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개요
고대 이래 메이지 유신 이전까지의 일본의 관직체계와 변천을 다룬 문서.2. 관위(官位)
2.1. 개요
일본의 군주인 천황에게 인정받은[1] 모든 정권의 역대 관위를 총칭한다. 아스카 시대부터 시작된 율령격식으로 구성되었다.[2]한반도의 율령제는 삼국시대에 처음 반포되고[3] 고려와 조선을 거치면서 독자적으로 발전, 변형한 반면, 일본은 견당사를 통하여 당나라의 제도를 적극 모방해 체계적인 법전을 편찬하고 오랜 기간 시행하였다. 즉, 당의 율령제를 가장 오랫동안 유지한 나라는 일본이라는 뜻.[4] 그러나 수, 당 원형의 율령제를 그대로 유지하진 않고, 일본 특유의 정치색을 가미하여 영외관(令外官)과 권관(権官) 등을 포함했다. 물론 형식이 그럴 뿐 일본 특유의 원정, 후지와라 섭관정치, 그리고 결정적으로 막부 체제로 인해 실질적인 정착은 지지부진하였다. 하지만 동아시아사 내신·모의고사에서는 일본의 2관 8성제도 하의 부서가 시험에 거의 다 나오므로 주의 깊게 봐야 한다.
기본적인 일본 율령제의 골격은 다이호 율령에서부터 나왔다. 지토 천황 3년 6월(689)에 일본의 첫 율령인 아스카기요미하라령(飛鳥浄御原令)을 반포·제정했지만, 일본의 국내 사정에 맞지 않는 부분이 많다는 한계가 있었다. 따라서, 몬무 천황 때 오사카베 황자(忍壁皇子, ? ~ 705), 후지와라 후히토(藤原不比等, 659 ~ 720), 아와타 마히토(粟田真人, ? ~ 719), 시모쓰케노 고마로(下毛野古麻呂, ? ~ 710) 등이 율령 선정을 담당하여 700년에 령을 거의 만들고 남은 율의 조문을 작성하여 다이호 원년(701)에야 다이호 율령을 완성했다.
다이호 율령은 본래 군주인 천황을 정점으로 관료기구를 2관 8성[5]으로 정한 체계를 골격으로 삼아 본격적인 중앙집권 통치체제를 수립하고자 했다. 그리고 관청에서 사용하는 문서에는 연호를 사용하고, 인감을 찍고, 정해진 형식에 따라 작성된 문서 이외에는 수리하지 않는 등 문서와 수속의 형식을 중시한 서면주의를 도입했다. 그러나 무인들이 발호하자 천황과 조정이 쥐었던 모든 통치권이 사실상 세습 섭정과 지방 토호 가문들에게 넘어가 중앙집권적 율령제가 붕괴되었다.
그런데 기이하게도 사실상 율령제가 붕괴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주 오랫동안 관위가 소멸하지 않고 남아 있었다. 이때부터 관위는 일종의 명예작위로서, 수도 교토의 공가귀족들이나 역사가 깊은 명문무가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 출신이 미천한 신진 토호들이 출신을 숨기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는 도구로 변질되었다.
예를 들면 교토로부터 멀리 떨어진 지역의 영주였던 타케다 신겐은 일본 내에서도 손꼽히는 유력 다이묘였으나 관직은 세습받은 종4위하 좌경대부, 상경하여 받은 정5위상 대선대부였고 신겐과 호각을 이루던 우에스기 겐신은 이보다도 낮은 정5위하 탄정소필이었다.[6] 반대로 교토를 장악한 유력 다이묘는 천황과 귀족들을 보호하는 대가로 고위직을 받을 수 있었다. 그렇지만, 4위만 되어도 장관급이어서 아주 낮다고 폄하하긴 어렵다. 교토를 중심으로 하는 긴키 지역 다이묘들에 비해 상대적으로 관위가 낮은 셈이었던 것이다.
교토를 장악한 오다 노부나가는 정2위 우대신을 받았다.[7] 아예 평민 출신인 하시바 히데요시는 물심양면의 부단한 노력으로 최고위 관직인 관백, 태정대신을 받거나 중앙 귀족의 성씨를 받는 등,[8] 관위의 권력에 매우 연연했다. 즉 미천한 신분 출신이라 부족한 권위를 천황의 신하로서 통치한다는 명분으로 채우려 한 것.[9]
에도 막부 시대에는 금중병공가제법도 제7조를 통해 무가의 관위가 조정의 관위와 공식적으로 분리되어 막부가 관장하게 되었다. 같은 관직이어도 무가 쪽과 공가 쪽에서 맡은 사람이 동시에 나왔다. 이는 쇼군이 겸직하기도 한 좌우대신, 내대신도 마찬가지였지만 쇼군이 태정대신까지 맡았을 때만큼은 조정 쪽과 겹치지 않고 한 명의 태정대신만 있도록 했다. 에도 시대 초기에는 소규모 다이묘의 경우 관위를 받지 못한 경우가 많았지만, 1709년 도쿠가와 이에노부가 모든 다이묘가 관위를 받도록 조치했다. 다이묘의 위계는 교토 공가 중 우림가(羽林家)를 기준으로 했다.
관직을 받은 사람의 실권이 크거나 예우를 크게 해줘야 할 필요가 있으면 율령에 정해진 품계보다 높은 관위를 수여한 사례도 흔하다.
관련출처: 출처, 출처2, 출처3
2.1.1. 관직 사칭과 백관명 풍습
막부 체제는 조정의 정치권한을 무사정권이 대행한다는 기이한 형식이었기 때문에 조정과 트러블이 잦았다.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등은 막부의 정식 중개와 승인 없이 조정에 직접 임관하여 벼슬 받음을 엄금하고 이를 어긴 동생 미나모토노 요시츠네를 주살하기까지 했다. 이런 과정에서 관위는 점차 정치적 실권을 잃고 명예직이 되었다.전국시대의 혼란함 속에서 조정의 관위체계와 기존 사회질서가 완전히 붕괴하자, 많은 관직들이 실제 조정의 해당 직무와는 전혀 관계가 없이 단순한 호칭으로 사용되었다. 고위무사는 조정에 일정한 돈을 바쳐 관위를 사기도 했지만, 하위무사들이 제멋대로 관위를 참칭하는 사례가 늘자 전국시대부터는 관위가 아무 의미나 권력이 없이 단순히 지방의 일개 하급무사들의 이름을 대신해 부를 때 사용하는 별호나 호칭 구실을 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일례로 치쿠젠에는 가본 적도 없던 하시바 히데요시가 치쿠젠노카미 작위를 칭했고, 그 외에도 영지와 전혀 관련이 없게 관직을 칭한 예로는 사나다 아와노카미 마사유키, 야마우치 쓰시마노카미 카즈토요 등이 있다.
게다가 무식하고 출신이 일천한 자가 발호하고는 자기 멋대로 칭호를 붙이다 보니 없는 직책의 명칭을 지어내기도 하였다. 예로 어린 시절 오다 노부나가는 카즈사 지방의 태수라는 뜻의 카즈사노카미(上総守)를 자칭했는데, 카즈사 지방은 천황의 아들, 즉 친왕이 임직하는 특별행정구역(친왕임국. 카즈사 말고도 히타치·코즈케가 친왕이 임직하는 봉국이었다)이었으므로 태수가 있을 수 없었고, 몇 년 뒤에야 이를 눈치챘는지 카즈사의 국상(國相)이란 뜻인 카즈사노스케(上総介)로 슬쩍 명칭을 수정했다.
그러다 보니 '백관명(百官名, 햣칸나)'라는 실제 관위와 상관이 없는 명예성명이라는 개념이 생겼다. 일본 위키피디아는 가명의 일종으로 취급한다.[10] 실제 관위와 관련된 일을 하는 것도 아니었지만, 자칭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이묘들이 사적으로 가신들에게 관직명을 붙여주고 세습하기까지 했다.
한자 문화권에서 상대방의 실명을 그대로 말함은, 설령 이름 뒤에 경칭을 붙이더라도 매우 무례했다(실명경피속).[11][12][13] 특히 하급자가 상급자의 이름을 직접 입에 올림은 죽을 죄였다. 전국시대 일본은 더 해서 실명은 전혀 언급하지 않고 명예성명인 백관명으로만 부르는 풍습이 생겼다. 자기보다 높은 사람만이 아니라 낮은 사람도 백관명으로 불러야 했고, 심지어 면전의 적장도 백관명으로 호명할 정도였다. 일본 사극을 보면 나이후니 지부니 교부니 하는 도통 알 수 없는 호칭이 나오는데, 나이후는 내대신[14] 도쿠가와 이에야스, 지부는 치부소보 이시다 미츠나리, 교부는 형부소보 오타니 요시쓰구를 가리키는 말이다.
햣칸나가 실제 벼슬과 관련성을 잃고 가명에 가깝게 사용되다 보니, 나중에는 이름보다 관위가 유명해지는 경우도 생겼다. 예로 기리시탄 다이묘로 유명한 다카야마 우콘은 본명이 '시게토모'지만, 통칭이자 관위인 '우콘' 쪽이 훨씬 널리 알려졌다. 기요오키도 시마 사콘으로 더 유명하다.
사실 이러한 관위 사칭은 일본만의 특징은 아니고 타국에서도 왕조가 분열하여 붕괴되는 과정에서 나오기도 했다. 가령 후삼국 시대에 견훤은 후백제를 세우기 전 '신라 서면도통 지휘병마제치 지절도독전무공등주군사 행전주자사 겸 어사중승 상주국 한남군개국공 식읍이천호'를 자칭했는데 이 역시도 신라의 관직, 제도 등을 섞어놓은 것이다. 물론 당연히 신라 조정에서 전주자사나 어서중승 등의 관직을 내려준 적은 없고 견훤이 아직 국왕을 자칭하고 나라를 세우기에는 부족하다고 여겨 사용한 자칭일 뿐이다.
중국은 진나라 말에 패공을 사칭한 유방, 천자를 협박해 서초패왕을 자칭한 항우의 예로부터 시작해서 후한 말에 조정을 휘어잡은 사실상 조조의 고위관직도 사실상 천자를 꼭두각시처럼 부려서 셀프 승진한 것에 불과하고, 이해득실에 따라 원소와도 자리를 나눠 먹은데다 그에 따라 할거한 군웅들조차 지역을 손에 넣어 실질적으로 그 곳을 다스릴 수 있게 된 뒤 형식상 그 곳을 다스릴 권한을 가진 지위에 오른 경우도 많다. 사실 유비가 한중왕으로 즉위한 것도 엄밀히 따지면 사칭인데 왕작은 천자만이 봉할 수있으니까.
