합군과 겨루게 된다.

중일전쟁을 거치며 실전경험을 많이 쌓은 일본군 파일럿들은, 태평양전쟁이 발발하고 나서 동남아시아 전선 등에서 아직까지도 남아 있던 F2A 버팔로[29] 고공 성능에 문제가 많았던[30] P-40, P-39 에어라코브라에 탑승한 초짜 파일럿들을 압도, 연합군을 제로 쇼크에 빠뜨렸다. 부랴부랴 F2A 버팔로를 교체해 투입된 F4F 와일드캣조차 A6M과 간신히 맞먹는 정도였던지라 연합군의 충격은 쉽게 가실 수 없었다. 연합군 파일럿들은 A6M을 처음 조우하고 2,000마력의 전투기를 개발해온 것이라 생각했다. 말 그대로 쇼크였다.

당시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인 제로와 미 해군의 주력 전투기였던 F4F 와일드캣을 비교한 미군측 보고서를 인용해보자면 제로는 1000ft 이상의 모든 고도에서 F4F-4에 비해 속도와 상승률, 가속도, 실용작전고도와 항속거리에서 모두 우위에 있었고 해수면 고도에서 일반 과급 상태의 F4F-4와 비교할 때 두 기체의 수평속도는 동일했으며 두 기체의 일반 강하성능은 비슷했다. 즉 대전 초기 A6M은 동시기에 배치된 F4F에 대해 비행성능 대부분의 항목에서 확실하게 앞서 있었다.

그러나 좀 더 세세한 사항으로 들어가면 이 우세는 일방적이 아니게 된다. 마이너한 단점으로는, 이를테면 제로의 경우 강하를 위해 기수를 숙이면 엔진에 컷아웃 현상이 발생하는 탓에 일반 강하에선 약간 늦게 가속이 붙는 약점이 있었다.#

좀 더 큰 단점으로 대표적인 것은 붐앤줌 기동의 핵심이 되는 급강하 속도에서의 열세. A6M은 기체 강도의 부족으로 F4F등에 비해 적잖이 느린 급강하 속도를 기록할 수밖에 없었다. 제로의 급강하 제한 속도는 21형의 경우 정확히 629km/h, 32형은 650km/h, 52형 甲형이나 전폭기 타입인 A6M7 62형에서도 740km/h인데 비해 F4F 와일드 캣의 급강하 속도는 772km/h.#[31] F6F 헬캣이나 F4U 콜세어는 900km/h대의 급강하 속도를 지녔다.

또한 에일러론 등의 문제 때문에, 저속에서의 뛰어난 기동성에 비해 대체로 300km/h 이상의 고속에서는 롤 성능이 제약되었고[32], 특히 롤성능은 대체로 250km/h 정도를 경계로 급격히 떨어졌다.[33]

아무튼 당시 처음 제로를 맞닥뜨린 미군이 받은 충격은 장난이 아니여서 엔진 출력 1000마력의 A6M을 보고서 '기어코 쪽바리 놈들이 2000마력의 전투기를 만들어버렸다.'라고 오해를 했을 정도. 물론 그 기동력의 실체는 엔진 출력이 아닌 지나친 경량화였고, 결과적으로 미군은 이 오해 덕분에 전투기 엔진 개발에 더욱 박차를 가하며 일본과의 기술력 차이를 넘사벽으로 벌려버리게 된다.

심지어 1941년 아프리카 전선에서 차출해 태평양전선에 배치한 스핏파이어마저 압도적 교환비[34]로 손쉽게 격추시키며 대전 초기 연합군 파일럿들의 악몽이 됐었다. 다만 영문위키에는 아태지역에 최초로 배치된 스핏파이어가 1942년 인도에 배치된 사진정찰기형 PR IV 2대라고 등재되어 있다. # 일본측이 기종을 착각했을 가능성이 있다. 가령 일본군은 페어리 풀머같은 복좌전투기를 격추시킨 것도 스핏파이어 격추라고 보고한 적이 있다. 태평양 전쟁 초기 동남아시아의 영국군의 주력 항공기는 F2A 버팔로같은 더 구형 전투기들. 당시 영국은 영국 본토항공전과 북아프리카 전투에 사력을 다하던 상태라 '그 흔한' 호커 허리케인조차도 1942년에, 그나마 터무니없이 적은 수만 배치되었고, 그것조차도 조기경보체계같은 지원을 받지 못해 30기 이상이 지상에서 격파당했다. 스핏파이어의 함상형인 시파이어는 1942년의 횃불 작전에서 데뷔했으니 일본군이 신바람을 내던 시절에는 만날 기회가 별로 없었다.

스핏파이어와 제로가 공식적으로 맞붙은 전투는 1942년 일본군의 호주 다윈 공습 이후 호주에 파견된 스핏파이어 Mk.Vc와의 교전. 1942년 일본군이 다윈 공습을 시작으로 호주 서북부를 공격하기 시작하자 호주는 영국에 지원을 요청, 당시 영국군에 파견되어 있던 자국 항공요원들의 귀환과 전투기 지원을 요청한다. 그리고 1943년 2월 스핏파이어 Mk.Vc 100대가 배치되어 다윈 상공 방어전에 나선다.

전투 기간 전체의 손실율 자체로는 분명 제로가 앞섰다. 호주 군은 9차례의 전투에서 38기를 손실하며 일본기 5기를 격추하는 졸전을 치렀다. 그러나 이 전과를 가지고 제로가 스핏파이어 상대로 우위였다고 하는건 무리다. 당시 일본측 비행대장이 대놓고 스핏파이어가 제로를 상대로 거의 모든 면에서 압도한다고 경계하고 이에 대항하기 위하여 경험이 많은 파일럿들을 최대한 확보하려고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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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크스 필터가 장착된 스핏파이어 Mk. Vc Trop 보크스 필터가 장착된 사막형 기수와 일반형 기수의 구조

첫번째로, 당시 A6M과 교전한 스핏파이어는 북아프리카에서 굴리다가 슬슬 교체를 준비중이었던 Spitfire Mk.VC Trop이었는데, 이 버전은 사막의 모래먼지로부터 엔진을 보호하기 위해 비행성능과 연비 면에서는 대단히 손해가 큰 보크스 필터를 장착하고 있었다. 속도만 따져도 시속 32km까지 더 느려지니 태평양에서는 당연히 제거했어야 하지만 이 필터는 기체 하부 거의 전체와 관련있는 부품이라 탈착이 쉽지 않았고, 결국 발등에 불이 떨어진 호주군은 보크스 필터가 장착된 기체들을 그대로 전투에 투입한다.[35]

두번째로, 이 시기 스핏파이어를 운용한 조종사 등 병력은 북아프리카에서 P-40등을 이용, 대지 공격 임무를 주로 맡던 지휘관과[36] 조종사들로 스핏파이어 운용은 물론 공대공 전투 경험도 거의 없던 병력이었다.

세번째로, 안 그래도 스핏파이어 운용 경험이 없는 조종사들과 정비사들에 의해 운용되는 와중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이 전투는 스핏파이어를 최초로 고온다습한 환경에서 운용하는 전투로서 여러 문제를 빚었다. 특히 유럽이나 서아프리카에 그랬듯 많은 조종사들이 발진 직후 저공에서 고공으로 급상승을 시도했는데 훨씬 고온다습한 태평양 전장에서 기체를 습하고 더운 저공에서 저온의 고공으로 급상승시키면 엔진 냉각계통을 비롯한 기체의 여러 부분이 얼어붙어 전투불능 상태에 빠지곤 했다. 특히 기관포가 얼어서 발사가 안되었다고 한다. 이 부분은 핀란드와 소련도 공통적으로 스핏파이어를 여름밖에 못 써먹을 전투기, 어쩔 수 없이 쓰는 기체로 똑같이 평가했다. 여기에 더해 급하게 전투기는 공급되었지만 교환 부품이 모자라 수리조차 제대로 받기 어려워 엔진 트러블에 시달렸다고 한다.

그 결과 이 일련의 항공전에서 공중전에서 직접 격추된 스핏파이어는 최대 7기로 전투기간 동안 손실된 스핏파이어의 70%는 엔진고장에 의한 손실이었다.출처 나아가 국지방공 전투기 성격이 강한 스핏파이어에 보크스필터의 악영향 덕분에 연비가 더 떨어져 연료 부족으로 추락하거나 불시착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즉 이 전투기간 중 스핏파이어 손실 대부분은 사실상 비전투 손실인 셈이었다.#
"영국군 조종사들은 독일과 이탈리아 전투기를 효과적으로 상대하는 방법을 완벽히 훈련받아 왔지만 그것은 곡예비행을 벌이는 일본군들을 상대론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다."

- 클레어 리 셰놀트 중장. 플라잉 타이거즈.[37]
하지만 제로의 날렵한 기동성은 충분히 위협적인 것이 사실이었고 당시 태평양 전선에 투입될 수 있던 연합군 전투기 중 어떤 기종도, 설령 정비상태나 조종사의 숙련도가 양호한 상태였다 하더라도 전통적인 방식대로 A6M과 선회전을 하며 교전하는 것은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인 것 또한 분명한 사실이었다. 구형화된 저성능의 기체나 정비불량의 기체가 아니라 고성능의 P-38 라이트닝이나 심지어 F4U 콜세어 초기형으로 출격한 미 육군항공대와 해병대 조종사들조차 잘못된 전술 선택으로 선회전을 시도한 경우 거의 예외없이 졸전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연합군 조종사들은 제로에 대처하기 위해 전략을 수립한다.

충분한 고도를 확보한 상태에서 급강하해 속도를 얻고 잠깐의 사격기회 동안 사격 후 다시 급상승 혹은 그대로 이탈하는 붐앤줌 전술이 도입된 것이다.[38] 붐앤줌 전술의 채택에는 전쟁 초기 동남아시아에서 A6M과 유사한 오스카 전투기와의 전투를 치른 플라잉 타이거즈의 경험을 바탕한 클레어 센놀트 소장의 보고서가 큰 역할을 했다.[39]

또한 미 해군 항모 요크타운의 와일드캣 비행대대장인 존 타치 소령이 고안한 "타치 위브"도 적극적으로 활용되기 시작한다. 타치 위브는 2기 1편대로 두 대가 나란히 날면서, 한쪽이 제로에게 꼬리를 잡힐 경우 서로를 향해 교차 선회비행하며 동료기를 추격하는 제로를 사각에서 공격하는 전술이다. 또한 규모를 늘려 2기 단위의 두 편대로 실행할 수도 있다. 이 전술은 미드웨이 해전에서 처음 선보이며 제로 10기를 격추하며 와일드캣은 4기 밖에 잃지 않는 전과를 거두는 데 기여한다. 이후 미 해군 조종사들의 주요 대 제로 전술 중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40]

이러한 대응전술이 자리잡기 시작하며, 제로의 악명도 점차 꺾이기 시작했다.[41]

이러한 전술변화의 결과가 특히 자주 언급되는 이유는, 이 결과가 '취약한 방어력, 저효율의 무장, 쓸모없는 수준의 통신장비, 저속에선 우수하지만 고속에선 저하되는 기동성'이라는 제로의 약점과 '견고한 기체구조와 충실한 방어력, 효율적인 화력구성, 조직적 전투를 가능케 하는 신뢰성 있는 통신장비, 우세한 고속 기동성'이라는 F4F 와일드캣의 상대적 강점을 가장 극명하게 반영해 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래 전략/전술이란 것은 나의 약점/상대의 강점은 최소화하고 상대의 약점/나의 강점을 극대화 시키기 위한 술책이다.

적어도 전쟁 초반까지는 적기를 1:1의 선회전투에 끌어들이기만 해도 제로는 무적에 가까웠고 적어도 저속의 선회전에서는 F6F 헬캣이나 F4U 콜세어가 등장한 후에도 만만치 않은 상대였던 것은 분명하다.[42] 제로의 선회성능이 본질적으로 저속영역에서만 뛰어난 것임에도 선회전이 필살병기가 되는 이유는 애초 지속 선회라는 기동 자체가 지속적으로 고도와 속도를 잃게 만드는 기동이기 때문이다. 즉 선회를 계속하면 항공기는 느려지며, 동시에 하강하게 된다. 꼬리를 잡혀 격추당하지 않는다 해도 어느 시점에선 다시 고도를 올려야 하는데, 상승은 급속하게 속도를 잃게 만드는 기동이기도 하다. 이미 속도를 많이 상실한 상태라는 걸 생각하면 까딱하면 스톨에 빠지기 좋은 상황이다. 가벼운 기체에 큰 날개를 지녀 뛰어난 저속선회력과 더불어 지속 상승력이 우수한 제로가 선회전의 강자가 되는 이유이다. 실제로 태평양 전쟁 초기, 경험이 미숙한 연합군 조종사들은 단지 저속에서의 기동성의 열세 뿐 아니라, 그 선회전 중에 상승하는 제로를 쫒다 스톨에 빠져 자멸하는 일도 적잖았고, 이러한 상황을 유도하는 '에너지 트랩'은 특히 A6M을 모는 숙련된 일본군 조종사들의 주요 전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만일 적기가 이런 선회 교전상황에 말려드는 걸 회피하고, 급강하로 가속하여 빠져나가버리면 제로는 쫒아갈 방법이 없다. 같이 급강하해서 따라가려다간 공중분해될 수도 있다. 이는 실제로 제로를 몰던 일본군 조종사들에게도 꽤 심리적 스트레스를 주었고, 과감한 전투기동을 방해하는 요소였다. 때문에 아예 미군의 제로 대응 교본에조차 대놓고 '기체 강도와 가속에 대한 심리적 영향으로 제약받는 고속기동으로 끌어들여라.'라고 써놓고 있다.#[43]

하지만 새로운 전술로 전과가 향상되기는 했어도, A6M이 미해군이 사용하던 와일드캣에 비해 비행성능에서 우위에 있었던 점은 분명한 사실이었고, 때문에 미드웨이에서 A6M을 상대로 승리를 거뒀음에도 미 해군 항공대 조종사들은 자신들이 모는 와일드 캣, 특히 F4F-4에 심각한 불만을 표출했으며 "엿같은 점"들을 보고했다.

USS 요크타운의 함장의 F4F-4에 대한 기록에 따르면,
전투기 조종사들은 F4F-4의 기동성과 한결같은 화력에 대해 대해 매우 실망하고 있습니다. 제로는 손쉽게 F4F-3의 선회각과 상승속도를 압도했고, 새로 개량된 F4F-4를 몰아본 대다수의 전투기 파일럿들이 F4F-4가 F4F-3보다 훨씬 굼뜨고 느리다는 의견을 표시했습니다. 또한 F4F-4에 기관총 6정을 장착한 것은 잘못됐다고 생각합니다. 기관총 수가 늘어난만큼 기관총 하나하나의 장탄 수가 감소되면서 호위기를 상대하다 일본군 급강하폭격기가 내습할 때 쯤이면 아군 전투기의 대부분이 탄약이 고갈되어 버렸습니다. 참고로 이는 경험 많은 파일럿들이 전투 후 보고한 것이며, 초보 파일럿들의 탄약 낭비가 아닙니다.

다만 이 반응은 F4F-4가 F4F-3에 비해 더 굼떠진 것에 대한 파일럿들의 불만에 맞춰져 있다는 것에 주의하자. 애초 와일드캣이 제로보다 상승력이나 선회력을 앞선 적은 처음부터 없었으니까. 그리고 F4F-4가 F4F-3에 비해 비행성능이 떨어지게 된 더 큰 이유는 기관총이 6정으로 늘어난 것 자체보다는 접히는 주익 탓이 더 컸다. 이후 프롭시대 그루먼 함재기의 특징이 되는 극도로 작게 접히는 날개는 접히지 않는 날개에 비해 무게도 더 무거웠고 저항도 컸으며 F4F-4의 경우 특히 증설된 기총이 외익에 장착되어 발사반동에 더 많이 흔들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런 비행성능의 악화는 항모 한 척당 전술적 이점에 의해 충분히 상쇄되고 남았다. 그러나 사실 어느 조종사가 기본적인 비행성능이 적기보다 떨어지는 비행기를 모는 상황에서 기분이 좋겠는가? 게다가 그게 뭔가 탐탁치 않은 업그레이드의 결과로 안그래도 별로이던 비행 성능이 더 나빠진 것이라면? 어느면에서 미 해군 조종사들의 F4F-4에 대한 부정적인 반응은 일선 조종사의 관점과 지휘부의 관점의 차이를 반영한다고 할 수도 있다. 다만 대전 후반 F6F 헬캣이나 F4U 콜세어 등이 일선에 배치되자 주로 호위항모 탑재용으로 생산된 FM-1/2 버전에선 다시 기관총 4정으로 돌아갔다. 애초 이 기관총 증설이 독일군을 상대하던 영국해군의 요구에서 시작한 것이었는데, 사실 방어력이 떨어지는 일본기를 상대하는 미 해군 파일럿들 입장에선 비행성능에도 마이너스요 무엇보다 지속사격시간이 급감한 부작용을 생각하면 괜한 옆그레이드로 여겨지는 것도 일리가 있다. 덧붙여 엔진 출력이 1200마력에서 1350마력으로 증가하고, 반면 중량은 F4F-3 때보다도 가벼워진 와일드캣 FM-2는 비행성능도 꽤 향상되어 일부 미군 조종사들은 '제로 후기형보다도 우수하다.'라고 약간 과장섞인 평가를 하기도 했다. 하지만 FM-2와 A6M 52형 사이의 후기형 리턴매치는 거의 이뤄지지 못했다. 그땐 이미 헬캣과 콜세어들의 등쌀에 태평양의 일본군 항공전력이 남아나지 않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미드웨이 해전 이후 1달 가량이 지난 1942년 7월 10일, 알류샨 열도의 아쿠탄 섬에서 A6M이 온전한 상태로 노획되면서 그동안 미지에 싸여 있었던 제로의 기동성의 실체가 비로소 베일을 벗게 되었고 이후 미군측은 각 기체별로 제로에 대한 상대지침을 파일럿들에게 하달했다.

물론 이 부분을 과장해서는 안 될 것은 이를테면 타치 위브 같은 성공적인 대응 전술이 등장한 것은 이미 미드웨이 해전시기. 즉 제로를 노획하기 이전이었기 때문. 실제로 이 시기에도 미 해군은 악전고투이기는 했지만 격추 비율로는 살짝 우세한 전투를 했었다. 그러나 어쨌든 상대 전투기를 실제로 시험해 본 결과 대응전술이 확고하게 자리잡히게 된 것은 분명하다. 덧붙여 후대의 연구자나 밀리매니아들이 '아쿠탄 제로'를 자주 언급하게 되는 것은 한때 무성했던 '제로 신화' 탓도 있지만, 타치 위브 등의 대응 전술이 제로에 대해 제대로 알기 전 현장 파일럿들의 경험에 기반해 응급처방으로 등장한 것과는 달리 '아쿠탄 제로'에 대한 미군의 분석과 대응은 실제 기체의 테스트를 통해 문서로 기록된 보다 확실한 '근거자료'를 제공하기 때문이다. 이런 전술변화에 의한 전세역전을 두고 '그건 어디까지나 전술이 좋아서 이긴 거지, 항공기 자체의 우열과는 무관하다.'라는 식으로만 이야기하는 것은 당연히 오류이다. 모든 병기에는 언제나 그 병기의 효과가 제대로 발휘될 수 있는 전술 운용이 있기 마련이다. 이를테면 전차를 보병 없이 단독으로 시가지에 밀어넣으면 안 되는 것처럼 말이다. 혹은 기관총으로 방어선을 구성할 때, 각 기관총들이 그냥 정면으로 펼쳐진 대형의 적을 상대로 사격하는 것 보다 서로 사선방향으로 교차해 적 대열을 '세로'로 사격하도록 하는 편이 훨씬 효과적이라던가. (덕분에 1차 세계대전은 기관총과 철조망이 조합된 방어선을 뚫지 못하고 교착된 참호전이 되었다.) 전술선택에 의한 차이가 좀 더 작아질지는 모르지만, 이는 동종의 병기 사이에도 마찬가지다. '실전을 치러 본 군대'가 강력한 이유 중 하나다. 자신과 적군의 장비가 지닌 장단점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적이 싸우자는 방식대로 말려들어 패배한 미숙한 군대의 미숙한 전술운용의 결과로 '우리 무기 그 자체가 그냥 세서 이긴 거다.'라고 말하는 건 사실 전시의 프로파간다에서나 사용될 이야기다. 이를테면 독소전쟁 초기에도 분명 900여대 정도로 '소수'이긴 했지만 이미 T-34가 일선에 배치되어있었다. 비율로도 소수고, 무엇보다 허를 찔려 완전한 전선 붕괴상태에 처한 소련군의 상황에서 소수의 T-34야 있으나 없으나 거의 아무 차이도 만들지 못했다. 그렇지만 전선의 독일군은 소련군의 위협적인 신형전차에 대한 보고서를 쏟아냈고 전선시찰 중 노획된 T-34를 조사해 본 구데리안은 '심각한 위협'이라 평가하며 신형 중전차 티거 배치를 종용했고 더 나아가 판터는 T-34에서 입증된 경사장갑을 대폭 적용한 설계로 변경되었다. 반면 제로의 경우는? 연합군이 노획된 A6M을 통해 그동안 현장의 전투경험에 기반한 제한된 정보를 바탕으로 알음알음 입안되던 대응전술을 보다 완성된 형태로 체계화할 수 있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제로의 (기술적) 영향을 받은 신형기' 같은 건 없었다. 일본 우익성향 밀덕들의 대체역사 판타지 속에서가 아니라면. 연합군이 제로를 실물로 보고 깨달은 바는 제로가 '밸런스 파괴자'라는 것이 아니라, 그동안 자신들이 상성에 대한 이해 없이 늅늅한 대응을 해왔다는 것에 더 가깝다.

미군은 서서히 초기의 충격에서 벗어나 제로에 대해 실상을 인식하기 시작했다. 미군은 제로의 속도의 원천이 자신들의 전투기보다 훨씬 더 높은 마력(약 2,000마력)을 가진 엔진이라고 생각했지만 오히려 제로의 엔진은 940마력이었고, 오히려 뛰어난 기동성은 듀랄루민을 사용한 경량화 동체로 무게를 극단적으로 낮춘 것 때문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규정된 최대속도를 초과하면 기체가 파괴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다. 사실 제로는 연료탱크 주변에 한 발만 맞아도 치명적이었다.

알아낸 사실들을 바탕으로 대응법을 개발하며 전세는 역전되어 결국 교전비를 따져보면 제로:와일드캣의 교전비는 1.5:1로 오히려 와일드캣 1대당 제로 1.5대가 격추됐다. 물론 이 교환비는 전쟁 전 기간의 통계이기는 하지만, 1943년 중반이면 미 해군의 일선 항모 항공대 대부분의 주력 전투기는 와일드캣이 아니라 F6F 헬캣으로 교체된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 교전비의 상당부분이 주로 1942년-43년 초, 즉 산호해 해전에서 과달카날 전투까지의 전투결과에 의한 것이라는 점은 어렵지 않게 추론해 볼 수 있다. 실제로 제로의 전성기로 인식되는 기간이자 또한 와일드캣이 미 해군 해병대의 주력 전투기로 가장 크게 활동했던, 산호해 해전에서 과달카날 전투까지 1942년 5월에서 11월 까지의 기간 동안의 전적을 살펴보면 산호해 해전과 미드웨이 해전까지 와일드캣과 제로 사이의 공중전에서 손실은 제로 14 : 와일드캣 10, 과달카날 전투에선 일본 라바울 항공대와 미 해병 1항공대 (캑터스 비행단) 사이의 공중전에서는 각각 제로 72기와 와일드캣 70기를 손실했고 함재기간 공중전에서는 제로 43기 손실에 대해 와일드캣 31기 손실로 1942년 5월에서 11월 사이의 A6M과 와일드캣의 공중전에서 제로 129기가 손실된 것에 비해 와일드캣은 총 111기 손실을 기록하고 있다.[44]

즉, A6M이 가장 눈부시게 활약했다는 대전 초기조차도 따지고 보면 실제 전투에서는 전쟁 초기 A6M이 잠시 악명을 떨쳤지만 그 우세는 얼마 시간이 지나지 않아 역전되었던 것. 결국 제로 vs 와일드캣 교전의 결과는 전쟁 전 기간의 전투손실비 1.5:1, 1942년의 주요 회전에선 1.16:1 로 결국 교전비는 와일드캣이 좀 더 우세했다. 심지어 대전 초기 와일드캣의 조종사들은 실전경험은 커녕 일부는 전투기 자체를 처음 조종하는 초보 수준의 조종사인데 반해, 제로 조종사들은 1937년 중일 전쟁부터 전투기를 몰고 실전을 치러온 프로중의 프로였는데도 이런 비율이 나왔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는 A6M과 3대1로 맞짱떠서 1대를 격추시키는 제임스 서덜랜드 소령과의 공중전에 대해 언급되어 있다. 누적된 데미지 때문에 결국 서덜랜드가 패배하지만 사카이 사부로의 A6M과 선회전으로 대등하게 싸우는 모습은 알려진 것처럼 선회전에서 압도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보여준다. 게다가 어차피 선회전도 넓은 의미로 볼 때 에너지 전투이다. 적 기체가 깊은 각도로 선회를 한다고 쳐도 롤 기동을 이용해 거리를 벌리면서 쫓아가면 선회 반경이 넓은 전투기도 호각으로 싸울 수 있다. 물론 여기에는 A6M이 고속에선 선회능력이 크게 감소된다는 특성을 이해하고 고속기동으로 끌어들이는 전술 등등이 개발된 것도 작용할 것이다.[45]

그동안 많이 퍼져있던 제로의 일방적 우세라는 세간의 속설에 비하면 거의 정반대에 가까운 이러한 실제 전과를 따져본다면, 실상 (함상)전투기로서 A6M과 와일드캣 두 기종은 어느 한 쪽이 특별히 우세했다보다는 서로 장단점이 극과 극에 가까울 만큼 매우 달랐던 기체였을 뿐이라 말하는 것이 더 적당할지 모른다는 것이다. 두 전투기 사이의 대결을 쉽게 정리한다면 이런 식이다. 즉, 제로의 입장에선 와일드캣을 조준선에 올려도 기총 몇 방에 떨어져준다는 보장이 없다는 게 함정이었고, 반대로 와일드캣의 입장에서는 일단 조준선에 제로를 올리기만 하면 그대로 불덩이를 만들 수 있었지만 그러기가 정말 쉽지 않은 상대였다는 식인 것이다. 그래서 몇몇 대담한 와일드캣 조종사들은 제로를 상대로 헤드온을 걸어서 박살 내버렸다.

A6M이 손실비로는 결국 손해를 본 기대 이하의 전과를 기록하게 만든 마지막 변수는, 아마도 미군이 타치 위브를 비롯한 유기적 팀플레이를 구사할 수 있었던데 반해 A6M은 존재가치 제로의 잉여스런 무전기 덕분에 상대의 전술적 발전에 상응하는 제대로 된 조직적 전투로 대응하는 것이 불가능했던 것에서 연유한 전술적 열세의 결과였을 것이다. 베테랑들의 각개전투가 초짜들의 팀웍에 막힌 것.[46]

서로 장단점이 매우 다른 기체였던 A6M과 와일드캣의 대결에서, 비행성능의 우세에도 불구하고 결국 A6M이 열세에 처하게 된 본질적인 이유는, 제로의 근본적인 한계, 즉 애초 제한된 기술적 조건에서 오직 극단적인 경량화에 의해 비행성능을 향상시킨다는 설계사상 자체의 결과라고 할 수도 있다. 본질적으로 제로에 대한 와일드캣 조종사들의 대응 매뉴얼은 다섯 가지 상대적 장점에서 나온 것이다. 1. 더 견고한 기체 구조와 방어력, 2. 우세한 급강하 성능, 3. 고속영역에서의 롤, 선회 등의 우세, 4. 효율적인 화력구성, 5. 조직적 전투능력을 크게 향상시키는 신뢰성 있는 무전기. 즉 제로의 우세한 상승력에 의해 기선을 제압당하고 불리한 전투상황에 처해도, 와일드캣은 불리한 상황을 빠져나갈 수 있었다. 주된 이점은 급강하 속도와 부수적으론 롤 성능이었지만 당연히 제로의 주된 대 전투기용 무장인 7.7mm급 기총에 몇 발 피탄당한다고 곧장 추락하거나 조종사가 사상당하는 걸 막을 수 있는 방어력 역시 여기에 크게 작용한다. 그리고 무선통신상의 강점은 애초 동료가 불리한 상황에 처하는 걸 미리 알려줄 수도 있고, 불리한 상황에 처한 기체가 빠져나갈 때 무선으로 주위의 동료에게 도움을 청한다면 이번엔 추격하던 제로가 때마침 적절한 위치에 있던 와일드캣에게 사각에서 공격당할 수 있다. 이런 상성의 조합을 의식적인 전술로 끌어올린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타치 위브이다. 이 전술은 애초 와일드캣의 우세한 맷집과 화력, 통신능력에 기반한다. 물론 수틀릴 때 빠져나갈 수 있는 급강하 능력도 포함해서 이다.

이에 비해 제로가 택할 수 있는 수단은 의외로 제약된다. 분명 뛰어난 상승력은 제로에게 전투의 주도권을 지닐 기회를 더 준다. 그러나 이를테면 동세대의 Bf109나 스핏파이어와 비교한다면, 이 기체들은 우세한 고도를 바탕으로 적기에 일격을 가한 후, 적기가 회피하거나, 급강하 가속으로 빠져나가려 한다 해도 마찬가지 높은 급강하 성능을 발휘하며 추격할 수도 있고, 혹은 자신의 속도를 이용해 이탈, 비교적 빠른 시간 내에 고도를 회복하고 다시 일격을 가할 기회를 노릴 수 있다. 하지만 제로는 주도권을 쥐고 일격을 가해도, 그 일격에 상대가 격추되지 않고 빠져나가면, 전투의 주도권을 지속하는 방법은 상대를 저속선회전에 끌어들이는 것 밖에 없다.

