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르나크 신전군 일대. 남쪽이 룩소르 시내 중심부이다 |
카르나크 신전 |
룩소르 신전과 카르나크 신전의 약도. 왼쪽이 북쪽이다 |
아랍어: معبد الكرنك
영어: Karnak Temp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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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몬 대신전의 열주 |
카르나크는 중왕국 ~ 프톨레마이오스 왕조까지 2000년에 걸쳐 세워진 신전으로 유명하나, 대부분은 건축물은 신왕국 때의 것이다. 중왕국 시대에는 테베의 주신인 아문을 모시는 작은 신전만 있었다가, 신왕국 시대에 들어 아몬이 주신이 됨과 함께 대대적으로 확장되기 시작하였다. 건축왕 람세스 2세 이전에 하트셉수트와 투트모스 3세를 비롯하여. 그 이후 람세스 3세 등 신왕국의 유명한 파라오들이 수백년에 걸쳐 아몬 대신전을 중심으로 엄청난 규모의 대역사를 벌였다. 비록 아톤을 유일신으로 섬기려는 '종교개혁' 군주 아멘호테프 4세에 의해 파괴되었으나 후계자인 투탕카멘 대부터 복원되었고, 람세스 2세 시기에 대대적으로 증축되었다. 후자는 히타이트를 상대로 싸웠던 카데시 전투의 전승 기념비와 장기 집권의 상징물을 더하였다.
4세기 로마 제국이 기독교를 국교화하고 356년 이교 신전 철폐령을 내리자 카르나크는 버려졌다. 아문 대신전 만큼은 콥트 정교회의 성당으로 개조되어 현재까지도 콥트어 명문이 남아있다. 다만 이 역시 오래가지 못하고 재차 버려졌고, 점차 사람들의 기억에서 사라져 모래 속에 반 이상 파묻혔다. 그러다 1668년 카푸친 수도회의 선교사들이 방문하여 인근 아랍 지명인 '엘 카르나크'라 묘사하며 유럽에 다시 알려졌고, 18세기의 탐험가들과 19세기 초엽 프랑스 학자들에 의해 조사되었다. 그리고 1895년 프랑스 학자 조르주 루그랑의 주도로 본격적인 발굴이 시작되었다. 다만 발굴 중에도 도굴꾼들이 들끓자 이집트 고고국은 카르나크 담당국을 설치하고 보수와 복원에 나섰다. 한세기에 걸친 조사에도 아직 전체의 10%만 발굴되었다고 한다.
2. 역사
2.1. 고대 이집트
고대 이집트 신왕국 시절의 3D 복원도.
카르나크 신전은 이집트 신왕국 시대부터 본격적인 두각을 드러낸 신전이다. 신왕국 시절부터에서야 이집트의 대표적인 종교 중심지였지, 그 이전인 고왕국, 중왕국 시절에는 별다른 주목을 받지 못했던 신전이었던 것이다. 중왕국 시대에 해당하는 제11왕조 시대에 처음으로 카르나크에 대한 언급이 나오지만 그마저도 별다른 중요성은 없다. 당시의 카르나크 신전은 조그마한 군소 신전에 불과했으며, 테베의 수호신인 몬투를 모시는 소규모 사원을 제외하면 딱히 볼만한 것도 없었다. 제11왕조 후반에 들어서 아문 라를 모시는 중심 사원이 들어섰고 점차 중왕국 시대에 걸쳐 조금조금씩 팽창해나갔다.
신왕국 들어서 카르나크 신전은 이집트 종교의 최고 중심지이자 최대 규모의 사원으로 급부상했다. 신왕국의 첫 왕조인 제18왕조 시대에 카르나크 신전은 크게 증축 작업을 거듭했는데, 아멘호테프 1세는 방주의 사원과 탑문을 봉헌했으며 투트모세 1세는 신전 주변에 거대한 벽을 둘렀다. 하트셉수트 여왕은 14개의 파피루스 모양의 기둥들과 오벨리스크를 건설했고 투트모세 3세는 주위에 벽을 쳐 이를 가렸다. 특히 투트모세 3세는 카르나크 신전에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으로 유명한데, 덕분에 거대한 탑들이 들어서고 근처에 신성한 호수[2]가 넓게 파내 만들어졌다. 투트모세 3세가 워낙에 많은 건물들을 연이어 세우면서 신전의 크기는 거의 50%나 증가했다. 또한 신전의 중심부를 구성하는 '투트모세 3세의 연회장'이 이때 지어지기도 했다.