다만 중국과 한국에서는 왕조의 분열기라는 특수한 상황에서 일어난 사례이고 왕조가 갈아엎어지는 과정에서 지배층도 어느정도 바뀌다보니 관직이 세습된다든가 하는 일은 일본만큼 이어지지는 못했으며 없는 관직을 지어냐는 '백관명' 관습도 없었다. 굳이 따진다면 조선 후기 이후 과거시험장 근처에도 가본 적 없는 서민들이 상대를 존칭으로 '생원', '참봉' 정도로 불러준 것 정도가 비슷하지만, 이것도 없는 직급을 지어내기보다는 말단에 가까운 직급을 사실상 상대를 부르는 대명사로 쓴 경우라 조금 다르다. 게다가 견훤, 유방, 유비, 조조 모두 실제로 원래부터 조정으로부터 관직을 받고 공무를 수행한 벼슬아치였었기라도 했지, 전국시대 일본의 관위는 이름뿐이고 공직근무와 관련이 없었다는 것도 차이점이다. 진짜배기 공직은 쇼군을 수행 보좌하는 자리였고…
이렇게만 보면 전국 시대에 와서 조정의 관직들이 아무 의미 없는 호칭으로 전락하고 너나 할 것 없이 관직을 사칭한 것으로 보이지만, 완전히 그렇지는 않았다. 하극상이 빈번하던 시대에 실력만으로 지역을 차지한 다이묘들은 그 지역을 합법적으로 정당하게 통치한다는 명분과 권위가 매우 부족했다. 그래서 이들은 관위를 받아 통치의 정당성과 권위를 확보해 영민과 호족들의 복종을 받아내려 했고, 이를 위해 형식상으로나마 조정과 막부의 권위를 인정하고 천황과 쇼군에게 헌상을 바쳤다.
예컨대, 다테씨의 경우에는 막부에 헌상을 바치고 영향력을 행사해 무츠 슈고에 임명되어 봉행이나 유수, 탐제 직책을 받은 동북의 여러 세력들을 권위로 누르려 했고, 이마가와 요시모토를 비롯해 무수히 많은 다이묘들이 쇼군의 이름에서 한 글자를 받아 자기 이름에 썼다. 관서의 대영주인 오우치 요시타카도 천황에게 거금을 헌상해 다자이노다이니가 되어 오토모와 쇼니씨를 견제하고 규슈의 여러 세력을 포섭했다. 아무리 약육강식이 보편화되고 명예보다는 실력이 중요한 시대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권위나 정당성이 아예 필요 없는 시대는 아니었던 것이다.
2.1.2. 정립된 무사계급의 호칭방법
무사계급은 호칭할때 최대한 본명을 언급하지 않는 것을 최고의 예우로 친다. 이는 상대방의 사회적 지위를 최대한 존중해준다는 의미이다. 따라서 관위가 있다면 대개 관위만 사용하는데, 3자로서 언급될 때 같은 관위를 가졌던 인물과 구분해야할 경우 일단 관위를 당명(唐名), 즉 중국식 명칭으로 부르기도 했다. 신겐의 동생 다케다 노부시게는 사마노스케(左馬助)란 관위를 자칭했는데, 사마노스케의 당명인 '덴큐(典厩)'라고 불렸다. 이름과 붙여서 '덴큐 노부시게'라고 불리기도. 하지만 같은 관위를 가졌던 인물들이 많다면 거기에 영주로서 갖고 있는 작위를 붙이고, 고위 다이묘는 봉건제 유럽과 비슷하게 아예 자기 영토의 이름을 성 대신 붙이기도 했는데,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무사시 내대신', 혹은 '간토 내부'라고 불렸다. 만약에 같은 관위를 가진 사람들과 구별할 뾰족한 수가 없다면 성에 관위를 더해서 부를 수밖에 없다.영주의 관위가 지방직이라면 약칭을 쓰고 성에 더한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관위가 셋츠노카미여서 '셋츠'를 따 주로 고니시 셋슈라고 불렸다.
관위보유자를 정식으로 호명할 경우 보통 관위를 성과 이름 사이에 넣었다. 이시다 미츠나리를 예로 들어보자. 이시다 지부노쇼 미츠나리, 줄여서 이시다 지부노쇼, 더 줄이면 지부라고 불렸다. 우키타 히데이에도 정식으로 부르면 '우키타 비젠 츄나곤 하치로 히데이에'가 된다.
고위 무사 출신이지만 당장은 관위도 작위도 없어서 곤란할 경우라도, 이름은 부르지 않고 성+도노~ 라고 부르는게 예의였다.
2.2. 태정관과 신기관 그리고 사등관(四等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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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무성 | 식부성 | 치부성 | 민부성 | 병부성 | 형부성 | 대장성 | 궁내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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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관 중 태정관은 사법·행정·입법을 관장하는 최고국가기관이다. 장관은 태정대신이나, 상설직이 아니었던 탓에 통상적으로는 좌대신과 우대신이 장관 역할을 맡았다.
수, 당의 율령제가 황제에게 모든 권한을 집중시켜 3성[15]이 보좌하는 체제인 데 반해, 일본의 율령제는 천황과 각 성(省)의 사이에서 천황의 대리 기능을 하는 관대한 합의체인 태정관을 둔 것이 특징이다. 헤이안 시대가 되자 섭정과 관백이 신설되어 그 힘은 약해졌으나 가마쿠라 막부 때까지 정무기관으로서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그러나 무사들이 일본 역사의 주역이 되는 무로마치 막부 시절이 되면 그런 것은 없어진다.
신기관은 국가의 제사를 관장하는 최고국가기관이다. 신기(神祇)라는 단어는 천신지기(天神地祇)를 줄인 말로, 하늘과 땅의 신들을 뜻한다. 아베노 세이메이 등이 신기관의 관위에 역임했으나, 이 문서에서는 신기관의 관위는 제외하였다. 신기관은 관부 자체는 율령에 태정관보다도 먼저 기재돼 높은 석차에 있었지만 정작 그 장관인 신기백(神祇伯)의 품계는 종4위하로 태정관의 각 성 장관(종사위상)보다도 낮았다. 그러면서도 헤이안 시대 후기부터 신기백을 세습한 시라카미 가문은[16] 반가에 머무면서도 현직 신기백에 한해 왕[17]의 칭호를 쓰는 특권을 누렸고, 또 그러면서도 무로마치 시대부터는 신기관의 차관인 신기대부를 세습하는 요시다 가문이 전국의 신사 지배권을 대부분 차지해 신기백은 실권 없는 관직이 되어버린 기묘한 기관이었다.
<rowcolor=#FFF> 1868년 2월 10일 | 1868년 2월 25일 | 1868년 6월 11일 | 1869년 8월 15일 | 1871년 9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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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25일 | 6월 11일 | 1869년 8월 15일 | 1871년 9월 22일 | 1872년 4월 21일 |
- | - | (독립) | ||
신기관 (神祇官) | 신기성 (神祇省) | |||
신기사무과 (神祇事務科) | 신기사무국 (神祇事務局) | |||
<rowcolor=#FFF> 1872년 4월 21일 | 1877년 1월 11일 | 1885년 12월 22일 | 1900년 4월 27일 | 1940년 11월 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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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wcolor=#FFF> 1877년 1월 11일 | 1885년 12월 22일 | 1900년 4월 27일 | 1940년 11월 9일 | 1946년 1월 31일 |
교부성 (敎部省) | ||||
사사국 (社寺局) | 신사국 (神社局) | 신기원 (神祇院) |
메이지 유신이 시작되자 1868년, 태정관 산하의 7과중 하나인 신기사무과로 격하되었다가,[18] 2월 신기사무국으로 바뀌었고 동년 6월, 정체서가 포고됨에 따라 신기관도 부흥해 행정기관의 필두에 놓였다. 1871년 신기관은 신기성이 되어 태정관 아래의 한개의 성(省)으로 격하되었지만 이는 오히려 지위의 격하가 아닌 태정대신이 신기백을 겸하는 등 제정일치를 강화하는 조치로 풀이된다. 이듬해 1872년, 신기성은 국민교화를 강조하기 위해 교부성으로 바뀌었지만 학교 교육제도의 확충으로 인해 1877년, 내무성 신사국으로 격하된다. 황기 2600년을 기념해 내무성의 내부부국이던 신사국은 외국[19]인 신기원으로 독립하고 1946년 연합국 총사령부의 신도지령에 의해 종교법인 신사본청으로 바뀌고 폐지된다.
일본의 관위는 사등관(四等官) 체계로 구성되었다. 장관(長官), 차관(次官), 판관(判官), 주전(主典)으로 네 등분되어 각기 소속된 관청 내에서의 위계서열을 구분했다.[20] 8성에 대한 설명은 하단의 표 비고란을 참고.