그런데, 2차 대전기의 전투기들 중 제로처럼 선회전에 목숨을 거는 기체가 거의 드물었던 이유는, 선회전이 가장 에너지 손실이 큰 전법이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기의 전투기와 비교하면 1차 세계대전기의 목재복엽기들은 기체가 낼 수 있는 속도와 기체의 중량에 의해 지닐 수 있는 총량적인 에너지는 얼마 없는 대신 양력과 저속 비행능력은 매우 뛰어나다. 물론 당연히 더 높은 고도를 차지하는 것의 중요성은 1차 세계대전에서도 강조된 사항이지만 한번 잃은 고도를 회복하는 것에 긴 시간이 걸렸기 때문에 고도의 우위를 통한 주도권 확보 - 선제 공격 - 선회전이라는 루틴을 피하기 어렵다. 사실 이미 1차 세계대전 시기 에이스들에 의해 초기적인 형태의 붐앤줌 전술교리가 등장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까지도 한동안 선회기동력을 중시한 전투기 설계가 이어진 이유이다. 물론 2차 세계대전기의 전투기들 역시 레시프로기인 이상 현대의 제트전투기들과 같은 수직기동은 불가능하다. 하지만 2차 대전시기의 전금속제 단엽의 고속기들은 적어도 고도-속도-고도라는 방식으로 운동 에너지를 보존해가며 전투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일격이탈, 붐앤줌 등 2차 세계대전부터 일반화된 에너지파이팅 전술은 모두 여기에 기초한다. 이는 한 번 주도권을 장악하면 공격이든 퇴피이든 자유로이 선택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한번의 공격이후에도 주도권을 지속할 수 있다. 또한 여전히 추력만으로 빠르게 고도회복을 할 수 없는 레시프로기로서는 고도를 회복하기 위한 지속상승이나 속도를 회복하기 위한 직선비행 같은 전술적으로 약점이 많은 기동형태에 덜 의존할 수 있다. 반면 에너지 손실이 큰 선회전에 들어가면 다시 에너지를 얻기 위해서는 전술적으로 불리한 지속상승이나 직선비행 등에 더 많이 의존해야 한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느린 기동이 될 수밖에 없는 지속상승을 하고 있는데 교전거리 내에, 특히 같거나 더 높은 고도에 적기가 있었다면? 날렵한 기체와 그걸 충분히 활용할 수 있는 뛰어난 조종사라면 어찌어찌 공격을 회피할 수도 있을지 모르지만 전투의 주도권이 상대에 넘어가버리는 것은 분명하다. 물론 진짜로 뛰어난 조종사라면 애초 이런 상황 자체를 당하지 않도록 전투를 이끌겠지만. 하지만 미숙한 조종사일수록 선회과정에서 잃은 고도와 속도를 회복하기 위해 무턱대고 상승[47]이나 직선비행을 하다 격추당하거나, 반대로 에너지 손실을 제때 회복하지 못해 실속하거나 심지어 저공에선 지면에 격돌해 추락해 버리는 경우조차 발생한다.

분명 제로의 우세한 선회능력과 확실한 지속상승력과 낮은 실속속도 거기에 미군 조종사들의 미숙함이 겹쳐, 전쟁 초반 일본군 조종사들은 선회격투전에서 우위를 점했을 뿐 아니라 제로의 우세한 지속상승력으로 적기를 스톨에 빠지게 유도하는 '에너지트랩' 전술 등을 통해서도 이득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어디까지나 상대가 선회전에 말려들어준다는 걸 전제로 성립하는 전술이다. 그러나 상대가 최초의 일격을 피하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급강하 혹은 급강하-롤기동 등을 이용 선회전으로 이어지는 과정 자체를 회피하고 벗어나 버린다면? 급강하 속도가 낮고 따라서 급강하 가속으로 얻는 에너지를 활용한 줌 상승에서도 상대적으로 효율이 낮은 제로로선, 전투의 주도권을 지속하기엔 애로사항이 꽃피며 모든 걸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판이 된다.

제로의 장단점을 확인한 후 미군의 전술교리는 당연히 붐 앤 줌의 일격이탈을 중심으로 변화했고, 선회전 등에 말려들 것 같으면 곧장 교전을 회피하고 이탈하는 것이 공식 매뉴얼이 되었는데, 이는 태평양 전쟁이 시작되기 전 미국 해군 항공대 소속의 비행단 지휘관 겸 조종사 존 태치 소령이 1941년 9월 22일 Fleet Air Tactical Unit Intelligence Bulletin에 게재된 보고서를 통해 제로에 대해 알게 되었고 그것에 대응하기 위한 타치 위브를 고안하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그런 의문을 가질 수도 있다. 교전을 회피해 버리면 적기는 누가 격추시키나? 그러나 이런 의문 자체가 사실은 "제로의 입장이다." 그리고 이에 대한 미군의 답은 "동료가"이다. 즉, 미군은 1:1의 전투에선 유리할 땐 공격하고 불리할 땐 회피하는 우선권을 가지고 있으며, 더 나아가 다수 대 다수의 교전에서는 유기적 협동과 조직적 전술을 통해 다수 대 다수의 교전에서 발생하는 기회들을 적극 활용할 수 있었다. 반면 A6M과 일본군 조종사들은 1:1의 전투[48], 그것도 저속선회전까지 적을 끌어들일 수 있느냐에 매달릴 수밖에 없었다.

2차 대전 초기 미군 파일럿들은 왜 제로와의 선회전에 쉽게 말려들어 제로의 밥이 되었을까? 그 이유는 단순하다. 왜냐하면 그들이 실전을 치르기 전, 훈련받은 기본 전술은 1차 대전시기 공중전의 경험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2차 세계대전, 특히 그 초반은 전간기에 눈부시게 발전한 항공기 성능이 본격적으로 공중전 교리에 반영되던 시점이다. 때문에 루프트바페와 일본군이 스페인 내전과 중일전쟁을 통해 2차 대전 직전 2차 대전 초기급 전투기를 이용한 공중전을 경험했다는 사실은 유럽과 태평양에서의 서전의 항공우세에 그들이 운용한 기체의 성능 이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이미 1930년대 초중반부터 전운이 감돌며 무기와 전술을 경쟁적으로 연구하고 있던 유럽과 달리 대서양 너머 미국에선 상황을 추상적으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다.[49] 이는 태평양은 물론 유럽전역에서도 미군이 초기에 졸전을 면치 못했고, 그 핵심이 전술적 미숙함에 있었다는 사실을 통해 엿볼 수 있다. 일례로 2차대전 시기 미 육군의 유럽전역 첫 데뷔전이던 "카세린 계곡 전투"를 떠올려 보라. 2차 세계대전을 맞이한 시점에서 미군의 전술적 준비상태는 그 정도였다. 항공전이라고 달랐을까?[50] 사실 미군이 전간기 동안 그나마 연구해 놓은 대표적인 부분이 바로 전략폭격의 효용이다. 그래서 미군은 4발의 장거리 중폭격기를 개발하고, 노던 조준경을 비롯 고고도 정밀폭격을 위한 기술을 축적했다. 그러나 실전에서 얻은 첫 결과란 독일을 상대로 폭격기만을 동원한 무리한 주간폭격으로 무수한 탑승원들을 희생시키는 것 아니었던가.[51] 심지어 태평양 전쟁의 이정표라고 말해지는 미드웨이 해전에서조차 엉성한 전술과 낡은 기체 그리고 엉터리 어뢰의 3중 막장으로 거의 전멸하다시피한 TBD 데버스테이터 부대를 떠올려 보라. 그런 미군이 서전에서 1차 대전식 공중전에 집착하다 쓸데 없는 피해를 당했다는 것은 많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러한 성능적, 전술적 상성의 맞물림 속에서 펼쳐진 태평양 전쟁 초반 A6M과 와일드캣의 전투에서의 결과는 결국 대부분의 경우 그냥 해당 전투상황에서 더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는 상당히 평범한 수준의 결과를 기록했다.# 서로의 장단점이 맞물리며[52] 결국 전체적인 '전투능력치'는 엇비슷 했으니 쪽수 많은 쪽이 이기는 건 당연.

결국 연합군이 적의 실체를 제대로 인식하고, 그에 걸맞은 전술의 발전을 이룸과 동시에 제로의 영광은 저물기 시작한다.

일본이 아직 전략적 주도권을 쥐고있고, 태평양 전역에 더 많은 항모와 함재기를 투입할 수 있었으며, 숙련된 조종사들 또한 다수 확보 되어있던 비교적 양호한 상태의 전쟁의 초반동안 조차도 A6M은 서전의 깜짝 승리를 빼고는 아직 미군의 주력이 와일드캣인 시기에 이미 호각열세로 밀리기 시작한다. 산호 해, 미드웨이 그리고 특히 과달카날의 혈전을 거치며 일본 해군 항공대는 짧은 시간에 회복될 수 없는 손실을 입고, 일본해군의 제공권, 제해권 장악은 실패한다. 다수의 항공기를 상실한 것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태평양 전쟁 이전부터 조금씩 축적된 숙련된 항공요원 다수를 잃는다. 미군이 입은 피해는 항공기 손실도 일본보다 적었고 특히 항공요원의 상실은 두드러지게 적었다. 게다가 미국은 막강한 공업력과 훨씬 풍부한 인적자원을 바탕으로 전쟁 초반의 피해를 그리 길지 않은 시간에 회복할 수 있었다.

서전의 충격에서 회복된 미국이 전시생산체제 전환을 완료하며, 새 항공모함과 거기에 탑재할 신형 전투기를 태평양 전선으로 쏟아내기 시작한다. 홀로 살아남아 '엔터프라이즈 VS 일본'의 사투를 벌이던 일본 해군의 담당일진 항모 엔터프라이즈와 '캑터스 항공대'의 와일드캣들의 자리에, 이제 풀빵 찍듯 취역하는 에식스급 항공모함과 그 격납고를 채운 F6F 헬캣들이, 해병대의 지상기지엔 F4U 콜세어들이 속속 배치되기 시작한다.


개전 초기만 해도 날아다니는 표적에 불과했던 연합군의 항공기들은 시간이 흐를수록 더 단단하고 더 좋은 성능으로 변했고 에이스 파일럿들이 성장하고 동시에 공중전 기술의 발전으로 인해 애초에 미군 전투기들은 우월한 파워를 살린 붐앤줌 공격방식을 도입해서 싸우기 시작했다. 붐앤줌이란 강력한 엔진 출력과 무게, 덩치에서 나오는 에너지를 살린 공중전 방식을 말하며, 쉽게 말해 급강하 공격의 반복이다. 당연하게도 이 전술에서는 선회전 따위를 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선회전이 잘 걸리지도 않기 때문에[53] 급강하 속도에도 제한이 걸려 있어서 선회전에 상대방을 말려들게 하는 전술 위주로 할 수 밖에 없는 제로의 입장에서는 그야말로 지옥이 따로 없었다. 당연하게도 격추비율이 넘사벽급으로 벌어지기 시작하면서 A6M은 서서히 쓸모없는 전투기로 전락하기 시작했다.

1943년 솔로몬 제도의 문다 비행장 주변에 추락한 A6M3.

타국 전투기가 두꺼운 장갑과 강한 엔진을 사용하는데 반해 A6M은 경량 전투기라는 태생의 한계로 출력이 강한 엔진을 얹을 수도 없었으니[54] 장갑은 고사하고 속도도 안 나오는 데다가 구조강도가 지나치게 빈약하다는 문제 때문에 고속도로 급강하할 수가 없었다. 덤으로 무리한 급강하 시도시에는 기체가 산산조각이 나버렸다. 이 문제 때문에 테스트 파일럿도 희생되었을 정도다.

때문에 다른 동시대 전투기들의 공중전 전술이 붐앤줌 형태의 수직 기동 위주로 바뀌었음에도 여전히 선회전에만 목을 매야만 했다. 이 말은 타국 전투기는 전황이 불리하면 물러나고 유리하면 공격을 할 수 있는 선택권이 있지만 일본 전투기는 철저하게 타국 전투기가 싸움을 걸어와야지만 싸울 수 있었다는 말이다. 애초에 속도가 느리고 급강하 기동이 불가능하니 불리한 여건에서도 도망칠 수조차 없다. 그래도 숙련된 조종사들이 모는 A6M은 여전히 위협적인 상대였다고는 하나 미드웨이 해전의 참패와 과달카날에서의 소모전[55]으로 태반의 베테랑들이 불귀의 객이 되어버렸으니. 미군 에이스들 개개인의 전과가 독일이나 일본 에이스보다 떨어졌던 것은 이들의 기량이 떨어져서가 아니라 순환 근무 체제가 잘 동작하는 덕분에 굳이 한 사람이 오래 전선에 나가 있지 않아도 되었기 때문이다. 정해진 출격 횟수를 채우면 후방으로 빠져서 휴식을 취하고 다시 복귀하거나, 비행 교관 등으로 근무하거나 전쟁기금 모금을 위한 홍보대사로 활동하거나 했지만, 추축국 에이스들은 나날이 불리해지는 전황으로 그런 게 사치가 되어버렸다. 당장 사카이 사부로가 한쪽 눈을 실명하고 교관 일을 하고 있었는데도 출격한 전적이 있었고 이와모토 테츠조도 원래 산호해 이후 본토에서 교관으로 일하기로 되어 있었으나 전황이 격해지면서 라바울로 불려갔다가 종전 때까지 비행기에서 내릴 수 없게 되었다.

F6F 헬캣F4U 콜세어가 전선에 본격적으로 투입되는 1943년 후반이 되면, A6M은 본격적으로 날아다니는 표적으로 전락하고 만다. 와일드캣 후계기로 일선 항모의 주력 함재기가 된 F6F 헬캣과의 교환비는 무려 13:1.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 같은 참사까지 겪는 지경에 처한다. 결국 초기에 우위를 가졌던 미군들에게 칠면조 취급을 당하면서 평균 격추비는 11:1(대전기간 전체를 기준으로 볼 경우에는 10:1) 가까이 떨어지는 굴욕 끝에 전쟁을 종결하게 되었다[56].

한 번의 전투로 투입 항공전력의 70%를 상실하며 일본 해군항공대의 주력이 붕괴 되어버린 저 유명한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은 학살자에서 밥으로 전락한 제로 전투기의 비참한 종말을 잘 보여준다. 여기서 일본 해군은 멍청하게도 제로의 반 이상에 250kg 폭탄을 달고 전폭기 용도로 쓰는 실수를 저질렀다. A6M이 장갑이 좋다면 모를까 장갑이 허약한 제로에게 함선을 공격하라는 짓은 삽질 그 자체였다.그 덕에 둔중해지고 느려진 A6M은 헬캣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 이 날 헬캣을 주력으로 삼은 미 해군 제 58기동함대와 제로를 주력으로 삼은 일본 해군 연합함대의 공중전 결과는 단순 격추비만 30 : 239.[57] 그리고 A6M은 레이테 만 해전에서 최초의 카미카제 격침을 기록한다. 그 덕에 A6M은 자살공격기의 대명사로 남게 된다.[58]

물론 이꼴을 당한 것은, 상대는 일찌감치 후계기를 준비 중[59]이었는데, 여전히 제로만 띄운 결과이기는 하다. 하지만, '후계기가 제 때 개발 안 돼서 이미지를 구겼다'는 식의 평가 또한 피상적이다. 애초 제로의 후계기가 제때 개발되지 못한 가장 큰 이유는 엔진기술이었다. 사실 이미 전쟁 초기에도 A6M은 1000마력이 채 되지 않는 엔진을 사용한 반면, 그 굼뜨다는 와일드캣도 1200마력대의 엔진을 사용했다. 후기형은 1130마력대의 엔진을 사용하기는 했지만, 그 시점엔 이미 2000마력대의 엔진을 단 괴물스런 적기들이 날아다니고 있었다. 덤으로 그 시점에 호위함대에서 운용되던 와일드캣들도 1350마력대의 엔진으로 업그레이드 된 상태.

더 나아가 A6M과 비슷한 시기에 등장한 스핏파이어와 Bf109는 지속적으로 업그레이드 되며 전쟁 말기까지 최일선기의 성능을 유지했다. 특히 최대한 컴팩트하고 가벼운 기체를 지향한 것은 Bf109 역시 마찬가지였다. 아니 기체 전체의 사이즈로는 Bf109 쪽이 더 작다. 하지만 '경량화한 기체와 최대한 강력한 엔진'의 조합을 추구한 Bf109와, 저출력엔진에 맞춰 극단적인 다이어트만으로 비행성능을 짜낸 제로의 업그레이드 가능성은 시작부터 달랐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애초에 Bf109는 덩치는 몰라도 무게는 제로의 1.5배정도로 스핏파이어와 동급이다. 즉 후계기의 개발이 지연되는 것도, 제로의 업그레이드가 상대에 비하면 옆그레이드 레벨에 멈춘 것도, 엔진개발의 곤란을 중심으로 한 동일한 문제였다.[60]

다만 독일, 영국의 육상전투기는 항속거리가 제로의 반도 안 된다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음을 알아두어야 한다. 만약 Bf109의 항속거리가 제로의 2/3만 되었다면 독일은 영국 항공전에서 그렇게 쉽게 지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이것은 제로센이 너무 과도하게 항속거리에 집착했다는 소리도 되지만 반대로 일본의 육상전투기는 함상기만한 항속거리를 요구받지 않았기 때문에, 보다 힘센 엔진을 달기 수월했고 균형잡힌 성능을 낼 수 있었다.

즉 전반적인 기술수준 자체의 한계로, 제한된 시기에 제한된 방식의 우위만을 달성할 수 있었던 것. 진주만 기습으로 시작되어 미드웨이에서 좌초하고 과달카날에서 몰락하기 시작하는 일본군의 운명과 딱 빼닮았다고 할 수 있겠다. 물론 T-34[61]의 경우처럼, 개개의 기술수준은 떨어지지만 전체 컨셉의 우위로 쓸모있는 병기가 되는 경우도 있다. 그러나 사실 이는 이미 2차 대전부터 기술력의 총체라 할 수 있던 항공병기에서는 기대하기 어려운 일일 수 있었다. 나아가 A6M은, 컨셉으로 조차 딱히 앞서 있지 못했다. A6M은 전통적인 선회전을 중시하는 공중전 사상과, 반면 전금속제의 고속 단엽기가 전투기의 표준으로 자리잡은 1930년대 항공기술의 발전을 절충한 '미묘한' 전투기에 더 가까웠으니까. 물론, 이 '미묘한' 전투기가 나온 원인은 시대에 뒤떨어진 '멍청한' 수뇌부의 요구 때문이다.

일본군이 제공, 제해권을 상실하고 태평양의 섬이 하나 하나 미군에게 넘어가며, 이제 일본 본토에 B-29 폭격기들이 들이닥치기 시작한다. A6M은 B-29를 잡기 위해 출격했으나 B-29의 고도가 너무 높아서 빌빌거리기만 해야했다. 이는 과급기가 없는 자연흡기 엔진의 기본적인 특성 때문이다. 미리 특별한 조치라도 취하지 않았다면 고고도에서는 공기밀도가 크게 감소하여 엔진에 공급되는 공기량이 급감한다. 공기량이 부족해짐에 따라서 성능이 급감하게 된다. 따라서 이 부족한 공기를 채워주는 과급기(슈퍼차저 또는 터보차저)가 필요한다. 과급기는 공기를 압축하여 엔진에 공급하므로써 이 부족해지는 공기밀도를 보상해 준다. 실제로 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공군에서도 고고도 폭격기 요격은 과급기를 장착한 Bf 109가 맡았다. 마찬가지로 미군의 P-47 썬더볼트는 고공에서 엔진 출력을 보장하는 2단 과급기[62] 덕분에 뛰어난 고고도 성능을 발휘했지만, 개량도 제대로 못하는 일본에 그런 걸 기대하는 게 무리였다. 설사 올라갔다 하더라도 제성능을 발휘하기는커녕 B-29의 기관총에 맞고 떨어지기만 했다. 가장 웃긴 건 B-29의 최대속도가 제로보다 빨랐다는 것. 요격은 고사하고 한 번 뒤쳐지면 따라가지도 못할 지경이었다. 그리고 작전 가능 고도 문제도 있는데, B-29의 제원표를 보면 나오지만 B-29의 작전 가능 고도는 제로의 작전 가능 고도 대비 두 배는 더 높다. 그래서 B-29 폭격기 탑승원들의 증언을 들어 보면 A6M이 B-29를 쫓아 고도를 올리면 어느 순간 에프킬라 맞은 모기처럼 뚝 하고 추락했다고 한다. 그야말로 B-29의 진행 경로를 미리 파악해 지나갈 길에서 대비하다가 1번 겨우 패스하고 격추를 하면 다행인 상황이었다. 때문에 일본군에서도 제로보다 수랭식 전투기나 쌍발기를 이용했다.

그러나 초기에는 제로보다 성능이 안 좋은 편으로 보았던 육군의 Ki-43 하야부사의 경우, 비행기 내구도를 높이고 2차 대전에 걸맞은 전투기로 개조하면서 제로에 비해 카탈로그 성능이 구려 묻혔지만 정작 미군들은 제로보다 더 우수하다는 평가를 내렸다.

2차대전 전사 연구가들은 중국 전선이나 동남아 전선에서 A6M과 조우, A6M과 교전으로 보고되었거나 문헌상의 기록으로 남은 것 중 대다수가 Ki-43 하야부사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일단 오스카나 제로나 모양이나 성능 모두 비슷하고, A6M이 압도적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벌어진 일로 추정된다. 일단 일본 측 기록에 의하면 해당 전선에서 주로 활동하던 기종은 A6M이 아니었다.[63]

여러모로 유럽전선에서 큰 활약을 벌였던 P-47 썬더볼트와 시작은 비슷하지만 (장거리 요격기[64] vs 장거리 함대 방공 전투기) 결과적으로는 정반대의 개념을 가지고 있는 기종이었다.

8. 사용 국가

8.1. 아시아

8.1.1. 동아시아

8.1.1.1. 일본 제국
파일:Yusukan_Zerosen_A6M5_type_52.jpg
유수칸 전쟁 박물관 소장 일본 제국 해군 항공대 소속 A6M5 52형 "81-161번기"
원조 사용국으로써, 해군 항공대에 편제하여 주력 함재기로 사용하였다.

훗날 전황이 불리해지자, 카미카제와 같은 전술로 소모되기도 하였으며, 현재는 유수칸 전쟁 박물관에 정태보존된 A6M5 1기가 전시 중에 있다.
8.1.1.2. 중화민국 국민정부
파일:P-5016_Zero_Kunming.jpg
국민당군 노획 A6M2 네임드 기체 "쿤밍 제로" P-5016번기
아쿠탄 제로 이전에 중일전쟁 당시 중국의 쿤밍에서 중국군이 A6M을 노획했는데, 해당 제로센은 대남해군항공대(台南海軍航空隊) 소속의 이노우에 시메조 1등 비조가 운용하던 A6M2로, 당시 악천후로 인해 첸산 근교의 국민당군 소유의 비행장에 불시착하게 되었으며, 국민당군과 미군 측은 이노우에 시메조 비조를 구금하고, 해당 제로센을 노획하였다.

해당 제로센은 타이어 및 카울이 마모된 상태여서, 정비창에서 새롭게 제작한 카울과 미국제 타이어, 그리고 기타 일본어로 되어 있던 조종간의 계기판을 미국제로 교체하였다고 한다.

이후 해당 항공기는 "P-5016"이라는 번호를 부여받고, 실전에서 사용하지 않고 훈련 및 미군들이 노획 장비 분석용으로 사용하였다가 1943년, 2차 세계 대전 중 파키스탄 카라치 비행장으로 이송되어, 선박에 실려 커티스 사의 수리를 받고 플로리다로 이송되어 미군 소속으로 재편제 후, 적기 훈련용으로 사용되었다 1946년에 스크랩되었다고 전해진다.

8.1.2. 동남아시아

8.1.2.1. 인도네시아
파일:indonesian_A6M5_zero.jpg
인도네시아 공군 박물관 소장 인도네시아 공군 소속 A6M5 52형
종전 이후, 자국에 남아있던 소수의 제로센을 취합하여 Ki-43 하야부사, Ki-79 2식 고등훈련기와 함께 공군 전력으로 사용하였다.

8.2. 유럽

8.2.1. 서유럽

8.2.1.1. 영국
파일:Mitsubishi_A6M5_Zeke_ATAIU_Cockpit.jpg
옥스포드 제국 전쟁 박물관 소장 영국 공군 기술 항공 정보 부대 소속 A6M5 잔해
종전 직후, 말라야 반도에서 A6M5 52형 2기를 노획하여 기술 항공 정보 부대 소속으로 시범 운용하였다가, 일부 부품만을 남기고 스크랩하였으며, 현재 옥스포드 제국 전쟁 박물관에 소장 중에 있다.

8.3. 아메리카

8.3.1. 북아메리카

8.3.1.1. 미국
파일:Akutan_zerosen.jpg
미 해군 항공대 노획 A6M2 네임드 기체 "아쿠탄 제로"

알래스카 아쿠탄섬에서 노획된 제로, 일명 '아쿠탄 제로'의 사진이다.

항공모함 류조 소속 코가 타다요시 1등비조(비행병조/상사)의 탑승기로, 1942년 6월 4일 AL 작전의 더치 하버 공습 당시 연료 호스가 피탄되어 연료가 떨어지자 더치 하버 인근 아쿠탄섬에 불시착했다. 코가는 상공에서 이 지역이 착륙하기 괜찮은 곳이라고 생각했는지 활주로가 아닌데도 동체착륙을 시도하지 않고 랜딩기어를 내렸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가 착륙하려던 지역은 단단하고 마른 땅이 아니라 이끼 퇴적층에 의해 만들어진 툰드라 지대의 진흙탕이었던 것. 결국 랜딩기어가 진흙 속에 빠지면서 착륙하던 속도 그대로 기수를 땅에 쳐박고 뒤집어졌고, 코가는 이 과정에서 목뼈가 부러져 사망했다.

추락 직후 동료기들은 파괴 명령을 받았지만 코가가 살아있을 것으로 예상하고 파괴하지 않았다. 무전기 성능이 형편없어서 동료간 통신이 제대로 안 된다는 제로센의 문제점이 이런 부분에서 결정적으로 작용한 것이다. 1942년 7월 10일에 PBY 카탈리나 조종사 윌리엄 티스 대위와 기장 앨버트 낵이 조종사의 시신과 함께 발견. 다음날 7월 11일부터 조종사의 시신을 장례해준 이후 회수작업을 시작해 7월 15일에 중장비를 동원해 회수한 이후 수리되어 9월 20일에는 완벽히 복구돼 비행이 가능해졌다.

미국은 아쿠탄 제로를 이리저리 날려보고 한 결과 A6M을 어떻게 상대해야 하는지에 대해 정확히 파악했고, 일선의 파일럿들에게 기체별 대응지침을 보냈다. 일본 극우파들은 "저것만 아니었어도 우리가 이겼을 거다!"하기도 하지만 그럴 리가. 이미 미드웨이 해전을 통해 일본의 전쟁 초기의 우세가 상당히 꺾여 전세는 거의 대등해졌고, 과달카날 전역 이후에는 거의 일본의 패배로만 일관되게 진행한다. 설사 잘 쳐준다 한들 전술의 도입이 몇 달 늦어졌을 뿐, 이미 기술적으로는 미군 쪽에선 제로와 상관 없이 와일드캣의 뒤를 이을 신예기의 준비가 끝난 상태였다. 한 예로 제로 킬러[65]로 일컬어지는 F6F 헬캣의 설계시기는 진주만 공습보다 훨씬 이전인 1938년부터였다. 원형기의 초도비행도 1941년 6월 30일. 일본이 진주만 공습이라는 기습적 공격을 한 것은 1941년 12월 7일. 고로 아쿠탄 제로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 뿐 아니라 대전기 최강의 함재기에 이름을 올린 F4U 콜세어도 설계시기는 F6F 헬캣과 같다. 이유는 해군이 헬캣의 개발사인 그루먼과 콜세어의 개발사인 보우트에 각각 다른 주문을 넣었던 것.[66] 게다가 제로는 물론 렛푸나 진푸, 신덴마저도 간단히 씹어 버릴 수 있는 F8F 베어캣과 속도와 기동성에서 모든 일본기를 능가하는 F5U도 개발이 진행 중이었다. 즉 이 아쿠탄 제로의 노획이 미군에게 도움이 된 것은 사실이나, 마치 이게 일본 우익들이 생각하는 '통한의 실수'와 같은 특별한 요소는 아니다.

이 제로기는 1945년 2월 이륙을 위해 택싱을 하다 SB2C 헬다이버충돌해 결국 기체가 산산조각 나버려 더 이상의 비행이 불가능하게 되었으며, 이후 아쿠탄 제로의 잔해들은 워싱턴 D.C.에 있는 미국 해군 국립 박물관(National Museum of the United States Navy)에서 보관, 전시하고 있다.

이밖에도, 태평양 전쟁 중, 최소 15기 이상을 노획하였으며, 해당 기체들 역시 미국 전역에 전시 중에 있다.

8.4. 오세아니아

8.4.1. 뉴질랜드

오클랜드 박물관에 스핏파이어와 같이 전시되어있다.