이후 카르나크 신전은 아톤 신앙을 주창했던 아케나톤 시대에 들어 약간 쇠퇴하는 모습을 보였다. 파라오 아케나톤이 대놓고 기존 종교를 부정하고 아톤 위주의 종교 정책을 피면서 상대적으로 카르나크 신전의 중요도가 떨어졌던 것. 이집트의 수도는 아마르나로 옮겨졌고, 카르나크의 신관들은 아마르나의 태양 신관들에 비해 크게 홀대받았다. 그러나 아케나톤이 죽자 아마르나가 버려지고 아톤 신앙이 몰락하며 카르나크 신전은 다시 부흥기를 맞는다. 아케나톤의 후계자인 투탕카멘과 호렘헤브는 아톤 신앙을 폐기, 대신 카르나크 신전에 건축물들을 봉헌하며 기존 종교에 대한 예우 정책을 폈고 카르나크 신전은 증축에 증축을 거듭했다.
신왕국 시대의 전성기인 제19왕조에 들어 카르나크 신전은 폭발적인 확장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제18왕조 시대에 착공에 들어간 대열주실이 이때 완공되었다. 세티 1세와 건축왕 람세스 2세가 연달아 즉위하면서 카르나크 신전에 대해 많은 관심을 쏟았고 특히 람세스 2세는 자신의 승리와 업적들을 새긴 기념비와 벽화들을 수도 없이 많이 남겼다. 람세스 2세의 후계자 메르넵타 역시 바다 민족들과 싸운 자신의 공로를 카르나크에 새겨놓아 포로와 전리품들을 싣고 테베로 귀환하는 왕의 모습을 새겼다. 메르넵타의 아들 세티 2세도 제 업적을 카르나크에 남기는 데에 열심이었다. 물론 람세스 2세 시절의 전성기만큼의 국력이 아니었기에 이전처럼 거대한 건축물들을 따로 세우거나 확장 작업을 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이름을 새긴 2개의 작은 오벨리스크들을 두 번째 탑문 바로 뒤에 세우거나 방주의 신전을 따로 건립하기도 했다. 카르나크 신전이 관리하는 도시와 인구는 최전성기에는 65개와 8만여 명에 이르렀고 조선소까지 가지고 있었다. 신왕국 시대의 파라오들은 모두 카르나크 신전에서 즉위식을 하였다.
이집트 신왕국도 최전성기인 제19왕조가 지나면서 점차 쇠퇴기에 접어들었다. 제19왕조의 뒤를 이은 제20왕조 시대에 이르자 국력 쇠퇴와 동시에 카르나크를 포함한 이집트 전역에서 건축 프로젝트들의 수나 규모가 확연히 줄어들기 시작했다. 그나마 최후의 위대한 파라오라 불리는 람세스 3세가 자신의 신전을 따로 하나 짓거나 콘수 신전을 지었고, 후계자 람세스 4세가 꽤나 큼직한 방주 신전을 하나 더 지었다. 그러나 람세스 4세가 죽은 이후부터는 더이상 별다른 개축 작업이 이루어지지 않게 된다. 이미 이집트가 지나칠 정도로 빠른 속도로 쇠락하며 신전이고 뭐고 더이상 무언가를 해낼 여력이 없었기 때문. 그와중에 카르나크 신전을 중심으로 한 아문 신관들의 힘은 갈수록 강해졌고, 나중에는 파라오와 맞먹을 정도의 권위를 움켜쥐게 되었다. 아문 신관들은 파라오보다 자신들의 모습을 신전에 새기기를 선호했다. 신왕국 말기에는 람세스 9세의 모습과 아문 대신관 아멘호테프[3]를 거의 똑같은 사이즈로 묘사할 정도로 파라오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4]