2.3. 관위 목록
정1위 | 정2위 | 정3위 | 정4위 | 정5위 |
종1위 | 종2위 | 종3위 | 종4위 | 종5위 |
2.3.1. 정1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wiki style="margin: -5px" {{{#!wiki style="display: inline-table" | <tablealign=center><tablewidth=81> 하얀색 칸 | }}} 및 🎎 표시: 생전 서위 }}} | |||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 720년 11월 27일 | 724년 | 737년 8월 25일 | |||
(화력 서위일 불명) | 요로 4년 10월 23일 | 진키 원년 | 덴표 9년 7월 25일 | |||
(고세노 도코타) | ||||||
737년 11월 3일 | 749년 5월 4일 | 760년 9월 20일 | 762년 2월 28일 | |||
덴표 9년 10월 7일 | 덴표칸포 원년 4월 14일 | 덴표호지 4년 8월 7일 | 덴표호지 6년 2월 1일 | |||
770년 10월 23일 | 785년 6월 14일 | 785년 10월 31일 | 788년 6월 21일 | |||
호키 원년 10월 1일 | 엔랴쿠 4년 5월 3일 | 엔랴쿠 4년 9월 24일 | 엔랴쿠 7년 5월 13일 | |||
791년 1월 | 791년 1월 | 806년 6월 | 806년 6월 | |||
엔랴쿠 9년 12월 | 엔랴쿠 9년 12월 | 다이도 원년 6월 | 다이도 원년 6월 | |||
819년 1월 18일 | 823년 6월 17일 | 823년 6월 17일 | 826년 9월 1일 | |||
고닌 9년 12월 19일 | 고닌 14년 5월 6일 | 고닌 14년 5월 6일 | 덴초 3년 7월 26일 | |||
833년 | 833년 | 847년 11월 16일 | 848년 1월 28일 | |||
덴초 10년 | 덴초 10년 | 조와 14년 10월 5일 | 조와 14년 12월 19일 | |||
850년 9월 | 854년 10월 28일 | 858년 | 867년 11월 9일 | |||
가쇼(嘉祥) 3년 8월 | 닌주 4년 10월 4일 | 덴난 2년 | 조간 9년 10월 10일 | |||
869년 4월 | 872년 10월 9일 | 877년 1월 | 877년 1월 | |||
조간 11년 3월 | 조간 14년 9월 4일 | 조간 19년 1월 | 조간 19년 1월 | |||
884년 3월 23일 | 884년 3월 23일 | 891년 2월 24일 | 895년 9월 20일 | |||
간교 8년 2월 23일 | 간교 8년 2월 23일 | 간표 3년 1월 13일 | 간표 7년 8월 28일 | |||
897년 7월 19일 | 898년 1월 3일 | 900년 4월 15일 | 906년 6월 24일 | |||
간표 9년 6월 16일 | 간표 9년 12월 7일 | 쇼타이 3년 3월 14일 | 엔기 6년 5월 30일 | |||
907년 | 909년 4월 27일 | 913년 4월 27일 | 937년 11월 | |||
엔기 7년 | 엔기 9년 4월 5일 | 엔기 13년 3월 18일 | 조헤이 7년 10월 | |||
949년 9월 13일 | 949년 9월 13일 | 962년 11월 17일 | 967년 | |||
덴랴쿠 3년 8월 18일 | 덴랴쿠 3년 8월 18일 | 오와 2년 10월 18일 | 고호 4년 | |||
969년 12월 2일 | 970년 6월 26일 | 972년 12월 13일 | 978년 1월 1일 | |||
안나 2년 10월 20일 | 덴로쿠 원년 5월 20일 | 덴로쿠 3년 11월 5일 | 조겐(貞元) 2년 11월 20일 | |||
987년 3월 | 989년 8월 23일 | 992년 7월 18일 | 993년 6월 12일 | |||
간나 3년 2월 | 에이엔 3년 7월 20일 | 쇼랴쿠 3년 6월 16일 | 쇼랴쿠 4년 5월 20일 | |||
993년 8월 19일 | 995년 6월 25일 | 995년 6월 25일 | 1025년 9월 23일 | |||
쇼랴쿠 4년 7월 29일 | 조토쿠 원년 5월 25일 | 조토쿠 원년 5월 25일 | 만주 2년 8월 29일 | |||
1029년 11월 25일 | 1073년 6월 | 1073년 6월 | 1075년 11월 16일 | |||
조겐(長元) 2년 10월 17일 | 엔큐 5년 5월 | 엔큐 5년 5월 | 조호 2년 10월 6일 | |||
(서기·양력 서위일 불명) | 1094년 | 1107년 | 1146년 11월 9일 | |||
(화력 서위일 불명) | 가호 원년 | 가쇼(嘉承) 2년 | 규안 2년 10월 4일 | |||
1146년 11월 9일 | 1166년 9월 8일 | 1168년 7월 | 1168년 7월 | |||
규안 2년 10월 4일 | 에이만 2년 8월 12일 | 닌난 3년 6월 | 닌난 3년 6월 | |||
1177년 8월 28일 | 1190년 5월 | 1220년 | 1242년 | |||
지쇼 원년 8월 3일 | 겐큐 원년 4월 | 조큐 2년 | 닌지 3년 | |||
1617년 4월 14일 | 1628년 7월 | 1632년 3월 30일 | 1651년 7월 4일 | |||
겐나 3년 3월 9일 | 간에이 5년 7월 | 간에이 9년 2월 10일 | 게이안 4년 5월 17일 | |||
1680년 6월 17일 | 1709년 3월 4일 | 1709년 10월 9일 | 1712년 12월 1일 | |||
엔호 8년 5월 21일 | 호에이 6년 1월 23일 | 호에이 6년 9월 7일 | 쇼토쿠 2년 11월 3일 | |||
1716년 7월 1일 | 1752년 7월 20일 | 1761년 8월 24일 | 1786년 10월 13일 | |||
쇼토쿠 6년 5월 12일 | 호레키 2년 6월 10일 | 호레키 11년 7월 24일 | 덴메이 6년 9월 22일 | |||
1841년 4월 8일 | 1848년 8월 7일 | 1853년 9월 23일 | 1858년 8월 29일 | |||
덴포 12년 2월 17일 | 가에이 원년 7월 9일 | 가에이 6년 8월 21일 | 안세이 5년 7월 21일 | |||
1866년 8월 29일 | 1880년 7월 20일 | 1882년 8월 7일 | 1885년 7월 20일 | |||
게이오 2년 7월 20일 | 메이지 13년 동월 동일 | 메이지 15년 동월 동일 | 메이지 18년 동월 동일 | |||
1891년 2월 18일 | 1898년 3월 18일 | 1899년 9월 26일 | 1900년 11월 16일 | |||
메이지 24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1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2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3년 동월 동일 | |||
1901년 5월 16일 | 1901년 5월 16일 | 1903년 6월 27일 | 1904년 3월 17일 | |||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4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6년 동월 동일 | 메이지 37년 동월 동일 | |||
1908년 4월 2일 | 1908년 9월 9일 | 1915년 8월 18일 | 1917년 11월 17일 | |||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 메이지 41년 동월 동일 | 다이쇼 4년 동월 동일 | 다이쇼 6년 동월 동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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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1위는 일본의 관위 체계하에서 최고의 품계이다.
통상 어떤 직이 정1위라 규정된 것은 아니고, 주요 고위 관료가 큰 공을 세운 경우 생전, 혹은 사후에 이 위계를 부여받았다. 조선에도 정1품 대광보국숭록대부라는 품계가 있었던 것과 비슷하다. 차이점이라면 원평등귤(源平藤橘, 미나모토·타이라·후지와라·타치바나)에 속하는 귀족가문 출신이 아니면 생전에 일본의 정1위 품계를 받기가 절대적으로 불가능했다는 것이다. 이는 고대 왕조 시절의 뼈대가 중세까지 그대로 이어졌기 때문으로 한국사와 비교하면 같은 고대 율령제 국가인 신라의 골품제와 대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나마도 정1위를 죽은 다음에 공적을 기리는 명예직처럼 운용했기 때문에 사후에 추증받기는 비교적 쉬웠지만[21] 생전에 정1위를 받기는 일본에 존재했던 그 어떤 관위보다 넘사벽으로 어려웠다.
일본 역사상 정1위를 생전에 받은 사람은 총 7명이다. 724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미야코[22], 737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무치마로[23], 749년에 받은 타치바나노 모로에, 762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에미노 오시카츠, 770년에 받은 후지와라노 나가테[24], 1146년에 받은 미나모토노 마사코, 마지막으로 1891년에 받은 산조 사네토미[25] 등이다. 생전에 제대로 정1위 품계를 받은 자들은 모두 13세기 이전 4대 명문 원평등귤 소속 인사들뿐이다. 전국시대에 농민 출신으로 아득바득 출세해 관백이 되어 원평등귤의 유리천장을 깬 도요토미 히데요시조차도 생전 정1위는 꿈도 꾸지 못했다.
일본의 3대 천하인 오다 노부나가·도요토미 히데요시·도쿠가와 이에야스 3명은 전부 사후 정1위에 추증되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후 약 1년 뒤인 1617년 4월 14일 추증받았는데 당시가 에도 막부 시절이어서 당연했던 것이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다이쇼 시대인 1915년 8월 18일에 와서야 추증되었으며, 오다 노부나가는 1917년 11월 17일 추증된 최후의 정1위이다. 3대 천하인 중 두 명이나 사후 수백 년이 지나 의례적으로 겨우 받을 정도로 어려운 것이 정일위이다.
2.3.2. 섭관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folding [ 펼치기 · 접기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섭정 | 공석 | 섭정 | 공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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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관백([ruby(関白, ruby=かんぱく)])
- 천황의 선하의 전권대리로서 어전의 정무를 총괄하는 섭정의 관위. 천황이 미성년일 때의 전권대리는 섭정, 성년일 때는 관백이 된다.
- 천황의 후계자인 황태자와 직계자손인 친왕 등의 고위 황족들과 더불어 전하라는 경칭을 사용한 실세적 관직.
- 관백(関白)이라는 용어의 출전은 한서 〈곽광·김일제전〉이다. 전한 시기 권신 곽광에게 위협을 느낀 선제가 "모든 일을 다 먼저 곽광에게 아뢰고 그런 후 천자에게 상주하라"[26] 명했던 일에서 유래했다.
- 본래 율령에는 규정되어 있지 않은 영외관(令外官)으로, 군주의 실권을 빼앗은 신하들이 수백 년간 지배했던 중세 일본 특유의 관직이다. 다만 정이대장군 같은 무관직 영외관과는 달리 조정·공가와 밀접한 관위이며, 다른 영외관과는 격이 다르기 때문에 따로 서술한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받은 관위로 유명하다. 보통 관백은 후지와라의 직계인 오섭가만이 할 수 있었던 것인데, 고셋케 내부의 관백직 계승 논쟁 때문에 어부지리로 얻은 것. 자세한 것은 관백상론 문서에 서술되어 있다.
- 관백 자리를 후계자에게 물려주고 은퇴한 사람을 태합(太閤)이라고 한다. 이 칭호로 불리는 사람 중 히데요시가 제일 유명해서 태합이라고 하면 흔히 히데요시를 떠올리는 경우가 많다. 한국에서도 '대원군'이라고 하면 흔히 흥선대원군을 연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 영외관은 정해진 품계가 없다. 이 경우 관백의 위상은 그 역임자가 이전에 맡았거나 그런 적이 있던 관위를 기준으로 정해지는데 정2위 대신급 인사가 관백이었던 적도 있고 종1위(태정대신 혹은 좌대신)가 관백이었던 적도 있다. 히데요시는 일단 관백 취임 시점만 놓고 보면 대신 중 가장 급이 낮았던 정2위 내대신이었다. 태정대신이 된 때는 관백 취임 이후.
- 영외관 최고지휘자인 관백은 쉽게 설명해서 '천황'에게 모든 권력을 위임받아 국가를 다스리고 여기에 더해 일본 조정 내의 직급이 내대신, 우대신, 좌대신, 태정대신으로 상향조정되는 구조이다. 이러니 관위의 승진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중앙귀족 세력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최고의 직위인 태정대신으로 가는 길이 험난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무가 출신이 관백 겸 태정대신 자리를 차지한다면 그야말로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최고권력자였다. 그에 따라 도요토미 가문이 관백을 차지했을 때는 이 자리가 일본의 군주화되는 형태를 띄기도 했다. 원래 일개 관직으로 시작했다가 군주화된 쇼군이나 집권과 비슷한 현상이다.