9. 장점

A6M은 분명 한 전기를 풍미했던 준수한 성능의 기체였음은 분명하다. 전후 동남아 국가들에 잔존 기체가 남겨졌고 이를 노획한 동남아 국가들은 잘 만 써먹었다. 정말 못 쓸만한 것이었다면 이들도 알아서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제로센을 평가할 때 다들 간과하는 점이 있는데 제로센은 일반적인 전투기에 비해 제작 및 운용상의 제약조건이 강한 함상전투기라는 점이다. 2차대전 당시에 제대로 된 함상전투기를 개발해서 대량으로 생산해 배치할 수 있었던 나라는 미국, 영국, 일본이 전부 다라고 할 수 있고 개중 영국의 함상전투기는 거의 언급도 되지 않는 현실을 감안하면[67] 이런 함상전투기를 개발해서 배치할 수 있었다는 것부터가 다른 나라는 넘기 어려운 장벽을 돌파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또한, 후술할 제로센의 단점은 따지고 보면 어디까지나 주 적대국인 미국의 기체에 비교했을 때의 상대적 무능이라고 볼 여지도 있다.

아래의 장점들은 전쟁 전기 12 대 1이라는 압도적인 교환비를 자랑하며 * A6M이 공포의 대상으로 군림할 수 있었던 이유들이다. 다만 저 장점들은 전쟁 후기로 갈수록 퇴색되게 되고 끝끝내 새 장점들은 추가되지 않았다. 또한 끊임없이 신식 전투기들이 쏟아졌던 미국에 비해서 세대교체가 늦어도 한참 늦었다.[68]결국 급변하는 2차 세계대전 판에서 A6M은 얼마 지나지 않아 구식 전투기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떠한 성능개선도 이루어지지 않은 채 꾸준히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 지위를 유지하게 되었고, 결국 태평양 전쟁에서의 제공권을 완전히 미국에게 넘겨주는 패착을 저지르게 된다.

9.1. 저속기동성

A6M은 애초부터 기체 설계 자체가 저속선회전에 특화된 기체였다. 자연히 저속선회전의 스페셜리스트였고 대전 초기 선회전을 교육받은 파일럿들은 도저히 A6M을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또한 이런 기체의 성능을 충분히 살릴 수 있는 베테랑 파일럿들의 조종기술이 맞물려 대전 초기에서 연합군기가 제로에게 선회전을 거는건 말 그대로 자살행위에 가까웠다. 당시 와일드캣을 몰던 미군 파일럿들은 '우리가 운 좋게 제로의 꼬리를 잡아도, 두 바퀴만 돌고 나면 제로가 우리 꼬리를 물고 있다'고 학을 뗄 정도였다.

특히 대전 초기의 연합군에겐 타치 위브와 같이 우수한 전술이 확립되기 전이었단걸 생각해보면 굉장한 무기로 작용했다. 제로에게 선회전을 이기려면 저속선회력이 더욱 월등한 복엽기를 끌고와야 하는데 이탈리아의 CR42같은 시대착오적 복엽전투기나 영국의 소드피시같은 특수목적기를 제외하면 복엽기가 전투기로서는 일선기에서 이미 퇴출된 당시 공중전 상황상 A6M이 선회전의 최강자였다는 것은 확실하다.

다만...
격투전의 시대는 이미 지나가고 있다. 외국의 전투기에 대항하려면 스피드와 항속력이 필요하다.
― 1938년 4월 13일 12시 함상전투기 계획 설명 심의회, ROC를 하향하거나 최소 우선순위를 정해 달라는 호리코시 지로의 요청에 대한 해군 항공기술창 비행실험부 소좌 시바타 타케오의 답변
모의전 결과는 96식 함전의 압도적인 승리로 끝났다...
(중략)
"결투를 한다면 어느 쪽을 고르겠는가?" 비행대장이 묻자, 전원이 96식 함전이라고 대답했다.
단기 공중전 모의전이 끝난 뒤에는 12기 대 12기의 편대 공중전이 벌어졌다. 여기서는 12시 함전이 가진 고속과 상승력을 발휘해 우위에 서는 장면도 있었지만, 사부로는 우위에 서기 전에 96식 함전에 격추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어째서 지금, 격투성능보다도 속도와 상승력을 중시한 전투기가 필요한 것인가...
이 질문에 비행장은 다음과 같이 강평했다.
"고정각, 소형에 7.7mm 기총 2기뿐인 빈약한 무장, 항속력도 부족한 96식 함전은, 아무리 격투전이 강해도 총합 능력으로는 대형, 고마력, 중무장을 갖춘 선진국 전투기에 대항할 수 없다."
'과연, 그런 의미인가'
사부로는 그제서야 납득할 수 있었다.
― 격추왕 사카이 사부로: 제로센에 맡긴 사무라이 혼 # 에서

야마모토 이소로쿠 - 오오니시 타키지로 - 겐다 미노루로 이어지는 해군 항공주병파 주류(이들도 일본군 해군 전체에서는 비교적 혁신파들이었음에도 불구하고)의 시대착오적인 인식과는 정 반대로, 이후 A6M이 연합군기와 싸우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는 A5M과의 모의전이나 중화민국군이 긁어모은 2선급 구식 전투기들과의 싸움에서 이미 밝혀져 있었던 것이다.

A6M의 저속 선회전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만으로 공중전 능력 자체가 과대평가 되는 경향이 있는데, 저속에서의 격투전 능력만이 공중전 능력의 전부가 아님을 상기해야 한다.

실제로도 대전 초반기 제로의 전과 대부분은 중국전선에서 이미 퇴물화된 복엽기나 속도와 상승 능력이 복엽기 수준에 머물러 있던 원시적인 수준의 단엽기들을 대상으로 우월한 상승 능력과 속도를 활용한 '일격이탈' 전술로 대부분의 전과를 올렸고, 가장 잘 알려진 제로 에이스 사카이 사부로조차도 "일격이탈을 제대로 해내지 못하는 놈은 전투기 파일럿도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저속 선회전 능력 보다는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를 활용한 공격전술을 중요하게 여겼다.

선회전의 위력이 시대가 흐르면서 빛을 상당히 잃었다고도 하지만, 위에서 언급했듯 세간의 인식과는 다르게 이미 대전 초반의 일본군 내부에서 조차 빠른 속도와 높은 고도를 활용한 에너지 파이팅이 대세 였던 것이다. 태평양 전쟁 초반 미군기들이 제로에게 털려 나갔었다는 사실만으로 제로의 격투전 능력을 치켜세우고 당시 미군기들의 성능을 깎아 내리는 경우가 많이 보이는데, 이런 사람들이 무겁고 느려터진 주제에 맷집만 좋은 고물 취급하는 와일드캣과 제로의 교전 격추비는 비슷한 수준이고 많은 연구에서 오히려 와일드캣이 제로을 앞선다. 앞서도 언급되었듯 전쟁 전 기간 1:1.5, 산호해, 미드웨이, 과달카날의 1942년 주요 교전에선 1:1.16.[69]

에이스 조종사들은 단순히 선회전만 하는 게 아니라 그 선회력을 이용해 기기묘묘한 회피기동을 펼치거나 상대가 선회전을 하게 판을 만들어서 적을 격추해내는 등 다양하게 활용했다곤 하지만 와일드캣 이후 등장한 헬캣과 커세어 같은 속도와 상승력은 물론 고속 기동성에서 까지 A6M을 압도하는 고성능기들을 상대론 A6M이 할수 있는 것이 그것밖에 없었다고 봐야 맞을 것이다. 거기다 문제는 전투기들의 출력이 강화되고 평균속도가 점점 올라가면서 '저속' 취급되는 속도 영역도 점점 높아졌다는 것이다. 콜세어 같은 기종들은 175노트 정도의 속도만 되어도 A6M과 맞먹는 기동이 가능하며 200노트 이상에선 A6M을 능가하는 기동력을 가지고 있었는데 콜세어는 전투속도 200노트정도는 가볍게 넘긴다. 정확히는 엔진의 출력 차이가 너무 커서 서구 열강의 기체들은 차고 넘치는 잉여추력으로 선회하면서 발생하는 항력을 감쇄시키고도 여전히 상대적으로 빠른 속도로 비행하고 있는데 제로 쪽은 같은 속도로 비행하려면 엔진의 추력이 부족해서 항력을 상쇄할 수가 없으므로 낮은 선회율으로 비행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 상황에서 더 좁게 선회를 하려고 시도한다면 실속이 일어난다.

나아가 또 하나의 함정은 보통 A6M이 고속영역에서 기동성이 나빠지는 원인을, 고속이 되면 에일러론 작동이 무거워지는 것을 드는데, 문제는 바로 그 에일러론이 또한 제로의 뛰어난 저속기동성을 만드는 요소 중 하나이기도 했다는 것. 때문에 A6M3 시리즈에서 고속에서의 선회력과 특히 롤기동성을 개선하기 위해 에일러론을 개량한 결과 고속에서 롤 성능은 좋아졌으나 저속선회력은 곧장 감소했고, 이후 버전에서는 21형만큼의 격투전 능력은 발휘될 수 없었다.

그나마도 미군의 신형기들에 대항하기 위해 엔진 출력의 강화를 시도한 전쟁 후반의 개량형들은 그 댓가로 전쟁 초기의 기종들에 비해 저속선회력이 확연히 떨어져 그마저도 불가능 하게 되었고 기다리고 있는 것은 카미카제 뿐이였다. (참고 자료)

9.2. 항속거리

날개접기와 파일럿의 생존성, 날개의 내구도 등 전투기가 가져야할 필수적인 장치들을 포기하고 피탄면적이 넓은 날개에까지 연료 탱크를 탑재하는 자살행위를 해서까지 체공시간을[70] 늘리려한 보람이 무색하지 않게 제로의 항속거리는 단발단좌 전투기 치고는 굉장히 길었다. 어느정도냐면 미국의 쌍발 폭격기 B-25 미첼의 항속거리보다 증조탱크 없는 21형이 조금 더 길고 증조 연료탱크를 장착할 경우 미국의 4발엔진 중폭격기 B-17의 항속거리보다도 조금 길다. A6M의 단발단좌 프롭기라는 압도적인 체급 차를 고려하면 비정상적인 수준.

이 장점이 진주만 공습을 포함한 여러 작전의 바탕이 되었고 전쟁 초기에는 이를 통해 이득을 보기도 하였으며 길을 잃은 파일럿이 육지나 아군 항공모함까지 귀환할 확률을 높여주는 부가효과도 있었다.

이는 항공모함의 위치를 노출시키지 않고 전투기가 작전을 하려면 전투기의 작전지역으로부터 먼 거리에서 출발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대표적인 예로 진주만 공습 당시 미군은 일본기가 남서쪽에서 날아와서 그쪽을 집중수색했으나 실제로 일본군의 항공모함이 있었던 곳은 북서쪽 방향이었다.

A6M은 7시간 가량 체공이 가능했으며 이러한 장거리/장시간 비행능력은 실제로 대전 전반에 유효하게 작용했다. 대전 후반까지 일본기들이 유일하게 가지고 있었던 이점이 바로 긴 항속거리였다. 개량으로 인해 항속거리가 줄어들었는데도 필리핀 해 해전 당시 다른 기종들과 공격대를 구성해도 미군기에 비해 100km 이상 우위에 있었다. 때문에 연합군은 예상치 못한 지역에서 A6M을 만나기도 했다. 2,600 km에 달하는 장대한 항속거리 덕분에 A6M은 연합군 지휘관들이 예상했던 것보다 더욱 먼 거리에서 이륙해 타격할 수 있었고 이로 인해 연합군 지휘관들은 골머리를 썩혔다고 한다.

그러나 영국군과 미군은 레이더가 있었고, 전쟁 전반부터 성능을 열심히 개량한 덕분에 일본의 이런 노력은 시간이 갈수록 헛수고가 되어갔다.[71] 그러나 고출력 엔진의 발달은 늦어지고 업그레이드를 지속해가며 기체의 하중은 늘고 늘어난 기체 중량을 엔진이 버티질 못하고 영국군, 미군의 군용기의 항속거리는 길어지는 등 점차 퇴색되기 시작했고 전쟁 말로 가면서 제로의 임무는 본토방위가 되면서 긴 항속거리의 이점은 거의 사라진다. 또한 긴 항속거리가 양날의 검으로 작용하는 점도 적잖았다. 물론 그 첫 번째는, 과도할 정도의 경량화 설계와 함께 어우러져 A6M을 쉽게 타오르는 비행기로 만든 문제일 것이다. 즉 이미 위에서 언급되었듯, 자동방루 연료탱크와 같은 기본적인 방호대책도 없이 주익에 연료를 가득 채운 탓에, 다른 항공기라면 손상을 입고 성능이 저하되는 수준의 피탄을 당하는 것으로도 A6M은 불덩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하지만 그게 아니라도 제로의 긴 항속거리는 언제나 장점만이 되지는 않았다. 물론 항속거리가 긴 것 자체가 일반적으로 모든 항공기에서 언제나 양날의 검이라는 이야기가 아니다. 다른 요구사항이 더 우선시 된다면 어쩔 수 없지만, 항속거리가 긴 것은 일반적으로는 언제나 장점이다. P-51에 '항속거리가 쓸데없이 길다'고 말하는 사람은 없다. '양날의 검'인 것은, 어디까지나 '제로의 긴 항속거리'에 한해서이다. 왜냐하면 제로의 길디 긴 항속거리는, 그러나 어디까지나 장대한 비행거리에 비해 상당히 느린 순항속도(200km/h대)에 의해 달성된 것이었기 때문이다. 즉 A6M이 멀리 날 수 있던 이유는 출력 대비 연료효율이 딱히 좋거나 한 이유가 아니었다. 도리어 저성능의 엔진으로 멀리 날아가기 위해 순항속도를 굉장히 낮게 잡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참고로 유럽에서 전투기의 순항속도는 적어도 300km/h에서 400km/h정도였고, 대전 후반에 가면 500km/h가 넘는 기종도 많다. 이 속도는 제로의 최고속도와 비슷하다.

덕분에 긴 비행시간(최대 7시간)을 요구하게 되는데, 이것 또한 인명 경시 풍조 중 하나였다. 오랜 시간을 날아가서 지친 채 교전에 임해야 하는 조종사들의 입장이 되어보면 난감하다. 게다가 전투를 마쳤다고 끝이 아닌게 장시간 비행해서 날아갔다는것은 동시에 귀환에도 그만큼 긴 시간을 비행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특히나 유명한 것이 과달카날 전투. 라바울에서 과달카날로 출격하는 조종사들이 귀환 도중에 장시간 비행과 전투로 인한 피로로 졸아버리는 바람에 추락해서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과로에 시달리는 조종사들에게 피로를 잊으라는 명목으로 메스암페타민[72]을 먹이고 작전을 뛰게 만들기도 했다. 물론 당시는 메스암페타민의 위험성이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던 시대라 연합군이건 추축국이건 가리지 않고 그냥 먹었던 시절이기는 하다.[73]

장거리 비행에 의한 조종사들의 피로율이 대단히 높아서 에이스 파일럿인 사카이 사부로조차도 피로 때문에 기종을 헷갈려서 와일드캣으로 착각하고 돈틀리스에게 후방으로 덤벼들었다가 후방기총에 공격당해 죽다 살아날뻔한 적도 있을 정도였다. 다만 이쪽은 기체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체가 장거리 비행이 가능하다는 이유만으로, 조종사의 피로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작전을 입안하고 실행한 일본군 지휘부의 문제가 더 크다. 물론 이 항속거리 자체, 군부의 요구사항으로 설계에 반영된 것이므로 어느 정도는 이렇게 쓰려고 극단적인 설계를 한 것이라고 말 할 수도 있지만. 그런데 이런 일을 겪고도 사카이는 전투기의 항속거리가 중요하단 발언을 했다. 연료가 없으면 마음이 조급해지고 제대로 전투를 할 수 없다면서 말이다. 물론 사카이가 그냥 고집 때문에 저런 말을 한 것은 아니고, 사카이가 42년에 라바울 기지에서 근무할 당시 과달카날과 라바울을 왕복할 경우 과달카날 상공에서는 20분도 전투할 수 없을 정도였다. 연료가 부족해지면 진짜로 못 돌아가는 마당이니 조급해지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해당 인터뷰

아무튼 이러한 긴 항속거리 + 느린 순항속도 = 기나긴 비행시간이라는 상황은 '인간'인 조종사에게 극심한 비행피로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제를 야기하는데, 바로 대소변. 우스운 소리 같지만 '왜 쓸데없이 지저분한 이야기를 하느냐'는 식으로만 말 할 문제는 아니다. 안그래도 좁은 캐노피 안에서 소음, 진동 등 각종 스트레스를 받아야 하는 것이 조종사의 상황이다. 거기에 생리현상까지 덤터기를 쓰면 사기와 전투능률에 좋을 턱이 있을까? 일례로 B-17이나 아브로 랭커스터 등의 장거리 중폭격기들은 보통 화학식 화장실을 갖추고 있었다. (시트가 달린 양동이 수준이라고는 하지만 일을 볼 수 있는 공간이 있다는 거다. 게다가 당시 이 기종들은 밖에다 그냥 갖다 버려도 뭐라 할 사람 없었다.) 게다가 일본군 항공기도 일례로 H8K 비행정의 경우 상당히 제대로된 화장실을 갖췄다고 전해진다. 이렇듯 장거리 비행을 하는 폭격기나 초계기가 화장실 설비를 갖추는 건 사치가 아니다. 그런데 유럽전선에서 B-17의 경우, 폭장량을 2,000kg으로 제한한 '장거리 임무'의 거리는 보통 800마일, 즉 1280km 정도. 300km/h 남짓한 순항속도를 생각하면, 왕복 8시간 반 정도로, 과달카날 전투 당시 제로의 비행시간과 큰 차이가 없다. 참고로, 영국군의 블렌하임 같은 경폭격기나, 미국군의 P-38, P-51, F4U, P-39 등 단좌 전투기의 경우에도 소변은 처리할 수 있는 파이프가 있었다고 한다. 이름하여 Relief Tube. 일본군에서도 96식 함전의 경우 동체가 상대적으로 여유가 있어, 소변주머니 형태의 간이 장비는 갖췄다고 한다.(그리고 조종석 밖으로 투척!) 그나마 소변의 경우는 설비가 없다해도, 비행 중 캐노피를 열 수 있는 기종은 빈 봉지나 병에 담아 바깥에 내던지면 되었지만 전투 중에 공포로 바지에 오줌을 지리는 경우들도 있어 완벽한 해결책은 되지 않았다. 소변은 그렇게 어찌어찌 한다고 쳐도, 확실히 단좌 전투기 사이즈가 되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하면 매우 곤란한 것이 분명하다. 매우. (다시 말하지만 그래서 8-9 시간씩 비행해야 하는 장거리 폭격기나 초계기들은 화장실을 갖춘다.) 더 황당한 것은 작전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식음료를 비행기에 넣고 먹으면서 다니게 했는데 이러면 당연히 탑승 전에 대소변을 처리해도 장시간 비행 중 뭔가 나올 가능성이 더 높아지고 고고도에선 기압차로 인해 대소변이 더 쉽게 마려워진다. 고고도에서는 기압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에 방광이나 장내의 압력이 상대적으로 높아진다. 그래서 소변이 더 마렵고 방귀가 더 자주 나온다. 거기에 더불어 급격한 기동과 급격한 고도변화는 방광과 장에 가해지는 압력을 더 높이고 그 결과 전투상황에서 실금을 유발시킨다. 특히나 오랫동안 공중에 체공하고 있었다면 그동안 볼일을 못보았을 가능성이 더 높고 몸에 더 많은 양의 그것들이 쌓였을 가능성은 더 높아진다.[74] 장이 받는 압박이 커지고, 괄약근 통제력도 약해지고 거기에 정신까지 혼미한 상태가 되면 실수를 할 가능성이 커지기 때문이다. 이미 많은 것들이 쌓여있고, 급격한 전투기동으로 엄청난 압박을 받는 동시에, 교전으로 뇌는 이것저것 복잡한 정보들을 처리하고 있고 그나마도 정신이 점점 흐려진다면? 그와중에 힘 꽉주고 참고 억제하는 것도 일이다.

그리고 이 부분 역시 미군기를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던 게, F4F 와일드캣의 경우는 하위 기종 별로 항속거리가 다양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장거리 정찰기로 나온 F4F-7이라는 기종. 이거, 순항속도 300km/h에 항속거리는 자그마치 '7,000km'를 넘어갔다. 뭐 왕복도 하고 해야 하니 실제 저 정도로 운용하지는 않고 대충 5,900km정도로 했지만.

9.3. 우수한 지속 상승률

전쟁 발발시점에 배치되어 있던 A6M 21형의 분당 상승률은 해수면에서 2710~2750ft/min 으로 피크를 찍고 15000ft까지 2380~2480ft/min을 유지하며 이후 20000ft에선 1760~1810ft/min 수준으로[75] 당시로선 유럽 전선의 Bf 109 E 초기형과 비교해도 밀리지 않는 수준급의 상승력이었다. 반면 이후 태평양의 주도권을 두고 주로 전투를 벌이게 되는 상대인 와일드캣은 피크시에도 1820~1850ft/min 정도[76]에 불과했으며 P-39나 P-40계열기는 앨리슨 엔진의 고질적인 문제 덕분에 저공만 벗어나면 힘을 못쓰는 상황이었다. 덕분에 대전 전기 높은 지속 상승률을 통해 A6M은 적기를 상대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하는 능력이 뛰어났으며, 미군기들은 높이있는 A6M을 상대하기 위해 무리하게 에너지를 소모하며 상승하거나 전투를 회피하고 도망가야 하는 상황에 처하는 일이 잦았다.

게다가 태평양 전역 전기엔 아직 기체들의 중량이 가볍고 속도도 그다지 빠르지 않은 상태였기 때문에 추중비가 뛰어난 A6M은 에너지 면에서도 대부분의 적기를 상대로 우위에 있었다. 일본 해군의 에이스 중 한명인 토시유키 수에다 병조장은 제로의 우수한 추중비를 이용해서 고각상승 → 따라서 올라가다 먼저 실속에 빠진 와일드캣에 사격 → 격추라는 방식으로 9기를 격추시켰는데 당시 미군기로서는 이런 에너지 트랩에 대응할 뾰족한 수단이 없어 제로기에 대한 환상만 늘려가고 있었다.

하지만, 제로의 높은 지속상승률을 '추중비가 높아서'라고 해석하는 것은 다소 부정확 할 수 있다. 이는 비단 제로에만 해당되는 사항이 아니라, 실제로 양력의 도움 없이 엔진의 추진력을 자체를 통한 '추력상승'이 가능한 현대의 제트기와는 달리, 제트엔진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무척 낮은 출력의 엔진으로 날아다니던 프롭시대 전투기에 '추중비'라는 개념 자체를 그대로 적용하기는 힘들다.[77]

이는 2차 대전시기 주요 전투기들의 (추중비 Thrust-to-Weight ratio가 아니라) 마력기준의 '출력 대 중량비'(Power/Mass)와 상승률을 살펴보면 알 수 있는데, 제트전투기들이 대체로 추력-중량비의 차이와 상승률의 차이가 거의 일치하는 데 비해, 2차 대전시기의 레시프로 전투기들은 출력 대 중량비의 차이와 상승률의 차이는 다소 독립적이다.[78] 일례로 제로의 출력-중랑비는 파운드당 0.18마력인데 비해, 헬캣, 콜세어 그리고 P-38의 파운드당 0.16마력 정도로 비슷한 편이다. 그러나 최대상승률은, A6M 21형이 15.7m/s인데 비해, 헬캣은 17.8m/s, 콜세어는 19.7m/s, P-38은 24.1m/s이다.[79]

또한 A6M이 '에너지'면의 우위를 지닌다는 것도 약간 부적절한 해석일 수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봐도, 속도로는 엇비슷하고 중량은 더 가벼운 A6M이 보유할 수 있는 '운동에너지 총량'에서 우위를 지닐 수는 없다. 다시 한 번 강조하지만 E=1/2*mv^2^. 대전 초반의 미 주력 함상기인 와일드캣과 비교해도, 수평비행 속도는 거의 비슷하고, 급강하속도/한계속도에선 와일드캣이 100km 이상 빠르며 (629km/h vs 772km/h[80]), 중량 또한 1/3 가까이 더 무겁다. 즉 '총 운동에너지량' 자체는 와일드캣이 더 많이 가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제로의 공중기동에서의 우위를 '에너지면에서 우위를 지닌다'고 해석하는 것은 다소 부적절한 해석이다. 사실 경량화는 어쩔 수 없었다쳐도 그 과정에서 기체강도의 부실로 인해 급강하 속도가 크게 제약되는 점 때문에 A6M은 '에너지' 면에서는 반대로 불리한 기체라고 봐야한다.[81]

A6M이 지속상승력으로 상대를 스톨상태에 빠뜨릴 수 있는 것은, 거꾸로 제로의 실속 속도가 그만큼 낮다는 뜻이다. 즉 이는 추중비나 보유 에너지량의 우위에 앞서, 역시 경량화된 기체와 상대적으로 훨씬 넓은 익면을 통한 '저 익면하중 설계'의 결과가 더 중요한 측면이라고 봐야 한다.

이는 달리 말해 설령 A6M이 지속상승력에서는 확고한 우위를 가지고 있는 기체들에 대해서도, 한계속도(초과금지속도)가 낮은 A6M의 경우, 붐앤줌 전술에서 급강하 자체 만이 아니라, 줌 상승과 같은, 급강하 가속을 이용한 타력상승에서도 A6M이 상대 기체에 우위를 점할 수 있다는 뜻은 아니라는 것. 이것이 아직 헬캣 등이 배치되기 이전의 태평양 전장에서도 미군이 저속 선회전을 회피하는 전술교리를 채택한 이후 제로의 우세가 급속히 무너지는 이유이다. 즉 A6M은 급강하로 퇴피하는 적기를 계속 추적하는 것도 그리고 그 적기가 줌 상승하는 것도 따라가기 곤란하다는 것.

그러나 42년 말 미해병 항공대에 F4U-1 콜세어가 43년 초에는 미해군 항공대의 F6F-3 헬켓이 각각 나타나면서 이러한 우위들은 의미를 잃게 된다. 콜세어와 헬켓은 2000마력급의 엔진과 5톤이 넘는 전비중량, A6M을 압도하는 속도를 가지고 있었는데 지속 상승력면에서도 A6M과 거의 비슷해졌으며[82] 무엇보다 속도와 무게를 이용한 급격한 줌상승 능력을 이용해 오히려 A6M을 단기간의 수직기동으로 압도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A6M은 기체의 경량화로 추중비를 높여 속도와 상승력을 얻었지만 덕분에 동등한 속도에서 기체가 품을 수 있는 에너지도 적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속도가 느리고 추중비가 심하게 떨어지는 와일드캣같은 기종을 상대로는 에너지트랩을 걸며 농락할 수 있었지만 5톤이 넘는 기체를 막강한 출력의 엔진으로 가속시키는 헬켓과 콜세어를 상대로 에너지트랩은 자살행위에 불과했다. 실제로 상기한 토시유키 수에다 병조장은 10번째 기체로 와일드캣이 아닌 헬켓을 만나 와일드캣에 하듯이 에너지트랩을 걸었다가 사망하고 만다. 추중비의 우위는 지속상승 속도 이하의 영역, 즉 공중에 메달린 저속 상태에선 상승력에서 우위를 가지지만 그 이상의 속도에선 얼마나 에너지를 품고 있는지가 상승력을 판가름하게 되는데 A6M은 태생적인 한계로 에너지 잠재력이 떨어져서 저런 신형 미군기들에게 대응할 방법이 없었다. 거기다 수평속도의 우위 덕분에 지속적인 상승이라도 최적 상승속도로 고도를 높이는 것에만 집중하지 않고 거리를 벌리면서 상승하는 고속 상승에서는 콜세어나 헬켓이 우위에 있었다.[83]

거기다 대전말이 되도록 지지부진한 제로의 상승력과는 달리 44년 말에는 115/145 옥탄유를 넣고 4770ft/min의 상승력을 기록하며 20000ft까지 4.9분만에 상승하는 F4U-4같은 괴물기체[84]들이 나타나면서 제로의 상승력 우위는 먼 옛날의 환상같은 것이 되고 만다. 심지어 쌍발기인 F7F-1 조차 4360ft/min[85]이었는데 동시기의 A6M 52형은 3340ft/min 정도였다.[86]

10. 단점

문제들은 대부분이 군부의 무리한 스펙 요구에 따른 반동이다. 뭔가 우수하기 위해서는 다른 부분에서 약점이 생기는 것이 병기로써 당연한 이치다.

물론 A6M이 단점만 한가득한 전투기는 아니었다. 상승력은 라이벌 취급받는 와일드캣에 대해선 1.5배에 달했고, 천적 헬캣에게도 상승력 만큼은 별로 안밀렸다. 그리고 저속에서의 선회전 능력은 종전까지도 태평양 탑클래스에 드는 전투기였다.[87] 하지만 그 장점들을 묻어버릴 만큼 A6M의 단점들은 심각했다.