신왕국이 무너지고 혼란기인 제3중간기 시대가 도래하면서 카르나크 신전에 새로운 건물들이 새로 올라가는 일은 없었다. 파라오들은 카르나크에 기념물을 짓는 것 따위에 신경을 쓸 여유가 없었다. 그나마 이집트 남부 일대를 통치하던 아문 신관들의 핵심 중심지가 카르나크 신전이었기에 다른 중소 도시들이나 사원처럼 약탈당하거나 파괴당하는 일은 없었지만, 신전은 천천히 쇠락해갔고 옛날처럼 대규모 예식이 치러지지도 않았다. 아문 신관들이 소소하게나마 조금씩 장식을 추가하거나 벽화를 지우고 새롭게 내용을 새기는 일을 반복하기는 했지만 전성기 시절 이집트만큼의 영광을 누리지는 못했다. 그나마 '흑인 왕조'라고도 불리는 제25왕조의 파라오 타하르카가 분열된 이집트를 통합한 후, 마지막으로 카르나크 신전에 개축 공사를 시도하긴 했다. 그러나 이마저도 옛날에 비하면 훨씬 초라한 수준이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버려졌다.
말기 왕조 시대에 넥타네보 1세가 카르나크 전체를 둘러치는 거대한 성벽을 세웠다. 이미 이집트가 지나치게 혼란스러워지면서 더이상 카르나크 신전이라 할지라도 적들이나 약탈자들의 침입으로부터 안전하지 않았기 때문. 이후 들어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는 이전만큼 카르나크에 큰 신경을 쏟지 않았다. 몇몇 장군들이나 유력자들이 투트모세 3세의 사원을 재증축하고 봉물을 헌납하긴 했지만 카르나크 신전은 조금씩 폐허로 전락해갔다. 신관들은 하나씩하나씩 카르나크를 떠나갔고,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쇠퇴와 함께 카르나크 신전도 같이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희미해져만 갔다. 프톨레마이오스 왕조 멸망 후 로마 제국이 이집트를 속주로 삼아 통치하게 되었고, 380년에 테오도시우스 1세가 기독교를 국교로 정한데 이어 391년에 이교 신전 철폐령을 내리며 카르나크는 완전히 버려졌다.[5]
2.2. 발굴 작업
카르나크 신전이 로마 제국 이후로 영락해 완전히 버려졌을지언정 애초에 워낙 크고 거대한 신전이었던 덕분에 완전히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지지는 않았다. 애초에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기에는 너무나 거대한 규모의 건축물이었고, 건물의 규모나 높이도 상당했기 때문에 사람들은 끊임없이 카르나크 신전의 폐허를 찾아왔다. 덕분에 로마 제국 시대에는 카르나크 유적 사이사이에 조그마한 소규모 콥트 교회들이 들어서 예배를 드리기도 했고, 이 때문에 현재 카르나크 유적 곳곳에 성화나 그리스도의 모습이 일부 남아있기도 하다.동로마 제국이 이집트 일대를 이슬람 세력에 빼앗기면서 이집트는 무슬림들에게 통치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교 숭배를 죄악시하는 무슬림 지배자들은 정작 고대 이집트 종교의 총본산이었던 카르나크에 대하여 별 관심이 없었다. 일단 워낙에 오래전에 지어진 사원이기도 했고, 그냥 저런 것도 있었나 보다 하고 생각하며 딱히 파괴하거나 이슬람 사원을 그 위에 덮어버릴 생각 따위는 하지 않았다. 이 덕분에 카르나크 유적은 이슬람 시대에도 유구가 온전히 보존된 채로 남아있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카르나크 신전을 복구하거나 다른 용도로 쓸 생각도 하지 않았기에 카르나크 유적은 쌓여가는 모래 속에 반쯤 파묻힌 채로 1400여 년 가까운 세월동안 허물어져갔다.