2.3.3. 종1위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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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태정대신([ruby(太政大臣, ruby=だじょうだいじん)])
- 태정관의 수장, 조정 관리들의 우두머리
- 수·당의 율령제와는 다른 일본 율령제 특유의 관위로, 비상설 명예직이다.[27]
- 관백과 관계는 다소 복잡하다. 태정대신은 오섭가보다 격이 낮은 청화가[28]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관백이라고 해서 꼭 태정대신보다 높지는 않다. 이론상 오섭가 중 가장 위계가 높은 이가 관백인데 이런 사람이 태정대신이 아닌 좌·우대신, 내대신 정도라고 한다면 그보다 위에 오섭가가 아닌 태정대신이 있어서 태정대신이 상위직 대우를 받기도 충분히 가능했다. 이런 괴이한 문제는 보통 전·현직 관백을 태정대신으로 승진시키거나 아니면 에도 막부 이후 관백·쇼군 경력자만이 태정대신이 되는 관행이 형성되어 대충 해결되었다.[29]
- 쇼군은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그 이전에 전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권력을 구축했던 아시카가 요시미츠가 유일하게 받았고, 에도 막부에서는 전직 쇼군에 해당하는 오고쇼가 명예직으로 태정대신에 오른 사례가 3인 있었다. 에도 막부에서 현직 쇼군들은 대체로 그보단 하위직인 대신급[30]을 받았다.
- 이 자리에 대하여 전국 3영걸의 태도가 서로 다르다는 점이 재미있다. 오다 노부나가는 조정에서 태정대신 취임을 제안하였으나 사양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아싸 좋구나 하고 냉큼 태정대신을 받았는데 이미 관백을 받은 뒤였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막부를 개창하고 고사했다가 오사카 성 전투 이후 죽기 직전에나 받았다.
- 태정대신으로 임명된 사람은 통상 종1위에 해당했고, 공훈이 크거나 혹은 사후에 추서되는 이에 한해 정1위가 되었다. 그런데 살아서 정1위가 된 사람은 총 6명이고 그 중 가장 마지막에 받은 사람이 메이지 시대 때 태정대신을 역임한 산조 사네토미다.
- 태정대신은 메이지 유신 이후 일본 제국 내각총리대신으로 전환되었다.
- 한국사로 대입해보면 신라 때의 관직 체계와도 비슷하다. 관백은 진골 귀족들의 최고 회의 화백회의의 수장 상대등이고, 태정대신은 최고 행정 기관인 집사부의 수장인 시중과도 같이 대입할 수 있다.
- 영외관인 에도 막부의 쇼군도 일본최정점의 권력자지만 조정내 관위로는 잘 쳐줘도 내대신, 좌·우대신 정도였으며, 조정 최고위직인 태정대신으로 승진하긴 쉽지 않았다.[31] 권력은 쥘 수 있으나 명예까지 쉽게 얻지는 못하는 것. 물론 이건 관백도 사정이 다르지는 않다. 원래 태정대신은 역사적으로 볼 때 궐석인 경우가 적지 않았다.
2.3.4. 정2위·종2위
{{{#!wiki style="margin: -5px -10px; padding: 5px 10px; background-image: linear-gradient(to right, #AF001F, #BD0029 20%, #BD0029 80%, #AF001F); color: #DCA600" {{{#!wiki style="margin: 0 -10px -5px; min-height: calc(1.5em + 5px)"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min-width: 50%" {{{#!folding [ 좌대신 ] {{{#!wiki style="margin: -5px -1px -11p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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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가관위 우대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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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좌대신([ruby(左大臣, ruby=さだいじん)]): 정2위
- 태정관의 최고위, 장관급
- 태정대신은 전관예우를 위한 명예직으로 공석인 경우가 많았기에 원래는 좌대신이 만인지상 일인지하 대접을 받았다. 영화 음양사를 보면 천황의 부인 2명이 각자 좌대신·우대신의 딸들이다.
- 도쿠가와 쇼군들 중 3명(3대 이에미츠, 11대 이에나리, 12대 이에요시)이 좌대신직을 가졌다.
- 우대신([ruby(右大臣, ruby=うだいじん)]): 정2위~종2위
- 태정관의 최고위, 장관급. 현실은 좌대신의 사이드킥
- 스가와라노 미치자네, 오다 노부나가 등이 받은 관위.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늦둥이 아들이자 후계자인 도요토미 히데요리도 받기는 했다. 그런데 도요토미 히데요리의 생모 요도도노가 태정대신으로 봉해달라고 하자 도쿠가와 이에야스[32] 曰 "노부나가 님이 천하를 제패하고도 태정대신을 사양하고 받은 게 우대신인데 젖비린내 나는 아이가 태정대신? 아무리 관위가 유명무실해도 그렇지 태정대신이 뉘집 개 이름이냐?" 며 반발했다. 사실 전임자가 이에야스였던 만큼 이에야스 입장에서는 젖비린내 나는 히데요리가 우대신을 차지한 것도 썩 곱게보이지 않았을텐데 태정대신까지 요구한건 선넘었다고 여긴 것일지도 모른다.[33]
- 대부분(9명)의 도쿠가와 쇼군들이 우대신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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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도쿠다이지 사네사다 | ||||||||
(환임)도인 긴카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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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조니시 긴쿠니) | ||||||||
(환임)고노에 이에히로 | ||||||||
(환임)니조 요시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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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니조 무네모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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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임)오이노미카도 이에타카 | ||||||||
(환임)사이온지 요시스에 | ||||||||
내대신부 내대신 → {{{#!wiki style="display: inline-block; width: 50px; padding: 0"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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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대신([ruby(内大臣, ruby=ないだいじん)]): 종2위
- 태정관의 영외관. 후자와라씨의 시조인 나카토미노 카마타리의 관직으로 유명하다. 내부(内府)라고도 칭해진다.
- 좌·우대신이 공석일 때 대신의 권한대행.
- 역사적으로 무가출신 권력자들이 많이 거쳐간 직책이다.
-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기 얼마 전에 받았다. 이 사실은 상당한 의미가 있는데, 훗날 에도 막부에서는 무가 중 쇼군만이 대신 타이틀을 쥘 수 있었다. 즉, 어떤 의미로 국가원수급 실권자도 아니었으면서 말석이나마 대신급 타이틀을 차지했다는 것 자체가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당시에 상당한 위상을 차지했다는 의미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이 시점에는 위의 대신들이 공석이라 이에야스가 대신들 중 제일 높았다는 아이러니가 있다.[34]
- 역대 모든 도쿠가와 쇼군들이 내대신을 받았다.
- 메이지 유신 당시인 1869년 이후 내대신은 사라졌으나, 1885년 산조 사네토미를 예우하기 위해 다시 설립되었다. 이전의 내대신과 달리 내각과는 독립적으로 궁내성의 외국(外局)으로서 궁중에서 천황의 고문 역할을 하였다. 이때는 ‘내대신부 내대신’이라고 불리며 전근대의 내대신과 구분된다. 영문 명칭은 ‘Lord Keeper of the Privy Seal of Japan’이고, 서양문화권에서 국새나 어새 등을 담당하는 고위 귀족 대신이라는 뜻의 국새상서 혹은 어새상서 정도의 의미이다. 1897년 내대신관방이 내대신부로 개편되었고, 약칭은 내상(内相)이 아니라 내부(内府)였다. 내상은 내무대신을 뜻한다. 1907년 내대신부 관제가 제정되었다. 원로들의 은퇴 이후 천황의 측근으로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 때문에 근황파 장교들에게 ‘천황 주변의 간신’으로서 척결 대상이 되어 5.15 사건때는 내대신 마키노 노부아키가 암살될 뻔 했고 2.26 사건에서는 아예 내대신 사이토 마코토가 살해당했다. 최후의 내대신은 1945년 항복 때에 있었던 기도 고이치였다. 이후 내대신은 폐지되고 궁내청으로 업무가 이관되었다.
2.3.5. 정3위·종3위
- 대납언([ruby(大納言, ruby=だいなごん)]): 정3위
- 태정관의 실무직 중 최상위에 위치하는 직위로, 태정관의 차관급. 타이라노 키요모리도 태정대신이 되기 전에 거쳐갔던 자리다.
- 권대납언([ruby(権大納言, ruby=ごんだいなごん)]): 정3위
- 권관(権官: 정원 외 관리)[35]의 일종이다.
- 맡은 직무는 대납언과 다르지 않다. 차관급.
- 일본 명문가인 후지와라 가문 자식들에게 한 자리씩 주기 위해 만들어진 관위다.
- 가마쿠라 막부의 창건자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역임했던 자리.
- 어삼가 중 오와리 번주와 기슈 번주가 무가 관위로서 받았다.
- 중납언([ruby(中納言, ruby=ちゅうなごん)]): 종3위
- 태정관의 영외관, 차관급
- 하는 일은 대납언이다. 권세가의 일원들에게 줄 자리가 부족해서 만들어진 관위.
- 황문(黄門) 또는 황문시랑(黄門侍郎)이란 별칭이 있다. 권중납언도 마찬가지.
- 권중납언([ruby(権中納言, ruby=ごんちゅうなごん)]): 종3위
- 권관(権官: 정원 외 관리)의 일종이다. 차관급.
- 하는 일은 중납언과 다르지 않다.
- 고산케 중 미토 번주가 무가 관위로서 받았다. 도쿠가와 미츠쿠니의 별칭인 미토 고몬(水戸黄門)이 여기에서 따왔다.
- 탄정윤([ruby(弾正尹, ruby=だんじょういん)]): 종3위
- 중앙 행정의 감찰을 담당하는 최고 관리자, 탄정대(弾正台)의 장관급
- 태정대신 이외 모든 관료들의 부정부패를 적발할 수 있는 권리가 있었으나, 말 그대로 권리만 있었지 그것을 재판하거나 조사하는 권한은 없었기에 직접 체포는 불가능해서 사실상 명예직 취급.
- 좌근위대장([ruby(左近衛大将, ruby=さこんえのだいしょう)]): 종3위
- 영외관 중 하나, 장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우근위대장([ruby(右近衛大将, ruby=うこんえのだいしょう)]): 종3위
- 영외관 중 하나, 장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가 겸직했던 자리.
- 오다 노부나가가 우대신과 함께 겸직했던 생전 마지막 관위이기도 하다.
- 무가 관위로서 3대 쇼군 이에미츠부터 마지막 쇼군 요시노부까지 역대 도쿠가와 쇼군들이 가져갔다.
- 대재수([ruby(大宰帥, ruby=だざいのそち)]): 종3위[36]
2.3.6. 정4위·종4위
- 중무경([ruby(中務卿, ruby=なかつかさきょう)]): 정4위상
- 조정의 문서의 접수 및 심사를 맡던 관직, 장관급.
- 주로 황자들 중에서 임명
- 천황의 국사 행위를 자문하며 천황의 교육을 주관함
- 참의([ruby(参議, ruby=さんぎ)])
- 조정의 고문직으로 차관급에 상응하는 영외관. 관위는 4위 정도로 취급되었지만 고정되지 않고 불분명한 측면이 있었다.
- 재상([ruby(宰相, ruby=さいしょう)]), 상공([ruby(相公, ruby=しょうこう)]), 간의대부([ruby(諌議大夫, ruby=かんぎたいふ)])란 별칭이 있었는데, 주로 사이쇼라 하였다.
- 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 대납언, 중납언, 참의 등 참의 이상의 고위직들을 공경(公卿) 또는 의정관(議政官)이라고 구분하기도 했다. 의정관이라는 명칭은 메이지 유신 당시 잠시 존재했던 일본 입법부의 명칭이기도 했다.