10.1. 문제의 시작

일본 해군의 무기 개발 과정을 보면, 기본적으로 요구되는 가시적인 스펙을 상부에서 우선 결정한 뒤에, 이를 기업들이 개발해가면서 맞추어내는 식이었다. 이 문제점은 짧은 기간 내에 무기를 바로 획득하고 배치를 해야만 하는 후발주자 군대들에서 지금도 나오는 문제인데. 진짜 심각한 건 이 과정에서 기본적인 자국의 기술수준이나 목표의 실용성이나 현실성 등에 대한 고찰이나 검증 등이 완전히 배제되어 있었던 데다가, 현장의 기술자들의 의견은 완벽하게 무시한 채로 스펙의 달성을 강요했다는 점에 있었다. 게다가 전투병력이 아닌 지원/보급/개발쪽은 찬밥 신세를 면치 못했던 것이 당시 일본군의 풍조였다.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요구를 받는다는 것 자체가 무리다.[88]

더 거슬러 보면, 일본은 1937년의 12시 함상전투기 개발계획부터 당대 유럽의 최전선의 신예기들에 준하는 속도와 상승력, 거기다가 그 몇 배 이상의 항속거리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문제는 그런 요구조건을 맞추기에는 일본의 공업 기술이 부족하다는 점에 있었다. 예를 들어서, 요구되는 속도와 그것을 달성해내기 위한 엔진의 수준을 비교해보면, 1936년 프로토타입이 최초로 비행한 슈퍼마린 스핏파이어는 극초기형에 장착된 롤스로이스 멀린2 엔진도 990마력은 나왔고, 1937년 500km/h의 벽을 넘어 중반대를 달성한 Bf109는 초기형이 DB600A의 980마력에서 시작하여 대전 초~중반까지 활약한 E형에 탑재된 DB601은 1100마력에서 1175마력까지 달성했으며, 일반적으로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와일드캣의 프랫 & 휘트니 R-1830 역시 1200마력이었던 반면에 일본의 경우는 제로 개발 당시 결함으로 인하여 사용할 수 없었던 940마력의 사카에를 제외하고, 780마력의 즈이세이와 900마력대로 후기형이 공칭출력 1250마력에 도달하는 킨세이 정도였으나, 킨세이의 경우 폭격기 용의 대형 엔진으로 항속능력과 격투성능의 문제로 인하여 배제되고 소형인 즈이세이가 선정되었고, 사카에의 문제가 해결되어 11형부터 채택된 이후에야 900마력대에 돌입하는 수준으로, 속력을 달성하는데 필요한 엔진의 출력이 부족했다.

부족한 출력에도 불구하고 대형의 엔진을 채택할 수도, 그렇다고 요구되는 카탈로그 스펙의 일부를 타협할 수도 없었던 상황으로 인하여 결국 군용기로는 적합하지 못한 수준의 극한의 경량화가 이루어졌고, 이는 기체의 구조강도의 부족으로 이어져 이후의 기체의 개선을 막고, 전투시 급강하 기동을 제한했다. 문제는 급강하 기동은 속도를 얻기 위한 매우 기본적인 기동이자 탈출법이다. 어차피 고도를 잃어버리는데 왜 하느냐 하면 사실, 이게 도약하기 위해 잠시 웅크리는 기동이라는 것이다. 그 당시 전투기들은 추력 대비 중량비가 현재 전투기들에 비해 처참하리만치 떨어졌으므로 엔진 파워로 상승하는 것은 안전할 때나 하는 일이었다. 반면에 속도를 높이게 되면 기체 설계에 의해 양력 또한 증가하기에 도리어 저속에서 엔진만 죽어라 돌리는 것 보다 월등한 상승력을 기대할 수 있다. 결국 안그래도 약한 장갑으로 인한 생존성이 더욱 떨어지는 결과로 이어지고 말았다.

10.2. 엔진 출력 제로

위아래로 나열된 제로의 단점들은 파일럿들의 지속적인 지적, 요구 등으로 느리게나마 반영이 되어갔다. 기체 골조의 강도[89]를 높이고 자동방루연료탱크를 탑재하고 무전기의 성능을 끌어올리고 무장도 강화시키는 등 제로의 전쟁 전과 전쟁 말기 생산형에는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이것만은 도저히 어떻게 답이 안나왔다.

A6M이 장비한 14기통 나카지마 사카에 엔진은 초기형이 940마력이고 1944년에 나온 후기형조차도 1200마력을 못 넘겼다. 1940년 영국과 독일의 전투기들이 1200마력은 가뿐히 발휘하면서 싸웠고, A6M과 같은 시기에 실전배치된 Fw190이 장비한 BMW801 공랭식 발동기가 14기통임에도 불구하고 1700마력을 내고 있었음을 감안하면, 사카에 엔진의 너무 낮은 출력이 제로의 발목을 잡아버렸다고 할 수밖에 없다. 사카에 엔진의 배기량이 27.9리터 밖에 되지 않는다는 걸 감안해도 많이 낮은 수치.(스핏파이어에 쓰인 롤스로이스 멀린 엔진은 27리터, P-39와 P-40등에 탑재된 앨리슨 V-1710 엔진도 환산하면 비슷한 28리터다.)

나아가 애초 제로의 많은 단점들의 출발이 바로 저성능의 엔진에서 비행성능을 쥐어짜기 위한 무리한 경량화에서 기원한다는 것을 생각하면, 어떤 의미에선 제로에겐 거의 만악의 근원에 해당할지도 모른다.

물론 일본군 상층부도 이 문제를 모르는 건 아니었기에 A6M과 Ki-43의 후속기에는 어떻게든 고출력 엔진을 도입하려 했다. 육군에서 운용한 Ki-84 하야테는 2000마력급의 호마레 엔진을 장착하고 1943년에는 실전배치가 시작된 상태였으며 1943년에 도입된 N1K-J 시덴(조지)도 1850마력의 호마레 엔진을 장착하고 있었다. 제로의 후계기인 렛푸는 2,200마력의 출력을 가지는 Ha-43엔진을 장착했다. 그러나 이들 중 어떤 기종도 제로나 오스카만큼의 신뢰성과 숫자를 확보할 수 없어서, 렛푸는 전쟁 끝날 때까지 양산도 되지 못했고[90] 그나마 좀 사정이 나은 하야테나 시덴카이도 엔진 수급과 부족한 신뢰성에 골머리를 앓아야 했다.

여기에는 웃지 못할 에피소드가 하나 있는데 104전대는 이 악명 높은 나카지마 호마레 엔진을 가지고 100%의 가동률을 냈다. 비결은 지급되는 일본제 품질이 안 좋은 윤활유나 재생 윤활유의 사용을 금지시키고 재고 미국제 윤활유만 사용했던 것이라고 한다.

10.3. 통신 능력 제로

제로의 무전기는 초창기에는 그럭저럭 쓸만했으나 미국의 금수조치로 관련부품을 구할 수 없어지자 성능이 급추락해서 전쟁중에는 제대로 된 음성통신이 불가능했다. 그로 인해 미군의 타치 위브나 독일의 슈밤 대형 등의 유기적인 협동전술은 불가능하게 됐다. 애초에 전선에 그냥 천을 돌돌 감고 페인트칠을 하는 걸 군용 절연대책이라고 시행했던 군대가 일본군이니 당연한 결과였다. 그 뿐 아니라 1936년 이후 몇년간 모든 전파 장비와 전파 기술에 관한 연구가 금지된 것도 치명적이었다. 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일로 일본군이 함선끼리 통신을 할 때도 함 내에서는 통신관을 썼고, 함끼리는 발광 신호를 썼다.

무전기가 이렇듯 형편없다보니 사카이 사부로의 라바울 항공대를 비롯한 일선 부대에서는 조금이라도 속도를 올리기 위해 아예 무전기를 떼어내고 안테나를 잘라내어 무게를 줄이는 경우마저 있었다. 그러니까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인데 그냥 이거 떼어내서 무게라도 줄여야지라는 식.

소련공군의 경우에도 Yak-1Yak-7B등의 전투기들이 비록 한계속도는 700km 안팎으로 A6M과 비슷했지만 이쪽은 그나마 쓸만한 무전기 성능을 보장할 수 있었으며, Yak 시리즈의 삼각형 주익형상 덕분에 순간적인 기동력이나 롤기동에서는 독일 항공기를 능가할 수 있었다.

군대에서 통신의 중요성을 비유하면, 손가락 다섯 개와 손 하나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시야확보가 훨씬 쉽고 적의 위치가 한정된 지상전에서도 티거판터 이전까지 독일군이 전차 개별의 성능에서는 밀렸음에도 이를 각 전차마다 탑재된 무전기를 이용한 협동전술로 극복해내 승승장구했고, 소련군도 중반에 미국 무전기들을 랜드리스해서 이론상에 있던걸 흉내만 냈던 소련식 보전합동전술을 완성한걸 감안하면 무전기의 효용성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괜히 현대전에 큰 변화를 준 요소중 하나로 무전기의 등장을 꼽는 게 아니다. 특히나 공중전은 적기가 어디서나 나타날 수 있을 뿐 아니라 상황이 급박하게 변화하므로 무전기가 굉장히 중요하게 작용한다.

독일의 루프트바페도 전쟁 후기에 들어서며 제공권 확보에 실패하게 되고, 폭격으로 시제기+기술자 등등 주요 자원들을 잃게 되면서 점차 기체의 성능이 우위를 점할 수 없게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상 파괴를 뺀 둘의 격추비는 제로마냥 1:7까지 벌어지지 않았다. 무전기가 그 정도까지 중요한 물건이라는 뜻이다. 하다못해 친구들과 온라인 게임을 해도 채팅으로라도 대화를 하면서 하는 것은 아무런 대화없이 할 때에 비해 그 효율이 몇배나 올라가는데 1초의 차이로 생사가 갈릴 수 있는 전쟁터라면 통신기기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91]

무전기는 편대전이나 대규모로 붙는 난투전이 됐을 경우, 방어측이 되든 공격측이 되든 아군끼리 연계가 되는가, 안 되는가를 판가름짓는다. 이것 때문에 미군에게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라고 일컬어지는 필리핀 해 해전에서는 아무리 조종사의 경험 미숙이 이유라고는 해도 오합지졸이 되면서 순수 공중전에서의 교환비만 단 하루만에 257:31[92]이라는 압도적인 교환비를 연출하며 칠면조 사냥당하듯 거의 몰살당해 버렸던 것이다. 더 간단히 말하면 당장 눈 앞의 아군을 향해 '꼬리에 적이 있다, 넌 좌로 난 우로' 정도의 대화가 되는 것과 안되는 것은 무지막지한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제로보다 한 수 아래로 평가되는 미군의 F4F 와일드캣이 A6M과 맞붙었던 미드웨이 해전같은 전장에서의 기록만 봐도 무전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미드웨이 해전은 F4F 와일드캣의 대 제로 전술인 타치 위브가 처음 선보인 해전이기도 하다.

이 무전의 문제가 해결된 343 해군항공대에서 운용한 시덴의 교환비는 1:1.5로 미군기에게서 격추비가 우위를 점하고 있었고 이와모토 테츠조도 이 문제가 해결된 후기형 A6M을 탑승하게 된 이후 붐앤줌을 걸어오는 적기와 마주치자 편대원의 절반을 미리 저공으로 강하시켜 역으로 포위해 격추하는 기록을 남기는 등, 그 맥없이 당하던 A6M이 맞는가 놀라운 전과도 남겼다. 실질적으로 여러 문제점들도 이 무전기만 원활하게 보급되었더라면 어느 정도 보완이 가능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일본군/무기체계 문서에서 일본군의 중대한 약점 중 하나로 괜히 통신문제를 꼽고 있는 게 아니다.

10.4. 지나친 경량화

10.4.1. 방어력 제로

제로의 성능을 요구한 일본 해군 수뇌부는 함대 상공에서의 체공시간에 대한 요구를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전투기로서의 성능 밸런스가 개판이 되었다.

대표적인 결과가 바로 허약한 방어력이었다. 물론 방어력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기체강성이 개판이 되면서 무장플랫폼으로서의 안정성도 떨어지는 상황이 벌어졌던 것도 심각했고 당장 무게를 조금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조종석 뒷쪽에 설치되는 방탄판조차 없었다. 애초 한 덩치하는 미군 전투기들 뿐 아니라, 그 작디작은 Bf109도 방탄유리와 다른 전투기와 비교해도 두꺼운 13mm 짜리 조종석 방탄판을 우겨넣고 날아다녔다.

그러나 제로의 경우, 극 후반의 일부를 제외하고, 대부분 형식은 이런 최소한의 방탄설비도 없었다.[93]

기체의 생존성이 얼마나 중요한가에 대해 말해보자면 처음엔 어느 파일럿이든 초보이기 마련이다. 당장 에리히 하르트만, 사카이 사부로 등의 나무위키에도 등록된 명 파일럿들도 처음에는 초보였고[94], 한스 요아힘 마르세이유는 여덟기의 적기를 잡는 동안 여섯번 기체를 잃었다. 그런데 생존성이 나쁘다는 것은 그 파일럿들에게 에이스/베테랑 파일럿으로 성장할 기회를 주지 않는다는 이야기가 되고 이는 장기적으로 굉장한 손실이 된다. 그뿐 아니라 전투기 조종사가 되면 이전 계급이 병이든, 부사관이든 닥치고 소위로 진급이 되던 미국과 달리 일본은 그냥 조종사 지원시의 계급을 그대로 유지했을 뿐 아니라 진급에 대해서도 엄청 짜게 굴었다. 당장 사카이 사부로 같은 병 계급의 에이스가 나오던 판이었으니 이런 일본군의 막장 행태에 대해서는 더 써야 손가락만 아파질 지경.

게다가 진주만 공격 당시 일본군 조종사들이 대부분 숙련병이었던 이유는 운 좋게도 그 전까지 상대했던 게 숙련도 0에 가까운 중국군 혹은 본토가 넘어갈 지경의 열강국들을 상대했었기 때문이다. 쉽게 말해, 전술적으로 넘사벽의 우위를 가진 상황에서 실전 숙련도를 쌓을 수 있는 여건이 되었던 것. 만일은 없지만 일본군이 태평양 전쟁 개전 당시 전부 초짜 파일럿들이었다면 제로의 전설은 존재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이는 숙련 조종사가 바닥난 과달카날 전역 이후 상황부터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전투에서 조종석 뒤 방탄판 덕분에 목숨을 건진 조종사가 한둘이 아니다. 대표적으로 독일의 에이스 아돌프 갈란트가 영국항공전 당시 정비병이 조종석 뒷쪽에 마개조해준 방탄판 덕분에 목숨을 건진 적이 있다. 핀란드의 한스 빈트계속전쟁중의 마지막 임무에서 소련 공군의 함정에 걸려 기체 중앙에 37mm 대구경 기관포탄이 명중, 큰 피해를 입고 급강하로 도망쳐야 했지만 조종석 바로 뒷쪽의 방탄판이 파편 피해를 줄여준 덕에 목숨을 부지 할수 있었다. 비행기를 잘 아는 사람들조차도 얼핏 이 부분은 이해하기 어려운데 비행기 정면에서는 서로 고속인 관계로 총알을 맞을 가능성이 적고, 헤드온은 공중전시 어지간하면 피하는 기동일 뿐만 아니라, 맞아도 프로펠러기는 엔진이 앞에 있기에 엔진에 피탄될 가능성이 높지 조종사가 맞을 가능성은 상대적으로 적다. 그러나 꼬리를 붙잡혀 뒤에서 맞으면 무방비 상태인데다, 총알이 동체를 뚫고 의자를 통과해 조종사 몸에 박힌다!!! 그리고 이걸 막기위한 방탄판이란게 사실 엄청 두꺼운 것도 아니고 두께 1cm 정도 될까말까한 철판이다. 이 철판도 총알이 명중하면 뚫리는 건 매한가지지만 적어도 뚫고 들어오는 총알의 에너지(운동 에너지)를 약화시키므로 조종사에게 피해가 가거나 주요한 부품이 파손될 확률이 줄어든다.[95] 참고로, 꼬리를 잡힌 채로 맞아도 상대속도로 따지면 총알의 제 속도를 그대로 맞는 것이므로 파괴력은 육상에서 쏘았을 때의 그것과 비슷하다 보아도 된다. 다만, 공중에서는 기본적인 거리가 멀고 심한 맞바람(비행기가 날아가는 속도)상황에서 발사하는 것이므로 약간 위력이 반감될 수 있다. 게다가 이쪽이 속도가 더 빠르다면 위력은 더 줄어들게 된다. 한편 1차 세계대전 당시 전투기 조종사가 비행석옆에 뭔가 가만히 떠있길래 손으로 잡았는데 알고보니 뒤에서 쏜 총알이었다는 도시전설이 있을 정도다. 적 전투기의 속도+(날아오는 동안 속도가 줄어든) 총알의 속도가 해당 전투기의 속도와 비슷해서 상대속도가 0이 되어버려 공중에서 떠있는 것처럼 보였다는 얘기. 총알잡기 항목 참조.

또한 2차 대전 당시 전투기들 다수가 조종석 뒤편의 방탄판과 더불어 엔진블록 위쪽과 조종석 사이 즉, 계기판 위치와, 엔진 부근 특히 오일쿨러 등에 방탄장갑을 설치하곤 했다. 그리고 기내 연료탱크 주변에도 부분적인 장갑이 설치되기도 했고, 좀 더 충실한 조종사 방호를 위해 조종석 뒤편 외에도 조종석 주변에 상대적으로 얇은 5 ~ 6mm 수준의 보조 장갑을 설치하기도 했다. 참조

물론 A6M과는 전혀 상관없는 이야기이며, 설상가상으로 후기 A6M을 제외하고선 캐노피 재질도 방탄유리[96]가 아니었다. 참고로 라이벌이던 와일드캣의 조종석 전면 방탄유리 두께는 70mm.

다만 일본 해군은 A6M이전까지 대량으로 파일럿을 손실한 경험이 없어 이 점이 빈약한 방탄설계에 참고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일본 육군의 하야부사가 방탄판을 갖추고 나온 건 1939년 노몬한에서 숙련 파일럿을 잃었고, Bf 109 또한 허리케인에게 대량으로 파일럿을 잃으면서 더 살려보려고 E형부터 방탄설비가 증설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언제나 등장하는 연료탱크 이야기. 와일드캣, 헬캣 등 미군 전투기들 대부분은 자동방루 탱크를 사용했다. 미 해군의 자동방루 탱크는 전쟁기간 동안 12.7mm급 기총탄의 피해 정도는 버텨낼 수 있었다. 물론 미군 만이 아니라, 이미 영국본토항공전 당시 영국과 독일의 전투기들도 자동방루 탱크를 사용했다.[97] 사실 자동방루식 연료탱크라는 게 기술적으로 딱히 복잡한 것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미 일본도 1920년대 전반부터 자동방루 탱크를 개발해 30년대부터 사용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게 장비가 안 되던 바람에 라바울 등지에서 공중전을 지켜보던 일본군들 사이에서도 "검은 연기 나면서 떨어지는 건 미군, 오렌지색으로 폭발하고 떨어지는 건 아군." 이라고 구분할 정도였다. 농담이 아니라 실제로 2차 대전 영상들을 찾아보면 연합군기는 시커면 오일이나 연기를 뿜아내며 추락하는 영상들이나 심지어 벌집이 된 채로도 생환해서 불시착하는 영상, 그 상태로 항모에 착함하다 사고나는 영상등등이 많은데 유독 일본군 기체들은 시뻘건 불덩어리가 되거나 공중폭발하는 장면이 많다. 당장 The fighting lady영상을 봐도 일본기체들은 화염에 휩싸여 추락하거나 산산조각나는 영상이 여럿 나오는데 연기를 풀풀 뿜으며 추락하는 기체는 하나도 안 나온다.

현재의 제트 엔진에 쓰이는 제트유가 등유를 주로 하는 혼합유라 상대적으로 불붙기 어려운 것과는 반대로 2차대전 당시의 레시프로 엔진은 전적으로 가솔린을 사용하기 때문에 방어면에서 취약하다. 그만큼 일찍이 자동방루 연료 탱크나 자동소화장치같은 장비가 개발되어 기체들에 장비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명경시가 심한 일본군부는 그것을 무시했고 그탓에 다른 기체들에 비해 훨씬 자주 불이 붙었다. 게다가 전쟁 후반으로 갈수록 숙련공이 마구 징집되어 그나마 높은 편이던 기계적 신뢰성도 추락을 거듭했고 석유 부족으로 불순물이 잔뜩 섞인 저질 가솔린이 사용되고, 심지어는 송진을 이용한 합성유까지 섞어 만들었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에서 언급되는 전쟁 말기 솔방울 수집이 이것. 이 합성유가 의외로 쓸만했다지만 당연하게도 저질 연료가 들어간 엔진이 자동 폭발하는 경우까지 생기는 지경이라 초기에 세운 명성을 자기가 깎아 먹었다.

게다가 A6M은 항속거리를 늘리려 주익에도 연료탱크를 집어넣었다. 주익에 연료 탱크를 탑재할 경우 치명적인 피탄면적이 더욱 넓어지기 때문에 당시 군용항공기는 방탄설비 설치의 용이성 등을 이유로 가능한 엔진과 조종실 부근에 연료 탱크를 위치시켰다. 물론, 더 큰 이유는 날개 강도 문제였다. 특히 동체와 날개가 연결되는 부분. 날개가 무거워지면 이 부분이 가장 부서질 위험이 커진다. 쉽게 말해서 날개에 달린 모든 것들이 이 연결부분에 매달려있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 당시 기술로는 얇은 날개에 연료 탱크와 안전장비를 넣고 기관총까지 설치해 발사하며 급격한 기동을 했다가는 날개가 부러질 가능성이 있었던 것. 이 때문에 유럽의 Bf109나 스핏파이어는 항속거리의 한계로 많은 제약을 받았다.[98] 그러나, A6M은 주익까지 연료=가솔린을 채우면서도 연료탱크의 자동방루 처리 등은 없었다. 몰라서가 아니라, 더 많은 연료를 넣으면서도 기체중량을 줄이기 위해서 한 일이다. 이것이 의미하는 것은 A6M은 다른 전투기보다 더 가벼운 체급임에도 잘못 맞으면 훅 갈 수 있는 'Vital Part'는 허벌나게 넓은 기체라는 것. 거기다 한술 더 떠 32형부터 엔진이 교체되면서 동체 연료탱크가 좁아지는 바람에 항속거리가 떨어졌고 이걸 보완하기 위해 22형 이후부터는 취약부위인 익내 연료탱크 용량을 늘렸는데, 당연히 이는 생존성에 악영향을 끼쳤다.[99]

또다른 문제는 날개에 연료탱크가 있어 피격시 불타오르기 쉽다는 것인데, 원래 예광탄이나 소이탄 계열은 공중전에서 애용되던 탄종이다. 미군 뿐만 아니라 당연히 제로도 예광탄과 소이탄을 포함한 탄종구성을 하고 전투에 참여했다. 즉 뭐가 날아올지 잘 알면서도 아무 대책을 세우지 않았다는 것. 즉 피탄 취약부위가 아니라면 맞는다고 곧장 타오르지는 않겠지만, 서너발 간격으로 섞여 날아오는 소이탄, 예광탄 같은 걸 조금만 얻어맞아도 화재가 발생할 위험이 높다는 것.[100]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에서 이런 실험을 진행한 폭파 기술자 시드니 알포드는 "한방에 불이 붙었네요. 저런 전투기에 누가 타고 싶겠어요?"라고 말한다[101]. 실제로 독일의 에이스인 에리히 하르트만이 미군의 건카메라를 감상한뒤 "일본군의 기체가 탄에 맞으면 간단하게 불타오르는 것이 인상적이었다."라는 말을 남겼을 정도다.

이런 설계를 단순히 어리석다고만 할 수는 없는 것이, 태평양 전선에서는 긴 항속거리가 굉장히 중요했다. 육지에서라면 연료가 떨어지면 지상에 불시착해 도망치거나 구조신호라도 보내겠지만 태평양에서 그러면 결국엔 고기밥 행이라고 봐야한다. 그래서 역시 함재기인 와일드캣도 유럽 전선의 전투기보다 항속거리가 길었고, 미군은 조종사가 실종되었다 하면 눈에 불을 켜고 수색을 했다. 때문에 주익에까지 연료탱크를 탑재해 항속거리를 확보하려 한 것 자체는 어찌보면 납득할 수도 있지만, 제로의 경우 날개를 비롯해 전반적인 기골의 강도가 영 좋지 않았고 방루탱크 등의 설비가 제대로 적용되지 못한 것과 맞물려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한 셈이다.

물론 2차 세계대전 당시에 그 당시 항공기들에 주로 탑재되었던 20mm급 기관포에 대해서 유의미한 방호를 제공할 수 있는 방탄판을 연료탱크 주변에 설치한 전투기는 거의 없었다. 그 시대의 자동방루 탱크들도 기껏해야 기관총탄의 피격 정도나 막아낼 뿐이지, 기관포탄의 직격에는 버텨내는 게 불가능한 물건들이었다.[102] 물론 미 해군의 자동방루 탱크는 때때로 20mm탄에 맞고도 연료유출을 막을 수 있었다고도 한다. 그러나 항상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기본적인 '매뉴얼상의' 방호력은 12.7mm 급의 피탄에 버틸수 있는 것으로 되어있다. 그도 그럴 게, 20 mm 기관 부터는 탄약도 적중 시 폭발하는 물건을 주로 사용한다. 고작 고무 한 겹 덧댄 자동방루 탱크가 폭발물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쉽지 않다. 도리어 이걸로 막았다는 케이스가 사실이면 그 만큼 일본군의 포탄이 제 할 일을 못 했다는 소리다[103]애초에 자동방루 라는 용어 자체가 그저 자동으로 기름이 새는 걸 막는다는 의미다. 장갑판 개념이 아니다.

이유는 간단한데, 보통 7.62 ~ 7.92mm급 탄종 정도를 방어할 수 있는 조종석 뒤편 방탄판의 무게만 따져도 50~60kg 이상이었다.[104] 즉, 연료탱크 전체 특히 익내 탱크를 이런 방탄장갑으로 두른다면 수백 킬로그램 이상의 중량증가가 생기기 때문에 웬만해선 할 수가 없었다.

좀더 변론을 해 보자면, 날개에 연료탱크를 집어넣은 기체가 영전만은 아니다. 그 P-51 머스탱조차도 항속거리 증대를 위해 주익에 연료탱크를 집어넣었고, 오히려 면적만 따지면 영전의 연료탱크보다 더 넓다. 제로와는 다르게 머스탱의 기골은 튼튼한 편이었다고 하지만, 뭐가 어찌되었던 독일기들이 쏴제끼던 미넨게쇼스 같은 것에 맞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해 보면 자동방루 탱크고 뭐고 아무런 소용도 없었을 것이다. 실재로 비슷한 이유로 날개에 연료를 넣었던 P-47도 나치 독일군과의 격한 공중전에서 날개에 불이 붙는 적이 많았다.[105] 그러나 제로의 경우는 그런 기본적인 방탄설비조차 대부분의 버전에서 생략되었기 때문에 20mm나 12.7mm급은 고사하고 7.7mm급 기관총탄에조차 기본적인 생존성을 보장할 수 없다는 것이 문제다. 그리고 기체가 튼튼하고 방탄, 내탄 설비가 갖춰져 있다면, 설령 미넨게쇼스 같은 강력한 고폭탄이라도[106] '설맞으면' 버틸 수도 있겠지만, 그야말로 알루미늄 캔에 가솔린을 가득 채운 (그리고 결과적으로 유증기 방지 대책도 없는) 상태나 마찬가지였던 제로센은 고폭탄을 맞으면 연료탱크에 직격탄이 아니어도 활활 타오르는게 부지기수였다.[107]

거기에, 주날개 연료탱크 자체는 쓰기 나름이다. 2차대전기 프롭전투기들은 주연료탱크와 1회용 외부연료탱크, 그리고 주연료탱크도 각부의 연료 소비를 조정해 무게중심을 조정하거나 소비 우선순위를 정할 수 있었는데, 주날개에 저장된 연료를 먼저 소비하고 전장에 도착하면 그만인 것이다. 앞서 말한 P-51의 경우 연료사용 매뉴얼이 존재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과 달리 A6M이 단 한발만 맞아도 불이 화르륵 붙는 기체는 아니었다. A6M이 불이 잘 붙는 것은 피탄시 위험 부위가 넓으면서도 방어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것이 이유였다. 피탄 취약부위 이외에 명중할 경우 대부분 전투기들처럼 구멍이 나고, 너무 많이 구멍이 나면 양력을 잃고 추락하는 게 대부분이었다.

반면 하야부사의 경우에는 제로와 달리 주날개에까지 여러 발을 피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생환한 사례가 있다.[108]

다시 말하지만 이 모든 일이, 일본 군부나 개발사가 정말로 '몰라서', 또는 '기술력이 부족해서' 한 일이 아니다. NHK의 <다큐멘트 태평양전쟁> 제3부 <일렉트로닉스가 전장을 지배한다 - 사이판>에도 나왔듯 제로센의 부실한 방호력 문제는 설계자들로부터도 꾸준히 제기되었지만, 일본 해군의 입장은 '필요없다'였다. '날렵하게 피해서 안 맞으면 된다'는 식. 그러나 과달카날 전투를 치르면서 항공기와 숙련된 조종사의 손실이 커지자 일선에서는 방어력 보강을 강력하게 요구했다. 이에 1943년 6월 이 문제를 놓고 일본 해군과 전투기 개발자들 사이의 회의가 열렸다. 그러나 이 회의에 참석한 제로센 설계기사 소네 요시토시의 증언에 의하면, 회의를 주재하던 겐다 미노루 중좌는 '가볍고 좋은 전투기를 받았으니 감사하는 마음을 가져야한다'며, "훈련 방식을 더욱 엄격하게 하고 전투기를 더욱 가볍게 만들어야 할 방법을 논하는 자리에서 이런 무의미한 공론을 들어야한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정신무장을 더 굳건히 해야할 이 시기에 이렇게 해이해지다니, 야마토 정신으로 돌파해아 한다."며, 일선과 제작사의 의견을 묵살해버렸다고 한다.

반면에 일본 육군의 Ki-43 하야부사는 미군보다는 부족하지만 나름대로 방탄판과 방루탱크를 갖추고 있었다.# 육군은 할힌골 전투의 전훈으로 비교적 빠르게 갖췄다고는 하는데 그 전훈을 교환하지 않았다. 단순히 일개 기종의 문제가 아니라 폭격기무적론의 문제점 등 항공전략 전반의 금쪽같은 노하우도 교환하질 않았다. 일본 전사연구가의 관련 글.]