정작 그 곳에 살고 있었던 무슬림들은 카르나크에 별 관심이 없었지만 반면 유럽의 여행가들은 카르나크 유적에 꽤나 관심을 보였다. 베네치아의 여행가들이 1500년대에 이집트를 여행하며 쓴 일지록에 카르나크 유적에 대한 언급이 있고, 카푸친 교회의 수사 2명이 1669년에 펴낸 기록에 '카르나크'라고 하는 마을 이름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카르나크 유적의 모습을 그림으로 남긴 첫 책은 1704년에 프랑스 학자인 폴 루카스가 펴낸 여행 안내서이고, 이 책에는 아문 라의 참배로와 몬투 신전에 대한 간략한 삽화가 짤막한 설명과 함께 들어있다. 이후 18세기 들어 본격적으로 유럽 여행가들이 이집트를 방문하기 시작하며 카르나크 유적 역시 함께 찾았고, 19세기에 이집트에 서구 제국주의 열강 세력들의 입김이 강해지며 더욱 많은 유럽인들이 카르나크를 방문했다.
카르나크 유구의 본격적인 발굴 작업은 19세기 후반부터 시작되었다. 두텁게 쌓인 모래층들을 제거하고 사라진 벽화 일부, 무너져내린 기둥과 탑문 유구 약간을 복구했다. 현재는 어느 정도 정비가 완료된 상태에서 관람객들을 맞이하고 있다. 가장 최근의 발굴 작업으로는 2018년에 이집트 고고당국에서 제25왕조 시대에 지어진 오시리스의 사원을 발굴한 것이 있다.
3. 갤러리
입구의 스핑크스 거리
염소 머리 스핑크스
성스러운 연못과 신전
하트셉수트 오벨리스크. 29.6m/325ton. 사진을 보는 방향으로 왼쪽 방향에 있는 것이다. 오른쪽에 있는 것을 하트셉수트의 아버지인 투트모세 1세의 오벨리스크. 23,2m/143ton.
- [카르나크 신전 기타 사진들]
3.1. 아몬 대신전
3.1.1. 구조
아몬 대신전 일대의 지도
아몬 대신전 일대
1914년 아몬 대신전 일대
3.1.2. 대열주
3.1.3. 람세스 3세 신전
3.2. 무트 신전
4. 기타
프랑스 브르타뉴 지방의 열석 유적지도 공교롭게도 이름이 카르나크이다. (카르나크 열석) 둘다 거대한 돌이 이어진 곳인 것을 감안하면 신기하다. 카르나크 신전의 카르나크는 아랍어로 요새화된이란 의미인 쿠르낙 (خورنق)에서 유래되었고, 프랑스의 카르낙은 켈트어로 돌이란 의미인 카른에 접미사가 붙은 형태이다. 다만 옛 켈트인들이 배를 타고 이집트로 이주하여 고향의 이름을 붙인 것이라는 음모론 역시 존재한다.007 나를 사랑한 스파이에서 제임스 본드와 트리플 X가 죠스를 상대로 싸우는 배경이 카르나크 신전이다.
1978년에 개봉된 영화 나일 강의 죽음에서 배경으로 등장한다.
로드 엘멜로이 2세의 사건부에서 루비아젤리타 에델펠트가 소유한 백화점의 이름이 카르나크다. 당연히 내부 인테리어가 고대 이집트를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1] 19세기 초만 해도 40m에 육박하는 프톨레마이오스 4세의 거대한 기념문이 남아 있었으나 후대에 붕괴하였다[2] 신관들이 제례 직전 몸을 씻거나 의식에 필요한 물을 공급받았던 호수. 아직도 일부가 남아있다.[3] 파라오 아멘호테프 1세, 아멘호테프 3세 등의 인물과는 별개의 인물이다.[4] 고대 이집트에서는 신분이나 지위가 높을수록 그림을 크게 그리고 석상을 크게 만드는 것이 관례였다. 예외는 아부심벨 대신전의 소신전이다. 파라오인 람세스 2세와 왕비인 네페르티티의 석상이 동등한 크기다.[5] 다만 이미 이때쯤에 카르나크 신전은 몇몇 상주 신관들을 제외하면 폐허로 전락한 상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