- 에도 막부 시기 도자마 다이묘들 중 가장 우대받은 마에다 가문 카가 번주들이 무가 관위로서 받았다.
- 대정봉환 이후 메이지 정부에서는 정부의 주요 직책 중 하나가 되었다. 고정된 정원 없이 최대 10여 명이 참의를 맡았다. 명목상으로는 내무경, 대장경 등 각 부처의 수장보다 직위가 높았고, 참의보다 지위가 높은 태정대신 등은 거의 실권을 휘두르지 않았기에 메이지 과두정의 공동 수장에 가까웠다. 폐번치현 이후 다이묘 출신들은 정부에서 밀려났고 유신지사들이 참의 자리를 모두 장악했다. 특히 사쓰마와 조슈가 대부분의 자리를 차지한 가운데 도사 번과 사가 번 출신들을 몇 명 끼워 준 정도였다. 메이지 6년 정변에서 참의들은 사이고 다카모리의 정한론파와 오쿠보 도시미치의 반정한론파로 분열되었고 정한론파가 패배하여 낙향하였다. 이후 오쿠보는 참의가 경(각 부처 수장)을 겸임하게 하여 중앙정부를 장악했다. 오쿠보가 암살된 뒤 참의와 경은 다시 분리되었고, 1885년 태정관제가 폐지되고 내각 제도가 도입되면서 참의도 함께 폐지되었다.
- 식부경([ruby(式部卿, ruby=しきぶきょう)]): 종4위상
- 식부성(式部省)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의 문관 인사, 일본 황실의 예식, 서훈, 행상 등을 책임.
- 주로 천황 가문 인사가 임명되었다.
- 치부경([ruby(治部卿, ruby=じぶきょう)]): 종4위상
- 치부성(治部省)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외국사절 접대 및 호적관계, 의례를 주관.
- 민부경([ruby(民部卿, ruby=みんぶきょう)]): 종4위상
- 민부성(民部省)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의 조세 및 재정 담당.
- 병부경([ruby(兵部卿, ruby=ひょうぶきょう)]): 종4위상
- 병부성(兵部省)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 내외의 무관의 인사고과, 무기관리 등 병사(兵事)를 주관.
- 막부 설립 이후 유명무실하게 되었다.
- 형부경([ruby(刑部卿, ruby=ぎょうぶきょう)]): 종4위상
- 형부성(刑部省)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재판 및 형벌 집행등의 사법을 전반을 담당.
- 대장경([ruby(大蔵卿, ruby=おおくらきょう)]): 종4위상
- 대장성(大蔵省)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의 재정 특히 출납을 관리, 조세는 민부경이 담당했으므로 재산 관리의 측면이 더 컸다. 그 밖에, 조정의 화폐·금은·세금·공물의 출납, 보관과 여러 쿠니(国), 백성간의 도량형과 매매가격의 공정(公定) 등도 담당.
- 궁내경([ruby(宮内卿, ruby=くないきょう)]): 종4위상
- 궁내성(宮内省)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천황의 궁전의 식사, 관리, 의료 등의 전반을 담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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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기백([ruby(神祇伯, ruby=じんぎはく)]): 종4위하
- 신기관의 수장
- 좌경대부([ruby(左京大夫, ruby=さきょうのだいぶ)]): 종4위하
- 교토 동쪽의 사법, 행정,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자, 장관급.
- 전국시대에 이르러, 무가의 가장 인기 있는 관위가 되었다.
- 오우치(大內) 가문, 다케다(武田) 가문, 후호조(後北条) 가문이 역임.
- 우경대부([ruby(右京大夫, ruby=うきょうのだいぶ)]): 종4위하
- 교토 서쪽의 사법, 행정, 치안을 담당하는 관리자, 장관급.
- 전국시대에 역시 인기 있는 관위였다.[39]
- 에도 시대 아키타 사타케 가문이 받은 무가 관위였다.
- 탄정대필([ruby(弾正大弼, ruby=だんじょうだいひつ)]): 종4하
- 중앙 행정 감찰직, 차관급.
- 에도 막부 시기 요네자와 번주 우에스기 가문이 받은 무가 관위였다.
- 좌근위중장([ruby(左近衛中将, ruby=さこんえのちゅうじょう)]): 종4위하
- 영외관 중 하나,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좌근위권중장([ruby(左近衛権中将, ruby=さこんえのごんちゅうじょう)]): 종4위하
- 영외관이면서 권관,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시마즈, 다테 등 최상위권 도자마 다이묘들과 에치젠, 아이즈 등 최상위권 마츠다이라 다이묘들이 무가 관위로 받았다.
- 우근위중장([ruby(右近衛中将, ruby=うこんえのちゅうじょう)]): 종4위하
- 영외관 중 하나,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우근위권중장([ruby(右近衛権中将, ruby=うこんえのごんちゅうじょう)]): 종4위하
- 영외관이면서 권관,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좌위문독([ruby(左衛門督, ruby=さえもんのかみ)]): 종4위하
- 궁중 성문 경호 담당, 장관급.
- 당명은 금오(金吾)로, 코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별칭 킨고(金吾)가 여기서 왔다. 오토모 소린도 이 관직을 역임했다.
- 사카이 타다츠구의 관위이기도 했다.
- 우위문독([ruby(右衛門督, ruby=うえもんのかみ)]): 종4위하
- 궁중 성문 경호 담당, 장관급.
- 좌병위독([ruby(左兵衛督, ruby=さひょうえのかみ)]): 종4위하
- 천황 가문의 경호 담당, 장관급.
- 우병위독([ruby(右兵衛督, ruby=うひょうえのかみ)]): 종4위하
- 천황 가문의 경호 담당, 장관급.
- 대재소이([ruby(大宰少弐, ruby=だざいのしょうに)]): 종4위하
- 규슈 부도독, 차관급.
- 쇼니 가문이 대대로 역임. 사실 대재소이 가문이라서 쇼니(소이)씨가 된 것이다.
- 감해유사([ruby(勘解由使, ruby=かげゆし)]): 종4위하
- 지방 행정 감찰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2.3.7. 정5위·종5위
- 중무대보([ruby(中務大輔, ruby=なかつかさたいふ)]): 정5위상
- 조정의 조칙 및 후궁 인사까지 담당하는 사무직 최고위, 차관급.
- 대선대부([ruby(大膳大夫, ruby=だいぜんのだいぶ)]): 정5위상
- 수리대부([ruby(修理大夫, ruby=しゅりのだいぶ)]): 정5위상
- 대재소이([ruby(大宰少弐, ruby=だざいのしょうに)]): 정5위상
- 규슈 부도독, 차관급.
- 식부대보([ruby(式部大輔, ruby=しきぶたゆう)]): 정5위하
- 식부성(式部省)의 차관급.
- 에도 막부에서는 사카키바라 야스마사와 그 후손들이 받은 관위이다.
- 치부대보([ruby(治部大輔, ruby=じぶたゆう)]): 정5위하
- 치부성(治部省)의 차관급.
-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관직으로 유명.
- 민부대보([ruby(民部大輔, ruby=みんぶたゆう)]): 정5위하
- 민부성(民部省)의 차관급.
- 병부대보([ruby(兵部大輔, ruby=ひょうぶたゆう)]): 정5위하
- 병부성(兵部省)의 차관급.
- 형부대보([ruby(刑部大輔, ruby=ぎょうぶたゆう)]): 정5위하
- 형부성(刑部省)의 차관급.
- 대장대보([ruby(大蔵大輔, ruby=おおくらたゆう)]): 정5위하
- 대장성(大蔵省)의 차관급.
- 궁내대보([ruby(宮内大輔, ruby=くないたゆう)]): 정5위하[40]
- 궁내성(宮内省)의 차관급.
- 탄정소필([ruby(弾正少弼, ruby=だんじょうしょうひつ)]): 정5위하
- 탄정대(弾正台)의 차관급.
- 우에스기 겐신이 임명되었던 관위로 유명하다.
- 좌근위소장([ruby(左近衛少将, ruby=さこんえのしょうしょう)]): 정5위하
- 영외관의 일종,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좌근위권소장([ruby(左近衛権少将, ruby=さこんえのごんしょうしょう)]): 정5위하
- 권관,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우근위소장([ruby(右近衛少将, ruby=うこんえのしょうしょう)]): 정5위하
- 영외관의 일종,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우근위권소장([ruby(右近衛権少将, ruby=うこんえのごんしょうしょう)]): 정5위하
- 권관, 차관급.
- 궁중 경호 담당.
- 중무소보([ruby(中務少輔, ruby=なかつかさしょう)]): 종5위상
- 조정의 조칙 및 후궁 인사까지 담당하는 사무직 최고위, 차관급.
- 도서두([ruby(図書頭, ruby=ずしょのかみ)]): 종5위상
- 도서료(図書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국가의 장서를 관리하였다. 오늘날 국립도서관장.
- 중무성(中務省) 소속.
- 내장두([ruby(内匠頭, ruby=たくみのかみ)]): 종5위상
- 내장료(内匠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내장료는 관영 공방을 뜻한다.
- 중무성(中務省) 소속.
- 아악두([ruby(雅楽頭, ruby=うたのかみ)]): 종5위상
- 아악료(雅楽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의 음악과 연주자 양성을 담당.
- 치부성(治部省) 소속.
- 에도 막부 후기에 히메지 번을 다스린 사카이 가문의 분파가 받은 관위이다.
- 현번두([ruby(玄蕃頭, ruby=げんばのかみ)]): 종5위상
- 현번료(玄蕃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 내 불사(佛事)의 담당 및 외국 사절 접대.
- 치부성(治部省) 소속.
- 주계두([ruby(主計頭, ruby=かずえのかみ)]): 종5위상
- 주계료(主計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세수의 파악 및 감사.
- 민부성(民部省) 소속.
- 직무와 그 필요성이 중대하여, 율령제가 무너진 지금도 일본 재무성에 주계국과 주계관이란 명칭이 존재.
- 목공두([ruby(木工頭, ruby=もくのかみ)]): 종5위상
- 목공료(木工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궁궐의 건축, 토목, 수리 담당.
- 궁내성(宮內省) 소속.
- 좌마두([ruby(左馬頭, ruby=さまのかみ)]): 종5위상
- 마료(馬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 내 말의 사육 및 조련.
- 미나모토노 요시토모가 받은 관직.
- 우마두([ruby(右馬頭, ruby=うまのかみ)]): 종5위상
- 마료(馬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조정 내 말의 사육 및 조련.
- 모리 모토나리의 관직.
- 병고두([ruby(兵庫頭, ruby=ひょうごのかみ)]): 종5위상
- 병고료(兵庫寮)의 최고 관리자, 장관급.
- 의례 혹은 전쟁에서 쓰이는 조정의 무기의 보관 및 수리 담당.
- 병부성(兵部省) 소속.