그런데, 과연 내탄능력이 제로라도 '날렵하게 피하면 된다'는 말은 당시의 공중전에서 현실적인 주장이었을까?

물론 애초 잘 피해서 조준선에 안 오르고, 안 맞는 것이 최선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겠지만, 전투라는 것이 원하는 대로만 진행될리 만무한 일이다. 게다가 제로의 문제는 2차 대전 초반의 당대 기준으로도 생존성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2차 세계대전 시기까지의 공중전은, BVR이든 WVR이든 기본적으로 'Km'거리에서 미사일 날리고 튀는 현대의 공중전과 달리 수백 미터 이내, 가까우면 수 십미터 거리에서 기관총을 퍼부으며 벌이는 난타전이었다.[109] 이를테면 P-47의 일반적인 기총 조준선 정렬 거리는 330m 정도였고 다른 미군기들도 200-300m 정도에 맞춰놓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영국공군 역시 보통 230m 정도로 맞춰놓았고 경우에 따라서는 110m에 맞춰놓기도 했다. 독일공군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참고이는 보병의 소총전 거리, 그것도 전투소총기준이 아니라 돌격소총의 교전 거리다. 이는 상황에 따라선 그 이상의 근거리에서도 교전이 벌어진라는 증거다.[110] 그런 거리에서 제로의 7.7mm 기총 2문 경우 분당 2000발, 즉 초당 30발 이상의 탄환을 퍼붓고, 미군 전투기가 장비한 AN/M2 .50cal 기총 4~6문 정도라면 분당 3000-5000발, 초당 50~80발의 총탄을 쏟아낸다.[111] 그렇다면 적기의 사선에 1~2초만 올라도 명중탄을 맞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거기에 수 십 기 이상의 전투기들이 뒤엉켜 날아다니는 상황이라면 얼마나 많은 눈먼 탄환까지 날아다니고 있겠는가.[112] 즉 제트기와 특히 미사일 이후의 공중전처럼, '먼저 보고, 먼저 쏘고, 나는 안 맞고'하는 '우아한' 전투를 항상 기대하는 것은 힘든 일이다.[113]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된 방탄 및 내탄설비가 등장 시점부터 종전 시점까지 쭉 참전국 전투기를 통틀어서도 최소 수준으로만 유지됐던 A6M을 갖고 손실이 경미할 수가 없다. A6M은 다른 전투기라면 귀환했을 손상이나 어쩌다 재수없게 맞은 탄환에 기체를 상실하는 일이 보다 빈번했고, 결국 전체 통계로 보면 이런 재수 없는 손실이 꾸준히 쌓여 무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이는 거꾸로 당시의 공중전에서, 다른 무엇보다 조종사의 능력치라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인지 입증한다.

게다가 일본군에게는 정말 유감스럽게도, 태평양 전쟁 초반 미군 파일럿들 스스로도 자기들이 거의 모든 부분에서 일본군 파일럿들에 비해 기량이 뒤쳐진다고 자인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딱 한 가지 만큼은 '우리가 더 잘한다'고 자신한 것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항공사격술"이었다.[114]

그리고 이는 앞서 '실전' 부분에 인용된 것 처럼, 결과적인 교전비로는 분명 승자인 미 해군의 와일드캣 파일럿들이 왜 그렇게 자신들이 몰던 전투기에 대해 불만을 토했는지 이해하게 해 주는 부분이다. 즉 그들이 겪은 전투는 정말 얄밉게 이리저리 빠져나가는 적기를 상대로, 여기저기 두들겨 맞는 걸 맷집으로 버티며 펼친 악전고투였기 때문이다[115]. 당연히 전투 동안 적기의 꼬리를 물고 몰아붙이는 쪽은 와일드캣을 탄 (그리고 상대적으로 미숙한) 미군 파일럿들보다는, 기동성 좋은 A6M과 거기에 탄 숙련된 일본군 파일럿들일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그 전투에서 결국 살아서 돌아간 것은 미군 조종사들이었다. 심지어 타고 나간 비행기는 거덜이나서 중간에 추락하거나, 간신히 착륙한 후라도 결국 폐기처분 되었을지언정 말이다. 그렇게 살아 돌아간 미군 조종사들은 숙련 파일럿, 에이스 파일럿이 되어 전장에 돌아가거나, 교관이 되어 후배를 양성하였다. 반면 심지어 우세한 전투를 벌이고서도, 혼전 중에 어쩌다 얻어맞은 '럭키샷' 고작 몇 발에 파이어볼이 돼버린 전투기와 함께 산화한 쪽은 일본군 파일럿들이었고 말이다.[116]

태평양 전쟁의 주요 공중전에서 일본군은 항공기 손실 비율 이상으로, 항공기 탑승원의 사상 비율에서 대부분 미군을 '앞섰다'.[117] 그 결과 일본군 몰락의 기점으로 평가되는 과달카날 전투가 아직 한창이던 산타크루즈 해전의 시점에서, 일본 해군항공대는 개전 초 진주만 공격에 참여했었던 765명의 베테랑 항공기 탑승원 중, 그 절반이 넘는 409명이 이미 전사해버리는 회복 불능의 인적손실을 입는다.

이 여파는 이후 일본 해군이 남은 여력을 다 긁어모아 감행했던 필리핀 해 해전에서 극명하게 드러났다. 방어력 제로의 전투기를 굴리며 베테랑 조종사 다수를 상실한 일본 해군항공대는 헬캣 등의 등장으로 이미 기체성능조차 절대열세로 밀리는 상황에서, 남은 조종사마저도 적기의 기습에 혼비백산 놀라 우왕좌왕하다 격추당하는 오합지졸 무리 뿐인 상태로 전락해있었다. 이 전투를 끝으로 일본해군 항공대는 사실상 완전히 몰락하고 만다. 필리핀 해 해전을 일컫는 미군측 별명이 괜히 '마리아나의 칠면조 사냥'이 아니다.

일본군도 완전 바보는 아니라 미군과 싸우면서 방루탱크와 방탄장비의 부재를 깨닫게 되었지만, 대전 중기에 들어서며 기본 설계의 한계도 있고 미국이 신형기를 개발하면서 일본 역시 제로의 개량형들을 내놓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영전은 방루탱크 장비의 우선순위에서 밀려나가게 된 탓도 있다. 결국 1943년의 52형부터는 자동소화장치가 탑재되는 등 어느정도 대응하기 위한 노력도 진행되었고, 1944년 후반 52형 '을' 부터는 45mm 두께의 조종석 방탄유리가 설치되기 시작했으며 '52형 병' 부터는 자동방루 탱크와 조종석 방탄판 등도 설치되기 시작한다. 조종석 방탄유리도 55mm로 더 늘리는 등의 조치를 취했다. 물론, 그 시기가 매우 많이 늦은 시기였고, 이미 제로라는 기체는 제아무리 가장 최고의 상태라 할 지라도 비행 성능과 물량에서 미군을 상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제로의 괴멸적인 방어력에 대한 유명한 이야기가 있는데, 미군 B-24의 승무원 중 하나가 M1911 권총으로 A6M을 격추했다고 주장한 사건이다. Owen Baggett은 1943년 3월 31일에 B-24의 승무원으로서 임무를 수행하던 중 일본군 제로의 공격으로 기체에 심각한 손상을 입었다. 제로들은 비상탈출하는 승무원들을 공격해서 두 명을 죽였고, 오웬 바게트는 M1911 권총을 뽑아들어 제로에게 발포했다. 제로는 멈추더니 아래로 떨어졌고, 바게트는 무사히 지상에 내렸지만 일본군의 포로가 되고 말았다. 일본인들은 그에게 할복을 권했지만 바게트는 거부했고, 전후에 무사히 돌아왔다. 관련기사 이 사건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그날 그 지역에 출격한 전투기는 A6M이 아니라 64전대의 Ki-43 하야부사였으며, 64전대의 기록에 따르면 인명손실은 없었다고 한다.
다만 미국측 기록에 머리에 .45구경 탄환이 박힌 조종사 시체가 언급되는것으로 보아 격추되긴 한거같다.

10.4.2. 내구도 제로

하지만, 군부가 요구한 스펙 - 특히 상승속도, 선회력, 항속거리 - 을 충족하기 위한 무리수로 행해진 과도한 경량화가 야기한 문제는 이처럼 '제로'레벨의 색즉시공 공즉시색한 방어력만이 아니었다. 그보다 더 심한 가장 큰 악영향은 바로 기체의 구조 강도를 훼손한 것이었다.

단 여기 사용된 기법들 중 하나인 골조에 구멍을 뚫는 설계 기술은 기본적인 경량화 기법에 속하며 모든 기체들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된다. 제로 킬러 헬캣조차도 설계가 진행되는 중 제로의 특성이 알려지면서 그에 대응한 중량절감 조치가 적용되었다. A6M이 문제가 된 건 이 기법을 남용했기 때문이다. 때문에 기체 강도는 더더욱 막장으로 치달았다. 닥치고 경량화에 올인한 탓에 동체도 비강도가 일반 듀랄루민보다 좀 더 높다는 이유로 초초 두랄루민(Extra Super Duralumin)을 사용, 다른 비행기에 비해 좀 더 얇은 외판을 사용했다. 하지만 안그래도 얇은데다 초초 듀랄루민은 비강도는 높지만 내식성이 형편없고[118] 높은 비강도의 반대급부로 취성이 강해서 잘 부러지는 탓에 종합적인 내구성이 튼튼한 건 아니라서 기체강도는 더 허약해졌다. 심지어 이런 기체강도의 부실로 인해 실전에서 황당한 불벼락을 뒤집어쓰는 일까지 발생한다. 실제로 P-40의 주익을 이용한 육탄공격을 받고 꼬리날개가 잘려서 격추된 사례도 있는데, 놀랍게도 상대 P-40은 무사히 귀환했다고 한다.

그러나 낮은 기체 강도가 발생시킨 문제 중 가장 심각했던 것은, 제로의 약점으로서 특히 고속 급강하 성능이 동세대 기종 중 가장 떨어지게 만든 것. 너무 가벼운 기체 중량과 허약한 기체강도가 결합되어 A6M은 태생부터 에너지 파이팅과는 무관한 전투기가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119] 이는 이미 제로의 개발 당시부터 예견되었는데, 시제기인 12시(試) 함상 전투기의 테스트 비행 중 급강하 실험에서 기체의 매스밸런스가 파손되며 공중분해되어 테스트 파일럿이 순직한다. 그 후 결점을 보강하였다는 양산형인 21형에서도 날개에 주름이 발생하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자 밸런스탭으로 인하여 플러터(공탄성 진동현상)에 취약해진 것으로 추정, 테스트를 위해 비행상황을 재현한 시모카와 대위는 기체가 공중분해 되어 죽고 말았다. 이 과정에서 주익의 강도 부실이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되었다. 그러나 대대적으로 뜯어고칠 수가 없어 밸런스탭을 제거하고, 주익의 외판의 두께를 두껍게 하고 급강하 속도를 629km/h로 제한하는 조치로 종결짓는다.[120] 결함을 고치지 못하니 대신 속도계에 빨간줄 하나 그어 놓은 셈.

영국 본토 항공전 등의 사례에서 확인되는 대로, 2차대전기의 일선급 전금속제 단엽 전투기는 대부분 740km/h 정도의 급강하는 충분히 버틸 수 있다.[121] 엔진의 연료공급 정지 등의 문제로 카탈로그상 급강하 속도는 제한되는 경우도 있지만[122] 일본기, 특히 해군기는 기체강도 문제로 740.8km/h를 넘길 수가 없었다. 호리코시 지로의 계산상으로는 A6M 11/21형 역시 900~950km을 버틸 수 있어야 했지만,[123] 속도가 250노트(약 463km/h)를 넘기면 진동(윙락현상 wingrock)이 발생했던 전작 A5M, A6M 이후 개발되었지만 제로만큼 무리한 ROC가 아니었음에도 이상 진동문제로 2년 가까이 허비했고 완성된 기체도 요격기이면서 강하 제한속도가 740km에 머물렀던 J2M 라이덴(잭), 격투전 성능의 유지와 문제가 속출하는 고출력 엔진 개발사정과 맞물려 수상기나 만들던 메이커의 급조 전투기에도 뒤처지며 양산도 되지 못한 A7M 렛푸(샘)까지, 일본 굴지의 항공기 설계자라는 호리코시가 설계한 기체들은 부족한 기초기술력과 군부의 무리한 요구 사이에서 예외없이 문제를 일으켰다.[124]

이미 이 문서 속에서도 당시의 항공전에서 '급강하 가속'의 중요성은 계속 언급되어왔다. 사실 강하가속과 줌 상승은 추중비가 1.0을 넘는 전투기가 수두룩한 지금도 공중전에서 에너지관리와 기동의 주된 요소이다. 2차 대전시기 프로펠러 항공기 사이의 공중전에선 더 말할 나위도 없다. 역시 반복이지만 '지속상승률이 좋다'와 일상적으로 '(급)강하가속 - 줌 상승'이 사용되는 전투상황의 수직기동의 우수함은 조금 다른 문제다. 전투시의 급가속이나 급상승을 원활하게 수행하기 위해선 (급)강하가속은 필수에 가까웠다. 무리한 경량화로 인한 취약한 기체강도는 '기동성'을 위해 나머지 대부분을 희생했다는 제로에게, 그 기동성마저 사실은 '수평면 기동에서의 우수함'이라는 반쪽짜리 기동성으로 만들어 주는 결과를 낳은 것이다. 물론 이 또한 '모든 문제의 원인의 원인'은, '근성으로 어떻게든 이 숫자를 채워와'라고 성능요구를 내민 일본 군부의 평면스런 인식의 결과일테지만.[125] 그런데 A6M 21형의 강하제한 속도인 630km/h 정도의 속도는, 사실은 A6M이 한참 활약하는 1942년 정도면 그 시기 미국, 영국, 독일 등의 고성능 전투기들의 수평속도에 불과하다. 한마디로 (아무래도 기체의 중량이나 사이즈 차이 등등 있으므로, 실제로 그 정도는 아니겠지만) 좀 과장해서 말하면 P-38이 (혹은 스핏파이어나 Bf109이) 수평비행하다 조종간 당겨서 올라가는 거나, 제로의 혼신의 붐앤줌이나 그게 그거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기체의 구조강도 문제의 경우 파일럿들의 지속적인 요구로 개량이 이뤄지긴 했다. 덕분에 제로의 최종생산형은 740km까지 한계속도가 올라갔고 수많은 파일럿들이 급강하 할 때마다 '나 이러다 터지지는 않겠지...'하고 겁에 떨었으나 대부분의 경우 강화된 기골은 급강하를 견뎌냈다고 한다. 다만, 그렇게 향상된 한계 속도도 전쟁 후반의 헬캣이나 콜세어는 커녕 초반의 와일드캣(F4F-4만 해도 급강하 속도가 772km/h다.)보다도 느린 강하 한계속도에 그친 어정쩡할 뿐인 개선에 불과했다. 나아가 이 정도 개선된 제로 후기형이 활동하던 시점이면, 역시 이번에도 미국이나 영국, 독일의 고성능기들은 수평비행으로도 제로의 급강하 제한속도 만큼의 속도를 낼 수 있었다.

10.5. 무장의 효율성

화력은 주익의 20mm 기관포 2정과 기수의 7.7mm 기관총 2정으로 동시대 스핏파이어나 Bf109와 비교해도 결코 나쁜 조합은 아니다. Bf109와 스핏파이어 모두 20mm 기관포 1~2문과 기관총 2정을 조합해서 사용하기도 했고 저 둘은 2차 대전시에 가장 뛰어난 전투기중 하나로 평가되는 기종들이다. 문제가 되는 부분은 제로의 경우 기관포를 쏠수록 약한 주익이 기관포의 반동을 제대로 받아내지 못해 주익이 떨려 탄도가 계속 변한다는 것이다. 이 기관포는 스위스 욀리콘 사가 만든 FF기관포의 라이센스 제품으로 동일한 제품을 독일 공군도 사용하고 있었으나,[126] 독일 공군은 탄도가 주익의 낮은 강도 때문에 계속 변한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사카이 사부로의 자서전에 따르면 해당 기관포는 포구초속마저 형편없이 느렸다고 한다.[127] 사카이는 심지어 99식 기관포의 쳐지는 탄도를 '마치 소변줄기 같다'고 악평하기도. 실제로 동시기의 유럽의 스핏파이어나 Bf109전투기의 기포보다 포구초속이 느리며, 한때 이 욀리콘 기관포를 사용했던 독일 공군은 저위력에 초구속도가 낮다고 불평하여 마우저 MG 151 20mm 기관포로 교체할 정도였다. 게다가 같은 욀리콘 20mm 기관포 중에서도 초기형 제로에 사용된 99식 1호 기총의 사용탄은 20×72mm탄으로 독일의 20×80mm탄에 비해 장약이 적은 편이였다.

그렇지만 20mm에 대해서는 어느정도 반론도 있는데, 사카이와 달리 아카마츠 사다아키 같은 다른 에이스들은 "이거 없이 구라망 어떻게 잡아요?"하고 선호하는 파일럿들도 있었고 정작 20mm를 악평한 사카이도 20mm로 꽤 전과를 올렸다. 물론 7.7mm 정도로 헬캣이나 콜세어는 물론이고, 와일드캣도 버거웠던 걸 생각하면, 좋던 싫던 쓸 수밖에 없던 게 사실일 것이다.
99식 기총과 그 '플랫폼'인 제로의 최악의 조합의 결과로 빚어진 무장효율 저하의 또다른 문제점 하나는, '가진 화력을 전부 사용할 수 없다'는 것이다.

미군은 대전 후반, 심지어 한국전쟁 때의 F-80이나 F-86같은 제트전투기까지도 12.7mm 6정 or 20mm 4문[128]을 표준 무장으로 고수했다. 이유는 당연히 같은 구경, 같은 탄도특성을 지닌 화기로 통일하는 쪽이 조준과 사격에 확실히 편하며, 언제나 가진 화기 전부를 사용할 수 있어 교전시 데드웨이트가 발생하지 않기 때문이다.[129]

이미 2차 대전 전반부터 .303구경이나 7.92mm 기총은 물론이고, 13mm급 기관총도 좀 부족하다는 게, 영국공군이나 독일공군의 판단이었고, 때문에 약간의 불편함을 감수하고라도 20mm급 이상의 무장을 혼용하는 쪽을 택했다. 하지만, 그들이 주력으로 사용한 MG 151이나 HS.404 기관포는 탄속이 비교적 높아, 필요하다면 억지로라도 기총과 함께 사용할 수 있었다.[130] 물론 미군의 무장방식이 크게 문제된 일이 없었던 것은, 2차 대전 당시 미군은 영국 공군이나 독일 공군과 달리 폭격기 요격에는 별로 신경 쓸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굳이 미군이 열심히 요격해야 했던 '쌍발 이상 체급의 폭격기'라고 해봐야 G4M인데... 미군이 20mm급 화기에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미국도 2차 대전시기에도 HS.404 20mm기관포를 라이센스 생산해 P-38등에 사용하기도 했다. 하지만 어째선지 미국제 HS.404는 영국제에 비해 잦은 잼 현상을 일으키는 등 신뢰성이 낮아 별로 선호되지 않았다. 결국 미군은 대충 그런대로의 펀치력에 탄도와 연사속도도 괜찮고, 무엇보다 신뢰성 높은 브라우닝 M2 12.7mm 기관총을 4~6정 이상 설치하는 것으로 떼웠다.[131] 그리고 이런 무장방식은 2차 대전 동안은 그럭저럭 먹혔다. 사실 미군도 주 임무를 폭격기 요격으로 상정했던 P-38이나 P-39에는 HS.404 20mm기관포는 물론이고(P-38) 무려 37mm, M4 기관포를 달기도 했다(P-39). 연합군의 중폭격기를 상대하던 독일군은 대전투기 전투에는 당연히 마이너스가 될 걸 알면서도, MK 108 기관포 같은 것도 어쩔 수 없이 사용했다.[132] 하지만 최소한 이쪽은 그냥 기관총과 함께 전투기를 상대로 써도 무방한 기관포거나 (HS.404), 아니면 최소한 위력만큼은 확실해서 어쩌다라도 일단 맞기만 하면 한방으로 보내 버릴 물건이었다.(M4, MK108) P-39의 M4 기관포 역시, 탄속은 600m/s로 느긋하고, 발사속도도 분당 150발 정도밖에 안 됐지만, 이 확실한 한방의 위력 덕분에 소련공군은 미국에서 공여받은 P-39를 중,저고도 전투가 주가 되던 독소전쟁 당시의 공중전에서 나름 잘 써먹었다.

하지만 '위력은 HS.404 이하인데, 탄속은 M4나 MK 108'인 99식 기총 같은 게 붙어있게 되면, 모든 것이 복잡해지기 시작한다.
기총만 쓰거나, 기관포만 쓰거나 하지 않고서는 약간만 거리가 떨어져도 조준 자체를 할 수가 없어진다. 이를테면 99식 기관포로 표적을 맞추려면 '적기의 기체 한 대 위 정도를 겨냥해야 맞는다'고 말해지는데, 그렇다면 기총을 함께 발사해봐야 전부 적기 머리 위로 흘러갈테니.

제로의 7.7mm기총과 20mm기관포의 탄도를 비교한 그림, 정확한 실제 비율인지는 불명[133]

즉, 제로의 무장은 사실은 '20mm 기관포 2문과 7.7mm 기관총 2정'이 아니라 실제 전투시에는 '20mm 기관포 2문과 7.7mm 기총 2정 중 택 1' 이었던 셈이다. 그동안 남은 화기와 탄약은 그저 잉여중량 일 뿐. 독일공군이야 매일 수백대 씩 날아오는 B-17과 B-24를 상대해야 했으니 대전투기 전투에는 비효율적인 MK 108 같은 거라도 달고 나가야 했겠지만, A6M은 지상기지의 방공전투기가 아니라 태평양 상공의 제공권을 책임져야 할 해군의 함상전투기였다.[134] 나쁜 탄도와 느린 발사속도에 그렇다고 어쩌다 맞아도 한방으로 보낼 만큼 위력적이지도 않은데다, 그나마 대부분의 제로 초,중기 형은 1문당 60발 씩의 20mm탄 밖에 탑재하지 못했다. 이 또한 대 전투기 전투에선 결국 7.7mm만 대 전투기 전투의 주요 화력이나 마찬가지가 되어 버리는 상황을 초래하는 데 적잖이 기여했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기 중 7.7mm 몇 발 맞고 뚝뚝 떨어져 줄 기종은 거의 없었다.

이런 화력 구성의 문제 때문에 제로 파일럿들은 공중전에서 일단 7.7mm 기총으로 시작했다. 기총으로 얼마라도 피해를 입히며 또한 거리를 가늠해보고 명중탄이 날만큼 좁혀졌다고 여겨지면 20mm 기관포를 발사하는 식. 하지만 7.7mm 기총은 와일드캣 등 맷집 좋은 미군 전투기에 큰 효과를 못 낼 뿐 아니라, 미군 조종사가 A6M이 공격해 오는 것을 미처 알아채지 못하고 있던 경우에도 7.7mm탄이 방탄판을 두들기는 후드득거리는 소리를 '경보'삼아 급강하+우측롤로 빠져나가 버리며 제로의 '일격'이 좌절되는 일도 종종 발생했다. 그야말로 '도어노커'.

게다가 다른 문제로는 전반의 주력이던 A6M 21형의 경우 기수형상 때문에 조종사가 전방시야를 충분히 확보하려면 기수를 약간 숙여야 했다. 그러나 사격을 위해서는 탄도를 확보하기 위해 반대로 기수를 약간 올려야 한다. 문제는 기수를 숙인 상태에서 적기를 포착한 파일럿이 이제 적기에게 사격을 가하려 기수를 들면 잠시 적기를 시야에서 놓치게 된다는 것. 그런데 공중전에서는 당연히 적기의 이동을 계산해서 적기의 예상위치를 향해 '편차사격'을 해야 한다. 지금처럼 레이더로 조준기가 자동으로 편차를 계산해주는 시절도 아니므로 당연히 사격을 하면서 예광탄의 궤적을 보고 편차를 수정해서 명중탄을 얻게 된다. 그런데 조종사가 잠깐이나마 표적을 시야에서 놓치며 초탄사격을 하게 되는 탓에 첫 발사에서 명중탄까지의 시간간격이 길어진다. 당연히 상대 조종사는 미처 예측 못한 기습을 받은 경우에도 자기 옆으로 지나가는 예광탄을 보고 공격을 받고 있다는 걸 알아채고 대응할 기회가 늘어난다. 또한 이는 제로 조종사에게 표적에 더 많은 신경을 쓰게 만들어 사각에서 튀어나오는 적기의 공격에 더 취약하게 만들었다. 게다가 더 심각한 것은 시야의 문제로 '약간 하방에서 가해지는 헤드온 공격'에 제대로 대응 못하게 만든다. 그런데 '사각에서 튀어나온 적기에게 정면 혹은 약간 하방에서 헤드온 공격을 당하는' 이 상황이 바로 전형적인 '타치위브'에 걸렸을 때의 상황이다. 물론 지미 태치가 이 전술을 만들 때는 와일드캣을 타고 실험해 보았으니 제로의 시야문제 까지는 몰랐겠지만. 참고로 일반적으로 공중전에서 헤드온은 선호되지 않던 공격코스이다. 하지만 태평양 전쟁 당시 미군조종사들은 우세한 맷집과 화력을 바탕으로 종종 헤드온 공격을 통해 이익을 얻었다. 비효율적인 화력구성에 시야 문제가 있는 A6M이나 화력 자체가 시덥잖은 Ki-43에 둘 다 맷집은 극도로 허약했으니 헤드온이라고 무서울 게 없다는 것.

일순간의 집중된 화력으로 적기를 격추할 확률이 낮아진다면, 애써 달성한 기체 퍼포먼스의 우위를 전투의 승리로 이어내는 '변환효율' 또한 낮아질 수밖에 없다. 풋워크는 현란하지만, 유리 몸에다가 양손(7.7mm 또는 20mm)을 동시에 쓰지못하는 외팔이이면서 펀치력은 결국 잽이 전부인 물 주먹의 복서 같은 처지가 된 것. 승리할 방법은 수준이 한참 떨어지는 상대가 헛방만 내지르다 제풀에 지쳐 쓰러지는 것 밖에는 없는. 이후 기체들에 비해 방어력 자체도 한 수 아래였고, 무엇보다 느긋하게 20mm를 맞추거나 아니면 7.7mm라도 떨어질 때까지 계속 퍼붜 줄 수 있을 만큼 압도적으로 저성능의 F2A 버팔로나,[135] A6M이 떠 있는 곳까지 제대로 올라오지도 못하고 빌빌거려 맷집이고 화력이고 아무 쓸모 없는 잉여가 된 P-40이나 P-39 정도까지가 A6M이 마음 놓고 실제 교환비로 털 수 있던 기체였던 것. 하지만 선회력이나 상승력 등 비행성능은 좀 딸려도, 어쨌든 '같은 고도에서 엇비슷한 속도로 날아다니며 같이 쏘아대는 것' 까지는 되는 와일드캣만 되어도 A6M은 현란한 비행술을 뽐내며 신은 냈는지 모르지만, 결국 떨군 적기보다 떨어진 기체가 많은, 실제 교전 결과에선 밀리는 사태가 벌어진다. 여기에는 우세한 기회에 화력을 집중해 적기를 빠르게 해치우는데 곤란한 저효율의 화력구성도 만만찮은 기여를 한 것이 분명하다. 그리고 '일격'에 빠르게 적기를 격추하지 못해서, 빠르게 '이탈'하지 못하고 오래 적기의 꼬리를 물고 있어야 한다면, 도리어 스스로를 위험에 빠뜨릴 수 있는 요인이 된다. '사각에서 튀어나온 적기에게 공격을 당한다'던가... 이것은 바로 아래 무전기 문제와 직접적으로 붙어 있는 문제이기도 하다.

단점이 많았던 99식 1호 기총은 1943년부터 욀리콘 FFL 기관포의 라이센스 제품인 99식 2호 기총으로 대체된다. 99식 2호 기총은 20x101mm탄을 사용해 탄속이 기존의 600m/s에서 750m/s의 쓸만한 수준으로 증가했고 급탄 방식도 탄창에서 벨트 급탄식으로 바뀌었다. 대신 발사속도는 520발/분에서 480발/분으로 떨어졌다. 그러나 99식 2호 기총이 처음으로 탑재된 A6M3-22형이 최초 배치된 것은 1942년 12월. 태평양 전쟁의 분수령이 된 과달카날 전투의 주요 항공전은 이미 거의 끝난 시점. 게다가 그 2개월 후 부터는 미 해군엔 헬캣이 본격 투입되기 시작한다. A6M이 와일드캣 등 그나마 그럭저럭 상대해 볼만한 적기와 싸우던 시기 내내 제로의 주익에 달려있던 건, '99식 1호 기총'이었다. 물론 썩어도 20mm는 20mm라서 아예 쓸모가 없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동시기의 20mm 기관포들과 비교하면 성능이 떨어지는 물건이었다는 건 사실이다.

그 와중에 A6M 52형 '을' 부터, 화력이 부족한 7.7mm 97식 기관총을 13.2mm 3식 기관총으로 교체하는 개량이 이뤄진다. 그런데 기존 7.7mm 2정 모두를 교체한 것이 아니라 오른쪽 카울링의 한 정만 바꿨다. 화력은 조금 강화되었겠지만, 이제 제로 파일럿 들은 무려 각기 구경이 다른 3 종류의 화기의 탄도를 신경써야 하게 되었다. 52형 '병'에 가서야 남은 7.7mm 1정을 마저 교체하며 이 복잡한 사태는 마무리된다.

그런데, 해군의 A6M이 이렇게 효율 낮은 화력으로 고민하는 동안, 일본 육군은 다름아니라 미국의 "브라우닝 M2 기관총"의 카피버전인 12.7mm Ho-103 기관총을 이미 Ki-43 하야부사에 사용하고 있었다.물론 그 시각 일본 육군은 또 육군대로 Ki-43에 7.7mm 기총 '1정'과 12.7mm 기총 역시 '1정'으로 소소하게 무장시켜,[136] 늘 화력부족에 시달리게 만드는 삽질을 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오스카의 화력부족은 내내 지적되었지만 개량은 12.7mm 기총 2정 탑재선에서 끝. 그래도 실제로 맘편히 쓸만한 무장은 7.7mm 기총 2정이나 마찬가지가 된 제로보다는 조금 나았을지도 모른다. 그런데 일본군이 사용한 '브라우닝 M2'의 카피판 중기관총은 Ho-103만이 아니었다. 육군에 12.7mm Ho-103이 있었다면, 해군엔 '13.2mm, 3식 기관총'이 있었다. 그렇다, A6M 52형 '을' 부터 탑재된 바로 그 기관총이다. 즉 같은 '브라우닝 M2'을 육군과 해군이 각기 따로 베낀 것이다. 이 역시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낳은 삽질이다.

또한, 기수에서 7.7mm가 나가고 주익에서 20mm가 발사되는 이상한 구조로 이루어져 있어,[137] 저질스런 탄속과 더불어 전혀 맞지 않는 무게중심과 함께 A6M이 전쟁 후반부 고화력, 대구경 무장을 적용시킨 전투기와의 헤드온 전투에서 저강도의 선체와 더불어 맥 없이 격추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시기 쯤이면, 제로의 적 전투기에 대한 성능 우위는 저속선회 말고는 없었고 무장의 개선 정도로 전황을 바꿀 수는 없었다.

10.6. 수납성 제로

앞서 언급했듯 아직 와일드캣 같은 전투기가 미군의 주력기이던 시절의 A6M과 미 해군기의 전투결과는 '교전 상황에서 더 숫자가 많은 쪽이 이기는' 비교적 평이한 성적표였다. 그런데 대체로 과달카날 전투 시기까지도 태평양 전역 전체에 배치된 항모와 함재기의 총 수는 일본군이 더 많았다. 하지만 실제 개개의 전투에선 당장 머리 위에 얼마나 많은 기체를 띄울 수 있느냐가 관건이 된다. 함재기가 교전상황에서 수적 우세를 가지려면, 중요한 건 "수납성". 즉 각각의 항모에 더 많이 실을 수 있어야 한다. 때문에 와일드캣 초기형인 F4F-3는 주익을 접을 수 없었지만 F4F-4에선 앞서 언급되었듯 비행성능의 다소의 희생을 감수하면서까지 주익을 컴팩트하게 접어 항모 한 척당 배치숫자를 늘렸다.[138] 이론상 2배, 현실적으로는 50%까지 증가했다.[139] 반면 A6M은 함재 전투기인데도 날개를 접을 수 없었다. 아니, 사실대로 말하면 접을 수 있기는 한데 날개 끝부분만 아주 살짝 접힌다.

파일:external/upload.wikimedia.org/F4F-4_SOC_VGS-1_CVE-1_Jun1942.jpg
제로의 라이벌인 F4F 와일드캣은 날개를 다 접을 수 있다.

파일:attachment/img_4359.jpg
그러나 A6M은 이게 날개를 다 접은 것이다.[140]

당시 일본군 함재기들이 모두 날개를 접을 수 없었던 것도 아니고 이를테면 전쟁 초기부터 활동하던 97식 함상공격기만 해도 잘만 날개를 접을 수 있었다.# 잠수함용 함재기에 이르면 주익을 접는 방식은 미군 함재기와 다를 것이 없다. 이렇게 된 이유는 주익에 반동이 강한 기관포와 대용량의 연료 탱크를 탑재, 날개를 접는 기구 등을 설치할 여유가 없었고, 날개 접히는 부분이 추가되면 더 큰 강도가 필요하여 비행기가 더 무거워지기 때문에 생략한 것.[141]

하지만 제로의 극초기형인 A6M 11형은 날개의 길이 때문에 항모 탑재가 불가능해져 A6M 21형은 함내 엘리베이터에 걸리는 부분만을 최소한도만 접을 수 있게 한 것이다. 그나마 A6M 32형, A6M 52형 등의 후기형에서는 주익의 폭이 1m 줄어들었기 때문에 날개접기 구조가 완벽히 생략되었다.

그리고 NHK의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32형의 경우 이 개량 덕분에 비행성능이 더 떨어졌다고 한다. 이 접히는 부분을 위한 공정이 복잡하고 시간을 많이 잡아먹었기 때문에 생산 속도를 늘리기 위해 해군의 결정으로 접히는 부분을 없애고 날개를 짧게하는 설계를 했는데, 공기저항을 줄이기 위해 둥글게 한 날개 끝을 없애면서 새 날개끝은 각진 상태로 남겨둔 채 생산되었다. 엔진이 커져서 연료탱크 크기가 줄고 더 큰 엔진이라 연료도 더 잡아먹으니 당연히 항속거리가 감소한데다 날개까지 말썽. 이 때문에 과달카날 전에서 이 신형 A6M은 라바울에서 항속거리 문제로 작전에서 제외되었다. 결함기라는 보고가 있었음에도 과달카날 포기 후 항공본부장의 사직 외에는 해군대신이 과도하게 책임을 묻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면서 문제해결은 안하고 대충 넘어갔다.[142]

미군 항모들이 이미 미드웨이 해전 때 부터 전투기만 따져 전쟁발발 시점의 1.5배씩 꾹꾹 눌러담고 다닌 것에 비해 일본 항공모함들은 계속 비슷한 숫자의 함재기만을 싣고 다녔다. 대전 후반으로 가면 (이미 F6F 헬캣 같은 미국의 신형기들이 설치고 다니던 상황이지만) 전투기 숫자를 늘리긴 하지만 그건 미군 처럼 함재기 숫자 전체가 늘어나면서가 아니라 폭격기나 뇌격기 등을 그만큼 빼고 실은 것. (그렇다고 A6M이 미군의 대전 후반기 전투기들처럼 웬만한 소형 폭격기를 뺨칠 폭장량을 지닌 것도 아니었다.[143])

당시 일본군 항공모함들을 보면 격납고 바닥에 비행기 모양으로 그려진 도형을 볼 수 있는데 그게 날개가 접히지 않는 제로 때문에 함재기를 그나마 더 많이 탑재하기 위해 그려놓은 주기선이다.

10.7. 문제점이 속출하는 개량과정

명기(名機)로 칭송받는 기종들은 단순히 등장 당시에만 뛰어난 성능을 지닌 것만이 아니라 상황의 변화와 기술의 발전에 맞춰 성능과 장비에 개량을 더하여 최일선에서 사용될 수 있는 성능을 계속해서 유지하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기동성[144]을 장기로 삼아 설계된 제로의 경우 Bf109나 스핏파이어와는 달리 고출력 엔진으로 업그레이드될 여지가 거의 없었다. 극단적인 경량화를 포기하거나 방탄설비의 증설, 외판의 강화 등으로 생존성이나 급강하성능까지는 어떻게 확보할 수 있어도 저익면하중 경량기라는 특성상 대출력 엔진은 얹을 공간도 부족했지만 무리해서 올린다 해도 기골이 그것을 버티지 못한 것.

호리코시 지로[145]나 사카이 사부로는 자신들의 저서에서 후기형 제로에 대해 무거워지기만 하고 그나마 있던 21형의 장점마저 까먹은 개악이라고 평했지만, 반면 일선에서의 평가는 정 반대로, 선회성능과 항속거리에 목숨거느라 전투기로서 기본적인 부분조차 결여된 21형은 32형이 등장하자마자 단숨에 구식화, 52형 이후로는 신형기를 달라는 요청이 빗발쳤으며 생산 난맥으로 44년까지 생산이 계속된 21형에 대해서는 일선 부대에서 수령을 거부하는 상황까지 생겨났다.

실제로 베테랑 파일럿들의 피로 얻어진 전훈이 어느 정도 반영된 52형 병쯤 되면 1000마력대 엔진을 단 대전 초반 티어 전투기로서는 준수한 성능이라고 할 수 있지만 같은 시기 다른 열강은 이미 1500마력은 가볍게 넘기고 일부는 2000마력의 출력을 가진 엔진을 단 전투기가 하늘을 덮고 있었던 것.

그야 미국의 와일드캣도 그냥 2000마력으로 업그레이드하는 것은 불가능해 헬캣이 나왔으니 제로만의 문제는 아니겠지만 앞서 저출력 엔진 항목에서 지적한 대로 고출력 엔진의 양산 운용능력이 없다시피한[146] 당시 일본의 상황에서 전투기의 세대교체는 불가능에 가까웠다. 그리고 일본군은 세대교체도 업그레이드도 되지 못한 A6M과 육군의 Ki-43 정도밖에 믿을 만한 전투기가 없었고, 함재기가 필요하니 계속 생산은 하되 이를 대체할 차기 전투기로 렛푸나 시덴을 개발하고 나서 생산라인을 교체하려 했으나, 렛푸의 경우 해군 수뇌부가 기동성을 중시할것을 요구하는 바람에 개발이 지연되었고 결국 끝까지 양산되지 못했고 시덴은 물건 자체는 쓸만했지만 숫자도 부족하고 품질도 엉망이었다.

2차대전이 후반으로 치달으면서 성능이 우세한 라이덴과 시덴이 뒤늦게 개발되어 소수나마 양산이 되긴 했지만, 이미 고착화된 제로의 생산라인[147]을 곧바로 신규 기체를 대량양산할수 있도록 바꾸는건 불가능했고, 결국 "당장 전투기 한대가 급급한 시기에 급격한 생산설비 교체는 전황에 악영향을 줄테고, 엔진 방면에서 제로에 사용되던 사카에 엔진의 생산량을 줄여 호마레, 킨세이 등의 다른 강력한 엔진을 증산하고, 제로엔 그걸 탑재시켜 기존 기체들을 대체해 나가자" 라고 초점이 맞춰졌다.

10.8. 생산성 제로

아쿠탄섬에서 노획된 A6M을 검사하던 미군 관계자들은 제로에 대해 '마치 시계처럼 정교하게 만들어졌다'고 평했다. 그러나 이 말은 그저 좋은 이야기만은 아니다. 이미 위에서도 언급되었듯 A6M은 기체 외판을 모두 플러시 리벳으로 결합했다. 그러나 플러시 리벳은 일반 리벳에 비해 작업시간이 길어지는 탓에, 타국 전투기들은 공기역학적으로 크게 문제가 되는 부분에만 플러시 리벳을 사용했다. 이를 비롯 생산과정에서 요구된 지나치게 높은 정교함들은 전시상태에서 빠르게 다량의 전투기를 생산해야 하는 것에서 불리하게 작용한다. 알다시피 2차 대전 동안 주요 참전국 대부분은 수 만대의 전투기와 폭격기를 생산했고 또 그만큼을 소모했다. 나아가 숙련된 기술자까지 마구잡이로 총알받이로 징집해 버린 일본의 경우처럼 극단적인 사례가 아니라해도 2차 대전시기 당시까지 산업에 별로 투입되지 않던 여성들을 비롯한 비숙련 노동자들이 생산에 대거 투입되는 것 또한 모든 주요 참전국에 공통적인 현상이었다. 한편으로는 많은 남성 노동력이 병력으로 빠져나가는, 반면 병기 생산라인은 급속도로 증대하므로. 여기서 체계화된 라인만 갖춰진다면 비숙련공들에 의해서도 제대로 생산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은 중요한 문제이다. 특히 후기에 가서는 기체의 경량화를 위해 뼈대 중 하중이 크게 걸리지 않는 부분에 구멍을 뚫는 방안을 생각해 냈는데, 이 작업은 숙련된 기술자가 일일이 수작업으로 해야 했고 이런 생산 방식으로는 생산 물량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제로센 99가지의 비밀 26[148]

그 결과 전시체제가 한창이던 1944년 당시 제로 한 대를 제작하는데 10,000인시(人時, Man-hour)가 투입되어야 했다. (그 이후에는 자원공급이 끊기고 나아가 산업시설을 폭격당하며 생산성은 더 떨어진다.) 그에 비해 같은 시기 P-47 썬더볼트 한 대를 생산하는데는 9,100 인시. 쌍발기인 P-38 라이트닝조차도 9,600 인시면 생산할 수 있었다. 쌍발에 심지어 중형폭격기인 B-25도 10,700인시면 생산할 수 있었다. 나아가 설계단계 부터 생산성을 더욱 배려했던 P-51 머스탱의 경우 미국의 전시생산체제가 한층 효율화된 1944년말-1945년 초의 시점엔 무려 2700인시면 한 대씩이 생산될 수 있었다. 정확한 자료는 없지만 제로의 주적이 된 미 해군 전투기들도 이에 못지 않았을 것이다.[149] 그루먼 철공소의 헬캣만 보더라도 스핏파이어같은 유려한 형상보다는 매우 투박하고 단순한 형상을 가짐으로써 생산효율성을 추구한 모습이 확연하게 드러나기 때문이다.

일본이 A6M이 함상기로 운용되기 위한 항공모함을 다 잃고 속태우고 있을 때 미국은 호위항공모함이긴 해도 주간항모라고 불릴 정도로 항모를 찍어내고 있었다. 물론 제로의 낮은 생산성은 당시 일본의 산업능력이 지닌 한계이기도 했지만 제로 자체의 제작상의 까탈스러움 역시 한몫 한 것은 틀림없다. 무엇보다 A6M은 다른 일본기들에 비해서도 생산효율이 낮았다. 일례로 일본군 전투기 중 개발과정부터 생산성 또한 고려했던 대표적인 기종인 Ki-84 하야테는 한 대당 4,000인시 정도면 생산할 수 있었다.

11. 결론

설계 자체는 “아시아의 기적”이라는 말이 대변하듯, 당대 일본의 기술력으로 나올 수 없다고까지 평가되는 우수한 기체였다. 그리고 제로센은 분명 1942년 5월까지 일본의 승전을 이끌었다.

특히 함재전투기로써의 성능을 확실히 뛰어넘는 함재전투기는 헬캣, 콜세어, 베어캣, 시파이어 후기형을 제외하곤 없었는데, 그중에서도 헬캣을 제외하고는 강력한 토크등 문제점으로 항공모함에서의 사용에 어려움을 겪었고, 베어캣과 시파이어 후기형은 종전 직전에나 등장했다. 괜히 사카이 사부로가 콜세어가 등장했을 때가 아닌 헬캣이 등장했을 때 좌절한 것이아니다.

제로에 대한 과도한 비판 자체의 삼분의 일 정도는 제로가 함재기라는 특수성을 간과했기에 있는 것이라고도 볼 수 있다. 함재기의 특성상 항공모함에서 이륙해야 하고 육상기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중량도 가벼워야 한다. 거기에 해수로부터의 부식으로부터도 버틸 정도의 내구성도 요구될 수도 있다.[150] 착륙할 곳도 마땅치 않은 바다의 특성상 항속거리 자체도 길어야 하는 등등 기술적 제약이 애초에 육상기보다 훨씬 높다. 제로센이 가지는 의의는 일본으로 하여금 어떤 의미로는 2차대전에서 미국과 더불어서 육상기와 성능을 비교할 수 있는 제대로 된 함재기를 개발해낸 사실상 유이한 나라[151]로 만들었다는 데 있다. 그만큼 함재기라는 것의 기술적 장벽은 육상기보다 높다. 심지어 제로보다 성능이 앞서는 F4U 콜세어조차도 초반에는 항공모함 운용이 어려웠고 그냥 육상기로 써먹었고 함재기로서는 실격품이었다고 볼 수 있다는 걸 감안하면 더더욱 그러하다.[152]

그러나 숙련된 파일럿들을 소모하며 싸우는 일해군의 전술과 더불어 미해군이 헬캣을 양산하기 시작하면서 평가가 떨어지기 시작했고, 전쟁후반 제해권을 잃어버린 일본군이 요격기로 사용하면서 함재전투기보다 평균성능이 높은 육군기를 상대로 평가가 더욱 하락했다.

설계단계에서는 정신력 만능주의에 도취된 일본 군부의 비현실적이고 불필요한 요구가 성능을 상당히 깎아먹었으며, 뒤떨어진 엔진 기술력만큼은 극복하지 못해, 저출력 엔진 문제도 발목을 잡았다.[153] 결국 제로센의 평가가 떨어진 이유는 상대가 미국이고 사용자가 일본이기 때문이라고 결론내릴 수 있다.

이처럼 일본 군부의 삽질을 그대로 담고 있는데다가 한계 또한 명확한 기체임에도 불구하고, 어쨌거나 42년 5월까지 미국 전투기들을 압도해가며 일본의 승전을 이끌었던 기체였기에 매우 높은 인기를 누리고 있다.

12.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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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모형화

A6M은 인기 프롭기답게 굉장히 많은 제조사에서 모형화했다. 인기나 인지도 면에서 다른 모든 일본기를 압도하는 기체답게 모형화 횟수 역시 압도적이다. 일본 제조사는 물론이고 한국과 중국을 포함한 전 세계의 제조사들이 A6M을 모형화했다. 이를 확실히 능가하는 프롭기라면 P-51 정도밖에 없다. 아래에서 보이듯 아카데미과학에서 출시한 적이 있다.[154]전쟁 말기의 개량형인 A6M5-C형 모델로, 설명문이 애매하게 쓰여져 있는데 52형 병은 44년 하반기에 등장했으므로 진주만 공습에는 참가할 수 없다. '진주만 공습과 카미카제로 유명한 제로 전투기의 후기 중무장형 버전' 이라는 의미가 되겠다. 링크
  • 1/24 스케일
  • 1/28 스케일
  • 도유샤
  • 1/32 스케일
  • 마루산
  • 하세가와
    인기 기체답게 금형을 여러 번 팠는데, 최신 금형의 경우 조립 난이도만큼은 타미야보다도 우위이다. 간편하게 만들기에는 좋은 킷이다. 디테일도 타미야에겐 안 되지만 나름 좋은 편이다.
  • LS
  • 도유샤
  • 타미야 모형
    모든 스케일의 A6M을 통틀어 결정판이라고 할 수 있는 제품이다. 이후 나온 같은 시리즈들에도 품질 면에서 전혀 밀리지 않는다. 수많은 기믹에 뛰어난 디테일[155]과 좋은 구성, 세심한 사용자 배려까지 만들어 보면 타미야가 자국 유명 기체라고 힘 주고 만들었다는 것이 느껴진다. 랜딩기어를 포함해 웬만한 부분은 전부 가동된다. 캐노피는 개폐 선택식이지만 단순히 얹어 놓는 것만으로도 고정이 되기 때문에 굳이 접착할 필요는 없다. 국적을 막론하고 한 번쯤은 만들어보면 좋은 킷이다.
    A6M5가 먼저 출시되었고 일부 부품을 추가하여 사운드 버전과 클리어 버전이 출시되었다. 그리고 A6M5를 기반으로 하여 A6M2가 출시되었고 A6M5도 구성을 업그레이드하여 재출시되었다.
  • 1/35 스케일
  • 니치모
  • 1/45 스케일
  • 린드버그
  • 1/48 스케일
  • 니치모
  • 하세가와
    에어로 명가 하세가와답게 바리에이션이 매우 다양하고 품질 역시 준수하다.
  • 테스터스
  • 토미텍
  • 아카데미과학
    A6M2b 21형 모델이다. 새로운 금형으로 2022년 말에 출시되었으며, 미드웨이 해전 80주년을 기념하여 발매했다고 표시되어 있다. 5개 버전 중 하나의 도장을 선택하여 데칼을 붙일 수 있고, 리벳 자리를 상당히 정밀하게 구현한데다 작은 피규어까지 들어있다. 정가가 2만 5천원밖에 하지 않아 반응이 좋은 편이다.
  • 1/50 스케일
  • 니치모
  • 마루산
  • 1/70 스케일
  • 니치모
  • 1/72 스케일
  • LS
  • 테스터스
  • 아카데미과학
    A6M5c 52형 모델이다. 뛰어난 가성비로 본고장 일본에서도 상당한 인기를 끌었다고 한다. 개당 5~6천 원 안팎의 가격으로, 국내에서 가장 저렴하게 구할 수 있는 제로센 키트 중 하나다. 다만, 출시된 지 꽤 오래된 터라 구하기 어려워질 수도 있다.
  • 도유샤
  • F-Toys
    특이사항으로는 타미야 1/32 킷처럼 랜딩기어가 가동된다.
  • 플라츠
    F-Toys 제품의 재포장판이다.
  • 1/100 스케일
  • 도유샤
  • 니치모
  • 마루산
  • 1/144 스케일
  • 크라운
  • SWEET
    SWEET의 주력 제품이라 그런지 바리에이션이 매우 다양하다.
  • F-Toys
    동사의 1/72 스케일 제품이 그랬듯이 품질이 꽤 좋다.
  • 플라츠
    1/72 스케일 제품이 그랬듯이 F-Toys 제품의 재포장판이다.
  • 1/250 스케일
  • 1/300 스케일
  • 니치모
  • 1/350 스케일
  • 피트로드
  • 1/700 스케일
  • 타미야 모형
    항공모함 전용 액세서리로, 다른 기체들과의 합본 팩이다.
  • 피트로드
  • 카지카
    플라이호크의 일본 함선 전용 브랜드이다. 플라이호크답게 작은 크기에도 뛰어난 디테일을 보여준다.
  • 논 스케일
  • 하세가와
    하세가와의 그 유명한 계란비행기 시리즈이다.
  • 아동과학
    하세가와의 계란비행기를 카피해 발매하였다.

14. 기타

  • 2016년 5월 3일에 중일전쟁부터 진주만 공습미드웨이 해전, 과달카날 전투 등을 거친 마지막 제로 에이스인 하라다 카나메가 사망하였다. 생전 인터뷰. 노년에도 가끔 전쟁에 대한 악몽에 시달린다고 하며, 전쟁영웅이란 호전적 이미지와는 거리가 먼, "추락하면서 적기 조종사는 날 다시 원망하는 눈으로 바라봅니다.", "모두가 마지막 순간 '오카상(어머니)'을 외치더군요. 그런 전쟁을 또 하려 합니까.", "일본은 전쟁에 패하고 평화를 얻었어요." 등의 인터뷰가 인상적이다.
  • 2016년 1월 27일에 일본인으로써 유일하게 현존하는 제로 오너인 이시즈카 마사히데가 처음으로 시험비행을 실시했다. '전쟁 이후 최초의 일본인에 의한 제로 비행'으로 주목을 받았으며, 전국의 항공덕후들이 비행장면을 보기 위해서 몰려들었다. 이시즈카는 "A6M을 전쟁의 상징이 아닌 일본의 기술력의 상징으로 만들고 싶다."라고 밝혔으나 일본 국내에서조차 정작 전쟁을 경험한 세대들은 "전쟁찬미로 이어질 수 있다"며 불쾌감을 표하고 있다.
  • 일본 주력 전투기인 미쓰비시 F-2는 제로와, 원본 기체인 바이퍼의 이름을 합쳐 바이퍼 제로라고 명명되었다.
  • 제로센 냄비(ゼロ戦鍋)라는 물건이 있다. 태평양 전쟁 패망 직후, A6M을 만들던 미쓰비시社에서 A6M을 만드는데 쓸 예정이었던 두랄루민 금속으로 냄비를 만든 것. GHQ에서 배급으로 나누어준 밀가루를 써서 빵을 굽는데 많이 쓰였다고 한다. 오키나와에서는 오키나와 전투로 가재도구를 모조리 잃어버린 주민들이 여기저기 나뒹굴고 있던 전투기 잔해를 뜯어가서 냄비, 솥, 주전자 등으로 재활용하여 요긴하게 사용했다.[156]
  • 실제 기체를 복원하여 일본 전국 곳곳에 전시한다. 그 예가 야스쿠니 신사유취관, 도쿄 우에노공원 내에 있는 일본 국립과학박물관과 히로시마구레 시에 있는 "구레시 해사역사과학관"(呉市海事歴史科学館. 애칭 : 야마토 뮤지엄(大和ミュージアム))의 로비형식의 1층 전시장 등이다.
  • 전후엔 아시아 각지에 남은 잔존 기체들이 해당영토의 국가들에게 흡수되었으며 프랑스군은 인도차이나에서 플로트가 달린 제로인 A6M2-N을 운용하였다. 꽤나 마음에 들었는지 일본군 정비공에게 정비 노하우를 배우면서까지 운용하였으나 부품 수급등의 문제로 본토에서 보낸 헬다이버베어캣으로 교체되며 퇴역하였다.