- 좌위문좌([ruby(左衛門佐, ruby=さえもんのすけ)]): 종5위상
- 궁중 성문 경호 담당, 차관급.
- 사나다 노부시게의 관직.
- 우위문좌([ruby(右衛門佐, ruby=うえもんのすけ)]): 종5위상
- 궁중 성문 경호 담당, 차관급.
- 좌위병좌([ruby(左兵衛佐, ruby=さひょうえのすけ)]): 종5위상
- 천황 가문의 경호 담당, 좌병위부(左兵衛府) 차관급.
- 우위병좌([ruby(右兵衛佐, ruby=うひょうえのすけ)]): 종5위상
- 천황 가문의 경호 담당, 우병위부(右兵衛府) 차관급.
-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초년 시절의 관직.
- 소납언([ruby(少納言, ruby=しょうなごん)]): 종5위하
- 태정관 관직으로 칙령의 하달과 그에 필요한 어새·태정관 인장의 관리, 판관급.
- 권소납언([ruby(権少納言, ruby=しょうなごん)]): 종5위하
- 권관(権官: 정원 외 관리)의 일종이다.
- 하는 일은 소납언과 다르지 않다.
2.3.8. 정6위·종6위
- 좌대변사([ruby(左大弁史, ruby=さだいべんし)]): 정6위상
- 태정관의 판관급 인사.
- 우대변사([ruby(右大弁史, ruby=うだいべんし)]): 정6위상
- 태정관의 판관급 인사.
- 대내기([ruby(大内記, ruby=だいないき)]): 정6위상
- 중무성(中務省)의 천황의 명령 출납 및 언행 기록 차관급 인사.
- 내선봉선([ruby(内膳奉膳, ruby=ないぜんぶうぜん)]): 정6위상
- 궁내성(宮内省)의 외청인 내선사(内膳司)에 속한 외청 책임자로 판관급.
- 천황과 황궁 내 음식을 담당.
- 수옥정([ruby(囚獄正, ruby=しゅうごくせい)]): 정6위상
- 형부성(刑部省)소속 수옥사(囚獄司)에만 있는 장관급 인사로 죄인 수용-관리-단죄-처벌을 담당.
- 대승([ruby(大丞, ruby=たいじょう)]): 정6위하
- 중무성(中務省)의 천황의 명령 출납 및 언행 기록 판관급 인사.
- 식부대승([ruby(式部大丞 , ruby=しきぶたいじょう)]): 정6위하
- 식부성(式部省)의 판관급 인사.
- 치부대승([ruby(治部大丞, ruby=じぶたいじょう)]): 정6위하
- 치부성(治部省)의 판관급 인사.
- 민부대승([ruby(民部大丞, ruby=みんぶたいじょう)]): 정6위하
- 민부성(民部省)의 판관급 인사.
- 병부대승([ruby(兵部大丞, ruby=ひょうぶたいじょう)]): 정6위하
- 병부성(兵部省)의 판관급 인사.
- 형부대승([ruby(刑部大丞, ruby=ぎょうぶたいじょう)]): 정6위하
- 형부성(刑部省)의 판관급 인사.
- 형부대판사([ruby(刑部大判事, ruby=ぎょうぶだいはんじ)]): 정6위하
- 형부성(刑部省)에만 속한 판관급 인사.
- 대장대승([ruby(大蔵大丞, ruby=おおくらたいじょう)]): 정6위하
- 대장성(大蔵省)의 판관급 인사.
- 국고 담당.
- 궁내대승([ruby(宮内大丞, ruby=くないたいじょう)]): 정6위하
- 궁내성(宮内省)의 판관급 인사.
- 국고 담당.
- 대사인조([ruby(大舎人助, ruby=おおとねりのすけ)]): 정6위하
- 대사인료(大舎人寮)의 판관급 인사.
- 천황의 마차 인도를 담당.
- 원래는 좌우대사인료(左右大舎人寮)로 좌우로 나뉘었으나 808년에 통합되어 대사인료(大舎人寮)가 되었다.
- 대학조([ruby(大学助, ruby=だいがくのすけ)]): 정6위하
- 대학료(大学寮)의 판관급 인사.[41]
- 명경박사([ruby(明経博士, ruby=みょうぎょうはかせ)]): 정6위하
- 아악조([ruby(雅楽助, ruby=うたのすけ)]): 정6위하
- 치부성(治部省)소속의 아악료(雅楽寮)에만 있는 차관급 인사.
- 궁중 음악과 제사를 담당.
- 주계조([ruby(主計助, ruby=かずえのすけ)]): 정6위하
- 민부성(民部省)소속 주계료(主計寮)에만 있는 차관급 인사로 세입-세출을 관장.
- 주세조([ruby(主税助, ruby=しゅぜいのすけ)]): 정6위하
- 민부성(民部省) 소속 주세료(主税寮)에만 있는 차관급 인사.
- 미곡(米穀)의 출납, 여러 지방의 모심기 따위를 관장.
- 직부정([ruby(織部正, ruby=おりべのしょう)]): 정6위하
- 대장성(大蔵省) 소속 직부사(織部司)에만 있는 장관급 인사.
- 직물-염색을 관장.
- 탄정소충([ruby(弾正少忠, ruby=だんじょうしょうちゅう)]): 정6위하
- 탄정대(弾正台)에만 있는 하판관(下判官)급 인사.
- 관리의 죄악을 규탄하고 풍속 단속을 관장.
- 수리소진([ruby(修理少進, ruby=しゅうりしょうしん)]): 정6위하
- 수리직(修理職)에만 있는 하판관(下判官)급 인사.
- 수리·조영(造營)을 관장.
- 감해유사판관([ruby(勘解由使判官, ruby=かげゆしじょう)]): 정6위하
- 감해유사(勘解由使)에만 있는 판관급 인사.
- 국사, 공문서 관리 위조 탐별을 관장.
- 병고조([ruby(兵庫助, ruby=ひょうごのすけ)]): 정6위하
- 병고료(兵庫寮)에만 있는 장관급 인사.
- 무기 생산, 관리를 관장.
- 좌마조([ruby(左馬助, ruby=さまのすけ)]): 정6위하
- 좌마료(左馬寮)에만 있는 차관급 인사.
- 말(馬) 관리 및 사육 등을 관장.
- 우마조([ruby(右馬助, ruby=うまのすけ)]): 정6위하
- 우마료(右馬寮)에만 있는 차관급 인사.
- 말(馬) 관리 및 사육 등을 관장.
- 좌근위장감([ruby(左近衛将監, ruby=さこんえのしょうげん)]): 종6위상
- 좌근위부(左近衛府)에만 있는 판관급 인사.
- 궁중 경비, 천황 행차 경호, 선양문(宣陽門)과 음명문(陰明門) 경비, 천황 경호 임무 총괄.
- 정5위·종5위급 인사가 임명되면 좌근대부([ruby(左近大夫, ruby=さこんのたいふ)])라고 불렸다.
- 우근위장감([ruby(右近衛将監, ruby=うこんえのしょうげん)]): 종6위상
- 우근위부(右近衛府)에만 있는 판관급 인사.
- 궁중 경비, 천황 행차 경호, 선양문(宣陽門)과 음명문(陰明門) 경비, 천황 경호 임무 총괄.
- 정5위·종5위급 인사가 임명되면 우근대부([ruby(右近大夫, ruby=うこんのたいふ)])라고 불렸다.
2.3.9. 정7위·종7위
- 대외기(大外記): 정7위상. 태정관 관직으로 소납언의 서기역, 주전급.
- 대주령(大主鈴): 정7위하. 중무성 관직으로 역령[43]이나 인감의 출납·급부를 담당.
- 소외기(少外記): 종7위상. 태정관 관직으로 소납언의 서기역, 주전급.
- 사생(史生). 태정관 관직으로 소납언의 하급 서기역
- 시부(使部). 태정관 관직으로 잡무 담당
- 대전약([ruby(大典鑰, ruby=だいてんやく)]): 종7위하. 중무성 관직으로 중무성 창고의 열쇠 관리를 담당.
2.3.10. 정8위·종8위
- 소주령(小主鈴): 정8위상. 중무성 관직으로 역령이나 인감의 출납·급부를 담당.
- 소전약([ruby(小典鑰, ruby=しょうてんやく)]): 종8위상. 중무성 관직으로 중무성 창고의 열쇠 관리를 담당.
- 산사([ruby(算師, ruby=さんし)]): 종8위하. 민부성, 대재부, 수리직, 궁내성의 관직. 각 도시에서 들어오는 세금과 그 지출에 대한 계산을 담당. 수리직의 산사는 영외관이다.
2.3.11. 대초위·소초위
대초위와 소초위는 정·종8위의 아래에 있는 관위로 한국식으로 따지자면 잡직[44]과 비교해볼 수 있겠다. 메이지 2년(1869년) 전후로 상하의 구별이 없어짐과 동시에 초위에 속하는 관직도 사라졌으며 영전으로의 위계제가 확립되는 메이지 20년의 서위 조례에서 폐지되었다가 다이쇼 15년의 칙령 제325호 위계령에서 다시 한번 초위의 폐지가 확인되었다.- 도문사([ruby(挑文師, ruby=あやとりのし)]): 대초위하. 대장성 직부사 소속. 고급직물인 비단의 문양 작성과 기술지도를 담당.
3. 지방관
- 태수([ruby(太守, ruby=たいしゅ)]): 국(国)의 행정관으로, 중국의 관직인 태수에서 영향을 받았다. 시대마다 조금씩의 차이는 있었지만 주로 국사([ruby(国司, ruby=こくし)]) 및 수호([ruby(守護, ruby=しゅご)]) 등이 태수라고 불리었다.
- 국사([ruby(国司, ruby=こくし)]): 국의 행정관으로, 등급에 따라 수([ruby(守, ruby=かみ)]), 개([ruby(介, ruby=すけ)]), 연([ruby(掾, ruby=じょう)]), 목([ruby(目, ruby=さかん)])의 사등관으로 나뉘었다.
- 목대([ruby(目代, ruby=もくだい)]): 헤이안 중기부터 본래 지방으로 부임해야될 국사들이 부임하지 않고 개인적으로 내려보낸 대리인들.
- 군사([ruby(郡司, ruby=ぐんじ)]): 국 밑의 행정구역인 군(郡)의 행정관으로, 임명직이었던 국사와는 다르게 세습직이었다. 등급에 따라 대령([ruby(大領, ruby=だいりょう)]), 소령([ruby(少領, ruby=しょうりょう)]), 주정([ruby(主政, ruby=しゅせい)]), 주장([ruby(主帳, ruby=しゅちょう)])으로 나뉘었다.
- 수령([ruby(受領, ruby=じゅりょう)]): 현지에 부임한 지방 행적의 실무자직.