15. 참고 문헌

16. 둘러보기

제2차 세계 대전의 미군 항공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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쌍발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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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트기/혼성동력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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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격기
공격기/급강하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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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형 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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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폭격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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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질랜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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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푸아뉴기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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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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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집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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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비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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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로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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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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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티오피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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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부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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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말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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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다가스카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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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모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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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아프리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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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정작 일본 항공기술의 결정체라고 부를 물건은 따로 있다.[2] '십일형'이 아니라 '일일형'이라고 읽어야 한다. 각각 기체 버전과 엔진 버전이므로 별개다.[3] A6M2-N 2식 수상전투기다.[4] 이 제로 공포증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해낸 '타치 위브'라는 기동을 고안해낸 와일드캣 에이스인 지미 타치 대령은 자신이 올린 보고서에서 "제로 전투기는 외계인이 만든 것이 아니었다. 우리와 같은 인간들이 만든 전투기였다."고 보고했을 정도이다.[5] 이 문서는 '제로센'과 '제로 파이터' 로도 접근 가능하다. 1942년에 개정된 해군기의 명명규칙이 적용되기 이전 기체 중에 유일무이하게 별명이 붙어있는 기체이다.[6] 워낙 많이 날아다니던 기체인 데다 애칭이 제로센이라 막상 일선의 미군들도 제로라고 불렀던 경우가 많으며 현재도 그렇게 통용된다.[7] 쇼와 15년, 황기 2600년[8] 같은 시기 육군은 같은 해 채용된 병기에 100식이라고 이름지었다.[9] 비슷한 사례로 당시 미군은 독일군의 전차들을 잘 구별하지 못해서 3호 전차, 4호 전차, 5호 전차 판터, 마르더 등 독일군의 다른 전차나 장갑차를 파괴하고도 그냥 제일 유명했던 6호 전차 티거를 잡았다고 기록하는 일이 왕왕 있었다. 티거를 잡았다고 실적 올리기를 하려는 게 아니라 진짜 자기가 잡은 게 티거인 줄 알고 보고를 올린 것이었다. 실제로 당시 일부 미군들은 특정 독일군 기갑차량을 판저 탱크(Panzer tank)라고 불렀는데, 독일어로 판처(영어식으로 읽으면 판저)는 전차라는 뜻이므로 실제로는 '전차 전차' 라는 겹말이 된다. 그러니까 독일어에서 전차 그 자체를 의미하는 명사를 독일군들이 전차를 보고 판처라고 말하는 걸 주워듣고 이 전차의 기종명 내지는 이런 유형의 전차를 독일에서 판저라고 하는갑다 하고 부른 것이다. 또 당시 소련군도 미군보다야 나았지만 독일군 기갑차량 구별을 잘했던 건 아니라서 1944년 9월 소련의 제21근위전차여단 소속 전차병들이 티거 2와 교전했을 당시 통신기록을 보면 포수가 티거처럼 생겼는데 티거는 아니라며 5호 전차 판터일지도 모른다고 하자 전차장이 난 저 짐승(티거 2)의 이름이 궁금한 게 아니라며 그냥 쏴버리라고 하는 기록이 있다.[10] 개발한 건 미쓰비시가 맞지만 정작 이 기종을 (파생형을 포함해서) 가장 많이 생산한 건 나카지마였다.[11] 중일전쟁에서 상대한 2선급 전투기들보다는 빠르지만, 동시기의 세계 1선급인 Bf109나 스핏파이어보다는 느리다. 미국의 함재기인 버팔로나 와일드캣과는 대등한 수준.[12] 해당 속도를 넘어서면 구조적으로 안전을 보장할 수 없으며, 조종이 불가능해지거나 공중에서 분해될 수 있다. A6M은 내구성이 약해서 당시의 타국 전투기들에 비하여 이 속도가 매우 낮은 편이었다. 애초에 이 형식의 시험기인 12시(試) 전투기가 공중분해 사고를 낸 탓에 양산 모델인 21형에 제한 속도가 붙은 것이다.[13] 어차피 이 속도까지 끌어올릴 시기 정도 되면 미 해군&해병대는 이미 F4F 와일드캣을 호위항공모함 용으로 내려버리고 700km/h 초중반대의 F6F 헬캣과 700km/h 후반대, 수틀리면 비공식이긴 해도 800km/h 대도 찍는 F4U 콜세어를 주력으로 삼고 있을 시점이다.(이는 급강하 속도가 아니라 일반 강하 속도다. 급강하시 헬캣과 콜세어는 900km/h대의 속도를 가진다.) 심지어 F6F 헬캣의 직전 함재기인 F4F 와일드캣의 경우 기체 강도를 믿고 급강하 속도 제한이란 걸 걸어놓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리고 이 속도 역시 '최고 속도가 아닌 최대 제한 속도'라는 것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그나마 이것도 보강을 거쳐 좀 나아진 것이고 52형의 초기생산분은 21형과 별 차이도 없는 667Km/h 정도. 그나마 좀 나아진 740Km도 애초에 이 버전의 기체가 나올 시점에 미 해군이 호위항공모함용으로 운용하던 F4F 와일드캣의 호위항공모함용 함재기 버전인 FM-1/2조차 급강하 기준 770km/h대다. 이에 대해서는 당시 일본 군부의 구세대적인 전투교리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견해도 있다. 당장 이 기체의 직계 후속기로 만들어진 A7M 렛푸도 구시대적인 격투전을 위한 저익면 하중을 지나치게 강조한 탓에 343 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을 지낸 시가 요시오가 테스트 파일럿으로 참여하고 나서 렛푸의 성능에 대해 이따위 물건을 만들려는 놈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며 악평을 넘어 혹평을 퍼부었을 정도다.[14] 일본해군은 20 mm까지를 '기총'으로 표기했다.[15] 폭전(6X형)및 54형은 250/500Kg 폭탄 탑재 가능.[16] 한화로 3억 5천만 원가량 된다.[17] 엔진 등 구동부와 연료계통, 골조가 변경되었으므로 내부설계에는 독자성이 있다.[18]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만화영화 '바람이 분다'의 그 호리코시 지로가 맞다.[19] 기본 설계가 시작된 1937년이 쇼와 12년이었기 때문에, '쇼와 12년 시제작 발령' 이라는 의미에서 12시 함상전투기라고 불렸다.[20] 참고로 96식 함전의 전비중량이 1.7톤 수준이고, 1,200마력에 직경 122cm짜리 R-1830 엔진을 사용한 F4F-4의 전비중량이 3.6톤이다.[21] 당장 엔진부터가 사카에의 초기 불량 문제로 더 저출력인 즈이세이를 달고 있다. 애초에 양산형 자체가 프로토타입에서 발견된 문제점을 수정해 성능을 개선시킨 형태다. 당연한 얘기지만 현실과 창작물은 다르다.[22] 해군 항공대 사양만 이렇게 날개가 접힌다. 이유는 후술.[23] 정격용량은 21형과 동일했지만, 21형은 과적시 60리터 정도를 더 집어넣을 수 있었다.[24] 원래는 'Hap'이라고 불렀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미 육군항공대 사령관 헨리 아놀드의 별명도 'Hap'이었다. 이를 불쾌하게 생각한 육군항공대 수뇌부의 반발로 'Hamp'라고 바뀌었다.[25] 위에서도 무전기의 중요성은 여러 번 언급됐지만 또 다시 무전기의 중요성을 강조하면 편대전이 되거나 대규모 난투전이 됐을 때 아군끼리의 연계가 되는가, 안 되는가다. 간단히 전투상황의 파악을 위해서도 동료기측에서 무전으로 전투 정보를 알려주느냐, 그렇지 않고 조종사가 정보를 직접 알아내야 하는가의 문제인 것이다. 전장의 상황 정보는 시시각각 변화하므로 동료기나 본대로부터 변하는 정보를 주고받으면서 상황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되기에 무전기는 매우 중요하다.[26] 카미카제용이기도 했으므로, 실제로 5X형과 6X형의 차이는 폭장능력 뿐이다.[27] 무장이 주익으로 옮겨졌기 때문에 집탄율은 낮아졌을 것이다.[28] 다만 상승률은 13.42m/s로 하락하였다.[29] 심지어 지상기지에서는 미드웨이 해전까지도 버팔로를 몰고 출격해야 했던 해병대 조종사들이 있었다.[30] 고공성능에 기반이 되는 과급기를 NACA가 빼버렸기 때문.[31] 물론 이 역시 사실은 두 기체가 맞붙던 1941-1943 기준으로 쳐도 '2부 리그' 전투기들의 도토리 키재기에 해당했다. 일례로 유럽전장의 Bf109Fw190같은 독일전투기들의 급강하 속도는 마하 0.75(918km/h)까지 이르렀고 그에 못미쳐서 유럽전선에선 잉여 취급을 받던 P-38의 급강하 속도는 마하 0.68(833km/h). 하지만 유럽전장에선 잉여스럽게 여겨진 라이트닝이 태평양 전선에선 '미 육군항공대 소속 전투기들 중 가장 많은 숫자의 일본기를 격추한 기종'으로 악명을 떨쳤다. P-47 정도가 되면 제한 속도가 마하 0.8, 즉 960km/h에 이른다.[32] 전쟁 초기 1942년 미군의 분석에선 제로의 선회성능 약화가 시속 300마일, 즉 480km/h 부터 발생한다고 판단되었으나 1944년 10월 미 해군이 노획된 A6M5-52를 테스트 해 본 결과 대략 시속 180마일 이상 부터 에일러론이 급격히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것으로 밝혀졌다.(Division of Naval Intelligence, 1944, p. 1.) #[33] NACA Report No.868 미해군의 제로에 대한 분석에서도 제로에 대응한 전술개발에서 반드시 참고할 사항으로 '고속에서의 제로의 느린 롤-레이트'를 언급한다. F4F 와일드캣으로 제로를 상대할 때엔 '급강하에서의 우위'나 '고속에서의 롤 성능의 우위에서' 또는 '둘을 결합'하여 이득을 얻을 것을 권고하고 있다. #[34] 일본의 202항공대와 영국군 제1전투항공단의 교차검증을 보면, 8번의 전투에서 영국은 26기의 항공기를 손실, 일본은 5기의 항공기를 손실했다.[35] 참고로 싱가포르 전투 당시, 급하게 북아프리카로부터 차출되어 파견된 호커 허리케인들도 이 보크스 필터를 붙인 채 (게다가 폭격기 요격을 위해 기총을 12정으로 증설, 여러모로 뚱뚱해진 상태로) 전투에 투입되어 역시 피를 보았다고 한다. 반면 자바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은 보크스 필터를 제거하고, 기총도 8정으로 다시 줄인 허리케인을 사용, Ki-43 하야부사를 상대로 선회전 맞짱을 뜰 수 있었다고. 그래봐야 12기 밖에 되지 않아 전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했겠지만.#[36] 그나마 1비행전대장인 클리브 칼드웰 대령은 28기의 격추를 기록한 에이스이기는 했다.[37] 이는 영국 및 동맹국 파일럿들이 독일공군을 상대로 강하성능에서 소폭 우세가 있던 Bf109에 비해 선회율에서 소폭 우세한 스핏파이어의 특징을 살려 곧잘 선회전으로 대응하던 버릇을 말한다. 그러나 스핏파이어의 선회성능 우세는 어디까지나 Bf109와 비교할 때 그렇다는 것이고, A6M은 그 몰락했다는 대전 말에도 선회전 성능만은 일류였다. 셰놀트는 태평양에서는 유럽과 반대로 스핏파이어가 고속 일격이탈 전술을 썼어야 했는데 습관적으로 선회전을 시도한 과오를 지적한 것이다.[38] 물론 유럽전역에서는 이미 기본전술로 사용되고 있었던 전술이었으나, 당시까지도 마땅히 2차 세계대전 수준의 '현대적인 공중전'에 대한 경험이 없던 미국으로선 괄목할만한 성과였다.[39] 플라잉 타이거즈는 A6M과 교전했다는 보고를 올린 적이 있는데, 이는 결과적으로 잘못된 말이다. 당시 플라잉 타이거즈가 배치된 지역에는 일본 육군 항공대만 있었기 때문에 해군 소속인 제로와 교전했을 리는 없다. 당시 일본군이 이 지역에 배치해두었던 전투기는 P-40B보다도 훨씬 구식 전투기인 Ki-27 네이트로 랜딩 기어도 고정형이고 일본군의 2~3선급 전투기였기 때문에 P-40B에게 속수무책으로 당했다. 이후 일본군은 더 고성능인 Ki-43 하야부사를 이 지역에 배치하지만, 이때 즈음이면 플라잉 타이거즈의 조종사들도 매우 숙련된 상황이라서 Ki-43을 상대로도 호락호락하지 않고 거의 대등한 전투를 펼쳤다. 재밌는 사실은 하야부사와 조우한 플라잉 타이거즈의 조종사들은 이 신형기(?)의 외형과 특성을 보고 오스카가 아닌 제로와 교전했다고 보고했다는 것.[40] 이 전술이 잘 먹히는 이유는 단순하다. 전방의 목표를 주시하는 동안, 시야가 고착될 수밖에 없다는 문제와 더불어 (이를 막으려면 다른 방향의 위험요소에 대해선 동료가 경고해 줘야 하는데 제로의 통신 성능은 좋지 못했다.) 아무리 상대에 비해 우수한 기체를 타고 있어도, 상대의 꼬리를 물고 조준선에 넣으려면 '상대를 따라서' 날아야 한다는 것. 더 빠른 전투기도 더 느린 상대만큼 날아야 하고, 더 날렵한 전투기로도 더 둔한 상대만큼 밖에 날 수 없다. 부분적으로는 제로보다 더 고성능 기체를 몰고 선회전을 벌이다 망신을 당한 미숙한 연합군 파일럿들의 오류와도 맞닿아 있는 부분이다. 즉 A6M은 와일드캣보다 민첩하지만 와일드캣의 꼬리를 물고 있는 경우는 와일드캣만큼만 날 수 있다. 물론 어디서든 강조되지만 이런 전술을 쓰려면 '맷집과 통신기'가 받쳐 주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이 부분은 독일공군 등이 일찌감치부터 '닥치고 붐앤줌'을 외친 이유와도 연관된다. 즉 꼬리를 물고 쫒아다니는 쪽보다는 순식간에 돌입해 말 그대로 적기를 순삭하고 역시 순식간에 이탈하는 쪽이 애써 달성한 성능의 우세를 풀로 발휘하는 데 좀 더 낫다는 것.) 이 상황에서 급강하 폭격대까지 끼어들면 어떻게 될 지는 미드웨이 해전 문서에서 '운명의 5분' 항목을 볼 것.[41] 과달카날 전투에서 활약한 미 해병대 + 미 육군 항공대의 혼성 부대 캑터스 항공대는 저공성능이 좋은 육군의 P-39 에어라코브라나 P-40 워호크가 미끼 역할을 하고, 일본기가 미끼를 물면 고공에서 대기하던 해병대의 와일드캣이 붐앤줌으로 공격하는 낚시성 전술로 괴롭히기도 했다. 무전기가 있어도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던 제로인지라 이런 식의 유기적인 협동전술은 불가능했다.[42] 참고로 싱가포르 전투 당시, 급하게 북아프리카로부터 차출되어 파견된 호커 허리케인들도 이 보크스 필터를 붙인 채 (게다가 폭격기 요격을 위해 기총을 12정으로 증설, 여러모로 뚱뚱해진 상태로) 전투에 투입되어 역시 피를 보았다고 한다. 반면 자바전투에서 네덜란드군은 보크스 필터를 제거하고 기총도 8정으로 다시 줄인 허리케인을 사용, Ki-43 하야부사를 상대로 선회전 싸움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래봐야 12기 밖에 되지 않아 전세에 영향을 주지는 못 했겠지만 말이다. (링크)[43] 물론 상승력은 꽤 열세고, 수평비행 속도로도 다소 뒤처지는 와일드캣 정도가 아니라, P-38 라이트닝처럼 아예 수평속도와 상승력조차 제로보다 한참 빠른 상대라면, 언제 어떻게 전투를 벌일 지에 대한 주도권은 거의 완전하게 상대에게 넘어갈 수밖에 없고, 심지어 전투를 회피하고 빠져나가는 것조차 쉽지 않아진다. 뿐만 아니라 고속 기동 한번 했다가 기체가 산산조각날 수도 있기에 제로 조종사들 입장에서 연합군 기체가 이런 기동을 하면 당할 수 밖에 없다.[44] Edward Young, "F4F Wildcat vs A6M Zero-sen: Pacific Theater 1942[45] 그리고 제로의 경우, 고속에서 선회능력만 급감하는 게 아니라 급강하 문제도 있는데, 만든 재료부터 취성이 너무 강하다 보니 기체 강도가 종이비행기 수준이라 고속에서 급강하 기동을 할 경우 기체가 산산조각난다.[46] 이것이 생각보다 많이 중요한 이유는, 란체스터 법칙에 의하여 국지적인 지역에서의 수적 우세는 파일럿 개개인의 역량 차이 이상으로 승패에 굉장한 영향을 끼치기 때문이다.[47] 지속 상승뿐만 아니라 급강하로 속도를 얻은 이후의 줌상승(Boom and Zoom Climb)까지 모두 포함하는 종합적인 의미다.[48] 다수 대 다수가 아닌 1:1인 이유는 무전기 문제가 원인이다. 제로의 경우 대규모로 맞붙어도 무전기가 사실상 없다시피 하기에 동료기와의 연계가 안되는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흔히 제로의 맞수로 불리는 F4F 와일드캣의 경우 제로을 상대하기 위해 통상 두 대 편대로 비행을 하는 걸 원칙으로 하는 타치 위브 전술을 1942년 6월의 미드웨이 해전 이후부터 정식으로 도입해서 쓰는데 와일드캣이 이게 되는 이유는 무전기가 제대로 갖춰져 있었기 때문이다.[49] 애초에 제2차 세계대전 초기만 해도 미국이 갖고 있던 정책은 먼로 독트린에 의거, 상대가 나를 때리지 않으면 방관한다는 이른바 고립주의 정책이었다.[50] 심지어 영국이 이미 일찌감치 1930년대 후반부터 레이더의 가치를 인식하고 레이더망과 효율적인 방공관제 체계에 투자하여 영국본토항공전을 승리로 이끌었던 것과 반대로, 멀쩡한 레이더는 갖다 놓고도 결국은 레이더 활용 경험의 미숙으로 앉아서 두들겨맞은 것이 바로 진주만 공습이 아니었던가. 그래도 진주만 공습의 경우 미군을 옹호할 거리가 있는 것이, 일본 해군 연합함대가 대미선전포고도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로 공습을 한 것이니, 얘기가 다르다.[51] 물론 그들이 타고 나간 폭격기가 튼튼하고 잘 무장된 B-17이어서 그나마라도 살아 돌아온 것이기는 하다. 만일 그게 G4M같은 기체였다면 B-24가 불이 잘 붙는다는 이야기도 어디까지나 20mm 미넨게쇼스탄이나 나중엔 30mm 기관포를 쏘아대던 독일공군을 상대로 한 이야기다.[52] 심지어 경험치로는 비교할 바 없이 높던 일본군 파일럿의 개별적 능력치조차, 미군의 조직적 전술 운용의 우위로 상쇄되었다.[53] 붐앤줌 전술은 일정 고도까지 올라가 아래쪽에 있는 적기를 겨냥해 급강하를 하고, 적기가 여기에 걸려들지 않을 시, 그대로 다시 올라가 다음 기회를 노린다. 물론, 적기들도 속도가 빠르다면 그야말로 공중전이 벌어진다. 물론, 이 공중전은 1차대전 기체들이나 제로의 특기인 저속 선회전이 아니고 고속(적어도 4-500 mph 이상 속도가 유지되는) 이렇게 되면 먼저 속도를 잃거나 기체 특성상 기동이 느려지는 측이 패배하게 된다. 제로처럼 느리다면 적기를 따라갈 수가 없으므로 제자리에서 빙빙 돌다 적기가 도망가는 걸 보고 있을 수 밖에 없게 된다. 이걸 초 에이스 파일럿이자, '라바울의 마왕' 이와모토 테츠조 마냥 속도조절을 염두에 두기라도 하면 다행이지, 억지로 쫓아가다가는 그냥 '날다가 산산조각'나기 십상이다.[54] 2,000마력급의 고출력 엔진 자체는 1941년 무렵에는 어느 정도 개발이 되어 있었고 이 엔진을 사용하는 항공기도 1943년 3월에는 배치되기 시작하기는 했다. 그러나 제로의 경우 기체강도를 보강하지 않고는 해당 엔진을 사용할 수 없다는 문제가 있었다.[55] 이는 조종사 교육이 잘못된 것도 한 몫 할 것이다. 현재 공격 목표가 잇는데 괜히 옆에 지나가는 적기를 공격했다가 귀환지점을 상실하고 한 대도 귀환 못 한 일본군 전투비행대 일화도 있다.[56] 비행슈팅으로 욕먹는 IL-2 1946에 유저 모드를 설치하면 좀 더 자세히 구현된 비행특성을 체험해볼 수 있는데, 같은 미군 기체로 독일군 전투기들과 전투하는 상황과 A6M과 전투하는 상황이 판이하게 다르다. 그야말로 고급 AI가 모는 Bf109G-10을 따라가려면 P-51B/D도 전력을 다해 엔진이 과열될 정도로 기동해야 하지만(기총 사격에 속도가 살짝 손실되는 것 마저 아까울 정도로 빠른 속도에서 공중전이 전개된다.) A6M은 P-51보다 느린 헬켓으로도 일격일탈(성패 관계 없이)후 상승해 버리면 A6M은 지가 알아서 되돌아가거나 동료한테 죽어나간다. 그야말로 골라먹기, Turkey shoot 이다.[57] 더 심각한 사실 하나 추가하면 이 교환비가 필리핀 해 해전 전 기간의 교환비도 아니라 단 하루 공중전에서의 교환비라는 거다. 필리핀 해 해전 문서 참고[58] 사실은 카미카제 초창기 숙련된 베테랑들이 A6M을 쓰는 바람에 그리고 일본군기 중 유명하다는 것 때문에 그렇게 알려졌을 뿐이며 정말 많이 쓰인 것은 99식 함폭/97식 함공 같은 구식 공격기나 항공모함이 없어 쓸데도 없는 공랭엔진형 스이세이(정비소요가 큰 수랭엔진형은 당시 일본 사정으로는 카미카제로 쓰기에도 애로사항이 꽃폈다)나 텐잔이었다. 대전 말기가 되면 그것만도 못한 각종 잡다한 연습기 따위를 동원했고, A6M은 얼마 안 남은 베테랑들이 타고 초보들의 특공기를 호위하는 선도기로 주로 쓰였다. 애초에 태생이 경량전투기이므로 폭장용으로는 카미카제를 하든 안 하든 99함폭보다도 비효율적이었다. 애초에 그런 허약한 기체들로 급강하폭격 기동을 하다가는 충돌하기 이전에 급강하 하다가 공중분해되기 십상이니. 그리고 A6M이 카미카제에 비효율적인 이유는 폭장도 폭장이지만 카미카제를 하려면 급강하 수준으로 비행기를 내리꽂아야하는데 A6M은 시속 600km 이상의 속도를 내면 수평으로 돌아가려고 한다. 그러니 급강하를 한다 한들 일저 속도이상으로 가버리면 결국 수평으로 돌아가서 적들한테 선체의 배 부분을 보이게 돼버리니 카미카제 성공확률은 더욱 낮아질 수 밖에 없다. 그러나 전투기를 아예 특공기로 쓰지 않은 것은 아니다. 영원의 제로에서 주인공의 특공기는 A6M 21형이었다.[59] 헬캣이 개발되기 시작한 것은 와일드캣이 해군항공대의 주력전투기로 채택된지 얼마 되지 않은 193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60] 사실 후계기의 개발은 엔진 자체의 문제보다는 수뇌부의 잘못된 이해와 공업능력 부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에 가깝다. 일본도 1943년 무렵에는 2000마력급의 출력을 가지는 엔진을 장착한 Ki-84 하야테(프랭크)같은 기종이 배치되기 시작한 단계였으나, 하야테는 본격적으로 생산된 물건들이 잦은 엔진 고장으로 인해 쓸 것이 못되던 상황이었고, 제로의 후계기 A7M 렛푸(샘)는 수뇌부가 익면하중을 낮춰서 격투전 성능을 올려야 한다는 시대착오적인 요구를 밀어붙인 탓에 개발이 지연되었고 그 성능조차 딱히 우수하다고 볼 수 없는 물건이 되어버렸기 때문.[61] 다만 육상전투는 공중전과 달리 다른 여러 병과(거기에는 공중지원도 들어간다)가 섞인 전장이 되는 만큼 직접적인 비유는 힘들다. 제아무리 T-34가 숫적 우세가 불가능해도 포격지원, 보병지원, 공격/방어 지형 등 상황에 따라 상당히 경우의 수가 달라진다. 도리어 공중전은 기체와 파일럿 기량이 좌우하는 부분이 더 크다.[62] P-47은 수퍼차저와 터보차저를 모두 사용해 고공 성능이 막강했다.[63] 당장 당시의 중국 전선이나 동남아 전선의 경우 육군이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걸 감안하면, 해군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이것 때문에 해군이 저지른 게 진주만 공습이다.)[64] P-47이 쑥재배에 유명하지만 본디 개발 목적은 고고도 요격기 혹은 엄호기였다. 즉, A6M과 마찬가지로 공중전 능력을 주력으로 쓰기 위해 디자인했다.[65] 이게 농담이 아니다. F6F 헬캣은 A6M을 상대로 일격일탈을 받아주든 선회전을 하든 상성적으로 무조건 천적에 가까웠다.[66] 왜인지 하면, 그루먼에 넣은 주문은 소위 계급을 단, 막 항공대로 배치를 받은 신참 파일럿이라도 성능을 뽑아줄 수 있을 만큼을 요구했고, 보우트에는 숙련자 파일럿들의 요구를 받아서 고고도 고속전투에 최적화한 기체를 개발할 것을 주문했기 때문이다.[67] 영국은 페어리 풀머와 후속기 페어리 파이어플라이 따위의, 잘못된 설계사상을 기반으로 개발된 전투기들을 주력으로 굴렸다가, 미국에서 F4F 와일드캣, F4U 콜세어같은 기체를 받아써야만 했다. 영국도 나름대로 호커 시허리케인/슈퍼마린 시파이어를 개발하는 등, 만회하려고 노력했으나 쓸만하다고 할만한 물건은 대전 말-종전 후에나 굴러나왔다.[68] A7M 렛푸 등의 후속기가 개발되긴 했지만 어떤 면에서는 A6M보다 못한 평가를 받기도 했고 무엇보다 도입된 시기도 전쟁이 거의 끝나가는 시기였다.[69] 공교롭게도 와일드캣과 제로의 마력차이는 A6M과 96함전의 마력차이와 큰 차이가 나지 않는다. 격투전이 강하다고 해봐야 고마력에서 나오는 속력 및 수직기동력을 당해낼 수 없는 것, A6M은 엔진마력은 낮으면서 와일드캣보다 속력과 상승력은 우세했지만 이는 잘 알려진 대로 방탄설비와 등가교환한 결과물이며 급강하성능은 열세하다.[70] 원래 개발 당시의 목적은 항속거리보다는 함대 상공에서 장시간 체공하면서 항공엄호를 제공하는 것이었다. 원래 함대방공 전투기는 이런 목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과도한 요구는 결과적으로 성능 밸런스를 해치는 결과가 되었다.[71] 참고로 레이더의 지향성을 획기적으로 향상시킨 야기-우다 안테나는 일본인이 1926년에 개발하여 영국과 미국이 독일 공군과 일본 해군을 털어먹는데 신나게 써먹었지만 일본 군부는 무관심했다. 여기참조 그리고는 야기 교수를 매국노라고 욕했다. 이 안테나의 실제 개발자인 우다 신타로는 말할 것도 없다. 참고로 우다 신타로의 경우는 일본 정부가 그가 죽기 1년 전에서야 문화훈장을 줬는데, 이거 받은 우다는 뭐라도 씹은 듯한 기분 나쁜 표정으로 인터뷰에서도 이런 의미의 말을 했다고 한다. '나라를 위해 기껏 좋은 걸 만들었더니, 그건 무시하더니, 이제 내가 죽을 때가 다 되자 훈장이나 주니, 이게 무슨 홀대냐?'[72] 필로폰이라고도 부르며 일본식으로 발음하면 히로뽕이 된다.[73] 독일은 '페르피틴'이라는 상호를 사용하였고, 프랑스 전역 당시 사단 군수참모가 직접 수만 정을 관리하며 72시간동안 무휴식 진격한 일화는 유명하다.