- 재청관인([ruby(在庁, ruby=ざいちょう)][ruby(官人, ruby=かんにん)]): 지방 행정 실무에 종사한 지방 관료의 총칭
4. 역직
관등에서 임시직위를 말하거나 가마쿠라 막부 이후 쇼군 이하의 직책들을 언급하는 자리이다.- 정이대장군([ruby(征夷, ruby=せいい)][ruby(大将軍, ruby=たいしょうぐん)]): 막부의 최고직, 통칭 '쇼군'. 영외관은 정해진 품계가 없다. 다만 그 벼슬에 있는 사람이 보통 겸직한 율령제하 관위 등을 기준으로 그때그때 그에 맞는 위계가 내려진다. 정이대장군의 위계는 진짜 그때그때 다른데 미나모토노 요리토모는 정2위, 아시카가 요시미츠나 대부분의 에도 막부 쇼군들은 종1위까지 했다. 정1위는 사후 추서 형식으로 받는 경우가 많았다.
- 탐제([ruby(探題, ruby=たんだい)]): 본래 일본 불교계의 직책이었지만 막부에서 정무 또는 지방 통치를 담당하는 직위가 되었다. 가마쿠라 막부에서 쇼군을 대신해 실권을 휘두른 싯켄(집권)과 그 보좌역인 렌쇼(연서)도 단다이(탐제)에 포함된다. 저 두 직위 외에 가마쿠라 막부의 단다이로는 진제이 단다이,[45] 나가토 단다이,[46] 로쿠하라 단다이[47] 셋이 있었다. 무로마치 막부에서는 오슈 단다이,[48] 우슈 단다이,[49] 주고쿠 단다이, 시고쿠 단다이, 규슈 단다이 다섯이 있었다. 이들은 슈고직보다 더욱 막강한 권한이 부여된 특수 지방관이었다.
- 가로([ruby(家老, ruby=かろう)]): 무가의 가신들중 최고 직위.
- 봉행([ruby(奉行, ruby=ぶぎょう)]): 본래 헤이안 시기 임시직으로 만들어졌지만 가마쿠라 시대 이후 막부나 수호가 임명하는 중견 간부로 바뀌었다.
- 군대([ruby(郡代, ruby=ぐんだい)]): 대관 중에서도 넒은 영역을 지배하는 이들.
- 대관([ruby(代官, ruby=だいかん)]): 본래는 국사의 목대, 수호의 수호대처럼 지방관을 대리하는 이들을 통틀어 부르던 말이지만 무로마치 이후 막부 직할지에 임명된 이들을 가리키게 되었고 전국시대부턴 다이묘들도 자신들의 직영지에 대관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 수호([ruby(守護, ruby=しゅご)]): 가마쿠라 시대 이후 국사를 대신하여 국을 통치하였던 지방관. 원래는 치안만을 담당하는 자리였지만 점차 권한이 늘어나다 무로마치 시대부터 자치권을 얻으며 반독립적인 지방세력으로 대두하였고 이들 중 일부가[50] 센고쿠 다이묘로 발전한다. 가장 대표적인 슈고 다이묘로서 에도 시대 말까지 존속하고 메이지 유신에 기여한 가문이 사츠마의 시마즈씨다.
- 지두([ruby(地頭, ruby=じとう)]): 본래 헤이안 시대 지방에서 자생적으로 발생한 유력자나 중앙 권력자들의 장원 관리자로 시작했지만 가마쿠라 막부 이후 막부에게 임명되는 지위가 된다.
- 피관([ruby(被官, ruby=ひかん)]): 본래 고대 율령제 시기 상급 관청에 부속된 하급관청이나 그 관리들을 의미했지만 무가 정권 성립 이후엔 수호들 밑에 있는 하급 영주들을 뜻하게 되었다.
- 국인([ruby(国人, ruby=こくじん)]): 남북조 시기부터 지두층을 대신해 지방에서 실질적인 지배자로 성장한 유력자 계층으로 전국시대에 들어서면서 대부분은 다이묘들의 가신단으로 변했지만 일부는 다이묘로 성장해 자립했다. 국인들중에서 막부나 수호들에게 반항적인 이들을 악당이라 불렀다.
4.1. 가마쿠라 막부
- 집권([ruby(執権, ruby=しっけん)]): 가마쿠라 막부 중반부터 쇼군을 대신해 실권을 휘둘렀던 관직으로, 호조씨가 역임하였다. 사가미국의 카미(守)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
- 연서([ruby(連署, ruby=れんしょ)]): 집권의 보좌역으로 집권 다음가는 관직이었다. 역시 호조씨에서 독점했다. 무사시국의 카미(守)를 겸하는 경우가 많았다.[51]
- 평정중([ruby(評定衆, ruby=ひょうじょうしゅう)]): 원래는 여러 어가인 집안들의 합의를 이끌어 내기 위해 설치됐으나, 가마쿠라 막부가 중기를 넘어가면서 호조 가문의 득종이 대를 이어 실권을 장악하면서 유명무실한 존재가 된다. 무로마치 시기에는 형식상으로만 존속했으며 그마저도 권력기구에서 개인의 관직명으로 변질되었다.[52]
- 득종([ruby(得宗, ruby=とくそう)]): 호조씨의 수장으로 호조 도키요리 이전에는 집권이 겸임했으나 그 이후부터는 득종이 집권 자리를 후계자에게 넘기고 상황처럼 행동하며 집권조차도 허수아비로 만들고 실권을 장악했다.
- 어가인([ruby(御家人, ruby=ごけにん)]): 가마쿠라 시기엔 쇼군과 직접 주종관계를 맺은 이들(호조씨 등)을 가리켰으나 에도 시대엔 하타모토 다음의 하급무사를 가리키게 되었다.
- 어내인([ruby(御内人, ruby=みうちびと)]): '미우치비토'라고도 부르며 호조씨와 주종관계를 맺은 이들을 가리킨다. 신분상으론 어가인들보다 낮은 존재지만 호조씨가 막부 권력을 장악하면서 그 밑에서 실권을 휘두르는 존재들이 된다. 이중 어내인의 우두머리를 내관령(内管領)이라고 칭했다.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나가사키 엔키(長崎円喜).
4.2. 무로마치 막부
- 관령([ruby(管領, ruby=かんれい)]): 무로마치 막부의 쇼군을 보좌하는 동시에 일본 서부의 통치를 총괄하는 직책. 주로 호소카와 가문에서 담당했지만 시바나 하타케야마 가문 등에서도 임명되었다.
- 관령대([ruby(管領代, ruby=かんれいだい)]): 호소카와씨가 관령직을 독점하면서 전국시대에 관령 임무를 대신 수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 공방 (公方)
- 가마쿠라 공방([ruby(鎌倉公方, ruby=かまくらくぼう)]): 일본 동부지방을 다스리는 총독으로 가마쿠라부(鎌倉府)의 수장.
- 관동관령([ruby(関東, ruby=かんとう)][ruby(管領, ruby=かんれい)]): 가마쿠라 공방의 보좌역으로 주로 야마노우치나 오기가야스 우에스기 가문에서 역임하여 주로 고즈케와 무사시 지역을 직접 다스렸다. 시모즈케나 시모사, 가즈사 지역을 다스린 가마쿠라 공방인 방계 아시카가 가문과는 협력 또는 대립하였다.
- 집사([ruby(執事, ruby=しつじ)]): 막부의 재정을 담당한 정소(政所)와 소송과 문서 기록을 담당한 문주소(問注所) 수장직.
- 사직([ruby(四職, ruby=ししき)]): 막부의 군사, 치안 조직인 사무라이도코로(侍所)의 수장직을 교대로 역임한 4가문. 아카마쓰, 잇시키, 교고쿠, 야마나 4가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 칠두([ruby(七頭, ruby=しちとう)]) 관령과 함께 막부의 정치에 참여한 7가문. 위의 사직 가문에 더해 만도코로(政所)의 수장직을 역임한 이세 가문, 간토 간레이직을 역임한 우에스기 가문, 그리고 토키 가문이 포함된다.[53]
- 봉행중([ruby(奉行, ruby=ぶぎょう)][ruby(衆, ruby=しゅう)]): 막부 직속 문관직.
- 봉공중([ruby(奉公, ruby=ほうこう)][ruby(衆, ruby=しゅう)]): 막부 직속 무관직.
- 수호대([ruby(守護, ruby=しゅご)][ruby(代, ruby=だい)]): 수호의 대리인으로서 임명되었다. 중앙 정부로부터 임명되는 수호와 달리, 수호대는 지방 영주들에 의해 임명되었다.
4.3. 아즈치모모야마 시대
- 오대로([ruby(五大老, ruby=ごたいろう)]): 도요토미 정권에서 히데요리를 보좌하기 위해 만들었다. 오대로라는 호칭은 후대에 붙은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 오봉행([ruby(五, ruby=ご)][ruby(奉行, ruby=ぶぎょう)]): 도요토미 정권 실무 관료진들중 최고위직. 오봉행이라는 호칭은 후대에 붙은 것으로 자세한 내용은 항목 참조
4.4. 에도 막부
- 대로([ruby(大老, ruby=たいろう)]): 에도 막부에서 비상설직으로 최고위직이었다. 격 문제로 노중을 맡을 수 없는 일부 거대 후다이 가문 다이묘가 임명되었다.
- 노중([ruby(老中, ruby=ろうじゅう)]): 막부에서 임명한 고위직. 막부의 정무를 담당한다.
- 측용인([ruby(側用人, ruby=そばようにん)))]): 쇼군의 비서실장 격인 직책이다. 야나기사와 요시야스(柳沢吉保)가 대표적.
- 약년기([ruby(若年寄, ruby=わかどしより)]): 노중을 보좌하고 하타모토를 감독하던 관직이다.
- 교토 소사대([ruby(京都所司代, ruby=きょうと しょし-だい)]): 교토 정봉행과 함께 교토의 정무를 담당하는 관직.[54]
- 성대([ruby(城代, ruby=じょうだい)]): 쇼군을 대리해 성주인 쇼군이 부재중인 성을 관리하는 관직.[55]
5. 그 외
[1] 형식상으로는 선하, 즉 조서를 받고 정권을 인정받았는데, 사실상 도장찍기에 가까웠다.[2] 율령은 중국에서 수·당대에 완성한 국가적 성문법 체계로, 고대 동아시아의 전반적인 중앙집권 행정 체계를 뜻한다. 우리가 흔히 쓰이는 율령제라는 단어는 율령격식(律令格式)을 줄인 표현이다. 율(律)은 형법, 령(令)은 공사 제반의 제도에 관한 규정, 격(格)은 율령을 수정 증보한 명령, 곧 칙령(勅令)의 편집, 식(式)은 율령의 시행 세칙을 뜻한다.[3] 고구려에서는 소수림왕 3년(373)에, 신라에서는 법흥왕 7년(520)에 율령을 반포했다.[4] 단, 중국에서 율령제가 없어진 것은 아니고 율만 존재했던 청나라를 제외하고 수나라부터 명나라가 멸망할 때까지 1000년간 율령격식이 모두 존재하였다. 이 문서에서 율령제는 수, 당의 율령제를 뜻한다.[5] 태정관(太政官)·신기관(神祇官) 등 2관, 태정관 휘하 중무성(中務省)·식부성(式部省)·치부성(治部省)·민부성(民部省)·병부성(兵部省)·형부성(刑部省)·대장성(大蔵省)·궁내성(宮内省) 등 8성을 아울러 이른다.[6] 막부 역직으로 기준을 따지면 우에스기 겐신은 결국에는 관동관령(간토간레이)이 되어 사실상 간토 지방의 지배자 타이틀까지 차지하지만 다케다 신겐은 그 아래 수호(슈고)에 불과했다. 즉, 이 두 라이벌은 조정 기준 서열과 막부 기준 서열이 다른 셈이다.[7] 그나마도 태정대신을 사양하고 받은 관위다.[8] 그것도 가장 격이 높은 섭관가 중에서도 후지와라 북가의 종가 중의 종가인 고노에 가문의 양자가 되었다. 고노에(近衛, 근위)는 천황가와 황적이탈하지 않은 가까운 황족을 제외하고는 가장 격이 높은 가문이다.[9] 허나 이런 관위를 얻으려면 당연히 자신이 겐지, 헤이시 등과 연이 있다는 것을 증명해야 했고 때문에 사칭이 잦았다. 대표적으로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헤이시를 칭하기도 후지와라(토우지)를 칭하기도 했다. 한국에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풍신수길 뿐만 아니라 평수길로도 알려진 것도 이 때문이다.[10] 리스트 이 문서에는 무사들이 주로 자칭하던 관위명들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했다.[11] 그래서 보통은 이런 이름에 해당되는 휘는 거의 사용하지 않고 대신 자, 호, 아명 등을 불렀다. 또한, 이 중에서 자도 친구사이 같이 아주 친한 사람 사이에만 쓸 수 있고, 호도 일종의 격식 표현이었다.[12] 예를 들어 마초도 유비에게 귀순한 후 자로 부르는 무례를 범하다 죽을 뻔했다. 비슷하게 유비도 조조가 여포를 처형할 때 여포의 이름을 그대로 부른 반면 여포가 죽인 동탁과 정원은 동 태사와 정 건양으로 불러서 이들의 격을 높였다. 또한 조조도 여포가 유비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는 것을 금했다.[13] 이것과 관련되어 예시를 든다면 이순신 장군의 경우, 이름은 순신이지만 만일 현대인이 타임머신 타고 이순신 장군을 만나서 '이순신 장군님' 이라고 하면 심각한 무례이다. 당시 기준으론 '통상대감'(양반)/'통제사또'(일반 백성)/통상대감마님(종) 이라는 식으로 불러야 한다. 이 경우에 이순신 장군의 이름을 그냥 말할 수 있는건 조선 국왕 같이 명백히 상급자가 말하는 경우나, 상소문에서 압존법을 쓰는 경우이다. 예를 들어 이순신을 변호하기 위해 정탁이 올린 신구차에서 정탁은 이순신을 '이모'라 돌려 썼지만 원균을 언급할때는 그대로 원균이라 썼다.[14] 내대신의 약칭이 내부(内府)였다. 메이지 유신 후 내무대신의 약칭은 내상으로 구분한다.[15] 중서성(中書省)·문하성(門下省)·상서성(尚書省)[16] 가잔 천황의 아들 노부자네 왕이 신적강하해 세운 카잔 겐지의 적류이다.[17] 시라카미 백왕가로 불였다. 유신 후에는 자작위를 받는다.[18] 다만 7개 사무과중 필두, 즉 맨 앞에 놓인다.[19] 한국의 외청에 상당[20] 장관에서 주전으로 갈수록 하위직이다. 다만 어디까지나 소속된 관청 내에서의 구분이라 소속이 다르면 관직에 따라 차관이 장관보다 관위가 높은 경우는 흔하고 종종 판관이 장관보다 관위가 높은 경우도 있었다.[21] 가령, 메이지 유신 이후 공작에 추서된 시마즈, 모리 가문 당주, 거의 대부분의 도쿠가와 막부 쇼군, 심지어 일개 다이묘였던 도쿠가와 나리아키 같은 인물도 받았다.[22] 앞서 사후에 정1위를 받은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장녀이자, 몬무 천황의 부인, 쇼무 천황의 어머니로, 쇼무 천황이 즉위한 724년에 받았으니, 천황이 자신의 즉위 직후 어머니인 태후에게 준 셈이다.[23]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장남이자, 이후 생전에 정1위를 받는 후지와라노 나카마로의 아버지이다. 무치마로의 경우, 중병으로 죽기 전날에 받았기 때문에 사실상 사후추증에 가까운 셈이다.[24] 후지와라노 후히토의 손자이자, 나카마로의 조카. 770년 고켄 천황이 사망하자, 후계분쟁에 개입해 고닌 천황을 세운 공으로 받았다.[25] 산조 사네토미는 그나마 죽기 바로 직전에 유신시대의 유일한 태정대신으로서 사실상의 일인지하 만인지상의 재상을 맡았음에도 기록상 이토 히로부미 초대 내각총리대신에게 밀린 반대급부로 정1위를 주었을 뿐이다. 유신 후라 사후추증이나 마찬가지로 상징적인 의미뿐이었다. 다만 산조는 태정대신을 지낸 후 초대 총리는 되지 못한 대신 2대 구로다 기요타카 총리가 사임한 후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취임할 때까지 잠시 총리 권한대행을 한 적은 있다.[26] 諸事皆先關白光 然後奏御天子[27] 요로령의 직원령에서 태정대신을 "한 사람 사범으로서 사해의 모범이 된다. 나라를 다스리고 도를 논하며 음양을 섭리한다. 적당한 사람이 없을 경우에는 비워 둔다(師範一人、儀形四海、経邦論道、燮理陰陽、无其人則闕)."고 규정하였다. 이 구절에서 마지막 두 자를 따와서 태정대신을 측궐(則闕)이라고도 불렀다.[28] 도쿠가와 가문도 이와 동급으로 취급되었다.[29] 따라서 에도 시대에는 태정대신직 역시 오고쇼가 승진을 요구하는 경우를 제외하면 사실상 오섭가의 독점 체제가 되었다.[30] 좌대신, 우대신, 내대신[31] 초대와 2대, 11대인 이에야스, 히데타다, 이에나리만이 태정대신이었고 이후에는 좌·우대신에 머물렀다.[32] 당시 우대신인 히데요리는 전임 우대신인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후임이었다. 참고로 이에야스는 위계는 종1위로 정2위인 히데요리보다 한 단위 높았다.[33] 그 뿐 아니라 히데요리가 태정대신 직을 받으면 명목상으론 도쿠가와 쇼군가보다 위에 서게 된다. 때문에 이를 허용했다가는 도쿠가와 쇼군가를 컨트롤하는 도요토미 태정대신·관백 가문이란 그림이 나올 수도 있었다.[34] 도요토미 정권 당시에는 공가와 무가의 관위체계가 분리되어 있지 않았고, 히데요시는 주요 다이묘 가문들을 청화가의 격으로 대우하며 관위를 하사하였기에 관위 수요가 급증했고, 그 결과 공가 쪽에서 대신에 오를 요건을 갖춘 사람이 없는 사태가 벌어졌다.[35] 권(權)의 신자체이다. 우리는 흔히 권(權)을 '권력'이란 뜻으로 쓰지만, 벼슬 이름 앞에 권(權) 자를 붙이면 임시직, 또는 대리직이란 뜻이다.[36] 혹은 だざいのそつ[37] 이 지역들을 친왕임국(親王任国)이라 한다.[38]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좌천된 후 죽기 전까지 있던 직위[39] 다만 좌경대부보다는 인기가 덜한 관직이었다. 좌경대부 또한 사실상 명예직이긴 했지만 전국시대에는 이미 교토 서쪽이 인근 하천의 잦은 범람으로 사람이 살지 않는 늪지대가 된지 오래다시피한 상태였다.[40] 이 대보라는 직위는 1860년대에 각 성의 수장의 명칭으로 몇년간 쓰였다. 그 전까지는 ㅇㅇ경으로 1890년대가 되면 ㅇㅇ대신으로 바뀌었다.[41] 정원 외에도 권조(権助)라는 동급 직종이 한 명이 특별직으로 더 있기도 했다.[42] 원래 명경(明經)이란 한잣말은 유학의 경서에 해박하다는 뜻이다. 여기에 '박사'란 단어를 붙였으니 직책명의 의미가 뻔하다.[43] 관리가 출장을 떠날 때 지급하는 종으로 용도는 역참에서 말을 빌리는 것으로 한국의 마패와 같았다.[44] 흔히 말하는 잡과시험에 급제되어 임명되는 체아직 정직의 기술관이 아닌 취재로 뽑히는 체아직 잡직의 문·무·기술관으로 정직과는 품계의 명칭이 달랐던데다 정6품을 초과하는 승진이 불가능했고 운이 좋아 정직으로 채용되었을 때에도 1품을 강등시켰다. 관복은 흉배가 없는 단령은 착용 가능했으나 사모와 품대의 착용은 불가능했다.[45] 규슈 통치 담당.[46] 나가토국, 또는 그 남쪽의 스오국까지 담당하며 주고쿠 서부의 통치 및 방어를 담당했다. 후일에는 그 권한이 확대되어 주고쿠 전역을 담당하기도 했다.[47] 교토 및 야마시로국의 통치와 조정 감시 담당. 로쿠하라는 교토의 구역명으로 과거 헤이케 정권 타이라노 키요모리의 저택이 있던 곳이다. 로쿠하라 단다이는 싯켄과 렌쇼 다음가는 중직으로서 그 업무가 특히 막중하여 2인이 파견되어 각각 교토 남북을 나누어 관리했다. 남쪽 담당은 미나미카타(南方), 북쪽 담당은 키타카타(北方)로 칭해졌다.[48] 무츠국(도호쿠 동부) 통치 담당.[49] 데와국(도호쿠 서부) 통치 담당.[50] 전국 다이묘들의 출신 성분은 굉장히 다양하다. 원래 슈고였던 경우도 있고 슈고의 가신이거나 아니면 지방과 연고가 없는 외부인인 경우도 있다.[51] 때문에 집권과 함께 양국사로 통칭되기도 했다.[52] 아시카가 일문인 키라씨 또는 하타케야마씨가 맡았다.[53] 롯가쿠와 이마가와도 칠두와 사직에 포함되기도 한다.[54] 교토 정봉행은 하타모토가, 교토 소사대는 후다이 다이묘가 임명되는 자리였다.[55] 오사카, 슨푸, 교토(니조 성), 후시미(1619년에 폐지)에 배치되었다. 이중 오사카 성대는 후다이 다이묘가, 나머지는 하타모토가 임명되는 자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