[74] 실제로 공군의 항공생리훈련을 하게 되면 무려 9G에 달하는 중력가속도 훈련, 저압실 훈련 등을 경험하는데, 배변 실수를 해버리는 경우도 생긴다.[75] USAAF INFOMATIONAL INTELLIGENCE SUMMARY NO. 85 및 MC-442-WF-3-24-42-50M AFAMC-5 INTER-OFFICE MEMORANDUM 에서 가져옴.[76] 이 문서이 문서에서 가져옴.[77] 게다가 분사추력 자체를 직접 측정할 수 있는 제트엔진과 달리, 프로펠러기라면, 엔진의 출력이 같아도 프로펠러의 효율 등에 의해 실제 작용하는 '추진력'은 달라질 수 있다.[78] 그럼에도 프롭기가 출력대중량비를 따져야 하는 이유는 같은 엔진이라도 장착되는 프로펠러에 따라 서로 다른 추력이 나와서 정확한 추중비 비교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79] P-38의 상승률은 스핏파이어 후기형과 더불어 2차 세계대전 전투기 중 탑클래스. 그러나 태평양 전선에선 깡패였던 데 비해, 유럽전선에선 Bf109와 Fw190에게 수모를 당했다. 상승률에선 더 떨어지고, 수평속도는 엇비슷한 독일기들에게 패배한 중요한 이유의 하나는 급강하 속도의 부족. 재밌게도 P-38은 이 문제를 타개하고자 선회성능의 우위를 활용, 선회전을 걸었다고. 덩치는 크지만 생각보다 고속에서의 선회력이 우서했기 때문이다. 이런 전술을 바탕으로 8공군 소속 P38은 독일군 상대로 2:1의 우월한 교환비를 찍었다.[80] 특히 F4F 와일드캣은 그루먼 철공소제 아니랄까봐 기체 강도를 믿고 급강하 속도 제한이라는 것을 걸어놓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을 정도.[81] 물론 문맥 상으로 따져보면 에너지로 비교하는 것은 당연히 절대적인 에너지 양을 뜻할 리가 없다. 그것보다는 전투 상황에서 더 높은 고도를 가짐으로, 위치에너지를 운동에너지로 얼마나 더 전환할 수 있느냐를 의미할 것이다. 또한, 전투 도중에 하는 각종 기동으로 손실되는 운동에너지와, 엔진의 힘으로 얻는 운동에너지의 합이 클수록, 해당 기체는 상대하는 기체보다 구사할 수 있는 기동이 다양해질 것이고 이는 지속 전투력의 비교우위로 이어진다. 공기저항은 공기와 마주보는 면적에만 비례하므로 제로센과 미군기가 크게 차이난다 볼 수 없지만, 질량과 엔진 출력은 굉장히 차이가 난다. 따라서 무게가 더 무거운 미군기와 제로센이 붐앤줌 전술을 똑같이 구사한다고 가정하면, 기동 과정에서 공기저항으로 손실되는 에너지의 절대값은 차이가 크지 않지만, 전체 에너지가 질량으로 인해 차이가 많이 나므로, 비율상 제로센의 손실 에너지 비율이 더 커져 불리하게 된다. 1000과 500에서 똑같이 100을 빼면, 1000에서는 10% 손실이고, 500에서는 20% 손실임을 생각하면 된다. 다만 제트 전투기 시대로 넘어가게 되면, 엔진의 추력이 프롭 전투기의 그것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강해지고, 그에 따라 전투기도 체급이 커지면서 공기저항이 전체 에너지에서 까먹는 비율이 굉장히 작아지게 된다. 위의 서술에서 프롭기와 달리 제트 전투기는 추중비와 지속 상승률이 거의 비례한다는 것은 이 이유 때문이다.[82] USAAF INFOMATIONAL INTELLIGENCE SUMMARY NO. 85 에서 가져옴.[83] USAAF INFOMATIONAL INTELLIGENCE SUMMARY NO. 85 에서 가져옴.[84] # 에서 가져옴.[85] #에서 가져옴.[86] # 에서 가져옴.[87] 그러나 고속선회능력은 F6F와 F4U가 더 우수했다. 그리고 항공전술이 발전되면서 저속선회의 중요성은 낮아졌다. 게다가 연합군항공기들은 지속적인 개량과 최고속도 700km/h대 중후반, 수틀리면 800km/h대도 심심찮게 찍어대는 신예기들의 배치로 인해 저속으로 판정하는 속도범위도 크게 올라간다. 그뿐 아니라 저속선회전에만 맞춘 전투기다 보니, 붐앤줌에는 맞지 않다. 이건 당장 독일의 루프트바페가 닥치고 붐앤줌을 외친 것과 명백히 대조되고 기체강도 이전에 Bf109나 스핏파이어처럼 수랭식 엔진을 갖춘 것도, P-47처럼 터보슈퍼차저를 갖춘 것도 아닌 평범한 기계식 과급기밖에 없는 공랭엔진으로는 고고도 전투나 폭격기 요격을 한다는 것은 무리였다. 고공으로 올라가봐야 과급도 제대로 안 되니 결국 뚝하고 떨어지기 십상. 실제로 당대 B-29의 탑승원들 증언 중에 이런 증언이 많다.[88] 예시된 지원/보급/개발이라는 이 세 조건은 어찌보면 전투력보다도 더 중요한 승패를 결정짓는 가장 중요한 요소이기도 하다. 당장 일본의 역사에도 이웃 나라를 침략했다가 해전의 신에 의해 지원과 보급이 끊겨 목표달성을 실패하고 패퇴한 사례가 있다. 소모성 무기와 자원이 압도적으로 많아진 현대전으로 올수록 지원과 보급의 중요성은 더 커진다. 군함이든 전투기든 연료가 있어야 이동하고 총탄이 있어야 이것들을 쏘며 싸울 수 있는것 아니겠는가? 튼튼한 지원과 보급이 뒷받침되어야 그 연료나 총탄과 같은 소모품들을 전장에서 사용할 수 있는 것이니.. 애초에 일본의 전략 자체가 단기결전으로 미국을 휴전 테이블로 끌어 들이는 것이었지만, 겁에 질리게 만들기는커녕 무기대여법으로 연합국을 지원했다. 한 마디로 대량생산을 앞세운 산업 생산 능력과 공업력으로 찍어 눌렀단 의미.[89] 이 부분은 경량화를 할 수 밖에 없는 게, 엔진출력이 가장 큰 영향을 줬다.[90] 렛푸의 경우는 더 심각한데, 시제품은 호마레 엔진을 달고도 1,300마력밖에 나오지 않아 테스트 파일럿으로 참여한, 후에 343해군항공대의 비행대장이 되는 시가 요시오가 이따위 물건을 만들려는 놈들의 머릿속이 궁금하다며 혹평을 퍼부었고, 개량 후 무려 2,200마력짜리 엔진을 달고서도 시대착오적인 격투전 중시형 저익면하중 설계를 고집하는 바람에 하야테나 시덴카이보다 비행성능이 딱히 나은 점이 없었다.[91] 단적인 예로 오늘날 대다수 국가의 공군에서 공중조기경보기를 운영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살펴보자. 심지어 일본의 항공자위대는 E-767뿐 아니라 미 해군에서 항모탑재용으로 운영하는 E-2C까지 굴린다.[92] 일본군은 함재기만으로 교전에 들어간 미군과 달리 육상기지의 기체 포함이며 제외해도 239:31이다.[93] 다만 한가지 유념할 사항은, 제로의 허약한 방어력을 말하며 간혹 'A6M은 장갑판이 얇다'고 표현하거나, 또 2차 대전기의 전투기 다수가 장갑판을 설치했었다 말한다고 해서, 2차 대전 시기의 전투기들이 전차나 장갑차처럼 기체에 장갑을 두르고 기본 외판으로 총탄을 튕겨내고 날아다녔다 식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해라는 것이다. A6M이 아니라 그 맷집 좋다는 P-47이든, 심지어 '날으는 전차' Il-2도 어디까지나 기본 외판은 1mm 내외의 얇은 알루미늄 합금제 판이라는 점에선 큰 차이는 없다. (아니 사실 Il-2는 초반 한 때는 경금속 재료 부족으로 후부 동체 일부를 목재로 만든 적도 었었다.) 따라서 당연히 A6M이 아니라 2차 대전 당시의 그 어떤 전투기 혹은 폭격기도 '기본 외판'으로는 기관총탄, 소총탄이 아니라 권총탄도 막아낼 수 없다. 전투기의 '장갑판'이라고 말해지는 것은, 어디까지나 기체의 기본 외판이 아니라 조종석이나 엔진, 연료탱크 등 'Vital Part'에 제한적으로 설치되는 장갑재를 뜻한다. 그러나 제로의 경우, 극 후반의 일부를 제외한 대부분 형식에는 이런 최소한의 방탄설비도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현대의 전투기에 비해선 작은 2차 대전시기의 전투기라도, 기본적으로 길이와 폭이 10m 이상인 구조물이므로, 치명적이 아닌 부분에 한 두 발 피탄하고 관통된다고 곧장 추락하지는 않는다. 정확히 말하면 탄환을 저지하지는 못하더라도 어느정도의 피탄은 구조적 내구성으로 버틸 수 있다...는 것인데, 뒤의 항목에서 다시 언급되겠지만, 사실 A6M은 이 부분에서도 그닥 높은 점수를 받지 못한다.[94] 예외적인 사람도 없지는 않다. 사카이 사부로조차 능가하는 일본군 해군 최고의 파일럿 이와모토 테츠조가 이런 사례다.[95] 그래도 2차 세계대전 당시의 기준으로는, 7.62~7.92mm급의 소총 및 경기관총의 일반탄이나, 상황에 따라 철갑탄도 버틸 수 있는 수준이다. M1 개런드 소총이나 M1919 브라우닝 기관총에 쓰이던 .30구경 철갑탄의 경우 50m에서 9~10mm 정도의 관통력을 지닌다. 물론 거리나 탄착각도의 문제나, 후방에서 날아드는 탄환은 대체로 후방 동체를 뚫고 들어온 것이므로 얼마라도 위력이 감소한 탄이니, 이 정도까지는 막아질 수 있다. 그리고 전투기 등의 방탄장갑은 균질압연장갑 같은 것이 아니라, 경전차 등의 경우처럼 표면경화 장갑 - 그것도 가능한 고품질의 것 - 을 사용했기 때문에, 기관총이나 기관포 같은 소구경 화기에 대해선 일반적인 RHA 보다 좀 더 방호력을 발휘했다. 나아가 공중전에서 선호된 것은 철갑탄 같은 종류 보다는, 항공기의 내부장비나 구조를 더 많이 손상시킬 수 있는 소이탄류나, 기관포라면 고폭탄 계열. 따라서, 더 대구경의 탄환이 날아다니는 상황이라 해도, 8~10mm 수준의 방탄판 한 장이 있고 없고가 조종사의 생사를 가르기에는 충분하다. 나아가 실전에서는 5~7mm 정도의 장갑만으로도 상당한 방호효과가 있다고 한다. 하지만 이 경우는 대체로 장갑을 좀 더 넓게 쓰는 경우이며, 그 경우에도 조종석 방탄판은 10mm 내외를 사용한다.[96] 사실 유리도 아니라 아크릴 수지, 쉽게 말해 플라스틱 판이다.[97] 덧붙여, 태평양 전쟁 기간 활동한 미군기 중 방탄설비와 자동방루식 연료탱크를 제대로 장비하지 않은 채 날아다니던 대표적인 기종이 바로 'A6M 신화'의 밑거름 중 하나였던 F2A 버팔로였다.[98] 하지만 스핏파이어는 애초에 개발목적이 단거리 방공요격임무를 가진 기체라 항속거리를 길게 요구하지 않았고 운용도 거기 맞춰서 했기에 심하게 문제가 되지는 않았다. 109도 영국 본토항공전 정도를 제외하면 항속거리가 심하게 딸린적은 없었고.[99] NHK 다큐멘터리 零戦ニ欠陥アリ(제로센에 결함 있다)에서 지적된 사항.[100] 그런데 히스토리 채널의 다큐멘터리에서는 진행자가 제로의 날개부분을 재현한 다음 기관총의 API탄도 아니고, 사냥용 엽총의 일반 납탄자 Buckshot으로 쏘았는데. 관통된 다음 바로 불이 붙었다. 당시 프롭기 연료로 쓰던 고옥탄가 가솔린은 매우 불이 잘 붙는 물질이다. 현재 가솔린이나 액화가스를 취급하는 주유소에서도 담배의 ㄷ도 못 나오게 하는 이유가 이것이며 휘발유 주유시에는 정전기마저 위험하다. 그런데 그게 들어있는 통에다 총을 쏘면 자연히 금속과 금속이 마찰하면서 국지적으로 열이 발생하거나 스파크가 튀게 된다.(자동방루 장치 고무는 사실 이걸 막는 것이다.)[101] 내셔널 지오그래픽 채널 <전쟁의 대가들 - 미드웨이, 플래쳐 VS 나구모>[102] 자동방루식 연료탱크는 연료탱크의 안이나 바깥을 고무로 감싸 피탄시 연료의 누출을 고무가 막는거지, 고무가 탄을 방어하는 게 아니다.[103] 당연한 일이지만 포탄 생산기술이 떨어지면 같은 구경 포탄이라도 내부의 작약량도 줄어들고 불발률도 높아진다.[104] 물론 스핏파이어 초기형의 경우 조종석 뒤편 방탄판의 무게는 33kg 정도였지만, 전쟁이 진행되며 장갑은 지속적으로 강화되어 Spitfire F Mk.21에 이르면 13mm 기관총탄은 물론, 탄착각도에 따라서는 20mm 철갑탄까지 막을 수도 있을 정도까지 강화되었다고 한다! 이는 독일 전투기들도 마찬가지여서, 특히 후기에는 12.7mm탄 방어를 기본 수준으로했다. 태평양 전쟁에서 제로의 맞수였던 와일드캣의 조종석 방탄판은 68kg, 헬캣의 경우는 96kg 정도. 기본적으로는 경기관총 급, 상황에 따라서는 중기관총탄 정도를 막는 것이 목표였지만, 탄속이 다소 느린 A6M 초기형의 99식 1형 20mm 기관포탄의 경우 와일드캣의 방탄장갑에 막히는 일도 종종 있었다고 한다. 참조[105] 그런데 P-51 머스탱을 A6M과 단순 비교하기엔 어폐가 있다. P-51 머스탱은 애초에 장거리를 날아가는 중폭격기의 호위기로 만들어진 것이기에 함대 호위를 맡는 함대 방공전투기로 나온 A6M과는 목표부터 다르다.[106] 물론 너무 정통으로 맞으면 연료탱크가 어쩌고가 아니라 그냥 날개가 부러져나간다...[107] 그나마 다행히도 미군이 독일이나 영국과는 달리 이런저런 이유로 줄창 그냥 중기관총만 썼기 때문에 더 험한 꼴 안보고 '연료탱크에 맞고 불타는' 선에서 끝났다.[108] 제로의 사례라고 잘못 알려져 있으나, 사실이 아니다. 제로와 오스카의 형상은 서로 비슷해 흔히 혼동하는데, 위에서 내려다본 동체의 모양으로 쉽게 구별할 수 있다. 게다가 해당 블로그의 글에는 주로 날개에 많이 피탄당했다고 기술했는데, 방루장치없는 연료탱크가 장착된 날개야말로 제로의 취약부위이며 피탄취약부에 맞지 않는다는 앞의 말과 완벽히 모순된다. 그러나 Ki-43과 A6M은 모양이 비슷하다보니 착각하기도 쉽다. Ki-43을 잡고도 제로를 잡았다고 보고하기도 하고 A6M을 잡았으면서 오스카를 잡았다고 하기도 한다. 이 역시 정보공유조차 하지 않고 비슷한 기종을 만들던 일본군의 육해군 대립이 낳은 삽질.[109] 괜히 심심치 않게 전투 중 공중충돌의 사례 같은 게 나오는 게 아니다.[110] 시속 수백 Km로 날아다니는 적기에 무유도의 탄환을 적중시키려면 최대한 달라 붙는 것이 사실 당연하니까. '상대 조종사의 표정이 똑똑히 보였다'는 식의 증언이 괜히 나오는 게 아니다. 20m까지 붙어서 사격했다는 에리히 하르트만을 비롯, 에이스면 에이스일수록 그렇게 바로 등 뒤까지 붙어 확실한 명중탄을 날리는 것도 당연하지 않을까. (대부분의 회고는 결국 그 전투에서 적을 격추하고 살아남은 파일럿들의 이야기다.) 다만 폭격기, 특히 방어기총으로 사방을 도배한 중폭격기를 상대로 쓸데없이 들러 붙으면 사망이다.[111] 이 시기 조종사들이 소비한 탄약 중 착탄율이 2-5%라는 이야기도 있다.#[112] 교전거리가 짧다는 것은 더 밀도 높은 전투공간에서 날아다니게 된다는 뜻이다. 당연히. 게다가 대부분의 전투에선 폭격기와 요격전투기, 호위전투기가 뒤엉킨 가운데 사방에서 대공포화가 작렬하는 상황도 자주 벌어진다. 당연히 호위 혹은 요격 전투기가 적은 물론 아군의 대공포화에 피해를 입는 일도 다반사다.[113] 물론 날아오는 총알을 일일이 피하라는게 아니라 더 날렵하게 움직여서 애초에 사선위에 올라가지 말라는 의미라면 이것보다는 말이 된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어디서 날아와서 어디로 박힐 지도 모르는, 눈먼 총알들이 날아다니는 전장의 사정을 무시하고 방탄 조치를 하지 않은 것은 까일거리 확정이지만. 그런데 사실 그 우아한 전투라도 양 측이 서로 다 스텔스라 BVR전개가 불가능하면 다시 근접전을 할 수 밖에 없어질 수도 있다. 애초에 비등한 국가 혹은 집단끼리 싸우게 되는 전면전에서 우아한 전투는 없다. 애초에 현대 공중전은 WVR로 들어가게 되면 고추력 엔진과 추력편향노즐을 아낌없이 장착한 전투기와 미사일들이 실속, 선회력이라는 레시프로 비행기들의 개념을 박살내버리는 입체적인 기동을 보여준다. 실속 속도에서 기수를 들어올린 상태로 상하좌우 춤을 춘 뒤 강력한 추력으로 기수를 내리고 실속을 씹어먹어버리는 기동이 가능한게 현대 최신 전투기들이다.[114] 사실 이런 결과가 나온 이유의 하나는 2차 대전 개전시점까지 지속되던 미 해군의 괴랄한 조종사 훈련 시스템 탓도 있다. 전쟁 초반 미군 조종사들이 실전경험이 없어 전술적 능력에서 일본군에 떨어지는 거야 당연할지 모른다고 해도, 미군이라고 조종사 경력 자체로는 꿀리지 않을 베테랑 조종사들이 없었을리는 없다. 그런데 문제는 당시 미 해군은 항공모함 비행대의 조종사들에게 항모에 탑재되는 모든 종류의 항공기를 다 훈련받도록 하는 훈련방침을 갖고 있었던 것. 즉, 전투기 비행대에 배속된 조종사라고 해서 계속 전투기를 몰고 공중전 훈련에 집중하던 조종사가 아니라, 급강하 폭격기도 몰다가, 뇌격기도 몰다가 하는 식으로 훈련받은 조종사들이었다는 것이다. '항공모함은 제한된 환경에서 제한된 인력으로 항공전력을 운용해야 하므로, 항모에 배속된 조종사들은 항모에서 운영하는 모든 항공기를 조종할 줄 알아야 한다'는 이유였다. 평시에는 얼핏 그럴싸하게 들릴 수도 있는 논리였는지 모르지만 정작 실전을 치르고보니 당연히 모든 조종사들이 모든 분야에서 적보다 숙련도가 떨어진다는 결과만을 낳고 말았다. 가장 직접적으로 적의 파일럿과 정면 대결을 하게 되는 전투기 조종사에서 그게 가장 두드러져 보인 것이지만, 뇌격기나 급강하 폭격기 조종사라고 해도 본질적으로 다르지는 않았다. 그렇게 이거 몰다 저거 몰다 하면서 대부분의 다른 스킬은 제대로 못 올렸다고 해도, 어떤 종류의 기종을 몰던 - 들인 시간에 비해선 좀 비효율적이더라도 - 그나마 쌓이는 스킬 중 하나가 바로 "항공사격술"이었던 것. 물론 당연히 실전에서 곤욕을 치른 미 해군은, 기존의 훈련방침을 폐기하고 전문화된 조종사 훈련코스로 바꾼다.[115] 근데 맺집으로 버티는 것도 숙련도가 필요하다. 기본적으로 적의 탄환을 최소한 맞으면서 징크 기동을 해야 하는데, 이러려면 왠종일 뒤를 보고 비행해야 한다![116] 실제로 당시 와일드캣을 타고 A6M을 격추시켰던 미군 파일럿들의 회고담을 보면, '꼬리를 잡고 사격을 가해 격추시켰다' 보다는 자신을 향해 강하해오는 A6M을 헤드온으로 격추시켰다 같은 다소 '비전형적인' 회고담이 적잖다. 당시 미군파일럿들에 대해 일본군조차도 (기량은 떨어지지만) 공격의욕은 넘친다고 칭찬하곤 했던 것을 생각해보면 - 말하자면 설령 자기 꼬리에 A6M이 붙어 총탄을 맞으며 쫒겨다니는 상황에서도, 눈 앞에 적기가 보이면 무조건 쏘고보는 - '날렵하지만 유리몸의 A6M과 둔하지만 맷집 좋은 와일드캣' 사이에서 어떤 식의 공중전이 벌어졌는지 얼마간 짐작해 볼 수 있을지 모른다. 그런데 그런 전투에서 손실비로는 거의 비슷한 결과가, 자세히 따지면 A6M이 되려 좀 더 많이 격추되었고, 인명피해로 가면 일본군 조종사가 확실히 더 많이 전사하는 결과가 나왔다.[117] 이를테면 아직 전쟁 초반인 산호해 해전에서, 미군은 69대의 항공기를 손실하며 35명의 항공기 탑승원을 잃었지만, 일본군은 92대의 항공기를 손실하며 90명의 항공기 탑승원을 잃는다. 물론 그 다수는 제로 조종사들보다는 폭격기나 뇌격기 승조원이었을 것이지만, 부실한 내구력과 방어력의 문제는 일본군 항공기 전반의 문제였기 때문에 제로도 마찬가지로 포함할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비단 전투기 조종사가 아니어도 기본적인 비행 실력과 전투 경험을 살릴 수 있으므로 샛병아리 처음부터 키우는 것 보다 적은 비용으로 전반적인 조종사들의 수준을 유지시킬 수 있다. 심지어 외견상 일본군은 정규항모 1척과 경항모 1척 손상에, 미군은 정규항모 1척 침몰과 1척 손상으로 외견상 일본군의 승리로 보였던 산타크루즈 해전에서도, 미군이 81기의 항공기를 잃은 데 비해 일본군은 그보다 많은 92기의 항공기를 잃었을 뿐 아니라, 미군이 26명의 항공기 탑승원을 잃은 데 비해 일본군은 그 여섯 배에 가까운 148명의 항공기 탑승원을 잃는다. 전투에 동원된 일본군 뇌격기 항공기 탑승원 49%, 급강하폭격기 항공기 탑승원 39% 그리고 전투기 항공기 탑승원 20%가 사망했다. 방어력이 취약한 항공기와 육탄돌격 수준의 무리수를 강요하는 전술이 겹치며 불러온 결과였다. 이러한 항공기와 특히 항공기 탑승원의 손실로 일본군의 항모기동부대는 사실상 무력화되었고 이후 과달카날 전투의 후반부에서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한다. 이는 결국 일본군 패배의 한 요인이 된다.[118] 이 문제 때문에 일본군 해군은 거의 모든 항공모함에 폐쇄식 2층 격납고를 채택할 수 밖에 없었다. 게다가 격납고 바닥에 그려놓은 비행기 모양의 주기선도 이것 때문에 생긴 것.[119] 이것의 근본적인 원인 역시 부족한 엔진출력에서 찾을 수 있다. 엔진의 출력이 부족한 상태에서 무리하게 비행성능을 짜내는 설계를 하게 되면 구조 강도는 자연히 약하게 설계할 수 밖에 없는 것. 사람으로 비유하면 심장이 약한 트라이애슬론 선수의 경우로 보면 되겠다.[120] 629km/h다. 숫자를 잘 보자. 저기서 1km/h만 올라간 630km/h로 들어가도 주익에 금이 간다는 뜻이다. 자칫하면 날다가 산산조각. 문자 그대로 공중분해 당한다.[121] 의외일지 모르지만 Bf109나 스핏파이어같은 일선급 기체들도 메뉴얼의 급강하 제한 속도는 750km/h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다. 하지만 저 제한은 어디까지나 메뉴얼상의 제한이지 실전에서는 그 이상으로 급강하해도 기체가 충분히 버틸수 있다. 예외로 소련의 경우 제로 뺨치는 속력의 제한이 걸렸고 그걸 넘어서면 진짜로 박살나지만 그쪽은 애초에 목재 항공기이므로 패스.[122] 와일드캣의 카탈로그상 급강하 제한속도는 772km, 헬캣도 F6F-5가 796km이지만 헬캣은 실전에서 거뜬하게 900km급의 강하속도를 냈다. 미일 양국의 각종 다큐멘터리 등에서도 헬캣의 강점으로서 빠지지 않고 언급되는 부분. 덤으로 와일드캣의 경우는 아예 제한속도라는 걸 상정하지도 않았다는 이야기도 있다.[123] 상술한 ROC의 '하중배수 7, 안전율 1.8'이 바로 이것이다. 헬캣의 내구성은 6.5G x 1.5배(F6F-5 기준), 콜세어는 7.5G x 1.5배를 버틸 수 있다. 제시한 요구사항이 달성됐다면 11형의 기체강도는 헬캣이나 콜세어보다도 뛰어나야 하지만, 당시 일본의 기술력으로 가능할 리가 없었다.[124] 이걸 보면 호리코시 지로가 일본 굴지의 항공기 설계자라는 명예로운 호칭을 받은건 어찌보면 진짜 실력보다는 제로센을 설계한 사람이라는 점이 더 큰 요인일 것일지도 모른다. 개요에 상술된 것처럼A6M은 강력했던 일본 해군의 주력 전투기였다는 점과 남방 사령부의 유능한 에이스 파일럿들이 탔다는 이유로 전후 일본 사회의 자존심 회복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라는 걸 보면 제로센을 고평가 하게되면 설계자인 호리코시 지로도 고평가될 수 밖에 없으니까. 실제로 성능상으로 대등하다는 하야부사의 설계주임 이토카와 히데오, 더 뛰어난 전투기인 하야테의 설계주임 코야마 야스시와 시덴의 설계주임 기쿠하라 시즈오를 아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제로센의 설계주임인 호리코시 지로는 매우 유명하고 더 나아가 그의 일대기를 다룬 애니메이션도 나오지 않았는가?[125] 나아가 위의 '실전' 항목에서도 언급되었듯, 미군의 대 제로 교범에는 '기체강도와 가속에 대한 심리적 영향으로 제약받는 고속기동으로 끌어들여라'고 대놓고 써 있다. 제로의 취약한 기체강도는 조종사들에게 과감한 전투기동을 방해하는 심리적 압박으로까지 작용한 것. 사실 과장해서 말하면 '기수 한 번 잘못 숙였을 뿐'인데 공중분해 될지도 모를 비행기를 몰고 있는데 한계 속도 이하라고 맘편히 기동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이와모토 테츠조마냥 속도 조절을 칼같이 할 수준이 아니면 제로로 급강하 기동은 자살행위다.[126] 참고로 영국 공군이 운용한 HS.404도 욀리콘 기관포를 바탕으로 설계된 물건이다.[127] 실제 99식 1호 기총의 실물 사진을 보면 포신이 상당히 짧은데, 당연히 포구초속이 낮을 수밖에.[128] F4U 콜세어F8F 베어캣이 대표적인 사례이며, 그 외 비슷한 시기에 양산된 적이 있는 기종들 중에는 F6U 파이어릿과 F7U 커틀러스가 20mm M3 4문, F2H 밴시와 F3H 데몬도 20mm Mk.12~16 4문을 장착했다.[129] 미군은 이후 MiG-15와 교전을 치르며,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는 제트 전투기 간의 교전에서 한발 한발의 위력이 떨어지는 중기관총으로는 버겁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주력 대공무장을 20mm급으로 뒤늦게 교체한다.[130] 일단 HS.404의 탄속(880m/s)은 영국군의 .303 구경 기총이나 미군의 M2 기총과도 엇비슷하다. (물론 그래도 구경이 다른 화기라서 실제 탄도가 완전히 같지는 않겠지만 말이다.) 결국은 후기엔 모두 20mm 구성으로 바꾸지만. MG 151의 탄속은 750m/s 전후로 그에 비해 약간 떨어지는 편이었지만, 대신 전쟁이 진행되며 독일 전투기들에 7.92mm 기총을 대체해 장착되기 시작한 MG 131, 13mm 기총과 엇비슷하다. 그리고 일반탄에 비해 탄자가 다소 가벼운 미넨게쇼스탄을 사용하면, 탄속이 좀 더 빨라진다. 물론 이는 Bf109 초기형 등이 아직 MG FF/M 기관포를 사용하던 때도 마찬가지. 기본적으로 일본의 99식과 같은 MG FF/M 기관포라도 미넨게쇼스탄 사용시에는 포구초속 700m/s로 얼마간 탄속이 개선될 수 있었다. 덧붙여 독일공군이 전쟁 초기 사용된 MG FF/M 기관포에 대해 표명했던 불만 중 하나가 바로 '기관포와 기관총을 동시에 사용할 수 없어서 화력의 집중력과 전투효율이 떨어진다'였다.[131] 사실 영국에서도 2차 대전 초기에는 HS.404 기관포의 신뢰성 문제로, 한동안은 20mm 대신 .303구경(7.7mm) 기관총 8~12정을 장착해 일단 퍼붓는 탄환 수를 늘리는 것으로 떼워 보기도 했다.[132] MK108은 탄속은 540m/s로 여유가 넘쳐도 그나마 발사속도는 650발/분으로 괜찮았다.[133] 일본군의 폭격기, 공격기로 쓰이던 G4M도 같은 99식 20mm 기총을 장착했으므로 탄도가 포물선이었다.[134] 물론 불가피했다고 해도 폭격기 요격에 집중한 독일공군 역시, P-51이 베를린 상공까지 날아와 깽판을 치는 상황에선 대 폭격기 전용 무장의 '데드웨이트' 만큼의 댓가를 치러야 했겠지만.[135] F2A는 이후 미군 전투기들에 비해 맷집도 별로였다.[136] 심지어 초기버전엔 7.7mm 기총만 달랑 두 정 탑재한 적도 있다.[137] 대다수의 비행기는 무장의 구경 변환 없이 전부 주익에 집중시키거나, 혹은 강력한 무장 일부만 주무장으로 삼아 기수에다 적용시키는 형식이었다.[138] 날개가 접히는 기구가 의외의 장점도 있었는데, 급강하 속도는 더 올라갔다. 붐앤줌 기동에서는 되려 장점이 된 셈.[139] 개전 당시 미군 항모의 전투기 비행대대는 와일드캣 18기가 배치되었지만, 이후 미드웨이 해전 시기에는 와일드캣 27기로 구성되었다.[140] 사실 이것도 수납 공간 확보를 위해 접은 것은 아니다. 비행갑판 폭이 좁은 중-소형 항공모함에서 엘리베이터 출입구를 통과하기 위한 것이다.[141] 이렇게 된 건 기체를 만든 재료부터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애당초 초초두랄루민 자체가 강도도 좋고 얇게 만들 수 있는 건 좋지만, 그 높은 강도의 반대급부로 취성이 강하다. 즉, 잘 깨진다. 불 잘붙는 유리날개.[142] F4F 와일드캣과는 날개를 접을 수 있게 하느라, 비행성능은 떨어졌어도, 그래도 항모에 한 척당 이전보다 50% 넘게 많이 싣고다닐 수는 있어졌지만 (다소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원래 목적은 달성) 이쪽은 싣는 숫자는 그대로인 채 성능만 떨어졌다.[143] 이건 위에서도 언급된 거고 아래에서도 주구장창 나올 내용이지만, 경량화에만 너무 집중하다 보니 생긴 폐해로 기체 강도 이전에 엔진 출력이 그 무게를 못 버틴다.[144] 문제는 이 기동성이 제1차 세계 대전에서나 통용될 저속 기동성이란 거다. 제로의 경우는 기체 강도도 라이벌이라 할 수 있는 미군의 F4F 와일드캣만 못해서 고속 기동을 하면 기체가 문자 그대로 산산조각 난다.[145] 21형 이후의 개량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146] 2000마력급 엔진의 개발 자체는 늦게나마 성공했지만 자원줄이 끊어지고 대도시가 공습을 받는 상황에서 일정한 품질을 유지하면서 양산하기에는 일본의 역량이 부족했다.[147] 정확히는 엔진 생산설비.[148] 이건 주재료인 초초두랄루민(ESD, Extra Super Duralumin)의 약점인 취성이 높아 깨지기 쉽다는 점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비숙련 기술자가 골조에 구멍을 뚫다가 잘못해서 깨지거나 금가기 쉽고 만약 골조에 눈에 보이지 않는 미세한 금이 잔뜩 간 제로센을 몰고 급기동을 했다가는 어찌 될지는 생각 안하는게 속편한 일일 것이니.[149] 그리고 여기서 특기할 사항은 이 기종들 대부분이 바로 그 1년 전에는 대부분 1.5배 이상의 생산인시를 요구했다는 것이다. 즉 전시생산체제를 갖추며 급속도로 생산효율이 증가했다는 것.(경영학, 관리회계의 경험효과/학습효과) 그런데 그럴려면 앞서 언급한 증설된 생산라인은 전쟁 이전보다 숙련도가 낮은 노동력에 의해 가동한다는 조건에서도 잘 생산될 수 있어야 한다.[150] 이 문제는 항공모함을 폐쇄형 구조로 설계함으로써 내부 격납시설을 활용해 제로를 보호하는 것으로 대응했다.[151] 나머지 하나는 미국, 굳이 따지면 영국도 있을 수는 있지만 그 영국도 결국에는 그냥 미국으로부터 함재기를 도입하는 방향으로 입장을 바꾸었다.[152] 대신 후반에는 개조를 통해 그래도 항모에서 운용할 수 있게 만들었다. F6F 헬켓은 그런 문제는 없었다.[153] 엔진 기술력은 1944년 Ki-84 하야테에 와서야 연합국 측과 비등한 수준을 갖추게 되었으나, 이때는 이미 전황이 답이 없어진 상황이었다.[154] 육자대 90식 전차도 발매한 걸 보면 일본팬들을 노린 것일 수도 있다. 의외로 일본에선 밀리터리 킷으로는 타미야와 함께 가성비로 인기가 많다. 참고로 90식은 48:1 스케일인데 이 스케일은 아카데미가 차체 하부를 전부 같은걸로 써서 K1A1,M48A5k는 비율이 한눈에 봐도 개판인데 90식만 몇 안 되게 비율이 괜찮다.[155] 다만 리벳과 패널라인 디테일의 경우 같은 라인업의 이후 제품들에 비해 다소 밀리는 듯한 감이 없잖아 있다.[156] 참고로 한국도 전투기로 만든 가재도구가 있다. 해방 직후 조선항공협회가 미 군정에게서 일본군 항공기를 받아오는 사업을 추진했는데, 일부 조종사가 비행을 하려면 사전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미 군정의 포고를 무시하고 비행했다 격노한 미 군정에 의해 모든 항공기를 폐기하고 그릇 만드는 업자들에게 넘겨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